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도심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18건

  1. 2023.12.17 북악산 북쪽 자락에 깃든 아름다운 별천지, 부암동 백석동천~백사실계곡
  2. 2021.01.08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한양도성, 남산서울타워, 목멱산봉수대, 백범광장)
  3. 2020.11.25 인왕산자락길, 황학정, 서촌(한양도성) 늦가을 나들이 ~~ (택견수련터, 감투바위, 단군성전, 행촌동 은행나무)
  4. 2020.04.09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에서 무지개를 보다 ~~ (숙정문에서 청운대, 백악마루, 부암동 창의문까지)
  5. 2020.03.01 서울 도심의 한복판을 거닐다 ~~ 견지동 우정총국, 인사동거리, 종로 나들이
  6. 2019.12.30 본인 제작 여행답사기 모음집 (2019년 12월 30일 기준)
  7. 2019.11.20 늦가을 서촌의 끝자락을 거닐다 [월암근린공원에서 딜쿠샤, 황학정까지]
  8. 2019.09.27 고즈넉한 한옥마을 속으로, 북촌한옥마을 구석구석 나들이 ~~ (북촌문화센터, 가회동 이준구가옥, 북촌4~7경, 맹사성집터)
  9. 2018.12.04 시문학의 성지이자 도심 속의 상큼한 언덕, 청운동 윤동주시인의 언덕 ~~~ (윤동주소나무,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10. 2017.11.27 서울 도심의 꿀단지, 서촌 늦가을 산책 ~~~ 옥인동 박노수미술관, 친일매국노 윤덕영의 기와집 흔적들

북악산 북쪽 자락에 깃든 아름다운 별천지, 부암동 백석동천~백사실계곡

부암동 백석동천(백사실계곡)


'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계곡) 늦가을 나들이 '

백석동천 별서터
백사실 백사폭포 백석동천 별서 사랑채터

 



 

늦가을이 무심히 익어가던 11월 첫 무렵, 나의 오랜 즐겨찾기 명소인 부암동 백석동천(백
사실계곡)을 찾았다.
두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그곳의 늦가을 풍경이 몸살 나게 그리워 간만에 찾은 것으
로 이번에는 흔하게 가는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들어가지 않고 그 동쪽인 평창동 화정박
물관에서 접근했다.
박물관 옆 골목길(평창8길)을 3분 정도 올라가면 오른쪽(서쪽)으로 오솔길이 손을 내미는
데, 그 길은 평창동(平倉洞)에서 백사실계곡을 빠르게 이어주는 지름길이다. 자연이 완전
히 묻힌 싱그러운 숲길로 길도 흙길이고 주변에 밭두렁까지 펼쳐져 있어 이곳이 서울임을
잠시 잊게 한다.

길 중간부터는 남쪽에 3~4m 높이의 석축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그 안에 배드민턴장과 보
호수로 지정된 늙은 소나무가 있다. 간만에 소나무를 보고 갈까 했으나 석축 밑에서도 어
느 정도는 보이므로 그것으로 퉁치고 길을 계속 이어가니 그 길의 끝에 백사실 동쪽 능선
이 소나무 숲길을 내밀며 마중을 한다.
솔내음이 그윽한 백사실 동쪽 능선에 올라타 남쪽으로 가면 백석동천의 중심인 별서(別墅
)터로 내려가는 산길이 나오며, 평창동 조망점으로 이어지는 북쪽 길로 가서 서쪽으로 내
려가면 현통사와 백사폭포로 이어진다. (본글은 편의상 백사폭포부터 다루도록 하겠음)


▲  소나무가 무성한 백사실 동쪽 능선길



 

♠  백사실계곡(백석동천) 입문

▲  현통사 앞에 자리한 백사폭포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려진 현통사(玄通寺) 대문(일주문) 밑에
는 하얀 피부의 너른 반석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매끄러운 바위 피부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백사폭포가 수줍은 모습으로 이곳을 찾은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시 들었다
놓는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지도 모른다.

백사폭포는 높이 4m 정도의 작은 폭포로 웅장하거나 수려한 멋은 딱히 없다. 그저 수수하게
생긴 폭포로 하얀 반석과 잘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내며 나그네로 하여금 백사실계
곡에 대한 첫 인상을 긍정적으로 인도하고 그곳에 대한 기대감을 크게 돋군다.
서울 도심에서 거의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라 그 희소성이 높은데, 그가 만약 설악산이나 금
강산, 주왕산(周王山) 등 일품 폭포가 즐비한 곳에 있었다면 주목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
러니 사람이나 폭포나 때와 자리를 잘 잡아야 덕을 본다.
백사폭포란 이름은 내가 백사실계곡(백사골)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옛날 이름이 동령폭
포란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폭포는 자신의 이름까지
저 멀리 흘려보내고 만 것이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서 폭포수가 실보다 가늘고 누런 낙엽까지 짙게 깔려있지만 비가 많이
오면 폭포수도 제법 패기를 보인다. 여름 제국 시절에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물놀이 현장이
되며, 사람들이 돗자리를 펴고 잠시 쉬어가는 등, 도심 속의 이색 공간이자 꿀피서지로 인기
가 높다.


▲  백사폭포와 하얀 반석


▲  가을과 낙엽을 속세로 흘려보내는 백사폭포 아랫 못

겨울 제국(帝國)의 시련을 견뎌내고자 나무들이 속절없이 털어낸 낙엽들은 폭포 주변에 수북
히 쌓여있다. 이들 낙엽은 폭포 밑에 모여 이곳에서의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며, 올해도 변함
없이 도래한 겨울을 원망한다. 몇몇 낙엽은 한이 맺혔는지 폭포 중간에 철썩 같이 달라 붙어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겠지만 자연은 그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아래로 흘러가거나 썩어 문드러질 것이니 그
런 낙엽의 발악을 보면 인생무상이 정말 허언이 아님을 실감한다.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실계곡 냇물은 넓은 세상을 꿈꾸며 폭포를 타고 내려와 폭포 밑에
마련된 소(沼, 못)에서 큰 세상을 향한 기나긴 여정을 준비한다. 다시는 오기 힘들 그리운 고
향, 북악산(백악산)의 그리움을 털어내며 길을 재촉한 그들은 다리 밑 조그만 폭포를 통해 아
랫 못으로 흘러가며 여기서 신나게 바위를 타고 내려가 홍제천, 한강을 거쳐 서해바다로 종점
없는 여행을 떠난다.

폭포 주변 나무들은 못을 거울로 삼아 늦가을의 절정을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열
심히 매무새를 다듬는다. 저들의 처절한 아름다움 뒤에는 겨울의 혹독한 시련이 기다린다. 잔
잔한 수면에는 귀를 접은 낙엽들이 둥실둥실 떠 가을의 저물어감을 아쉬워하며 백사실에 머문
늦가을도 낙엽을 데리고 계곡을 통해 저 밑으로 그렇게 흘러간다.


▲  백사폭포 위에 둥지를 튼 현통사(玄通寺)

백사실계곡 밑에 둥지를 트며 백사폭포를 굽어보는 현통사는 20세기 이후에 지어진 조그만 산
사(山寺)로 정확한 내력(來歷)은 모르겠다. 이 시대 큰 승려의 하나였던 일붕(一鵬)이 머물렀
던 절로 백사실을 오갈 때마다 늘 지나치기만 했을 뿐, 경내로 발을 들인 적은 겨우 2~3번이
다. 그 이유는 오래된 절도 아니고 나를 애타게 만들만한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백사실의 시원한 산바람이 낮잠에 잠긴 풍경물고기를 살짝 건드리며 그윽
한 풍경소리가 주변의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여
산신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며, 기와를 얹힌 불전 밑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있다.


▲  늦가을이 진하게 깃든 백사실계곡 숲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 속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다.
바람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찾는 이로 하여금 절로 시상에 물들게 한다.

▲  운치가 진한 백사실계곡 숲길 (백사폭포~백석동천 별서터 구간)

간만에 백사실계곡을 본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 잡으며 백사폭포를 지나면 청정한
내음과 솔내음이 두루 나래를 펼치는 백사실 숲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 발을 들이면 1폭의
수묵담채화(水墨淡彩畵)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가히 숨이 지릴 지경이다. 인간의 언
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이곳의 풍경을 완벽히 표현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또한 인간의 한낱 언어로 억지로 표현하려 드는 것은 어쩌면 백사실과 그것을 빚은 대자연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 나는 감히 언어로 이곳을 희롱하지 않고 그저 탄
성만 연거푸 지르며, 조용히 백사실계곡을 거닌다.
 
숲에 깃든 청명한 기운은 속세의 때를 말끔히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숲길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실에는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도롱뇽,
가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그들이 설 땅은
점점 줄어들고 서울에서는 이곳을 비롯한 일부 계곡에만 겨우 살아가고 있다. 만약 그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다면 그 다음은 바로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  별서터 돌다리에서 바라본 백사실계곡

▲  별서터 돌다리 직전 계곡에 누워있는 바위들
크고 견고하게 생긴 바위들 피부에는 일정하게 긁힌 흔적이 있는데, 이는
별서를 닦을 때 필요한 돌을 떼던 흔적들이다.


계곡에 누워있는 바위들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자라고 있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사실계곡은 백석동천, 백사실, 백사골 등이라 불리는데, 어느 이름을 쓰든 별로 상관은 없
다. 정식 명칭은 백사실계곡으로 이곳 지명이 백사실이며, 백사골은 백사실계곡을 줄여 표현
한 이름이다. 그리고 백석동천은 이곳에 반한 선비와 양반들이 붙인 칭호이자 백사실의 다른
이름이다.


▲  별서터 옆을 지나는 백사실계곡 (별서터 징검다리 주변)

백사실계곡 안내도와 자연보호 안내문이 있는 별서터 직전 갈림길에서 정겹게 펼쳐진 계곡 징
검다리나 돌다리를 건너면 바로 사랑채터와 연못이 있는 백석동천 별서터이다. 이토록 아름다
운 계곡에 콘크리트로 닦은 둑이 조금은 눈에 거슬리는데, 둑 바로 위에 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을 보면 옛날에 별서 주인이 돌과 흙으로 쌓은 둑이 있었던 모양이다.


▲  별서터에서 바라본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를 코앞에 두고 별서터 맞은편인 서쪽 산자락의 윗부분을 유심히 살펴보면 언
덕 정상에 큰 바위 하나가 나무들 사이로 어렴풋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를
잘 살펴보면 글씨 같은 것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월암은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중 가장 발이 닿기 어려운 궁색한 곳에 자리해 있다. 별서터
바로 서쪽 산자락에 있지만 그를 알리는 이정표도 없고 짙은 숲에 가려져 있어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99% 이상은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다. 나무들이 벌거벗은 11월 중순 이후나 겨
울에는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다 보면 눈에 들어오기라도 하겠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파고 그 안에 월암(月巖) 2자를
새겼는데, 18세기에 백석동천의 존재를 기록으로 남긴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씨로 추
정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습은 가히
명필 중의 명필이라 하겠다.

백사실계곡은 나무가 울창해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할 수 없다. 곡차 1잔 걸치러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굳이 이
광여가 자신의 호를 새기지 않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 바위에 달바위(월암)란 이름을 붙여
주고 글씨를 새겼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  북악산(백악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부암동 백석동천(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 별서(別墅)터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벗어나면 여
기가 서울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기가 막힌 경치가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
암동(付岩洞)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안긴 분지
로 서울의 일부라기보다 산간 마을이나 산골에 묻힌 조그만 읍내 같은 분위기이다. 도심이 바
로 지척임에도 도심과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산 속에 자리한 탓도 있겠지만 나라
의 예민한 곳이 동네 주변에 많아 개발의 천박한 칼질을 크게 잠재웠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서울 근교 경승지로 이름이 높았던 부암동은 양반사대부와 왕족들의 별서(별장) 및
휴식 장소로 인기가 대단했다.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인 무계정사(
武溪精舍)를 비롯해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그 외에 세검정(洗劍亭), 탕춘대(
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까지 옛 사람들의 별장, 풍류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백석동천은 북악산(백악산) 북서쪽 백사실계곡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
福)의 별장이 있었다고 해서 백사실이라 불리고 있지만 정작 그는 이곳에 머문 적이 없으며,
백사실과 별서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백석동천이라 부른다. 그 이름은 북악산(백악산)에서 비
롯되었으나 계곡에 하얀 돌이 많고 경치가 고와 굳이 북악산이 아니더라도 백석동천의 이름
자격은 충분하다. 여기서 동천(洞天)이란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부여되는 경승지의 명예로운
칭호이다.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함>

▲  연못 정자터

▲  사랑채터

백석동천과 관련된 첫 기록은 18세기 인물인 월암 이광여(1720~1783)의 이참봉집(李參奉集)에
있다. 그 책에는
'비가 온 뒤 북한산(삼각산)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가 폭포수를 보았다. 세검정으로 빠지
는 계곡 위쪽에 근원을 알 수 없는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가느다란 폭포(백사폭포)가 있는데
그 위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다. 그곳의 편액은 간정료(看鼎寮)였다'
여기서 간정료는 '솥을 보는 집'이란 뜻으로 차를 끓이는 다조(茶俎)를 말한다. 허씨의 초가
정자가 일찌감치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여기서 허씨는 허필(許佖)로 여겨진다. 그는 시
문과 그림, 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손가락으로 그리는 지두화(指頭畵)를 잘했다. 1737년 '북
한산 남쪽 백석 별업(別業)에서 정윤, 강세황(姜世晃)과 함께 짓다'
는 제목의 시를 지으니 그
때 이미 '백석(백석동천)'이란 지명이 있었음을 살짝 밝혀주고 있다.

개화파로 유명한 박규수(朴珪壽)도 14살이던 1820년에 외할아버지를 따라 한양도성 북쪽의 여
러 명소를 거닐었는데, 그때 백석동천에도 들려 시문을 남겼다. 그는 석경루 위쪽에 백석정의
옛 터가 있는데 허씨 성을 가진 진인(眞人)이 살던 곳이라 하였고, 백석정은 허도사가 단약(
丹藥)을 달이던 곳이라 언급하며 백석정은 이미 사라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허씨(허도
사)는 허필로 보이며, 백석정은 간정료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2012년에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백석동천에 손을 댄 기록이 발견되었다. 김정희
는 금헌(今軒)이란 친구와 읊은 시에서
'하찮은 문자에도 정령이 배었으니 선인이 살던 백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다','나의 북쪽 별서
는 백석정의 옛터에 있다'
는 문구가 나온 것이다. 김정희가 백석동천을 북쪽 별서<북서(北墅)
>라 한 것은 이미 한양도성 동남쪽 금호동(金湖洞)과 경기도 과천(果川)에 별서가 있었기 때
문이며, 김유근(金逌根)에게 보낸 편지에는 백석동천 별서를 산루(山樓)라고 표현했다.

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가 1960년대에 낸 '동명연혁고(洞名沿革攷)'에는 이곳 별서가 1830년
대에 지어진 것으로 나와있는데 추사가 그때 이곳을 사들여 정자를 짓고 600평 규모의 별서를
지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허나 추사가 계속 소유하고 있지는 않은 듯 싶으며, 이후 이곳
관련 기록에는 주인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친일파로 변절한 윤치호(尹致昊)는 1926년 11월, 이곳을 유람했는데, 그의 '윤치호일기'에 '
백석실'이라 나와있어 백석동천(백사실)의 다른 명칭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1930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에는 '북악8경'의 하나인 '백석곡 팔각정'이 나왔는데, 백석곡은 백석동천의
별칭으로 그 신문에 정자의 사진이 나왔다. 그것이 백석동천 별서터의 유일한 생전의 사진이
다.

이곳에는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채를 비롯해 정자와 동그란 연못, 별서를 둘러싸던
담장이 있었다. 안채는 4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는데,
안채는 1917년 집 한쪽이 기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6.25때 이곳까지 총탄이 날라와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은 기능을 잃었다.
사랑채와 안채는 1970년대까지 살아는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월의 무게를 감당치 못
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하여 지금은 사랑채터와 안채터, 동그란 연못, 정자터, 담장터, 돌다
리, 돌계단, '백석동천'과 '월암' 바위글씨 2개가 남아 이곳의 정취를 아련히 전한다.

옛날에는 그래도 마음 놓고 발을 들일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으나 북한이 저지른 1968년 1.21
사태(김신조 공비사건)로 북악산 일대와 백사실계곡이 금지된 곳(청와대 경호구역)으로 꽁꽁
묶이면서 사람들의 발길은 거의 끊기게 된다. 이후 동네 사람들이나 오갈 정도로 비밀의 공간
으로 숨겨져 있다가 2004년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로 통제구역에서 해방되었고, 그 시절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이곳을 두고
'조선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이 땅의 휼륭한 전통
정원'
임을 인정해 비지정문화재에서 국가 사적 462호로 특진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명승 36
로 변경되었다.

2010년과 2011년에 별서터 일대를 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를 확인했으며, 깨
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량으로 수습했다.

▲  사랑채터에서 바라본 연못

▲  백석동천 바위글씨

서울 도심 속의 숨겨진 보석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거니와
여름의 녹음과 피서삼매, 가을 단풍, 겨울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이 고루고루 몸살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 숲이 매우 삼삼하여 강렬한 여름 햇살도 고개를 숙이며, 나무가 베푼 신
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고, 백사실계곡의 졸졸졸~♪ 교향곡을 들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거
나, 침침한 두 눈을 비비며 독서를 하거나, 돗자리를 피고 낮잠을 청하면 정말 피서의 성지가
따로 없다.
거기에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터를 둘러보며 자연의 일부로 살고 싶었던 옛 사람(주로 지
배층들)들이 여기서 무엇을 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살았을까? 상상하며 그들의 생활과 마음 속
으로 들어가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바램이지만 이런 곳은 대중적인 명소보다는 소수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쭉
남았으면 좋겠다. 찾는 이가 늘면서 바람직하지 못한 작자들까지 섞여 들어와 사랑채터 주춧
돌에 낙서를 하고 계곡을 괴롭히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다행히 2019년 이후 관리인을 두어
이곳을 지키고 있다.
또한 2013년에 종로구에서 별서터를 복원하겠다며 이곳을 들쑤실 생각까지 했었는데, 괜히 복
원하려 들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두기 바란다. 비록 폐허가 되었어도 지금의 모습이 더 운
치가 강하며, 옛 터 위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 수 있다. 그리고 백사실계곡은 서울시에
서 지정한 도룡뇽 보호구역이니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부로 냇물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않기 바란다.


* 백석동천(백사실계곡)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 부암동 산25일대


▲  사랑채터와 안채터가 있는 언덕

백사실계곡 안내도가 있는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검은 피부의 백석동천 안내문이 마
중을 한다.
안내문 너머로 사랑채터와 안채터가 있는 언덕과 그곳으로 이어주는 돌계단이 있는데 장대한
세월의 태클로 돌계단이 좀 헝클어진 했으나 경사가 완만해 오르락 내리락에는 별로 어려움은
없다. 다만 연못 쪽에서 오르는 돌계단은 거칠게 다듬은 큰 돌을 계단처럼 얹혀 높이가 고르
지 못해 어린이나 다리가 짧은 사람은 다소 진땀을 빼야 된다.


▲  선명하게 남아있는 사랑채터

연못이 잘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ㄱ' 구조의 5량집 사랑채가 있었다. 허나 아쉽게도 생전
의 사진이나 그림도 남기지 못한 채, 1970년경에 무너져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주춧돌과
건물터는 잘 남아있으며, 2010년 발굴조사로 새롭게 드러난 흔적을 더해 지금의 모습으로 정
비되었다.

사랑채 서쪽 부분은 누마루로 주춧돌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에서 별서 주
인은 연못을 바라보며 책을 보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들이 오면 여기서 곡차를 대접
하여 1잔씩 걸쳤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채 동쪽 부분에는 키 작은 주춧돌 6개와 석축이 남아
있다.


▲  석축 위에 닦여진 사랑채터 누마루 주춧돌
누마루가 사라지면서 주춧돌은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사랑채터 옆에 자리한 네모난 우물터
2010년 발굴조사 때 발견된 것으로 우물(또는 작은 연못)로 여겨진다. 지금은
낙엽과 잡석만 가득 널려 황폐의 극치를 보여준다.

▲  공터로 남아있는 안채터
안채가 가고 없는 허전한 터를 잡초와 낙엽이 서로 보듬으며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 이후 그 자리에
는 엉뚱하게 배드민턴장이 들어섰고,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적지 않게 파괴되고 생매장을 당
했다.
그렇게 별서터를 깔고 앉던 배드민턴장은 서울시와 문화재청에서 2010년 여름부터 별서터 일
대를 발굴하면서 없앴으며, 땅에 묻힌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건
졌다. 그리고 2011년 3월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땅속에 고이 묻고 그 위를 풀로 덮
어 완전히 가렸으며, 사랑채와 안채터에서 수습된 주춧돌 등의 돌덩어리들은 안채터 서쪽 구
석에 일부 모아두었다.

비록 기와를 입힌 사랑채와 안채는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춧돌은 사랑채의 기품과 분위
기를 흐릿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또한 사랑채 문을 열고 연못에 비친 달
과 별을 바라보며 곡차 1잔과 시상에 잠겼을 별서 주인을 머릿속에 그리니 정말로 부러움이
가득 돋아 오른다.


▲  사랑채터와 안채터 일대
이곳에 있었을 건물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어디까지나 상상에서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이곳의 운치를 크게 말아먹을 수 있다.

▲  사랑채 뒷쪽 석축과 담장터

사랑채터와 안채 동쪽 산자락에는 석축과 담장의 흔적이 있다. 석축은 별서 주변을 다지면서
쌓은 것으로 높이는 1.5~2m 정도 되며, 석축 윗쪽에는 별서와 속세(俗世)의 경계를 가르던 담
장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세월의 무심한 태클에 거진 무너지고 안채터 뒷쪽에서 연못 동쪽까
지 담장의 밑도리만 옛 산성(山城)의 잔해처럼 남아있다.

▲  연못에서 사랑채로 오르는 돌계단

▲  흔적만 남은 사랑채 뒷쪽 담장터



 

♠  백석동천 별서터의 중심, 연못

▲  사랑채터에서 바라본 연못

사랑채터에서 바라본 연못은 물고기가 수영하고 연꽃이 살며시 떠있는 그런 흔한 연못이 아닌
나무들이 털어놓은 낙엽, 그리고 잡초로 가득한 모습을 보인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은
연못의 성격과 구성원까지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옛날에 정자터 옆에 배수로를 만들어 백사실계곡 물을 가져와 둥그런 연못을 채웠으며 연못을
채운 물은 2개의 통돌로 이루어진 돌다리 밑 수로를 통해 계곡으로 빼면서 계속 연못은 물갈
이가 되었다.
허나 이 땅을 쑥대밭으로 만들던 6.25전쟁 때 조용하던 이곳까지 총탄이 날라와 정자가 파괴
되고 연못 또한 손상을 입어 배수가 불가능하게 되면서 무늬만 연못이 되어버렸다.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연못, 허나 저 연못에도 자연의 생명력
은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나고 있다. 게다가 비가 많이 오면 비록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그
런데로 연못티를 풍긴다. 잡초로 가득한 연못의 모습도 나름대로 초록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며, 늦가을에는 낙엽이 한가득 공간을 채우면서 누런 연못이 된다.

연못의 둘레는 약 100m 정도로 주변은 나무들로 삼삼하여 두텁게 시원한 그늘이 펼쳐진다. 거
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 후원(後園)도 울고 갈 정도로 울창한 삼림은 이곳을 찾은 나
그네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여기가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었다면, 그 감동은 그리
크지 못했을 것이다.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六茅亭)이라 부른다.

연못에 발을 담궜던 정자는 윗도리와 중심부는
모두 사라지고 6개의 돌기둥과 돌계단만 남아
있다. 정자터 옆구리에는 계곡물을 끌어들이던
배수구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6.25전쟁으로 그
것이 손상되면서 더 이상 물을 소환할 수 없게
되었다.
백석동천 별서터 식구 증 유일하게 생전의 모
습을 남긴 운이 좋은 존재로 1930년 7월 19일
자 동아일보에 백석곡 팔각정으로 등장했다.

▲  옆에서 바라본 정자터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혼자 혹은 벗들과 시를 읊거나 세상 이야기
를 하며 차나 술을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꽃을 바라보며 유유자적 했을 것이다.
비록 터만 남아있으나 지금의 모습도 그리 싫지는 않으며 괜히 복원한다고 난리를 치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둬야 이곳의 운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  물푸레나무 밑에 누운 바위

연못 우측에는 키가 약 15~20m에 이르는 커다란 물푸레나무가 연못과 그 주변에 그늘을 드리
우고 있다. 나이는 약 150~200년 정도로 여겨져 추사 김정희가 심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이는
데, 나무 밑에는 커다란 바위가 누워 있어 별서를 닦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두었으니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원이나 별서를 꾸민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  별서터에서 수습된 돌로 이루어진 소박한 쉼터 (정자터 옆)

별서터 일대에서 수습된 크고 견고한 돌덩어리들을 이곳에 모아두었다. 이들은 아마도 사랑채
와 안채, 정자에 쓰인 석재로 보이는데, 시커먼 피부를 지닌 큰 돌을 가운데 두고, 그보다 작
은 돌덩어리 2개를 좌우에 두어 마치 탁자와 의자와 같은 모습이 되어 조촐하게 이곳의 쉼터
역할을 한다.
나도 둘이나 여럿이서 이곳을 찾았을 때 여기서 앉아 쉬거나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을 섭취하
고는 했는데, 저곳에 앉은 횟수는 최소 50회는 넘을 것이다. 저 돌덩어리들과 별서터 유적은
거의 그대로이거늘 나와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계속 늙어가고 변해가니 정말 인상무상이로다.


▲  통돌 2개로 이루어진 작은 돌다리

정자터 옆에 있던 배수구를 통해 옆에 흐르는 백사실계곡 물을 가져와 연못을 채우고 채워진
물은 돌다리(윗 사진)가 있는 작은 수로를 통해 계곡으로 내보내 고인물을 경계했다.
이곳 돌다리는 인왕산 수성동계곡(水聲洞溪谷, ☞ 관련글 보기)의 기린교처럼 길쭉한 통돌 2
개로 이루어진 단출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은근히 정감을 가게 한다. 별서가 조성되던 1830년
에 수로, 연못과 함께 닦여진 것으로 보이며, 수로에는 더 이상 물이 나갈 일이 없어 낙엽만
가득하다.


▲  연못을 중심으로 한 백석동천 별서터 전경

▲  늦가을이 고스란히 담긴 연못 둘레길 (연못 동쪽)

▲  연못 동쪽 산비탈에 둘러진 석축의 흔적



 

♠  백석동천 마무리

▲  별서터에서 백사실 상류로 인도하는 산길

백사실계곡은 별서터 옆에서 백사실약수터 입구까지의 황금 구간을 도룡뇽과 맹꽁이 등의 수
중 동물 보호를 위해 금줄을 둘러 접근을 금하고 있다. 하여 별서터에서 계곡 상류로 가려면
별서터를 등지고 계곡을 건너 솟대 돌탑과 안내문이 있는 별서터 입구로 나와야 된다.
하지만 통제의 줄이 느슨해 금줄의 경고를 무시하고 들어가는 사람이 종종 나타나고 있고 특
히 여름에는 피서객들의 칩입이 빈번하여 오히려 도룡뇽이 짐을 싸고 나가야 될 지경이다.

별서터 입구에는 2012년에 마련한 산불방제 구제함과 솟대를 품은 돌탑이 있는데, 솟대 돌탑
은 백석동천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그냥 백석동천 수식용으로 달아놓은 것이다. 돌탑을 지나
면 소나무숲과 늦가을에 잠긴 은행나무숲이 반짝 펼쳐지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동쪽)으로
가면 백사실 상류와 능금마을,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로 이어지고, 오른쪽(남쪽)으로 가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나타난다.


 백석동천의 늦가을 경관을 한몫 거들고 있는 짧은 은행나무숲길

▲  아직도 선명한 백석동천(白石洞天) 바위글씨

은행나무숲에서 오른쪽(남쪽) 길로 가면 서쪽을 향해 95~100도 정도 약간 고개를 숙인 큰 바
위가 직각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 피부에 '白石洞天' 바위글씨가 아주 또렷하게 깃들여져
있다. 여기서 '백석'은 북악산(백악산)을 뜻한다.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백석동천 바위글씨는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북악산(백악산) 산신
도 모른다. 아마도 월암 바위글씨와 비슷한 시기로 여겨지는데, 정말로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다. 조선 때 선비와 양반 등 지배층들은 경관이 수려한 곳에 저렇게 낙서를 남기는 습
성이 있었는데, 백석동천 역시 그들의 낙서가 2개나 있으니 그만큼 이곳 풍경이 그들의 마음
을 통 크게 훔쳐갔기 때문일 것이다.


▲  백사실계곡의 그림 같은 숲길 (능금마을 방향)
동화 속에 나오는 숲길도 저곳만은 못할 것이다. 비록 짧은 거리지만 알록달록
익어가는 숲길을 거닐며 나무들과 잠시나마 말벗이 되어 본다.

▲  백사실계곡의 그림 같은 숲길 (백석동천 별서터 방향)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능금마을로 이어지는 숲길을 조금 가면 잠시 떨어졌던 백사실계곡 상
류가 나타난다. 하얀 피부의 너른 반석부터 이끼 옷을 걸친 바위들까지 줄줄이 이어져 탄사를
자아내게 하는데, 비록 설악산과 금강산, 백두산, 주왕산, 지리산 등 큰 산의 계곡만은 못해
도 서울 도심 지척에 저런 계곡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꿀단지나 다름이 없다.
때묻지 않은 냇물이 바위를 타고 흐르면서 운치를 진하게 우려내는데, 이렇게 순수함을 지닌
백사실 물은 백사아랫폭포부터 속세의 기운을 강제로 받기 시작하면서 점차 속물로 변해간다.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간직한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하겠는가?

한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및 수중 생물의 탄압 현장이 되고, 시민들의 소풍/나들이 장소로
돗자리를 피고 물에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하며,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석에 걸
터 앉아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놀음을 즐겼을 것이다.


▲  외나무다리 직전 백사실계곡 상류

▲  백사실계곡의 새로운 명물을 꿈꾸는 외나무다리

백사실계곡 상류의 너른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지어진 외나무다리가 깊은 산골의 고적하고
도 달달한 풍경을 자아낸다. 길쭉한 목재 2개를 엮어서 닦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다닐 정
도로 좁은데 만약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나면 어찌해야 될까? 다리 길이도 짧고, 다리 밑
수심도 매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 굳이 다리를 두고 싸울 필
요는 없다.
사람 많고, 차량 많고, 키다리 건물 많고, 복잡하고 각박하게 보이는 서울 도심 지척에 이런
다리가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신기할 따름이다. 백사실계곡(백석동천)은 그 존재 자체로도 예
사롭지 않지만 캐면 캘수록 보물이 더 나올 것 같은 마르지 않는 샘이나 신세계 같다. 백사폭
포에서 시작된 백석동천은 이 외나무다리에서 사실상 끝이 나며, 백사실계곡은 능금마을 안쪽
까지 이어진다.


▲  백사실계곡 상류와 능금마을 밭두렁 (능금마을 방면)

외나무다리를 지나면 산길은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1~2m 정도로 폭이 줄어든다. 계곡 건너에
는 생뚱맞게도 비닐하우스와 밭, 과수원이 펼쳐져 두 눈을 심히 어리둥절하게 만드는데, 그들
을 지나면 집들이 나오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분명 이곳은 서울 도심의 한복판
종로구가 맞거늘 이런 두멧골이 있었나. 마음을 설레게 하니 그곳이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
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이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백사실계곡(백석동천)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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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한양도성, 남산서울타워, 목멱산봉수대, 백범광장)

 


'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

▲  남산서울타워

▲  남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  백범광장 주변


 

여름이 빠르게 익어가던 6월 끝 무렵,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南山)을
찾았다.
서울 한복판에 누워있는 남산은 내 어릴 적 즐겨찾기 장소로 고등학교 1학년까지 남산 인
근에 살면서 뒷동산 삼아 활보했던 추억 깊은 현장이다. 나는 남산의 물을 먹고 자랐으며,
남산에서 친구들과 뛰어놀고, 남산 정상에 올라 천하를 바라보며 나름대로의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 이후 남산과 먼 곳에 살게 되면서 다소 뜸해졌고, 가끔 찾는 정도에서 머물다가
2015년 이후 오후와 저녁, 평일, 휴일을 가리지 않고 발걸음을 크게 늘리고 있다.

햇님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14시, 동대입구역(3호선)에서 출발하여 장충단공원을 거쳐 국
립극장으로 이동했다. 국립공원교차로에 이르니 남산의 너른 품으로 인도하는 남산공원길
이 가파른 경사를 들이밀며 우리를 맞이한다.


 

♠  남산 품에 안기다 ~~~

▲  남산공원길 (남산북측순환로 입구)

국립극장 정문을 지나면 남산의 대동맥인 남산공원길이 시작된다. 길은 2갈래로 북쪽 길은 남
산북측순환로 입구에서 남산 북쪽 자락을 거쳐 회현동(會賢洞) 소파로로 이어지며, 예전부터
오로지 뚜벅이 전용 산책로로 이용되어 차들의 바퀴 자국을 철저히 금하고 있다. 크게 오르락
내리락 부분이 없는 느긋한 길로 장충단공원과 필동(筆洞), 남산1호터널로 내려가는 길이 있
으며,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諸葛亮)을 봉안한 와룡묘(臥龍廟)란 오래된 사당이 있다.
그리고 남쪽 길(2차선)은 남산 정상과 남산서울타워로 인도하는 길로 차량 통행이 가능하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왕복 운행이었으나 일방통행으로 변경하면서 '국립극장→남산서울타워→
남산도서관' 방향으로만 바퀴를 굴릴 수 있다.

내가 남산에서 무척 가까운 신당동과 금호동(金湖洞)에 살던 시절, 가족이나 친구와 남산에
물을 뜨러 많이 갔었는데, 가족과 갈 때는 주로 평일 저녁을 이용했다. 그때는 약수터 입구까
지 차를 끌고 가서 약수를 뜬 다음 북측순환로 입구에 있던 차량 매표소까지 후진하여 국립극
장으로 내려갔지. 일방통행로라 그렇게 가는 것은 위법이긴 하나 거리도 그리 길지 않고, 매
표소 아저씨의 쿨한 묵인도 있어서 몇년을 그렇게 했었다.
이후 남쪽 길의 40% 정도를 뚜벅이길로 만들고 남산의 건강을 위해 차량 통행의 크게 제한을
두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반 차량은 절대로 바퀴를 들일 수 없게 되었으며, 오로지 시내버스
(02, 04번)와 시티투어버스, 관광버스, 공원/긴급 차량만 들어올 수 있다. 차를 끌고 온 경우
에는 국립극장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걸어서 이동하거나 02, 04번 시내버스를 타야 된다.


▲  뚜벅이들의 낙원이 된 남산 남측순환로

남산북측순환로입구에서 남쪽 길로 접어들면 숲 사이로 빛바랜 한양도성이 모습을 비춘다. 그
리 멀지 않은 과거(2010년 이후)에 성곽 옆에 탐방로를 내었는데, 남산 정상까지 질러 가고
싶다면 그 길을 이용하면 된다. 다만 경사가 좀 각박하여 조금은 힘들 수 있으나 짧은 거리라
서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거닐 수 있다. 게다가 숲이 짙어서 대낮에도 그늘이 가득해 한여
름에는 시원하다.

성곽 앞에 난 산길의 일부는 예전부터 있던 길이다. 그 길의 끝에는 남산에서 제법 잘나갔던
남산약수터가 있었다. 남산산악회가 관리하는 곳으로 어린 시절 여러 번 가봤었지. 그곳은 입
구에 철문까지 설치했으며, 오로지 이른 아침에만 문이 열려 아무 때나 접근이 어려웠다. 다
행히 그곳 산길이 개방되어 이제는 자유의 공간이 되었으며, 약수터 주변에는 남산산악회 건
물과 체력 단련시설이 있다.

성곽길(남산산악회 입구)을 지나 5분 정도 가면 오른쪽에 계단길이 나온다. 그 계단을 2~3분
오르면 운동시설을 갖춘 상춘약수터가 나오는데, 예전 신당동, 금호동 시절 우리집 단골 약수
터였다. 약수터 옆에는 약수로 몸을 씻는 노천탕이 있었는데, 약수로 냉수마찰을 하면 겨울에
감기가 안걸린다고 해서 한때 인기가 대단했었다.
예전에는 서울에 노천 목욕터를 가진 약수터가 적지 않았는데, 대중이 이용하는 약수터에 아
저씨와 노공(老公)들이 벌고 벗고 씻는다는 것이 오랫동안 문제로 지적되었다. 하여 차츰 사
라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기억 속의 풍물시(風物詩)가 되어버렸다.


▲  남산 남측순환로 (4월 풍경)

상춘약수터입구를 지나 계속 남측순환로를 따라 가면 크게 구부러지는 남쪽에 2개의 조망대가
있다. 이 구간은 남쪽이 확 트여있어 조망이 일품인데, 바로 밑에 용산구 지역을 비롯해 한강
과 동작구, 강남/서초구, 관악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대기만 청정하다면 보이는 범위는 더욱
넓어진다. 그럼 여기서 잠시 남산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서울의 한복판이자 도심 남쪽에 누운 남산(262m, 270m)은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낙산(낙타
산)과 더불어 한양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다. 서울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으로 북현무(北
玄武)인 북악산(백악산)을 바라보고 있으며, 도성 남쪽에 있어서 남산이란 아주 평범한 이름
을 지니고 있다.
천하에는 남산이란 산이 참 많은데, 이들의 공통점은 시내와 아주 가깝고 시민들이 많이 안기
는 휴식처이며, 경주(慶州) 남산(468m)을 제외하면 산세가 낮고 완만해 누구든 편히 오를 수
있는 친근한 산이라는 것이다. 서울 남산도 대체로 편히 안길 수 있는 스타일로 그 걷는 것도
싫다면 남산을 오르는 시내버스나 시티투어버스,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금세 정상까지 간다.

남산의 원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으로 그 옛말인 '마뫼'는 남산을 뜻한다. 인경산(引慶山),
잠두봉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1395년 태조 이성계가 남산을 높여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
하고 그를 위한 사당인 목멱신사(木覓神祠)를 산꼭대기에 세웠다. 이후 매년 제를 올리면서
국사당(國師堂)으로 이름을 갈았다.
남산 능선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한양도성이 걸쳐져 있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전국에
서 날라오는 봉화를 받았다. 조선시대 봉화는 5개 노선이 있었는데, 그 종점이자 중심지가 바
로 남산이다.

