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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의 북쪽 끝, 옥류천(玉流川) 구역

▲ 취규정(聚奎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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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천 구역으로 인도하는 동쪽 숲길을 오르면 고개 정상에 활짝 열린 모습의 취규정이 마중
을 한다. 여기서 존덕정에서 올라온 서쪽 숲길과 만나는데, 이곳에서 북쪽 숲길로 가면 옥류
천 구역 중심부로 이어지며, 서남쪽 숲길은 연경당(延慶堂)으로 빠진다. 그리고 서쪽 숲길은
다래나무와 신선원전(新璿源殿)으로 이어지는 창덕궁 후원의 북쪽 길로 내가 갔을 때는 통제
구역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공개하는 경우도 가끔 있으니 사전에 창덕궁에 확인 요망)
옥류천의 입구 역할을 하는 취규정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정자로 1640년
에 세워졌다. '취규'란 이름은 학자들이 모인다는 뜻으로 이를 통해 제왕과 왕자들의 휴식 및
독서를 위한 공간으로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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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규정의 단출한 옆 모습

▲ 취규정에서 옥류천으로 인도하는 숲길
취규정에서 자연에 푹 묻힌 북쪽 숲길을 2분 들어가면 취한정이 나오고
여기서 1분을 더 발품을 팔면 소요정과 소요암, 태극정이 있는
옥류천 중심부에 이른다.

▲ 취한정(翠寒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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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천 중심부 직전에 자리를 잡은 취한정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민도리집 정자이
다.
정자 이름인 '취한'은 '푸른 나무들이 추위를 능가한다. 깔본다'는 뜻의 '창취능한(蒼翠凌寒)
'을 2자로 줄인 것이다. 지금은 정자 주변으로 느티나무가 무성하나 예전에는 소나무가 많았
다고 하는데, 그로 인해 여름에는 시원한 것을 넘어 서늘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고 한다. 하
여
'취한'이란 이름을 썼다고 전한다.
언제 지어졌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취한정을 주제로 한 숙종(肅宗)의 '취한정제영(翠寒亭題詠)
'이란 시와 정조의 '취한정' 시가 전하고 있어서 숙종(재위 1674~1720) 시절이나 17세기 말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이곳은 옥류천을 찾은 제왕의 휴식 공간으로 이곳 어정(御井)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잠시
쉬다가 창덕궁 중심부나 창경궁으로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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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한정 뒷쪽에 있는 작은 돌다리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짧은 돌다리로 6개의 통돌과 4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간결한 모습이다. 취한정과 비슷한 17~18세기에 닦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 취한정에서 옥류천 중심부로 인도하는 숲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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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천
구역은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구석진 곳으로 후원 동북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 (후원
의 서북쪽 끝은 다래나무가 있는 곳)
돈화문(敦化門)에서 약 1.4km, 함양문(咸陽門) 옆 후원 입구에서 1km를 들어가야 닿을 수 있
는 깊은 골짜기로 북악산(백악산) 동쪽 봉우리인 응봉(와룡산) 자락에서 발원한 계곡과
후원
내에서 발원한 물이 이곳에서 만나 옥류천을 이룬다. (이곳 일대 계곡을 옥류천이라 부름)
옥류천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세조 때 후원을 크게 넓힌 이후, 제왕의 휴식처
로 가끔씩 쓰였던 것으로 여겨지며, 옥류천이란
이름과 현재 옥류천 구역은 병자호란 직전인
1636년에 인조가 닦았다. 그는 이곳 풍경에 퐁당 반하여 소요암을 건드려 그 위에 홈을 파서
물길을 냈으며 그 물길을 밑으로 가게 하여 작은 폭포를 빚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태극정
과 청의정, 소요정 등을 닦았다.
