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폭포'에 해당되는 글 19건

  1. 2023.03.28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강원도의 깊은 내륙, 양구 방산면 나들이 <수입천, 직연폭포, 양구백자박물관>
  2. 2021.07.31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서귀포 천제연폭포, 제주올레길8코스 나들이 (천제연관개수로, 선임교, 베릿내오름)
  3. 2020.11.14 늦가을에 찾아간 청송 주왕산 단풍 나들이 ~~~ (절골에서 가메봉, 용연폭포, 절구폭포, 용추폭포, 자하성터, 대전사까지)
  4. 2020.08.26 서울의 단단한 북쪽 지붕, 도봉산 계곡 나들이 ~~ 무수골계곡에서 우이암 관음봉, 문사동계곡, 도봉계곡, 도봉동문까지
  5. 2020.08.02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북한산 뒷통수에 숨겨진 달달한 폭포, 밤골계곡 숨은폭포 (북한산둘레길 효자길, 효자비)
  6. 2018.08.14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관악산에서 제일 맵시가 좋은 계곡, 과천 문원계곡 둘러보기 (문원폭포, 문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보광사) 4
  7. 2018.07.15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속리산 폭포 나들이 ~~~ (장각폭포, 장각동계곡, 오송폭포, 시어동계곡, 성불사, 옥양폭포)
  8. 2017.08.16 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숲과 계곡, 폭포, 옛 별서 유적이 어우러진 ~~ 부암동 백석동천 (백사실계곡)
  9. 2016.09.07 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아름다운 계곡을 옆구리에 차고 있는 ~~ 북한산 진관사 (진관사계곡)
  10. 2016.08.29 도심 속에 숨겨진 은빛 폭포, 북한산 3대 폭포의 하나로 추앙받는 ~~ 북한산 구천폭포 (구천계곡,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강원도의 깊은 내륙, 양구 방산면 나들이 <수입천, 직연폭포, 양구백자박물관>

양구 직연폭포, 백자박물관



' 강원도 양구 여름 나들이 '
(직연폭포, 양구 백자박물관)
양구 직연폭포
▲  양구 직연폭포
 



 

여름이 점점 깊어가던 6월의 끝 무렵, 한반도의 정중앙이자 배꼽을 자처하는 강원도 양구
(楊口) 땅을 찾았다.

양구는 거의 9년 만에 방문으로 이번이 4번째 인연인데, 양구읍내 북쪽에 있는 '양구근현
대사박물관'과 '양구 선사박물관', 선사박물관의 깜찍한 마스코트인 '가오작리 선돌', 파
로호 상류에 떠있는 '한반도섬' 등을 간만에 복습했다. 이들은 거의 한곳에 몰려 있어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면 편하다. (☞ 관련글 보러가기)

그들을 모두 둘러보고 양구 읍내로 나오니 어느덧 15시, 점점 흥분이 더해가는 여름 제국
의 기운과 10km에 가까운 행군으로 몸은 다소 지쳐 있었다. 읍내 다음으로 방산면 지역의
직연폭포와 백자박물관을 정처(定處)로 두고 있었으나 날도 덥고 피곤도 하려니와 하루에
너무 많은 것을 봐버리면 내 침침한 두 망막이 과부하(?)가 걸릴 것 같아서 마음을 싹 비
우고 철수하려고 했다.
그래서 양구시외터미널로 들어가 양구를 뜰 궁리를 하던 찰라, 방산(오미리)으로 가는 군
내버스가 나타나 나의 그런 태만에 빵빵 제동을 건다.
'그래! 오늘 죽더라도 방산면과 인연을 짓자' 마음을 고쳐먹고 그 버스에 올라 미답(未踏
)의 공간인 방산면으로 이동했다.

방산면(方山面)은 양구 지역의 서북부를 이루고 있는 고장으로 읍내에서 방산면 중심지인
현리까지 30여 분 정도 걸린다. 서쪽은 남북분단이 빚은 어이없는 작품, 평화의댐에 이르
고 북쪽은 미움의 선, 휴전선으로 막힌 외로운 곳으로 두타연(頭陀淵)이 있는 고방산리까
지는 오로지 북만 보고 달리다가 거기서부터 급격히 서남쪽으로 길이 꺾인다.

방산면사무소(현리)에서 내려 남쪽으로 가면 방산면의 대지를 적시며 파로호로 흐르는 수
입천(水入川)이 마중을 한다. 수입천은 휴전선 이북에 강제로 잡힌 수입면 청송령(靑松嶺
)에서 발원한 34.8km의 하천으로 두타연과 직연폭포 등의 걸출한 명승지를 간직하고 있으
며, 수질 또한 전방 지역의 특수로 인해 청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  칠전1교에서 바라본 수입천 (서쪽 방향)
방산면의 중심지인 현리 마을 남쪽을 굽이쳐 북한강으로 흘러간다.

▲  칠전교에서 바라본 칠전1교와 수입천 (서쪽 방향)

▲  칠전교에서 바라본 직연폭포 방향
멀리 보이는 다리 밑에 나를 이곳으로 부른 직연폭포가 누워 있다. 물이 얼마나
맑은지 주변 나무는 물론이고 하늘과 구름, 달까지 그를 거울로 삼으며
매뭇새를 다듬는다.



 

♠  수입천이 빚은 대작품, 직연폭포(直淵瀑布)

▲  직연폭포로 인도하는 수입천 산책로

칠전교에서 수입천 산책로를 따라 동쪽으로 조금 가면 귀신이 놀라 도망칠 정도로 소리가 요
란한 직연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금강산(金剛山) 밑에서 발원한 수입천이 두타연을 거쳐 흐르다가 바위가 팽팽하게 들어선 이
곳에서 격한 흥분을 보이며 빚은 폭포로 동면 팔랑폭포(八郞瀑布, ☞ 관련글 보기)와 더불어
양구 지역을 대표하는 자연산 폭포이다.
팔랑폭포처럼 높이는 낮은 편이나 폭포 주위로 주름진 암벽들이 기묘하게 펼쳐져 있어 마치
조그만 대협곡을 보는 듯 하며, 폭포수가 고인 못은 깊이가 무려 20m가 넘어 많은 물고기가
살아가고 있다. 예전에는 물이 바로 떨어지는 못이란 뜻의' 직소(直沼)폭포'라 불렸으나 19세
기에 양구현감을 지냈던 '김구현'이 이곳을 다녀가면서 '직연(直淵)'으로 이름을 갈고 인근
바위 피부에 '직연' 바위글씨를 남겼다. (그 글씨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남아있지 않음)

암벽 한복판에서 요란하게 몸을 푸는 직연폭포에는 옛 사람들이 달아놓은 그럴싸한 전설이 있
을 법도 하지만 딱히 마땅한 전설은 없다. 다만 1922년 폭포 부근 칠전리에 살던 '김왈용'이
란 사람의 6개월 된 송아지가 직연에 빠져 죽은 일이 있었는데, 3자 이상이나 되는 메기들이
그 몸뚱이를 먹어치웠다는 소름 돋는 일화가 1토막 전해온다. 1자의 크기가 30cm 정도이니 대
략 90~100cm 정도 되는 메기들이 소고기 회식을 즐긴 것이다.

폭포 위에는 다리가 닦여져 있으며, 다리 너머에는 벼랑을 깎아 지은 방산백자폭포와 전통가
마 등이 있고, 다리 북쪽에는 양구 백자박물관과 백자공원이 닦여져 있다. 백자박물관 바로
남쪽에 폭포가 있으니 이들을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면 된다.

* 직연폭포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칠전리


▲  층층이 주름진 암벽 사이를 패기 있게 흐르는 직연폭포

▲  대자연이 시퍼런 물감을 풀어놓은 직연폭포 못(직연)
물에 둥둥 떠있는 하얀 것은 비누 거품이 아니라 폭포에서 쏟아진 물의
자연산 거품이다. 수질이 청정하긴 하지만 워낙 깊이가 있고
시퍼런 기운이 가득해 밑바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  수풀 너머로 바라본 직연
산 속에 숨겨진 것이 아닌 주변에 훤히 드러난 곳이라 하늘나라 선녀 누님도
마음껏 놀러오지는 못할 것이다.

▲  직연폭포의 허공을 가르는 다리
폭포를 가까이서 보고 싶다면 이 다리를 이용하자. 다리 바로 밑에 폭포가
무섭게 입을 벌리며 하얀 실타래 같은 물을 풀어놓는다.

▲  다리 바로 위에서 바라본 직연폭포의 위엄

▲  다리 남쪽에서 바라본 직연폭포와 직연소

▲  직연폭포 동쪽 수입천

폭포 동쪽 보 너머에는 백사장이 닦여진 완만한 공간이 있다. 그곳은 수심도 얕은 편이라 어
린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피서객들에게 아주 그만인 곳이다. (내가 갔을 당시 한 가족이 텐트
를 치고 놀고 있었음) 다만 주변에 깊은 곳이 지뢰처럼 도사리고 있으니 조심은 필수이다.


▲  방산백자폭포에서 바라본 직연폭포 다리와 폭포 주변

▲  방산백자폭포 앞에 축소 재현된 황포 돛배

조선시대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황포돛배를 통해 양구 지역의 백토와 여러 물자를 서울과 경기
도로 수송했다. 하지만 화천댐과 춘천댐 등 여러 댐이 북한강에 걸쳐지면서 물길이 모두 막혔
고, 도로가 닦이면서 육상교통이 그 역할을 대신하니 이제는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지기가 바
쁜 추억 속의 풍물시(風物詩)가 되어버렸다.


▲  말라버린 방산백자폭포

직연폭포 남쪽에는 또 다른 폭포인 방산백자폭포가 주름을 가득 보이며 자리해 있다. 직연폭
포가 대자연이 빚은 작품이라면 백자폭포는 인간이 지은 인공폭포로 높이만큼은 직연을 훨씬
능가하지만 나머지는 대자연 형님 작품에 모두 밀린다.
이 졸작스러운 폭포는 직연폭포 주변에 백자박물관과 백자공원, 전통가마를 닦으면서 그 수식
용으로 지은 것으로 내가 갔을 때는 물은커녕 물기조차 느낄 수 없는 우울한 상태였다. 물이
좀 흐르고 있거나 자연산 비슷하게 만들었다면 좀 봐줄 만하겠지만 꽤 어색해 보이는 주름선
만이 가득하니 주변 풍경과 너무 맞지 않는 것 같다. (서울의 홍제천인공폭포와 순창 강천산
의 여러 인공폭포를 보고 배워야 될 듯함)


▲  백자를 굽던 전통가마

백자폭포 서쪽에는 백자박물관에 딸린 전통가마가 길게 누워있다.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비바
람을 막고자 그 허공에 길쭉하게 지붕을 씌웠으며 지붕 용마루 2곳에 연기를 배출하는 장치를
달았다. (지금도 가마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

양구 지역, 특히 방산면은 고려시대부터 도자기 생산지로 명성이 높았다. 도자기 제조에 필요
한 백토(白土)와 도석(陶石)이 매우 풍부한데다 백토의 질도 매우 우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려 말부터 가마터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이곳을 꽤 애지중지하
여 많은 관요(官窯)를 설치해 백자를 생산했다. 조선 초에는 분청사기(粉靑沙器), 조선 말에
는 청화백자(靑華白瓷)도 생산했으나 백자가 그 중심을 이루었으며, 양구에서 만든 백자를 '
양구백자'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 양구에서 40기의 가마터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상무룡리의 9기를 빼면 모두 방산면
(장평리, 칠전리, 현리, 송현리, 오미리, 금악리)에 분포하고 있어 방산면이 그 중심지였음을
알려준다. 이렇듯 풍부한 백토 덕에 반짝 흥한 것이 아닌 20세기 중반까지 600년 이상 두고두
고 도자기 산지로 위엄을 떨쳤으며 이렇게 오랫동안 도자기를 만든 현장은 천하에서 양구 방
산면이 거의 유일하다.

이곳에서 태어난 백자 등의 도자기는 한강을 통해 서울로 운송되어 상당수 왕실과 귀족들에게
납품되었는데, 서울에서 가까운 광주(廣州)에 백자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마('광주분원'이라
고 함)가 많이 설치되면서 양구와 방산 지역 가마터는 조금 한가해졌다. 그래서 지역 사람들
을 대상으로 여러 그릇과 도자기를 만들어 판매했다.
허나 나라에서는 여전히 양구 백토를 선호하여 중심 안료로 계속 인기를 누렸다. <광주 지역
수토도 적지 않게 사용했음>
양구 백토는 매년 500~550석(72~79.2톤) 정도 채굴했는데, 이를 채굴하고자 양구의 민호(民戶
) 500호가 동원되었다. 백성을 닥달하여 백토를 캐내고 거기서 괜찮은 것을 선별한 다음 한강
을 이용해 봄과 가을에 2번 운송을 했는데, 이때는 북한강 주변의 인제, 화천, 춘천, 홍천 지
역 백성들이 동원되었다. 양구 백성들도 운송에 동원되었으나 1709년 이후 빠지게 된다. 백토
채굴도 힘든데 수송까지 시켜먹으니 백성들의 고단함이 컸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지역의 백토를 쓰려고 했으나 광주분원을 관리하던 사옹원(司饔院)에서 양구 백
토가 아니면 그릇이 거칠어지고 흠이 생긴다고 하자 계속 양구 것을 썼다. 이후 백성들의 고
통을 덜어주고자 상정미(詳定米)를 나누어 주고 백토 값을 올려주기도 했다.

백토를 수송할 때는 보통 배 10척에 25석씩 나눠 실었으며 화천이 110석, 춘천 220석, 인제
60석, 홍천이 12석을 나누어 운반했다. 또한 가뭄으로 물이 마르거나 제때 수송하지 못하는
경우는 말을 이용해 육로로 수송하기도 했고, 수송비를 주고 민간업자에게 맡기기도 했다.


▲  누런 황토로 닦여진 전통가마



 

♠  양구백자와 방산면 가마터를 집대성한 양구 백자박물관

▲  양구 백자박물관

직연폭포 북쪽에는 양구군에서 세운 백자박물관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양구는 기초자치
단체(군청, 시청, 구청)에서 세운 군립(시립) 박물관이 다른 군(郡)이나 인구가 적은 시(市)
에 비해 아주 많은 편으로 이번 나들이는 기이하게도 양구의 군립박물관 3곳(근현대사, 선사,
백자)과 한꺼번에 인연을 지었다.
 
방산면 중심지(현리) 동남쪽에 자리한 백자박물관은 2006년 6월 27일에 문을 열었다. 2003년
박기병(현재 명예관장)이 수집한 양구백자 50여 점을 양구군에 흔쾌히 기증을 했는데, 그것을
계기로 양구백자를 취급할 박물관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어 양구백자의 대표 생산지인 방산
면 한복판에 그들을 전시하고 다룰 박물관을 세우게 되었다.
양구군은 박기병의 기증 이후 많은 이들의 문화유산과 자료 기증이 잇달아 그 방대한 자료로
근현대사박물관을 차리고, 선사박물관에 삼엽충(三葉蟲) 화석 전시실까지 닦았으며, 거기에
양구백자박물관까지 차렸으니 정말 기증 복은 많은 고장이다.

전시 유물은 50여 점 정도로 양구백자실과 도자역사문화실 등의 전시실 2개를 지니고 있으며,
전시실 외에 전기가마, 가스가마, 장작가마를 갖추어 도자기 체험을 선사하는 체험실, 양구
지역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를 판매하는 박물관(뮤지엄) 샵, 영상실, 전통가마, 칠전리 1호 가
마터, 백자공원을 갖추고 있다.
(예전에는 입장료가 없었으나 요즘에는 어린이(8세 이상)/청소년/군인/65세 미만 성인들에게
일률적으로 3,000원을 받고 있음)


▲  백자박물관에서 직연폭포로 이어지는 하얀 길
길바닥에는 백자박물관에 걸맞게 백자 등의 도자기 파편들이 박혀있다.

▲  박물관 잔디밭에 심어진 커다란 도자기 파편들 (오래된 것들은 아님)

▲  진지하게 도자기를 빚고 있는 도공의 모형

▲  '순(順)' 글씨가 쓰인 백자 접시 파편
작살난 파편에 깨알처럼 쓰인 '순'은 태종 말엽에 잠시 있었던
'순승부(順承府)'로 여겨진다. (자세한 것은 사진 참조)

▲  새가 나무가 그려진 백자청화수명호 (조선 중기)

▲  '구(龜)'가 쓰인 백자청화 대발 (조선 후기)
거북이처럼 장수하라는 의미에서 대발 피부에 '龜'를 넣은 것 같다.

▲  여러 자연물이 그려진 백자청화초화문호의 수수한 자태

▲  양구 백토를 먹고 자란 여러 백자들

▲  천하에서 가장 좋은 백토로 꼽히는 양구 백토의 위엄
저 하얀 가루가 바로 백자를 야무지게 해주었던 양구 백토이다. 지금도 많이 나오고
있으며, 저 백토로 양구와 방산 지역 가마는 600년이 넘는 역사를 유지했다.

▲  백자박물관 바깥에 마련된 전통가마
전통 방식으로 도자기를 불에 다지는 공간이다.


전시실에서 순백의 미와 몸매를 뽐내고 있는 백자들을 구경하며 일부를 사진에 살짝 담고 영
상실에서 지친 두 다리에게 잠시 자유를 주며 양구백자 관련 영상을 시청했다. 전시실 바깥에
있는 전통가마를 구경하고 백자박물관을 마무리 지었는데, 그만 칠전리 1호 가마터를 놓치고
말았다.
야무지게 본다고 했음에도 하나를 놓치고 말았으니 아직 내공이 멀었나 보다. 그 가마터는 언
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넘기고 장평리(방산면소방서) 정류장으로 나왔다. 시간은 벌써 18시
, 햇님은 여름 제국의 눈치를 격하게 보며 아직까지 퇴근을 못해 세상은 훤하다.

백자박물관을 끝으로 양구 땅에 목적한 곳을 모두 둘러보았다. 한동안은 양구에 오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다. 버스를 기다린 지 10여 분 뒤, 양구 읍내로 가는 군내버스가 모습을 드러
내며 내 앞에서 입을 벌린다. 그것을 타고 다시 읍내로 나가 춘천(春川)으로 나가는 직행버스
에 고된 몸을 실으며 나의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렇게 하여 양구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양구백자박물관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장평리 344 (평화로 5182 ☎ 033-480-7238)
* 양구백자박물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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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3월 1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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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서귀포 천제연폭포, 제주올레길8코스 나들이 (천제연관개수로, 선임교, 베릿내오름)

서귀포 천제연폭포



' 서귀포 천제연폭포 겨울 나들이 '

천제연폭포 제1폭포

▲  천제연폭포 제1폭포 (천제연)

천제연폭포 제2폭포 천제연폭포 제3폭포

▲  천제연폭포 제2폭포

▲  천제연폭포 제3폭포



 

겨울 제국의 차디찬 한복판인 1월의 첫 무렵,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인 제주도(濟州
島)를 찾았다.

아침 일찍 김포공항에서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1시간을 내달려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정말 오랜만에 제주도에 나를 던져놓았으나 정처(定處)는 싹 정해둔 상태라
그곳만 얌전히 찾아가면 되는데, 첫날은 계획대로 외도동 월대(月臺)를 시작으로 서일
주선을 따라 모슬포(摹瑟浦)까지 여러 주옥 같은 명소와 올레길을 둘러보고 20시 넘어
서 산방산(山房山) 부근에 자리한 '산방산 탄산온천 게스트하우스(게하)'에 여장을 풀
었다.
첫날 여로(旅路)가 너무 배불렀는지 눕자마자 바로 꿈나라로 직통하여 9시간 가까이를
푹 잤다. 여관(모텔)이나 호텔, 펜션, 민박 등은 많이 이용해보았으나 게하는 첫 이용
인데, 그렇게 게하란 존재를 체험하고 아침 일찍 탄산온천에서 몸을 푹 끓이고 말리고
다진 다음 길을 나섰다. (탄산온천 숙박객에게 온천 이용권을 줌)

둘째 날은 첫날 못지 않게 아주 빵빵한 수준의 답사 코스를 준비했다. 천제연폭포를 시
작으로 서귀포(西歸浦) 시내까지 움직이는 일정으로 외도 월대부터 이곳까지 신세를 쭉
진 제주도 간선 202번을 타고 20분 정도를 달려 천제연폭포 정류장에 두 발을 내렸다.



 

♠  천제연폭포(天帝淵瀑布) 제1폭포와 제2폭포

▲  천제연폭포 정문

천제연폭포 정문에 이르니 매표소가 나그네의 호주머니를 부담스럽게 노려본다. 여기서 입장
료를 내야 폭포로 들어설 수 있기에 비싼 입장료를 치루고 유료의 공간으로 들어선다.

제주도의 남부를 이루고 있는 서귀포에는 천제연폭포와 천지연폭포(天地淵瀑布), 정방폭포(正
房瀑布) 등 3개의 유명 폭포가 있다. 이들은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지역 명소로
크게 두각을 보인 존재로 그중 천지연폭포와 정방폭포는 까마득한 과거가 되버린 초등학교 시
절(1988년)에 인연을 지었고 천제연폭포는 무려 30여 년이 지난 이제서야 인연을 짓는다. (이
들 폭포 외에 소정방폭포와 엉또폭포, 원앙폭포도 있음)

정문을 지나면 천제연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오고 이내 2갈래로 갈라져 오른쪽(북쪽)은 천
제연폭포(1폭포), 왼쪽(남쪽)은 천제연2폭포, 3폭포로 이어진다. 제2폭포 남쪽에 걸린 선임교
를 건너 여미지식물원과 롯데호텔제주 일대까지 접근이 가능하며, 제3폭포를 지나 제주올레길
8코스와 베릿내오름, 대포 해변(주상절리)까지 접속이 가능하다. 그래서 천제연폭포만 보고
돌아갈 요량이 아니라면 '폭포 정문 → 제1폭포 → 제2폭포 → 선임교 주변과 천제루 → 제3
폭포 → 폭포 후문 → 제주올레길8코스(베릿내오름, 대포해변)' 순으로 이동하길 권한다. 그
러면 영양만점의 여로가 될 것이다.

* 천제연폭포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동 2232 (천제연로 132, ☎ 064-760-6331)


▲  천제연폭포 제1폭포

제주도 최대의 관광단지인 중문관광단지 한복판에 천제연폭포가 자리하고 있다. 천지연폭포와
정방폭포는 1개의 폭포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곳은 무려 3개의 폭포를 지녀 조금은 단조로운
저들과 크게 차별화된 모습을 보인다.
천제연폭포 3형제는 편의상 제1폭포, 제2폭포, 제3폭포라 불리나 제1폭포가 원래 천제연폭포
이다. 폭포의 높이는 22m에 이르며, 그 앞에 펼쳐진 못을 천제연(天帝淵, 웃소)이라 부르는데
, 못의 밑바닥이 흔쾌히 보일 정도로 수질이 좋으나 겉보기와 달리 21m의 깊이를 지녀 만만히
보면 안된다.

호랑이가 담배를 알기 훨씬 이전에 옥황상제 직속의 선녀 7명이 밤이면 이곳에 내려와 목욕을
했다고 한다. 그 선녀의 주인이 옥황상제라 그 명칭을 따서 '천제연'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
는데, 이는 상상 속의 존재인 선녀와 옥황상제가 군침을 흘릴 정도로 빼어난 절경을 지녔다는
뜻이다. (옛 사람들은 경승지에 학이나 용, 신선, 선녀 등을 엮어놓는 것을 좋아했음)
조선시대에는 천제연 동쪽에 중문원(中文院)을 두었는데, 제주목사(濟州牧使, 현 제주시장)가
이곳에 쉬면서 폭포의 경치를 즐겼다. 이때는 폭포 양쪽 언덕에 표적을 세우고 군사들에게 활
쏘기를 시켰으며, 양쪽 언덕 사이로 긴 줄을 걸어놓고 줄에 매달려 건너가 화살을 수거하도록
했다. 바로 중문원에서 서귀포 시내의 서부를 이루는 중문(中文)이란 지명이 생겨났으며, 천
제연폭포를 빚은 계곡을 중문천이라 부른다.

제1폭포는 대자연이 절묘하게 빚은 주상절리(柱狀節理)식 벼랑으로 실로 감탄을 머금게 한다.
그런데 그 폭포 위(북쪽)에 천제교란 다리가 걸려있어 적지 않은 옥의 티를 내고 있다. 그 다
리는 서귀포시내와 모슬포를 잇는 다리로 차량의 왕래가 빈번하여 이곳의 적막을 수시로 아작
을 낸다. 도로와 다리를 놓는 것은 좋지만 꼭 폭포 윗도리에 저렇게 볼썽사납게 개설해야 했
는지 의문이 든다. (다리가 보이지 않게 좀 북쪽에 지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폭포라고는 하지만 정작 위에서 떨어지는 물은 없고 음악 무대의 뒷배경처럼 주상절리 벼랑만
덩그러니 있다. 이는 겨울 가뭄으로 중문천 상류에 물이 거의 없어서 그렇다. 그런데 이상한
건 폭포 앞 못(천제연)에는 물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보통 폭포가 쏟아낼 물이 없으면 그 밑
의 못도 갈증을 겪기 마련인데 말이다. 허나 이곳은 절벽과 점토층 사이에서 물이 꾸준히 나
와 천제연을 채우고 있고 폭포 동쪽 동굴에서도 물이 나와 아무리 상류에 물이 증발해도 전혀
물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이곳 물은 제2폭포, 제3폭포를 빚으며 유유히 바다로 흘러간다.

제1폭포의 폭포다운 모습을 보고자 한다면 비가 한바탕 온 직후에 가기 바란다. 그 외에는 병
풍처럼 멀뚱히 서 있어 이곳이 폭포인지 단순히 못인지 햇갈리게 만든다.


▲  천제연폭포 제1폭포와 옥처럼 맑은 천제연(웃소)

폭포 동쪽 벼랑에는 조그만 바위동굴이 있다. 그 천장에서는 얼음보다 차가운 물이 흘러내리
고 있는데, 예로부터 물맞이 명소로 백중(百中)과 처서에 이 물을 맞으면 만병통치가 된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허나 지금은 폭포 보호와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접근을 통제
하고 있어 물맞이를 할 수 없다.


▲  물맞이 명소로 유명했으나 지금은 그림의 떡이 되버린
천제연 동쪽 바위동굴

▲  천제연 제1폭포 앞 계곡(중문천)

천제연폭포와 계곡 좌우에는 푸른 빛의 숲이 짙게 우거져 있다. 제주해협 건너 북쪽은 겨울
제국의 핍박으로 남쪽 바닷가를 제외하고는 자연산 푸른 잎사귀가 거의 사라졌으나 제주도는
겨울의 힘이 미약해 푸른 잎의 나무와 숲을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그만큼 제주도는 따뜻한
남쪽 땅이다.

이곳을 장식하고 있는 숲은 보통 숲이 아닌 따뜻한 기후대에서 뿌리를 내리는 난대성식물(暖
帶性植物)의 보금자리로 희귀식물인 솔잎란과 백량금, 죽절초, 담팔수나무, 구실잣밤나무, 조
록나무, 참식나무, 가시나무, 감탕나무, 바람들칡, 마삭줄, 남오미자, 왕모람 등이 식구를 이
루고 있다. 희귀식물과 난대성식물이 어우러진 이 땅의 대표적인 난대림지대로 '천제연 난대
림(暖帶林)
'이란 이름으로 국가 천연기념물 378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제1폭포 서쪽 벼랑에는 높이 13m, 둘레 2.4m 규모의 담팔수(膽八樹)나무가 있는데, 그는
별도로 '천제연 담팔수나무'란 이름으로 제주도 지방기념물 14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담팔
수나무는 아주 따뜻한 곳에서 자라는 나무로 우리나라에는 제주도에만 있다. 천제연계곡에는
20여 그루의 어린 담팔수가 자라고 있는데, 주변에 여러 나무와 뒤섞인 상태라 일반 사람들은
구별하기가 어렵다.


▲  세월을 간지나게 탄 제1폭포와 제2폭포 사이 계곡(중문천)

▲  제1폭포에서 제2폭포로 인도하는 산책로
천제연계곡(중문천) 벼랑에 닦여진 길이라 벼랑 구간이 많다.

▲  천제연 관개수로(灌漑水路) - 등록문화재 156호

천제연폭포 구역에는 대자연이 빚은 중문천(천제연계곡) 외에 사람들이 만든 조그만 관개수로
도 존재하여 2개의 물줄기를 보여주고 있다.
천제연폭포의 작은 운하인 관개수로는 마르지 않는 샘인 천제연 물을 농업용수로 활용하고자
닦은 것으로 대정군수를 지낸 채구석(蔡龜錫, 1850~1920)이 이재하(李載廈), 이태옥(李太玉)
등과 함께 중문과 창천, 감산, 대포리 지역 사람들을 동원하여 2회에 걸쳐 만들었다.

채구석은 제주도에서 오랫동안 관리를 지낸 제주 토박이로 제주판관(判官)과 대정군수를 지냈
다. 1894년 제주판관 시절에 제주도에 흉년이 들자 자신의 봉급을 털어 백성을 구제했고, 대
정군수 시절인 1895년에는 주민들이 갑오개혁(1894년)으로 생겨난 신제도에 반발해 경무청을
파괴하자 이를 진압했다. 또한 1901년 이재수(李在守)의 난을 진압한 공로가 있으나 군수에서
파직되어 3년간 금고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중문에 거주하면서 바다로 매일 버려지는 천제연 물을 보며 '저 물을 이용해 논 농사를
할 수 없을까?'
궁리하다가 3년 동안 폭포 주변 지세를 직접 조사했고 천제연 물을 활용하여
논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하여 1907년 천제연 토지신(土地神)에게 토신제(土神祭)를 지내고
공사에 들어갔다.
 
천제연계곡에는 암반과 벼랑이 많아서 공사가 꽤 힘들었는데, 소주 원액을 쏟아붓고 장작불로
바위를 폭파하기도 했으며, 제1폭포 주변 창구목과 화폭목은 가장 난공사 구간으로 화약을 구
해 화포를 만들어 바위를 건드리거나 장작불로 바위를 부셨다. 그렇게 1년의 공사 끝에 1908
년 수로가 완성되었고, 성천봉(星川峯, 베릿내오름) 밑에 5만여 평(약 231,000㎡)의 논을 닦
으면서 논농사의 불모지였던 제주도에 한줄기 빛을 선사했다.
그리고 1917년 2월, 2차 공사에 들어갔는데, 이때도 채구석과 이재하, 이태옥이 돈을 내어 추
진했다. 하지만 1920년에 채구석이 사망하는 등, 여러 진통이 있었으나 1923년 공사가 마무리
되어 2만여 평의 논밭이 추가로 개척되었다. 하여 중문마을은 동쪽에 자리한 강정마을과 함께
제주도의 대표 쌀 생산지로 번영을 누렸다. (공사에 참여한 일꾼의 일당은 3돈이었다고 함)

1차 공사 때는 천제연폭포(웃소)에서 베릿내오름골 앞을 돌아 국제컨벤션 앞 밀레니엄관까지
수로를 닦았고, 2차 공사는 천제연 제2폭포(알소)에서 국제컨벤션까지 닦았는데, 이들 수로는
채구석, 이재하, 이태옥이 중심이 된 '성천답회'에서 관리하다가 1957년 국유화되어 서귀포시
에서 관리하고 있다.
천제연의 물을 먹고 자란 성천봉 밑 옥답은 중문관광단지가 닦이면서 싹 사라지고 말았다. 제
주도 논농사의 성지(聖地)와 같은 곳인데 일부를 기념으로 남겨두어 약간의 논농사라도 했으
면 좋았을 것을 개발 지상주의는 그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수로의 길이는 1.9km로 최근 정비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콘크리트 떡칠이 되었으나 논농사가
힘들었던 제주도의 자연환경을 극복한 현장으로 그 시절 농업환경을 전해주는 존재라 등록문
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허나 이제는 물을 대줄 논도 모두 사라져 무늬만 남은 상태이며,
일부 수로는 아예 물이 말라버렸다.
그래도 산책로 옆에 이렇게 100년 묵은 수로가 물을 머금고 흘러가 조촐하게 볼거리를 선사하
니 천제연폭포에서 생각치도 못한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다.


▲  오늘도 묵묵히 흘러가는 천제연 관개수로
한때는 농업용수 수송으로 바쁘게 살았으나 이제는 천제연폭포를 수식하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  제2폭포로 인도하는 벼랑 산책로

산책로 오른쪽(서쪽)은 깎아지른 듯한 천제연계곡 벼랑, 왼쪽(동쪽) 역시 주름선이 진한 벼랑
이다. 저 단단한 벼랑과 암벽을 뚫고 힘들게 관개수로를 닦았으니 제주도 농업 발전과 식량확
보에 대한 강인한 집념이 없었으면 불가능하다.


