'추천사찰'에 해당되는 글 44건

  1. 2017.05.30 고려대 뒤쪽에 묻힌 작고 고즈넉한 절집, 귀티가 넘치는 오래된 보살상과 마애불을 간직한 안암동 보타사 (개운산)
  2. 2017.05.24 석가탄신일 도심 사찰 나들이, 연산군이 폐비윤씨의 원찰로 지었다고 전하는 회기동 연화사 ~~~ (월계동 기원사)
  3. 2017.04.07 낙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사찰, 작은 석굴암을 간직하고 있는 서울 낙산 보문사 (보문사 괘불)
  4. 2016.09.19 변산반도 제일의 경승지, 아름다운 전나무숲길을 간직한 ~~~ 부안 내소사
  5. 2016.09.07 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아름다운 계곡을 옆구리에 차고 있는 ~~ 북한산 진관사 (진관사계곡)
  6. 2016.08.12 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서울 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문화대축제)
  7. 2016.07.13 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강화 석모도 보문사 (외포리, 낙가산, 눈썹바위 마애불)
  8. 2016.03.13 금빛 와불상과 우담바라를 간직한 고즈넉한 산사, 의왕 청계산 청계사
  9. 2015.07.15 짙은 숲과 시원한 계곡을 품은 고즈넉한 산사 ~ 도봉산 회룡사 (회룡골, 회룡폭포, 석굴암)
  10. 2015.06.02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 정릉 봉국사 (맛있는 점심공양)

고려대 뒤쪽에 묻힌 작고 고즈넉한 절집, 귀티가 넘치는 오래된 보살상과 마애불을 간직한 안암동 보타사 (개운산)


' 석가탄신일 도심 사찰 나들이 ~ 서울 개운산 보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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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올해도 변함없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이하 초파일)의 아침은 밝아왔다. 설레는 마음
을 진정시키며 서울 장안을 중심으로 절 투어 코스를 아름답게 짠 다음, 초파일 오전 길
을 나섰다.

우선 청량리 뒷쪽 회기동(回基洞)에 자리한 연화사(蓮華寺)와 월계동(月溪洞)에 있는 기
원사(祈願寺, ☞ 관련글 보러가기)를 찾아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탱화를 말끔히 챙겨보
고 초파일의 꿀재미인 공양밥과 떡도 든든히 챙겨 먹었다. (너무 배불리 먹어서 며칠 동
안 밥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였음) 그런 다음 안암동 개운사(開運寺)로 이동하여 그곳을
둘러보고 그 부근에 자리한 보타사로 넘어갔다.

보타사는 개운사에서 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구석진 숲속에 묻혀 있는데 나와 같은 서
울 하늘 밑에 있음에도 10여 년 전에 딱 1번 가본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이번에 억지로
인연을 갖다 붙여 그곳을 다시 찾았다. <그곳에 깃든 마애보살좌상과 금동보살좌상이 국
가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소식도 인연을 다시 이어붙이는데 크게 한몫했음>

개운사 주차장 동문을 나와 주택가를 지나면 그 골목길의 끝에 보타사 정문이 나오고 그
문을 들어서면 대원암이 가장 먼저 마중을 한다.


▲  활짝 열린 보타사 정문


 

♠  개운사의 부속 암자로 석전 박한영과 탄허가 주석했던 유서 깊은 현장
~ 안암동 대원암(大圓庵)

보타사 정문을 들어서면 양반가 기와집처럼 생긴 한옥이 제일 먼저 모습을 비춘다. 이곳이 초
행이라면 이것이 보타사인가 싶어 마음이 설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함정이며, 그의 정체
는 개운사의 부속암자인 대원암이다.
보타사를 가리고 앉은 대원암은 큰 기와집 1동이 거의 전부인 아주 단촐한 절로 암자(庵子)란
이름에 가장 충실한 규모를 하고 있는데, 그 옆에는 중앙승가대학 동문회 건물이 우뚝 자리하
여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대원암은 1845년 지봉선사(智峰禪師)가 창건했다. 그는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으로 법명(法名
)은 우기(祐祈)이며, 효성이 깊고 인품이 넉넉했다고 한다. 북한산(삼각산) 도선사(道詵寺)에
서 인파당 축홍(仁波堂 竺洪)에게 사사하여 그의 법을 이어갔으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도 친분이 있어 그에게 판서(判書)직을 받은 적이 있었다. 바로 그 연유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지봉판서라 불렀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개운사의 그늘에 가려진 암자이지만 20세기 큰 승려로 추앙 받는 석전 박한
<石顚 朴漢永, 법명은 정호, 영호>과 탄허(呑虛)가 주석하여 불교 교육과 역경사업을 벌였던
유서 깊은 현장이다.
박한영(1870~1948)은 근세 한국 불교 3대 강백(講伯)의 하나로 불교와 유교, 노장사상, 한시(
漢詩), 서법(書法) 등 이른바 유불선(儒佛仙)에 통달했던 당대 제일의 석학이다. 그 시절 제일
가는 지식인으로 손꼽혔던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조차도 '나는 누구에게도 물어볼 것이 없
는데, 석전 선생한테는 물어볼 것이 있다'
며 그에게 만큼은 한 수 접어주었다. 고수가 고수를
알아본 것이다.

석전은 전북 완주(完州) 출신으로 19세에 전주 인근 위봉사(威鳳寺)에서 출가를 했다. 스승인
금산에게 '정호(鼎鎬)'란 법명을 받았으며, 26세에 순창 구암사에 들어가 설유의 법통을 받고
법명을 영호(暎湖)라 했다.
27세부터 법주사(法住寺)와 해인사(海印寺), 범어사(梵魚寺)에 들어가 강의를 했고, 선운사(禪
雲寺)의 큰 승려인 백파(白波)의 선맥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그의 호를 따 '석전'이라 했다. 석
전은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백파에게 우정의 뜻으로 선물한 호이다.

1910년 이후, 만해 한용운(韓龍雲)과 이 땅의 불교를 지키고자 노력을 기울였고,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이 조선 불교를 왜열도 조동종(曹洞宗)에 통합하려는 만행을 저지르려고 하자
이를 막았다. 1913년에는 불교잡지인 '해동불교(海東佛敎)'를 창간해 왜정(倭政)의 조선불교
왜식화(倭式化)를 강하게 비판하고 왜의 대한제국(大韓帝國) 강제 합방을 규탄했으며, 불교의
혁신을 강조했다. 그리고 1919년 한성임시정부 수립에도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도 큰 활약을
보였다.

1926년 대원암에 들어와 이곳의 조실(祖室)로 지내면서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해 불교 교육에 나
섰다. 그러자 승려 뿐 아니라 많은 문학가와 지식인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그의 가르침을 받았
는데, 그중에는 신석정(辛夕汀), 조지훈(趙芝薰), 뒷끝이 영 좋지 못했던 서정주(徐廷柱)와 이
광수(李光洙) 등이 있었다.
그중 왜정과 독재정권에 심하게 아부를 떨어 주옥 같은 작품을 무색케 하였던 서정주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으로 서울중앙고보(중앙중고교)와 고창고보에서 퇴학을 당하여 방황하고 있었는데
그를 중앙불교전문학교(지금의 동국대)로 데려와 제자로 기른 이가 바로 석전이었다. 그 인연
으로 둘은 각별한 사이가 되었고 서정주는 그를 '내 뼈와 살을 데워준 스승~'이라 찬양하며 평
생 은혜를 갚지 못함을 아쉬워 했다고 한다. 하여 석전이 남긴 한시 130수를 한글로 번역해 그
원고를 가지고 있다가 2006년에 비로소 공개되었다. <석전은 서정주의 친일짓거리와 친독재행
위를 보며 지하에서 피눈물을 바가지로 흘렸을 것이다>

또한 그의 문하에는 20세기 중/후반 이 땅의 불교계를 이끈 운허와 지관 등 이름 높은 승려들
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우리나라 불교 학승(學僧)의 대부분이 그의 배움을 이어갈 만큼 불교계
의 큰 줄기를 형성했다.

1945년 이후, 조선불교 중앙총무원회 제1대 교정을 지냈고 1946년까지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
을 지냈다. 이후 정읍 내장사(內藏寺)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48년 열반에 들었다.
그는 많은 한시와 수필을 남겼는데, 최남선이 그의 작품을 '석전시초(石顚詩抄)','석림수필(石
林隨筆)','석림초(石林抄)' 등 9권의 책으로 정리했으며 수필도 500여 편이 남아있다.

▲  대원암 어칸(가운데 칸)과 현판

▲  조그만 석불과 탄허 역경(譯經) 기념비
(가운데), 그리고 석전 박한영 기념비


대원암을 거쳐간 2명의 큰 승려 중 마지막인 탄허(1913~1983)는 전북 만경(김제) 출신으로 원
래 이름은 김금택(金金宅)이다. 법명은 택성()이며, 최익현(崔益鉉)의 제자인 이극종에게
한학을 배워 도학에도 능했다.
15살에 도(道)에 대한 답을 얻고자 고승 한암(漢岩, 1876~1951)과 서신문답을 주고받았고, 그
인연으로 하여 1934년 한암이 머물던 오대산 상원사(上院寺)를 찾아가 출가하여 그의 열성 제
자가 되었다.

이후 월정사 조실과 연수원장을 지냈으며, 1964년부터 1971년까지 동국대 대학선원 원장을 지
냈고 1967년 조계종 중앙역경원 초대원장이 되어 대원암에 머물며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큰
임무를 완수하기도 했다.
그는 동양철학에도 해박하여 왜열도와 대만에서 화엄학 등을 강의했으며, 대만대학교에서 비교
종교에 대한 특강으로 세계적인 석학으로 찬양을 받았다. 말년에는 월정사(月精寺)에서 지내다
가 1983년 70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으며, 나라에서는 그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  숲속에 자리한 보타사와 주차장

대원암을 지나면 삼삼하게 닦여진 숲이 펼쳐진다. 이곳은 안암동(安岩洞) 주택가 바로 옆으로
녹음이 짙은 나무들로 완전 그늘을 이루고 있어 마치 첩첩한 산속의 암자나 신선의 산중(山中)
거처를 찾은 기분이다. 개운사에서 아주 잠깐 이동했을 뿐인데 주변 풍경화는 이렇게나 180도
달라졌다.

햇살도 거의 들어오기 힘든 그 숲속에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있고 그 너머로 석
축을 쌓고 터를 다진 보타사가 마치 별장 같은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연등이나 보물 지정 경
축 현수막이 아니었다면 이곳이 과연 절집인지 고개 조차 갸우뚱했을 것이다.
주차장 옆에는 키도 제각각인 중창 송덕비와 사적비 등 비석 4기가 서 있고 그 옆에 아기자기
하게 꾸며진 반원(半圓) 모양의 작은 연못이 장차 다가올 연꽃의 향연을 숨죽여 준비한다.

▲  보타사 송덕비와 사적비

▲  계단 끝에 자리한 일주문

주차장에서 보타사로 인도하는 계단에는 고운 연등이 길게 드리워져 초파일 분위기를 한층 고
조시키고 있다. 그 계단을 올라서면 보타사 현판을 머금은 일주문(一柱門)이 중생을 맞이하는
데, 일주문이라고 하지만 그냥 주택 대문에 기와 지붕을 얹힌 모습이다.


▲  숲속 막다른 곳에 자리한 보타사


 

♠  개운산(開運山)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조그만 산사, 겉은 작아도
보물급 문화유산을 2점이나 품은 실속파 절집 ~ 안암동 보타사(普陀寺)

▲  보타사 대웅전(大雄殿)

개운사 동쪽 그늘진 곳에 비구니 절인 보타사가 살포시 자리해 있다. 대원암과 더불어 개운사
의 부속 사찰로 경내가 숲에 완전히 감싸여 있어 바깥에서는 거의 보이질 않으며 나무들이 무
성해 속세의 온갖 기운과 소음을 거의 털어버린다. 그러다보니 늘 번잡한 안암동 대학가가 지
척임에도 고적하고 아늑한 산사(山寺)의 분위기가 진해 그야말로 매우 조용하다는 뜻의 '절간
답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보타사는 개운산(안암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고 있다. 서남쪽을 제외하면 모두가 막혀버린 궁
색한 곳으로 경내 동쪽과 남쪽은 고려대로 막혀있고, 북쪽은 벼랑으로 완전히 막혀 있으며 그
벼랑 윗쪽에 개운산의 남쪽 허리를 가르는 북악산로가 흘러가 차량의 소음이 조금씩 전해진다.
그리고 서쪽에는 고려대 안암학사가 있다.

이 절은 원래 20세기 중반 불교전문강원과 중앙승가대학의 기숙사로 출발했다. 허나 1911년 2
월 경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마애보살좌상 옆에 맞배지붕 건물이 보인다. 하여 개운사나 대원
암에서 마애불 관리를 위해 닦은 조그만 건물이 이전부터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기숙사 건물을 손질해 칠성암(七星庵)이란 간판을 내걸었고 1980년대에 보타사로 이름을
갈아 마애불과 금동보살좌상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으며 절을 꾸리고 있다.

처음에는 개운사의 부속 암자로 조용히 묻혀 지냈고, 마애불 또한 부근 사람만 찾아올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다. 하지만 낭중지추(囊中之錐)란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결국 세상에 그 모습
을 드러내게 된다. 1992년 서울문화사학회가 서울에 숨겨진 문화유산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그
가 발견되었고, 단순히 오래된 존재로만 구전되어 오던 상태였으나 조사 결과 고려 후기에 조
성된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바로 이듬해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고, 2014년에는 국가 보물로 흔쾌히
승진까지 했다. 또한 요사에 봉안된 금동보살좌상은 이 땅에 흔치 않은 유희좌(遊戱坐) 스타일
로 그도 서울 지방문화재로 있다가 2014년 3월 보물로 승진되어 같은 해에 무려 보물급 문화재
를 2개나 거느리게 되었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요사, 선방 등 3~4동의 건물이 있으며, 마애보살좌상과 금동보살좌
상 등의 빵빵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절이 매우 소소한 모습이라 눈에 별 부담 없이 살
필 수 있으며 숲에 묻힌 벼랑 밑도리로 깊은 산중에 들어선 기분을 들게 하여 이곳이 서울 한
복판임을 순간 잊게 한다. (현재 새 건물을 짓느라 경내가 좀 어수선함)


▲  대웅전 앞에 차려진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일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마애불과 벼랑이 있고, 오른쪽에는 새로 지은 선방(禪房), 왼쪽에는
대웅전과 요사가 자리해 있다.

대웅전 앞에는 초파일을 맞이하여 오랜만에 외출 나온 아기부처가 화사하게 꾸며진 꽃밭 가운
데에 서 있다. 바로 중생들에게 관불의식을 받고자 함이다. 하지만 절을 찾은 중생이 별로 없
다보니 관불 수요도 저조하여 거의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좀 있으면 다시 어두컴컴한 창고에
봉인되어 1년을 갇혀 지내야 되는데 저녁이 다가옴에 따라 사람들 발길도 줄어드니 아기부처와
돈을 좋아하는 불전함의 마음은 그저 타들어갈 뿐이다. 그들에게 초파일 해는 너무 짧다.
 
아기부처상 앞에는 파라솔을 지닌 동그란 탁자가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누구든 먹을 수 있도
록 떡(절편)과 수박이 놓여져 절의 훈훈한 초파일 인심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들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비구니들이 바로 채워놓아 먹거리가 마르지를 않는다. 나도 떡과 수박을 수없이 집어
먹으며 이른 저녁 배를 채웠다.


▲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대웅전 석가불

보타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불단(佛壇)에는 금색 찬란한 석가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근래에 조성되어 피부가 아
주 탱탱하며, 변색된 부분이 없는 순 100% 금동색으로 그의 광배(光背)는 마치 이글이글 타오
르는 모습 같다.
볼살이 많아 보이는 그의 온후한 표정에는 미소가 깃들여져 중생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데, 그
뒤에는 그 흔한 후불탱을 두지 않고 환하게 창문을 내어 마애보살좌상이 보이게끔 하였다. 그
러니까 마애불이 일종의 후불탱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불상 앞에는 중생들이 진상한 과일과 꽃, 쌀로 상에 금이 갈 지경이며, 건물 좌측 벽에는 석가
의 설법 장면을 담은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와 법당 수호용인 신중도(神衆圖)가 걸려있다. 이
들은 20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아직 피지 못했다.


▲  온갖 호법신(護法神)들이 그려진 신중도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 위태천(韋太天) 등 온갖 호법신들이
복잡하게 담겨져 그야말로 정신을 다 빼놓는다.

▲  후불탱의 황금 자리를 버리고 옆으로 비켜 선 영산회상도

◀  경내 좌측에 자리한 선방과 쉼터
선방은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전통 찻집이나
여염집 한옥 같은 분위기이다. 그 앞에는
탁자와 의자를 두어 녹차 등을
제공하고 있었다.


▲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 보물 1828호

대웅전 뒷쪽 벼랑에는 보타사의 2대 꿀단지의 하나인 마애보살좌상이 깃들여져 있다. 마애불(
磨崖佛)이 고된 몸을 기댄 화강암 벼랑은 거의 80~85도 각도로 그 윗쪽에는 암벽이 눈썹바위
마냥 앞으로 짙게 튀어나와 자연산 모자나 보개(寶蓋)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바로 그 윗쪽에는
개운산의 남쪽 허리를 가르는 2차선 북악산로가 닦여져 있어 차량 소리가 가늘게 들려온다.

이 마애불은 오랫동안 개운산의 은자(隱者)로 이곳에 살짝 은신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2년
서울문화사학회에 의해 강제로 발견되었다. 어떤 자료에는 발굴했다고도 하는데 그는 이미 바
깥에 노출된 상태였으므로 발견이 맞을 것이다. 서울 굴지의 오래된 절인 개운사가 바로 지척
이고 그 그늘에 조그만 것도 아닌 커다란 마애불이 수백 년을 숨어왔으니 그의 숨바꼭질 실력
은 참으로 대단하다.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발견된 이듬해(1993년)에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89호로 지정
되었으며, 2014년 3월 경내에 있는 금동보살좌상이 보물로 지정되자 그 여세를 몰아 그해 7월
보물로 승진되었다.

마애불의 높이는 대략 5m, 폭은 4.3m로 감정 결과 고려 후기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런데 그 생
김새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는 홍은동 옥천암(玉泉庵) 마애보살좌상(보도각 백불)을 너무나
닮았다. 보관(寶冠)은 좀 틀리지만 얼굴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하얀 피부까지 옥천암의 그것과
다소 비슷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옥천암 마애불 역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같은 사람이 조성하거나 모방하여 만들
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며, 고려 후기 서울 변두리에서 아주 잠깐 나타났던 마애불 형식으로 진
정한 서울 스타일의 고려 마애불이다. 놀라운 것은 이런 마애불은 천하에서 서울에 딱 2곳 뿐
이라는 것이다.


▲  옆에서 바라본 마애보살좌상

마애불의 모습을 살펴보면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데, 좌우로 관대(冠帶)가 나와있고
그 밑에 보관 장식이 늘어져 있다. 오른쪽 관대 밑에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긴 장식이 눈에
띈다. 하얀 얼굴은 약간 볼살이 있어 보이는데,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그 눈썹 사이에
백호가 찍혀 있으며, 검은 두 눈은 지그시 뜨고 있다. 코와 입은 좀 작은 편이며, 입술은 붉은
색이나 빛이 좀 바래있고 귀는 보관 장식에 가려져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왼쪽 가슴을 가로지르는 스
카프 형태의 천의(天衣)가 밖으로 흘러나오도록 표현되어 있다. 왼쪽 팔은 몸에 비해 지나치게
크게 표현되어 괴물 팔처럼 보이는데, 팔찌를 낀 왼손은 무릎 밑까지 내려와 있으며, 엄지와 3
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그리고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올려 엄지와 2번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옷 주름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고, 두 다리는 포개어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으며 두 발은
옷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  마애보살좌상 옆에 새겨진 원패(圓牌)

마애불 어깨쪽 좌우에는 네모나게 구멍이 파여 있다. 이는 자연산 구멍이 아니라 불상을 지켜
주던 목조 건물이나 보호각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마애불에 대한 기록
이 부실하여 언제 지어지고 어떤 모습을 취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부족한 상상력을
꺼내본다면 옥천암 마애보살좌상(보도각 백불)처럼 앞으로 조금 튀어나온 형태가 아닐까 싶다.
마애불은 바로 그것을 갑옷으로 삼아 온전하게 남았고, 건물은 장대한 역사의 거친 흐름 속에
형편없이 녹아버려 이렇게 상처 만이 남았다.

불상 왼손 쪽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네모난 공간이 있는데, 이를 원패라고 부른다. 이 원패는
마애불 제작 당시<또는 조선시대>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데, '南無金剛會上佛菩薩(나무금강회
상불보살)'이라 쓰여 있다. 원패란 부처나 보살의 이름을 적어 불단 앞에 놓는 것으로 마애불
옆에 새겨진 점이 꽤 이채롭다.

현재 마애불은 하얀 피부의 백불이지만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하얗게 호분(胡粉, 여
자들이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하던 것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듬)이 칠해진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이며 그로 인해 몇몇 부분은 확인이 어렵게 되었다. 참고로 그의 친척뻘인 옥천암 마
애보살좌상은 19세기에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가 호분을 칠했다고
전한다.

하나같이 거대하고 개성이 강한 수많은 석불과 마애불이 등장했던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마애불
로 그가 아무리 장대하다 한들, 초파일을 맞이하여 허공을 가득 수놓은 연등의 물결 앞에선 별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연등이 그 앞에 진하게 아른거려 제 모습을 담기가 어려웠다.

마애불의 밑도리와 팔에는 중생들이 무심히 얹혀놓은 동전들이 수북한데 가히 1만원은 넘을 것
이다. 저 돈이야 다 뻔한 데로 가겠지만 부디 속세의 어두운 구석을 위해 쓰기를 바란다. 그게
마애불의 지극한 뜻이자 그의 존재의 이유이다.


▲  마애보살좌상의 얼굴과 자연이 그에게 씌워준 자연산 돌모자
어깨 옆에 파인 홈은 지금은 전설이 되버린 보호각의 아련한 흔적이다.

▲  마애보살좌상의 아랫도리
오른쪽 발은 발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했으며, 왼쪽 발은 오른쪽 발에 가려져 있다.

▲  보타사 요사(선방)

대웅전 옆에는 여염집 모습의 요사가 자리해 있다. 선방과 종무소(宗務所)의 역할까지 도맡고
있는 건물로 예전에는 중앙승가대학 숙소로 사용되었는데, 저 안에 보타사의 나머지 꿀단지가
들어있으니 꼭 들어가보자. 다행히 절 사람들은 그것을 보여주는데 다소 호의적인 편이라 사진
촬영에도 흔쾌히 협조를 해준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면 종무소 공간이 나오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조그만
금동불이 봉안된 불단이 나올 것이다. 그 불상은 포즈도 참 특이한데, 그가 바로 마애보살좌상
과 더불어 보타사의 2대 꿀단지의 하나인 금동보살좌상이다. <현재 기존 건물을 부시고 새 건
물을 짓고 있음, 금동보살좌상의 거처도 임시로 변경된 상태, 친견 가능 여부는 절에 문의 요
망>


▲  유리막에 봉안된 금동보살좌상과 붉은 색채의 후불탱

▲  보타사 금동보살좌상 - 보물 1818호

요사 불단에 봉안된 금동보살좌상은 이 땅에 흔한 불상이나 보살 스타일이 아니다. 오른쪽 다
리는 의자에 올려 무릎을 세웠고, 왼쪽 다리는 밑으로 내린 모습이기 때문이다. 딱 보면 아줌
마 스타일의 착석 방법과도 비슷한데, 불상(보살상)의 이런 포즈를 유희좌(遊戱座)라고 한다.

유희좌는 9세기 이후 북송(北宋)시대부터 생겨났으며, 이 땅에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중기
에 가뭄에 콩 나듯 조금씩 생겨났다. 그러다보니 매우 귀한 실정이라 그 가치는 대단할 수 밖
에 없다. 바로 그것이 현대 사찰 보타사에 깃들여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보살상이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제자리가 어디였는지는 귀신도
모르는 실정이며, 보살상 또한 굳게 입을 다물며 진술을 거절한다. 아마도 이리저리 떠돌아다
니다가 중앙승가대학으로 흘러들어와 기숙사 불단에 봉안되었고, 이렇게 보타사의 마르지 않는
꿀샘이 되어 우리 앞에 자리해 있는 것이다.

앞서 마애보살좌상이 좀 남성적이라면 이 보살상은 여성적이다. 고품격과 미색(美色)이 느껴지
는 그의 정체는 딱 봐도 관음보살(觀音菩薩) 누님인데, 덩치는 조그만하고 머리에는 황제의 금
관을 유린시킬 정도로 장엄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보관 밑으로 검은 머리칼이 조금 나와있다.
얼굴은 아리따운 여인네처럼 곱기 그지 없어 은근히 마음을 설레게 하는데, 카메라도 그를 보
고 흥분을 했는지 셔터가 마구마구 눌러진다. 불상은 보통 당시 귀족이나 특정 인물의 얼굴을
모델로 하여 조성한 경우가 적지 않아서 아마도 이쁘장하게 생긴 젊은 귀족이나 중년층 여인을
모델로 삼은 듯 싶다.
그의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지그시 떠 있으며 코는 작고, 입술은 작지만 어여쁜 모
습이다. 볼에는 살이 조금 있어 보이며, 가슴에는 온갖 장식물을 달고 있다. 어깨에는 천의(天
衣)를 걸치고 있고 그 한 자락을 수직으로 늘어뜨렸는데, 이는 조선 초기 보살상에서 조금 등
장하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그가 앉아있는 연화좌(蓮花座)는 보타사에서 마련한 것이라 오래된
것은 절대 아니다.


▲  유리막의 눈치를 피하고자 옆에서 담은
금동보살좌상의 위엄~~!


보살상의 예사롭지 않은 모습과 조그만 불상이 많이 등장하는 조선 초기 금동상 중에서 그나마
모가 큰 점으로 보아 조선 초 왕실이나 귀족에서 발원하여 특별히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비
록 고향은 잃었지만 건강 상태는 양호하며, 조선 초기 귀족적인 보살상의 형식을 보여주는 대
표적인 케이스이자 조선시대 불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어 2006년에 서울 지방유형문화
재 216호
로 지정되었다가 2014년 3월 보물로 특진되었다.
이처럼 귀한 몸이니 보타사에서 유리막을 설치해 그에게 손도 되지 못하게끔 했는데, 어찌보면
유리 감옥에 갇혀있는 듯 답답하게 보이기도 한다. 허나 어찌하랴? 문화유산 도난이 다반사처
럼 일어나는 이 땅의 현실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런걸 바로 필요악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절 사람들이 별 거부감 없이 속세에 쿨하게 공개를 하고 있고 사진 촬영에도 호의적이
니 그것으로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보살상 뒤에는 붉은 색채로 이루어진 후불탱이 그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고, 불단 바닥도 순 빨
간색이라 주변이 너무 화사하다.


▲  금동보살좌상 보물지정서의 위엄
난생 처음으로 본 문화재 지정서, 문화재청이 금동보살좌상에게 달아준 일종의
훈장이다. 허나 그의 희소 가치를 본다면 저 정도 종이 문서와 보물 등급도
너무 부족해 보인다.

▲  연등의 배웅을 받으며 보타사를 떠나다 ~~

보타사를 정신없이 둘러보니 어느덧 18시가 넘었다. 인근 개운사에서 18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고적한 이곳까지 울려 퍼진다. 그만큼 서로는 가까운 거리이다. 이제 햇님이 퇴근하고 어둠의
커텐이 내려오면 우두커니 하늘을 가리던 연등도 제몸을 불살라 어둠을 몰아내고 연등의 이름
값을 할 것이다.

정말 벌처럼 날라가 콩을 볶듯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초파일 하루, 많은 절을 답사하면서 공양
밥과 다양한 먹거리, 문화유산, 괘불(掛佛), 초파일 분위기를 마음껏 누렸다. 이날만큼은 왜이
리 해가 짧은지 퇴근 본능이 발동한 햇님을 계속 중천에 붙잡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목적한 바를 거의 이루며 하루를 정말 야무지고 알차게 보내 마음은 뿌듯하다. 이리하
여 보타사를 끝으로 초파일 절투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안암동 보타사 찾아가기 (2017년 5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안암역 2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로 돌아서면 바로 안암역교차로이다. 교차
  로에서 동쪽(북쪽) 길(개운사길)로 3~4분 가면 개운사 일주문인데 그 앞에 보타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그의 안내를 따라 가면 된다. 안암역에서 도보 10분
* 서울시내버스 273, 1111, 2115번을 타고 안암역에서 하차하여 도보 10분. (2115번 서경대 방
  향은 개운사입구에서 하차, 중랑차고지 방향은 안암역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8
(개운사길 60-46 ☎ 02-923-4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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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5월 1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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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 도심 사찰 나들이, 연산군이 폐비윤씨의 원찰로 지었다고 전하는 회기동 연화사 ~~~ (월계동 기원사)

 


' 석가탄신일에 즐긴 사찰 나들이 ~ 서울 연화사, 기원사 '

▲  연화사 대웅보전

▲  연화사 천수관음도

▲  기원사 대웅전

 


 

평소에도 답사와 출사, 산책 등으로 많은 절집을 들락거리고 있지만 석가탄신일(사월 초파
일, 이하 초파일)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사찰 투어를 벌인다. 그날 하루를 온전히 절
투어에 쓴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데 그렇다고 내가 불교 신도는 아니다. (나는 무교임)
그럼에도 초파일을 챙기는 것은 초파일의 흥겨운 분위기가 너무 좋기 때문이다. 거기에 공
양밥과 과일, 떡 등 갖은 먹거리까지 풍성하여 그 흥겨움을 더해주며, 특히 평소에는 개방
을 꺼리거나 외지인에게 배타적으로 대해 답사쟁이의 카메라를 무력화시키는 절<주로 문화
유산을 간직한 인지도가 별로인 현대 사찰과 오래된 절들~>도 이날만큼은 대부분 경계심을
푼다. 하여 이때를 이용해 그런 절을 찾아가 문화유산을 아낌없이 친견하고 사진에 담는다.

초파일이 코앞에 아른거리자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서울 장안에서 아직 발자국을 남기
지 못한 오래된 절과 문화유산을 품은 현대 사찰을 대상으로 정처(定處)를 물색하였다. 초
파일에는 굳이 멀리 나가지 않고 마음 편히 집에서 가까운 서울 시내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들보다 몇 배 이상으로 서울 곳곳을 들쑤시고 다녔기 때문에 그런 미답지(未踏地
) 사찰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몇 남지 않은 미답지 사찰을 열심히 쥐어짜니 적당한 절 두 곳이 걸려들었다. 바로
경희대 옆에 자리한 연화사와 월계동의 기원사이다.
연화사는 연산군 시절에 세워진 절로 그 이름은 익히 들었지만 오래된 볼거리가 없는 절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곳에 있는 탱화 여러 점이 2013년에 무더기로 지방문화재로 지정
되면서 관심도 없던 그곳에 슬슬 구미가 오른 것이다.
또한 월계동 기원사는 1980년에 창건된 사찰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화가 2점이나 있다.
하여 이들을 먼저 살펴보고 예전에 갔던 오래된 절 여러 곳을 추가로 둘러보기로 했다.


 

♠  경희대 그늘에 자리한 오래된 절집, 조선 왕실의 원찰이었던
~ 회기동 천장산 연화사(天藏山 蓮華寺)

▲  활짝 열린 연화사의 정문, 일주문(一柱門)

경희대학교 병원 바로 서쪽에는 연화사란 조그만 절이 자리해 있다. 바로 옆에 큰 덩치를 자랑
하는 경희대 병원 건물이 있다보니 절 건물은 거의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인데, 마치 큰 바위에
붙은 조그만 들꽃 같은 모습이다.

지금은 경희대에 완전히 포위된 외로운 공간이 되었지만 1950년대까지만 하여도 이곳은 소나무
가 무성한 한적한 숲속이었다. 그때는 청량리(淸凉里) 북쪽 영휘원<永徽園, 고종의 후궁인 엄
비의 묘역>에서 오솔길을 따라 절로 들어섰으며, 절 북쪽에는 천장산(141m)이 자리해 연화사와
의릉<懿陵, 조선 20대 군주인 경종의 능>을 감쌌다. 그래서 연화사는 자연히 '천장산 연화사'
를 칭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1955년 종로1가에 있던 경희대(옛 신흥대학)가 이곳으로 오면서 절 바로 옆에 학교 건
물이 들어서게 되었고, 덩달아 주거지까지 조성되면서 절 주변 풍경화는 강제로 180도 달라지
게 되었다. 게다가 연화사를 품었던 천장산은 경희대로 인해 서로 끊어졌고, 절 사방으로 경희
대(경희여중고, 경희대병원)에 완전히 감싸여 외부에서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조계종(曹溪宗) 소속인 이 절은 1499년 폐비윤씨의 묘역인 회묘(懷墓)의 원찰(願刹)로 창건되
었다고 전한다. 여기서 폐비윤씨는 바로 연산군(燕山君)의 어머니로 그 이름을 아주 요란하게
남긴 여인이다.
회묘는 원래 경희대 병원 자리에 있었는데, 억울하게 죽은 어미를 위해 연산군은 1504년 회묘
를 회릉(懷陵)으로 높여 석물을 심고 회묘를 지키는 절을 세웠다. 허나 아쉽게도 연화사의 시
작점이라 할 수 있는 그 원찰의 이름은 아쉽게도 전하지 않는다. (절이 매우 작았던 모양임)

어미를 향한 연산군의 사무친 마음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덧없이 아작이 나버렸고,
연산군 자신은 강화 교동도(喬桐島)로 추방되어 바로 그해 겨울,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회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어 방치되었고, 연화사 역시 이때 풍비박산이 난 것으로 보인다. 반
정파들은 연산군과 관련된 모든 것을 철저히 깔아뭉개버렸기 때문이다.

이후 터만 아련히 전해오다가 경종(景宗, 재위 1720~1724)의 능인 의릉이 인근 석관동(石串洞)
에 터를 닦으면서 다시 존재감을 드러낸다. 영조(英祖)가 1725년 절을 지어 의릉의 원찰로 삼
은 것이다. 허나 그 원찰의 이름도 전하지 않는다.
1870년대에 이르러 승려 묘련(妙蓮)이 절을 중수했는데 그는 성품이 좋아 인기가 대단했다. 그
래서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 절을 묘련사(妙蓮寺, 또는 묘련암)라 부르니 이때부터 절의 이
름이 역사에 나타난다.

1882년 임오군란 때 파괴된 것을 1883년에 승려 정담(淨潭)이 남화(南化), 완허(玩虛)의 도움
으로
다시 일으켰으며, 이때 궁인(宮人) 박씨와 상궁(尙宮) 최씨, 김씨 등이 시주하여 여러 불
화를 제작했다. 그렇게 중건이 마무리 되자 1884년 10월 '천장산 묘련사 중건기(重建記)'를 남
겼다.
이후 절은 연화사로 이름이 갈렸는데, 그 시기가 정확하지 않다. 다만 1993년 자음(慈音)이 지
은 '천장산 연화사 삼성각 상량문(上樑文)'에는 '부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 머무는 곳이 연
화장(蓮華藏) 세계이고, 중생의 근본적 자성(自性)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청정한 연꽃과 같
아 절 이름을 연화사라 했다'고 적고 있어 연화장 세계에서 절 이름을 따왔음을 귀띔해준다.

1950년대까지 절 주변은 자연에 묻힌 싱그러운 곳이었으나 경희대가 절 옆에 터를 닦으면서 도
심 속의 절이 되어버렸으며, 연화사의 첫 후광(後光)이던 회묘는 1969년 경희대에 밀려 서삼릉
(西三陵)으로 강제 이전되었다.
1990년대까지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과 미륵전(彌勒殿), 대방(大房), 종각 등의 기와집 건
물이 경내를 이루었으며 극락보전 앞에는 뜨락이 닦여있었고, 경내 뒤에는 약간의 소나무가 운
치를 이루었다. 허나 건물이 낡고 터가 좁아 1993년부터 크게 중수를 벌여 기존의 건물을 부시
고 집약적인 공간인 2층짜리 대웅보전과 삼성각 등을 새로 지었으며, 그 과정에서 '미륵전 상
량문'과 '묘련암 중수기(1875년)'가 발견되어 절의 숨겨진 역사 일부가 속살을 드러냈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보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무애당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
으로는 2013년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칠성도, 천수관음도, 신중도, 지장시왕도, 산신도, 아미
타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2호) 등이 있다.
이중 아미타괘불도(阿彌陀掛佛圖)는 1901년 10월 28일에 제작해 다음달 11월 20일에 점안된 것
으로 대은 돈희(
大恩 頓喜)를 중심으로 계은 봉법(啓恩 奉法), 한봉 응작(漢峰 應作), 보암 긍
법(普庵 亘法) 등이 참여해 조성했다. 아미타3존불을 비롯해 가섭존자, 아난존자, 사자와 코끼
리를 탄 문수/보현동자상까지 등장시켰는데, 이는 19세기 중반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했던
괘불 양식이다. 날이 날인지라 괘불(掛佛)의 화려한 외출을 기대했으나 아쉽게도 그는 나오지
않았다.
그밖에 1880년에 제작된 독성도가 있으며, 지방문화재 불화들은 괘불을 제외하고 상당수 삼성
각과 대웅보전 1층에 포진해 있다.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경내로 인도하는 짧은 숲길
봄이 푸르게 붓질을 한 숲길에 고운 빛깔의 연등이 허공을 메우며
초파일 분위기를 한껏 드높인다.


훤칠하게 솟은 일주문을 들어서 찰라와 같이 짧은 숲길을 들어서면 바로 대웅보전 앞이다. 오
색찬란한 연등이 연화사의 좁은 하늘을 가득 메우며 초파일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연화사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좁게 경내를 이루고 있는데 그 동쪽에 삼성각과 무애당이 있고
서쪽에는 불교용품과 전통차 등을 파는 건물이 있다. 초파일 분위기를 즐기러 나온 수많은 사
람들로 좁은 경내는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고 절은 초파일 특수로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  대웅보전 뜨락에서 펼쳐진 초파일 오후 법회

▲  시장통을 이루고 있는 대웅보전 뜨락

대웅보전 뜨락에는 행사용 천막을 가득 지어 전통차 시음과 다도(茶道) 체험, 연등 만들기, 불
교용품 판매, 간식과 음료수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안그래도 좁은 터에 사람까지 많
은데 천막까지 주렁주렁 지었으니 마치 콩나무시루의 버스나 교실을 보는 듯, 공간이 좀 답답
하다.
전통차는 무료로 제공하고 있는데 조그만 청자 찻잔에 차를 따라준다. 무슨 차였는지는 벌써

터 기억이 가물가물하나 1잔 들이키니 속이 좀 맑아지는 것 같다. 그리고 팝콘은 공짜로 제공
하고 있어 그 기나긴 줄에 동참하여 1봉지를 챙겼다. 그 외에 연등만들기와 다른 간식류는 돈
을 받고 있었다.

▲  무애당(無礙堂)
종무소와 선방(禪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  1993년에 새로 지어진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 식구들 <왼쪽부터 산신, 칠성(치성광여래), 독성(나반존자)>

대웅보전 뒷쪽 구석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에게 친숙
한 산신과 독성, 칠성의 보금자리이다. 건물 바로 뒷쪽에는 콘크리트로 다져진 언덕이 있는데
경희대 건물이 높이 자리해 절을 대놓고 엿본다.

삼성각에는 산신과 독성, 칠성을 담은 3개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이중 칠성도와 산신도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허나 독성도는 그들보다 나이가 더 많음에도 아직 지정문화
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으니 그 이유가 자못 궁금하다. 그렇다고 독성도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
도 아니다.


▲  삼성각 석가불과 칠성도(七星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3호)

삼성각 중앙에는 평온한 미소를 머금은 금동석가불과 고색이 역력한 칠성도가 자리해 있다. 내
가 좋아하는 것이 바로 고색(古色)의 향기이니 내가 그 향기에 이끌려 이제서야 이곳 연화사에
발을 들인 것이다.

칠성도는 치성광여래
(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 칠성
불(七星佛), 칠원성군(七元星君), 노인성(老人星), 삼성(三星) 등 칠성의 주요 식구들이 복잡
하게 담겨져 있다. 칠성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존재로 오랫동안 이 땅의 토속신앙으로 머
물러 있었는데, 조선 때 불교의 일원으로 쿨하게 흡수되면서 그를 봉안하지 않은 절이 거의 없
을 정도이다.

연화좌(蓮花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칠성도의 주인, 치성광여래는 금륜(金輪)
을 들고 있는데, 양어깨를 덮은 통견의(通肩衣)를 입고 있으며, 좌우 협시보살은 연화좌 위에
반가좌(半跏坐) 형태로 앉아 본존불을 향해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인다. 그리고 머리에 쓴 관
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붉은 원과 하얀 원이 그려져 있고, 치성광여래 주위로 좌우 대칭되게
배치된 칠성불은 합장한 채 본존불 쪽으로 몸을 향해 있으며, 칠원성군은 각기 홀을 들거나 합
장한 채 치성광여래를 향해 서 있다.

이 그림은 구한말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활약한 한곡 돈법(漢谷 頓法)을 중심으로 한명 환조(
漢明 幻照), 두삼(斗三), 태호(太湖), 창호(昌湖) 등이 동참하여 1901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때
아미타괘불도와 지장시왕도, 신중도, 천수관음도가 같이 제작되었다.


▲  삼성각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6호

칠성도 우측에는 산신(山神)과 호랑이, 동자 등 산신 가족을 머금은 산신도가 자리해 있다. 칠
성도만큼이나 고색이 끼어있으나 그와 달리 등장 인물이 단촐해서 보기는 좋다. 언제 제작되었
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923년에 문성(文性)이 산신각을 짓고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
어 이르면 1880년대 후반, 적어도 칠성도와 비슷한 시기로 여겨진다.

