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 묘비만 남은 이영민묘

차중락 묘 북쪽에는 야구선수로 유명했던 이영민의 유택이 있다. 무덤은 다른 곳으로 이전되고 묘비
만 덩그러니 남아 옛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이곳의 신세를 잠시 졌던 이영민(1905~1954)은 경북 예
천 출신으로 배재고등보통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나왔다.

 

1928년 육상 400m에 출전해 한국 신기록을 세웠으며, 같은 해 서울운동장(구 동대문운동장)에서 열
린 경성의전과의 시합에서 우리나라 사람 최초로 홈런을 날려 크게 인기를 얻기도 했다. 1931년 잡지
'동광'이 선정한 '조선이 낳은 10대 운동가' 중 최다 득표를 차지했으며, 해방 이후 조선야구협회 초대
이사장, 1954년에는 대한야구협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1958년부터 대한야구협회에서 그를 추모하고자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서 종합 타격 1위를 차지한 선

수에게 '이영민 타격상'을 수여하고 있다.

 

2. 이영민묘 묘비(묘표)

 

3. 망우역사문화공원 사색의길 서쪽 구간 (설산 장덕수 선생묘 입구 북쪽)

 

4. 표석에 쓰인 설산 장덕수의 어록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노라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장덕수의 '주지를 선명하노라'에서

 

 

5. 설산 장덕수 선생묘

설산 장덕수(1894~1947,12)는 황해도 재령군 출신으로 빈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10세 때 부친을

여의었으며, 이후 진남포로 넘어가 그곳 학교를 나왔는데, 거기서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게 된다.

해주 연희보통학교를 나와 진남포 이사철 급사로 취직했으며, 1911년 9월 조선총독부에서 시행한 제

임문관 시험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판임관에 임용되었으나 1912년에 그만두고 왜열도로 유학길을

떠났다.

 

왜열도에서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면서 와세다대학의 문학 강의록과 정경과 강의록으

로 독학하여 1912년 가을 와세다대학 고등예과에 편입했다.

1913년 고등예과를 수료하고 같은 대학의 정경학부에 입학했는데, 그 학교에서 신익희와 김성수, 송

진우를 만나 벗으로 교류했다. 특히 신익희는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와 조선학회 등에서 같이 활동을

했다.

조선유학생학우회의 기관지 '학지광' 간행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신익희, 윤홍섭 등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고 한인학생회의 간부로 주도적으로 활동했다. 또한 웅변에 뛰어나 1915년 일본전국대학생웅

변대회에 참가하여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열변을 하여 1등을 차지했다.

 

1916년 7월 와세다대학교를 졸업했으며, 대학교 교수가 조선총독부 관리를 제안했으나 이를 흔쾌히

거부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허나 조선총독부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명되어 형사들의 감시를 받는

처지가 된다.

1917년 중원대륙 상해로 건너가 여운형 등을 만났고, 신아동제사의 사원으로 들어가 1918년 정당 조

직의 필요성을 역설해 여운형, 신채호, 조동호, 김규식, 신성모, 신규식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

하는데 가담했다.

1919년 2월 비밀리에 귀국을 했으나 왜경에게 체포되어 신안군 하의도로 거주제한을 당했다. 1919

년 11월 왜국 정부로부터 초청을 받은 임시정부 외무부 차장 여운형이 장덕수 석방을 조건으로 내걸

면서 하의도에서 벗어나 상해로 들어왔고, 이후 여운형을 수행해 왜열도에 다녀왔다.

 

1920년 4월 김성수, 송진우 등과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했으며, 동아일보의 초대 주필에 취임했다. 그

해 6월 조선교육회 결성에 참여해 평의원을 지냈으며, 그해 가을 서울에서 사회혁명당에 참여했고,

12월에는 조선청년연합회 창립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1년 1월 서울청년회 결성에 참가하여 이사가 되었으며, 그해 4월 조선노동공제회의 창립에 참여

고, 노동공제회 의사(議事)에 선출되었다. 또한 그는 조선청년연합회와 서울청년연합회의 지도자

로 추대된다.

