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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8.11 조선시대 공동묘지였던 도심의 달달한 뒷동산, 초안산 (초안산분묘군, 월계동 비석골근린공원)
  2. 2021.07.23 강서구의 상큼한 지붕, 개화산~꿩고개산 나들이 (강서둘레길, 개화산자락길, 신선바위, 미타사, 치현정)
  3. 2021.01.08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한양도성, 남산서울타워, 목멱산봉수대, 백범광장)
  4. 2020.12.10 도심 속의 푸른 공간이자 너른 초원, 올림픽공원~몽촌토성 늦가을 나들이 (나홀로나무, 충헌공 김구묘역, 성내천)
  5. 2020.07.26 서울 서쪽 변두리에 깃든 상큼한 호수공원, 신월동 서서울호수공원 (능골산, 백인의식탁, 몬드리안정원)
  6. 2020.07.09 오산의 꿀단지를 거닐다 ~~~ 보적사에서 독산성, 세마대, 고인돌공원까지 (경기도 삼남길7코스, 금암리지석묘군)
  7. 2020.06.29 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지붕길, 동작충효길 고구동산길~서달산자락길~현충원길 나들이
  8. 2020.04.28 서울 도심에 깃든 상큼한 개나리동산, 응봉산 봄꽃 나들이 (응봉산 개나리, 독서당공원, 살곶이다리, 중랑천)
  9. 2020.02.16 서울 송파에 깃든 옛 한성백제의 장대한 영혼터, 석촌동고분군~방이동고분군
  10. 2019.12.19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달달한 숲길, 인왕산자락길 (청운문학도서관, 청운공원에서 수성동계곡까지)

조선시대 공동묘지였던 도심의 달달한 뒷동산, 초안산 (초안산분묘군, 월계동 비석골근린공원)

서울 도심의 상큼한 뒷동산이자 조선시대 공동묘지, 초안산 나들이 (초안산 분묘군)



' 서울 도심의 상큼한 뒷동산이자 조선시대 공동묘지, 초안산 '

초안산 숲길

▲  봄이 무르익은 초안산 숲길

초안산의 조선시대 무덤들 비석골근린공원

▲  초안산 조선시대 분묘군

▲  비석골근린공원



 

봄이 한참 무르익던 4월 한복판의 어느 화창한 날, 집에서 무척 가까운 초안산(楚安山)을
찾았다.

초안산(114.1m)은 도봉구 창동(倉洞)과 노원구 월계동(月溪洞)에 걸쳐있는 야트막한 뫼로
내가 서식하고 있는 도봉구(道峰區)의 남쪽 끝을 붙잡고 있다. 모래와 진흙으로 이루어진
흙산으로 산세는 아주 느긋하며, 서쪽에는 우이천(牛耳川)이, 동쪽에는 중랑천(中浪川)이
흘러 마치 산을 둘러싸고 도는 모습이다. 그러다보니 동쪽과 서쪽은 자연히 배산임수라는
착한 지형을 띄면서 무덤이나 마을, 집 자리로는 아주 그만이다. 그래서 초안산 주변에는
안골, 녹천, 벼루말, 각심사 등 여러 마을이 둥지를 틀었다. (현재는 개발의 칼질에 모두
날라가 이름만 희미하게 남아있음)
또한 조선시대에는 한양도성 밖 10리 안<성저십리(城底十里)>에는 대놓고 무덤을 닦을 수
가 없어 천상 도성 10리 밖에 무덤을 써야 했는데 배산임수의 조건을 지닌 초안산이 10리
밖에서 가장 가까운 것이다. 그런 조건들이 묘하게 맞아 떨어져 구파발의 이말산(莉 茉山)
과 더불어 서울 사람들의 공동묘지가 되었다.

이곳에는 양반사대부부터 내시, 상궁, 중인,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이 신분을 초
월하며 묻혀 있는데, 지금까지 확인된 조선시대 무덤만 1,100여 기에 이르러 천하 최대의
조선시대 공동묘지를 이루게 되었다. 산 전체가 거의 무덤밭인 것이다. (무덤은 20세기까
지 들어섰음) 초안산이란 이름도 죽은 이들의 편안한 안식처를 정한다는 뜻이니 그야말로
이곳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라 하겠다.
비록 서울 지역 최대의 조선시대 공동묘지란 조금은 후덜덜하고 우울한 성격을 가지고 있
지만 그 덕에 2000년 이후 조금씩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조선시대 무덤 양식과 변천
을 한 자리에서 더듬을 수 있는 소중한 현장으로 뒤늦게 인정을 받으면서 '서울 초안산분
묘군'이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 440호로 지정되었다. <산 전체가 아닌 무덤이 몰려있는 곳
들이 사적으로 지정됨, 사적으로 지정된 면적은 319,503㎡>
초안산에 안긴 무덤 가운데 내시 무덤이 무려 100여 기에 이르러 '내시산(內侍山)','내시
네 산'이란 별명도 지니고 있다. 그들의 무덤은 거의 서쪽(서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
는 그들이 일했던 궁궐과 충성을 바쳤던 제왕이 서쪽<정확히는 서남쪽~>에 있어 죽어서도
그 일편단심을 보이고자 함이라 한다.

그렇게 산을 가득 뒤덮은 무덤들은 아쉽게도 예안이씨묘역(정간공 이명 묘역) 등 극히 일
부를 제외하고 관리 소홀과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사람들의 못된 손장난 등으로 적지
않게 고통과 파괴를 당했다. 하여 형체를 온전하게 남긴 무덤은 별로 없으며 문인석과 상
석, 묘표 등 석물만 일부 남아있거나 납작해진 봉분이 고작인 무덤이 태반이다. 그러다보
니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이 태반이다. 
다행히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나라와 관할 구청(도봉/노원구)의 보호를 받게 되어 고
통도 많이 줄었지만 워낙 무덤이 많다보니 그 관리도 여간 어렵지가 않다.

초안산은 북한산(삼각산)까지 산줄기가 이어져 있었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이 그 주변을
마구 들쑤시면서 서로 끊긴 상태이다. (산줄기의 윤곽만 남아있음) 게다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인 1971년 '초안산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었음에도 행정관청의 오랜 무관심과 관
리 소홀로 적지 않은 살을 인간에게 내주면서 그 영역도 많이 줄어들었다. 다행히 서울시
가 늦게나마 정신을 차리면서 1990년대 후반부터 자연의 기운이 많이 살아났다.
그 결과 맹꽁이, 무당개구리, 청개구리 등 다양한 양서류와 파충류가 안기는 공간이 되었
으며, 2006년에는 서울에서 최초로 멸종위기종인 표범장지뱀이 발견되기도 했다. 도시 한
복판에 외로이 자리한 초안산에서 말이다. 또한 2012년에는 생태계 복원 차원에서 두꺼비
, 도룡뇽, 산개구리 등 3종 1,500여 마리를 방사하기도 했다.
한때 골프연습장이 이곳에 숟가락을 얹히고자 난리법석을 피우기도 했으나 지역 주민들의
노력으로 산을 지켰다. 그만큼 창동, 월계동 사람들의 소중한 쉼터이자 꿀단지로 뿌리 깊
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초안산은 녹천역(1호선)과 창동주공3단지, 창동주공4단지, 도봉문화정보도서관 서쪽 생태
다리, 창3동어린이집, 초안1단지아파트, 비석골근린공원, 청백1단지, 초안산체육공원에서
올라가면 된다. 정상까지는 넉넉잡아서 15~30분 정도 걸리며, 창동주공3단지에서 오를 경
우에는 30~40분 정도 잡으면 된다.

초안산에는 조선시대 무덤군을 비롯해 비석골근린공원과 각심재, 정간공 이명 묘역, 허공
바위, 잣나무숲, 세대공감공원, 초안산공원캠핑장 등의 명소가 있으며 축구장과 배드민턴
장 등의 체육시설도 닦여져 있다.
아직까지는 인지도가 낮아 지역 사람들이 주로 찾는 쉼터이자 명소로 머물러 있으나 주머
니 속의 뾰족한 송곳처럼 언젠가는 서울의 잘나가는 명소로 거듭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다. 게다가 늙은 무덤들이 산자락과 산길 도처에 헝클어진 모습으로 흩어져 있으니 내 염
통 상태도 체크하고 소소하게 납량특집도 즐길 겸, 한여름 밤에 야간 산책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달님도 등을 돌린 어둑어둑한 밤이면 효과가 더 좋을 듯 싶다. 혹시 아는가 무덤
이나 문인석 등에서 귀신 형님이나 누님이 확 튀어나와 반가이 맞이해줄지도??


▲  녹천역에서 초안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



 

♠  초안산 둘러보기 (녹천역에서 정상 주변까지)

▲  봄이 시정(詩情)을 뿌리는 초안산 산길 (녹천역에서 정상 방향)

녹천역(1호선) 1번 출구를 나오면 초안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손짓을 한다. 경사도 느긋하여
그리 힘든 것은 없으며, 개나리와 진달래, 벚꽃은 다양한 색채로 봄 풍경의 아름다움을 돕고
나무들은 녹색 옷을 걸치며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들이 없다.
봄이 겨울 제국(帝國)을 힘겹게 몰아내고 따스한 기운으로 천하를 해방시키니 세상만물의 찬
양과 우러름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그 봄이 너무 짧다는 것. 봄이 되기가 무섭게 겨
울에 상반되는 여름 제국이 천하를 삼키니 말이다.


▲  느긋한 산길의 정석, 초안산 산길 (녹천역에서 정상 방향)

▲  초안산 북쪽 능선길 ▼

녹천역에서 초안산 정상으로 오르는 산길에는 오래된 무덤이 없다. 중간에 생태공원으로 거듭
난 세대공감공원과 창동4단지로 내려가는 산길이 실핏줄 만큼이나 복잡하게 엉켜 있으며 이정
표가 많이 부실하여 잘 골라서 움직여야 된다.


▲  초안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 초안산 정상

녹천역에서 20분 남짓 오르니 드디어 초안산 정상(114.1m)에 이르렀다. 정상에는 삼각점과 태
극기, 정자, 헬기장 등이 있는데, 나무가 울창하여 조망은 별로이며 나지막하게 누운 뫼의 꼭
대기라 그런지 마치 고양이가 주인 배 위에 올라가 야옹거리며 두리번거리는 기분이다.

여기서 길은 여러 갈래로 갈리는데, 동북쪽은 녹천역과 창동4단지, 서북쪽은 도봉문화정보도
서관과 창1동, 창3동, 서남쪽은 창3동, 남쪽은 매봉과 월계동이다. 초안산의 오랜 문신이나
다름없는 조선시대 무덤을 보려면 서북쪽과 서남쪽, 남쪽으로 내려가면 되며 정상 남쪽 헬기
장 부근부터 무덤의 흔적들이 초췌한 모습으로 마중을 나온다.

▲  정상에 자리한 4각형 정자

▲  'H'마크가 박힌 헬기장


▲  헬기장 남쪽에 자리한 무덤 2기와 묘비

헬기장 남쪽 산길 옆에는 무덤 2기가 납작하게 누워 있다. 이들은 원래 저거보다 더 컸지만
후손들의 손길에서 벗어난 이후, 대자연과 장대한 세월의 의해 저런 몰골이 되버렸다. 하긴
천하에 어느 누가 대자연과 세월을 이기겠는가?
주변에 비석과 비석을 세우던 비좌(碑座) 등이 널려있어 얼핏 봐도 무덤 티가 나는데, 묘비와
비좌는 제자리를 약간 벗어나 무덤 옆과 뒷쪽에 널부러져 있다.

▲  무덤 뒷쪽에 누운 비좌
비좌에 의지했을 비석은 온데간데 없고,
그 빈자리에는 빗물이 고여 있다.

▲  헬기장 부근에 외로이 서 있는
문인석 1기


▲  헬기장 남쪽에 있었던 체육시설 (2015년)

헬기장 남쪽에는 체육시설과 너른 공터가 있다. 이 주변에는 자연의 일부로 동화된 무덤의 흔
적과 문인석이 적지 않게 방황하고 있어 무덤이 여럿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초안산의 옛
무덤에 대한 인식이 바닥이었던 20세기 중~후반, 동네 사람들이 그들을 밀어내고 체육시설을
닦았고 상태가 괜찮은 문인석을 주위에 갖다 놓아 이곳의 장식물로 삼았다.
이처럼 무덤 문인석으로 주변을 치장한 체육시설은 천하에서 이곳이 유일할 것인데, 다행히도
근래에 무덤 유적 보호를 위해 배드민턴장을 밀어버렸으며, 지금은 체육시설 일부가 남아있다.


▲  초안산 정상에서 창3동으로 내려가는 산길
이 산길 주변에도 무덤들이 많다.

▲  무덤 봉분(封墳)은 대자연의 의해 완전 가루가 되었지만 상석과
향로석, 혈(穴)에 해당되는 봉분 뒷쪽은 그런데로 남아있다.



 

♠  초안산 서남쪽 둘러보기 (창3동 구역)

▲  창3동 산자락에서 만난 무덤 3기

초안산 창3동 구역에는 늙은 무덤이 많다. 산자락은 물론이고 산길에도 세월의 무게로 납작해
진 무덤이 널려있어 한밤에 오면 정말 기분이 오싹해질 정도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시 초안
산 분묘군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초안산에 깃든 무덤 가운데 가장 늙은 것은 좌의정을 지낸 이명(李蓂, 1496~1572)의 무덤이다.
그의 묘는 월계동 예안이씨 묘역(각심재 주변)에 있는데, 예안이씨 외에 밀양박씨(창3동 지역
), 태안이씨(창3동 지역) 묘역 등 3개의 사대부 집안 묘역이 초안산에 둥지를 틀고 있다. 그
들은 후손들의 보살핌이 각별하여 무덤 상당수가 양호하게 남아있다.
이들 외에는 내시, 상궁, 중인, 서민들의 무덤으로 산 곳곳에 흩어져 있는데, 상당수는 관리
의 손길이 끊겨 초췌한 몰골이다. 특히 100여 기에 이르는 내시 무덤 중에는 김계한(金繼韓,
?~1624)과 김광택(金光澤)의 묘가 제일 오래되었으나, 1993년 김계한의 13세손이 경기도 양주
시 광적면 효촌리로 이장시키면서 이제는 인덕대학 뒷쪽 매봉에 자리한 승극철(承克哲) 부부
묘가 제일 늙은 내시의 무덤이 되었다. 묘비에 의하면 1634년에 조성되었다고 나온다.

현재까지 산에서 확인된 오래된 무덤은 2000년 기준으로 1,154기로 상석 511기, 향로석(香爐
石) 210기, 석인상 169기, 묘비 182기, 비석 대좌 123기, 망주석(望柱石) 58기, 초석 2기, 장
명등 1기이다. 하지만 아직도 땅 속에 잠긴 묘와 석물이 적지 않아 그 갯수는 계속 변동된다.
상황이 이리된 것은 후손에게 버려진 묘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그런 묘들은 대자연과 몰지각
한 인간들의 희롱으로 대부분 우울한 몰골이 되기 일쑤이고 심지어 도굴까지 당한 무덤도 적
지 않다.

높은 사람들이나 쓸 수 있던 신도비(神道碑)는 앞서 언급한 집안 묘역에 조금 있고, 그 외의
무덤은 묘표(墓表, 묘비)를 지녔다. 묘표는 15세기 형식인 하엽방부형(荷葉方趺形)은 일부이
고, 17~18세기 형식인 원수방부형(圓首方趺形)의 묘표가 대부분이다. 특히 방형(方形)의 비대
만 남은 것이 많은데 윗면에는 연판문이나 당초문(唐草紋), 옆면에는 안상문이나 운문(雲紋)
을 새기거나 아무 문양도 없는 것이 많았다. 이는 중인과 내시, 상궁, 서민의 무덤이 많기 때
문으로 풀이된다.

남아있는 석인상은 3대 가문 묘역을 비롯해 적지 않게 흩어져 있고 쌍계를 갖춘 동자석(童子
石)도 많다. 이들 석인은 대부분 17~18세기 것으로 18세기 중반 이후 사실주의 양식의 석물도
적지 않아 무덤 석물의 변천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상석(床石)은 장방형의 상석 받침을
지닌 형태거나 향로석이 상석 받침과 연결되어 겸용으로 만들어진 형태가 많다. 이러한 석상
의 형식은 17세기 이후에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상석 받침과 겸용으로 만든 향로석은 18세기
이후 초안산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들 석물을 통해 빠르면 15세기에 무덤이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17~18세기에 폭발적으로 늘
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 넓지 않은 산에 무덤이 마구 들어서니 자연히 묘역 구성은 간소
한 밀집형이 주류를 이루며 석물들은 단순하고 실용적인 형태로 제작되었다.

이곳은 특히나 내시묘가 많이 분포하고 있는데, 조선 제일의 법전(法典)인 경국대전(經國大典
)에 내시의 묘는 도성 10리 밖에 두라는 규정이 있어 그거에 맞는 이곳과 구파발 이말산(莉茉
山)이 무덤 자리로 격하게 선호되었다.
초안산에 안긴 1,100여 기의 무덤들은 '서울 초안산 분묘군'이란 이름으로 사적 440호로 지정
되었으며, 조선 중/후기에 걸쳐 긴 시간에 조성된 조선시대 공동묘지로 비록 상태가 양호한
석물은 별로 없으나 나름대로 무덤과 석물의 변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초안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1동, 창3동 / 노원구 월계2동
* 초안산 분묘군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산202-1, 노원구 월계동 산8-3번지 등


▲  문인석과 동자석까지 갖춘 무덤들 - 이들은 사대부의 무덤으로
무덤의 상태는 그런데로 양호하다.

▲  오랜 세월 표정을 잃지 않으며 주인
무덤을 지키는 문인석의 일편단심

▲  비석과 상석, 동자석을 갖춘 무덤
비석에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라 쓰여있어
통정대부로 추증된 이의 무덤임을 알려준다.

▲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 무덤 앞에
자리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무덤

▲  산자락에 가득 깔린 옛 무덤의 물결


▲  봄이 곱게 붓질을 한 생생한 수채화, 창3동 주택가와 초안산 경계선

▲  창3동 주택가에서 초안산으로 오르는 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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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안산 창3동 산자락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가까이에 창3동 지역을 비롯해 쌍문동(雙門洞)과 수유동(水踰洞) 지역이
낮게 바라보인다. 그들 너머로 보이는 장대한 산줄기는 서울의 듬직한
진산(鎭山)인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이다.

▲  초안산 창3동 산자락에서 바라본 북한산의 위엄
북한산(삼각산) 인수봉과 백운대, 만경대 등이 거뜬히 시야에 잡힌다.
그만큼 이곳과 저곳은 가깝다.

▲  봉분은 사라지고 석물만 남은 무덤 ①
인간이 빚은 봉분은 사라지고 감쪽같이 대자연의 일부로 녹아들어 나무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결국 무덤도 인생처럼 부질 없는 것이다.

▲  봉분은 사라지고 석물만 남은 무덤 ②

▲  봉분은 사라지고 석물만 남은 무덤 ③

▲  봉분은 사라지고 상석만 덩그러니
남은 무덤 3기

▲  고된 세월에 지쳐 쓰러진 망주석
하늘을 향해 우뚝 섰던 망주석은 땅바닥에
쳐박혀 산길의 일부가 되었다.


▲  창3동 산자락의 작은 소나무숲

▲  소나무숲에 이리저리 뒹굴고 있는 무덤 상석들
이곳에는 상석을 갖춘 무덤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소나무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  마치 칼질을 당한 듯, 윗도리가 잘려나간 가련한 문인석

▲  산길의 일부가 되버린 무덤의 비애
봉분은 말끔히 파괴되어 겨우 흔적만 남아있고, 누렇게 뜬 낙엽이 그 자리에 한가득
쌓여 허전함을 달래준다. 무덤 주변에는 문인석 1기와 윗도리만 겨우 남은
상석이 제자리를 지켜 이곳에 무덤이 있었음을 강하게 어필한다.

▲  피부가 누렇게 뜬 비석(묘표)
피부가 손상되어 글 해독이 불가능하다.

▲  세월에 지쳐 쓰러진 비석이 상석을
베게 삼아 하늘을 바라본다.



 

♠  초안산 동남쪽 둘러보기 (월계동 구역)

▲  초안산 정상에서 비석골근린공원으로 내려가는 산길

초안산 정상에서 남쪽 길로 내려가면 월계동 청백1단지와 비석골근린공원으로 이어진다. 이
구간에도 늙은 무덤이 적지 않게 흩어져 있는데, 4각형 정자 쉼터에 이르면 산길 동쪽으로 철
조망이 빙 둘러져 있다. 그 안쪽은 예안이씨 땅으로 정간 이명을 중심으로 한 예안이씨 묘역
이 둥지를 틀었다.

▲  산길에 널부러진 상석들

▲  수풀에 파묻힌 고적한 상석


▲  파괴된 무덤에 남아있는 조그만 문인석과 상석 (바로 옆이 산길)
문인석이 상석보다 작은 경우는 처음 본다.

▲  4각형 정자 쉼터 (왼쪽 철조망 너머가 예안이씨 묘역)

▲  장대한 세월을 예민하게 탄 시커먼 피부의 문인석
무덤은 사라지고 문인석만 남아 있는데, 자신의 우울한 처지에
너무 울었던 탓일까? 얼굴이 거의 지워졌다.

▲  숲속에서 숨바꼭질을 당하고 있는 상석과 묘표

▲  세월의 때가 진하게 낀 검은 피부의 묘표와 상석
무덤 봉분은 진작에 녹아 없어지고 그 자리에 산길이 뚫렸다. 무덤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무덤 자리를 밟고 지나가니
저 세상에서도 속이 편치 않을 것이다. '내가 이럴려고 무덤을
썼나~~!' 자괴심이 들 정도로 말이다.

▲  산비탈의 일부가 되버린 무덤 (묘표와 상석)

▲  월계고등학교 뒷쪽 숲길 (비석골근린공원 부근)

▲  비석골근린공원 서쪽 산자락에 안긴 옛 무덤들 (내시묘로 추정됨)



 

♠  초안산 비석골근린공원과 궁중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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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석골근린공원 내부 ▼

초안산 남쪽 끝에는 비석골근린공원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염광여자메디텍고등학교와
월계고등학교 사이로 비석이 많다고 해서 비석골이라 불렸는데, 그 비석이란 다름 아닌 초안
산에 널린 묘표(묘비)들이다.

이곳은 초안산을 비롯해 노원구 곳곳에서 수습된 문인석과 동자석, 묘표를 옮겨와 보존하고
있다. (공원 주소가 '노원구 월계동'이라 노원구 석물만 있음) 그래서 자연히 문화유산을 겯
드린 상큼한 시민공원이 되었는데, 매년 4월 하반기에는 '임금님과 충신의 만남이 시작된다'
는 주제로 '태강릉 • 초안산 궁중문화제(이하 궁중문화제)'가 열린다.
궁중문화제는 딱히 축제가 없어 애를 태웠던 노원구청이 개최하는 지역 축제로 태강릉(泰康
陵, 중종의 왕후인 문정왕후 윤씨의 능인 태릉, 명종과 인순왕후 김씨의 능인 강릉>
과 비석골
근린공원 일대에서 열리는데, 태강릉은 제왕과 왕후의 지체높은 무덤이고 초안산은 궁궐에서
일했던 내시와 상궁들이 많이 묻혀있으니 이들을 하나로 묶어 궁중문화제란 그럴싸한 행사를
지어낸 것이다.

이 행사에는 어가행렬과 다양한 전통체험, 안골 치성제, 음악회, 포토존, 장터 등이 열리는데
, 내가 이번에 초안산을 찾은 이유 중의 하나도 궁중문화제를 약간이나마 맛보기 위함이다.
허나 내가 도착한 시간은 벌써 17시, 행사도 완전 끝 무렵에 이르러 음악 공연의 끝부분과 약
간의 전통 체험만 남아있던 상황이었다.


▲  신명나는 궁중문화제 음악 공연 (통기타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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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철수해버린 관상보기 체험장
나는 과연 무슨 상일까? 물론 관상이나 손금, 사주는 100% 믿으면 곤란하다.

▲  역시나 텅 비어버린 초안산 안골치성제 천막

서울 도심과 한참이나 떨어진 초안산, 1980년대까지만 해도 안골, 녹천(鹿川), 각심절, 벼루
말 등의 오래된 마을이 있었으나 1990년대 이후 불어닥친 개발의 칼질로 죄다 사라지고 그 이
름마저도 이제 희미해져 기억 속으로 꼴까닥하기 직전이다. 그나마 녹천역 남쪽에 있던 녹천
마을이 시골 풍경을 간드러지게 드러내며 늦게까지 자리를 지켰으나 자비 없는 개발의 칼질에
결국 2015년에 역사의 뒤안길로 강제 퇴장당하고 만다.

옛날 마을에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 의식이 하나씩은 있었다. 치성제나 당제(堂祭)
등 이름은 틀리지만 본질은 비슷한 마을 제사로 안골 역시 치성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단
합을 도모했다. 안골 치성제는 조선 초기 이후부터 전래된 것으로 소 1마리가 7개의 칼을 맞
고 쓰러져 있던 것을 잡아서 안골, 각심사(각심절), 벼루말 사람들이 매봉 남쪽 허공바위에서
제를 지내니 그것이 안골 당제(치성제)의 시초라고 한다.
그 사연으로 제를 지낼 때는 꼭 7개의 식칼을 놓는다. 왜 하필이면 7개의 칼을 맞은 소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름 상서로운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소만 불쌍함;;)

옛날에는 소 1마리를 통째로 잡아서 제를 지냈으나 20세기 이후 약식으로 지내고 있으며 제각
(祭閣)을 두어 제사 도구를 보관하고 음식을 준비했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고 말았다.
제는 1년에 3회를 지냈는데, 2월 초하루는 통합적으로 제를 지냈고, 6월 초하루는 할머니산제
라하여 간소하게 소 내장을 갖추어 지냈으며, 10월 초하루에는 소를 통째로 잡아서 지냈다.
제주(祭主)는 마을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나이 많은 남자를 뽑았는데, 3일간 바깥 출입을 금
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제를 준비했다.

허나 1980년대 이후 개발의 칼질로 마을이 강제로 사라지면서 마을 사람 대부분은 다른 곳으
로 가버리고 9대째 안골에 살고 있는 박점순 할머니가 마을 제사를 지키고 있어 다행히 치성
제 전통은 유지되고 있다. 요즘은 10월 초하루에만 제를 지내며 그날이 되면 각지에 흩어진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허공바위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제단에는 대추, 밤, 사과의 3색 과일
과 생소고기를 올리고 향과 초를 켜 옛날부터 전해오던 식칼 7개와 놋숟가락을 놓는다.


▲  비석골근린공원을 장식하고 있는 문인석과 망주석들 ▼

공원 한쪽에는 문인석 13기가 무리지어 있다. 이들은 염광학원과 옛 경춘선 철로변, 영축산(
靈鷲山), 수락산(水落山)에서 가져온 것으로 16~19세기에 조성된 것들인데 세월의 때를 진하
게 탄 문인석부터 피부가 하얀 문인석까지 다양한 모습들이라 문인석의 변천 과정을 살피기에
는 아주 좋은 곳이다.


▲  서로 상반된 피부 색깔을 지닌 문인석들

▲  망주석들 - 염광학원과 불암산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  키 작은 동자석들 - 염광학원과 영축산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  빛바랜 묘표(묘비)와 하얀 피부의 상석, 향로석
비석이 너무 낡아서 글씨는 확인할 수 없다. 저들을 거느리던 봉분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저들만 겨우 남아 공원에 안착했다.

▲  비석골근린공원에서 시내로 나가는 길 (초안산로5길, 청백3단지 옆)

축제 막바지라 짐싸기 바쁜 비석골근린공원을 벗어나 초안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각심재(恪心
齋)와 정간 이공묘를 찾았다. 허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보수 공사 중이라 온 몸을
가리고 있었다. (정간 이공 묘역과 신도비도 접근이 통제된 상태)
그래서 별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굳이 무리를 하면서까지 사진에 담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
다. 어차피 내 서식지와도 가까운 곳이니 그들의 몸단장이 끝난 이후에 다시 인연을 지어도
상관 없다.

이렇게 하여 초안산 봄나들이는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 채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비석골근린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월계동779 (월계로45가길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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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구의 상큼한 지붕, 개화산~꿩고개산 나들이 (강서둘레길, 개화산자락길, 신선바위, 미타사, 치현정)

강서구 개화산 (강서둘레길, 미타사, 치현산)



' 강서구의 상큼한 지붕, 개화산 나들이 '
(강서둘레길, 미타사, 꿩고개산)

  신선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미타사 석불입상

▲ 신선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 미타사 석불입상

▶ 개화산 호국공원(호국충혼비)

개화산 호국공원 (호국충혼비)


 


서울 서쪽 끝에 솟은 개화산(開花山, 128m)은 강서구(江西區)의 상큼한 지붕이자 김포국
제공항의 뒷동산이다.
동쪽에 솟은 치현산(꿩고개산)까지 개화산의 영역으로 북쪽은 한강과 맞닿아 있으며, 동
/서/남은 평지로 비록 산은 작으나 평지 속에 홀로 솟은 잇점으로 낮은 키에 비해 조망(
眺望)이 아주 좋다. 게다가 산세도 느긋하고 숲도 무성해 거닐기에 좋으며, 약사사와 미
타사 등의 오래된 절과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신선바위, 봉화대, 개화산호국공원, 치
현산(꿩고개산) 등의 다양한 명소들, 그리고 강서둘레길과 개화산자락길 등의 일품 숲길
까지 넉넉히 품은 알찬 뫼이다. 그러다보니 그의 매력에 일찌감치 녹아들어 매년 1번 이
상은 꼭 발걸음을 한다.

개화산의 옛적 이름은 주룡산(駐龍山)이라고 한다. 신라 때 주룡이란 도인(道人)이 이곳
에 살았는데, 매년 9월 9일에 친구(또는 동자)들을 데리고 정상에 올라가 술을 마셨다고
한다. 이것을 '9일용산음(九日龍山飮)'이라 불렀는데, 그가 세상을 뜨자 9월 9일마다 술
을 마시던 자리에서 이상한 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또는 그가 죽은 자리에서 꽃이 피어
났다고 함)
그래서 그 터에 절을 세워 꽃이 열린다는 뜻의 개화사(開花寺, 현 약사사)라 했으며, 그
개화사가 있는 산이라 해서 개화산으로 이름이 갈렸다고 전한다. 또한 산의 모습이 꽃이
피는 형국이라 개화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불을 피운다
는 뜻의 개화산(開火山), 봉화뚝이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한다.
그리고 강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과 궁산 양천고성(陽川古城)터와 더불어 한강 하류를
지키는 요충지로 개화산 정상과 꿩고개산 정상에 봉화대를 설치해 변경의 소식을 남산으
로 전달했으며, 6.25때는 치열한 격전지이기도 했다. 특히 양천읍지(陽川邑誌)에는 개화
산이 코끼리, 행주산(幸州山, 행주산성)이 사자의 형상으로 이들이 서해바다에서 들어오
는 액운을 막고, 서울에서 흘러나가는 재물을 걸러서 막아주는 사상지형(獅象之形)으로
크게 소개하고 있다.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선인 계절의 여왕 한복판에 찾은 이번 개화산 나들이는 약사사(
藥師寺)에서 시작해 개화산자락길과 강서둘레길1코스, 신선바위, 미타사를 거쳐 치현산(
꿩고개산)까지 싹 둘러보며 개화산을 철저히 복습했다.



 

♠  개화산 둘러보기 (개화산전망대에서 호국충혼비까지)

▲  약사사에서 개화산전망대로 이어지는 개화산자락길
약사사에서 느긋한 산길을 따라 5~6분 가면 개화산전망대가 모습을 비춘다.


▲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개화산해맞이공원 개화산전망대

약사사 북쪽이자 개화산 북쪽 능선에 개화산전망대가 조촐히 터를 닦았다. 2011년 5월 근교산
환경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는데, 한강과 방화대교를 비롯해 하늘공원과 은평구, 서대
문구, 마포구 지역, 남산, 북한산(삼각산), 가양동 지역이 두 눈에 바라보여 낮은 높이에 비
해 조망의 가성비는 높다.
또한 이곳은 동쪽으로 시야가 트여있어 해맞이에 최적화된 곳이라 개화산해맞이공원이란 이름
으로 살아가고 있다.


▲  개화산전망대에 설치된 겸재 정선의 그림 설명문 ①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은 1740년부터 5년 동안 조선에서 제일 작은 고을, 양천현(
陽川縣)의 현령(縣令)을 지냈다. 그는 양천(서울 강서구, 양천구, 영등포구, 김포시 일부)의
명소를 아낌없이 그림으로 남겼는데, 이들 그림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과 양천8경첩(陽川
八景帖)에 실려있어 무척이나 많이 변한 양천 지역과 한강(염창동~행주산성 구간)의 옛 모습
을 조금이나마 붙잡고 있다.

개화사(약사사)는 벗인 이병연(李秉淵)의 소개로 찾았다가 그곳 경관에 감탄하여 그림으로 남
긴 것이다. 하나는 한강에서 바라본 시점, 다른 하나는 동쪽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린 것이
특징이다.
낙건정(樂建亭)은 당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김동필(金東弼, 1678~1737)의 별서(別墅,
별장)인 낙건정을 그린 것으로 한강 북쪽 덕양산(행주산) 자락에 있었다. 그리고 행호관어(杏
湖觀漁)는 행호(행주산 주변 한강) 주변을 담은 것으로 지금이야 그저 그런 곳이지만 그때는
양반, 귀족들의 별서/유람 장소로 인기가 높았다.


▲  개화산전망대에 설치된 겸재 정선의 그림 설명문 ②

소악후월(小岳候月)은 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거나 살핀다는 뜻이다. 소악루(小岳樓)는 양천
고을의 중심지였던 가양동의 뒷산, 궁산(宮山) 동쪽에 있었는데, 왼쪽 하단에 소악루를 두고
탑산과 두미암, 선유봉, 와우산, 잠두봉(蠶頭峰, 절두산성지) 등의 경강(京江) 서쪽 명소를
담았다. (현재 소악루는 궁산에 복원되어 있음)

금성평사(錦城平沙)는 양천(가양동)에서 바라본 난지도(蘭芝島)를 담은 것이다. 서울의 쓰레
기장이 되기 전에는 홍제천과 불광천이 물머리를 맞대고 들어오는 너른 저지대로 한강의 폭이
넓어져 경치가 꽤 좋은 곳이었는데, 지금은 그 쓰레기를 딛고 하늘공원과 월드컵공원이란 거
대한 자연공원으로 거듭났다.

