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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둘레길 늦가을 나들이


' 인왕산둘레길 늦가을 나들이 '

늦가을에 잠긴 인왕산자락길2코스

▲  늦가을에 잠긴 인왕산둘레길

인왕산자락길 가온다리 백운동천 바위글씨

▲  가온다리

▲  백운동천 바위글씨

 


늦가을이 하늘 아래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던 11월 첫 무렵, 서울 도심의 상큼한 숲길
로 추앙을 받는 인왕산둘레길을 찾았다.

인왕산둘레길은 인왕산(仁王山) 허리에 닦여진 8.4km의 둘레길로 인왕산은 물론 인왕산
둘레길까지 내 즐겨찾기 명소로 흔쾌히 등록되어 있다. 하여 매년 20번 넘게 그들을 찾
아가 나의 마음을 끊임없이 비춘다.
이번에는 황학정에서 시작하여 청운공원까지 이동했는데, 아직은 늦가을 풍경이 여전하
여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마음과 오감(五感)이 어느 정도 정화가 되었다. 역시나
사람은 대자연을 떠나서는 절대로 살 수 없다.


♠  인왕산자락길 택견수련터~수성동 이남 구간

▲  택견수련터로 인도하는 숲길 (인왕산둘레길)

사직단(社稷壇, 사직공원)에서 황학정(黃鶴亭)을 거쳐 인왕산길로 들어서면 오른쪽 언덕으로
계단길이 손을 내민다. 인왕산둘레길은 여기서 인왕산길을 버리고 계단길을 통해 산속으로 들
어서는데, 그 계단길을 오르면 택견수련터가 모습을 비춘다.


▲  인왕산 택견수련터

황학정 뒷쪽 산자락에 자리한 택견수련터는 그 이름 그대로 택견을 수련했던 현장이다. 처음
에는 막연히 옛날 사람들이 택견을 닦던 현장으로 알았으나 한때 끊어질 위기에 놓였던 우리
고유의 전통 무술인 택견을 지키고 널리 알렸던 조선의 마지막 택견꾼, 송덕기(宋德基, 1893~
1987)가 택견을 수련했던 현장이었다.

송덕기는 조선의 마지막 한량이자 택견꾼으로 유명하다. 그는 1893년 1월 19일, 이곳과 가까
운 필운동(弼雲洞)에서 하급 관리인 송태희(宋泰熙)의 2남3녀 중 막둥이로 태어났는데, 어머
니 김씨가 잡화가게를 꾸리고 있어서 생활은 비교적 여유로웠다.
당시 필운동과 사직골, 누상동(樓上洞), 누하동(樓下洞) 등 서촌(웃대) 지역은 택견의 성지(
聖地)로 택견을 갈고 닦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장안 제일의 택견꾼으로 '인왕산 호랑
이'라 불렸던 임호(林虎)도 있었다. 그는 지금의 배화여고 앞에 살고 있었으며, 송덕기는 12
살부터 또래 동네 아이들과 그에게 택견을 배웠다.

송덕기는 선천적으로 힘이 장사고 운동과 무예에 소질이 상당했다. 하여 16살에 마을 택견꾼
으로 사직골 대표로 출전해 유각골, 옥동, 애오개의 택견꾼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부
터 '결련택견판(택견의 시합을 지칭하는 말)'에서 그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는 비록 체
격은 작았지만 동작이 매우 날쌔 적을 정확히 타격했으며, 특히 뛰어오르며 쓰는 발차기는 매
우 일품이라 당할 자가 없었다고 전한다.
17세에 장가를 들었고, 곧 군대에 입대했으나 1주에 2~3번 정도만 출근하면 되었다. 하여 나
머지 시간에는 택견을 수련했으며, 종종 결련택견판에 나가 몸을 풀었다. 그리고 그때 이 땅
에 막 소개된 축구에도 구미가 당겨 축구를 익혔다.

1910년 8월 이후, 왜정(倭政)은 우리의 상무정신이 깃든 결련택견과 택견 수련을 금지시켜 그
맥을 끊으려고 했다. 게다가 집안에서도 계속 택견을 그만두라고 압력을 가하면서 택견 수련
도 이제 눈치를 보고 해야될 지경이었다. 당시 그의 부모는 그가 자칫 싸움꾼이 될까봐 걱정
되어 택견 수련에 무조건 정색을 표했다고 전한다.
상황이 그러하니 택견 수련 딱 10년이 되는 22살에 잠시 택견을 접어두고 대신 활쏘기로 관심
을 돌려 황학정에서 국궁(國弓)을 익혔다. 그는 궁술(弓術)에도 꽤 소질을 보여 명궁으로 명
성을 날렸는데, 죽기 전까지 활쏘기를 즐겨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을 오래 쏜 사람이자 최초의
국궁심판으로 '한국인물도감(1982년)'에 소개되기도 했다.
또한 군대에서 사병들에게 근대식 체조를 가르쳤고, '조선불교 축구단'에 선수로 스카웃되어
월급 80원을 받으며 축구 선수로 3년 동안 뛰기도 했다. 이때 매년 열리던 평양축구단과의 경
기에 참가해 큰 활약을 보여주었다.

