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공원'에 해당되는 글 52건

  1. 2024.04.30 서울 서남쪽 끝자락에 깃든 상큼한 명소들, 푸른수목원~항동저수지~항동철길 1바퀴
  2. 2023.12.05 부산의 소금강, 금정산 금강공원 겨울 나들이 <동래온천 온정개건비, 임진동래의총, 금정사>
  3. 2023.11.25 망우리공동묘지를 거닐다. 망우산~망우역사문화공원~구리둘레길 늦가을 나들이 (사색의길, 태허 유상규묘, 망우산3보루, 오세창묘, 방정환묘)
  4. 2023.09.12 조선시대 공동묘지였던 서울 변두리의 이색 뒷동산, 구파발 이말산 <금성당 샤머니즘박물관, 최효원묘역, 은평둘레길3코스, 약수사>
  5. 2023.07.14 벽오산 자락에 넓게 깃들여진 달달한 시민공원, 강북구 북서울꿈의숲 <창녕위궁재사, 월영지, 청운답원, 북서울꿈의숲아트센터>
  6. 2023.02.26 송파구 한복판에 자리한 상큼한 푸른 쉼터, 오금공원 <문양군 류희림묘역, 신선경과 류인호묘역, 오금공원 인공폭포>
  7. 2022.11.13 봉천동 낙성대, 관악강감찬축제, 서울둘레길5코스 관악산 구간 늦가을 나들이 (강감찬생가터, 낙성대공원, 무당골)
  8. 2022.10.03 서울 동쪽 변두리에 숨겨진 작고 상큼한 뒷동산, 일자산 (일자산 허브천문공원, 서울둘레길3코스, 둔굴)
  9. 2022.02.26 서울 도심의 상큼한 서쪽 뒷동산, 안산 나들이 (홍제천인공폭포, 연희숲속쉼터, 안산자락길, 안산메타세콰이어숲길)
  10. 2021.11.08 강남의 상큼한 지붕을 거닐다. 대모산 나들이 (완남부원군 이후원묘역, 대모산성, 불국사, 서울둘레길4코스)

서울 서남쪽 끝자락에 깃든 상큼한 명소들, 푸른수목원~항동저수지~항동철길 1바퀴

구로구 푸른수목원, 항동철길 가을 나들이



' 구로구 푸른수목원, 항동철길 가을 나들이 '

푸른수목원 항동저수지

▲  푸른수목원 항동저수지

항동철길(오류선) 푸른수목원 장미원 분수대

▲  항동철길(오류선)

▲  장미원 분수대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에도 수목원이 있다. 바로 홍릉수목원과 서울 서
남쪽 변두리에 있는 푸른수목원이 그것이다.
구로구의 일원으로 서울의 서남쪽 끝을 잡고 있는 항동(航洞)에 자리한 푸른수목원은 이
미 2~3번 인연이 있으나 주마등(走馬燈)으로 둘러본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가을이 늦가
을로 숙성되어 가던 10월의 한복판에 겸사겸사 그곳을 찾았다.

비록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나 나는 서울의 동북쪽 끝, 푸른수목원은 서남쪽 끝
으로 완전 끝에서 끝이다. 거리만 해도 최소 34km가 넘는다. 우리 동네 전철역인 방학역
에서 1호선을 타고 70분을 달려 오류동역에서 하차, 여기서 서울시내버스 6614번(양천차
고지↔옥길지구)으로 환승하여 푸른수목원 후문에서 두 발을 내렸다.



 

♠  푸른수목원 입문 (항동저수지)

▲  활짝 열린 푸른수목원 후문

서울의 서남쪽 변두리인 항동 한복판에 서울 최초의 시립 수목원(樹木園)인 푸른수목원이 상
큼하게 누워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수많은 사람과 차량, 그리고 번잡한 시가지가 크게 연상
되는 서울에도 수목원이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하겠지만 짙은 숲으로 이루어진 국립산림과학
원 소속의 홍릉수목원과 오산(烏山)의 물향기수목원과 비슷한 푸른수목원을 가지고 있다.

푸른수목원 자리에는 지금도 건재한 항동저수지와 경작지가 펼쳐져 있었다. 저수지 동쪽에는
구로구(九老區)의 지붕인 천왕산(天王山, 144m)이 자리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태도 그런
데로 띄고 있었다.
시골 향기 그윽했던 변두리로 조용히 묻혀있던 항동, 바로 그곳에 서울시는 수목원을 닦기로
하고 2004년 6월 30일에 수목원 기본계획용역을 실시해 같은 해 12월 30일, 수목원 실시설계
용역을 시행했다. 2005년 12월 15일 수목원 조성사업 실시계획 인가를 얻어 2006년 3월 8일까
지 토지 측량, 경계 측량, 분할 측량을 완료했으며, 4월 15일 실시계획 변경 인가를 받아 6월
16일 보상계획 공고를 하여 12월까지 수목원 토지 보상과 공사 시행을 완료했다.

2009년 10월부터 2010년 10월까지 1단계 조성 공사로 저수지 생태탐방로, 목재방틀을 설치했
으며, 2010년 9월 2단계 조성 공사에 들어갔으나 2011년 6월, 캠핑장 반영 변경 계획에 따른
시민들의 반대로 공사가 잠시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2012년 7월 17일 시민들의 제안을 받아들
여 정원 개념을 도입한 수목원으로 공원조성계획이 통과되어 2013년 3월, 3단계 조성 공사에
들어가 그해 6월 5일, 상큼한 모습으로 속세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2018년 서울시 1호 공립
수목원으로 지정되었다.

수목원 면적은 103,354㎡로 2,400여 종 52만 주의 다양한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잔디마
당과 향기원, 초화원, 장미원, 암석원 등 20개의 테마공간과 북까페 등의 편의시설이 닦여져
있으며, 숲해설 등의 자연 교육 프로그램과 친환경관리의 중심인 '생태의 섬(Eco-island)'을
내세우고 있다. 또한 도심 속에서 식물과 인간, 환경이 공존하고 3무(無, 농약과 무화학비료,
쓰레기 배출을 하지 않음) 운동을 실천하는 생태공간임을 내세우며 실천하고 있다.
수목원 동쪽에는 천왕산이 포근히 감싸고 있고, 북쪽은 주거지와 성공회대학교, 서쪽과 동쪽
은 들녘과 항동지구가 공존하고 있다. 수목원 남쪽에는 철길 관광지로 크게 인기를 누리고 있
는 항동철길(오류선)이 지나가며, 천왕산과 구로올레길 산림형3코스가 동쪽에 있어 볼거리도
넉넉하고 거닐 곳도 정말 많다. 하여 푸른수목원과 항동철길을 한 덩어리로 둘러보거나 천왕
산과 구로올레길 산림형3코스까지 보태면 정말 알차고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수목원이긴 하지만 나무가 빽빽한 그런 수목원이 아니라 정원 및 공원 같은 분위기로 정문과
후문, 2개의 쪽문(항동철길, 더불어숲길)을 통해 들어설 수 있으며, 나는 후문으로 들어가서
항동철길 쪽문으로 나왔다. 쉬는 날과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5시부터 22시까지로 이
땅의 수목원 중 이렇게 관람시간이 긴 곳은 여기 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도시와 도시 사람
들에게 최적화된 수목원이다.

* 푸른수목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항동 81-1(연동로 240 ☎ 02-2686-3200)
* 푸른수목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장미원 ①

후문을 들어서면 바로 장미원(장미정원)이 마중을 한다. 수목원을 대표하는 정원으로 붉은 장
미와 분홍 장미 등 천하의 온갖 장미 69종이 모여 아름다움을 견주고 있는데, 그들이 심어진
부지는 장미의 꽃잎과 푸른 잎의 모양을 따서 만들었으며, 분수대가 정원 한복판에 자리하여
경관을 크게 돕는다.


▲  장미원 ②
늦가을 장미의 향연이 한참 펼쳐져 나그네의 정처 없는 마음에
마구 돌을 던진다.

▲  장미원 ③
수목원 너머로 항동지구 아파트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어 도시 속의
장미공원을 보는 듯 하다.

▲  꾸벅꾸벅 졸고 있는 장미원 분수대

▲  더불어숲길 안내도

장미원 동쪽에는 천왕산으로 인도하는 더불어숲길 쪽문이 있다. 더불어숲길은 서울시와 구로
구청, 성공회대, 사단법인 더불어숲이 함께 조성한 짧은 숲길로 더불어숲길 쪽문에서 성공회
대 뒷쪽(천왕산 북쪽 자락) 언덕까지 이어지며 거기서 구로올레길 산림형3코스와 만난다.


▲  장미원 남쪽이자 조망원 주변 산책로

▲  항동저수지 수생식물원

항동저수지는 푸른수목원의 상큼한 거울이자 터줏대감이다. 근처의 궁동저수지(궁동저수지생
태공원)와 더불어 서울에 몇 없는 저수지로 경기도 농산물원종장의 농업용수를 위해 왜정(倭
政) 때 닦여졌다.
경기도 농산물원종장은 1917년 5월에 여기서 가까운 부천 역곡(벌응절리)에 세워진 경기도종
묘장에서 시작되었는데, 1932년 경기도 농사시험장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49년에 경기도
농사기술원으로, 1957년에는 경기도농사원으로 이름이 갈렸다.
196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항동은 경기도 부천군(富川郡)에서 서울로 바뀌었으며, 서울의 지
나친 도시화로 1998년 폐지되면서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경기도 농업기술원에서 그 기능을 담
당하고 있다.

이 저수지는 농업용수 외에도 낚시터와 물놀이 장소로 바쁘게 살았는데, 겨울에는 썰매와 얼
음 낚시 명소로도 유명했다. 주변이 온통 경작지와 산이라 한때 존폐 위기까지 갔던 궁동저수
지와 달리 좋은 수질을 유지했으나 푸른수목원이 닦이면서 농업용수 제공은 중단되고 낚시와
썰매도 모두 금지되는 등, 그동안의 존재의 이유를 모두 빼앗기긴 했으나 대신 궁동저수지와
비슷한 수생식물원 및 생태저수지로 새롭게 살아가고 있다.
저수지 동부에는 나무로 다진 생태탐방로를 닦았고 연꽃 등 수초(水草)들이 무성해 저수지의
왕성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저수지 주위로 산책로가 닦여져 있으며, 물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니 저수지 수중 식구들을 위해 접근을 삼가하기 바란다. 푸른수목원의 절반은 항동저수지
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곳에서 매우 비중이 크며, 그가 없는 푸른수목원은 정말 상상
할 수가 없다.


▲  저수지 위에 그물처럼 닦여진 수생식물원 생태탐방로

▲  푸르기 그지 없는 항동저수지
농업용수 제공과 낚시터, 피서지 바쁘게 살았던 그는 이제 인간의 손을
덜 받는 생태저수지로 새 삶을 누리고 있다.

▲  저수지 외곽에 삼삼하게 자라난 수초들
온갖 수초들이 저수지와 속세의 경계를 팽팽히 그으며 저수지 식구들을
지킨다.

▲  항동저수지 서쪽 산책로

▲  평화로운 모습의 항동저수지와 천왕산
천왕산은 물론 주변 나무와 하늘, 구름, 햇님, 달님까지 저수지를
거울로 삼으며 매뭇새를 다듬는다.

▲  항동저수지와 가까이에 보이는 옥의 티들(항동지구)

푸른수목원이 닦여졌을 때는 주변은 산과 들판이 전부인 자연의 공간이었다. (집들이 여럿 있
었음) 서울에 몇 남지 않은 농촌이었으나 이곳까지 개발의 칼질이 들어와 춤을 추면서 수목원
주변으로 회색빛 아파트들이 마구 들어서 일명 항동지구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곳은 서울의 영원한 시골로 남았으면 했는데, 이 변두리까지 가만두지를 않고 자꾸 성냥갑
아파트를 올려 난개발을 일삼은 것이다. 아직 시골 들판이 좀 남아있긴 하나 그마저도 안전을
장담하지 못한다. 서울의 인구는 미세하게나마 줄고 있고, 전국적으로 비어있는 아파트가 즐
비하다고 하는데, 자연이 잘 남아있는 이곳까지 공간을 낭비해야 했을까? 아파트보다는 자연
공간을 크게 조성하여 푸른수목원의 확장판으로 삼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수목원과 천왕
산 일대는 숲을 중심으로 한 자연공간으로, 수목원 서쪽과 남쪽은 수목원 수식용 자연 공간과
주말농장 등의 경작지로 손질해야 했음)

▲  북쪽에서 바라본 항동저수지

▲  저수지와 습지식물원 사이 산책로



 

♠  푸른수목원 둘러보기

▲  참여정원의 평화로운 풍경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가 싹 정화되는 기분이다.

▲  가을에 푹 잠긴 붉은 단풍나무
올해의 마지막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늦가을 향연을
준비하고 있다.

▲  습지식물들의 조그만 낙원, 습지식물원

이곳은 동그란 작은 웅덩이가 여러 개 모여 이루어진 습지대(濕地帶)로 다양한 수생식물과 수
서곤충(水棲昆蟲)이 살아가고 있다. 습지대는 생태공원의 필수 요소로 오염된 물을 정화시켜
주며, 조그만 생물들의 삶터와 먹거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습지를 이룬 물은 항동저수지로 흘
러가 저수지를 살찌워준다.


▲  야생화원과 계류원 주변 산책로

▲  계류원에 차려진 하얀 천막(국화정원)

계류원은 수목원 이전부터 있던 물길을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다양한 수생식물이 살아가고 있
다. 그 위에는 나무다리를 닦고 천막을 씌워 국화정원으로 삼아 아름답게 꾸며진 국화와 분재
를 전시하고 있다. (전시 내용은 매달 다를 수 있음)


▲  계류원 국화정원의 학 모양 분재
학 분재 1쌍이 서로를 각별히 바라보며 정을 속삭인다. 그 앞에는 다양한
피부색의 국화들이 서로 아름다움을 견준다.

▲  불꽃처럼 화사하게 돋은 노란
국화의 위엄 (국화정원)

▲  늦가을에 점차 물들어가는 활엽수원
(闊葉樹園)


▲  활엽수원 산책로
단풍나무와 참나무, 벚나무 등의 활엽수가 중심을 이루고 있어
늦가을에는 단풍의 고운 향연을 구경할 수 있다.

▲  KB숲교육센터 유리온실

수목원 동쪽 끝자락에는 KB숲교육센터라 불리는 유리온실이 있다. 하얀 피부를 지닌 이 온실
은 국민은행(KB)의 후원(기부채납)으로 2015년에 지어진 것으로 시민을 위한 친환경 휴식 공
간과 체험형 생태교육공간으로 조성되었으며, 초승달 모양을 지닌 정남향 온실(溫室)로 다른
나라에서 가져온 열대식물들이 자라고 있어 조촐하게 실내 식물원 역할을 한다.
수목원 구성원 중 유일한 실내 공간(관리사무소와 까페는 제외)으로 안으로 들어가면 조금은
더울 수 있다. (겨울에는 따스해서 좋으나 여름에는 다소 더울 수 있음)

▲  2015년 KB숲교육센터 조성 기념으로
전 서울시장 박원순이 심은 소나무

▲  열대 밀림 같은 KB숲교육센터
유리온실 내부 ①


▲  열대 밀림 같은 KB숲교육센터 유리온실 내부 ①

▲  KB숲교육센터 유리온실 내부의 조그만 문

▲  '아라우카리아'라 불리는 열대식물

▲  스코파리움호주매화(마누카)
이름도 무지하게 어렵고 생김새도 요상한 나무로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가
고향이다. 최대 3m까지 자란다고 하며, 잎과 가지에서 오일을 추출한다.

▲  만지면 꽤 아플 것 같은 선인장 무리들
저들은 생긴 것 자체가 단단한 무기이다.

▲  벌써 휴식기에 잠긴 무궁화원
130여 종의 무궁화가 향연을 펼치는 곳이나 계절 관계로 벌써부터
휴식에 들어가 잠잠한 모습이다.

▲  무궁화원 부근에 닦여진 돌탑

▲  영국정원과 가로수


▲  영국정원과 늘씬하게 솟은 가로수들
영국(잉글랜드) 양이(洋夷) 스타일의 자연풍경식 정원의 소박함과 아름다움을
수목원 구석에 구겨 넣었다. (바로 옆에 억새원이 있음)

▲  야생화원
이 땅에 자생하는 야생화를 잔뜩 머금은 공간으로 그중에서
구절초(九節草)가 제일 많이 아른거린다.

▲  구절초의 앳되고 청초한 미소가 깃든 야생화원

▲  야생화원의 풍경 하나 (커다란 돌과 식물, 꽃들)

▲  프랑스정원(오른쪽)과 억새원(왼쪽)
영국정원이 있으니 그에 대비되는 프랑스정원도 그 옆에 구겨 넣었다.

▲  향기원
이곳에는 오감을 흥분시키는 다양한 허브식물과 약용식물, 식용식물 등이
닦여져 있다. 이들은 자원봉사자들이 정성을 들여 조성했다.

▲  항동철길 쪽문 방향

후문을 통해 푸른수목원으로 들어와 수목원 내부를 고루고루 둘러보고 항동철길 쪽문으로 나
갔다. 일몰이 턱 밑이라 흐리게 나오거나 별로인 사진이 적지 않아 수목원의 ¼> 정도의 분량
은 본글에서 쿨하게 뺐다. 나머지는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에 다시 인연을 지어 별도의 글에
서 채울 생각이다. (생각에서만 멈출 수도 있음)



 

♠  서울에서 유일한 철길 명소, 항동철길(오류선)

▲  푸른수목원 남쪽을 지나는 항동철길 (수목원 정문 방향)

푸른수목원 바로 남쪽에는 철길이 지나고 있다. 속세에서는 그 철길을 항동철길이라 부르는데
, 정식 명칭은 오류선(梧柳線)으로 오류동역(1호선)에서 광명시 옥길동에 있던 경기화학을 이
어주던 4.5km의 화물열차 전용 단선 철로이다. ('경기화학선'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음)

경기화학주식회사는 이 땅 최초의 비료 공장으로 1954년 옥길동에 설립되었다. (그 시절 지명
은 '부천군 소래면 옥길리') 원료와 비료 운송을 위해 1957년 9월 26일 철길을 닦기 시작해
1959년 5월 30일에 완성을 보았는데, 경기화학 외에도 한때 오류동에 있던 삼천리연탄공장과
동부제강도 이 철로의 신세를 졌다.
경기화학은 울주 온산공장으로 통합, 이전되면서 광명 공장은 문을 닫았으며, 그로 인해 열차
가 다닐 일이 거의 없어지면서 완전 한가한 신세가 되었다. (동부제강과 삼천리연탄공장도 다
른 곳으로 이전됨)
그렇게 열차의 기적소리도 사라지고 열차의 바퀴자국도 녹이 슬면서 철로에는 잡초가 덥수룩
하게 끼었으며, 무쓸모급 철길로 전락했지만 주변에 천왕산공원, 푸른수목원이 조성되면서 그
들을 수식하는 철길 명소로 덕을 보게 되었고, 2014년 이후 방송매체에서 이곳을 줄기차게 홍
보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항동철길은 오류동역에서 1호선 경인선에서 살짝 갈라져 나와 서해안로와 오리로가 만나는 광
덕4거리를 지난다. 여기서부터 뚜벅이들이 거닐 수 있다. (광덕4거리~오류동역 구간은 접근
금지) 오리로11길 골목길이 바로 남쪽에 붙어있으며, 금강수목원아파트와 맞닿은 철길 북쪽에
는 짧게 숲길을 닦아놓아 눈길을 부드럽게 배려했다.
철길은 주택가의 끝인 우창굿모닝아파트를 지나면 숲에 감싸인 야트막한 고갯길을 지난다. 천
왕산 산세가 움푹 낮아진 곳에 산의 살을 파서 생긴 틈으로 그 고개를 지나면 푸른수목원 항
동철길 쪽문과 천왕산 등산로가 나온다. 그들을 지나면 푸른수목원 정문이 나오며, 항동우남
퍼스트빌까지 이동할 수 있다. 허나 그 이상은 곤란하다.
 
철길에 잡초가 덥수룩하고 골목길과 바로 붙어있어 열차도 완전히 등을 돌린 철길처럼 보이지
만 가뭄에 콩 나듯 화물열차가 지나간다. 주택가와 뚜벅이길이 바로 옆에 붙어있어 폭주는 하
지 못하고 천천히 지나가지만 그래도 조심은 해야 된다. 그것만 유념한다면 철길 산책은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또한 열차가 아주 드문드문 지나가므로 산책 중에 열차를 만난다면 꼭
복권을 사보기 바란다. 그만큼 열차를 보기 힘들다.
한때 이 철길을 두고 관광지로 두느냐 안전을 위해 접근 불가로 봉인하느냐를 두고 말이 많았
으나 이제는 관광지로 크게 무게가 쏠리고 있다.

이 땅에 철길 명소가 여럿 있지만 서울은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옛 경춘선 철길과 옛 경의
선 철길은 폐선된 철로라 제외) 게다가 주거지와 골목길 속을 거리낌없이 지나가므로 매우 친
숙하게 다가온다. 철길 주변 풍경도 주택가와 자연(천왕산, 푸른수목원)이 어우러진 모습이라
가히 싫지는 않다. 특히 우창굿모닝아파트에서 푸른수목원으로 넘어가는 나무에 감싸인 그늘
진 고갯길은 이곳의 백미로 소박한 자연 풍경을 보여준다.


▲  푸른수목원 남쪽을 지나는 항동철길 (수목원 정문 방향)

▲  푸른수목원 남쪽을 지나는 항동철길 (오류동 방향)

▲  항동철길의 유일한 간이역(簡易驛), 항동철길역

항동철길에도 간이역이 있었다. 바로 항동철길역이 그것이다. 간이역이라고 하지만 정작 이곳
에 바퀴를 멈추는 열차는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무늬만 역이다. 항동철길이 관광지로 뜨고 바
로 옆에 푸른수목원이 들어서면서 수식용으로 달아놓은 장식물이기 때문이다.
요즘 인기가 높은 레일바이크(Rail bike) 명소로 삼아도 좋을 듯 싶으나 화물열차가 랜덤 수
준으로 지나다녀 그것도 여의치 않다.

역무원 모자를 쓴 귀여운 개모형 옆에는 하얀 피부로 된 조그만 역명 간판이 달려있는데, 동
쪽 역은 무려 개성(開城), 서쪽 역은 해남(海南)으로 나와있다. 여기서 개성과 해남이 그렇게
나 가까웠던가? 갑자기 나의 둔한 돌머리에 혼돈이 온다. 해남은 비록 철도는 들어가지 않으
나 시외직행버스와 승용차로 언제든 갈 수 있지만 개성은 분명 우리 영역임에도 이상하게 70
년 이상 금지된 땅으로 봉해져 전혀 갈 수가 없다. 거리는 해남보다 개성이 훨씬 가까움에도
말이다. (항동철길에서 해남까지 400여km, 개성은 체감 거리가 달나라보다 훨씬 멈)

* 항동철길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2동, 항동


▲  아무것도 정차하지 않는 간이역, 항동철길역 주변

▲  천왕산의 북쪽 틈을 지나는 항동철길 (오류동 방향)
철길을 닦고자 산세가 낮은 이곳을 손질했다. (나쁘게 말하면 천왕산 북쪽
산줄기를 철길로 끊어버림) 철길 좌우로 뚜벅이길이 닦여져 있는데
뚜벅이길로 가던 철길로 가던 그건 각자의 취향대로 하면 된다.

▲  천왕산의 북쪽 틈을 지나는 항동철길 (푸른수목원 방향)
항동철길을 끝으로 늦가을 초입에 벌인 푸른수목원, 항동철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4년 4월 1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24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부산의 소금강, 금정산 금강공원 겨울 나들이 <동래온천 온정개건비, 임진동래의총, 금정사>

부산의 소금강, 금강공원


' 부산의 소금강을 거닐다. 금정산 금강공원 '
금강공원 소나무숲
▲  금강공원 소나무숲
 



 

새해를 코앞에 둔 12월 끝 무렵의 어느 덜 추운 날, 우리나라의 2번째 대도시이자 천하
제일의 항구 도시인 부산(釜山)을 찾았다.

이번 부산 나들이는 운 좋게 얻은 수서고속전철(SRT) 무료 쿠폰을 이용해 아주 기분 좋
게 다녀왔는데, 새벽의 차디찬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 7시에 수서역에서 부산으로
가는 고속전철(SRT)에 몸을 싣고 2시간 20여 분을 달려 경부선의 남쪽 종점인 부산역에
두 발을 내렸다.

부산은 북쪽으로 울산(蔚山) 울주군, 서쪽은 경남 창원(昌原)과 맞닿아 있으며, 동쪽은
동해바다에 접해 있고, 남쪽은 바다 건너 대마도(對馬島)에 이른다. 벌써 70번 넘게 인
연을 지은 곳이라 딱히 땡기는 미답처(未踏處)가 없어 아주 부질없는 추억팔이도 할 겸,
가슴을 시리게 했던 옛 추억이 아련히 깃든 몇 곳을 그날의 메뉴로 삼았다.

부산에 이르자 제일 먼저 서면(西面) 부근에 자리한 선암사(仙巖寺, ☞ 관련글 보기)를
둘러보고 즐거운 추억이 여러 겹이나 쌓여있는 해운대(海雲臺)로 넘어가 늦은 점심으로
소고기국밥 1그릇을 말았다.
그렇게 시장한 뱃속을 달래고 저 앞에 아른거리는 해운대 해변도 간만에 가볼까 했으나
해가 짧은 시기라 쿨하게 접고 해운대역(2호선)에서 부산시내버스 31번(송정↔모라주공
아파트)을 타고 동래(東萊)로 넘어가 온천장 뒤쪽에 있는 금강공원을 찾았다.

동래의 뜨거운 현장인 온천장(溫泉場, 동래온천지구)을 지나다가 문득 생각나는 존재가
있어 잠시 금강공원을 접어두고 온천장 거리를 배회하니 나를 여기로 부른 용각과 온정
개건비가 활짝 마중을 나온다.



 

♠  동래온천의 빛바랜 일기장과 온천 용왕신의 공간
온정개건비(溫井改建碑)와 용각(龍閣)


▲  온정개건비(부산 지방기념물 14호)와 욕탕으로 쓰였던
옛 석조(石槽)


천하 제일의 온천으로 오랫동안 명성이 높았던 동래온천(東萊溫泉)은 해운대온천과 더불어 부
산 지역의 대표적인 온천이다. 동래온천 일대를 흔히 온천장이라 부르고 있으며, 동래 지역의
뜨거운 혈맥이자 꿀단지 같은 존재이다. <온천은 온정(溫井), 탕천(湯泉)이라 불리기도 했음>

동래온천이 속세를 향해 언제부터 뜨거운 맛을 보여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신문왕(神
文王, 재위 681~692) 시절 재상을 지냈던 충원공(忠元公, 김충원)이 683년 장산국(萇山國) 온
천에서 목욕하고 성으로 돌아올 때 굴정역(屈井驛) 동지(桐旨) 들판에서 쉬었다는 삼국유사(
三國遺事) 기록이 있다. 여기서 장산국온천이 동래온천이라고 하니 적어도 신라 중기부터 온
천으로 쓰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온천물이 얼마나 좋은지 계란이 익을 정도로 물이 뜨겁고 병든 사람이 목욕을 하면 병이 낫는
다고 하며<온정개건비에 '탕에 들어가 목욕하면 모든 질병을 고친다'는 내용이 강조되어 있음
> 고려 후기 문신(文臣)인 정포(鄭誧, 1309~1345)가 이곳을 다녀가 온천에서 받은 감동을 시
로 남기기도 했다.

온천이 옛날부터 전해 내려와 욕실이 지금까지 남아있네
물줄기 오는 곳 멀지 않으니 욕조가 항상 따뜻하네
1년을 질병에 시달린 몸 반나절 목욕으로 씻은 듯하네


1617년에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가 중풍을 치료하고자 제자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
은 적이 있었다. 그는 정포의 후손이기도 한데 동래부사(東萊府使)와 지역 선비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30일이나 머물면서 온천욕을 41회나 했다. 그의 동래 나들이는 제자들이 세심
하게 정리하여 기록을 했으니 그것이 바로 '봉산욕행록(蓬山浴行錄)'이다. <여기서 봉산은 동
래의 별칭임>
그 기록에 따르면 동래온천에는 신라 제왕이 만들었다고 전하는 돌로 된 욕조가 있었으며, 욕
조 하나는 5~6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욕조 윗부분 돌구멍에서 온천수가 나왔고 소문
대로 너무 뜨거워 손발을 급하게 담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온천 본전을 뽑고 그해 9월 4일 고향 칠곡(漆谷)으로 돌아왔는데, 안색과 기혈이 전보
다 좋아져 사람들이 목욕의 효과라고 찬양했다. 정구는 그의 조상인 정포처럼 동래온천의 덕
을 톡톡히 본 것이다.

1691년 온천의 옛 천원(泉源) 부근을 파서 새로운 천원을 발견해 돌로 다진 2개의 욕탕과 욕
사(浴舍)를 새로 지었다. 1730년과 1740년에 중수했으나 건물이 낡고 탕까지 막히자 1765년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 1713~1767)가 크게 손질하여 남탕과 여탕을 나눈 9칸짜리 건물을 지
으니 그 모습이 마치 상쾌하고 화려해 꿩이 나는 것과 같았다고 했다.
동래 지역의 큰 경사였던 그 중수를 영원히 기리고자 1766년 온정개건비를 세웠으며, 비문(碑
文)은 동래 유생인 송광적(宋光迪)이 작성했다.

비석의 몸매는 높이 1.47m, 폭 64cm, 두께 21cm로 10행x16자가 쓰여져 있으며, 그 앞에는 욕
조처럼 생긴 석조가 누워있으니 그가 바로 조선 후기에 쓰였던 욕조(浴槽)로 유일하게 1기만
남아있다. 거의 1인용 수준인 저 탕에 몸을 푹 끓이는 기분은 과연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온정개건비 자리에서 온천수를 뽑아 올렸으며, 이후 물 뽑는 자리가 바
뀌면서 지금은 동래온천의 과거를 보관하는 공간이 되었다.


▲  삼문으로 이루어진 용각의 정문, 온정용문(溫井龍門)

온정개건비와 옛 욕조는 용각 뜨락에 북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용각은 온천수를 관리한
다는 용왕<龍王, 용왕신>이 봉안된 건물로 매년 음력 9월 9일에 온천수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용신제(龍神祭)를 지내며 착한 품질의 온천물이 계속 나오기를 염원한다.
온천장의 성역과 같은 곳이라 관리와 정성이 대단하며, 제삿날과 일부 날을 제외하고 용 문신
이 굵게 그려진 온정용문은 굳게 닫혀 있어 내부 진입은 거의 어렵다. 허나 붉은 피부로 이루
어진 키 작은 담장 너머로 온정개건비와 옛 욕조, 용각 모두 확인이 가능하니 굳이 무리를 하
면서까지 담을 넘을 필요는 없다.


▲  용왕이 봉안된 팔작지붕 용각

용각을 둘러보고 잠시 넣어두었던 금강공원으로 길을 향했다. 온천장을 벗어나 '금강공원로'
를 따라가던 중, 계속 뭔가 허전한 구석을 느꼈다. 골목에 꽉 차게 들어앉아 금강공원의 관문
역할을 했던 망미루(望美樓)가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다. '이상하다 어디 갔지?' 싶어 고개를
몇 번이나 두리번거렸는데 알고 보니 2014년에 그의 제자리였던 동래부 동헌(東軒)으로 이전
되었다.

금강공원로 끝에는 금정산(金井山)의 동쪽 밑도리를 가르는 '우장춘로'가 있는데, 그 길로 접
어들면 금강공원 정문이 마중을 나온다.

* 온정개정비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135-26 (금강로124번길 23-17)



 

♠  부산의 작은 소금강(小金剛), 금강공원(金剛公園)

▲  금강공원 정문
정문 옆에 입장료를 징수했던 옛 매표소의 흔적이 남아있다.


금정산 동남쪽 자락에는 부산의 소금강이자 대표적인 공원으로 추앙을 받는 금강공원이 넓게
누워있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기암괴석, 계곡이 어우러진 수려한 절경을 자랑해 마치 작은 금강산(金剛
山)과 같다 하여 예로부터 소금강이라 불렸는데, 1940년 왜정(倭政)에 의해 공원으로 개발되
어 금강원이라 불렸으며, 1972년 부산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 공원 전체가 문화재 보호구역이
되었으나 1993년 지방기념물에서 정리되면서 문화재 보호구역에서 해방되었다.
1973년 6월부터 입장료를 받으면서 31년간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쳐다보았으나 2004년
7월 무료로 바뀌었다.

공원의 면적은 2,220,372㎡로 금정산 540m 고지까지 빠르게 이어주는 금강케이블카가 있으며,
임진동래의총과 금정사, 부산해양자연사박물관, 부산민속예술관, 이영도 시비(詩碑), 지석영
선생 공덕비, 허종배선생 기념비 등의 많은 명소를 품고 있다. 동래 중심지에서 강제로 이전
된 독진대아문과 이섭교비, 내주축성비 등도 잠시 이곳의 신세를 졌으나 모두 제자리로 돌아
가 지금은 임진동래의총만 남아있다.

마치 아무렇게나 놓여진 바위가 계곡과 어우러져 예사롭지 않은 풍경을 빚어내고 있으며, 거
미줄처럼 닦여진 산책로가 그 절경 사이를 가르고 있어 나들이를 심심치 않게 해준다. 금정산
까지 오르는 산길이 있으나 빠르고 편하게 가고 싶다면 금강케이블카를 이용하면 되며, 공원
안쪽에는 소나무 숲을 지붕으로 삼은 둘레길이 펼쳐져 있다.

이 공원은 벌써 3번째 인연으로 상큼한 추억이 서린 현장이기도 하다. 그 현장을 이렇게 홀로
다시 찾으니 기분이 좀 거시기하다. 공원은 거의 그대로인데 예전의 추억은 흩어진 나날의 일
부가 되어 기억 조차 희미하고 '나'라는 존재도 그 사이 적지 않게 나이가 누적되면서 볼품이
계속 떨어지고 있으니 모든 것이 참 덧없기만 하다.

* 금강공원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1동 27-9 (우장춘로 155 ☎ 051-860-7880)
* 금강공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종두법(種痘法)으로 유명한 지석영(池錫永) 선생 공덕비

송촌(松村) 지석영(1855~1935)은 서울 출신으로 부산과도 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20대 초
반 부산 제생원(濟生院)에서 종두법(種痘法)을 익혀 이 땅에서 천연두를 완전히 뿌리뽑는데
공헌했으며, 1895년에는 동래부사로 부임해 선정(善政)을 베풀고, 왜인(倭人)의 밀수 무역을
때려잡기도 했다.


▲  거북바위 (금강케이블카 남쪽)
거북이 몸을 잔뜩 움츠린 듯한 모습이다.

▲  금강공원의 자랑, 소나무 숲길

▲  대자연의 돌 창고는 아니었을까? 돌과 바위로 가득한 금강공원
금강공원의 제일 큰 매력은 공원 곳곳에 널린 기묘하게 생긴 바위와
돌덩어리들이다. 왜정이 이곳을 공원으로 꾸미면서 그들의 어설픈
조경(造景) 방식에 따라 배치한 바위도 있지만 상당수는
거의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  제자리로 돌아간 독진대아문(獨鎭大衙門)터

독진대아문은 동래부 동헌의 바깥 대문으로 왜정 때 이곳으로 강제 이전되었다. 2014년 12월
망미루와 함께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그가 80여 년 동안 발을 붙였던 자리에 작게 표석을 세워
떠나간 그를 추억한다.