목멱조돈(木覓朝暾)은 목멱산(남산)에서 아침 해가 떠오른 모습을 담은 것으로 양천에서 바라
본 기준으로 그려진 것이다. 남산 앞에는 만리동고개, 애오개(아현동), 노고산(老姑山) 등이
그려져 있다.


▲  개화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방화대교와 하늘공원(난지도), 고양시 화전 지역, 서울 서북부를 비롯해
멀리 북한산(삼각산)과 남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  개화산전망대 주변 (개화산해맞이공원)
이곳에 있는 헬기장과 군사시설은 군사 훈련과 예비군 훈련용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니 이들 시설은 건드리면 안된다.


▲  재현된 개화산 봉수대(烽燧臺)

조선은 총 5개의 봉수 노선<거로(炬路)라고 함>을 운영했다. 개화산봉수대는 전남 순천(順天)
에서 시작되어 서울 남산 제5봉수대에서 끝을 맺는 5번째 거로로 김포 북성산(北城山) 봉수대
에서 봉수를 받아 남산 제5봉수대로 넘겼다.

개화산봉수대는 원래 개화산 정상에 있었다. 이곳 외에도 동북쪽 꿩고개산(치현산) 정상에도
하나 더 있었는데, 이를 개화산 제2봉수대라 부른다. 이들 봉수대는 1950년대까지 있었으나
6.25 시절, 군부대가 정상 주변에 주둔하면서 싹 밀어버리고 말았다. 하여 지금은 자리만 겨
우 확인할 수 있는 정도로 기와조각과 백자 파편, 도기 파편 등이 여럿 수습되었으며 1994년
11월 개화산 봉수대터에 표석을 세웠다.

개화산은 한자만 달리하여 개화산(開火山)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는 개화산봉수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행주산성, 양천고성(가양동)과 함께 한강 하류를
지키던 군사적 요충지로 임진왜란 시절 행주산성을 지원하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지금까지 군부대가 쭉 주둔하면서 그 역사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강서구청에서 개화산 봉수대를 복원하고자 이
미 복원된 남산 봉수대와 안산 봉수대, 봉화산
(烽火山) 봉수대를 참조하여 2013년 11월에 재
현을 했는데 원래 자리가 금지된 구역이라 북
쪽으로 250m 떨어진 봉화정 맞은 편에 세웠다.
높이 2m, 둘레 4m 규모의 봉수대 2개를 지었는
데, 옛날처럼 불을 피울 일도 없고 어디까지나
모형일 뿐이라 딱히 볼품은 없으며, 나중에 개
화산 정상이 해방되면 그곳으로 옮겨져 크게
손질될 것이다.

▲  봉수대 맞은편에 자리한 봉화정(烽火亭)


▲  상사마을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16-1호

봉화정에서 문득 생각나는 곳이 있어서 개화산숲길을 잠시 접고 강서둘레길 3코스(개화산전망
대↔서남환경공원 북쪽, 4.56km)를 따라 상사마을로 내려갔다.
상사마을은 개화동 북쪽 끝이자 개화산 북서쪽에 자리한 시골 마을로 북쪽에는 행주대교와 한
강이 있고 동쪽은 마을을 포근히 감싼 개화산, 남쪽에는 부석마을과 내촌마을, 서쪽에는 김포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여기서 행주대교와 이어지는 서쪽 도로(개화동로)를 넘어가면 경
기도 김포시임>

마을에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으며, 부석마을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마
을이다. <예전에는 김포공항 서쪽 평야 한복판에 자리한 과해동(果海洞)이 서쪽 끝을 이루었
으나 김포공항 확장으로 마을이 철거됨> 마을 동쪽 끝에는 개화산의 품으로 들어가는 산길이
있으며, 그 앞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마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1971년에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그때 추정 나이가 약 410년이었다. 그
러니 그새 50여 년이 강제로 얹혀져 460년 정도의 적지 않은 나이를 지니게 되었다. 높이 22
m, 둘레 4.45cm로 상사마을이 적어도 400~500년 정도 되었음을 보여주는 산증인인데, 은행나
무는 스스로 싹을 틔우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사람들이 심은 것이다. 그러니 이 나무도
당시 마을 촌장이나 선비가 심었을 것이다.
나무 옆에는 상은약수터가 있으나 이미 옛날에 숨통이 끊겨 물이 마른지 오래되었으며, 지금
은 마을 창고로 쓰여 이곳이 예전 약수터였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  상사마을에서 개화산으로 올라가는 산길 (강서둘레길 3코스)

▲  봉화정에서 개화산숲길로 들어서다 (강서둘레길 1코스, 개화산둘레길)

상사마을 은행나무를 둘러보고 다시 개화산으로 올라와 개화산숲길에 임했다. 도보길이 천하
에 크게 유행을 타면서 강서구에서도 그 야심작을 내놓았으니 바로 강서둘레길이다.

강서둘레길은 개화산을 중심으로 모두 3코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1코스는 개화산을 1바퀴 도
는 3.35km의 상큼한 산길이다. 그래서 개화산둘레길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오르락내리락이 도
돌이표처럼 반복될 뿐, 힘든 구간은 거의 없으며, 60분 이내면 충분히 1바퀴가 가능하다. 여
러 전망대가 닦여져 있어 조망의 기품을 누릴 수 있으며, 약사사 윗쪽과 개화산전망대, 미타
사 윗쪽, 신선바위,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을 지나간다. 하여 이 길과 개화산자락길을 같이
돌면 개화산의 80% 이상을 둘러보는 것과 같다.


▲  나무데크로 이루어진 개화산숲길 (아라뱃길전망대 부근)

▲  아라뱃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아라뱃길과 김포시 고촌읍 지역
서쪽을 향하고 있는 이곳은 이름 그대로 희대의 세금 낭비의 현장,
아라뱃길이나 구경하라고 만든 의미 없는 전망대이다.

▲  신선바위 윗쪽에서 바라본 천하
비행기가 수시로 들락거리는 김포공항을 비롯하여 김포평야와 부천 북부,
인천 동북부 지역이 두 눈에 들어온다.

  울퉁불퉁하게 생긴 신선바위

개화산은 흙산이라 신선바위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바위가 거의 없다. 서쪽을 향해 크게 누워
있는 이 바위는 개화산 산신(山神)이 호랑이를 타고 내려오는 바위라 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
게 되었는데, 산신이 이곳을 지나는지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확인할 길이 없다. 산신이
나 신선도 결국 인간이 만든 가상의 존재가 아니던가??
이곳은 개화산에서 가장 시야가 넓은 곳으로 이를 두고 신선이 구름을 타고 천하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여겨 신선바위라 불리게 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  개화산 호국충혼비(개화산호국공원)

신선바위를 지나면 미타사로 내려가는 길이 손을 내민다. 여기서 둘레길을 잠시 버리고 그 손
에 이끌려 3분 정도 내려가면 호국충혼비(김포지구 전투위령비)를 지닌 개화산 호국공원이 마
중을 한다. 나그네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이곳은 6.25 때 이곳에서 전사한 국군을 기리고자
세운 것으로 다음의 사연이 깃들여져 있다.

1950년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6.25가 터지자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6.25 이전에는 남한 영역
이었음) 지역을 지키던 1사단은 북한군을 감당하지 못하고 김포를 거쳐 김포공항까지 후퇴했
다.
개화산에 진을 치고 김포비행장을 지키고자 장비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며 싸웠으나 탄약과
식량보급이 끊겼고, 북한군의 대량 공세를 극복하지 못하여 결국 1사단 12연대 3대대 대대장
김무중 소령과 12연대, 13연대와 15연대 일부를 포함 1,100여 명이 안타깝게 전사하고 만다.
이후 호국신(護國神)이 된 그들의 충혼을 기리고자 미타사에서 1993년 12월 31일에 충혼비를
세우고 매년 6월과 가을걷이가 끝나는 11월에 지역 주민들과 1사단 군부대 장병들이 같이 위
령제를 지낸다.

예전에는 충혼비와 태극기, 두 다리를 쉴 수 있는 쉼터가 전부였으나 추모의벽과 명각비, 기
념조형물을 새로 닦고 주변을 산듯하게 정비하여 2017년 12월 개화산 호국공원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충혼비 뒤에 병풍처럼 둘러진 검은 피부의 추모의 벽에는 개화산에서 산화
한 1,100용사의 이름이 쓰여 있으며, 푸른 잔디와 개화산의 녹음(綠陰)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공간으로 호국신들을 기리며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  평화로운 모습의 개화산 호국공원 (호국충혼비 주변)


 

♠  서울에서 가장 서쪽 끝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 개화산 미타사(彌陀寺)

개화산 서쪽 자락에 자리해 김포공항과 김포평야를 바라보고 있는 미타사는 서울에서 가장 서
쪽 끝에 자리한 절이다. 약사사와 함께 개화산에 안긴 늙은 절로 19세기에 '김대공'이 석불입
상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많은 자손을 얻자 집안의 원찰(願刹)로 세웠다고 전한다.
1924년 절 아래 내촌마을 사람들의 꿈에 석불이 나타나 집을 지어줄 것을 청하므로 그해 4월
8일 미륵당(彌勒堂)을 세웠는데, 이때를 절의 실질적인 창건시기로 보고 있다.

그 미륵당이 미타사로 발전했으나 6.25전쟁 때 모두 파괴되었으며, 이후 자리를 조금 달리하
여 절을 재건했다. 1970년 승려 한지일(韓智壹)이 중창을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
며, 제자리를 떠났던 지장보살입상을 1993년에 다시 가져와 새 법당에 봉안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절 뒷쪽에 호국충혼위령비를 세워 6.25때 개화산에서 전사한 이들을 기리고 있다.

숲에 감싸인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과 요사(寮舍) 등 4~5동의 건물과 석불, 5층석탑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금의 미타사를 있게 한 오래된 석불입상이 있다. 바로 그를 보고자 이
곳에 온 것이다.

▲  여염집 모습의 미타사 법당
겉은 이래도 경내에서 가장 큰 집이다.

▲  법당에 신세를 지고 있는
산신탱과 칠성탱


이곳의 법당은 그 흔한 기와집 불전(佛殿)이 아닌 여염집 스타일의 집으로 1970년대에 중건되
었다.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로 이루어진 석가여래3존
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들은 1993년에 조성된 것이며, 산신과 독성, 칠성 식구들도 법당의
신세를 지고 있다. 그리고 왜정(倭政) 때 석고로 만든 지장보살입상(地藏菩薩立像)도 있는데,
그는 석불입상 다음으로 경내에서 늙은 존재로 원래 법당에 있었으나 6.25전쟁 때 절이 파괴
되자 실종되었다.
이후 인근 군부대 장교가 부대 우물에서 불에 그을린 채 망가진 그를 수습하여 군부대에서 가
지고 있다가 경주(慶州)의 어느 절로 넘긴 것을 1993년에 다시 찾아왔다. 무려 40년 이상 타
향살이의 고통을 겪은 그는 개화산을 점령한 북한군이 화풀이용으로 괴롭히다가 우물에 버린
것으로 여겨진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석불좌상
커다란 바위에 들어앉아 비행기가 수시로 뜨는 서쪽을 굽어보고 있다.
김포공항 비행기들이 늘 무탈한 것도 그의 묵묵한 가피 덕이
아닐까 싶다.

▲  미타사 석불입상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김포공항과 김포평야, 인천 동북부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날렵한 몸매의 5층석탑

석불입상 뒤쪽에는 경내의 유일한 돌탑인 5층탑이 있다.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하얀 피부를
지닌 잘생긴 탑으로 석탑은 보통 법당 앞이나 경내 안쪽에 두기 마련이나 이곳은 자리가 여의
치 않아서 석불입상 뒤쪽 산자락에 두었다.
그는 1980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곳의 단골 신도인 석물 판매업자가 1995년에 기증한 것인데,
그로 인해 미타사는 힘들지 않게 탑을 소유하게 되었다.


▲  미타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9호

석불입상은 이곳의 유일한 문화유산이자 가장 늙은 존재로 여기서는 미륵불(彌勒佛)로 애지중
지하고 있다.
고려 후기나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는 다른 데서는 보기 힘든 이형적(異形
的)인 모습으로 밑도리에는 세월의 고된 때가 자욱한 반면, 그 윗쪽 몸통의 3/4 이상은 완전
하얀 피부라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허나 그것은 함정이다. 근래 교체된 대좌(
臺座)을 제외하고 석불 자체는 순수 늙은 석불이다.

미타사가 있기 전부터 이곳을 지켰던 석불로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관리 소홀로 여러 번
땅속에 묻혔다가 빛을 보기를 반복했다. 19세기에 김대공이 그를 보살펴 많은 자손을 얻자 석
불 옆에 절을 세웠다고 전하며, 1924년에 내촌마을 주민들 꿈에 나타나 현 요사 자리에 미륵
당을 지어 봉안했다. 즉 미타사는 석불의 후광(後光)으로 지어진 절이다.
근래에 요사를 새로 지으면서 석불을 지금 자리로 옮겼으며, 그때 대좌를 새로 만들어 교체했
고, 옛 대좌는 석불 주변에 두었다.

석불 머리에는 동그란 갓돌이 씌워져 있고, 얼굴 표정은 좀 일그러져 있다. 아마도 순탄치 못
한 삶을 살아서 그리된 모양이다. 얼굴은 거의 동그란 모습이며, 눈과 눈썹, 입은 선으로 처
리했고, 코는 매우 오똑하다. 그리고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졌다.
얼굴과 몸통을 이어주는 목은 긴 편으로 삼도(三道)는 보이질 않으며, 몸통은 매우 길쭉하다.
두 손은 가슴 앞에 서로 교차되게 모으고 있는데, 그만의 특이한 수인(手印)으로 손가락이 꽤
두껍다.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통견을 하고 있으며, 다리와 발 등의 밑도리는 옷에 가려져
생략되었다.

석불의 높이는 4m 정도로 전체적으로 얼굴이 크고 몸통이 길며, 특이한 신체 표현과 밑도리를
생략하는 센스, 갓돌 모양의 보관(寶冠) 등에서 고려 때 큰 불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오
랜 세월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음에도 피부도 하얗고 건강도 양호하며, 약사사 석불입상과 함
께 서울에 몇 없는 고려 말~조선 초기 석불이란 점이 인정되어 2008년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미타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 산81-24 (개화동로13길 56-33 ☎ 02-2662-4736)


▲  석불입상의 옛 대좌
커다란 석불입상이 사용했던 늙은 대좌로 근래 새 대좌로 갈아탔다. 하여
옛 대좌는 옆으로 물러나 막연히 허공을 이고 있다.


▲  하늘길전망대에서 바라본 김포공항과 김포평야

미타사를 둘러보고 잠시 놓아두었던 강서둘레길1코스(개화산숲길)로 돌아와 남쪽으로 조금 가
면 '하늘길전망대'가 마중을 나온다.
이곳은 나무데크 형태로 닦여진 전망대로 서울의 하늘길을 책임지고 있는 김포국제공항과 그
곳을 오가는 비행기 구경에 최적화된 곳이다. 하여 전망대 이름도 하늘길이다. 여기서는 김포
공항 뿐 아니라 김포평야와 인천 계양구, 계양산(桂陽山), 부천 북부 지역, 김포 고촌읍 지역
이 두 눈에 들어와 조망 수준도 괜찮은 편이며, 국내선과 국제선 비행기가 5분이 멀다하고 공
항을 들락거려 김포국제공항의 높은 위엄을 보여준다.


▲  하늘길전망대에서 바라본 김포평야와 개화동, 계양산

▲  개화산자락길 서쪽 구간 (무장애숲길)

하늘길전망대를 지나 무장애숲길(나무데크길) 남쪽 기점에서 개화산자락길 서쪽 길로 갈아탔
다.
개화산자락길은 '방원중학교~금낭화로17길~약사사 표석~개화산전망대' 구간의 동쪽 길과 '하
늘길전망대~북카페~약사사 표석' 구간의 서쪽 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쪽 길은 북까페 주변
이 무장애숲길로 이루어져 있어 천하에서 가장 편한 둘레길로 찬양 받는 안산(鞍山) 자락길을
긴장시킬 정도로 큰 편안함을 보여준다. 북까페 주변을 제외하고는 흙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경사가 느긋해 거닐기 좋으며, 길 중간에 근래 세운 개화산 정상 표지석이 있다.


▲  방화근린공원 방면 개화산숲길
개화산 자락길 무장애숲길을 지나 약사사 표석에서 다시 개화산 숲길로 갈아타고
방화근린공원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치현산이란 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개화산 동쪽에 솟은 작은 뫼, 치현산(雉峴山, 꿩고개산)

▲  치현산 공원길 입구

개화산 동쪽에는 꿩고개(70.5m)라 불리는 야트막한 산줄기가 있다. 개화산의 일원으로 방화동
(傍花洞) 시내와 한강 사이에 자리하여 강바람을 막아주는 병풍 같은 존재로 동서로 짧게 이
어져 있는데, 순 우리말로는 꿩고개(또는 꿩고개산), 한자로는 치현산이라 부른다.
이곳이 꿩과 관련된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은 2가지 설이 있다. 지금은 실감이 별로겠지만 옛날
에는 꿩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꿩사냥을 하기에 좋은 곳이라 꿩고개라 불렸다는 설이
있고, 다른 하나는 꿩을 뜻하는 한자인 치(雉)가 꿩 외에도 성곽에 달린 방어시설도 뜻한다.
아무래도 개화산이 강 건너 행주산성과 함께 한강 하류를 지키는 요충지였고, 정상에 개화산
동봉수대가 있다보니 방어시설을 뜻하는 치를 사용했다가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새이름 꿩
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꿩고개에는 강서둘레길 2코스인 공원길이 닦여져 있는데, 길 하나로 이루어진 1코스(개화산숲
길)와 달리 2갈래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 시작점은 개화산숲길과 만나는 방화근린공원이며,
여기서 산길과 벚꽃길(수레길)로 분리되어 있다. 분리된 길은 마곡서광아파트 부근에서 잠시
만나지만 여기서 서남환경공원으로 들어가면서 다시 2갈래로 갈려 공원을 1바퀴 돈다. 총 길
이는 4.5km로 서광아파트 서쪽은 산, 동쪽은 평지 공원이라 길은 거의 느긋하다.


▲  주민 혐오 공간에서 친화적인 공간으로 거듭난 방화근린공원 벚꽃길

방화택지 북쪽이자 개화산과 꿩고개산 사이에 넓게 터를 다진 방화근린공원은 1996년에 조성
되었다. 딱히 특별한 것은 없는 이 땅의 흔한 시민공원이나 수목이 울창하고 연못과 분수대, 광장, 물레방아 등이 공원 곳곳을 수식하고 있으며, 쉼터가 많아 소풍 장소로는 아주 제격이
다.
산책로가 개화산과 꿩고개산으로 핏줄처럼 이어져 있고, 불법주차와 덤프트럭의 통행으로 꽤
나 시끄럽던 공원 북쪽 길을 손질하면서 100여 그루의 벚꽃을 심어 상큼한 벚꽃길을 닦았다.
하여 이제는 서울의 어엿한 벚꽃 명소의 성지로 추앙을 받고 있다.


▲  숲이 무성한 치현산 서쪽 능선길 (강서둘레길2코스)

▲  짙은 녹음 속으로~~ 치현산 서쪽 능선길 (강서둘레길2코스)

▲  치현산 북쪽 벼랑에 매달린 치현정(雉峴亭)

치현산에 왔다면 꼭 가봐야 되는 명소가 있다. 바로 산 북쪽 벼랑에 깃든 치현정이란 팔각형
정자이다. 이곳은 겸재 정선의 그림에 나올 정도로 오래된 존재는 아니지만 강서구에서 한참
강서둘레길을 닦던 2012년, 강서구새마을금고협의회에서 만든 것으로 한강이 바라보이는 벼랑
에 자리한 탓에 조망도 제법 괜찮아 사진쟁이들의 발길이 잦다. 특히 야경이 아주 일품이다.
하여 겸재의 '행호관어(杏湖觀漁)'의 현대판 버전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사진으로 말이다.
물론 그때와 비교하면 완전 하늘과 땅 차이겠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이곳도 결코 그
진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  치현정에서 바라본 천하 ① 한강과 행주대교, 일산신도시
치현정 바로 앞으로 올림픽대로와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가 그물망처럼
복잡하게 펼쳐져 차량의 굉음이 대단하다. 그러니 그 소음을
감안하고 이곳의 조망을 누리기 바란다.

▲  치현정에서 바라본 천하 ②
한강 건너에 길게 누운 뫼가 행주대첩(幸州大捷)의 현장인 행주산이다.
행주산 앞 한강을 예전에는 행호라 불렀다.

▲  치현정에서 바라본 천하 ③
방화대교와 고양 화전 지역, 앵봉산~봉산 산줄기, 북한산(삼각산), 노고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잡힌다.

▲  치현산 동쪽 능선길 (강서둘레길2코스)
산은 작지만 숲이 생각 외로 짙어 마치 깊은 산골에 푹 묻힌 기분이다.

▲  치현산을 정리하며, 치현산 동쪽 능선길 (강서둘레길2코스)

치현산 능선을 완전히 가로질러 산 동쪽 끝에 자리한 치현둘레소공원으로 내려갔다. 마곡서광
아파트 북서쪽에 자리한 작은 공원으로 치현산을 중심으로 한 꿩고개근린공원의 일원이다. 강
서둘레길2코스가 이곳을 지나며 동쪽을 서남물재생센터와 서남환경공원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하여 치현산까지 겯드린 개화산 5월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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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한양도성, 남산서울타워, 목멱산봉수대, 백범광장)

 


'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

▲  남산서울타워

▲  남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  백범광장 주변


 

여름이 빠르게 익어가던 6월 끝 무렵,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南山)을
찾았다.
서울 한복판에 누워있는 남산은 내 어릴 적 즐겨찾기 장소로 고등학교 1학년까지 남산 인
근에 살면서 뒷동산 삼아 활보했던 추억 깊은 현장이다. 나는 남산의 물을 먹고 자랐으며,
남산에서 친구들과 뛰어놀고, 남산 정상에 올라 천하를 바라보며 나름대로의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 이후 남산과 먼 곳에 살게 되면서 다소 뜸해졌고, 가끔 찾는 정도에서 머물다가
2015년 이후 오후와 저녁, 평일, 휴일을 가리지 않고 발걸음을 크게 늘리고 있다.

햇님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14시, 동대입구역(3호선)에서 출발하여 장충단공원을 거쳐 국
립극장으로 이동했다. 국립공원교차로에 이르니 남산의 너른 품으로 인도하는 남산공원길
이 가파른 경사를 들이밀며 우리를 맞이한다.


 

♠  남산 품에 안기다 ~~~

▲  남산공원길 (남산북측순환로 입구)

국립극장 정문을 지나면 남산의 대동맥인 남산공원길이 시작된다. 길은 2갈래로 북쪽 길은 남
산북측순환로 입구에서 남산 북쪽 자락을 거쳐 회현동(會賢洞) 소파로로 이어지며, 예전부터
오로지 뚜벅이 전용 산책로로 이용되어 차들의 바퀴 자국을 철저히 금하고 있다. 크게 오르락
내리락 부분이 없는 느긋한 길로 장충단공원과 필동(筆洞), 남산1호터널로 내려가는 길이 있
으며,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諸葛亮)을 봉안한 와룡묘(臥龍廟)란 오래된 사당이 있다.
그리고 남쪽 길(2차선)은 남산 정상과 남산서울타워로 인도하는 길로 차량 통행이 가능하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왕복 운행이었으나 일방통행으로 변경하면서 '국립극장→남산서울타워→
남산도서관' 방향으로만 바퀴를 굴릴 수 있다.

내가 남산에서 무척 가까운 신당동과 금호동(金湖洞)에 살던 시절, 가족이나 친구와 남산에
물을 뜨러 많이 갔었는데, 가족과 갈 때는 주로 평일 저녁을 이용했다. 그때는 약수터 입구까
지 차를 끌고 가서 약수를 뜬 다음 북측순환로 입구에 있던 차량 매표소까지 후진하여 국립극
장으로 내려갔지. 일방통행로라 그렇게 가는 것은 위법이긴 하나 거리도 그리 길지 않고, 매
표소 아저씨의 쿨한 묵인도 있어서 몇년을 그렇게 했었다.
이후 남쪽 길의 40% 정도를 뚜벅이길로 만들고 남산의 건강을 위해 차량 통행의 크게 제한을
두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반 차량은 절대로 바퀴를 들일 수 없게 되었으며, 오로지 시내버스
(02, 04번)와 시티투어버스, 관광버스, 공원/긴급 차량만 들어올 수 있다. 차를 끌고 온 경우
에는 국립극장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걸어서 이동하거나 02, 04번 시내버스를 타야 된다.


▲  뚜벅이들의 낙원이 된 남산 남측순환로

남산북측순환로입구에서 남쪽 길로 접어들면 숲 사이로 빛바랜 한양도성이 모습을 비춘다. 그
리 멀지 않은 과거(2010년 이후)에 성곽 옆에 탐방로를 내었는데, 남산 정상까지 질러 가고
싶다면 그 길을 이용하면 된다. 다만 경사가 좀 각박하여 조금은 힘들 수 있으나 짧은 거리라
서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거닐 수 있다. 게다가 숲이 짙어서 대낮에도 그늘이 가득해 한여
름에는 시원하다.

성곽 앞에 난 산길의 일부는 예전부터 있던 길이다. 그 길의 끝에는 남산에서 제법 잘나갔던
남산약수터가 있었다. 남산산악회가 관리하는 곳으로 어린 시절 여러 번 가봤었지. 그곳은 입
구에 철문까지 설치했으며, 오로지 이른 아침에만 문이 열려 아무 때나 접근이 어려웠다. 다
행히 그곳 산길이 개방되어 이제는 자유의 공간이 되었으며, 약수터 주변에는 남산산악회 건
물과 체력 단련시설이 있다.

성곽길(남산산악회 입구)을 지나 5분 정도 가면 오른쪽에 계단길이 나온다. 그 계단을 2~3분
오르면 운동시설을 갖춘 상춘약수터가 나오는데, 예전 신당동, 금호동 시절 우리집 단골 약수
터였다. 약수터 옆에는 약수로 몸을 씻는 노천탕이 있었는데, 약수로 냉수마찰을 하면 겨울에
감기가 안걸린다고 해서 한때 인기가 대단했었다.
예전에는 서울에 노천 목욕터를 가진 약수터가 적지 않았는데, 대중이 이용하는 약수터에 아
저씨와 노공(老公)들이 벌고 벗고 씻는다는 것이 오랫동안 문제로 지적되었다. 하여 차츰 사
라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기억 속의 풍물시(風物詩)가 되어버렸다.


▲  남산 남측순환로 (4월 풍경)

상춘약수터입구를 지나 계속 남측순환로를 따라 가면 크게 구부러지는 남쪽에 2개의 조망대가
있다. 이 구간은 남쪽이 확 트여있어 조망이 일품인데, 바로 밑에 용산구 지역을 비롯해 한강
과 동작구, 강남/서초구, 관악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대기만 청정하다면 보이는 범위는 더욱
넓어진다. 그럼 여기서 잠시 남산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서울의 한복판이자 도심 남쪽에 누운 남산(262m, 270m)은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낙산(낙타
산)과 더불어 한양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다. 서울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으로 북현무(北
玄武)인 북악산(백악산)을 바라보고 있으며, 도성 남쪽에 있어서 남산이란 아주 평범한 이름
을 지니고 있다.
천하에는 남산이란 산이 참 많은데, 이들의 공통점은 시내와 아주 가깝고 시민들이 많이 안기
는 휴식처이며, 경주(慶州) 남산(468m)을 제외하면 산세가 낮고 완만해 누구든 편히 오를 수
있는 친근한 산이라는 것이다. 서울 남산도 대체로 편히 안길 수 있는 스타일로 그 걷는 것도
싫다면 남산을 오르는 시내버스나 시티투어버스,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금세 정상까지 간다.

남산의 원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으로 그 옛말인 '마뫼'는 남산을 뜻한다. 인경산(引慶山),
잠두봉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1395년 태조 이성계가 남산을 높여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
하고 그를 위한 사당인 목멱신사(木覓神祠)를 산꼭대기에 세웠다. 이후 매년 제를 올리면서
국사당(國師堂)으로 이름을 갈았다.
남산 능선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한양도성이 걸쳐져 있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전국에
서 날라오는 봉화를 받았다. 조선시대 봉화는 5개 노선이 있었는데, 그 종점이자 중심지가 바
로 남산이다.

임진왜란 때는 한양을 점령한 왜장이 산허리에 왜장대(倭將臺)란 성을 쌓았으며, 병자호란 이
후 어영청(御營廳)과 금위영(禁衛營) 분영이 남산에 설치되어 서울을 지켰다. 왜정 때는 왜군
헌병대가 산자락에 있었고, 1945년 이후에는 중앙정보부가 1호터널 북쪽에 말뚝을 박으며 갖
은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남산은 도성 경승지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양반들이 세운 정자와 그들이 새긴 바위글씨가 즐
비했는데, 지금은 바위글씨 극히 일부를 빼면 남아있는 것이 없다. 또한 가난한 선비와 하급
관리들이 산자락에 많이 살았으며, 개화기 이후 왜인들이 남산 북쪽과 남촌(南村)이라 불리는
청계천 이남에 두루 터를 닦고 살았는데, 왜정 때는 남산도서관 자리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 남산 중턱에는 왜성대공원과 경성신사(京城神社)를 지어 그들의 성지(聖地)로 만들었다.
특히 조선신궁을 짓는 과정에서 남산의 오랜 성역인 국사당이 신궁보다 높은 곳에 있다며 왜
정이 속좁게 징징거려 어쩔 수 없이 인왕산으로 자리를 옮기는 비운을 감당해야 했다. 그렇게
남산의 중심은 토박이 목멱대왕에서 왜열도의 온갖 잡귀들로 바뀌게 된다.
그렇게 왜정이 남긴 자국들은 1945년 이후 대부분 지워졌으나 조선신궁 계단과 일부 소소한
흔적들은 자신의 정체를 꼭꼭 숨기며 1945년 8월 패전 때 연합군에 살려달라고 징징거린 왜왕
(倭王)처럼 구차한 목숨을 연명한다.

196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케이블카가 놓여 남산의 이름 두 자를 떨쳤고, 1965년 조선신궁
자리에 남산도서관을, 1969년에는 백범 김구(白凡 金九)의 동상을 세워 주변을 백범광장으로
삼았다. 1973년에는 국립극장이 지어졌으며, 1975년에는 6년의 대공사 끝에 천하 최대의 타워
인 남산서울타워가 완성되어 남산의 높이를 배로 높였다. 이 타워는 1980년에 공개되어 남산
과 서울의 굳건한 상징이 되었다.


▲  남측순환로 아랫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한남동과 보광동(普光洞), 한강을 비롯하여 강남 일대가 상쾌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우리 애국가에 보면 '남산 위에 저 소나무'란 구절이 나온다. 그 구절에서 보이듯 남산은 북
악산(백악산)과 더불어 소나무로 유명했는데, 특히 금송(金松)이 많이 자랐다. 소나무 외에도
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며 산을 아름답게 수식하고 있고, 도심 한복판에 솟아있어
학의 등에 올라탄 듯 국보급의 조망은 물론 도심 야경도 풍족하게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산 곳곳에 약수터가 뿌리를 내려 나그네의 목을 아낌없이 축여주었는데, 그중에서 부
엉바위 약수터가 제일 유명했다. 허나 이 약수는 남산3호터널이 뚫리면서 그 혈이 막혀 사라
진 상태이며, 다른 약수터도 상당수 문을 닫거나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그 흔한 계곡도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겨우 실처럼 흐르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여럿 있을 뿐
이다.

남산은 남산공원길 남측순환로와 북측순환로, 여러 갈래의 계단길이 있는데, 계단길은 장충단
공원에서 정상까지, 백범광장에서 정상까지 이어지는 계단길이 대표적이며, 남산1호터널과 남
산동, 후암동(厚岩洞)에서 오르는 계단길이 있다. 길 외에는 싹 철조망을 쳐놓아 산으로에 접
근을 막았으나 근래에 모두 풀어버렸다. 허나 철조망을 없앴다고 해서 산자락 곳곳을 쑤시고
다니면 안된다. 무조건 지정된 길로 가야 남산도 좋고, 사람도 좋은 것이다.

남산에는 한양도성과 장충단공원, 와룡묘, 남산봉수대, 한양공원 표석, 남산골한옥마을 등의
문화유산과 백범광장, 안중근의사기념관, 남산야외식물원, 남산서울타워 등의 명소가 있으며,
산 전체가 남산공원(남산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심 속 나들이 명소이자 조촐한
등산 명소로 그 인기가 식을 줄을 모르며, 예로부터 서울에 오면 꼭 가봐야 되는 서울의 상징
적인 명소로 지방 사람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까지 평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수십만 씩 몰려
드는 서울 관광의 성지이다. 하여 한적한 분위기는 좀 누리기가 어렵다. (서울을 찾은 외래
관광객의 1/3 이상이 남산을 찾는다고 함)

남산이 없는 서울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아니 상상하기도 싫다. 도심 속의 허파이자 꿀단
지로 남산이 있으니 인근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조선 왕궁이 합세해 도심의 녹지 비율이
좀 되는 편이지 그가 없었다면 서울은 더 지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개인적으로 내 옛
추억이 몇 권씩 녹아있는 현장으로 나에게도 꽤 의미심장한 곳이라 할 수 있는데, 내가 제일
많이 오른 산이 바로 남산으로 어림잡아도 500번 이상은 올랐을 것이다.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 지점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한남동과 보광동, 강남, 관악산과 우면산 산줄기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 지점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해방촌과 이태원, 용산구 지역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 지점 조망대에서 바라본 남산서울타워
서울타워는 동양에서 제일 높은 타워로 높이가 236.7m에 달한다. 하늘을
찌를 듯 늘씬하게 솟은 저 타워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보면 볼수록
신기할 따름이다.

▲  다시 만난 한양도성 - 성곽 밑에도 탐방로가 닦여져 있다.

남산 정상을 코앞에 둔 남산서울타워 종점(02, 04번 종점)에 이르니 온갖 관광객들로 뒤엉켜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룬다. 여기서는 오로지 시내버스만 길게 바퀴를 접을 수 있으며 나머지
버스는 승하차가 끝나자마자 바로 자리를 떠야 된다. (주차 공간이 별로 없음)
무수한 인파 속으로 몸을 던져 하나의 점이 되어 서쪽 오르막길을 3분 정도 오르면 남산 정상
과 남산서울타워 밑에 이르며, 오르막길 대신 서남쪽 남측순환로를 내려가면 남산도서관으로
이어진다.

