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평 벌판에 넓게 깃든 백제 후기 유적, 익산 왕궁리유적 (왕궁리5층석탑,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익산 겨울 나들이 (왕궁리유적,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 익산 겨울 나들이 '
(왕궁리유적, 왕궁리5층석탑,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익산 왕궁리5층석탑
▲  익산 왕궁리5층석탑


 

다사다난으로 짙게 얼룩졌던 묵은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한 해가 밝았다. '올해는 정말 고
깃국 좀 먹어야 될텐데~~!' 소망하며 지방의 미답처(未踏處)를 대상으로 새해 첫 답사지
를 물색하다가 익산 왕궁리유적에 크게 구미가 당겨 그곳으로 길을 잡았다.

햇님이 등청하기 전인 이른 아침, 도봉동 집을 나서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익산행 직행버
스에 나를 실어 익산으로 보냈다. 버스는 경부고속도로와 천안논산고속도로, 호남고속도
로를 두루 거쳐 2시간 50분에 익산시외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여기서 익산역까지 10분 정
도를 걸어서 익산시내버스 65번(동산동 동신아파트↔삼례읍)을 잡아타고 다시 30여 분을
달려 1번 국도 변에 자리한 왕궁리유적에 두 발을 내딛었다.


▲  유네스코가 달아준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왕궁리유적' 표석
익산 왕궁리 유적은 공주, 부여의 주요 백제 유적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이란 감투를 받았다.

▲  왕궁리 유적으로 인도하는 남쪽 정문


 

♠  궁궐터와 절터가 공존하는 백제 후기 유적지, 아직도 많은 비밀을 품으며
그 해답을 모두 내놓지 않는 익산 왕궁리(王宮里) 유적 - 사적 408호

▲  왕궁리 유적과 폐허의 옛터에 홀로 핀 꽃, 왕궁리 5층석탑

금마 남쪽 왕궁리에는 왕궁평(王宮坪)이라 불리던 너른 대지가 있다. 왕궁평은 왕검이, 왕금
성, 모질메 등의 별칭도 지니고 있어 결코 심상치 않은 곳임을 귀뜀해주고 있는데, 익산 지역
의 역사를 다룬 금마지(金馬誌)에 마한(馬韓) 시절 조궁(朝宮)터로 왕궁평이라 불렸다는 기록
이 있어 그것을 믿고 오랫동안 마한 관련 왕궁터로 보았다.
허나 왕궁리5층석탑 외에는 그야말로 허허벌판이라 무슨 메세지를 보내려는 듯 그 석탑을 오
랜 세월 바깥에 내밀며 잠수를 타고 있었다. 그러다가 1976년에 비로소 원광대 마한백제문화
연구소에서 처음으로 땅을 파보았는데, 이때 왕궁 담장의 외곽 경계와 석탑 북측에서 금당터
가 발견되어 마한 도읍설과 함께 팽팽하게 거론되던 백제 무왕의 금마저 천도설에 따라 그때
지어진 것으로 콩 볶듯이 결론을 보았다. 그리고 석탑 주변은 왕궁 안에 지은 내불당이 있던
것으로 추정했다.

이후 다시 흙으로 덮어두어 미래로 넘겼다가 1989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다시 왕궁평을
들추었다. 이번에는 20년 이상의 오랜 세월을 두고 조사를 벌였는데, 절터와 궁궐터를 비롯해
그들을 둘러싼 장방형 석성(담장), 후원터, 공방터, 대형 화장실터가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그들을 조사한 결과 멀리 마한까지 갈 필요도 없이 백제 후기에서 신라 후기에 이르는 유적임
이 확인되어 백제 무왕(武王, 재위 600~641) 시절에 조성된 것으로 그 믿음이 크게 굳어졌다.

▲  강당터

▲  건물터

백제 무왕은 금마저(金馬渚, 익산 금마) 출신으로 백제 29대 군주인 법왕(法王. 재위 599~600
)의 아들이다. 옛부터 그의 금마저 천도설이 나돌고 있었는데, 그 증거로
① 삼국유사에 후백제(後百濟)를 세운 견훤(甄萱)이 고려 태조에게 보낸 국서에 백제는 금마
산(金馬山, 금마저)에서 개국했다는 내용이 있음.
②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는 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본래 백제의 금마지(今麻
只)인데 무강왕(무왕) 때 성을 쌓고 별도의 도읍을 두어 금마저라 칭했다고 씀.
③ 육조시대(六朝時代) 때 쓰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백제 무강왕이 지모밀지에
천도하여 새로 제석정사(帝釋精舍)를 지었는데, 639년(당태종 정광 13년)에 큰 뇌우가 있어
제석정사가 불탔다는 기록(여기서 지모밀지는 금마저 지모현)이 있음.