독진대아문 안쪽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강제로 옮겨진 이섭교비(利涉橋碑)와 내주축성비(來州
築 城碑)가 있었으나 2012년 9월 다들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섭교비는 낙민치안센터 앞 둑,
내주축성비는 원래 자리(동래경찰서)가 어려워 동래읍성 북문으로 옮겨짐>


▲  빛바랜 동래금강원 표석(표지석)
독진대아문터를 지나면 왜정 때 세워진 동래금강원 표석이 모습을 비춘다.

▲  금강공원 연못
금정산이 베푼 물을 막아서 만든 그림 같은 연못으로 연못 한복판에
돌다리를 다져 풍경을 한껏 돋군다.

▲  북쪽에서 바라본 연못
물 색깔이 유난히 푸르다. 그 속에는 온갖 물고기들이 유유자적하며
그들의 삶터를 지킨다. (수심이 2~3m 정도 됨)

▲  서쪽에서 바라본 연못

▲  소나무숲을 가르며 흘러가는 금강공원 둘레길

예전 금강공원에 왔을 때는 딱 독진대아문 자리까지만 가고 길을 돌렸다. 그 이상은 딱히 볼
거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여 이번에는 그 선을 넘어 미답의 공간으로 남아있
던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 보았는데, 푸른 연못과 돌다리, 그리고 소나무숲과 둘레길까지 오히
려 독진대아문 밑보다 풍경이 훨씬 진국이었다. 나의 그릇된 생각이 공원의 진풍경을 만나지
못하게 시야를 가렸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금강케이블카를 타고 금정산성까지 훌쩍 올라가고 싶었지만 시간이 되지 않는
다는 이유로 공원 위쪽에서 길을 접고 북쪽 방향 둘레길로 들어섰다.
둘레길은 그윽하게 우거진 소나무들이 하늘을 훔치며 늘씬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데, 그들이
베푼 솔내음이 속세에서 오염된 오각과 마음을 제대로 어루만져준다. 중간에 계곡과 연못, 쉼
터가 있으며, 걷는 길이 그리 지루하지는 않다.


▲  계곡과 만나는 금강공원 둘레길
수심이 얕은 조그만 소(沼)가 길 옆에 펼쳐져 있다.

▲  소나무로 가득한 금강공원 둘레길 ①

▲  소나무로 가득한 금강공원 둘레길 ②

▲  소나무로 가득한 금강공원 둘레길 ③

▲  소나무로 가득한 금강공원 둘레길 ④

▲  계곡을 막아서 다진 금강공원 북쪽 연못

금강공원 둘레길을 이 정도 거닐고 임진동래의총을 보고자 동쪽으로 내려갔다. 부산민속예술
관 옆을 지나 남쪽으로 빠지면 태극 문신을 지닌 기와집 문(외삼문)이 나오는데 그 문을 들어
서면 그 길의 막다른 곳에 금강공원의 유일한 사적(史蹟)인 임진동래의총이 있다.



 

♠  금강공원의 문화유산들 (임진동래의총, 금정사)

▲  임진동래의총 정문인 외삼문(外三門)

외삼문은 오른쪽 문만 반 정도 열려 있었다. 태극마크가 요동치는 가운데 문과 왼쪽 문은 제
향이 있는 날에만 주로 열리므로 평소에는 굳게 입을 봉하고 있다.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20기의 늙은 비석들이 1열로 늘어서 조촐하게 비석거리를 이루고
있다. 이들 비석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들로 동래 시가지 정비로 이곳으로 강제 집합된 것
인데, 대부분 동래부사의 선정비(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이다.
지붕돌을 지닌 비석과 대머리처럼 허전한 비석, 푸른 피부의 비석까지 부산 인구만큼이나 다
양한 모습들을 보이고 있는데, 저들 중 진정으로 선정비(불망비)를 받을 자격이 되는 목민관
(牧民官)이 얼마나 있을지 침묵으로 일관하는 비석들에게 묻고 싶다. 아마도 적지 않은 비석
들이 그와 상관없이 지어져 외람되게 선정비를 칭하고 있을 것이다.

▲  외삼문 안쪽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비석들 (모두 20기임)

▲  임진동래의총으로 인도하는 길 ▲
외삼문에서 내삼문 구간 길바닥에는 박석이 꼼꼼히 입혀져 있다. 무덤 주위로
소나무가 삼삼하여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하며, 길 왼쪽
담장 너머는 금정사이다.

▲  소나무 그늘에 자리한 임진동래의총 내삼문(內三門)
내삼문도 오른쪽 문만 반 정도 열려있다.

▲  임진동래의총 충혼각(忠魂閣)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임진동래의총이 이곳에 안착했던 1974년에
지어졌다. 충혼각 바로 뒤쪽 높은 곳에 임진동래의총이 있으며, 보통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서 무덤에 예를 표하고 왼쪽 계단으로 내려오면 된다.

▲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 - 부산 지방기념물 13호

임진동래의총은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동래 사람들이 안
장되어 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진(釜山鎭)을 점령한 왜군은 동래부의 중심인 동래성을 공
격했는데, 성을 지키는 유리한 입장임에도 왜군의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 앞에 금방 털리고 만
다.
이때 전사하거나 살해된 동래성 군사와 백성들의 시신은 대부분 남문 해자(垓子)와 그 부근에
버려졌는데,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동래읍성을 수축했을
때 옛 남문터에서 적지 않은 유골과 포환(砲丸), 화살촉이 발견되었다. 하여 그 시신을 거두
어 삼성대(三姓臺) 서쪽 구릉지(내성중학교 부근)에 6개의 무덤을 만들어 안장하고 '임진전망
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이란 비석을 세웠다. 그것이 이 무덤의 첫 이름이다.

조선 조정에서 제사 비용을 위해 제전(祭田)을 내리고 동래향교에 제사를 맡겨 매년 한가위에
제를 지내게 했으며, 순절일(4월 15일)에는 관에서 장사(壯士)를 보내 제사를 지냈다.
왜정은 토지개간을 이유로 무덤을 영보단(永報壇, 복천박물관 자리) 부근으로 강제 이장시켰
는데, 이후 비석도 그곳으로 추방시켰다. 그러다가 1974년 복천동 개발로 다시 짐을 싸고 지
금의 자리에 안착했으며, 그때 '임진동래의총'으로 이름을 갈았다. 즉 임진왜란 때 동래성에
서 순절한 이름 없는 이들의 무덤이란 뜻으로 여기서 '총(塚)'이란 주인을 모르는 무덤에 붙
이는 이름이다.
제향은 동래성이 함락된 음력 4월 15일에 무덤 밑에 있는 충혼각에서 지내고 있으며, 동래구
청에서 직접 주관하고 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임진동래의총

임진동래의총과 충혼각은 동래읍성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왜정에 의해 제자리를 떠났
던 망미루와 독진대아문, 이섭교비 등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는 기쁨을 누렸지만 임진동래의
총은 제자리에 이미 건물이 들어찬 상태이다. 그렇다고 그 부근으로 옮기자니 무덤의 덩치도
크고 딸린 식솔(충혼각, 외삼문, 내삼문, 돌담)도 많아 그들을 수용할 자리가 여의치 않다.
하여 무덤만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이곳에 눌러 살고 있다. 허나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이곳도 자리가 괜찮아 계속 머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무덤 앞에는 제물을 올릴 수 있는 상석(床石) 1기가 누워 있으며, 무덤 밑도리에는 호석을 둘
렀는데, 무덤 정면 밑에는 제를 지내는 충혼각이 있고, 뒤쪽에는 담장을 둘러 성역의 경계를
구분 지었다. 이 담장은 외삼문에서 임진동래의총까지 빙 둘러져 있다.

* 임진동래의총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산 17-7


▲  충혼각 옆구리에 있는 '임진전망유해지총' 비석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이 세운 것으로 비문은 그가 작성했다. 비석 높이는 103cm,
너비 45cm로 앞면에는 '임진전망유해지총' 8자를, 뒷면에는 10행 분량으로
무덤의 내력을 기록했다.

▲  금정사 보제루(金井寺 普濟樓)

임진동래의총을 둘러보고 바로 남쪽에 자리한 금정사로 넘어갔다. 비록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서로를 이어주는 문이 닫혀져 있어 외삼문으로 나가 보제루로 빙 돌아가야 된다.

금정사 자리는 원래 동래부 사형장으로 죄인들의 목을 가차없이 썰었던 으시시한 곳이다. 바
로 그 현장에 1954년 승려 금우가 그 원혼을 달랜다며 인적도 거의 없던 이곳에 절을 세웠다.
석주가 중건하여 선학원(禪學院)에 등록했으며, 현재 대웅전과 보제루, 칠성각, 요사 등 5동
정도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이 있는데 바로 그를 보고자 간만에 금정사에 발을 들였다.

* 금정사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282 (우장춘로 157-59 ☎ 051-555-1208)


▲  소나무숲에 감싸인 고적한 금정사 경내 (정면 건물이 대웅전)

▲  보제루 부근에 자리한 5층석탑

▲  대웅전 옆구리에 있는 칠성각(七星閣)


▲  대웅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115호

금정사의 유일한 문화유산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멀리 전북 완주군(完州郡)에서 넘어온 것
이다.
1677년 혜희(慧熙)를 중심으로 한 7명이 제작하여 고산현(완주군 북부) 대둔산(大芚山) 용문
사(龍門寺)에 봉안했던 것으로 그 절이 사라지자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이곳에 안착했다. 좌우
에 조그만 협시보살(夾侍菩薩)은 그의 허전한 옆구리를 채워주고자 근래 붙여놓은 것으로 서
로간의 덩치가 너무 차이가 나 마치 아비와 어린 자식들이 나란히 앉아 가족 사진을 찍는 것
같다.

머리는 나발(꼽슬)로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툼히 솟아있으며, 신체에 비해 머리와 얼
굴이 지나치게 크다. 고개는 앞으로 조금 내밀어 밑을 굽어보는 모습인데, 이는 조선 후기 불
상에서 많이 나타난다.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지그시 정면 밑을 바라보고 있으며,
코와 붉은 입술은 조그맣다.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고, 몸통에는 법의(法衣)가 걸쳐져 있는데, 수인(手
印)은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취하고 있다. 무릎의 너비가 상반신보다 넓어 안정감이 있으
며, 법의가 발까지 모두 가리고 있다.

이 불상이 속세의 주목을 받은 것은 바로 그의 뱃속에서 복장유물(腹臟遺物)이 나왔기 때문이
다. 조성발원문과 후령통, 7종 8점의 경전류, 목판으로 찍어낸 수백 매의 다라니가 쏟아져 나
왔는데, 조성발원문을 통해 그의 탄생시기와 고향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대웅전의 주인 역할
을 하고 있지만 원래는 석가여래상 옆을 지키던 협시상으로 다른 협시상은 전주(全州) 일출암
에 있다고 한다.
후령통에서는 조성발원문 외에 그 시절 흔치 않았던 동으로 만든 오보병(五寶甁)이 나왔고 경
전류에서는 당시 훈민정음(訓民正音) 표기법이 남아있어 국문학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어준
다. 게다가 판각 연대도 나와 있어 조선시대 만다라 연구에도 좋은 단서를 제공해준다. 바로
옛 사람들의 그런 배려가 불상의 과거는 물론 그 시절의 여러 상황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고
그것들이 이 아미타불을 더욱 돋보이게 한 것이다.
복장유물은 절에서 따로 관리하고 있어 관람은 거의 불가능하나 그들을 오랫동안 품었던 아미
타여래좌상은 이렇게 대웅전에서 중생들을 맞이하고 있다.

금정사를 둘러보니 벌써 17시가 넘었다. 어둠의 기운이 스르륵 내려와 밝은 기운을 잡아먹으
니 햇님도 그 등쌀에 떠밀려 서둘러 퇴근 준비를 한다. 비록 낮은 짧지만 그날 목적한 정처(
定處)를 싹 둘러보니 은근히 배가 부르다. 더 이상 욕심을 부릴 필요도 없고, 당일 일정으로
콩 볶듯 내려왔기 때문에 다시 나의 제자리로 돌아가야 된다. 아무리 부산에서 서울까지 고속
열차가 2시간대로 연결해준다고 하지만 여전히 먼 거리이기 때문이다.

온천장 부근에서 저녁으로 순대국밥을 섭취하고 지하철로 구포역(龜浦驛)으로 이동하여 서울
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 고된 몸을 실었다. 부산으로 올 때는 고속열차(무료 쿠폰 사용)로
왔으나 제자리로 돌아갈 때는 느림의 미학도 느낄 겸, 그리고 천하에서 가장 빈약한 내 지갑
의 사정도 고려할 겸, 빨간색 무궁화호를 이용했다.
열차표를 판매하는 구포역 역무원이 은근히 고속열차를 권하며(무궁화호를 타면 지하철 막차
못탑니다. 이런 식으로) 나의 지갑을 자꾸 흥분시키려고 했지만, 빨리 가나 느리게 가나 서울
만 가면 되고 서울의 교통과 지리는 지구에서 본인을 능가할 사람이 없으므로 흔쾌히 거절했
다. <역무원의 지하철 막차 설교에 속으로 몇 번을 웃었는지 모름>

서울역까지는 5시간이 걸려 자정 너머에 도착했으며, 집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나의 제자
리로 돌아왔다. 그러고 문득 깨어보니 난 내 방에 있었다. 부산에 갔다온 것이 아리송할 정도
로 말이다. 그렇게 그날은 흩어져 나의 기억력까지 햇갈리게 만든다.

이렇게 하여 벌처럼 날라가 개미처럼 올라왔던 부산 연말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3년 11월 21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23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망우리공동묘지를 거닐다. 망우산~망우역사문화공원~구리둘레길 늦가을 나들이 (사색의길, 태허 유상규묘, 망우산3보루, 오세창묘, 방정환묘)

망우산, 망우역사문화공원 늦가을 나들이



' 망우산, 망우역사문화공원 늦가을 나들이 '

망우역사문화공원 사색의길 동쪽 구간
▲  망우역사문화공원 사색의길

송촌 지석영묘와 지성주묘

죽산 조봉암묘

▲  지석영 선생묘와 지성주묘

▲  죽산 조봉암 선생묘



 

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대표 성지(聖地)이자 서울의 동쪽 지붕인 아차산(峨嵯山) 산줄기
는 남쪽은 아차산(295.7m), 중간은 용마산(龍馬山, 348m), 북쪽은 망우산(忘憂山, 281m
)으로 이루어진 남북으로 길쭉한 산맥이다. <옛날에는 중랑구 북부에 자리한 봉화산(烽
火山)까지 아차산의 일원이었음>

아차산과 용마산은 나의 즐겨찾기 뫼로 아침부터 저녁(야간 등산)까지 고루고루 찾아가
안긴 횟수만 무려 300회가 넘는다. 허나 망우산은 이상하게도 몸과 마음이 그리 가지를
않아 찾은 횟수는 거의 손에 꼽는다. 그렇다고 망우산이 매력과 볼거리가 부실한가. 그
것도 전혀 아니다. 고구려가 남긴 보루 유적이 4곳(시루봉보루 포함)이 전하고 있으며,
망우산에 상당수를 차지하는 망우역사문화공원에는 20세기 초/중기 유명 인물의 무덤이
많이 깃들여져 있다. 그것으로도 망우산의 매력은 차고 넘친다.
하여 그동안 소홀했던 망우산을 제대로 익히고 그곳의 미답처(未踏處)도 많이 정리하고
자 늦가을이 절정을 이루던 11월 한복판에 그의 품을 찾았다.


▲  망우저류조공원에서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인도하는 숲길



 

♠  망우역사문화공원(망우리묘지) 입문

▲  무덤들이 수북히 쌓인 망우저류조공원 동쪽 (망우역사문화공원)

이번 망우산 나들이는 망우리고개 서쪽에 자리한 망우저류조공원에서 시작했다. 그 공원에서
무덤들이 즐비한 동쪽 숲길을 4~5분 오르면 망우리고갯길(망우로)에서 올라온 2차선 길이 나
오는데, 그 길로 들어서 남쪽으로 조금 가면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가벽이 나온다.


▲  망우역사문화공원 인물가벽 직전 (사색의길 북쪽 시작점)

서울의 거대한 동쪽 지붕인 아차산 산줄기의 북쪽을 맡고 있는 망우산은 서울 중랑구와 경기
도 구리시(九里市)에 걸쳐있는 뒷동산 같은 뫼이다.
남북으로 길쭉한 그의 품에는 망우역사문화공원이 넓게 둥지를 틀고 있는데, 그는 832,800㎡
에 덩치를 지닌 큰 공원이다. 지금은 달달한 뒷동산 공원으로 살아가고 있으나 그의 정체는
이름만 들어도 염통이 후덜덜한 망우리공동묘지(망우리묘지)이다. 서울의 유일한 공동묘지로
망우리고개부터 망우산 남쪽 자락까지 7,400여 기의 무덤을 지니고 있는데, 망우리묘지가 생
겨난 사연과 내력은 대략 이렇다.

고약했던 왜정(倭政) 시절, 서울 주변에는 경성부(京城府, 서울시)가 관리하는 이태원(梨泰院
) 공동묘지와 미아동(彌阿洞, 미아리) 공동묘지가 있었다. 왜정은 미아리묘지 과부하에 대비
하고 이태원묘지 일대에 주택을 조성하고자 1933년 2월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땅인 망우산
일대 임야 75만 평을 확보했는데, 그중 52만 평에 묘역을 닦기로 하고 그해 5월 27일 문을 여
니 이것이 망우리묘지의 시작이다.

37,000여 기를 지닌 이태원묘지는 1935년부터 미아리와 망우리로 분산 이장되었는데, 연고자
가 있는 무덤은 망우리로, 연고자가 없는 28,000여 기는 은평구 신사동(新寺洞)으로 보내 화
장 처리하고 망우리묘지 북쪽에 합장하여 위령비를 세웠다. 그리고 1938년에는 신촌 노고산(
老姑山)에 있던 노고산공동묘지까지 이곳으로 옮기면서 망우산 전체가 거대한 공동묘지가 되
었다.
왜정이 망우산에 공동묘지를 닦은 것은 서울 시민들의 무덤 수요를 해결하고자 함이지만 망우
리고개 동북쪽에 있는 조선 최대의 왕릉군인 동구릉(東九陵)의 기운을 유린하려는 사악한 의
도도 짙게 깔려있었다.

1971년 8월 7일 건설교통부고시 제465호로 공원 결정고시가 떨어졌으며, 1973년 3월 분묘 한
계치인 28,500여 기(봉분 47,754기)에 이르자 그해 5월부터 무덤 쓰는 것을 금했다. 이후 이
장과 납골을 적극 장려해 지금은 7,400여 기가 남았으며, 지금도 방을 빼는 무덤들이 꾸준하
여 계속 빈 자리가 늘고 있다.

1977년 4월 도시계획시설 공원으로 지정되어 망우묘지공원(망우공원)으로 간판을 바꾸었으며,
1998년 8월 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망우리공원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리고 그해 공원 산책로
인 사색의길(4.7km)을 닦아 세상에 내놓았다.
2005년 12월 27일 서울시고시 제2005-403호로 망우묘지공원 조성 계획이 수립되었으며, 2013
년에 망우리묘지를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2015년에서 2016년까지 망우리공원 인문학길
을 조성했으며, 2020년 7월에는 공원 관리권이 서울시에서 중랑구로 넘어갔다. 그리고 2022년
4월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이름을 새롭게 갈아 지금에 이른다.


▲  사색의길 북쪽 시작점(인물가벽)에서 바라본 망우산
가운데에 봉긋 솟은 뫼가 망우역사문화공원을 온몸으로 품고 있는
망우산 정상이다.


비록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이름과 성격이 세탁되었으나 공동묘지의 기능과 성격은 여전하다.
하여 산 도처에서 무덤들이 아주 쉽게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숲이 매우 삼삼하여 무덤을 포
근히 감싸고 있으며, 사색의길 등 상큼한 숲길이 많고, 풍경도 고와서 거닐기에 아주 좋다.
그러다 보니 무덤은 시각과 마음에 부담이 되는 존재가 아닌 대자연의 수채화에 살짝 녹아든
존재처럼 다가와 그리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게다가 두 귀가 쫑긋 반응을 보일 정도로 명성이 높은 20세기 초/중기 애국지사와 문학가, 정
치인들의 무덤이 30여 기가 전하고 있고, 그중 9기가 국가 등록문화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너른 대륙을 경영했던 고구려가 남긴 보루 유적 4곳(시루봉보루 포함)이 전하고 있어
오래된 볼거리도 넉넉하다.

또한 서울둘레길2코스가 사색의길 서쪽 길을 타고 남북으로 흘러가며, 중랑둘레길, 구리둘레
길, 용마산자락길 등 다양한 숲길이 앞다투어 닦여져 있다. 산세도 거의 완만하고 조망도 일
품이며, 볼거리도 풍부해 걷는 길이 썩 지루하지가 않다. 아니 지루할 틈도 주지 않는다.

* 망우역사문화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 02-2094-
  6800~6803)
* 망우역사문화공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늦가을에 잠긴 사색의길 동쪽 구간

사색의길 북쪽 시작점에는 이곳에 묻힌 유명 인사를 소개한 '인물가벽'이 있다. 여기서 길은
동/서로 갈라지는데, 이들 길은 망우역사문화공원의 대표 숲길인 사색의길(망우순환로, 4.7km
)로 순환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삼한 숲에 묻힌 느긋한 숲길로 이름 그대로 온갖 사색에 잠
겨 거닐기에 아주 좋으며, 유명 인사들의 무덤 대부분이 사색의길 주변에 머물고 있어 이 길
을 중심으로 그들을 찾아 나서면 된다.
나는 망우산2/3보루를 첫 메뉴로 정해서 그곳으로 접근하기 쉬운 사색의길 동쪽 길로 들어섰
다.


▲  은행나무 밑을 지나는 사색의길 동쪽 구간

▲  그윽하게 펼쳐진 사색의길 동쪽 구간

▲  송촌 지석영(松村 池錫永)묘와 지성주(池成周)묘

사색의길 동쪽 구간으로 들어서 야트막한 고갯길을 지나면 망우산2/3보루를 알리는 이정표가
손짓을 한다. 그 길은 망우산2/3보루와 정상으로 이어지는 망우산 능선길로 산길 주변으로 무
덤들이 즐비한데, 안내문을 지닌 무덤이 툭하면 나타나 내 취향을 저격한다. 그중 처음 등장
한 무덤이 종두법으로 유명한 송촌 지석영선생 묘이다.

지석영(1855~1935)은 충주지씨로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 태원(太原)이다. 종두법(種痘
法)으로 워낙 유명하여 의사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는 벼슬을 지냈던 문신(文臣)이었으며,
국문학자로도 크게 활동했던 팔방미인의 인물이다.

10대 시절에는 개화사상가인 강위(姜瑋) 밑에서 유길준(兪吉濬)과 함께 공부했으며, 그때 청
나라에서 건너온 서양의학 번역서를 많이 익혔는데, 특히 E. 제너가 발견한 우두접종법(牛痘
接種法)에 큰 관심을 가지며 천연두 박멸을 위한 기초를 닦는다.
1876년 수신사(修信使)의 수행원으로 왜열도에 간 박영선(朴永善)이 종두법을 배우고 '종두귀
감(種痘龜鑑)'이란 서적을 입수하여 돌아오자 그에게 이를 전수 받았으며, 1879년 10월 부산
으로 내려가 제생의원(濟生醫院) 원장인 마쓰마에(松前讓)와 군의(軍醫) 도즈카(戶塚積齊)에
게 종두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해 12월 말, 두묘(痘苗)와 종두침(種痘針)을 얻어 서울로 오다가 처가 고향인 충주
덕산면에 들려 2살 애기였던 처남에게 종두를 처음으로 실시해 성공을 했다. 하여 처가 마을
어린이 40여 명에게도 접수해 그 동네는 천연두 공포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1880년 조선 조정이 왜열도로 2차 수신사를 파견하자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따라갔으
며, 왜국 내무성 위생국 우두종계소장(牛痘種繼所長)인 기쿠치(菊池康庵)에게 두묘의 제조와
저장법, 독우(犢牛. 송아지)로부터의 채장법(採漿法), 독우사양법(犢牛飼養法) 등을 배우고
두묘까지 얻어 귀국했다.
귀국 후 왜국공사관 의사와 접촉하며 우두 보급에 힘을 기울였으나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이 터지자 왜인(倭人)으로부터 의술을 배웠다는 죄로 체포령이 떨어져 급히 피신했다. 하지
만 그가 설치했던 종두장은 성난 군사들에게 파괴되고 말았다.
그해 10월 개화(開化)를 주장하는 국내외 인사들의 서적을 수집하여 간행하고 각 지방에서 추
천된 사람들에게 각종 문물을 익히게 할 것을 역설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883년 전라도암행
어사로 내려갔던 박영교(朴泳敎)의 요청으로 전주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종두를 실시하면서 종
두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충청우도암행어사 이용호(李容鎬)의 요청으로 공주에도 우두국을 설
치했다.


▲  정면에서 바라본 지석영(왼쪽)묘와 묘비, 그리고 지성주(오른쪽)묘

1883년 3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
으며, 1885년에 그동안 쌓은 경험을 토대로 이 땅 최초의 우두 관련 서적이자 서양의학서인 '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했다.
1887년 개화당 인사들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신지도(薪智島, 전남 완도)로 유배되자 그곳에서
'중맥설(重麥說)'.'신학신설'을 저술했으며, 1892년 서울로 돌아와 이듬해 우두보영당(牛痘保
堂)을 설립하고 접종을 실시했다. 그리고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내무아문(內務衙門)
내에 위생국이 설치되자 종두를 관장하게 되었다.
이후 형조참의(刑曹參議)와 우부승지(右副承旨), 대구판관, 동래부사, 동래부관찰사 등을 역
임했고, 1897년 중추원(中樞院) 2등의관이 되었으나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한
이유로 이듬해 황해도 풍천으로 유배되었다.

1899년 의학교가 설치되자 초대 교장이 되어 교육에 힘썼으며, 종두 및 전염병 예방과 관련된
각종 관제와 규칙을 공포하도록 힘썼다. 그리고 1907년 의학교가 폐지되고 대한의원의육부(大
韓醫院醫育部)로 개편되자 교장직에서 물러나 학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스승 강위의 영향으로 한글(국문)에도 꽤 지식이 깊었다. 하여 국문학교(國文學校) 설립
에 크게 기여했으며, 의학교 학생 모집 때도 국문을 시험과목으로 채택했다. 1905년 '신정국
문(新訂國文)' 6개조를 상소하여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를 설치하게 하고 그 연구위원이 되었
으며, 1909년에 한글로 한자를 해석한 '자전석요(字典釋要)'를 간행했다.
그리고 그해 4월 통감부(統監府)가 의학교육을 왜어(倭語)로 할 것을 요구하자 즉각 의견서를
제출하여 반대했으며, 국채보상연합회(國債報償聯合會) 부소장,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평의
원,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부회장 등으로 활발하게 애국 관련 사회활동을 벌였다. 하여 고
종(高宗)은 그의 공을 인정해 태극장(太極章)과 팔괘장(八卦章) 등을 수여했다.

1910년 8월 이후, 공직에서 물러나 왜정을 등지며 집에서 독서 등으로 여생을 보내다가 1935
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무덤은 작은 봉분과 1962년에 세운 묘비가 전부인 소박한 모습으로 그 옆에는 아들인 지
성주의 묘가 있는데, 비슷한 크기의 봉분과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을 지녔다.

지성주는 경성의전을 나와 내과의사로 활동했으며, 손자인 지홍창은 서울의대 출신으로 박정
희대통령의 주치의를 지냈다. 증손자 또한 내과를 경영해 한의사였던 지석영의 부친부터 무려
5대가 의사로 활동한 뼈대있는 의사 집안이다.


▲  망우산 능선길 (지석영 선생묘~망우산3보루 구간)

▲  망우산 역사의 전망대

지석영선생묘를 지나 망우산 능선길을 더듬으면 조망이 좋은 곳에 '역사의 전망대'란 전망대
가 마중을 한다.
아차산~용마산~망우산에는 고구려와 신라가 닿아놓은 보루 유적과 백제가 쌓은 것으로 전해지
는 아차산성(阿且山城), 영화사와 범굴사(대성암) 등의 늙은 절, 아차산3층석탑과 온달샘석탑
등의 소소한 늙은 존재들, 그리고 근현대 인물이 많이 묻힌 망우리묘지도 품고 있다. 하여 아
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오랫동안 켜켜히 쌓인 역사의 상징성을 기리고자 '역사의 전망대'란
근사한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  역사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구리시 남부 지역과 한강, 강동구, 하남시, 남양주 와부읍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망우산 능선길 (망우산2,3보루)

▲  화가 이인성(李仁星) 묘

역사의 전망대를 지나면 이인성묘가 모습을 비춘다. 이인성(1912~1950)은 대구(大邱) 출신 화
가로 16세 때 방정환 등의 색동회가 주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 나가 '촌락의 풍경'이란 그
림으로 특선에 뽑혀 화가로 진출했다.
왜열도 유학 시절이던 19살에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수채화 '여름의 어느날'로 입선했으며, 23
살 때 조선미술박람회에서 '경주의 산곡에서'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937
년 제16회 선전에서 최연소 추천작가가 되었다.

1945년 이후 이화여중과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가르쳤으며, 1949년 가을 국전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했으나 1950년 38세의 한참 나이로 병사하고 만다. 월간미술 1998년 2월호에는 그를 근대
유화가 1위로 꼽았으며, '경주의 산곡에서','가을 어느 날'을 각각 공동 1위와 7위로 선정해
그를 기렸다.

그의 무덤에는 호석이 둘러진 봉분과 상석, 검은 피부의 묘비, 후학들이 세운 '근대 화단의
귀재'라 쓰인 표석이 있어 외롭지는 않은 모습이다.


▲  애국지사 김봉성(金鳳性) 묘터

김봉성(1900~1943)은 도산 안창호(安昌浩)의 조카사위(도산의 형인 안치호의 사위)이다. 그는
1919년 3.1운동 때 평북 선천군(宣川郡)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해 옥고를 치루었으며, 출옥 후
왜열도로 건너가 1922년 주오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넘어가 1927년 남캘
리포니아대학 경제학과를 수학했으며, 1930년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해 활동했다.

1933년 동아일보 선천지국 기자가 되었고, 1934년 3월에 안치호의 딸인 안맥결(安脈潔, 1901~
1976)과 혼인하여 부부가 안창호가 세운 점진학교의 교사로 일했다. 1938년 동우회(同友會)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으며, 1943년 12월 18일 불의의 연탄가스 중독사고로 딸 김자영과 정
말 허무하게 세상을 뜨고 말았다.

도산과의 인연으로 그의 묘 오른쪽에 안장되었으며, 2005년에 이르러 늦게나마 건국포장을 추
서받았다. 그리고 2016년 4월 28일,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되면서 낙엽이 뒤덮힌 묘터와 비
석만 허전하게 남아 옛 무덤 자리를 지킨다.

김봉성의 부인인 안맥결은 독립운동가 출신의 경찰관으로 숙부인 도산의 뜻을 따라 평생 나라
를 위해 살았으며, 이 땅 최초의 여성경찰서장으로 위엄을 날리기도 했다.


▲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묘터와 묘비 (2022년 이전)

김봉성 묘터 옆에는 안창호의 묘비와 묘터가 있다. 그의 무덤 또한 이곳을 떠난 상태로 지금
은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에 머물고 있다.

이름도 꽤 익은 안창호(1878~1938)는 평남 강서(江西) 출신으로 1894년 상경하여 구세학당에
서 공부했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했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발전함에 따라 평양에
서 관서지부를 세우고 쾌재정(快哉亭)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백성들에게 자각(自覺)을 호
소했다.
1899년 강서군 화리에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고 황무지 개간사업도 병행해서 추진했으며,
1902년에 미대륙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친목회(韓人親睦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
출되었다. 1905년에 한인친목회를 발전시킨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이 되었
으며, '상부상조 조국광복'을 협회의 목적으로 삼고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행했다.
1907년 귀국하여 양기탁(梁起鐸), 안태국(安泰國), 이승훈(李昇蕓)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新
民會)를 조직하여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세웠으며, 주요 도시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두고, 자기회사(磁器會社)를 차려 다양한 방법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09년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세워 청년운동을 전개했는데, 안중근(安重根) 의거에 관련
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용산헌병대에 수개월 수감되기도 헸으며, 1910년 통감부의 도산내
각(島山內閣) 조직 권유를 거절하고 거국가(去國歌)를 남긴 후, 청나라로 망명했다.
1911년 북만주에서 무관학교를 세우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다시 미대륙으로 넘어갔으
며, 191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 중앙총회를 조직하
고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흥사단 조직에 착수하여 무실역행(務實力行), 건전인격(健
全人格), 단결훈련, 국민개업(國民皆業) 등 정신개조를 목표로 한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했으며
, 공립신문을 신한민보(新韓民報)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9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파리강화회의에 국민회(國民會) 대표를 파
견할 계획을 추진했으나 고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상해(上海)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그를 초청하자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가 된다.
그는 연통제(聯通制) 실시, 독립신문 발간 등을 지도했으며, 그해 7월 2일에 임시사료편찬회
를 구성하고 그 총재가 되어 한일관계사료 전4권을 편찬 발행했다. 또한 임시정부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임시정부후원회를 조직하여 외국 교포들로부터 군자금을 지원받았으며, 1920년에
는 흥사단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를 설치하고 '대(對)미국의원시찰단준비위원장'이 되어 북
경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그해 8월에는 지방선전총판(地方宣傳總瓣)이 되어 민족의 단합을 호소하는 격문을 만주 등지
에 배포했으며, 임시정부의 세력 통일을 위해 노력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국무위원을
인책 사임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추진했다.
1921년 서울에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 평양에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를 설립했으며, 나중
에 이들 단체를 통합해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라 했다.

1923년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리자 그는 부의장에 선임되었다. 허나 임시정부에
서 개조파(改造派)와 창조파(創造派)가 대립하자 이에 염증을 느끼고 북만주에 독립운동기지
인 이상촌(理想村) 건립을 추진했으며, 1924년 남경(南京)에서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해
실력배양운동의 기초를 다졌다.
군자금 확보를 위해 다시 미대륙으로 건너갔다가 1926년에 돌아와 만주 일대를 둘러보며 이상
촌 후보지를 물색하고 민족유일당 조직과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 발기 등을 추진했으나 여러
가지로 영 좋지 못한 일(독립군 간부 체포, 김좌진 암살, 만주사변 등)로 이상촌 건설은 실현
되지 못했다. 이후 상해로 돌아와 1930년 협동상조, 소비합작, 신용생산(信用生産) 등으로 생
활역량을 넓히고자 동인호조사(同人互助社)를 조직해 상해 지역 한인의 합심 협력을 계획했다.

1931년 1월 흥사단 제17회 원동대회를 주재하여 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흥사단보(興士團報
)를 발행했다. 그리고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가 흥사단의 취지에 따라 군자금 모집 계획을
세우자 설립목적이 동일한 동인호조사와 합병하여 공평사(公平社)로 개칭하고, 그 이사장에
취임해 생활 역량을 증강시키고자 소비, 신용, 생산 등의 합작운동(合作運動)을 추진했다.

바로 그해 만보산(萬寶山) 사건으로 한국 사람과 중원대륙 애들간의 충돌이 생기자 병인의용
대(丙寅義勇隊)와 노병회(勞兵會), 교민단(僑民團), 학우회(學友會), 여자청년동맹, 애국부인
회, 청년동맹 등의 한인 단체들이 연합해 상해한인단체연합회(上海韓人團體聯合會)를 조직했
다. 이에 안창호는 흥사단 대표로 참가해 중원대륙 애들을 설득하여 그들과 함께 왜군 토벌에
주력했다.