그림을 살펴보면 중앙에 붉은 옷을 걸친 산신 할배가 크게 표현되어 있는데, 머리에 모자 모양
의 두건을 쓰고 있고, 까무잡잡한 얼굴은 둥근 넓적하며 포근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본다. 왼
손에는 깃털로 된 부채를 들고 있고 있으며 오른손으로 그의 수염을 쓰다듬고 있다.
산신 오른쪽에는 그의 비서인 동자 2명이 그려져 있는데, 모두 기물을 들고 서 있으며, 왼쪽에
는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민화(속화)풍으로 익살스럽게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그런데
시중에 돌고 있는 어느 유명한 민화(民畵)의 호랑이와도 많이 닮아있어 혹 그를 참조하여 그린
것이 아닐까 싶다. 하여튼 옛 사람들은 호환(虎患)이라 하여 두려움의 대상인 호랑이를 고양이
처럼 친근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짙었다.

산신 뒤에는 그의 활동무대인 산이 있는데, 노송과 길게 떨어지는 폭포를 그려 심산유곡(深山
幽谷)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  삼성각 독성도(獨聖圖)

칠성도 좌측의 독성도는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를 담은 그
림으로 아줌마 자세로 편하게 앉은 백발의 독성 할배와 그의 활동무대인 천태산이 그려져 있다.
비단 바탕에 채색된 것으로 1880년에 제작되었으며, 삼성각에 깃든 3개의 탱화 중 가장 오래되
었다.


 

♠  연화사의 심장부, 대웅보전(大雄寶殿)

▲  연등을 두룬 대웅보전

연화사의 법당인 대웅보전은 1993년에 지어진 지상 2층, 지하 1층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하
는 선방(禪房)과 공양간, 2층은 대웅보전, 1층은 강당(講堂)으로 작은 절에 걸맞게 집약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화를 보고 싶다면 1층을 기웃거리면 되며 시장기
가 있다면 지하로 내려가면 된다.


▲  대웅보전(2층) 내부

석가불이 관음보살(觀音菩薩)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좌우로 대동하며 자리해 있고, 영산회상
도(靈山會相圖)를 비롯한 후불탱 3점이 그들을 든든하게 받쳐준다. 그들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떡과 과일 등 온갖 음식들로 상다리가 아작날 지경인데, 음식을 쳐다보며 입맛만 다실 뿐, 먹
을 수도 손을 댈 수도 없다. 그러니 음식 모두 승려와 신도의 뱃속으로 고스란히 들어간다. 하
여 때만 잘맞으면 저 음식들을 얻어먹을 수 있다.
허나 이번에는 그런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승려와 절에서 일하는 신도의 허락 없이
마구 집어먹지는 말자~~! 그건 제사음식을 마구 집어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  연등이 알록달록 그늘을 드리운 대웅보전(2층) 앞부분
대웅보전 가운데 칸 앞에서는 아기부처에게 물을 끼얹는 관불(灌佛)의식이
열리고 있었다.

▲  관불의식을 기다리는 사람들

대웅보전 2층 앞에는 초파일을 맞아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 부처가 온갖 꽃으로 치장된 관
정대(灌頂臺)에 우뚝 서 중생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관정대 옆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줌마 신도가 관정을 도와주고 있는데 날도 날인지라 한
번 관정을 해봐야 직성이 풀릴 것이다. 하여 기나긴 관불의식 행렬에 동참하여 아기부처를 시
원하게 냉수마찰을 시켜주었다. 물을 맞은 그의 표정이 잠시 빙그레 환해진 듯 싶었는데 햇님
이 퇴근하고나면 다시 어두컴컴한 창고에 봉인되어 내년 초파일까지 기나긴 잠을 자야된다. 그
러니 오늘 실컷 냉수마찰을 받아야 여한이 없을 것이다.

다른 절에서도 관불의식을 많이 해봤지만 이곳
은 의식을 거행한 사람들에게 손수건을 하나씩
나눠주는 미덕을 보여주었다. 수건에는 연화사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빨간 바탕과 파란 바탕
2가지가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 적지않은 절(성당과 교회도 그렇고)들이
사세 확장과 돈 벌기에 지나치게 혈안이 되어
있어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데, 절이란 중생을
위해 헌신하며 속세를 위해 모든 것을 베푸는
존재가 되야 한다. 더러운 속세를 정화시키는
한 송이 연꽃처럼 말이다. 그것이 바로 초파일
주인의 뜻이며 절의 이름값을 하는 것이다.

 ◀  꽃밭에 선 아기부처, 관불의식의 현장
하얀 코끼리 위에 홍련(紅蓮) 모양의 관정대를
얹히고 그 위에 오른손을 치켜든 아기부처를
세웠다.


▲  연등의 물결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대웅보전 앞뜨락

▲  대웅보전 1층 금동석가3존불과 금동후불목각탱
금동으로 지어진 닫집 안에 금동 피부를 한 석가불이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을
대동하여 앉아 있고, 그 뒤로 금동으로 도배된 후불목각탱이 자리해 있는데
너무 화사한 나머지 두 눈이 정신을 잃을 지경이다.

▲  연화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5호

대웅보전 1층은 강당으로 쓰이고 있다. 중앙에는 금동(金銅)으로 치장된 석가3존불과 후불목각
탱이 자리해 있고, 그 우측 벽에 연화사의 주요 보물인 신중도와 천수관음도, 지장시왕도가 액
자 안에 나란히 담겨져 있다.

신중도는 호법신(護法神)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등장 인물이 너무 과다해 정신을 쏙 빼놓는다.
주로 법당을 지키는 용도로 신중도(신중탱)를 많이 거는데,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 위
태천(韋太天)을 중심으로 그의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그림 좌우측에 대칭으로 자리한 제석천과 범천은 동그란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뒤에 두루
며 머리에 보관(寶冠)을 쓴 채, 두 손으로 꽃을 들고 있으며, 그림 하단에는 위태천을 중심으
로 칼로 무장한 팔부중(八部衆)이 있고, 제석천과 범천 주위로 일월대신(日月大神) 등의 천신(
天神)과 산개(傘蓋) 등을 받쳐든 천동(天童), 악기를 연주하는 천녀(天女) 등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1901년에 수화원 한봉 응작(漢峰 應作)을 비롯해 대은 돈희(大恩 頓喜), 계은 봉법(
啓恩 奉法), 보산 복주(寶山 福珠), 보암 긍법(普庵亘法), 재겸(在謙) 등 12명의 화승(畵僧)이
그린 것으로 이중 계은 봉법, 보암 긍법, 돈법(頓法), 두삼(斗三) 등은 20세기 초 경기도 지역
에서 활약한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釋)과 교류를 가진 화승들이다.
그림의 구도와 형태, 필선, 채색 등이 깔끔하게 처리되었으며, 세부묘사가 정교해 19세기 중반
이후 화풍 흐름을 잘 보여준다.


▲  연화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6호

신중도 옆에 자리한 지장시왕도는 가운데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
道明尊者),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신중도 만큼이나 정신없
어 보이는 이 그림은 언제 그려졌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연화사 불화가 대거 조성되던 1901년에
슬쩍 제작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림을 살펴보면 지장보살은 수미단(須彌壇) 위에 마련된 연화좌에 결가부좌로 앉아있으며, 투
명한 흑색두건을 쓰고 오른손에 보주(寶珠), 왼손에 육환장(六環杖)을 들고 있다. 그 좌우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합장인을 선보이며 지장보살을 향해 서 있고, 지장보살의 신광(身光)
좌우로는 온갖 모습의 시왕이 지장보살을 향해 서 있는데 시왕 뒤에는 8곡병(曲屛)이 들러져
있으며 광배는 금박을 붙여 장식했다.
이렇게 광배를 금색으로 처리한 수법은 구한말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하던 것으로 그림의
인물표현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우두옥졸(牛頭獄卒)과 마두옥졸(馬頭獄卒) 등 인물의 상호에
표현된 음영법이다. 이 음영법 역시 19세기 이후 서울, 경기 지역 불화에서 많이 보인다.

이 그림은 1867년에 경선당 응석이 그린 낙산 보문사(普門寺, ☞ 관련글 보기)의 지장시왕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서울 청룡사(靑龍寺) 지장시왕도와 유사하며, 구한말에 서울, 경기 지
역 지장시왕도의 도상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작품으로 채색 및 인물 표현에서도 19세기 양식
이 잘 반영되어 있다. 하여 이를 통해 서울 지역 불화유파(佛畵流派)의 사승(師僧)관계를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  연화사 천수관음도(千手觀音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4호

대웅보전 1층에서 특히 눈여겨볼 그림은 바로 천수관음도이다. 지금이야 천수관음을 담은 그림
이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정작 오래된 천수관음도는 이 땅에 매우 드물게 남아있다. 그 희귀한
그림이 무려 연화사에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은 한봉 응작, 보산 복주, 청암 운조(淸菴 雲照) 등이 1901년에 그린 것으로 바다 중앙
에 봉긋 솟은 연화좌 위에 천수관음이 붉은 색 바탕의 옷을 걸치며 앉아있다. 그는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과 경책(經冊)을 받쳐든 4비(臂)를 비롯해 40비를 갖추고 있는데, 그의 커다란 광배
안에는 무려 1,000개의 손과 눈을 그려놓아 관음보살의 위엄을 한층 드높였다. 신중도와 달리
등장인물은 달랑 1명이지만 그의 찬란한 광배로 인해 이 그림 또한 혼을 다 빼놓는다.

연화사 천수관음도는 고려와 조선 전기 천수관음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 수월
관음도(水月觀音圖)의 도상까지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1925년에 제작된 대산사 천수관음
도가 연화사 천수관음도에서 계승을 받으니 그 가치는 꽤 크다. 특히 관음보살의 얼굴은 살이
많고 이목구비가 단정해 경선당 응석의 영향을 조금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  옆에서 바라본 천수관음도의 위엄

▲  대웅보전 1층 천정을 가득 수놓은 조그만 연등의 앙증맞은 물결

▲  연화사 공양밥의 위엄

연화사는 절이 조그만하여 정말 5분이면 다 보고도 남겠지만 이곳에 깃든 문화유산과 신이 나
는 초파일 분위기에 너무 취해있다 보니 1시간이 훌쩍 가버렸다. 다시는 안와도 될 정도로 경
내를 살폈지만 만나기가 꽤 까칠한 괘불을 친견하지 못했으니 그를 보기 위해서라도 나중에 또
인연을 지어야 될 것 같다. 그래도 그를 제외하면 계획한 바를 모두 누렸으니 오늘은 이 정도
로 충분하다.

초파일에 절에 왔다면 공양밥은 반드시 먹어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
다. 지금까지 눈과 마음을 지겹게 호강시켜주었으니 이제는 입과 뱃속을 달래줘야 된다. 시간
도 점심 시간을 지난 상태라 뱃속에선 밥달라며 난리를 친다. 그래서 공양(供養)을 먹고자 공
양간이 있는 대웅보전 지하로 내려갔다.
방에는 이미 사람들로 거의 만원, 연화사에서 정성을 다해 준비한 공양밥 1그릇을 들고 적당한
곳에 앉아 즐겁게 공양에 임한다. 이곳 공양밥은 호박과 김치, 무생채 등 갖은 나물을 밥에 넣
고 고추장으로 비벼먹는 이 땅에 흔한 공양밥 스타일이다. 딱히 개성은 없으나 절을 열심히 둘
러보고 먹는 밥이라 정말 꿀맛이다.
그렇게 공양을 마치고 잠시나마 정든 연화사를 나왔다. 나에게는 그날 연화사가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 회기동 연화사 찾아가기 (2017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경의중앙선 회기역(1번 출구)에서 동대문구 마을버스 01번을 타고 의료원입구
  4거리 하차<거리가 가까워 도보로 가도 상관없음, 도보 9분>  길 맞은편(서쪽) '경희대로3길
  '로 들어서 쭉 가다가 CU경희스타점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연화사이다.
* 서울시내버스 201, 273번을 타고 경희대입구 하차, 도보 7분 (경희대병원 서쪽에 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109-1 (경희대로3길 56 ☎ 02-962-6186)


 

♠  법등의 역사는 매우 짧으나 오래된 보물 2점을 간직한
조그만 절집 ~ 월계동 영축산 기원사(祈願寺)


▲  기원사 정문

연화사를 둘러보고 젊은 층으로 번잡한 경희대 주변을 벗어나 회기시장으로 나왔다. 여기서 광
운대역(옛 성북역) 부근에 있는 기원사를 가고자 서울시내버스 261번(석관동↔여의도)을 타고
월계3거리에서 하차, 월계동(月溪洞) 주택가를 가로질러 오르막길을 오르면 그 길(광운로17길)
의 끝에 기원사가 문을 활짝 열며 중생을 맞는다.

기원사는 일주문을 두지 않고, 절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기와 담장에 정문을 내어 마치 교외
에 자리한 별장이나 커다란 한식당에 들어선 기분이다. 그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창고와 해우
소를 갖춘 기와집이 있고, 정면에 뜨락과 팔작지붕을 지닌 2층 기와집이 있다. 그 건물은 요사
와 선방, 종무소, 공양간을 갖춘 복합 공간으로 그 앞에서 오른쪽(북쪽)으로 방향을 틀면 보이
지 않던 대웅전이 고개를 내민다.
대웅전 뒷쪽으로 가면 수풀이 우거진 쉼터와 석굴 모양의 삼성각이 있는데, 여기가 경내의 끝
이다. 절의 규모는 꽤 조촐하나 앞서 연화사보다 터가 좀 너르며, 건물이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고 주변이 확 트여있어 체감상 더 넓게 보인다. 반면 연화사는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주
변이 경희대 건물에 포위되어 있어 좀 답답한 구조이다.


▲  기원사에서 바라본 월계동 지역

월계동 주택가 뒷쪽이자 영축산(靈鷲山)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기원사는 조계종 소속으로 비
구니 절집이다. 이 땅에 흔한 현대 사찰의 하나로 없는 것이 없다는 인터넷 조차도 고개를 갸
우뚱거릴 정도로 정보도 거의 없고 인지도도 낮다. 서울을 거의 꿰고 산다는 나도 기원사의 존
재를 안 것은 채 몇 년도 되지 않았다. 그런 절을 내가 이렇게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화 2점을 보기 위함이다.
그들의 소환(?)을 받아 발을 들인 기원사는 그런데로 절집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바로
뒤에 월계근린공원으로 포장된 영축산이 있어 산사의 분위기도 어느 정도 풍기고 있다. 주택가
와 영축산 숲이 경계를 이룬 곳에 절이 둥지를 튼 것이다.

그렇다면 기원사는 언제 창건되었을까? 인터넷에 관련 정보가 좀처럼 걸려들지를 않아 나중에
기원사를 다시 찾아 창건송덕비를 살펴보았다. 그것이 바로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이 절은 1980년에 함경남도 성천군(成川郡) 출신인 한혜숙(당시 60대)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지었다. 그러니 그가 기원사의 창건주(創建主)가 된다. 절이 세워지자 승려 지연(知淵)이 주지
승이 되어 절을 꾸렸으며, 오래된 독성도와 산신도를 입수하여 절의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
았다.
현재 법당인 대웅전을 위시해 요사, 삼성각 등 4~5동의 건물이 경내를 채우고 있으며, 비구니
절이다보니 경내가 정갈하고 깔끔하다.

기원사를 품은 산의 이름은 영축산이다. 해발 96m의 조그만 동네 뒷산으로 월계동 한복판에 벌
러덩 누워있는데, 그 이름이 공교롭게도 불교에서 매우 좋아하는 산 이름이다. 부처가 설법을
했던 산이 바로 영축산(영취산)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름의 산에는 절이 꼭 있기 마련이라<통
도사(通度寺)를 품은 산 이름도 영축산> 혹시 기원사가 이름이 전하지 않는 옛 절터에 지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다.
오래된 절도 없는 산이 왜 영축산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기원사가 들어선 이
후 절에서 그 산을 '영축산'으로 부르면서 그것이 자연히 퍼져 얼떨결에 산의 이름으로 정착된
것이 아닐까 싶다.


▲  남쪽을 바라보는 기원사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그 주변을 돌난간으로 둘렀다. 겉으
로 보면 1층이지만 엄연한 2층으로 밑층을 반지하 형태로 먼저 깔고 그 위를 돌로 덮어 대웅전
을 올렸다. 밑층에는 신도들의 공간과 창고가 있다.

▲  영축산 기원사 창건 송덕비(頌德碑)
창건주 한혜숙을 기리는 송덕비이다.

▲  대웅전 뒷쪽에 마련된 그늘진 쉼터
자연에 둘러싸인 포근한 공간이다.


▲  대웅전 계단 옆에 마련된 관불의식의 현장

불교의 큰 대목인 초파일임에도 경내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보니 관불의식 현장도 꽤
나 한산했는데 다른 절들은 그 의식의 현장을 하나만 두기 마련이나 이곳은 계단 좌우로 2개나
배치했다.
꽃에 감싸인 아기부처는 물기가 마를 정도로 따분한 시간을 보내며 아까운 초파일 시간을 부질
없이 죽이고 있지만 천진난만한 미소만큼은 잃지 않았으며, 그의 곁에는 하얀 피부의 보시함이
놓여져 애타게 돈을 원한다.


▲  대웅전 석가불과 붉은 색채의 석가후불탱
붉은 닫집 밑으로 이글거리는 모습의 광배(光背)를 두룬 석가불이 홀로 앉아
미소를 머금으며 중생들이 헌상한 음식을 바라본다.

▲  하늘에 칠해진 4가지의 색깔, 대웅전 뜨락을 가득 채운 네모난 연등
다른 절들은 보통 동그란 연등을 매달지만 이곳은 네모난 연등으로
절의 하늘을 훔쳤다. (정문과 요사 주변은 동그란 연등을 달았음)

▲  연등이 주렁주렁 매달린 대웅전 옆구리 돌담길
돌담 너머는 영축산 숲으로 경내에서 산으로 넘어가는 길은 없다.

대웅전 뒷쪽에 숨겨진 삼성각은 2004년에 지어
졌다. 지형을 이용하여 다진 석굴(石窟) 모양
의 돌집으로 건물 내부와 천정, 문은 나무로
손질했으며 문 앞에는 머리를 2갈래로 묶은 조
그만 문수동자상이 환한 표정을 지으며 삼성각
을 지킨다.

건물 내부 중심에는 산신이, 방 좌우에는 독성
과 칠성이 한 자리씩 차지하며 중생들의 인사
를 받고 있는데, 산신의 공간이 유독 넓고 그
위로 높게 동그란 천정을 내어 산신이 사실상
삼성각의 주인임을 알려준다. 바로 이 건물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산신도와 독성도가 있으
니 꼭 살펴보도록 하자.

▲  삼성각과 귀여운 문수동자상


▲  기원사 독성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2호

독성도는 천태산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을 담은 그림이다. 소나무 밑에 앉은 독성은
시선을 오른쪽(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향해 있는데 오른손은 무릎에 놓았으며, 그의
허전한 머리 뒤에는 하얀 광배가 그를 비춘다.
그는 빨간색과 녹색이 어우러진 법의(法衣)를 입었는데, 옷 끝단에는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으
며, 그의 오른쪽에는 나무 밑둥치가 있고 바로 그 위에 세발향로가 얹혀져 있다. 소나무 그늘
위로 하얀 구름이 흘러가며 그 사이로 푸른 하늘과 붉은 햇님이 살짝 모습을 비춘다.

그림 우측 하단에 화기(畵記)가 있지만 푸른 안료로 덧칠을 하는 통에 판독이 불가능하게 되었
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조성되었는지는 오리무중(五里霧中)에 감싸인 상태로 '供養(공양)','
圓(원)' 등 몇 자만 겨우 확인이 가능하다. 허나 붉은색과 녹색을 주조로 하얀색과 청색을 같
이 사용하는 색채감과 구도는 19세기 중반 이후 불화에서 많이 나타나 19세기 중/후반에 조성
되었음을 귀띔해주고 있으며, 제자리를 잃고 이리저리 떠돌다가 20세기 후반에 기원사에 안착
하여 이곳의 듬직한 후광이 되었다.


▲  기원사 산신도와 석조 산신상

▲  기원사 산신도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5호

독성과 칠성은 그림만 걸려있지만 산신은 그림 외에 돌로 만든 산신상까지 갖추고 있어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다. 어흥~! 거리는 호랑이를 옆에 끼고 앉은 석조 산신상 뒤에는 독성도와 더불
어 이곳의 오랜 보물인 산신각이 걸려있다.

그림 중앙에는 붉은 도포와 푸른 두건을 걸친 산신이 하얀 부채를 들고 앉아있다. 머리는 좌우
만 조금 남은 대머리로 수염이 무성하며, 그 옆에는 산신의 비서인 동자와 여인이 주전자와 찻
잔을 들며 서 있다. 보통 산신도에는 동자만 나오기 마련인데, 산신의 마음을 읽었는지 여자까
지 등장을 시켰다. 호랑이는 산신 맞은편에서 산신을 바라보며 어흥~! 거리고 있는데, 아마도
산신이 제때 밥을 주지 않아 항의하는 모양이다. 보통 호랑이가 산신 뒤나 옆에 있기 마련이지
만 여기는 서로 마주보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산신 옆에는 소나무가 있고 구름과 해가 소나무를 감싸고 있는데, 굵은 줄기에 태점을 찍고 옅
은 수묵을 사용하여 줄기를 표현해 오래된 노송의 질감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명도가 높은 청
색을 사용하고 손발에 음영법이 쓰이는 등 19세기 말 이후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독성도와 달리 그림 밑부분 좌측에 화기가 남아있어 그의 정보를 소상히 알려준다.
화기에 따르면 을유년(1885년) 5월 1일에 조성되어 전라남도 나한산 사태암(어딘지 모르겠음)
에 봉안되었다. 그런데 전라남도란 명칭은 1896년 이후에 쓰여진 것이니 아마도 화기를 그 이
후에 작성하거나 수정한 것 같다. 1885년에는 전북, 전남, 제주도가 모두 전라도였기 때문이다.
금어 우곡(雨谷)과 수산 근혜(守山謹惠) 등이 그림을 그렸고, 시주는 식성(湜惺) 등이 했으며,
어찌된 영문인지 제자리를 잃고 천하를 방황하다가 기원사에 흘러들어와 안착을 하였다.

◀  나이가 한참 어린 칠성도
독성도와 산신도에만 한참 눈이 가있다 보니
칠성도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  기원사 공양밥의 위엄

열심히 경내를 둘러보니 다시 시장기가 엄습한다. 부지런히 일을 마쳤으니 공양 1그릇 들고 가
야 되겠지. 하여 이곳의 인심도 확인할 겸, 요사 공양간을 찾았다. 시간이 15시가 넘었지만 밥
은 아직 제공되고 있었다.
밥그릇에는 갖은 나물이 버무려져 있었는데, 밥주걱이 부러지도록 밥을 담고 고추장을 푼 다음
오뎅국이 든 그릇을 챙기고 밖으로 나왔다. 절에서 차려준 공양 자리는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어서 자리가 여의치 않았으나 비구니의 배려로 요사 1층에 들어가 다시금 즐거운 공양
시간을 가진다.

이곳 공양밥도 연화사와 마찬가지로 비빔밥이다. 밥과 콩나물, 무생채, 고사리 등 온갖 나물에
고추장을 넣어 빨갛게 해먹으면서 되는데, 특이하게 무와 오뎅, 미역이 든 오뎅국도 제공해 주
었다. 그렇데 공양을 마치고 그릇을 반납하니 뜨락에서 음료수와 솜사탕, 얼음 슬러시를 제공
하고 있었다. 그래서 슬러시 1컵 받아 먹으며 후식까지 채웠다.
이렇게 기원사의 훈훈한 인심을 체험하고 잠시나마 정든 그곳을 뒤로 한 채, 유독 짧아보이는
초파일의 낮을 원망하며 다음 목적지를 향해 콩 볶듯 길을 움직였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 월계동 기원사 찾아가기 (2017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광운대역(1,2번 출구)에서 광운대 방면으로 가면 월계3거리이다. 3거리를 건너
  서 광운대 쪽으로 직진하면 기원사를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나온다. 그 이정표를 따라 들어
  가다가 광운로17길로 진입하여 직진하면 그 길의 끝에 기원사가 있다. 단 길이 조금 복잡해
  초행인 경우 햇갈릴 수 있으니 감이 잡히지 않으면 주민들에게 문의한다.
* 서울시내버스 261, 1017, 1137, 1140번 시내버스를 타고 월계3거리 하차, 도보 6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월계1동 392-106 (광운로17길 48-47, ☎ 02-918-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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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 바람)
* 공개일 - 2017년 5월 4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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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사찰, 작은 석굴암을 간직하고 있는 서울 낙산 보문사 (보문사 괘불)

 


' 낙산 동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사찰, 탑골승방 보문사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  보문사 석굴암


 

매년 변치 않고 찾아오는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을 맞이하여 친한 후배들과 함께 서울
장안을 중심으로 절 나들이에 나섰다.

오전 11시부터 시작된 그날 초파일 나들이는 서울 강북의 여러 오래된 절을 거쳐 보문사
에서 그 마무리를 지었는데, 때이른 무더위와 적지 않은 산행, 너무나 알찬(?) 일정으로
몸은 거의 녹초가 되버렸다.
18시 경, 시원한 국수로 저녁을 때우며 그날 일정을 곱게 정리하려고 했으나 아직까지도
여전한 해를 보니 다시 욕심이 싹트면서 후식거리로 절 1개를 더 챙겨보기로 했다. 그러
자 일행들은 힘들다며 다들 정색을 한다. 그래서 기절 직전(?)인 후배는 고이 집으로 보
내고 나머지 1명과 보문동(普門洞)에 있는 보문사의 산문을 찾았다.


 

♠  보문사(普門寺) 입문

▲  보문사의 정문인 호지문(護持門)

보통 절들은 일주문이나 천왕문(天王門)을 경내 밖으로 내밀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만 보문사
는 도시 한복판에 자리해 있어 그럴만한 공간이 없다. 그렇다고 차량의 왕래가 빈번한 보문역4
거리나 보문역에서 절로 가는 길목에 억지로 일주문을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여 절과 속세
의 경계이자 정문으로 쓰였던 동쪽에 2층 규모의 호지문을 지어 일주문과 천왕문의 역할을 도
맡게 했다.
호지문이란 계속 지킨다는 뜻으로 이는 천왕문의 역할을 뜻한다. 비록 우람한 사천왕(四天王)
은 없으나 대신 수위실을 두어 수위들이 사천왕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문 위에는 '호지문'
현판이 걸려있고 팔작지붕을 취한 2층에는 '보문사' 현판을 두어 이곳의 존재와 이름을 속세에
밝힌다.

호지문 앞에는 초파일 특수를 노린 행상들이 진을 치며 솜사탕과 음료수, 아이스크림 등을 팔
고 있었고, 절로 들어가는 길목의 가게들도 앞다투어 양초와 공양미 등을 내밀며 초파일 특수
를 나누고 있었다.


▲  봉축한마당 막바지 공연 (춘향전으로 여겨짐) ▼

호지문을 들어서면 바로 초파일 공연으로 떠들썩한 향운각 뜨락이다. 여기서부터 보문사 경내
가 시작되는데, 뜨락 너머로 종각과 법보전 등이 보이고, 공연장 뒤에는 2층으로 이루어진 향
운각(香雲閣)이 자리한다.
향운각 1층은 매점과 불교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으로, 2층은 요사(寮舍)로 쓰이고 있으며, 그
앞뜨락에 공연장을 닦아 흥겨운 봉축한마당 공연을 벌이고 있었다.


▲  꽃동산처럼 꾸며진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공연을 뒤로하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초파일의 백미(白眉)인 관불의식의 현장이 나온다. 꽃으로
곱게 치장된 공간 한복판에 단정한 헤어스타일의 아기부처를 두었는데 거의 1년 만에 외출이라
잔뜩 즐거움에 잠긴 모습이다. 사람들은 길쭉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그의 몸에 부으며 슬쩍 소
망을 들이밀고 그 앞에 마련된 복전함은 관불의식의 덕을 톡톡히 보며 디룩디룩 배를 채운다.


▲  보문사 괘불(掛佛)

관불의식 현장 바로 뒤쪽에는 괘불이 거룩하게 자리하여 경내를 비추고 있었다. 괘불은 초파일
이나 절 행사일에 잠깐씩 얼굴을 비추는 비싼 존재로 평소에는 친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여 지
금까지 270곳이 넘는 고찰(古刹)을 답사했음에도 그를 만난 절은 고작 열 손가락 내에 불과하
다. <보문사, 홍은동 옥천암, 우이동 도선사, 돈암동 흥천사, 강남 봉은사, 고양시 흥국사 정
도> 그것도 봉은사(奉恩寺)와 도선사(道詵寺)를 제외하면 모두 초파일에 만났다. 그러니 초파
일에 기를 쓰고 절투어를 벌어야 괘불(특히 오래된 괘불)에 대한 가려움을 어느 정도 긁을 수
있다.

보문사 괘불은 내가 처음으로 만났던 괘불<2004년 초파일에 친견했음>로 이번이 2번째 인연이
다. 정정한 그를 다시 만나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보문사는 8~9회 정도 인연을 지었
음) 그의 구조를 보면 중앙에 큰 석가불을 배치하고 좌우에 보살(菩薩)로 보이는 작은 존재를
두었다. 20세기 중반에 제작되어 매우 반질반질하며 탱화의 높이는 5m 정도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보문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8각9층석탑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 보문동과 안암동(安岩洞) 지역
약간의 산지를 낀 절이라 조망은 썩 별로이다.

① 보문사의 역사
서울 도심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인 낙산(駱山, 낙타산), 그 동쪽 줄기에 단종(端宗)의 왕비
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의 애환이 서린 동망봉(東望峰)이 있고, 바로 그 봉우리 동쪽에 비
구니 사찰의 성지(聖地)이자 천하 유일의 불교 종파인 보문종(普門宗)의 중심지 보문사가 둥지
를 틀고 있다.

그렇다면 보문사는 언제 법등(法燈)을 켰을까? 불교 학자 겸 승려인 권상로(權相老, 1879~1965
)는 고려 중기인 1115년(예종 10년) 담진국사
(曇眞國師)가 창건했다고 주장했다. '보문사일신
건축기(普門寺一新建築記)'에는 당시까지 전해오던 창건 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보문사의 창
건배경과 담진국사와의 연관성을 강조하며 고려 때부터 비구니들이 머물며 나라의 안녕과 제왕
의 성수만세(聖壽萬歲)를 기원하는 니사(尼寺)로 언급하고 있다.
허나 아무리 그러면 무엇하랴. 창건 이후 17세기까지 아무런 기록과 유물이 없으니 말이다. 그
불편한 진실을 해소하지 못하는 한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계속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혹
여 경내를 싹 뒤엎고 조사를 벌이면 땅 속에서 고려나 조선 초/중기 주춧돌이나 그 시절 유물
이 나올 수도 있지만 뒤집을 여건도 되지 못한다.

본격적인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17세기 후반으로 1692년 묘첨(妙沾)이 대웅전을 중건했다고 한
다. 1826년 수봉법총(秀峰法聰)이 만세루를 세우고 1827년에는 정운(正雲)이 좌우 승당을 세워
제법 가람을 이루었으며, 1842년에는 영전(永典)이 대웅전과 만세루를 개조했고, 1867년 지장
시왕도를 비롯한 여러 탱화를 조성했다. 그리고 1872년에는 금훈(錦勳)이 좌우승당을 새로 지
었다.

조선시대에는 보문사와 바로 이웃에 자리한 미타사(彌陀寺)를 하나로 묶어 '탑골승방(僧房)'이
라 불렀는데, 그 시절 도성(都城) 밖에 있던 4개 비구니 승방의 하나였다. 그 4개 승방이란 탑
골승방과 옥수동(玉水洞)의 두무개승방<미타사(彌陀寺), 두무개는 옥수동 옛 이름>, 석관동(石
串洞)의 돌곶이승방<청량사(淸凉寺)와 연화사(蓮花寺), 돌곶이는 석관동의 옛 이름>, 창신동(
昌信洞)의 새절승방<청룡사(靑龍寺)>으로 이들은 궁궐 상궁(尙宮)과 후궁이 머리를 깎고 말년
을 보냈던 그들의 마지막 의지처였다.
탑골승방은 이름 그대로 탑골에 있는 승방인데, 보문동(普門洞) 일대를 탑골이라 불렀으며, 그
유래는 고려 초(1047년)에 조성된 미타사 5층석탑에서 비롯되었다. (지금도 탑이 있음)

왜정(倭政) 이후에는 1928년 긍탄(亘坦)이 대규모 불사를 벌였는데, 대웅전 석가3존불을 개금(
改金)하고 관음전과 대웅전, 좌우승당을 증축하는 한편, 칠성각과 삼성각을 세웠다. 1945년에
는 보문사의 큰 여승으로 일컬어지는 송은영(宋恩榮)이 주지로 들어와 1980년대까지 불사를 벌
였는데 지금의 가람은 거의 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땅을 크게 확보하여 선불장과 범종각, 극락전을 비롯하여 많은 건물을 지었으며, 1971년
대한불교보문원을 설립하고 1972년에 왜정 때 주지를 지낸 긍탄과 보문종을 개창했다. 보문종
은 천하 유일의 비구니 종단으로 천하 최초의 비구니인 석가모니의 이모, 마하파자파티를 종조
(宗祖)로, 신라 때 비구니인 법류니(法流尼)를 중흥조(中興祖)로 삼고 있다.

보문종이 개창된 그해에 보문사의 최대 프로젝트였던 석굴암(당시 이름은 석불암)이 완성되었
다. 1970년 8월 1일 착공하여 1972년 6월 16일 완성을 보았는데, 소요된 석재는 화강암 2,400
톤, 철재 25톤, 시멘트 1만 포대로 경주 석굴암을 축소 재현해 눈길을 끈다.
1978년에 거대한 사리탑을 만들어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고, 1986년에는 황법준이 대웅전과 좌
승당을 개조했으며, 1987년 석불암을 석굴암으로 이름을 갈았다. 1988년 주지 이름을 딴 은영
유치원을 세워 복지/교육사업에도 손을 뻗었으며. 1998년과 1999년에 각각 동원정사와 만불전
을 지었다.
현재는 인태가 주지승으로 있으며, 보문종의 중심지로 천하에 30여 절을 말사(末寺)로 거느리
고 있다. (미대륙과 왜열도에도 말사가 4곳 있음)

보문사 대지는 1만여 평으로 건물은 무려 20여 동(일반 주택처럼 생긴 건물이 꽤 많음). 머무
는 비구니는 150명이 넘는다. 소장문화유산은 보물 1164-2호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권3~4,
5~7<5권 2책>과 석가불도, 신중도, 지장시왕도 등 지방문화재 3점(이들은 모두 1867년에 제작
됨), 그리고 19세기 이후 왕실에서 하사한 것으로 전해지는 연수식과 인로왕보살번(引路王菩薩
幡)이 전하고 있다. 그중 묘법연화경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로 조선 초에 간행되었으나
원래부터 보문사 것은 아니다. (묘법연화경은 관람 불가)

② 보문사의 구조
절의 정문인 호지문을 들어서 정면으로 계속 가면 석굴암과 사리탑, 선불장으로 이어진다. 그
런데 이상한 것은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통 정문을 들어서 곧장 가면
알아서 법당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곳은 전혀 그러지를 못하여 초행인 사람은 대웅전도 없는
절로 여기기가 쉽다. 나도 처음에는 대웅전도 못보고 갔으니 말이다.

허나 대웅전은 향운각 뒷쪽 구석에서 숨바꼭질을 즐기고 있다. 다른 건물도 아닌 법당이 말이
다. 대웅전으로 가는 길은 좁은 골목길 분위기로 그 길의 끝에 대웅전과 묘슬전, 보광전 등이
자리해 있다. 이처럼 절의 중심 건물이 눈에 쉽게 띄지도 않는 그늘진 곳에 있는 것은 대웅전
주변이 원래 보문사 영역으로 그 공간에 현대식 주택의 건물을 마구 심다보니 이렇게 독특한
구조가 된 것이다. 반면 새로 편입된 서남쪽 부분은 석굴암과 몇몇 건물만 닦아놓아 다소 여유
가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경내는 크게 옛 도심 같은 대웅전 구역과 신도시 같은 서남쪽 구역(석굴암, 선불장)으
로 나눌 수 있다. (대웅전 구역 북쪽에 미타사가 있음)

경내 서쪽 석굴암 주변은 숲이 좀 우거져 있는데, 석굴암과 8각9층석탑 서쪽 숲속에는 비구니
들이 주로 이용하는 오솔길이 있다. 허나 이곳 외에는 나무는 별로 없으며, 주변이 온통 아파
트와 주택가라 산사(山寺)
의 내음은 다소 떨어진다. 옛날에야 그런데로 산사의 내음이 진했으
나 20세기 중반 이후 개발의 칼질이 절 주변을 가만히 두지 않으면서 도시 속에 고립된 별천지
가 되버린 것이다. 게다가 오랜 내력에 걸맞지 않게 고색의 내음도 상당히 식은 상태라 조금은
안타깝다. (대웅전과 삼성각 정도만 고색이 조금 피어있음)

※ 보문사 찾아가기 (2017년 3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보문역 1번 출구에서 도보 3분
* 서울시내버스 103, 142, 152, 272, 273, 1014, 1111, 1162번 시내버스를 타고 보문역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3가 168 (보문사길 20) <☎ 02-928-3797>
* 보문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대웅전 내부 (석가3존불과 석가불도, 닫집, 용머리 장식)


 

♠  보문사 대웅전(大雄殿) 구역

▲  연등에 가려진 대웅전

완전 동네 골목길 같은 향운각과 남별당 사잇길로 들어가면 동쪽을 바라보고선 대웅전이 나타
난다. 허공을 가득 메운 연등의 위엄에 대웅전은 감히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간신히
계단과 아랫도리만 드러낸다. 지붕과 윗도리는 하늘과 함께 연등에 의해 말끔히 지워진 상태,
이날만큼은 연등이 하늘과 속세의 경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대웅전은 보문사의 법당(중심 건물)으로 이곳이 경내의 옛 중심이다. 지금도 여전히 중심이긴
하지만 일반 주택과 뒤섞인 구석진 곳이라 그 실감이 덜하다. 그러다보니 경내에 편입되어 개
발된 서남부 구역에 비해 무게감도 좀 떨어져 보이고 햇살도 엉거주춤하는 그늘진 곳이라 조금
은 칙칙하기까지 하다.
대웅전 구역은 경내에서 가장 건물이 밀집되어 있는데, 대웅전과 묘승전, 심우당, 삼성각 등은
기와집을 취하고 있지만 일반 주택처럼 생긴 건물이 많아 마치 조그만 마을 같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불전(佛殿)이다.
1842
년과 1865년 중건을 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손질을 했다. 이 자리에는
보문사를 세웠다는 담
진국사가 정진했다는 토굴이 있었다고 하며, 건물 내부에는 석가3존불과 석가불도, 지장도 등
의 탱화와 1928년에 조성된 범종, 경전(經傳)을 보관하는 경궤(經櫃) 등이 있다. (범종과 경궤
의 보관 위치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


▲  대웅전 석가3존불과 석가불도(釋迦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8호

대웅전 불단에는 나무로 만든 조그만 석가3존불이 자리해 있다. 가운데 석가불은 인자하고 동
자승 같은 귀여운 표정이며, 그 좌우로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
현보살(普賢菩薩)이 자리해 있는데, 석가불과 덩치가 비슷하거나 조금 커 보인다.

그들 뒤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가불도(석가모니후불탱)가 든든한 후광(後光)처럼 걸려 있
다. 비단에 그려진 이 탱화는 가로 140cm, 세로 180cm 크기로 1867년에 제작되었다. 관련 화기
(畵記)가 구석에 남아있는데, 석가불이 법화경(法華經)을 강의하는 영산회상(靈山會上)의 장면
을 담고 있으며, 그 아랫족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배치하고, 석가불 머리 위쪽에 관음
보살과 지장보살을, 왼쪽에는 10대 제자와 화불(化佛) 2위를 넣었다. 그리고 화면 사방에는 사
천왕을 배열해 조금의 여백도 허용치 않았다.
색감은 붉은색을 많이 썼고, 보살과 사천왕상은 모두 두광(頭光)을 지녔다. 이는 그 시절 탱화
의 주요 특징 중 하나로 표현기법이 정교하고 구도 또한 좌우 대칭의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9호

대웅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도는 절과 불법(佛法)을 지키는 호법신(護法神)을 몽땅 머금은 탱
화이다. 비단에 채색된 가로 200cm, 세로 140cm의 크기로 1867년에 그려졌는데 앞에 석가불도
와 비슷한 색상과 표현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신중도의 중심 멤버인 제석(帝釋)과 범천(梵天)은 그림 상단에, 용왕(龍王)은 중앙에, 위태천(
韋太天)은 하단에 배치했고, 여러 산신과 복덕대신(福德大神), 토지대신(土地大神), 가람대신(
伽藍大神)과 인도의 야차(夜叉), 아수라(阿修羅) 등 10여 명을 빼곡히 배치하여 그야말로 누가
누군지 모를 정도로 정신을 쏙 빼놓는다.

◀  대웅전 앞쪽에 자리한 심우당(尋牛堂)
2006년에 참선 수행을 위해 조성된 맞배지붕
건물로 템플라이프와 행사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  시왕전(十王殿) 내부
1970년에 지어진 것으로 지장보살의 공간이다.
시왕(十王)이 담긴 금동목각탱이 건물
내부를 화사하게 밝혀준다.


▲  심우당과 마주하고 있는 묘승전(妙勝殿)

묘승전은 예전 좌승당(左僧堂)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불단에는 조그만
석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로 이루어진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석가모니후불탱, 감로
탱, 지장시왕도, 1916년에 그려진 신중도와 현왕도(現王圖) 등이 건물 내부를 채우고 있다.