▲  산책로 옆 바위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관개수로
바위들이 목이 많이 말랐는지 이곳 수로는 물이 말라버렸다.

▲  위에서 바라본 천제연폭포 제2폭포

▲  천제연폭포 제2폭포

제2폭포는 제1폭포와 비슷한 높이로 그 앞에 '알소'라 불리는 못(소)이 형성되어 있다. 제1폭
포와 달리 물이 굉음을 내며 떨어져 귀신도 놀라 도망칠 정도인데, 만약 비가 와서 수량이 많
았다면 지금보다 소리가 더 요란했을 것이다.
알소 남쪽에 닦여진 관람공간까지 접근이 가능하나 그 이상의 접근은 통제하고 있다. 제1폭포
는 그래도 못과 계곡의 물을 만질 수 있으나 아랫 폭포로 내려갈수록 자유의 공간이 절반 이
상씩 줄어든다. (제3폭포는 아예 접근도 불가능하여 위에서 바라봐야됨)


▲  확대해서 바라본 천제연폭포 제2폭포의 위엄
폭포 좌우에 우거진 나무들은 '천제연 난대림'의 일원이다.

▲  제3폭포로 흘러가는 제2폭포 앞 계곡(중문천)



 

♠  선임교(仙臨橋) 주변

▲  선임교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선임교는 천제연협곡(중문천)에 높이 걸린 다리로 제2폭포와 제3폭포 사이에 무지개처럼 걸려
있다. 7명의 선녀가 천제연폭포에서 노닐었다는 전설에 맞추어 다리 밑도리에 하얀 피부의 칠
선녀상을 달았는데, 밑도리 옆구리에 각각 7명씩, 총 14명의 선녀상이 새겨져 있다.
선녀의 길이는 1명당 20m로 각자의 악기를 든 선녀 누님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
을 웅장하게 자아냈다. 하여 칠선녀다리, 칠선녀교, 구름다리 등의 별칭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오작교(烏鵲橋) 스타일의 아치형 다리로 가운데 부분이 하늘로 향해 볼록 솟
아있으며, 다리 길이는 128m, 폭 4m로 230톤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게 설계되었다. 또한 야경까
지 고려하여 100개의 난간 사이로 34개의 석등을 설치해 햇님의 퇴근 이후, 일제히 빛을 쏟아
내게 했다. 하여 이곳 야경은 천제연폭포에서 가장 일품으로 칭송이 자자하다.

천제교와 천제2교 사이, 천제연협곡에 걸린 유일한 다리로 이렇게 구름다리처럼 높이 닦은 것
은 협곡이 깊고, 천제연 난대림이 우거져 있어 그들의 피해가 덜 가게끔 하고자 함이다.
오로지 뚜벅이를 위한 다리로 그것을 건너면 천제루 구역이며, 중문관광단지의 일원인 여미지
식물원과 이어진다. 허나 천제루 구역만 천제연폭포 관람료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 이상을 가
려면 폭포 서문을 나와서 접근해야 된다.

▲  잘생긴 석등이 마중하는 선임교 동쪽

▲  볼록 솟은 선임교 한복판


▲  선임교에서 바라본 바다 방향 천제연협곡(중문천)
계곡은 천연기념물 난대림에 둘러싸여 있어 금지된 공간이 되었다.

▲  선임교에서 바라본 제1폭포 방향과 한라산(漢拏山)
멀리 구름에 감싸인 높은 뫼가 제주도의 심장이자 성역인 한라산이다.
제주도는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한라산이 바라보인다.

▲  선임교에서 바라본 제2폭포와 무성한 천제연 난대림

▲  나그네의 동전을 노리는 오복천(五福泉)

선임교는 그 길이가 128m라고 하지만 다리 높이가 상당해 은근히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다. 하
여 체감거리는 2배 이상으로 다가온다.
다리를 건너면 천제루 구역으로 오복천이란 분수대가 마중을 한다. 여기서 오복(五福)이란 장
수를 뜻하는 거북이와 부자를 뜻하는 돼지, 귀함을 뜻하는 용, 사랑을 뜻하는 원앙, 자식복을
뜻하는 잉어를 뜻한다. 그 동물상 앞에는 복주머니로 포장된 돌통이 각각 설치되어 있어 거기
에 동전이 들어가면 해당 동물상의 복을 받는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그리고 그렇게 긁어
모은 동전은 나중에 불우 이웃을 돕는데 쓴다고 안내문에 당당히 적혀있다. (정말로 그럴까?)


▲  천제연폭포의 칠선녀 전설과 폭포 안내문을 머금은 돌병풍식 석물

▲  꽃길만 걷자~~ 동백이 화사하게 꽃길을 이룬 천제루 주변 산책로
동백(동백꽃)은 친 겨울파의 꽃으로 초봄까지 제주도와 남해안 지역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  천제루 주변 동백 산책로 ①
동백이 붉은 입술을 도도하게 드러내며 나그네의 정처 없는 마음에
마구 돌을 던진다.

▲  천제루 주변 동백 산책로 ②

▲  천제루 주변 동백 산책로 ③

▲  밑에서 바라본 천제루(天帝樓)
선임교 서쪽 높은 곳에 자리한 천제루는 천제연협곡 전망대용으로 세워진 2층
누각이다. 1층은 매점으로, 2층은 전망대로 쓰이며, 2층에 오르면
천제연협곡과 제2폭포가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천제루에서 바라본 천제연폭포 제2폭포와 천제연 난대림

▲  선임교 동쪽에서 바라본 천제연협곡(중문천)과 천제연 난대림

▲  선임교에서 천제연폭포 제3폭포로 내려가는 길

▲  제3폭포로 인도하는 나무데크길

▲  제3폭포 입구 주변 천제연 관개수로
이곳 관개수로는 제2폭포에서 성천봉 옥답을 잇는 수로로 1917년에 닦기 시작하여
1923년에 완성을 보았다.

▲  제3폭포 입구 갈림길



 

♠  천제연폭포 제3폭포와 대포해변

▲  천제연폭포의 막내, 제3폭포

제3폭포는 높이가 10여m로 제2폭포보다 넓은 못(소)을 가지고 있다. 폭포수는 실타래를 굵게
풀어놓은 듯 제2폭포보다 장쾌하게 쏟아지고 있으며 못은 청정하고 요염한 색깔을 보이고 있
다. 아무리 따뜻한 남쪽이라고 해도 엄연한 겨울의 한복판이라 폭포의 유혹이 먹히지 않아서
그렇지 만약 여름의 한복판에 왔더라면 그 유혹에 일부러 넘어가 접근 금지를 무시하고 풍덩
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접근이 어느 정도 허용된 제1폭포, 제2폭포와 달리 폭포 주변 접근이 통제되어 있어 폭
포가 보이는 전망대에서 이렇게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제1폭포와 제2폭포, 선임교 주변까지는 관광객들이 많았으나 선임교 남쪽부터는 사람 구경하
기가 힘들다. 다소 구석진 제3폭포 주변까지는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기 때문이다. 허나 제3
폭포도 엄연한 천제연 식구이고 제2폭포 못지 않은 외모를 지녔으니 꼭 살펴봐야 나중에 저승
이나 하늘나라에 가서 옥황상제에게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보통은 선임교까지만 둘러봐
도 충분하다 여기고 천제루 구역 쪽으로 빠지거나 천제연폭포 정문으로 되돌아감)


▲  시원하게 쏟아내는 제3폭포의 위엄
폭포 앞 못에 모인 중문천(천제연계곡) 물은 여기서 마지막 휴식을 취하고
지척에 보이는 바다로 길을 재촉한다.

▲  제3폭포 입구에 세워진 성천답관개유적비(星川畓灌漑遺跡碑)

천제연폭포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천제연 관개수로를 만들어 제주도 농업사의 커다란 빛
을 주었던 채구석이다. 제3폭포 입구에 채구석을 기리고자 2003년 2월에 세운 '성천답 관개유
적비'가 자리해 있는데, 비좌(碑座)와 검은 피부의 비신(碑身), 이무기가 새겨진 이수(螭首)
를 고루 갖추어 맵시도 좋다.
천제연폭포 정문 주변에도 1957년 8월 대정 지역 유림들이 세운 '통훈대부 채구석기적비(通訓
大夫 蔡龜錫紀蹟碑)'가 있는데 그 기적비는 존재를 몰라서 지나치고 말았다.


▲  제3폭포에서 폭포 후문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와 관개수로(왼쪽)

▲  제주올레길8코스와 만나는 천제연폭포 남쪽 후문

제3폭포 입구에서 나무데크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 뻥뚫린 남쪽 후문이 나온다. 철저하게 금
줄을 치며 입장료를 챙기는 정문, 서문과 달리 후문은 지키는 사람도 없고, 제재하는 시설도
없어 그냥 대놓고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 (내가 갔을 때는 그랬음)
이곳은 밖으로 나가는 문이지 폭포 구역으로 들어가는 문은 아니며 일루 들어가지 말고 정문
을 이용할 것을 권하는 경고판이 인상을 쓰며 지키고는 있으나 정작 지키는 사람이 없으니 그
경고가 먹혀들어갈 턱이 없다.
천제연폭포의 개구멍 같은 곳으로 이곳의 존재를 알았다면 조금 돌아가더라도 이곳을 이용하
는 것인데, 역시 아는 것이 힘이다. 서귀포시는 이렇게 후문을 방치할 것이 아니라 매표소를
두어 후문 수요라도 좀 챙기기 바란다.


▲  베릿내오름 서쪽 자락 제주올레길8코스

남쪽 후문에서 제주올레길 8코스와 만난다. 8코스는 월평에서 대평포구까지 이어지는 19.6km
의 긴 올레길로 천제2교에서 베릿내오름(성천봉) 서쪽 자락을 지나 폭포 후문을 거쳐 베릿내
오름 정상을 찍고 다시 천제2교로 내려간다. 하지만 나는 오름 정상은 가지 않고 서쪽 자락길
을 통해 천제2교로 내려가 한참이나 떨어진 약천사까지 올레길의 신세를 졌다.
제주올레길 장거리 탐방은 전날 절부암에서 수월봉까지 제주올레길12코스에 이어 2번째이다.


▲  베릿내오름 서쪽 자락길에서 바라본 천제연계곡(중문천)
계곡 너머 언덕에는 중문관광단지의 일원인 별내린전망대와 씨사이드아덴리조트가
둥지를 틀고 있다.

▲  중문천을 바다로 흘려보내는 천제2교와 너른 남해바다
(베릿내오름 서쪽 자락길에서 바라본 모습)

▲  베릿내오름 서쪽 자락길 (제주올레길8코스)

▲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제주올레길8코스 (제주부영호텔앤리조트 옆 구간)

베릿내오름을 완전히 내려가면 천제2교가 나온다. 여기서 올레길8코스는 '중문관광로'를 따라
동쪽으로 조금 가다가 제주부영호텔앤리조트 직전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트는데, 그 길을 3분
정도 가면 남해바다와 스킨쉽을 즐기는 대포 해변이 나온다.
대포주상절리까지 제주부영호텔과 제주국제컨벤션센터 남쪽을 지나가는데, 이 일대는 예전 천
제연 물을 먹고 자랐던 제주도 제일의 옥토, 성천답이 있던 터이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 식량
을 조달하던 농업 현장이 이제는 휴식과 여흥의 장소로 싹 바뀐 것인데, 이곳 옥토에 대한 미
련이 없어질 정도로 세상이 조금은 살만해진 모양이다. (밥은 굶지 않게 되었으나 삶이 팍팍
한 것은 여전함)


▲  제주부영호텔앤리조트 옆 제주올레길8코스 (북쪽 방향)

▲  평화로운 바닷가 풍경, 제주올레길8코스 대포 해변 ①
저 멀리 봉긋 손짓을 하는 산이 산방산이다. 내가 저 부근에서 여기까지
이동을 한 것이다. (천제연폭포 정류장부터 여기까지 도보 이동)

▲  평화로운 바닷가 풍경, 제주올레길8코스 대포 해변 ②

▲  제주올레길8코스 대포해변 숲길 (대포주상절리 서쪽)
여기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대포 해변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대포주상절리가 나온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꺼내도록 하겠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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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1년 7월 13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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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에 찾아간 청송 주왕산 단풍 나들이 ~~~ (절골에서 가메봉, 용연폭포, 절구폭포, 용추폭포, 자하성터, 대전사까지)

 


' 주왕산 늦가을 나들이 '
(절골, 가메봉, 용연폭포, 용추폭포, 주왕계곡)

▲  대전사에서 바라본 주왕산

▲  용추폭포

▲  절골계곡


 

늦가을이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수놓기 시작하던 10월의 한복판에 늦가을 단풍 성지로 격
하게 추앙받고 있는 청송(靑松) 주왕산을 찾았다.
주왕산은 대자연이 경북 한복판에 빚은 크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호남 내장산(內藏山)에 버
금가는 단풍의 대표 성지(聖地)이다. 서울에서 약 600리(옛 10리는 약 5km) 거리로 당일로
가기에는 무리가 있어 좀 넉넉하게 무박 2일 코스로 다녀왔다.

토요일 저녁 10시, 신도림역(1,2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준비된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주
왕산이 있는 동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늦가을 단풍의 화려한 향연과 아직까지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는 주왕산에 대한 강한 설
레임에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고 검은 도화지가 되버린 차창 밖만 열심히 바라보며 나름대
로 주왕산을 그려본다. 말로만 듣던 주왕산의 실물은 어떠할까?? 단풍은 제법 물이 올랐겠
지? 대전사까지 모두 볼 수 있을까? 등등...

서울을 출발하여 약 5시간 30분 만에 주왕산 남쪽 끝에 자리한 주산지 주차장(상이전마을)
에 이르렀다. 아직 새벽 어둠에 잠긴 주차장에는 천하 곳곳에서 산꾼과 나들이꾼을 바리바
리 싣고 온 관광버스로 가득한데,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주차장 모퉁이에서 간단히 아침을
해먹었다.
밥과 반찬을 가져온 이들이 많았고, 취사 도구까지 가져와 라면과 찌개, 오뎅탕 등을 해먹
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렇게 갖은 먹거리들이 모두 모이니 그야말로 출장 뷔페가 따로 없
으며, 주차장 옆에는 식당을 겸한 가게가 환하게 불을 켜며 간단한 먹거리를 팔고 있었다.

그렇게 아침을 때우고 4시 30분에 다시 버스를 타고 서쪽에 자리한 절골교로 이동했다. 그
림 같은 비경을 자랑하는 주산지(注山池)도 봤으면 좋으련만 그곳은 일정에 없었기 때문에
공간의 여유가 있는 주산지 주차장에서 아침만 먹고 바로 철수한 것이다.
절골교에서 모두 버스에서 내려 절골탐방지원센터까지 12분 정도 걸었다. 여기서 주왕산의
빗장이 열리기를 기다리다가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5시, 빗장이 열리기가 무섭게 주왕
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  주왕산 절골, 가메봉, 사창골

▲  주왕산 뒷쪽에 숨겨진 절골

절골(절골계곡)은 주왕산 동남쪽에 깃든 계곡으로 주왕산 뒷통수에 해당된다. 주산천(注山川)
의 상류로 골짜기가 꽤 깊고 숲이 울창하며, 옛날에 절이 있었다고 해서 절골이라 불린다. 계
곡 길이는 8km로 주왕산 동쪽 대관령(731m)에서 발원한 갈전골(갈절골)과 신술골이 한데 모여
절골을 이룬다.
삼삼한 숲에 포근히 감싸여 태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여름 제국도 눈치를 보며 피해갈 정
도로 시원하다. 계곡은 물이 풍부하고 기암괴석과 반석, 간간히 나오는 조그만 폭포가 운치를
더해주며. 상류로 올라갈수록 풍경의 질이 높아지니 꼭 상류(대문다리)까지는 오르기 바란다.
  
절골코스는 절골탐방지원센터에서 계곡을 따라 펼쳐지는데 여러 차례 계곡을 건너야 된다. 반
듯한 다리 대신 징검다리가 놓여져 있으나 부실한 곳이 적지 않아 자칫 물에 빠지기 쉽다. 하
지만 수심이 얕아 그리 위험은 없으며, 계곡 트래킹 및 피서지로 아주 그만이다.

절골은 인근 주산지와 함께 '내주왕계곡'이라 불리며, 풍경이 고와 주왕계곡(周王溪谷) 못지
않다. 계곡을 옆에 끼고 상류로 올라가다가 대문다리를 지나서부터 계곡과 서서히 멀어지며,
산길 경사도 점차 각박해져 깔딱 직전까지 이른다. 그렇게 각박한 산길을 오르면 가메봉 동쪽
갈림길에 이르고, 여기서 서쪽 능선길로 가면 가메봉이다.

* 절골탐방지원센터 → 대문다리 → 가메봉 (3시간 20~30분 소요)


▲  고요함에 잠긴 절골 (절골 중류)
늦가을 향연을 준비하는 나무들이 계곡을 거울 삼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  벼랑 사이를 흐르는 절골

▲  늦가을 채색이 짙은 절골 상류
너른 반석과 조촐한 폭포가 풍경의 아름다움을 돕는다.

▲  가메봉으로 오르는 길목에서 바라본 주왕산 남쪽 줄기
산 아랫도리와 중간 도리는 단풍의 향연이 한참이나 해발 700m 이후로는 벌써부터
앙상한 분위기를 자아내 올해도 거의 저물었음을 실감케 한다.

▲  주왕산 가메봉(882m) 바위와 그 너머로 보이는 왕거암

가메봉은 주왕산 구역에서 두수람(923m), 왕거암(907m)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이다. 주왕산 동
쪽에 자리한 가메봉은 넓직한 바위로 이루어져 동쪽과 남쪽, 서쪽이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으
며, 하늘에서 가까운 봉우리이나 칼처럼 솟은 뫼에 꽁꽁 둘러싸여 있어 조망의 질은 그리 시
원치 못하다.

우리는 여기서 간단히 행동식을 섭취하고 주왕계곡으로 내려갔다. (일부는 칼등고개를 경유하
여 주왕산 정상으로 이동)


▲  가메봉에서 바라본 천하 (주왕산 남쪽)
가메봉이 아무리 높다한들 하늘 아래 뫼이로다.

▲  가메봉에서 주왕계곡, 사창골로 내려가는 산길


 

♠  주왕산 사창골, 용연폭포

▲  사창골 상류

가메봉에서 울퉁불퉁한 산길을 20~30분 정도 내려가면 사창골이 슬쩍 모습을 비춘다. 가메봉
북쪽에서 발원하여 주왕계곡으로 흘러가는 사창골은 숲이 매우 삼삼하고 바위와 소(沼)가 많
아 절골 못지 않은 고운 매력을 드러내고 있으며, 후리메기3거리를 지나 40~50분 정도 내려가
면 주왕계곡이 모습을 비춘다.


▲  동그랗게 자리를 닦은 조그만 소(못)
해가 지고 밤이 되면 하늘에서 선녀 누님들이 이곳으로 내려와 목욕을
하지는 않을까? 그러고 보니 못의 사이즈도 선녀 누님에 걸맞게
아담하다.

▲  너른 반석과 조그만 폭포
계곡 주위로는 낙엽이란 쓸쓸한 꼬리표를 단 단풍들이 귀를 접고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하고 있다.

▲  풍덩 스킨쉽을 하고 싶은 동그란 소
사창골 냇물은 여기서 숨 좀 고르다가 다시 종점 없는 길을 재촉한다.

▲  사창골 하류 산길
사창골 산길은 하류에 이르러 잠시 계곡과 멀어지고 벼랑길로 돌변한다.
벼랑 밑에는 사창골이 빚은 절구폭포가 있으며, 벼랑길을 지나면
주왕계곡에 이르게 된다.

▲  주왕계곡 용연폭포(龍淵瀑布, 제3폭포)

주왕계곡(주왕천계곡, 주방천계곡)은 주왕산(720m)의 중심 계곡으로 '내주왕계곡'이라 불리기
도 한다. 주왕산 동쪽에서 발원한 큰골에서 시작하여 주왕산 심장부를 구비구비 돌다가 대전
사를 지나서 주방천(周房川)이란 이름으로 속세로 흘러간다.
용연폭포와 용추폭포, 시루봉, 학소대, 급수대 등 대자연이 빚은 온갖 작품이 가득해 눈을 부
시게 하며, 특히 용추폭포 주변은 주왕산의 모든 것을 긁어모은 것처럼 대장관을 이룬다.
깊은 산골에 숲이 울창하고, 계곡 좌우는 높은 벼랑으로 이루어져 협곡이 적지 않은데, 그런
계곡을 둘러싸고 600m가 넘는 많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그래서 주왕산을 석병
산(石屛山)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험한 지형을 지닌 탓에 예로부터 산적들이 많았고, 난리가
날 때마다 이곳으로 피난을 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한다. 특히 바위 봉우리가 많아 설악산,
월출산(月出山)과 더불어 이 땅의 3대 암산(岩山)으로 격하게 꼽히기도 하며, 경북의 금강(金
剛)으로 추앙받기도 한다.

신라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의 족자(簇子)이자 원성왕(元聖王)에게 밀린 김주원(金周
元)이 머물렀다고 해서 주방산(周房山)이라 불렸는데, 이후 그는 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해
졌다. 하여 그 연유로 주왕산으로 이름이 갈린 것으로 보이며, 고려 후기에 나옹화상이 그리
바꾸자고 해서 이름이 갈렸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다른 유래로는 당나라 사람인 주도(周鍍)가 8세기 후반,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을 칭하며
진나라 재건을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당나라군에게 보기 좋게 털렸다. 그래서 요동을 거쳐
신라로 도망, 주왕산이 험하다는 풍문을 듣고 그곳에 들어가 주변을 약탈하며 후일을 도모하
다가 당나라의 토벌 요청을 받은 신라에게 털리고 자신은 잡혀 처단되었다. 그래서 주왕산이
라 했다고 한다.
허나 이 전설은 마땅한 기록도 없고 역사적인 근거가 없으며, 조선 때 명나라에 대한 꼴통 사
대주의(事大主義)에 젖은 지역 유생들이 지어낸 것으로 여겨진다. 명나라가 있던 중원대륙과
청송의 명산인 주왕산을 연결시켜 지역의 자부심을 어떻게든 높이려고 머리를 싸맸던 유생들
의 그릇된 생각이 지어낸 산물인 것이다.

주왕계곡은 '청송 주왕산 주왕계곡 일원'이란 이름으로 국가 명승 11호로 지정되었다.


▲  용연폭포의 위엄 (윗폭포)

주왕계곡 상류에 자리한 용연폭포는 제3폭포, 쌍폭, 용폭이라 불리기도 한다. 예전에는 간단
하게 제3폭포라 불렸으며, 2단으로 이루어진 장대한 폭포가 위엄을 자랑하며 하얀 실타래 같
은 물줄기를 밑으로 뽑아낸다. 폭포 밑에는 푸른 못이 펼쳐져 있는데, 영덕 강구항 앞바다와
이어져 용이 머물렀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있다. 그래서 용연폭포란 간판을 지니게 되었
다.
윗폭포 옆에는 얕게 파인 3개의 동굴이 있어 폭포의 경관을 더욱 신비롭게 꾸며주며, 물소리
가 우렁차 귀신도 도망을 칠 정도이다. 못 남쪽에는 탐방로와 조망대가 있는데, 사람들이 폭
포를 구경하느라 금방금방 빠지지를 않아 정체가 심하다. 그만큼 폭포가 사람들의 마음을 제
대로 앗아간 것이다. 우리도 폭포를 구경하느라 한동안 발을 움직이지 못했지. 대자연의 기묘
한 작품 앞에 우리가 할 일이란 그저 감탄사 연발과 사진 촬영 뿐이다.

▲  용연폭포 옆에 패인 3개의 동굴

▲  푸르게 익은 용연폭포 못 (윗폭포)


▲  용연폭포 아랫폭포
아랫폭포도 윗폭포 못지 않은 장쾌함을 보여준다. 이곳은 못 바로 앞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  주왕계곡의 백미, 절구폭포~용추폭포

▲  절구폭포로 인도하는 좁은 사창골 협곡

용연폭포를 둘러보고 다시 왔던 길로 내려가면 절구폭포로 인도하는 좁은 협곡이 마중을 한다
. 앞서 사창골 산길의 아랫쪽으로 사창골의 하류이기도 한데, 그 협곡을 5분 정도 들어가면
그 길의 끝에 절구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  절구폭포 (제2폭포)

바위 너머 윗쪽에서 2단으로 쏟아지는 절구폭포는 제2폭포라 불리기도 한다. 응회암(凝灰巖)
에 주로 생성되는 절리(암석이 갈라진 틈)에 의해 생긴 폭포로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윗폭
포 밑에는 선녀탕(仙女湯)이 수줍은 듯 숨겨져 있으며, 아랫 폭포 밑에는 수심이 얕은 못이
형성되어 있어 물놀이 장소로 아주 그만이다.
이곳은 사창골 하류로 폭포 주변이 모두 벼랑으로 막혀 길이 없다. 그래서 다시 되돌아나가야
된다. 전쟁 때 만약 이곳으로 몰린다면 정말 몰살을 각오해야 될 정도로 궁벽한 곳이나 주변
풍경이 아름답고 물이 시리도록 맑아서 내 즐겨찾기 명소로 살짝 숨기고 싶다. 현재 선녀탕과
윗폭포는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니 얌전히 아랫폭포 앞에서만 머물기 바란다.


▲  옆에서 바라본 절구폭포

▲  병풍바위

절구폭포를 둘러보고 주왕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주변 풍경이 서서히 흥분을 하면서 나도 모르
게 장대한 벼랑에 감싸이게 된다. 그 벼랑은 병풍바위로 계곡 양쪽으로 거의 직각으로 솟은
낭떠러지가 병풍처럼 둘러져 그야말로 하늘만 보이는데, 벼랑 밑에는 옥처럼 맑은 주왕계곡이
청정함을 자랑하며 힘차게 흐르고 있다.
발을 전혀 들일 수도 없을 이런 험지에 인간들은 산천유람 욕구를 위해 마구 탐방로를 내었는
데, 벼랑 밑부분에는 혹시나 모를 대자연의 테러(낙석)에 대비해 지붕까지 둘렀다. 주왕산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웅장한 멋을 지닌 병풍바위 밑에는 제1폭포라
불리는 용추폭포가 달려있는데, 이곳 풍경은 가히 압권이라 앞서 제2폭포, 제3폭포를 능가한
다.
대자연의 위대한 작품에 혼이 탈탈 털린 속인들은 사진을 찍고 풍경을 구경하느라 좁은 탐방
로는 늘 정체를 빚어 행렬이 다소 버벅거리는데, 풍경이 풍경인지라 정말 그럴 수 밖에 없다.
그게 동물과 신(神)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는 인간들의 인지상정이 아니던가?
아무리 여름 제국이 무더위 갑질로 천하를 뜨겁게 달구어도 이곳만큼은 어림도 없을 정도로
무더위를 잊게 한다. 벼랑에 감싸여 햇살도 마음 놓고 착륙을 못하고, 계곡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주니 땀이 붙어있을 재간이 없다.

용추폭포 윗쪽에는 선녀탕이 있고, 그 위에 구룡소(九龍沼)가 있으며, 탐방로 밑은 계곡과 벼
랑으로 되어있어 계곡과 폭포로의 접근은 통제되어 있다.


▲  대륙의 협곡 같은 병풍바위의 위엄
협곡 사이로 탐방로가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있다. 이렇게 보니 주왕산의 옛 이름인
석병산(石屛山)이란 이름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

▲  용추폭포 구룡소
수심도 깊고 지형도 각박한 이곳에 9마리의 용이 살았다고 전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  구룡소와 용추폭포 사이에 자리한 선녀탕
선녀 누님들이 들어가기에는 수심이 좀 깊다. 하늘나라 선녀들은
키가 나무만 했던 것일까?

▲  용추폭포(제1폭포)
제2폭포, 제3폭포와 달리 폭포의 정면 모습을 담을 수가 없다. 그만큼
이곳은 칼처럼 솟은 벼랑 밑에 무섭게 펼쳐진 첩첩한 협곡이다.
그나마 탐방로가 닦여져 있으니 이 정도로라도 보는 것이다.

▲  가까이에 있으나 그림의 떡처럼 보이는 용추폭포 밑 동그란 못

▲  벼랑 사이로 각박하게 이어진 병풍바위 협곡 (서쪽 부분)


 

♠  주왕산 마무리

▲  주름선이 인상적인 시루봉 ▲

병풍바위 협곡을 지나면 계곡을 건너는 학소교가 나온다. 다리 옆에는 홀로 솟은 날씬한 돌기
둥이 손짓을 하는데, 그 돌기둥이 시루봉이다.
시루봉은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은 작품으로 그 모습이 떡을 찌는 시루처럼 생겼다
하여 시루봉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바위 피부에는 주름선이 많은데 옆에서 보면
어두운 표정을 지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여 신비감을 더한다. 완전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무장된 천험의 돌기둥이라 접근은 정말 어림도 없어 보이는데, 저 봉우리 위에는 주왕산 산신
이나 신선만의 공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들의 숨겨진 보물이라도? 그러니까 대자연
이 사람들이 오르지 못하게끔 저렇게 깎아 놓았을 것이다.

이런 절경에는 꼭 옛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붙여놓은 전설이 하나씩은 꼭 있기 마련, 그 내용
은 대략 이렇다.
옛날 어느 추운 겨울, 한 도사가 바위 위에 올라가 열심히 도를 닦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신선 2명이 하늘에서 내려와 도사가 추위에 떨지 않도록 바위 밑에 불을 지폈는데, 그 연기가
바위 전체를 감싸며 봉우리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이게 끝임.


▲  시루봉 밑 주왕계곡


▲  학소대(鶴巢臺)

시루봉 맞은편에는 학소대라 불리는 커다란 낭
떠러지가 장대한 모습을 자랑하며 시루봉과 자
웅을 겨룬다.

계곡 바로 옆에 직각으로 높이 솟아있어 그 장
엄함에 주눅을 들게 만드는데, 시루봉 마냥 낭
떠러지로 이루어져 있어 철옹성 마냥 범접하기
가 어려워 보인다.
절벽 꼭대기에는 키 작은 나무들이 자라 세상
을 굽어보고 있으며, 학소대의 덩치가 대단하
여 주변 계곡에 늘 그늘을 드리운다.
옛날에 청학(靑鶴)과 백학(白鶴)이 무리를 지
어 살았다고 해서 학소대라 불리며, 그 학소대
밑에 도승(道僧)이 절을 짓고 살았는데, 꿈에
신선이 나타나 빨리 피하라고 재촉하므로 밖으
로 나오니 위에서 바위가 굴러떨어져 절을 덮
쳤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한 토막 전해온
다.


▲  인간이 만든 비루한 작품, 학소교 (학소대 밑)
대자연의 걸쭉한 작품을 쭉 보다가 인간이 만든 콘크리트 다리를 보니 정말로
못봐주겠다. 아무리 아치형으로 만들어도 거기서 거기임..

▲  급수대(汲水臺)

학소대를 지나면 육중한 바위 봉우리인 급수대가 모습을 비춘다. 그 역시 낭떠러지로 이루어
진 30여m의 주상절리(柱狀節理) 바위로 옛날 주왕의 군사들이 바위 위에 무자위를 설치해 계
곡 물을 위로 소환했다는 전설이 있어 급수대란 간판을 지니게 되었다. 물론 주왕의 전설도
거짓이며 급수대의 전설 또한 거짓이다.


▲  주왕계곡 북쪽에 솟아난 벼랑 (이름은 모르겠음)

▲  자하성(紫霞城)터

급수대를 지나 계곡 하류(대전사)로 계속 길을 재촉하면 길 오른쪽에 자하성터가 초췌한 몰골
로 마중을 한다.
자하성은 주왕굴을 중심으로 하여 지형을 이용해 쌓은 산성(山城)으로 주방산성, 주왕산성이
라 불리기도 한다. 주왕이 신라군을 막고자 쌓았다고 하나 현실은 삼국시대 또는 고려 때 축
성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곳을 거쳐 갔다는 신라 왕족 김주원이 자신에게 돌아올 왕위를
가로챈 김경신(원성왕)을 크게 원망하며, 여기서 잠시 딴 마음을 품지 않았을까 싶다. 허나
그 마음도 부질 없음을 깨달았는지 강릉(명주)으로 내려가 거기에 둥지를 틀었다.

