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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1.04.17 안성맞춤의 고장, 안성 죽산 나들이 ~~~ 태평미륵(매산리석불입상), 죽주산성, 비봉산
  3. 2021.02.19 북녘 황해도가 바라보이는 교동도의 지붕, 화개산 나들이 (화개산성, 화개약수, 강화나들길9코스, 연산군유배지, 대룡시장)
  4. 2020.08.02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북한산 뒷통수에 숨겨진 달달한 폭포, 밤골계곡 숨은폭포 (북한산둘레길 효자길, 효자비)
  5. 2020.07.09 오산의 꿀단지를 거닐다 ~~~ 보적사에서 독산성, 세마대, 고인돌공원까지 (경기도 삼남길7코스, 금암리지석묘군)
  6. 2020.04.17 봄맞이 산사 나들이 ~ 고즈넉한 비구니 수행도량, 수원 광교산 봉녕사
  7. 2019.11.06 한가을에 찾아간 산사 나들이, 화성 비봉산 봉림사
  8. 2019.02.15 세계 구석기시대 유적의 대표 성지, 연천 전곡리선사유적지 ~~ (전곡선사박물관, 연천 구석기 겨울여행축제)
  9. 2018.10.23 군포 수리산, 반월호수에서 가을을 맞이하다 ~~~ (철쭉동산, 수리산산림욕장, 수리산둘레길, 수리사)
  10. 2018.08.14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관악산에서 제일 맵시가 좋은 계곡, 과천 문원계곡 둘러보기 (문원폭포, 문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보광사) 4

한탄강 언덕에 살짝 깃든 고구려의 작은 흔적, 연천 은대리성

연천 은대리성(한탄강)



' 연천에서 만난 고구려의 작은 흔적, 전곡 은대리성 '
연천 은대리성



 

여름 제국(帝國)의 무더위 갑질이 극성이던 7월의 한복판에 경기도 북부에 자리한 연천
(漣川)을 찾았다. 남북분단의 비애가 서린 연천 고을에서 가장 큰 읍내이자 구석기유적
의 성지(聖地)로 추앙받고 있는 전곡읍(全谷邑)까지 어찌어찌 가게 되었는데, 오랜만에
찾은 전곡을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워 마침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는 은대리성을 더듬
기로 했다.

은대리성은 전곡읍내 서쪽에 위치한 연천군보건의료원 서쪽에 자리해 있는데, 그곳으로
가려면 보건의료원 내부를 거쳐야 된다.



 

♠  한탄강 언덕에 깃든 옛 고구려(高句麗)의 조그만 성
연천 은대리성(隱垈里城) - 사적 469호

▲  은대리성 내부

한탄강(漢灘江)과 주상절리로 유명한 차탄천(車灘川)이 만나는 삼각형 지형 강변 언덕에 장대
한 세월이 묻힌 은대리성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한탄강은 용암대지의 하천 침식작용으로
주상절리(柱狀節理) 등의 벼랑이 참 많은데, 그중에서 3각형 모양의 강변 언덕도 적지 않다.
강변은 높은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윗쪽에 평지가 벼랑과 반대 방향으로 점차 넓어지는
형태로 은대리성도 바로 그 지형을 바탕으로 닦여진 것이다.

은대리성은 적당한 기록도 없이 이곳에 오랫동안 묻혀 있었는데, 1995년에 발간된 연천군사료
집에 의해 속세에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과 토지박물관,
국립문화재연구소 등이 이곳을 찾아 간단하게 발굴/지표조사를 벌였고, 2003년에 단국대 매장
문화재 연구소에 의해 정식으로 발굴이 이루어져 성의 실체가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다.

성의 평면은 삼각형으로 3면은 막다른 벼랑이고, 동쪽만 속세로 이어진 평지라 수비하기에는
딱 좋은 요새이나 만약 성이 적군에게 털린다면 이건 정말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항복하기
싫다면 싸우다 죽던지, 아니면 벼랑에 몸을 던지던지 해야 된다. 이는 무조건 성을 사수하고
만약 성이 함락되면 성과 함께 최후를 마치라는 제왕(帝王)의 차가운 배려가 담긴 것이다.

성은 크게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외성의 폭은 동서 400m, 남북 130
m, 둘레 1,005m의 조그만 규모로 외성의 동벽은 평지를 가로질러 축조되었다. 성벽 내부는 점
토와 모래로 다지고 외벽은 돌로 쌓았는데, 다른 성과 달리 현무암(玄武岩)을 사용한 것이 특
징이다.
동벽의 길이는 60~120m, 성벽 높이는 6m 정도로 성벽 상당수가 대자연과 세월의 태클로 녹아
내려 북쪽으로 가면서 2~3m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동벽의 내벽 부분에는 기둥을 설치했던 흔
적이 나왔고, 최소 2번 이상 성을 고쳐 쌓았음이 밝혀졌다.
내성은 길이가 230m 정도로 성의 핵심부이다. 여기서는 대형 건물터가 하나 나왔으며, 외성을
포함하여 문터 3개, 치성(雉城) 3개소(어떤 자료는 2개소), 도랑 흔적이 확인되었다. 치성은
성의 북동쪽과 북문터 서쪽, 남문터 서쪽에 있었으며, 북문터와 남문터 치성은 8x5 규모로 '
ㄷ'자형으로 돌출되었다.

성에서 수습된 유물은 별로 없으나 상당수가 토기 파편이며 소량의 철기편이 나왔다. 토기 상
당수는 고구려 토기(土器)로 약간의 백제 토기도 나왔는데, 동벽을 처음 쌓은 시기와 일치하
는 배수구 바닥에서 고구려 토기가 집중적으로 나와 이곳이 고구려성임을 알려준다.

전곡 지역은 오랫동안 백제(百濟)의 영역으로 북방으로 진출하는 요충지였다. 4세기 후반, 고
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 백제를 공략하면서 한강 이북을 점유했고, 이때 전곡과 연천
지역도 고구려의 그늘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고구려 입장에서는 전곡을 비롯한 한탄강 주변이
남쪽으로 진출하는 요충지이자, 강을 낀 천험의 요새지로 포천 반월성(半月城, ☞ 관련글 보
)과 호로고루(瓠蘆古壘), 은대리성 등 작은 성을 많이 구축했다. 그러니 빠르면 5세기 초/
중반, 늦어도 5세기 후반에 조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가 먼저 세웠을 가능성도 있
으나 요즘은 거의 고구려성으로 몰고 가고 있음)
이후 백제가 신라와 합심해 고구려를 북쪽으로 몰아내면서 6세기 중반에 한강 유역을 차지하
게 되었는데, 한강에 군침을 흘린 신라 진흥왕(眞興王)은 백제의 뒷통수를 후려치며 한강을
가로채는 비열한 짓을 벌인다. 그 기세로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 북부, 함경도 남부까지 북진
을 하였고, 이때 은대리성도 신라에게 털리게 된다.

은대리성을 지키던 고구려군이 신라군과 전투를 벌였는지 아니면 성을 버리고 줄행랑을 쳤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유물이 거의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신라가 잠깐 이용하다가 주변
성과 통폐합시키거나 7세기 중반 이후 버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이곳은 방치되어 수풀이
무성한 자연의 공간이 되었다.

성의 이름은 이곳의 지명인 은대리를 따서 붙인 것으로 2003년 이후 동벽과 북벽 일부를 손질
했다. 허나 완전한 석성(石城)으로 복원하지 못하고 성 밑도리에 돌을 입히는 선에서 끝나버
려 거의 토성(土城)으로 남아있으며, 남벽에는 목책(木柵)을 다시 세웠다. 성 내부와 토성에
는 풀을 곱게 입혀 싱그러운 녹색 도화지가 되었으며, 토성과 목책, 도랑 외에 흔적은 모두
풀로 뒤덮었다.

연천에는 은대리성 외에 고구려가 쌓은 것으로 여겨지는 당포성(堂浦城), 호로고루성 등의 성
곽 유적이 있는데, 모두 3각형 지형의 강가 언덕 평지에 조성된 것이 특징이라 고구려 축성술
의 다른 면모를 보여주며, 남한 땅에 흔치 않은 고구려 유적으로 그 가치와 희소성이 높다.


▲  연천군보건의료원에서 은대리성으로 인도하는 언덕길
(언덕 위가 바로 은대리성)

▲  어설프게 복원된 은대리성 동벽과 남문터

성벽 밑도리는 돌을 끼워 넣었으나 나머지는 그냥 흙만 다져 복원했다. 그래서 졸지에 팔자에
도 없는 토성이 되버린 은대리성. 이러면 이곳이 토성인줄 알지 누가 석성으로 보겠는가? (나
도 토성으로 알았음..)

▲  남벽과 마주한 남문터 서쪽

▲  동벽 중앙 부분

▲  동벽 동쪽

▲  동벽 내부


▲  동벽 남문터에서 바라본 천하 (보건의료원 산책로와 소나무숲, 한탄강)

▲  동벽 동쪽에서 바라본 천하 (보건의료원 산책로, 소나무숲)

▲  토성이 되버린 동벽 윗쪽
지금은 토성이라 이런 곳에서 과연 수비가 가능할까 싶겠지만 나중에 석성으로
재현된다면 지금과 180도 달리 보일 것이다.

▲  동벽과 성 내부

▲  은대리성 내부
지금은 온통 초록 도화지라 실감이 나지 않지만 이곳에는 건물과 군사 주둔지가
있었다. 성 내부와 건물, 주둔지의 모습, 군사들의 삶에 대해서는 딱히
정답이 없는 실정, 그러니 저 푸른 도화지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보자.

▲  푸른 수풀 너머에는 북벽이 있었다. (북벽도 벼랑임)

▲  남벽에 설치된 목책 - 목책이 여장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  수풀과 뒤엉킨 남벽 목책

▲  도랑 흔적
도랑은 빗물이나 생활용으로 쓰인 물을 바깥으로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 성 안에서
아직 우물터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식수는 인근 산이나 한탄강에서
힘들게 운반했을 것이다.

▲  남벽 목책 너머로 보이는 한탄강

▲  서쪽에서 바라본 은대리성 내부

▲  은대리성 내부를 가로지르는 황토색 산책로



 

♠  한탄강전망대와 3형제바위

▲  은대리성에서 전망대로 가는 숲길 입구

은대리성은 조그만 성이라 학술조사나 정밀 답사까지 벌이지 않는 이상은 금방 둘러본다. (길
어봐야 30~40분, 보통 사람은 10~20분 정도) 그래서 좀 싱거울 수 있는데, 이것이 은대리성의
전부는 아니니 너무 아쉬워하지는 말자. 대륙을 누비던 통 큰 고구려의 성곽 유적인데 설마
이것으로 끝나겠는가..? 고구려 유적은 절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성 서쪽을 보면 우거진 숲이 보일 것이다. 솔내음이 그윽한 숲 오솔길을 따라가면 그 길의 끝
에 한탄강전망대가 자리한다. 소나무숲과 전망대도 엄밀히 따지면 은대리성 내부로 성곽 서단
(西端)에 해당된다.


▲  은대리성에서 전망대로 인도하는 숲길 ①

▲  은대리성에서 전망대로 인도하는 숲길 ②

▲  은대리성에서 전망대로 인도하는 숲길 ③

▲  벼랑에 자리한 한탄강전망대

오솔길 끝에 자리한 전망대는 의자가 여럿 있는 것이 전부인 그야말로 친환경적인 전망대이다
. 이곳에 서면 한탄강(왼쪽)과 차탄천(오른쪽)이 하나가 되어 하류로 흘러가는 현장이 보이는
데 여름의 기운을 먹고 자란 수풀 때문에 완전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난간에 오르거나
난간 너머에서 아슬아슬하게 보거나, 겨울에 와서 보던가 해야 제대로 보인다.
한탄강 물소리가 얼마나 패기가 진한지 여기까지 울린다. 차탄천 너머 서쪽은 군남면 지역이
고, 한탄강 너머 남쪽은 전곡읍 고능리이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한탄강 (파주 방향)

▲  수풀에 가려 보일까 말까하는 삼형제바위

전망대에는 조그만 안내문이 있는데, 그 안내문에는 임진강과 차탄천 합류지점에 있는 삼형제
바위에 대한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담겨져 있다. 삼형제란 이름 그대로 조그만 바위 3개가 나
란히 수면 위에 고개를 들고 있는데, 무성한 수풀이 시야를 방해하여 본의 아니게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인 어느 옛날, 어느 과부가 삼형제를 기르고 있었다. 그들 형제
는 우애가 참 깊었는데 어느 날 여름, 일을 하다가 무더위에 지쳐 한탄강에서 물놀이를 했다.
그런데 막내가 부주의로 깊은 곳에 빠져 허우적거리자 그를 구하고자 형들이 다가갔지만 결국
그들 모두 강제로 저승으로 보내지고 말았다.
졸지에 아들을 모두 잃은 과부는 강가로 달려가 3달 동안 대성통곡을 했는데, 3달 뒤에 삼형
제의 형상이 강 가운데에 나타나더니 그대로 바위로 변했다고 한다.
이후 해마다 이곳에서 익사사고가 발생하여 큰 바위에 제단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 그들을 달
랬다고 전했다고 하니 전설을 통해 인근에 살던 삼형제가 강에서 사고를 당하자 그들의 넋을
달래고자 제사를 지내면서 바위를 그들의 화신으로 삼은 모양이다. 설마 그들의 시신이 바위
로 변할리는 없을테니 말이다.

전망대에 잠시 머물며 한탄강의 유유히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있으니 시간은 어느덧 19시가
되었다. 여름이라 낮이 무척 길어 아직도 한낮 같고 더위의 기운도 거의 여전한 것 같다. 다
만 한탄강의 보우로 그 기운이 많이 수그러들었고 땀이 나오기가 무섭게 강바람이 그들을 털
어가니 땀도 나오는 것을 포기한다.

전망대를 나와 은대리성의 나머지 부분을 살펴보고 연천군보건의료원을 거쳐 전곡읍내로 나왔
다. 이렇게 하여 은대리성 여름 나들이는 그 막을 고한다.

* 은대리성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 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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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5월 1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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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맞춤의 고장, 안성 죽산 나들이 ~~~ 태평미륵(매산리석불입상), 죽주산성, 비봉산

안성 죽산 나들이 (매산리 석불입상, 죽주산성)



' 안성 죽산 나들이 (매산리 석불입상, 죽주산성) '
죽주산성
▲  힘차게 뻗은 죽주산성


 

새해가 밝은지 정말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겨울과 봄의 팽팽한 경계선인 3월 한복판에 이
르렀다.
올해 유난히도 혹독했던 겨울 제국(帝國)은 봄의 해방군에게 밀려 소멸 직전까지 가는 듯
싶었으나 제국의 부흥을 꿈꾸는 겨울의 잔여 세력들이 도처에서 꽃샘추위를 일으켜 시간
이 다시 1~2월로 돌아가는 듯 했다. 이렇게 꽃샘추위의 패기가 잠시 대단했던 시기에 안
성마춤(안성맞춤)의 고장으로 오랫동안 추앙받고 있는 경기도 안성(安城)으로 짧은 여정
을 떠났다.

점심을 간단히 섭취하고 집 부근 방학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2시간 이상을 달려 평택
역에 두 발을 내렸다. 평택역은 경기도 최남단을 장식하고 있는 평택시(平澤市)의 관문으
로 역 남쪽에 있는 평택시외터미널로 이동하여 안성시내버스 370번(평택터미널↔일죽)에
몸을 실어 안성 땅으로 들어갔다.
원래는 안성 남쪽 끝에 자리한 청룡사(靑龍寺)에 가려고 했으나 차 시간이 영 맞지 않아
서 청룡사를 흔쾌히 포기하고 안성시내를 가로질러 죽산(竹山)까지 쭉 이동했다. 죽산에
서 봉업사지(奉業寺址) 5층석탑과 태평미륵, 죽주산성을 보고자 함이다.

죽산에 이르러 제일 먼저 봉업사지5층석탑(보물 435호)을 보려고 했으나 잠깐의 방심으로
한 정거장을 지나쳐 거리가 제법 멀어졌다. 게다가 시간도 17시가 넘어 해가 깔딱하기 직
전이다. 하여 봉업사지는 포기하고 바로 매산리로 들어가 태평미륵을 찾았다. 태평미륵은
죽산에서 용인으로 가는 국도변에 있어 찾기는 매우 쉽다.


▲  태평미륵(매산리 석불입상)의 조촐한 거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태평미륵과 5층석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문의 높이가 조금 낮으므로 키가 큰 사람은 자존심을 곱게 접고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뒷탈이 없다.



 

♠  태평미륵이라 불리는 고려 초기 석불, 매산리 석불입상(梅山里石佛立像)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37호

세상에서는 안성을 안성마춤(안성맞춤)의 고장이라고 부른다. 허나 혹자(或者)는 미륵불의 고
장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안성에 유난히도 미륵불(彌勒佛)이라 불리는 석불이 많기 때문
이다. 이번에 문을 두드린 매산리 석불입상은 안성을 수식하는 주요 미륵불로 오랫동안 태평
미륵(太平彌勒)이란 이름으로 지역 사람들의 숭상을 받았다.

태평미륵은 고려 초에 조성된 석불로 높이가 5.6m에 이르러 안성 지역 미륵불 가운데 가장 키
가 크다. 그의 조촐한 안식처인 미륵당(彌勒堂)도 그의 키에 맞추다 보니 자연히 높이가 올라
가 대략 7m정도 되며, 미륵당이란 이름도 태평미륵의 거처란 뜻에서 생긴 것으로 마을 이름도
미륵당이고 인근 버스정류장 이름도 미륵당이다.


▲  네모난 기단 위에 자리한 태평미륵의 위엄

석불은 제법 높은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데, 보관 밑부분에는 온갖 문양이 새겨져 있고, 네
모난 보관 윗부분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세월의 때가 가득 끼어있어 중후한 멋을
보인다. 근래 세수를 한 듯 보관에 비해 조금은 하얀 얼굴은 길고 넓적한 편이며, 볼살이 좀
있어 보인다.
눈썹과 굳게 감긴 눈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선의 미를 더해주며, 두 눈썹 사이로 백호
가 하얗게 남아있다. 코는 끝부분이 오목하고, 입은 다물어져 있는데, 코와 입이 지나치게 작
고 눈 또한 지나치게 커서 균형이 떨어지며, 삼도(三道)가 그어진 목도 지나치게 비대하다.

몸통은 얼굴에 비해 그리 큰 편은 아니다. 보관을 포함한 얼굴 부분이 몸통의 거의 40%를 잡
아먹기 때문이다. 너무 없어보이는 어깨는 둥글게 내려가 있는데, 왼쪽 어깨를 감싼 옷은 두
껍게 표현되었으며, 하체에는 계단식으로 처리된 U자형의 옷주름이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가
슴 앞에 대고 있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한 듯 싶으며, 손가락을 모두 구부렸다. 왼손은
배 위에 대고 있으며, 양 손목에는 2중으로 된 팔찌를 차고 있다. 몸통을 받치는 두 다리는
꼿꼿하게 서 있으며, 다소 육중하지만 다리 표현은 분명하여 알아보는데 그리 지장은 없다.


▲  태평미륵의 얼굴과 보관

▲  태평미륵의 뒷통수와 보관

▲  태평미륵의 가슴 부분과 손

고려 때 조성된 석불은 유난히 덩치가 크고 각기 제각각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논산 관촉사(
灌燭寺)의 은진미륵(恩津彌勒)처럼 키와 덩치가 대단한 석불도 부지기수이며, 개성이 넘치고
흥미진진한 모습으로 중생들의 인기를 모은다. 그 시절 유난히 커다란 석불과 지역색이 강한
석불이 많은 등장한 것은 지방 세력과 부호(富豪)들이 집안의 안녕을 빌고 자신의 세력을 과
시하려는 차원에서 앞다투어 그런 것이며, 지역 석공(石工)들이 주로 석불을 다듬다 보니 투
박하고 거칠고 조금은 부족해 보이는 토속적인 석불이 많이 나왔다.
안성 지역에 널린 미륵불도 대부분 고려 때 것으로 태평미륵 또한 죽산 지역 세력이나 부호가
장만한 것이다. 처음부터 미륵불은 아니었던 듯 싶으며, 미륵신앙(彌勒信仰)이 크게 대두되면
서 지역 백성들에 의해 미륵불로 숭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태평미륵은 논산 개태사(開泰寺) 석불입상이나 충주 미륵리사지 석불처럼 고려 초기를 대표하
는 석조보살상으로 인정되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미륵당5층석탑 - 안성시 향토유적 20호

미륵불 앞에는 납작한 석탑 하나가 우두커니 자리잡고 있다. 겉으로 보면 3층석탑인데 안내문
에는 5층석탑이라 나와있다.
이 탑은 고려 초인 993년에 조성된 것으로 탑의 조성 시기를 알려주는 탑지석(塔誌石)이 나와
고맙게도 그의 탄생시기를 알려주고 있다. 그 탑지석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있으며, 태
평미륵과 한 덩어리처럼 보이나 그는 인근에서 옮겨온 것이라 태평미륵과는 관련이 1도 없다.

고려 때 흔하게 보이는 석탑과 달리 기단(基壇)이 1층으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며, 바닥돌과
기단부, 1층 탑신(塔身)까지는 온전하게 남아있으나 2층과 3층, 4층은 탑신은 사라지고 지붕
돌만 애처롭게 남아있고, 5층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완전히 사라졌다. 지붕돌은 귀퉁
이가 좀 상한 것 빼고는 거의 멀쩡하다.
탑에는 고된 세월의 때가 가득해 고색의 멋을 드러내고 있으며, 높이는 1.9m에 불과하나 탑신
이 온전하게 남았더라면 가히 5m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 매산리 석불입상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365-3 (미륵당길 32)



 

♠  죽산을 지키던 오랜 갑주이자 1236년 몽골군을 때려잡았던
전승의 현장, 죽주산성(竹州山城) - 경기도 지방기념물 69호

▲  죽주산성 남치성(南雉城)

태평미륵을 친견하고 차량들이 쌩쌩 바퀴를 굴리는 17번 국도를 따라 북쪽(용인 방면)으로 10
분 정도 가면 죽주산성을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을 한다. 그의 지시에 따라 왼쪽의 완만한 산
길을 오르면 한자로 된 죽주산성 표석이 나오고, 몇 굽이를 더 오르면 죽주산성 안내문과 비
봉산 안내도가 있는 너른 공간이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북쪽)에는 근래에 세워진 성은사(聖
恩寺)란 작은 절이 있고, 왼쪽에 산으로 오르는 조금은 각박한 길을 2분 정도 임하면 죽주산
성 동문이 모습을 비춘다.
산성 입구에서 동문까지 계속 오르막길이라 10분 정도 걸리며 길이 포장되어 있어 차량 접근
도 용이하다.


▲  윗도리는 사라지고 아랫도리만 남은 죽주산성 동문(東門)
동문은 윗도리인 문루(門樓)는 없고, 아랫도리인 성곽과 홍예만 남아있어
대머리처럼 허전한 모습이다.


비봉산(飛鳳山, 369m) 동쪽 자락에 둥지를 튼 죽주산성은 신라 후기에 축성된 것으로 외성(外
城)의 둘레가 1,688m, 높이는 2.5m~5m에 이른다. 돌로 튼튼하게 다진 산성(山城)으로 성 내부
중앙에는 1,500m 길이의 내성(內城)과 270m 길이의 중성(中城)을 두어 방어력을 한층 높였다.