▲  묘승전 석가3존불과 석가모니후불탱

▲  흐릿한 모습의 묘승전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0호

묘승전 우측 벽에는 3개의 불화가 걸려 있는데, 왼쪽이 신중도, 가운데가 지장시왕도, 오른쪽
이 현왕도(現王圖)이다. 처음에는 지장시왕도의 위치를 몰라 깜박 넘어갈 뻔 했으나 묘승전에
있다는 말을 듣고 절을 나가기 바로 전에 부랴부랴 묘승전으로 들어갔다.
텅 빈 묘승전 내부는 불단을 제외하고 모두 컴컴한 상태, 불을 켰으나 지장시왕도 쪽은 여전히
어둠의 기운이 높아 사진에 담기가 힘들었다. 그때 시간도 초파일 행사가 거의 마무리 되는 19
시 직전이고 비구니와 신도 아줌마가 언제 들어와 잔소리를 던질지 모르는 상황이라 새가슴마
냥 저 정도만 담고 철수했다.

비단에 그려진 지장시왕도는 1867년에 응석(應釋)이 제작한 것으로 가로 145cm, 세로 200cm 크
기이다. 그림 한복판에 커다란 금니(金泥)가 칠해진 원을 닦아 그 안에 지장3존을 그렸고, 그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위와 아래 두 줄로 저승의 시왕(十王)을
나누어 배치했다.
그리고 그 주위로 석류를 비롯한 여러 지물을 가진 동자(童子)와 동녀(童女), 판관(判官), 녹
사(錄事), 우두(牛頭), 마두(馬頭), 나찰(羅刹), 사자(使者)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을
빼곡히 배치했다. 색감은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며, 조선 후기 지장탱(지장도) 가운데 구도의
특이함과 시왕의 복색 등 여러 면에서 특색이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  대웅전 뒤쪽 구석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북쪽 구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삼성각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이 건물은 칠성(七星)
과 독성(獨聖), 산신(山神)의 보금자리로 그중 칠성탱은 1874년에 조성되어 지방문화재로 지정
된 3점의 불화 다음으로 연세가 지긋하다. 허나 지방문화재 불화만 크게 의식을 했지 칠성탱의
존재를 깨닫지 못해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  보문사 석굴암, 사리탑 구역

▲  범종각(梵鍾閣)

▲  법보전에서 바라본 범종각 2층

호지문에서 석굴암으로 가려면 범종각을 지나야 된다. 범종각 밑도리를 통해 가도 되고, 범종
각 직전 왼쪽 계단을 통해 접근해도 된다. (거리는 비슷함)

범종각은 누각 형태로 지어진 2층 건물로 1층에 석굴암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어 석굴암으로 인
도하는 출입구 역할을 하고 있는데, 2층에는 범종과 목어(木魚), 운판(雲版), 법고(法鼓) 등의
사물(四物)이 깃들여져 있다. 이들 사물은 1969년에 조성된 것으로 예전에는 범종을 새벽에 3
번, 점심에 12번, 저녁에 28번을 쳤으나 지금은 새벽과 저녁에만 친다.


▲  뱉어낼 물이 없어 멀뚱히 혀만 내민 채 고통 받고 있는 용머리
보문사도 오래된 절이라 자체 샘터가 있었다. 허나 개발의 칼질로 도심 속의
외로운 공간이 되면서 수질이 악화되고 물줄기까지 끝내 끊기면서
바쁘게 움직이던 바가지도 그를 떠나버렸다.

▲  석굴암 북쪽에 자리한 산령각(山靈閣)

용머리 샘터를 지나 윗쪽으로 오르면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석굴암 구역이다. 석굴
암을 20m 앞둔 곳에 갈림길이 있는데, 여기서 오른쪽(북쪽)으로 가면 담장에 둘러싸인 산령각
이다.

산령각은 산신을 봉안한 공간으로 산신각의 다른 이름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1963년에 지어졌는데, 경내에서 가장 명당(明堂)으로 꼽히는 터라고 한다. 그런데 앞서
삼성각에서 이미 산신을 봉안하고 있어 산신을 위한 공간이 2개나 있는 셈인데, 삼성각의 산신
은 일반적인 산신이고, 산령각은 보문사를 품은 낙산의 산신을 위한 공간으로 보문사에서 낙산
을 위해 만든 특별한 건물이다. (산신탱 외에 독성이 그려진 독성탱과 독성상도 있음)

▲  정면에서 바라본 산령각

▲  산령각에 봉안된 산신탱과 독성탱


▲  보문사의 명물인 석굴암(石窟庵)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서쪽 끝에 보문사의 제일가는 명물이자 꿀단지인 석굴암이 있다.
딱히 내세울 명물이 없어 애태우던 보문사에 단비를 뿌려준 존재로 절을 크게 일군 송은영 주
지의 야심작이기도 하다.
경내 서쪽 야산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이를 활용해서 조성했는데, 석굴암이란 그 이름 그대
로 경주(慶州) 석굴암을 축소 재현해 눈길을 끈다. 하지만 본존불(本尊佛)을 제외하면 경주의
그것과 생김새가 많이 다르므로 괜히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경주 석굴암에 왔다고 우기지는
말자.

이곳 석굴암은 1970년 8월 1일 공사를 시작하여 1972년 6월 16일 완성을 보았는데, 소요된 화
강암은 2,400톤, 철재 25톤, 돔용 시멘트 10,000포대, 석공과 조각 담당자는 연 45,000명, 노
동자는 연 25,000명에 이르는 보문사 최대의 프로젝트였다. 총감독을 맡은 이는 현대화가인 한
봉덕 화백으로 석공예(石工藝)에도 일가견이 있어 봉원사(奉元寺)에 석불을 만든 적이 있었다.

1970년 7월, 주지 송은영이 봉원사를 찾았는데, 거기서 한봉덕이 만든 석불을 보고 그만 반하
고 말았다. 안그래도 큰 석불을 지을 계획이라 봉원사에 머물던 탱화 명장(名匠)인 만봉에게
석불을 만든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하여 같이 한봉덕을 찾아 석불 건립을 의뢰했다.
의뢰를 맡은 한봉덕은 공사에 앞서 경주 석굴암을 찾아 그곳을 스케치하면서 석불을 만들었다.
처음 조성 계획은 본존불만 만드는 것이었으나 공사 때문에 여러 차례 석굴암을 다녀오면서 그
만 석굴암 전체를 재현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났다. 그래서 주지를 설득하여 판을 크게 벌였고
그렇게 보문사 스타일의 석굴암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석굴암의 면적은 1,000평, 건평은 65평으로 본존불에 쓰인 화강암만 15톤에 달한다. 불상 높이
는 3.38m이며, 석굴 내부에 문 3개를 두었다. 허나 석굴 자리가 넓지 못해 팔부중상(八部衆像)
은 만들지 않았다.
석굴암 내부 배치는 바깥 복도에 금강역사와 사천왕을 배치했고, 석굴 안에 본존불을 두었는데,
그 주위로 10대 제자와 관음보살, 대범천왕(大梵天王), 석가탑(釋迦塔) 등을 두어 경주와는 조
금 다르다. 처음에는 석불암(石佛庵)이라 불렀으나 1987년 석굴암으로 이름을 갈았으며, 복도
좌우에 난 통로를 통해 본존불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  석굴암 내부 - 본존불까지는 들어가지 않고 그냥 바깥에만 머물렀다.

▲  석굴암을 지키는 금강역사(金剛力士)와 사천왕의 위엄

▲  보문사 8각9층석탑(사리탑)

석굴암에서 남쪽으로 가면 칼처럼 날렵하게 솟은 8각9층석탑을 만나게 된다. 이 탑은 1979년에
주지 송은영이 만든 것으로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8각9층석탑을 모방해서 만들었다. 석굴암도
그렇고 이 탑도 그렇고 송은영은 기존의 명성이 높은 불교 문화유산을 본떠서 만드는 것을 좋
아했던 모양이다.
탑 안에는 당시 자운(慈雲)이 스리랑카에서 얻어온 부처의 진신사리 3과를 봉안했는데, 그 연
유로 간편하게 사리탑<탑전(塔殿)이라 하기도 함>이라 부르기도 한다.


▲  8각9층석탑에서 극락전으로 이어지는 짧은 산책로

▲  돌담 너머로는 비구니들만의 숨겨진 오솔길이 있어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일반인은 출입 통제)

▲  선불장(選佛場)
1958년에 지어진 2층 건물로 강당 및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  법보전(法寶殿)
보문사 어른 승려의 요사채이다.


▲  경내 서남쪽에 자리한 극락전(極樂殿)

속세를 등지고 북쪽을 바라보고 선 극락전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공간으로 1970년에 세워졌
다.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로 이루어진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죽은 영가(靈
駕)를 위한 공간으로도 쓰이고 있어 그들을 위한 제사가 치루어진다. 그래서 건물 주변에 조금
은 으시시한 하얀 연등을 두른 것이다.


▲  괘불의 철수 현장

경내를 둘러보고 향운각 앞으로 내려오니 괘불이 사람들에 의해 둘둘 말려지고 있었다. 아쉽지
만 괘불함으로 들어가야 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그림에 그려진 존재가 석가불이긴 해도 인
간이 편의상 만들고 봉안하는 그림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들 입맛에 맞춰 나왔다가 다시 들어
가야 되는 것이 괘불 부처의 운명이다. 이번에 들어가면 언제나 햇살을 볼까?? 점점 작아지는
괘불 석가불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진다.


▲  이제는 헤어져야될 시간~~ 괘불은 끝내 접히고 말았다.

▲  초파일의 끝을 장식하는 저녁 예불

괘불이 철수하자 경내를 1바퀴 돈 승려와 신도들은 관불의식 현장 앞에 모여 초파일 저녁 예불
을 올린다. 딱히 특별한 것은 없는 것 같아서 조그만 연꽃 모형을 하나 얻고 총총히 내 제자리
로 돌아왔다.

벌처럼 날라가 콩을 볶듯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하루, 벌써 그날이 재생이 불가능한 과거가 되
었다는 현실이 참 소름이 돋긴 하지만 그 짧은 초파일 하루를 정말 야무지게 쓴 것 같아 정말
뿌듯하다. 이렇게 하여 초파일 나들이는 내년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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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반도 제일의 경승지, 아름다운 전나무숲길을 간직한 ~~~ 부안 내소사



' 부안 내소사(來蘇寺) 봄나들이 '

▲  내소사 대웅보전


봄이 나날이 흥해가던 4월의 끝 무렵에 멀리 남쪽에서 온 일행들과 부안군(扶安郡) 변산
에 자리한 내소사를 찾았다.
그날 오전에 군산 비응도(飛鷹島)에서 월명유람선을 타고 선유도(仙遊島)와 고군산군도(
古群山群島)를 1바퀴 둘러보고 비응도 인근에서 해물탕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배불리 먹고 바다의 만리장성이라 찬양받는 새만금방조제를 건너는데, 정말 징그
럽게 길긴 긴 모양이다. 아무리 가도가도 그 끝이 나오질 않는 것이다. 그저 서해바다와
둑방길만 지겹게 보일 뿐이다.
그렇게 방조제를 건너 부안군 땅으로 진입, 격포와 상록해수욕장을 지나 변산 남쪽에 자
리한 내소사 주차장에서 도착했다.

내소사는 주말 상춘객들로 선유도 못지 않은 높은 탐방밀도를 보인다. 이곳은 이미 예전
에 2번이나 발걸음을 했던 곳으로 슬슬 지겨울 법도 하겠지만, 나의 마음을 제대로 훔친
명소의 하나로 그곳을 모두 외울 정도로 들락거려도 결코 지루하지가 않다. 


 

♠  내소사 입문 (전나무숲길)

▲  내소사 일주문(一柱門)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 가는 길은 다른 유명 사찰이나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식당과 가게, 민박
집들이 즐비하다. 절 밑에 형성된 마을을 3자로 사하촌(寺下村)이라고 하는데, 이 마을도 내소
사의 덕을 보는 일종의 사하촌이자 관광단지이다. 식당들은 산채비빔밥과 도토리묵, 파전, 향토
음식 등 갖은 음식과 술을 내밀며 관광객들을 진하게 유혹한다. 마치 절을 목전에 둔 속세의 마
지막 유혹이라고나 할까?

먹거리의 유혹을 휼륭하게 물리치고 관광단지를 지나면 내소사가 일주문을 내밀며 중생을 맞는
다. 이 문은 내소사의 정문으로 속세와 절의 경계를 가르는 역할이다. 문이라고는 하지만 여닫
는 문짝은 없으며 허공처럼 뻥 뚫려 있어 부처나 관음보살 누님, 대자연 형님의 마음처럼 누구
든 가리지 않고 맞이한다. 사람들이 일주문의 절반만 닮았다면 이 세상은 참 아름다울텐데, 신
(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고 있는 존재라 아마 안될 것이다.
내소사 일주문은 1982년에 승려 원조가 3평의 팔작지붕 건물로 만든 것으로 1984년 우암혜산이
단청을 칠하고 지금의 모습으로 고쳤다. 문 정면에는 '능가산 내소사(楞伽山 來蘇寺)'라 쓰인
현판이 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주는데, 글씨가 차분하면서도 맵시가 있어 보인다. 이 글씨는
1983년에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縣)이 쓴 것이다.

일주문 바로 너머에는 그리 반갑지 않은 매표소가 중생들의 발길을 강제로 붙잡으며 그들의 호
주머니를 탐낸다. 이곳 입장료는 무려 3,000원씩이나 한다. (성인 기준)


▲  일주문 동쪽에 자리한 재미난 모습의
장승들 - 이보다 익살스러운 장승이
천하에 어디에 또 있을까? 허나 얼굴이
붉어서 밤에 본다면 조금 소름 끼칠 것 같다.

 

  700년 묵은 느티나무의 위엄
(할아버지 당산나무)

일주문 남쪽에는 하늘까지 좁게 보일 정도로 장대한 느티나무 1그루가 주변에 넓게 그늘을 드리
운다. 그는 700년 이상 묵은 오래된 나무로 할아버지 당산나무라 불리며, 옛날부터 내소사와 입
암마을(내소사 남쪽 마을)로부터 끈끈한 숭상을 받고 있다. 반면 그의 배우자라 할 수 있는 할
머니 당산나무는 내소사 경내에 있는데, 나이가 무려 1,000년을 헤아린다.

이 느티나무에서는 매년 음력 1월 14일 당산제(堂山祭)가 열리고 있는데, 나무의 700년 나이를
통해 대략 고려 후기부터 제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 이 당산제는 오랫동안 내소사에서 제사를
주관했다는 것이 큰 특징으로 이 땅에 들어온 불교가 나름 붙임성을 발휘하며 토속신앙을 받아
들여 생긴 한국식 불교의 대표적인 산물이다. 이렇게 절에서 직접 제사를 지내다 보니 다른 당
산제와는 그 형식과 의식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제사와 굿도 불교 의식을 따르고 있
다. 그래서 당산제의 이름도 절의 이름을 딴 '내소사 당산제'였다.

반면 입암마을은 내소사와 별도로 당산제를 지내는 웃뜸 서낭당이 있었다. 허나 1940년대부터
당산제를 지내지 않으면서 그 서낭당은 버려졌으며, 이후 내소사당산제를 마을 당산제로 삼아
내소사와 함께 제를 지냈다. 그러다가 1990년 이후 내소사에서 마을로 당산제를 넘기면서 '입암
당산제'로 명칭이 갈렸고, 할아버지 당산을 마을의 주신(主神)으로 받들게 되었다. 제를 지낼
때는 내소사에서 승려와 여러 제물을 보내 당산제를 돕는다.
이렇게 사연이 깊은 뿌리 깊은 나무이건만 아직까지도 천연기념물이나 지방기념물 등의 적당한
지정문화재 지위를 얻지 못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  전나무로 자욱한 내소사의 자랑, 전나무숲길

일주문을 들어서면 내소사의 명물인 전나무숲길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
정된 이 숲길은 천왕문까지 600m 정도 이어져 있는데,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전나무숲길에 버
금갈 정도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봄의 신선한 내음이 가득 깃들여져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안구와 마음에 적지 않은 감동을 불어넣으며, 전나무가 앞다투어 베푼 산내음에 그 끈질긴
번뇌조차 제대로 털리면서 정신을 잠시나마 맑게 해준다.

절로 들어서는 길목에 이렇게 아름다운 숲길을 내민 것은 속세(俗世)
의 온갖 번뇌와 기운을 자
연의 힘을 빌려 모두 털고자 함이다. 즉 숲길을 거닐면서 속세의 망상을 숲의 기운에 의지하여
싹 지우고 절에 임하라는 주문이 담긴 것이다.


▲  보기만해도 안구가 싹 정화되는 전나무숲길
우리집으로 살짝 가져와 나만 두고두고 누리면 안될까?

▲  아무리 걸어도 싫증이란 것이 나지 않는 전나무숲길

나무숲길에 무한 감동을 받으며 그렇게 걷다보면 보이지 않던 내소사 경내가 천왕문을 시작으
로 슬슬 모습을 비춘다. 별로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천왕문이 바로 앞
에 있는 것이다. 체감거리는 실제 거리의 1/3정도인 200m 정도 되려나? 그만큼 숲길이 짧아 조
금은 아쉽기도 하다.

▲  네모난 연못, 연지(蓮池)
여름이 되면 연꽃의 즐거운 향연이 전나무
숲길을 더욱 아름답게 수식해줄 것이다.

▲  내소사 사적비(事蹟碑, 왼쪽)와 해안당
대종사(海眼堂大宗師, 오른쪽) 행적비


▲  천왕문 직전의 전나무숲길

▲  내소사 천왕문(天王門)

전나무숲길이 다한 곳에는 두툼한 모습의 천왕문이 경내를 가리고 서 있다. 이 문은 부처와 절
의 수호신인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1986년에 우암 혜산선사가 세웠다. 현판은 일주문 현
판을 썼던 일중 김충현의 글씨이고, 주련(柱聯)에 쓰인 글귀는 해안당의 오도송(悟道頌)이다.

▲  표정이 유난히도 날카롭고 무서운 사천왕의 위엄
왼쪽부터 용을 쥐어든 지국천왕(持國天王)과 보탑을 든 광목천왕(廣目天王), 비파 연주에
신이 난 다문천왕(多聞天王), 무인의 기가 넘치는 증장천왕(增長天王)

▲  옥계수가 담긴 내소사 수각(水閣)

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갈증에 잠긴 목 좀 축이고 가라며 동그런 석조(石槽)가 중생을
맞는다. 절에서는 이 석조를 수각이라 부르며 예우하는데, 대자연이 내소사를 찾은 중생들에게
아낌없이 베푼 옥계수로 늘 가득하여 봄가뭄이 극심한 바깥 세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앙증맞은 모습의 연꽃 잎이 정교하게 표현되었고, 물로 넘치는 석조를 보니 술이 가득 담긴 연
꽃 무늬의 술잔을 보는 듯 하다.


▲  1,000년 묵은 느티나무(할머니 당산나무) - 부안군 보호수 9-15-2호

수각과 보종각 사이에는 내소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느티나무가 있다. 이 나무가 일주문 남
쪽에 있는 700년 묵은 느티나무인 할아버지 당산나무의 배우자로 할머니 당산나무라 불린다.
나이는 무려 1,000년을 헤아린다고 하며,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는 세월을 양분으로 삼은 끝에
높이 20m, 둘레 7.5m의 거대한 나무로 자라났다. 내소사의 오랜 내력을 귀뜀해주는 존재로 굵직
한 기둥과 줄기에는 덧없이 깃든 오랜 세월이 잔뜩 묻어난다.
그럼 여기서 잠시 내소사의 내력(來歷)을 간단히 짚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 변산반도(邊山半島) 굴지의 고찰, 능가산 내소사(來蘇寺) - 전북 지방기념물 78호
변산 능가산(관음봉) 남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내소사는 백제 무왕(武王) 시절인 633년에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것이 맞다면 천하에 몇 남지 않은 백제 후기 사찰
이 된다. 허나 이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어 아쉽게도 신빙성은 적으며, 그나마 오래된
존재가 할머니 당산나무라 불리는 1,000년 묵은 느티나무가 고작이라 길게 잡으면 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어쨌든 창건 당시에는 2개의 크고 작은 소래사(蘇來寺)가 있었는데, 대소래사(大蘇來寺)는 내소
사 서쪽 원암마을 뒷쪽 아차봉 밑에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관련 기록이 없어 어떻게 돌아갔는
지는 알 수 없으나 1887년 부안군에서 발행한 부안지(扶安誌)에 1870년 경오년(庚午年)에 산불
로 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소소래사(小蘇來寺)는 지금의 내소사로 대소래사와 마찬가지로 창건 이후 조선 중기까지
소상한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다만 고려시대에 조성된 3층석탑이 서 있고, 1414년에 조성된 봉
래루가 있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소래사란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고려와 조
선 때도 그런데로 법등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33년에
청민선사(靑旻禪師)가 중건했는데, 이때 내소사의 제일 가는 보물인 대웅보전이 탄생했다.
1865년(고종 2년)에는 관해선사(觀海禪師)와 만허선사(萬虛禪師)가 중수하고, 1983년에 크게 중
창하여 지금에 이른다.
옛날 변산에는 내소사 외에도 선계사(仙溪寺), 실상사(實相寺), 청림사(靑林寺)등의 절이 있었
다고 하며, 이들 절을 변산 4대 명찰로 꼽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내소사만 달랑 남았다.

소래사가 내소사로 바뀐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설들이 있으나 조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
람(東國輿地勝覽)에 소래사로 나온 것으로 봐서 그때까지는 옛 이름을 쓰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1870년 대소래사가 사라진 이후, 내소사로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660년에 신라(新羅)와 함께 백제(百濟)를 공격한 당나라 장수 소정
방(蘇定方)이 이 절에 시주를 했는데, 그런 연유로 소정방이 왔다는 절, 즉 내소사로 이름이 바
뀌었다는 것이다. 허나 이는 전혀 근거도 없고, 말도 되지 않으며, 소래사(蘇來寺)나 내소사(來
蘇寺)나 글 순서만 다를 뿐, 한자와 뜻은 모두 같다.

경내에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설선당, 삼성각, 무설당, 봉래루,
보종각, 봉래선원, 관음전, 벽안당 등 20동에 가까운 건물이 있으며, 청련암(淸蓮庵)과 지장암
(地藏庵) 등의 부속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대웅전과 고려동종, 영산회괘불탱(보물 1268호) 등 보물 3점과 3층석탑, 설
선당과 요사 등 지방문화재 2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백지묵서묘법연화경(보물 278호)도 가지고
있었으나 현재는 서울 조계사(曹溪寺)에 있는 불교중앙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절 전
체는 전북 지방기념물 78호로 지정되었다.

다른 굴지의 고찰과 달리 소장문화유산이 매우 적은 편이고 절의 역사도 조선 중기 이후를 빼고
는 상당수 흐릿하지만 그에 비해 인지도는 상당히 높아 변산에서 꼭 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변산
의 대명사와 같은 명소로 해인사(海印寺)나 순천 송광사(松廣寺)만큼이나 속세에 널리 알려졌다
. 휴일이나 피서철이 되면 찾는 중생의 발길이 전나무숲길을 가득 메우며, 대웅보전에 서린 백
의관음보살의 눈동자와 목침이 하나 덜 입혀진 부분을 찾느라 부산하다.

변산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사람들의 발길이 너무 잦아 고적한 멋은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늘씬
하게 솟아 하늘을 앞다투어 가린 전나무숲을 비롯하여 삼삼한 숲과 계곡에 둘러싸여 있어 그런
데로 산사의 향기를 우려내고 있다.

※ 내소사 찾아가기 (2016년 9월 기준)
① 부안까지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부안행 고속버스가 5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부안행 직행버스가 1일 2회, 동서울터미널에서는 1일 6회 떠난다.
* 인천, 고양, 성남, 광주에서 부안행 직행버스가 1일 2~6회 정도 다닌다.
* 전주, 익산, 군산에서 부안행 직행버스 이용
② 현지교통
* 부안터미널에서 내소사행 군내버스가 1일 19회 정도 다니며, 직행버스가 1일 1회 다닌다.
* 정읍터미널에서 내소사행 직행버스가 1일 3회 다닌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서해안고속도로 → 줄포나들목을 나와서 줄포 방면 710번 지방도 → 줄포우회도로 → 영전4
   거리에서 좌회전 → 곰소 → 석포3거리에서 우회전 → 내소사 주차장

★ 내소사 관람정보
* 관람료 - 어른(대학생 포함) 3,000원 (30인 이상 단체 2,500원) / 청소년 1,500원(단체 1,000
  원) / 어린이 500원(단체 400원)
* 관람시간 : 일출 시간부터~일몰 시간까지
* 주차비(1시간 기준) - 소형차 1,000원 / 중형차 1,500원 / 대형차 2,000원
* 내소사에서는 자유롭게 머물다가는 '휴식형 템플스테이'와 사찰 체험과 여러 이벤트를 겯드린
  '프로그램형 템플스테이'를 운영한다. 휴식형은 3박 4일까지 머물 수 있으며, 새벽예불과 저
  녁예불, 공양시간, 취침시간(21시)을 꼭 지켜줘야 된다. 1박 2일은 5만원으로 하루 추가될 때
  마다 5만원씩 더 받아먹는다.
  프로그램형은 '참 나를 찾아서(2박 3일)', '트래킹 템플(2박 3일)','연밭체험, 연꽃차 만들기
  (2박 3일)','달빛 맞이 추석템플스테이(3박 4일)' 등이 있으며, 3시간만 머무는 '템플라이프'
  도 있다.
  템플스테이 신청은 내소사 홈페이지 템플스테이 부분을 참조하면 되며, 자세한 일정과 참가비
  , 일정 관련 문의는 홈페이지 참조 (문의 ☎ 063-583-3035)
* 소재지 -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268 (내소사로 243 ☎ 063-583-7281)
* 내소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대웅보전 문짝에 피어난 꽃무늬창살


 

♠  내소사 보종각, 봉래루, 설선당 주변

▲  고려 동종의 보금자리 - 보종각(寶鐘閣)

보종각은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조그만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할머니 당산나무 다
음으로 오래된 동종의 보금자리이다. 그래서 보배로운 종의 건물이라 하여 범종각(梵鍾閣)도 아
닌 보종각이란 낯선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범종각은 별도로 따로 있음)

이 건물은 정확히 언제 지어졌는지 귀신도 알 수 없으나 1880년경 정읍 태인(泰仁)에 있던 것을
부안군 상서면 김상기의 집으로 넘어가 누각으로 쓰였다. 그러다가 다시 만화동의 구병서가 구
입하여 사용했으며, 1965년 내소사 주지 원경(圓鏡)이 구입해 이곳으로 가져왔다. 처음에는 대
웅보전 앞마당에 서남향(西南向)으로 세웠으나 우암 혜산이 1983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 개조를
하면서 그 안에 고려 동종을 품게 하였다. 보종각 현판은 내소사 현판 담당이나 다름없는 일중
김충현이 쓴 것으로 동종을 의식했는지 글씨에 기품이 넘쳐 보인다.

▲  보종각에 소중히 안긴 내소사 동종(銅鐘) - 보물 277호

내소사 동종은 1222년(고려 고종 9년)에 제작된 것으로 내소사에 있는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자연물 제외) 허나 이 종은 원래부터 이곳 출신이 아닌 변산 4대 명찰(名刹)의 하나였
던 청림사(靑林寺)의 것으로 그 절이 어느 순간 파괴되어 사라지고 종은 절터에 묻혀 생사마저
몰랐던 것을 1853년(철종 4년)에 김성규(金性圭)를 비롯한 동네 주민들이 발견한 것이다.

종이 발견되었을 당시, 아무리 종을 쳐도 종소리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종을 깨운 이가
그것을 갖기로 하고 각자 종을 흔들어 깨웠는데, 내소사 승려가 종을 치자 비로소 아름다운 종
소리가 울렸다고 하며, 그런 연유로 내소사에 안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이는 동종에 대한
내소사의 소유를 정당화하고자 내소사에서 꾸민 이야기로 정황이야 어쨌든 이 종이 이곳에 오게
됨으로써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 되었다.

이 동종은 높이가 103cm, 입지름 67cm로 좀 작은 편이다. 항아리를 엎은 듯한 고복형으로 종신(
鐘身)에는 상대와 하대에 모란당초문(牡丹唐草紋)이 새겨져 있고, 어깨 부분에는 이중여의두문(
二重如意頭紋)의 입상화문대(立狀花紋帶)가 배치되어 있다. 종의 정상부에는 주형(珠形)이 달린
용통(甬筒)을 두고 큰 머리의 용뉴가 있는데, 모두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종신에는 당초문의 띠 밑에 중판연화문(重瓣蓮華紋)으로 된 유곽(乳廓) 4개를 두르고 유곽 안에
당초문을 새겼으며, 그 안에 9개의 유두를 표현하였다. 또 유곽 아래에는 12개의 연잎으로 장식
된 당좌(撞座)가 원좌(圓座) 밖에 있으며, 유곽과 유곽 사이인 종신 중앙부에는 꽃송이 위로 구
름을 표현하고 구름 위에 삼존상(三尊像)을 새겼다.

3존상 가운데 본존상은 연꽃 위에 앉아있고, 협시상(脇侍像)은 서 있으며, 모두 동그런 두광(頭
光)을 갖추었다. 그리고 구름 위에는 바람에 휘날리는 보개(寶蓋)가 있어 고려시대 범종 문양의
특징과 화려한 장엄미를 드러낸다. 또한 당좌와 당좌 사이에 종의 신상에 대한 3종류의 명문(銘
文)이 새겨져 있어 1222년에 새겨지고 1853년 이곳으로 들어왔음을 알려준다.

내소사 동종은 고려 후기의 특징인 입상화문대를 갖추고 있고, 표면의 묘사 수법과 함께 정교하
고 사실적인 주조기술로 우리나라 종의 양식을 잘 계승한 것으로 꼽힌다. 그래서 일찍이 보물로
지정된 것이다.


▲  내소사 봉래루(蓬萊樓)

보종각과 할머니 당산나무에서 대웅보전으로 가려면 2층 규모의 봉래루를 지나야 된다. (그 옆
구리로 지나도 됨)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누각으로 강당의 역할과 법당으로 인도하는 문의 역
할을 도맡고 있는데, 1414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다가 1823년 만세루(萬歲樓)란 이름으
로 중건되었으며, 봉래루란 현판을 별도로 달아 별칭으로 불리다가 1926년 이후 봉래루로 이름
이 완전 갈린 듯 싶다. 그와 같은 내용은 최남선(崔南善)의 '심춘순례(尋春巡禮)'에 등장하며,
실상사(實相寺)의 누각으로 1415년에 옮겨왔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다.

봉래루 내부에는 고려 중기 대표적인 시인으로 묘청(妙淸)의 난(1095년) 때 김부식(金富軾) 패
거리에서 처단된 정지상(鄭知常)의 시를 비롯해 그의 시운(詩韻)을 차운(次韻)한 시가 현판으로
걸려있으며, 내소사만세루중건기(1821년), 변산내소사사자암중창기(1856년), 변산내소사영세불
망기(1875년) 등 36개의 현판이 내부를 가득 수식한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양반들은 말에서 내리지 않고 대웅전까지 들어와 예불을 올렸는데, 이에 발
끈한 내소사 승려들이 양반의 그런 무례를 막고자 봉래루 1층을 50cm 정도 낮게 설계했다고 한
다. 그래서 어른 키가 닿을 정도로 높이가 낮아지자 양반들도 더 이상 말을 타고 들어오지 못했
다고 한다. 허나 근래에 중수를 하면서 기둥을 높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말
을 타고 들어올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  내소사 범종각(梵鍾閣)
봉래루 좌측에 자리한 범종각은 1995년 주지 철산이 만든 것으로 범종과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 등 사물(四物)의 보금자리이다. 보종각에 이미 고려시대
동종이 있지만 그의 건강을 우려해 별도로 새 범종을 만들어 봉안했다.

▲  내소사 설선당(設禪堂)과 요사(寮舍)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25호

대웅전 뜨락 좌측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인 설선당과 요사가 있다. 두 건물은 서로 별개이지만 서
로 이어져 있어 하나의 건물처럼 보인다.
이 건물은 1640년에 청민선사가 세운 것으로 전면 중앙에 설선당을 중심으로 4면을 건물로 연결
하고, 내부에 안마당을 두어 '回'자형의 특이한 모습을 이룬다. 그리고 안마당에는 우물이 닦여
져 있어 생활의 편리를 도모했다.

설선당은 중앙에 우물천정을 배치한 구조로 동쪽 측면 1칸은 마루이고, 전면의 남쪽 2칸은 난방
을 위한 부엌으로 거대한 아궁이가 있다. 주초석은 커다란 자연석을 그대로 썼고, 그 위에 원형
기둥을 설치했다.
요사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거의 2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은 승방(僧房
)과 공양간, 부엌으로 쓰이며, 2층은 마루로 식량 등을 저장할 수 있도록 각 칸 벽면에 환기창
을 설치했다. 이들 건물은 서로 높낮이가 다르지만 인위적으로 땅을 평평하게 다지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초석만을 사용했고, 설선당 동쪽과 요사 서쪽 서까래의 일부를 잘라내고 건물의 용마
루를 끼워 지붕을 서로 맞추어 세운 점이 눈길을 끈다.

설선당 중앙에 걸린 현판은 조선 후기 명필가(名筆家)로 크게 위엄을 떨친 이광사(李匡師, 1705
~1777)가 쓴 것이라고 한다.


▲  대웅전 뜨락 쪽으로 등을 보인 설선당의 뒷모습

▲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는 밥과 국 생각을 간절하게 만드는
설선당 무쇠솥의 위엄

▲  무쇠솥을 끓일 때 쓰이는 장작들
아직도 나무 장작으로 밥과 국을 끓인다.

▲  설선당 무쇠솥의 보금자리
저 안에는 들어가지 말자~~ 아직 무쇠솥은
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선당과 요사는 승려들의 생활공간이다 보니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다만 설선당 현
판 우측에 유일하게 활짝 열린 문이 있는데, 그 문을 들어서면 밥과 국을 끓일 때 쓰는 커다란
무쇠솥과 그것을 흥분시킬 장작들이 놓여져 지금은 많이 사라진 옛 풍물시(風物詩)를 정겹게 자
아낸다. 무쇠솥 주변은 내소사가 문을 열어 속세에 공개를 하고 있는데, 보통 무쇠솥이나 가마
솥의 크기와 절의 규모가 정비례하기 때문에 그 사세(寺勢)도 과시할 겸, 건물 외곽에 있는 이
것을 공개하는 듯 싶다. 허나 그 이상은 들어갈 수 없다.


▲  설선당 앞뜰에 심어진 조그만 산수유 나무 - 살짝 봄을 머금고 있다.

◀  벽안당(碧眼堂)
대웅보전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건물로
1911년에 관해선사가 선실(禪室)로 세웠다.
2002년에 주지 진원이 새로 지어
지금은 회주실(會主室)로 쓰인다.

▲  내소사 조사당(祖師堂)

▲  조사당에 봉안된 여러 고승들의 진영

대웅보전 우측에는 내소사를 빛낸 여러 고승(高僧)의 진영(眞影)이 봉안된 조사당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삼성각이었으나 2010년 이후 조사당으로 이름을 갈고
고승의 진영을 봉안했으며, 삼성각에 봉안된 존재들은 뒤에 따로 마련된 거처로 모두 옮겨졌다.
이 건물은 1941년에 능파가 건립한 것으로 1986년과 1993년에 우암혜산이 보수했다.

▲  조사당 우측에 자리한 지장전(地藏殿)

▲  지장전 지장보살상과 도명존자(道明尊者)
, 무독귀왕(無毒鬼王)


조사당 우측에 자리한 지장전 자리에는 원래 1988년에 지어진 진화사(眞華舍)란 건물이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그 건물을 갈고 지장전을 새로 만들어 속세에 선보였는데, 예전에 삼성각이었
던 건물이 조사당으로 안면을 바꾸었고, 지장전이란 건물까지 새로 생겼으니 그저 낯설기만 하
다. 이곳에 온 것이 근 8년 만인데 절에서 돈을 꽤나 모아 이렇게 건물을 불린 모양이다.

지장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저승의 시왕(十王) 등, 저승의 주요 식구들을 봉안한 건물이다.
모두 최근에 조성된 따끈따끈한 것이라 냄새 또한 향기롭다.


▲  삼성각 뒷쪽에 새로 자리를 마련한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기존 건물이 조사당으
로 전환되면서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를 다지고 그들의 거처를 닦았다. 건물은 이전 것
보다 많이 좁은 1칸 짜리로 조금 넓은 곳에 있다가 1칸 짜리에 그 3명이 들어가 앉으니 완전히
샛방살이가 따로 없을 것이다.


 

♠  내소사의 보물 창고, 대웅보전(大雄寶殿) - 보물 291호

전나무숲길은 내소사의 자랑이자 명물이 분명하다. 허나 그보다 더 비중이 큰 오래된 명물이 하
나 있다. 바로 이곳의 법당인 대웅보전(대웅전)이다. 내소사가 역사과 명성에 비해 소장 문화유
산이 빈약한 편인데, 대웅보전은 그 빈약함을 크게 극복할 정도로 이곳의 명물이자 꿀단지로 속
세에 널리 알려졌다.

내소사 대웅보전은 1633년에 청민선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세워지던 시기부터 재미난 설화를 간
직하고 있어 많은 이들의 흥미를 끄는데, 특히 목침이 하나 덜 있다는 천정과 덜 그려졌다는 그
림, 눈이 따라온다는 백의관음보살 후불탱화, 문에 새겨진 꽃창살 등이 이 건물을 한층 윤이나
게 만든다. 게다가 조선 중기 대표적인 사찰 건축물로 비록 알록달록 단청(丹靑)은 지워지고 없
지만 이들 4가지의 명물로 인해 이미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자연석으로 쌓은 높은 석축 위에 낮은 기단과 별로 다듬지 않은 덤벙주초를 얹히고 그 위에 정
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대웅전을 세웠다. 공포가 촘촘히 박힌 다포(多包) 양식으로 공포
가 외3출목과 내5출목으로 박혀있어 수려한 미를 더해주며, 단청이 말라버려 아쉬움은 있지만
덕분에 오래된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나 나름대로 반전을 선보인다. 모서리 기둥에는 배흘림을
두고 안기둥은 민흘림을 두었으며, 귀솟음과 안쏠림의 기법도 충실하여 안정감을 드러낸다.

내소사에서 다른 것은 다 흘리더라도 대웅보전과 그 내부는 꼭 둘러봐야 내소사에 갔다고 속세
에 자랑을 할 수 있다. 그만큼 이곳에서 대웅보전의 비중은 대단한 것이다. 전나무숲길이 유

하다고 하나 아직 대웅보전의 적수가 되지 못하며 대웅보전이 없는 내소사는 감히 상상할 수 조
차 없다. (전나무숲길이 없는 내소사는 그런데로 봐줄만은 함)


▲  대웅보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나란히 자리한다.


▲  대웅보전 우물천정

웅보전은 지구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꼭 내부를 둘러봐야 된다. 섬돌에 신발을 맡겨두고 안
으로 들어서 제일 먼저 고개를 위로 올려보자. 그럼 휘황찬란한 천정이 두 눈을 단단히 호강을
시킬 것이다. 천정 중앙에 자리한 우물천정은 48개 사각형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안에 모두 연
꽃과 극락조(極樂鳥) 등의 새가 새겨져 있다. 단청은 좀 퇴색하긴 했지만 그들의 아름다움에 전
혀 재를 뿌리지 않는다.
천정 대들보 위에는 대웅전을 지키는 용의 머리 2개가 있는데, 하나는 물고기를 입에 물고 있고
, 다른 용머리는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있다. 이들 외에도 10여 종의 악기가 천정과 대들보 사
이에 그려져 있는데, 천정을 장식하는 이들은 모두 부처의 설법(說法)을 듣고 기쁜 마음을 나타
내는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또한 바닷게 여러 마리를 두어 이곳이 해중사찰(海中寺刹)임을 상
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니 천정 전체를 조그만 불국토(佛國土)로 꾸민 셈이다.


▲  장엄하기 그지없는 대웅보전 천정
대들보에 몸을 기댄 용머리 하나가 물고기를 물고 아래를 굽어본다.


▲  공포(空包)덩어리로 정신이 없는 앞쪽 천정
이곳에 공포 목침이 하나 없다. 잘 살펴보기 바람~~


대웅보전에는 2가지의 재미난 설화가 전해오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이 전설은 대웅전을 더욱
알차고 아름답게 꾸며주는 구수한 양념과 같은 존재이다.

 #  1번째 전설~~
청민선사가 쓰러진 내소사를 일으키고자 열심히 동분서주했던 1630년 어느 날, 청민은 어린 사
미승(沙彌僧)에게 '절 입구에 가면 목수(木手) 한 명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야. 그를 모시고 오
너라'
분부를 내렸다.
사미는 그 분부에 따라 절 입구로 내려가니 초라한 옷차림의 남자 하나가 문 기둥에 기대어 꾸
벅 졸고 있는 것이다. 그가 대웅전을 짓고자 초청을 받은 목수였다. 사미는 한심하게 그를 바라
보며 잠에서 깨워 절로 데려왔다.

목수는 다음 날부터 산에서 나무를 베어와 대웅전을 지을 재목을 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
하게도 3년이 다 되도록 건물을 지을 생각은 안하고 나무란 나무는 죄다 목침만한 크기로 토막
을 내어 다듬는 것이다. 이에 답답함을 느낀 사미는 '3년 동안 목침만 깎고 앉았으니 법당은 언
제 짓나?'
한숨을 쉬며, 그 목수를 골려줄 생각으로 나무토막 하나를 몰래 집어와 감췄다.