1931년 10월 이시영(李始榮), 김사집(金思潗), 김철(金澈)과 함께 교민단 심판원(僑民團 審判
員)으로 활동했으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로 뚜껑이 뒤집힌
왜경은 프랑스 조계 경찰의 협조를 받아 독립운동가 검거를 실시했다.
도산은 이런 정보를 알고 있음에도 어린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상해 하비로(霞飛路)에 있
는 이유필(李裕弼) 집을 찾았다가 잠복했던 왜경에게 체포되었으며, 바로 서울로 압송되어 그
해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았다.

1935년 2월 대전감옥에서 출옥하여 왜경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지방을 돌며 계몽 강연을 하였
으며, 평남 대보산(大寶山)에 은거하여 이상촌 건설을 계획했으나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관
계로 다시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중병이 들어 그해 12월 보석으로 나왔다. 허나 건강은
악화되어 1938년 3월 세상을 떴으며, 그의 유언에 따라 아들처럼 아끼던 유상규묘 옆에 무덤
을 썼다.

1962년 정부에서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으며, 1973년 강남구 한복판에 도산
공원을 닦으면서 도산의 무덤과 1955년에 세운 묘비는 그곳으로 이장되었다.
2005년 도산 묘 앞에 새 비석을 세우자 이전 비석을 서울시와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도산기념
사업회가 협의하여 2016년 3월 1일 제자리인 이곳으로 가져왔으며, 2022년에 봉분을 새로 만
들어 지금은 가묘(假墓) 봉분과 지붕돌 묘비가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  태허 유상규(太虛 劉相奎)묘 - 국가 등록문화재 691-8호

유상규(1897~1936)는 평북 강계(江界) 출생이다. 경신중학를 거쳐 1916년 경성의전 1기로 입
학했으며, 1919년 3.1운동 때 경성의전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상해임시정부로 넘어가 도산 안창호의 비서관으로 활동했으며, 이때 흥사단에 가입했다.
도산의 권고로 귀국하여 1925년에 경성의전에 복학, 1927년 졸업하여 경성의전 강사 및 부속
병원 외과의사로 근무했으며, 동아일보사에서 주최한 강연회에 꾸준히 연사로 참석했다. 그리
고 잡지와 신문에 많은 글을 실어 민중의 의학적 계몽활동에 나섰고, 1930년에 조선의사협회
창설을 주도했다.
허나 1938년 중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안타깝게 단독에 감염되어 불과 39세의 나이로 병사
하고 만다.

그는 도산과 거의 부자(父子) 사이처럼 각별했는데, 자신의 아들 이름에 도산의 필명인 산옹
(山翁)의 '옹'을 넣어 '유옹섭'이라 했다. 태허의 사망 소식에 도산은 크게 통곡하면서 그의
장례를 직접 주관했으며, 2년 후 그의 무덤 오른쪽 위에 묻히면서 죽어서도 서로의 끈끈한 정
을 보였다. 그러다가 1973년 도산 묘가 강남구 도산공원으로 이장되면서 서로 떨어지게 된다.

유옹섭은 부친 묘와 도산 묘를 같이 돌보았는데, 2007년 보훈처로부터 부친 묘의 국립현충원
이장 허가를 받았으나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분과위원장이던 김영식의 권유와 부친의 도산
선생에 대한 마음을 헤아려 이장하지 않고 도산 묘터 복원에 힘쓰다가 2014년 사망했다.

무덤은 봉분과 상석, 향로석, 지붕돌 묘비로 이루어진 단출한 모습으로 '망우 독립유공자 묘
역 - 유상규묘소'란 이름으로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태허 유상규묘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  망우산3보루터

유상규묘를 지나면 망우산3보루터를 알리는 안내문이 마중을 한다. 아차산~용마산~망우산 일
대에서 늙은 보루터가 20곳 이상 발견되었고, 망우산에서 3개(시루봉보루를 포함하면 4개)가
나왔는데, 망우산 보루 3형제 중, 상태가 조금 나은 1보루만 국가 사적('아차산일대 보루군'
이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 455호로 지정됨)의 지위를 누리고 있고, 2보루와 3보루는 상태가 너
무 우울하여 아직까지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다.

망우산3보루는 망우리묘지를 닦는 과정에서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그로 인해 원래 형태와 규
모를 파악하기 어렵게 되었다. 다만 보루터 남쪽 비탈면에 무너진 석축 일부가 있고, 돌을 다
듬은 기법과 주변에서 고구려 토기 조각과 민무늬토기 조각이 나와 고구려가 조성한 것은 확
실하다.
이처럼 중요한 유적이 무덤에 자리를 내주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고, 1973년 이후 무덤들이 적
지 않게 빠져나가면서 자연 공간으로 많이 풀렸으나 아직도 무덤이 여럿 있어 그들이 모두 옮
겨진 이후에나 제대로 된 조사를 받을 수 있다. 하여 빠르면 내 다음 세대에서나 가능할 것이
다.

▲  숲과 산길, 무덤에 묻혀버린 망우산3보루터

▲  망우산2보루터

망우산 정상부 북쪽에는 망우산2보루가 폐허의 상태로 살짝 깃들여져 있다. 이곳은 망우리묘
지에게 철저히 희생되어 원래의 형태와 규모는 알 수가 없는 실정인데, 무덤 조성 때 쓰였던
보루터 석재와 주변에서 나온 고구려 토기 조각을 통해 고구려 보루로 여기고 있다.
보루터는 능선길과 그 주변에 희미하게 남아있는데, 무덤들이 적지 않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
어서 그들을 모두 옮기고 이곳을 싹 뒤집어야 이곳의 구체적인 정체를 캘 수 있을 것이다.


▲  망우전망대 (망우산 정상)

망우산2보루터 남쪽이 망우산의 정상(281m)이다. 이곳은 아차산 산줄기의 북쪽 지붕으로 2층
규모의 전망대가 닦여져 있는데, 여기서는 서울 동부와 북부 지역,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
불암산, 구리시, 하남시, 강동구, 한강이 그윽하게 두 눈에 들어온다.

* 망우산 정상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  망우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중랑구와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지역과 도봉산, 북한산(삼각산),
불암산, 봉화산 등이 시야에 들어와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망막이 제대로 위로를 받는다.

▲  망우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한강과 아차산 산줄기를 비롯해 강동구, 하남시, 남한산성, 검단산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망우산 정상에 작게 박힌
국가기준점(삼각점)



 

♠  망우산 마무리 (사색의길 동쪽 구간)

▲  다시 안긴 사색의길 동쪽 구간

망우산 정상에서 남쪽 능선길을 7~8분 내려가면 동락정 쉼터가 나온다. 이곳은 망우산 능선길
과 사색의길 동쪽 구간. 용마산과 시루봉 방향 산길이 만나는 요충지로 포장길로 닦여진 길이
사색의길이다. 마음 같아서는 시루봉과 사색의길 서쪽 길까지 범위를 넓히고 싶었으나 햇님의
퇴근시간이 임박하여 욕심을 버리고 아까 거닐다가 말았던 사색의길 동쪽 구간으로 빠져 북쪽
으로 내려갔다. (산은 도시보다 일찍 해가 짐)

사색의길 동쪽 구간에는 많은 무덤이 둥지를 틀고 있고, 그 사이사이에 안내문을 지닌 인사들
의 무덤이 섞여있다. 특히 만해 한용운과 조봉암, 오세창, 방정환 등 귀가 쫑긋 반응을 보일
정도로 유명한 인물도 많아 나들이의 재미를 더해준다. 하여 일몰까지 최대한 살피면서 망우
산의 여로(旅路)를 풍부히 살찌웠다.


▲  왜인 사이토 오토사쿠묘

망우리묘지에는 왜인들도 약간 자리를 축내고 있는데, 그중에는 사이토 오토사쿠(1866~1936)
란 자도 있다. 그는 이곳에 묻힌 왜인 중 가장 높은 벼슬을 했던 자로 왜정 칙임관(勅任官)
이상 관료 중 유일하게 이 땅에 묻힌 왜인이기도 하다.

사이토는 야마나시현 출신으로 동경대 임학과를 나와 농상무성 산림국에 취직, 대만과 야마나
시현을 거쳐 부해도 임정과장을 거쳤으며, 1909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농공상부 기사로 들
어왔다. 그 이듬해 왜정 초대 산림과장이 되었으며, 식목일을 만들고 미루나무와 아까시나무
를 이 땅에 도입했다.
1915년 영림창장을 거쳐 1918년에 퇴직했으나 조선에 계속 남아 사이토임업사무소를 세워 산
림위탁경영사업을 통해 녹화사업을 펼치며 배때기를 불렸다. 그에 대해서는 임업 근대화에 기
여했다는 평가와 산림 수탈에 앞장선 자라는 비난이 존재하나 후자에 더 무게를 두는 것이 진
리일 것이다. 어디까지나 왜정 중심으로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1936년에 사망했는데, 왜열도로 가지 않고 망우리묘지에 묻혔으며, 지금도 여전히 자리
를 축내고 있다.

이 무덤은 뚱뚱해 보이는 비석이 전부로 비석 밑에 화장된 유골을 묻은 전형적인 왜열도 무덤
스타일이다. 왜정 고위 관리의 무덤이라 해방 이후 적지 않게 고통을 당해 비석에 쓰인 글씨
까지 뜯겨져 나갔는데, 이는 왜정 시절 그들이 이 땅에 저지른 개짓거리에 대한 당연한 보복
이라 할 것이다.
비록 무덤 주인은 그 정도가 약했다고 하나 그건 사후에도 이 땅에 남은 그의 팔자이며, 비석
옆에는 꽃이 담긴 돌통(다른 인사의 무덤에도 모두 돌통이 있음)이 있는데, 이곳까지 온 기념
으로 돌통을 발로 뻥 넘어트리고 하얀 액체의 침을 여러 번 투하하며 자리를 떴다.


▲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巖)묘

이름도 꽤 익은 조봉암(1898~1959)은 강화도 출신이다. 1911년 강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강화군청 고원(雇員)으로 근무했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하여 1년간 옥고의 고통
을 겪었다.
이후 출옥하여 YMCA 중학부에 입학했으며, 왜열도로 건너가 세이쏘꾸(正則) 영어학교에서 영
어를 익혔다. 중앙대학(中央大學) 정경학부에서 공부를 하다가 동경 유학생들이 조직한 사회
주의~무정부주의계열의 흑도회(黑濤會)에 들어갔는데, 그로 인해 그의 한때 본업이었던 공산
주의에 푹 빠지게 된다.

흑도회가 해산되자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항일단체인 조선노동총동맹 문화부책을 맡아 노
동운동을 했다. 1922년 소련령 웨르흐네스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합동회의에 국내파 대표로
참가하여 공산당 파벌 통일에 노력했으나 실패했으며, 이후 통합대회 결렬 사유를 모스크바
코민테른대회에 보고했다.
1924년 코민테른의 지시로 공산주의지도자 양성기관인 모스크바 동방지도자공산대학 단기과정
을 이수했으며, 그 뒤 귀국하여 신사상연구회, 북풍회 등 사회주의단체에서 활동했다. 이 두
단체는 화요회(火曜會)로 통합되었는데, 그 창설 주역으로 활동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조직에 참여했으며, 조선공산당 1차당 창당을 주도했다.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을 수습 조직하고 5월에 만주로 넘어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
하고 그 책임비서가 되었으며, 코민테른의 지시로 상해로 넘어가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의
조선대표도 겸직했다.
1926년 6.10만세운동으로 제2차 조선공산당 조직이 왜경에 의해 해체되자 제3차당인 ML당조직
에 참여했으나 국내당과 마찰을 빚어 지도 기능을 잃었다. 그 뒤 코민테른의 결정으로 1국1당
주의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들어갔다.

1932년 상해에서 왜국 영사경찰에 붙잡혀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옥살이를 했으며, 왜정에게
요시찰인물로 찍혀 1945년까지 대외활동을 못했다. 하여 이때 고향에서 김조이(金祚伊)와 혼
인하여 인천에서 조용히 은거했다. 그러다가 1945년 2월 왜경에 검거되어 수감되었다가 광복
으로 풀려난다.

광복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에 들어갔다가 1946년 사회주의계열인 민족전선에서 활동
했으며, 그해 5월 박헌영(朴憲永)의 공산주의노선을 공개서한을 보내 비판했다. 그리고 그 다
음 달(6월)에 '민족 전체의 자유생활보장'을 내걸고 노동계급의 독재, 자본계급의 전제를 다
같이 반대하는 중도통합노선을 주장하고는 조선공산당과 영원히 결별했다. 즉 공산당 노선에
서 자유민주주의로 갈아탄 것이다.
그해 8월부터 미군정의 좌우파합작을 지지하고 협력했으며, 1948년 5.30선거 때 인천에서 제
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직도 맡았다. 이승만 정권이 수립되자 초대 농
림부장관이 되었는데, 농지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허나 1949년 농림부장관 관사 수리비
를 농림부 예산으로 때운 것이 걸려서 그 책임을 지고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부의장에 선임되었다.

1952년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 나갔다가 이승만에게 밀려 낙선했으며, 1956년 11월 책임 있
는 혁신정치, 수탈 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화통일의 3대 정강을 내걸고 사회민주주의 정당
인 진보당(進步黨) 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 제3대 정/부통령선거에 박기출(朴己出)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우고 자신은 대통령에 출마했으나 또 낙선했다.
1957년 진보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1958년 5월 국회의원 선거에 지역구 후보
를 내세워 원내에 진출했다. 허나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정권 유지를 위해 그를 북한 간첩
으로 내몰아 1958년 1월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했으며, 1959년 11월에 서둘러
처형시키고 말았다.

이후 1992년 10월 여야 국회의원 86명이 서명한 조봉암의 사면 복권 청원서가 국회에 제출되
었으며, 2007년 9월 27일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그가 연루된 진보당 사건이
이승만 정권의 반인권적 정치탄압이라 결론을 내리고, 국가에게 유가족에 대한 사과와 독립유
공자 인정, 판결에 대한 재심 등을 권고했다. 그리고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
를 선고 받으면서 간첩으로 몰려 오랫동안 고통 받은 그의 명예가 다소 회복되었다.

그의 무덤은 호석이 높이 둘러진 봉분과 지붕돌 묘비, 망주석, 장명등, 상석, 혼유석을 지니
고 있으며, 묘비에는 특이하게도 글씨가 없어 오랫동안 그의 누명을 침묵의 소리로 항변하고
있다.


▲  죽산 조봉암의 어록을 머금은 견고한 돌덩어리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허냐'

▲  만해 한용운(
萬海 韓龍雲) 묘 - 국가 등록문화재 519호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충남 홍성(洪城) 출생으로 본명은 유천(裕天, 어렸을 때 쓴 이름),
정옥(貞玉, 장성해서 쓴 이름)이며, 호는 만해이다.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웠으며 14세에 혼인을 했으나 1896년 홀연히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
암(五歲庵)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절의 허드렛일을 돌보다가 출가해 승려가 되었으며,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홀로 여행하다가 1905년 다시 설악산에 들어와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
을 스승으로 삼아 득도에 나섰다. <'만해'란 이름은 스승 만화(萬化)가 지어줌>

1908년에는 전국 사찰 대표 52인의 1명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
립하고 왜열도를 시찰하고 왔으며, 1910년 이후 만주로 건너갔다가 1913년에 귀국, 불교학원
선생이 되었다. 바로 그해에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하여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
)에 입각해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했다.

1916년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했고,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하나로 독립선
언서(獨立宣言書)에 앞장 서서 서명했다. 그리고 3.1운동 이후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했다.
1926년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님의 침묵(沈默)'을 출간해 왜에 저항하는 저항문학에 앞장섰
으며, 1927년 신간회에 가입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이 되었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해 청년운동을 강화했으
며, 같은 해에 여러 뜻있는 이들의 도움으로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했다. 이후 많은 논
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했고, 1937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
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이후 왜정에 배타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불교 개혁과 문학활
동을 계속하다가 광복을 겨우 1년 앞둔 1944년 6월 29일,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쓸쓸히
눈을 감는다.

이곳에는 부인이 같이 묻혀있는데, 2기의 봉분과 지붕돌 묘비, 상석, 혼유석을 지니고 있으며
, 묘비에는 '부인유씨재우'라 쓰여 있으니 이는 부인이 만해 오른쪽에 묻혀있다는 뜻이다. 여
기서 오른쪽은 바라보는 입장이 아니라 만해가 머리를 북으로 하고 누운 상태에서의 오른쪽을
뜻한다고 한다. ('구리 한용운 묘소'란 이름으로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음)

* 만해 한용운묘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  박희도(朴熙道)묘

박희도(1889~1951)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종교인, 교육가이다.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에서 활동하다가 3.1운동 때 기독교계 대표 영입과 학생들의 참여에 크게 힘을 썼고 독립선언
33인 중 최연소자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복역하고 최초의 사회주의계 잡지 '신생활'을 발간해 독립운동에 진력
했으나 러시아혁명 기념 필화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서 2년간 징역살이를 했다. 1928년 중앙보
육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지내는 등 기독교 교육계의 지도층으로 활동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자치론의 길을 걸었다.
1949년 반민특위(反民特委)에 잡혀가 조사를 받고 풀려났으며, 육군정훈학교 출강 외에는 활
동을 하지 않다가 왜정 시절 옥고 휴유증으로 1951년에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봉분과 하얀 피부의 묘비, 상석, 혼유석을 지니고 있으며, 옆에 부인 묘가 있고
윗쪽에 부모 묘가 있다.
참고로 그의 동생인 박희성(1896~1937)은 연희전문(연세대) 출신으로 광복군 비행장교 1호로
미국에서 훈련을 받다가 안타깝게 순직했으며, 2010년 대전현충원에 안정되었다.


▲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묘 - 국가 등록문화재 691-1호

오세창(1864~1953)은 서화가이자 언론인으로 서울 출생이다. 부친 오경석(吳慶錫)은 청나라에
서 많은 서적을 가져와 개화에 앞장섰던 역관으로 오세창도 그런 부친의 영향으로 20세에 역
관이 되었다.
1888년 박문국(博文局) 주사로 있으면서 이 땅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 기자를 겸
임했으며, 우정국 통신국장 등을 거쳐 1897년에 1년간 왜열도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 교
사로 일했다. 

개혁당 사건으로 1892년 왜열도로 넘어갔으며, 거기서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에 들
어가 의암 손병희의 참모로 활동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손병희와 함께 천도교 대표로 독
립선언서에 서명했으며, 1922년에 손병희가 죽고 천도교 내부 갈등이 심해지자 그는 왜정에
비타협적인 보수파 노선을 지켰다. 그리고 왜의 감시를 피하며 독립운동가들과 수시로 교류를
했다.
1945년 이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고, 1946년 8월 15일에 민족대표로 왜국으로
부터 대한제국의 국세를 돌려받았다. 그리고 1949년 백범 김구의 장의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서화가이자 서예가로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있는 노고산천골취장비과 방정환묘비,
설태회 묘비에 글씨를 남겼으며,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의 스승으로 그에게 많은 도움과
가르침을 주었다.

무덤은 호석을 두룬 봉분과 지붕돌 묘비, 상석을 지니고 있으며, '망우 독립유공자 묘역, 오
세창 묘소'란 이름으로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위창 오세창묘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  명온공주(明溫公主)와 김현근(金賢根)묘

망우역사문화공원에 깃든 7,400여 기의 무덤 중에서 제일 계급이 높은 무덤, 그리고 가장 늙
은 무덤은 무엇일까? 그 정답은 바로 명온공주(1810~1832)와 김현근(1810~1868)의 묘이다.

명온공주는 순조(純祖)의 딸이고 동갑내기 남편인 김현근은 안동김씨 집안으로 김상용(金尙容
)의 8대손이다. 김현근은 어려서부터 말과 글이 똑똑했다고 하는데, 순조가 명온공주의 남편
을 물색하고자 1824년에 12~15세 남성을 대상으로 간택령(揀擇令)을 내렸다. 그래서 그해 5월
22일 17명 후보 중에서 8명을 추렸고, 5월 25일에 다시 3명으로 줄였으며, 6월 2일 3번째 간
택에서 진사 김한순의 아들인 김현근이 최종 합격되어 동년위로 봉하고 그해 7월 17일 혼인을
했다.

명온공주는 일찍 병을 얻어 22세 때 사망하면
서 김현근은 20대의 한참 나이에 홀아비가 되
는 비운을 겪는다.
그는 청나라 사신 업무, 판의금부사(判義禁府
事) 등을 지내다가 58세에 사망했는데, 고종은
명온공주의 오라비인 효명세자<추존 익종(翼宗
)>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명온공
주와 김현근은 그의 고모와 고모부가 된다.
명온공주 묘는 합장분으로 이루어진 봉분 1기
와 지붕돌 묘비, 장명등, 상석을 지닌 조촐한
규모로 원래 종암동(鍾岩洞) 고려대 앞쪽에 있
었으나 1936년 이곳으로 이장되어 서민들 묘역
속에 들어앉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무덤의 사
이즈가 많이 왜소해졌다.
6.25 시절 망우리고개 일대가 격전지가 되면서
무심한 총탄에 장명등과 묘표의 지붕돌이 깨지
고 심지어 장명등은 통구이가 되는 등 크게 고
통을 당했으며, 상석 위에 꼬부랑 알파벳이 쓰
여 있는데, 이는 이곳 전투에 참여했던 어느
철딱서니 없는 양이(洋夷) 군사가 남긴 낙서이
다.

▲  명온공주와 김현근 묘표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있는 묘비 중
가장 늙은 존재이다.

▲  상석에 흉하게 새겨진 영문 낙서
세상에 낙서할 곳이 없어서 남의 무덤
상석에다가 저런 짓을 했단 말인가.

▲  지붕돌이 시커먼 장명등
6.25 때 지붕돌이 총탄으로 불에 탔고
추녀 귀퉁이도 크게 깨졌다.


▲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묘 - 국가 등록문화재 691-3호

명온공주묘 북쪽에는 어린이날로 유명한 소파 방정환(1899~1931)의 묘가 있다. 그는 서울 당
주동(唐珠洞) 출신으로 1913년 선린상업학교에 들어갔으나 2년 뒤 중퇴했으며 1917년에 비밀
결사로서 청년구락부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천도교에 들어가 손병희의 3째 딸인 손용화와 혼인했으며, 191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해 '신
청년','신여자','녹성' 등의 잡지 편집을 맡았다. 3.1운동 때는 손병희 밑에서 천도교 청년회
의 회원으로 3.1운동 준비에 나섰고, 오일철과 함께 집에서 '독립신문'을 등사하여 배포하던
중 왜경에 붙잡혔으나 석방되었다.
3.1운동 이후 왜열도로 건너가 동양대학 문학과에 진학하여 아동문학을 중심으로 공부했으며,
1921년 여름방학 때 잠시 귀국하여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고 어린이에 대한 존대말쓰기 운동
을 벌였다. 그리고 1922년에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간행했다.

1923년에 어린이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그해 3월 20일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으며, 고
한승(高漢承) 등과 '색동회'를 조직하여 어린이날을 만들어 5월 1일을 그날로 삼았다.
1924년 전국 소년지도자 대회를 개최하여 어린이단체의 단합을 추진했으며, 잡지 '별건곤(別
乾坤)'과 '신여성'을 발간하고, 동화대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1925년에는 소년운동협회를 조
직했고, 1927년에 조선소년총연맹의 발족으로 소년운동의 방향이 달라지자 일선에서 은퇴하여
강연회와 동화대회, 라디오 방송 등에서 주로 활동했다.
1928년 10월 2일부터 1주간 서울에서 세계아동 미술전람회를 개최했으며, 1931년에 새로운 월
간잡지인 '혜성'을 발간했으나 지나친 과로로 그만 큰 병을 얻어 쓰러지고 만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벗들에게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네' 유언을 남겼고, '여보게 밖
에 검정말이 끄는 검정 마차가 와서 검정옷을 입은 마부가 기다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

란 마지막 말을 남기며 32세의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지금 많이 사용하는 '어린이'란 이름은 소파가 만든 것으로 그가 활동하던 시절까지 어린 아
이를 지칭하는 좋은 표현의 이름은 없었다. 그리고 어린이날을 제정해 이 땅의 어린이들에게
큰 선물을 주었으며, 그 짧은 인생을 어린이를 위해 모두 쏟아부을 정도로 어린이에 대한 사
랑과 관심은 실로 대단했다. 이후 한참의 세월이 흐른 1990년, 정부에서 그의 공훈을 기리고
자 늦게나마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소파의 유골은 홍제동(弘濟洞) 화장터에서 화장되어 그곳에 있었으나 1936년 후배 최신복(崔
信福, 1906~1945) 등이 모금 운동에 나서 현 자리에 무덤을 마련해 안착했다. 최신복은 소파
와 함께 개벽사에서 어린이 잡지를 만든 인물로 수원에 집안 묘역이 있음에도 자신의 부모 무
덤을 소파 묘 밑 왼쪽에 썼으며, 자신도 부인과 함께 그 밑에 묻혀 죽어서도 그와의 인연을
끈끈히 이어가고 있다.

무덤은 흙 봉분 대신 특이하게 쑥돌을 표석처럼 세워 해관 오긍선(海觀 吳兢善) 묘와 더불어
망우역사문화공원에서 개성파 무덤으로 꼽힌다. 비석 글씨는 위창 오세창이 썼으며, 표석 앞
에는 묘비와 상석을 두었는데, 다른 무덤에 비해 헌화된 꽃도 많은 편이라 그의 높은 인기를
보여준다.
(소파의 무덤은 '망우 독립유공자 묘역, 방정환 묘소'란 이름으로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
었음)

* 소파 방정환 묘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방정환묘를 둘러보니 햇님은 완전히 퇴근하고 땅거미가 짙게 드리워져 세상은 검은색 도화지
가 되었다. 이것 외에도 유명 인사의 무덤을 여러 기 더 둘러보았으나 일몰 직전이라 사진이
나의 침침한 두 망막처럼 흐리멍텅하게 나와서 여기서는 생략했다.

이렇게 하여 망우산 늦가을 나들이는 나름 큰 성과를 거두며 기분 좋게 마무리가 되었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3년 11월 11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23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조선시대 공동묘지였던 서울 변두리의 이색 뒷동산, 구파발 이말산 <금성당 샤머니즘박물관, 최효원묘역, 은평둘레길3코스, 약수사>

구파발 금성당, 이말산



' 구파발 이말산 봄나들이 '

이말산 조선시대 무덤군
▲  이말산 조선시대 무덤군

금성당 이말산 숲길

▲  금성당

▲  이말산 숲길

 



 

봄이 겨울을 몰아내고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물들이던 4월의 한복판에 서울의 서남쪽 끝
으머리를 잡고 있는 구파발을 찾았다.

구파발(舊把撥)은 서울 서북부 교통의 요충지로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시골스런 모습
을 여실히 지니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구파발과 진관동 지역의 전원(田園) 풍경을 좋아했
고 그런 풍경이 쭉 유지되기를 바랬지만 개발 지상주의가 지배적인 이 땅의 현실 앞에 결
국 아파트 일색의 은평뉴타운으로 강제 성형을 당하고 말았다.

비록 구파발 주변에서 밭두렁과 논두렁 등의 경작지와 시골 풍경은 많이 사라졌으나 은평
뉴타운을 둘러싼 이말산과 북한산(삼각산), 앵봉산은 크게 건드리지 않아 산 속의 조그만
도시 같은 아늑한 분위기를 준다. 게다가 못자리골천, 구파발천 등의 짧은 하천이 뉴타운
내부를 흘러가고 뉴타운 북쪽에는 창릉천(昌陵川)이 흐르고 있어 은근히 배산임수(背山臨
水)의 형태까지 보인다. 그 뉴타운 한복판에 이말산이 자리해 뒷동산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 남쪽 자락에 조선 후기 무속신앙의 현장인 금성당이 있다. 이번 나들이는 바로 금성당
과 이말산을 잡으러 간 것이다.



 

♠  서울에 숨겨진 옛 무속신앙의 현장, 조선시대 굿당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금성당(錦城堂) - 국가 민속문화재 258호

▲  서쪽에서 바라본 금성당(샤머니즘박물관)의 외경

이말산 남쪽 자락이자 은평뉴타운 우물골 2단지 한복판에 기와집 일색의 금성당이 있다. 회색
피부의 밋밋한 아파트 숲에서 고고한 전통 한옥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곳은 거의 새집처럼
보이지만 이래봬도 19세기 말에 지어진 무속신앙용 기와집으로 그 성격에 걸맞게 샤머니즘박
물관까지 겸하고 있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금성당은 세종의 6번째 아들인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을 주신(主
神)으로 봉안한 당집이다. 그래서 집 이름도 금성당을 칭하고 있는데, 금성대군은 2번째 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이 조카인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한 것에 잔뜩 불만을 품고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순흥부(順興府, 경북 영주시 순흥면)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거기서도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단종 복위를 작당하다가 또 발각되어 형이 보낸 쓰디쓴
사약 1사발을 들이키고 죽게 된다. 그때 이보흠도 처단되었으며, 순흥 백성들까지 복위에 가
담했다는 이유로 대부분 학살을 당하면서 순흥 지역은 완전히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순흥
고을도 강제로 폐쇄되어 풍기, 영주에 임시 통합됨)

이후 백성들 사이에서 금성대군과 단종에 대해 측은한 마음이 생겨났고 제와 굿을 지내 그들
의 넋을 달래주었다. (강원도 남부 지역은 단종을 산신으로 추앙하고 있음) 그러다보니 자연
히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무당들은 영업 차원에서 금성대군을 영험한
신으로 영입하기에 이른다. 서울에서는 진관동(津寬洞)과 망원동(望遠洞), 월계동(月溪洞)의
각심절마을에 그를 위한 금성당이 지어져 서울 토속신의 하나로 굳게 자리를 잡았다.

허나 20세기 중반 이후 무속신앙의 쇠퇴와 개발의 칼질로 망원동과 월계동 금성당이 1970년대
에 사라졌으며, 진관동은 개발제한구역에 묶인 탓에 다행히 살아남아 계속 굿당의 역할을 수
행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구파발 지역에 은평뉴타운이 닦이게 되면서 퇴락된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철밥통 행정당국과 개발업자의 의해 가루가 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다행히 양종승 박사
와 뜻있는 이들이 금성당 구명에 나서면서 간신히 목숨을 유지하게 되었고, 금성당의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문화재청이 2008년 중요민속자료(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하면서 개발의 칼질
로부터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된다.

한때 서울시는 그를 은평뉴타운 밖으로 내보내 복원하려고 했으나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인 그
를 옮기는 것이 영 바람직하지 않아 제자리에 2010년 복원, 정비하고 주변에 작은 공원을 닦
아서 세상에 내놓았다.
비록 복원되어 개방은 되었으나 굿당의 역할은 이미 상실된 상태라 민속촌 한옥처럼 거의 무
늬만 남은 한가한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2016년 5월, 그런 금성당에게 활력을 주는 일이 생
겼다. 바로 양종승 박사가 세운 샤머니즘박물관이 이곳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양종승은 2013년 5월 사재를 털어 정릉동 국민대 남쪽에 샤머니즘박물관을 세웠다. 그는 우리
나라와 중원대륙, 히말리야, 몽골의 무속 유물 2만여 점을 보유하고 있었고 샤머니즘 관련 서
적과 영상/음향자료도 넉넉히 가지고 있었다. 또한 금성당을 없애려는 철밥통과 개발업자들을
보기 좋게 참교육시켜 금성당 보존에 크게 공헌을 한 이력이 있어 은평구청은 그에게 금성당
으로 옮길 것을 제안, 그에 따라 박물관을 이곳으로 가져와 금성당의 완전한 지킴이가 된 것
이다.
무속신앙의 현장과 그 신앙을 다루는 전시/교육 공간까지 그에 걸맞는 두 얼굴을 지닌 의미가
깊은 현장으로 보유한 유물은 많지만 공간이 매우 좁아서 극히 일부만 꺼내 본채, 행랑, 안채
, 본채 뜨락 등에 전시하고 있다.

▲  금성당 대문 (대문채)

▲  본채와 안채 경계에 놓인 오리 솟대

금성당은 인왕산(仁王山), 평창동(平倉洞) 보현산신각과 더불어 서울 지역 무속신앙의 성지(
聖地)로 1880년대 이전에 지어졌다. 지역 주민과 무당들이 무속신앙을 벌이고자 지은 공간으
로 조선 때 무악재에서 구파발까지 많은 무속 당집이 있었는데 서울로 들어오는 명/청나라 사
신과 반대로 중원대륙으로 가는 조선 사신의 안녕을 빌고 악의 기운을 없애는 의미에서 굿을
지냈다. 그러다보니 금성당은 나라에서 많은 지원을 받았다.
금성대군의 생일인 음력 3월 24일에 마을의 대동단결과 나라의 안녕을 위한 당굿을 열어 그의
넋을 기렸으며 왕년에는 서대문과 왕십리 등 서울의 유명한 무속인과 악사들이 문턱이 마르고
닳도록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뉴타운 개발 이전까지 당지기가 집을 지켰고 굿판도 계
속 이루어졌다.

금성당의 구조는 본채와 안채, 아래채, 대문채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는 금성대군과 여러 신
이 봉안되어 있고, 동쪽에 'ㄱ'자의 안채를 두어 금성당을 관리하는 당지기와 시봉자(侍奉者)
가 생활했다. 안채는 중부지방의 흔한 기와집 형태이나 동쪽 방을 '田'자 형태로 크게 지은
것은 금성당만의 특징이다.
본채에 있던 무신도<巫信圖, 금성도(금성대군의 영정)>와 무구(巫具)류, 제사도구 등은 보존
처리를 위해 서울역사박물관에 가 있으며 불화(佛畵)의 명가로 유명한 만봉(萬奉)의 제자 조
영희가 그린 금성도의 복사본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  금성당 본채와 행랑채

대문채를 들어서면 왼쪽(북쪽)에 본채와 행랑이 있다. 본채는 마루로 이루어져 있어 굿과 제
사를 지내기에 좋으며, 대청 뒤쪽에는 벽감(壁龕)을 두어 금성대군(금성님) 등을 봉안했다.
현재 금성도(금성님) 등 이곳의 오랜 유물은 서울역사박물관에 가 있으며, 샤머니즘박물관 유
물과 금성도 사본이 본채와 행랑채에 담겨져 있다. 허나 그들 내부는 매주 목/금(10~17시)에
만 잠깐씩 문이 열리며, 금성당 건물과 뜨락, 안채 서쪽과 마루에 놓인 유물들은 요일에 상관
없이 관람이 가능하다. (금성당 입장은 보통 17시까지, 입장료 없음)

나는 그런 사연을 알지 못한 채, 온 터라 전시 유물은 만나지 못했다. 금성당은 매주 문이 열
려있지만 정작 박물관의 중심인 본채와 행랑 내부는 1주에 딱 이틀만 만날 수 있는 비싼 존재
였던 것이다. 하여 여러 달 이후 금요일에 다시 인연을 지어 내부 유물까지 싹 살폈다.


▲  굳게 닫혀진 금성당 행랑채와 본채

▲  안채 서쪽에 기대어 선 샤머니즘박물관의 무속 유물들
개성 넘치게 생긴 저 작은 존재들은 몽골이나 히말리야, 티벳에서
넘어온 것으로 여겨진다.