그러나 1921년 '사기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다른 공산주의 그룹으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1922년 6

서울청년회와 조선청년연합회에서 제명을 당하게 된다. 사기공산당 사건은 그가 사망한지 37년이

지난 1984년이 되서야 관련이 없음이 밝혀졌으나 그때는 그 사건을 완전히 뒤집어쓰며 세인들의 손가

락질과 좌절감에 크게 괴로워했다.

 

1923년 4월, 동아일보사 부사장 겸 주필로서 미국으로 유학을 갔는데, 이때부터 사회주의자와 사회주

의 체와 완전히 선을 긋게 된다.

1936년까지 미국에 머물면서 허정, 이기붕 등과 한국인 유학생 친목단체 조직에 참여, 북미한국인유학

생총회의 부회장에 선출되었으며, 허정, 이기붕, 조병옥, 이승만, 안창호, 김규식, 서재필과 만나 교류

다. 1925년에는 이승만 등이 조직한 동지회에 가입하기도 했으며, 임정 구미위원부에 수시로 출입

했다.

 

1934년 6월 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재무부 주미(뉴욕 지부) 제5행서 재무위원에 선임되었다.

국하여 1936년 동아일보 부사장을 지냈으나 그해 8월 25일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부사

장직을 사퇴했다. 속이 좁은 조선총독부는 일장기 말소 사건을 구실로 동아일보를 폐간시키려고 했으

나 장덕수는 송진우와 함께 조선총독부 경무국을 찾아가 폐간 조치를 철회해줄 것을 호소해 간신히

폐간을 면했다.

허나 그때부터 조선총독부 그늘에 순응하며 왜정 전시체제에 적극적인 협력자가 되어 더러운 친일 행

오점을 남긴다.

 

1945년 9월 송진우, 김성수, 백남훈, 허정, 백관수, 조병옥, 윤보선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 창당 조직에

했으며, 이후 한민당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한국민주당 외무부장에 선출되었고 1946년 한민당 정

치부장이 되어 당의 이념을 정립하는데 크게 공을 세웠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이 땅의 신탁통치를 추진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던 김구, 이승만과 달리 미소공동

회에 참여해 우리의 견해를 적극 표명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한국의 독립에 미국과 소련의 입김

이 배제될 수는 없으며, 현재로써는 그들을 실력으로 밀어내는 것은 역부족이란 견해를 내비췄다.

그 일로 김구와 격렬히 논쟁을 벌이기도 했으며, 1947년 5월부터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여부를

김구와 다시 갈등 관계에 놓이기도 했다.

 

1947년 12월 2일 새벽, 종로경찰서 소속 경찰관 박광옥과 한독당 당원 교사 배희범이 장덕수의 제기

자택을 방문했는데, 그들이 갑자기 쏜 총에 맞아 쓰러졌으며,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과다출

혈로 인해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6. 적막에 잠긴 설산 장덕수 선생묘

호석이 둘러진 봉분과 지붕돌 묘비(묘표), 상석, 문인석 1쌍, 망주석 1쌍, 장명등을 지니고 있는데, 망

우리묘지(망우역사문화공원)에서 이 정도의 규모를 갖춘 무덤은 별로 없다.

 

7. 얼굴 한쪽이 날라간 가련한 문인석 (설산 장덕수 묘역)

6.25 시절인 1950년 서울 수복 이후, 망우산과 망우리 일대에서 북한군을 크게 토벌했는데, 그 과정에

서 무심히 지나간 총탄, 폭탄으로 저렇게 되었다. (누구의 총탄으로 저 지경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음)

 

8. 세호가 새겨진 망주석 (설산 장덕수 묘역)

 

9. 사색의길 동림정 갈림길 (북쪽 방향)

여기서 잘 닦여진 사색의길을 계속 따라 가면 망우역사문화공원 시작점, 망우리고개로 이어지고, 동

림정 뒷쪽 산길을 오르면 망우산 북쪽 능선길로 망우산2보루와 3보루, 망우산 정상(망우전망대)과 만

난다. 그리고 구리둘레길1코스인 동쪽 길로 들어서면 관룡탑과 시루봉, 망우산1보루, 용마산으로 이

어진다.

 

10. 관룡탑, 시루봉으로 인도하는 숲길

동림정 갈림길에서 잠시 망우산 사색의길을 뒤로 하고 오랫만에 관룡탑을 보고자 남쪽 산길로 들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