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에 해당되는 글 21건

  1. 2017.11.27 서울 도심의 꿀단지, 서촌 늦가을 산책 ~~~ 옥인동 박노수미술관, 친일매국노 윤덕영의 기와집 흔적들
  2. 2017.02.08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산을 거닐다. 안산 나들이 ~~~ (영천시장, 안산자락길, 무악산 동봉수대)
  3. 2016.12.07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서촌의 끝자락을 더듬다 ~~~ (인왕산 한양도성, 딜쿠샤, 행촌동은행나무, 홍난파가옥 등)
  4. 2016.11.25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늑한 전원마을을 거닐다 ~~~ 부암동 늦가을 나들이 (무계원, 안평대군집터...)
  5. 2016.08.22 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서촌 제일의 경승지 ~~ 인왕산 수성동계곡 (인왕산길, 기린교)
  6. 2016.05.28 서울 도심의 듬직한 우백호를 거닐다. 인왕산 (개미마을, 북쪽 능선길, 환희사, 큰절골)
  7. 2016.01.01 서울 도심의 새로운 꿀단지, 서촌 나들이 (한옥마을)
  8. 2015.03.16 서울 도심의 이색 명소 ~ 인왕산과 선바위 (국사당, 해골바위)
  9. 2014.04.09 풍경과 조망이 일품인 서울 도심의 상큼한 명소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10. 2013.04.26 서울 도심 속의 아늑한 전원마을을 거닐다 ~ 종로구 부암동 산책

서울 도심의 꿀단지, 서촌 늦가을 산책 ~~~ 옥인동 박노수미술관, 친일매국노 윤덕영의 기와집 흔적들



' 늦가을 서촌 나들이 '

(박노수미술관과 친일매국노 윤덕영의 집)


▲  박노수 가옥(박노수 미술관)의 뒷모습

▲  박노수 가옥 뒷쪽 굴뚝

▲  청운동에서 바라본 북악산


 


▲  옛 청휘각(晴暉閣)터 주변에서 바라본 서촌(西村)

서울 도심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서촌(웃대)은 경복궁(景福宮) 서쪽 동네를 일컫는다. <청계
천 이북이자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는 북촌(北村), 청계천 이남은 남촌(南村), 창덕궁 동부는
동촌(東村)이라 불림>
흔히 서촌이라 불리는 경복궁 서부는 옛날부터 웃대라 불렸으며 원래 서촌은 경희궁(慶熙宮)
과 서대문 주변 지역이었다. 그러던 것이 인왕산 동쪽까지 확장된 것이다. 또한 세종대왕이
통인동에서 태어난 인연(1397년 출생)을 내세워 2011년 이후에는 종로구청과 지역 주민 주도
로 새롭게 '세종마을'을 칭하고 있다.

서촌(웃대)은 왕족부터 양반사대부(士大夫)부터 내시와 상궁(尙宮), 의관(醫官), 역관(譯官)
등의 중인(中人)과 평민 등 다양한 계층이 살았는데 그중 중인 계급이 많이 살았다. 또한 인
왕산과 북악산(백악산)을 병풍으로 두룬 아름다운 절경으로 인해 조선 초부터 도성(都城) 내
경승지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런 곳은 늘 귀족들이 군침을 흘리는 법이라 안평대군(安平大君,
세종의 3번째 아들)부터 이항복(李恒福), 정철(鄭澈), 권율(權慄), 김상용(金尙容), 김수항(
金壽恒), 추사 김정희(金正喜)에 이르기까지 많은 귀족들이 집과 별장을 지어 머물렀다.
특히 이곳은 도시와 자연이 경계를 맞닿은 도성의 변두리로 지금과 달리 필운대로와 신교동교
차로만 지나면 완전 자연에 감싸인 한적한 곳이었다. 게다가 궁궐과 육조(六曹) 등의 관청이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가까워 고위 관리들의 주택, 별서 장소로는 아주 그만이었다.

서촌의 이름난 명소는 겸재 정선(鄭敾)이 그의 노련한 손끝을 통해 그림으로 남겼는데, 그 화
첩이 장동(壯洞)8경첩으로 여기서 장동은 서촌의 일원인 청운동 지역의 옛 이름이다. 조선 후
기에는 중인이던 천수경(千壽慶)이 송석원(松石園)이란 시사(詩社)를 세워 중인들의 문학 공
간으로 키웠으며, 왜정(倭政) 이후에는 윤동주(尹東柱), 이상범(李象範), 박노수(朴魯壽), 이
상(李箱) 등 많은 시인과 화가들이 서촌에 안겨 주옥 같은 작품을 그려냈다.

서촌은 북촌만큼은 아니지만 한옥들이 제법 많이 남아있다. 대략 700여 채의 한옥이 옥인동과
누하동, 사직동, 체부동, 창성동 일대에 흩어져 있는데, 120년 이상 묵은 한옥은 하나도 없고
, 20세기 개량 한옥이 주류를 이루며 박노수 가옥 등의 양옥도 섞여있어 20세기 초/중반 서울
의 주거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옥이 많긴 하지만 북촌처럼 정식적으로 한옥마을을 칭하
고 있지는 않다. (비공식적으로 '서촌한옥마을'이라 불리기도 하며, 창성동 일대 한옥을 따로
'창성동 한옥마을'이라 불리기도 함)

조선 후기까지 북촌과 더불어 잘나가는 동네로 이름을 날렸던 서촌이지만 옥인동 일대에 고래
등 저택을 짓고 인왕산의 맑은 공기를 축내던 친일파 윤덕영(尹德榮)과 이완용의 부정 때문인
지 왜정 이후 적지 않게 기울었고 해방 이후 개발제한구역에 묶이면서 거의 시골 읍내처럼 정
체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루면 강산도 변한다는 서울 도심 한복판임에도 북촌과 서촌만큼은 시간도 느릿느릿 양반걸
음을 하거나 뒷걸음을 치는 것이다. 조금만 나가면 21세기 한복판인데 서촌 상당수는 아직 20
세기 한복판에 머물러 있어 서울의 옛 모습을 더듬기에 좋다.
허나 시간이 너무 정체되면 지역 주민들의 삶이 힘들어진다. 북촌도 도심 속의 꿀단지로 화려
하게 재기를 하고 있지만 서촌은 근래까지 낙후된 모습으로 거의 남아있던 것이다. 그러다보
니 한옥 기피증이 생겨나 한옥이 감소하게 되었고 거기에 서울시의 무관심까지 더해져 서촌의
숨겨진 명소들도 은근히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0년 4월 서울시에서 '경복궁 서측
지구단위계획'을 발표하여 한옥 보존과 신축을 장려했고, 북촌으로 단단히 재미를 본 서울시
와 종로구청이 서촌을 새로운 꿀단지로 개발하면서 서촌도 드디어 때를 만나게 되었다.

그 이후 새로 지어진 한옥이 나날이 늘고 있고, 종로구청에서 서촌 답사코스를 개발하고 홍보
하는 한편, 새로운 명소를 발굴하고, 기존의 명소를 손질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조
금씩 북촌을 추격하고 있다. 특히 수성동계곡 복원(2012년 7월)과 박노수 가옥을 구립 미술관
으로 해방시킨 사건(2013년 9월)은 서촌에 큰 활력을 불어넣는데 충분했다. 게다가 소규모 갤
러리와 공방도 조금씩 둥지를 틀면서 서촌의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한다.

서촌에는 수성동계곡과 박노수가옥(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 이상범 가옥, 사직단, 황학정(
黃鶴亭), 단군성전, 선희궁(宣禧宮)터, 백호정 바위글씨, 백세청풍 바위글씨, 창성동 한옥단
지, 통의동 백송터, 신익희(申翼熙) 가옥, 백운동천, 송석원터, 청휘각터, 자수궁터, 보안여
관, 필운대, 배화여고 생활관, 체부동(體府洞) 홍종문가옥, 백운동천 바위글씨, 운강대 바위
글씨, 행촌동 은행나무, 딜쿠샤, 홍건희 가옥 등 조선과 근대, 현대 문화유산이 풍부하게 깃
들여져 있으며 갤러리아트가, 대림미술관 등의 온갖 갤러리와 문화공간, 금천교시장(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과 통인시장 등의 전통재래시장이 있다. 특히 금천교시장은 제2의 피마골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먹자골목이 크게 형성되어 있는데, 고깃집과 전집, 횟집, 분식집
등 다양한 식당이 즐비하여 학생과 직장인, 인왕산 등산객, 답사객으로 1주 내내 활기가 넘친
다. (나도 가끔 이용함)

부암동(付岩洞)과 성북동, 북촌과 더불어 나의 마음을 계속 훔치고 있는 서촌은 2011년 늦여
름부터 구석구석 발자국을 남기며 그의 숨겨진 속살을 계속 뒤집고 있다. 별거 없을 것 같은
겉보기와 달리 그 속은 신대륙 이상으로 다양한 보물을 품은 곳이 바로 서촌이다.

서촌 나들이는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나 2, 3번 출구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여기서 자하
문로나 사직공원 동쪽(경복궁역 1번 출구)의 필운대로를 중심으로 움직이면 되며, 자하문고개
에 있는 윤동주시인의 언덕(청운공원)에서 주요 명소를 거쳐 경복궁역으로 내려오는 것도 괜
찮다. 또한 조그만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고, 그 속에 여러 명소와 소소한 볼거리 등
이 숨겨져 있으니 너무 큰 길만 살피지 말고 서촌 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골목길도 꼭 거닐어
보자. 그러면 정말 배부르고 알찬 서촌 나들이가 될 것이다. 단 서촌도 엄연히 사람들이 사는
공간이므로 민폐를 부리지말고 조용히 둘러보기 바란다.


 

♠  친일파 윤덕영이 지은 근대 가옥, 화가 박노수의 삶터로 미술관으로
새롭게 거듭난 박노수 가옥(朴魯壽 家屋)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호

서촌 중심에 자리한 통인시장에서 수성동계곡으로 인도하는 옥인길을 따라가다보면 오른쪽 골
목 속에 서촌의 상큼한 명소로 등극한 박노수 가옥이 손짓을 한다. 이곳은 집 이름 그대로 우
리나라 미술계의 원로이자 현대 화가인 남정 박노수의 집으로 인근 이상범 가옥과 함께 현대
미술의 따끈따끈한 산실이며 2013년 9월 이후 속세에 개방되어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이하
미술관)'으로 새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이야 천하에 공개된 현대 화가의 미술관으로 누구든 돈만 내면 안길 수 있는 명소가 되었
지만 이 집의 태생은 그렇게 곱지는 못했다. 바로 친일매국노로 개추잡한 이름을 날렸던 윤덕
영(尹德榮, 1873~1940)이 지은 집이기 때문이다.
윤덕영은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큰아버지로 왜정(倭政)에 적극 협
력하여 나라를 팔아먹고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며 배때기에 기름칠했던 1급 매국노이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친일파로 추잡한 뒷끝을 보인 윤치호(尹致昊) 조차도 '이 비열한 매국노
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웹스터 사전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라며 그의 만행을
꼬집었다.
하지만 사람이기를 포기한 윤덕영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온갖 손가락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이권에 개입해 많은 부를 쌓았고, 집과 땅에도 징그럽게 욕심을 부려 송석원(松石園)을
비롯한 옥인동(玉仁洞) 일대를 사들여 고래등 양옥 별장인 벽수산장(碧樹山莊)을 지었다. 그
리고 그 주변으로 가족과 첩을 수요할 14동의 고래등 한옥을 주렁주렁 지어 완전 그만의 조그
만 세상을 만들어놓았다.
박노수 가옥은 그 14동의 하나로 딸과 사위를 위해 이 땅 최초의 근대 건축가인 박길룡(朴吉
龍)에게 의뢰하여 1937~1938년경에 지어진 것이다.


▲  세상을 향해 활짝 문을 연 박노수 가옥(미술관) 대문

▲  벽돌로 지어진 박노수 가옥 (박노수미술관)

이 가옥은 한옥 양식과 중원대륙 양식, 서양식이 잡탕이 된 이른바 절충식 기법의 집이다. 2
층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벽돌 건물로 반지하층을 가지고 있으며, 붉은 벽돌로 된 1층에는 온
돌방과 마루, 복도, 응접실이 있고, 하얀 피부로 이루어진 2층은 나무 구조로 지어졌는데 계
단을 중심으로 마루로 된 방이 널려있다.
그리고 3개의 벽난로를 설치해 온기가 머물 공간을 확보하고 집 서쪽에 현관을 두었으며, 벽
돌로 포치를 설치하여 집의 운치를 더욱 높였다. 지붕은 서까래를 노출한 단순 박공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2층의 증축 부분을 빼면 거의 원형 그대로 잘 남아있다.

박노수가 매국노의 악취가 진동하는 이 집에 들어온 것은 1973년이다. 왜 이곳을 골랐는지는
모르겠으나 스승인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의 집과도 가깝고, 집의 모습도 중후하고 운치가
진해 예술가의 집 분위기로는 아주 좋아 보인다. 게다가 뜨락도 넓고, 인왕산도 가깝고, 도심
과도 가까우니 시내 왕래가 잦았던 그에게도 딱 적당한 장소였을 것이다.
남정은 이곳을 집과 화실로 삼아 많은 작품을 그려냈으며, 그의 예술적이고 꼼꼼한 손맛이 담
긴 뜨락에는 그가 수집한 수석과 석물, 문화유산을 배치하고 다양한 꽃과 나무를 심어 자연과
문화, 수석이 어우러진 아주 참한 공간으로 꾸몄다.

왜정 때 박길룡이 설계한 건물로 당시 건축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고 현대 미술화가인
박노수가 40년 가까이 머물며 작품 활동을 벌였던 현장이라 윤덕영이라는 친일파 괴물이 만든
건물임을 무릅쓰고 1991년 5월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그것도 1호라는 그럴싸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바로 그 점이 참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데 1호나 2호, 3호ㅡ 100호 등은 그저 지정된 번호
일 뿐 가치 순위는 아니기 때문에 그리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1호만큼은 신중
해야 된다고 본다. 국보 2호는 몰라도 1호는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1호의 의미는 이 땅에서
는 꽤 각별하기 때문이다. 해방이 된지 70년이 되도록 친일매국노 청산조차(청산은 커녕 그것
들이 더 활개치고 있음) 제대로 되지 못한 이 땅의 거지 같은 현실을 이 가옥이 보여주는 듯
싶어 마음이 참 쓰라리다.

만약 윤덕영의 후손이 염치없이 계속 살고 있었다면 화염병이나 폭탄을 던져 없는 화마(火魔)
라도 억지로 소환해 집과 함께 날려버려야 마땅하겠지만 박노수가 이곳에 살면서 집에 일종의
면죄부가 붙여졌으니 굳이 때려부실 필요는 없을 것이다. 허나 문화재 지정 후순위로 두어 천
천히 지정을 하던가 요즘 개나 소나 지정된다는 등록문화재로 삼는 것이 어땠을까 싶은 아쉬
움도 살짝 든다. 뭐 이렇게 써봤자 허공에 메아리에 불과하지만...


▲  가옥(미술관) 현관 앞 (가옥 서쪽)

★ 남정 박노수(藍丁 朴魯壽, 1927~2013)의 간략한 생애
박노수는 1927년 2월 17일 충남 연기군(현 세종시)에서 태어났다. 1940년대에 청전 이상범의
문하로 들어가 그림을 배웠으며, 해방 이후 서울대 회화과에 진학했다.

그의 작품활동은 주로 국전(國展)에서 이루어졌는데 1953년 국무총리상, 1955년에 대통령상을
받았으며 1957년에는 추천작가를 지냈다. 이후 5.16민족상, 3.1문화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등
을 받았고, 이화여대(1956~1962)와 서울대(1962~1982)에서 교수를 지냈다. 이후 서울대 명예
교수가 되었고,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운영위원을 역임했으며, 1995년 자랑스러운 서울
시민 6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왜열도 동경과 스웨덴, 미대륙에 다수의 국제전과 10
여 회의 국내외 개인전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화제를 취하면서도 간결한 문필과 강렬한 색감, 대담한 터치 등 독자적
인 화풍을 구축해 전통 속에서 현대적 미감을 구현한 작가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대표작으로
는 '달과 소년'이 있으며, 그의 많은 작품이 이곳에 진열되어 속인들의 정처없는 안구와 마음
을 다독거려준다.

남정은 1973년부터 2011년 말까지 이곳에 살았다. 2011년 죽음이 임박해진 그는 집과 소장품
등 재산의 상당수를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해 11월 11일 자신의 집에서 미술
계 인사와 후배들, 제자들, 종로구청 관계자 등이 모여 기증협약식을 갖고 약속대로 집과 소
장품을 쿨하게 종로구청에 내주었다.
그가 기증한 물건은 그의 그림이 포함된 미술작품 500점, 수석과 여러 석물 379점, 오래된 가
구 66점, 개인 소장품 49점 등, 약 1,000여 점으로 그의 통 큰 기증은 서민의 쪽박까지 빼앗
으려 드는 졸부와 위정자들로 가득한 이 땅에 한줄기 빛과 같은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가 베
푼 대인의 기운은 친일파 집이라는 굴레를 지닌 이 가옥을 180도 달리 보이게 하는데 충분했
다.

종로구청은 남정의 뜻에 따라 기증받은 집을 종로구립 미술관으로 꾸미기로 하고 2012년 10월
에 개관하기로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못해 1년 연기되었다. 그 사이 남정은 그의 소망이던 미
술관 개관을 끝내 지켜보지 못하고 2013년 2월 25일, 86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숨을 놓고 말았
다.
그가 사라진 이후, 유족과 종로구청의 노력에 힘입어 남정의 손때와 예술혼이 서린 그의 집은
드디어 2013년 9월 11일,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 천하에 문을
열었다. 개관 기념전으로 그의 대표적인 작품을 모아 '달과 소년전'을 가졌으며, 종로구 최초
의 구립 미술관으로 이곳이야말로 남정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유작이자 아름다운 선물이다.

나는 근/현대 미술가에는 그리 관심이 없다보니 남정이 왜정과 현대를 거쳐간 원로 화가의 하
나로만 알고 있었다. 허나 이번에 그의 깊은 부분까지 파고드니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못
지 않은 대인(大人)으로 그의 이름 3자가 제법 크게 다가온다.


▲  무늬가 살아있는 석조대좌(臺座) (현관 앞)
무엇을 받치던 대좌였길래 무늬가 저렇게 요염한 것일까? 허나 대좌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채 망연히 뜨락 장식물의 일원이 되었다. 정체성과 역사를 잃어버리는 것만큼
무섭고 한심한 것은 없다.

▲  미술관 개원 기념으로 종로구청장이 남정에게 바친 메세지

▲  야외 전시관을 방불케하는 미술관 남쪽 뜨락

박노수 가옥은 크게 미술관으로 변신한 2층 가옥과 남쪽 뜨락, 그리고 북쪽 벼랑에 설치된 전
망대로 이루어져 있다.
남쪽 뜨락에는 남정이 수집한 온갖 수석과 문화유산 등이 가득 흩어져 있고, 소나무와 감나무
등 여러 나무와 꽃이 자리해 있어 조촐하게 자연과 문화가 잘 버무려진 야외 전시장을 이루고
있다. 특히 그는 수석 취미가 대단하여 뜨락 안팎으로 수석들이 가득한데 군침이 돌 정도로
잘생긴 돌도 적지 않으며, 그가 도안해서 만든 석조 원탁과 돌의자 6기는 가족과 벗, 제자/후
배들과 이야기꽃을 피웠던 정겨운 현장이다.

▲  남정이 만든 석조 원탁과 돌의자 6기

▲  비석의 지붕돌인 가첨석(加檐石)


▲  귀여움과 고색의 때가 묻어난 조그만 호랑이상
어디서 데리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조선 후기 작품으로 여겨진다.

▲  또다른 호랑이상
호랑이를 고양이로 만든 옛 사람들의 손때로 피부가 꺼무잡잡하다.

▲  머리 위에 또다른 머리 장식을 둔 특이한 석등(石燈)
피부가 아직 반질반질하고 머리 장식이 특이한 흔치 않은 석등으로 20세기
초/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음)

▲  향로석(香爐石)과 그 위에 수줍게 놓인 작은 수석

▲  물을 머금은 조그만 돌항아리와 분재들
벌써부터 수면에 떨어진 낙엽들이 인생의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돌항아리는 저들의 인생을 마무리 짓는 블랙홀인 모양이다.

▲  늦가을이 깃든 상큼한 남쪽 뜨락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  수석과 잡초, 꽃으로 가득한 가옥 동쪽

     ◀  집 동쪽에 솟아난 늘씬한 소나무
박노수가 심은 나무로 하늘과 가까운 줄기 끝
에 소나무 잎이 덩어리로 몰려있는 모습이 특
이하다. 나무의 높이는 거의 가옥 2층 정도 된
다.

▲  키 작은 태산목(목련목)
양옥란(洋玉蘭)이라고도 하며 박노수가
심었다.

▲  포치가 달린 가옥(미술관) 현관
구한말, 왜정 때 지어진 개인 양옥 가운데
포치가 달린 집은 흔치 않다.


▲  현관 앞에 놓인 커다란 돌확


 

♠  박노수 가옥(미술관) 현관과 전망대 주변

▲  현관을 지키고 있는 목조 동자상
세월이 달아놓은 주름으로 빛이 좀 바래 보이지만 앳된 표정은 변함이 없다.

    ◀ 가옥 현관과 여의륜(如意輪) 현판
지금은 유료의 공간이 되버린 박노수 가옥 내
부는 포치가 달린 현관을 통해 들어서면 된다.현관문에서 신발을 버리고 실내화로 갈아타면
되는데, 반지하층을 제외한 1층과 2층 상당수
의 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미술관 사무실은 1층
에 있다. 또한 '달과 소년'을 비롯한 박노수의
그림은 주로 2층을 장식하고 있으며, 1층은 박
노수의 생애와 그림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
다. (내부 촬영은 통제됨)

현관문에는 한자로 쓰인 여의륜 현판이 걸려있다. 글씨가 꽤 큼지막하고 패기가 넘치는 모습
으로 박노수의 집에 있으니 그의 글씨로 착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이다.
현판에 담긴 여의륜이란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 세간(世間), 출세간 이익을 더하는 것
을 본뜻으로 하는 보살(菩薩)을 뜻하는 말로 추사가 말년에 불교에 관심을 가지면서 서울 봉
원사(奉元寺)와 봉은사(奉恩寺), 팔공산 은해사(銀海寺), 해남 대흥사(大興寺) 등 천하에 유
명한 절을 유람하며 많은 글씨를 남겼다.

현판 우측에는 '승연노인(勝蓮老人)'이란 낙관이 찍혀있는데, 승연노인은 추사의 다른 아호(
雅號)이다. 이 현판을 손에 넣은 박노수는 현관문에 걸어두어 현관부터 미술가의 집 분위기를
진하게 우려냈다.


▲  근대 양옥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2층 벽난로
난방의 기능은 사라지고 이제는 무늬만 남아 한가로운 말년을 보낸다.

▲  2층 목조 다락방
다락방에 설치된 모니터에는 남정의 인터뷰 장면(1970~80년대로 여겨짐)이 나와
그의 생전에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 현관 앞에서 바라본 미술관 정문
조금씩 숨겨진 끼를 드러내며 경쟁자 북촌을 긴장시키는 서촌, 박노수 미술관은
바로 그 서촌의 새로운 활력소이자 허브이다. 평일임에도 제법 많은 이들이
찾아와 짧은 시간에 비해 너무 떠버린 이곳의 높은 인기를 실감케 한다.

▲  뚜껑이 닫힌 죽은 우물
친일파 윤덕영의 딸 내외와 박노수 가족의 목을 축여주었던 우물이다. 허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그 수맥이 끊기면서 이제는 껍데기만 남았다.

▲  커다란 수석 (현관 앞)
호랑이나 사자, 낙타가 웅크리고 앉아 망중한에 잠겨있는 모습 같다.

▲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과 홀을 쥐어든 조그만 석인(石人)

가옥 북쪽에는 수풀이 우거진 가파른 벼랑이 있다. 예술과 문학의 향이 깃든 가옥답게 대나무
도 삼삼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벼랑에 계단과 석물을 배치한 고즈넉한 산책로를 내
었고, 그 길의 끝에는 무려 전망대까지 두었다. 이 언덕 산책로와 전망대야말로 박노수 미술
관만이 가진 강한 매력이자 백미라 칭할 만하다.

산책로 입구에는 고색이 묻어난 조그만 석인이 홀을 쥐어들며 안내인처럼 자리해 있다. 제자
리를 잃고 방황하는 그를 남정이 데리고 온 것인데 고향을 잃은 충격 때문일까? 석인은 좀처
럼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긴 이곳에 이끌려온 석조 문화유산 모두 제자리를 잃
은 가련한 처지이다. 아마도 사람이 들을 수 없는 그들만의 속삭임으로 고향을 잃은 동병상련
의 한을 달래지는 않을까?
투박하게 닦여진 돌계단을 오르면 북쪽으로 난 아주 짧은 샛길이 있는데, 대나무로 둘러싸인
그곳에는 돌의자가 놓인 조그만 쉼터가 있다. 그리고 숲길을 마저 오르면 나무로 지어진 전망
대(전망데크)가 나타난다.

이 전망대는 박노수 가옥을 미술관으로 바꿀 때 지은 것으로 예전에는 그냥 나무와 풀만 있었
다. 숲길에는 조그만 돌의자가 여럿 있는데 남정은 이들 의자에 앉아 천하를 바라보며 작품을
구상하거나 온갖 망중한에 잠겼을 것이다.
전망대까지 인도한 숲길은 담장 앞에서 뚝 끊겨버려 적지 않게 달아오른 숲길의 여흥을 깨뜨
려버린다. 지금이야 이렇게 막혔지만 윤덕영이 한참 인왕산의 산소를 축내던 시절에는 바로
옆에 자리한 벽수산장까지 이어져 있었다.

전망대에 서면 가옥의 뒷모습을 비롯해 옥인동 일부와 옛 인경궁(仁慶宮)터인 배화여자대학이
바라보인다. 이곳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나 두 눈에 들어오는 천하의 범위는 우물안 개
구리 수준이다. 그래도 주어진 공간을 최대로 활용해 이런 곳까지 갖추니 정말 알차긴 알차다.

▲  숲길에서 만난 조그만 향로석

▲  숲길에서 만난 장명등


▲  숲길 끝 벼랑에 다리를 걸친 전망대
숲길과 돌의자, 석물은 박노수 시절의 것이고 전망대는 2013년에 단 것이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가옥의 뒷모습과 지붕
건물의 모습은 양옥이지만 지붕만큼은 거의 한옥 스타일이다. 윤덕영이 14동의 한옥을
지을 때 자신의 벽수산장을 제외하고 모두 한옥으로 지었으면서 왜 딸의 집만
이렇게 이채로운 모습으로 지어주었을까?

▲  전망대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옥인동과 통인동 지역이 주류를 이루며, 광화문 부근도 조금씩 시야에 들어온다.

▲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굴뚝
지붕에는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굴뚝 5개가 뿔처럼 솟아나 집의 멋스러움을 한층
수식한다. 1층 지붕에는 2개, 2층에는 3개가 달려있는데, 이중 3개는
벽난로용, 나머지는 부엌용이다.

▲  가옥 북쪽 굴뚝과 언덕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왼쪽)

▲  가옥 동쪽에 자리한 장독대와 창고

남정 일가가 사용하던 장독대가 창고 위에 놓여있다. 남정의 작품은 장독대에서 숙성된 여러
음식의 힘이라고 봐도 절대 과언을 아닐 것이다. 허나 그들이 떠난 이후 이제는 인생처럼 공
허한 장독대가 되어 뜨락 장식물의 일원으로 조용히 묻혔다.

※ 옥인동 박노수 가옥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찾아가기 (2017년 11월 기준)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4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
  서 종로구 마을버스 09번을 타고 박노수미술관 하차, 도보 1분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1,2번 출구)에서 도보 15분
* 입장료 : 성인(25~64세) 3,000원 (20명 이상 단체 1,800원) / 청소년 1,800원 (단체 1,200
  원) / 어린이 1,200원 (단체 600원) / 종로구민은 50% 할인
* 관람시간 : 10시~18시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과 한가위 당일은 휴관)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68-2 (옥인1길 34, ☎ 02-2148-4171)


 

♠  다쓰러져간 매국노 윤덕영의 고래등 기와집

▲  옛 윤덕영 집 돌계단

옥인동 47-133번지 주변은 새 주택과 헌 주택, 달동네 스타일의 집이 공존하는 현장이다. 바
로 그곳에 윤덕영의 기와집이 1채 남아있다.
윤덕영은 서촌(웃대)에서 가장 풍경이 아름다운 송석원과 옥인동 일대를 싹 매입하여 그곳에
자신의 탐욕을 풀어놓았는데 송석원에 큼지막한 서양식 별장을 짓기로 작정하고 프랑스 공사
(公使)를 지낸 민영찬을 통해 건물 설계도를 의뢰했다. 그 설계도를 바탕으로 독일인 감독관
을 고용하여 1914년 집을 짓기 시작해 10여 년의 공사 끝에 완성을 보았다.

그 집은 무려 222평 크기의 프랑스식 건물로 자신의 호를 따서 벽수산장(碧樹山莊)이라 하였
다. 또한 송석원에 있다고 해서 '송석원별장'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었다. 산장 주변에는 14동
의 한옥을 지어 가족과 자식, 첩들과 모여 살았는데, 소나무와 사과나무가 무성하던 벽수산장
북쪽에 1고주 7량집의 99칸 기와집을 지어 첩의 거처로 삼았다. 그 집이 바로 이곳이다.

윤덕영이 1940년 골로 간 이후, 그의 자식들이 재산을 말아먹으면서 벽수산장은 왜열도 회사
인 미쓰이에게 넘어가고, 14동의 기와집도 거진 남의 손에 넘어갔다. 6.25 이후 서울의 폭발
적인 인구 증가로 벽수산장 주변에 무허가 집이 난립을 했고, 약간 처지가 괜찮은 이들은 윤
덕영의 한옥을 1칸씩 차지해 서울살이를 했다. 그렇게 서울을 휩쓴 근대화의 회오리로 그의
부질없는 한옥들은 대거 다운당했고, 지금은 박노수 가옥과 이 한옥만 간신히 남게 되었다.

한옥에는 현재 여러 가구가 살고 있는데, 대지를 공동으로 소유하며 각각 별도의 출입구를 두
어 1지붕 여러 가족을 이루고 있다. 매국노의 악취가 코를 찌르는 기와집이 힘겹게 서울살이
를 하는 서민들의 소박한 삶터가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형태가 적지않게 변질되고 수리도 제
대로 받지 못해 20세기 초반 최상류층 고래등 가옥은 이제 거의 쓰러지기 직전의 허름한 몰꼴
이 되었다. 마치 무관지옥으로 개처럼 끌려갔을 윤덕영과 아비의 재산으로 팔자좋게 살다가
가산을 말아먹은 그 자손들처럼 말이다.

비록 빛은 많이 바랬지만 한 시대를 나쁘게 풍미했던 권력자가 살던 현장이라 집에 쓰인 공사
자재는 거의 고급 수준이며, 단풍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한옥 동쪽에는 제법 품격이 돋보이는
석조 계단을 늘어뜨렸다. 지금이야 주택들 사이에 끼어있는 가련한 신세라 골목길 계단 정도
로 실감이 나진 않겠지만 왕년에는 궁궐 계단 못지 않은 위풍을 자랑했다. 게다가 일반 한옥
에서는 보기 힘든 계단의 소맷돌, 장대석 주초, 처마 장식, 장식이 새겨진 벽 등을 갖추고 있
어 예사 한옥이 아님을 귀띔해준다.
그러다보니 버리기는 좀 아까워 서울시에서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을 조성하면서 이 집을 옮
기려고 했는데, 나이에 비해 한옥이 너무 낡아 이전이 불가능하자 부득이 예전 모습 그대로
본을 따서 새롭게 짓는 선에서 끝을 냈다. 그리고 집 이름은 그 더러운 주인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냥 '옥인동 윤씨 가옥'이라 하였다. (가옥의 면적은 225.79㎡)

참고로 윤덕영의 아우로 형못지 않던 쓰레기 매국노인 윤택영(尹澤榮, 1866~1935)의 재실(齋
室)도 남산골한옥마을로 옮겨져 한가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  위에서 본 돌계단과 단풍나무

▲  계단 끝에 자리한 옛 윤덕영 집


▲  서민의 삶터가 되버린 옛 윤덕영 집
허름한 모습 속에 아직 고급 기와집의 기품이 남아있다.
 

계단을 오르면 윤덕영 집이 일부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북쪽으로 휘어진 계단을 오르면 집
대문인데 서민들의 거처가 되버린 탓에 갖은 생활도구와 가스관, 전깃줄, 편지함으로 주변이
참 어수선하다. 게다가 대문도 굳게 잠겨져 있고, 골목길도 막혀버려 세세한 집 구경은 어려
운 실정이다.

지금은 잠잠하지만 혹여 나중에 개발의 칼질이 그어지면 이 한옥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 같다.
이미 남산골한옥마을에 본을 따서 지은 집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곳의 집은 엄연히 새 집
이라 고색의 냄새가 없는 이 땅의 흔한 민속촌의 한옥 같은 인상이다. 반면 이곳은 100년 가
량 묵은 한옥이라 겉모습에서 벌써 고색의 향이 피어올라 고택의 기분을 들게 한다.
이곳을 만약 밀게 된다면 모두 가루로 만들지 말고 지붕과 벽, 목재 등을 모두 수습해 남산골
에 있는 윤씨가옥을 다시 손질했으면 좋겠다. 비록 매국노의 잔재라 껄끄럽긴 하지만 '박노수
가옥'도 박노수 화백 덕분에 개과천선하여 아주 새로운 삶을 사는 것처럼 이 한옥도 서민들의
오랜 삶터로 그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현장이다. 게다가 20세기 초반 상류층 한옥의 형태
를 잘 간직하고 있으니 한옥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옛 윤덕영 집을 끝으로 늦가을 서촌의 일부 더듬기는 막을 내린다. 다른 명소는 별도의 글에
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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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산을 거닐다. 안산 나들이 ~~~ (영천시장, 안산자락길, 무악산 동봉수대)

 


'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산, 안산 (무악산 동봉수대) '

▲  무악산 동봉수대(안산 동쪽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천하만물의 마지막 희망, 늦가을이 세월의 저편으로 뉘엿뉘엿 저물고 혹독한 겨울 제국(帝
國)이 한참 기세를 올리던 11월 끝 무렵, 떠나가는 늦가을 누님의 뒷자락이라도 잡아볼 생
각에 친한 후배와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안산을 찾았다.

오후 3시 서대문역(5호선)에서 그를 만나 독립문 남쪽에 있는 영천시장에서 떡복이와 오뎅,
튀김 등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였다. 원래 시장은 일정에 없었으나 안산에 가다보니 자연히
지나치게 되었고,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쿨하게 못지나치듯 시장 먹거리를 온전히 뿌리치기
가 어려웠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아름다운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지! 그래서
잠시 안산을 잊고 먹거리 섭취에 임했다.
그렇게 요기를 마치고 포만감의 행복을 누리며 독립문 삼호아파트 뒷쪽으로 흘러가는 안산
자락길로 들어섰다. 그 길을 따라 안산의 남쪽 기점인 천연뜨란채아파트로 이동, 거기서부
터 안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안산(鞍山)의 품으로 들어서다.

▲  안산 남쪽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멀리 관악산과 호암산도 덩달아 시야에 들어온다.


서울 도심 북서쪽에 누워있는 안산은 해발 295.9m의 조촐한 산이다. 대륙을 향해 뻗어가는 의
주로(義州路)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仁王山, 338m)
과 마주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홍제천(弘濟川)을 사이에 두고 백련산(白蓮山)과 이어진다.
산의 영역은 남쪽으로 천연동(天然洞)과 북아현동(北阿峴洞), 북쪽은 홍제1동과 연희동. 동쪽
은 의주로, 서쪽은 서대문구청 뒷쪽과 연세대에 이르며, 남북으로 아무리 길게 잡아봐야 3km
남짓이다.

안산이란 이름은 산의 모습이 마치 말과 소의 등에 짐을 싣기 위해 사용하는 길마처럼 생겼다
하여 유래된 것으로 <안(鞍)은 안장을 뜻함> 길마재라고도 하며, 모래내, 추모련, 무악산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또한 산 꼭대기에 봉수대가 있어 봉우재라 불리기도 했다. 서울의 남주작
(南朱雀)인 남산(南山, 목멱산)보다는 조금 높지만 인왕산과 북악산(北岳山, 백악산)보다는 조
금 낮으며, 이들 산과 비슷하게 덩치도 고만고만하여 아무리 산행을 길게 잡아도 2~3시간 내외
면 충분하다.
또한 바위와 벼랑이 많은 정상부(동쪽 정상)를 제외하면 산세가 완만하고 산길이 잘 닦여져 있
어 누구든 부담없이 안길 수 있으며, 편한 둘레길의 정석으로 추앙받는 안산자락길이 산 허리
에 둘러져 있다. 게다가 조망도 일품이고 수맥도 풍부하여 20여 개가 넘는 약수터가 나그네의
목마름을 어루만진다.

지리적인 위치를 보면 인왕산과 함께 서울 도심을 서북쪽으로 둘러싼 형태로 예나 지금이나 서
울을 지키는 주요 요충지이다. (지금도 안산 정상에 군사시설이 있음) 하여 산을 둘러싼 다툼
도 여럿 있었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1623년에 일어났던 이괄(李适)의 난이다.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의 주역이던 이괄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
으켜 순식간에 서울을 점령했다. 서인(西人) 패거리에 의해 왕위에 오른 얼떨떨한 인조(仁祖)
는 서인 일당을 데리고 충청도 공주(公州)로 급하게 줄행랑을 쳤다.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은 어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토벌하고자 안산에 진을 치
니 도성을 점령하여 잔뜩 자만감에 빠진 이괄은 도성 사람들에게
'내가 저것들을 단숨에 때려잡을 것이니 나와서 싸움이나 구경하도록~~!' 자신감을 강하게 내
비췄다. 그리고 군사<군사 중에 임진왜란 때 투항한 항왜(降倭)들이 많았음>를 이끌고 인왕산
서쪽으로 나가 장만의 군사와 대치했다. 도성 백성들은 그 싸움을 구경하고자 인왕산에 잔뜩
모여들었는데, 조선 사람들은 대체로 흰 옷을 즐겨입다보니 산을 가득 메운 그들로 인해 산이
마치 하얀 백로처럼 보였다고 한다.

