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을 찾아 떠났던 남도기행 1편 ~ 광주지역 (월계동 장고분 / 무양서원)


' 봄을 찾아 떠났던 남도 기행 (2005년 4월 5일)'
'상편 ― 신도시에 숨겨져 있는 옛 유적들 (광주광역시)'


♠ prologue
길고 긴 겨울이 지나고 이제 바야흐로 2005년의 봄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러나 춘분(春分)이 지나고 4월에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겨울의 잔여 세력들이 다시
겨울의 제국을 꿈꾸며 계속해서 반란을 부리는 통에 정작 봄은 우리 곁으로 다가오지도 못하고
저 멀리서 맴돌 뿐이다.
그러다 보니 따뜻해야 할 시기임에도 여전히 두꺼운 외투를 입고 다녀야 됨은 물론 3월 중~하순까지
눈이 버젓히 내리고 꽃과 나무의 잎이 피어날 시기임에도 좀처럼 그들이 피어나지를 못하니
이러다가는 정말 봄이란 존재가 완전히 망각되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다.

이상하리 만큼 추운 날씨 속에서도 식목일은 바로 다음 날로 성큼 다가왔고 그 날, 남도(南道)라
불리는 광주와 전라도 지역을 오랜만에 가보기로 하였다.

4월 4일 월요일 저녁, 일과 공부로 파김치가 되버린 몸뚱아리를 억지로 이끌며 사람들로 가득한
천안(天安) 방면 전철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간다.
천안역에 이르러서 0시 14분에 광주(光州)로 가는 입석표를 사들고 조용히 그 시간을 기다리니
이윽고 4월 5일 새벽 0시 15분, 용산을 출발하여 광주로 가는 심야 무궁화호 열차가 천안역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온다.

수면실과 다름 없었던 객차 안에서 입석으로 가면서 주요 역을 정차할 때마다 틈틈히 빈자리를
노렸으나 자리가 좀처럼 빠지질 않는다. 김제를 지나서야 겨우 자리 하나를 차지하여 앉아
갈 수가 있었지.

새벽 3시 24분, 열차의 마지막 역인 광주역에 도착, 닭이 울 때까지 역사(驛舍) 맞이방에서
자리 2개를 떡하니 차지하며 약 3시간 동안 열심히 잠을 청했다. 얼마나 잠이 잘 오던지 머리를
의자에 기대자마자 바로 잠이 들어버렸지. 얼마나 피곤했으면 그렇게 잠이 들었을까..

어느덧 식목일의 여명은 밝아오고 아침 7시 경에 잠에서 깨어나 부근 편의점에서 라면으로 아침을
때우고는 전날(4일) 계획했던 식목일 답사 일정에 따라 제일 먼저 첨단지구라 불리는 광주서북쪽의
신도시를 찾아갔다.

첨단지구에는 세상에 알려지기를 꺼려하는 문화유산 2곳이 숨어 있는데 하나는 서원(書院),
다른 하나는 특이한 구조의 오래된 무덤들로 내가 그 곳을 선택한 이유는 별로 특별한 것은 없다.
그냥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니까..

* 이번 답사 코스
' 서울
→ 천안역 → 광주역 → 무양서원 → 월계동 장고분 → 담양읍 → 관어공원,관어정 →
관방제림, 담양향교, 죽녹원 입구 →
순창읍 → 순창향교/단성전 → 순창객사/정려비와 효자비 → 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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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시 속에 자리한 고색창연한 기와집 ~ 무양서원(武陽書院)
첨단지구의 서남쪽 월계동에 있는 무양공원, 그 공원의 서쪽자락 양지 바른 곳에는 '무양서원'이라
불리는 조그만 서원이 자리해 있다.
이 서원은 1927년, 탐진최씨(耽津崔氏) 문중에서 유림(儒林)들의 도움을 받아 세웠으며 광주 지역
유교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서원의 이름인 무양(武陽)은 광주의 옛 이름인 무진주(武珍州)의 양지(볕)에 있다는 뜻인 무진지양
(武珍之陽)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곳은 탐진최씨의 시조(始祖)인 최사전(全, 고려 중기 때 인물)을 비롯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여진족을 정벌했던 최윤덕(崔潤德) 장군금남 최부(錦南 崔溥) 등 문중의 유명한 인물 3명과
광주권 출신 인물로 미암일기(眉巖日記)의 저자(著者)인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 충렬공 나덕헌
(忠烈公 羅德憲)
등을 배향(配享)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陰曆) 9월 6일에 제사를 지낸다.