죽주산성 남쪽에는 죽산 고을이 있는데, 지금은 안성시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신라 말부터 조
선시대까지 안성을 능가하는 큰 고을로 죽주(竹州)라 불리기도 했다. 산성의 이름은 바로 죽
주에서 비롯된 것으로 죽산 고을의 중심지로 여겨지기도 한다.
신라가 내리막을 타던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 시절에 기훤(箕萱)이 반란을 일으켜
이 성을 접수해 세력을 키웠으며,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세운 궁예(弓裔)가 그의 밑에 들어가
잠시 일하기도 했다.

▲  동문 남쪽 성벽

▲  동문 안쪽

고려 때는 성을 수리하여 관리한 것으로 보이며, 1236년 몽골(원나라)의 3번째 고려 침공 때
몽골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때 죽주산성을 지켰던 장수는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인 송문
주(宋文胄)로 일찍이 1231년 몽골의 1차 공격 때 귀주성<貴州省, 평북 구성시(龜城市)>에서
박서(朴犀)를 도와 몽골군을 크게 때려잡았던 인물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귀주성 싸움을 간
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고려가 몽골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1218년 서경(西京, 평양) 근처인 강동성(江東城) 전투였다.
신라 왕족과 고려 사람, 발해 유민,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에게 털린 거란족의 잔당들이
몽골과 동진국(東眞國) 연합군에게 쫓겨 고려 땅으로 침투해 강동성을 점거하자 당시 고려의
실권자인 최충헌(崔忠獻)은 김취려(金就礪)를 보내 몽골+동진국 연합군과 강동성을 탈환하고
거란 잔당을 토벌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몽골의 강요로 형제국 동맹을 맺었으나 힘만 앞세운 몽골의 무식한 오만함
과 무리한 공물(貢物) 요구에 고려는 그야말로 진절머리가 났다. 심지어는 몽골의 사신이 고
려 제왕의 어좌(御座) 바로 옆까지 가서 국서(國書)를 주는 무례까지 범하는 등, 고려와 몽골
의 관계는 나날이 악화되었다.
그런 와중에 1225년 몽골 사신인 저고여(著古與)가 압록강(鴨綠江) 부근에서 의문의 개죽음을
당하자 몽골은 크게 발작하여 고려의 만행이라 규정했다. 그리고 군사를 꾸려 그 유명한 살리
타이를 총대장으로 삼아 1231년 고려를 공격하니 그 지긋지긋한 반백년의 고려 vs 몽골 전쟁
의 서막이 열린다.

▲  남치성 부근 성곽

▲  내성 북쪽

압록강을 건넌 몽골군은 순식간에 고려의 북계(北界, 평안북도) 몇몇 도시를 점령했다. 허나
정주(定州)와 서경(西京)을 점령하지 못해 북계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고 고려군의 무력 또
한 만만치가 않아 몽골군은 크게 고전을 하게 된다. 절치부심에 빠진 살리타이는 든 것도 없
는 머리통을 열심히 굴려 북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귀주성을 공격해 전세를 만회하기로 했
다.

몽골군이 철주성(鐵州城, 평북 철산군)을 점령하고 귀주를 공격하려하자 주변 지역의 고려 장
수와 군사들, 백성들이 귀주성으로 쏙쏙 모여 결전을 준비했다. 귀주성에는 서북면병마사(西
北面兵馬使)인 박서(朴犀)와 부하 장수인 송문주가 지키고 있었다.
귀주성에 당도한 몽골군은 항복 권고 한마디도 없이 바로 공성전(攻城戰)에 들어갔다. 귀주성
은 산자락에 자리한 탓에 공격이 쉽지 않은데, 단순한 살리타이는 단지 머릿수만 믿고 군사를
나눠 쉬지 않고 돌리면서 공격했다. 그렇게 고려군을 지치게 만들어 나중에 한꺼번에 들이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성을 오르기도 전에 고려군의 화살비에 많은 군사가 죽어나갔다.
이렇게 몽골군이 고전하는 틈을 노려 김경손(金慶孫)이 12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성밖으로 나
가 적군을 무수히 죽였으며, 검은 말을 타고 있던 적장을 화살로 쏘아 죽이자 몽골군은 전의
를 잃고 바로 줄행랑을 쳐버렸다.

1차 공성전에서 단단히 개망신을 당한 살리타이는 잠시 작전을 바꾸어 항복한 위주부사(渭州
副使) 박문창(朴文昌)을 보내 항복을 권했다. 허나 박서는 '어찌 오랑캐에게 항복을 한단 말
이냐. 너도 고려의 신하이거늘 자존심도 없냐!'
답을 하고 그 자리에서 박문창을 죽여 그 목
을 몽골군에게 보냈다.
뚜껑이 단단히 폭발한 살리타이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성을 공격했는데 이번에는 방패차
와 성문을 부시는 충차(衝車)를 앞세워 성문을 집중공격했다. 허나 성이 산자락이고 성 북쪽
과 동쪽에 동문천(東門川)이 흐르면서 행군은 느릴 수 밖에 없었다. 겨우 하천을 건너 성문
앞에 이르렀으나 고려군이 불화살과 큰 돌을 날려 보내면서 충차와 방패차는 산산이 박살이
나고 몽골군은 죄다 사지가 헝클어진 귀신이 되고 말았다.

다시 개망신을 당한 살리타이는 이번에는 성 밑에 굴을 파고 침투하는 방법을 썼다. 이 작전
에는 '두거'라는 물을 먹인 소가죽을 쓴 이동식 상자와 두거 보호용 누차(樓車)를 보냈는데,
고려군은 용광로에 쇠를 녹여 쇳물을 통에 담아 누차를 향해 마구 던졌다. 쇳물을 뒤집어쓴
누차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면서 누차에 탄 몽골군은 죄다 즉석 통구이가 되었다.
또한 몽골군이 판 갱도에 군사를 보내 굴을 떠받치던 목재 버팀목을 불태우면서 갱도가 무너
져 삽질을 하던 몽골군도 죄다 생매장을 당했다. 그리고 날카로운 가시가 있는 나무를 모아
띠로 묶은 다음 불을 붙여 두거 위로 던졌다. 가시나무 가지가 두거에 그대로 박히면서 계속
타오르니 아무리 물을 먹인 소가죽도 소용이 없었고, 그대로 불이 옮겨타면서 작전에 임한 몽
골군은 그대로 폐기처분되고 만다.

▲  서문터 북쪽 성곽

▲  내성(內城)

이렇게 30일 이상 처절하게 공격을 퍼부었지만 귀주성은 건재했다. 기가 확 질러버린 몽골군
은 인근에 있던 군사들까지 싹 소환해 30여 대의 포차(砲車)를 급히 마련하여 다시 성을 공격
했다.
포차가 무수히 돌덩어리를 날리니 성곽 곳곳에 금이 가고 성내(城內)의 건물도 적지 않게 피
해를 입었다. 성벽의 무너진 틈새를 이용해 몽골군이 기들어오려 했으나 그 앞에 검차(檢車)
를 설치해 적군을 쫓아냈다. 그리고 무너진 틈을 쇠사슬을 엮어서 막았다.

몽골군의 끊임없는 공격에 단단하던 귀주성의 성벽도 슬슬 지쳐 내려앉기 시작했다. 하여 박
서는 정예병을 뽑아 성 밖으로 보내 몽골군을 공격했다. 고려군의 기습에 몽골군은 적지 않게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가 되었고, 혼란한 틈을 타 박서가 포차공격을 퍼부으니 그들은 목을 붙
잡고 후퇴했다.

단단히 똥줄을 탄 살리타이는 항복한 고려 왕족의 서신을 이용해 제발 투항좀 해주십사 부탁
을 했으나 박서는 살리타이의 사신을 내쫓았다. 이에 다시 발작한 살리타이는 운제(雲梯) 등
의 공성무기를 모두 동원해 공격에 들어갔다. 허나 고려는 운제 사다리를 파괴하고자 자물쇠
의 걸쇠 모양으로 구부러진 크고 무거운 칼 대우포를 개발해 비치한 상태였다. 대우포의 공격
에 운제는 죄다 박살이 났고, 사다리에 올라탄 몽고군은 목 없는 귀신이 되었다.

천하 최강의 깡패 나라로 악명을 날린 몽골군은 그보다 더 독한 귀주성 앞에 형편없이 꼬랑지
를 내렸고, 결국 공격 1달 만에 공격을 멈추었다. 또한 개경(開京)을 점령하고 돌아오는 몽골
군까지 격파되면서 몽골군의 간이 완전 쫄깃해졌다.
하지만 귀주성과 정반대의 상황이던 고려 조정은 개경이 함락된 휴유증에 몽골과 화의(和議)
를 맺었고, 당시 고려 군주인 고종(高宗)이 지병마사(知兵馬使) 최임수()를 보내 항복
을 종용하는 칙서(勅書)를 전하니 박서는 분을 삼키며 어쩔 수 없이 창칼을 내던지고 몽골군
에게 항복하고 만다.
자신들의 힘이 아닌 고려 군주의 칙명으로 어거지로 귀주성의 항복을 받은 몽골군은 씁쓸한
마음을 금치 못하며 막대한 피해를 입은 채 철수했는데, 당시 전쟁에 참여한 몽골 장수는 이
런 말을 남겼다.
'나는 소년 시절부터 군에 있으면서 천하 곳곳의 성지(城地)에 대한 공성전을 무수히 보았지
만 이처럼 지독한 공격을 당하면서도 항복하지 않은 성을 본 일이 없다. 이 성을 지킨 장수들
은 훗날 모두 장상(將相)이 될 것이다'
역사에 전하지는 않지만 박서도 아마 몽골군에게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내가 전쟁터에서 늙었지만 너희처럼 징글징글한 오랑캐는 처음이다. 너희들도 고생 많았다'

귀주성대첩 이후 박서는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승진을 했고
송문주는 낭장(郎將)으로 특진되었다가 몇 년 뒤 죽주방호별감이 되어 죽주를 지키게 되었다.

1236년 몽골군이 다시 고려를 침범해 죽산 인근에 이르자, 송문주는 백성을 이끌고 죽주산성
으로 들어갔다. 전에 귀주성에서 송문주에게 혹독하게 당한 몽골군은 그의 이름 3자에 잠시
염통이 쫄깃해져 서둘러 항복을 권했으나 거절당하자 포를 쏘면서 맹렬히 성을 공격했다.
성문이 부서지는 피해가 있었지만 고려군도 바로 포로 응수하면서 적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
혔고, 몽골군은 짚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화공(火攻)을 펼쳤으나 송문주는 성문을 열고 그
들을 기습해 수천의 몽골군을 고깃덩어리로 만들었다. 다시 한번 귀주성의 영웅에게 제대로
털린 몽골군은 공격 15일 만에 목을 붙잡고 줄행랑을 쳤다.

▲  송문주 장군의 사당인 충의사

▲  북치성(北雉城), 포루(砲樓)

송문주는 귀주성에서 몽골군을 질리도록 경험하여 그들의 전법을 꿰뚫고 있었다. 그리하여 효
과적으로 대응을 할 수 있었고, 다시 빛나는 승리를 취하게 된 것이다. 죽산 백성들은 그런
그를 '귀신','신명(神明)'이라 부르며 존경했으며, 그 공으로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이 되었
다. 또한 백성들은 그를 기리고자 성 안에 사당을 지어 매년 제사를 올렸다.
참고로 박서는 죽산박씨(竹山朴氏)로 죽산이 고향이다. 바로 그 죽주산성에서 그의 부하장수
였던 송문주가 몽골군을 격퇴했으니 이것도 참 인연인가 보다. 몽골 애들 입장에서는 지독한
곳에서 지독한 적장과 적군을 만나 허벌나게 개고생을 한 것이다.

조선시대로 들어와서는 충청도의 주요 고을인 청주(淸州)와 충주(忠州)에서 서울로 통하는 요
충지라 애지중지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잠시 점거했으나 황진(黃進)이 기습작전으로
탈환하면서 왜군은 더 이상 용인과 이천 지역을 넘보지 못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시절에는 남한산성(南漢山城)을 구하고자 지방에서 올라온 군사들
이 진을 쳤으나 인조(仁祖)가 삼전도(三田渡)에서 머리를 박고 항복하자 분을 삼키며 철수했
다.

조선 후기에는 조정의 무관심과 관리소홀로 방치되어 나무로 다진 문루 등의 건물은 사라지고
견고한 성곽만 남게 되었다. 성곽 대부분이 남아있으나 외성 북부와 중성은 거의 주저앉았고,
외성 남부와 내성도 곳곳이 벗겨지거나 무너져 아픈 속살을 드러냈으나 2006년 이후 보수공사
를 벌여 외성 남쪽과 내성, 치성(雉城)을 손질해 왕년의 위엄을 조금은 되찾았다.

산성에는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으며, 그 외에 성문터 3~4개가 더 있다. 남쪽 끝과 북
쪽 끝에는 치성(남치성, 북치성)을 두었고 외성 북쪽에도 조그만 치성을 3개 정도 만들어 수
비력을 드높였으며, 남치성에는 장대(將臺)터가 아련히 남아있고, 북치성에는 포루(砲樓)터가
있다. 우물은 2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현재 약수터로 쓰인다. 또한 남문 밖에는 도랑을 판
자리가 있어 조촐하게 해자(垓子)를 두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성 내부는 분지(盆地)로 북쪽
과 남쪽을 제외하고는 지형이 평탄해 군사시설과 집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는 송문주 장군의
사당인 충의사와 절 건물로 쓰이는 집 몇 동이 있다.

죽주산성과 비봉산은 근래에 등산로를 정비하면서 이정표와 안내문을 설치했으며, 비봉산 정
상을 거쳐 삼죽면이나 죽산리로 내려가도 된다. 산성은 외성 남쪽과 내성 북쪽을 돈다면 대략
30~40분 정도 걸리며, 아직 복원되지 않은 외성 북쪽까지 모두 돌 경우에는 2시간이 넘는다.


▲  죽주산성 안내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안성의 주요 명소이자 대몽항쟁의 승전지로 의미가 깊은 곳이지만 이리저리 헝클어진 모습을
보면 인간의 창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그저 허술한 모래성임을 뼛속 깊이 느끼게 될 것이다.
근래에 복원을 하였지만 고색의 때가 자욱한 옛돌과 하얀 피부의 새돌이 어색한 조화를 이루
고 있으니 한참의 시간을 흘려보내야 서로가 조화를 이룰 것이다.

남치성에 이르면 죽산면 중심지(죽산리)가 두 눈에 바라보이고, 북치성에는 백암 지역이 시야
에 들어와 조망이 일품이며, 평택과 충주, 청주로 통하는 길목에 가파른 곳에 의지해 자리해
있어 천하의 요새임을 실감할 것이다.

* 죽주산성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산105-1, 106


 

♠  죽주산성 둘러보기 (충의사, 남치성, 서문, 북문)

▲  산성 안 풍경 (동문에서 바라본 모습)

동문을 들어서면 포근하게 분지 지형을 이룬 산성 내부가 조촐하게 펼쳐진다. 바로 정면에는
잡초가 무성한 초지(草地)인데, 이 일대에는 군사시설과 창고(倉庫), 집들이 있었을 것이다.
초지 너머로 집들이 띄엄띄엄 간격을 두고 있는데, 가장 왼쪽에 어렴풋이 보이는 기와집이
송문주 장군 사당인 충의사이다.


▲  죽주산성에 유일한 약수터 (죽주산성약수터)

산성이 축성된 신라 후기부터 있던 것으로 여겨지는 샘터로 오랫동안 이곳의 목을 축여준 소
중한 샘이다. 1236년 송문주가 이끈 군사와 백성들도 저 물을 먹고 몽골군을 때려잡았으니 이
곳을 지킨 고려 사람들의 힘을 무한대로 솟게 만든 신비의 영천(靈泉)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탐방객과 인근 주민들이 마시는 그저 흔한 약수로 특별한 맛은 없으며, 성내에는 우물이 2개
가 있었는데, 지금은 이 약수터만 남았다.


▲  누런 잡초로 가득한 동문 안쪽 초지 (약수터에서 바라본 모습)
바로 이곳에 군사시설과 백성과 군사들의 집이 있었을 것이다. 장대한 세월에
푹 파묻힌 이곳을 똑똑 깨우면 죽주산성의 숨겨진 많은 것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  송문주 장군 사당(충의사)으로 인도하는 오솔길
푸른 갑주를 입은 소나무들이 길 양쪽에 2열로 늘어서 사당 손님들을 마중한다.
혹 송문주 장군의 병사들이나 그를 존경하던 백성들의 혼이 소나무로
부활한 것은 아닐까?

▲  송문주 장군의 사당인 충의사(忠義祠)

성내 서쪽 산자락에 송문주 장군의 사당인 충의사가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돌로 터를
다지고 그 위에 지은 조그만 맞배지붕 집으로 아래를 향해 돌계단을 늘어뜨렸다.
이 사당은 죽산 백성들이 송문주를 기리고자 세운 것으로 백성들은 그를 귀신, 신명이라 부르
며 존경을 표했다. 그리고 나중에 사당까지 손수 지어 그를 길이길이 추모했다.

사당의 조성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송문주가 세상을 뜬 13세기 말 이후로 보이며, 처음에는
조그만 영당(影堂)으로 여러 차례 보수를 했다가 근래에 지금의 건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충
의사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전남 여수(麗水)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타루비(墮淚碑)처럼 백성과 군사들이 송문주의 공덕을
기리고자 세운 백성들의 정이 서린 의미 깊은 사당으로 오늘날 저런 사당을 지어 추모할 위정
자(爲政者)가 없음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  숲속에 자리한 충의사 - 바로 뒤쪽에 내성 남쪽 성곽이 있다.

▲  산비탈에 의지해 닦여진 서남쪽 성곽

▲  중간에 잠시 길을 접은 남치성(南雉城)
성곽이 약간 비스듬히 쌓였는데, 이는 고구려 축성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런 축성 양식을 들여쌓기라고 한다.

▲  남치성 장대(將臺)터

산성 서남쪽을 이루는 남치성에는 장대터가 있다. 이곳에 올라서면 안성의 서부 지역인 죽산
과 일죽 일대가 두 눈에 훤히 바라보여 조망이 일품이며, 지금은 성을 지키고 산불을 감시하
는 조그만 초소가 이곳을 지킨다.


▲  남치성에서 바라본 죽산 일대 (멀리 보이는 산은 도덕산)

▲  남치성에서 바라본 일죽 일대

▲  죽주산성 남문(南門)
남문 앞에 도랑을 둔 흔적이 있어 해자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안그래도
오르기 힘든 산비탈인데, 성 앞에 해자까지 두었으니 어찌 적들이
쉽게 점령할 수 있겠는가.

▲  끊김이 없이 힘차게 질주하는 산성 서남부 성곽 (남치성에서 본 모습)

▲  저렇게 보잘것 없는 자연석들이 모여 견고한 죽주산성이 탄생했다.
사람이나 동물, 사물은 어디에 있고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가치와 팔자가 달라진다.

▲  유연한 곡선을 자랑하는 서쪽 성곽
성곽에는 여장 등의 안전시설이 없고, 성곽길을 이루는 돌도 거칠고 모가 많아서
걷는데 반드시 주의해야 된다. 가급적이면 흙과 성돌 사이 부분으로
걷거나 안쪽 흙길로 걷는 것이 좋다.

▲  외성과 내성이 갈리는 서문(西門)

완만하게 오르막길을 형성하던 성곽길은 서문을 코앞에 두고 갑자기 내리막을 이룬다. 내리막
을 이루기 전인 서문 남쪽이 죽주산성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그 내리막의 끝에 커다
란 장대석을 머리에 인 서문이 있다. 서문에서 성곽은 2갈래로 갈리는데, 서문을 지나 북쪽으
로 흐르는 성곽은 죽주산성의 본성인 외성이고, 서문 남쪽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는 성곽이 내
성이다.


▲  죽주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인 서문 남쪽 부분

▲  서문에서 바라본 비봉산

▲  뼈대만 남은 서문 안쪽

▲  서문 바깥쪽

서문의 높이는 문의 높이는 2m 정도로 비봉산 정상이나 죽산으로 가려면 이 문을 이용하면 된
다.


▲  서문 동쪽으로 흘러내려가는 내성

▲  서문 북쪽 성곽

성곽을 이루는 성돌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애환과 사연이 차곡차곡 깃들여져 있다. 산성
축성에 동원된 백성들의 애환부터 신라 후기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이곳에 웅거한 지방 세력
의 사연, 성을 지키던 병사들의 애환과 장수들의 꿈, 1236년 피를 흘리며 이곳을 지킨 고려군
과 백성들의 함성, 그때 전사힌 이의 원통한 넋, 이곳에서 고깃덩어리가 되어 지옥으로 떨어
진 몽골군의 넋까지, 그 모든 것이 함축적으로 깃들여져 산성의 경력과 가치를 드높인다.


▲  자연과 세월에 의해 헝클어진 서문 북쪽 성곽(외성 북부) ▼

외성 북부는 서문 구간을 제외하면 거의 헝클어진 채, 간신히 산성의 윤곽만 남아있다. 이곳
성곽의 높이는 2m 정도로 성곽을 이루던 성돌은 뒤죽박죽이 되었고 그러다보니 성곽길도 거칠
어져 이동하기가 쉽지가 않다. 아직 여기까지는 복원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성 북부에는 서치성(西雉城)과 동치성(東雉城) 2개가 있으며, 외성 북문터와 수구(水口)터
등이 있다. 성곽길이 별로 좋지 못하고 급내리막길이라 조금만 가다가 바로 서문으로 돌아왔
다.


▲  남쪽으로 90도 꺾은 내성 - 숲 너머에 보이는 성도 내성임

▲  내성 (내성 북문 부근) - 내성은 높이가 2m 정도이다.

▲  내성 북문~북치성 구간은 성곽길을 동네 담장마냥 시멘트로 발라버려
적지 않은 옥의 티를 보인다. 저럴거면 복원의 의미가 없지 않는가.

▲  내성 북문(北門) - 서문과 비슷한 구조이다.


 

♠  죽주산성 마무리 (북치성 주변)

▲  북치성(北雉城) 포대와 겨울에 잠긴 나무 1그루

죽주산성의 동북쪽 끝으머리에는 세상을 향해 고개를 내민 북치성이 있다. 이곳은 서문에서
갈라진 내성과 외성이 다시 만나는 곳으로 내성의 동쪽 종점이기도 한데 가파른 곳에 자리한
남치성과 달리 평탄하고 너른 공간으로 돌로 쌓은 포대와 커다란 나무 1그루가 북치성을 지킨
다.
시야가 확 트인 이곳에 올라서면 안성 죽산면/일죽면 북부 지역을 비롯해 용인 백암면 지역이
바라보여 조망이 좋아 전략적 요충지임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북치성 끝부분에 마련된 포대는 돌을 던지거나 화포(火砲)를 쏘는 대포나 무기를 비치한 곳으
로 1236년에 이곳에서 적군을 향해 무수히 돌을 날려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후 이곳에서는
전쟁이 벌어진 일이 없어 그냥 겉모습만 남아있다가 거친 세월의 흐름 속에 거의 떠내려가면
서 포대의 일부만 남아있던 것을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했다.


▲  북치성 포대

▲  포대 가운데 부분

포대는 'ㄷ'자 모습으로 높이는 1m 정도이며,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끔 그 석축 안에 돌을 날
려보내는 무기를 엄폐시켜 전쟁 때 요긴하게 써먹었다.
포대를 이루고 있는 돌은 주변에서 가져온 큰 돌을 네모나게 다듬은 것으로 석축 밑도리에 동
그란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는 성 밑을 바라보는 용도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포대의 위치가
북치성 끝부분이라 전쟁이 한참일 경우에는 석축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전방을 확인하기에는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포대 정중앙에 주춧돌처럼 놓인 돌은 돌을 날리는 무기를 두
었던 곳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 널린 오래된 산성과 석성(石城) 가운데, 이렇게 포대까지 갖춘 성은 거의 흔치가
않다. 강화도(江華島)를 비롯한 서해바다 쪽에 포대를 둔 성이 많지만 이들은 바다에 설치된
화포용 요새이다.