이를 통해 금마저로 도읍을 잠시 옮겼거나 일종의 별도(別都)를 세운 것으로 보이며, 그 현장
의 중심이 바로 왕궁평이다. 물론 마한의 도읍설, 고안승(高安勝)의 보덕국(報德國)설, 후백
제 도읍설도 여전히 공존하며 이곳의 수수께끼를 증폭시키고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금마저 관
련 내용이 없다. 허나 요즘에는 백제 무왕 때 처음 닦여진 궁성으로 거의 자리를 잡은 것 같
다.
사람이란 자신의 고향을 늘 그리워하고 챙기는 편이라 무왕은 비록 천도까지는 아니라도 일종
의 별궁(別宮)을 고향 부근에 조성하여 종종 머물렀고, 의자왕(義慈王) 시절이나 백제가 망한
이후 신라에 의해 기존 궁궐 건물을 대거 밀어버리고 절로 전환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고구려 왕족으로 668년 이후 고구려 부흥운동을 펼치다가 실패하여 신라로 도망친 고안
승이 신라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에게 익산 지역을 다스리는 보덕국왕으로 봉해진 바
가 있어 그의 거처로 이용되었을 수도 있으며, 후백제를 세운 견훤 역시 이곳을 별궁 또는 원
찰로 삼아 종종 왕래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만큼 이곳은 매우 장엄하게 잘지어졌던 것이다.

이토록 장대했던 꿈의 현장이 언제 무상한 폐허의 터가 되었는지는 아쉽게도 기록이 없어 정
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이곳 유적이 고려 때를 끝으로 더 이상 흔적이 나오지 않아 백성들
의 민란이 빈번했던 고려 중기(13세기)나 왜구의 침범이 극심했던 고려 후기에 사라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이곳은 탑만 드러낸 채, 땅 속에 묻혔고 막연히 왕궁평, 왕금성 등의 이름으
로 전해오다가 이제 비로소 조금씩 속살을 보이고 있다.

▲  남측 담장

▲  동측 담장

왕궁리 유적의 면적은 218,155㎡이다. 허나 북쪽으로 계속 발굴 범위를 넓히고 있고, 경작지
로 쓰이는 동쪽이 잠재적인 공간이라 이들을 모두 들추면 지금보다 훨씬 이상의 규모와 성과
가 나올 것이다. 그러니 현재 면적 21만㎡는 지금까지의 임시 성적표일 뿐이다.
왕궁터의 흔적은 용화산에서 뻗어내린 능선의 남측 끝부분(해발 40m 내외)에 자리해 있다. 언
덕을 손질하여 낮은 곳은 흙을 쌓아 다지고 그 위에 궁궐을 닦았는데, 그 주위로 폭 3m의 성
곽 또는 담장을 길게 두르니 규모가 남북 490m, 동서 240m, 둘레 1.5km로 약간 틀어진 네모꼴
이다. 담장 안쪽과 바깥에는 폭 1m의 편평한 돌을 깔아 보도(步道)로 삼았으며, 이런 시설은
궁궐을 지을 때 보통 마무리 단계에 짓는 것들이라 왕궁이 완전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음을 알
려준다.
담장 주변에 기와조각이 즐비해 담장 상부에 기와를 얹힌 것으로 여겨지며, 궁문(宮門)은 남
측 담장에서 3곳, 서측과 동측, 남측에서 각각 1곳이 확인되었다.

왕궁 남측 전반부에는 건물을 짓고자 동서로 석축 4단을 닦았는데 남측부터 폭 75m, 45m의 대
지를 2:1:2:1의 비율로 4개로 분할해 부지를 조성했다. 부지 내에는 크고 작은 건물터 40여
곳이 나왔는데, 백제와 신라 건물터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고려시대 것도 1곳이 발견되어
백제 후기부터 신라 후기, 고려까지 길게 활용되었음을 알려준다.

백제 건물터 중, 제1석축 앞에 왕궁의 정전 또는 주요 건물로 여겨지는 대형 건물터가 확인되
었다. 이곳에서 가장 큰 규모(동서 31m, 남북 15m)로 건물 중심이 남측 중문의 중심축과 일치
하여 왕궁의 중심이 되는 건물임이 분명하다. 나머지 백제 건물터는 제1석축 뒤에 널려있다.
제4석축 동쪽이자 북측 후반부에는 후원(정원)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곳은 왕궁과 연결되는
부분에 괴석과 장대석, 하천석 등을 조합해 물의 흐름을 조절할 수 있도록 지어졌으며, 정원
주변에 정자로 보이는 건물터와 제4석축 위로 연결되는 길이 발견되었다. 또한 공방터와 대형
화장실터, 석축 배수시설도 덩달아 쏟아져 나왔는데, 이들은 왕궁 북서쪽 낮은 곳에 위치해
있어 왕궁에 소속된 공방으로 여겨진다.