옥류천 구역에는 소요정과 태극정, 농산정, 취한정, 청의정 등의 작은 정자들이 숲과 조화를
이루며 상큼하게 자리해 있고, 청의정은 조선 궁궐 유일의 초가 정자로 그 주위로 작게 논을
지니고 있다. 소요암에는 인조의 친필이라는 옥류천 바위글씨와 숙종이 지은 오언절구 시가
깃들여져 있으며, 구불구불한 물길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으며 연회를 즐긴 이른바 유상곡
수연(流觴曲水宴)이 여기서 종종 열렸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지시를 받은 청나라군이 김옥균(金
玉均)과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의 정변 패거리를 잡고자 창덕궁을 공격했는데,
정변 패거리와 그들을 도우러 온 왜군이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고종과 왕족을 호위하며 옥류
천을 지나 후원 북문인 북장문(北牆門)을 통해 창덕궁 밖으로 도망친 흑역사가 있다.
순종은 옥류천을 즐겨 찾아 여기서 망중한을 달랬으며, 창덕궁이 속세에 해방된 이후에도 이
곳만큼은 존재를 숨기며 오랫동안 금지 구역으로 묶였다. 그러다가 부분 개방으로 비로소 속
세에 열린 것이다. (공개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음)
옥류천 북쪽에는 창덕궁과 속세의 경계를 긋는 돌담(후원 북쪽 돌담)이 있는데, 옥류천과 돌
담 사이의 거리는 40~50m 정도로 숲이 우거져 있다. 옥류천과 돌담 사이 숲은 접근이 통제되
어 있으며, 그 돌담 너머로 성균관대가 살짝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성균관대에서 후원 북쪽
돌담길을 통해 북촌(北村)과 삼청동(三淸洞)으로 넘어갈 수
있는데, 이때 돌담 너머로 옥류천
구역 일부가 시야에 들어온다. 그동안 옥류천을 돌담 너머
로 살짝 본 것이 전부였으나 그 옥류천 현장에 나를 넣었으니 정말 세상이 많이 바뀌었음을
실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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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산정(籠山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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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한정
북쪽이자 태극정 동쪽 숲에 자리한 농산정은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집이다.
비록 '정'을 칭하고 있지만 정자라고 하기에는 생김새가 너무 애매하여 농산정 대신 농산각
을 칭하는 것이 딱 적당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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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1636년에 지어진 것으로 대청 2칸과
온돌방 2칸, 부엌 1칸을 지니고 있는데, 부엌
을 지닌 건물의 구조나 위치를 통해 제왕이 옥
류천을 찾았을 때, 다과상과 연회상을 준비하
던 건물로 짐작된다. 옥류천에서 농산정을 제
외하면 모두 정자이고 여기서 가까운
관람정
구역도 모두 정자나 방을 지닌 건물이라 음식
이나 다과상을 준비하고 따스하게
해줄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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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산정의 옆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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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극정(太極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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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산정과
청의정 사이에 자리한 태극정은 1칸짜리 사모지붕 정자이다. 난쟁이 반바지 접은 정
도의 높이로 두툼하게 네모난 기단(基壇)을 다지고 기단 사방으로 1단 계단을 내었으며, 기단
위에 얕게 석축을 닦아 정자를 얹혔다. 정자 북쪽과 남쪽으로 2단 계단을 내어 정자와 속세를
이어주고 있는데, 작고 간결한 모습이 탐이 날 정도로 깜찍하고 단아하게 다가온다.
정자 내부에는 마루를 깔고 퇴를 달아 평난간을 둘렀으며, 천정은 우물천정으로 지붕 꼭대기
에는 절병통을 얹혔다. 농산정과 비슷한 1636년에 세워진 것으로 처음에는 운영정(雲影亭)이
라 불렸다가 나중에 태극정으로 이름이 갈렸는데, 언제 이름이 갈렸는지는 전하지 않으나 영
조~정조 시절로 여겨진다.
게다가 원래는 내부 측면에 벽을 설치하고, 남쪽과 북쪽으로 문을 달아놓은 구조였는데, 왜정
때 촬영된 그의 빛바랜 사진에서는 벽은 사라졌지만 문을 달려있었다. 하여 고종 때나 왜정
초기에 개조를 당한 것으로 보이며, 꽤 혼란스러운 20세기 한복판을 거치면서 남아있던 문짝
마저 세월에게 털렸다.