그리고 며칠 뒤, 목수는 나무 토막 다듬는 일을 다 끝냈는지 다듬은 토막을 세기 시작했다. 그
런데 1번을 세고 나서 뭔가 이상했는지 계속해서 여러 번 세더니만 청민선사 앞에 고개를 떨구
고 눈물을 흘리며 '선사님 저는 아직 법당을 지을 인연이 안되나 봅니다 ㅠㅠ'

그 말을 들은 청민은 크게 놀라며 '법당을 지을 인연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목수 왈 '재목 하나를 덜 깎았습니다. 이런 주제에 어찌 법당을 짓는다고 하겠습니까?'
그 말을 엿듣던 사미는 '어떻게 하나가 없어진 것을 알았지?' 놀라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양심
에 가책을 느껴 숨겨두었던 나무 토막을 내밀며 용서를 구했다. 그러자 목수는 '부정탄 재목으
로 법당을 지을 수는 없지. 그것을 빼고 짓겠다' 그러며 그 토막을 빼놓은 채로 대웅전을 지었
다. 그래서 대웅전 천정에 목침이 있어야 될 자리 하나가 비어 있다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대웅전을 지은 목수는 호랑이가 화현(化現)한 대호선사(大虎禪師)라고 한다. 하
지만 전설의 내용에 신화적인 요소가 별로 없어보여 아마도 실제로 있던 일을 그럴싸하게 다듬
어 전설화 시킨 모양이다. 대웅전을 만들고자 3년 동안 공포 목침과 꽃창살 하나하나까지 일일
이 공을 들여 만든 그 목수의 정성에 그저 감탄사만 나올 뿐이며, 그런 목수를 끝까지 믿고 격
려했던 청민선사 또한 대단한 인물이 아닐 수가 없다.

이런 대웅전의 전설을 통해 생각나는 말이 하나 있으니 바로 대기만성(大器晩成), 즉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이 건물 역시 대기만성(大器晩成)의 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
미승처럼 조급하게 굴지 않고, 천천히 정성을 들여 만든 결과 내소사의 꿀단지이자 조선 중/후
기 불교 건축물의 갑(甲)인 이 건물이 탄생했으니 말이다.


▲  대웅보전 좌측 벽에 걸린 붉은 바탕의 지장탱

▲  온갖 호법신들로 정신이 없는 신중탱

 #  2번째 전설~~
대웅보전이 완성되자 목수는 벽화와 단청을 그릴 늙은 화공(畵工)을 추천했다. 그 화공은 청민
선사에게 단청을 그리는 100일 동안 아무도 법당 안을 들여다보지 말 것을 지겹게 신신당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청민은 법당을 봉쇄하여 승려들의 접근을 막았다.

한편 목침 사건으로 크게 물의를 일으켰던 사미승은 궁금증이 일어나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도대체 안에서 무슨 짓을 하는 것일까? 그래서 청민의 당부도 씹어버리고 99일 째 되는 날 또
민폐를 끼치고 말았다. 몰래 법당으로 다가가 문틈으로 그 내부를 훔쳐본 것이다.
근데 이게 왠일인가? 화공은 온데간데 없고 황금빛 새 1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때 갑자기 천둥 같은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리면서 황금새는 붓을 내던지고
종적을 감추었고 법당 앞에 쓰러진(혹은 죽어있는) 커다란 호랑이 앞에서 갑자기 청민선사가 법
문을 하고 있었다. '대호선사(大虎禪師)여! 생과 사가 둘이 아니거늘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
가? 그대가 지은 이 법당은 영원히 법연을 이으리라~!' 법문을 마친 청민선사는 어디론지 사라
졌다고 한다.

어쨌든 사미 때문에 황금새는 하루를 남기고 사라지면서 대웅전 양쪽 도리에 그려져야 될 용과
선녀의 그림이 왼쪽 도리는 있고 오른쪽 도리에는 없다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단청을 그린
새는 관음보살의 화현인 관음조(觀音鳥)라고 한다.
허나 이 전설은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무리가 있다. 아마도 황금새로 비유된 화공이 채색(彩色)
을 하는 도중 갑작스런 일이나 절의 내부 사정으로 작업이 중단된 것이 아닐까 싶으며 혹은 화
공이 실수로 빠뜨린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화공도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실수도 가능
하다.

▲  대웅전 불단 뒷쪽에 그려진 거대한 백의관음보살상(白衣觀音菩薩像) ▼

기왕 대웅전에 두 발을 들였다면 불단 뒷쪽에도 한번 가보기 바란다. 시간도 얼마 안걸린다. 후
불 뒷쪽 벽을 간단하게 후불벽(後佛壁)이라고 하는데, 그곳에 백의관음보살이 후불벽화(後佛壁
畵)로 장엄하게 자리하여 대웅전에서 놀란 두 눈을 또 놀라게 만든다.

이 백의관음보살은 대웅전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우리나라에 있는 후불벽화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대웅전 내부 그림을 그렸다는 황금새가 직접 그린 것이라고 전하는데, 자세히 보면
인간의 솜씨를 뛰어넘은 성스러운 모습 그 자체이다.
그의 눈을 애타게 바라보며 좌우로 왔다갔다 하면 그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움직인
다고 하는데, 눈동자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어 사연을 아
는 이들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열심히 그 앞을 서성인다. 나도 오랜만에 그의 눈동자를 보며 열
심히 걸었으나 눈동자가 정말 따라오는 것인지 아닌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쫓아오는 것 같기는
한데 정작 잘 살펴보면 그의 시선은 정면에 가 있다.

그가 그려진 후불벽은 좀 어둡고 좁은 공간이다. 왜 이런 법당의 후미진 뒷자리에 그려진 것일
까? 이를 두고 관음보살의 대자대비심(大慈大悲心)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대웅전의
구조가 반야용선형(般若龍船形)으로 피안(彼岸)의 세계를 향해 앞으로 나가는 형태라서 그 배에
올라타지 못하고 어둠에서 허우적거리는 가련한 중생을 위해 관음보살 누님을 고해(苦海)를 향
해 있게 한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자세한 것은 그림을 그린 황금새나 화공만이 알 것이다. 어
쨌든 내소사의 명물 중 하나로 대웅전과 별개로 보물로 지정해도 손색은 없어 보인다. 전남 강
진에 있는 무위사(無爲寺) 극락전(極樂殿)의 벽화도 따로 구곱와 보물로 지정하지 않았던가..?


▲  대웅보전 문짝에 피어난 수수하면서도 아름다운 꽃창살무늬

대웅전 문짝에는 흑백모드의 연꽃과 국화꽃 등 수많은 꽃들이 피어나 안그래도 놀란 눈을 더욱
안절부절 못하게 만든다. 이들은 문에 새겨진 꽃창살로 부처가 설법을 할 때 꽃이 우수수 떨어
진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정면 문짝마다 꽃들이 가득 수를 놓으니 완전 화사한 꽃밭이다. 비록
그들에게 입힌 색은 세월의 장대한 흐름 앞에 죄다 씻겨 내려가 원초적인 나무색이 되었지만 워
낙 정교하게 만들어진 탓에 그 수수함도 또 하나의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섬세하게 만들어진 꽃창살 꽃잎에 진짜 꽃들의 시샘이 대단했던 것일까? 그 주변에 자연산 꽃은
보이질 않는다. 아마도 그들이 배가 아파 바람을 타고 멀리 가버린 모양이다.

 내소사3층석탑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24호

대웅전 뜨락에는 고색이 드러난 조그만 3층석탑
이 서 있다. 그를 통해 내소사의 가람배치는 1
금당(金堂) 1탑 형식 임을 알 수 있는데, 정면
이 아닌 약간 우측에 자리해 있다.
이 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
身)을 얹히고 다시 상륜(相輪)을 올린 형태로
고려 초/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까 할머니 당산나무와 다른 곳에서 가져온 동종
을 빼면 이 탑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순수 내
소사의 유물인 셈이다.

탑의 높이는 3.46m, 폭 1.43m로 기단과 탑신부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다. 경사가 급해 보
이는 옥개석(屋蓋石)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
었고, 탑 꼭대기에는 노반(露盤)을 비롯해 크고
작은 석재 2개로 상륜부를 이루고 있다.


▲  내소사를 등지고 다시 아비규환의 속세로 나가다 (천왕문 앞 숲길)

이렇게 간만에 발걸음을 한 내소사를 구석구석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일행들
도 대부분 빠져나간 상태라 서둘러 내소사를 등지며, 전나무숲길을 거쳐 다시 주차장으로 나왔
다. 통제구역을 빼고는 죄다 둘러본 터라 그렇게 아쉬울 것은 없다.

일행을 태운 관광버스는 내소사에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속세로 나간다. 일행들과 나는 행
선지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하고 내소사와 가까운 곰소에서 그들과 작별을
고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들이 간 이후, 곰소정류장에서 부안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기다렸는데, 잠시 방심한 사이 바로
앞에서 차를 놓쳤다. 다음 차는 30분 뒤에나 있어서 마침 정류장에서 바퀴를 접고 쉬고 있는 정
읍행 직행버스(내소사에서 출발함)를 잡아탔다.
정읍까지 버스비가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100원 단위까지 나왔는데 버스표를 파는 가게가 그
날 문을 닫았고, 내 수중에는 100원 단위의 잔돈이 없었다. 버스 운전사 역시 잔돈을 갖추지 못
해 잔돈을 준비하여 타라고 성화를 낸다. 마침 차 출발시간이 다되어 다음 것을 타겠다고 그러
니 기다릴테니 건너편 편의점에서 돈을 바꿔오라 그런다. 그래서 편의점에서 돈을 바꿔와 차비
를 내는 난리를 피우며, 그 버스를 타고 정읍(井邑)으로 나갔다.

정읍에서 서울로 가는 일반고속버스를 타고 미련없이 나의 제자리로 돌아오니 이렇게 하여 내소
사 봄나들이는 대단원의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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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아름다운 계곡을 옆구리에 차고 있는 ~~ 북한산 진관사 (진관사계곡)



' 북한산 진관사 여름 나들이 (진관사계곡) '

▲  진관사 경내

진관사 독성전, 칠성각

▲  진관사 독성전과 칠성각

▲  진관사계곡 폭포




뜨거운 도가니와 같았던 7월의 끝 무렵, 여름 제국(帝國)의 혹독한 핍박에서 잠시 벗어나
고 싶은 마음에 북한산(삼각산) 진관사계곡과 진관사로 피서 순례를 떠났다.

서울에서 계곡하면 북한산에 안긴 계곡들을 으뜸으로 쳐주는지라 서울에 몇 남지 않은 미
답처(未踏處)인 불광사(佛光寺)계곡으로 가려고 했다. 허나 사람의 마음은 갈대라고 이미
익숙해진 진관사와 진관사계곡으로 마음이 기울면서 오랜만에 진관사로 발걸음을 향했다.
서울 서북부의 중심지인 연신내역에서 일행을 만나 간단히 먹거리를 사들고 서울시내버스
701번(진관차고지↔종로2가)에 의지하여 진관사(삼천사)입구에서 두 발을 내린다. 여기서
전원 풍경이 눈을 시리게 하는 진관길을 7분 정도 들어서니 일주문이 멀리감치 나와 우리
를 맞는다.

진관사입구에서 일주문 사이에는 조선 성종(成宗)의 아들인 영산군묘역(寧山君墓域)과 영
산군의 생모인 숙용심씨묘표(淑容沈氏墓表) 등의 문화유산이 있고, 1968년 1,21사태를 일
으킨 김신조 공비 일당이 거쳐갔던 산길임을 알리는 안내문이 있으며, 북한산둘레길의 마
실길과 구름정원길이 이곳에서 서로 간판을 바꾸어 제 갈 길로 흘러간다.


 

♠  진관사 입문

▲  진관사의 정문인 일주문(一柱門)

1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진관사도 그 몇 년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그새 적지 않은 변화를 보여
주었다. 절에 들어서기도 전에 예전에는 없던 문이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으니 그 문은 바로
일주문이다.
그렇다면 그 문이 있기 전에는 진관사에 그 흔한 일주문이 없었을까? 그건 아니다. 여기서 경내
로 더 들어가면 1970년에 지어진 예전 일주문이 있다. 그 문이 40년 동안 일주문 역할을 하였으
나 2012년 속세 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주차장에 나무로 새 일주문을 만들고 기존 일주문은
해탈문으로 용도를 바꾸었다.

이전보다 더 크게 세워진 일주문은 그 위치가 길의 중앙이 아닌 너무 좌측으로 밀려나 있어 조
금은 뒷전으로 밀려난 기분을 준다. 그러다보니 산꾼과 중생들 대부분은 절의 관문인 일주문을
애써 지나지 않고 옆으로 지나간다. 문에게 그런 굴욕을 준 이유는 절을 찾는 차량들과 사람들
의 통행 편의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일주문 주변은 2008년 이전까지 조그만 마을이 터를 닦고 있었다. 산꾼과 속세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벌였던 식당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진관사에 갈 때마다 그들이 흘린 음식
냄새에 정신을 잃곤 하였다. 허나 북한산 주변을 정비하면서 마을을 모두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소나무와 갖은 나무를 심었으며, 마을까지 들어왔던 시내버스<7723번, 옛 454-2번>도 진관사입
구로 멀리감치 물러나 거기서 육중한 바퀴를 돌린다.

▲  극락교 밑을 흐르는 진관사계곡
(극락교 우측)

▲  진관사계곡과 나무 탐방로
(극락교 좌측)


▲  진관사 해탈문(解脫門)

일주문을 지나 극락교에서 졸졸졸~♪ 흐르는 계곡에 나의 번뇌를 힘껏 내던지며 흩어진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번뇌야 제발 바람 따라 멀리멀리 가거라~!' 주문을 해도 그 번뇌가 얼마나 무
거운지 떠내려가지도 않고 나를 기다리며 외친다. '잠시 너를 놓아줄테니 좋은 말 할 때 언능
내려와~~!!'

극락교를 지나면 시원스런 팔작지붕의 해탈문이 중생을 맞는다. 이 문은 원래 진관사의 일주문
으로 1970년에 진관이 만들었다. 전통 방식으로 만들지 않고 콘크리트로 기둥을 세우고 지붕만
나무로 한 형태로 한글로 가로식으로 쓰인 '삼각산 진관사' 현판이 걸려있었다. 콘크리트로 기
둥을 삼은 것도 그렇지만 현판 글씨도 전통식이 아닌 너무 현대식이라 옛 절의 면모가 다소 떨
어지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진관사도 그 부분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지 2012년에 새로
일주문을 짓고 기존의 일주문은 해탈문으로 이름을 갈았다.

해탈문을 들어서면 숲에 가려 보이지 않던 진관사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며, 문의 이름처럼
해탈을 해야 하건만 그게 참 쉽지가 않다. 그래서 부처는 아무나 되지 못하는 모양이다.


▲  석종형 승탑(僧塔)과 2기의 빛바랜 비석들

일주문을 지나면 왼쪽에 숲으로 인도하는 오솔길이 보일 것이다. 그 길은 삼천사로 넘어가는 산
길로 그 오솔길로 들어서면 근래에 지어진 때깔이 고운 사적비와 공덕비를 비롯하여 수풀 속에
자리한 석종형 승탑과 비석들이 나란히 3형제를 이루며 서 있는 모습이 두 눈에 들어올 것이다.

3형제 가운데 왼쪽에 자리한 승탑은 '혜월당대선사우성탑(慧月堂大禪師宇性塔)'으로 승탑에 잠
든 혜월당은 20세기에 활동했던 승려이다. 그 옆에 지붕돌을 인 빛바랜 비석은 조선 후기에 세
워진 것으로 정3품 벼슬을 지낸 전사명(全士明)의 석교송덕비(石橋頌德碑)와 자선송덕비(慈善頌
德碑)이다. 비석을 하나도 아닌 2개씩이나 지어줄 정도면 절에 대한 지원이 꽤 상당했던 모양이
다. 이래서 속세나 절이나 돈은 중요하다.

▲  2012년에 세워진 진관사 사적비(事積碑)와
공적비(功績碑)

▲  초가로 이루어진 진관사 찻집
(2015년 이전)


▲  진관사 돌담길 - 길 오른쪽(홍제루 방향)에는 진관사계곡이
속세를 향해 힘차게 물-질을 한다.

 ◀  진관사 은행나무 - 서울시보호수 12-3호
진관사에는 오래된 보호수가 3그루가 있다. 그
중 찻집 옆에 서 있는 이 은행나무는 그 막내로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지정 당시 나이
가 약 115년이라고 하니 그새 30년의 세월이 추
가되어 약 150년 정도 된다. 높이는 26m로 경내
에서 가장 높으며 둘레는 3m이다.


▲  진관사계곡에 걸려있는 세심교(洗心橋)
선암사 승선교(昇仙橋)를 꿈꾸는 것일까? 하얀 피부의 맨들맨들한 세심교는 경내와
함월당, 길상원, 공덕원을 이어주는 돌다리로 근래에 지어졌다.

▲  홍제루 정면

경내를 가리고 선 홍제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중층 건물로 절의 속살을 보이기 싫
은지 좌우로 담장을 두르며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다.
이 건물은 1977년에 진관이 세운 것으로 지붕은 호화롭게 청기와로 꾸몄으며, 아랫 층은 경내로
인도하는 통로로 가운데 계단을 올라서면 대웅전을 비롯한 경내가 흔쾌히 모습을 나타낸다.

홍제루 윗층은 교육 공간으로 수륙재를 비롯한 절의 행사 때는 단체 공양 장소로 쓰이기도 한다
. (예전 진관사 행사에 참여했을 때 여기서 점심공양을 한 적이 있음) 그리고 홍제루를 들어서
오른쪽으로 가면 커피 자판기와 두 다리를 쉴 수 있는 쉼터가 있다.


▲  홍제루 뒷면 (경내)

▲  홍제루 앞에 자라난 오래된 느티나무

홍제루 앞에는 오랜 세월을 머금은 느티나무 2
그루가 서로를 보듬으며 앞다투어 그늘을 드리
운다. 나무가 뿌리를 내린 위치가 평평한 곳이
아닌 계곡변 90도 벼랑이라 어떻게 저런 험난한
자리에서 어엿하게 자라날 수 있었는지 그저 신
기할 따름이다.
이들 느티나무는 1982년에 서울시 보호수 12-4,
12-5호로 지정되었는데, 지정 당시의 저들 나이
가 230년이라고 한다. 그새 30년에 세월이 얹혀
졌으니 나이는 260년 정도 된다. 높이는 각각
18m, 19m, 둘레는 3.1m, 2.5m이다. 둘이 워낙
따닥따닥 붙어있어 보호수 안내문이 아니면 누
가누군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  석조 옆 화단에 심어진 옛 주춧돌과 석물들
6.25때 파괴된 옛 건물의 주춧돌 3개가 화단에 벌러덩 누워 있다. 어느 건물을 받치던
주춧돌이었을까? 받쳐들 상대를 잃은 주춧돌의 허전한 대머리를 달래주려는 듯
합장인을 선보인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거북이상을 그들 머리에 두었다.

▲  진관사 석조(石槽)
석조에는 북한산이 베푼 물로 조그만 바다를 이룬다. (가뭄 때는 맨바닥을 드러냄)
허나 속세의 때를 탔는지 식수 불가가 되어 석조에 고인 물은 그야말로
그림의 물이 되었고, 석조는 경내를 수식하는 장식물이 되고 말았다.
그럼 여기서 잠시 진관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서울 서북부 제일의 고찰, 수륙재의 성지(聖地)인 북한산 진관사(津寬寺)
① 고려 현종의 이야기가 서린 진관사의 창건 설화
북한산(삼각산) 서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진관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조계사의 말
사(末寺)이다. 조선시대부터 불암산 불암사(佛巖寺), 삼성산 삼막사(三幕寺), 북한산 승가사(
僧伽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더불어 서울 근교 4대 명찰의 하나로 명성을 누렸으며 서울 서
북부에서 가장 크고 잘나가는 절이었다.

진관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고려 8대 제왕인 현종이다. 그는 자신을 구
해준 진관대사(津寬大師, 진관조사)를 위해 이 절을 지어주었는데,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워
낙에 유명한 이야기라 사극이나 영화 소재로 써도 손색은 없을 것이다. (이미 사극 '천추태후'
에서 1번 써먹었음)

현종(992~1031, 재위 1009~1031)은 고려 태조(太祖)의 아들인 안종 왕욱(安宗 王郁, ?~997)과
태조의 손녀인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씨의 소생으로 이름은 왕순(王詢)이다. 헌정왕후는 태조
의 아들인 대종 왕욱(大宗 王旭, ?~969)의 딸로 그녀의 남편인 안종과 한자만 다를 뿐 이름은
같으며, 헌정왕후도 엄연한 왕씨이나 고려 황족(皇族)들은 족내혼(族內婚)을 너무 선호한 탓에
공주를 비롯한 왕족 여인들은 보통 외가의 성을 땄다. 그래서 외가인 황보<皇甫, 황해도 황주(
黃州) 지역 세력가>씨를 칭하게 된 것이다.

헌정왕후는 사촌인 경종(景宗, 재위 975~981)에게 시집을 갔으나 981년 경종이 붕어(崩御)하자
사저로 나와 살던 중, 숙부가 되는 안종과 친해지게 된다. 그들은 숙부와 조카 사이임에도 그
경계를 넘어섰고, 그 결과 현종(왕순)을 낫게 되었으나 극심한 산고(産苦)로 죽고 만다.
그의 오라버니인 성종(成宗)은 그 책임을 물어 안종을 멀리 경상도 사천(泗川)으로 귀양보냈는
데, 나중에 왕순을 내려보내 직접 기르도록 했다. 하지만 안종 역시 오래 살지는 못하고 997년
거기서 숨을 거둔다.
이후 성종은 왕순을 다시 불러 궁중에서 길렀고, 성종이 997년 붕어하자 왕순의 사촌인 목종(穆
宗)이 제위에 오른다. 목종은 경종과 헌애왕후(獻哀王后) 황보씨(왕순의 큰 이모)의 아들로 그
가 제위에 오르자 왕후는 그 이름도 유명한 천추태후(千秋太后)를 칭하게 된다.

천추태후는 김치양(金致陽)이란 오랜 정인(情人)이 있는데, 그 사이에서 아들까지 낳아 부부행
세를 하기에 이른다. 유약한 목종은 특이하게도 동성연애를 빠져 점점 병약해지고 아들을 포기
한 태후와 김치양은 그들의 아들을 제위에 올리고자 안간힘을 쓴다. 마침 목종은 아들도 없었으
므로 그가 죽으면 별탈없이 김씨가 제왕이 될 수도 있다. 허나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친조카
인 왕순의 존재였다.

김치양은 고려 왕실을 뒤엎고 새 왕실을 세우려는 욕심 때문인지 왕순을 죽이고자 혈안이 된다.
그래서 그를 숭경사(崇慶寺)에 보내 죽이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진관사의 전신(前身)
으로 여겨지는 북한산 신혈사(新穴寺)로 쫓아내 비밀리에 자객을 보냈다.
당시 신혈사에는 진관대사가 머물고 있었는데, 왕순의 위급함을 눈치채고 불단(佛壇) 밑에 굴을
파 그를 숨기는 등 3년 동안 지켜주면서 자객은 결국 헛탕만 치고 만다. 젊은 나이에 드러누운
목종은 왕순을 후계자로 정하며 대량원군(大良元君)에 봉해 즉시 그를 데려오도록 했다.
그래서 왕순은 무사히 개경(開京)으로 돌아왔고, 1009년 북쪽에서 반란을 일으킨 강조(康兆)에
의해 제위에 오른다.

1010년 요나라(거란) 성종(成宗)이 강조의 난을 따진다는 이유로 친히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
어왔다. 초반에 강조가 검차(檢車)를 이용하여 꽤 선전을 했으나 자만으로 인해 크게 패하였고,
그 여세로 개경이 함락되자 현종은 눈물을 머금고 나주(羅州)까지 먼 길을 몽진했다. 1011년 거
란군이 토벌되어 개경으로 환궁을 했는데, 바로 그 해에 진관조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
인근에 절을 지어주고 그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했다.
절은 1012년 가을에 완성되었으며, 대웅전이 10칸, 동/서 승당(僧堂)이 각각 30칸, 청풍당(淸風
堂)과 명월요(明月寮)가 10칸, 기타 일주문, 해탈문, 종각 등 규모가 상당했고, 불상과 온갖 물
품까지 현종이 하사했다. 그리고 진관조사를 국사(國師)로 삼았다.
이렇게 제왕의 어려웠던 시절을 구해준 깊은 인연으로 태어난 진관사는 고려 왕실의 지원을 두
고두고 입으며 크게 승승장구한다.

② 딱 천년 묵은 진관사, 창건 이후 지금까지의 과정
1090년 선종(宣宗)은 남경(南京, 서울 도심)에 행차하면서 진관사에 친히 들려 오백나한재(五百
羅漢齋)를 열었다. 그리고 1099년 숙종(肅宗)이, 1110년에는 예종(睿宗)이 남경을 순행하는 과
정에서 들리면서 여러 보물을 하사했다. 당시 진관사는 승가사, 장의사(長義寺)와 더불어 서울
에서 가장 잘나가는 절이었다.

1392년 천하가 조선으로 강제로 바뀐 이후에도 진관사의 명성은 여전했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를 뒤엎으면서 마구잡이로 죽인 고려 왕족과 백성들의 혼을 달래고 민심 안정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수륙재(水陸齋)를 계획한다. 그래서 서울과 가까운 북한산과 도봉산 일대 사찰 가운
데 마땅한 장소를 물색했는데, 진관사가 딱 적합하다는 보고에 따라 재를 지낼 수륙사(水陸社)
를 짓게 했으며, 1397년 건물이 완성되자 친히 낙성식에 참여하여 거하게 수륙재를 여는 한편,
권근(權近)에게 '수륙사 조성기(造成記)'를 작성토록 했다. 그 인연으로 진관사는 수륙재의 중
심 도량이 되어 변함없는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때 지어진 수륙사와 부속건물은 59칸 규모로 상/중/하단의 3단을 기본 구조로 하여 중/하단에
회랑(回廊)을 설치하는 등, 자못 위엄이 있는 규모였다.

참고로 수륙재는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물과 땅을 헤매는 고혼(孤魂)들을 천도하는 일종의 천도
재로 영산재에 비해 공익성이 큰 불교의 주요 행사이다. 양나라 무제(武帝, 502~549) 때 처음
시작되었다고 하며, 이 땅에서는 940년(고려 태조 22년) 12월에 처음 시작되었다.

1413년 태종은 일찍 죽은 4번째 아들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해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
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하사해 경비로 쓰게 했다. 그 이후 매년 1
월 또는 2월 15일에 국가 주도의 수륙대재가 열리면서 왕족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구름처럼 몰
려와 재에 참여했고, 서울 근교 제일의 사찰로 굳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421년에는 세종(世宗)이 부모인 태종 내외의 명복을 빌고자 재를 지냈는데, 이때부터 왕실의
각종 재를 지내는 역할까지 담당하게 된다. 또한 1442년 세종은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의 공부
를 독려하고자 독서당(讀書堂)을 경내에 설치해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등 많은 문인
들이 이곳에서 머리를 싸매고 독서를 했다.

1452년에 중수를 벌였고, 1463년 화재로 건물 일부가 타버리면서 1470년에 중건했다. 이후 별탈
없이 지내오다가 1854년과 1858년에 중수했으며, 1879년에 당두화상(堂頭和尙) 경운(慶雲)이 34
칸을 지었다. 그리고 1908년 송암(松庵)이 경내에 오층석탑을 세웠으며, (경내 서쪽 외곽에 있
음) 명부전에 불상과 시왕탱을 개금했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짓고, 자신의 토지를 절에 기
증해 '백련결사염불회'의 자원으로 쓰게 했다.

1950년 6.25전쟁 때 공비 토벌 작전 과정에서 나한전과 칠성각, 독성전을 제외하고 모두 파괴되
는 비운을 겪었으며, 초라한 몰골로 있던 것을 1963년 비구니 최진관<진관(眞觀)>이 이곳 주지
로 들어와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비록 살아남은 칠성각 등 3동을 제외하고는 예전 가람과는
다르게 중창되어 아쉬움이 다소 있으나 진관의 노력으로 예전 규모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으며,
1980년 대웅전과 주요 건물의 기와를 청기와로 도배했다. 그리고 1992년 공양간과 요사를 새로
지었으며, 1996년 코끼리유치원, 2007년에 사회복지법인 진관 무위원을 세워 어린이 교육과 사
회복지, 포교에 나섰다.

2009년에는 칠성각을 해체/수리하는 과정에서 3.1운동 시절 승려 백초월이 사용했던 태극기와
독립신문 등이 발견되어 매스컴을 크게 흔든 바가 있으며 이때쯤 수륙사터를 발굴 조사하였다.
2012년에는 일주문을 새로 지었고, 2015년에는 경내 북쪽을 싹 밀어 산사음식연구소, 보현다실
등 사찰 음식과 전통 찻집, 템플스테이를 다루는 건물을 요란하게 지어올려 절의 사세를 한껏
뽐내었다.
또한 진관의 주도로 오랫동안 잊혀진 옛 수륙재(국행수륙대재)를 복원하고자 동분서주하여 1982
년 자운율사의 의해 힘들게 복원에 성공, 이후부터 매년 윤년 윤달에 수륙재를 봉행하고 있으며
, 2012년부터는 매년 여름과 가을에도 개최하여 수륙재의 전통을 힘차게 이어나가고 있다. 그렇
게 진관사를 반석 위에 올렸던 우리나라 비구니의 원로, 진관은 바로 얼마 전 2016년 7월 3일
한낮에 88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어 영원히 진관사에 깃들게 되었다.

③ 진관사의 현재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독성전, 칠성각, 나한전, 나가원, 요사, 서
별원, 홍제루, 범종각 등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세심교 건너에도 함월당과 길상원, 공덕
원 등의 여러 건물이 있어 도합 약 20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칠성각에서 발견된 태극기 및 독립신문류(등록문화재 458호)를 비롯해 칠성
각과 독성전, 석불좌상, 독성도, 소조3존불상, 소조16나한상, 산신도, 칠성도, 수륙무차평등재
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23호) 등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간직하고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준다. 또한 이곳의 자랑인 수륙재는 '진관사 수륙재'란 이름으로
국가 무형문화재 126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100~200년 묵은 보호수 3그루가 있어 고색의
무게를 조금 보탠다.

서울 도심과 가까운 산사로 울창한 숲속에 묻혀있으며, 멋드러진 진관사계곡을 옆에 끼고 있어
경관도 일품이라 세종이 왜 이곳에 독서당을 지었는지 알만하다. 첩첩한 산골에 자리하여 산사
의 내음도 진하게 풍기고 있으며, 비구니 사찰이나 경내가 깨끗하고 정갈해 어수선한 마음마저
싹둑 가다듬게 만든다. 속세에서 나를 잠시 지우고 싶은데 멀리 가기가 힘들 때 찾아와 안기고
싶은 곳으로 한여름에 오면 절을 둘러보고 윗쪽 계곡에 올라가 피서를 즐기면 아주 극락이 따
로 없다.

※ 진관사 찾아가기 (2016년 8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에서 701,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
  입구)에서 하차하여 도보 15분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3번 출구)에서 7723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에
  서 하차
* 연신내역 3번 출구 밖 하나은행 앞에서 진관사 셔틀버스 이용. 평일은 1일 4회, 행사가 있는
  날과 주말은 9회 운행한다. (8시부터 10시대까지 운행)
* 진관사 일주문 주변에 주차장이 있으며 홍제루까지 차량 접근 가능

★ 진관사 관람정보
* 진관사는 템플스테이(Temple Stay)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주중이나 주말에 1박 2일을 머
  무는 휴식형(14시부터 다음날 10시까지)과 불교문화 체험형, 단체형, 어린이 템플스테이. 청
  소년 템플스테이 등이 있으며, 예불과 참선, 다담(茶談), 발우공양, 108배, 안행(安行), 연꽃
  등 만들기, 사찰음식 체험 등을 제공한다. 1박2일 가격은 성인 7만원, 청소년과 어린이는 5만
  원이며, 템플스테이 신청과 자세한 정보는 진관사 홈페이지를 참조한다.
  (문의 ☎ 02-359-8410)
* 진관사 홍제루에서 계곡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폭포가 등장하며, 여기서부터 진관사계곡의 숨
  겨진 절경이 마음을 앗아간다. 서울에서 제법 잘생긴 계곡이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또한 진
  관사계곡 산길은 2015년 이후 길이 다소 정비되었다고 하나 바위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어 조
  심을 기해야 되며, 탐방로에서 계곡까지는 대부분 바위를 타고 내려가야 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354 (☎ 02-359-8410)
* 진관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칠성각에 봉안된 귀여운 석불좌상과 칠성도


 

♠  진관사 대웅전 주변

▲  서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大雄殿)

홍제루를 들어서면 바로 정면으로 법당인 대웅전이 마주한다. 정면 5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1965년에 진관이 세웠으며, 1980년에 그 비싸다는 청기와를 입혀 화려함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불단에는 1966년에 조성된 석가/미륵/제화갈라보살상을 중심으로 1967년에 제작된 삼신불
후불탱, 신중탱(1967년), 오여래탱(1990년), 범종(1966년), 1934년에 그려진 현왕탱(現王幀) 등
이 내부를 눈부시게 수식한다.

대웅전 뜨락에는 푸른 잔디가 정갈하게 깔려져 입혀져 있고, 건물 바로 앞에 석등(石燈) 2기가
자리한다. 허나 법당 앞에 으례 있는 석탑은 없는데, 원래는 1908년에 세운 5층석탑이 하나 있
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지금은 경내 구석에 몰래 찌그러져 있으니 아마도 풍수지리(風水地理)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곳이 계란을 상징하는 지형인데, 탑을 세우면 계란이 자칫 깨질 수 있
어서 그런듯)


▲  대웅전 불단을 지키는 석가/미륵/제화갈라보살

법당의 3존불이면 보통 중심 불상과 협시불(夾侍佛)을 짧은 간격으로 배치하는데 반해, 이곳은
서로가 조금씩 거리를 두며 독자적인 모습으로 앉아있다. 이들은 1966년에 조성된 것으로 가운
데 앉아있는 불상이 불교의 1인자인 석가불이고, 그의 왼쪽은 미래의 부처로 일컬어지는 미륵보
살(彌勒菩薩), 오른쪽은 과거불인 제화갈라(提華褐羅)보살로 이들은 법화경(法華經)에 나오는
수기3존불(授記三尊佛)이다.
가운데에 자리한 석가불을 빼고는 모두 보살(菩薩)의 신분이라 탐이 날 정도로 화려한 보관(寶
冠)을 쓰고 있으며, 다들 온화한 미소로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격려한다. 그리고 그들 뒤에
는 각각 후불탱화가 걸려있는데, 이들은 1967년에 제작된 것으로 석가불 뒤에는 비로자나불(毘
盧舍那佛)을 담은 후불탱이, 미륵보살 뒤에는 노사나불(盧舍那佛)이 담긴 후불탱화, 제화갈라
뒤에는 석가모니 후불탱화가 걸려있다.


▲  진관사 나가원(那迦院)

푸른 잔디가 곱게 입혀진 대웅전 뜨락 우측에는 나가원이 있다. 정면으로 요사인 동별당을 마주
하고 있는 나가원은 한때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1972년에 진관이 지은 것이다. 정면 7칸, 측
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요사 및 대중방(大衆房), 종무소(宗務所)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신
도를 수용하는 대중방에는 1972~73년에 조성된 석조관음보살좌상과 아미타후불탱화가 있다.


▲  나가원 뒷쪽(종무소 쪽)에 놓인 맷돌들
조선 후기와 왜정 때 쓰인 맷돌 3형제가 어처구니를 상실한 채, 뜻하지 않은
장식물이 되어 쓸쓸한 노년을 보낸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건물이든 뒷전으로 밀려난 모습은 쓸쓸하기 그지 없다.

▲  진관사 동정각(動靜閣)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아련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의 보금자리로 1975년에 지어졌다.
종은 1974년에 조성된 것으로 그 흔한 범종각이 아닌 고요함을 흐트린다는 뜻의
동정각을 칭하는 점이 참 이채롭다.

▲  대웅전과 나가원 뒷쪽

▲  수륙재 행사 천막에 정면이 가려진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명부전은 1968년에 지어진 것으로 1996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새로 지어졌
다. 지붕에는 푸른 기와가 입혀져 화려함을 더하며, 내부에는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10왕, 판관,
사자,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건물 내부를 사진에 담으려고 했으나 마침 비구니 1명이 안에서 염불을 중얼거리고 있어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  진관사의 보물창고 ~~ 나한전, 독성전, 칠성각

▲  왼쪽부터 독성전, 칠성각, 나한전

진관사에 왔다면 꼭 봐야되는 존재들이 있다. 바로 경내 좌측 구석에 옹기종기 모인 나한전과
칠성각, 독성전 3동(나한전 구역)이 그것이다. 이들은 진관사를 잿더미로 몰아넣었던 6.25 때
도 살아남은 진관사의 옛 건물로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지어진 것들이다. 겉보기에는 청
기와로 번쩍이고 덩치도 큰 대웅전이나 나가원, 홍제루에 비해 보잘 것도 없고 구석에 몰려들
있어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정말 지나치기 일쑤다.
하지만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명언이 있듯이 진관사의 지정문화재(무형문화재 제외) 가운
데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를 빼고는 모두 이들 건물 안에 담겨져 있다.
게다가 자리 이동도 없이 예전의 가람배치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진관사의 예전 모습을 더듬
는데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대웅전과 나가원 등은 대충 둘러봐도 되니 나한전 구역 건물들은 내부까지 꼭 살펴보도록 하자.
그래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독성전과 칠성각은 서울에 있는 칠성각/독성각/산신각 계
열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  진관사 나한전(羅漢殿)

나한전 구역에서 유일하게 청기와를 눌러쓴 나한전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필체의 힘이 넘쳐보이는 명부전 현판은 1886년에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이 쓴 것이라고 전하며, 내부에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한 소조3존불을 비롯해 소조
16나한상, 영산회상도, 16나한도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나한전 소(塑, 소조) 3존불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3호
후불탱화로 걸린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5호


나한전 불단 유리 안에 소중히 봉안된 소조 3존불은 흙으로 빚어서 도금을 입힌 것으로 가운데
불상은 석가불이고, 좌우에 보관을 쓴 이들은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다. 대웅전 불단에 봉
안된 수기3존불(授記三尊佛)과 같으며, 석가불은 통통한 얼굴에 좀 경직된 표정이지만 좌우 보
살은 온화한 표정으로 살짝 미소가 드리워져 있다.
이 3존불은 진관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
겨진다. 서울 토박이 불상 가운데서도 나이가 많은 편으로 얼굴의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그들이
입은 법의(法衣)는 통견의(通肩衣)로 옷주름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3존불상 뒤에 걸린 영산회상도는 부처가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1884년 상궁(尙宮)들의
시주로 진철(震徹)이 그린 것이다. 구도는 중앙에 부처가 있고, 그 옆에 4명의 보살과 사천왕(
四天王), 6명의 제자를 배치했는데, 빈 공간에는 채운(彩雲)을 가득 채워 여백이 없다.
부처는 얼굴이 양감(量感)있게 표현되었고, 몸을 꽤나 단련한 듯, 힘찬 모습이다. 법의는 통견
으로 두 손은 아미타수인(阿彌陀手印) 비슷한 수인을 보이고 있는데, 이런 제스쳐는 조선 후기
불화에서 많이 나온다. 그리고 부처 좌우에는 문수/보현보살이 큰 연꽃을 들고 서 있고, 사천
왕이 각자의 장비를 들고 그들을 호위한다. 또한 상체만 드러내며 합장인을 보이고 있는 제자
가 좌우에 3명씩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횡축의 화면과 단아한 형태, 밝은 주조색 등 19세기 후반 불화의 양식을 잘보여주고
있으며, 그 당시 서울 지역 불화의 베스트급으로 꼽힌다.



▲  나한전 소(塑) 16나한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4호
16나한도(十六羅漢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6호


3존불 좌우에는 부처의 핵심 제자인 16나한상과 16나한도가 자리해 있다. 불단 좌우에 각각 8
구의 나한상이 16나한을 이루고 있고, 그외에 제석상(帝釋像) 1구, 사자상(使者像) 1구, 활력
이 넘치는 인왕상(仁王像) 2구 등 모두 20구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흙으로 빚어 색을 입힌 것으로 진관사를 찾는 수많은 중생처럼 제각각의 모습이라 어느
하나 같은 얼굴, 같은 포즈가 없을 정도로 개성이 넘친다. 게다가 자세나 얼굴 표정도 어느 양
식에 얽매이지 않은 사실적이고 해학적으로 묘사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서울, 경기도 지역의
나한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유물로 가치가 높다.

16나한도는 나한도 4폭과 제석신중도(帝釋神衆圖) 1폭, 사자신중도(使者神衆圖) 1폭 등 총 6폭
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한도(羅漢圖)는 4명의 나한이 산수를 배경으로 시자(侍者)와 동자를 거
느리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제석신중도와 사자신중도는 나한도 좌우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화면
을 2개로 나누어 구름 속에 있는 제석과 신중, 사자와 신중(神衆)을 그렸는데 근대적인 음영법
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 그림은 영산회상도와 마찬가지로 상궁의 시주로 1884년에 진철(震徹), 축연(竺衍) 등이 그
린 것으로 세밀한 필선(筆線)과 정교한 문양 표현, 금니(金泥) 사용 등이 주목된다. 그리고 나
한도에 나와있는 경물(景物)은 당시에 유행하던 민화풍으로 그려져 있어 그 시절 회화 연구에
착한 자료가 되어준다.


▲  진관사 독성전(獨聖殿)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4호

칠성각 옆에 자리하며 나한전을 바라보고 있는 독성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아주 단촐한 맞
배지붕 건물이다. 부처의 제자로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의
보금자리로 2006년까지만 해도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독성각이라 불렸으나 진관사에서 이 건물
에 대한 기대감이 큰지 각(閣)에서 전(殿)으로 등급을 높이면서 독성전이 되었다.