관군을 맞은 이괄은 처음에는 여유롭게 전쟁을 진행했으나 난데없이 불어닥친 강풍에 기가 꺾
여 장만에게 몰리고 말았다. 그래서 서둘러 도성으로 도망쳤으나, 백성들이 성문을 죄다 걸어
잠구면서 도성을 포기하고 한강을 건너 이천, 여주까지 줄행랑을 쳤다. 하지만 내부 갈등으로
결국 부하에게 살해되어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이때 살아남은 이괄의 부하들은 목을 붙잡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후금(後金)으로 도망쳤는
데, 그들은 청태종(淸太宗)에게 광해군(光海君)의 복수를 구실로 조선을 치라고 들쑤셨다. 그
래서 일어난 것이 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이 되겠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청나라군이 안산과 인왕산 사이의 무악재를 눈치를 보며 넘었
으며, 1950년 9월에는 인천(仁川)에 상륙한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되찾고자 북한군과 격전을
벌였던 현장이기도 하다.

안산의 포근한 품으로 들어서려면 서대문구청이나 홍제천인공폭포(연희숲속쉼터). 봉원사, 천
연동, 홍제1동, 무악재역, 한성과학고 등지에서 접근하면 된다. 근래에는 서대문구청에서 안산
자락길이라 불리는 둘레길(7km)을 야심차게 닦았는데, '쉽게 걸을 수 있는 편안한 여행길 10선
'에 꼽혀 국민적인 둘레길로 칭송을 받고 있다.
안산 서남쪽 자락에는 서울 지역의 주요 고찰(古刹)이자 영산재(靈山齋)의 성지(聖地)인 봉원
사가 있고, 산 동쪽 정상에는 무악산 동봉수대가 있으며, 연희숲속쉼터와 안산허브공원, 흔들
바위, 안산자락길, 메타세콰이어숲, 잣나무숲 등의 명소가 즐비해 지루할 틈이 거의 없다.
이렇게 착한 산임에도 오랫동안 인왕산과 북악산, 북한산, 남산에게 제대로 가려져 고통(?)의
시간을 보내다가 안산자락길을 계기로 동네 명소에서 벗어나 서울 굴지의 꿀단지로 훨훨 나래
를 펼치고 있다.

※ 안산 찾아가기 (2017년 1월 기준)
① 봉원사
*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6번 출구), 지하철 2호선 신촌역(3,4번 출구), 서울역버스환승센터에
  서 7024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1번 출구)에서 272, 606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대부고에서 하차, 동쪽
  (오른쪽) GS25시(봉원동4거리) 앞에서 7024번 시내버스로 환승 또는 도보 10분
② 천연동
* 지하철 2,5호선 충정로역(7,8번 출구)에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02번(대) 천연뜨란채아파트 방
  면 차량을 타고 뜨란채아파트 101동 종점에서 하차
③ 독립문역
* 지하철 3호선 무악재역 3번 출구에서 1분 정도 가면 통일로23길 골목길이 나온다. 그 가파른
  골목길을 5~6분 정도 오르면 안산자락길이 모습을 드러낸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천연동, 신촌동, 연희동, 홍제동


▲  안산 숲 너머로 바라보이는 서울 시내 (남산과 N서울타워도 덤으로)

▲  안산 산책로에서 만난 조촐한 쉼터

천연동에서 안산 정상까지는 능선길을 따라 30~40분 정도 걸리는데, 경사가 거의 느긋하고 길
도 잘 닦여져 있다. 능선길이라 오로지 직진을 고수하면 무난하게 봉수대가 있는 정상으로 갈
수 있으며, 서울 도심과 독립문, 서대문구/마포구 지역만 보이던 시야도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정비례로 늘어나 조망의 품질도 높아진다.

늦가을의 향연을 누린 나무들은 무심히 다가온 겨울 제국의 눈치를 보며 거추장스러운 잎을 떨
구고 초라한 몰골로 내년 봄을 기다린다. 몇몇 나무들은 나뭇잎을 단단히 붙들며 가을을 끝까
지 고수하지만 이미 하늘마저 겨울로 가득차 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은 귀를 접으며 인
생의 마지막을 노래하고, 산꾼들은 낙엽의 사각사각 소리가 듣고자 그들을 밟고 지나간다. 낙
엽의 처절한 말로를 보면서 '올해도 완전 저물었구나, 이제 곧 1살이 강제로 누적되겠지~!' 싶
은 우울감이 나를 감싼다.


▲  안산 능선길 동쪽으로 보이는 독립문 주변과 인왕산
인왕산 너머로 북악산(백악산)과 북한산(삼각산)까지 두 눈에 들어온다.

▲  안산 능선길에서 바라본 천연동, 서대문 주변과 서울 도심

▲  정상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안산천약수터

안산 정상을 10여 분 정도 앞둔 곳에서 길은 능선길과 서북쪽 길로 갈린다. 정상으로 빨리 가
고 싶다면 능선길을 이용하면 되나 거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고 경사가 좀 각박하여 각별한 주
의가 필요하다. 하여 잠시 여유를 갖고 서북쪽 길로 우회하니 안산에 별처럼 널린 안산천약수
터가 살짝 모습을 비춘다.
이곳은 정상에서 가장 가까운 샘터로 가뭄에도 물이 마를 날이 없다고 하는데, 여기서 안산이
베푼 약수를 몇 바가지나 들이키니 목구멍과 몸 속의 불이 싹 진화되는 것 같다.

약수터 주변에는 운동시설과 산악회에서 만든 조그만 건물이 여럿 있으며, 여기서 북쪽으로 가
면 무악정이란 2층 정자가 모습을 비춘다. 무악정은 근래에 지어진 8각형 2층 정자(亭子)로 여
기서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리는데, 북쪽은 홍제1동과 연희동, 동쪽은 안산 정상이다.


▲  겨울에 잠긴 안산 오솔길 (안산천약수터에서 무악정 방향)
발자국 소리, 낙엽 밟는 소리가 미안할 정도로 고요하기 그지 없다.

▲  정상 입구에 자리한 무악정(毋岳亭)
안산의 구수한 명물로 나그네들의 포근한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동쪽으로 10분 정도 오르면 안산 정상과 무악산 동봉수대에 이른다.

▲  무악정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서대문구와 마포구, 한강 너머로 강남, 동작, 관악, 영등포구 지역과
관악산까지 시야에 잡힌다.

▲  안산 동쪽 정상 밑에 자리한 'H' 마크의 헬기장
(서쪽 정상과 동쪽 정상 사이)


 

  안산 정상과 무악산 동봉수대(毋岳山 東烽燧臺)

▲  안산 동쪽 정상에 자리한 무악산 동봉수대 - 서울 지방기념물 13호

하늘과 맞닿은 안산의 지붕에는 2개의 봉우리가 봉긋 솟아있다. 이중 서쪽 봉우리가 안산의 정
상으로 안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나 그곳에는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어 출입이 100% 통제되어 있
다. 하여 자유로운 땅인 동쪽 봉우리(동쪽 정상, 이하 '안산 정상')가 실질적인 정상의 역할을
맡고 있다. 서쪽 봉우리보다 약간 낮을 뿐, 거의 비슷하며 바로 그 봉우리에 무악산 동봉수대(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무악산 동봉수대터')가 천하를 굽어보며 요새처럼 버티고 있다.

봉수대는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불을 피워 연기와 불빛을 이용해 변방의 소식을 중앙으로 빠
르게 전달하던 것으로 주로 산 정상에 자리를 닦았다. 지금처럼 전화나 인터넷이 있던 시절이
아니니 봉수대의 역할은 더욱 클 수 밖에 없었고 그 봉수대를 이용한 봉수체제가 그나마 제일
빠른 통신 수단이었다. 비와 눈이 내려 연기가 여의치 못할 때는 봉수지기가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소식을 전했다.

조선시대 봉수제(烽燧制)는 1438년(세종 20년)에 확립되었는데, 그때 무악산(안산) 정상에 봉
수대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무악산은 안산의 다른 이름으로 안산과 인왕산 경계에 자리
한 무악재에서 비롯됨)
지금은 동봉수대 1개 밖에 없지만 원래는 2개로 동,서로 구분되어 있었다. 동봉수대는 조선의
제3봉수로(烽燧路)의 경유지로 평안도 강계(江界)에서 시작하여 황해도(黃海道)와 파주, 고양
해포나루, 무악산 동봉수대를 거쳐 남산 훈도방(남산 목멱산 봉수대)에서 그 끝을 맺는다. 이
노선은 직봉 78곳, 간봉 22처를 경유한다. 그리고 서봉수대는 제4봉수로의 경유지로 황해도에
서 시작하여 경기도 해안을 따라 고양시 고봉, 무악산 서봉수대를 거쳐 남산 명래방으로 연결
되며, 직봉 71처, 간봉 22처를 경유한다.
이들 봉수대는 구한말(舊韓末)에 봉수제가 폐지되면서 귀신도 모르게 녹아 없어졌으며, 그 터
만 아련히 남아 전하던 것을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동쪽 정상에
있던 동봉수대만 대충 복원되었다. 허나 서쪽 정상에 있던 서봉수대터는 군부대가 들어앉은 관
계로 재현되지 못했다.

비록 동봉수대가 복원되긴 하였으나 주위가 문화재와 어울리지 않고 추락사고의 위험이 있다는
문제점이 2008년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하여 그때부터 2011년까지 서울시 문화재위원들이 현
장실사와 고증을 통해 화강석 성곽으로 재현하기로 결정하고 기존의 봉수대를 부시고 2단의 석
축을 다진 다음 그 위에 봉수대를 얹혔다.
허나 이번에는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이 떨어진다고 민원이 들어와 지금의 모습으로 어
색하게 재현되었다. 그러니까 원래의 모습이 아닌 사람들 입맛에 맞게 이리저리 변질된 것이다.
굳이 좋게 포장한다면 융통성 있고 시대에 맞게 재현된 것이 되겠지.
그러다보니 봉수대를 받치고 있는 석축과 불을 피우던 봉수대, 봉수대 주변 테두리의 돌 피부
가 확연히 차이가 나 어색하기 그지 없다. 봉수대 석축을 이루는 돌은 고색의 기운이 약간이나
마 피어있는데 반해 봉수대와 테두리에 쓰인 돌은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맨들맨들한 하얀 피
부이다.


▲  천하를 굽어보며 왕년의 향수를 달래는 봉수대
연기를 모락모락 풍기며 불빛을 날리던 왕년의 시절이 있었건만 이제는
안산 정상을 수식하는 장식용이자 전망대 그 이상도 아니게 되었다.

▲  때깔이 고운 하얀 피부의 봉수대
봉수대 중앙에 있는 네모난 창을 통해 불과 연기를 피웠다. 그 연기는
봉수대 꼭대기를 통해 하늘을 찔렀다.

▲  새롭게 두룬 봉수대 테두리

봉수대를 모자처럼 눌러쓴 안산 동쪽 정상, 그 동쪽은 바위로 이루어진 낭떠러지이고, 북쪽과
남쪽은 경사가 다소 각박하여 봉수대 복원 이후 추락사고의 위험이 늘 제기되었다. 하여 2011
년 이후 봉수대를 새로 갈면서 주변에 하얀 피부의 테두리를 성곽처럼 두른 것이다. 그러다보
니 기존의 봉수대 모습을 좀 잃게 되었다.
아무리 호랑이 담배 빨던 시절에 없어진 것을 복원한 거라고 해도 철저하게 고증하여 재현했으
면 좋겠다. 입맛대로 변형을 가하면 그건 더 이상 문화유산이 아니다.


▲  안산 정상(무악산 동봉수대)에서 바라본 인왕산(仁王山)의 위엄
이렇게 보면 인왕산이 좀 낮아보이겠지만 저곳이 이곳보다 40m 이상 더 높다.
그래도 서울의 우백호(右白虎)가 아니던가~~


안산 정상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제법 일품이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이만저만이 아
닌 서울을 두 발 아래 두며 제대로 굽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뫼에 오르는 이유는 바로 이런
맛이 아닐까? 이때만큼은 천제(天帝)도 황제도, 청와대 주인도 부럽지가 않다.

정상에서 보이는 범위는 바로 밑에 무악재를 비롯하여 인왕산, 독립문, 홍제동, 홍은동, 신촌,
서울 도심부, 북한산(삼각산), 북악산을 비롯해 멀리로는 서울 동부, 불암산, 아차산, 여의도,
서울 서남부, 동작구, 강남구, 관악산과 호암산(虎巖山) 등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와 속세에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눈이 제대로 호강을 누린다. 그래서 이곳에 왜 봉수대를 씌우고 이괄의
난(1623년)과 6.25전쟁, 그리고 지금까지 군사적인 요충지로 절찬리에 쓰이고 있는지 십분 이
해가 간다.

* 무악산 동봉수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1) 홍제동과 홍은동, 불광동, 평창동,
북한산 서남부 지역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2)
홍제동과 홍은동, 녹번동, 연신내를 비롯하여 멀리 고양과 파주 지역의
산줄기까지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3) 서울 도심
도심을 이루는 빌딩숲 너머로 남산과 N서울타워가 시야에 들어온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4)
바로 밑에 서대문독립공원과 독립문 주변을 비롯하여 도심부와 남산,
서울 동부, 강남 지역이 바라보인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5) 안산 남부와 도심부, 신촌 지역
우리가 저 밑의 안산 남쪽 기점(천연뜨란채아파트)에서 길을 시작했는데
이렇게 보니 정말 꽤나 올라왔다. (초여름 사진)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6)
안산 남부와 서대문구, 마포구, 용산구, 여의도 63빌딩을 비롯하여
동작구와 관악산, 호암산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온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7)
일몰이 진행되는 가운데 서대문구와 마포구, 강서 지역이 바라보인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8)
인왕산 남쪽과 서대문독립공원, 도심부, 서울 동부 지역을 비롯해
불암산과 아차산 산줄기가 까마득하게 바라보인다.

▲  정상 바로 밑 바위 (정상 동쪽)
정상 동쪽은 암벽으로 이루어진 낭떠러지이다. 북쪽과 남쪽은 경사가 가파르며
그나마 서쪽이 좀 접근이 편하다.


안산 정상에서 발 밑에 펼쳐진 천하를 굽어보며 열심히 사진에 담으니 시간은 어느덧 6시가 되
었다. 산바람은 더욱 매서워져 바람과 맞닿은 얼굴이 아플 정도이며, 천하를 비추던 햇님은 달
님에게 모든 것을 넘기고 지평선 너머로 꽁무니를 뺀다. 특히 산에서는 평지보다 일찍 해가 떨
어지기 때문에 서둘러야 뒷탈이 없다. 아무리 안산이 작은 산이라고 해도 염연히 뫼는 뫼이기
때문이다.

짙어져가는 땅거미에 안산 정상을 내주고 봉원사 방면으로 내려가는데 금세 어두워졌다. 길이
미로처럼 여러 갈래로 흩어져 조금 정신이 없었으나 길눈과 지리에 밝은 나의 직감을 믿고 내
려가니 어느덧 봉원사 경내에 이른다. 봉원사는 일몰 이후에 모든 건물을 잠궈놓기 때문에 그
규모에 맞지 않게 벌써부터 어둠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었다.
봉원사와 절 밑에 펼쳐진 마을(봉원사 승려들의 집이 대부분)을 지나면 7024번 종점과 봉원사
주차장이 나온다. 여기서 서울역으로 가는 7024번 시내버스를 타려고 했으나 대기시간이 길어
서 봉원동로터리, 이대부고까지 더 내려갔다. 거기까지만 가면 도심으로 가는 버스는 물 흐르
듯 넘쳐난다.

이대부고 정류장에 이르러 어디서 저녁을 먹을까 궁리를 하다가 북촌(北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아무리 명소나 맛집을 많이 안다고 해도 정작 필요할 때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것이 내 돌
머리의 단점이다. 하여 생각난 감에 북촌으로 흔쾌히 넘어가기로 했다.

퇴근/하교 손님들로 가축 수송을 이룬 272번 시내버스(면목4동↔남가좌동)를 타고 안국역에서
내려 나의 즐겨찾기 명소의 하나인 북촌으로 들어섰다. 한정식을 먹자는 의견이 있어서 마땅한
곳을 물색하던 중, 마침 부근에 '다정'이란 한정식집이 시야에 들어온다. 예전에 가봤던 집을
생각했으나 새로운 집을 개척할 겸, 별 미련 없이 그 집의 사립문을 열었다.


▲  김치 등의 밑반찬과 보쌈, 잡채, 굴

▲  고기 8조각 보쌈의 위엄

▲  달랑 3종류 6조각 전의 초라함

▲  제일 마지막에 나온 칼국수의 위엄

다정에서 2만원대의 한정식을 주문하였다. (가격은 변동 가능) 시장한 배를 달래며 맛이 어떨
까 기대를 하고 있으니 얼마 안가서 김치 등의 밑반찬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것을 시작으로 굴
과 보쌈, 잡채, 전이 차례대로 나왔는데 (그 외 몇 가지가 더 있었으나 생각이 안 남) 높은 가
격에 비해 성인 남자들이 먹기에는 양이 적었다.
좀 두둑하게 나왔으면 좋으련만 쥐꼬리마냥 찔끔찔끔 나오니 나오기가 무섭게 동이 난다. 다행
히 주인 아지매가 인심이 좀 있는지 전과 잡채, 몇몇 반찬을 더 갖다주었으나 그것으로는 택도
없었다.

그렇게 메인 메뉴를 처리하고 나니 제일 끝에 칼국수가 나온다. 칼국수 대신 밥을 먹어도 되지
만 칼국시가 양이 많다고 하여 그것을 택했다. 조개와 호박, 면발이 어우러진 칼국수는 국물이
꽤 진국이었다. 국수와 호박도 괜찮았지. 칼국수가 나오기 전까지는 배가 덜 찼지만 국수로 인
해 배는 완전히 만땅이 되었다. 이건 완전 한정식보다 칼국수가 더 생각이 날 정도로 말이다.
이렇게 비싼 한정식을 끝으로 11월 안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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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서촌의 끝자락을 더듬다 ~~~ (인왕산 한양도성, 딜쿠샤, 행촌동은행나무, 홍난파가옥 등)

 


' 서촌의 끝자락을 거닐다. (사직동, 행촌동, 송월동 지역) '

▲  한양도성 (인왕산 남쪽 기점 ~ 사직터널 구간)


 

♠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적 10호) 인왕산 남쪽 기점~사직터널 구간

▲  무악동과 행촌동 뒤쪽으로 울퉁불퉁 흐르는 한양도성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2번 출구)에서 독립문초등학교와 무악현대아파트를 지나 가파른 오르막
길(통일로18나길)을 지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S'라인 비슷한 굽이길이 나
온다. 그 길을 지나면 한양도성과 만나는 해발 130m의 고개 정상이다. 이곳이
인왕산(仁王山)
남쪽 기점으로 북쪽으로 각박하게 펼쳐진 성곽길을 따라 올라가면 인왕산 정상이고, 남쪽으로
펼쳐진 성곽길을 내려가면 사직터널 위쪽과 교남동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성곽이나 인왕산에
관심이 전혀 없다면 고갯길을 그대로 넘어가자. 그러면 도심 속의 산악도로인 인왕산길이 마중
을 나올 것이다.

인왕산 남쪽 기점에서 만난 한양도성은 북쪽으로 인왕산 주능선을 따라 정상(338m, 또는 340m)
을 거쳐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으로 이어지며, 성곽은 온전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인
왕산 정상에서 한 갈래의 성곽이 조심스럽게 북쪽으로 내려가는데, 그 성곽은 탕춘대성
(蕩春臺
城)으로 홍제천(弘濟川)에 자리한 홍지문(弘智門)
을 거쳐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이어진다.
또한 이곳 남쪽은 인왕산의 완만한 줄기를 타고 사직터널까지 1리 정도 이어지는데, 그 줄기는
경희궁(慶熙宮) 옆구리까지 이어진다. 허나 성곽은 사직터널 위쪽에서 그만 끊기며, 그 이남은
집들이 가득 들어차 성곽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그나마 월암근린공원에서 잠시 근래에 복원된
성곽이 펼쳐지긴 하지만 그것도 얼마 흐르지 못하고 끊기고 만다. 이후로 한참 가야 나오는 남
대문에서 간의 기별도 안갈 정도로 성곽이 나오고 남산 백범광장에 들어서야 그나마 속 편하게
성곽이 가슴을 핀다.
끊어진 남대문과 월암근린공원 사이에 있던 서대문<西大門, 돈의문(敦義門)>과 서소문<西小門,
소의문(昭
義門)>은 고약한 왜정(倭政)의 의해 모두 사라져 정확한 자리조차 아리송한 실정이다.
그럼 여기서 서울 도심의 든든한 갑주였던 한양도성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1388년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란 그 유명한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이 몸담던 고려 왕조를 싹
갈아엎고 조선이란 비리비리한 왕조를 세운 이성계(李成桂), 그는 1394년 남경(南京)이라 불리
던 한양(서울)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의 도성 천도 프로젝트에는 천하 제일의 대학자이자 정치
가로 명망이 높던 정도전(鄭道傳)이 그 중심에 서서 도읍 천도와 도성 축조계획을 세웠는데,
1395년까지 경복궁, 종묘, 사직단, 대략적인 한양 시가지 등을 지어놓고 1396년 1월 도성 축조
에 들어갔다.
한양도성 코스는 정도전이 짰으며, 도읍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사산(內四山)인 북악산(北
岳山, 백악산), 인왕산(仁王山), 남산(南山), 낙산(駱山, 낙타산)을 모두 끼게 했다. 성곽 길
이는 59,500자(18.2km)로 고려의 도읍인 개경<開京, 나성(羅城) 길이만 23km>보다는 작은 수준
이며, 평지는 토성(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지었다.
이때 천하에 징발령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을 완성했고, 농사철
이 다가오자 축성을 잠시 멈추고 집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했다. 농사를 지어야 뜯어먹을
세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는 8월 다시 79,400명을 콩볶듯이 동원, 49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지어 도성 축조는 마무리 되었다.


▲  한양도성 산책로
두툼하게 만든 여장 너머로 성밖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업그레이드 시키기로 마음
을 먹었다. 하여 1422년 1월, 무려 32만 2천명의 인부와 기술자 2,200명을 동원하여 보수 작업
에 들어갔다. 그 시절 한양 인구가 10만 명이었다고 하니 보수 작업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
지를 가늠케 해주며, 이때 동원 규모는 가히 조선 최대였다.
허나 아무리 현군(賢君)으로 추앙받는 세종이라지만 공사를 너무 닥달했는지 죽어나간 일꾼이
872명에 달했으며, 그 공사 결과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6곳, 곡
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춘 아주 늠름한 도성이 되었다. 그리고 1426년 수성금화도
감(修城禁火都監)을 두어 도성을 관리케 했는데, 성곽을 워낙 단단히 지은 탓에 20세기까지 스
스로 붕괴된 적이 없으며, 보수도 겨우 1차례만 벌였다. (인위적으로 철거되거나 전쟁 폭격을
받은 것은 제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宣祖)는 신하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하여
도성은 왜군에게 아주 허무하게 무혈점령되고 만다. 그런 꼬라지를 막아보고자 온갖 욕을 들어
가며 단단하게 지었건만 오늘날도 그렇고 그때도 그렇고 소위 윗대가리들의 무능으로 눈을 뜨
고 적군이 도성 안에 들어오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다. 하지만 치열한 수성전(守城戰)이 없어서
성곽과 성문은 피해가 없었다.

1704년(숙종 30년) 숙종(肅宗)은 혹시나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해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
치고 성곽을 보수했다. 이때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山城)도 크게 손질 했는데, 그 안에 행
궁(行宮)과 여러 관청, 창고를 갖춘 조그만 도시를 만들고 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탕춘
대성(蕩春臺城)을 쌓아 도성의 수비력을 한층 드높였다.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조선의 심장, 한양(서울)의 든든한 갑주로 위엄을 드러내던 한양도
성은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던 1899년 이후 팔자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1899년 조선 황실은 미국 사람인 콜브란(Corlbran)과 합작해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들었다. 콜
브란은 고종 황제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인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거둥하라며 전차(電
車)의 필요성을 건의, 그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홍릉 남쪽인 청량리(淸凉里)까지 이
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의 통행을 위해 부득이 동대문과 서대문의 양쪽 성
벽을 싹둑 자르면서 성곽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龍山)을 잇는 전차 노선이 생겨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려나갔
다. 허나 그래도 여기까지는 황제의 명으로 시내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허나 문제는 1905년 이후이다.


▲  한양도성과 주택가 사이를 가르는 행촌동 인왕산로1길 (경희궁 방향)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왜국은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 그 소속으로 1908년 '
성벽처리위원회'라는 해괴한 기관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도성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1910년 이
후 서소문<소의문(昭義門)>과 서대문<돈의문(敦義門)>은 물론 동소문<혜화문(惠化門)>까지 밀
어버리면서 망국(亡國)의 서울을 욕보인 것이다.
그렇게 빼앗긴 들에서 차디찬 시련을 견디며 35년 만에 봄을 찾았건만 바로 무섭게 6.25가 발
발하면서 왜정이 남긴 상처만큼이나 무거운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6.25이후까지 살아남은 성
문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하문), 숙정문(肅靖門), 광희문(光熙門)
뿐이며, 성벽은 북악산과 성북동, 낙산, 장충동, 남산, 인왕산 등 10.5km 정도만 겨우 남았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품고 쓰러진 성곽을 1975년부터 손질하기 시작하여 광희문과 숙정문을
복원하고, 남아있던 성곽을 수리했다. 이후 동소문을 제자리 북쪽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사라
진 성곽에 대한 복원에 착수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되찾고 있다. 또한 2010년 이후에는 시
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탐방로를 닦았는데, 북악산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 출입이
가능하다. (인왕산 성곽길은 매주 월요일은 못감) 다만 성곽이 사라진 부분<사직터널 윗쪽~월
암근린공원, 서울시교육청~남대문, 남대문~남산육교, 장충단고개~옛 타워호텔 남쪽, 장충체육
관 고개~광희문, 광희문~동대문, 동소문고개~성북쉼터>
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예전에는 서울성곽이라 불렸으나 2011년 7월 '서울성곽'에서 '한양도성'으로 문화재청 지정 명
칭이 바뀌었다. 허나 서울성곽이란 이름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으며, 한양성곽이라 불리기도 한
다. 어차피 서울에 있는 성곽이고 한양을 둘러싸던 성곽이니 서울성곽, 한양성곽이라 불러도
크게 상관은 없다. (본글에서는 한양도성으로 통일함)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
래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왕산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으며 어떤 코스로 성을 쌓을지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난데없이 큰 눈이 내렸는데,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글쎄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이 쌓여져 있었다. 그래서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 쌓인 자리에 성
곽을 쌓게 했다. 눈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를 따라 성을 쌓
았다고 하여 설울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서울은 이 땅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명사이기도 하여 수도(首都) 대
신 많이 쓰이기도 한다.


▲  한양도성 밖 행촌동 인왕산로1길 (인왕산 방향)

인왕산 남쪽 기점에서 남으로 1리 가면 사직터널 윗쪽(사직동)에 이른다. 그 중간에는 성 밖으
로 나가는 조그만 암문(暗門)이 나오는데, 이는 동네 주민들의 통행을 위해 만든 것이다. 여기
서 성밖은 교남동(행촌동) 산동네 주택가, 안쪽은 성곽길과 인왕산 숲이다.

인왕산에서 힘차게 내려온 한양도성은 한국사회과학자료원 남쪽(송월1길)에서 잠시 그 길이 끊
기고 만다. 성곽이 있어야 될 자리에는 집들이 우후죽순 들어차 달릴 공간 조차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서울시에서 도성을 완전히 복원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하니 철저히 고증하여 그 주변
에 첩첩이 들어찬 집들을 밀어내고 (물론 보상과 이주는 넉넉히) 복원을 했으면 좋겠다.

※ 한양도성 인왕산 남쪽 ~ 행촌동 구간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2번이나 3-1번 출구를 나오면 무악현대아파트로 가는 도로가 나온다.
  그 길로 들어서 무악현대아파트 직전에 윗쪽으로 오르는 계단길이 나오는데 그 계단을 올라
  무악어린이집에서 왼쪽으로 가면 1굽이 지난 곳에 오른쪽 오르막길이 있다. 그 길로 오르면
  한양도성이 보이면서 인왕산 남쪽 기점에 이른다. (독립문역에서 도보 15분)
* 사직단 버스정류장<연세대, 무악재 방면 정류장 : 171, 272, 606, 706, 7025번 시내버스 정
  차 / 광화문 방면 정류장 : 171, 272, 601, 606, 700, 707, 7025, 9703번 정차> 바로 서쪽에
  돌담을 옆구리에 낀 인왕산길이 있다. 그 길을 3분 정도 가면 단군성전이 나오는데, 여기서
  광화문아트홀 방면 왼쪽 길(인왕산로1길)로 4분 가면 한양도성이 나온다.
*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3번 출구)이나 3호선 독립문역(3번 출구를 나와서 행촌의원 앞에 정
  류장이 있음)에서 한국사회과학자료원에서 내리면 바로 한양도성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행촌동, 교남동


▲  은행나무가 가로수를 이루고 있는 송월1길 (왼쪽이 한양도성)


 

♠  서촌(西村)의 끝자락 행촌동(杏村洞)에서 만난 숨겨진 명소들

▲  행촌동 은행나무 (늦가을 사진) - 서울시 보호수 1-10호

사직터널 윗쪽이자 인왕산 남쪽 자락의 끝을 잡은 행촌동은 조금은 빛바랜 산동네이다. 그렇다
고 옛날 달동네처럼 주황색 기와를 지닌 허름한 집들이 즐비한 그런 곳은 아니다. 온갖 빌라와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찬 서울의 흔한 동네로 그 주택가 속에 행촌동 은행나무와 권율장군의 집
터, 그리고 딜쿠샤란 명소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딜쿠샤 곁에 자리한 행촌동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420년에 이르는 장대한 나무로 행촌동의 오
랜 터줏대감이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덧없는 양분과 동네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높이 23m, 둘레 6.8m에 이르는 큰 나무로 어엿하게 성장했다. 허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
이 이곳까지 미치면서 그의 보금자리는 크게 좁아졌고, 이렇게 주택 사이에 비좁게 자리해 마
치 강제 샛방살이로 비쳐질 정도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건강은 양호하며, 자신의 둥지를 침범한 건방진 인간들을 미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우수한 품질의 그늘과 은행잎을 선사해 넉넉한 마음을 드러낸다.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이자 이곳에 살았던 권율이 손수 심었다고 전하며, 주인은 오래 전
에 갔지만 그의 사연을 끈질기게 붙잡으며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로 이 나무 때문에
동네 이름이 행촌동(은행나무 마을)이 된 것이다. 참고로 은행나무는 태반이 사람이 심은 것이
며 자연적으로 싹을 내린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서울 장안에서 오래된 아름다운 은행나무를 꼽으라면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와 성균관(문묘)
은행나무(대성전 은행나무 포함), 당산동 은행나무 그리고 이곳 은행나무를 내세우고 싶다.


▲  은행나무 밑에 누운 권율(權慄) 장군 집터 표석

은행나무가 있는 곳은 권율(1537~1599)의 집터로 인근 필운동(弼雲洞) 배화여고에도 그의 집이
있었다. 필운동 집은 그의 사위이자 오성과 한음으로 격하게 유명한 오성 이항복(李恒福)에게
물려주었으니 그 집이 바로 필운대(弼雲臺)이다. (현재 필운대란 바위글씨가 남아있음)
그렇다면 임진왜란의 영웅, 권율(權慄)은 누구일까?

권율은 안동 권씨로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과 모악(暮嶽). 시호는 충장(忠莊)
이다. 1582년 식년시 문과(式年試 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는데 임진왜란 때 전쟁에서 크
게 활약한 것으로 보아 무예도 제법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와 전적(典籍)을 거쳐 1587년 전라도도사(全羅道都使)와 예조정랑(禮曹
正郞), 경성판관(鏡城判官) 등을 지냈으며, 1591년 평안도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었으나 업
무상 과실로 파면되었다.
허나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급히 경기도 광주목사(廣州牧使)로 임명되어 그곳으로 달려갔
으며 전라도 순찰사(巡察使) 이광(李珖)과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이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군사 4만을 모아 서울로 올라오자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었다.
이광과 곽영은 수원과 용인에 각각 진을 치고 주변에 있는 왜군을 토벌하려고 했다. 이에 권율
은 주변에 조금씩 흩어진 적들을 치지 말고 임진강(臨津江)에서 그들의 서진(西進)을 막아 군
량미를 운반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다음, 적의 빈틈을 노리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냈다. 허나 뇌에 주름이 가득한 이광은 그 말을 무시, 오로지 머릿 수에 의지
해 용인에 있는 왜군을 공격했다.

이광의 군사는 4만(왜국은 10만이라고 주장함)에 이르나 태반이 칼과 창도 제대로 못잡는 오합
지졸이었다. 그에 반해 용인에 머물던 왜군은 왜열도에서 나름 알아주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
坂安治)로 수백 명의 정예 기병으로 저항을 했다.
허나 조선군은 그 수백에 불과한 왜군에게 완전히 박살이 나고 싸움에 서툴렀던 선봉장 이시지
(李詩之)와 백광언(白光彦)이 전사하는 등,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했다. 허나 권율은 이를 직감
하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휘하 군사를 잃지 않고 광주로 물러나 후일을 도모했다.

1592년 가을, 전라도 남원으로 내려가 1,000명의 군사를 모집해 동복현감(同福縣監, 전남 화순
동복면)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梨峙)에서 전주(全州)로 진출하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
의 왜군을 막았다. 초반에 황진이 조총에 맞아 부상을 입으면서 군사의 사기가 잠시 떨어졌으
나 권율이 군사를 독려하여 왜군을 격퇴하고 승리를 거뒀다. 그렇게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았
으며, 그 공으로 전라도 감사(監事)로 승진되었다.
1592년 12월, 서울 수복을 위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천안 직산(稷山)에서 머물렀는데, 체찰사
(體察使) 정철(鄭澈)이 그 많은 인원을 먹일 군량이 없으니 돌아가서 관내를 지키는 것이 좋겠
다고 편지를 보냈다. 허나 행재소(行在所)에서 북상하라는 명이 떨어지면서 곧바로 군을 이끌
고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 오산 세마대(洗馬臺)>에 들어가 진을 쳤다.

한편 권율이 독성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왜장 우키타(宇喜多秀家)는 후방과 차단될 것
이 두려워 서울에 있던 군사를 이끌고 독산성을 선제 공격했다. 허나 권율은 성문을 굳게 닫고
수비만 할 뿐이라 왜군의 피해는 나날이 늘어갔다.
뚜껑이 열린 우키타는 사람을 보내 독산성의 약점을 탐지한 결과 물이 부족하다는 정보를 입수
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바로 성 밑에 큰 못을 파니 과연 성 안에 물이 마르면서
조선군의 식수에 비상이 걸렸다.
허나 권율은 당황하지 않았다. 비범한 인물답게 명쾌한 꾀를 낸 것이다. 그래서 동이 트는 이
른 아침에 왜군이 잘보이는 곳에 말을 세워놓고 쌀을 부어 말을 씻기는 시늉을 벌였다. 그것을
본 단순한 왜군은 성 안에 물이 부족하다는 것이 거짓임을 알고 크게 동요했다고 한다. 바로
그때를 이용해 공격을 가하자 발작한 우키타는 영책(營柵)을 불지르고 서울로 줄행랑을 쳤고,
정예 기병 1,000명을 미리 보내 퇴로를 차단하고 왜군 수천을 죽였다.

1593년 1월, 서울 수복을 위해 조경(趙儆)을 보내 근교에 마땅한 곳을 물색하다가 행주산성(幸
州山城)으로 들어가 목책(木柵)을 쳤다. 그곳은 서울과도 가깝고, 한강을 끼고 있으며, 조망도
좋고, 인근에 여러 요새와 함께 연합 작전을 펴기에 아주 좋은 위치였다. 허나 석성(石城)이
아닌 야트막한 토성(土城)이라 수비전에는 썩 유리한 편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서둘러 목책을
엮었다.
목책이 완성되자 독산성에 병력 일부를 남기고 모두 불러들였으며, 별도로 4,000명을 뽑아 전
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를 시흥 호암산(虎巖山, ☞ 관련글 보러가기)으로 보내 후방
을 돕도록 했다. 그때 처영(處英)이 이끄는 승병(僧兵) 1,000명이 행주산성에 합류했다.

권율은 소수의 군사를 보내 서울을 공격했고, 고양 혜음령(惠陰嶺)에서 왜군에게 박살난 명나
라군을 도와 그들의 전멸을 막아주었다. 이렇게 권율의 활약에 적지않게 염통이 쪼그라든 왜군
은 그가 있는 행주산성을 쓸어버리기로 마음 먹고, 앞서 독산과 인근의 군사를 싹 긁어모아 무려 3만의 대군으로 1593년 2월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그때 행주산성에 있던 조선군은 승병을 합해서 겨우 약 2,800명, 그외에는 군사들을 도우러 성
에 들어온 밥할머니를 중심으로 한 아낙네들과 지역 사람들이 있었다.

왜군은 7부대로 나눠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행주산성이 견고한 성이 되지 못하다보니 여
러번 위기가 있었으나 권율의 뛰어난 통솔력과 군사와 백성들의 강인한 협동심으로 다들 일당
백의 위엄을 드러내며 적들을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로 만들었다. 또한 화차(火車)와 비격진천
뢰(飛擊震天雷)란 신식 무기가 열심히 나래를 펼쳐 왜군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밥할머니의 행주치마 부대는 치마로 돌을 나르고 군사들의 밥을 나르는 등, 서로가 단결하니
왜군은 결국 1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수천 명의 전사자 시신을 불태우며 도망쳤다.
이 싸움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니 권율과 조경, 처영, 조선군과 승군, 밥할머
니의 아낙네들, 지역 사람들이 빚어낸 대작품이었다.

이후 파주로 옮겨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이빈(李薲)과 함께 후방을 지켰으며, 전라도
로 내려갔다가 그해 6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都元帥)로 승진해 경상도에 주둔했다. 1596
년에 도망친 병사를 즉결처분한 것으로 잠시 해직되기도 했으나 바로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임
명되어 호조판서(戶曹判書)와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성에서 크게 패한 우키타가 서울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터지자 밥버러지 명나라군과 함께 왜군이 머무는 울산성(蔚山城)
을 공격했다. 허나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부실하여 겁에 질려 도망치는 바람에 함락시키지
못했으며, 순천으로 자리를 옮겨 순천 예교(曳橋)에 머물던 왜군을 공격했으나 역시나 병든 닭
새끼 같은 명나라군의 비협조로 함락시키지 못했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갔으나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7월 장대한 인생
을 마감하니 그의 나이 62세였다. 선조(宣祖)는 그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했으며,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으로 삼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봉해 그의 공을 기렸다.

권율은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명장으로 바다에 이순신(李舜臣)이 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
鄭起龍)과 곽재우(郭再祐), 그리고 권율이 있었다. 비록 초창기 용인 싸움에서 어리버리한 상
관들 때문에 졌고, 정유재란 때는 밥버러지 명나라군 때문에 적지 않은 고생을 했지만 그외에
는 모두 대승을 거두었다. 특히 행주대첩은 적은 군사로 10배 이상의 왜군을 물리친 우리 전쟁
사의 길이 빛나는 장쾌한 대첩이다. 그의 활약과 공훈에 대해서는 '권원수실적(權元帥實蹟)'이
란 책이 1권 전하고 있다. 그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있으나 인근이 유원지화되어 늘 시
끄러우니 편하게 잠이나 주무실지는 모르겠다.