축구를 그만둔 이후 30대 말까지 딱히 두드러지는 행적은 없으며, 40세 때 조선극장(인사동에
있었음)을 운영하던 매부를 도와 극장을 지키는 기도를 하였다. 그래서 극장 주변에서 설치던
건달들을 죄다 때려잡았고, 당시 주먹패 대장으로 유명하던 김두한(金斗漢)과도 맞짱을 뜬 적
이 있다고 한다.
이후 금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으나 소득은 없었으며, 1951년 1.4후퇴 때 경남 밀양(密陽)으
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1958년경. 경무대(청와대)의 이승구 경관이 그를 찾아와 대통령에게 택견 시범을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택견은 일정한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둘이 맞서서 상대를 때려잡는 실전무
예라 혼자 시범을 보이기가 마땅치 않아 옛날 스승(임호) 밑에서 같이 배웠던 김성한(金成漢)
을 급히 불러 1달 정도 가르친 다음 그해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생신 축하 경찰무도대회'
가 열렸던 소공동(小公洞) 유도회관에서 택견을 선보였다.
당시 권력층과 무도인들은 왜열도식 무술에 익숙해 있던 상태라 택견을 보더니 별로라며 고개
를 돌렸다. 하지만 택견에 관심이 있던 이승만은 우리 무술을 발전시켜야 된다며 당시 경무대
경호원을 가르치던 박철희에게 그를 소개하여 택견을 배우도록 지시했다.

박철희는 육군사관학교 초대 태권교 교관을 지낸 사람으로 그를 자주 초청해 경호원들에게 택
견을 가르치도록 도움을 주었다.


▲  택견수련터 바위(감투바위 암릉)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1960년 제17회 로마올림픽에 출전할 한국 대표팀은 우리나라의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장에 선
보일 한국 문화로 택견을 선택했다. 그래서 제자 박철희와 함께 경복궁(景福宮)에서 택견 동
작을 사진 촬영했다. (당시 경복궁은 통제구역이었음)

박철희는 경무대 무도사범을 그만두고 '사단법인 택견무도원'을 설립하려고 하였다. 송덕기도
그를 전폭적으로 도왔으나 법인 설립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당시 영향력이 컸던 '수박도협회'
의 방해로 어려움에 빠졌다. 게다가 4.19혁명과 5.16쿠데타로 나라가 계속 혼란 속에 잠기고
법인 설립도 계속 뜻대로 되지 않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부터 박철희
의 조교이자 같은 사직골 토박이인 김병수가 송덕기의 1등 제자가 되었다.

김병수는 당수도의 고수로 경무대 부사범을 지냈으며, 외국어대학교에 '택견권법부'를 만들었
고, 1963년에는 효자동 오리온 다방 3층에 택견도장을 차리기도 했다. 또한 영어에도 능통하
여 1964년에 '블랙벨트(Black Belt)'와 '가라데 일러스트레이트(Karate Illustrate)'라는 미
국의 유명한 무술 잡지에 택견에 대한 기사를 기고한 적이 있었다.
허나 그는 외국 진출에 더 무게를 두고 있어서 1968년 1월 미국으로 건너가 버렸고, 미국 휴
스턴에 정착해 '김수가라데'란 타이틀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자연무술류'라는 새로운 체계
의 과학적 무술을 창안해 동양무도인의 대표로 위엄을 날렸다.

1972년 '태권도 가을호'에 송덕기가 '살아있는 태권도인'으로 소개되면서 당시 태권도의 1인
자였던 임창수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찾아가 배움을 받았다. 하지만 제대로 배우려는 사람이
없었고 실생활에도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아 금방 사람들이 나갔다.
그는 슬하에 자녀도 없었고, 마땅한 제자도 없어서 이것저것 소일거리로 간신히 척박한 삶을
꾸려나갔으나 1979년 부인이 세상을 떠나면서 더욱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1970년대 중반 신한승이 택견을 바로 일으켜 보고자 충북 충주(忠州)에서 송덕기를 찾아와 택
견을 배웠다. 그는 택견이 살려면 국가 중요무형문화재(현재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는 길 밖
에는 없다고 여겨 문화재관리국을 수시로 찾아가 택견을 홍보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철밥통
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저 냉대만 일삼으며 보다 체계적인 자료를 가져오라고 소위 '갑'질
을 벌였다. 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들의 요구 양식에 맞추었고, 택견도 약간 변형시켜가며
해당 자료를 제출했다.
그렇게 하여 간신히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76호'의 지위를 얻으면서 택견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허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송덕기는 신한승의 그런 행동을 못마땅히 여기면서 서
로 갈라진 것이다.