▲  'ㄱ'자 모습의 금성당 안채

본채 맞은편에는 아래채가 있다. 현재 관리사무실로 쓰이고 있는데 그 옆구리를 지나 동쪽으
로 가면 안채 뜨락과 안채 정면이 모습을 보인다.
안채는 금성당을 관리하는 당지기와 시봉자가 머물던 공간으로 지금은 박물관 사무실과 자료
실(교육실), 박물관 전시공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허나 그날은 박물관 공개일이 아니므로 전
시 공간으로 쓰이는 부엌 등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고, 민속유물이 있는 마루만 개방되어
있다. 그러니 그날 만난 박물관 유물은 안채 마루와 안채 서쪽 벽에 있는 석조 유물 뿐이다.

▲  금성당 아래채(왼쪽)와 대문채

▲  도자기와 여러 민속유물이 놓인
안채 마루 (왼쪽이 박물관 사무실)


▲  안채 뒤쪽 장독대와 부뚜막, 그리고 낡은 가마솥

안채 옆구리를 통해 뒤쪽으로 가면 장식용으로 놓여진 장독대들이 있다. 그 옆에 부뚜막이 있
는데 금성당이 바쁘게 움직이던 시절, 부엌과 여기서 음식을 했으며, 누렇게 뜬 저 가마솥을
거쳐간 음식과 국거리는 동해바다를 뒤덮을 정도로 많았다. 허나 이제는 은퇴하여 뒷방 마님
처럼 아주 잉여로운 신세가 되었다.


▲  안채 뒤쪽 (굴뚝과 돌로 다져진 화단)
금성당은 보이지 않는 뒷통수 부분도 적지 않게 신경을 썼다. 화단을 닦아서
나무와 꽃을 심었고, 본채 뒤쪽에는 샤머니즘박물관에서 수집한 여러
스타일의 장독대들이 놓여져 빈 공간을 채우고 있다.

▲  본채 뒤쪽에 가득 널린 장독대들 ①

▲  본채 뒤쪽에 가득 널린 장독대들 ②

▲  봄이 내려앉은 금성당 동쪽 돌담

▲  금성당 본채의 뒷모습

금성당 주변은 아늑하게 공원이 닦여져 있다. 그 좌우로 은평뉴타운 우물골2단지가 가득 들어
앉아 아파트 속의 이색 공간을 자아내고 있는데 다른 아파트단지와 달리 녹지 공간이 많고 바
로 뒤에 이말산이 있어 주변이 그리 번잡해 보이지는 않는다.

* 금성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175-836 (진관2로 57-23, ☎ 02-389-6522)
* 금성당 샤머니즘박물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조선시대에 거대한 공동묘지 속으로, 이말산(莉茉山)

▲  최효원 묘역 (해주최씨와 남양홍씨 묘역)

금성당을 둘러보고 이말산의 품으로 들어서고자 은평메디텍고등학교(은평공고) 뒤쪽으로 이동
했다. 그 구석에도 아파트(우물골2단지 7블록)들이 들어차 있는데 그 동쪽 산자락을 올라서니
말끔한 모습의 최효원 묘역이 마중을 나온다.

묘역의 주인공인 최효원(崔孝元, 1638~1672)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아버지이
다. 숙빈최씨와 영조는 많이들 알지만 정작 그들의 뿌리인 최효원은 인지도가 극 밑바닥이라
아는 이가 적다. (나도 여기서 처음 알았음)
그는 해주최씨 집안으로 자는 의경(義敬)이며, 아버지는 최태일(崔泰逸), 어머지는 평강장씨(
平康張氏)이다. 남양홍씨인 홍계남의 딸과 혼인했으며, 무관으로 관직에 진출해 선략장군 행
충무위 부사과(宣略將軍 行忠武衛 副司果, 종6품)까지 지내다가 34살에 사망했다.
그에게는 딸이 둘 있었는데,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하여 막내딸은 궁궐 무수리로 들어갔다. 그
녀는 숙종의 왕후인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잠시 폐위의 고통을 받자 눈물을 흘리며 그의 복귀
를 빌었는데, 그 모습이 우연히 숙종의 눈에 띄면서 예민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 인
연으로 연잉군<延礽君, 영조>를 낳게 되었고 희빈장씨의 모진 구박을 이겨내면서 숙빈최씨로
승급된다.

1734년 영조는 외할아버지인 최효원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하면서 묘비를 세우고 묘역을
손질했다. 딸과 외손주 덕분에 그의 존재와 무덤이 적게나마 호강을 누리게 된 것이다.


▲  최효원과 남양홍씨 합장묘 (오른쪽이 홍계웅 묘, 왼쪽이 홍계남묘)

최효원묘는 묘비와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망주석(望柱石) 1쌍을 지니고 있다. 예전에
는 양석(羊石)도 1쌍 있었으나 1988년경 어느 바람직하지 못한 작자들이 그 무거운 돌덩이를
훔쳐가 버렸다.
묘비는 지붕돌을 갖춘 2면비로 내용은 영조가 친히 쓴 것이며 글씨는 당시 명필로 꼽히던 서
평군 이요(西平君 李橈)가 썼다. 이요는 왕족 출신으로 학문이 깊고 음악과 글씨에 능했는데,
영조(英祖)의 신임이 두텁자 부정하게 재산을 모아 사치향락을 일삼기도 했다.

최효원 묘역에는 총 6기의 무덤이 있는데 그의 아들과 손자, 증손자 뿐 아니라 장인(홍계남)
과 처남(홍계웅)의 묘도 같이 있다. 이는 최효원이 처가 묘역에 묻히면서 두 집안(해주최씨+
남양홍씨)이 같이 있게 된 것으로 장인과 처남 무덤 사이에 아주 눈에 띄도록 큼지막하게 자
리해 있어 딸과 외손주의 덕을 톡톡히 봤음을 알려준다. (최효원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묘는
여기서 가까운 불광2동에 따로 있음)
이들 무덤은 묘비부터 상석, 향로석, 망주석까지 대체로 17~18세기 무덤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으나 후손들의 정성이 너무 과한 탓에 무덤 밑도리에 20세기 스타일의 호석(護石)이 둘러져
옛 무덤으로서의 멋이 다소 떨어졌다. 윗도리는 17~18세기 옷인데 밑에는 20세기 옷을 입혀놓
았으니 그게 어디 어울리겠는가?

* 최효원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85

      ◀  홍계웅(洪繼雄)과 김화김씨 묘
홍계웅은 홍계남의 아들로 최효원의 처남이자
숙빈최씨의 외삼촌이 된다. 최효원보다 낮은
봉분(封墳)과 머리가 둥근 묘비, 그리고 상석
이 전부인 단출한 모습이다.

      ◀  최수강(崔壽崗)과 김해김씨 묘
최수강은 최효원의 손자이자 최후의 아들로 영
조 시절에 무관을 지냈다. 왼쪽 비석은 최수강
의 아들인 최진해(崔鎭海)와 해풍김씨의 묘비
이다.

▲  늘씬하게 생긴 최수강 묘비

▲  최후(崔厚) 묘비


▲  최후와 순흥안씨 묘
최후는 최효원의 아들이자 숙빈최씨의 오라버니로 외할아버지(홍계남) 무덤 바로
앞에 있다. 묘비와 상석, 향로석, 망주석까지 갖추고 있어 최효원 묘 못지
않은 규모를 지녔다.

▲  최효원의 장인인 홍계남(洪繼男) 묘비
세월을 너무 예민하게 탄 것일까? 다른 비석에 비해 피부가 너무 검다.

▲  장대한 세월에게 목을 빼앗긴 가련한 동자석(童子石)

최효원 묘역을 둘러보고 본격적으로 이말산 더듬기를 시작했다. 이말산은 구파발역 동쪽에 자
리한 해발 132.7m의 야트막한 뫼로 군부대가 있는 북쪽 끝을 제외하고 모두 은평뉴타운에 감
싸여 있어 자연히 은평뉴타운의 포근한 뒷동산이 되었다.

산의 이름은 말리화(茉莉花)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리(이말)는 말리화
차, 쟈스민차, 향편으로도 불리며 말리화의 향을 잎차에 스며들게 하여 만든 것이 화차(花茶)
가 된다.
허나 말리화차가 외래종인 것을 감안하면 이 산에 정말 그것이 많았는지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말리화를 재배하는 공간이 있던 것도 아니다. 게다가 이말산에 안긴 무덤 중
숙종~영조 시절에 활동했던 이영수의 묘가 있는데 그 묘비에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다른 이말산
(李末山)이라 쓰여 있어 말리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에 회의감을 던지게 한다.
그런데 영조 시절 무덤인 이세철 묘비와 홍세태(洪世泰)의 묘지명(墓誌銘) 등에는 이말산(茉
莉山)이라 나와있어 18세기부터 한자가 슬쩍 바뀐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두(吏讀)처럼 순
우리말을 한자의 음만 가져와 표기한듯싶다. 참고로 지금 이말산에는 말리화는커녕 비슷한 꽃
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말산은 1977년 진관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시민공원의 역할을 했으나 본격적으로 알려지고
꾸며진 것은 은평뉴타운 개설 이후이다. 둘레길 유행에 따라 은평구는 그 산에 은평둘레길3코
스인 이말산 묘역길(거리 2.7km)을 닦았는데 그 길은 구파발역에서 이말산 주능선을 가로질러
은평한옥마을까지 이어진다.


▲  묘비와 상석만 덩그러니 남은 무덤
무덤 봉분은 장대한 세월이 무심히 밀어버리면서 졸지에 산길이 되어버렸다.


조선 때는 한양도성(서울) 밖 10리 이상부터 무덤을 쓸 수 있었는데, 북서쪽은 이말산, 북동
쪽은 초안산(楚安山, 도봉구 창동, 노원구 월계동 ☞ 관련글 보러가기)이 그 적격지였다. 게
다가 이들은 앞뒤로 하천이 흘러 은근히 배산임수의 형세를 이루고 있어 무덤 선호지로 인기
가 대단했다.
그러다보니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서자인 은언군(恩彦君) 같은 왕족부터 해서 양반사대부, 중
인, 상궁, 내시, 서민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앞다투어 이말산에 뼈를 묻으면서 지금까지
수습된 무덤만 1,700여 기에 달한다. (은언군묘는 파괴되어 사라짐) 이중 무연고가 313기, 나
머지는 연고가 있으며, 묘비와 문인석, 망주석, 상석 등의 석물도 13종 1,488기가 확인되어
산 전체가 거대한 공동묘지이자 살아있는 조선시대 무덤 박물관이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비슷한 성격의 초안산은 조선시대 무덤들이 몰려있는 곳을 중심으로 국가
사적으로 애지중지되고 있고, 각심절 마을에 있는 정간공 이명(貞簡公 李蓂) 묘역은 지방문화
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나 이말산은 그보다 무덤도 더 많고 그에 못지 않은 가치를 지녔음에
도 어떠한 문화재로도 지정되지 못한 채, 버려져 있다는 것이다.
초안산과 더불어 내시(내관) 무덤이 많은 곳으로 꼽히며 조선 초기부터 후기까지 다양한 무덤
과 무덤 석물이 공존하고 있어 무덤 답사지로는 아주 좋다. 또한 산 곳곳에 무덤이 널려있고
심지어 산길에도 파괴된 무덤의 잔해들이 즐비해 산책의 흥미를 유발시키며 여름에는 납량(納
凉) 놀이를 벌이기에도 좋다. 어두컴컴한 산길을 걷다가 갑자기 무덤이나 인상을 쓴 문인석,
동자석이 툭 튀어나온다면 정말로 염통이 제대로 수축될 것이다.


▲  낙엽에 묻혀 고통받고 있는 상석과 향로석
저런 꼴을 보면 무덤을 쓰는 것도 결코 좋은 것은 아니다. (후손의 관리가
끊기면 바로 게임 끝나는 것임)

▲  세상을 등지며 꺼꾸로 엎어진 문인석(文人石)
자신을 살피지 않는 무심한 세월과 세상에 대한 원망의 표현일까? 얼굴을
땅에 묻고 세상을 등진 채, 엎어져 있다.

▲  봄이 뿌려지고 있는 이말산 산길 (이말산 동남쪽 자락)

▲  나란히 목을 잃은 동자석들 ①
망나니의 칼과 세월의 칼날은 모두 목만 취하는 모양이다. 이 세상에 목을 취해야
될 썩은 작자와 무리들이 적지 않거늘 왜 그들은 건드리지 않고
죄없는 저들만 건드리는지 모르겠다.

▲  나란히 목을 잃은 동자석들 ②

▲  이말산 능선길 (북쪽 방향)

▲  부드럽게 펼쳐진 이말산 능선길 ①

이말산은 흙산이라 산길과 능선길이 거의 부드럽다. 산세도 일부를 제외하면 느긋한 편으로
구파발역(3호선)과 진관동주민센터, 진관초교, 약수사, 연화사, 우물골2단지7블록, 삼천사/
진관사입구 정류장 등에서 접근하면 되며, 구파발역에서 산의 동북쪽 끝 봉우리까지 30~40분
이면 충분하다. (거기서 부근으로 하산하면 40~50분이면 끝)


▲  부드럽게 펼쳐진 이말산 능선길 ②

▲  부드럽게 펼쳐진 이말산 능선길 ③
산길 주위로 방치된 옛 무덤들이 적지 않다. 하여 밤에 오면(달이 뜨지 않은
밤이나 비오는 날 밤) 염통이 제대로 쫄깃해질 것 같다.

▲  흙과 나무에 깔린 무덤 상석

▲  머리가 덥수룩한 옛 무덤들
묘비는 사라졌지만 상석과 향로석은 잘 남아있다.

▲  이말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향로봉과 족두리봉
북한산이 남성적인 뫼라면 이말산은 귀여운 여동생 같은 작고 아늑한 뫼이다.



 

♠  이말산 마무리

▲  무덤이 떼거지로 나타나다 (묘비 1기와 상석 6기)

이말산 동북쪽 끝 봉우리에는 네모난 쉼터와 약간의 운동시설이 있다. 여기서 북쪽과 동쪽은
군부대로 막혀있어 서쪽(진관초교)으로 내려가거나 남쪽 능선길로 돌아나가야 되는데, 일몰까
지는 아직 여유가 넘쳐 남쪽 길로 다시 나가면서 옛 무덤들을 보물찾기 하듯 더 찾아보기로
했다.
남쪽을 바라보며 능선길을 거닐다 보니 앞서 보이지 않던 무덤들이 쏙쏙 시야에 걸려든다. 특
히 제각말5-3단지 뒤쪽인 동쪽 산자락에 여러 기가 몰려있는 무덤군들이 여럿 나타나 나에게
적지 않은 흥분감을 주었다. 역시 한쪽 방향으로만 향하면 놓치는 것이 많은 법이다.


▲  이말산 동쪽 자락 무덤군
대부분 묘비(묘표)를 지니고 있다. 그들 중 1기는 문인석까지 지니고 있어
잘나가던 집안의 묘역임을 알려준다. (누구 묘역인지는 확인하지 않았음)

▲  장대한 세월에 꼬꾸라진 묘비
그를 거느렸던 무덤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묘비만 뿌리가 뽑힌 채,
자빠져 있다. 무덤은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 저 꼬라지가 되어 버리니
굳이 많은 돈을 들여 사후(死後) 흔적을 남기는 것도 다 부질없다.

▲  장대한 세월에게 제대로 깨지고 요절난 묘비들

▲  칠원윤씨 윤용(尹鎔) 묘역

윤용은 16~17세기 인물로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1631년 이곳에 무
덤을 썼으며<묘비에는 이곳 지명이 '양주군 신혈리 택사(神穴里 澤寺)'로 나옴> 부인 예안이
씨와 쌍분(雙墳)을 이루고 있다. 묘비(묘표)와 상석, 조그만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을 갖추
고 있으며, 후손들의 손길이 여전하여 호석도 새로 갖추었다.


▲  칠원윤씨 윤응린(尹應麟), 하동정씨 부부묘
윤응린은 16~17세기 인물로 자헌대부 형조판서를 지냈다. 비석과 호석은
20세기에 후손들이 새로 갈아넣은 것들이라 장대한 시간의 무게는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  칠원윤씨 윤용, 윤응린 묘역 전경

▲  상선(尙膳) 노윤천(盧允千) 묘역

노윤천은 16세기에 활동했던 내시(내관)이다. 1545년 명종(明宗) 즉위 때 승전색(承傳色)으로
써 왕명을 전달한 공이 있어 그해 8월, 가자(加資)되었으며 1546년 1월, 위사원종공신(衛社原
從功臣)에 책록되기도 했다.
세월의 불도저 같은 흐름 앞에 무덤 봉분은 사라지고 묘표(묘비)와 상석, 문인석 1기가 남아
있으며, 향우측에 비슷한 모습의 묘표가 있어 이곳이 그의 선영(先塋)이었음을 알려준다. 묘
비는 피부가 많이 손상되어 대부분의 글씨는 확인할 수 없다.

▲  무심한 세월 속에서도 표정 하나
잃지 않은 노윤천 묘역 문인석

▲  정체성을 잃은 어느 상석
무덤 상석이 졸지에 잠깐 쉬었다 가는
산길 쉼터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  녹음이 짙어가는 이말산 서쪽 능선길
능선길을 거닐며 무덤과 석물을 찾는 재미가 참 쏠쏠하다. 이번 이말산 더듬기에서
대략 찾아낸 무덤만 어림잡아 200기는 넘을 것이다.


▲  방공호 시설이 있는 이말산 정상

이말산 정상은 산 서쪽 부분에 있다. 정상(132.7m)은 평평한 넓은 공간으로 방공호 등의 군사
시설이 있으나 이곳이 공원으로 해방되면서 버려진 상태이며 은평뉴타운과 앵봉산, 북한산 향
로봉 등이 시야에 보이나 수목(樹木)이 울창하여 조망의 깊이는 별로이다.


▲  소탈한 모습의 이말산 정상 표목(標木)

▲  개나리들이 격하게 반겨주는 약수사 방면 산길 ▼



▲  이말산 서북쪽 자락에 있는 약수사(藥水寺)

이말산 정상에서 구파발역으로 내려가려고 했으나 깜찍하게 손짓하는 개나리들에게 마음이 끌
려 약수사로 길을 틀었다.
4~5분 정도 내려가니 산과 아파트 경계에 자리한 약수사가 마중을 나온다. 이 절은 고색이 아
직 여물지도 못한 20세기 후반 현대 사찰로 20여 일 정도 남은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을
위해 벌써부터 연분홍 연등으로 경내를 곱게 다듬은 상태였다. 그 오색 연등에 순백 벚꽃까지
어우러져 조촐하게 별천지를 구가하고 있어 이말산에서 많은 것을 보고 담느라 힘겨운 두 눈
의 피로감을 크게 덜어준다.


▲  오색 연등으로 정신이 없는 약수사 경내
약수사를 끝으로 4월 한복판에 찾아간 이말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이말산, 진관근린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74일대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3년 8월 30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티스토리(tistory)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3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벽오산 자락에 넓게 깃들여진 달달한 시민공원, 강북구 북서울꿈의숲 <창녕위궁재사, 월영지, 청운답원, 북서울꿈의숲아트센터>

북서울꿈의숲 늦가을 산책



' 북서울꿈의숲 가을 나들이 '

북서울꿈의숲 청운답원

▲  북서울꿈의숲 청운답원

창녕위궁재사 북서울꿈의숲아트센터 옥상정원

▲  창녕위궁재사

▲  북서울꿈의숲아트센터 옥상정원

 



 

가을이 깊어가던 10월의 한복판에 강북구 번동(樊洞)에 위치한 '북서울꿈의숲'을 찾았다.
북서울꿈의숲은 집에서 겨우 6km 거리로 아주 가까운 곳이나 그곳은 이상하게도 몸과 마
음이 썩 흥미를 보이지 않아 오랜 세월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었다. 하여 이번에 그곳
을 미답처 목록에서 싹싹 지우고자 햇님이 중천에 걸린 14시에 집을 나섰다.



 

♠  북서울꿈의숲 입문 (창녕위궁재사)

▲  '북서울꿈의숲' 마크

북서울꿈의숲(이하 '북서울숲')은 강북구 번동과 미아동(彌阿洞) 일부에 걸쳐있는 너른 공원
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두 귀에 생생한 '드림랜드'란 서울 북부 최대의 테마파크가 뿌리를 내
려 왕성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2008년 문을 닫았다. 하여 서울시가 인수하여 1년에 걸친
손질 끝에 2009년 10월 시립공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공원 이름은 드림랜드의 분위기를 잇는다는 뜻에서 '드림(Dream)'의 우리말인 '꿈'을 취했으
며, 서울 북부권에 자리해 있어 부르기 좋게 '북서울꿈의숲'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공원 면적은 684,157㎡로 서울에서 월드컵공원, 올림픽공원, 서울숲에 이어 4번째로 큰 공원
이다. 월영지와 초화원, 칠폭지, 허브정원, 사슴장 등 자연 중심의 다양한 공간을 담고 있으
며, 꿈의아트센터와 상상톡톡미술관, 숲속문화전시장 등의 공연장과 전시장도 아낌 없이 갖추
고 있다.
또한 청운답원이란 너른 풀밭도 지니고 있어 보기만 해도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며, 창녕위궁
재사란 늙은 한옥도 지니고 있어 고색의 멋도 잠시 누릴 수 있다. 게다가 오패산과 벽오산(碧
梧山) 자락에 자리한 탓에 울창한 숲도 지니고 있으며, 그 숲속에는 숲길과 여러 운동시설이
닦여져 동네 사람들의 발길도 빈번하다. 그래서 가족 나들이와 소풍, 모임, 산책, 데이트 명
소로 완전 만점급이다.

북서울숲 서남쪽 숲에는 이곳의 옛 주인인 창녕위 김병주와 복온공주의 묘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 지역을 '공주능'이라 불렀으며, 버스정류장 이름 역시 '공주능'이었다. 허나 드림랜
드가 들어서면서 경기도 용인시로 무덤을 이전했고, 무덤을 관리하던 창녕위궁재사만 제자리
에 남게 되었다.
드림랜드는 가본 적은 없으나 수영장과 눈썰매장이 제법 유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허나 어
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공원 시설은 싹 사라지고 자연을 중심으로 한 상큼한 공간으로 다시금
태어나 드림랜드 몇 배 이상으로 왕성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처음으로 발을 들인 북서울숲, 생각보다 크고 아름다운 모습에 놀랬고 볼거리도 꽤 넉넉하여
다시 놀랬으며, 산책로도 아주 그림 같았다. 이렇게 좋은 곳을 왜 이제서야 인연을 지었을까.
그의 존재를 알고 있음에도 가지를 않았으니 그를 하찮게 봤던 내 안목이 정말로 쓰레기였음
을 실감한다. 또한 앞으로 등장 밑도 잘 살펴봐야 되겠다. 등잔 밑에 은근히 월척거리가 많으
니 말이다.

북서울숲은 무료 자유 공간으로 미술관 등 건물을 제외하면 관람시간에 제한은 없다. 접근은
옛 드림랜드 정문이었던 동문(북서울꿈의숲 동문교차로)과 후문이었던 서문에서 접근하면 되
며, 그 외에 동네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소소한 접근로가 10여 개가 있다.


▲  칠폭지(七瀑池)

북서울숲 동문으로 들어서니 칠폭지란 생태연못이 마중을 한다. 이름 그대로 7개의 폭포를 지
닌 연못으로 경사를 이용한 물길 위에 9개의 다리가 놓여져 있다. 옛 드림랜드의 흔적인 풍화
암 주변에 억새와 자작나무길이 닦여졌고, 다양한 수생식물들이 수북히 자라나 서로를 의지한
다. 또한 분수대도 지니고 있는데, 5월부터 9월까지만 짧게 몸을 푼다. (비가 오면 자동으로
분수 가동이 정지됨)


▲  긴 방학에 들어간 칠폭지 분수대와 그 너머로 보이는 방문자센터

▲  창녕위궁재사(昌寧尉宮齋舍) 안채와 제사를 위한
제청(오른쪽에 삐죽 나온 부분)


방문자센터 서쪽에는 고색이 깃든 한옥이 있다. 얼핏 보면 공원을 조성하면서 지은 장식용 한
옥처럼 여길 수 있으나 그는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이자 북서울숲의 유일한 문화유산인 창녕위
궁재사이니 여로(旅路)를 살찌울 겸, 꼭 둘러보기 바란다.

이름도 긴 이곳은 순조(純祖, 재위 1800~1831)의 둘째 딸인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1832)와
공주의 남편인 창녕위 김병주(昌寧尉 金炳疇, 1819~1853)의 묘를 관리하고 제를 지내던 재사(
齋舍)이다. 건물 이름에 무려 '궁(宮)'이 쓰인 것은 공주 부부의 재사라 그런 것인데, 지금은
비록 다른 곳으로 갔지만 서남쪽 산자락에 그들의 무덤이 있었으며, 재사이긴 하나 서울 시내
와 가까워 살림집도 겸하고 있었다.

공주묘의 재실이라 왕실에서 내린 좋은 재료로 지어졌으며, 사랑채와 안채, 대문채, 아래채를
지니고 있었다. 안채는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집으로 그 날개채에 제사 공간인 4칸 반 규모의
제청(祭廳)이 딸려있다. 제청이 사랑채가 아닌 안채에 딸린 것은 거의 흔치가 않은데 6.25 때
아래채와 함께 파괴된 것을 1955년에 재건했으나 아래채는 다시 일으키지 못해 사랑채와 안채
, 대문채만 남게 되었다.

안채 옆에 자리한 사랑채는 다른 곳에서 가져온 건물로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彈琴臺) 전
투를 신나게 말아먹은 신립(申砬)의 아들, 충익공 신경진(忠翼公 申景禛)의 별장에서 가져왔
다고 전한다. 안채와 나란히 자리해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1910년 김병주의
손자인 김석진(金奭鎭, 1847~1910)이 경술국치(庚戌國恥)에 격분하여 자결한 곳으로 널리 알
려져 있다. <그때 고약한 왜정(倭政)은 김석진에게 남작 작위를 주며 회유하려고 했음>

창녕위궁재사는 조선 후기 재사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고 김석진이 자결한 현장으로
가 등록문화재 40호
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복온공주 부부묘는 드림랜드 건설로 용인 지역
으로 자리를 떴지만 재사는 제자리를 지켜 이곳의 옛 이야기를 붙잡고 있다.
재사 관람은 가능하나 사랑채와 안채 내부는 금지된 구역으로 묶여 있어 뜨락과 건물 외부만
살펴야 되며, 9시부터 18시까지만 발을 들일 수 있다. 그리고 재사 서쪽과 뒷쪽으로 대나무가
무성하여 깊은 숲에 묻힌 별서(別墅)에 들어선 기분까지 선사한다.

▲  활짝 열린 대문과 대문채 (바깥쪽)

▲  대문과 대문채 (안쪽)
대문채는 하인들의 생활공간이다.


▲  정면에서 바라본 안채와 그 안채를 가리고 있는 소나무
소나무 자리에는 6.25 때 쓰러진 아래채가 있었다. 그의 빈자리를
잘생긴 소나무가 조금이나마 채워준다.

▲  창녕위궁재사 사랑채
안채와 비슷한 'ㄱ' 구조의 건물로 다른 곳(신경진의 별서로 여겨짐)에서
가져와 사랑채로 삼았다.

▲  사랑채 마루

▲  우수에 잠긴 사랑채 뒤쪽 굴뚝


▲  사랑채 주변에 옹기종기 모인 주춧돌들
고색이 깃든 주춧돌의 높이가 어느 정도 있어 옛 안채와 아래채 것들로 여겨진다.
이제는 받쳐들 상대를 상실하여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사랑채 뒤쪽에 짙게 우거진 대나무숲
살랑거리는 가을 바람에 대나무들이 사각사각 소리를 낸다.

▲  창녕위궁재사의 서쪽 협문과 키 작은 돌담

▲  낮은 돌담 너머로 바라본 창녕위궁재사
(왼쪽이 사랑채, 오른쪽이 안채 부분)

▲  이야기정원 대나무숲길

창녕위궁재사 서쪽과 남쪽에는 이야기정원이 닦여져 있다. 월영지까지 경사지를 활용하여 닦
여진 것으로 대나무숲과 전통화계정원(꽃계단정원), 사랑마당 등이 있으며, 특히 창녕위궁재
사 바로 옆구리에 펼쳐진 대나무 숲길이 백미(白眉)로 비록 거리는 짧지만 이곳을 거닐면 대
나무 관광지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담양 죽녹원이 크게 부럽지가 않다.



 

♠  북서울꿈의숲 월영지, 청운답원 주변

▲  월영지(月影池)

북서울숲 한복판에는 월영지란 너른 수면 공간이 있다. 전통정원 분위기로 조성된 호수와 같
은 큰 연못으로 월영지란 이름 그대로 달 그림자가 수면에 비춘다. 달님뿐만 아니라 햇님과
구름, 벽오산과 나무들까지 모두 거울로 삼아 매뭇새를 다듬는 상큼한 못으로 주변에 월영대
(月影臺), 월광폭포, 월광대, 애월정 등 달과 관련된 이름으로 도배된 명소가 늘어서 있으며,
물속에서 자라는 낙우송(落羽松) 군락지와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 못은 둥글고 섬은 네모난
모습)의 연지(蓮池), 매화가 있는 매대(梅臺) 등이 있다.
이곳도 칠폭지처럼 분수를 품고 있는데, 5월부터 9월까지만 짧게 몸을 푼다. (비가 오면 자동
으로 분수 가동이 정지됨)


▲  애월정(愛月亭)과 월광대(月光臺), 월영지 일대

▲  월영지의 화려한 입술, 애월정

월영지 북쪽 월광대에 자리한 애월정은 1칸짜리 팔작지붕 정자이다. 연못 이름이 월영지라 정
자 또한 달을 사랑하는 이름의 애월정으로 이곳의 운치를 아름답게 돋구는 장식물이다. 정자
에 앉아 월영지와 벽오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누리고 있으면 정말 세상 시름이 절로 잊혀진
다. 물론 잠깐이긴 하지만.

▲  품격이 느껴지는 애월정 현판의 위엄

▲  애월정에서 바라본 월영지와 벽오산


▲  북서울숲의 너른 들판, 청운답원(淸雲踏圓) <남쪽에서 본 모습>

월영지와 창포원 사이로 청운답원이라 불리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완만한 경사의 풀
밭으로 대도시 한복판에서 이런 넓은 초원을 보기가 참 쉽지가 않은데 돗자리를 펴고 김밥과
도시락을 까먹거나, 수다를 떨거나, 모임이나 놀이를 하거나. 한숨 자기에는 정말 좋은 곳이
다.
단 그늘이 없는 것이 흠이라 여름과 햇살이 크게 흥분했을 때는 피해야 된다. 또한 들쥐와 진
드기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존재들도 있을 수 있으므로 풀밭에 그냥 앉거나 벌러덩 눕는 것은
피해야 된다.


▲  북쪽에서 바라본 청운답원

▲  도심 속의 푸른 초원, 청운답원의 위엄
공원 너머로 보이는 회색 도시는 장위동과 석관동 지역으로 저 멀리
아차산~용마산 산줄기까지 시야에 잡힌다.

▲  상상톡톡미술관

청운답원 북쪽에는 이름도 톡톡 튀는 상상톡톡미술관이 있다. 꿈의숲 아트센터에 있는 미술관
을 새로 손질한 2층 규모의 어린이와 어린이 동반 가족을 위한 이색미술관으로 어린이들이 미
술과 함께 자연을 직접 체험하며 창의력과 상상력을 키워주는 것이 이곳의 목적이다. 그러니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나들이객들은 꼭 들려서 자녀들의 창의력과 상상력 경험치를 조금씩 높
여주기 바란다.

이곳은 세종문화회관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동/식물 캐릭터와 숲을 형상
화한 계단, 파이프를 이용하여 만든 난간 등 그들이 흥미를 보일 수 있도록 독특한 인테리어
로 꾸며져 있으며, 작은 전시실 3개와 옥상 야외까페를 지니고 있다. 또한 가족 관람객을 위
해 휴게실과 수유실을 지니고 있으며, 어린이들의 공간은 모두 친환경 소재로 만들었다.
(이곳은 미술관의 특성상 굳이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했음)


▲  서쪽에서 바라본 청운답원과 상상톡톡미술관

▲  북서울꿈의숲아트센터와 전망대(오른쪽에 붕 떠있는 건물)

벽오산 정상과 가까운 북서울숲 북서쪽 산자락에 북서울드림스튜디오와 북서울꿈의숲아트센터
(이하 꿈의숲아트센터), 전망대가 몰려있다.
스튜디오는 언제든 공개 방송이 가능한 라디오 방송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며, 디지털라디오 방
송시스템을 지녀 양질의 방송 품질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꿈의숲아트센터는 스튜디
오 132㎡(조정실 16.5㎡ 포함)와 방청석, MC석, 조정실 등을 지니고 있으며 이곳은 드림랜드
시절에 눈썰매장이 있던 곳으로 눈썰매장 지형 형태를 활용해 다졌다.
또한 옥상에는 들꽃을 가득 머금은 옥상공원이 닦여져 상큼한 볼거리를 선사하는데, 옥상이라
고 해서 꼭 건물을 거칠 필요는 없으며, 건물 옆에 벽오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어 그 길로 접
근하면 된다. 그리고 아트센터 서쪽으로 허공에 떠있는듯한 건물이 있는데, 그는 북서울숲의
지붕인 전망대이다.


▲  북서울꿈의숲아트센터 옥상공원

옥상공원(옥상정원)은 2009년 10월에 조성된 것으로 구절초 등 들꽃 11종, 단풍철쭉 외 7종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들꽃들의 보금자리이다. 면적은 590㎡로 의자 등의 쉼터도 마련되어 있
으며 자유롭게 관람이 가능하다.


▲  해맑게 웃고 있는 가녀린 구절초들
구절초와 벌개미취가 너무 비슷하게 생겨먹어 나 같은 돌머리들은
자주 햇갈린다. (내 머리가 나쁜 것을 어찌하누?)

▲  꿈의숲아트센터 옥상공원에서 바라본 오패산과 북한산(삼각산)

▲  꿈의숲아트센터 옥상공원에서 바라본 번동과 수락산(水落山)

▲  꿈의숲아트센터 옥상정원에서 바라본 청운답원과 상상톡톡미술관



 

♠  북서울꿈의숲 전망대와 벽오산(碧梧山)

▲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전망대 (옥상공원에서 바라본 모습)

북서울숲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에 전망대가 있다. 건물이 일직선이 아닌 크게 비스듬한
모습으로 1층에서 거의 30도 기울어진 길쭉한 부분을 계단이나 경사식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그 끝에서 일직선 엘리베이터나 계단을 타고 꼭대기 전망대로 올라가는 방식이다. 그 모습이
공룡이나 큰 동물이 웅크리고 앉아 긴 목을 길게 쳐든 모습으로 비스듬한 부분 끝에 매달린
전망대는 그것을 받치는 기둥 같은 것이 없어 한편으로는 아찔하면서도 신기하다.

전망대 높이는 49.7m로 면적 860.27㎡, 연면적 1,173.26㎡의 철근철골콘크리트 건물이다. 꼭
대기 3층에는 360도 조망이 가능한 까페가 있으며, 이곳에 올라서면 서울 동북부(도봉구, 강
북구, 노원구, 성북구)와 동부(중랑구, 동대문구) 지역과 북한산(삼각산), 도봉산, 수락산,
아차산 산줄기가 거침없이 바라보여 조망도 꽤 일품이다. 그러니 북서울숲에 왔다면 이곳까지
꼭 들려서 일품 조망을 누려보기 바란다. 입장료는 없으며, 까페에서 커피 한잔의 여유를 누
리며 천하를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서울 야경(夜景) 구경이 백미이다.