성 둘레는 12km에 이르렀다고 하며, 대자연의 끊임없는 태클과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죄
다 무너지고 지금은 일부만 겨우 남아 있다. 그 모습도 돌무더기처럼 남아있어 자하성터 안내
문이 없었다면 그냥 자연산 돌무더기로 지나쳐도 이상할 것이 없다.


▲  주왕계곡의 흥미로운 존재, 아들바위

자하성터를 지나면 계곡 냇가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아들바위를 만나게 된다. 덩치가 큰 네
모난 바위가 다소 기운 모습으로 자리해 있는데, 겉모습은 딱히 유별난 것은 없으며, 그냥 계
곡에 놓인 커다란 바위 정도 외에는 특별한 것은 없다. 허나 어찌된 영문인지 아들을 낳게 해
준다는 신비한 존재로 각인되어 옛날부터 아들바위란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땅의 오랜 고질병이라 할 수 있는 아들 선호 사상이 빚은 산물이라고나 할까? 냇가 한복판
에 저런 커다란 바위가 있으니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돌을 던졌을 것이고, 바위 위에 얹혀지면
마치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것이 점차 확장되어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이
야기까지 생겨난 모양이다.
그런데 다른 바위와 달리 여기서는 그냥 던지면 안된다. 바위를 등지고 다리 가랑이 사이로
돌을 던져 바위에 골인을 해야 아들을 얻는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그냥 왼팔로 던져 골인을
하면 된다고 했는데, 그새 수법이 바뀐 모양이다. 어쨌든 오랜 세월 사람들이 던질 돌이 바위
위에 수북히 쌓여 그의 높은 인기를 실감케 한다.


▲  잠시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다 (주왕계곡 하류와 주왕산 산줄기)

▲  주왕계곡 하류 (대전사 동쪽)

▲  주왕산 서쪽 자락에 자리한 대전사

주왕산에 들어서면서 시간이 되면 주왕굴과 대전사(大典寺)까지 말끔히 둘러보려고 했다. 주
왕산 상의주차장까지 13시까지 모이기로 해서 시간이 좀 넉넉할 줄 알았는데 벌써 12시 반이
넘어버렸다. 상의주차장까지는 앞으로도 30분을 더 가야 된다. 그러니 이들을 제대로 볼 시간
이 없는 것이다.
하여 산을 좀 타야 되는 주왕굴은 다음으로 미루고 상의주차장 직전 길목에 있는 대전사라도
어떻게 해보려고 했다. 이 절은 신라 후기에 창건된 오래된 절로 주왕산의 터줏대감격 존재인
데, 문화유산이 여럿 있어서 사진에 모두 담고 싶었다. 허나 시간 부족이란 현실 앞에 경내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쳐야 했다.
그렇다고 무리를 해서 보는 것도 단체 활동에 대한 예의는 아니며, 너무 시간에 쫓기듯이 보
느니 쿨하게 다음으로 넘기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하지만 얼마나 아쉽던지 아무리 다음에
오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그 다음이란 것이 언제가 될지는 미지수이다. 서울에서 제
법 먼 거리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대전사를 지나니 바로 주왕산의 대표 관문인 상의 매표소이다. 이곳은 대전사 때문에
문화재 관람료란 명목으로 입장료를 뜯고 있는데, 매표소 사람들의 눈빛에는 어느 누구도 그
냥 들여보내서는 안된다는 비장한 각오가 엿보였다. 그 돈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
<주왕산 상의(대전사)매표소만 입장료를 징수함, 나머지(절골, 월외리 등)는 입장료 없음>

상의매표소를 지나니 다른 유명 산과 마찬가지로 먹거리촌이 징하게 펼쳐진다. 도토리묵과 파
전, 송이, 동동주, 산채비빔밥, 백숙 등을 취급하고 있는데, 서둘러 길을 재촉하려는 찰라 낯
익은 얼굴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적지 않은 일행들이 거기서 동동주 1잔에 간단한 요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늦을까봐 대전사 등 많은 것을 두고 왔는데, 이렇게 여유롭게 산행
뒤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이럴줄 알았다면 대전사라도 제대로 보고 오는 건데
갑자기 기분이 허탈해진다.
상황이 뭐 그리 되었으니 다시 대전사로 가기는 틀렸고, 일행들과 어울려 주왕산의 명물인 송
이와 도토리묵, 동동주 1잔을 걸치며 같이 상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  상의주차장에서 바라본 주왕산과 주왕계곡

상의주차장에 도착하니 13시 20분, 늦게 오는 사람들이 속출하여 13시 40분이 되어서야 출발
을 했다. 주차장에는 산꾼과 나들이꾼을 태운 관광버스와 차량들로 홍수를 이루었고 그에 아
랑곳하지 않고 차량들은 계속해서 밀려들어온다. 그러나보니 들어오는 길은 정체가 대단하여
많은 차량들이 마을 밑에 차를 대고 걸어오기도 했다.

주왕산을 벗어난 우리는 안동(安東)으로 넘어갔다. 안동댐 주변에 자리한 식당에 들어가 안동
의 토속 음식인 헛제사밥 정식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는데, 헛제사밥 정식은 일반적인 제삿상
음식과 비슷하다.
헛제사밥의 유래는 조선 때 유생들이 배가 고프거나 비싼 음식을 먹고 싶어서 성현(聖賢)들에
게 제사를 지낸다고 거짓말을 치고 노비와 주변 백성들을 닥달하여 만들게 한 음식상으로 '헛
'이란 접두어를 붙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그 음식상이 이제는 안동의 대표 밥상이 되
어 전국에 불티나게 팔리는 것이다.

이곳 헛제사밥 정식은 나물이 버무려진 놋쇠 그릇에 밥을 비벼 먹는 것인데, 제사 때 쓰는 국
과 간고등어, 전, 떡, 잡채 등이 정식을 이룬다. 맛도 그런데로 괜찮은 편, 순식간에 밥과 반
찬을 비우고, 술도 여러 잔 마시니 졸음이 밀려와 나를 희롱한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식당 남쪽에 자리한 낙동강(落東江)과 월영교에서 잠시 소화 좀 시키다가
16시 30분에 출발했다. 아무리 목적지가 주왕산이라고 해도 마지막 종점은 결국 집이다. 서울
까지는 4시간 정도 걸렸으며, 피곤한 탓에 자다깨다를 무한으로 반복했다.

정말 번개처럼 날라가 재미나게 보냈던 무박 2일, 그곳이 그리워지고 같이한 이들이 보고 싶
은 마음에 비록 보잘 것은 없지만 이렇게 글을 남긴다. 다소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 아쉬움은
다음이란 인연을 잡아 해결하면 될 것이다.

* 절골 소재지 -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주산지리
* 주왕계곡(용연폭포, 용추폭포 등) 소재지 -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상의리
* 주왕산국립공원(☎ 054-870-5300)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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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0월 2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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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단단한 북쪽 지붕, 도봉산 계곡 나들이 ~~ 무수골계곡에서 우이암 관음봉, 문사동계곡, 도봉계곡, 도봉동문까지

 


' 도봉산 봄나들이 (우이암, 문사동계곡, 도봉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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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봉산 우이암(관음봉)

▲  문사동 바위글씨

▲  도봉산 (주능선, 자운봉)


 

봄이 막바지 절정에 이르던 5월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일행들과 서울의 북쪽 지붕, 도
봉산(道峯山)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가운데서 방긋거리던 13시, 집에서 가까운 도봉역(1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분식점과 마트에서 김밥과 간식 등을 넉넉히 사들고 무수골을 통해 도봉산의 포근한 품
으로 들어섰다.

서울의 별천지이자 아늑한 산골 마을로 논까지 갖추고 있는 무수골을 지나 원통사계곡(
보문사계곡, 무수골 상류)을 오른다. 계곡은 작지만 바위와 암반이 즐비하고 수심이 얕
아 조촐한 피서의 성지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그 계곡을 30분(무수골공원지킴터 기준)
정도 오르면 우이암(관음봉) 밑에 자리한 원통사(圓通寺)에 이른다.

원통사는 관음성지로 일컬어지는 우이암(관음봉)을 후광(後光)으로 삼은 관음도량(觀音
道場)으로 신라 후기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고려 후기 정도에 창건된 것으
로 여겨짐) 절은 오래되긴 했으나 건물은 죄다 20세기 이후 것들이라 고색의 기운은 말
라버렸으나 대신 조망이 일품이라 서울 사찰 중 북한산(삼각산) 일선사(一禪寺) 다음으
로 우수 조망을 자랑한다. (서울 사찰 조망 부분 2위임)
약사전(藥師殿) 거북바위에 깃들여진 상공암(相公岩) 바위글씨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로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고려를 뒤엎기 전, 여기서 기도를 했는데, 그 마지막 날,
하늘나라의 상공(정승)이 되어 옥황상제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하여 그것을 기
리고자 조선 말에 이곳을 찾은 사대부가 새긴 것으로 전해진다.

원통사에서 20분 정도 머물다가 다시 10여 분 정도 각박한 산길을 올라 드디어 우이암(
관음봉) 서쪽 봉우리에 이르렀다. (우이암 이전의 자세한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도봉산의 남쪽 지붕이자 대자연의 걸출한 작품
~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우이암<牛耳岩, 관음봉(觀音峯)>

도봉산 남쪽 끝 봉우리인 우이암(해발 542m)은 아주 잘생긴 순 100% 바위 봉우리이다. 대자연
형님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으로 약 2억 년 전인 중생대 쥐라기 중엽 시절에 일어
났던 대보조산운동(大寶造山運動)으로 도봉산 산줄기가 형성되었다고 하며 이후 바람과 비 등
이 계속 산을 깎고 다듬으면서 산 정상부는 화강암이 노출된 채 바위산이 되었다.
그래서 도봉산은 서울 근교의 대표적인 화강암 바위 산으로 자운봉과 선인봉, 만장봉, 칼바위
등 걸출한 바위와 암봉(岩峰)이 즐비하다. 우이암(관음봉)도 바로 그중의 하나로 대자연이 신
(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의 손길을 꺼렸는지 완전히 난공불락
의 요새로 지어놓았다. 허나 그렇게 크고 단단하게 만들었음에도 하늘과 가까워지고 싶은, 봉
우리를 정복하고 싶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 앞에 결국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도봉산
칼바위와 주봉 능선, 만장봉, 자운봉 등이 바라보인다.


봉우리 자체가 거의 수직 절벽으로 아무나 범할 수 없는 천험의 요새이며, 내려가는 것 또한
까마득한 그야말로 하늘의 감옥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나 올라갈 수는 없고 장비를 갖춘 암벽
꾼에게만 제한적으로 길을 내주고 있다. 특히 암벽 타기에 아주 최적화된 곳이라 암벽꾼들로
늘 부산하며, 전국 암벽 등반대회가 열렸던 암벽 등반의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대자연이 인
간의 접근을 막고자 만든 바위 봉우리가 암벽 등반을 위해 인간에게 내려준 선물의 모양새가
되버린 것이다.

지금은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에서 아무렇지 않게 우이암이라 불리고 있지만 원래 이름은 관
음봉이다. 관세음보살 누님이 부처를 향해 기도하는 모습과 비슷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
었으며,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쓰고 있는 모습과도 비슷하여 '사모봉'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
다.
도봉산에는 호랑이와 코끼리, 두꺼비, 코뿔소, 학 등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지닌 바위들이 많
은데 이들이 관음봉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
전부터 도봉산 제일의 관음성지(觀音聖地)로 조촐히 추앙을 받았다. 아마도 원통사에 있던 석
굴(현재 나한전)에서 수행하던 승려나 도봉산에 머물던 승려들이 발견하여 불교 성지로 격하
게 추켜세웠을 것이다. 바위 자체가 아주 휼륭한 관음성지라 그 후광(後光)을 놓치지 않고자
바위 밑 적당한 곳에 원통사가 둥지를 틀고 관음도량을 칭하고 있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①
도봉구,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지역


조금 밋밋해 보이면서도 순백의 아름다움이 묻어난 이 봉우리에도 왜정(倭政)의 추악한 잔재
가 남아있다. 왜정은 관음봉의 위엄을 욕보이고자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의 우이암으로 강제
로 이름을 갈아버린 것이다. (우이동, 우이시장에서 바위 봉우리가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바
꾸었다고도 함)
아무리 봐도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왜정은 왜 그리 눈이 삐딱한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 이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사람의 망각 속에 완전히 굳어져 버렸고, 관음봉이란
이름은 흐릿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원통사와 불교단체, 뜻있는 이들이 원래 이름으로
다시 갈아야 된다며 천하에 호소하고 있어 차차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
하긴 왜정에 의해 고의로 왜곡되고 격하된 지명이 어디 한둘이던가? 비록 관음봉이 불교식 이
름이나 왜정의 나쁜 의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니 원래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맞다. 그들의 썩
은 잔재가 이 봉우리 속에도 깃들여져 천하를 비웃고 있으니 기분이 다소 씁쓸하며, 이렇게
잘생긴 바위가 소의 귀로 머물러 있는 것도 좀 위엄이 서질 않는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②
우이동과 방학동, 쌍문동, 강북구, 성북구, 북한산 동쪽 자락 등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③
북한산(삼각산) 백운대와 영봉


앞서 원통사가 아무리 조망이 좋다고 해도 우이암만은 못하다. 해발도 무려 140m나 차이가 나
며 그만큼 하늘과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머리 위로는 푸른 하늘과 유유히 흘러가
는 구름과 햇님, 별님이 바라보이고, 저 밑으로는 서울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
북구, 동대문구, 광진구, 수락산과 불암산, 아차산 산줄기가 시야에 잡혀 여기까지는 원통사
와 비슷하다.
허나 이곳에서는 의정부 일부(호원동, 장암동, 민락1,2지구 등)와 상계1동, 도봉동 북부가 추
가로 시야에 들어와 조망의 범위는 조금 넓어졌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④
도봉산 산줄기와 상계1동, 수락산을 비롯해 의정부 호원동과 민락1,2지구
(수락산 너머로 보이는 곳)가 추가로 시야에 잡힌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로 이
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발 밑에 펼쳐진 천하를 바라보니 산부터 점보다 작게 아른거리는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즐거운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면 얼마나 좋
을까? (현실은 시궁창 인생 ㅠㅠ)


우이암에는 마침 한 무리의 암벽꾼들이 줄에 의지하여 아슬아슬하게 봉우리를 더듬고 있었다.
하늘의 감옥 같은 봉우리 정상에 올라선 기분은 어떠할까? 허나 정상부는 좁고 그 주변은 죄
다 수직 벼랑이니 자칫 실수라도 하는 순간에는 정말 답이 없을 것이다. 내가 저기로 순간이
동을 당한다면 아찔한 위치 때문에 염통이 쫄깃해져서 오래 있기도 어려울 것 같다. 그냥 이
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⑤
무수골이 저 밑으로 아득하게 바라보여 참 많이 올라왔음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에서 두 다리를 푹 쉬었다.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이 솔솔 불어
주는 산바람이 땀과 이른 무더위를 싹 털어가고, 대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일품 조망을 실컷 누
리니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마음과 안구가 제대로 정화되는 것 같다. 이보다 좋은 정
화감은 없지.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20분 정도 머물다가 자리를 털고 우이암
능선으로 길을 잡았다.

* 우이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의 위엄
약 50~60도 경사로 비스듬히 기대며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


 

♠  우이암능선과 문사동계곡(問師洞溪谷)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 <우이암을 중앙으로>

우이암능선은 도봉산의 남쪽 지붕길로 우이암에서 도봉산 주능선(주봉능선) 남쪽까지 짧게 이
어진다. 이곳에서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가 가장 높은데, 동쪽과 북쪽으로 서울 동북부와 의정
부, 도봉산 주능선이, 서쪽과 남쪽으로는 오봉산과 우이령, 북한산(삼각산)이 바라보이며, 특
히 능선에서 바라보는 우이암의 모습이 자못 위엄이 돋는다.

우이암의 자태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서쪽 봉우리와 우이암 능선에서 보는 것이 좋다. 서쪽에
서 보는 것과 능선에서 보는 것이 서로 다르게 보이는데, 마치 유럽식 투구를 쓴 장군이 비스
듬히 기대어 서울을 바라보는 모습 같으며, (하얀색 모자 달린 옷을 입은 사람이 비스듬히 기
댄 모습으로도 보임) 두건을 쓴 관세음보살 누님이 서울을 걱정하는 모습으로도 보인다. 허나
왜정의 비뚤어진 주장처럼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으니 관음봉을 우이암으로 깎아내린 왜정
의 눈이 비정상임을 보여준다. 빠른 시일 내에 제 이름을 회복한다면 우이암능선도 관음봉능
선으로 이름을 갈아야 될 것이다.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도봉동과 상계1동, 수락산,
의정부 호원동과 민락1,2지구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도봉구, 노원구, 강북구, 중랑구,
성북구, 광진구,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 무수골 등)

▲  우이암능선 조망대

우이암능선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면 서쪽을 향해 고개를 내민 우이암능선 조망대가 모습을 비
춘다. 능선길 서쪽 벼랑 위에 닦여진 이곳은 위치상 오봉과 우이령, 북한산(삼각산)의 북쪽
뒷통수(상장봉 등)가 바라보이는데, 특히 오봉이 잘 조망된다.


▲  우이암능선 조망대에서 바라본 오봉(五峯)과 오봉능선
오봉(해발 660m)은 오봉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우이령 북쪽 봉우리로 도봉산이나
송추에서 접근하면 되며, 바로 밑에 있는 우이령에서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  우이암능선 조망대에서 바라본 우이령, 북한산 북쪽 능선(상장봉)

▲  우이암능선 조망대에서 바라본 도봉산 주능선과 칼바위,
만장봉, 자운봉


우이암능선 조망대에서 북쪽으로 마저 내려가면 우이암능선분기점이다. 여기서 직진하면 지붕
길을 따라 칼바위, 오봉, 도봉산 주능선으로 이어지며, 동쪽은 보문능선으로 도봉산 종점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서쪽은 우이령(牛耳嶺)으로 이어지나 금지된 길인 비법정 탐방로이다. 그러
니 도봉산의 건강을 위해 아예 가지도 말자~~!
우리는 목적지인 우이암(관음봉)을 찍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지붕길을 고집하지 않고 쿨하게 보
문능선으로 내려갔다.


▲  보문능선에서 문사동계곡으로 내려가는 산길

▲  산악신앙의 현장, 산꾼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모이고 모여
커다란 돌탑으로 어엿하게 성장했다.

▲  경쾌하게 몸을 푸는 문사동계곡 상류

내려가는 길이긴 하지만 느낌상 가도가도 끝이 없어 보인다. 그 산길에 연두연두하게 익은 나
무들과 진달래 등의 봄꽃들이 우리를 응원하고 산바람이 종종 스쳐가며 조금씩 꿈틀거리는 땀
의 기운을 털어간다. 보이지 않던 계곡도 어디서 나타났는지 살짝 다가와 낭랑한 물소리를 들
려준다. 이 계곡은 문사동계곡 상류로 전날까지 넉넉히 내린 봄비로 인해 물이 아주 넘쳐 흐
른다.

문사동계곡은 무수골(원통사계곡), 원도봉계곡(망월사계곡)과 더불어 도봉산 3대 계곡의 하나
로 추앙을 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문사동계곡이 단연 갑(甲)으로 상류 부분은 작고 조촐한 모
습이라 두드러지는 풍경은 별로 없지만 속세로 내려갈수록 일품 풍경이 펼쳐져 두 눈을 제대
로 호강을 시킨다. 주름지고 잘생긴 바위와 벼랑은 물론 폭포도 여럿 나타나 산행의 여흥을
제대로 돋구며 특히 문사동 바위글씨 주변과 구봉사 주변이 최고의 절경으로 꼽힌다.
이 계곡은 용어천계곡과 합쳐져 도봉계곡으로 간판을 바꾸며, 도봉역에서 무수골에서 나온 무
수천과 하나를 이루며 중랑천(中浪川)으로, 다시 한강으로 흘러간다. 문사동은 도봉계곡과 한
덩어리로 묶어 도봉동천(道峰洞天)이라 불리기도 하며, 계곡 밑에 도봉서원이 자리해 있어서
서원 유생과 선비들의 피서지로 명성을 누렸다.


▲  문사동(問師洞) 바위글씨

문사동계곡의 이름표인 문사동 바위글씨는 하늘을 향해 약간 고개를 든 바위 피부에 깃들여져
있다. 문사동이란 '스승을 모시는 곳','스승에게 묻는 곳'이란 뜻으로 도봉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스승과 함께 학문을 논하거나 경치를 즐기거나 팔자좋게 탁족(濯足) 등의 피서를 즐
겼던 현장이다. 그래서 계곡 이름도 교육에 걸맞게 문사동으로 굳어진 것이다.

이 바위글씨는 초서체(草書體)로 쓰여 있어 알아보기가 조금 까다로운데, 마치 뱀이 기어가는
듯한 모습이다. 글씨 크기는 41x16cm으로 예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한 '바위글씨전' 포스
터에 절찬리에 실렸던 명필이기도 하다.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도봉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
나 조선 후기에 서원 유생이 남긴 것으로 여겨지며, 바위글씨 주변은 문사동계곡에서 가장 아
름다운 절경을 자아내고 있어 두고두고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제대로 앗아간다.


▲  가까이서 바라본 문사동 바위글씨의 위엄
동(洞)은 그런데로 알아보겠는데, 나머지 글씨는 진짜 해독 불가 수준이다.
(초서체 글씨들이 그런 경향이 큼)

▲  문사동 바위글씨 주변 풍경

계곡이 흘러가는 글씨 건너편에는 주름진 폭포와 벼랑이 펼쳐져 운치를 진하게 우려낸다. 이
런 절경에는 늘 신선(神仙) 전설이 있기 마련인데 이곳에는 없는 모양이다. 하긴 고리타분한
유생들이 지겹게 찾아와 쓸데없는 사상 논쟁이나 일삼고 있으니 신선 형과 선녀 누님들도 딱
히 오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  층층이 주름진 문사동 바위글씨 주변 폭포

▲  문사동계곡 마당바위 갈림길
이곳에서는 자운봉, 윗마당바위(천축사 윗쪽)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난다.


 

♠  도봉산 마무리 (문사동계곡, 도봉계곡)

▲  문사동계곡 중류

문사동계곡의 절경은 도봉계곡까지 연거푸 이어진다. '과연 도봉산 3대 계곡의 위엄이 전혀
녹슬지 않았구나' 감탄사를 마구 쏟아내며 계곡 풍경에 퐁당퐁당 빠지고 말았다.
대자연이 빚은 아름다운 절경, 그 절경을 인간의 한낱 언어나 문장으로 감히 표현하는 것은
어쩌면 무례가 아닐까? 아무리 좋은 단어를 마구마구 갖다붙여도 이곳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
을지 모르겠다. 이럴 때는 그냥 '와~~!' 탄성만 자아내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른다.


▲  문사동계곡 중류 (보문능선, 성불사입구)

계곡을 옆구리에 낀 넓적바위가 지나가는 산꾼을 유혹한다. 아직 봄이니까 그냥 지나쳤지, 한
여름이었다면 정말 뿌리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온몸으로 풍덩은 하지 않더라도 냄새가 모락
모락 나는 두 발을 꺼내들고 계곡을 휘저으며 피서삼매를 즐겼을 것이다~~!


▲  돌과 계곡이 어우러진 문사동계곡 중류 (성불사입구 부근)

▲  문사동계곡 서광폭포
폭포가 귀신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정도로 굉음을 울리며 굵은 명주실 같은
하얀 물줄기를 뽑아낸다. 그렇게 내려온 폭포수는 폭포 밑에 닦여진
담(潭)에서 잠시 숨 좀 고르다가 다시 긴 여정을 떠난다.

▲  옆에서 바라본 서광폭포의 위엄
폭포의 높이는 5m에 불과하지만 그 매력과 위엄은 어느 폭포 못지 않다.

▲  폭포가 여러 겹으로 펼쳐진 문사동계곡 (구봉사 주변)

서광폭포를 지나면 구봉사(龜峰寺)라 불리는 절집이 나온다. 법당인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요
사(寮舍), 범종각, 커다란 금동미륵불을 지닌 조그만 현대 사찰로 이 주변이 '문사동' 바위글
씨 주변과 함께 문사동계곡의 대표적인 흥미거리로 꼽힌다. 구봉사는 아마도 이들의 후광을
단단히 보고자 이곳에 둥지를 튼 모양인데, 층층이 이루어진 암벽에 키 작은 폭포가 여러 개
걸쳐져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바위를 타고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꽤 청아하다.


▲  주름진 바위를 타고 내려오는 문사동계곡 (구봉사 주변)
대자연이 그어놓은 주름이 주변 바위에 가득하다. 그만큼 도봉산도 늙었다.

▲  문사동계곡과 연등이 둘러진 산길 (구봉사 주변)
나무와 꽃들이 급하게 흐르는 계곡을 천연 거울로 삼으며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들이 없다.

▲  온갖 바위들이 재주를 부리는 문사동계곡 산길 (금강암 주변)

▲  연등이 허공을 가르는 금강암 주변 문사동계곡

구봉사에서 1굽이를 지나면 비구니 절집, 금강암(金剛庵)이 마중을 한다. 이곳 역시 구봉사와
마찬가지로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현대 사찰로 그곳을 지나면 천축사와 포대능선, 자운
봉에서 내려오는 산길과 합쳐져 사람들이 제법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길은 더욱 수월
해져 마치 말에 올라탄 듯, 거침없이 내달려 어느덧 도봉서원터에 이른다.

도봉서원(道峰書院)은 서울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서원으로 1573년 양주목사 남언경(南彦經)이
지역 유림의 뜻을 모아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세웠다. 이곳에는 원래
도봉산에서 가장 잘나갔던 영국사(寧國寺)가 있었으나 유림들이 절을 때려부셨으며, 조선 말
까지 이곳 일대를 영국동(寧國洞)이라 불렀다.
이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진 것을 임시로 단을 설치해 봄과 가을에
제를 지냈으나 6.25전쟁으로 중단되었고, 1972년 사당인 정로사(靜老祠)와 신문(神門)을 복원
했으나 왕년의 1/4도 안되는 규모였다. 허나 서울 유일의 서원이라는 큰 매력 덕분에 서울시
가 39억의 돈을 들여 2011년 기존의 건물을 밀어버리고 2014년 완공을 목표로 복원 공사에 들
어갔다.
하지만 이곳에서 옛 영국사 시절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불교계와 이해관계가 제대로 얽히게
되었고, 그때까지 지어진 건물을 모두 밀어버리고 발굴조사를 벌였다. 이후 계속 허전하게 터
만 남은 상태이며, 터 일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언제 복원이 될지는 모르지만 유교 쪽도
그렇고 불교 쪽도 영국사 복원을 계속 우기고 있는 실정이라 졸지에 뜨거운 감자가 되버렸다.
괜히 벌인 복원공사에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  거친 물살의 희롱을 받는 고산앙지(高山仰止) 바위글씨

도봉서원터에서 잠시 앞 계곡(도봉계곡)을 살펴보자. 그러면 계곡에 반쯤 잠긴 바위에 새겨진
고산앙지 바위글씨가 크게 아른거릴 것이다.
이 글씨는 1700년 7월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죽기 1년 전에 새긴 글씨이다
. 고산앙지란 시경(詩經)에 나오는 구절로 '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한다'는 뜻이다. 하여 김
수증이 조광조의 학덕을 우러러 사모한다는 의미로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도봉서원이 조광조
를 배향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들 글씨는 특이하게도 계곡물의 영향을 받는 자리에 새겨져 있어, 계곡 수량에 따라 보이는
범위가 천차만별인데, 제일 밑에 있는 '지(止)'는 늘 물에 잠겨 있어 심한 가뭄이 아닌 이상
은 보기가 참 힘들며, '앙(仰)'은 물이 많으면 역시나 보기가 힘드나 보통 때는 절반에서 1/3
정도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갔을 당시는 수량이 풍부해 '앙지' 2자는 강제 잠수 중이었다.
물의 희롱을 받는 '앙지'와 달리 '고산(高山)' 2자는 완전히 뭍으로 나와 햇살을 즐기고 있는
데 '산(山)'이 마치 3개의 산봉우리처럼 귀엽게도 새겨져 눈길을 끈다. 고산앙지 옆에는 글씨
가 새겨진 시기<경진 칠월(庚辰 七月)>가 쓰여져 있으며, 그 주변에는 이것 외에도 여러 바위
글씨들이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으니 한번 찾아보기 바란다.
도봉계곡과 문사동계곡 일대에는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권상하, 이재(李縡), 김
수증 등 옛 사람들이 남긴 바위글씨가 14개 전하고 있는데, 조선시대 서예 연구에 중요한 자
료로 인정되어 2009년 10월 도봉서원과 한 덩어리로 묶어 '도봉서원과 각석군(刻石群)'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28호로 지정되었다.

* 도봉서원과 바위글씨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도봉동문(道峰洞門) 바위글씨 - 서울 지방기념물 28호

도봉서원터에서 계곡을 따라 10분 정도 내려가면 200여 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를 간직한 광
륜사(光輪寺)가 나오고 여기서 다시 2분 정도 가면 도봉탐방지원센터 부근 큰 바위에 깃들여
진 도봉동문 바위글씨가 마중을 한다.
이 4자는 대노(大老), 송자(宋子)로 추앙 받던 조선 중기 문인이자 멸망한 명(明)나라에 과한
충성과 사대(事大)를 보인 꼴통 친명(親明) 사대주의의 대가 송시열(宋時烈)의 친필이라고 전
한다. 도봉동문이란 도봉서원과 도봉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뜻하며, 유명 문인이 쓴 글씨라
그런지 필체가 요란하게 율동을 부린다. 도봉서원 단골 고객 중에는 송시열도 있었다.


▲  저녁으로 먹은 삼겹살쌈밥의 위엄

도봉산 종점으로 내려가니 어느덧 17시가 되었다. 모락모락 김이 풍기는 저녁 밥에 곡차(穀茶
) 1잔이 그리워질 시간이라 산행 뒷풀이로 무엇을 먹을까 궁리하다가 종점 부근에 있는 쌈밥
집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고기를 겯드린 쌈밥집으로 우리는 삼겹살 쌈밥을 먹었는데, 삼겹살과 콩나물, 계란찜
, 무채, 김치, 된장찌개를 비롯해 상추, 양배추, 깻잎 등이 푸짐히 쏟아져 나왔다. 밥은 처음
에는 조금 주었으나 필요한 경우 더 제공해준다. 이들을 밥에 버무려 비빔밥처럼 해먹으면 되
며, 상추와 양배추에 노릇노릇 익은 삼겹살을 1점 넣어 쌈을 싸먹어도 된다. 이런 풍성한 찬
에 곡차가 없으면 안되겠지? 하여 막걸리를 시켜서 2병 정도 겯드렸다.

그렇게 기분 좋게 저녁 겸 산행 뒷풀이를 마치며 도돌이표처럼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행히 도
봉산과 내 제자리는 무척이나 가깝다는 것. 이렇게 하여 도봉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
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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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북한산 뒷통수에 숨겨진 달달한 폭포, 밤골계곡 숨은폭포 (북한산둘레길 효자길, 효자비)

 


'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북한산 숨은폭포(밤골계곡) '



▲  숨은폭포 (윗폭포와 아랫폭포)


 

여름 제국의 무더위 갑질이 극성이던 8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북한산(삼각산) 뒷통수에 숨
겨진 숨은폭포를 찾았다.
날도 징그럽게 더워서 도심에서 가까운 계곡에서 밤을 담구며 잠시 여름의 핍박을 피하기로
했는데, 처음에는 구파발(舊把撥)에서 가까운 진관사계곡이나 사기막골(효자동계곡)을 염두
에 두었으나 밤골계곡에 숨겨진 숨은폭포가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출동했다.

여름의 기운이 제법 강했던 14시에 연신내(3,6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폭포에서 섭취할 간단
한 먹거리와 막걸리를 구입했다. 그런 다음 서울시내버스 704번(부곡리,송추↔서울역)을 타
고 박석고개와 구파발역, 북한산성입구, 효자비를 지나 효자2통 정류장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 밤골계곡으로 인도하는 길을 들어서면 농가들이 여럿 나오는데, 그들을 지나면 바로
무성한 숲길이 펼쳐지면서 천하를 녹여먹을 정도로 강렬한 햇살로부터 다소 자유로워진다.
그 숲길을 조금 들어서면 북한산둘레길 11구간(효자길)과 만나게 되며, 거기서 2분 정도 가
면 밤골공원지킴터와 북한산(삼각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게이트(문)가 나온다.


▲  북한산국립공원 밤골공원지킴터와 공원 게이트(문)


 

♠  밤골계곡(숨은벽계곡)

▲  녹음(綠陰)이 짙은 밤골계곡 산길

밤골공원지킴터를 지나면 본격적인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이다. 숲도 녹음(綠陰)도 더욱 짙어져
원시림(原始林)을 방불케 하는데, 날씨는 덥지만 숲이 베푼 바람과 갖은 내음으로 땀은 줄행
랑 치기가 바쁘다.

