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122건

  1. 2021.11.20 북악산과 인왕산 그늘에 숨겨진 서촌의 비경 ~~ 청송당유지, 백운동계곡, 백운동천 늦가을 나들이 (경기상고 본관 및 청송관)
  2. 2021.11.08 강남의 상큼한 지붕을 거닐다. 대모산 나들이 (완남부원군 이후원묘역, 대모산성, 불국사, 서울둘레길4코스)
  3. 2021.10.31 강원도의 깊은 내륙이자 한반도의 배꼽, 양구 나들이 (양구근현대사박물관, 양구선사박물관, 파로호인공습지, 한반도섬)
  4. 2021.10.20 우리나라 수돗물의 탄생지, 성수동 수도박물관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
  5. 2021.10.08 청양의 꿀명소를 거닐다 ~~ 우산, 우산성, 천장호, 천장호출렁다리 나들이 (청양3층석탑, 소원바위)
  6. 2021.09.30 국보급 조망과 넉넉한 볼거리를 지닌 서울의 숨겨진 명산, 호암산 ~~ (호압사, 호암산 정상, 민주동산 깃대봉)
  7. 2021.09.20 송파구의 싱그러운 모퉁이를 거닐다 ~~ 방이습지(방이동 생태경관보전지역), 서울둘레길3코스, 성내천 나들이 (송파둘레길 성내천길)
  8. 2021.09.07 도심 속에 숨겨진 달달한 계곡이자 서촌의 오랜 경승지, 인왕산 수성동계곡 (인왕산자락길)
  9. 2020.11.25 인왕산자락길, 황학정, 서촌(한양도성) 늦가을 나들이 ~~ (택견수련터, 감투바위, 단군성전, 행촌동 은행나무)
  10. 2020.11.14 늦가을에 찾아간 청송 주왕산 단풍 나들이 ~~~ (절골에서 가메봉, 용연폭포, 절구폭포, 용추폭포, 자하성터, 대전사까지)

북악산과 인왕산 그늘에 숨겨진 서촌의 비경 ~~ 청송당유지, 백운동계곡, 백운동천 늦가을 나들이 (경기상고 본관 및 청송관)