▲  북치성에서 바라본 천하 - 죽산면과 일죽면 북부 지역과 용인 백암면

▲  북치성에서 동문으로 이어지는 동쪽 성곽
서쪽 성곽과 달리 경사가 좀 완만하여 길이 부드럽다.

▲  동문 북쪽 성곽

동문 주변은 자연과 세월에 의해 가루가 되거나 뭉개진 성돌이 많아 하얀 피부의 새 성돌을
많이 입혀 복원했다. 그러다보니 늙은 성돌과 새 성돌이 어색한 조화를 보인다. 하지만 어쩌
겠는가. 늙은 성돌이 많이 사라져 상황이 여의치가 않은 것을 말이다.

동문을 시작으로 죽주산성을 1바퀴 둘러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니 시간은 어느덧 19시가
되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어느 정도 어두워진 상태였다. 서쪽으로 지는 해를 억지로 잡
아가면서 동문을 들어선 것이 17시 20분이었으니 1시간 30분 동안 둘러본 셈이다. 물론 서문
북쪽인 외성 북부는 조금 가다가 말았지만 거긴 성벽 상태가 영 좋지 못해 그런 것이니 거의
80%는 본 것이나 다름이 없다.

동문을 나와 다시 속세로 내려가니 세상은 비로소 완연한 검정 도화지가 되었다. 상경(上京)
코스를 어떻게 잡을까 머리를 굴리다가 백암에서 저녁을 먹고 용인(龍仁)을 거쳐 올라가기로
했다. 하여 죽주산성 정류장에서 용인시내버스 10-1번을 타고 백암으로 넘어가 저녁으로 백암
의 명물인 백암순대국밥을 섭취했다.
백암 계통의 순대국은 처음 먹어보는데, 내장은 적으면서 고기와 순대 덩어리가 많아 비린내
도 거의 없고, 담백하고 얼큰하여 1그릇을 뚝딱 빈 그릇으로 만들었다. 뜨끈한 국물에 졸음이
몰려와 나를 희롱하니 서비스로 제공되는 커피를 마시며 졸음을 단죄한다. 이렇게 저녁을 먹
고 장거리를 이동하여 집에 들어오니 거의 자정~~

이렇게 하여 꽃샘추위 속에 찾아간 안성 죽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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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C) 2021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북녘 황해도가 바라보이는 교동도의 지붕, 화개산 나들이 (화개산성, 화개약수, 강화나들길9코스, 연산군유배지, 대룡시장)