▲  전망대로 올라가는 경사식 엘리베이터

▲  크게 비스듬한 부분 끝에 매달린
전망대의 아찔한 위엄


▲  단출한 모습의 전망대 까페 3층
까페에서는 커피 등의 음료를 팔고 있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 산줄기

▲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도봉산(왼쪽 산)과 도봉구, 강북구, 노원구, 수락산(오른쪽 산)

▲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정면에 멀리 보이는 산이 수락산과 불암산이고, 그 앞에 길게 누운 산이
조선시대 서울 근교 공동묘지인 초안산(楚安山)이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④
수락산(왼쪽 끝)과 불암산, 노원구, 중랑구, 장위동 지역

▲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⑤
장위동과 석관동, 성북구, 중랑구, 동대문구, 아차산~용마산 산줄기

▲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⑥
바로 앞에서 시야를 방해하는 뫼가 벽오산이다. 그 뒷쪽으로 장위동, 석관동,
중랑구, 동대문구, 아차산~용마산 산줄기가 두 망막에 들어온다.

▲  전망대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계단길 (오른쪽이 계단식 엘리베이터)
전망대로 올라갈 때는 엘리베이터, 내려갈 때는 계단을 이용했다.

▲  벽오산 숲길

북서울숲을 품고 있는 산은 오패산(123m)과 벽오산(135m)이다. 이들을 같은 뫼로 보기도 하나
보통 북서울숲 북쪽이자 미아역 동쪽 뫼를 오패산, 북서울숲 서남쪽 뫼(전망대가 있는 뫼)를
벽오산이라 구분 짓기도 한다.
벽오산은 매봉산, 빡빡산이라 불리기도 하며, 철종(哲宗, 재위 1849~1863)의 왕비인 철인왕후
(哲仁王后) 김씨가 복온공주의 손자인 김석진에게 '벽오산' 3자를 친필로 써주기도 했다. 이
는 벽오산에 복온공주 부부의 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거 외에는 딱히 옛 이야기는 없다.

전망대 바로 서남쪽에 벽오산의 싱그러운 숲이 펼쳐져 있는데, 숲속에 그어진 숲길(남측순환
로)을 따라 북서울숲 동문까지 이동이 가능하다. 경사는 느긋한 편이며, 숲이 매우 짙어서 햇
살이 들어오기가 힘들다. 중간중간 미아동 동네로 내려가는 길이 있으나 처음 인연을 짓는 뫼
라 혹시 숨겨진 꿀단지가 있을까 싶어 동문까지 싹 살펴보기로 했다.


▲  벽오산 서쪽 자락에 있는 네모난 정자
미아4거리 방향인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곳에 올라서면 미아동과 삼양동,
길음동, 종암동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벽오산에서 만난 이름없는 샘터
이곳 약수는 철뚜껑을 열어 바가지로 떠마시는 형태로 수질 검사 안내문이
없어서 굳이 마시지는 않았다. (안 마시는 것이 좋을 듯)

▲  벽오산 남쪽 자락에서 바라본 일몰 풍경
(장위동과 석관동, 동대문구, 중랑구, 아차산)

▲  벽오산 남쪽 자락에서 만난 주름진 큰 바위
주름선이 범상치 않은 크고 견고한 바위로 그에게 붙여진 이름은 아직 없다.
이 조그만 산에 이런 큰 바위가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  숲에 완전히 파묻힌 벽오산 남쪽 오솔길

이 부근에 벽오산의 옛 주인이던 복온공주와 창녕위 김병주의 묘가 있었다. 드림랜드가 아니
었다면 이곳에 계속 눌러앉아 북서울숲의 문화유산을 1개 늘려주었을 텐데, 이미 떠나간 그들
의 빈자리가 무척 아쉽기만 하다.


▲  칠폭지 서쪽 숲길

벽오산 남쪽 숲길의 끝에 낯익은 곳이 마중을 나온다. 바로 북서울숲 나들이를 시작했던 칠폭
지이다.
시간은 어느덧 18시, 낮 근무인 햇님은 퇴근 준비를 서두르고 야간 근무인 달님이 세상을 인
계 받는다. 비록 초화원 등 놓친 곳이 여럿 있으나 땅꺼미도 짙어지고 몸도 피곤하여 무리를
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우리집과도 가까우니 봄이나 다음 늦가을에 다시 인연을 지으면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북서울꿈의숲 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3년 7월 1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티스토리(tistory)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3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송파구 한복판에 자리한 상큼한 푸른 쉼터, 오금공원 <문양군 류희림묘역, 신선경과 류인호묘역, 오금공원 인공폭포>

송파구 오금공원



' 도심 속의 푸른 쉼터, 송파구 오금공원 '

오금공원 숲길
▲  오금공원 숲길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 오금공원 인공폭포

▲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

▲  오금공원 인공폭포

 



 

여름 제국이 봄을 몰아내고 천하의 패권을 쥐어들던 6월의 한복판에 송파구 오금동에 자
리한 오금공원을 찾았다.

오금공원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음에도 겨우 2~3번 가본 것이 고작이다. 그냥 숲이나
운동시설, 쉼터가 전부인 단순한 근린공원이 아닌 조선 중기 무덤을 여럿 간직한 곳으로
그들이 문득 그리워져 발길의 본능대로 그들을 찾아 나섰다.



 

♠  오금공원(梧琴公園)에서 만난 늙은 무덤들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 문양군 류희림 묘역)

▲  오금공원 북부 산책로

송파구(松坡區)의 작은 밀림인 오금공원은 오금동(梧琴洞)과 방이동(芳荑洞) 지역에 한참 개
발의 칼질이 그어지던 1990년에 조성되었다. (1983년부터 개발이 시작됨;) 시골 풍경을 이루
던 공원 주변은 죄다 아파트와 주거지로 강제 성형을 당했으나 이곳은 해발 200m 정도의 야산
으로 이루어져 있고 오래된 무덤도 여럿 있어서 거의 자연 그대로의 멋을 살려 근린공원으로
닦여졌다.
인근 올림픽공원과 더불어 송파구 동부의 소중한 오아시스이자 쉼터로 면적은 219,167.4㎡에
이르며 어린이놀이터와 자연학습장, 송파구 다목적경기장과 배드민턴장, 운동장 등의 운동시
설, 송파도서관, 산책로, 쉼터 등을 두루 갖추고 있어 근린공원의 자격을 충실히 갖추고 있다.
게다가 숲(소나무가 많음)도 아주 짙어 조촐하게 삼림욕이나 산책을 누리기에 아주 제격이다.

공원에는 2000년 5월 23일에 조성된 자연학습장이 있는데 은방울꽃, 초롱꽃, 옥잠화, 동자꽃
등 야생 초화류 30종과 자생 관목류 20종을 지니고 있으며, 2005년에는 송파경찰서 교차로와
맞닿은 공원 서쪽 모서리에 정자와 인공폭포를 닦아 시원한 볼거리를 하나 추가했다. 또한 공
원이 조성된 이듬해(1991년)부터 에어로빅 교실이 시작되어 거의 매일 아침 열리고 있는데 이
제는 공원의 명물로 자리를 잡아 아침마다 몸을 푸는 동네 사람들로 아침이 아주 활기차다.

허나 이곳에는 그런 것들보다 더 오래되고 값비싼 존재들이 있으니 바로 거창신씨묘역과 문화
류씨 묘역이다. 이들은 조선 중기 무덤들로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인데 바로 그들 덕분에 오금
공원이 개발의 칼질에서 비켜가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들은 꼭 살펴보기 바란다. 그들이 없
는 오금공원은 갈비가 없는 갈비탕과 같기 때문이다.

나는 오금공원4거리에서 공원 더듬기를 시작하여 거창신씨묘역(신선경과 류인호 묘역), 문화
류씨묘역(문양군 류희림묘역), 인공폭포와 충민정, 공원 남부를 거쳐 송파도서관에서 마무리
를 지었다.


▲  솔내음이 그윽한 공원 소나무숲과 그 속에 닦여진 운동시설들

▲  울퉁불퉁한 지압용 산책로
저 싱그러운 숲속에 나를 자꾸 숨겨본다.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게끔
하지만 나를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함정... 지금까지
뭐하고 살았나 모르겠네 ㅠㅠ

▲  지압용 산책로와 돌탑
건강을 위해 발에 진하게 자극도 줄 겸, 맨발로 거닐어보기 바란다.
(그렇게 하라고 만든 길임)


마치 첩첩한 산골에 숨겨진 어느 신성한 곳으로 강제 인도된 기분이다. 저곳에 옛날 이야기에
나 나오는 삼한시대 소도(蘇塗)나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신선(神仙)의 세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개인적으로 오금공원의 이 산책로가 썩 마음에 든다. 묘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돌탑, 속인들의
건강을 위한 지압용 산길, 거기에 숲까지 어우러진 상큼한 현장이라 그런 모양이다. 이들 돌
탑은 공원 수식용으로 근래에 지어졌다.


▲  지압용 산책로 주변에 솟아난 돌탑들

▲  하늘을 앗아간 울창한 숲길

정말 깊은 산골의 숲길을 거니는 기분이다. 허나 이곳은 엄연히 시가지에 둘러싸인 근린공원
이다. 산도 아니고 궁궐도 아닌 대도시 한복판의 공원이란 말이다. 그만큼 공원을 이루는 숲
의 품격이 아주 높으며 그것이 오금공원의 자랑이다.


▲  문양군 류희림(文陽君 柳希霖) 묘역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9호

오금공원 한복판에는 거창신씨묘역과 문화류씨묘역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들은 1991년에 서
지방유형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는데(거창신씨묘역은 78호, 문화류씨묘역은 79호) 2008년 이들
묘역을 '신선경과 류인호묘역'이란 이름으로 통합을 하여 지정 번호를 78호로 했다. 즉 79호
가 사라진 것인데, 비록 문중은 다르지만 장인(거창신씨)과 사위 집안(문화류씨)으로 묶여진
혈연관계이고 무덤도 6기 밖에 없어서 그렇게 합친 것이다.

허나 문화류씨 문중에서 크게 반발하자 5년이 지난 2013년 7월에 이들을 다시 분리했다. 그래
서 기존의 문화류씨묘역의 무덤 3기는 '문양군 류희림 묘역'이란 이름으로 79호의 번호를 되
찾았으며, 거창신씨묘역의 무덤 3기는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이란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곳에 제일 먼저 둥지를 튼 거창신씨의 신선경 묘역이 북쪽에 있고, 그 뒤쪽에 그의 사위인
문화류씨의 류인호 부부 묘가 있으며, 동남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 류인호의 아들인 류복
룡과 그의 아들인 류희림 묘역이 자리한다.


▲  문원군 류복룡(文原君 柳伏龍)과 평강채씨 부부묘

류복룡은 16세기 인물로 류인호의 아들이다. 딱히 이력은 없으나 잘난 아들(류희림) 덕에 문
원군에 봉해졌으며 이들 묘역에서 유일하게 신도비까지 지니고 있다.
이 묘역은 신도비 외에 풍만하게 솟은 봉분(封墳) 2기와 묘비(묘표), 상석(床石), 향로석(香
爐石), 망주석(望柱石) 1쌍, 문인석(文人石) 1쌍을 갖추고 있다.

▲  검게 빛바랜 류복룡 묘비(묘표)

▲  우측 문인석과 망주석, 신도비

▲  류복룡 신도비(神道碑)
비석을 꽂는 비좌(碑座)와 머리 부분이
동그랗게 다듬어진 비신(碑身)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모습이다.

▲  홀(忽)을 꽉 쥐어든 좌측 문인석
고된 세월에 지쳤는지 표정이 조금은
일그러져 보인다.


▲  류희림(柳希霖)묘

류복룡 묘 뒤쪽에는 그의 아들인 류희림 묘가 있다. 류인호 3대 중 가장 출세한 류희림(1520~
1601)은 자는 경열(景說), 시호는 문양(文陽)으로 부인은 박언량(朴彦良)의 딸이다.

성균관 유생을 지내던 1560년 왕실의 보호로 불교가 다시 뜨려고 하자 1,000여 명의 유생들을
선동, 그 대표로 불교를 비판하고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을 모두 폐지하자는 상소문을 올려
그 존재를 크게 알렸다.
1561년 식년과(式年科)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문한관(文翰官)이 되었으며, 검열(檢閱), 정
언(正言),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을 지냈다. 그리고 1581년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명나
라 연경(燕京)에 동지사(冬至使)로 갔으나 명나라 왕실에서 가져온 선물이 적다고 항의하면서
엉뚱하게 파직되고 말았다.

그 뒤 다시 기용되어 한직에 머물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
事)가 되어 못난 왕(선조)을 호종한 공로로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이어서 동지중추부사(
同知中樞府事)와 예조참판(禮曹參判), 동지돈녕부사(冬至敦寧副使)를 지냈으며, 1601년 81세
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후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봉해지고 문양군(文陽君)에 추봉되었으며, 그의 아버
지(류복룡)와 할아버지(류인호)까지 싹 군(君)의 시호를 받았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류인
호 3대의 묘역은 그저그런 사대부의 묘로 남았을 것이다.

류희림 묘는 상석과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을 갖추고 있으나 문인석은 근래에 새로 단 것들
이라 고색의 때는 아직 여물지 못했다.

* 문양군 류희림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동 51 (오금로 363)


▲  신선경(慎先庚)과 류인호(柳仁濠) 묘역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8호

▲  신선경과 청주한씨 부부묘

신선경은 이곳에 처음 묻힌 인물로 1456년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을 거쳐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허나 그에 대한 자세한 이력은 더 이상 전하는 것이 없으며 그의 딸과 사위(류인호)
가 뒤쪽 좌측에 묻혔고, 그 인연으로 외손주와 외증손자까지 부근에 묻히면서 이곳은 두 집안
4대의 공동 묘역이 되었다.

신선경 묘는 봉분 2기와 묘비, 상석, 문인석 1쌍을 지니고 있으며 묘비(묘표)의 머리 부분에
연화무늬가 새겨져 있어 조선 초기 묘비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이들 묘역이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것은 15~16세기 무덤 양식을 잘 간직한 점도 있지만 신선경의 묘비와 류복룡 신
도비의 영향도 크다.

▲  연꽃무늬가 새겨진 신선경 묘비
비석은 작지만 귀엽고 앙증맞은 모습이다.

▲  홀쭉하고 긴 키를 지닌 신선경묘
우측 문인석

▲  검은 주근깨가 여기저기 피어난
신선경묘 좌측 문인석

▲  류인호와 거창신씨 부부묘


신선경 묘역 뒤쪽 우측에 자리한 류인호는 15세기 인물로 신선경의 사위이다. 죽어서도 그의
사위로 있고 싶었는지 장인과 장모 무덤 뒤쪽에 부인과 함께 묻혀있으며 공조참의(工曹參議)
정도 지낸 것 외에는 딱히 이력은 없다.
사위가 장인/장모 무덤 뒤쪽에 자리한 특이한 케이스로 합장된 봉분과 묘비, 상석, 망주석이
전부인 조촐한 모습이다. 조선 중기까지 이렇게 처가 묘역에 묻힌 양반사대부와 왕족이 적지
않았는데 제왕이었던 연산군(燕山君, 조선 10대 군주)도 처가 집안(거창신씨)에 묻혔다.

*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동 51 (동남로 263)



 

♠  오금공원 마무리

▲  인공폭포 위에 닦여진 충민정(忠愍亭)

송파경찰서 교차로와 맞닿은 공원의 서쪽 끝으머리에 인공폭포와 충민정이 있다. 2003년 서울
시의 지원을 받아 지하수를 개발하고 폭포와 연못을 닦아 2005년 10월에 완성을 보았는데, 폭
포 위쪽에 1칸짜리 팔작지붕 정자인 충민정을 달아놓아 운치를 돋구었다.
'충민'이란 이름은 송파구 출신이라는 임경업(林慶業, 1594~1646) 장군의 시호<충민(忠愍)>에
서 따온 것으로 정자 옆구리에는 지하수를 소환해 채워놓은 연못이 있고 그 밑에 인공 암벽을
다져 인공폭포를 걸쳐놓았다. 연못 너머로 송파경찰서 교차로와 주변 시가지가 바라보이며 정
자 동쪽과 북쪽에는 숲이 우거져 있어 자연히 자연과 속세의 경계 역할을 한다.


▲  충민정 연못과 그 너머로 바라보이는 송파경찰서

▲  충민정 현판의 위엄

▲  수질이 좋은 충민정 연못

충민정은 자리가 자리인지라 이곳에 앉아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이 불어준 바람
을 느끼고 있노라면 정말 피서의 성지(聖地)가 따로 없다. 이제 지어진지 막 20년 남짓 밖에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존재들이지만 1개의 100년이 흐르면 20세기 초, 대표적인 풍류 명소로
크게 도마 위에 오를지도 모른다.


▲  옆에서 바라본 오금공원 인공폭포 (윗쪽에 충민정이 살짝 보임)

▲  힘차게 쏟아지는 오금공원 인공폭포

지하수를 소환해 속세에 내뱉고 있는 이 폭포는 2005년에 조성되었다. 자연산이 아닌 인공(人
工)이라 전기를 먹어야만 왕성히 움직일 수 있는데, 봄과 여름, 초가을에는 보통 18시까지 가
동을 하며 겨울에는 움직이지 않고 그냥 묵혀둔다. 이는 다른 인공폭포도 비슷하다. 하루종일
틀면 전기세 부담이 적지 않아 보통 아침 8~9시부터 전기를 먹인다.

폭포를 품은 암벽은 너무 인공티가 팍팍 난다. 서대문구의 홍제천(弘濟川) 인공폭포처럼 자연
산으로 착각할 정도로 감쪽같이 했으면 좋으련만 그것까지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한여
름의 납량처로 손색은 없으며 직선으로 떨어지는 폭포와 주름진 바위를 굽이쳐 내려오는 폭포
등, 2개의 폭포 줄기가 있다.


▲  주름진 인공 바위를 굽이쳐 흐르는 인공폭포 (이때가 18시 직전)

▲  다시 오금공원의 속살 속으로
인공폭포에서 오금공원 더듬기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으나 공원의 남쪽 부분을
살피지 않아서 다시 공원 속으로 들어갔다.

▲  오금동 유래비 (오금공원 남부)

오금동 유래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옛날 이 지역에는 오동나무가 많았다고 하
는데 그 나무로 거문고나 가구 등을 만드는 장인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하여 오동나무와 거
문고를 뜻하는 오금동이 되었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병자호란 시절(1636~1637년), 청나라의 파상적인 공격에 도성 부근 무악재까지
무기력하게 밀리자 염통이 쫄깃해진 무능한 인조(仁祖)는 서울을 모두 내버리고 서둘러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들이 오금동 백토고개에 이르렀을 때 인조는 너무 힘들어 '아이고 내 오금이야!' 주접을 떨
며 잠시 쉬어갔는데 그 연유로 오금동이라 했다고 한다. 어느 것이 정답인지는 판단하기 어려
우나 나는 전자에 500원을 걸고 싶다.

이곳은 오랫동안 경기도 광주(廣州)에 속해있었으나 1963년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편입되었으
며, 1983년부터 도시계획 구획정리 사업이 이루어져 1990년대 초반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
었다. 그 과정에서 오금공원이 탄생하게 되었고 이곳에 서린 시골 풍경은 거의 전멸되었다.


▲  오금동 유래비 주변 산책로

▲  오금공원 남부에서 만난 나홀로 망주석

구의 무덤을 지켰던 망주석일까? 딱 봐도 오래된 티가 느껴져 이 부근에 사대부의 무덤이
있었던 모양이다. (다른 곳에서 업어왔을 수도 있음)
그를 거느렸던 무덤은 후손들의 관리소홀과 대자연의 집요한 태클로 사라지고 겨우 망주석 하
나만 남아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무덤은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 저 꼬라지가 되버
리니 굳이 많은 돈을 들여 사후(死後) 흔적을 남기는 것도 정말 부질없다.


▲  녹음(綠陰)이 우거진 오금공원 남부 산책로 ①

▲  녹음(綠陰)이 우거진 오금공원 남부 산책로 ②

▲  녹음(綠陰)이 우거진 오금공원 남부 산책로 ③

▲  녹음(綠陰)이 우거진 오금공원 남부 산책로 ④

▲  다양하고 귀여운 모습의 새집 모형들
새집이긴 하나 겉모습만 그렇지 너무 작아서 참새도 들어갈 수 없다.
하여 새들에게는 그저 그림의 집 같은 존재들이다.

▲  녹음(綠陰)이 우거진 오금공원 남부 산책로 ⑤
숲이 얼마나 두터운지 햇살도 제대로 들어오기 힘들어 벌써부터 어둑어둑하다.

▲  오금공원 남부에서 송파도서관으로 인도하는 나무데크 계단길

오금공원의 남쪽 끝인 송파도서관으로 내려오니 어느덧 19시이다. 오금공원의 북쪽 끝인 오금
공원4거리에서 시작된 공원 더듬기는 공원을 완전히 가로질러 남쪽 끝인 송파도서관에서 대단
원의 막을 고한다. 다음에는 늦가을 한복판에 꼭 한번 와보고 싶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3년 2월 11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티스토리(tistory)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3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봉천동 낙성대, 관악강감찬축제, 서울둘레길5코스 관악산 구간 늦가을 나들이 (강감찬생가터, 낙성대공원, 무당골)

낙성대 늦가을 나들이 (강감찬생가터, 관악 강감찬축제, 관악산 서울둘레길 5코스)


' 낙성대, 관악 강감찬축제, 서울둘레길5코스
늦가을 나들이 '

낙성대 안국사

▲  낙성대 안국사

낙성대3층석탑 관악산 무당골

▲  낙성대3층석탑

▲  관악산 무당골

 



 

늦가을이 익어가는 매년 10월 중/하순에는 강감찬 장군의 유적인 낙성대에서 '관악 강참
찬축제'가 열린다. 관악구(冠岳區) 제일의 축제로 등극한 그의 명성을 나의 침침한 망막
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축제 마지막 날인 일요일에 그곳을 찾았다.

내가 살고 있는 도봉동(道峰洞)에서 낙성대까지는 비록 같은 서울 하늘 밑이라고 하여도
완전 북쪽 끝에서 남쪽 끝이라 아무리 빠른 지하철로 가도 1시간 이상은 걸린다. 낙성대
역(2호선)에서 답답한 땅굴을 벗어나 낙성대로 가다가 문득 생각나는 곳이 있어 길을 동
쪽으로 조금 틀어 낙성대동 주택가로 들어섰다. 밀림 같은 주택가 한복판에 옛 낙성대터
(강감찬 생가터)가 있기 때문이다.



 

♠  강감찬 장군이 탄생했던 유서 깊은 현장, 옛 낙성대<(落星垈),
강감찬 생가터> -
 서울 지방기념물 3호

▲  수목으로 우거진 옛 낙성대 (강감찬 생가터)

지금은 '낙성대동'이란 행정동명을 쓰는 봉천동(奉天洞) 218번지 주택가 속에 옛 낙성대가 묻
혀 있다.
이곳은 관악구 출신으로 귀주대첩의 영웅인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으로 흔히 낙성대하면 여
기서 남쪽으로 1리 정도 떨어진 낙성대공원과 안국사 일대를 일컬으나 원래 낙성대는 이곳이
다. 낙성대란 이름은 별이 떨어진 터란 뜻으로 세종실록(世宗實錄)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
勝覽)에 다음과 같은 탄생설화가 한 토막 전해온다. <낙성대는 절대로 이상한 대학교나 하위
권 대학교의 이름이 아니니 오해가 없기 바란다~~!>

948년 어느 날 밤, 중원대륙 왕조의 사신(使臣)으로 표현된 인물(그냥 사신으로 나오기도 함)
이 근처를 지나다가 하늘에서 큰 별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신기한 광경에 입이 떡 벌
어진 그는 별이 떨어진 곳을 찾아가니 그곳에는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자 금주(衿州,
서울 관악구와 금천구, 옛 시흥군 지역) 지역 세력가인 강궁진(姜弓珍)의 집이 있었다. 마침
그의 부인이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강감찬이라는 것이다.
이후 송(宋)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다가 그를 만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곡성(文曲星)을 못
본지 오래되었는데 여기서 지금 뵈옵니다~'
하며 꾸벅 절을 했다고 한다. 여기서 문곡성은 도
가(道家)에서 말하는 9개의 별 가운데 학문을 관장하는 4번째 별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떨어
진 별이 문곡성이라고 하니 강감찬의 학문이 매우 뛰어났음을 문곡성을 빌려서 표현했을 것이
다.

당시 고려는 중원대륙의 후한(後漢), 진나라 등과 교류를 했는데 고려와 중원대륙의 사신, 무
역 상인들은 개경(開京) 인근 벽란도(碧瀾渡, 예성강 하류)에서 배를 타고 고려의 내해(內海)
나 다름이 없는 서해바다를 오갔다. 그러니 굳이 내륙인 서울로 돌아갈 이유는 없다. 하여 개
경에서 남쪽으로 파견된 관리나 칙사(勅使)가 지나갔을 가능성이 크며, 그것이 세월이 흐르면
서 지나가지도 않았을 중원대륙 사신으로 변질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고려나 조선은 중원
대륙을 동경했고 군침을 흘렸던 것이다.
또한 별은 나라를 세운 시조(始祖)나 영웅의 탄생설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존재기도 하다. 그
들이 태어났을 때 흔히 별이 떨어졌다 하늘이 기뻐서 별을 내렸다는 식으로 탄생을 추켜세우
는 것으로 설화처럼 정말로 별이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짜로 떨어졌다면 강감찬 집은
물론이고 그 주변은 정말 남아나지 못한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은 우스갯소리로 딸 수 있을
정도로 작아 보이나 그게 코앞에 다가왔을 때는 정말 답이 없는 상태가 됨>

이곳에 있었다는 강감찬 생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어떠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
의 집안이 후삼국시대부터 금주 지역을 다스렸던 세력가였으니 집은 제법 컸을 것이다. 허나
세월의 장대한 흐름 속에 집은 형편없이 녹아내리면서 생전의 모습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
러다가 13세기 경, 지역 사람들과 후손들이 그의 공덕과 탄생지를 알리고자 생가터에 3층석탑
을 세우니 그것이 낙성대3층석탑으로 그 탑의 영향으로 이곳 일대를 탑골이라 불렀다.

이후 3층석탑 홀로 이곳을 지키다가 1974년 안국사로 이전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대신 유허비
를 세우고 나무와 꽃을 심어 주변을 산뜻하게 정비했다.
안국사가 조성되면서 그곳이 새 낙성대가 되었고 기존의 낙성대는 옛 낙성대가 되어 '낙성대
유지(遺址)
'란 이름으로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근래에 '강감찬 생가터(낙성대)'로 명칭
이 갈렸다.

현재 이곳에는 낙성대유허비와 옛 강감찬 향나무의 뒤를 이은 160년 묵은 향나무가 있으며 나
무와 꽃이 가득해 조촐하게 소공원 역할을 한다. 강감찬 생가터라고 하지만 생가와 관련된 어
떠한 흔적도 전해오지 않으나 땅을 파보면 건물 주춧돌이나 당시 유물이 고개를 들고 나오지
않을까 싶다. 나중에 이곳 일대를 재개발하거나 싹 밀어버릴 기회가 있다면 꼭 발굴조사를 벌
였으면 좋겠다.

* 강감찬 생가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낙성대동) 218-14


▲  낙성대유허비(落星垈遺墟碑)

옛 낙성대 한복판에 자리한 유허비는 3층석탑
이 새 낙성대로 옮겨감에 따라 허전한 옛 자리
를 달래고자 1974년에 세워졌다.
안국사 안에 세워진 강감찬사적비를 모델로 하
여 똑같이 만들었는데, 고개를 높이 쳐들며 엉
금엉금 기어가는 듯한 거북 머리 귀부(龜趺)를
밑에 깔고 그 등에 비좌(碑座)를 만들어 '강감
찬장군 낙성대유허비'라 쓰인 비신(碑身)을 세
웠으며 그 위를 2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두
고 다투는 모습을 담은 이수(螭首)로 마무리를
지었다.

▲  낙성대유허비의 뒷모습

비석 높이는 2~3m 정도로 안국사의 강감찬사적비보다 키가 작고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어 1997년에 다시 손질했다.


▲  강감찬 향나무

옛 낙성대의 명물로는 3층석탑과 함께 나이가 꽤 지긋했던 향나무가 있었다. 향나무는 강감찬
과 더불어 자랐다고 전해져 일명 '강감찬나무'라 불렸는데 그것이 맞다면 나이가 무려 1,100
살 가까이가 된다.
허나 실제 나이는 그 정도까지 미치지 못하며 조선시대에 강감찬을 흠모하던 지역 사람들이나
후손이 심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게 시간이 지나면서 강감찬과 연관된 나무로 엮어진 것이다.
이 나무 외에도 인근 난곡(蘭谷)에 그가 심었다고 전하는 굴참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도 강감
찬나무란 별명을 지니고 있다.

낙성대 향나무는 낙성대와 강감찬을 상징하는 자연 명물로 1968년 서울시 보호수 1-23호로 지
정되었으나 1987년에 장대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숨줄을 놓고 말았다. 그래서
그에게 부여된 보호수 등급은 해제되었고 죽은 몸뚱이도 문드러져 전설 속의 나무가 되었다.
이후 1996년 관악구에서 옛 낙성대를 정비하면서 향나무의 빈자리를 채울 계획을 세웠고 적당
한 나무를 찾다가 그해 11월 경기도 고양시에서 150년 묵은 향나무를 구입해 비록 씨는 다르
지만 강감찬나무의 후예로 삼있다. (나무 앞에 그와 관련된 유래를 머금은 표석이 누워있음)



 

♠  관악 강감찬축제의 현장, 낙성대 안국사 (낙성대공원)

▲  강감찬축제 공연이 열리고 있는 낙성대공원

옛 낙성대를 둘러보고 안국사가 있는 새 낙성대로 향했다. 낙성대역에서 서울대로 가는 길목
에 자리한 이곳은 1974년 6월에 조성된 것으로 크게 안국사와 낙성대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늦가을이 살포시 내려앉은 공원에는 관악구의 대표 축제 '관악 강감찬축제'가 떠들썩하게 열
리고 있었다. 축제를 보고 즐기려는 사람들로 완전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데, 음악 공연과 다
양한 문화/전통 체험, 강감찬을 주제로 한 역사포럼, 장터(먹거리 장터 포함) 등이 주류를 이
룬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문화/전통 체험이 풍성해 아이를 동반한 가족 나들이 장
소로 딱 그만이다.

관악 강감찬축제는 강감찬 장군을 기리고자 벌이는 축제로 안국사에 제를 지내는 '낙성대 인
헌제'에서 비롯되었다. 1988년 추석(9월 20일)에 처음 시작되었으며 관악구의 예전 대표 축제
인 '관악산 철쭉제'와 통합되어 '관악 강감찬축제'로 크게 몸집이 커졌다. (관악산 철쭉제는
사실상 없어짐)
강감찬 추모제향을 시작으로 안국사와 낙성대공원 일대에서 강감찬을 주제로 한 출병식, 전승
행렬 거리 퍼레이드, 역사포험 등의 이벤트, 고려민속촌과 벽란도21, 주민화합 한마당, 다채
로운 문화/전통 체험행사, 음악회, 전시회 등이 열린다. 나는 혼자 간 터라 간단히 1바퀴 둘
러보고 안국사로 넘어갔다.


▲  안국사로 인도하는 싱그러운 숲길
저 숲길의 끝에 안국사와 강감찬전시관이 있다.

▲  강감찬전시관

안국사 앞에는 근래 닦여진 강감찬전시관이 놓여져 있다. 이곳은 강감찬 장군의 생애와 3차례
에 걸쳐 이루어진 고려와 거란(요)과의 전쟁, 그 전쟁을 최종 마무리 지은 귀주대첩(龜州大捷
)을 다루고 있는데, 전시 유물은 모두 모조품이며 해설과 디오라마 중심으로 짜여져 그 시절
의 이해를 최대한 돕고 있다. (전시관 내부는 사진 촬영 가능)


▲  강감찬이 지은 오언절구(五言絶句) 양식의 시(왼쪽)와
강감찬의 일대기를 다룬 강감찬전(姜邯贊傳)


강감찬의 한시는 오세창(吳世昌)이 고려부터 20세기 초까지 옛 사람들의 필적을 모은 근역서
휘(槿域書彙)에 수록되어 있다. 그 부분을 복사해서 이곳에 전시한 것으로 여기서 근역은 조
선을 뜻한다. (즉 무궁화 나라)
옆구리에 놓인 강감찬전은 우기선(禹基善)이 1908년에 지은 것으로 일한주식회사에서 단행본
으로 간행했다. (그 역시 모조품)


▲  안국사의 정문인 안국문(安國門)

윤기가 철철 흐르는 청기와 맞배지붕을 지닌 안국문은 안국사의 정문이자 외삼문(外三門)이다.
사당은 안국문부터 내삼문을 거쳐 본전까지 약간 서북향(西北向)을 하고 있는데, 이는 지형상
에 이유도 있겠지만 강감찬이 고려 때 인물이므로 옛 고려의 국도(國都)인 개경(開京)을 바라
보게끔 서북향으로 설정한 것이 아닐까 싶다. 개경(개성)은 여기서 서북향이다.

안국문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운데 문은 사당 주인만 왕래하는 특별한 문으로 제
향 외에는 닫아둔다. 속인들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왼쪽 문으로 나가면 되며, 계단 남쪽에
는 낙성대 안내문과 낙성대 표석이 있다.


▲  커다란 돌로 이루어진 낙성대 표석

낙성대 안내문 옆에 자리한 낙성대 표석은 낙성대가 완성되자 박정희 전대통령이 남긴 낙성대
3글자를 바위에 새긴 것이다.
1974년 청와대와 서울시는 강감찬 장군을 기리고 그를 통해 백성들의 나라사랑 정신과 충효의
지를 높이고자 그의 사당을 짓기로 했다. 당시 서울에는 옛날에 잘나갔던 장군의 사당이 하나
도 없던 상황. 그런 상황에 관악구 출신인 강감찬은 정말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의
유적인 낙성대는 3층석탑과 향나무만 있었을 뿐, 제를 지내는 어떠한 시설도 없었다.
그래서 관악산 북쪽 자락에 넓게 터를 다져 사당을 지었는데 그해 4월 11일, 상량식을 가졌고
불과 2달 만인 6월 10일에 뚝딱 완성을 보았다. 공사비는 4.5억원이 들었으며 강감찬이 국내
외적으로 크게 불안정했던 고려를 반석 위에 올려 나라가 평안해진 것처럼 나라의 평안을 염
원하는 뜻에서 사당 이름을 안국사라 하였다.

낙성대 표석 밑도리에는 박대통령께서 하사하셨다는 식으로 아주 딱딱하게 쓰여있어 독재시대
의 우울했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허나 어찌하랴 이 역시 이곳을 거쳐간 엄연한 역사인 것을
<사당을 지어 영웅을 기리는 것은 좋으나 그 사당을 짓게 한 이를 너무 높인 것이 옥의 티임>


▲  3층석탑과 마주보고 있는 강감찬장군 사적비(事蹟碑)
1974년에 지어진 것으로 옛 낙성대에 있는 유허비와 같은 모습이다.


안국문을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내삼문(內三門)이 보이고, 좌우로 3층석탑과 강감찬장군사적
비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서울의 유일한 옛 시대 장군의 국립 사당이라 <민간신앙으로 지어
진 원효로 남이(南怡) 장군 사당, 보광동 김유신장군 사당은 제외> 경내가 꽤 깔끔해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  낙성대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호

강감찬사적비 맞은편에는 낙성대의 오랜 상징인 낙성대3층석탑이 자리해 있다.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왜 이곳에 절탑이 있지?','인근 절이나 절터에서 가져온 것인가~?' 고개를 갸
우뚱하지만 그는 겉모습만 그렇지 불교와는 그리 관련이 없는 석탑이다.