* 남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남산동, 회현동 / 용산구 용산동2가, 후암동 
* 남산공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02-3783-5900)


▲  남산서울타워 종점에서 바라본 서울타워
남산 어디서든 구석진 곳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서울타워가 바라보인다.


 

♠  남산 정상

▲  정상 동쪽 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도심과 서울 북부)

하늘과 맞닿은 남산 정상에는 남산서울타워와 팔각정, 남산봉수대가 둥지를 틀고 있다. 남산
서울타워(N서울타워)는 남쪽에, 팔각정은 중앙, 남산봉수대는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중
에서 인파가 가장 많은 곳은 남산서울타워와 팔각정 주변이다.

남산서울타워는 236.7m의 키다리 타워로 아시아 최대를 자랑한다. 남산을 든든한 기반으로 삼
아 기둥과 철탑 하나로 하늘을 받들고 있는 웅장한 탑으로 TV와 라디오 방송을 수도권으로 송
출하고자 1969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 전파탑으로 세워졌다. 1971년 공중선 철탑이 완
성되었고, 1975년 7월에 최종 마무리가 되어 전국 인구의 48%가 이 타워의 전파탑을 통해 방
송을 시청하고 있다고 한다.

1980년 10월 속세에 개방되어 남산의 소중한
꿀단지이자 야경과 조망의 진정한 성지로 자리
매김을 했는데,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道峯
山). 수락산(水落山). 관악산(冠岳山), 불암산
(佛岩山) 정상을 빼고 서울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다. 그러다보니 콧대가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밑에서 그를 보려면 고개가 그냥 까
딱 넘어가 버린다.
게다가 입장료도 꽤 야박한 편, 그래도 관광
수요는 늘 꾸준하여 외국인 선정 서울 명소 1
위의 지위(2012년 서울시청 설문조사 결과)를
누리기도 했다.

 

◀  바로 밑에서 바라본 남산서울타워의 위엄

남산을 안방처럼 들락거린 나도 초등학교 시절에 가족, 친척과 2~3번 타워에 오른 적이 있었
다. 허나 그 이후에는 이상하게도 인연이 닿지 않아 그의 품에 오른 적이 없었다. 정상에 오
더라도 그냥 타워 밑도리와 정상 주변에서 좀 머물다가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막상 가려
고 해도 이상하게 땡기지가 않는다.

* 남산서울타워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2가 산1-3 (남산공원길 105 ☎ 02-3455-
  9277)
* 남산서울타워 홈페이지는 아래 팔각정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남산 팔각정(八角亭)

팔각정은 남산서울타워와 더불어 남산의 주요 장식물로 이곳에는 원래 1959년에 이승만 대통
령을 치켜세우고자 세운 우남정(雩南亭)이 있었다. 여기서 우남은 이승만의 호로 1960년 4.19
의거로 그가 물러나자 바로 철거되었다.
이후 1968년 11월 탑골공원 팔각정을 모델로 삼아 지금의 팔각정을 지었으며, 남산 정상을 수
식하는 존재로 삼았다. 정자 서쪽에는 한양도성 여장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산바람이 주변
에늘 머물고 있어 한여름에도 시원하다. 정자 자체는 60년도 채 안된 존재이지만 관광객들로
늘 붐비며, 매년 1월 1일 새해 해맞이 행사가 성황리에 열린다.


▲  옛 국사당(國師堂)터 표석

남산 정상은 늘 사람들로 미어터지나 팔각정 부근 구석에 누운 국사당터 표석에 눈길을 주는
이는 거의 없다. 애처로운 눈빛을 보이며 눈길과 관심을 호소하지만 맨날 외면을 받는 그 표
석, 표석에 쓰인 국사당은 남산의 수호신인 목멱대왕의 사당으로 1395년에 태조가 세웠다.
1404년 목멱대왕을 호국(護國)의 신으로 높이면서 목멱신사(木覓神祠)라 불리기도 했던 남산
의 성역이자 중심이었으나 1925년 왜정이 조선신궁을 지을 때 국사당이 그보다 높은 곳에 있
는 것에 쓸데없이 아니꼬움을 드러내면서 다른 데로 옮기라고 난리를 쳤다. 그래서 태조와 무
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를 했던 곳이라 전하는 인왕산 선바위 밑으로 눈물을 머금고 이사를
가게 되었고, 목멱대왕의 남산은 왜열도의 온갖 잡귀들이 판을 치는 일그러진 현장이 되었다.

국사당을 핍박했던 왜정도, 조선신궁도 다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그곳에 건방지게 들어앉던 왜
열도의 잡귀들도 추방되었지만 남산의 주인인 국사당은 끝내 제자리로 오지 못하고 인왕산에
뿌리를 내려 선바위와 함께 기도처의 성지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로 미어터
지는 이곳에 다시 와봐야 너무 시끄러운 나머지 국사당 신들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다. 그
만큼 남산은 많이도 변했다.


▲  남산 목멱산봉수대(木覓山烽燧臺) - 서울 지방기념물 14호

정상 북쪽에는 남산의 오랜 상징물인 남산봉수대가 도심을 바라보고 있다. 남산의 옛 이름을
취해 목멱산봉수대('목멱산봉수대터'가 문화재청 지정 명칭임)라 불리기도 하며 서울에 있다
고 해서 '경(京)봉수대'란 별칭도 있으나 그냥 속편하게 남산봉수대라 불러도 문제는 없다.

봉수대란 불을 피우거나 연기를 이용해 변방의 소식을 알리던 옛날 통신 수단으로 산꼭대기에
주로 설치되었다. 낮에는 연기로 알리고, 밤에는 불을 피워 소식을 전했으며, 비가 많이 오는
경우에는 봉수지기가 직접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봉수대는 크게 5개 노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변경인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
滿江), 남해바다에서 시작하여 이곳 남산을 종점으로 삼았으며, 평소에는 봉화 1개, 적이 나
타나면 2개, 경계에 다다르면 3개, 경계를 넘으면 4개, 전쟁이 터지면 5개를 올렸다.

남산봉수대는 1394년에 설치되어 하루도 연기가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았으며, 동
쪽에서부터 서쪽을 향해 5개소가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1895년 봉수제도가 폐지되면서 문
을 닫았고, 왜정 때 말끔히 철거되면서 그 위치를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청구도(靑
邱圖)를 통해 봉수대터 1곳을 발견하니 그곳이 지금 봉수대로 철저한 고증을 통해 1994년 복
원되었다. (나머지 4곳은 아직도 위치가 아리송하다고 함;;;)

이곳 봉수대는 벽돌로 쌓은 5개의 봉수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금은 불과 연기를 피울 일이
없는 죽은 봉수대로 남산 정상을 수식하는 상징적인 존재이자 조선시대 봉수제도의 중앙봉수
대 의미 밖에는 없다. 그것이 현역에서 은퇴한 사물의 쓸쓸한 뒷모습이다. 봉수대는 관람이
가능하며, 여기서 바라보는 조망이 가히 차관도 아닌 장관이라 이곳이 왜 조선 봉수대의 중심
이 되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남산이 서울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고 조망이 뛰어나 사방에
서 날라오는 봉수대 연락을 받기에 아주 좋기 때문이다.
참고로 서울에는 남산 외에도 무악봉(毋岳峰) 동봉수대와 봉화산(烽火山) 봉수대, 봉산 봉수
대, 개화산 봉수대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근래에 복원된 따끈따끈한 상태로 무악산 동봉
수대와 봉화산 봉수대는 서울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8-1


▲  목멱산봉수대 내부
불을 피우는 봉수대는 벽돌로 쌓고 그 밑도리는 성벽처럼 돌을 다듬어서 쌓았다.
1994년에 복원된 상태라 고색의 때는 채 익지 못했으며 아직까지는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피부를 지녔다.

▲  남산봉수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서울 도심 동부와 성북/강북/도봉 권역과 동대문/중랑/성동 권역을 비롯하여
멀리 수락산과 불암산 등이 흔쾌히 두 눈에 잡힌다.

▲  남산봉수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바로 앞에 보이는 것은 남산케이블카 승차장이다. 그 너머로 서울 도심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줄기가 바라보인다.


 

♠  남산 마무리

▲  성곽길에서 바라본 용산과 여의도, 서울 서남부 지역

산 정상에서 남산도서관, 백범광장으로 내려가는 성곽길은 경사가 매우 급한 편이다. 내려
갈 때야 상관은 없지만 올라갈 때는 거의 혼이 다 빠진다.

남산케이블카를 지나면 도심을 향해 튀어나온 잠두봉 전망대가 손짓을 하는데, 여기서 바라보
는 조망 맛이 아주 일품이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달까지 올라간 서울의 심장부를
바로 발 밑에 두며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가까이로 남산3호터널을 오가는 차량의 물결이
개미들의 행진처럼 보이며, 키다리급의 온갖 성냥갑 건축물들이 여기서만큼은 손가락보다 작
게 다가온다.


▲  남산 정상에서 남산도서관으로 내려가는 성곽길
장충단공원에서 올라가는 것보다 거리는 매우 짧지만 대신 경사가 좀 각박하다.
남산 산길 가운데 가장 경사진 곳으로 장충단공원이나 국립극장에서 올라가
정상을 찍고 남산도서관 방면으로 내려가는 것을 추천한다.
(그래봐야 넉넉히 2시간이면 족함)

▲  잠두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서울 도심과 인왕산,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  잠두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서울 도심 동부와 동대문, 성북/강북/도봉 권역과 수락산, 불암산 산줄기 등

▲  잠두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남대문시장과 시청,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서울 도심과 안산(鞍山), 인왕산 등


정상에서 서쪽 성곽길을 따라 20분 정도 내려가면 시립남산도서관이다. 이제 남산도 다 내려
온 것이다.

여기서 안중근의사기념관과 2020년 11월에 닦여진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을 지나면 백범 김구
선생을 기리고자 닦은 백범광장이 나온다. 공원을 이루고 있는 광장 남쪽에는 한양도성이 복
원되면서 나무와 온갖 꽃을 심은 녹지 공간이 대폭 늘어났다. 바로 옆이 키다리 빌딩이 즐비
한 도심이건만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완전 딴 세상을 이루고 있으니 그 역시 남산이 있으니
가능한 것이다.


▲  백범광장 터널과 서울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한양도성과 남산을 복원하면서 예전에 도로 공사로 줄기가 끊긴 백범광장과
남산 사이의 산줄기를 다시 이어붙여 그 밑에 터널(소월로3길)을 냈다.

▲  휴일 오후 한가로움이 느껴지는 백범광장과 서울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  백범광장 남쪽에 다시 재현된 한양도성 - 사적 10호

백범광장 남쪽과 서쪽에는 근래 복원된 아주 따끈따끈한 성곽이 있다. 이들은 한양도성의 일
원으로 왜정 때 끊어진 남대문과 남산 구간의 일부이다.
오랫동안 잊혀진 이들을 끄집어내고자 백범광장 주변을 싹 뒤집어 조사를 벌였고, 땅속에 묻
힌 성터가 발견되어 그 자리를 바탕으로 성벽과 여장을 복원했다. 재현된 구간은 200m 정도로
최근 지어진 탓에 피부가 아주 하얗고 반질반질하여 마치 벽에다 그린 성벽 벽화 같다. 남산
도서관 북쪽 성곽터를 조사하여 2020년 11월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을 내었으며, 나머지 사라진
구간도 복원 계획에 있다.


▲  한양도성 백범광장 구간
하얀 피부의 성곽 여장 너머로 서울역 동쪽에 자리한 여러 키다리 빌딩이 보이며,
성곽 안쪽에도 탐방로를 내어 억새를 비롯한 온갖 나무와 꽃을 심었다.

▲  한양도성 백범광장 구간 서쪽 부분
성곽은 계속 달리고 싶다~~!! 허나 왜정과 개발의 칼질로 끊어진 구간이
적지 않고 복원 속도도 굼벵이보다 느려 그런 날은 아직도 멀었다.

▲  한양도성에서 바라본 후암동과 이태원, 용산구 지역
천하를 비추던 햇님은 엄청난 광을 쏟아부으며 슬슬 커텐을 칠 준비를 하고
회색빛 도시도 석양이 짙어지면서 점차 검은 도화지 속에 묻혀간다.

▲  온갖 야생화가 살랑거리는 백범광장 서부

▲  도동3거리에 있는 남산공원 마크

백범광장과 한양도성 백범광장 구간을 뒤로하고 남산공원 출입구의 하나인 도동3거리로 나오
니 시간은 18시가 넘었다. 햇님도 그 기운이 다했는지 84,000광 보다 더 진한 석양을 비추며
슬슬 꽁무니를 내빼고 토끼의 달나라가 하늘 높이 떠올라 땅꺼미의 기운을 북돋는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찾은 남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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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2월 2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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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의 푸른 공간이자 너른 초원, 올림픽공원~몽촌토성 늦가을 나들이 (나홀로나무, 충헌공 김구묘역, 성내천)