임진왜란 때는 한양을 점령한 왜장이 산허리에 왜장대(倭將臺)란 성을 쌓았으며, 병자호란 이
후 어영청(御營廳)과 금위영(禁衛營) 분영이 남산에 설치되어 서울을 지켰다. 왜정 때는 왜군
헌병대가 산자락에 있었고, 1945년 이후에는 중앙정보부가 1호터널 북쪽에 말뚝을 박으며 갖
은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남산은 도성 경승지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양반들이 세운 정자와 그들이 새긴 바위글씨가 즐
비했는데, 지금은 바위글씨 극히 일부를 빼면 남아있는 것이 없다. 또한 가난한 선비와 하급
관리들이 산자락에 많이 살았으며, 개화기 이후 왜인들이 남산 북쪽과 남촌(南村)이라 불리는
청계천 이남에 두루 터를 닦고 살았는데, 왜정 때는 남산도서관 자리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 남산 중턱에는 왜성대공원과 경성신사(京城神社)를 지어 그들의 성지(聖地)로 만들었다.
특히 조선신궁을 짓는 과정에서 남산의 오랜 성역인 국사당이 신궁보다 높은 곳에 있다며 왜
정이 속좁게 징징거려 어쩔 수 없이 인왕산으로 자리를 옮기는 비운을 감당해야 했다. 그렇게
남산의 중심은 토박이 목멱대왕에서 왜열도의 온갖 잡귀들로 바뀌게 된다.
그렇게 왜정이 남긴 자국들은 1945년 이후 대부분 지워졌으나 조선신궁 계단과 일부 소소한
흔적들은 자신의 정체를 꼭꼭 숨기며 1945년 8월 패전 때 연합군에 살려달라고 징징거린 왜왕
(倭王)처럼 구차한 목숨을 연명한다.

196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케이블카가 놓여 남산의 이름 두 자를 떨쳤고, 1965년 조선신궁
자리에 남산도서관을, 1969년에는 백범 김구(白凡 金九)의 동상을 세워 주변을 백범광장으로
삼았다. 1973년에는 국립극장이 지어졌으며, 1975년에는 6년의 대공사 끝에 천하 최대의 타워
인 남산서울타워가 완성되어 남산의 높이를 배로 높였다. 이 타워는 1980년에 공개되어 남산
과 서울의 굳건한 상징이 되었다.


▲  남측순환로 아랫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한남동과 보광동(普光洞), 한강을 비롯하여 강남 일대가 상쾌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우리 애국가에 보면 '남산 위에 저 소나무'란 구절이 나온다. 그 구절에서 보이듯 남산은 북
악산(백악산)과 더불어 소나무로 유명했는데, 특히 금송(金松)이 많이 자랐다. 소나무 외에도
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며 산을 아름답게 수식하고 있고, 도심 한복판에 솟아있어
학의 등에 올라탄 듯 국보급의 조망은 물론 도심 야경도 풍족하게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산 곳곳에 약수터가 뿌리를 내려 나그네의 목을 아낌없이 축여주었는데, 그중에서 부
엉바위 약수터가 제일 유명했다. 허나 이 약수는 남산3호터널이 뚫리면서 그 혈이 막혀 사라
진 상태이며, 다른 약수터도 상당수 문을 닫거나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그 흔한 계곡도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겨우 실처럼 흐르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여럿 있을 뿐
이다.

남산은 남산공원길 남측순환로와 북측순환로, 여러 갈래의 계단길이 있는데, 계단길은 장충단
공원에서 정상까지, 백범광장에서 정상까지 이어지는 계단길이 대표적이며, 남산1호터널과 남
산동, 후암동(厚岩洞)에서 오르는 계단길이 있다. 길 외에는 싹 철조망을 쳐놓아 산으로에 접
근을 막았으나 근래에 모두 풀어버렸다. 허나 철조망을 없앴다고 해서 산자락 곳곳을 쑤시고
다니면 안된다. 무조건 지정된 길로 가야 남산도 좋고, 사람도 좋은 것이다.

남산에는 한양도성과 장충단공원, 와룡묘, 남산봉수대, 한양공원 표석, 남산골한옥마을 등의
문화유산과 백범광장, 안중근의사기념관, 남산야외식물원, 남산서울타워 등의 명소가 있으며,
산 전체가 남산공원(남산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심 속 나들이 명소이자 조촐한
등산 명소로 그 인기가 식을 줄을 모르며, 예로부터 서울에 오면 꼭 가봐야 되는 서울의 상징
적인 명소로 지방 사람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까지 평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수십만 씩 몰려
드는 서울 관광의 성지이다. 하여 한적한 분위기는 좀 누리기가 어렵다. (서울을 찾은 외래
관광객의 1/3 이상이 남산을 찾는다고 함)

남산이 없는 서울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아니 상상하기도 싫다. 도심 속의 허파이자 꿀단
지로 남산이 있으니 인근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조선 왕궁이 합세해 도심의 녹지 비율이
좀 되는 편이지 그가 없었다면 서울은 더 지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개인적으로 내 옛
추억이 몇 권씩 녹아있는 현장으로 나에게도 꽤 의미심장한 곳이라 할 수 있는데, 내가 제일
많이 오른 산이 바로 남산으로 어림잡아도 500번 이상은 올랐을 것이다.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 지점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한남동과 보광동, 강남, 관악산과 우면산 산줄기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 지점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해방촌과 이태원, 용산구 지역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 지점 조망대에서 바라본 남산서울타워
서울타워는 동양에서 제일 높은 타워로 높이가 236.7m에 달한다. 하늘을
찌를 듯 늘씬하게 솟은 저 타워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보면 볼수록
신기할 따름이다.

▲  다시 만난 한양도성 - 성곽 밑에도 탐방로가 닦여져 있다.

남산 정상을 코앞에 둔 남산서울타워 종점(02, 04번 종점)에 이르니 온갖 관광객들로 뒤엉켜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룬다. 여기서는 오로지 시내버스만 길게 바퀴를 접을 수 있으며 나머지
버스는 승하차가 끝나자마자 바로 자리를 떠야 된다. (주차 공간이 별로 없음)
무수한 인파 속으로 몸을 던져 하나의 점이 되어 서쪽 오르막길을 3분 정도 오르면 남산 정상
과 남산서울타워 밑에 이르며, 오르막길 대신 서남쪽 남측순환로를 내려가면 남산도서관으로
이어진다.

* 남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남산동, 회현동 / 용산구 용산동2가, 후암동 
* 남산공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02-3783-5900)


▲  남산서울타워 종점에서 바라본 서울타워
남산 어디서든 구석진 곳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서울타워가 바라보인다.


 

♠  남산 정상

▲  정상 동쪽 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도심과 서울 북부)

하늘과 맞닿은 남산 정상에는 남산서울타워와 팔각정, 남산봉수대가 둥지를 틀고 있다. 남산
서울타워(N서울타워)는 남쪽에, 팔각정은 중앙, 남산봉수대는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중
에서 인파가 가장 많은 곳은 남산서울타워와 팔각정 주변이다.

남산서울타워는 236.7m의 키다리 타워로 아시아 최대를 자랑한다. 남산을 든든한 기반으로 삼
아 기둥과 철탑 하나로 하늘을 받들고 있는 웅장한 탑으로 TV와 라디오 방송을 수도권으로 송
출하고자 1969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 전파탑으로 세워졌다. 1971년 공중선 철탑이 완
성되었고, 1975년 7월에 최종 마무리가 되어 전국 인구의 48%가 이 타워의 전파탑을 통해 방
송을 시청하고 있다고 한다.

1980년 10월 속세에 개방되어 남산의 소중한
꿀단지이자 야경과 조망의 진정한 성지로 자리
매김을 했는데,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道峯
山). 수락산(水落山). 관악산(冠岳山), 불암산
(佛岩山) 정상을 빼고 서울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다. 그러다보니 콧대가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밑에서 그를 보려면 고개가 그냥 까
딱 넘어가 버린다.
게다가 입장료도 꽤 야박한 편, 그래도 관광
수요는 늘 꾸준하여 외국인 선정 서울 명소 1
위의 지위(2012년 서울시청 설문조사 결과)를
누리기도 했다.

 

◀  바로 밑에서 바라본 남산서울타워의 위엄

남산을 안방처럼 들락거린 나도 초등학교 시절에 가족, 친척과 2~3번 타워에 오른 적이 있었
다. 허나 그 이후에는 이상하게도 인연이 닿지 않아 그의 품에 오른 적이 없었다. 정상에 오
더라도 그냥 타워 밑도리와 정상 주변에서 좀 머물다가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막상 가려
고 해도 이상하게 땡기지가 않는다.

* 남산서울타워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2가 산1-3 (남산공원길 105 ☎ 02-3455-
  9277)
* 남산서울타워 홈페이지는 아래 팔각정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남산 팔각정(八角亭)

팔각정은 남산서울타워와 더불어 남산의 주요 장식물로 이곳에는 원래 1959년에 이승만 대통
령을 치켜세우고자 세운 우남정(雩南亭)이 있었다. 여기서 우남은 이승만의 호로 1960년 4.19
의거로 그가 물러나자 바로 철거되었다.
이후 1968년 11월 탑골공원 팔각정을 모델로 삼아 지금의 팔각정을 지었으며, 남산 정상을 수
식하는 존재로 삼았다. 정자 서쪽에는 한양도성 여장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산바람이 주변
에늘 머물고 있어 한여름에도 시원하다. 정자 자체는 60년도 채 안된 존재이지만 관광객들로
늘 붐비며, 매년 1월 1일 새해 해맞이 행사가 성황리에 열린다.


▲  옛 국사당(國師堂)터 표석

남산 정상은 늘 사람들로 미어터지나 팔각정 부근 구석에 누운 국사당터 표석에 눈길을 주는
이는 거의 없다. 애처로운 눈빛을 보이며 눈길과 관심을 호소하지만 맨날 외면을 받는 그 표
석, 표석에 쓰인 국사당은 남산의 수호신인 목멱대왕의 사당으로 1395년에 태조가 세웠다.
1404년 목멱대왕을 호국(護國)의 신으로 높이면서 목멱신사(木覓神祠)라 불리기도 했던 남산
의 성역이자 중심이었으나 1925년 왜정이 조선신궁을 지을 때 국사당이 그보다 높은 곳에 있
는 것에 쓸데없이 아니꼬움을 드러내면서 다른 데로 옮기라고 난리를 쳤다. 그래서 태조와 무
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를 했던 곳이라 전하는 인왕산 선바위 밑으로 눈물을 머금고 이사를
가게 되었고, 목멱대왕의 남산은 왜열도의 온갖 잡귀들이 판을 치는 일그러진 현장이 되었다.

국사당을 핍박했던 왜정도, 조선신궁도 다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그곳에 건방지게 들어앉던 왜
열도의 잡귀들도 추방되었지만 남산의 주인인 국사당은 끝내 제자리로 오지 못하고 인왕산에
뿌리를 내려 선바위와 함께 기도처의 성지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로 미어터
지는 이곳에 다시 와봐야 너무 시끄러운 나머지 국사당 신들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다. 그
만큼 남산은 많이도 변했다.


▲  남산 목멱산봉수대(木覓山烽燧臺) - 서울 지방기념물 14호

정상 북쪽에는 남산의 오랜 상징물인 남산봉수대가 도심을 바라보고 있다. 남산의 옛 이름을
취해 목멱산봉수대('목멱산봉수대터'가 문화재청 지정 명칭임)라 불리기도 하며 서울에 있다
고 해서 '경(京)봉수대'란 별칭도 있으나 그냥 속편하게 남산봉수대라 불러도 문제는 없다.

봉수대란 불을 피우거나 연기를 이용해 변방의 소식을 알리던 옛날 통신 수단으로 산꼭대기에
주로 설치되었다. 낮에는 연기로 알리고, 밤에는 불을 피워 소식을 전했으며, 비가 많이 오는
경우에는 봉수지기가 직접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봉수대는 크게 5개 노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변경인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
滿江), 남해바다에서 시작하여 이곳 남산을 종점으로 삼았으며, 평소에는 봉화 1개, 적이 나
타나면 2개, 경계에 다다르면 3개, 경계를 넘으면 4개, 전쟁이 터지면 5개를 올렸다.

남산봉수대는 1394년에 설치되어 하루도 연기가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았으며, 동
쪽에서부터 서쪽을 향해 5개소가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1895년 봉수제도가 폐지되면서 문
을 닫았고, 왜정 때 말끔히 철거되면서 그 위치를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청구도(靑
邱圖)를 통해 봉수대터 1곳을 발견하니 그곳이 지금 봉수대로 철저한 고증을 통해 1994년 복
원되었다. (나머지 4곳은 아직도 위치가 아리송하다고 함;;;)

이곳 봉수대는 벽돌로 쌓은 5개의 봉수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금은 불과 연기를 피울 일이
없는 죽은 봉수대로 남산 정상을 수식하는 상징적인 존재이자 조선시대 봉수제도의 중앙봉수
대 의미 밖에는 없다. 그것이 현역에서 은퇴한 사물의 쓸쓸한 뒷모습이다. 봉수대는 관람이
가능하며, 여기서 바라보는 조망이 가히 차관도 아닌 장관이라 이곳이 왜 조선 봉수대의 중심
이 되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남산이 서울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고 조망이 뛰어나 사방에
서 날라오는 봉수대 연락을 받기에 아주 좋기 때문이다.
참고로 서울에는 남산 외에도 무악봉(毋岳峰) 동봉수대와 봉화산(烽火山) 봉수대, 봉산 봉수
대, 개화산 봉수대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근래에 복원된 따끈따끈한 상태로 무악산 동봉
수대와 봉화산 봉수대는 서울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8-1


▲  목멱산봉수대 내부
불을 피우는 봉수대는 벽돌로 쌓고 그 밑도리는 성벽처럼 돌을 다듬어서 쌓았다.
1994년에 복원된 상태라 고색의 때는 채 익지 못했으며 아직까지는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피부를 지녔다.

▲  남산봉수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서울 도심 동부와 성북/강북/도봉 권역과 동대문/중랑/성동 권역을 비롯하여
멀리 수락산과 불암산 등이 흔쾌히 두 눈에 잡힌다.

▲  남산봉수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바로 앞에 보이는 것은 남산케이블카 승차장이다. 그 너머로 서울 도심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줄기가 바라보인다.


 

♠  남산 마무리

▲  성곽길에서 바라본 용산과 여의도, 서울 서남부 지역

산 정상에서 남산도서관, 백범광장으로 내려가는 성곽길은 경사가 매우 급한 편이다. 내려
갈 때야 상관은 없지만 올라갈 때는 거의 혼이 다 빠진다.

남산케이블카를 지나면 도심을 향해 튀어나온 잠두봉 전망대가 손짓을 하는데, 여기서 바라보
는 조망 맛이 아주 일품이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달까지 올라간 서울의 심장부를
바로 발 밑에 두며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가까이로 남산3호터널을 오가는 차량의 물결이
개미들의 행진처럼 보이며, 키다리급의 온갖 성냥갑 건축물들이 여기서만큼은 손가락보다 작
게 다가온다.


▲  남산 정상에서 남산도서관으로 내려가는 성곽길
장충단공원에서 올라가는 것보다 거리는 매우 짧지만 대신 경사가 좀 각박하다.
남산 산길 가운데 가장 경사진 곳으로 장충단공원이나 국립극장에서 올라가
정상을 찍고 남산도서관 방면으로 내려가는 것을 추천한다.
(그래봐야 넉넉히 2시간이면 족함)

▲  잠두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서울 도심과 인왕산,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  잠두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서울 도심 동부와 동대문, 성북/강북/도봉 권역과 수락산, 불암산 산줄기 등

▲  잠두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남대문시장과 시청,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서울 도심과 안산(鞍山), 인왕산 등


정상에서 서쪽 성곽길을 따라 20분 정도 내려가면 시립남산도서관이다. 이제 남산도 다 내려
온 것이다.

여기서 안중근의사기념관과 2020년 11월에 닦여진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을 지나면 백범 김구
선생을 기리고자 닦은 백범광장이 나온다. 공원을 이루고 있는 광장 남쪽에는 한양도성이 복
원되면서 나무와 온갖 꽃을 심은 녹지 공간이 대폭 늘어났다. 바로 옆이 키다리 빌딩이 즐비
한 도심이건만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완전 딴 세상을 이루고 있으니 그 역시 남산이 있으니
가능한 것이다.


▲  백범광장 터널과 서울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한양도성과 남산을 복원하면서 예전에 도로 공사로 줄기가 끊긴 백범광장과
남산 사이의 산줄기를 다시 이어붙여 그 밑에 터널(소월로3길)을 냈다.

▲  휴일 오후 한가로움이 느껴지는 백범광장과 서울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  백범광장 남쪽에 다시 재현된 한양도성 - 사적 10호

백범광장 남쪽과 서쪽에는 근래 복원된 아주 따끈따끈한 성곽이 있다. 이들은 한양도성의 일
원으로 왜정 때 끊어진 남대문과 남산 구간의 일부이다.
오랫동안 잊혀진 이들을 끄집어내고자 백범광장 주변을 싹 뒤집어 조사를 벌였고, 땅속에 묻
힌 성터가 발견되어 그 자리를 바탕으로 성벽과 여장을 복원했다. 재현된 구간은 200m 정도로
최근 지어진 탓에 피부가 아주 하얗고 반질반질하여 마치 벽에다 그린 성벽 벽화 같다. 남산
도서관 북쪽 성곽터를 조사하여 2020년 11월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을 내었으며, 나머지 사라진
구간도 복원 계획에 있다.


▲  한양도성 백범광장 구간
하얀 피부의 성곽 여장 너머로 서울역 동쪽에 자리한 여러 키다리 빌딩이 보이며,
성곽 안쪽에도 탐방로를 내어 억새를 비롯한 온갖 나무와 꽃을 심었다.

▲  한양도성 백범광장 구간 서쪽 부분
성곽은 계속 달리고 싶다~~!! 허나 왜정과 개발의 칼질로 끊어진 구간이
적지 않고 복원 속도도 굼벵이보다 느려 그런 날은 아직도 멀었다.

▲  한양도성에서 바라본 후암동과 이태원, 용산구 지역
천하를 비추던 햇님은 엄청난 광을 쏟아부으며 슬슬 커텐을 칠 준비를 하고
회색빛 도시도 석양이 짙어지면서 점차 검은 도화지 속에 묻혀간다.

▲  온갖 야생화가 살랑거리는 백범광장 서부

▲  도동3거리에 있는 남산공원 마크

백범광장과 한양도성 백범광장 구간을 뒤로하고 남산공원 출입구의 하나인 도동3거리로 나오
니 시간은 18시가 넘었다. 햇님도 그 기운이 다했는지 84,000광 보다 더 진한 석양을 비추며
슬슬 꽁무니를 내빼고 토끼의 달나라가 하늘 높이 떠올라 땅꺼미의 기운을 북돋는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찾은 남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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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0년 12월 21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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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자락길, 황학정, 서촌(한양도성) 늦가을 나들이 ~~ (택견수련터, 감투바위, 단군성전, 행촌동 은행나무)

 


' 인왕산자락길, 황학정, 서촌 늦가을 나들이 '
인왕산자락길의 만추
▲  인왕산자락길의 만추(晩秋)


 

늦가을이 그 절정에 이르던 11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서울 도심에 숨겨진 상큼
한 자락길 인왕산자락길(숲길탐방로)을 찾았다.

인왕산자락길은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동쪽 자락에 닦인
둘레길로 2개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제1코스(2.7km)는 인왕산길을 졸졸 따라가는 길
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사직단(사직공원)까지 이어진다. 경사가 완만해 그리 힘들이지 않
고 이동할 수 있으며, 인왕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여럿 손짓해 언제든 정상 쪽으
로 방향을 틀 수 있다. 다만 인왕산길이 차량 왕래가 빈번하다보니 비록 작은 소음이지
만 종종 적막을 깨뜨린다. 

본글의 주인공인 제2코스는 숲길탐방로(3.2km)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산길을 따라 이빨바
위, 가온다리, 수성동계곡 윗쪽을 거쳐 택견수련터(황학정 북쪽)까지 이어진다. 인왕산
길과 서촌 주택가 사이에 자리한 길로 제1코스와 달리 차량의 눈치와 소음 걱정에서 벗
어나 아늑하고 달달한 산길의 멋을 누릴 수 있다. 다만 오르락내리락 굴곡이 조금 있어
서 약간은 힘들 수 있다. 하지만 두 다리만 멀쩡하면 삼척동자도 완주가 가능하니 걱정
따위는 인왕산 산바람에 날려보내기 바란다.
제2코스는 인왕산길(제1코스)과 서로 만날 듯 가깝게 거리를 두고, 경쟁을 하듯 펼쳐져
있다. (현실은 청운공원과 택견수련터에서만 만남) 아주 편한 길을 원한다면 제1코스를
, 차량의 눈치 없이 아늑한 산길을 꿈꾼다면 제2코스(숲길탐방로)를 이용하자. 특히 제
2코스에는 숨겨진 명소와 계곡, 약수터가 많고 풍경도 고우며, 서울 도심이 늘 옆에 파
노라마처럼 따라다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번 나들이는 제2코스를 이용하여 윤동주문학관에서 사직단(社稷壇, 사직공원)까지 이
동했다. 늦가을이 겨울 제국의 압박으로 생각보다 명이 짧아서 그가 지기 전에 그의 가
랭이라도 붙잡을 겸 서둘러서 찾았는데, 아직은 늦가을 풍경이 여전해 내 정처 없는 마
음과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오감(五感)을 크게 정화시켜 주었다. 역시 사람은 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이후 제2코스는 인왕산자락길이라 표시하며, 제1코스는 인왕산길로 표시함)


 

♠  인왕산자락길 (수성동 이남 구간, 택견수련터)

▲  수성동에서 남쪽으로 넘어가는 인왕산자락길

수성동계곡에서 잠시 시원한 계곡 바람을 맞은 인왕산자락길은 다시 남쪽으로 각박한 오르막
길을 오른다. (북쪽 방향도 마찬가지임) 길은 잘 닦여져 있지만 그렇다고 오르막길의 야성을
완전히 잠재운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거친 것을 조금 순하게 다듬었을 뿐이다.

그 길을 오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인왕산길이고, 왼쪽 내리막길
이 인왕산자락길이다. 그러니 자락길을 놓치기 싫다면 무조건 왼쪽으로 붙자. 그 길을 내려가
면 서촌의 일원인 누상동(樓上洞) 주택가와 불과 몇 보 차이로 가까워지며 길은 다시 온순해
진다. 이후 이름 모를 계곡과 체육시설을 지나면 길은 다시 오르막을 보이나 그리 각박하지는
않으며, 그 길을 오르면 배드민턴장과 인왕산길이 모습을 비춘다.


▲  다시 오르막은 시작되고 (인왕산길 배드민턴장 방향)

▲  택견수련터로 인도하는 북쪽 계단길

인왕산길 배드민턴장 남쪽에는 화장실을 갖춘 쉼터가 닦여져 있다. 청운공원 이후 가깝게 거
리를 두며 떨어져 있던 인왕산길과 인왕산자락길은 여기서 잠시 만났다가 이내 헤어진다.
쉼터 남쪽 언덕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길이 자락길로 그 계단을 오르면 자락길의 남쪽 종점
인 택견수련터가 마중을 한다.


▲  택견수련터 주변 체육시설
저 산길의 끝에 택견수련터가 깃들여져 있다.

▲  인왕산 택견수련터

황학정 뒷쪽 산자락에 자리한 택견수련터는 이름 그대로 택견을 수련했던 현장이다. 처음에는
막연히 옛날 사람들이 택견을 닦던 곳으로 알았으나 한때 끊어질 위기에 놓였던 우리 고유의
전통 무술인 택견을 지키고 널리 알렸던 조선의 마지막 택견꾼 송덕기(宋德基, 1893~1987)가
택견을 수련했던 현장이다.

송덕기는 조선의 마지막 한량이자 택견꾼으로 유명하다. 그는 1893년 1월 19일, 이곳과 가까
운 필운동(弼雲洞)에서 하급 관리인 송태희(宋泰熙)의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어머니
김씨는 잡화가게를 꾸리고 있어서 생활은 비교적 여유로웠다.
당시 필운동과 사직골, 누상동, 누하동 등 서촌(웃대) 지역은 택견의 성지로 택견을 갈고 닦
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장안 제일의 택견꾼으로 '인왕산 호랑이'라 불리던 임호(林
虎)도 있었다. 그는 지금의 배화여고 앞에 살고 있었으며, 송덕기는 12살부터 또래 동네 아이
들과 그에게 택견을 배웠다.

송덕기는 선천적으로 힘이 장사이고 운동과 무예에 소질이 상당했다. (나와 완전 반대임) 하
여 16살에 마을 택견꾼과 더불어 사직골 대표로 출전하여 유각골, 옥동, 애오개의 택견꾼과
싸워 이겼으며, 이때부터 '결련택견판(택견의 시합을 지칭하는 말)'에서 그 이름을 날리기 시
작했다. 그는 비록 체격은 작았지만 동작이 매우 날쌔어 적을 정확히 타격했으며, 특히 뛰어
오르며 쓰는 발차기는 매우 일품이라 당할 자가 없었다고 전한다.
17세에 장가를 들었고, 곧 군대에 입대했으나 1주에 2~3번 정도만 출근하면 되었으므로 나머
지 시간에는 택견을 수련하여 종종 결련택견판에 나가 몸을 풀었다. 그리고 이때 이 땅에 막
소개된 축구에도 구미가 당겨 축구를 익혔다.

1910년 8월 이후, 왜정(倭政)은 우리의 상무정신이 깃든 결련택견과 온갖 택견 수련을 금지시
켜 그 맥을 끊으려고 했다. 게다가 집안에서도 계속 택견을 그만두라고 압력을 가하면서 택견
수련도 눈치를 보고 해야될 지경이었다. 당시 그의 부모는 그가 자칫 싸움꾼이 될까봐 걱정되
어 택견 수련에 무조건 정색을 표했다고 전한다.
상황이 그러하니 택견 수련 딱 10년이 되는 22살에 잠시 택견을 접어두고 대신 활쏘기로 관심
을 돌려 황학정에서 국궁(國弓)을 닦았다. 그는 궁술(弓術)에도 꽤 소질을 보여 명궁으로 명
성을 날렸는데, 죽기 전까지 활쏘기를 즐겨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을 오래 쏜 사람이자 최초의
국궁심판으로 '한국인물도감(1982년)'에 소개되기도 했다.
또한 군대에서 사병들에게 근대식 체조를 가르쳤고, '조선불교 축구단'에 선수로 스카웃되어
월급 80원을 받으며 축구 선수로 3년 동안 뛰기도 했다. 이때 매년 열리던 평양축구단과의 경
기에 참가해 큰 활약을 보여주었다.

축구를 그만둔 이후 30대 말까지 딱히 두드러지는 행적은 없으며, 40세 때 조선극장(인사동에
있었음)을 운영하던 매부를 도와 극장을 지키는 기도를 하였다. 그래서 극장 주변에서 설치던
건달들을 죄다 때려잡았고, 당시 주먹패 대장으로 유명했던 김두한(金斗漢)과도 맞짱을 뜬 적
이 있다고 한다.
이후 금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으나 소득은 없었으며, 1951년 1.4후퇴 때 경남 밀양(密陽)으
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1958년경. 경무대(청와대)의 이승구 경관이 찾아와 대통령에게 택견 시범을 보여달라고 부탁
을 했다. 당시 택견은 일정한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둘이 맞서서 상대를 때려잡는 실전무
예라 혼자 시범을 보이기가 마땅치 않아 옛날 스승(임호) 밑에서 같이 배웠던 김성한(金成漢)
을 급히 불러 1달 정도 가르친 다음 그해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생신 축하 경찰무도대회'
가 열렸던 소공동(小公洞) 유도회관에서 택견을 선보였다.
당시 권력층과 무도인들은 왜열도식 무술에 익숙해 있던 상태라 택견을 보더니 별로라며 고개
를 돌렸다. 하지만 택견에 관심이 있던 이승만은 우리 무술을 발전시켜야 된다며 당시 경무대
경호원을 가르치던 박철희에게 그를 소개해 택견을 배우도록 지시했다.

박철희는 육군사관학교 초대 태권도 교관을 지낸 사람으로 그를 자주 초청해 경호원들에게 택
견을 가르치도록 도움을 주었다.


▲  택견수련터 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1960년 제17회 로마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대표팀은 우리나라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장에 선보
일 한국 문화로 택견을 선택했다. 그래서 제자 박철희와 함께 경복궁(景福宮)에서 택견 동작
을 사진 촬영했다. (당시 경복궁은 통제구역이었음)

박철희는 경무대 무도사범을 그만두고 '사단법인 택견무도원'을 설립하려고 하였다. 송덕기도
그를 전폭적으로 도왔으나 법인 설립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당시 영향력이 컸던 '수박도협회'
의 방해로 어려움에 빠졌다. 게다가 4.19와 5.16으로 나라가 계속 혼란 속에 잠겼고 법인 설
립도 계속 뜻대로 되지 않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부터 박철희의 조교
이자 같은 사직골 토박이인 김병수가 송덕기의 1등 제자가 되었다.

김병수는 당수도의 고수로 경무대 부사범을 지냈으며, 외국어대학교에 '택견권법부'를 만들었
고, 1963년에는 효자동 오리온다방 3층에 택견도장을 차리기도 했다. 또한 영어에도 능통하여
1964년 '블랙벨트(Black Belt)'와 '가라데 일러스트레이트(Karate Illustrate)'라는 미국의
유명한 무술 잡지에 택견에 대한 기사를 기고한 적이 있다.
허나 그는 해외 진출에 더 무게를 두고 있어서 1968년 1월 미국으로 건너가 버렸고, 미국 휴
스턴에 정착해 '김수가라데'란 타이틀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자연무술류'라는 새로운 체계
의 과학적 무술을 창안해 동양무도인의 대표로 위엄을 날렸다.

1972년 '태권도 가을호'에 송덕기가 '살아있는 태권도인'으로 소개되면서 당시 태권도의 1인
자였던 임창수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찾아가 배움을 받았다. 하지만 제대로 배우려는 사람이
없었고 실생활에도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아 금방 사람들이 나갔다.

그는 슬하에 자녀도 없고, 마땅한 제자도 없어서 이것저것 소일거리로 간신히 척박한 삶을 꾸
려나갔으나 1979년 부인이 세상을 떠나면서 더욱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1970년대 중반 신한승이 택견을 바로 일으켜보고자 송덕기를 찾아와 택견을 배웠다. 그는 택
견이 살려면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길 밖에는 없다고 여겨 문화재관리국을 수시로
찾아가 택견을 홍보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철밥통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저 냉대만 일삼
으며 보다 체계적인 자료를 가져오라고 소위 '갑'질을 벌였다. 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들
의 요구 양식에 맞추고 택견을 약간 변형시켜가며 해당 자료를 제출했다.
그렇게 하여 간신히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76호'의 지위를 얻으면서 택견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허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송덕기는 신한승의 그런 행동을 못마땅히 여기면서 서
로 갈라진 것이다.

송덕기는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1982년부터 젊은 제자를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83년 그 역시 국가 중요무형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이를 기리고자 '택견계승회(현재
사단법인 '결련택견협회')'를 만들었다. 1984년 집 근처에 '박민태권도 도장'을 빌려 제자를
가르쳤고, 제자 중 부유했던 '최유근'의 지원으로 1986년 신촌에 '택견보존회'란 이름으로 본
격적인 택견전수관을 개관하기에 이른다.
송덕기는 너무 기뻐서 매일 나와 제자를 가르쳤는데, 택견이란 존재를 매우 생소해하는 현대
인들의 무관심과 체육관을 운영한 경험이 전혀 없는 제자들의 운영 미숙으로 결국 1년도 안되
어 문을 닫고 말았다. 그나마 남은 제자들도 거의 군대에 들어가면서 죄다 흩어졌고, 1987년
에는 활까지 놓으면서 노인정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우연히 걸린 감기가 커지면서 그해 7월 22
일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9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1981년에 '제1회 대한민국 전통무도예술제'에서 '무도대상(武道大賞)'을 타기도 했으며,
택견을 보존하고 전수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택견의 태반은 이미 사라졌
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 택견수련터는 그가 택견을 닦았던 현장으로 그의 후학들(결련택견협
회)이 표석과 안내문을 세워 택견의 성지로 기리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여러 체육시설이 닦
여져 있어 동네 사람들과 산꾼들이 몸을 풀고 간다. 비록 목적은 다르지만 몸을 푸는 수련터
의 역할은 거의 녹슬지 않은 것이다.


▲  수련터 옆 감투바위 암릉
주름진 바위가 황학정 옆구리까지 느긋하게 내리막을 이루며 펼쳐져 있고,
늦가을이 질러놓은 불(단풍)이 활활 타올라 바위 주변을 화사하게 돋군다.


수련터 옆에는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길게 누워있다. 이들 바위는 저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
라 조촐하게 암릉을 이루며 황학정 동쪽까지 완만하게 내려간다. 그 암릉에 송덕기와 인연이
있는 감투바위가 숨겨져 있으니 한번 숨바꼭질을 해보기 바란다.
그 암릉에 두 발을 딛으면 바로 밑에 황학정을 비롯하여 서울 도심 서부와 남산이 훤히 시야
에 잡혀 조망도 그런데로 괜찮다. 인왕산자락길 개설로 수련터를 찾은 사람들은 늘었으나 정
작 바위의 존재감이 없어 지나치기 일쑤이다. 안내문이 없다보니 수련터 바로 옆에서 바위가
예사롭지 않은 눈짓을 보내고 있음에도 다들 지나치는 것이다.
하여 감투바위 암릉은 인적이 거의 없어 무척이나 한적해 천하 최대의 대도시인 서울 도심을
멍을 때리고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기기에는 아주 좋다.


▲  감투바위

사람들이 매우 좋아한다는 감투, 그 감투를 닮은 바위가 암릉 한복판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 속세에 알려지지 않은 인왕산의 비장의 바위로 송덕기가 택견 수련을 하거나 황학정에서 활
쏘기로 몸을 풀고 이곳에 걸터앉아 나라와 택견의 미래를 걱정했다고 한다. 송덕기의 택견 수
련을 묵묵히 지켜봤을 그는 황학정과 사직단, 서울 도심을 늘 지켜보고 있다.


▲  감투바위의 뒷모습

바위 뒷통수에는 장대한 세월이 무심히 긁고 간 흔적들이 역력하다. 지금은 저런 모습이나 여
러 세대가 흘러간 이후에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지 궁금하다. 대자연 형님의 성형(成形)
속도가 매우 느려서 그렇지 성형 실력만큼은 대자연을 따를 존재가 없다.

택견수련터 서쪽에는 인왕산길과 황학정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내려가면 윤동주문
학관부터 3.2km를 함께 한 인왕산자락길은 그 끝을 맺고 인왕산길에 합쳐진다. 소요시간은 사
진을 찍고 쉬는 시간을 합쳐서 넉넉잡아 1시간 반 정도. 경사가 좀 각박한 구간이 여럿 있지
만, 그것은 산이니까 어쩔 수 없다. 산은 산다워야 오르는 재미가 있지 않겠는가?
도로만 따라가는 인왕산길과 달리 상당수가 흙길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득이한 구간은 나무데
크를 닦아 놓았다. 자락길을 둘러싼 숲은 무성하며 도심을 향해 흘러가는 조그만 계곡들(청풍
계, 옥류동, 수성동 등)을 대부분 거쳐가면서 인왕산에도 계곡들이 꽤 숨바꼭질을 하고 있음
을 귀뜀해준다. 그 계곡들은 시내에 진입하면서 모두 강제 생매장을 당했으며, 2012년에 복원
된 수성동만 제대로 어깨를 피고 있다. (수성동 역시 조금 흐르다가 생매장 당함)
이처럼 인왕산자락길은 인왕산의 숨겨진 속살과 명소를 아낌없이 드러낸 도심 속의 보석이자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사각지대로 이번에 이렇게 인연을 지어 사각지대를 하나 지웠다.

* 인왕산자락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누상동, 사직동


 

♠  옛 경희궁의 흔적이자 전통 국궁(國弓)의 성지, 황학정(黃鶴亭)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5호

▲  등과정(登科亭) 바위글씨

택견수련터에서 인왕산길로 나와 남쪽(사직단 방향)으로 내려가면 황학정으로 내려가는 입구
(후문)가 나온다. 바로 그곳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커다란 바위가 누워있는데 길 쪽에서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가면 그냥 의미없는 바위로 여기고 지나치기 쉬우나 황학정 쪽에서
보면 180도 달리 보일 것이다. 그는 옛 기록에나 남아있던 등과정의 아련한 흔적으로 황학정
방향 바위면에 '등과정' 바위글씨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등과정은 서울 장안의 이름난 활터인 서촌5사정의 하나로 그 오사정이란 등과정과 옥동(玉洞)
등용정. 삼청동 운용정(雲龍亭). 사직동 대송정(大松亭). 그리고 누상동 풍소정(風嘯亭)을 일
컫는다. 이중 삼청동(三淸洞)은 북촌의 일원인데, 어찌 서촌5사정에 꼽혔는지 모르겠다.
조선 때는 활쏘기가 양반사대부와 왕족들이 익혀야 될 교양의 일원으로 인식되어 오사정에는
늘 그들로 붐볐다. 무관 같은 경우는 직업상 여기서 활쏘기 연습으로 몸을 풀었고, 다른 이들
은 교양 및 수련의 일원으로 몸을 풀었던 것이다.
허나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군대 무기에서 활이 제외하면서 이들 오사정은 싹 철
거되었고, 등과정만 유일하게 고종 때 새겨진 바위글씨를 흔적으로 남겨 그의 옛 자리를 귀뜀
해준다. 게다가 경희궁의 활터였던 황학정이 왜정 때 이곳에 안착하면서 자연스럽게 등과정을
계승하였다.


▲  황학정8경(八景) 바위글씨

황학정 후문(등과정 바위글씨)에서 황학정으로 내려가 그 뒷쪽 바위를 잘살펴보면 황학정8경
을 담은 바위글씨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바위에 네모난 홈을 닦고 그 안에 글씨들이 담겨져 있는데, 이들은 1928년 9월 금암 손완근(
錦巖 孫完根)이 쓴 것으로 황학정8경이란 제목을 내세웠지만 정작 황학정은 1개도 없고 모두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경복궁 주변의 풍경을 다루고 있어 제목과 내용이 완전 따로 논다.
여기서 읊은 8경은 다음과 같으며, 이중 금천교와 경복궁 담장 옆 수양버들을 제외하고는 그
런데로 살아있다.

백악청운(白岳晴雲) - 구름이 맑게 갠 북악산(백악산)
자각추월(紫閣秋月) - 자하문(창의문) 문루 위에 가을 달
모암석조(帽巖夕照) - 인왕산 모자바위에 비치는 석양 빛
방산조휘(榜山朝暉) - 인왕산 바위 위의 아침 햇살
사단노송(社壇老松) - 사직단을 둘러싼 노송
어구수양(御溝垂楊) - 경복궁 담장 옆 배수로 둑의 수양버들
금교수성(禁橋水聲) - 금천교 밑을 흐르는 물소리
운대풍광(雲臺楓光) - 필운대의 단풍 광경


▲  사방이 뻥 뚫린 황학정
황학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 밑에 부연을 두어 처마와
추녀의 곡선이 무척 시원스럽다. 정면 중앙에 걸린 황학정 현판은
이승만(李承晩) 전대통령이 쓴 것이다.


사직단 북쪽이자 인왕산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황학정은 이 땅에 몇 남지 않은 전통 활터이
다.
조선 말까지 서울 장안에는 서촌오사정 등 활쏘기를 닦던 사정(射亭)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군대 무기에서 화살이 제외되자 서울과 전국의 많은 사정이 문을 닫았고
황학정 자리에 있던 등과정도 그 거친 흐름을 헤어나지 못해 바위글씨만 남긴 채 휩쓸려 사라
졌다.