이 건물은 1907년에 지어진 것으로 상궁 4명과 부부 2쌍이 돈을 대주었다. 당시에 만들어진 독
성전 공덕기(功德記)에 시주한 사람과 공사 참여자 명단이 기재되어 있는데, 6.25때 운이 좋게
살아남았으며, 1969년에 진관이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조그만 내부에는 소조독성상을 비롯해 독성도, 산신도 등이 있는데, 모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독성상과 독성도는 유리로 봉해져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다.


▲  소(塑) 독성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1호
독성도(獨聖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2호

▲  작고 귀여운 소 독성상의 위엄

독성전의 주인장인 독성상은 흙을 빚어서 만든 것으로 인형처럼 귀엽고 아담한 모습이다. 눈썹
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입술은 살짝 다물고 있으며, 입술 위에 엷은 수염이 있다.
눈은 양쪽으로 길게 뜨고 있고, 표정은 동자승을 모델로 만든 듯, 천진난만해 보인다. 이는 독
성의 존재가 백성들에게 아주 가까이 있었다는 뜻이 된다. 왼쪽 어깨에는 옷을 고정한 금구장
식(金具裝飾)이 있으며, 몸통에 비해 얼굴이 좀 크고 무릎이 매우 낮아 신체가 다소 길어 보인
다.
19세기(이르면 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고색이 묻힌 독성상이 꽤 많은 것 같지만 정작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서는 거의 없어 진관사의 독성상은 꽤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래서 당시 독성
상의 특징과 조각 수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지방문화재자료의 지위를 얻었다.

독성상 뒤에 걸린 독성도는 독성을 비롯하여 시자(비서)와 동자 등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와 인연이 깊은 천태산으로 보이는 돌봉우리가 여러 개 보이고, 동자 옆에는 소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그림 폭이 2m에 이르러 우리나라 독성도(독성탱) 가운데 제법 큰 편에 속한다. 이 그
림은 1907년 상궁 이씨와 홍순모(洪淳謨)의 시주로 경기도에서 활약하던 화승(畵僧) 경선당 응
석(慶船堂 應釋)이 그린 것으로 채색이 전체적으로 탁해 보이며, 같은 독성인데도 그림에 나온
독성과 앞에 있는 독성상의 모습이 너무 차이가 나 마치 독성의 한참 때 시절과 늙은 시절을
사이좋게 담은 것 같다.


▲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9호

진관사는 독성전과 칠성각을 갖추고 있지만 유독 산신의 건물인 산신각을 갖추지 않았다. 그래
서 독성전 한쪽에 조촐하게 그의 공간을 마련했다.
산신도에는 유난히 빨간 옷을 입은 산신(山神)과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그려져 있는데, 민
화에 나오는 호랑이 이상으로 너무 익살스럽고 귀여워 정말 쓰다듬고 싶다. 그의 긴 꼬랑지는
산신 왼쪽에서 살랑살랑 춤을 춘다. 산신은 인심 좋은 구멍가게 노공(老公) 같으며, 산신도(산
신탱)에 기본으로 등장하는 산은 나와있지 있고, 배경은 그냥 여백으로 남아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그려진 것으로 자세한 제작시기와 시주자, 화승에 대한 정보는
아쉽게도 전해오지 않는다.


▲  칠성각(七星閣)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3호

독성전 옆에 자리한 칠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1911년에 지어
진 것으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서울, 경기도 지역의 사찰 건물에서 많이 나타나는 건
축 양식인 좌/우/후면을 벽돌로 처리한 화방벽(火防壁)이 설치되었다.
내부에는 석불좌상과 칠성도, 명호 스님 초상화 등이 있으며, 2009년 5월 칠성각을 해체/보수
했을 때 태극기와 독립신문류 등이 발견되어 속세를 한참 떠들썩하게 했다. 


▲  칠성각 석불좌상(石佛坐像)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0호
칠성도(七星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7호

▲  귀여움이 묻어난 칠성각 석불좌상의 위엄

유리로 봉해진 칠성각 불단에는 아기부처를 닮은 아주 조그만 불상이 앉아있어 보는 이로 하여
금 마음의 편안함을 안겨준다.
이 불상은 옥석(玉石)으로 만든 것으로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으며, 1969년에 진관이 개금(改金
)을 입혔다. 불상의 크기를 봐서는 천불상(千佛像)의 일원으로 조성되었다가 따로 떨어져 나온
것으로 여겨지며, 이런 불상은 서울과 경기도 북부, 강원도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불상의 머리는 나발로 머리 윗부분에는 육계(肉髻, 무견정상)가 완만하게 튀어나왔으며, 앳되
고 귀여운 인상으로 내가 친견한 불상 가운데 제일 편안하고, 귀여우며. 근엄하지도 무섭지도
없는 온화한 표정이다. 불상의 양손은 손의 바깥부분이 보이도록 다리에 대고 있는데, 그 의미
는 모르겠다. 저건 도대체 무슨 수인(手印)일까?

석불좌상 뒤에 걸린 그림은 칠성도로 1910년 춘담(春潭), 범천(梵天) 등이 그린 것이다. 그림
중앙에는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를 중심으로 칠성(七星)과 성군(星君) 등이 있다. 청련화(靑
蓮花) 위에 앉은 치성광여래는 붉은 법의를 입고 오른손은 가슴 부위에, 왼손은 무릎 위에서
금륜을 얹고 있으며, 그 좌우에는 7구의 칠성이 여래를 향해 합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밑에
는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이 여의(如意)를 들고 있는데, 일광은 붉은 해를,월광은 하얀 달이 그려진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그 옆에는
도교식으로 표현된 칠원성군(七
元星君)이 홀을 들고 서 있다.

이 그림은 두터운 설채법(設彩法), 붉은 적색의 주조색(主調色)에 감색과 녹색이 조금 섞인 채
색, 등장 인물 얼굴에 칠해진 두터운 호분(胡粉) 등의 표현에서 20세기 초반 불화 양식을 보여
주고 있으며, 조성 연대와 그림을 그린 승려 등이 나와있고 서울에서 보기 드문 칠성도(七星圖
)의 작례(作例)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명호스님 초상(肖像)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8호

석불좌상과 칠성도 옆에는 독특하게도 승려의 초상(영정)이 걸려있다. 초상의 높이는 106.2㎝,
폭 83㎝로 그림 왼쪽 상단에 세로로 '影入山水圖 數珠看經(영입산수도 수주간경)~'으로 시작되
는 4줄의 찬시(讚詩)가 있고, 오른쪽 상단에는 한글로 '인사졀명호불영뎡'이란 문구가 있어 인
수사(또는 인사사)에 있던 명호의 영정으로 여겨진다.
그림 중앙에는 경상(經床)을 앞에 두고 정면을 향한 채 결가부좌한 승려의 모습을 가득히 그렸
는데, 그의 옆으로 불자(拂子)와 두루마리를 든 시자를 배치해 3존형식을 이루었다. 이러한 3
존 형식의 영정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것으로 크게 주목된다.
허나 그림의 제작시기와 그린 사람의 정보, 명호란 인물의 대한 기록과 인수사의 위치, 진관사
에 흘러들어온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그림에 속사정은 알 수 없으나 그림 구도와 채색으로 미
루어볼 때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3존 배치와 찬시, 한
글 제목 등은 다른 불화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이다.


▲  90년 만에 햇살을 본 빛바랜 태극기 - 등록문화재 458호

2009년 5월 칠성각을 해체 보수했을 때 불단 내부와 벽체 사이에서 태극기와 독립신문 등 독립
운동 관련 자료 6종 21점이 발견되어 속세의 진한 주목을 받았다. (이때 대들보에서도 칠성각
상량문이 발견되어 1911년에 지어졌음이 밝혀졌음)
이들은 진관사와 인연이 깊던 백초월(白初月, 1878~1944)이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사용한 것
으로 여겨지는데, 독립신문과 자료들은 태극기에 포근히 감싸인 채로 발견되었다.
이렇게 90년 가까이 칠성각에 꽁꽁 숨겨진 것은 왜정의 탄압을 피하기 위함으로 보여지며, 기
나긴 세월 동안 광합성 작용을 받지 못했지만 빛이 좀 바랜 것을 빼고는 대체로 양호하여 알아
보는데 그리 지장은 없다. 단순해보이면서 심오한 뜻이 가득 깃든 태극기를 보니 그동안 진관
사에서는 누리지 못했던 가슴 뭉클함이 솟아 오른다.

태극기는 가로 89cm, 세로 70cm의 면직물에 바느질되어 있으며 중앙에 32cm 직경의 태극문양이
있고, 건과 곤, 감, 리의 4괘가 갖추어져 있다. 4괘의 위치가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
위원회가 제정한 국기 양식의 4괘와 동일하나 현재와는 위치가 달라 태극기 변천사에 귀중한
자료일 뿐 아니라 진관사가 서울 지역 불교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음을 살짝 귀뜀해 준다.

태극기 안에 담긴 독립신문류는 신대한<(新大韓), 신채호(申采浩)가 창간한 신문> 3점, 독립신
문<(獨立新聞), 상해임시정부의 기관지> 4점,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 천도교에서 3.1운
동 당시 발행한 신문> 5점, 자유신종보(自由晨鍾報) 6점, 경고문(警告文) 2점으로 이중 자유신
종보는 이번에 처음으로 그 존재가 알려진 매우 신선한 자료이다. 신문마다 태극기 도안과 태
극기와 관련된 내용이 게재되어 있고, 경고문은 독립에 대한 확신으로 끝까지 독립투쟁을 하자
고 호소하는 문서이다.
이렇게 귀중한 독립운동 관련 자료가 같은 곳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것에 그 의미가 크며, 1919
년 3.1운동 이후 12월까지 조선과 우리의 옛 땅인 중원대륙에서 펼쳐진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보충해주는 중요 자료로 그 가치가 높다. 현재 태극기는 칠성각에 공개하고 있으며, 독립신문
과 기타 문서는 비공개이다, ('진관사 소장 태극기 및 독립신문류'란 이름으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됨) 2010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진관사 태극기' 특별전에 이들이 처음 속세에 공개
되었으며, KBS에서 3.1절 특집으로 '초월의 비장, 진관사 태극기'를 방영하기도 했다.

이 태극기를 사용했던 백초월은 만해 한용운(韓龍雲)에 비견되는 항왜(抗倭) 승려로 3.1운동
이후 진관사에 주로 머물며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1944년 왜정에 체포되어 그들의 잔인한 고문
끝에 광복을 1년 앞둔 청주교도소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  진관사 뒷쪽에 숨겨진 서울 제일의 명품 계곡 ~ 진관사계곡

▲  진관사계곡에서 만난 1번째 폭포 (폭포 이름은 없음)

진관사에 왔다면 경내만 살피지 말고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발품을 조금 팔아서 절 뒷쪽 계곡에
도 한번 올라가보자. 그렇다고 많이 올라갈 것도 없다. 조금만 가면 윗 사진의 폭포가 나오고,
여기서부터 금강산과 설악산도 질투할 정도로 1품급 경관이 펼쳐져 중생의 정처없는 마음을 단
단히 앗아갈 것이다.

진관사계곡(진관천)은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서 있던 비봉(碑峰) 북쪽에서 발원해 진관
사를 끼고 창릉천(昌陵川)으로 흘러가는 북한산 서쪽 계곡의 하나로 북한산성 안에 자리한 북한
산성계곡, 개연폭포 주변과 견줄 정도로 국보급 계곡을 자랑한다. 북한산에서 가장 빼어난 수준
의 계곡이자 서울 장안 으뜸의 계곡으로 키 작은 폭포가 주렁주렁 달려있어 경관을 크게 돕는다.
이들 폭포는 아직까지는 속세에서 지어준 이름이 없다.

1번째 폭포를 시작으로 대자연 형님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그림 같은 절경이 가히 숨을 질리
게 하는데, 1번째 폭포 윗쪽부터는 계곡 접근이 가능하여 여름 제국에 저항하며 피서를 즐기는
이들로 봐글봐글하다. (폭포 밑에서 진관공원지킴터 구간 계곡은 접근 통제)
우리는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속세에서 가져온 먹거리로 황제 못
지 않은 간식 시간을 가지며 거울처럼 맑은 못에 꼬질꼬질한 발과 다리를 담구었다. 마음 같아
서는 온 몸으로 진하게 계곡과 스킨쉽을 즐기고 싶지만 여벌의 옷을 갖추지 않았다.


▲  물이 지그재그로 흐르는 2번째 폭포 주변

▲  장대한 세월의 거친 주름이 그어진 90도 벼랑과 계곡
벼랑 밑에 폭포와 좁은 목이 있다. 수심은 얕으나 큰 비가 내려 계곡이
잔뜩 흥분한 직후에는 조심하는 것이 좋다.
 

진관사계곡 산길은 1번째 폭포를 조금 지나 2번째 폭포 직전에서 계곡 북쪽으로 펼쳐지는데, 경
사가 각박한 벼랑길을 올라가야 된다. 다행히 2015년에 길을 크게 순화시켜 통행이 한결 편해졌
는데, 산보다 계곡이 주목적이라면 계곡을 따라 가는 것도 괜찮다. 중간중간 머물 자리도 많고,
계곡의 속살을 깊히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 이름난 계곡은 여기 외에도 북한산 삼천리골(삼천사계곡)과 불광사계곡, 구기동계곡, 소
귀천계곡, 구천계곡(구천폭포, ☞ 관련글 보러가기), 동령폭포, 도봉산(道峰山) 무수골과 문사
동계곡, 도봉계곡, 북악산 백사실(백사골), 수락산 벽운동계곡, 관악산 암반천계곡 등이 있다.


▲  40~45도 기울어진 하얀 피부의 벼랑과 그 밑을 흐르는 진관사계곡
우리는 등산로에서 40도 벼랑을 타고 내려와 이곳에 자리를 피고 조촐하게
피서를 즐겼다. 끝없이 넓은 여름 제국에 대항하며 머문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우리의 임시 낙원이었다.

▲  40도 벼랑 밑에 숨겨진 청정한 못
하늘나라 선녀 누님들이 살짝 몸을 씻는 곳은 아닐까? 달님이 천하를 희미하게
비출 때 몰래 잠입하여 그들의 목욕 장면을 훔쳐보고 싶다.

▲  장쾌하게 쏟아지는 40도 벼랑 밑 폭포의 위엄
하얀 명주를 급하게 늘어뜨린 듯, 폭포수의 기세가 대단하다.
그 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귀신이 다 도망칠 정도이다.

▲  진관사계곡 90도 벼랑
단양 사인암(舍人巖, ☞ 관련글 보러가기)의 축소판일까? 산길에서 보는 것보다는
계곡 40도 벼랑에서 보는 모습이 훨씬 장관이다.

▲  40도 벼랑에서 바라본 진관사계곡 최상류와 비봉 능선
마음 같아서는 더욱 깊숙히 파고들고 싶지만 이후는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에
맡기며 여기서 길을 접었다. 다음에 오면 계곡 끝까지 꼭 올라가보리라~~~!

▲  다시 속세로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다. (진관사 앞 길)
이렇게 하여 명품 계곡을 겯드린 진관사 여름 나들이는 다음의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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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서울 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문화대축제)

 


' 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서울 봉원사 연꽃 나들이 '

▲  봉원사 대웅전 뜨락


 

여름의 제국(帝國)이 한참 패기를 부리는 7~8월에는 하늘 아래 곳곳에서 연꽃축제가 열린
다.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도 괜찮은 연꽃축제가 하나 있으니 바
로 서대문구 봉원사에서 하고 있는 '서울연꽃문화대축제'가 그것이다. <그냥 축제도 아니
고 무려 대축제.. 이곳 외에도 조계사(曹溪寺)에서도 연꽃축제가 열림>
벌써 10년이 넘게 축제가 열리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인지도가 신통치 않아 서울 사람들도
많이 모르는 실정이다. 주말에는 답사꾼, 사진꾼, 산꾼 등이 좀 몰리긴 하지만 평일은 피
서철임에도 한산한 편이라 보다 적극적인 홍보가 절실해 보인다.

7월 한복판에 봉원사 연꽃 축제 소식을 접하고 연꽃에 대해 입맛을 다시며 흔쾌히 축제를
기다렸다. 그 축제는 이미 여러 번 인연을 지은 적이 있지만 여름이 왔으니 친(親)여름파
인 연꽃의 향연을 1번은 꼭 봐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만
큼 여름을 대표하는 꽃이 바로 연꽃이다.

드디어 고대하던 축제일이 다가오자 후배 여인네와 함께 그곳의 문을 두드렸다. 서대문역
(5호선)에서 봉원사 턱 밑까지 올라가는 7024번 시내버스를 타고 8분 정도를 달려 봉원사
종점에서 두 발을 내렸다.
보기만해도 숨통이 질리는 서울 도심이 바로 지척이건만 그것을 통쾌하게 비웃듯 종점 주
변은 완전 자연에 감싸인 산골 마을이다. 서울이라고 해서 꼭 높은 빌딩과 번잡한 시가지
, 꼬리를 무는 차량들의 정체와 사람들의 엄청난 물결만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거늘 서울
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그런 풍경과 대비되는 곳을 만나면 '왠 뚱딴지 같은 풍경인가?'
눈을 먼저 의심하게 된다.

버스가 육중한 바퀴를 접고 쉬는 곳은 봉원사 주차장으로 그 북쪽에 숲속한방랜드 숯가마
찜질방이 있다. 여기서 봉원사로 이어지는 동북쪽 길을 조금 가면 오른쪽에 승탑(僧塔)과
비석이 즐비하게 늘어선 부도전이 잠시 발길을 붙잡는다. 이곳에는 석종형(石鐘形)부터 8
각원당형(八角圓堂形)까지 다양한 모습의 승탑 7~8기가 비석 9기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있
는데, 다들 20세기 것들이라 때깔이 무지 곱다.
그런 부도전을 지나면 봉원사 밑에 자리한 마을의 중심에 이르게 된다. 사찰 밑에 자리한
마을을 유식한 말로 사하촌(寺下村)이라 부르는데,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집 상당수는 봉원
사 승려의 거처로 대부분 처자 등의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승려가 왜 부인과 자식이 있어??' 고개가 갸우뚱 하겠지만 봉원사는 승려의 혼인을 대놓
고 허용하는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라 자신만의 가정을 눈치 없이 꾸릴 수가 있으며 그들
은 보통 자신이 일하는 절 밑에 집을 마련하여 절로 출퇴근을 한다. 그러니 이 마을은 봉
원사의 또다른 일원이자 확장판으로 봐도 상관은 없다.
마을은 절 바로 밑까지 펼쳐져 있어 절과 마을이 거의 붙어있으며 나무도 제법 많아 마치
벽지 산골 같은 분위기이다. 이곳이 이렇게 도심 속의 산골로 남게 된 것은 이 일대를 봉
원사가 소유하고 있으며, 개발제한구역에도 묶여 있어 개발의 칼질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
문이다.


▲  봉원사 종점에서 봉원사로 인도하는 길

▲  승탑과 비석이 옹기종기 모인 부도전(浮屠殿)


 

♠  봉원사 입문 (유애비, 보호수 느티나무)

▲  조낭자 희정 유애비(趙娘子 熺貞 遺哀碑)

부도전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 길로 가야 바로 봉원사에 이르는데, 조그
만 구멍가게를 지나서 오르막길을 오르면 길 오른쪽에 하얀 피부의 조그만 비석이 애타게 눈길
을 보낸다. 허나 구석에 자리한 탓에 봉원사가 있는 정면만 죽어라 쳐다보고 가는 중생의 심리
상 태반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왠 비석인가 싶어 기웃거리니 비신(碑身)에 쓰인 내용 그대로 조낭자 희정 유애비이다. '조낭
자 희정~~'이란 문구를 통해 '조희정'이란 여인을 기리는 비석임을 알 수 있는데, 보통 행적이
나 절에 시주한 것을 기리는 비석이 아닌 슬픔을 남긴다는 뜻의 유애비(遺哀碑)를 칭하는 것을
보니 뭔가 애처로운 사연이 있는 모양이다. 과연 이 비석에는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비석의 주인공인 조희정(趙熺貞)은 1904년 경남 진주(晋州) 인근에서 태어났다. 고명딸이던 그
녀는 8살 때 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기생이 되었는데, 기생이 된 이후 늘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
다. 그러다가 19살 때 첩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으나 남편이 사업이 바쁘다는 이유로 1년에 1~2
번 정도만 그녀를 찾을 정도로 소홀히 대했다고 한다. 그렇게 구중궁궐의 버려진 능소화처럼
고독한 외로움에 묻혀 살던 희정은 결국 21살이란 꽃다운 나이에 내세(來世)에 다시는 이런 인
생을 살고 싶지 않다는 유서 1장을 남기고 음독 자살을 하고 만다.

그녀의 죽음에 충격을 먹은 남편은 봉원사에서 그녀를 화장(火葬)하고 약간의 전답을 절에 기
증해 극락왕생을 기원했으며 이 비석을 세워 그녀의 빈 자리에 대한 슬픈 마음을 표현했다. 비
신 뒷쪽에는 비석을 세운 이유가 쓰여 있는데, 단순히 기생이란 신분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
했다고 적어놓아 자신의 직무유기(?)를 부정하고 있다. 물론 희정이 기생 시절부터 신세 한탄
을 자주하는 등 부정적인 모습도 있었으나 남편의 지극히 부족했던 관심과 애정이 그녀를 죽음
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비석 주변에는 네모난 주춧돌 4개가 멀뚱히 자리해 있는데, 이는 비석을 씌우던 비각(碑閣)의
주춧돌로 비각은 오래 전에(6.25전쟁 때 파괴되었다고 함) 녹아 없어졌다.


▲  봉원사 회화나무 (1) - 서울시 보호수 13-7호
봉원사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가 5그루가 있는데, 가장 먼저 마중하는 것이
바로 이 회화나무이다. 이 나무도 구석에 있어 진짜 지나치기가 쉽다.
나무의 높이는 18m, 둘레는 3m이며, 2000년 12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180년이라고 한다. (지금은 190여 년)


▲  봉원사 느티나무 (1) - 서울시 보호수 13-3호

유애비와 회화나무를 지나면 바로 경내 직전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중을 한다. 오르막길에 있
다보니 풍채가 자못 대단해보여 나그네를 적지 않게 주눅을 들게 하는데, 보호수로 지정될 당
시 나이가 30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40년이 고스란히 더해져 약 340~350년의 지긋한 나이를 먹
었다. 높이는 18m, 둘레 4.3m로 뒤에 있는 느티나무보다 늘씬하고 키가 크며 주변에 넓게 그늘
을 드리워 무더위의 패기를 잠재운다.


▲  봉원사 느티나무 (2) - 서울시 보호수 13-1호

앞서 느티나무를 지나면 비슷한 덩치의 느티나무가 연거푸 마중을 나온다. 앞서 나무에서도 완
전히 털어내지 못한 속세의 기운과 번뇌를 다시 한번 털어주는 역할인지 촘촘한 간격으로 나무
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나무를 지나면 비로소 봉원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봉원사가 서울 장안에서 규모가 제법 있는 절이지만 아직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갖추지 못
했다. 그러니 이들 나무가 자연히 일주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느티나무는 앞 나무보다 100년 정도 더 숙성되어 약 440~45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지며,
앞 나무보다 키가 좀 작지만 몸집은 크다. 그 옆에는 삼천불전 밑에 지은 종무소(宗務所) 겸
다원(茶園)이란 찻집이 있는데, 다양한 전통차를 팔고 있으며, 불교용품과 공양물, 불교 서적
도 판매한다.

               ◀  봉원사 연못
네모난 연못에 동그란 섬을 심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난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상징
하는 것 같다. 연못에 홀로 떠 있는 섬에는 조
그만 소나무가 운치를 가득 우려낸다.

       ◀  연못 옆에 자리한 비각(碑閣)
봉원사에 크게 재정을 지원했던 전성기(全星基)
의 송덕비(頌德碑)가 담겨져 있다.
비석도 모자른지 대웅전 옆에 그의 제사까지 지
내는 전씨영각까지 두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지원이 꽤 상당했던 모양이다.


 

♠  봉원사 16나한상, 범종각 주변

▲  하얀 연꽃의 수수한 자태

연못 윗쪽 라인에는 연꽃을 심은 수조를 배치해 연꽃의 조촐한 향연을 선보인다. 붉은색과 흰
색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연분홍 연꽃부터 한참 물이 오른 홍련(紅蓮)과 백련(白蓮)까지 늦
여름에 나타나는 수련(睡蓮)을 빼고는 거의 다 모여 있다. 어여쁜 잎을 펼쳐보이며 부처와 대
자연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연꽃들은 정처없는 중생의 마음에 제대로 불을 지핀다.


▲  무슨 근심이 있는지 입을 오므린 홍련
저 홍련에서 심청(沈淸) 누님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  16나한상 동쪽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1967년에 목수인 이광규가 세웠다. 건물 이름
그대로 범종이 담겨져 있으며. 종 밑에는 단지
를 묻었는데, 이는 소리의 공명정도를 길게 하
고자 함이라 한다.

▲  좌측 16나한상

▲  우측 16나한상

16나한상은 부처의 열성제자인 16명의 나한(羅漢)으로 2001년 6월에 봉안했다. 나한상 북쪽에
는 그들을 조성한 이유를 담은 16나한 조성연기문(造成緣起文) 비석이 있다. 그럼 여기서 연꽃
은 잠시 접어두고 봉원사의 내력을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서울 연꽃축제의 성지 ~~ 봉원사(奉元寺)
서울 도심에서 북쪽으로 뻗어가는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
산(仁王山)과 마주하고 있는 안산<鞍山, 295.9m, 무악산(毋岳山)이라고도 함> 서남쪽 자락에는
서울에 이름난 고찰(古刹)의 하나인 봉원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봉원사는 태고종(太古宗)의 총본산으로 신라가 한참 망해가던 889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
금의 연세대<연희궁(延禧宮)터>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명쾌히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이 전혀 없는 실정이고, 그나마 조선 초기에 정도전(鄭道傳)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
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져 도선국사 창건설은 거의 신뢰성이 없다고 봐야 된다.
어쨌든 창건 이후 적당한 내력이 없다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시절에 보우대사<普
愚大師, 원증국사(圓證國師)>가 크게 중창하면서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 중생들로부터
크게 찬양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때 보우가 창건한 것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색(李穡)에게 명해 보우대사(원증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스
로 그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니 그 이름이 봉원사에 기록되어 있다. 허나 이색은 고려가 망
하자 초야에 숨으며 조선을 멀리했던 삼은(三隱)의 하나인데, 왜 나라를 뒤엎은 이성계의 명을
받아 보우대사의 비문을 썼는지가 의심스럽다. 아마도 잘못된 기록인 듯 싶다.
1396년(태조 4년)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3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했고, 태조가 붕어(崩
御)한 이후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여 왕실의 원찰로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렸다.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어 1651년에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했으나 동,서 요사채가 불타자 극
령(克齡)과 휴엄(休嚴)이 중건했으며, 1748년 영조(英祖)가 현재 절 자리를 하사하며 절을 옮
길 것을 명하자 찬즙(贊汁)과 증암(增岩)이 절을 이전하니 그 기념으로 영조가 친히 '봉원사'
란 친필 현판을 하사했다. (그 현판은 6.25때 사라짐) 그리고 원래 자리에는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映嬪)이씨의 묘역, 수경원(綏慶園)을 1764년에 조성했다.
이 수경원은 20세기 후반, 서오릉(西五陵)으로 이전되어 지금은 정자각과 약간의 석물만 제자
리를 지키고 있다.
봉원사를 흔히 '새절'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영조 때 터를 옮기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새
로 지은 절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며, 수경원의 원찰 역할까지 자연스레 맡게 되면서 굶어
죽을 일은 없게 되었다.

1788년에는 전국 승려의 풍기를 단속하고자 8도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가 설치되었으며, 1856
년에는 은봉(銀峯), 퇴암(退庵)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잠시 머물며
여러 현판을 써주기도 했다. (대방에 2개의 현판이 남아있음)
고종(高宗) 초기에는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開化派)의 지도자로 활약했던 이동인(
李東仁)이 5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던 김옥균(金玉均)과 박영
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이 찾아와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에는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세웠으나 곧 불에 탔으며, 1908년 8월에는 한글학회가
이곳에서 창립되어 창립총회를 열리기도 했다.

▲  봉원사 염불당(대방)

▲  봉원사 대웅전

1911년에 주지 보담(寶潭)이 중수를 했고, 땅을 더 확보하여 가람(伽藍)을 넓혔다. 1945년에는
해방을 기념하고자 주지 기월(起月)이 광복기념관을 세웠으며, 1950년 6.25가 터지자 초반에는
절이 무탈했으나 한참 서울 수복을 벌이던 9월 말, 무심한 총탄과 폭탄이 무수히 날라와 광복
기념관이 소실되고 영조의 현판과 이동인 등 개화파 인물들의 유물까지 덩달아 화마(火魔)의
먹이가 되면서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대웅전과 몇몇 건물만 간신히 살아남았음)

6.25이후 주지 영월(映月)이 1966년 염불당을 중건했는데, 그 목재는 1962년에 공덕동(孔德洞)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를 구입하여 충당했다.
당시 친일 식민사학의 두목이던 이병도와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유적을 부시고자 봉원사에
판 것이다.

1991년 젊은 주지승인 김성월이 삼천불전을 짓는다고 난리를 피우다가 누전으로 이곳의 유일한
지정문화재였던 대웅전을 홀라당 태워먹었다. (당시 뉴스에 요란하게 나왔음) 이후 새로 부임
한 주지 혜경이 신도들과 함께 1994년 쓰러진 대웅전을 복원하고 삼천불전까지 같이 완성을 보
았다.
2009년에는 봉원사에서 전문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영산재(靈山齋)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
정되었고, 2011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넓직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천불전, 명부전, 염불당, 극락전, 만월전, 미륵
전, 칠성각, 운수각, 전씨영각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빼곡히 자리를 메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아미타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3호), 범종(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
), 반야암 목조관음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9호), 반야암 목조석가여래좌상(서울 지
방유형문화재 370호
), 반야암 석조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1호) 등 지방문화재 5점이
있다. 이들은 2014년 여름 이후에 지방유형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또한 중요무형문화재 48호
인 단청장(丹靑匠) 기능 보유자 만봉이 주석하고 있고, 중요무형문화재 50호인 영산재(靈山齋)
를 지키는 영산재보존회가 이곳에서 후학을 기르고 있다.
그외에 명부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 대방 아미타불,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조성
된 탱화가 여럿 전하며, 오래된 보호수 5그루가 경내 외곽에서 사이 좋게 그늘을 드리운다.

봉원사는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운 곳으로 숲속에 묻힌 도심 속의 포근한 산사이다. 서울
4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고찰이기도 하며, 접근성과 교통도 그런데로 착한 편이라 속세에서 잠
시 나를 지우고 싶으나 멀리 가기가 힘들 때 언제든 찾아와 안기고 싶은 곳이다. 절을 둘러싼
숲이 무성해 깊은 산골에 들어온 듯한 즐거운 기분을 선사하며 공기 또한 맑다.

봉원사는 2003년부터 매년 한여름에 연꽃축제를 선보인다. 2016년을 기준으로 벌써 14회를 맞
이했는데, 서울 최초의 연꽃축제로 '서울연꽃문화대축제'라 불린다. 허나 봉원사 연꽃축제라
간단히 일컬어도 상관은 없다. 이곳이 다른 연꽃축제와 다른 것이 있다면 연못이나 논두렁에
연꽃밭을 닦지 않고 커다란 수조(水槽)를 동원해 연꽃을 심어 경내에 배치했다.
축제기간 동안에는 연꽃의 향연 외에도 전통차 시음, 산사음악회, 영산재 등이 열리며, 연꽃은
축제가 끝난 이후에도 8월 중/하순까지 경내에 선보인다.

절에서 안산으로 조금 오르다보면 봉원사의 숨은 명물인 관음바위가 있고, 안산 정상까지 올라
가면 동쪽 정상부에 서울 지방기념물 13호로 지정된 무악산 동봉수대(東烽燧臺)가 있다. 봉수
대는 근래에 복원된 것으로 정상에서 홍제동, 독립문 방면으로 내려가면 되며, 안산 둘레에는
도심의 아름다운 숲길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안산자락길(7.4km)이 아주 편안하게 닦여져 둘레
길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다.

※ 봉원사 찾아가기 (2016년 8월 기준)
* 서울역버스환승센터(1,4호선 9-1번 출구), 5호선 서대문역(6번 출구), 2호선 신촌역(4번 출
  구)에서 7024번 시내버스를 타고 봉원사 하차
* 경복궁역(3호선) 1번 출구를 나와서 사직동주민센터에서 272, 606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대부
  고(봉원동)에서 하차, 봉원사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어가거나 GS25시 앞에서 7024번 버스로
  환승한다.
* 매년 여름(7월 말~8월 초)에는 서울연꽃문화대축제가 열린다. 영산재를 비롯해 산사음악회와
  각종 공연, 불화 전시 등의 이벤트가 열린다. (2016년에는 7월 30일 딱 하루만 축제를 했음)
* 봉원사 승려는 거의 출퇴근을 한다. 이른 아침에 출근하여 일몰 직후에 퇴근을 하는데, 퇴근
  이후에는 모든 건물을 잠궈두며 경비인이 절을 지킨다. (연꽃축제 기간에는 대웅전은 늦게까
  지 문을 열어둠)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 (☎ 02-392-3007~8)
* 봉원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어찌 꿈엔들 잊으리요 ~ 연꽃의 즐거운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과 대방

▲  서울연꽃문화대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은 연꽃축제장의 심장으로 연꽃을 머금은 수조들이 가득 널려 거대한 연꽃 숲을 이
룬다. 천하의 연꽃을 모두 소환한 것일까? 갖은 연꽃들이 서로 아름다움과 맵시를 견주며 물결
을 이루니 연꽃축제의 열기를 여름보다 더욱 뜨겁게 만든다. 속세에서 아무리 오염되고 상처받
은 안구와 마음이라도 연꽃의 즐거운 향연을 보면 금세 정화가 될 것이다.


▲  삼삼하게 우거진 푸른 연잎들
이렇게 보니 연지(蓮池) 한복판에 퐁당 빠진 기분이다.

▲  활짝 미소를 머금은 홍련들

▲  출렁이는 연꽃 밀림 너머로 보이는 대방

▲  서로 키와 아름다움을 견주는 홍련들

▲  홍련을 희롱하는 잠자리
연꽃 봉오리 속에 그만의 꿀단지가 숨겨진 것은 아닐까?
 

▲  방긋 연잎 속에서 숨바꼭질을 즐기는 홍련들

▲  수조에 몸을 담군 연꽃 무리들
한 마리의 개구리가 되어 연잎에 앉아 개굴개굴 노래를 부르고 싶다.

▲  대방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과 삼천불전

▲  두툼하게 살이 오른 홍련

▲  방긋 웃는 홍련 - 하루살이보다 못한 찰라와 같은 삶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으며 이곳을 찾은 중생들을 격려한다.

▲  연밥을 드러내 보인 백련

▲  대웅전 우측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
대웅전 바로 앞에도, 계단에도 연꽃 수조를 갖다 놓아 연꽃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었다.

▲  봉원사 대방<(大房) = 염불당(念佛堂)>

대웅전 뜨락 좌측에 자리한 대방(염불당)은 넓직한 팔작지붕 건물로 공덕동(孔德洞) 동도공고
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의 본채 건물을 업어와 만든 것이다.

1960년대에 당시 봉원사 주지인 영월이 6.25로 파괴된 절 건물을 다시 짓고자 궁리를 하던 중,
마침 이병도를 비롯한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흔적을 산산조각 내고자 아소정을 헐값에 내놓
았다. 하여 아소정 본채를 구입하여 도화주 김운파 등과 1966년에 축소/변형하여 세우고 대방
으로 삼았다. 그래도 명세기 대원군의 별장 건물인데 내부는 절 스타일에 맞게 변형을 주더라
도 외형은 원래 모습으로 했으면 좋으련만 당시 인식 부족으로 인하여 그리 하지 못한 점이 참
아쉽다.
비록 아소정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지 못한 채, 또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유일하게 남
은 아소정의 흔적으로 건물 자재는 대부분 아소정 것이며, 그 시절 현판이 걸려있어 그런데로
대원군 할배의 독한 향기를 뿜어낸다. 게다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기존 크기에서 축소했
다는 것이 저 정도이니 원래 모습은 대원군의 생전의 위엄처럼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  대방에 봉안된 하얀 피부의 아미타불

대방은 승려의 생활공간 및 손님들의 숙식, 유가족을 위한 49재, 그리고 영산재를 지도하는 공
간으로 범패(梵唄)와 영산재를 배우는 이들의 음악 소리가 늘 끊이지 않고 구수하게 새어나와
이곳이 영산재의 성지임을 실감케 한다.
대방 불단에는 아기처럼 매우 조그만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는 17~18세기
에 조성된 것으로 원래 철원 심원사(深源寺)에 있던 것으로 예로부터 영험이 깃들여져 있다고
전한다.

건물 내부는 딱히 방을 가르는 벽이 없어 하나의 거대한 방을 이르고 있으며, 추사 김정희(金
正喜)가 쓴 현판을 비롯하여 인간문화재인 이만봉 승려의 신장도(神將圖, 부엌문에 있음) 등이
외부를 아낌없이 수식한다.

▲  운강 석봉이 쓴 봉원사 현판의 위엄

▲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  추사 김정희가 쓴 산호벽루(珊瑚碧樓)

▲  추사의 청나라 스승인 옹방강(翁方鋼)의
현판 ~ 무량수각(無量壽閣)

추사체(秋史體)의 주인공인 김정희는 말년에 불교에 크게 관심을 가지며 많은 절을 찾았다. 방
문한 절마다 친필 현판을 남겼는데, 봉원사에도 그의 현판 2개가 고스란히 전해온다. 파란 글
씨로 쓰인 그의 필체는 160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으며, 추사는 비록 가고 없
지만 그의 힘찬 필력을 느끼는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  봉원사 대웅전(大雄殿)과 삼천불전 주변

봉원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연세대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1748년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조
금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 중반 건축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8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는데,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린 사찰 건축물은 화계
사(華溪寺) 대웅전과 흥천사(興天寺, ☞ 관련글 보러가기) 극락전, 명부전이 고작이었다. 그만
큼 일찌감치 서울 지역 조선 후기 사찰 건축물의 대표작으로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봉원사 대웅전은 1991년 삼천불전을 무리하게 짓는 과정에서 전기 누전으
로 홀라당 태워먹고 말았다. 그때 영조가 내린 봉원사 현판을 비롯하여 건물 내부를 장식하고
있던 조선 후기 탱화들이 죄다 재가 되었으니 6.25 시절 피해만큼이나 그 안타까움은 실로 크
다 할 것이다. 봉원사가 축적했던 많은 보물들이 그렇게 또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건물이 쓰러지자 2년 동안 공사를 벌여 1993년에 생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일으켜 세웠
지만 떠나간 지방문화재의 지위는 되찾지 못했으며, 인간문화재인 승려 이만봉이 탱화와 단청
대부분을 그려 건물 내부는 매우 화려하다.

대웅전 안에는 조그만 범종(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호)이 하나 깃들여져 있다. (종의 위치는
바뀔 수 있음) 이는 흥선대원군이 부질없는 명당(明堂) 욕심에 예산 덕산(德山)에 있던 가야사
(伽倻寺)로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이전할 때 그 절을 강제로 불을 질렀는데, 그때 타
지 않고 남아서 이곳에 가져온 거라고 한다.
과연 가야사 자리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제왕이 되었지만 결국 자신을
포함 3대 만에 나라를 제대로 말아먹었으니 명당의 숨겨진 함정이라고나 할까..?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관음보살(觀音菩薩)이 3존불을 이룬다.
색채가 고운 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그들을 받쳐주고 있으며, 붉은 지붕의 닫집이
매우 호화롭기 그지없다.

▲  대웅전 천정을 바라보는 여유 ~ 용이 새겨진 금빛찬란한 천정보개(寶蓋)
저들이 있는 한 대웅전은 더 이상 화마의 덧없는 반찬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인간들 하기에 달려있지만 말이다.

   ◀  대웅전 계단 좌우에 자리한 해태상
대웅전을 화마로부터 굳게 지키고자 계단 양쪽
에 귀여운 해태상을 두었다. 연꽃에 둘러싸인
탓에 해태상의 표정이 씨익~ 해맑기 그지 없어
대웅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그의 표정
앞에 이곳에 온 소임도 잊고 돌아갈 것이다.

▲  운수각(雲水閣)과 영안각(靈晏閣)

▲  영안각과 전씨영각(靈閣)

대웅전 좌측에는 조그만 건물 3동이 연이어 자리해 있다.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은 운수
각으로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이며, 그 옆에 조금은 낡아보이는 맞배지붕 건물은 일정기간 혼백
을 봉안하는 영안각으로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196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겉 나이는
거의 100년은 되어 보인다.
그리고 바로 좌측에 있는 1칸짜리 건물은 전씨영각으로 평생 모은 재산을 절에 넘긴 전성기 부
부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매년 기일(忌日)마다 절에서 제사를 지내주고 있는데, 이렇게 사
당까지 지어 제삿밥까지 직접 챙겨줄 정도면 시주한 재산이 꽤 되었던 모양이다. 절이나 속세
나 돈 앞에서는 역시나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절에서는 그들을 부처 시절의 급고독장자로 비
유까지 하며 찬양을 하니 말이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관음보살상
이글거리는 두광(頭光)을 지닌 관음보살이
용선을 타고 있다.

▲  9마리의 용조각
수각(샘터) 옆 바위에 놓인 특이한 조각품으로
9마리의 용이 모여 작전 회의를 하는 것 같다
.


▲  봉원사 수각(水閣, 샘터)
대자연이 내린 옥계수로 연꽃 석조(石槽)는 늘 마를 날이 없다. 여름의 제국 시절에는
연꽃보다 샘터가 더 반갑지. 메마른 목에 한줄기 빛이 되어주니 말이다.