늦가을 서촌 산책



~~~ 인왕산과 북악산 그늘에 깃든 서촌(웃대)의 숨겨진 명소들 ~~~

백운동천 바위글씨

▲  백운동천 바위글씨 (백운동계곡)

청송당유지 바위글씨 경기상고와 북악산(백악산)

▲  청송당유지 바위글씨

▲  경기상고와 북악산(백악산)

 



 

경복궁 서쪽에 넓게 자리한 서촌(西村, 웃대)은 나의 즐겨찾기 명소의 하나이다. 10년 넘
게 그 일대를 구석구석 많이도 돌아다녔지만 그럼에도 나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사각지대
가 일부 고개를 들며 내 심기를 은근히 건드린다. 다른 지역은 몰라도 서촌 등 서울의 미
답처(未踏處)는 도저히 못참는 성격이라 늦가을의 한복판인 10월의 끝 무렵, 서촌의 미답
처를 잡으러 출동했다.



 

♠  경기상고(京畿商高)와 청송당유지 바위글씨

▲  경기상고 본관과 그 뒤로 보이는 북악산(백악산)

서촌의 북부(北部)를 이루고 있는 청운동(淸雲洞)에는 100년 역사를 지닌 경기상고(경기상업
고등학교)가 있다. 이곳은 서촌의 북쪽 끝으로 북악산(백악산) 서남쪽 자락에 위치해 있는데,
학교 바로 뒤에 북악산이 우뚝 솟아 있어 든든한 후광(後光)이 되어준다.

경기상고는 1923년 5월 14일, 종로구 동숭동(東崇洞)에서 '경기공립갑종상업학교(京畿公立甲
種商業學校)'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경기도에서 세운 최초의 도립학교로 경기도상(京畿道
商 )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서울 도심에 왠 경기도립학교인가? 고개가 갸우뚱하겠지만 왜정(
倭政) 시절 서울은 경기도의 일원이었다. <경기도 경성부(京城府)라 불림>
그 시절 시범적으로 조선 학생과 왜열도 학생을 한 교실에 두어 가르친 한일공학 중학교로 학
교 자리에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이 들어서면서 1926년 4월 현재 자리로 이전되었다.

1927년 제1회 졸업생 85명을 배출했고, 1946년 경기공립상업중학교로 이름을 갈았으며, 서울
이 경기도에서 분리되자 서울시로 운영권을 넘겼다. 1950년 5월, 서울상업고등학교로 이름을
갈고 경기상업중학교를 세웠으며, 경기상업중교는 청운중학교로 이름이 바뀌어 분리되었다.
1968년 경기상고로 이름을 갈았고 1984년에 학교의 역사를 집대성한 백악기념관(白岳紀念館)
을 세웠다. 그리고 2007년 중소기업청 지정 특성화 전문계고교로 선정되는 등, 장안 제일의
명문 상고로 명성을 누리고 있다.

교내에는 1926년에 지어진 붉은 피부의 2층짜리 본관(本館)과 청송당(聽松堂)이 있어 학교의
깊은 역사를 속삭이고 있으며, 본관 앞에는 80~90년 묵은 소나무들이 숲길을 이루고 있어 학
교의 명물이 되어준다.
본관과 청송당, 본관 앞 화단은 '서울 경기상업고등학교 본관 및 청송관'이란 이름으로 국가
등록문화재 584호
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본관 앞에 펼쳐진 소나무 숲길
80~90년 묵은 소나무들이 길게 가로수를 이룬다. 그들이 베푼 솔내음이
그윽하니 공부는 정말 잘될 것 같다.

▲  강당으로 쓰이고 있는 청송당과 백악의 정기 표석
여기서 백악(白岳)은 북악산(백악산)을 뜻한다. 그의 품에 안겨져 있으니
그의 정기를 듬뿍 누리고 싶은 학교의 마음은 당연하다.

▲  학교 발전에 이바지한 화정 이상덕의 흉상

▲  이상덕 흉상 뒤에 자리한 연못


▲  학교 뒷쪽에 숨겨진 청송당(聽松堂)터 표석

▲  바위에 새겨진 청송당유지(聽松堂遺址) 바위글씨

내가 경기상고를 찾은 것은 여기가 내 모교도 아니요. 그렇다고 학교를 조사하러 온 것도 아
니다. 바로 교내 뒷쪽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청송당유지 바위글씨'를 보기 위함이다.
요즘 오래된 바위글씨<어려운 말로 각자(刻字)>에도 퐁당퐁당 빠져 그를 찾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는데, 서울 땅에는 수많은 바위글씨가 전하고 있어 나를 격하게 설레게 한다. 청송당유지
역시 그 글씨의 하나로 그가 있을 것 같은 교내 뒷쪽을 뒤적거리며 숨바꼭질을 벌이다가 교내
제일 북쪽 구석에서 그를 찾아 술래 신세에서 벗어났다.
이 바위글씨는 검게 때를 탄 바위 피부에 깃들여져 있다. 네모나게 홈을 파고 5자를 새겼는데
글씨는 여전히 선명하다. 비록 외진 곳에 있어도 경기상고의 뜨거운 심장과 같은 존재로 교내
앞쪽에 1961년 9월 당시 교장인 맹주천이 청송당유지의 역사를 적은 표석을 세웠다. 그렇다면
청송당은 무엇이고 왜 이곳에 바위글씨가 덩그러니 있는 것일까?


▲  가까이서 본 청송당유지 바위글씨

청송당은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 1493~1564)이 세운 집이다. 그의 본관은 창녕(昌寧), 호
는 청송, 죽우당(竹雨堂), 시호는 문정(文貞)으로 글씨를 매우 잘썼다. 죽은 이후 좌의정(左
議政)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서적을 정리한 '청송집'이 전하고 있다.

성수침(이하 청송)은 스승인 조광조(趙光祖)와 친분이 있던 사림(士林) 패거리들이 기묘사화
(己卯士禍, 1519년)로 무더기로 화를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북악산 서남쪽인 유란동(幽蘭洞,
경기상고 일대)에 집을 짓고 유학 공부와 후학을 양성하며 팔자 좋게 살았다. 당시 유란동은
백악의 2번째 기슭(第二麓)으로도 불렸는데, 그 윗쪽을 대은암동(大隱巖洞) 또는 도화동(桃花
洞)이라 불렀다.

청송당은 경복궁 바로 코 앞이자 도성(都城) 안으로 굳이 이곳에 둥지를 튼 것은 그의 아버지
인 성세순(成世純, 1463~1514년)이 북악산 밑에 집을 짓고 살았던 인연 때문으로 보인다. 청
송의 아들인 우계 성혼(牛溪 成渾, 1535~1598년)이 쓴 '성세순 행장(行狀)'에
'백악산 밑에 집을 정했는데 숲이 깊고 땅이 외져 자못 산수의 멋이 있었다. 공무를 마치면
지팡이를 들고 신발을 끌며 왕래했다. 계곡마다 두루 찾아다니며 시를 읊조리고 돌아갈줄 몰
랐다'
는 기록이 이를 알려준다. 아마도 청송은 아버지의 별장 자리에 새로 집을 지었던 모양
이다.

청송은 집을 짓자 그와 가깝던 눌재 박상(訥齋 朴祥, 1474~1530)에게 집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이에 눌재는
'서당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모두 소나무이니 곧 그 색이 볼만하고 그 절개가 가상하오'
답을 하여 집 이름을 청송이라 했고, 호까지 '청송'이라 했다. (그때가 1526년임)

청송의 청송당 생활은 정치와 불의를 멀리하며 정말 은자(隱者)처럼 한가롭게 살았다. 임억령
(林億齡, 1496~1568)의 '청송당기'에 따르면
'청송은 새둥지 같은 집에서 약초를 캐어 달이면서 몸을 보양했다. 의롭지 않은 명성과 공명,
부귀 따위는 썩은 쥐나 똥으로 보는 것 이상으로 하였다. 고고하게 누워 몸을 일으키지 않고
서 이곳에서 10년을 살았다'

청송당 구조에 대해서도 임억령은 그의 청송당기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낮은 담을 두르고 소나무, 잣나무, 단풍나무, 대나무, 매화나무, 국화, 두충 등을 심었다.
담 밑에 구멍을 내어 산속의 샘과 통하게 하고 앞뒤에서 굽이돌아 버드나무가 있는 개울로
흘러들게 했다. 그 위에 다리를 놓아 청송당으로 가는 사람들이 건너다닐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눌재 박상도 한 자 남겼다.
'북악산을 등에 지고 남산을 바라보는데 푸른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시냇물이 구비쳐서 흐르
니 암자와 같이 그윽하고 외지기가 형용하기 어렵다. 앞으로는 돌아가신 상공댁을 굽어보게
되는데 곧 청송(성수침)이 병을 고치며 공부하는 곳이다'

지금은 생매장을 당했지만 경기상고 일대에 계곡이 흐르고 있었다. 이를 청송당계곡이라 불렀
는데, 계곡에 다리를 놓고 온갖 나무를 심어 집 주변을 꾸몄으니 비록 규모는 조촐하여도 담
양 소쇄원(瀟灑園) 못지 않은 아름다운 별서를 가지고 있던 것이다.

1564년 청송이 죽자, 청송당은 슬슬 거미줄이 끼고 거의 폐가가 되어갔다. 그의 아들인 성혼
도 부친의 별장을 그리 신경쓰지 못한 모양이다.
이를 보다 못한 청송의 후학들이 뜻을 모아 청송당을 중건하려고 했으나 남명 조식(曹植)의
제자였던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으며 청송당 중건을 위해 모인
사람들을 비방하는 상소를 올리자 중건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후 청송당은 더욱 폐허가 되었고,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갔다가 1668년 청송의 외손인 윤
순거(尹舜擧, 1596~1668)와 윤선거(尹宣擧, 1610~1669)가 중건했다. 이때 송시열(宋時烈)이
기문을 지었고, 송시열과 윤순거, 윤선거, 남구만(南九萬, 1629~1711) 등은 이를 기념하는 시
회를 열었다. 이처럼 청송당은 단순히 청송의 별장이 아닌 율곡 이이와 성수침, 성혼의 학풍
을 이은 후학들과 서인(西人) 패거리의 사상적 뿌리가 되는 조촐한 성지 같은 곳이었다.

1751년경 겸재 정선(鄭敾)은 서촌의 명소를 담은 장동8경첩을 그렸는데, 여기에 청송당이 나
온다. 허나 19세기경 감쪽 같이 사라졌고 세월의 저편으로 납치당한 청송당을 그리던 이들이
새긴 청송당유지 바위글씨만이 남아 청송의 흔적을 아련히 전해줄 따름이다.

바위글씨는 현재 경기상고 뒷쪽 구석에 있지만 청송당은 그 동쪽인 청운중교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 허나 바위글씨가 경기상고 안에 있으니 그곳에 청송당터 표석을 세웠다. 비록 이곳에
서린 멋드러진 운치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크게 헝클어졌지만
천하에 어느 누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세상의 변화를 막을 수 있겠는가?? 그저 바위글
씨라도 남아있는 것도 다행인 것 같다. 특히 모든 것이 거칠게 변해가는 이 땅의 현실에선 말
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89-3 (자하문로 136 경기상고 ☎ 02-737-6490)



 

♠  자하문터널 부근에 숨겨진 오랜 경승지
인왕산 백운동계곡(白雲洞溪谷) - 서울 지방기념물 40호

▲  백운동천(白雲洞天) 바위글씨

경기상고 정문에서 자하문터널 쪽으로 가면 터널 바로 직전 오른쪽(동쪽)에 오르막길이 있다,
그 길을 오르면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가 나오는데, 그 교회를 지나면 숲이 나오고, 숲으
로 들어서면 건물터와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바위에 새겨진 백운동천 바위글씨를
만나게 되니 그곳이 바로 인왕산 비장의 계곡인 백운동계곡이다.


▲  백운동천에 말뚝을 박았던 옛 백운장(白雲莊)터

백운동천 바위글씨 남쪽에 둥지를 틀었던 현대식 건물터는 서울 장안의 이름난 고급요정이었
던 백운장과 그 뒤를 이은 요정 건물의 흔적이다.
백운장은 1915년 왜인(倭人) 키타무라 세이타로(北村淸太郞)가 세운 식당으로 원래 이름은 청
향원(淸香園)이었다. 1929년 백운장으로 이름을 갈았으며, 1945년 이후 폐결핵요양소로 쓰이
다가 요정으로 변경되어 화남장으로 간판을 바꾸었다. 허나 요정 사업의 쇠퇴로 문을 닫았고,
건물도 싹 철거되어 황량하게 터만 남게 되었다.


▲  바위에 화석처럼 깃든 백운동천 바위글씨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자하문터널 주변을 백운동(白雲洞)이라 불렀다. 서울의 4
소문 중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의 바로 남쪽 밑으로 백운동계곡, 백운동천이라 불리
기도 했는데, 이는 흰 구름이 떠있는 고운 계곡이란 의미이다. 지금은 동네 사람들도 아리송
할 정도로 존재감이 없으나 조선 초부터 서울 제일의 경승지로 존재감이 북한산(삼각산)만큼
이나 컸다.
조선 초기 사대가(四大家)로 꼽혔던 괴애 김수온(乖崖 金守溫, 1410~1481)과 삼탄 이승소(三
灘 李承召, 1422~1484), 사숙재 강희맹(私淑齋 姜希孟, 1424~1483),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
宗直, 1431~1492) 등이 이곳에 퐁당 빠져 시를 남겼으며, 용재 성현(傭齋 成俔, 1439~1504)은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서울에서 경치가 가장 좋은 곳은 삼청동(三淸洞), 그 다음은 인
왕동(仁王洞), 그 다음은 쌍계동(雙溪洞)과 백운동, 청학동이라 찬양했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던 이염의(李念義. ?-1492)는 아예 계곡에 집을 짓고 살았으며
,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팔경첩에도 백운동 그림이 전한다.

1770년에 제작된 한양도성도, 19세기에 제작된 동여도(東輿圖)에 백운동 지명이 나오며, '신
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준천사실(濬川事實)','한경지략(漢京識略)','육전조례(
六典條例)'에는 개천(開川, 청계천)의 발원지 중 백운동천 계곡이 가장 길고 멀다고 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는 법부대신(法部大臣)을 지낸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 1846~1922)이 이곳
에 백운장을 지어 머물렀는데, 백운동천 바위글씨는 바로 그가 남긴 것으로 글씨 서쪽에 아주
작게 '光武七年 東農(광무7년 동농)'이라 쓰여 있어 1903년 동농이 썼음을 알려준다.
독립운동에도 나섰던 동농 김가진은 안동김씨 집안으로 여기서 가까운 신교동(新橋洞)에서 태
어났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나 서얼 출신이라 과거에 나갈 수가 없어 1877년 적서차별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 인연으로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으로 발탁되었으며, 1883년 통
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이 신설되자 유길준(兪吉濬)과 함께 주사로 임명되
었고, 188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이 되었
다.

나라의 개화 필요성과 방법론을 다룬 봉서(封書)를 올리기도 했으며, 이후 개화정책을 주도하
게 되었다. 특히 청나라의 내정간섭에 반발해 러시아와 밀약을 추진했다가 발각되어 유배형을
받기도 했으며, 유배에서 풀려나 청나라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시찰했다. 그리고 주차일본공
사관참찬관(駐箚日本公使館參贊官)이 되어 왜열도 동경(東京)에 머물렀으며, 이후 주일본판사
대신(駐日本辦事大臣)이 되었다.
왜에 호의적이고 청나라를 멀리하는 태도 때문에 민씨 세력의 견제를 받아 한직으로 물러났다
가 1895년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이 되어 박영효(朴泳孝)가 추진했던 개혁정책의 실무를
담당했다. 허나 바로 그해 박영효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위기에 몰리기도 했으며 제4차 김홍
집(金弘集) 내각이 들어서자 상무회의소 발족, 건양협회(建陽協會) 창립에 가담했다.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가 창설되면서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독립문(獨立門)과 독립공원을 조
성하는데 크게 나섰다. 또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 적극 가담해 헌의6조의 실행을 촉구하
였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이를 반대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1906년 스스로
충청남도 관찰사를 자청해 지방에 내려갔다. 대한자강회(大韓自彊會), 대한협회(大韓協會)에
가담해 활동했으며, 1910년 이후 왜정으로부터 남작(男爵) 작위를 받자 9년 동안 대외활동을
하지 않고 거의 잠수를 탔다.
그러다가 1919년 3.1운동으로 독립운동에 나섰고, 대동단(大同團)을 창설해 초대 총재로 선출
되었다.

1919년 11월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의 뜻에 따라 그를 중원대륙 상해로 망명시켜 독립선언
서 발표를 시도했으나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자마자 왜군에 발각되어 무산되었다. 하여 동농
혼자 상해로 넘어가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으로 활약했고, 대동단을 통해 무장투쟁을 계획하
다가 1922년 7월, 77세의 나이로 눈을 감고 말았다.

조선(대한제국)이 아주 허무하게 망하자 많은 고위 귀족과 황족들은 왜정에 붙었다. 허나 동
농은 협조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으며, 왜정이 상해임시정부를 우습게 보았으나 김가
진이 가세하자 크게 긴장했다고 한다. 허나 남작 작위를 받은 것 때문에 한때 친일 행적 논란
이 나오기도 했다.

동농의 집은 장안 제일로 일컬어질 정도로 그 위엄이 대단했는데, 백운동계곡의 풍경을 너무
좋아하여 이곳을 자주 찾았다. 그래서 1903년 백운동천 글씨를 남겼으며, 백운장이란 별장까
지 지어 이곳의 일원을 꿈꾸었다.
백운장 부근에 왜인이 세운 청향원이 들어섰고, 동농이 중원대륙으로 넘어간 이후에는 백운장
을 모두 매입해 고급식당을 굴렸다. 1961년까지 요정과 호텔로 쓰이면서 요정 정치의 현장으
로 악명을 떨쳤으며, 이후 여러 번 주인이 바뀌면서 결국 집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터만 남
은 상태이다.


▲  백운동계곡 바위굴
백운동천 주변을 더듬다가 바위굴을 발견했다. 비록 깊이는 얕으나 서울 도심에서
자연산 바위굴은 정말 흔치 않은 존재라 이곳이 정녕 도심 한복판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  백운동천(백운동계곡) 상류

백운동계곡은 인왕산의 주요 계곡으로 서울 도심에 몇 안되는 자연산 계곡이다. 웃대를 가로
질러 청계천으로 흘러가는데, 20세기 중반 이후 이곳까지 개발의 칼질이 춤을 추면서 동쪽과
남쪽에 주거지가 형성되었고, 서쪽에는 자하문터널까지 생겨 백운동의 아름다운 풍경은 크게
망가졌다.
서촌을 촉촉히 어루만지며 흘러가던 백운동계곡 대부분은 생매장을 당했고, 그나마 백운동천
바위글씨 주변에 간신히 실날처럼 남아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곳만 지나면 계곡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다행히 서울시에서 이곳의 가치를 뒤늦게 깨닫고 2014년 10월 지방문화재로 지
정하여 세월의 뒷편으로 넘어갈뻔한 그곳을 겨우 붙잡고 있다.

오랜만에 찾아왔지만 이곳 풍경은 그때와 비슷하고 이곳을 알리는 이정표나 안내문도 부실하
여 그야말로 아는 사람들만 살짝 찾는 숨겨진 명소로 머물러 있다. 이 계곡을 복원할 계획이
있다고 들었는데 수성동계곡처럼 지나치게 인공티를 내지 말고 주변을 좀 손질하여 역사공원
으로 삼는 선에서 깔끔하게 끝냈으면 좋겠다. 계곡도 청계천까지 싹 복원하면 좋겠으나 이미
시가지가 터질 정도로 들어차있어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  백운장터의 서쪽 끝 계단

서쪽 계단의 끝에는 건물터가 있다. (백운장이나 그 이후에 지어진 부속건물) 그 너머에는 청
운공원이 있으나 담장이 민통선처럼 꽁꽁 둘러져 있어 넘어갈 수는 없다. 하여 여기서 무조건
왔던 길로 돌아나가야 된다.
나중에 이곳에 사적공원이 꾸며지면 청운공원을 잇는 길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러면 인왕산자
락길과 인왕산길, 인왕산, 윤동주시인의언덕, 부암동, 북악산(백악산)과 바로 연계가 가능해
져 인왕산과 서촌(웃대), 부암동, 북악산을 아우르는 환상적인 답사 코스가 태어나게 된다.


▲  백운장터를 지키는 외로운 석등 하나

백운동천 바위글씨를 제외하고 백운장터에 제대로 남은 인공 유물은 석등이 유일하다. 생김새
를 보니 멀리 잡아도 김가진이 이곳에 별장을 지어 머물던 1900~1910년대, 가깝게 잡으면 왜
정 때 세워진 것으로 탑 스타일이 왜식(倭式)에 가깝다.
그에 대한 정보는 딱히 전해오는 것도 없고, 자신을 보듬던 백운장을 잃고 외로운 신세가 된
충격에 벙어리까지 되어 아무에게도 속삭여주지 않는다. 석등 주변에는 나무들이 털어놓은 낙
엽이 수북하게 쌓여 서로 동변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이곳 백운동계곡은 사실상 막다른 외로운 곳으로 북쪽 높은 곳에 청운문학도서관이 있고, 동
쪽 높은 곳에는 붉은 피부의 빌라로 이루어진 청운벽산빌리지가 있다. 서쪽은 길이 막혀있고,
오로지 남쪽만 입을 벌리고 있다. 청운동에 가해진 개발의 칼질이 이곳의 수려한 풍경을 제대
로 난도질했던 것이다.
옛날에는 창의문에서 서울 중심부로 들어설 때 창의문로로 가지 않고 백운동 옆인 청운벽산빌
리지를 거쳐 경기상고로 내려갔다. 그 옛길도 도시화로 사라져 온전하게 더듬기는 어렵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서촌(웃대) 나들이는 백운동계곡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백운동계곡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6-6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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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상큼한 지붕을 거닐다. 대모산 나들이 (완남부원군 이후원묘역, 대모산성, 불국사, 서울둘레길4코스)

강남 대모산 (완남부원군 이후원묘역, 대모산성, 불국사)


    
' 서울 강남의 대표 지붕, 대모산 나들이 '

  대모산 숲길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  대모산 숲길
◀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  대모산 불국사

대모산 불국사

 



 


서울 강남권의 대표 지붕인 대모산은 어린 시절부터 여러 번 인연을 지었던 친숙한 뫼이
다. 보통 접근성이 좋은 일원동(逸院洞)이나 수서역에서 길을 시작했는데, 한 해의 절반
이 끝나가는 시점에 이르러 다시 대모산 앓이가 도졌다. 그 앓이는 대모산에 안겨야 100
% 낫는 병이라 겸사겸사 시간을 내어 그를 찾았는데, 이번에는 산 남쪽인 자곡동(紫谷洞
)에서 산 더듬기를 시작했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3시, 지하철로 수서역까지 이동하여 거기서 강남구 마을버스 03
번을 타고 못골마을 정류장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 자곡로를 따라 서쪽으로 6분 정
도 가면 래미안강남힐즈아파트가 나오는데, 그 옆구리에 닦여진 '자곡로5길'로 들어서면
오른쪽 산자락에 옹기종기 모인 무덤들이 두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이들이 바로 완남부
원군 묘역으로 그들을 미답처 목록에서 싹싹 지우고자 이곳을 대모산 나들이의 시작점으
로 삼은 것이다. (못골마을 정류장보다는 래미안강남힐즈 정류장에서 내리는 것이 더 가
까움)


▲  완남부원군 묘역 남쪽에 상큼하게 닦여진 공원 산책로



 

♠  대모산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조선 중기 무덤,
완남부원군 이후원(完南府院君 李厚源) 묘역
- 서울 지방기념물 29호

▲  밑에서 바라본 묘역

대모산 남쪽 산골인 못골에는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인적이 드
물던 이 두멧골까지 개발의 칼질이 밀려오면서 묘역 서쪽에 아파트가 심어지고 신작로가 바로
옆구리까지 들어왔으며, 남쪽과 동쪽에 공원이 조성되는 등, 주변 풍경이 다소 변화를 겪었다.
묘역은 거의 옛 모습 그대로이거늘 그 주변이 크게 홍역을 치룬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이곳
으로 부른 묘역의 주인공, 이후원 그는 누구인가?

이후원(李厚源, 1598~1660)은 자는 사진(士晋), 사심(士深), 호는 우재(迂齋)로 세종(世宗)의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의 7세손이다. 그의 아비는 이욱(李郁), 어미는 장수황씨로 황정욱
(黃廷彧)의 딸이다.

10대 시절, 김장생(金長生)의 문하로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이때 김집(金集)과 조속(趙涑),
송준길(宋浚吉)과 친분을 쌓았다. 1623년 서인 패거리들이 일으킨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
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평가를 받아 완남군(完南君)에 봉해졌으며, 1624년 이괄(李
适)의 난 때 반란 토벌에 앞장섰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터지자 총융사(摠戎使)로 전쟁에 임했으며, 이듬해 청나라군 포
로를 잡은 공로로 녹훈되었으나 이를 반기지 않았다. 이후 단양군수와 태안군수를 지냈고, 조
정으로 돌아와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 종4품)을 지내다가 1635년 익산군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해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뒤늦게 과거시험을 통과했다.

1636년 김상헌(金尙憲)의 천거로 지평(持平, 정5품)이 되었으며, 얼마 가지 않아서 장령(掌令
, 정4품)이 되었다. 바로 그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터지자 인조(仁祖)를 따라 남한산
성으로 서둘러 도망을 쳤으며, 그곳이 청군에게 포위되자 염통이 오그라든 김류(金瑬) 등이
강화도로 도망치자며 어리석은 인조를 구워삶았다.
그러자 이후원은 남한산성을 끝까지 지킬 것을 주장하여 그들의 의견을 가라앉혔고, 최명길(
崔鳴吉)이 항복을 제안하자 죽기로 싸울 것을 주장했다.

1639년 승지(承旨)가 되고 이어 수원부사에 천거되었으나 인조가 그를 곁에 두고 싶어서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삼았다. 이후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백성의 힘을 무리하게 쓰지 않고 사풍(
士風)을 변경시켜 군정(軍政)을 닦았으며 이어 강화부유수가 되었다가 1642년에 대사간(大司
諫)을, 1643년에는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

1644년 심기원(沈器遠)이 좌의정(左議政)과 남한산성 수어사(守禦使)를 겸임하자 심복의 장사
들을 호위대에 집어넣고 전 지사(知事) 이일원(李一元)과 작당하여 회은군 이덕인(懷恩君 李
德仁)을 추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후원이 적극 나서 반란을 토벌했으며, 이듬해 호
조판서와 대사헌이 되고 1646년에는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어 회명연(會盟宴)에 참여했다.

1650년 효종(孝宗)이 청나라 정벌 프로젝트인 이른바 북벌(北伐)을 추진하자 그 참모가 되었
다. 효종의 명으로 전함 200척을 준비하여 그때를 알뜰히 대비했으나 1659년에 효종이 아쉽게
도 승하를 하면서 북벌프로젝트는 흐지부지 되고 만다.
1653년 도승지(都承旨)가 되어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1655년 예조판서로 추쇄도감제조
(推刷都監提調)가 되어 도망간 노비나 부역, 군역을 회피한 사람들을 잡아와 그 죄를 물었고,
악학궤범(樂學軌範)을 개간해 사고(史庫)에 나누어 보관하게 하였다. 이어서 한성부판윤(漢城
府判尹), 형조판서, 공조판서, 대사간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1657년 우의정(右議政)이 되면서 명나라에 대한 꼴통 사대주의의 대가 송시열(宋時烈)을 이조
판서에, 송준길을 병조판서로 임명했으며, 이후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 지경연사(知經
筵事),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등을 지냈다.

그는 성품이 청개(淸介, 청렴하고 절개가 있음)하고 인화를 중히 여겼으며, 선(善)을 좋아하
고 악을 멀리했다. 그리고 관직생활 중에도 틈틈히 경사(經史)를 읽으며 머리 속에 늘 풍부한
지식을 쌓아두었다.
1685년 경기도 광주 수곡서원(秀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세상 사람
들은 그를 완남부원군이라 부른다.


▲  고색의 기운을 머금은 이후원 신도비(神道碑)

이후원 묘역은 광명시 일직동 삼석산(三石山) 호봉골에 처음 자리를 잡았다. 그곳은 그와 같
은 시대를 살았던 이원익(李元翼, 1547~1634) 묘역 부근이다. 그러다가 1685년 광주 세촌(細
村) 금성산(金星山)으로 이장되었으며, 1714년 현 자리에 완전히 안착을 했다. 이때 그의 전
처인 광주김씨, 후처인 영월신씨와 같은 봉분(封墳)을 쓰는 합장묘(合葬墓)로 조성되었다.

이후원 신도비는 묘역 동남쪽에 자리해 있다. 신도비란 2품 이상의 높은 사람과 왕족들만 지
닐 수 있었던 비싼 비석으로 무덤 주인의 생애를 기록해 놓는다. 두툼하게 생긴 비좌(碑座)
위에 글씨를 깨알 같이 적어놓은 비신(碑身)을 세우고, 지붕돌로 마무리를 한 단출한 모습으
로 비석에 딱히 '신도비'를 칭하는 내용은 없으나 신도(神道)로 통한다는 무덤 동남쪽에 자리
해 있고, 묘표도 따로 마련되어 있어 그를 신도비로 보고 있다.
비문(碑文)은 이후원의 벗인 송준길이 짓고, 송시열이 추기를 지었으며, 명필로 유명한 이정
영(李正英)이 글씨를 쓰고,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두전(頭篆)을 썼다. 1685년 광주로 이장
되었을 때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며, 당대 유명한 사람들의 글과 글씨를 머금고 있어 역사적인
가치가 대단하다.


▲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후원 묘

이후원 묘는 이후원 자신과 그의 전처, 후처가 모두 안장된 봉분을 중심으로 묘표(墓表), 상
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망주석(望柱石) 2기, 해치석 2기로 이루어진 조촐한 모습이다.
봉분 밑도리에는 호석(護石)을 둘러 무덤이 조금 있어 보이게 하였으며 묘표는 봉분 앞이 아
닌 옆에 두었다. 허나 높은 사람들 무덤에 흔히 쓰는 문인석(文人石)과 동자석(童子石) 같은
석물을 전혀 갖추지 않았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 대신 독특하게도 해치석을 지
니고 있으며, 이들은 다른 사대부나 왕족의 무덤에서는 만날 수 없는 희귀한 예로 나 역시 이
곳에서 그들을 처음으로 접해 본다. 이들 해치는 무덤 지킴이로 배치되었다.

▲  호석을 두룬 봉분과 상석, 향로석
묘표(오른쪽 돌기둥)

▲  이후원 후손들의 무덤 (3기)
이들은 상석과 향로석, 망주석만 갖추었다.


▲  오늘도 평화롭기 그지 없는 이후원 묘역의 초여름 풍경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  무덤의 주인을 소상히 알려주고 있는 묘표
연꽃 무늬가 진하게 새겨진 비좌 위에 곧게 솟은 비신(빗돌)을 세우고
그 위에 네모난 지붕돌을 얹혔다. 빗돌 피부에는 고된 세월의 때로
얼룩이 져 있으나 글씨를 확인하는데는 그리 어려움은 없다.

▲  향로석에 새겨진 글씨 '완남 이충정공묘(完南 李忠貞公墓)'
여기서 '완남 이충정공'은 이후원을 뜻한다. 300년이 넘은 글씨이지만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정함을 과시하고 있다.

▲  뻐드렁니를 드러낸 서쪽 해치석의 위엄

이후원 묘만의 특별한 옵션, 해치석은 아주 조그맣고 앙증맞은 모습으로 상석 앞에 2기가 자
리해 있다. 네모난 바닥돌 위에 귀엽게도 앉아있는 해치는 상상 속의 동물로 광화문 앞에도
커다란 해치석(해태석)이 있는데, 얼굴과 이빨, 귀, 뒷다리, 꼬랑지까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서쪽 해치상의 두 눈은 장대한 세월에게 제대로 얻어맞은 듯 멍이 부었고, 코는 깎여나가 흔
적만 남았다. 아마도 그의 코를 갈아 그 가루를 먹으면 아들을 낳거나 시험에 붙는다는 유언
비어가 있었던 듯 싶다. 그래도 코를 제외한 나머지는 잘 남아있으며, 동쪽 해치상은 눈과 코
가 모두 멀쩡하다.
그들의 귀여운 자태에 반해 집으로 살짝 가져가 나의 수호용 석수(石獸)로 삼고 싶지만 그들
을 들고 갈 힘도, 지위도 되지 못한다.

▲  서쪽 해치석의 얼굴

▲  서쪽 해치석의 옆모습


▲  맞은편 해치석을 바라보고 있는 동쪽 해치석
무덤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바람직하지 못한 기운들도 해치의 귀여운 모습에
그만 넋을 잃고 그들의 임무도 잊은 채, 돌아갈 것이다.

▲  동쪽 해치석의 해맑은 얼굴

▲  동쪽 해치석의 옆모습


▲  이후원 묘역 동쪽 숲길 (못골위 근린공원)

이후원 묘역 남쪽과 동쪽에는 '못골위 근린공원'이 닦여져 있다. 동쪽 산책로는 야트막한 오
르막길로 그 고개를 넘으면 바로 못골마을로 이어지는데, 고개 너머 길은 잡초들이 덥수룩하
여 접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대모산으로 이어지는 산길도 없는 눈치여서 다시 묘역
으로 나와 그 서쪽 길(래미안강남힐즈 동쪽 길)을 기웃거려 보았으나 딱히 길은 없어 보였다.
하여 자곡로로 나와 길을 탐색하니 LH강남3단지아파트 남쪽 세명근린공원에서 대모산으로 가
는 계단길을 발견, 그 길을 통해 오랜만에 대모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자곡동 산39-3


▲  대모산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세명근린공원)



 

♠  대모산(大母山, 293m)을 더듬다

▲  대모산 숲길 (자곡동에서 정상 방향)

대모산은 강남의 대표 지붕이자 듬직한 뒷동산이다. 1977년에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 1989년 이후 공원으로 조금씩 꾸며지기 시작했다. 개포동과 일원동, 수서동, 자곡동, 내곡
동(內谷洞), 세곡동(細谷洞)에 걸쳐있는 산으로 1980년대 개포동(開浦洞) 개발 이전에는 산세
가 양재천(良才川)까지 이르렀다. <꼬마 시절인 1980년대 중반에 대모산을 타고 도곡동(道谷
洞)까지 내려간 기억이 있음>
산의 모습이 늙은 할머니처럼 생겼다고 해서 할미산, 대고산(大故山)이라 했으나 조선 세종(
世宗) 때 태종(太宗)의 능인 헌릉(獻陵)이 산 남쪽에 조성되면서 어명에 의해 대모산(大母山)
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산세가 비구니가 앉은 모습 또는 여자의 앞가슴처럼 생겼다고 하여
그리 이름을 내렸다는 설도 덧붙여 전해지고 있음)
조선 후기에 신경준(申景濬)이 작성한 산경표(山經表)에는 한남정맥(漢南整脈)에 속하는 산이
라 했으며, 여지도서(輿地圖書) 광주목(廣州牧) 기사에는 '관아 남쪽 30리에 있으며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다'고 나와있다.

대모산에 안긴 오랜 명소로는 불국사와 대모산성터 등이 있으며, 넓은 산세에 비해 계곡은 매
우 빈약하다. 개포동과 일원동 개발로 계곡 상당수가 날라갔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아있는 계
곡들도 시멘트를 바르고 요상하게 공구리를 쳐서 볼품이 매우 없다. 반면 약수터는 주변 산들
못지 않게 많아서 구룡산을 포함하여 무려 18개소의 샘터가 있다. (일부는 부적합 상태임)
또한 도보 산책길의 전국적인 유행으로 강남구청에서는 수서역에서 대모산 북쪽 자락과 구룡
산 북쪽 자락을 거쳐 염곡동(廉谷洞)으로 이어지는 대모산 둘레길인 '강남그린웨이'를 닦았으
며, 천하 둘레길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찬양받는 서울둘레길4코스(대모, 우면산 코스)가 대
모/구룡산 북쪽 자락으로 흘러간다. (불국사를 경유함)


▲  대모산 숲길 (왼쪽 철책 너머는 헌인릉 보호구역)

자곡동 세명근린공원에서 20여 분 정도 오르면 대모산 능선길에 이른다. 길은 거의 완만한 수
준으로 길이 약간 흥분기를 보이는 구간은 나무데크 계단길을 깔아 그 흥분을 조금 가라앉혔
다.


▲  대모산 능선길
왼쪽 푸른 철책은 헌인릉과 국정원 구역이니 넘어가지 말자. 국가의
예민한 곳을 건드려봐야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

▲  숲에 감싸인 대모산 정상(293m)

대모산 능선길로 들어서 서쪽으로 10분 정도 가면 대모산 정상에 이른다. (동쪽 능선길로 가
면 수서역임)
보통 하늘을 이고 있는 뫼의 정상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거나 잡초로 이루어진 대머리 같은 지
형이나 대모산 정상은 나무가 무성하여 정상이라는 것이 그리 실감이 나지 않는다. 삼삼하게
솟은 나무들로 하늘은 절반 밖에 보이지 않으며 조망 또한 별로 기대할 수 없다. 하여 여기서
는 동남쪽인 자곡동과 세곡동, 성남시 정도만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대모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 대모산 정상

대모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H'마크가 새겨진 헬기장이 나온다. 이곳은 북쪽이 확 트
여있어 앞서 정상에서 누리지 못한 조망을 제대로 보상 받을 수 있다. 바로 앞에 개포동과 일
원동을 비롯하여 강남구와 서초구, 송파구, 성동구, 광진구, 중랑구, 아차산~용마산 산줄기,
구리시, 멀리 불암산과 수락산, 도봉산, 북한산(삼각산), 남양주 지역까지 시야에 잡혀 조망
도 제법 진국이다.


▲  대모산 헬기장에서 바라본 천하 ①
개포동과 일원동을 비롯하여 송파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기,
그리고 멀리 수락산과 도봉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  대모산 헬기장에서 바라본 천하 ②
개포동과 일원동, 송파구, 강동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기, 수락산,
구리시, 남양주 지역 등

▲  천하를 향해 고개를 내민 대모산 서쪽 조망대

대모산 정상 서쪽에는 천하를 굽어보는 조그만 조망대가 있다. 이곳은 동쪽 헬기장보다 더 조
망이 일품으로 강남구 지역을 중심으로 송파구, 강동구, 구리시, 서초구, 성동구, 광진구, 중
구와 남산, 동대문구, 멀리는 북한산(삼각산), 도봉산, 수락산, 남양주 지역까지 망막에 들어
온다. 강남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고 서쪽의 구룡산 외에는 주변이 상당수 평지라 조망
의 깊이도 클 수 밖에 없다.


▲  대모산 서쪽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개포동과 도곡동, 양재동을 비롯한 강남/서초구 지역과 동작구, 용산구,
중구, 남산, 북한산(삼각산)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대모산 서쪽 조망대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강남구와 서초구, 우면산, 관악산, 동작구 지역

▲  옛 대모산성(大母山城)의 아련한 흔적들

대모산 헬기장 서쪽 능선길과 대모산 조망대 주변을 잘 살펴보면 무리를 지어 모인 돌무더기
들이 심심치 않게 보일 것이다.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그저 잡석들의 무리로 보고 밟고 지나
가기 일쑤이나 눈썰미가 조금 있다면 그저 단순한 돌무더기가 아님을 느낄 것이다. 그들은 바
로 대모산의 갑옷이었던 대모산성의 흔적들(대모산성터)이다.

산꾼과 행정당국의 오랜 외면을 받으며 굴욕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대모산성은 6~7세기 정도
(또는 신라 후기)에 신라(新羅)가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1999년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한양대
박물관팀이 발굴조사를 벌인 적이 있는데, 이때 짧은 굽다리 접시를 비롯하여 다양한 신라 유
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곳 산성은 정상을 둘러싸며 조성된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약 600m, 내부 면적은 약 8,276
㎡이며, 성돌은 50~70cm 정도의 자연석과 활석을 이용했다. 봉은사(奉恩寺)에서 편찬한 '봉은
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백제 때 고성(古城)으로 나와있고, 북쪽 성벽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일부 확인되기도 했으나 나중에 성곽을 구축하면서 과반수 이상 날라간 상태였다,
또한 정상 중간 지점에 제단으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 바위가 널려있는데 이 바위에는 달걀 모
양의 조각이 50여 개 이상 새겨져 있다. 이들 흔적을 어려운 말로 성혈(聖穴)이라 하며, 그
흔적을 문신처럼 지닌 바위는 알바위라 부른다. 하여 이를 통해 대모산은 옛 조선(고조선)부
터 지역에서 꽤나 애지중지되었음을 귀뜀해준다.
그랬던 대모산성은 고려 이후 버려졌고,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의 오랜 괴롭힘으
로 완전히 헝클어져 돌이 약간 뭉쳐있는 형태로 여럿 남아있을 뿐이다.

옛 조선부터 신라 후기까지 절찬리에 이용된 의미 깊은 곳이지만 오랫동안 세상의 관심을 받
지 못했다가 2012년에 비로소 서울시에서 지방기념물로 지정하고자 문화재위원회에 상정했다.
허나 여러 가지 이유(사유지, 강남구의 의지 부족 등)로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보호 조치도 계속 보류되었다. 게다가 대모산성을 알리는 어떠한 안내문도 없는
실정이라 사람들의 발길에 계속 고통받고 있으며, 봉우리 주변에 철탑 시설물과 국정원 철책
까지 산성터를 그냥 두지 않아 상태는 더욱 악화되고 있다.
그러니 더 망가지기 전에 서둘러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여 흐릿하게 남아있는 흔적이라도 수습
했으면 좋겠다. 그래도 서울에 거의 흔치 않은 산성 유적이 아니던가.


▲  옛 대모산성의 흔적들 ①
대모산성 왕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차산에 깃든 아차산성(阿且山城)이나
금천구 호암산에 깃든 호암산성(虎巖山城)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까?

▲  옛 대모산성의 흔적들 ②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성벽이 많이 남아있었다고 하며 멀리서도 그 흔적이
보였다고 한다. 허나 속세의 무관심 속에 그마저도 대부분 헝클어지고
지금과 같은 우울한 몰골이 되고 말았다.

▲  옛 대모산성의 흔적들 ③
성곽을 다졌던 자리에는 성돌 일부와 성터 윤곽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  불국사로 내려가는 숲길



 

♠  대모산 북쪽 자락에 둥지를 튼 오래된 산사
~ 대모산 불국사(大母山 佛國寺)


▲  불국사 약사보전(藥師寶殿)

대모산성터에서 일원동 쪽으로 15분 정도 내려가니 불국사가 뒷통수를 보이며 모습을 드러낸
다. 이름도 참 좋은 불국사는 몇 번 인연을 지었던 절로 그냥 넘어갈까 했으나, 간만에 대모
산에 왔고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지나치듯, 그냥 가기가 아쉬웠다. 하여 석불좌상의 안
부도 물을 겸, 불국사로 발을 들였다.

절 밑에는 약수터(불국사 약수터)가 있어 더위로 지친 목구멍을 적실 겸 다가갔다. 허나 수질
부적합 빨간 딱지가 부착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것을 무시하고 마셔도 상관은 없으나
이후는 장담하지 못한다. 요즘 내리는 비가 너무 각박한 수준이다보니 약수터의 목구멍도 죄
다 타들어가고 있었고, 바가지들도 실업자 신세가 되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런 약수터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경내로 인도하는 돌계단을 오르면 정면으로 약사보
전과 그곳의 주인 약사여래(불국사 석불좌상)와도 시선이 딱 마주친다.

대모산 북쪽 자락에는 이름도 참 아름답고 외우기도 쉬운 불국사가 조용히 안겨져 있다. 흔히
불국사하면 다보탑과 석가탑으로 유명한 경주(慶州) 불국사를 100% 생각하기 마련이라 불국사
에 간다고 하면 의심할 여지도 없이 다들 경주에 가냐고 묻는다. 허나 부처 형님의 나라를 뜻
하는 '불국'이란 이름을 경주 불국사 혼자서만 누리면 어디 쓰겠는가?
비록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불국사' 이름을 지닌 절은 천하에 수십 곳이 넘는다. (그나
마 오래된 절은 경주와 대모산 불국사가 고작임)

'불국사' 이름의 절 중에 경주 다음으로 2위(1위와 2위의 차이가 완전 넘사벽 수준;;)라고 볼
수 있는 대모산 불국사는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한 약사도량으로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다. 법
당(法堂)인 약사보전을 중심으로 삼성각, 나한전 등 4~5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으며, 지형상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시선의 끝에는 이곳의 마르지 않는 샘 강남이 펼쳐져 있다.
가람배치는 법당 앞에 석탑 1기를 둔 1법당 1탑 배치로 절에 흔히 있는 일주문(一柱門)은 없
다. 게다가 절이 들어앉은 위치도 사세 확장에 그리 용이한 지형이 아니라서 새로 건물을 짓
기에도 여의치가 않아 보인다.

▲  불국사 약수터
내가 갔을 때는 수질 부적합 판정으로
잠시 휴업 상태였다.

▲  2층으로 이루어진 삼성각(三聖閣)
1993년에 지은 것으로 2층은 삼성각, 1층은
공양간과 요사, 선방으로 쓰인다.


이 절은 고려 말기인 1352년에 진정국사(眞靜國師)가 창건하여 약사사(藥師寺, 약사절)라 했
다고 전한다. 믿거나 말거나 설화에 따르면 절 아랫마을(일원동)에서 박씨 농부가 경작을 하
고 있었는데 소가 논 한가운데서 나아가지 않아 살펴보니 글쎄 땅 속에 석불(지금의 불국사
석불좌상)이 있는 것이었다.
하여 바깥으로 꺼내 가까운 봉은사(奉恩寺)에 넘기려고 했으나 석불이 거부 반응을 보이며 꿈
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약사절로 보내려고 하니 갑자기 석불이 지푸라기보다 가벼워져 그
곳으로 옮겼다. 그때 불상이 발견된 논을 부처논이라 불렀고 그 옆을 흐르는 개천을 부처내라
불렀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절 아랫마을에서 농부가 밭을 갈다가 석불을 발견하여 마을 뒷산에 자리를 만들
어 봉안했는데, 진정국사가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와 1385년에 그 자리에 절을 세워 약사절(약
사사)이라 했다는 것이다.
위에 언급된 설화의 내용처럼 과연 진정국사가 창건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석불은 고려
후기 것으로 판명이 난 상태라 창건시기와도 그런데로 맞아보인다. 또한 밭에서 발견되었다는
설화를 통해 지역 농민들이나 지역 세력가의 발원으로 석불이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불국사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옛 절터(일원동 246-12)가 있는데, 그곳이 불국사의 원래 자
리라고 한다. 허나 언제쯤 현 위치로 옮겨졌는지는 대모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창건 이후
500년 동안 마땅한 흔적을 남기지 못했으며, 1874년 고종(高宗)의 지원으로 중창을 했다고 전
하는데, 그때 현 자리로 이전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모산 남쪽 헌인릉(獻仁陵)에서 물이 나오자 고종은 그곳과 가까운 약사사 주지에게 의
견을 물었다고 한다. 이에 주지승이 대모산 동쪽(현 성지약수터)의 수맥을 끊으면 된다고 답
을 올려 그렇게 하니 과연 물이 나오지 않았다고 하며, 고종은 고마움의 뜻으로 불국정토를
이루라는 뜻에 '불국사'란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고종의 꿈에 헌릉에 묻힌 태종이 자꾸 나타나자 그를 달래고자 약사사를 증축하
고 불국사란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  1칸짜리 나한전(羅漢殿)
불국사에서 가장 늙은 건물로
1964년에 지어졌다.

▲  나한전 내부
석가여래와 문수/보현보살, 16나한,
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6.25전쟁 때 절이 처참히 파괴되고 오로지 창건 설화에 나온 석불만 겨우 살아남았는데, 1963
년 안양 삼막사(三幕寺)에서 온 권영선(풍곡당)이 중창해 법당과 칠성각, 나한전(1964년)을
세웠다. 이후 건물이 낡고 협소하여 영길(법선당)이 1993년부터 3년의 불사 끝에 나한전을 제
외한 모든 건물을 싹 갈고 탱화를 새로 제작했다.

강남구의 거의 유일한 늙은 산사로 강남권에서는 봉은사 다음 급이며, 고색의 향기는 말끔히
씻겨 내려갔으나 이곳의 유일한 보물인 늙은 석불이 전하고 있어 나름 오래된 절임을 증명하
고 있다.
시내와 가깝긴 하지만 숲에 푹 묻힌 탓에 고적하고 아늑한 산사의 멋과 여유를 누리기에 부족
함은 없으며, 으리으리한 경주 불국사와 달리 두 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조촐하여 은근히 정
감이 간다.


▲  약사보전 내부 (단란한 모습의 약사5존상과 불단, 닫집)

불국사의 중심 건물(법당)인 약사보전(약사전)은 삼성각과 더불어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약사전 앞에는 근래 마련된 5층석탑이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하얀 피부를 드러내
고 있고, 약사전으로 오르는 돌계단 좌우에는 수호의 의무를 지닌 돌사자 2기가 있는데, 사자
의 탈을 쓴 고양이처럼 귀엽게 다가온다.

약사전 불단에는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3존상도 아닌 무려 5존상이 봉안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 왜 특이하게 5존상으로 불단을 장식했을까? 실제 다른 절에서는 3존불(또는 3존상) 주변에
별도의 불상과 보살상을 두는 사례도 많고 이곳 불국사 같은 경우는 지형상 다른 여래나 보살
상을 중심으로 한 건물을 더 두기가 곤란하므로 그 역할을 약사전이 싹 도맡고 있는 것이다.
즉 약사전이라고 해서 약사여래만 집중적으로 취급해야 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대신 불단
가운데에 약사여래를 높게 배치하고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 4개의 협시보살상을 낮게 배치
하여 5존상을 구성했다.


▲  불국사 석불좌상(가운데 석불)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6호

이들 5존상 가운데 가장 맏이는 가운데에 있는 석불좌상(약사여래상)이다. 이곳의 중심 불상
답게 좌우에 거느린 보살상보다 대좌(臺座)가 높은데, 그의 우측에는 육환장(六環杖)을 든 승
려머리의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좌측에는 보관(寶冠)을 눌러쓰고 가슴에 금색 장식을 단 관
세음보살이 있으며, 양쪽 끝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앉아있다. 그리고 그들 뒤로 석가여
래를 중심으로 도드라지게 돋음새김으로 조성된 후불탱이 든든히 자리해 있다.

불국사 석불좌상이라 불리는 이 약사여래상은 밭에서 나왔다고 전한다. (지역 농민이나 지역
세력가의 발원으로 조성된 것을 그리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음)
불국사가 가장 의지하고 있는 이곳의 든든한 밥줄로 그를 내세워 약사도량을 칭하고 있는데,
절에서는 약사불(약사여래)이라 하여 많은 정성을 들이고 있다. 허나 고려 때 약사여래와는
다소 차이가 있어 처음부터 약사불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원래 정체는 아미타불로 여겨
진다. 그런 것을 나중에 약사여래로 강제 전환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불상의 높이는 79.5cm로 머리의 크기가 신체에 비하여 너무 크다. 하얀 피부의 몸과 달리 머
리는 검은 색이며 꼽슬인 나발이다. 머리 꼭대기에는 육계로 보이는 하얀 혹이 솟아 있으며,
홍예처럼 구부러진 눈썹 사이로 백호가 있다. 지그시 뜬 두 눈으로 중생을 보는 약사여래의
표정은 그야말로 인자함이 느껴진다. 오뚝 솟은 코와 붉은 입술, 살이 두툼해 보이는 양쪽 볼
은 정말 손으로 비벼보고 싶다. 두 귀는 중생들의 소망을 하나도 빠짐없이 접수하려는 듯, 안
테나처럼 크다.
그의 몸에 걸쳐진 법의(法衣)는 석굴암(石窟庵)의 본존불처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있으며
이런 형태를 어려운 말로 우견편단(右肩偏袒)이라고 한다. 다리 위에 놓여진 두 손은 선정인(
禪定印)을 취하고 있으며, 손 위로 알 모양의 빨간색 물건이 있는데, 이는 약사여래가 늘 지
니고 다닌다는 약합(藥盒)이다. 약합에는 중생을 치료하기 위한 그만의 치료제가 들어있을 것
이다.

그는 원래 맨돌의 불상이었으나 나중에 호분(胡粉, 조개껍데기를 태워 만든 것으로 여자들의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됨)
으로 하얗게 떡칠을 하여 하얀 피부의 석불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원래 모습을 적지 않게 잃었다.
신라 후기~고려 초기 시절 유행했던 불상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머리와 신체 비례가 맞지 않
으며, 자연스럽지 않은 옷주름 조각 등으로 고려 후기 것으로 여겨진다.

* 불국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442
(광평로10길 30-71 ☎ 02-445-4543)


▲  두툼하고 탐스럽게 열린 어여쁜 불두화(수국)
순백의 불두화보다는 그래도 색이 입혀진 불두화가 더 유혹적이다.

▲  불국사를 뒤로하며... 대모산도시자연공원 숲길

▲  그림 같은 숲길, 대모산공원 산책로

대모산공원으로 내려와 에어브러쉬(air brush)로 대모산이 나에게 살짝 붙여둔 존재들을 말끔
히 털어버렸다. 이제 내가 서식하고 있는 세상으로 갈아타야 되니 지금까지 의지한 다른 세상
의 흔적을 싹 지우는 것이다. 오늘 나들이도 충분히 그리고 달달하게 즐겼으니 나의 제자리로
돌아가 잠이나 실컷 자야겠다.
이렇게 하여 대모산 여름 나들이는 그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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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10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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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의 깊은 내륙이자 한반도의 배꼽, 양구 나들이 (양구근현대사박물관, 양구선사박물관, 파로호인공습지, 한반도섬)

양구 근현대사박물관, 가오작리 선돌, 한반도섬(파로호인공습지)



' 강원도의 깊은 내륙, 양구 여름 나들이 '
(양구 근현대사박물관, 한반도섬)
양구 가오작리 선돌
▲  양구 가오작리 선돌
 



 

여름이 무심히 깊어가던 6월의 끝 무렵, 한반도의 배꼽을 자처하는 강원도 양구(楊口) 땅
을 찾았다.
아침 일찍 경춘선 전철을 타고 그림처럼 펼쳐진 북한강을 벗삼으며 강원도의 중심 도시인
춘천(春川)으로 이동했다. 오랜만에 발을 들인 춘천이지만 마음은 이미 양구에 넘어간 상
태라 남춘천역 인근에 있는 춘천시외터미널에서 양구로 가는 직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
렇게 춘천을 콩 볶듯이 떠나 첩첩한 산주름 속을 50분 정도 내달려 양구읍 한복판에 자리
한 양구시외터미널에 두 발을 내린다.

이 땅에 바람직하지 않은 나쁜 선, 휴전선을 강제로 짊어지고 있는 양구 땅은 거의 8~9년
만에 방문이다. 서울보다 높은 곳에 자리한 탓에 그리 덥지는 않았으며, 공기도 확연하게
틀려 청정함마저 진하게 느껴진다. 오죽하면 양구에 오면 10년은 젊어진다고 강조까지 하
겠는가. (양구군청에서 그렇게 강조하고 있음)

양구에서는 이미 정처(定處)를 정해둔 상태라 그곳만 얌전히 찾아가면 된다. 그래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양구 근현대사박물관(이하 근현대사박물관)'으로 예전 '양구향토사료관'
이다. 이곳은 양구터미널에서 북쪽으로 2km 거리로 '양구 선사박물관(이하 선사박물관)'
바로 남쪽에 자리해 있는데, 그들은 이미 2번이나 인연을 지었지만 정처의 하나인 한반도
섬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동선상 들리게 되었다.
게다가 '근현대사박물관'으로 거창하게 이름까지 바꾼 '양구향토사료관'이 어찌 변했을까
궁금도 했고, 눈과 코, 입을 지닌 깜찍한 돌덩어리, 가오작리 선돌의 안부도 궁금했다.


▲  여름 가뭄으로 그림이 완전히 바뀐 파로호 인공습지 남쪽 부분


양구 읍내를 벗어나면 근현대사박물관으로 인도하는 길(함춘로) 서쪽으로 수풀로 덥수룩
한 너른 공간이 나온다. 마치 물이 나간지 오래된 황량한 수몰지대처럼 덥수룩하기 그지
없는데, 이곳이 양구군의 야심작이었던 파로호(破虜湖) 인공습지이다.
이 습지는 이 땅 최초의 인공습지로 읍내 북쪽에서 양구서천(西川)을 따라 한반도섬까지
이어지며 그 거리는 2km가 넘는다. 허나 오랜 가뭄으로 물은 몽땅 말라버렸고 물이 가고
없는 자리에는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나 졸지에 밀림과 초원 같은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하늘의 야박함으로 여러 달째 습지의 정체성을 잃은 이곳은 원래 파로호 물을 먹고 살던
경작지였다. 허나 무단 경작과 농약과 비료의 과다 사용, 쓰레기 투기, 흙/돌의 무단 채
취 등으로 수질이 악화되었고, 경관 또한 나날이 훼손되자 뿔이 난 양구군청에서 2007년
에 이곳을 싹 갈아엎고 서천과 한전천이 만나는 하류부에 저류보를 다진 다음, 수면공간
을 확보하고 습지를 조성해 2008년 말 완성을 보았다.
그렇게 태어난 습지의 면적은 약 163만㎡로 천하 최대급을 자랑하며 저수량은 300만㎥에
이른다. 또한 양구가 한반도의 배꼽임을 강조하고자 한반도 모양의 섬을 닦아 양구의 새
로운 꿀단지로 격하게 키우고 있다.
하천변에는 자전거길을 겸한 산책로를 내었으며, 강원외고 서쪽과 선사박물관 서쪽에 습
지 탐방로를 내었다.


▲  물이 가득 올랐던 예전 어느 겨울의 파로호 인공습지 (2008년)

▲  거대한 초원이 되버린 파로호 인공습지
물은 저 멀리 밀려나 겨우 형태만 유지하고 있다.

▲  정체성을 잃은 파로호 인공습지
인공습지 너머로 하리, 동수리 지역과 양구의 서쪽 지붕 사명산(四明山, 1,198m)이
시야에 들어온다.

▲  파로호 인공습지 산책로 (자전거길)
양구읍내에서 인공습지 옆구리를 따라 한반도섬까지 이어지는 호젓한 길이다.

▲  인공습지 습지식생대를 가르는 습지 탐방로 (선사박물관 서쪽)
습지에 물이 없으니 나무로 만든 습지 탐방로도 딱히 의미가 없어졌다.
그냥 들판 위에 다진 다리에 불과해진 것이다.



 

♠  양구 지역 문명시대(文明時代)의 역사와 이 땅의 근현대사를 담은
양구 근현대사박물관

▲  근현대사박물관 정문 앞에 있는 쌍겨리 조형물
쌍겨리란 멍에에 소 2마리를 지어 논, 밭을 가는 것으로 1마리는 독겨리라고 한다.
쌍겨리 농법은 화전이나 단단한 땅을 갈 때 많이 이용되었다.


양구 선사박물관과 마주보고 있는 양구 근현대사박물관은 양구군에서 세운 군립(郡立) 박물관
으로 2002년 11월에 문을 열었다. 원래 이름은 '양구향토사료관'으로 건너편 선사박물관이 선
사시대의 양구를 다루었다면 이곳은 옛 조선(고조선)부터 20세기까지 문명시대의 양구를 다루
고 있었다.
그 시절 소장 유물은 600여 점으로 양구의 역사와 문화, 생활을 담은 작은 박물관이었으나 국
내 제1호 아리랑박사로 불리는 석우(石牛) 박민일<2011년에 10,700여 점을 기증>, 강원도민일
보 특파원을 지냈던 송광호<2012년과 2014년에 기증>, 연세대 명예교수이자 철학박사인 김형
석<2014년에 580여 점을 기증>, 독립운동가인 장준하(張俊河)의 장남이자 고려문화연구원 이
사장인 장호권 등 4명이 그들의 소장 자료와 문화유산 15,000여 점을 양구군에 흔쾌히 기증하
면서 번데기를 탈피한 나비처럼 크게 업그레이드를 하게 된다.
그 방대한 자료를 담고자 기존의 향토사료관을 2012년 7월부터 2년 동안 손질하여 2014년 9월
4일, 간판까지 바꾸어 '양구 근현대사박물관'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강원도 최초의 근현대사 전문 박물관으로 박물관의 중심이 양구에서 근현대사로 맞춰졌고, 근
현대사와 기증 받은 자료의 공간이 더해져 스케일이 엄청 커졌다. 기증 유물로 인해 소장 자
료만 무려 16,000점 가까이 머금게 되었고, 눈에 착착 달라붙는 다양한 주제의 볼거리와 사라
지기가 바뻤던 옛 존재들, 과거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20세기 중~후반 볼거리까지 흥미로운
것들이 많아 침침한 두 눈과 과거를 늘 그리는 마음을 제대로 어루만져준다.

박물관은 2층 규모로 '제1전시실'에는 이 땅의 근현대사를 집대성한 '역사의 휘모리', 오래된
우표와 엽서가 전시된 '엽서관','우표관','씰관'이 있고, '제2전시장'에는 우리나라 영화의
역사와 영화 관련 자료를 모든 '추억의 영화관', 아리랑 문화의 다양한 면을 다룬 '아리랑관'
, 근현대 출판의 역사를 다룬 '창간호관'이 있다.
'기획전시실'에는 박민일, 송광호, 김형석이 기증한 자료의 일부를 다루고 있으며, 근현대사
박물관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양구향토민속자료관에는 양구의 역사와 문화, 생활을 담고 있다.
그 외에 '추억의 교실','근현대사 체험의 공간','주막'이 있고, 양구 곳곳에서 수습한 비석과
연자방아, 맷돌 등의 문화유산이 뜨락을 채우고 있다.

그럼 지금부터 근현대사박물관을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전시 유물 일부를 전시관 순
서에 상관없이 다루도록 하겠음)

       ◀  초가 주막(酒幕)과 물레방아
주막에서는 국밥과 도토리묵, 메밀전병과 동동
주를 팔고 있다.
주막 앞에는 연못이 닦여져 있는데, 물레방아
가 쉬지 않고 돌아가며 연못에 물을 베푼다.

◀  양구에서 발견된 구석기/청동기시대 유물
왼쪽 돌덩어리들은 구석기 유물인 '찍개', 오
른쪽 것들은 청동기 유물인 '간돌도끼'와 '간
돌화살촉'이다.


▲  검은 피부의 신라 토기들

동아시아를 호령했던 옛 조선(고조선)이 사라진 후, 그 땅에는 고구려(高句麗)와 부여, 낙랑,
백제, 신라, 가야 등의 수많은 나라가 생겨났다. 요녕성(遼寧省) 지역인 요동(遼東)과 요서(
遼西)에서 시작된 고구려가 오랫동안 양구를 통치했고, 6세기 중반 이후에 신라가 접수 받아