강화 교동도 화개산 


~~~~~  강화 교동도의 지붕. 화개산 나들이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교동평야와 고구저수지
(바다 너머로 멍하게 보이는 곳이 북한 땅)

화개약수 화개산 한증막

▲  화개약수

▲  화개산 한증막


 

♠  교동도의 지붕, 화개산 오르기 (봉수대, 화개산 정상)

▲  읍내리에서 바라본 화개산

여름 제국(帝國)이 막바지 절정에 이르던 8월 광복절에 강화도와 황해도(黃海道) 사이에 자리
한 교동도를 찾았다.

아침 일찍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별다른 정체 없이 강화터미널에 도착했다. 강화도는 꿀
명소가 많다 보니 주말과 휴일에 나들이, 답사 수요가 폭발적이라 교통정체를 피하고자 아침
부터 부지런을 떤 것이다.
강화터미널에서 교동도의 발인 강화군내버스 18번(1일 11회)을 타고 송해면과 하점면, 인화리
검문소, 교동대교를 지나 황해도를 코앞에 둔 교동도(喬桐島)의 품으로 들어선다. <일반 차량
은 인화리 검문소에서 검문을 받으나 강화군내버스 18번 승객은 받지 않음, 허나 특수 상황에
는 버스 승객도 검문을 하는 경우가 있으니 교동도 방문객은 무조건 신분증을 지참 요망>

교동도에 들어서 읍내리에 있는 교동읍성(喬桐邑城)과 교동향교(喬桐鄕校), 화개산 남쪽 자락
에 안긴 화개사(華蓋寺)를 둘러보고 화개사 옆 산길을 따라 화개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교동
읍성과 교동향교, 화개사 부분은 이곳을 클릭한다)


▲  화개산을 오르면서 바라본 교동평야

화개산(華蓋山, 269m)은 교동도의 대표 지붕이자 이곳에서 가장 큰 뫼이다. 교동도 동부에 홀
로 솟아있어 교동도의 대부분 지역과 강화도와 석모도, 서검도, 미법도 그리고 바다 북쪽 너
머로 황해도와 개성(開城) 땅까지 속시원히 시야에 들어와 일품 조망을 자랑한다. 이렇듯 북
녘까지 거침없이 내닫는 조망 덕에 이북 실향민들이 자주 찾아와 코앞에 보이는 북쪽을 바라
보며 넋두리를 하거나 망향제(望鄕祭)를 지내기도 했다.

화개산에는 청동기시대 유적인 성혈바위를 비롯해 화개산성, 봉수대, 효자묘, 화개사, 교동향
교, 연산군유배지, 화개약수 등 많은 문화유산과 명소가 깃들여져 있으며, 고려 후기 삼은(三
隱)의 하나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산을 방문하여
'바닷속 화개산은 푸른 하늘에 닿았는데, 산 위 옛 사당은 언제 지었는지 모르네. 제사 지낸
후 잔 마시고 이따금 북쪽을 바라보니 부소산(扶蘇山) 빛이 더욱 푸르구나'

시를 지었다. 그는 화개사에서 독서를 한 적이 있으니 그때 이 시를 지은 모양이다.

교동대교 개통 전에는 거의 교동도와 실향민들의 산으로 숨어있었으나 2014년 7월 다리가 뚫
리면서 등산객과 나들이객 수요가 크게 늘어 강화군의 새로운 꿀단지로 명성을 누리고 있다. 
화개산 등산은 화개사나 교동면사무소(대룡리)에서 시작하는 것이 편하다. 화개사를 기준으로
봉수대, 정상, 성혈바위, 북벽망루터, 화개산성 북쪽 성곽, 화개약수, 한증막터를 거쳐 교동
면사무소(대룡리)로 내려가면 되는데, 이 코스는 강화나들길 9코스(교동도 다을새길)의 일부
이기도 하며, 화개약수 주변에 효자묘가, 한증막터 근처에 연산군유배지가 있다. 화개사에서
정상까지는 약 30분 정도, 정상을 찍고 교동면사무소까지는 1시간 30분 내외로 걸린다.


▲  화개산 봉수대(烽燧臺) - 강화군 향토유적 29호

화개사에서 20~25분 정도 오르면 주변이 확 트인 능선에 이르고 곧바로 화개산 봉수대가 마중
을 나온다.

화개산 봉수대는 정상 서쪽에 자리해 있는데, 사방이 확 트여있어 봉수대 자리로는 아주 명당
이다. 현재 가로 4.5m, 세로 7.2m의 석축만 남아있는데,, 불을 피우고 연기를 휘날리던 봉수
시설은 장대한 세월에 녹아 없어졌다.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전해지며, 여기서 고려의 국도
(國都)인 개경이 지척이라 그 중요성이 매우 컸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
覽)에는 남쪽으로 강화도 덕산봉수대에서 봉화를 받아 동쪽의 강화도 봉천산(奉天山) 봉수대
로 연락을 보냈다고 한다.

이 땅에 수많은 봉수대(봉화대)가 있었지만 그나마 이 정도라도 남은 봉수대는 거의 없다. 고
된 세월에 지쳐 우중층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는 봉수대, 내 나이의 수십 배에 달하는 세월
을 머금고 있는 봉수대 돌은 저렇게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있으나 나란 존재는 그들의 1% 인생
도 되지 못하니 참 인생은 부질 없는 것 같다.


▲  봉수대에서 바라본 서해바다와 석모도, 미법도(彌法島)
하늘과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질은 더욱 높아진다.

▲  봉수대에서 정상으로 인도하는 능선길
능선길은 나무가 제법 삼삼하여 강렬한 햇살과 숨바꼭질을 하며 움직이기에 좋다.

▲  화개산 정상(269m)

봉수대에서 5~6분 정도 가면 교동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화개산 정상에 이른다. 교동도에
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제일 높은 곳으로 6각형 정자와 초소가 정상을 지키고 있다.
이곳에 올라서면 동서남북 사방으로 일품 조망이 펼쳐지는데, 안개와 구름을 제외하면 시야를
방해하는 존재는 그 어느 것도 없다. 허나 여기서는 북한 땅까지 바라보여 산이 높고 조망이
좋은 만큼 남북분단의 비애도 크게 만든다.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교동도 서부와 대룡리, 드넓은 교동평야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교동평야를 기름지게 적셔주는 고구저수지가 밑에 보이고, 바다 너머로 그 말로만 듣던 황해
도 연백군(延白郡)과 배천군 지역이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철없던 어린 시절(1980~90년대)에는 어른이 되기 전에 남북통일이 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 어른을 한참이나 지난 지금도 통일은 커녕 아직까지도 이북 땅에 발도 들일 수가 없다.
교동도와 황해도는 3~4km로 매우 가까운 거리지만 그 체감거리는 가히 1억 광년 그 이상으로
문제는 그 거리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③
고구저수지와 교동도 북부를 비롯해 바다 너머로 황해도 연백/배천군 지역이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④
교동도의 옛 중심지인 읍내리(사진 가운데 부분), 바다 너머로 길게 누운
석모도(席毛島)와 기장섬(오른쪽 섬)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⑤
확대해서 바라본 교동도의 옛 중심지인 읍내리 지역
(사진 가운데 부분에 교동읍성이 있음)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⑥ 석모도와 상주산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⑦
석모도 북부 상주산과 강화도 서부 지역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⑧
읍내리와 남산포(사진 가운데 산), 석모도 북서부와 기장섬, 미법도, 서검도 등

           ◀  화개산 정상 표석

정상에 지어진 정자에는 산꾼들이 자리를 펴
쉬고 있었고,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어디가
북한 땅인가?','여기가 북한 땅인가?' 따지며
조망을 즐긴다.
정상의 자리란 오래 있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10분 정도 정상을 누리다가 동쪽 능선으
로 철수했다.


 

♠  화개산 내려가기 (성혈바위, 화개산성, 화개약수)

▲  성혈(星穴)바위

정상에서 서쪽 능선으로 가면 봉수대, 화개사, 효자묘(중간 갈림길에서 북쪽), 대룡리로 이어
지고, 동쪽 능선으로 가면 성혈바위, 화개산성, 화개약수로 이어진다. 성혈바위를 지나면 길
은 북서쪽으로 크게 꺾이는데, 화개약수에서 효자묘로 가는 길이 있으며, 효자묘에서 바로 올
라가면 화개사에서 올라온 길과 만난다.

동쪽 능선으로 들어서면 얼마 안가서 성혈바위라 불리는 납작한 바위가 발길을 잡는다. 하얀
금줄이 쳐진 그 안에 얕은 구멍이 여럿 찍힌 성혈바위가 있는데, 성혈이란 바위구멍 그림으로
청동기시대 이후에 많이 나타난다.
성혈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대체로 하늘의 별자리를 표시하거나 풍요, 다산(多産), 자
연 등을 숭배하는 민간신앙이나 제사 현장으로 보고 있다. 바위에 구멍을 내고 여기서 제사를
지내거나 주술행위를 했던 것이다. 이런 성혈 흔적은 자연산 바위 외에도 고인돌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  위에서 바라본 성혈바위
바위 오른쪽에 얕게 파인 동그란 자국들이 성혈이다.

▲  성혈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교동도 읍내리 동부와 석모도 상주산, 강화도 서부가 바라보인다.

▲  북벽 망루(望樓)터

성혈바위를 지나면 산길은 북서쪽으로 크게 꺾인다. 그래서 정상 외에는 보이지 않던 북쪽의
산하가 나의 시야를 점유하게 되었고 그런 길을 조금 내려가면 북쪽을 향한 곳에 북벽망루터
가 허전하기 그지 없는 모습으로 나를 맞는다.

북벽망루는 화개산에 두룬 화개산성 북쪽 성벽에 세운 망루로 산성의 외성(外城)과 내성(內城
)이 교차하는 곳에 자리한다. 산성에서 2개의 망루터가 발견되었는데, 다른 하나는 여기서 북
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 있으며, 다들 망루를 받쳐들던 돌만 아련하게 남아있다.


▲  북벽 망루터에서 바라본 교동평야와 고구저수지
바다 너머로 황해도가 흐릿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  북벽 망루터에서 바라본 고구저수지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북벽 망루터에서 바라본 교동도 동북부 (교동대교 방면)
바다 너머로 강화도 양사면 지역이 희미하게 두 눈에 들어온다.

▲  화개산성(華蓋山城) - 강화군 향토유적 30호

북벽망루를 지나면 오른쪽(북쪽) 숲속에 초췌한 모습의 화개산성이 모습을 비춘다. 화개산의
듬직한 갑옷인 화개산성은 내성(1,013m)과 외성(1,155m)으로 이루어진 산성(山城)으로 총 길
이는 약 2,168m이다.
계곡을 포함한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남북으로 길게 닦여졌는데, 이 산성이 언제 축성되었
는지는 화개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고려 때 지어진 봉수대를 통해 고려 때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1553년에 최세운이 성을 증축했으며, 1591년 외성을 철거하여 교동읍성(지금
의 교동읍성과는 다름)을 쌓았고, 1737년 개축하여 군창(軍倉)을 두었다.

허나 19세기 이후 성은 버려졌고, 관리의 손길이 떠난 산성에 장대한 세월과 대자연의 고약한
심술이 이어지면서 성곽 대부분이 분해되어 겨우 북벽망루와 화개약수 주변, 남쪽 산자락(화
개사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헝클어진 모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  화개산의 젖, 화개약수

화개산성 안내문을 지나면 깎아지른 듯한 바위 밑에 자리한 화개약수가 마중을 한다. 교동향
교에 있는 성전약수와 더불어 화개산이 속세에 베푼 약수로 푸른 이끼가 짙게 뒤덮힌 돌에서
물이 쏟아진다. (성전약수보다 물맛이 좋음) 산에 왔으니 산의 마음도 확인할 겸, 약수를 한
모금 마셔야 되겠지. 하여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갈증과 체내(體內)
의 체증이 싹 가시는 것 같다.
약수터에는 나무로 보호각을 만들었으며, 기둥에는 화개약수를 찬양하는 시가 적혀있으니 읊
어보면 다음과 같다.


▲  오랜 세월을 머금은 갸륵한 맛, 화개약수

'화개약수'  석천(石泉) 김흥기

얼마나 품었길래 그 먼길 돌아 졸졸 쉼없이 흐르는가
수없이 오갔을 세기의 지층을 밟고 귀뚜리 우는 밤에도
산주름 굽이치는 돌틈을 비집고 또르르 굴려오는 은빛 맨발의 낙수
허기진 산비탈 길에서 적막을 견뎌온 너, 천년 비밀의 갸륵한 맛

▲  효자묘(孝子墓) - 실상은 효자 아버지의 묘라고 함

화개약수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직진하면 한증막과 교동면사무소로 이어지고, 왼쪽 오르
막길을 오르면 낮은 봉분(封墳)으로 이루어진 효자묘가 나온다. 이 무덤을 지나 뒷쪽(남쪽)
산길을 오르면 화개사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서쪽 능선길과 만난다.

효자묘는 야트막한 봉분과 낮은 상석(床石)이 전부인 조그만 무덤이다. 무덤의 이름도 참 모
범적이라 부모들이 딱 좋아할만한 이름인데, 누구의 무덤인지는 전하는 것이 없고 그저 막연
하게 효자묘라 불리고 있으니 그 유래는 대략 이렇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인 어느 옛날<안내문에는 삼국시대로 추정된다고 나오나 전설
내용은 거의 조선시대 스타일임> 인근 청주골에 병환중인 아버지와 함께 사는 신씨란 젊은이
가 있었다.
그는 효성이 지극했으나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하여 교동현 군사로 징발된 부잣집 아들을 대신
하여 군대에 들어갔다. 매일 부친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댓가로 대신 들어간 것이다.
 
신씨는 화개산성에서 근무를 하였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안부를 묻고자 산 밑 고읍마을로
을 옮겼다. 마침 전쟁(또는 장거리 훈련)에 나갈 일이 있어 무탈하게 돌아오면 산성 북루(北
樓)에 해가 지기 전까지 하얀 적삼을 달기로 아버지와 약속을 했다.
무탈하게 돌아온 신씨는 약속대로 북루에 적삼을 달려고 했으나 이를 수상하게 여긴 수장(守
長)이 적삼을 빼앗고 관아로 잡아갔다. 당시 문루에 적삼 등의 깃발을 다는 것은 다른 성과
병사들에게 일종의 연락을 취하기 위함인데 수장의 허가도 없이 달려고 하니 당연히 오해를
산 것이다. 그래서 결국 약속된 시간까지 적삼은 달리지 못했고, 그 사연을 알 도리가 없는
아버지는 아들이 죽은 것으로 판단해 성급하게 목숨을 끊고 만다.
신씨를 추궁하던 수장은 그 사연을 알게 되었고, 그의 아버지 시신을 산성 안에 안장하고 3년
시묘를 하며 군복무를 하도록 해주었다. 또한 신씨의 효행을 기리고자 장수와 병사들이 매일
아침 무덤에 참배를 했고 참배 자국이 마를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무덤은 효자가
아닌 효자의 아버지 무덤인 것이다. 허나 효자 아버지 무덤이라 하기에는 이름이 기니 효자
신씨를 기릴 겸 효자묘라고 한 것 같다.


 

♠  화개산 마무리

▲  그림처럼 펼쳐진 화개산 서쪽 숲길 (효자묘~한증막 구간)

효자묘를 둘러보고 아름다운 숲길에 취하며 대룡리(교동면사무소)로 내려갔다. 숲이 매우 삼
삼해 제아무리 세상을 녹일 기세인 여름 햇살이라 한들 여기서는 어림도 없다.


▲  빽빽하게 우거진 화개산 숲길

▲  숲길에 달아놓은 조촐한 문
둘레길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둘레길 스타일의 문이다.

▲  화개산 한증막(汗蒸幕)

숲길을 내려가니 아주 단단하게 지어진 커다란 돌집이 마중을 나온다. 생김새를 보니 오래된
돌무덤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쪽에 문까지 나있어 마치 북극 사람들이 살던 이글루의 돌버전
같은 느낌까지 드는데, 뜻밖에도 옛날 사람들이 이용하던 한증막의 흔적이다.

한증막이란 오늘날 우리 목욕 문화의 일원인 찜질방의 옛 형태로 보면 된다. 이곳 한증막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황토를 밑에 깔고 위에 돌을 쌓아 반 동그라미 모습을 자아냈다.
둘레는 15m, 직경 4.5m, 높이 3m로 인근 냇물에 한증으로 푹 삶은 몸을 식힐 수 있도록 돌을
깐 자리가 남아있다.
돌한증막 작동 원리는 우선 마른 소나무가지 등으로 돌집 안에 불을 지펴 온도를 높인 다음
그 재를 꺼낸다. 그런 다음 무성한 생솔가지를 안에 넣어 바닥에 깔고 그 안에 들어가 땀을
충분히 낸 다음, 옆 냇물에서 몸을 식힌다. 그렇게 한증(汗蒸)을 반복하고 마지막은 목욕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지금의 찜질방과 같은 방식인 것이다.

이 한증막은 1970년대까지 절찬리에 사용되었으며, 교동도에는 이곳 외에도 수정산과 여러 곳
에 한증막을 두어 섬 사람들이 이용했으나 지금은 이곳만 남아있다. 솔직히 한증막 유적은 처
음 보는지라 참 생소하기 그지없는데, 이런 한증막 유적은 이 땅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옛
사람들의 목욕/찜질 문화를 귀뜀해주는 소중한 존재로 '국가 민속문화재'나 '지방문화재'로
지정해도 전혀 손색은 없어보인다. 그렇게 해야 이 한증막도 우리 곁에 더 오래 있을 것이 아
닌가?

* 한증막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 산233


▲  냇가 옆 숲속에 터를 닦은 한증막

▲  앞에서 바라본 한증막

▲  한증으로 뜨거워진 몸을 식히던 현장
(냇가에 있음)


▲  한증막 내부로 들어가는 네모난 문

증막 문이 작아서 완전 엎드려서 들어가야 된다. 내부는 옛 무덤의 석실(石室) 같은 모습으
로 너른 공간이 있는데, 거기에 마른 가지 등을 태워 내부를 뜨겁게 달군 다음, 재를 치우고
생솔가지를 바닥에 깔아 한증(찜질)을 하였다.
안에 들어가볼까 했으나 내가 들어가면 자칫 무너질까 겁나서 이렇게 보는 선에서 욕심을 버
렸다. 게다가 버려진지 오래된 한증막이고 한여름이니 안에는 벌레들도 무지 많을 것이다.


▲  연산군유배지로 인도하는 숲길

한증막을 둘러보고 조금 내려가다보면 연산군유배지를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한다. 조선의 제
10대 군주인 연산군(燕山君)이 교동도로 유배를 와서 죽었으니 그 유배처가 남아있을 것이고
그 현장이 이 부근에 있던 모양이다.


▲  연산군유배지 표석 (2014년)

연산군유배지 표석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반질반질한 하얀 피부를
지녔다.
이 땅의 사람들은 연산군(1476~1506)하면 다들 폭군, 신하들 때려죽이기, 불효자, 할머니 죽
인 패륜아, 흥청망청, 기생 잡기 등 그야말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허나 그는 우리
가 생각한 것 외로 그렇게 쓰레기 군주는 아니었다.

연산군은 조선 9대 군주인 성종(成宗)과 폐비윤씨의 아들로 성종의 장자(長子)이다. 폐비윤씨
가 한 성깔 하던 여인이라 성종과 자주 마찰이 있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성종의 어머
니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와 성종에 의해 폐비되어 궁 밖으로 쫓겨났고, 1482년 사사(賜死)
되고 만다. 성종은 이 사실을 아들이 알까 두려워 신하들에게 100년 동안 윤씨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명했다.

연산군은 왕자 시절부터 말썽을 핀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상은 다르다. 그는 10년 이상 허침(
許琛)과 조지서(趙之瑞) 등에게 학문을 배웠고, 시문(詩文)과 음악, 악기에 매우 능했으며,
많은 시를 남겼다. 또한 효성도 지극해 부왕 성종이 중병으로 눕자 밤을 새며 간호했으며, 자
신의 생일 하례를 취소시켰다. 또한 1494년 부왕인 성종이 승하하자 삼사(三司)의 반대를 뿌
리치고 부왕의 명복을 비는 수륙재(水陸齋)를 지내기도 했다.

1494년 왕위에 오르자 비융사(備戎司)를 설치해 갑옷과 무기를 생산하여 국방에 신경을 썼고,
두만강(豆滿江)에서 소란을 피우는 여진족(女眞族)을 토벌해 투항한 여진족에게 토지와 상급
을 내렸다. 또한 변방의 안정을 위해 백성들의 이주를 독려했다.
종묘 제도를 정비하고 사창과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해 물가를 안정시켜 굶주리는 백성을 구
제했으며, 호적식년(戶籍式年)을 개정해 백성의 불편을 덜었다. 그리고 '경상우도지도(慶尙右
道地圖)','여지승람(輿地勝覽)' 등의 지리서와 '국조보감(國朝寶鑑)','역대제왕시문잡저(歷代
帝王詩文雜著)' 을 편찬해 제왕 수업에 귀감으로 삼았다.
또한 성종 이후 계속된 태평성대로 관리들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사치향락을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되자 금제절목(禁制節目)을 만들어 강력히 단속을 했으며, 전국에 암행어사(暗
行御史)를 풀어 지방 관료들의 기강을 바로 잡고, 백성들의 동정을 살폈다. 그리고 문신(文臣
)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와 학문 연구에 전념케 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다시 실시해 학
문 발달에 크게 신경을 썼다.

연산군은 신하의 눈치를 받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왕권 강화를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면
서 그 유명한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년)와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가 터졌고, 왕에게
불경죄를 저지른 이들이 많이 피를 보았다. 또한 어머니 윤씨의 사망 이유를 알게 되면서 다
소 이성을 잃게 된다.
이렇게 그의 패도정치(覇道政治)가 나날이 심해지자 왕을 갈아야 된다는 무리들이 조금씩 고
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 주역은 바로 연산군과 가까웠던 박원종(朴元宗)과 성희안(成希顔)이
었다. 성희안은 금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으로 왕에게 혼이 난 적이 있었고, 박원종
은 확실치는 않지만 연산군이 그의 누이를 건드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둘은 앙심을
품고 홍경주(洪景舟)까지 끌어들여 반란을 모의했고, 1506년 9월 2일 박원종 일당은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쳐들어갔다.
그때 왕은 연회를 베풀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반란군의 침입에 왕은 크게 당황하여 아무런 말
도 못했다고 하며, 결국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반란군에게 옥새를 내주고 말았다.

반란군은 정현왕후(貞顯王后, 성종의 계비)의 허락을 구해 왕을 동궁(東宮)에 가두고 그녀의
소생인 진성대군(晉城大君)을 데려와 익선관(翼善冠)을 쓴 상태로 왕위에 올렸다. 그가 바로
조선 11대 군주인 중종(中宗)이다. 이 사건을 세상에서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 부른다.

동궁에 유폐된 연산군은 창경궁 선인문(宣人門)을 통해 궁밖으로 추방되어 교동도(喬桐島)로
유배되었다. 유배된지 2달 뒤인 11월 역질(疫疾)에 걸리자 중종은 약을 보냈는데, 어찌된 영
문인지 불과 며칠 만에 갑자기 죽으니 그때 그의 나이 겨우 30살이었다. 기록에는 단순히 병
으로 죽었다고 나와있을 뿐 자세한 내용은 없는데, 이상한 것은 한겨울에 역질이란 전염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또한 중종이 보냈다는 약도 상당히 의심쩍다. 그래서 병사가 아닌 독살되었
다는 설이 강하게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싸늘한 주검이 된 연산군은 교동도에 매장되었으며, 1512년 12월 부인 신씨가 남편의 무덤을
자신의 외조부 땅(서울 방학동)으로 이장해 줄 것을 청하자 중종이 이를 허락해 1513년 2월
왕자의 예로 이장되고 양주군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관리하도록 했다.
연산군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부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넣었으나 그 요구는 거절당했다
고 한다. (연산군묘 제사는 처가집인 거창신씨 집안에서 지내고 있음)

그는 왕이었음에도 그 흔한 묘호(廟號)도 받지 못했으며, 시호(諡號)도 없다. 그냥 왕자 시절
의 칭호인 연산군을 그대로 썼다. 김정국(金正國)과 유숭조(柳崇祖) 등은 그에게 시호를 올려
왕으로 추봉(追封)하고 양자(養子)를 들여 제사를 받들 것을 건의했으나 중종과 반정파들은
이를 거절했다. 이를 두고 이긍익(李肯翊)은 그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김정국 등을
높이 평가하며, 연산군의 제사가 끊긴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라 기록했다.

이렇게 죽어서도 왕의 예우를 받지 못한 것은 물론 조선이 망할 때까지 종묘(宗廟)에 배향되
지도 못했다. 또한 무덤도 능(陵)이 아닌 묘(墓)로 사대부의 무덤 수준에 머물렀으며, 그의
사초는 실록이 아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로 격하되었다.
이렇듯 중종과 반정파에게 철저히 매장되고 왜곡되었으며, 명종(明宗)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
면서 연산군 3글자는 부정적인 의미이자 폭군의 대명사가 완전히 찍히게 된다. 사림파는 연산
군 때 죽은 사림 계열 사람들, 즉 자신의 선배들을 의로운 인물로 추앙했고, 연산군과 그 측
근은 죄다 쓰레기로 기록하여 그것을 후손들에게 계속 주입시켰다. 이는 패배자에게 인정을
두지 않는 역사의 매정한 현실이다.
승리자는 항상 영광스럽게 포장이 되지만 패배자는 아무리 공적이 뛰어나도 승리자의 구미에
따라 철저히 왜곡되고 파괴된다. 연산군은 바로 역사의 패배자의 정석을 보여주는 것이다.

연산군이 유배살이를 했던 현장은 3곳이 비정되고 있는데, 이곳과 교동읍성 부근, 교동관아터
부근 등이다. 허나 어느 곳이 정답인지는 아직도 오리무중(五里霧中) 상태, 교동읍성 부근과
교동관아터 주변은 유배지를 알리는 비석이 있고, 내가 찾은 화개산 유배지는 표석이 있어 서
로 연산군 유배지임을 내세운다. (근래에 그 시절을 재현한 초가와 연산군 인형 등을 설치했
음)


▲  화개산 서쪽 산길 (대룡리)

▲  교동도의 서울인 대룡리

연산군유배지를 둘러보고 대룡리로 내려갔다. 나를 진하게 감싸던 숲길은 어느덧 끝나고 주변
이 확 트인 평탄한 흙길이 나를 맞이해 교동면사무소까지 쭉 인도한다.
교동면사무소에는 큼지막한 화개산 안내도가 있는데, 안내도를 보니 화개산을 남과 동, 북,
서로 완전히 1바퀴를 돌았다. 소요시간은 2시간 정도로 강화나들길 9코스인 교동도 다을새길
과 코스가 겹친다. 다을새길은 월선포에서 교동향교~화개사~화개산 정상~석천당~대룡리시장~
남산포~교동읍성~동진포를 두루 거쳐 다시 월선포로 돌아오는 16km의 도보길이다.