송덕기는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1982년부터 젊은 제자를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83년 그 역시 국가 중요무형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이를 기리고자 '택견계승회(현재
사단법인 '결련택견협회')'를 만들었다. 1984년 집 근처에 '박민태권도 도장'을 빌려 제자를
가르쳤고, 제자 중 부유했던 '최유근'의 지원으로 1986년 신촌에 '택견보존회'란 이름으로 본
격적인 택견전수관을 개관하기에 이른다.
송덕기는 너무 기뻐서 매일 나와 제자를 가르쳤는데, 택견이란 존재를 매우 생소해하는 현대
인들의 무관심과 체육관 운영 경험이 전혀 없는 제자들의 운영 미숙으로 결국 1년도 안되어
문을 닫고 말았다. 그나마 남은 제자들도 거의 군대에 들어가면서 죄다 흩어졌고, 1987년에는
활까지 놓으면서 노인정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우연히 걸린 감기가 커지면서 그해 7월 22일 서
대문적십자병원에서 9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1981년 '제1회 대한민국 전통무도예술제'에서 '무도대상(武道大賞)'을 타기도 했으며,
택견을 보존하고 전수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택견의 태반은 이미 사라졌
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 택견수련터는 그가 택견을 수련했던 현장으로 그의 후학들(결련택견
협회)이 표석과 안내문을 세워 택견의 성지로 기리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여러 체육 시설이
닦여져 있어 동네 사람들과 산꾼들이 몸을 풀고 간다. 비록 목적은 다르지만 몸을 푸는 수련
터의 역할은 여전히 녹슬지 않은 것이다.


▲  택견수련터 바위 (감투바위 암릉)

수련터 옆에는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누워있다. 이들 바위는 저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
촐하게 암릉을 이루며 황학정 동쪽까지 완만하게 내려간다. 그 암릉에 송덕기와 인연이 있는
감투바위가 숨겨져 있으니 한번 숨바꼭질을 해보기 바란다.
암릉에 발을 딛으면 바로 밑에 황학정을 비롯하여 서울 도심 서부와 남산(南山)이 훤히 시야
에 잡혀 조망도 그런데로 괜찮다. 인왕산둘레길 개설로 수련터를 찾은 사람들은 늘었으나 정
작 바위의 존재감이 없어 지나치기 일쑤이다. 안내문이 없다 보니 수련터 바로 옆에서 바위가
예사롭지 않은 눈빛을 보내고 있음에도 다들 지나치는 것이다. 하여 감투바위 암릉은 인적이
거의 없고 한적해 천하 최대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도심을 멍 때리고 바라보며 망중한
을 즐기기에는 아주 좋다.


▲  택견수련터 옆 감투바위 암릉
주름진 바위가 황학정 옆까지 느긋하게 내리막을 이루며 펼쳐진다. 늦가을이
질러놓은 불(단풍)이 활활 타올라 바위 주변을 화사하게 돋군다.

▲  인왕산 감투바위

사람들이 매우 좋아한다는 감투, 그 감투를 닮은 바위가 암릉 한복판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속세에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인왕산 비장의 바위로 송덕기가 택견 수련을 하거나 황학정에서
활쏘기로 몸을 풀고 이곳에 걸터앉아 나라와 택견의 미래를 걱정했다고 한다. 송덕기의 택견
수련을 묵묵히 지켜봤을 그는 황학정과 사직단, 서울 도심을 늘 지켜보고 있다.


▲  감투바위의 뒷모습

바위 뒷통수에 세월이 무심히 긁고 간 흔적들이 역력하다. 지금은 저런 모습이나 여러 세대가
흘러간 이후에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지 궁금하다. 대자연 형님의 성형(成形) 속도가 매우
느려서 그렇지 성형 실력만큼은 대자연을 따를 존재가 없다.

* 택견수련터, 감투바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산1-1


▲  인왕산둘레길 택견수련터 동북쪽 갈림길 (누상동)

택견수련터 동북쪽에 둘레길이 신세를 지는 내리막길이 있다. 벌써 내리막인가 싶겠지만 그곳
을 내려가면 이내 오르막이 나오면서 오르락 내리락이 계속 반복된다. 하지만 기복이 썩 크지
않아서 사지만 멀쩡하면 누구든 거닐 수 있는 국민 둘레길이다.
여기서 가온다리까지는 많은 계곡을 지나치는데, 그들 상당수는 도심 경승지로 이름을 날렸던
계곡의 상류이다. '인왕산에 이렇게 계곡이 많았어?' 고개가 갸우뚱하겠지만 단단한 바위산인
겉모습과 달리 계곡과 샘터가 무척이나 많다. 허나 급격한 도시화로 계곡 중/하류는 생매장되
거나 훼손되었고, 상류는 숲속에 묻혀있어 그나마 원초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인왕산 품에는 2012년에 복원된 수성동계곡을 비롯하여 백운동(白雲洞), 청풍계(淸風溪), 청
계동천(淸溪洞天), 옥류동(玉流洞) 등 왕년에 꽤나 명성을 날렸던 계곡들이 많다. 허나 수성
동을 제외하면 다들 조그만 편이며, 수성동(水聲洞) 상류와 홍제동(弘濟洞) 환희사계곡 정도
만 그나마 제대로 남아있다.
인왕산둘레길은 시내에서 모두 실종된 듯 보이는 인왕산 서촌(웃대) 방면 계곡들의 상류를 거
의 만나볼 수 있는 소중한 현장으로 인왕산을 달리 보는 계기를 선사해준다. 허나 계곡 안내
문이 수성동 외에는 전혀 없어 전문가나 아니면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니 계곡 안내문
을 설치하여 잊혀진 인왕산 계곡에 대한 존재를 다시 끄집어 냈으면 좋겠다.