▲  봉원사 삼천불전(三千佛殿)

경내 우측에 자리한 삼천불전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름 그대로 3,000불을 머금고 있다.
이곳에는 1945년에 지은 46칸짜리 광복기념관이 있었으나 1950년 9월 25일 서울 수복을 둘러싼
우리군과 북한군과의 싸움에서 무심한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 영조의 봉원사 현판과 이
동인, 김옥균의 유물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이후 터만 남아오다가 1988년 지금의 삼천불전을 짓기 시작하여 1997년 완성을 보았다. 무
려 9년에 걸쳐 지은 이 건물은 210평 규모로 대들보 무게만 7톤을 헤아린다고 하며, 미국 알래
스카에서 227년 이상 묵은 나무를 수입하여 만들었다. 또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 본
건물의 특징인데, 절을 크게 돋보이게 할 겸, 삼천불전을 짓는 것까지는 좋으나 이 건물을 짓
는 과정에서 누전으로 소중한 대웅전을 화마로 떠나보내는 비극을 겪었다. 그런 대웅전의 희생
으로 태어난 것이 바로 삼천불전이 되겠다.

건물 중앙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가 이 큰 건물의 주인장이다. 그
를 중심으로 좌우에 조그만 금동불(金銅佛) 3,000불을 가득 채워 눈을 부시게 하는데, 모두 중
생의 돈을 받아 만든 원불(願佛)이다. 그외에 내부 우측에는 조그만 납골당이 있어 영가(靈駕
)들을 위한 공간을 두었으며, 건물 내부가 워낙 넓어서 1,000명은 능히 구겨 넣을 수 있다.


▲  삼천불전의 주인장인 비로사나불과 좌우에 가득 널린
조그만 3천불의 위엄

▲  삼천불전 좌측에 자리한 윤장대(輪藏臺)
윤장대를 돌리면 불교 경전을 다 이해하고
더불어 소원까지 성취된다고 한다.

▲  저보다 정신이 없는 그림이 또 있을까?
100명이 넘는 호법신들이 빼곡히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  화려하기 그지없는 삼천불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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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원사 3층석탑(진신사리탑)

절에 필수 요소인 석탑은 보통 법당(금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다. 허나 봉원사는 풍수지리 때
문인지 오랫동안 탑이 없는 허전함을 안겨주었지. 그러다가 1991년 7월 봉원사 승려와 신도 75
명이 스리랑카의 초청을 받아 캔디의 불치롬보에 있는 강가라마사(寺)를 방문했는데, 그곳 대
승정(大僧正)인 그나니사라가 부처의 사리 1과를 선물로 주면서 봉원사도 진신사리 보유 사찰
의 하나가 되었다.
사리는 가져왔으나 정작 탑을 세우지 못해 애를 태우다가 삼천불전이 세워진 이후 신도들의 지
원으로 석가탑(釋迦塔)을 닮은 3층석탑을 세우게 된 것이다. 대웅전 앞에 세우면 좋으련만 삼
천불전에 대한 기대가 큰지 그 앞에 세워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뽀송뽀송한 하얀 피부를 마
음껏 뽐낸다.

▲  삼천불전에서 바라본 천하
숲 너머로 좁게나마 신촌과 서대문구,
마포구 지역이 바라보인다.

▲  이동인이 이곳에 머물던 것을 기리고자
세운 두 손가락 조형물 -
저 수인(手印)은 무슨 제스쳐일까?


▲  삼천불전 서쪽에 자리한 느티나무 (3) - 서울시 보호수 13-2호
봉원사에서 제일 오래된 나무로 높이 21.5m, 둘레는 4.4m이다.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1972년) 추정 나이가 430년이라고 하니 그 사이 40년이 얹혀져
470여 년의 장대한 나이를 지니게 되었다.

▲  삼천불전 주변에서 만난 연분홍 연꽃


 

♠  봉원사 마무리

▲  봉원사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칠성각은 그 이름 그대로 칠성(七星)의 건물이다. 허나 이상하게도 칠성
(치성광여래)이 아닌 하얗게 피부를 다듬은 약사여래상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 건물의 이름
을 무색하게 만든다.

칠성각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고색이 짙은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방문화재로 삼아도 전혀 손색은 없어 보이는데, 내부에는 약사여래상
을 중심으로 19세기 말에 제작된 칠성탱이 그 뒤를 지켜주고 있으며,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팔
상도(八相圖)와 호법신들이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산신(山神) 가족이 담긴 산신탱 등이 있다.


▲  칠성각에 봉안된 약사여래좌상
붉은색의 약합(藥盒)을 쥐어들며 흐릿한 눈빛을 보내는 그 뒤에 칠성탱이 걸려있다.
보통 존상과 탱화는 일치하기 마련인데, 여기는 서로가 따로 논다.

▲  칠성각 우측 - 산신탱과 팔상도 4폭이
걸려있다.

▲  칠성각 좌측 - 신중탱과 팔상도의
나머지 4폭이 자리해 있다.


▲  한글학회 창립 기념비

봉원사는 우리 글 지킴이인 한글학회 창립 총회가 열렸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1908년 8
월 주시경(周時經)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한글학회
(국어연구학회)를 세웠는데, 그들은 개화파 선구자였던 이동인이 머물던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
를 열어 봉원사를 근거지로 삼았다.
2008년 8월 한글학회 창립 100돌을 기념하여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사업회'와 봉원사가 표
석을 세워 그날을 기린다.


▲  봉원사 명부전(冥府殿)

삼천불전 뒷쪽에 자리한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저승의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를
봉안하고 있다. 명부전 현판은 조선 태조 때 정도전이 친히 쓴 것이라고 하는데, 현판을 보니
그렇게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게 맞는다면 거의 620년을 묵은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
래된 보물이 된다.

명부전은 정도전의 현판으로도 빛이 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다고 기둥에 달린 주련 4
개가 친일매국노로 악명이 높은 이완용(李完用)이 쓴 것이라고 한다. 1945년 이후 친일파를 제
대로 척결하지 못한 휴유증으로 나날이 기형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이 매국노의 흔
적을 남겨두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봉원사도 생각이 있다면 속히 이들을 뜯어내 장작으로 쓰기
바란다.


▲  명부전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

녹색 승려머리의 지장보살과 좌우에 봉안된 10왕(十王)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나름 가
치가 있는 문화유산이다. 10왕 끝에는 당찬 패기의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서 있어 명부(저승)
식구들을 지킨다.


▲  명부전 옆구리에 둥지를 튼 연꽃 무리들 (거의 연잎만 있음)

▲  봉원사 미륵전(彌勒殿)

칠성각 뒷쪽에 있는 미륵전은 기와집이 아닌 현대식 건물로 마치 강당이나 체육관 같은 모습이
다. 건물 안에는 근래에 조성된 하얀 피부의 미륵불(彌勒佛)이 서 있는데, 건물도 그를 닮아서
죄다 하얀색이라 조촐하게 순백(純白)의 세계를 자아내고 있다. 미륵불 주위에는 기름을 먹고
사는 인등(引燈)이 가득 자리해 건물 내부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데, 인등으로 인해 인등각이
라 불리기도 한다.


▲  미륵전 미륵불입상

부처가 사라지고 막연히 56.7억년 후에 나타난다는 미륵불, 이 땅은 점점 아비규환 그 이상으
로 흘러가는데 중생의 고통을 나몰라하며 어딘가에 숨어있을 미륵불(彌勒佛)이 그저 밉기만 하
다. 그렇게 나오기 싫으면 다른 이를 보내 구제해 주던가. 꼭 56.7억년 후에 나타나야 되는가?
미리 땡겨서 나오는 센스좀 보여주기를.. 자꾸 숨어있는 것도 미륵불의 직무유기이다.

◀  미륵전 앞에 세워진 날씬한 7층석탑
왜정 이후 많이 나타나는 석탑 양식으로 언제
무슨 이유로 세웠는지는 모르겠다.


▲  극락전(極樂殿)과 자애수(慈愛樹)

명부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선 극락전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
의 맞배지붕 건물로 그리 오래된 존재는 아닌데, 건물 우측에는 자애수란 이쁜 이름을 지닌 아
름드리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나이는 150~200년 정도 된 것으로 여겨지며, 왜 자애수라
불리는 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극락전에 그늘을 제공하는 것 때문은 아닌 듯 싶다.


▲  극락전 아미타불과 문수,보현보살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만월전(滿月殿)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자 외진 숲속에 만월전이 있다. 이 건물은 약사불을 봉안하고 있는데,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그의 곁에 둔 것이 특징이다. 1904년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독성탱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우리가 갔을 당시는 애석하게도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내부는 살
피지 못했다.


▲  내려가는 길에 만난 아리따운 홍련

▲  삼천불전의 숨겨진 부분 - 절 주차장

봉원사에 조촐히 닦여진 연꽃 세상을 구경하며 그들의 향기에 취해 1시간 30분 정도 머물렀다.
연꽃이 완전 시간 도둑인 셈이다.
연꽃이 앗아간 나의 마음을 간신히 되찾아 절을 나올 때는 아직 발자국을 남기지 못한 삼천불
전 서쪽으로 내려갔다. 경내에서 볼 때는 1층(아래 공양간을 합치면 2층)이지만 그 밑에 숨바
꼭질을 하는 공간이 있어 삼천불전은 거의 4층 규모이다. 물론 지형을 이용하여 지었기 때문에
저런 모습이 나온 것이다.

삼천불전 서쪽에는 주차장이 있는데, 이곳도 봉원사 주차장이다. 그 주차장을 지나니 봉원사의
숨겨진 나머지 보호수 1그루(느티나무)가 모습을 드러낸다.


▲  봉원사 느티나무 (4) - 서울시 보호수 13-5호

이 느티나무는 민가 옆에 비스듬히 자리해 있다. 하늘을 향한 높이는 23m, 둘레는 3m로 보호수
로 지정된 1981년 당시 추정 나이가 15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180여 년으로 보면 된다. 나무가
특이하게 절을 향해 45도 정도 고개를 숙이고 있어 절을 향한 일편단심을 보여준다.

이 나무를 끝으로 봉원사 연꽃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다음에 또 이곳과 인연을 짓
는다면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아미타괘불도와 반야암(봉원사의 부속 암자)에 깃든 지방문화재
불상들을 꼭 두 눈에 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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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강화 석모도 보문사 (외포리, 낙가산, 눈썹바위 마애불)


' 서울에서 가까운 그림 같은 섬, 그리고 그림 같은 산사
강화 석모도 보문사(普門寺) '
보문사 마애석불좌상 (눈썹바위)
▲ 보문사 눈썹바위 마애석불좌상



 

봄이 슬슬 기지개를 켜던 4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강화도(江華島) 서쪽에 자리한 석모도
보문사를 찾았다. 원래는 강화도 1박 2일 여행으로 토요일 낮에 가서 일요일 오후에 오는
일정이나 나는 개인 사정으로 토요일에 같이 가지 않고 일요일 아침 일찍 새벽 이슬을 맞
으며 완전 후발대로 그들이 있는 강화도 황청리로 넘어갔다.

내가 서식하는 서울 도봉동(道峰洞)에서 황청리(외포리 서북쪽 동네)까지 그 장대한 거리
를 대중교통에 의지하여 9시 정도에 황청리 종점에 이르렀다. 그들이 머물던 펜션은 종점
바로 뒷쪽 언덕에서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자리해 있어 찾기는 쉬웠다.
펜션에 들어서니 몇몇은 해장술이란 명목으로 아침부터 곡차(穀茶)를 걸치고 있었고 대부
분은 안에서 아침을 먹거나 TV를 보고 있었다. 물론 전날 밤샘의 위엄으로 아직도 깨어나
지 못한 이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아침을 먹으면서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몸을 쉬게 했다.
11시가 넘자 슬슬 자리를 정리하고 석모도로 가고자 외포리(外浦里)로 이동을 했다. 일행
들 차량 6대 중 1대만 외포리에 두고 나머지 5대에 나눠 타서 석모도로 넘어갔는데, 일요
일이라 석모도 나들이 수요가 상당하여 외포리는 그야말로 시장통을 이루었다.

외포리와 석모도(석포리)를 오가는 여객선은 휴일 만선(滿船)의 기쁨을 톡톡히 누리며 수
시로 두 곳을 악착같이 이어준다. 이 여객선은 소형차량은 물론 대형버스, 화물차에 이르
기까지 수송이 가능하여 나들이객들이 가져온 차량을 꾸역꾸역 넣어 섬으로 보낸다.
사람이야 아무리 미어터져도 배 1척에 거의 다 실을 수 있지만 차량들은 수송능력에 한계
가 있고 섬으로 가려는 차량들이 길게 꼬리를 물고 있어 40분 정도를 기다린 끝에야 배에
오를 수 있었다. 배가 크긴 해도 차량 10대 정도 들어가면 꽉 찰 것이라 생각했는데 공간
이란 공간을 다 활용하여 차량을 구겨넣으니 거의 30대 정도 실은 듯 싶었다.
사람들은 차에 있거나 2층 객실에 있으면 되며, 석모도까지는 소리를 지르면 흔쾌히 들릴
정도로 가까워 불과 10분이면 도착한다.


 

♠ 석모도(席毛島)와 보문사 입문

▲ 외포리 포구와 잠시 작별을 고하다.

사람과 차량을 가득 머금은 배는 미련 없이 포구를 출발했다. 이렇게 보면 한반도에서 섬으로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강화도도 엄연한 섬이므로 섬에서 섬으로의 이동이다. 다만 강화도가
2개의 다리로 한반도와 너무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보니 착각하기가 쉽다.

포구 주변에는 서해바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갯벌이 진하게 펼쳐져 여러 생명들이 삶을 의지
하고 있다. 서해바다의 보물이라 일컬어지는 갯벌은 기후 변화와 인간들의 무분별한 개발의 칼
질로 계속 줄어들고 있는 형편으로 강화도 지역 갯벌은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세계적 희귀종인
저어새(가리새)가 서식하고 있어 지구에서 매우 우수한 갯뻘로 추앙을 받고 있다. 하여 강화도
를 비롯하여 석모도, 볼음도(乶音島) 지역의 갯벌을 한 덩어리로 묶어 천연기념물 419호로 삼
았으며 단일 문화유산 지정 구역으로는 이 땅에서 가장 넓다.
(면적은 약 1억 3,600만평,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강화갯벌 및 저어새번식지')


▲ 조금씩 멀어져가는 강화도, 그리고 시야를 어지럽히는 갈매기들

배가 출발하니 인근 갯벌에서 망을 보던 구공(鷗公, 갈매기)들이 몰려와 배를 포위한다. 날카
롭게 끼룩끼룩거리며 통행세를 요구하니 사람들은 준비해 온 새우깡을 던지며 그들을 달랜다.
허나 구공들이 입맛들이 변했는지 아니면 배가 불러터졌는지, 아니면 둔해졌는지 좀처럼 새우
깡을 잡지 못했다. 바다에는 그렇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떨어진 새우깡이 두둥실 무리를
이루며 떠있었다.


▲ 어느 양이(攘夷) 여인이 팔을 뻗어 새우깡으로 구공을 유혹하지만
낯설은 피부색 탓인지 아무도 오지 않았다.


▲ 통행세를 요구하며 배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구공들

▲ 하늘이 온통 구공들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을
거니는 그들이 그저 부러울 뿐~~ ▼

외포리를 출발한지 겨우 10분 만에 석모도의 관문인 석포리 포구에 닻을 내린다. 배로 이동한
구간이 강화도와 석모도, 교동도(喬桐島) 등에 빙 둘러싸여 있어 마치 소양호, 대청호(大淸湖)
등의 너른 호수를 건넌 기분이다.
배에 담긴 사람과 차량들이 도착하기가 무섭게 쏟아져 나오면서 석포리 포구는 다시 활기를 되
찾고 강화도로 나가려는 사람과 차량들이 그들의 빈 자리를 메우면서 배는 왕복으로 만선의 기
쁨을 재현한다. 아마도 그날 여객선 회사는 소고기 회식을 거창하게 했을 것이다.

석포리에서 보문사까지는 잘 닦여진 2차선 도로를 따라 차량으로 10~15분 정도 들어가야 된다.
보문사에 이르니 주차장은 그야말로 초만원. 간신히 공간을 찾아 바퀴를 접고 보문사로 올라갈
준비를 한다.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는 여타 관광지와 비슷하게 보문사를 후광(後光)으로 삼은
주막촌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들 주막은 나물튀김과 동동주를 미끼로 호객행위를 벌인다. 덕분
에 튀김과 동동주 몇 잔을 무료로 챙겨 마시며 배를 조금이나마 채운다.


▲ 보문사 일주문(一柱門)

보문사에 들어서려면 반드시 일주문을 거쳐야 된다. 일주문 옆에는 별로 반갑지 않은 매표소가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고, 문 앞에는 매표소 사람이 철통같이 입장권을 검
사하고 있다. 예전 2004년에 왔을 때는 입장료가 1,500원이었는데, 지금은 10년의 무게가 억지
로 더해져 무려 2,000원씩이나 뜯는다.
후덜덜한 입장료 앞에 경악하며 단체 할인을 요구하였으나 적정 인원(30명)이 안된다며 거절당
했다. 우리 일행은 딱 20명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이에 굴하지 않고 어떻게 구워삶아 단체 할
인으로 표를 끊고 일주문을 들어선다.

일주문 현판에는 '낙가산 보문사(洛迦山 普門寺)'라 쓰여 있는데, 이는 서예가로 명성이 높은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 1927~2007)의 글씨이다.


▲ 은행나무 옆에 자리한 보문사 사적비(事蹟碑)

일주문을 들어서면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길의 경사가 급해진다. 허나 그렇게 긴 거리는 아니므
로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길을 2분 정도 오르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보문사가 조금씩
모습을 끄집어내고, 담장에 둘러싸인 보문사 사적비와 거대한 은행나무가 먼저 마중을 나온다.

◀ 보문사 은행나무 - 강화군 보호수 4-9-63호

사적비 옆에 자리한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400
년에 이른다. 겨울이 저 멀리 물러가고 봄이 왔
건만 아직도 겨울의 망령에 사로잡혀 허우적거
리고 있다. 하루 빨리 파릇파릇한 은행잎을 펼
쳐보여야 될텐데 몸이 마음처럼 잘 따라주지를
못하니 보는 입장에서도 좀 안따까울 따름이다.
나무의 높이는 약 20m, 둘레는 3m에 이르며 보
문사의 정성과 아무리 먹어도 고갈되지 않는 세
월을 양분으로 삼아 어엿하게 성장했다.

은행나무를 지나면 천하 3대 관음성지로 명성이
자자한 보문사 경내에 이른다. 그럼 여기서 잠
시 보문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觀音聖地)의 하나, 서해바다를 품은 석모도 보문사(普門寺)
석모도의 중심을 이루는 낙가산(洛迦山) 서쪽 자락, 서해바다가 잘 바라보이는 곳에 보문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보문사의 보문(普門)은 중생을 구제하려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의 보살행(菩薩行)이 크고 변함
이 없다는 뜻으로 동해바다의 낙산사(洛山寺), 남해바다의 금산(錦山) 보리암(菩提庵)과 더불
어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의 하나로 꼽힌다.

이 절은 635년 회정대사(懷正大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는 금강산(金剛山)에서 도를 닦고 강
화도 지역으로 들어와 보문사와 마니산(摩尼山)에 정수사(淨水寺)를 창건했다고 하는데 그 당
시 강화도와 석모도는 고구려(高句麗)와 신라의 팽팽한 접경 지역으로 절을 지을 만한 상황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창건 이후 무려 1,100년 이상의 공백기가 있어 창건 시기에 대해 강하게
회의감을 품게 한다. 물론 관련 기록이나 유물도 없다.
다만 전국에 절이 우후죽순 들어섰던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창건되거나 경내에 600~700년 묵은
향나무가 있어 적어도 고려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절을 지은 이는 창건설화에 나오
는 회정(懷正)으로 보인다. 그는 석모도 어민들과 섬을 좌지우지하는 세력가, 부호(富豪)들의
지원으로 절을 세운 듯 싶으며 지역 어민들의 지원에 힘입어 지금도 여전히 서로를 도우며 공
존하고 있다.

절이 창건된 이후 18세기까지 이렇다할 내력이 전해오지 않으며, 180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
소 발자국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1800년 선방(禪房)을 조성해 한영 등 여러 승려가 수행을 했
으며, 1812년 유생 홍봉장의 지원을 받아 절을 중창했다.
1867년 경산이 석굴이 나한전을 지었고, 1893년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지원으로 관음전과 객실
을 지었다. 1919년 보경이 관음후불탱, 신중탱, 칠성탱, 산신탱, 현왕탱을 제작해 봉안했으며,
1920년 대원이 관음전법당(극락보전)을 중건했다. 그리고 1928년 주지 배선주가 금강산 표훈사
의 이화응과 함께 경내 뒷쪽 눈썹바위에 그 유명한 마애관음보살을 조성해 절의 듬직한 명물로
삼았다.
1935년 나한전 7칸을 새로 지었으며, 1958년 나한전 석굴을 손질하고 1972년 관음전을 중건했
다. 1982년 동각이 석실을 확장해 여러 성상(聖像)을 봉안했으며, 1987년부터 18년 동안 와불
조성 공사를 벌여 2005년 5월 완공을 보았다. 1996년 관음전을 중창해 극락보전으로 이름을 갈
았고, 2006년 5월부터 3년 동안 오백나한을 조성하는 등 새로운 볼거리를 계속 추가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선방, 석실, 삼성각, 와불전 등 10동 정도의 건물
이 있으며 석실을 제외하고는 모두 근래에 지어진 것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마애석불좌상과
석실, 맷돌, 향나무 등 지방문화재 4점을 품고 있으며, 은행나무와 향나무 등 수백 년 묵은 나
무들이 앞다투어 그늘을 드리운다.

보문사는 관음성지의 명성에다가 석실 나한상의 영험, 배를 타고 가야되는 섬 산자락에 있다는
특성, 바다가 가깝다는 매력과 서해 일몰지, 서울과 가깝다는 잇점으로 1960년 이후 수도권의
명소를 뛰어 넘어 천하 명소로 성장했으며, 강화도에 오면 꼭 들려야 직성이 풀리는 국민관광
지가 되었다. 이렇듯 석모도의 든든한 후광이자 꿀단지로 보문사가 없는 석모도는 순대가 없는
순대국밥이나 다름이 없다. 그만큼 석모도에서 보문사의 위치는 90%를 먹고 들어간다.

바다를 겯드릴 수 있는 수도권 당일 나들이 코스로 명성이 자자하며, 바다를 바라보는 이 땅에
서 몇 안되는 절로 조망 또한 일품이다.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을 때 찾아와 안기고 싶
은 절로 관음보살의 인자함과 시원스런 조망이 속세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잠시나마 보듬어 줄
것이다.
참고로 이곳은 관음성지 외에도 나한도량(羅漢道場)으로도 명성이 높다. 석실에 봉안된 18인의
나한상은 영험하기로 소문이 자자하여 관련 전설이 몇 개나 전해온다.

※ 석모도 보문사 찾아가기 (2016년 7월 기준)
① 수도권에서 강화읍(강화터미널)까지
* 신촌역(2호선/1,4번 출구) 정류장과 홍대입구역(2호선, 경의중앙선, 공항전철/2번 출구) 중
앙차로 정류장, 합정역(2,6호선/5,10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3000번 좌석버스를 타고
강화터미널 종점 하차
* 5호선 송정역(1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88, 3000번 시내버스 이용
* 3호선 마두역(4번 출구), 3호선 백석역(4번 출구)에서 96번 시내버스 이용
* 3호선 대화역(4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뒷쪽)에서 97번 시내버스를 타고 장기4거리 이후 아
무 정류장에서 강화행 시내버스로 환승 (88, 96, 3000, 90, 800번 등)
* 부평역(1호선, 인천1호선) 국민은행 앞 정류장과 부평구청역(7호선, 인천1호선/1번 출구)에
서 90번 시내버스 이용
* 인천종합터미널 건너편이나 인천터미널역(인천1호선/1번 출구), 인천시청역(인천1호선/3번
출구)에서 800번 좌석버스 이용
② 강화도에서 보문사까지
* 강화터미널에서 외포리행 군내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다닌다.
* 외포리 연안여객터미널(외포리터미널에서 도보 3분)에서 석모도행 여객선이 30분 간격으로
다니며, 주말과 휴일, 피서철에는 10~20분 내외 간격으로 오간다. 마지막 배는 3~11월은 21
시, 12~2월은 19시 정도이며 차량 수송도 가능하다. (문의 삼보해운 ☎ 032-932-6007)
* 석모도 선착장에서 보문사까지 마을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다니며, 주말과 휴일, 피서철에
는 20~30분 간격으로 증회 운행한다.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 서울 → 48번 국도 → 강화터미널 → 인산3거리 → 외포리 연안여객터미널 → 여객선 승선
→ 석모도 석포리 → 보문사
* 인천 → 검단 → 대곶 → 강화초지대교 → 온수리 → 화도 → 외포리 연안여객터미널 → 여
객선 승선 → 석모도 석포리 → 보문사

★ 보문사 관람정보 (2016년 7월 기준)
* 입장료 : 일반 2,000원(30인 이상 단체 1,600원) / 청소년 1,500원(단체 1,200원) / 어린이
1,200원 (단체 800원)
* 주차비 : 대형 5,000원 / 소형 2,000원 (문의 ☎ 032-933-8271)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629 (삼산남로 828번길 ☎ 032-933-8271~3)
* 보문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경내에서 바라본 낙가산, 하얀 바위가 뭉쳐있는 곳에 눈썹바위와
마애석불좌상이 있다.


 

♠ 보문사 경내 둘러보기

▲ 보문사 와불전(臥佛殿)

경내로 들어서면 범종각과 와불전, 500나한상 등이 제일 먼저 중생을 맞는다. 범종각(梵鍾閣)
은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세지가 담긴 사물(四物)의 보금자리로 범종과 운판(雲版), 법고
(法鼓), 목어(木魚) 등이 자리를 메운다.
와불전과 오백나한(五百羅漢)은 2006년 이후에 닦여진 보문사의 새로운 명물로 와불전에는 말
그대로 누워있는 부처가 봉안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와불전의 존재를 몰라 내부를 살피지 못
했지. 그런 와불전 옆에는 하얀 피부의 500나한이 그들의 스승 부처를 중심으로 빙 둘러 앉아
있는데, 그들의 표정이 우리나라 5,000만 인구 만큼이나 가지각색이라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 새롭게 만든 500나한상과 3층석탑

▲ 극락보전에 바라본 와불전(오른쪽)과 오백나한(왼쪽)

▲ 보문사 석실(石室)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27호

보문사에는 유명한 존재가 2개가 있으니 하나는 눈썹바위 마애석불좌상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석실이다.
이 석실은 나한상을 봉안한 공간으로 나한전(羅漢殿)으로 불리기도 한다. 649년 회정대사가 어
부들이 바다에서 건진 나한상(羅漢像)을 봉안하고자 만들었다고 하나 신빙성은 없으며, 1812년
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867년(고종 4년)에 경산(京山)
이 보수했으며, 1958년 춘성(春城)이 석굴 내부를 확장, 개수했고, 1980년에 정수(靜守)가 내
부를 확장하고 불단 뒤와 옆에 석탱화를 조성했다.

우리나라의 몇 안되는 석굴사원(石窟寺院)으로 바위 밑에 난 천연동굴을 개조하여 만들었는데,
'1⌒1⌒1⌒1'모양의 3개의 홍예문을 만들고 동굴 안에 30평 크기로 넓게 자리를 닦아 18나한
과 석가불, 미륵불, 제화갈라보살, 송자관음보살, 관음보살 등을 봉안했다.


▲ 석실을 가득 메운 중생들

석실에는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 보문사 측에서 649년이라 주장하는 어느 멀고 먼 옛날, 석모도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나갔다.
바다에 쳐놓은 그물이 평소와는 달리 꽤 무거운지라 이거 큰 것이 잡혔구나 싶어 즐거운 마음
에 힘껏 당겨보니 왠걸 이상한 괴석(怪石) 22개가 걸려든 것이 아닌가! 자세히 보니 사람 모습
과 비슷했다.
어부들은 기이한 석상에 허탈해하며 죄다 바다에 내던지고 다른 곳에 가서 고기를 잡았다. 허
나 거기서도 그 석상들이 그대로 걸려들었다. 어부들은 매우 놀라 그들을 바다에 내던지고 육
지로 돌아가 버렸다.

그날 밤, 어부들은 비슷한 시간에 같은 꿈을 꾸었다. 그들 꿈에 노승(老僧)이 나타나
'우리는 서천축국(인도)에서 왔다. 나와 함께 22명의 성인(聖人)이 돌배를 타고 여기까지 왔는
데 돌배를 돌려보내고 물 속에 잠수해 있다가 그대들의 그물을 따라 올라왔더니 2번 씩이나 우
리를 버렸더구나. 우리는 부처의 법문과 중생의 복락(福樂)을 성취하는 길을 전하러 온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편히 쉴 수 있는 명산으로 안내해주길 바란다. 그러면 그대들의 후손까지 길이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며 어부들을 인도해 보문사 앞 석굴을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이곳
에 쉬게 해달라고 당부를 하고는 바다로 사라졌다.

어부들은 이른 아침 바다로 나와 간밤의 꿈 이야기를 나누니 글쎄 다들 같은 꿈을 꾼 것이 아
닌가? 보통 일이 아닌 듯 싶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배를 끌고 석상을 버린 곳으로 달려
가 그물을 치니 그 석상들이 고스란히 나왔다.
어부들은 그 석상을 가지고 보문사로 가져와 꿈에서 본 석굴에 봉안했다. (또는 석상을 낙가산
으로 옮겼는데 보문사 석굴 앞에서 그들이 갑자기 무거워져 꼼짝도 하지 않자 그 석굴에 봉안
했다고 함)
석굴에서 경 읽는 소리가 나고 은은한 향내음이 진동했는데, 누가 다듬은 듯 석상이 앉을 좌대
(座臺)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 석상을 앉히니 신비한 기운이 가득찬 듯 하였고 마을 사
람들은 일제히 그들 앞에 엎드려 절을 했다. 어부들은 그 공로로 후손들까지 잘먹고 잘살았다
고 한다.

이 전설을 통해 이들 나한상은 바다에서 발견된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종종 불상이나 옛 사
람들의 물건이 바다나 강 속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더러 있으니까 말이다. 아마도 운반이나 약
탈을 당하는 과정에서 배가 침몰하여 바다에 버려진 것을 석모도 어부가 우연히 발견하여 보문
사에 봉안한 것으로 보이며, 보문사가 해상세력 또는 석모도 어부를 위한 사찰임을 은연중 내
비추는 것 같다. 또한 근래 절에서 나한상의 석질을 조사했더니 우리나라 화강암이 아닌 인도
에서 산출되는 돌로 밝혀졌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이다.

석실 내부는 마침 단체 예불 중이라 들어가지 않았다. 하여 나한의 자세한 모습까지는 확인을
하지 못했지. 그리고 나한상에는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하나 덧붙여 전해오니 내
용은 대략 이렇다. 아마도 나한도량을 내세우는 과정에서 지어낸 이야기로 여겨진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어느 동짓날, 보문사 승려들은 팥죽을 만들어 불공을 드리고자 이른 아침
부터 서둘렀다. 그런데 그날따라 아궁이에는 불이 없었고, 불을 일으킬만한 어떠한 도구도 없
어서 도저히 팥죽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보문사 아래에 살던 고씨의 집에 보문사 동자승(童子僧)이 성냥을 구하기 위해 추
운 날씨에 맨발로 찾아왔다. 고씨는 그 동승을 불쌍히 여기고 따뜻한 방으로 데려와 팥죽을 한
그릇 먹이고 성냥을 보내주었다.
몇 시간 뒤 보문사 부엌 아궁이에 불이 붙는 소리가 들리면서 승려들은 신이 났고 서둘러 팥죽
을 지어 불공을 올리고 맛있게 공양을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보문사 주지승이 고씨 집에 갔다. 고씨가 주지에게
'저번 동짓날. 어른 승려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어린 동자승을 보냈습니까?'
주지승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네? 동자승이라니요? 우리 절에는 동자승이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불씨를 얻어오라고 시키지도 않았구요'

그 말에 고씨는 발끈하여 '스님들이 거짓말도 하시오? 절에 불씨가 꺼져서 팥죽 공양을 못하게
되자 불씨를 얻으러 왔다고 했어요~~!'

고씨 집에서 돌아온 주지승은 승려들에게 고씨의 말을 전하면서 그 동자승의 정체가 과연 무엇
일까 곰곰히 생각하던 중, 우연히 석실에 들어가보았다. 그러니 왠걸 석실 한쪽 구석 나한상의
입에 팥죽이 묻어있는 것이 아닌가. 이에 승려들은 나한의 은혜에 감복하여 더욱 열심히 정진
했다고 하며, 마을 사람들도 동짓날이 되면 팥을 가지고 절로 올라와 팔죽을 쑤어 올리고 기도
를 했다고 한다. 그 일이 100년 동안 연례 행사처럼 계속되고 있다.


▲ 보문사 향나무 - 인천 지방기념물 17호

석실 바로 앞에는 푸른 내음을 자랑하는 오래된 향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석실 나한상의 법력(
法力)을 받아서 일까? 하늘을 향해 곧게 서지 못하고 옆으로 퍼져 용트림을 하는 듯한 모습으
로 그의 나이는 약 600~7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문사가 최소 600년은 넘었음을 보
여주고 있다.
나무의 높이는 겨우 3.2mㄹ로 바위 틈을 비집고 뿌리를 내렸으며, 6.25전쟁 때 폭격으로 뇌사
상태에 빠졌다가 3년 뒤에 다시 살아났다고 하니 생명력 하나는 정말 끈질기다.


▲ 보문사 맷돌 - 인천 지방민속문화재 1호

향나무 앞에는 어처구니가 없는 큰 맷돌이 놓여 있다. 여기서 어처구니는 맷돌을 돌리는 손잡
이를 말하는데 어처구니가 없으면 맷돌을 돌리지를 못한다. 그래서 기가 막힐 때 사용하는 '어
처구니가 없다'
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보문사 승려들이 불공과 공양(供養)에 쓸 음식을 만들 때 사용했던 이 맷돌은 조선 후기에 화
강암으로 조성된 것으로 지름 69cm, 두께 20cm이며, 웃돌과 아랫돌이 잘 남아 있다. 지금은 현
대화된 조리기구에 제대로 밀려나 이렇게 손잡이를 잃은 채, 돌절구 등과 한가로이 남은 여생
을 보내고 있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현역에서 물러나 앉은 모습은 정말 쓸쓸하다.


▲ 맷돌 옆에 놓인 돌절구
조선 후기부터 쓰인 보문사의 음식 조리 도구로 지금은 전시/관상용이 되어
향나무 주변을 수식한다.

▲ 석실과 극락보전 사이에 들어앉은 삼성각(三聖閣)
3명의 성스러운 존재인 산신(山神),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로
1960년에 지어졌다. 처음에는 4평도 안되는 작은 건물이었다.

▲ 삼성각에 봉안된 불화들
왼쪽부터 산신탱, 칠성탱, 독성탱으로 모두 1992년에 제작되었다.

▲ 보문사 극락보전(極樂寶殿)

극락보전은 보문사의 법당으로 원래는 대웅전이었다.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
阿彌陀佛)을 중심으로 하여 관음보살과 옥(玉)으로 조성된 조그만 3,000불이 봉안되어 장엄함
을 더해주고 있다.


▲ 극락보전 불단에 봉안된 아미타3존불과 3천불의 위엄

▲ 'ㄱ'자 모습의 요사(寮舍)
보문사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종무소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요사 건너편에 자리한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바다를 바라보며 자리한 오백나한전은 근래에 지어진 것이다. 나한을 위한 공간은
이미 석실과 야외 500나한상이 있는데 그걸로도 모자른 것일까? 오백나한전까지
지어 올려 3대 관음성지 외에 나한도량 성지의 인지도를 더욱 견고히 했다.


 

♠ 보문사의 상징, 눈썹바위와 마애석불좌상

▲ 오색영롱한 연등이 계단을 오르는 중생들을 격려하고 인도한다.

극락보전 옆구리에는 눈썹바위로 인도하는 계단길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펼쳐져 있다. 눈썹바
위와 마애석불좌상은 보문사에서 꼭 봐야되는 이곳의 얼굴로 오르기 귀찮다고 통과하는 사람들
도 종종 있는데, 이는 천지(天池)를 안보는 백두산(白頭山) 관광과 같다. 계단길이 좀 가파르
긴 해도 보문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누리고 있는 존재인만큼 꼭 올라가 보는 것이 보문사에 대
한 예의가 될 것이다.

경내에서 눈썹바위까지는 108계단도 아닌 418계단이 이어져 있다. 왜 418계단인지는 모르겠다.
오르는 길이 좀 각박해 보여도 노공(老公)들도 거뜬히 오를 정도로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
이 있듯이 열심히 길을 임하면 눈썹바위 마애불이 반가이 맞이해 줄 것이다. 또한 그 앞에 훤
히 펼쳐진 서해바다는 근심덩어리로 꽉 막힌 가슴과 머리를 시원하게 트이게 할 것이다.


▲ 눈썹바위와 마애석불좌상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29호

418계단 끝에 이르면 기이하게 생긴 커다란 바위, 눈썹바위를 만나게 된다. 그 바위에는 거대
한 마애석불좌상이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힘들게 올라온 중생을 환하게 맞이한다. 불상이 있는
바위 위쪽에는 특이하게도 암석이 눈썹처럼 앞으로 돌출되어 약 90년 동안 마애불의 우산 역할
을 해주니 덕분에 석불의 건강은 여전히 청신호이다.

이 석불은 1928년 금강산 표훈사(表訓寺) 주지였던 이화응(李華應)과 당시 보문사의 주지인 배
선주(裵善周)가 관음성지의 명성을 견고히 다지고자 의기투합하여 조성한 것으로 나이는 고작
90년 정도 밖에 안된 팔팔한 석불이다. 어둠의 시절 당시에 조성된 여러 불상 중 하나이자 가
장 규모가 큰 석불로 그의 얼굴을 보면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조금은 우울해 보이
는데, 이는 1920년대 어둠의 시기를 살아야 했던 중생들의 근심어린 얼굴을 모델로 한 듯 싶다.

마애불의 정체는 관음보살로 소원을 들어주기로 명성이 높아 바위 아래 기도처에 시주를 하려
는 사람들로 넘쳐나며, 불상 앞에 닦여진 예불장소에도 언제나 중생들로 가득하다. 게다가 서
해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져 있어 그 풍경에 나도 모르게 매료되고 만다. 여기서 바라보는 낙조
(落照)는 김제 망해사(望海寺), 변산 월명암(月明庵)의 낙조와 버금갈 정도로 그 찬란함을 자
랑한다.

눈썹처럼 삐죽 나온 암석과 그 밑에 관음보살,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대자연은 저곳에 저런
멋드러진 바위를 만들었고, 20세기 초반 이 땅의 인간들은 관음보살상을 조성하여 자연과 인간
의 합작품 눈썹바위 마애불이 탄생하게 되었다. 보면 볼 수록 눈썹바위의 모습은 신기하여 절
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장소로 쓰였던 듯 싶다.

마애불의 높이는 약 9.2m, 폭은 약 3,3m이다. 앙련(仰蓮)으로 구성된 대좌(臺座) 위에 선정인(
禪定印)을 하며 앉아 있으며, 선정인 아래 다리는 옷에 덮여 있는 방식으로 처리했는데 현실감
이 조금은 떨어지는 것 같다. 다만 못생긴 발바닥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저 석불이 결가부좌(
結跏趺坐)로 앉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법의(法衣)를 입고 있으며 가슴 부분에는 특이하게도 '卍'마크가 새겨져 있어 참 이채롭
다. 둥근널쩍한 그의 얼굴은 시름에 잠긴 듯, 별로 유쾌한 인상은 아닌 것 같다. 그의 손 위에
는 조그만 정병(政柄)이 하나 놓여져 있으니 이는 관음보살이 좋아하는 감로수(甘露水) 병으로
물방울이 들어가기도 버겨울 정도로 정병의 크기가 너무 작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이 씌워져 있으며 이마 가운데에는 백호가 찍혀 있고, 지그시 감은 눈, 커
다란 코, 입술, 풍만해 보이는 얼굴살, 그리고 해학적 분위기의 길쭉한 귀가 있다.

석불의 우산 역할을 하는 눈썹바위에 바다를 향해 약간 튀어나온 암석 아래에 무지개 모양처럼
돋음새김이 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들의 손길이 미친 흔적들로 무엇을 새길려고 했는지
는 잘 모르겠다. 그를 더 장엄하게 연출하고자 저곳까지 손을 댄 모험까지 감행했던 것 같다.


▲ 관음보살 옆에 새겨진 바위글씨

불상 옆에는 '造佛華應禪師'라 쓰여 있으니 즉 앞에서 언급했던 이화응 선사가 조성했음을 알
려주고 있으며, 오른쪽 글씨에는 '華嚴會上八部四王衆(화엄회상필부사왕중), 南無華嚴會上欲色
諸天衆(나무화엄회상욕색제천중), 華嚴會上護法善(화엄회상호법선신중)이라 쓰여 있다.


▲ 마애석불좌상에서 바라본 천하

눈썹바위와 마애석불좌상(마애관음보살)을 둘러보고 3배를 하려고 했으나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냥 향만 키고 왔다. 내려가는 길에도 눈썹바위를 향한 사람들의 물결은 여전하다.

절을 등지고 주막촌으로 내려가다가 어느 적당한 주막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이런 데 와서
파전에 도토리묵도 먹어줘야 되지만 아침을 많이 먹은 탓에 간단히 산채비빔밥과 동동주로 마
무리했다.
점심을 먹으니 식곤증이 살짝 등을 두드리며 한숨 주무시라고 부추긴다. 서비스로 제공되는 커
피를 마시며 식곤증의 압박을 덜면서 잠깐이지만 석모도 보문사와의 인연을 정리했다.