공방터에서는 금고리, 금판 등 금제품과 유리제품, 동제품, 이들을 제련하면서 나온 도가니
등이 나왔으며, 대형 화장실은 땅을 3m 깊이로 파고 나무 기둥을 세워 발판을 만들었는데, 구
덩이에서 회충, 편충 등의 기생충알과 똥막대기가 발견되었다. 삼국시대에 정말 많은 유적이
있지만 이처럼 화장실까지 고스란히 보인 것은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  5층석탑 남쪽 건물터

▲  5층석탑 북쪽 건물터

왕궁으로 시작된 이곳은 나중에 절로 바뀌었다. 5층석탑과 금당, 강당 등이 왕궁의 주요 건물
이 있어야 될 자리에 자리해 있고 석탑 밑에서 목탑터와 먼저 지어진 건물터가 나와서 기존의
왕궁 건물을 부시고 절을 깔았음을 보여준다. 왜 왕궁이 절로 전환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의자왕이 부근에 있는 무왕의 능을 지키고자 원찰(願刹)로 삼았을 수도 있고, 신라가 백제를
평정한 기념으로 궁궐을 부시고 절로 삼았을 가능성도 있다.
석탑 1기와 금당, 강당으로 이루어진 1금당 1탑의 가람배치로 왕궁리5층석탑을 통해 고려 때
까지 법등(法燈)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 홀연히 사라져 답답한 수수께끼의 현장이
되었다. 비록 20년 넘게 발굴을 하였지만 아직도 캐내야 될 비밀이 많은 것이다.

석탑만 홀로 남긴 채 공허한 터가 되버린 왕궁평은 발굴 이후 왕궁리 유적으로 간판을 바꾸며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세계문화유산의 지위를 얻어 미륵사지(彌勒寺址)와 더불어
익산의 꿀단지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지금은 터만 남아있어 허전하기 그지 없지만 그 부족한 도화지에 지금까지 발견된 건물터 등
여러 흔적을 바탕으로 이곳의 왕년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은 어떨까? 생전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백제와 신라 건축 양식에 맞춰 상상의 나래를 살찌운다면 그게 바로 정
답이 될 수도 있다.

왕궁리 유적 남쪽에는 이곳의 추가 설명과 발견 유물을 머금은 왕궁리유적전시관이 있으니 같
이 둘러보기 바란다.

▲  왕궁리유적에서 발견된 거대한 항아리

▲  궁궐 남측 동쪽 문터

* 왕궁리 유적 소재지 :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631-30일대
* 왕궁리 유적전시관 소재지 :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562 (궁성로 666, ☎ 063-859-
  4631~32)
* 왕궁리유적전시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왕궁리 유적 모형도 (왕궁리유적전시관)


 

♠  왕궁리유적 둘러보기 ①

▲  남측 담장 중앙문터

거대한 수수께끼 보따리, 왕궁리 유적으로 들어서려면 남측 중앙문터를 지나야 된다. 유적을
둘러싼 담장(성곽)은 동서 약 240m, 남북 약 490m로 둘레는 약 1.5km이며, 담장의 폭은 3m 정
도로 담장 안과 바깥에 돌을 깔아 보도를 만들고 담장 경계인 석렬시설(石列施設)을 닦았다.
허나 담장의 원래 높이는 알 도리가 없어서 1m 높이로 남쪽(남측) 담장과 동쪽(동측) 담장 일
부와 담장 안쪽 보도, 바깥 보도 일부를 복원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돌을 섞어서 지은 토성(
土城) 같다.
남측 담장에서는 문터 3곳, 동/서/북쪽에서는 문터 1곳이 발견되었는데, 남측에 문을 많이 둔
것은 궁궐 건축의 주요 특징이며, 문은 복원하지 않았으나 어설프게 재현하는 것보다는 이렇
게 열려있는 모습으로 두는 것이 좋다. 답사객으로 하여금 문 모습에 대해 알아서 그려보게끔
말이다. 보통 궁궐 문은 중층(2층)이 많으니 이곳 궁문도 2층이 아니었을까 싶다.

▲  남측 담장 (중앙문터 서쪽) ▼

▲  남측 담장 (중앙문터 동쪽) ▼

▲  남측 담장 서문터

▲  남측 담장 동문터

동문은 폭 9.8m 규모로 서문, 중앙문과 달리 오래가지 못하고 없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 자리에는 따로 기초 시설을 두지 않고 바로 담장을 올렸다.

▲  대형건물터

남측 담장 중앙문을 들어서면 커다란 건물터가 마중을 한다. 현재 왕궁리유적에서 가장 큰 건
물터로 정면 31m, 측면 15m 규모인데, 규모나 건축 기법, 위치로 미루어 왕궁의 중심 건물이
거나 대규모 연회를 벌이던 건물로 여겨지며, 건물 기둥을 받치고자 커다란 구덩이를 파서 그
속에 점토를 다진 다음 기둥을 세운 이른바 토심(土心) 기법이 사용되었다.
건물터를 건져내어 조사를 벌인 다음, 주춧돌과 건물터 윤곽은 보호를 위해 땅 속에 고이 묻
고 땅을 두툼히 다진 다음 그 위에 잔디를 입혀 이곳에 건물이 있었음을 귀뜀해준다. (이곳
건물터는 모두 그렇게 봉해져 있음)


▲  왕궁리 유적에서 수습된 건물터 주춧돌의 보금자리
이곳을 조사하면서 발견된 건물터 주춧돌을 대형건물터 인근에 집합시켰다.
왕궁리유적에 서린 장대한 역사를 머금은 존재들로 이곳의 왕년의
모습을 비춰주는 시간의 거울이다.