▲  늦가을에 잠긴 인왕산둘레길 누상동 구간

▲  누상동계곡 (계곡의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음)
이곳에는 서울시 보호종인 도룡뇽이 살고 있다. 하여 그들의 삶터를 위해 계곡을
손질하여 '누상동 생물서식공간'으로 삼았다. 그러니 그들을 위해 계곡에
해코지를 하는 행위는 하지 말자.

▲  수성동으로 내려가는 인왕산둘레길

▲  수성동계곡 상류

누상동계곡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수성동계곡 상류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는 인왕산길에서
내려오는 산길과도 만나는데, 상류는 인공티가 너무 풍기는 복원된 계곡 중심부와 달리 거의
자연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자연산 바위와 온갖 잡석이 좁은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고, 그 사이를 인왕산이 베푼 계곡물이 거의 소리도 없이 흘러간다.
이곳은 청계천의 주요 발원지이기도 하며 수질이 양호해 도룡뇽, 가재, 개구리, 버들치 등이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좁은 계곡이나 그들에게는 이만한 보금자리가 없을 것이다.

계곡 주변은 나무가 무성하여 한여름에도 더위를 잊게 하며, 산길을 따라 1분 올라가면 인왕
산길(석굴암입구)이 나오고, 반대로 2분 정도 내려가면 수성동계곡 중심부와 그를 내세운 공
원이 나온다.


▲  수성동계곡 상류

수성동계곡의 상류는 3개 정도 된다. 석굴암에서 내려오는 계곡과 그 남쪽에서 내려오는 계곡
, 인왕천약수터에서 오는 계곡이 서로 상류를 자처하며 수성동으로 내려온다. 수성동은 이들
을 통해 인왕산의 맑은 물을 접수받아 청계천으로 흘려보낸다.
수성동은 이 정도만 둘러보고 잠시 놓아두었던 둘레길을 다시 재촉했다.


♠  인왕산둘레길 수성동 이북 구간

▲  수성동 북쪽 인왕산둘레길
수성동에서 둘레길을 따라 조금은 각박한 북쪽 고갯길을 넘으면 해맞이동산과
산들수목원 약수터가 나온다.

▲  적막에 잠긴 해맞이동산 서쪽 배드민턴장

▲  산들수목원 약수터

산들수목원약수터는 약수터 이름치고는 좀 긴 편이다. 단순히 이름만 봐서는 산들수목원에 있
는 약수터로 착각할 수 있으나 그런 이름의 수목원은 없으며, 이곳에 수목원 같은 시설도 전
혀 없다. 어찌하여 속칭 낚시성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갔을 때는 수질
적합 판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약수터는 수도꼭지로 물을 통제하고 있어서 물을 마시려면 꼭지를 돌려야 된다. 그러면 물이
쏴~ 쏟아진다. 동네 사람들은 이 약수가 인왕산에서 제일 물 맛이 좋다고 그러는데, 딱히 특
별한 맛은 없는 이 땅에 흔한 약수 맛이다. 그래도 서울 도심에 이 정도의 약수가 남아있는
것이 어디인가. 예전에는 남산과 인왕산, 북악산(백악산)에 약수터가 많았으나 개발의 칼질로
대부분 숨통이 끊기면서 온전한 것이 거의 없다.


▲  산들수목원약수터 옆 해맞이동산 표석
해맞이에 최적화 되도록 동쪽을 향해 표석을 닦았다. 여기서는 매년 1월 1일
해맞이행사가 성황리에 열린다.

▲  해맞이동산에서 청운공원으로 이어지는 인왕산둘레길

▲  약수터의 추억을 지닌 옥인동(玉仁洞) 생물서식공간

이곳은 원래 버드나무약수터로 사진에 보이는 돌거북이 인왕산이 빚은 물을 열심히 베풀고 있
었다. 허나 세월을 영 좋지 않게 타서 부적합 빨간 딱지를 받게 되었고, 끝내 딱지를 벗어나
지 못하자 약수터 폐쇄 대신 여기서 나오는 물을 활용해 그 앞에 조그만 생태연못을 만들어
옥인동 생물서식공간으로 삼았다.