밤골계곡은 숨은벽능선 북쪽에서 시작해 창릉천(昌陵川)으로 흘러가는 계곡으로 숨은벽계곡이
라 불리기도 한다. 북한산(삼각산)에는 여름 제국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드는 일품 계곡이 참
많은데, 대표적인 것으로 북한산성계곡, 우이동계곡(우이9곡), 소귀천계곡, 구천계곡(구천폭
포), 정릉계곡, 구기동계곡, 불광사계곡, 진관사계곡, 삼천사계곡 등이 있다. (도봉산과 사패
산 구역은 제외)
이들은 일찍이 천하에 널리 알려져 서울과 경기도 사람들의 피서지로 바쁘게 살았는데, 밤골
계곡은 그들에 비해 인지도는 낮으나 계곡 풍경은 그들 못지 않다. 게다가 계곡의 수질도 매
우 청정하여 신선들의 비밀 피서지로 손색이 없으며, 계곡 중간에 있는 숨은폭포는 북한산의
일품 폭포로 찬양을 받는다.

밤골계곡 코스(또는 숨은벽 코스)는 숨은폭포를 지나 숨은벽능선을 거쳐 북한산의 지붕인 백
운대(白雲臺, 837m)로 이어지며. 숨은벽능선은 바위 구간이 많아 제법 험하다고 하는데 대신
조망과 풍경이 국보급이다. 숨은벽이란 이름은 북한산 뒷쪽(북쪽)에 숨은 듯 자리해 있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이 참 귀여우면서도 정감이 많이 간다.

북한산(삼각산)을 많이 갔다고 자부하는 본인이나 아직 숨은벽능선은 미답처(未踏處)로 남아
있다. 그 능선으로 들어가는 계곡과 폭포도 이번이 첫 인연이라 기대와 설렘이 아주 큰 편인
데, 밤골안내소에서 숨은폭포까지는 1km 정도 된다. 길은 거의 평탄한 수준으로 처음에는 산
길과 계곡이 조금 거리를 두고 펼쳐지다가 끝내는 서로가 붙어 나란히 이어지면서 폭포에 이
르게 된다.


▲  밤골계곡 물이 잠시 정체를 빚는 계곡 건널목


▲  인적이 거의 없는 밤골계곡 산길
길을 가다가 혹여 신선 형님이나 선녀 누님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폭포에 대한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열심히 산길에 임한다.

▲  밤골계곡 산길 ~ 우리들은 점점 푸른 산속에 묻혀 간다.

▲  밤골계곡에서 만난 기묘하게 생긴 바위

숨은폭포로 열심히 가다보면 홀쭉하게 선 기묘한 바위를 만나게 된다. 마치 옛 유적에서 많이
나오는 기와 조각이나 도자기 파편을 크게 확대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하늘에서 천제(
天帝)의 명으로 토목공사를 하다가 인부가 실수로 떨어트린 기와 파편이 그대로 곤두박질 친
것 같다.

바위 피부에는 자연이 입힌 이끼와 고된 세월의 때가 가득해 시커먼 모습이며, 중간에는 누구
에게 얻어 맞은 듯, 움푹 패인 자국들이 있다. 바위 윗쪽에는 속인(俗人)들이 얹혀놓은 돌이
널려있는데, 산길에 접한 바위 피부에도 조금의 틈이 보이는 곳에는 꼭 돌들이 여러 개 얹혀
져 있다.
이곳을 지난 사람들이 유독 눈에 띄는 이 바위에 소망과 정성을 담아 얹힌 돌로 일종의 산악
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지어준 이름도 있을 듯 싶으나 전해오는 것은
딱히 없는 것 같으며, 사람들이 얹힌 돌이 많이 붙어있어 그 흔한 '붙임바위'라 불러도 손색
은 없어 보인다. (기와 파편처럼 생겼으니 기와바위라 불러도 될 듯)


▲  기묘하게 생긴 바위 옆모습

▲  여기저기 절경과 벼랑을 빚은 밤골계곡


 

♠  북한산 뒷통수에 숨겨진 비경, 숨은폭포(숨은벽폭포)

▲  숨은폭포의 아랫폭포

밤골공원지킴터에서 넉넉잡아 20분 정도 들어가면 우렁찬 폭포수 소리가 진하게 귀청을 때리
면서 숨은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숨은벽폭포라 불리기도 하는데 숨은벽능선으로 오르는 길
목에 있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대자연 형님이 북한산이란 대작품을 빚고 혼자 두고두고 보려고 북한산 뒷쪽에 몰래 이 폭포
를 만든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첩첩한 산주름 속에 소리도 없이 묻혀있다. 북한산에 안긴
폭포 가운데 단연 으뜸으로 물이 매우 맑고 수려한 절경을 자랑하며, 경승지를 찾아 부지런히
움직였던 선비와 양반들도 이곳의 존재를 몰랐던지 폭포에 대한 기록이나 시문(詩文)은 전하
는 것이 없다. 다만 북쪽에 있는 효자리계곡(사기막골)에 조선 후기에 지어진 육모정과 서산
정사터 등이 남아있어 그곳을 찾은 일부가 이곳에 왔을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폭포는 2~3개(엄밀히 따지면 3개이나 2개로 봐도 무방)로 이루어져 있는데, 윗폭포가 더 일품
이다. 단순히 폭포를 보러 온 이들은 윗사진의 아랫폭포가 전부인줄 알고 이거만 보고 돌아가
는 경우가 많은데, 반드시 1단계 더 올라 윗폭포도 보기 바란다. 그래야 괜히 애꿎은 땅을 치
며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숨은폭포에게도 숨겨진 별칭이 있다고 하는데, 아랫폭포를 총각폭포, 윗폭포를 색시폭포(처녀
폭포)라 부른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것은 아니며, 그에 대한 사연과 전설은 딱히 전
해지는 것이 없다. 지금은 많이들 찾아오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동네 사람이나 아는 사람만
찾아오던 숨겨진 비경이다 보니 그들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아랫폭포의 높이는 대략 10m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 30~40도의 경사진 바위를 미끄럼
을 타듯 내려온다. 어제까지 비가 많이 내려서 계곡의 수량이 크게 증가해 물줄기가 성난 기
세로 쏟아져 마치 하얀 비단을 드리운 듯 하다. 우렁찬 폭포수 소리가 천하를 흔드니 여름 제
국도 크게 놀라 식은땀을 흘리며, 폭포에서 부는 선선한 바람은 지금이 여름의 한복판이란 사
실 조차 흐릿하게 만든다.
폭포 앞에는 폭포수가 담긴 못이 있는데, 물이 얼마나 해맑은지 바닥이 훤히 보인다. 허나 바
닥이 보인다고 괜히 방심하지는 말자, 폭포수가 떨어지는 바로 앞은 수심이 깊으니 주의해야
된다.


▲  숨은폭포의 아랫폭포의 위엄 ▼



▲  풍덩 안기고 싶은 아랫폭포 못

폭포에 도착한 우리는 어린 아이 마냥 신이 났다. 때가 묻지 않은 폭포수에 발과 다리를 담구
니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이 무척 시원해진다. 기분 같아서는 온몸으로 계곡물과 짜릿하게 스킨
쉽을 즐기고 싶지만 여벌의 옷을 챙겨오지 않아 다리와 발을 담구는 선에서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마치 폭포를 전세낸 듯 한없이 다리를 담구니 다리가 정말 하얗고 매끄러워진
것 같다.

그렇게 발을 담구며 주변 풍경을 사진에 담고 즐거운 간식 시간을 갖는다. 적당한 돌에 속세
에서 사들고 온 막걸리와 김밥, 과자, 커피 음료 등을 차려놓고 열심히 섭취를 했다. 폭포가
안겨준 시장기에 금세 동이 나고, 막걸리 또한 바닥을 보인다.


▲  폭포 윗쪽에서 바라본 아랫폭포

▲  아랫폭포로 빠르게 흘러가는 계곡물

즐거운 간식시간을 마치고 계속 폭포 앞에 머물렀다. 이곳이 분명 숨은폭포는 맞는데 폭포와
관련된 사진에는 이거 말고 폭포가 더 있었다. 그러니 분명히 위로 올라가면 나머지 폭포가
있을 것이다. 하여 윗쪽으로 올라가니 평탄한 계곡이 나오고, 그 계곡을 조금 들어서니 바로
숨겨진 폭포가 모습을 비춘다. 바로 숨은폭포의 윗폭포이다.


▲  숨은폭포 옆구리를 지나는 산길에서 바라본 아랫폭포

▲  윗폭포와 아랫폭포 사이의 계곡

▲  모습을 드러낸 윗폭포 - 폭포수 소리가 여기까지 쩌렁쩌렁 울린다.

▲  정면에서 본 윗폭포의 위엄

아랫폭포과 윗폭포는 대략 1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같은 숨은폭포 형제지만 서로가 완전
히 다른 모습으로 30~40도의 경사를 이룬 아랫폭포와 달리 윗폭포는 거의 90도 직각을 이루며
패기 넘치게 물을 아래로 내리 쏟는다. 그러다보니 폭포수 소리는 아랫폭포보다 한층 더 우렁
차다.

벽처럼 늘어선 하얀 피부의 바위를 타고 장쾌하게 쏟아지는 윗폭포는 높이가 10m 남짓으로 폭
포 앞에는 물이 담긴 못 대신 바위 하나가 오랜 세월 물을 맞으며 누워있다. 한여름에야 시원
하겠지만 억겁의 세월 동안 종일 물을 맞으니 바위 피부가 완전 매끄럽다 못해 미끄럽다. 이
렇게 폭포 앞에 바위가 있으니 경북 청도(淸道)의 낙대폭포처럼 물맞이 장소로 적당하다.


▲  산길에서 본 윗폭포

윗폭포의 위엄을 제대로 보려면 계곡보다는 등산로(산길)에서 봐야 된다. 산길은 아랫폭포 옆
구리에서 바위를 타고 윗폭포 서쪽을 지나가는데, 윗폭포보다는 높은 곳에 있어 폭포와 그 윗
쪽까지 훤히 바라보인다.
윗폭포 윗쪽에는 못과 함께 폭포가 하나 더 숨어있는데, 그 폭포는 완만한 경사로 높이는 5m
정도 되는 듯 싶다. 허나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지 나무에 대부분 가려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
고 귀차니즘 발동으로 그곳까지 올라가지는 않았다.
위에 있는 것도 그런데로 폭포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 그가 윗폭포가 되고, 윗폭포를 중간폭포
라 불러야 되겠지만 위에 있는 폭포는 느슨한 경사라 윗/아랫폭포보다 멋이 떨어져 별도로 다
루어도 무리는 없어보인다.


▲  윗폭포 윗쪽 부분의 못과 폭포
선녀 누님의 숨겨진 욕탕은 아닐까? 나뭇꾼과 선녀에 나오는 나뭇꾼처럼
주변 숲에 숨어 그들을 노리고 싶다.


윗폭포를 둘러보고 다시 아랫폭포로 내려와 20분 정도를 머물다가 17시에 자리를 접고 폭포와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등을 돌리기가 얼마나 섭섭했던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다봤는지 모른
다. 삼척(三陟) 미인폭포(☞ 관련글 보러가기) 전설에 나오는 미인처럼 폭포를 끼고 살고 싶
었지만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이곳이 아닌 아비규환의 속세이다. 그러니 돌아가야 된다.

* 숨은폭포, 밤골계곡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산 19-1


 

♠  호랑이와 효자의 애틋한 설화가 깃든 박태성 정려비(朴泰星 旌閭碑)
- 고양시 향토유적 35호

▲  효자비라 불리는 박태성 정려비

밤골계곡지킴터에서 북한산둘레길 11구간(효자길)을 따라 남쪽으로 10분 정도 넘어가면 효자
비(孝子碑)라 불리는 시커먼 피부의 비석을 만날 수 있다. 그는 박태성 정려비로 비석 앞 도
로(북한산로)에 있는 정류장 이름도 무려 '효자비'이다.

이 비석은 조선 후기에 박태성(朴泰星, 1679~1758)이란 효자를 기리고자 만든 것으로 사연은
대략 다음과 같다.
1679년 박세걸(朴世傑)의 아들로 태어난 박태성은 자가 경숙(景淑), 본관은 밀양이다. 품성이
온화하고 효성이 대단한 인물로 3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집안에서는 고양시 효자동 뒷
산에 무덤을 썼다. 홀로 남은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는데 그의 효행이 영조(英祖) 때 조
정에까지 알려지면서 음사(蔭仕)로 내의(內醫)에 천거되었다. 허나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데, 무슨 아버지의 음덕으로 벼슬을 받겠습니까??'
하고 거절했다.

그는 효자란 이름에 걸맞게 종로구 효자동(孝子洞)에 살았는데, 부친이 별세한 갑년(甲年, 60
년)이 다가오자 63세에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일찍 집을 나서
고양시 효자동에 있는 부친묘로 성묘를 다녔다. 그리고 성묘를 하고 도성으로 돌아와 궁궐로
등청(登廳)을 했다.
효자동에서 서대문을 거쳐 부친묘까지는 거의 30여 리(10리는 5km) 정도 된다. 지금이야 차량
으로 금방 오갈 수 있지만 그때는 오로지 두 발과 말 밖에는 없었다. 그는 큰 벼슬은 지내지
못했고 호랑이를 만나기 전에는 걸어다녔다고 하니 절하는 시간을 포함해 오가는데 왕복 7~8
시간 정도가 걸렸을 것이다. 도성(都城) 성문이 새벽 3시에 열리니 성묘를 하고 11시까지 등
청을 한 듯 싶으며, 그걸 매일처럼 했다는 것은 지나친 효심과 근면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
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성묘를 하고자 새벽 일찍 집을 나서 무악재를 넘어가는데, 어둠 속에서 갑자
기 무서운 호랑이의 대명사인 인왕산(仁王山)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막는 것이다. 그는 순간
쫄았으나 용기를 잃지 않고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선친묘에 가는 길이다. 나를 잡아 먹으려면 잡아 먹거라!!'
그 말을 들은 호랑이는 그를 덮치기는 커녕 머리를 반대로 돌리고 뒷걸음질을 하여 그의 곁으
로 다가가 '내 등에 타라!'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를 알아들은 박태성은 선택의 여지도 없이
그의 등에 올라탔다.

호랑이는 그를 태우고 깊은 산중으로 달려갔다. 자꾸 낯선 산속으로만 들어가니 박태성은 산
속으로 납치하여 잡아먹는 것은 아닌가 싶어 염통이 쫄깃해졌으나 막상 당도한 곳은 다름 아
닌 부친묘 앞. 그제서야 마음을 놓은 그는 옷깃을 여미고 무덤에 절을 올렸다. 그리고 무덤을
끌어안고 통곡을 하니 그때 새 1마리가 주변 나무 가지에 앉더니 슬피 울었다고 한다. (몇 년
동안 같이 울었다고 함)
호랑이는 그의 성묘 장면을 지켜보다가 성묘가 끝나자 그에게 다시 타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
래서 그를 타니 바람을 가르며 달려가 처음 만났던 무악재에서 그를 내려놓고 사라졌다.

다음날에도 무악재에 이르니 호랑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역시나 왕복으로 태워주어 편하
게 성묘를 다녀왔다. 호랑이는 무임으로 '무악재~효자동 선친묘'구간을 고속으로 셔틀 운행을
해준 것이다. 전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박태성은 자신을 매일처럼 태워주는 그를 위해 종종 고
기를 준비해 주지 않았을까 싶다.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는 것은 인지상정이기 때문
이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고 1758년에 박태성은 79세에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후손들은 그의 선
친묘 앞에 그의 묘를 썼다. 며칠 뒤, 후손들이 가보니 그의 묘 앞에 큰 호랑이 1마리가 엎드
려 죽어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박태성을 매일 태워주었던 그 호랑이였다. 이에 후손들은
호랑이의 시신을 수습하여 그 곁에 무덤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후 박태성의 이야기를 들은 고종(高宗)은 크게 감동을 먹고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1893년
하사금을 내려 사당과 효자비를 세워 포상을 했으며, 비문(碑文)은 박태성의 증손인 박윤묵(
朴允默)이 썼다. 또한 그의 효심에 감동한 사람들이 그의 무덤 주변으로 몰려와 마을을 이루
고 살면서 효자리(孝子里)가 되었다고 하며, 그의 효행을 길이길이 기억하게 해주었다.
<비석은 고종이 아닌 영조가 내렸다는 설도 있으며, 박태성이 부친묘에 성묘를 다니자 이곳에
들끓던 호랑이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효자리는 고양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효자동으로 변경
됨>


▲  박태성 정려비

효자비의 설화처럼 호랑이가 부친묘까지 매일
왕복 운행을 해주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호랑이가 동물의 제왕이면서 사람들이 제일로
두려워했던 존재다보니 전설/설화의 격을 높이
는 용도로 많이 등장한다. 이 설화 역시 후손
들이 그의 효행을 드높이고자 호랑이를 넣어
적절하게 꾸민 것으로 여겨지는데, 말을 타고
다닌 것을 호랑이로 둔갑시킨 것은 아닌지 모
르겠다.

1893년에 왕명으로 세운 효자비는 흑요석(黑曜
石)으로 된 검은 피부의 비석이다. 그의 피부
에는 박윤묵이 쓴 12자의 글씨가 있는데, '朝
鮮孝子朴公 泰星旌閭之碑'라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비석의 높이는 117cm, 폭은 40cm, 두께
는 12cm이다.

참고로 효자비에서 동쪽 산자락으로 300m 정도 들어가면 박태성의 묘역이 있다. 그의 묘역을
알리는 이정표가 없어서 나는 길을 찾지 못했는데 그 묘역에는 박태성과 그의 부인인 완산이
씨, 김해김씨의 묘가 있으며, 묘비는 1778년에 흑요석으로 세웠다.
묘 옆에는 귀엽게 만든 호랑이상이 있는데, 이는 효자비 부근에서 농원을 하는 사람이 사비를
들여 만든 것이며, 그 옆에는 호랑이의 묘로 전하는 조그만 봉분(封墳)이 있다. 그리고 묘역
에서 50m 떨어진 곳에 박태성의 부친인 박세걸 묘역이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224


▲  봄이 빚은 아름다운 수채화 (효자비에서 북한산성입구 방향)

▲  효자동 내시묘역길에서 바라본 노고산(老姑山)

노고산에는 예비군훈련장이 많이 안겨져 있는데, 평일에는 예비군의 사격 훈련 총소리가 여기
까지 징하게 울려퍼진다. 그 정겨운 소리를 들으니 바람처럼 흘러간 예비군 시절이 진하게 떠
오른다.
이렇게 하여 북한산 숨은폭포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효자비와 노고산 사진은 봄에 별도로 담은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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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관악산에서 제일 맵시가 좋은 계곡, 과천 문원계곡 둘러보기 (문원폭포, 문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보광사)



' 관악산 문원계곡 여름 나들이 '


▲  문원하폭포

▲  관악산 일명사지

▲  보광사 문원리3층석탑



 

여름이 한참 깊어가던 7월 초에 일행들과 관악산(冠岳山, 632m) 문원계곡을 찾았다. 예전
에는 관악산의 품에 자주 안기곤 했으나 그에 대한 마음이 시들시들해졌는지 기껏 가봐야
그의 외곽만 겉돌 뿐, 그곳 정상<연주대(戀主臺)>을 오른지도 어언 10년이 넘어가 버렸다.
연주대까지는 아니더라도 간만에 관악산과 인연을 짓고자 여름에 걸맞은 정처를 물색하다
가 과천(果川)에 있는 문원계곡을 찾기로 했다. 이곳은 관악산에 몇 남지 않은 미답처(未
踏處)이자 대표적인 피서의 성지(聖地)로 관악산 뒷통수에 자리해 있는데, 문원폭포와 문
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등의 명소가 숨겨져 있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1시에 정부과천청사역(4호선)에서 일행을 만나 관악산의
품으로 들어선다. 넓게 깔린 교육원로를 가다보면 국사편찬위원회가 나오는데, 그곳을 지
나면 오른쪽에 2명이 지나다닐 정도로 비좁은 길이 나온다. 그 길이 문원계곡으로 인도하
는 길로(이정표가 있음) 길 양쪽에는 철책이 둘러져 답답함을 안겨준다.
그런 길을 4분 정도 들어가면 산림초소가 나오면서 비로소 관악산 산길이 펼쳐진다. 여기
서 서쪽으로 가면 백운사(용운암)란 절이 나오고, 직진하면 바위에 새겨진 승려 얼굴상이
, 동북쪽으로 가면 문원계곡 산길이다.


▲  관악산 문원계곡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
두 행정관청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짓눌려 좁고 각박한 길이 되어버렸다.
관악산 탐방객을 위해 길을 조금 트여주면 좋으련만..


 

♠  문원계곡(文原溪谷) 입문

▲  문원계곡의 생매장 현장

문원계곡은 관악산을 수식하고 있는 주요 계곡의 하나이다. 관악산에는 바로 근처에 있는 자
하동천(紫霞洞天) 계곡을 비롯해 관악산계곡(서울대 서쪽), 관음사계곡(남현동), 삼성천계곡
(안양예술공원)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단조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반해 문원계곡은
아기자기한 변화도 좀 보이고 있고, 높이도 제법 되는 자연산 폭포를 2개나 간직하고 있다.

정부과천청사역에서 문원계곡으로 가는 길목에는 식당이나 가게가 전혀 없다. 그들 사이에는
지체높은 정부청사와 여러 공공기관이 단단하게 자리하여 그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막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번잡하지 않아서 좋음) 그러니 먹거리를 사거나 간단하게 요기를 하려면
정부과천청사역 10번이나 11번 출구로 나가거나 KT과천지사 정류장에서 내리기 바란다. 그곳
이 과천의 중심지로 식당과 가게가 많다.

문원계곡은 관악산 남쪽에서 발원하여 정부청사 서쪽으로 흐르는데, 옛 기술표준원 북쪽에서
그만 강제 생매장을 당한다. 강제로 지하에 묻히는 계곡의 한이 얼마나 깊은지 물소리가 귀신
을 쫓아낼 정도로 우렁찬데 아무리 공공기관이라도 계곡이 그리 크지도 않거늘, 계곡에 대한
부족한 배려가 참 아쉽다. 허나 다행히 생매장 구간은 짧아서 옛 기술표준원을 지나면 교육원
로 남쪽에서 다시 햇살을 본다. (기술표준원은 충북혁신도시로 이전되었음)

산림초소를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문원
계곡 하류가 나온다. 생매장 직전인 이곳에 폭
포 2개가 연달아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는데 이
들은 자연산이 아닌 지형을 이용하여 다듬은
인공폭포이니 속지 말자. 문원계곡의 알짜배기
폭포는 여기서 더 들어가야 된다.

▲  인공(人工)이 가해진 문원계곡 하류 폭포

 


▲  각세도의 성지(聖地), 신계 이선평(晨鷄 李善枰)의 묘역

인공폭포를 지나면 산길 오른쪽으로 소나무 그늘에 묻힌 무덤과 안내문이 손짓을 한다. 전혀
정보가 없는 무덤이라 안내문을 기웃거리니 각세도(覺世道)를 세운 이선평의 묘역이다. 각세
도에서는 그를 도조(道祖)로, 그의 묘는 성묘(聖墓)라 추앙하며 애지중지하고 있다.

이선평(1882~1956)은 황해도 문화군(文化郡) 태산촌(泰山村)에서 태어났다. 조선 2대 군주인
정종(定宗)의 16대손으로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에 정진했는데, 평양 근교에서 '천하대보 정
진무외(天下大寶 正眞無外)'라는 글귀가 하늘에 나타난 것을 보고 각세(覺世)의 진리를 깨달
았다고 한다. 그래서 고향 인근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가 10여 년 동안 도를 닦으면서 의술과
복점(卜占), 풍수지리서를 익혔다고 한다.

수도를 마치고 잠시 세상으로 내려와 군의(軍醫)가 되기도 했으나 1907년 군대해산으로 실업
자가 되자 다시 수도를 하다가 뜻한 바가 있어 1913년 비봉산(飛鳳山)에 들어가 1,000일 기도
에 돌입했다.
기도를 벌인지 488일째 정오에 남쪽 하늘에서 황금색으로 쓰인 각세도 3자가 나타났다. 그리
고 다음날에는 서쪽 하늘에 '원각천지 무궁조화 해탈사멸 영귀영계(圓覺天地 無窮造化 解脫死
滅 永歸靈界)'란 16자의 주문이 나타났다고 하며 그 이후 초하루부터 매일 1자씩 하늘에서 글
씨를 받아 30계명과 도기(道旗), 각세훈사(覺世訓詞) 등을 얻었다고 한다. 그렇게 1,000일을
채우고 속세로 내려와 자신이 깨달은 것을 가르치니 그것이 각세도의 시작이다.

왜정(倭政) 말기에는 신도가 3만에 이르렀고, 해방 이후에는 10만까지 늘어났으며, 이선평은
문원계곡 하류에 세심정(洗心亭)이란 초막을 지으며 포교를 벌이다가 마땅한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1956년에 세상을 떴다. 그래서 후계자를 둘러싸고 분열이 일어나 여러 갈래로 갈라지
게 된다. (이선평과 각세도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하겠음)

이선평의 묘는 1976년부터 2년 동안 성역화 사업을 벌였으며, 문인석(文人石) 1쌍과 망주석(
望柱石) 1쌍, 묘비, 봉분(封墳)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존재를 대충 덤으
로 챙기고 서둘러 문원계곡으로 들어섰다.


▲  녹음(綠陰)이 우거진 문원계곡 산길

▲  속세를 향해 흘러가는 문원계곡 중류
한여름에는 피서의 성지로 추앙을 받으며, 피서객들의 욕탕이 되버린다.

▲  문원계곡 바위 산길 - 보호 난간이 등산객의 발길을 지켜준다.

문원계곡 산길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느긋하다. 산길과 계곡과는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
다가 바위 산길(이선평 묘역과 문원하폭포 중간)에서 잠시 멀어지는데 바위 벼랑 밑으로 아득
하게 계곡이 보인다.


▲  바위 산길에서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
숲 너머로 과천 시내와 청계산(淸溪山)이 두 눈에 들어온다.

▲  문원계곡을 건너는 나무 다리
바위 산길을 지나면 잠시 멀어진 계곡과 다시금 가까워진다. 그 상태는
문원폭포까지 쭉 이어져 서로의 끈끈한 정을 과시한다.

▲  나무다리 주변 문원계곡 중류


 

♠  문원계곡의 꿀단지, 문원하폭포와 문원폭포

▲  관악산 제일의 폭포, 문원하폭포(文原下瀑布)

산림초소에서 천천히 30분 정도 오르면 계곡 상류에 걸린 문원하폭포(이하 하폭포)가 마중을
한다. 나도 처음에는 그를 문원폭포로 알고 있었으나 이는 답이 아니었다. 그 문원폭포는 여
기서 더 올라가야 되며, 그 폭포 밑에 있다고 해서 문원하폭포라 불린다. 허나 외모는 문원폭
포보다 하폭포가 훨씬 잘났다. 그래서 문원폭포보다는 하폭포가 이곳의 중심 폭포이자 관악산
제일의 폭포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니 차라리 하폭포를 문원폭포라 하고, 문원폭포를 문원상
폭포나 윗폭포로 칭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하폭포는 하얀 피부의 바위를 타고 명주 자락을 늘어뜨린 듯 하얀 물보라를 쏟아내는데, 위에
서 바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서 거의 20도 정도로 구부러졌다가 다시 바위
를 타고 힘차게 내려온다. 폭포의 높이는 약 20m 정도로 폭포 밑에는 물놀이 하기에 좋게 얕
은 수심의 못이 형성되어 있으며, 폭포 남쪽에 산길이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고, 폭포가 있는
바위는 안전을 위하여 하얀 금줄을 쳐놓았으나 어기는 산꾼이 적지 않다.

관악산은 산세와 바위는 참 일품이지만 문원계곡과 관악산 제일의 경승지로 추앙받던 자하동
천을 빼면 계곡도 평범하고 폭포도 거의 없다. 그나마 문원계곡이 좀 아기자기한 편이고, 그
곳에 빚어진 하폭포와 문원폭포가 관악산에서 제일 화끈하게 폭포의 패기를 보여준다.


▲  위에서 바라본 하폭포

▲  반석으로 이루어진 하폭포 윗쪽

하폭포 옆구리를 통해 폭포 위쪽으로 오르면 계곡을 둘러싸고 넓게 펼쳐진 반석이 나온다. 문
원계곡을 찾은 산꾼들이 많이 쉬어가는 쉼터로 여기서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리는데, 북쪽으로
난 마당바위를 오르면 일명사지와 연주암으로 이어지고, 계곡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문원폭포
가 나온다. 그리고 서북쪽 길로 오르면 육봉과 팔부능선으로 이어지는데 정상(연주대)이 목적
이라면 북쪽 마당바위로 오르면 된다.


▲  하폭포 윗쪽에 자리한 마당바위

▲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 정경백(鄭景伯) 바위

마당바위 꼭대기에는 큰 바위가 아슬아슬하게 걸터 앉아 천하를 굽어보고 있다. 살짝 밀면 당
장이라도 때굴때굴 굴러떨어질 것 같은 기세인데, 그의 피부에는 한자로 큼지막하게 '정경백'
이라 쓰여 있다. 바로 그 바위글씨 때문에 '정경백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정
경백은 사람 이름으로 뭐하던 양반인지는 모르겠으나 글씨의 폼을 보니 구한말이나 왜정 때
새겨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을 찾은 정경백은 문원계곡의 뛰어난 절경에 퐁당퐁당 빠지면서 마당바위 피부가 아닌 이
바위에 이름 3자를 낙서로 남겼다. 인명사전이나 인터넷 검색에도 그의 정보가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면 그저 평범한 선비거나 글 좀 아는 백성인 듯 싶으며, 바위에 이름을 남긴 인연으로
비록 그의 정체는 몰라도 그의 이름은 바위와 함께 지금까지 남게 되었고, 관악산의 주요 바
위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관악산에 널린 바위 가운데 사람 이름을 취한 바위는 이
것이 유일하다.


▲  정경백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과천과 의왕시내, 청계산, 광교산)

  하폭포에서 문원폭포로 인도하는 산길

   ◀  그늘에 숨겨진 문원폭포(文原瀑布)
하폭포에서 계곡을 따라 5분 정도 오르면 그
늘에 묻힌 문원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하폭
포는 위성지도에도 나올 정도로 그 위용을 속
세에 드러내고 있지만 문원폭포는 숲 그늘 속
에서 수줍게 물보라를 피운다.
폭포의 높이는 10m 정도로 하폭포에 비해 볼
품도 많이 떨어지고 물소리도 차분하다. 거의
90도 각을 이룬 윗부분을 빼면 경사도 거의
40~50도 정도로 물이 미끄럼을 타듯 부드럽게
내려와 착지를 한다.
폭포 옆에는 벼랑이 있는데 그 벼랑 밑에 비
와 눈을 피할 정도로 움푹 들어간 공간이 있
다.
거의 석모도 보문사(普門寺)의 눈썹바위와 좀
비슷한 모습으로 그곳에 태극기를 비롯해 기
도나 굿에 사용하는 물건과 그것을 보관하는
공간이 있어 굿이나 기도터로 몰래 쓰이고 있
음을 알려준다.