양록군(楊麓郡)으로 지명을 변경하여 400년 가까이 통치했다.
이들 토기는 양구 지역에서 나온 것들로 신라 조정에서 파견된 양록군 태수(太守)나 양구 지
역 세력가들이 사용했을 것이다.


▲  고려시대 청동 수저와 청동 사발

9세기 말, 신라의 영역이 크게 3개로 쪼개지면서 양구는 후고구려(태봉, 마진)를 세운 궁예(
弓裔)의 지배를 받는다. 이후 918년 왕건(王建)의 고려가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춘주(春州,
춘천)의 속현(屬縣)이 된다.
이들 청동 수저와 그릇은 지역 세력가나 관리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숟가락이 지금보다 훨씬
커 그들의 왕성했던 식성을 보여준다.


▲  푸른 꽃이 그려진 백자 청화초화문 항아리 (조선 후기)
백자 피부에 깃들여진 꽃이 무척 곱다.

▲  왜정 때 만들어진 하얀 그릇과 '양구군 함춘리 이임명' 글씨가
새겨진 검은 피부의 놋그릇

▲  1950년대 이후 양구 군인들이 사용했던 수통과 수류탄 등잔,
군용 반합과 숟가락, 피복바구니

▲  이 땅의 경제를 이끌었던 20세기 지폐들

개인적으로 오른쪽 줄의 자주색 1,000원권과 점선이 있는 10,000원권, 그리고 1980년대에 사
라진 500원권에 크게 마음이 간다. 이들을 손에 쥐며 사용했던 것이 정말 엊그제 같은데 새
지폐에게 모두 밀려나면서 대부분 불살라지고 말았다.


▲  추억이 되버린 다양한 전화카드(위)와 서민들을 희망고문시켰던
여러 복권들(아래)

▲  옛 초등학교 교과서와 가방 (1970~80년대)
나도 어렸을 적에 저런 책으로 공부를 했었지. 근데 '보건'이란
교과서는 처음 본다.

▲  방산초교(방산국교)를 졸업한 어떤 이의 솔직한
생활통지표와 졸업 수료증(1978년)
내 초등학교 시절(그때는 국민학교)에도 저런 생활통지표가 쓰였다. 나의
교과학습 성적표에는 늘 '양'과 '가'만 가득했었지. '수'와 '우'는
가뭄에 콩나듯 나왔던 걸로 ㅠㅠ


▲  1960년대 강원도 미인들의 위엄 (미스 강원 선발대회)
빛바랜 흑백사진에 나온 미인들, 지금은 70~80대 할머니가 되어 세상 어딘가에서
살고들 있을 것이다. 파릇파릇한 저들이 설마 백발 할머니가 될 줄은
누가 알았으랴.

▲  고종(高宗)이 관리를 임명하면서 내린 칙명(勅命) <광무 7년, 1903년>

▲  네모난 구멍이 파인 옛 동전들
위에 조그만 동전은 송나라(1107~1110년) 동전인 대관통보 당십전(代官通寶 當十錢)이고
밑에 3개는 조선 후기에 널리 쓰인 상평통보(常平通寶)이다.

▲  왜정 시절 결전식기(決戰食器)와 궁성요배(宮城遙拜) 전단

돌다리와 붉은색 해가 담겨진 윗 사진은 왜열도 동경(토쿄)에 있는 황거(皇居, 코쿄)이다. 황
거란 왜열도 백성들의 영원한 등골브레이커 왜왕(倭王)과 그 떨거지들이 서식하는 곳으로 20
세기 전반기 왜국 군국주의의 상징과 같은 곳이다. 왜정은 저런 것들을 통해 이 땅의 사람들
에게 충성과 협조를 강요했다.


▲  의친왕 이강이 1914년 초가을에 쓴 글씨 (가운데 유물)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1955)은 고종의 5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귀인 장씨이다. 이곳
에 그의 글씨가 1점 전시되어 있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끝없이 펼쳐진 대륙은 그 드넒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산은 솟고 물은 흐르며 온갖 경계는 높
고 낮다. 이글거리는 태양은 그 밝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구름은 모이고 달은 숨으며 온갖 물
상은 같은 것이 없다. 이것이 하늘과 땅이 크다고 하지만 오히려 아쉬운 것이 있다.

아아! 인생만사 잠시라도 그 높고 낮은 산수와 변화무쌍한 구름과 달에서 그것을 즐기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명(命)을 아는 사람은 산에 가면 산과 함께 높아지고, 물을 만나면 반드
시 물과 함께 맑아지고, 구름과 마주치면 반드시 구름과 함께 치사(致辭)하고, 달을 만나면
달과 함께 숨어서 그 오는 것에 나를 맡길 뿐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그 안은 비워두고 그 바깥은 채우며, 그 날카로운 끝을 무디게 하고 그 등지
는 것을 벗어나야 한다. 쓰이게 되면 행하여 그 능력을 팔지 않으며 버려지면 숨어서 그 몸을
치욕스럽게 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세상에 처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  김형석 교수가 기증한 조선시대 백자들
김형석은 2012년 양구에 '시와 철학의 집'을 개관한 인연으로 자신이 수집했던
백자와 청자, 서화(書畵) 등 580여 점을 양구군에 기증했다.

▲  고고한 푸른 빛을 드러낸 고려 청자들
저 청자로 마시는 차와 곡차(穀茶)의 맛은 어떠할까? 아무리 맛없는 곡차나
쓴 차라고 해도 저들을 통하면 달달한 맛으로 바뀔 것 같다.

▲  고려 상감청자(象嵌靑瓷) 사발

▲  조선 분청사기(粉靑沙器) 사발

▲  조선 백자 사발

▲  조선 후기 청화백자

▲  북한에서 넘어온 상감청자(1990년 작)

▲  빛깔이 고운 청자상감과초화문 꽃병
(1990년 북한)

양구 지역이 북한과 살을 대고 있는 현장이다보니 북한에서 넘어온 존재들이 여럿 담겨져 있
다. 이들은 송광호 기자가 시베리아와 북미대륙 등에서 수집한 것을 양구군에 기증한 것으로
북한을 코 앞에 둔 곳이라 그런지 꽤 남달라보인다.


▲  북한의 소액 화폐들 (50전, 1원, 50원짜리)

▲  북한의 중/고액 화폐들 (1원, 10원, 100원, 200원, 500원)

▲  20세기 중/후반 영화 포스터들

▲  20세기 영화포스터와 여러 잡지들

▲  조촐하게 재현된 옛 극장 출입문


▲  옛 초등학교 교실을 재현한 추억의 교실 (박물관 세미나실)

나도 저런 교실에서 초등학교(국민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에는 저 의자와 책상이 딱 사
이즈에 맞았었는데 이제는 어떻게 저기에 앉아서 공부를 했는지 고개가 갸우뚱할 정도로 좁다.
그만큼 나의 면적이 넓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뚱뚱한 것은 아님)
이곳은 전시용 외에도 강연과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교육 공간으로도 쓰이고 있다.


▲  추억의 교실 한복판에 놓여진 난로

내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는 겨울마다 저 난로를 교실 한복판에 두어 난방을 했었다. 담당
주번은 학교 시설물을 수리하는 곳이나 창고에서 장작을 가져와 난로에게 먹였는데, 비록 오
늘날 난방기구만은 못해도 저 난로가 몸을 푸는 동안은 그런데로 따스했던 것 같다. 가끔 난
로에 도시락을 올려서 따끈하게 덥혀서 먹기도 했고 라면을 끓여먹기도 했었지.

허나 세월이 흐르면서 도시가스나 전기로 대체되었고 그로 인해 저런 난로와 장작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다. 저 난로의 온기를 받으며 교실에서 겨울잠을 잤던 본인으로서는 조금 아
쉽기는 하지만 어찌하랴. 그것 또한 변화의 과정이거늘, 이제는 정겨운 풍물시(風物詩)가 되
어 이런 곳에서나 만날 수가 있다.



 

  양구 근현대사박물관 뜨락과 가오작리 선돌

▲  근현대사박물관 뜨락 (장독대, 연자방아)

햇살이 내리쬐는 근현대사박물관 뜨락에는 양구 곳곳에서 가져온 비석과 연자방아, 맷돌, 돌
절구, 항아리 등의 문화유산이 자리를 채우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양구향토사료관 시절부터
있던 것이라 꽤나 낯이 익은데, 문화유산을 기증하여 박물관을 크게 살찌운 이들을 위한 '근
현대사 자료기증 감사비'가 한쪽에 닦여져 있어 그들을 두고두고 기리고 있다.

▲  현역에서 물러나 한가로운 여생을
보내는 연자방아

▲  나무 그늘 밑에 모인 비석들


▲  서로를 보듬고 있는 조그만 비석과 석인(石人)
늦가을에 버려진 낙엽처럼 존재의 가치를 상실한 채, 뜨락의 일부가 되버린
그들의 초췌한 모습에 쓸쓸함만이 감돈다.

▲  초가3간 수복주택(收復住宅)

수복주택은 6.25전쟁 이후 미국군이 양구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지어준 초가이다. 나왕목으로
지었다는 특징 외에는 일반 초가와 크게 다를 것은 없으며, 수복(양구 지역은 1953년 이전까
지 북한 치하였음) 이후에 지었다고 해서 '수복주택'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허나 새마을운동 이후 대부분 사라지고 이곳으로 이전된 2채만 겨우 살아남아 수복주택의 존
재를 아련히 전해주고 있으며, 현재는 전통공예체험 장소로 쓰이고 있다.


▲  근현대사 자료기증 감사비 (김형석 교수)
그들의 크나큰 공로가 있기에 이 첩첩한 산골에 근현대사박물관이 단단히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  양구 선사박물관의 상징, 가오작리 선돌

선사박물관 앞에는 이곳의 상징으로 꼽히는 가오작리 선돌이 있다. 바닥에 평퍼짐한 돌을 깔
고 그 위에 세운 3m의 선돌로 아랫도리는 다소 볼록하여 풍만해 보인다. 중간에는 폭이 다소
넓어졌다가 위로 갈수록 일정하게 줄어들면서 세모로 머리 부분을 마무리 지었는데, 한반도의
배꼽을 칭하는 양구의 토박이 선돌이라 그럴까? 몸매가 한반도와 비슷하게 생겼다.
그의 얼굴에는 동그란 두 눈과 눈썹, 세모난 코, 살짝 구부러진 입 등이 앙증맞게 새겨져 있
어 정말 깜찍하기 그지 없다. 하여 나는 그를 '선사시대의 미소'라 칭하며 내 마음 바구니에
계속 넣어두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입과 눈은 원래부터 있던 것은 아니다. 가오작리에 있던 시절, 동네 사람이나 군
인이 심심풀이로 새긴 것으로 비록 수작(秀作)은 아니나 그렇다고 졸작도 아니어서 어색함이
없이 잘 새겨 놓았다. 예전(2008년)에 비해 눈썹과 코가 진하게 표현되어 그때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다가와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그도 내가 올 것을 알았는지 미리 얼굴을 다듬은 모양
이다.
그래도 어여쁜 누님처럼 긍정이 느껴지는 눈과 미소가 드리워진 입술은 여전하여 이곳을 찾은
이들에게 웃음과 기쁨을 선사한다.

원래는 근현대사박물관과 가오작리 선돌만 보고 바로 빠지려고 하였으나 앞에서 선사박물관이
진하게 아른거리니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지나친다고 애써 무시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입장료도 무료이고 시간도 아직 넉넉하니 잠깐 발을 들인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다.
간만에 발을 들인 선사박물관도 근현대사박물관만큼이나 많이 달라져 있었는데, 마음 같아서
는 그 박물관과 뒤쪽에 있는 고인돌공원도 싹 다루고 싶으나 내용이 너무 길어지므로 본글에
서는 쿨하게 생략한다. (예전에 갔던 ☞ 양구 선사박물관 글 보러가기)

* 양구 근현대사박물관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하리 510 (금강산로 439-51, 54 ☎
  033-480-2677)
* 양구 근현대사박물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양구 선사박물관



 

♠  양구 속의 조그만 섬, 소한민국이라 불리는 한반도섬

▲  들판이 되버린 파로호 인공습지 (희망의 다리 부근)

양구 근현대사박물관과 선사박물관 세트를 둘러보고 잠시 잊었던 파로호 인공습지를 마저 거
닐었다. 습지라고는 하지만 오랜 가뭄에 지쳐 물은 사라지고 잡초만 무성한 황량한 들판이 되
버리면서 습지란 이름을 무색하게 만든다. 정말 때를 잘못 맞춰서 온 것이다.
그런 가련한 습지를 왼쪽에 끼고 북쪽으로 가면 한반도섬이 나온다. 양구가 한반도의 정중앙
임을 강조하고자 한반도를 축소 재현하여 띄워놓은 섬으로 소한민국을 칭하고 있다. 하지만
가뭄의 악영향으로 섬의 자격을 상실한 채, 그야말로 두툼히 솟은 언덕 신세가 되버렸다. 이
곳 매력은 물에 떠있는 한반도섬 자체의 모습인데 섬은 커녕 잡초 속에 두툼히 솟은 한반도
언덕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  가뭄에게 빼앗긴 습지에도 봄은 오는가? (한반도섬 남쪽)

▲  사막처럼 되버린 인공습지 (한반도섬 동남쪽)
이곳은 잡초도 포기했나보다. 거의 맨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  인공습지 강변(뱃길나루터)에
장식용으로 놓인 옛날 배

▲  알 모양으로 생긴 소한민국 조형물


한반도섬이나 지형이 갑자기 유명세를 탄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그때 영월(寧越)에서 3면
이 강으로 둘러싸인 한반도 모양의 지형이 발견되어 크게 주목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후 옥
천(沃川) 등 여러 곳에서 대자연이 빚은 비슷한 지형이 발견되어 한반도지형이란 이름을 지니
게 되었다.
한반도와 비슷하게 생겨먹은 자연산 지형이 천하 곳곳에 숨겨져 있어 참 신비롭기 그지 없는
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양구는 아예 한반도섬을 만들어 띄워놓았다. 하지만 그런 것이 자칫
우리의 강역과 활동무대를 한반도로 국한시키는 모양새로 비춰지기도 한다. 우리는 원래 만주
와 동북3성, 연해주, 산동반도, 중원대륙 화북(華北)과 서해바다 지역, 왜열도, 유구(오키나
와) 지역까지 다스렸던 잘나갔던 민족이다.
허나 잘난 조상보다는 제삿밥도 아까운 못난 조상이 더 많아 그 넓은 땅이 모두 갈라지고 흩
어졌으며, 민족은 분열되어 겨우 좁은 한반도만 추스린 딱한 신세가 되었다. 그 한반도도 남
북으로 갈라져 남북분단의 비애를 겪고 있으며, 개양아치 같은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 고
통을 받고 있다.
다음에 한반도형 섬을 닦는다면 중원대륙과 일찍이 떨어져나간 왜열도는 빼더라도 대마도(對
馬島)와 동북3성, 만주를 포함하여 통 크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한반도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중심이자 일부이지 모두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양구 속의 섬, 한반도섬을 이어주는 나무데크 다리
다리 높이는 4m 정도 된다. 원래대로라면 물이 2~3m 정도는 차있어야 되는데
50cm는 커녕 물기조차도 없다.

▲  억새가 춤을 추는 한반도섬 동쪽 (양구읍내 방향)
황량한 들판을 보니 마치 드넓은 대륙이나 초원을 거니는 기분이다. 한반도섬에서
옛 조선이나 고구려 같은 대륙의 기분을 느낄 줄이야. 역시 우리에게는
이런 좁은 땅보다는 넓은 대륙이 딱 어울린다.

▲  물이 없는 다리를 건너는 기분은 사람이 없는 도심 번화가를
걷는 기분일 것이다. (서쪽에서 바라본 나무데크 다리)

▲  한반도섬 동쪽에 닦여진 푸른 독도와 울릉도

▲  울릉도의 모습
한반도섬 주변에는 울릉도와 독도, 제주도가 두툼하게 닦여져 있다.
(울릉도와 독도는 접근 불가, 제주도는 접근 가능)

▲  그늘이 별로 없는 한반도섬 산책로

한반도섬은 나무와 수풀로 가득한 녹색의 섬이다. 산책로가 잘 닦여져 있고 다리를 쉬어갈 수
있는 쉼터도 갖추어져 있으며, 섬 복판에는 공군에서 지원받은 비행기 1대가 자리하여 조촐하
게 눈요깃감이 되어준다. 그리고 섬 서부에는 짚와이어(짚라인)가 있다. (짚라인은 서천 건너
편 산에서 타면 됨)

바깥에서 한반도섬으로 인도하는 길은 섬 북쪽과 동쪽, 남쪽에 있으며, 남쪽 다리는 제주도로
상징되는 섬을 경유한다. 그 외에 짚라인을 이용해 공중을 가르며 짜릿하게 들어서는 방법이
있다. (짚라인은 유료임)


▲  한반도섬 옆구리를 흐르는 양구서천
물은 섬 서쪽 서천에서만 겨우 흐르고 있었다. 물이 더 차야만 섬 주변과
인공습지를 촉촉이 어루만져줄 것인데 서천 하나로도 벅차다.

▲  양구서천과 그 너머로 보이는
공수리, 동수리 지역

▲  한반도섬의 하늘을 지키는
RF-4C 정찰기


한반도섬 한복판에는 현역에서 물러난 정찰기 1대가 매달려 있다. 미국 맥도널 더글라스사에
서 F-4C전투기를 기반으로 만든 비무장 항공정찰형 모델로 1962년 개발에 착수해 1963년 5월
에 최초로 비행을 했는데, 이 땅에는 1989년 12월 18일 3대가 수입되었고, 1990년까지 18대를
더 도입하여 항공정찰용의 역할을 수행했다.
허나 RF-16전력화에 따라 2014년 6월 30일 퇴역을 했고, 공군의 협조를 받아 이곳에 두어 한
반도섬의 조촐한 볼거리이자 휴전선을 머리에 인 양구의 현실을 일깨워주는 안보용 볼거리로
삼고 있다.


▲  한반도섬 짚라인(짚와이어)
서천 건너 산에서 짚라인을 타고 바로 이곳에 착륙을 한다.

▲  한반도섬 남쪽 끝에서 바라본 인공습지
다음에는 어설픈 섬이 아닌 완전한 한반도섬을 만나고 싶다.

▲  한반도섬에서 바라본 울릉도(오른쪽 섬)와 나무데크 다리

▲  파로호 인공습지와 한반도섬을 뒤로 하며

한반도섬을 1바퀴 둘러보고 남쪽 다리를 통해 동수리로 건너가려고 했으나 마침 다리 보수공
사로 통행이 금지되어 있었다. 하여 할 수 없이 건너왔던 동쪽 다리를 통해 육지로 넘어왔다.
한반도섬은 이렇게 볼일이 끝나 다시 읍내로 나가야되는데, 까마득하게 보이는 읍내를 보니
정말 멀리 오긴 했다. (양구터미널까지 약 3km) 도보 외에는 딱히 길이 없어 파워 도보로 양
구 읍내와의 간격을 좁혀나갔다.

방산면에 있는 다음 행선지로 가고자 읍내로 들어섰으나 오후 더위에 몸이 제대로 지쳐서 귀
차니즘이 파도처럼 몰려온다. 오늘 이 정도로 충분하다 여기고 마음을 곱게 접고 철수할까 했
으나 그때 방산면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눈 앞에 나타난다. 하여 약해진 마음을 다 잡으며 그
차에 몸을 실었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막을 고하며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한반도섬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고대리 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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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수돗물의 탄생지, 성수동 수도박물관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

서울 수도박물관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



' 우리나라 수돗물의 고향, 수도박물관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 '

수도박물관 본관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 송수실)

▲  수도박물관 본관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 송수실)

성수동 느티나무 수도박물관 정수지와 정수지 환기장치

▲  성수동 느티나무

▲  정수지와 정수지 환기장치

 



 

♠  우리나라 수돗물의 탄생지, 수도박물관 입문

▲  수도박물관 입구 (저 고개를 넘으면 수도박물관임)

봄이 힘겹게 겨울 제국을 몰아내고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수놓던 4월의 한복판에 서울숲 옆
구리에 자리한 수도박물관을 찾았다.
서울숲역(수인분당선)에서 남쪽으로 5분 정도 가면 뚝도아리수정수센터 교차로로 여기서 한강
사업본부 쪽으로 가면 하늘색 피부의 수도꼭지 모형이 마중을 하는데 그를 지나 야트막한 고
개를 넘으면 바로 수도박물관이다. <고개에서 오른쪽(서쪽)으로 가면 서울시 한강사업본부와
한강 산책로로 이어짐>


▲  20세기 초, 뚝도수원지 상수도 보호구역을 표시하고자 세운 '경성
수도상수 보호구역표(京城水道上水 保護區域標)' 돌기둥과 독기(왼쪽)

▲  수도박물관 본관으로 인도하는 산책로
(왼쪽 건물이 '물과 환경전시관', 오른쪽은 '완속여과지')

▲  완속여과지(緩速濾過池)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2호

수도박물관 본관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의 오른쪽(서쪽) 너른 잔디밭에 하얀 피부의 네모난 것
들과 문짝이 달린 하얀 건물이 주렁주렁 보인다. 그들은 '완속여과지'로 잔디밭에 바짝 누운
하얀 것들은 환기구이고, 문이 있는 건물은 완속여과지 내부로 들어가는 출입구이다.

완속여과지는 고운 입자의 모래층에 물을 천천히 통과시켜 불순물을 잡아내는 정수 방식으로
여기서 '완속'은 느린 속도를 뜻한다.
1908년 5개의 여과지(濾過池)를 설치하여 작동에 들어갔고 1938년 1지를 더 증설했는데 면적
은 4,344㎡로 겉으로 보면 딱히 고색이 와닿지 않지만 송수실과 더불어 이 땅의 철근콘크리트
구조물 중 가장 늙은 것으로 꼽힌다.

여과지의 정화 순서는 대략 이렇다. 한강에서 물을 가져와 제일 먼저 침전지(沈澱池)에서 모
래 등의 무거운 물질을 걸러낸다. 그런 다음 모래와 자갈층으로 구성된 완속여과지로 보내는
데 여과지 모래층에서 증식하는 미생물을 이용해 물속 부유물질을 걸러내고 분해하는 방식으
로 정수가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물의 탁도(濁度)가 낮아지며, 세균을 비롯해 암모니아, 철,
망간 등도 거의 걸러진다.
모래층의 두께는 80cm를 기준으로 했으며 여과 속도는 하루에 4m로 매우 느리다. 겨울철 동파
방지를 위해 상부를 철근콘크리트로 다지고 천정 위를 60cm 두께로 흙을 덮었으나 안전 문제
로 인해 상부의 흙은 모두 걷어내었다.

완속여과 방식은 수질이 괜찮은 경우 정수약품을 쓰지 않고 수도물을 생산할 수 있다. 게다가
장치도 간단하고 운전과 유지 관리도 쉽다. 하지만 넓은 부지가 필요하고 생산 효율이 떨어져
요즘 시대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이곳 여과지도 80년 이상 바쁘게 살아오다가 1990년 현역
에서 물러나 송수실과 함께 서울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함부로 할 수 없는 귀한 몸이 되었다.
(이 땅의 수원지, 정수장 중 처음으로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얻은 존재임)


▲  5열로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완속여과지 환기구들
지금은 여과지를 굴리지 않기 때문에 환기구 뚜껑이 늘 닫혀있다.

▲  출입구 윗쪽, 환기구 줄

▲  굳게 닫힌 완속여과지 북쪽 출입구

▲  완속여과지의 중간 출입구들

▲  유일하게 입을 벌린 완속여과지 출입구

1990년 현역에서 물러난 이후, 여과지는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신세가 되었고 출입구와 환기
구 역시 굳게 닫히고 만다. 그러다가 2008년 수도박물관이 닦이면서 칠흑처럼 어두운 여과지
내부가 속세에 공개되었는데, 출입구는 본관과 가까운 문 1개만 열어두어 호기심 어린 관람객
들을 맞이하고 있다.
여과지 출입구들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네모난 문을 지닌 하얀 건물과 윗부분이 살짝 구부
러진 문을 지닌 건물, 그리고 건물 없이 문만 있는 것 등 3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출
입구 앞 잔디밭에는 1908년부터 20세기 후반까지 정수장에 쓰였던 밸브와 관, 기계들이 놓여
져 조촐하게 야외전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  완속여과지 출입구 앞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20세기 초/중/후반
펌프와 수도밸브, 수도관, 온갖 기계들 (야외전시장)

▲  옛 밸브와 관들 (왜정~20세기 중반)

▲  완속여과지 내부 ①
조명시설을 설치하여 시야에 흐릿함을
다소 덜어준다.


▲  완속여과지 내부 ②
생김새가 마치 하천을 생매장하여 만든 복개도로의 밑도리 같다.


여과지가 한참 몸을 풀던 시절, 매주 1회 정도 모래 위의 부유물질을 치우는 작업을 했고, 매
년 1회 이상 모래를 보충하는 작업을 했다. 이들 작업은 모두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졌는데 새
로 투입된 모래는 밑바닥에 깔고 오래된 모래는 깨끗하게 씻긴 다음 맨 위에 수평으로 깔았다.
거둬낸 흙은 처음에는 한강에 그냥 내버렸으나 1970년대 중반부터는 도로 공사나 매립지에 투
입시켜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깔끔하게 활용되었다.


▲  완속여과지 내부 ③
물 대신 모래만 가득한 여과지의 속살, 얄미운 세월에 적응하며 비록
예전만은 못해도 전시용으로 새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모래가 깔린 부분은 접근 금지)

▲  완속여과지 내부 ④

▲  완속여과지 왕년의 모습
여과지는 이렇게 외치고 있을 것이다. '나 옛날로 돌아갈래~~~!'
허나 현실은 '응 안돼~~!'

▲  완속여과지 운영 당시 물 높이는 약 1.3m였다.



 

♠  수도박물관 본관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 송수실)

▲  수도박물관 본관 (제1정수장 송수실,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2호)

수도박물관이 둥지를 튼 곳은 이 땅 최초의 정수장인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 자리이다. 즉 우
리나라 수도물의 탄생지이자 고향이 된다.

1903년 12월 9일, 미국 기업가인 콜브란(C.H.Collbran)과 보스트윅(H.R.Bostwick)은 고종(高
宗) 황제로부터 상수도 부설 경영에 대한 특허권을 하사받는다. 그들은 1899년에 조선황실과
합작하여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들기도 했으며, 전차의 필요성을 황제에게 건의해 1899년 12
월 서대문~청량리 전차 노선까지 닦으며 돈을 긁어 모았다.
그들은 1905년 8월, 영국 사람이 설립한 대한수도회사(Korean Water Works Co.)에 특허권을
양도했으나 그들에게 공사 도급을 받으면서 1906년 8월 1일 공사를 시작하여 1908년 8월 제1
정수장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달인 9월 1일, 완속여과 방식으로 생산된 12,500㎥의
수돗물이 서울 4대문 안과 용산 일대 주민 125,000명에게 공급되면서 우리나라 근대 상수도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당시 서울에 닦여진 상수도 시설은 아시아권에서는 굉장히 빠른 것으로 수도물 보급으로 서울
시민들의 수인성(水因性) 질병 발생이 크게 떨어졌으며, 서울시내에 공용수도 220전(栓)이 설
치되어 물장수들의 연합체인 수상조합원들이 물을 각 집에 배달했다.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은 처음에 '경성수도양수공장'이라 불렸다. 이후 서울 확장에 따라 계속
몸집을 불려나갔으나 보다 월등한 정수 시설이 생겨나면서 완속여과지 방식으로는 도저히 타
산과 수요를 맞추기가 어렵게 되었다. 하여 1990년 바로 서쪽에 자리한 뚝도아리수정수센터에
정수장 기능을 모두 넘겨주고 은퇴하게 된다.
옛 뚝도수원지를 계승한 뚝도아리수정수센터는 35만㎥의 시설용량을 갖추고 있으며, 종로구와
중구, 용산구, 마포구, 성동구, 서대문구, 성북구 등 7개 구 102만 명에게 하루 평균 25만㎥
의 수도물을 공급하고 있다.

은퇴한 송수실은 계속 놀려두기가 아까워 내부를 손질하여 뚝도수원지의 역사와 옛 유물, 서
울 수도물의 역사와 문화, 수도물 생산과정 등을 머금은 수도박물관으로 2008년에 문을 열었
다. (완속여과지도 개방됨) 이 땅 최초의 정수장이 이 땅 최초의 수도물 전문 박물관으로 새
롭게 태어난 것이다. (천하에서 드물게 최초라는 타이틀을 2개나 가지고 있음)

수도박물관은 송수실을 다듬은 본관을 비롯해 별관, 물과환경전시관 등 3개의 전시실로 이루
어져 있으며, 본관은 '① 물장수를 만나다'→'② 뚝도에 세우다'→'③ 한강물이 들어오다'→
'④ 여과지를 지나다'→'⑤ 수돗물을 내보내다' 등 5개의 테마로 이루어져 뚝도수원지의 역사
와 서울 수도물의 역사를 흔쾌히 담고 있다.
그 외에 완속여과지와 정수지 등의 옛 정수장 시설과 야외전시장, 야외체험장, 생태연못, 이
곳의 오랜 터줏대감인 오래된 느티나무가 수도박물관 야외를 아낌없이 꾸며준다.
(송수실과 완속여과지는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문화재로 지정됨)

▲  동쪽에서 바라본 수도박물관 본관

▲  수도박물관 본관의 뒷모습

수도박물관 본관은 옛 제1정수장 송수실(送水室)로 1907년에 지어졌다. 사용된 기재와 시설은
모두 영국과 미국에서 가져왔으며, 붉은 벽돌조에 박공지붕을 씌운 공장형 건물로 화강석으로
된 아치형 포치를 정문에 설치하고 출입문과 좌우측 창틀도 아치로 둘렀다. 완속여과지와 더
불어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여과지보다 1년 먼저 지어졌으니 송수실이
그 1등이 된다.
건물 모습이 공장형이라고 하지만 십자가 같은 것이 없을 뿐이지 정말 오래된 성당과 교회로
봐도 어색하지가 않다. 정문 좌우에는 이곳 이름과 지어진 시기가 적힌 현판이 있고 그 위쪽
에는 꼬부랑 영어 현판까지 있다.

침전지와 여과지, 정수지를 거쳐 이루어진 수도물은 송수실의 모터펌프(영국 워싱턴사 제품)
를 통해 여기서 3.3km 떨어진 금호동 대현산배수지(해발 79m)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475mm와
500mm, 550mm 등 3종의 배수관을 통해 자연유하(流下) 방식으로 광희동(光熙洞)을 거쳐 을지
로5가 부근(옛 청녕교)까지 내려갔으며, 거기서 다시 4개 구간으로 분리되어 도심(4대문 안)
과 용산 지역으로 공급되었다.

1번 구간 : 을지로 보도 양쪽을 따라 동쪽으로 성벽(서울운동장 뒤쪽)까지 연결
2번 구간 : 퇴계로를 지나 한국은행 앞까지 연결
3번 구간 : 종로5가 부근에서 2개 방향으로 나눠짐, 동쪽 선은 동대문까지, 서쪽 선은 종로,
           광화문, 서대문을 거쳐 공덕동까지 연결
4번 구간 : 을지로, 남대문로, 서울역을 지나 용산까지 연결
<
뚝도에서 대현산을 거쳐 도심까지 이어지는 상수도 구간은 아래 지도를 참조>


▲  왜정 때 그려진 경성수도 일반평면도(京城水道 一般平面圖)
뚝도수원지에서 대현산배수지를 거쳐 도심으로 퍼져나가는 상수도 코스를
불빛으로 진하게 표현하고 있다. 녹색은 4번 구간으로 용산까지, 황색은
3번 구간으로 공덕동까지 이어진다. (축척 1/30,000)

▲  본관 정문 옆에 있는 '경성수도양수공장(京城水道揚水工場)' 현판

'경성수도양수공장'은 이곳의 첫 이름이다. 여기서 경성은 서울의 옛 이름 중 하나로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황성(皇城)'이라 불리다가 왜정 때 경성으로 격하되어 불렸고 1945년 이후에
는 서울이 정식 이름으로 자리잡았다.


▲  송수실의 탄생시기를 귀띔해주는 '광무11년건축(光武十一年建築)' 현판
여기서 광무는 고종의 2번째 연호로 그 11년은 1907년이다.
(시작된 해를 1년으로 매겨서 계산함)

▲  아치형 포치 위쪽 'SEOUL WATERWORKS 1907' 현판
영국 양이가 세운 대한수도회사에서 지은 것이라 저렇게 멋대가리 없이
영문 현판까지 붙여놓았다.

▲  박물관 전시실로 거듭난 수도박물관 본관 내부 ①

▲  박물관 전시실로 거듭난 수도박물관 본관 내부 ②

▲  본관 시작부터 마중을 나오는 물장수 형상

▲  대리석으로 지어진 뚝도수원지 한글과 영문 현판 (1956년)

▲  준공도면 - 1932년 경성수도 확장공사 당시 준공도면

▲  대현산 제1배수지 준공 표지석 (1907년)

여기서 가까운 금호동(金湖洞)에 대현산(大峴山, 123m)이란 뫼가 있다. 신당동의 뒷산이기도
한 그곳에 1907년 대현산 제1배수지(配水池)가 조성되었는데 바로 그 배수지의 준공표지석으
로 지금은 퇴직하여 이곳에 편안히 누워있다.
대현산 배수지의 시설용량은 제1배수지 6,407톤, 제2배수지 2,795톤 등 총 9,202톤으로 뚝도
수원지 송수실에서 보낸 물을 받아 도심으로 보냈다. (현재 대현산배수지는 공원으로 개방됨)


▲  대현산 제2배수지 준공 표지석 (1910년대)

▲  삼상유도 전동기 (펌프)
1926년 6월에 제작된 것으로 한강물을 잡아오는 역할을 했다.
(뚝도수원지 제1취수장에서 활동했음)

▲  완속여과지(오른쪽) 내부 모형도

▲  여과수 집수블록 (자구식 휠러블럭)
1956년에 제작된 것으로 넓이 600mmX600mm, 높이 200mm이다. 여과된 물을 통과시키고자
여과지 바닥에 설치한 것으로 옛 제3공장 여과지에 있었다.

▲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의 과거 모습
현재는 송수실과 완속여과지(사진 가운데 부분), 정수지만 남아있다.
(송수실 옆 건물과 한옥은 진작에 사라지고 없음)

▲  1926년에 만들어진 제어기 (전압 220V, 마력 20HP)
저압전동기를 돌릴 때 전압을 서서히 상승시켜 회전력을 높이는 장치로
뚝도수원지 제1취수장에서 활동했다.

▲  검은 피부의 곡관(曲管)
1937년 3월에 제작된 것으로 곡선 구간에 투입된 수도관이다.

▲  경성수도 확장공사 뚝도수원지 평면도 (1928년)
(평면도의 축척은 약 1/600)

▲  수도박물관 별관

본관 옆구리에는 별관이 있다. '① 추억의 상수도 문화'→'② 상수도의 변화와 성장'→'③ 미
래의 수돗물' 등 3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획전시도 가끔씩 열리며 그 뒤쪽에는 추억
의 상수도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야외체험장과 조그만 생태연못이 있다.


▲  별관에서 만난 추억의 수도계량기들
양수기, 수도미터라 불리기도 한다. 사용한 수도량을 체크하여 수도세를 징수하는
용도로 쓰인 것으로 계량기가 망가졌을 경우 교환을 요청하면 거의 무료로
해준다. (수도세를 징수하는 원천이기 때문에 그 정도는 서비스로 해줌)



 

♠  수도박물관 마무리 (정수지, 느티나무)

▲  정수지(淨水池)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내민 환기장치

본관 서쪽에는 푸른 잡초와 꽃으로 덥수룩한 공간이 있다. 이곳은 물을 잠시 머금어 깨끗하게
다듬던 정수지로 1908년에 지어졌는데, 면적 672㎡, 저수용량 920㎥로 처음에는 1지(池)만 있
었으나 1960년 1지를 추가로 지었으며 1990년에 송수실, 완속여과지와 나란히 은퇴했다.

수도물의 생산량과 공급량 간의 불균형을 조절하고, 여과 단계 이후 주입된 염소를 혼합시켜
물을 저장하는 정수 과정의 마지막 단계 시설로 완속여과지에서 검문을 거친 물은 여과지 각
면 출구에 설치된 양수기를 통해 400mm 관을 타고 정수지로 넘어왔다. 그리고 정수지를 나온
물은 350mm 관을 통해 바로 옆 송수펌프실(송수실)로 들어가 도심을 향한 대장정을 준비한다.

정수지의 속살은 지하에 묻혀 있으며 완속여과지와 달리 공개는 하지 않는다. 6개의 환기장치
(통풍구)가 땅 위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데 이들은 정수지 내부를 환기시키는 용도로 2012년 4
월 산화로 손상을 입어 수리를 하였다.


▲  가까이서 대한 정수지 환기장치들 (바로 옆에 완속여과지가 있음)
풀밭에 모여 앉아 봄의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는 모습들이 귀여워 보인다.

▲  수도박물관의 상큼한 자연물,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4-5호

별관 북쪽에는 야트막한 동산이 솟아있는데 그 동산에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이자 상큼한 존재
인 늙은 느티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340년 정도 묵은 것으로<보호수로 지정된 1982년 당시 추정 나이가 약 300년> 높이
20m, 나무둘레는 4.8m이다. 이곳 동쪽에 성덕정(聖德亭)이란 큰 정자가 있었는데 제왕이 군사
훈련을 사열하던 곳으로 양반과 선비들의 풍류 명소이기도 했다. 하여 그곳과 관련하여 심어
진 것이 아닐까 여겨지는데, 그들이 성덕정 주변에 흐르던 맑은 물을 마시니 그 물을 성스러
운 물로 높여 이곳 동네를 성수동(聖水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이 한강물을 식수로 사용했는데 깨끗하고 고마운 물이란 뜻에서 성수동이라 했다
는 설, 성덕정에서 '성', 뚝도수원지에서 '수'를 따서 성수동이라 했다는 설이 덧붙여 전해옴
, 어쨌든 물과 관련되어 유래된 것은 확실함>

나무 앞에는 상석(床石)이 누워있는데, 옛날에 동네 사람들이 당제(堂祭)를 지낼 때, 제물을
올리던 상이다. 허나 그 당제는 흩어진 과거가 되었으며, 뚝도수원지가 그의 그늘에 안긴 이
후, 수도물을 빚느라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지금은 이곳을 찾은 관람객을 위해 매일마다
품질이 좋은 그늘을 베푼다.

▲  느티나무의 옆 모습

▲  물과 환경전시관

수도박물관에서 마지막으로 살핀 존재는 '물과 환경전시관'이다. 정문 바로 앞에 자리한 공간
으로 '① 종이배를 띄우다'→'② 숲으로 간 물'→'③ 생활 속에 머물다','④ 물은 생명이다'
등 4개의 테마로 하여 물의 기능과 물과 환경, 물과 인체, 물과 생활 등 물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머금고 있다. 특히 '수분측정기'라는 흥미로운 것이 있어 몸 속의 수분 양을 직접 측
정할 수 있다.


▲  여기서 쿨하게 공개하는 내 몸의 수분량 (수분측정기)
적정 수분량보다 0.5% 정도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양호한 편이다.
(내가 좀 싱겁다보니 물을 좀 많이 마시는 편임)

▲  수도박물관을 뒤로 하며~~~ (정문 방향)
이렇게 하여 약 90분에 걸친 수도박물관 더듬기는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벌처럼
날라와서 벌처럼 보고 가려고 했지만 내 발길을 붙잡는 것이 하염없이 많아서
개미처럼 천천히 보고 나갔다. (천천히 둘러보는 것이 정석임)


* 수도박물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1가 642-1 (왕십리로27, ☎ 02-3146-5921)
* 수도박물관과 서울시상수도사업본부 홈페이지는 이곳을 ☞ 흔쾌히 클릭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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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9월 30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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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의 꿀명소를 거닐다 ~~ 우산, 우산성, 천장호, 천장호출렁다리 나들이 (청양3층석탑, 소원바위)

청양 우산(우산성), 천장호, 천장호출렁다리



' 충남의 내륙을 거닐다. 청양 겨울 나들이 '

천장호와 출렁다리

▲  천장호와 출렁다리

청양 우산 숲길 겨울 운무에 잠긴 우산

▲  청양 우산 숲길

▲  겨울 운무에 잠긴 우산

 



 

겨울 제국의 한복판인 1월의 어느 덜 추운 날, 충남의 지붕인 청양(靑陽)을 찾았다. 청양
땅은 20대의 한복판인 2000년대 이후 딱 2번째 방문으로 인연이 참 지지리도 없던 곳이다.
하여 몸뚱이와 정신이 더 늙기 전에 청양의 신선한 공기도 맛보고 그곳의 미답처(未踏處)
도 여럿 지우고자 흔쾌히 청양을 택했다.

아침 일찍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청양으로 가는 직행버스에 몸을 싣고 90분 정
도를 달려 청양시외터미널에 도착했다. 정말 오랜만에 발을 들인 청양읍내는 겨울 안개가
두텁게 내려앉아 가시거리가 100m 이내였는데, 마치 무너진 하늘의 구름 속에 갇힌 듯 눈
에 뵈는 것이 제대로 없어 잠시 방향 감각을 잃었으나 이내 감각을 되찾고 읍내 동북쪽에
자리한 우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  청양읍내의 포근한 뒷산, 우산(牛山) 둘러보기

▲  새벽에 내린 눈으로 얇게 하얀 옷을 걸친 우산 숲길

우산은 해발 237m의 조촐한 뫼로 청양읍내의 듬직한 뒷동산이자 쉼터이다. 겉보기에는 천하에
그저 흔한 뒷동산이라 '이곳에 뭐 볼게 있을까?' 의문이 들겠지만 그의 품으로 들어서면 생각
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작지만 넉넉한 그의 품에는 백제 때 지어진 우산성과 읍내에서 넘
어온 석조여래3존입상과 3층석탑 등 고색이 깊은 문화유산이 있고, 칼바위와 떡바위, 가족바
위 등 대자연이 빚은 아기자기한 바위들이 능선부에 포진해 있으며 짙은 숲에 산책로까지 잘
닦여져 있어 전혀 지루할 틈이 없다.
게다가 호국(護國)의 신이 된 청양 사람들의 위패가 봉안된 충령사(忠靈祠)가 남쪽 자락에 기
대고 있어 잠시 옷깃을 여미게 한다. 그만큼 우산은 청양읍의 소중한 뒷산이자 성역이다.

나는 우산 남쪽인 청양읍사무소(청양읍행정복지센터)에서 접근했는데 그 길을 오르면 충령사
와 그곳을 관리하는 '용암사(봉안사)'란 작은 절이 마중을 나온다.


▲  청양 읍내리 석조여래삼존입상 - 보물 197호

충령사 옆에는 용암사란 현대 사찰이 있다. 그 밑을 가만히 보면 맞배지붕을 지닌 기와 건물(
보호각)과 3층석탑이 층층이 자리한 모습이 눈에 보일 것인데, 그 보호각 안에 늙은 석조여래
3존입상이 고된 몸을 벽에 기대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 석불은 읍내리1구의 일명사터(逸名寺址)로 전하는 절터에 있던 것으로 1961년 밑에 있는
3층석탑과 함께 용암사 경내로 이전되었다. 그러다가 1981년 지금 자리에 정면 3칸, 측면 2칸
의 맞배지붕 건물을 짓고 그 안으로 옮겼다. (건물을 짓기 전에는 벽만 있었음)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가지고 있는데 본존불 키는 310cm, 좌측 보살은 223cm, 우측 보살
은 225cm이다. 장대한 세월에 오랫동안 두드려 맞은 흔적이 역력하고 광배 같은 경우는 날라
간 부분도 적지 않으나 얼굴부터 대좌까지 그런데로 잘 남아있다.

가운데 본존불은 주인공답게 좌우 보살상에 비해 덩치와 키가 크다. 머리에는 무견정상(육계)
이 솟아있고 얼굴은 고된 세월에 지쳐 많이도 울었는지 표정이 좀 지워졌으며, 어깨는 넓고
옷은 가슴부터 발목까지 U자형으로 주름을 이루면서 내려왔고 다리 사이에는 바지 자락이 표
현되어 있다.
몸통을 윤기나게 해주는 광배는 배 모양으로 불상과 같은 돌에 조성되었는데 파손이 심해 원
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려우며 두 발을 딛고 있는 대좌는 4각형으로 각 면에 안상(眼象) 3개를
새겨놓았다.
왼쪽 협시보살은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허리까지 절단이 난 것을 붙여놓은 것으로 얼굴은 본
존불과 비슷하며 허리를 약간 왼쪽으로 틀어 본존불을 향하고 있다. 옷은 밑부분이 넓게 퍼져
마치 두터운 겨울 옷을 걸친 듯 하다. 그리고 오른쪽 협시보살은 왼쪽 것과 비슷하나 얼굴 윤
곽이 둥굴고 앳되어 보이며 몸매가 아주 좋아 한참 물이 오른 젊은 여인네를 모델로 하여 지
은 것 같다.

그들은 당당한 신체 표현과 강인한 신체 묘사, 유려한 각선 등에서 높은 솜씨를 보이고 있지
만 평판적인 신체 묘사와 형식화된 조각기법으로 미루어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밑에서 바라본 석조여래3존입상
서 있을 힘도 부족하여 그들 뒤에 벽을
설치해 비빌 구석을 마련해 주었다.

▲  석조여래3존입상이 거처하는 맞배지붕
보호각 (뒤에 보이는 건물은 용암사)


▲  청양3층석탑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48호

석조여래3존입상 밑에는 작고 잘생긴 3층석탑이 있다. 그는 3존입상과 함께 일명사터에 있던
것으로 청양군청 뒤쪽으로 이전되었다가 1961년 석불과 함께 용암사에 안착했다.
네모난 바닥돌을 땅바닥에 깔고 그 위에 1층 기단(基壇)을 두었으며, 3층의 탑신(塔身)과 노
반(露盤), 앙화(仰花, 연꽃모양 장식)를 둔 머리장식을 차례로 올렸다. 1층 탑돌에는 네모난
문고리 장식이 있으며 탑 높이는 310cm, 조성시기는 고려 때로 여겨진다.

상처가 많은 석불과 달리 건강상태도 양호하며 머리장식도 잘 남아있어 꽤나 감동을 준다. 이
정도면 능히 국가 보물로 삼아도 손색이 없어 보이나 무슨 영문인지 상처 투성이 석불은 보물
, 멀쩡한 석탑은 지방문화재에 머물러 있으니 지정 기준이 참 아리송하다.

       ◀  청양3층석탑과 돌기둥 3기
3층석탑 옆에는 받쳐들 것을 상실한 채, 막연
히 하늘을 이고 있는 돌기둥이 있다. 이들 기
둥은 모두 3기로 일명사지에서 넘어온 것으로
여겨지며 건물 주춧돌로 추정된다.


▲  겨울에 잠긴 우산 숲길

용암사 밑에 자리한 늙은 석불과 석탑을 둘러보고 우산의 속살로 들어섰다. 아침 산책과 운동
을 나온 지역 사람들이 이따금 보일 뿐, 바람의 소리가 전부일 정도로 적막한데, 숲길도 매우
고와서 무척 탐이 난다.

산의 이름인 우산은 비올 때 쓰는 그것이 아닌 음매음매~ 소를 뜻하는 이름으로 그 이름에 걸
맞게 우산에 닦여진 산길을 추스려 '우산슬로길'이라 하였다. 여기서 슬로(slow)는 느리다는
뜻의 양이(洋夷) 말로 소의 발걸음이 느리니 천천히 둘러보라는 뜻에서 그런 이름을 붙인 모
양이다.
허나 아름다운 우리말을 놔두고 굳이 배배 꼬인 꼬부랑 영어를 써야 했는지 관련 공무원 철밥
통들의 사상이 심히 의심된다. '우산 느림길'이나 '우산 여유길'이라고 하면 참 좋았을 것을
굳이 외래어로 지어야 했는지 참으로 회의감이 든다. (이 땅의 아주 몹쓸 '영어 사대주의'의
폐해임)

우산슬로길은 칼바위길(2.43km)과 약수길(2.38km), 산성길(1.65km)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길
로 가던 봉화대과 우산성, 칼바위는 끼게 되어있으나 산이 작아서 굳이 코스에 연연할 필요는
없으며, 봉화대와 청룡정, 우산성, 용암사를 모두 겯드려 속성으로 보면 1시간 정도, 길게 잡
으면 90~120분 정도(휴식시간, 촬영시간 포함)면 넉넉히 산을 1바퀴 둘러볼 수 있다.


▲  솔내음이 춤을 추는 우산 소나무숲길

▲  숲을 뚫고 들어와 우산의 속살을 어루만지는 아침 햇살의 위엄
햇님이 찬란한 햇살을 쏘며 겨울에 잠긴 우산을 깨운다.

▲  어둠과 낮의 경계에 서다. 우산 소나무숲길

▲  우산성(牛山城) - 충남 지방기념물 81호

우산 윗부분에는 옛 백제(百濟)가 씌워놓은 우산성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있다. 산꼭대기 주변
을 빙둘러서 다진 테뫼식 산성(山城)으로 둘레는 약 965m로 파악되고 있는데, 경사가 있는 동
쪽을 제외하고 모두 돌로 다졌으며 높이는 최대 7m, 폭은 6m 정도 된다. 남벽과 동벽이 만나
는 곳과 북벽과 동벽이 만나는 부분이 다른 곳보다 조금 높은데 이들은 장대(將臺) 자리로 여
겨진다.
동남쪽 모서리와 동북쪽 모서리에는 성벽 바깥으로 네모 모양으로 성곽을 다진 이른바 치성(
雉城) 흔적이 있으며, 성벽에서 약 2m 안쪽에 문을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북문터 부근에는 50x50m 규모의 건물터가 있고 그 서쪽 봉우리 정상에서 19x2m 규모의 저장용
구덩이가 발견되었으며, 백제 때 토기와 고려 때 어골문(魚骨文) 기와조각, 조선 때 기와조각
이 발견되어 우산성이 백제부터 조선까지 골고루 쓰였음을 귀띔해준다. 그 외에 우물 2개가
있었다고 전하나 아직 발견되지 못했다.


▲  우산성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 북문터와 봉화대
헝클어진 성곽 위에 닦여진 계단을 통해 우산성 북쪽 밖으로 나갈 수 있다.

▲  눈옷을 뒤집어쓰며 나지막하게 누운 우산성 북쪽 성곽
(북문터 주변)

▲  윤곽만 남은 우산성 동쪽 성곽 ①
우산성 동쪽은 가파른 벼랑이 상당수이다. 하여 돌로 다지지 않고 지형을
가파르게 다듬어 마치 성곽의 윤곽처럼 다져놓았고 성곽 방어를 위해
그 밑으로 수풀을 잔뜩 심었다.

▲  윤곽만 남은 우산성 동쪽 성곽 ②

▲  구름 위에 올라서다 ① 우산성 동쪽 성곽에서 바라본 모습

청양읍내를 감쪽같이 훔쳐간 안개(운무), 우산 윗도리에 이르니 그 운무가 내 밑에 하얗게 펼
쳐져 있다.
'내가 이리 높이 올라왔나??' 고개가 갸우뚱할 정도로 이렇게 보니 해발 1,000m 이상 올라온
기분이다. 허나 현실은 200m 정도이다. 겨우 200m 높이를 올라왔을 뿐인데 이런 황홀한 광경
을 보다니. 그렇다고 그날 종일 비나 눈이 온 것도 아니다.
운무는 우산 밑에 낮게 누워 읍내와 키 작은 것들을 삼켜버렸고 우산 높이 이상의 뫼들만 고
개를 들고 있다. 저 너머로 보이는 뫼들은 청양의 진산인 칠갑산(七甲山)이다.


▲  구름 위에 올라서다 ② 우산성 동쪽 성곽에서 바라본 모습

▲  우산 떡바위

우산성 동쪽 성곽은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데 떡바위를 비롯한 상큼한 모습의 바위들이 줄지어
포진해 있어 우산의 조촐한 만물상(萬物相) 같은 곳이다. 떡바위는 떡과 비슷하게 생겨서 생
긴 이름으로 거의 인절미처럼 보이는데 우산을 빚은 대자연이 먹고 남은 떡이 딱딱하게 굳어
져 돌이 된 모양이다.


▲  수풀 속에서 간신히 고개를 내민 떡바위 부근 우산성
(동남쪽 성곽)

▲  우산 가족바위
바위들이 옹기종기 붙어있는 모습이 마치 가족처럼 보인다.

▲  위에서 바라본 가족바위 (왼쪽에 각이 똑바로 진 바위)

▲  천하를 훔친 운무의 위엄 ① (떡바위 주변에서 바라본 모습)
이렇게 보니 천하를 뒤덮은 운무가 마치 너른 호수처럼 보인다. 왼쪽에
작게 보이는 건물은 우산 남쪽 봉우리에 자리한 청룡정이다.

▲  천하를 훔친 운무의 위엄 ② (칠갑산 방향)

▲  천하를 훔친 운무의 위엄 ③ (청양읍내 방향)

▲  우산의 남쪽 끝을 잡고 있는 청룡정(靑龍亭)
우산 남쪽 봉우리에 들어앉아 청양읍내를 살피고 있는 청룡정은 6각형 정자로
1984년 10월에 지어졌다. 조망이 아주 일품으로 우산에 발을 들였다면
이곳에 꼭 들려 국보급 조망을 누리기 바란다.

▲  짙은 운무에서 서서히 해방되는 청양읍내
아침 햇살이 운무를 강제 해산시키며 그들로부터 청양 지역을 해방시키고 있다.
하여 이제 비로소 청양읍내가 푸른 하늘을 보게 되었다.

▲  서서히 걷히는 운무 (칠갑산 방향)

▲  우산을 정리하며~~~

* 우산성 소재지 :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읍 백천리 산69-5외
* 읍내리 석조여래3존입상, 청양3층석탑 소재지 :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읍 읍내리 산4-2



 

♠  칠갑산 자락에 묻힌 그림 같은 호수, 천장호(天庄湖)

▲  천장호 전망대

우산을 2시간 정도 거닐고 내려오는 사이, 읍내를 오리무중(五里霧中)처럼 짙게 감싸던 운무
가 싹 걷혔다. 파란 하늘과 햇님이 안개에 놀란 천하를 진정시키며 겨울 제국의 차가운 기운
도 조금씩 잠재운다.

읍내로 들어와 다음 행선지인 천장호를 가고자 군내버스터미널을 찾았다. 청양읍에서 천장호
는 시외직행버스와 청양군내버스가 운행하고 있는데 직행버스(청양시외터미널에서 승차)는 1
시간에 1~2회꼴로 있고, 군내버스도 비슷한 간격(1일 16회 정도)으로 다닌다. 속 편하게 직행
버스를 타는 것이 낫겠지만 시골군내버스가 격하게 땡겼고 마침 20분 뒤에 차가 있어 그 시간
을 억지로 죽이고 있으니 정산행 군내버스가 다가와 활짝 입을 벌린다.
버스는 칠갑산 북쪽 자락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칠갑산로를 15분 정도 달려 천장호(천장리)
에 나를 내려놓는다. 칠갑산로는 청양과 공주를 잇는 주요 도로이나 우회 국도가 생기면서 조
금은 한가해졌다. (천장호, 칠갑산 관광 수요는 여전히 많음)


▲  천장호전망대에서 바라본 천장호와 칠갑산

▲  확대해서 바라본 천장호와 출렁다리(가운데 다리)

천장호전망대는 천장호가 잘 바라보이는 칠갑산로 도로변 벼랑에 자리해 있다. 천장호 정류장
에서 서쪽으로 도보 3분 거리로 2016년 9월에 지어졌으며 전망대의 면적은 610㎡이다. 호수를
바라보는 전망대에 걸맞게 돛대 모양을 여럿 달아서 마치 배를 연상케 하는데, 이곳에 올라서
면 천장호 일대와 출렁다리는 물론 칠갑산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천장호 관광객들은 출렁다리와 천장호만 생각하여 이곳은 잘 오지 않는데 천장호의 전경을 싹
담을 수 있는 곳이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  천장호전망대에서 바라본 천장호
북쪽과 칠갑산 산줄기

▲  청양고추를 귀엽게 표현한 캐릭터

천장호전망대에서 천장호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펴보고 저 밑에 바라보이는 천장호로 내려갔다.
천장호는 1월 평일임에도 청양의 대표 명소에 걸맞게 관광객들이 많았다.
주차장을 지나면 식당들이 앞다투어 맛난 냄새를 풍기며 나그네를 유혹하는데 그 유혹을 지나
면 출렁다리로 인도하는 잘 닦여진 산책로가 고속도로처럼 펼쳐진다. 청양의 특산품인 고추를
형상화한 캐릭터와 2층 규모의 황룡정, 소금쟁이고개길이 차례로 나타나며, 그 길의 끝에 출
렁다리가 있다.

▲  황금색 지붕의 황룡정
천장호 장식용으로 지어진 정자이다.

▲  천장호 출렁다리로 내려가는 산책로
(소금쟁이고개)


▲  오늘도 푸르기 그지 없는 천장호

천장호는 농업용 저수지로 이곳의 지명인 천장리(天庄里)에서 이름을 땄다. 1972년 12월에 짓
기 시작하여 1979년 완성을 보았는데 면적은 1,200ha로 물이 청정하고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칠갑산을 수식하는 경승지로 오랫동안 명성을 누리고 있다. 거기에 한때 우리나라 최장의 출
렁다리로 추앙을 받았던 출렁다리까지 한복판에 걸쳐놓아 천장호의 위엄을 더욱 돋보이게 한
다.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천장호 출렁다리의 위엄을 몸소 체험하고자 함이다.


▲  천장호 소금쟁이고개

출렁다리 동쪽은 호수를 향해 길게 삐죽 나온 지형으로 서,남,북이 호수에 접해있다. 지금은
3면이 호수에 둘러싸여 있지만 원래는 소금쟁이고개라 불리던 고갯길로 청양에서 정산, 공주
를 이어주던 길목이다. 이곳이 소금쟁이고개라 불린 사연은 대략 이렇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아가던 옛날의 어느 봄날, 소금장수가 이곳을 넘다가 잠시 소금지게를
세워놓고 쉬고 있었다. 그런데 담배나 피워야될 호랑이가 갑자기 나타나 징하게 으르렁거리자
염통이 쫄깃해진 소금장수는 지게를 받치던 작대기를 들고 호랑이에 대항했다. 그러자 지게가
넘어지면서 시장에서 산 그릇과 볏짚가마니에 들어있는 소금이 와르르 쏟아지고 말았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단순한 호랑이는 슬금슬금 뒷걸음질하다가 줄행랑을 쳐버렸다. 그렇
게 호랑이를 물리친 소금장수는 아랫도리가 이상해 살펴보니 글쎄 소변이 흘러내린 것이 아닌
가? 너무 놀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바지에 실례를 한 것이다.

그날 밤, 주막에서 하룻밤 머물면서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 소문이 널리 퍼
져 이곳 이름이 소금쟁이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즉 소금쟁이가 호랑이를 물리치고 동시에 실
례까지 범했던 고개란 뜻이 된다. 허나 지금은 고개가 아닌 육지와 출렁다리를 잇는 자라목
같은 지형이 되버렸고 고갯길의 역할은 호수 북쪽에 닦여진 도로(칠갑산로)가 맡게 되었다.


▲  천장호 서쪽 황룡 쉼터에서 바라본 소금쟁이고개


▲  소금쟁이고개에서 출렁다리를 이어주는 접속 다리

▲  옆에서 바라본 접속다리와 출렁다리의 빨간 고추 기둥

▲  드디어 건너게 되는 천장호 출렁다리

천장호 출렁다리는 흔들다리의 일종으로 2007년 11월에 착공하여 2009년 7월 28일 완성을 보
았다. 길이 207m, 높이 24m, 폭 1.5m 규모로 한때는 이 땅에서 가장 크고 긴 흔들다리였으며,
동양에서 2등으로 컸다. (지금은 이보다 큰 흔들다리와 출렁다리가 많이 생겨났음)
약 30~40cm 정도 흔들리게 설계되어 있어 스릴감을 주며 중간중간에 다리 밑 호수가 잘 보이
도록 거울 바닥을 깔아서 염통의 쫄깃함을 더해준다. 물론 단단하게 지어졌겠지만 혹시나 그
판을 밟으면 밑으로 쑥 빠질 것 같은 두려움이 일어나 나도 모르게 그 바닥은 피해 움직였다.
다리 길이는 겨우 207m에 지나지 않으나 염통을 적지않게 자극시키다보니 체감거리는 그 5배
는 되는 것 같다. 세상에 이보다 긴 200m가 또 어디에 있을까?


▲  출렁다리 한복판에서
다리의 거울 바닥 밑에는 얼어붙은 호수가 차갑게 입을 벌리고 있다.

▲  유연하게 솟구친 출렁다리의 위엄

▲  출렁다리 서쪽에서 바라본 천장호
호수 너머 벼랑에 천장호전망대가 있다.

▲  출렁다리 서쪽에 자리한 용(왼쪽)과 호랑이 조형물(오른쪽)

출렁다리를 건너면 용과 호랑이상이 마중을 하면서 길은 3갈래로 갈린다. 칠갑산 등산이 목적
이라면 서쪽 산길로 들어서면 되며, 호수도 둘러보고 이곳의 오랜 명물인 소원바위도 보고 싶
다면 북쪽 산책로(천장호 둘레길)로 가면 된다. 남쪽도 호수 산책로이나 길이 중간에 끊긴다.

출렁다리 서쪽에 자리한 용과 호랑이상은 단순한 장식용이 아닌 칠갑산의 유래와 전설을 상징
하고자 세운 것이다. 칠갑산은 만물생성의 7대 근원인 '七'자와 육십갑자(六十甲子)의 첫 자
이자 싹이 난다는 뜻에 '甲'자로 이루어져 있어 생명의 발원지를 뜻한다고 한다. (산자락에 7
명의 장수가 태어날 명당이 있어 칠갑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옴)
또한 이곳에는 1,000년의 세월을 기다리며 승천을 준비하던 황룡(黃龍)이 있었는데 부근에 살
던 아이가 위급에 처하자 직접 다리를 놓아 아이를 구했다고 하며. 이를 지켜본 호랑이는 산
에 들어가 칠갑산을 지키는 영물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악을 다스리고 복을 준다는 황
룡의 기운과 영험한 기운을 지닌 호랑이의 기운이 같이 서려있어 여기서 기도를 하면 복을 받
고 건강한 아이를 낳는다고 전한다.


▲  천장호 둘레길에서 바라본 출렁다리의 위엄

▲  호수 옆구리에 닦여진 천장호 둘레길 (소원바위 입구)
호수의 서쪽을 따라 나무데크식으로 둘레길을 닦았다. 길을 잘 다져놓아서
거닐기에 아주 좋으며, 둘레길을 한 굽이 지날 때마다 천장호와
출렁다리는 조금씩 모습을 달리한다.



 

♠  천장호 마무리 (소원바위)

▲  천장호 둘레길에서 만난 칠갑산의 수호신, 금색 황룡상 (황룡 쉼터)

호수를 따라 펼쳐진 천장호둘레길은 해가 짧다는 구실로 다 돌지 않고 황룡상이 있는 쉼터까
지만 갔다. 마음 같아서는 둘레길을 다 돌면 좋겠지만 그 정도만 돌아도 천장호에 대한 성의
는 충분히 보였다 여겨진다.
거기서 쿨하게 길을 되돌려 소원바위를 보고자 잠시 호수를 버리고 언덕길을 오르니 길 중턱
에 천장호의 오랜 명물인 소원바위가 모습을 비춘다.


▲  황룡 쉼터에서 바라본 출렁다리

▲  겨울 가뭄으로 수분이 다소 줄어든 천장호 상류 부분

▲  소원바위로 인도하는 언덕길 (천장호둘레길)
언덕을 넘으면 내리막이 나오는데 그 길로 가면 다시 호수길과 만난다. 즉 둘레길
북쪽 구간은 '출렁다리 서쪽→소원바위입구→소원바위→호수길→
소원바위입구'로 순환형으로 짜여져 있다.

▲  주름선이 선명한 소원바위 (잉태바위)

천장호에 왔다면 출렁다리도 좋지만 꼭 만나야될 존재가 있다. 바로 소원바위이다. 그 모습이
마치 구석기시대에 절찬리에 쓰였던 주먹도끼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기자신앙(祈子信仰)의 현장으로 입소문이 났던 바위이다.
이 바위가 아이를 기원하는 현장이 된 것은 고려 때로 여겨지는데 다음의 믿거나 말거나 전설
이 전하고 있다.

그 시절 시집간 딸이 5년이 넘도록 아이를 얻지 못하자 보다 못한 친정어머니가 이곳에서 700
일 동안이나 정성을 기울여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칠갑산 수호신(산신)이 감동을 먹고 딸이
혼인 7년차가 되던 해에 바위에서 살을 떼어내 임신이 되도록 해주었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는 장성하여 용호장군(龍虎將軍)에 이르렀고 거란군(요나라)을 때려잡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마치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탄생설화 같지만 그는 아니
다.

최근에는 인근 목면에 거주하는 유모 할머니가 44살이 넘도록 자식을 얻지 못해 애태우는 아
들을 위해 매일 이 바위에서 기도를 올렸는데 혼인 7년차에 드디어 임신에 성공, 2013년 10월
29일에 건장한 아들을 얻었다. 앞서 전설도 혼인 7년차에 아이를 얻었고 이번 것도 7년차이니
이 바위는 결혼 7년차의 사람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소망을 빌면 거의 이루어진다고 하여 소원바위라 불리게 되었으며, 아이(특히 아들)를 기원하
던 현장이다보니 잉태바위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특히 천장호는 풍수지리상 여자의 자궁형상
이라 임신과 자손의 번창을 상징한다고 하며 그 이유로 소원이 잘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바위 앞에 걸린 줄에는 사람들의 소원이 적힌 종이가 가득 매달려 있고, 바위 피부에는
사람들이 소원을 들이밀며 붙인 동전이 즐비하다.


▲  주름이 가득한 소원바위 (잉태바위)

소원바위 앞에는 기도 자리가 닦여져 있다. 한쪽에는 소원을 적을 하얀 종이(소원지)와 펜이
비치되어 있어 종이에 소박하게 소망을 적어 바위 앞에 매달린 줄에 매듭을 지어 붙여놓았다.
이들 소원지는 일정 시기마다 소원 성취를 이루라는 뜻에서 모아서 소각을 하는데 그가 과연
명성처럼 영험하다면 내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고,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소문이 거짓이니
망치를 가져와 항의 표시를 해도 그는 할말이 없을 것이다.

바위 바로 앞에는 바구니가 놓여있는데 거기에는 1,000원 지폐가 담겨져 있었다. 사람들이 소
망을 접수하면서 놓고 간 것으로 그 돈은 과연 누구 호주머니로 들어갈지 궁금하다. 설마 바
위가 직접 챙기는 것은 아닐 것이고 천장호 관리사무소나 그를 후광(後光)으로 삼은 무속인이
나 종교인이 챙길 것이다. 재주는 바위가 부리고 돈은 사람이 챙기는 것이다.

* 천장호 소재지 :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천장리 (천장호길 24, 천장호 관리사무소 ☎ 042-
  940-2723)


▲  천장호 남쪽 부분

▲  출렁다리를 건너 다시 소금쟁이고개로

▲  천장호를 나오다 ~~~ (천장호 산책로)

소원바위에 약소하게 소원 하나를 들이밀고 출렁다리로 나왔다. 여기서 바깥으로 나가려면 꼼
짝없이 출렁다리를 이용하거나 칠갑산을 넘어야 되는데, 아무리 다리가 무섭다고 해도 산 하
나를 통째로 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체감거리가 긴 출렁다리를 건너 천장호 정류장으로 나왔다. 천장호전망대를 포함해 천장호 일
대에서 머문 시간이 2시간, 둘레길을 제대로 돌았다면 3시간은 걸렸을 것이다. 겨울에는 해가
짧아서 벌써부터 땅꺼미가 기지개를 펼 준비를 한다.

천장호 정류장에서 정산(서정리)으로 가고자 버스를 기다리는데 여기는 시외직행버스와 군내
버스 모두 정차한다. 그러니 먼저 오는 것을 타면 된다. 그런데 이번에도 군내버스가 당첨이
라 그를 타고 정산으로 나왔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생략하며 한겨울에 벌인 청양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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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9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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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급 조망과 넉넉한 볼거리를 지닌 서울의 숨겨진 명산, 호암산 ~~ (호압사, 호암산 정상, 민주동산 깃대봉)

호암산 호압사, 호암산 정상