이 탑은 고색의 기운이 없는 낙성대 안국사에서 유일하게 고색의 내음을 뿌리는 존재로 13세
기에 지역 사람들과 후손이 강감찬의 공덕을 기리고자 그의 생가터에 세웠다. 공덕을 기린다
고 하면 흔히 비석을 세우기 마련이나 불교 국가인 고려답게 불탑(佛塔) 모양의 탑을 세워 강
감찬을 큰 존재로 추앙한 것이다. 이를 통해 옛 금주(금천) 지역 사람들의 그에 대한 존경심
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가늠케 하며 지금은 금지된 도시로 묶인 개성(開城)에도 그를 위해
세운 석탑이 전하고 있다.

이 땅에서 석탑을 불탑이 아닌 영웅을 기리고자 세운 경우는 강감찬 외에도 경남 남해(南海)
의 정지(鄭地) 장군 석탑이 있다. 그는 14세기 말에 남해 관음포(觀音浦)에서 왜구를 격퇴해
남해 백성을 구했는데 지역 백성들이 그의 전승을 기리고자 세웠다.

탑이 영락없는 불탑 스타일이라 다른 절의 탑을 가져와 이곳 상징물로 삼은 것이 아닐까 여길
수도 있지만 낙성대 주변에는 마땅한 절 흔적이 없다. 오로지 강감찬을 찬양하고자 세운 탑이
라고 봐야된다. 조성시기가 13세기인 것을 보면 그 당시 무척이나 징그러웠던 몽고(원나라)와
의 전쟁에서 거란족(요나라) 토벌의 영웅, 강감찬을 그리며 그의 혼령이 몽고를 보기 좋게 참
교육시켜 나라를 구해주길 바라는 뜻도 담겨져 있을 것이다.

탑 높이는 4.5m로 순 화강암으로 지어졌는데 밑에 바닥돌을 두고 그 위에 길쭉한 기단부(基壇
部)를 세운 다음, 3층 탑신(塔身)을 얹혔다. 1층 탑신에는 '강감찬 낙성대' 글씨가 새겨져 있
어 이 탑의 정체를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으며 머리장식은 훼손되어 남아있지 않다. 거의 800
년 이상 묵은 늙은 탑이나 아직 정정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강감찬의 왕년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이 탑은 옛 낙성대에 있었으나 1974년 제자리를 떠나 이곳에 왔으며 낙성대의 오랜 상징으로
이곳에 왔다면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꼭 살펴보기 바란다. 3층석탑이 없는 낙성대는 갈
비가 없는 갈비탕과 같기 때문이다. 안국사도 그가 있기에 빛을 발하는 것이다.


▲  1층 탑신에 희미하게 새겨진 '강감찬 낙성대(姜邯贊 落星垈)' 6자

▲  푸르게 익은 낙성대 은행나무

1974년 안국사가 완공되자 박정희 전대통령이 그 기념으로 보낸 나무이다. 나무 앞에 관련 내
용이 적힌 표석이 누워있는데 '~~각하께서 ~~하사하시었다~'는 식으로 적혀있어 그 표현에 다
소 거북함을 들게 한다. 허나 역사의 산물이니 어찌하랴. 좋은 뜻에서 안국사를 세운 것은 분
명하니 이런 시대도 있었음을 알리는 뜻에서 그냥 두거나 내용을 좀 순화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표석과 나무를 뽑아버리자는 것은 절대로 아님>


▲  안국사 본전(本殿)

안국사 가장 안쪽에 자리한 본전은 말그대로 이곳의 중심 건물로 강감찬 장군의 영정이 봉안
되어 있다. 가운데 칸에 그의 영정이 자리해 있고, 그 좌우로 그의 주요 장면(탄생, 조정 출
사, 귀주대첩, 영파역에서 현종을 알현하는 모습 등)을 머금은 기록화가 걸려있는데 오직 상
상으로 그려진 것이라 그 당시와는 다소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3중으로 된 기단 위에 높이 들어앉아 서북쪽을 바라보고 선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푸른 청기와를 입혔다. 고려 후기 대표적인 건축물인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을 본떠서 지었는데 그 무량수전의 기둥을 따라서 배흘림 기둥을 취했다.
(기둥 가운데가 볼록함)


▲  닫집 안에 봉안된 강감찬 장군의 영정

강감찬은 키가 작고 외모가 볼품이 없으며 평소에는 해지고 때가 묻은 옷을 입고 다녀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몰라봤다고 전한다. 허나 거란 토벌의 대영웅을 그리 수수하게 그리는 것은 좀
아닌듯싶어 매우 늠름하고 매서운 눈초리로 표현했다.

이 영정은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1912~2005)이 1974년에 그린 것이다. 강감찬 생전의 모
습을 담은 그림이 전혀 없고 달랑 키가 작고 외모가 별로라는 내용만 있으니 나름 상상을 발
휘하여 대충 때려 맞춘 것이다. 그러니 실제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월전이 그린 강감찬 영정이 그의 표준 영정으로 지정되면서 본전에 이렇게 걸리게 되
었다. 게다가 월전은 조선의 마지막 어진(御眞) 화가이자 친일 화가로 추잡한 경력을 남겼던
김은호(金殷鎬)의 제자라 그의 화풍을 조금은 닮은 것 같다.

이곳 영정은 1998년 1월 11일에서 12일 사이에 도난을 당했는데 관리인의 신고를 받은 관악구
청은 이를 신고하지 않고 몰래 월전을 찾아가 새로 그려줄 것을 요청했다. 허나 고령의 나이
를 이유로 거절 당하자, 급하게 신림동에 사는 금광복이란 화가에게 영정과 똑같이 그려줄 것
을 의뢰하며 160만원을 건넸다.
그가 그림을 그려 표구점에 맡기자 구청에서 그 몰래 영정을 가져왔으며, 새로 영정을 봉안할
때 제를 지내 예를 갖춰야 함에도 그런 절차도 없이 3월에 그냥 봉안해버리는 무례를 범했다.
영정 도난 사건은 냄새를 킁킁 맡은 언론사의 취재로 7월에서야 드러나 관악구청은 두고두고
욕을 먹었는데 당시 사건을 맡은 관악경찰서도 무명 화가의 그림이라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
단하여 수사를 일찍 종결시킨 것이 드러나 둘 다 쌍으로 욕을 얻어먹었다. 이에 관악구청 철
밥통 관계자는 좀 무안했는지 무속인이 가져간 것으로 둘러댔으나 영정은 끝내 찾지 못했다.
그래도 상상으로 근래에 그려진 영정이라 망정이지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온 진품이었다면 정
말 관악구청과 관악경찰서는 분노한 대중들에게 크게 털렸을 것이다.


▲  강감찬과 고려 군사들이 일군 대작품, 귀주대첩도(龜州大捷圖)

▲  거란군을 토벌하고 개선한 강감찬 장군과 고려군을 현종이
영파역(迎破驛)에서 맞이하는 모습을 담은 기록화

▲  늦가을에 잠긴 본전 뒷쪽 풍경
관악산에 접해있는 본전 뒤쪽 풍경도 제법 경치가 있으니 앞모습만
살피지 말고 뒷모습도 둘러보기 바란다.

▲  태극마크가 걸린 안국사 홍살문

▲  나른한 늦가을 오후를 깨우는
낙성대공원 분수대


▲  강감찬 장군 동상

낙성대공원 서쪽에는 말을 달리며 칼을 휘두르는 강감찬 장군의 동상이 있다. 1997년 10월 청
동(靑銅)으로 지은 것으로 1990년대부터 관악구 의회와 관악문화원에서 동상 건립을 추진했으
나 돈이 딸려서 계속 연기되었다. 그러다가 1997년 서울시의 지원으로 기존 동상과는 다르게
갖은 요소를 넣어 제법 큰 규모로 건립했다.

★ 강감찬(姜邯贊) 장군(948~1031)의 생애

강감찬은 금천강씨<금주(衿州)강씨>로 금천 지역 세력가인 강궁진의 아들이다. 금천강씨는 진
주강씨에서 분파되었는데 그 시조인 강여청(姜餘淸)이 신라 말에 금천 지역에 자리를 닦았으
며, 그 4세손이 바로 강궁진으로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벽상공신이란 큰 감투를 받았다.

강감찬은 고려 초기 명장(名將)으로 이 땅의 민중들에게 적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
다보니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민중을 통해 신화처럼 미화된 경우가 적지 않은데 앞서 그의 탄
생 설화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강궁진이 휼륭한 아들을 얻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부인에게 가는 도중 여우 부
인을 만나 그를 통해 낳은 것이 강감찬이란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탄생 설화와 여우부인 이
야기는 흔히 시조나 위인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설화라 순진하게 100% 믿으면 곤란하다.

강감찬의 어릴 적 이름은 은천(殷川)이다. 관악구에 '은천로'란 도로가 있고, 그의 이름을 딴
'은천동'이란 행정동명<봉천본동과 봉천9동을 통합한 동네>도 있다. 또한 그의 시호인 인헌(
仁憲)을 딴 '인헌동'이란 행정동명과 학교가 부지기수이며, 그와 관련된 명소도 적지 않아 관
악구가 완전 강감찬의 세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30대까지 금천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고 하며 종종 관악산에 올라가 심신을 단련
했다고 전한다. (그의 30대 중반 이전 기록이 너무 빈약함)

35살이던 성종(成宗, 재위 981~997) 시절, 개경으로 상경하여 과거에 응시, 갑과(甲科)로 급
제해 조정에 출사했다. 이때 예부시랑(禮部侍郞)에 임명되었는데, 그를 장군이라 부르다보니
자연히 무인으로 알기 쉽지만 문과(文科)로 들어온 문인(文人)이었다. 허나 거란과의 싸움에
출전했고 귀주대첩을 이뤄낼 정도로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동북9성 여진정벌의 영웅인 윤관(
尹瓘)과 더불어 문무를 두루 갖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가 문인으로 출사한 것은 광종(光宗, 재위 949~975)이 지방 세력을 때려잡고 왕권을 강화하
는 과정에서 무인들이 대거 털렸기 때문이다. 지방 세력 태반은 병사를 소유한 무인들로 그들
을 털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하고 과거제도를 도입해 인재를 발
탁했는데 조선과 달리 문과만 치루었다. 그러다보니 문과를 거쳐야만 출세가 쉬웠다. 강감찬
도 그런 상황에서는 어찌할 도리 없이 문과에 응시해야 했다.

그의 관직생활과 관련하여 여러 재미난 설화가 전하고 있는데 그 일부를 살펴보면
① 그가 어느 고을에 수령(守令)으로 부임을 했다. 그 고을의 관속(官屬)들은 그가 나이가 어
리다고 무시했는데 강감찬은 그들에게 뜰에 세워둔 수숫대를 소매 속에 다 집어넣으라 했다.
그들이 그건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흔들자 강감찬 왈 '겨우 1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에 다 집어
넣지 못하면서 20년이나 자란 나를 그대들 소매 속에 넣으려고 하시오?'
호통을 치니 관속들
은 그제서야 잘못했다고 빌었다. 허나 강감찬이 35살 이후에 벼슬살이를 했으므로 나이가 크
게 맞지 않는다.

② 그가 강원도 원주(原州)로 출장을 가서 하룻밤 머물렀는데, 객사(客舍) 옆 연못에는 개구
리들이 많아 늘 시끄럽게 울었다. 원주 수령은 강감찬이 편히 잠을 자게끔 하인을 배치해 개
구리의 입을 막게 했으나 아무리 돌팔매질에 나무로 연못 수면을 때려도 오히려 더 크게 우는
것이었다. 이를 본 강감찬은 미소를 지으며 부적을 쓰고 연못에 몰래 넣으니 개구리 울음소리
는 뚝 그쳤다.
이후 개구리 울음 소리는커녕 개구리 구경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원주 강원감영 선화
당 연못 설화)

③ 그가 지방으로 출장을 가다가 충북 옥천(沃川)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그곳은 모기
가 징그럽게 극성이라 백성들이 찾아와 귀주대첩 때 거란군을 쓸어버린 것처럼 모기 좀 어떻
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러자 그가 하천으로 나와 모기들에게 '너희가 아무리 미물이라
해도 백성을 괴롭히는 행위는 용서치 못한다. 씨가 마르기 싫거든 당장 떠나라'
호통을 치니
모기들이 크게 쫄아 다음날 모두 사라졌다. 그곳은 지금도 모기가 거의 없다고 한다. (옥천
청석교 설화)

④ 그가 남경(南京, 서울)을 다스리고 있을 때, 북한산(삼각산)과 남산 등에 호랑이가 득실거
려 호환(虎患) 피해가 극성이었다. 이에 부하를 산으로 보내 승려를 데려오게 하여 그를 크게
꾸짖으니 승려가 호랑이로 변신하여 잘못했다고 굽신거리며 부하 호랑이를 데리고 다른 곳으
로 도망쳤다. (또는 강감찬이 호랑이들에게 새끼도 평생 1번 낳게 하고 몇몇 산에서만 살게
했다고 함)

1009년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폐하고 태조의 손자인 대량원군<大良院君, 현종(顯宗)>을
옹립한 이른바 강조의 난이 일어났다. 고려가 요동반도 일대의 강동6주(江東六州)를 점거하고
재미를 보는 것에 불쾌감을 드러낸 거란<요나라> 성종(聖宗)은 강조의 난을 구실로 30만 대군
을 이끌고 친히 고려에 쳐들어왔다.
강조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검차(檢車)를 이용해 그들을 여유롭게 때려잡았으나 그만 방심하
여 오히려 역전을 당하고 만다. 강조가 패하자 고려 조정은 벌통이 여러 개나 뒤집힌 듯 큰
혼란에 빠졌고 염통이 쫄깃해진 많은 신하들이 항복을 주청했으나 강감찬과 하공진(河拱辰)은
강력히 반대했다.
결국 개경이 함락되었고 현종은 멀리 나주(羅州)까지 힘에 겨운 몽진을 했으나 양규(楊規)와
김숙흥(金叔興), 강감찬의 활약으로 거란은 크게 피해를 입고 줄행랑을 쳤다.

그 이후 한림학사(翰林學士), 서경유수(西京留守),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서북면
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 등을 지냈으며 서경유수와 내사시랑평장사로 임명한다는 현종
의 조서(詔書)에는
'경술년(1010년) 오랑캐(거란) 무리가 우리나라 한강 연안까지 깊숙히 쳐들어온 전란이 있었
다. 그때 강공(강감찬)의 전략을 쓰지 않았다면 온 나라가 오랑캐 옷을 입을 뻔했다'
적혀있
어 그의 공이 엄청났음을 알려준다.

1018년 거란 성종은 강동6주와 고려 굴복시키기에 대한 미련을 다시 드러냈다. 옛 조선과 고
구려, 발해의 그늘에서 오랫동안 살아갔던 거란족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으킨 큰 나라, 요
나라는 10~11세기에 천하 강국으로 위엄을 날렸지만 고려를 비롯한 인접 국가와의 계속되는
전투로 상황이 넉넉치 못했다. 하여 간신히 10만 명을 정예병이라고 쥐어짜 소배압(蕭排押)을
총대장으로 삼아 고려로 보냈다.
참 지긋지긋한 거란의 3번째 침공을 맞이하여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삼고 20만 8
천의 군사를 주어 거란을 막게 했다. 그때 강감찬의 나이는 벌써 칠순이었다.

거란군이 압록강<鴨綠江, 현재 요하(遼河)로 지금의 압록강이 아님>을 넘어 고려의 영역에 들
어오자 강감찬은 재미없는 수성전을 버리고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기병 1만2천을 뽑아 압
록강 하류 흥화진(興化鎭) 동쪽에 매복시켰는데, 거란군은 꼭 거치던 흥화진을 그냥 놔두고
고려군이 매복된 곳으로 기어들어왔다. 이때 강감찬은 기병을 매복시켜 호되게 후려쳤다.

여기서 2만 정도를 잃은 소배압은 자주(慈州)에서 강감찬의 부장인 강민첨(姜民瞻, ?~1021)의
공격에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개경만 점령하면 게임 끝이라는 무모한 생각에 무작정 개경으로
달려갔다. 이에 강감찬은 추격과 매복을 골고루 구사했고, 개경 점령에 눈이 뒤집힌 소배압은
개경과 가까운 신은(新恩)까지 진출했으나 식량도 부족하고 피해가 막대한 아군의 상황을 간
신히 깨닫고는 길을 돌려 열심히 줄행랑을 쳤다.

허나 그 길목에는 이미 고려군이 쫘악 깔려 열심히 그들을 털었고, 거란군이 요동반도 어딘가
로 여겨지는 귀주(龜州)까지 후퇴하자 강감찬은 귀주 벌판에 진을 치며 그들을 기다리니 이윽
고 소배압의 거란군은 병든 닭새끼처럼 귀주에 나타났다. 벌판에 진을 친 고려군을 본 소배압
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와 고려군과 진검 승부를 벌였다.
이에 강감찬은 그들을 크게 포위해서 잡는 작전을 펼쳤다. 기마병을 선두로 하여 보병과 사수
(射手)를 적절히 배치해 그들을 맹렬히 털었으며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金宗鉉)의 군사
도 때마침 합세하여 안그래도 힘이 딸린 거란군은 더욱 밀려 거의 전멸을 당하고 소배압은 간
신히 목을 붙잡고 도망쳤다. 이때 살아서 돌아간 군사는 불과 수천에 불과했으니 그야말로 거
란에게는 개망신의 패배였으며 이 대승을 두고 고려사(高麗史)에서는 '거란의 패함이 이와 같
이 심한 적이 없었다'
고 기록을 했을 정도이다.

거란 성종은 부하를 싹 잃고 돌아온 소배압을 보자 크게 발작하여 '너가 적지에 너무 깊숙히
들어가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다. 무슨 얼굴로 짐을 보려고 하는가? 너의 얼굴 가죽을 벗겨
죽여야 되나 내가 참는다'
질책하고 멀리 귀양보냈다.

강감찬은 부하 장졸과 함께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챙겨들고 개경으로 개선했다. 현종은 너
무 기뻐서 친히 도성 밖 영파역까지 나와 연회를 베풀었으며 금으로 만든 8가지의 꽃을 그의
머리에 친히 꽂아준 뒤 왼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 축배를 들어 위로하고 찬양하니
강감찬은 '폐하의 분에 넘치는 황은(皇恩)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사의를 표했다.

현종은 그에게 식읍(食邑) 300호를 하사하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으로 책봉(
冊封)했다. 1030년에는 개경 주변에 나성(羅城)을 쌓을 것을 건의, 둘레 23km에 이르는 개경
도성(都城)이 구축되었으며 그 공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이후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현종은 오히려 3일에 1번씩 입궐토록 명했다. 그랬던
현종이 그해 붕어(崩御)하고 덕종(德宗)이 제왕이 되자 1031년 6월 사직이 수용되었다.
허나 바로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83세에 나이로 장대했던 삶을 마감하니 왕은 3일 동안 조회
를 멈추고 그를 애도했으며, 인헌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특지검교태사시중 천수국 개국후(開
國侯)를 추증(追增)했다. 이후 수태사 겸 중서령(中書令)까지 더하여 현종 묘정(廟庭)에 배향
(配享)되었다.

강감찬은 키가 작고 외모도 별볼일 없었으나 학문을 매우 좋아하고 무예와 지략, 기개가 뛰어
났다. 그리고 성품이 청백하고 검소해 재산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해지고 때가 묻은 허름한 옷
을 입고 다녀 그의 얼굴을 모르는 이들은 일반 백성으로 오인하기 일쑤였다. 또한 엄숙한 태
도로 국사를 처리하고 국책을 결정할 때는 당당한 국가의 중신으로 그 역할을 다했으며, 백성
들도 잘 보살펴 그들은 나라가 평온한 것이 강감찬의 공으로 여기고 추앙했다.

그는 고려가 한참 거란과의 싸움으로 안정되지 못한 11세기 초반, 안으로는 내정을 살피고 지
지기반이 부실했던 현종을 도왔으며, 밖으로는 거란을 토벌해 국내외적으로 나라를 안정시켜
고려를 강한 나라로 우뚝 서게 했다. 고려와의 3차례 전투에서 모두 깨지고 거기에 귀주대첩
에서 완전히 털린 거란도 이제는 힘이 딸려 더 이상 강동6주 반환과 고려 제왕의 입조(入 朝)
를 요구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고려의 반격을 걱정해야될 판이었다.
고려 역시 오랜 전쟁에 지친 상태라 딱히 거란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강동6주를 완
전히 차지하지는 못했으며, '내원'과 '포주' 등 극히 일부 지역은 거란이 점거했다. 이들 지
역은 요서(遼西)나 요하 주변 지역으로 고려가 여러 번 공격했으나 거란이 굳게 수비하여 점
령하지 못했으며, 예종(睿宗, 재위 1105~1122) 시절에 비로소 회복했다. 그리고 12세기 초까
지 압록강(요하) 가교 사건 등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양국은 별무리 없이 평화로운 외교관
계를 유지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국가가 장차 화패(禍敗)가 올 때 반드시 명현을 내시어 이를
구하시는구나. 목종(穆宗) 말년과 현종 원년에 역신(逆臣)이 난을 일으키고 거란이 내습해 안
으로는 내홍, 밖으로는 환란이 있어 국가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만약 강공(姜公)이 없
었더라면 장차 나라가 어찌됐을지 알 수가 없다'
는 내용이 있어 그의 존재감과 공적이 얼마나
장대했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저서로는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 구선집(求善集) 등이 있으나 전하지는 않아 무슨 내
용의 책인지는 알 수 없으며, 그의 묘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에 있는데 오랫동
안 무덤의 위치를 몰라 애태우던 것을 1963년 지석(誌石)을 발견해 무덤을 복원했다.

* 낙성대 안국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228 (낙성대로 77 ☎ 02-877-6896)



 

♠  짧게 거닐은 관악산 서울둘레길 5코스 (낙성대~남현동)

▲  숲터널을 이루고 있는 낙성대 동쪽 산길 (서울둘레길5코스)

축제로 떠들썩한 낙성대를 둘러보니 어느덧 16시가 넘었다. 다음 정처(定處)는 딱히 정한 것
이 없어 어디로 갈까 궁리하다가 서울둘레길5코스(이하 5코스)가 갑자기 땡겨 그곳으로 길을
잡았다.
천하 둘레길의 대표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고 있는 서울둘레길은 총 8코스 157km로 이루
어져 있다. 이중 5코스는 사당역에서 관악산 북쪽 자락, 낙성대, 서울대 정문, 삼성산(三聖山
) 북쪽 자락, 호암산(虎巖山) 옆구리를 거쳐 석수역까지 이어지는 13.5km의 도보길로 관악산
둘레길과도 조금 겹치는데, 관악산과 삼성산, 호암산 등 뫼 3개를 거치다 보니 오르락내리락
이 무수히 반복된다. 허나 해발도 낮고 길의 난이도도 초급으로 무난하다. 즉 사지만 멀쩡하
면 어린이도 쉽게 완주할 수 있는 코스다. (5코스 완주는 4~5시간 정도 걸림)


▲  5코스에서 바라본 관음사(觀音寺) 능선 (사당능선)

5코스는 낙성대공원을 지나간다. 안국사 남쪽 산길로 접어들면 관악산 북쪽 산자락을 지나 사
당역으로 이어지는데, 속세와 적당히 거리를 두며 해발 100~200m대를 구불구불 지나간다. 길
북쪽은 확 트여있고 딱히 시야를 방해할 뫼나 높은 존재가 없어서 낮은 높이치고는 조망도 괜
찮은 편이다.


▲  5코스에서 바라본 신림동, 봉천동 지역

▲  5코스에서 바라본 낙성대동, 사당동, 동작동, 서초구 지역
멀리 남산과 북한산(삼각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  늦가을에 잠긴 5코스 산길 속으로 (무당골 서쪽)

▲  조촐하게 생긴 무당골 서쪽 계곡

▲  무당골 굴

5코스 낙성대~관음사 구간 중간 정도에 무당골이란 계곡이 있다. 이름 그대로 무당들이 굿을
했던 산악/무속신앙의 현장으로 그 현장의 중심이 바로 무당골 굴이다. 둘레길이 그 앞을 흐
르면서 그의 존재도 덩달아 알려지게 되었고 나도 이렇게 그를 만나게 되었는데 호랑이가 담
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굿과 치성 장소로 바쁘게 살아와 굴 주위 피부가 온통 시커멓다. 굿/
치성에 촛불을 쓰기 때문이다. (특히 저녁과 밤에 치성 수요가 많았음)
비록 간의 기별도 안가는 얇은 수준이지만 작은 굴까지 지니고 있는데, 현재 무속행위는 통제
되어 있으나 치성이나 기도 행위는 밤을 중심으로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우리네 속세살이가 고통스럽기 때문이리라.


▲  촛불 등에 그을린 흔적들이 아주 요란한 무당골 굴

▲  무당골에서 바라본 관악구의 평화로운 모습 (낙성대동, 봉천동 지역)

▲  무당골 동쪽 5코스 구간

무당골을 지나 관음사까지 욕심을 부리려고 했으나 햇님 퇴근시간이 임박했고 몸 또한 지쳐서
관음사 이전인 남현흥화브라운빌아파트(남현동)로 미련없이 내려갔다. 비록 짧게 타긴 했지만
남현동~낙성대 구간 둘레길을 오랜만에 복습했으니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낙성대, 관악산 서울둘레길5코스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2년 10월 30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서울 동쪽 변두리에 숨겨진 작고 상큼한 뒷동산, 일자산 (일자산 허브천문공원, 서울둘레길3코스, 둔굴)

강동구의 지붕, 일자산 (허브천문공원, 둔굴, 서울둘레길3코스)



' 강동구의 지붕을 거닐다. 일자산 '
(허브천문공원, 둔굴, 서울둘레길3코스)

일자산 허브천문공원
▲  일자산 허브천문공원

일자산 정상

일자산 둔굴

▲  일자산 정상

▲  일자산 둔굴

 



 

여름이 무심히 깊어가던 6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날, 강동구의 대표 지붕인 일자산(
一字山)을 찾았다.
일자산은 서울에 버젓히 남아있는 미답처(未踏處)의 일원으로 그곳에 안겨있는 허브천문
공원과 일자산 능선길(서울둘레길3코스), 둔굴을 둘러보고자 그곳을 택했다. 허브천문공
원을 빼면 모두 인연이 없는 곳들로 아직까지도 서울 하늘 밑에는 나의 발걸음을 느끼지
못한 미답처들이 적지 않아 나를 참지 못하게 한다.


▲  허브천문공원 후문(부출입구)으로 인도하는 숲길

▲  반쯤 열린 허브천문공원 후문(부출입구)



 

♠  허브식물과 천문을 한곳에 다룬 서울의 이색 명소
일자산 허브천문공원

일자산 북쪽 끝자락에는 강동구(江東區)의 야심작, 일자산 허브천문공원이 가슴을 피며 자리
해 있다.
이곳은 원래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에서 만든 길동배수지의 윗부분이다. (길동배수지는 아직
도 있음) 강동구는 일자산에서 가장 전망이 좋고 수목이 성장하기에 적합한 이곳에 공원을 조
성하고자 계획을 짰는데, 처음에는 단촐하게 화초류 중심으로 꾸미려고 하였으나 2005년 6월,
서울시 도시공원위원회에 변경계획안을 제출, 인근의 길동생태공원과 생태문화센터 등과 연계
할 수 있고 허브와 천문을 취급하는 공원으로 조성하여 2006년 9월 21일에 문을 열었다.

사람에게 매우 좋은 허브식물과 천문 관련 시설을 갖춘 공원이자 서울 최초의 허브 전문 공원
으로 면적은 25,500㎡, 사업비는 15억이 들었다. 이곳에 둥지를 튼 식물은 소나무 등의 수목
28종 4,694주(교목 254주, 관목 4,440주), 지피식물 181종<허브(herb)가 142종 32,448본, 자
생 39종 9,138본>이다. (식물 수는 나중에 증감될 수 있음)
공원은 동그란 구조를 하고 있는데, 우리 고유의 전통사상인 천,지,인(天,地,人) 삼재사상(三
才思想)에서 공간 개념을 도출해 우주공간(자미원, 태미원, 천시원, 별자리, 은하수 등)을 공
원에 반영했으며, 음양오행사상에 기초해 시설물과 수목을 배치했다.

공원 내부는 크게 허브원과 약초원, 암석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허브원은 이름 그대로 허브식
물의 공간으로 공원 중앙부에 넓게 자리해 있다. 약초원은 약용으로 쓰이는 허브를 모았으며,
암석원은 돌과 허브를 조화롭게 배치했다. 유리온실에는 120종의 허브를 화분 등에 담아 겨울
에도 허브향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
공원 동쪽 끝에는 새벽 일출을 감상할 수 있는 관천대(일대)가 있고, 시내를 향한 서쪽에는 
일몰을 감상하는 또 다른 관천대(월대)가 있다. 동남쪽에는 어린이를 위한 놀이 공간을 닦았
는데, 이는 옛날 궁궐에서 왕자의 거처인 동궁(東宮)을 동쪽에 배치해 햇님의 기운을 가장 먼
저 받게한 연유에서 착안한 배치라고 한다.
또한 야간에 찾는 이들을 위해 공원 바닥 곳곳에 282개의 오색 별자리 조명을 설치,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별자리를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바닥 조명은 직경 75m 천문도(天文圖)를
고스란히 공원 바닥에 옮겨놓은 것으로 동/서에 마련된 관천대(觀天臺) 위에서 바라보면 북극
성(北極星)을 비롯하여 견우와 직녀 등 다양한 별자리를 구경할 수 있다. 즉 낮에는 허브식물
공원으로, 밤에는 천문공원의 역할을 하는 2개의 얼굴을 지닌 공원이다.

공원 내부 뿐만 아니라 바깥에도 온갖 정성을 기울였는데, 동쪽 바깥에는 소나무와 버드나무,
복숭아나무를, 서쪽 바깥에는 느릅나무, 남쪽 바깥에는 오동나무와 매화나무, 대추나무, 북쪽
바깥에는 측백나무와 벚나무, 살구나무, 자작나무를 심었다. 이는 풍수지리사상의 사신사(四
神砂)를 표현하고자 함이며, 우주의 순환원리 중 상생원리(相生原理)에 맞게 수목배치를 하였
다.
자원봉사자들이 평일과 휴일을 가리지 않고 공원에 머물고 있어 허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며, 매년 5~10월에는 작은 천문대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천문관측프로그램도 운영하
고 있다. 그리고 매년 9월 말~10월 초에는 이틀(금,토) 일정으로 '별의 별 축제'가 열려 공원
의 분위기를 한껏 드높인다.

강동구의 꿀단지이자 일자산의 달콤한 양념으로 공원 정문은 강동그린웨이 가족캠핑장이 있는
남쪽에 있으며 내가 오른 북쪽 길은 후문(부출입구)으로 이어진다. 만약 천호대로에서 접근할
경우에는 후문으로 들어서면 빠르다.


▲  다양한 허브들이 공존하는 허브천문공원 내부

▲  피부색도 가지각색인 허브들 (차의 정원)
허브식물 대부분이 서양에서 건너온 것들이라 이름도 낯설고 외우기도 어려운
외래어 투성이다. 허나 그들이 서양 출신이니 어찌하겠는가?
우리 정서에 맞게 다듬고 이용하면 그만이다.

▲  보라빛 향기를 지닌 레몬베르가못(Lemon Bergamot)

원산지는 아메리카로 잎에 톡 쏘는 강한 레몬 같은 향기가 있다. 꽃잎 색깔이
분홍이나 보라색을 띠고 있으며, 샐러드나 차, 음료, 조미료에 많이 쓰인다.

▲  야로우(Yarrow)

서양톱풀로도 불리며 원산지는 유럽과 서아시아이다. 재배가 쉽고 번식력이 좋으며, 살균력과
수렴력, 지혈력이 있어 상처나 코피를 멎게 하는 작용이 있다. 또한 야로우의 생잎을 씹으면
치통을 멎게 한다고 하며, 생잎을 달인 즙은 열을 내리고 독소를 체외로 방출한다.


▲  온갖 허브향이 나래를 펼치는 천시원(天市垣)
허브들이 온갖 고운 향기를 베풀며 속세의 기운을 털어간다. 허브향이 늘 가득하니
그 향기에 취해 잠시 세상사를 놓으며 머물고 싶은 곳이다.

▲  동쪽 관천대 주변

▲  허브원 - 중앙에 볼록 나온 언덕 밑에 길동배수지가 있다.

삼재사상과 음양오행사상, 풍수지리, 우주의 순환원리까지 복잡한 원리는 죄다 적용했다는 허
브천문공원, 과연 그래서일까? 공원 내부는 질서 있게 배치된 기분이며 그리 어수선해 보이지
도 않는다. 허나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런 사연에 민감하지도 않고 신경쓰지도 않으며 알지도
못한다. 그저 허브식물과 공원을 즐길 뿐이다. 나도 이곳과 3번 정도 인연을 지었지만 이번에
서야 그런 원리가 깃들여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  감촉이 좋은 허브들이 옹기종기 모인 감촉정원

▲  아로마 워킹 산책로
아로마 향기를 베푸는 식물들 사이로 울퉁불퉁 길이 닦여져 있다.

▲  서로 아름다움을 견주는 남색 허브꽃과 분홍 허브꽃의 위엄

▲  콘플라워<Corn Flower, 블랙볼(Black ball)>
원산지는 유럽 동남부이다. 꽃의 높이는 30~90cm 정도로 가지가 다소 갈라지며
흰 솜털로 덮여있다. 밝은 청색의 아름다운 꽃은 정원이나 화단의 관상용으로
많이 쓰이며, 청색 안료나 잉크, 약품으로 많이 이용된다.

▲  에키네시아 화이트스완(Echinacea Whiteswan)
원산지는 북아메리카로 다년생으로 크며 성장이 빠르고 향기가 좋아 나비와
꿀벌을 잘 불러들인다. 그리고 꽃대를 잘라 포푸리나 리스를 만든다.

▲  허브천문공원 작은천문대 <관천대 = 일대(日臺)>

공원 동쪽에는 하늘을 겨낭하고 있는 '허브천문공원 작은천문대'가 있다. 식물원이나 허브정
원 같은 이곳에 천문대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어 조금 어색함은 주지만 허브식물과 천문과의
어색함을 줄여주고 그들을 한데 어우른 것이 바로 이 공원의 특징이다.
매년 7~9월 매주 목요일에 운영을 하며, 운영시간은 19시30~21시30분(7~8월 20~22시)이다. 어
두컴컴한 저녁에 천문대에 들어가 하늘을 구경하는 것으로 서울시 공공예약 홈페이지에서 미
리 예약을 해야 된다. (☞ 서울시 공공예약 홈페이지)


▲  색의정원과 공원을 동그랗게 둘러싼 남색 피부의 산책로
공원의 중심인 허브는 주로 남색 산책로 내부에, 관천대나 암석원,
작은천문대는 산책로 바깥에 두었다.

▲  허브천문공원 동쪽에서 바라본 일자산과 주차장
주차장 옆에 강동그린웨이 가족캠핑장이 닦여져 있다.

▲  산토리나(Cotton Lavender, Gray Santolina, 오른쪽)
핑거볼 레몬제라늄(Fingerbowl Lemon Geranium, 왼쪽)

산토리나는 유럽 남부가 원산지이다. 향료 식물로 잎과 꽃에 구충과 방충 효과가 있으며, 꽃
잎을 말려도 색깔이 변하지 않아 드라이플라워로도 아주 좋다.
핑거볼 레몬제라늄은 남아프리카 출신으로 꽃이 고와 관상용으로 인기가 좋다. 특히 음식과
음료수에 향을 낼 때 많이 쓰이며, 해충을 괴롭히는 효능도 있다.