활쏘기를 좋아했던 고종 황제는 백성들의 심신단련을 위해 궁술(弓術)을 장려하기로 했다. 하
여 1898년 경희궁 회상전(會祥殿) 북쪽에 황학정을 지어 활터로 삼고 백성에게 개방하여 언제
든 활을 쏘도록 했다.
고종은 자주 황학정을 찾아 활쏘기를 했는데, 그가 사용했던 활 호미(虎尾)와 화살을 보관하
는 전통(箋筒)이 황학정에 전해 내려오다가 1993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천하에 어둠이 내리던 1910년 이후, 왜정은 망국의 황궁(皇宮)인 경희궁을 철저히 산산조각을
냈다. 1918년부터 궁궐을 밀어버리면서 주요 건물을 민간에 팔아먹었고, 1922년 황학정 자리
에 고의로 총독부 전매국 관사를 지으면서 그 황학정까지 밀어버리려고 했다. 이에 국궁을 하
던 사람들이 뜻을 모아 왜정과 협상을 벌여 돈을 건네주고 그 건물을 현 자리로 가져왔다.
앞서 소개했던 택견꾼 송덕기 역시 황학정을 해체 이전했을 때 직접 참여하여 손수 건물을 해
체하고 건물 부재(部材)를 가져와 다시 재조립했다. 또한 황학정 지킴이가 되어 이곳에서 행
패를 부리거나 예의 없이 구는 사람을 혼내주어 당시 사람들은 그를 '사직골 호랑이'라고 불
렀다.

1945년 이후 황학정은 전국 활터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으나 6.25 때 건물이 파괴되면서 활
쏘기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으며, 이후 황학정을 중수하고 한천각(閑天閣)과 국궁전시관 등 여
러 부속 건물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

전통 활터가 많이 사라진 와중에도 여전히 활터 기능을 수행하여 우리나라 전통 궁술의 성지
로 여전히 추앙을 받고 있다.
이곳에서는 궁술 대회(매년 12월에 전국궁술경연대회를 개최함)와 관련 행사, 활쏘기 체험이
열리고 있으며, 평일은 물론 휴일에도 활 쏘는 이들을 자주 구경할 수 있다. 천하 제일의 신
궁(神弓)으로 추앙받는 고구려 동명성왕(東明聖王)과 조선 이성계(李成桂)를 꿈꾸는 궁수들이
실력을 겨루는 모습도 볼만하며, 일반인을 대상으로 궁술 체험 이벤트도 열고 있다. 아직 활
을 만져본 적은 없지만 기회가 생기면 명중률을 떠나서 쏴보고 싶은 마음은 정말 굴뚝 같다.

* 황학정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산1-1 (사직로9길 15-32 ☎ 02-732-1582)


▲  황학정 내부
천정에는 황학정의 내력 등이 적힌 현판 2개가 걸려 있고, 평방(平枋)에는 태극기와
고종 황제의 어진(御眞)이 나란히 자리한다. 황룡포를 입은 그의 어진이
여기에 걸린 이유는 황학정을 세운 그를 기리고자 함이다.

▲  이승만 전대통령이 쓴 황학정 현판의 위엄

▲  화살을 쏘는 동명성왕, 이성계의 후예들

마침 황학정 회원 4명이 활쏘기를 겨루고 있었다. 여기서 과녁까지는 약 130~150m. 평소에는
매우 가깝게 여겼던 그 거리가 여기서 보니 참 까마득하게 보인다. 남산(南山)보다 더 멀리
느껴질 정도. 보는 사람도 그러한데 활을 쏘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그들은 주황색 천을 허리에 묶었는데 이는 황학정 국궁 회원임을 뜻하는 모양이다. 정자 이름
이 누런색, 주황색 학을 뜻하기 때문이다. 과녁까지 거리도 멀고 눈도 침침하여 명중을 했는
지. 외곽에 맞췄는지. 아니면 과녁 밖으로 빗나갔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날라간 화살은 전
동식 미니 케이블카에 실려 황학정으로 옮겨진다.

▲  황학정으로 인도하는 길 (국궁전시관 옆)

▲  황학정 표석 (황학정 정문)


 

♠  단군성전과 행촌동 은행나무

▲  단군성전(檀君聖殿)

황학정에서 다시 인왕산길로 나와 남쪽으로 가면 길 동쪽에 단군성전이 마중을 한다. 단군(檀
君)은 옛 조선을 세운 천하의 시조(始祖)로 그의 단군설화는 3살짜리도 모두 알 만큼 유명하
다. 허접스럽기 그지 없는 양이(洋夷)들의 그리스, 로마 설화를 능가하는 알찬 설화로 삼국유
사(三國遺事)에 그 설화가 실려 있으니 내용을 새삼스레 풀어보면 대략 이렇다.

옛날 천하를 다스리던 최고의 신, 환인(桓因)과 환웅(桓雄) 부자가 있었다. 환웅이 하늘 아래
로 내려가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싶었는데,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지구를 살펴보니 삼위태
백산(三危太白山) 지역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만하다 여겨져 천부인(天符印) 3개와 3,000명
의 무리를 주어 지구로 내려보냈다.
환웅은 태백산 마루 신단수 밑에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 했으며, 바람과 구름, 비를 관
장하는 풍백(風伯)과 우사(雨師) 등 신하를 거느리고 곡식과 인명(人命), 질병, 형벌, 선악(
善惡) 등 사람들의 360여 가지 일을 직접 다스렸다. 이때 굴 속에 함께 살던 호랑이와 곰이
찾아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청하니, 환웅은 쑥 1자루와 마늘 20개를 주며 이를 먹으면서 100
일 동안 햇빛을 안보면 사람이 되리라 했다.
그들은 굴에 들어가 수행을 했으나 호랑이는 이를 견디지 못해 뛰쳐나갔고, 곰은 21일을 버티
면서 여자 사람이 되니 이가 곧 웅녀(熊女)이다.

웅녀는 매일 신단수 밑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기원을 하니 환웅이 잠시 남자로 변해 웅녀
와 결혼하고 아들을 낳았다. 이가 곧 옛 조선의 시조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이다.

단군은 장성하여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여 옛 조선을 세우니 그때가 기원전 2,333년이
다. 우리 땅은 바로 그때를 단기(檀紀) 1년으로 삼아 지금에 이르니 무려 4,350여 년의 역사
를 지니고 있으며 단군은 무려 1,908년을 살았다고 전한다.

▲  단군성전 정문(외삼문)

▲  단군성전 뜨락 은행나무


▲  푸근한 인상의 단군왕검상 (오른쪽에 단군 영정)

※ 단군이 세운 옛 조선(고조선)
오로지 상상으로 제작된 단군상, 그리고 그의 영정, 후덕한 인상과 긴 수염, 황색 옷이 인상
적이다. 단군은 옛 조선(고조선) 군주의 명칭으로 여겨지며, 조선 군주가 정치와 제사를 모두
관장하던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였다.

옛 조선은 기원전 2333년 경에 건국되어 기원전 108년에 강제로 문을 닫은 장수국가로 한반도
를 비롯하여<남한 지역에 있던 삼한(三韓)도 조선의 간접 영역으로 보기도 함> 요동(遼東),
만주, 요서, 연해주, 산동반도를 포함한 화북(華北) 지역을 다스린 천하 대국이었다. (중원대
륙 상당수를 점유하고 있었다는 견해도 있으며, 서안 등 산서성에는 옛 조선이 세운 거대한
무덤 유적이 많이 있다고 함)

조선의 건국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여전해 기원전 2333년 건국설도 솔직히 무리가 있다. 산
소도 아까운 식민사관 패거리들은 기원전 10세기 이내로 창건 연대를 잡고 있으며, 영역도 한
반도 북부와 요동, 남만주로 크게 축소시켰다.
옛 조선의 중심지는 요동으로 보이며, 춘추전국시대에 연나라를 공격하여 대륙에 다시금 영향
력을 행사하려고 했으나 철기(鐵器)로 중무장한 연나라의 반격에 오히려 크게 밀려 요하(遼河
)를 비롯한 2,000리 이상의 땅을 잃고 만다. 당시 조선은 청동기 무기였다. 그러니 어찌 게임
이 되겠는가?
이후 대륙에서 넘어와 준왕(準王)의 신임을 받은 위만(衛滿)이 반란을 일으켜 준왕을 쫓아내
고 왕이 되었다. 준왕은 그를 따르는 신하와 배를 타고 남쪽으로 건너가 한왕(韓王)을 칭했다
고 하는데, 아마도 마한(馬韓) 영역인 전라도나 충청도로 내려간 것이 아닐까 싶다.

위만이 조선을 장악하자 철제무기를 개발하고 국력을 길러 한나라를 비롯한 주변 나라를 공격
해 사방으로 크게 영토를 넓히고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하여 막대한 부를 누렸다. 이에 한나라
무제(武帝)는 조선이 동방(東方) 무역 독점으로 배를 불리며 나날이 커지는 것에 크게 위협을
느끼며 우선 주변 나라를 말끔히 정리하고 그 자신감으로 섭하(涉河)를 사신으로 보내 조선을
협박했다.
당시 조선의 군주는 조선의 마지막 제왕인 우거왕(右渠王)으로 한나라의 요구를 한마디로 거
부하며 비왕(裨王, 제후왕)을 시켜 사신을 전송케 했다. 허나 섭하는 그 호의에 배은망덕하게
도 마부로 가장한 무사를 시켜 비왕을 죽이고 도망쳤다. 이에 한무제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옛
조선과 가까운 요동(지금의 요동이 아님)으로 보내 요동도위(都尉)로 삼았다.

비왕이 암살된 것에 적지 않게 뚜껑이 열린 조선은 섭하가 요동도위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
자 바로 한나라를 공격해 그 요동을 점령하고 섭하를 쳐죽었다. 그렇게 조선이 먼저 공격을
하자 한무제는 그것을 구실로 조선을 공격했다. 아마도 섭하를 떡밥으로 보내 조선을 건드리
려는 수작이 아니었을까 싶다.
허나 조선의 반격과 한나라군 내부 분열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패했다. 하여 뚜껑이 단
단히 폭발한 한무제가 다시 군사를 다그치자 정신을 차린 한나라군은 정비를 가다듬고 공격을
가해 끝내 왕검성까지 포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하며 끙끙 앓던 차에 조선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우거왕이 반
대파에게 피살되고, 왕을 잃은 조선 조정은 그 혼란을 잠재우지 못하여 결국 성은 함락되고
만다.

이렇게 옛 조선은 망하고, 그 땅 일부에 그 유명한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는데, 그것도 조
선 사람들의 끊임없는 비협조와 반발, 그리고 고구려(高句麗)와 부여(夫餘) 등의 등장으로 그
땅에 제대로 침도 바르지 못하고 쫓겨나고 만다.
한사군의 존재에 대해서도 여전히 말들이 많으나, 식민계열 쓰레기들은 평안도와 황해도, 요
동 일부로 보고 있으며, 많은 사학자들은 요동과 요서 지역으로 보고 있다. 한사군의 하나로
유명한 낙랑(樂浪)이란 존재는 낙랑군 외에 비슷한 이름에 낙랑국도 있었다고 하는데, 낙랑국
은 평양 지역, 낙랑군은 요서로 보고 있다.
호동왕자(好童王子)와 낙랑공주(樂浪公主) 설화로 유명한 낙랑은 낙랑군이 아닌 낙랑국이다.
만약 낙랑군이라면 낙랑공주는 공주를 칭할 수가 없다. 그냥 군을 다스리는 태수(太守)의 딸
일 뿐이다.

옛 조선은 전성기였을 때 인구가 무려 1억 8천만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조선의 문화와 문
명은 중원대륙과 주변의 많은 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한자(漢字) 같은 경우도 동이족(東夷族)
으로 대표되는 조선(또는 은나라)에서 만들어 전파했다는 견해가 많으며, 그 문자가 대륙에서
크게 발전하면서 동아시아 통용 글자가 되었다.
또한 흥안령산맥(興安嶺山脈) 주변에서 일어난 홍산문명(紅山文明) 또한 조선의 찬란했던 흔
적으로 보고 있으며, 한반도와 만주에서 많이 발견되는 엄청난 양의 고인돌(지석묘) 또한 조
선의 청동기시절 흔적이다. 그리고 비파형동검도 조선을 상징하는 유물이다.

※ 단군성전(백악전)의 역사
단군성전은 1968년 이숙봉(李淑峰) 여사의 3자매(이정봉, 이숙봉, 이희수)가 세웠다. 이후 사
단법인 현정회(顯正會)로 이관되었으며, 1973년 서울시로부터 보호문화재로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1990년에는 쌍용그룹 김석원 회장의 지원으로 성전을 개축했다.

전체 대지면적 약 800㎡, 성전 52.92㎡, 태극정문(太極旌門), 관리실 등을 갖추고 있으며, 건
물 색깔이 죄다 베이지색을 띄고 있는데, 이는 박정희 시절 그가 좋아하는 색으로 칠했기 때
문이다. 이곳 뿐 아니라 많은 사당과 문화유산이 그 시절 베이지색으로 색 변경을 당했다. 성
전 현판은 김응현, 홍익인간 글씨는 원중식, 내외삼문 간판은 이현종이 썼다.
또한 옛 조선이 열렸던 유서깊은 10월 3일 개천절<어천절(御天節)이라고도 함>에는 이곳에서
개천절대제전(開天節大祭典)이 성황리에 열린다. 전통제례와 전통공연, 온갖 체험행사(제례복
체험, 국궁체험 등) 등이 열리며, 일반인도 참여 가능하다.

* 단군성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1-28 (인왕산로 22, 현정회 ☎ 02-736-6375)


▲  단군성전 앞에 펼쳐진 늦가을 동화

단군성전 남문은 바로 사직공원(사직단)과 이어진다. 허나 평소에는 늘 닫혀있고 사직공원에
서 그곳을 이어주는 길 또한 봉쇄되어 있어 별 수 없이 인왕산길로 우회해 외삼문(外三門)으
로 들어서야 된다. 그 덕분에 사직공원~단군성전 지름길에 인적이 거의 끊기면서 사람의 발자
국 대신 노란 은행잎이 가득 쌓여 늦가을 정취를 아주 진국으로 끌어올린다.
벌써부터 겨울 제국의 보이지 않는 압박이 시작되면서 은행나무와 단풍나무들은 나뭇잎을 하
나, 둘 땅바닥으로 털어낸다. 우리는 그 잎을 낙엽이라고 부른다. 늦가을에 어울리면서도 한
편으로는 우울증을 유발시키는 그 이름 말이다. 은행잎이 금지된 길과 그 주변에 수북히 쌓여
이 일대는 그야말로 노란 세상을 이룬다. 마치 황금색 비단이 쫙 깔린 듯한 모습으로 말이다.

우리야 귀를 접고 누운 그들을 보면서 늦가을 분위기를 즐기지만, 그들은 인생의 마지막을 노
래하며 서서히 끝을 준비한다. 그러고보면 사람이나 은행잎, 인간이 지은 건물이나 인생은 모
두 부질 없는 모양이다. 시작이야 어쨌든 그 종점은 다 같지 않던가.


▲  한양도성 밖 인왕산로1길 (인왕산, 무악동 방향)

▲  인왕산입구 한양도성 탐방로 (인왕산 방향)

단군성전 앞 교차로에서 서쪽 인왕산로1길로 들어섰다. 길 왼쪽(남쪽)은 사직동 주택가와 종
로문화체육센터가 있고, 오른쪽은 인왕산의 싱그러운 숲으로 그 산줄기는 경희궁(慶熙宮)까지
미치지만 숲은 여기서 뚝 끊기고 만다. 그러니 인왕산로1길이 속세와 자연의 팽팽한 경계선인
셈이다.
그 길을 4분 정도 가면 고색이 짙은 한양도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크게 5거리를 이루
는데, 성 밖 북쪽 길(인왕산로1길)은 무악동과 인왕산 쪽으로, 서쪽(사직로1가길)은 독립문
방면, 남쪽(송월1길)은 홍파동, 경희궁 쪽으로 이어지며, 5거리 동쪽(성곽 안쪽) 인왕산입구
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성곽길을 타면 인왕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  송월1길과 한양도성 (홍파동, 경희궁 방향)

▲  사직동 한양도성 (5거리 서남쪽)
인왕산에서 내려온 한양도성은 여기서 잠시 고개를 숙이고 만다.
(사직동~월암근린공원 구간 성곽은 아직 복원되지 못함)

▲  은행잎의 마지막 삶터이자 정모 현장, 한양도성 여장
나무에게 버림받은 은행잎들이 딱딱한 여장 위에 모여 앉아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한다. 여장 뿐 아니라 그 주변은 온통 황금색 은행잎의 세상이다.

▲  여장 위에 내려앉은 은행잎들

▲  행촌동(杏村洞)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0호

사직터널 윗쪽이자 인왕산 남쪽 자락의 끝을 잡은 행촌동은 조금은 빛바랜 산동네이다. 그렇
다고 옛날 달동네처럼 주황색 기와를 지닌 허름한 집들이 즐비한 그런 곳은 아니다. 온갖 빌
라와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찬 서울의 흔한 동네로 그 주택가 속에 행촌동 은행나무와 권율장
군의 집터, 그리고 딜쿠샤란 명소가 숨겨져 있다.

딜쿠샤 곁에 자리한 행촌동 은행나무는 약 420살에 이르는 장대한 나무로 행촌동의 오랜 터줏
대감이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덧없는 양분과 동네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
어 높이 23m, 둘레 6.8m에 이르는 큰 나무로 어엿하게 성장했다. 허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이
이곳까지 미치면서 그의 보금자리는 주택에 밀려 많이 좁아졌고, 주택 사이에 비좁게 자리해
있으나 건강은 아직 양호하다.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이자 이곳에 살았던 권율(權慄)장군이 손수 심었다고 전하며, 주인
은 오래 전에 갔지만 그의 사연을 끈질기게 붙들며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로 이 나
무 때문에 동네 이름이 행촌동(은행나무 마을)이 된 것이다. 참고로 은행나무는 태반이 사람
이 심은 것이며, 자연적으로 싹을 내린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서울에서 오래되고 아름다운 은행나무를 꼽으라면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 성균관(문묘) 은
행나무(대성전 은행나무 포함), 그리고 이곳 은행나무를 격하게 내세우고 싶다.

▲  남쪽에서 바라본 행촌동 은행나무

▲  북쪽에서 바라본 행촌동 은행나무


▲  은행나무 그늘에 자리한 권율장군 집터 표석

은행나무가 있는 곳은 권율(1537~1599)의 집터로 인근 필운동(弼雲洞) 배화여고에도 그의 집
이 있었다. 필운동 집은 그의 사위이자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오성 이항복(李恒福)에게 물
려주었는데 그 집이 필운대(弼雲臺)이다. (현재 필운대 바위글씨가 남아있음)

그럼 임진왜란의 영웅, 권율(權慄)은 누구일까?
권율은 안동 권씨로 자는 언신(), 호는 만취당()과 모악(). 시호는 충장()
이다. 1582년 식년시 문과(式年試 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는데, 임진왜란 시절 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것으로 보아 무예도 제법 갖추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는 승문원정자()와 전적()을 거쳐 1587년 전라도도사(全羅道都使)와 예조정
랑(禮曹正郞), 경성판관(鏡城判官)을 지냈으며, 1591년 평안도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급히 광주목사(廣州牧使)로 임명되어 그곳으로 달려갔으며 전라도
순찰사(巡察使) 이광(李珖)과 방어사(防禦使) 곽영()이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군사 4만을
모아 서울로 올라오자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었다.
이광과 곽영은 수원과 용인에 진을 치고 주변에 있는 왜군을 토벌하고자 했는데, 권율은 주변
에 조금씩 흩어진 적들을 치지 말고 임진강(臨津江)에서 그들의 서진(西進)을 막아 군량미를
운반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다음 적의 빈틈을 노리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고 의견을 냈다. 허나 뇌에 주름이 가득한 이광은 그 말을 무시하고 오로지 머릿수에 의지해
용인에 있는 왜군을 공격했다.
이광의 군사는 4만(왜국은 10만이라고 주장함)에 이르렀으나 대부분이 칼과 창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오합지졸이었다. 그에 반해 왜군은 왜열도에서 나름 알아주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수백 명의 정예 기병으로 저항을 했다.
허나 조선군은 겨우 수백에 불과한 왜군에게 형편없이 깨지고 싸움에 서툴렀던 선봉장 이시지
(李詩之)와 백광언(白光彦)이 전사하는 등,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했다. 허나 권율은 이를 직
감하고 신중하게 처신해 휘하 군사를 잃지 않고 광주로 물러나 후일을 도모했다.

1592년 가을, 전라도 남원으로 내려가 1,000명의 군사를 모집해 동복현감(同福縣監, 전남 화
순)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梨峙)에서 전주(全州)로 진출하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왜군을 막았다. 초반에 황진이 조총에 맞아 부상을 입으면서 군사의 사기가 잠시 떨어졌으나
권율이 군사를 독려하여 왜군을 격퇴하고 승리를 거뒀다. 그 공으로 전라도 감사(監事)로 승
진하게 된다.
1592년 12월, 서울 수복을 위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천안 직산(稷山)에서 머물렀는데, 체찰
사(體察使) 정철(鄭澈)이 그 많은 인원을 먹일 군량이 없으니 돌아가서 관내를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허나 행재소(行在所)에서 북상하라는 명이 떨어지면서 곧바로 군을
이끌고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 오산 세마대(洗馬臺)>에 들어가 진을 쳤다.
한편 권율이 독성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은 왜장 우키타(宇喜多秀家)는 후방과 차단될 것이
두려워 서울에 있던 군사를 이끌고 독산성을 공격했다. 허나 권율은 성문을 굳게 닫고 수비만
할 뿐, 좀처럼 성 밖으로 나오질 않아 왜군의 피해는 나날이 늘어갔다.
뚜껑이 열린 우키타는 사람을 보내 독산성의 약점을 탐지한 결과 물이 부족하다는 정보를 입
수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바로 성 밑에 큰 못을 파니 과연 성 안에 물이 마르면
서 조선군의 식수에 비상이 걸렸다.

허나 권율은 당황하지 않았다. 비범한 인물답게 명쾌한 꾀를 낸 것이다. 그래서 동이 트는 이
른 아침에 왜군이 잘보이는 곳에 말을 세워놓고 쌀을 부어 말을 씻기는 시늉을 벌였다. 그것
을 본 단순한 왜군은 성 안에 물이 부족하다는 것이 거짓임을 알고 크게 동요했다고 한다. 바
로 그때를 이용해 유격전을 펼치며 타격을 가하자 발작한 우키타는 영책(營柵)을 불지르고 바
로 서울로 줄행랑을 쳤다. 그들이 도망칠 때 정예 기병 1,000명을 보내 퇴로를 차단하고 왜군
수천을 죽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세마대 전투)

1593년 1월, 서울 수복을 위해 조경(趙儆)을 보내 근교에 마땅한 곳을 물색하다가 행주산성(
幸州山城)으로 들어가 목책(木柵)을 쳤다. 그곳은 서울과도 가깝고, 한강을 끼고 있으며, 조
망도 좋고, 인근에 여러 요새와 함께 연합 작전을 펴기에 아주 좋은 위치였다. 허나 석성(石
城)이 아닌 야트막한 토성(土城)이라 수비전에는 썩 유리한 편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서둘러
목책을 엮은 것이다.
목책이 완성되자 독산성에 병력 일부를 남기고 모두 불러들였으며, 별도로 4,000명을 뽑아 전
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를 시흥 호암산(虎巖山, ☞ 관련글 보러가기)으로 보내 후방
을 돕도록 했다. 그리고 처영(處英)이 이끄는 승병(僧兵) 1,000명이 행주산성에 합류했다.

권율은 소수의 군사를 보내 서울을 공격했고, 고양 혜음령에서 왜군에게 깨진 명나라군을 도
와 그들의 전멸을 막아주었다. 권율의 활약에 적지않게 염통이 쪼그라든 우키타는 행주산성을
쓸어버리기로 마음 먹고 서울과 인근의 군사를 싹 긁어모아 무려 3만의 대군으로 1593년 2월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그때 행주산성에 있던 조선군은 승병을 합해서 겨우 약 2,800명, 그 외에 군사들을 도우러 성
에 들어온 밥할머니를 중심으로 한 아낙네들과 지역 사람들이 있었다.

왜군은 7부대로 나눠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행주산성이 견고한 성이 되지 못해 여러 번
위기가 있었으나 군사들은 일당백의 위엄을 드러내며 적들을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로 만들었
으며, 화차(火車)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등의 새 무기도 크게 활약을 했다. 또한 밥할머
니의 행주치마 부대는 치마로 돌을 나르고 군사들의 밥을 나르는 등, 서로가 단결하니 왜군은
결국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사한 군사들의 시신을 모아 불태우고 줄행랑을 쳤다.
이 싸움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니 권율과 조경, 처영, 조선군과 승군, 밥할머
니의 아낙네들, 지역 사람들이 빚어낸 대작품이었다.

이후 파주로 옮겨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이빈(李薲)과 함께 후방을 지켰으며, 전라
도로 내려갔다가 그해 6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都元帥)로 승진해 경상도에 주둔했다. 1596년에 도망친 병사를 즉결처분한 것으로 잠시 해직되기도 했으나 바로 한성판윤(漢城判尹)
에 임명되어 호조판서(戶曹判書)와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터지자 명나라군과 함께 왜군이 머무는 울산성(蔚山城)을 공격
했다. 허나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겁에 질려 도망치는 바람에 함락시키지 못했으며, 순천
으로 자리를 옮겨 순천 예교(曳橋)에 있던 왜군을 공격했으나 비리비리한 명나라군의 비협조
로 함락시키지 못했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왔으나 그해 7월 인생을 마감하니 그의 나이
62세였다. 선조(宣祖)는 그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했으며,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
등으로 삼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봉해 그의 공을 기렸다.

권율은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명장으로 바다에 이순신(李舜臣)이 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
鄭起龍)과 곽재우(郭再祐), 권율이 있었다. 비록 초창기 용인 싸움에서 어리버리한 상관들 때
문에 졌고, 정유재란 때는 밥버러지 명나라군 때문에 적지 않은 고생을 했지만 그 외에는 모
두 대승을 거두었다. 특히 행주대첩은 적은 군사로 10배 이상의 왜군을 물리친 우리 전쟁사의
길이 빛나는 장쾌한 대첩이다.
그의 활약과 공훈에 대해서는 '권원수실적(權元帥實蹟)'이란 책이 전하고 있으며, 그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있으나 인근이 유원지화되어 늘 시끄러우니 숙면이나 제대로 취하고 있
을지 모르겠다.

행촌동 은행나무를 끝으로 늦가을 한복판에 달달하게 벌였던 인왕산과 황학정, 행촌동 나들이
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딜쿠샤는 시간 관계로 사진에 담지 않고 통과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행촌동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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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1월 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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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에서 무지개를 보다 ~~ (숙정문에서 청운대, 백악마루, 부암동 창의문까지)

 


' 서울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 나들이 '

▲  북악산에 뜬 무지개

▲  숙정문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가을이 막바지 절정을 누리던 11월 중순 주말에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北
玄武)인 북악산(백악산)을 찾았다.

둥근 햇님이 하늘 높이 떠 있던 오후 2시,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서울시내
버스 1111번(번동↔성북동)을 타고 성북동(城北洞) 서울다원학교 종점에서 두 발을 내렸다.
성북동 종점에서 천하 여러 나라의 만국기(萬國旗)가 펄럭이는 '성북 우정의 공원'을 지나
삼청각으로 인도하는 조그만 길(성북로31가길)로 들어서니 숲과 계곡, 주택이 뒤섞인 전원
(田園) 풍경이 펼쳐진다. 길 왼쪽(남쪽)에는 진하게 우거진 숲과 함께 북악산이 베푼 계곡
이 졸졸졸~~♬ 흘러가며, 그 계곡은 성북천이란 간판을 달고 북악산의 청정한 기운을 가득
머금으며 속세로 흘러간다.
그 길의 막다른 부분에 이르면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함께 약간의 오르막 길이 펼쳐지
는데, 그 길을 오르면 바로 삼청터널 북쪽이다. 삼청터널은 성북동과 삼청동, 도심을 이어
주는 터널로 시대가 변했음에도 여전히 2차선 덩치를 고수하고 있어 주말과 휴일에는 버벅
거리는 차량의 행렬을 심심치 않게 본다.
(삼청터널은 차량 전용 터널이라 뚜벅이는 통행 금지임)

삼청터널로 향하는 길(대사관로)을 건너면 홍련사로 가는 길과 북악산으로 가는 길이 나란
히 나타난다. 허나 길이 서로 붙어있어 초행자는 자칫 햇갈리기 쉬운데, 오른쪽 평탄한 길
이 홍련사(紅蓮寺) 길이며, 왼쪽 계단길이 북악산과 김신조루트로 가는 길이다. 그러니 햇
갈리지 않도록 한다.
홍련사로 가는 길은 오로지 홍련사만 이어줄 뿐이며, 절 입구에 정열적으로 타오른 단풍나
무가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에 마구 돌을 던진다. 저 길로 들어서면 나도 저들처럼 붉게
물드는 것은 아닐까..?


▲  늦가을이 화사하게 질러놓은 붉은 단풍이 펼쳐진 홍련사 입구(오른쪽)와
북악산, 숙정문 입구(왼쪽)


 

♠  북악산(北岳山, 백악산) 입문

▲  북악산으로 오르는 산길 (숙정문안내소 직전)

북악산으로 인도하는 계단길을 오르면 2007년에 북악산 개방 기념으로 조림(造林)한 것을 기
리고자 세운 표석이 있고, 그 표석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와 제2산책로(김신조루트)로 이어지며, 직진을 하면 바로 숙정문안내소
가 나온다.


▲  숙정문안내소

숙정문안내소는 말바위안내소, 창의문안내소와 함께 북악산 주능선(한양도성길)으로 인도하는
관문이다. 예전에는 신분증을 무조건 지참하여 출입신청서를 작성해야 했으나 2019년 4월 5일
부터 그런 것이 폐지되어 다소 자유의 공간이 되었다.
허나 북악산에 국가의 예민한 곳이 많다보니 개방 시간에는 여전히 제한을 두어 여름(5~8월)
에는 7~19시(출입은 17시까지), 봄과 가을은 7~18시(출입은 16시까지), 겨울은 9~17시(출입은
15시까지)이다. 또한 쉬는 날도 사라져 요일 가리지 않고 접근이 가능하다.

숙정문안내소를 지나면 속세살이처럼 각박한 길이 숙정문까지 이어진다. 시작부터 힘든 길이
니 북악산이 그리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님을 느끼게 하는데, 그 각박함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나무데크 계단길을 닦아놓았다.


▲  숙정문으로 오르는 산길 (숙정문안내소 이후, 초겨울)


※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白岳山)> - 명승 67호
서울 도심 북쪽에 가파르게 솟아난 북악산(342m)은 서쪽의 인왕산. 동쪽의 낙산(駱山, 낙타산
),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남산)과 함께 서울 도심을 지키는 4대 산의 하나이다. 이들을 내사
산(內四山)이라 부르는데, 그들 중 북악산이 맏형이며, 낙산은 막내 동생이다.

서울 도심의 지형은 내사산에 감싸인 분지(盆地)로 조선 태조 때 개경(開京)에서 서울로 국도
(國都)를 옮기면서 이들 산의 능선을 따라 18.2km의 도성(都城)을 구축했다. 그리고 풍수지리
에 따라 북악산을 북현무로 하여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삼았으며,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
낙산을 좌청룡(左靑龍), 남산을 남주작(南朱雀)으로 삼았다.
이렇게 도성을 만들고 한강 남쪽에 있는 관악산(冠岳山, 629m)을 신하의 산이란 뜻의 조산(朝
山)으로 삼았는데, 그가 주산인 북악산보다 훨씬 높고 산세가 우람해 거의 신하가 왕을 누르
고 있는 형세였다. 게다가 관악산과 그 서쪽에 있는 호암산(虎巖山)이 각각 활활 타오르는 불
의 모습과 호랑이의 모습으로 나란히 서울을 응시하고 있어 조선 위정자들은 비보풍수(裨補風
水)의 일환으로 서울 북쪽에 있는 북한산(삼각산)을 가져와 서울을 지키는 듬직한 진산(鎭山)
으로 삼아 관악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했다. 북한산이 관악산보다 키도 높고 산세 또한 장대하
기 때문이다.

북악산의 옛 이름은 백악산으로 종로구에서는 어디서든 그가 보이는데, 오랫동안 서울을 상징
하는 산으로 남쪽 자락에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을 닦고, 그 북쪽(지금의 청와
대)에는 넓게 후원을 두었다. 지금은 청와대(靑瓦臺)와 국무총리공간이 둥지를 틀어 이 땅의
정치, 행정 1번지의 역할은 변함이 없다.

북악산 주능선에는 한양도성(漢陽都城)이 파노라마처럼 길게 펼쳐져 있다. 정상 동쪽에는 북
문인 숙정문이 있고, 인왕산과 경계를 이루는 자하문고개에는 창의문(자하문)이 고색의 모습
으로 고개 중턱을 지킨다.
이렇듯 예나 지금이나 서울을 지키는 예민한 곳으로 성곽을 낀 주능선과 정상 주변은 사람들
의 발길을 통제했는데, 그래도 해방 이후에는 주능선과 북쪽 능선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으나 1968년 1.21 사건 이후 북악산 대부분이 닫힌 땅이 되고 말았다.

주능선과 조금 떨어진 삼청동(三淸洞)과 청운동(淸雲洞)은 한양도성의 북쪽 변두리로 숲이 무
성했다. 삼청동계곡과 대은암(大隱巖)계곡, 백운동(白雲洞)계곡, 청송당(聽松堂)계곡 등의 계
곡이 흘렀으며, 풍경이 아름다워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 및 풍류 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그리
고 삼청공원과 숙정문 주변은 사대부(士大夫) 여인들의 봄꽃놀이 장소로 유명했다고 한다. 대
은암계곡 바위글씨를 비롯해 당시의 여러 문화유적이 아련히 남아있으며, 북악산 북쪽 백사골
(백사실)에는 백석동천이란 별서(別墅)유적이 전하고 있다.

북악산은 북쪽으로 북한산과 이어져 있고 숲이 무성하다보니 예로부터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
다. 그들은 궁궐 후원과 북촌까지 침투했는데, 태종(太宗)이 경복궁 후원을 거닐다가 호랑이
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북악산 호랑이는 다른 호랑이와 달리 곶감 따위는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하며, 대신 수진궁(壽
進宮) 귀신을 무서워한다고 했다. 하여 인왕산, 북악산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는 속담이 생겨났다. (수진궁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왕족의 사당임)

1968년 이후 속세에 개방을 꺼렸던 북악산은 2006년 4월 1일 홍련사에서 숙정문을 거쳐 촛대
바위까지 부분 개방되었으며, 그것도 인터넷 예약을 통해 1일 4회만 출입이 가능했다. 이후
전면 개방을 위해 쉼터와 의자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어 2007년 4월 5일에 말바위에서 정상을
거쳐 창의문까지 전 구간이 개방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2009년 북쪽 능선인 북악하늘길(김신
조루트)이 활짝 열려 시민의 품으로 들어왔는데, 이 길은 약간의 통제구역이 있긴 하지만 제
약이 심한 주능선과 달리 언제든 자유롭게 안길 수 있다.

북악산은 예로부터 소나무가 유명하여 조선 조정에서 특별히 옆구리에 끼고 관리했으며, 왜정
(倭政) 이후 관리 소홀과 마구잡이 벌채로 지금은 주능선 일대에 조금 남아있다. 그 외에는
간간히 소나무가 목격된다. 또한 오랫동안 금지된 곳으로 있다보니 나무와 식물들이 마음 놓
고 뿌리를 내려 숲이 원시림마냥 울창하다. 게다가 숙정문 주변에는 팔배나무가 군락을 이루
고 있으며, 수목이 무성하여 새들이 많이 산다.
그러다보니 서울 도심의 하늘을 정화시켜주는 허파 역할까지 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인왕산
과 북한산, 관악산과 더불어 대자연이 서울에 내린 소중한 선물이자 꿀단지로 앞으로도 지금
의 모습 그대로 삼삼한 자연의 공간으로 서울 속에 있었으면 좋겠다. 하긴 산 주변에 국가의
예민한 곳이 많다보니 개발의 칼질 또한 그 눈치로 마음껏 칼질을 할 수는 없다.


▲  북악산 김신조루트 남마루에서 바라본 북악산 주능선(가운데 산줄기)과
서울 도심

※ 북악산(백악산) 주능선과 한양도성길
2006년 4월부터 순차적으로 개방된 주능선은 창의문에서 정상을 거쳐 말바위로 이어지는 4.3
km 구간으로 숙정문 안내소와 말바위 안내소, 창의문 안내소를 통해 입장할 수 있다. (그 외
에는 출입금지) 또한 탐방구간(말바위안내소~창의문안내소)을 절대로 벗어나면 안되며 도처에
군인이 지키고 서 있으니 엉뚱한 마음을 품으면 곤란하다. (말바위안내소~말바위~삼청공원/와
룡공원 구간은 완전 개방된 구간이라 시간 제한 없음)

주능선에서 만날 수 있는 명소로는 숙정문과 1.21사태소나무,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촛대바
위, 청운대 등이며, 군사시설이 옥의 티처럼 널려 있어 북악산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실감케
한다. 만약 서울이 수도가 아니었다면 북악산은 꽤나 자유로운 몸이 되었을 것이다.
북악산 정상과 청운대에서는 서울 도심이 두 눈 아래로 펼쳐져 조망(眺望)이 일품이며, 숙정
문과 말바위에서는 성북동과 성북구 지역이 보이고, 한양도성을 따라 평창동(平倉洞)과 부암
동, 인왕산, 북한산이 차례대로 보여 그야말로 움직이는 조망대이다.

* 북악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삼청동 / 성북구 성북동
* 말바위안내소 (☎ 02-765-0297~8, 팩스 02-765-0296)
* 숙정문안내소 (☎ 02-747-2152, 팩스 02-747-2153)
* 창의문안내소 (☎ 02-730-9924~5, 팩스 02-730-9926)


 

♠  숙정문에서 청운대까지

▲  약간 측면에서 올려다본 숙정문(肅靖門) - 사적 10호
숙정문 앞은 바로 각박한 산비탈이라 평평한 공간이 적어 성문을
지키기에는 아주 그만인 곳이다.


숙정문안내소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숙정문이 모습을 비춘다. 이 문은 한양도성의 북문(北門)
으로 남대문<숭례문(崇禮門)>, 동대문<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돈의문(敦義門)>과 함께
한양 4대문의 하나였다. 북대문(北大門), 북문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가파른 산능선에 자리해
있어 도성의 대문이라기 보다는 산성(山城)의 조촐한 성문 분위기가 진하다.