▲  은행잎이 두텁게 깔린 옛 버드나무약수터 주변

버드나무약수터는 인왕산의 유명 약수로 한때 위엄을 떨쳤던 샘터이다. 허나 부적합 판정으로
샘터의 기능은 끊겼고, 대신 남쪽에 새로 샘터를 파서 버드나무약수터란 간판을 달았으나 그
역시 약수의 기능을 상실해 생태연못으로 새롭게 살아가고 있다.
비록 샘터의 기능은 잃었으나 수맥은 왕성하여 물이 여전히 고여 있는데, 예전에 누가 물고기
를 풀어놓아서 그들의 조그만 공간이 되기도 했다. 그들이 아직도 있는지 샘터 내부를 살펴보
았으나 누가 낚시로 꿀꺽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  늦가을도 사람들도 몸을 푸는 버드나무약수터 체육시설

▲  버드나무약수터 북쪽 둘레길

▲  인왕산둘레길에서 가장 달달한 곳, 은행나무숲길

버드나무약수터와 청와마루 사이에는 은행나무가 조촐히 우거진 아름다운 숲길이 있다. 비록
숲길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지만 은행잎이 황금 비단처럼 깔려 있으니 대자연 형님의 초청을
받아 잔칫집이나 연회장에 들어서는 기분이다. 그만큼 감동의 너울은 컸다. 이곳의 아름다움
은 두고두고 망막과 가슴 속에 은은히 남아 아른거렸고 그들이 그리워 이렇게 다시 찾아왔다.


▲  은행잎이 깔린 은행나무숲길
땅바닥에 귀를 접고 누워있는 은행잎과 온갖 단풍잎들, 우리는 그들을 우울한
이름의 두 글자 '낙엽'이라고 부른다.

▲  청와마루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의 북현무(北玄武), 북악산(백악산)

▲  청와대를 겨낭한 청와마루
이곳은 청와대가 정면으로 보이는 위치이다. 청와대 외에 서촌(웃대)과
북악산(백악산), 서울 도심부가 사이 좋게 시야에 들어온다.

▲  인왕산둘레길의 흔들다리, 가온다리

청와마루에서 고개를 넘으면 가온다리가 마중을 한다. 그는 일종의 흔들다리로 지방의 산이나
호수, 섬에서나 볼 수 있는 관광용 흔들다리가 이렇게 서울 도심 코앞에서 버젓히 내 앞에 아
른거리니 '서울에서도 이제 흔들다리를 다 보는구나!' 그저 충격과 놀라움 그 자체였다.
흔들다리의 성지인 파주 감악산(紺岳山)과 청양 천장호, 논산 탑정호, 원주 소금산 등 스케일
이 큰 흔들다리만은 못해도 서울 유일의 흔들 구름다리로 흔들다리의 이름값은 하고 있으며,
이곳이 깊은 협곡을 이루고 있어 눈요기도 시킬 겸, 이렇게 높이 구름다리를 닦은 것이다.

처음에는 다리 이름이 딱히 없었으나 그새 '가온다리'란 간판을 달게 되었는데, 사람의 중량
과 다리를 흥분시키는 정도에 따라 흔들리는 강도가 조금씩 다르다. 가벼운 사람이 건너면 거
의 미동 정도로 흔들리고, 무게가 좀 있거나 다리를 막 건드리면 조금은 출렁거려 사람에 따
라 염통이 쫄깃해지는 짜릿함도 느낄 수 있다.


▲  남쪽에서 바라본 가온다리

다리 저 밑에는 계곡이 흐르고 있는데, 위치를 봐서는 옥류동(玉流洞)계곡으로 여겨진다. 옥
류동에는 청휘각(晴暉閣)이란 유명한 정자가 있었는데, '청휘'란 이름은 '비가 개인 뒤에 맑
은 햇살이 비추는 누각'이란 상큼한 뜻으로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집 후원에 지었다.
이후 옥류동의 대표 명소로 이름을 날렸고,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팔경첩에 그 존재가 남겨져
있다.
그토록 아름답던 청휘각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흔적 조차 더듬기 어렵게 되었고, 옥류동
도 왕년의 위엄을 잃은 채, 인왕산 숲속에서나 겨우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
고 보면 인왕산은 20세기를 거치면서 인간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상실 당했다. 게다가 서울
도심에 자리해 있으니 그 희생의 정도는 매우 컸다.


▲  북쪽에서 바라본 가온다리

▲  가온다리 북쪽 청운마루에서 바라본 서촌(웃대)과 서울 도심
저 멀리 희미하게 바라보이는 긴 산줄기는 서울의 동쪽 벽이자
고구려(고구리) 유적의 성지인 아차산~용마산이다.