숙종은 소요정과 청의정, 태극정 등 옥류천 구역의 정자 3곳을 상림삼정(上林三亭)으로 삼아
애지중지했는데, 그는 '상림삼정기(記)'를 통해 태극정을 크게 찬양했으며, 정조도 '태극정시
(詩)'로 이곳을 칭송했다. 그리고 순조는 여기서 신하들과 학문을 논하면서 그들에게 심경(心
經)을 읽게 하는 등 많은 제왕들이 이곳과 옥류천 구역을 즐겨찾기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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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쪽에서 바라본 태극정
2중으로 둘러진 석축 위에 태극정이 살짝 올려진 형태로 크기는 작지만
후원 정자에 걸맞게 간결 단아한 모습을 보여준다.

▲ 태극정과 청의정 사이에 복잡하게 놓인 다리와 수로(水路, 물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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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암 주변을 흐르는 옥류천 물을 가져와
태극정과 청의정, 소요정 사이로 작게 물길을 내고
조그만 돌다리를 넉넉히 얹혀서 옥류천 구역 식구들을 서로 이어주었다. 옥류천은 가뭄과 겨
울을 제외하고 물길을 늘 수분으로 채워주었으며, 물길에 물이 흐르면 돌다리도 진정한 돌다
리의 역할을 한다.
돌다리들은 통돌 2개 또는 3개로 아주 간결하게 만든 소박한 모습으로 창덕궁은 너른 후원을
지닌 특성으로 서울에서 늙은 돌다리들이 가장 많다. 하여 서울의 돌다리박물관 같은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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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가 지붕을 지닌 청의정(淸漪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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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정 옆에 자리한 청의정은
초가 지붕을 지닌 1칸짜리 정자이다. 기와 정자는 많이 봤지만
늙은 초가 정자는 거의 없는 편으로 '동궐도'에는 후원에 초가 건물이 16채가 나온다. 허나
모두 사라지거나 기와 정자로 성형되어 지금은 오로지 이곳만 남아 후원 유일의 초가 정자이
자 조선 궁궐의 딱 하나 뿐인 초가 지붕 건물이며. 거기에 이 땅의 초가 정자 중 가장 늙은
존재로 독보적인 가치와 존재감을 보이고 있다.
수수하면서도 정겨운 모습이라 옥류천 정자 식구 중 내 침침한 두 망막을 가장 오래도록 부여
잡았는데,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소박한 모습이라 부득이 뼛속까지 서민인 나와 정서적으로
비슷해서 그런 것 같다. 그와 약간의 동질성이라고나 할까.
정자 주위로 풀이 돋은 공간이 네모나게 둘러져 있는데, 이곳은 벼를 기르는 논이다. 이 또한
조선 궁궐 및 천하 궁궐, 그리고 서울 도심의 유일한 논으로 희소가치가 백두산만큼 크다. 이
처럼 청의정과 그에 딸린 논은 아주 희귀한 존재로 국가 보물의 지위가 충분하나 늦게나마 그
지위를 얻은 부용정, 연경당, 주합루 등과 달리 여전히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다.
제왕은 왕세자(황태자), 신하들과 이곳에서 직접 벼를 심어 가을에 수확했는데, 여기서 나온
볏짚으로 청의정의 지붕 이엉을 거의 매년마다 교체했다. 이렇게 벼를 기르고 청의정 지붕을
볏짚으로 한 것은 궁궐 식량을 충당하려고 함이 아니라 제왕이 몸소 백성들의 고단함을 체험
하고(서민 체험, 백성 체험) 농사의 소중함을 백성들에게 널리 일깨워주고자 함이다. 그러니
까 일종의 정치쇼였다.
논에 둘러싸인 청의정은 1636년에 지어진 것으로 '청의'란 '맑은 물결'을 뜻한다. 하여 옥류
천의 맑은 물을 상징하여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곳에는 정조의 시액(詩額)과 선조(宣祖)의
어필(御筆)이 걸려있었다고 전한다.