▲  출입시설로 여겨지는 건물터
석축을 넘나드는 출입시설로 추정되는 건물터이다. 동서 길이 8m, 남북 약 7m,
석축 높이 0.6m 정도로 그 동쪽에도 비슷한 건물터가 있다.

▲  한참 비밀을 들춰내고 있는 굴립주 건물터와 초석 건물터

왕궁리 유적 서남부에는 서쪽 담장과 굴립주 건물터, 초석 건물터, 부엌터, 장랑형 건물터 등
다양한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서쪽 담장을 따라 동서 방향으로 길쭉한 건물터 1기(건물터 37)와 남북 방향으로 긴 건물터 4
기(건물터 38, 40~42)가 나왔는데, 원형 혹은 타원형의 구덩이를 파고 나무를 세워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굴립주 양식이다. 특히 건물터37은 다른 건물과 달리 동서로 아주 기나긴 형태로
규모는 정면 5칸(520cm), 측면 4칸이며, 북쪽 중앙에서 180cm 떨어진 곳에는 출입과 관련된
주공이 210cm 간격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건물터 주변에는 석축 배수로가 나왔다.

굴립주 건물터 주변에는 원형 초석 3매가 1.5m 간격으로 남아있는 건물터 39가 있다. 원형 초
석은 기단과 함께 기초를 조성하면서 지어진 것으로 약 50cm 떨어진 곳에 기단 석재가 빠진
흔적이 확인되어 신라 후기에 가마터가 들어서면서 파괴된 백제 건물로 여겨진다.


▲  왕궁 부엌터, 장랑형 건물터

왕궁 부엌터는 이름 그대로 왕궁의 음식을 담당하던 공간으로 철제솥 2점과 직구단경호 1점,
광견호 2점, 단경병 2점, 철제가래날 1점, 철부 1점, 숫돌 3점과 불을 땐 흔적이 발견되었다.
백제 무왕이나 의자왕이 이곳에 머물 때 제왕 부부와 왕족들에게 올릴 진수성찬을 닦던 곳으
로 건물 양식과 출토 유물을 통해 무왕~의자왕 시절 건물로 여겨진다.

장랑형(長廊形) 건물터는 길쭉한 행각(행랑)을 두룬 건물로 기단석 1매, 판형 석재 3매가 발
견되었으며, 그 규모는 정면 10칸(27.5m)으로 여겨진다. 이런 건물 양식은 백제의 별채이자
속방(屬邦)인 왜열도에 전파되어 경도(京都, 교토) 지역 궁궐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  왕궁리 석탑 서쪽 건물터

이 건물터는 규모와 원형 주춧돌을 통해 왕궁의 행정 업무를 돌보던 정청(政廳)으로 여겨진다.
정면 9칸(19.2m), 측면 4칸(11.6m)으로 내부에는 한 변의 길이가 6m인 방이 2개가 있다. 건물
주위로 백제 때 유물인 뚜껑이 있는 접시<개배(蓋杯)>와 토기, 기와파편 등이 발견되어 궁궐
시절에 절찬리에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  배수로(排水路) 흔적

왕궁리 유적에서는 물을 배출하는 배수로의 흔적도 여럿 발견되었다. 윗 사진의 배수로는 0.7
~0.8m 폭에 길이가 약 28m로 배수로 가장자리에는 잘 다듬어진 석재를 1단 높이로 잇대어 연
결해 만들었으며, 배수로 남쪽에 건물터가 자리해 있다, 현재 배수로는 발굴 결과를 토대로
재현한 것이다.


▲  강당터 서쪽에 자리한 남쪽 건물터 ①

강당터 서쪽에 남북으로 나란히 자리한 2개의 건물터로 앞쪽 건물터는 강에서 가져온 자갈돌
을 둥글게 쌓은 동서 1칸, 남북 7칸 규모이며, 대형 항아리를 묻었던 시설이 나왔다. 그리고
뒷쪽 건물터는 불규칙한 모습으로 이들은 승려의 숙소인 승방(僧房)으로 여겨진다.

▲  강당터 서쪽에 자리한 남쪽 건물터 ②

▲  서쪽에 바라본 강당(講堂)터


▲  동쪽에서 바라본 강당터

금당터 뒷쪽에는 강당터가 넓직하게 누워있다. 강당은 설법이나 강연을 하던 교육 공간으로
정면 5칸(17.9m), 측면 4칸(12.6m) 규모이며, 이곳에서 남쪽 10m 지점에 3개의 계단 흔적이
나왔다. 부근에서 공방으로 쓰였던 흔적도 나왔으며, 잘 수습된 주춧돌과 두툼하게 솟은 건물
터만이 허전하게 남아 모든 것이 무상함을 보여준다.


▲  후원터 (유적 북부 언덕)

왕궁리 유적 북부는 야트막한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의 수수께끼를 밝히려는 불굴의
집념이 한참 펼쳐지는 중이라 북부 일대가 금지된 구역으로 묶여 있는데, (후원터는 2017년
7월에 개방됨) 대자연이 뿌려놓은 무성한 잡초와 나무들이 유적을 깔고 앉으며 그들을 꽁꽁
숨기고 있었지만 결국 발견되어 유적을 둘러싼 지루한 수수께끼 놀이가 진행되고 있다. 그 놀
이가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으나 부디 인간이 이기기를 바래본다.