▲  태미원(太微垣)과 견본원

▲  견본원에 뿌리를 내린 허브식물들

▲  오렌지타임(Orange Balsam Thyme)
유럽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이다. 상록저목성으로 오렌지향이 진하며, 말린 잎은
샐러드나 스프, 소스 등 요리에 사용된다. 관상용으로도 널리 쓰이는 편이다.

▲  페니로얄민트(Pennyroyal Mint)
아프리카가 원산지로 상쾌한 박하향이 강하게 나며, 모기와 파리를 쫓는 구충제
역할도 한다. 즉 모기와 파리가 싫어하는 향기를 가진 허브식물이다.

▲  딜(Dill, Ameto)
미국이 원산지로 가는 실과 같은 잎을 가지고 있다. 여름에는 우산을 편 것 같은
모양의 황색 꽃을 피우며, 특유의 강한 향기가 있어 요리에 많이 쓰인다.
(잎과 종자는 모두 피클에 쓰임)

▲  애플사이다제라늄(Applecider Geranium, 왼쪽)과
솝워트(Soapwart, 오른쪽)

애플사이다제라늄(이름도 겁나 어려움)은 남아프리카가 원산지로 상큼하고 톡쏘는 향을 지녔
다. (허브차나 요리, 원예로 많이 쓰임)
그리고 솝워트는 유럽과 서아시아가 원산지로 비누로 쓰이는 다년초이다. 솝워트 추출액은 세
제, 삼푸로 사용되며, 여드름과 습진 등의 세정액으로도 효과가 있다. 개량된 관상 원예종은
꽃이 아름답고 향기가 고와 실용을 겸한 관상용으로 아주 좋다.


▲  계란꽃과 비슷하게 생긴 로먼캐모마일(Roman chamomile)
서유럽이 고향으로 다년생 꽃이다. 사과향이 나며 털모양의 줄기가 땅바닥을
기어가는 성질이 있다. 특히 아픈 식물체와 같이 심으면 그의 원기를
회복시켜주어 '식물의사'로도 불린다.

▲  에키네시아(Echinacea)
북아메리카가 고향으로 인디언들이 비상용 약으로 많이 사용했다. 꽃대를 잘라
포푸리나 리스를 만들며, 뿌리와 줄기는 면역부활제로 입증되어 에이즈
치료제로 쓰고자 연구하고 있다.

▲  공원 한복판에 봉긋 솟은 자미원
저 밑에 길동배수지가 숨겨져 있다. 언덕 위에는 별자리 조명이 닦여져 있어
저녁 때 하늘을 찌르며 조명을 비춘다. (언덕 윗쪽은 조명 보호를 위해
통행을 금하고 있음)

▲  약초용 허브로 가득한 약초원과 자미원(중앙에 솟은 언덕)

▲  시내를 바라보고 있는 관천대<월대(月臺)>

공원 서쪽에는 돌로 견고하게 다져진 관천대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일몰과 밤하늘, 시내를
구경하는 곳으로 앞서 작은천문대(일대)와 마찬가지로 천문을 담당한다. 동쪽에 계단을 닦고
사방을 난간으로 둘러 마치 제단처럼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저곳에 오르면 바로 밑으로
길동(吉洞)과 둔촌동, 천호동 지역이 작게나마 시야에 들어온다.


▲  관천대(월대)에서 바라본 허브천문공원

▲  관천대(월대)에서 바라본 허브천문공원 남쪽 (약초원, 온실)

▲  관천대(월대)에서 바라본 암석원

부출입구(후문) 바로 옆에 자리한 암석원은 돌덩어리와 허브를 같이 배치한 공간으로 다른 공
간(약초원, 허브원)보다 상당히 작은 편이다. 의자와 탁자를 갖춘 쉼터가 닦여져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  유리막으로 이루어진 온실(식물원)
공원 서남쪽에는 햇살을 먹고 사는 유리온실이 있다. 120종의 허브를 화분 등에
담아 선보이고 있는데, 1년 내내 따스하여 겨울에도 허브들이
마음껏 몸을 풀며 허브향을 불어준다.

▲  바깥보다 더 무더운 온실 내부
이곳에 사는 허브들은 바깥 친구들과 달리 겨울 걱정은 안해도 된다.

▲  허브 화분들이 잔뜩 마중을 나온 허브천문공원 정문

오랜만에 인연을 지은 허브천문공원을 1시간 정도 둘러보고 작은천문대 주변 쉼터에 앉아 김
밥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였다. 허브향기가 바람을 타고 여기까지 어슬렁거려 정처 없는 나의
후각을 건드리니 따뜻한 허브차(Herb tea)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것을 후식으로 1잔 걸치면
아주 예술이지. 하지만 여기서는 허브차를 팔지 않으며 시각과 후각, 촉각으로만 허브를 즐겨
야 된다.

공원에 뿌리를 내린 허브식물을 본글에 모두 다루지는 못하고 일부 끌리는 존재들만 소개하였
다. 다 소개해봐야 내용만 길어질 뿐이다. 다음에 다시 이곳과 인연이 된다면 땅꺼미가 짙은
저녁에 찾아와 별자리 놀이를 해보고 싶다. (모두 낮에만 와봤음)

* 허브천문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산86일대 (☎ 02-3425-6448)



 

♠  강동구의 대표 지붕이자 남쪽 지붕, 작지만 아담하고 싱그러운
일자산(一字山) 둘러보기

▲  일자산 숲길로 들어서다 (유아숲체험장)

허브천문공원 정문을 나와 남쪽으로 내려가면 강동그린웨이 가족캠핑장 주차장이 나온다. 이
곳 바로 서쪽에는 가족캠핑장(49면)과 오토캠핑장(8면)이 닦여져 있고, 그 주차장을 가로질러
남쪽 숲으로 들어서면 유아숲체험장이 잠깐 나타나면서 일자산의 푸른 품이 펼쳐진다. 그렇다
면 일자산은 어떤 곳일까?

일자산(134m)은 강동구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뫼로 강동구와 경기도 하남시(河南市)의 경계
선 역할을 하고 있다. 위에서 보면 '一' 모습처럼 보여 일자산이란 단순한 이름을 지니게 되
었는데, 실제로도 이 산은 남북으로 길게 '一' 모습을 하고 있으며, 서울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이라 해돋이 명소로도 유명하다.

산줄기는 약 5km에 이르나 허브천문공원 이북은 천호대로로 잘렸으며, 남쪽은 하남시 감북동(
서하남나들목입구 교차로 북쪽)까지 뻗는다. 1971년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숲길과 쉼터
가 조성되었으며, 강동구의 각별한 관심에 힘입어 허브천문공원과 강동그린웨이 가족캠핑장,
강동구 도시농업공원, 일자산 해맞이공원, 잔디광장 등이 닦여져 강동구의 소중한 꿀단지로
애지중지되고 있다.
또한 서울의 외곽을 가르는 서울둘레길 코스(157km) 중 서울둘레길3코스 고덕,일자산 코스(광
나루역↔수서역, 26.13km)가 이 산의 신세를 지며 남쪽과 동쪽으로 흘러간다.

일자산 잔디광장에서는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에 각 1회씩 '강동그린웨이걷기대회'가 열려 성
황을 이루고 있으며, 산에는 딱히 문화유산은 없으나 오래된 자연산 동굴로 둔촌 이집이 피신
을 했던 둔굴이 전하고 있다.
그 외에 지금은 고된 세월에 녹아 없어졌지만 서울 유일의 탄산약수로 수도권에서 꽤 유명했
던 천호약수가 산 서쪽 자락 보훈병원 부근에 있었다. 한참 어린 시절(1980년대 초/중반) 그
곳에 갔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는데, 그 착했던 약수는 천박한 개발의 칼질에 핏줄이 끊겨 사
라지고 말았다. 그가 없어지면서 서울에서 탄산약수를 마시려면 최소 춘천과 양구, 홍천, 인
제, 평창까지 가야 된다. 기억 속의 풍물시로 아련히 잊혀진 천호약수 빈 자리의 무게가 그만
큼 커진 것이다.


▲  일자산 숲길 (서울둘레길3코스와 만나기 이전)

▲  서울둘레길3코스와 하나가 된 일자산 숲길
정면에 보이는 숲길이 서울둘레길3코스 상일동 방향이다. (오른쪽은 초이동 방향)


일자산 숲길은 유아숲체험장을 지나면서 서서히 시골 동구밭 고갯길 풍경을 자아내다가 상일
동(上一洞)에서 달려온 서울둘레길3코스와 만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일자산의 지붕길인 능선
길이 시작된다. 서울둘레길3코스는 일자산 능선길의 신세를 지며 둔촌습지, 배다리까지 거침
없이 흘러가며, 서울과 하남의 경계선도 이 능선의 몸을 의지하며 흘러간다. (능선 서쪽은 서
울 강동구, 동쪽은 하남시 땅)
능선길은 정상을 향해 서서히 올라가므로 길이 느긋하고 부드럽다. 산길도 잘 닦여져 있고 길
을 둘러싼 숲 또한 매우 짙어서 편한 둘레길의 정석을 보여준다.


▲  일자산 능선길, 정상 북쪽 구간 ①
능선길이 매우 부드러워 걷기에는 매우 좋다. 게다가 녹음이 짙은 숲이 숲터널을
이루며 펼쳐져 있어 여름 제국의 기운도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한다.

▲  일자산 능선길, 정상 북쪽 구간 ②

▲  일자산 능선길, 정상 북쪽 구간 ③
능선이긴 하지만 숲이 매우 삼삼해 능선길의 기분을 다소 잊게 한다.

▲  일자산 정상, 해맞이광장 (134m)

일자산 정상은 능선길과 마찬가지로 숲에 감싸여 있다. 하여 정상에서 맛볼 수 있는 일품 조
망을 누리기가 어렵다. 정상 바닥에는 큰 돌이 입혀져 있고, 주위로 낮은 돌담이 둘러져 있는
데, 강동구에서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기념하고자 이곳을 해맞이광장으로 닦으면서
입혀놓은 것들이다.
서쪽에는 둔촌 이집의 시(詩)가 적힌 동그란 표석이 있고, 동쪽에는 1994년 해맞이광장 준공
을 기념하는 조그만 비석이 자리하여 조촐하게 눈요깃감을 선사한다.

▲  둔촌 이집의 시비
(둔촌 선생이 후손에게 이르기를...)

▲  거의 30년 세월의 때가 묻어난 1994년
해맞이광장 준공 기념비


둔촌 이집(遁村 李集, 1327~1387)은 일자산과 인연이 깊은 고려 후기 문인이다. 본관은 광주(
廣州)로 초명(初名)은 원령(元齡), 자는 호연(浩然), 호는 둔촌이다.
그는 경기도 광주 사람으로 충목왕(忠穆王, 재위 1344~1348)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
했다. 공민왕(恭愍王) 시절 당시 권력자인 신돈(辛旽)에게 제대로 찍혀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그 핍박을 피해 일자산 둔굴 등에 은신하기도 했으며, 그 고통의 시간을 후세까지 잊지 않고
자 호를 둔촌으로 갈기도 했다. <일자산을 간직한 둔촌동(遁村洞)의 이름은 바로 그의 호 '둔
촌'에서 비롯됨>
신돈이 사라지자 바로 상경하여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안가서 그만두
고 여주 천녕현(川寧縣)에서 시를 지으며 무척 한가롭게 지내다가 60살에 인생을 마무리했다.

그의 시는 꾸밈과 우회적 표현보다는 직서적이고 자연스러운 작품이 많으며, 임심문(任深文)
을 비롯한 문인 60여 명과 교류했다. 무덤은 성남시(城南市) 하대원동에 있는데 그의 후손들
까지 같이 묘역에 잠들어 있어 완전 집안 묘역을 이루고 있다.

정상 서쪽에는 이집의 후손에게 당부하는 시가 적힌 시비가 물결치는 파도 위에서 솟는 햇님
의 모습처럼 자리해 있는데, 시의 내용은 아래와 같으며, 결론은 무조건 머리가 터져라 공부
하라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우리들을 위한 충고처럼 말이다.

                       독서는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하느니
                       시간을 아껴서 부지런히 공부하라
                       늙어서 무능하면 공연히 후회만 하게 되니
                       머리 맡의 세월은 괴롭도록 빠르기만 하느니라
                       자손에게 금을 광주리로 준다 해도
                       경서 1권 가르치는 것만 못하느니라
                       이 말은 비록 쉬운 말이나
                       너희들을 위해서 간곡히 이르노라


▲  일자산 능선길, 정상에서 둔굴 구간 ①
저 계단 위쪽이 바로 일자산 정상이다.


▲  일자산 능선길, 정상에서 둔굴 구간 ②
정상을 벗어나면 바로 내리막길이 느긋한 모습으로 펼쳐진다.

▲  일자산 능선길, 정상에서 둔굴 구간 ③

둔굴이 가까워 오면서 일자산 능선길도 다소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동쪽 풍경(하남시 감북
동)이 숲 대신 수풀과 밭으로 이루어진 확트인 공간으로 풍경이 바뀌는 것이다. 곳곳에 작은
무덤들도 여럿 보여 어둑어둑한 밤에 오면 염통도 좀 쫄깃해질 듯싶다.
비록 이곳이 하남시와 맞닿은 서울의 변두리이나 '정녕 서울 곁이 맞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싱그러운 산골 풍경을 보인다. 일자산에 이런 비경도 있었다니 이번에 인연 짓기를 참 잘한
것 같다.


* 일자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2동 /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 감북동


▲  일자산 능선길에서 바라본 하남시 감북동, 감일동 지역
남한산성을 간직한 남한산(청량산)이 정면에 바라보인다.



 

♠  일자산 마무리 (둔굴)

▲  둔굴(遁窟) 입구 쉼터

일자산 정상에서 남쪽 능선을 계속 더듬으면 둔굴 입구 쉼터가 마중을 나온다. 둔굴 바로 위
쪽에 나무로 넓게 자리를 닦아 쉼터를 조성했는데, 여기서 능선길을 잠시 버리고 쉼터를 지나
아래쪽 계단을 내려가면 일자산에서 가장 구석에 자리한 일자산의 오랜 명물, 둔굴이 주름진
모습을 드러낸다.
둔굴은 능선길 서쪽 벼랑에 자리해 있어 접근하기가 넉넉치 못했는데, 바로 앞에 의자와 탁자
를 갖춘 쉼터 데크를 닦고 계단을 내면서 그 고통이 크게 줄었다. 이제는 둔굴을 바라보면서
간식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허나 둔굴 주변은 난간이 둘러져 있어 굴을 보호하고 있으니
애써 들어가서 굴을 괴롭히지는 말자. 어차피 쉼터에서 둔굴의 속살까지 다 보인다.


▲  벼랑에 깃든 둔굴

둔굴은 대자연이 빚은 조그만 자연산 굴로 벼랑 밑에 자리해 있다. 굴이라고는 하지만 그 깊
이는 얕으며 윗 사진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다. 바로 이곳이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이집이 신
돈의 괴롭힘을 피해 잠시 숨어산 곳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산 밑까지 주거지가 들
어서고 바로 옆까지 산길이 뚫려 접근하기 쉽지만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에는 워낙 외
진 곳이라 찾기가 어려워 여기서 여러 날 머무른 것으로 여겨진다.

굴의 크기는 작지만 비바람을 피해 잠시 머물기에는 적당해 보이며, 굴 속에서 고통스런 시간
을 보냈을 이집의 모습이 그런데로 상상이 간다. '이곳이 발각되는 것은 아닐까? 나라는 앞으
로 어떻게 될 것인가?' 시름에 잠겼을 그의 모습이 말이다.

▲  남쪽에서 바라본 둔굴

▲  북쪽에서 바라본 둔굴

둔굴은 둔촌 이집 외에도 지역 사람들의 손때가 적지 않게 묻었을 것이다. 일자산에 사냥이나
산나물을 채집하러 갔다가 잠시 쉬거나 비를 피했을 수도 있고, 죄를 저지른 사람이 은신했을
수도 있으며, 여기서 고기 굽기 등의 취사행위를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지역 명소이
자 일자산의 명물로 존재감의 무게를 더했으니 그런 행위는 이제 없어야 될 것이다.


▲  둔굴 입구에서 바라본 하남시 감북동과 감일동, 남한산(청량산)

▲  둔굴 입구 남쪽 능선길 ①
오솔길의 진수를 보여주며 남쪽으로 구불구불 흘러간다.

▲  둔굴 입구 남쪽 능선길 ②

둔굴을 둘러보고 잠시 놓아두었던 능선길(서울둘레길3코스)을 다시 잡아 남쪽으로 향했다. 이
제 딱히 잡아야될 명소는 없으며 숲길을 따라 쭉 이동하면 된다. 중간중간에 서쪽과 동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손짓하나 서울둘레길3코스의 미답 구간도 조금씩 줄일 겸, 계속 능선길을 고집
했다.
동쪽으로 확트인 능선길은 다시 무성한 나무에 갇힌 숲길로 변하며, 그 상태로 둔촌습지(배다
리) 정류장까지 이어진다.


▲  둔굴 입구 남쪽 능선길 ③

▲  일자산의 남쪽 끝 내리막 길

▲  한강으로 흘러가는 감이천 (서부교에서 바라본 모습)

일자산 숲길은 둔촌습지, 배다리 정류장 북쪽에서 그 끝을 맺는다. 서울둘레길3코스도 여기서
일자산과 작별하여 서울의 동쪽 끝을 가르는 '동남로'를 따라간다. 비록 차량들 통행이 빈번
한 도로를 따라가야 되나 서울의 변두리답게 죄다 밭두렁과 논두렁, 야산 등의 시골 풍경투성
이라 서울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차량의 눈치를 보던 서울둘레길3코스는 감이천(서부교)을 건너 효죽동입구에서 비로소 찻길을
버리고 서쪽 시골길로 들어서면서 차량 소음에서 해방된다. 그 길로 들어서면 늪지대를 간직
한 방이동(芳荑洞) 생태경관보전지역이 나온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일자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2년 9월 1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서울 도심의 상큼한 서쪽 뒷동산, 안산 나들이 (홍제천인공폭포, 연희숲속쉼터, 안산자락길, 안산메타세콰이어숲길)

서울 안산 (홍제천 인공폭포, 안산자락길, 메타세콰이어숲길)



'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안산 여름 나들이 '

안산 메타세콰이어 숲길

▲  안산 메타세콰이어 숲길

홍제천인공폭포 안산 잣나무숲길

▲  홍제천 인공폭포

▲  안산 잣나무숲길

 



 

여름 제국이 지독한 무더위로 천하만물을 들들 볶던 성하(盛夏)의 한복판에 후배 여인네
와 서대문구 안산을 찾았다.
보통 안산에 안길 때는 봉원사(奉元寺, ☞ 관련글 보기)나 독립문(獨立門)에서 올라갔으
나 이번에는 길을 달리 잡아 홍제천 인공폭포에서 시작했다. 이곳은 안산의 서북쪽 자락
으로 홍제천변에 자리해 있다.

서대문구의 동쪽 젖줄인 홍제천(弘濟川)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인왕산(仁
王山)이 사이좋게 빚은 하천이다. 지금이야 생물이 살아 숨 쉬는 착한 하천으로 있지만
오직 개발만 앞세우던 20세기 후반, 개발의 칼질에 서울의 다른 하천과 마찬가지로 시커
먼 하천으로 전락되어 세상을 향해 온갖 악취를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1999년 내부순환
로가 홍제천에 구축되면서 하천이 자주 마르는 현상까지 발생했다.
그렇게 인간들에게 제대로 만신창이가 된 홍제천은 2008년 이후 하천 정비사업으로 수질
을 개선시키고 꽃과 수풀을 잔뜩 심으면서 생물을 불러들이는 생태하천으로 다시금 살아
났다. 또한 지하수를 소환해 하천을 채우면서 이제는 물이 마를 날이 없으며, 하천 주변
에 산책로와 운동시설, 쉼터, 홍제천폭포, 홍제천 폭포마당 등을 닦아 지역 주민들의 상
큼한 명소이자 쉼터로 착하게 거듭났다.


▲  백련교 주변 홍제천과 그에게 씌워진 칼, 내부순환로
고가 형태로 지어진 내부순환로가 홍제천에 육중한 다리를 걸치고 있다.

▲  멀리서 바라본 홍제천 인공폭포
홍제천과 폭포 주변은 수질이 어느 정도 개선되고 수풀도 무성해지면서
물고기와 새들이 앞다투어 비빌 구석을 마련했다.



 

♠  홍제천과 안산의 새로운 명물, 홍제천 인공폭포

▲  홍제천폭포와 음악분수

홍제천 백련교와 홍연교 사이에는 서대문구의 새로운 명물로 애지중지되고 있는 홍제천 인공
폭포(이하 홍제천폭포)가 여름 제국의 염통을 건드린다.

이 폭포는 2008년부터 진행된 홍제천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2009년 2월에 짓기 시작해 2011년
에 완성을 보았다. 처음에는 백련교 옆에 있다 하여 '백련교폭포'라 하였으나 나중에 '홍제천
인공폭포'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곳은 안산과 홍제천이 만나는 유일한 곳으로 하천변에 20~30m 정도에 벼랑이 형성되어 있는
데, 그 벼랑을 활용해 높이 25m, 폭 60m에 장대한 폭포를 닦았다. 물줄기는 크게 3줄기로 굵
은 실타래마냥 물(지하수)을 뽑아내며 홍제천을 듬뿍 살찌운다.
비록 인공폭포긴 하지만 인공의 느낌이 거의 들지 않을 정도로 아주 감쪽같이 지어져 자연산
폭포로 착각해도 이상할 것은 없으며, 주변 풍경과도 잘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달달한
풍경을 자아낸다.

폭포 앞 하천에는 폭포를 수식하는 음악분수를 매복시켜 하루에 2번씩(12~13시, 17~18시) 1시
간 동안 음악에 맞춰 깜짝 율동을 부린다. 그리고 폭포 맞은편(동신병원 뒷쪽)에는 쉼터인 홍
제천 폭포마당을 2층으로 설치했고, 폭포 남쪽에는 안산으로 인도하는 징검다리와 물레방아를
닦아 조촐하게 볼거리를 선사한다.
홍제천폭포가 자연산 흉내를 제대로 내고 있지만 그래도 엄연한 인공폭포이다. 그러다보니 하
루 종일, 1년 내내 돌리기가 여의치가 않다. 그만큼 전기와 수도 등 유지 비용이 소요되기 때
문이다. 하여 겨울을 제외한 4월부터 10월까지만 폭포와 음악분수를 돌리며, 가동시간은 8시
~19시(6~8월은 20시까지, 비오는 날과 사정이 여의치 않은 날은 가동하지 않거나 단축 운영)
이다. 그 외에는 죽은 폭포로 지낸다.


▲  홍제천 폭포마당에서 바라본 홍제천폭포

이곳은 한때 지상파 방송 날씨예보에 자주 등장했던 곳이다. 서대문구가 야심 차게 지어놓기
는 했으나 문제는 홍보이다. 기껏 잘 지어놓은 것인데 겨우 동네 명소로만 머물면 얼마나 아
깝겠는가. 그래서 홍보에 이용한 것이 바로 지상파 방송사이다.


▲  서남쪽에서 바라본 홍제천폭포의 위엄

하얀 명주처럼 쏟아지는 폭포수 소리가 얼마나 장쾌한지 귀신이 놀라 도망칠 정도이며, 천하
를 쥐고 흔드는 여름 제국도 이곳만큼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니 이곳에 머물고 있는 한, 여름
을 잊어도 좋은 착한 납량처이다.


▲  홍제천 너머에 웬 벽지 산골이? 물레방앗간과 안산
홍제천폭포에서 안산으로 인도하는 숲길이 바로 저곳에 숨겨져 있다.

   ◀  홍제천 징검다리 (홍제천폭포 서남쪽)
잘 다듬어진 큼지막한 돌을 점점이 깔아놓아
정겹게 징검다리를 이루고 있다. 저 다리를 건
너 왼쪽(징검다리)으로 가면 물레방앗간과 안
산으로 이어지며, 오른쪽 나무데크길은 홍제천
동쪽 산책로이다.


▲  징검다리에서 바라본 홍제천폭포와 폭포마당 주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의 맑은 기운을 싣고 한강으로 유유히 흘러가는
홍제천은 오늘도 평화롭기 그지 없다.


홍제천폭포를 둘러보고 서남쪽으로 조금 가면 안산으로 인도하는 징검다리가 나온다. 이들은
홍제천을 정비하면서 닦은 것으로 초등학교 고학년 발걸음에 맞게 돌이 놓여져 있어 덤벙대지
만 않는다면 물에 빠질 위험은 거의 없다. 그리고 설사 빠진다고 해도 수심이 얕아서 그리 위
험하지는 않다.
징검다리는 내를 건너 물레방앗간 이전까지 이어져 있으며 그 길로 가야 안산의 품으로 들어
설 수 있다. 그리고 오른쪽 나무데크길은 홍제천 동쪽 산책로이다.

▲  물레방앗간과 안산으로 인도하는
하천변 징검다리

▲  징검다리가 끝나면 박석이 입혀진 길이
물레방앗간까지 펼쳐진다.

▲  장식물로 놓여진 연자방아

▲  홍제천 물레방아

징검다리를 건너면 박석이 깔린 길이 나오면서 물레방아와 연자방아 등이 자신들 좀 보고 가
라며 발길을 붙잡는다. 그들의 등장은 주변 숲과 어우러져 잠시나마 서울에서 머나먼 첩첩한
산골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을 선사하는데, 이들은 홍제천폭포를 닦으면서 지어진 것들로 비
록 고색의 때는 여물지 못했으나 안산 동쪽 자락에 있는 너와집과 함께 안산 속의 전통 민속
공간으로 소소하게 볼거리를 선사한다.

물레방아는 강원도 물레방아의 백미(白眉)로 추앙받는 정선군(旌善郡) 백전리 물레방아(19세
기에 지어짐)를 모델로 삼아 만든 것으로 물레방아 위에서 쉬지 않고 물이 떨어져 물레방아의
나태함을 경계하고 있다. 그 옆에는 물레방앗간이 있고, 연못과 연자방아, 장독대, 전통식 배
등이 놓여져 있는데, 이중 물레방아만 바쁘게 움직이고 있고, 나머지는 장식용으로 한가로운
여름 오후를 보낸다.


▲  물레방앗간과 전통식 배

20년도 채 익지 않은 방앗간 지붕에는 벌써부터 세월이 달아준 잡초가 무성하다. 그 오른쪽에
자리한 배는 옛날에 바다와 경강(京江, 한강)을 오가던 전통 배를 재현한 것으로 물레방아와
더불어 이곳의 장식물로 살아가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닻을 올리고 홍제천을 따라 당장이라
도 한강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홍제천이 배를 띄울만한 처지가 되지 못한다.

* 홍제천인공폭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170-181



 

♠  연희숲속쉼터와 잣나무숲길

▲  안산의 싱그러운 꽃밭, 연희숲속쉼터 허브정원

물레방아에서 개울을 옆구리에 낀 산길을 조금 오르면 안산의 꽃밭, 연희숲속쉼터 허브정원이
그윽한 허브향기와 시원스런 풍경을 내밀며 마중을 한다. 강동구(江東區)의 일자산(一字山)
허브천문공원과 더불어 서울에 대표적인 허브(Hub)공원으로 산비탈을 이용해 계단식 정원으로
닦여져 있다.

이곳 허브정원은 연희숲속쉼터의 일원으로 2010년에 조성되었다. 순 외래어 투성이인 허브식
물과 허브꽃들이 고운 미소를 머금고 유혹적인 허브향으로 사람들의 후각을 정화시켜주며, 그
런 식물들 사이로 산책로가 산뜻하게 닦여져 있다. 그리고 돌 모양 스피커 8개가 설치되어 있
는데, 여기서는 잔잔한 음악과 가요가 흘러나와 허브공원의 향연을 고조시킨다. 이 음악은 보
통 7시부터 19시까지(주말은 9시부터 19시까지) 운영한다. (운영시간은 변경될 수 있음)


▲  허브정원 아랫부분
애플민트와 파인애플민트, 초코민트, 골드레몬타임 등 귀에 익은
허브식물들이 서로 매력을 겨룬다.

▲  허브정원 윗부분
레몬밤과 에키네시아, 레몬타임, 야로우 등 귀에 그리 익숙치 않은
허브식물이 자라고 있다.

▲  밑에서 바라본 허브정원 윗부분

▲  '허브'라는 공동체로 똘똘 뭉친 허브식물들

▲  허브의 향연장을 거닐다 ~~
부드러운 곡선의 허브정원 윗쪽 산책로

▲  끝없이 이어진 허브정원 계단 산책로

▲  2개의 동그라미처럼 닦여진 허브밭
허브들의 햇님을 향한 마음의 표현일까?


▲  윗쪽에서 바라본 허브정원
허브정원 너머로 연희동과 홍은동 지역, 백련산(白蓮山)이 흐릿하게
바라보인다.

▲  연희숲속쉼터 산책로 (허브정원 윗쪽)

허브정원을 거느리고 있는 연희숲속쉼터는 안산 서북쪽 자락에 자리해 있다. 이곳 동네 이름
이 연희동(延禧洞)이라 '연희숲속쉼터'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쉼터 서쪽에는 허브정원이
곱게 입혀져 있고, 숲이 매우 짙어 풍경도 자못 일품이다. 특히 봄을 책임지는 왕벚나무와 산
벚나무, 수양벚나무 등이 0.5km 정도 벚꽃길을 이루고 있어 매년 4월에는 '안산 벚꽃축제'가
성황리에 열리며, 이곳 벚꽃축제는 서울 장안의 이름난 벚꽃축제로 격하게 손꼽힌다.
허나 봄에만 반짝 순백(純白)의 향연이 열릴 뿐, 그 외에는 푸른 잎으로 다른 나무와 그리 다
를 것이 없다. 그것이 벚꽃의 반짝 인생이다.

이곳은 서대문구에서 추진하는 지역 축제와 행사의 중심지로 벚꽃축제 외에도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벚꽃이 향연을 펼치는 봄에 행사가 집중되어 있으며, 가을에도 여러 행사가 열려 자
연과 문화의 향기를 선사한다.


▲  푸른 옷을 두룬 연희숲속쉼터 벚꽃길 (쉼터 숲길)

▲  드디어 만난 안산자락길 (연희숲속쉼터 윗쪽)

연희숲속쉼터에서 산길을 조금 오르면 서대문구 제일의 야심작, 안산자락길이 모습을 드러낸
다. 안산 허리를 따라 이어진 이 길은 이 땅에 흔한 산 둘레길로 '둘레길' 대신 '자락길'을
칭하고 있는 점이 이채로운데, 자락길의 총 길이는 7km로 2010년 10월부터 3단계 과정으로 닦
아 2013년 12월에 완성을 보았다.
총 사업비는 48억(서울시 지원 33억, 서대문구 15억)으로 노약자와 장애인, 휠체어나 유모차
의 통행 편의를 위해 전 구간을 무장애자락길(나무데크길, 마사토 포장길)로 싹 닦아놓은 점
이 특징이다. 하여 2016년 4월 한국관광공사에서 선정한 '쉽게 걸을 수 있는 편안한 여행길
10선'의 하나로 꼽혀 국민적인 둘레길로 격하게 칭송을 받기도 했다. 그만큼 걷기 편한 길이
라 이보다 편한 둘레길은 천하에 거의 없을 것이며, 비록 서울둘레길, 제주올레길, 지리산둘
레길처럼 전국적인 둘레길은 아니지만 서울 굴지의 둘레길로 인기와 위엄이 대단하다.
허나 편리를 너무 강조하다보니 산길의 진미인 흙길이 거의 없는 것이 단점이라 흙길을 원한
다면 일반 산길을 이용하거나 자락길 안쪽에 닦여진 초록숲길을 이용해야 되며, 자락길이 산
자락에 있기 때문에 시내에서 접근하려면 어느 정도 오르막길과 산길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
다.

안산자락길은 연희숲속쉼터 윗쪽, 자락길전망대, 흔들바위, 북카페, 천연마당쉼터, 안산천약
수터, 숲속무대, 메타세콰이어숲, 잣나무숲을 두루 거쳐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순환형
둘레길로 봉원사나 천연동 뜨란채아파트, 서대문독립공원 서쪽, 독립문파크빌아파트, 무악재
역, 풍진베이스타운아파트, 연희숲속쉼터, 서대문구청에서 접근하면 된다. 우리는 남쪽인 잣
나무숲길로 해서 메타세콰이어숲으로 이동했다.


▲  드디어 나타난 안산자락길 잣나무숲길



 

♠  안산자락길 잣나무숲길, 메타세콰이어숲길
▲  잣내음으로 그윽한 잣나무숲길

안산 잣나무숲은 연희숲속쉼터와 메타세콰이어 숲 사이에 자리해 있다. 숲 한복판에 안산자락
길이 유연히 흘러가 그림 같은 잣나무숲길을 이루고 있는데, 숲길 길이는 0.3km로 메타세콰이
어숲과 함께 안산을 꾸미면서 조성된 안산의 아름다운 얼굴이다.
잣내음과 솔내음이 가득하여 상쾌한 기분을 안겨주며, 잣나무들이 베푼 산바람이 비록 약하긴
하지만 속세의 기운과 여름의 기세를 조금씩 털어간다. 이 숲을 지나면 바로 메타세콰이어숲
길이 나타나 두 눈을 다시금 호강을 시킨다.


▲  삼삼하게 자라나 하늘을 가린 잣나무숲의 위엄

▲  잣나무와 초록 수풀이 어우러진 잣나무숲
숲길이 너무 고와서 0.3km(잣나무 숲길 길이)가 참으로 짧게만 느껴진다.

▲  자락길의 기둥 역할도 도맡은 잣나무들
잣나무의 생명을 위해 그들을 밀어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두었다. 그들의
줄기만큼 구멍을 내어 그들의 삶을 배려한 것이다.

▲  시원하게 뻗은 잣나무숲길

▲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 (잣나무숲길)
그저 보이는 것은 녹음(綠陰)에 깃든 나무들 뿐이다.

▲  허공에 붕 떠있는 잣나무숲길
길이 아닌 곳에 자락길을 내다보니 이런 구간도 적지 않다.

▲  잣나무숲길 남쪽 구간

서울에 대표적인 잣나무숲으로는 이곳 외에도 동작구 서달산 잣나무숲(☞ 관련글 보기)과 호
암산(虎巖山) 잣나무숲이 있다. 이들이 시골에 있었다면 감흥이 덜하겠지만 번잡함이 격하게
연상되는 서울 한복판에 고스란히 박혀 있으니 그 감흥은 클 수 밖에 없다. 그만큼 자연은 인
간에게 소중하다.


▲  잣나무숲길 남쪽 끝부분

▲  안산 서쪽 자락 메타세콰이어숲길 (북쪽 시작점)

잣나무숲길이 끝나면 바로 메타세콰이어숲길이 펼쳐진다. 그 잠깐 사이에 대자연이 그린 풍경
화가 색깔을 빼고는 싹 바뀌는 것이다.
이 숲길은 앞서 잣나무숲길과 더불어 안산의 아름다운 얼굴로 안산을 꾸밀 때 야무지게 닦여
졌다. 늘씬하게 솟아나 하늘을 가린 메타세콰이어의 위엄 앞에 잣나무숲보다 더욱 짙은 숲을
선사하고 있으며, 그 기세가 얼마나 당찬지 한낮임에도 꽤 어두울 정도이다.