▲  시원찮게 떨어지는 문원폭포 윗도리

▲  문원폭포 옆 기도처
깎아지른 벼랑 밑도리에 움푹 들어간 예사롭지 않은 공간이 있어 기도나 굿터로
암암리에 쓰이고 있다. 아마도 이곳의 지기(地氣)가 높거나 지형상의 이유로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승려와 참선하는 사람들의 수행 공간이나
산악신앙의 현장으로 바쁘게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문원폭포 아랫 계곡 (왼쪽은 폭포 옆
기도터로 인도하는 길)


 

♠  하늘과 가까운 곳에 숨겨진 옛 절터, 관악산 일명사지(逸名寺址)
- 경기도 지방기념물 191호

▲  동쪽에서 바라본 일명사터(육봉일명사지)

▲  서쪽에서 바라본 일명사터

하폭포에서 마당바위를 지나 각박한 산길을 6~7분 정도 오르면 긴 석축이 나온다. 그 석축이
바로 옛 일명사터로 석축 앞에 관련 안내문이 서 있어 등산객들의 관심을 호소한다.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일명사터는 육봉(六峰) 밑에 있다고 해서 육봉일명사터라 불리기도 한
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육봉일명사지') 절터의 면적은 400평 정도 되는데, 이곳에 대한
정보가 남아있는 것이 없어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의 비밀을 캐려는 집념으로 1999년 절
터를 뒤집은 결과 연꽃잎이 새겨진 연화문대석(蓮花紋臺石) 2점과 석탑(石塔)의 잔재 1기, 우
물 2곳이 나왔고, 조선시대 암막새기와 조각 20여 점이 나왔다. 또한 범어(梵語)가 새겨진 기
와와 무늬가 없는 조그만 기와 등 신라 후기 기와도 여럿 나와 신라 후기에 법등(法燈)을 켰
음을 짐작케 한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절터의 입을 강제로 열면서 그동안 밝혀진 사실을 정리하면, 신라 후기에
창건되었다가 고려 중기나 후기에 망한 것으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4세기 후반에 다시
중창되어 그런데로 절을 꾸리다가 17세기 후반에 완전 문을 닫고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재정 악화와 주변 사찰과의 경쟁 등이 큰 원인이 아닐까 싶다.
< 무리한 조세와 공납(貢納), 고적한 곳에 위치한 지리적 불리함 등으로> 만약 산사태 등의 자
연재해로 망했다면 절터가 좀 온전하지 못해야 되는데 절터는 너무 선명하다.

절터에는 건물터와 석축, 연화문대석이 있는데, 절이 망한지 꽤 되었음에도 절터가 원형을 잃
지않고 잘 남아있어 관악산 불교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관악산에는 이곳 외에도 연
주암의 전신(前身)으로 여겨지는 관악사(冠岳寺)터가 있으며, 관악산과 삼성산은 신라 후기부
터 절이 많이 생겨나 북한산(삼각산)과 더불어 수도권 불교의 성지로 일컬어진다. 특히 연화
문대석은 관악산에 남아있는 옛 석조물 가운데 가장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칭송받고 있어
일명사도 왕년에 꽤 잘나갔음을 가늠케 한다.
그 잘나가던 절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가늠할 수 없는 전설이 되었고, 건물을 받쳐들던 주춧돌
만 앙상하게 남아 하늘을 받들고 있으니 참 인생무상이 아닐 수 없다. 일명사는 스스로를 태
우며 그 위대한 진리인 인생무상 4자를 우리에게 진하게 일깨워 주고 있다. 허나 그러면 뭐하
나. 인간은 동물과 신(神) 사이에 어정쩡하게 들어앉은 존재라 그것을 죽기 전에나 깨달으니
말이다.

일명사터는 하폭포에서 연주암 가는 길목에 있어 찾기는 쉽다. 연화문대석 2기는 절터 한복판
에 박혀있어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하며, 석탑의 잔재와 우물은 절터 인근 수풀에 묻혀 있다.
석탑은 고려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산11


▲  일명사터 석축

▲  여름 햇살을 즐기고 있는 일명사터 중앙 건물터
다른 건물터와 달리 규모가 크고 절터 중앙에 자리해 있어 절의 중심 건물인
법당(法堂)으로 여겨진다.

▲  일명사터 동쪽 건물터
조그만 건물이 여럿 뿌리를 내렸던 곳으로 산신각(山神閣)이나 명부전(冥府殿),
요사채 자리로 여겨진다.


▲  북쪽에서 바라본 일명사터

▲  화석처럼 박힌 연화문대석 형제
이들은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석불 대좌(臺座)의
일부로 여겨진다. 관악산의 몇 안되는 옛 석조물 가운데 가장 정교하게
새겨진 것으로 천하에 짧게나마 주목을 받았다.

▲  절터 북쪽 석축과 돌다리

절터 북쪽과 동쪽에는 조그만 물줄기를 두어 산에서 내려온 시냇물을 아래로 흘러보낸다. 이
렇게 배수 시설까지 갖추어 식수를 해결하고 언제 문을 두드릴지 모를 화마(火魔)의 공습에도
대비를 했는데, 석축 북쪽에는 통돌을 깔아 조그만 돌다리까지 두었다.

일명사터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다시 속세로 내려갔다. 기분 같아서는 오랜만에 연주암까지 오
르고 싶었지만 거까지 가려면 1시간 이상 각박한 산길을 올라야 되고, 날씨도 무지 덥다. 하
여 쿨하게 포기하고 계곡으로 내려갔다. 오늘 인연도 아님에도 억지로 인연을 짓는 것은 그렇
게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문원계곡 하류인 산림초소로 내려와서 바로 속세로 향가지 않고 근처에 있는 마애승용군을 찾
았다. 그곳은 산림초소와 매우 가까운데, 이정표가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고 있어 찾기는 쉽다.
오르는 길도 그리 힘든 편은 아니라서 2분 정도 수고하면 바위 2개와 소나무가 마중을 나오는
데, 소나무 서쪽 바위에 '용운암 마애승용군'이 자리해 있다.


▲  바위에 새겨진 용운암 마애승용군(磨崖僧容群) - 과천시 향토유적 4호

이름도 참 생소한 마애승용군(이하 승용군)은 과연 무엇일까? 여기서 승용(僧容)은 승려의 얼
굴을 뜻한다. 그러니 쉽게 풀이하면 바위에 새겨진 승려 얼굴상이 된다. 승용군 앞에 붙은 용
운암은 부근에 자리한 절 이름으로 예전에는 승용군 주변에 있었다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홍촌(洪村) 마애승용상'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산 밑에 홍촌이란 마을이 있어서 유래된 것이
다.

보통 불상이나 보살 등을 바위에 새겨 마애불(磨崖佛)로 삼지만 그들 대신 승려의 얼굴을 새
긴 경우는 천하에서 거의 이곳이 유일하다. 바위 윗도리에 얼굴 3구가 새겨져 있고, 밑도리에
2구가 간결하게 스며들었는데, 얼굴이 하나 같이 동자승처럼 밝고 귀여운 표정이다. 3명은 정
면을, 2명은 측면(側面)상을 하고 있으며,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불상도 아닌 승려 얼굴을 새겼을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딱히 해답은 없다. 승려
를 귀족처럼 받들던 고려 때 관악산의 이름 있는 승려를 기리고자 얼굴을 새겼을 가능성도 있
으나 이 역시 부질없는 추측일 뿐이다. 참고로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관악산 서쪽 자락인 안
양예술공원에 마애종(磨崖鍾)이 새겨져 있는데, 범종과 이를 치는 승려가 조각되어 있다. 이
역시 이 땅의 하나 밖에 없는 존재로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새겨진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관악산에만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존재가 1종류도 아닌 2종류가 있다는 것이 참 흥미롭
다.


▲  바위 윗도리를 장식하고 있는 승려 얼굴상 3구
가운데와 오른쪽 승려는 정면을 보고 있고, 왼쪽 승려는 옆을 보이고 있다. 눈썹과
살짝 감긴 눈, 코, 입, 귀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표정이 하나같이 앳된
동자승이나 원숭이처럼 해맑기 그지 없다.

▲  바위 밑도리를 장식하고 있는 승려 얼굴상 2구
귀마개나 이어폰을 낀 것 같은 왼쪽 승려는 정면을, 오른쪽 승려는 옆을 보고 있다.
승려 얼굴 상 외에도 정체가 아리송한 문양들이 여럿 새겨져 있다.

▲  승용군 바위 뒤에 깨알처럼 새겨진 글씨들
이곳에서 예불을 올린 사람들이 남긴 것으로 근래까지 불공 장소로 쓰였음을 보여준다.
참고로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오래된 마애미륵불이 있다.


 

♠  법등의 역사는 짧지만 문화유산 3점을 든든한 후광으로 삼은
과천 보광사(普光寺)

▲  보광사의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

관악산 문원계곡을 뒤로하고 속세로 나오다가 과천중앙고 서쪽에 자리한 보광사에 잠시 발을
들였다.
교육원3거리에서 교육원로를 따라 6~7분 정도 걸으면 길 왼쪽(남쪽)에 보광사를 알리는 이정
표가 손짓을 하는데 그의 손짓에 맞춰 다리를 건너면 바로 보광사가 모습을 비춘다.

이 땅의 흔한 절 이름의 하나인 보광사, 서울과 수도권에만 우이동(牛耳洞) 보광사, 파주 보
광사(☞ 관련글 보러가기), 남양주 보광사, 그리고 이곳까지 60년 이상 묵은 절만 쳐도 최소
4곳이 넘는다.

관악산 남쪽 자락이자 정부과천청사를 바라보고 선 과천 보광사는 1946년에 창건되었다. 이때
법당 6칸과 요사 1동이 닦았는데 현재의 가람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이룩된 것으로 2001년
에 극락보전을 새로 지어 법당으로 삼았고, 삼성각과 명부전, 설법전 등을 세워 지금에 이른
다.
법등(法燈)이 켜진 역사는 고작 70년 남짓으로 고색의 기운은 아직 싹트지도 못했다. 허나 인
근 문원동 절터에서 오래된 3층석탑과 석조보살입상을 업어와 마땅히 내세울 것이 없는 이곳
의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았고, 1993년에는 조선 후기 불상까지 새로 영입하면서 매우 짧
은 법등에 비해 오래된 문화유산을 3개나 간직하게 되었다. 비록 보광사와 관련이 없는 것들
이지만 바로 그들 때문에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현대에 지어진 그저 그
런 사찰의 하나로 눈길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절의 규모는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크기로 북쪽을 바라보고 선 극락보전을 비롯하
여 명부전과 설법전, 삼성각, 요사, 범종각 등 6~7동의 건물을 갖추고 있다. 설법전(說法殿)
과 요사(寮舍) 같은 경우 겉으로 보면 1층이지만 밑에도 공간을 만들어 2층을 이루고 있다.

▲  2002년에 지어진 보광사 삼성각(三聖閣)
산신과 칠성, 독성의 보금자리이다.

▲  보광사 설법전

◀  관악산이 베푼 물로 늘 만조를 이루는
보광사 샘터과 이끼 옷을 살짝 걸친
석조(石槽)


▲  보광사 경내 동부 <3층석탑과 명부전(冥府殿), 석조보살입상>

▲  보광사 문원리 3층석탑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39호

툇마루를 간직한 주지실 앞에 조그만 3층석탑이 서 있다. 이 탑은 관문동 절터(어딘지는 모르
겠음)에서 가져온 것으로 하얀 피부를 지닌 커다란 바닥돌 위에 얹혀져 있는데 2중의 기단(基
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인 보주(寶珠)로 마무리를 한 맵시 좋은 탑이다.
이중 바닥돌은 시멘트로 지은 것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1층 탑신에는 2중으로 새겨진 자물쇠가 새겨져 있으며, 지붕돌 밑에는 얇게 만든 3단의 받침
이 있고, 지붕돌의 처마 끝은 살짝 올려져 약간 경쾌감을 준다. 기단과 지붕돌의 모습을 통해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탑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시흥 문원리 3층석탑'이다. 허나 과천은 어엿한 시(市)로 시
흥군에서 분리된지도 30년이 넘었고, 그 문원리도 문원동이 되었건만 명칭은 아직도 30여 년
전에 머물러 있다. 그 쾌쾌묵은 이름을 현실에 맞게 다듬어 '보광사 3층석탑'이나 '과천 문원
동 3층석탑'으로 갈아야 될 것인데 말이다. 국가지정문화재는 그래도 시대와 지역에 맞게 이
름이 많이 바뀌고 있으나 지방문화재는 아직도 제자리 걸음이다.


▲  문원리사지 석조보살입상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77호

명부전 앞에는 오래된 석조보살입상이 서 있다. 이 석불은 문원동 15-166번지에서 가져온 것
으로 높이 1.7m 정도 되는 돌에 얇게 선각으로 새기고 그 위에 둥근 갓을 씌우는 선에서 아주
간단히 처리했다. 허나 세월의 태클로 그 선각도 희미해져 자세히 안보면 석불인지 다른 석상
(石像)인지 햇갈릴 정도이다.

갓으로 머리가 가려진 얼굴은 둥근 편으로 눈썹과 눈, 입, 코를 새겼으나 거의 표정이 지워진
상태이고 목은 짧지만 두껍다. 돌을 제대로 깎지 않고 그냥 선각만 했기 때문이다. 왼손은 가
슴에 대어 연꽃 봉오리를 잡고 있고, 오른손은 밑으로 내리고 있는데, 옷은 양쪽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通見)의 법의(法衣)이다.
많이 부실해 보이는 이 석불은 납작한 얼굴과 짧은 어깨, 간략화된 옷주름 등 도식화된 모습
을 통해 고려 후기나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보광사 목조여래좌상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62호

극락보전 불단(佛壇)에는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그중 아미타불(阿彌陀佛)로 삼고 있
는 불상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여래좌상이다. 그 좌우에 자리한 존재들은 대세지보살(大
勢至菩薩)과 관음보살로 2001년에 조성되었다.

포근한 표정을 지으며 중생의 하례를 받고 있는 목조여래좌상은 나무로 만들어서 금칠을 입힌
것으로 원래는 양평 용문사(龍門寺, ☞ 관련글 보러가기)에 있었다고 한다. 6.25가 터지자 어
느 신도가 여주(驪州)로 피신시켰고, 그렇게 개인이 가지고 있다가 1993년 이곳에 기증하여
보광사의 보물을 하나 더 늘려주었다.

불상의 얼굴은 크고 둥근 편인데, 눈썹이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지그시 뜨며 북쪽을 바라
본다. 코는 작고 오똑하며, 붉은 입술 위에 검은 수염이 살짝 그려져 있다. 얼굴이 크다보니
볼살도 많아 보이며, 두 귀는 거의 어깨에 닿는다. 저리 귀가 크니 중생의 민원은 하나도 누
락됨이 없이 잘 들어줄 것이다. (민원도 잘 처리해주는지는 모르겠음)
머리는 나발로 두툼하게 무견정상이 솟아 있으며,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다. 가슴과 배 사
이에는 연꽃이 새겨진 허리띠가 있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왼손은 따로 만들었는데, 가운데
손가락과 약지 손가락을 구부렸다. 불상의 양식을 보아 조선 초기 또는 조선 초기 양식을 간
직한 조선 중기 불상으로 여겨진다.

* 보광사 소재지 -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 산126-21 (교육원로 41, ☎ 02-502-2262)


▲  극락보전 앞에서 바라본 관악산
절은 작지만 관악산을 앞뜰로 품고 있어 앞뜰 만큼은 천하 제일이다.


보광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8시 반이 넘었다. 칼퇴근의 달인 햇님도 뉘엿뉘엿 그만의
공간으로 꽁무니를 빼고, 장대한 관악산도 어둠의 커텐 속으로 사라질 채비를 한다. 이렇게
하여 관악산 문원계곡 여름 나들이는 저물어가는 햇님처럼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관악산 보광사, 문원계곡(문원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찾아가기 (2018년 7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정부과천청사역 6번 출구를 나오면 정부청사입구 교육원3거리이다. 여기서 국
  가공무원인재개발원으로 인도하는 교육원로를 6~7분 가면 왼쪽에 보광사가 있으며, 15분 정
  도 가면 오른쪽에 관악산 문원계곡으로 인도하는 조그만 길이 나온다. 여기서 마애승용군까
  지는 6~7분, 문원하폭포까지는 35~40분, 일명사터와 문원폭포는 40~45분 정도 걸린다.
* 441, 502, 540, 541, 542, 1-1, 9, 9-3, 11-1, 11-2, 11-3, 11-5, 103, 777, 3030번 시내버
  스를 타고 정부과천청사나 과천주공2,3단지 하차
* 문원계곡 소재지 -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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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속리산 폭포 나들이 ~~~ (장각폭포, 장각동계곡, 오송폭포, 시어동계곡, 성불사, 옥양폭포)



' 상주 속리산 폭포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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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리산 장각폭포

▲  오송폭포

▲  옥양폭포



 

봄이 겨울 제국을 응징하며 얼어붙은 천하에 한참 희망을 내리던 3월 끝 무렵에 친한 후
배와 1박 2일 일정으로 짧게 좁은 천하를 주유했다.
첫날은 강원도 내륙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충북 단양(丹陽)으로 내려가 단양 친척집에
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오랜만에 찾은 단양 시골이지만 다음 날도 갈 길이 멀기에 나머
지 회포는 불투명한 미래로 쿨하게 넘기고 아침을 두둑히 섭취한 다음, 길을 떠났다.

둘째 날은 소백산맥 너머 경북으로 시야를 돌려 예천(醴泉) 지역을 둘러보고 이 땅의 마
지막 전통 주막으로 꿀재미를 보고 있는 삼강주막(三江酒幕)을 찾았다. 거기서 소고기국
밥과 파전, 도토리묵, 두부로 두둑히 점심을 먹었는데 나올 때는 인절미도 1개 구입하여
후식까지 챙겼다.

삼강주막을 나오면서 후식거리로 어디로 갈지 궁리하다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속리산
(俗離山)을 찾기로 했다. 속리산하면 흔히 충북 보은(報恩)과 괴산(槐山) 지역만 생각하
기 쉽지만 경북 상주(尙州)에도 적지 않게 덩치를 걸치고 있다. 바로 그 상주 권역에 이
름난 폭포들이 여럿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데 이들을 시간이 되는데까지 찾아보기로 했다.
그중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장각폭포이다.


 

♠  장각동계곡 하류에 그림처럼 자리한 조그만 폭포
장각폭포(長角瀑布)

속리산의 최고 봉우리는 과연 어디일까? 흔히 문장대(文藏臺, 1,054m)를 생각하기 쉽지만 정
답은 바로 그 남쪽에 자리한 천왕봉(天王峰, 1,057m)이다. 그 천왕봉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가는 계곡이 장각동계곡(長角洞溪谷)으로 그 계곡이 굽이굽이 큰 세상을 향해 흐르다가
그냥 떠나기가 아쉬워 하류에 걸쭉한 폭포를 빚어놓으니 그 폭포가 장각폭포이다.

동쪽을 향해 힘차게 물을 내뱉는 장각폭포는 높이가 겨우 6m 정도인 조그만 폭포이나 수량만
큼은 풍부하여 우렁찬 폭포수 소리에 귀신의 염통까지 쫄깃하게 한다. 폭포 밑에는 용소(龍沼
)라 불리는 깊은 못이 푸르고 청초한 빛을 띄며 상류에서 온 계곡물을 담아두고, 폭포 윗쪽에
는 근래에 지어진 금란정과 아름드리 소나무가 폭포의 운치를 한층 돕는다.
폭포 좌우에는 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벼랑이 6~7m 높이로 형성되어 있고 폭포 정면에
는 폭포의 모습을 사진에 잘 담을 수 있도록 포토존(photo zone)이 설치되어있다. 용소 주변
에는 조그만 돌이 많아 조촐하게 백사장을 이루고 있어 피서의 성지(聖地)로도 아주 그만이다.

이곳은 풍경이 아름다워 속리산의 주요 명소이자 피서지로 인기가 높으며, 고려 중기 무인정
권기를 다룬 '무인시대(KBS)'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생애를 정리한 '불멸의 이순신(KBS)'
등의 사극이 여기를 거쳐가기도 했다. 무인시대(武人時代)는 무인정권 3번째 권력자인 이의민
(李義旼)이 이의방(李義方)의 명을 받고 거제도로 귀양간 의종(毅宗)을 만나 그의 허리를 분
질러 죽이는 장면을 담았으며, '불멸의 이순신'은 그의 어린 시절, 친한 선배(유성룡과 원균
이 그의 선배로 나왔음)들과 폭포에서 뛰어내리며 담력을 기르는 장면을 담았다. 그외에 '태
양인 이제마(MBC)', 영화 '낭만자객'이 이곳의 신세를 졌다.


▲  겨울 제국(帝國)의 먼지를 털어내며 슬슬 기지개를 켜는
장각동계곡 (장각폭포 직전)

▲  장각폭포 윗쪽, 금란정과 소나무

▲  장각폭포를 수식하는 구수한 양념, 금란정(金蘭亭)

장각폭포 윗쪽에는 금란정이 동쪽을 굽어보며 자리해 있다. 정면 2칸, 측면 1칸의 조그만 팔
작지붕 정자로 20세기 한복판에 지어졌는데 그의 곁에는 소나무들이 운치를 이루며 조촐하게
그늘을 드리운다. 늘 장각폭포와 한 덩어리를 이루며 세상에 그 존재를 진하게 알리고 있으며
정자에 올라서면 폭포와 용소를 비롯해 상오리(上五里) 일부가 좁게나마 시야에 들어온다.

정자의 이름인 '금란(金蘭)'은 주위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그 이로움은 쇠붙이도 끊을
수 있고 마음을 같이 한다는 말은 그 냄새가 난보다 향기롭다는 복잡한 뜻이다. 정자를 보다
전통식으로 지었다면 지금보다 운치가 더 진했을 터인데, 기둥과 지붕은 어설픈 전통식, 마루
와 난간은 현대식으로 만들어 일종의 절충양식이 되어버렸다. 정자 동쪽에는 금란정 현판이
걸려있다.

▲  최근에 지어진 금란정 기념비

▲  금란정에서 바라본 용소와 그 너머
풍경 (상오리 지역)


▲  장각폭포의 위엄

폭포 밑 용소에는 속리산이 베푼 옥계수들이 푸른 빛을 띄며 모여 있다. 용소의 수심이 꽤 깊
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바닥은 어렴풋이 보인다. 허나 수심은 2m가 넘으니 물놀이를 할 때 반
드시 주의해야 된다. 폭포가 조촐하게 생겼고 폭포 앞에 이렇게 대자연이 빚은 잘생긴 자연산
수영장이 있으니 자연히 피서의 성지로 격하게 추앙을 받으면서 여름에는 무더위에 대항하며
벼랑 중간과 벼랑 위에서 뛰어내리는 용자들이 많다. 허나 그로 인해 물놀이 사고도 적지 않
은 터라 2014년 여름에는 동네 주민들이 벼랑 앞에 그물망을 치기도 했다.

마침 우리가 폭포에 이르렀을 때 20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반바지만 입고 벼랑 중간에 주름진
틈으로 기어올라가 폭포를 향해 다이빙을 하고 있었다. 봄이 한참 선전을 해주어 날이 좀 포
근하긴 했으나 그래도 쌀쌀한 기운은 좀 남아있어 물놀이를 할 정도는 아니었다. 허나 그들은
젊은 혈기만을 믿고 폭포로 뛰어들며 이른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래도 춥기는 한지 큰
수건으로 몸을 가리며 물을 닦느라 부산하다.
그들이 요란하게 거쳐간 후, 폭포 주변은 다시 적막감이 감돈다. 이때다 싶어 잠시나마 폭포
를 나의 전유물로 삼으며 열심히 그를 사진에 담는다. 종종 관광객들이 폭포 밑으로 내려와
사진에 담기는 하지만 콩을 볶듯 금세 가버리고, 폭포 주변은 산바람 소리와 폭포 소리만이
적막감을 살포시 어루만질 따름이다.


▲  장각폭포를 거쳐 큰 세상으로 흘러가는 장각동계곡
이 계곡은 상오리 마을에서 용유천의 일원으로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내려간다.


폭포를 열심히 사진에 담으며 폭포 주변에서 30분 정도 머물다가 시어동계곡(오송골)에 자리
한 오송폭포로 이동했다. 장각폭포에서 그곳까지는 약 6km 거리로 가깝지만 옥양폭포까지 모
두 보려는 욕심에 길을 서둘렀다.

※ 장각폭포 찾아가기 (2018년 6월 기준)
① 상주까지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상주행 고속버스가 50~7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에서 30~50분 간격
  으로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송면 경유 화북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화북 하차 (동서울에서 1일 1
  회, 13시 출발)
* 인천, 부천, 성남, 안산, 청주, 충주, 대전(복합), 김천, 구미, 안동, 대구(북부), 울산에
  서 상주행 직행버스 이용
* 경북선 무궁화호 열차(부산~밀양~경산~동대구~구미~김천~영주)를 타고 상주역 하차 (1일 3
  회, 금/토는 1일 4회 운행)
② 현지교통
* 상주시외터미널에서 화북 방면 시내버스(1일 7회 운행)를 타고 상오리 하차, 장각폭포까지
  도보 7~8분 (상주역에서 갈 경우에는 1.1km 정도 떨어진 상주초교 정류장까지 나와서 버스
  를 타야 됨)
* 화북에서 상주시내 방면 시내버스(1일 7회)를 타고 상오리 하차
③ 승용차 (폭포 주변에 주차장 있음)
* 당진영덕고속도로 → 화서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수청거리3거리에서 좌회전 → 상오리
  에서 장각동, 장각폭포 방면 좌회전 → 장각폭포

* 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속리산국립공원 화북분소 ☎ 054-533-3389)



♠  시어동계곡의 아름다운 보석, 오송폭포(五松瀑布)

상오리에서 북쪽(괴산 방면)으로 가다가 장암교차로에서 좌회전하여 입석천을 따라 구비구비
산길을 오르면 후백제(後百濟)를 세운 견훤(甄萱, 진훤)이 쌓았다고 전하는 견훤산성(甄萱山
城) 입구가 손을 내민다. 견훤은 상주 출신으로 이곳에 성을 쌓고 군사를 조련하며 경주(慶州
)로 가는 진상품과 세금을 빼앗아 세력의 발판을 닦던 곳이라 전한다. 기분 같아서는 그곳도
흔쾌히 들리면 좋겠지만 가파른 산길을 한참 올라가야 되고, 나의 마음은 이미 오송폭포에 가
있던 터라 견훤산성은 안중에도 없었다.

견훤산성입구를 지나면 속리산 화북탐방지원센터가 나오고 그곳을 지나 한굽이 오르면 화북분
소와 문장대주차장이 모습을 비춘다. 이곳에 차를 세우고 소정의 주차비를 치른 다음 잘 닦여
진 길을 10분 정도 가면 오송폭포 입구가 나오고, 여기서 계곡을 2~3분 정도 들어가면 그 길
의 끝 막다른 곳에 오송폭포가 있다.

오송폭포는 속리산 신선대(神仙臺)에서 발원한 시어동계곡(오송골)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작품으로 폭포수가 마치 하늘에서 은가루를 쏟아내는 듯한 아름답고 경쾌한 폭포이다. 높이는
15m로 5단(혹은 7단)으로 주름진 벼랑을 타고 폭포수가 내려앉는데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마
르지 않으며, 비가 온 이후에는 더욱 장쾌하게 쏟아진다. 폭포 밑에는 담(潭)이 형성되어 있
으나 수심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할 정도로 아주 얕아서 아이들 물놀이 장소 및 물맞이 장소로
아주 제격이다.

지금은 비록 흔적도 없지만 예전에는 폭포 옆에 오송정(五松亭)이란 정자가 있어 거기서 오송
폭포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며, 폭포 윗쪽에는 20세기 중반에 창건된 성불사가 자리해
폭포를 거쳐가는 옥계수를 제일 먼저 만진다.


▲  오송지구 문장대 주차장
속리산을 대표하는 문장대를 비롯하여 문수봉과 청법대(聽法臺), 신선대 등
속리산 주능선의 봉우리들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온다.

▲  오송폭포와 문장대로 인도하는 길 (화북분소 부근)

▲  오송폭포 입구 주변 시어동계곡

오송폭포를 끼며 흐르는 계곡을 시어동(侍御洞)계곡이라 부른다. (또는 오송골) 그 이름은 조
선 7대 군주인 세조(世祖)가 속리산을 찾았을 때 땅에 널려있던 칡넝쿨이 모두 나무 위로 올
라가 왕의 행차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모셨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물론 칡넝쿨
이 스스로 올라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에게나 제왕일 뿐이지 식물에게는 그저 두 발 달
린 생명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허나 왕이 온다고 하니 지역 수령(守令)들이 왕에게 잘보이고자 백성과 군사들을 들들볶아 칡
넝쿨과 행차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미리 치웠을 것이고, 이를 칡넝쿨이 스스로 올라갔다는 식
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  오송폭포 직전 계곡 - 멋드러진 돌과 반석(盤石)이 제법 널려 있다.

▲  시원하게 물보라를 뿜어내는 오송폭포

▲  옆에서 바라본 오송폭포의 위엄
하얀 실타래를 밑으로 풀어놓은 듯 하다.

▲  폭포 밑 못 - 깊이도 매우 얕고 돌도 그리 거칠지 않아 물놀이나
물맞이 장소로 아주 휼륭하다.

▲  오송폭포 윗쪽

오송폭포를 둘러보고 폭포 윗쪽에 있는 성불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폭포 입구에서 가파른 언
덕길을 오르면 오송폭포로 흘러가는 시어동계곡이 다시 옆에 나타난다. 그 계곡과 함께 속리
산의 품으로 조금 들어가면 속리산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성불사(成佛寺)가 모습을
드러낸다.
첩첩한 속리산의 산주름 속에 묻혀있는 성불사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창건된 현대 사찰이다.
1980년대 제작된 관광책에 속리산 성불사의 앳된(?) 모습이 담겨져 있는데, 조그만 삼성각과
양옥처럼 지어진 건물이 전부인 그야말로 숲에 묻힌 조촐한 산사였다. 허나 지금은 속리산이
부담을 가질 정도로 정말 어마어마하게 성장했다. 2층짜리 건물하며 온갖 석탑과 석불을 잔뜩
지어올려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따로 없는 것이다.
허나 성불사가 커질수록 속리산의 희생은 그만큼 커지는 법, 더 이상 경내 확장은 하지 않았
으면 좋겠다. 지금 성불사도 충분히 크기 때문이다.


▲  산속에 숨겨진 조그만 궁궐 같은 성불사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등 약 10동 정도의 건물이 있다. 건물들은 하나 같이 덩치가 커서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꽤 장대하며, 3개의 옥불(玉佛)을 봉안한 대옥불전(大玉佛殿)은 무려
금칠까지 해놓아 화려함을 더욱 돋구었다.
법등(法燈)의 역사가 짧다보니 오래된 문화유산은 없으며 죄다 1990년대 이후에 지어진 것들
이라 고색의 기운은 여물지도 않았다. 다만 대웅전(大雄殿) 뒷쪽 삼성각(三聖閣)이 이곳에서
그나마 오래된 건물이며, 나의 관심을 돋굴만한 오래된 존재가 없기 때문에 그냥 가볍게 둘러
보고 절을 나왔다.


▲  피안불로장생문(彼岸不老長生門)과 바위에 새겨진 하얀 선각의 마애불

▲  3개의 옥불(석가불, 미륵불, 아미타불)이
봉안된 대옥불전

▲  대웅전 금동석가3존불과 붉은 닫집

※ 오송폭포 찾아가기 (2018년 6월 기준)
① 상주까지 교통편은 앞의 장각폭포 참조
② 현지교통
* 상주시외터미널에서 화북, 입석, 용화 방면 시내버스(1일 7회 운행)를 타고 장암리(문장대
  입구) 하차, 오송폭포까지 도보 50분, 성불사는 1시간 / 주말과 휴일에는 입석, 용화 방면
  시내버스 중 3회(상주발 7:40, 11:10, 16:40)가 화북분소 문장대주차장까지 들어간다. (평
  일에는 안들어감)
* 화북에서 입석, 용화 방면 시내버스(1일 7회) 이용 또는 택시 이용 (주말과 휴일에는 입석
  , 용화 방면 시내버스 중 3회가 화북분소 문장대주차장까지 들어감)

③ 승용차 (주차비는 유료)
* 당진영덕고속도로 → 화서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수청거리3거리에서 좌회전 → 상오리
  → 장암교차로에서 좌회전 → 화북분소 문장대 주차장

* 오송폭포 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속리산국립공원 화북분소 ☎ 054-533-
  3389)
* 성불사 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산33 (문장대2길 293, ☎ 054-532-5555)


 

♠  자연산 돌다리를 위에 두룬 옥양폭포(玉樑瀑布)

오송폭포를 둘러보고 다시 밑으로 내려가 북쪽으로 길을 향했다. 7km를 달려 충북 괴산 땅을
바로 코 앞에 둔 입석리에 이르니 길 왼쪽에 '백악산 옥양폭포'와 '석문사'를 알리는 이정표
가 슬며시 얼굴을 내민다. 그의 안내를 따라 인적도 없는 각박한 고갯길을 올라가다가 석문사
(石門寺) 직전 적당한 공터에 차량을 세우고 백악산의 품으로 들어서니 이내 석문사가 모습을
비춘다.

석문사는 백악산(白岳山, 858m) 동쪽 자락 옥양골에 묻힌 조그만 현대 사찰이다. 옥양폭포 북
쪽 절벽에 있는 굴 주위에 보굴암(寶窟庵)이란 암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절의 뒤를 잇고자
지어진 듯 싶으며 법등의 역사는 앞서 성불사보다 짧은 듯 싶다. 대웅전과 요사(寮舍), 벼랑
밑에 세운 석불 등이 전부로 요사 옆에는 장독대들이 가득 놓여져 음식들이 한참 숙성의 과정
을 밟고 있다.
그 곁에는 나무 장작으로 밥과 국을 짓는 작은 부뚜막이 있는데 무슨 국을 끓이고 있는지 김
이 모락모락 푸른 하늘에 회색 점을 찍는다.