▲  근대 건축물인 딜쿠샤(Dilkusha)

행촌동 은행나무 서쪽에는 붉은 피부로 이루어진 2층 건물이 자리해 있다. 딱 봐도 20세기 초
에 지어진 근대 건축물로 지금은 원형을 조금 잃었지만, 한참이나 후배인 건물들 사이에서 의
연함을 잃지 않으며 중후한 멋을 드러낸다.

이 건물은 '딜쿠샤'란 이름의 건물로 지하 1층, 지상 2층의 붉은 벽돌집이다. 1923년 미국 사
람 알버트 테일러(Albert Taylor)가 금광과 언론 특파원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지은 고래등 집
으로 여기서 딜쿠샤는 '이상향', '행복한 마음','희망의 궁전'을 뜻하는 인도 힌두어이다.

테일러는 금광엔지니어이자 UPI통신사 프리랜서 특파원으로 이 땅에 들어왔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천하에 널리 알린 인물로 유명하며, 독립운동가들과 자주 어울리고 그들을 흔쾌히 도와
주었다. 그러다보니 왜정은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계속 감시를 하다가 1942년 독립운동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6개월간 감옥살이를 시켰다가 가족과 함께 추방시키고, 딜쿠샤는 왜정이 몰
수해 민간에 팔아먹었다. 그렇게 강제로 이 땅을 떠난 그는 1948년 미국에서 숨을 거두었고 그
의 유해는 이 땅으로 다시 건너와 서울 합정동(合井洞)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후 딜쿠샤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존재와 사연을 망각한 채, 그저 왜정 때 지어진 근대 건
축물의 하나로 조용히 살아왔다. 사람들이 각 방마다 들어와 살면서 원형도 조금씩 깎여나갔고,
집도 낡아 개발의 칼질로부터 위협을 받을 정도였으나 다행히 2006년 알버트의 아들인 브루스
테일러가 64년만에 이 땅을 방문하면서 베일에 가려진 건물의 비밀이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되
었다. 브루스는 바로 이 집에서 이런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딜쿠샤의 사연이 알려지자 그에 대한 시선과 팔자는 180도 달라졌으며, 2008년에는 서울시에서
브루스에게 명예시민증을 수여해 그의 부친을 기렸다.


▲  딜쿠샤의 어수선한 뒷모습

알버트 테일러의 사연을 머금은 유서 깊은 건물이지만 아직 그 흔한 지방문화재나 등록문화재
의 지위도 얻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만약 딜쿠샤의 사연이 계속 묻혀있었다면 분명 개발
의 칼질이 이 건물을 진작에 난도질했을 것이다. 우울하지만 그것이 이 땅의 천박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이곳을 거쳐갔고 또한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어 원형도 조금 잃었고 다소 어수
선한 분위기긴 하지만 상당수는 원형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또한 유서가 깃든 곳인만큼 지
정문화재로 삼아 보호를 해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행히 서울시가 이 건물의 복원과 개방 및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있으며, 2016년 가을에 미국에 있는 테일러의 손녀에게 테일러의 유품
300점을 전해받아 테일러 전시전을 열 계획이다. 그리고 건물을 튼실히 손질하여 3.1운동 100
주년이 되는 2019년 3월 1일 속세에 개방할 예정이라고 하니 그때를 기다려보자.

※ 행촌동 은행나무, 딜쿠샤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3번 출구)을 나와서 독립문역4거리에서 남쪽으로 길을 건너 사직터널
  방면으로 가면, 터널 직전에 터널 위로 올라가는 '사직로2길' 골목길이 나온다. 그 골목을
  오르면 3거리가 나오는데, 거기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딜쿠샤와 은행나무가 있다.
*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4번 출구)을 나와서 3분 정도 직진하면 정동4거리이다. 여기서 왼쪽(
  송월로) 길로 5분 정도 들어서면 한양도성이 나오면서 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월암근린공
  원 방면(송월1길)으로 들어서 홍난파가옥을 지나 계속 직진하면 은행나무와 딜쿠샤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행촌동 1-89 (사직로2길 17)


 

♠  1930년대에 지어진 근대 가옥으로 친일파 홍난파가 말년을 보낸 곳
홍파동 홍난파 가옥(紅把洞 洪蘭坡 家屋) - 등록문화재 90호

행촌동 은행나무와 딜쿠샤에서 '송월1길' 골목길을 타고 남쪽으로 3분 가면 길 왼쪽 높은 곳에
붉은 피부의 벽돌과 지붕, 그리고 담쟁이덩굴까지 멋지게 두룬 별장 같은 아담한 주택이 두 눈
을 부여 잡는다. 그 집이 바로 홍파동 홍난파 가옥이다.

이 집은 지상 1층, 지하 1층으로 지하라고는 하지만 가파른 경사에 자리한 탓에 서쪽과 남쪽이
바깥에 노출되어 햇볕을 보고 있으므로 거의 2층이나 다름이 없다. 이곳에는 원래 구한말에 양
기탁(梁起鐸)과 함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하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을 도와 항왜
(抗倭) 언론을 주도했던 영국 사람 '어니스트 베델'<Ernest Thomas Bethell, 1872~1909년, 한
국 이름은 배설(裵說)>의 집이 있었다.
배설은 1909년 5월, 37세의 짧은 나이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떴는데, 그에게 원한이 깊던 왜국
은 쪼잔한 마음을 드러내며 그의 집을 강제로 밀어버렸다. 다만 토지는 몰수하지 않고 그의 부
인인 '메리 모드 베델'(Mary Maud Bethell)이 계속 가지고 있다가 1920년대 이후 매각한 것으
로 전한다.

1920년대 후반, 이 일대가 여러 지번으로 분할되었는데, 송월동과 홍파동 지역에는 독일 양이(
洋夷)들이 많이 서식해 그들의 주택이 많이 들어섰다. 홍난파 가옥도 바로 그 과정에서 1930년
대에 태어났다. 허나 그 집은 주인이 여러 번 바뀌어 집 자신도 정신이 없을 정도였는데, '불
놀이'를 쓴 시인으로 친일 행적이 요란한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의 부인, 최선복의 이름이
먼저 올라와있다.
그 다음에 들어온 사람은 홍어길(洪魚吉)로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의 조카딸인 신수옥에게
장가들어 여기서 보금자리를 폈다. 그는 배화여학교 선생으로 수양동우회에서 활동했으며, 철
학박사로 서울에 철학연구사를 세웠던 한치진(韓稚振, 1901~?)이 다음 타자로 들어와 잠시 머
물렀다. 그는 1944년 왜정의 패망을 예견하는 시국답을 논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살기도
했다.
바로 그 다음에 들어온 이가 홍난파로 1935년 이 집을 사들여 말년을 보냈다. 그 연유로 홍난
파 가옥(홍난파의 집)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  골목에서 바라본 홍난파 가옥

예전에는 집 앞에 마당이 있었으나 담장을 허물고 조그만 야외무대를 닦았으며, 1968년 4월 10
일에 난파기념사업회에서 세운 홍난파의 흉상이 옛 마당을 지킨다. 이 흉상은 김경승이 조각하
고, 김충현이 글씨를 썼으며, 윤석중이 흉상 기단(基壇)에 글을 새겼다. 또한 골목 쪽에는 담
장과 대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담장 일부만 남았으며, 1층 현관을 통하여 가옥 내부로 들어서면
된다. 현재는 종로구청에서 관리한다.

집 지붕은 다른 서양인 선교사의 집보다 경사가 가파르고, 거실에는 양옥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벽난로가 있다. 현관과 이어지는 복도를 사이로 서쪽에 거실을, 동쪽에 침실을 두었으며, 거실
밑에는 지하실을 두어 공간을 알뜰하게 활용하던 서양 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2007년에 홍난파 기념관 및 소공연장으로 손질하고자 보수 공사를 벌여 1층에 있던 침실 2개를
하나로 합쳤으며, 음향시설 등을 달아 50명 규모의 공연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유품과 자
료를 전시하여 기념관의 역할을 하도록 했고, 지하에는 시청각실을 만들었다.

      ◀  홍난파의 그 잘난 흉상(胸像)
이 땅의 현대 음악을 발전시키고 꾸려나간 업
적만 본다면 동상도 아깝지 않겠으나 말년에
보인 추잡스런 친일 행적을 생각하면 흉상은
커녕 기념비도 아깝다. 그 더러운 면판이 달린
흉상은 좀 치워버리고 기념비만 두는 선에서
끝냈으면 좋겠다. 그 이상은 그에게는 과분하
다.

우리 귀에 무척 익은 홍난파, 그 자는 누구일까?
홍난파(洪蘭坡, 1898~1941)는 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시 남양(南陽)에서 태어났다. 본명
은 홍영후(洪永厚)로 난파는 일종의 호가 되며, 본관은 남양홍씨이다. 왜정 때 매우 잘나갔던
음악가이자 우리 현대 음악의 중추적인 존재로 '봉선화','성불사(成佛寺)의 밤','옛 동산에 올
라' 등으로 유명하다.

5살에 서울로 올라와 1912년 YMCA 중학부에 들어갔으며, 음악에 자꾸 손과 마음이 가면서 내면
에 숨겨진 자신의 소질을 알게 된다. 그래서 1913년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전문학교인 조선정악
전습소(朝鮮正 樂傳習所) 서양악과에 입학하여 1년 동안 김인식(金仁湜)에게 바이올린을 배웠
으며, 1918년 창가 '야구전'을 작곡, 발표하고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음악학교에 진학, 음악과
문학, 미술을 배우며 문예의 꿈을 키웠다. 그러다가 1919년 유학생들이 벌인 독립운동에 가담
하면서 학업을 그만두고 귀국했다.

귀국하여 경성양악대 제1회 연주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린 연주
자란 기록을 세웠다. 대한매일신보 기자로도 잠깐 일하다가 1920년 '처녀혼'이란 첫 작품을 냈
는데, 봉선화는 처녀혼 첫머리에 나오는 애수(哀愁)라는 곡명으로 발표된 것이다.
1922년에는 서울 연악회(硏樂會)를 창설해 음악 교육에 나섰으며, 1925년 우리나라 최초의 음
악 잡지인 '음악계(音樂界)'를 창간했다. 그리고 1926년 다시 왜열도로 넘어가 동경고등음악학
교를 졸업하고 동경신교향악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1929년 '조선음악백곡집'과 '조선동요백곡집'을 발표하고 1933년에는 '조선가요창작곡집' 등의
작품을 냈으며, 현제명(玄濟明)과 함께 '봄노래'를 발표했다. 그 외에 바이올린독주곡인 '애수
의 조선','동양풍의 무곡','로망스' 등이 있고, '관현악곡 즉흥곡','관현반주 붙은 즉흥곡','
명작합창곡집','특선가요선집' 등을 냈는데, 그는 우리나라 선율의 요소를 작곡에 반영해 서정
적인 분위기를 그려내고자 했다. 그의 의도는 그의 평론에서도 잘 나타나며, 1930년대 이후 우
리나라 현대 음악 창작의 패턴을 정립한 음악가로 널리 찬양을 받았다.

1931년 바이올린을 더 배우고자 미국으로 넘어가 셔우드(Sherwood)음악대학을 다녔으며, 1933
년 졸업 기념으로 독주회를 가지고 귀국했다. 그리고 경성보육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음
악을 가르치고, 1936년 경성방송 현악단 지휘자 및 빅터레코드의 양악부장을 지냈으며, 이영세
(李永世)와 난파트리오를 조직해 실내악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또한 1938년 경성음악전문학교
교수로 활동하면서 '음악만필'을 냈으며, '백마강의 추억' 등 14곡의 가요를 나소운(羅素雲)이
란 예명으로 발표했다.

이렇게 우리나라 현대 음악 발전에 크게 공헌을 하며, 주옥같은 작품으로 민중의 마음을 달랬
던 그였지만 그의 말년은 그 초심을 잃으며 추악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친일파로 노선을 바꾸
며 민중의 뒷통수를 제대로 쳤던 것이다.
1937년 독립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 회원이라는 이유로 검거된 이후, 그해 4월 조선총독부 학무
국(學務局)에서 결성한 친일 단체인 '조선문예회'에 가입하여 왜정 정책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내선일체를 강조하였고 '지나사변(支那事變)과
음악','희망의 아침' 등 친일 성향의 악취나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끊임없이 왜정을 찬양했다.
허나 다행히도 하늘이 보우하사 변절한지 4년 만인 1941년 8월 30일 43살의 나이로 죽었다.

그가 마지막 4년 동안 보여준 속절없는 친일 행적은 20~30대 시절에 일구어낸 온갖 업적과 공
로에 제대로 똥칠을 하기에 충분했다. 50년도 채우지 못한 그 짧은 인생, 무슨 영달을 더 누려
보겠다고 그 추잡함을 보였던 것일까? 그것만 아니었다면 참 착했을 것을 심히 좋지 않은 뒷끝
을 보이고 말았다.
왜정 시절 이 땅의 나약한 지식인들의 끝없는 변절과 방황, 그도 결국 그 재능과 인격 때문에
나락의 길인지도 모르고 바로 앞에 놓인 꿀에 속아 악마의 유혹에 넘어갔던 것이다. 그래도 다
행히 해방 이전에 한참 나이로 자체 폐기가 되었으니 나라와 민중을 배신하고 친일을 벌인 그
대가는 톡톡히 받은 것으로 보면 될까? 그렇게 홍난파에게 실망한 대중을 위로해 본다. 내 학
창시절에 봉선화부터해서 그의 노래가 음악책과 문학책에 지겹도록 실려 참 머리 아프게 했는
데, 그의 친일 행적은 나의 마음까지도 심히 아프게 만든다.

그런데 홍난파 가옥에서 다루고 있는 그의 일생과 그곳에서 배부하는 홍난파 자료, 그리고 홍
난파 흉상 기둥에는 친일 행적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오로지 찬양 일색이다. 심지어는 '우리
는 홍난파 선생님에게 신세를 너무 많이 졌습니다~~ 홍난파 선생님은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이
며 우리는 홍난파 선생님의 후손입니다'
라는 식의 암을 유발하는 해괴망측한 구절도 있다.
종로구청의 실수인지 아니면 난파기념사업회의 장난인지는 모르겠으나 지나친 찬양은 오히려
역겨움과 정신건강 해악만 가져올 뿐이다. 홍난파가 어떤 인물인지는 내가 직접 겪어보질 않아
서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그도 개념이 있다면 후학들의 이런 말장난에 지하에서 눈물을 머금을
것이다. 기릴 것은 기리고 깔 것은 과감히 까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홍난파의 후학들이 세운 난파기념사업회는 1968년 난파음악상을 제정해 매년마다 적당한 음악
인을 골라 상을 주고 있다. 상을 받은 이는 정경화, 정명훈, 금난새, 조수미 등 이름 3자만 들
어도 거의 알법한 인물인데, 2013년에 일대 이변이 생겼다. 수상자로 선정된 작곡가 류재준씨
가 수상을 거부했던 것이다. 거부 사유는 친일파의 이름으로 된 상을 받기 싫다는 것이다. 그
의 업적은 인정하나 실수 또한 거대하다며 그의 친일행적을 꼬집은 것이다.
그의 개념찬 행동에 천하 사람들은 많은 찬사를 보냈고, 난파기념사업회는 그냥 음악가로서의
홍난파를 기리고 상을 줄 뿐이라며 말도 안되는 변명만 늘어놓다가 오히려 욕만 죽어라 얻어먹
었다.

근래에 들어 민족문화연구소는 홍난파 가옥의 이름을 변경하자며, 이곳에 살았던 여러 인물의
삶과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공간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또한 안내문을 수정하고 가옥 내부의
공간 구성을 바꾸는 방안을 종로구에 제시했다. 비록 홍난파가 이곳에 쓸데없이 오래 살긴 했
어도 그 작자를 너무 치켜세우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니 홍난파 유물은 크게 줄이거나 갖다버
리고 독립운동을 했던 한치진과 홍어길을 기리는 공간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물론 홍난파도 음악에 공이 적지 않으니 쥐꼬리만큼 기려주자. 또한 집 이름은 지역 이름만 따
서 '홍파동 가옥' 또는 '홍파동 근대 가옥'으로 바꾸는 것이 적당해보인다.

가옥 내부를 둘러보려고 현관을 기웃거렸으나 이미 관람시간은 끝난 상태. 그래서 다음을 기약
하며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 홍난파 가옥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4번 출구)에서 직진하면 정동4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송월길로
  들어서 5분 정도 가면 한양도성이 보이면서 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 송월1길로 진
  입하여 월암근린공원을 지나면 그 공원의 끝에 홍난파가옥이 있다.

★ 홍난파 가옥 관람정보 (2016년 12월 기준)

* 관람시간 : 평일 11시부터 17시까지 (11~3월은 16시까지) / 주말, 공휴일은 휴관
* 관람비 없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파동2-16 (송월1길 38) (☎ 070-8112-7901)


▲  홍난파 가옥 1층 거실
이곳의 백미인 붉은 벽난로를 비롯해 홍난파의 흉상과 의자, 피아노, 바이올린 등이
놓여져 나라를 배신한 그의 음향(音香)을 느끼게 한다.

▲  홍난파 찬양 공간으로 변질된 가옥 1층 동쪽 (옛 침실 공간)
홍난파의 유품과 음악 문서들, 그리고 그의 일생과 음악을 정리한 내용들이
벽을 가득 채운다. 이 공간은 소공연장으로 쓰이기도 한다.

▲  월암근린공원에 다시 세워진 한양도성
헌돌과 새돌이 어색한 조화로 보이며 다시 성곽을 이루었다. 장대한 시간이 흐르면
하얀 피부의 돌도 밑에 깔린 어른 돌처럼 고색이 짙어질 것이다.


홍난파가옥 남쪽에는 월암근린공원이 자리해 있다. 여기서 남대문(숭례문)과 사직터널 윗쪽에
서 끊긴 한양도성이 짧게나마 모습을 비추는데 그 성곽 밑에 월암(月巖)근린공원이 넓게 자리
를 닦았다.

이곳 성곽은 근래에 복원된 탓에 피부가 온통 하얗고, 성곽 밑도리에 고색의 때를 머금은 성돌
이 일부 끼어있을 뿐이다. 그래서 오래된 도성(都城)의 무게감보다는 대충 얹힌 촬영세트장이
나 모조품처럼 가볍게 보인다.
상황이 이리 우울하게 된 것은 왜정이 사직터널부터 남대문 사이에 성곽을 아주 철저하게 뭉개
버렸기 때문이다. 성곽이 가고 없는 자리에는 집과 건물이 가득 들어찼는데, 도성 복원 계획으
로 이 일대를 밀어버리면서 땅 속에 묻힌 성돌이 다시금 햇살을 보게 되었고, 성곽을 복원하면
서 그들을 끄집어내 성돌의 역할을 부여했다. 그리고 숨통이 크게 트인 성곽 서쪽에는 공원을
닦아 휴식처로 삼았는데, 월암이란 이름은 인근에 숨겨진 '월암동(月巖洞)' 바위글씨에서 비롯
되었다.
성곽 안쪽에는 서울기상관측소와 서울복지재단, 서울시 교육청이 자리해 있으며, 그 동쪽에는
경희궁(慶熙宮)이 오욕의 세월을 견디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성곽 북쪽은 주택들이 첩첩하게 들어차 재개발을 하지 않는 이상은 복원이 거의 어렵다. 사직
터널까지 200m 정도만 다시 이으면 되는데, 현실의 벽 앞에 어림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남쪽
또한 건물과 도로 등으로 손을 대기가 거의 불가능한 실정, 허나 도성 복원 계획은 끊어진 성
곽이 모두 이어지는 그 순간까지 끈기를 가지고 추진된다고 하니 내 생애 언젠가는 반드시 복
원이 마무리 될 것이라 믿는다.


▲  복원된 성곽 북쪽 끝(서울기상관측소)에 성곽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  서울기상관측소 남쪽 성곽길 (북쪽에서 본 모습)
재현된 성곽의 길이가 매우 짧기 때문에 저 길의 끝은 아직 막혀있다.
그래서 다시 돌아나와야 된다. 일종의 똥개훈련~~

▲  서울시 교육청 옆 성곽길 (남쪽에서 본 모습)

▲  서울시 교육청 서쪽 성곽
서울시 교육청 서쪽 성곽은 성벽은 완성이 되었으나 아직 여장은 달지 못했다.
경원선과 경의선 철마가 우리의 잃어버린 북쪽 대륙으로 달리고 싶듯이
한양도성은 끊어진 구간을 넘어 다시금 서울 도심을 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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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늑한 전원마을을 거닐다 ~~~ 부암동 늦가을 나들이 (무계원, 안평대군집터...)


'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늦가을 산책
(인왕산 자락 명소들) '

▲ 인왕산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부암동

▲ 반계 윤웅렬 별장의 뒷모습

▲ 부암동 무계원



 

늦가을 누님이 그의 마지막 열정을 불사르며 천하를 곱게 물들이던 11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후배 여인네와 함께 나의 즐겨찾기 명소인 종로구 부암동을 찾았다.

부암동(付岩洞)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인왕산(仁王山)에 포근히 감싸인 도
심 속의 전원(田園) 마을로 천하 제일의 큰 도시로 콧대가 매우 높은 서울의 심장부에 자
리해 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정녕 서울이 맞더냐?' 고개가 갸우뚱거릴 정
도로 매우 번잡한 시내가 연상되는 도심과는 전혀 다른 산골마을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어
서울 도심의 또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이곳은 아름다운 경관과 도심과 가까운 잇점으로 조선 초부터 도성(都城) 밖 경승지로 격
하게 찬양을 받아와 그와 관련된 오래된 명소가 많이 서려있다. 이들 명소와 부암동의 수
려한 풍경에 나는 그만 퐁당퐁당 빠져버렸고 매년 적지 않게 찾아와 그에 대한 마음을 표
현한다.

부암동에는 고색의 명소, 현대 명소, 자연 명소 등 볼거리가 상당하여 본글에서는 인왕산
자락에 안긴 명소 몇몇만 다루도록 하겠다. 참고로 부암동은 붙임바위에서 유래된 이름으
로 법정동명과 행정동명을 겸하고 있으며, 법정동인 신영동(新營洞)과 홍지동(弘智洞) 등
을 관할하고 있다.


 

♠ 부암동의 새로운 문화체험 공간, 고급 요정으로 악명을 떨친 옛 오진암
건물로 새롭게 재생된 ~~~ 무계원
(武溪園)

부암동주민센터에서 '창의문로5길' 골목길을 2분 정도 들어서면 부암동의 새로운 명소로 격하
게 주목 받고 있는 무계원이 모습을 비춘다.
무계원은 한옥으로 이루어진 공간으로 겉으로 보면 최근에 지어진 따끈따끈한 집처럼 보이겠지
만 실상은 100년 이상 묵은 한옥, 오진암을 가져와 지은 것이다. 부암동을 지겹게 들락거린 본
인 역시 그의 존재를 처음 보는데, 그도 그럴 것이 2013년 겨울 이전에는 없던 존재였기 때문
이다.

이 한옥은 서화가(書畵家)로 유명한 송은 이병직(松隱 李秉直, 1896~1973)이 1910년에 지은 고
래등 기와집으로 원래는 종로구 익선동(益善洞, 종로3가 북쪽)에 있었다. 규모는 700평으로 여
기서 그의 많은 글씨와 그림이 탄생했다. 특히 사군자 중 난과 죽을 잘 그렸으며, 서화 감식에
도 매우 밝았다.
1953년 집을 조모씨에게 팔았으며, 조모씨는 이곳을 요정(料亭)으로 손질하여 장사를 했다. 이
집이 바로 이 땅 최초의 요정이자 서울시에 등록된 음식점 1호인 오진암(梧珍庵)인 것이다. 오
진암이란 이름은 뜨락에 큰 오동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오진암을 시작으로 청운각과 대원각, 삼청각 등의 요정이 서울 도심과 성북동(城北洞)에 생겨
났으며, 이들과 함께 1960~80년대 요정 정치의 산실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흔히 서울 3대 요
정으로 삼청각(三淸閣), 대원각, 청운각을 꼽으나 청운각 대신 오진암을 넣기도 한다.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박성철 제2부수상과 논의하여 그 유명한 7.4남북공동성
명을 이끌어 낸 현장이기도 하며, 권력 실세와 고위 관료, 기업인들이 자주 들락거렸는데, 이
름만 대면 이 땅의 사람들이 거의 알만한 사람들이 이곳 단골이었다. 이후락도 오진암의 단골
로 많이 재미를 봤다고 한다.
또한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늘자 당시 미국 등 철없는 양이(洋夷) 언론들은 이 땅의 요정들
이 기생 관광으로 돈을 번다며 꼬집었고, 그때 오진암이 진하게 언급되기도 하였다.
2006년에는 어느 손님이 290만원을 카드로 결제해 유명세를 타기도 했으며, 이곳 음식은 맛이
좋고 정갈한 편으로 접대 아가씨들이 매우 친절했으나 대신 가격이 후덜덜한 수준이라 100만원
이상은 훌쩍 넘어간다. 그래서 서민들은 얼씬도 하지 못한 그야말로 있는 자, 권력층의 폐쇄된
공간이었다.

허나 시간이 흐르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급 요정도 대거 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대원각
은 절로 탈바꿈해 길상사(吉祥寺, ☞ 관련글 보러가기)가 되었고, 삼청각은 서울시가 인수해
고급 문화공간이 되었다. 청운각은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으며, 오진암은 그들보다 더 오래
버티긴 했으나 손님이 줄면서 주인 조모씨는 결국 2010년에 집을 내놓고 말았다.
이곳을 사들인 사업자는 10층짜리 관광호텔을 짓고자 그해 9월 오진암을 밀어버렸는데 오래된
한옥이고, 20세기 중반 요정/풍류문화가 깃든 현장이라 철거 반대 여론도 적지 않았으나 종로
구에서는 개인 집이고 지정문화재가 아니라는 이유로 집이 가루가 될 때까지 방관하고 말았다.
다행히 늦게나마 철이 든 종로구는 2010년 10월 호텔 사업자와 협의를 벌여 오진암을 다른 곳
으로 이건(移建)하기로 의견을 모았으나 마땅한 장소가 없어 철거된 목조 자재를 모아두며 시
간을 허비하다가 2012년 2월 안평대군의 별장인 무계정사터 아랫쪽 지금의 자리를 마련해 복원
하기로 했다.
복원 비용은 종로구와 호텔사업자가 부담했으며, 정부에서 건네준 한옥건축지원금을 포함해 23
억이 소요되었다.

2012년 2월 복원 공사를 벌여 2013년 11월 완성을 보았으며, 오진암에서 옮겨온 목재와 안채의
지붕기와, 서까래 기둥 등이 활용되었고, 특히 종로 청진동(淸進洞)에서 발견된 500년 이상 묵
은 건물 주춧돌로 석축을 쌓아 오진암을 그런데로 재현했다. 또한 뛰어난 장인들이 많이 참여
했고 (주)이건창호에서 한옥 화장실을 지어 기증했다.
공사가 완료되자 문화재 전문가들은 이곳이 무계정사터의 일부임을 내세워 그곳과 연관지어 한
옥의 이름을 정하자고 요청했다. 하여 고심 끝에 무계원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고, 2014년 3월
20일 세상을 향해 활짝 사립문을 열었다.

무계원은 대지 1,654㎡, 연면적 389㎡로 안채와 행랑채, 사랑채, 연못, 돌담, 대문을 두었는데,
들어앉은 지형상 예전 오진암보다는 작게 재현되었으며, 분실된 예전 건물의 부재가 많아 기둥,
건물벽은 거의 새로운 것으로 채워넣었다. 그러다보니 새 집 냄새가 다소 진한 것이다.

다시 태어난 무계원은 전통문화체험 공간으로 개방해 인문학강좌, 서당체험, 다도교실, 국악공
연, 기획전시 등 다양한 전통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종로구와 안견기념사업회가 2016년
5월 안평대군과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의 예술혼을 기리고 그 유적 복원을 위하여 '몽유도원
무계정사 문화축제'를 열기로 했다. (저번 10월에는 황제를 위한 콘서트가 매 주말에 열리기도
했음)

부암동의 새로운 명소이자 꿀단지로 원래 자리도 아니고 이전 과정에서 고색의 내음도 거의 시
들었지만, 권력층과 돈 있는 자의 공간이 시민들의 공간으로 거듭난 의미 깊은 현장이며, 인근
무계정사터(안평대군 집터)와 반계 윤웅렬별장, 청계동천 등 숙성된 오랜 명소와 같이 둘러보
면 정말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 건물 전체를 전통문화 및 교육 공간으로 쓰는 것보다는 사랑채나 안채 정도는 한옥 체
험 겸 숙박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대문에 걸린 파란색 무계원 현판의 위엄
글씨가 마치 살아서 율동을 부리는 것 같다. '武'자는 꼭 칼질을 하는 것 같고,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채와 사랑채, 안채로 인도하는 계단이 나온다.

▲ 무계원 행랑채와 전통 굴뚝

▲ 안채에서 바라본 행랑채


▲ 'ㄱ'자 모습의 안채
안채와 행랑채는 모두 'ㄱ' 모습을 취하고 있다. 옛 오진암의 냄새는
거의 없고 근래 새로 지은 한옥 냄새만 가득하다.

▲ 안채 뒷쪽 돌담과 돌로 단단히 다진 석대(石臺)
청진동에서 가져온 조선시대 건물터 석축과 새로 얹힌 하얀 피부의 석축이
어색하게 대비를 이룬다.

▲ 사랑채 통로

▲ 아무도 없는 사랑채 방


▲ 'ㄱ'자 모습으로 이루어진 사랑채 (밑층은 무계원 사무실)

▲ 사랑채 뒷모습과 네모난 굴뚝
굴뚝을 뜨겁게 달구던 연기는 온데간데 없고 차갑게 식어버린 장식용 굴뚝만
멀뚱히 솟아있다.

▲ 무계원 뒷뜨락 (사랑채 동쪽)
건물을 짓고 남은 동쪽 짜투리 공간은 뒷뜨락으로 삼았다. 이곳에는 나무와
조그만 화초 등을 심었으며, 뜨락 끝에는 굳게 잠긴 협문이 있다.

▲ 뒷뜨락에서 바라본 사랑채
새집 냄새가 가득한 무계원은 딱히 오래된 볼거리나 특별한 것이 없어
이 정도로 마무리를 짓고 미련없이 대문을 나섰다.

※ 무계원 찾아가기 (2016년 11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부암동주민센터(
무계원) 하차, 버스가 내려간 방향(북서쪽)으로 조금 가면 길 건너편에 부암동주민센터가 있
으며, 그 옆 창의문로5길을 따라 자하미술관 방면으로 도보 2분 (찾기는 쉬움)
* 관람시간 : 9시~18시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과 추석 연휴는 쉰다)
* 입장료는 없으며 단체 관람시 사전 예약 요망
* 전통 공연과 전통문화체험, 기획전시, 인문학강연 등이 부정기적으로 열린다. (자세한 일정
은 무계원에 문의)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27 (창의문로5가길 2 ☎ 02-379-7131)
* 무계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연꽃이 한참 와신상담을 벌이고 있는 네모난 석조 연못
사랑채 뒷쪽에 자리해 있는 것으로 오진암 시절부터 있던 연못인지는 모르겠다.


 

♠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부질없는 야망이 서린 곳
무계정사
(武溪精舍)터(안평대군 이용 집터)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2호

▲ 무계동(武溪洞) 바위글씨

무계원에서 다시 골목길(자하미술관 방면)을 1분 들어서면 '현진건 집터'를 알리는 표석이 마
중을 한다.
그 표석에서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서면서 왼쪽을 계속 주시하면 커다란 나무를 간
직한 기와집이 보이는데, 그 집 옆에 커다란 바위가 고개를 들고 있다. 바로 그 바위에 '무계
동'이란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으니 그곳이 안평대군 이용의 별장인 무계정사터이다.

※ 안평대군의 생애(1418~1453)
안평대군은 세종(世宗)의 3째 아들로 세종이 왕위에 오르던 1418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이용(
李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간거사(琅玕居士), 매죽헌(梅竹軒)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시문(詩文)과 그림에 능해 삼절(三絶)이라 칭송을 받았으며 거문고를 잘타고
무예에도 일가견이 있는 등, 문무(文武)와 예술을 두루 갖춘 팔방미인으로 세종의 18명 아들
중에 가장 능력이 좋았다.
1428년 안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429년 불과 11살의 나이로 좌부대언 정연(鄭淵)의 딸과 혼인
하고 1430년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유학 공부를 했다. 1438년에는 두만강(豆滿江) 6진으로
파견되어 두만강 이북의 여진족을 정벌하기도 했다.

세종이 승하하자 맏형인 문종(文宗)의 신임으로 황표정사(黃票政事 : 왕자들이 추천한 인물 중
에서 왕이 그 적임자를 골라 임명하던 인사제도)를 장악하고 측근의 사람을 요직에 앉히는 등,
조정에서 꽤나 영향력을 행사했다. 1452년 조카인 단종(端宗)이 즉위하자, 황보인(皇甫仁), 김
종서(金宗瑞)와 손을 잡고 수양대군을 견제하며 자신의 세력을 꾸준히 키워나갔다.

그는 창의문 너머 지금의 자리에 넓게 별장을 지었는데, 그곳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의 계곡을
닮았다 하여 무계동
(武溪洞)이라 이름 짓고, 별장 이름을 무이정사(武夷精舍, 무계정사)라 하
였다. 원래 이곳은 그의 2째 큰아버지이자 세종의 2째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집터였다.
별장을 짓자 장정을 모아 숙식을 제공하고 훈련을 시키며 자신의 사병을 키워나갔으며 용산에
담담정(淡淡亭)이란 정자를 지어 문인들과 교류를 하며 자신의 야망을 길렀다.
하지만 2째 형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온 이후, 크게 존재를 드러내면서
단종을 설득해 안평대군 손아귀에 있던 황표정사를 폐지시켰다. 이는 안평에 대한 심각한 도전
이자 대권에 대한 야망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위기를 느낀 안평은 함경도에 있던 이징옥(李澄玉)에게 무기를 지원 받아 무력을 앞세워
잠시 황표정사를 회복시켰으나 이는 그의 명을 단축시키는 꼴 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의 무력
도전에 발끈한 수양은 1453년 10월, 그 유명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김종서과 황보인
을 순식간에 처단하고, 방심하고 있던 안평을 포박되어 강화도로 유배보냈다.
허나 수양은 그것으로도 안심이 되질 않는지 다시 강화도 서쪽에 자리한 교동도(喬桐島)로 쫓
아냈고 한명회(韓明澮)의 건의로 그 해를 넘기지 않고 세상에서 제일 쓴 약, 사약(死藥)을 보
내 빨리 죽을 것을 재촉했다.

안평은 형이 보낸 사약 사발을 쭈욱 들이키며 권력에 눈이 어두웠던 그리고 형에게 선수를 당
했던 자신의 어리석움을 한탄하며 이내 피를 와장창 토하고 아무런 미련도 없는 듯, 쓰러지니
그의 나이 불과 35살이었다.
이후 18세기 중반까지 복관(復官)되지 못했으며, 영조 23년(1747년)에 이르러 영의정 김재로(
金在魯)의 건의로 그제서야 복관이 되고 시호를 받았다. 그의 시호는 장소(章昭)이며 무덤의
위치는 전해오지 않는다.

그가 이승을 뜬 이후, 그의 야망이 깃든 무계정사는 완전 쑥대밭이 되었으며 그의 권력을 향한
강인한 정열이 느껴지는
'武溪洞' 3글자만이 쓸쓸히 바위에 남아 이곳이 안평의 집터였음을 아
련하게 전해줄 따름이다.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의 호를 따서 비해당(匪懈堂)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여름철에는 많은 문인
들이 찾아와 경치를 즐겼다.

※ 문예가(文藝家)로써의 안평대군
그는 무이정사와 담담정으로 문인들을 초청하여 수시로 연회를 베풀었고, 궁중에 소장된 서화(
書畵)와 자신이 수집한 명나라 서화를 연구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이를 소개하는 등 그 당시 문
학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趙孟頫)체를 사용했는데 이를 나름대로 조선식의 필법으로 발
전시켰다. 조선에 온 명(明)나라 사신들은 그의 글씨를 보고는 조맹부의 글씨보다 더 휼륭하다
며 서로 글씨를 받아가려고 아우성을 떨었다.

한편 무계정사에 머물던 어느 평화로운 날, 꿈 속에서 아름다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냥 기
억 속에 두기가 너무 아까워 그와 친분이 있던 안견(安堅)에게 그 꿈의 내용을 설명하여 그리
게 하니 그는 3일 만에 그림을 완성하여 올렸다. 그것이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이다.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바다 건너 왜열도에 가 있으며, 2009년 후반 국립중앙박물관 특별
전 때 잠시 귀국한 인연으로 몽유도원도의 현장인 무계정사터를 찾는 답사객이 잠시나마 늘기
도 했다.
또한 여러 문인들의 글을 정리하여 시화첩(詩畵帖)을 만들기도 하였고, 1452년에는 경자자(庚
子字)를 개주(改鑄)해 만든 임신자(壬申字)의 자모(字母)를 쓰기도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그
의 글씨로는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에 있는 세종대왕 신도비(神道碑), 수원에 있는 청천부원군
심온묘표(靑川府院君沈溫墓表), 자신의 아우인 임영대군묘표(臨瀛大君墓表) 등의 비문이 있다.


'武溪洞' 바위글씨가 있는 기와집은 무계정사와 전혀 관련이 없는 존재로 예전에는 개인 소유
였으나 현재는 종로구청에서 관리하여 빈 집이 되었다. 집과 바위글씨 주변은 나무들이 여럿
있을 뿐, 거의 방치되고 있는 수준이며, 서남쪽은 너른 공터가 있는데, 그곳은 현진건의 집터
이다.

10여 년 전 무계동을 찾았을 때는 쥐방울만한 견공(犬公) 2마리가 요란을 떨며 바위를 지키는
통에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글씨를 봤었는데, 이제는 그들도 무계정사처럼 희미한 추억이 되어
버렸다.
2007년 이후 문화재청 지정 명칭이 '무계정사터'에서
'안평대군 이용집터'로 변경되었으며, 집
으로 들어가는 대문이 굳게 잠겨있어 관람을 애타게 원할 경우 문에 달린 종로구청 문화관광과
연락처로 연락을 하거나 요령껏 넘어가기 바란다.

※ 무계정사터 찾아가기 (2016년 11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부암동주민센터(
무계원) 하차, 창의문로5길을 따라 자하미술관 방면으로 도보 5분, 현진건집터 표석만 찾으
면 금방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19-4 (창의문로7길 28-4)


▲ 무계동 바위글씨로 인도하는 조그만 골목길
낙엽이 쓸쓸히 내려앉아 만추(晩秋)의 서정을 불러 일으킨다.