문의 이름인 숙정(肅靖)은 엄숙히 다스린다는 뜻으로 원래 이름은 가운데 1자만 다른 숙청문(
肅淸門)이었다. 1396년 지금보다 약간 서쪽에 조성되었는데, 1413년에 풍수학자인 최양선(崔
揚善)이 태종에게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 길을 내어 지맥(地脈)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건의하여 이들 문을 닫아걸고 소나무를 잔뜩 심어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래
서 무늬만 문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거 외에도 숙정문을 품은 북악산 주능선은 도성 내부와 바깥이 훤히 바라보이는 예
민한 위치로 서울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러다보니 백성들의 출입을 거의 통제했고,
설령 이 성문을 나와도 이어지는 곳은 숲이 무성한 북악산 북쪽 산줄기와 북한산, 성북동가
고작이었다. <성북동은 동소문(東小門)을 통해 갈 수 있음>
그리고 평소와 비가 많이 올 때는 숙정문을 닫아 걸다가 가뭄이 심할 때 남대문을 닫고 이 문
을 열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는 1416년에 제작된 기우절목(祈雨節目)에 따라서 북쪽은
음(陰). 남쪽은 양(陽)을 상징하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니 통행문으로서의 존
재감보다는 도성 수비와 음양의 원리를 따지는 풍수지리적인 존재감이 훨씬 컸던 것이다.

1504년 성곽을 보수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으며, 숙청문이 언제 숙정문으로 이름이 갈렸
는지는 북악산 산신(山神)도 모르는 실정이나 1523년부터 숙정문 이름이 등장했다. 숙정문 외
에도 북정문(北靖門)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이들 명칭이 같이 쓰이다가 언제부턴가 숙정문으
로 통합되었다.
1968년 1.21사태 이후 북악산 대부분과 숙정문 일대가 금지된 땅이 되었으며, 1976년 북악산
일대 성곽을 손질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문루는 비록 새 건물이지만 성벽을 이
루는 성돌에는 고색의 때가 만연해 중후한 멋을 보인다.
2006년부터 다시 속세에 공개되어 제한적이긴 하지만 성문 관람이 가능해졌다. 허나 문 좌우
성곽길과 숙정문안내소 방면만 통행이 가능하며, 남쪽에는 삼청동으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으
나 금줄이 쳐져 있어 절대로 갈 수 없다.

숙정문 문루에 올라서면 북악산 북쪽 능선과 성북동 일대가 바라보이며, 대자연이 그린 가을
단풍이 산자락을 곱게 수를 놓아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자아낸다. 높은 곳에 자리한 것
은 분명하지만 문 남쪽은 울창한 수목이 시야를 방해하고 있고, 북쪽도 겨우 성북동과 삼청각
, 북악산 북쪽 능선이 전부라 조망은 생각보다 별로다.
매년 봄에는 사대부 여인들이 숙정문 남쪽에서 봄꽃놀이를 즐겼다고 하며, 그거 외에는 딱히
숙정문 주변에 대한 옛 사람들의 시(詩)나 문구(文句)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  숙정문의 수수한 뒷모습

▲  숙정문 서쪽 협문(夾門)


▲  숙정문에서 바라본 천하
눈이 시리게 맑은 가을 하늘 아래로 북악산과 북한산 사이에 포근히 둥지를 튼
성북동이 바라보인다. (왼쪽에 보이는 큰 기와집이 삼청각)

▲  숙정문 서쪽 성곽에서 바라본 천하 (가운데 기와집이 삼청각)

▲  북악산에서 만난 일곱 색깔 무지개의 위엄
비가 잠깐 오더니 이내 일곱 색깔 무지개가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무지개를
본 것이 정말 몇 년 만인지 옛 친구를 만난 듯 무척 반갑고 신기했다.

▲  힘차게 뻗은 숙정문 서쪽 성벽
서울 수비를 향한 굳건한 마음이 뭉쳐 단단한 성벽이 되었다. 성곽을 따라
북악산으로 오르면 시야에 범위도 점차 넓어진다.

▲  촛대바위

숙정문 서쪽에는 촛대바위가 있다. 아마도 촛대처럼 생겨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 듯 싶은데
현실은 바위의 북쪽과 동쪽 면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곳에서 보면 촛대처럼 보이지도 않아
그저 그런 바위로만 보이는데, 그를 제대로 보려면 바로 정면인 남쪽에서 봐야 되지만 남쪽은
금지된 구역이라 발을 못들이게 한다. 또한 바위 정상도 금지된 곳이니 괜히 바위 위에 올라
가는 일이 없도록 한다.

우리가 촛대바위를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왜정(倭政)이 이 땅의 혈을 끊고자 무식하게 쇠말뚝
을 박았던 추악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왜정은 1920년대에 경복궁과 일직선이 되는 이곳에 말뚝을 꽂았는데, 사람으로 친다면 머리의
정수리가 되는 부분이다. 즉 조선 땅의 머리 부분을 아작을 내어 이 땅을 영원히 통치하고 싶
은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다행히 그 말뚝은 제거되었으나 말뚝의 휴유증 때문일까? 이 땅은
아직도 혼돈 속에 잠겨있다. 친일매국노와 그런 것을 추종하는 잡것들이 권력과 부를 챙기고
이 땅을 이간질시켜 나라의 기본부터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언제쯤 촛대바위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까? 그때가 되면 주름진 나라 사정도 좀 펴지겠지.
(왜정의 쇠말뚝에 대해서는 측량용이란 말도 있음)


▲  촛대바위와 그에게로 인도하는 나무데크길
나무 난간 너머와 바위는 감히 발도 들일 수 없는 금지된 구역이다.

▲  촛대바위에서 청운대로 오르는 성곽
성곽을 따라 이어진 북악산의 명물 소나무의 푸른 물결..

▲  북악산 주능선을 따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양도성
(곡장 조망대에서 바라본 모습)
도성 너머로 구름에 감싸인 북한산(삼각산)이 바라보인다.


촛대바위를 지나면 성곽길 경사가 점점 각박해지면서 암문(暗門)이 하나 나온다. 여기서 암문
밖으로 나가서 잠시 성곽 바깥 길을 이용해야 되는데, 이는 성곽에 군사시설이 있기 때문에
부득이 그렇게 길을 낸 것이다.
길 옆에는 철조망이 둘러져 있고, 그 너머로 북한산, 평창동 등이 바라보여 마치 휴전선 너머
의 금지된 땅을 보는 듯 하며, 그 길의 끝에 이르면 성 안으로 인도하는 계단길이 나온다. 거
기서 다시 성곽길이 이어진다.


▲  청운대(靑雲臺) 표석 (해발 293m)

촛대바위에서 성 바깥, 안쪽을 들락거리며 20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백악산)에서 2번째로 높
은 곳인 청운대가 마중을 한다.
청운대는 푸른 구름의 지대란 뜻으로 근래에 붙여진 이름인 듯 싶다. 이곳은 공간이 넓고 의
자가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으며 북쪽으로 성북동과 북한산, 남쪽으로 남산과 서울 도심이
바라보여 조망 또한 괜찮다. (도심 쪽이 괜찮음)


▲  소나무가 짧게 그늘을 드리운 청운대

▲  청운대에서 바라본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 도심과
서울의 영원한 남현무, 남산(목멱산)

▲  청운대에서 바라본 북악산 정상

▲  청운대 주변에서 바라본 평창동과 신영동, 부암동, 북한산

▲  여장 성돌에 새겨진 빛바랜 글씨들

청운대를 지나면 안내문이 하나 나오는데, 그 안내문에 따라 여장을 살펴보면 글씨들이 희미
하게 아른거릴 것이다. 이 글씨들은 도성을 축조하면서 새긴 공사 구역 표시와 공사 담당 고
을,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자의 직책과 이름으로 이런 것이 새겨진 성돌이 한양도성에 여럿
있다.

1396년 한양도성을 만들 때 성곽 전 구간을 600자(약 180m) 단위로 끊어 97구간으로 구획하고
천자문(千字文) 순으로 공사 구역을 표시했다. 북악산 정상에서 천(天)으로 시작하여 지(地),
현(玄)... 순으로 해서 북악산 정상 동쪽에서 조(弔)로 끝나며, 구역 다음에 공사 일자와 공
사 책임자의 직책, 이름을 새겼다. 이런 공사 실명제는 조선 후기까지 계속 되었으며, 이곳
성돌에는 의령시면(宜寧始面)이라 쓰여 있어 의령(경남) 시작 지점을 뜻한다.


▲  남북분단의 쓰라진 비극 - 1,21사태 소나무

성돌글씨 부근에는 1.21사태 소나무라 불리는 소나무가 있다. 북악산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
건이 바로 1968년 김신조 공비 패거리의 서울 침공 사건인 이른바 1.21사태로 그들과 총격전
을 나눈 현장의 하나이다. 북악산에는 그와 관련된 쓰라린 장소가 많은데, 이 소나무와 호경
암이란 바위에는 총탄의 흔적이 있으며, 호경암이 있는 북쪽 능선에는 김신조 일당이 도망친
길인 김신조루트(북악하늘길 제2산책로)가 있다.
1.21사태 소나무에서 우리 군과 공비 패거리간의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그때 이 나무에 총탄
15발이 무심하게 박혔다. 이후 그 자리에 흉물스럽게 동그란 표시를 하여 남북분단의 잔인한
현실과 함께 이곳을 지키는 군인들로 하여금 경계로 삼고 있다.

때는 1968년, 북한은 김신조 일당 31명을 보내 청와대를 공격케 했다. 임진강(臨津江)을 건너
파주와 양주의 여러 산과 북한산 서쪽 자락, 창의문을 거쳐 1월 21일 서울 도심까지 용케 들
어온 김신조 패거리는 청와대를 코앞에 둔 청운동(淸雲洞)에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
1932~1968)이 이끄는 경찰에게 저지를 당했다.
경찰이 검문을 한다며 그들의 길을 막자 공비들은 크게 발작하여 외투 속에 감춘 기관단총을
꺼내 먼저 공격을 가했다. 불행히도 최서장은 가슴과 배에 관통상(貫通傷)을 입어 쓰러졌고
'끝까지 청와대를 사수하라!!'
마지막 명령을 내리며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
서장의 죽음에 애끓는 복수심에 불탄 경찰은 더욱 반격의 속도를 올려 공비들 상당수를 벌집
으로 만들었다. 이때 김신조를 비롯한 살아남은 공비들은 목을 붙잡고 북악산과 인왕산으로
줄행랑을 쳤는데, 그들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바로 이 소나무 부근에서 격전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 북악산 북쪽 능선인 호경암에서 격전이 있었고, 1월 21일 이후 14일의 토벌 끝에 김신조
와 도주 1명을 제외한 29명을 사살했다. 도주 1명은 북한까지 도망을 친 것으로 전해지며, 처
단된 공비의 시신은 파주시 적성면 적군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김신조는 투항해 이 땅 어
딘가에 살고 있다.

김신조 일당의 난입 사건을 1.21사태라 부르며, 이 사건을 계기로 단단히 뚜껑이 폭발한 박정
희 대통령은 바로 그해 4월 1일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군작전도로인 북악스카이웨이를 콩볶
듯 급히 만들게 했다. 이 예비군 창설로 인해 이 땅의 남자들은 군제대를 하고도 8년이나 예
비군 훈련을 받아야 되는 불이익을 받게 된 것이다.


▲  1,21사태 소나무의 총탄 흔적
그때 총탄이 박힌 자리에 빨간색과 흰색으로 좀 흉하게 표시를 해두었다.


북악산에 널린 수많은 소나무의 하나로 이제는 북악산의 명물로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허나
좋은 뜻에서 그리 되면 모르겠지만 호경암과 함께 1.21사건 같은 영 좋지 않은 사건으로 명물
이 된 것이니 소나무 자신도 마음이 그리 편치 않을 것이다. 차라리 이름이 없는 소나무처럼
조용히 묻히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어쩌다가 안좋은 쪽으로 명물이 되었는지 나무나 사람이
나 운과 시간을 잘 만나야 된다.
게다가 호경암처럼 당시에 총탄 흔적까지 안고 있으니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70년 넘게 대치
하고 있는 남북분단의 우울한 비극을 전율이 일도록 느끼게 만든다.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에서 창의문까지

▲  북악산 정상힌 바위 (저 바위가 실질적인 정상임)

청운대에서 10분 정도를 마저 오르면 북악산(백악산)의 정상인 백악마루에 이르게 된다. 백악
마루는 해발 342m로 마루란 순수 우리말로 정상을 뜻한다.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정상 중앙에 백악산 정상 비석과 북악산 옛모습 복
원기념비가 있다. 그리고 정상 북쪽에는 사람 키보다 2배 정도 높은 굵직한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꼭대기가 실질적인 북악산의 머리이다.
정상 남쪽에는 청운대와 마찬가지로 소나무가 가득해 그윽한 솔내음을 전해주며, 테두리 안에
서만 움직이고 사진을 찍어야 된다. 테두리를 넘으면 나라가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굳이 넘을
생각은 하지 않도록 한다.
여기서는 동서남북 어디든 촬영이 가능하며, 북쪽으로는 평창동과 북한산(삼각산), 동쪽은 성
북동과 서울 동북부지역, 서쪽은 부암동과 인왕산(仁王山), 그리고 남쪽으로 서울 도심과 남
산(南山)이 속시원히 바라보여 조망이 일품이다.

이곳에 올라 발아래 펼쳐진 천하를 보고 있자면 그 천하가 마치 내 것이 된 듯, 잠시나마 제
왕(帝王)마냥 즐거운 기분이 밀려온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중의 시궁창..) 세계 최대의 대
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발 아래 두고 굽어볼 수 있는 곳으로 이곳만큼 조망이 좋은 곳도
없다. 또한 서울 도심을 둘러싼 뫼 가운데 가장 높은 산이며, 오랜 세월 서울 땅을 지켜온 북
현무로서의 면모와 위엄도 느껴진다.


▲  하얀 돌로 다듬은 백악산 정상 표석

▲  소나무 너머로 바라보이는 서울 도심과 남산
중공 짱깨산 미세먼지로 조망이 영 시원치가 못하다.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성북동과 서울 동북부 지역
산속에 묻힌 너른 동네가 성북동이고, 그 산 너머로 성북구와 강북구,
노원구 등 서울 동북부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북악산 꼭대기 바위에서 바라본 정상부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평창동과 북한산
북악산을 받쳐주는 서울의 듬직한 진산, 북한산이 북악산을 굽어본다.
그 남쪽 산자락에는 부자 동네 평창동이 크게 둥지를 틀었다.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인왕산
인왕산을 비롯하여 서대문구, 은평구 지역과 서울/고양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봉산, 앵봉산 등)들이 바라보인다.

▲  백악쉼터에서 바라본 북악산 북쪽 산줄기와 평창동,
그리고 북한산의 위용
북악산(삼각산) 북쪽 산줄기는 늦가을이 질러놓은 단풍에 산불마냥 활활
타오르고 있다. 너무 곱게 타올라 깜깜한 밤에도 모두 보일 것만 같다.

▲  백악쉼터에서 창의문으로 내려가는 성곽길
녹음이 짙은 소나무가 아찔한 내리막길을 가려주려는 듯 가운데서 시야를 막는다.

▲  백악쉼터 부근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신영동, 홍지동 지역

북악산 정상에서 창의문으로 가는 성곽길은 북악산에서 가장 고달픈 구간으로 각박한 속세살
이만큼이나 길이 가파르다. 내려갈 때는 올라가는 것보다야 부담이 적겠지만 급하게 펼쳐진
성곽길에 아찔함마저 들 정도이다. 그리고 창의문에서 올라갈 때는 각박한 경사를 자랑하는
성곽길에 '이게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길인가?' 기를 제대로 질리게 만든다. 거의 30~40도 경
사의 야속한 성곽길을 올라야 되니 말이다.
그래서 등산이 딸리거나 노인과 어린이들은 가급적 숙정문이나 말바위에서 오르기를 권한다.
어차피 거기도 힘들긴 마찬가지이나 서서히 경사가 급해지는 구간이라 덜 힘들다. 창의문이
정상과 가까운 지름길이라고 해서 만만히 보면 후회한다.

정상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백악쉼터라 불리는 조촐한 쉼터가 나온다. 여기는 북악산 개방
을 위해 닦은 공간으로 역사적인 의미는 없다. 이곳에서도 사진 촬영은 가능하나 쉼터 자체는
찍을 거리가 없으며 성곽과 성 밖에 펼쳐진 천하를 찍으면 된다.


▲  각박한 경사를 자랑하는 한양도성길 (백악쉼터에서 정상 방향)

▲  돌고래쉼터에서 만난 돌고래바위

백악쉼터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돌고래쉼터가 나온다. 쉼터 바로 옆에 돌고래처럼 생긴 바
위가 누워있어 돌고래쉼터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 이름도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닌 북
악산을 개방하면서 지은 이름이다.
바위가 돌고래를 닮았다며 거의 주입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제 눈이 안경이라고 내 눈에는 물개
처럼 보인다. 바위 동쪽에는 약간의 틈이 있는데, 거의 입처럼 생겼고 그 위에 눈처럼 보이는
자국도 있다. 가만 보면 물개가 꼬랑지를 흔들면서 움직이는 모습 같아 차라리 물개바위라고
했으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나에게는 이름을 갈아치울 힘이 없다.

돌고래쉼터 주변은 촬영이 가능하나 찍을 만한 것은 돌고래바위와 성곽 너머로 보이는 풍경들
뿐이다. 돌고래바위는 통제구역이라 그냥 난간 너머로 보기 바라며, 바위 주변에도 소나무가
그윽하게 운치를 자아낸다. 그런 소나무 사이로 서울 도심이 살짝 속살을 비친다.


▲  창의문 - 보물 1881호
자하문고개를 밀어 만든 신작로(新作路)에 밀려 성문으로의 기능은 다소
떨어졌으나 왕년에 도성 성문으로서의 위엄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서울 도심과 부암동(付岩洞)을 잇는 자하문고개에 옛 한양도성의 성문인 창의문이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킨다. 창의문은 성밖 부암동의 계곡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 부르
기도 하는데, 창의문보다는 자하문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나도 자하문이라 주로 부름)

이 문은 한양도성의 8개 성문의 하나이자 4소문(小門)의 하나인 북소문이다. 4소문은 동소문
<東小門, 혜화문(惠化門)>, 서소문<西小門 ,소의문(昭義門)>, 남소문<南小門, 광희문(光熙門
)>, 그리고 이곳 창의문으로 혜화문과 소의문, 광희문은 각각 동소문. 서소문, 남소문이라 불
리나 유독 창의문은 북소문이라 불린 적이 거의 없다.


▲  창의문 안쪽 (도심 쪽)

창의문은 1396년 한양도성을 지을 때 조성된 것으로 문의 이름인 창의(彰義)는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다. 1413년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
아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건의하여 1416년 문을 닫아걸었다. 다만 1422년 군인들의 통로로 사용되었고, 1617년 창덕궁
을 보수할 때 이 문을 통해 석재를 운반하는 등, 철저히 나라 일에만 문을 열었다. 허나 성
밖 부암동 지역에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과 그들의 즐겨찾기 명소가 즐비해 그들의 은밀한 통
행로로 쓰였다. 즉 국가와 높은 사람들의 전용문이었던 것이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등은 세검정(洗劍亭)에서 칼을 씻으며 역적질을 모의, 역촌동(驛村洞) 별서에 있
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 인조)을 앞세워 도성에 쳐들어가 광해군을 폐위시킨 이른바 인조
반정(仁祖反正)을 저질렀다. 그때 그 반역도당들이 부시고 들어간 문이 바로 창의문이다. 그
래서 문루에는 인조반정을 저지른 작자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문이 백성들에게 전격 개방된 것은 1741년이다. 그때 훈련대장 구성임(具星任)이 인조반정
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라며 성문을 중수하고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문루를 다시 세
울 것을 건의해 지금의 문루가 지어졌다.


▲  창의문안내소에서 바라본 창의문 문루와 협문
하얀 추녀에 잡상(雜像)과 용머리가 걸터앉아 성문을 지킨다. 창의문이 무탈했던
것은 저들의 굳은 직업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  문루에 걸린 인조반정 반역자들의 명단 현판
저들의 우매한 권력투쟁과 명나라에 대한 지극한 사대주의, 국제정세에 우둔함으로
얼마 뒤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삼전도(三田渡) 굴욕의 대치욕을 당하게 되고
그것도 모자라 동아시아의 호구 국가로 이리 털리고 저리 털리다가 결국
나라와 이 땅의 장대한 역사마저 잃게 된다.


창의문은 한양도성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서소문은 왜국 통감부(統監
府)가 만든 성벽처리위원회에서 1908년에 무단 철거하여 정확한 위치조차 아리송하고 동소문
은 왜정 때 없어진 것을 근래에 다시 지었다. 남소문인 광희문은 성문만 오래되었을 뿐, 문루
와 성곽은 1970년 이후에 복원되었다.
그에 비해 창의문은 6.25 때도 총탄이 알아서 비켜가 별다른 피해가 없었으며, 1958년 중수된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 정정함을 과시한다. 바로 그런 점이 인정되어 2015년 12월 2일, 국
가 지정 보물로 특진되었다. 비록 일찌감치 국보와 보물 1호 지위를 누린 남대문(숭례문), 동
대문(흥인지문)에 비해 다소 늦은 감도 있고 너무 늦게 빛을 본 서글픔도 있지만 역시나 인생
은 끝까지 살아남고 봐야 된다.


▲  창의문 문루에서 바라본 창의문 안쪽

겨울 제국의 등쌀에 떠밀려 서서히 손을 놓으려는 늦가을이 잠시 이곳에 걸음을 멈추고 그의
마지막 잎새를 잔뜩 그려놓았다. 단풍이 환대하는 저 오솔길을 거닐면 나도 저들처럼 곱게 물
들지는 않을까? 황색 피부가 졸지에 다색(多色) 피부로 변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  신작로로 강제로 끊어진 창의문 반대쪽 언덕과 성곽
저 언덕에는 2009년에 터를 닦은 윤동주시인의 언덕이 있다. 끊어진 폭은 짧지만
고개를 깊게 깎아놔서 마치 끊어진 강가 절벽을 보는 듯 하다.


오랫동안 도성 성문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으나 1960년 이후 자하문고개를 밀어내고 신작로를
닦으면서 성문의 통행 기능을 잃게 되었다. 요즘이야 산꾼과 답사꾼, 나들이꾼들로 심심치는
않겠지만 그래도 예전 같지는 못하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물건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뒷전에
물러나 앉은 모습은 정말 초라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문 서쪽에 신작로를 내면서 한양도성은 50m 남짓 끊어져 있다. 끊어진 반대쪽<현재 윤동주(尹
東柱)시인의 언덕과 청운공원이 들어서 있음>
을 애타게 바라보는 인왕산 쪽 성벽이 견우와 직
녀를 보듯 애처롭기까지 하다. 끊어진 구간은 도로 위에 흙을 덮어 성벽을 세우지 않는 이상
은 복원은 어려우며, 창의문 바로 남에는 북악산길이 지나가 시야를 제대로 방해한다. 하여
문루에 올라가 북쪽 전방을 뚫어지라 바라봤자 북악산길에 가려 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별로
없다.


▲  창의문 성문 천정에 그려진 봉황(혹은 닭)과 구름무늬

창의문은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문의 모습이라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만 그만의 매력이
자 특징이 2가지가 있다. 그러니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눈여겨 보기 바란다.
우선 빗물이 잘 흘러가도록 문루 바깥 쪽에 설치된 1쌍의 누혈(漏穴) 장식이 있다. 이것은 연
꽃잎 모양으로 조각되어 성문의 매력을 수식해주고 있으며, 성문 천정에는 화려하게 날개짓을
펼치는 봉황(鳳凰) 1쌍이 그려져 있는데 속설에는 봉황이 아닌 닭이라고 한다. 성문 밖 부암
동 지형이 지네를 닮았다고 하여 비보풍수에 일환으로 그 천적인 닭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림
을 가만히 보면 머리와 목, 날개는 닭을 많이 닮았으나 몸통과 꼬리는 닭과는 거리가 먼 봉황
의 모습이다.
봉황이 1마리가 아닌 둘이 있는 것을 보면 암수 1쌍일 것이다. 그들 주변으로 와운문(渦雲紋)
이 가득 그려져 있는데,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
센 소용돌이를 보는 듯하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북악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창의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산1-1 (창의문로 118)


▲  하늘을 향해 경쾌하게 날개짓을 펼치는 추녀마루의 고운 맵시
선의 유연함과 아름다움이 진하게 배여난 창의문,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선이 또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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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한복판을 거닐다 ~~ 견지동 우정총국, 인사동거리, 종로 나들이

 


' 서울 도심의 한복판을 거닐다 '
(우정총국, 인사동 주변)

▲  우정총국 회화나무의 겨울 풍경


 

♠  우리나라 근대우편의 발상지이자 갑신정변의 쓰라린 현장
우정총국(郵政總局) - 사적 213호

▲  우정총국 (체신기념관)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조계사(曹溪寺) 바로 옆에는 우리나라 근대 우편의 발상지로 추앙
받는 우정총국이 있다. 이곳은 1884년에 일어난 그 유명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의 현장으로 초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물론 관련 수험서에도 지겹도록 나오는 갑신정변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우정총국은 겉으로 보면 고색(古色)의 기운이 썩 와닿지가 않는다. 나도 처음에는 우정국(郵
政局)이 설치된 1884년에 지어진 것으로 알고 있었지. 허나 겉보기와 달리 제법 오래된 건축
물로 원래는 조선 초기에 세워진 전의감(典醫監)이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7세기 초에
재건되었으며, 1629년에 왜국(倭國) 사신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이후 서양 제국(諸國)과 외교를 맺으면서 근대적인 우편제도
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하여 홍영식(洪英植, 1855~1884)의 건의로 1884년 4월 22일 우정총
국이 설치되었는데, 바로 전의감으로 쓰이던 현재의 건물을 손질하여 사용했으며, 홍영식이
초대 우정총판(郵政總辦)에 임명되었다.

1884년 5월 5월, 왜국(일본)과 영국, 미국 공관(公館)에 우정총국 설립을 알리고 왜국과 홍콩
우정국과 우편물 교환약정을 맺었다. 6월 8일에는 우정총국 신설에 따른 조직 편성 내용을 고
종(高宗)에게 보고하고 직원 모집에 들어가 7월 1일 왜인(倭人) 2명을 고용했으며, 10월 9일
에는 이상재(李商在)와 남궁억(南宮億), 신낙균(申樂均) 등 14명을 채용하고, 10월 21일에는
성익영(成翊永)을 우정총국 사사(司事)로 임명했다.
10월 29일에는 각종 우정 규칙과 장정에 대해 왕이 재가를 하였고, 11월 17일에 업무 분장과
입직(入直) 절차를 정했으며, 11월 18일에 5문과 10문, 2종의 우표를 발행하여 서울과 인천(
仁川) 간의 우정 업무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이 땅에서 본격적인 근대 우편이 시작되었다. 당
시 우정총국은 옆에 있는 회화나무에 날마다 국기(태극기)를 걸었는데, 그 높이가 2장(丈, 6
m) 남짓이었다고 하며, 그것이 우리나라 국기 게양의 효시로 전한다.

우편 업무가 시작되자 이를 기념하고자 12월 4일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가지기로 했다. 바로
이때 홍영식과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開化黨) 인물들은 큰일을 벌이기로 작정하고 몰래
준비에 착수했다. 그럼 여기서 별로 유쾌하진 못하지만 긴박하게 흘러갔던 갑신정변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사족이긴 하지만 내가 제일로 싫어하는 국사 분야가 근/현대사이다.


▲  우정총국 앞 도로변에 있는 전의감터 표석
우정총국은 원래 전의감 건물이었다.

※ 갑신정변의 배경
1876년 이후, 조선 사회의 개혁과 서양 문물의 수용을 실현하고자 박규수(朴珪壽)와 오경석(
吳慶錫) 등에게 개화사상(開化思想)을 배운 사대부(士大夫)의 젊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개화
파(開化派)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개화파는 실현 방법을 두고 김홍집(金弘集), 어윤중(魚允中) 중심의 온건개화파와 김
옥균 중심의 급진개화파로 나눠졌는데, 온건파(사대당)는 청나라에 의존하면서 천천히 개혁을
하자는 반면, 급진개화파(개화당)는 청과의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조속한 개혁을 꿈꾸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터지고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소환한 청나라군이 서울에 들어와
군란을 진압하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군란으로 크게 혼쭐이 난 명성황후의 민
씨 패거리는 청나라에 크게 의지하며 권력을 유지하느라 급급했고, 개화파에 정치적인 압박을
가하면서, 그들을 통해 개혁을 이루려던 개화파의 노선은 중대한 수정을 요하게 되었다. 하여
개혁 외에 민씨 패거리 타도까지 계획에 넣었다.

그렇게 청나라와 민씨의 눈치를 살피며 기회를 엿보던 중 1884년 봄, 베트남을 둘러싸고 프랑
스가 청나라에 시비를 걸면서 8월에 전쟁이 터졌다. 프랑스에게 밀리던 청나라는 조선에 보낸
군사 3,000명 중 절반을 빼내 전쟁에 투입했는데, 급진개화파는 이것을 기회로 삼은 것이다.
하여 그해 9월 17일(음력) 김옥균은 박영효 집에서 정변을 일으킬 것을 주장하고, 민씨 패거
리를 때려잡아 권력을 장악하여 그들의 뜻을 펼치기로 했다. 그리고 홍영식을 설득해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거사일로 삼는 한편, 왜국 사관학교를 나온 신식 군대 중 자신들이 통솔하는
군인들을 동원하기로 했으며, 청나라군의 반격과 개혁 정책에 필요한 군사와 재정을 확보하고
자 왜국에게 도움을 요구했다.
왜국 역시 그들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1도 없었다. 그들을 통해 청나라와 민씨 패거리를 몰
아내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높일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국 공사(公使) 다케조에 신
이치로(竹添進一郞, 이하 다케조에)는 군사 지원과 차관을 흔쾌히 약속했다.


※ 갑신정변의 시작 (첫날)
드디어 우정국 개설 축하연이 벌어질 12월 4일(음력 10월 17일)의 서광이 밝아왔다. 홍영식이
주축이 된 축하연은 오후 늦게 시작되었는데, 왜국과 미국 공사/영사와 수행원, 개화당 인물
과 사대당 주요 인물이 자리에 참석했으며, 서재필을 비롯한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다른 개화
당 인물과 군사들은 우정국 밖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6시 정도가 되자 개화당은 우정국 옆집에 불을 질러 거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원래는 안
동별궁에 화약을 터뜨려 불을 지르려고 했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자 애궂은 옆집에 불을 질렀
다.
갑작스런 불길에 염통이 쫄깃해진 민영익(閔泳翊)이 서둘러 밖으로 나오다가 서재필(徐載弼)
이 이끄는 군사들의 칼을 받아 쓰러졌다. 그 광경에 혼비백산한 참석자들은 서둘러 도망쳤고
그 혼란을 틈타 김옥균과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서재필이 급히 경복궁(景福宮)에
들어가 고종을 알현하고 변고가 생겼으니 서둘러 피신할 것을 청했다.
전후사정을 모르던 얼떨떨한 고종은 얼굴이 새파래져 왕후를 비롯한 왕실 가족과 수행원을 콩
볶듯이 대동하여 그들을 따라 경우궁<景祐宮, 현대사옥 북쪽으로 순조의 후궁인 수빈박씨(綏
嬪朴氏)의 사당>으로 이전했다. 개화당이 경우궁을 택한 것은 그곳이 좁아서 수비하기가 쉽고
, 창덕궁과 가깝기 때문이다.

거사 소식을 들은 왜국공사 다케조에는 군사 200명을 끌고 경우궁으로 달려가 왕을 호위했으
며, 개화당도 50여 명의 수하 군사들로 왕을 호위했다.

※ 갑신정변의 절정 (둘째 날)
고종을 차지해 명분을 얻은 개화당은 12월 5일(음력 10월 18일), 고종의 재가를 받아 자신들
을 중심으로 한 새정부 조직과 구성원을 발표했다. 김옥균은 혜상공국당상(惠商公局堂上) 및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고, 홍영식은 좌우영사(左右營使) 겸 우의정(右議政), 서광범은 협판
교섭사무(協辦交涉事務), 서재필은 전영정령관(前營正領官), 박영효는 전후영사(前後營使),
이재원(李載元, 1831~1891)은 좌의정(左議政), 이재완(李載完, 1855~1922)은 병조판서(兵曹判
書), 윤웅렬(尹雄烈)은 형조판서(刑曹判書), 김윤식(金允植)을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이중에 윤웅렬, 박영효, 이재완은 친일 짓거리로 뒷끝이 영 좋지 않은 작자들임>
그리고 사대당 인물들을 왕명을 구실로 경우궁으로 소환해 단죄했는데, 좌찬성(左贊成) 민태
호(民台鎬)를 비롯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조영하(趙寧夏), 해방총관(海防總管) 민영목
(民泳穆), 좌영사(左營使) 이조연(李祖淵), 후영사(後營使) 윤태준(尹泰駿), 전영사(前營使)
한규직(韓圭稷), 내관 유재현(柳載賢) 등을 처단했다.

경우궁이 왕실 사당이다보니 머물기에는 너무 불편했다. 게다가 날씨도 춥고, 음식도 여의치
않아 경우궁 남쪽에 있는 계동궁(桂洞宮)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계동궁은 이번 거사에서 좌의
정으로 추천된 왕실 종친이자 흥선대원군의 장조카인 이재원의 집이다. 허나 명성황후와 조대
비(趙大妃)의 요구로 창덕궁 관물헌(觀物軒)으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  전의감터 표석과 나란히 자리한 도화서(圖畵署)터 표석
고려 때 도화원(圖畵院)을 계승한 관청으로 그림으로 이름 꽤나
날린 인물들이 거의 이곳을 거쳐갔다.


※ 갑신정변 3일 천하의 마지막 날 (세째 날)
12월 6일(음력 10월 18일)이 밝아오자, 개화당은 14개 조항의 정령(政令)을 공포하니 그 내용
은 다음과 같다.
① 흥선대원군을 조속히 귀국시키고 청에 대한 조공을 폐지할 것,
② 문벌을 폐지하고 백성의 평등권을 제정하여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
③ 전국의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고 간리(奸吏)를 근절하여 빈민을 구제하고 국가재정 충실
을 도모할 것,
④ 내시부(內侍府)를 폐지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등용할 것,
⑤ 전후 간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할 것,
⑥ 각도의 환상미(還上米)는 영구히 면제할 것,
⑦ 규장각(奎章閣)을 폐지할 것,
⑧ 시급히 순사를 설치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⑨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할 것,
⑩ 전후의 시기에 유배 또는 금고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시킬 것,
⑪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고 영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급히 설치할 것, 육군 대장
은 왕세자(王世子)로 할 것,
⑫ 일체의 국가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하고 그 밖의 재정 관청은 금지할 것,
⑬ 대신과 참찬은 날을 정하여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정령을 의정, 집행할 것,
⑭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參贊)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
하도록 할 것, 

여기까지는 고종과 왕후, 왕대비의 거처 불편 호소로 거처를 좀 옮겼을 뿐, 개화당의 뜻대로
순탄하게 진행된 듯 싶었다. 허나 하늘은 개화당을 버려 그들에게 큰 시련을 내리니 바로 창
덕궁으로 들아간 명성황후가 동대문 부근에 머물던 청나라 장수 원세개(袁世凱)에게 원병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에 원세개는 오후 3시경,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의 좌우영(左右營) 군사와 함께 창
덕궁으로 들어가 고종을 호위한 왜군과 개화당 군사를 공격했다. 쪽수로 밀어부친 청군의 공
격에 왜군과 개화당 군사는 속수무책으로 털리고, 고종과 개화당은 연경당(延慶堂)으로 피했
다. 허나 거기도 여의치 못해 후원 북쪽 북장문(北墻門)을 통해 북묘(北廟)로 피신했다.

청군의 공격에 염통이 콩알만해진 왜국공사는 북장문을 나오자마자 개화당과의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이끌고 줄행랑을 쳤다. 이에 개화당이 강력히 항의를 했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이미
전세는 기울었기 때문이다.
하여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거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왜국 공사와 나란히
왜국공사관(운현궁 서쪽 경운동에 있었음)으로 도망쳤으며, 홍영식과 박영교(朴泳敎)를 비롯
한 군사 7명은 고종을 따라 북묘로 갔다. 허나 청군이 북묘를 접수하면서 홍영식과 박영교 일
행, 군사 7명은 모두 살해되고 만다. 이리하여 갑신정변 삼일천하(三日天下)는 아주 허무하게
막을 고하게 되고, 고종은 그날 밤, 창경궁 동쪽에 머물던 오조유(吳兆有)의 청나라 군영으로
들어가 하루를 머물렀다.

※ 갑신정변 이후
12월 7일(음력 10월 19일), 고종은 하도감(下都監)에 있던 원세계의 군영으로 이동했다. 왜국
공사는 목을 붙잡고 왜군과 서울 거주 왜인(倭人)을 데리고 인천으로 달려가 귀국선에 올랐으
며,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과 생도 10여 명도 그들을 따라 왜국으로 튀었다.

개화당의 정변에 단단히 고생을 한 고종은 개화당이 발표한 인사개편을 취소하고 심순택(沈舜
澤)을 좌의정으로, 김홍집을 우의정, 조병호(趙秉浩)를 교섭통상사무독판(交涉通商事務督辦)
으로 삼았으며, 다음날인 12월 8일 교서(敎書)를 내려 개화당의 3일 천하 기간에 내려진 전교
를 모두 거두고, 이때에 행해진 모든 것을 무효화시켰다. 또한 정변이 터진 우정총국을 없애
고, 통리군국아문(統理軍國衙門)을 의정부에 합쳤으며, 정변으로 인한 인심수습책으로 1882년
이후 멀리 유배를 보낸 죄인들을 모두 방면한다는 전교를 내렸다.
원세계의 군영에 머물던 고종은 12월 10일, 7일간의 숨가쁘던 방황을 마치고 창덕궁으로 이어
(移御)했다.

정변 이후, 왜국은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군인이 적지 않게 죽었다며 배상금을 요구
했다. 하여 1885년 1월 9일, 조선 조정은 유감을 표하고 배상금 10만 원을 지불했다. 또한 공
사관 수축비 부담 등을 내용으로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했으며, 4월 18일에는 조선과 청
나라에게 청군과 왜군이 모두 철수할 것을 제의, 조선에 변란이 생겨 군사를 보낼 때, 파병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을 내용으로 하는 천진조약(天津條約)을 추가로 맺었다. 이 조약으로 왜국
은 청나라와 마찬가지로 조선에 대한 파병 권한을 갖게 되었다.

개화당(급진개화파)의 새로운 나라를 향한 개혁 의지는 정말 높이 살만하다. 그 꿈을 실현하
고자 정변을 일으켜 처음에는 패기가 넘치고도 남음이 있으나 그들은 국내에서의 지지기반이
빈약했고, 독자적인 힘이 아닌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렸다는 한계점이 있다. 게다가 서울에 주
둔해 있던 청나라군 1,500명을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했으며, 정변이 조금은 꼼꼼하지가 못했
다. 결국 섣부른 행동에 개혁도 못해보고, 뭐하나 국익에 제대로 도움도 주지 못했으며, 안그
래도 동아시아 대표 호구로 비리비리했던 조선을 더욱 호구로 만들어 청나라와 왜국의 영향력
만 키워버린 꼴이 되었다.
설령 정변이 성공했더라도 국내 지지기반 미약과 왜국의 힘을 빌렸다는 한계점에 부딪쳐 제대
로 개혁이나 되었을지 모르겠으며, 조선에서의 왜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발끈한 청나라와
개화당을 싫어했던 명성황후가 손을 잡아 청일전쟁이 10년 일찍 발발했을 가능성도 크다.