~~~ 볼거리가 풍부한 서울의 숨겨진 명산, 호암산 ~~~
(호압사, 정상 주변)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호압사 석불좌상

호암산 남쪽 봉우리

▲  호압사 석불좌상

▲  호암산 남쪽 봉우리

 



 

천하를 접수한 가을이 늦가을로 숙성되어 가던 10월의 첫 무렵, 친한 후배와 나의 즐겨찾
기 뫼의 하나인 호암산을 찾았다.

1년에 여러 번씩 발걸음을 하고 있는 호암산(虎巖山, 393m)은 삼성산(三聖山, 480m)의 일
원으로 삼성산 서북쪽에 우뚝 솟아 있다. 서울 금천구와 관악구, 경기도 안양시에 걸쳐있
는 그는 산세(또는 산에 있는 바위의 모습)가 호랑이를 닮았다고 해서 호암산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옛 금천<衿川, 시흥(始興)> 고을의 주산(主山)으로 금지산(衿芝山), 금
주산(衿州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호랑이를 닮은 잘 생긴 뫼이나 풍수지리적으로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관악산과 함께 오랫
동안 서울을 위협하는 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조선 조정은 그들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에 따라 호암산 밑에 절(호압사)을 세우고, 관악산(冠岳山) 정상 밑에
절을 짓고 연못을 팠으며,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세우고,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
을 세로로 세우는 등, 그야말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이처럼 호암산에는 산의 매서운 기운을 누르고자 세웠다는 호압사를 비롯하여 한우물, 석
구상, 호암산성터, 제2한우물터, 약수사, 불영암, 삼성산성지 등의 늙은 문화유산과 절이
깃들여져 있으며, 조망 또한 일품이라 서울 대부분과 안양, 광명, 부천, 인천, 북한산(삼
각산)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온다.
또한 호랑이를 닮은 뫼답게 잘생긴 바위들이 잔뜩 포진해 있고, 산 정상부와 능선부로 오
르는 길이 잠시 각박할 뿐, 그 잠깐의 고생만 감내하면 부드러운 주능선과 국보급 조망이
두 망막과 마음, 다리를 즐겁게 해준다. 그밖에 시흥계곡과 호암산 잣나무산림욕장, 호암
산폭포 등의 명소가 있고, 서울둘레길5코스(사당역~석수역, 13.5km)가 호암산을 남북으로
흘러가며. 잣나무 산림욕장을 중심으로 호암늘솔길이 싱그럽게 닦여져 있어 산은 비록 작
지만 매우 알찬 팔방미인 뫼이다. 이러니 내가 호암산에게 단단히 퐁당퐁당 빠진 것이다.



 

  호압사(虎壓寺) 입문

▲  '호암산문(虎巖山門)'이라 쓰인 호압사 일주문(一柱門)

호압사입구(벽산아파트1단지) 정류장 동쪽에는 호압사 일주문이 팔작지붕을 펄럭이며 중생을
맞이한다.
이 문은 절에서 세운 것이 아니라 2000년에 금천구(衿川區)에서 지어준 것으로 그 당시 금천
구가 서울시 25개 자치구 민원행정실적평가에서 우수 구로 선정되어 시상금을 받았는데, 그
돈으로 '활기찬 금천구 만들기 기념'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관내에서 호압사의 입구이자 호암
산의 대표 관문인 이곳에 세운 것이다.

문 현판에 쓰인 호암산문은 호암산에 안긴 절, 즉 호압사를 뜻하며, 문이라고는 하지만 여닫
는 문짝이 없어 누구든 가리지 않고 맞이한다. 문 앞에는 호암산 안내문과 조그만 공원이 자
리해 있다.


▲  호압사로 올라가는 산길

일주문을 지나면 속세살이처럼 각박한 오르막길이 펼쳐져 시작부터 숨을 헐떡이게 한다. 절까
지 차량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포장길이 닦여져 있으나 경사의 패기가 대단하여 아
무리 4발 차량이라 한들 바퀴를 조심스럽게 굴려야 된다.
처음에는 경사가 조금 완만하나 서서히 기울기가 커지면서 주차장을 지날 쯤에는 상당히 급해
지며, 하늘과 한 발자국 가까워질수록 호압사의 모습이 솟아나듯 보이기 시작한다.