▲ 공터가 되버린 현진건 집터
저 뒤쪽 붉게 물든 아름드리 나무가 자리한 곳에 무계동 바위글씨가 있다. 공터
구석에는 은단천(銀丹泉)이라 불리는 샘터가 있으나 수질은 장담 못한다.

▲ 한줄기 신기루가 되어 사라진 '현진건 집터 표석'

현진건(玄鎭健, 1900~1943)은 소설 '운수좋은 날'로 유명한 문인이다. 그는 1930년대에 무계정
사터인 이곳에 조그만 집을 짓고 살았는데, 2000년 이후 개발의 칼질을 당해 사라졌다. 그래도
현대문학의 중추적인 인물의 집인데, 문화유산이나 기념물로 보존하거나 평창(平昌) 봉평의 이
효석(李孝石) 생가처럼 조촐한 문학의 성지(聖地)로 키웠으면 좋았을 것을 위정자들의 철학과
역사의식 부재, 그리고 그들을 등에 업으며 오로지 돈을 위해 마구잡이로 칼질을 일삼는 개발
업자들, 그들이 날뛰는 이 땅의 현실이 그저 딱할 따름이다.


▲ 청계동천(靑溪洞天) 글씨를 지닌 바위

무계정사의 흔적을 둘러보고 인왕산의 품으로 다시 길을 재촉했다. 전원 분위기가 물씬 감도는
부암동, 부암동에 핏줄처럼 얽힌 골목길은 마치 시골길을 거니는 기분이다. 산골에 있어 다소
오르막길이 많긴 하지만 그리 힘든 정도는 아니다.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이 앞다투어 베푼
숲내음에 걷기만 해도 마음이 느긋해지며 온갖 감상을 강하게 불러 일으킨다.

현진건집터와 윤웅렬별장 사이에는 피부를 드러낸 바위들이 여럿 있는데, 청계동천(靑溪洞天)
바위글씨를 품은 바위가 있어 이곳도 한때 동천(洞天)의 칭호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바위
글씨는 작고 얇은 수수한 모습으로 옛 사람들이 이곳 절경에 반해 새겨놓은 것이다. 이름 그대
로 맑고 깨끗한 계곡이 있었다는 뜻인데, 지금은 그 계곡이 사라져 실감이 나지 않지만 윤웅렬
별장 뒤쪽에 가늘게 흐르는 계곡이 이 앞을 흘러갔다. 그러다가 주택을 만들고 길을 내면서 지
하에 생매장된 것이다.

언제 누가 새겼는지는 귀신도 모르나 조선 후기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며, 바위 주변이 개인 소
유 땅이라 주변을 철책으로 꽁꽁 둘렀다. 그래서 바위 코 앞까지는 접근이 어려우나 어차피 길
가에 있고 훤히 다 보이기 때문에 관람에는 그리 지장은 없다.


▲ 청계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한옥, 반계 윤웅렬 별장(磻溪 尹雄烈 別莊)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2호

▲ 윤웅렬별장 문간채 (안쪽 대문)

청계동천에서 1분 정도 오르면 반계 윤웅렬별장(이하 별장)이라 불리는 한옥이 나온다. 이곳은
인왕산 품에 포근히 안긴 그림 같은 기와집으로 1906년 친일파의 하나인 윤웅렬(尹雄烈, 1840
~1911)이 지은 별장이다.

윤웅렬은 해평(海平) 윤씨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1856년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감영중군(
忠淸監營中軍)과 공주중군(公州中軍), 북청병마우후토포사(北靑兵馬虞侯討捕使)를 거쳐 1878년
통리기무아문참사(統理機務衙門參事)과 남양부사를 지냈다.
1880년 수신사(修信使)의 일행으로 왜열도를 시찰하고 왔으며, 1882년 별기군(別技軍)이 창설
되자 훈련원 하도감(下都監)의 신병대장의 영관(令官)이 되었다. 허나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
亂)으로 왜열도로 도망쳤다가 귀국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터지자 김옥균(金玉均)에 의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었으
나 3일 천하로 싱겁게 끝나면서 화순 능주로 유배를 갔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군부
대신(軍部大臣)으로 있으면서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여 청나라 상해(上
海)로 줄행랑을 쳤으며, 다시 기들어와 1906년 많은 돈을 들여 부암동에 별장을 짓고 머물렀다.
하지만 1910년 이후 왜국의 남작(男爵) 작위를 받는 등 심히 좋지 않은 뒷끝을 보였다.

윤웅렬의 아들로 그 유명한 이름, 윤치호(尹致昊, 1865~1945)가 있는데, 그는 개화파 지식인으
로 여러 선각자들과 함께 독립협회와 신민회(新民會)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민중 계몽
에 앞장섰다. 1910년 이후 안창호(安昌浩)가 세운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장을 지내면서 민족교
육에 헌신했으나 1911년 105인 사건으로 3년 동안 옥살이를 했으며, 서서히 친일파로 갈아타면
서 부친과 마찬가지로 구린 뒷끝을 보였다.

윤웅렬이 이곳에 별장을 지을 때, 벽돌로 지은 서양식 2층 건물만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
가 골로 가면서 3째 아들 윤치창(尹致昌)이 상속을 받았는데, 1930년대 한옥으로 안채와 사랑
채, 광채, 문간채를 추가로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별장 안채는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좌우에 있으며, 안방 앞에는 2칸 부엌이 있
고, 건넌방 앞에는 작은 누마루가 있다. 안채 왼쪽에 광채와 사랑채가 나란히 있는데, 'ㄱ'모
양의 사랑채 한쪽 끝에 서양식 2층 벽돌 건물이 있다. 사랑채와 2층 건물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앞에 인왕산이 베푼 조그만 계곡이 흘러간다. 그 계곡이 바로 앞서 언급한 청계동
천의 상류로 계곡에 돌로 2단의 석축을 쌓고 나무를 심어 경관을 아름답게 꾸몄다. 사랑채 지
붕에는 옥상 테라스를 만들어 경관을 감상하는 전망대로 삼았다.
사랑채와 광채는 변형이 심해 원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우며, 한양 도성 밖 부암동에 세워진
별서(별장)의 하나로 외국 건축 양식이 상류층 주택에 적용된 사례로 주목된다. 또한 안채는
서울 지역 근대 한옥의 변화가 잘 반영되어 있다.

윤치창 이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봉산서원이라 불리는 미술공간으로 쓰였으며, 이때는 대문(
문간채) 앞 뜨락에 비너스상도 두고 집채만한 큰 바위도 두면서 특이한 모습을 보였는데, 2010
년 이후 어느 기업 회장이 인수하면서 2011년 가을에 크게 보수를 했다. 이때 대문을 새로 만
들고 담장을 추가했으며 집도 새집처럼 산뜻하게 손질했다.
집 보수공사는 2011년 12월에 끝났으며 이후로는 폐쇄적인 상류층의 습성으로 어지간해서는 속
살 개방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이전에 본 것이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내 바램이긴 하
지만 이렇게 괜찮은 한옥을 주인 일가만 누릴 것이 아니라 다수가 좀 누렸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한옥 민박이나 게스트하우스로 개방하는 것은 어떨까? 북촌(北村)과 전주한옥마을, 안동
의 오래된 한옥, 경주 양동민속마을 한옥들이 내/외국인을 상대로 한옥 체험 및 숙박 제공으로
단단히 재미를 보고 있다.
이곳 집 크기도 북촌의 왠만한 한옥과 비슷하거나 조금 크며, 뜨락도 넓고, 바로 옆이 인왕산
숲이라 공기도 청정하다. 도심이긴 하지만 첩첩한 산골에 들어온 듯, 전원 분위기도 진하게 풍
겨 도심 속의 이색적인 분위기도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방도 많고 사랑채 위에 테라스까지 갖
춘 매력도 있으니 어지간한 한옥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수도 있다. 교통도 도심에서 무척이
나 가깝고 버스정류장에서 도보 10분이니 그만하면 적당하다.


▲ 서쪽 담장 너머로 바라본 윤웅렬별장의 뒷모습

▲ 윤웅렬별장 앞길 (대문과 담장은
2011년 보수 때 새로 했음)

▲ 안채 옆에 있는 또 다른 문
원래 있던 문으로 늘 굳게 닫혀있다.

▲ 윤웅렬별장 위쪽(서쪽) 돌담

▲ 겨울잠에 잠긴 별장 연못
물과 연꽃, 물고기가 넘쳐날 그때를 꿈꾼다.


▲ 윤웅렬 별장의 숨겨진 아름다움 (사랑채 뒤쪽 계곡)

별장 뒤쪽에는 이곳의 숨겨진 비경이 있다.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절경이 수줍은 듯 숨바꼭
질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는 조그만 계곡이 없는 듯 흘러가는데 이 계곡이 바로 청계동천이다. 계곡 양쪽에는 돌
로 높게 석축을 쌓았으며, 위쪽에는 2단으로 석축을 둘렀다. 석축 위에는 단풍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들이 앞다투어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늦가을의 정취를 진하게 우려낸다. 지나던 가을
도 이 별장에 눈독을 들였는지 뒤쪽에 살며시 들어와 고운 작품을 연출한 것이다. 화사하게 타
오른 단풍과 알록달록 물든 나무들이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슬슬 올해를 정리한다. 겨울
제국(帝國)이 도래하면 모든 것을 다 공출당해 숨죽이고 있다가 소쩍새가 우는 그날이 되면 다
시 기지개를 켤 것이다.


▲ 사랑채 뒤쪽 계곡의 막다른 곳 (바위와 폭포)

계곡의 막다른 곳에는 푸른 이끼를 뒤집어 쓴 바위가 있다. 이끼가 가득하다는 것은 이곳이 그
만큼 청정하다는 것을 강하게 의미한다. 상류에서 내려온 계곡은 이 바위를 타고 아래로 흘러
가 아담한 폭포를 자아내며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폭포의 높이는 2m 정도로 물줄기가 바위 전
체를 타고 흐르는 것이 아닌 한쪽 구석에 답답한 모습으로 흘러간다. 바위 위쪽 주변에는 석축
을 쌓고 계단을 만들었는데, 붉은 색채의 낙엽이 수북히 쌓여 마치 산불이 일어난 듯 하다.


▲ 푸른 이끼의 청정한 안식처 바위와 폭포, 그리고 인왕산 계곡물

▲ 바위 위쪽 부분 (석축과 돌계단)
비록 짧지만 한 세상 멋지게 살다가 쓸쓸히 대지로 떨어진 이쁜 빛깔의
낙엽들이 수북히 쌓여 아름다운 선경(仙境)의 불빛을 이룬다.

▲ 2층 테라스를 갖춘 사랑채와 2층 벽돌집

비경의 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사랑채는 별장 내부를 남쪽에서 꽁꽁 가리고 있다. 사
랑채 기와 지붕 위에는 특이하게 옥상 테라스를 두어 작지만 천하를 굽어볼 수 있게 했으며 사
랑채 바로 옆에는 서양식으로 만든 2층 붉은 벽돌집을 두어 옥상으로 연결하는 계단을 두었다.
벽돌집에는 각 층마다 큰 방이 있어 사랑채의 보조 역할을 하며, 옥상 테라스와 벽돌집은 이곳
만의 강한 매력이자 서울에 있는 근대 한옥 중에서도 유일하다.

▲ 2층 벽돌집과 안으로 들어가는 문

▲ 사랑채 지붕에 마련된 2층 테라스


▲ 사랑채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별장 안채

사랑채 지붕으로 올라가려면 2층 벽돌집을 거쳐야 된다. 실내화로 갈아신고 계단을 타고 올라
가 문을 열면 나무로 지어진 테라스이다. 전망용으로 지어지긴 했으나 두 눈에 들어오는 범위
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매우 좁다. 비록 별장 일대와 남쪽 산자락이 고작이지만 주변의 풍경
이 고와 눈이 그리 심심치는 않다. 이곳에 올라 인왕산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면 속
세에서 마비된 머리와 정신이 싹 가시는 듯 하며, 머리도 맑아져 공부도 잘될 것 같다.

별장 서쪽 언덕에는 돌로 2단의 석축을 쌓고 구석에 소나무 등의 나무를 심었는데, 나무가 제
법 다 자란 티를 내며 별장에 작게나마 그늘을 드리워준다. 게다가 커다란 바위도 한쪽에 자리
잡고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숫키와가 얹혀진 담장이 집을 넓게 둘러싸며 속세와 경계를 이룬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부암동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다른 명소들은 별도의 글에서 흔
쾌히 다루도록 하겠다.

* 반계 윤웅렬 별장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48 (내부 관람은 거의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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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서촌 제일의 경승지 ~~ 인왕산 수성동계곡 (인왕산길, 기린교)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계곡이자 옛 경승지
~ 인왕산 수성동계곡 '

▲  인왕산 수성동계곡 (사모정 주변)

옛 옥인아파트의 흔적

▲  옛 옥인아파트의 흔적

▲  기린교

 


 

여름 제국이 무더위로 천하 만물을 핍박하던 7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들과 인왕산 수성
동계곡을 찾았다.

오전 11시,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그들을 만나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북악산 백
사실계곡<백석동천(白石洞天), 백사골 ☞ 관련글 보러가기>을 제일 먼저 찾았다. 속세에
찌든 꼬질꼬질한 두 발을 계곡에 담구며 막걸리 1잔 걸치다가 도심 속의 두멧골, 능금마
을(뒷골마을)을 거쳐 부암동(付岩洞) 산복도로를 따라 창의문(彰義門, 자하문)으로 내려
갔다.

창의문에서 윤동주(尹東柱)시인의 언덕(☞ 관련글 보러가기)에 자리한 서시정(序詩亭)에
서 잠시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하다가 인왕산(仁王山) 동쪽 허리를 가르는 인왕산길을 따
라 남쪽으로 넘어갔다.
인왕산길은 사직공원에서 창의문까지 이어지는 산악도로로 북악산길과 서로 이어져 있다.
4발 수레를 위한 2차선 도로와 뚜벅이를 위한 도보길이 공존하고 있어 서로의 눈치 없이
거닐기 좋으며 주변 풍경도 아름다워 지루할 틈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그런 인왕산길에
단단히 홀린 듯 정신없이 따라가니 어느덧 석굴암(石窟庵) 입구에 이른다.
여기서 석굴암 약수를 마시고자 잠시 인왕산의 품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무더운 날씨로
인해 반대 여론이 거세 인연을 짓지 못하고 동쪽으로 난 조그만 산길을 따라 수성동계곡
으로 내려갔다.
이 산길은 석굴암 부근에서 발원한 계곡과 나란히 속세로 내려가는데, 그 계곡은 수성동
계곡의 상류가 된다.


 

♠  수성동계곡 상류

▲  숲속에 묻힌 수성동계곡 상류

인왕산에서 수성동계곡 공원으로 이어지는 계곡 상류는 복원된 계곡 중심부와 달리 거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자연산 바위와 온갖 돌들이 좁은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고, 그
사이를 인왕산이 베푼 계곡물이 숨을 죽이며 흘러간다. 계곡 옆에는 시멘트를 발라놓은 산길이
이어져 있는데, 그냥 흙길이었으면 매우 좋았을 것을 시멘트길이라 촉감이 그리 착하지가 않다.
계곡 일대는 숲이 무성하여 강렬한 여름 제국의 햇살도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피해가며 계곡
상류 산길을 2~3분 정도 내려가면 바로 수성동계곡 공원이다.


▲  계곡 산길과 조그만 나무 다리 (석굴암 입구 방향)

▲  계곡 상류에서 만난 조그만 폭포

이 계곡은 청계천의 주요 발원지로 수질이 양호하여 도룡뇽과 가재, 개구리, 버들치 등이 조용
히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저 좁은 계곡이지만 그들에게는 이만한 보금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계곡에서 괜히 물놀이를 하거나 그들을 탄압하는 행위는 하지 말자. 그들이 사
라지면 그 다음 차례는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는 우리 인간이 될 지
도 모른다.


▲  수성동계곡 상류의 아랫부분 (수성동계곡 공원의 제일 서쪽)

▲  수성동계곡 공원 가장 윗쪽에 닦여진 황토색 산책로
계곡 일대를 두 눈으로 살피며 거닐 수 있다. 계곡 복원에 걸맞게 흙길이면 좋았을 것을
길을 현대식으로 밀어버린 점이 상당히 아쉽다.

▲  수성동계곡 공원 윗쪽 계곡

▲  수성동계곡의 또다른 상류
숲속에 숨겨진 가느다란 폭포를 타고 수성동계곡으로 살짝 숟가락을 내민다.
폭포 주변에는 수풀을 걸친 벼랑과 흙과 돌이 섞인 자갈밭이
조촐하게 펼쳐져 있어 1폭의 수채화를 자아낸다.

▲  협곡을 그리며 내려오는 수성동의 또다른 상류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온 계곡)


수성동의 상류는 대략 3개 정도로 석굴암에서 내려온 계곡과 그 남쪽에서 내려오는 계곡, 인왕
천약수터에서 내려오는 계곡이 서로 상류를 자처하며 수성동으로 내려온다. 수성동은 이들에게
서 인왕산의 맑은 물을 공급받고 서울 도심으로 청계천으로 흘려보낸다.

인왕산에서 제법 이름이 있는 인왕천약수터도 손을 내밀며 수성동에 아낌없이 물을 보태고 있
는데 이 물줄기는 거의 90도 각도가 진 암벽 사이의 좁은 공간을 타고 내려와 그 풍경이 나름
절경을 이루며, 조그만 폭포 앞에는 얕은 못과 모래밭이 있어 어린이들이 흙장난을 하며 물놀
이를 하기에 아주 적당한 곳이다.
모래 옆과 다리 주변에 돌로 쌓은 인공의 흔적이 조금 끼여있어 약간의 어색함을 주지만 그 외
에는 예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 수성동 상류의 원초적 모습을 살피는데 도움을 준다.


▲  수성동계곡 서남쪽 산책로


 

♠  옛 한양도성의 오랜 경승지,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었으나 2012년
복원되어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도심 속에 흔치 않은 계곡 ~~~
인왕산 수성동계곡(水聲洞溪谷) - 서울 지방기념물 31호

인왕산 동쪽 자락이자 서촌(西村, 경복궁 서쪽 지역) 서쪽에 자리한 수성동계곡은 서울 도심에
이름난 경승지로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와 한경지략(韓京識略) 등에
서울의 오랜 명승지로 절찬리에 소개된 곳이다. 이곳 계곡을 예로부터 수성동(水聲洞)이라 하
였는데, 이는 계곡 밑에 걸린 기린교란 돌다리 밑에 물소리가 청아하고 좋기로 명성이 자자하
여 물소리가 좋다는 뜻에서 유래된 것이다.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이자 거대한 돌산으로 제대로 된 계곡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인
왕산이지만 그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계곡이 많음에 놀라게 된다. 수성동을 비롯해 청풍
계(淸風溪), 청계동천(淸溪洞天), 송석원(松石園), 백운동(白雲洞) 등 이름난 계곡이 많이 있
었으나 20세기 중반 이후 개발의 칼질에 죄다 사라지고 수성동만 옥인아파트의 압박 속에 간신
히 숨쉬고 있었다. (백운동과 청계동천은 일부만 살아남음) 그외에 환희사계곡(큰절골)과 몇몇
약수터 주변에 조그만 계곡이 있으나 볼품은 별로 없다.

수성동은 도시와 먼 첩첩한 산주름 속이 아닌 도성(都城) 속에 자리해 있어 접근성이 매우 착
했다. 게다가 경복궁(景福宮)과 귀족들이 주로 살던 북촌(北村)과 서촌과도 바로 지척이다. 그
래서 왕족과 사대부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계곡의 풍경을 즐겼는데, 이곳에 단단히 반한 이들은
아예 집이나 별장 등을 지어 머물기도 했다. 이곳에 처음으로 집을 지은 이는 세종의 3번째 아
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으로 계곡 밑 기린교 부근에 비해당(匪懈堂)을 지어 머물렀다.
 
영조(英祖) 시절에는 겸재 정선이 인왕산을 모델로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남기
면서 수성동을 비롯한 장동8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수성동 그림은 계곡 복원에 아주 큰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그 그림에는 기린교를 건너는 선비 3명과 시중을 드는 동자(童子) 1명이 계곡
상류로 걸어가는 모습이 담겨져 있고 가벼운 붓놀림으로 이끼가 낀 바위와 질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도 비오는 날에 이곳을 찾아 '수성동 빗속에서 폭포를
구경하다(水聲洞 雨中觀瀑)'란 시를 지어 수성동을 찬양했다.
도시와 가까운 탓에 중인과 평민들도 많이 발걸음을 했는데, 인근 송석원과 더불어 조선 후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위항문학(委巷文學, 중인/평민/서얼들이 주도하는 문학활동)의 성지(聖
地)로도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 (기린교 돌다리가 그려져 있음)

이렇게 인왕산을 든든한 후광으로 두르며 서울 장안의 경승지로 초절정 인기를 누렸던 수성동
은 1960년대 이후 서울 도심에 개발의 칼질이 정신없이 그어지면서 아작나기 시작했다.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 9동이 건방지게 수성동계곡을 깔고 앉았던 것이다. 그래서 참으로 아름답고 착
했던 수성동의 경관은 99% 망가졌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인근 청풍계나 옥류동처럼 계곡이 거의 증발되는 꼴은 면했지만 아파트로
인해 계곡 폭도 줄어들고 아파트 사이를 마치 버려진 하천처럼 흘러가면서 완전 천덕꾸러기 신
세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아파트 9동 앞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해 어두컴컴한 지하를 거쳐 역시
나 생매장된 청계천으로 서글프게 흘러가야 했다. 그렇게 도시 개발과 생활 편의를 내세운 인
간의 욕심 속에 서울 도심에 많은 경승지는 꽃잎처럼 지고 말았다.

그 이후 수성동의 이름 3자는 속인(俗人)들의 뇌리 속에서 점차 시들어가고 동네 사람들만 세
월의 저편으로 잊혀져 가던 계곡의 이름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서울 전문을 자처하는 본인
역시 수성동의 존재를 안 것은 2011년, 그 이전에는 인왕산에 이런 곳이 있는 것도 몰랐고 그
런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존재감이 밑바닥을 기었던 것이다.
 
옥인시범아파트에 강제로 깔린 채, 40년 가까이 수난의 세월을 보냈던 수성동계곡. 개발의 칼
질에 빼앗긴 계곡에도 과연 봄이 올 것인가? 이러다가 수성동 이름 3자가 영구히 지워지는 것
은 아닐까?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으나 계곡을 해방시킬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수성
동에게는 절망의 시절이었다.

▲  기린교

▲  사모정 북쪽 산책로

허나 자연과 인간의 대결에서 거의 자연이 이기듯, 수성동에게도 좋은 소식이 날라왔다. 옥인
아파트가 2008년 재난안전위험시설 C급으로 지정되면서 철거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수성동의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서울시는 이번 기회에 아파트를 싹 밀어버리고 계곡을 복원하기로 의견
을 모으고 우선 2010년 10월 21일 기린교를 비롯한 수성동계곡 일대를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삼
아 늦게나마 문화유산으로 대우를 해주기 시작했다.
이후 인왕산을 가리며 계곡의 목을 조르던 옥인아파트는 2011년에 모두 철거되었으며, 아파트
주변을 통제하고 1년의 복원공사를 벌여 2012년 7월 마무리가 되었다.

계곡 복원을 위하여 전문가와 사회단체, 문화재청에 자문을 구했고 정선의 수성동 그림을 적극
참조했다. 또한 옛 경관을 어느 정도 재현하고자 소나무를 중심으로 상수리나무, 참나무, 산철
쭉 등 우리 고유의 나무 18,477그루를 심었으며, (그중에 구부러진 소나무가 제일 많음) 돌단
풍과 바위취 등 다양한 화초를 심어 주변과의 조화를 꾀했다. 그리고 계곡을 크게 넓혀서 계곡
양쪽에 전통 방식으로 돌을 쌓아 암석 지형을 최대한 회복하고자 했으며, 계곡 중간에 전통식
정자를 세워 옛 사람들의 풍류를 조금이나마 느끼도록 했다.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곳으로 여겨지는 계곡 아랫쪽에 관람공간을 닦아 정선의 눈으로 계
곡을 바라볼 수 있게끔 배려하였고, 계곡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산책로를 닦아 인왕산과 어
우러진 시민공원의 성격도 겸하게 했다.

수성동계곡 공원에는 복원된 계곡을 비롯하여 이곳의 터줏대감이자 유일한 오래된 존재인 기린
교가 있으며, 옥인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공원 북쪽에 아파트의 잔재를 일부 남겨두어 수성
동을 거쳐간 개발 지상주의의 그릇됨을 일깨우게 했다. 상류 부분과 사모정 주변은 계곡 출입
이 그런데로 가능하나 계곡 하류와 기린교 주변은 통제하고 있으며, 계곡을 복원했다고는 하지
만 완전한 옛날 모습은 아니다. 게다가 여전히 비슷한 자리(옛 옥인아파트 9동 자리로 지금은
관람 공간으로 바뀜)에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해 청계천으로 흘러간다.
청계천까지 이어지는 전 구간을 모두 끄집어내 복원하면 참 좋겠지만 이미 시가지가 꽉차게 들
어앉아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계곡이 생매장되는 부분은 계곡이 상당히 밑으로 내려간 상태
이고, 주변 바위들도 날카로운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어 사고의 위험이 있다. 기린교 같은 경우
는 계곡이 3m 밑에 흐르고 있으므로 조금 아찔하다.

도시 개발의 칼질에 희생된 수성동은 인간 중심의 개발의 난도질이 무조건 능사가 아님을 보여
준다. 안그래도 사람도 허벌나게 많고, 빌딩도 많고, 차도 많고, 공기도 탁한 서울 도심에 마
음 편히 의지할 수 있는 공간이 1개 더 생겼으니 그 가치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비슷하다 할 것
이다.
비록 옛 모습 그대로 100% 복원된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옛 모습을 되살리고자 노력했고 복원
공사를 벌이는 중에도 여러 의견을 수렴해 어색함을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그래서 인왕산이
베푼 옥계수를 모아 계곡을 재현했으니 어설프게 재현되어 전기와 세금만 잔뜩 축내는 청계천
과는 차원이 다른 살아있는 계곡이다.

※ 인왕산 수성동계곡 찾아가기 (2016년 8월 기준)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4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
  서 종로구마을버스 09번을 타고 수성동계곡 종점 하차.
*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자하문로를 거치거나 1번 출구에서 사직공원 못미처에 나오는
  필운대로를 거쳐 수성동계곡까지 가볍게 걸어가도 된다. (17~20분 소요)
* 수성동계곡 관람공간 동쪽에 주차공간이 있으나 충분치는 않다. 대중교통 이용을 권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79-1, 185-3외


 

♠  수성동계곡 둘러보기

▲  수성동계곡 사모정 주변

몇년 전만 해도 밋밋한 성냥갑 아파트 사이로 그들의 눈치를 보며 눈물처럼 흘러야했던 수성동
계곡은 이제 누구의 눈치도 없이 가슴을 피며 당차게 흘러간다. 소나기가 지나간 이후라 계곡
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어린이와 여중생으로 보이는 애들이 계곡 주변을 서성이며 발을 담
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  수성동의 풍경을 한껏 수식해주는 구수한 양념 - 사모정

수성동계곡 한복판에는 달랑 1칸에 불과한 조그만 정자, 사모정이 맵시를 드러내고 있다. 사모
정이란 네모난 정자를 뜻하는 것으로 새색시처럼 단아한 모습으로 계곡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
는 옛날부터 이곳을 스쳐갔던 정자는 아니며 계곡을 복원하면서 장식용으로 달아놓은 것이다.
(정선이 그린 그림에도, 수성동 관련 기록에도 정자의 존재는 나오지 않음)
허나 계곡과 나무만 있는 계곡에 전통 양식의 정자(亭子)를 하나 두니 수성동의 미소와 풍경이
한층 더 살아나는 것 같다.

정자 안에는 한 무리의 아줌마들이 진을 치고 놀고 있었다. 계곡 바람과 인왕산 바람이 앞다투
어 선선한 바람을 선사하고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며 솔내음을 불어주는 명당 자리라 저곳에
들어가 낮잠 한숨 청하면 정말 꿀맛일 것 같다.


▲  사모정 동쪽 계곡
계곡과 돌을 대충 배치한 듯 조금은 어색한 모습이다.

▲  사모정과 사모정 북쪽 산책로
산책로 너머로 인왕산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  공원 북쪽 산책로
저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옛 옥인아파트의 초췌한 흔적이 나온다.

▲  공원 북쪽 산책로에서 만난 바위글씨
동그라미 안에 중(中) 또는 신(申)으로 보이는 글씨가 문신처럼 박혀있다.
조금은 오래된 티가 풍기긴 하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다.
(수성동에 바위글씨가 있다는 정보는 듣지 못했음)

▲  공원 북쪽에 자리한 옛 옥인아파트의 잔재 ▼

수성동계곡 북동쪽에는 옛 옥인아파트의 흔적이 아련하게 남아있다. 이 흔적은 아파트 7동의 1
층으로 2008년 철거가 결정되자 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계곡과 조금 떨어진 7동의 아랫도리
일부만 남겨 이곳의 기념물로 삼았다.

한때 계곡을 깔고 앉아 감히 인왕산을 가리던 옥인아파트의 최후로 이곳을 요란법석 거쳐간 엄
연한 역사의 흔적이다. 아파트를 말끔히 밀어버리는 것보다는 이렇게 일부라도 남겨 개발의 난
도질의 희생된 수성동의 서글픈 과거를 보여주고, 무분별한 개발의 폐해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교육의 장으로 삼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또한 이곳 아파트에 살았던 사람들의 향수(鄕愁
)와 추억도 조금은 배려하였다.
흔적을 모두 없앤다고 이곳에 40년 가까이 둥지를 틀었던 옥인아파트의 존재와 수성동의 그늘
이 완전 지워지는 것은 아니며,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20세기 후반 서울 지역 아파트의 양
식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 인정되어 등록문화재나 지방문화재 등의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얻
게 될 수도 있다.

계곡에 둥지를 틀었던 인간의 흉한 창조물은 그 자리를 계곡과 자연에게 다시 내주었고 이제는
그들 눈치를 살살 보며 공원 한쪽 구석에 찌그러진 신세가 되었다. 인간이 아무리 용을 쓰고
만들어도 위대한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역시나 일개 모래성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파트의
남겨진 흔적은 마치 예비군훈련장의 시가전 훈련장이나 전쟁의 폭격으로 주저앉은 건물처럼 보
인다. 그렇다 대자연의 보복 폭격의 옥인아파트는 저렇게 주저앉은 것이다.


▲  주름진 바위들로 가득한 수성동계곡 (사모정과 기린교 사이)

▲  기린교 서쪽에서 바라본 수성동계곡과 인왕산

▲  한굽이 쉬어가며 조그만 폭포를 빚은 수성동계곡


 

♠  수성동계곡의 오랜 상징 ~ 기린교(麒麟橋)

▲  2개의 통돌로 이루어진 조촐한 돌다리 - 기린교

넉넉한 폭으로 흐르던 수성동계곡은 기린교 이전에서 급격히 좁아지고 하얀 피부의 포근한 반
석들도 무시무시한 낭떠러지를 계곡 쪽에 빚으면서 제법 날카로운 모습을 보인다. 그 낭떠러지
바위 사이에 우리네 인생처럼이나 짧은 돌다리가 고색의 때를 간직하며 놓여져 있는데, 그 다
리가 바로 수성동의 오랜 명물인 기린교이다.

기린교는 달랑 길쭉한 통돌 2개로만 이루어진 아주 단촐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다리 남쪽에 다
리를 보조하는 커다란 돌 여럿을 둔 것이 전부이다. 다리 폭은 1m 남짓, 길이는 3m로 언제 조
성되었는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겸재 정선의 수성동 그림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7세기에 놓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계곡을 찾은 귀족들의 통행 편의를 위해 가설된 듯
싶은데 벼랑으로 이루어진 이 부분이 계곡 가운데 가장 위험하기 때문이다.


▲  높은 벼랑 위에 걸쳐진 기린교

서울 도심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는 누가 뭐
래도 광통교(廣通橋, 광교)이다. 그외에 수표
교(水標橋)와 창경궁(昌慶宮) 옥천교(玉川橋)
도 2위, 3위에 들어간다.
(중랑천 살곶이다리는 도심이 아니므로 제외)
수표교는 청계천 생매장 때 제자리를 떠나 장
충단공원에 둥지를 틀었고, 광통교는 비록 자
리는 지켰지만 생매장의 치욕을 겪다가 청계천
엉터리 복원 때 약간 서쪽으로 옮겨졌다.
그에 반해 기린교는 그들보다 한참 후배이지만
제자리를 지키며 원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그 가치가 높다. 게다가 통돌로 만든 다리 가
운데 가장 긴 편이다.

인왕산이 빚은 제일 가는 경승지인 수성동계곡
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된 것도 어찌보
면 기린교 덕분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계곡
이 아무리 잘났어도 딱히 오래된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계곡은 복원되
었을 망정, 지방문화재까지 지정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  옆에서 바라본 기린교

▲  바로 앞에서 본 기린교
다리 너머로 수성동계곡의 생매장 현장이 보인다.

▲  멋드러진 반석이 잔뜩 널린 기린교 주변
대자연이 칼로 싹둑 손질을 했는지 바위들이 90도 절벽을 이루며 무시무시한
모습을 드러낸다. 저 밑으로 떨어지면 정말 나오기도 힘들다.

▲  기린교 동쪽에 마련된 수성동계곡 관람공간 (계곡 동쪽 광장)

수성동계곡 동쪽에는 잘다져진 평평한 광장이 있다. 이곳은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위치로
여겨지는 곳에 넓게 터를 다진 것으로 그 당시 정선의 눈높이가 되어 수성동계곡과 인왕산의
모습을 바라보도록 지어졌다.
이곳에서는 계곡 상류를 제외한 수성동계곡 일대와 인왕산이 흔쾌히 바라보이는데 보통은 높은
곳에 전경(全景)을 바라보는 자리를 두지만 이곳은 반대로 계곡 밑에 그 자리를 둔 것이 특징
이다.

인왕산이 빚은 수성동계곡은 기린교 밑을 지나 낭떠러지 밑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관람공간 밑
에서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하수구를 통해 어두컴컴한 지하로 생매장된다. 계곡을 복원했다고
는 하지만 옛 옥인아파트 주변만 재현된 것이며, 이후 서촌을 가로질러 세종로 서쪽을 거쳐 청
계천으로 흘러간다. 이 구간은 보기만 해도 머리가 복잡한 시가지로 땅을 열기도 힘들다. 이곳
도 마저 끄집어낼려면 수많은 건물과 도로를 싹 밀어야 되나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
하긴 수성동계곡만 그렇겠는가? 삼청골(삼청천)이나 청풍계, 창덕궁 빨래터에서 나오는 냇물도
그렇고 기타 북악산과 인왕산, 남산에서 발원한 수많은 물줄기도 근대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어
대부분 생매장을 당했다.


▲  유연하게 구부러진 수성동계곡 동북쪽 산책로

인왕산길에서 수성동 상류로 내려와 계곡 구석구석을 천천히 둘러보니 어느덧 1시간이 훌쩍 흘
러가버렸다. 보통 20분이면 충분히 둘러볼 장소를 뭐 그리 세세히 보겠다고 두 다리를 바쁘게
부렸는지 3배 이상의 시간을 투자한 것이다. 그래도 혹 빠진 것은 없는지 모르겠다.

2012년 복원 이후, 시작부터 싹수를 보이며 도심의 인기 명소들을 긴장시켰다. 서촌의 인기와
인왕산의 인기, 그리고 서울 도심에 흔치 않은 계곡이란 타이틀로 나날이 인기가 높아져 이제
는 도심의 주요 경승지이자 서촌 나들이 때 필수로 들려야 직성이 풀리는 서촌 지역의 꿀단지
로 완전히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수성동계곡을 겯드린 도심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서울은 내가 서
식하고 있는 곳이라 지방과 달리 달랑 1번이 아니라 계속 찾는 경우가 빈번하다. 일부를 빼고
는 지겹도록 찾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수성동계곡의 가을과 봄 풍경을 담아 소소하게 글로 남
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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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6년 8월 12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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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듬직한 우백호를 거닐다. 인왕산 (개미마을, 북쪽 능선길, 환희사, 큰절골)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인왕산 환희사 (인왕산 북쪽 능선) '

▲  환희사 경내

* 스마트폰으로 보실 경우 꼭 PC버전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가급적 컴퓨터 모니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를 권함)


 

 

올해도 변함없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을 맞이하여 순례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세우며 서
울 시내 절 투어에 나섰다. 이번에는 절을 좋아하는 후배 2명이 동참을 하였는데, 오전 11
시에 길음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제일 먼저 정릉동(貞陵洞)에 자리한 오래된 절, 봉국
사(奉國寺)의 문을 두드렸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상과 탱화를 중심으로 경내를 마음껏 누비며 온갖 나물이 버무려진
비빔밥과 떡, 전으로 이루어진 점심 공양으로 배를 두둑히 다듬었다. 그런 다음 인왕산 환
희사로 이동하고자 110번 시내버스에 몸을 싣고 홍제동(弘濟洞)으로 이동 중, 홍제천(弘濟
川) 변에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을 내민 옥천암(玉泉庵)이 진하게 손짓을 하자, 계획에
도 없던 그곳에 잠시 발을 들였다. 거기서 중생들의 하례를 받느라 분주한 고려시대 백불(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을 친견하고 두툼한 떡(백설기)을 하나씩 쥐어들며 잠시 잊었던 환희
사로 이동을 재촉했다.

여기서 환희사까지는 참 애매한 거리이다. 버스를 타고 가기에도 참 어정쩡하여 때이른 무
더위를 무릅쓰고 인왕산을 더듬기로 했다. 옥천암 서남쪽 유원하나아파트에 인왕산으로 넘
어가는 산길이 있는데, 그 길을 타고 북쪽 능선(기차바위 북쪽)을 거쳐 서남쪽으로 내려가
면 1시간 이내에 환희사에 도착한다.
다만 그렇게 가려면 해발 280m까지 올라가야 된다. 절을 목적으로 왔는데, 뜻하지 않게 강
제 등산을 하게 되니 후배들은 버스를 타고 가자며 정색을 한다. 허나 내 마음은 석불처럼
굳어졌다. 산과 산사(山寺)는 물과 물고기와 같은 사이인데 산을 좀 타면 어떠하리~! 몸은
좀 힘들어도 보람은 그만큼 클 것이며 청정한 산내음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게다가 환희
사는 산속에 있기 때문에 버스를 타더라도 산을 좀 올라가야 된다.