 


~~~ 늦가을 올림픽공원(몽촌토성) 나들이 ~~~


▲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  올림픽공원 보호수 느티나무

▲  몽촌토성 동벽


 

늦가을이 한참 익어가던 11월 첫 무렵, 일행들과 나의 즐겨찾기 명소의 하나인 올림픽공원
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4시에 몽촌토성역(8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올림픽공원으로 들어섰
는데, 너른 공원에는 주말을 맞아 늦가을 정취를 즐기려는 온갖 사람들로 그야말로 북새통
을 이루었다.


 

♠  올림픽공원(Olympic Park) 입문

▲  지구 평화를 위한 웅대한 날개짓, 허나 진정한 평화는
아직도 멀었다 - 세계평화의문


올림픽공원의 정문이자 올림픽공원9경의 제1경으로 손꼽히는 세계평화의문은 1988년 7월 건축
가 김중업이 만든 것이다.
문 높이 24m, 폭(전/후) 37m, 전면 길이 62m(날개 정면 폭)의 장대한 규모로 1988년 가을, 천
하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서울올림픽의 정신을 기리고 지구의 평화를 염원하는 뜻에서 세웠다.
그래서 문 이름도 거창하게 세계평화의문이다.
문의 생김새를 보면 마치 큰 새가 날개짓을 하는 것 같다. 날개 밑부분에 그려진 수려한 색채
의 그림은 서양화가 백금남이 그린 것으로 고구려(高句麗) 사신도(四神圖)를 바탕으로 우측에
는 현무(玄武)와 주작(朱雀), 좌측에는 청룡(靑龍)과 백호(白虎)를 그렸다. 그리고 문 앞쪽
좌/우에는 조각가 이승택이 만든 열주탈이 각각 30개씩 배열되어 장관을 이룬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의 둥근 곡선을 활용해 비상(飛上)과 상승의 이미지를 강조하였다고 하며,
올림픽공원의 얼굴이자 마스코트로 그를 보는 순간 이미 아득한 과거가 되버린 1988년 그 시
절, 그리고 서울올림픽 개최 하루 전, 잠실에서 봤던 성화봉송까지 그때의 추억이 모락모락
떠오른다.


▲  세계평화의문 성화(聖火)

세계평화의문 안쪽에는 서울올림픽 당시 전국을 누볐던 성화의 보금자리가 있다. 나 같은 서
민들은 미친 난방비에 허리가 아작날 지경인데, 성화는 당시를 상징하는 특별한 존재라 하여
매일 비싼 기름을 먹는다. (성화 밑에 기름관이 있음) 늘 넉넉히 제공되는 기름을 먹고 살이
오른 불꽃을 휘날리며 거의 영생(永生)의 삶을 사는데, 1시간도 꺼진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기름 낭비로 비춰지는 것도 사실이라 공원의 빗장을 걸어잠구는 새벽에 한해 불을 꺼
두어 기름도 아끼고 성화도 좀 쉬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저것도 다 눈먼 세금임..)


▲  국기광장과 올림픽운동조형물 '서울의 만남'

세계평화의문을 들어서면 평화의광장이 마중을 나온다. 광장 좌우에는 공원안내센터와 편의점
, 식당, 커피집 등이 늘어서 있고, 여기서 직진하면 몽촌해자로 막다른 곳에 국기광장과 서울
의만남 조형물이 배수의 진을 치고 있다.
국기광장은 서울올림픽에 참여한 161개 나라의 국기가 펄럭이는 곳으로 그 광장 중심부에 '서
울의 만남' 조형물이 자리해 있다. 이 석물은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SLOOC)와 국제올림픽
위원회(IOC)가 서울올림픽 1주년을 맞이하여 올림픽운동의 확산을 염원하고자 세운 것으로 조
형물 바닥에는 올림픽에 참여한 세계 각국의 돌을 깔았는데, 돌 수집을 위해 돌 축제를 기획
했으며, 이 축제를 통해 우리의 전통문화와 풍습을 널리 소개하기도 했다.
그럼 여기서 잠시 서울 올림픽공원의 역사에 대해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서울의 만남' 바닥에 화석처럼 박힌 세계 각지의 돌들

올림픽공원은 1986년 제10회 아시안게임과 1988년 제24회 올림픽을 위해 조성된 공원으로 예
전에는 몽촌마을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1980년대 초반 이곳이 서울올림픽 체육시설 건립지로 확정되자 막연히 백제시대 토성으로 전
해 오던 몽촌토성을 품은 일종의 사적공원으로 꾸미기로 하고 1983년부터 6년에 걸쳐 토성을
발굴조사를 하였다. 1984년 본격적으로 이 일대를 갈아엎으면서 몽촌 사람들은 강제로 고향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1985년 5월 30일까지 이주를 마쳤으며, 1986년 4월 공원이 완성되었
다.
이후 1988년 몽촌토성 발굴조사가 대충 완료되자 토성을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
으며,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을 두루 개최하면서 국제적인 명소로 거듭났다.

공원 면적은 무려 1,674,380.17㎡(506,500평)로 서울에서 제법 큰 공원이다. 공원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서쪽은 몽촌토성과 몽촌해자로 이루어진 자연/역사 공간으로 22만
평에 이르며, 동쪽은 온갖 경기장으로 이루어진 체육 공간으로 23만 평에 달한다. 그 외 5만
평은 체육대 등의 교육 공간으로 쓰인다.

공원에는 온갖 운동 경기와 공연이 열리는 경기장과 공연장을 비롯해 한성백제박물관과 소마
미술관, 몽촌역사관 등의 실내 전시 공간과 지구촌공원 등의 소공원, 공원 곳곳에 놓여진 온
갖 조각품들, 몽촌토성과 충헌공 김구 묘역 등의 문화유적, 몽촌해자와 성내천, 88호수 등의
호수와 생태계 공간, 평화의광장과 세계평화의문 등의 광장과 올림픽 상징물, 서울올림픽파크
텔 등의 숙박시설 등이 닦여져 역사와 문화, 미술, 체육, 음악, 자연, 여가생활을 두루 누릴
수 있는 복합적인 공원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입장료를 받았으나 무료로 해방되었으며, 관람시간도 크게 완화되어 밤
시간(22시~5시)에만 빗장을 걸어둔다.

올림픽공원은 크게 줄여서 '올팍'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공원의 품으로 인도하는 관문은 세계
평화의문과 올림픽공원역으로 이어지는 동1/2문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 북1/2문, 남1/2/3/4문
, 서1/2문이 있다.

* 올림픽공원 9경 명소 (한국사진작가 협회에서 추천한 사진 촬영 명소임)
- 세계평화의문, 엄지손가락 조각품, 몽촌해자 음악분수, 대화 조각품, 몽촌토성 산책로, 나
  홀로나무, 88호수와 팔각정, 들꽃마루, 장미광장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 88-3 등 (올림픽로 424 ☎ 02-410-1114)
* 올림픽공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몽촌해자(夢村垓子, 몽촌호)와 수변무대

▲  남쪽 수변무대 부근에서 바라본 몽촌해자와 몽촌토성

국기광장 뒷쪽에는 몽촌해자라 불리는 호수가 그림처럼 누워있다. 여기서 해자란 방어력을 높
이고자 성 바깥에 닦은 물길로 1983년 이후, 몽촌토성 외곽을 싹 뒤집고 발굴조사를 했을 때
성벽 밑에서 도랑 흔적이 나왔다. 하여 발견된 흔적을 바탕으로 넓게 호수를 조성하여 몽촌해
자라 했다. 물은 성내천(城內川)에서 가져왔으며, 호수 둘레 1,800m, 총면적 53,500㎡, 수심
1.4~2m, 담수량은 무려 76,000톤이다.

남한산(南漢山)에서 발원하여 한강으로 흘러가는 성내천은 송파구의 소소한 젖줄로 송파구의
동부를 흘러간다. 올림픽공원역(5/9호선)을 지나서 올림픽체조경기장, 수영경기장 옆까지 다
가선 성내천은 까치다리 너머로 88호수를 빚고, 올림픽공원 북쪽 경계를 더듬으며 공원과 속
세(俗世)의 경계를 가르다가 성내교 직전에서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직진하면 한강이고, 왼
쪽(서남쪽) 지류가 바로 몽촌해자로 이 해자는 소마미술관 북쪽 물레방아에서 뚝 끊긴다.

해자 중앙에는 포항제철에서 1989년에 달아준 음악분수가 있는데, 물줄기가 최고 30m까지 솟
아 올라 하늘을 긴장시키며, 140여 곡의 멜로디에 맞춰 14종 14,000여 가지의 황홀한 물줄기
를 연출한다. 이 음악분수는 올림픽공원9경의 3경으로 꼽히며, 해자 남쪽에는 국기광장을 사
이에 두고 수변무대 2개를 닦아놓아 다양한 음악회가 열린다. 또한 자연형 호안(湖岸)과 6개
의 식물섬을 띄워놓아 생태계를 적극 배려했다.

* 음악분수 활동 시간 - 5~11월, 11~17시 (매시 10분에 가동)
* 몽촌분수 활동 시간 - 5~11월, 11~17시 (연속 가동)


▲  몽촌해자 남쪽 끝에서 바라본 해자와 토성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호수 너머로 수목이 울창한 언덕이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인 몽촌토성이다. 이 해자는 토성을 지키고자 그 앞에
조성된 것으로 토성이 절찬리에 쓰이던 백제 때와 지금의
모습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

▲  누가 이리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게 방화를 저지른 것일까?
늦가을에 잠긴 놀이터 나무들 (평화의광장 동쪽)

▲  대자연 앞에 한없이 작아보이는 인간의 작품들
아무리 거장이 만든 작품이라 한들 대자연 형님이 지른 늦가을의
향연 앞에서는 일개 장난감에 불과하다.

▲  두 얼굴의 조각품 (올림픽공원9경의 4경인 '대화')

서울 올림픽공원은 세계5대 조각공원의 하나로 추앙을 받고 있다. 88호수 주변과 평화의광장,
소마미술관, 지구촌공원, 조각공원, 만남의광장에 우리나라 조각품 34점과 세계 조각품 177점
이 공원을 아낌없이 수식하고 있는데, 이는 이곳이 88서울올림픽이 열린 현장이자 지역 명소
로 끝나는 것이 아닌 자연과 역사, 문화, 체육이 어우러진 국제적인 명소로 계속해서 가꾸어
진 결과이기도 하다.
물론 88올림픽을 후광(後光)으로 삼아 이곳이 국제적인 명소가 되긴 했지만 그 이후로도 관리
를 꾸준히 했기 때문에 빛은 그때보다 더욱 밝아졌다.

소마미술관에서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면 지구촌공원 건너편에 '대화'란 이름을 지닌 두 얼굴
의 조각품이 마중을 한다. 윗부분이 아작난 얼굴 2개가 서로 귀를 대고 있는 모습인데, 북아
프리카 알제리의 조각가 아마라 모한이 만든 것으로 1987년 7월부터 8월까지 50일 동안 이 땅
에 머물며 화강암을 깎고 다듬었다.
아마라 모한은 똑같이 생긴 쌍둥이가 서로 반목하며 대화를 끊자 발작한 신이 그들의 눈을 없
애 버려 서로를 볼 수 없게 만든 뒤, 평생 옆에 붙어 대화를 하도록 했다는 설화를 소재로 하
여 만들었다. 즉 말하기보다 듣는 것이 대화의 첫걸음이란 심오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이다
.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자 머리가 부딪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모습을 통해 의사소통
을 위한 노력을 표현하고 있다. 단순 작품을 떠나서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참
아름다운 작품인 것이다. 허나 인간은 신과 말 못하는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
는 존재라 그 단순한 진리를 쉽게 깨닫지 못한다. 당장 나도 그렇고, 이 땅의 백성들, 위정자
들이 그렇지 않은가?

▲  온갖 조각품이 누워있는 조각공원과 지구촌공원


 

♠  보호수 느티나무, 88마당, 몽촌토성 동벽 주변

▲  보호수 느티나무와 돌기둥 (오른쪽)

'대화' 작품을 지나면 불끈 솟은 하얀 피부의 돌기둥과 오래된 느티나무가 나란히 마중을 나
온다. 인간의 일개 작품이 감히 대자연이 빚은 작품과 나란히 서 있는 셈인데, 변화를 거부하
며 늘 같은 모습으로 일관하는 밋밋한 돌기둥보다는 계절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자연물이 더
아름답게 보여 자연산 작품에 자꾸 눈길이 간다. 돌기둥은 나무를 수식하는 들러리 정도 밖에
는 안보인다.

올림픽공원에는 늙은 보호수가 3그루 있는데, 이중 2그루가 이곳에 있다. 겉으로 보면 가지가
크게 2개로 된 나무처럼 보이지만 잘살펴보면 서로 별개임을 알 수 있는데, 그들이 너무 달라
붙어 있어서 그런 착시가 생긴 것이다.
이들 가운데 곧게 솟은 좌측 나무는 높이 7.5m, 둘레 300cm이며, 그 옆에 45도로 기운 우측
나무는 높이 12.5m, 둘레 380cm이다. 그들의 나이는 470여 년(1989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 약 430년)으로 이제는 먼지처럼 사라진 몽촌마을 사람들의 정자나무 역할을 했던
존재이나 지금은 공원 탐방객들에게 매일 그늘을 드리운다.


▲  우애가 좋은 형제처럼 너무 붙어있는 보호수 느티나무
(왼쪽이 서울시 보호수 24-5호, 오른쪽이 서울시 보호수 24-6호)

▲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먹고 자란 몽촌유허비
몽촌유허비는 강제로 정든 고향을 떠난 몽촌마을 사람들(몽촌 향우회)이 그리움과
푼돈을 모아 2001년 12월에 장만한 비석이다. 귀부와 검은 피부의 비신(碑身),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이무기가 새겨진 이수(螭首)까지 싹 갖추고 있는
당당한 모습이다.


▲  늦가을에 잠긴 산책로 (88마당, 올림픽체조경기장 방면)

▲  너른 잔디밭인 88마당

88마당은 토성과 자연으로 이루어진 올림픽공원 서부와 경기장, 공연장으로 이루어진 동부의
경계 지점이다. 너른 잔디밭으로 이루어진 공간으로 서쪽에는 몽촌토성이 흐르고 있으며, 동
에는 한얼광장과 여러 경기장이 있다. 광장 구석에는 여러 조각품이 공원의 향수를 돋구며,
이곳은 주로 대형 음악회와 사생대회, 소풍 장소로 널리 쓰인다.

▲  88마당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조각품들
 

▲  한얼광장과 올림픽공원역을
이어주는 한얼교


▲  한얼광장에 놓인 붉은 피부의 조각품
하늘에 뜬 초승달을 잡아와 붉게 박제를 한 것은 아닐까? 한얼광장은 88마당
동쪽으로 체조경기장과 핸드볼경기장 사이의 너른 광장을 일컫는다.

▲  몽촌토성(夢村土城)  동벽 (동문터)

올림픽공원하면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인 몽촌토성(사적 297호)이
다. 몽촌토성은 이곳의 진정한 알맹이로 그가 없는 올림픽공원은 갈비가 없는 갈비탕과 같다.
그가 있기에 이곳이 역사가 깃든 사적공원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고, 역사와 문화, 자연이 어
우러진 싱그러운 자연지대로 서울 부도심에 남게 된 것이다.

올림픽공원의 거의 40%를 장악하고 있는 몽촌토성은 백제 초기에 축성된 것으로 대표적인 한
성백제(漢城百濟)시대의 유적이다. 여기서 한성백제란 한강 유역인 현재 서울 강동구와 송파
구 일대에 있던 것으로 여겨지는 백제의 도읍지 위례성<慰禮城, 또는 한성(漢城)> 시절을 일
컫는 말이다.
둘레 2.3km(2,285m)에 이르는 몽촌토성은 막연히 백제 때 토성으로 전해져 왔을 뿐, 거의 방
치되고 있었다. 토성의 이름인 몽촌은 이곳 지명에서 따온 이름이지 원래부터의 명칭은 아니
었다. 그러다가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 흔쾌히 선정되면서 1980
년대 초에 체육시설을 갖춘 공원을 이곳에 닦기로 했다. 그래서 공사 전에 토성의 비밀을 밝
히고자 1983년부터 서울대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벌였다.
1989년까지 6차에 걸쳐 조사를 받았으며, 그 결과를 토대로 지금의 모습으로 산뜻하게 복원되
었다. (1982년 7월 국가 사적 297호로 지정됨)

몽촌토성은 자연산 언덕과 지형을 이용해 진흙으로 다진 것으로 경주 반월성(半月城)과 대구
달성(達城)과 비슷한 유형을 하고 있다. 자연 암반층을 급경사로 깎아 다듬기도 했으며, 동북
쪽 구릉에서는 외성(外城)의 흔적이 나왔다. 성 바깥으로 나가는 길목에서는 동/남/북문터가
확인되었고, 토성의 지형을 통해 남과 북, 동과 서를 잇는 도로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토성(土城)의 단점을 보완하고 수비력을 높이고자 서북쪽과 동벽 바깥에 목책을 세운
흔적과 서벽과 북벽 앞에 둘러진 도랑(해자)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북쪽 성벽은 성내천을
자연산 해자로 삼았다. 

토성 안에서는 출입구가 달린 6각형 모양의 움집터(12곳)와 건물터(4곳), 연못터(2곳), 저장
용 구덩이(30여 개), 무덤 등이 확인되었으며, 모두 한성백제 때 흔적이다. 그리고 한성백제
시절 유물이 앞을 다투어 무수히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 서진(西晋, 3세기 후반)의 동전무늬
도기조각(陶器片) 3점이 성 내부 퇴적층에서 발견되어 토성 축성시기가 늦어도 3세기 후반 이
전임이 분명해졌다.
움집터는 토성을 지키던 군사들의 막사로 여겨지며, 건물터는 자갈을 다져 기단과 적심을 만
든 정면 3칸 이상, 측면 2칸의 큰 구조로 밝혀졌다. 저장용 구덩이는 입구가 좁고 아랫 바닥
이 넓은 복주머니 모양 구덩이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런 구덩이는 음식물을 저장하기에
아주 좋다. 여기서 220개 이상의 큰 독이 출토되었으며, 부뚜막 시설과 조리용 토기, 배식용
토기 등이 나와 당시 백제인들의 식문화를 보여준다.
그리고 금동제 허리띠 장식과 금귀걸이, 세발토기, 굽다리 뚜껑항아리, 손잡이잔, 돌절구, 쇠
집게, 뼈갑옷, 화살촉 등 왕족과 귀족의 장신구부터 제사 유물, 군사 유물까지 다양한 유물이
나와 안그래도 많이 빈약한 한성백제 시절의 역사 이야기를 조금씩 채워주었다.

그렇다면 몽촌토성은 백제에게 어떤 곳이었을까? 아직 의견이 분분하나 풍납토성을 위례성의
중심으로 본다면 몽촌은 위례성을 보조하던 곳이거나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도읍으로 삼았다
는 한산(漢山)으로 여겨진다.<또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보기도 함> 풍납과 몽촌은 거
의 이웃처럼 자리해 있으니 이름은 조금 다르나 거의 같은 곳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바로
이들을 합쳐서 한성(漢城)이라 부르는 것이다.
발견된 유적과 유물을 통해 몽촌에는 제왕의 별궁과 관청, 군사시설, 왕족, 귀족들의 집이 있
던 것으로 여겨지며, 위례성의 중심으로 여겨지는 풍납은 왕궁과 관청, 귀족들의 집, 백성들
의 집, 시장이 있었다.

백제는 서울 송파/강동 지역(또는 하남시)에 위례성(한성)을 세워 5세기 말까지 아시아 해양
대국으로 크게 번영을 누렸다. 왜정(倭政) 때 확립된 식민사관 쓰레기들과 있는 역사도 왜곡
하고 축소시키는 영 좋지 못한 쓰레기들의 영향으로 백제하면 그저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제주도, 황해도를 차지한 조그만 나라로 생각하고 있다.
허나 백제는 우리의 좁은 생각과 달리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나라였음이 많은 역사자료와 유
물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백제는 일찍이 바다를 활용한 나라이다. 수군을 강화시키고 대외무역을 늘려 중원대륙의 요서
, 산동반도, 강남 지역 등 대륙의 무수한 해안 지역을 점령했고, <저장성을 비롯한 수천 리의
영토를 점유했다는 기록, 탐라 남쪽의 큰 섬(대만?)을 통치했다는 기록, 최치원(崔致遠)이 고
구려와 백제는 강성할 때 군사가 수십만으로 대륙 상당수를 먹었다는 발언 등등> 4세기 이후
가야(伽倻)가 점유하고 있던 왜열도로 진출해 그곳을 백제의 별채로 삼았다. 그리고 중원대륙
을 넘어 동남아까지 힘을 뻗치며 담로(擔魯)를 설치했다는 학설도 크게 지지를 얻고 있다.
특히 동성왕(東城王) 시절 북위(北魏)의 기병 수십 만을 때려잡은 사건이 있었는데, 그 현장
은 바로 산동반도(山東半島)였다. 산동을 둘러싼 백제와 북위와의 싸움에서 백제는 크게 승리
. 남조(南朝)의 여러 나라에 국서를 보내 자랑을 하며 그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렇게 잘나갔던 한성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한강을 건너 위례성을 점령하고
백제 군주인 개로왕(蓋鹵王)을 처단하면서 아주 비참하게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웅진(熊津
, 충남 공주)으로 천도함> 그때 고구려는 위례성 일대를 싹 불지르고 파괴하면서 모두 잿더미
가 되었고, 위례성 3글자는 천하에서 지워지게 되었다. 바로 그 고구려의 만행 때문에 위례성
위치가 오랫동안 아리송했던 것이다. 한산으로 여겨지는 몽촌토성도 그때 철저히 파괴되어 사
람이 살기 어려운 곳이 된 것으로 보인다.


▲  몽촌토성 동문터 (북쪽에서 본 모습)

토성 내부 면적은 216,000㎡로 인근 해자와 성내천까지 합치면 542,542㎡까지 덩치가 올라간
다. 토성에는 산책로가 그림처럼 그어져 걷는 재미가 쏠쏠하며, 예전 송파/잠실이 개발되기
전에는 서벽에서 행주산성(幸州山城)까지 보였다고 전한다. 옛날처럼 왕성(王城) 방어용의 역
할은 상실되었지만 관광/나들이의 성지(聖地)로 바쁘게 살고 있으며, 올림픽공원에 왔다면 꼭
1바퀴는 돌아야 1년이 잘풀리는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 겸 꿀단지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곳을 올림픽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면서 몽촌토성은 그 주인공이 아닌 조
연이 되버린 것이다. (지금 보면 거의 주연처럼 보이긴 함) 물론 이곳이 공원이 되면서 몽촌
토성이 개발의 칼질에서 목숨을 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엄연히 올림픽을 위한 공간으로 조성되
었기 때문에 토성의 동쪽 부분은 죄다 체육시설에 자리를 넘겨주었다. 게다가 서둘러 운동경
기장을 만들고 공원을 닦으면서 발굴 조사도 속시원히 하지 못하고 6년 만에 뚝 멈춰섰다.
그러다가 2013년 11월 몽촌토성 발굴 30주년이 되자,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그 특별전을 기획했
고, 아직도 적지 않게 베일에 가려진 몽촌토성의 속살을 들추고자 2014년부터 다시 발굴 조사
를 벌이고 있다. 현재는 예전 내성농장 일대를 조사하고 있는데, 조사가 마무리 되면 보다 많
은 흔적과 유물이 쏟아져 나올 것이며, 주택가로 뒤덮힌 풍납토성(風納土城) 일대도 싹 뒤집
어 땅속에 묻혀 공백으로 남아있는 한성백제의 나머지 이야기도 싹 맞추었으면 좋겠다.


▲  몽촌토성 동문터 (남쪽에서 본 모습)

토성이라고 해서 만만하게 보면 안된다. 높이는 왠만한 산성(山城)이나 석성(石城) 높이에 버
금가며 경사 또한 각박하기 때문이다. 높이가 낮은 곳은 5~6m, 높은 곳은 무려 10~15m에 달하
며, 몽촌해자와 접한 북벽과 서벽은 높이도 상당하고 경사도 아찔하다.
토성 보호를 위해 성벽 부분은 금줄을 쳐놓아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나 겨울 제국이 눈폭탄을
크게 투하해 은빛세계를 빚으면 포대자루 하나 들고 와서 썰매를 타고 싶은 곳이다. (물론 그
러면 절대로 안됨)


▲  몽촌토성 동벽에서 바라본 88마당

▲  몽촌토성 움집터 유적 (백제집자리전시관)

몽촌토성 동벽에는 백제시대 움집터를 담은 백제집자리전시관이 있다. 1983년부터 1989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이곳을 포함해 12곳의 움집터가 나왔는데, 여기서 발견된 움집터는 총
4곳으로 보존을 위해 특별히 푸른 피부의 보호각을 갑옷처럼 둘러 그들의 보금자리로 삼았다.
이곳이 전시관이다보니 인근 소마미술관이나 한성백제박물관처럼 매주 월요일마다 빗장을 걸
고 쉰다. (마침 그날이 월요일이라 내부는 담지 못했음)

전시관에 담긴 움집터는 6각형 모양으로 동남쪽에 출입구 시설이 있으며, 긴 벽의 높이가 6m,
짧은 벽은 4m 정도 된다. 그리고 주거지 한쪽 벽을 따라 밖으로 나온 온돌 모양의 화덕이 설
치되어 있었고, 벽체 안쪽 바닥에는 20~30cm 정도의 기둥 구멍이 남아있는데, 긴 벽에는 10개
가, 짧은 벽에는 4~5개가 남아 있다.


▲  자연과 역사 속을 거닐다 ~ 몽촌토성 동벽 산책로

▲  나무의 착각 ~ 몽촌토성 동벽
대자연이 여기저기 내던진 씨앗들이 토성에 뿌리를 내려 큰 나무가 되었다.
토성이 얼마나 큰지 나무도 그곳을 언덕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  몽촌토성 동벽~북벽, 옛 내성농장 주변

▲  늦가을이 마지막 춤을 추는 목책 앞 산책로 (몽촌역사관 방향)

▲  자연산 숲터널을 이룬 목책 앞 산책로 (88마당 방향)
무성한 숲터널 사이로 겨울이 슬그머니 들어와 제국의 기반을 닦는다. 조만간
이 아름다운 숲길도 겨울에게 몽땅 털려 뼈와 낙엽만 남게 될 것이다.

▲  몽촌토성 목책(木柵)

몽촌토성 동벽 앞에는 나무를 엮어서 만든 목책이 있다. 목책이란 방어시설의 하나로 몽촌토
성 일대를 조사했을 때, 목책의 흔적이 드러났는데, 생토 암반층에 1.8m 간격으로 직경 30~40
cm, 길이 30~90cm의 구멍을 파고 큰 나무로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 보조 기둥
을 세웠다.
목책의 높이는 정확하진 않으나 2m 이상으로 여겨지며, 이곳 목책은 발굴조사된 목책 기둥 자
리를 따라 그 위에 조촐하게 상상을 얹혀 재현한 것이다.

아무래도 토성이다보니 석성보다는 방어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목책과 해자를 두
룬 것인데, 목책은 동벽과 남벽 일대에 주로 설치된 것으로 여겨진다.


▲  가지런히 재현된 몽촌토성 목책

▲  늦가을이 우수수 떨어지면서 빈 자리도 조금씩 보이고 있다.

▲  올림픽공원 산책로(몽촌토성 산책로 제외) 가운데 가장 으뜸을 꼽으라면
목책에서 옛 내성농장으로 이어지는 구간이 아닐까 싶다. 늦가을의 손길이
가장 아름답게 거쳐간 곳으로 사람들은 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올해도 속절없이 흘러가는 가을의 발목을 붙잡으려 든다.

▲  '무제'라는 이름의 이글루 모양의 조각품 (1988년 박충흠 작)

▲  몽촌토성 북벽 (북문터)

'무제'라는 이름의 작품 앞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토성 북벽과 내
성농장이, 오른쪽은 몽촌역사관과 성내천, 성내천을 앞에 둔 토성의 동쪽 부분이다. 이제 공
원의 40% 정도 돌아본 셈이다.


▲  잠시 과거가 되버린 내성농장 (북문터 안쪽)

토성과 언덕으로 울퉁불퉁한 몽촌토성 속살에는 넓은 편은 아니나 조촐하게 평원이 펼쳐져 있
다. 그 평원은 몽촌토성 북벽 안쪽에 자리해 있는데, 평원 가운데 6,600㎡에 농경지를 닦고
토성 안에 있다는 뜻에서 내성농장이라 했다.

내성농장은 밭벼와 목화, 고구마는 물론 유채꽃과 코스모스, 해바라기 등의 들꽃이 넉넉히 둥
지를 틀던 싱그러운 곳이었으나 몽촌토성과 한성백제의 숨겨진 비밀을 캐고자 3년 넘게 발굴
조사에 들어가 농장은 사라지고 발굴 지역 주변에 펜스가 빙 둘러져 있다. 여기서 많은 백제
유물과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발굴이 마무리가 되면 농장으로 다시 돌아가거나 관련 유적지
보호구역으로 살아갈 것이다.


▲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처럼 솟은 나홀로나무 (사진 가운데)

내성농장 북쪽을 살펴보면 평원 한복판에 다른 나무와 멀리 거리를 두며 고독을 즐기고 있는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는 그를 '나홀로나무'라고 부른다. 어떤 이들은 '외톨이나무',
'왕따나무','연예인나무'라고도 하는데, 올림픽공원9경의 제6경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 나무가 홀로 된 이유는 정말 별거 없다. 1985년 몽촌토성 내부를 싹 갈아엎는 과정에서 키
가 크고 모양이 괜찮은 나무만 남기고 모두 베어버렸기 때문이다. 즉 인간들이 잘생기고 마음
에 드는 나무만 살려두고 모두 밀어버리면서 졸지에 나홀로나무가 된 것이다. 그렇게 친구를
잃고 홀로 되었지만 전화위복(轉禍爲福), 새옹지마(塞翁之馬)란 말이 괜히 허언이 아닌 듯 이
곳의 사진 모델로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낸다.


▲  토성 북벽에서 바라본 내성농장 들판 (예전 모습)

▲  토성 북벽에 뿌리를 내린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24-2호

내성농장에서 토성 북벽을 따라가면 장대하게 자라난 은행나무가 그늘을 내밀며 마중을 한다.
이 나무는 올림픽공원에 깃든 보호수 3그루의 하나로 나이가 무려 580년(1968년 보호수 지정
당시 추정 나이는 530년)에 이르며, 높이 17.5m, 둘레 6m에 이른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
는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이렇게 어엿한 나무로 성장을 했는데, 이곳에 서면 내성농장과 성내
천, 풍납동(風納洞) 일대가 훤히 바라보인다.


▲  몽촌토성에서 가장 높은 북벽 (서쪽 방향)

▲  몽촌토성 북벽 (동쪽 방향)

▲  북벽 쉼터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토성 북벽과 성내동/둔촌동 지역, 내성농장 등)

▲  북벽 쉼터에서 바라본 토성 북쪽 산책로와 성내천
성내천은 양재천(良才川)과 더불어 생태 하천으로 크게 거듭난 현장이다.

▲  늦가을 오색 향연에 잠긴 몽촌토성 북부(올림픽파크텔 동쪽)와
그런 향연을 지켜보는 속세(시내)


 

♠  올림픽공원 마무리

▲  억새가 춤을 추는 몽촌토성 서벽
서벽은 북벽에 비해 높이가 조금 낮고 경사도 포근한 뒷동산처럼 느슨하다.
게다가 다른 구간과 달리 소나무가 무성해 솔내음이 그윽하며,
그늘도 깊다.

▲  소나무로 그윽한 몽촌토성 서벽

몽촌토성 산책로는 경사도 거의 느슨하여 누구든 편히 거닐 수 있는 착한 길이다. 제아무리
걷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이런 길에는 퐁당퐁당 빠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걸
어도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자꾸만 걷고 싶다. 누군가 나를 말리지 않았다면 햇님 주위를 도
는 지구처럼 토성을 몇바퀴씩 돌았을 지도 모른다.
우리집으로 살짝 가져와 나 혼자서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아름다운 길이다.


▲  충헌공 김구 묘역(忠憲公 金構 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9호

몽촌토성 서벽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서 왼쪽을 잘 살펴보면 소나무들 너머로 하얀 철책이 둘
러진 공간이 보일 것이다. 주마간산처럼 움직이면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으니 속도를 조금 줄
이고 잘 살펴보자. 그 철책 안에는 올림픽공원의 숨겨진 옛 명소인 충헌공 김구 묘역이 조용
히 들어앉아 늦가을 햇살을 즐기고 있다.
이 묘역은 약간 구석에 있다보니 기웃거리는 사람이 거의 없어 늘 한적하다. (무덤을 알리는
이정표도 없음;) 올림픽공원에서 몽촌토성, 보호수 3그루 다음으로 늙은 이곳의 토박이로 토
성 산책로를 거닌다면 꼭 챙겨보기 바란다.


▲  소박한 모습의 충헌공 김구 묘

묘역의 주인공은 김구이다. 여기서 김구는 친일파들이 싫어하는 애국지사 김구(金九)가 아니
라 조선 중기에 살았던 김구(金構)로 이름만 같지 한자는 다르다.

김구(1649~1704)는 청풍김씨 집안으로 김징(金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참봉 이의길(李義吉)
의 딸이며, 자는 사긍(士肯), 호는 관복재(觀復齋)이다.
1669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83년 춘당대(春塘臺)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비로소 관
직 생활을 시작했다. 전적과 각 조의 낭관(郎官)를 거쳤고,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에 있을 때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의 계속되는 대립을 조정하려고 만언(萬言)에 가까운 시
무소(時務疏)를 올리는 등 애를 쓰기도 했다.

경연관(經筵官)과 승지(承旨), 황해도와 충청도, 전라도, 평안도관찰사(觀察使)를 지냈고, 대
사간(大司諫)을 거쳐 1697년 강화유수(江華留守)가 되어 장녕전(長寧殿)을 경영해 공을 세웠
다. 허나 흉년으로 모든 역사(役事)가 중지된 마당에 내전(內殿)의 명을 받아 집을 지었다고
해서 오도일(吳道一), 이광좌(李光佐) 등에게 탄핵을 받기도 했다.

김구가 잘한 일을 하나 끄집어 본다면 바로 단종(端宗) 부부의 원통한 넋을 조금이라도 풀어
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판결사(判決事)로 있을 때 노산군(魯山君)의 복위를 숙종(肅宗)에
게 건의했다. 하여 노산군은 강제로 눈을 감은지 241년만인 1698년에 비로소 단종이란 묘호(
廟號)를 받게 된다. 그리고 단종의 부인인 송씨의 묘도 능으로 추봉(追封)할 것을 건의해 사
릉(思陵)이란 능호를 받게 했으며, 사릉 능역(陵域) 공사를 맡아 그 공으로 형조판서(刑曹判
書)가 되었다.
이렇게 단종 부부에게 큰 선물을 준 그는 1703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으며, 1704년에 65세
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숙종은 충헌이란 시호를 내렸다.

김구는 제왕의 위엄에 굽히지 않았고, 의리에 따라 처신했으므로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
게 존경을 받았다. 육도(六韜)와 도가(道家) 관련 서적에 정통했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
가 패기가 넘쳤다. 그가 남긴 글씨로는 강원도 고성(高城)에 있는 '백천교중창비(百川橋重刱
碑)'와 경상도 선산(善山)에 있는 '김주신도비(金澍神道碑)'가 있다.

그는 말년에 몽촌토성에 거주했는데, 광주유수(廣州留守)도 자주 찾아와 인사를 했다고 하며,
비록 죄인이라도 이곳에 들어오면 김구의 허락을 받아야 잡아갈 수 있었다고 하니 몽촌 지역
에서 그의 영향력이 제법 컸음을 알려준다.

묘역에는 커다란 봉분(封墳)과 비석, 상석(上席), 망주석(望柱石) 1쌍과 양석(羊石) 1쌍이 있
으며, 양석은 근래에 조성되었다. 예전에는 공원 산책로에서 묘역이 뻔히 보였지만 그 앞에
야생화단지를 꾸미면서 그 뒤에 숨어버렸다.


▲  충헌공 김구 신도비(神道碑)

묘역 동남쪽에는 김구의 행적이 소상히 적힌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고급 관료와 왕족의 묘
역에만 쓸 수 있던 비싼 비석으로 보통 신도(神道)로 통한다고 전하는 묘역 동남쪽에 세운다.
1743년에 세운 비석으로 비문(碑文)은 이의현이 짓고 글씨는 서명균(徐命均)이 썼다.
270년이 넘은 늙은 비석이지만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하얀 피부를 잘 유지하고 있으며, 네
모난 비좌(碑座)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이무기 2마리가 다투는 모습을 새긴 지
붕돌을 얹혔는데, 조각 솜씨가 매우 현란하다.


▲  코스모스가 넝실거리는 야생화단지

김구 묘역 남쪽에는 야생화단지가 펼쳐져 있다. 가을이라 분홍색과 하얀색 코스모스가 들판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들의 보금자리와 꽃을 짓밟으며 오로지 사진 찍기에 부산하
다. 꽃을 보호하려고 금줄까지 쳐놓았지만 인간들의 욕망은 그 금줄마저 무색하게 만든다.


▲  미로찾기
미로가 속세보다는 덜 복잡하여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치면 거뜬히
통과할 수 있다. 우리네 인생도 다 저런 미로가 아니던가..?

▲  몽촌토성 남벽 (남문터 주변)

충헌공 김구 묘역과 야생화단지에서 잠시 놓고 있었던 몽촌토성 산책로를 다시 더듬는다. 남
벽은 높이도 낮고 경사도 완만한 편으로 숲도 제법 우거져 있어 일부 구간은 숲길 분위기를
자아낸다.


▲  늦가을에 잠긴 산책로 (목책 앞)
마지막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겨울을 경계하고 있는 나무들,
그렇게 다들 늦가을을 붙잡건만 힘이 다한 가을은 결국 짐을 싸고
떠나려고 한다. 나무들은 늦가을의 떠남을 슬퍼하며 낙엽으로
눈물을 대신한다.

▲  성내천 산책로 (피크닉장 주변)