교동면사무소를 나오면 바로 교동도의 서울인 대룡리 마을이다. 마을 한복판에는 대룡시장이
있는데 시간이 흐르다가 제대로 기절한 듯, 1970~80년대 분위기를 진하게 간직하고 있다. 시
장이라고 하나 가게와 음식점이 여럿 있는 짧은 거리에 불과하다.

시장 인근 마트에서 간식거리를 사서 목마름과 배고픔을 조금 해소하며 바깥으로 나가는 군내
버스를 기다렸다. 정류장에 부착된 시간표를 보니 30분 뒤에 월선포를 출발한다고 한다. 월선
포에서 대룡리까지는 10분 정도 걸린다.
해는 아직도 여전하나 시간은 이미 17시가 넘었고, 몸도 다소 지친 상태라 더 이상 섬을 둘러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그 지루한 시간, 허나 한번 밖에 없는 그 시간을 억지로 죽여
가며 정류장에 죽치고 앉았다. 나중에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교동도와의 인연은 또 있을 것
이다. 이번에 못가본 곳은 그때 인연을 지으면 될 것이요. 인연이 닿지 못하면 어쩔 수 없다.
너무 과한 욕심을 부리며 억지로 인연 짓는 것도 딱히 좋지는 못하다.

시간이 되자 강화군내버스 18번이 동쪽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오랜 친구를 만난 양 얼마나 반
갑던지. 그를 잡아타고 바다를 건너 다시 강화도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교동도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하루 속히 남북이 통일되어 교동도
가 NLL의 동쪽 시작점, 민통선 구역이란 딱지를 떼었으면 좋겠다.

* 화개산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 대룡리, 읍내리, 상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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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북한산 뒷통수에 숨겨진 달달한 폭포, 밤골계곡 숨은폭포 (북한산둘레길 효자길, 효자비)

 


'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북한산 숨은폭포(밤골계곡) '



▲  숨은폭포 (윗폭포와 아랫폭포)


 

여름 제국의 무더위 갑질이 극성이던 8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북한산(삼각산) 뒷통수에 숨
겨진 숨은폭포를 찾았다.
날도 징그럽게 더워서 도심에서 가까운 계곡에서 밤을 담구며 잠시 여름의 핍박을 피하기로
했는데, 처음에는 구파발(舊把撥)에서 가까운 진관사계곡이나 사기막골(효자동계곡)을 염두
에 두었으나 밤골계곡에 숨겨진 숨은폭포가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출동했다.

여름의 기운이 제법 강했던 14시에 연신내(3,6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폭포에서 섭취할 간단
한 먹거리와 막걸리를 구입했다. 그런 다음 서울시내버스 704번(부곡리,송추↔서울역)을 타
고 박석고개와 구파발역, 북한산성입구, 효자비를 지나 효자2통 정류장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 밤골계곡으로 인도하는 길을 들어서면 농가들이 여럿 나오는데, 그들을 지나면 바로
무성한 숲길이 펼쳐지면서 천하를 녹여먹을 정도로 강렬한 햇살로부터 다소 자유로워진다.
그 숲길을 조금 들어서면 북한산둘레길 11구간(효자길)과 만나게 되며, 거기서 2분 정도 가
면 밤골공원지킴터와 북한산(삼각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게이트(문)가 나온다.


▲  북한산국립공원 밤골공원지킴터와 공원 게이트(문)


 

♠  밤골계곡(숨은벽계곡)

▲  녹음(綠陰)이 짙은 밤골계곡 산길

밤골공원지킴터를 지나면 본격적인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이다. 숲도 녹음(綠陰)도 더욱 짙어져
원시림(原始林)을 방불케 하는데, 날씨는 덥지만 숲이 베푼 바람과 갖은 내음으로 땀은 줄행
랑 치기가 바쁘다.

밤골계곡은 숨은벽능선 북쪽에서 시작해 창릉천(昌陵川)으로 흘러가는 계곡으로 숨은벽계곡이
라 불리기도 한다. 북한산(삼각산)에는 여름 제국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드는 일품 계곡이 참
많은데, 대표적인 것으로 북한산성계곡, 우이동계곡(우이9곡), 소귀천계곡, 구천계곡(구천폭
포), 정릉계곡, 구기동계곡, 불광사계곡, 진관사계곡, 삼천사계곡 등이 있다. (도봉산과 사패
산 구역은 제외)
이들은 일찍이 천하에 널리 알려져 서울과 경기도 사람들의 피서지로 바쁘게 살았는데, 밤골
계곡은 그들에 비해 인지도는 낮으나 계곡 풍경은 그들 못지 않다. 게다가 계곡의 수질도 매
우 청정하여 신선들의 비밀 피서지로 손색이 없으며, 계곡 중간에 있는 숨은폭포는 북한산의
일품 폭포로 찬양을 받는다.

밤골계곡 코스(또는 숨은벽 코스)는 숨은폭포를 지나 숨은벽능선을 거쳐 북한산의 지붕인 백
운대(白雲臺, 837m)로 이어지며. 숨은벽능선은 바위 구간이 많아 제법 험하다고 하는데 대신
조망과 풍경이 국보급이다. 숨은벽이란 이름은 북한산 뒷쪽(북쪽)에 숨은 듯 자리해 있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이 참 귀여우면서도 정감이 많이 간다.

북한산(삼각산)을 많이 갔다고 자부하는 본인이나 아직 숨은벽능선은 미답처(未踏處)로 남아
있다. 그 능선으로 들어가는 계곡과 폭포도 이번이 첫 인연이라 기대와 설렘이 아주 큰 편인
데, 밤골안내소에서 숨은폭포까지는 1km 정도 된다. 길은 거의 평탄한 수준으로 처음에는 산
길과 계곡이 조금 거리를 두고 펼쳐지다가 끝내는 서로가 붙어 나란히 이어지면서 폭포에 이
르게 된다.


▲  밤골계곡 물이 잠시 정체를 빚는 계곡 건널목


▲  인적이 거의 없는 밤골계곡 산길
길을 가다가 혹여 신선 형님이나 선녀 누님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폭포에 대한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열심히 산길에 임한다.

▲  밤골계곡 산길 ~ 우리들은 점점 푸른 산속에 묻혀 간다.

▲  밤골계곡에서 만난 기묘하게 생긴 바위

숨은폭포로 열심히 가다보면 홀쭉하게 선 기묘한 바위를 만나게 된다. 마치 옛 유적에서 많이
나오는 기와 조각이나 도자기 파편을 크게 확대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하늘에서 천제(
天帝)의 명으로 토목공사를 하다가 인부가 실수로 떨어트린 기와 파편이 그대로 곤두박질 친
것 같다.

바위 피부에는 자연이 입힌 이끼와 고된 세월의 때가 가득해 시커먼 모습이며, 중간에는 누구
에게 얻어 맞은 듯, 움푹 패인 자국들이 있다. 바위 윗쪽에는 속인(俗人)들이 얹혀놓은 돌이
널려있는데, 산길에 접한 바위 피부에도 조금의 틈이 보이는 곳에는 꼭 돌들이 여러 개 얹혀
져 있다.
이곳을 지난 사람들이 유독 눈에 띄는 이 바위에 소망과 정성을 담아 얹힌 돌로 일종의 산악
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지어준 이름도 있을 듯 싶으나 전해오는 것은
딱히 없는 것 같으며, 사람들이 얹힌 돌이 많이 붙어있어 그 흔한 '붙임바위'라 불러도 손색
은 없어 보인다. (기와 파편처럼 생겼으니 기와바위라 불러도 될 듯)


▲  기묘하게 생긴 바위 옆모습

▲  여기저기 절경과 벼랑을 빚은 밤골계곡


 

♠  북한산 뒷통수에 숨겨진 비경, 숨은폭포(숨은벽폭포)

▲  숨은폭포의 아랫폭포

밤골공원지킴터에서 넉넉잡아 20분 정도 들어가면 우렁찬 폭포수 소리가 진하게 귀청을 때리
면서 숨은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숨은벽폭포라 불리기도 하는데 숨은벽능선으로 오르는 길
목에 있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대자연 형님이 북한산이란 대작품을 빚고 혼자 두고두고 보려고 북한산 뒷쪽에 몰래 이 폭포
를 만든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첩첩한 산주름 속에 소리도 없이 묻혀있다. 북한산에 안긴
폭포 가운데 단연 으뜸으로 물이 매우 맑고 수려한 절경을 자랑하며, 경승지를 찾아 부지런히
움직였던 선비와 양반들도 이곳의 존재를 몰랐던지 폭포에 대한 기록이나 시문(詩文)은 전하
는 것이 없다. 다만 북쪽에 있는 효자리계곡(사기막골)에 조선 후기에 지어진 육모정과 서산
정사터 등이 남아있어 그곳을 찾은 일부가 이곳에 왔을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폭포는 2~3개(엄밀히 따지면 3개이나 2개로 봐도 무방)로 이루어져 있는데, 윗폭포가 더 일품
이다. 단순히 폭포를 보러 온 이들은 윗사진의 아랫폭포가 전부인줄 알고 이거만 보고 돌아가
는 경우가 많은데, 반드시 1단계 더 올라 윗폭포도 보기 바란다. 그래야 괜히 애꿎은 땅을 치
며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숨은폭포에게도 숨겨진 별칭이 있다고 하는데, 아랫폭포를 총각폭포, 윗폭포를 색시폭포(처녀
폭포)라 부른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것은 아니며, 그에 대한 사연과 전설은 딱히 전
해지는 것이 없다. 지금은 많이들 찾아오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동네 사람이나 아는 사람만
찾아오던 숨겨진 비경이다 보니 그들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아랫폭포의 높이는 대략 10m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 30~40도의 경사진 바위를 미끄럼
을 타듯 내려온다. 어제까지 비가 많이 내려서 계곡의 수량이 크게 증가해 물줄기가 성난 기
세로 쏟아져 마치 하얀 비단을 드리운 듯 하다. 우렁찬 폭포수 소리가 천하를 흔드니 여름 제
국도 크게 놀라 식은땀을 흘리며, 폭포에서 부는 선선한 바람은 지금이 여름의 한복판이란 사
실 조차 흐릿하게 만든다.
폭포 앞에는 폭포수가 담긴 못이 있는데, 물이 얼마나 해맑은지 바닥이 훤히 보인다. 허나 바
닥이 보인다고 괜히 방심하지는 말자, 폭포수가 떨어지는 바로 앞은 수심이 깊으니 주의해야
된다.


▲  숨은폭포의 아랫폭포의 위엄 ▼



▲  풍덩 안기고 싶은 아랫폭포 못

폭포에 도착한 우리는 어린 아이 마냥 신이 났다. 때가 묻지 않은 폭포수에 발과 다리를 담구
니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이 무척 시원해진다. 기분 같아서는 온몸으로 계곡물과 짜릿하게 스킨
쉽을 즐기고 싶지만 여벌의 옷을 챙겨오지 않아 다리와 발을 담구는 선에서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마치 폭포를 전세낸 듯 한없이 다리를 담구니 다리가 정말 하얗고 매끄러워진
것 같다.

그렇게 발을 담구며 주변 풍경을 사진에 담고 즐거운 간식 시간을 갖는다. 적당한 돌에 속세
에서 사들고 온 막걸리와 김밥, 과자, 커피 음료 등을 차려놓고 열심히 섭취를 했다. 폭포가
안겨준 시장기에 금세 동이 나고, 막걸리 또한 바닥을 보인다.


▲  폭포 윗쪽에서 바라본 아랫폭포

▲  아랫폭포로 빠르게 흘러가는 계곡물

즐거운 간식시간을 마치고 계속 폭포 앞에 머물렀다. 이곳이 분명 숨은폭포는 맞는데 폭포와
관련된 사진에는 이거 말고 폭포가 더 있었다. 그러니 분명히 위로 올라가면 나머지 폭포가
있을 것이다. 하여 윗쪽으로 올라가니 평탄한 계곡이 나오고, 그 계곡을 조금 들어서니 바로
숨겨진 폭포가 모습을 비춘다. 바로 숨은폭포의 윗폭포이다.


▲  숨은폭포 옆구리를 지나는 산길에서 바라본 아랫폭포

▲  윗폭포와 아랫폭포 사이의 계곡

▲  모습을 드러낸 윗폭포 - 폭포수 소리가 여기까지 쩌렁쩌렁 울린다.

▲  정면에서 본 윗폭포의 위엄

아랫폭포과 윗폭포는 대략 1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같은 숨은폭포 형제지만 서로가 완전
히 다른 모습으로 30~40도의 경사를 이룬 아랫폭포와 달리 윗폭포는 거의 90도 직각을 이루며
패기 넘치게 물을 아래로 내리 쏟는다. 그러다보니 폭포수 소리는 아랫폭포보다 한층 더 우렁
차다.

벽처럼 늘어선 하얀 피부의 바위를 타고 장쾌하게 쏟아지는 윗폭포는 높이가 10m 남짓으로 폭
포 앞에는 물이 담긴 못 대신 바위 하나가 오랜 세월 물을 맞으며 누워있다. 한여름에야 시원
하겠지만 억겁의 세월 동안 종일 물을 맞으니 바위 피부가 완전 매끄럽다 못해 미끄럽다. 이
렇게 폭포 앞에 바위가 있으니 경북 청도(淸道)의 낙대폭포처럼 물맞이 장소로 적당하다.


▲  산길에서 본 윗폭포

윗폭포의 위엄을 제대로 보려면 계곡보다는 등산로(산길)에서 봐야 된다. 산길은 아랫폭포 옆
구리에서 바위를 타고 윗폭포 서쪽을 지나가는데, 윗폭포보다는 높은 곳에 있어 폭포와 그 윗
쪽까지 훤히 바라보인다.
윗폭포 윗쪽에는 못과 함께 폭포가 하나 더 숨어있는데, 그 폭포는 완만한 경사로 높이는 5m
정도 되는 듯 싶다. 허나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지 나무에 대부분 가려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
고 귀차니즘 발동으로 그곳까지 올라가지는 않았다.
위에 있는 것도 그런데로 폭포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 그가 윗폭포가 되고, 윗폭포를 중간폭포
라 불러야 되겠지만 위에 있는 폭포는 느슨한 경사라 윗/아랫폭포보다 멋이 떨어져 별도로 다
루어도 무리는 없어보인다.


▲  윗폭포 윗쪽 부분의 못과 폭포
선녀 누님의 숨겨진 욕탕은 아닐까? 나뭇꾼과 선녀에 나오는 나뭇꾼처럼
주변 숲에 숨어 그들을 노리고 싶다.


윗폭포를 둘러보고 다시 아랫폭포로 내려와 20분 정도를 머물다가 17시에 자리를 접고 폭포와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등을 돌리기가 얼마나 섭섭했던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다봤는지 모른
다. 삼척(三陟) 미인폭포(☞ 관련글 보러가기) 전설에 나오는 미인처럼 폭포를 끼고 살고 싶
었지만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이곳이 아닌 아비규환의 속세이다. 그러니 돌아가야 된다.

* 숨은폭포, 밤골계곡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산 19-1


 

♠  호랑이와 효자의 애틋한 설화가 깃든 박태성 정려비(朴泰星 旌閭碑)
- 고양시 향토유적 35호

▲  효자비라 불리는 박태성 정려비

밤골계곡지킴터에서 북한산둘레길 11구간(효자길)을 따라 남쪽으로 10분 정도 넘어가면 효자
비(孝子碑)라 불리는 시커먼 피부의 비석을 만날 수 있다. 그는 박태성 정려비로 비석 앞 도
로(북한산로)에 있는 정류장 이름도 무려 '효자비'이다.

이 비석은 조선 후기에 박태성(朴泰星, 1679~1758)이란 효자를 기리고자 만든 것으로 사연은
대략 다음과 같다.
1679년 박세걸(朴世傑)의 아들로 태어난 박태성은 자가 경숙(景淑), 본관은 밀양이다. 품성이
온화하고 효성이 대단한 인물로 3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집안에서는 고양시 효자동 뒷
산에 무덤을 썼다. 홀로 남은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는데 그의 효행이 영조(英祖) 때 조
정에까지 알려지면서 음사(蔭仕)로 내의(內醫)에 천거되었다. 허나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데, 무슨 아버지의 음덕으로 벼슬을 받겠습니까??'
하고 거절했다.

그는 효자란 이름에 걸맞게 종로구 효자동(孝子洞)에 살았는데, 부친이 별세한 갑년(甲年, 60
년)이 다가오자 63세에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일찍 집을 나서
고양시 효자동에 있는 부친묘로 성묘를 다녔다. 그리고 성묘를 하고 도성으로 돌아와 궁궐로
등청(登廳)을 했다.
효자동에서 서대문을 거쳐 부친묘까지는 거의 30여 리(10리는 5km) 정도 된다. 지금이야 차량
으로 금방 오갈 수 있지만 그때는 오로지 두 발과 말 밖에는 없었다. 그는 큰 벼슬은 지내지
못했고 호랑이를 만나기 전에는 걸어다녔다고 하니 절하는 시간을 포함해 오가는데 왕복 7~8
시간 정도가 걸렸을 것이다. 도성(都城) 성문이 새벽 3시에 열리니 성묘를 하고 11시까지 등
청을 한 듯 싶으며, 그걸 매일처럼 했다는 것은 지나친 효심과 근면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
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성묘를 하고자 새벽 일찍 집을 나서 무악재를 넘어가는데, 어둠 속에서 갑자
기 무서운 호랑이의 대명사인 인왕산(仁王山)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막는 것이다. 그는 순간
쫄았으나 용기를 잃지 않고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선친묘에 가는 길이다. 나를 잡아 먹으려면 잡아 먹거라!!'
그 말을 들은 호랑이는 그를 덮치기는 커녕 머리를 반대로 돌리고 뒷걸음질을 하여 그의 곁으
로 다가가 '내 등에 타라!'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를 알아들은 박태성은 선택의 여지도 없이
그의 등에 올라탔다.

호랑이는 그를 태우고 깊은 산중으로 달려갔다. 자꾸 낯선 산속으로만 들어가니 박태성은 산
속으로 납치하여 잡아먹는 것은 아닌가 싶어 염통이 쫄깃해졌으나 막상 당도한 곳은 다름 아
닌 부친묘 앞. 그제서야 마음을 놓은 그는 옷깃을 여미고 무덤에 절을 올렸다. 그리고 무덤을
끌어안고 통곡을 하니 그때 새 1마리가 주변 나무 가지에 앉더니 슬피 울었다고 한다. (몇 년
동안 같이 울었다고 함)
호랑이는 그의 성묘 장면을 지켜보다가 성묘가 끝나자 그에게 다시 타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
래서 그를 타니 바람을 가르며 달려가 처음 만났던 무악재에서 그를 내려놓고 사라졌다.

다음날에도 무악재에 이르니 호랑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역시나 왕복으로 태워주어 편하
게 성묘를 다녀왔다. 호랑이는 무임으로 '무악재~효자동 선친묘'구간을 고속으로 셔틀 운행을
해준 것이다. 전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박태성은 자신을 매일처럼 태워주는 그를 위해 종종 고
기를 준비해 주지 않았을까 싶다.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는 것은 인지상정이기 때문
이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고 1758년에 박태성은 79세에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후손들은 그의 선
친묘 앞에 그의 묘를 썼다. 며칠 뒤, 후손들이 가보니 그의 묘 앞에 큰 호랑이 1마리가 엎드
려 죽어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박태성을 매일 태워주었던 그 호랑이였다. 이에 후손들은
호랑이의 시신을 수습하여 그 곁에 무덤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후 박태성의 이야기를 들은 고종(高宗)은 크게 감동을 먹고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1893년
하사금을 내려 사당과 효자비를 세워 포상을 했으며, 비문(碑文)은 박태성의 증손인 박윤묵(
朴允默)이 썼다. 또한 그의 효심에 감동한 사람들이 그의 무덤 주변으로 몰려와 마을을 이루
고 살면서 효자리(孝子里)가 되었다고 하며, 그의 효행을 길이길이 기억하게 해주었다.
<비석은 고종이 아닌 영조가 내렸다는 설도 있으며, 박태성이 부친묘에 성묘를 다니자 이곳에
들끓던 호랑이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효자리는 고양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효자동으로 변경
됨>


▲  박태성 정려비

효자비의 설화처럼 호랑이가 부친묘까지 매일
왕복 운행을 해주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호랑이가 동물의 제왕이면서 사람들이 제일로
두려워했던 존재다보니 전설/설화의 격을 높이
는 용도로 많이 등장한다. 이 설화 역시 후손
들이 그의 효행을 드높이고자 호랑이를 넣어
적절하게 꾸민 것으로 여겨지는데, 말을 타고
다닌 것을 호랑이로 둔갑시킨 것은 아닌지 모
르겠다.

1893년에 왕명으로 세운 효자비는 흑요석(黑曜
石)으로 된 검은 피부의 비석이다. 그의 피부
에는 박윤묵이 쓴 12자의 글씨가 있는데, '朝
鮮孝子朴公 泰星旌閭之碑'라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비석의 높이는 117cm, 폭은 40cm, 두께
는 12cm이다.

참고로 효자비에서 동쪽 산자락으로 300m 정도 들어가면 박태성의 묘역이 있다. 그의 묘역을
알리는 이정표가 없어서 나는 길을 찾지 못했는데 그 묘역에는 박태성과 그의 부인인 완산이
씨, 김해김씨의 묘가 있으며, 묘비는 1778년에 흑요석으로 세웠다.
묘 옆에는 귀엽게 만든 호랑이상이 있는데, 이는 효자비 부근에서 농원을 하는 사람이 사비를
들여 만든 것이며, 그 옆에는 호랑이의 묘로 전하는 조그만 봉분(封墳)이 있다. 그리고 묘역
에서 50m 떨어진 곳에 박태성의 부친인 박세걸 묘역이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224


▲  봄이 빚은 아름다운 수채화 (효자비에서 북한산성입구 방향)

▲  효자동 내시묘역길에서 바라본 노고산(老姑山)

노고산에는 예비군훈련장이 많이 안겨져 있는데, 평일에는 예비군의 사격 훈련 총소리가 여기
까지 징하게 울려퍼진다. 그 정겨운 소리를 들으니 바람처럼 흘러간 예비군 시절이 진하게 떠
오른다.
이렇게 하여 북한산 숨은폭포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효자비와 노고산 사진은 봄에 별도로 담은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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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의 꿀단지를 거닐다 ~~~ 보적사에서 독산성, 세마대, 고인돌공원까지 (경기도 삼남길7코스, 금암리지석묘군)

 


' 오산 독산성(세마대) 봄나들이 '

▲  오산 독산성(독성산성)


 

봄이 막바지에 이르던 평화로운 어린이날에 다 큰 일행들과 오산 독산성(독산)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떠있던 12시에 병점역(1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화성시마을버스 56번을
타고 독산 북쪽인 한신대학교로 이동했다. (병점역에서 한신대까지는 버스 10분 거리)

한신대 종점에서 완만한 산길을 타고 10여 분 정도 오르니 독산성 산림욕장이 마중을 한
다. 이곳은 오산시(烏山市)에서 1999년에 닦은 숲으로 소나무가 무성하여 그윽한 솔내음
을 불어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듯이 우리는 소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가져온
간식과 음식을 섭취하며 늦은 점심을 때웠다. 그렇게 배를 잔뜩 불리고 다시 10여 분 오
르니 보적사로 인도하는 길이 나오고 그 길을 오르면 독산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  독산성과 보적사로 인도하는 오르막길
오색 연등이 대롱대롱 길을 비추며 중생을 맞이한다.

▲  보적사 방면 오르막길에서 바라본 수원시내와 화성시 병점 지역

▲  보적사로 인도하는 구부러진 오르막길 (보적사 주차장)

오산 북부에 자리한 독산은 해발 208m의 조촐한 산으로 독성산(禿城山), 세마산(洗馬山)
. 석대산, 향노봉 등의 별칭을 지니고 있다. 이곳이 유명세를 탄 것은 바로 독산성과 세
마대 덕분으로 면적도 적고, 인구도 적고, 볼거리도 빈약한 오산시에서 매우 애지중지하
는 꿀단지 같은 존재이다.


▲  보적사 주차장에서 바라본 천하
경기도 제일의 도시, 수원(水原)과 그를 남쪽으로 둘러싼 화성시 병점, 동탄 지역


 

♠  독산성에 감싸인 조촐한 산사, 보적사(寶積寺)
- 오산시 향토유적 8호

▲  보적사 해탈문(解脫門)으로 살아가고 있는 독산성 동문

하늘을 향해 야트막하게 솟은 독산 정상 북쪽에 오산 지역 유일의 전통사찰인 보적사가 포근
히 둥지를 틀고 있다. (경기도 전통사찰 34호)
독산성 동문 바로 안쪽에 자리해 있어 성곽을 담장으로, 동문을 정문으로 삼고 있는데, 동문
에 '해탈의 문'이란 간판을 내걸어 일종의 해탈문으로 삼았다.

독산성 품에 안긴 보적사는 인근에 있는 화성 용주사(龍珠寺)의 말사로 무려 401년에 백제(百
濟) 왕실에서 창건했다고 전한다. (또는 고려 초에 창건되었다고 함) 허나 아쉽게도 이를 밝
혀줄 유물과 증거가 없는 실정이며, 오래된 전설 외에는 그리 오래된 유물도 없고, 절의 원래
이름도 전하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의 절은 20세기 초반에 형성된 것이라 창건 시기를 추정하
기가 어렵다.
하여 아마도 절이 우후죽순 들어서던 고려 때나, 독산성이 다소 밥값을 하던 조선시대에 승병
들의 주둔지로 조촐하게 지어진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1920년에 주대식이 약사전(藥師殿)을 부시고 대웅전을 지으면서 절 이름을 보적사라 했다. 이
는 절에 전해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을 바탕으로 지은 것으로 옛날 어느 춘궁기(春窮期) 때
먹을 것이 쌀 1되 밖에 남지 않던 노부부가 그 쌀을 미련 없이 절 부처에게 공양을 했다. 그
리고 집에 돌아오니 희안하게도 곳간에 쌀이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부처가 몇 배로 되돌려준 모양이다. 이에 무한 감동을 먹은 그들은 계속 열심히 공양
을 하였고 여기서 보물을 쌓았다는 뜻에 '보적사'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허나 전설에서는
보물 대신 쌀이 쌓인 것이니 미적사(米積寺)라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싶다.

1986년 주지 도광(道光)이 세마대의 이름을 따서 세마사(洗馬寺)로 이름을 갈았으나 얼마 안
가서 다시 보적사로 변경했다.
조촐한 경내에는 1986년에 중수된 대웅전과 선실(禪室), 요사(寮舍), 삼성각(三聖閣) 등이 있
으며, 성문 밑까지 길이 닦여져 있어 차량으로도 경내 접근이 가능하다.

* 보적사 소재지 :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 150 (독산성로 269번길 144, ☎ 031-372-3433)


▲  보적사의 담장이 되버린 독산성 북쪽 성곽
옛날처럼 군사 기지로 쓰일 일이 없으니 이제는 절을 지키는 담장이 되어
자신을 낮추어 살아가고 있다.

▲  보적사 3층석탑
근래에 지어진 탑으로 석가탑(釋迦塔)을
많이 닮았다.

▲  배가 시커먼 똥배 포대화상의 위엄
그의 배를 어루만지며 소원을 빌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  맞배지붕을 지닌 대웅전(大雄殿)

▲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3존상


▲  보적사에서 바라본 푸른 천하 (화성시 북부 지역)