▲  콘크리트 석축 위에 모습을 드러낸 호압사

호압사는 돌로 다진 석축 위에 자리하고 있다. 경내 밑부분은 콘크리트로 높게 기단을 만들고
주차장과 해우소 등을 두었는데, 돌이 아닌 콘크리트라 다소 눈에 거슬린다. 차라리 돌과 흙
으로 2단이나 3단의 계단식 기단(基壇)을 다졌으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난다.
저 콘크리트 공간을 지나 2개의 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호압사 심장부에 이른다. 그럼 여기서
잠시 호압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호암산 서쪽 자락 230m 고지에 둥지를 튼 호압사는 호랑이를 누르는 절이란 뜻으로 자비를 강
조하는 불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이 절이 호랑이와 무슨 원수를 졌길래 호랑이
에게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을까?

호압사는 1394년 무학대사(無學大師)가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과연 그가
지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약사전에 조선 초기 석불좌상이 깃들여져 있어 그런데로 시기
는 맞아떨어지며, 조선 조정에서 관악산과 호암산의 매서운 기운을 잡고자 비보풍수의 일환으
로 세운 것은 분명해 보인다.
봉은사(奉恩寺)에서 작성한 '봉은사말사지(末寺誌)'에는 1407년에 창건되었다고 나오며, 태종
(太宗)이 호압(虎壓)이란 현액(現額)을 하사했다고 한다. 이후 400년 동안 적당한 사적(事績)
을 남기지 못했다가 1841년 승려 의민(義旻)이 상궁(尙宮) 남씨와 유씨의 시주로 법당을 중창
했으며, 1935년 만월(滿月)이 약사전 6칸을 중건하고 1995년에 삼성각을 지었다. 그리고 2008
년에 9층석탑을 세워 지금에 이른다.

서울 금천구의 유일한 전통사찰로 믿거나 말거나 창건설화가 한 토막 전해오고 있다. 이 설화
는 이 절이 호암산의 기운을 때려잡고 서울을 수호하는 절임을 강조하고자 후대에 그럴싸하게
지어진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태조 이성계가 백성들을 동원해 서울에 궁궐(경복궁)을 짓던 1394년, 궁궐 건
물이 완성되면 이상하게도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계속 무너지는 현상이 일어나자 태조는 뚜껑
이 폭발하여 공사책임자를 불러 추궁했다. 이제 책임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전하, 소인들이 일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면 호랑이를 닮은 커다란 괴물이 나타나 소인들을
위협하고 건물을 모두 때려부시고 사라집니다. 소인들이 막으려고 해도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어 다들 궁궐 공사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살펴주십시요!!'
그 말을 듣던 태조는 어이가 없어서
'너희들이 지금 나를 우롱하는 것이냐?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것이냐??'
책임자는 더욱 오금을 저리며
'어찌 전하께 거짓을 아뢰나이까. 정 믿기 어려우시면 오늘 밤 몸소 확인하심이 좋을 듯 합니
다'

하여 태조는 직접 확인할 겸 그날 밤 군사를 이끌고 공사현장에서 괴물을 기다렸다. 과연 어
둠이 내려앉자 반은 호랑이고 반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눈에 불을 강하게 뿜으며 현장
에 나타났다. 괴물이 건물을 부시려고 폼을 잡자 태조는 군사들에게 화살을 쏘게 했다. 허나
괴물은 화살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기껏 만든 건물을 보기 좋게 부시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괴물의 기세에 염통이 쫄깃해진 태조는 침소로 돌아와 한숨을 쉬며
'한양은 나와 인연이 아닌가 보구나. 개경으로 다시 돌아가야되나?'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인의 우렁찬 목소리
'한양은 정말 도읍지로 제격이다!!'
태조는 깜짝 놀라 소리가 들리는 밖으로 나가보니 아름다운 수염의 노인이 서 있었다.
'공은 뉘시오?'
'허허~ 그런 것은 아실 필요는 없구요. 전하의 근심을 덜어드릴까 하여 왔습니다'
태조가 표정을 바로 하고 그 대책을 문의하자 노인은 저 멀리 보이는 한강 남쪽의 한 산봉우
리를 가리켰다. 태조는 달빛 속에서 노인이 가리킨 곳을 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오매~ 호랑이 머리를 한 봉우리가 한양을 바라보고 있구나!!'
태조는 노인에게 산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물었다.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호랑이는 꼬랑지를 밟히면 꼼짝 못하니 산 꼬리 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입니
다'
알려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태조는 바로 무학대사를 호출하여 호랑이의 꼬리 부분인 지금 자리에 절을 짓게 하고 호랑이
를 누른다는 뜻에서 호압사라 이름 지었다. 그랬더니 궁궐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한
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금천 고을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과 같고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 까닭에 범바위(虎巖)라 부른다. 술사(術士)가
이를 보고 바위 북쪽에다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했다'라는 내용이 있어 이것이 호압사의
유래로 크게 여겨진다. 여기서 호갑은 '호압사'로 호압사의 다른 이름으로 많이 등장한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약사전을 비롯해 삼성각, 심검당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
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좌상과 50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살짝 속삭여준다.
호압사는 서울 장안에서 1년에 여러 번씩 발걸음을 하는 절의 하나인데, 그 이유는 호압사를
안고 있는 호암산 때문이다.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도봉산(道峯山)과 더
불어 나의 마음을 앗아간 뫼이다보니 호압사도 자연스럽게 발길이 늘어난 것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234 (호암로 278 ☎ 02-803-4779)
* 호압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호압사에서 바라본 호암산 서남쪽 봉우리
바로 저곳에 호암산의 명물인 석구상과 한우물, 불영암, 호암산성터가
깃들여져 있다.



 

♠  호압사 둘러보기

▲  호압사 서쪽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8-5호 (늦가을 사진)

경내에 들어서면 계단 양쪽으로 50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마중한다. 이들은 약사전에 있
는 석불좌상과 더불어 호압사의 오랜 내력을 밝혀주는 존재들로 서쪽 느티나무는 500년 정도
되었으며, 높이 7m, 허리둘레 4.2m이다. 그리고 계단 동쪽 나무는 키 11m, 허리둘레 3.6m이다.


▲  호압사 동쪽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8-6호 (늦가을 사진)

▲  호압사 심검당(尋劍堂)
건물 앞에 서 있는 크고 굵직한 나무가 서울시 보호수 18-5호인 느티나무이다.


오래된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호압사 경내로 들어서면 서쪽에 2층 규모의 심검당이 있
고, 북쪽에는 법당인 약사전, 그 옆구리 높은 곳에 삼성각, 그리고 그 아래쪽에 근래에 심은
9층석탑이 조촐히 경내를 이룬다.
심검당은 호압사의 요사(寮舍)이자 종무소(宗務所), 공양간으로 쓰이는 다용도 건물로 심검(
尋劍)이란 지혜의 칼을 찾는다는 뜻으로 선원(禪院)에서 많이 쓰는 이름이다.


▲  호압사 삼성각(三聖閣)과 9층석탑

삼성각 아랫쪽에 자리한 9층석탑은 2009년에 조성되었다.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에 있는 8각9
층석탑을 유난히도 많이 닮았는데, 호압사의 유일한 탑으로 그가 태어나기 이전에는 이곳에는
그 흔한 탑이 하나도 없었다. 그 허전함이 계속 걸렸는지 통 크게 9층석탑을 세우고, 기증 받
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그리고 그 사리를 직접 친견할 수 있도록 1층 탑신에 동그란
창을 냈다.
가람배치의 정석대로라면 법당 정면에 탑을 세워야 하겠으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좌측 구석에
세웠으며,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맨들맨들한 하얀 피부를 지녀 가을 햇살에 한층 빛나 보인
다.

그리고 석탑 북쪽 높은 곳에는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인
삼성각이 자리하고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
붕 건물인데 1995년에 완성을 보았으나 건물을 받치는 석축과 계단은 1999년에 완성되어 2000
년에 비로소 낙성식을 가졌다.
내부에 봉안된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은 1978년에 제작된 것이며 우측 벽에는 호압사를 세
웠다는 무학대사의 영정이 걸려있어 절의 창시자를 기린다.


▲  호압사 9층석탑
탑 너머로 호압사의 눈치를 살살 보고 있는 호암산 정상이 시야에 들어온다.

▲  삼성각에 봉안된 무학대사의 진영(眞影)

▲  칠성 식구들이 그려진 칠성탱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  독성 식구들이 담긴 독성탱

▲  삼성각 뒤쪽에 있는 관세음보살상
(2012년 작)


▲  호압사 약사전(藥師殿)

경내 중심에 자리하여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약사전은 이곳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창건 당시부터 있던 것으로 여겨지나 현 건물은 1935년에 새로 지
었다.


▲  호압사 석불좌상(약사불)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8호

호압사는 석가여래 대신 약사여래(藥師如來)를 중심으로 내세운 약사도량(藥師道場)이다. 하
여 법당 불단(佛壇)에는 약사여래를 봉안했으며, 법당 이름도 약사전이다. 바로 그 약사전에
이곳의 오랜 보물이자 든든한 밥줄인 석조약사여래좌상<예전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석약사불
좌상', 지금은 '석불좌상(약사불)'임>이 협시보살을 넉넉히 대동하며 자리해 있다.
예전에는 약사여래상이 홀로 불단을 지켰으나 2009년에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
菩薩)을 좌우에 붙여 약사3존불을 이루게 되었으며, 2011년에 그 양쪽에 천진불(天眞佛)이라
불리는 귀여운 아기부처 2기를 갖다 붙였다.

인상이 온후하기 그지없는 약사여래상은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사뿐히 앉아 조용히 명상에
임하고 있다. 아무리 서울에 위협을 주는 호암산 호랑이라 할지라도 그의 덕스러운 표정 앞에
선 절로 꼬랑지를 내리며 온순한 호랑이가 될지도 모른다.


▲  호압사 석불좌상(가운데)과 일광/월광보살상

15세기(늦어도 16세기)에 조성된 이 불상은 돌로 만들어 금색 피부를 입힌 것으로 불두(佛頭)
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촘촘히 표현했으며 얼굴은 둥근 넓적한 모습으로 약간의 양
감이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선정인(禪定印)을 취한 듯, 다리 위에 모은 그의 두 손에는 약합
(藥盒)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약사여래 좌우에는 일광, 월광보살이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각기 꽃을 1송이씩 들며 좌우
를 지킨다. 그들 뒤에는 후불탱화가 있으며, 불단 위쪽에 걸쳐진 닫집은 단청(丹靑)과 조각이
화려하여 중생의 눈을 마비시킨다. 그리고 불단 좌우에는 헤아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
로 조그만 금동 원불(願佛)이 빼곡히 벽을 채워 약사전 내부를 화사하게 만든다.

▲  약사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탱(神衆幀)

▲  약사전 뒤쪽 굴뚝과 지장보살상


▲  넓직한 원두막 쉼터와 풍경소리 도서관 (왼쪽 하얀 책장이 도서관)

범종과 목어, 법고, 운판을 머금은 사물(四物)의 공간인 범종각 좌측에는 2칸짜리 쉼터와 풍
경소리 도서관이라 불리는 하얀 피부의 책장이 있다. 이들은 호압사에서 절과 호암산을 찾은
동네 사람들과 산꾼, 답사꾼을 위해 2012년에 만든 것으로 누구든 찾아와 시간과 종교, 장르
에 구애받지 않고 독서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개방형 책쉼터이다.

절에 딱 어울리는 이름을 지닌 풍경소리 도서관 책장에는 절과 신도, 동네 사람들이 기증한
책들이 담겨져 있는데, 소장 권수는 적으나 기증이 늘고 있다고 하니 책장도 조만간 미어터질
것이다.
책장과 쉼터는 매일 개방하며, 누구든 책장에서 책을 꺼내 쉼터에 앉아 독서의 여유를 누리면
된다. 책을 며칠 빌리고자 한다면 종무소에 문의하면 되며, 쉼터에서는 독서 외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쉬거나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을 먹어도 된다. (음주나 누워서 자는 것은 안됨)

호압사는 산중 사찰이나 제대로 된 샘터가 몇
년 동안 없었다. 물론 예전에 샘터가 있긴 했
지만 사라진 지 오래, 그래서 종무소 옆에 큰
물통을 두어 거기서 물을 마셔야 했다.
그러다가 2011년 이후 풍경소리 도서관 주변에
자리를 마련해 새롭게 샘터를 갖추었다.
긴 파이프에서 쏟아져 나온 물은 호암산이 베
푼 물로 동그란 조그만 석조로 떨어진다. 가을
오후 햇살에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서 갈증
에 타들어가는 목구멍을 진화하니 몸 속의 때가 싹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 없다.

▲  호압사 샘터


▲  호암산 정상을 목전에 둔 호압사 분기점

호압사 뒤쪽(동쪽)에는 호암산 등산로가 여럿 지나간다. 이곳을 편의상 '호압사분기점'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남쪽 오르막 길을 오르면 호암산 정상과 삼성산으로 이어지고, 채소밭을 끼고
동쪽으로 내려가는 산길(서울둘레길5코스)은 삼성산성지로 이어진다. 그리고 북쪽으로 난 평
평한 길은 독산동(禿山洞)과 목골산으로, 서쪽은 호압사와 호암산 잣나무산림욕장으로 이어지
니 취향대로 고르면 된다.



 

  호암산 정상(385m)

▲  호압사에서 호암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
처음에는 방심하기 좋을 정도로 얌전한 수준이나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산길은 잔뜩 흥분하여 속인들의 혼을 다 빼놓는다.

 

호암산 정상을 보다 빨리 오르고 싶다면 호압사에서 오르는 것이 좋다. 호압사 바로 뒤에 병
풍처럼 둘러진 뫼가 바로 정상이고 시내버스와 마을버스가 해발 140m(호압사입구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상까지는 해발 250m만 오르면 된다.
허나 그만큼 산길의 경사는 각박하여 만만히 보고 덤벼든 속인(俗人)들의 혼을 제대로 빼놓는
다. 호압사입구에서 호압사로 오르는 길도 그렇고, 호압사 분기점에서 정상 입구로 오르는 길
도 제법 야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중간인 호압사에서 잠시 경내를 둘러보며 쉬다가 정상
으로 오르는 것이 좋다.

호압사분기점에서 10~15분 정도 오르면 정상 입구인데, 여기서 왼쪽(동쪽)으로 4~5분 가면 호
암산 꼭대기이다.
호암산은 대체로 호압사입구에서 호압사까지, 호압사에서 정상 입구까지, 잣나무 산림욕장에
서 서남쪽 능선까지, 벽산5단지에서 불영암으로 오르는 산길이 좀 야박한 편이지, 그곳만 오
르면 구름 위를 거닐듯 편안한 능선길이 펼쳐진다.


▲  호암산 정상 입구에서 바라본 천하 ①
시흥동을 비롯한 금천구, 광명시를 비롯하여 멀리 서해바다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  호암산 정상 입구에서 바라본 천하 ②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광명시 지역

▲  호암산 정상 입구에서 바라본 천하 ③
신림동과 난곡을 비롯한 관악구 지역과 동작구, 영등포구,
서울 서남/서북부 지역

▲  호암산 정상 입구에서 바라본 호암산 남쪽 봉우리
저 봉우리에 석구상과 한우물, 불영암, 호암산성터가 깃들여져 있다.

▲  호암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
정상 입구에 이르면 흥분된 산길은 급히 진정을 되찾으며, 여기서부터
조금은 느긋한 산길(바위길 위주)이 정상까지 이어진다.

▲  돌로 이루어진 호암산 정상(385m)

호암산은 돌의 성분이 많은 산이라 정상도 견고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에는 2개의 커
다란 바위가 비스듬히 매달려 서울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중 오른쪽 바위가 정상으로 호암산
의 머리에 해당된다.
이곳은 서울에 이름난 조망터이자 야경(夜景) 명소로 마치 서울을 향해 미사일이나 로켓포를
쏘는 듯한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자연은 이미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훨씬 이
전부터 인간이 20세기에 발명한 미사일과 로켓포, 그것을 취급하는 기계의 모습을 예견했던
것은 아닐까? 이러니 조선의 위정자들이 이 산을 경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굳
이 미사일이 아니더라도 무엇인가 날려보낼 것 같은 기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위 꼭대기나 그 부근까지 오르면 서울의 서남부를 중심으로 도심부와 서북부, 동북
부, 강남과 강동 일부, 도심 주변의 여러 산들(북한산, 남산, 인왕산, 북악산 등), 그리고 광
명과 안양, 멀리 인천과 부천 등 수도권의 주요 도시들이 두 발 밑에 펼쳐지니 굳이 풍수지리
나 산의 생김새가 아니더라도 전략적으로도 꽤 중요한 곳이다. 이곳이 만약 적에게 넘어가면
서울 도심을 물론 서울의 왠만한 곳이 거의 다 노출되기 때문이다.

하늘나라 선녀 누님의 웃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오가는 신선
이 바로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눈과 발 밑으로 점점이 펼쳐진 천하를 굽어보니 저
모든 것을 다스리고 소유한 군주가 된 듯 즐거운 기분이 솟아 오른다.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영등포구 등 서울의 서남부 지역과
광명, 부천 지역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금천구와 구로구, 영등포구, 강서구 등 서울 서남부 지역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③
관악구와 동작구, 영등포구, 강남구, 서울 도심과 남산, 서북부, 동북부
지역이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정면에 아득하게 보이는 큰 산은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산(삼각산)이다.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④
관악구와 서울대, 동작구, 서초구, 강남구, 강동구, 성동구, 광진구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멀리 까마득하게 보이는 긴 산줄기들은 수락산과
불암산, 용마산~아차산이다.

▲  호암산 정상과 깃대봉 사이에 자리한 헬기 착륙장

▲  태극기가 펄럭이는 깃대봉(민주동산)

호암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4~5분 정도 가면 태극기가 있는 깃대봉(민주동산)이 나온다. 두꺼
운 바위에 우리의 영원한 국기인 태극기가 심어져 있어 잠시 옷깃을 여미게 하는데, 국기(國
旗)가 걸린 깃대가 있다고 해서 깃대봉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가면 깃대봉 조망대(민주동산 조망대)가 바로 나오며, 남쪽으로 가면 장군봉
과 삼성산 삼막사(三幕寺) 쪽으로, 동쪽은 신우초교와 약수사, 서울대 쪽으로 이어진다.


▲  늦가을이 알록달록 타오른 삼성산 돌산 능선
대자연이 지른 늦가을 불에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두 망막과
마음이 싹 정화되는 것 같다.

▲  서울을 굽어보는 깃대봉 조망대(민주동산 조망대)

깃대봉 북쪽 벼랑에 터를 다진 깃대봉 조망대는 호암산 정상 만큼이나 호화로운 조망을 자랑
한다. 서울 대부분의 지역은 물론, 북한산(삼각산)과 수락산 등 서울을 둘러싼 온갖 산들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온다. (보이는 범위는 정상과 비슷함)


▲  깃대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서울 서남부(관악구,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와 강서구 지역

▲  깃대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신림동과 난곡을 비롯한 관악구 지역과 동작구, 영등포구, 서울 서북부 지역

▲  깃대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신림동과 봉천동, 관악구, 동작구, 강남구, 용산구, 남산, 도심부
(멀리 보이는 산이 북한산)

▲  깃대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④
신림동과 서울대, 관악구. 서초구, 강남구, 서울 동남부, 동북부 지역


깃대봉 조망대에서 하늘 아래 세상을 마음껏 굽어보고 호암산 남쪽 능선으로 움직였다. 호암
산은 시작이 좀 빡세서 그렇지 잠깐의 고생으로 능선까지 오르면 평지만큼이나 느긋하고 부드
러운 곡선의 산길을 즐길 수 있다. 내가 호암산을 즐겨찾기하여 종종 찾아오는 것도 바로 그
매력 때문이다. 또한 호압사와 한우물, 석구상, 호암산성터 등 오래 숙성된 맛좋은 양념도 가
득하니 정말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착한 산이다.

깃대봉에서 남쪽으로 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동남쪽으로 가면 장군봉(412m)과 삼성
산으로 이어지고, 서남쪽으로 가면 호암산 남쪽 능선과 남쪽 봉우리로 이어진다. 장군봉이나
남쪽 능선이나 길은 매우 부드럽다.

본글은 내용상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에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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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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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구의 싱그러운 모퉁이를 거닐다 ~~ 방이습지(방이동 생태경관보전지역), 서울둘레길3코스, 성내천 나들이 (송파둘레길 성내천길)

방이동 생태경관보전지역(방이습지), 서울둘레길3코스 나들이

     

' 송파구, 서울둘레길3코스 자연 나들이 '
<방이동 생태경관보전지역(방이습지), 성내천>
방이동 생태경관보전지역(방이습지)
▲  방이습지



 

방이동(芳荑洞) 생태경관보전지역(방이습지)은 서울 동쪽 변두리 끝으머리에 숨겨진 늪지
대로 조그만 우포늪(경남 창녕 소재) 같은 곳이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에 이런 늪지대가 있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인데,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음에도 오랫동안 인연이 없다가 1년의 절반이 끝나가는 시점에 서
울 지역의 미답처(未踏處)를 여럿 지울 겸, 그곳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3시 경,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130번 시내버스(우이동↔길동
4거리)를 타고 쌍문역과 미아사거리, 경동시장, 답십리역, 군자역, 광나루역를 지나 한강
(천호대교)을 건너 천호동(千戶洞)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 바로 3316번 시내버스(마천동↔천호역)로 환승하여 둔촌역, 서부입구를 거쳐 서울
과 하남시(河南市)의 경계선인 효죽동입구에서 내리니 '방이동 생태경관보전지역'을 알리
는 갈색 이정표가 마중을 나온다. 그의 손짓을 따라 서쪽 시골길을 2분 정도 들어가면 방
이습지 정문이다.
정문 주변으로 대나무로 엮은 담장길이 펼쳐져 있는데, 정문 동쪽은 길 남쪽에 담장이 이
어져 있고, 정문 서쪽은 양쪽으로 배열되어 운치를 진하게 자아낸다. 이들은 속세와 방이
습지의 경계선이다.


▲  효죽동입구에서 방이습지로 인도하는 시골길 (서울둘레길3코스)

▲  반쯤 열린 방이습지 정문
방이습지와 속세를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이다.



 

♠  방이동 생태경관보전지역(방이습지) 입문

▲  천연 원목으로 지어진 방이동 생태학습관

하남시와 맞닿은 오륜동(五輪洞) 뒤쪽(방이동 동북부)은 논두렁과 밭두렁, 농장, 농업용 비닐
하우스가 전부인 녹색 공간이다. 이곳은 꽃과 과일, 채소, 허브식물을 다루는 근교농업이 중
심을 이루고 있는데, 바로 그 밭두렁 한복판에 진한 숲과 갈대밭, 늪지를 품은 방이동 생태경
관보전지역(방이습지)이 누워있어 서울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곳이 녹색 공간으로 남
게 된 것은 개발제한구역에 묶여 개발의 칼날을 부러뜨렸기 때문이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나? 두 눈을 심히 어리둥절하게 만든 이 공간은 창녕 우포늪의 축소판
같은 곳이다. 그렇다고 그곳처럼 100% 자연산은 아니며 또한 100% 인공적인 곳도 아니다. 그
렇다면 이곳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1970년대 방이습지 자리에는 벽돌공장이 자리하여 오랜 세월 많은 흙을 채취했다. 흙을 판 자
리에는 웅덩이가 여럿 생겨났는데, 벽돌공장이 없어지자 그 주변은 사람의 발길이 거의 끊긴
고적한 모퉁이가 되었다. 그런 상태로 세월이 꽤 흐르면서 웅덩이에는 물이 누적되어 늪지대
로 변해갔고, 나무와 수풀이 늪지에 의지해 덥수룩하게 자라났으며, 철새와 곤충, 물고기들이
이곳의 소문을 듣고 모여들어 자연히 생태습지를 이루게 되었다. 대자연 형님이 인간이 망치
고 버린 땅에 크고 아름다운 작품을 일군 것이다.

이후 이곳의 생태적 가치를 깨달은 서울시는 2002년 4월 15일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하여
개발의 칼질을 경계했다. 허나 지정만 했지 거의 방치 수준으로 계속 망가지고 있다가 2006년
11월부터 2007년 5월 말까지 생태복원공사를 벌였다.
이때 연결습지(498㎡)와 연결수로(62m)를 만들었고, 탐방로(398m)와 진입로 조성(55m), 습지
와 바깥 경계선으로 대나무로 엮은 담장 설치(1,564m), 조류 관찰대(1개소)와 수생식물원 설
치, 초화류 식재를 했으며, 공사가 완료되자 속세에 개방했다. 이후 2014년 1월에 방이동 생
태학습관을 지어 이곳 생태계의 이해를 돕게 했다.

방이습지의 면적은 58,909㎡(사유지 6,119㎡ 포함)로 생태학습관 1동과 탐방로, 조류관찰소를
지니고 있으며, 식물은 114종, 야생조류(황조롱이, 오색딱다구리, 청둥오리 등), 양서파충류(
청개구리, 산개구리 등), 곤충류(온갖 잠자리, 메뚜기 등), 어류(떡붕어, 대륙송사리) 등이
살고 있다.
연못과 늪지는 6개로 이중 북쪽 늪지(조류와 소생물 서식지)는 공개를 하지 않고 있으며, 나
머지 연못과 늪지는 관람이 가능하다. 습지대 주변으로 길게 대나무 담장을 둘러 속세와 경계
를 긋고 있고, 북쪽 늪지 또한 대나무 담장으로 꽁꽁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이들 늪
지는 여름에는 거의 만수(滿水)를 이루나 늦가을과 겨울에는 다소 수심이 줄어든다.

이곳 늪지대가 너무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순수 자연산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인공습지로 분류
되어 있으며, 엄밀히 따지면 사람과 자연이 같이 닦은 늪지대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여기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둔춘주공아파트(현재 재개발 중임) 뒤쪽에도 둔촌동(遁
村洞) 생태경관보전지역이 있는데 그곳 또한 늪지대와 숲을 지니고 있다. 방이동 동북부에서
둔촌동 뒤쪽까지 시골이 펼쳐져 있다 보니 상큼한 공간도 여럿 자리해 있는 것이다.

* 방이습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 443-15 (동남로 397, 문의 ☎ 02-2147-2100)

▲  바깥에서 바라본 방이동 생태학습관

▲  방이동 생태학습관 옆 늪지대

방이습지 정문을 들어서면 갈색 피부를 지닌 2층짜리 방이동 생태학습관이 모습을 비춘다. 방
이습지의 유일한 건물로 송파구에서 8억의 돈을 들여 6개월의 공사 끝에 2014년 1월 7일 완성
을 보았는데, 지상 2층, 연면적 618㎡ 규모로 생태전시교육실, 생태자료보관실, 전망용 옥외
데크(2층)를 갖추고 있으며, 아토피성 피부염 방지를 위해 환경호르몬 발생을 억제하는 천연
원목으로 건물을 지었다.
또한 이산화탄소 배출 감소를 위해 지붕에 15KW 규모의 태양광 발전시스템을 지니고 있어 그
야말로 친환경적인 건물이며, 이곳에는 자원봉사자들이 머물고 있어 방이습지와 습지대 생태
계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방이습지에서 화장실은 이곳 밖에 없음)


▲  방이동 생태학습관 앞 탐방로
방이습지의 속살로 인도하는 단 하나뿐인 길로 여기서부터 서울을
무색케 하는 늪지대 탐험이 시작된다.

▲  방이습지 나무데크 탐방로
인간들의 방이습지 탐방 편의와 습지 식물의 보호를 위해 400m 길이의
나무 탐방로를 닦았다.

▲  짙은 숲속을 가르는 방이습지 탐방로 (논습지 직전)

▲  방이습지 한쪽에 마련된 논습지

탐방로를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서 뜬금없이 푸른 논두렁이 마중을 나왔다. 늪지대에 웬 논
이 있는 것일까? 그 물음의 답은 생각 외로 단순했다. 논도 습지의 엄연한 일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논이란 벼를 기르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 땅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물
의 약 80% 정도를 저장하는 기능이 있으며, 논에 모인 물은 한여름에 적당량이 하늘로 증발되
어 대기의 온도를 낮춰주기도 한다. 또한 벼는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연간 1,028
만 톤의 산소를 배출하여 공기를 신선하게 갈아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겨울에는 철새들이 먹거리를 찾아 잠시 쉬었다 가기도 하며, 어류와 양서류, 곤충, 미생물 등
다양한 생물들의 소중한 삶터이기도 하다. 그만큼 논의 기능은 우리들 생각보다 엄청나다.

이곳 논습지에서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벼 재배 체험과 생태 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봄과 여름, 가을에 운영, 자세한 것은 방이동 생태학습관에 문의 요망)


▲  올해도 풍년 예감, 푸르게 익어가는 논습지의 위엄

▲  논습지를 지나 더 안쪽으로 안내하는 탐방로

▲  방이습지 나무들의 패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거의 머리에
닿을 정도로 무성함을 보여준다.

▲  수생식물원 늪지대

논습지에서 1굽이 지나면 커다란 늪지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늪지 한쪽에는 작은 땟목이 몸을
기대고 있는데, 이것은 방이습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습지 관리를 위해 이용하는 것이다. 또
한 이곳은 수심도 조금 있고 뻘도 있으므로 괜히 늪지를 괴롭히는 행동은 하지 말자.


▲  늪지 식물과 하늘의 조그만 거울, 수생식물원 늪지

▲  수풀 너머로 바라본 수생식물원 늪지
이렇게만 본다면 정말 머나먼 밀림의 한 장면 같다.

▲  갈대밭을 지나는 탐방로 ①

▲  갈대밭을 지나는 탐방로 ②

▲  초록색 머리칼을 휘날리는 갈대밭의 위엄

습지대하면 빼놓을 수 없는 약방의 감초가 수질정화의 신으로 추앙받는 갈대이다. 그저 바람
에 따라 이리저리 휘날리는 갈대에게 그런 놀라운 힘이 있다니 정말 겉과 속이 다른 존재이다.
갈대는 상류나 주변에서 흘러내려오는 오염물질의 물길을 막는다. (갈대들이 물의 흐름을 느
리게 함)
이때 갈대 뿌리와 뿌리 주변의 미생물이 오염물질을 흡수하여 유기물, 질소, 인으로 분해시켜
물을 깨끗하게 정화시킨다. 그래서 생태 관련 습지나 연못에 무조건 갈대를 심는 것이다. 또
한 대기 중으로 유입되는 탄소를 차단하고 이산화탄소의 양을 조절해 주변 지역의 온도와 습
도, 기후 조절의 기능도 가지고 있는 그야말로 팔방미인과 같은 존재이다.

흔히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 비유를 한다. 갈대는 사람 뿐만 아니라 많은 생물과 지구에게
크게 도움을 주지만 정작 인간은 그 반대로 놀고 있으니 어찌보면 갈대에 대한 명예훼손이 아
닐까 싶다.


▲  넓게 펼쳐진 갈대밭

▲  갈대밭을 가르는 탐방로
이 탐방로가 없었다면 갈대밭 접근은 심히 어려웠을 것이다.

▲  갈대밭 탐방로에서 만난 3색 고양이의 위엄

방이습지의 남쪽 끝 갈대밭 탐방로에서 3색 털옷을 입은 고양이를 만났다. 3~4살로 여겨지는
암컷이었는데, 젖꼭지가 두툼하고 배가 조금 나온 것으로 봐서 임신을 한 모양이다. 사람이
다가와도 도망은 커녕 계속 그 자리를 맴돌며 한가롭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날씨도 덥고
몸까지 무거우니 그냥 누워있는 것이 편한 모양이다.
방이습지 사람들이 기르는 고양이로 여겨지며, 만약 도둑 계통이었다면 습지 생물의 보호를
위해 아마 추방했을 것이다.


▲  날카로운 미소를 보이는 고양이



 

♠  방이습지 나머지 부분

▲  조류서식지 늪지대 ①

방이습지 북서쪽 끝에는 조류서식지 늪지대가 있다. 이곳에서 가장 넓은 늪지로 왜가리와 해
오라기, 쇠백로, 중대백로, 꾀꼬리, 물총새, 파랑새, 논병아리, 오색딱다구리, 흰뺨검둥오리
등 다양한 새들이 머물고 있는데, 철새들이 주류를 이루다보니 여름(7~8월)에 새들이 많으며,
그들을 마음 편히 구경할 수 있도록 조류관찰대가 늪지대 남쪽에 닦여져 있다.

조류관찰대는 나무로 간단히 건물을 짓고 늪지대 쪽으로 네모난 구멍을 여럿 내어 새를 살피
는 공간으로 아무래도 새들이 사람들을 크게 경계하다보니 그들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건물과
대나무 담장으로 위장을 하였다. 하여 좋게 말하면 조류 관찰, 철새 탐방이고, 나쁘게 말하면
새들의 사생활을 훔쳐보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새들은 그들의 사생활이 침해된 줄도 모른 채 그저 열심히 자기 할 일을 한다. 하긴 저들과
우리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니 딱히 신경을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늪지대 접근 불가)


▲  방이습지에서 가장 큰 늪지, 조류서식지 늪지대 ②

▲  조류서식지 늪지대 ③

늪지대 너머로 보이는 회색빛 존재들은 올림픽선수기자촌아파트이다. 그만큼 이곳은 시내와
가깝다. 그럼에도 이렇게 늪지대의 정석을 잘 간직하며 상큼하게 자리하고 있으니 참으로 고
맙기 그지 없다. 이곳 덕분에 서울 하늘 밑에서 늪지대와 습지 구경을 하니 말이다. 지금의
모습을 쭉 유지하여 나중에 국가 천연기념물의 지위까지 얻었으면 좋겠다.


▲  조류관찰대
늪지대 새들을 훔쳐보는 공간으로 네모난 구멍이 여럿 있다. 내가 갔을 때는 다들
주변으로 마실을 나갔는지 1마리도 보이지 않았는데, 어쩌면 내가 그들에게
감시를 받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때 사람은 나 밖에 없었으니;;)

▲  조류관찰대로 인도하는 대나무 담장 탐방로
대나무로 엮어진 담장 너머가 조류서식지 늪지대이다.