▲  생태계 복원의 정석, 성내천 (둔촌동 방향)

몽촌토성을 반 바퀴 정도 복습을 더 하고 아쉽지만 평지길로 갈아탔다. 목책(木柵)과 피크닉
장, 성내천 남쪽 산책로를 지나 속세와 공원의 경계를 가르는 성내천을 건넌다. 성내천에는
많은 다리가 놓여져 있는데, 우리가 건넌 것은 무지개다리이다.
성내천은 한때 개발의 칼질로 망가진 저주 받은 하천이었으나 오랜 노력에 결과로 자연이 숨
쉬고 온갖 식물과 동물들이 발을 뻗고 자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다시 살아난 성내천을 보니
회색 도시에서 오염된 눈과 마음이 자연을 통해 확 정화됨을 느낀다. 역시 인간은 자연의 일
부로 살아야 별탈이 없다. 부디 복원이 무색하지 않게끔 앞으로도 철저히 관리를 해주어 우포
늪 수준으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다리를 거쳐 속세로 나오니 어느덧 18시. 평온했던 공원에 잠시 익숙해졌다가 다시 속세로 나
오니 정말 딴 세계에 온 기분이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올림픽공원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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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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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1월 1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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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쪽 변두리에 깃든 상큼한 호수공원, 신월동 서서울호수공원 (능골산, 백인의식탁, 몬드리안정원)

 


' 도심 속의 상큼한 호수공원, 서서울호수공원(능골산) '

▲  서서울호수공원 중앙호수와 소리분수


 

여름 제국(帝國)이 막바지 위엄을 보이던 8월 끝 무렵에 일행들과 서서울호수공원을 찾았
다.
서서울호수공원은 서울 서남쪽에 생겨난 호수공원으로 그 이름은 익히 듣고 있었다. 비록
나와 서울 하늘을 같이 이고는 있지만 나는 서울 동북쪽 끝인 도봉동(道峰洞)이고 호수공
원은 그 반대인 서남쪽 끝에 있으니 서로의 거리가 무척 멀다. 하여 쉽게 인연이 닿지 않
았었지. 그러다가 이번에 억지로 인연을 갖다 붙여 그를 찾게 되었다.

오후 2시, 신도림역에서 일행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662번을 서서울호수공원으로 이동했는
데, 나머지 일행은 까치산역(2,5호선)에서 버스를 타고 들어왔다.


 

  그림 같은 호수를 품은 서울 서남권 최대의 시민공원
~ 서서울호수공원 (제생정원, 능골산)

▲  정수장 시절 수도관을 활용한 제생정원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에 그림 같은 호수를 품은 호수공원이 있다. 그 현장
은 바로 양천구 신월3동 신월나들목 북서쪽에 넓게 자리한 서서울호수공원(이하 호수공원)이
다.

이곳은 원래 물을 정화하여 상수(수도물)를 생산하던 정수장(淨水場)이었다. 얼핏 봐서는 이
곳이 설마? 믿겨지진 않겠지만 제생정원과 몬드리안정원 등 공원 곳곳에 정수장 시절의 흔적
이 짙게 남아있어 사연을 알게 된다면 아마 놀라게 될 것이다. 쾌쾌한 약품 냄새와 하수도 냄
새가 풍겼던 통제구역 정수장이 포근한 시민공원으로 완벽하게 변신을 꾀한 의미 깊은 현장이
기 때문이다.

1959년 경기도 김포군(金浦郡)은 이곳에 김포정수장을 닦았다. 당시 신월동(新月洞)을 비롯한
강서/양천구 지역은 모두 김포군 땅이었다. 1963년 이들 지역이 서울에 편입되었으나 계속 김
포군에서 소유하고 있던 것을 1979년 서울시에서 인수하여 신월정수장으로 이름을 갈았다.
이곳은 매일 12만 톤의 수도물을 공급했으나 2003년 10월 '서울시 정수장 정비계획'에 의거하
여 정리 대상이 되면서 강제로 심장을 멈추게 된다. 이로써 44년이나 이어오던 정수장으로서
의 생명은 끝이 난 것이다.

이후 신월정수장 자리를 두고 청소년 유스타운 건설, 임대주택 조성, 징그럽기 그지 없는 영
어 사대주의 현장 조성(영어체험마을) 등 다양한 계획이 쏟아져 나왔으나 어느 것도 답이 되
지 못한 채, 갈팡질팡했다.
그러다가 2006년 서울의 지역간 불균형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김포공항 비행기 소음에 매일
고통받는 지역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마땅한 넓은 공원이 없던 강서/양천 지역 공원 확충을
위해 서울 서남권 제일의 테마공원을 닦기로 결정했다. 하여 3년 가까이 공원화 작업을 벌였
고, 정수장 뒷쪽에 자리한 능골산까지 공원에 포함시켜 숲을 복원하고 산길을 정비해 2009년
10월 26일 '서서울호수공원'이란 새로운 현판을 내걸며 세상에 공개되었다. 금지된 구역에서
누구나 안길 수 있는 시민공원으로 새롭게 거듭난 것이다.

이곳은 옛 정수장을 발판으로 삼아 일어선 친환경 공원이라 그에 걸맞게 '물'과 '재생'을 테
마로 내세웠다. 공원 면적은 217,946㎡(능골산 포함)로 여의도공원, 양재시민의숲에 버금가는
서울 서남권 최대의 공원이며, 소나무 등 47종의 나무와 눈주목 등 44종의 관목, 수호초와 원
추리 등 3종의 초화, 금잔디(22,961㎡)와 양잔디(417㎡)로 이루어진 잔디밭까지 갖추었다.
김포정수장 시절부터 있던 중앙호수에는 노즐 41개로 이루어진 소리분수를 닦아 비행기가 뜰
때마다 흥분하게 했고, 실개천과 생태수로 등의 물줄기와 백인의 식탁, 제생정원, 정수장 건
물을 활용한 몬드리안정원과 미디어벽천 등을 갖추어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한다.

호수공원에 왔다면 공원의 심장부(중앙호수, 몬드리안정원 일대)만 살피지 말고, 공원 서쪽에
자리한 능골산도 올라가보자. 그 산도 엄연한 호수공원의 일원(부천 구역은 제외)으로 정상까
지는 길어봐야 10분 정도이다.
정상을 찍고 서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조선 초기 무인(武人)인 변종인과 20세기 초/중반 유명
시인인 수주 변영로가 묻힌 밀양변씨묘역이 있으니 그들까지 둘러보면 정말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  제생정원

호수공원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제생공원이라 불리는 공간이다. 이곳은 정수장
에 쓰인 직경 1m짜리 수도관을 손질하여 깔아놓고 그 주변에 풀, 억새를 심은 정원이다. 즉
정수장 시절 수도관을 활용하여 짠 공간이다.
그 옆에는 네모난 얕은 연못을 깔았는데, 수도관과 정수장 기둥을 심고 다양한 색채를 입히거
나 기둥 위에 꽃을 두었다. 완전 친환경공원에 어울리게 말이다.


▲  서서울호수공원 스타일로 재현된 제생정원 연못

▲  호수공원 개원 기념으로 심어진 소나무 (2009,10,26일에 식수됨)
호수공원이 진국으로 숙성될수록 이 소나무도 덩달아 숙성의 기쁨을 누린다.

▲  강렬한 붉은 피부에 하얀 점을 지닌 백인의 식탁

제생정원 남쪽에는 붉은 피부에 네모난 하얀 점을 지닌 길쭉한 식탁과 의자가 있다. 그가 바
로 호수공원의 대표 명물인 '백인의 식탁'이다. 그 이름 그대로 100명이 식사를 할 수 있는
규모로 공원 조성 때 현상 공모에서 당선된 작품을 현실화시켰다. <씨토포스와 지안건축사사
무소에서 제출한 작품임>
여기서는 도시락이나 간단한 먹거리를 섭취할 수 있다. 다만 음식을 만들거나 취사는 절대로
안된다. 이렇게 휼륭한 식사 장소가 있으니 동네 축제나 모임 뒷풀이 장소, 야외 결혼식이나
생일잔치 피로연 장소로 활용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  큐브(cube) 모양으로 이루어진 어린이놀이터

미끄럼틀을 밖으로 내민 저 정육면체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살짝 들어가고는 싶어도 순
수 어린이 싸이즈다보니 나는 들어갈 수가 없다. 우리 때는 저런 신선한 놀이터도 없었는데,
이럴 때는 잠시나마 어린 시절로 역주행하고 싶다.


▲  푸른 잔디가 곱게 입혀진 열린마당(열린풀밭)
이곳은 이름 그대로 누구든 들어가 자리를 피고 쉴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  능골산, 몬드리안 정원으로 인도하는 오르막길

▲  능골산 정자

호수공원 서쪽에는 짙은 숲을 지닌 능골산이 병풍처럼 자리해 있다. 산이라 하기에는 좀 아쉬
운 모습이나 그래도 하늘을 향해 작게나마 솟아있으니 뫼는 뫼이다.

능골산은 해발 71.5m의 조그만 뫼로 거의 뒷동산 규모이다. 서울 신월동과 경기도 부천시(富
川市) 고강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산 남쪽으로 서울과 부천의 경계를 이루는 지양산(芝
陽山), 와룡산(臥龍山)과 이어져 있었으나 경인고속도로로 그 줄기가 끊겼다. 서쪽과 북쪽은
주거지(고강동, 신월3동)로 막혔고, 동쪽 또한 호수공원으로 막혀있다. 그야말로 속세(俗世)
에 좁게 갇힌 외로운 신세이다. 그나마 신월정수장과 밀양변씨묘역 덕분에 이 정도라도 살아
남은 것이다.

호수공원을 조성하면서 숲을 짙게 깔아놓아 생태숲탐방로로 활용하고 있으며, 산 남쪽에는 다
목적운동장을 닦았다. 그리고 산 서쪽 고강동(古康洞)에는 변종인(卞宗仁, 1433~1500)의 묘를
중심으로 한 밀양변씨 묘역이 자리해 있는데, 비록 왕족의 묘역은 아니나 정2품 벼슬을 지낸
변종인의 묘가 있어 능골이라 불리게 되었고, 그게 산 이름으로 굳어졌다.

변종인묘역은 능골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넘어가면 쉽게 만날 수 있는데, 신도비(神道碑)까지
갖추고 있으며 '논개(論介)'란 시로 유명한 수주 변영로(卞榮魯, 1898~1961)의 무덤도 그 곁
에 함께 있어 같이 둘러보기를 권한다. 호수공원에서 길어봐야 도보 20분 이내 거리이다.

▲  능골산 정상 표석
호수공원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다.

▲  고강동, 변종인 묘역으로 이어지는
능골산 서쪽 산길


 

♠  서서울호수공원의 상징이자 아름다운 거울, 중앙호수와 소리분수

서서울호수공원의 상징이자 얼굴은 바로 중앙호수이다. 그가 있었기에 이곳이 호수공원이란
명분과 간판을 달게 된 것이다.
서울 서남쪽 변두리에 이렇게 큰 호수가 있었다니?? 처음에는 공원을 닦으면서 만든 호수로
단순하게 생각을 했다. 허나 그는 김포정수장 시절부터 있던 50년 이상 묵은 호수였다. 다만
정수장이 엄격히 금지된 보안시설이기 때문에 아무나 발을 들일 수 없었고, 그로 인해 그 존
재가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오랜 세월 철저히 베일에 감싸여 그 속살을 드러내지 않던 숨
겨진 호수였던 것이다.

천하에 그 미모를 드러낸 호수의 면적은 18,000㎡로 정수장에서 제공한 물을 먹고 자랐다. 정
수장을 지우고 공원을 한참 닦을 때 호수를 그대로 보전하고 연꽃을 비롯한 여러 수생식물과
동물을 풀어놓아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치장했다.
호수에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왔으나 정작 와보니 대단했다. 비록 인공호수지만 자연산처
럼 변해버린 생태 호수, 거기에 호수를 둘러싼 산책로도 일품급이다. 특히 호수 복판에 분수
를 깔아놓았는데, 비행기가 지날 때마다 격하게 흥분하여 스스로 물줄기를 뿜어내는 이색 분
수쇼를 선보인다. 그가 바로 호수의 운치를 크게 돋구는 명물, 소리분수이다.
분수는 41개 노즐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비행기 소음(81db)을 감지하여 자동으로 흥분하
게끔 했다. 또한 조명시설까지 갖추고 있어 밤에도 볼 수가 있다.
안그래도 이 지역은 김포공항 근처고 그곳으로 착륙하는 경로라 비행기 소음에 늘 고통을 받
고 있었는데, 비록 2001년에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하여 국제선 대부분이 그곳으로 옮겨갔지만
소음은 여전하다. 그 소음을 이용한 것이 바로 소리분수이다. 지역 환경의 단점을 역발상으로
공원 명물로 꾸민 것이다. 하여 이곳만큼은 비행기를 애타게 기다리게 된다. 소음이 들려야
분수가 흥분을 하니 말이다. 그렇다고 분수가 1년 내내, 24시간 내내 흥분하는 것은 아니며,
호수 주변에서 너무 시끄럽게 떠드는 경우 자칫 비행기 소리로 잘못 인식해 흥분하는 경우도
있다. 어디까지나 인간이 달아놓은 기계라 그 한계는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다.

* 소리분수 가동기간 : 5월1일~9월30일 (12~18시에만 가동, 비가 오거나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에는 움직이지 않음)


▲  저기 비행기가 떴다

▲  비행기가 소음을 선사하며 호수 하늘을 가르자 소리분수는
슬슬 흥분을 낸다.

▲  비행기를 향한 그리움인가? 비행기 소음에 대한 단체 항의인가?
일제히 허공을 찌르는 소리분수의 위엄

▲  비행기가 사라질 때까지 분수는 계속 하늘을 찌르고

▲  비행기가 사라지자 분수는 남쪽부터 진정을 되찾는다.
지금까지 많은 분수를 보았지만 비행기 소음을 양분으로 삼은 분수는 처음이다.

▲  슬슬 가라앉는 소리분수
소리분수는 남북으로 41개의 노즐이 펼쳐져 있다. 비행기가 남쪽에서 오니
자연히 남쪽부터 반응을 보이며, 북쪽이 제일 늦게 흥분을 보인다.

▲  남쪽에서 바라본 소리분수의 격한 흥분 ▼



▲  북쪽에서 바라본 중앙호수와 소리분수의 향연

▲  호수 서쪽, 문화마당에서 바라본 중앙호수
호수에 개구리 운동장(연잎)이 넓게 닦여져 있다.

▲  목재로 닦아놓은 문화마당과 중앙호수

▲  비행기가 뜨는 중앙호수 남쪽

▲  서쪽에서 바라본 중앙호수

▲  호수를 지키는 물고기들 (이곳에서 낚시는 안됨)

▲  호수 동쪽 산책로 ①

중앙호수 주위로 마치 테이프를 두른 듯, 산책로를 빙 둘렀는데, 그중에서 북쪽과 동쪽 산책
로가 가장 호젓하다. 온갖 나무와 강아지풀 등 다양한 수풀이 진한 녹음을 휘날리며 운치를
강렬히 수식하기 때문이다. (호수 서쪽에는 문화마당과 방문자센터가 있음)
호수에서 잔잔히 불어오는 바람과 능골산이 불어주는 산바람이 교차해 여름 제국의 한복판에
도 늘 시원하며, 호수는 보는 지점에 따라 늘 모습을 달리하여 그의 다양한 얼굴을 만날 수
있다.


▲  호수 동쪽 산책로 ②

▲  호수 동쪽 산책로 ③
집으로 살짝 훔쳐와 혼자서만 누리고 싶은 길이다. 허나 그럴 재주가
없으니 가끔 찾아와 거닐어야겠다.


 

♠  서서울호수공원 몬드리안정원과 미디어벽천

▲  옛 정수장과 자연의 조화, 몬드리안 정원

중앙호수 남쪽에는 마치 폐허의 유적지 같은 공간이 있다. 초췌한 기둥과 벽 사이로 온갖 꽃
과 나무들이 어깨를 펴고 있는데, 그곳은 정수장 시절에 쓰인 침전조 등의 여러 시설이 있던
공간으로 그 시설을 부시고 몬드리안 정원을 새로 심었다.
정수장 시설을 다 밀어버리지 않고 기둥과 천정 등을 남기고 추상화가 몬드리안의 구성 기법
을 도입해 수직과 수평의 선이 조화되게끔 만들었는데, 미디어벽천과 수생식물원, 하늘정원,
생태수로 등이 있으며, 공간마다 꽃과 나무를 심어 조촐하게 야외식물원(야생화원)의 역할도
겸하게 했다. 또한 옛 시설을 재활용한 수질정화 시스템과 빗물을 이용한 물순환 시스템 등의
친환경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정원 주위로 늘 깨끗한 물이 흐른다.


▲  온갖 키 작은 화초들이 자라고 있는 몬드리안 정원 (야생화원)

▲  물과 화초, 옛 정수장 시설이 어우러진 몬드리안 정원

▲  수풀의 보금자리가 되버린 옛 정수장 벽
여러 갈래로 쪼개진 정수장 벽이 도처에 남아 옛 정수장 시절을 아련히 귀뜀해준다,
마치 일부만 남은 폐허의 근대 유적지 같은 모습으로 푸른 옷을 걸친 벽은
친자연적으로 변화한 이곳의 긍정적인 현실을 대변해준다.

▲  옛 정수장 벽 사이로 이어진 정원 통로
마치 20세기에 벌어진 전쟁의 흔적 마냥 폐허의 벽에는 담쟁이덩굴이 무성하다.

▲  몬드리안 정원 야생화원 탐방로
야생화초가 나와 비슷한 눈높이에서 환한 미소를 짓는다.

▲  야트막한 경사에 마치 눈이 흩날리듯 메밀꽃으로 보이는 하얀 꽃이
심어져 있다.

▲  폭포처럼 이루어진 미디어벽천(Media Waterfall)

미디어벽천은 몬드리안 정원의 명물로 파워글라스라는 투명 디스플레이 글라스를 사용하여 문
자나 이미지, 동영상 등을 표현한다. 그러니까 디지털영상을 벽천이라 불리는 90도 직각면에
표현하는 것이다.
허나 우리가 갔을 때는 오후 늦은 시간이라 그냥 맨바닥만 있었을 뿐 아무 것도 재현된 것이
없다. 소리분수보다 훨씬 보기 힘든 존재로 그를 보려면 12~13시대에 와야 된다.

* 미디어벽천 가동 시간 : 5월1일~9월30일까지 (12시~12시30분, 13시~13시30분)


▲  위에서 바라본 미디어벽천
벽천 앞에는 늘 물이 머물러 있다. 이들은 생태수로의 일원으로 수심은 매우 얕다.
그렇다고 물에 들어가지는 말자. (물놀이, 발담구기 금지)

▲  서서울호수공원을 닦은 기념으로 세워진 비석 (2009년 10월 26일)

▲  물순환시스템이 적용된 몬드리안 정원 생태수로

▲  물이 모여있는 몬드리안 정원 남쪽 끝

▲  옛 정수장 기둥이 남아있는 몬드리안정원 하늘정원

몬드리안정원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하늘정원이 자리해 있다. 그래서 이름도 하늘정원
인 모양이다. 하얀 기둥 끝에는 철골이 을씨년스럽게 노출되어 있어 옛 정수장 시절을 애타게
그리는 듯 하다.
이곳에는 여러 꽃과 풀이 심어져 있으며, 의자가 넉넉히 깔려있어 밑에 펼쳐진 중앙호수를 바
라보며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  다채로운 화초가 심어진 하늘정원
마치 빌딩 옥상 정원 같은 기분이다.

▲  몬드리안 정원 허공을 가르는 윗 탐방로 ①

▲  몬드리안 정원 허공을 가르는 윗 탐방로 ②

▲  몬드리안 정원 허공을 가르는 윗 탐방로 ③

▲  중앙호수와 접한 몬드리안정원 북쪽 구역

호수공원을 한바퀴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8시가 되었다. 햇님도 슬슬 빈틈을 보이기 시작
하고 그 틈을 노려 달이 세상을 훔치려 든다. 열심히 돌아다녔더니 배도 고프고 슬슬 따끈한
저녁밥이 간절해지는 시간이라 부근에서 저녁에 곡차(穀茶) 1잔 걸치고 각자 제자리로 돌아왔
다.
이렇게 하여 늦여름 서서울호수공원 나들이는 막을 내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월3동 149-20 (남부순환로64길20, ☎ 02-2604-3004)
* 서서울호수공원 홈페이지는 아래 중앙호수 사진을 클릭한다.


▲  남쪽에서 바라본 중앙호수
은빛 물결이 출렁이는 잔잔한 호수에도 어느덧 어둠이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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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의 꿀단지를 거닐다 ~~~ 보적사에서 독산성, 세마대, 고인돌공원까지 (경기도 삼남길7코스, 금암리지석묘군)

 


' 오산 독산성(세마대) 봄나들이 '

▲  오산 독산성(독성산성)


 

봄이 막바지에 이르던 평화로운 어린이날에 다 큰 일행들과 오산 독산성(독산)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떠있던 12시에 병점역(1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화성시마을버스 56번을
타고 독산 북쪽인 한신대학교로 이동했다. (병점역에서 한신대까지는 버스 10분 거리)

한신대 종점에서 완만한 산길을 타고 10여 분 정도 오르니 독산성 산림욕장이 마중을 한
다. 이곳은 오산시(烏山市)에서 1999년에 닦은 숲으로 소나무가 무성하여 그윽한 솔내음
을 불어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듯이 우리는 소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가져온
간식과 음식을 섭취하며 늦은 점심을 때웠다. 그렇게 배를 잔뜩 불리고 다시 10여 분 오
르니 보적사로 인도하는 길이 나오고 그 길을 오르면 독산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  독산성과 보적사로 인도하는 오르막길
오색 연등이 대롱대롱 길을 비추며 중생을 맞이한다.

▲  보적사 방면 오르막길에서 바라본 수원시내와 화성시 병점 지역

▲  보적사로 인도하는 구부러진 오르막길 (보적사 주차장)

오산 북부에 자리한 독산은 해발 208m의 조촐한 산으로 독성산(禿城山), 세마산(洗馬山)
. 석대산, 향노봉 등의 별칭을 지니고 있다. 이곳이 유명세를 탄 것은 바로 독산성과 세
마대 덕분으로 면적도 적고, 인구도 적고, 볼거리도 빈약한 오산시에서 매우 애지중지하
는 꿀단지 같은 존재이다.


▲  보적사 주차장에서 바라본 천하
경기도 제일의 도시, 수원(水原)과 그를 남쪽으로 둘러싼 화성시 병점, 동탄 지역


 

♠  독산성에 감싸인 조촐한 산사, 보적사(寶積寺)
- 오산시 향토유적 8호

▲  보적사 해탈문(解脫門)으로 살아가고 있는 독산성 동문

하늘을 향해 야트막하게 솟은 독산 정상 북쪽에 오산 지역 유일의 전통사찰인 보적사가 포근
히 둥지를 틀고 있다. (경기도 전통사찰 34호)
독산성 동문 바로 안쪽에 자리해 있어 성곽을 담장으로, 동문을 정문으로 삼고 있는데, 동문
에 '해탈의 문'이란 간판을 내걸어 일종의 해탈문으로 삼았다.

독산성 품에 안긴 보적사는 인근에 있는 화성 용주사(龍珠寺)의 말사로 무려 401년에 백제(百
濟) 왕실에서 창건했다고 전한다. (또는 고려 초에 창건되었다고 함) 허나 아쉽게도 이를 밝
혀줄 유물과 증거가 없는 실정이며, 오래된 전설 외에는 그리 오래된 유물도 없고, 절의 원래
이름도 전하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의 절은 20세기 초반에 형성된 것이라 창건 시기를 추정하
기가 어렵다.
하여 아마도 절이 우후죽순 들어서던 고려 때나, 독산성이 다소 밥값을 하던 조선시대에 승병
들의 주둔지로 조촐하게 지어진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1920년에 주대식이 약사전(藥師殿)을 부시고 대웅전을 지으면서 절 이름을 보적사라 했다. 이
는 절에 전해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을 바탕으로 지은 것으로 옛날 어느 춘궁기(春窮期) 때
먹을 것이 쌀 1되 밖에 남지 않던 노부부가 그 쌀을 미련 없이 절 부처에게 공양을 했다. 그
리고 집에 돌아오니 희안하게도 곳간에 쌀이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부처가 몇 배로 되돌려준 모양이다. 이에 무한 감동을 먹은 그들은 계속 열심히 공양
을 하였고 여기서 보물을 쌓았다는 뜻에 '보적사'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허나 전설에서는
보물 대신 쌀이 쌓인 것이니 미적사(米積寺)라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싶다.

1986년 주지 도광(道光)이 세마대의 이름을 따서 세마사(洗馬寺)로 이름을 갈았으나 얼마 안
가서 다시 보적사로 변경했다.
조촐한 경내에는 1986년에 중수된 대웅전과 선실(禪室), 요사(寮舍), 삼성각(三聖閣) 등이 있
으며, 성문 밑까지 길이 닦여져 있어 차량으로도 경내 접근이 가능하다.

* 보적사 소재지 :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 150 (독산성로 269번길 144, ☎ 031-372-3433)


▲  보적사의 담장이 되버린 독산성 북쪽 성곽
옛날처럼 군사 기지로 쓰일 일이 없으니 이제는 절을 지키는 담장이 되어
자신을 낮추어 살아가고 있다.

▲  보적사 3층석탑
근래에 지어진 탑으로 석가탑(釋迦塔)을
많이 닮았다.

▲  배가 시커먼 똥배 포대화상의 위엄
그의 배를 어루만지며 소원을 빌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  맞배지붕을 지닌 대웅전(大雄殿)

▲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3존상


▲  보적사에서 바라본 푸른 천하 (화성시 북부 지역)

보적사 경내 남쪽에 독산성 성곽길이 펼쳐져 있다. 성곽 방어물인 여장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그냥 성곽만 남아있는데, 성곽 높이가 3~5m에 이르니 자칫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기 바란다.


▲  보적사 남쪽 성곽에서 바라본 천하 (수원 남부와 화성 병점, 동탄 지역)
보이는 범위는 앞서 보적사 방면 오르막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직까지 독산 북쪽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  독산성 북동쪽 성곽 (세마대 동쪽)


 

♠  권율장군의 세마(洗馬) 설화가 깃든 오래된 산성
오산 독산성(禿山城)과 세마대(洗馬臺)터 - 사적 140호


▲  독산성 동문 주변

독산 산정에 자리한 독산성<독성산성(禿城山城)>은 백제 때 닦여진 매우 늙은 성이다. 신라와
고려도 이 성을 손질해 사용했으며, 조선도 서울 남부를 지키는 요충지로 썼다.

이곳이 크게 이름을 날린 것은 바로 임진왜란 시절이다. 1592년 12월, 전라도 관찰사 겸 순변
사(巡邊使)인 권율(權慄)장군이 근왕병(勤王兵) 2만을 모아 서울로 향하다가 바로 이곳에 진
을 치고 주변에 있던 왜군을 토벌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재미난 설화가 한 토막 전해오
고 있으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권율이 2만 대군을 이끌고 이곳에 들어와 진을 쳤다. 그들을 두려워한 왜군은 성을 포위해 공
격을 가했는데, 아무리 공격을 해도 소용이 없자 뿔이 난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은 첩자를
보내 성의 결점을 알아오라고 했다. 그 결과 성에 물이 매우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식량이 많아도 물이 없으면 게임이 끝나는 법, 왜군은 성 밑에 큰 웅덩이를 파 성 내
부에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지하수를 차단하니 얼마 안가서 조선군은 물로 크게 곤란을 겪게
되었다. 그러자 왜장은 물 1지게를 보내 조롱하며 조선군의 분열을 조장하려고 했다. 허나 권
율이 누구던가?
그는 기가 막힌 계략을 생각해내고 다음 날 아침, 왜군들이 잘 바라보이는 곳에 백마를 데리
고 와서 흰쌀을 말에게 끼얹어 목욕시키는 연극을 보였다. 그것을 본 단순한 왜군은 말을 목
욕 시킬 정도로 물이 많다고 판단하여 포위를 풀고 바로 줄행랑을 쳤다. 그때 권율은 그들을
추격하여 수천의 왜군을 잘 다져진 고기 덩어리로 만들었다.
이상이 독산성의 세마대 설화이다. 쌀로 말을 씻겼다고 해서 장대(將臺) 이름을 세마대라 했
을 정도이니 아마도 사실이 아닐까 싶다. 이런 설화는 구미 천생산성(天生山城)에도 전해오고
있는데, 해가 막 뜰 때쯤 저리 연극을 한다면 정말 물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1593년 9월, 3일 동안 백성들이 합심하여 성을 수축했으며, 1595년 포루(砲樓) 시설이 설치되
었다. 1597년 2월에는 조총을 방어하고자 평평한 집을 성벽 안에 짓고, 거기에 성 아래로 향
한 창문을 설치해 석차와 포차를 배치했다. 그리고 성 밖에는 목책을 세우려고 했으나 실현하
지는 못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권율의 빛나는 전승지로 천하에 널리 알려지자 성의 중요성도 커져 1602년
수원부사 변응성(邊應城)이 수축했으며, 1796년 수원 화성(華城) 축조로 그 남쪽을 지키는 용
도로 개축되었다. 이때 독산의 이름이 잠시 향로봉으로 갈렸는데, 앞서 말했듯이 늘 물이 부
족한 곳이라 그 이후 철저히 버려지게 되었다. 아무리 수비하기에 좋은 곳이라 해도 물이 없
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성 둘레는 1,800보(3,240m)로 현재는 그 1/3정도만 남아있으며, 4개의 문을 갖추고 있다. 성
벽 바깥은 장방형 또는 방형(方形)으로 다듬었고, 약간의 기울기를 주어 매우 단단하게 쌓았
다. 성 내부에는 보적사와 세마대가 있으며, 옛 건물터가 조금 남아있다.
오산의 대표적인 명소로 탐방로와 숲길이 잘 닦여져 있으며, 숲이 무성하고 조망도 일품이라
교외 나들이 및 소풍 장소로 아주 제격이다. 속세에서 독산성으로 가려면 세마역(1호선)에서
보적사입구를 거쳐 가거나 한신대에서 산림욕장을 거쳐가는 것이 좋으며 경사가 완만하여 오
르기도 쉽다.

* 소재지 :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 155외


▲  독산성의 얼굴, 세마대

독산 정상에는 독산성의 얼굴이자 장대인 세마대가 의연하게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
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임진왜란 이후에 지어졌으며, 왜정(倭政) 때 세마대 이야기에 크게 발
작한 왜인들이 부셔버렸다. 이때 성 안에 살던 300호 정도의 민가도 강제로 정든 고향을 떠나
주변으로 흩어져야 했다.
1957년 세마대가 복원되었으며, 이승만 전대통령이 이곳을 다녀가 세마대 현판을 남겼다. 건
물 중앙에는 툇마루 같은 것이 있어 앉아갈 수 있으며, 소나무에 둘러싸여 있어 이곳에 앉아
있으면 자연히 솔내음을 누리게 된다.


▲  이승만이 남긴 세마대 현판의 위엄

▲  독산성 동쪽 치 (독산성에서 가장 동쪽 부분)
이곳에 서면 세교지구와 오산시내, 운암지구, 동탄신도시가 앞다투어
시야에 잡힌다.

▲  부드럽게 펼쳐진 독산성 성곽 (동남쪽 성곽길)

▲  남쪽을 향해 고개를 내민 독산성 남쪽 치

이곳은 독산성의 남쪽 끝으로 오산시내와 화성시 정남면 지역이 훤히 두 눈에 들어온다. 권율
이 쌀로 말을 씻기는 연극을 했던 현장이 바로 이곳이 아니었을까? 그만큼 시야도 좋고 산 밑
에서도 쉽게 눈에 띄는 곳이다.


▲  봄이 활짝 나래를 펼치는 독산성 남쪽 성곽

▲  독산성 남쪽 성곽

독산성을 다시는 안와도 될 정도로 완전히 1바퀴를 돌고 싶었는데, 일행들의 권유로(나는 힘
이 없었음) 절반만 돌다 철수했다. 아무래도 다음에 또 인연을 지어 나머지를 모두 둘러보라
는 독산성의 숨겨진 뜻인가 보다. 어쨌든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  독산성 남쪽 성곽에서 바라본 오산 서북부(세마동) 지역
정면에 보이는 산줄기를 넘으면 바로 오산 시내이다.

▲  수풀 속에 잠든 의문의 주춧돌

동문터 주변에는 2013년 11월에 발견된 오래된 돌이 누워있다. 딱 봐도 사람의 손길이 거쳐간
돌임을 눈치챌 수 있는데, 고려 때 이용된 건물터 주춧돌이나 석등 초석으로 보고 있다.
현재 독산성에는 세마대 외에는 성곽 건물이 남아있지 않은데, 그가 건물 주춧돌이라면 장대
나 군창(軍倉), 군사 숙소를 받치는 용도로 쓰였을 것이고, 석등 초석이라면 오래된 유물이
없어 애태우는 보적사의 유물일 것이다. 하지만 발견된 것이 달랑 돌 하나 뿐이니 그 이상의
상상은 어렵다.


▲  문 천정이 사라진 동문

독산성 동문은 동그란 천정인 홍예도 없이 문의 흔적만 남아있다. 잘 쌓여진 성돌을 보니 이
곳이 정말 크고 단단한 성임을 느끼게 하는데 그 문을 나서 15분 정도 내려가면 보적사 일주
문이 나온다.


▲  보적사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한 일주문(一柱門)
높이가 상당한 일주문 현판에는 '독산성세마대산문(山門)'이라 쓰여 있다.
즉 보적사를 뜻한다.


보적사입구로 나온 우리는 물향기수목원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날 코스가 그랬음) 버스로
가기에는 매우 애매하여 도보로 가기로 했는데, 동네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독산과 오산시내
사이에 자리한 여계산을 넘어 세교지구로 넘어갔다.
이 구간은 경기도와 오산시가 닦아놓은 '경기도 삼남길 7코스' 독산성길로 세마교에서 독산성
과 여계산. 고인돌공원을 거쳐 은빛개울공원까지 이어지는 7.2km의 길이다. 여계산은 독산보
다 낮은 산이나 숲이 삼삼하여 오솔길처럼 걷기 좋으며, 그 산을 넘어 세교지구에 이르니 왠
돌덩이들이 땅에 바짝 누워 우리를 바라본다. 뭔가 해서 살펴보니 고인돌(지석묘)로 산을 내
려오니 너른 공원이 나타나는데, 그 공원에도 고인돌이 잔뜩 널려있다. 바로 금암동 고인돌공
원이다.


 

♠  오래된 고인돌을 후광으로 삼은 금암동 고인돌공원
'오산 금암리 지석묘군 - 경기도 지방기념물 122호'

▲  금암리 5호 고인돌

오산 세교지구(세교신도시) 남부에 고인돌공원이 넓게 누워있다. 이곳은 큰 바위가 많은 마을
이라 하여 '묘바위', '검바위', '금암'이라 불렸는데, 그것이 이 지역의 이름인 '금암동(錦岩
洞)'이 되었다.
공원을 중심으로 고인돌 11기가 발견되었는데, 그중 신원이 확실한 9기가 경기도 지방기념물
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나머지 2기(10,11호)는 신원이 확실치 않은 존재> 11기 중 4기는 공
원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있어 공원 안내문을 참조하여 숨바꼭질을 하기 바란다. (7기는 공원
에 있음)
이들 고인돌은 덮개돌(뚜껑돌)이 모두 땅에 누워있어 내부 구조는 아직 밝혀진 게 없으나 아
마도 무덤방이 땅 속에 있을 것으로 보이며, 달랑 덮개돌만 있는 고인돌로 보인다. 덮개돌은
화강암을 사용했으며, 길이는 1.96m에서 최대 6m까지, 너비 1.2~3m, 두께 0.3~1.1m이다. 2호
고인돌에는 알구멍이라 불리는 성혈(聖穴)의 흔적이 있으며, 청동시시대 유물로 이곳을 다스
렸던 세력의 우두머리 무덤으로 여겨진다. 그 시대면 한참 옛 조선(朝鮮, 고조선)이 동아시아
와 중원대륙의 적지 않은 땅을 다스리던 시절이니 아마도 옛 조선의 간접 지배를 받았을 것이
다.

고인돌 주변에 세교지구가 들어서자 오산시는 여계산 동쪽 자락과 묶어 고인돌공원을 닦아 시
민들에게 선사했다. 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흔치 않은 고인돌공원으로 시민들의 포근한 휴식처
이며, 공원 한복판에는 잔디를 넓게 닦아 탁 트인 모습이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오산의 새로
운 명소로 인근에 독산성, 여계산, 물향기수목원과 같이 연계해서 둘러보면 정말 배부른 여로
(旅路)가 될 것이다.

* 소재지 : 경기도 오산시 금암동 520일대 (수목원로 449)


▲  금암리 4호 고인돌

▲  재현된 움집

여기서 움집터가 발견되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청동시시대까지 무작정 선사시대(先史
時代)로 몰고 있는 경향이 커 그에 걸맞게 움집을 재현한 모양이다. 그래도 청동기시대는 돌
만 다르던 석기시대보다 더 진보된 사회인데, 사람들이 다 움집에만 살았을까? 게다가 옛 조
선(고조선)과 동이족의 수준 높은 문화가 천하 곳곳을 어루만지던 시절이고 그들이 만든 한자
(漢字)까지 있거늘...


▲  고대(古代)의 비밀을 품으며 오후 햇살을 누리고 있는 1,2호 고인돌

▲  멀리서 바라본 1,2호 고인돌의 위엄

고인돌공원에 있는 고인돌을 모두 둘러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여의치 못해 이 정도만 둘러보고
문헌근린공원을 넘어 물향기수목원으로 이동했다.
이후 내용은 생략하며, 5월 5일 오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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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지붕길, 동작충효길 고구동산길~서달산자락길~현충원길 나들이

 


' 동작구의 지붕을 거닐다 '
(동작충효길 고구동산길~서달산~현충원길)

▲  고구동산길 잣나무숲길

▲  서달산 정상

▲  현충원길


 

더운 여름이 저물고 가을이 조금씩 세력을 다지던 초가을의 어느 평화로운 날, 일행들과
동작충효길을 찾았다.
동작충효길은 서울 동작구(銅雀區)가 야심차게 내놓은 도보길이다. 도보길 유행에 따라 제
주올레길, 지리산둘레길, 북한산둘레길, 서울둘레길, 해파랑길 등 온갖 둘레길이 생겨났는
데, 동작구도 그 시류를 타고 산과 공원, 한강을 잇는 도보길을 닦아 동작충효길이란 간판
을 내건 것이다. 여기서 충효(忠孝)는 동작구 관내에 있는 국립현충원과 노량진 사육신묘(
死六臣墓)에서 따온 명칭이다.

동작충효길은 총 7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별로 넓지 않은 동작구에 이렇게 많은 코스가
가능한 것일까? 고개가 갸우뚱하긴 하지만 충분히 쥐어짜면 못할 것도 없다.
제1코스는 본글의 주인공인 고구동산길(3.4km)로 노들역에서 서달산을 거쳐 현충원 상도출
입문까지, 제2코스는 현충원길(3.4km)로 현충원 상도출입문에서 동작역까지 이어진다.
제3코스는 한강나들길(4.6km)로 동작역에서 한강을 따라 노량진역까지, 제4코스는 노량진
길(3.4km)로 노량진역에서 용마산을 거쳐 신대방3거리역까지. 제5코스는 보라매길(2.9km)