어찌되었던 우울했던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현장으로 지금은 언제 그런 소동이 있었
냐는 듯, 서울 도심의 명소가 되어 조용히 자리를 지킨다.


▲  UPU위임장, 여권 (복사본)
1897년 제5차 만국우편연합총회에 파견된 민상호(閔商鎬, 1870~1933)에게 고종이 내린
위임장과 여권이다. 민상호는 1910년 이후 왜정에 협력한 친일 버러지이다.


※ 갑신정변 이후 우정총국
야심차게 문을 연 우정총국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그해 12월 8일(음력 10월 21일) 폐쇄되고 말
았다. 이후 오랫동안 버려져 있다가 1895년 이후에 관립한어학교(官立漢語學校)가 들어왔으며
1904년에는 보안회(保安會)가 이곳에서 왜국을 규탄하는 대중집회를 열기도 했다.
1906년 중동학교(中東學校)가 설립되면서 한어학교 건물을 빌려 썼으며, 1908년에는 그 건물
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다. 허나 1914년 재정악화로 건물이 처분되는 지경에 이르자 조계사
서쪽 수송공원 자리로 이전했고, 이 건물은 왜인이 사들였다.

1945년 이후 국가 소유가 되어 그런데로 원형을 유지하다가 1956년 체신부에서 관리하게 되었
으며, 1970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1972년 건물을 중수하여
체신기념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이후 1987년 5월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벌여 내부에 우정
자료를 전시했는데, 그로 인해 건물이 다소 변형되어 19세기 모습을 온전하게 유지하지 못하
고 있다.
그리고 매년 봄 연등회(燃燈會)가 오면 조계사가 우정총국 뒤쪽 공원과 옆구리에 연등과 장엄
등을 1달 정도 닦아놓아 환상적인 야경을 선보인다.

* 우정총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39-7(우정국로 59, ☎ 02-734-8369)


▲  우정총국 회화나무

우정총국 옆에는 나이가 지긋한 회화나무가 우정국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있다. 이 나무는 전
의감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약 400년 정도 묵었다고 한다. 그러니 우정국 건물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벗인 셈이다. 아마도 전의감에서 정자나무 용으로 심은 것으로 보이며, 이 건물을
거쳐간 모든 것을 말없이 지켜봤다. 특히 갑신정변 때는 권력과 야망에 대한 인간들의 부질없
는 행동에 몸서리를 쳤을 것이다. 이렇듯 역사적인 현장에 있는 나무이나 아직 그 흔한 보호
수 등급도 얻지를 못했다.

체신기념관으로 거듭난 우정총국 내부에는 우정(郵政) 관련 문서와 자료들이 있다. 허나 대부
분은 진짜가 아닌 모조품이라 은근히 허탈하게 만드는데, 이들의 진품과 원본 상당수는 천안(
天安)에 있는 우정박물관에 있다.


▲  경성, 제국, 매일, 황성신문 허가신청서 및 허가서
1898년에 작성된 신문 허가 신청서와 허가서 (복사본)

▲  서울 지역 우정집신분전구역도(郵征集信分傳區域圖)
1884년 서울시내 우표 판매 설치도 및 집배 구역도

▲  대한제국 시절 우편물의 무게와 규격을 확인하던 저울과 자

▲  1900년에 제정된 국내외 우편 요금표 (복제본)

▲  주본안(奏本案) - 1903년 우정국 고급직원 임용과 승진에 관해
고종에게 재가를 요청한 문서 (복사본)

▲  우정규칙적요(郵征規則摘要)
1884년에 제작된 우정국 우편물 취급에 관한 기본 법규 (역시 복제품)

▲  대한제국 시절 우정국 우체부 아저씨의 모습과 의복
처음에는 하얀 두루마기 옷이었다가 차차 활동에 적합한 근대식 옷으로 변화했다.

▲  체신기념관으로 거듭난 우정총국 내부

▲  1972년 중수 기념으로 세운 우정총국 중수 기념비

▲  우정총국 뒤쪽에 닦여진 공원과 편지봉투 모양의 낙서장
그리고 화사하게 익어간 붉은 단풍나무


 

♠  인사동(仁寺洞)에서 만난 숨겨진 명소들

▲  경운동 민병옥 가옥(慶雲洞 閔丙玉 家屋)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5호

서울 도심의 대표 전통거리로 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인사동에는 오래된 명소들이 많이 깃들
여져 있다. 그들 상당수는 장대한 세월과 개발의 칼질에 사라지고 그들의 추억을 쫓는 표석만
아련히 있을 뿐이며, 제대로 남은 것은 천도교 중앙대교당과 경운동 민병옥가옥, 승동교회 등
얼마 되지 않는다. 허나 사라진 명소건, 살아있는 명소건 모두 조선 중/후기에서 20세기에 걸
쳐진 것들로 둘러보면 다 살이 되고 지식이 된다.

천도교(天道敎)의 중심지인 수운회관과 천도교 중앙대교당 남쪽에는 전통 돌담에 둘러싸인 고
즈넉한 한옥이 있다. 그 집이 인사동 주변에 몇 남지 않은 오래된 한옥인 경운동 민병옥 가옥
이다.
이 집은 왜정 때 친일파 사업가로 더러운 이름을 남긴 민영휘(閔泳徽, 1852~1935)가 1930년대
에 지은 것이다. 그 작자는 아들인 민대식(閔大植, 1882~?)과 민병옥에게 같은 꼴의 기와집 2
채를 지어주었는데, 이들 집을 이 땅 최초의 근대 건축가인 박길룡(朴吉龍, 1898~1943)이 직
접 설계했다. 민병옥 가옥 주변에 있던 민대식 집은 주인이 바뀌면서 월계동(月溪洞)으로 넘
어가 예안이씨 재실인 각심재(恪心齋)로 살고 있다.

박길룡은 한옥 개량에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전통 한옥에서 채광이 잘 되지 않는 안방과 불편
한 동선을 해소하고자 사랑방과 안방, 문간방을 하나로 이어주는 독특한 모양의 'H'모습의 평
면 집을 설계해 이 집을 지었다. 안방과 주요 방들은 전면에 두어 채광과 전망을 고려했고,
대청을 1칸 규모로 줄인 대신 화려한 응접실을 두었다. 현관과 화장실, 욕실은 후면에 두었으
며, 서양 건축물처럼 모두 복도로 연결시켰다.

왜정 시절 전통 한옥과 서양식 고급 주거 양식이 혼합된 개량 한옥으로 친일 행적으로 막대한
부를 챙긴 친일 버러지와 그런 아비를 만나 평생 호의호식한 금수저 작자들의 집이란 점이 꽤
거슬린다. 하지만 사람이 미운 것이지 집까지 무슨 죄가 있겠는가. 얼굴에 철면피를 깔며 밥
맛 없이 구는 친일매국 후손들을 싸그리 잡아 족칠 생각을 해야지 괜히 집까지 구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민가다헌'이란 한정식당으로 바쁘게 살았으나 다시 찾아가보니 그 식당은 사라지고
텅 비어있었다. (2018년 11월 기준) 열려있던 대문은 굳게 잠겨져 그저 담장 밖에서 까치발로
바라보는 수 밖에는 도리가 없다.
민병옥이 죽고 그 자손인 '민익두'가 차지해 '민익두가'란 이름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
나, '경운동 민병옥 가옥'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소유자가 오래전에 갈렸음에도 그 이름은
아직까지도 변함이 없다. 그러니 이 집을 떠난 친일파 아들의 이름은 그만 쓰고 소유자의 이
름으로 명칭을 바꿔야 될 것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은 보통 그 소유자의 이름을 붙임)


▲  굳게 닫힌 대문과 담장 너머로 보이는 민병옥 가옥

▲  민병옥 가옥 현관 (옛 민가다헌 시절)

작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가옥 정원에는 여러 나무와 식물이 심어져 있고, 동자석(童子石)과
수석, 여러 석물들이 놓여져 정원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다. 우리 전통식과 서양식, 왜식
이 적절히 섞인 정원으로 동쪽 담장에는 대나무가 늘씬한 모습으로 늘어서 있어 눈길을 끈다.

참고로 민병옥 가옥과 천도교 중앙대교당에는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친일파로 추잡한 이름을
남긴 박영효의 집이 있었다. 1880년 서대문 밖에 공사관을 차린 왜국은 임오군란 이후 그의
집을 사들여 여기로 이전했으며, 갑신정변 때 불타버리자 1885년에 남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 66-7 (인사동10길 23-9)


▲  충훈부(忠勳府)터 표석

인사동 북쪽 안국동4거리에는 공신과 왕족들에게 상을 내리고 그들을 관리하던 충훈부란 관청
이 있었다. 처음에는 공신도감(功臣都監), 충훈사(忠勳司)라 불렸으나 1459년에 충훈부로 이
름을 고쳤으며, 표훈원(表勳院)이라 불리기도 했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훈장 수여와 제조를 담당했으며, 을사조약 때 조병세(趙秉世)가 조약 파기
와 을사5적을 처단할 것을 요구하다가 자결한 애환의 장소이기도 하다. 1910년 이후에는 왜정
이 친일매국노와 왜정에 협조한 조선 황족들에게 훈장을 무더기로 만들어 뿌리면서 업무가 마
비되기도 했다.
충훈부는 6.25시절에 크게 파괴되었으며, 이후 보신각(普信閣)을 복원할 때 이곳의 기와 일부
를 임시방편으로 사용했다. 즉 보신각 재건에 충훈부가 희생된 것이다.


▲  죽동궁(竹洞宮)터 (태화빌딩 부근)

죽동궁은 순조(純祖, 재위 1800~1831)가 장녀인 명온공주(明溫公主, 1810~1832) 부부를 위해
지어준 것이다.
명온공주는 1823년 김현근(金賢根)에게 시집을 갔는데 남편에게는 공교롭게도 무시무시한 정
신병이 있었다. 그 병을 고치고자 날마다 무당을 불러 굿을 했으며, 무당들은 대나무칼을 흔
들며 굿을 했다고 전한다. 대나무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죽도궁(竹刀宮)이라 불렸
으며, 공주는 남편의 정신병과 선천적인 병약 체질로 22살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고 만다.

철종(哲宗) 이후 죽동궁은 민씨 패거리에게 넘어가 민영익(閔泳翊)이 집으로 삼았다. 그는 갑
신정변 때 우정국에서 서재필이 이끄는 군사들에게 난도질을 당해 쓰러졌으나 용케도 숨은 끊
어지지 않았고, 인근에 살던 묄렌도로프가 구조하여 알렌을 불러 치료하면서 저승의 문턱에서
간신히 돌아온 행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1886년 국왕폐위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청나라로 망명했으며, 귀국을 거부하고 청나라 상해(上
海)에서 많은 돈을 벌며 떵떵거리고 살다가 1914년에 죽었다. 한편 민씨 일가는 민영익이 아
들도 없고 귀국도 하지 않자 민준식(閔俊植)을 그의 양자로 삼았는데, 민영익은 청나라에서
부인을 만들어 늦게 아들 민정식(閔庭植)을 두었다.
민영익이 죽자, 양자(養子)와 친자 간의 진흙탕 튀기는 재산싸움이 일어나 장안의 이목을 끌
기도 했으며, 결국 1924년 앞서 민병옥 가옥을 지었던 민영휘에게 넘어갔다. 허나 가산은 거
덜나고 집과 살림살이는 모두 경매 처분되었으며, 죽동궁은 철거되어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지
고 말았다.


▲  순화궁(順和宮)터 (태화빌딩 부근)

죽동궁터 표석 옆에는 헌종(憲宗)의 후궁인 경빈(慶嬪)김씨의 거처이자 사당인 순화궁터 표석
이 고개를 들고 있다.
경빈김씨는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07년 6월 세상을 떴는데, 이완용(李完用)의 형 이윤
용(李允用, 1854~1939)이 반송방(盤松坊, 서대문 서쪽)에 있던 자신의 땅과 순화궁 땅을 교환
하여 이곳을 차지했다. (순화궁은 반송방으로 이전됨)

이준용은 동생인 이완용과 쌍벽을 이루던 더러운 매국노로 1911년 3월 동생에게 이 집을 넘겼
다. 이완용은 그 집에 2년 가량 있다가 옥인동(玉仁洞)에 징그럽게 큰 저택을 마련해 옮기고
이곳은 세를 주었는데, 태화관(太華館)이란 요리집이 들어와 장사를 했고, 장안 기생의 본거
지인 명월관(明月館)의 지점이 되었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이 이곳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그해 5월 명월관 본점이 불타
자 이곳이 자연스럽게 본관이 되었다. 1921년 전세 계약이 만료되면서 돈의동 옛 장춘관 자리
로 이전했으며, 이완용은 그 집을 남감리회 선교본부에게 비싸게 팔아먹었다.
1939년 기존 건물을 부시고 새로 지었으나 1980년 도심 재개발계획으로 무심히 사라졌으며 그
자리에는 태화빌딩과 하나로빌딩이 새로 뿌리를 내렸다.


▲  태화빌딩 앞에 자리한 3.1독립선언유적지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민족대표 33인이 명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읽었다.
흔히 태화관으로 알고 있는데, 명월관이 맞는 표현이다.

▲  태화빌딩 로비에 걸린 민족대표 33인 명월관 3.1독립선언도
상상으로 그려진 그림으로 3.1운동과 관련된 자료로 많이 등장하여
무척 낯이 익다.

▲  유리 안에 갇힌 서울의 중심점 표석

태화빌딩 동쪽에는 하나로빌딩이 자리해 있다. 이 건물 1층 로비에는 흥미를 끄는 석물 2개가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는데, 바로 서울의 중심점 표석(표지석)과 하마석이다. 서울을 거의 꿰
고 산다는 나도 그들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고, 건물 안에 이런 것들이 숨어있을 줄은 상
상도 못했는데 그 상상을 보기 좋게 깨버린 것이다. (석물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서울 중심점 표석은 1896년에 세워졌다. 말 그대로 서울의 중심점을 알리는 표지석으로 1395
년에 한양으로 천도한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 도성(都城)의 중심을 알리는 지표석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1896년 건국의 번지 중심 지점이라 하여 지금의 표석을 세웠다.
가운데에 굵직하게 생긴 네모난 표석을 세우고, 그 주위로 난쟁이 반바지 반 접은 정도의 낮
은 돌기둥 4개를 세웠는데, 원래는 주변에 있었으나 빌딩 지하로 가져왔으며 다시 1층으로 옮
겨 햇볕을 보게 했다. 또한 유리막 안에 넣어 그들의 신변을 지킨다.

중심점 표석 옆에는 2단으로 된 돌계단이 있는데, 이는 옛 순화궁의 유일한 유물로 말을 타고
내릴 때 쓰던 하마석(下馬石)이다. 그 역시 주변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빌딩 지하로 수습했고,
1층으로 옮겨 표지석과 나란히 두었다.

이들을 빌딩 안에 계속 두는 것보다는 바깥으로 옮겨 바람이라도 쐬게 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원래 밖에 있던 존재인만큼 답답하게 실내에 두지 말고 밖으로 보내 더 많은 사람들이 보게
말이다. 또한 도난과 건강이 우려된다면 유리막을 씌우거나 조그만 보호용 건물을 세우는 것
도 괜찮을 것이며, 100년 이상 된 서울의 유일한 중심 표지석인만큼 지방문화재로 지정해 제
대로 관리를 해야 될 것이다.

* 서울중심점 표석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194-4(인사동5길 25, 하나로빌딩 1층)


▲  옛 순화궁의 유일한 유물인 하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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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종로구

동대문성곽공원, 이화마을, 낙산(낙산공원) 201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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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성북구

성북동 선잠단터, 최순우옛집, 삼청각 201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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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종로구

인왕산 인왕사, 국사당, 선바위, 해골바위 201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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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종로구

서울연등회(연등축제), 조계사 201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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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성북구

정릉 봉국사 201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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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동작구

국립현충원(창빈안씨묘역, 부안군이석수묘역),
동작충효길(현충원길), 이수폭포

201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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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 (백사실)

201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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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성북구
종로구

북악산 주능선 (숙정문, 촛대바위, 청운대,
백악마루, 창의문)

201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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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종로구

배화여고생활관, 이상범가옥, 백호정, 자수궁터,
송석원터

201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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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종로구

창덕궁 후원뒷길, 흥덕사터, 북묘하마비,
우암 송시열집터

201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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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종로구

북촌(고희동가옥, 기기국번사창, 삼청동길) 201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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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중구
용산구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 남산공원길, 남산 정상
(팔각정), 남산야외식물원

201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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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도봉구

도봉산 천축사, 마당바위, 자운봉, 포대능선

201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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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서대문구

인왕산 개미마을, 환희사, 큰절골

201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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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강동구

암사동 선사유적지

201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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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서대문구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

201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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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종로구

인왕산 수성동계곡

201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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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강북구

북한산 구천폭포(구천계곡),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201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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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은평구

북한산 진관사, 진관사계곡

201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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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성북구

심우장, 수연산방, 최순우옛집

201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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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강남구

대모산, 불국사, 구룡산

201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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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종로구

부암동 무계원, 무계정사터(안평대군 이용집터),
청계동천, 반계 윤웅렬별장

201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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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종로구

한양도성, 행촌동 은행나무, 딜쿠샤, 홍난파가옥
, 월암근린공원

201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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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금천구

호암산 (삼성산성지, 호압사, 호암산 정상)

201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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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서대문구

안산, 무악동봉수대 (안산자락길, 무악정)

201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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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종로구

중앙고등학교(본관, 서관, 동관), 창덕궁 신선원전

201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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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성북구

보문동 보문사 201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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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광진구

홍련봉 보루,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1/5/6보루, 고구려정

201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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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동대문구
노원구

회기동 연화사
월계동 기원사

201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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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성북구

개운산 보타사 201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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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동작구

국립현충원 호국지장사 201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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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 (백사실)

201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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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종로구

삼청공원, 북악산 말바위

201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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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은평구

북한산 삼천사 (삼천사계곡)

201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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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관악구

강감찬생가터, 낙성대(안국사), 난곡로 느티나무,
신림동 굴참나무

201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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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종로구
성북구

한양도성, 낙산공원, 비우당, 자지동천,
삼군부총무당(삼선공원)

201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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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종로구

서촌 박노수가옥(박노수미술관), 옛 윤덕영 집

201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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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종로구
은평구

북한산둘레길 옛성길, 구름정원길, 탕춘대성 암문

201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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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강서구

양천향교, 궁산, 소악루, 양천고성터, 관산성황당

201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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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

201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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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종로구

장면 가옥, 흥덕사터, 북묘 하마비, 송시열집터

201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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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강서구

능말 은행나무/느티나무,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개화산 약사사

201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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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종로구
서대문구

세검정, 석파정 별당(석파랑), 홍지문과 탕춘대성
옥천암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201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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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동대문구

선농단(선농대제), 선농단 향나무,
선농단역사문화관

201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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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성북구

안암동 개운사

201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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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종로구

낙산 청룡사

201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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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강북구

북한산 화계사

201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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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은평구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구름정원길,
경천군 송금비, 백화사, 화의군묘역

201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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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노원구

수락산 벽운동계곡, 염불사, 영원암, 귀임봉

201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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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구로구

궁동저수지생태공원, 정선옹주묘역, 구로올레길,
지양산

201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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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종로구

윤동주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201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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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성북구

북악산 북악하늘길1산책로, 2산책로(김신조루트)

201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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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광진구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5보루

201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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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성북구

성북동 최순우옛집, 수연산방(상허 이태준 가옥)

201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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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종로구
서대문구

박종화가옥, 보현산신각, 홍지문, 산모퉁이까페
옥천암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201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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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종로구

북한산 금선사 (목정굴)

201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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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중랑구

숙선옹주묘역, 봉화산(아차산봉수대터),
봉화산둘레길, 충익공 신경진 묘역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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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노원구

불암산 학도암, 중계본동 느티나무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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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강북구

수유동 분청사기가마터, 신익희묘, 김병로묘,
유림묘, 북한산둘레길 순례길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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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도봉구

무수골, 무수골느티나무, 전주이씨영해군파묘역

201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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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서대문구

봉원사(서울연꽃문화축제)

201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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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노원구

수락산 노원골, 수락산보루, 동막골, 도선사

201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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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종로구

북촌문화센터, 김형태가옥, 이준구가옥,
북촌 가회동 일대

201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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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도봉구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능원사, 도봉사, 윗무수골

201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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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종로구

월암근린공원(한양도성), 홍난파가옥, 딜쿠샤,
행촌동 은행나무, 황학정

201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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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관악구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관악산 사당능선,
선유천국기봉, 관음사국기봉, 관음사

201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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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종로구

청운문학도서관, 청운공원, 인왕산자락길
(이빨바위, 가온다리, 산들수목원약수터)
수성동계곡

201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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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금천구

호압사, 호암산, 석구상, 호암산성터,
한우물, 불영암, 칼바위

201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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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인천 - 4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글 링크

1

부천

야인시대촬영장, 루미나리에축제 20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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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양 북한산성(대서문, 중흥사터, 북한산행궁터) 200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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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양 북한산성(태고사, 산영루터, 북한산성계곡) 200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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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남 망경암, 봉국사 (사월초파일) 200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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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오산
수원

오산 물향기수목원 / 수원 팔달문

20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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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남양주

수락산 흥국사

2008, 3 ☞ 블로그글 보기
7 남양주

덕릉마을 산신각, 덕흥대원군 묘역

2008, 5 ☞ 블로그글 보기

8

파주 용미리 마애2불입상, 용암사 2008, 10 ☞ 블로그글 보기
9

안양

안양사, 석수동마애종, 석수동석실고분 2009, 3 ☞ 블로그글 보기
10

안성

서운산 석남사 (사월초파일)

2009, 5 ☞ 블로그글 보기
11

하남

춘궁동동사지(동사지3/5층석탑), 광주향교

2010, 2 ☞ 블로그글 보기
12

안양

삼성산 염불암, 중초사지당간지주, 안양예술공원

2010, 12 ☞ 블로그글 보기
13

양평

용문산 사나사, 사나사계곡

2011, 5 ☞ 블로그글 보기
14

강화

강화도 선원사 (연꽃축제)

2011, 8 ☞ 블로그글 보기
15

고양

북한산성 중성문, 노적사, 중흥사터, 봉성암,
산영루터

2011, 8 ☞ 블로그글 보기
16

포천

반월성, 청성공원, 포천향교

2011, 10 ☞ 블로그글 보기
17

하남

선법사(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

2011, 11 ☞ 블로그글 보기
18

고양

한미산(노고산) 흥국사

2011, 12 ☞ 블로그글 보기
19

고양

중남미문화원, 벽제관터

2012, 5 ☞ 블로그글 보기
20

강화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장정리5층석탑, 고려궁터,
김상용 순절비

2012, 8 ☞ 블로그글 보기
21

이천

관고리 석불입상, 설봉공원(설봉저수지),
설봉서원, 설봉산 영월암

2012, 10 ☞ 블로그글 보기
22

양평

용문산 용문사,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

2012, 11 ☞ 블로그글 보기
23

파주

고령산 보광사

2013, 2 ☞ 블로그글 보기
24

화성

제암리 3.1운동순국유적 2014, 3 ☞ 블로그글 보기
25

파주

용미리 마애2불입상, 용암사 2014, 12 ☞ 블로그글 보기
26

의정부

도봉산 회룡사, 석굴암, 회룡골 2015, 7 ☞ 블로그글 보기
27

고양,
서울
종로구

북한산 북한산성계곡, 태고사, 행궁터,
금위영이건기비, 금위영유영지, 경리청상창터,
대남문, 문수사

2015, 12 ☞ 블로그글 보기
28

의왕

청계산 청계사

2016, 2 ☞ 블로그글 보기
29

강화

외포리, 석모도 보문사

2016, 7 ☞ 블로그글 보기
30

포천

백운산 백운계곡, 흥룡사

2016, 7 ☞ 블로그글 보기
31

양주
서울

우이령길(교현리~우이동), 우이동유원지

2016, 11 ☞ 블로그글 보기

32

인천

소래철교, 소래포구(소래어시장), 장도포대지
(댕구산), 논현포대

2017, 2 ☞ 블로그글 보기

33

수원

서호(서호공원), 항미정 2017, 6 ☞ 블로그글 보기

34

광명

광명동굴, 가학산 2017, 7 ☞ 블로그글 보기

35

양주

오봉산 석굴암, 우이령길 2017, 11 ☞ 블로그글 보기

36

안양

안양예술공원, 안양사지, 김중업건축박물관,
석수동 마애종, 안양사

2018, 1 ☞ 블로그글 보기

37

강화

월곶돈대, 연미정, 강화평화전망대

2018, 6 ☞ 블로그글 보기

38

과천

관악산 문원계곡, 문원폭포, 문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보광사

2018, 7 ☞ 블로그글 보기

39

군포

수리산(철쭉동산, 수리산 산림욕장, 수리산
둘레길), 수리사, 반월호수

2018, 9 ☞ 블로그글 보기

40

인천

양주성금속비, 용궁사, 영종도 백운산

2018, 12 ☞ 블로그글 보기

41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 (구석기 겨울여행축제)

2019, 1 ☞ 블로그글 보기

42

강화

교동도 (교동읍성, 교동향교, 화개사, 화개산)

2019, 6 ☞ 블로그글 보기

43

화성

봉림사, 구봉산 당성

2019, 10 ☞ 블로그글 보기

 

강원도 - 2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링크

1

양양

낙산사, 홍련암, 오색약수, 성국사, 설악산 주전골 200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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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릉 객사문, 오죽헌, 경포대, 굴산사터, 신복사터 200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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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창 대관령 양떼목장 200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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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릉
동해

경포대해수욕장, 등명낙가사, 묵호항 200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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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동해 감추사, 감추해변 200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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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태백 구문소 200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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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양구

양구 선사박물관 20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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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화천

토고미마을(산천어축제), 딴산 2011, 1 ☞ 블로그글 보기
9

화천,양구
춘천

화천 평화의댐, 세계평화의종공원,
춘천 윗샘밭

2011, 2 ☞ 블로그글 보기
10

평창

남산공원, 송학루, 노산성

2011, 12 ☞ 블로그글 보기
11

삼척

미인폭포(통리협곡), 여래사

2012, 6 ☞ 블로그글 보기
12

정선

정선5일장, 봉양리뽕나무, 아우라지

2012, 7 ☞ 블로그글 보기
13

영월

보덕사, 금몽암, 낙화암, 금강정, 금강공원

2013, 11 ☞ 블로그글 보기
14

태백

태백산 (당골, 석탄박물관, 석장승, 눈꽃축제장,
단군성전)

2014, 2 ☞ 블로그글 보기
15

동해

추암(추암해수욕장, 촛대바위), 해암정,
추암조각공원, 북평5일장

2014, 7 ☞ 블로그글 보기
16

화천

화천 산천어축제(화천읍내, 북한강) 2015, 1 ☞ 블로그글 보기
17

정선,태백

함백산, 만항재 2015, 9 ☞ 블로그글 보기
18

정선

아라리촌, 아우라지 2015, 12 ☞ 블로그글 보기
19

양구

팔랑폭포, 팔랑계곡 2016, 6 ☞ 블로그글 보기
20

삼척

미인폭포(통리협곡), 여래사

2016, 7 ☞ 블로그글 보기
21

홍천

삼봉약수, 삼봉자연휴양림, 운두령

2017, 6 ☞ 블로그글 보기
22

춘천

사명산 추곡약수, 천전리 고인돌

2018, 2 ☞ 블로그글 보기
23

원주

치악산 구룡사, 구룡사계곡, 학곡리 황장금표

2019, 3 ☞ 블로그글 보기

 

충청북도 - 1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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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은
대전

보은 삼년산성
대전 동춘당 / 송애당 / 법동 석장승

20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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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동 영동향토민속자료전시관, 가학루, 황간향교 20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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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충주

단호사, 사문리당산나무숲, 미륵리사터,
하늘재, 충주호

20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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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단양

사인암, 청련암, 중선암, 북상리 시골

20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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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괴산

각연사 (각연사계곡)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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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괴산

원풍리 마애2불병좌상, 홍범식고가, 개심사

20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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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옥천

정지용 생가(정지용문학관), 육영수생가,
죽향리초교 구교사, 죽향리사지3층석탑, 옥천성당

201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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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청주

낙가산 보살사, 명암약수터, 명암저수지

201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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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단양

북상리 시골, 사인암, 청련암

201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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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단양

구인사 (구봉팔문)

201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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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괴산

산막이옛길 (괴산호, 등잔봉)

201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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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충청남도, 세종 - 16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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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안 태화산 광덕사 200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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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진
태안

행담도, 꽃지해수욕장, 방포항, 안면도자연휴양림,
안면암

200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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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전

식장산 고산사

2009. 11 ☞ 블로그글 보기
4 공주

계룡산 동학사

2012. 3 ☞ 블로그글 보기
5 공주

계룡산 남매탑, 삼불봉, 천진보탑, 용문폭포

2012. 3 ☞ 블로그글 보기
6 공주

계룡산 갑사

2013. 2 ☞ 블로그글 보기
7 태안

신진도(안흥외항), 마도, 안흥항, 안흥성(태국사)

2013, 8 ☞ 블로그글 보기
8 홍성

용봉산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용봉산자연휴양림)

2014, 6 ☞ 블로그글 보기

9

당진
아산

장고항, 삽교호관광지, 외암리민속마을

2015, 11 ☞ 블로그글 보기

10

예산

금오산 향천사

2016, 1 ☞ 블로그글 보기

11

대전

계족산(계족산성, 계족산 황톳길), 장동산림욕장

2016, 10 ☞ 블로그글 보기

12

보령

성주사지, 성주천 가로수길

2017, 2 ☞ 블로그글 보기

13

서산

해미읍성, 해미순교성지

2017, 12 ☞ 블로그글 보기

14

대전

장태산자연휴양림, 형제산

2018, 7 ☞ 블로그글 보기

15

천안

태조산 각원사, 성불사 2019, 1 ☞ 블로그글 보기

16

세종

비암사, 도깨비도로 2019, 3 ☞ 블로그글 보기

 

전라북도 - 15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링크

1

부안 상록해수욕장, 내소사, 곰소항 200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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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수 의암사(논개사당) 200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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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주
장수

한풍루, 무주향교
의암송, 장수향교

200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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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주 전주한옥마을, 오목대(이목대), 한벽당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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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군산

동국사, 은적사, 발산초등학교

20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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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군산

응항, 선유도, 고군산군도 일주

201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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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순창

강천산(강천산계곡, 구장군폭포), 강천사, 삼인대

201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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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임실

오수 의견비, 오수망루, 오수리석불, 해월암

201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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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김제 망해사, 새만금바람길, 심포항 201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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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부안 변산 내소사 201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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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무주 적상산(적상호, 적상산성, 적상산사고), 안국사 201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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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무주

무주머루와인동굴, 덕유산무주리조트(곤도라),
덕유산 설천봉

201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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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김제 모악산 귀신사 201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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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완주 종남산 송광사 201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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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완주 모악산 대원사, 수왕사 201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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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전라남도 - 14개

연번

지역 가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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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성
담양
나주

장성 방울샘,
담양 관방제림 / 담양읍 5층석탑 / 석당간
나주 남고문 / 정수루

200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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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광 내산서원 200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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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주
광주

정수루, 금성관
광주 풍영정

200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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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순천 금전산 금둔사 2009, 11 ☞ 블로그글 보기

5

순천 개운산 동화사 2010, 1 ☞ 블로그글 보기

6

순천 조계산 천자암 2010, 2 ☞ 블로그글 보기

7

장성 백암산 백양사 2011, 9 ☞ 블로그글 보기

8

광주 무등산 원효사 2011, 10 ☞ 블로그글 보기

9

구례 지리산 천은사(천은제) 2012, 4 ☞ 블로그글 보기

10

곡성 동리산 태안사(태안사계곡) 2013, 5 ☞ 블로그글 보기

11

광양 백계산 옥룡사터 (동백나무숲, 운암사) 2015, 4 ☞ 블로그글 보기

12

목포

노적봉, 유달산(목포시사), 달성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갓바위

2017, 9 ☞ 블로그글 보기

13

나주

덕룡산 불회사, 불회사 석장승

2018, 12 ☞ 블로그글 보기

14

영광

불갑산 불갑사(꽃무릇군락지)

2019, 9 ☞ 블로그글 보기

 

대구, 경상북도 - 2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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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주

반월성, 석빙고, 남산 서쪽(용장사터, 천룡사터)

200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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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경 문경새재(여궁폭포, 혜국사, 주흘산, 주흘관) 20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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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달성 비슬산(유가사 / 암괴류), 현풍석빙고 200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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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구미 의구총, 낙산리고분군, 낙산리3층석탑 200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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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예천
상주

개심사지5층석탑
용화사(증촌리석불좌상/입상), 전고령가야왕릉

200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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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주

남산 불곡 석불좌상, 신문왕릉 2009, 7 ☞ 블로그글 보기
7 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불무사)

2009, 9 ☞ 블로그글 보기
8

영덕
울진

고래불해수욕장, 후포항, 월송정, 월송해변 2011, 6 ☞ 블로그글 보기
9

달성

다람재, 도동서원, 이노정 2012, 12 ☞ 블로그글 보기
10

청도

남산 낙대폭포 2013, 7 ☞ 블로그글 보기
11

달성

비슬산 용연사 2014, 2 ☞ 블로그글 보기
12

예천

회룡포, 비룡산 2014, 7 ☞ 블로그글 보기
13

경산

팔공산 갓바위, 선본사 2014, 11 ☞ 블로그글 보기
14

경주

효소왕릉, 성덕왕릉, 성덕왕릉귀부 2014, 12 ☞ 블로그글 보기
15

경주

남산 보리사(미륵곡 석조여래좌상) 2015, 10 ☞ 블로그글 보기
16

안동

도산서원 2016, 1 ☞ 블로그글 보기
17

대구

팔공산 파계사, 대비암, 성전암 2016, 4 ☞ 블로그글 보기
18

경주

효현동3층석탑, 법흥왕릉, 율동 마애여래3존입상 2016, 11 ☞ 블로그글 보기
19

의성

문소루, 구봉산, 금성산고분군, 문익점면작기념비 2016, 12 ☞ 블로그글 보기
20

예천

개심사지5층석탑, 동본리석조여래입상과
3층석탑, 초간정(초간정 원림)

2018, 3 ☞ 블로그글 보기
21

상주

장각폭포, 오송폭포(성불사), 옥양폭포

2018, 6 ☞ 블로그글 보기
22

영주
봉화

휴천동 지석 및 입석
오전약수, 삼계서원, 석천계곡, 석천정사

2019, 6 ☞ 블로그글 보기
23

경주

감산사, 연지암, 숭복사(숭복사터)

2019, 8 ☞ 블로그글 보기

 

부산 - 17개

연번

지역 가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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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영구
강서구

광안리해수욕장, 가덕도(외양포, 대항, 세바지)

200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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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서구
서구

망상도/유주암, 송도해변, 송도해수욕장

2008, 9 ☞ 블로그글 보기
3

기장군

불광산 (장안사. 장안사계곡) 2009, 1 ☞ 블로그글 보기
4

기장군

불광산 (척판암, 백련암) 2009, 1 ☞ 블로그글 보기

5

서구
북구

내원정사, 만덕사(만덕사 당간지주), 알터유적 2009, 9 ☞ 블로그글 보기

6

금정구

금정산(금정산성, 국청사) 2011, 1 ☞ 블로그글 보기

7

금정구

금정산 미륵사, 금성동 2011, 1 ☞ 블로그글 보기

8

강서구

가덕도(가덕도등대, 외양포, 대항, 새바지) 2012, 7 ☞ 블로그글 보기

9

사상구
강서구

백양산 운수사, 백양산 숲길,
범방동3층석탑, 부산경남경마공원

2012, 12 ☞ 블로그글 보기

10

사하구

몰운대, 다대포

2013, 7 ☞ 블로그글 보기

11

남구

백운포, 오륙도 (오륙도등대, 등대섬) 2014, 1 ☞ 블로그글 보기

12

사하구
서구

승학산, 구덕문화공원 2014, 11 ☞ 블로그글 보기

13

금정구

금정산(고당봉, 금샘), 원효암, 금정산성 2015, 4 ☞ 블로그글 보기

14

해운대구

해운대 동백섬, 해운대해수욕장, 미포,
달맞이길, 문텐로드, 청사포, 구덕포, 송정해수욕장

2015, 7 ☞ 블로그글 보기

15

연제구

배산, 배산성터

2016, 9 ☞ 블로그글 보기

16

기장군

죽성리해송, 죽성리왜성, 황학대, 두호포구,
기장성당, 월전포구

2017, 4 ☞ 블로그글 보기

17

기장군

월전~대변 해안가, 대변항, 죽도, 연하리 해변,
오랑대, 해동용궁사

2017, 7 ☞ 블로그글 보기

 

울산, 경상남도 - 2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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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울산
부산

처용암
옥련선원 / 정묘사(배롱나무)

200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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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창원 무학산(관해정), 가포해변 20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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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해

김해 수로왕릉

20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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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진주
사천

진주 금선암
사천읍성(산성공원), 대방진굴항

2008, 1 ☞ 블로그글 보기
5

함안
창원

함안박물관, 말산리/도항리고분군
진해 우체국

2008, 1 ☞ 블로그글 보기
6

창원

불모산 성흥사, 대장동계곡

2008, 9 ☞ 블로그글 보기
7

밀양

밀양 표충비, 무안리 향나무(홍제사) 2009, 1 ☞ 블로그글 보기
8

양산

천성산 홍룡사(홍룡폭포), 원효암 2009, 6 ☞ 블로그글 보기

9

울산 일산해수욕장, 대왕암공원 2009, 7 ☞ 블로그글 보기

10

창녕

창녕석빙고, 송현동석불좌상, 송현동고분군,
진흥왕척경비, 만옥정공원, 남지철교

2010, 5 ☞ 블로그글 보기

11

거창

수승대(귀연서원, 요수정)

2011, 7 ☞ 블로그글 보기

12

울주
밀양

서생 나사리해변,
밀양 얼음골(천황사)

2011, 7 ☞ 블로그글 보기

13

함양

상림공원, 한남군묘역

2012, 7 ☞ 블로그글 보기

14

산청

목면시배유지, 배산서원, 덕천서원, 남명조식유적

2012, 9 ☞ 블로그글 보기

15

남해

호구산 용문사, 남해자생식물단지, 미국마을,
용소리/금평해변

2012, 11 ☞ 블로그글 보기

16

통영

통영 달아공원

2013, 3 ☞ 블로그글 보기

17

울주

가지산 석남사 (석남사계곡)

2013, 9 ☞ 블로그글 보기

18

고성

연화산 옥천사, 공룡발자국화석

2013, 11 ☞ 블로그글 보기

19

창원

불모산 성주사 (성주사계곡)

2014, 10 ☞ 블로그글 보기

20

울주

서생포왜성

2016, 6 ☞ 블로그글 보기

21

산청

덕양전, 전 구형왕릉, 왕산(유의태약수터,
왕산사지)

2018, 10 ☞ 블로그글 보기

 

제주도 - 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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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

외도 월대, 수산봉, 수산리곰솔, 납읍리
납읍 금산공원(납읍리 난대림)

2019, 3 ☞ 블로그글 보기


 

기타 지역 - 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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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열도

동경 지역(긴자, 록뽕키, 우에노, 도쿄도청타워,
아사쿠사<관음사>, 신주쿠, 코쿄, 디즈니랜드)

200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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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하에 공개된 글 중에서 하자가 없는 글만 선정해서 지역별로 모았습니다.
2. 2003년 4월 이전 글은 모두 제외했습니다.
3. 답사기 내용과 사진을 전체 혹은 일부라도 퍼갈 경우, 반드시 출처와 원작자(박융) 이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4. 사진이 일부 뜨지 않는 글들이 약간 있습니다. 이 점 널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5. 공개된 글 중, 추후 업데이트 판이 나올 경우, 이전 판은 모음집에서 삭제 될 수 있으며 2개 이상의 시리즈로
   작성된 글 중 추후 본인 필요에 따라 1개나 2개로 통폐합 정리될 수 있습니다.
6. 지역 별로 분류했으나 지역이 2개 이상 겹치는 글은 먼저 간 곳을 기준으로 했습니다.
7. 최종 업데이트 2019년 12월 30일

늦가을 서촌의 끝자락을 거닐다 [월암근린공원에서 딜쿠샤, 황학정까지]

 


' 서촌 늦가을 나들이 (월암근린공원에서 황학정까지) '

행촌동 은행나무

▲  행촌동 은행나무

황학정 홍난파가옥

▲  황학정

▲  친일파 홍난파 가옥

 


늦가을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서촌(西村) 지역을 찾았다. 흔히 서촌하면 경복궁(景福宮)
서쪽 일대를 일컬으나 원래는 서대문<西大門, 돈의문(敦義門)> 안쪽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웃대라 불리던 경복궁 서쪽 동네와 합쳐지면서 거대한 서촌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번 나들이는 서대문 안쪽이자 서촌의 원래 지역인 송월동(松月洞)과 홍파동(紅把洞), 행
촌동(杏村洞) 지역과 사직단(社稷壇) 주변을 느긋하게 돌아다녔다. 이미 10번 이상 인연을
지은 곳들이나 서촌(웃대)과 인왕산에 빼앗긴 마음이 좀처럼 돌아오지를 않으니 자꾸만 손
과 발이 간다.