시간이 시간인만큼 석포리 포구까지 가는 길은 썩 순탄치 않았다. 포구 1km를 앞두고 섬을 나
가려는 차량들로 대도시 못지 않은 극심한 정체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 1km가 마치 1,000km
로 마냥 늘어진 듯, 강화도로 나가는 배에 오르기까지 무려 2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 시간이
얼마나 따분하던지 속히 이곳을 탈출하기를 희망하며 잠을 억지로 청했다. 다행히 잠이 금방
와주어 기다림의 시간을 좀 덜어주었다.
허나 한참을 잔 듯 싶은데 겨우 100m 이동.. 배 2~3척이 대박 쾌재를 부르며 바깥으로 나가는
차량과 사람을 열심히 실어나르지만 힘에 겨워 보인다. 그렇게 간신히 배에 올라 멀어져 가는
석모도와 작별을 고하며, 10여 분의 짧은 항해를 마치고 외포리로 돌아왔다. 지금은 비록 배로
왕래하지만 석모도를 한반도에 더욱 단단히 묶어두고자 한참 연륙교 공사가 진행중이다. 2017
년에 완공될 예정이라고 하니 그때가 되면 더 이상 불편하게 배의 신세를 질 필요는 없게 된다.
여객선 회사에게는 미안한 소리지만 말이다.

정말 번개처럼 날아가 짧지만 재미지게 보냈던 그날 하루, 그곳이 그리워지고 같이한 사람들이
보고 싶은 마음에 비록 보잘 것은 없지만 이렇게 글을 남긴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찾은 석모
도 보문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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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와불상과 우담바라를 간직한 고즈넉한 산사, 의왕 청계산 청계사

 


' 늦겨울 산사 나들이, 청계산 청계사(淸溪寺) '

▲  청계사 와불상


 


겨울 제국(帝國)의 차디찬 위엄이 잠시 느슨해진 2월 끝 무렵에 후배들과 의왕시에 자리한
청계사를 찾았다.
그곳은 예전에 2번 발걸음을 한 적이 있는데, 간만에 그를 찾은 이유는 별거 없다. 그곳에
그냥 마음이 갔기 때문이다.

오후 3시, 안양(安養)의 동쪽 요충지인 인덕원역에서 그들을 만나 분식집에서 만두와 여러
과자 등을 사들고 대기하고 있는 청계산행 의왕시 마을버스 10번에 몸을 담는다. 평일이라
등산 수요는 거의 없지만, 대신 청계지구 주민들로 조그만 마을버스는 만석의 기쁨을 누린
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청계사입구에 조성된 청계지구에서 승객을 모두 쏟아내고 우리만 태운
가뿐한 상태에서 청계산의 품으로 들어갔다. '과천~의왕간 고속화도로'의 밑도리를 지나니
아파트와 시가지 대신 산과 들녘이 전부인 농촌 풍경이 정겹게 펼쳐진다.
청계사천(淸溪寺川)을 따라 계속 들어가던 버스는 청계산 주차장에서 그만 두 바퀴를 멈춘
다. 그곳이 그들의 종점이었던 것. 그래서 여기서부터 별수 없이 걸어가야 되는데, 천천히
가도 20분이면 충분하다.


 

♠  청계사계곡 숲길

청계지구에서 청계사로 가는 길목에는 맛과 분위기를 내세운 식당과 찻집이 즐비하다. 절을 목
전에 둔 속세(俗世)의 마지막 유혹이라고나 할까? 허나 그날이 평일이라 몇몇 식당을 제외하면
대부분 장사를 하는지 안하는지 모를 정도였다.

청계사 종점에서 7분 정도 가면 다리가 나오는데, 그곳을 경계로 더 이상 속세의 흔적은 나오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자연의 비율이 높았지만 여기서부터는 99% 자연 및 부처의 청정한 공간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또한 청계산에서 발원한 청계사계곡도 여기서 청계사천으로 간판을 바꾸며 속
세로 길을 재촉한다.
그 다리를 건너면 그동안 하나로 쭉 이어진 길(청계로)은 수레길과 숲길로 갈리는데, 어느 길로
가든 청계사로는 이어진다. 빨리 가고 싶다면 잘 닦여진 수레길을 이용하면 되지만 4발 수레의
적지않은 눈칫밥과 고약한 매연 냄새를 감당해야 된다. 그러니 차라리 친환경적인 숲길로 가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이 숲길은 통행 편의를 위해 나무로 길을 닦았는데, 늘씬하고 삼삼하게 솟은 나무들이 앞다투어
신선한 숲내음을 베푼다. 산바람이 아직은 차갑지만 청정하고 해맑은 기운이 담겨져 있어 바람
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오히려 심신(心身)이 맑아지는 기분. 게다가 숲길 옆에는 청계사계곡이
졸졸~♬ 흘러 그 나름대로 계곡의 바람을 선사하니 찰거머리같은 번뇌(煩惱)도 여기서만큼은 바
짝 긴장을 탄다. 

숲길 입구에는 의자가 여럿 설치되어 있는데, 여기서 속세에서 가져온 먹을거리를 섭취했다. 원
래 절 밑에서 먹으려고 했지만 다들 시장기가 높아 잠시 청계사를 잊고 여기서 자리를 펼쳤다.

▲  청계사계곡 숲길
겨울이라 실감이 덜해서 그렇지 봄이나 여름, 가을에는 정말 옆구리에 끼고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숲길이다.

▲  소리없이 봄을 잉태하고 있는 청계사계곡
눈과 얼음의 지배를 받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계곡, 허나 소쩍새가 우는
그날이면 거추장스러운 얼음을 박차며 봄의 해방군을 맞이할 것이다.


숲길을 10분 정도 가면 다시 수레길과 만난다. 여기서부터 경사가 잠시 각박해지는데, 그길을 5
분 정도 오르면 청계사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을 지나면 첩첩한 청계산 산주름에 묻힌 청계사
의 바깥 부분이 모습을 드러낸다.


▲  주차장 밑에 자리한 청계사 표석
바위 피부에는 붉은 글씨로 '우담바라 핀 청계사'라 쓰여 있다.

▲  주차장 동쪽에 자리한 승탑과 비석의 보금자리

청계사 주차장 동쪽에는 승탑(僧塔, 부도)과 비석(碑石)의 보금자리가 있다. 이들은 원래 극락
보전 서쪽에 있던 것으로 밑 석축에는 사적비를 비롯한 비석 3기가 심어져 있고, 윗 석축에는
승려의 사리가 담긴 승탑과 승탑 주인의 생애가 담긴 검은 피부의 가로형 비석들이 널려 있다.
이중에서 가장 오래 숙성이 된 존재는 청계사의 내력을 담고 있는 사적비로 고려 후기에 청계사
를 크게 일으킨 조인규(趙仁規)의 11대손 조운
(趙橒)과 조신(趙新)이 1689년에 세웠다. 조운이
문장을 짓고 윤창적(尹昌績)이 글씨를 썼는데, 비석 피부에는 세월이 그어놓은 주름과 검은 때
가 여럿 있지만 아직은 글씨를 알아보는데 지장은 없다.
<청계
사 관련 자료에는 1341년에 세웠다는 조정숙공사당기비(趙貞淑公祠堂記碑)가 있다고 하나
확인하지는 못했음>


▲  아직 정정한 모습을 잃지 않은 청계사 사적비(事蹟碑)

적비와 승탑을 둘러보고 주차장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높은 계단을 오르면 경내 밑부분에 이른
다. 오를 때는 모르지만 계단이 조금 각박하니 내려갈 때는 각별히 주의하기 바란다.
그럼 여기서 잠시 청계사의 내력을 잠시 더듬어보도록 하자.


 

♠  청계산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고색의 절집, 와불과 우담바라를
간직한 청계산 청계사(淸溪寺)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6호

청계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터를 닦은 청계사는 신라 후기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허나 기록이
없어 자세한 것은 알 도리가 없으며, 조선 후기에 봉은사(奉恩寺)에서 엮은 봉은본말사지(奉恩
本末寺誌)에도 단순히 신라 때 창건되었다는 1줄 뿐이다. 다만 신라 후기나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등(石燈)과 승탑의 잔재가 있다고 하니 (확인은 못했음) 적어도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조금은 열어두고 있다.
그래도 뚜렷한 기록과 유물이 없음에도 원효대사(元曉大師)나 의상대사(義湘大師), 자장율사(慈
藏律師),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세웠다고 강력하게 우기는 상당수의 절보다는 좀 양심적이다.

청계사의 본격적인 기록은 고려 후기부터 등장한다. 고려가 몽골(원)의 그늘에 있던 충렬왕(忠
烈王) 시절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을 지낸 조인규(趙仁規, 1227~1308)가 많은 자금을 들여 청
계사를 중창하고 집안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이때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음) 그리고 절 아랫
쪽에 별당(別堂)을 지어 잠시 머무는 등, 청계사를 특별히 옆구리에 끼었다.
이렇게 당대 실력자인 조인규(평양 조씨)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청계사는 오랜 세월 그
의 후손들의 지원에 힘입어 절을 꾸렸는데, 경내에 조인규의 영당(影堂)을 지어 그를 기렸으며,
1431년과 1448년에 영당을 중건했다고 전한다.

천하가 조선으로 바뀐 이후, 1407년 자복사(資福寺)로 지정되면서 천태종(天台宗) 소속이 되었
으며, 1448년 경내에 있던 대장경(大藏經)이 인출되기도 했다. 연산군(燕山君)과 중종(中宗) 시
절에는 흥천사(興天寺)와 원각사(圓覺寺) 등 한양도성의 많은 사찰이 연산군 또는 유생에 의해
대거 박살이 나면서 봉은사를 대신해 선종(禪宗)의 본찰(중심 사찰)인 정법호지도량(正法護持道
場)이 되었다. 그래서 이때 잠시나마 조선 불교의 중심이 된다.
허나 그 영광도 잠시, 광해군(光海君) 시절에는 청계사 소속의 전답과 노비가 나라와 양반들에
게 대거 몰수당하거나 빼앗기는 비운을 겪었으며, 1689년 화재로 건물 대부분이 무너지자 성희
(性熙)가 평양조씨의 도움으로 절을 중건했다. (이때 사적비가 세워짐)

1701년에는 경내 제일의 보물인 동종이 조성되었으며, 정조가 왕세손(王世孫) 시절이던 1761년
친히 이곳을 찾아 원당(願堂)을 짓고, 밤나무 3,000주를 내려 원감(園監)을 두어 관리케 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정조는 1789년 경내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역인 현륭원(顯隆園)의 제각(
祭閣)을 지어 매년 2회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바로 그 해에 평양 조씨인 조심태(趙心泰)의 지
원으로 절을 중창했다.
1862년에는 괘불(掛佛)을 봉안했고, 1876년 3월 무심히 찾아온 화마(火魔)의 위엄 앞에 불전들
이 앞을 다투어 쓰러지자 1879년 주지 은곡(隱谷)이 중건을 벌였으나, 예전만큼은 못하여 간신
히 호흡이나 하는 지경이었다.

1900년 법당인 극락보전을 세웠고, 왜정 시절에는 봉은사의 말사(末寺)가 되었는데, 경허(鏡虛)
를 비롯한 만공(滿空), 월산(月山), 금오(金烏) 등 당대에 유명한 승려들이 주석하면서 선풍(仙
風)을 떨치기도 했다. 1955년 비구니인 아연(娥演)이 주지가 되면서 크게 중창을 벌이기 시작했
고, 1965년에는 용주사(龍珠寺)의 말사로 변경되었다.

1999년에는 와불상을 조성해 경내에 새로운 볼거리를 이끌어냈고, 2000년 이후 주지 종상이 경
내를 대대적으로 손질하고 진입로를 정비해 접근성을 높였다. 그리고 2001년에 극락보전을 중수
했는데, 바로 전년 10월에 극락보전 아미타3존불의 협시(夾侍)인 관음보살상 상호 왼쪽 눈썹 주
변에 불교에서 매우 신성시하는 꽃인 우담바라가 피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우담바라는
아직도 관음보살상 눈썹 주변에 진을 치고 있으며, 20여 송이나 피었다고 한다. 나는 이들의 존
재를 몰라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했지만 청계사에 갈 일이 있다면 그 꽃을 꼭 눈에 담기 바란다.
(우담바라가 풀잠자리 알이라는 이야기도 있음)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삼성각과 지장전, 서요사, 동요사, 동종각 등 10
동 남짓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동종을 비롯하여 지방문화재로 지
정된 신중도와 소장목판(所藏木板, 1622년, 1623년, 1831년에 만든 14종 466판,
경기도 지방유
형문화재 135호
)과 조정숙공사당기비(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76호) 등이 있으며, 그외에 사적
비와 극락보전, 극락보전 아미타3존불, 괘불 등이 앞을 다투며 고색의 향기를 더해준다. (소장
목판은 비공개이며, 괘불은 석가탄신일과 등의 행사일에만 잠깐 얼굴을 비침) 또한 청계사 전체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6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첩첩한 청계산의 산주름 속에 묻혀 산사의 향기도 매우 진하며, 서울이나 안양, 성남, 의왕 등
기라성 같은 도시와 가까이 있음에도 꽤 멀리 나온 듯한 기분을 누리게 한다. 속세에서 잠시 나
를 지우고 싶을 때 어디론가 가서 마음을 싹둑 정리하고 싶으나 멀리 가기가 어려울 때 무작정
찾아와 안기고 싶은 포근한 산사이다.
또한 이곳은 산세가 수려하고 삼삼한 숲에는 산새가 지저귀며, 청정한 계곡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경승지로 수도권 명소로도 명성이 높다. 또한 청계산으로 오르는 주요 기점의 하나이기도
하여, 이곳을 시작으로 응봉을 경유해 과천(果川) 문원동이나 포일2지구로 내려가거나, 청계산
정상을 거쳐 서울 원지동, 옛골 방면이나 양재동 화물터미널로 내려가도 된다.

※ 청계산 청계사 찾아가기 (2016년 2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인덕원역(2번 출구)에서 의왕시 마을버스 10, 10-1번(10~15분 간격)을 타고 청
  계산 주차장 종점에서 도보 20분. 18시 이후에는 청계산주차장까지 들어가지 않고 그 이전인
  상청계(청계산입구)에서 차를 돌린다, (상청계에서 청계사까지는 도보 30분)
* 분당이나 죽전, 수지에서 접근할 경우에는 103번(분당 도촌동, 야탑역, 판교 백현마을), 303
  번(분당 오리역, 판교 백현마을), 좌석 1303번(모현 외대, 죽전 단대, 분당 오리역/정자역),
  좌석 1550-3번(광교, 수지구청역)을 타고 양지편에서 하차, 건너편 정류장에서 10, 10-1번
  마을버스를 이용한다. 양지편 전 정류장인 청계동주민센터과 한직골(청계농협)에서 내려도
  되지만 여기서는 10-1번 마을버스 밖에 없다.
* 청계사 셔틀버스가 인덕원역(4호선) 3번 출구 인덕원프라자 앞에서 출발한다. 평일에는 9시
  와 10시, 초하루와 석가탄신일, 백중, 칠석, 동지 때는 오전에 5회 운행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 바로 밑에 주차장 있음)
① 서울(과천)/안양/군포/의왕 → 인덕원4거리 → 안양판교로 → 청계사입구4거리에서 좌회전
   → 청계사
② 성남(분당/판교) → 안양판교로 → 청계사입구4거리에서 우회전 → 청계사

* 소재지 -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산11 (청계로 475 ☎ 031-426-2348)
* 청계사는 매일 12~13시에 점심 공양을 제공한다. (가끔 짜장밥이 나오기도 함)
* 청계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청계사 극락보전 주변 (오른쪽이 동종각)

▲  청계사 수각(水閣)

경내 밑에서 높이 5m 정도 되는 계단을 더 딛으면 비로소 경내에 이른다. 극락보전 뜨락은 하얀
피부의 박석(薄石)이 넓게 바닥을 이루어 꽤 깔끔해 보이는데, 그런 뜨락 중앙에는 달랑 1칸 밖
에 안되는 수각이 자리해 있다.
수각은 산사의 필수 요소인 샘터의 보금자리로 동그란 석조(石槽) 주위에 4개의 붉은 기둥을 세
우고 시원한 처마의 팔작지붕을 얹혀 소박하게 건물을 이루었다. 이렇게 샘터에 건물을 씌워 수
각으로 삼은 절이 꽤 되는데, 이는 물에 대한 일종의 보답 차원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싶
다. 그만큼 물은 어디서든 소중하니 말이다. 특히 고적한 곳에 자리한 산사는 더욱 그렇다.

수각 석조에는 청계산이 베푼 옥계수로 늘 넘쳐나는데, 산사에 왔다면 그곳의 샘물은 꼭 마셔줘
야 된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콸콸콸 마시니 그렇게 담백한 맛은 아니지만 몸
속에 낀 때가 싹 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 없다. 다만 석조 안에 사람들이 무심히 투하한 동전이
여럿 잠들고 있어 그냥 마셔도 뒷탈이 없을지 모르겠다. 기분 같아서는 그들을 구제해주고 싶지
만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어서 그냥 두었다. 절에서는 이들 동전을 계속 방치해 수질에 영향
을 주지 말고 속히 구제하여 좋은 곳에 썼으면 좋겠다. 이들 동전도 다 비싼 세금을 들여서 만
든 것이니 말이다.

수각 서쪽에는 2층 규모의 서요사(西寮舍)와 가건물 찻집이 있다. 찻집에서는 전통차와 커피를
판매하고 있는데, 거기서 차와 커피를 구입하여 서요사 앞에 널린 의자에서 마시면 된다. 차와
커피 가격은 2~3천원선으로 속세와 거의 비슷하거나 조금 저렴한 수준, 서요사 앞에는 그보다
더 저렴한 길다방 자판기가 있어 돈이 궁한 경우에는 그를 이용하면 된다. 자판기 커피 가격은
300원선.. (자판기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청계사 동요사

▲  천의를 휘날리며 하늘을 유유자적하는
비천상(飛天像)의 위엄

▲  수각과 극락보전 경계선에 자리한 12지신상(十二支神像)

수각과 동/서요사보다 1단계 높은 곳에 다양한 모습의 12지신상이 자리해 있다. 거의 90도로 서
있는 다른 12지신상과 달리 편안한 포즈로 정면 또는 좌우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데, 특히 쥐 같
은 경우는 쌀가마니 위에 앉아 쌀을 축내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소소하게 웃음을 건네준다. 마치
이 땅의 현실을 그렇게 함축한 것일까? 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  연등을 평방(平枋)에 두룬 청계사 지장전(地藏殿)

뜨락에서 2단계 높은 곳에는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지장전이 자리해 있다. 극락보전 우측
에 자리한 지장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봉안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
는 와불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가 1999년 와불을 조성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  지장전 뒤쪽에서 졸고 있는 청계사 연(輦)
석가탄신일이나 불교 행사 때 불상이나 불경을 운반하는 용도로 쓰인다.

▲  찻집 주변에 누워있는 옛 석조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조로 중간 부분이 깨져 있다. 그래서 새로운 석조에게
수각의 자리를 넘기고 이렇게 뒤로 물러나 물 대신 겨울 제국이 내린
하얀 눈을 강제로 머금으며, 왕년을 그리워한다.

▲  계단 끝에 자리한 청계사 삼성각(三聖閣)

지장전 뒤쪽 언덕에는 삼성각이 조촐하게 자리를 닦고 있다. 달랑 1칸짜리 맞배지붕 건물로 3명
의 성스러운 존재,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봉안하고 있는데, 경내에
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여 천하를 굽어본다.
이 건물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그 뒤쪽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다.

▲  조그만 석불좌상과 칠성탱

▲  산신탱과 독성탱


▲  삼성각에서 바라본 청계사 경내


 

♠  청계사 극락보전, 와불 주변

▲  청계사 극락보전(極樂寶殿)

청계사의 법당인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겉으로 보면 200년 정도
들어보이지만 실상은 1900년에 지어진 것으로 이제 110여 년 정도 되었다. 대들보에서 '
庚子 三
年 三月'이란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그 시기를 따져보니 1900년이다.

불단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아미타3존불과 신중도 등이 봉안되어 있는데, 특히 아미타불 옆에
자리한 관음보살 상호 왼쪽 눈썹 주변에 우담바라가 피어있으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꽃이 조그
만하여 두 눈을 크게 부릅 떠야 시야에 들어올 것이다. 우담바라는 21송이 정도 피어있으며, 길
이가 겨우 1cm 밖에 안되는 가녀린 존재이다.


▲  극락보전에 봉안된 아미타3존불 (아미타불 왼손 쪽이 관음보살)

극락보전 불단을 지키고 있는 아미타3존불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협시해 있다. 중심 불상인 아미타불은 높이 110cm, 협시보살은 107cm
로 다들 조선 후기(19세기 정도)에 조성되었다.


이들은 신체에 비해 얼굴이 다소 커보이는데, 거의 네모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볼살이 매우 푸
짐하다.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선의 미를 더해주고 있고, 눈은 좌우로 길고 가늘게
뜨고 있으며, 코는 작고 오목하다. 붉은 입술은 조그만 하며, 얼굴 좌우에 붙어있는 귀는 중생
의 민원을 하나도 빠짐없이 경청하려는 듯, 어깨까지 축 늘어졌다. 다들 표정도 온후하여 나름
미소를 선보이며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다독거리며, 두터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다.
특히 아미타불 왼손 쪽에 자리한 관음보살상 같은 경우는 우담바라가 피어 화제가 되고 있는데,
대세지보살과 양식에서 다소 차이가 있어 대세지보다 이전에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하체
와 상체, 머리 부분에서 나발의 모습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점은 비슷한 시대의 다른 불상과
는 다소 다른 모습이다.

아미타불을 뒤에서 받쳐주고 있는 아미타후불탱은 아미타3존불을 중심으로
아난(阿難)과 가섭(
迦葉), 타방불(他方佛) 등이 그려져 있는데, 조선 철종(哲宗. 재위 1849~1863) 시절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  신중도(神衆圖)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274호

극락보전 좌측에는 색채가 고운 신중도(신중탱)가 자리해 있다. 신중도는 불법(佛法)을 지키는
신(神)들의 무
리를 담은 것으로 법당의 수호를 위해 법당 내부에 많이 걸어둔다.

이 그림은 1844년에 제작된 것으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경성(京城, 서울)
학파 승려의 화풍이 반영되어 눈길을 끈다. 이목구비에 음영을 주고 코발트색과 금니(金泥)를
사용해 색채가 매우 곱지만 등장 인물이 많아 (어림 잡아 30명은 넘음) 다소 빽빽하게 보인다.


▲  동종이 담긴 동종각(銅鍾閣)

극락보전 좌측에는 조그만 동종각(종각)이 자리해 있다. 범종각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다른 절
의 범종각보다 규모도 좀 작은 편이고, 그 안에 담긴 동종 역시 많이 왜소하다. 허나 작다고 그
냥 지나치지 말자. 이 동종은 경내에서 제일 가는 보물로 국가 지정 보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비싼 몸이다.

▲  청계사 동종(銅鍾) - 보물 11-7호

동종각에 담겨진 동종은 높이 115cm, 입지름 71cm의 조촐한 종으로 그의 청동색 피부에 '康熙四
十年辛已四月日鑄成 廣州靑龍山淸溪寺大鐘七百斤'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어 1701년에 동 700근을
들여 조성되었음을 알려준다. 여기서 광주 청룡산은 청계산으로 이후에 절의 이름을 따서 청계
산으로 이름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 광주(廣州) 고을의 범위가 이곳까지 미쳤음을 알
려준다.
청계사에서 조성된 동종이지만 한동안 봉은사에 머물러 있다가 1975년에 돌아왔으며, 경기도 지
방유형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가 2000년에 사인 비구(
思印 比丘)가 만든 다른 종과 묶어서
보물 11호 계열로 승격되었다.

청계사 동종은 18세기에 활동했던 사인 비구가 만든 조선 후기 종으로 다른 범종에 비하여 작은
편이나 무게가 700근에 이르며, 종 꼭대기에는 2마리의 용이 종을 단단히 붙들고 있고, 종 윗도
리에 보살입상 4구와 9개의 유두가 달린 유곽이 2개 있다. 이 유두는 종을 옮길 때마다 하나씩
떼어낸다.
종 밑도리에는 보상화문(寶相花紋)이 연속으로 새겨져 있어 신라 범종의 제조 기법이 반영되어
있으며, 명/청나라의 범종 양식을 슬쩍 대입한 듯, 2줄의 굵은 횡선이 둘러져 있다. 또한 그 밑
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 종의 신상명세를 알려준다.

이 종을 만든 사인은 종을 매우 잘만들었다. 이곳을 비롯하여 천하에 그가 만든 종이 8개가 전
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보물 11호로 지정되어 있다. 허나 그의 굵직한 작품에 비해 그의 삶
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야말로 세상에 조용히 나타나 조용히 종만 만들다가 조
용히
세상을 뜬 것이다.


▲  청계사 와불상(臥佛像) ▼

극락보전 좌측에는 너른 공간이 있는데, 그곳에 청계사의 새로운 명물인 금빛의 와불상이 있다.
와불은 말그대로 누워있는 불상인데, 완전히 하늘을 보고 누운 것이 아닌 정면을 보며 옆으로
누워있는 자세이다. 이런 불상은 인도와 동남아에서 많이 보이는데, 우리나라에는 기껏해봐야
화순 운주사(雲住寺)의 와불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옆으로 누운 것이 아닌 하늘을 보며 누워있
는 것이다.

이 땅에서는 매우 보기 힘든 와불이 1990년대 이후 거의 유행처럼 번져 이제는 보기가 쉬워졌다.
청계사도 그 유행을 타고 1999년에 하나 장만했는데, 이곳에 있던 지장전을 극락보전 옆으로 밀
어내고 터를 넓게 닦아 와불을 봉안했다. 특히 이곳 와불은 돌을 깎아서 만든 것이 아닌 조그만
자갈을 모아서 만든 것으로 꽤 눈길을 끈다. 보잘 것 없는 자갈이 강인한 협동심을 발휘해 와불
이란 무시못할 작품으로 거듭났으며, 그 자갈을 일일이 모아서 만든 청계사의 노력도 참 대단하
다. 물론 새로운 명물거리를 만들어 절의 명성과 수입을 늘리려는 의도도 크게 작용했다.
처음에는 자갈에 색을 입히지 않아 거의 하얀 피부를 지녔으나 그게 마음에 걸렸는지 죄다 금칠
을 칠해 졸지에 금색 와불이 되었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자갈이 아닌 금동불로 보인다.

와불 앞에는 예불을 올리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고, 와불을 받치고 있는 기단에는 조그만 금동불
을 빼곡히 집어넣어 장관을 이룬다. 이들은 중생의 시주로 넣어둔 원불(願佛)이다.

▲  와불상 뒷쪽

▲  와불상의 발부분

내가 본 와불은 이곳을 비롯해 석모도 보문사(席毛島 普門寺), 기장 장안사(長安寺), 화순 운주
사(雲住寺) 정도이다. 운주사 와불을 제외하면 죄다 근래 조성된 것들로 지금은 그저 그런 존재
로 시선을 받고 있지만 시간이 꽤 흐르고 나면 20~21세기 불상 양식이라 하여 한국 미술사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존재로 애지중지 될 것이다.

와불을 끝으로 간만에 찾은 청계사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서요사에 있는 길다방 커피에서 추
위에 시달린 몸을 달랠 겸, 커피 1잔을 뽑아마시며 잠시 두 다리를 쉬게 했다. 2월 하순이지만
햇님이 산을 싫어하는지 산속에서는 속세보다 해가 일찍 저문다. 이제 5시가 넘었음에도 땅거미
의 정도가 진해졌으며, 해가 기운 만큼 겨울 제국의 기운이 다시 용솟음치면서 찬바람의 패기도
제법 높아졌다.

청계사에서 머문 시간은 약 1시간 40분 정도, 겨울 제국의 차가운 등쌀에 떠밀려 청계사와의 짧
은 인연을 정리하고 속세로 길을 향한다. 우담바라를 친견 못한 아쉬움이 크지만 다음에 인연이
된다면 그때 와서 보면 된다. 내가 서울에 있는 한, 언젠가는 또 오지 않겠는가? 나 또는 청계
사가 멀리 떠나지 않는 이상은 언젠가 또 오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늦겨울 청계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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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숲과 시원한 계곡을 품은 고즈넉한 산사 ~ 도봉산 회룡사 (회룡골, 회룡폭포, 석굴암)

 


' 도봉산 회룡사, 회룡골 나들이 '

▲  회룡사 동자상

회룡사 극락보전

▲  회룡사 극락보전

▲  석굴암 석굴



봄이 한참 절정을 이루던 5월 첫 무렵에 20년 이상 숙성된 오랜 친구와 도봉산 회룡사를 찾았

다.

집(도봉동)에서 의정부로 가는 서울시내버스 106번(의정부 가능동↔종로5가)을 타고 북쪽으로
15분 정도를 달려 회룡역에서 두 발을 내린다. 우선 회룡역 인근 편의점에서 조촐하게 삼각김
밥, 음료수를 사들고 아파트단지를 지나 도봉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회룡역 서쪽 동네는 20년
전까지만 해도 거의 시골이나 다름 없었는데, 이제는 인구 40만을 지닌 의정부(議政府)시내의
일부가 되어 건물과 주택, 아파트가 즐비하다.

호원동 주거지를 어느 정도 지나면 도봉산의 일품 계곡으로 꼽히는 회룡골(회룡사 계곡)이 모
습을 드러내는데, 그는 여기서 회룡천(回龍川)으로 간판을 바꾸고 중랑천(中浪川)으로 흘러간
다. 하늘을 향해 치솟던 키다리 아파트와 빌라 대신 조그만 시골집들이 조촐히 마을을 이루며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데, 그 중간에 의정부 보호수 제1호로 지정된 450여 년 묵은 회화나무가
아직도 겨울 제국(帝國)의 망령에 사로잡힌 채 벌거숭이의 모습으로 나그네를 맞는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420년)

이 나무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450여 년 전 회룡골을 지나던 도인(道人)이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심은 나무라고 전하며,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신목(神木)으로 삼고 애지
중지 살핀다. 만약 나무를 괴롭히거나 보살핌이 소홀하면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그
런다. 그들은 매년 3월과 9월 마을에서 나이가 많고 부정이 없는 사람을 제관(祭官)으로 추대
해 제를 지내며 마을의 전통 풍속과 결속을 지키고 있다.


▲  회룡골 마을에서 만난 오래된 회화나무 - 의정부 보호수 1호
400여 년 묵은 나무로 높이 25m, 둘레 4.6m에 이른다. 어찌된 영문인지 한참 봄의
절정임에도 그 혼자서만 잎 하나 피우지 못한 채, 벌거숭이로 방황하고 있다.
하긴 우리네 인생도 저 방황하는 회화나무와 다를 것이 없겠지..


회룡탐방지원센터(옛 매표소)를 지나면 속인들의 집은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완연한 자연의 공
간이 펼쳐진다. 한때 등산객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보던 옛 매표소를 지나 10분 정도 오르
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백범 김구 선생과 인연이 깊은 석굴암이고 직
진하면 회룡사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회룡사로 간다.


♠  회룡사를 끼고 흐르는 회룡골(회룡사계곡)

▲  회룡골 중류 (석굴암입구 주변)

도봉산(사패산 포함)에는 여러 계곡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회룡골이 단연 일품이 아닐까 싶다.
회룡골 하류는 다른 계곡과 비슷비슷한 모습이지만 안쪽으로 파고 들어갈 수록 그의 숨겨진 매
력이 서서히 드러난다. 그런 회룡골의 백미(白眉)는 석굴암입구 갈림길에서 회룡사 사이의 계곡
으로 그곳에 회룡폭포가 숨겨져 있으며, 멋드러진 바위들이 계곡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계곡을
따라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은 속인(俗人)들의 번뇌를 흩날리기에 충분하고 온갖 잡념에 오염
된 마음을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다. 다만 이곳의 진한 옥의 티가 있다면 계곡 옆에 회룡사로 오
르는 길을 시멘트로 높게 발라버려 회룡골에 대한 감동을 크게 반감시킨 점이다.


▲  회룡골의 찬란한 꽃, 회룡폭포

▲  하얀 피부가 돋보이는 멋드러진 반석들 (회룡폭포 위쪽)

▲  바위를 따라 내려오는 회룡골, 그 곁에 회룡사 접근을 이유로 시멘트를
높이 발라 어울리지도 않는 옥의 티를 선사해버렸다.

▲  회룡사로 오르는 길
길은 힘들지만 자존심과 불만을 곱게 접고 연등의 안내를 따라
묵묵히 오르다보면 금세 회룡사 산문이 마중을 한다.

▲  드디어 도착한 회룡사 정문
회룡사는 따로 일주문(一柱門)이 없으며, 이곳이 그 역할을 대신 한다.
그럼 여기서 잠시 회룡사의 내력을 더듬어 보도록 하자.


※ 도봉산 굴지의 오랜 산사(山寺), 태조 이성계와 인연이 깊은 도봉산 회룡사(回龍寺)
도봉산의 북쪽을 이루고 있는 사패산(賜牌山, 552m) 동쪽 자락 회룡골에 비구니 사찰, 회룡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사패산은 조선 선조(宣祖)의 6번 째 딸인 정휘옹주(貞徽翁主)가 유정량(
柳廷亮)에게 시집갈 때 선조가 하사한 산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다.

회룡사는 681년(신라 신문왕 원년)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여 법성사(法性寺)라 했다고 한
다. 930년 동진국사(洞眞國師)가 중창하고, 1070년(고려 문종 24년) 혜거국사(慧炬國師)가 3창
을 했으며, 1384년(우왕 10년) 무학대사(無學大師)가 4창하고, 1403년(태종 3년)에 회룡사로 이
름을 갈았다고 한다.
허나 무학대사 이전은 이를 입증할 자료와 흔적이 전혀 없다. 게다가 권상로(權相老)가 편찬한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 하권 회룡사 부분에는 무학대사가 1384년 또는 1395년에 창건했
다고 나와있으며, 1881년 우송이 쓴 '회룡사중창기(回龍寺重倉記)'에는 1384년 무학이 지은 것
으로 나와 무학대사 창건설에 무게가 크게 쏠리고 있다. 사실 의상대사의 창건설은 이 땅의 많
은 오래된 절들이 창건주로 팔아먹는 유명한 승려를 그를 절 창건주로 내세워 내력을 윤색시키
고자 함이다. 정작 그가 창건한 절은 부석사(浮石寺) 외에 몇 개 되지도 않는다.

'회룡사중창기'에는 1384년 창건설을 알려주는 내용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1384년 이성계(李成桂)와 무학대사가 도봉산에서 같이 창업 성취 기도를 올렸는데, 이성계는 회
룡사 뒤쪽 석굴암에서, 무학대사는 무학굴(지금의 회룡사)에서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1388년
이성계는 최영(崔瑩) 장군과 우왕(禑王)의 명으로 10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遼東)을 정벌하러
가자 무학은 작은 절(회룡사)을 짓고, 손수 만든 관음보살(觀音普薩)을 봉안하여 그의 영달을
축원했다고 한다.
요동을 코앞에 둔 위화도(威化島)에서 딴 뜻을 품고 군사를 돌려 고려 조정을 뒤엎은 이성계는
이후 왕위에 오른 뒤 무학을 찾아가 회룡사란 절 이름을 내렷다고 한다. 회룡(回龍)은 용이 돌
아왔다는 뜻이니 즉 용으로 상징되는 제왕, 이성계가 돌아왔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회룡사중창기'에는 '회룡'의 연유에 대한 다른 이야기도 실려 있다. 1403년(어떤 기록
에는 1398년) 2차례나 일어난 아들들의 권력 싸움, 왕자의 난에 뚜껑이 폭발한 태조(太祖) 이성
계가 함흥(咸興)으로 돌아갔다가 서울로 환궁할 때 회룡사에 있던 무학대사를 방문했는데, 태조
는 여기서 며칠을 머물며 그와 회포를 풀었다고 한다. 무학은 그의 환궁을 크게 기뻐했는데, 태
조가 절을 크게 중창하고 자신이 환궁했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회룡사라 했다는 것이다.

위의 이야기를 통해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은 분명하다. 그러니 자연
스레 1384년(또는 그 이후) 무학대사의 창건설이 정답일 듯 싶으며, 15세기에 왕실의 발원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5층석탑이 있어 이를 더욱 입증해준다.

▲  회룡사 5층석탑

▲  회룡사 석조

무학대사의 창건 이후 조선 왕실의 지원으로 무럭무럭 성장했을 것이나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다. 그러다가 1630년 비구니 예순(禮順)이 중창했다고 하니 아마도 임진왜란 때 파괴된
듯 싶다. (이때 비구니 절로 전환된 것으로 보임)
그 이후 1878년 혜봉 최성(慧峯 最性)이 상궁(尙宮) 박씨의 지원으로 절을 크게 중수했고, 1881
년 경해당 원삼(慶海堂 圓三)이 잘나가는 장인들을 모아 당우와 요사를 새로 지었다. 이때 채사
(彩師)들을 초빙하여 지장탱과 신중탱, 현왕탱, 무학대사의 진영을 조성했는데, 시주자는 상궁
하씨와 조씨 등이었다. 비록 왕실의 지원은 아니지만 왕실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상궁들의 지원
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조선이 사라진 이후, 1938년 순악(順岳)이 요사를 건립했으나 6.25전쟁으로 절은 잿더미가 되었
다. 전쟁이 끝나자 도준(道準)이 1954년부터 중창불사를 벌여 승당(僧堂)과 대웅전, 약사전, 선
실, 요사 등을 다시 지었으며, 1971년 대웅전을 새로 짓고, 1987년에 석조관음보살상을 봉안했
으며, 1988년에 범종각을, 1996년에는 극락보전과 삼성각, 노전채를 새로 지었다. 거기서 멈추
지 않고 2000년에는 선원인 취선당(聚禪堂)을 개축하고, 2001년에는 성견(性見)이 삼성각을 증
축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극락보전, 삼성각, 설화당, 취선당, 범종각 등 8~9동
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조선 초기 석탑인 5층석탑을 비롯하여 석조와 신중도 등 지방문화
재 3점을 품고 있다. 건물들은 죄다 6.25이후에 새로 지은 것들이라 고색의 내음은 씻겨 내려갔
지만 3점의 문화유산을 통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도봉산을 아우른 북한산(北漢山)국립공원 일대의 대표적인 비구니 절이라 경내가 깨끗하고 정갈
하며, 석조관음보살상을 통해 나름대로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칭하고 있다. 멋드러진 회룡골을
옆에 품고 있고, 속세와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첩첩한 산주름 속의 산사로 고즈넉한 산사의 멋
과 여유를 누릴 수 있다. 아무리 끈질긴 번뇌라 한들 회룡골과 도봉산의 청정한 기운 앞에 꼬랑
지를 내리고 도망을 칠 것이다.
그리고 여름의 제국 시절에는 절을 구경하고 회룡폭포나 회룡골에서 발을 담구며, 피서를 즐기
는 것도 괜찮다. 게다가 회룡사 바로 뒤에는 이성계가 기도를 올렸다는 석굴암이란 조그만 암자
가 있으니 같이 둘러보면 정말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다만 석굴암은 바로 질러가지 못하
고 석굴암입구 갈림길로 내려와서 다시 10분 정도를 올라가야 된다.

※ 도봉산 회룡사 찾아가기 (2015년 7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회룡역 3번 출구에서 도보 35분. 회룡탐방지원센터까지는 수레가 들어갈 수 있
  도록 길이 잘 닦여져 있으며, 이후는 수레 1대 다닐 정도의 산길이다. 회룡폭포를 지나서 경
  사가 좀 급해질 뿐, 길은 대체로 평탄하다. (수레로 회룡사까지 접근 가능)
* 서울 종로5가, 동대문, 혜화역, 돈암동, 미아4거리에서 서울시내버스 106, 108번을 타고 회룡
  역 하차, 회룡역 밑을 지나 도보 40분
* 소재지 -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411 (전좌로 155번길 262 ☎ 031-873-3391)
* 회룡사에서 1시간 30분 정도 오르면 회룡골재 정상이다. 여기서 서쪽은 송추, 북쪽은 사패산
  정상과 안골로 이어지며, 남쪽 능선을 타고 망월사나 포대능선, 자운봉으로 넘어가도 된다.


▲  삼성각에서 굽어본 회룡사 경내


♠  회룡사 둘러보기 (1) 석조, 설화당 주변

▲  회룡사 취선당(聚禪堂)

회룡사 정문에서 다리를 건너면 작고 조촐한 회룡사 경내가 펼쳐진다. 회룡사의 역사를 머금은
안내문과 푸른 옷을 걸친 부채꼴 모양의 나무가 제일 먼저 마중을 하며, 그 주변은 주차장이다.
주차장 뒤쪽에는 높이 석축을 쌓고 취선당을 두었는데,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선원(禪院)
으로 쓰이고 있다.

▲  회룡사 설화당(說話堂)

▲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네모난 연못

취선당을 지나면 설화당이라 불리는 커다란 건물이 나온다. 설화당은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
로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며, 승려와 신도의 생활공간 및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  회룡사 범종각(梵鍾閣)

설화당 맞은 편에는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아련한 메아리가 담긴 4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
각이 자리해 있다. 대웅전과 더불어 청기와를 입혀 단연 돋보이는 범종각은 1989년에 지어진 것
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규모이다. 범종각의 알맹이인 4물은 2층에 담겨져 있으며, 1층
에는 회룡사의 오랜 보물 중 하나인 석조가 옥계수를 뿜으며 누워 있다.


▲  회룡사 석조(石槽)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17호

범종각 1층 그늘진 곳에는 물이 담긴 석조가 3개가 있는데, 제일 위쪽에서 물을 흘려보내는 존
재가 바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조이다.
이 석조는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오래된 유물로 높이가 90cm, 가로 폭이 1.53m,
세로는 2.44m의 화강암 수통이다. 석조 한쪽에는 홈통을 두어 물이 가득 차면 아래로 흘러가게
끔 하여 물이 나태하게 고여있는 걸 경계했다.