▲  물배추와 부레옥잠

▲  북쪽에서 바라본 수생식물원 늪지대

▲  동그란 수조 안에 앙증맞게 피어난
수련(睡蓮, 연꽃의 일종)

▲  조류관찰대 주변에 자리한 쉼터와
생태체험장


▲  숲속에 숨겨진 비밀의 연못 같은 수생식물원 늪지대

▲  추억의 풍물시(風物詩), 김치를 숙성시켰던 김치각
내 시골 외가집(충북 단양)에도 저런 김치각이 있었지. 저기서 숙성시킨 김치는
정말 일품이었음~~! 허나 그 김치각은 세월의 거친 흐름에 대부분
사라지고 지금은 장식용이나 교육용으로 지어진 김치각만 남아
그들의 존재를 아련히 속삭일 따름이다.

▲  자연학습장과 뒤쪽 오리나무 군락

방이동 생태학습관 뒤쪽에는 자연학습장과 오리나무 군락이 있다. 자연학습장은 아이들이 풀
과 꽃을 만지거나 흙밭에서 흙장난을 하는 그야말로 그들의 동심을 키워주는 공간으로 그 뒤
쪽에는 키 작은 오리나무들이 무리를 이루며 한참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들 오리나무는 인근 둔촌동 생태경관보전지역에서 가져온 새끼 나무들로 그곳에는 오리나무
자생 군락지가 있다. (습지대 주변에 숲이 형성되어 있음) 비록 수십 년이 지나야 되는 근성
의 시간이지만 둔촌동 못지 않은 오리나무숲으로 무럭무럭 자라나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선
선한 그늘을 드리워 주기를 염원해 본다.


▲  방이동 생태학습관 2층에 마련된 청띠신선나비 포토존(Photo zone)

방이습지를 둘러보고 앞서 남겨두었던 방이동 생태학습관으로 들어섰다. 볼거리는 주로 2층에
몰려있는데, 그중 청띠신선나비를 배경으로 한 포토존이 크게 눈길을 끈다. 방이습지의 주 수
요층이 어린이들이라 그들이 좋아할만한 어여쁜 나비를 모델로 한 것인데, 그 앞에 서서 사진
을 찍으면 누구든 날개가 달린 커다란 청띠신선나비가 된다. 여기에는 열심히 꿈을 키워 나비
처럼 비상(飛上)하라는 의미도 담겨져 있을 것이다.

청띠신선나비는 이 땅 곳곳에 살고 있는 나비로 6월부터 이듬해 5월에 걸쳐 나타난다. 참나무
류 수액이나 썩은 과일에 잘 모이며, 바위 위나 길 위에 날개를 펴고 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는 나비들

▲  우리나라의 잠자리들
나비잠자리와 검은물잠자리를 빼고는 모두 내 손으로 잡아봤다.



 

♠  성내천(城內川)을 거닐다 ~~ (서울둘레길3코스)

▲  방이습지 대나무 담장길 (성내천 방향)
오른쪽 담장 너머에 통제구역으로 묶인 조류 및 소생물 서식지 늪지대가 있고,
왼쪽 너머에는 앞서 훔쳐본 조류서식지 늪지대가 있다.
 

방이동 생태학습관을 끝으로 약 1시간에 걸친 방이동 생태경관보전지역(방이습지) 자연 탐방
은 마무리가 되었다. 종종 자연 공간이나 생태공원, 생태습지를 살펴보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은 것 같다. 그렇게 싱그러운 녹색 세상을 거닐면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머리와 마
음이 싹 정화되고 자연에 대한 소중함과 함께 대자연 형님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공간을 나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잊어버리는 것이 문제지만 말이다.

방이습지 앞에는 시골길이 펼쳐져 있는데, 서울시의 야심작이자 천하 둘레길의 대표 성지(聖
地)로 추앙을 받는 서울둘레길(157km)이 그 길의 신세를 진다. 서울둘레길이 워낙 장대한 거
리다보니 8개 구간으로 구분을 했는데, 그중 3코스인 고덕,일자산코스(광진교~수서역, 26.1km
)가 방이습지를 지나간다.
이 코스는 광진교(廣津橋)와 수서역, 하남시 초이동을 제외하고 모두 강동구와 송파구 지역이
며, 산과 언덕, 밭두렁, 농경지, 하천길을 두루 거쳐가 이곳이 과연 서울인지 의심을 품게 만
든다. (한강도 건너고, 탄천도 건넘)

방이습지 정문 주변은 대나무로 지어진 담장이 펼쳐져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이 담장은 방이
습지와 속세의 경계선으로 정문 서쪽은 양쪽으로 대나무 담장이 펼쳐져 있는데, 북쪽 담장 너
머에는 금지된 공간인 조류 및 소생물 서식지 늪지대가 있다.


▲  방이습지 대나무 담장길 ①
습지대 나무들이 담장 밖으로 손을 내밀며 짙은 그늘을 베푼다.

▲  방이습지 대나무 담장길 ②
이곳 길은 서울의 숨겨진 상큼한 길로 방이습지의 상징이자 가장 인상 깊이
남은 곳이다. 마음 같아서는 집으로 고이 훔쳐와 곁에 두며 혼자서
누리고 싶지만 내가 조물주가 아니니 그럴 능력이 되지 못한다.

▲  방이습지 대나무 담장길 ③

▲  방이동 시골을 가로지르는 서울둘레길3코스 ①
길 주위로 밭두렁, 논두렁, 과수원, 농장, 비닐하우스, 숲이 주류를 이룬다.
이들 대부분은 사유지이므로 쓸데없이 경계를 넘지 말자. 그냥 길만
거닐며 주변 풍경을 구경하면 그만이다.

▲  방이동 시골을 가로지르는 서울둘레길3코스 ②
갑자기 머나먼 지방 시골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  드디어 만난 성내천 (오금1교 주변)

방이동 시골 풍경을 지나면 성내천이 졸졸졸~♪ 소리를 지르며 모습을 비춘다. 성내천은 남한
산성이 있는 청량산(淸凉山)에서 발원하여 마천동과 오금동, 풍납동(風納洞)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가는 9.85km(유역 면적 34.11㎢)의 짧은 하천으로 송파구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하천이라
송파구(松坡區)의 젖줄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생태 하천의 대명사로 추앙을 받지만 개발의 칼질이 지금보다 천박하게 날뛰던 1970~
1980년대에는 하천 제방과 바닥을 콘크리트로 도배하면서 멀쩡한 하천을 고자로 만들던 흑역
사가 있었다. 그때 물이 크게 줄어들어 1년 내내 메마른 건천(乾川) 상태를 보였고 오염물질
의 유입으로 악취가 진동하여 그야말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 시대가 바뀌면서 굴레처럼 씌워진 콘크리트를 모두 제거하고 생태하천으로 조성, 2005
년 6월 복원이 마무리 되었다. 이때부터 하천 물은 한강 물과 인근 지하철에서 쏟아져 나오는
지하수를 소환하여 채워 넣었고, 수생식물 47,000여 본을 심고 인공섬을 띄우니 이곳을 등졌
던 물고기와 새, 곤충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성내천 곳곳을 채워 나갔다.
또한 산책로, 자전거길, 분수대, 징검다리, 수변데크, 어린이를 위한 무료수영장까지 닦아놓
아 도심 속 피서의 성지이자 송파구의 꿀단지로 찬양을 받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하
천 100선에 꼽히는 등 좋은 성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서울둘레길3코스가 오금1교에서 성내
4교까지 성내천의 신세를 지며, 송파구가 닦은 송파둘레길의 성내천길은 한강에서 성내4교까
지 이어진다. (성내천 산책로가 서울둘레길3코스와 송파둘레길 성내천길임)


▲  동네 사람들의 조촐한 피서지, 오금1교 밑 성내천
여름 제국의 기세가 아무리 드세다 한들 다리 밑까지는 어쩌지 못한다.
하여 폭염조차도 이곳만큼은 한 수 접고 물러간다.

▲  성내7교 주변에 닦여진 나무데크길

▲  성내천 물빛다리


▲  성내천 메기들 (성내7교 주변)
서울에서 이렇게 메기들이 많은 것은 처음 본다. 사람들의 매운탕 입맛을
자극시키는 메기들의 시끌벅적한 정모 현장.

▲  여름 제국의 염통을 건드리는 성내천 물빛광장 분수대

▲  갈대가 덥수룩하게 자라난 성내천 성내5교 주변

▲  성내천의 매력, 성내천수영장

성내천은 특별하게도 수영장까지 갖추고 있다. 성내4교와 성내5교 사이 하천변에 길쭉하게 석
조 수영장을 닦았는데 사방이 모두 열려있는 무료 수영장으로 쉼터, 탈의실, 샤워장을 갖추었
다. 어린이들 눈높이에 맞게 수심은 얕으나 돌로 다져진 탓에 넘어지면 조금 다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어린이를 위한 풀장이라 다 큰 성인들이 놀기에는 다소 어색할 수 있다. 단 아이
들과 같이 노는 경우는 예외. 여름 제국이 한참 전개되는 시점이라 제국에 저항하려는 아이들
로 수영장은 북새통을 이룬다. 누구의 발상인지 모르지만 도심 속 하천에 이렇게 신선한 공간
을 만든 점은 참 칭찬할 만하다.

▲  성내천수영장 남쪽 풀장
(북쪽에서 본 모습)

▲  성내천수영장 남쪽 풀장
(남쪽에서 본 모습)


성내천수영장은 송파구가 애지중지하는 여름 명소라 관리는 잘되고 있었다. 물도 자주 갈아주
는 편이고 주변도 깨끗하다.

성내4교에 이르니 어언 19시가 넘었다. 햇님도 길어진 근무시간을 원망하며 슬슬 그만의 공간
으로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고, 나 역시 더위 속에서 길게 걸었더니 피곤하다. 인생이란 너무
욕심을 부리면 탈이 나는 법, 방이습지부터 성내천(서울둘레길3코스)을 따라 성내4교까지 적
지 않은 미답지를 지웠으니 오늘은 이 정도로도 배도 충분히 부르고 마음도 뿌듯하다.

이렇게 하여 방이동 생태경관보전지역과 서울둘레길3코스, 성내천 초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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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숨겨진 달달한 계곡이자 서촌의 오랜 경승지, 인왕산 수성동계곡 (인왕산자락길)

인왕산 수성동계곡



' 도심 속에 숨겨진 달달한 쉼터 - 인왕산 수성동계곡 '
인왕산 수성동계곡
▲  인왕산 수성동계곡 (기린교 주변)



 

늦가을이 절정에 이르던 11월 첫 무렵 주말에 일행들과 수성동계곡을 찾았다. 햇님이 하
늘 높이 걸린 14시에 그들을 만나 내 즐겨찾기 명소인 백사실계곡(백사골)과 부암동산복
길(백석동길), 인왕산자락길을 거쳐 16시 넘어서 수성동계곡에 이르렀다.
이곳도 즐겨찾기의 하나로 정말 지겹도록 찾은 곳이라 계곡 윗도리만 주마등처럼 통과하
려고 했으나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못지나친다고 기린교가 있는 계곡 밑도리까지 싹 복습
을 하였다.



 

♠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었다가 다시 복원된 현장, 서울의 경승지로
오랫동안 명성을 누렸던 인왕산 수성동계곡(水聲洞溪谷)
- 서울 지방기념물 31호

인왕산 동쪽 자락이자 서촌(西村, 웃대) 한복판에 자리한 수성동계곡은 한양도성(漢陽都城)에
오랜 경승지로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한경지략(韓京識 略) 등에 서
울의 명승지로 절찬리에 소개된 곳이다. 이곳 계곡(기린교와 공원 일대)을 예로부터 수성동이
라 불렀는데, 이는 계곡에 걸린 기린교 밑의 물소리가 청아하고 좋기로 명성이 자자하여 물소
리가 좋다는 뜻에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이자 거대한 돌산으로 제대로 된 계곡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인
왕산(仁王山)이지만 그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계곡이 제법 있다. 수성동을 비롯해 청풍
계(淸風溪, 청운동), 청계동천(淸溪洞天, 부암동) 등이 명소로 꼽혔으나 개발의 칼질로 죄다
쓰러지고 수성동만 옥인아파트의 압박 속에 간신히 살아남은 것을 2012년에 복원되어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그 외에 환희사계곡과 몇몇 약수터 주변에 조그만 계곡이 있으나 죄다
볼품은 없다.

수성동계곡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가인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8)이 그린 장
동팔경첩(壯洞八景帖)의 '수성동'이란 제목으로 어깨를 피고 등장한다. 여기서 장동은 인왕산
자락인 효자동(孝子洞)과 청운동(淸雲洞) 일대를 말하며, 북촌(北村)과 더불어 왕족과 사대부
(士大夫)들이 집과 별장을 짓고 살던 금싸라기 땅이었다.
특히 이 지역에는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이 빚은 절경이 많은데, 그중에 장동8경이 대표적
이다. (지금은 수성동과 창의문, 대은암 바위글씨만 살아남았음)

수성동에 가장 먼저 집을 지은 사람은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다. 문무(文
武)를 겸비하고 풍류의 1인자였던 안평대군은 기린교 부근에 비해당(匪懈堂)이란 집을 짓고
살았으며, 나중에 창의문 북쪽에 무계정사(武溪精舍)란 별장을 지었다.
영조(英祖) 시절에는 겸재 정선이 인왕산을 모델로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란 그림
을 남기면서 수성동을 비롯한 장동8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수성동 그림은 계곡 복원에 아주
큰 단서를 제공해주었다. 그림을 보면 기린교를 건넌 선비 3명과 시중을 드는 동자(童子) 1명
이 계곡 상류로 걸어가는 모습이 담겨져 있고, 가벼운 붓놀림으로 이끼가 낀 바위와 질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도 비오는 날에 이곳을 찾아 '수성동 빗속
에서 폭포를 구경하다(水聲洞 雨中觀瀑)'란 시를 지어 수성동을 격하게 찬양했다.


▲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 (기린교 돌다리가 그려져 있음)

이곳은 첩첩한 산주름 속의 골짜기가 아닌 도성(都城) 속에 자리해 있어서 접근성도 아주 착
하다. 하여 사대부 외에도 중인과 평민들도 많이 발걸음을 했는데, 인근 송석정(宋石亭)과 더
불어 조선 후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위항문학(委巷文學, 중인/평민/서얼들이 주도하는 문학
활동)의 성지(聖地)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이렇게 인왕산을 든든한 후광으로 삼으며 장안의 경승지로 큰 인기를 누렸던 수성동과 장동8
경은 1960년대 이후 서울 도심이 개발되면서 큰 위기를 맞는다. 오로지 개발 밖에 모르던 천
박한 개발의 칼질은 장동8경의 태반을 가루로 만든 것이다. 대은암 같은 경우는 그 칼질에 희
생되지는 않았으나 엉뚱하게 군사작전지역에 묶이면서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 되었고, 수성
동도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 9동이 계곡 중류 일대에 들어서면서 참으로 아름답던 그 경관은
99% 망가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인근 청풍계나 청계동천처럼 계곡이 대부분 증발하는 꼴은 면했지만 아파
트로 인해 계곡의 폭도 줄어들었고, 아파트 사이를 마치 버려진 하천처럼 흘러가면서 완전 천
덕꾸러기 신세가 되어버렸다. 또한 옥인아파트 9동 앞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해 어두컴컴한 지
하를 거쳐 역시나 생매장 신세가 되버린 청계천(淸溪川)으로 서글프게 흘러가야 했다.

그 이후 수성동의 이름 3자는 속인(俗人)들의 뇌리 속에서 점차 시들어가고 동네 사람들만 세
월의 저편으로 잊혀져가는 계곡의 이름을 간신히 붙잡을 정도로 명성은 크게 하락했다.

▲  수성동계곡 사모정

▲  기린교 돌다리

개발의 난도질로 태어난 옥인시범아파트가 계곡을 건방지게 깔고 앉으면서 수성동계곡은 40년
가까이 어둠에 묻혀 수난의 세월을 보냈다. 이러다가 수성동 이름 3자가 영원히 지워지는 것
은 아닐까? 빼앗긴 계곡에도 과연 봄은 오는가? 수성동에게는 그야말로 절망의 시절이었다.

허나 자연과 인간의 대결에서 거의 자연이 이기듯이, 수성동에게도 끝내 좋은 소식이 날라왔
다. 계곡을 깔고 앉던 옥인아파트가 2008년 재난안전위험시설 C급으로 지정되면서 철거가 결
정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발일변도(一邊倒)로 일관하던 세상도 조금은 변하면서 수성동의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서울시가 아파트를 밀어버리고 계곡을 되살리기로 의견을 모았다.
하여 2010년 10월 21일 기린교를 비롯한 수성동계곡 일대를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삼으면서 뒤
늦게나마 문화유산의 대우를 받게 된다. (서울의 계곡 중 최초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됨)
 
이후 인왕산을 가리던 옥인아파트는 입주민을 모두 내보내고 2011년까지 모두 철거되었다. 그
리고 아파트 주변을 통제하여 그해 여름부터 복원 공사에 착수, 1년 동안 공사를 벌여 2012년
7월 완성을 보면서 시민공원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개발의 칼질에 날라간 계곡을 살리고자
전문가와 사회단체, 문화재청에 자문을 구했고 정선의 수성동 그림을 적극 참조했으며, 옛 경
관을 어느 정도 재현하고자 소나무를 중심으로 상수리나무와 참나무, 산철쭉 등 우리 고유의
나무 18,477그루를 심었다. (그중에 구부러진 소나무가 제일 많음)
그 외에 돌단풍, 띠, 바위취 등 다양한 화초를 심어 주변과의 조화를 꾀했고, 좁아진 계곡을
크게 넓혀 계곡 양쪽에 전통 방식으로 돌을 쌓아 암석 지형을 최대한 회복하고자 했으며, 계
곡 중간에 전통식 정자인 사모정을 세워 선비와 지배층의 풍류를 조금이나마 느끼도록 했다.
그리고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곳으로 여겨지는 계곡 아랫쪽(기린교 동쪽)에 관람공간을
조성해 정선의 눈으로 계곡을 바라볼 수 있게끔 했으며, 게곡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산책로
를 닦아 인왕산과 어우러진 시민공원의 성격도 겸하게 했다.

수성동계곡 공원에는 복원된 계곡을 비롯하여 이곳의 터줏대감이자 유일한 늙은 존재인 기린
교가 있으며, 옥인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공원 북쪽에 아파트의 잔재를 일부 남겨두어 수
성동을 거쳐간 개발 지상주의의 그릇됨을 일깨우게 했다.
비록 계곡을 복원했다고는 하지만 완전 옛날 모습은 아니며 여전히 비슷한 자리(옛 옥인아파
트 9동 자리로 지금은 계곡 관람공간으로 바뀜)에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한다.

이 계곡은 청계천으로 흘러가는데, 기분 같아서는 전 구간을 모두 끄집어내 복원하면 좋겠지
만 이미 회색빛 시가지가 가득 들어차 지금으로써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계곡이 생매장
되는 구역은 계곡이 상당히 밑으로 내려간 상태로 주변 바위들도 날카로운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어 사고의 위험이 있으며, 기린교 같은 경우는 계곡이 3m 밑에 흐르고 있으므로 조금 아찔
하다.
그래도 수성동의 혜성(彗星)과 같은 재등장으로 서울 도심에서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하나 늘었으니 그 가치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비슷하다 할 것이다. 비록 완전하게 복원된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옛 모습을 되살리고자 했고, 복원공사를 벌이는 중에도 여러 의견을 수렴해
어색함을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그렇게 하여 인왕산이 베푼 옥계수를 모아 계곡을 재현했으
니 어설프게 재현된 청계천과 달리 살아있는 계곡이다.

수성동계곡의 범위는 보통 공원 일대 계곡과 기린교를 일컫지만 인왕산길에서 공원으로 내려
가는 계곡도 수성동 범위에 들어간다. 그 계곡이 있기에 수성동계곡도 있는 것이다. 비록 재
현된 폼이 낯설기는 하나 그것은 장차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옛날의 경치도
슬슬 피어오를 것이요. 도심 속의 상큼한 피서의 성지(聖地)로 잃어버린 왕년의 명성도 되찾
을 것이다.

* 수성동계곡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85-3


▲  2개의 통돌로 이루어진 조촐한 돌다리 - 기린교(麒麟橋)
칼로 싹둑 손질을 했는지 바위들이 90도 절벽을 이루며 무시무시한
모습을 드러낸다.


넉넉한 폭으로 흐르던 수성동계곡은 기린교 이전에서 급격히 좁아지고 하얀 피부의 반석들도
무시무시한 낭떠러지를 계곡 쪽에 빚으면서 제법 날카로운 모습을 보인다. 그 낭떠러지 바위
사이에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짧은 돌다리가 고색의 때를 간직하며 놓여져 있는데, 이
다리가 바로 수성동의 오랜 명물인 기린교이다.

기린교는 길쭉한 통돌 2개로만 이루어진 아주 단촐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다리 남쪽에 다리를
보조하는 커다란 돌 여럿을 둔 것이 전부이다. 다리 폭은 1m 남짓, 길이는 3m로 언제 조성되
었는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겸재 정선의 수성동 그림에 다리가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적
어도 17세기 이전에 닦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계곡을 찾은 귀족과 사대부들의 편의를 위해 닦은 것으로 보이는데, 벼랑으로 이루어진 이 부
분이 계곡 가운데 가장 위험하다.

서울 도심에서 가장 늙은 돌다리는 광통교(廣
通橋)이다. 그리고 수표교(水標橋)와 창경궁(
昌慶宮) 옥천교(玉川橋)가 2위, 3위에 들어간
다.
(중랑천 살곶이다리는 도심이 아니므로 제외)
수표교는 청계천 생매장 때 제자리를 떠나 장
충단공원에 둥지를 틀었고, 광통교는 비록 자
리는 지켰지만 생매장의 치욕을 겪다가 청계천
복원 때 약간 서쪽으로 옮겨졌다.
그에 반해 기린교는 그들보다 한참 후배이지만
제자리를 지키며 원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그 가치가 높다. 게다가 통돌로 만든 다리 가
운데 가장 긴 편이다.


◀  높은 벼랑 위에 걸쳐진 기린교


▲  정면에서 본 기린교의 위엄

▲  바로 앞에서 본 기린교
다리 너머로 수성동계곡의 생매장 현장이 보인다.



 

♠  수성동계곡 둘러보기

▲  잘 닦여진 수성동계곡 북쪽 산책로
계곡 일대를 두 눈으로 살피며 거닐 수 있다. 계곡 복원에 걸맞게 흙길이면
좋으련만 길을 현대식으로 닦은 것이 상당히 아쉽다.

▲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옛 옥인시범아파트의 잔해

수성동계곡 북쪽에는 옛 옥인아파트의 흔적이 아련하게 남아있다. 이 흔적은 아파트 7동의 1
층으로 2008년 철거가 결정되자 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계곡과 조금 떨어진 7동의 아랫도
리 일부만 남겨 이곳의 기념물로 삼았다.

한때 계곡을 깔고 앉아 감히 인왕산을 가리던 옥인아파트의 최후로 이곳을 요란법석 거쳐간
엄연한 역사의 흔적이다. 아파트를 말끔히 밀어버리는 것보다는 이렇게 일부라도 남겨 개발의
난도질에 희생된 수성동의 서글픈 과거를 보여주고, 무분별한 난개발의 폐해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교육의 장으로 삼는 것이 적당하다.
또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20세기 말 서울 지역 아파트의 양식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인
정되어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얻을 수도 있다.

계곡을 유린하던 인간의 창조물은 그 자리를 원주인인 계곡과 자연에게 내주고 이제는 그들의
눈치를 살살 보며 공원 한쪽 구석에 찌그러진 신세가 되었다. 인간이 아무리 용을 쓰고 만들
어도 위대한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귀여운 모래성에 지나지 않는다. 아파트의 남겨진 흔적은
마치 예비군훈련장의 시가전 훈련장이나 전쟁의 폭격으로 주저앉은 건물처럼 보이는데, 그렇
다. 대자연의 보복 폭격에 옥인아파트는 저렇게 주저앉은 것이다.


▲  옛 옥인아파트의 초라한 잔해

▲  계곡 북쪽 산책로 (인왕산길 방향)
지나가던 늦가을도 이곳이 좋았는지 알록달록 봉숭아물을 입혔다.

▲  계곡 북쪽 산책로 (하류 방향, 사모정 옆)

▲  수성동계곡의 구수한 양념, 사모정

사모정은 1칸 밖에 안되는 조촐한 팔작지붕 정자로 2012년에 지어졌다. 사모정이란 이름은 네
모난 정자를 뜻하는 것으로 새색시처럼 단아한 모습으로 계곡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는 이곳
을 스쳐갔던 옛날 정자를 재현한 것이 아닌 수성동계곡 수식용으로 세운 것이다.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에도 정자는 나와있지 않고, 수성동 관련 기록에도 정자가 있었다는 내용은 없기
때문이다.
허나 계곡과 나무만 있는 계곡에 전통 양식의 정자를 하나 두니 수성동의 풍경이 한층 더 살
아나는 것 같다.

계곡 바람과 인왕산 바람이 앞다투어 선선한 바람을 선사하고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며 솔내
음을 불어주는 명당 자리라 저곳에 들어가 낮잠 한숨 청하면 정말 꿀맛일 것 같다.


▲  계곡 상류와 인왕산으로 인도하는 산책로
나무와 꽃들이 산듯하게 가을옷을 입으며 막바지 처절한 아름다움을 불사른다.

▲  수성동계곡 공원 윗쪽 계곡

▲  인왕산 품과 맞닿은 수성동계곡 서쪽 산책로

▲  수성동계곡 상류 -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온 계곡

수성동계곡의 상류는 대략 3개 정도 되는 것 같다. 석굴암에서 내려오는 계곡과 그 남쪽에서
내려오는 계곡, 인왕산에서 꽤 유명했던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오는 계곡까지 서로가 상류를
자처하며 수성동으로 슬금슬금 내려온다. 특히 인왕천약수터에서 온 계곡은 거의 90도 각도의
암벽 사이로 좁은 공간을 타고 내려오는데, 그 풍경이 나름 절경을 이룬다. 그리고 작은 폭포
앞에는 얕은 못과 모래밭이 있어 어린이들이 흙장난을 하며 물놀이하기에 적당하다.
모래 옆과 공원 쪽에는 돌로 쌓은 인공의 흔적이 있어 조금은 어색하지만 이는 계곡을 복원하
면서 끼워놓은 것으로 2012년 복원 이전에는 폭포와 주변 암벽, 모래밭까지만 원래 모습이었
다.


▲  수성동계곡 남쪽 산책로

▲  계곡 남쪽 산책로에서 바라본 사모정

▲  슬럼프에 빠진 사모정 앞 수성동계곡

한때는 밋밋한 성냥갑 아파트 사이로 그들의 눈치를 보며 눈물처럼 흘러야했던 수성동계곡은
이제 누구의 눈치도 없이 가슴을 피며 당차게 흘러간다. 허나 늦가을 비가 적었던 탓에 상류
에서 물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 사모정 앞 계곡은 수풀만 무성한 늪지대처럼 변해버렸다.


▲  계곡 남쪽 산책로 (기린교 방향)

▲  잠시 흙길로 돌아선 계곡 남쪽 산책로 (기린교 부근)

▲  수성동계곡 관람공간에서 바라본 계곡 (계곡 동쪽 광장)

수성동계곡 동쪽에는 넓게 다져진 광장이 있다. 이곳은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위치로 여
겨지는 자리로 그 당시 정선의 눈높이가 되어 기린교를 비롯한 수성동계곡과 인왕산을 한 덩
어리로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상류를 제외한 수성동계곡 일대와 인왕산이 바라보
이는데, 보통은 높은 곳에 전경(全景)을 바라보는 자리를 두지만 이곳은 거꾸로 계곡 밑에 그
자리를 두었다.

인왕산이 빚은 수성동계곡은 기린교 밑도리를 지나 낭떠러지 밑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관람공
간 밑에서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하수구를 통해 칠흙같은 지하로 생매장된다. 계곡을 복원했
다고는 하지만 옛 옥인아파트 주변만 재현된 것이며, 이후 서촌(웃대)을 가로질러 세종로 서
쪽을 거쳐 청계천까지 흘러가는데, 이 구간은 보기만 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복잡한 시가지로
땅을 열기도 힘들다.
이들도 마저 끄집어낼려면 수많은 건물과 도로를 밀어야 되는데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 하
긴 서울 도심에서 수성동계곡만 그렇겠는가? 삼청골(삼청천)이나 청풍계, 창덕궁 빨래터에서
나오는 냇물 등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남산에서 베푼 수많은 물줄기들이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어 대부분 생매장을 당했다.


▲  가로등이 불을 밝히며 어두운 저녁을 대비한다.

계곡을 1바퀴 둘러보고 동쪽 관람공간으로 내려가니 시간은 어언 17시가 넘었다. 햇님이 커튼
을 치고 꽁무니를 빼면 인왕산과 수성동계곡은 검게 익고, 계곡 가로등이 불을 밝히며 어둠에
대항한다. 허나 가로등의 패기가 미약하고 이곳도 엄연한 자연 공간이라 그 어둠을 제대로 극
복하지는 못한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수성동계곡 나들이는 저물어가는 햇님처럼 그렇게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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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자락길, 황학정, 서촌(한양도성) 늦가을 나들이 ~~ (택견수련터, 감투바위, 단군성전, 행촌동 은행나무)

 


' 인왕산자락길, 황학정, 서촌 늦가을 나들이 '
인왕산자락길의 만추
▲  인왕산자락길의 만추(晩秋)


 

늦가을이 그 절정에 이르던 11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서울 도심에 숨겨진 상큼
한 자락길 인왕산자락길(숲길탐방로)을 찾았다.

인왕산자락길은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동쪽 자락에 닦인
둘레길로 2개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제1코스(2.7km)는 인왕산길을 졸졸 따라가는 길
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사직단(사직공원)까지 이어진다. 경사가 완만해 그리 힘들이지 않
고 이동할 수 있으며, 인왕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여럿 손짓해 언제든 정상 쪽으
로 방향을 틀 수 있다. 다만 인왕산길이 차량 왕래가 빈번하다보니 비록 작은 소음이지
만 종종 적막을 깨뜨린다. 

본글의 주인공인 제2코스는 숲길탐방로(3.2km)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산길을 따라 이빨바
위, 가온다리, 수성동계곡 윗쪽을 거쳐 택견수련터(황학정 북쪽)까지 이어진다. 인왕산
길과 서촌 주택가 사이에 자리한 길로 제1코스와 달리 차량의 눈치와 소음 걱정에서 벗
어나 아늑하고 달달한 산길의 멋을 누릴 수 있다. 다만 오르락내리락 굴곡이 조금 있어
서 약간은 힘들 수 있다. 하지만 두 다리만 멀쩡하면 삼척동자도 완주가 가능하니 걱정
따위는 인왕산 산바람에 날려보내기 바란다.
제2코스는 인왕산길(제1코스)과 서로 만날 듯 가깝게 거리를 두고, 경쟁을 하듯 펼쳐져
있다. (현실은 청운공원과 택견수련터에서만 만남) 아주 편한 길을 원한다면 제1코스를
, 차량의 눈치 없이 아늑한 산길을 꿈꾼다면 제2코스(숲길탐방로)를 이용하자. 특히 제
2코스에는 숨겨진 명소와 계곡, 약수터가 많고 풍경도 고우며, 서울 도심이 늘 옆에 파
노라마처럼 따라다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번 나들이는 제2코스를 이용하여 윤동주문학관에서 사직단(社稷壇, 사직공원)까지 이
동했다. 늦가을이 겨울 제국의 압박으로 생각보다 명이 짧아서 그가 지기 전에 그의 가
랭이라도 붙잡을 겸 서둘러서 찾았는데, 아직은 늦가을 풍경이 여전해 내 정처 없는 마
음과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오감(五感)을 크게 정화시켜 주었다. 역시 사람은 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이후 제2코스는 인왕산자락길이라 표시하며, 제1코스는 인왕산길로 표시함)


 

♠  인왕산자락길 (수성동 이남 구간, 택견수련터)

▲  수성동에서 남쪽으로 넘어가는 인왕산자락길

수성동계곡에서 잠시 시원한 계곡 바람을 맞은 인왕산자락길은 다시 남쪽으로 각박한 오르막
길을 오른다. (북쪽 방향도 마찬가지임) 길은 잘 닦여져 있지만 그렇다고 오르막길의 야성을
완전히 잠재운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거친 것을 조금 순하게 다듬었을 뿐이다.

그 길을 오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인왕산길이고, 왼쪽 내리막길
이 인왕산자락길이다. 그러니 자락길을 놓치기 싫다면 무조건 왼쪽으로 붙자. 그 길을 내려가
면 서촌의 일원인 누상동(樓上洞) 주택가와 불과 몇 보 차이로 가까워지며 길은 다시 온순해
진다. 이후 이름 모를 계곡과 체육시설을 지나면 길은 다시 오르막을 보이나 그리 각박하지는
않으며, 그 길을 오르면 배드민턴장과 인왕산길이 모습을 비춘다.


▲  다시 오르막은 시작되고 (인왕산길 배드민턴장 방향)

▲  택견수련터로 인도하는 북쪽 계단길

인왕산길 배드민턴장 남쪽에는 화장실을 갖춘 쉼터가 닦여져 있다. 청운공원 이후 가깝게 거
리를 두며 떨어져 있던 인왕산길과 인왕산자락길은 여기서 잠시 만났다가 이내 헤어진다.
쉼터 남쪽 언덕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길이 자락길로 그 계단을 오르면 자락길의 남쪽 종점
인 택견수련터가 마중을 한다.


▲  택견수련터 주변 체육시설
저 산길의 끝에 택견수련터가 깃들여져 있다.

▲  인왕산 택견수련터

황학정 뒷쪽 산자락에 자리한 택견수련터는 이름 그대로 택견을 수련했던 현장이다. 처음에는
막연히 옛날 사람들이 택견을 닦던 곳으로 알았으나 한때 끊어질 위기에 놓였던 우리 고유의
전통 무술인 택견을 지키고 널리 알렸던 조선의 마지막 택견꾼 송덕기(宋德基, 1893~1987)가
택견을 수련했던 현장이다.

송덕기는 조선의 마지막 한량이자 택견꾼으로 유명하다. 그는 1893년 1월 19일, 이곳과 가까
운 필운동(弼雲洞)에서 하급 관리인 송태희(宋泰熙)의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어머니
김씨는 잡화가게를 꾸리고 있어서 생활은 비교적 여유로웠다.
당시 필운동과 사직골, 누상동, 누하동 등 서촌(웃대) 지역은 택견의 성지로 택견을 갈고 닦
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장안 제일의 택견꾼으로 '인왕산 호랑이'라 불리던 임호(林
虎)도 있었다. 그는 지금의 배화여고 앞에 살고 있었으며, 송덕기는 12살부터 또래 동네 아이
들과 그에게 택견을 배웠다.