▲  조그만 계곡(청풍계로 여겨짐)을 건너는 나무데크길
(청운마루와 이빨바위 사이)


청운마루를 넘으면 넓게 닦여진 나무데크 공간이 나온다. 그 밑에도 조그만 계곡이 가늘게 흐
르고 있는데, 위치를 봐서는 청풍계(淸風溪) 상류로 짐작된다.
조선 중기 인물인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이 계곡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주변 풍경이
수려해 청풍각(淸風閣)이란 별도의 건물을 지었다. 바로 그 건물로 인해 이곳 계곡이 청풍계
란 간판을 달게 되었고, 청풍계와 인근 백운동의 이름을 따서 청운동이 되었다. <옛날에는 장
동(壯洞)이라 불림>

이곳 역시 주택가에 이르러서는 강제 생매장을 당해 청계천으로 흘러가며, 계곡 왕년의 모습
은 겸재 정선(謙齋 鄭敾)이 그린 장동팔경첩에 잘 남아있다.


▲  북쪽에서 바라본 청운마루 직전 공간 (청풍계 상류)
둘레길을 알록달록 물들인 늦가을 단풍의 곱고도 처절한 물결~~

▲  인왕산 이빨바위

청풍계 추정 계곡에서 고개 1굽이를 지나면 이빨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검은 이빨을 드러내며
발길을 붙잡는다.
바닥에 누운 커다란 암석과 뚜껑돌처럼 놓인 암석 중간에 마치 동물의 이처럼 생긴 부분이 있
어 눈길을 끄는데 그로 인해 이빨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둘레길을 닦으면서 발굴
된 것으로 사람의 틀니나 해골의 입처럼 보이기도 하며, 배가 고파서인지 모르지만 햄버거처
럼 보이기도 한다. 제 눈이 안경이라고 사람마다 눈에 비치는 모습이 다 같을 수는 없다.

이처럼 잘 생기거나 요상하게 생긴 바위에는 꼭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있기 마련이나 눈썰미
가 좋은 옛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는지 전설은 딱히 없다. 다만 둘레길을 닦으면서
종로구청에서 인왕산 치마바위와 인연이 깊은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와 중종(中宗)의 전설
을 억지로 꾸며서 당당하게 안내문까지 부착했다. 허나 문제는 그 내용이 실로 철밥통스럽고
어거지가 깊다는 것. 하여 말들이 많자 그 전설 안내문은 떼어버렸고,
'건강한 치아는 오복 중의 하나! 이빨바위를 보며 건강과 평안을 빌어보십시오'
란 조그만 돌
표석을 달았다. 차라리 엉터리 전설보다는 돌 표석 안내문이 훨씬 깊이가 있어 보인다.


▲  청운공원 방면 둘레길

▲  늦가을의 수채화 속을 거닐다 (청운공원 인왕산둘레길)

택견수련터에서 시작된 둘레길 산책은 어느덧 청운공원에 이르렀다. 눈이 시릴 정도의 늦가을
풍경과 소소한 명소, 그리고 도심을 품은 조망이 서로 눈길을 놓아주지 않아 3km가 넘는 구간
을 순식간에 지나친 기분이다. 이런 길이라면 3km가 아니라 30km라도 지루하지 않게 거닐 수
있다. (체력은 충분히 됨)


♠  자하문터널 부근에 숨겨진 옛 경승지
인왕산 백운동계곡(白雲洞溪谷) - 서울 자연유산

▲  백운동천(白雲洞天) 바위글씨

청운공원에서 곱게 집으로 철수하려고 했으나 일몰까지는 여유가 좀 있었다. 그냥 철수하기도
허전하여 여로(旅路)나 좀 살찌울 겸, 간만에 자하문터널 부근에 숨겨진 백운동계곡을 찾았다.

경기상고 정문에서 자하문터널 쪽으로 가면 터널 직전 오른쪽에 오르막길이 있다, 그 길을 오
르면 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가 나오는데, 그 교회를 지나면 숲이 나오고, 숲으로 들어서
면 건물터와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바위에 새겨진 백운동천 바위글씨를 만나게 된
다. 그곳이 바로 인왕산 비장의 계곡인 백운동계곡이다.


▲  백운동계곡에 말뚝을 박았던 옛 백운장(白雲莊)터

백운동천 바위글씨 남쪽에 둥지를 틀었던 현대식 건물터는 서울 장안의 이름난 고급요정이었
던 백운장과 그 뒤를 이은 요정 건물의 흔적이다.
백운장은 1915년 왜인(倭人) 키타무라 세이타로(北村淸太郞)가 세운 식당으로 원래 이름은 청
향원(淸香園)이었다. 1929년 백운장으로 이름을 갈았으며, 1945년 이후 폐결핵요양소로 쓰이
다가 요정으로 변경되어 화남장으로 간판을 바꾸었다. 허나 요정 사업의 쇠퇴로 문을 닫았고,
건물도 싹 철거되어 이렇게 터만 남게 되었다.