북부 언덕에서는 후원터와 화장실터, 공방터 등이 나왔는데. 그중 후원(後苑)터는 언덕 동북
부에 자리해 있다. 후원 남쪽과 서쪽에는 구불구불한 수로(水路)가 하나 또는 2중으로 설치되
어 있고, 또 다른 수로가 연결되어 후원 연못에 물을 공급해 주었다. 그리고 후원의 동남쪽
모서리 지점은 궁성 전각 구역에서 후원 진입용으로 뚫려 있었다.
후원 내부 남측에는 동서 방향으로 돌을 깐 보도가 있었고, 중앙에는 정면 4칸, 측면 4칸의
건물터가 나왔다. 또한 물을 보관하는 장방형의 수조시설과 물의 양을 조절하는 'ㄱ'자 형태
의 암거시설, 그리고 정원 중심 공간에서 배출된 물을 모으는 네모난 집수시설이 있다.

후원에 있던 연못은 네모난 모습으로 정원 중심 공간에 괴석과 판석(板石)을 이용해 네모난
못을 만들고 조경석과 자갈돌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궁궐터 내부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정원(
후원) 유적으로 자연과 어우러지게 만든 백제의 우수한 조경 기술을 쿨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그들의 조경 기술은 신라와 속국인 왜열도에 많은 영향을 내렸다. 물론 부여 궁남지(宮南池)
도 백제 왕궁의 후원이긴 하지만 그곳은 후원 중심의 별궁(別宮)이었다. 그러니 조금은 다르
게 봐야 된다.


▲  대형화장실1 모형도 (왕궁리유적전시관)

왕궁리 유적은 궁궐 내 후원 유적이 나온 현장으로도 유명하지만 백제시대 화장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현장으로도 가치가 높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늘 예민한 생리현상을 해소하는 공간이 있기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늙은
유적에서는 그와 관련된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곳에서 화장실 유적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 이름도 아름다운 화장실(뒷간), 사람에게 필요한 공간이 분명하지만 한편으로는 다소 예민
하고 껄끄러운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역사에서도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고 조사와 연구
도 부실하며 자료도 빈약하다. 그 빈약한 자료를 크게 보충해준 곳이 이곳 왕궁리이다.

유적 북부인 언덕 동북부에는 후원터가, 서북부에는 화장실터와 공방터가 발견되었는데, 화장
실터는 동서 방향으로 크기가 다른 3기가 나란히 위치해 있다. 이중 가장 큰 것(대형화장실1)
은 길이 10.8m, 너비 1.8m, 깊이가 3.4m로 볼일을 보는 곳에 뒷처리용으로 쓰이는 이른바 똥
막대기가 있었다.
그 외에 목재품과 나무방망이, 백제시대 짚신, 목제칠기 뚜껑 등이 나왔으며, 특히 회충과 편
충 등의 기생충알이 나오니 이들은 대변의 흔적들로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과 질병 상태, 생활
상 등을 조금이나마 보여준다.

깊은 구덩이에 볼일을 본 잔재들은 어느 깊이에 이르면 서측 담장 밖으로 이어지는 긴 수로를
통해 밖으로 배출되며 그 과정에서 조금은 정화되어 인근 개천으로 흘러갔다. 허나 구덩이 안
쪽에 박힌 것들은 어지간해서는 잘 빠지지 않는다. 그러니 위생 문제도 있고, 옷도 지금과 달
리 불편하기 그지 없으니 불편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현대인들 입장에서는 사용하기가 좀
꺼림칙하지만 그 당시로써는 그나마 최신식 화장실이었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이용했다.

이들 화장실 유적은 공방터 남쪽에 있어 공방에서 일하는 사람과 궁궐이나 절에서 잡일을 하
는 사람들과 군사들이 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처럼 칸막이가 있던 것은 아니라서 남
녀공용으로 이용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며, 3개의 화장실터 중 2개는 남자 전용, 1개는 여자 전
용이 아니었을까 싶다.

공방은 남북으로 긴 2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좌측에 공방 관련 원료와 재료, 도구
들을 버리는 공간이 나왔다. 특히 공방 내부의 습기를 제거하려는 독특한 지하 시설이 확인되
었으며, 금과 유리제품, 원재료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곳은 왕궁의 전용 공방으
로 왕족들의 사치품과 생활용품을 제작했으며, 절로 바뀐 이후에도 어느 정도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  와적기단(瓦積基壇) 건물터

와적기단이란 기단 바깥을 기와로 쌓아 장식하는 것으로 6세기 중반 이후 백제에서 널리 유행
하여 부여(관북리 유적, 정림사터)와 익산에서 여럿 발견되었다. 이후 왜열도로 전파되었으며
, 이들 건물터는 백제의 건축기술과 그 변천 과정을 밝혀낼 수 있는 중요한 존재이다.


▲  건물터

왕궁의 주요 건물로 여겨지는 터로 잘 다듬어진 면석을 0.8~0.9m 폭으로 세우고 내부를 진흙
으로 단단하게 다졌다. 주변에서는 길쭉하거나 둥근 형태의 폐기 구덩이가 여럿 나왔는데, 6
세기 중반 중원대륙에서 만들어진 청자파편이 나왔다.