 

♠  인왕산을 넘다 (개미마을, 홍심약수터, 옥동약수터)

▲  신록의 도화지를 이룬 인왕산 산길
(유원하나아파트에서 개미마을로 이어지는 산길)


옥천암과 가까운 유원하나아파트는 인왕산 북쪽 끝 세검정로 길가에 자리한 아파트이다. 천박
한 개발의 칼질이 인왕산 북쪽과 서쪽, 남쪽을 마구잡이로 난도질하면서 성냥갑 아파트를 잔뜩
지어올려 대자연의 걸출한 작품 인왕산의 시야를 가리며 농락한다. 특히 통일로로 이어지는 의
주로(義州路) 동쪽은 더욱 심각해 여유 공간도 없을 것 같은 가파른 산자락을 헤집고 온갖 아
파트를 지어놓아 미관을 찌푸리게 한다. 굳이 인왕산을 희롱하며 저렇게 잔뜩 아파트를 지어야
했는지 의문일 따름이다. 이 땅의 개발은 언제나 개념을 탑재하고 바른 길을 갈지 정말로 답이
없다.

유원하나아파트 남쪽에 인왕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계단이 있는데, 그 계단을 오르면 조촐한 운
동시설과 공원이 나온다. 여기서 용천약수터를 거쳐 기차바위 능선으로 가려고 했으니 길을 잘
못들어 개미마을로 이어지는 서남쪽 산길로 들어섰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그곳을 강제로 거치
게 되었다.
개미마을로 가는 길은 둘레길마냥 느긋하다. 게다가 숲도 삼삼하여 시원한 산바람이 우리를 보
듬으며,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우리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아비규환 같은 속세에 우리를 보고
저리 웃어주는 존재는 거의 흔치 않은데 이렇게 대자연의 위로를 받으니 마음도 편해진다. 그
런 길을 10분 정도 가면 개미마을의 동쪽 부분에 이른다.


▲  벽화마을의 성지(聖地)로 거듭난 개미마을

부암동 뒷골마을(능금마을)과 더불어 서울 도심 속의 산골마을인 개미마을은 인왕산 북서쪽 자
락 100m 고지에 터를 닦은 산동네(달동네)이다. 허나 도시의 흔한 달동네와 달리 숲이 무성한
산자락에 감싸여 있어 완전 산골 벽지마을 같다. 거기에 뻐꾸기가 뻐꾹뻐꾹~♪ 노래하니 그런
기분은 더해져 이곳이 정녕 서울이 맞더냐? 내 자신도 햇갈려 순식간에 강원도 산골 마을로 순
간이동을 당한 줄 알았다.

이곳의 주소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3동 9번지, 지하철 3호선 홍제역과 가깝고, 서울 도심
이 바로 지척이다. 그런데도 이런 산골 마을이 도심 턱밑에 자리해 서울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
고 있으니 이런 것을 보면 서울도 참 넓긴 넓은 모양이다. 서울하면 대부분 키다리 빌딩과 사
람, 수레로 뒤엉킨 복잡한 시가지만 있는 것으로 알지 이런 시골 분위기는 생각을 못한다. 그
게 바로 서울에 대해 가지는 흔한 오류이다.

개미마을은 약 15,000평 규모로 200여 가구에 400여 명의 주민이 사는 마을이다. 오래된 마을
까지는 아니고 6.25 이후에 오갈 데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와 천막을 걸치고 살면서 자연
히 마을이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옹기종기 천막을 이룬 마을의 모습이 인디언마을과 비슷하다
고 하여 '인디언촌'이라 불렸는데, 인디언처럼 소리지르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그리 불렸다
는 설도 있어 바깥에서 이곳을 썩 좋은 시선으로 보고 있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마을 사람들도 그런 이름이 싫어서 적당한 이름을 물색하다가 1983년 개미마을을 이름으로 삼
았다. 이는 마을 사람들의 부지런함이 개미를 닮았다고 하여 스스로에게 붙인 이름이며, 애당
초 마을의 이름은 없었다.

이곳은 가난하고 고된 동네로 서민의 애환과 나날이 격해지는 빈부격차의 현실에 한숨을 쉬게
만드는 곳이다. 독거노인을 비롯해 일용노동자와 국민기초생활수급자가 주류를 이루며, 주황색
슬레이트 지붕을 얹힌 달동네 스타일의 집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마을 위쪽까지 길이 포장되어
있으나 여느 산동네와 마찬가지로 경사가 각박해 눈이 쌓이면 통행에 꽤 애를 먹는다. 그리고
연탄을 연료로 많이 사용하여 색깔이 벗겨진 살색 연탄을 쉽게 구경할 수 있다.
시내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오로지 문화촌에서 들어오는 북쪽 골목(세검정로4길)길이 전부
이다. 그 길로 마을버스와 차량들이 오간다. 마을버스는 산간 벽지처럼 서너 시간에 1대 정도
들어올 것 같지만 거의 10분 간격으로 들어와 접근성은 양호하며, 요즘은 좀 살만해졌는지 차
량을 가진 집도 좀 늘었다. 북쪽 외에는 3면이 죄다 산으로 막혀있으며, 인왕산 산길로는 인왕
산 정상이나 환희사, 홍은동 유원하나아파트로 넘어갈 수 있다.

이 마을의 이름 2자가 속세에 크게 주목을 받은 것은 요즘 지나치게 유행을 타고 있는 벽화마
을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2008년 이후 이곳 분위기를 화사하게 바꾸고자 서대문구청과 금호건
설이 '빛 그린 어울림 마을'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에 성균관대와 건국대, 추계예술대, 상명대, 한성대의 미술 전공 학생들이 몰려와 각기 다른
5개의 주제로 51가지의 그림을 그리면서 우울한 달동네가 화사한 그림 마을로 변신했다. 별로
기대를 하지 않던 마을 사람들도 그림판이 된 마을에 싱글벙글 웃었고, 벽화마을로 크게 언론
을 타자 마을 주민과 약간의 인왕산 등산꾼이 고작이던 이곳에 사진쟁이와 관광꾼들의 발길이
늘면서 도심의 새로운 명소로 성장했다. 또한 이곳과 동대문 이화(梨花)마을을 시작으로 많은
산동네와 시골 마을이 이를 따라하면서 전국적으로 너무 쓸데없이 벽화마을이 유행을 타게 된
것이다.
허나 사람들이 사는 마을임에도 사진 본능에 충실해 갖은 민폐를 부리는 사진쟁이가 적지가 않
고, 어렵게 사는 그들을 부정적인 눈으로 보며 무시하는 이들도 많아 마을 사람들과 적지 않은
충돌이 생긴다. 마을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시도한 벽화마을의 폐해인 셈으로 단순히 외지인들
이 들어와 그림만 그렸을 뿐,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냥 벽화만 두룬 산골 분위기 그
윽한 마을일 뿐이다. 하여 뭣도 모르는 이들은 잔뜩 기대를 하고 들어와 '이게 전부야?' 실망
을 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사진쟁이와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열게 할만한 꺼리가 없으니 단
지 사진만 찍고 가거나 인왕산을 오가는 경유지에 불과하여 마을 주민들에게도 그리 이익이 되
질 않는다.

이렇게 관광객과 마을 주민과의 조금은 불편한 동거를 줄이려면 마을을 개량하고 주민들도 이
득을 보도록 해줘야 된다. 예를 들면 도심과 가까운 잇점을 이용하여 1박 머물 수 있는 캠핑장
이나 산골, 농촌마을 체험 현장으로 활용하거나 부암동(付岩洞) 능금마을(뒷골마을)처럼 농작
물과 원예물을 재배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수 있으며, 예술인들을 초대하여 북촌(北村)처럼
갖은 예술을 체험할 수 있는 예술마을로 키우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개미마을은 아직 개발 계획은 없다. 허나 벽화마을로 뜬 적이 있으니 졸부들의 마수를 경계해
야될 것이며, 마을을 둘러볼 때 사진을 찍는다며 허락도 없이 집에 침투하거나 사생활을 침해
하는 등 호들갑을 떠는 행위는 삼가해야 된다. 그리고 개미마을 하나만으로는 50% 부족하니 인
왕산 등산이나 인근 부암동 답사를 겯드리면 정말 알차고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 홍제동 개미마을 찾아가기 (2016년 5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홍제역(1,2번 출구 중간)에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07번을 타면 개미마을까지 들
  어간다.
* 서울시내버스 110, 153, 7018, 7730번을 타고 문화촌현대아파트에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07번
  으로 환승 또는 도보 15분 (평창동이나 부암동 방면에서 갈 경우에는 길 건너 정류장에서 서
  대문 07번으로 환승)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3동 9번지 일대


▲  개미마을 동쪽 부분

우리는 개미마을의 동쪽만 스치듯 지나갔다. 이런 인위적인 벽화마을에는 별로 관심이 없기 때
문이다. 강원도 산골 같은 한적하고 전원적인 분위기는 참 마음에 들었는데, 단순히 벽화를 보
자고 또 오는 것은 싫다.

개미마을 동쪽 끝에는 홍심약수터가 있다. 처음에는 홍삼약수터로 알고 '이름이 참 건강하네~~
물에 홍삼의 기운이 있나?' 싶었는데, 이름을 다시 보니 홍심이었다. 받침 하나에 약수터의 이
름과 이미지가 싹 바뀌는 순간이다.
이 샘터에는 인왕산이 베푼 약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가뭄이라 그 양이 시원치 못하다. 수질은
다행히 적합을 유지하고 있으며, 물이 나오는 구멍이 위에 2~3개가 더 있는데, 윗쪽이 아래 보
다 물이 더 잘나온다.

우리는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갈증을 해소하며 두 다리를 잠시 쉬었다. 오후 한참 시간이라
날은 덥고 땀은 약수터를 이룰 정도라 미동도 하기 귀찮았다. 허나 환희사를 목적으로 왔으니
목적은 달성해야 뒷탈이 없다. 그래서 나른한 몸을 억지로 움직이며 다시 길을 재촉했다.
홍심약수터에서 10분 정도 오르니 소나무가 우거진 북쪽 능선에 이른다. 이 능선은 장차 기차
바위 능선으로 변신을 하는데, 거기까지는 갈 필요가 없고, 그 직전 280m 고지에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된다. 사방이 뻥 뚫린 능선길로 서쪽으로 개미마을과 서대문구, 은평구가, 동쪽은 부
암동과 북악산(백악산), 자하문고개가 시야에 들어와 조망도 제법 일품이며, 소나무가 매우 삼
삼하여 솔내음이 진동을 한다.


▲  소나무로 그윽한 인왕산 북쪽 능선길 (1)

▲  소나무로 그윽한 인왕산 북쪽 능선길 (2)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1)
바로 밑에 산골마을인 개미마을이 보이고 그 너머로 홍제동과 홍은동을 비롯하여
백련산(白蓮山) 산줄기와 은평구 일부가 바라보인다.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2)
홍은동과 홍제동 일대를 비롯하여 산골고개 너머로 은평구와 서울~고양
경계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3)
비슷한 높이로 북악산 정상이 시야에 들어오고, 그 밑에 북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 사이에 포근히 들어앉은 부암동이 보인다.

▲  환희사로 내려가는 산길

▲  옥동약수터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서쪽인 홍제동으로 좀 내려가다가 남쪽으로 가늘고 가파르게 이어진 산
길로 접어들면 바위로 이루어진 옥동약수터가 나온다.
이곳은 한때 인왕산 서쪽을 대표했던 약수터로 물 뜨는 동네 사람들이 꼬리를 물었으나 서대문
구청의 관리 소홀과 약수터를 지키는 노공(老公) 회원들의 감소, 수질의 부적합 판정으로 이제
는 초라한 행색이 되었다.

여기서 환희사까지는 작년 초여름에 발자국을 그은 경험이 있어 길은 훤하다. 이곳에서 계곡을
하나 건너면 조그만 약수터와 큰 바위가 나오며, 그들을 무시하고 서쪽으로 6~7분 정도 내려가
면 계곡 건너로 주차장과 연등을 두른 집이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환희사이다.


▲  전원주택 같은 환희사 외경


 

♠  인왕산 서쪽 자락에 소리없이 안긴 조촐한 산사(山寺),
오래된 지방문화재 2점을 간직한 인왕산 환희사(歡喜寺)

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338m)은 바위로 이루어진 각박한 경사의 암산(巖山)이
다. 시내에서 보면 산이 대개 협소해 보이지만 그의 품으로 들어가보면 생각 외로 넓어 놀라게
된다. 겉과 달리 속은 깊고 넓은 것이다.

인왕산에서 가장 경사가 각박하고 건물 지을 자리도 없을 것 같은 서쪽 자락에 조그만 비구니
절인 환희사가 조용히 안겨져 있다. 너무 없는 듯 자리해 있어 이곳의 존재를 안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다. 나도 그만큼 등잔 밑이 어두웠다.

이 절은 20세기 중반에 지어진 현대 사찰로 정보의 바다로 자부심이 대단한 인터넷 세계에서도
그곳에 대한 정보는 좀처럼 걸려들지 않았다. 하여 누가 언제 창건하고 무슨 과정을 거쳤는지
는 절에 가서 묻지 않는 이상은 알 길이 없다. 그만큼 법등(法燈)의 역사와 인지도의 끈이 매
우 낮은 것이다.
절이 있기 전에는 부근에 무당이 굿을 하거나 사람들이 수행을 하는 석굴이 있었다고 하며 그
인근에 터를 닦고 환희사를 세워 지금은 인왕산의 주요 사찰로 성장했다.

나는 오래된 절을 무척 좋아하는지라 소장 문화유산이 있거나 성북동 길상사(吉祥寺) 같은 경
우를 제외한 80년도 안된 절에는 거의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환희사에 주목을 하고 초파
일에 이렇게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상이 무려 2점이나 있기 때문으로 그들의 존재
가 나를 이곳으로 소환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곳이나 인왕산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
며, 20세기 중반 어느 때에 외지에서 모두 업어온 것이다. 역사가 짧고 딱히 내세울 것이 없는
환희사에서는 이들 불상을 후광(後光)으로 삼아야 장차 절을 꾸리기가 수월하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용화전, 요사로 쓰이는 건물 3동이 전부로 그 흔한 삼성각(三聖閣), 일주문
(一柱門)도 아직 갖추지 못했다. 경내는 작은 편으로 건물 3동에 딱 걸맞는 크기라 두 눈에 쏙
넣고 봐도 부담이 없다.
경내 북쪽과 동쪽, 남쪽은 경사가 급하며, 서쪽으로 속세로 내려가는
길이 닦여져 있다. 절 주변은 속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목이 울창해 산사의 기운을 더해주
며 남쪽에 조촐하게 계곡이 흘러간다.
이곳은 비구니 사찰이라 경내가 꽤 정갈하고 아기자기하다. 여인들의 공간이다보니 이쁘게 꾸
며진 것이다. 경내 곳곳에는 그들의 손맛이 담긴 온갖 귀여운 인형과 장식물이 놓여 있고, 뜨
락은 산뜻하여 먼지 하나 앉을 틈이 없다. 게다가 찬불가나 불교 관련 음악이 아닌 클래식 같
은 잔잔한 음악을 주로 틀어놓아 색다른 기분을 건넨다.
또한 다른 현대 사찰과 달리 외지인에 대한 경계심이 별로 없어 평일이나 주말 낮에 오면 종종
차 1잔 얻어마실 수 있으며, 편안한 기분으로 절을 둘러보거나, 쉼터에서 쉬거나, 예불을 보거
나 사진 출사를 하게끔 배려해 주는 착한 절이다. 지방문화재 불상 때문에 외지인에 대한 신경
이 다소 예민할텐데도 말이다. 허나 그렇게라도 해야 간접적으로나마 절의 존재를 조금씩 알릴
수 있다. 인지도가 누적이 되야 사람이 찾아오고 그에 따른 수입도 생기기 때문이다.
다만 18시 이후에는 초파일 등의 경우가 아니면 대문을 걸어잠구며, 18시까지는 밖으로 나가줘
야 된다. (비구니가 대문을 닫으니 나가라고 함) 연약한 비구니들의 공간이고 문화유산을 지키
그렇게 하는 모양이니 그거 외에는 딱히 문제될 것은 없다.

절 밑에는 주차장이 있는데, 주차장에서 대문을 지나 오르막을 오르면 요사(寮舍)이다. 이 건
물은 경내를 가리며 자리해 있는데, 그 흔한 기와집이 아닌 일반 주택으로 되어있어 겉으로 보
면 절집이 아닌 별장이나 전원주택 같은 분위기이다. 경내를 두른 연등이 아니었다면 누가 이
곳을 절로 생각이나 했을까? 그런 상식 밖에 요사를 지나면 뜨락이 나오면서 그보다 한층 높은
곳에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그보다 1단계 더 높은 곳에 용화전이 나오니 이들은 다행히 기와
집이라 나름 절집의 분위기를 풍긴다.

절이 작고 조촐하여 정말 5분이면 다 보고도 남음이 있으나 지방문화재 불상 때문에 머무는 시
간은 조금 길어진다. 작년에도 인왕산 정상을 찍고 홍제동으로 넘어오면서 이곳을 들린 적이
있는데, 그때는 용화전에 담긴 석불입상을 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갈 기회를 노리다가 이번 초파일에 인연을 지은 것이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인왕
산을 넘어서 왔다. 그들 불상이 아니었다면 굳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이 절
의 존재를 길이길이 몰랐을 지도 모른다. 그들 덕분에 이렇게 정갈한 비구니 사찰을 알게 되니
나로써는 고마울 따름이다.

절에 들어서니 오후 행사가 막 끝난 터라 경내가 꽤 부산하다. 뜨락 서쪽과 정자에는 가족 단
위 신도와 산꾼, 노공들이 모여 앉아 있었고, 10~20대로 이루어진 행사 요원(학생 신도들)들은
행사 뒷처리와 먹거리를 파느라 바쁘다. 이곳 이전에 갔던 봉국사와 옥천암은 먹을거리를 무상
으로 제공했는데, 이곳은 그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공양이나 떡은 꿈도 못꾼다. 게다
가 판매 가격도 속세만큼이나 야박하니 아무래도 초파일 특수를 노려 재정을 채우려는 모양이
다. 부처와 관음보살의 뜻에 따라 중생을 위해야 될 절이 지나치게 돈에 집착하는 것도 썩 좋
은 것은 아니다.


▲  대문 주변에 자리한 5층석탑
이 석탑은 왜정 때(또는 1950~60년대)에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며,
2층 지붕돌과 3,4,5층 몸돌에는 고색의 때가 약간 피어있다.

▲  연등이 춤을 추는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에는 잔디가 곱게 입혀져 있다. 뜨락 북쪽에는 석불입상을 세우고 서쪽에는 7층석
탑을 세웠는데, 그 주위에 아기자기한 장식물이 널려 있어 사진기를 흥분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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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희사 요사 - 승려들의 생활공간으로 종무소(宗務所)도 겸하고 있다.

▲  인자한 표정으로 남쪽을 바라보는
석불입상과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  날씬한 몸매의 7층석탑
대문 앞 5층석탑과 조금 비슷한 모습이다.

▲  작고 귀여운 청개구리상

▲  돌 위에 얹혀진 인형들

▲  이쁘게 치장된 뜨락 화단

▲  오리 솟대(왼쪽)와 인형의 만남


▲  환희사 대웅전(大雄殿)

▲  환희사 목불좌상(아미타불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17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절 규모에 걸맞게 조촐한 모습이다. 불단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불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좌우에는 아주 작은 관음보살과 법륜(法輪
)이란 동그란 바퀴를 두광(頭光)으로 두른 지장보살이 자리해 소위 아미타3존불을 이룬다.
그들 뒤에는 색채가 고운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하게 걸려있고, 좌우 벽에는 신중탱(神衆幀), 산
신탱(山神幀), 독성탱(獨聖幀), 칠성탱(七星幀) 등의 탱화가 빼곡히 자리하여 삼성각의 역할도
도맡고 있다.

불단에 앉아 넉넉하고 포근한 미소를 보이고 있는 목불좌상, 그는 원래 연천(漣川)에 있던 심
원사(心源寺)에서 넘어온 것이다. 심원사는 연천 지역에서 꽤 명성이 높았던 절로 6.25 때 파
괴되자 그곳에 있던 숱한 불상들이 고향을 잃고 외지로 흩어졌다. 이 목불좌상도 그중 하나로
환희사에서 어떻게 수습하여 이곳의 중심 불상으로 삼았다.
이 불상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로 17세기 중반 전후에 조성된 것
으로 여겨지며, 덩치는 작은 편이나 그를 협시(夾侍)하는 좌우 불상이 그보다 훨씬 작아 여기
서만큼은 제법 커보인다. 
그의 검은 머리칼은 꼽슬인 나발(螺髮)로 그 사이에 무견정상(無見頂相)이 솟아있으며, 두 눈
은 명상에 잠긴 듯 포근히 감겨 있다. 눈썹 사이에 푸른 백호가 찍혀있고. 작은 코는 오똑 솟
아있으며, 조그만 입술에는 미소가 넉넉히 드리워져 있다. 코와 입 사이에는 수염이 나있고,
볼살은 별로 없는 작고 갸름한 얼굴로 작은 얼굴을 선호하는 젊은 현대인들에게 부러움을 받는
다. 볼살이 절제되어 있으니 볼살이 많은 불상이나 포대화상(布袋和尙)보다는 더 미남으로 보
인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두 손은 복잡하다는 아미타9품인(阿彌陀九品印)의 하
나를 취해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다.

그는 중부지방 목불상(木佛像)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어 2006년 9월 서울 지방유형문화
재의 지위를 얻었다.

▲  대웅전 우측의 불화들
(영산회상도, 신중탱, 독성탱 등)

▲  대웅전 옆에 자리한 용화전


▲  환희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18호

대웅전 좌측에는 용화전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 있는데 그 안에는 지
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입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의 예전 명칭은 판석부조불입상(板石浮彫佛立
像)으로 발음하기도 참 어렵다.

이 석불은 두꺼운 판석(板石)에 새긴 입상(立像)으로 마애불(磨崖佛)과도 다소 비슷하다. 고려
석불의 형식을 계승하고 있다고 하며, 조선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앞서 목
불좌상과는 달리 신체 비례와 조형감이 많이 떨어진다. 그 역시 다른 곳에서 가져왔으며, 고향
이 어디고 정체가 무엇인지는 자료가 없어서 모르겠다. 여기서는 막연히 미륵불(彌勒佛)로 심
심치 않은 대접을 받고 있다.

판석 위에 새겨진 석불은 보는 시각에 따라 고색의 기운도 별로 느껴지지 않아 근래 것으로 착
각하기도 쉽다. 얼굴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죄다 씻겨가거나 눈과 코, 입의 위치만 확
인할 수 있는 정도이며, 머리에는 무견정상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머리 뒤에는 꽃무늬가 새겨진 동그란 두광이 그를 밝혀주며, 몸에는 양 어깨를 가린 법의(法衣
)가 입혀져 있다. 가슴 밑은 얼굴처럼 닳은 부분이 많고, 몸 뒤에는 신광(身光)이 묘사되어 있
다. 석불입상 옆에는 조그만 귀여운 석상이 있는데, 서로 피부가 비슷해 같은 셋트임을 느끼게
한다. 정체는 알 수 없으나 부처의 열성제자인 나한(羅漢)이 아닐까 살짝 점쳐본다.


▲  대웅전과 관음전 사이에 자리한 관음보살상
지나치게 큰 정병(政柄)을 두 손에 쥐어들며 명상에 잠겨있다. 저 병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그를 졸라서 1잔 받아보고 싶다.

▲  환희사의 조그만 극락, 대웅전 우측 정자 쉼터
누구든 신발을 벗고 들어가 쉴 수 있는 쉼터로 간식도 먹을 수 있게끔
조그만 탁자도 닦여져 있다.

▲  정자에 걸린 현판과 음악을 흘려보내는 조그만 스피커의 위엄~~

▲  정자 뒷쪽 풍경
그림 같은 산책로가 수풀 사이로 나 있으나 그 길이는 인생처럼 짧다.

▲  정자에서 바라본 경내 뜨락

▲  환희사를 뒤로하고 다시 속세로 컴백하다

초파일 특수로 간만에 북새통을 이룬 환희사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빈 공간이 늘어간다. 음료
수도 거진 팔았는지 이내 장사도 접고 행사를 돕고 정리하던 앳된 여인네들도 일부만 남았다.
손바닥만한 이곳에서 목적한 2개의 불상을 질리도록 보고 정자 쉼터에서 지친 두 다리를 쉬고
16시에 그곳을 뒤로하며 속세로 길을 향했다.
시내로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다소 각박한데, 길 옆에는 인왕산에 몇 안되는 조그만 계곡이 온
전한 모습을 보이며 흘러간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물이 풍부해 밤이면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빨래를 하며 수다를 떨던 곳으로 이 골짜기를 '큰절골', 남쪽 청련사 부근 계곡을 '작은절골'
이라 불렀다. 그러니 이 계곡은 큰절골이라 부르면 되나 요즘에는 '환희사계곡'으로도 불린다.
절까지 길을 닦느라 계곡 북쪽이 좀 깎이거나 콘크리트에 묻힌 옥의 티가 상당하지만 계곡이
맑은지 동네 아이들이 냇물을 뒤집으며 수중 동물을 탄압하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환희사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인왕산을 건방지게 가리고 선 인왕산현대아파트와 홍제원현대
아파트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길은 진정을 되찾으며, 5분 정도 더 가면 마을버스 정류장이 나
온다. 여기서 마을버스를 타면 의주로와 홍제역으로 바로 이어지는데, 마을버스를 탈 것도 없
이 5분 더 발품을 팔면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인 의주로가 알아서 모습을 비춘다.

이렇게 하여 인왕산을 겯드린 환희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
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하얀 암반을 미끄럼타고 내려오는 환희사계곡(큰절골)

※ 인왕산 환희사 찾아가기 (2016년 5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홍제역 3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로 돌아가면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다. 거기
  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13번을 타고 인왕산현대아파트117동 종점에서 내려 도보 10분
* 지하철 3호선 무악재역(1번 출구)에서 도보 20분 (인왕아파트교차로에서 우회전)
* 환희사는 보통 18시까지 개방한다. 그 이후는 들어가지 못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2동 산1-1 (☎ 02-735-8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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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 시정을 요청했으나 소용이 없었음) 그러니 보기에 조금 불편하더라도 양해를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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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새로운 꿀단지, 서촌 나들이 (한옥마을)

 


' 서울 서촌(西村) 둘러보기 '

   
배화여고 생활관

▲ 이상범 가옥 담장
◀ 배화여고 생활관
▶ 백세청풍 바위글씨
▼ 박노수 가옥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

   

 

 



▲  옛 청휘각(晴暉閣)터 주변에서 바라본 서촌

서울 도심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서촌(웃대)은 경복궁(景福宮) 서쪽 동네를 일컫는다. <청계천
이북이자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는 북촌(北村), 청계천 이남은 남촌(南村), 창덕궁 동부는 동촌
(東村), 청계천 주변은 중촌(中村)이라 불림>
원래 서촌은 서대문 동쪽 동네를 일컬었고, 지금의 서촌은 '웃대'라 불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
르면서 서촌의 범위는 웃대를 넘어 자하문고개 밑까지 확장된 것이다. 그리고 세종(世宗)이 통
인동(通仁洞)에서 태어난 인연(1397년 출생)을 내세워 종로구청과 지역 주민 주도로 '세종마을
'이란 간판까지 달게 되었다.
서촌의 범위는 청운동(淸雲洞), 효자동(孝子洞), 옥인동(玉仁洞), 신교동(新橋洞), 누상동(樓上
洞), 누하동(樓下洞), 체부동(體府洞), 필운동(弼雲洞), 통의동(通義洞). 통인동, 창성동(昌成
洞), 사직동(社稷洞), 행촌동(杏村洞) 일대로 이들은 서울의 든든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
仁王山)의 동쪽 자락이다.
1394년 서울이 조선의 도읍이 되면서 주거지가 조금씩 형성되었는데, 북촌이 양반사대부와 부유
층의 공간이었다면 서촌은 왕족과 양반사대부, 내시(內侍)와 상궁(尙宮), 의관(醫官), 역관(譯
官) 등 다양한 계층이 살았으며, 특히 중인 계급이 많이 살았다.

인왕산과 북악산(北岳山, 백악산)을 병풍으로 두룬 아름다운 절경으로 인해 조선 초부터 도성(
都城) 내 경승지로 아주 명성이 높았다. 이런 곳은 늘 귀족들이 군침을 흘리는 법이라 일찍이
안평대군(세종의 3번째 아들)부터 이항복(李恒福), 정철(鄭澈), 권율(權慄), 김상용(金尙容),
김수항(金壽恒), 추사 김정희(金正喜)에 이르기까지 많은 귀족들이 집과 별장을 지어 머물렀다.
특히 이곳은 도시와 자연이 경계를 맞닿은 도성의 변두리로 필운대로와 신교동교차로만 지나면
완전 자연에 감싸인 한적한 곳이었다. 게다가 궁궐과 육조(六曹) 등의 관청과는 엎어지면 코 닿
을 정도로 가까우니 귀족들의 별장 선호지로는 아주 그만이었다.

서촌의 이름난 명소는 겸재 정선(鄭敾)이 그의 노련한 손끝을 통해 그림으로 남겼는데, 그 화첩
이 장동(壯洞)8경첩으로 여기서 장동은 서촌의 일원인 청운동 지역의 옛 이름이다. 조선 후기에
는 중인이던 천수경(千壽慶)이 송석원(松石園)이란 시사(詩社)를 세워 중인들의 문학 공간이 되
었으며, 1910년 이후에는 윤동주(尹東柱)와 이상범, 박노수, 이상(李箱) 등 많은 시인과 화가들
이 자연과 가까운 서촌에 안기며 주옥 같은 작품을 그려냈다.

서촌은 북촌만큼은 아니지만 한옥들이 제법 많이 남아있다. 약 700여 채의 한옥이 옥인동과 누
하동, 사직동, 체부동, 창성동 일대에 흩어져 있는데, 정작 150년 이상 묵은 한옥은 하나도 없
고, 왜정 때 개량 한옥과 해방 이후 한옥이 전부이다. 그리고 왜식(倭式) 가옥과 박노수 가옥
등의 양옥도 섞여있어 20세기 초/중반 서울의 주거 양식을 잘 보여준다.
비록 한옥이 많긴 하지만 북촌처럼 정식적으로 한옥마을을 칭하고 있지는 않으며, 비공식적으로
서촌한옥마을이라 불리기도 한다, 또한 창성동 일대 한옥을 따로 '창성동한옥마을'이라 불리기
도 한다.

구한말까지 북촌과 더불어 장안에서 잘나가던 서촌이지만 옥인동 일대에 고래등 저택을 짓고 인
왕산의 맑은 공기나 축내던 악덕 친일파 윤덕영(尹德榮)과 이완용의 부정 때문인지 왜정 이후
적지 않게 기울었다. 게다가 해방 이후 개발제한구역에 꽁꽁 묶이면서 거의 시골 읍내처럼 오랫
동안 정체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루면 강산도 변한다는 서울 도심의 한복판임에도 북촌과 서촌만큼은 시간도 느릿느릿 양반걸
음을 하거나 뒷걸음을 친 것이다. 불과 조금만 나가면 21세기 한복판인데, 서촌은 아직 20세기
초/중반에 머물러 있어 서울의 옛 모습을 더듬기에 좋다.
허나 시간이 너무 정체되면 지역 주민들의 삶이 힘들어진다. 북촌도 도심 속의 꿀단지로 화려하
게 재기를 하고 있지만 서촌은 2011년까지 낙후된 과거 모습으로 남아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한옥 기피증이 생겨나 한옥이 적지 않게 사라졌고, 서촌의 숨겨진 명소들도 은근히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0년 4월 서울시에서 '경복궁 서측 지구단위계획'을 발표하여 한옥 보존과
신축을 장려했고, 북촌으로 단단히 재미를 본 서울시와 종로구청이 서촌을 새로운 꿀단지로 손
을 대면서 서촌도 드디어 때를 만나게 되었다.
그 이후 새로 지어진 한옥이 나날이 늘고 있고, 종로구청에서 서촌 답사코스를 개발하고 홍보하
는 한편, 새로운 명소를 발굴하고, 기존의 명소를 손질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조금씩
북촌을 추격하고 있다. 특히 수성동계곡 복원(2012년 7월)과 박노수 가옥을 구립미술관으로 개
방한 일(2013년 9월)은 서촌에 큰 활력을 불어넣는데 충분했다. 게다가 소규모 갤러리와 공방(工
房),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조금씩 둥지를 틀면서 서촌의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한다.

서촌에는 수성동계곡과 박노수가옥(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 이상범 가옥, 사직공원, 황학정(
黃鶴亭), 선희궁(宣禧宮)터, 백호정 바위글씨, 백세청풍 바위글씨, 창성동 한옥단지, 통의동 백
송터, 신익희(申翼熙) 가옥, 송석원터, 청휘각터, 자수궁터, 이상 가옥, 필운대, 배화여고 생활
관, 체부동 홍종문가옥, 백운동천 바위글씨, 운강대 바위글씨, 보안여관, 행촌동 은행나무, 홍
건희 가옥 등 조선과 근/현대 문화유산이 풍부하게 깃들여져 있으며, 이상범 가옥과 박노수 가
옥, 신익희 가옥은 내부 관람이 가능하다.
그리고 대림미술관, 갤러리시몬 등의 온갖 갤러리와 문화공간, 금천교시장과 통인시장 등의 전
통재래시장이 있다. 특히 금천교시장(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은 제2의 피마골이라 불러도 손색
이 없을 정도로 먹자골목이 크게 형성되어 있는데, 온갖 고기와 해산물, 전, 한식, 분식 등을
내놓는 식당이 즐비해 학생과 직장인, 등산객, 답사객으로 1주 내내 활기가 넘친다.

성북동과 부암동(付岩洞), 북한산(삼각산), 북촌에 빼앗긴 나의 마음을 계속 훔쳐가고 있는 서
촌, 그들에 비해 늦게 인연을 맺었지만, 2011년부터 구석구석 발자국을 남기며 서촌의 숨겨진
속살을 계속 뒤집고 있다. 겉은 허름하고 그저 흔한 주거지로 보이겠지만 그 속은 신대륙 이상
으로 다양한 보물을 품은 곳이 바로 서촌이다.

서촌 나들이는 3호선 경복궁역(1,2,3번 출구)에서 시작하면 좋다. 여기서 자하문길이나 사직단
동쪽(경복궁역 1번 출구)의 필운대로를 중심으로 움직이면 되며, 창의문 옆에 자리한 윤동주시
인의 언덕(청운공원)에서 주요 명소를 거쳐 경복궁역으로 내려오는 것도 괜찮다. 또한 북촌처럼
조그만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고, 그 속에 여러 명소와 소소한 볼거리가 숨겨져 있으니
큰 길만 살피지 말고 서촌 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골목길도 꼭 거닐어보자. 그러면 정말 배부르
고 알찬 서촌 나들이가 될 것이다.

본글에서는 서촌의 명소 일부를 소개하도록 하겠다. 다 다루기에는 너무 많음..

 

 


 

♠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근대 건축물이자 배화학당(培花學堂)의 옛 흔적
배화여고 생활관(培花女高 生活館) - 등록문화재 93호

▲  배화여고 생활관

사직단을 품은 사직공원 북쪽에는 옛 배화학당의 역사를 이은 배화여자대학교와 배화여중/여고
가 한 덩어리로 몰려 있다. 대학과 여중, 여고, 유치원까지 한 울타리 안에 담긴 흔치 않은 현
장으로 교복을 입은 앳된 사춘기 여중~여고생부터 자유분방한 차림의 20대 여대생이 한데 공존
하는 여인들의 공간이다.
여중은 교내 북쪽, 여고는 교내 서쪽에 자리해 있고, 나머지는 대학이 채우고 있는데, 이화학당
(梨花學堂)과 더불어 이 땅에서 제법 오래된 신식학교이자 여학교로 의미가 깊다.

배화학당을 세운 사람은 미국 텍사스에서 건너온 남감리교 소속 여자 선교사 '조세핀 필 캠밸(
Josephine Eaton Peel Campbell, 1853~1920)'이다. 그는 이 땅을 찾은 최초의 여자 선교사로
1897년에 들어와 그들의 목적인 기독교 홍보를 위해 조선 여인들의 교육 계몽을 벌이기로 했다.
그래서 그가 몸담았던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학생들에게 선교 기금을 받아 경복궁 인근 내자동
(內資洞)에 땅을 구입해 캐롤라이나 학당을 세웠다.

학교를 열자 청나라 여선교사 도라유의 도움으로 2명의 여자 아이와 3명의 남자 아이를 간신히
모집해 초등교육을 실시했다. 당시 여자들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학교에 기숙사
를 두어 먹이고 재웠으며, 국어와 한문, 성경 등을 가르쳤다.
1902년 통학생의 입학을 허용하여 학생 수가 30명으로 늘어났다. 1903년 남감리교회 여선교부에
서 경비를 지원하여 학교 건물과 기숙사를 증축했고, 중학교 예비과를 설치했다. 1909년 고등과
를 설치했으며, 1910년 4월 배화학당으로 이름을 갈았다. 이때 초대 교장대리로 니콜스(Nicolls
)여사가 취임하면서 4년제 중학과와 4년제 소학과를 병설했다.
1910년 5월 16일 고등과 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했는데,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가 친히 축사를
보내 그들의 졸업을 치하했으며, 그때 축사를 윤치호(尹致昊)가 대독했다.

1910년 이 땅에 어둠이 내려온 이후, 1914년 왜인 교사의 왜어(倭語) 수업을 거부하기도 했으며,
1916년 1월 지금의 자리로 학교를 옮겨 1915년에 미리 지은 과학관 건물에 보통과/고등과/유치
원을 담았다. 이때 3년제 고등과를 4년제로 개편했으며, 홍천에서 '무궁화 보급 운동'을 펼쳤던
남궁억(南宮檍)이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독립선언문'을 배포해 독립운동에 적극 동참했으며, 1920년 기숙생들
이 만세 사건을 벌이면서 많은 교사와 학생이 왜정에 잡혀갔다. 1922년 4년제 보통과를 6년제로
바꾸고 대학 예과를 설치했으나 이듬해 폐지했으며, 1924년에는 교가(校歌)가 지어졌는데,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가 노래 가사를 쓰고, 교사인 루비 리가 작곡을 했다.

1925년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로 이름을 갈았고, 1926년 캠벨기념관을 신축해 고등과가 이전했다.
1929년 11월 광주(光州) 학생운동이 터지자 격문(檄文)을 붙이는 등, 만세운동에 동참하여 왜정
의 염통을 잠시 쫄깃하게 만들었으며, 1938년 3월 배화여자고등학교, 배화여자소학교로 명칭을
갈았다.
1940년 왜정의 신사(神社) 참배 강요에 선교사들이 반발하면서 모두 그들 나라로 돌아가자 경영
난으로 일시 위기를 맞게 된다. 다행히 이민천(李閔天)의 재산 기부와 여러 교사들의 노력으로
문을 닫는 것은 면했다. 1943년 배화여자소학교를 경성여자배화학교로 변경했으며, 1944년 7월
왜군 통신부대가 캠벨기념관을 무단 점유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1945년 9월, 경성여자배화학교를 폐교하고 재학생을 종로국민학교로 보냈으며, 1946
년 4월, 6년제로 개편하고 배화여자중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허나 1950년 6.25가 터지면서 학
교는 부산(釜山) 초량동으로 내려가 임시 교사를 만들어 운영했으며, 서울의 학교는 폭격으로
상당수가 파괴되고 말았다.
1951년 5월, 교육법 개정으로 배화여중과 배화여고로 개편했으며, 1977년 배화여자대학을 설립
하여 지금에 이른다.