▲  바위에 화석처럼 깃든 백운동천 바위글씨 주변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자하문터널 주변을 백운동(白雲洞)이라 불렀다. 서울 사소
문(四小門)의 일원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 바로 남쪽 밑으로 백운동계곡, 백운동천이라 불
리기도 했는데, 이는 흰 구름이 떠있는 고운 계곡이란 의미이다. 지금은 동네 사람들도 아리
송할 정도로 존재감이 없으나 조선 초부터 서울 제일의 경승지로 존재감이 북한산(삼각산)만
큼이나 컸다.
조선 초기 사대가(四大家)로 꼽혔던 괴애 김수온(乖崖 金守溫, 1410~1481)과 삼탄 이승소(三
灘 李承召, 1422~1484), 사숙재 강희맹(私淑齋 姜希孟, 1424~1483),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
宗直, 1431~1492) 등이 이곳에 퐁당 빠져 시를 남겼으며, 용재 성현(傭齋 成俔, 1439~1504)은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서울에서 경치가 가장 좋은 곳은 삼청동(三淸洞), 그 다음은 인
왕동(仁王洞), 다음은 쌍계동(雙溪洞)과 백운동, 청학동이라 찬양했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던 이염의(李念義. ?-1492)는 아예 계곡에 집을 짓고 살았으며
,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팔경첩에 백운동 그림이 전한다.

1770년에 제작된 한양도성도, 19세기에 제작된 동여도(東輿圖)에 백운동 지명이 나오며, '신
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준천사실(濬川事實)','한경지략(漢京識略)','육전조례(
六典條例)'에는 개천(開川, 청계천)의 발원지 중 백운동천 계곡이 가장 길고 멀다고 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는 법부대신(法部大臣)을 지낸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 1846~1922)이 이곳
에 백운장을 조성해 머물렀는데, 백운동천 바위글씨는 바로 그가 남긴 것으로 글씨 서쪽에 아
주 작게 '光武七年 東農(광무7년 동농)'이라 쓰여 있어 1903년 동농이 썼음을 알려준다. 독립
운동에도 나섰던 동농 김가진은 그럼 누구일까?

그는 안동김씨 집안으로 서촌의 일원인 신교동(新橋洞)에서 태어났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
으나 서얼 출신이라 과거에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1877년 적서차별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올린 인연으로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으로 발탁되었다. 1883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
涉通商事務衙門)이 신설되자 유길준(兪吉濬)과 함께 주사로 임명되었으며, 1886년 정시문과(
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이 되었다.

나라의 개화 필요성과 방법론을 다룬 봉서(封書)를 올리기도 했으며, 이후 개화정책을 주도하
게 되었다. 특히 청나라의 내정간섭에 반발해 러시아와 밀약을 추진했다가 발각되어 유배형을
받기도 했으며, 유배에서 풀려나 청나라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시찰했다. 그리고 주차일본공
사관참찬관(駐箚日本公使館參贊官)이 되어 왜열도 동경(東京)에 머물렀으며, 이후 주일본판사
대신(駐日本辦事大臣)이 되었다.
왜에 호의적이고 청나라를 멀리하는 태도 때문에 민씨 세력의 견제를 받아 한직으로 물러났다
가 1895년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이 되어 박영효(朴泳孝)가 추진했던 개혁정책의 실무를
담당했다. 허나 바로 그해 박영효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위기에 몰리기도 했으며 제4차 김홍
집(金弘集) 내각이 들어서자 상무회의소 발족, 건양협회(建陽協會) 창립에 가담했다.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가 창설되면서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독립문(獨立門)과 독립공원을 조
성하는데 크게 나섰다. 또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 적극 가담해 헌의6조의 실행을 촉구하
였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이를 반대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1906년 스스
로 충청남도 관찰사를 자청해 지방에 내려갔다. 대한자강회(大韓自彊會), 대한협회(大韓協會)
에 가담해 활동했으며, 1910년 이후 왜정으로부터 남작(男爵) 작위를 받자 9년 동안 대외활동
을 하지 않고 거의 잠수를 탔다.
그러다가 1919년 3.1운동으로 독립운동에 나섰고, 대동단(大同團)을 창설해 초대 총재로 선출
되었다.

1919년 11월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의 뜻에 따라 그를 중원대륙 상해로 망명시켜 독립선언
서 발표를 시도했으나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자마자 왜군에 발각되어 무산되었다. 하여 동농
혼자 상해로 넘어가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으로 활약했고, 대동단을 통해 무장투쟁을 계획하
다가 1922년 7월, 77세의 나이로 눈을 감고 말았다.

조선(대한제국)이 망하자 많은 수의 고위 귀족과 황족이 왜정에 붙었다. 허나 동농은 협조하
지 않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으며, 왜정이 상해임시정부를 우습게 보았으나 김가진이 가세하
자 크게 긴장했다고 한다. 허나 남작 작위를 받은 것 때문에 한때 친일 행적 논란이 나오기도
했다.