메타세콰이어 숲은 안산 서쪽 자락과 북쪽 자락에 있는데 이곳은 서쪽 자락이다. 이들 사이를
안산자락길이 무장애 데크길을 내밀며 흘러간다. 흔히 메타세콰이어하면 전남 담양(潭陽)과
전북 순창(淳昌)의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생각하기 쉽지만 이제는 천하에 널리 보급되어 서울
에서도 그들의 시원스런 풍경을 누릴 수 있다. 이곳 외에도 난지도(蘭芝島) 하늘공원과 마곡
동(麻谷洞) 서남물재생센터공원에도 닦여져 있으니 말이다. 허나 숲으로 크게 조성된 것은 이
곳 안산 밖에 없으며, 나머지 2곳은 가로수길 수준이다.


▲  늘씬한 자태로 하늘을 훔친 안산 메타세콰이어숲길의 위엄
숲 사이로 안산자락길이 그들의 기운을 받으며 지그재그로 흘러간다.

▲  하늘과 조금씩 가까워지는 메타세콰이어숲길

안산 서쪽 자락 메타세콰이어숲길은 0.3km 거리로 우리네 인생만큼이나 매우 짧다. 게다가 숲
길이 워낙 고와 정처없는 속인들의 마음을 들었다 놓으니 체감거리는 그보다 짧다. 숲길 중간
에는 숲속무대라 불리는 너른 공간이 있는데, 무장애데크길을 닦으면서 조성된 것이다.

▲  점점 짙어지는 메타세콰이어숲길

▲  메타세콰이어숲길 속으로~~

▲  메타세콰이어숲이 얼마나 삼삼한지 한낮에도 어두울 지경이다.

▲  메타세콰이어숲 숲속무대

메타세콰이어숲 한복판에는 숲속무대가 있다. 목재로 높이 공간을 다져 허공에 떠있는 형태로
비록 무대를 칭하고는 있지만 그 이름과 달리 나그네의 포근한 쉼터로 탁자와 의자가 넉넉히
깔려 있어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과 행동식을 먹거나 쉬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사방이 메타세콰이어로 꽁꽁 감싸여 있어 깊은 숲속에 갇힌 듯한 기분을 선사하며, 숲내음과
산바람도 달콤하여 여기서만큼은 속세의 시름을 잊어도 좋을 것 같다.


▲  지그재그로 펼쳐진 메타세콰이어숲 안산자락길
각박한 경사의 눈치를 줄이고자 길을 지그재그로 펼쳐놓았다.
그래서 오르는 길이 그리 힘들지는 않다.

▲  지그재그 안산자락길 중간 부분 ①

▲  지그재그 안산자락길 중간 부분 ②

▲  지그재그 안산자락길 중간 부분 ③

▲  지그재그 안산자락길 윗쪽

▲  메타세콰이어숲길 남쪽 끝 지점

짧게만 느껴지는 메타세콰이어숲길을 지나면 무악정과 봉원사로 인도하는 숲길이 나온다. 기
분 같아서는 무악정을 거쳐 안산 정상 봉수대(무악산 동봉수대)까지 거침없이 내달리고 싶으
나 날씨가 전혀 내 마음 같지가 않은 폭염 앞에 정상에 대한 욕심을 쿨하게 버리고 봉원사로
내려갔다. 어차피 안산 정상은 무려 100번 넘게 찾은 곳이다. 게다가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
에 있어 언제든 찾을 수 있는 곳이니 굳이 여름 제국에 힘겹게 저항하며 오를 필요가 없다.

이렇게 하여 홍제천인공폭포, 안산자락길, 잣나무숲, 메타세콰이어숲을 겯드린 안산 여름 나
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2년 2월 6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다음(daum)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강남의 상큼한 지붕을 거닐다. 대모산 나들이 (완남부원군 이후원묘역, 대모산성, 불국사, 서울둘레길4코스)

강남 대모산 (완남부원군 이후원묘역, 대모산성, 불국사)


    
' 서울 강남의 대표 지붕, 대모산 나들이 '

  대모산 숲길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  대모산 숲길
◀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  대모산 불국사

대모산 불국사

 



 


서울 강남권의 대표 지붕인 대모산은 어린 시절부터 여러 번 인연을 지었던 친숙한 뫼이
다. 보통 접근성이 좋은 일원동(逸院洞)이나 수서역에서 길을 시작했는데, 한 해의 절반
이 끝나가는 시점에 이르러 다시 대모산 앓이가 도졌다. 그 앓이는 대모산에 안겨야 100
% 낫는 병이라 겸사겸사 시간을 내어 그를 찾았는데, 이번에는 산 남쪽인 자곡동(紫谷洞
)에서 산 더듬기를 시작했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3시, 지하철로 수서역까지 이동하여 거기서 강남구 마을버스 03
번을 타고 못골마을 정류장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 자곡로를 따라 서쪽으로 6분 정
도 가면 래미안강남힐즈아파트가 나오는데, 그 옆구리에 닦여진 '자곡로5길'로 들어서면
오른쪽 산자락에 옹기종기 모인 무덤들이 두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이들이 바로 완남부
원군 묘역으로 그들을 미답처 목록에서 싹싹 지우고자 이곳을 대모산 나들이의 시작점으
로 삼은 것이다. (못골마을 정류장보다는 래미안강남힐즈 정류장에서 내리는 것이 더 가
까움)


▲  완남부원군 묘역 남쪽에 상큼하게 닦여진 공원 산책로



 

♠  대모산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조선 중기 무덤,
완남부원군 이후원(完南府院君 李厚源) 묘역
- 서울 지방기념물 29호

▲  밑에서 바라본 묘역

대모산 남쪽 산골인 못골에는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인적이 드
물던 이 두멧골까지 개발의 칼질이 밀려오면서 묘역 서쪽에 아파트가 심어지고 신작로가 바로
옆구리까지 들어왔으며, 남쪽과 동쪽에 공원이 조성되는 등, 주변 풍경이 다소 변화를 겪었다.
묘역은 거의 옛 모습 그대로이거늘 그 주변이 크게 홍역을 치룬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이곳
으로 부른 묘역의 주인공, 이후원 그는 누구인가?

이후원(李厚源, 1598~1660)은 자는 사진(士晋), 사심(士深), 호는 우재(迂齋)로 세종(世宗)의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의 7세손이다. 그의 아비는 이욱(李郁), 어미는 장수황씨로 황정욱
(黃廷彧)의 딸이다.

10대 시절, 김장생(金長生)의 문하로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이때 김집(金集)과 조속(趙涑),
송준길(宋浚吉)과 친분을 쌓았다. 1623년 서인 패거리들이 일으킨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
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평가를 받아 완남군(完南君)에 봉해졌으며, 1624년 이괄(李
适)의 난 때 반란 토벌에 앞장섰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터지자 총융사(摠戎使)로 전쟁에 임했으며, 이듬해 청나라군 포
로를 잡은 공로로 녹훈되었으나 이를 반기지 않았다. 이후 단양군수와 태안군수를 지냈고, 조
정으로 돌아와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 종4품)을 지내다가 1635년 익산군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해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뒤늦게 과거시험을 통과했다.

1636년 김상헌(金尙憲)의 천거로 지평(持平, 정5품)이 되었으며, 얼마 가지 않아서 장령(掌令
, 정4품)이 되었다. 바로 그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터지자 인조(仁祖)를 따라 남한산
성으로 서둘러 도망을 쳤으며, 그곳이 청군에게 포위되자 염통이 오그라든 김류(金瑬) 등이
강화도로 도망치자며 어리석은 인조를 구워삶았다.
그러자 이후원은 남한산성을 끝까지 지킬 것을 주장하여 그들의 의견을 가라앉혔고, 최명길(
崔鳴吉)이 항복을 제안하자 죽기로 싸울 것을 주장했다.

1639년 승지(承旨)가 되고 이어 수원부사에 천거되었으나 인조가 그를 곁에 두고 싶어서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삼았다. 이후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백성의 힘을 무리하게 쓰지 않고 사풍(
士風)을 변경시켜 군정(軍政)을 닦았으며 이어 강화부유수가 되었다가 1642년에 대사간(大司
諫)을, 1643년에는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

1644년 심기원(沈器遠)이 좌의정(左議政)과 남한산성 수어사(守禦使)를 겸임하자 심복의 장사
들을 호위대에 집어넣고 전 지사(知事) 이일원(李一元)과 작당하여 회은군 이덕인(懷恩君 李
德仁)을 추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후원이 적극 나서 반란을 토벌했으며, 이듬해 호
조판서와 대사헌이 되고 1646년에는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어 회명연(會盟宴)에 참여했다.

1650년 효종(孝宗)이 청나라 정벌 프로젝트인 이른바 북벌(北伐)을 추진하자 그 참모가 되었
다. 효종의 명으로 전함 200척을 준비하여 그때를 알뜰히 대비했으나 1659년에 효종이 아쉽게
도 승하를 하면서 북벌프로젝트는 흐지부지 되고 만다.
1653년 도승지(都承旨)가 되어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1655년 예조판서로 추쇄도감제조
(推刷都監提調)가 되어 도망간 노비나 부역, 군역을 회피한 사람들을 잡아와 그 죄를 물었고,
악학궤범(樂學軌範)을 개간해 사고(史庫)에 나누어 보관하게 하였다. 이어서 한성부판윤(漢城
府判尹), 형조판서, 공조판서, 대사간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1657년 우의정(右議政)이 되면서 명나라에 대한 꼴통 사대주의의 대가 송시열(宋時烈)을 이조
판서에, 송준길을 병조판서로 임명했으며, 이후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 지경연사(知經
筵事),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등을 지냈다.

그는 성품이 청개(淸介, 청렴하고 절개가 있음)하고 인화를 중히 여겼으며, 선(善)을 좋아하
고 악을 멀리했다. 그리고 관직생활 중에도 틈틈히 경사(經史)를 읽으며 머리 속에 늘 풍부한
지식을 쌓아두었다.
1685년 경기도 광주 수곡서원(秀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세상 사람
들은 그를 완남부원군이라 부른다.


▲  고색의 기운을 머금은 이후원 신도비(神道碑)

이후원 묘역은 광명시 일직동 삼석산(三石山) 호봉골에 처음 자리를 잡았다. 그곳은 그와 같
은 시대를 살았던 이원익(李元翼, 1547~1634) 묘역 부근이다. 그러다가 1685년 광주 세촌(細
村) 금성산(金星山)으로 이장되었으며, 1714년 현 자리에 완전히 안착을 했다. 이때 그의 전
처인 광주김씨, 후처인 영월신씨와 같은 봉분(封墳)을 쓰는 합장묘(合葬墓)로 조성되었다.

이후원 신도비는 묘역 동남쪽에 자리해 있다. 신도비란 2품 이상의 높은 사람과 왕족들만 지
닐 수 있었던 비싼 비석으로 무덤 주인의 생애를 기록해 놓는다. 두툼하게 생긴 비좌(碑座)
위에 글씨를 깨알 같이 적어놓은 비신(碑身)을 세우고, 지붕돌로 마무리를 한 단출한 모습으
로 비석에 딱히 '신도비'를 칭하는 내용은 없으나 신도(神道)로 통한다는 무덤 동남쪽에 자리
해 있고, 묘표도 따로 마련되어 있어 그를 신도비로 보고 있다.
비문(碑文)은 이후원의 벗인 송준길이 짓고, 송시열이 추기를 지었으며, 명필로 유명한 이정
영(李正英)이 글씨를 쓰고,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두전(頭篆)을 썼다. 1685년 광주로 이장
되었을 때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며, 당대 유명한 사람들의 글과 글씨를 머금고 있어 역사적인
가치가 대단하다.


▲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후원 묘

이후원 묘는 이후원 자신과 그의 전처, 후처가 모두 안장된 봉분을 중심으로 묘표(墓表), 상
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망주석(望柱石) 2기, 해치석 2기로 이루어진 조촐한 모습이다.
봉분 밑도리에는 호석(護石)을 둘러 무덤이 조금 있어 보이게 하였으며 묘표는 봉분 앞이 아
닌 옆에 두었다. 허나 높은 사람들 무덤에 흔히 쓰는 문인석(文人石)과 동자석(童子石) 같은
석물을 전혀 갖추지 않았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 대신 독특하게도 해치석을 지
니고 있으며, 이들은 다른 사대부나 왕족의 무덤에서는 만날 수 없는 희귀한 예로 나 역시 이
곳에서 그들을 처음으로 접해 본다. 이들 해치는 무덤 지킴이로 배치되었다.

▲  호석을 두룬 봉분과 상석, 향로석
묘표(오른쪽 돌기둥)

▲  이후원 후손들의 무덤 (3기)
이들은 상석과 향로석, 망주석만 갖추었다.


▲  오늘도 평화롭기 그지 없는 이후원 묘역의 초여름 풍경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  무덤의 주인을 소상히 알려주고 있는 묘표
연꽃 무늬가 진하게 새겨진 비좌 위에 곧게 솟은 비신(빗돌)을 세우고
그 위에 네모난 지붕돌을 얹혔다. 빗돌 피부에는 고된 세월의 때로
얼룩이 져 있으나 글씨를 확인하는데는 그리 어려움은 없다.

▲  향로석에 새겨진 글씨 '완남 이충정공묘(完南 李忠貞公墓)'
여기서 '완남 이충정공'은 이후원을 뜻한다. 300년이 넘은 글씨이지만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정함을 과시하고 있다.

▲  뻐드렁니를 드러낸 서쪽 해치석의 위엄

이후원 묘만의 특별한 옵션, 해치석은 아주 조그맣고 앙증맞은 모습으로 상석 앞에 2기가 자
리해 있다. 네모난 바닥돌 위에 귀엽게도 앉아있는 해치는 상상 속의 동물로 광화문 앞에도
커다란 해치석(해태석)이 있는데, 얼굴과 이빨, 귀, 뒷다리, 꼬랑지까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서쪽 해치상의 두 눈은 장대한 세월에게 제대로 얻어맞은 듯 멍이 부었고, 코는 깎여나가 흔
적만 남았다. 아마도 그의 코를 갈아 그 가루를 먹으면 아들을 낳거나 시험에 붙는다는 유언
비어가 있었던 듯 싶다. 그래도 코를 제외한 나머지는 잘 남아있으며, 동쪽 해치상은 눈과 코
가 모두 멀쩡하다.
그들의 귀여운 자태에 반해 집으로 살짝 가져가 나의 수호용 석수(石獸)로 삼고 싶지만 그들
을 들고 갈 힘도, 지위도 되지 못한다.

▲  서쪽 해치석의 얼굴

▲  서쪽 해치석의 옆모습


▲  맞은편 해치석을 바라보고 있는 동쪽 해치석
무덤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바람직하지 못한 기운들도 해치의 귀여운 모습에
그만 넋을 잃고 그들의 임무도 잊은 채, 돌아갈 것이다.

▲  동쪽 해치석의 해맑은 얼굴

▲  동쪽 해치석의 옆모습


▲  이후원 묘역 동쪽 숲길 (못골위 근린공원)

이후원 묘역 남쪽과 동쪽에는 '못골위 근린공원'이 닦여져 있다. 동쪽 산책로는 야트막한 오
르막길로 그 고개를 넘으면 바로 못골마을로 이어지는데, 고개 너머 길은 잡초들이 덥수룩하
여 접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대모산으로 이어지는 산길도 없는 눈치여서 다시 묘역
으로 나와 그 서쪽 길(래미안강남힐즈 동쪽 길)을 기웃거려 보았으나 딱히 길은 없어 보였다.
하여 자곡로로 나와 길을 탐색하니 LH강남3단지아파트 남쪽 세명근린공원에서 대모산으로 가
는 계단길을 발견, 그 길을 통해 오랜만에 대모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자곡동 산39-3


▲  대모산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세명근린공원)



 

♠  대모산(大母山, 293m)을 더듬다

▲  대모산 숲길 (자곡동에서 정상 방향)

대모산은 강남의 대표 지붕이자 듬직한 뒷동산이다. 1977년에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 1989년 이후 공원으로 조금씩 꾸며지기 시작했다. 개포동과 일원동, 수서동, 자곡동, 내곡
동(內谷洞), 세곡동(細谷洞)에 걸쳐있는 산으로 1980년대 개포동(開浦洞) 개발 이전에는 산세
가 양재천(良才川)까지 이르렀다. <꼬마 시절인 1980년대 중반에 대모산을 타고 도곡동(道谷
洞)까지 내려간 기억이 있음>
산의 모습이 늙은 할머니처럼 생겼다고 해서 할미산, 대고산(大故山)이라 했으나 조선 세종(
世宗) 때 태종(太宗)의 능인 헌릉(獻陵)이 산 남쪽에 조성되면서 어명에 의해 대모산(大母山)
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산세가 비구니가 앉은 모습 또는 여자의 앞가슴처럼 생겼다고 하여
그리 이름을 내렸다는 설도 덧붙여 전해지고 있음)
조선 후기에 신경준(申景濬)이 작성한 산경표(山經表)에는 한남정맥(漢南整脈)에 속하는 산이
라 했으며, 여지도서(輿地圖書) 광주목(廣州牧) 기사에는 '관아 남쪽 30리에 있으며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다'고 나와있다.

대모산에 안긴 오랜 명소로는 불국사와 대모산성터 등이 있으며, 넓은 산세에 비해 계곡은 매
우 빈약하다. 개포동과 일원동 개발로 계곡 상당수가 날라갔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아있는 계
곡들도 시멘트를 바르고 요상하게 공구리를 쳐서 볼품이 매우 없다. 반면 약수터는 주변 산들
못지 않게 많아서 구룡산을 포함하여 무려 18개소의 샘터가 있다. (일부는 부적합 상태임)
또한 도보 산책길의 전국적인 유행으로 강남구청에서는 수서역에서 대모산 북쪽 자락과 구룡
산 북쪽 자락을 거쳐 염곡동(廉谷洞)으로 이어지는 대모산 둘레길인 '강남그린웨이'를 닦았으
며, 천하 둘레길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찬양받는 서울둘레길4코스(대모, 우면산 코스)가 대
모/구룡산 북쪽 자락으로 흘러간다. (불국사를 경유함)


▲  대모산 숲길 (왼쪽 철책 너머는 헌인릉 보호구역)

자곡동 세명근린공원에서 20여 분 정도 오르면 대모산 능선길에 이른다. 길은 거의 완만한 수
준으로 길이 약간 흥분기를 보이는 구간은 나무데크 계단길을 깔아 그 흥분을 조금 가라앉혔
다.


▲  대모산 능선길
왼쪽 푸른 철책은 헌인릉과 국정원 구역이니 넘어가지 말자. 국가의
예민한 곳을 건드려봐야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

▲  숲에 감싸인 대모산 정상(293m)

대모산 능선길로 들어서 서쪽으로 10분 정도 가면 대모산 정상에 이른다. (동쪽 능선길로 가
면 수서역임)
보통 하늘을 이고 있는 뫼의 정상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거나 잡초로 이루어진 대머리 같은 지
형이나 대모산 정상은 나무가 무성하여 정상이라는 것이 그리 실감이 나지 않는다. 삼삼하게
솟은 나무들로 하늘은 절반 밖에 보이지 않으며 조망 또한 별로 기대할 수 없다. 하여 여기서
는 동남쪽인 자곡동과 세곡동, 성남시 정도만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대모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 대모산 정상

대모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H'마크가 새겨진 헬기장이 나온다. 이곳은 북쪽이 확 트
여있어 앞서 정상에서 누리지 못한 조망을 제대로 보상 받을 수 있다. 바로 앞에 개포동과 일
원동을 비롯하여 강남구와 서초구, 송파구, 성동구, 광진구, 중랑구, 아차산~용마산 산줄기,
구리시, 멀리 불암산과 수락산, 도봉산, 북한산(삼각산), 남양주 지역까지 시야에 잡혀 조망
도 제법 진국이다.


▲  대모산 헬기장에서 바라본 천하 ①
개포동과 일원동을 비롯하여 송파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기,
그리고 멀리 수락산과 도봉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  대모산 헬기장에서 바라본 천하 ②
개포동과 일원동, 송파구, 강동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기, 수락산,
구리시, 남양주 지역 등

▲  천하를 향해 고개를 내민 대모산 서쪽 조망대

대모산 정상 서쪽에는 천하를 굽어보는 조그만 조망대가 있다. 이곳은 동쪽 헬기장보다 더 조
망이 일품으로 강남구 지역을 중심으로 송파구, 강동구, 구리시, 서초구, 성동구, 광진구, 중
구와 남산, 동대문구, 멀리는 북한산(삼각산), 도봉산, 수락산, 남양주 지역까지 망막에 들어
온다. 강남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고 서쪽의 구룡산 외에는 주변이 상당수 평지라 조망
의 깊이도 클 수 밖에 없다.


▲  대모산 서쪽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개포동과 도곡동, 양재동을 비롯한 강남/서초구 지역과 동작구, 용산구,
중구, 남산, 북한산(삼각산)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대모산 서쪽 조망대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강남구와 서초구, 우면산, 관악산, 동작구 지역

▲  옛 대모산성(大母山城)의 아련한 흔적들

대모산 헬기장 서쪽 능선길과 대모산 조망대 주변을 잘 살펴보면 무리를 지어 모인 돌무더기
들이 심심치 않게 보일 것이다.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그저 잡석들의 무리로 보고 밟고 지나
가기 일쑤이나 눈썰미가 조금 있다면 그저 단순한 돌무더기가 아님을 느낄 것이다. 그들은 바
로 대모산의 갑옷이었던 대모산성의 흔적들(대모산성터)이다.

산꾼과 행정당국의 오랜 외면을 받으며 굴욕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대모산성은 6~7세기 정도
(또는 신라 후기)에 신라(新羅)가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1999년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한양대
박물관팀이 발굴조사를 벌인 적이 있는데, 이때 짧은 굽다리 접시를 비롯하여 다양한 신라 유
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곳 산성은 정상을 둘러싸며 조성된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약 600m, 내부 면적은 약 8,276
㎡이며, 성돌은 50~70cm 정도의 자연석과 활석을 이용했다. 봉은사(奉恩寺)에서 편찬한 '봉은
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백제 때 고성(古城)으로 나와있고, 북쪽 성벽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일부 확인되기도 했으나 나중에 성곽을 구축하면서 과반수 이상 날라간 상태였다,
또한 정상 중간 지점에 제단으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 바위가 널려있는데 이 바위에는 달걀 모
양의 조각이 50여 개 이상 새겨져 있다. 이들 흔적을 어려운 말로 성혈(聖穴)이라 하며, 그
흔적을 문신처럼 지닌 바위는 알바위라 부른다. 하여 이를 통해 대모산은 옛 조선(고조선)부
터 지역에서 꽤나 애지중지되었음을 귀뜀해준다.
그랬던 대모산성은 고려 이후 버려졌고,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의 오랜 괴롭힘으
로 완전히 헝클어져 돌이 약간 뭉쳐있는 형태로 여럿 남아있을 뿐이다.

옛 조선부터 신라 후기까지 절찬리에 이용된 의미 깊은 곳이지만 오랫동안 세상의 관심을 받
지 못했다가 2012년에 비로소 서울시에서 지방기념물로 지정하고자 문화재위원회에 상정했다.
허나 여러 가지 이유(사유지, 강남구의 의지 부족 등)로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보호 조치도 계속 보류되었다. 게다가 대모산성을 알리는 어떠한 안내문도 없는
실정이라 사람들의 발길에 계속 고통받고 있으며, 봉우리 주변에 철탑 시설물과 국정원 철책
까지 산성터를 그냥 두지 않아 상태는 더욱 악화되고 있다.
그러니 더 망가지기 전에 서둘러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여 흐릿하게 남아있는 흔적이라도 수습
했으면 좋겠다. 그래도 서울에 거의 흔치 않은 산성 유적이 아니던가.


▲  옛 대모산성의 흔적들 ①
대모산성 왕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차산에 깃든 아차산성(阿且山城)이나
금천구 호암산에 깃든 호암산성(虎巖山城)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까?

▲  옛 대모산성의 흔적들 ②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성벽이 많이 남아있었다고 하며 멀리서도 그 흔적이
보였다고 한다. 허나 속세의 무관심 속에 그마저도 대부분 헝클어지고
지금과 같은 우울한 몰골이 되고 말았다.

▲  옛 대모산성의 흔적들 ③
성곽을 다졌던 자리에는 성돌 일부와 성터 윤곽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  불국사로 내려가는 숲길



 

♠  대모산 북쪽 자락에 둥지를 튼 오래된 산사
~ 대모산 불국사(大母山 佛國寺)


▲  불국사 약사보전(藥師寶殿)

대모산성터에서 일원동 쪽으로 15분 정도 내려가니 불국사가 뒷통수를 보이며 모습을 드러낸
다. 이름도 참 좋은 불국사는 몇 번 인연을 지었던 절로 그냥 넘어갈까 했으나, 간만에 대모
산에 왔고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지나치듯, 그냥 가기가 아쉬웠다. 하여 석불좌상의 안
부도 물을 겸, 불국사로 발을 들였다.

절 밑에는 약수터(불국사 약수터)가 있어 더위로 지친 목구멍을 적실 겸 다가갔다. 허나 수질
부적합 빨간 딱지가 부착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것을 무시하고 마셔도 상관은 없으나
이후는 장담하지 못한다. 요즘 내리는 비가 너무 각박한 수준이다보니 약수터의 목구멍도 죄
다 타들어가고 있었고, 바가지들도 실업자 신세가 되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런 약수터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경내로 인도하는 돌계단을 오르면 정면으로 약사보
전과 그곳의 주인 약사여래(불국사 석불좌상)와도 시선이 딱 마주친다.

대모산 북쪽 자락에는 이름도 참 아름답고 외우기도 쉬운 불국사가 조용히 안겨져 있다. 흔히
불국사하면 다보탑과 석가탑으로 유명한 경주(慶州) 불국사를 100% 생각하기 마련이라 불국사
에 간다고 하면 의심할 여지도 없이 다들 경주에 가냐고 묻는다. 허나 부처 형님의 나라를 뜻
하는 '불국'이란 이름을 경주 불국사 혼자서만 누리면 어디 쓰겠는가?
비록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불국사' 이름을 지닌 절은 천하에 수십 곳이 넘는다. (그나
마 오래된 절은 경주와 대모산 불국사가 고작임)

'불국사' 이름의 절 중에 경주 다음으로 2위(1위와 2위의 차이가 완전 넘사벽 수준;;)라고 볼
수 있는 대모산 불국사는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한 약사도량으로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다. 법
당(法堂)인 약사보전을 중심으로 삼성각, 나한전 등 4~5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으며, 지형상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시선의 끝에는 이곳의 마르지 않는 샘 강남이 펼쳐져 있다.
가람배치는 법당 앞에 석탑 1기를 둔 1법당 1탑 배치로 절에 흔히 있는 일주문(一柱門)은 없
다. 게다가 절이 들어앉은 위치도 사세 확장에 그리 용이한 지형이 아니라서 새로 건물을 짓
기에도 여의치가 않아 보인다.

▲  불국사 약수터
내가 갔을 때는 수질 부적합 판정으로
잠시 휴업 상태였다.

▲  2층으로 이루어진 삼성각(三聖閣)
1993년에 지은 것으로 2층은 삼성각, 1층은
공양간과 요사, 선방으로 쓰인다.


이 절은 고려 말기인 1352년에 진정국사(眞靜國師)가 창건하여 약사사(藥師寺, 약사절)라 했
다고 전한다. 믿거나 말거나 설화에 따르면 절 아랫마을(일원동)에서 박씨 농부가 경작을 하
고 있었는데 소가 논 한가운데서 나아가지 않아 살펴보니 글쎄 땅 속에 석불(지금의 불국사
석불좌상)이 있는 것이었다.
하여 바깥으로 꺼내 가까운 봉은사(奉恩寺)에 넘기려고 했으나 석불이 거부 반응을 보이며 꿈
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약사절로 보내려고 하니 갑자기 석불이 지푸라기보다 가벼워져 그
곳으로 옮겼다. 그때 불상이 발견된 논을 부처논이라 불렀고 그 옆을 흐르는 개천을 부처내라
불렀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절 아랫마을에서 농부가 밭을 갈다가 석불을 발견하여 마을 뒷산에 자리를 만들
어 봉안했는데, 진정국사가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와 1385년에 그 자리에 절을 세워 약사절(약
사사)이라 했다는 것이다.
위에 언급된 설화의 내용처럼 과연 진정국사가 창건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석불은 고려
후기 것으로 판명이 난 상태라 창건시기와도 그런데로 맞아보인다. 또한 밭에서 발견되었다는
설화를 통해 지역 농민들이나 지역 세력가의 발원으로 석불이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불국사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옛 절터(일원동 246-12)가 있는데, 그곳이 불국사의 원래 자
리라고 한다. 허나 언제쯤 현 위치로 옮겨졌는지는 대모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창건 이후
500년 동안 마땅한 흔적을 남기지 못했으며, 1874년 고종(高宗)의 지원으로 중창을 했다고 전
하는데, 그때 현 자리로 이전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모산 남쪽 헌인릉(獻仁陵)에서 물이 나오자 고종은 그곳과 가까운 약사사 주지에게 의
견을 물었다고 한다. 이에 주지승이 대모산 동쪽(현 성지약수터)의 수맥을 끊으면 된다고 답
을 올려 그렇게 하니 과연 물이 나오지 않았다고 하며, 고종은 고마움의 뜻으로 불국정토를
이루라는 뜻에 '불국사'란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고종의 꿈에 헌릉에 묻힌 태종이 자꾸 나타나자 그를 달래고자 약사사를 증축하
고 불국사란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  1칸짜리 나한전(羅漢殿)
불국사에서 가장 늙은 건물로
1964년에 지어졌다.

▲  나한전 내부
석가여래와 문수/보현보살, 16나한,
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6.25전쟁 때 절이 처참히 파괴되고 오로지 창건 설화에 나온 석불만 겨우 살아남았는데, 1963
년 안양 삼막사(三幕寺)에서 온 권영선(풍곡당)이 중창해 법당과 칠성각, 나한전(1964년)을
세웠다. 이후 건물이 낡고 협소하여 영길(법선당)이 1993년부터 3년의 불사 끝에 나한전을 제
외한 모든 건물을 싹 갈고 탱화를 새로 제작했다.

강남구의 거의 유일한 늙은 산사로 강남권에서는 봉은사 다음 급이며, 고색의 향기는 말끔히
씻겨 내려갔으나 이곳의 유일한 보물인 늙은 석불이 전하고 있어 나름 오래된 절임을 증명하
고 있다.
시내와 가깝긴 하지만 숲에 푹 묻힌 탓에 고적하고 아늑한 산사의 멋과 여유를 누리기에 부족
함은 없으며, 으리으리한 경주 불국사와 달리 두 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조촐하여 은근히 정
감이 간다.


▲  약사보전 내부 (단란한 모습의 약사5존상과 불단, 닫집)

불국사의 중심 건물(법당)인 약사보전(약사전)은 삼성각과 더불어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약사전 앞에는 근래 마련된 5층석탑이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하얀 피부를 드러내
고 있고, 약사전으로 오르는 돌계단 좌우에는 수호의 의무를 지닌 돌사자 2기가 있는데, 사자
의 탈을 쓴 고양이처럼 귀엽게 다가온다.

약사전 불단에는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3존상도 아닌 무려 5존상이 봉안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 왜 특이하게 5존상으로 불단을 장식했을까? 실제 다른 절에서는 3존불(또는 3존상) 주변에
별도의 불상과 보살상을 두는 사례도 많고 이곳 불국사 같은 경우는 지형상 다른 여래나 보살
상을 중심으로 한 건물을 더 두기가 곤란하므로 그 역할을 약사전이 싹 도맡고 있는 것이다.
즉 약사전이라고 해서 약사여래만 집중적으로 취급해야 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대신 불단
가운데에 약사여래를 높게 배치하고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 4개의 협시보살상을 낮게 배치
하여 5존상을 구성했다.


▲  불국사 석불좌상(가운데 석불)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6호

이들 5존상 가운데 가장 맏이는 가운데에 있는 석불좌상(약사여래상)이다. 이곳의 중심 불상
답게 좌우에 거느린 보살상보다 대좌(臺座)가 높은데, 그의 우측에는 육환장(六環杖)을 든 승
려머리의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좌측에는 보관(寶冠)을 눌러쓰고 가슴에 금색 장식을 단 관
세음보살이 있으며, 양쪽 끝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앉아있다. 그리고 그들 뒤로 석가여
래를 중심으로 도드라지게 돋음새김으로 조성된 후불탱이 든든히 자리해 있다.

불국사 석불좌상이라 불리는 이 약사여래상은 밭에서 나왔다고 전한다. (지역 농민이나 지역
세력가의 발원으로 조성된 것을 그리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음)
불국사가 가장 의지하고 있는 이곳의 든든한 밥줄로 그를 내세워 약사도량을 칭하고 있는데,
절에서는 약사불(약사여래)이라 하여 많은 정성을 들이고 있다. 허나 고려 때 약사여래와는
다소 차이가 있어 처음부터 약사불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원래 정체는 아미타불로 여겨
진다. 그런 것을 나중에 약사여래로 강제 전환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불상의 높이는 79.5cm로 머리의 크기가 신체에 비하여 너무 크다. 하얀 피부의 몸과 달리 머
리는 검은 색이며 꼽슬인 나발이다. 머리 꼭대기에는 육계로 보이는 하얀 혹이 솟아 있으며,
홍예처럼 구부러진 눈썹 사이로 백호가 있다. 지그시 뜬 두 눈으로 중생을 보는 약사여래의
표정은 그야말로 인자함이 느껴진다. 오뚝 솟은 코와 붉은 입술, 살이 두툼해 보이는 양쪽 볼
은 정말 손으로 비벼보고 싶다. 두 귀는 중생들의 소망을 하나도 빠짐없이 접수하려는 듯, 안
테나처럼 크다.
그의 몸에 걸쳐진 법의(法衣)는 석굴암(石窟庵)의 본존불처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있으며
이런 형태를 어려운 말로 우견편단(右肩偏袒)이라고 한다. 다리 위에 놓여진 두 손은 선정인(
禪定印)을 취하고 있으며, 손 위로 알 모양의 빨간색 물건이 있는데, 이는 약사여래가 늘 지
니고 다닌다는 약합(藥盒)이다. 약합에는 중생을 치료하기 위한 그만의 치료제가 들어있을 것
이다.

그는 원래 맨돌의 불상이었으나 나중에 호분(胡粉, 조개껍데기를 태워 만든 것으로 여자들의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됨)
으로 하얗게 떡칠을 하여 하얀 피부의 석불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원래 모습을 적지 않게 잃었다.
신라 후기~고려 초기 시절 유행했던 불상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머리와 신체 비례가 맞지 않
으며, 자연스럽지 않은 옷주름 조각 등으로 고려 후기 것으로 여겨진다.

* 불국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442
(광평로10길 30-71 ☎ 02-445-4543)


▲  두툼하고 탐스럽게 열린 어여쁜 불두화(수국)
순백의 불두화보다는 그래도 색이 입혀진 불두화가 더 유혹적이다.

▲  불국사를 뒤로하며... 대모산도시자연공원 숲길

▲  그림 같은 숲길, 대모산공원 산책로

대모산공원으로 내려와 에어브러쉬(air brush)로 대모산이 나에게 살짝 붙여둔 존재들을 말끔
히 털어버렸다. 이제 내가 서식하고 있는 세상으로 갈아타야 되니 지금까지 의지한 다른 세상
의 흔적을 싹 지우는 것이다. 오늘 나들이도 충분히 그리고 달달하게 즐겼으니 나의 제자리로
돌아가 잠이나 실컷 자야겠다.
이렇게 하여 대모산 여름 나들이는 그 막을 고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1년 10월 20일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다음(daum)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1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prev 1 2 3 4 ··· 6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