 

♠  왕궁리유적 둘러보기 ②

▲  금당터

왕궁리유적의 한복판이자 왕궁리5층석탑 북쪽에 금당터가 누워있다. 금당(金堂)이란 절의 중
심 건물인 법당(法堂)으로 왕궁 건물을 밀어버리고 새로 지은 것으로 여겨지며, 바로 앞에 5
층석탑이 있어서 1금당 1탑 양식의 가람배치를 취하고 있다.


▲  'ㄱ'자 모습의 건물터

와적기단 건물터 옆에 누워있는 건물터로 둥근 형태의 적심이 1.5m 내지 2.8m 간격으로 배치
되어 있다. 앞쪽 건물터는 너비 약 3m, 길이 약 5m 크기의 2개의 방을 지닌 구조로 인근 미륵
사지와 부여 능산리사지에서도 비슷한 구조가 발견되었는데, 궁궐 건축물로 여겨진다.


▲  남북방향 석축
경사면에 돌을 쌓고 평탄하게 땅을 다지고자 만든 것이다. 현재 길이 약 30m, 높이
0.55m 정도가 남아있으며, 궁궐 관련 건물에서 사용된 석부재(石部材)가
포함되어 있어 절을 닦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  왕궁리5층석탑 북쪽 건물터

왕궁 조성을 위한 기초 시설로 여겨지는 동서 방향 석축 중간에 자리한 건물터이다. 땅을 파
고 잘 다듬은 석재를 1~2단으로 쌓아 터를 다졌는데, 한 변의 길이가 12m인 정사각형 건물로
여겨지며, 건물터 주변에 기와를 잇댄 토판(土版)을 설치하여 배수처리용으로 삼았다. 위치와
구조를 통해 절의 중요 건물로 짐작되며 조그만 주춧돌이 어지럽게 박혀져 있어 그들의 고된
세월을 느끼게 된다.


▲  왕궁리5층석탑 동쪽 건물터
여기서는 땅을 파고 그 위에 주춧돌을 놓은 토심 구조와 나무와 흙으로 단을
쌓아 올린 토축(土築) 기단 구조, 건물 바닥을 지면에서 띄워서 지은
굴립주 구조가 발견되었다.

▲  동그란 모습의 기와 가마터
기와를 굽던 2기의 가마가 동서로 나란히 발견되었다. 기와를 굽던 아궁이와 숯,
불에 탄 흙과 기와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앞쪽 가마터는 너비 1.7m, 길이 2.6m
규모의 반 지하식 가마로 이들은 신라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  건물터

석축을 넘나드는 출입시설로 여겨지는 건물터이다. 동서방향 석축에서 양쪽으로 면을 맞춰 돌
을 쌓았는데, 동서 길이가 약 6m, 남북이 약 4m 정도 남아있으며, 석축 서쪽에도 비슷한 건물
터가 있다. 오른쪽 건물터는 원형 주춧돌 3개와 기초시설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한 정면 3칸
, 측면 1칸의 건물로 여겨진다.


▲  동서 방향 1번째 석축터

석축은 왕궁 안에서 동서 방향으로 4개, 남북 방향으로 2개가 나왔다. 동서 방향의 1번째 석
축은 길이 95m, 높이 0.9m로 원래 높이는 2m 정도로 여겨지며, 석축 부근에서 토기와 기와 조
각, 중원대륙에서 건너온 청자 조각 등이 출토되어 백제 후기 왕궁의 생활상과 축조 시기 등
을 보여주고 있다.

▲  왕궁리 유적 남부 건물터

▲  유적에서 발견된 기와 조각으로 다진
기와 기단 (와적기단을 흉내 낸 듯)


▲  왕궁리 유적의 꽃, 왕궁리 5층석탑 - 국보 289호

왕궁리 유적 한복판에는 이곳의 백미(白眉)이자 백제탑의 후예인 왕궁리5층석탑이 고운 맵시
를 드러내고 있다.
잠들어있던 왕궁리 유적을 깨웠던 장본인으로 바닥돌과 1단의 기단(基壇) 위로 5층의 탑신(塔
身)을 올린 다음 그 위에 약간의 머리 장식을 얹혔는데, 기단이 파묻히고 다소 기울어져 있던
것을 1965년에 해체 수리하면서 기단이 다시금 햇살을 보게 되었다.

탑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으로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크고 길쭉
한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을 쌓아올려 목조탑(木造塔)의 양식을 석탑에 그
대로 펼쳐 보였다.
팔각기둥과 네모난 돌들 사이는 흙을 다져서 메웠는데, 그 속에서 백제 때 기와조각이 발견되
기도 했으며, 발굴 중에 기단 각 면 가운데에 2개씩 기둥조각을 새긴 것이 드러났고, 1층 지
붕돌 가운데와 탑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1965년에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
어 크게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 사리장치는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 있으며,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란 이름으로 국보 123호로 지정되었다.