청의정 논은 옥류천 물을 소환하여 수분을 채웠는데, 논 한복판에 기단을 쌓아 아담하게 터를
닦고 그 위에 장대석을 깔아 정자를 얹혔다. 비록 논 한복판이지만 논에 물을 대기 때문에 벼
가 무럭무럭 자라는 때는 거의 섬과 같은 모습이 된다. 정자의 정면인 북쪽으로 큰 통돌로 이
루어진 돌다리를 놓았는데, 길이는 1m 정도, 폭은 한 사람 사이즈로 꽤 작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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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의 모내기, 벼 수확 이벤트는 순종 시절까
지 계속 진행되었으나 100년 가까이 극심한 혼
란기를 겪으면서 모내기를 하지 못지 무늬만
논이 되었다.
그러다가 2006년 문화재청과 농촌진흥청이 합
심하여 그 행사를 되살렸다. 그때부터 그들의
주도로 매년 6월에 모내기. 10월에 벼베기 행
사를 벌이고 있으며, 일반인도 참여가 가능하
다.
또한 벼가 뽀송뽀송 자라는 한여름과 황금
들녘을 이루는 9~10월 풍경은 이곳의 갑으로
추앙을 받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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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박한 모습의 청의정과 그를 둘러싼
작은 논두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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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옥류천 식구인 청의정과 태극정, 소요정을 후원에서 가장 고운 정자로 정해 '상림삼정
(上林三亭)'으로 삼아 애지중지 했으며, 청의정 기둥 바깥에는 주련이
걸려있는데, 이는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이 썼다고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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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의정의 북쪽 모습과 돌다리
청의정 정면(북쪽)으로 단순한 모습의 작은 통돌 돌다리를 두었다. 다리가
짧아서 그 옆으로 점프해서 넘어가도 되지만 돌다리와 청의정 내부는
금지 공간으로 묶여있어 들어갈 수 없다.

▲ 옥류천 반석에 덩그러니 놓인 수상한 돌지붕
계곡 반석에 돌지붕 하나가 바짝 엎드려 있다. 보아하니 주변에 있던
석등
같은 돌덩어리의 지붕돌 같은 모습인데, 그는 어디서 왔고, 정체가
무엇이며, 왜 이곳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 옥류천 소요암(逍遙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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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암은 옥류천에 병풍처럼 둘러진 크고 견고한 바위로 약 100도 경사를 보이고 있다. 옥류
천 및 창덕궁 후원의 일품 바위로 옥류천 구역이 바로 이 바위에서 비롯되었는데, 그의 피부
에는 옥류천 바위글씨와 숙종의 오언절구 시가 깃들여져 있으며, 그 앞에는 계곡물이 옹기종
기 모인 작은 못과 동그랗게 그어진 물길(수로)이 있어 운치를 크게 돋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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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요암 주변 (반석 위에 동그란 수로가 닦여져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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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암 피부에 얕게 굴곡진 수로를 내고, 그 수로 끝에는 물이 고인 못이 있다. 못에 모인 물
은 바로 벼랑으로 떨어져 조촐하게 작은 폭포를 자아내고, 폭포 밑으로 못이 있는데, 못 앞에
넓게 누운 반석(磐石)에 동그랗게 수로를 내어 그곳으로 수분이 들어가게 했다.
여기서는 물길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기는 유상곡수연이 종종 열렸다고 하는
데, 술잔을 물에 띄우고 그 술잔이 1바퀴 돌아 자기 앞에 올 때까지 시를 지어 읊은 것이 유
상곡수연의 백미(白眉)이다. 만약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를 마셔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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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요암에 깃든 숙종의 오언절구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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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옥류천을 찬양하며 지은 오언절구(五言絶句) 시가 소요암 피부에 선명하게 들어있으니
내용은 이렇다.