보적사 경내 남쪽에 독산성 성곽길이 펼쳐져 있다. 성곽 방어물인 여장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그냥 성곽만 남아있는데, 성곽 높이가 3~5m에 이르니 자칫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기 바란다.


▲  보적사 남쪽 성곽에서 바라본 천하 (수원 남부와 화성 병점, 동탄 지역)
보이는 범위는 앞서 보적사 방면 오르막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직까지 독산 북쪽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  독산성 북동쪽 성곽 (세마대 동쪽)


 

♠  권율장군의 세마(洗馬) 설화가 깃든 오래된 산성
오산 독산성(禿山城)과 세마대(洗馬臺)터 - 사적 140호


▲  독산성 동문 주변

독산 산정에 자리한 독산성<독성산성(禿城山城)>은 백제 때 닦여진 매우 늙은 성이다. 신라와
고려도 이 성을 손질해 사용했으며, 조선도 서울 남부를 지키는 요충지로 썼다.

이곳이 크게 이름을 날린 것은 바로 임진왜란 시절이다. 1592년 12월, 전라도 관찰사 겸 순변
사(巡邊使)인 권율(權慄)장군이 근왕병(勤王兵) 2만을 모아 서울로 향하다가 바로 이곳에 진
을 치고 주변에 있던 왜군을 토벌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재미난 설화가 한 토막 전해오
고 있으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권율이 2만 대군을 이끌고 이곳에 들어와 진을 쳤다. 그들을 두려워한 왜군은 성을 포위해 공
격을 가했는데, 아무리 공격을 해도 소용이 없자 뿔이 난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은 첩자를
보내 성의 결점을 알아오라고 했다. 그 결과 성에 물이 매우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식량이 많아도 물이 없으면 게임이 끝나는 법, 왜군은 성 밑에 큰 웅덩이를 파 성 내
부에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지하수를 차단하니 얼마 안가서 조선군은 물로 크게 곤란을 겪게
되었다. 그러자 왜장은 물 1지게를 보내 조롱하며 조선군의 분열을 조장하려고 했다. 허나 권
율이 누구던가?
그는 기가 막힌 계략을 생각해내고 다음 날 아침, 왜군들이 잘 바라보이는 곳에 백마를 데리
고 와서 흰쌀을 말에게 끼얹어 목욕시키는 연극을 보였다. 그것을 본 단순한 왜군은 말을 목
욕 시킬 정도로 물이 많다고 판단하여 포위를 풀고 바로 줄행랑을 쳤다. 그때 권율은 그들을
추격하여 수천의 왜군을 잘 다져진 고기 덩어리로 만들었다.
이상이 독산성의 세마대 설화이다. 쌀로 말을 씻겼다고 해서 장대(將臺) 이름을 세마대라 했
을 정도이니 아마도 사실이 아닐까 싶다. 이런 설화는 구미 천생산성(天生山城)에도 전해오고
있는데, 해가 막 뜰 때쯤 저리 연극을 한다면 정말 물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1593년 9월, 3일 동안 백성들이 합심하여 성을 수축했으며, 1595년 포루(砲樓) 시설이 설치되
었다. 1597년 2월에는 조총을 방어하고자 평평한 집을 성벽 안에 짓고, 거기에 성 아래로 향
한 창문을 설치해 석차와 포차를 배치했다. 그리고 성 밖에는 목책을 세우려고 했으나 실현하
지는 못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권율의 빛나는 전승지로 천하에 널리 알려지자 성의 중요성도 커져 1602년
수원부사 변응성(邊應城)이 수축했으며, 1796년 수원 화성(華城) 축조로 그 남쪽을 지키는 용
도로 개축되었다. 이때 독산의 이름이 잠시 향로봉으로 갈렸는데, 앞서 말했듯이 늘 물이 부
족한 곳이라 그 이후 철저히 버려지게 되었다. 아무리 수비하기에 좋은 곳이라 해도 물이 없
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성 둘레는 1,800보(3,240m)로 현재는 그 1/3정도만 남아있으며, 4개의 문을 갖추고 있다. 성
벽 바깥은 장방형 또는 방형(方形)으로 다듬었고, 약간의 기울기를 주어 매우 단단하게 쌓았
다. 성 내부에는 보적사와 세마대가 있으며, 옛 건물터가 조금 남아있다.
오산의 대표적인 명소로 탐방로와 숲길이 잘 닦여져 있으며, 숲이 무성하고 조망도 일품이라
교외 나들이 및 소풍 장소로 아주 제격이다. 속세에서 독산성으로 가려면 세마역(1호선)에서
보적사입구를 거쳐 가거나 한신대에서 산림욕장을 거쳐가는 것이 좋으며 경사가 완만하여 오
르기도 쉽다.

* 소재지 :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 155외


▲  독산성의 얼굴, 세마대

독산 정상에는 독산성의 얼굴이자 장대인 세마대가 의연하게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
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임진왜란 이후에 지어졌으며, 왜정(倭政) 때 세마대 이야기에 크게 발
작한 왜인들이 부셔버렸다. 이때 성 안에 살던 300호 정도의 민가도 강제로 정든 고향을 떠나
주변으로 흩어져야 했다.
1957년 세마대가 복원되었으며, 이승만 전대통령이 이곳을 다녀가 세마대 현판을 남겼다. 건
물 중앙에는 툇마루 같은 것이 있어 앉아갈 수 있으며, 소나무에 둘러싸여 있어 이곳에 앉아
있으면 자연히 솔내음을 누리게 된다.


▲  이승만이 남긴 세마대 현판의 위엄

▲  독산성 동쪽 치 (독산성에서 가장 동쪽 부분)
이곳에 서면 세교지구와 오산시내, 운암지구, 동탄신도시가 앞다투어
시야에 잡힌다.

▲  부드럽게 펼쳐진 독산성 성곽 (동남쪽 성곽길)

▲  남쪽을 향해 고개를 내민 독산성 남쪽 치

이곳은 독산성의 남쪽 끝으로 오산시내와 화성시 정남면 지역이 훤히 두 눈에 들어온다. 권율
이 쌀로 말을 씻기는 연극을 했던 현장이 바로 이곳이 아니었을까? 그만큼 시야도 좋고 산 밑
에서도 쉽게 눈에 띄는 곳이다.


▲  봄이 활짝 나래를 펼치는 독산성 남쪽 성곽

▲  독산성 남쪽 성곽

독산성을 다시는 안와도 될 정도로 완전히 1바퀴를 돌고 싶었는데, 일행들의 권유로(나는 힘
이 없었음) 절반만 돌다 철수했다. 아무래도 다음에 또 인연을 지어 나머지를 모두 둘러보라
는 독산성의 숨겨진 뜻인가 보다. 어쨌든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  독산성 남쪽 성곽에서 바라본 오산 서북부(세마동) 지역
정면에 보이는 산줄기를 넘으면 바로 오산 시내이다.

▲  수풀 속에 잠든 의문의 주춧돌

동문터 주변에는 2013년 11월에 발견된 오래된 돌이 누워있다. 딱 봐도 사람의 손길이 거쳐간
돌임을 눈치챌 수 있는데, 고려 때 이용된 건물터 주춧돌이나 석등 초석으로 보고 있다.
현재 독산성에는 세마대 외에는 성곽 건물이 남아있지 않은데, 그가 건물 주춧돌이라면 장대
나 군창(軍倉), 군사 숙소를 받치는 용도로 쓰였을 것이고, 석등 초석이라면 오래된 유물이
없어 애태우는 보적사의 유물일 것이다. 하지만 발견된 것이 달랑 돌 하나 뿐이니 그 이상의
상상은 어렵다.


▲  문 천정이 사라진 동문

독산성 동문은 동그란 천정인 홍예도 없이 문의 흔적만 남아있다. 잘 쌓여진 성돌을 보니 이
곳이 정말 크고 단단한 성임을 느끼게 하는데 그 문을 나서 15분 정도 내려가면 보적사 일주
문이 나온다.


▲  보적사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한 일주문(一柱門)
높이가 상당한 일주문 현판에는 '독산성세마대산문(山門)'이라 쓰여 있다.
즉 보적사를 뜻한다.


보적사입구로 나온 우리는 물향기수목원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날 코스가 그랬음) 버스로
가기에는 매우 애매하여 도보로 가기로 했는데, 동네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독산과 오산시내
사이에 자리한 여계산을 넘어 세교지구로 넘어갔다.
이 구간은 경기도와 오산시가 닦아놓은 '경기도 삼남길 7코스' 독산성길로 세마교에서 독산성
과 여계산. 고인돌공원을 거쳐 은빛개울공원까지 이어지는 7.2km의 길이다. 여계산은 독산보
다 낮은 산이나 숲이 삼삼하여 오솔길처럼 걷기 좋으며, 그 산을 넘어 세교지구에 이르니 왠
돌덩이들이 땅에 바짝 누워 우리를 바라본다. 뭔가 해서 살펴보니 고인돌(지석묘)로 산을 내
려오니 너른 공원이 나타나는데, 그 공원에도 고인돌이 잔뜩 널려있다. 바로 금암동 고인돌공
원이다.


 

♠  오래된 고인돌을 후광으로 삼은 금암동 고인돌공원
'오산 금암리 지석묘군 - 경기도 지방기념물 122호'

▲  금암리 5호 고인돌

오산 세교지구(세교신도시) 남부에 고인돌공원이 넓게 누워있다. 이곳은 큰 바위가 많은 마을
이라 하여 '묘바위', '검바위', '금암'이라 불렸는데, 그것이 이 지역의 이름인 '금암동(錦岩
洞)'이 되었다.
공원을 중심으로 고인돌 11기가 발견되었는데, 그중 신원이 확실한 9기가 경기도 지방기념물
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나머지 2기(10,11호)는 신원이 확실치 않은 존재> 11기 중 4기는 공
원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있어 공원 안내문을 참조하여 숨바꼭질을 하기 바란다. (7기는 공원
에 있음)
이들 고인돌은 덮개돌(뚜껑돌)이 모두 땅에 누워있어 내부 구조는 아직 밝혀진 게 없으나 아
마도 무덤방이 땅 속에 있을 것으로 보이며, 달랑 덮개돌만 있는 고인돌로 보인다. 덮개돌은
화강암을 사용했으며, 길이는 1.96m에서 최대 6m까지, 너비 1.2~3m, 두께 0.3~1.1m이다. 2호
고인돌에는 알구멍이라 불리는 성혈(聖穴)의 흔적이 있으며, 청동시시대 유물로 이곳을 다스
렸던 세력의 우두머리 무덤으로 여겨진다. 그 시대면 한참 옛 조선(朝鮮, 고조선)이 동아시아
와 중원대륙의 적지 않은 땅을 다스리던 시절이니 아마도 옛 조선의 간접 지배를 받았을 것이
다.

고인돌 주변에 세교지구가 들어서자 오산시는 여계산 동쪽 자락과 묶어 고인돌공원을 닦아 시
민들에게 선사했다. 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흔치 않은 고인돌공원으로 시민들의 포근한 휴식처
이며, 공원 한복판에는 잔디를 넓게 닦아 탁 트인 모습이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오산의 새로
운 명소로 인근에 독산성, 여계산, 물향기수목원과 같이 연계해서 둘러보면 정말 배부른 여로
(旅路)가 될 것이다.

* 소재지 : 경기도 오산시 금암동 520일대 (수목원로 449)


▲  금암리 4호 고인돌

▲  재현된 움집

여기서 움집터가 발견되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 청동시시대까지 무작정 선사시대(先史
時代)로 몰고 있는 경향이 커 그에 걸맞게 움집을 재현한 모양이다. 그래도 청동기시대는 돌
만 다르던 석기시대보다 더 진보된 사회인데, 사람들이 다 움집에만 살았을까? 게다가 옛 조
선(고조선)과 동이족의 수준 높은 문화가 천하 곳곳을 어루만지던 시절이고 그들이 만든 한자
(漢字)까지 있거늘...


▲  고대(古代)의 비밀을 품으며 오후 햇살을 누리고 있는 1,2호 고인돌

▲  멀리서 바라본 1,2호 고인돌의 위엄

고인돌공원에 있는 고인돌을 모두 둘러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여의치 못해 이 정도만 둘러보고
문헌근린공원을 넘어 물향기수목원으로 이동했다.
이후 내용은 생략하며, 5월 5일 오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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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 산사 나들이 ~ 고즈넉한 비구니 수행도량, 수원 광교산 봉녕사

 


' 봄맞이 산사 나들이 ~ 수원 봉녕사 '


 

차디찬 겨울 제국이 저물고 봄이 천하 평정에 열을 올리던 4월의 첫 무렵, 경기도의 중심
도시인 수원(水原)을 찾았다.

화서역(1호선)에서 친한 후배를 만나 도심 속의 그림 같은 호수인 서호(西湖)를 둘러보고
일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어 후식거리를 물색하다가 수원시내 동북부에 자리한 봉녕사로
길을 잡았다.


  콘크리트와 개발의 산물에 둘러싸인 봉녕사 표석 (봉녕사입구)


 

♠  봉녕사 입문

▲  봉녕사 일주문(一柱門)

녕사입구에서 봉녕사를 알리는 이정표의 안내에 따라 동남쪽 오르막 길을 5분 정도 가면 봉
녕사의 정문인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일주문은 절과 속세(俗世)의 경계를 가르는 문으로 1994년에 지어졌는데 문에 쓰인 목재는 영
천 백흥암(百興庵) 승려인 육문이 희사(喜捨)했다. 육중한 맞배지붕을 받치고자 돌로 기둥을
삼았지만 지붕의 위엄을 감당하기가 버겨운지 바로 옆에 보조용 목조 기둥을 두어 4개의 기둥
으로 지붕을 사이좋게 받쳐들고 있다.


▲  일주문 옆에 자리한 봉녕사 사적비

문 정면에는 '광교산 봉녕사(光敎山 奉寧寺)'
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고, 좌우 기둥에는
'봉
녕사 승가대학(奉寧寺僧伽大學)','봉녕사금강
율원(奉寧寺金剛律院)'이라 쓰인 현판이 자리
해 이곳의 이름과 성격을 알려준다.

문 옆에는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
이 있고, 그 너머로 요즘 한참 난개발이 진행
되고 있는 광교(光敎)신도시가 바라보인다.


▲  일주문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길

일주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언덕에 소나무와 함께 한참 물이 오른 연분홍 진달래꽃이 중생들을
환영한다. 이 언덕은 봉녕사 비구니들이 직접 가꾼 것으로 그 언덕 너머에 바로 봉녕사가 자
리해 있는데, 경내로 다가설수록 언덕의 높이도 낮아져 절 건물의 머리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
낸다.
보통 평지나 낮은 곳에 자리한 절들은 일주문에서 경내까지 거의 정면으로 뻗은 길을 따라가
면 경내 외곽부터 법당까지 줄줄이 나타나는데 반해 여기는 낮은 지대에 자리해 있음에도 지
형상의 이유로 경내를 바로 언덕 너머에 두고 빙 둘러가는 구조를 취했다. 오로지 지름길과
직선을 선호하는 요즘 세상과는 맞지 않게 말이다. 물론 일주문을 지나 쭉 들어가면 알아서
경내가 나오기는 하나 중간에 서쪽으로 90도로 휘어져 경내로 이어지니 이는 부질없는 인생,
너무 빠른 길만 찾으려 하지 말고 조금은 돌아가는 삶도 즐기면서 살라는 봉녕사의 주문이 담
긴 것은 아닐까 싶다.


▲  길이 서쪽으로 크게 휘어지는 부분에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이라 쓰인 2개의 돌기둥이 나와 중생을 검문한다.

▲  돌기둥을 지나면 나오는 오르막길
경사가 낮은 저 언덕길을 오르면 봉녕사 경내가 수줍은 듯 모습을 드러낸다.

▲  범종루 주변 (정면에 3층석탑과 '佛' 바위글씨가 있음)

조금 구부러진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주차장이 있는 경내 외곽에 이른다. 바로 정면에는 범
종각과 우화궁, 불(佛) 바위글씨가 새겨진 바위 등이 보이고, 왼쪽(남쪽)에는 늘씬한 숲길과
승려들의 보금자리인 육화료(六和寮), 그리고 오른쪽(북쪽)에는 불서각을 비롯해 경내 중심이
질서를 잡으며 정갈하게 펼쳐져 있는데, 여기서 법당인 대적광전까지 길(130m 정도 됨)이 곧
게 닦여져 있어 장쾌한 기분을 누리게 한다. 게다가 길 중간에 시야를 가로막는 문도 없으니
대적광전까지 속시원히 두 눈에 들어와 그런 기분을 더욱 돋구어 주며, 그 길을 척추로 하여
좌우에 향하당과 청운당, 소요삼장 등의 건물과 온갖 석물,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이 자리
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비추는 불서각(쉼터)에는 불교 용품과 서적, 공양미 등을 판매하
고 있는데, 옆 쉼터에는 길다방 커피와 음료수 자판기, 그리고 의자가 넉넉히 배치되어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그럼 여기서 잠시 봉녕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봉녕사 범종루(梵鍾樓)
2002년에 조성된 범종(梵鍾)을 비롯해 법고
(法故), 목어(木魚), 운판(雲版) 등의 4물
(四物)이 담겨져 있다.

▲  '佛' 바위글씨의 위엄
크고 단단하게 생긴 바위에 부처를 뜻하는
'佛' 1글자가 마치 물이 흘러내리는
듯한 모습으로 깃들여져 있다.


수원 우만동 뒷산에 자리한 봉녕사는 비구니 수행/교육도량으로 수원의 듬직한 진산(鎭山)인
광교산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광교산 봉녕사'를 칭하고 있다.
겉으로 보면 광교산과 멀리 떨어져 있어 강원도 고성(高城)의 건봉사(乾鳳寺)가 한참이나 떨
어진 금강산(金剛山)을 가져와 '금강산 건봉사'를 칭하는 것처럼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봉
녕사와 광교산 사이에 도로와 주거지, 경기대가 자리하여 서로를 떨어트려서 그렇지 이곳도
엄연한 광교산(582m)의 일부이다. 정확히 말하면 광교산의 제일 남쪽 끝으머리에 해당된다.

봉녕사는 1208년
원각국사(圓覺國師)가 창건하여 창성사(彰聖寺) 또는 성창사(聖彰寺)라 했다
고 전한다. 원각이 과연 세웠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경내에 고려 중기 석불이 있고, 800
년 정도 묵은 향나무가 있어 13세기에 창건되었음을 그런데로 받쳐주고 있다.
조선 초에는 봉덕사(奉德寺)로 이름을 갈았으며, 1469년 혜각국사(慧覺國師)가 중수하여 봉녕
사로 이름을 갈았다. 혜각국사에 대해서는 적당한 기록은 없지만 세조(世祖)
가 예우했던 신미
(信眉)가 아닐까 여겨진다. 그는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한자로 된 불교 경전을 한글로 해석
하는데 큰 공을 세운 승려이다.

이후 1878년까지 무려 400년 동안 적당한 내력을 남기지 못했는데, 아마도 임진왜란 때 파괴
되어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있던 것을 19세기 중반부터 조금씩 중창을 벌인 것으로 여겨진다.


▲  돌다리와 계단 너머로 보이는 대적광전

1878년에는 석가모니후불탱과 칠성탱, 현왕탱을 조성했고, 1891년에 신중탱을 조성했다. 이후
그런데로 법등을 유지하다가 1971년 묘전(妙典)이 주지가 되면서 우리나라 현대 비구니의 큰
승려로 추앙받는
묘엄(妙嚴)과 의기투합해 요사와 법당을 신축하고 선원을 개원했으며, 1974
년에 대웅전을 신축하고, 석가불을 봉안했다. 그리고 1975년에는 묘엄이 승가학원을 설립하면
봉녕사는 이때부터 비구니 수행/교육 도량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1983년 육화당(육화료) 3층 건물을 지어 승가학원을 승가대학(僧伽大學)으로 개칭하여 묘엄이
초대 승가대학장이 되었으며, 1989년과 1992년에 도서관(소요삼장)을 세우면서 선원(禪院)과
강원(講院)을 모두 지닌 비구니 수련도량으로 내실을 키웠다.

1994년에는 영천 백흥암의 육문이 희사한 나무로 일주문을 세웠고, 1998년 약사보전을 중건했
으며, 야외에서 고통받던 석조3존불을 위해 용화각을 그에게 씌우는 한편, 1998년에는 법당을
중건해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리고 1999년에는 묘엄이 천하 최초로 비구니 율원(律
院)인 금강율원(金剛律院, 금강율원승가대학원)을 개원하여 수행도량으로서의 위엄을 더욱 드
높였다.
지금의 봉녕사와 승가대학, 그리고 비구니 최초의 율원을 만든 저력을 과시한 묘엄은 2011년
12월 3일 봉녕사에서 80세의 나이로 입적했는데, 그는 큰 승려로 찬양받는 성철의 유일한 비
구니 제자로도 유명하다.

제법 너른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용화각, 약사보전,
향하당, 청운
당, 소요삼장 등 10여 동의 온갖 건물이 자리해 있는데, 용화각과 약사보전, 불서각 등을 제
외하면 허벌나게 크다. 그리고 대적광전과 용화각, 약사보전은 동남향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경내가 완전 북향도 남향도 아닌 동남향(東南向)이기 때문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석조3존불과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신중
탱, 현왕탱 등 지방문화재 2점이 있으며, 대적광전 뜨락에 800년 묵었다는 향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며 봉녕사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준다. 그 외에는 딱히 오래된 유물은 없으며, 건물도
1971년 이후에 죄다 으리으리하게 갈았기 때문에 고색의 향기도 싹 말라버렸다.

봉녕사는 비구니 사찰이라 경내가 꽤 깔끔하고 정갈하다. 어여쁜 꽃과 식물들이 구석구석 심
어져 자연과 여인의 향기를 그윽하게 베풀고 있고, 조금의 먼지도 찾기가 힘들다. 게다가 피
부와 눈 색깔이 다른 외국인 비구니도 많은데, 서구에서 온 이들이 많다. 또한 다른 정통수행
도량과 달리 속세에도 개방적이라 나들이객과 속인들에게도 친절한 편이며, 템플스테이와 산
사음악회, 사찰음식대향연(매년 10월) 등 다양한 볼거리와 축제를 열어 속세와의 거리를 좁히
고자 애쓰고 있다.

* 봉녕사 소재지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 (창룡대로 236-54 ☎ 031-256-4127)

* 봉녕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연꽃 돌조각
연꽃이 그대로 돌로 굳은 것 같다. 저기에 색채만 입히면 정말 연꽃이
따로 없을듯~


 

♠  봉녕사 둘러보기

▲  3층석탑과 석불 (어디서 많이 본 모습들인데..?)

불서각(쉼터)에서 대적광전으로 이어지는 직선 길에 임하면 독특한 모습의 3층석탑과 석불을
만나게 된다. 다들 근래에 심어진 것들이라 하얀 피부가 봄햇살에 비쳐 더욱 빛을 발하고 있
는데, 그들의 모습이 왠지 옛친구처럼 낯이 익다. 어디서 본 것일까? 아 기억이 난다. 바로
강원도 강릉(江陵)의 신복사(神福寺)터에 있는 고려시대 석불과 석탑을 본떠서 만든 것이다.
경주 불국사(佛國寺)의 다보탑과 석가탑, 화엄사(華嚴寺)의 4사자3층석탑 등을 모방한 것은
많이 봤지만 인지도도 별로 없는 신복사터 탑과 석불을 모방한 것은 처음 본다. 마치 그들에
게 낀 오랜 세월의 때를 빡빡 밀어내고 윤을 낸 모습으로 이들을 만든 사람이 강릉이 고향이
거나 강릉이 고향인 고참 승려의 부탁으로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  다보탑(多寶塔)

신복사지 석탑/석불 맞은편에는 경주 불국사 다보탑의 축소/재현판이 있어 눈길을 끈다. 그곳
다보탑보다 작아서 그렇지 영락없이 닮은 꼴로 신라 때 불국사처럼 수행도량의 대표 성지(聖
地)로 성장하고 싶은 봉녕사의 염원을 다보탑의 축소판으로 강렬하게 표현한 듯 싶다.


▲  봉녕사에서 만난 백송(白松)

신복사지 탑과 다보탑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대적광전 계단 밑에 뿌리를 내린 하얀 피부의 소
나무가 마중을 한다. 그는 천하의 희귀종으로 우리나라에만 남아있는 백송이다.
백송은 원래 중원대륙이 고향으로 그곳을 오가는 조선 사신이 가져와 심은 것이 여럿 남아있
다. 그 대표적인 것이 경복궁 서쪽 통의동(通義洞)에 있는 백송으로 천하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백송이었으나 1990년 9월 폭우로 장렬히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아직 남아있
음) 그래서 헌법재판소 안에 자리한 재동(齋洞) 백송이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의 타이틀을 쥐
게 되었다.
그 외에 조계사(曹溪寺) 백송과 이천(利川) 백송, 예산 추사고택 백송이 있는데, 이들이 오래
된 백송의 전부이며, (원효로 백송, 내자동 백송, 회현동 백송, 보은 백송, 밀양 백송은 사망
) 그들의 후예가 창경궁(昌慶宮)과 재동 백송 주변, 그리고 이곳에 뿌리를 내려 백송의 부흥
을 꿈꾼다.
봉녕사에 백송이 들어온 것은 1999년 4월 기증을 통해서였다. 그래서 조계사와 더불어 백송을
간직한 이 땅에 흔치 않은 절이 된 것이다.

  대적광전 계단 밑에 자리한 샘터
자연이 베푼 샘물이 4개의 동그란 석조와
3개의 대나무통을 거쳐 내려온다.

▲  청운당(淸雲堂)

▲  향하당(香霞堂)

대적광전 1단계 밑 좌우에는 비슷하게 생긴 청운당과 향하당이 자리해 있다. 이들은 정면 7칸
, 측면 4칸의 2층으로 된 팔작지붕 건물로 청운당은 1999년에 지어졌는데, 콘크리트로 구성된
1층은 큰방과 율원 지대방이 있고, 나무로 된 2층은 금강율원, 율주(律主) 승려방, 강사 승려
방이 있다.
그리고 청운당과 마주보고 있는 향하당은 1997년에 지어진 것으로 1층에는 종무소(宗務所)와
다각실이, 2층에는 선방(禪房)과 주지실, 객실 등이 있다.


▲  대적광전(大寂光殿)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대적광전은 봉녕사의 법당이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
지붕 건물로 청운당, 향하당과 달리 1층이라 그렇지 우람한 수준은 그들에 못지 않다.
원래 이곳에는 시멘트로 만든 조그만 대웅전(大雄殿)이 있었으나 1997년 1월에 부셔버리고 지
금의 건물을 지어 1998년 7월에 완성을 보았다. 그때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갈았으며, 불단(佛
壇)에는 1998년에 조성된 비로자나불좌상과 노사나불, 석가여래 등의 삼신불(三身佛)을 비롯
해 후불탱인 삼신불탱과 신중탱(神衆幀)이 있다. 그리고 건물 외벽에는 팔십화엄변상도(八十
華嚴變相圖)가 장엄하게 자리를 채우고 있다.


▲  대적광전 앞에 있는 오래된 돌덩어리
돌의 뿌연 피부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적어도 200년 이상은 묵은 것 같은데
그에 대한 정보가 없어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돌덩어리 위에는 원래
있어야 될 존재 대신 꽃이 조촐하게 둥지를 틀었다.

▲  봉녕사 향나무 - 수원시 보호수 22호

적광전 뜨락 좌측에는 오래된 향나무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그는 나이가 무려 800년
을 헤아린다고 한다. 800년이면 창건시기인 1208년과도 거의 맞아떨어져 봉녕사의 13세기 창
건설을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
절의 오랜 보살핌에 힘입어 높이 8m, 둘레 2.7m 덩치로 자라났으며, 2007년에 수원시 보호수
로 지정되었다.

▲  대적광전 외벽에 그려진
팔십화엄변상도의 위엄

▲  대적광전 앞 (대적광전에서 주차장까지
곧게 뻗은 길)


▲  봉녕사 용화각(龍華閣)

적광전 좌측에는 용화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오
래된 보물인 석조3존불의 거처이다.
용화각은 미래의 부처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의 거처로 보통 용화전(龍華殿)을 칭하기 마련이
다. 허나 봉녕사는 미륵보살에는 썩 의미를 두지 않는지 전(殿)보다 1단계 낮은 용화각을 칭
하고 있다. 

이곳에 깃든 석조3존불은 고려 중기 석불로 1995년에 대적광전 뒤쪽을 손질하며 터를 닦다가