서원에는 사당인 무양사(武陽祠)와 강당으로 쓰이는 이택당(以澤堂)을 비롯하여 성지재(誠之齋),
낙호재(樂乎齋) 등의 서재가 있으며, 현재 탐진최씨 문중에서 이 서원을 소유, 관리하고 있다.

무양서원은 광주광역시 지방문화재자료 3호.

※ 무양서원 찾아가기 (2005년 8월 현재)
* 광주시내버스 1,25,35,88,120,771번 이용, 무양서원 입구에서 하차하여 도보 3분
* 서원 앞에 조그만 주차장이 있다.

▲ 무양서원 뒷쪽 담장
담장 주변으로 아름드리 나무들이 서원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 담장너머에서 바라본 무양서원
인적이 없는 쓸쓸한 분위기의 서원 경내(境內),
오직 봄의 따스한 햇살만이 썰렁한 서원 내부를 어루만지고 있을 뿐이다.

▲ 서원 동쪽에 있는 제단(祭壇)
무양서원에서 배향(配享)하는 5명(
최사전, 최윤덕, 최부, 유희춘, 나덕헌)의 제단으로
제단 위에는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5기가 세워져 있다.

이 곳은 제향을 올릴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철문으로 굳게 닫혀져 있다.

▲ 조촐한 분위기의 제단(祭壇)
담장 너머로 본 것이라 어느 것이 누구의 비석인지는 모르겠다.

◀ 탐진최씨 선조 제단에 세워진 비석
때깔좋은 검은색의 비문에는 '耽津崔氏先祖
四世五位壇庭碑'라 쓰여 있어 이곳이 그들
문중의 신성한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 무양서원 이택당(以澤堂)
서원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보통 삼문(三門)이나 누문(樓門)등의 출입문이 있으나
이 곳은 특이하게도 강당(講堂)으로 쓰이는 이택당이 정면에 딱 자리해 있다.

서원 내부로 들어가려면 이택당 양쪽으로 있는 합의문(合義門), 합인문(合仁門)
등의 2개의 문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처음에 이 서원을 둘러보면서 "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문이 없네 도대체 들어가는 문이 어디야?"
하며 어리둥절하였지.
그러다가 이택당 양쪽으로 조그만 쪽문을 발견했는데 그 문은 굳게 닫혀져 있었다.

▲ 이택당(以澤堂)에 걸려있는 '武陽書院' 현판

◀서원 내부로 들어서는 합인문(合仁門) -
태극마크가 새겨진 저 문은 좀처럼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번 열어
보려고 나름대로 용을 써 보았으나 문은
나의그런 행동을 비웃기라도 하듯 전혀
꿈쩍도 하질 않는다.
나를 거부하며 굳게 입을 다문 저 문을
바라보며얼마나 허탈하던지, 여기서 이만
발걸음을돌려야 했다.
 

 

▲ 담장 밖에서 바라본 무양서원
삼문(三門) 너머에 무양서원의 정전(正殿)이라 할 수 있는 무양사가 있다.

◀서원 앞에 높이 자라난 나무 -
서원을 세웠을 때 기념으로 심었던
나무로 생각된다. 어느덧 봄이
다가왔건만 나무는 아직도 겨울의
망령에서 좀처럼 벗어나질 못한다.

서원 안에 피어난 동백꽃들
 

▲ 무양공원에서 만난 개나리꽃
무양서원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잠깐 만난 개나리꽃들,
그들은 항상 고개를 숙이고 있다. 마치 잘 익은 벼처럼,,
자연 앞에서 항상 자신을 낮추고 겸손의 자세를 보이는 개나리들.