동농의 집은 서울 장안 제일로 일컬어질 정도로 그 위엄이 대단했는데, 백운동계곡의 풍경을
너무 좋아하여 이곳을 자주 찾았다. 그래서 1903년 백운동천 글씨를 남겼으며, 백운장이란 별
장까지 지어 이곳의 일원을 꿈꾸었다.
허나 백운장 부근에 왜인이 세운 청향원이 들어섰고, 동농이 중원대륙으로 넘어간 이후에는
백운장을 모두 매입해 고급식당을 굴렸다. 1961년까지 요정과 호텔로 쓰이면서 요정 정치의
현장으로 악명을 떨쳤으며, 이후 여러 번 주인이 바뀌면서 결국 집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터
만 아련히 남은 상태이다.


▲  백운동계곡 바위굴
백운동천 주변을 더듬다가 바위굴을 발견했다. 비록 깊이는 얕으나 서울 도심에서
자연산 바위굴은 정말 흔치가 않은데 (인왕산에 몇 곳 있음) 이곳이 정녕 도심
한복판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  백운동계곡(백운동천) 상류

백운동계곡은 인왕산의 주요 계곡으로 웃대를 가로질러 청계천으로 흘러간다. 20세기 중반 이
후 이곳까지 개발의 칼질이 춤을 추면서 동쪽과 남쪽에 주거지가 형성되었고, 서쪽에는 자하
문터널까지 생기면서 백운동의 아름다운 풍경은 크게 망가졌다.
서촌을 촉촉히 어루만지며 흘러가던 백운동계곡 대부분은 생매장당했고, 그나마 백운동천 바
위글씨 주변에 일부 남아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곳만 지나면 계곡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다행히 서울시에서 이곳의 가치를 뒤늦게 깨닫고 2014년 10월 지방문화재로 지정해 세월의 뒷
편으로 넘어갈뻔한 그곳을 붙잡고 있다.

오랜만에 찾아왔지만 이곳 풍경은 그때와 비슷하고 이곳을 알리는 이정표나 안내문도 여전히
없어 그야말로 아는 사람들만 살짝 찾는 숨겨진 명소로 머물러 있다. 이 계곡은 복원할 계획
이 있다고 하는데 수성동계곡처럼 지나치게 인공티를 내지 말고 주변을 좀 손질하여 일종의
역사공원으로 삼는 선에서 깔끔하게 끝냈으면 좋겠다. 계곡도 청계천까지 싹 복원하면 좋겠으
나 이미 시가지가 터질 정도로 들어차 있어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  백운장터의 서쪽 끝 계단

서쪽 계단의 끝에는 건물터가 있다. (백운장이나 그 이후에 지어진 부속건물) 그 너머에는 청
운공원이 있으나 담장이 민통선처럼 꽁꽁 둘러져 있어 넘어갈 수는 없다. 하여 여기서 무조건
왔던 길로 돌아나가야 된다.
나중에 이곳에 사적공원이 꾸며지면 청운공원을 잇는 길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러면 인왕산둘
레길과 인왕산길, 인왕산, 북악산(백악산), 윤동주시인의언덕, 부암동과 바로 연계가 가능해
져 인왕산과 서촌(웃대), 북악산(백악산), 부암동 지구를 아우르는 최적화된 답사 코스가 닦
여지게 된다.


▲  백운장터를 지키는 외로운 석등

백운동천 바위글씨를 제외하고 백운장터에 제대로 남아있는 인공 유물은 석등이 유일하다. 생
김새를 보니 멀리 잡아도 김가진이 이곳에 별장을 지어 머물던 1900~1910년대, 가깝게 잡으면
왜정 때 세워진 것으로 스타일이 거의 왜식(倭式)에 가깝다.
석등에 대한 정보는 딱히 전해오는 것은 없으며, 자신을 보듬던 백운장을 잃고 외로운 신세가
된 충격에 벙어리까지 되어 아무에게도 속삭여주지 않는다. 석등 주변에는 나무들이 털어놓은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서로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이곳 백운동계곡은 사실상 막다른 외로운 곳으로 북쪽 높은 곳에 청운문학도서관이 있고, 동
쪽 높은 곳에는 붉은 피부의 빌라로 이루어진 청운벽산빌리지가 있다. 서쪽은 길이 막혀있고,
오로지 남쪽만 입을 벌리고 있다. 청운동에 가해진 개발의 칼질이 이곳의 수려한 풍경을 제대
로 난도질했던 것이다.
옛날에는 창의문에서 서울 중심부로 들어설 때 창의문로로 가지 않고 백운동 옆인 청운벽산빌
리지를 거쳐 경기상고로 내려갔다. 그 옛길은 도시화로 사라져 온전하게 더듬기는 어렵다. 이
렇게 하여 늦가을 인왕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백운동계곡(백운동천)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6-6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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