백악산이 베푼 옥양골 계곡은 경내를 가로질러 흘러가며 계곡 옆구리에 석축을 높이 쌓아 길
과 경내를 닦은 점이 적지 않게 옥의 티로 남는다.


▲  옥양폭포, 석문사로 올라가는 길

▲  석문사 곁을 흐르는 옥양골 - 계곡 옆구리에 적지않게 인공이
가해진 점이 상당히 아쉽다.

▲  석문사를 지키는 백구(白狗)의 위엄
간밤에 무리를 했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다.
절을 지키는 그가 있기에 오늘도 석문사는 평화롭다.

▲  눈썹 모양의 장대한 바위 밑에 자리한 석불좌상

바위 그늘에 석불이 들어앉아 동쪽을 바라보며 한참 선정(禪定)에 잠겨있다. 바위 윗쪽이 눈
썹처럼 두텁게 나와있어 눈과 비를 피할 수 있고 주변에 소나무도 무성해 바람 또한 그를 마
음껏 희롱하지 못한다. 다만 바위 윗쪽이 무너지면 그냥 게임 끝~~!
바위의 풍채가 대단하여 예로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이 아니었을까 싶으며 석문사에
서 그나마 두 눈을 호강시킬 수 있는 존재이다.


▲  옥양폭포 윗쪽

석문사를 간단하게 살펴보며 폭포를 찾았으나 경내 계곡에는 폭포 비슷한 것도 보이질 않는다.
하여 절 밑에 있을 듯 싶어 (절 윗쪽은 출입금지임~) 계곡을 살피며 차를 세운 곳까지 내려왔
는데 그곳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고, 그 옆에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있다. 그래서 벼랑 밑을
살펴보니 무언가 두터운 존재감이 느껴진다. 바로 그날의 마지막 답사지인 옥양폭포였다.

폭포로 내려가는 길은 다소 경사가 급하다. 그 길을 조심스레 임하면 폭포의 윗도리가 나오는
데 특이하게 폭포 윗도리와 아랫도리 사이에 돌다리처럼 생긴 길쭉한 막대형 돌이 걸려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인공이 아닐까 싶었으나 자세히 보니 대자연 형님이 빚은 돌다리였다. 그
모습이 마치 돌다리, 또는 대들보처럼 생겼는데 폭포의 이름인 양(량, 梁)이 바로 대들보를
뜻한다. 옥(玉)은 폭포의 풍경과 폭포수를 옥으로 비유한 것이니 자연히 폭포의 대들보를 의
미하게 된다.
이처럼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옥양(옥량)폭포는 높이가 약 20m에 이르며, 은빛 물보라를 일으
키며 흘러가는 폭포 윗쪽에 길이 20m, 두께 1.5m 정도 되는 자연산 돌다리가 걸쳐져 있다.


▲  윗쪽에서 바라본 폭포와 자연산 돌다리 ▼

옥양폭포의 백미(白眉)는 폭포 위에 있는 자연산 돌다리이다. 큼직한 바위와 돌들이 밑에 깔
려있고, 그 중간에 폭포수를 위한 통로가 뚫려 있어 마치 사람의 손이 간 것 같기도 하다. 그
위에 장대한 크기의 하얀 돌이 길쭉하게 다리처럼 놓여져 있는데 사람이 만든 돌다리보다 더
튼실한 모습이다. 대자연의 거룩한 작품 앞에 사람들은 그저 감동과 감탄사를 연발하고 문자
꽤나 쓴다는 사람들은 한낱 언어와 문자로 폭포의 아름다움을 감히 표현한다.
앞서 본 장각폭포와 오송폭포도 아름다운 폭포임은 분명하나 천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폭포
의 형태로 개성은 조금 부족하다. 허나 옥양폭포는 그들보다 덩치도 크고 자연산 돌다리라는
희귀한 아이템까지 가지고 있어 이날 본 폭포 가운데 단연 으뜸이다. (앞서 폭포는 조연, 옥
양폭포는 주연) 게다가 그리 알려진 곳도 아니라서 인적도 거의 없다.


▲  폭포 윗쪽에 자리한 커다란 바위 (옥양폭포 바위글씨가 새겨짐)

▲  옛 사람들이 새긴 옥양폭포 바위글씨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옛 사람들은 경치가 좋은 곳 바위에 꼭 바위글씨를 남기는 버릇이 있었다. 옥양폭포 역시 그
예외는 아니라서 조선 후기 언젠가 이곳을 거쳐간 선비들이 걸쭉하게 낙서와 이름을 남겼으니
그 글씨가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것 같다.


▲  밑에서 바라본 옥양폭포
자연산 돌다리 중간에 뚫린 수구(水口)를 통해 폭포수가 힘차게 쏟아진다. 돌다리
모서리 부분은 경사가 급해 자칫 미끄러져 폭포 밑으로 추락할 수 있으니
각별히 조심하기 바란다.

▲  폭포 돌다리와 옥양폭포

▲  옥양폭포 밑부분
옥양폭포에서 급하게 흥분기를 보인 옥양골 계곡은 폭포를 내려오면서 비로소
진정을 되찾는다. 이곳도 피서지로는 아주 좋은 곳..

◀  수구를 거쳐 장쾌하게 쏟아지는
옥양폭포 폭포수의 위엄

옥양폭포 북쪽 절벽 위에는 조그만 굴이 있다. 굴의 존재를 알지 못해 지나치고 말았지만 그
굴 속에는 옛날에 미륵불이 있었고, 굴 밖에는 보굴암이란 암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조
선 초기에 나중에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의 왕위를 빼앗으려는 움직임
을 보이자 이름이 전하지 않는 수양의 딸이 이를 만류하다가(또는 신하들에게 아버지가 하는
일이 옳지 못함을 말하고 다녔다고 함~)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 서울에서 추방되었다. 그래서
이 굴에서 숨어 살았다고 전한다. (그 딸의 존재도 불투명함)

※ 옥양폭포 찾아가기 (2018년 6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송면 경유 화북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옥양동 하차 (동서울에서 1일
  1회, 13시 출발)
* 상주시외터미널에서 입석리행 시내버스를 타고 삼송(옥양동) 하차 (1일 4회 운행 / 7:40,
  11:10,16:40, 18:15)
* 동서울터미널에서 괴산행 직행버스가 30~60분 간격으로 운행 → 괴산시외터미널 부근 아성
  교통 군내버스터미널(시외터미널에서 동쪽으로 도보 3분)에서 옥양동(입석리)행 군내버스(
  1일 4회 운행)를 타고 삼송(옥양동) 하차
* 삼송(옥양동) 정류장에서 석문사 방향으로 도보 10분
* 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

대자연의 기묘한 작품, 옥양폭포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6시가 되었다. 봄이 서서히 천하
를 평정하면서 낮도 많이 길어졌지만 일요일 오후에 지방에서 서울(수도권)까지 올라가는 길
이 그리 만만치가 않다. 날씨가 따스해지자 행락객들이 대거 지방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하여
옥양폭포를 끝으로 1박2일에 걸친 천하 유람을 쿨하게 마무리 짓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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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숲과 계곡, 폭포, 옛 별서 유적이 어우러진 ~~ 부암동 백석동천 (백사실계곡)



' 서울 도심 속의 아름다운 별천지,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늦가을 나들이 '



늦가을이 거의 저물어가던 11월 끝 무렵에 후배 여인네와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백사골)을 찾았다. <본글에서 '백사실=백사골'임>

백사실은 서울 장안에서 가장 흠모하는 곳의 하나로 2005년 5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
시키며 처음 발을 들인 이래 매년 6~7회 이상 발걸음을 하고 있다. 그렇게나 많이 찾았으
면<지금까지 80번은 넘게 찾은 듯> 정말 지겹고도 남음이 있을텐데 그에게 제대로 중독된
것일까? 돌아서기가 무섭게 또 들어가고 싶은 곳이다.
 
우선 도심 속의 전원 마을, 부암동(付岩洞)의 여러 명소(☞ 관련글 보러가기)를 둘러보고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홍제천(弘濟川) 다리를 건너 '세검정로 6다길' 골목으로 들어섰다.
백사실의 눈부신 인기를 보여주듯 그를 알리는 이정표가 자주 비춰주니 길치들도 조금 마
음을 놓고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백사실로 들어가는 골목이 조금 복잡함)
골목길 끝에 자리한 빌라 옆으로 높게 펼쳐진 계단을 오르면 혜문사입구인데 여기서 오른
쪽으로 야트막한 길을 넘으면 바로 백사실의 남쪽 정문인 현통사와 백사폭포(동령폭포)가
모습을 비춘다.


▲  혜문사입구 골목길에서 바라본 서울의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감싸인 산악 분지(盆地)이다.


▲  혜문사입구에서 백사골로 넘어가는 산길
저곳을 넘으면 바로 현통사와 백사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  두근두근 백석동천(백사실)의 속살로 들어서다.

▲  현통사 밑에 자리한 백사폭포(白沙瀑布, 동령폭포)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려진 현통사(玄通寺) 대문 밑에 새하얀 반
석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그의 매끄러운 피부에는 북악산에서 발원한 백사골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 백사폭포가 수줍은 모습으로 별천지를 꿈꾸며 찾아온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
시 들었다 놓는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 지도 모른다.

백사폭포는 높이 4m 정도의 조그만 폭포로 웅장하고 수려한 멋은 별로 없다. 그냥 수수하게 생
긴 폭포로 하얀 반석(盤石)과 썩 어우러져 제법 수려한 멋을 풍기면서 백사골에 대한 첫 인상
을 긍정적으로 인도한다.
서울 도심에 거의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로 나름 가치가 높으며, 만약 설악산이나 주왕산(周王
山) 등 1급 폭포가 즐비한 산에 붙어있었다면 그리 주목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사
람이나 폭포나 때와 장소를 잘 만나야 된다.
백사폭포란 이름은 내가 백사골의 이름을 따서 멋대로 갖다붙인 것인데, 원래 이름은 동령폭포
라고 한다. 하지만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에 자신의 이름마저 계곡에 떠내려보내면서 그의 이름
은 아득히 잊혀지고 말았다.


▲  백사폭포와 하얀 반석

늦가을이라 폭포수가 가늘고 누런 낙엽이 짙게 깔려있지만 비가 많이 오면 폭포수도 제법 패기
를 보인다. 한여름에는 동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물놀이 현장이 되어주며, 여름 제국(帝國)에
대항하고자 찾아온 피서객들이 돗자리를 피며 한숨 자거나 쉬는 등, 도심 속의 조촐한 꿀피서
지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  낙엽은 물론 가을까지 무심히 흘려보내는 백사폭포 아랫 못

겨울 제국의 시련을 견뎌내고자 백사골 나무들이 속절없이 털어낸 낙엽들은 폭포 주변에 수북
히 쌓여있다. 이들 낙엽은 폭포 밑에서 마지막 정모를 즐기며 올해도 변함없이 도래한 겨울을
원망한다. 몇몇 낙엽은 한이 맺혔는지 폭포 중간에 철썩 달라붙어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시 제자리로 가고 싶겠지만 매정한 자연은 그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으며 그렇게 발버
둥을 치다가 결국 힘이 다해 떠내려가거나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그런 낙엽의 발악을 보면서
인생무상이 정말 허언이 아님을 실감한다.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골 냇물은 큰 세상을 꿈꾸며 폭포를 타고 내려와 폭포 밑 담(潭)에서
큰 세상을 향한 기나긴 여정을 준비한다. 다시는 오지 못할 그리운 고향, 북악산(백악산)의 그
리움을 털어내며 길을 재촉한 그들은 다리 밑 조그만 폭포를 통해 아랫 못으로 흘러가며 여기
서 다시금 바위를 타고 홍제천으로, 한강으로, 다시 서해바다로 종점없는 여행을 떠난다.

폭포 주변 나무들은 못을 거울로 삼아 늦가을의 절정을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열심
히 매뭇새를 다듬는다. 저들의 처절한 아름다움 뒤에는 겨울의 혹독한 시련이 기다린다. 잔잔
한 수면에는 낙엽들이 두둥실 떠 가을의 저물어감을 아쉬워하며 백사골에 머문 늦가을도 낙엽
을 데리고 계곡을 통해 저 밑으로 쿨하게 흘러간다.


▲  백사폭포 위에 둥지를 튼 현통사(玄通寺)

백사골 밑에 둥지를 튼 현통사는 조그만 현대 사찰로 20세기 후반 큰 승려의 하나로 추앙을 받
는 일붕(一鵬)이 머물렀던 절이다. 백사골을 오갈 때마다 늘 지나치기만 했을 뿐, 경내로 발을
들인 적은 거의 없는데 그 이유는 오래된 절도 아니고 나를 애타게 만들만한 구석도 없기 때문
이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雄殿)과 산신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며,
기와를 지닌 불전 밑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한덩어리로 몰려있는
데, 대웅전은 서남쪽을, 나머지는 남쪽과 동남쪽을 향하고 있다.

인적도 거의 없는 적막한 산사에 백사골 산바람이 살며시 들어와 낮잠에 잠긴 풍경물고기를 살
짝 희롱하고 그 희롱에 놀란 풍경은 그윽한 풍경소리를 풍기며 주변의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  늦가을이 깃들여진 백사골 산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 속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다. 자연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찾는 이로 하여금
절로 시상(詩想)에 물들게 한다.

▲  대자연이 그린 아름다운 작품, 백사골(백사실계곡) - 별서터 서쪽

간만에 백사골을 본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 잡으며 백사폭포를 지나면 청정한 내음
과 솔내음이 두루 나래를 펼치는 백사골 숲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 발을 들이면 1폭의 담채
화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가히 몸살이 날 지경인데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
들 이곳의 풍경을 완전히 표현하는 것은 힘들 것이며, 인간의 한낱 언어로 억지로 표현하려 드
는 것은 어쩌면 백사골과 그것을 빚은 대자연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저 탄성만 연거푸 지르며 조용히 백사골에 묻혀간다.
 
숲에 깃든 순결한 기운은 속세의 때를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산길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골에는 서울 땅에서는 보기 어려운 도롱뇽, 가
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그들이 설 땅은 점
점 사라지고 이제 이곳이 그들의 몇 안되는 낙원이 된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
다면 그 다음은 바로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계곡에 누운 바위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가득하
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저런 무성한 이
끼를 만나는 것은 보기가 정말 힘들지, 이처럼 백사골은 서울 도심의 별천지처럼 청정함을 여
실히 간직하고 있다.


▲  별서터 북쪽 계곡에 드러누운 바위들
오른쪽 하얀 바위에 일정하게 긁힌 흔적이 있는데, 이는 별서를 만들 때
돌을 떼던 흔적이다.


▲  별서터 연못 옆을 지나는 백사골 (별서터 징검다리)

백사실 안내도가 있는 별서터 직전 갈림길에서 계곡에 놓인 징검다리나 돌다리를 건너면 바로
사랑채터와 연못이 있는 백석동천 별서터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계곡에 콘크리트로 계곡에 둑
을 두른 것이 조금은 눈에 거슬린데 둑 바로 위에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면 이전부터 별서 주
인이 돌과 흙으로 쌓은 둑이 있었던 모양이다.


▲  언제나 달을 그리는 바위,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 직전 갈림길(백사실 안내도가 있는 곳)에서 뒤쪽(서남쪽) 산자락의 윗부분을
눈여겨 살펴보자. 그 언덕 정상에 커다란 바위가 나무들 사이로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를 유심히 살펴보면 글씨가 화석처럼 박혀있는 것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이 바위는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중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해 있다. 위치는 별서터(연못터 주
변) 바로 서남쪽 산자락이지만 그를 알리는 이정표도 없고 숲에 거의 가려져 있어 대부분의 사
람들은 그의 존재감을 눈치채지 못한다. 나무들이 강제로 벌거벗는 늦가을이나 겨울에는 그나
마 쉽게 눈동자에 들어오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그마저도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닦고 그 안에 '月巖' 바위글씨를
를 다졌는데, 백사실의 존재를 처음으로 언급했던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씨로 추정되
나 확실한 것은 없다.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습은 가히 명필 중의 명필
이라 하겠다.
 
백사골은 나무가 울창하여 늦가을과 겨울을 제외하면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하기가 어렵다. 백
사골의 경치를 즐기러 온 선비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확트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
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굳이 이광여가 아니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달놀이 기
념으로 글씨를 새겼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어두운 밤에 곡차(穀茶) 1병
들고 찾아와 달님을 붙잡으며 잔을 걸치고 싶다.


 

♠  북악산(백악산)에 숨겨진 비밀의 옛 별서 유적,
부암동 백석동천(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 별서(別墅)터 전경

한양도성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나서면 여기가 정녕 서
울일까? 고개가 갸우뚱거릴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가 눈 앞에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
암동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에 감싸인 분지로 서
울의 일부라기보다 산간 마을이나 산골에 묻힌 조그만 읍내 같은 분위기이다. 도심이 바로 지
척임에도 도심과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지형 탓도 있지만 나라의 예민한 곳이 동
네 주변에 많아 개발의 천박한 칼질을 잠재웠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서울 도성 밖 경승지로 꼽혔던 부암동은 양반과 왕족의 별서(別墅, 별장) 및 피서지
로 인기가 높았다. 세종의 3번째 아들로 형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완전히 털려 강제로 사라진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부질없는 야망이 깃든 무계정사(武溪精舍),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
(石坡亭), 인조반정(1623년)과 관련이 깊은 세검정(洗劍亭), 연산군(燕山君)이 사냥과 여가의
장소로 닦았던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까지, 옛 사람들의 풍류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했던 그들의 메아리를 아련히 전해준다.

백석동천은 북악산 북서쪽인 백사골(백사실)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의 별장이 있었다 하여 백사실이라 불리지만 정작 그는 이곳에 머문 적이 없다고 하며, 백사골
과 별서터를 하나로 묶어 백석동천이라 부른다. 그 이름은 북악산(백악산)에서 유래된 것으로
북악산의 바위 명소란 뜻인데, 그만큼 하얀 바위와 반석이 많고 경치가 고왔다. 그리고 동천<
洞天, 동학(洞壑)이라고도 함>은 양반과 선비들이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붙어주는 경승지의 명
예로운 칭호이다.

이곳은 백석동천 외에 백사실(계곡), 백사골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으며, 백석정(亭), 백석실(
室)이란 옛 이름도 있다. (백석정은 19세기에 주로 쓰였음) 옛 이름을 제외하고 어느 이름을
쓰던 그건 각자의 취향이나 백사실, 백사실계곡, 백석동천으로 많이 불리며 백사골은 백사실계
곡을 줄여서 표현한 이름이다. (나는 백사골이라 많이 부름)

▲  연못 한쪽에 자리한 정자터

▲  사랑채터

백석동천 별서는 1830년경에 지어진(또는 중건된) 것으로 여겨지는 600평 규모의 별서이다. 누
가 지었는지는 딱히 전해오는 것은 없으나 백석동천과 관련된 최초 기록인 월암 이광여(1720~
1783)의 이참봉집(李參奉集)에 '세검정과 탕춘대 계류 고간(高澗) 세폭(細瀑) 위에 동천이 조
성되어 있고 그곳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었으며 모정의 이름은 간정료(看鼎寮)였다'
는 내용
이 있어 현재의 별서 이전(17~18세기)부터 조그만 집이 이미 둥지를 트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2012년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이곳을 매입하여 별장으로 삼았음이 밝혀지면서
백사실의 비밀이 다소 벗겨졌다. 추사의 문집인 '완당전집(阮堂全集) 권9'에 '선인이 살던 백
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다','나의 북서(北墅, 북쪽 별서)에 백석정 옛터가 있다'
등의 내용이 있
고 그곳과 관련된 시가 여럿 발견되어 추사가 백석정 자리를 구입하여 크고 아름답게 다시 지
었음이 밝혀졌다. 하여 지금까지 전해오던 1830년 창건설(또는 중건설)의 주인공이 바로 추사
로 여겨진다.
 
이곳에는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채를 비롯해 정자와 동그란 연못이 있었다. 안채는 4
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다. 안채는 1917년에 집 한쪽이
기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살아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월의 무
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랑채와 함께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사랑채는 그나마 주춧돌과
석축이 진하게 남아있으나 안채터는 땅 속에 묻혀있다.
동그런 연못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6.25전쟁 때 정자가 파괴되고 그 휴유증으로 연못
마저 그 기능이 상실되고 말았다. 현재는 사랑채터와 안채터, 정자터, 연못, 담장의 흔적, 바
위글씨 2개만이 남아 백석동천의 옛 정취를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끝없이 몰아넣던 백석동천은 2006년까지만 해도 거의 동네 사람들만 찾
던 그들만의 숨겨진 명소였다. 그 흔한 지방문화재의 지위도 얻지 못한 채, 조용히 잠들어 있
던 그는 2005년 문화재청으로부터 '조선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이 땅의 휼륭한 전통 정원'
으로 아름답게 평가를 받으면서 무명 수준에서 바로
적 462호
로 특진되었으며, 2008년 1월 명승 36호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변변한 안내문과 이정표조차도 없었으며, 2009년에 겨우 문화재 안내문과 이
정표가 설치되었다. 또한 2010년에 별서터 일대를 싹 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
를 확인했으며, 깨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량으로 수습했다.

▲  사랑채에서 바라본 연못

▲  사랑채와 안채터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숨겨진 꿀단지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
거니와 여름의 녹음(綠陰), 늦가을 단풍, 겨울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이 모두 아름다
운 경승지이다. 숲이 매우 삼삼하여 강렬한 햇살도 고개를 숙이며, 나무가 베푼 신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아 백사골의 졸졸졸~♪ 교향곡을 들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거나, 독서를 하거나, 돗자리를 피고 낮잠을 청하면 정말 극락이 따로 없다.
거기에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터를 둘러보며 옛 사람들이 여기서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으
로 살았을까? 그려보면서 그들의 생활과 마음을 조금이나마 체험해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2006년 이후 이곳의 존재감이 널리 퍼져 사람들의 발길이 쓸데없이 늘어나면서 고적했던
분위기는 조금 떨어진 것 같다. (평일은 그래도 한적함) 게다가 정신줄을 놓은 사람까지 불순
물처럼 섞여 들어와 주춧돌에 낙서를 하거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계곡을 뒤집거나, 수목을 괴
롭히는 행위가 늘면서 이에 대한 대책이 절실해 보인다. 아직은 괜찮다고 해도 지키는 사람도
제대로 없는 첩첩한 산골이라 방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2013년 종로구청에서 별서터를 복원하겠다며 뇌에 주름 잡힌 소리를 일삼아 크게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다행히 그 개소리는 쏙 들어갔지만 어설프게 복원하려 들지 말고 제발 지금의
모습 그대로 두길 바란다. 비록 폐허의 상태여도 현재 모습이 더 운치가 진하며 옛터 위에 상
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 수가 있다. 끝으로 개인적인 욕심이지만 이런 곳은 대중적인 명소로
너무 노출되는 것보다는 소수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쭈욱 남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미 그러기에는 그의 존재감이 한라산 꼭대기에 붙어있을 정도로 커버렸다. 

※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찾아가기 (2017년 7월 기준)
* 백사실로 들어가는 일반적인 산길은 하림각, 세검정초교, 창의문 등 3개가 있다. 여기서 가
  장 쉽고 가까운 코스는 세검정초교이며, 하림각은 경사가 각박하고, 창의문은 거리가 길다.
* 각 코스별 접근 방법
① 하림각 코스 - 하림각(AW컨벤션센터) 길 건너편에 백석동천 이정표가 있다. 그 길(백석동길
   )은 경사가 다소 각박한데 10분 정도 낑낑대고 오르면 백사골로 들어가는 산길이 나온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
   내버스를 타고 하림각 하차. 버스에서 내려 오른쪽(자하문터널 방면)으로 가면 백석동천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② 세검정초교 코스 : 세검정초교 정류장 → 신영교를 건너 백석동천 이정표를 따라 '세검정로
   6다길'로 쭉 올라감 → 혜문사입구 → 현통사 → 백사골(백석동천)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시내버스 / 4호
   선 길음역(6,7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53번 시내버스 이용 → 세검정초교 하차

③ 창의문 코스 - 자하문고개 정류장에서 서쪽(부암동 방향)으로 조금 가면 창의문앞 교차로이
   다. 여기서 오른쪽 길(북악산길 방향)로 꺾어서 백석동길 골목(부암동 산복길)으로 진입해
   산모퉁이와 지하우스를 지나면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직진하여 계속 들어가면<왼쪽 길
   로 가도 됨> 그 길의 끝에 뒷골마을(능금마을)이 있다. 그 마을에서 왼쪽 계곡길로 내려가
   면 바로 백석동천이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백사골은 서울시에서 지정한 도롱뇽보호구역이다.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부로 냇
  물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말 것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 산25일대


 

♠  백석동천 사랑채터

▲  사랑채터 언덕 밑 (백석동천 안내문)

백사실 안내도가 있는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검은 피부의 백석동천 안내문이 마중을
한다.
안내문 너머로 사랑채터가 있는 언덕과 그곳으로 인도하는 돌계단이 오롯하게 있는데, 장대한
세월의 태클로 계단 돌이 좀 헝클어져 있으나 경사가 완만하여 계단의 역할은 그리 녹슬지 않
았다. 반면 연못 쪽에서 오르는 돌계단은 거칠게 다듬은 큰 돌을 계단처럼 얹혀놓았는데 높이
가 고르지 못해 어린이나 다리가 짧은 사람은 다소 진땀을 빼야 된다.

연못이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ㄱ' 구조의 5량집 사랑채를 두었는데, 아쉽게도 생전의 사진
도 남기지 못한 채, 1970년경에 영구히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건물터와 주춧돌은 잘 남아있
으며 2010년 발굴조사로 새롭게 드러난 흔적까지 더해 산듯하게 정비했다.
사랑채 서쪽 부분은 누마루로 주춧돌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에선 별서 주
인이 연못을 바라보며 독서를 하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이 오면 여기서 곡차와 산해
진미를 대접하거나 시 1수 주고 받았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부러움이 가득 돋아 오름) 사랑
채 동쪽 부분은 키 작은 주춧돌 6개와 석축이 남아있다.


▲  선명하게 남아있는 사랑채터

▲  석축 위에 세워진 사랑채터 누마루 주춧돌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지금은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바로 옆에서 바라본 사랑채터

▲  사랑채터 옆에 자리한 네모난 연못터
2010년 발굴조사 때 발견된 것으로 연못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낙엽과
잡석만 가득 널려 황폐의 극치를 보여준다.

▲  허전한 공터가 되버린 안채터
안채터의 흔적은 발굴조사 이후 보존을 위해 땅속에 고이 묻었다. 그 허전한 터를
잡초와 낙엽이 서로 보듬어주며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넓은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 이후 그 자
리에는 엉뚱하게도 배드민턴장이 들어섰고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완전히 생매장을 당했다. 그
러다가 2010년 이곳이 서울시와 문화재청의 조사 대상이 되면서 옥의 티 같은 배드민턴장을 밀
어버렸으며,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수습했다. 이후 2011년 3월 문
화유산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땅속에 묻었다.

사랑채와 안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돌담의 흔적이 여럿 남아있으며, 비록 기와를 지닌 사랑채와
안채는 세월이란 용광로에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춧돌은 사랑채의 기품과 분위기를 흐릿
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터 일대
이곳에 있었을 건물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상상에서만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백석동천 별서터의 운치를 말아먹을 수 있다.

▲  사랑채로 오르는 헝클어진 남쪽 돌계단

▲  연못에서 사랑채를 이어주는 서쪽 돌계단


▲  사랑채 뒷쪽 석축과 돌담

사랑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돌로 다진 석축과 돌담의 흔적이 있다. 석축은 별서 주변을 다지면
서 쌓은 것으로 높이는 1.5~2m 정도 된다. 석축 윗쪽에는 별서의 경계를 가르던 돌담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세월의 무심한 태클에 상당수 허물어지고 지금은 안채터 뒷쪽에서 연못 북쪽까
지 돌담의 밑도리만 옛 산성(山城)의 잔해처럼 남아있다.

▲  사랑채 뒷쪽 돌담장의 흔적

▲  사랑채와 안채터에서 끄집어낸 기와조각과
그릇 파편


 

♠  물 대신 낙엽과 잡초로 가득한 연못과 정자터

▲  사랑채터에서 바라본 연못 ▼

사랑채터에서 바라보이는 연못은 물고기가 수영하고 연꽃이 떠있는 물 대신 나무들이 미련없이
떨군 낙엽들이 가득 연못을 이루어 낙엽의 마지막 보금자리가 되었다. 세월의 자비 없는 흐름
은 연못의 구성원을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옛날에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여 보름달처럼 둥그런 연못을 채웠으며, 지나가던 햇님과 달님이
그 연못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나무들도 연못을 거울 삼아 매무새를 다듬었다. 허나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든 6.25전쟁은 조용하던 이곳까지 총탄을 휘날려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
또한 기능이 상실되어 껍데기만 남았다.


▲  연못에 들어가서 바라본 사랑채터와 동쪽 돌계단

비록 살아있는 연못은 아니지만 비가 많이 오면 물이 가득히 고여 잠시나마 왕년의 모습을 되
찾기도 한다. 연못이 넓기 때문에 이때만큼은 조그만 조각배를 하나 띄워놓고 가볍게 뱃놀이를
즐겨도 무방할 듯 싶다. 내가 만약 개미였다면 단단한 나뭇잎 하나 마련하여 뱃놀이를 즐겼을
지도 모른다.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연못, 허나 저 연못에도 자연의 생명력
은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나고 있다. 게다가 빗물이 모이면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런데로
연못티를 풍긴다. 잡초로 덥수룩한 연못의 여름 모습도 나름대로 초록의 아름다움을 띄고 있으
며 늦가을에는 낙엽이 한가득 공간을 채우면서 누런 연못이 된다.

연못의 둘레는 약 100m 정도로 그 주변은 나무가 무성하여 짙은 그늘이 연못을 덮어주고 있으
며 거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 후원(後園)도 울고 갈 정도로 울창한 삼림은 이곳을 찾
은 속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이곳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었다면 그 감동은 그
다지 크지 못했을 것이다.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이라 부른다.

연못에 발을 담구며 아무런 내색도 없이 정자를 떠받치던 6개의 돌기둥, 그러나 지금은 저렇게
허전한 대머리가 되어 버렸다. 할 수만 있다면 내 마음으로 그 허전함을 달래주고 싶구나. 그
렇다고 정자를 복원하는 것은 쌍수들고 반대한다. 그냥 저렇게 둬야 백석동천의 운치를 극대화
시킬 수 있다.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시를 읊거나 벗들과 세상 이야기를 하며 차나
술을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며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꽃을 바라
보았겠지. 그가 풍류를 좀 아는 사람이면 기생들도 불러 정자 안에서 얼씨구~ 춤과 노래, 시를
즐겼을 것이고, 아 상상만 해도 정말 몸살이 날 정도로 부러울 뿐이다. 이래서 무슨 수를 쓰든
권력층이 되야 되고 부자가 되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뜬 구름과 상상으로만 끝나버린다.


▲  물푸레나무 밑에 누운 바위

연못 우측에는 키가 약 20m에 이르는 물푸레나무가 연못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나이는 대략
150~200년 정도로 여겨진다고 하니 별서 주인이 별서 완공, 또는 매입 기념으로 심었을지도 모
르겠다.
나무 밑에는 거대한 돌이 누워있는데 이는 별서를 지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원래 모습 그대로 두었는데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원
을 꾸민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이 바위는 어쩌면 별서 마당쇠들이 연못을 구경하며 신세를 한탄하던 자리는 아니었을까? 그들
은 주인처럼 사랑채나 정자에서 놀지 못하니 이곳에 앉아 연못에 돌이나 던지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평등 사회는 언제쯤이나 올련지...?


▲  백석동천 별서터 전경

▲  연못 옆으로 흐르는 백사골 (늦가을)
콘크리트 둑을 두른 것이 너무 거슬린다. 이런 것을 두고 바로 옥의 티라고 한다.