로 신대방3거리역에서 보라매공원을 거쳐 보라매역까지 이어진다.
제6코스는 동작마루길(4.8km)로 신대방3거리역에서 국사봉을 거쳐 현충원 상도출입문까지,
제7코스는 까치산길(4.4km)로 현충원 상도출입문에서 까치산을 거쳐 사당역까지 이어진다.


 

♠  동작충효길 고구동산길 (고구동산)

▲  고구동산길 노들역 시작점

동작충효길1코스 고구동산길 나들이는 노들역 4번 출구에서 시작하면 아주 편리하다. 지하철
9호선이 노들역을 지나가고 있고, 부근에 1호선(노량진역)이 빗자루 배차로 운행하고 있으며,
수많은 시내버스 노선이 노들역 주변을 물 흐르듯 빈번히 운행해 접근성이 아주 좋기 때문이
다.

노들역에서 상도터널 쪽으로 가면 서쪽에 나무가 우거진 산이 보이고, 그곳으로 인도하는 계
단길이 살짝 손을 내민다. 그 길이 바로 고구동산길 북쪽 시작점이다. 그 계단을 오르면 '고
구동산'이란 조그만 뫼의 품에 들어서게 되면서 동작충효길 고구동산길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고구동산길(3.4km)은 노들역에서 국립현충원 상도출입문까지 이어지는 길로 고구동산과 서달
산 등 뫼 2개를 지난다. 이들은 모두 숲을 지니고 있어 길 대부분이 숲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택가와 아파트 사이에 완충지대처럼 자리한 숲을 따라 길이 이어진다. 중앙대 후문에서 서
달산 생태다리 구간은 상도동과 흑석동(黑石洞)의 경계를 가르는 산줄기를 지나가며, 잣나무
숲과 소나무숲이 짙게 닦여져 있어 예사로운 숲길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또한 서달산 정상까
지 이어지는 동작구의 북쪽 지붕길이기도 하다.


▲  한낮에도 어두울 정도로 짙게 우거진 고구동산길
(본동 신동아아파트 옆)

▲  본동 신동아아파트 옆을 흐르는 고구동산길 ①

▲  본동 신동아아파트 옆을 흐르는 고구동산길 ②

▲  노량진근린공원 고구동산길

▲  노량진근린공원 조망대

고구동산은 노량진과 상도동(上道洞) 사이에 자리한 조그만 뫼로 산 중앙(상도터널 윗쪽, 본
동) 정상부에 노량진근린공원이 자리해 있다.
노량진근린공원에는 게이트볼장과 배드민턴장, 축구장, 농구장, 간단한 운동기구 등의 운동시
설과 조망대, 산책로, 정자쉼터 등이 있으며, 조망대는 한강과 여의도가 훤히 바라보이는 곳
에 위치해 있어 조망이 시원하다. 특히 천하 제일의 불꽃축제로 추앙을 받는 여의도불꽃축제
를 바로 가까이서 구경할 수 있는 명당으로 불꽃의 향연을 코 앞에서 누릴 수 있다.

* 고구동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 흑석동 (노량진근린공원 : 동작구 본동 486-2)


▲  노량진근린공원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여의도와 63빌딩, 한강, 마포 지역이 바라보인다.

▲  노량진근린공원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1호선 전철과 온갖 철도가 매일 수백 차례씩 오가는 한강철교를 비롯해
원효로, 마포 지역과 멀리 북한산(삼각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  노량진근린공원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숲 너머로 한강과 노들섬, 용산, 남산(南山) 등이 바라보인다.

▲  노량진근린공원에서 중앙대 후문으로 넘어가는 고구동산길
공원을 지나 남쪽으로 가면 다시 싱그러운 숲이 펼쳐진다. 고구동산길은
그 숲속을 가르며 중앙대후문까지 거침없이 흘러간다.

▲  푸른 철책이 둘러진 고구동산길 (강남초교 동쪽)

▲  강남초교 동쪽을 흐르는 고구동산길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


 

♠  고구동산길의 백미, 잣나무숲길

▲  서달산으로 인도하는 고구동산길

고구동산에서 남쪽으로 나오면 차량들이 오가는 흑석로가 나온다. 여기서 잠시 숲길이 끊기면
서 처음 온 사람들을 적지 않게 동요하게 하는데, 그렇다고 너무 당황할 필요는 없다. 고구동
산길은 여기서 상도동 패리스아파트까지 잠시 시멘트 도로의 신세를 지는 것일 뿐, 끊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구간을 제외하면 거의 흙으로 된 산길(숲길)이다.

흑석로로 진입하여 오른쪽(서쪽)으로 가면 중앙대후문이다. 후문 입구 커브를 지나면 바로 3
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남쪽) 길(상도로53길)로 조금 가면 고구동산길의 부활을 알리
는 나무계단길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고구동산길의 나머지 부분과 서달산이 흔쾌히 펼
쳐진다.


▲  중앙대와 상도동 사이를 지나는 고구동산길

중앙대후문~서달산 생태다리 구간은 상도동과 흑석동의 경계를 이루는 산줄기를 따라 이어진
다. 이 산줄기는 개발의 칼질이 미치지 않은 자연 공간으로 그 능선에 동작충효길을 살짝 얹
혔는데, 산줄기는 길지만 산길 좌우로 주택과 아파트가 진하게 보일 정도로 그 폭은 좁다.


▲  고구동산길의 자랑, 잣나무숲길

고구동산길 중간인 중앙대후문~숲속도서관 사이에 잣나무숲이 짙게 자리를 닦았다. 이곳은 고
구동산길의 자랑이자 백미로 동작구가 동작충효길을 만들면서 잣나무를 더욱 확충했다.
잣나무는 피톤치드(Phytoncide)를 많이 베푸는 나무로 그들이 우거진 숲은 산림욕 장소로 아
주 좋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한복판에 이런 잣나무숲이 있다니 그저 놀
라울 따름인데, 동작충효길은 나에게 여러 번 신선한 충격과 공포를 주니 범상치 않은 둘레길
이 분명하다.


▲  잣나무숲길 ①

▲  잣나무숲길 ②
이곳에서 만큼은 서울을 잊어도 좋다. 도시와 머나먼 산골이라 우겨도
손색이 없으니 말이다.

▲  잣나무숲길 ③④

▲  잣나무숲길 ⑤

▲  잣나무숲길 ⑥

잣나무숲 남쪽에는 숲에 완전히 묻힌 동작충효
길 숲속도서관이 있다. 숲이 얼마나 삼삼한지
한낮에도 거의 어두울 지경인데, 숲내음이 가
득한 숲속 한복판에 어린이와 동네 주민을 위
해 초소 건물을 손질하여 도서관을 닦았다.
이런 숲속이라면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도 술술
머리 속에 잘 들어올 것만 같은데, 9시부터 18
시까지 운영하며, 평일에는 가끔 빗장을 닫아
거는 경우가 있다. 도서관 북쪽에는 청강정이
란 네모난 정자가 있으며 주변에 의자와 탁자
를 지닌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  4각형 정자인 청강정(淸康亭)


▲  장봉옥 영모비와 송덕비 <백운암 창건주 장대보화(張大寶華) 송덕비>

숲속도서관에서 초화원 쪽으로 조금 가면 장봉옥 송덕비와 영모비를 만날 수 있다. 단 고구동
산길에서 남쪽으로 조금 비껴있기 때문에 지나치기가 쉽다.

비석에 쓰인 장대보화 장봉옥(1904~1981)은 누구일까? 내 돌머리에는 전혀 정보가 없는 존재
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나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진정한 보살행(菩薩行)을 실천했던 여
인이었다. 그리고 이름 대신 쓰인 대보화(大寶華)는 그의 법명(法名)이다.

장봉옥은 1904년 8월 평양에서 태어났다. 동덕여학교를 졸업하여 돈이 많은 친일파 관료의 소
실(첩)로 들어갔는데, 남편 몰래 조경한(趙擎韓) 등의 독립운동가를 도우며 독립운동 자금도
넉넉히 지원했다. 그래서 해방 이후 신문에서는 그를 '광복군의 어머니'라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1930년대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을 다녔는데, 안국동에 있
는 선학원(禪學院)에 들어가 열심히 수행을 하며 깊은 불심을 다졌고, 그 인연으로 불교계에
주요 승려, 인사들과 두루두루 알고 지냈다. 그리고 1950년대에 마야부인회를 조직하여 불교
지도자의 면목까지 보여주었다.

6.25 이후 어머니가 별세하자 그의 명복을 빌고자 그동안 모은 돈을 싹 털어 현재 비석이 있
는 자리를 중심으로 20,000평의 부지를 매입해 1961년에 백운암(白雲庵)을 지었다. 백운암은
현재 상도선원(上道禪院)의 모태가 된다.
또한 남편이 죽자 그의 막대한 재산까지 물려받았는데, 그 돈으로 크게 사업을 벌여 큰 돈을
벌었으며, 도심 한복판인 무교동(武橋洞) 일대 땅을 거의 가지고 있을 정도로 막대한 재력을
자랑했다. 그 재력을 기반으로 온갖 불사(佛事)에 나서 불교계에서 '불사를 많이 일으킨 화주
보살'로 격하게 칭송을 받았다.

그는 백운암 주변에 160여 채의 연립주택을 지어 '나라사랑반'이란 이름 짓고 전몰군경의 유
가족과 집이 없는 어려운 이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했다. 그리고 노인대학을 지어 노인들을 배
려했고, 1964년 성조장학회를 세워 학생과 청년, 어려운 이웃을 넉넉히 도왔다. 그 장학회는
지금도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어쨌든 그 공로로 1966년 서울시경으로부터 '청소년 선도 유공
자 표창장'을, 1979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한평생 모은 재산을 어려운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풀면서 불법(佛法)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
았고, 노승과 불교 수행자들에게도 극진히 대접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그를 '살아있는
보살'이라 추앙했고, 조계종 5대 종정을 지낸 서옹(西翁)도 그를 크게 찬양하며 종종 백운암
에 들려 법문을 전했다.

딱히 자녀가 없던 그는 수양딸을 1명 맞이했는데, 그가 1982년 어음사기 사건으로 천하를 크
게 경악하게 했던 '장영자' 그 사람이었다. 장영자도 불교 신자로 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
던 장봉옥은 그를 수양딸로 삼아 많은 것을 베풀었던 것이다.
그는 장영자 사건 1년 전(1981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만약 더 살았더라면 못된 수양딸로 인
해 자칫 명예가 크게 훼손되었을 지도 모른다.

지붕돌을 지닌 장봉옥 송덕비는 1974년 서옹이 직접 비문을 쓰고 지어준 것이다. 그 옆에 자
리한 영모비는 독립운동가로 그의 신세를 졌던 백강 조경한(1900~1993)이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나라사랑반' 주민과 상도동 주민들을 대표해 1982년 4월에 세운 것이다. 그는 비문(碑
文)에
'나라사랑반 주민들이 장여사의 시은(施恩)을 잊지 않기 위해 비를 세우니 이 땅에 보은의 씨
앗이 살아있음을 기뻐하며 기꺼이 비문을 쓴다'
고 소감을 밝혔다.

이들 비석과 장봉옥의 무덤은 백운암 뒷쪽에 있었으나 이 일대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절은
아랫쪽으로 자리를 옮겼고, 비석과 묘소까지 제자리를 잃고 김포로 옮겨졌다. 그러다가 2010
년 비석만 지금의 자리로 돌아와 옛 백운암 자리를 쓸쓸히 지키고 있다.
사회와 어려운 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인물의 흔적이건만 이 땅의 천박한 개발의 칼질과 부동
산 수익에 눈이 어두운 졸부와 위정자들은 그런 이들의 흔적마저 온전히 놔두지를 않는다. 이
게 이 나라의 몹쓸 현실이다.


 

♠  서달산 서쪽 자락 (초화원, 생태다리, 서달산자락길)

▲  온갖 화초가 향연을 벌이는 초화원(草花園)

장봉옥 송덕비를 지나면 온갖 화초가 자라고 있는 초화원(서달산 야생초화원)이 모습을 드러
낸다.
이곳은 서달산의 서쪽 자락으로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할미꽃과 구절초, 붓꽃, 톱풀 등
야생화 30여 종을 음지와 양지에 맞게 배치했다. 이곳 역시 동작충효길을 닦으면서 조촐한 규
모로 조성된 것으로 화초가 한참 기지개를 켜는 봄이나 무성함을 이루는 여름, 처절한 아름다
움을 선보이는 가을에 와야 제대로 된 초화원을 누릴 수 있다.


▲  녹음(綠陰)이 짙은 초화원

▲  초화원 수풀들

▲  상록잔디패랭이


▲  초화원과 이웃한 암석원(Rock Garden)
둥근 바위와 꼬리풀 등 30여 종의 꽃과 풀이 돌과 함께 배치한 공간으로
초화원과 거의 비슷하다.

▲  옥잠화

▲  이름도 참 특이한 큰꿩의비름만추

▲  이름도 초롱초롱한 초롱꽃

▲  여름이 깃든 암석원 내부


▲  숲이 무성한 초화원 남쪽

초화원과 암석원 주변에는 자연학습원과 수목학습원, 2015년 11월에 닦여진 유아숲체험장 등
이 있다. 이들은 나무와 여러 화초를 심은 공간으로 그리 넓지 않은 산자락을 활용하여 자연
과 관련된 많은 것을 닦아 놓아 집약적 공간 활용도는 정말 높다.


▲  수목학습원 부근 숲길

▲  서달산 생태육교

서달산 생태육교는 상도동과 흑석동을 잇는 도로(서달로)로 인해 강제로 끊긴 서달산 자락을
연결하고 양쪽 산의 동물 이동을 위해 닦여진 것이다. 육교 밑에는 터널을 뚫어 차량의 통행
을 배려했으며, 생태육교 윗도리에는 산책로를 닦고 나무와 온갖 풀을 심어 산의 자연스런 일
부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감쪽 같이 만들었다.
육교 동북쪽에는 달마사(達磨寺)란 80여 년 묵은 절이 있는데, 그 절 이름을 따서 육교 동쪽
산자락을 달마공원이라 부르기도 하며, 고구동산길과 별도로 '서달산자락길'이 따로 가지를
뻗어 숭실대 후문 쪽으로 이어진다.


▲  서달산 생태육교에서 바라본 흑석동과 한강, 남산

▲  조그만 새집을 주렁주렁 머금은 나무조각과 의자
새집이긴 하지만 너무 작아서 어느 새도 들어오기 어렵다. 하여 새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 같은 장식물이다.

▲  소나무숲을 따라 이어진 서달산자락길

생태육교 동쪽 서달산 자락에는 소나무숲이 짙게 우거져 있다. 그래서 이곳을 피톤치드체험장
으로 삼았는데, 앞서 잣나무숲 만큼이나 삼삼해 다시금 이곳이 서울임을 잊게 만든다.
소나무숲 밑부분에는 나무로 도보길을 닦아 서달산자락길을 내었는데 숭실대 후문까지 이어지
며, 고구동산길과 서달산 정상으로 가려면 무조건 산을 오르면 된다.


▲  하늘을 훔친 서달산 소나무숲
피톤치드가 진하게 꿈틀거리는 싱그러운 자연의 현장이다.

▲  국립현충원 서남쪽 철책길 (서달산 정상 북쪽)
현충원과 속세의 경계에 푸른색 철책을 삼엄하게 둘러놓아 국가의 성역을 지킨다.
그 철책을 따라 산길이 나있는데, 고구동산길도 그 철책길을 잠시 거쳐간다.


 

♠  서달산(西達山) 정상과 현충원길

▲  서달산 정상

서달산(179m)은 동작구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뫼로 동작구의 대표 지붕이다. 국립현충원을
품은 특별한 뫼로 화장산(華藏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현충원 뒷쪽에 자리한 화장사(華藏寺,
현재 호국지장사)에서 유래된 이름이며, 산세가 마치 공작이 날개를 펼친 모습이라 하여 공작
봉(孔雀峰)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서달산의 범위는 현충원 주변과 달마공원, 서달로 서쪽 잣나무숲까지로 숲이 무성하여 동작구
의 허파 역할을 한다. 현충원이 조성되면서 서달산 정상을 비롯한 현충원 외곽이 현충원 영역
에 꽁꽁 묶였는데, 동작구가 그 외곽을 시민 공간으로 삼고자 서울시, 국방부와 협상해 2009
년 8월 현충원 영역(묘지공원)에서 근린공원으로 풀렸다. 즉 현충원 철책 바깥은 자유의 공간
으로 해방된 것이다.
이를 기리고자 2010년 봄, 정상에 동작대란 조망대를 세웠고, 주변 산길과 숲을 정비해 아주
휼륭한 시민들의 쉼터로 거듭났다.

서달산 정상에는 정상 표석과 토지지신(土地之神) 표석, 동작대, 쉼터, 운동장 등이 있으며, 산세도 완만하다. 이곳에 편히 오려면 국립현충원과 호국지장사를 거치거나 달마사, 중앙대
후문에서 접근하면 되며, 노들역이나 동작역에서 동작충효길을 따라 들어가도 된다.


▲  서달산 정상에 세워진 동작대(銅雀臺)

동작대는 서달산의 새로운 명물이자 상징물로 2010년 봄에 지어진 3층짜리 8각형 정자(亭子)
이다. 동작대하면 3세기 초반, 조조가 업(業) 부근에 세운 동작대가 떠오를 것인데, 이 동작
대는 그 동작대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한자만 같음) 그 이름도 동작구에서 따온 것이다.
정자 옆에는 윗층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을 별도로 내어 새로운 정자 형태를 그려내고 있는
데, 정자가 아무리 높아도 숲에 몽땅 감싸여 있어 조망은 별로 시원치 못하다. 

동작구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동작대 3층에 올라 나무들의 눈치를 피해가며 주변을 두리번
거리면 상도동과 사당동, 관악구 지역, 관악산, 여의도 등이 시야에 잡히며, 북쪽은 겨우 서
달산 정상만 시야에 들어온다.

▲  동작대 현판의 위엄

▲  동작대에서 바라본 상도동 지역

▲  동작대에서 바라본 관악산(冠岳山)의
위엄

▲  서달산 정상에서 상도출입문으로
이어지는 고구동산길


▲  동작충효길의 허브, 국립현충원 상도출입문 앞 갈림길

▲  현충원과 속세를 이어주는 국립현충원 상도출입문

서달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7~8분 가면 현충원 상도출입문이 나온다. 노들역에서 시작된 고구
동산길은 여기서 흔쾌히 그 끝을 맺는데, 고구동산길 뿐만 아니라 현충원길(2코스)과 동작마
루길(6코스), 까치산길(7코스) 등 무려 4코스의 시작점이자 종점이기도 하다.

상도출입문은 현충원의 남쪽 후문으로 6시부터 18시까지(주말과 현충일은 19시까지) 문을 열
어둔다. 그 문을 들어서면 바로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와 국립현충원으로 이어지며 문 안쪽
에는 초소가 있어 혹시나 방향을 잃고 들어올지 모를 속세의 나쁜 기운을 경계한다.

우리는 여기서 현충원길로 갈아타 동북쪽으로 이동했다. 현충원길(3.4km)은 상도출입문에서
동작역까지 이어지는 숲길로 현충원 철책을 따라 이어져 마치 국경선을 거니는 기분을 들게
한다.
철책 안쪽은 영원한 성역인 현충원이요, 우리가 걷는 바깥은 속세이다. 이 구간 역시 서달산
동쪽 자락으로 숲이 짙으며 길 북쪽 종점(동작역, 이수폭포)을 제외하면 각박한 구간은 없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사당2,3동과 정금마을로 내려가는 산길이 여럿 있다.


▲  현충원길에서 바라본 한강
숲 너머로 한강에 발을 담군 동작대교와 반포대교, 한남대교 등이 바라보인다.

▲  끝없이 펼쳐진 현충원길과 현충원 철책의 위엄

▲  푸른 철책과 함께 이어지는 현충원길 ①

▲  푸른 철책과 함께 이어지는 현충원길 ②

▲  길 중간중간에 설치된 메모리얼 게이트(Memorial Gate)

현충원길에는 메모리얼 게이트란 문이 심심치 않게 있다. 이 문은 현충원에 봉안된 순국선열
을 추모하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태극기를 형상화하여 문의 지붕은 태극모양처럼 넝실거리게
했고, 기둥은 건, 곤, 감, 리로 표현했다고 한다. 허나 그런 심오한 의미와 다르게 문의 이름
은 어렵게 영어로 되어있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문 이름은 보나마나 서울시나 동작구청 공무원들이 없는 지식 쥐어짜서 만든 이름으로 보이는
데, 굳이 영어로 이름을 삼아야 폼이 나는 것일까? 그냥 순국선열의 문이나 애국의 문으로 하
면 정녕 안되는 것일까? 이 땅의 정말 과하기 그지 없는 영어 사대주의는 실로 역겹기가 그지
없다.


▲  굳게 닫힌 사당출입문
현충원의 동쪽 후문으로 개방 시간은 앞서 상도출입문과 같다.

▲  푸른 철책과 함께 이어지는 현충원길 ③

현충원길은 예전에 완주를 했기 때문에 1/3 정도만 거닐다가 사당3동으로 쿨하게 빠졌다. 일
몰도 적지 않게 눈치를 주고 있고, 나와 일행도 모두 지쳤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동작충효길(고구동산길, 현충원길), 서달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나
중에 억지로라도 인연을 지어 동작충효길의 나머지 구간도 모두 맛보고 싶다.

* 서달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상도동, 사당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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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에 깃든 상큼한 개나리동산, 응봉산 봄꽃 나들이 (응봉산 개나리, 독서당공원, 살곶이다리, 중랑천)

 


' 서울 개나리의 성지, 응봉산 봄나들이 (살곶이다리) '


▲  봄티가 물씬 풍기는 응봉산

▲  응봉산 꼭대기 응봉산정

▲  살곶이다리


 

겨울 제국이 저물고 봄이 무럭무럭 익어가던 4월의 첫 무렵, 일행들과 성동구 한복판에
자리한 응봉산(鷹峯山)을 찾았다.
서울숲을 먼저 둘러보고 중랑천에 걸린 용비교를 통해 그날의 주인공이나 다름 없는 응
봉산의 품으로 들어섰는데, 응봉산은 응봉역(경의중앙선)이나 금호동 독서당로, 용비교
에서 접근하면 편하다.


▲  용비교 동측에서 바라본 응봉산의 위엄
(그 밑에 경의중앙선과 중랑천이 있음)


 

♠  응봉산 둘러보기

▲  용비교에서 바라본 중랑천(中浪川)과 응봉교

용비교 밑을 흐르는 중랑천은 경기도 동두천과 양주, 의정부, 서울 동북부 지역의 물을 모두
모아 한강으로 보내는 긴 하천이다. 우리 동네 도봉동(道峰洞)을 지나는 하천이기도 한데 이
곳이 한강과 만나는 지점이라 폭이 왠만한 강 못지 않게 넓다.

중랑천 좌/우 옆구리에는 산책로와 자전거길이 닦여져 있는데, 그의 우측(서쪽)에는 경의중앙
선 복선 철로가 있어 경의중앙선 전철(문산~용산~청량리~용문,지평)과 경춘선 ITX-청춘열차(
용산~춘천), 강릉선 고속전철(서울~강릉,동해)까지 수시로 지나간다. 그러다보니 종종 그들이
버벅대는 모습을 보인다. 선로는 겨우 2개인데 지나는 열차 종류는 허벌나게 많기 때문이다.
(관광열차와 화물열차도 적지 않게 지나다님)
그런 경의중앙선 바로 뒤에 펼쳐진 뫼가 바로 응봉산으로 한강을 향해 우람하고 잘생긴 암벽
을 아낌없이 내밀고 있다. 개나리가 한참일 때는 벼랑을 빼고 거의 노란 천하가 되지만 개나
리의 기운이 70% 이상 빠진 때에 왔기 때문에 녹색 비율이 더 높다.


▲  응봉산과 그 밑도리를 지나는 경의중앙선 전철
바위들이 우럭우럭한 모습으로 포진해 있어 산의 경치를 크게 돋군다. 바위가
마치 사람이 서 있는 모습과 비슷하여 한강, 중랑천과 맞닿은 산 남쪽을
입석포(立石浦)라 불렀다.

▲  응봉산과 경의중앙선, 중랑천 3박자가 어우러진 현장
오직 용비교에서만 그 매력을 누릴 수 있다. 거기에 전철이나 각종 열차가
때맞추어 지나가면 더욱 금상첨화가 된다. 하여 이곳은 그런 풍경을
담으려는 사진쟁이들의 출사 장소로 명성이 자자하다.

▲  용비교 서쪽에서 응봉산으로 인도하는 남쪽 계단길
응봉산의 각박한 남쪽 벼랑을 극복하며 닦여진 길로 이쪽은 약간의 개나리와
하얀 벚꽃, 연분홍 진달래들이 봄의 향연을 이어가고 있다.

▲  응봉산 능선으로 인도하는 남쪽 계단길 (윗쪽에서 바라본 모습)
지그재그로 이어진 계단길을 오르면 바로 서쪽 능선이다.

▲  남쪽 계단길에서 바라본 용비교(왼쪽 다리)와 서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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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봉산 서쪽 능선길 ①
능선길 주변의 수풀은 거의 개나리이다. 개나리가 적지 않게 주저앉은 시기에
와서 실감은 덜하지만 개나리가 한참일 때는 완전 노란 개나리길이다.

▲  응봉산 서쪽 능선길 ②

▲  응봉산 서쪽 능선길 ③ 정상 직전

밑에서는 별로 보이지 않던 개나리들이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정상 주변
은 개나리들이 아직 정정함을 과시하고 있었던 것. 하지만 그래봐야 김옥균(金玉均)의 3일천
하처럼 고작 며칠 연장에 불과하다. 이래서 인생이나 세상만사가 참 부질없는 모양이다.


▲  응봉산 서쪽 능선길 ④

▲  응봉산 서쪽 능선에서 바라본 나지막한 천하 ①
서울숲과 용비교(바로 밑의 다리), 중랑천, 한강, 성수대교,
청담동과 압구정동 지역

▲  응봉산 서쪽 능선에서 바라본 나지막한 천하 ②
한강과 중랑천 하류, 동호대교, 옥수동, 한남동, 압구정동, 신사동 지역

▲  응봉산 정상을 지키고 있는 응봉산정(鷹峯山亭)

응봉산의 나지막한 꼭대기에는 단아하게 생긴 2층짜리 응봉산정이 자리해 있다. 근래에 응봉
산을 꾸미면서 달아놓은 것으로 그 주위로 너른 공터가 있는데 바로 여기가 응봉산 개나리축
제의 중심지로 공연과 먹거리 장터, 전시회 등이 열린다.
이곳에 올라서면 바로 밑에 서울숲과 한강, 중랑천을 비롯하여 성동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
기, 옥수동, 한남동, 한강 너머로 강남구와 서초구 지역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허나 봄
마다 찾아오는 중공산 미세먼지의 역한 내습으로 시야가 적지 않게 꺾여 보이는 것은 평소에
2/3 이하에 불과하다.


▲  옆에서 바라본 응봉산정

응봉산(응봉)은 성동구(城東區)의 한복판이자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곳에 급하게 솟은 해발
94m(95m)의 조촐한 뫼이다.
산의 이름인 응봉(鷹峯)은 매봉우리란 뜻으로 조선 때 제왕과 왕족들이 매사냥을 즐겼던 곳이
다. 1395년에 응봉 기슭에 매를 기르는 관청인 응방(鷹坊)을 설치해 필요한 매를 충당했으며,
태조와 태종, 세종, 성종까지 여기서 자주 매사냥을 즐겨 꿩과 토끼 등을 사냥했다.
매사냥을 벌였던 곳이라 자연히 응봉, 응봉산, 매봉산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산의 모양새가 마
치 매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응봉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중랑천과 한강과 맞닿은 산 남쪽은 각박한 벼랑으로 우럭우럭하게 생긴 암벽들이 많으며 그들
이 마치 사람이 서 있는 모습처럼 보여 산 밑의 포구(浦口)를 입석포(선돌개)라 불렀다. 뒤에
는 응봉이, 앞에는 강이 흐르는 빼어난 경치로 많은 시인묵객들을 홀렸으며,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이라 물고기도 잘 잡혀 낚시터로도 이름이 높았다.
월산대군(月山大君, 성종의 형)과 서거정(徐居正), 성임(成任) 등 조선 초에 이름있는 문인들
들이 서울(한양)의 아름다운 풍경 10곳을 선정하여 한도십영(漢都十詠)이라 칭하고 그에 관한
시를 남기며 격하게 찬양을 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입석조어(立石釣魚, 입석포에서의 낚
시)'이다.

응봉산은 남쪽과 동쪽은 한강과 중랑천으로 막혀 경사가 급하고 서쪽은 옥수역 동쪽 달맞이봉
과 이어져 있으며, 북쪽은 대현산, 금호산, 남산까지 산줄기가 이어져있다. 비록 개발의 칼질
로 중간중간 키다리 아파트와 주택가가 마구 들어서 서로 끊어진 듯 보이지만 엄연히 이어져
있으며, 서울숲에서 응봉산을 거쳐 남산까지 이들을 모두 엮은 도보길이 닦이면서 도시와 산,
숲을 아우른 서울 도심 속의 환상적인 지붕길로 각광을 받고 있다. (단 대현산공원~응봉공원
구간은 부득이 번잡한 도로와 시내를 지나가야 됨)

응봉산에 안겨있던 옛 명소로는 관리들의 학습 장려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동호독서당(東湖讀
書堂)이 서쪽 자락에 있었고, 양반사대부들이 지은 황화정, 유하정 등의 정자가 있었으며, 옥
수역 부근에는 얼음을 보관하던 국립 얼음창고인 동빙고(東氷庫)가 있었다. 또한 산 남쪽에는
앞서 언급했던 입석포가 있었다. (입석포를 제외하고 모두 세월이 잡아가고 없음)

허나 개발이 요란하게 칼춤을 추던 20세기를 거치면서 그렇게나 잘생기고 착했던 응봉산은 영
좋지 못한 모습으로 강제 성형수술을 강요 받게 된다. 응봉동(鷹峯洞)과 금호동 지역에 격하
게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산의 북쪽과 동쪽, 서쪽이 난도질을 당했고, 대현산과 이어지던 북쪽
은 독서당로가 닦이면서 완전 절벽 수준으로 칼질을 당했다.

나는 중학교 시절(1990년대 초반), 여기서 가까운 금호1가에서 여러 해를 살았었다. 그때 응
봉산은 동네 우범지대로 이미지가 별로 좋지 못했지. 하여 가까이 살았음에도 그곳은 쳐다보
지도 않았다. 그만큼 20세기 말, 응봉산의 이미지는 참으로 우울했던 것이다.
게다가 산이 나날이 허약해지면서 모래흙이 자꾸 흘러내리자 그 대책으로 20만 그루의 개나리
를 심었는데 그 개나리가 무럭무럭 자라나 개발의 칼질에 녹초가 다 된 응봉산을 되살려주었
고 그것이 글쎄 전화위복이 되어 도심 속 개나리동산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성동구는 1997년부터 응봉산 개나리축제를 벌여 이제는 서울의 주요 봄꽃 축제로 자리
를 잡게 되었으며, 금호동에 살 적에 단 1번도 오지 않았던 나를 이곳으로 오게 하였다. 사람
은 옷이 날개이듯, 산은 꽃이 날개인 모양이다.


▲  응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성수동과 화양동, 송정동 지역, 아차산~용마산 산줄기

▲  응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차량들로 늘 버벅거리는 용비교와 서울숲, 성수대교 주변


응봉산은 매년 1월 1일 성동구청 주최로 해돋이행사가 열린다. 동쪽과 서쪽이 뻥 뚫려있어 일
출과 일몰을 모두 지켜볼 수 있으며, 개나리가 크게 위엄을 부리는 3월 말~4월 초에는 '응봉
산 개나리축제'가 열려 상춘객들로 완전 시장통을 이룬다. (축제가 열리는 토,일요일에는 개
나리보다 사람이 더 많을 정도임)


▲  응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③ 옛 저자도를 추억하다

윗 사진의 가운데 부분 한강(서울숲과 동호대교 사이)에는 저자도(楮子島)란 섬이 있었다. 그
는 한강의 주요 경승지의 일원으로 종이 제작에 쓰이는 닥나무가 많이 자랐던 곳이다. (섬의
이름인 저자는 닥나무를 뜻함)
그렇게 착했던 저자도는 1970년대 강남 개발과 압구정동 아파트 조성에 필요한 흙을 충당하고
자 무식하게 폭파되어 인간의 시야와 지도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그렇게 영원히 없어진 듯 보
였던 저자도는 대자연의 위대한 힘으로 조금씩 살아나 아주 작지만 섬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하여 몇십 년 또는 10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면 지도에 다시 그를 표시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 응봉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동구 응봉동, 금호4가동


▲  응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④
굉음을 울리며 응봉산 밑도리를 지나는 경의중앙선 전철


 

♠  응봉산 마무리

▲  개나리와 벚꽃이 아른거리는 응봉산 동쪽 능선길 ▼



▲  응봉산 출렁다리 (동쪽)

동쪽 능선길을 내려가면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온다. 그 길은 응봉산의 북쪽 자락을 돌아
응봉산정 북쪽까지 이어지는데 그 중간에 출렁다리가 있다. (길 옆에 있음)
출렁다리는 응봉산정, 인공암벽공원과 함께 응봉산을 수식하는 조촐한 눈요깃감으로 벼랑 사
이에 짧은 허공을 이용해 다리를 놓았다. 천하 출렁다리의 성지(聖地)로 추앙받는 청양 천장
호 출렁다리, 파주 감악산(紺岳山) 출렁다리, 원주 소금산 출렁다리만은 못해도 복잡하기 그
지 없는 서울 도심에 거창할 것도 없이 저 정도의 흔들다리만 있어도 충분하다. 다리를 건널
때 조금씩 흔들거려 염통을 은근히 건드리니 다리의 이름값은 그런데로 하고 있다.


▲  응봉산 출렁다리를 건너다. (출렁다리 서쪽)

▲  개발의 칼질에 고통받는 응봉산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곳
절벽처럼 잘려나간 응봉산 북쪽 부분 (독서당로)


응봉산 서쪽과 북쪽은 개발의 칼질로 그의 살이 적지 않게 깎여나갔다. 특히 대현산과 이어지
는 북쪽은 독서당로가 닦이면서 아예 산줄기를 절단을 내버려 강제로 절벽이 되어버렸다. 흉
하게 깎인 동쪽과 북쪽에 인공암벽공원(동쪽 자락)을 설치하고 풀과 나무로 덮는 등 안간힘을
썼지만 주변과 너무 어색하다.

독서당로로 산줄기가 끊긴 북쪽 벼랑에는 나무데크길을 마치 고산지대의 잔도(棧道)처럼 아슬
아슬하게 걸쳐놓아 보기만 해도 참 아찔하다. 길 북쪽의 신동아아파트를 이어주는 육교가 설
치되어 응봉산 북쪽 산줄기(대현산)와 연결은 시켜놓았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통행로이지 산줄
기는 아니다.
이 땅의 개발이 일찍 철이 들었다면 생태다리 터널 방식으로 도로를 뚫어 산의 피해를 최소화
시켰을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하긴 이 땅의 개발지상주의는 철이 들려면 아직도 멀었다.


▲  응봉산 북쪽에 자리한 독서당공원

응봉산에서 독서당로 육교를 건너 신동아아파트 서쪽 길로 가면 독서당공원이 마중을 나온다.
겉으로 보면 응봉산과 별개처럼 보이지만 이곳 역시 응봉산의 엄연한 일원으로 신동아아파트
와 벽산아파트 사이에 남북으로 가늘게 이어져 있으며, 공원 북쪽은 바로 대현산(대현산공원)
과 맞닿아있다. 또한 서울숲~남산을 잇는 둘레길이 이 공원의 신세를 지며 대현산, 금호산으
로 흘러간다.

공원 이름은 응봉산 자락에 있었다는 독서당에서 따온 것이다. 지금은 산뜻한 모습들을 드러
내고 있지만 1960년대 이후 서울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금호동과 옥수동, 응봉동에 달동
네 스타일의 집들이 마구 들어서 꽤 우울하고 어지러운 모습을 간직했던 곳이다.
1973년 12월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었으나 시행되지는 못했으며, 무허가 건물과 위험 건물이
마구 들어서 말썽이 자꾸만 늘자 2007년 10월 '공원화사업지구'로 지정하여 주변을 모두 갈아
엎고 2009년 12월 공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달동네 시절보다 다소 정비되고 안정적인 모습이긴 하나 공원도 좀 단조롭고 주변이 온통 성
냥갑 아파트 일색이라 지금의 풍경이 참 낯설고 재미가 없다. 기존 시내와 주택가를 싹 밀어
버리고 재개발이 된 곳들은 마치 같은 도장을 찍어낸 듯 다들 비슷한 모습 같다. 나도 서울이
고향이고 약수동과 금호동 산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강제 성형을 당한 곳이 적지 않
아 어린 시절을 추억할 공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이 역시 모든 것을
지우기 좋아하는 심술쟁이 세월의 장난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동구 금호동1가 37-7일대


▲  벚꽃의 순백 향연이 한참인 독서당공원 ①

▲  벚꽃의 순백 향연이 한참인 독서당공원 ②

▲  벚꽃의 순백 향연이 한참인 독서당공원 ③

▲  북쪽(대현산)으로 넘어가는 독서당공원 산책로

▲  독서당공원 북쪽에서 만난 푸른 나무

▲  독서당공원 북쪽 입구 (금봉어린이집 옆)
공원 바로 북쪽에는 대현산을 등에 업은 대현산공원이 있다. 같은 지붕이지만
길(독서당로63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름만 다른 것이다.


 

♠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돌다리, 살곶이다리<전곶교(箭串橋)>
- 보물 1,738호

늦가을이 깊어가던 11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한양대 남쪽 중랑천에 있는 살곶이다리를 찾았
다. (앞의 응봉산과 찾아간 시기는 틀리나 그곳과 가깝고 중랑천 라인이므로 편의상 본글에
넣었음)

살곶이다리는 한자로 전곶교(箭串橋)라 하는데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자 조선시대에
지어진 돌다리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그렇다고 다리 길이가 수백m씩이나 되는 것은 아니
다. 길이 78m(256척), 너비 6m(20척) 정도로 기둥을 4줄로 하여 모두 64개를 세우고 그 위에
받침돌을 올려 대청마루를 올리듯 3줄의 판석을 빈틈없이 깔았다. 가운데 2줄 교각을 낮게하
여 다리의 중량을 안으로 모았으며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고자 마름모형으로 다듬고, 다리
기둥에 무수하게 흠집을 내어 물살의 흐름을 배려했다. 단순해 보이는 겉보기와 달리 과학과
기술이 꽤 들어간 것이다.