산사에 왔으면 물은 한 모금 마셔줘야 되겠지? 그래서 석조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파란 바
가지로 물을 떠서 마시니 이른 더위에 갈증을 호소하던 목구멍이 즐겁다고 쾌재를 부른다.


▲  석조관음보살입상(石造觀音菩薩立像)

범종각 옆에는 짜투리 공간을 닦아서 만든 관음보살의 보금자리가 있다. 1987년 등산객을 위해
조성한 것으로 8각의 기단(基壇) 위에 앙련(仰蓮)과 복련(伏蓮)으로 된 2단의 연화대좌(蓮花臺
座)를 자리로 삼아 정병(政柄)을 들며 동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 어여쁜 표정과 수려한 외모로
경내를 굽어보는 관음보살 누님 주변에는 석등 2기와 동자상 등의 여러 석물을 두어 그를 수식
하고 있으며, 주변으로 돌난간을 둘렀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석조관음보살입상과 범종각


♠  회룡사 둘러보기 (2) 대웅전, 극락보전 주변

▲  회룡사 대웅전(大雄殿)

범종각에서 한단계 오르면 5층석탑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대웅전이, 북쪽에는 극락보전이 자리해
있다. 바로 회룡사의 중심 부분으로 석탑 주변에는 깔끔하게 돌을 깔아 터를 닦았다. 탑 주변에
는 돌난간을 둘러 탑을 보호하며, 대웅전과 극락보전이 탑이 있는 뜨락을 굽어본다. 가람배치는
탑 하나의 법당이 하나인 1금당(金堂) 1탑 형식이다.

회룡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1971년에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모습의 팔작지
붕 건물이다. 석가불을 비롯하여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봉안하고 있으며,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신중도를 간직하고 있다.


▲  대웅전 석가3존불과 금빛 찬란한 닫집
온후한 표정으로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맞이한다.


▲  회룡사 신중도(神衆圖)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18호

대웅전 서쪽 벽에 걸린 신중도는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으로 1883년에 조성된 것이다. 조금
의 여백도 없이 가득 그려져 있어 다소 번잡해 보이는데, 전체적으로 붉은 색조를 띠고 있다.
그림 윗부분에는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배치하고 아래쪽에 천룡(天龍)을 중심으로 권
속(眷屬)들을 배치한 2단 구성을 하고 있으며, 범천과 제석, 천룡을 역삼각형 구도로 배치하여
이들이 그름의 중심임을 알게 해준다.
이 그림은 화승(畵僧) 배출지로 유명한 남양주 수락산 흥국사(興國寺)에서 그린 것으로 그림을
그린 이는 응석(應碩)이며, 시주자는 상궁 신씨와 그의 부모이다.


▲  5층석탑 인근에 자리한 괘불석주(掛佛石柱)
평소에는 정말 보기 힘든 괘불을 거는 받침대이다. 지금처럼 한가한 때는
중생들이 갖다놓은 조그만 동자상과 돌하르방, 불상의 보금자리가 된다.

▲  회룡사 5층석탑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86호

대웅전, 극락보전 뜨락 한가운데에 자리한 5층석탑은 15세기에 조성된 조선 초기 석탑으로 경내
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높이 약 4m의 조그만 탑으로 기단부(基壇部)는 높직한 1매석의 바
닥돌 위에 괴임대를 돌출시키고 기단을 받치고 있으며, 괴임대에 5구의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
다. 기단은 1층으로 괴임대와 기단면석이 같은 돌로 되어 있는데, 괴임대에는 4구의 안상이 있
으며, 위쪽에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1층에서 3층까지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을 별개의 석재로 했고, 4층 이
상은 탑신과 옥개석을 같은 돌로 만들었다. 2층과 3층 탑신은 유독 피부가 하얀데 이는 근래에
새로 만들어 낀 것이다. 그래서 조금은 어색하며, 5층 옥개석은 세월이 할퀴고 간 상처가 진하
게 남아 안타까움을 전한다.

탑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의상대사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고 하나. 조선 초기에
조성된 탑이고 무학대사가 창건한 마당에 이는 말이 되질 않는다. 현재 의상대사의 부도탑은 이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  대웅전 방향으로 바라본 5층석탑

▲  5층석탑 좌우에 자리한 노주(露柱)들 - 연화대 위에 신장상이 놓여 있다.

5층석탑 좌우에는 석탑의 옥개석으로 보이는 돌(혹은 연화대의 일부)과 조그만 연화대(蓮花臺),
신장상(神將像)이 새겨진 두터운 돌이 하나를 이루며 자리를 잡고 있다. 이들은 원래 이곳에 있
던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회룡사의 유물인지 아니면 주변(마땅한 절터는 없음)에서 가져온 것
인지는 모르겠으나 석탑이나 어느 석물의 일부를 이루던 일부분으로 이곳으로 수습해 왔다.
신장상을 받치고 있는 연화대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으며, 신장상은 칼을 들고 서 있는 무장의
모습이다. 이들은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신상정보는 알 수 없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대웅전과 극락보전 뒤쪽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삼성각이 자리해 있다. 1955
년 대웅전으로 건립되었다가 나중에 지금의 대웅전을 만들면서 삼성각으로 변경되었으며, 1996
년에 새로 짓고 2002년에 증축했다. 삼성(三聖) 즉 3명의 성스러운 존재인 칠성(七星)과 산신(
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그들이 그려진 칠성탱과 산신탱은 1954년, 독성탱은
1956년에 조성되었다.


▲  삼성각 내부 - 제일 왼쪽부터 산신탱, 칠성탱, 독성탱

▲  회룡사 극락보전(極樂寶殿)

3줄로 된 계단 위에 높직히 들어앉아 궁궐의 정전(正殿)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극락보전은 서방
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봉안한 건물이다. 1996년에 조성된 것으로 아미
타불 좌우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地藏菩薩) 등을 봉안했으며, 1,000상의 조그만 금동불을 좌우
로 빼곡히 배치하여 장관을 이룬다.


▲  극락보전 아미타3존불과 후불탱화
후불탱화는 극락전 벽화로 그 유명한 월출산 무위사(無爲寺)
아미타3존벽화를 모사했다고 한다.

▲  극락보전 아미타3존불 좌우를 화려하게 받쳐주는 천불(千佛)

극락보전 불단 좌우에는 1,000기의 금동불을 빼곡하게 배치했다. 과연 천불이 맞는지는 모르겠
지만 오백이라 하기에는 너무 많아 보여 아마도 천불이 맞을 것이다. 조그만 금동불이 마치 단
체 사진을 찍듯 정신없이 자리를 채우고 있어 두 눈을 그야말로 놀라게 만든다. 너무 눈부셔서
눈이 멀어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로 말이다.

20년 만에 문을 두드린 회룡사는 나처럼 많이도 변해 있었다. 1시간 정도 구석구석 둘러보다가
다음을 기약하며 회룡사와의 짧은 인연을 정리했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이곳이 아닌 속세이기
때문이다. 속세로 나가면서도 자꾸 미련이 남는지 계곡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아쉬운 마
음을 살짝 띄워 날려 보낸다.

회룡폭포로 내려와 속세에서 사들고 온 삼각김밥과 음료수를 먹으며, 잠시 허기진 뱃속을 진정
시킨다. 하늘과 조금은 가까운 곳에서 먹어서 그런지 맛이 매우 좋다. 작지만 수량이 풍부한 폭
포의 시원한 물줄기 앞에 철모르고 찾아온 더위는 나살려라~ 줄행랑을 친다. 이렇게 배를 채우
고 석굴암입구에서 석굴암으로 길을 잡았다. 회룡사 바로 뒤에 석굴암이 있지만 일반인은 못가
게 한다. 그래서 천상 석굴암입구로 나와서 힘겨운 산길을 10분 정도 올라야 된다.

석굴암 가는 길은 토함산(吐含山)의 석굴암처럼 무지 가파르다. 회룡사는 회룡골이라도 옆에 품
고 있어 시원하기라도 하지 여기는 그냥 경사가 급한 산길과 산림이 전부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회룡사로 갈 뿐, 석굴암은 인적이 거의 없다. 회룡폭포이 위엄에 줄행랑을 친 더위가 다시 찾아
와 우리는 땀을 바가지로 흘리며 급한 길을 오르니 어느덧 회룡사 뒤쪽이다. 회룡사에서 바로
가면 1분이면 될 것을 20분이나 걸릴 정도로 돌아가야 하니 참 딱할 따름이다. 허나 인내력을
가지며 계속 발을 재촉하니 숲에 가려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석굴암이 돌문을 시작으로 슬슬 그
모습을 드러낸다.


▲  석굴암 가는 길

▲  석굴암 돌문(불이문)


♠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조그만 산중암자, 백범 김구 선생과
인연이 깊은 도봉산 석굴암(石窟庵)

▲  돌문(불이문) 사이로 보이는 조그만 천하, 석굴암

석굴암하면 속인들은 보통 경주에 있는 석굴암을 떠올린다. 경주 석굴암과 불국사(佛國寺)는 3
살짜리 애도 다 알고 있는 이 땅의 대중적인 명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절의 이름으로는 그만
한 좋은 이름이 없다. 석굴암은 말그대로 바위에 굴을 판 암자나 석굴사원을 뜻하며, 불국사는
불국토(佛國土)를 상징한다. 이렇게 좋은 이름을 경주의 그곳만 누리는 것은 말이 되지 않겠지?
불국사 같은 경우 서울 대모산(大母山, 대모산 불국사글 ☞ 보러가기)을 비롯해 여러 곳이 있으
며, 석굴암은 도봉산 일대에만 2곳이 있다. 하나는 우이령 고개에 자리한 양주시 교현리의 석굴
암이요. 다른 하나는 바로 회룡사 뒤에 자리한 이곳 석굴암이다.

사패산 범골능선 밑인 회룡사 북서쪽 높다란 곳에 둥지를 튼 석굴암은 회룡사의 부속 암자로 법
당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석굴과 산신각, 요사가 전부인 그야말로 작고 아늑한 산중암자이다.
1384년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도봉산에 들어왔는데, 이성계는 지금의 석굴암 자리에서 기도를 올
렸다고 한다. 그가 나라를 갈아치운 이후, 무학대사가 그 자리에 절을 세웠는데, 처음부터 석굴
암은 아닌 듯 싶으며, 그 이후 구체적인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절을 이루는 건물도 모두 1960
년 이후에 지어진 것이고, 석굴도 비슷한 시기에 새로 단장을 하여 딱히 고색의 기운은 없다.
도봉산에 널린 수많은 절의 하나로 절 이름만 경주 석굴암 덕분에 낯이 좀 익을 뿐, 마땅한 매
력거리가 없을 듯 싶지만 그럼에도 이곳에 온 것은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의 흔적이
서린 암자이기 때문이다.

김구는 중원대륙 상해(上海)로 망명하기 전, 왜경(倭警)을 피해 이곳에 잠시 은신했는데, 해방
이후 그 당시를 회상하며 종종 들렸다고 한다. 1948년 남상도를 비롯한 언론인 7명에게 '석굴암
불 무자 중추 유차 김구(石窟庵 佛戊子 仲秋 遊此 金九)'란 친필을 써주었는데, 이에 감명 받
은 그들은 1949년 3월 그의 친필을 이곳에 가져와 석굴 바위에 3개월 동안 새겼다. 그 바위글씨
'김구선생필적 암각문(巖刻文)'이란 이름으로 의정부 향토유적 8호로 지정되었다. 처음에는
김구가 새긴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현실은 다른 사람이 그의 친필을 바위에 새긴 것이다.
1949년 6월 백범이 안두희에게 불의의 암살을 당하자 의정부 사람들은 크게 애통해하며 그와 인
연이 깊던 석굴암에 사당을 지어 매년 봄, 가을에 제향(祭享)을 올린다.

해발 210m 고지에 자리한 석굴암에 이르면 2개의 커다란 바위가 마치 두툼한 성곽 같은 모습으
로 경내를 가리고 서 있다. 이들은 자연스레 석굴암과 속세의 경계선 역할을 하며, 번뇌와 악의
기운을 막고자 하는 의도도 담겨져 있는데, 가운데 머리 부분이 서로 맞물려 있고. 그 밑에 삼
각형 모양으로 돌문이 뚫려 있어 경내로 인도하는 정문의 역할을 한다. 그 모습이 너무 신묘하
고 특이하여 두고두고 잊혀지질 않는다. 석굴암하면 자연스럽게 떠올릴 정도로 말이다. 돌문에
는 딱히 인위적인 부분이 보이질 않아 자연이 빚은 문인 듯 싶으며, 사실상 속세에서 유일하게
석굴암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문 양쪽에 시멘트로 기둥을 만들고 한글로 된 절의 현판을 가로로
달았다.
그리고 돌문 양쪽에는 기둥을 세우고 문짝까지 달았는데, 석굴암이 속세에 미련이 없다고 문짝
을 닫아버리면 꼼짝없이 그 바위를 넘어야 된다. 석굴암에서는 이문을 불이문(不二門)이라 부르
며, 문 앞에는 수레들을 위한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  돌문(불이문) 위쪽에 새겨진 바위글씨들

▲  돌문(불이문)에서 바라본 석굴암 경내 (정면에 극락전이 보임)

돌문(불이문)을 들어서면 조그만 석굴암 경내가 펼쳐진다. 연등이 대롱대롱 허공을 메운 요사(
寮舍) 앞뜰을 기준으로 정면에 극락전과 산신각, 오른쪽에 석굴이 자리해 있는데, 그것이 석굴
암의 전부이다.

▲  돌문(불이문)의 뒷모습
두툼한 문짝까지 달려 있다.

▲  석굴암 승려의 생활공간인 요사


▲  석굴암의 법당인 극락전(極樂殿)
서방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의 거처로 근래에 지어졌다.

▲  극락전 앞에 놓인 오래된 부도(浮屠)

극락전 앞에는 높이 1m 정도의 정말 조그만 부도가 놓여져 있다. 이 부도는 석굴암에서 가장 오
래된 유물로 바닥돌과 기단부, 탑신, 지붕 부분이 죄다 8각형을 취하고 있는데, 조선 후기에 조
성된 것으로 짐작될 뿐,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어쨌든 석굴암의 오랜 역사를 입증하는 거의 유일한 존재로 지붕과 꼭대기 부분에는 장대한 세
월이 입혀준 때가 가득하여 작지만 중후한 멋을 선보인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산신각(山神閣)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단촐한 건물로 산신의 보금자리이다.

▲  산신할배와 동자, 호랑이 등이 그려진 산신각 산신탱
꼬랑지를 살랑살랑 움직이며, 산신 곁에 앉은 호랑이는 용맹함은 온데간데 없고
고양이처럼 귀엽기만 하다.

▲  산신각에서 바라본 도봉산 줄기

▲  석굴(石窟)과 김구선생필적 암각문(의정부 향토유적 8호)

석굴암 석굴은 이곳의 백미이자 든든한 밥줄이다. 이성계가 기도를 올렸다고 전하는 석굴로 겉
으로 보면 3개의 돌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거의 같은 바위이다. 아랫쪽 두 바위의
틈을 이용해 계단을 만들고, 석굴로 들어가는 문을 내었으며, 바위의 머리 부분이 자연히 석굴
의 지붕 역할을 하는데, 머리가 아래보다 지나치게 비대해 다소 어색해 보인다.
왼쪽 바위 피부에는 한자로 김구(金九)를 비롯한 여러 바위글씨들이 있는데, 1949년 백범의 친
필을 받은 남상도 등이 3개월 동안 새긴 것이다. 문 위쪽 바위에는 석굴암이란 바위글씨가 새겨
져 있으니 이는 나중에 새겨진 것이다.

바위 사이로 난 석굴은 자연 동굴을 개조한 것으로 근래에 손질을 가해 불단과 불상을 두었으며,
내부는 밖과 달리 시원하다. 석굴암이란 이름은 바로 이 석굴에서 유래된 것이다.


▲  조촐한 모습의 석굴 불단(佛壇)
불단에는 석가불이 홀로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로 촛불들이 자신을 밝히며 석굴에서
어둠을 밀어내고 있다. 그래서 마땅히 조명시설이 없음에도
석굴 내부는 그런데로 밝다.

▲  그 모든 것을 뒤로하며 속세로 나오다.

석굴 석가불에 예를 올리면서 슬쩍 소망을 들이밀고 회룡사와 더불어 오랜만에 발걸음을 한 석
굴암과 아쉬운 작별을 고한다. 석굴암은 의정부시내와 무척이나 가깝지만 번뇌가 따라오다 졸도
할 정도로 첩첩한 산골에 박힌 산중암자로 복잡한 마음과 머리를 가다듬기에는 그런데로 괜찮은
곳이다. 게다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평생을 바친 김구 선생과도 인연이 깊은 절이니 친일파에
단단히 더럽혀진 이 땅의 참담한 현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이렇게 하여 도봉산 회룡사, 석굴암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내린다.

※ 석굴암 찾아가기 (2015년 7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회룡역 2번 출구에서 도봉산을 향해 도보 40분. 절까지 수레 접근 가능
* 소재지 -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산89 (☎ 031-873-7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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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7월 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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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 정릉 봉국사 (맛있는 점심공양)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정릉 북한산 봉국사(奉國寺) '

▲  조선 후기에 조성된 봉국사 석조여래좌상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선인 5월이 되면 3가지의 볼거리가 나를 바쁘게 만든다, 서울연등축
제(연등회)와 석가탄신일, 그리고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특별전이 그것인데, 이중 가장 흥
겨운 것이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과 그 1주 전에 열리는 서울연등회이다.  (간송미술관 특
별전 2014년부터 미술관 대신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리고 있음, 특별전 기간도 연장됨)

간송미술관 특별전은 별 인연이 없으면 거르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초파일은 비가 와도 절대
거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불교 신도도 아니고 평소에도 많은 절을 다녀 지금까지 300곳
에 이르는 사찰을 들락거렸지만 초파일에 굳이 순례를 가장한 절 투어를 벌이는 이유는 초파
일의 흥겨운 분위기가 너무 좋기 때문이다. 거기에 공양밥과 떡 등 온갖 먹거리까지 그 흥겨
움을 보탠다. (공양밥 때문에 그럴지도??)

초파일이 다가오자 설레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내가 살고 있는 서울 장안을 대상으로 미답(未
踏)으로 남은 고찰(古刹)을 물색해본다. 초파일 만큼은 멀리 갈 것도 없이 마음 편하게 가까
운 시내 고찰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의 왠만한 고찰과 문화유산을 간직한 근현대
사찰은 거의 가본 터라 아무리 쥐어짜도 적당한 곳이 나오질 않는다.  <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지만 개방을 꺼리거나 외지인에게 꽤나 인색하게 구는 곳은 뺐음>
그래서 아주 옛날에 가보거나 1~2번 정도 간 곳을 포함하여 서울 강북 일대를 대상으로 코스
를 짰는데, 이번에는 후배 2명도 같이 가기로 하여 이동이 편하게끔 동선을 고려했고, 그 첫
답사지로 20년 전에 딱 1번 가봤던 정릉 봉국사를 선정했다.

드디어 고대하던 초파일의 서광이 밝았다. 그 서광을 받으며 오전 11시에 길음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국민대로 가는 1213번 시내버스를 타고 봉국사에서 발을 내린다. 봉국사가 비록
도선사(道詵寺), 길상사(吉祥寺) 만큼이나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생의 발길이 적지
않은 절이라 일주문부터 사람과 수레가 꼬리를 꼬리를 문다.


♠  봉국사 입문

▲  봉국사 일주문(一柱門)의 뒷모습 - 지붕에 세월이 달아준
푸른 머리칼이 자라고 있다.

서울의 북서쪽과 동쪽을 이어주는 정릉로는 시
내의 주요 간선도로로 수레의 왕래가 빈번하다.
거기에 고가도로로 된 내부순환도로까지 있어
수레의 굉음이 멈추질 않는다. 그런 정신없는
현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선 일주문은 봉국사
의 정문이다.
북한산(삼각산)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지만
내부순환로가 떡하니 앞을 가로막고 있어 그 시
야도 시원치 못하며, 문의 크기가 상당하여 시
작부터 중생의 기를 죽인다. 여기는 그런식으로
속세의 기운을 다스리는 모양이다.
문 앞쪽과 뒷쪽에는 절의 이름(삼각산 봉국사)
이 쓰인 현판이 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경내까지 200m 정도의 가파
른 오르막이 펼쳐져 다시 한번 중생의 기를 죽
인다. 절이 산중턱에 있고 경내로 인도하는 길
이 일주문을 경유하는 북쪽 언덕길 뿐이라 꿩
대신 닭을 택할 권리는 없다. 그저 자존심을 곱
게 접고 길을 임하는 수 밖에..


▲  천왕문(天王門)과 범종루(梵鍾樓)를 품고 있는 일음루(一音樓)

일주문을 들어서면 2층 규모의 건물이 중생을 맞는다. 1층에는 천왕문 현판이, 2층에는 범종루
현판이 있어, 한지붕 밑에 2개의 서로 다른 공간이 담겨져 있는데, 이 건물을 통틀어 일음루라
부른다. 일음루는 범종루의 다른 이름으로 그 일음(하나의 소리)이란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세지이다.
이 건물은 1979년 10월에 주지 현근(玄根)이 세웠는데, 일음루 편액과 주련은 청사 안광석(晴斯
安光碩)이 썼고, 천왕문 현판은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의 글씨이다.


▲  일음루의 뒷모습 - 일음루 현판이 뒷쪽에 달려 있다.

▲  천왕문 사천왕상(四天王像)
천왕문 양쪽에 늘어서 중생을 검문하는 사천왕, 허나 일음루 옆에 수레를
위한 길이 따로 닦여 있어 사천왕의 눈치를 굳이 볼 필요는 없다.

▲  여염집 같은 종무소(宗務所)

일음루를 지나면 주차장이 나온다. 수레를 끌고 온 이들은 여기서 수레를 접어야 되는데, 주차
공간이 넉넉치 못해 바퀴를 동동 굴리는 수레들도 적지 않았다. 어떤 수레 주인은 주차장 관리
요원과 자리를 두고 말싸움을 벌여 석가탄신일의 경건한 분위기를 해치기도 한다. 봉국사가 교
통이 불편한 시골에 있다면 이해라도 하지만 교통편도 괜찮은 서울 한복판에 자리해 있는데, 잠
깐 편하자고 굳이 수레를 끌고와 불편과 혼잡에 기름을 껴얹어야 되는지 모르겠다. 이런 날은
그저 대중교통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주차장을 지나면 길은 180도로 크게 구부러지며, 그 길의 끝에 산중턱에 둥지를 튼 봉국사가 자
리해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봉국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정릉의 원찰(願刹)이자 약사도량(藥師道場), 봉국사(奉國寺)
북한산(삼각산)의 가장 남쪽 산줄기에 자리한 봉국사는 1395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창건했
다고 전한다. 예전에는 1354년(고려 공민왕 3년)에 나옹선사(奈翁禪師)가 창건했다고 우겼으나
근래에는 무학대사 창건설로 완전 굳어진 모양이다.
무학은 이곳에 절을 짓고 약사여래불을 봉안해 약사사(藥師寺)라 했다고 전하며, 1468년에는 세
조(世祖)의 지원으로 절을 중창했다고 전한다.
허나 그 이후 정릉(貞陵)이 복원된 17세기 중반까지 200년 동안 적당한 내력이 없어 창건 시기
에 대한 의구심을 던지게 한다. 게다가 조선 초기 유물은 하나도 없으니 무학이 정녕 창건한 것
인지 아니면 15세기의 세조의 지원으로 지어진 것인지, 정릉이 복원된 이후에 지어진 것인지는
좀더 조사가 필요하다.

봉국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1669년 이후이다. 태종(太宗)에 의해 260년 가까이 속세
의 뇌리 속에 잊혀져 쑥대밭이 된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정릉을 현종(
顯宗)의 명에 따라 1669년에 복원되었다. 이때 정자각(丁字閣)과 전례청(典禮廳) 등 정릉의 부
속 건물이 새로 지어지고, 인근 경국사(慶國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이곳을 정릉의 원찰로
삼았는데, 이때 나라를 받든다는 착한 뜻에서 봉국사로 이름을 갈았다. 왕실에 더욱 잘보여 절
을 크게 꾸려보겠다는 야심에서 비롯된 소산일 것이다. 참고로 봉국사는 정릉과 같은 산자락에
안겨져 있으며, 정릉에서 바로 북쪽 300m 거리에 자리해 있어 원찰의 자격으로는 충분하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터지자 성질이 난 군인들에 의해 절이 피해를 입었고, 1883년 한
계(漢溪), 덕운(德雲)이 중건했다. 1885년 3월에는 명부전에 지장탱을 조성했으며, 1898년에 운
담(雲潭), 영암(永庵), 취봉(翠峰) 등이 명부전을 중건하고 시왕도를 봉안했다.
1913년에 주지 종능(宗能)과 화주 월하봉연(月荷奉蓮)이 칠성각을 중건했고, 1938년 화주 금파(
錦坡)가 조인섭(趙寅燮)의 시주로 염불당을 새로 지었다. 1979년에는 주지 현근이 2층 크기의
일음루를 세워 범종루와 천왕문으로 삼았고, 1986년에 산신각을 중수하고 만월보전에 신중탱을
봉안했으며, 1991년에 천불전에 신중탱을 봉안했다.
1994년 3월에는 안심당을 새로 마련해 승려와 신도의 수행처로 활용하고 있고, 주지 선관과 신
도들이 합심해 경내에 나무 1,000여 그루와 온갖 꽃을 심어 도량의 분위기를 화사하게 살렸다.
그래서 경내에 제법 나무가 무성하여 산사의 티가 진하게 된 것이다.

일주문이 정릉로 도로변에 있어서 그렇지 일주문과 일음루를 지나면 산사의 내음이 오각을 간지
럽힌다. 정릉로와 내부순환도로가 절 앞에 있고 주택가와 가깝지만 숲에 짙게 둘러싸인 경내는
아늑하고 적막해 깊은 산골에 들어선 기분이다. 지금이야 속세의 기운이 절 밑까지 올라와 실감
이 덜하겠지만 옛날에는 완전 첩첩한 산주름 속이었다. 한양(서울) 도성에서 오려면 동소문<(東
小門), 혜화문(惠化門)>을 나와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야 했는데 워낙 외진 곳이라 호랑이의 등장
이 잦았다.

일주문은 북한산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경내 서쪽과 남쪽, 동쪽은 야산이라 정릉천이
있는 북쪽이 그나마 진입이 쉬웠다. 그래서 그곳에 문을 내고 속세와 왕래했으며, 그 길이 절과
속세를 잇는 유일한 통로이다. 경내는 일주문에서 각박한 오르막길을 200m 올라야 나오는데, 법
당(만월보전)은 지형상의 이유로 동쪽을 향하고 있고, 명부전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법당 뒤쪽
에는 높은 벼랑이 병풍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벼랑에 독성각과 산신각을 아슬아슬하게 걸쳐놓
았다. 이는 경내 확장이 용이하지 못해 그리 한 것이다.
이렇게 조촐한 경내에는 만월보전을 위시하여 명부전, 천불전, 산신각, 독성각, 납골당인 연화
원 등 약 10동의 건물이 터를 메우고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목조석가여래좌상, 석조여래
좌상, 석조지장3존상과 시왕상 및 권속일괄,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아미타괘불도(서울 지방유형
문화재 351호
), 지장시왕도, 시왕도와 사자상 등 지방문화재 6점을 간직하고 있다. 이들은 2014
년 1월에 한꺼번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받았다.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고, 교통편도 양호해 접근성은 진짜 좋다. 몇 시간이나 발품을 팔아
야 되거나 수레도 겁을 집어먹는 깊은 산중의 산사에 가기가 여의치 않을 때 아주 잠깐의 발품
으로 언제든 안길 수 있는 산사(山寺)로 산사의 기운을 나름 진하게 간직하고 있어 속세의 기운
을 잠시 털어버리기에 좋다.

※ 정릉 봉국사 찾아가기 (2015년 5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길음역(3번 출구)에서 171, 1213,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봉국사 하차
* 지하철 4호선 미아3거리역(1,6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길음역(7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에서 153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6호선 고려대역 4번 출구에서 1213번, 6번 출구에서 7211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4번 출구)에서 7211번 시내버스 이용
* 경내에 주차장 있음 (주차장까지 진입 가능)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2동 637 (정릉로 202 ☎ 02-919-0211~2)
* 봉국사 홈페이지(연화원 포함)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초파일 분위기에 잠긴 봉국사 경내


♠  봉국사 만월보전, 명부전 주변

▲  봉국사의 법당인 만월보전(滿月寶殿)

경내로 들어서니 사람들로 진짜 봐글봐글하다. 때가 점심시간이라 공양밥을 먹고자 사람들이 만
월보전 뜨락에 길게 꼬리를 물고 있는데, 지금 그 꼬리에 동참을 하더라도 공양밥이 내 손에 오
기까지는 30분 이상은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밥은 나중에 먹고 일단 경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사람들로 가득한 뜨락을 말없이 굽어보고 있는 만월보전은 이곳의 법당이다. 정면 5칸, 측면 3
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큰 불전(佛殿)인데, 만월보전이란 약사전(藥師殿)의 다른
이름으로 약사여래(藥師如來)의 거처이다. 봉국사가 약사도량을 칭하다보니 자연히 약사여래와
그의 거처가 절의 중심이 되었다.

만월보전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건물은 근래에 새롭게 손질한 것이다. 만월
보전 현판은 조선 후기 것으로 지금은 종무소에 있으며, 그 글씨를 확대한 새 현판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  만월보전 불단에 봉안된 불상과 용이 그려진 기둥
불단 가운데가 석조여래좌상, 왼쪽에 보관을 쓴 이가 관음보살,
오른쪽은 목조석가여래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4호)


만월보전 불단에는 이곳에 주인으로 약사불로 통하는 석조여래좌상을 가운데에 두고 그 좌우에
관음보살과 목조석가여래좌상을 배치했다.
이중 목조석가여래좌상은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어깨가 넓고 둥글며, 머리를 앞으로
살짝 수그려 굽어보는 듯한 자세를 하고 있고, 간략해진 옷 주름으로 신체 윤곽이 뚜렷하고 부
피감이 있어 보이는 점으로 보아 18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해맑은 표정의 만월보전 석조여래좌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7호

봉국사의 든든한 밥줄인 석조여래좌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불로 정확한 시기는 전해오지 않
는다. 불상의 얼굴은 거의 동그랗고 볼에는 살이 좀 있어 보이며,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
러져 선의 미학을 선사한다. 눈썹 사이에는 백호가 살짝 찍혀 있고, 두 눈은 가늘고 살며시 뜨
며 중생과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진 제물을 바라본다. 코는 끝이 두툼하고 붉은 입술은 얼굴 크
기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감이 있으나 입술에 드리워진 미소는 얼굴 전체를 환하게 만든다.
두 귀는 중생들의 소망을 모두 경청하려는 듯, 어깨까지 늘어졌으며, 머리칼은 꼽슬인 나발이고,
그 가운데에 하얀 무견정상(無見頂相)이 솟아 있다.
목에는 불상에 흔한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지 않고, 몸에 걸친 옷은 어깨를 감싼 통견
(通肩)이
다. 가슴 밑에는 군의(裙衣)가 보이는데, 그 옷깃과 띠가 직사각형으로 정형화되어 표현된 것은
조선 후기 불상에서 많이 나타나는 양식이다.
두 손은 다리 위에 모아 금색이 칠해진 무엇인가를 소중히 들고 있는데, 이는 약사여래의 필수
품인
약합(藥盒)로 근래에 금색을 입혔다.

불상을 만들 때 해맑은 동자승을 모델로 하지 않았을까? 그의 동그란 얼굴은
해맑고 귀여워 보
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웃음의 꽃을 머금게 한다. 아무리 세상이 즐거움과 웃음을 앗아가도 그
는 그 웃음을 되찾아주고 치료해주는 의원인 셈이다. 약합보다는 그의 얼굴이 그야말로 약이다.
자신을 보며 늘 웃어주고 밝은 표정을 지어주는 불상 앞에 어느 누가 즐겁지 않으리..? 찰거머
리같은 번뇌도 속세의 부정한 기운도 그 앞에서는 모두 털리게 되어있다.

이 약사불은 도금을 입히지 않고 원초적인 돌의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신체 비례도 거
의 맞고 세부 묘사도 충실해 조선 후기 불상 가운데 괜찮은 작품으로 점수를 받고 있다. 특히나
해맑은 얼굴과 미소는 보물급으로도 손색이 없다. 다행히 조선 후기 서울/경기 지역에서 유행했
던 도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뒤늦게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  석조여래좌상과 석가후불탱화

▲  호법신(護法神)을 있는데로 끌어 담은 신중탱
법당에 필수적으로 걸어놓는 신중탱은 법당 수호를 목적으로 한다.
허나 그림에 그려진 이들이 너무 많아 누가 누군지 정신이 없다.

▲  봉국사 5층석탑
만월보전 뜨락에 날씬한 몸매의 5층석탑 2기가 서있다. 이들은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저들 이전에는 경내에 그 흔한 탑도 없었다.

       ◀  천불전(千佛殿)과 느티나무
남쪽을 바라보고 선 천불전은 석가3존불과 조그
만 금동불 1,000상을 봉안하고 있다. 이들이 합
심하여 금빛을 발산하니 그 찬란함에 눈이 마비
될 지경이다.
천불전 앞에는 60여 년 묵은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
무 9호
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높이는 약 16m
정도로 경내에 있는 나무 가운데 가장 으뜸이다.


▲  천불전을 장식하고 있는 석가3존불과 조그만 금동불 1,000상의 위엄
조그만 불상은 중생들의 돈으로 조성된 원불(願佛)이다. 즐거운 초파일을 맞이하여
후하게 차려진 제물을 바라보며 봉국사 승려를 대신하여 흐뭇한 미소로 답을 한다.

▲  천불전 옆에 자리한 안심당(安心堂)
승려와 신도들의 수행을 위해 1994년 3월에 지어졌다.

▲  봉국사의 보물 창고, 명부전(冥府殿)

만월보전의 옆구리를 뚫어지라 바라보는 명부전은 조선 후기에 지어졌다. 지금의 건물은 1989년
에 중건된 것인데, 내부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조지장3존상과 시왕상, 지장시왕도, 시왕도,
사자도 등이 푸짐하게 봉안되어 있어 경내의 보물 창고나 다름이 없다.
특히 건물 현판은 가로가 아닌 세로로 걸린 것이 이채로우며, 현판의 색깔도 검은색이 아닌 붉
은색 바탕에 금색으로 된 것이 꽤 돋보인다. 이런 현판은 여기서도 가까운
흥천사(興天寺) 명부
전(☞ 흥천사글 보러가기)에도 있어 무슨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보니 거기 명부전과
여기 명부전이 너무나 닮았다.


▲  명부전 석조지장3존상과 시왕상, 권속일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5호
그 뒤에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2호

명부전 불단에 봉안된 조그만 지장3존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다. 금동 옷을 입은 지장보살상
은 녹색 승려머리로 조금 매서운 맵시로 앉아있는데, 북한산(삼각산) 동쪽에 있는
본원정사(本
精舍) 지장보살상과 비슷한 모습이다. (☞ 본원정사글 보러가기)
지장보살 옆에는
도명존자(道明尊者)무독귀왕(無毒鬼王)협시(夾侍)해 있는데, 얼굴이 좀
순하고 단정해 보인다. 그들 뒤에는 1885년에 제작된 지장시왕도가 든든하게 걸려있고, 그 좌우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인 시왕상을 비롯하여 판관(判官), 녹사, 시자상, 동자상, 인
왕상 등이 거의 빠짐없이 자리를 메운다. 시왕도와 사자도는 1898년에 그려진 것으로 19세기 후
반 불화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명부전 시왕상과 시왕도
밑줄에 자리한 상은 판관, 녹사, 시자상

◀  호랑이탈을 쓴 고양이처럼 귀여운
인왕상(仁王像)과 사자도
(시왕도와 사자도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3호)


♠  봉국사 마무리

▲  산신각이 달려있는 경내 뒤쪽 벼랑

만월보전 뒤쪽(서쪽)에는 거의 80도 가까이 솟은 벼랑이 병풍처럼 자리해 있다. 그 옹색한 곳에
계단을 내고 좁은 자리를 간신히 닦아서 독성각과 산신각을 내는 기적을 내었는데, 산신각은 각
한 계단을 1분 정도 올라야 된다.
봉국사가 이런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산신각을 걸친 것은 경내가 썩 넓지가 않고,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에 산신각이나 삼성각을 두는 원칙 때문이다. 그래서 욕심을 내어 벼랑 윗부분
에 자리를 닦은 것이다.

산신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예전에는 광응전(光膺殿)이란 생소한 이름으로
불렸다. 산신각이니 당연히 산신(山神) 할배가 중심이 되야겠지만 중심은 엉뚱하게도 약사여래
상이 차지하고 있으며, 산신과 관음보살상이 그 좌우에 자리해 있다. 아무래도 이곳이 약사도량
을 내세우다보니 경내에서 가장 높고 험준한 이곳까지 약사여래를 둔 모양이다.

이곳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각박하지만 다행히 거리는 짧아서 그런데로 올라갈 만하다. 경내에
서 가장 하늘과 가까워 조망은 좋을 것 같지만 숲의 패기가 드높아 조망은 썩 좋지 못하다. 숲
에 가려 경내와 정릉동 일부가 보이는 것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건물 주변이 낭떠러지라
추락사고의 위험도 늘 도사리고 있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뒷탈이 없다. 사고가 나면 제아무리
영험하다는 산신, 약사여래라도 구제해주지 못한다.

▲  계단 끝에 자리한 산신각

▲  산신각 중수 공덕비(功德碑)


▲  산신각 식구들 (왼쪽부터 산신, 약사여래상, 관음보살)
이들과 후불탱화는 모두 근래에 조성되었다. (산신각도 마찬가지)

▲  산신각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울창한 숲에 가려 보이는 것은 별로 없다.

▲  독성각(獨聖閣, 위쪽)과 용왕단(龍王壇, 아랫쪽)

▲  용왕단 (독성각 바로 밑에 있음)

월보전과 산신각으로 인도하는 계단 입구 사이에 용왕단이 자리해 있다. 말그대로 용왕(龍王)
의 거처로 용왕과는 전혀 관련도 없어보이는 이런 산속에 그의 공간이 있다는 것이 참 이채롭다.
바다 용왕이 바다에서 먼 이런 산골까지 무슨 볼일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이곳에 용왕단을 세운 것은 지금은 제대로 안나오지만 약수터를 지키고자 세운 것이다. 용왕이
라고 해서 꼭 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이 미치는 모든 곳이 그의 관리 영역이다. 허나 독
성, 산신과 달리 번듯한 건물이 아닌 노천에 있어 절에 봉안된 다른 존재와 크게 차별을 두었다.
용왕의 거처는 둥근 초석을 깔고 그 위에 나무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에 용이 새겨져 있으나 색
이 퇴색해서 제대로 안보면 지나치기 쉽다. 마주보는 용머리 위에 기둥을 세우고 기와를 올렸는
데, 이는 최근에 세운 것이며, 그 안쪽을 파서 얕은 감실(龕室)을 두고 거기에 용을 탄 용왕을
봉안했다.


▲  벼랑 위에 둥지를 튼 독성각

용왕단 위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독성각이 벼랑 바위에 아찔하게 걸터 앉아있다. 이곳은 독성(獨
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근래에 조성된 독성상과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독성각을 가려면 만월보전 좌측에서 올라가야 되는데, 산신각보다는 접근이 쉽다. 다만 건물 정
면 바깥은 벼랑이기 때문에 내부에서 괜히 뒷걸음질하다가 자칫 골로 가는 수가 있다. 건물 크
기도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손바닥만한 규모라 3명만 들어가도 숨쉬기 힘들다. 추락을
염려하여 2줄로 안전 난간을 둘렀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해 보인다.


▲  독성상과 독성탱 - 초파일 특수로 그에게 올려진 제물이 꽤 풍족하다.
며칠 동안 독성 식구들 제대로 회식했을 듯~~

▲  독성각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 오른쪽 녹색 천막에서는 전을 팔고 있었다.

▲  봉국사에서 먹은 점심 공양의 위엄

국사를 정신없이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3시가 되었다. 경내도 다 구경했으니 이제 점심을
먹으며 지친 몸을 달래줘야 되겠지. 공양줄도 제법 줄어든 상태라 줄에 동참하여 공양을 받았다.
이곳 공양은 다른 절집과 비슷한 비빔밥이다. 밥과 갖은 나물, 고추장이 그릇에 담겨
이들을
비벼먹으면 되며, 작은 그릇에는 물김치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떡도 1봉지씩 나눠주면서 후식
도 배려했다.

공양을 받는 건 좋으나 경내가 사람들로 가득하다보니 밥먹을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산
신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간신히 자리를 잡고 즐거운 공양시간을 갖는다. 이들 공양밥 외에도
전과 간식도 있는데, 이들은 돈 주고 사먹어야 된다. 전 1장은 1~2천원선, 후배 1명이 전을 2장
사와서 같이 먹었다. 한참 배가 고플 시간이고 바깥에서 소풍 나온 듯 밥을 먹으니 밥과 물김치,
전이 모두 꿀맛 같다. 밥에 담긴 고추장은 양이 적당하여 모두를 붉게 물들이는데 충분했고, 물
김치는 맛이 시원하여 이내 바닥을 드러냈다.

그렇게 즐겁게 점심 공양을 마치고 봉국사를 뒤로하며 다음 절로 이동했다. 이날 우리의 갈 길
은 아직 멀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만 둘러보고 끝낼 수도 있지만 달랑 1곳으로 초파일 절투어
를 땡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1년에 딱 하루 있는 날이니 이날만큼은 좀 무리하여 초파일 분위
기를 내내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봉국사 글은 여기서 끝 ~~~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8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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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5월 2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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