비류삼백척(飛流三百尺) - 날아 흐르는 물이 300척이고
요락구천래(遙落九天來) -
멀리 떨어지는 물은 구천에서 내리네
간시백홍기(看時白虹起) -
볼 때 흰 무지개 일고
번성만학뢰(翻成萬壑雷) -
골짜기마다 번개 소리 가득 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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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요암에 희미하게 깃든 옥류천 바위글씨
옥류천 일대를 처음 개발했던 인조가 1636년에 기념으로 남긴 것이라고 전한다.
하여 창덕궁 및 조선 궁궐에 있는 바위글씨 중 가장 늙은 존재가 된다.

▲ 소요정(逍遙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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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암 남쪽에 자리한 소요정은 1칸짜리 사모지붕 정자로 1636년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탄서
정(歎逝亭)이라 했다가 나중에 소요정으로 이름을 갈았는데, 소요(逍遙)란
'구속없이 천천히
거닐다'는 뜻이다.
숙종과 정조, 순조가 즐겨찾기 했던 곳으로 숙종은 이곳을 상림삼정의 하나로 크게 칭송했으
며, 1790년에 장마로 쓰러진 것을 정조가 다시 지었는데, 그때 소요정기(逍遙亭記)를 지었다.
또한 창덕궁 후원에서 경치가 좋은 곳을 10곳 선정하여 상림십경(上林十景)으로 삼아 그들을
시로 열렬히 찬양했는데, 소요정은 그 5번째로 등장하며, 소요정 시의 이름은 '소요유상(逍遙
流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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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요정의 뒷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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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정은 2중으로
닦여진 기단 위에 정자를 얹힌 형태로 기단과 정자 마루 사이로 약간의 허
공이 있다. 원래는 벽돌로 채워져 있었으나 어느 세월이 싹 털어갔는지 지금은 뻥 뚫려 있어
공중에 조금 떠있는 모습인데,
남쪽으로 2단 계단을 두었고, 동쪽으로 작은 돌다리를 냈으며,
북쪽과 동쪽으로 옥류천 계곡이 흐르고 있다. 돌다리는 소요정과 비슷한 나이로 여겨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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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쪽에서 바라본 소요정 |
▲ 소요정 옆 돌다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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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요정 옆구리로 담백하게 펼쳐진 소요암 일대
소요암 너머로 초가 머리의 청의정과 소요정과 비슷하게 생긴
태극정이 나란히 두 망막에 들어온다.

▲ 취규정에서 관람정 구역으로 인도하는 서쪽 숲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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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천 구역은 후원의
동북쪽 끝이라 더 이상 나갈 길이 없다. (북장문이 있으나 그곳으로 가
는 길은 통제되어 있고 길 또한 거의 잊혀짐;) 하여 취규정으로 다시 나와야 된다.
창덕궁 후원은 부용정 구역, 애련정 구역, 연경당, 관람정 구역, 옥류천 구역 모두 풍경이 예
술이나 그들
중에서 굳이 최고를 꼽으라면 근소한 차이로 옥류천 구역을 갑(甲)으로 정하고
싶다. 이곳에
퐁당 빠진 제왕(인조, 숙종, 정조, 순조 등)들도 많았고. 그들이 후원 명소 중
옥류천 식구들을 꽤 치켜세웠다. 그러니 그들이나 본인이나 보는 시각은 비슷한 모양이다.
옥류천에서 받은 감동은 실로 대단해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망막과 후각, 마음이 제
대로 정화를 받은 기분이다. 마음 같아서는 우리집으로 가져오거나 나만의 정원으로 삼아 두
고두고 누리고 싶지만 나에게 그럴 힘과 권한이 없다.
취규정에서 관람정 구역의 존덕정으로 바로 이어지는 서쪽 숲길을 통해 관람정 구역으로 돌아
왔다. 신선원전으로 이어지는 서쪽 길은 통제구역으로 묶여 있어 발을 들일 수가 없어서 다시
관람정 구역으로 온 것인데, 이곳을 지나 앞서 지나쳤던 애련정 구역 동쪽의 연경당으로 길을
잡았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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