이맘 때면 벌써 개나리가 전국을 뒤덮고도 남을 시기이건만 서울 지역을 비롯한
중부지방은 아직도 개나리가 피어나질 못했다.(4월 5일 기준)

2005년 들어와서 처음으로 만난 개나리의 무리들..

 


♠ 옛 백제, 마한사람들의 무덤, 1500년 전의 수수께끼를 간직한 체
말 없이 누워있는 특이한 형태의 무덤 ~ 월계동 장고분(長鼓墳)
무양서원을 둘러보고 다시 버스가 다니는 대로(大路)로 나와서 비아동 쪽으로 3분 정도 걷다보면
'장고분4거리'라 불리는 4거리가 나온다.
그 사거리 북서쪽에 제법 넓은 공원이 하나 있는데 그 공원에 특이한 모습의 거대한 고분(古墳) 2기가
따사로운 봄햇살을 즐기며 누워있으니, 바로 장고분이라 불리는 옛 무덤들이다.

장고분에서 장고(長鼓)는 우리 전통 음악에 많이 등장하는 장고를 말하는데 이 무덤이 마치 그 장고와
비슷하다 하여 후대 사람들은 이를 '장고분'.'장고형고분'이라 부르고 있고 고분 주변에 있던 마을
(지금은 첨단지구 신도시로 변해버림) 이름 또한 '장구마을'이라 하였다,

이 고분의 조성시기는 발굴조사결과 대략 4~5세기라는 결론을 내렸는데 그 시기는 백제(百濟)가
전라남도에 남아 있던 마한연맹(馬韓聯盟)의 잔여세력을 때려잡고 국력을 대내외로 급속히 팽창시키던
시기였다.

이 고분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아직 속시원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현재 그 의문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대체로 (나의 의견도 포함)
1. 이 지역을 다스렸던 마한연맹의 어느 소국(小國)의 지배층 무덤
2. 백제에 투항한 이 지역 지배층의 무덤,
3. 백제정부에서 지방관리로 파견한 왕족, 귀족들의 무덤
4. 백제정부의 명령 혹은 필요에 의해 소환된 왜인(倭人, 여기에는 왜열도로 진출한 백제인, 그의
후손들도 포함)들의 무덤 <KBS 역사스페셜에서 주장한 내용>
5. 전남지역을 다스렸던 왜국 관리의 무덤 (왜국 사학자 다수가 주장하는 내용..)

이 무덤은 네모와 둥그런 모습이 혼합되어 있는 형태로 이런 형태의 무덤은 오직 영산강(榮山江) 유역
광주, 함평, 나주, 해남―
에서만 발견되고 있는데 지금까지 14기 정도가 발견되었다.
이런 무덤 양식은 고대(古代) 왜국(倭國)에서 주류를 이루며 만들어졌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과
비슷한 양식으로 이를 두고 왜국에서는 "전방후원분은 우리 왜국만의 독특한 무덤 형태이다.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 발견되는 이들 무덤으로 미루어 볼 때 왜국 야마토조정이 일찍이 한반도의
남부지방을 지배했음(임나일본부)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라고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심지어
왜국 역사교과서에도 이런 내용을 실었다고 하니 참으로 어이가 없을 뿐이다.

그러나 4~5세기 이전 왜국의 수준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진출이 불가능하며 오히려
백제(百濟), 가야(伽倻) 사람들이 대거 왜열도로 진출하여 기존의 토착민을 때려잡고 그들을 자신들에
맞게 동화시키면서 왜열도를 다스리던 시기라 할 수가 있다.
현재 왜왕(倭王)도 백제와 가야에서 건너간 사람들의 후손이라 할 수 있으며 이들 나라(백제, 가야..)
에서 건너간 사람들 중에 자신의 힘으로 혹은 그들 나라의 지원으로 왜왕이 된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영산강 유역에 남아 있는 이들 장고분의 기원은 현재로써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에 주류를 이루며
만들어졌던 둥그런 무덤(圓墳)과 네모난 무덤(方墳)의 형태가 혼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라 하며 그것이
백제와 가야 등이 왜열도를 점유(占有)해 가는 과정에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혼합형태는 이상하게도 왜국에서 크게 유행, 발전하면서 왜왕(倭王)과 지배층들의 무덤으로 많이
만들어졌다,