 

♠  백사골 상류와 백석동천 바위글씨

 별서터 입구에서 백사골 상류로 올라가는 산길

백석동천 별서터 계곡 윗쪽 일부는 도롱뇽 등의 수중 생물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허나
통제의 줄이 느슨하여 들어가는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고 있고, 특히 여름에는 피서객들로 정신
이 없어 오히려 도룡뇽이 짐을 싸고 나가야 될 지경이다.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우회하여 백사골 상류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는데, 2012년에 주변 산길
을 정비하고 산불방제 장비를 갖춘 구제함과 솟대를 품은 돌탑을 심어 소소한 볼거리를 선사하
고 있다. 허나 솟대 돌탑은 백사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존재이다.
돌탑을 지나면 소나무숲과 처절한 아름다움을 보이며 늦가을에 잠긴 은행나무숲이 반짝 펼쳐지
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으로 가면 백사골 상류와 능금마을로 이어지고, 오른쪽(부암동 주택가
방면)으로 가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나타난다.


 별서터 입구에 세워진 오리 솟대 돌탑
예로부터 오리 등의 새는 하늘과 인간 세상을 이어주는 중간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소도(蘇塗)에서 비롯된 솟대 꼭대기에 오리 모양을 달아두어
하늘과의 연락을 꾀했다.

 백석동천의 경관을 한층 돕고 있는 호젓한 은행나무숲길

▲  아직도 선명한 백석동천(白石洞天) 바위글씨

은행나무숲에서 오른쪽 산길로 가면 '白石洞天'이란 문신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동천(洞天)이란 신선이 머물 정도로 경관이 아름다운 경승지에 붙여진 이름으로 아무 산천에나
주어지는 이름이 아니다. <백석동천의 유래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음>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백석동천 바위글씨는 누가 언제 썼는지 북악산 귀신도 모른다. 아
마도 월암 바위글씨와 비슷한 시기가 아닐 듯 싶은데 글씨가 정말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
다. 옛 사람들은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저렇게 낙서를 남기는 습성이 있었는데, 백사골 역시
그들의 낙서가 1개도 아닌 2개나 깃들여져 있으니 그만큼 이곳 풍경이 그들의 마음을 통 크게
훔쳐갔기 때문이다.


▲  백사골의 그림 같은 숲길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외나무다리 방향)

 새하얀 반석들이 가득 펼쳐진 백사골 상류 (백석동천 동쪽)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뒷골마을(능금마을)로 인도하는 숲길을 조금 가면 잠시 떨어졌던 백사
골 냇물이 나타난다. 하얀 피부의 너른 반석과 푸른 이끼 옷을 입은 바위까지 줄줄이 이어지면
서 탄사를 자아내게 하는데, 비록 설악산이나 금강산 등 쟁쟁한 큰 산의 계곡만은 못해도 서울
도심에 저런 계곡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꿀단지나 다름이 없다.

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및 수중 생물을 탄압(?)하는 현장이 되고 시민들이 소풍과 나들이로
이곳에 들어와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석에
걸터앉아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
놀음을 즐겼을 것이다.


 백사골의 새로운 명물을 꿈꾸는 외나무다리

백사골 상류의 넓직한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지어진 외나무다리가 나타나 깊은 산골의 고적
하고도 정겨운 풍경을 자아낸다. 2개의 목재를 엮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다닐 정도
로 좁은데, 만약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난다면 어찌해야 될까? 하지만 다리 길이도 짧고 다
리 밑 수심도 매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 굳이 다리를 두고 싸
울 필요는 없다.

사람도 많고, 차량도 많고, 키다리 빌딩도 많고, 복잡하고 각박하기만 한 서울 도심 속에 이런
다리가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백사골은 그 존재 자체로도 예사롭지 않지만 캐면 캘
수록 보물이 더 나올 것만 같은 마르지 않는 샘이나 신세계 같다.


▲  백사골 상류 (능금마을 방면)
모든 것을 내버린 나무들이 하늘이 두려운지 아니면 벌써 노년에 들어선 건지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허리를 90도 가까이 숙였다.

 백사골 상류 (능금마을 직전)

외나무다리를 지나면서 길은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1~2m 정도로 폭이 좁아진다. 계곡 오른쪽에
는 생뚱맞게도 비닐하우스와 밭, 과수원이 펼쳐져 두 눈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데, 그들을 지
나면 집들이 나오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분명 이곳은 서울 도심 종로구가 분명
한데 풍경은 완전히 강원도 두멧골이나 다름이 없으니 그곳이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이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에 벌인 부암동 백사실(백석동천)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 이후 내용은
분량상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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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아름다운 계곡을 옆구리에 차고 있는 ~~ 북한산 진관사 (진관사계곡)



' 북한산 진관사 여름 나들이 (진관사계곡) '

▲  진관사 경내

진관사 독성전, 칠성각

▲  진관사 독성전과 칠성각

▲  진관사계곡 폭포




뜨거운 도가니와 같았던 7월의 끝 무렵, 여름 제국(帝國)의 혹독한 핍박에서 잠시 벗어나
고 싶은 마음에 북한산(삼각산) 진관사계곡과 진관사로 피서 순례를 떠났다.

서울에서 계곡하면 북한산에 안긴 계곡들을 으뜸으로 쳐주는지라 서울에 몇 남지 않은 미
답처(未踏處)인 불광사(佛光寺)계곡으로 가려고 했다. 허나 사람의 마음은 갈대라고 이미
익숙해진 진관사와 진관사계곡으로 마음이 기울면서 오랜만에 진관사로 발걸음을 향했다.
서울 서북부의 중심지인 연신내역에서 일행을 만나 간단히 먹거리를 사들고 서울시내버스
701번(진관차고지↔종로2가)에 의지하여 진관사(삼천사)입구에서 두 발을 내린다. 여기서
전원 풍경이 눈을 시리게 하는 진관길을 7분 정도 들어서니 일주문이 멀리감치 나와 우리
를 맞는다.

진관사입구에서 일주문 사이에는 조선 성종(成宗)의 아들인 영산군묘역(寧山君墓域)과 영
산군의 생모인 숙용심씨묘표(淑容沈氏墓表) 등의 문화유산이 있고, 1968년 1,21사태를 일
으킨 김신조 공비 일당이 거쳐갔던 산길임을 알리는 안내문이 있으며, 북한산둘레길의 마
실길과 구름정원길이 이곳에서 서로 간판을 바꾸어 제 갈 길로 흘러간다.


 

♠  진관사 입문

▲  진관사의 정문인 일주문(一柱門)

1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진관사도 그 몇 년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그새 적지 않은 변화를 보여
주었다. 절에 들어서기도 전에 예전에는 없던 문이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으니 그 문은 바로
일주문이다.
그렇다면 그 문이 있기 전에는 진관사에 그 흔한 일주문이 없었을까? 그건 아니다. 여기서 경내
로 더 들어가면 1970년에 지어진 예전 일주문이 있다. 그 문이 40년 동안 일주문 역할을 하였으
나 2012년 속세 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주차장에 나무로 새 일주문을 만들고 기존 일주문은
해탈문으로 용도를 바꾸었다.

이전보다 더 크게 세워진 일주문은 그 위치가 길의 중앙이 아닌 너무 좌측으로 밀려나 있어 조
금은 뒷전으로 밀려난 기분을 준다. 그러다보니 산꾼과 중생들 대부분은 절의 관문인 일주문을
애써 지나지 않고 옆으로 지나간다. 문에게 그런 굴욕을 준 이유는 절을 찾는 차량들과 사람들
의 통행 편의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일주문 주변은 2008년 이전까지 조그만 마을이 터를 닦고 있었다. 산꾼과 속세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벌였던 식당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진관사에 갈 때마다 그들이 흘린 음식
냄새에 정신을 잃곤 하였다. 허나 북한산 주변을 정비하면서 마을을 모두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소나무와 갖은 나무를 심었으며, 마을까지 들어왔던 시내버스<7723번, 옛 454-2번>도 진관사입
구로 멀리감치 물러나 거기서 육중한 바퀴를 돌린다.

▲  극락교 밑을 흐르는 진관사계곡
(극락교 우측)

▲  진관사계곡과 나무 탐방로
(극락교 좌측)


▲  진관사 해탈문(解脫門)

일주문을 지나 극락교에서 졸졸졸~♪ 흐르는 계곡에 나의 번뇌를 힘껏 내던지며 흩어진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번뇌야 제발 바람 따라 멀리멀리 가거라~!' 주문을 해도 그 번뇌가 얼마나 무
거운지 떠내려가지도 않고 나를 기다리며 외친다. '잠시 너를 놓아줄테니 좋은 말 할 때 언능
내려와~~!!'

극락교를 지나면 시원스런 팔작지붕의 해탈문이 중생을 맞는다. 이 문은 원래 진관사의 일주문
으로 1970년에 진관이 만들었다. 전통 방식으로 만들지 않고 콘크리트로 기둥을 세우고 지붕만
나무로 한 형태로 한글로 가로식으로 쓰인 '삼각산 진관사' 현판이 걸려있었다. 콘크리트로 기
둥을 삼은 것도 그렇지만 현판 글씨도 전통식이 아닌 너무 현대식이라 옛 절의 면모가 다소 떨
어지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진관사도 그 부분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지 2012년에 새로
일주문을 짓고 기존의 일주문은 해탈문으로 이름을 갈았다.

해탈문을 들어서면 숲에 가려 보이지 않던 진관사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며, 문의 이름처럼
해탈을 해야 하건만 그게 참 쉽지가 않다. 그래서 부처는 아무나 되지 못하는 모양이다.


▲  석종형 승탑(僧塔)과 2기의 빛바랜 비석들

일주문을 지나면 왼쪽에 숲으로 인도하는 오솔길이 보일 것이다. 그 길은 삼천사로 넘어가는 산
길로 그 오솔길로 들어서면 근래에 지어진 때깔이 고운 사적비와 공덕비를 비롯하여 수풀 속에
자리한 석종형 승탑과 비석들이 나란히 3형제를 이루며 서 있는 모습이 두 눈에 들어올 것이다.

3형제 가운데 왼쪽에 자리한 승탑은 '혜월당대선사우성탑(慧月堂大禪師宇性塔)'으로 승탑에 잠
든 혜월당은 20세기에 활동했던 승려이다. 그 옆에 지붕돌을 인 빛바랜 비석은 조선 후기에 세
워진 것으로 정3품 벼슬을 지낸 전사명(全士明)의 석교송덕비(石橋頌德碑)와 자선송덕비(慈善頌
德碑)이다. 비석을 하나도 아닌 2개씩이나 지어줄 정도면 절에 대한 지원이 꽤 상당했던 모양이
다. 이래서 속세나 절이나 돈은 중요하다.

▲  2012년에 세워진 진관사 사적비(事積碑)와
공적비(功績碑)

▲  초가로 이루어진 진관사 찻집
(2015년 이전)


▲  진관사 돌담길 - 길 오른쪽(홍제루 방향)에는 진관사계곡이
속세를 향해 힘차게 물-질을 한다.

 ◀  진관사 은행나무 - 서울시보호수 12-3호
진관사에는 오래된 보호수가 3그루가 있다. 그
중 찻집 옆에 서 있는 이 은행나무는 그 막내로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지정 당시 나이
가 약 115년이라고 하니 그새 30년의 세월이 추
가되어 약 150년 정도 된다. 높이는 26m로 경내
에서 가장 높으며 둘레는 3m이다.


▲  진관사계곡에 걸려있는 세심교(洗心橋)
선암사 승선교(昇仙橋)를 꿈꾸는 것일까? 하얀 피부의 맨들맨들한 세심교는 경내와
함월당, 길상원, 공덕원을 이어주는 돌다리로 근래에 지어졌다.

▲  홍제루 정면

경내를 가리고 선 홍제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중층 건물로 절의 속살을 보이기 싫
은지 좌우로 담장을 두르며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다.
이 건물은 1977년에 진관이 세운 것으로 지붕은 호화롭게 청기와로 꾸몄으며, 아랫 층은 경내로
인도하는 통로로 가운데 계단을 올라서면 대웅전을 비롯한 경내가 흔쾌히 모습을 나타낸다.

홍제루 윗층은 교육 공간으로 수륙재를 비롯한 절의 행사 때는 단체 공양 장소로 쓰이기도 한다
. (예전 진관사 행사에 참여했을 때 여기서 점심공양을 한 적이 있음) 그리고 홍제루를 들어서
오른쪽으로 가면 커피 자판기와 두 다리를 쉴 수 있는 쉼터가 있다.


▲  홍제루 뒷면 (경내)

▲  홍제루 앞에 자라난 오래된 느티나무

홍제루 앞에는 오랜 세월을 머금은 느티나무 2
그루가 서로를 보듬으며 앞다투어 그늘을 드리
운다. 나무가 뿌리를 내린 위치가 평평한 곳이
아닌 계곡변 90도 벼랑이라 어떻게 저런 험난한
자리에서 어엿하게 자라날 수 있었는지 그저 신
기할 따름이다.
이들 느티나무는 1982년에 서울시 보호수 12-4,
12-5호로 지정되었는데, 지정 당시의 저들 나이
가 230년이라고 한다. 그새 30년에 세월이 얹혀
졌으니 나이는 260년 정도 된다. 높이는 각각
18m, 19m, 둘레는 3.1m, 2.5m이다. 둘이 워낙
따닥따닥 붙어있어 보호수 안내문이 아니면 누
가누군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  석조 옆 화단에 심어진 옛 주춧돌과 석물들
6.25때 파괴된 옛 건물의 주춧돌 3개가 화단에 벌러덩 누워 있다. 어느 건물을 받치던
주춧돌이었을까? 받쳐들 상대를 잃은 주춧돌의 허전한 대머리를 달래주려는 듯
합장인을 선보인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거북이상을 그들 머리에 두었다.

▲  진관사 석조(石槽)
석조에는 북한산이 베푼 물로 조그만 바다를 이룬다. (가뭄 때는 맨바닥을 드러냄)
허나 속세의 때를 탔는지 식수 불가가 되어 석조에 고인 물은 그야말로
그림의 물이 되었고, 석조는 경내를 수식하는 장식물이 되고 말았다.
그럼 여기서 잠시 진관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서울 서북부 제일의 고찰, 수륙재의 성지(聖地)인 북한산 진관사(津寬寺)
① 고려 현종의 이야기가 서린 진관사의 창건 설화
북한산(삼각산) 서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진관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조계사의 말
사(末寺)이다. 조선시대부터 불암산 불암사(佛巖寺), 삼성산 삼막사(三幕寺), 북한산 승가사(
僧伽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더불어 서울 근교 4대 명찰의 하나로 명성을 누렸으며 서울 서
북부에서 가장 크고 잘나가는 절이었다.

진관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고려 8대 제왕인 현종이다. 그는 자신을 구
해준 진관대사(津寬大師, 진관조사)를 위해 이 절을 지어주었는데,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워
낙에 유명한 이야기라 사극이나 영화 소재로 써도 손색은 없을 것이다. (이미 사극 '천추태후'
에서 1번 써먹었음)

현종(992~1031, 재위 1009~1031)은 고려 태조(太祖)의 아들인 안종 왕욱(安宗 王郁, ?~997)과
태조의 손녀인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씨의 소생으로 이름은 왕순(王詢)이다. 헌정왕후는 태조
의 아들인 대종 왕욱(大宗 王旭, ?~969)의 딸로 그녀의 남편인 안종과 한자만 다를 뿐 이름은
같으며, 헌정왕후도 엄연한 왕씨이나 고려 황족(皇族)들은 족내혼(族內婚)을 너무 선호한 탓에
공주를 비롯한 왕족 여인들은 보통 외가의 성을 땄다. 그래서 외가인 황보<皇甫, 황해도 황주(
黃州) 지역 세력가>씨를 칭하게 된 것이다.

헌정왕후는 사촌인 경종(景宗, 재위 975~981)에게 시집을 갔으나 981년 경종이 붕어(崩御)하자
사저로 나와 살던 중, 숙부가 되는 안종과 친해지게 된다. 그들은 숙부와 조카 사이임에도 그
경계를 넘어섰고, 그 결과 현종(왕순)을 낫게 되었으나 극심한 산고(産苦)로 죽고 만다.
그의 오라버니인 성종(成宗)은 그 책임을 물어 안종을 멀리 경상도 사천(泗川)으로 귀양보냈는
데, 나중에 왕순을 내려보내 직접 기르도록 했다. 하지만 안종 역시 오래 살지는 못하고 997년
거기서 숨을 거둔다.
이후 성종은 왕순을 다시 불러 궁중에서 길렀고, 성종이 997년 붕어하자 왕순의 사촌인 목종(穆
宗)이 제위에 오른다. 목종은 경종과 헌애왕후(獻哀王后) 황보씨(왕순의 큰 이모)의 아들로 그
가 제위에 오르자 왕후는 그 이름도 유명한 천추태후(千秋太后)를 칭하게 된다.

천추태후는 김치양(金致陽)이란 오랜 정인(情人)이 있는데, 그 사이에서 아들까지 낳아 부부행
세를 하기에 이른다. 유약한 목종은 특이하게도 동성연애를 빠져 점점 병약해지고 아들을 포기
한 태후와 김치양은 그들의 아들을 제위에 올리고자 안간힘을 쓴다. 마침 목종은 아들도 없었으
므로 그가 죽으면 별탈없이 김씨가 제왕이 될 수도 있다. 허나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친조카
인 왕순의 존재였다.

김치양은 고려 왕실을 뒤엎고 새 왕실을 세우려는 욕심 때문인지 왕순을 죽이고자 혈안이 된다.
그래서 그를 숭경사(崇慶寺)에 보내 죽이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진관사의 전신(前身)
으로 여겨지는 북한산 신혈사(新穴寺)로 쫓아내 비밀리에 자객을 보냈다.
당시 신혈사에는 진관대사가 머물고 있었는데, 왕순의 위급함을 눈치채고 불단(佛壇) 밑에 굴을
파 그를 숨기는 등 3년 동안 지켜주면서 자객은 결국 헛탕만 치고 만다. 젊은 나이에 드러누운
목종은 왕순을 후계자로 정하며 대량원군(大良元君)에 봉해 즉시 그를 데려오도록 했다.
그래서 왕순은 무사히 개경(開京)으로 돌아왔고, 1009년 북쪽에서 반란을 일으킨 강조(康兆)에
의해 제위에 오른다.

1010년 요나라(거란) 성종(成宗)이 강조의 난을 따진다는 이유로 친히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
어왔다. 초반에 강조가 검차(檢車)를 이용하여 꽤 선전을 했으나 자만으로 인해 크게 패하였고,
그 여세로 개경이 함락되자 현종은 눈물을 머금고 나주(羅州)까지 먼 길을 몽진했다. 1011년 거
란군이 토벌되어 개경으로 환궁을 했는데, 바로 그 해에 진관조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
인근에 절을 지어주고 그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했다.
절은 1012년 가을에 완성되었으며, 대웅전이 10칸, 동/서 승당(僧堂)이 각각 30칸, 청풍당(淸風
堂)과 명월요(明月寮)가 10칸, 기타 일주문, 해탈문, 종각 등 규모가 상당했고, 불상과 온갖 물
품까지 현종이 하사했다. 그리고 진관조사를 국사(國師)로 삼았다.
이렇게 제왕의 어려웠던 시절을 구해준 깊은 인연으로 태어난 진관사는 고려 왕실의 지원을 두
고두고 입으며 크게 승승장구한다.

② 딱 천년 묵은 진관사, 창건 이후 지금까지의 과정
1090년 선종(宣宗)은 남경(南京, 서울 도심)에 행차하면서 진관사에 친히 들려 오백나한재(五百
羅漢齋)를 열었다. 그리고 1099년 숙종(肅宗)이, 1110년에는 예종(睿宗)이 남경을 순행하는 과
정에서 들리면서 여러 보물을 하사했다. 당시 진관사는 승가사, 장의사(長義寺)와 더불어 서울
에서 가장 잘나가는 절이었다.

1392년 천하가 조선으로 강제로 바뀐 이후에도 진관사의 명성은 여전했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를 뒤엎으면서 마구잡이로 죽인 고려 왕족과 백성들의 혼을 달래고 민심 안정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수륙재(水陸齋)를 계획한다. 그래서 서울과 가까운 북한산과 도봉산 일대 사찰 가운
데 마땅한 장소를 물색했는데, 진관사가 딱 적합하다는 보고에 따라 재를 지낼 수륙사(水陸社)
를 짓게 했으며, 1397년 건물이 완성되자 친히 낙성식에 참여하여 거하게 수륙재를 여는 한편,
권근(權近)에게 '수륙사 조성기(造成記)'를 작성토록 했다. 그 인연으로 진관사는 수륙재의 중
심 도량이 되어 변함없는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때 지어진 수륙사와 부속건물은 59칸 규모로 상/중/하단의 3단을 기본 구조로 하여 중/하단에
회랑(回廊)을 설치하는 등, 자못 위엄이 있는 규모였다.

참고로 수륙재는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물과 땅을 헤매는 고혼(孤魂)들을 천도하는 일종의 천도
재로 영산재에 비해 공익성이 큰 불교의 주요 행사이다. 양나라 무제(武帝, 502~549) 때 처음
시작되었다고 하며, 이 땅에서는 940년(고려 태조 22년) 12월에 처음 시작되었다.

1413년 태종은 일찍 죽은 4번째 아들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해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
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하사해 경비로 쓰게 했다. 그 이후 매년 1
월 또는 2월 15일에 국가 주도의 수륙대재가 열리면서 왕족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구름처럼 몰
려와 재에 참여했고, 서울 근교 제일의 사찰로 굳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421년에는 세종(世宗)이 부모인 태종 내외의 명복을 빌고자 재를 지냈는데, 이때부터 왕실의
각종 재를 지내는 역할까지 담당하게 된다. 또한 1442년 세종은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의 공부
를 독려하고자 독서당(讀書堂)을 경내에 설치해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등 많은 문인
들이 이곳에서 머리를 싸매고 독서를 했다.

1452년에 중수를 벌였고, 1463년 화재로 건물 일부가 타버리면서 1470년에 중건했다. 이후 별탈
없이 지내오다가 1854년과 1858년에 중수했으며, 1879년에 당두화상(堂頭和尙) 경운(慶雲)이 34
칸을 지었다. 그리고 1908년 송암(松庵)이 경내에 오층석탑을 세웠으며, (경내 서쪽 외곽에 있
음) 명부전에 불상과 시왕탱을 개금했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짓고, 자신의 토지를 절에 기
증해 '백련결사염불회'의 자원으로 쓰게 했다.

1950년 6.25전쟁 때 공비 토벌 작전 과정에서 나한전과 칠성각, 독성전을 제외하고 모두 파괴되
는 비운을 겪었으며, 초라한 몰골로 있던 것을 1963년 비구니 최진관<진관(眞觀)>이 이곳 주지
로 들어와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비록 살아남은 칠성각 등 3동을 제외하고는 예전 가람과는
다르게 중창되어 아쉬움이 다소 있으나 진관의 노력으로 예전 규모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으며,
1980년 대웅전과 주요 건물의 기와를 청기와로 도배했다. 그리고 1992년 공양간과 요사를 새로
지었으며, 1996년 코끼리유치원, 2007년에 사회복지법인 진관 무위원을 세워 어린이 교육과 사
회복지, 포교에 나섰다.

2009년에는 칠성각을 해체/수리하는 과정에서 3.1운동 시절 승려 백초월이 사용했던 태극기와
독립신문 등이 발견되어 매스컴을 크게 흔든 바가 있으며 이때쯤 수륙사터를 발굴 조사하였다.
2012년에는 일주문을 새로 지었고, 2015년에는 경내 북쪽을 싹 밀어 산사음식연구소, 보현다실
등 사찰 음식과 전통 찻집, 템플스테이를 다루는 건물을 요란하게 지어올려 절의 사세를 한껏
뽐내었다.
또한 진관의 주도로 오랫동안 잊혀진 옛 수륙재(국행수륙대재)를 복원하고자 동분서주하여 1982
년 자운율사의 의해 힘들게 복원에 성공, 이후부터 매년 윤년 윤달에 수륙재를 봉행하고 있으며
, 2012년부터는 매년 여름과 가을에도 개최하여 수륙재의 전통을 힘차게 이어나가고 있다. 그렇
게 진관사를 반석 위에 올렸던 우리나라 비구니의 원로, 진관은 바로 얼마 전 2016년 7월 3일
한낮에 88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어 영원히 진관사에 깃들게 되었다.

③ 진관사의 현재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독성전, 칠성각, 나한전, 나가원, 요사, 서
별원, 홍제루, 범종각 등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세심교 건너에도 함월당과 길상원, 공덕
원 등의 여러 건물이 있어 도합 약 20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칠성각에서 발견된 태극기 및 독립신문류(등록문화재 458호)를 비롯해 칠성
각과 독성전, 석불좌상, 독성도, 소조3존불상, 소조16나한상, 산신도, 칠성도, 수륙무차평등재
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23호) 등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간직하고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준다. 또한 이곳의 자랑인 수륙재는 '진관사 수륙재'란 이름으로
국가 무형문화재 126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100~200년 묵은 보호수 3그루가 있어 고색의
무게를 조금 보탠다.

서울 도심과 가까운 산사로 울창한 숲속에 묻혀있으며, 멋드러진 진관사계곡을 옆에 끼고 있어
경관도 일품이라 세종이 왜 이곳에 독서당을 지었는지 알만하다. 첩첩한 산골에 자리하여 산사
의 내음도 진하게 풍기고 있으며, 비구니 사찰이나 경내가 깨끗하고 정갈해 어수선한 마음마저
싹둑 가다듬게 만든다. 속세에서 나를 잠시 지우고 싶은데 멀리 가기가 힘들 때 찾아와 안기고
싶은 곳으로 한여름에 오면 절을 둘러보고 윗쪽 계곡에 올라가 피서를 즐기면 아주 극락이 따
로 없다.

※ 진관사 찾아가기 (2016년 8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에서 701,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
  입구)에서 하차하여 도보 15분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3번 출구)에서 7723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에
  서 하차
* 연신내역 3번 출구 밖 하나은행 앞에서 진관사 셔틀버스 이용. 평일은 1일 4회, 행사가 있는
  날과 주말은 9회 운행한다. (8시부터 10시대까지 운행)
* 진관사 일주문 주변에 주차장이 있으며 홍제루까지 차량 접근 가능

★ 진관사 관람정보
* 진관사는 템플스테이(Temple Stay)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주중이나 주말에 1박 2일을 머
  무는 휴식형(14시부터 다음날 10시까지)과 불교문화 체험형, 단체형, 어린이 템플스테이. 청
  소년 템플스테이 등이 있으며, 예불과 참선, 다담(茶談), 발우공양, 108배, 안행(安行), 연꽃
  등 만들기, 사찰음식 체험 등을 제공한다. 1박2일 가격은 성인 7만원, 청소년과 어린이는 5만
  원이며, 템플스테이 신청과 자세한 정보는 진관사 홈페이지를 참조한다.
  (문의 ☎ 02-359-8410)
* 진관사 홍제루에서 계곡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폭포가 등장하며, 여기서부터 진관사계곡의 숨
  겨진 절경이 마음을 앗아간다. 서울에서 제법 잘생긴 계곡이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또한 진
  관사계곡 산길은 2015년 이후 길이 다소 정비되었다고 하나 바위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어 조
  심을 기해야 되며, 탐방로에서 계곡까지는 대부분 바위를 타고 내려가야 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354 (☎ 02-359-8410)
* 진관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칠성각에 봉안된 귀여운 석불좌상과 칠성도


 

♠  진관사 대웅전 주변

▲  서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大雄殿)

홍제루를 들어서면 바로 정면으로 법당인 대웅전이 마주한다. 정면 5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1965년에 진관이 세웠으며, 1980년에 그 비싸다는 청기와를 입혀 화려함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불단에는 1966년에 조성된 석가/미륵/제화갈라보살상을 중심으로 1967년에 제작된 삼신불
후불탱, 신중탱(1967년), 오여래탱(1990년), 범종(1966년), 1934년에 그려진 현왕탱(現王幀) 등
이 내부를 눈부시게 수식한다.

대웅전 뜨락에는 푸른 잔디가 정갈하게 깔려져 입혀져 있고, 건물 바로 앞에 석등(石燈) 2기가
자리한다. 허나 법당 앞에 으례 있는 석탑은 없는데, 원래는 1908년에 세운 5층석탑이 하나 있
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지금은 경내 구석에 몰래 찌그러져 있으니 아마도 풍수지리(風水地理)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곳이 계란을 상징하는 지형인데, 탑을 세우면 계란이 자칫 깨질 수 있
어서 그런듯)


▲  대웅전 불단을 지키는 석가/미륵/제화갈라보살

법당의 3존불이면 보통 중심 불상과 협시불(夾侍佛)을 짧은 간격으로 배치하는데 반해, 이곳은
서로가 조금씩 거리를 두며 독자적인 모습으로 앉아있다. 이들은 1966년에 조성된 것으로 가운
데 앉아있는 불상이 불교의 1인자인 석가불이고, 그의 왼쪽은 미래의 부처로 일컬어지는 미륵보
살(彌勒菩薩), 오른쪽은 과거불인 제화갈라(提華褐羅)보살로 이들은 법화경(法華經)에 나오는
수기3존불(授記三尊佛)이다.
가운데에 자리한 석가불을 빼고는 모두 보살(菩薩)의 신분이라 탐이 날 정도로 화려한 보관(寶
冠)을 쓰고 있으며, 다들 온화한 미소로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격려한다. 그리고 그들 뒤에
는 각각 후불탱화가 걸려있는데, 이들은 1967년에 제작된 것으로 석가불 뒤에는 비로자나불(毘
盧舍那佛)을 담은 후불탱이, 미륵보살 뒤에는 노사나불(盧舍那佛)이 담긴 후불탱화, 제화갈라
뒤에는 석가모니 후불탱화가 걸려있다.


▲  진관사 나가원(那迦院)

푸른 잔디가 곱게 입혀진 대웅전 뜨락 우측에는 나가원이 있다. 정면으로 요사인 동별당을 마주
하고 있는 나가원은 한때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1972년에 진관이 지은 것이다. 정면 7칸, 측
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요사 및 대중방(大衆房), 종무소(宗務所)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신
도를 수용하는 대중방에는 1972~73년에 조성된 석조관음보살좌상과 아미타후불탱화가 있다.


▲  나가원 뒷쪽(종무소 쪽)에 놓인 맷돌들
조선 후기와 왜정 때 쓰인 맷돌 3형제가 어처구니를 상실한 채, 뜻하지 않은
장식물이 되어 쓸쓸한 노년을 보낸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건물이든 뒷전으로 밀려난 모습은 쓸쓸하기 그지 없다.

▲  진관사 동정각(動靜閣)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아련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의 보금자리로 1975년에 지어졌다.
종은 1974년에 조성된 것으로 그 흔한 범종각이 아닌 고요함을 흐트린다는 뜻의
동정각을 칭하는 점이 참 이채롭다.

▲  대웅전과 나가원 뒷쪽

▲  수륙재 행사 천막에 정면이 가려진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명부전은 1968년에 지어진 것으로 1996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새로 지어졌
다. 지붕에는 푸른 기와가 입혀져 화려함을 더하며, 내부에는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10왕, 판관,
사자,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건물 내부를 사진에 담으려고 했으나 마침 비구니 1명이 안에서 염불을 중얼거리고 있어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  진관사의 보물창고 ~~ 나한전, 독성전, 칠성각

▲  왼쪽부터 독성전, 칠성각, 나한전

진관사에 왔다면 꼭 봐야되는 존재들이 있다. 바로 경내 좌측 구석에 옹기종기 모인 나한전과
칠성각, 독성전 3동(나한전 구역)이 그것이다. 이들은 진관사를 잿더미로 몰아넣었던 6.25 때
도 살아남은 진관사의 옛 건물로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지어진 것들이다. 겉보기에는 청
기와로 번쩍이고 덩치도 큰 대웅전이나 나가원, 홍제루에 비해 보잘 것도 없고 구석에 몰려들
있어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정말 지나치기 일쑤다.
하지만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명언이 있듯이 진관사의 지정문화재(무형문화재 제외) 가운
데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를 빼고는 모두 이들 건물 안에 담겨져 있다.
게다가 자리 이동도 없이 예전의 가람배치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진관사의 예전 모습을 더듬
는데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대웅전과 나가원 등은 대충 둘러봐도 되니 나한전 구역 건물들은 내부까지 꼭 살펴보도록 하자.
그래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독성전과 칠성각은 서울에 있는 칠성각/독성각/산신각 계
열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  진관사 나한전(羅漢殿)

나한전 구역에서 유일하게 청기와를 눌러쓴 나한전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필체의 힘이 넘쳐보이는 명부전 현판은 1886년에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이 쓴 것이라고 전하며, 내부에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한 소조3존불을 비롯해 소조
16나한상, 영산회상도, 16나한도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나한전 소(塑, 소조) 3존불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3호
후불탱화로 걸린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5호


나한전 불단 유리 안에 소중히 봉안된 소조 3존불은 흙으로 빚어서 도금을 입힌 것으로 가운데
불상은 석가불이고, 좌우에 보관을 쓴 이들은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다. 대웅전 불단에 봉
안된 수기3존불(授記三尊佛)과 같으며, 석가불은 통통한 얼굴에 좀 경직된 표정이지만 좌우 보
살은 온화한 표정으로 살짝 미소가 드리워져 있다.
이 3존불은 진관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
겨진다. 서울 토박이 불상 가운데서도 나이가 많은 편으로 얼굴의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그들이
입은 법의(法衣)는 통견의(通肩衣)로 옷주름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3존불상 뒤에 걸린 영산회상도는 부처가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1884년 상궁(尙宮)들의
시주로 진철(震徹)이 그린 것이다. 구도는 중앙에 부처가 있고, 그 옆에 4명의 보살과 사천왕(
四天王), 6명의 제자를 배치했는데, 빈 공간에는 채운(彩雲)을 가득 채워 여백이 없다.
부처는 얼굴이 양감(量感)있게 표현되었고, 몸을 꽤나 단련한 듯, 힘찬 모습이다. 법의는 통견
으로 두 손은 아미타수인(阿彌陀手印) 비슷한 수인을 보이고 있는데, 이런 제스쳐는 조선 후기
불화에서 많이 나온다. 그리고 부처 좌우에는 문수/보현보살이 큰 연꽃을 들고 서 있고, 사천
왕이 각자의 장비를 들고 그들을 호위한다. 또한 상체만 드러내며 합장인을 보이고 있는 제자
가 좌우에 3명씩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횡축의 화면과 단아한 형태, 밝은 주조색 등 19세기 후반 불화의 양식을 잘보여주고
있으며, 그 당시 서울 지역 불화의 베스트급으로 꼽힌다.