 

♠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적 10호)과 월암근린공원 주변

▲  월암(月巖)근린공원

5호선 서대문역에서 광화문 방면으로 조금 걸으면 정동4거리가 나온다. 이곳은 서울 4대문의
하나인 서대문(돈의문) 자리로 여겨지는 곳으로 여기서 왼쪽(북쪽) 길인 송월길로 조금 들어
서면 하얀 피부의 성곽(城郭)이 나타나 뭇사내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 성곽은 근래에 복원
된 한양도성의 일부로 여기서 홍난파가옥까지 성곽을 겯드린 월암근린공원이 조촐하게 자리를
닦았다.

남대문(숭례문)과 사직터널 윗쪽에서 각각 길이 끊긴 한양도성은 월암근린공원에서 짧게나마
모습을 비춘다. 허나 근래에 복원된 탓에 피부가 하얗고, 성곽 밑도리에 고색의 때를 머금은
성돌이 일부 끼어있을 뿐이다. 하여 오래된 도성(都城)의 무게감보다는 대충 닦은 촬영세트장
이나 모조품처럼 가볍게 보인다.
상황이 이리 우울하게 된 것은 왜정(倭政)이 사직터널부터 남대문 사이에 성곽을 철저하게 뭉
개버렸기 때문이다. 성곽이 가고 없는 자리에는 집과 건물이 가득 들어찼으며, 도성 복원 계
획으로 이 일대를 밀어버리면서 땅속에 묻힌 성돌이 다시금 햇살을 보게 되었다. 성곽을 복원
하면서 그들을 끄집어내 성돌의 역할을 다시 부여했고, 숨통이 크게 트인 성곽 서쪽에는 공원
을 닦아 휴식처로 삼았는데, 공원 이름인 월암은 인근에 있는 월암 바위글씨에서 비롯되었다.
성곽 안쪽에는 서울기상관측소와 서울시교육청이 자리해 있으며, 그 동쪽에는 경희궁(慶熙宮)
이 오욕의 세월을 견디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성곽 북쪽은 주택들이 첩첩하게 들어차 재개발을 하지 않는 이상은 복원이 거의 어렵다. 사직
터널까지 200m만 다시 이으면 되는데, 현실의 벽 앞에 어림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남쪽 또한
건물과 도로 등으로 손을 대기가 거의 불가능한 실정, 허나 도성 복원 계획은 끊어진 성곽이
모두 이어지는 그 순간까지 끈기를 가지고 추진된다고 하니 언젠가는 반드시 복원이 마무리가
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또한 안되면 그만이다.


▲  복원된 성곽 북쪽 끝(서울기상관측소)에 성곽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  서울시교육청 서쪽 성곽
경원선과 경의선 철마가 잃어버린 북쪽으로 달리고 싶듯이 한양도성은
끊어진 구간을 넘어 다시금 서울 도심을 품고 싶다.

▲  홍난파가옥과 이어진 월암근린공원 북부

▲  홍파동 홍난파가옥(洪蘭坡家屋) - 등록문화재 90호

월암근린공원 북쪽에는 붉은 피부의 벽돌과 지붕, 그리고 담쟁이덩굴까지 두룬 별장 같은 아
담한 주택이 시선을 부여잡는다. 그 집이 홍파동 홍난파 가옥이다.
이 집은 지상 1층, 지하 1층으로 지하라고는 하지만 가파른 경사에 자리한 탓에 서쪽과 남쪽
이 바깥에 노출되어 햇볕을 보고 있으므로 거의 2층이나 다름이 없다. 이곳에는 원래 구한말
시절, 양기탁(梁起鐸)과 함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하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을
도와 항왜(抗倭) 언론을 주도했던 영국 사람 '어니스트 베델'<Ernest Thomas Bethell, 1872~
1909년, 한국 이름은 배설(裵說)>의 집이 있었다.
배설은 1909년 5월, 심장병으로 37세란 한참 나이에 세상을 떴는데, 그에게 원한이 깊었던 왜
정(倭政)은 쪼잔한 마음을 드러내며 그의 집을 강제로 밀어버렸다. 다만 토지는 몰수하지 않
고 그의 부인인 '메리 모드 베델'(Mary Maud Bethell)이 계속 가지고 있다가 1920년대 이후,
매각한 것으로 전한다.

1920년대 후반, 이 일대가 여러 지번으로 분할되었는데, 송월동과 홍파동 지역에는 독일 양이
(洋夷)들이 많이 서식해 그들의 주택이 많이 들어섰다. 홍난파 가옥도 바로 그 과정에서 1930
년대에 태어났다. 허나 그 집은 주인이 여러 번 바뀌어 집 자신도 정신이 없을 정도였는데, '
불놀이'를 쓴 시인으로 친일 행적이 요란한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의 부인, 최선복의 이
름이 먼저 올라와있다.
그 다음에 들어온 사람은 홍어길(洪魚吉)로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의 조카딸인 신수옥에게
장가들어 여기서 보금자리를 폈다. 그는 배화여학교 선생으로 수양동우회에서 활동했으며, 철
학박사로 서울에 철학연구사를 세웠던 한치진(韓稚振, 1901~?)이 다음 타자로 들어와 잠시 머
물렀다. 그는 1944년 왜정의 패망을 예견하는 시국답을 논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살기도
했다.
바로 그 다음에 들어온 이가 홍난파로 1935년 이 집을 사들여 말년을 보냈다. 그 연유로 홍난
파 가옥(홍난파의 집)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  골목에서 바라본 홍난파 가옥

예전에는 집 앞에 마당이 있었으나 담장을 허물고 작게 야외무대를 닦았으며, 1968년 4월 10
일에 난파기념사업회에서 세운 홍난파의 흉상이 옛 마당을 지킨다. 이 흉상은 김경승이 조각
하고, 김충현이 글씨를 썼으며, 윤석중이 흉상 기단(基壇)에 글을 새겼다. 또한 골목 쪽에는
담장과 대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담장 일부만 남았고, 1층 현관을 통하여 가옥 내부로 들어서
면 된다. 현재는 종로구청에서 관리한다.

집 지붕은 다른 서양인 선교사의 집보다 경사가 가파르고, 거실에는 양옥에서 많이 볼 수 있
는 벽난로가 있다. 현관과 이어지는 복도를 사이로 서쪽에 거실, 동쪽에 침실을 두었으며, 거
실 밑에는 지하실을 두어 공간을 알뜰하게 활용하던 서양 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2007년에 홍난파 기념관 및 소공연장으로 손질하고자 보수 공사를 벌여 1층에 있던 침실 2개
를 하나로 합쳤으며, 음향시설 등을 달아 50명 규모의 공연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유품
과 자료를 전시하여 기념관의 역할을 하도록 했고, 지하에는 시청각실까지 닦았다.

    ◀  홍난파의 그 잘난 흉상(胸像)
이 땅의 현대 음악을 발전시키고 꾸려나간 업
적만 본다면 동상도 아깝지 않겠으나 말년에
보인 추잡스런 친일 행적을 생각하면 흉상은
커녕 기념비도 아깝다. 흉상은 좀 내다버리고
기념비만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 이상은
그에게는 과분하다.

우리 귀에 무척 익은 홍난파, 그 작자는 누구일까?
홍난파(洪蘭坡, 1898~1941)는 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시 남양(南陽)에서 태어났다. 본명
은 홍영후(洪永厚)로 난파는 일종의 호이며, 본관은 남양홍씨이다. 왜정 때 매우 잘나갔던 음
악가이자 우리 현대 음악의 중추적인 존재로 '봉선화','성불사(成佛寺)의 밤','옛 동산에 올
라' 등으로 유명하다.

5살에 서울로 올라와 1912년 YMCA 중학부에 들어갔으며, 음악에 자꾸 손과 마음이 가면서 내
면에 숨겨진 자신의 소질을 알게 된다. 그래서 1913년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전문학교인 조선
정악전습소(朝鮮正 樂傳習所) 서양악과에 입학하여 1년 동안 김인식(金仁湜)에게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1918년 창가 '야구전'을 작곡, 발표하고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음악학교에 진학, 음
악과 문학, 미술을 배우며 문예의 꿈을 키웠다. 그러다가 1919년 유학생들이 벌인 독립운동에
가담하면서 학업을 그만두고 귀국했다.

귀국하여 경성양악대 제1회 연주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린 연
주자란 기록을 세웠다. 대한매일신보 기자로도 잠깐 일하다가 1920년 '처녀혼'이란 첫 작품을
냈는데, 봉선화는 처녀혼 첫머리에 나오는 애수(哀愁)라는 곡명으로 발표된 것이다.
1922년에는 서울 연악회(硏樂會)를 창설해 음악 교육에 나섰으며, 1925년 우리나라 최초의 음
악 잡지인 '음악계(音樂界)'를 창간했다. 그리고 1926년 다시 왜열도로 넘어가 동경고등음악
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신교향악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1929년 '조선음악백곡집'과 '조선동요백곡집'을 발표하고 1933년에는 '조선가요창작곡집' 등
의 작품을 냈으며, 현제명(玄濟明)과 함께 '봄노래'를 발표했다. 그 외에 바이올린독주곡인
'애수의 조선','동양풍의 무곡','로망스' 등이 있고, '관현악곡 즉흥곡','관현반주 붙은 즉흥
곡','명작합창곡집','특선가요선집' 등을 냈는데, 그는 우리나라 선율의 요소를 작곡에 반영
해 서정적인 분위기를 그려내고자 했다. 그의 의도는 그의 평론에서도 잘 나타나며, 1930년대
이후 우리나라 현대 음악 창작의 패턴을 정립한 음악가로 널리 찬양을 받았다.

1931년 바이올린을 더 배우고자 미국으로 넘어가 셔우드(Sherwood)음악대학을 다녔으며, 1933
년 졸업 기념으로 독주회를 가지고 귀국했다. 그리고 경성보육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1936년 경성방송 현악단 지휘자 및 빅터레코드의 양악부장을 지냈으며, 이
영세(李永世)와 난파트리오를 조직해 실내악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또한 1938년 경성음악전
문학교 교수로 활동하면서 '음악만필'을 냈으며, '백마강의 추억' 등 14곡의 가요를 나소운(
羅素雲)이란 예명으로 발표했다.

이렇게 우리나라 현대 음악 발전에 크게 공헌을 하며, 주옥같은 작품으로 민중의 마음을 달랬
던 그였지만 그의 말년은 그 초심을 잃으며 추악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친일파로 노선을 바꾸
며 민중의 뒷통수를 제대로 쳤던 것이다.
1937년 독립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 회원이라는 이유로 검거된 이후, 그해 4월 조선총독부 학
무국(學務局)에서 결성된 친일단체 '조선문예회'에 가입하여 왜정 정책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내선일체를 강조하였고 '지나사변(支那事變)
과 음악','희망의 아침' 등 친일 성향의 악취나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끊임없이 왜정을 찬양했
다.
허나 다행히도 하늘이 보우하사 변절한지 4년 만인 1941년 8월 30일, 43살의 나이로 지옥으로
떨어졌다.

그가 마지막 4년 동안 보여준 속절없는 친일 행적은 20~30대 시절에 일구어낸 온갖 업적과 공
로에 제대로 똥칠을 하기에 충분했다. 50년도 채우지 못한 그 짧은 인생, 무슨 영달을 더 누
려보겠다고 그 추잡함을 보였던 것일까? 그것만 아니었다면 정말 착했을 것을 심히 좋지 않은
뒷끝을 보이고 말았다.
왜정 시절 이 땅의 나약한 지식인들의 끝없는 변절과 방황, 그도 결국 그 재능과 인격 때문에
나락의 길인지도 모르고 바로 앞에 놓인 꿀에 속아 악마의 유혹에 넘어갔던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해방 이전에 한참 나이로 자체 폐기가 되었으니 나라와 민중을 배신하고 친일을 벌인
그 대가를 톡톡히 받은 것으로 보면 될까? 그렇게 홍난파에게 실망한 대중을 위로해 본다. 내 학창시절에 봉선화부터해서 그의 노래가 음악책과 문학책에 지겹도록 실려 나의 돌머리를
적지않게 아프게 했는데, 그의 친일 행적은 나의 마음까지도 심히 아프게 만든다.

그런데 홍난파 가옥에서 다루고 있는 그의 일생과 그곳에서 배부하는 홍난파 자료, 그리고 홍
난파 흉상 기둥에는 친일 행적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오로지 찬양 일색이다. 심지어는 '우리
는 홍난파 선생님에게 신세를 너무 많이 졌습니다~~ 홍난파 선생님은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이
며 우리는 홍난파 선생님의 후손입니다'
라는 식의 암을 유발하는 해괴망측한 구절도 있다.
종로구청의 실수인지 아니면 난파기념사업회 작자들의 개짓인지는 모르겠으나 지나친 찬양은
오히려 역겨움과 정신건강 해악만 가져올 뿐이다. 홍난파가 어떤 인물인지는 내가 직접 겪어
보질 않아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그도 개념이 있다면 후학들의 이런 말장난에 지하에서 눈물을
머금을 것이다. 기릴 것은 기리고 깔 것은 과감히 까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홍난파의 후학들이 세운 난파기념사업회는 1968년 난파음악상을 제정해 해마다 적당한 음악인
을 골라 상을 주고 있다. 상을 받은 이는 정경화, 정명훈, 금난새, 조수미 등 이름 3자만 들
어도 거의 알법한 인물인데, 2013년에 일대 이변이 생겼다. 수상자로 선정된 작곡가 류재준씨
가 수상을 거부했던 것이다. 거부 사유는 친일파의 이름으로 된 상을 받기 싫다는 것이다. 그
의 업적은 인정하나 실수 또한 거대하다며 그의 친일행적을 꼬집은 것이다.
그의 개념찬 행동에 천하 사람들은 많은 찬사를 보냈고, 난파기념사업회는 그냥 음악가로서의
홍난파를 기리고 상을 줄 뿐이라며 말도 안되는 변명만 늘어놓다가 오히려 욕만 죽어라 얻어
먹었다.

근래에 들어 민족문화연구소는 홍난파 가옥의 이름을 변경하자며, 이곳에 살았던 여러 인물의
삶과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공간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또한 안내문을 수정하고 가옥 내부의
공간 구성을 바꾸는 방안을 종로구에 제시했다. 비록 홍난파가 이곳에서 쓸데없이 오래 살긴
했어도 그 작자를 너무 치켜세우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니 홍난파 유물은 크게 줄이거나 갖
다버리고 독립운동을 했던 한치진과 홍어길을 기리는 공간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물론
홍난파도 음악에 공이 적지 않으니 쥐꼬리만큼 기려주자. 또한 집 이름은 지역 이름만 따서 '
홍파동 가옥' 또는 '홍파동 근대 가옥'으로 바꾸는 것이 적당해보인다.
난파기념사업회도 생각이 있다면 이제 그만 난파음악상을 접고 조용히 잠수를 타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게 난파의 이름에 그나마 덜 먹칠을 하는 거니 말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파동2-16 (송월1길 38) (☎ 070-8112-7901)


▲  기념관 겸 전시관으로 쓰이는 홍난파 가옥 1층 거실

온통 붉은 피부로 이루어진 홍난파 가옥은 붉은 날을 제외하고 늘 속세에 열려있다. 허나 현
관문이 닫혀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문이 잠긴 줄 알고 발길을 돌리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
이다.
그것이 바로 홍난파 가옥의 함정, 허나 관람시간이라면 닫힌 문 앞에서 좌절하지 말고 문 앞
에 달린 벨을 눌러보자. 그러면 안에서 관리인이 나와 문을 열어준다.

현관에 들어서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탄 다음, 1층 홀로 들어간다. 1층에는 거실과 침실
2개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침실 2개를 합쳐서 전시관 겸 소공연장으로 꾸몄다. 거실에는 이
집의 특징인 붉은 벽난로가 있으며, 그의 흉상과 의자, 바이올린, 피아노 등이 놓여져 음악가
의 집임을 새삼 실감케 한다.


▲  홍난파의 인생을 요약하면 위와 같다.
친일 행적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모두 빠져있고 꿀발린 내용만 가득하다.
이러면 역사 왜곡을 일삼으며 민중을 우롱하는 식민사관, 친일파
후손 패거리와 다를 것이 도대체 뭐가 있을까?

▲  홍난파의 그 잘난 사진과 그의 유품, 음악 문서들

▲  홍난파의 사진과 조선가요작곡집(오른쪽)

▲  왼쪽은 고향의 봄 악곡집, 가운데는 봉선화 악보, 오른쪽은
조선동요백곡집

▲  홍난파 가옥 1층 동쪽 (옛 침실 공간)
홍난파의 유품과 음악 문서들, 그리고 그의 일생과 음악을 정리한 내용들이
벽을 가득 채운다. 이 공간은 소공연장으로 쓰이기도 한다.

▲  어둑어둑한 홍난파 가옥 지하
이곳은 시청각실로 쓰인다. 허나 그 횟수가 별로 없어 거의 노는 공간이다.


 

♠  행촌동(杏村洞)에서 만난 숨겨진 명소들

▲  수북하게 자란 행촌동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0호

홍난파 가옥에서 송월1길 골목길을 따라 북쪽(인왕산 방면)으로 조금 가면 근대 건축물인 딜
쿠샤와 커다란 은행나무를 만나게 된다. 이들이 있는 행촌동은 송월동과 함께 인왕산의 남쪽
끝을 잡고 있는 산동네로 사직터널 바로 윗쪽이다. 산동네라고 해서 주황색 지붕을 지닌 허름
한 달동네 스타일이 아닌 온갖 빌라와 주택들이 즐비한 서울에 아주 흔한 그런 동네이다.

딜쿠샤 곁에 자리한 행촌동 은행나무는 약 420살에 이르는 장대한 나무로 행촌동의 오랜 터줏
대감이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덧없는 양분과 동네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
어 높이 23m, 둘레 6.8m에 이르는 큰 나무로 어엿하게 성장했다. 또한 아들을 원하는 여인들
이 찾아와 치성을 드리는 현장으로도 바쁘게 살았다.
허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이 이곳까지 미치면서 그의 보금자리는 주택에 밀려 많이 좁아졌고,
주택 사이에 비좁게 자리해 있다. 그래도 아직까지 건강은 양호하며, 자신의 둥지를 침범한
집들을 미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늘과 은행잎을 선사해 넉넉한 마음을 드러낸다.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이자 이곳에 살았던 권율이 손수 심었다고 전하며, 주인은 옛날에
갔지만 그의 사연을 끈질기게 붙들며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로 이 나무 때문에 동
네 이름이 행촌동(은행나무 마을)이 된 것이다. 참고로 은행나무는 태반이 사람이 심은 것이
며, 자연적으로 싹을 내린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서울에서 오래되고 아름다운 은행나무를 꼽으라면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 성균관(문묘) 은
행나무(대성전 은행나무 포함), 그리고 이곳 은행나무를 내세우고 싶다.


▲  은행나무 밑에 누운 권율 장군 집터 표석

은행나무가 있는 곳은 권율(1537~1599)의 집터로 인근 필운동(弼雲洞) 배화여고에도 그의 집
이 있었다. 필운동 집은 그의 사위이자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오성 이항복(李恒福)에게 물
려주었으니 그 집이 바로 필운대(弼雲臺)이다. (현재 필운대란 바위글씨가 남아있음)
그렇다면 임진왜란의 영웅, 권율(權慄)은 누구일까?

권율은 안동 권씨로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과 모악(暮嶽). 시호는 충장(忠莊)
이다. 1582년 식년시 문과(式年試 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는데 임진왜란 때 전쟁에서 크
게 활약한 것으로 보아 무예도 제법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와 전적(典籍)을 거쳐 1587년 전라도도사(全羅道都使)와 예조정랑(禮
曹正郞), 경성판관(鏡城判官) 등을 지냈으며, 1591년 평안도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었으나
업무상 과실로 파면되었다.
허나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급히 경기도 광주목사(廣州牧使)로 임명되어 그곳으로 달려갔
으며 전라도 순찰사(巡察使) 이광(李珖)과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이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군사 4만을 모아 서울로 올라오자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었다.
이광과 곽영은 수원과 용인에 각각 진을 치고 주변에 있는 왜군을 토벌하려고 했다. 이에 권
율은 주변에 조금씩 흩어진 적들을 치지 말고 임진강(臨津江)에서 그들의 서진(西進)을 막아
군량미를 운반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다음, 적의 빈틈을 노리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냈다. 허나 뇌에 주름이 가득한 이광은 그 말을 무시, 오로지 머릿 수
에 의지해 용인에 있는 왜군을 공격했다.

이광의 군사는 4만(왜국은 10만이라고 주장함)에 이르나 태반이 칼과 창도 제대로 못잡는 오
합지졸이었다. 그에 반해 용인에 머물던 왜군은 왜열도에서 나름 알아주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脇坂安治)로 수백 명의 정예 기병으로 저항을 했다.
허나 조선군은 그 수백에 불과한 왜군에게 완전히 박살이 나고 싸움에 서툴렀던 선봉장 이시
지(李詩之)와 백광언(白光彦)이 전사하는 등,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했다. 허나 권율은 이를
직감하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휘하 군사를 잃지 않고 광주로 물러나 후일을 도모했다.

1592년 가을, 전라도 남원으로 내려가 1,000명의 군사를 모집해 동복현감(同福縣監, 전남 화
순 동복면)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梨峙)에서 전주(全州)로 진출하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
景)의 왜군을 막았다. 초반에 황진이 조총에 맞아 부상을 입으면서 군사의 사기가 잠시 떨어
졌으나 권율이 군사를 독려하여 왜군을 격퇴하고 승리를 거뒀다. 그렇게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았으며, 그 공으로 전라도 감사(監事)로 승진되었다.
1592년 12월, 서울 수복을 위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천안 직산(稷山)에서 머물렀는데, 체찰
사(體察使) 정철(鄭澈)이 그 많은 인원을 먹일 군량이 없으니 돌아가서 관내를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허나 행재소(行在所)에서 북상하라는 명이 떨어지면서 곧바로 군을
이끌고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 오산 세마대(洗馬臺)>에 들어가 진을 쳤다.

한편 권율이 독산성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왜장 우키타(宇喜多秀家)는 후방과 차단될
것이 두려워 서울에 있던 군사를 이끌고 독산성을 선제 공격했다. 허나 권율은 성문을 굳게
닫고 수비만 할 뿐이라 왜군의 피해는 나날이 늘어갔다.
뚜껑이 열린 우키타는 사람을 보내 독산성의 약점을 탐지한 결과 물이 부족하다는 정보를 입
수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바로 성 밑에 큰 못을 파니 과연 성 안에 물이 마르면
서 조선군의 식수에 비상이 걸렸다.
허나 권율은 당황하지 않았다. 비범한 인물답게 명쾌한 꾀를 낸 것이다. 그래서 동이 트는 이
른 아침에 왜군이 잘 바라보이는 곳에 말을 세워놓고 쌀을 부어 말을 씻기는 시늉을 벌였다.
그것을 본 왜군은 성 안에 물이 부족하다는 것이 거짓임을 알고 크게 동요했다고 한다. 바로
그때를 이용해 공격을 가하자 발작한 우키타는 영책(營柵)을 불지르고 서울로 줄행랑을 쳤으
며, 정예 기병 1,000명을 미리 보내 퇴로를 차단하고 왜군 수천을 잘 다져진 고기덩어리로 만
들었다.

1593년 1월, 서울 수복을 위해 조경(趙儆)을 보내 근교에 마땅한 곳을 물색하다가 행주산성(
幸州山城)으로 들어가 목책(木柵)을 쳤다. 그곳은 서울과도 가깝고, 한강을 끼고 있으며, 조
망도 좋고, 인근에 여러 요새와 함께 연합 작전을 펴기에 아주 좋은 위치였다. 허나 석성(石
城)이 아닌 야트막한 토성(土城)이라 수비전에는 썩 유리한 편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서둘러
목책을 엮었다.
목책이 완성되자 독산성에 병력 일부를 남기고 모두 불러들였으며, 별도로 4,000명을 뽑아 전
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를 시흥 호암산(虎巖山, ☞ 관련글 보러가기)으로 보내 후방
을 돕도록 했다. 그때 처영(處英)이 이끄는 승병(僧兵) 1,000명이 행주산성에 합류했다.

권율은 소수의 군사를 보내 서울을 공격했고, 고양 혜음령(惠陰嶺)에서 왜군에게 박살난 명나
라군을 도와 그들의 전멸을 막아주었다. 이렇게 권율의 활약에 적지 않게 염통이 쪼그라든 왜
군은 그가 있는 행주산성을 쓸어버리기로 마음 먹고, 앞서 독산성에서 크게 패한 우키타가 서
울과 인근의 군사를 싹 긁어모아 무려 3만의 대군으로 1593년 2월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그때 행주산성에 있던 조선군은 승병을 합해서 겨우 약 2,800명, 그 외에는 군사들을 도우러
성에 들어온 밥할머니를 중심으로 한 아낙네들과 지역 사람들이 있었다.

왜군은 7부대로 나눠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행주산성이 견고한 성이 되지 못하다보니 여
러 번 위기가 있었으나 권율의 뛰어난 통솔력과 군사와 백성들의 강인한 협동심으로 다들 일
당백의 위엄을 드러내며 적들을 고깃덩어리로 만들었다. 또한 화차(火車)와 비격진천뢰(飛擊
震天雷)란 신식 무기가 열심히 나래를 펼쳐 왜군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었다. 왜군은 결국 1
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수천 명의 전사자 시신을 불태우며 도망을 친다.
이 싸움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니 권율과 조경, 처영, 조선군과 승군, 밥할머
니의 아낙네들, 지역 사람들이 빚어낸 대작품이었다.

이후 파주로 옮겨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이빈(李薲)과 함께 후방을 지켰으며, 전라
도로 내려갔다가 그해 6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都元帥)로 승진해 경상도에 주둔했다.
1596년에 도망친 병사를 즉결처분한 것으로 잠시 해직되기도 했으나 바로 한성판윤(漢城判尹)
에 임명되어 호조판서(戶曹判書)와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터지자 밥버러지 명나라군과 함께 왜군이 머무는 울산성(蔚山城
)을 공격했다. 허나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부실하여 겁에 질려 도망치는 바람에 함락시키
지 못했으며, 순천으로 자리를 옮겨 순천 예교(曳橋)에 머물던 왜군을 공격했으나 역시나 병
든 닭새끼 같은 명나라군의 비협조로 함락시키지 못했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갔으나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7월 인생을 마
감하니 그의 나이 62세였다. 선조(宣祖)는 그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했으며, 1604년 선무
공신(宣武功臣) 1등으로 삼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봉해 그의 공을 기렸다.

권율은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명장으로 바다에 이순신(李舜臣)이 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
鄭起龍)과 곽재우(郭再祐), 그리고 권율이 있었다. 비록 초창기 용인 싸움에서 어리버리한 상
관들 때문에 졌고, 정유재란 때는 명나라군 때문에 고생을 했지만 그 외에는 모두 대승을 거
두었다. 특히 행주대첩은 적은 군사로 10배 이상의 왜군을 물리친 우리 전쟁사의 길이 빛나는
장쾌한 대첩이다. 그의 활약과 공훈에 대해서는 '권원수실적(權元帥實蹟)'이란 책이 1권 전하
고 있다.
그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있으나 인근이 유원지화되어 늘 시끄러우니 잠이나 편히 잘
련지 모르겠다.


▲  딜쿠샤(Dilkusha, 앨버트테일러 가옥) - 등록문화재 687호

행촌동 은행나무 서쪽에는 붉은 피부로 이루어진 2층 건물이 자리해 있다. 딱 봐도 20세기 초
반에 지어진 근대 건축물로 원형을 조금 잃긴 했으나 한참이나 후배인 건물들 사이에서 의연
함을 잃지 않으며 중후한 멋을 드러낸다.

이 건축물은 '딜쿠샤(Dilkusha)'란 생소한 이름의 건물로 1923년에 미국 사람인 알버트(앨버
트) 테일러(Albert Taylor)가 지은 것이다. 딜쿠샤는 인도 힌두어로 '이상향','행복한 마음'
을 뜻한다. 그는 금광엔지니어 및 UPI통신사 프리랜서 특파원으로 조선에 들어왔다가 1919년
3.1운동 소식을 전세계에 알린 인물로 유명하다.
또한 독립운동가들과 어울려 그들을 도왔으며, 제암리 학살사건까지 천하에 알려 왜정은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늘 감시를 했다. 금광(金鑛)과 특파원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1923년 이곳
에 고래등 같은 2층 집을 지어 가족과 함께 지냈는데, 힌두어에도 관심이 많았는지 집 이름을
'딜쿠샤'라 하였다.

1926년 7월 26일 아침, 낙뢰를 동반한 폭우가 내렸는데, 낙뢰가 2층 굴뚝을 때리면서 화재가
발생해 2층 전부와 1층 절반이 홀라당 타버렸다. 그 불을 끄고자 서대문서와 서울 시내 소방
서들이 총출동했으나 높은 언덕 지대이고 폭우까지 심해 진화에 크게 애를 먹었다. 집에서 일
하는 사람 1명이 감전되어 정신을 잃었고, 테일러 부부가 모아둔 오래된 골동품이 많이 소실
되어 1만원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허나 테일러는 집을 보수하여 계속 그 자리에 살았다.

1941년 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서울에 살던 미국 등 연합국 국적 외국인을 서대문형무
소에 감금했는데, 이때 테일러도 6개월간 갇혔으며, 그의 부인인 메리 테일러는 가택연금을
당했다. 메리는 왜경의 지독한 감시로 식량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웃 주민들이 몰래 달
걀과 암탉, 죽은 꿩, 김치 등을 지원하면서 겨우 허기를 면했다.

1942년 왜정을 테일러 부부를 강제 추방시켰고, 집을 몰수하여 민간에 팔아먹었다. 1945년 이
후 테일러는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1948년 캘리포니아에서 사망
했다. 그는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겨 그 뜻에 따라 서울 합정동(合井洞) 외국인묘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에 고이 안장되었다.

6.25이후 자유당 조경국 국회의원이 집을 소유했으나 1963년 박정희 군사정권 때 압수되어 국
사 소유가 되었다. 이후 많은 서민들이 여기서 샛방살이를 하였고, 그 과정에서 딜쿠샤는 자
신의 정체를 잃은 채, 막연히 왜정 시절에 세워진 근대 건축물의 하나이자 서민들이 의지하는
다세대주택으로 조용히 묻히게 된다.
그러다가 2006년 앨버트의 아들인 브루스 테일러가 이 땅을 방문하면서 베일에 가려진 건물의
비밀이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 사연으로 딜쿠샤의 대한 팔자와 시선은 180도 확 달라졌
다. 서울시는 66년만에 서울 고향집을 찾은 브루스에게 명예시민증을 내려 그의 부친을 기렸
다.

2017년 8월 뒤늦게나마 국가 등록문화재의 지위를 얻었으며, 서울시와 중앙 정부는 딜쿠샤를
손질하여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에 '알버트테일러박물관'으로 세상에 내놓으려고 했
다. 허나 이곳에 불법으로 살던 세입자들이 협조를 안해주면서 지연되었으며, 서울시와 중앙
정부와의 갈등도 있어 이제는 2020년 개방을 목표로 복원공사를 벌이고 있다. 그러니 2020년
이 되면 속세에 쿨하게 개방되어 딜쿠샤의 속살도 구경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행촌동 1-89 (사직로2길 17)

  장독대와 온갖 통들 사이에서 간신히 고
개를 내민 딜쿠샤 정초석(定礎石)
미국 사람이 지은 건물이다보니 정초석도 꼬
부랑 영어로 쓰여 있다.


▲  행촌동 골목길 (한양도성이 흘러가던 옛 자리)
도시에서 자란 30대 이상 사람들에게 저런 골목길의 유년(幼年) 추억은 거의 몇 권씩
서려있을 것이다. 나도 코흘리개 시절 저런 골목을 참 열심히 누볐었지.

▲  인왕산입구 한양도성 탐방로 (인왕산 방면)

월암근린공원에서 반짝 등장한 한양도성은 사직터널 윗쪽에서 다시금 고개를 든다. 인왕산로1길과 사직로1가길, 송월1길 등이 만나는 사직터널 윗쪽 고개를 지나면 도시화에 잔뜩 주눅이
든 성곽이 다시 어깨를 피며 인왕산(仁王山)으로 힘차게 흘러가는데, 성 바깥은 행촌동 주택
가, 성 안쪽은 인왕산 숲으로 각각 탐방로가 펼쳐져 있다.


 

♠  옛 경희궁의 흔적이자 전통 국궁(國弓)의 성지, 황학정(黃鶴亭)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5호


▲  사방이 뻥 뚫린 황학정
황학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 밑에 부연을 두어 처마와
추녀의 곡선이 무척 시원스럽다. 정면 중앙에 걸린 황학정 현판은
이승만(李承晩) 전대통령이 쓴 것이다.
 

사직터널 윗쪽 고개(인왕산입구)에서 종로문화체육센터를 지나 동쪽으로 가면 사직단을 품은
사직공원 서쪽 옆구리이다. 여기서 인왕산길을 조금 타다가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사직로9길을
따라가면 길이 크게 구부러지는 곳에 황학정을 알리는 표석이 마중한다. 그의 안내를 받아 북
쪽 길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전통 활터인 황학정이 자리해 있다.

▲  황학정 표석

▲  황학정으로 인도하는 오르막길

사직단 북쪽이자 인왕산 남쪽 자락에 둥지를 닦은 황학정은 이 땅에 몇 안되는 전통 활터이다.
조선 후기까지 서울 장안에는 활쏘기를 닦던 사정(射亭)이 많이 있었는데,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에 자리한 웃대(서촌)에는 등과정을 비롯해 5개의 사정<서촌5사정(西村五射亭)>이 있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군대 무기에서 화살이 제외되자 서울과 전국의 많은 사정이 문을 닫았고
황학정 자리에 있던 등과정 역시 그 거친 흐름을 헤어나지 못하고 바위글씨만 남긴 채 휩쓸려
사라졌다.

활쏘기를 좋아하던 고종 황제는 백성들의 심신단련을 위해 궁술(弓術)을 장려하기로 했다. 그
래서 1898년 경희궁 회상전(會祥殿) 북쪽에 황학정을 지어 활터로 삼고 백성들에게 개방하여
언제든 활을 쏘도록 했다.
고종은 자주 이곳을 찾아 활쏘기를 했는데, 그가 사용했던 활 호미(虎尾)와 화살을 보관하는
전통(箋筒)이 황학정에 전해 내려오다가 1993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천하에 어둠이 내리던 1910년 이후 왜정은 망국의 황궁(皇宮)인 경희궁을 철저히 산산조각을
냈다. 1918년부터 궁궐을 밀어버리면서 주요 건물을 민간에 팔아먹었고, 1922년 황학정 자리
에 고의로 총독부 전매국 관사를 지으면서 그 황학정까지 밀어버리려고 했다. 이에 국궁을 하
던 사람들이 뜻을 모아 왜정과 협상을 벌였고, 돈을 주고 그 건물을 등과정 자리인 이곳으로
가져와 안착을 시켰다.

왜정 이후 황학정은 전국 활터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으며, 인왕산 호랑이로 불리던 택견꾼
송덕기(宋德基)가 황학정을 지키기도 했다.
6.25 때 건물이 파괴되면서 활쏘기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으며, 이후 황학정을 중수하고 한천
각(閑天閣)과 국궁전시관 등 여러 건물을 지었다. 전통 활터가 많이 사라진 와중에도 여전히
활터 기능을 수행하여 우리나라 전통 궁술의 성지(聖地)로 여전히 추앙을 받는다.

이곳에서는 궁술 대회(매년 12월에 전국궁술경연대회가 열림)와 관련 행사, 활쏘기 체험이 열
리고 있으며, 평일은 물론 휴일에도 활을 쏘는 이들을 자주 구경할 수 있다. 천하 제일의 신
궁(神弓)으로 추앙받는 고구려 동명성왕(東明聖王)과 조선 이성계(李成桂)를 꿈꾸는 궁수들이
실력을 겨루는 모습이 볼만하며, 일반인을 대상으로 궁술 체험 이벤트가 열고 있다. 아직 활
을 만져본 적은 없지만 기회가 생기면 명중률을 떠나서 한번 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황학정은 무료의 공간이나 국궁전시관은 입장료를 받는다. (종로구민은 50% 할인)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산1-1 (사직로9길 15-32 ☎ 02-722-1600)


▲  황학정 내부
천정에는 황학정의 내력 등이 적힌 현판 2개가 걸려 있고, 평방(平枋)에는
태극기와 고종의 어진(御眞)이 나란히 자리한다. 황룡포를 입은 그의
어진이 여기에 있는 이유는 황학정을 세운 그를 기리고자 함이다.