이 다리의 탄생 배경은 대략 이렇다. 왕위에서 물러난 태종(太宗)과 정종(定宗)은 서울 동부
지역으로 종종 외출을 나갔다. 하여 세종(世宗)은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위해 1420년 5월, 그
길목인 살곶이에 다리를 지었다. 허나 중랑천 너비가 넓고 여름마다 찾아오는 홍수를 이겨내
기 어려웠으며 때마침 태종도 승하하여 기초 공사 정도에서 공사는 중단되고 만다.
그렇게 50년 이상 방치되어 오다가 백성들의 교통 편의를 위해 다리 가설의 필요성이 계속 제
기되면서 1475년 잠자고 있던 다리에 다시 손질을 가해 1483년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살곶이다리는 서울에서 뚝섬과 광진구, 송파, 경기도 동부와 동남부, 멀리로는 충청도 동부와
강원도, 경상도를 잇는 중요한 다리로 백성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게다가 제왕과 왕족들이 화
양정(華陽亭)과 성덕정(聖德亭, 성수동)으로 사냥이나 군사훈련을 보러 가거나 여주 영녕릉(
英寧陵), 헌인릉(獻仁陵)에 참배하러 갈 때도 꼭 이곳을 거쳐갔다. 이렇게 높은 사람들의 이
용이 높다보니 다리 폭을 넓게 잡았으며, 마치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하여 제반교(濟盤橋)라
불리기도 했다.

고종 때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무리하게 경복궁(景福宮)을 재건할 때, 애궂은 살곶이다
리까지 손을 대어 다리 석재를 절반씩이나 뜯어갔으나 대부분 제대로 쓰이지도 못하고 버려졌
다.
1920년대 대홍수로 다리가 크게 손실되었고 그런 상태로 방치되는 고통을 겪다가 1972년에 서
울시에서 복원을 했다. 허나 중랑천 폭이 그 사이 많이 넓어져 현재 다리로는 감당이 되지 않
자 북쪽 구석으로 옮겼으나 너무 대충 복원하여 원래 모습으로 하지는 못했다. 또한 다리 남
쪽에는 중랑천 물줄기 위에 시멘트로 연결다리를 엮으면서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이게
모두 살곶이다리로 오해하기가 쉽다.
허나 북쪽의 돌로 된 다리가 진짜이며, 중간에 돌로 두텁게 다져진 돌축대와 그 남쪽 다리는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들이니 착오가 없기 바란다.


▲  가까이서 본 살곶이다리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랜만에 찾은 살곶이다리는 보수공사로 다리 북쪽이 다소 어수선했다.
1972년에 서울시 철밥통들이 너무 날림으로 복원을 해서 손댈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통행은 가능하며, 갈대와 온갖 수풀이 출렁이는 다리 밑도리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나 다리
높이가 낮고 물도 없기 때문에 적당히 들어가서 살피면 된다. 


▲  평지처럼 넓어 보이는 살곶이다리

돌다리를 이루고 있는 돌의 피부가 조금 거칠기는 하나 거닐기에는 그리 지장은 없다. 이래뵈
도 조선시대 돌다리 중 가장 크고 단단하며 제왕(帝王)들도 이용했던 비싼 다리이다. 다만 수
표교(水標橋)처럼 다리 양 모서리에 난간 같은 시설이 없으니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기 바란
다.


▲  남쪽 돌축대에서 바라본 살곶이다리와 한양대
돌다리와 시멘트 다리 사이에는 돌축대를 쌓았다. 그곳을 경계로 진짜 살곶이다리와
그를 접선하는 시멘트다리가 갈라진다. 돌축대 역시 1972년에 다져진 것이므로
원래 살곶이다리와는 관련이 없다.

▲  동쪽에서 바라본 살곶이다리
다리 주변에는 갈대와 온갖 수풀들이 늦가을의 막바지 향연을 즐기고 있다.


다리의 이름이 되고 있는 살곶이는 이곳의 지명이다. 살곶이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재미난 설화가 아련히 전해온다.
고려를 뒤엎고 조선이란 비리비리한 나라를 세운 태조 이성계, 그의 5번째 아들인 정안대군(
靖安大君)은 2차례(1398, 1400년)의 왕자의 난을 통해 이복동생(이방석, 이방번)을 때려죽이
고 친형인 이방간(李芳幹)까지 때려잡으면서 결국 1400년 왕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그 유명
한 태종이다.
자식들의 권력 싸움에 뚜껑이 단단히 뒤집힌 이성계는 그의 본거지인 함경도 함흥(咸興)으로
가버렸다가 태종의 계속되는 설득에 못이겨 결국 서울로 돌아오기로 했다. 부왕(父王)의 컴백
소식에 기뻐한 태종은 살곶이 부근에서 부왕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기다렸는데 하륜(河崙)이
혹시 모르니 연회장소에 큰 나무 기둥을 세우라고 했다. 즉 태조의 화가 아직 가라앉지 못해
그의 주특기인 화살을 갑자기 날릴지 모른다는 뜻이다. 하여 큰 기둥을 여러 개 세웠다.

태조 일행이 이곳에 이르자 태종은 너무 반가워 그에게 달려갔는데 태조는 그를 보자 다시금
뚜껑이 뒤집혀 귀신같이 화살을 매겨 쏘았다. 태종 또한 무예를 조금 하는지라 잽싸게 큰 기
둥 뒤로 숨어 화살을 피했다. 이를 지켜본 태조는 껄껄 웃으며 그에게 옥새를 내주었다고 하
며 태조가 화살을 쏜 곳이라 하여 이곳 지명이 살곶이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1가지 이상
한 점이 있다.
함흥에서 서울로 오려면 추가령구조곡(楸哥嶺構造谷)과 평강(平康), 철원(鐵原), 연천(漣川),
양주(楊州), 도봉구를 거쳐 동소문(혜화문)이나 동대문으로 들어서면 된다. 그런데 살곶이를
경유하는 것은 동남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고 좁은 중랑천을 배를 타고 이동
했을 리는 없다. 다만 다리 남쪽인 성수동 성덕정은 군사 훈련을 했던 곳이라 다리 부근에서
제왕이나 귀족들, 군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이 살곶이의 유래가 되
지 않았을까 싶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 성수동1가


▲  살곶이다리의 옛 모습 (다리 남쪽 둑방길 터널에 있음)
저때 중랑천은 딱 살곶이다리 길이에 맞게 흘러갔다.

▲  살곶이다리에서 바라본 중랑천과 내부순환로
중랑천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서식하는 도봉동이 나온다.
그래서 무척 반가운 하천이다.

▲  살곶이다리에서 바라본 성동교와 2호선 철교

▲  늦가을에 물씬 잠긴 중랑천 둑방길

살곶이다리를 건너 중랑천 남쪽에 길게 둘러진 둑방길로 들어섰다. 이 둑방은 성동교에서 송
정동주민센터 부근까지 이어져 있는데, 둑방 위에 산책로를 닦고 긴 생머리의 버드나무와 여
러 나무를 심었다.
늦가을이라 나무들은 처절한 아름다움을 내보이며 둑방 주변을 마치 네온사인마냥 화사하게
물들였다.


▲  중랑천 둑방길 속으로 빠져들다...①

▲  중랑천 둑방길 속으로 빠져들다...②

▲  둑방길 옆에 짧게 펼쳐진 은행나무 숲길
황금색 은행잎이 우수수 내려앉아 우울한 2글자 '낙엽'이란 이름으로
귀를 접고 누워있다.

▲  중랑천 둑방길에서 바라본 중랑천과 동부간선도로
중랑천이 크게 구부러지는 곳 너머가 송정동(松亭洞) 북부이다. 그 너머로
보이는 긴 산줄기는 고구려 유적의 성지인 아차산~용마산 산줄기이다.

둑방길을 끝으로 봄의 응봉산+늦가을 살곶이다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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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4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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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송파에 깃든 옛 한성백제의 장대한 영혼터, 석촌동고분군~방이동고분군

 


' 서울 백제 유적의 성지, 송파구 나들이 '
(석촌동고분군, 방이동고분군)

▲  석촌동고분군 제4호분

▲  석촌동고분군 제5호분

▲  방이동고분군 제7,8,9,10호분


 

 

서울 동남부에 자리한 송파(松坡)는 장대한 해양대국을 일구었던 백제(百濟)의 도읍인 위
례성(慰禮城)의 변두리로 여겨지는 곳이다. 백제는 고구려(高句麗)의 위대한 시조인 동명
성왕(東明聖王, 추모성왕)의 3번째 아들, 온조(溫祚)가 어머니인 소서노(召西奴)와 졸본(
卒本) 세력을 이끌고 내려와 세웠다고 전한다.
그들은 한강(漢江) 이북 서울 어딘가에 도읍을 세우고 위례성이라 하였는데, 주변 세력의
침공이 잦고 자리가 영 좋지 못해서 한강 남쪽에 또 다른 위례성을 만들어 도읍으로 삼았
다. 그래서 이전 위례성을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 이후를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위례성의 자리를 두고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논란이 많았는데 고려와 조선시
대에는 천안의 위례산성(慰禮山城)으로 여겼으며, 18세기 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위례성은 한강 북쪽, 하남위례성은 광주(廣州, 하남시 지역)라 주장하면서 서울+광주설이
대세를 이루었다.

20세기 이후 남한산성(南漢山城)과 풍납토성(風納土城), 하남 춘궁동을 수상하게 여겨 조
사를 벌였는데, 풍납토성 일대에서 1세기부터 5세기에 걸친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고 올
림픽공원 조성으로 조사를 받은 몽촌토성(夢村土城)에서도 비슷한 시기의 유물이 마구 쏟
아져 위례성은 풍납토성 일대, 근초고왕(近肖古王)이 370년에 도읍으로 삼았다는 한산(漢
山)은 몽촌토성 일대로 크게 여기고 있다.
허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불과 1km거리이니 둘은 거의 한곳이나 다름 없으며, 도성(都
城) 확장 차원에서 몽촌 일대를 개발하여 왕궁과 관청을 두었다. 그래서 위례성과 한산을
아울러 한성(漢城) 또는 한산이라 부르며, 이곳에 도읍을 하던 시절을 한성백제(漢城百濟
)라 부르기도 한다.

한성백제는 개로왕(蓋鹵王, 재위 455~475) 시절까지 큰 번영을 누렸으나 475년 고구려 제
19대 태왕(太王)인 장수왕(長壽王, 재위 413~491)의 공격 앞에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고
구려는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개로왕을 생포하여 아차산성(阿且山城)에서 처단했고, 그것
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위례성이란 존재를 깔끔하게 파괴시켜 위례성 3자를 세상에서
영구히 지워버렸다.
바로 장수태왕의 그 만행 때문에 위례성을 찾느라 오랫동안 허벌나게 고생하고 있는 것이
다. 허나 위례성과 이어져있던 한산(몽촌토성)은 다 부시지 않고 그들의 군사기지로 삼았
다고 한다.
이렇게 고구려에게 도읍을 짓밟힌 백제는 왜열도와 산동반도를 비롯한 중원대륙의 무수한
해안 지역을 다스렸던 해양대국의 체통도 다 내버리며 형편없이 쫓겨가 간신히 웅진(熊津,
공주)에서 정신을 차렸다.

한성(위례성)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100% 맞는다면 석촌동과 방이동을 비롯한 송파 일
대는 도읍의 남쪽 변두리가 된다. 석촌동에는 한성백제 시절의 거대한 돌무덤이 남아있고,
방이동에도 백제 고분이 남아있으며, 가락동 등 송파 일대에 백제와 신라 때 고분이 적지
않게 존재하고 있었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이 그들을 모두 앗아가버렸다.

본글에서는 한성백제 시절 고분군이자 나의 즐겨찾기의 일원인 석촌동고분군, 방이동고분
군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  옛 한성백제의 영화로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백제 초기의 무덤들
석촌동고분군(石村洞古墳群) - 사적 243호

▲  석촌동고분군 제3호분

송파구(松坡區) 한복판에 자리한 석촌동고분군은 천하에 몇 남지 않은 한성백제의 소중한 발
자국이다. 이곳은 한성백제 시절(1~5세기)에 다져진 백제 왕족과 귀족들의 묘역으로 특히 거
대한 적석총(積石塚, 돌무지무덤)으로 유명하다. 적석총은 5세기까지 고구려의 대표 무덤 양
식이라 흥미를 끌고 있는데, 무덤 주변에 호석(護石)까지 갖추고 있어 영락없는 고구려 무덤
꼴이다. 하여 고구려의 무덤 양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가꾸었음을 귀뜀해주고 있으며, 석
촌동이란 지명도 바로 이들 적석총 무리에서 유래되었다.

백제의 적석총은 5세기 이후 석실분(石室墳, 돌방무덤)으로 모양이 점차 바뀌며, 방이동고분
군과 개발의 칼질로 사라진 가락동고분군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또한 백제의 중심이 웅진(공
주)으로 옮겨지면서 더 이상 고구려 스타일의 적석총은 등장하지 않는다.
백제는 잃어버린 한성을 되찾고자 200년 가까이 몸부림을 쳤으나 끝내 되찾지 못했고, 주인을
잃은 한성백제의 고분은 고구려와 신라의 침략군, 고려와 조선의 농민들, 대자연 형님의 집요
한 괴롭힘으로 끊임없이 고통 받으며 속세의 뇌리 속에서 잊혀지고 만다.

20세기 초반, 왜정(倭政)은 송파 벌판에 무리지어 펼쳐진 돌고분에 흥미를 던지며 조사를 벌
였다. 조선총독부가 1917년에 작성한 '조선고적도보'의 '석촌 부근 백제고분군 분포도'에 따
르면 석촌동 일대에서 89기(흙무덤 23기, 적석총 66기)의 고분이 기록되어 있으며, 가락동 등
송파구 일대에서 무려 290기 이상의 백제와 신라 고분이 존재하고 있었다. 허나 간단히 조사
만 벌이고는 무책임하게 방치해 버린다.
1974년에 이르러 서울대박물관이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벌였다. 1983년까지 조사를 벌여 적석
총 7기를 비롯하여 토광묘(土壙墓, 움무덤)와 독무덤(옹관묘), 즙석봉토분(葺石封土墳, 흙무
지무덤),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고분) 등 30여 기의 다양한 무덤과 화장(火葬) 흔적이 나왔
으며, 이들은 모두 한성백제의 무덤임이 드러났다. 하여 제왕과 귀족 뿐 아니라 하급 관리나
돈 꽤나 만지던 백성들도 이곳에 묻힌 것으로 여겨져 석촌동과 송파 일대는 한성백제 시절의
거대한 사후(死後) 안식처였음을 알려주며 시기를 달리하여 중복되게 조성된 무덤도 많아 오
랫동안 공동묘지로 쓰였음을 속삭인다.
하지만 그 조사는 송파 지역 도시정비사업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조사에 부실한 점이 꽤 많았
다. 게다가 송파 개발을 우선으로 두면서 송파 지역의 수많은 고분과 삼성동토성(三成洞土城,
강남구 삼성동) 등의 백제 유적이 천박한 개발의 칼질에 모두 희생을 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깔끔하게 밀어버려 그들의 흔적을 더듬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그나
마 석촌동고분군은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 사적의 지위(1975년에 지정됨)를 얻으면서 칼날을
피해갔으나 겨우 몇 기만 살아남았다.

1986년부터 1987년까지 살아남은 고분을 중심으로 고분공원을 조성했는데, 3호분 동쪽 일대에
서 상층에 토광묘와 옹관묘가, 그 밑에 대형토광묘 등이 발굴되었다. 특히 대형토광묘는 천하
에 알려지지 않는 무덤 형태로 제일 아래층에 점토층을 파내고 그 안에 8기의 목관을 안치한
신선한 구조를 지녔다. 허나 공원을 만들면서 고분군 밑에 지하차도를 닦는 어리석음을 범했
고, 고분 주위로 주거지가 빼곡히 들어차 도시에 갇힌 답답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2015년부터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이곳의 숨겨진 이야기를 더 풀고자 석촌동고분군을 다시 들추
었다. 그래서 제2호분과 제3호분 주변을 조사했는데 숨바꼭질을 벌였던 새로운 적석총이 발견
이 된 것이다. 그 무덤의 기단 석축은 동~서, 남~북으로 연결되어 있고, 점토를 쌓아 올린 부
분이 여럿 확인되었다. 하여 처음 지어진 적석총에 잇대어 다른 무덤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또한 2019년에는 화장된 인골이 발견되어 백제 왕실에서 화장 문화가 적지 않게 유행했음을
알려준다. 수습된 인골의 무게는 총 4.3kg으로 여러 사람의 뼈로 여겨지며, 같은 부위의 뼈가
2개 발견되기도 했다. 다만 뼈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고온에서 화장되어 유전자 분석은 아쉽
게도 불가능했다. 그리고 여러 적석총이 100m 길이로 이어진 이른바 '연접식(連接式) 적석총'
형태도 발견되었다. 이 무덤은 네모꼴의 중소 규모의 적석총 16기와 이를 이어주는 연접구,
화장한 인골을 묻은 매장의례부 3개소를 맞붙여가며 지은 큰 규모의 특이한 형태로 이를 통해
석촌동에는 아직도 숨바꼭질을 즐기는 한성백제의 비밀이 적지 않음을 알려준다. 하여 남은
비밀을 모두 밝히고자 계속 조사를 벌이고 있다.

석촌동고분을 배경으로 한 석촌동고분공원의 면적은 약 49,999㎡로 적석총 3기와 흙무덤 1기,
무덤 흔적 4기를 지니고 있으며, 20여 기는 땅속에 묻어버렸다. 공원에는 소나무와 단풍나무
등을 넉넉히 심고 상큼하게 산책로를 닦았으며, 24시간 열린 공간으로 산책이나 운동을 나온
동네 사람부터 답사와 출사, 나들이객들까지 고루고루 찾아오는 서울의 굴지 명소이다.
비록 경주(慶州) 대릉원(大陵苑)의 위엄에는 미치지 못하나 인근의 방이동고분군과 함께 서울
에 딱 2곳 뿐인 고분공원으로 도심 속의 소중한 오아시스이자 쉼터, 그리고 고색이 깃든 사적
공원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 248일대 (가락로7길 21)


▲  남쪽에서 바라본 석촌동 제3호분
그 모습이 마치 거대하고 신성한 제단(祭壇)처럼 보인다.


석촌동고분군 북쪽에는 이곳의 맏이격이자 백미(白眉)인 제3호분이 딱딱한 돌피부를 드러내며
길게 누워있다.
그는 3단의 네모난 적석총으로 고구려 적석총의 자존심인 장군총(將軍塚)과 많이 비슷해 눈길
을 끈다. 그 독특한 생김새로 '백제의 피라미드','서울의 피라미드'란 별명을 지니고 있으며,
무덤의 동서 길이 50.8m, 남북 길이 48.4m, 둘레는 무려 199m에 이른다. 그 대단한 덩치에 비
해 키는 겨우 4.5m에 불과해 사람으로 따지면 완전 초비만형 무덤인데, 1980년대 중반까지 민
가들이 건방지게 무덤 위에 들어앉아있었고, 세월 또한 이 무덤을 그냥 두지 않았다. 그로 인
해 무덤의 키와 덩치가 다소 깎여나갔다. 하여 원래 둘레와 폭, 높이는 지금보다 훨씬 컸다고
보면 된다.
어쨌든 북한과 만주, 요동(遼東), 왜열도 등 잃어버린 땅을 제외한 우리나라에서 경주 황남대
총(皇南大塚) 다음으로 덩치가 크며, 비록 장군총과 황남대총보다 키는 많이 작으나 둘레와
덩치는 그들을 능가한다. 만약 키까지 제대로 받쳐줬다면 그 위엄은 실로 대단했을 것이다. 

무덤은 약간 높은 지형을 평탄하게 다지고 40~50cm 두께로 진흙을 깐 다음, 자갈돌과 지댓돌
을 차례로 깔았다. 그 위에는 40cm가 넘는 크기의 깬돌과 작은 판자돌을 가로 누여서 층층히
다졌으며, 무덤 꼭대기에는 4호분과 달리 돌이 고여있다. 부장품이 많았을 것으로 여겨지나
이미 오래전에 싹 털려 금으로 만든 얇은 장식 조각인 달개, 백제 토기 조각, 동진(東晉) 시
대 도자기 조각 정도만 겨우 건졌다.

이르면 3세기 중반에서 적어도 4~5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무덤의 위엄으로 봤을 때
백제의 전성기를 닦았던 고이왕(古爾王)이나 근초고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다. 요즘에는 근
초고왕으로 무게가 더 쏠리고 있으나 출토 유물이 빈약하고 사료(史料) 또한 부족하여 이 역
시 허공의 메아리에 불과한 실정이다.


▲  제3호분의 옆모습

▲  제3호분의 뒷모습
자연석이 사람의 손을 타 차곡차곡 쌓이면서 거대한 적석총의 위엄을 이루었다.

▲  석촌동 제4호분

제3호분 남쪽에는 제4호분이 놓여져 있다. 3단으로 이루어진 네모난 적석총으로 제3호분의 축
소판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한 변의 길이는 17m 정도이며, 겉모습은 돌로 이루어져 있
고 내부는 흙으로 채워져 순 돌로 이루어진 고구려 적석총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하여 이
런 무덤 양식을 백제식 적석총(돌무지무덤)이라 부른다.

1974년 발굴조사 때는 윗쪽 3단에서 동서 4.6m, 남북 4.8m 크기의 돌방으로 여겨지는 부분과
너비 2m 정도의 널길의 윤곽이 확인되었으며, 1984년 조사 때는 진흙을 다져 쌓은 흙무지무덤
에 돌을 씌운 무덤임이 밝혀졌다.
시신을 묻은 흔적은 흙을 다져 쌓은 지점 3곳에서 각각 발견이 되었으며, 이미 내부가 싹 털
린 상태라 부장품은 거의 나오지 않았고 돌무지 속에서 벽돌과 기와, 토기 등의 조각만 일부
수습이 되었다.
4~5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제3호분이 고이왕이나 근초고왕의 능(陵)이 맞다면 이 무
덤은 그의 왕비나 가족 무덤 정도 될 것이다. 제3호분과 달리 무덤 꼭대기는 돌 대신 풀이 돋
아난 흙으로 마무리를 지었으며, 무덤 아랫도리에는 작은 호석이 몸을 기대고 있다.


▲  옆에서 바라본 제4호분

▲  석촌동 제2호분

제4호분 남쪽에 자리한 제2호분은 제4호분과 쌍둥이꼴 모습으로 3단의 기단으로 이루어져 있
다. 동서 약 16.4m, 남북 16.5m, 둘레 65m, 높이 3.5m의 덩치를 지닌 그는 1985년 이후에 복
원되었는데, 그 이전에는 기단부의 1m 정도, 내부 흙무지는 높이 3.8m 정도가 겨우 살아남아
돌로 덮힌 낮은 봉우리 모습으로 있었고 그 주변으로 민가와 담장이 어지럽게 들어서 있었다.

제4호분처럼 겉은 돌, 속은 흙으로 된 백제식 돌무지무덤(적석총)으로 서북쪽 모서리에서 나
무관(나무널) 1기가 발견되었는데, 움을 파지 않고 널을 놓은 뒤 작은 봉분을 만들었다. 그리
고 나중에 무덤을 확장했다.
널무덤과 서남쪽 봉분 안에서는 3세기 말에 만든 것으로 여겨지는 굽다리접시와 곧은입 항아
리가 나왔을 뿐, 이미 속 빈 강정이 되버린 상태였다.


▲  서쪽에서 바라본 제2호분

▲  남쪽에서 바라본 제2호분과 제4호분, 그리고 제2롯데월드
적석총 너머로 일명 '사우론의 탑'이라 불리는 제2롯데월드가 하늘을 건드리며
아슬아슬하게 바라보인다. 이곳은 잠실 지척이라 고분공원 어디서든
저 이상한 키다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  석촌동 제2호 토광묘(움무덤) 모형

제2호분 동쪽 소나무 숲에는 제2호 토광묘의 모형이 누워있다. 이 무덤은 원래 여기서 북쪽으
로 10여m 떨어진 곳에 있으나 보존을 위해 땅속에 고이 묻고 대신 이곳에 모형을 두었다.
그는 땅을 파서 움을 만들고 관을 넣은 천하에 흔한 무덤 양식으로 평면은 장방형(長方形)이
고, 장축은 동남동에서 서남서로 두었다. 벽면은 바닥에서 위로 향해 약간 경사가 졌고, 별다
른 시설이 없는 바닥 동쪽에는 회백색에 짧은목 단지 1개가, 움 안 흙속에서는 지름 1.6cm 크
기의 민고리 금귀고리 1개가 발견되어 귀족의 무덤임을 귀뜀해 준다.

무덤의 크기는 길이 223cm, 너비 76cm, 높이 21cm로 제3호분 동쪽에서 집단 움무덤과 대형 움
무덤이 10여 기 이상 발견되었는데, 적석총 바닥보다 아래층에 자리한 것으로 보아 적석총보
다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석촌동 회화나무 - 서울시 보호수 24-7호

제2호분 서쪽에는 다소 허전해보이는 회화나무 하나가 철을 지팡이 삼아 몸을 지탱하고 있다.
그는 240년 정도 묵은 것으로 높이 12m, 둘레 2.3m인데, 2015년 이후, 회화나무와 제2호분 주
변에서 석촌동고분군의 숨겨진 이야기를 캐내려는 굳은 집념으로 나무 주변에 펜스를 두르고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다.
다른 나무들은 거의 생생한 모습이나 이 나무는 벌써부터 노화가 되었는지 잎사귀는 커녕 가
지 조차 부실해 머리숯 일부만 남은 애처로운 신세가 되었다. 몸도 썩 좋아보이지 않아 저러
다 골로 가는 건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


▲  제3호 움무덤(토광묘)

제1호분 북쪽에는 제3호 움무덤의 모형이 있다. 표토(表土) 밑 70cm에서 발견된 것으로 실물
은 보존을 위해 모형에서 50cm 땅속에 방수처리를 하여 묻었다.
무덤의 길이는 208cm, 너비 58cm, 깊이 26cm로 네 모서리가 둥그스름한 네모난 모습이다. 장
축은 동북-서남 방향으로 제2호 움무덤처럼 특별한 시설은 없었으며, 북서쪽 모서리에 회청색
짧은목단지 1개가 발견되었다.


▲  내원외방형(內圓外方形) 적석총(A호 적석총)의 흔적

내원외방형 적석총이란 바깥을 네모나게 만들고 그 속살을 동그랗게 다진 돌무덤을 일컫는다.
우뚝 솟은 적석총의 위엄은 온데간데 없고 그 밑도리 흔적만 아련하게 남아있는데, 어느 세월
이 잡아갔는지 무덤은 녹아 없어지고 그 자리에 민가와 경작지가 가득 들어앉은 것을 발굴조
사로 모두 치워버리고 무덤 기단부의 서남쪽 모서리와 서쪽, 북쪽의 기단 일부가 확인되었다.
하여 나온 것을 바탕으로 정리를 해보니 기단 안쪽은 지름 11.4m의 흙무지무덤이 있고, 기단
겉면은 한 변이 16m인 네모난 모습을 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신라 무덤에서 볼 수 있는 호석처럼 안쪽에 둥근 원 모양으로 열을 지은 꺤돌이 봉분 자락에
놓여 있었고, 그 바깥에 자갈돌과 네모 모양으로 열을 지어 놓여진 테두리의 깬돌은 제1,2,3
,4호분처럼 계단식 적석총의 흔적으로 여겨진다.

1987년 발굴조사 때 돌무지 움무덤 2기와 돌널무덤(석관묘) 3기가 안쪽 바닥면에서 나왔는데,
돌무지무덤이 파괴된 이후에 조성된 무덤일 가능성이 있어 내원외방형 돌무지무덤과의 관련성
은 분명치가 않다. 또한 무덤 안과 밖에서 각종 토기와 손칼, 쇠못, 꺾쇠 등의 철기가 나왔으
나 이곳이 일종의 교란층(攪亂層)이라 백제 유물인지도 정확하지가 않다.

무덤의 모습이 확실치가 않아서 적석총의 내부를 적나라하게 보여줄 겸, 복원하지 않고 이런
모습으로 깔아두었다.


▲  남쪽에서 바라본 내원외방형 적석총(A호 적석총)의 흔적

▲  석촌동 제1호분

내원외방형 적석총 서쪽에는 제1호분의 흔적이 있다. 제1호분은 사람들이 집을 만들고자 부셔
버린 탓에 정확한 구조를 확인하기가 어렵게 되었는데, 무덤을 깔고 앉던 집들을 밀어버리고
발굴을 벌여 무덤의 밑도리를 확인했다. 그 결과 무덤 2개가 남북으로 이어진 쌍분(雙墳)임이
밝혀졌으며, 북쪽 무덤은 3세기 중반, 남쪽 무덤은 3세기 말~4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
되고 있다.
북쪽 무덤은 동서 9.9m, 남북 8.9m, 남쪽 것은 동서 9.6m, 남북 9.8m 규모로 이들은 3.7m 정
도의 거리를 두고 있으며, 그 사이를 진흙으로 메우고 서쪽으로 길게 돌을 덧쌓아 무덤을 연
결했다. 또한 길이 20~30cm 크기의 깬돌로 네 벽을 쌓았으며, 바닥에는 10cm 안팎의 돌조각과
자갈을 깐 석곽(石槨) 4개가 있었다.
가장 큰 석곽은 길이 2.5m, 너비 2.3m 크기로 한가운데에 동서 방향으로 놓았고, 작은 석곽은
길이 1.2m, 너비 1m 크기로 3개를 북쪽 벽에 잇대어 나란히 놓았다. 석곽의 크기로 보아서 큰
것은 무덤 주인(물론 왕족이겠지), 작은 것은 그 가족으로 여겨진다.

여기서는 백제 토기와 기와, 금귀걸이 등이 조금 나왔으며, 고구려의 환인현(桓因縣) 고력묘
자촌 제15호분과 평안북도 송암리 제45호분과 비슷해 고구려 묘제를 따랐음을 보여준다. 현재
는 무덤의 밑도리만 밝혀진 상태라 일단 밑부분만 정비하였다.


▲  제1호분의 속살 (석곽이 발견된 밑도리 부분)

▲  석촌동의 유일한 흙무덤인 제5호분

석촌동고분군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한 제5호분은 이곳 유일의 흙무덤으로 즙석(葺石) 봉토분
이다. 이름도 참 어려운 즙석봉토분이란 내부 구조 위에 흙을 다져 쌓고 그 위에 강돌과 막돌
을 섞어서 깐 다음에 다시 그 위를 흙으로 엷게 덮은 무덤을 말한다.

이 무덤은 둘레 17m, 높이 3m의 동그란 봉토분으로 5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왕족이
나 귀족의 묘로 여겨지는데, 파란만장한 세월을 겪은 적석총들과 달리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내부 조사를 딱히 벌이지 않고 봉분의 흙을 쌓은 형태만 확인했다. 봉분은 즙석식으로 봉긋하
게 닦았으며, 개발의 칼질로 사라진 가락동고분군 제1,2호분도 같은 즙석식으로 내부는 하나
의 봉분 안에 여러 개의 나무널과 독널이 들어있어 그와 비슷한 구조로 여겨진다.

백제의 즙석봉토분은 토착 세력의 무덤 양식에 즙석이라는 고구려식 요소가 가미된 설과 봉분
을 만들고 지상에 시신 안치 공간을 둔 마한(馬韓)의 무덤 양식이란 견해가 있으나 확실한 것
은 아직 모른다. (즉 고구려+백제 양식 혹은 백제+마한 양식)


▲  석촌동 돌마리 표석

석촌동고분공원 동문에는 '전통마을 돌마리' 표석이 이곳의 옛 추억을 상기시키고 있다. 돌마
리는 석촌동의 옛 이름으로 적석총에서 유래되었으며, 마리는 마을을 뜻한다.
돌마리는 이곳에 뿌리를 내린 마을이었으나 송파 개발에 휩쓸려 사라지고 지금은 서울의 일부
가 되어 그 이름만 남아있다. 지금은 도시 속에 파묻혀 옛 마을의 모습은 죄다 증발해버렸지
만 전통마을을 칭하는 것을 보면 돌마리 시절의 사람들이 적지않게 살고 있는 모양이다.
석촌동은 1963년 광주군 중대면(中垈面)에서 서울로 편입되어 강남구가 되었으며, 1988년 송
파구로 분리되어 송파구의 일원이 되었다.


 

 

♠  석촌동고분군과 쌍벽을 이루던 옛 한성백제의 무덤들
방이동고분군(芳荑洞古墳群) - 사적 270호

석촌동고분군만 보기에는 너무 허전하여 그날의 여로(旅路)를 한층 살찌울 겸, 두 다리를 다
시 재촉하여 방이동고분군으로 이동했다. 둘 사이의 거리는 약 1.7km로 쉬엄쉬엄 걸으면 20~
25분 정도면 닿는다. (나는 걸어갔음)
석촌동고분군과 올림픽공원 중간에 자리잡은 방이동고분군은 석촌동과 더불어 서울에 딱 2개
밖에 없는 백제 고분군이다. 송파와 광진구 지역에 무려 수백 기나 존재하던 백제의 무덤들이
개발의 칼질에 모두 목이 떨어지고 몸이 부셔져 겨우 석촌동과 방이동의 10여 기만 남은 것이
참으로 통탄스러울 따름인데, 조선총독부가 1917년에 송파 지역 고적조사사업을 벌이면서 방
이동고분군이 발견되었다.
허나 간단한 조사 이후 다시 버려졌으며, 철저하게 파괴되어 그 존재가 세월 속에 푹 묻히고
만다. 그러다가 1973년 김모씨의 집 뒷산 언덕이 무너지면서 숨겨진 석실고분(제1호분)이 속
살을 드러내니 그것이 방이동고분군의 20세기 후반 첫 세상 데뷔였다.

1976년까지 발굴 조사를 벌인 결과 8기의 고분이 확인이 되었으며, 한성백제 후반인 4~5세기
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무덤의 주인은 당연히 백제 왕족과 귀족으로 화려했을 부장
품은 옛날에 싹 털려 겨우 유약이 입혀진 회청색경질 굽다리접시와 굽다리접시 뚜껑, 약간의
토기와 철제류만 건졌을 뿐이다. 특히 제6호분에서 나온 회청색경질 굽다리접시는 신라 토기
와 비슷해 6~7세기 이후에 닦여진 신라 고분으로 보기도 한다.
허나 제1,4,6호분은 백제 스타일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고분)이라 백제 무덤으로 여기고
있으며 웅진백제 시절에 조성된 공주 송산리(宋山里) 제5호분과 구조와 형식이 비슷해 방이동
고분 양식이 공주로 이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제5호분은 구덩식 돌덧널무덤으로 확인되었으며, 제3호분 같은 경우 백제가 일부 조성하고 이
후에 신라가 재활용했다는 견해도 있다. 즉 백제 귀족들의 묏자리로 쓰였다가 6세기 이후 서
울 지역이 신라 치하가 되면서 신라 조정에서 보낸 귀족과 관리의 무덤들이 들어선 것이다. (
신라로 넘어간 백제 관리와 귀족들의 무덤, 또는 그 후손들의 무덤으로 보기도 함) 그래서 백
제와 신라의 무덤이 공존하게 된 것이다.

방이동고분군은 석촌동고분군처럼 그 가치가 인정되어 국가 사적의 지위(1979년 12월에 지정
됨)를 부여 받았다. 그래서 개발의 칼질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누렸으며 서울시에서 1983년에
이들을 복원하고 고분공원으로 닦아 속세에 내놓았다.
현재 정비된 고분은 8기로 서쪽 언덕에 제1,2,3,6호분이, 동쪽 언덕에 제7,8,9,10호분 4기가
자리한다. 조사를 받은 무덤은 제1,4,5,6호분이며, 나머지는 아직 손을 대지 않았고, 제4,5호
분은 복원되지 못했다. 2011년에 석실을 비롯한 고분 상당수를 보수했으며, 2016년에 제3호분
봉분이 흘러내리면서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이를 복구할 겸, 재조사에 들어가 그 주변을 통제했
다.
이곳은 시내 한복판에 감싸여 있으며, 언덕에 자리해 있어 인근 시가지보다 해발이 조금 높다.
고분 주변에는 소나무와 단풍나무 등 온갖 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산책로도 잘 닦아놓아 산책
의 운치를 더했으며, 석촌동과 달리 개방시간에 제한을 두어 6시부터 20시까지만 빗장을 열어
둔다. (12~2월은 9~18시) 들어가는 문은 오금로에 접한 서쪽에 딱 하나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 125 (오금로 219 ☎ 02-410-3661)


▲  방이동 제1,2,3호분

방이동고분군은 크게 2개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정문을 기준으로 왼쪽(서쪽) 언덕에는 제1,
2,3,6호분, 오른쪽(동쪽) 언덕에는 제7,8,9,10호분이 자리해 있으며, 이들은 서로 2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그 사이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어 자연의 향기까지 아낌없이 보탠다.


▲  늦가을 단풍이 곱게 까페트를 이룬 제1호분 앞 산책로

▲  죽음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드러낸 단풍잎들 (제1호분 앞)

벌써부터 시작된 겨울 제국(帝國)의 압박에 땅으로 떨어진 단풍들은 마지막 아름다움을 불사
르며 서서히 저물어가는 늦가을의 발목을 붙잡으려 든다. 허나 아무리 그들이 안간힘을 써본
들 약기운이 다 된 늦가을은 결코 겨울을 이기지 못한다. 어디까지나 단풍들의 부질없는 몸부
림일 뿐, 그들은 '낙엽'이란 우울한 이름이 되어 삶을 마감해야 된다.
단풍도 그렇지만 인간 역시 늦가을의 저물어감을 아쉬워하는 것은 마찬가지라 땅바닥을 장식
하는 단풍잎을 바라보며 '올해도 이제 다 저물었구나. 곧 1살이 강제로 누적되겠네' 우울감
에 적지 않은 고통을 받는다.


▲  방이동 제1호분

제1호분은 방이동고분군의 대표격인 존재로 무덤 안으로 인도하는 문이 무덤 서쪽에 달려있다.
이 무덤은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 굴식돌방무덤)으로 시신과 부장품을 둔 현실(玄室, 널
방)과 바깥과 현실을 이어주는 연도(널길)를 갖추고 있다. 깬돌로 널방을 다졌으며, 석실 벽
이 위로 올라갈수록 모두 안쪽으로 기울어지게끔 다져 폭을 좁히고 맨 위에 큰 돌을 올려 천
장을 만들었다. 이런 식의 천장을 어려운 말로 '궁륭형'이라고 부른다.

무덤의 높이는 2.2m, 둘레 12m이며, 돌로 다진 현실은 길이 3.1m, 너비 2.5m, 높이는 2.15m로
중앙에는 시신을 안치했던 시상대(屍床臺)가 있다. 연도는 현실 남쪽 벽 서쪽에 닦여져 있는
데, 길이는 약 2.39m, 너비 1.06m, 높이는 1.1m이다. 그리고 널길 입구에는 1983년에 화강암
으로 문을 달아 흙과 돌이 무너지지 않게 했으며, 굳게 닫힌 문 창살을 통해 무덤 속살을 구
경할 수 있다. 방이동 식구 중 유일하게 속살(널길, 널방)을 개방하고 있으니 이곳에 왔다면
꼭 살펴보도록 하자.
무덤은 오래전에 도굴되어 나온 유물은 없으며, 인근 주민들에 의해 토기 3점이 수습되었다.


▲  돌로 차곡차곡 닦여진 제1호분의 속살(널길과 널방)
바로 앞에 보이는 널길(현도)은 바깥과 무덤 석실을 이어주는 짧은 통로로
저 통로의 끝에 무덤 주인과 부장품이 깃든 널방(현실)이 있다. 이곳에
가득했을 부질없는 부장품들은 나쁜 손에 의해 모두 털리고 이제는
먼지만 가득하다. (무덤 내부는 접근 금지)

▲  제1호분의 옆 모습

▲  나지막하게 누워있는 제2호분

▲  피가 묻힌 듯 붉은 단풍잎을 군데군데 걸친 제3호분

제1호분 동쪽에는 제2호분과 제3호분이 누워있다. 제2호분은 지름 13.4m, 높이 2.7m이며, 제
3호분은 지름 13.12m, 높이 2.9m 규모로 봉분 서북쪽 밑도리에 얇게 호석이 둘러져 있다. 이
들은 조사를 받지 않고 겉모습만 복원을 했는데, 2016년 봄에 제3호분 봉분 흙이 흘러내려와
봉분이 오목하게 변형된 사고가 발생했다.
송파구는 한성백제박물관에 점검을 의뢰했고, 박물관 측은 무덤 안쪽의 무너짐 방지와 보존
정비 대책을 세우고자 정밀발굴조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무덤을 정비 할 겸,