▲  나한전 소(塑) 16나한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4호
16나한도(十六羅漢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6호


3존불 좌우에는 부처의 핵심 제자인 16나한상과 16나한도가 자리해 있다. 불단 좌우에 각각 8
구의 나한상이 16나한을 이루고 있고, 그외에 제석상(帝釋像) 1구, 사자상(使者像) 1구, 활력
이 넘치는 인왕상(仁王像) 2구 등 모두 20구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흙으로 빚어 색을 입힌 것으로 진관사를 찾는 수많은 중생처럼 제각각의 모습이라 어느
하나 같은 얼굴, 같은 포즈가 없을 정도로 개성이 넘친다. 게다가 자세나 얼굴 표정도 어느 양
식에 얽매이지 않은 사실적이고 해학적으로 묘사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서울, 경기도 지역의
나한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유물로 가치가 높다.

16나한도는 나한도 4폭과 제석신중도(帝釋神衆圖) 1폭, 사자신중도(使者神衆圖) 1폭 등 총 6폭
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한도(羅漢圖)는 4명의 나한이 산수를 배경으로 시자(侍者)와 동자를 거
느리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제석신중도와 사자신중도는 나한도 좌우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화면
을 2개로 나누어 구름 속에 있는 제석과 신중, 사자와 신중(神衆)을 그렸는데 근대적인 음영법
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 그림은 영산회상도와 마찬가지로 상궁의 시주로 1884년에 진철(震徹), 축연(竺衍) 등이 그
린 것으로 세밀한 필선(筆線)과 정교한 문양 표현, 금니(金泥) 사용 등이 주목된다. 그리고 나
한도에 나와있는 경물(景物)은 당시에 유행하던 민화풍으로 그려져 있어 그 시절 회화 연구에
착한 자료가 되어준다.


▲  진관사 독성전(獨聖殿)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4호

칠성각 옆에 자리하며 나한전을 바라보고 있는 독성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아주 단촐한 맞
배지붕 건물이다. 부처의 제자로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의
보금자리로 2006년까지만 해도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독성각이라 불렸으나 진관사에서 이 건물
에 대한 기대감이 큰지 각(閣)에서 전(殿)으로 등급을 높이면서 독성전이 되었다.

이 건물은 1907년에 지어진 것으로 상궁 4명과 부부 2쌍이 돈을 대주었다. 당시에 만들어진 독
성전 공덕기(功德記)에 시주한 사람과 공사 참여자 명단이 기재되어 있는데, 6.25때 운이 좋게
살아남았으며, 1969년에 진관이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조그만 내부에는 소조독성상을 비롯해 독성도, 산신도 등이 있는데, 모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독성상과 독성도는 유리로 봉해져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다.


▲  소(塑) 독성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1호
독성도(獨聖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2호

▲  작고 귀여운 소 독성상의 위엄

독성전의 주인장인 독성상은 흙을 빚어서 만든 것으로 인형처럼 귀엽고 아담한 모습이다. 눈썹
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입술은 살짝 다물고 있으며, 입술 위에 엷은 수염이 있다.
눈은 양쪽으로 길게 뜨고 있고, 표정은 동자승을 모델로 만든 듯, 천진난만해 보인다. 이는 독
성의 존재가 백성들에게 아주 가까이 있었다는 뜻이 된다. 왼쪽 어깨에는 옷을 고정한 금구장
식(金具裝飾)이 있으며, 몸통에 비해 얼굴이 좀 크고 무릎이 매우 낮아 신체가 다소 길어 보인
다.
19세기(이르면 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고색이 묻힌 독성상이 꽤 많은 것 같지만 정작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서는 거의 없어 진관사의 독성상은 꽤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래서 당시 독성
상의 특징과 조각 수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지방문화재자료의 지위를 얻었다.

독성상 뒤에 걸린 독성도는 독성을 비롯하여 시자(비서)와 동자 등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와 인연이 깊은 천태산으로 보이는 돌봉우리가 여러 개 보이고, 동자 옆에는 소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그림 폭이 2m에 이르러 우리나라 독성도(독성탱) 가운데 제법 큰 편에 속한다. 이 그
림은 1907년 상궁 이씨와 홍순모(洪淳謨)의 시주로 경기도에서 활약하던 화승(畵僧) 경선당 응
석(慶船堂 應釋)이 그린 것으로 채색이 전체적으로 탁해 보이며, 같은 독성인데도 그림에 나온
독성과 앞에 있는 독성상의 모습이 너무 차이가 나 마치 독성의 한참 때 시절과 늙은 시절을
사이좋게 담은 것 같다.


▲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9호

진관사는 독성전과 칠성각을 갖추고 있지만 유독 산신의 건물인 산신각을 갖추지 않았다. 그래
서 독성전 한쪽에 조촐하게 그의 공간을 마련했다.
산신도에는 유난히 빨간 옷을 입은 산신(山神)과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그려져 있는데, 민
화에 나오는 호랑이 이상으로 너무 익살스럽고 귀여워 정말 쓰다듬고 싶다. 그의 긴 꼬랑지는
산신 왼쪽에서 살랑살랑 춤을 춘다. 산신은 인심 좋은 구멍가게 노공(老公) 같으며, 산신도(산
신탱)에 기본으로 등장하는 산은 나와있지 있고, 배경은 그냥 여백으로 남아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그려진 것으로 자세한 제작시기와 시주자, 화승에 대한 정보는
아쉽게도 전해오지 않는다.


▲  칠성각(七星閣)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3호

독성전 옆에 자리한 칠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1911년에 지어
진 것으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서울, 경기도 지역의 사찰 건물에서 많이 나타나는 건
축 양식인 좌/우/후면을 벽돌로 처리한 화방벽(火防壁)이 설치되었다.
내부에는 석불좌상과 칠성도, 명호 스님 초상화 등이 있으며, 2009년 5월 칠성각을 해체/보수
했을 때 태극기와 독립신문류 등이 발견되어 속세를 한참 떠들썩하게 했다. 


▲  칠성각 석불좌상(石佛坐像)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0호
칠성도(七星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7호

▲  귀여움이 묻어난 칠성각 석불좌상의 위엄

유리로 봉해진 칠성각 불단에는 아기부처를 닮은 아주 조그만 불상이 앉아있어 보는 이로 하여
금 마음의 편안함을 안겨준다.
이 불상은 옥석(玉石)으로 만든 것으로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으며, 1969년에 진관이 개금(改金
)을 입혔다. 불상의 크기를 봐서는 천불상(千佛像)의 일원으로 조성되었다가 따로 떨어져 나온
것으로 여겨지며, 이런 불상은 서울과 경기도 북부, 강원도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불상의 머리는 나발로 머리 윗부분에는 육계(肉髻, 무견정상)가 완만하게 튀어나왔으며, 앳되
고 귀여운 인상으로 내가 친견한 불상 가운데 제일 편안하고, 귀여우며. 근엄하지도 무섭지도
없는 온화한 표정이다. 불상의 양손은 손의 바깥부분이 보이도록 다리에 대고 있는데, 그 의미
는 모르겠다. 저건 도대체 무슨 수인(手印)일까?

석불좌상 뒤에 걸린 그림은 칠성도로 1910년 춘담(春潭), 범천(梵天) 등이 그린 것이다. 그림
중앙에는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를 중심으로 칠성(七星)과 성군(星君) 등이 있다. 청련화(靑
蓮花) 위에 앉은 치성광여래는 붉은 법의를 입고 오른손은 가슴 부위에, 왼손은 무릎 위에서
금륜을 얹고 있으며, 그 좌우에는 7구의 칠성이 여래를 향해 합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밑에
는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이 여의(如意)를 들고 있는데, 일광은 붉은 해를,월광은 하얀 달이 그려진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그 옆에는
도교식으로 표현된 칠원성군(七
元星君)이 홀을 들고 서 있다.

이 그림은 두터운 설채법(設彩法), 붉은 적색의 주조색(主調色)에 감색과 녹색이 조금 섞인 채
색, 등장 인물 얼굴에 칠해진 두터운 호분(胡粉) 등의 표현에서 20세기 초반 불화 양식을 보여
주고 있으며, 조성 연대와 그림을 그린 승려 등이 나와있고 서울에서 보기 드문 칠성도(七星圖
)의 작례(作例)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명호스님 초상(肖像)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8호

석불좌상과 칠성도 옆에는 독특하게도 승려의 초상(영정)이 걸려있다. 초상의 높이는 106.2㎝,
폭 83㎝로 그림 왼쪽 상단에 세로로 '影入山水圖 數珠看經(영입산수도 수주간경)~'으로 시작되
는 4줄의 찬시(讚詩)가 있고, 오른쪽 상단에는 한글로 '인사졀명호불영뎡'이란 문구가 있어 인
수사(또는 인사사)에 있던 명호의 영정으로 여겨진다.
그림 중앙에는 경상(經床)을 앞에 두고 정면을 향한 채 결가부좌한 승려의 모습을 가득히 그렸
는데, 그의 옆으로 불자(拂子)와 두루마리를 든 시자를 배치해 3존형식을 이루었다. 이러한 3
존 형식의 영정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것으로 크게 주목된다.
허나 그림의 제작시기와 그린 사람의 정보, 명호란 인물의 대한 기록과 인수사의 위치, 진관사
에 흘러들어온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그림에 속사정은 알 수 없으나 그림 구도와 채색으로 미
루어볼 때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3존 배치와 찬시, 한
글 제목 등은 다른 불화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이다.


▲  90년 만에 햇살을 본 빛바랜 태극기 - 등록문화재 458호

2009년 5월 칠성각을 해체 보수했을 때 불단 내부와 벽체 사이에서 태극기와 독립신문 등 독립
운동 관련 자료 6종 21점이 발견되어 속세의 진한 주목을 받았다. (이때 대들보에서도 칠성각
상량문이 발견되어 1911년에 지어졌음이 밝혀졌음)
이들은 진관사와 인연이 깊던 백초월(白初月, 1878~1944)이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사용한 것
으로 여겨지는데, 독립신문과 자료들은 태극기에 포근히 감싸인 채로 발견되었다.
이렇게 90년 가까이 칠성각에 꽁꽁 숨겨진 것은 왜정의 탄압을 피하기 위함으로 보여지며, 기
나긴 세월 동안 광합성 작용을 받지 못했지만 빛이 좀 바랜 것을 빼고는 대체로 양호하여 알아
보는데 그리 지장은 없다. 단순해보이면서 심오한 뜻이 가득 깃든 태극기를 보니 그동안 진관
사에서는 누리지 못했던 가슴 뭉클함이 솟아 오른다.

태극기는 가로 89cm, 세로 70cm의 면직물에 바느질되어 있으며 중앙에 32cm 직경의 태극문양이
있고, 건과 곤, 감, 리의 4괘가 갖추어져 있다. 4괘의 위치가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
위원회가 제정한 국기 양식의 4괘와 동일하나 현재와는 위치가 달라 태극기 변천사에 귀중한
자료일 뿐 아니라 진관사가 서울 지역 불교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음을 살짝 귀뜀해 준다.

태극기 안에 담긴 독립신문류는 신대한<(新大韓), 신채호(申采浩)가 창간한 신문> 3점, 독립신
문<(獨立新聞), 상해임시정부의 기관지> 4점,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 천도교에서 3.1운
동 당시 발행한 신문> 5점, 자유신종보(自由晨鍾報) 6점, 경고문(警告文) 2점으로 이중 자유신
종보는 이번에 처음으로 그 존재가 알려진 매우 신선한 자료이다. 신문마다 태극기 도안과 태
극기와 관련된 내용이 게재되어 있고, 경고문은 독립에 대한 확신으로 끝까지 독립투쟁을 하자
고 호소하는 문서이다.
이렇게 귀중한 독립운동 관련 자료가 같은 곳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것에 그 의미가 크며, 1919
년 3.1운동 이후 12월까지 조선과 우리의 옛 땅인 중원대륙에서 펼쳐진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보충해주는 중요 자료로 그 가치가 높다. 현재 태극기는 칠성각에 공개하고 있으며, 독립신문
과 기타 문서는 비공개이다, ('진관사 소장 태극기 및 독립신문류'란 이름으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됨) 2010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진관사 태극기' 특별전에 이들이 처음 속세에 공개
되었으며, KBS에서 3.1절 특집으로 '초월의 비장, 진관사 태극기'를 방영하기도 했다.

이 태극기를 사용했던 백초월은 만해 한용운(韓龍雲)에 비견되는 항왜(抗倭) 승려로 3.1운동
이후 진관사에 주로 머물며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1944년 왜정에 체포되어 그들의 잔인한 고문
끝에 광복을 1년 앞둔 청주교도소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  진관사 뒷쪽에 숨겨진 서울 제일의 명품 계곡 ~ 진관사계곡

▲  진관사계곡에서 만난 1번째 폭포 (폭포 이름은 없음)

진관사에 왔다면 경내만 살피지 말고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발품을 조금 팔아서 절 뒷쪽 계곡에
도 한번 올라가보자. 그렇다고 많이 올라갈 것도 없다. 조금만 가면 윗 사진의 폭포가 나오고,
여기서부터 금강산과 설악산도 질투할 정도로 1품급 경관이 펼쳐져 중생의 정처없는 마음을 단
단히 앗아갈 것이다.

진관사계곡(진관천)은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서 있던 비봉(碑峰) 북쪽에서 발원해 진관
사를 끼고 창릉천(昌陵川)으로 흘러가는 북한산 서쪽 계곡의 하나로 북한산성 안에 자리한 북한
산성계곡, 개연폭포 주변과 견줄 정도로 국보급 계곡을 자랑한다. 북한산에서 가장 빼어난 수준
의 계곡이자 서울 장안 으뜸의 계곡으로 키 작은 폭포가 주렁주렁 달려있어 경관을 크게 돕는다.
이들 폭포는 아직까지는 속세에서 지어준 이름이 없다.

1번째 폭포를 시작으로 대자연 형님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그림 같은 절경이 가히 숨을 질리
게 하는데, 1번째 폭포 윗쪽부터는 계곡 접근이 가능하여 여름 제국에 저항하며 피서를 즐기는
이들로 봐글봐글하다. (폭포 밑에서 진관공원지킴터 구간 계곡은 접근 통제)
우리는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속세에서 가져온 먹거리로 황제 못
지 않은 간식 시간을 가지며 거울처럼 맑은 못에 꼬질꼬질한 발과 다리를 담구었다. 마음 같아
서는 온 몸으로 진하게 계곡과 스킨쉽을 즐기고 싶지만 여벌의 옷을 갖추지 않았다.


▲  물이 지그재그로 흐르는 2번째 폭포 주변

▲  장대한 세월의 거친 주름이 그어진 90도 벼랑과 계곡
벼랑 밑에 폭포와 좁은 목이 있다. 수심은 얕으나 큰 비가 내려 계곡이
잔뜩 흥분한 직후에는 조심하는 것이 좋다.
 

진관사계곡 산길은 1번째 폭포를 조금 지나 2번째 폭포 직전에서 계곡 북쪽으로 펼쳐지는데, 경
사가 각박한 벼랑길을 올라가야 된다. 다행히 2015년에 길을 크게 순화시켜 통행이 한결 편해졌
는데, 산보다 계곡이 주목적이라면 계곡을 따라 가는 것도 괜찮다. 중간중간 머물 자리도 많고,
계곡의 속살을 깊히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 이름난 계곡은 여기 외에도 북한산 삼천리골(삼천사계곡)과 불광사계곡, 구기동계곡, 소
귀천계곡, 구천계곡(구천폭포, ☞ 관련글 보러가기), 동령폭포, 도봉산(道峰山) 무수골과 문사
동계곡, 도봉계곡, 북악산 백사실(백사골), 수락산 벽운동계곡, 관악산 암반천계곡 등이 있다.


▲  40~45도 기울어진 하얀 피부의 벼랑과 그 밑을 흐르는 진관사계곡
우리는 등산로에서 40도 벼랑을 타고 내려와 이곳에 자리를 피고 조촐하게
피서를 즐겼다. 끝없이 넓은 여름 제국에 대항하며 머문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우리의 임시 낙원이었다.

▲  40도 벼랑 밑에 숨겨진 청정한 못
하늘나라 선녀 누님들이 살짝 몸을 씻는 곳은 아닐까? 달님이 천하를 희미하게
비출 때 몰래 잠입하여 그들의 목욕 장면을 훔쳐보고 싶다.

▲  장쾌하게 쏟아지는 40도 벼랑 밑 폭포의 위엄
하얀 명주를 급하게 늘어뜨린 듯, 폭포수의 기세가 대단하다.
그 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귀신이 다 도망칠 정도이다.

▲  진관사계곡 90도 벼랑
단양 사인암(舍人巖, ☞ 관련글 보러가기)의 축소판일까? 산길에서 보는 것보다는
계곡 40도 벼랑에서 보는 모습이 훨씬 장관이다.

▲  40도 벼랑에서 바라본 진관사계곡 최상류와 비봉 능선
마음 같아서는 더욱 깊숙히 파고들고 싶지만 이후는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에
맡기며 여기서 길을 접었다. 다음에 오면 계곡 끝까지 꼭 올라가보리라~~~!

▲  다시 속세로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다. (진관사 앞 길)
이렇게 하여 명품 계곡을 겯드린 진관사 여름 나들이는 다음의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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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숨겨진 은빛 폭포, 북한산 3대 폭포의 하나로 추앙받는 ~~ 북한산 구천폭포 (구천계곡,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일품 폭포, 북한산 구천폭포 '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구천폭포 상단 


 

지구 온난화를 등에 업고 나날이 비대해지는 여름, 그 여름이 한참 기지개를 켜며 무더운
이빨을 드러내던 6월 한복판에 여름 제국(帝國)의 이른 핍박에서 잠시 벗어나고자 북한산
(北漢山, 삼각산) 동쪽 자락에 묻힌 구천폭포를 찾았다.

동그란 햇님이 하늘 복판에 걸려있던 오후 2시, 수유역에서 일행들을 만나 강북구 마을버
스 01번을 타고 4.19국립묘지 윗쪽에 자리한 아카데미하우스<통일교육원, 이준 묘역 입구
> 종점에서 두 발을 내린다. 여기서 구천계곡을 따라 15분 정도 들어가면 피서의 구세주,
구천폭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  대자연이 서울에 내린 크나큰 선물, 북한산 3대 폭포의 하나로
오랫동안 찬양을 받고 있는 구천폭포(九天瀑布)

▲  구천폭포 하단(아랫폭포)

구천폭포를 품은 구천계곡은 북한산 동부를 장식하고 있는 주요 계곡의 하나로 계곡 상류 200
~250m 고지에 북한산 3대 폭포(구천폭포, 동령폭포, 개연폭포)의 하나인 구천폭포가 1폭의 수
채화처럼 도도하게 걸려있다.
이 폭포는 '수도폭포'라고도 하며, 폭포 상단에 '구천은폭(九天銀瀑)'이란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어 그 글씨 그대로 '구천은폭'이라 불리기도 한다.

폭포는 상/중/하단(넓게 나누면 4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
은 하단(아랫폭포)이다. 구천계곡 산길은 폭포 직전에서 2갈래로 갈라지는데, 여기서 직진하면
바로 폭포 하단이며 왼쪽으로 가면 구천폭포의 윗도리와 진달래능선, 북한산성 대동문으로 이
어진다.
누워있는 계곡을 일으켜 세운 듯, 비스듬한 경사의 암벽을 타고 내려오는 폭포의 모습에 '이게
구천폭포야? 장난해??' 다들 실망을 금치 못한다. 허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구천폭포의 맛보기
버전이지 본 모습은 아니다. 그의 실체는 여기서 더 올라가야 나오니 괜히 폭포의 농간에 발길
을 돌리지 말자~~~!

폭포 하단은 높이가 약 20~25m 정도로 폭포를 이루는 암벽은 새하얀 피부를 자랑하며 폭포 앞
에는 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암석과 바위들이 이리저리 널부러져 있고, 폭포 동남쪽에
는 넓은 공터가 있다. 우리는 그 공터에 자리를 잡고 속세에서 가져온 행동식을 섭취했다.
일행들이 가져온 먹거리는 김밥과 떡볶이, 순대, 온갖 과자, 막걸리, 파전, 도토리묵 등 참으
로 다양했다. 버스에서 내려 겨우 15분 정도 올라온 곳이지만 기분은 마치 2시간 이상 올라온
느낌으로 속세보다는 하늘과 조금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모두가 꿀맛이다.
그렇게 폭포 앞에서 푸짐한 행동식에 곡차(穀茶) 1잔 겯드리다가 계곡에 두 손을 담구며 잠시
이른 더위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다. 정말 기분 같아서는 두 발과 몸까지 물에 푹 담구고 싶
었으나 그러지는 못하고 대신 폭포의 상단을 보고자 폭포 암벽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폭포 하단을 이루고 있는 하얀 피부의 암벽은 경사가 완만해 기어오르기는 쉽다. 하지만 파리
가 미끄러질 정도로 미끄러운 구석도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그렇게 폭포 하단을 딛고 올라서
면 폭포의 중단(중간 부분)이다.


▲  구천폭포 중간에서 바라본 하단

▲  구천폭포 중단(중간폭포)

접근성이 쉬운 폭포 하단과 달리 중단(중간 폭포)은 거의 숨겨진 속살이다. 경사 30도의 바위
를 미끄럼틀 삼아 2줄기의 폭포수를 이루며 힘차게 쏟아지는데, 이 폭포는 어디까지나 구천폭
포의 중간이지 본폭포는 아니다. 폭포 주변은 하얀 바위가 암벽을 이루며 은빛 절경을 빚는다.


▲  외부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중간폭포 못
혹시 선녀 누님의 숨겨진 욕탕(浴湯)은 아닐까?

▲  슬슬 꽁무니를 드러내는 구천폭포의 상단(윗폭포)

▲  구천폭포 상단(윗폭포)의 위엄

구천폭포 상단은 구천폭포의 진정한 위엄과 매력을 패기있게 보여주고 있다. 그저 폭포의 아랫
도리만 보고 그것이 구천폭포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서울 부도심에 들어와 서울 전부를 봤
다고 우기는 것과 마찬가지의 오류이다. 폭포는 자신의 준수한 모습을 천하에 보이기가 싫어서
아랫폭포를 내세워 구천폭포의 전부인냥 눈속임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긴 신(神)과 동물 사
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사람들이 잔뜩 몰려와봐야 그저 폭포와 계곡만 괴로우니 그
심정이 십분 이해가 간다.
어쨌든 폭포의 속임수를 간파하고 폭포 옆 산길이나 폭포 암벽을 열심히 발품을 팔면 중간 폭
포가 나오고 그곳을 지나면 바로 이곳의 백미(白眉)인 윗폭포가 수줍은 듯 모습을 드러낸다.

동쪽을 향해 하얀 비단을 늘어트린 듯 장엄한 모습의 폭포 상단은 2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성
나게 쏟아지는 폭포수가 윗도리 중간에서 방향을 꺾어 우렁찬 소리를 지르며 위엄 돋게 쏟아진
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바위와 숲이 죄다 흔들릴 정도이며, 멋모르고 놀러온 귀신과 악귀
도 놀라서 정신줄을 놓을 정도이다. 폭포의 높이는 대략 25m 정도로 상/중/하단을 모두 합치면
대략 60m 정도 된다.
이렇게 잘생기고 장대한 자연산 폭포가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다니 그저 믿기지 않으면
서도 한편으로 정말 영광스럽다. 일행들도 의외에 장소에서 보석을 발견한 듯, 감탄을 하느라
입을 좀처럼 다물 줄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흔히 서울하면 키다리 빌딩과 사람과 차량으로
번잡한 거리만 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서울에 이런 폭포가 버젓히 있으니 놀라 기절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만약 폭포 사진
만 들이민 채, 그의 정보를 말해주지 않으면 다들 강원도나 경기도 동북부, 지방 어딘가의 폭
포로 여길 것이다. 허나 이 폭포는 엄연히 서울에 있다. 서울 도심에서도 무척 가까운 곳에 말
이다.

참고로 서울에는 잘생긴 폭포가 북한산의 품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평창동(平倉洞)에 동령폭
포는 북한산 3대 폭포의 하나로 당당히 꼽히며, 진관사계곡과 삼천리골(삼천사계곡), 불광사(
佛光寺)계곡에 구천폭포 수준은 아니지만 소소한 폭포들이 여럿 널려있다. 그외에 나의 즐겨
찾기 명소의 하나인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 관련글 보러가기)에도 백사폭포(동령폭포)라
불리는 폭포가 있는데 작고 아담한 것이 나름 패기가 있다.


▲  하얀 명주를 늘어트린 듯한 구천폭포 상단의 아랫폭포

▲  윗폭포에 진하게 새겨진 '구천은폭' 바위글씨

윗폭포 상단 우측의 바위 피부를 가만히 살펴보면 왠 한자가 눈에 밟힐 것이다. 모두 4자가 쓰
여 있으나 얼핏 보면 3자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 글씨는 '구천은폭(九天銀瀑)'으로 여기서 은
폭이란 은빛처럼 아름다운 폭포를 뜻한다.
해서체로 쓰인 이 글씨는 17세기 중반, 당대 명필인 이신(李伸)이 쓴 것이라고 전한다. 인조의
3째 아들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수행원으로 따라갔으며, 경희궁(
慶熙宮) 흥화문(興化門) 현판 글씨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글씨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대궐에
쓴 글씨는 밤에도 그 빛이나 어둠을 훤히 밝혔다'고 찬양할 정도였으며, 글씨 외에도 그림과
무예에도 능했다. 그는 이 폭포와도 인연이 있었는지 이렇게 4자를 남겨 폭포에 퐁당퐁당 빠진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하지만 글씨의 위치가 그리 쉬운 자리가 아니어서 어떻게 저런 위치에 글씨를 썼을까 궁금하다.
사다리를 올려놓고 했을까? 위에서 줄을 잡고 내려와 새겼을까? 아니면 폭포를 다녀간 선녀 누
님이나 신선 형님들이 이신의 글씨체를 흉내내서 몰래 한 글자 남긴 것일까? 요즘 같은 세상에
도 저런 자리에 글씨를 새기는 것이 쉽지가 않은데, 장비와 시설이 열악하던 옛날에는 어떻게
했을까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  윗폭포 상단과 구천은폭 바위글씨

※ 구천폭포 찾아가기 (2016년 8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수유역(4번 출구)에서 강북구 마을버스 01번을 타고 아카데미하우스 종점 하차,
  구천계곡 산길을 따라 도보 15분
* 서울역버스환승센터, 남대문시장(4호선 회현역), 대학로(4호선 혜화역), 성신여대입구역(4호
  선), 길음역(4호선)에서 104번 시내버스를 타고 강북청소년수련관 종점에서 하차. 강북구 마
  을버스 01번으로 환승하거나 도보 25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127-1


 

♠  구름을 거닐듯 편안한 숲길,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  녹음이 짙은 흰구름길

구천폭포에서 2시간 정도 신선놀음 못지 않은 시간을 보내다가 아쉬움을 뒤로 하며 다시 아카
데미하우스로 내려왔다. 마음 같아서는 속세를 잠시 잊고 더 머물고 싶지만 이곳이 우리의 전
용 공간도 아닐 뿐더러 우리가 있어야 될 곳은 폭포가 아닌 속세의 한복판이기 때문이다. 아무
리 좋은 자리라고 해도 적당히 머물러야 뒷탈이 없는 법인데, 인간들은 그 쉬운 원칙을 알면서
도 제대로 깨닫지를 못해 늘 욕을 본다.

햇님의 퇴근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고, 날씨도 조금은 선선해져서 구천폭포 입구를 흘러가
는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을 잠깐 거닐기로 했다.
북한산둘레길은 북한산과 도봉산(道峯山), 사패산(賜牌山)의 밑도리를 지나는 21개 구간, 71.5
km의 장대한 산길이다. 이름도 어여쁜 흰구름길(북한산둘레길 3구간)은 이준열사묘역입구에서
북한산과 속세의 경계를 수 차례 넘나들다가 북한산생태숲(성북생태체험관)에 이르는 4.1km 구
간으로 구름을 만날 것 같은 이쁜 길 이름과는 달리 현실은 겨우 해발 100~150m를 왔다갔다하
는 구름도 만질 수 없는 얕은 높이이다. 그러니 괜히 이름에 속지 말자~~!

흰구름길은 북쪽으로 순례길(북한산둘레길 2구간), 서남쪽으로는 솔샘길(둘레길 4구간)과 이어
지며, 그리 각박한 경사가 없는 정말 착한 산길이다. 별로 힘들지 않은 코스라 마실 삼아 가다
보면 길게 잡아도 1시간 20~30분 내외면 완주할 수 있는데, 이 구간에는 화계사, 본원정사(☞
관련글 보러가기), 삼성암 등의 오래된 절과 냉골, 빨래골 등의 계곡, 조병옥(趙炳玉, 1894~
1960)박사묘, 구름전망대 등의 조촐한 명소가 있어 무작정 앞사람 뒷통수만 보며 걸을 것이 아
니라 이들 명소를 제대로 겯드리며 거닐으면 정말 알차고 배부른 둘레길 나들이가 될 것이다.


▲  냉골 (조병옥박사묘 입구)


▲  나무로 지어진 구름전망대

흰구름길 구간에는 냉골(화계사와 본원정사 중
간)이란 깊은 골짜기가 있다. 찻길이 냉골 윗쪽
에 있는 영락기도원까지 나 있어 차량들도 마음
편히 바퀴를 굴릴 수 있는데, 냉골공원지킴터에
서 칼바위능선으로 조금 오르면 현대사의 주요
인물인 유석(維石) 조병옥박사의 묘역이 있다.

또한 화계사 남쪽 산자락에는 속세를 향해 고개
를 쳐든 높은 전망대가 있다. 이 전망대는 둘레
길의 이름을 따서 간단히 구름전망대라 부르는
데, 그렇다고 구름까지 닿는 높이는 아니다. 전
망대 꼭대기까지는 계단이 빙글빙글 늘어져 있
으며, 20m 내외 높이인 전망대 꼭대기에 올라서
면 강북구와 도봉구, 성북구, 노원구를 비롯해
북한산 동부의 주요 봉우리와 도봉산, 수락산(
水落山), 불암산(佛巖山) 등이 거침없이 들어와
조망이 제법 일품이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 동쪽 자락과 도봉산(오른쪽 산줄기)
녹색 물결이 일렁이는 북한산 동쪽 자락, 그 너머로 백운대(白雲臺, 북한산 꼭대기)와
인수봉(仁壽峯)을 비롯하여 북한산 동쪽 봉우리 능선이 두 눈에 들어온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유동, 우이동, 도봉구 지역)
정면 왼쪽에 보이는 산이 도봉산, 오른쪽에 멀리 보이는 산이 수락산이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 강북구, 노원구 지역)
정면에 멀리 보이는 산이 불암산이다. (그 왼쪽이 수락산)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미아동, 월곡동 지역)

▲  숲속으로 인도하는 흰구름길 (화계사 남쪽)
화계사를 끝으로 짧게 진행된 북한산 구천폭포, 흰구름길 초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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