이 무덤은 마한, 가야의 무덤 양식이 왜국으로 전파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왜정(倭政) 때 왜인들이
도굴하여 파괴한 것을 1990년대에 전남대에서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벌였는데 이 때 금귀고리, 쇠화살촉,
여러 모습의 토기조각, 유리구슬, 동그란 모습의 토기 등 유물 수십 점이 1500년의 기나긴 잠을 깨고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전남대 박물관에 있음)

지금의 고분은 발굴 이후에 복원되었으며 첨단지구 신도시 조성에 따라 무덤을 중심으로 공원이
조성되면서 이 지역 사람들의 휴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월계동 장고분은 광주 지방기념물 20호로 지정되었다.

※ 월계동 장고분 찾아가기
* 무양서원에서 도보 5분 거리,
* 광주시내버스 1,25,35,88,120,771번 이용, 라인아파트에서 하차,
* 광주 광산구마을버스 75번 이용, 장고분4거리에서 하차,
* 주차장은 없음

▲ 장고분 공원
장고분 2기를 중심으로 제법 넓직한 공원이 꾸며져 있다.
따사로운 휴일 오전이건만 공원 안에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다.

▲ 누워있는 장고분(동쪽 무덤)
소나 고양이가 누워있는 듯한 모습의 장고분,

▲ 장고분의 서쪽 무덤
이렇게 보면 마치 고분 2기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1기로
무덤 하나가 거대한 언덕을 이루고 있다.

▲ 장고분 동쪽 무덤의 주구(周構)와 갈대 (1)
장고분 주변으로 물이 고여있는 해자 같은 것이 있는데 그 해자를 주구(周構)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저렇게 호(濠, 해자)를 갖춘 고분이 있는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새로운 것을 보게 되니 여기 오기를 참 잘한 것 같다.
솔직히 '장고분'이라 하여 그냥 우리나라에 일반적으로 널려있는
그런 것을 생각했거든..

참고로 우리나라에서도 주구를 갖춘 옛 무덤이 보령, 나주, 광주 등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이들 조성시기는 대체로 철기시대로 이런 무덤 양식은
왜국으로 전파되어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의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주구를 판 이유는 무덤을 높다랗게 세우기 위해 주변 땅을 파는데
그 파인 부분을 그냥 방치하기 뭐해서 그 부분에 물을 채운 것이다.
물론 무덤을 지키기 위한 목적도 들어 있다.
그러나 저런 주구(호)도 도굴꾼의 마수(魔手)를 막지는 못했지.

▲ 장고분 동쪽 무덤의 주구와 갈대 (2)
오랜 기간 비가 오지 않아서 주구에는 물이 별로 없다.
그렇지만 가득 차 있는 갈대들의 위세에 눌려 감히 고분으로 접근하지를 못하고
멀리서만 이렇게 바라볼 뿐이다.

▲ 장고분 서쪽 무덤의 북쪽 주구
여기는 그래도 물이 많이 고여 있다.
웅덩이의 깊이를 보니 대략 1m는 넘어보여 비가 많이 온다면
주구는 완전히 물로 가득차 마치 물에 떠 있는 무덤처럼 보일 것이며
그러인해 무덤으로 접근하기가 더욱 어려워 질 것이다.
주구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갈대들은 무덤을 지키다 지친 듯 다들 쓰러져 있다.

▲ 장고분 서쪽 무덤의 남쪽 주구
북쪽 주구와 달리 여기는 많은 갈대들이 자라나고 있다.
수량이 별로 없는 저 물에 의지해 힘겹게 살아가며 무덤을 지키는 갈대의 무리들,

▲ 장고분 서쪽 무덤의 모습
무덤의 동쪽 부분에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고
무덤의 능선에는 사람들이 많이 자닌 듯, 길이 파여져 있다.

▲ 장고분 서쪽 무덤 석실(石室) 입구
무덤을 발굴 복원하면서 무덤 내(內) 석실을 구경할 수 있도록
저렇게 입구 부분을 만들어 놓았다.