아직 열지 못한 제3호분의 뚜껑을 열고 한참 조사를 벌이고 있다. 이번에는 부디 굵직한 것들
이 많이 나와서 이곳에 숨겨진 이야기 보따리가 흔쾌히 풀렸으면 좋겠다.


▲  제6호분

제6호분은 1976년에 조사를 받았다. 무덤 내부는 제1호분과 비슷한 횡혈식석실(굴식돌방) 구
조로 석실 중간에 벽을 쌓아 서쪽 주실(主室)과 동쪽 부곽(副槨)으로 나누었고 남쪽 벽 중앙
에 연도(널길)가 닦였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무덤의 지름은 10.6m, 높이는 2.1m이며, 여기서는 회청색경질 굽다리접시가 나왔는데, 그 굽
다리접시가 백제가 아닌 전형적인 신라 토기의 형식이라 6세기 이후에 조성된 신라 고분으로
보기도 한다. 


▲  늦가을이 너울치는 고분공원 중앙 동쪽 산책로 (남쪽 방향)

▲  고분군 중앙 동쪽 산책로 (북쪽 방향)
늦가을이 이곳에 마지막 작품을 빚으며 슬슬 올해를 정리한다. 이번에 그가
떠나면 내년 10월에나 기약을 해야 된다.

▲  누런 낙엽들이 귀를 접고 누워있는 현장
(고분공원 중간 부분)

▲  방이동고분군 남쪽 식구들 (제7,8,9,10호분)

방이동고분군 동쪽 언덕에는 제7,8,9,10호분이 조용히 누워있다. 푸른 소나무가 이들을 빙 둘
러싸며 그윽한 솔내음을 베풀고 있어 콧속에 낀 속세의 때를 긴장 타게 만드는데 이들 무덤은
1983년에 복원된 것으로 겉모습과 덩치는 서쪽 무덤들과 비슷하나 딱히 특이사항은 없다. 무
덤의 속살은 이미 도굴되어 유물도 없고, 방이동고분군 자료에도 북쪽 무덤만(제1,2,3,6호분)
만 부각시킬 뿐, 남쪽 무덤은 소외되어 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제7,8,9,10호분

▲  제8호분

▲  제9호분


▲  돌이 입혀진 고분군 남쪽 산책로

▲  솔내음이 가득한 고분군 중앙 서쪽 산책로

겨울 제국(帝國)의 등쌀에 점차 빛을 잃어가는 늦가을의 끝 무렵을 즐기며 1시간 정도 방이동
고분군을 둘러보았다. 이미 여러 번 인연을 지은 곳이나 올 때마다 마치 새로운 곳처럼 늘 새
롭다. 이렇게 하여 백제의 향기를 쫓을 송파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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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달달한 숲길, 인왕산자락길 (청운문학도서관, 청운공원에서 수성동계곡까지)

 


' 서울 도심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 인왕산자락길 '

▲  인왕산자락길 (은행나무숲길)

▲  인왕산자락길 가온다리

▲  이빨바위

 


 

늦가을이 존재감을 진하게 드러내며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물들이던 11월의 어느 평화
로운 날, 인왕산 품에 숨겨진 인왕산자락길(숲길탐방로)을 찾았다.

인왕산자락길은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동쪽 자락에 닦인
둘레길로 2개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제1코스(2.7km)는 인왕산길을 졸졸 따라가는 탐
방로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인왕산길을 따라 사직단(사직공원)까지 이어진다.
경사가 거의 느긋하여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지 마음 편히 거닐 수 있으며, 시내와
도 무척이나 가까워 언제든 도시로의 탈출이 가능하다. 다만 인왕산길이 차량들 왕래가
빈번하다보니 비록 작은 소음이지만 종종 적막을 깨뜨린다.

본글의 주인공인 제2코스는 숲길탐방로(3.2km)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산길을 따라 이빨바
위, 가온다리, 수성동계곡 윗쪽을 거쳐 택견수련터(황학정 북쪽)까지 이어진다. 인왕산
길과 서촌(西村, 웃대) 주택가 사이에 자리한 길로 제1코스와 달리 차량의 눈치와 소음
걱정에서 벗어나 아늑하고 달달한 산길의 멋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오르락 내리락 굴곡
이 다소 있어서 약간은 힘들 수 있다. 하지만 다리만 멀쩡하면 삼척동자도 능히 완주할
수 있으니 걱정 따위는 인왕산 산바람에 날려보내기 바란다.

제2코스는 인왕산길(제1코스)과 서로 만날 듯 가깝게 거리를 두고, 경쟁을 하듯 펼쳐져
있다. (현실은 청운공원과 택견수련터에서만 만남) 아주 편한 길을 원한다면 제1코스를
, 차량의 눈치 없이 아늑한 산길을 꿈꾼다면 제2코스(숲길탐방로)를 이용하자. 특히 제
2코스에는 숨겨진 명소와 계곡, 약수터가 많고 풍경도 고우며, 서울 도심이 늘 옆에 파
노라마처럼 따라다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번 나들이는 제2코스를 이용하여 윤동주문학관에서 사직단(社稷壇, 사직공원)까지 이
동했다. 늦가을이 겨울 제국의 압박으로 생각보다 명이 짧아서 그가 지기 전에 그의 가
랭이라도 붙잡을 겸 서둘러서 찾았는데, 아직은 늦가을 풍경이 여전해 내 정처 없는 마
음과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오감(五感)을 크게 정화시켜 주었다. 역시 사람은 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이후 제2코스는 인왕산자락길이라 표시하며, 제1코스는 인왕산길로 표시함)


▲  윤동주문학관 앞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바로 앞에 붉은 뒷통수를 보인 주택들은 청운벽산빌리지이다.


 

♠  우리나라 최초의 한옥 공공도서관, 인왕산 동쪽 자락에 자리해
문학의 향기를 흩날리는 청운문학도서관 (청운공원)

▲  윗쪽에서 바라본 청운문학도서관

'한옥으로 지어진 도서관이 있다? 없다?'란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 될까? 2014년 11월 중순
까지는 '없다'로 해야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있다'로 바뀌었으니 그 정답을
바꾼 첫 현장이 바로 청운공원에 자리한 청운문학도서관이다.

윤동주문학관에서 청운공원, 인왕산자락길로 이어지는 2차선 길(자하문로35길)을 따라 3~4분
정도 가면 왼쪽(남쪽) 밑에 근래 지어진 산뜻한 한옥들이 모습을 비춘다. 처음에는 전통체험
공간으로 여겼으나 확인해보니 종로구에서 닦은 청운문학도서관이다. 콘크리트 건물이 진리를
이루고 있는 현실에서 한옥으로 도서관을 지을 생각을 하다니 그 생각이 참 기발하다. 그 발
상 덕분에 이 땅 최초의 한옥 공공도서관이란 근사하면서도 변치 않을 타이틀을 지니게 되었
다.

종로구가 '책읽는 종로만들기' 프로젝트를 야심차게 추진하면서 짜투리 공간을 활용하여 조그
만 공공도서관(일반 도서관 11곳, 문학 또는 예술로 특화된 도서관 7곳) 18곳을 지었는데 청
운문학도서관은 문학 특화 도서관으로 2014년 11월 19일에 문을 열었다.
종로구의 16번째 공공도서관으로 문학 특화 도서관이 된 것은 바로 옆에 윤동주문학관과 윤동
주시인의 언덕 등 현대 문학의 성지(聖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히 문학 특화의 목적
을 띄게 된 것이다. 그래서 종종 문학인과 명성이 있는 지식인을 초청해 문학 관련 프로그램
이나 강좌를 운영하고 있으며, 윤동주문학관과 한 덩어리를 이루며 도심 속 문향(文香)의 성
지로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이곳은 인왕산 동쪽 자락이자 청운공원 한복판으로 주변이 온통 싱그러운 자연에 감싸여 풍광
이 곱다. 그러다보니 정녕 이곳이 서울 도심 한복판이 맞는지 고개가 절로 갸우뚱거린다. 마
치 머나먼 산골로 순간이동을 당한 즐거운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변 자연과 흔쾌히 어우러진 모습과 한옥의 미를 잘 드러내고 있어 '서울의 아름다운
건물 찾기 공모전'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건물에 쓰인 기와는 돈의문(敦義門) 뉴타운 개발로
철거된 한옥 기와 중, 괜찮은 것 3,000여 장을 추려내 재활용했다.

도서관의 규모는 734.35㎡로 본관(지하 1층, 지상 1층)과 조그만 별당으로 이루어진 조촐한
모습이며, 열람석 수는 115석, 소장 서적은 21,985권(2018년 1월 1일 기준)이다. 도서관 이용
방법과 책 대출 방법 등은 다른 도서관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관련 홈페이지 참조), 10시부터
22시까지 운영을 한다. (일요일은 19시까지, 매주 월요일은 쉼)

굳이 책을 빌리거나 독서를 하지 않더라도 나들이로 잠시 들릴만하다. 주변에 청운공원과 윤
동주문학관, 윤동주시인의 언덕, 인왕산, 부암동, 창의문, 북악산, 서촌 등의 굵직한 명소가
많고 한옥으로 지어진 매력 때문에 북촌(北村)의 필수 관광지로 꼽히는 정독도서관처럼 자연
스럽게 명소처럼 되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4-20 (자하문로36길 40, ☎ 070-4680-4032~3)
* 청운문학도서관 홈페이지는 아래 '남쪽에서 도서관 본관' 사진을 클릭한다.

▲  남쪽에서 바라본 도서관 본관
본관 지하층 앞쪽에 주차장이 있다.

▲  운치를 더해주는 도서관 돌담


▲  청운문학도서관 본관

도서관 본관은 'ㄱ'자 모습의 팔작지붕 한옥이다. 겉으로 보면 1층 같지만 그 밑에 지하층을
품고 있어서 지상 1층, 지하 1층 규모를 이루고 있다. 지하는 서고(書庫), 지상은 열람실 및
교육 공간으로 쓰이며, 교육이나 강좌 프로그램이 없을 때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책을 읽으며
문향을 즐기면 된다.


▲  온갖 화초와 동물이 새겨진 도서관 담장의 위엄
이보다 우아한 도서관 담장이 또 있을까? 전통식 고급 담장에 충실하고자
다양한 화초와 동물 문양을 넉넉히 담아 넣었다.

▲  메마른 연못에 다리를 담군 1칸짜리 별당(別堂)

본관 서쪽에는 1칸짜리 별당이 자리해 있다. 별당 옆에는 연못이 있으나 내가 갔을 당시에는
물이 없는 휴업 상태였다. 만약 연못에 물이 차있고, 연꽃까지 두둥실 떠있었다면 그 운치가
몸살나게 죽여줬을 것이다.
별당은 늘 열린 공간으로 누구든 들어가서 책을 보면 된다. 가끔 명사들을 초청해 여기서 강
연이 열리기도 한다. 허나 이곳은 엄연한 도서관의 일원이기 때문에 대놓고 낮잠을 자거나 음
식을 섭취하는 행위 등은 하지 말자.


▲  탁자만 외로이 놓여진 별당 내부
여기서 책을 읽는다면 내용이 무엇이든 머릿속으로 술술 잘 들어올 것 같다.
그만큼 독서의 명당 자리이다.

▲  청운문학도서관 서쪽 출입구 (별당 옆에서 바라본 모습)

▲  붉게 타오른 단풍이 마중을 하는 청운문학도서관 서쪽 출입구
(바깥에서 바라본 모습)

▲  붉은 단풍이 진하게 아른거리는 청운공원 숲길 (인왕산자락길)
늦가을 단풍이 소리 없이 내려앉으면서 내 마음도 덩달아 알록달록 물들어간다.
(청운문학도서관 서남쪽, 인왕산자락길)

▲  늦가을의 붉은 수채화 속을 거닐다 (청운공원 인왕산자락길)

청운문학도서관 서쪽 출입구를 나오면 몸을 푸는 운동시설과 분수대가 있는 청운공원 서쪽 구
역이다. 여기서 오른쪽 산길을 오르면 인왕산자락길이 펼쳐진다. (인왕산길과도 연결됨)

청운공원은 종로구의 지붕인 인왕산 동쪽 자락에 자리를 닦은 공원으로 2007년에 인왕산 잡석
들을 모아서 만든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돌아파트)'와 2009년에 공원 동쪽을 떼서 만든 윤
동주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등이 있다. 2014년에는 청운문학도서관까지 지어지면서 공원
을 더욱 알차게 수식해준다.
도심보다 한층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탓에 서울 도심과 남산, 부암동, 홍지동 일대가 훤
히 바라보여 조망도 일품이며,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경계에 자리해 있어 바로 밑에 펼쳐
진 도심보다 청정한 공기를 자랑한다. 또한 서울 장안의 주요 해맞이 명소로 매년 1월 1일 아
침에 해맞이 축제가 열리며, 나무와 각종 꽃이 가득해 봄에는 벚꽃과 진달래, 개나리가 봄의
향연을 열고, 가을에는 오색영롱한 단풍잎이 가을의 향연을 베푼다.

청운공원 서쪽 구역에는 꿈의 분수라 불리는 바닥분수와 넓은 운동장이 있다. 꿈의 분수는 매
일 2회 조촐하게 분수쇼를 선보이는데, 그리 현란한 편은 아니며, 그냥 주변을 시원하게 해주
는 정도이다. 가동 기간은 4월부터 10월까지로 1차는 11시에서 13시까지, 2차는 15시부터 16
시까지이며, 겨울에는 무조건 쉰다. (가동 기간과 시간은 언제든 변경될 수 있음)
분수쇼는 전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분수와 어울려 물놀이를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니
그냥 눈으로만 보기 바란다.

* 청운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7-4 일대


▲  꿈의 분수가 있는 청운공원 서쪽 구역, 그 너머로 서울 도심이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  청운공원 서쪽 구역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의 위엄


 

♠  인왕산자락길 이빨바위에서 해맞이동산까지

▲  인왕산 이빨바위
그저 단단해 보이는 뚜껑돌 위에도 자연은 피어나고 있었다.
 

청운공원에서 인왕산자락길로 들어서 1굽이 지나면 이빨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검은 이빨을 드
러내며 발길을 붙잡는다.
바닥에 누운 커다란 암석과 뚜껑돌처럼 놓인 암석 중간에 마치 동물의 이처럼 생긴 부분이 있
어 눈길을 끄는데 그로 인해 이빨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자락길을 닦으면서 발굴
된 것으로 나도 그의 존재는 처음인데 사람의 틀니나 해골의 입처럼 보이기도 하며, 배가 고
파서인지 모르지만 햄버거처럼 보이기도 한다. 제 눈이 안경이라고 사람마다 눈에 비치는 모
습이 다 같을 수는 없다.

이처럼 잘생기거나 요상하게 생긴 바위에는 꼭 믿거나말거나 전설이 있기 마련이나 눈썰미가
좋은 옛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는지 그에게 깃든 전설은 딱히 없다. 다만 자락길을
닦으면서 초반에 종로구청에서 인왕산 치마바위와 인연이 깊은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와 중
종(中宗)의 이야기를 어거지로 지어서 당당하게 안내문까지 부착했는데, 그 내용이 실로 개판
에 똥판 수준이라 말들이 많자 그 안내문을 떼어버렸다. 대신 '건강한 치아는 오복 중의 하나
! 이빨바위를 보며 건강과 평안을 빌어보십시오'
란 조그만 돌 표석을 달았다. 차라리 엉터리
전설보다는 돌 표석 안내문이 훨씬 깊이가 있어 보인다.


▲  이빨바위 남쪽 쉼터 (운동시설이 여럿 있음)

▲  소나무 숲 사이로 바라보이는 서촌(웃대)과 서울 도심
자락길을 한 굽이 넘을 때마다 서울 도심은 조금씩 모습을 달리한다.

▲  조그만 계곡(청풍계로 여겨짐)을 건너는 나무데크 탐방로
(청운마루와 이빨바위 사이)

인왕산은 단단하게 생긴 바위 산이라 계곡과 샘터가 거의 없을 듯 싶지만 겉보기와 달리 많은
계곡과 샘터를 지닌 부드러운 산이다. 다만 서울 도심에 자리한 탓에 개발의 칼질이 계곡을
마구 끊어버리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거의 없을 뿐이다.

인왕산 품에는 2012년에 복원된 수성동계곡을 비롯해 백운동(白雲洞), 청풍계(淸風溪), 청계
동천(淸溪洞天), 옥류동(玉流洞) 등 서울 장안의 경승지로 명성을 날렸던 계곡들이 많다. 허
나 수성동(水聲洞)을 제외하면 다들 조그만 편이며, 수성동 상류와 홍제동 환희사계곡이 그나
마 제대로 남아있다. 그 외 계곡들은 주택가 등 시가지 확장으로 모조리 강제 생매장을 당해
산 속 상류에만 여리게 물줄기가 남아있을 뿐이다. 인왕산자락길은 시내에서 모두 실종된 듯
보이는 인왕산 서촌(웃대) 방면 계곡들의 상류를 거의 만나볼 수 있는 소중한 현장으로 인왕
산을 달리 보는 계기를 선사해준다.

청운마루 직전에 이르면 넓게 닦인 나무데크 공간이 나온다. 그 밑에도 조그만 계곡이 가늘게
흐르고 있는데, 위치를 봐서는 청풍계(淸風溪) 상류로 짐작된다.
조선 중기 인물인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청풍계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주변 풍경이 수
려해 청풍각(淸風閣)이란 별도의 건물을 지었다. 바로 그 건물로 인해 이곳 계곡이 청풍계란
간판을 달게 되었고, 청풍계와 인근 백운동의 이름을 따서 청운동이 되었다. <옛날에는 장동(
壯洞)이라 불림>

이곳 역시 주택가에 이르러서는 강제 생매장을 당해 청계천으로 흘러가며, 계곡 왕년의 모습
은 겸재 정선
(謙齋 鄭敾)이 그린 장동8경첩에 잘 남아있다.


▲  인왕산자락길의 구름다리인 가온다리

청풍계 추정 계곡을 건너 고개를 넘으면 '청운마루'라 불리는 나무로 다진 조망대가 있고, 바
로 조망대 정면(남쪽)에 인왕산자락길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가온다리가 펼쳐져 있다.
그는 일종의 흔들다리로 지방의 산이나 호수, 섬에서나 볼 수 있는 관광용 흔들다리가 이렇게
서울 도심에 버젓히 나타나 내 앞에 아른거리니 '서울에서 이제 흔들다리나 구름다리를 다 보
는구나~! 내가 너무 오래살았나?' 그저 충격과 놀라움 그 자체였다.
흔들다리의 성지인 파주 감악산(紺岳山), 원주 소금산, 청양 천장호 등 스케일이 큰 흔들다리
만은 못해도 서울에 거의 흔치 않은 흔들 구름다리로 흔들다리의 이름값은 하고 있으며, 이곳
이 깊은 협곡을 이루고 있어 눈요기도 시킬 겸, 이렇게 높이 구름다리를 닦은 것이다.

처음에는 다리 이름이 딱히 없었으나 언제부터인가 '가온다리'란 간판을 달게 되었는데, 사람
의 중량과 다리를 흥분시키는 정도에 따라 흔들리는 강도가 조금씩 다르다. 가벼운 사람이 건
너면 거의 미동 정도로 흔들리고, 무게가 좀 있거나 다리를 막 건드리면 조금은 출렁거려 사
람에 따라 염통이 쫄깃해지는 짜릿함도 느낄 수 있다.


▲  북쪽에서 바라본 가온다리

다리 저 밑에는 계곡이 흐르고 있는데, 위치를 봐서는 옥류동(玉流洞)계곡으로 여겨진다. 옥
류동에는 청휘각(晴暉閣)이란 유명한 정자가 있었는데, '청휘'란 이름은 '비가 개인 뒤에 맑
은 햇살이 비추는 누각'이란 상큼한 뜻으로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집 후원에 지었다.
이후 옥류동의 대표 명소로 이름을 날렸고,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8경첩에 그 존재가 남겨져
있다.
그토록 아름답던 청휘각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흔적 조차 더듬기 어렵게 되었고, 옥류동
도 왕년의 위엄을 잃은 채, 인왕산 숲속에서나 겨우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
고보면 인왕산은 20세기를 거치면서 인간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상실 당했다. 게다가 서울 도
심에 자리해 있으니 그 희생의 정도는 매우 컸다.


▲  남쪽에서 바라본 가온다리

▲  가온다리 남쪽에서 바라본 청운동(淸雲洞) 지역과 북악산(백악산)
그들 너머로 북한산(삼각산) 남쪽 줄기가 살짝 모습을 비춘다.

▲  남쪽 밑 계단에서 바라본 가온다리

▲  청와대를 꿈꾸는 청와마루

가온다리를 건너 고개 1굽이를 넘으면 청와마루가 마중한다. 이곳은 청와대가 정면에 보이는
위치라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청와대와 함께 서촌(웃대)과 북악산(백악산), 서울 도
심부가 사이 좋게 시야에 들어온다.


▲  청와마루에서 바라본 서촌(웃대)과 북악산, 청와대

▲  숲 너머로 보이는 서울 도심 (청와마루 남쪽)

숲 사이로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도심이 모습을 비춘다. 인왕산자락길은 서
울을 잊게 할 정도로 싱그러운 산길이나, 번잡한 도심이 늘 옆에 머물며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는다. 마치 이곳이 시골이 아닌 서울 한복판임을 잊지 말라는 듯이...


▲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은행나무숲길

버드나무약수터와 청와마루 사이에는 은행나무가 조촐히 우거진 숲길이 있다. 비록 숲길의 거
리는 얼마 되지 않으나 은행잎이 황금 비단처럼 깔려 있으니 대자연 형님의 초청을 받아 잔칫
집이나 연회장에 들어서는 기분이다. 그만큼 감동의 너울은 컸다. 이곳의 아름다움은 두고두
고 망막과 가슴 속에 은은히 남아 아른거렸고 그들이 그리워 이후에도 여러 번 찾아왔다.


▲  은행잎이 깔린 은행나무숲길
땅바닥에 귀를 접고 누워있는 은행잎과 온갖 단풍잎들, 우리는 그들을
우울한 이름의 두 글자 '낙엽'이라고 부른다.

▲  은행나무숲길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

▲  버드나무약수터 체육시설

은행나무 숲길에서 1굽이 지나면 버드나무약수터 체육시설이 마중을 한다. 옥인동(玉仁洞) 주
민들의 체력 단련을 위해 닦여진 것으로 늦가을 절정에 잠긴 나무들이 흩날린 누런 낙엽과 은
행잎이 바닥을 잔잔히 덮으며, 흙길의 촉감을 부드럽게 해준다.


▲  샘터의 기능을 잃은 옛 버드나무약수터

버드나무약수터는 인왕산의 유명 약수로 위엄을 떨쳤던 샘터이다. 허나 부적합 판정으로 샘터
의 기능은 끊겼고, 대신 남쪽에 새로 샘터를 파서 버드나무약수터란 간판을 달았으나 그 역시
약수의 기능을 상실해 생태연못으로 새롭게 살아가고 있다.


▲  좁은 샘터에서 유유자적 살고 있는 물고기들
저들은 무엇을 먹고 살아갈까? 좁은 샘터에 마땅한 수초도 없을텐데 말이다.

▲  늦가을도 몸을 푸는 버드나무약수터 체육시설 주변

▲  약수터의 추억을 지닌 옥인동(玉仁洞) 생물서식공간

이곳은 원래 버드나무약수터로 사진에 보이는 돌거북이 인왕산이 빚은 물을 열심히 베풀고 있
었다. 허나 세월을 너무 안좋게 타서 부적합 빨간 딱지를 받게 되었고, 끝내 딱지를 벗어나지
못하자 약수터 폐쇄 대신 여기서 나오는 물을 활용해 그 앞에 조그만 생태연못을 만들어 옥인
동 생물서식공간으로 삼았다. 그래서 조금은 어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약수터가 생태연못(생태공간)으로 거듭난 현장으로 이런 예는 천하에서 이곳이 거의 유일할
듯 싶다.


▲  버드나무약수터에서 수성동으로 이어지는 인왕산자락길

▲  해맞이동산 북쪽 인왕산자락길


 

♠  인왕산자락길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수성동까지)

▲  낙엽이 짙게 깔린 산들수목원약수터 해맞이동산

산들수목원약수터는 버드나무약수터와 수성동 사이에 자리해 있다. 약수터 이름치고는 좀 긴
편으로 단순히 이름만 봐서는 산들수목원에 깃든 약수터로 착각할 수 있으나 그런 이름의 수
목원은 여기에 없으며, 수목원 같은 시설도 전혀 없다. 어찌하여 속칭 낚시성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직까지는 수질이 양호하여 마셔도 무리는 없다.


▲  산들수목원약수터

마침 주변에 있던 아저씨들이 인왕산에서 제
일로 물맛이 좋다며 1모금 권하길래 졸고 있
는 바가지를 깨워 마셔보았다. 약수터는 수도
꼭지로 물을 통제하고 있어 물을 마시려면 꼭
지를 돌려야 된다. 그러면 물이 쏴~ 쏟아진다. 
물을 마셔보니 딱히 특별한 맛은 느껴지지 않
는 이 땅에 흔한 약수 맛이다.

약수터 주변에는 '해맞이동산' 표석이 있는데, 해맞이에 걸맞게 동쪽을 향하고 있다. 여기서
는 매년 1월 1일 해맞이행사가 열린다.


▲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서촌, 남산,
그리고 푸른 하늘

▲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수성동으로 넘어가는 인왕산자락길
늦가을 단풍이 곱게 자연산 터널을 이루며 산책의 흥을 돋군다.

▲  자연산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수성동계곡 상류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자락길을 따라 고개를 넘으면 수성동계곡 상류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는 인왕산길에서 내려오는 산길과도 만나는데, 상류는 복원된 계곡 중심부와 달리 거의 자연
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자연산 바위와 온갖 잡석이 좁은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고,
그 사이를 인왕산이 베푼 계곡물이 거의 소리도 없이 흘러간다.
이곳은 청계천의 주요 발원지이기도 하며 수질이 양호해 도룡뇽, 가재, 개구리, 버들치 등이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좁은 계곡이나 그들에게는 이만한 보금자리가 없을 것이다.

계곡 주변은 나무가 무성하여 한여름에도 더위를 잊게 하며, 산길을 따라 1분 올라가면 인왕
산길(석굴암입구)이 나오고, 반대로 2분 정도 내려가면 수성동계곡 중심부와 그를 내세운 공
원이 나온다.


▲  수성동계곡의 또다른 상류

수성동의 상류는 3개 정도 된다. 석굴암에서 오는 계곡과 그 남쪽에서 오는 계곡, 인왕천약수
터에서 오는 계곡이 서로 상류를 자처하며 수성동으로 내려온다. 수성동은 이들을 통해 인왕
산의 맑은 물을 접수받아 청계천으로 흘려보낸다.

상류 계곡들은 계곡 중심부와 달리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이 계곡 역시 바위
틈의 좁은 협곡을 타고 물이 내려온다. 수량이 많으면 폭포도 신이 나고 폭포 밑에도 많은 물
이 고여 조촐히 담(潭)을 이룰텐데, 가을 가뭄이 풍년 수준이라 간신히 물만 축이는 실정이다
. 물과 흙이 있어야 될 자리에는 잡초만 무성해 폭포의 위기감을 더해준다.


▲  협곡을 그리며 내려오는 수성동의 또 다른 상류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온 계곡


인왕산에서 제법 이름이 있는 인왕천약수터도 수성동에 물을 보태고 있었다. 이 물줄기는 거
의 90도 각도가 진 암벽 사이의 좁은 공간을 타고 내려오는데 그 풍경이 나름 절경을 이루며,
조그만 폭포 앞에는 얕은 못과 모래밭이 있어 어린이들이 흙장난을 하며 놀기에 아주 적당하
다.
모래 옆과 다리 주변에 돌로 쌓은 인공의 흔적이 조금 끼어있어 약간의 어색함을 주나 그 외
에는 예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 수성동 상류의 원초적 모습을 살피는데 도움을 준다.


▲  수성동 중심으로 내려가는 상류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온 물줄기)

▲  수성동 풍경을 더욱 돋보이게 꾸며주는 사모정

수성동계곡 한복판에는 이곳의 구수한 양념인 사모정이란 네모난 정자가 자리해 있다. 사모정
이란 네모난 정자를 뜻하는 것으로 달랑 1칸 크기의 아주 조그만 팔작지붕 건물이다.
새색시처럼 단아한 모습으로 계곡을 굽어보고 있는 그는 옛날부터 이곳을 스쳐갔던 정자는 절
대 아니며 계곡을 복원하면서 장식용으로 달아놓은 것이다.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에도 정
자는 나와있지 않고, 수성동 관련 기록에도 정자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허나 계
곡과 나무만 있는 계곡에 전통 양식의 정자(亭子)를 하나 두니 수성동의 풍경이 한층 더 살아
나는 것 같다. 그럼 여기서 수성동에 대해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  사모정 앞을 흐르는 수성동계곡 - 서울 지방기념물 31호

인왕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수성동계곡은 인왕산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서울의 주
요 경승지로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와 한경지략(韓京識 略) 등에 서
울 명승지로 절찬리에 언급된 곳이다. 이 계곡을 예로부터 수성동(水聲洞)이라 불렀는데, 이
는 계곡에 있는 '기린교' 돌다리 밑에 물소리가 청아하고 좋기로 명성이 자자하여 유래된 이
름이다.

수성동계곡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유명한 겸재 정선(鄭敾)이 그린 장동팔경첩(壯洞八景
帖), 즉 장동(壯洞) 지역에 이름난 명소 8곳을 그린 그림의 '수성동'이란 제목으로 어깨를 피
고 등장한다. 여기서 장동은 효자동(孝子洞)과 청운동 일대로 북촌과 더불어 왕족과 사대부(
士大夫)들이 앞다투어 집과 별장을 지었던 금싸라기 땅이다. 특히 이 지역에는 인왕산과 북악
산이 빚은 절경이 많은데, 그중에 장동8경이 대표적이다. (지금은 수성동과 창의문, 대은암
바위글씨 정도만 남아있음)

수성동에 가장 먼저 집을 지은 귀족은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다. 그는 계
곡 아랫쪽 기린교 부근에 비해당(匪懈堂)이란 집을 짓고 살았는데, 나중에 창의문 북쪽에 무
계정사(武溪精舍)란 별장까지 장만했다.
영조(英祖) 시절에는 겸재 정선이 인왕산을 모델로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란 그림
을 남기면서 수성동을 비롯한 장동8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수성동 그림은 계곡 복원에 아주 큰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그 그림에는 기린교를 건넌 선비 3명과 시중을 드는 동자(童子) 1명이
계곡 상류로 걸어가는 모습이 담겨져 있고, 가벼운 붓놀림으로 이끼가 끼어있는 바위와 질감
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도 비오는 날에 이곳을 찾아 '수성동 빗
속에서 폭포를 구경하다(水聲洞 雨中觀瀑)'란 시를 지어 수성동을 격하게 찬양했다.

이 계곡은 첩첩한 산주름 속이 아닌 도성(都城) 안에 자리하여 접근성 또한 아주 착했다. 그
래서 사대부 외에도 중인과 평민들도 많이 발걸음을 했는데, 인근 송석정(宋石亭)과 더불어
조선 후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위항문학(委巷文學, 중인/평민/서얼들이 주도하는 문학활동)
의 성지(聖地)로도 명성을 날렸다.


▲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 (기린교 돌다리가 그려져 있음)

이렇게 인왕산을 든든한 후광으로 두르며 장안의 경승지로 인기를 누렸던 수성동은 1960년대
이후 개발의 칼질이 정신없이 그어지면서 아작나기 시작했다.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 9동이
건방지게 수성동계곡을 깔고 앉았던 것이다. 하여 참으로 아름답고 착했던 수성동의 경관은
99% 망가지고 말았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인근 청풍계나 옥류동처럼 계곡이 거의 증발하는 꼴은 면했지만 아파트
로 인해 계곡 폭도 줄어들고 아파트 사이를 마치 버려진 하천처럼 흘러가면서 완전 천덕꾸러
기 신세가 되어버렸다. 아파트 9동 앞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해 어두컴컴한 지하를 거쳐 역시
나 생매장된 청계천으로 서글프게 흘러가야 했으며, 수성동 뿐만 아니라 도심의 많은 경승지
들이 인간의 욕심 앞에 큰 고통을 받으며 꽃잎처럼 지고 말았다.

그 이후 수성동의 이름 3자는 속인(俗人)들의 뇌리 속에서 점차 시들어가고 동네 사람들만 세
월의 저편으로 잊혀져 가던 계곡의 이름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서울 전문을 자처하는 본인
역시 수성동의 존재를 안 것은 2011년, 그 이전에는 인왕산에 이런 곳이 있는 것도 몰랐고 그
런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존재감이 밑바닥을 기었던 것이다.
 
옥인시범아파트에 깔린 채, 40년 가까이 고통스럽게 살았던 수성동계곡. 개발의 칼질에 빼앗
긴 계곡에도 과연 봄이 올 것인가? 이러다가 수성동 이름 3자가 영구히 지워지는 것은 아닐까
?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계곡을 해방시킬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수성동에게는
절망의 시절이었다.
허나 자연과 인간의 대결에서 거의 자연이 이기듯, 수성동에게도 좋은 소식이 날라왔다. 옥인
아파트가 2008년 재난안전위험시설 C급으로 지정되면서 철거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수성동
의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서울시는 아파트를 밀어버리고 계곡을 복원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우
선 2010년 10월 21일 기린교를 비롯한 수성동계곡 일대를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삼아 늦게나마
문화유산으로 대우를 해주기 시작했다.
이후 인왕산을 가리며 계곡의 목을 조르던 옥인아파트는 입주민을 싹 내보내고 2011년까지 모
두 철거되었으며, 아파트 주변을 통제하고 1년의 복원공사를 벌여 2012년 7월 마무리되었다.

계곡 복원을 위해 전문가와 사회단체, 문화재청에 자문을 구했고 정선의 수성동 그림을 적극
참조했다. 또한 옛 경관을 어느 정도 재현하고자 소나무를 중심으로 상수리나무, 참나무, 산
철쭉 등 우리 고유의 나무 18,477그루를 심었으며, (그중에 구부러진 소나무가 제일 많음) 돌
단풍과 바위취 등 다양한 화초를 심어 주변과의 조화를 꾀했다.
그리고 좁아진 계곡을 크게 넓혀서 계곡 양쪽에 전통 방식으로 돌을 쌓아 암석 지형을 최대한
회복하고자 했으며, 계곡 중간에 전통식 정자를 세워 선비와 지배층의 풍류를 조금이나마 느
끼도록 했다. 그리고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곳으로 추정되는 계곡 아랫쪽(기린교 동쪽)
에 관람공간을 조성해 정선의 눈으로 계곡을 바라볼 수 있게끔 했으며, 계곡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산책로를 닦아 인왕산과 어우러진 시민공원의 성격도 겸하게 했다.

수성동계곡 공원에는 복원된 계곡을 비롯하여 이곳의 터줏대감이자 유일한 오래된 존재인 기
린교가 있으며, 옥인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공원 북쪽에 아파트의 잔재를 일부 남겨 수성
동을 거쳐간 개발 지상주의의 그릇됨을 일깨우게 했다.
상류 부분과 사모정 주변은 계곡 출입이 그런데로 가능하나 계곡 하류와 기린교 주변은 통제
하고 있다. 게다가 계곡을 복원했다고는 하지만 완전 옛날 모습은 아니며 여전히 비슷한 자리
(옛 옥인아파트 9동 자리로 지금은 계곡 관람공간으로 바뀜)에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해 청계
천으로 흘러간다.
청계천까지 이어지는 전 구간을 모두 끄집어내어 복원하면 좋겠지만 이미 시가지가 꽉 들어차
거의 불가능하다. 계곡이 생매장되는 구역은 계곡이 상당히 밑으로 내려간 상태이고, 주변 바
위들도 날카로운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어 사고의 위험이 있다. 기린교 같은 경우는 계곡이 3m
밑에 흐르고 있으므로 조금 아찔하다.

도시 개발의 칼질에 희생된 수성동은 개발의 난도질이 무조건 능사가 아님을 보여준다. 안그
래도 사람도 허벌나게 많고, 빌딩도 많고, 공기도 탁한 서울 도심에 마음 편히 의지할 수 있
는 공간이 하나 더 생겼으니 그 가치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비슷하다 할 것이다.
비록 완전하게 복원된 것은 아니나 가급적 옛 모습을 되살리고자 했고, 복원공사를 벌이는 중
에도 여러 의견을 수렴해 어색함을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그래서 인왕산이 베푼 옥계수를 모
아 계곡을 재현했으니 어설프게 재현되어 전기와 세금만 축내는 청계천과 달리 살아있는 계곡
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79-1, 185-3외


▲  도심을 향해 흘러가는 수성동계곡 (사모정 주변)

인왕산자락길은 수성동계곡 상류를 지나간다. 이번은 어디까지나 자락길이 중심이라 그가 지
나는 부분만 살폈을 뿐, 기린교를 비롯한 나머지는 모두 통과했다. 수성동은 이미 20번을 넘
게 가본 곳이고 자락길 종점까지 아직 갈 길이 멀기 때문에 굳이 자세히 살펴볼 필요는 없었
다.


▲  수성동에서 남쪽으로 넘어가는 인왕산자락길
내용 분량 관계로 본글은 여기서 마무리를 짓는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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