배화학당 초창기 시절, 이화학당도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조선이란 나라가 워낙 남녀유별이 심하
다보니 여학생 교육을 모두 여선교사들이 맡아서 했다. 단 한문(漢文)은 남자 선생이 맡는 경우
도 있었는데, 이때는 선생이 여학생을 마주 보며 가르치지 못하고 항상 뒤로 돌아앉아 여학생의
질문에만 대답을 하거나 선생과 학생 사이에 병풍을 치고 수업을 했었다. 지금으로써는 도저히
상상도 안되는 일이다.


▲  붉은 피부로 이루어진 배화여고 생활관

내가 배화여자대학을 찾은 것은 단순히 여자 구경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정말임ㅠ) 바로 옛
배화학당 건물을 보고자 함이다. 교내(校內)를 들어서면 황금빛으로 물든 은행나무 뒷쪽에 붉게
물든 중후한 모습의 근대 건축물이 있는데, 바로 학교에서 2번째로 오래된 건물인 배화여고 생
활관이다.

언덕에 터를 닦은 배화여고 생활관(이하 생활관)은 배화학당이 내자동에서 이곳으로 둥지를 옮
긴 1916년에 선교사 주택으로 지어졌다. 선교사들 대부분 미국에서 건너와서 그런지 건물도 그
들의 고향, 미국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해방 이후 윌슨 선교사의 집으로 사용되었다
가 1971년 배화여고에 기증하면서 배화여고 생활관 및 동창회관으로 쓰였다. 그러다가 1997년
이후에는 동창회관으로만 쓰이면서 많이 한가해졌다.

서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반지하와 2층으로 이루어졌는데, 반지하는 완전 밖으로 노출되어
있어 준3층이나 다름이 없다. 건물 현관은 1층에 있으며, 반지하는 현관을 거쳐 내려가야 된다.
현관 앞에는 돌출된 지붕을 만들고 그 위를 발코니로 사용했으며, 건물 내부에는 홀과 계단이
있고, 그 양쪽으로 방을 두었다. 건물의 겉모습은 서양식 근대 건축물로 붉은 피부의 벽돌을 사
용했는데, 지붕은 흥미롭게도 한옥의 기와지붕을 취했다. 그래서 서양식과 우리식이 조화를 이
룬 건물로 지붕에는 2개의 붉은 굴뚝을 세워 연기로 하늘을 찌른다. 허나 난방 방식도 많이 바
뀌었으니 이제는 무늬만 굴뚝이 되어 모락모락 연기를 불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늦가을이 씌운 황금옷을 입고 아장아장 신이 난 은행나무
(나무 그늘에 캠벨 여사의 흉상이 있고, 그 뒷쪽에 생활관이 있음)

▲  은행나무 그늘에 세워진 배화학당의 창시자 '조세핀 필 캠벨'의 흉상과
리드(Dr. C.F. Reid)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비(왼쪽), 그리고 2007년에
세운 배화학당 창립 110주년 및 대학 개교 30주년 기념비(오른쪽)

▲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배화여고 과학관

생활관 앞에는 넓게 운동장이 닦여져 있다. 그 북쪽에는 교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과학관이
붉은 피부를 드러내며 자리해 있는데, 배화학당이 필운동으로 자리를 옮기던 1915년에 2층으로
지어진 것을 나중에 3층으로 올렸다. 바로 옆 생활관보다 무려 1년이나 선배이지만 아직까지 문
화유산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 아마도 학교에서 문화재 지정에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그리고 사진에는 없지만 배화여고 본관(本館)도 생활관, 과학관과 마찬가지인 붉은 벽돌 건물로
1926년에 켐벨기념관으로 지어졌다. 1944년 왜군 통신부대가 무단으로 점유했으며, 6.25 시절에
반파된 것을 개축하여 현재는 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유치원 놀이터 옆에는 수북하게 자라난 회화나무 1그루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나이는 대략
200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아직 오래된 나무로써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보호수 등급도 따지
못했지만 그에게는 인간이 달아주는 보호수란 훈장 따위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끝으로 여기서는 빠졌지만 배화여고 필운관 뒷쪽에 필운대(弼雲臺)란 오래된 명소가 숨겨져 있
다. 이곳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오성 이항복(李恒福)의 집터로 필운(弼雲)은 그의 또다른
호이다.
오성의 집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오래 전에 사라지고 고종 때 그의 후손인 이유원(李裕元)
이 '필운대' 3자와 이곳을 소개하는 바위글씨를 바위에 새겼다. 원래는 이들도 보려고 했는데
그만 깜박하고 말았다. 교문을 나오고 한참이 지나서야 앗차 생각이 나더군.. 아무래도 이번은
인연이 아닌듯 싶어서 쿨하게 다음으로 미루었다.

※ 배화여고 생활관, 필운대 찾아가기 (2015년 12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에서 직진하면 사직동주민센터와 파출소가 나온다. 여기서 주
  민센터와 파출소를 왼쪽에 끼고 '사직로9길'로 들어서면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과 매동초교가
  나오며, 그들을 지나면 배화여자대학 정문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생활관의 옆구리가 정면에
  보이며, 필운대는 교내 서쪽 필운관(배화여고) 안쪽에 있다. (경복궁역에서 도보 10분)
* 경복궁역 2번 출구를 나와서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금천교시장)를 가로질러 직진하면(필운대
  로1길) 배화여자대학 정문이다.
* 사직단과 경복궁역(사직동주민센터) 정류장에서 도보 8분
  (이곳을 경유하는 시내버스 노선 - 171, 272, 601, 606, 700, 706, 707, 7025, 9703번)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산12 (배화여고 ☎ 02-724-0300)
* 배화여고 홈페이지는 아래 회화나무 사진을 클릭한다.


▲  유치원 운동장에 그늘을 드리우는 오래된 회화나무

 


 

♠  근/현대 동양화의 산실이자 왜정 때 개량한옥
이상범(李象範) 가옥 및 화실(畵室) - 등록문화재 171호

▲  이상범 가옥

배화여고 생활관을 둘러보고 서촌을 남북으로 가르는 필운대로를 따라 조금 올라가면 누하동(樓
下洞) 주택가이다. 여기서 왼쪽으로 펼쳐지는 갖은 골목길을 유심히 살펴보자. 앞서 배화여자대
학 유치원 회화나무가 가옥들 뒷쪽으로 짙게 보이는 골목길로 들어서면 그 막다른 곳에 서촌을
거쳐간 근/현대 동양화가 이상범의 가옥과 화실이 있다.
골목 입구에는 그를 알리는 이정표가 없기 때문에 동네 뒤로 보이는 배화유치원 회화나무를 단
서로 삼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찾아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눈뜨고도 놓칠 정도로 주택가
속에 파묻혀 있다.


▲  이상범 가옥과 화실이 있는 골목길
골목 끝에 자리한 집이 이상범 가옥이며, 그 뒤에 배화유치원 회화나무가 바라보인다.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푸른색 기와 대문 안쪽이 이상범의 화실과
그의 아들 내외가 거주하는 집이다.

▲  담장 너머로 바라본 이상범 화실 (청전화숙)

골목 끝 직전에는 이상범이 그림을 그리던 붉은 벽돌의 집이 있다. 그는 집 바로 동쪽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실을 두어 그림을 그리고, 많은 제자를 길러냈는데, 이 화실을 청전화옥(靑田畵屋)
또는 청전화숙(靑田畵宿)이라 불렀다. (여기서 '청전'은 이상범의 호)
겉을 보면 별로 오래되지 않은 주택처럼 보이지만 속은 1930년대에 지어진 왜식(倭式) 목조 건
물로 바깥에 빨간 벽돌과 기와를 씌웠다. 건물 남쪽에는 큰 창을 두어 실내를 밝게 하였고, 서
쪽에는 집과 이어지는 통로를 내었는데, 지금은 담장을 막아놓았다.
현재 화실은 그의 아들이 소유하고 있으며, 바로 동쪽에 그들이 사는 주택이 있다. 이상범 가옥
은 서울시에서 매입하여 관리하면서 관람시간 내에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지만 화실만큼은 아직
은 자유롭지 못해 관람을 원할 경우 초인종을 눌러 집주인에게 요청해야 된다. (나는 아직 화실
은 구경 못함)
화실에는 청전이 그림을 그리던 현장이 고스란히 남아있으며, 그의 손때가 탄 미술용품과 여러
유품, 서적이 전한다.

▲  화실 대문에 걸린 청전화옥 현판

▲  화실 담장에 걸린 표석


▲  함정이 깃든 이상범 가옥 바깥 대문

이상범 가옥의 철제 대문은 늘 굳게 닫혀져 있다. 그래서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비공개로 여
기고 발길을 돌리기 일쑤, 허나 그것이 대문의 함정이다. 화실은 몰라도 가옥은 2012년부터 속
세에 개방된 상태이므로 함정에 속지 말고 과감히 초인종을 눌러보자. 그러면 닫혔던 문이 확
열릴 것이다. 그렇게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쪽 대문이 나타나는데, 이 대문이 원래 것이다.
바깥 대문은 가옥을 손질하면서 새로 단 것이다.


▲  이상범 가옥 안쪽 대문 (예전 대문)

안쪽 대문을 들어서면 뜨락과 대문 사이에 자리한 문간방이 나온다. 이 방은 현재 가옥 관리인
이 머무는 일종의 경비실로 예전에는 청전의 3째 아들 부부가 거처하기도 했고, 4째 아들 이건
걸(李建傑)이 작업실로 쓰기도 했다.

    ◀  행랑채 응접실 (안쪽은 청전의 방)
문간방 맞은편에는 행랑채 응접실이 있다. 이곳
은 청전이 남자 손님을 맞던 방으로 탁자와 의
자가 놓여져 있으며, 안쪽 방은 청전이 생활하
던 방이다.
손님이 많았던 청전은 대문과 이웃한 행랑채 끝
방을 자신의 방으로 삼고 그 양쪽 방을 손님 응
접실로 삼았으며, 방 동쪽에는 별도 건물로 화
실(청전화숙)을 두어 직접 드나들었다.


▲  주인이 가고 없는 청전의 빈 방
청전은 여기서 잠을 자고 책을 읽으며 작품을 구상했다.

▲  청전의 방에서 바라본 안채 응접실
안채와 연결된 안채 응접실은 여자 손님을
맞이하던 방이다.

▲  거실에서 바라본 안채 응접실과
청전의 방


▲  거실(마루)과 안채 응접실(오른쪽)

이상범 가옥은 1930년대에 지어진 서울에 흔한 개량한옥으로 1942년 청전이 매입하여 1972년 세
상을 뜰 때까지 30년을 살았다. 가옥의 구조는 'ㄱ'자 안채와 'ㅡ'자 행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도시 한옥에서는 드물게 부엌에 찬마루를 갖고 있는 것이 이 집의 강한 특징이다.
가옥 서부는 가족들의 생활공간으로, 동부는 자신의 사회적 활동공간으로 구분했으며, 화실에서
그의 많은 작품이 숱한 인고의 노력 끝에 태어났다. 그리고 배렴과 박노수를 비롯한 많은 열성
제자들이 이곳을 거쳐 현대 미술의 한 획을 그으면서 현대 미술의 살아있는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을 받았다.

청전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의 자손들이 거주하다가 2006년 서울시에서 매입하면서 그들은 화
실 옆 주택으로 집을 옮겼다. 이후 2008년 복원 공사를 벌였으며 2012년 속세에 개방되어 자유
롭게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허나 집을 알리는 이정표도 아직 없고, 집의 인지도도 그의 높은
이름에 걸맞지 않게 너무 낮아 찾는 이는 별로 없는 실정이다.

가옥 내부에는 청전의 방과 안방 등 6개의 방과 마루(거실), 찬마루, 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청전 일가가 사용하던 TV수상기와 빨래 방망이, 돌판, 냉장고, 가구, 그릇과 밥상 등이 놓여져
청전의 숨결을 조금이나마 누리게 해준다.

▲  거실 한쪽에 자리한 냉장고
청전 식구들이 사용하던 냉장고라고 한다.

▲  막이 닫힌 오래된 TV수상기
그 밑에 빨래 방망이와 돌판이 있다.

▲  거실 서쪽에 자리한 안방
안방은 부인의 거처로 청전이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  찬마루에 걸린 누하동천(樓下洞天) 현판
이 글씨는 청전이 쓴 것으로 그는 자신의
집을 누하동천이라 칭하며 소중히 여겼다.


▲  아랫방(왼쪽)과 찬마루(가운데), 부엌
아랫방은 청전의 2째 아들(이건웅) 부부가 살던 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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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전 식구가 식사를 준비하거나 밥을 먹던 부엌 찬마루
그들이 사용하던 밥상과 놋쇠로 된 그릇이 고스란히 놓여져 갑자기
밥생각을 간절하게 만든다.

▲  껍데기만 남은 부엌 부뚜막과 검은 피부의 솥뚜껑
장작을 먹으며 모락모락 연기를 내뿜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청전의 작품도 저 솥에서 나온 밥과 음식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  마당과 장독대, 고품격 무늬가 새겨진 남쪽 담장
담장 벽면에는 궁궐 담장이나 벽에서나 볼 수 있는 화려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 무늬는 청전이 직접 제작한 것으로 벽면 절반이 뜯어져 나가
허전한 모습이다. 장대한 세월이 이곳을 방문한 기념으로
하나씩 뜯어간 모양이다.

※ 청전 이상범(1897~1972)의 생애
이상범은 1897년 몰락한 선비 집안인 이승원(李承遠)의 3째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
워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공짜로 교육을 시키던 서화미술원에 입학하면서 그의 숨겨진 미술적
재능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그 빛을 제대로 비추게 만든 이가 바로 그의 스승인 안중식(安中植
)으로 1917년 미술원을 수료하자 자신의 화실인 경묵당(耕墨堂)에 머물게 하며 미술을 가르쳤다.

1923년 이용우(李用雨), 노수현(盧壽鉉), 변관식(卞寬植)과 동연사(同硯社)를 조직하고 전통 회
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으나, 그해 11월 노수현과 2인전을 개최하는 선에서 중단되고 말았다.
1929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으며, 그 인연으로 추천 작가와 심
사 위원을 역임했다.

이후 동아일보사에서 근무하다가 1936년 손기정이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1등을 먹자,
그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운 사건으로 옥고를 치루었으며, 감옥을 나온 이후 집에 청전화
숙을 차리고, 오로지 그림과 제자 양성에 모든 것을 내던졌다. 그의 화숙을 거쳐간 이로는 배렴
과 박노수가 있으며, 청전의 그림 솜씨가 나날이 신을 닮아가면서 미술계의 춘원 이광수로 찬양
을 받기도 했다.

1947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가 창설되자 추천 작가, 심사 위원, 고문 등을 역임했고, 1950년부
터 홍익대 교수를 지내다가 1961년에 퇴직, 집에서 그림을 벗삼으며 말년을 보내다가 1972년 세
상을 떠났다.

청전의 작품은 그의 스승이던 안중식의 영향으로 남북종(南北宗) 절충 화풍을 추구하였다. 그러
다가 1923년부터는 논과 개울을 근경에 두고 나지막한 야산을 원경에 배치해 횡으로 전개되는
독창적인 구도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때 나온 작품으로 '산수도'(1919년), '모연도(暮煙圖)'
(1924년), '초동도(初冬圖)'(1926년) 등이 있다.
그만의 독자적인 양식이 형성된 것은 1945년 이후로 농촌의 전원 풍경을 2단의 간단한 구도 속
에 배치했으며, 엷은 먹에서 점차 진한 데로 변화하는 농담(濃淡)의 묘를 살려 향토색 짙은 세
계로 승화시켰다. 특히 시골 산야의 정취를 계절 변화에 따라 특유의 기법으로 처리하면서 한국
적 서정성을 추구했다.
이 당시 대표작으로 '설로도(雪路圖)'(1957년), '고원귀려도(高原歸旅圖)'(1959년) 등이 있으며,
전통적 수묵 기법의 새로운 창조적 추구와 한국 산야와 전원의 향토적 분위기를 독자적인 사상
풍의 화법으로 이루어낸 우리나라 현대 한국화의 대표적인 화가로 꼽힌다.

※ 누하동 이상범 가옥 찾아가기 (2015년 12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1번 출구)에서 직진하면 사직공원 바로 직전에 사직동주민센터가 나온
  다. 여기서 오른쪽 필운대로길로 들어서 조그만 언덕을 넘으면서 왼쪽 골목길을 잘 살펴보자.
  커다란 회화나무가 바로 뒤에 보이는 조그만 골목길을 들어서면 그 길의 끝에 이상범 가옥과
  화실이 있다.
* 가옥 관람시간 : 9시~18시 (겨울은 17시, 매주 월요일은 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하동 178, 181 (필운대로 31-7)

 

 


 

♠  서촌에 숨겨진 명소, 옛 백호정(白虎亭)의 아련한 흔적

▲  개발의 분별없는 칼질 앞에 외로운 신세가 된 옛 백호정터

주택들로 밀림을 이룬 누상동 서남쪽 구석에는 서울 장안의 활터로 유명했던 백호정터가 숨겨져
있다.
이곳에는 백호정 바위글씨와 글씨가 새겨진 바위, 죽은 샘터가 남아있는데, 바위 바로 윗쪽에는
배화여자대학이 콘크리트로 흉하게 터를 다지고 캠벨기념복지관을 세우면서 보기에도 참 가련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바위 머리까지 학교 땅이라고 해도 바위를 저렇게 짓누르면서까지
콘크리트를 바르고 건물을 세워야 했는지 모르겠다.
여기서 가까운 청운동의 백세청풍(百世淸風) 바위글씨도 그 위에 졸부들의 빌라가 들어서 있고,
명륜동(明倫洞)에 있는 증주벽립(曾朱壁立) 바위글씨도 그 위에 집들이 들어앉아 그들을 깔아뭉
개니 그게 바로 개발이 철학도 없이 칼질을 자행한 결과이다. 인간이 저지른 개발의 칼질이 그
들에게 몹쓸 칼을 씌운 셈이다. 그래도 이곳은 바위가 그런데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고, 주변에
수목도 조촐하게 숲을 이루어 백호정터를 감싸니 그나마 백세청풍이나 증주벽립보다는 좀 나은
상황이다.

백호정은 서촌에 있던 5개의 활터인 오사정(五射亭)의 하나로 무인들이 궁술을 연마하던 곳이었
다. 허나 굳이 활쏘기가 아니더라도 이곳은 풍경이 빼어나 많은 문인들이 바위가 닳도록 찾아왔
던 장안의 경승지였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오사정이 폐쇄되면서 그때 문을 닫았는데, 6.25이후 무분별하게
집들이 들어서면서 아련하게 남은 활터의 흔적마저 완전 지워지고 말았다. 다행히 백호정이란
바위글씨가 백호정을 엄호했단 바위 피부에 화석처럼 새겨져 백호정의 옛 정취를 조금이나마 풍
겨주고 있는데, 이 글씨는 엄한명(嚴漢明, 1685~1759)이 새긴 것으로 여겨지며, 글씨가 제법 크
고 당찬 모습이다.

백호정이란 하얀 호랑이란 뜻으로 천하 호랑이의 성지로 추앙받던 인왕산 호랑이와 관련이 있다.
조선 초기에 인왕산에 살던 병든 호랑이가 풀속에서 솟는 물을 마신 이후 병이 나았는데, 물이
솟는 자리에 가보니 조그만 샘이 있었더랜다. 그래서 그 샘을 약수터로 삼으니 그것이 백호정
약수로 이 물을 마시면 모든 병이 낫는다는 이야기가 있어 왕년에는 많은 폐질환자들이 찾아와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렇게 장안에서 이름난 약수터였지만 개발의 칼질이 그 약수의 명
줄을 위협하면서 1980년대 이후 샘터는 끝내 숨이 끊겼고, 세상 뇌리 속에 완전 잊혀졌다.
다행히 1990년대 후반 이곳을 관리하는 효자동(孝子洞)에서 동네 명소로 지정하고 주변을 정비
하면서 그나마 바위글씨라도 유지하게 되었고, 2014년 6월,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어 개발의
칼질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문화재 지정 명칭은 '백호정') 하긴 서울에서 이렇게 처참한 모습
이 된 명소와 샘터가 어디 한둘이랴..?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상동 1-33


▲  한토막 전설이 되버린 백호정 약수터

약수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라 샘터를 머금은 연두색 문은 거의 열릴 일이 없다. 방학동(放鶴
洞)의 원당(元堂)샘처럼 말끔히 복원을 하여 다시금 샘물이 콸콸 솟는 그날을 재현할 수는 없을
까? 허나 그전에 바위를 깔고 앉은 학교 건물과 인근 주택들 먼저 싹 지워야 될 것이다. 그래야
물도 마음 놓고 이곳까지 올 것이 아니던가?


▲  백호정 바위글씨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9호

▲  백호정 바위글씨가 새겨진 바위, 그리고 그 위에 굴레처럼 씌워진
흉물스러운 개발의 잔재물


▲  자수궁(慈壽宮)터 표석

필운대로는 사직공원에서 통인시장 서쪽, 맹학교와 농학교 앞을 거쳐 신교동로터리에서 끝을 맺
는 길이다. 서촌의 서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길로 길 주변에 사직공원, 배화여고 생활관, 이상
범가옥, 체부동 홍종문가옥(비공개), 홍건희가옥, 수성동계곡, 백호정 바위글씨, 박노수가옥,
송석원터, 자수궁터, 우당기념관, 선희궁터 등 명소가 풍부해 서촌의 꿀단지 같은 길이니 꼭 둘
러보기 바란다.

필운대로를 거닐다가 옥인아파트에 이르면 자수궁터 표석을 만날 수 있다. 자수궁은 광해군(光
海君)이 1616년에 지은 궁궐로 조선 초부터 이곳에는 북학(北學)이란 학당과 후사가 없는 후궁
들의 거처가 있었는데, 인왕산과 경희궁 자리에 왕기(王氣)가 서려있다는 풍수설(風水說)이 나
돌자 광해군은 그 기운을 막고 풍수설에 따른 백성들의 혼란을 잠재우고자 자수궁과 인경궁(仁
慶宮), 경덕궁(敬德宮, 경희궁)을 지었다.
궁이라고는 하지만 규모는 작았으며,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인경궁
은 철거되어 일부 건물과 목재가 창경궁으로 옮겨졌고, 자수궁은 후사가 없는 후궁들이 비구니
가 되어 말년을 보내는 일종의 이원()으로 형태를 전환하여 자수원()으로 이름을 갈
았다.

자수원은 한때 5,000명이 넘는 여승이 머물렀으나 경비가 많이 드는 등, 폐해가 심해 1661년 2
월 부제학(副提學) 유계() 등의 상소로 철거되었으며, 건물 목재는 성균관(成均館) 건물을
짓거나 보수하는데 동원되었다. 이후 자수궁 돌다리와 일부 건물이 왜정 때까지 남아있었으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매국노의 대명사인 이완용(李完用)이 이곳을 매
입하여 잠시 살기도 했다. 이완용은 거의 공공의 적이 되어 목을 노리는 사람들이 나날이 많아
지자 그 더러운 목숨을 지키고자 여러 번 집을 옮겼다.


▲  송석원(松石園)터 표석

필운대로 통인시장 부근 길가에는 송석원터 표석이 있다. 송석원은 인왕산 계곡의 하나인 옥류
동(玉流洞)에 있던 천수경(千壽慶)의 집으로 그의 자는 군선(). 호는 송석원(), 송석
도인()이다.
천수경은 가난한 평민 출신으로 한시(漢詩)에 아주 능했으며, 1786년 옥류동에 집을 짓고 송석
도인을 칭하며 취미가 비슷한 중인 계급의 지식인 10여 명을 모아 일종의 동호회를 결성했다.
그 모임이 옥계시사(玉溪詩社), 또는 송석원시사()였다. <서사(西). 서원시사(西
)라고도 함>

그 모임은 그의 집인 송석원에서 열렸으며, 1817년 5월 천수경의 회갑을 기념하는 시사 모임에
추사 김정희(金正喜)도 찾아와 회갑 선물로 송석원 뒤에 있던 바위에 송석원 바위글씨를 남겼다.
당시 추사는 인근 통의동(通義洞) 백송터에 살고 있었다. (바위글씨는 1950년대 이후 동네 주민
들이 집을 지으면서 깨부심)

옥계시사는 천수경이 죽은 이후 점차 와해되었고, 송석원은 명성황후(明成皇后) 일가인 민규호(
閔奎鎬)와 민태호(閔台鎬)가 차례대로 접수했다가 친일매국노 윤덕영이 모두 매입했다.
그 작자는 1914년 독일인 감독을 시켜 222평의 양옥 건물인 벽수산장(碧樹山莊)을 지었는데, 무
려 10여 년이 걸렸으며, 산장 외에도 한옥 14동(그중의 박노수가옥도 있음)을 지어 그의 일가에
게 주었다.
당시 벽수산장은 서울 장안에서 제일 호화로운 주택으로 꼽혔는데, 사람들은 '돌문안 뾰족집'이
라 불렀다.

1940년 윤덕영이 지옥에 떨어지자, 그의 아들이 상속을 받았다. 허나 세상물정 모르던 금수저라
금세 재산을 말아먹었고, 집 유지비도 벅차서 1941년 왜열도 회사인 미쓰이(三井)에게 팔아넘겼
다. 미쓰이는 이때 부근 청풍계도 매입하여 그곳 절경을 싹 말아먹었다.

해방 이후 벽수산장에 덕수병원이 들어섰으며, 6.25시절에는 잠시 조선인민공화국 청사가 되기
도 했다. 청사로 쓰일 정도로 건물이 웅장하고 멋드러졌기 때문일 것이다. 1951년 이후에는 유
엔군장교 숙소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 건물로 쓰였으며, 1966년 수리를 하던 중 불이나 건
물은 전소되었다. 그래도 부시기 아까운 건물이라 중수를 하려고 했으나 도저히 가능성이 없어
1973년 말끔히 부셔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벽수산장 외곽에 세운 돌기둥 3개가 남아있고, 그가 지은 한옥 1동이 옥인동 구
석에 남아있으며, 딸에게 준 2층짜리 건물은 박노수가 매입하여 2011년까지 살다가 2013년 9월
에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본글은 여기서 끝.. 나머지 명소는 별도의 글에서 소개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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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이색 명소 ~ 인왕산과 선바위 (국사당, 해골바위)

 


'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 인왕산(仁王山) 나들이 '

▲  인왕산 선바위의 위엄


 

겨울의 제국이 슬슬 고개를 들던 11월 끝 무렵에 일행들과 간만에 인왕산 선바위를 찾았다.
오후 2시에 독립문역에서 그들을 만나 회색빛 아파트촌으로 변해버린 무악동(毋岳洞) 동네
를 가로질러 선바위로 올라갔다.
선바위 밑에 자리한 인왕사 입구에 이르니 인왕사가 일주문을 내밀며 우리를 마중한다.

 


♠  한 지붕 다가족의 특이한 절집, 불교와 무속이 어우러진 도심 속의
이채로운 현장 ~ 인왕산 인왕사(仁王寺)

▲  인왕사 일주문(一柱門)

인왕사의 정문인 일주문은 속세살이만큼이나 각박한 경사면에 자리해 있다. 이 문은 다른 일주
문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1m 정도 솟은 기단 위에 기둥을 심고 그 기둥에 용을 그려 기둥을
휘감게 했다. 그리고 지붕 길이와 비슷한 평방(平枋) 위에 절 이름을 담은 현판을 내걸어 이곳
의 정체를 속세에 밝힌다.

일주문을 지나면 수레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조그만 주차장이 나오고, 여기서 국사당까지 선바
위로 오르는 콘크리트 계단길을 중심으로 조급한 경사면에 빼곡히 건물을 심은 인왕사 경내가
숨가쁘게 펼쳐진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각 건물마다 별도의 절 이름을 칭하고 있어 고개를 심
히 갸우뚱하게 한다. 분명 인왕사는 분명한데, 왜 건물들이 이름을 달리하는 것일까? 그것이 바
로 인왕사만이 지닌 독특한 개성이자 결점이다.

인왕사는 8개 종단에 15개(절집 수는 변경될 수 있음)의 절이 군락을 이루며 가람을 이룬 절이
다. 그러니까 인왕사란 테두리 안에 서로 다른 절이 각자의 영역을 가지며 인왕사란 한 지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종단도 다르고, 주지승도 각 절마다 달라 제각각 따로 놀았다.
이는 마치 13개의 연맹국(聯盟國)으로 이루어진 옛 가야(伽倻)와 비슷하다. 가야 역시 가야란
테두리 안에 무려 13개의 나라가 따로 놀지 않았던가.
이렇게 각 절들이 따로국밥처럼 되버리니 서로 갈등이 심해졌다. 하여 4년에 1번씩 절 전체를
총괄하는 주지승을 뽑아 절 전체의 살림과 행정을 맡기면서 조금씩 통합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속세만큼이나 복잡하게 이루어진 인왕사의 고유 건물은 선암정사(본원정사)와 대웅전, 관음전,
보광전, 극락전(極樂殿) 등이며, 이들을 중심으로 법회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이외에는 이
름만 같이 쓰고 있는 다른 절로 보면 된다.


▲  숲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인왕사 (맞배지붕의 큰 건물이 대웅전)

인왕사는 1912년에 창건된 절로 역사가 이제 103년 밖에 안된다. 그러다보니 아직 내력(來歷)을
알리는 안내문도 갖추지 못했으며, 죄다 근래에 지은 건물이라 고색의 향기는 여물지도 못했다.
경내 위쪽에 국사당과 선바위 등의 문화유산이 있지만 그들은 애시당초 인왕사와는 관련이 없던
존재들이다.

인왕산에는 원래 조선 초기에 창건된 인왕사가 있었다. 지금의 인왕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존
재이나 이름이 같다보니 절과 관련된 자료에는 대부분 쾌쾌묵은 옛날 부분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옛날 인왕사는 어떤 절이었을까?
1392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1394년에 개경(開京)을 버리고 서울
로 도읍을 옮겼다. 이때 인왕산 동쪽 자락에 인왕사를 세워 궁궐 내원당(內願堂)에 머물던 승려
조생(祖生)을 보내 주지로 삼았으며, 인왕사란 이름은 부처의 법을 지키는 인왕상(仁王像)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절의 규모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절이 있던 골짜기를 인왕동(仁王洞)이라 하
였고, 산 이름도 덩달아 인왕산이 되었을 정도니 절의 규모가 어느 정도는 되었음을 가늠케 한
다. 게다가 태조가 창건한 절이니 왕실의 지원도 넉넉했을 것이며, 세종(世宗)과 성종(成宗) 때
기록에도 가끔 절의 이름이 등장한다.

연산군(燕山君) 시절에는 인왕산에 안겨있던 인왕사와 복세암(福世庵), 금강굴(金剛窟)이 경복
궁(景福宮)보다 높은 곳에 자리해 궁궐을 누르며 바라보고 있다고 하여 인근 민가와 함께 부셨
다는 기록이 있다. 연산군은 전제왕권을 지향하던 군주로 절과 민가가 높은 곳에서 궁궐을 바라
보고 있는 것에 적지 않게 기분이 뒤틀렸을 것이다.
중종(中宗) 이후에 절을 다시 일으켰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다고 하며, 그 이후
로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12년 박선묵 거사가 선바위 밑에 절을 세우고, 선바위를 뜻하는 선암정사(禪巖精舍)
라 하였다. 기도처로 유명한 선바위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자 이곳에 절을 세운 듯 싶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왕사란 이름은 취하지 않았으며, 1914년 탄옹(炭翁)이 선암정사 곁에 대원암
(大願庵)을 지으면서 인왕사의 한 지붕 다가족 시대가 시작되었다.

1922년에는 극락전을 지었고, 1924년 자인(慈仁)이 안일암(安逸庵)을 세웠다. 1925년에는 남산
꼭대기에 있던 국사당이 왜정의 태클로 인왕사 위쪽에 새롭게 둥지를 틀었으며, 1927년에는 극
락전을 중수하고 1930년 치성당(致誠堂)을 세웠다.
그러다가 1942년 각각 분리된 암자를 인왕사란 이름으로 통합하면서 잊혀진 이름 인왕사가 다시
속세에 고개를 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연히 옛 인왕사를 계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인왕사 위쪽에는 인왕산의 오랜 명물인 선바위가 있다. 선바위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던 시절
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 및 아들을 비는 기자신앙(祈子信仰) 등 토속신앙(土俗信仰)의 성지(聖
地)였으며, 그 밑에 자리한 국사당은 무당이 굿판을 벌이는 도심 속의 무속 현장이다.
또한 선바위 주변 인왕산 서남쪽 자락은 대자연이 빚은 기묘하게 생긴 바위들이 즐비하고 선바
위와 국사당의 영향으로 산자락과 바위, 약수터 곳곳에 자리를 피고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많
다. 게다가 매일 굿소리도 끊이질 않는다.

서울에 계룡산(鷄龍山) 같은 곳이자 도심 속의 이채로운 현장으로 민가(民家)와도 적당히 거리
를 두고 있어 굿을 벌이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인왕사는 바로 이런 토속신앙과 거리낌없이 한데
어우러진 무불(巫佛)의 공존 현장으로 색다른 신앙체계를 천하에 보여준다.


▲  국사당(國師堂) - 중요민속문화재 28호

선바위로 오르다보면 인왕사 경내 가장 윗쪽에 국사당이란 건물이 모습을 비춘다. 겉으로 보면
그리 오래된 티가 풍기질 않지만 엄연한 조선 후기 건물로 비록 자리를 옮기긴 했어도 조선 초
기부터 존재한 서울을 지키던 신당(神堂)이다.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無學大師)를 비롯해 여
러 무속신(巫俗神)을 모시고 있으며, 무학대사를 모신 탓에 국사당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국사당은 정면 3칸(협칸을 포함하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목멱산(木覓山)
이라 불리던 남산(南山) 꼭대기 현 팔각정(八角亭) 자리에 있었다.
1396년 태조는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삼아 서울을 지키는 존재로 신성시 했는데, 이때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1404년에는 호국(護國)의 신으로 품격을 높이면서 목멱신사(木覓神祠)라
불렸다.

남산 꼭대기에서 서울 장안을 굽어보며 오랜 세월 별탈없이 지내온 국사당은 왜정(倭政) 시절에
강제로 정든 곳을 떠나야 했다. 때는 1925년 왜정이 지금의 남산도서관 자리에 조선신궁(朝鮮神
宮)을 지었는데, 국사당이 그보다 높은 곳에 들어앉은 것에 쓸데없이 뿔이 나 다른 곳으로 옮기
라고 요란하게 징징거렸다. 그래서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를 하던 곳이라 전하는 지금의 자리
로 급하게 이전되었다.
이전할 때 사당의 목재를 옮겨와 원형대로 복원했으며, 자연 암반을 기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
하 기초는 없다. 그리고 석재와 흙으로 터를 평탄하게 다지고 단단한 돌을 쌓아서 1m 정도의 전
단(前壇)과 동단(東壇)을 만들었으며, 건물 양쪽에 마치 날개를 붙인 듯, 협칸 1칸씩을 달아 마
치 큰 새가 날개짓을 하는 듯 하다. 이 협칸<양측실(兩側室)>은 무당과 기도를 드리러 온 이들
의 휴식처 및 기도처로 쓰인다.

건물 면적은 11평 정도로 전체적으로 구조가 간결하고 목재도 튼튼해 18세기 건축 기법이 잘드
러나 있으며, 당시 서울 장인들의 솜씨를 볼 수 있다. 그래서 다른 당집에 비해 건물이 견고한
편이다.

국사당은 거의 매일 굿이 열려 굿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굳이 굿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찾아
와 기도를 올리는 사람도 많으며, 특히 정월에 많이들 찾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하는 굿은 사업
번창을 비는 경사굿과 병의 쾌유를 비는 병굿과 우환굿, 부모나 가족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진
오귀굿 등이다. 허나 이곳은 무당이 상주하는 곳은 아니고, 김형재란 사람이 집안 대대로 관리
하는 건물로 그가 당주(堂主)이다. 무당의 요청이 있으면 돈을 받고 자리를 빌려주며, 굿은 3월
과 10월에 많이 열린다. 반면 음력 섣달은 거의 없다고 한다.

건물을 소유한 당주는 당에 봉안된 신들을 위해 2년마다 동짓달에 날을 잡아서 '마지'라는 제사
를 올리는데, 무녀(巫女)를 불러 굿을 한다고 한다. 이처럼 서울에서는 거의 잊혀진 서울 무속
인들의 안식처이자 그들의 성지로 서울 무속신앙이 살아있는 거의 유일한 현장이다. 또한 국사
당과 선바위 주변은 굿판과 기도장소로 명성이 높아 무속인들과 기도를 하려는 속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국사당 내부 중앙에는 무속 신앙의 신을 그린 무신도(巫神圖) 18점이 있는데, 곽곽선생만 빼고
모두 비단 바탕에 그려졌다. 이들은 '국사당의 무신도'란 이름으로 중요민속문화재 17호로 지정
되었는데, 그림에 그려진 존재들은 태조 이성계인 아태조(我太祖)를 비롯해, 강씨부인, 호구아
씨, 용왕대신(龍王大神), 산신(山神)님, 창부씨(昌夫氏), 신장(神將)님, 무학대사, 곽곽선생,
단군(檀君), 삼불제석(三佛帝釋), 나옹대사(懶翁大師), 칠성(七星)님, 군웅대신(軍雄大神), 금
성(錦聖)님, 민중전(閔中殿), 최영(崔瑩)장군 등이며, 양쪽 협칸에는 각각 4점과 6점의 무신도
가 걸려있어 총 28개의 무신도가 있다.
또한 명도(明圖)란 이름에 명두(明斗) 7점이 무신도 사이에 걸려있는데, 명두란 무녀를 계승할
때 넘겨주는 일종의 증표로 큰무당이 자신을 이을 사람을 선정해 그 상징물로 명도를 주고, 이
것을 받은 무녀는 자신의 수호신처럼 귀하게 여긴다. 이 명두는 놋쇠로 만든 것으로 청동기시대
제천의식(祭天儀式)에 사용되었던 도구들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들 무신도는 한 사람이 그린 것으로 보이는 같은 화법의 조선 후기 그림과 이후에 제작된 것
으로 보이는 그림이 섞여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중 12점은 조선 인조(仁祖) 때인 17세기에,
나머지 16점은 고종 때 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정확한 것은 없다.