탑신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고, 지붕돌은 얇고 밑은 반듯하나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위로 치켜 올려져 있으며, 풍경 등의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있다. 그리고 각 층 지붕
돌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고자 다른 돌을 끼워놓았다.

사리장치를 통해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옛 백제 땅(충남, 전라도)에서
고려 때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으로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을 좀 닮기도 했다. 하지만 탑의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백제 후기, 신라 후기 설도 존재하고 있어서 아직은 정체가 아리송하며,
고려 탑이 맞다면 왕궁리 유적은 적어도 고려 중기까지 절로써 밥벌이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근래 유적을 손질하면서 탑 밑에서 목탑터와 건물터가 발견되어 그가 있기 전에 왕궁 건
물이 있었고, 그것을 부시고 목탑을 세웠다가 다시 부시고 그것을 닮은 석탑을 세웠음을 귀뜀
해주고 있으며, 탑의 높이는 8.5m이다. 허나 폐허의 너른 공간에 홀로 피어있다 보니 다소 장
엄하게 다가오며, 오랫동안 보물 44호라는 지위를 누렸다가 1997년 국보로 승진되었다.

▲  북쪽과 남쪽에서 바라본 왕궁리 5층석탑의 위엄
그는 고려 초기 석탑일까? 신라 후기 또는 백제 후기 탑일까? 정답은 오직 탑만이
알고 있으나 좀처럼 말해주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들아 알아서 풀어보셔~~!'
수수께끼를 내듯이..

▲  왕궁리 유적의 동남쪽 모서리
(남측 담장과 동측 담장이 만나는 곳)

▲  남측 담장 (동문터 동쪽)


 

♠  왕궁리유적 둘러보기 ③

▲  동측 담장 (담장 내부 보도, 배수로)

동측 담장은 폭이 3m 정도로 구간마다 돌을 쌓은 방법이 다르다. 폭 6m 정도 되는 문터와 담
장을 보호하는 시설, 보도, 배수로가 발견되었으며, 담장의 높이는 알 수 없으나 남측 담장과
비슷하게 1m 높이로 절반 남짓 거리를 복원했다. 비록 절반 남짓 정도만 복원이 되어 실감이
적겠지만 왕년에는 제법 장대한 규모였다.
최대한 발견된 돌을 이용해 담장과 보도, 배수로를 재현했으나 수량이 충분치 못해 군데군데
새 돌을 끼어 넣으면서 고색이 짙은 돌과 하얀 피부의 어린 돌이 서로 어색한 조화를 보인다.
허나 시간이 상당히 지나면 어린 돌도 늙은 돌을 닮아 고색의 빛을 낼 것이다.

▲  북쪽으로 달리는 동측 담장

▲  동측 담장 배수로 ①

▲  동측 담장 배수로 ②

▲  왕궁리유적전시관

왕궁리 유적 남쪽에는 왕궁리유적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2008년 12월 23일에 문을 연 왕궁
리유적 전문 박물관으로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 1,700여 점이 담겨져 있으며, 그중 300여 점만
꺼내 전시하고 있다. 유물 외에도 유적 관련 디오라마와 모형도, 영상물 등이 유적에 대한 이
해를 흔쾌히 돕고 있으며, 왕궁리5층석탑의 옛 모습이 담긴 오래된 사진도 별도 공간에서 다
루고 있다. 또한 어린이를 위해 목판 찍기 체험 등 다양한 체험도 준비되어 있다.

유물전시관 내부를 제대로 다룬다는 것은 솔직히 무모한 행동이고 또한 사진도 몇 장 담지 않
아서 그 일부만 본글에 꺼내보도록 하겠다. 솔직히 전시관 내용과 앞서에서 길게 언급했던 왕
궁리 유적 내용은 많이 교집합을 이루니 별도로 다룰 필요는 없다.


▲  공방터 모형 (오른쪽이 대형화장실터)

▲  백제시대 소변통 - 요강의 이전
모습으로 남녀 공용이다.

▲  공방터에서 발견된 백제 금도가니

▲  왕궁리 유적에서 나온 온갖 토기들

▲  1917년 왕궁리5층석탑의 모습
(지금과 달리 기단이 묻혀 있음)


▲  왕궁리5층석탑의 흑역사, 1938년에 제작된 석탑 실측도
석탑이 이탈리아의 피사의 사탑처럼 왼쪽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다.
(기단부는 여전히 땅에 묻혀 표시되지 않았음)

▲  1965~1966년 왕궁리 5층석탑을 복원하면서 찍은 빛바랜 흑백 사진
사람과 비교해보면 석탑이 얼마나 장대한 규모인지 알 수 있다.

▲  왕궁리5층석탑 몸 속에서 나온 사리공의 모습 (1965년)

▲  왕궁리 유적 서남부 모서리 (서측 담장과 남측 담장)

왕궁리 유적 서측 담장은 1번 국도와 맞닿아 있다. 2중으로 이루어진 석축 위에 흙을 쌓은 형
태로 남측, 동측 담장과 비슷하며, 이 역시 정확한 높이를 헤아리기가 어려워 1m 정도 높이로
북서부 구역(공방, 화장실터)을 제외하고 그런데로 복원해 놓았다.