발견되었다. 하여 봉녕사 초창기 시절의 석불이 분명하며, 향나무와 함께 13세기 창건설을 입
증하는 소중한 존재가 된다. 허나 그런 고마운 존재에게 번듯한 건물도 지어주지 않고 야외에
두는 우를 범하다가 1998년에 이르러 용화각을 씌워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건물 이름을
용화(龍華)로 한 것을 보면 그들을 미륵불로 삼은 모양이다.

봉녕사 석조삼존불
▲  봉녕사 석조3존불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51호
(문화재청 사진)

대적광전을 둘러보고 약사보전을 우선 살펴본 다음 용화각을 보려고 했다. 약사보전을 살피는
동안 시간이 18시가 되면서 비구니들이 이들 건물에 들어가 저녁 예불을 벌였는데, 약사보전
은 예불 전에 싹 사진에 담았으나 용화각은 예불 때문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들의 예불을 방
해하면서까지 내 욕심을 채우기는 싫었기에 예불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으나 6시 30분이 넘어
도 좀처럼 끝날 줄을 모른다. 이제 곧 땅꺼미의 세상이 될 터인데, 배도 고프고 더 기다리기
도 어정쩡하여 문틈으로 소심하게 석조3존불을 보는 선에서 끝내고 말았다.

나를 구경하지 못한 석조3존불은 대적광전 뒤쪽 야산에서 발견되었는데, 가운데 불상(본존불)
은 연화대(蓮花臺) 위에 앉아있고, 좌우 석불은 서 있다. 본존불은 왼쪽 어깨에 법의(法衣)를
걸치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머리와 목이 지나치게 커 신체비례가
떨어진다. 얼굴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씻겨 내려가 눈과 코. 입은 거의 닳았으며, 희
미한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졌다. 수인(手印)은 손가락을 곧게 펴 왼손은 경례를 하
듯 가슴에 대고 있고, 오른손은 위에 두었다.
좌우 석불도 본존불처럼 비슷한 스타일로 법의를 걸쳤으며 모두 머리 부분이 깎여져 있다. 이
들 모두 귀는 짧고 목이 매우 두꺼운데, 앉고 서 있는 것에 차이가 있을 뿐, 거의 비슷해 같
은 사람이 조성했음을 짐작케 한다.

이들의 조성시기는 고려 중기(또는 후기)로 여겨지며, 봉녕사의 오랜 내력을 증명하는 증거물
이자 수원 토박이 불상 중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봉녕사는 초창기와 조선 중/후기 부분
에 많은 공백이 있는데, 불상이 땅속에 묻혀있다가 발견된 것을 보면 봉녕사도 우울한 시절이
꽤 길었던 모양이다.


 

♠  봉녕사 마무리

▲  약사보전(藥師寶殿)

대적광전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약사보전이 있다. 1998년에 중건된
것으로 1979년에 조성된 석조약사여래좌상을 비롯해 석가모니후불탱과 아미타후불탱, 현왕탱,
신중탱 등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 밖 기둥에 걸린 주련(柱聯)은 '
석문의범(釋門儀範)','가
사이운(袈裟移運)'의 가영(歌詠)에서 옮겨온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  약사보전 앞에 있는 봉황(鳳凰)의 위엄 (봉황 맞나?)
왼쪽 봉황은 가만히 서 있고, 오른쪽 봉황은 날개를 퍼득이고 있다.
봉황이긴 해도 조금은 어설퍼보여 봉황 흉내를 낸 닭처럼 보인다.


▲  약사보전 석조약사여래좌상과 석가모니후불탱

▲  신중탱(神衆幀)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52호

약사보전 내부에 자리한 신중탱과 현왕탱은 '봉녕사 불화(佛畵)'란 이름으로 경기도 지방문화
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신중단(神衆壇)에 자리한 신중탱은 1891년에
현조(現照), 돈조(頓照)가 비단에 그린 것으로
가로 168cm, 세로 178cm의 크기이다. 대범천왕(大梵天王)과 제석천왕(帝釋天王)이 신의 무리
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으로 아래 중앙에는 위태천(韋太天)을 중심으로 팔부신장(八部神將)과
용왕(龍王), 금강상(金剛像) 등을 그렸다. 조금의 여백도 없이 빼곡하게 그려져 조금은 정신
이 없어 보인다.


▲  현왕탱(賢王幀, 왼쪽 그림)과 아미타후불탱(오른쪽)

현왕탱은 1878년에 완선(完善)이 비단에 그린 것으로 가로 131cm, 세로 104cm 크기이다. 현왕
이란 저승의 제왕인 염라대왕(閻羅大王)의 다른 칭호로 사람이 죽은 지 3일 만에 그에게 소환
되어 재판을 받는다고 한다. 이 그림에는 현왕과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인물이 그려져 있
는데, 이 그림은 보통 명부전(冥府殿)에 많이 건다.

약사
보전 내부를 둘러보고 있으려니 서양인 비구니가 들어와 불단과 불화 앞을 정리하고 향내
로 진동하는 건물 내부를 정화하고자 문을 활짝 열고 저녁예불을 준비한다. 사진을 찍으며 서
성이는 나를 그리 경계하지 않고 밝게 웃으면서 이따가 예불을 할테니 같이 하자고 그런다.
그래서 자연히 몇 마디를 주고 받았다.
그는 멀리 동유럽 체코에서 왔다고 한다. 요즘 불교가 서구에서 적지않게 주목을 받고 있다보
니 많은 이들이 우리나라로 건너와 승려의 길을 택하거나 불교를 익히고 있는데, 그도 불교에
심취해 꽃다운 나이에 이 땅에 들어와 출가를 했다. 자연히 우리나라 말도 꽤 능숙해 의사 소
통에는 별로 문제는 없었다. 현왕탱과 신중탱을 찍고자 양해를 구하니 상관없다면서 마음껏
사진에 담으라고 그런다.
그렇게 시간은 18시가 되고 건물 안에 있던 아줌마 신도 1명과 저녁예불에 들어갔다. 나는 용
화각에 볼일이 있어 이따가 참석하겠다고 나왔는데, 용화각은 비구니 1명이 한참 예불 중이라
들어가지도 못하고 끙끙 앓다가 다시 약사보전으로 들어와 체코 비구니가 주관하는 예불에 참
여했다. (대적광전은 2명이 예불을 주관했음)


▲  주차장 남쪽에 늘씬하게 솟은 숲길

저녁예불에서 절도 여러 번 하다가 다시 나와서 용화각을 노렸으나 여전히 예불 중이었다. 그
렇게 시간은 18시 반이 넘어가고 퇴근 본능이 발동한 햇님은 꽁무니를 숨기면서 세상은 더욱
어두워진다. 게다가 저녁시간이라 배도 무지 고프고, 봉녕사에 발을 들인지 어언 1시간 반이
넘어 더 이상 있는 것도 그렇고 해서 봉녕사와의 짧은 인연을 정리하고 속세로 나왔다.
사찰음식대향연이 열리는 10월에 다시 인연을 지어 사진에 담지 못한 석조3존불을 사진에 담
고 사찰 음식으로 배를 실컷 채워보고 싶다.

이렇게 하여 봄맞이 수원 봉녕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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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3월 3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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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을에 찾아간 산사 나들이, 화성 비봉산 봉림사

 


' 가을 산사 나들이 ~ 화성 봉림사 (당성) '

▲  비봉산 봉림사


 

가을이 한참 숙성되어가던 10월의 한복판에 화성시 서부에 자리한 봉림사를 찾았다. 수원
역에서 친한 후배를 만나 갈증에 지친 목구멍을 달랠 겸 커피 음료를 섭취하며 갈만한 곳
을 물색하다가 아직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는 남양(南陽) 봉림사를 그날의 메뉴로 정했
다.
수원역(수원역 환승센터)에서 봉림사까지는 수원 400-4번(광교웰빙타운↔마도면 바이오단
지입구)을 타면 되는데 그 버스를 잡아타고 40분 정도를 달려 봉림사입구에 두 발을 내린
다. 예전에는 남양/사강/서신 방면 아무 시내버스나 타고 북양1통에서 40여 분 발품을 팔
아야 했으나 근래에 봉림사입구까지 가는 버스편이 생겨 접근성은 좀 좋아졌다. (단 배차
간격이 좀 긴 것이 함정)

봉림사입구에서 일주문 바로 밑까지는 온갖 공장들로 즐비해 꽤나 어수선한 모습이다. 공
장 굴뚝에는 수시로 연기가 피어올라 하늘을 찔러대고, 온갖 소음이 우리의 두 귀를 연신
때려댄다. 게다가 대형차들이 수시로 들락거려 길바닥은 늘 헝클어진 모습이다. 지금까지
300곳이 넘는 오래된 절을 찾았지만 여기처럼 공장 지대를 한참이나 지나야 되는 절은 처
음이다.


 

♠  봉림사(鳳林寺) 둘러보기


▲  봉림사 일주문(一柱門)


▲  껍데기만 남은 천왕문(天王門)

어미도 몰라본다는 세월의 모진 풍파와 개발의 무자비한 칼질로 아비규환처럼 변해버린 북양
동 바닥을 가로질러 비봉산(飛鳳山)의 품으로 들어선다. 거의 끝이 보이지 않던 공장의 행렬,
이러다가 공장이 절까지 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었지만 다행히 일주문의 위엄 앞에 개발
의 칼질은 푹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애미, 애비도 못알아본다는 이 땅의 천박한 개발주의라
고 해도 양심은 있는지 오래된 절과 그곳을 품은 산까지는 완전히 건드리지는 못했다.
공장과 시가지에 밀려 잔뜩 기가 죽었던 비봉산도 일주문의 응원에 가슴을 피며 호젓한 숲길
을 그려내 보이고 산사(山寺)로 인도하는 산길 분위기도 서서히 회복하면서 일주문 앞까지 펼
쳐진 혼란한 풍경에 제대로 놀란 중생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절의 정문이자 속세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일주문에는 '비봉산 봉림사'란 현판이 있어 이곳의
이름을 알려준다. 바로 옆에 도로가 나 있어 굳이 문의 아랫도리를 지날 필요는 없겠지만 그
래도 절에 왔으니 그의 체면도 세워줄 겸, 문의 밑도리를 지나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얼마 안가서 천왕문이 마중을 한다. 천왕문은 부처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
의 거처로 일주문을 지나온 중생을 검문하는 곳인데, 이곳에 있어야 될 사천왕은 어디로 마실
을 갔는지 보이질 않고 문 안은 텅 비어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절을 들락거렸지만 이렇게 비
어있는 천왕문은 처음이다. 시작부터가 참 이상했던 봉림사. 허나 다행히 사천왕은 멀리 가지
않고 범종루 밑으로 자리를 옮겨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  숲터널을 이루고 있는 봉림사 숲길
숲에서 갑자기 선녀가 튀어나와 나를 잡아가도 모를 정도로 호젓한 숲길이다.

▲  경내를 가리고 선 범종루(梵鍾樓)와 금강역사(金剛力士)상

숲길을 지나면 그 길의 끝에 2층 범종루가 계단을 늘어뜨리며 우리를 마중한다. 범종루 앞에
는 우람한 체격에 성난 표정을 지은 금강역사 4기가 자리하여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우리를 쫄
게 만드는데, 우측 뒷쪽의 금강역사는 무려 바위까지 들며 위협을 한다.
아무래도 개발의 칼질이 일주문 바로 앞까지 밀고 들어와 절을 위협하니 절 입장에서도 그리
마음이 편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두 눈을 부릅뜨며 성난 표정을 지은 저들을 경내 앞에
내세워 속세의 기운을 경계하며 더 이상 선을 넘지 말 것을 경고하는 것 같다.

▲  범종루 1층에 자리한 사천왕들

금강역사의 검문을 거쳐 범종루의 밑도리를 들어서면 사천왕의 검문을 받게 된다. 이들은 원
래 천왕문에 있다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금강역사와 함께 든든하게 절을 지키고 있는데 성
난 포즈의 금강역사와 달리 사천왕의 얼굴은 귀엽기만 하다. 이들의 공간을 따로 사천왕각(四
天王閣)이라 부르며, 그들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매우 조촐한 크기의 봉림사 경내가 펼쳐진다.


▲  봉림사 3층석탑

경내로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법당인 극락전, 왼쪽에는 요사와 선방으로 쓰이는 봉향각, 오른
쪽에는 3층석탑과 1708년에 지어진 'ㄴ'자 건물을 부시고 다시 지은 설법전이 자리한다. 바로
가까이에 자리한 3층석탑은 극락전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뱃속에서 나온 유물 가운데
사리 6과를 봉안하고자 1979년에 세운 것으로 신라 석탑의 백미(白眉)로 통하는 석가탑(釋迦
塔)과 많이도 닮았다.
그럼 여기서 잠시 봉림사의 내력을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  요사(寮舍)와 선방(禪房), 종무소의
역할까지 도맡고 있는 봉향각(奉香閣)

▲  설법전(說法殿)
1883년에 조성된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경기도의 중심 도시인 수원(水原)을 서쪽과 남쪽으로 감싸고 있는 화성시(華城市)의 주요 시
가지이자 화성시청을 품고 있는 남양 동쪽 비봉산 자락에 봉림사가 고즈넉하게 안겨져 있다.

이 절은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 시절,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의 잦은
침공을 부처의 힘을 빌려 물리치려는 심보로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당시 이곳은 신라의 당항
성(黨項城) 지역으로 고구려와 백제와도 가까워 그들과의 싸움이 늘 그치지가 않았다. 특히
당항성은 신라가 당나라와 교역을 하던 무역항으로 이곳이 끊기면 신라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기 때문에 악으로 깡으로 이곳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
절을 창건할 때 궁궐에서 기르던 봉황이 이곳으로 날라와 숲에 앉았다고 하여 봉황의 숲이란
뜻에서 봉림사라 불리게 되었으며, 절을 품은 산도 봉황이 날라왔다는 뜻의 비봉산이라 불리
게 되었다. 허나 신라 중기(7세기)에 창건되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역사 기록이나 유적이 전
혀 없어 과연 그때 지어졌는지는 심히 회의적이다. 다만 목조아미타여래좌상에서 지정(至正)
22년(1362년)이란 묵서명(墨書名)이 발견되어 최소 14세기 이전부터 절이 있었음을 보여주니
절이 우후죽순 들어섰던 신라 후기나 고려 초/중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절의 본격적인 사적(事蹟)이 등장하는 것은 조선 중기이다. 1621년 안모(安暮)와 자현(慈賢)
이 대웅전과 망양루(望洋樓), 봉향각, 범종각을 개축했다고 전하며, 1708년 요사를 중건했다.
그리고 1883년과 1887년 아미타후불탱을 비롯해 지장시왕탱, 신중탱, 칠성탱을 새로 조성했고,
1978년에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새로 개금하는 과정에서 복장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중 사
리 6과를 담고자 뜨락에 3층석탑을 세우고, 나머지 유물은 신변보호를 위해 용주사(龍珠寺)
효행박물관으로 보냈다.
1988년 삼성각을 새로 짓고, 1992년 요사채와 봉향각, 범종각을 개축했으며, 1990년대 후반에
주지로 부임한 성무(性無)가 도로와 주차장을 깔고 가람을 정비하여 지금에 이른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물인 극락
전과 19세기 후반에 조성된 탱화 여럿이 전하고 있다. 법당(法堂)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봉향
각과 설법전, 삼성각, 천왕문 7~8동의 건물이 경내를 메우고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불상을
간직한 오래된 절이라 처음에는 어느 정도 덩치가 있는 절인줄 알았으나 정작 와보니 생각보
다 매우 작은 절이라 다시 한번 놀랬다.
허나 절이 아담하여 두 눈에 넣어 살피기에 별 부담이 없으며, 비록 절 밑까지 속세의 기운이
밀어닥쳤지만 일주문과 천왕문, 비봉산의 가호로 경내 주변은 무성한 숲을 이루며 한적한 산
사의 분위기를 마음껏 드러낸다. 허나 산을 조금만 벗어나면 공장과 시가지 등 속세의 기운이
이빨을 드러내니 졸지에 속세에 갇힌 외로운 처지가 되어버렸다.

*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북양리642 (주석로80번길 139, ☎ 031-356-9117)


▲  봉림사의 법당인 극락전(極樂殿)

범종루의 뒷통수를 바라보며 북향(北向)을 하고 있는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
붕 집이다. 화강암으로 높이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조촐하고 묵직하게 들어앉은 극락전은 조
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예전에는 대웅전(大雄殿)이라 불렸으나 아미타불(阿彌陀佛) 거처에
걸맞게 극락전으로 이름을 갈았다.
불단에는 봉림사의 제일 가는 꿀단지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1883년에 제작
된 아미타후불탱과 지장시왕탱 등이 그를 수식한다. 특히 지장시왕탱은 19세기 후반에 경기도
에서 활약했던 대허체훈(大虛體訓)과 수일(守一), 태삼(台三)이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  봉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가운데 불상) - 보물 980호

극락전 불단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한 3존불이 저마다 미소 경쟁을 벌이며, 온화한 표정으
로 중생을 맞이한다. 아미타불 좌우에 자리한 지장보살상과 관음보살상은 아미타불의 허전한
옆구리를 달래고자 근래에 붙여놓은 협시(夾侍) 보살상이며, 그들 뒤에 든든하게 자리한 아미
타후불탱은 1883년에 제작된 것이다.

극락전의 주인장인 아미타불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1978년에 불상에 다시 금칠을 했을
때, 그의 뱃속에서 수많은 복장유물이 쏟아져 나와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때 지정(至正) 22
년(1362년)이라 쓰인 묵서명이 나와 최소한 1362년 이전에 조성되었음을 귀뜀해주며, 1583년
에 새로 개금(改金)을 했음이 밝혀졌다.
이 불상은 높이 88.5cm, 무릎 폭 78cm의 작지만 단아한 모습으로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이 두툼하게 솟아있으며, 살짝 구부러진 눈썹 사이로 백호가 박혀 있다. 얼굴은 단아하고 온
화한 표정을 머금고 있는데, 코는 작지만 오똑하게 솟았고, 붉고 조그만 입술 위에는 수염이
살짝 그어져 있다. 두 귀는 중생의 민원을 하나도 빠짐없이 접수하려는 듯, 어깨까지 늘어져
있고 굵은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다.
몸에 걸친 옷은 통견(通肩) 스타일로 가슴 부분은 U자형으로 처리되어 있고, 옷은 띠매듭 대
신 3줄의 옷주름으로 처리했다. 고려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뱃속에서
나온 유물은 전적(典籍) 8종과 사리병, 섬유류, 종자류, 각종 구슬, 부적 등으로 이들은 '봉
림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복장전적일괄'이란 어려운 이름으로 보물 1095호로 지정되었다. 이들
가운데 사리와 법화경(法華經)을 제외하고 모두 용주사 효행박물관에 가 있다.

아미타불 좌우에는 가히 1,000기는 넘을 듯한 조그만 금동불이 빼곡히 자리해 일제히 금빛을
발산하고 있는데, 이들은 중생의 돈을 받아 만든 원불(願佛)이다.

▲  조그만 연못과 다리를 갖춘 샘터

▲  봉림사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 칠성탱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삼성각은 달랑 1칸에 불과한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
로 1988년에 지어졌다.
남쪽을 바라보는 곳에는 산신탱과 독성탱이, 서해바다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칠성탱이
자리해 있는데, 칠성탱은 1887년에 제작된 것으로 19세기 후반 경기도에서 활약한 혜산축연의
작품으로 나름 가치가 높다. 그림 중앙에 치성광여래를 두고 그 좌우로 월광보살(月光菩薩)과
일광보살(日光菩薩),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배치했는데, 붉은 색과 청색이 잘 대조를 보이고
있으며, 19세기 후반 경기도 불화 양식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  산신탱과 독성탱
산신과 호랑이, 동자, 소나무, 주름진 산이 표현된 산신탱은 1984년에,
편하게 앉은 독성 할배와 동자, 천태산(天台山)이 그려진 독성탱은
1991년에 조성되었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경내

우리는 삼성각에 들어가 염치불구하고 10분 정도 쉬었다. 건물이 매우 작아서 장정 2명이 들
어가 앉으니 완전 꽉찬다. 여기서 세월과 세상, 근심을 잠시 잊으며 없는 듯 쉬고 있다가 밖
으로 나와 봉향각 툇마루에도 걸터앉아 산사의 고적함을 즐겨본다.

햇님도 슬슬 퇴근할 때가 되었는지 찬 기운이 조금씩 엄습해온다. 우리가 있어야 될 곳은 이
런 절간이 아닌 아비규환의 속세이기에 억지로 발을 떼며 경내를 나왔다.
절에는 하얀 털의 멍멍이 3마리가 절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를 일주문까지 배
웅을 해주고 숲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일부러 배웅해준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는 몰라도 늘
번잡한 일주문 밑과 달리 절은 고적하기 그지 없으니 그도 사람이 그리웠나보다. 그만큼 봉림
사는 한적한 절간이었다.


▲  봉림사를 뒤로하며, 하얀 털의 멍멍이가 일주문까지 배웅을 해주었다.


 

♠  신라의 대외무역항인 옛 당항성, 화성 당성(唐城)
- 사적 217호

봉림사에서 남양, 마도, 사강을 지나 서신 방면으로 조금 가면 당성<唐城, '黨城'이라 쓰기도
함>이란 오래된 산성(山城)을 만날 수 있다. (당성이 봉림사와 가까워 편의상 봉림사 글에 통
합했음, 당성은 몇 년 전 3월 말에 갔었음)

당성은 옛 당항성<唐項城, 또는 黨項城>으로 전해지는 곳으로 당성이란 이름은 모를지언정 당
항성 3글자는 아마 지겹도록 들어봤을 것이다.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허벌나게 등장했던, 그것
도 주관식 문제의 단골로 필수로 외워야 했던 그 이름이다. 그 당항성이 바로 화성시에 있는
당성이다.

당성은 서해바다를 향해 약간 튀어나온 남양반도(南陽半島) 서남쪽 구봉산(九峯山)에 위치한
다. 산 정상부와 동쪽 계곡, 서남쪽 능선에 걸쳐 성벽을 쌓았으며, 지금은 간척으로 많이 메
워졌지만 예전에는 산 서쪽까지 서해바다가 넝실거렸다.
백제가 처음 당항성을 지었으며, 5세기 후반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점령하여 당성군(唐城
郡)이라 했다. 그러다가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장악하여 당항성으로 이름을 갈았
다.
신라는 한강 유역과 당항성을 점령하면서 서해바다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중원(中原)대륙으로
바로 이어지는 통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고구려나 백제를 거치거나 직접 남해바
다를 돌아서 가야 했으니 자연히 대륙과의 교류는 더딜 수 밖에 없었다.

당항성은 대륙을 이어주던 신라의 대외무역항으로 이곳을 통해 중원 왕조와 교류를 했다. 그
런 중요성 때문에 신라는 이곳을 꿀단지처럼 애지중지했다. 문무왕(文武王) 이전까지 이곳만
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고구려, 백제와 매우 가까운 곳이라 그들은 자주 이곳을 공
격했고 빼앗긴 적도 1~2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신라는 국력마저 딸려 그들을 상대하기 벅찼으
나 그런 위험을 감수하며 악으로 깡으로 이곳을 사수했다.

당나라를 비롯한 중원대륙으로 가는 신라 사신과 상인, 승려는 대부분 이곳을 거쳤으며, 나중
에 무열왕(武烈王)이 되는 김춘추(金春秋)도 백제에 대해 복수의 개거품을 잔뜩 물며 이곳을
통해 대륙으로 넘어가 당태종(唐太宗)에게 아부를 떨었다. 결국 나중에 저지르게 되는 고구려
와 백제 멸망의 발판을 당항성을 통해 닦은 셈이다.
문무왕 이후 백제가 거닐던 서해(西海)와 서남해를 장악하게 되었지만 698년 이후 신라 이북
에 발해(渤海)가 들어서 대륙과의 육로가 끊기면서 당항성의 인기는 여전히 식을 줄을 몰랐다.
경덕왕(景德王) 때는 당항성 지역을 당은군(唐恩郡)이라 고쳐 부르며 당나라에 잘보이고자 애
를 썼다. 그리고 신라 후기에는 창궐하는 해적을 막고자 당성진(唐城鎭)을 두었다.

신라가 망하면서 500년 가까이 번영을 누리던 당항성은 풍비박산이 났다. 무역항과 대외교류
의 기능이 거의 사라져 해안기지의 기능으로 크게 축소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성을 수리한
흔적이 있어 방어용으로 조선 중기까지 쓰였음을 보여주나 그 이후 제대로 버려지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쇠퇴하고 만다.

당성은 산 정상을 에워싼 테뫼식과 계곡을 포함한 포곡식(包谷式)이 혼합되었다. 백제는 테뫼
식 성을 만들었는데, 테뫼식 성의 둘레는 약 360m 정도로 기단(基壇) 바깥쪽을 보축(補築)하
여 성벽을 견고하게 했으며, 성 남서쪽 높은 곳에 축조된 흔적이 남아있다. 6세기 이후 신라
가 차지하면서 협소한 산성을 넓히고자 포곡식 성을 쌓아 복합적인 구조를 지니게 된 것이다.
현재의 성은 신라 때 것으로 그 평면은 장방형(長方形)을 이루고 있다. 포곡식 성의 둘레는
약 1.1km로 예전에는 당성의 내성(內城)으로 추정되기도 했으나
신라 후기 유물이 출토되면서
신라 말에 설치된 당성진 성곽으로 여기고 있다.

현재 동문(東門)터와 남문터, 북문터, 우물터, 건물터가 있으며, 서쪽 성곽 정상부에 조선 때
지어진 망해루(望海樓)로 여겨지는 건물 주춧돌이 있다. 성벽은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대체
로 잘 남아있으며, 성벽의 높이는 2~5m 정도이다. 여장 등의 방어시설은 녹아 사라졌고, 성의
지형은 남쪽은 높고 북쪽은 낮다.
당성을 품은 구봉산은 남양반도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산으로 동쪽을 제외하고는 산이 없어
조망이 매우 좋다. 게다가 바다가 지척이라 대륙으로 가는 관문으로 전혀 손색이 없다.


▲  당성으로 가는 숲길

당성 입구인 신흥사 정류장에서 7~8분 정도를 오르면 당성을 지키는 관리소가 나온다. 관리소
동쪽에는 건물터와 성터에서 수습된 돌들이 조그만 보금자리를 이루고 있으며, 그 서쪽에 지
붕돌과 이수(螭首)를 갖춘 당성사적비가
우람한 모습으로 속인을 맞는다.


▲  당성 관리소 동쪽에 모인 옛 당성의 성돌들