장고분의 석실 내부를 구경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인데
저 곳으로 접근하려면 어떻게 가야 될까.
마치 창이나 칼을 들고 서 있는 병사들처럼 경계의 눈빛을 보이는
저 갈대들을 과연 통과할 수 있을까?
저 곳으로 가고는 싶은데. 그래서 무덤을 한바퀴 둘러보며
경계가 허술한 곳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석실로 가는 길을 찾았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음을 보여 주듯, 무덤 능선으로 길이 잘 닦여져 있으며
이 곳만은 유일하게 갈대와 주구의 영향력이 미치지를 못한다.
아마도 고분을 복원하면서 사람들이 고분과 석실을 직접 답사할 수 있도록
무덤 한쪽 구석에 저렇게 무덤으로 접근하는 길을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석실로 가는 길은 처음에는 완만하나 석실에 다가 갈수록 경사가 심해지면서
잘못하면 웅덩이로 미끄러질 수 있으니 조심하기 바란다.

드디어 고분의 석실입구에 도착했다.
그러나 입구는 저렇게 철문이 굳게 닫혀져
있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며
문 밖에서 석실 내부를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 무덤 안을 살펴보자.. (1)
이 무덤은 횡혈식(橫穴式) 무덤, 즉
굴식돌방무덤으로 무덤 내부로 들어가는
연도를 만들고 그 안에 돌방, 즉 석실
(石室)을 만들어 시신이 든 관(棺)을
안치했다.
어두 컴컴한 석실에는 관을 안치했던
석대(石臺)만 하나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으며, 봄의 햇살이 무덤 내부를 환하게
비춰주고 있어 석실 내부를 그런데로
살펴볼 수 있었다.

▲ 무덤 안을 살펴보자 (2)
석실 안에서는 석빙고(石氷庫)처럼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철문을 만져보니 얼음을 만지듯 차갑고, 석실 바닥에는 온갖 벌레들이 이리저리 유람을 한다.

약 20분 동안 석실 내부를 뚫어지라 바라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으로부터 천수백년 전, 이 지역의 어느 지배층 혹은 귀족의 무덤으로 그들의 권위(權威)와
호화스러움으로 가득했을 무덤 내부, 그러나 이제는 조그만 돌맹이들과 벌레들의 세상이 되었을 뿐,
그 화려함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아무리 군주나 절대권력자라도 죽으면 그저 썩어빠진 뼈다귀에 불과하거늘 저렇게 무덤을 크고
화려하게 만들어 도대체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아무리 자신의 존재가 대단했어도 지금은 그 존재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의 호화스러움을
보여주는 무덤의 부장품(副葬品) 역시 옛날에 이미 도굴을 당한 상태인데 거의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석실 내부는 죽어서까지 자신의 존재와 권위. 위대함을 내세우고자 했던 인간들의 허황된
욕심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를 나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오리무중(五里霧中)으로 뒤덮힌 장고분, 그 무덤의 주인공 혹은 정확한 시대가 밝혀지는 날이
과연 올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아직도 많은 수수께끼를 간직한 체 오리무중
(五里霧中)을 헤매고 있는 마한, 백제의 숨겨진 역사를 풀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되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렇게 월계동 장고분을 약 30분 동안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0시가 넘어버렸다.
첨단지구에서 이렇게 목적지 2곳을 별다른 헤매임 없이 둘러보게 되어 참으로 뿌듯하다.

첨단지구에서의 볼 일을 이렇게 마치고 이제 어디로 가야 될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본다.
극락강역 부근에 있는 '풍영정'이란 조선시대 정자(亭子)를 찾아갈까 아니면 소쇄원(瀟灑園),
광주호 지역을 갈까? 아니면 계획대로 담양 관방제림으로 갈까? 결국 결론은 나와버렸다.
담양 관방제림으로 가기로..
 

~~ 아쉽지만 상편은 여기서 끝. ~~


* 상편 작성 시작일 - 2005년 4월 5일
* 상편 작성 완료일 - 2005년 4월 25일
* 상편 수정,보완,편집 ~ 2005년 4월 25일 ~ 8월 3일
* 공개일 - 2005년 8월 3일부터

* 중,하편은 각각 8월 4일에 공개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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