유물전시관을 포함해 왕궁리 유적을 2시간 정도 둘러보았다. 유적이 모두 속살을 드러낸 상태
가 아니라서 어디까지나 전체를 둘러본 것은 아니며 허용된 공간만 두 발을 움직였다. 완전히
가늠하기도 어려운 왕궁리 유적은 지금도 비밀 캐내기가 한참이라 나중에 온다면 지금보다 더
넓은 유적을 둘러보게 될 지도 모르고, 유적에 대한 설명도 크게 안면을 바꿀지도 모른다. 혹
시 아는가 마한부터 닦여진 왕궁터일지도?


▲  왕궁리 유적 서측 담장 (1번 국도에서 바라본 모습)


 

♠  하천을 사이에 두고 애타게 바라보고 있는 길쭉한 석불
고도리(古都里) 석조여래입상 - 보물 46호

▲  고도리 동쪽 석불

▲  고도리 서쪽 석불

금마면 중심지(동고도리)와 왕궁리 유적 중간에는 흥미롭게 생긴 고도리 석불이 있다. 왕궁리
유적을 둘러보고 그 석불을 보고자 우회 국도 신설로 무척 한가해진 옛 1번 국도를 조금 따라
가다가 새 국도 밑에 뚫린 굴다리를 지나면 너른 평야가 나온다. 여기서 직진하면 익산천이란
하천이 나오는데, 유유히 흐르는 그 하천을 따라 북쪽으로 길을 재촉하면 하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고도리 석불이 뜨겁게 눈짓을 보낸다. 평야와 비닐하우스가 전부인 곳이
라 쉽게 눈에 띄며 이정표가 잘되어 있어 찾기는 쉽다.

석불이 있는 고도리는 옛 도읍을 뜻한다. 아마도 오랜 세월 마한의 도읍으로 전해오던 왕궁리
유적 부근이라 그런 거창한 이름을 지니게 된 듯 싶은데 현재는 경작지와 시골 마을로 이루어
져 있어 고도리란 이름 값을 무색케 한다.


▲  익산천 둑방길 (고도리 석불 방면)

▲  고도리 동쪽 석불

고도리 석불은 금마 들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익산천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약 200m 거리를 두
며 자리해 있다. 이들은 흙으로 두툼하게 닦여진 조그만 둥근 언덕 위에서 서로 애타게 마주
보고 있는데, 그들 높이는 4.24m로 어깨는 매우 좁으며, 머리에는 2중의 관(冠), 즉 네모난
관 위에 다시 네모난 관을 쓰고 있다.

네모난 얼굴에는 가는 눈과 눈썹, 짧은 코, 작은 입이 있으며, 양쪽으로 두 귀가 희미하게 달
려있다. 목은 겨우 하나의 선으로 처리해 얼굴과 몸통은 완전 붙어있으며 어깨부터 밑도리까
지는 그냥 형식적인 모습으로 손이 배 앞에 있고, 옷자락도 몇 줄의 선이 고작이다. 몸통 밑
에는 앞면을 약간 깎아서 만든 대좌(臺座)가 있으나 이 역시 몸통과 같은 돌로 되어있다.
몸통은 대체로 굴곡이 없는 매우 날씬한 사다리꼴 돌기둥으로 석불이라기 보다는 무덤의 석인
상(石人像)이나 토속적인 마을 수호상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하여 석불과 관련이 없는 존재로
보는 설도 있다.

이들은 가지각색의 석불과 마애불이 많이 등장했던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그 시절에는 개성
이 강하고 거대한 모습을 자랑하지만 반면에 작품성이 다소 떨어지는 거대한 석불이 많이 등
장했다. 이 고도리 석불 역시 그런 예의 하나로 지극히 절제화되고 간략화된 거대한 석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석불에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있는데, 석불 중 하나는 남자이고 다른 하나는 여자라고
한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익산천이 흐르고 있어 평소에는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다가 1년에 1
번, 섣달 그믐날 밤에 개울이 꽁꽁 얼어붙으면 냇물을 건너서 서로 회포를 풀다가 닭이 울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한다.
과연 전설처럼 그들이 움직일리는 없겠지만 마을을 지키는 남녀 수호신의 역할도 하고 있었음
을 알려준다. 즉 마을의 안녕을 위해 이렇게 그들을 배치한 것이다. 또한 왕궁리 유적과도 가
까워 그들을 알리는 이정표 역할도 했을 것이다.

▲  고도리 동쪽 석불

▲  뒷쪽에서 바라본 고도리 서쪽 석불


▲  동쪽을 바라보고 선 고도리 서쪽 석불

하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고도리 석불을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5시가 넘었
다. 제아무리 천하에서 가장 크다는 햇님이라고 하지만 차디찬 겨울 제국(帝國)의 무한 눈치
때문에 16시가 넘으면 어둑어둑해지면서 제국의 쌀쌀한 기운이 칼처럼 불어온다. 어차피 오늘
목적한 바를 모두 이루었기 때문에 더 이상 무리하지 않고 나의 제자리로 길을 재촉했다. 
 
이렇게 하여 한겨울 익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소재지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400-2, 1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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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6월 2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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