▲  무신도의 하나인 아태조(이성계)
(문화재청 사진)

▲  강씨(康氏) 부인
(문화재청 사진)

태조 이성계가 그려진 아태조는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있는 태조의 영정을 본떠서 그린 것이라
고 전하며, 강씨부인은 태조의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로 여겨지나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왕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로 보기도 한다. 허나 태조의 그림이 있으니 그 왕후인 신덕왕후일
가능성에 더 큰 무게가 쏠리고 있으며, 그림 이름도 강씨부인이니 신덕왕후와 성씨도 같다.
그림에 담긴 그들의 얼굴을 보면 태조는 조금 멍해보이고, 강씨는 뭔가 불만이 많은지 인상을
잔뜩 쓴 것 같다.

우리가 국사당에 이를 때는 건물 내부에서 굿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굿과 관련된 사람들
이 협칸에 머물러 있어서 당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새가슴처럼 잠깐씩 열려진 문을 통해 안을
살짝 보는 선에서 그쳤다. 기분 같아서는 안에 들어가 무신도를 마음껏 사진에 담고 싶었지만
괜히 그러다가 크게 안좋은 소리나 들을 듯 싶어서 그만두었다. 무신도와 관련 설명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있으니 알아서 참조하기 바란다.


▲  선바위로 올라가는 도중에 바라본 국사당과 인왕사

▲  선바위로 인도하는 가파른 경사의 계단
계단 너머로 선바위가 삐죽 얼굴을 내민다. 그런데 계단 양쪽에 자리한 석등이
우리 전통식이 아닌 왜식(倭式) 석등인 것이 심히 눈에 거슬린다.
저 석등 좀 갈아치우면 안될까?


♠  대자연이 빚은 기묘한 바위, 산악신앙 및 기자(祈子)신앙의 오랜 성지,
인왕산 선바위<선암(禪岩)>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4호

인왕산 중턱 해발 140m 고지에 자리한 선바위는 인왕산의 오랜 명물이자 산악/기자신앙의 성지
로 2개의 커다란 돌이 마치 승려가 장삼을 입은 것처럼 보인다 하여 선바위(禪岩)란 이름을 지
니게 되었다. 하지만 제 눈이 안경이라고 사람에 따라 보이는 모습은 다른 법, 바위에 길쭉한
구멍이 많이 뚫려 있어 유령이나 귀신처럼 보이기도 하며, 한밤중에 그를 본다면 정말 오싹할
것 같다.
그리고 바위 뒤나 옆에서 보면 판초의나 우비, 모자 달린 잠바 등을 뒤집어 쓰고 고개를 숙인
모습으로도 보이며, 서양 동화나 영화에 많이 나오는 마법사(판초의 비슷한 걸 입고 나옴)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화를 많이 봤다면 그런 만화에 나오는 이상한 형체의 괴물이 떠오를 수도 있
겠다. (난 선바위를 정면에서 볼 때 마다 만화나 오락에서 나왔던 새 대가리 괴물이 떠오름)

대자연이 인왕산에 기가 막히게 빚어놓은 기묘한 작품으로 보면 볼 수록 신기할 따름이다. 이곳
주변에는 해골바위나 모자바위 등 준수한 바위들이 많아 인왕산이 과연 바위의 산 임을 실감케
한다. 이 산에 기암괴석이 많은 건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돌산이기 때문이다.

선바위는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 또는 태조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며, 인
왕사가 밑에 둥지를 튼 이후에는 불상으로 대우를 받아 석불님, 관세음보살님으로 불리기도 한
다. 그래서 절 신도나 선바위를 받드는 이들은 그 바위를 양주(兩主)라 부르며, 인왕사의 든든
한 후광으로 그에 대한 지극정성이 대단하다.

이 바위는 그 신비한 자태 때문에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산악신앙 및 아들을 기원
하는 기자(祈子)신앙 및 민간신앙의 성지로 명성을 누렸다. 특히 아들을 원하는 부인들이 바위
에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많이 찾아와 기도를 하는데, 작은 돌을 바위에 붙이면 효험이 더
크다고 하여 돌을 문질러서 붙인 자국이 많다. 그래서 붙임바위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인왕사가 바위 밑에 둥지를 틀면서 불교의 신앙 대상이 되었고, 국사당까지 이곳으로
와 무속 신앙까지 더해져 복합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하나의 바위에 '민간신앙+
불교+무속'이 되버린 셈이고, 선바위부터 태조 이성계 부부의 상, 태조 상, 무학대사 상, 석불
님, 관세음보살님, 양주, 그리고 붙임바위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이름을 간직하게 되었으니 그에
대한 속세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케 한다. 바위는 가만 있는데, 사람들이 알아서 난리
를 피우며, 그렇게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그의 공식 명칭은 '선바위')

2개의 큰 바위가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으로 높이가 7∼8m, 가로 11m 내외, 앞뒤의 폭이 3
m 내외이다. 바위 밑에는 시멘트로 바른 제단이 있으며, 제단 좌우로 중생들의 소망이 담긴 촛
불을 가득 지닌 기와집 모양의 함이 있다.


▲  선바위의 깜찍한 뒷태
판초의나 모자 달린 우비를 쓰고 웅크리고 앉아 서울 시내를 보는 것 같다.


선바위는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와 얽힌 이야기가 서려있으며, 바위를 둘러싸고 정도전(鄭道傳)
의 유교와 무학대사의 불교 간의 대립이 일어났던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조선을 연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에서 새로운 도읍 자리를 알아봐달라고 했다. 그래서 무학대
사는 전국을 뒤적거리다가 지금의 서울(한양) 땅을 찾고는 크게 기뻐했다. 허나 자리를 살펴보
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 나라가 500년 밖에 못갈 팔자였다. 그래서 선바위에서 1,000일 기도
를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500년에서 겨우 18년이 추가된 518년 만에 나라가 쫄딱 망한 모양이
다. 이는 서울이 조선의 국도(國都)가 되는 데에 선바위가 어느 정도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한토막 이야기이다.

한양이 수도로 정해지자 이 바위를 성 안에 두느냐 성 밖에 두느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논쟁을 벌였다. 태조는 무학을 통해 그 바위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던 터라 쉽사리 결정을 내리
지 못하고 침소로 들어와 자버렸다.
그런데 그날 밤 초여름인 4월(음력 기준)임에도 눈이 쌓이는 꿈을 꾸었는데, 잠에서 깨어 밖을
보니 글쎄 눈이 성벽 모양으로 쌓여있고, 안쪽 부분의 눈이 녹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선바위는
그 밖에 있었다. 이에 태조는 하늘의 뜻으로 짐작하고 정도전의 의견대로 선바위를 성밖에 두
기로 했다.
그 말을 들은 무학대사는 단단히 뚜껑이 열려 크게 한숨을 쉬면서 '이제 중들은 선비 책보따리
나 짊어지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구나' 한탄했다고 한다. 그때 눈이 쌓인 자리에 도성을 만들었
다 하여 설성(雪城), 설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그게 이름이 바뀌어 서울이 되었다.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선바위 사건은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유교(성리학) 패거리와 무학대사로 상
징되는 불교의 충돌로 볼 수 있다. 선바위를 도
성 안에 들이면 불교가 흥하는 것으로 자연히
도성 안에 절이 많아져, 고려처럼 불교 국가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 그러니까 유교 위에 들
어앉게 되는 것이다. 허나 도성 밖으로 밀려나
면서 유교가 그 위를 점하게 되고, 나라의 중심
이념이 된 것이며, 불교는 점차 힘을 잃고 밀려
났다. 그래고 태조와 세종, 세조 때를 제외하고
는 혹독한 억불숭유의 시련을 겪게 된다.
도성 밖으로 밀려나 졸지에 조선 불교 몰락의
우울한 상징까지 떠맡게 된 셈이다.

인왕사는 음력 4월 초파일과 7월 칠석날, 그리
고 영산제(靈山祭) 때 바위에서 제를 지내고 있
으며, 절을 많이 하면 좋다고 하여 108배를 하
는 사람들이 많다. 바위 서쪽에는 바위를 지키
는 공간으로 조그만 건물을 지었으며, 바위 주
변으로 빼곡히 돌담을 둘러 성역으로 삼았다.

▲  측면에서 본 선바위 -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다.


▲  선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옛 국사당 자리에 솟아난 N서울타워(남산타워)가 중앙에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  선바위 뒤쪽에 새롭게 터를 다진 인왕사 삼성각(三聖閣)
3명의 성스러운 존재인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이다.

▲  송림 속에 우뚝 솟은 해골바위

▲  선바위약수터

인왕산에는 남산만큼이나 약수터가 많은데, 선바위 동쪽 계곡에 자리한 약수터도 그중에 하나이
다. 인왕산이 속세에 베푼 고마운 약수이나 물을 보니 수질이 조금은 의심스러워 바가지를 대진
않았다. 이곳은 예전에 굿터 많이 쓰였으나 행정기관에서 굿에 제한을 걸면서 요즘은 약수터 주
변에 조촐하게 파라솔 등으로 머물 자리를 만들어 치성을 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  선바위 동쪽 벼랑 (선바위약수터는 바로 밑, 윗부분에 솟은 바위가 선바위)


※ 인왕산 선바위(국사당, 인왕사) 찾아가기 (2015년 3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2번 출구를 나가면 선바위, 국사당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있다. 그
  이정표의 지시에 따라 골목길로 들어서 무악동주민센터를 지나 인왕산현대아이파크아파트 옆
  길을 오르면 인왕사 일주문이 나온다. 독립문역에서 일주문까지는 10분 정도 걸린다. 일주문
  에서 선바위까지는 도보 4~5분 거리
* 독립문역 1번 출구를 나와서 바로 나오는 골목길로 들어가면 새마을금고가 나온다. 여기서 오
  른쪽으로 보이는 골든팰리스 앞을 지나면 통일로14길이 나오는데, 그 길로 직진하면 무악동주
  민센터이다. 이후는 앞 내용 참조
* 독립문역을 경유하는 시내버스(471, 701, 702, 703, 704, 705, 706, 720, 752, 7019, 7021,
  7025, 9701, 9703, 9709, 6005(공항버스), 서대문마을11번)번을 타고 독립문역 정류장에서
  하차, 독립문역 1,2번 출구를 찾는다.
* 승용차로 인왕사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일주문 윗쪽에 주차장 있음
* 매년 5~6월에 국사당에서 인왕산 산신대제가 열린다.

* 인왕사(국사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산2 (통일로18가길 20 ☎ 02-737-4434)
* 선바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산3-4 (통일로18가길 26)


♠  인왕산 마무리

▲  선바위에서 인왕산약수터로 올라가는 산길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은 해발 338m의 바위 봉우리이다. 동북쪽으로 자하문고
개를 경계로 북악산(342m)과 이어져있고, 서쪽은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안산(鞍山, 295.9m)과
마주보고 있으며, 북쪽은 홍제천(弘濟川)을 사이로 북한산(삼각산)과 이어진다. 북악산(北岳山,
백악산)과 낙산(洛山), 남산과 더불어 서울 도심을 안쪽으로 둘러싼 이른바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기도 하다.
인왕산의 다른 이름으로 필운산(弼雲山)도 있는데, 이는 제왕이 있는 궁궐 오른쪽<제왕이 정전
(正殿)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에 있어 '군주는 오른쪽에서 모신다'는 의미이다.
배화여고 뒷쪽에 있던 이항복(李恒福)의 집 이름인 필운대(弼雲臺)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경복궁 서쪽인 서촌(西村)과 사직터널, 의주로, 부암동, 홍제동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으
나 동서의 폭이 좁아 남북과 달리 경사가 각박하고 지형이 험하다. 시내에서 볼 때는 산세(山勢
)가 작아 보이지만 정작 그의 품에 안기면 보기와 달리 제법 넓으며, 독립문역에서 정상까진 1
시간 정도 걸린다. 정상을 찍고 홍제동(환희사, 개미마을)이나 홍지문, 창의문(자하문), 부암동
으로 내려갈 경우는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돌산으로 남북으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 선바위, 치마바위, 모자바위, 범바
위, 기차바위 등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걸쭉한 바위들이 산의 장대한 경관을 돕고 있
으며, 정상을 이루는 바위 봉우리는 북악산에 버금갈 정도로 웅장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우백호
에 걸맞은 위엄을 드러내며 서울을 굽어본다. 18세기에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명성을 날린
겸재 정선(鄭敾)은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비롯하여 인왕산의 주요 명소와 장면을
그림에 남겨 인왕산을 격하게 찬양했다.

돌산이다보니 물이 귀할 것처럼 보이지만 선바위와 부암동, 옥인동(玉仁洞), 홍제동에 약수터가
많이 널려 속인(俗人)들의 목을 축여준다. 또한 산의 폭이 좁고 경사가 각박하다보니 속시원한
계곡은 거의 없으며, 그나마 개발의 칼질과 급격한 도시화로 대부분 숨어버렸다. 선바위와 인왕
사를 끼고 흐르는 계곡은 계곡이라 하기에도 뭐한 수준이고, 산 서쪽에는 환희사(歡喜寺) 주변
으로 약간의 계곡이 졸졸졸 소리를 낸다.
산 동쪽 옥인동에는 장안 제일의 경승으로 손꼽히던 수성동(水聲洞)계곡이 있으나 옥인아파트로
크게 훼손된 것을 2011년에 복원 공사에 들어가 2012년 여름에 완성되었으며, 효자동(孝子洞)에
는 청풍계(淸風溪)와 백운동천(白雲洞天) 계곡이 있었으나 주택가에 생매장당해 흔적도 보기 힘
들다. 부암동에는 청계동천(淸溪洞天)이란 계곡이 있었지만 이 역시 생매장당해 반계 윤웅렬 별
서(磻溪 尹雄烈 別墅, ☞ 관련글 보기)에 그 일부만 남았다.

인왕산은 1968년 1.21사건(김신조 공비 패거리 침투 사건)으로 정상 주변과 한양도성 길이 폐쇄
되어 선바위 주변을 비롯한 산 밑도리만 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김영삼 정권 시절에 개방되어
자유롭게 오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군부대와 초소가 한양도성 능선에 남아있어 통제구역이 조
금 남아있으며, 사진을 찍을 때도 약간 주의를 기울어야 된다.

인왕산에는 많은 명소가 있는데, 선바위와 국사당이 대표적이며, 중종과 단경왕후(端敬王后) 신
씨의 슬픈 사연이 서린 치마바위와 장안 제일의 경승지였던 수성동계곡, 근래에 벽화로 유명해
진 달동네 홍제동 개미마을, 자하문고개 서쪽에 자리한 청운공원과 윤동주(尹東柱)시인의 언덕
(☞ 관련글 보기), 석굴사원인 석굴암(石窟庵), 지방문화재 불상을 2기나 간직한 환희사 등이
있다. 또한 국사당과 선바위 일대는 토속신앙과 무속, 불교가 어우러진 현장으로 서울에서 보
기 힘든 무속의 성지이기도 하다.

600년 동안 서울의 우백호로 있다보니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도 많이 서려있다. 태조 때 서울을
도읍으로 정하고 궁궐 자리를 정할 때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북악산과 남
산을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로 삼자고 했다. 허나 선바위 사건으로 사이가 단단히 틀어진 정
도전이 '옛부터 제왕은 남면(南面)을 하여 천하를 다스렸지, 동향을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태클을 걸면서 무학의 뜻은 다시금 꺾였다. 무학은 '내 주장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에 다시
도읍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또한 신라 후기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었다고 전하는 '산수비기(山水秘記)'에는 '도읍을 정할
때 승려의 말을 들으면 국가가 기운이 연장될 것이나, 만일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의 말을 들으면
5대가 지나지 않아서 혁명이 일어나고, 200년 만에 큰 난리가 일어나 백성이 어육이 될 것이다'
란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과연 5대 만에 세조가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을 일으켜 조정을
갈아 엎었고, 딱 200년 만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이 내용은 19세기에 편찬된 한경지략(漢京識略
)에 실려있는데, 아마도 불교 쪽에서 무학대사에게 태클을 걸고 불교를 배척한 정도전과 조선의
위정자들에게 억불숭유에 불만을 품고 그럴싸하게 지어낸 전설을 그대로 인용한 듯 싶다.

그리고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주역이던 이괄(李适)이 논공행상(論功行賞)의 불만을 품
고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했다. 이 사건을 이괄의 난이라고 하는데, 어리석은 서인(西人)
패거리에 의해 왕위에 오른 얼떨떨한 인조(仁祖)는 서인 일당을 데리고 급히 충청도 공주(公州)
로 줄행랑을 쳤다.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은 인조의 어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토벌하고자 안산에
진을 치자 도성을 점령하여 잔뜩 자만감이 오른 이괄은 도성 사람들에게
'내가 저것들을 단숨에 때려잡을 것이니 나와서 싸움이나 구경하도록' 자신감을 강하게 내비췄
다. 그리고 군사<군사 가운데 임진왜란 때 투항한 항왜(降倭)들이 많았음>를 이끌고 인왕산 서
쪽으로 나가 장만의 군사와 대치했다.
도성 백성들은 그 싸움을 구경하고자 인왕산에 잔뜩 모였는데, 조선 사람들은 흰 옷을 주로 입
다보니 산을 가득 메운 그들로 인해 산이 마치 하얀 백로처럼 보였다고 한다.

관군을 맞은 이괄은 처음에는 여유롭게 전쟁을 진행했으나 난데없이 불어닥친 강풍에 기가 꺾여
장만에게 몰리고 말았다. 그래서 서둘러 도성으로 도망쳤으나, 백성들이 성문을 죄다 걸어 잠구
면서 결국 도성을 버리고 한강을 건너 이천, 여주로 줄행랑을 쳤고, 결국 부하에게 살해되어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살아남은 이괄의 부하들은 목을 붙잡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후금(後
金)으로 도망쳤는데, 그들은 청태종(淸太宗)에게 광해군(光海君)의 복수를 구실로 조선을 치라
고 들쑤셨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이 된다.

끝으로 인왕산은 호랑이들이 많았는데, 무서운 정도는 천하 제일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궁궐에
수시로 나타나 횡포를 부렸고, 심지어 종묘까지 침입했다고 하며, 백성들의 피해가 부지기수였
다. 그래서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 머리는 인왕산 호랑이 같다'란 말도 나왔으니 인왕
산은 그야말로 천하 호랑이의 성지였다. 허나 지금은 호랑이는 온데간데 없고 그들의 먼 친척인
묘공(猫公)만 종종 보일 뿐이다.
북악산과 인왕산을 비롯한 서울 호랑이들은 지방 호랑이와 달리 곶감 따위는 눈도 꿈쩍안했다고
한다. 그들이 무서워한 것은 다름 아닌 수진궁(壽進宮) 귀신이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재미
난 전설이 걸쭉하게 전해온다.

옛날에 북악산(혹은 인왕산) 호랑이가 먹을거리를 찾으러 경복궁에서 안국동으로 넘어가는 송현
(松峴)고개로 마실을 나왔다. 마침 어느 집에서 애기가 징징거리며 우니 그 어머니가
'문 앞에 호랑이가 왔어. 뚝!'
허나 애기는 계속 징징거렸다. 그러자
'애기야 곶감 줄께. 뚝!'
곶감이란 말에 호랑이는 잠시 염통이 쫄깃해졌으나 역시 울음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흐흐흐 곶감의 시대는 이제 갔구나. 이제 흔쾌히 식사나 해야겠다'
환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때 갑자기 어머니가
'수진궁 귀신이닷!!'
외치자 그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눈물을 뚝 그쳤다는 것이다. 그러자 호랑이는 '엥? 수진궁귀신
이라고??' 크게 놀라며 염통과 꼬리를 부여잡고 36계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는 속담이 생긴 것이다. (참고로 수진궁
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조선 왕족의 사당임)


▲  인왕산약수터

선바위약수터에서 북쪽으로 5분 정도 오르면 인왕산약수터가 나온다. 아직까지는 수질 적합 판
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가뭄 탓인지 물이 실처럼 가늘게 나와 바가지 하나를 채우는데 많은 인내
력을 요한다. 물을 받는 바가지도, 그 물을 마시려는 사람도 그저 환장할 노릇이다.

우리는 여기서 속세에서 사온 과자를 먹으며, 지친 두 다리의 불만을 잠시 달래주었다. 배가 고
파서 그런지 과자에 자꾸 손이 가서 금세 가루만 날리는 빈 봉지가 되었다. 그렇게 일다경(一茶
頃)의 여유를 누리다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


▲  소나무 너머로 보이는 모자바위(왼쪽)와 인왕산 성곽능선

▲  소나무 너머로 흐릿하게 다가오는 서울 도심

▲  해골바위 (선바위 동쪽 산자락)

선바위 동쪽 산자락에 해골바위라 불리는 괴상한 모습의 바위가 천하를 굽어보고 있다. 바위 윗
부분에 구멍이 여러 개 파여 있어 마치 손상된 해골바가지를 보는 듯 하며, 화생방훈련 때 쓰는
방독면 마스크와도 비슷해 보인다. 구멍에는 치성의 흔적과 술판의 흔적, 속인(俗人)들이 남긴
하얀 글씨들이 흉물스럽게 화석처럼 박혀 바위에 적지 않은 흠집을 내고 있다.


▲  동쪽에서 본 해골바위

▲  해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 독립문역 주변과 안산(鞍山)
바로 저 장소에서 1623년 이괄의 반란군과 장만의 관군이 충돌했다.

▲  해골바위에서 바라본 뿌연 천하

▲  모자바위 (오른쪽은 한양도성)

검은 때가 적당히 낀 매끄러운 벼랑 위에 어설프게 쓴 모자처럼 아슬아슬하게 자리한 모자바위,
줌을 최대한 땡겨 확대해서 보면 마치 고개를 든 개나 동물로도 보이니 인간의 한낱 언어나 문
자로 표현한다는 것이 무례가 될 정도로 대자연의 숭고한 작품에 그저 탄사만 나올 뿐이다.

 
▲  인왕산 200m 고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북←종로구→남)
콧대 높은 서울 도심이 내 발 아래로 펼쳐지고, 나는 하늘과 보다
가까운 곳에서 그들을 여유롭게 굽어본다. 하늘 아래의 저 세상이
이대로 나의 세상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  인왕산 200m 고지에서 바라본 천하 (무악동과 종로구, 중구)

▲  범바위와 그 너머로 삐죽 고개를 내민 매바위와 인왕산 정상
산 곳곳에 터를 닦은 각종 바위와 기암괴석들은 대자연이 인왕산에 내린 소중한 선물이다.
만약 저들이 없었다면 인왕산의 모습은 낙산이나 남산처럼 그저 그랬을 것이고
우백호의 완장마저 차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  내려가면서 담은 독립문역 주변 (가까이에 보이는 기와집이 인왕사)

해골바위에서 성곽이 보이는 방향으로 내려가면 한양도성 안으로 인도하는 철계단길이 나온다.
정상을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서 자존심을 곱게 접고 시내로 내려갔다. 어차피 나와 인왕
산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언제든 인연이 가능하다. 굳이 오늘 갈 필요는 없지~

이렇게 하여 인왕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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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조망이 일품인 서울 도심의 상큼한 명소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 서울 도심의 신선한 명소, 윤동주 시인의 언덕 '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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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시인의 언덕 소나무


♠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에 터를 닦은 서울의 새로운 명승지
문향(文香)이 가득 깃들여진 '윤동주(尹東柱) 시인의 언덕'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정상에 심어진 서시 비석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序詩)


서울 도심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자하문(紫霞門)고개 정상에 윤동주시인의 언덕이 도심을 굽
어보고 있다. 옛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성문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 서쪽에 둥지를 튼 이곳
은 인왕산 동쪽 자락에 조성된 청운공원의 일부로 2009년 6월, 천하의 큰 시인 윤동주를 기리고
자 공원에서 가장 높은 곳인 북동쪽에 자리를 닦고 그의 이름을 따서 '윤동주시인의 언덕'(이하
윤동주 언덕)이라 하였다.
언덕 이름이 그의 이름에 걸맞게도 무척 시적(詩的)이면서도 서정적인데, 그 이름은 지금의 윤
동주 언덕을 있게 한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의 회장 박영우씨가 지은 것이다.

하늘과 맞닿은 윤동주 언덕은 천하에서 가장 큰 윤동주의 유적 겸 기념지이자 38선 이남에서 거
의 유일한 윤동주 기념터로 그의 시를 머금은 비석과 그의 혼이 깃든 영혼의 터, 그를 집대성한
윤동주문학관이 있으며, 야외공연장과 정자(서시정), 벤치 등도 갖추었다. 언덕 좌우는 북악산(
北岳山)과 인왕산(仁王山)으로 막혀있지만, 대신 남북으로 뻥 뚫린 형태로 북악산과 인왕산, 북
한산(삼각산)의 산바람이 모여들며, 앞뒤로 바라보이는 조망(眺望)은 가히 천하 명품급이다. <
특히 도심 야경이 갑(甲)> 게다가 공원의 분위기도 조용하고 차분하여 시 한 수 절로 생각나게
하니 그야말로 시상(詩想)의 공간이다. <언덕의 이름도 제법 시상을 돋군다>

그럼 어째서 이곳이 윤동주의 언덕이 되었을까?
윤동주는 이곳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살지도 않았다. 다만 1941년 누상동(樓上洞)에 있던 소설
가 김송의 집에서 연희전문대학(현 연세대) 후배인 정병욱(鄭炳昱)과 하숙 생활을 했는데, 이때
하숙집에서 가까운 자하문고개와 청운공원을 수시로 찾아와 시를 구상했다고 하며, '별헤는 밤
'과 '서시'를 바로 이 언덕에서 지었다고 한다.
바로 그 인연으로 윤동주기념사업회에서 서울시청과 종로구청의 협조를 얻어 그의 언덕을 닦게
된 것이다.

그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고자 했는데, 그 서문(序文)으로 지어진 것이 바로 서시
이다. 허나 출간은 하지 못하고, 3부를 필사하여 이양하(李敭河)와 정병욱에게 1부씩 증정했으
며, 해방 이후 정병욱이 보관하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세상에 공개하였다.


▲  윤동주 형님의 초상화 -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을 초상화한 것이다.

※ 윤동주(1917~1945년)의 간략한 생애
윤동주는 왜정 시절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그의 이름 석자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중/
고등학교 국어/문학 교과서에 서시를 비롯한 그의 굵직한 작품들이 정말 지겹게 나오니 말이다.
숙성이 덜 되던 학창 시절, 나는 시를 싫어했다. 무조건 외우면 장땡인 암기 위주의 잘못된 교
육의 폐해 탓일 것이다. 그런 일그러진 교육과 나의 굳건한 돌머리 앞에서 시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고, 국어/문학 선생이 무조건 가르친 내용대로 외워야 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20세기에 활약했던 윤동주나 김영랑(金永郞), 이육사(李陸史) 등의 유명
문학가들의 이름과 그들의 작품을 보면 정말 이가 갈리곤 했다.
허나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흐르고 나이도 강제로 더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시에 대한 관심이 커지
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시의 내용도 조금씩 이해를 하게 되었고 김광섭(金珖燮)의 '성북동비둘
기'란 시가 무척 땡겨 그 시가 태어난 성북동 성락원(城樂苑, 명승 35호)에 걸터앉아 그 시를
읊고 싶은 생각까지 했었다. (성락원 비공개로 아직까지 실현하지 못했음) 비록 머리가 돌 수준
이라 시를 완벽히 외우지는 못하지만 즐겨찾는 관심사의 하나가 된 것은 분명하다.

학창 시절 그렇게나 나를 괴롭혔던 윤동주는 1917년 12월, 두만강(豆滿江) 이북인 북간도(北間
島) 명동촌(明洞村)에서 윤영석()과 어머니 김룡()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대랍자()학교를 다니다가 용정(龍井)으로 이사가면서 1933
년 그곳 은진()중학교에 들어갔다.

1935년 조선 본토로 넘어와 평양 숭실(崇實)중학교로 학교를 옮겼으나 신사참배 문제로 왜정(倭
政)에 의해 강제로 학교가 문을 닫았다. 그래서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
를 졸업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 문과에 진학하여 1941년에 졸업했다.
그때 누상동 김송의 집에서 정병욱과 하숙생활을 했었다.
학문의 열기가 뜨거웠던 그는 그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東京) 릿쿄(敎)
대학 영문과에 들어갔으며, 1942년 도시샤대학(同學) 영문과로 옮겼다.

1943년 7월 학업을 멈추고 잠시 고향에 가려고 했으나 독립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왜경에 체포되
었다. 왜경은 그에게 변론의 기회도 제대로 주지 않고 징역 2년형을 때려 후꾸오카 형무소에 집
어넣었는데 거기서 잔인한 생체실험의 희생자가 되어 결국 해방을 목전에 둔 1945년 2월,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28세였다. 목격담에 의하면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
를 계속 강제로 맞았다고 하니, 결국 왜국의 비인간적인 만행에 천재시인 윤동주는 제대로 꽃도
피우지 못하고 강제로 눈을 감게 된 것이다.

윤동주는 그의 조부(祖父)의 영향으로 시에 천재적인 소질을 발휘했다. 그의 동생인 윤일주(
)와 당숙인 윤영춘()도 시인이었다고 하니, 그의 집안은 문학적 소질이 다분한 지식
인 집안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15살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첫 작품은 '삶과 죽음'과 '초한대'이다. 이후 '병아리(1936
년 11월)','빗자루(1936년 12월)''오줌싸개 지도(1937년 1월),'무얼 먹구사나(1937년 3월)','거
짓부리(1937년 10월)' 등을 간도 연길(延吉)에서 발간된 '카톨릭소년'이란 잡지에 소개했다.
연희전문대학 시절에는 조선일보에 '달을 쏘다'를 냈고, 학교 교지 '문우(文友)'에 '자화상','
새로운 길'등이 실렸다. 그리고 '쉽게 쓰여진 시'가 1946년 경향신문에 실렸다.
앞서에서 언급했던 누상동 하숙 시절,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려고 했으나 내지 못했다. 그때 그가 남긴 시들은 정병욱과 윤일주에 의
해 1948년 정음사에서 출간되었다.

그의 시는 청소년 시절에 지은 시와 성년 이후의 시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청소년기에 쓰여진 시
들은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고 대체로 어린 시절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다.
대표작으로는 '겨울'과 '버선본' 등이 있다. 그리고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자아성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왜정 시절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시가 주류를 이루니 '서시','자
화상','또 다른 고향','별헤는 밤'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대
표 시로 어둠의 시절에 깊은 우수 속에서도 티없이 순수한 인생을 살아가려는 그의 내면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그는 비록 뜻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그의 시는 우리나
라 뿐 아니라 왜열도와 중원대륙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적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특히
그가 다닌 왜열도의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에는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어 해마다 많은
이들이 헌화를 하고 그를 기린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아시아를 뛰어넘는 세계 문학계
의 큰 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윤동주가 세상을 뜨자 그의 시신을 간도 용정으로 옮겨 묘를 썼다. 허나 그 무덤도 한때 위치를
몰라 가족들이 방황하다가 연길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온 왜인 교수의 노력으로 간신히 묘비를 찾
았다. 이후 우리나라와 중원대륙의 공산당 정부가 국교를 맺자 가족들은 봉분을 단장하고 묘비
도 새로 세웠으며, 그의 명동촌 생가는 1994년에 복원되었다. 또한 그가 다닌 명동소학교는 윤
동주 관련 단체의 지원으로 옛 건물을 복원하여 윤동주기념관으로 거듭났다.

우리나라에 참으로 굵직한 시인들이 많지만 윤동주만큼 인기와 사랑이 큰 시인도 손에 꼽을 것
이다. 우리나라를 넘어 다른 나라에서도 그의 팬들이 많으니 말이다. 비록 왜의 잔악무도한 만
행으로 일찍 눈을 감게 되었지만 그의 작품을 통해 그의 혼은 우리들 마음 속에 길이길이 깃들
여져 있으며,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히 적셔주는 영원한 문학신(文學神)이다.


▲  인왕산길 바로 옆에 자리한 윤동주시인의 언덕

서울의 새로운 꿀명소이자 문학의 성지(聖地)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윤동주시인의 언덕은 그 이
름만 들어도 마음의 여유가 생길 듯한 느긋한 언덕으로 생각하기 쉽다. 허나 현실은 세상처럼
가파른 언덕이다. 인왕산과 북악산이 만나는 자하문고개에 있다보니 그런 것인데, 고갯길에서
언덕 동쪽으로 오르는 길이 경사가 좀 각박하지만 지름길이며, 윤동주문학관 뒷쪽으로 오르는
길도 있다. 언덕의 날카로운 기세를 좀 피하고 싶다면 청운공원으로 가는 길(자하문로35길)을
이용하여 서시정으로 조금 우회하는 것도 괜찮다.


▲  늦여름 햇살 속에 한가롭게 졸고 있는 야외 공연장

푸른 잔디와 키 작은 나무들이 아낌없이 수식하고 있는 언덕 정상에는 언덕의 이름을 밝힌 두툼
하게 생긴 표석과 야외 공연장이 있다. 공연장에서는 윤동주 시 낭송회와 백일장, 문예 관련 여
러 행사와 공연이 열린다.


▲  언덕 정상에 박힌 윤동주시인의 언덕 간판 표석

▲  시비 앞면을 장식하는 '서시'

▲  시비 뒷면을 장식하는 '슬픈족속'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이 시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재학 초기에 쓴 것으로
어둠의 시절 속에서 살아가는 민족의 슬픈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흰색은 조선 민중과
삶, 밝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언덕 정상 남쪽에는 서시가 적힌 커다란 시비(詩碑)가 있는데, 대부분은 앞면만 보고 지나친다.
허나 뒤에도 시가 숨겨져 있으니 시비의 속임수에 속지 말자. 뒤에 새겨진 시는 슬픈족속이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 북쪽을 장식하는 한양도성 성곽길 (사적 10호)

언덕 북쪽에는 옛 한양도성의 성곽(城郭)이 길게 둘러져 있다. 이 언덕은 성곽 안쪽으로 성곽을
따라 길이 나 있는데, 서쪽으로 인왕산과 이어지나 인왕산길로 잠깐 끊기며, 동쪽으로 자하문과
이어지지만 문 서쪽에 언덕을 깎고 창의문로를 뚫으면서 서로가 끊겨버렸다. 그래서 윤동주 언
덕의 성곽은 양쪽이 강제로 끊긴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소나무 (윤동주 소나무)

언덕 성곽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청청한 소나무 1그루가 마치 성곽을 지키는 군사처럼 서 있다.
나무 곁에 서면 성곽 여장 너머로 도성 밖 경승지이자 도심 속의 전원(田園) 마을인 부암동(付
岩洞)과 평창동(平倉洞)이 앞다투어 두 눈 밑에 펼쳐지고 그 너머로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
산(삼각산)이 든든한 모습으로 서울을 살핀다.

이 소나무는 윤동주가 시를 구상하던 곳이라 하여 일명 윤동주 소나무라 불린다. 흔히 이 땅에
서 볼 수 있는 소나무이지만 어둠의 시절, 독야청청(獨也靑靑)한 그의 얼이 깃들여진 듯 청초하
고 고고해 보이며, 높은 곳에 우뚝 솟아 주변을 보는 모습도 예사롭지가 않아 보인다. 정말 그
가 저 나무 그늘에서 시를 구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윤동주 언덕을 상징하는 의미 깊은 나무로
나름 분주한 삶을 살고 있다.


▲  윤동주 소나무에서 바라본 천하
인왕산과 북악산, 북한산(삼각산) 사이에 포근히 둥지를 튼 부암동과 홍지동(弘智洞)을
비롯하여 북한산 남쪽 봉우리들도 바라보인다.

▲  윤동주 영혼의 터

야외공연장에서 자하문 쪽으로 내려가면서 오른쪽 잔디밭을 유심히 살펴보면 땅에 박힌 표석 하
나가 눈에 달려올 것이다. 그 표석은 윤동주 영혼의 터로 서시 시비의 뒷면처럼 많이들 지나치
는데, 이곳은 간도 용정에 있는 그의 무덤에서 흙 한줌을 가져와 뿌린 것으로 그 위에 표석을
박았다. 즉 그의 소소한 가묘(假墓)가 되는 셈이다. 영혼의 터라고 하니 조금은 오싹한 기분도
들긴 하지만 그만큼 근사한 시적 표현이기도 하다.


▲  솔내음이 나래를 펼치는 서시정(序詩亭)

언덕 서쪽 밑에는 서시정이라 불리는 단촐한 모습의 정자가 도심을 굽어보고 있다. 2009년 언덕
을 꾸미면서 지은 것으로 윤동주의 대표작인 서시를 따서 서시정이라 하였다. 정면 1칸, 측면 1
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정자로 이곳에 몸을 들여 남쪽을 보면 천하 제일의 도시로 콧대가 이만
저만이 아닌 서울의 심장부가 두 눈 밑에 그림처럼 펼쳐진다. (특히 야경이 멋짐)


♠  서촌의 지붕이자 윤동주 언덕을 옆구리에 낀 시민공원
청운공원(淸雲公園)

▲  가을옷을 곱게 걸친 청운공원과 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서촌의 북쪽 끝이자 인왕산 자락 동북쪽에 청운공원이 넓게 자리를 닦았다. 이곳은 청운동 주택
가와도 제법 거리를 둔 자연 지대로 윤동주시인의 언덕이란 신선한 꿀단지를 옆구리에 품고 있
다. 인왕산길이 공원의 북쪽과 서쪽을 지나가며, 이 길은 자하문고개에서 북악산길로 간판을 바
꾸고 북악산 뒷쪽을 통해 성북구로 달려간다. 그리고 공원을 가로지르는 골목길(자하문로35길)
은 윤동주문학관에서 공원을 지나 청운동 주택가를 거쳐 자하문로로 내려간다.

청운공원은 인왕산 품에 조성된 시민공원으로 산자락에 조성된 것 외에는 딱히 볼거리는 없었다.
그러다가 2007년에 인왕산 돌을 모아 일종의 돌아파트를 지었고, 2009년 이후 공원 동쪽에 윤동
주시인의 언덕과 윤동주문학관이 자리를 닦으면서 예전보다 더 값비싼 존재가 되었다.
공원이 산자락에 있기 때문에 서울 도심과 부암동, 홍지동 일대가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일품이
며, 북악산과 인왕산의 청정한 기운이 늘 깃들여져 있어 공기도 맑다. 게다가 서울 장안의 주요
해맞이 성지(聖地)로 매년 1월 1일에 해맞이 축제가 열리며, 나무와 각종 꽃들이 울창하여 봄에
는 벚꽃과 진달래, 개나리가 봄의 향연을 열고, 가을에는 오색영롱한 단풍잎이 가을의 향연을
베푸는 도심 속의 경승지이다.

청운공원에 가려면 자하문고개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자하문터널 남쪽에서 자하문로
35길을 따라 올라가는 방법도 있는데, 그건 경사가 제법 각박하다. 그리고 청운동 안쪽에 자리
한 유진인재개발원 정문 직전에 청운공원으로 오르는 산길이 가늘게 이어져 있고, 사직공원과
수성동(水聲洞)계곡에서 인왕산길을 타고 접근하는 것도 괜찮다.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의 위엄

늦가을 단풍이 한참 절정을 이루던 때(11월 초)라 나무들이 진한 붉은색과 노란색, 녹색 등으로
단단히 물들었다. 겨울 제국(帝國)의 시련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남은 기력을 모두 발산하는 나
무들.. 죽음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무지개처럼 짧은 삶을 원망하는 나뭇잎들.. 인
간은 그들을 보며 늦가을의 정취를 즐기면서도 '올해도 이제 저물었구나, 좀 있으면 강제로 1살
을 더 먹네' 늦가을과 연말 우울증에 부질없는 한숨을 쉰다.