송덕기는 선천적으로 힘이 장사이고 운동과 무예에 소질이 상당했다. (나와 완전 반대임) 하
여 16살에 마을 택견꾼과 더불어 사직골 대표로 출전하여 유각골, 옥동, 애오개의 택견꾼과
싸워 이겼으며, 이때부터 '결련택견판(택견의 시합을 지칭하는 말)'에서 그 이름을 날리기 시
작했다. 그는 비록 체격은 작았지만 동작이 매우 날쌔어 적을 정확히 타격했으며, 특히 뛰어
오르며 쓰는 발차기는 매우 일품이라 당할 자가 없었다고 전한다.
17세에 장가를 들었고, 곧 군대에 입대했으나 1주에 2~3번 정도만 출근하면 되었으므로 나머
지 시간에는 택견을 수련하여 종종 결련택견판에 나가 몸을 풀었다. 그리고 이때 이 땅에 막
소개된 축구에도 구미가 당겨 축구를 익혔다.

1910년 8월 이후, 왜정(倭政)은 우리의 상무정신이 깃든 결련택견과 온갖 택견 수련을 금지시
켜 그 맥을 끊으려고 했다. 게다가 집안에서도 계속 택견을 그만두라고 압력을 가하면서 택견
수련도 눈치를 보고 해야될 지경이었다. 당시 그의 부모는 그가 자칫 싸움꾼이 될까봐 걱정되
어 택견 수련에 무조건 정색을 표했다고 전한다.
상황이 그러하니 택견 수련 딱 10년이 되는 22살에 잠시 택견을 접어두고 대신 활쏘기로 관심
을 돌려 황학정에서 국궁(國弓)을 닦았다. 그는 궁술(弓術)에도 꽤 소질을 보여 명궁으로 명
성을 날렸는데, 죽기 전까지 활쏘기를 즐겨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을 오래 쏜 사람이자 최초의
국궁심판으로 '한국인물도감(1982년)'에 소개되기도 했다.
또한 군대에서 사병들에게 근대식 체조를 가르쳤고, '조선불교 축구단'에 선수로 스카웃되어
월급 80원을 받으며 축구 선수로 3년 동안 뛰기도 했다. 이때 매년 열리던 평양축구단과의 경
기에 참가해 큰 활약을 보여주었다.

축구를 그만둔 이후 30대 말까지 딱히 두드러지는 행적은 없으며, 40세 때 조선극장(인사동에
있었음)을 운영하던 매부를 도와 극장을 지키는 기도를 하였다. 그래서 극장 주변에서 설치던
건달들을 죄다 때려잡았고, 당시 주먹패 대장으로 유명했던 김두한(金斗漢)과도 맞짱을 뜬 적
이 있다고 한다.
이후 금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으나 소득은 없었으며, 1951년 1.4후퇴 때 경남 밀양(密陽)으
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1958년경. 경무대(청와대)의 이승구 경관이 찾아와 대통령에게 택견 시범을 보여달라고 부탁
을 했다. 당시 택견은 일정한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둘이 맞서서 상대를 때려잡는 실전무
예라 혼자 시범을 보이기가 마땅치 않아 옛날 스승(임호) 밑에서 같이 배웠던 김성한(金成漢)
을 급히 불러 1달 정도 가르친 다음 그해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생신 축하 경찰무도대회'
가 열렸던 소공동(小公洞) 유도회관에서 택견을 선보였다.
당시 권력층과 무도인들은 왜열도식 무술에 익숙해 있던 상태라 택견을 보더니 별로라며 고개
를 돌렸다. 하지만 택견에 관심이 있던 이승만은 우리 무술을 발전시켜야 된다며 당시 경무대
경호원을 가르치던 박철희에게 그를 소개해 택견을 배우도록 지시했다.

박철희는 육군사관학교 초대 태권도 교관을 지낸 사람으로 그를 자주 초청해 경호원들에게 택
견을 가르치도록 도움을 주었다.


▲  택견수련터 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1960년 제17회 로마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대표팀은 우리나라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장에 선보
일 한국 문화로 택견을 선택했다. 그래서 제자 박철희와 함께 경복궁(景福宮)에서 택견 동작
을 사진 촬영했다. (당시 경복궁은 통제구역이었음)

박철희는 경무대 무도사범을 그만두고 '사단법인 택견무도원'을 설립하려고 하였다. 송덕기도
그를 전폭적으로 도왔으나 법인 설립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당시 영향력이 컸던 '수박도협회'
의 방해로 어려움에 빠졌다. 게다가 4.19와 5.16으로 나라가 계속 혼란 속에 잠겼고 법인 설
립도 계속 뜻대로 되지 않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부터 박철희의 조교
이자 같은 사직골 토박이인 김병수가 송덕기의 1등 제자가 되었다.

김병수는 당수도의 고수로 경무대 부사범을 지냈으며, 외국어대학교에 '택견권법부'를 만들었
고, 1963년에는 효자동 오리온다방 3층에 택견도장을 차리기도 했다. 또한 영어에도 능통하여
1964년 '블랙벨트(Black Belt)'와 '가라데 일러스트레이트(Karate Illustrate)'라는 미국의
유명한 무술 잡지에 택견에 대한 기사를 기고한 적이 있다.
허나 그는 해외 진출에 더 무게를 두고 있어서 1968년 1월 미국으로 건너가 버렸고, 미국 휴
스턴에 정착해 '김수가라데'란 타이틀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자연무술류'라는 새로운 체계
의 과학적 무술을 창안해 동양무도인의 대표로 위엄을 날렸다.

1972년 '태권도 가을호'에 송덕기가 '살아있는 태권도인'으로 소개되면서 당시 태권도의 1인
자였던 임창수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찾아가 배움을 받았다. 하지만 제대로 배우려는 사람이
없었고 실생활에도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아 금방 사람들이 나갔다.

그는 슬하에 자녀도 없고, 마땅한 제자도 없어서 이것저것 소일거리로 간신히 척박한 삶을 꾸
려나갔으나 1979년 부인이 세상을 떠나면서 더욱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1970년대 중반 신한승이 택견을 바로 일으켜보고자 송덕기를 찾아와 택견을 배웠다. 그는 택
견이 살려면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길 밖에는 없다고 여겨 문화재관리국을 수시로
찾아가 택견을 홍보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철밥통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저 냉대만 일삼
으며 보다 체계적인 자료를 가져오라고 소위 '갑'질을 벌였다. 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들
의 요구 양식에 맞추고 택견을 약간 변형시켜가며 해당 자료를 제출했다.
그렇게 하여 간신히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76호'의 지위를 얻으면서 택견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허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송덕기는 신한승의 그런 행동을 못마땅히 여기면서 서
로 갈라진 것이다.

송덕기는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1982년부터 젊은 제자를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83년 그 역시 국가 중요무형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이를 기리고자 '택견계승회(현재
사단법인 '결련택견협회')'를 만들었다. 1984년 집 근처에 '박민태권도 도장'을 빌려 제자를
가르쳤고, 제자 중 부유했던 '최유근'의 지원으로 1986년 신촌에 '택견보존회'란 이름으로 본
격적인 택견전수관을 개관하기에 이른다.
송덕기는 너무 기뻐서 매일 나와 제자를 가르쳤는데, 택견이란 존재를 매우 생소해하는 현대
인들의 무관심과 체육관을 운영한 경험이 전혀 없는 제자들의 운영 미숙으로 결국 1년도 안되
어 문을 닫고 말았다. 그나마 남은 제자들도 거의 군대에 들어가면서 죄다 흩어졌고, 1987년
에는 활까지 놓으면서 노인정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우연히 걸린 감기가 커지면서 그해 7월 22
일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9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1981년에 '제1회 대한민국 전통무도예술제'에서 '무도대상(武道大賞)'을 타기도 했으며,
택견을 보존하고 전수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택견의 태반은 이미 사라졌
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 택견수련터는 그가 택견을 닦았던 현장으로 그의 후학들(결련택견협
회)이 표석과 안내문을 세워 택견의 성지로 기리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여러 체육시설이 닦
여져 있어 동네 사람들과 산꾼들이 몸을 풀고 간다. 비록 목적은 다르지만 몸을 푸는 수련터
의 역할은 거의 녹슬지 않은 것이다.


▲  수련터 옆 감투바위 암릉
주름진 바위가 황학정 옆구리까지 느긋하게 내리막을 이루며 펼쳐져 있고,
늦가을이 질러놓은 불(단풍)이 활활 타올라 바위 주변을 화사하게 돋군다.


수련터 옆에는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길게 누워있다. 이들 바위는 저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
라 조촐하게 암릉을 이루며 황학정 동쪽까지 완만하게 내려간다. 그 암릉에 송덕기와 인연이
있는 감투바위가 숨겨져 있으니 한번 숨바꼭질을 해보기 바란다.
그 암릉에 두 발을 딛으면 바로 밑에 황학정을 비롯하여 서울 도심 서부와 남산이 훤히 시야
에 잡혀 조망도 그런데로 괜찮다. 인왕산자락길 개설로 수련터를 찾은 사람들은 늘었으나 정
작 바위의 존재감이 없어 지나치기 일쑤이다. 안내문이 없다보니 수련터 바로 옆에서 바위가
예사롭지 않은 눈짓을 보내고 있음에도 다들 지나치는 것이다.
하여 감투바위 암릉은 인적이 거의 없어 무척이나 한적해 천하 최대의 대도시인 서울 도심을
멍을 때리고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기기에는 아주 좋다.


▲  감투바위

사람들이 매우 좋아한다는 감투, 그 감투를 닮은 바위가 암릉 한복판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 속세에 알려지지 않은 인왕산의 비장의 바위로 송덕기가 택견 수련을 하거나 황학정에서 활
쏘기로 몸을 풀고 이곳에 걸터앉아 나라와 택견의 미래를 걱정했다고 한다. 송덕기의 택견 수
련을 묵묵히 지켜봤을 그는 황학정과 사직단, 서울 도심을 늘 지켜보고 있다.


▲  감투바위의 뒷모습

바위 뒷통수에는 장대한 세월이 무심히 긁고 간 흔적들이 역력하다. 지금은 저런 모습이나 여
러 세대가 흘러간 이후에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지 궁금하다. 대자연 형님의 성형(成形)
속도가 매우 느려서 그렇지 성형 실력만큼은 대자연을 따를 존재가 없다.

택견수련터 서쪽에는 인왕산길과 황학정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내려가면 윤동주문
학관부터 3.2km를 함께 한 인왕산자락길은 그 끝을 맺고 인왕산길에 합쳐진다. 소요시간은 사
진을 찍고 쉬는 시간을 합쳐서 넉넉잡아 1시간 반 정도. 경사가 좀 각박한 구간이 여럿 있지
만, 그것은 산이니까 어쩔 수 없다. 산은 산다워야 오르는 재미가 있지 않겠는가?
도로만 따라가는 인왕산길과 달리 상당수가 흙길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득이한 구간은 나무데
크를 닦아 놓았다. 자락길을 둘러싼 숲은 무성하며 도심을 향해 흘러가는 조그만 계곡들(청풍
계, 옥류동, 수성동 등)을 대부분 거쳐가면서 인왕산에도 계곡들이 꽤 숨바꼭질을 하고 있음
을 귀뜀해준다. 그 계곡들은 시내에 진입하면서 모두 강제 생매장을 당했으며, 2012년에 복원
된 수성동만 제대로 어깨를 피고 있다. (수성동 역시 조금 흐르다가 생매장 당함)
이처럼 인왕산자락길은 인왕산의 숨겨진 속살과 명소를 아낌없이 드러낸 도심 속의 보석이자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사각지대로 이번에 이렇게 인연을 지어 사각지대를 하나 지웠다.

* 인왕산자락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누상동, 사직동


 

♠  옛 경희궁의 흔적이자 전통 국궁(國弓)의 성지, 황학정(黃鶴亭)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5호

▲  등과정(登科亭) 바위글씨

택견수련터에서 인왕산길로 나와 남쪽(사직단 방향)으로 내려가면 황학정으로 내려가는 입구
(후문)가 나온다. 바로 그곳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커다란 바위가 누워있는데 길 쪽에서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가면 그냥 의미없는 바위로 여기고 지나치기 쉬우나 황학정 쪽에서
보면 180도 달리 보일 것이다. 그는 옛 기록에나 남아있던 등과정의 아련한 흔적으로 황학정
방향 바위면에 '등과정' 바위글씨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등과정은 서울 장안의 이름난 활터인 서촌5사정의 하나로 그 오사정이란 등과정과 옥동(玉洞)
등용정. 삼청동 운용정(雲龍亭). 사직동 대송정(大松亭). 그리고 누상동 풍소정(風嘯亭)을 일
컫는다. 이중 삼청동(三淸洞)은 북촌의 일원인데, 어찌 서촌5사정에 꼽혔는지 모르겠다.
조선 때는 활쏘기가 양반사대부와 왕족들이 익혀야 될 교양의 일원으로 인식되어 오사정에는
늘 그들로 붐볐다. 무관 같은 경우는 직업상 여기서 활쏘기 연습으로 몸을 풀었고, 다른 이들
은 교양 및 수련의 일원으로 몸을 풀었던 것이다.
허나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군대 무기에서 활이 제외하면서 이들 오사정은 싹 철
거되었고, 등과정만 유일하게 고종 때 새겨진 바위글씨를 흔적으로 남겨 그의 옛 자리를 귀뜀
해준다. 게다가 경희궁의 활터였던 황학정이 왜정 때 이곳에 안착하면서 자연스럽게 등과정을
계승하였다.


▲  황학정8경(八景) 바위글씨

황학정 후문(등과정 바위글씨)에서 황학정으로 내려가 그 뒷쪽 바위를 잘살펴보면 황학정8경
을 담은 바위글씨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바위에 네모난 홈을 닦고 그 안에 글씨들이 담겨져 있는데, 이들은 1928년 9월 금암 손완근(
錦巖 孫完根)이 쓴 것으로 황학정8경이란 제목을 내세웠지만 정작 황학정은 1개도 없고 모두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경복궁 주변의 풍경을 다루고 있어 제목과 내용이 완전 따로 논다.
여기서 읊은 8경은 다음과 같으며, 이중 금천교와 경복궁 담장 옆 수양버들을 제외하고는 그
런데로 살아있다.

백악청운(白岳晴雲) - 구름이 맑게 갠 북악산(백악산)
자각추월(紫閣秋月) - 자하문(창의문) 문루 위에 가을 달
모암석조(帽巖夕照) - 인왕산 모자바위에 비치는 석양 빛
방산조휘(榜山朝暉) - 인왕산 바위 위의 아침 햇살
사단노송(社壇老松) - 사직단을 둘러싼 노송
어구수양(御溝垂楊) - 경복궁 담장 옆 배수로 둑의 수양버들
금교수성(禁橋水聲) - 금천교 밑을 흐르는 물소리
운대풍광(雲臺楓光) - 필운대의 단풍 광경


▲  사방이 뻥 뚫린 황학정
황학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 밑에 부연을 두어 처마와
추녀의 곡선이 무척 시원스럽다. 정면 중앙에 걸린 황학정 현판은
이승만(李承晩) 전대통령이 쓴 것이다.


사직단 북쪽이자 인왕산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황학정은 이 땅에 몇 남지 않은 전통 활터이
다.
조선 말까지 서울 장안에는 서촌오사정 등 활쏘기를 닦던 사정(射亭)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군대 무기에서 화살이 제외되자 서울과 전국의 많은 사정이 문을 닫았고
황학정 자리에 있던 등과정도 그 거친 흐름을 헤어나지 못해 바위글씨만 남긴 채 휩쓸려 사라
졌다.

활쏘기를 좋아했던 고종 황제는 백성들의 심신단련을 위해 궁술(弓術)을 장려하기로 했다. 하
여 1898년 경희궁 회상전(會祥殿) 북쪽에 황학정을 지어 활터로 삼고 백성에게 개방하여 언제
든 활을 쏘도록 했다.
고종은 자주 황학정을 찾아 활쏘기를 했는데, 그가 사용했던 활 호미(虎尾)와 화살을 보관하
는 전통(箋筒)이 황학정에 전해 내려오다가 1993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천하에 어둠이 내리던 1910년 이후, 왜정은 망국의 황궁(皇宮)인 경희궁을 철저히 산산조각을
냈다. 1918년부터 궁궐을 밀어버리면서 주요 건물을 민간에 팔아먹었고, 1922년 황학정 자리
에 고의로 총독부 전매국 관사를 지으면서 그 황학정까지 밀어버리려고 했다. 이에 국궁을 하
던 사람들이 뜻을 모아 왜정과 협상을 벌여 돈을 건네주고 그 건물을 현 자리로 가져왔다.
앞서 소개했던 택견꾼 송덕기 역시 황학정을 해체 이전했을 때 직접 참여하여 손수 건물을 해
체하고 건물 부재(部材)를 가져와 다시 재조립했다. 또한 황학정 지킴이가 되어 이곳에서 행
패를 부리거나 예의 없이 구는 사람을 혼내주어 당시 사람들은 그를 '사직골 호랑이'라고 불
렀다.

1945년 이후 황학정은 전국 활터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으나 6.25 때 건물이 파괴되면서 활
쏘기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으며, 이후 황학정을 중수하고 한천각(閑天閣)과 국궁전시관 등 여
러 부속 건물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

전통 활터가 많이 사라진 와중에도 여전히 활터 기능을 수행하여 우리나라 전통 궁술의 성지
로 여전히 추앙을 받고 있다.
이곳에서는 궁술 대회(매년 12월에 전국궁술경연대회를 개최함)와 관련 행사, 활쏘기 체험이
열리고 있으며, 평일은 물론 휴일에도 활 쏘는 이들을 자주 구경할 수 있다. 천하 제일의 신
궁(神弓)으로 추앙받는 고구려 동명성왕(東明聖王)과 조선 이성계(李成桂)를 꿈꾸는 궁수들이
실력을 겨루는 모습도 볼만하며, 일반인을 대상으로 궁술 체험 이벤트도 열고 있다. 아직 활
을 만져본 적은 없지만 기회가 생기면 명중률을 떠나서 쏴보고 싶은 마음은 정말 굴뚝 같다.

* 황학정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산1-1 (사직로9길 15-32 ☎ 02-732-1582)


▲  황학정 내부
천정에는 황학정의 내력 등이 적힌 현판 2개가 걸려 있고, 평방(平枋)에는 태극기와
고종 황제의 어진(御眞)이 나란히 자리한다. 황룡포를 입은 그의 어진이
여기에 걸린 이유는 황학정을 세운 그를 기리고자 함이다.

▲  이승만 전대통령이 쓴 황학정 현판의 위엄

▲  화살을 쏘는 동명성왕, 이성계의 후예들

마침 황학정 회원 4명이 활쏘기를 겨루고 있었다. 여기서 과녁까지는 약 130~150m. 평소에는
매우 가깝게 여겼던 그 거리가 여기서 보니 참 까마득하게 보인다. 남산(南山)보다 더 멀리
느껴질 정도. 보는 사람도 그러한데 활을 쏘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그들은 주황색 천을 허리에 묶었는데 이는 황학정 국궁 회원임을 뜻하는 모양이다. 정자 이름
이 누런색, 주황색 학을 뜻하기 때문이다. 과녁까지 거리도 멀고 눈도 침침하여 명중을 했는
지. 외곽에 맞췄는지. 아니면 과녁 밖으로 빗나갔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날라간 화살은 전
동식 미니 케이블카에 실려 황학정으로 옮겨진다.

▲  황학정으로 인도하는 길 (국궁전시관 옆)

▲  황학정 표석 (황학정 정문)


 

♠  단군성전과 행촌동 은행나무

▲  단군성전(檀君聖殿)

황학정에서 다시 인왕산길로 나와 남쪽으로 가면 길 동쪽에 단군성전이 마중을 한다. 단군(檀
君)은 옛 조선을 세운 천하의 시조(始祖)로 그의 단군설화는 3살짜리도 모두 알 만큼 유명하
다. 허접스럽기 그지 없는 양이(洋夷)들의 그리스, 로마 설화를 능가하는 알찬 설화로 삼국유
사(三國遺事)에 그 설화가 실려 있으니 내용을 새삼스레 풀어보면 대략 이렇다.

옛날 천하를 다스리던 최고의 신, 환인(桓因)과 환웅(桓雄) 부자가 있었다. 환웅이 하늘 아래
로 내려가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싶었는데,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지구를 살펴보니 삼위태
백산(三危太白山) 지역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만하다 여겨져 천부인(天符印) 3개와 3,000명
의 무리를 주어 지구로 내려보냈다.
환웅은 태백산 마루 신단수 밑에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 했으며, 바람과 구름, 비를 관
장하는 풍백(風伯)과 우사(雨師) 등 신하를 거느리고 곡식과 인명(人命), 질병, 형벌, 선악(
善惡) 등 사람들의 360여 가지 일을 직접 다스렸다. 이때 굴 속에 함께 살던 호랑이와 곰이
찾아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청하니, 환웅은 쑥 1자루와 마늘 20개를 주며 이를 먹으면서 100
일 동안 햇빛을 안보면 사람이 되리라 했다.
그들은 굴에 들어가 수행을 했으나 호랑이는 이를 견디지 못해 뛰쳐나갔고, 곰은 21일을 버티
면서 여자 사람이 되니 이가 곧 웅녀(熊女)이다.

웅녀는 매일 신단수 밑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기원을 하니 환웅이 잠시 남자로 변해 웅녀
와 결혼하고 아들을 낳았다. 이가 곧 옛 조선의 시조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이다.

단군은 장성하여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여 옛 조선을 세우니 그때가 기원전 2,333년이
다. 우리 땅은 바로 그때를 단기(檀紀) 1년으로 삼아 지금에 이르니 무려 4,350여 년의 역사
를 지니고 있으며 단군은 무려 1,908년을 살았다고 전한다.

▲  단군성전 정문(외삼문)

▲  단군성전 뜨락 은행나무


▲  푸근한 인상의 단군왕검상 (오른쪽에 단군 영정)

※ 단군이 세운 옛 조선(고조선)
오로지 상상으로 제작된 단군상, 그리고 그의 영정, 후덕한 인상과 긴 수염, 황색 옷이 인상
적이다. 단군은 옛 조선(고조선) 군주의 명칭으로 여겨지며, 조선 군주가 정치와 제사를 모두
관장하던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였다.

옛 조선은 기원전 2333년 경에 건국되어 기원전 108년에 강제로 문을 닫은 장수국가로 한반도
를 비롯하여<남한 지역에 있던 삼한(三韓)도 조선의 간접 영역으로 보기도 함> 요동(遼東),
만주, 요서, 연해주, 산동반도를 포함한 화북(華北) 지역을 다스린 천하 대국이었다. (중원대
륙 상당수를 점유하고 있었다는 견해도 있으며, 서안 등 산서성에는 옛 조선이 세운 거대한
무덤 유적이 많이 있다고 함)

조선의 건국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여전해 기원전 2333년 건국설도 솔직히 무리가 있다. 산
소도 아까운 식민사관 패거리들은 기원전 10세기 이내로 창건 연대를 잡고 있으며, 영역도 한
반도 북부와 요동, 남만주로 크게 축소시켰다.
옛 조선의 중심지는 요동으로 보이며, 춘추전국시대에 연나라를 공격하여 대륙에 다시금 영향
력을 행사하려고 했으나 철기(鐵器)로 중무장한 연나라의 반격에 오히려 크게 밀려 요하(遼河
)를 비롯한 2,000리 이상의 땅을 잃고 만다. 당시 조선은 청동기 무기였다. 그러니 어찌 게임
이 되겠는가?
이후 대륙에서 넘어와 준왕(準王)의 신임을 받은 위만(衛滿)이 반란을 일으켜 준왕을 쫓아내
고 왕이 되었다. 준왕은 그를 따르는 신하와 배를 타고 남쪽으로 건너가 한왕(韓王)을 칭했다
고 하는데, 아마도 마한(馬韓) 영역인 전라도나 충청도로 내려간 것이 아닐까 싶다.

위만이 조선을 장악하자 철제무기를 개발하고 국력을 길러 한나라를 비롯한 주변 나라를 공격
해 사방으로 크게 영토를 넓히고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하여 막대한 부를 누렸다. 이에 한나라
무제(武帝)는 조선이 동방(東方) 무역 독점으로 배를 불리며 나날이 커지는 것에 크게 위협을
느끼며 우선 주변 나라를 말끔히 정리하고 그 자신감으로 섭하(涉河)를 사신으로 보내 조선을
협박했다.
당시 조선의 군주는 조선의 마지막 제왕인 우거왕(右渠王)으로 한나라의 요구를 한마디로 거
부하며 비왕(裨王, 제후왕)을 시켜 사신을 전송케 했다. 허나 섭하는 그 호의에 배은망덕하게
도 마부로 가장한 무사를 시켜 비왕을 죽이고 도망쳤다. 이에 한무제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옛
조선과 가까운 요동(지금의 요동이 아님)으로 보내 요동도위(都尉)로 삼았다.

비왕이 암살된 것에 적지 않게 뚜껑이 열린 조선은 섭하가 요동도위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
자 바로 한나라를 공격해 그 요동을 점령하고 섭하를 쳐죽었다. 그렇게 조선이 먼저 공격을
하자 한무제는 그것을 구실로 조선을 공격했다. 아마도 섭하를 떡밥으로 보내 조선을 건드리
려는 수작이 아니었을까 싶다.
허나 조선의 반격과 한나라군 내부 분열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패했다. 하여 뚜껑이 단
단히 폭발한 한무제가 다시 군사를 다그치자 정신을 차린 한나라군은 정비를 가다듬고 공격을
가해 끝내 왕검성까지 포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하며 끙끙 앓던 차에 조선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우거왕이 반
대파에게 피살되고, 왕을 잃은 조선 조정은 그 혼란을 잠재우지 못하여 결국 성은 함락되고
만다.

이렇게 옛 조선은 망하고, 그 땅 일부에 그 유명한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는데, 그것도 조
선 사람들의 끊임없는 비협조와 반발, 그리고 고구려(高句麗)와 부여(夫餘) 등의 등장으로 그
땅에 제대로 침도 바르지 못하고 쫓겨나고 만다.
한사군의 존재에 대해서도 여전히 말들이 많으나, 식민계열 쓰레기들은 평안도와 황해도, 요
동 일부로 보고 있으며, 많은 사학자들은 요동과 요서 지역으로 보고 있다. 한사군의 하나로
유명한 낙랑(樂浪)이란 존재는 낙랑군 외에 비슷한 이름에 낙랑국도 있었다고 하는데, 낙랑국
은 평양 지역, 낙랑군은 요서로 보고 있다.
호동왕자(好童王子)와 낙랑공주(樂浪公主) 설화로 유명한 낙랑은 낙랑군이 아닌 낙랑국이다.
만약 낙랑군이라면 낙랑공주는 공주를 칭할 수가 없다. 그냥 군을 다스리는 태수(太守)의 딸
일 뿐이다.

옛 조선은 전성기였을 때 인구가 무려 1억 8천만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조선의 문화와 문
명은 중원대륙과 주변의 많은 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한자(漢字) 같은 경우도 동이족(東夷族)
으로 대표되는 조선(또는 은나라)에서 만들어 전파했다는 견해가 많으며, 그 문자가 대륙에서
크게 발전하면서 동아시아 통용 글자가 되었다.
또한 흥안령산맥(興安嶺山脈) 주변에서 일어난 홍산문명(紅山文明) 또한 조선의 찬란했던 흔
적으로 보고 있으며, 한반도와 만주에서 많이 발견되는 엄청난 양의 고인돌(지석묘) 또한 조
선의 청동기시절 흔적이다. 그리고 비파형동검도 조선을 상징하는 유물이다.

※ 단군성전(백악전)의 역사
단군성전은 1968년 이숙봉(李淑峰) 여사의 3자매(이정봉, 이숙봉, 이희수)가 세웠다. 이후 사
단법인 현정회(顯正會)로 이관되었으며, 1973년 서울시로부터 보호문화재로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1990년에는 쌍용그룹 김석원 회장의 지원으로 성전을 개축했다.

전체 대지면적 약 800㎡, 성전 52.92㎡, 태극정문(太極旌門), 관리실 등을 갖추고 있으며, 건
물 색깔이 죄다 베이지색을 띄고 있는데, 이는 박정희 시절 그가 좋아하는 색으로 칠했기 때
문이다. 이곳 뿐 아니라 많은 사당과 문화유산이 그 시절 베이지색으로 색 변경을 당했다. 성
전 현판은 김응현, 홍익인간 글씨는 원중식, 내외삼문 간판은 이현종이 썼다.
또한 옛 조선이 열렸던 유서깊은 10월 3일 개천절<어천절(御天節)이라고도 함>에는 이곳에서
개천절대제전(開天節大祭典)이 성황리에 열린다. 전통제례와 전통공연, 온갖 체험행사(제례복
체험, 국궁체험 등) 등이 열리며, 일반인도 참여 가능하다.

* 단군성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1-28 (인왕산로 22, 현정회 ☎ 02-736-6375)


▲  단군성전 앞에 펼쳐진 늦가을 동화

단군성전 남문은 바로 사직공원(사직단)과 이어진다. 허나 평소에는 늘 닫혀있고 사직공원에
서 그곳을 이어주는 길 또한 봉쇄되어 있어 별 수 없이 인왕산길로 우회해 외삼문(外三門)으
로 들어서야 된다. 그 덕분에 사직공원~단군성전 지름길에 인적이 거의 끊기면서 사람의 발자
국 대신 노란 은행잎이 가득 쌓여 늦가을 정취를 아주 진국으로 끌어올린다.
벌써부터 겨울 제국의 보이지 않는 압박이 시작되면서 은행나무와 단풍나무들은 나뭇잎을 하
나, 둘 땅바닥으로 털어낸다. 우리는 그 잎을 낙엽이라고 부른다. 늦가을에 어울리면서도 한
편으로는 우울증을 유발시키는 그 이름 말이다. 은행잎이 금지된 길과 그 주변에 수북히 쌓여
이 일대는 그야말로 노란 세상을 이룬다. 마치 황금색 비단이 쫙 깔린 듯한 모습으로 말이다.

우리야 귀를 접고 누운 그들을 보면서 늦가을 분위기를 즐기지만, 그들은 인생의 마지막을 노
래하며 서서히 끝을 준비한다. 그러고보면 사람이나 은행잎, 인간이 지은 건물이나 인생은 모
두 부질 없는 모양이다. 시작이야 어쨌든 그 종점은 다 같지 않던가.


▲  한양도성 밖 인왕산로1길 (인왕산, 무악동 방향)

▲  인왕산입구 한양도성 탐방로 (인왕산 방향)

단군성전 앞 교차로에서 서쪽 인왕산로1길로 들어섰다. 길 왼쪽(남쪽)은 사직동 주택가와 종
로문화체육센터가 있고, 오른쪽은 인왕산의 싱그러운 숲으로 그 산줄기는 경희궁(慶熙宮)까지
미치지만 숲은 여기서 뚝 끊기고 만다. 그러니 인왕산로1길이 속세와 자연의 팽팽한 경계선인
셈이다.
그 길을 4분 정도 가면 고색이 짙은 한양도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크게 5거리를 이루
는데, 성 밖 북쪽 길(인왕산로1길)은 무악동과 인왕산 쪽으로, 서쪽(사직로1가길)은 독립문
방면, 남쪽(송월1길)은 홍파동, 경희궁 쪽으로 이어지며, 5거리 동쪽(성곽 안쪽) 인왕산입구
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성곽길을 타면 인왕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  송월1길과 한양도성 (홍파동, 경희궁 방향)

▲  사직동 한양도성 (5거리 서남쪽)
인왕산에서 내려온 한양도성은 여기서 잠시 고개를 숙이고 만다.
(사직동~월암근린공원 구간 성곽은 아직 복원되지 못함)

▲  은행잎의 마지막 삶터이자 정모 현장, 한양도성 여장
나무에게 버림받은 은행잎들이 딱딱한 여장 위에 모여 앉아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한다. 여장 뿐 아니라 그 주변은 온통 황금색 은행잎의 세상이다.

▲  여장 위에 내려앉은 은행잎들

▲  행촌동(杏村洞)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0호

사직터널 윗쪽이자 인왕산 남쪽 자락의 끝을 잡은 행촌동은 조금은 빛바랜 산동네이다. 그렇
다고 옛날 달동네처럼 주황색 기와를 지닌 허름한 집들이 즐비한 그런 곳은 아니다. 온갖 빌
라와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찬 서울의 흔한 동네로 그 주택가 속에 행촌동 은행나무와 권율장
군의 집터, 그리고 딜쿠샤란 명소가 숨겨져 있다.

딜쿠샤 곁에 자리한 행촌동 은행나무는 약 420살에 이르는 장대한 나무로 행촌동의 오랜 터줏
대감이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덧없는 양분과 동네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
어 높이 23m, 둘레 6.8m에 이르는 큰 나무로 어엿하게 성장했다. 허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이
이곳까지 미치면서 그의 보금자리는 주택에 밀려 많이 좁아졌고, 주택 사이에 비좁게 자리해
있으나 건강은 아직 양호하다.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이자 이곳에 살았던 권율(權慄)장군이 손수 심었다고 전하며, 주인
은 오래 전에 갔지만 그의 사연을 끈질기게 붙들며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로 이 나
무 때문에 동네 이름이 행촌동(은행나무 마을)이 된 것이다. 참고로 은행나무는 태반이 사람
이 심은 것이며, 자연적으로 싹을 내린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서울에서 오래되고 아름다운 은행나무를 꼽으라면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 성균관(문묘) 은
행나무(대성전 은행나무 포함), 그리고 이곳 은행나무를 격하게 내세우고 싶다.