▲  황학정에서 바라본 과녁과 서울 도심
여기서 과녁까지는 대략 130~150m 정도 된다. 평소에는 가깝게 생각했던 그 거리가
여기서만큼은 참 까마득하게 보인다. 남산보다 더 멀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과녁이나 그 주변에 떨어진 화살은 전동식 미니 케이블카에 실어
황학정으로 운반한다.

▲  황학정8경(八景) 바위글씨

황학정 뒷쪽 바위에는 황학정8경을 노래한 바위글씨가 있다. 바위에 네모난 홈을 닦고 그 안
에 글씨를 심었는데, 이들은 1928년 9월 금암 손완근(錦巖 孫完根)이 쓴 것으로 황학정8경이
라 제목을 내세웠지만 정작 황학정은 단 하나도 없고 모두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경복궁
주변의 풍경을 다루고 있어 제목과 내용이 완전히 따로 논다. 여기서 읊은 8경은 다음과 같으
며, 이중 금천교와 경복궁 담장 옆 수양버들을 제외하고는 그런데로 살아있다.

백악청운(白岳晴雲) - 구름이 맑게 갠 북악산(백악산)
자각추월(紫閣秋月) - 자하문(창의문) 문루 위에 가을 달
모암석조(帽巖夕照) - 인왕산 모자바위에 비치는 석양 빛
방산조휘(榜山朝暉) - 인왕산 바위 위의 아침 햇살
사단노송(社壇老松) - 사직단을 둘러싼 노송
어구수양(御溝垂楊) - 경복궁 담장 옆 배수로 둑의 수양버들
금교수성(禁橋水聲) - 금천교 밑을 흐르는 물소리
운대풍광(雲臺楓光) - 필운대의 단풍 광경


▲  등과정(登科亭) 바위글씨

황학정 뒷쪽에서 계단을 오르면 인왕산길 직전에 등과정 바위글씨가 새겨진 큰 바위가 모습을
비춘다.
바위에 진한 문신처럼 남은 등과정은 서울 장안의 이름난 활터인 서촌5사정의 하나로 그 5사
정이란 등과정과 옥동(玉洞) 등용정. 삼청동 운용정(雲龍亭). 사직동 대송정(大松亭). 그리고
누상동 풍소정(風嘯亭)을 일컫는다. 이중 삼청동(三淸洞)은 북촌의 일원인데, 어찌 서촌5사정
에 꼽혔는지 모르겠다.
조선시대에는 활쏘기가 사대부를 비롯한 귀족, 왕족들이 익혀야 될 교양의 하나로 인식되어 5
사정에는 늘 그들로 붐볐다. 무관 같은 경우는 직업상 여기서 활쏘기 연습으로 몸을 풀었고,
다른 이들은 교양 및 수련의 일원으로 몸을 풀었던 것이다.
허나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군대 무기에서 활이 제외하면서 이들 5사정은 모두 내
리막을 걷게 되었고, 등과정만 유일하게 고종 때 새겨진 바위글씨를 흔적으로 남겨 그의 옛
자리를 귀뜀해준다. 게다가 경희궁의 활터였던 황학정이 왜정 때 이곳에 안착하면서 자연스럽
게 등과정을 계승하였다.


▲  늦가을 물감이 야드르르 번진 황학정입구 숲길 (사직공원 뒷쪽)
황학정을 끝으로 본글은 마무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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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한옥마을 속으로, 북촌한옥마을 구석구석 나들이 ~~ (북촌문화센터, 가회동 이준구가옥, 북촌4~7경, 맹사성집터)

 


'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 북촌 나들이 '

▲  북촌5경 골목길


 

♠  조선 후기 한옥을 개조하여 북촌을 안내하는 공간으로
새로 태어난 북촌문화센터 - 등록문화재 229호

▲  북촌문화센터 대문과 바깥채

여름 제국이 조금씩 숙성되어가던 6월의 첫 무렵에 후배 여인네와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북
촌(北村, 북촌한옥마을)을 찾았다. 이번에 찾아간 북촌 명소들은 이미 여러 번씩 기봤던 곳들
로 복습 차원에서 또 찾게 되었다. 북촌과 인연을 지은 횟수도 벌써 60회가 넘어 이제는 지겨
울 법도 하지만 그곳에 퐁당퐁당 빠진 상태라 뒤돌아서면 또 가고 싶어진다.

이번 북촌 산책의 시작은 북촌문화센터<3호선 안국역 3번 출구에서 도보 3~4분>로 북촌 초행
이라면 이곳부터 인연을 짓고 북촌 나들이에 임하기 바란다.
북촌문화센터로 쓰이는 기와집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양반가로 고종(高宗) 시절 민씨 세도
가(勢道家)의 하나이자 왜정 때 탁지부(度支部) 재무관(財務官)을 지낸 민형기의 집이다. 한
때 '계동마님댁'으로 장안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집 구조는 안채와 바깥채, 앞행랑채, 뒷행랑채, 사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계동마님이
사라진 이후 크게 쇠락하고 만다. 그러다가 2002년에 서울시에서 북촌 가꾸기 사업의 일환으
로 매입하여 기존 한옥의 원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말끔히 몸단장을 시켜 그해 10월 북촌을 안
내하는 북촌문화센터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대문을 들어서면 'ㄷ'자형 안채와 'ㄱ'형 행랑채가 나오고, 중문을 지나면 'ㄱ'자
형 안행랑채(별당)가 나온다. 안채는 안방과 부엌을 개조하여 서울시청 한옥조성과 사무실과
한옥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상담하는 상담실을 두었으며, 회의실과 주민들의 사랑방을 갖추고
있다.

뒷행랑채는 전부 터서 북촌홍보전시관으로 삼아 북촌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을 여러 자료로 다
루고 있는데, 영상물도 준비하여 북촌에 대한 이해를 돕게 하는 한편, 북촌안내책자와 지도도
여기서 얻을 수 있다. 이곳을 지나면 집의 뒷부분이 나오는데, 여기에 2칸 규모의 아담한 정
자가 있다. 원래 사당이었던 것을 정자로 개조하여 두 다리를 쉬어가는 쉼터로 삼았으며, 서
울 도심에서는 흔치 않은 이색 공간으로 다른 건물과 달리 기단(基壇)이 높아 예전에 사당이
있었음을 살짝 귀뜀해 한다.
정자를 지나면 안행랑채라 불리는 별당(別堂)이 나오는데, 이곳은 온갖 공예와 예절과 다도(
茶道), 전통주 만들기, 민화(속화) 그리기 등 다양한 전통문화 강좌를 연다. (자세한 것은 북
촌문화센터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105 (계동길 37 ☎ 02-2133-1371)
* 북촌문화센터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대문을 들어서면 중문과 'ㄷ'자형 안채가 나온다.

▲  중문과 안채 서쪽

▲  안채 동쪽 (회의실과 사랑방)


▲  중문과 짧은 담장
중문 담장은 다른 담장과 이어지지 않고 안채 가운데 기둥에서 끝을 맺는다.

▲  북촌홍보전시관으로 탈바꿈한 뒷행랑채
북촌의 역사와 현재, 한옥의 구조에 대한 관련 자료들이 하얀 벽을
조촐하게 채운다.

▲  뒤쪽에 자리한 2칸짜리 정자
원래 사당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누구나 발을 멈추고 쉴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정자 뒤쪽에는 외부로 나가는 문이 있는데 늘 닫혀있다.

▲  안행랑채(별당)와 뒷간(왼쪽)

▲  대청마루로 쓰이는 안행랑채 동쪽

정자 동쪽에 자리한 안행랑채는 툇마루를 갖추고 있는데, 여기선 다양한 전통문화를 배울 수
있다. 그 곁에는 뒷간이 있는데, 겉은 한옥이지만 속은 현대식 시설로 무장하고 있어 화장실
걱정은 안해도 된다. 그들 뒤로 현대식 건물들이 이곳을 굽어보고 있으니 과거와 현재가 서로
를 조금씩 인정하며 보듬어주는 북촌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  북촌4경 주변

▲  가회동 김형태 가옥(嘉會洞 金炯泰 家屋)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30호

안국역(3호선) 2번 출구에서 북촌의 주요 간선로인 북촌로를 따라 감사원(監査院) 방면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가회동성당을 지나서 검은 피부의 문화재 안내판이 '잠시 나좀 보고 가소'
발길을 잡는다. 그 안내문 바로 윗쪽에 기와집이 있는데, 그 집이 안내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가회동 김형태 가옥이다.

이 집은 19세기 후반 또는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사랑채와 안채, 문간채로 이루어져 있
다. 안채는 문간채를 포함하여 'ㄷ'자 모양, 문간채는 'ㅡ'모양, 사랑채는 'ㄹ'자 모습으로
팔작지붕의 5량가 가구(樑架 架構)의 기와집이다. 비록 집은 다르지만 이 자리에서 명성황후
(明成皇后) 민씨가 태어났다고 전하며, 집 동쪽은 북촌로와 살을 마주 대고 있는데, 석축이
높게 닦여져 있다. 이는 도로를 확장하면서 집 동쪽 부분이 잘려나가 그렇게 된 것이다.

현재 김형태란 사람이 소유하고 있으며, 문화
재청에서 그의 이름을 붙여 문화재 명칭으로
삼았다.
엄연히 사람이 사는 집이라 내부 관람은 거의
어렵고, 그냥 바깥에서 얌전히 바라보는 것으
로 만족해야 된다.
또한 집을 보면 19세기 후반 집이 아닌 최근
에 지어진 것처럼 너무 화사한데, 이는 2011
년 후반에 종로구청의 지원을 받아 해체/보수
했기 때문이다. 보수도 좋지만 그로 인해 고
색의 내음은 죄다 증발해버렸다. 오히려 지방
문화재 등급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16-8
(북촌로 67-4)

▲  굳게 입을 봉한 김형태 가옥 대문

 

재동초교와 김형태가옥 중간에는 돈미약국이
있다. (북촌한옥마을 입구 마을버스 정류장)
여기서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은 안쪽으로 인
도하는 '북촌로11길' 골목길이 있는데, 북촌
나들이에서 그 길은 꼭 둘러보기 바란다.
이곳에는 북촌4경과 5경, 6경, 7경, 8경, 이
준구 가옥, 북촌동양문화박물관 등 북촌의 주
요 꿀단지들이 숨겨져 있고 북촌의 다른 부분
의 비해 한옥의 밀도가 아주 높다.

이곳은 북촌이 뜨던 초창기부터 관광객과 나
들이객들의 발길이 많았고 지금도 늘 미터지
지는데, 안국역에서 가장 빠르게 삼청동길을
이어주는 길이기도 하며, 나도 북촌에서 처음
거닐던 곳이 바로 이 북촌로11길 주변이었다.

▲  북촌로11길에 있는 오래된 회화나무

 

돈미약국에서 북촌로11길을 3분 정도 가면 하늘 높이 솟은 회화나무(회나무)가 마중을 한다.
그는 200년 정도 묵은 이곳의 정자나무로 높이는 약 20m 정도 되는데, 나이가 지긋함에도 그
흔한 보호수 등급도 받지를 못했다. 게다가 그는 집 뜨락이나 조금은 독립적인 공간이 아닌
집과 집 사이에 비좁은 틈에서 샛방살이처럼 지내고 있어 숨이나 제대로 쉴련지 뿌리나 기둥
이 마음껏 자랄 수나 있을련지 걱정이 들 정도이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계속 직진하면 북촌5/6/7경으로 이어지고, 왼쪽 좁은 길로 가
면 북촌4경으로 이어진다. 북촌5/6/7경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지만 4경은 발길도 적고 한
적한 편이다.
북촌4경은 가회동 31번지 언덕으로 그곳 골목길은 매우 좁다. 허나 지대가 조금 높아 북촌5/
6/7경과 가회동 일대 한옥들의 지붕이 두 눈에 바라보여 조망은 그런데로 괜찮으며, 특히 지
방문화재로 지정된 이준구 가옥(북촌6경 동쪽)의 모습을 유일하게 살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4경 골목은 북쪽으로 향했다가 동쪽으로 90도 휘어지고(여기서 직진하면 막다른 골목) 남쪽으
로 다시 90도 휘어져 회화나무와 북촌5경 남쪽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4경으로 들어가는 입구
에서 4경 골목길로 들어가지 않고 서쪽으로 조금 경사가 각박한 고개를 넘어가면 북촌로5나길
로 이어지는데. 그 고갯길 남쪽에는 높다란 석축과 철책이 둘러져 있다. 그 철책 너머가 바로
정독 도서관이다.


▲  북촌4경 입구에서 삼청동길, 북촌로5나길로 넘어가는 고개
(왼쪽 축대와 푸른 철책 너머가 바로 정독도서관)

▲  북촌로11다길 주변 기와집들 ①

▲  북촌로11다길 주변 기와집들 ②

▲  북촌4경 골목길 (가회동 31번지 주변)
이곳에서 오른쪽 담장 너머로 펼쳐진 한옥의 끝없는 물결을 조용히 살펴보자.
(북촌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므로 정숙과 청결을 지키기 바람)

▲  북촌4경에서 바라본 북촌 가회동 한옥들 ①
과거와 현재가 각각 2/3, 1/3씩 사진 화면을 채운다

▲  북촌4경에서 바라본 북촌 가회동 한옥들 ②
여기도 완전 한옥 투성이이다. 그런데 저 멀리 보이는 푸른 지붕은 무엇일까?

▲  푸른 지붕의 주인공, 이준구(李俊九) 가옥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2호

북촌6경 동쪽 언덕 위에 푸른 지붕의 집이 있다. 한옥의 고풍스런 물결이 넝실거리는 북촌의
한복판에 뜬금없이 이질적인 양옥이 있어 두 눈과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데, 그는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이준구 가옥이다.

이 가옥은 1938년에 지어진 2층 양옥으로 집을 짓는데 쓰인 재료는 매우 비싼 것을 사용했다.
개성(開城) 송학에서 신돌(화강암)을 들여와 지었으며, 프랑스산 기와로 푸른색의 뾰족 지붕
을 입혔다. 딱 봐도 상류층의 냄새가 역하게 풍기는 서양식 부잣집 가옥으로 이 정도의 집을
지을 정도면 꽤나 돈을 주무르던 사람일 것이다. 그의 대한 정보가 없어 자세한 것은 모르겠
지만 제발 친일 관련 졸부가 아니기를 바란다.

집을 둘러싼 벽은 벽돌식으로 모양을 냈고, 출입문은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의 아치형으로 만
들었다. 그리고 여러 곳에 격자무늬 창을 내었고, 높이 굴뚝을 내어 멀리서 보면 오래된 성당
처럼 보이기도 하며, 뜨락에는 정원수와 석탑을 세워 집을 수식한다.
현재 이준구란 사람이 소유하고 있어 문화재 지정 명칭도 그의 이름을 넣었으며, 이 집 주변
에 여러 채의 건물을 두었다. 또한 건물을 포함한 대지가 넓고, 밑에는 차고(車庫)까지 두고
있는데, 집 대문은 졸부의 폐쇄성이 드러난 듯, 거의 작은 성문(城門) 만하다. 또한 언덕 위
에 자리하여 북촌 한옥들을 바라보고 있어 자리도 매우 좋다. 단 개인 집이다보니 내부 관람
은 거의 불가능하며, 앞서 둘러본 김형태 가옥은 길가에서도 대충 보이긴 하지만 이곳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북촌4경 장소가 아니면 집을 보기도 힘들다. 또한 북촌 금싸라기 땅에 있어
집값도 거의 수십 억을 호가할 것이니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이 집은 조금은 세련되고 양호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2호라는 괜찮은 등
급을 지녔다. 지정번호가 1호 다음인 2호로 인지도와 상징성도 꽤 큰 편인데, 굳이 이 집이 2
호로 지정될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지정 번호는 가치별로 매기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일
련번호로 숫자에는 별 의미는 없지만 그만큼 가치를 일찍 인정받아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
무슨 기준으로 그리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집은 2호란 숫자가 어울리지는 않아 보인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31-1 (북촌로11가길 49)


▲  북촌4경 동쪽 골목길


 

♠  북촌5,6,7경, 북촌로5나길 주변

▲  북촌5경

북촌5경과 6경은 같은 골목길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5경은 밑에서 6경이 있는 윗쪽을 바라보
는 것이고, 6경은 윗쪽(이준구 가옥 서쪽)에서 5경이 있는 남쪽을 바라보는 것이다. 5/6/7경
구역은 북촌에서 한옥이 제일 많고 또한 한옥 비율이 가장 높은 곳으로 이 주변은 죄다 한옥
이다.

5/6경은 북촌이 속세에 널리 알려진 초창기 시절에도 사람들이 많이 찾았던 곳으로 옛 골목길
과 한옥의 경관이 잘 남아있어 북촌에서 꼭 발자국을 남겨야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
다는 이곳의 제일가는 명소이다. 천하의 사람을 싹 모아놓은 듯, 늘 관광객들로 미어터져 사
람이 없는 한산한 풍경을 찍는 것은 거의 어렵다.


▲  북촌6경

북촌5경의 반대가 북촌6경이다. 5경에서는 언덕진 골목길을 중심으로 6경 주변 한옥만 보였지
만 6경은 5경보다 조금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이 조금은 좋다. 골목길을 사이로 양쪽에
자리한 한옥 지붕 사이로 천하 최대의 대도시 서울 도심의 전경이 펼쳐지며, 처마 끝 사이로
보이는 도심의 전경은 이곳의 백미로 북촌 관련 자료에 꼭 등장하는 유명 명소이다.


▲  북촌6경에서 이준구 가옥으로 이어지는 골목

▲  이준구 가옥 앞에서 바라본 북촌6경
이준구 가옥은 성곽처럼 높다란 석축 위에 숨겨져 있는데, 석축에는 담쟁이덩굴을
비롯한 온갖 덩굴들이 서로 협동심을 발휘하며 완전한 녹색 벽으로 만들었다.

▲  이준구 가옥에서 북촌5경으로 내려가는 골목길

▲  북촌7경 골목길 (가회동 31번지)
북촌7경은 북촌5,6경의 골목길보다 조금은 좁은 소박한 골목으로 마치 어린 시절
친구들과 뛰어놀던 동네 골목길을 떠오르게 한다.

▲  북촌7경 골목길 (위에서 바라본 모습)

▲  대나무를 지닌 북촌7경의 어느 기와집
대문 옆에 조촐하게 보금자리를 닦은 대나무들이 인상적이다. 도심 한복판에서 비록
크기는 작지만 이렇게 대나무밭을 보다니 두 눈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  북촌동양문화박물관 앞에 심어진 맹사성(孟思誠) 집터

조선 초기에 황희(黃喜)와 더불어 청백리(淸白吏)를 다투었던 맹사성(1360~1438)의 집이 동양
문화박물관 서쪽에 있었다. 그는 신창(新昌)맹씨로 고향은 아산이며, 자는 자명(自明)과 성지
(誠之), 호는 동포(東浦), 고불(古佛)로 고려시대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을 지낸 맹희도(盟
希道)의 아들이다. 또한 고려의 마지막 보루 최영(崔瑩)의 손서(孫婿)이기도 하다.

1386년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해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이 되었으며, 전의시승(典
儀寺丞), 기거랑(起居郎), 사인(舍人) 등을 지내고 수원판관(水原判官)을 거쳐 내사사인(內史
舍人)이 되었다.

조선으로 강제로 하늘이 바뀐 후, 예조의랑(禮曹議郎)이 되었고, 정종(正宗) 때 간의우산기상
시(諫議右散騎常侍). 태종 때에 좌사간의대부(左司諫議大夫), 동부대언(同副代言), 이조참의(
吏曹參議)를 지냈으며, 1407년에는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이 되어 진표사(進表使)로 명나라
에 가는 세자(양녕대군)의 시종관(侍從官)으로 따라갔다.
1408년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태종의 사위인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의 죄를
묻고자 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잡아 족친 사건이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태종은 크게 뚜껑이
폭발하여 맹사성을 죽이려고 했으나 성석린(成石璘)의 변호로 죽음은 간신히 면하고 파면당했
다.

1411년 다시 기용되어 판충주목사(判忠州牧使)가 되었는데, 마침 예조(禮曹)에서 그가 음률(
音律)에 정통해 선왕(先王)의 음악을 복구하는 작업에 필요하다며 서울로 부를 것을 건의했으
며, 하륜(河崙)도 음악에 정통한 그를 서울에 머물게 해 악공을 가르치도록 건의했다.

1416년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었고, 이듬해에 생원시(生員試)에 시관(試官)이 되어 100명을
뽑았으며, 그해 부친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청했으나 태종은 이를 거부하고 대신 역마(驛馬
)와 약을 내리며 호조판서로 삼았다. 허나 그래도 사직을 원하자 왕은 그의 고향을 고려해 충
청도 관찰사(觀察使)를 제소하여 부친을 봉양하게 했다.

1419년에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고, 1421년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역임하였으며,
1427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 우의정을 지낼 때 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 감관사(監館事)
가 되어 태종실록을 감수했다.
실록이 완성되자 세종(世宗)이 한번 읽어보고 싶다고 청했다. 허나 그는 '전하께서 실록을 보
시고 그 내용을 고친다면 후대 왕들이 이를 본받게 되니 사관(史官)들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뢰니 세종은 할 수 없이 고집을 꺾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432년 좌의정(左議政)에 오르고, 1435년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은퇴했다. 허나 나라에 중요
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를 찾아 자문을 구했다.

맹사성은 성격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그리 엄하진 않았다고 한다.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
도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 밖에서 맞아들였으며, 윗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그가 돌아갈 때
도 공손하게 배웅하고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집으로 들어왔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늙은 부친을 위해 벼슬을 사직하려고 했고, 청백하고 검소한 것은 타
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살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식량은 녹봉으로 받는
쌀로 때웠으며, 고향인 아산에 내려갈 때나 외출을 할 때는 소를 타고 다녔는데, 의복도 남루
하여 그를 몰라보고 함부로 대했다는 일화가 여럿 전해온다. 그럴 때는 맹사성은 그저 웃으며
'맹고불(자신을 일컫는 말)이 소를 타고 고향에 가오' 그러며 지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으며, 품성이 어질고 부드러웠으나
조정의 중요한 일을 논의할 때는 과단성이 있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그저 평범한 골목 같은 북촌로11다길 주변
이렇게 하여 초여름에 벌인 북촌 산책은 마무리를 짓는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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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의 성지이자 도심 속의 상큼한 언덕, 청운동 윤동주시인의 언덕 ~~~ (윤동주소나무,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 서울 도심의 신선한 명소, 윤동주 시인의 언덕(청운공원) ~~~

▲  윤동주시인의 언덕 소나무


 

♠  청운공원에 마련된 새로운 명소, 문향(文香)이 깃든
윤동주(尹東柱) 시인의 언덕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정상에 세워진 서시 시비(詩碑)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序詩)


서울 도심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자하문(紫霞門)고개 정상에 '윤동주시인의 언덕'이 도심
을 굽어보고 있다. 창의문(彰義門, 자하문) 남쪽에 둥지를 튼 이곳은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
늘과 가까운 공원이자 인왕산 동쪽 자락에 조성된 청운공원(淸雲公園)의 일부로 2009년 6월,
윤동주 시인을 기념하고자 공원에서 가장 높은 북쪽에 조촐하게 자리를 닦았다.
언덕의 이름이 그의 이름에 걸맞게 매우 시적(詩的)이면서도 서정적이라 가슴에 꽤 와닿는데
그 이름은 '윤동주 문학사상선양회'의 회장을 맡았던 박영우씨가 지은 것이다.

윤동주 언덕이라 하여 크게 특별한 것은 없다. 높다란 언덕에 잔디를 입히고, 소나무와 여러
키 작은 나무를 심었으며, 윤동주의 시를 머금은 비석을 여럿 세운 그저 평범한 공원이다 성
곽과 소나무 사이로 시원하게 불어오는 산바람에 속세에서 오염된 머리와 마음이 정화되며,
앞뒤로 보이는 조망(眺望)도 가히 명품이다. 게다가 공원의 분위기도 조용하고 차분하여 절로
시 한 수 읊고 싶은 마음을 솟구치게 하는 그야말로 시상(詩想)의 공간이다. <언덕의 이름도
시상을 크게 적지 않게 돋구고 있음>

이곳이 윤동주의 언덕이 된 사연은 대략 이렇다.
윤동주는 1941년 누상동(樓上洞)에 있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연희전문대학(현 연세대) 후배
인 정병욱(鄭炳昱)과 하숙생활을 했다. 그는 하숙집에서 가까운 자하문고개와 지금의 청운공
원 일대를 수시로 찾아와 시를 짓고 구상을 했다고 하는데, '별헤는 밤'과 '서시'를 바로 이
언덕에서 지었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윤동주기념사업회에서 서울시와 종로구청의 협조를 얻
어 언덕을 조성한 것이다.

그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고자 했는데, 그 서문(序文)으로 지어진 것이 바로 서
시로 출간까지는 하지 못하고, 3부를 필사하여 이양하(李敭河)와 정병욱에게 1부씩 증정했다.
이후 세상이 좀 진정되면서 정병욱이 보관하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세상에 공개하였다.


▲  윤동주의 초상화 -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을 초상화한 것이다.

※ 윤동주(1917~1945년)의 간략한 생애
윤동주는 왜정 때 대표적인 시인으로 그의 이름 3자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중/고
등학교 국어/문학 교과서에 서시를 비롯한 그의 굵직한 작품들이 정말 지겹게 나오니 말이다.
지금도 이름이 또렷한 윤동주는 1917년 12월, 두만강(豆滿江) 이북인 북간도(北間島) 명동촌(
明洞村)에서 윤영석()과 어머니 김룡()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대랍자()학교를 다니던 중 용정(龍井)으로 이사를 가면
서 1933년 그곳 은진()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다가 1935년 본토로 넘어와 평양 숭실(崇
實)중학교에 들어갔으나 신사참배 문제로 왜정(倭政)에 의해 강제로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다
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 문과에 진학하여 1941년에 졸업했는데, 학교 기숙사의 식사
가 부실해지면서 후배 정병욱과 누상동에 하숙집을 얻어 잠시 살다가 그해 5월 그믐날에 다른
하숙집을 알아보고자 옥인동을 기웃거리던 중, 우연히 전신주에 붙어있던 하숙집 광고 쪽지를
보았다.
그래서 혹시나해서 그 집을 찾아가니 문패에는 '김송(金松)'이라 쓰여 있었다. 마침 그는 소
설가 김송을 존경하고 있었는데, '설마 그 김송?' 생각하며 문을 두드리니 글쎄 그 김송이 나
타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김송 집에서 4개월 정도(1941년 5월~9월) 하숙을 했으며, 저녁 식사가 끝나면 김
송 가족과 대청에서 차를 마시며 음악을 즐기거나 문학 이야기를 나누었고, 때로는 성악가인
김송 부인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듣기도 했다.

김송 집에 머무는 동안 인근 자하문고개를 수시로 올라가 시를 구상했다고 하며 그 현장이 바
로 윤동주시인의 언덕이다. 또한 이때 많은 시가 쓰여졌는데, 마음을 주고 받는 후배가 곁에
있었고, 자신이 존경하는 이의 집에 머물며 그의 가족에게 호의를 받으니 마음도 즐겁고 덩달
아 작품 구상도 잘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붓과 머리가 흥분하여 좋은 시가 나오는 것은 자명
한 것이다.

1941년 9월, 김송과 작별하고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東京) 릿쿄(敎)대학 영문과에 들어갔으
며, 1942년 도시샤대학(同學) 영문과로 자리를 옮겼다. 허나 1943년 7월 학업을 멈추고
잠시 고향으로 가려다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왜경에 급히 체포되었다.
왜경은 그에게 변론의 기회도 제대로 안주고 무조건 징역 2년형을 때려 후꾸오카 형무소에 집
어넣었는데 거기서 잔인한 생체 실험의 희생자가 되어 결국 해방을 목전에 둔 1945년 2월, 회
한의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28세였다. 목격담에 따르면 그는 정체를 아리
송한 주사를 계속 강제로 맞았다고 하니, 결국 왜국의 비인간적인 만행에 천재시인 윤동주는
제대로 꽃도 피우지 못하고 강제로 눈을 감게 된 것이다.

윤동주는 조부(祖父)의 영향으로 시에 천재적인 소질을 발휘했다. 그의 동생인 윤일주(
)와 당숙인 윤영춘()도 시인이었다고 하니, 그의 집안은 문학적 소질이 다분한 지식인
집안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15살에 시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첫 작품은 '삶과 죽음'과 '초한대'이다. 이후 '병아리(
1936년 11월)','빗자루(1936년 12월)','오줌싸개 지도(1937년 1월)','무얼 먹구사나(1937년 3
월)','거짓부리(1937년 10월)' 등을 간도 연길(延吉)에서 발간된 '카톨릭소년' 잡지에 소개했
다.
연희전문대학 시절에는 조선일보에 '달을 쏘다'를 냈고, 학교 교지 '문우(文友)'에 '자화상',
'새로운 길' 등을 실었다. 그리고 '쉽게 쓰여진 시'가 1946년 경향신문에 실렸다.

누상동 김송의 집에서 하숙을 하던 1941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
려고 했으나 내지 못하고 대신 3부를 필사해 정병욱과 이양하에게 1부씩 주었다. 바로 그 시
집의 서문(序文)으로 지어진 것이 그 유명한 서시로 해방 이후 1948년에 이르러 정병욱과 윤
일주에 의해 정음사에서 출간되었다.

그의 시는 청소년 시절에 지은 시와 성년 이후의 시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청소년기에 쓰여진
시들은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고 대체로 어린 시절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
다. 대표작으로는 '겨울'과 '버선본' 등이 있다. 그리고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자아성
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왜정 시절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시가 주류를 이루니 '서
시','자화상','또 다른 고향','별헤는 밤'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대표 시로 어둠의 시절에 깊은 우수 속에서도 티없이 순수한 인생을 살아가려는 그의 내
면 세계를 표현했다.

그는 비록 뜻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나보다 더 창창한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그의 시는 우
리나라 뿐 아니라 왜열도와 중원대륙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적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특히 그가 다닌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에는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어 해마다 많은 이
들이 헌화를 하고 그를 기린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아시아를 뛰어넘는 세계 문학계
의 큰 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윤동주가 세상을 뜨자 그의 시신을 간도 용정으로 가져와 묘를 썼다. 허나 그 무덤도 한때 위
치를 몰라 방황하다가 연길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온 왜인 교수의 노력으로 간신히 묘비를 찾았
다. 이후 우리나라와 중원대륙의 공산당 정부가 국교를 맺자 가족들은 봉분을 단장하고 묘비
도 새로 세웠으며, 그의 명동촌 생가는 1994년에 복원되었다. 또한 그가 다닌 명동소학교는
윤동주 관련 단체의 지원으로 옛 건물을 복원하여 윤동주기념관으로 거듭났다.

우리나라에는 굵직한 시인들이 꽤 많지만 윤동주만큼 인기와 사랑이 대단한 시인도 손에 꼽을
것이다. 우리나라를 넘어 다른 나라에서도 그의 팬들이 많으니 말이다. 비록 왜의 잔악무도한
만행으로 일찍 눈을 감게 되었지만 그의 작품을 통해 그의 혼은 우리들 마음 속에 길이길이
깃들여져 있으며,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히 적셔주는 영원한 문학신(文學神)이다.


▲  언덕 정상에 박힌 윤동주시인의 언덕 표석

윤동주시인의 언덕은 그 이름만 들어도 마음의 여유가 생길 듯한 느긋한 언덕으로 생각하기가
쉽지만 현실은 조금 가파른 언덕이다. 서울을 지키는 인왕산과 북악산(北岳山, 백악산)이 만
나는 자하문고개에 있다보니 그런 것인데, 고갯길에서 언덕 동쪽으로 오르는 길이 경사가 좀
각박하지만 지름길이며, 윤동주문학관 뒷쪽으로 오르는 길과 청운공원으로 가는 길(자하문로
35길)을 이용하는 것이 언덕의 날카로운 기세를 피하기가 좋다.


▲  늦가을 햇살 속에 한가롭게 졸고 있는 야외 공연장

푸른 잔디와 나무들이 아낌없이 수식하고 있는 언덕 정상에는 언덕의 이름을 드러낸 두툼하게
생긴 표석이 누워있고, 조그만 야외 공연장이 있다. 이곳에서는 윤동주 시 낭송회와 백일장,
문예 관련 여러 행사와 공연이 열린다.


▲  시비 앞면을 장식하는 '서시'

▲  시비 뒷면을 장식하는 '슬픈족속'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이 시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재학 초기에 쓴 것으로 어둠의 시절
속에서 살아가는 민족의 슬픈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흰색은 백의민족인 우리를 뜻한다고 하며,
삶과 밝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언덕 정상 남쪽에는 서시가 적힌 커다란 시비가 있는데, 대부분은 앞면만 보고 지나친다. 허
나 뒤에도 시가 숨겨져 있으니 시비의 속임수에 속지 말자. 뒤에 새겨진 시는 슬픈족속이다.


▲  늦가을도 잠시 길을 멈춘 윤동주 시인의 언덕 북쪽 산책로
<오른쪽에 보이는 건 한양도성(사적 10호)>


언덕 북쪽에는 옛 한양도성의 성곽(城郭)이 길게 둘러져 있다. 이 언덕은 성곽 안쪽으로 성곽
을 따라 길이 나 있는데 서쪽으로 인왕산과 이어지나 인왕산길로 잠깐 끊기며, 동쪽으로 자하
문과 이어지지만 문 서쪽에 언덕을 깎고 자하문로를 뚫으면서 서로가 끊겨버렸다. 그래서 윤
동주 언덕의 성곽은 양쪽이 끊어진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소나무 (윤동주 소나무)

언덕 성곽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청청한 소나무 1그루가 마치 성곽을 지키는 군사처럼 서 있
다. 나무 곁에 서면 성곽 여장 너머로 도성 밖 경승지이자 도심 속의 전원(田園)마을인 부암
동과 평창동(平倉洞)이 앞다투어 두 눈 아래 펼쳐지고 그 너머로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산
(삼각산)이 든든한 모습으로 서울을 살핀다.

이 나무는 윤동주가 시를 구상하던 곳이라고 하며, 일명 윤동주 소나무라 불리기도 한다. 흔
히 볼 수 있는 소나무지만 어둠의 시절, 민족을 향한 독야청청(獨也靑靑)한 그의 얼이 깃들여
진 듯 청초하고 고고해 보이며, 높은 곳에 우뚝 솟아 주변을 보는 모습도 예사롭지가 않아 보
인다. 정말 그가 저 나무 그늘에서 시를 구상했는지 낮잠만 잤는지는 모르겠지만 윤동주 언덕
을 상징하는 의미 깊은 나무로 나름 분주한 삶을 살고 있다.


▲  윤동주 소나무에서 바라본 천하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사이에 포근히 둥지를 튼 부암동과
홍지동(弘智洞) 일대, 그리고 저 멀리 북한산 봉우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  윤동주 소나무에서 바라본 인왕산과 인왕산길

▲  윤동주 영혼의 터

야외공연장에서 창의문 쪽으로 내려가면서 오른쪽 잔디밭을 유심히 살펴보면 땅에 박힌 표석
이 하나 눈에 달려올 것이다. 그 표석은 윤동주 영혼의 터로 서시 시비의 뒷면처럼 많이들 지
나치는데, 이곳은 간도 용정에 있는 그의 무덤에서 흙 한줌을 가져와 뿌린 곳으로 그 위에 표
석을 박았다. 즉 그의 소소한 가묘(假墓)가 되는 셈이다. 영혼의 터라고 하니 조금은 오싹한
기분도 들긴 하지만 그만큼 근사한 시적 표현이기도 하다.


▲  솔내음이 나래를 펼치는 서시정(序詩亭)

언덕 서쪽 밑에는 서시정이라 불리는 단촐한 모습의 정자가 도심을 굽어보고 있다. 2009년 언
덕을 꾸미면서 지은 것으로 윤동주의 서시를 따서 서시정이라 하였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정자로 이곳에 몸을 들여 남쪽을 보면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의 심장부가 장엄하게 펼쳐진다. (특히 야경이 멋짐)


 

♠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시민공원
청운공원(淸雲公園)

▲  가을옷을 곱게 걸친 청운공원과 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서촌(웃대)의 북쪽 끝이자 인왕산 자락에 자리한 청운공원은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
은 공원이다. <산 전체 또는 대부분이 공원으로 지정된 남산과 안산(鞍山), 낙산공원은 제외>
윤동주시인의 언덕이란 새로운 꿀단지를 동쪽에 달고 있는 이곳은 인왕산 동쪽 자락으로 청운
동 주택가와도 약간 거리를 둔 자연 지대이다. 인왕산길이 공원의 북쪽과 서쪽을 지나가며 자
하문고개에서 북악산길로 간판을 갈고 북악산 뒷쪽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공원을 가로지르는
골목길(자하문로35길)은 윤동주문학관에서 공원을 지나 청운동 주택가를 거쳐 자하문로로 내
려간다.

청운공원은 평범한 시민공원으로 산자락에 조성된 것 외에는 딱히 볼거리는 없었다. 그러다가
2007년에 인왕산 돌을 모아 일종의 돌아파트를 지었고, 2009년 이후 공원 동쪽에 윤동주시인
의 언덕과 윤동주문학관이 들어서면서 예전보다 인기가 늘어졌다. 윤동주언덕도 엄연히 청운
공원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공원이 산자락에 있기 때문에 서울 도심과 부암동, 홍지동 일대가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그런
데로 일품이며, 북악산과 인왕산의 청정한 기운이 늘 깃들여져 있어 공기도 맑다. 게다가 서
울 장안의 주요 해맞이 성지(聖地)로 매년 1월 1일에 해맞이 축제가 열리며, 나무와 각종 꽃
들이 울창하여 봄에는 벚꽃과 진달래, 개나리가 봄의 향연을 열고, 가을에는 오색영롱한 단풍
잎이 늦가을의 향연을 베푸는 도심 속 경승지이다.

청운공원에 가려면 자하문고개(교통편은 아래 윤동주문학관 참조)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자하문터널 남쪽에서 자하문로35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도 있는데, 그건 경사가 좀 각박
하다. 그리고 청운동 안쪽에 자리한 유진인재개발원 정문 못미쳐에 청운공원으로 오르는 산길
이 가늘게 이어져 있고, 사직공원과 수성동(水聲洞)계곡에서 인왕산길을 타고 접근하는 것도
괜찮다.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의 위엄

늦가을 단풍이 한참 절정을 이루던 때라 진한 붉은색과 노란색, 녹색 등으로 단단히 물들었다. 겨울 제국(帝國)의 시련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남은 끼와 기력을 모두 발산하는 나무들과 죽
음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무지개처럼 짧은 삶을 원망하는 나뭇잎들.. 인간은 그
들을 보며 늦가을의 정취를 즐기면서도 '올해도 이제 저물었구나, 좀 있으면 강제로 1살을 더
먹네' 늦가을과 연말 우울증에 한숨을 쉰다.