▲  청운공원 서부 (꿈의 분수 주변)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그리고 일몰 직전의 하늘

▲  공원 서부에 자리한 청운공원 꿈의 분수

청운공원 서쪽에는 꿈의 분수라 불리는 바닥분수와 넓은 운동장이 있다. 꿈의 분수는 매일 2번
씩 조촐하게 분수쇼를 선보이는데, 그리 현란한 편은 아니며, 그냥 주변을 시원하게 해주는 정
도이다. 가동기간은 4월부터 10월까지로 1차는 11시에서 13시까지, 2차는 15시부터 16시까지이
며, 겨울에는 무조건 쉰다.
분수쇼는 전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분수와 어울려 물놀이를 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그러니
그냥 눈으로만 보기 바란다.


▲  고양이 같은 인왕산 호랑이상

천하 호랑이의 대명사이자 하늘 아래 제일 무서운 존재였던 인왕산 호랑이, 이제는 숱한 설화만
을 남긴 채, 우리들 뇌리에서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그들을 그리며 만들었다는 인왕산 호랑이상, 어린이들이 울고 갈 정도로 매섭게 좀 만들 것이지
순둥이 비슷하게 만들면서 졸지에 호랑이 탈을 쓴 인왕산 고양이상이 되어버렸다. 곶감도 우습
게 봤다는 천하 제일의 인왕산 호랑이를 제대로 모욕한 셈이다.


▲  인왕산 돌로 만든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

서시정에서 윤동주문학관으로 내려가면 돌의 거대한 보금자리를 만나게 된다. 이것은 2007년 서
울시에서 추진한 '서울 도시갤러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으로 인왕산과 그 주변에서
주운 돌을 정리하여 그들의 조촐한 아파트로 만들었다.


♠  윤동주 언덕 밑에 마련된 윤동주문학관

윤동주시인의 언덕 밑이자 자하문고개 정류장 부근에 시인 윤동주를 집대성한 '윤동주문학관'이
심플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이곳에는 원래 청운동 수도가압장 건물이 있었는데, 빈 채로 버려져 있던 것을 2009년 윤동주의
언덕을 만들면서 우선 급한데로 손질해 문학관으로 삼으면서 우리네 정신적 영혼의 가압장이 되
었다. 속은 문학관일지 몰라도 겉은 문학과는 담을 쌓은 우울한 모습이었는데, 윤동주문학사상
선양회에서 서울시청과 종로구청의 지원을 받아 오랜 번데기 생활 끝에 2012년 7월 25일 지금의
모습으로 화려하게 태어났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2011년 3월로 그해 연말까지 여러 번 발걸음을 했는데, 당시 내부
는 좀 어수선했다. 공개시간이 있긴 하지만 평일에는 일찌감치 문을 걸어잠군 경우가 많았으며,
처음에는 정문 옆에 난 조그만 문으로 입장을 해야 했다. 그런 공간이 이제는 윤동주를 닮은 세
련된 문학적 공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번데기를 탈피한 이 문학관은 2012년 대한민국 공공건축 부분에서 무려 국무총리상을 받았으며,
우리나라 현대건축 Best 20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화려하다 못해 눈부신 나비로 태어난
셈이다.

문학관은 3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있는데, 제1전시실(시인채)에는 윤동주의 손때가 담긴 친필
원고와 온갖 문서와 서적들, 사진, 윤동주 모교의 의자와 등사기(謄寫機), 떡판 등 그의 유품
133점이 전시되어 있고, 제2전시실(열린우물)은 옛 가압장의 물탱크 윗부분을 개방해 중정(中庭
)으로 꾸미면서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으로 삼았다. 그리고 제3전시실(닫힌우물)은 물탱크
를 원형대로 보존하면서 그 안에 윤동주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담은 동영상을 상영한다. 그외에
'별뜨락'이란 쉼터를 만들어 서울 도심을 굽어볼 수 있게 했다.

문학관에 진열된 윤동주의 유품 가운데 그의 생가에서 가져온 나무 우물이 있다. 우물의 목판은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회장인 박영우씨가 직접 간도 용정에서 가져온 것으로 땅을 깊게 파고 그
우물을 보호하고자 나무 판을 4단으로 얹힌 점이 특징이다. 허나 이곳에 안착하면서 우물의 기
능은 상실되고 무늬만 남은 늙은 우물이 되었다. 전시관 안이다보니 깊게 땅을 뚫을 수도 없고,
더군다나 마땅한 수맥도 없기 때문이다.


▲  번데기 속을 헤매던 윤동주문학관 예전 모습 (2011년)

▲  윤동주문학관에 진열된 그의 유품과 초상화들

▲  윤동주 모교에서 가져온 조그만 의자
내 초등학교 시절(1~3학년)까지만 해도 저거와 똑같은 의자에 앉았는데,
기억도 흐릿한 그 시절의 추억을 잠시나마 소환해준 정겨운 의자이다.

▲  윤동주의 마지막 사진

윤동주가 교토 도시샤대학에 재학하던 시절, 학교 친구들과 우지강<우지천(宇治川), 요도가와강
> 강변으로 마실을 나가 찍은 사진이다. 이때 왜인 친구들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청하자 그는 아
리랑을 우수에 찬 모습으로 불렀다고 한다. 허나 그때까지만 해도 윤동주나 그의 친구들이나 그
것이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얼마 뒤 그는 왜경에 끌려가 후꾸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으로 비온 뒤 잠깐 모습을 드러낸 무지개처럼 짧은 인생을 마감했으니 말이다.
그가 불의의 죽음을 당하자 그의 친구들은 크게 통곡하며 그를 애도했다.


▲  윤동주 생가에서 수습해온 나무 우물
우물 위에 두른 나무판을 가져와 복원한 것이다. 대략 100년 정도 묵었다고 하며.
고된 세월의 때가 가득하여 중후한 멋을 풍긴다.


※ 윤동주시인의 언덕(청운공원) 찾아가기 (2014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자하문고개(윤동
  주문학관) 하차, 길 건너편에 윤동주문학관과 언덕이 있다.
* 지하철 1호선 종각역(1번 출구)과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에서 1020,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윤동주시인의 언덕(청운공원) 관람정보 (2014년 4월 기준)
* 문학관 관람시간 : 10시 ~ 18시 (매주 월요일, 1월 1일, 추석과 설날 연휴는 쉼)
* 윤동주 언덕과 청운공원은 관람시간 제한이 없는 열린 공간이다.
* 입장료 없음. 문학관 해설사 운영
* 매년 5월에 윤동주문화제가 열린다. 시낭송회와 백일장, 윤동주상 시상식, 문학콘서트, 문학
  둘레길 걷기대회 등의 행사를 가지며, 문학둘레길 걷기는 인사동 남인사마당을 출발하여 만해
  당(한용운 가옥), 시인마을 보안여관, 이상(李霜)의 집, 윤동주 하숙집터, 세종대왕 생가터,
  정철집터 등을 거쳐 윤동주 언덕까지 걷는 4시간 코스이다.
* 윤동주시인의 언덕(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다음 까페 ☞ 보러 가기
* 연세대 윤동주기념사업회 ☞ 보러 가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3-100 (창의문로 119, 문의 ☎ 02-2148-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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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4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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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의 아늑한 전원마을을 거닐다 ~ 종로구 부암동 산책

 


' 볼거리가 풍성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종로구 부암동(付岩洞) '

▲  인왕산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북악산


하늘 높이 솟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北岳山), 그리고 인왕산(仁王山) 사이로 움푹 들
어간 분지(盆地)가 있다. 그곳에는 수려한 경치를 지닌 부암동이 포근히 감싸여 있는데 서
울 도심과 고작 고개(자하문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거리임에도 '이곳이 정녕 서울
이 맞더냐~?' 고개가 갸우뚱할 정도로 도심과는 생판 다른 전원(田園) 풍경을 간직하고 있
다.

부암동은 서울의 심장부인 종로구의 일부로 아늑한 전원 분위기와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경
승지가 즐비해 북촌(北村), 성북동(城北洞)과 더불어 두고두고 나의 마음을 앗아가는 곳이
다. 부암동의 주요 경승지로는 북악산 백사골(백사실, 백석동천)을 비롯해 세검정(洗劍亭),
홍지문(弘智門), 석파정, 무계정사터, 반계 윤웅렬별장, 능금마을, 북악산, 청계동천 바위

글씨 등이 있으며, 석파정을 옆구리에 낀 서울미술관을 위시하여 환기미술관, 자하미술관,
유금와당박물관 등 미술관과 박물관도 풍부해 문화의 향기도 진하기 그지 없다.

본글에서는 부암동 명소의 일부인 석파정 별당과 무계정사터(무계동 바위글씨), 청계동천,
반계윤웅렬 별장 등을 소개한다.
☞ 북악산 백사골(백사실) 보러가기
부암동 명소 (장의사지 당간지주/세검정/홍지문 등) 보러가기


♠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의 옛 사랑방 - 석파정 별당(石坡亭 別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3호

상명대입구 4거리에 이르면 4거리 서남쪽에 고풍스런 멋이 깃들여진 고래등 기와집 하나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집은 석파랑(石坡廊)이란 고급 한정식당으로 서예가로 이름을 날린 소전 손
재형(素筌 孫在馨, 1903~1981) 선생이 살던 곳이다.

소전은 6.25 시절, 서울을 접수한 북한이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담긴 문화유산을 죄다 빼돌
리려고 하자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와 함께 뛰어난 재치로 그곳의 문화유산을 지켜냈으며,
<자세한 내용은 ☞ 간송미술관 답사기 참조> 왜열도로 넘어간 김정희(金正喜)의 완당세한도(阮
堂歲寒圖, 국보 180호)를 천신만고 끝에 품에 안고 온 인물로도 유명하다.

이 집은 원래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의 집으로 인왕
산 동쪽인 옥인동(玉仁洞)에 있었다. 그러다가 소전이 1958년에 매입하여 이곳으로 옮겨 거처로
삼았으며, 그 기세를 몰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의 별당까지 떼어와
집 뒤쪽에 두었다. 이렇게 잘나가던 기와집을 하나도 아닌 2채나 누릴 정도면 소전도 꽤 부자였
음을 알 수 있다. (당시로는 흔치 않던 서양개 세퍼드를 여러 마리나 키우고 있었다고 함)
소전이 1981년 세상을 뜨자 이들 집은 모두 다른 이에게 넘어가 한정식당으로 변했으며, 석파정
의 이름을 따서 석파랑이란 간판을 달았다.

석파랑 뒤쪽 높은 곳에 자리한 석파정 별당은 맞배지붕의 'ㄱ'자 형태로 방이 모두 3개이다. 가
운데 큰 방은 흥선대원군의 방이고 건너 방은 손님을 접대하던 공간이다. 그리고 대청방은 그의
특기인 사군자(四君子)의 난초를 그릴 때만 특별히 사용했다고 전한다. 사랑채의 마루 안쪽에는
난간을 설치해 고급스러운 한옥 분위기를 진하게 자아내고 있으며, 외벽은 벽돌로 도배해 내부
를 가리고 가운데에 동그란 창을 냈다. 이는 청나라의 건축 양식을 부분 반영한 것이다.

소전에게 별당을 빼앗긴(?) 석파정은 오랫동안 비공개로 일관하다가 2012년 겨울에 비로소 공개
되었다. 문화유산은 제자리에 있어야 된다는 진리에 따라 별당을 원자리로 돌려놓는 것도 괜찮
을 듯 싶은데, 서로 소유자가 다르다보니 이 또한 쉽지가 않을 것이다.


▲  적막에 사로잠긴 석파정 별당
저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가면 열심히 난초를 그리고 있는
대원군 할배가 있는 것은 아닐까?

▲  석파랑 정원 (오른쪽 계단 너머에 석파정 별당이 있음)

석파정 별당은 현재 식당의 일부로 쓰이고 있다.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던 대원군의 별장
이 졸지에 식당 손님들의 밥먹는 장소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별탈이 없이 깨끗하게 보
존되고 있으니 이 정도는 뭐 봐줄 만은 하겠다.
별당으로 접근하는 방법은 석파랑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석파랑 주차장에서 들어가는 길이 있
는데, 주차장 쪽으로 가는 것이 더 접근이 쉽고 빠르다.


▲  150년 묵은 감나무가 무럭무럭 익어가는 석파랑

▲  경복궁에서 가져온 만세문(萬歲門)

석파랑 한옥은 순정효황후의 집을 옮겨온 것으로 청나라 천진(天津)에서 가져온 청나라식 호벽
이 그대로 남아있다. 뜰에 세워진 만세문은 고종(高宗)이 황제에 오른 것을 기념하고자 1898년
에 경복궁에 세운 것으로 궁궐 건축물의 품격이 고스란히 배여있는 문이다.
또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에는 곳곳에 박석(薄石)을 깔아 돌길을 냈으며, 조그만 절구를
비롯한 다양한 석물과 나무. 꽃 등을 심어놓아 눈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석파랑은 고급 한정식당이라 가격이 매우 얄미운 수준이다. 점심 상차림은 55,000원에서 11만원
대, 저녁은 95,000원에서 15만 5천원이나 한다. 그것도 10% 부과되는 부가가치세(VAT)와 서비스
비(Service Charge)는 제외이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 우리 같은 서민들에게는 정말 특별한 날이
아니면 가기 힘든 아득한 곳이지만 졸부들에게는 그저 가뿐한 장소다. 이 땅에서는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님이 많고 봐야 된다. 돈이 사람을 평가하는 더러운 세상이니 말이다. 아
직 이곳의 밥은 먹어보진 못했지만 돈을 몇 달치 모아서라도 한번은 먹어보고 싶다.


※ 석파정 별당(석파랑) 찾아가기 (2013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번, 1711번, 7016번, 7018번, 7022번, 7212번 시내
  버스를 타고 상명대입구 하차 (1,2호선 시청역 4/7번 출구에서 1711, 7016번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3번 출구)에서 110번, 153, 8153번 버스로 세검정(상명대) 하차, 도보
  2~3분
* 지하철 3호선 녹번역(4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로 세검정(상명대) 하차
* 석파랑 홈페이지는 위의 석파정 만세문 사진을 클릭한다.
* 석파랑 영업시간 : 12시~15시, 18시~22시 (설날, 추석연휴는 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125 (석파랑 ☎ 02-395-2500)


▲  하림각 건너편 길가에 자리한 부침바위터(付岩址)

부암동의 지명유래가 된 부침(붙임)바위는 바위 피부 곳곳에 난 구멍에 돌을 대고 비비면서 소
원을 빌면 아들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부터 뿌리 깊던 아들 선호 사상이 빚어낸
민간 신앙의 현장으로 아들을 원하는 서울 장안의 아낙네들로 늘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바위의 높이는 2m 정도 되었다고 하며, 자하문고개를 넘어온 개발의 칼질이 이곳의 명물인 부침
바위를 산산조각 내면서 이제는 그의 어떠한 흔적도 더듬을 수 없게 되었다. 다만 근래에 세운
바위터 표석이 이곳에 예전 그가 있었음을 아련하게 전할 따름이다.

서울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멋드러진 바위가 참 많았는데, 개발만 앞세운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과 인간들의 속물 근성 앞에 많은 바위가 희생을 당했다. 그 바위 가운데 여기서
가까운 응암동(鷹岩洞) 백련산(白蓮山) 자락에는 매 모양의 잘생긴 매바위가 있었는데, 땅값을
노린 집주인이 무식하게 파괴해 버렸다.


♠  야망의 사나이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부질없는 꿈이 깃든 현장
화려한 별장은 온데간데 없고 무계동 바위글씨만 아련히 남은
안평대군 이용 집터(무계정사터)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2호

▲  무계동(武溪洞) 바위글씨

석파랑에서 석파정을 품고 있는 서울미술관을 지나 부암동주민센터에서 창의로5가길을 들어서면
현진건 집터 표석이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 골목길을 들어서 왼쪽으로 20~30도 각도를 바라보면
커다란 나무를 간직한 기와집이 보이는데, 그 집 뜨락 동쪽에 '무계동' 바위글씨가 새겨진 검은
피부의 커다란 고개가 들고 있다. 거기가 바로 한 토막 전설이 되버린 안평대군의 별장, 무계정
사의 옛터이다.


※ 안평대군의 생애(1418~1453)
안평대군은 세종(世宗)의 3번째 아들로 세종이 왕위에 오르던 1418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이용
(李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간거사(琅玕居士), 매죽헌(梅竹軒)으로 그의
호에서 보이듯 꽤나 낭만적인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시문(詩文)과 그림에 능해 삼절(三絶)이라 칭송을 받았으며 거문고를 잘 타고
무예에도 꽤 일가견이 있었다. 이렇게 문무(文武)를 두루두루 겸비한 인재로 세종의 18명 아들
가운데서 가장 능력이 좋았다.

1428년에는 안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429년 좌부대언 정연(鄭淵)의 딸과 혼인했다. 그리고 1430
년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공부를 했으며, 1438년에는 두만강(豆滿江) 6진으로 파견되어 두만
강 이북의 여진족을 정벌했다.

세종이 붕어(崩御)한 이후, 맏형인 문종(文宗)의 신임으로 황표정사
(黃票政事 - 왕자들이 추천
한 인물 가운데 왕이 그 적임자를 골라 임명하던 인사제도)
를 장악, 자신의 측근을 요직에 앉혀
조정에서 꽤나 영향력을 행사했다. 1452년 문종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단종(端宗)이 즉위하
자,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과 손을 잡고 수양대군을 견제하며 세력을 꾸준히 키워
나갔다.

그는 창의문 북쪽에 별장을 지었는데, 이곳은 자신의 2째 큰아버지이자 세종의 2째 형인 효령대
군(孝寧大君)의 별장이 잠시 있던 곳이다. 안평대군은 이곳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의 계곡을 닮
았다고 하여 무계동(武溪洞)이라 이름 짓고, 별장 이름을 무계정사<武溪精舍, 또는 무이정사(武
夷精舍)>라 했다.
그리고 힘깨나 쓰는 장정을 모집해 숙식을 제공하며 자신의 사병을 꾸준히 키워나가는 한편 용
산에 담담정(淡淡亭)이란 정자를 지어 문인(文仁)들과 교류를 하며 자신의 야망을 키워갔다.

하지만 2째 형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온 이후, 크게 존재를 드러내면서
단종을 설득해 안평대군의 꿀단지던 황표정사를 폐지시켰다. 이는 안평대군에 대한 심각한 도전
이자 대권에 대한 야망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위기를 느낀 안평은 함경도에 있던 이징옥(李澄
玉)에게 무기를 지원받아 무력을 앞세워 잠시나마 황표정사를 회복시키는데 성공했으나 이는 그
의 명을 단축시킨 꼴 밖에는 되지 않았다.

동생의 무력도전에 발끈한 수양은 1453년 10월 그 유명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순식간
에 김종서, 황보인 등을 처단했다. 방심하고 있던 안평은 꼼짝없이 포박되어 반역의 죄를 뒤집
어 쓰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는데, 수양은 썩 안심이 되질 않았던지 곧 강화도 서쪽인 교동도(喬
桐島)로 추방했으며, 한명회(韓明澮)의 건의로 그 해를 넘기지 않고 사약 한사발을 보냈다.
안평은 형이 보낸 사약을 쭈욱 들이키며 권력에 눈이 어두웠던 그리고 형에게 방심했던 자신의
어리석움을 한탄하며 이내 피를 토하고 쓰러지니 그의 나이 불과 35살이었다.

역사에서 쓰라리게 퇴장을 당한 안평대군은 18세기 중반까지 복관(復官)되지 못했으며, 영조 23
년(1747년)에 이르러서야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건의로 복관되면서 죽은 지 300년 만에 편하
게 눈을 감게 되었다. 그의 시호는 장소(章昭)이며 무덤의 위치는 전해오지 않는다.

그가 이승을 뜬 이후, 그의 야망이 깃든 무계정사는 파괴되었으며, 권력을 향한 그의 강인한 정
열이 느껴지는 무계동 바위글씨만 쓸쓸히 바위에 남아 이곳이 무계정사였음을 속삭일 뿐이다.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의 호를 따서 비해당(匪懈堂)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여름철에는 많은 문인들
이 찾아와 경치를 즐겼다. 또한 정사 앞에는 기린교(麒麟橋)라는 다리가 있었다.

※ 문예가(文藝家)로써의 안평대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 서화, 거문고에 두루 능했던 안평대군, 그는 무이정사와 담
담정을 짓고 문인들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며, 궁중에 소장된 서화(書畵)와 자신이 수집한 중원
대륙의 서화들을 연구하거나 소개하는 등, 당시 문학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趙孟頫)체를 사용했는데, 이를 나름대로 조선식의 필법으로 발
전시켰다. 또한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들은 그의 글씨를 보고 조맹부의 글씨보다 더 휼륭하다고
칭송하며 그의 글씨를 서로 받아가려고 굽신거렸다고 한다.

한편 무계정사에 머물던 어느 날, 꿈 속에서 아름다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냥 기억 속에 두
기가 너무 아까워 그와 친분이 있던 안견(安堅)에게 그 꿈의 내용을 설명하여 그리게 하니, 그
그림이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왜국에 가 있으며, 2009
년 후반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때 잠시 귀국한 인연으로 몽유도원도가 그려진 현장인 무계정사
터를 찾는 답사객의 수가 잠시나마 늘기도 했다.
또한 여러 문인들의 글을 정리하여 시화첩(詩畵帖)을 만들기도 하였고, 1452년에는 경자자(庚子
字)를 개주(改鑄)해 만든 임신자(壬申字)의 자모(字母)를 쓰기도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글씨로는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에 있는 세종대왕 신도비(神道碑), 수원에 있는 청천부원군 심
온묘의 묘표(靑川府院君沈溫墓表), 자신의 아우인 임영대군묘표(臨瀛大君墓表, 의왕시 소재) 등
의 비문이 전한다.

'武溪洞' 바위글씨 곁에 자리한 낡은 기와집은 무계정사와 전혀 관련이 없는 집으로 구한말이나
왜정 때 지어진 것이다. 2005년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때는 쥐방울 만한 견공(犬
公) 2마리가 바위와 집을 철통같이 지켜 그들의 눈치를 살살 보며 바위글씨를 봐야 했다. 허나
이제는 그들도 안평대군의 부질없는 꿈을 따라 추억 속으로 사라졌고, 현재는 종로구청에서 관
리하고 있다.

2007년 이후 이곳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무계정사터'에서
'안평대군 이용 집터'로 변경되었
으며, 집으로 들어가는 철문이 굳게 잠겨있어 관람을 애타게 원할 경우 문에 달린 종로구청 문
화관광과로 연락을 하거나 철문의 헝클어진 틈을 요령껏 뚫고 들어가면 된다.


※ 무계정사터 찾아가기 (2013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버스로 부암동주민센터 하차
  창의문로5가길을 따라 도보 5~6분, 현진건집터 표석만 찾으면 금방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19-4


▲  현진건집터에서 바라본 무계정사터
붉게 물든 아름드리 나무가 자리한 곳에 기와집과 무계동 바위글씨가 있다.
공터 남쪽 구석에는 은단천이라 불리는 샘터가 있으나 수질은 장담 못한다.

▲  이제는 표석으로만 남은 현진건 집터

빙허 현진건(憑虛 玄鎭健, 1900~1943)은 소설 '운수좋은 날'로 유명한 소설가이다. 예전에는 그
의 초라한 집이 좀 남아있었으나 개념도 밥말아먹은 개발의 칼질에 무침히 짓밟혀 지금은 표석
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래도 명세기 현대문학의 중추적인 인물의 집인데, 지방문화재나 등록
문화재로 삼아 보존하거나 평창(平昌) 봉평의 이효석(李孝石) 생가처럼 문학 테마 관광지로 특
성화시키면 정말 꿀단지가 되었을 것을 무작정 개발만 내세우는 작금의 현실이 그저 딱할 따름
이다.


▲  청계동천(靑溪洞天) 바위글씨

무계정사의 흔적을 둘러보고 현진건집터 표석으로 나와 인왕산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전원
분위기가 물씬 감도는 부암동, 그런 부암동에 핏줄처럼 얽힌 골목길은 마치 시골길을 거니는 즐
거운 기분이다. 동네가 산지에 있다보니 오르막길이 꽤 많지만 그렇게 죽을 정도는 아니다. 게
다가 인왕산과 북악산이 청정한 기운을 베푸니 도시의 탁한 기운도 거의 없어 머리도 맑아진다.

현진건집터와 윤웅렬별장 사이에는 피부를 드러낸 바위들이 여럿 있는데, 청계동천이란 바위글
씨를 품은 바위가 있어 이곳도 동천(洞天)의 칭호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바위글씨는 작고 얇은 모습으로 옛 사람들이
이곳 절경에 반해 낙서를 남긴 것이다. 지금이
야 계곡 대부분이 주택 개발로 생매장을 당해
실감이 썩 나지 않겠지만 반계 윤웅렬 별장 뒤
쪽에 얇게 흐르는 계곡이 바로 청계동천의 상류
이다.

청계동천 바위 주변은 개인 땅이라 바위 주변을
철책으로 꽁꽁 둘렀다. 그래서 바위 앞까지는
접근이 어려우나 바로 길가에 있기 때문에 관람
과 촬영에는 그리 지장은 없다.

▲  확대해서 본 청계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  서울 지역 근대 한옥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는
반계 윤웅렬 별장(磻溪 尹雄烈 別莊)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2호

▲  윤웅렬별장 문간채 (안쪽 대문)

청계동천에서 1분 정도 오르면 반계 윤웅렬별장(이하 별장)이라 불리는 한옥이 나온다. 이곳은
인왕산의 품에 포근히 안긴 그림 같은 기와집으로 1906년에 윤웅렬(尹雄烈, 1840~1911)이 지은
별장이다.

윤웅렬은 해평(海平) 윤씨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1856년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감영중군(忠
淸監營中軍)과 공주중군(公州中軍), 북청병마우후토포사(北靑兵馬虞侯討捕使)를 거쳐 1878년 통
리기무아문참사(統理機務衙門參事)와 남양부사를 지냈다.
1880년 수신사(修信使)의 일행으로 왜국(倭國)을 둘러보고 왔으며, 1882년 별기군(別技軍)이 창
설되자 훈련원 하도감(下都監)의 신병대장의 영관(令官)이 되었으나 곧바로 터진 임오군란(壬午
軍亂)으로 왜국으로 줄행랑을 쳤다가 곧 귀국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면서 김옥균(金玉均)에 의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
었으나, 3일 천하로 허무하게 막을 내리면서 화순 능주로 유배를 갔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
革) 때 군부대신(軍部大臣)으로 있으면서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여 청나
라 상해(上海)로 도망쳤으며, 몇 년 뒤 다시 컴백해 법무대신을 지냈다. 1910년 이후에는 왜정
의 남작(男爵) 작위를 받는 등 좋지 않은 뒷끝을 보이다가 1911년 인생을 마감했다.

참고로 윤웅렬의 아들 가운데 그 유명한 윤치호(尹致昊, 1865~1945)가 있다. 그는 개화파 지식
인의 하나로 여러 선각자들과 함께 독립협회와 신민회(新民會) 등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며 민
중 계몽에 앞장섰다. 1910년 이후 안창호(安昌浩)가 세운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장을 지내면서
민족 교육에 헌신했으며, 1911년 105인 사건으로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허나 이후 친일파로
갈아타면서 부친과 더불어 쌍으로 구린 뒷끝을 보였다.

윤웅렬의 별장은 처음에는 서양식 2층 벽돌 건물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윤웅렬이 골로 가면서 3
째 아들인 윤치창(尹致昌)이 상속을 받았는데, 1930년대에 한옥으로 안채와 사랑채, 광채, 문간
채를 추가로 지어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별장 안채는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좌우에 있으며, 안방 앞에는 2칸 부엌이 있고
, 건넌방 앞에는 작은 누마루가 있다. 안채 왼쪽에 광채와 사랑채가 나란히 있는데, 'ㄱ'모양의
사랑채 한쪽 끝에 윤웅렬 시절부터 전해오던 서양식 2층 벽돌건물이 있다.
사랑채와 2층 건물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앞에 인왕산이 베푼 조그만 계곡이 흘러간다.
그 계곡이 바로 청계동천의 상류로 계곡에 돌로 2단의 석축을 쌓고 나무를 심어 경관을 아름답
게 꾸몄다. 사랑채 지붕에는 옥상 테라스를 돋보이게 만들어 경관을 감상하는 전망대로 삼았다.

사랑채와 광채는 변형이 심해 원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우며, 한양도성(都城) 밖 부암동에 세
워진 별서(별장)의 하나로 외국 건축 양식이 상류층 주택에 적용된 사례로 주목된다. 또한 안채
는 서울 지역 근대 한옥의 변화가 잘 반영되어 있다.

윤치창 이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봉산서원이라 불리는 미술공간으로 쓰였으며, 이때는 대문(
문간채) 앞 뜨락에 비너스상과 집채만한 큰 바위가 있어 특이한 모습을 보였는데, 2011년에 어
느 졸부가 이곳을 사들이면서 싹 정비해 그들을 내버렸다. 이때 대문을 새로 만들고 담장을 추
가했으며, 집도 새집처럼 산뜻하게 손질했는데, 보수공사 기간에 공사 관계자의 흔쾌한 허가로
2층 테라스를 비롯하여 별장 내부를 구석구석 관람하는 행운을 누렸다.
부암동이 요즘 인기를 누리면서 찾는 이가 쓸데없이 늘긴 했지만 여기까지는 거의 오지 않는다.
설령 용케 왔다고 해도 속사정을 알지 못하니 그저 담장만 찍고 돌아갈 뿐이다.

별장 보수공사는 2011년 12월에 끝났으며, 이후로는 소유자의 뜻에 따라 절대로 속살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그 이전에 본 것이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내 바램이긴 하지만 이 괜찮은 한
옥을 집주인 일가만 야속하게 누리지 말고 다수가 좀 누렸으면 좋겠다. 그냥 누리면 좀 미안하
니 요즘 인기를 더하고 있는 한옥체험장(한옥 민박, 게스트하우스)으로 개방하면 어떨까?
북촌과 전주한옥마을, 경주 양동민속마을, 안동의 몇몇 기와집들은 관광객을 상대로 한옥 체험/
숙박 장사를 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곳 집 크기는 북촌의 왠만한 한옥과 비슷하거나 조금
큰 편이며, 뜨락도 넓고, 바로 옆이 인왕산 숲이라 공기도 매우 상쾌하다. 도심이긴 하지만 깊
숙한 산골 마을에 들어온 듯, 전원 분위기가 그윽하며, 집에 딸린 방이 많고 한옥의 흔치 않은
2층 테라스까지 두고 있으니 소문만 잘나면 어지간한 한옥 숙박집 이상의 인기를 얻을 것이다.
게다가 도심과 가깝고 교통도 괜찮으며, 정류장에서 도보 10분이니 접근성도 그만하면 딱이다.


▲  서쪽 담장 너머로 바라본 윤웅렬별장의 뒷모습

▲  2011년 후반에 새로 지은 바깥 대문
예전에는 그냥 뻥 뚫린 공간이었다
.

▲  안채 옆에 있는 또 다른 문
원래 있는 문으로 늘 굳게 닫혀있다.

▲  윤웅렬별장 앞길 (대문과 담장은 2011년
보수 때 새로 했음)

▲  겨울잠에 잠긴 별장 연못
물과 연꽃, 물고기가 넘쳐날 그때를 꿈꾼다.


▲  윤웅렬 별장의 숨겨진 아름다움 (사랑채 뒤쪽 계곡) ▼

별장 뒤쪽에는 이곳만의 숨겨진 비경이 있다.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절경이 수줍은 듯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는 조그만 계곡이 없는 듯 흘러가는데, 이 계곡이 바로 청계동천이다. 계곡 양쪽에는 돌
로 높게 석축을 쌓았으며, 위쪽에는 2단으로 석축(石築)을 둘렀다. 석축 위에는 단풍나무를 비
롯한 여러 나무들이 앞다투어 작품이 되면서 늦가을의 정취를 진하게 우려낸다. 지나가던 가을
도 이 별장에 단단히 눈독을 들였는지 뒤쪽으로 슬며시 들어와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을 빚은 것
이다.


▲  사랑채 뒤쪽 계곡의 막다른 곳 (바위와 폭포)

계곡의 막다른 곳에는 푸른 이끼를 뒤집어 쓴 바위가 있다. 이끼가 가득하다는 것은 이곳이 그
만큼 청정하다는 것을 강하게 의미한다. 인왕산에서 흘러온 계곡이 이 바위에서 아담하게 폭포
를 자아내며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폭포의 높이는 2m 정도로 물줄기가 바위 전체를 타고 흐르
는 것이 아닌 한쪽 구석에 답답한 줄기로 흘러간다. 바위 위쪽 주변에는 석축을 쌓고 계단을 만
들었는데, 붉게 타오른 낙엽이 수북히 쌓여 마치 산불이 일어난 듯 하다.


▲  푸른 이끼의 청정한 안식처인 바위와 폭포

▲  폭포 밑에 모인 인왕산 계곡물

티끌 없이 맑은 계곡물이 폭포 밑에 마련된 조그만 담(潭)에 옹기종기 모여 기나긴 여행을 준비
한다. 여기서 숨을 돌리고 길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기 힘드니 그 아쉬움은 정말 대단하겠지. 그
런 못에 낙엽들도 몰려와 그들 생애의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고, 주변 나무들은 조그만 못에 비
친 자신을 바라보며 막바지 매무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  바위 위쪽 부분 (석축과 돌계단)
비록 짧지만 한세상 폼나게 살다 쓸쓸히 대지로 떨어진 이쁜 빛깔의 낙엽이
수북히 쌓여 아름다운 선경(仙境)의 불빛을 이룬다.

▲  불의 화신일까..? 붉게 물이 오른 단풍잎

▲  2층 테라스를 갖춘 사랑채와 2층 벽돌집

비경의 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사랑채는 별장 내부를 꽁꽁 가리고 있다. 사랑채 지붕
위에는 특이하게 옥상 테라스를 두어 작지만 천하를 굽어볼 수 있게 했으며, 사랑채 바로 옆에
는 붉은 피부의 서양식 2층 벽돌집을 두어 옥상으로 연결하는 계단을 두었다.
벽돌집에는 각 층마다 큼직한 방이 있어 사랑채의 보조 역할을 하고 있으며, 옥상 테라스와 벽
돌집은 이곳만의 진한 매력이자 서울에 있는 근/현대 한옥 중에서도 유일한 케이스이다.


▲  측면에서 바라본 2층 벽돌집과 사랑채
붉은 벽돌로 치장한 벽돌집에 중후한 멋이 엿보인다.

▲  별장 안쪽으로 들어가는 통로 - 왼쪽이 사랑채, 오른쪽이 문간채이다.

▲  2층 벽돌집과 안으로 들어가는 문

▲  사랑채 지붕 2층 테라스


▲  사랑채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별장 안채

▲  사랑채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남쪽 산자락
정말 시리도록 아름다운 늦가을 풍경이다.

▲  사랑채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별장 뒤쪽 (서쪽)

사랑채 지붕으로 올라가려면 2층 벽돌집을 거쳐야 된다. 실내화로 갈아신어 계단을 타고 2층으
로 올라가 문을 열면 나무로 지어진 2층 테라스로 전망용으로 지어지긴 했으나 시야에 들어오는
범위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매우 좁아 별장 일대와 남쪽 산자락이 고작이다. 하지만 산자락에
나무가 무성해 눈이 그리 심심치는 않으며, 이곳에 올라 인왕산에서 잔잔히 다가오는 선선한 바
람을 맞으면 속세에서 오염된 머리와 마음이 싹 가시는 듯 하다.

별장 서쪽 언덕에는 돌로 2단의 석축을 쌓고 구석에 소나무 등의 나무를 심었는데, 나무가 제법
다 자란 티를 내며 별장에 작게나마 그늘을 드리워준다. 게다가 커다란 바위도 한쪽에 자리잡고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숫키와가 얹혀진 담장이 집을 넓게 둘러싸며 속세와 경계를 이룬다.


▲  텅 비어있는 벽돌집 2층

※ 반계 윤웅렬 별장 찾아가기 (2013년 4월 기준)
* 교통편은 앞의 무계정사 참조, 무계정사 입구 현진건집터에서 큰 골목길로 직진하면 된다.
* 개인 소유라 내부 관람은 어렵다. 관계자의 허가를 받드시 받기 바란다.
* 여기서 인왕산의 품으로 6분 정도 들어가면 자하미술관(02-395-3222)이 있으며, 미술관 직전
  에서 부암약수터를 거쳐 인왕산으로 올라가도 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48


▲  부암동 나들이를 마치고 자하손만두에서 먹은 떡만두국
색이 입혀진 만두가 나그네의 입맛과 시각을 제대로 자극시킨다.

부암동을 둘러보니 슬슬 어둠이 내려오면서 시장기가 감돈다. 답사와 등산에서 먹는 재미만큼이
쏠쏠한 것은 없지. 마침 자하문고개까지 올라온 터라 자하문길과 북악산길이 만나는 고개 중턱
에 자리한 자하손만두를 찾았다.
이 만두집은 서울식 만두를 파는 곳으로 서울에서 만두로 꽤 유명한 집이다. 다양한 색과 모양
을 지닌 만두는 입안에서 살살 녹기가 바쁘며, 만두집이라 만두와 떡국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2층 양옥으로 이루어진 이 집은 뜨락에도 상을 놓고 손님을 맞는데, 휴일 저녁이라 자리가 거의
없다. 우리는 편수와 떡만두국을 먹었는데, 가격이 몹시나 얄미운 수준이다. 편수는 11,000원,
만두국은 무려 12,000원이나 한다. 내가 먹은 만두국 가운데 가장 허벌나게 비싸다. 그렇다고
나같은 장정이 먹기에도 썩 넉넉한 양도 아님. 만두를 겯드린 식사를 하려면 2인 기준으로 3~4
만원대는 잡아야 된다.

반찬은 김치와 송송(깍두기)이 전부이며, 식사를 마치면 후식으로 잘 익은 수정과를 준다. (지
금도 주는 지는 모르겠음) 고개 중턱에 자리한 탓에 자리만 잘 잡으면 인왕산과 부암동을 바라
보며 식사를 할 수 있으며, 산자락이라 밤공기가 좀 차다.


▲  편수의 위엄
편수는 소고기와 표고버섯, 오이 등이 들어간 만두로 그 모양이 참 이쁘다.
저들의 모습은 소중한 무엇인가를 꼭꼭 품고 있는 모습 같은데, 그 껍질을
벗기면 잘 버무려진 편수의 내용물이 수줍은 듯 속살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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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4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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