▲  남쪽에서 바라본 행촌동 은행나무

▲  북쪽에서 바라본 행촌동 은행나무


▲  은행나무 그늘에 자리한 권율장군 집터 표석

은행나무가 있는 곳은 권율(1537~1599)의 집터로 인근 필운동(弼雲洞) 배화여고에도 그의 집
이 있었다. 필운동 집은 그의 사위이자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오성 이항복(李恒福)에게 물
려주었는데 그 집이 필운대(弼雲臺)이다. (현재 필운대 바위글씨가 남아있음)

그럼 임진왜란의 영웅, 권율(權慄)은 누구일까?
권율은 안동 권씨로 자는 언신(), 호는 만취당()과 모악(). 시호는 충장()
이다. 1582년 식년시 문과(式年試 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는데, 임진왜란 시절 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것으로 보아 무예도 제법 갖추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는 승문원정자()와 전적()을 거쳐 1587년 전라도도사(全羅道都使)와 예조정
랑(禮曹正郞), 경성판관(鏡城判官)을 지냈으며, 1591년 평안도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급히 광주목사(廣州牧使)로 임명되어 그곳으로 달려갔으며 전라도
순찰사(巡察使) 이광(李珖)과 방어사(防禦使) 곽영()이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군사 4만을
모아 서울로 올라오자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었다.
이광과 곽영은 수원과 용인에 진을 치고 주변에 있는 왜군을 토벌하고자 했는데, 권율은 주변
에 조금씩 흩어진 적들을 치지 말고 임진강(臨津江)에서 그들의 서진(西進)을 막아 군량미를
운반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다음 적의 빈틈을 노리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고 의견을 냈다. 허나 뇌에 주름이 가득한 이광은 그 말을 무시하고 오로지 머릿수에 의지해
용인에 있는 왜군을 공격했다.
이광의 군사는 4만(왜국은 10만이라고 주장함)에 이르렀으나 대부분이 칼과 창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오합지졸이었다. 그에 반해 왜군은 왜열도에서 나름 알아주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수백 명의 정예 기병으로 저항을 했다.
허나 조선군은 겨우 수백에 불과한 왜군에게 형편없이 깨지고 싸움에 서툴렀던 선봉장 이시지
(李詩之)와 백광언(白光彦)이 전사하는 등,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했다. 허나 권율은 이를 직
감하고 신중하게 처신해 휘하 군사를 잃지 않고 광주로 물러나 후일을 도모했다.

1592년 가을, 전라도 남원으로 내려가 1,000명의 군사를 모집해 동복현감(同福縣監, 전남 화
순)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梨峙)에서 전주(全州)로 진출하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왜군을 막았다. 초반에 황진이 조총에 맞아 부상을 입으면서 군사의 사기가 잠시 떨어졌으나
권율이 군사를 독려하여 왜군을 격퇴하고 승리를 거뒀다. 그 공으로 전라도 감사(監事)로 승
진하게 된다.
1592년 12월, 서울 수복을 위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천안 직산(稷山)에서 머물렀는데, 체찰
사(體察使) 정철(鄭澈)이 그 많은 인원을 먹일 군량이 없으니 돌아가서 관내를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허나 행재소(行在所)에서 북상하라는 명이 떨어지면서 곧바로 군을
이끌고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 오산 세마대(洗馬臺)>에 들어가 진을 쳤다.
한편 권율이 독성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은 왜장 우키타(宇喜多秀家)는 후방과 차단될 것이
두려워 서울에 있던 군사를 이끌고 독산성을 공격했다. 허나 권율은 성문을 굳게 닫고 수비만
할 뿐, 좀처럼 성 밖으로 나오질 않아 왜군의 피해는 나날이 늘어갔다.
뚜껑이 열린 우키타는 사람을 보내 독산성의 약점을 탐지한 결과 물이 부족하다는 정보를 입
수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바로 성 밑에 큰 못을 파니 과연 성 안에 물이 마르면
서 조선군의 식수에 비상이 걸렸다.

허나 권율은 당황하지 않았다. 비범한 인물답게 명쾌한 꾀를 낸 것이다. 그래서 동이 트는 이
른 아침에 왜군이 잘보이는 곳에 말을 세워놓고 쌀을 부어 말을 씻기는 시늉을 벌였다. 그것
을 본 단순한 왜군은 성 안에 물이 부족하다는 것이 거짓임을 알고 크게 동요했다고 한다. 바
로 그때를 이용해 유격전을 펼치며 타격을 가하자 발작한 우키타는 영책(營柵)을 불지르고 바
로 서울로 줄행랑을 쳤다. 그들이 도망칠 때 정예 기병 1,000명을 보내 퇴로를 차단하고 왜군
수천을 죽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세마대 전투)

1593년 1월, 서울 수복을 위해 조경(趙儆)을 보내 근교에 마땅한 곳을 물색하다가 행주산성(
幸州山城)으로 들어가 목책(木柵)을 쳤다. 그곳은 서울과도 가깝고, 한강을 끼고 있으며, 조
망도 좋고, 인근에 여러 요새와 함께 연합 작전을 펴기에 아주 좋은 위치였다. 허나 석성(石
城)이 아닌 야트막한 토성(土城)이라 수비전에는 썩 유리한 편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서둘러
목책을 엮은 것이다.
목책이 완성되자 독산성에 병력 일부를 남기고 모두 불러들였으며, 별도로 4,000명을 뽑아 전
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를 시흥 호암산(虎巖山, ☞ 관련글 보러가기)으로 보내 후방
을 돕도록 했다. 그리고 처영(處英)이 이끄는 승병(僧兵) 1,000명이 행주산성에 합류했다.

권율은 소수의 군사를 보내 서울을 공격했고, 고양 혜음령에서 왜군에게 깨진 명나라군을 도
와 그들의 전멸을 막아주었다. 권율의 활약에 적지않게 염통이 쪼그라든 우키타는 행주산성을
쓸어버리기로 마음 먹고 서울과 인근의 군사를 싹 긁어모아 무려 3만의 대군으로 1593년 2월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그때 행주산성에 있던 조선군은 승병을 합해서 겨우 약 2,800명, 그 외에 군사들을 도우러 성
에 들어온 밥할머니를 중심으로 한 아낙네들과 지역 사람들이 있었다.

왜군은 7부대로 나눠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행주산성이 견고한 성이 되지 못해 여러 번
위기가 있었으나 군사들은 일당백의 위엄을 드러내며 적들을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로 만들었
으며, 화차(火車)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등의 새 무기도 크게 활약을 했다. 또한 밥할머
니의 행주치마 부대는 치마로 돌을 나르고 군사들의 밥을 나르는 등, 서로가 단결하니 왜군은
결국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사한 군사들의 시신을 모아 불태우고 줄행랑을 쳤다.
이 싸움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니 권율과 조경, 처영, 조선군과 승군, 밥할머
니의 아낙네들, 지역 사람들이 빚어낸 대작품이었다.

이후 파주로 옮겨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이빈(李薲)과 함께 후방을 지켰으며, 전라
도로 내려갔다가 그해 6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都元帥)로 승진해 경상도에 주둔했다. 1596년에 도망친 병사를 즉결처분한 것으로 잠시 해직되기도 했으나 바로 한성판윤(漢城判尹)
에 임명되어 호조판서(戶曹判書)와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터지자 명나라군과 함께 왜군이 머무는 울산성(蔚山城)을 공격
했다. 허나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겁에 질려 도망치는 바람에 함락시키지 못했으며, 순천
으로 자리를 옮겨 순천 예교(曳橋)에 있던 왜군을 공격했으나 비리비리한 명나라군의 비협조
로 함락시키지 못했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왔으나 그해 7월 인생을 마감하니 그의 나이
62세였다. 선조(宣祖)는 그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했으며,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
등으로 삼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봉해 그의 공을 기렸다.

권율은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명장으로 바다에 이순신(李舜臣)이 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
鄭起龍)과 곽재우(郭再祐), 권율이 있었다. 비록 초창기 용인 싸움에서 어리버리한 상관들 때
문에 졌고, 정유재란 때는 밥버러지 명나라군 때문에 적지 않은 고생을 했지만 그 외에는 모
두 대승을 거두었다. 특히 행주대첩은 적은 군사로 10배 이상의 왜군을 물리친 우리 전쟁사의
길이 빛나는 장쾌한 대첩이다.
그의 활약과 공훈에 대해서는 '권원수실적(權元帥實蹟)'이란 책이 전하고 있으며, 그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있으나 인근이 유원지화되어 늘 시끄러우니 숙면이나 제대로 취하고 있
을지 모르겠다.

행촌동 은행나무를 끝으로 늦가을 한복판에 달달하게 벌였던 인왕산과 황학정, 행촌동 나들이
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딜쿠샤는 시간 관계로 사진에 담지 않고 통과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행촌동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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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1월 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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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에 찾아간 청송 주왕산 단풍 나들이 ~~~ (절골에서 가메봉, 용연폭포, 절구폭포, 용추폭포, 자하성터, 대전사까지)

 


' 주왕산 늦가을 나들이 '
(절골, 가메봉, 용연폭포, 용추폭포, 주왕계곡)

▲  대전사에서 바라본 주왕산

▲  용추폭포

▲  절골계곡


 

늦가을이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수놓기 시작하던 10월의 한복판에 늦가을 단풍 성지로 격
하게 추앙받고 있는 청송(靑松) 주왕산을 찾았다.
주왕산은 대자연이 경북 한복판에 빚은 크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호남 내장산(內藏山)에 버
금가는 단풍의 대표 성지(聖地)이다. 서울에서 약 600리(옛 10리는 약 5km) 거리로 당일로
가기에는 무리가 있어 좀 넉넉하게 무박 2일 코스로 다녀왔다.

토요일 저녁 10시, 신도림역(1,2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준비된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주
왕산이 있는 동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늦가을 단풍의 화려한 향연과 아직까지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는 주왕산에 대한 강한 설
레임에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고 검은 도화지가 되버린 차창 밖만 열심히 바라보며 나름대
로 주왕산을 그려본다. 말로만 듣던 주왕산의 실물은 어떠할까?? 단풍은 제법 물이 올랐겠
지? 대전사까지 모두 볼 수 있을까? 등등...

서울을 출발하여 약 5시간 30분 만에 주왕산 남쪽 끝에 자리한 주산지 주차장(상이전마을)
에 이르렀다. 아직 새벽 어둠에 잠긴 주차장에는 천하 곳곳에서 산꾼과 나들이꾼을 바리바
리 싣고 온 관광버스로 가득한데,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주차장 모퉁이에서 간단히 아침을
해먹었다.
밥과 반찬을 가져온 이들이 많았고, 취사 도구까지 가져와 라면과 찌개, 오뎅탕 등을 해먹
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렇게 갖은 먹거리들이 모두 모이니 그야말로 출장 뷔페가 따로 없
으며, 주차장 옆에는 식당을 겸한 가게가 환하게 불을 켜며 간단한 먹거리를 팔고 있었다.

그렇게 아침을 때우고 4시 30분에 다시 버스를 타고 서쪽에 자리한 절골교로 이동했다. 그
림 같은 비경을 자랑하는 주산지(注山池)도 봤으면 좋으련만 그곳은 일정에 없었기 때문에
공간의 여유가 있는 주산지 주차장에서 아침만 먹고 바로 철수한 것이다.
절골교에서 모두 버스에서 내려 절골탐방지원센터까지 12분 정도 걸었다. 여기서 주왕산의
빗장이 열리기를 기다리다가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5시, 빗장이 열리기가 무섭게 주왕
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  주왕산 절골, 가메봉, 사창골

▲  주왕산 뒷쪽에 숨겨진 절골

절골(절골계곡)은 주왕산 동남쪽에 깃든 계곡으로 주왕산 뒷통수에 해당된다. 주산천(注山川)
의 상류로 골짜기가 꽤 깊고 숲이 울창하며, 옛날에 절이 있었다고 해서 절골이라 불린다. 계
곡 길이는 8km로 주왕산 동쪽 대관령(731m)에서 발원한 갈전골(갈절골)과 신술골이 한데 모여
절골을 이룬다.
삼삼한 숲에 포근히 감싸여 태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여름 제국도 눈치를 보며 피해갈 정
도로 시원하다. 계곡은 물이 풍부하고 기암괴석과 반석, 간간히 나오는 조그만 폭포가 운치를
더해주며. 상류로 올라갈수록 풍경의 질이 높아지니 꼭 상류(대문다리)까지는 오르기 바란다.
  
절골코스는 절골탐방지원센터에서 계곡을 따라 펼쳐지는데 여러 차례 계곡을 건너야 된다. 반
듯한 다리 대신 징검다리가 놓여져 있으나 부실한 곳이 적지 않아 자칫 물에 빠지기 쉽다. 하
지만 수심이 얕아 그리 위험은 없으며, 계곡 트래킹 및 피서지로 아주 그만이다.

절골은 인근 주산지와 함께 '내주왕계곡'이라 불리며, 풍경이 고와 주왕계곡(周王溪谷) 못지
않다. 계곡을 옆에 끼고 상류로 올라가다가 대문다리를 지나서부터 계곡과 서서히 멀어지며,
산길 경사도 점차 각박해져 깔딱 직전까지 이른다. 그렇게 각박한 산길을 오르면 가메봉 동쪽
갈림길에 이르고, 여기서 서쪽 능선길로 가면 가메봉이다.

* 절골탐방지원센터 → 대문다리 → 가메봉 (3시간 20~30분 소요)


▲  고요함에 잠긴 절골 (절골 중류)
늦가을 향연을 준비하는 나무들이 계곡을 거울 삼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  벼랑 사이를 흐르는 절골

▲  늦가을 채색이 짙은 절골 상류
너른 반석과 조촐한 폭포가 풍경의 아름다움을 돕는다.

▲  가메봉으로 오르는 길목에서 바라본 주왕산 남쪽 줄기
산 아랫도리와 중간 도리는 단풍의 향연이 한참이나 해발 700m 이후로는 벌써부터
앙상한 분위기를 자아내 올해도 거의 저물었음을 실감케 한다.

▲  주왕산 가메봉(882m) 바위와 그 너머로 보이는 왕거암

가메봉은 주왕산 구역에서 두수람(923m), 왕거암(907m)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이다. 주왕산 동
쪽에 자리한 가메봉은 넓직한 바위로 이루어져 동쪽과 남쪽, 서쪽이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으
며, 하늘에서 가까운 봉우리이나 칼처럼 솟은 뫼에 꽁꽁 둘러싸여 있어 조망의 질은 그리 시
원치 못하다.

우리는 여기서 간단히 행동식을 섭취하고 주왕계곡으로 내려갔다. (일부는 칼등고개를 경유하
여 주왕산 정상으로 이동)


▲  가메봉에서 바라본 천하 (주왕산 남쪽)
가메봉이 아무리 높다한들 하늘 아래 뫼이로다.

▲  가메봉에서 주왕계곡, 사창골로 내려가는 산길


 

♠  주왕산 사창골, 용연폭포

▲  사창골 상류

가메봉에서 울퉁불퉁한 산길을 20~30분 정도 내려가면 사창골이 슬쩍 모습을 비춘다. 가메봉
북쪽에서 발원하여 주왕계곡으로 흘러가는 사창골은 숲이 매우 삼삼하고 바위와 소(沼)가 많
아 절골 못지 않은 고운 매력을 드러내고 있으며, 후리메기3거리를 지나 40~50분 정도 내려가
면 주왕계곡이 모습을 비춘다.


▲  동그랗게 자리를 닦은 조그만 소(못)
해가 지고 밤이 되면 하늘에서 선녀 누님들이 이곳으로 내려와 목욕을
하지는 않을까? 그러고 보니 못의 사이즈도 선녀 누님에 걸맞게
아담하다.

▲  너른 반석과 조그만 폭포
계곡 주위로는 낙엽이란 쓸쓸한 꼬리표를 단 단풍들이 귀를 접고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하고 있다.

▲  풍덩 스킨쉽을 하고 싶은 동그란 소
사창골 냇물은 여기서 숨 좀 고르다가 다시 종점 없는 길을 재촉한다.

▲  사창골 하류 산길
사창골 산길은 하류에 이르러 잠시 계곡과 멀어지고 벼랑길로 돌변한다.
벼랑 밑에는 사창골이 빚은 절구폭포가 있으며, 벼랑길을 지나면
주왕계곡에 이르게 된다.

▲  주왕계곡 용연폭포(龍淵瀑布, 제3폭포)

주왕계곡(주왕천계곡, 주방천계곡)은 주왕산(720m)의 중심 계곡으로 '내주왕계곡'이라 불리기
도 한다. 주왕산 동쪽에서 발원한 큰골에서 시작하여 주왕산 심장부를 구비구비 돌다가 대전
사를 지나서 주방천(周房川)이란 이름으로 속세로 흘러간다.
용연폭포와 용추폭포, 시루봉, 학소대, 급수대 등 대자연이 빚은 온갖 작품이 가득해 눈을 부
시게 하며, 특히 용추폭포 주변은 주왕산의 모든 것을 긁어모은 것처럼 대장관을 이룬다.
깊은 산골에 숲이 울창하고, 계곡 좌우는 높은 벼랑으로 이루어져 협곡이 적지 않은데, 그런
계곡을 둘러싸고 600m가 넘는 많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그래서 주왕산을 석병
산(石屛山)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험한 지형을 지닌 탓에 예로부터 산적들이 많았고, 난리가
날 때마다 이곳으로 피난을 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한다. 특히 바위 봉우리가 많아 설악산,
월출산(月出山)과 더불어 이 땅의 3대 암산(岩山)으로 격하게 꼽히기도 하며, 경북의 금강(金
剛)으로 추앙받기도 한다.

신라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의 족자(簇子)이자 원성왕(元聖王)에게 밀린 김주원(金周
元)이 머물렀다고 해서 주방산(周房山)이라 불렸는데, 이후 그는 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해
졌다. 하여 그 연유로 주왕산으로 이름이 갈린 것으로 보이며, 고려 후기에 나옹화상이 그리
바꾸자고 해서 이름이 갈렸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다른 유래로는 당나라 사람인 주도(周鍍)가 8세기 후반,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을 칭하며
진나라 재건을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당나라군에게 보기 좋게 털렸다. 그래서 요동을 거쳐
신라로 도망, 주왕산이 험하다는 풍문을 듣고 그곳에 들어가 주변을 약탈하며 후일을 도모하
다가 당나라의 토벌 요청을 받은 신라에게 털리고 자신은 잡혀 처단되었다. 그래서 주왕산이
라 했다고 한다.
허나 이 전설은 마땅한 기록도 없고 역사적인 근거가 없으며, 조선 때 명나라에 대한 꼴통 사
대주의(事大主義)에 젖은 지역 유생들이 지어낸 것으로 여겨진다. 명나라가 있던 중원대륙과
청송의 명산인 주왕산을 연결시켜 지역의 자부심을 어떻게든 높이려고 머리를 싸맸던 유생들
의 그릇된 생각이 지어낸 산물인 것이다.

주왕계곡은 '청송 주왕산 주왕계곡 일원'이란 이름으로 국가 명승 11호로 지정되었다.


▲  용연폭포의 위엄 (윗폭포)

주왕계곡 상류에 자리한 용연폭포는 제3폭포, 쌍폭, 용폭이라 불리기도 한다. 예전에는 간단
하게 제3폭포라 불렸으며, 2단으로 이루어진 장대한 폭포가 위엄을 자랑하며 하얀 실타래 같
은 물줄기를 밑으로 뽑아낸다. 폭포 밑에는 푸른 못이 펼쳐져 있는데, 영덕 강구항 앞바다와
이어져 용이 머물렀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있다. 그래서 용연폭포란 간판을 지니게 되었
다.
윗폭포 옆에는 얕게 파인 3개의 동굴이 있어 폭포의 경관을 더욱 신비롭게 꾸며주며, 물소리
가 우렁차 귀신도 도망을 칠 정도이다. 못 남쪽에는 탐방로와 조망대가 있는데, 사람들이 폭
포를 구경하느라 금방금방 빠지지를 않아 정체가 심하다. 그만큼 폭포가 사람들의 마음을 제
대로 앗아간 것이다. 우리도 폭포를 구경하느라 한동안 발을 움직이지 못했지. 대자연의 기묘
한 작품 앞에 우리가 할 일이란 그저 감탄사 연발과 사진 촬영 뿐이다.

▲  용연폭포 옆에 패인 3개의 동굴

▲  푸르게 익은 용연폭포 못 (윗폭포)


▲  용연폭포 아랫폭포
아랫폭포도 윗폭포 못지 않은 장쾌함을 보여준다. 이곳은 못 바로 앞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  주왕계곡의 백미, 절구폭포~용추폭포

▲  절구폭포로 인도하는 좁은 사창골 협곡

용연폭포를 둘러보고 다시 왔던 길로 내려가면 절구폭포로 인도하는 좁은 협곡이 마중을 한다
. 앞서 사창골 산길의 아랫쪽으로 사창골의 하류이기도 한데, 그 협곡을 5분 정도 들어가면
그 길의 끝에 절구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  절구폭포 (제2폭포)

바위 너머 윗쪽에서 2단으로 쏟아지는 절구폭포는 제2폭포라 불리기도 한다. 응회암(凝灰巖)
에 주로 생성되는 절리(암석이 갈라진 틈)에 의해 생긴 폭포로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윗폭
포 밑에는 선녀탕(仙女湯)이 수줍은 듯 숨겨져 있으며, 아랫 폭포 밑에는 수심이 얕은 못이
형성되어 있어 물놀이 장소로 아주 그만이다.
이곳은 사창골 하류로 폭포 주변이 모두 벼랑으로 막혀 길이 없다. 그래서 다시 되돌아나가야
된다. 전쟁 때 만약 이곳으로 몰린다면 정말 몰살을 각오해야 될 정도로 궁벽한 곳이나 주변
풍경이 아름답고 물이 시리도록 맑아서 내 즐겨찾기 명소로 살짝 숨기고 싶다. 현재 선녀탕과
윗폭포는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니 얌전히 아랫폭포 앞에서만 머물기 바란다.


▲  옆에서 바라본 절구폭포

▲  병풍바위

절구폭포를 둘러보고 주왕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주변 풍경이 서서히 흥분을 하면서 나도 모르
게 장대한 벼랑에 감싸이게 된다. 그 벼랑은 병풍바위로 계곡 양쪽으로 거의 직각으로 솟은
낭떠러지가 병풍처럼 둘러져 그야말로 하늘만 보이는데, 벼랑 밑에는 옥처럼 맑은 주왕계곡이
청정함을 자랑하며 힘차게 흐르고 있다.
발을 전혀 들일 수도 없을 이런 험지에 인간들은 산천유람 욕구를 위해 마구 탐방로를 내었는
데, 벼랑 밑부분에는 혹시나 모를 대자연의 테러(낙석)에 대비해 지붕까지 둘렀다. 주왕산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웅장한 멋을 지닌 병풍바위 밑에는 제1폭포라
불리는 용추폭포가 달려있는데, 이곳 풍경은 가히 압권이라 앞서 제2폭포, 제3폭포를 능가한
다.
대자연의 위대한 작품에 혼이 탈탈 털린 속인들은 사진을 찍고 풍경을 구경하느라 좁은 탐방
로는 늘 정체를 빚어 행렬이 다소 버벅거리는데, 풍경이 풍경인지라 정말 그럴 수 밖에 없다.
그게 동물과 신(神)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는 인간들의 인지상정이 아니던가?
아무리 여름 제국이 무더위 갑질로 천하를 뜨겁게 달구어도 이곳만큼은 어림도 없을 정도로
무더위를 잊게 한다. 벼랑에 감싸여 햇살도 마음 놓고 착륙을 못하고, 계곡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주니 땀이 붙어있을 재간이 없다.

용추폭포 윗쪽에는 선녀탕이 있고, 그 위에 구룡소(九龍沼)가 있으며, 탐방로 밑은 계곡과 벼
랑으로 되어있어 계곡과 폭포로의 접근은 통제되어 있다.


▲  대륙의 협곡 같은 병풍바위의 위엄
협곡 사이로 탐방로가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있다. 이렇게 보니 주왕산의 옛 이름인
석병산(石屛山)이란 이름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

▲  용추폭포 구룡소
수심도 깊고 지형도 각박한 이곳에 9마리의 용이 살았다고 전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  구룡소와 용추폭포 사이에 자리한 선녀탕
선녀 누님들이 들어가기에는 수심이 좀 깊다. 하늘나라 선녀들은
키가 나무만 했던 것일까?

▲  용추폭포(제1폭포)
제2폭포, 제3폭포와 달리 폭포의 정면 모습을 담을 수가 없다. 그만큼
이곳은 칼처럼 솟은 벼랑 밑에 무섭게 펼쳐진 첩첩한 협곡이다.
그나마 탐방로가 닦여져 있으니 이 정도로라도 보는 것이다.

▲  가까이에 있으나 그림의 떡처럼 보이는 용추폭포 밑 동그란 못

▲  벼랑 사이로 각박하게 이어진 병풍바위 협곡 (서쪽 부분)


 

♠  주왕산 마무리

▲  주름선이 인상적인 시루봉 ▲

병풍바위 협곡을 지나면 계곡을 건너는 학소교가 나온다. 다리 옆에는 홀로 솟은 날씬한 돌기
둥이 손짓을 하는데, 그 돌기둥이 시루봉이다.
시루봉은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은 작품으로 그 모습이 떡을 찌는 시루처럼 생겼다
하여 시루봉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바위 피부에는 주름선이 많은데 옆에서 보면
어두운 표정을 지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여 신비감을 더한다. 완전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무장된 천험의 돌기둥이라 접근은 정말 어림도 없어 보이는데, 저 봉우리 위에는 주왕산 산신
이나 신선만의 공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들의 숨겨진 보물이라도? 그러니까 대자연
이 사람들이 오르지 못하게끔 저렇게 깎아 놓았을 것이다.

이런 절경에는 꼭 옛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붙여놓은 전설이 하나씩은 꼭 있기 마련, 그 내용
은 대략 이렇다.
옛날 어느 추운 겨울, 한 도사가 바위 위에 올라가 열심히 도를 닦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신선 2명이 하늘에서 내려와 도사가 추위에 떨지 않도록 바위 밑에 불을 지폈는데, 그 연기가
바위 전체를 감싸며 봉우리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이게 끝임.


▲  시루봉 밑 주왕계곡


▲  학소대(鶴巢臺)

시루봉 맞은편에는 학소대라 불리는 커다란 낭
떠러지가 장대한 모습을 자랑하며 시루봉과 자
웅을 겨룬다.

계곡 바로 옆에 직각으로 높이 솟아있어 그 장
엄함에 주눅을 들게 만드는데, 시루봉 마냥 낭
떠러지로 이루어져 있어 철옹성 마냥 범접하기
가 어려워 보인다.
절벽 꼭대기에는 키 작은 나무들이 자라 세상
을 굽어보고 있으며, 학소대의 덩치가 대단하
여 주변 계곡에 늘 그늘을 드리운다.
옛날에 청학(靑鶴)과 백학(白鶴)이 무리를 지
어 살았다고 해서 학소대라 불리며, 그 학소대
밑에 도승(道僧)이 절을 짓고 살았는데, 꿈에
신선이 나타나 빨리 피하라고 재촉하므로 밖으
로 나오니 위에서 바위가 굴러떨어져 절을 덮
쳤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한 토막 전해온
다.


▲  인간이 만든 비루한 작품, 학소교 (학소대 밑)
대자연의 걸쭉한 작품을 쭉 보다가 인간이 만든 콘크리트 다리를 보니 정말로
못봐주겠다. 아무리 아치형으로 만들어도 거기서 거기임..

▲  급수대(汲水臺)

학소대를 지나면 육중한 바위 봉우리인 급수대가 모습을 비춘다. 그 역시 낭떠러지로 이루어
진 30여m의 주상절리(柱狀節理) 바위로 옛날 주왕의 군사들이 바위 위에 무자위를 설치해 계
곡 물을 위로 소환했다는 전설이 있어 급수대란 간판을 지니게 되었다. 물론 주왕의 전설도
거짓이며 급수대의 전설 또한 거짓이다.


▲  주왕계곡 북쪽에 솟아난 벼랑 (이름은 모르겠음)

▲  자하성(紫霞城)터

급수대를 지나 계곡 하류(대전사)로 계속 길을 재촉하면 길 오른쪽에 자하성터가 초췌한 몰골
로 마중을 한다.
자하성은 주왕굴을 중심으로 하여 지형을 이용해 쌓은 산성(山城)으로 주방산성, 주왕산성이
라 불리기도 한다. 주왕이 신라군을 막고자 쌓았다고 하나 현실은 삼국시대 또는 고려 때 축
성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곳을 거쳐 갔다는 신라 왕족 김주원이 자신에게 돌아올 왕위를
가로챈 김경신(원성왕)을 크게 원망하며, 여기서 잠시 딴 마음을 품지 않았을까 싶다. 허나
그 마음도 부질 없음을 깨달았는지 강릉(명주)으로 내려가 거기에 둥지를 틀었다.

성 둘레는 12km에 이르렀다고 하며, 대자연의 끊임없는 태클과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죄
다 무너지고 지금은 일부만 겨우 남아 있다. 그 모습도 돌무더기처럼 남아있어 자하성터 안내
문이 없었다면 그냥 자연산 돌무더기로 지나쳐도 이상할 것이 없다.


▲  주왕계곡의 흥미로운 존재, 아들바위

자하성터를 지나면 계곡 냇가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아들바위를 만나게 된다. 덩치가 큰 네
모난 바위가 다소 기운 모습으로 자리해 있는데, 겉모습은 딱히 유별난 것은 없으며, 그냥 계
곡에 놓인 커다란 바위 정도 외에는 특별한 것은 없다. 허나 어찌된 영문인지 아들을 낳게 해
준다는 신비한 존재로 각인되어 옛날부터 아들바위란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땅의 오랜 고질병이라 할 수 있는 아들 선호 사상이 빚은 산물이라고나 할까? 냇가 한복판
에 저런 커다란 바위가 있으니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돌을 던졌을 것이고, 바위 위에 얹혀지면
마치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것이 점차 확장되어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이
야기까지 생겨난 모양이다.
그런데 다른 바위와 달리 여기서는 그냥 던지면 안된다. 바위를 등지고 다리 가랑이 사이로
돌을 던져 바위에 골인을 해야 아들을 얻는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그냥 왼팔로 던져 골인을
하면 된다고 했는데, 그새 수법이 바뀐 모양이다. 어쨌든 오랜 세월 사람들이 던질 돌이 바위
위에 수북히 쌓여 그의 높은 인기를 실감케 한다.


▲  잠시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다 (주왕계곡 하류와 주왕산 산줄기)

▲  주왕계곡 하류 (대전사 동쪽)

▲  주왕산 서쪽 자락에 자리한 대전사

주왕산에 들어서면서 시간이 되면 주왕굴과 대전사(大典寺)까지 말끔히 둘러보려고 했다. 주
왕산 상의주차장까지 13시까지 모이기로 해서 시간이 좀 넉넉할 줄 알았는데 벌써 12시 반이
넘어버렸다. 상의주차장까지는 앞으로도 30분을 더 가야 된다. 그러니 이들을 제대로 볼 시간
이 없는 것이다.
하여 산을 좀 타야 되는 주왕굴은 다음으로 미루고 상의주차장 직전 길목에 있는 대전사라도
어떻게 해보려고 했다. 이 절은 신라 후기에 창건된 오래된 절로 주왕산의 터줏대감격 존재인
데, 문화유산이 여럿 있어서 사진에 모두 담고 싶었다. 허나 시간 부족이란 현실 앞에 경내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쳐야 했다.
그렇다고 무리를 해서 보는 것도 단체 활동에 대한 예의는 아니며, 너무 시간에 쫓기듯이 보
느니 쿨하게 다음으로 넘기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하지만 얼마나 아쉽던지 아무리 다음에
오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그 다음이란 것이 언제가 될지는 미지수이다. 서울에서 제
법 먼 거리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대전사를 지나니 바로 주왕산의 대표 관문인 상의 매표소이다. 이곳은 대전사 때문에
문화재 관람료란 명목으로 입장료를 뜯고 있는데, 매표소 사람들의 눈빛에는 어느 누구도 그
냥 들여보내서는 안된다는 비장한 각오가 엿보였다. 그 돈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
<주왕산 상의(대전사)매표소만 입장료를 징수함, 나머지(절골, 월외리 등)는 입장료 없음>

상의매표소를 지나니 다른 유명 산과 마찬가지로 먹거리촌이 징하게 펼쳐진다. 도토리묵과 파
전, 송이, 동동주, 산채비빔밥, 백숙 등을 취급하고 있는데, 서둘러 길을 재촉하려는 찰라 낯
익은 얼굴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적지 않은 일행들이 거기서 동동주 1잔에 간단한 요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늦을까봐 대전사 등 많은 것을 두고 왔는데, 이렇게 여유롭게 산행
뒤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이럴줄 알았다면 대전사라도 제대로 보고 오는 건데
갑자기 기분이 허탈해진다.
상황이 뭐 그리 되었으니 다시 대전사로 가기는 틀렸고, 일행들과 어울려 주왕산의 명물인 송
이와 도토리묵, 동동주 1잔을 걸치며 같이 상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  상의주차장에서 바라본 주왕산과 주왕계곡

상의주차장에 도착하니 13시 20분, 늦게 오는 사람들이 속출하여 13시 40분이 되어서야 출발
을 했다. 주차장에는 산꾼과 나들이꾼을 태운 관광버스와 차량들로 홍수를 이루었고 그에 아
랑곳하지 않고 차량들은 계속해서 밀려들어온다. 그러나보니 들어오는 길은 정체가 대단하여
많은 차량들이 마을 밑에 차를 대고 걸어오기도 했다.

주왕산을 벗어난 우리는 안동(安東)으로 넘어갔다. 안동댐 주변에 자리한 식당에 들어가 안동
의 토속 음식인 헛제사밥 정식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는데, 헛제사밥 정식은 일반적인 제삿상
음식과 비슷하다.
헛제사밥의 유래는 조선 때 유생들이 배가 고프거나 비싼 음식을 먹고 싶어서 성현(聖賢)들에
게 제사를 지낸다고 거짓말을 치고 노비와 주변 백성들을 닥달하여 만들게 한 음식상으로 '헛
'이란 접두어를 붙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그 음식상이 이제는 안동의 대표 밥상이 되
어 전국에 불티나게 팔리는 것이다.

이곳 헛제사밥 정식은 나물이 버무려진 놋쇠 그릇에 밥을 비벼 먹는 것인데, 제사 때 쓰는 국
과 간고등어, 전, 떡, 잡채 등이 정식을 이룬다. 맛도 그런데로 괜찮은 편, 순식간에 밥과 반
찬을 비우고, 술도 여러 잔 마시니 졸음이 밀려와 나를 희롱한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식당 남쪽에 자리한 낙동강(落東江)과 월영교에서 잠시 소화 좀 시키다가
16시 30분에 출발했다. 아무리 목적지가 주왕산이라고 해도 마지막 종점은 결국 집이다. 서울
까지는 4시간 정도 걸렸으며, 피곤한 탓에 자다깨다를 무한으로 반복했다.

정말 번개처럼 날라가 재미나게 보냈던 무박 2일, 그곳이 그리워지고 같이한 이들이 보고 싶
은 마음에 비록 보잘 것은 없지만 이렇게 글을 남긴다. 다소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 아쉬움은
다음이란 인연을 잡아 해결하면 될 것이다.

* 절골 소재지 -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주산지리
* 주왕계곡(용연폭포, 용추폭포 등) 소재지 -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상의리
* 주왕산국립공원(☎ 054-870-5300)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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