▲  청운공원 서부 (오른쪽에 보이는 동그란 존재가 '꿈의 분수')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그리고 일몰 직전의 하늘

청운공원 서쪽에는 꿈의 분수라 불리는 바닥분수와 넓은 운동장이 있다. 꿈의 분수는 매일 2
번 정도 조촐하게 분수쇼를 선보이는데, 그리 현란한 편은 아니며, 그냥 주변을 시원하게 해
주는 정도이다. 가동기간은 4월부터 10월까지로 1차는 11시에서 13시까지, 2차는 15시부터 16
시까지이며, 겨울에는 무조건 쉰다. (가동 시간은 변경될 수 있음)
분수쇼는 전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분수와 어울려 물놀이를 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그러
니 그냥 눈으로만 보기 바란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 남쪽에 자리한 인왕산 호랑이상

천하 호랑이의 대명사이자 하늘 아래 제일 무서운 존재였던 인왕산 호랑이, 이제는 숱한 설화
만을 남긴 채, 우리들 뇌리에서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그들을 그리며 만들었다는 인왕산 호랑이상, 어린이들이 울고 갈 정도로 매섭게 좀 만들 것이
지 너무 순둥이처럼 만들어 졸지에 호랑이 탈을 쓴 인왕산 고양이상이 되어버렸다. 곶감도 씹
어먹었다는 천하 제일의 인왕산 호랑이인데 그들을 제대로 모욕한 셈이다.


▲  인왕산 돌로 만든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인왕산 돌아파트)'

서시정에서 윤동주문학관으로 내려가면 돌의 거대한 보금자리를 만나게 된다. 이것은 2007년
서울시에서 추진한 '서울 도시갤러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으로 인왕산과 그 주변
에서 주운 돌들을 정리하여 그들의 조촐한 아파트로 만들었다. 


 

♠  윤동주 언덕 밑에 자리한 윤동주문학관

▲  화려한 나비를 꿈꾸는 윤동주 문학전시관(윤동주문학관)

윤동주시인의 언덕 밑이자 자하문고개 정류장 부근에 시인 윤동주를 집대성한 '윤동주문학관'
이 심플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이곳에는 원래 청운동 수도가압장 건물이 있었는데 빈 채로 버려져 있던 것을 2009년 윤동주
의 언덕을 만들면서 우선 급한데로 문학관으로 손질하여 정신적 영혼의 가압장이 되었다. 속
은 문학관일지 몰라도 겉은 문학과는 담을 쌓은 우울한 모습이었는데,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에서 서울시와 종로구청의 지원을 받아 오랜 번데기 생활 끝에 2012년 7월 25일 지금의 모습
으로 화려하게 태어났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2011년 3월로 그해 연말까지 여러 번 발걸음을 했는데, 당시 내
부는 좀 어수선했다. 공개시간이 있긴 하지만 평일에는 일찌감치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았으며,
처음에는 정문 옆에 조그만 문으로 입장을 해야 했다. 그런 공간이 이제는 윤동주를 닮은 세
련된 문학적 공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번데기를 탈피한 이 문학관은 2012년 대한민국 공공건축 부분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았으며 우
리나라 현대건축 Best 20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화려하다 못해 눈부신 나비로 태어난
셈이다. (2014년 서울시 건축상 대상을 받았고, 2015년에는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됨)

문학관은 3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있는데, 제1전시실(시인채)에는 윤동주의 손때가 진하게 담
긴 친필 원고와 온갖 문서와 서적들, 사진, 윤동주 모교의 의자와 등사기(謄寫機), 떡판 등
그의 유품 133점이 전시되어 있고, 제2전시실(열린우물)은 옛 가압장의 물탱크 윗부분을 개방
하여 중정(中庭)으로 만들어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으로 삼았다. 그리고 제3전시실(닫힌
우물)은 물탱크를 원형대로 보존하면서 그 안에 윤동주의 생애와 문학 세계를 담은 동영상을
상영한다. 그 외에 '별뜨락'이란 쉼터를 만들어 서울 도심을 굽어볼 수 있게 했다.

문학관에 진열된 윤동주의 유품 가운데 주목을 끄는 존재가 하나 있는데, 그건 그의 생가에서
가져온 나무 우물이다. 우물의 목판은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회장인 박영우씨가 직접 간도 용
정에서 가져온 것으로 땅을 깊게 파고 그 우물을 보호하고자 나무 판을 4단으로 얹힌 점이 특
징이며, 이곳에 안착한 우물은 이제 우물 기능은 상실되고 무늬만 남은 늙은 우물이 되었다.
전시관 안이다보니 깊게 땅을 뚫을 수도 없고, 마땅한 수맥도 없기 때문이다.


▲  윤동주문학관에 진열된 그의 유품과 초상화들 (2012년 이전)

▲  윤동주의 모교에서 가져온 조그만 의자 (2012년 이전)

요즘 초등학교에서 저런 나무 의자를 쓸까? 내 초등학교 시절(1~3학년)까지만 해도 저거와 똑
같은 의자에 앉았는데, 기억도 흐릿한 그 시절의 추억을 잠시나마 소환해준 정겨운 의자이다.


▲  윤동주의 마지막 사진

윤동주가 교토 도시샤대학에 재학하던 시절, 학교 친구들과 우지강<우지천(宇治川), 요도가와
강> 강변으로 마실을 나가 찍은 사진이다. 이때 왜인 친구들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청하자 그
는 아리랑을 우수에 찬 모습으로 불렀다고 한다.
허나 그때까지만 해도 윤동주나 그의 친구들이나 그것이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
다. 얼마 뒤 그는 왜경에 끌려가 후꾸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으로 비온 뒤 잠깐 모습을 드
러낸 무지개처럼 짧은 인생을 마감했으니 말이다.
그가 불의의 죽음을 당하자 그의 친구들은 크게 통곡하며 그를 애도했다.


▲  윤동주 생가에서 수습해온 나무 우물
우물 위에 두룬 나무판을 가져와 복원한 것이다. 대략 100년 정도 묵었다고 하며.
고된 세월의 때가 가득 입혀져 중후한 멋을 풍긴다.
 

※ 윤동주시인의 언덕(청운공원) 찾아가기 (2018년 11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자하문고개(윤
  동주 문학관)에서 하차, 길 건너편에 윤동주문학관과 언덕이 있다.
*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에서 1020,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윤동주문학관 관람정보 (2018년 11월 기준)
* 문학관 관람시간 : 10시 ~ 18시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 추석은 쉼)
* 윤동주 시인의 언덕은 관람시간 제한이 없는 열린 공간이다.
* 입장료 없음. 문학관 해설사 운영
* 매년 5월에 윤동주문화제가 열린다. (시낭송회와 백일장, 윤동주상 시상식, 문학콘서트, 문
  학둘레길 걷기대회 등의 행사가 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3-100 (창의문로 119 ☎ 02-2148-4175)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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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8년 11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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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꿀단지, 서촌 늦가을 산책 ~~~ 옥인동 박노수미술관, 친일매국노 윤덕영의 기와집 흔적들



' 늦가을 서촌 나들이 '

(박노수미술관과 친일매국노 윤덕영의 집)


▲  박노수 가옥(박노수 미술관)의 뒷모습

▲  박노수 가옥 뒷쪽 굴뚝

▲  청운동에서 바라본 북악산


 


▲  옛 청휘각(晴暉閣)터 주변에서 바라본 서촌(西村)

서울 도심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서촌(웃대)은 경복궁(景福宮) 서쪽 동네를 일컫는다. <청계
천 이북이자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는 북촌(北村), 청계천 이남은 남촌(南村), 창덕궁 동부는
동촌(東村)이라 불림>
흔히 서촌이라 불리는 경복궁 서부는 옛날부터 웃대라 불렸으며 원래 서촌은 경희궁(慶熙宮)
과 서대문 주변 지역이었다. 그러던 것이 인왕산 동쪽까지 확장된 것이다. 또한 세종대왕이
통인동에서 태어난 인연(1397년 출생)을 내세워 2011년 이후에는 종로구청과 지역 주민 주도
로 새롭게 '세종마을'을 칭하고 있다.

서촌(웃대)은 왕족부터 양반사대부(士大夫)부터 내시와 상궁(尙宮), 의관(醫官), 역관(譯官)
등의 중인(中人)과 평민 등 다양한 계층이 살았는데 그중 중인 계급이 많이 살았다. 또한 인
왕산과 북악산(백악산)을 병풍으로 두룬 아름다운 절경으로 인해 조선 초부터 도성(都城) 내
경승지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런 곳은 늘 귀족들이 군침을 흘리는 법이라 안평대군(安平大君,
세종의 3번째 아들)부터 이항복(李恒福), 정철(鄭澈), 권율(權慄), 김상용(金尙容), 김수항(
金壽恒), 추사 김정희(金正喜)에 이르기까지 많은 귀족들이 집과 별장을 지어 머물렀다.
특히 이곳은 도시와 자연이 경계를 맞닿은 도성의 변두리로 지금과 달리 필운대로와 신교동교
차로만 지나면 완전 자연에 감싸인 한적한 곳이었다. 게다가 궁궐과 육조(六曹) 등의 관청이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가까워 고위 관리들의 주택, 별서 장소로는 아주 그만이었다.

서촌의 이름난 명소는 겸재 정선(鄭敾)이 그의 노련한 손끝을 통해 그림으로 남겼는데, 그 화
첩이 장동(壯洞)8경첩으로 여기서 장동은 서촌의 일원인 청운동 지역의 옛 이름이다. 조선 후
기에는 중인이던 천수경(千壽慶)이 송석원(松石園)이란 시사(詩社)를 세워 중인들의 문학 공
간으로 키웠으며, 왜정(倭政) 이후에는 윤동주(尹東柱), 이상범(李象範), 박노수(朴魯壽), 이
상(李箱) 등 많은 시인과 화가들이 서촌에 안겨 주옥 같은 작품을 그려냈다.

서촌은 북촌만큼은 아니지만 한옥들이 제법 많이 남아있다. 대략 700여 채의 한옥이 옥인동과
누하동, 사직동, 체부동, 창성동 일대에 흩어져 있는데, 120년 이상 묵은 한옥은 하나도 없고
, 20세기 개량 한옥이 주류를 이루며 박노수 가옥 등의 양옥도 섞여있어 20세기 초/중반 서울
의 주거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옥이 많긴 하지만 북촌처럼 정식적으로 한옥마을을 칭하
고 있지는 않다. (비공식적으로 '서촌한옥마을'이라 불리기도 하며, 창성동 일대 한옥을 따로
'창성동 한옥마을'이라 불리기도 함)

조선 후기까지 북촌과 더불어 잘나가는 동네로 이름을 날렸던 서촌이지만 옥인동 일대에 고래
등 저택을 짓고 인왕산의 맑은 공기를 축내던 친일파 윤덕영(尹德榮)과 이완용의 부정 때문인
지 왜정 이후 적지 않게 기울었고 해방 이후 개발제한구역에 묶이면서 거의 시골 읍내처럼 정
체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루면 강산도 변한다는 서울 도심 한복판임에도 북촌과 서촌만큼은 시간도 느릿느릿 양반걸
음을 하거나 뒷걸음을 치는 것이다. 조금만 나가면 21세기 한복판인데 서촌 상당수는 아직 20
세기 한복판에 머물러 있어 서울의 옛 모습을 더듬기에 좋다.
허나 시간이 너무 정체되면 지역 주민들의 삶이 힘들어진다. 북촌도 도심 속의 꿀단지로 화려
하게 재기를 하고 있지만 서촌은 근래까지 낙후된 모습으로 거의 남아있던 것이다. 그러다보
니 한옥 기피증이 생겨나 한옥이 감소하게 되었고 거기에 서울시의 무관심까지 더해져 서촌의
숨겨진 명소들도 은근히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0년 4월 서울시에서 '경복궁 서측
지구단위계획'을 발표하여 한옥 보존과 신축을 장려했고, 북촌으로 단단히 재미를 본 서울시
와 종로구청이 서촌을 새로운 꿀단지로 개발하면서 서촌도 드디어 때를 만나게 되었다.

그 이후 새로 지어진 한옥이 나날이 늘고 있고, 종로구청에서 서촌 답사코스를 개발하고 홍보
하는 한편, 새로운 명소를 발굴하고, 기존의 명소를 손질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조
금씩 북촌을 추격하고 있다. 특히 수성동계곡 복원(2012년 7월)과 박노수 가옥을 구립 미술관
으로 해방시킨 사건(2013년 9월)은 서촌에 큰 활력을 불어넣는데 충분했다. 게다가 소규모 갤
러리와 공방도 조금씩 둥지를 틀면서 서촌의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한다.

서촌에는 수성동계곡과 박노수가옥(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 이상범 가옥, 사직단, 황학정(
黃鶴亭), 단군성전, 선희궁(宣禧宮)터, 백호정 바위글씨, 백세청풍 바위글씨, 창성동 한옥단
지, 통의동 백송터, 신익희(申翼熙) 가옥, 백운동천, 송석원터, 청휘각터, 자수궁터, 보안여
관, 필운대, 배화여고 생활관, 체부동(體府洞) 홍종문가옥, 백운동천 바위글씨, 운강대 바위
글씨, 행촌동 은행나무, 딜쿠샤, 홍건희 가옥 등 조선과 근대, 현대 문화유산이 풍부하게 깃
들여져 있으며 갤러리아트가, 대림미술관 등의 온갖 갤러리와 문화공간, 금천교시장(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과 통인시장 등의 전통재래시장이 있다. 특히 금천교시장은 제2의 피마골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먹자골목이 크게 형성되어 있는데, 고깃집과 전집, 횟집, 분식집
등 다양한 식당이 즐비하여 학생과 직장인, 인왕산 등산객, 답사객으로 1주 내내 활기가 넘친
다. (나도 가끔 이용함)

부암동(付岩洞)과 성북동, 북촌과 더불어 나의 마음을 계속 훔치고 있는 서촌은 2011년 늦여
름부터 구석구석 발자국을 남기며 그의 숨겨진 속살을 계속 뒤집고 있다. 별거 없을 것 같은
겉보기와 달리 그 속은 신대륙 이상으로 다양한 보물을 품은 곳이 바로 서촌이다.

서촌 나들이는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나 2, 3번 출구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여기서 자하
문로나 사직공원 동쪽(경복궁역 1번 출구)의 필운대로를 중심으로 움직이면 되며, 자하문고개
에 있는 윤동주시인의 언덕(청운공원)에서 주요 명소를 거쳐 경복궁역으로 내려오는 것도 괜
찮다. 또한 조그만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고, 그 속에 여러 명소와 소소한 볼거리 등
이 숨겨져 있으니 너무 큰 길만 살피지 말고 서촌 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골목길도 꼭 거닐어
보자. 그러면 정말 배부르고 알찬 서촌 나들이가 될 것이다. 단 서촌도 엄연히 사람들이 사는
공간이므로 민폐를 부리지말고 조용히 둘러보기 바란다.


 

♠  친일파 윤덕영이 지은 근대 가옥, 화가 박노수의 삶터로 미술관으로
새롭게 거듭난 박노수 가옥(朴魯壽 家屋)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호

서촌 중심에 자리한 통인시장에서 수성동계곡으로 인도하는 옥인길을 따라가다보면 오른쪽 골
목 속에 서촌의 상큼한 명소로 등극한 박노수 가옥이 손짓을 한다. 이곳은 집 이름 그대로 우
리나라 미술계의 원로이자 현대 화가인 남정 박노수의 집으로 인근 이상범 가옥과 함께 현대
미술의 따끈따끈한 산실이며 2013년 9월 이후 속세에 개방되어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이하
미술관)'으로 새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이야 천하에 공개된 현대 화가의 미술관으로 누구든 돈만 내면 안길 수 있는 명소가 되었
지만 이 집의 태생은 그렇게 곱지는 못했다. 바로 친일매국노로 개추잡한 이름을 날렸던 윤덕
영(尹德榮, 1873~1940)이 지은 집이기 때문이다.
윤덕영은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큰아버지로 왜정(倭政)에 적극 협
력하여 나라를 팔아먹고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며 배때기에 기름칠했던 1급 매국노이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친일파로 추잡한 뒷끝을 보인 윤치호(尹致昊) 조차도 '이 비열한 매국노
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웹스터 사전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라며 그의 만행을
꼬집었다.
하지만 사람이기를 포기한 윤덕영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온갖 손가락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이권에 개입해 많은 부를 쌓았고, 집과 땅에도 징그럽게 욕심을 부려 송석원(松石園)을
비롯한 옥인동(玉仁洞) 일대를 사들여 고래등 양옥 별장인 벽수산장(碧樹山莊)을 지었다. 그
리고 그 주변으로 가족과 첩을 수요할 14동의 고래등 한옥을 주렁주렁 지어 완전 그만의 조그
만 세상을 만들어놓았다.
박노수 가옥은 그 14동의 하나로 딸과 사위를 위해 이 땅 최초의 근대 건축가인 박길룡(朴吉
龍)에게 의뢰하여 1937~1938년경에 지어진 것이다.


▲  세상을 향해 활짝 문을 연 박노수 가옥(미술관) 대문

▲  벽돌로 지어진 박노수 가옥 (박노수미술관)

이 가옥은 한옥 양식과 중원대륙 양식, 서양식이 잡탕이 된 이른바 절충식 기법의 집이다. 2
층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벽돌 건물로 반지하층을 가지고 있으며, 붉은 벽돌로 된 1층에는 온
돌방과 마루, 복도, 응접실이 있고, 하얀 피부로 이루어진 2층은 나무 구조로 지어졌는데 계
단을 중심으로 마루로 된 방이 널려있다.
그리고 3개의 벽난로를 설치해 온기가 머물 공간을 확보하고 집 서쪽에 현관을 두었으며, 벽
돌로 포치를 설치하여 집의 운치를 더욱 높였다. 지붕은 서까래를 노출한 단순 박공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2층의 증축 부분을 빼면 거의 원형 그대로 잘 남아있다.

박노수가 매국노의 악취가 진동하는 이 집에 들어온 것은 1973년이다. 왜 이곳을 골랐는지는
모르겠으나 스승인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의 집과도 가깝고, 집의 모습도 중후하고 운치가
진해 예술가의 집 분위기로는 아주 좋아 보인다. 게다가 뜨락도 넓고, 인왕산도 가깝고, 도심
과도 가까우니 시내 왕래가 잦았던 그에게도 딱 적당한 장소였을 것이다.
남정은 이곳을 집과 화실로 삼아 많은 작품을 그려냈으며, 그의 예술적이고 꼼꼼한 손맛이 담
긴 뜨락에는 그가 수집한 수석과 석물, 문화유산을 배치하고 다양한 꽃과 나무를 심어 자연과
문화, 수석이 어우러진 아주 참한 공간으로 꾸몄다.

왜정 때 박길룡이 설계한 건물로 당시 건축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고 현대 미술화가인
박노수가 40년 가까이 머물며 작품 활동을 벌였던 현장이라 윤덕영이라는 친일파 괴물이 만든
건물임을 무릅쓰고 1991년 5월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그것도 1호라는 그럴싸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바로 그 점이 참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데 1호나 2호, 3호ㅡ 100호 등은 그저 지정된 번호
일 뿐 가치 순위는 아니기 때문에 그리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1호만큼은 신중
해야 된다고 본다. 국보 2호는 몰라도 1호는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1호의 의미는 이 땅에서
는 꽤 각별하기 때문이다. 해방이 된지 70년이 되도록 친일매국노 청산조차(청산은 커녕 그것
들이 더 활개치고 있음) 제대로 되지 못한 이 땅의 거지 같은 현실을 이 가옥이 보여주는 듯
싶어 마음이 참 쓰라리다.

만약 윤덕영의 후손이 염치없이 계속 살고 있었다면 화염병이나 폭탄을 던져 없는 화마(火魔)
라도 억지로 소환해 집과 함께 날려버려야 마땅하겠지만 박노수가 이곳에 살면서 집에 일종의
면죄부가 붙여졌으니 굳이 때려부실 필요는 없을 것이다. 허나 문화재 지정 후순위로 두어 천
천히 지정을 하던가 요즘 개나 소나 지정된다는 등록문화재로 삼는 것이 어땠을까 싶은 아쉬
움도 살짝 든다. 뭐 이렇게 써봤자 허공에 메아리에 불과하지만...


▲  가옥(미술관) 현관 앞 (가옥 서쪽)

★ 남정 박노수(藍丁 朴魯壽, 1927~2013)의 간략한 생애
박노수는 1927년 2월 17일 충남 연기군(현 세종시)에서 태어났다. 1940년대에 청전 이상범의
문하로 들어가 그림을 배웠으며, 해방 이후 서울대 회화과에 진학했다.

그의 작품활동은 주로 국전(國展)에서 이루어졌는데 1953년 국무총리상, 1955년에 대통령상을
받았으며 1957년에는 추천작가를 지냈다. 이후 5.16민족상, 3.1문화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등
을 받았고, 이화여대(1956~1962)와 서울대(1962~1982)에서 교수를 지냈다. 이후 서울대 명예
교수가 되었고,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운영위원을 역임했으며, 1995년 자랑스러운 서울
시민 6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왜열도 동경과 스웨덴, 미대륙에 다수의 국제전과 10
여 회의 국내외 개인전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화제를 취하면서도 간결한 문필과 강렬한 색감, 대담한 터치 등 독자적
인 화풍을 구축해 전통 속에서 현대적 미감을 구현한 작가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대표작으로
는 '달과 소년'이 있으며, 그의 많은 작품이 이곳에 진열되어 속인들의 정처없는 안구와 마음
을 다독거려준다.

남정은 1973년부터 2011년 말까지 이곳에 살았다. 2011년 죽음이 임박해진 그는 집과 소장품
등 재산의 상당수를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해 11월 11일 자신의 집에서 미술
계 인사와 후배들, 제자들, 종로구청 관계자 등이 모여 기증협약식을 갖고 약속대로 집과 소
장품을 쿨하게 종로구청에 내주었다.
그가 기증한 물건은 그의 그림이 포함된 미술작품 500점, 수석과 여러 석물 379점, 오래된 가
구 66점, 개인 소장품 49점 등, 약 1,000여 점으로 그의 통 큰 기증은 서민의 쪽박까지 빼앗
으려 드는 졸부와 위정자들로 가득한 이 땅에 한줄기 빛과 같은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가 베
푼 대인의 기운은 친일파 집이라는 굴레를 지닌 이 가옥을 180도 달리 보이게 하는데 충분했
다.

종로구청은 남정의 뜻에 따라 기증받은 집을 종로구립 미술관으로 꾸미기로 하고 2012년 10월
에 개관하기로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못해 1년 연기되었다. 그 사이 남정은 그의 소망이던 미
술관 개관을 끝내 지켜보지 못하고 2013년 2월 25일, 86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숨을 놓고 말았
다.
그가 사라진 이후, 유족과 종로구청의 노력에 힘입어 남정의 손때와 예술혼이 서린 그의 집은
드디어 2013년 9월 11일,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 천하에 문을
열었다. 개관 기념전으로 그의 대표적인 작품을 모아 '달과 소년전'을 가졌으며, 종로구 최초
의 구립 미술관으로 이곳이야말로 남정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유작이자 아름다운 선물이다.

나는 근/현대 미술가에는 그리 관심이 없다보니 남정이 왜정과 현대를 거쳐간 원로 화가의 하
나로만 알고 있었다. 허나 이번에 그의 깊은 부분까지 파고드니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못
지 않은 대인(大人)으로 그의 이름 3자가 제법 크게 다가온다.


▲  무늬가 살아있는 석조대좌(臺座) (현관 앞)
무엇을 받치던 대좌였길래 무늬가 저렇게 요염한 것일까? 허나 대좌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채 망연히 뜨락 장식물의 일원이 되었다. 정체성과 역사를 잃어버리는 것만큼
무섭고 한심한 것은 없다.

▲  미술관 개원 기념으로 종로구청장이 남정에게 바친 메세지

▲  야외 전시관을 방불케하는 미술관 남쪽 뜨락

박노수 가옥은 크게 미술관으로 변신한 2층 가옥과 남쪽 뜨락, 그리고 북쪽 벼랑에 설치된 전
망대로 이루어져 있다.
남쪽 뜨락에는 남정이 수집한 온갖 수석과 문화유산 등이 가득 흩어져 있고, 소나무와 감나무
등 여러 나무와 꽃이 자리해 있어 조촐하게 자연과 문화가 잘 버무려진 야외 전시장을 이루고
있다. 특히 그는 수석 취미가 대단하여 뜨락 안팎으로 수석들이 가득한데 군침이 돌 정도로
잘생긴 돌도 적지 않으며, 그가 도안해서 만든 석조 원탁과 돌의자 6기는 가족과 벗, 제자/후
배들과 이야기꽃을 피웠던 정겨운 현장이다.

▲  남정이 만든 석조 원탁과 돌의자 6기

▲  비석의 지붕돌인 가첨석(加檐石)


▲  귀여움과 고색의 때가 묻어난 조그만 호랑이상
어디서 데리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조선 후기 작품으로 여겨진다.

▲  또다른 호랑이상
호랑이를 고양이로 만든 옛 사람들의 손때로 피부가 꺼무잡잡하다.

▲  머리 위에 또다른 머리 장식을 둔 특이한 석등(石燈)
피부가 아직 반질반질하고 머리 장식이 특이한 흔치 않은 석등으로 20세기
초/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음)

▲  향로석(香爐石)과 그 위에 수줍게 놓인 작은 수석

▲  물을 머금은 조그만 돌항아리와 분재들
벌써부터 수면에 떨어진 낙엽들이 인생의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돌항아리는 저들의 인생을 마무리 짓는 블랙홀인 모양이다.

▲  늦가을이 깃든 상큼한 남쪽 뜨락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  수석과 잡초, 꽃으로 가득한 가옥 동쪽

     ◀  집 동쪽에 솟아난 늘씬한 소나무
박노수가 심은 나무로 하늘과 가까운 줄기 끝
에 소나무 잎이 덩어리로 몰려있는 모습이 특
이하다. 나무의 높이는 거의 가옥 2층 정도 된
다.

▲  키 작은 태산목(목련목)
양옥란(洋玉蘭)이라고도 하며 박노수가
심었다.

▲  포치가 달린 가옥(미술관) 현관
구한말, 왜정 때 지어진 개인 양옥 가운데
포치가 달린 집은 흔치 않다.


▲  현관 앞에 놓인 커다란 돌확


 

♠  박노수 가옥(미술관) 현관과 전망대 주변

▲  현관을 지키고 있는 목조 동자상
세월이 달아놓은 주름으로 빛이 좀 바래 보이지만 앳된 표정은 변함이 없다.

    ◀ 가옥 현관과 여의륜(如意輪) 현판
지금은 유료의 공간이 되버린 박노수 가옥 내
부는 포치가 달린 현관을 통해 들어서면 된다.현관문에서 신발을 버리고 실내화로 갈아타면
되는데, 반지하층을 제외한 1층과 2층 상당수
의 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미술관 사무실은 1층
에 있다. 또한 '달과 소년'을 비롯한 박노수의
그림은 주로 2층을 장식하고 있으며, 1층은 박
노수의 생애와 그림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
다. (내부 촬영은 통제됨)

현관문에는 한자로 쓰인 여의륜 현판이 걸려있다. 글씨가 꽤 큼지막하고 패기가 넘치는 모습
으로 박노수의 집에 있으니 그의 글씨로 착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이다.
현판에 담긴 여의륜이란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 세간(世間), 출세간 이익을 더하는 것
을 본뜻으로 하는 보살(菩薩)을 뜻하는 말로 추사가 말년에 불교에 관심을 가지면서 서울 봉
원사(奉元寺)와 봉은사(奉恩寺), 팔공산 은해사(銀海寺), 해남 대흥사(大興寺) 등 천하에 유
명한 절을 유람하며 많은 글씨를 남겼다.

현판 우측에는 '승연노인(勝蓮老人)'이란 낙관이 찍혀있는데, 승연노인은 추사의 다른 아호(
雅號)이다. 이 현판을 손에 넣은 박노수는 현관문에 걸어두어 현관부터 미술가의 집 분위기를
진하게 우려냈다.


▲  근대 양옥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2층 벽난로
난방의 기능은 사라지고 이제는 무늬만 남아 한가로운 말년을 보낸다.

▲  2층 목조 다락방
다락방에 설치된 모니터에는 남정의 인터뷰 장면(1970~80년대로 여겨짐)이 나와
그의 생전에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 현관 앞에서 바라본 미술관 정문
조금씩 숨겨진 끼를 드러내며 경쟁자 북촌을 긴장시키는 서촌, 박노수 미술관은
바로 그 서촌의 새로운 활력소이자 허브이다. 평일임에도 제법 많은 이들이
찾아와 짧은 시간에 비해 너무 떠버린 이곳의 높은 인기를 실감케 한다.

▲  뚜껑이 닫힌 죽은 우물
친일파 윤덕영의 딸 내외와 박노수 가족의 목을 축여주었던 우물이다. 허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그 수맥이 끊기면서 이제는 껍데기만 남았다.

▲  커다란 수석 (현관 앞)
호랑이나 사자, 낙타가 웅크리고 앉아 망중한에 잠겨있는 모습 같다.

▲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과 홀을 쥐어든 조그만 석인(石人)

가옥 북쪽에는 수풀이 우거진 가파른 벼랑이 있다. 예술과 문학의 향이 깃든 가옥답게 대나무
도 삼삼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벼랑에 계단과 석물을 배치한 고즈넉한 산책로를 내
었고, 그 길의 끝에는 무려 전망대까지 두었다. 이 언덕 산책로와 전망대야말로 박노수 미술
관만이 가진 강한 매력이자 백미라 칭할 만하다.

산책로 입구에는 고색이 묻어난 조그만 석인이 홀을 쥐어들며 안내인처럼 자리해 있다. 제자
리를 잃고 방황하는 그를 남정이 데리고 온 것인데 고향을 잃은 충격 때문일까? 석인은 좀처
럼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긴 이곳에 이끌려온 석조 문화유산 모두 제자리를 잃
은 가련한 처지이다. 아마도 사람이 들을 수 없는 그들만의 속삭임으로 고향을 잃은 동병상련
의 한을 달래지는 않을까?
투박하게 닦여진 돌계단을 오르면 북쪽으로 난 아주 짧은 샛길이 있는데, 대나무로 둘러싸인
그곳에는 돌의자가 놓인 조그만 쉼터가 있다. 그리고 숲길을 마저 오르면 나무로 지어진 전망
대(전망데크)가 나타난다.

이 전망대는 박노수 가옥을 미술관으로 바꿀 때 지은 것으로 예전에는 그냥 나무와 풀만 있었
다. 숲길에는 조그만 돌의자가 여럿 있는데 남정은 이들 의자에 앉아 천하를 바라보며 작품을
구상하거나 온갖 망중한에 잠겼을 것이다.
전망대까지 인도한 숲길은 담장 앞에서 뚝 끊겨버려 적지 않게 달아오른 숲길의 여흥을 깨뜨
려버린다. 지금이야 이렇게 막혔지만 윤덕영이 한참 인왕산의 산소를 축내던 시절에는 바로
옆에 자리한 벽수산장까지 이어져 있었다.

전망대에 서면 가옥의 뒷모습을 비롯해 옥인동 일부와 옛 인경궁(仁慶宮)터인 배화여자대학이
바라보인다. 이곳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나 두 눈에 들어오는 천하의 범위는 우물안 개
구리 수준이다. 그래도 주어진 공간을 최대로 활용해 이런 곳까지 갖추니 정말 알차긴 알차다.

▲  숲길에서 만난 조그만 향로석

▲  숲길에서 만난 장명등


▲  숲길 끝 벼랑에 다리를 걸친 전망대
숲길과 돌의자, 석물은 박노수 시절의 것이고 전망대는 2013년에 단 것이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가옥의 뒷모습과 지붕
건물의 모습은 양옥이지만 지붕만큼은 거의 한옥 스타일이다. 윤덕영이 14동의 한옥을
지을 때 자신의 벽수산장을 제외하고 모두 한옥으로 지었으면서 왜 딸의 집만
이렇게 이채로운 모습으로 지어주었을까?

▲  전망대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옥인동과 통인동 지역이 주류를 이루며, 광화문 부근도 조금씩 시야에 들어온다.

▲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굴뚝
지붕에는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굴뚝 5개가 뿔처럼 솟아나 집의 멋스러움을 한층
수식한다. 1층 지붕에는 2개, 2층에는 3개가 달려있는데, 이중 3개는
벽난로용, 나머지는 부엌용이다.

▲  가옥 북쪽 굴뚝과 언덕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왼쪽)

▲  가옥 동쪽에 자리한 장독대와 창고

남정 일가가 사용하던 장독대가 창고 위에 놓여있다. 남정의 작품은 장독대에서 숙성된 여러
음식의 힘이라고 봐도 절대 과언을 아닐 것이다. 허나 그들이 떠난 이후 이제는 인생처럼 공
허한 장독대가 되어 뜨락 장식물의 일원으로 조용히 묻혔다.

※ 옥인동 박노수 가옥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찾아가기 (2017년 11월 기준)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4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
  서 종로구 마을버스 09번을 타고 박노수미술관 하차, 도보 1분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1,2번 출구)에서 도보 15분
* 입장료 : 성인(25~64세) 3,000원 (20명 이상 단체 1,800원) / 청소년 1,800원 (단체 1,200
  원) / 어린이 1,200원 (단체 600원) / 종로구민은 50% 할인
* 관람시간 : 10시~18시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과 한가위 당일은 휴관)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68-2 (옥인1길 34, ☎ 02-2148-4171)


 

♠  다쓰러져간 매국노 윤덕영의 고래등 기와집

▲  옛 윤덕영 집 돌계단

옥인동 47-133번지 주변은 새 주택과 헌 주택, 달동네 스타일의 집이 공존하는 현장이다. 바
로 그곳에 윤덕영의 기와집이 1채 남아있다.
윤덕영은 서촌(웃대)에서 가장 풍경이 아름다운 송석원과 옥인동 일대를 싹 매입하여 그곳에
자신의 탐욕을 풀어놓았는데 송석원에 큼지막한 서양식 별장을 짓기로 작정하고 프랑스 공사
(公使)를 지낸 민영찬을 통해 건물 설계도를 의뢰했다. 그 설계도를 바탕으로 독일인 감독관
을 고용하여 1914년 집을 짓기 시작해 10여 년의 공사 끝에 완성을 보았다.

그 집은 무려 222평 크기의 프랑스식 건물로 자신의 호를 따서 벽수산장(碧樹山莊)이라 하였
다. 또한 송석원에 있다고 해서 '송석원별장'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었다. 산장 주변에는 14동
의 한옥을 지어 가족과 자식, 첩들과 모여 살았는데, 소나무와 사과나무가 무성하던 벽수산장
북쪽에 1고주 7량집의 99칸 기와집을 지어 첩의 거처로 삼았다. 그 집이 바로 이곳이다.

윤덕영이 1940년 골로 간 이후, 그의 자식들이 재산을 말아먹으면서 벽수산장은 왜열도 회사
인 미쓰이에게 넘어가고, 14동의 기와집도 거진 남의 손에 넘어갔다. 6.25 이후 서울의 폭발
적인 인구 증가로 벽수산장 주변에 무허가 집이 난립을 했고, 약간 처지가 괜찮은 이들은 윤
덕영의 한옥을 1칸씩 차지해 서울살이를 했다. 그렇게 서울을 휩쓴 근대화의 회오리로 그의
부질없는 한옥들은 대거 다운당했고, 지금은 박노수 가옥과 이 한옥만 간신히 남게 되었다.

한옥에는 현재 여러 가구가 살고 있는데, 대지를 공동으로 소유하며 각각 별도의 출입구를 두
어 1지붕 여러 가족을 이루고 있다. 매국노의 악취가 코를 찌르는 기와집이 힘겹게 서울살이
를 하는 서민들의 소박한 삶터가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형태가 적지않게 변질되고 수리도 제
대로 받지 못해 20세기 초반 최상류층 고래등 가옥은 이제 거의 쓰러지기 직전의 허름한 몰꼴
이 되었다. 마치 무관지옥으로 개처럼 끌려갔을 윤덕영과 아비의 재산으로 팔자좋게 살다가
가산을 말아먹은 그 자손들처럼 말이다.

비록 빛은 많이 바랬지만 한 시대를 나쁘게 풍미했던 권력자가 살던 현장이라 집에 쓰인 공사
자재는 거의 고급 수준이며, 단풍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한옥 동쪽에는 제법 품격이 돋보이는
석조 계단을 늘어뜨렸다. 지금이야 주택들 사이에 끼어있는 가련한 신세라 골목길 계단 정도
로 실감이 나진 않겠지만 왕년에는 궁궐 계단 못지 않은 위풍을 자랑했다. 게다가 일반 한옥
에서는 보기 힘든 계단의 소맷돌, 장대석 주초, 처마 장식, 장식이 새겨진 벽 등을 갖추고 있
어 예사 한옥이 아님을 귀띔해준다.
그러다보니 버리기는 좀 아까워 서울시에서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을 조성하면서 이 집을 옮
기려고 했는데, 나이에 비해 한옥이 너무 낡아 이전이 불가능하자 부득이 예전 모습 그대로
본을 따서 새롭게 짓는 선에서 끝을 냈다. 그리고 집 이름은 그 더러운 주인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냥 '옥인동 윤씨 가옥'이라 하였다. (가옥의 면적은 225.79㎡)

참고로 윤덕영의 아우로 형못지 않던 쓰레기 매국노인 윤택영(尹澤榮, 1866~1935)의 재실(齋
室)도 남산골한옥마을로 옮겨져 한가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  위에서 본 돌계단과 단풍나무

▲  계단 끝에 자리한 옛 윤덕영 집


▲  서민의 삶터가 되버린 옛 윤덕영 집
허름한 모습 속에 아직 고급 기와집의 기품이 남아있다.
 

계단을 오르면 윤덕영 집이 일부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북쪽으로 휘어진 계단을 오르면 집
대문인데 서민들의 거처가 되버린 탓에 갖은 생활도구와 가스관, 전깃줄, 편지함으로 주변이
참 어수선하다. 게다가 대문도 굳게 잠겨져 있고, 골목길도 막혀버려 세세한 집 구경은 어려
운 실정이다.

지금은 잠잠하지만 혹여 나중에 개발의 칼질이 그어지면 이 한옥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 같다.
이미 남산골한옥마을에 본을 따서 지은 집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곳의 집은 엄연히 새 집
이라 고색의 냄새가 없는 이 땅의 흔한 민속촌의 한옥 같은 인상이다. 반면 이곳은 100년 가
량 묵은 한옥이라 겉모습에서 벌써 고색의 향이 피어올라 고택의 기분을 들게 한다.
이곳을 만약 밀게 된다면 모두 가루로 만들지 말고 지붕과 벽, 목재 등을 모두 수습해 남산골
에 있는 윤씨가옥을 다시 손질했으면 좋겠다. 비록 매국노의 잔재라 껄끄럽긴 하지만 '박노수
가옥'도 박노수 화백 덕분에 개과천선하여 아주 새로운 삶을 사는 것처럼 이 한옥도 서민들의
오랜 삶터로 그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현장이다. 게다가 20세기 초반 상류층 한옥의 형태
를 잘 간직하고 있으니 한옥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옛 윤덕영 집을 끝으로 늦가을 서촌의 일부 더듬기는 막을 내린다. 다른 명소는 별도의 글에
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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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11월 1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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