신라 제일의 무역항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 참말로 엊그제 같은데 세월과 자연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해 성 안에 모든 것은 주저앉고 성벽과 건물을 이루던 돌은 잔해가 되어 산 곳곳
에서 이리저리 흩어져 당당히 성벽의 일부로 살아가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당항성의 내력이 적힌 당성 사적비(史蹟碑)

▲  당성 은행나무 숲길

당성사적비를 지나면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 숲길이 나그네의 마음을 부여 잡는다. 만추(晩
秋) 때 왔더라면 황금색 은행잎이 흩날리는 그림 같은 현장이겠지만 겨울 제국이 모든 것을
공출해 가면서 앙상히 뼈만 드러낸 채, 봄의 해방군을 기다린다. 봄이 바로 앞까지 온 것 같
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제국의 잔당들이 설치고 있으니 은행나무들도 마음 놓고 은행잎을 틔우
지 못한다. 어여 얼어붙은 뿌리에 완연한 봄이 내려와 메마른 가지에 살이 붙었으면 좋겠다.
(이때가 3월 초였음)
폐허가 되버린 옛 성에서의 허전함을 달래주는 숲길로 늦봄이나 가을에 거닐고 싶은 길이다.

숲길을 지나면 길이 2갈래로 갈린다. 왼쪽으로 가든, 오른쪽으로 가든 상관은 없으며, 넉넉잡
아 30분 정도면 충분히 1바퀴를 돈다. 가파른 구간이 별로 없고, 성 남쪽에서는 궁평항과 제
부도(濟扶島),
서신 앞바다가, 서쪽에서는 땅으로 매립된 서신 서부 지역과 대부도(大阜島)가
시야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그림처럼 박힌 섬들의 파노라마를 볼 수 있었으나 이제는 바다도
겨우 보일 정도이다.

성곽 외에는 장대한 세월에 죄다 휩쓸려 내려가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야말로 폐허의 현장이
다. 중간중간 옛 건물터와 주춧돌, 성돌의 무더기가 눈에 띄며, 은행나무 숲길 끝에는 출토된
기와조각을 차곡차곡 올려 만든 돌탑이 눈길을 끈다.


▲  출토된 기와조각으로 이루어진 돌탑
메마른 수풀을 이불로 삼아 늦겨울을 견디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소복을
걸친 헝클어진 머리의 처녀귀신 누님처럼 보인다.

▲  기와 돌탑 주변의 건물터
건물이 녹아내린 흔적을 자연이 수풀로 보듬으면서 자연의 일부로 녹아들었다.

▲  소나무가 우거진 남쪽 성곽

▲  솔내음이 가득 깃들여진 남쪽 성곽

▲  남문터
성문의 흔적은 없고, 성곽이 끊어진 움푹 패인 부분이 옛날 이곳에
성문이 있었음을 아련히 전해줄 따름이다.

▲  남문터 동쪽 성곽

▲  남문터 서쪽 성곽

▲  서남쪽 성곽

▲  서남쪽 성곽에서 바라본 천하 (서신면 서부 지역과 대부도)
바다가 산 아래 마을까지 넝실거렸으나 거의 육지로 바뀌면서 바다는 저 멀리
밀려나고 말았다. 산 너머로 대부도가 아련히 얼굴을 내민다.

▲  서쪽 성곽 정상부에 자리한 망해루터 주춧돌
당성에서 가장 높은 곳인 이곳에 서해바다를 바라보던 망해루가 있었다.
망해루는 조선 후기에 녹아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누각 주춧돌과
성돌이 한데 고여 커다란 돌무더기를 이룬다.

▲  서쪽 성곽에서 바라본 천하 (서신면 서부)

▲  성곽이 잠시 끊어진 북문터
북쪽을 바라봤을 북문과 문루의 모습이 대충 머리 속에 그려진다.

▲  힘차게 뻗은 동북쪽 성곽

▲  동북쪽 성곽 부근의 건물터

건물 주춧돌과 성돌이 모여 거대한 돌의 나라를 이룬다. 건물터와 성문터에 작게 안내문을 두
어 답사객의 이해를 도왔다면 무척 좋았을 것을 그런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상당히 아쉽다.
저런 식의 건물 유적은 겉으로만 보면 버려진 돌의 의미 없는 공간으로 비춰져 지나치기가 쉽
다.


▲  동남쪽 성곽 (1)

▲  동남쪽 성곽 (2)

보잘 것 없는 돌들이 강인한 협동심을 이루며 거대한 산성을 일구었다. 수석에 끼지도 못하는
저들 자체는 보잘 것이 없지만 그것이 뭉치고 모이면서 하늘까지도 겁을 먹게 만든 요새를 이
루어낸 것이다.
이렇게 하여 당성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 당성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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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구석기시대 유적의 대표 성지, 연천 전곡리선사유적지 ~~ (전곡선사박물관, 연천 구석기 겨울여행축제)

 


' 천하 구석기 유적의 성지,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 '

(연천 구석기 겨울여행 축제)

▲  구석기 스타일의 눈사람 (전곡리 선사유적지 구석기축제장)



선사시대(先史時代, Prehistory)란 문자가 없던 시대로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와 중석기
시대,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를 일컫는다. (청동기시대도 일부 포함됨)
선사시대는 그리 재미도 없고 관심도 별로 없는지라 이따금씩 관련 유적지나 박물관을 찾
는 것이 고작인데, 겨울의 한복판인 1월에 전곡리 선사유적지에서 '연천 구석기 겨울여행
축제'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축제의 대한 호기심도 채우고 미답지(未踏地)도 하
나 줄일 겸 친한 후배와 겸사겸사 그곳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복판에 머물던 13시, 집 부근 방학역에서 그를 만나 1호선 전철을 타고 수도
권 전철의 북쪽 끝인 소요산(逍遙山)역으로 이동했다. (소요산행 열차는 거의 30~40분 간
격으로 운행)
소요산역에서 호떡으로 허기를 좀 달래고, 경기도 최북단 고을인 연천(漣川) 땅으로 넘어
가는 의정부시내버스 39번을 타고 차디찬 삭풍(朔風)을 가르며 북쪽으로 더 올라갔다. 수
도권 북방을 가르는 한탄강(漢灘江)을 건너니 전곡리 선사유적지가 누워있는 언덕이 보이
기 시작하고, 그 밑에 둥지를 튼 전곡선사박물관에서 두 발을 내린다. 전곡리 선사유적지
답사는 바로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  밑에서 바라본 전곡선사박물관


 

♠  전곡리 선사유적지 입문

▲  은빛으로 이루어진 전곡선사박물관 지붕 (지붕에 산책로가 있음)

전곡리 선사유적지 남쪽에 자리한 전곡선사박물관은 구석기시대 유적의 영원한 성지(聖地)이
자 상징으로 전곡리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과 구석기시대,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옛 인류의 진
화 과정을 집대성한 선사시대 전문 박물관이다.
박물관을 이루고 있는 건물이 마치 상상 속의 우주 기지를 보는 듯, 심플하게 은색으로 이루
어져 있어 구석기시대를 취급하는 박물관에는 썩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2004년 전곡리 선사유적지 종합정비 기본계획이 문화재청의 승인을 받자 2005년 도립(道立)박
물관을 짓기로 결정했다. 하여 2006년 온 천하에 박물관 디자인 국제현상공모를 하였는데, 천
하 곳곳에서 앞다투어 응모해 아시아 131건, 아프리카 5건, 유럽 169건, 북미 17건, 남미 20
건, 오세아니아 4건 등 총 346건의 응모작이 접수되었다.
그래서 이들을 심사한 결과 1등은 프랑스 양이(洋夷)가 먹었으며, 2등은 미국 양이, 3등은 미
국 양이와 왜인(倭人)이 수상했다. 이들 수상작 40건을 서울 인사동 학고재에서 그해 4월 17
일부터 4월 23일까지 전시회를 열었고, 박물관 부지의 발굴조사가 끝나자 2009년 3월 23일에
삽을 뜨기 시작해 2011년 4월 25일에 완성을 보았다.

원시 생명체의 아름다운 곡선을 모티브로 했다는 박물관 내부에는 전곡에서 발견된 주먹도끼
를 주인공으로 하여 고고학체험실과 상설전시실, 체험 전시실 등을 두어 구석기시대와 무수한
세월을 겪으며 진화된 원시인의 변화 과정에 대해 소상히 다루고 있으며, 700만 년 전 투마이
부터 1만 년 전 만달인까지 14개체의 원시인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복원하여 전시했다. 그 외
에 도서실, 교육실, 야외체험장 등을 갖추고 있다.

박물관을 구경하고자 입장료를 살펴보니 성인은 무려 4,000원을 받는다. 1,000원 정도로 생각
을 했는데 생각보다 4배 이상이나 얹혀진 가격에 우리는 한없이 작아지고 말았다. 그 돈을 박
물관에 쥐어주면서까지 구경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리 땡기지도 않아 언제가 될지 모를 미래
로 쿨하게 넘겼다.
(박물관 입장료는 2017년 9월부터 무료로 바뀌었음, 이곳을 포함한 우리나라 박물관 대부분은
월요일과 1월1일, 설날, 추석 당일에 쉬므로 그날은 꼭 피해서 찾기 바람)

* 전곡선사박물관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178-7 (평화로 443번길 2, ☎ 031-
830-5600)
* 전곡선사박물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전곡 선사박물관 야외에 재현된 구석기 사람들의 매머드 사냥 현장
오른쪽은 지금은 먹을 수도 없는 매머드 고기 육포를 말리는 모습

▲  겨울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황야에 재현된 코뿔소로 보이는 동물상

▲  전곡 선사박물관에서 전곡리 선사유적지로 인도하는 계단
계단 앞에는 원숭이와 비슷하게 생긴 옛 인류의 모형이 멀뚱히 서 있다. 오늘날
인간의 과거형이 저런 모습이었다고?? 하지만 진화론도 흔쾌히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과연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그저
궁금~ 궁금할 따름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전곡 선사박물관의 위엄

전곡선사박물관 지붕에는 서쪽 언덕과 동쪽 언덕을 잇는 지붕 산책로가 있다. 지붕에 오르면
한탄강 주변 남쪽 산하가 보이긴 하나 박물관 건물이 키가 좀 작기 때문에 보이는 범위는 그
뿐이다. 박물관 동쪽 언덕에는 산책로와 숲이 있고, 서쪽 언덕 너머에 전곡리 선사유적지가
있다.

선사박물관을 지나 야트막한 북쪽 언덕을 오르면 전곡리 선사유적지 후문이다. 선사유적지는
선사박물관과 별도로 소소하게 입장료를 받고 있는데, (어른 1,000원 / 학생과 어린이 500원)
구석기 축제 기간이라 잠시 무료의 공간으로 해방되어 아주 기분 좋게 선사유적지 내부로 들
어섰다.
(단 구석기축제 행사장은 유료의 공간이며,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은 문을 닫아걸고 쉼)


 

♠  천하 구석기 유적의 소중한 꿀단지, 아슐리안 주먹도끼의 등장으로
구석기 역사를 새로 쓰게 하였던 전곡리 선사유적지 - 사적 268호

▲  전곡리 선사유적지 내부

한탄강이 'U'자로 크게 굽이쳐 흐르는 전곡읍 서남쪽 강변 언덕에 구석기 유적지의 성지로 추
앙받고 있는 전곡리 선사유적지가 넓게 누워있다.

인류의 본격적인 첫 시대라 할 수 있는 구석기시대는 약 300만년 전부터 1만년 전까지를 일컫
는데 약간의 중석기시대를 거쳐 신석기시대로 발전하게 된다. 구석기 사람들은 강가나 동굴에
주로 살면서 과실을 따먹거나 동물을 사냥해 식량을 해결했으며, 여기까지는 다른 동물과 거
의 비슷해 보인다. 허나 그들은 일반 동물과 다르게 돌을 다듬어서 사냥 도구로 사용했다. 또
한 불을 지피는 방법을 터득하여 추위를 이겨내고 맹수들의 공격을 막았으며, 잡은 동물을 불
로 구워 먹었다. 이것이 동물과 사람의 큰 차이점이다. 

구석기 사람들은 자연석을 다듬거나 바위에서 돌을 떼어내 주먹도끼 등을 만들었는데, 주먹도
끼가 바로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역사/국사 교과서에 아주 지겹도록 등장한다. 이
도끼는 구석기 초기에 등장하며, 프랑스 생따슐(St. Acheul)에서 발견되어 지역 이름을 따서
아슐리안 주먹도끼라 불린다.
그 주먹도끼는 전곡리 유적이 발견되기 이전까지 주로 유럽과 아프리카, 서남아 지역에서 많
이들 나왔으며, 1940년대 초, 미국 하버드대학의 모비우스(H.L. Movius) 교수가 그동안의 고
고학 자료를 근거로 내세우며 이상한 학설을 내뱉었다. 인도를 중심으로 그 서쪽 유럽과 아프
리카, 서남아를 아슐리안 주먹도끼 문화권으로, 인도 동쪽 아시아를 찍개 문화권으로 나눈 것
이다. 찍개 역시 돌로 다듬은 도구이나 주먹도끼보다는 다소 떨어진다.
그래서 그걸 두고 구석기시대부터 이미 서양이 동양보다 우월했고 아시아는 주먹도끼가 없으
므로 그때부터 정체되었다고 주장했다. 털만 많은 양놈들의 그런 삐뚤어진 생각을 보기 좋게
참교육시킨 현장이 바로 이곳 전곡리이다.
전곡리의 등장으로 그동안 서양 오랑캐들의 의해 그릇되게 작성된 구석기 역사는 새로 쓰여지
게 되었으며, 천하 굴지의 구석기 유적으로 꽤 무거운 존재가 되었다. 이곳을 통해 동아시아
구석기 문화를 새롭게 조명하게 되었고, 전곡리를 시작으로 아시아 곳곳에서 주먹도끼가 쏟아
져 나왔다.


▲  전곡리 선사유적지 발견을 대서특필한 1978년 봄 신문기사들

한탄강변에 자리한 전곡리 선사유적 일대는 숲과 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속에는 억겁의
세월이 숙성된 보물이 잠들어 있었고, 이미 그 일대에 석기들이 적지 않게 노출되어 속세(俗
世)의 관심을 애타게 바랬건만 사람들은 단순 돌로만 생각했지 아무도 그들을 크게 여기지 않
았다. 허나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언젠가는 크게 드러난다는 말이 있듯이 결국 일이 터지고 말
았다.

때는 1978년 3월 '그렉 보왠(Mr. Gred Bowen)'이란 주한 미군이 한탄강에 놀러왔다. 그는 인
디애나대학교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자로 돈벌이를 위해 주한 미군에 들어왔다.
한탄강을 거닐던 그는 강 주변에 석기로 보이는 돌맹이가 많은 것에 크게 놀랬다. 자신의 짧
은 소견으로 볼 때 분명 선사시대 석기로 여겨져 석기 사진과 발견 경위를 작성하여 프랑스의
저명한 구석기 학자 보르드(Bordes) 교수에게 편지를 보냈다.
보르드는 그 사진을 보고 크게 놀랐다. 바로 아슐리안 주먹도끼였던 것이다. 허나 그 역시 전
형적인 양이라 그걸 쉽사리 믿지 않으며 '이 유물이 유럽이나 아프리카에서 발견되었다면 아
슐리안 문화의 석기가 맞다. 내가 직접 가보고 싶을 정도로 중요한 발견이지만 그럴 수가 없
으니 우선 서울대학교 김원용 교수를 찾아가 자문을 얻으라'
답을 하였다.
그러자 보웬은 그 석기를 들고 서울대를 찾아가 김원용 교수를 만났는데 그 석기를 살펴본 김
원용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여 발굴단을 꾸려 전곡으로 달려갔고, 그해 5월 14일 전곡리
일대를 지표 조사하였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김원용 교수와 영남대 정영화 교수가 진단학보
에 '전곡리 아슐리안 양면핵석기 문화예보'를 발표하여 전곡리 유적은 서양 고고학자들의 염
통을 쫄깃하게 만들 정도로 크게 이름을 드러낸다.


▲  오래 잠들어있던 전곡리 구석기 유적을 깨우다.
1978년 5월 전곡리 유적 지표 조사 장면


1979년 3월 26일, 김원용 교수가 이끄는 서울대 박물관 발굴단과 경희대와 영남대, 건국대가
연합해 본격적으로 발굴조사를 벌였다. 이후 전곡리 유적을 중심으로 전곡리 일대에서 30여
년 동안 17회의 발굴조사를 벌였으며, 약 8,500점의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들 유물은
인근 강에서 가져온 강자갈로 제작된 것으로 다소 거칠게 다듬은 아슐리안 주먹도끼와 잘 다
듬어진 찍개, 가로날도끼, 긁개, 소형 박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곡리의 명성을 듣고 다른 나라에서도 앞다투어 교수와 고고학자들이 찾아와 이곳을 조사했
으며,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30만 년 전으로 판단되고 있다. 참고로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은 평양(平壤) 부근에 있는 상원 검은모루동굴 유적으로 약 100만년
을 헤아린다.

전곡리 선사유적은 크게 5지구로 이루어져 있는데, 1지구는 처음으로 석기가 발견된 곳이고,
2지구는 1지구 남쪽 건너편으로 주먹도끼가 많이 나왔으며, 3지구는 발굴유구와 습지가 있고,
4지구는 제1차 발굴(1979년) 때 발견된 강 건너 고능리 지역이고, 5지구는 유적지의 동편 언
덕 일대이다.


▲  전곡에서 발견된 아슐리안 주먹도끼의 위엄
그의 등장으로 한참이나 잘못된 구석기 역사는 새로 쓰여지게 되었고, 뼛속까지
서양 우월주의로 물들었던 양이 고고학자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아시아에는 찍개만 있던 것이 아니라 이런 섬세한 주먹도끼도
일찌감치 있었던 것이다.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 돌을 전체적으로 손질하여 끝부분이 뾰족
하고 몸체는 둥근 모습이며, 석기의 양측면에 날카로운 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이용해 나
무를 벗기고나 동물 사냥, 가죽 벗기기 등에 사용했다. 그래서 만능석기라 불리기도 한다.

전곡리에서 나온 주먹도끼는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주먹도끼와 달리 몸체가 두텁고, 자
연면이 많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채석을 통해 규소 성분이 풍부한 양질의 석재를 이용
한 유럽, 아프리카와 달리 전곡리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석영이나 규암 등으로 된 강자갈을 주
로 사용하여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측면날보다는 뾰족한
끝부분의 손질에 더 집중한 경향이 있어 자르는 도구로 주로 사용된 서양과 달리 대상을 찍거
나 땅을 파는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  토층전시관에 전시된 전곡리 유적 발굴 이야기와 이곳을 발굴한
구석기시대 전문가 김원용의 빛바랜 수첩
김원용 교수는 1993년 세상을 뜨면서 전곡리 유적에 유해를 뿌려달라는 유언을 했다.
그만큼 이곳은 그에게 의미가 각별한 곳이자 그의 존재를 세상에 각인시켜준
소중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전곡리 유적의 지층 구조는 2001년에 조사된 E55S20 발굴피트를 통해 알 수 있다. 이곳은 현
무암을 기반암으로 하여 그 위에 사질층, 실트층, 점토층이 쌓여 있는데, 퇴적층의 최상부에
서부터 일정한 간격을 두고 토양쇄기가 4~5차례 반복되며, 1번 째 토양쇄기면과 2번 째 토양
쇄기면 상부에서 왜열도에서 날라온 2개의 화산재와 AT(약 25,000년 전), K-Tz(약 95,000년
전)가 발견되었다. 이들 화산재는 분출된 연대가 대략 밝혀졌기 때문에 전곡리 유적의 장대
한 나이를 추정할 수 있는 소중한 단서가 되었다.
퇴적층 하부의 사질층과 실트층은 하천 퇴적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상부의 붉은 색조의 점토
층에 대해서는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날라온 풍성퇴적물이라는 설과 강의 범람으로 쌓인 퇴적
물이라는 설이 서로 엇갈리고 있다. 구석기 유물 상당수는 붉은 색조의 점토층에서 많이 발견
된다.


▲  전곡리 선사유적 외곽 산책로

홍적세 중기 무렵, 강원도 평강 오리산에서 분출된 용암이 한탄강을 따라 흐르며 전곡을 비롯
한 강 주변을 용암대지(鎔巖臺地)로 칠해버렸다. 이후 수많은 물줄기가 용암대지를 적셔주었
고, 곳곳에 작은 습지와 호수가 만들어졌다. 또한 강에 떠내려온 퇴적물은 용암대지 위에 차
곡차곡 쌓이면서 숲이 우거지고 강에는 물고기들이 둥지를 틀었으며 온갖 동물들이 식량과 식
수 해결을 위해 모여들었다. 구석기 사람들 역시 이곳에 정착을 하였다. (전곡에 살았던 구석
기 사람들을 ''전곡리안'이라 부름) 그때가 약 30만 년 전으로 여겨진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언제까지 살다가 사라졌는지는 귀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그들이 떠난 이
후, 그들이 남긴 석기와 흔적은 자연의 거친 흐름 속에 죄다 묻히게 되었다. 그 흔적이 배인
퇴적층이 용암대지 위에 잘 보존되어 수천 년을 비밀리에 숨바꼭질을 하다가 1978년 이후 발
견된 것이다.

발굴조사가 마무리 되자 유물은 전곡선사박물관과 토층전시관, 여러 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
졌고, 유적은 영구 보존을 위해 흙으로 빼곡히 덮고 그 위에 숲과 잔디를 깔았다. 그래서 겉
으로 다가오는 전곡리 선사유적지의 모습은 유적지가 아닌 그냥 공원 같은 분위기이다.

전곡리 유적은 숲과 잔디로 뒤덮힌 지역과 토층전시관, 선사체험마을 등이 있으며,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또한 매년 1월과 5월에는 '전곡리안의 숨소리'라는 태마로 구석기 축제를
열어 크게 호응을 얻고 있다. 5월에는 그냥 '연천 구석기축제'란 이름으로 열고 있으나 겨울
축제는 '연천 구석기 겨울여행축제'란 이름으로 열리고 있는데, 선사시대 체험 프로그램, 원
시 퍼포먼스, 공연 행사, 전문가의 강연과 선사시대 전시 행사 등이 열린다.
구석기시대를 완전히 익히고 싶다면 전곡리 선사유적지를 꼭 찾기 바란다. 그러면 누구든 구
석기 전문가가 될 수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515 (양연로 1510, ☎ 031-832-2570)
* 전곡리 선사유적지 홈페이지는 오른쪽 링크를 클릭하기 바라며 ☞ 전곡리 선사유적지
  겨울 축제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2019년 겨울여행축제는 1월 12일부터 2월 6일까지 열린다.


▲  인공눈이 깔린 전곡리 구석기축제장


 

♠   전곡리 선사유적지, 구석기 축제장 둘러보기

▲  전곡 구석기축제를 맞이하여 멀리 서유럽에서 온 신석기 사람의 미라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겨울 제국의 매서운 폭정에도 불구하고 구석기 축제로 뜨거웠다. 평일임
에도 어린이를 데리고 온 가족 나들이객들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이 축제
장 곳곳을 뛰어놀거나 썰매타기, 바베큐 체험 등. 온갖 체험에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르고 있
어 겨울 제국을 무색하게 만든다.

축제장 일부에는 인공눈을 깔아 조촐하게 하얀 설원을 자아냈는데 그곳에 썰매장과 얼음 조각
등을 두었으며, 그 서쪽에 여러 부스와 천막을 설치하여 먹거리 장터와 구석기 체험 현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듯이 점심도 제대로 못먹은 시장기를 달래고자 간단
하게 어묵으로 배를 때웠다. 가격은 시중보다 2배 정도 비쌌으나, 꿩 대신 닭을 고를 권한이
여기서는 없는지라 그냥 사먹었다.

그렇게 요기를 마치고 옆 부스로 가니 멀리 서유럽에서 왔다는 뼈다귀 미라가 전시되어 있었
다. 이 미라는 1991년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경계선인 외츠탈 알프스에서 발견된 것으로
온몸이 얼음 속에 묻혀있어서 미라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발견된 곳의 이름을 따
서 이미 영혼이 빠져버린 그에게 '외찌'라는 이름을 붙여주면서 아이스맨이란 별명도 지어주
었다.
그는 약 5,300년 전 사람으로 그때면 신석기시대 한복판이다. 그가 어찌하여 알프스 산맥에서
그 지경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전곡리 구석기 축제를 맞이하여 수만 리나 떨어진 이곳까지
소환되어 휼륭한 눈요깃감이 되어준다. 설마 그가 나의 전생은 아니겠지?


▲  구석기 스타일로 지어진 눈사람
인공눈을 빚어서 두텁게 만든 눈사람으로 장소가 장소인 만큼 구석기 스타일로
만들었다. 귀여움이 묻어난 그는 눈, 코, 입, 머리까지 갖추고 있고
오른손에는 돌도끼까지 쥐어들고 있다.

▲  눈 속에 묻힌 돌 운반 체험장
무거운 돌을 끌어야 되는 일종의 3D 체험장이라 체험 수요가 없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어린이들의 인기를 먹고 자라는 눈썰매장 (유료임)
때가 겨울인지라 눈썰매장까지 갖추었다. 딱 30년만 어렸다면 한번 타보는 것인데
다 큰 장정이 눈썰매를 타는 것도 좀 그래서 그냥 구경만 했다.

▲  빙어잡이 삼매경에 빠진 어린이들 (빙어잡이 현장)
조그만 낚시 도구로 빙어를 탄압한다. 여기서 잡은 빙어는 비닐봉지에
담아서 가져가면 된다. 그 이후는 알아서...

▲  빙어잡이 현장 - 빙어의 마지막 몸부림 (죽어있는 빙어도 적지 않음)

▲  돼지고기 바비큐 체험 현장

제아무리 눈썰매와 빙어잡이가 인기가 대단하다 한들 돼지고기 바비큐 체험 앞에서는 어림도
없다. 먹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구석기 축제의 백미(白眉)나 다름없는 바비큐 체험은 길다란 나무 꼬챙이에 돼지고기를 직접
구워 먹는 것으로 흙으로 다진 네모난 화로에 숯을 넣어 고기를 구우면 된다.
편하게 고기를 굽게끔 나무 의자도 설치되어 있으나 고기가 익는데 시간이 다소 걸린다. 또한
나무 꼬챙이를 들고 있어야 되기 때문에 팔도 아프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적당하게 걸쳐놓고
딴짓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잘못하면 고기가 화로로 자빠지거나 검게 타버리는 경우도 발생
한다.
돼지고기 바비큐는 1꼬치에 3,000원(예전에는 2,000원)으로 잘만 구우면 유명 고깃집 못지 않
은 맛있는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으나 잘못하면 거의 타버리거나 흙, 숯에 묻혀 난감한 경우
도 생길 수 있다. 여기서는 그저 인내력과 근성, 요령이 있는 사람만이 맛있는 고기를 쟁취한
다. 나는 인내력을 발하며 고기 굽기에 매진한 결과 그런데로 잘 익어서 맛있게 고기 바비큐
를 섭취했다. 허나 후배는 잘못 구워서 반 정도를 버리고 말았지. 구석기 사람들은 이렇게 화
로 비슷한 것에 불을 지피고 사냥한 동물을 구워 먹었다고 한다. 바로 그 체험을 하는 것이다.
단 다른 것이 있다면 숯으로 불을 지핀다는 것과 고기를 돈주고 사먹는다는 것 정도. 구석기
축제에 왔다면 뱃속도 채울 겸 바비큐 체험을 꼭 해보기 바란다.


▲  노릇노릇 익어가는 돼지고기 바비큐

▲  구석기 생활상 복원존(Zone) ▼

축제장 동쪽에는 구석기 사람들의 생활상을 재현해 놓은 복원존이 있다. 사냥 모습을 위시하
여 잡은 동물을 손질하는 모습과 구석기 가족들의 단란한 모습, 석기 제작 모습 등이 있으며,
지금은 사라진 그 시절 동물의 모형 등도 담겨져 있다.

▲  말을 사냥하는 모습

▲  구석기 가족의 생활 모습


▲  지금은 사라진 넙적큰뿔사슴
지구 역사상 가장 큰 뿔을 가진 사슴과로 홍적세 중기~후기를 누볐던 동물이다.
구석기 사람들의 좋은 먹잇감으로 평양 상원 검은모루동굴에서 그의
뼈가 출토되기도 했다.

▲  역시나 화석만 남은 검치호랑이
오늘날 호랑이의 조상격으로 길이 18~20cm에 달하는 큰 송곳니를 가진 홍적세
시절 맹수이다. 아주 매섭게 재현되어 비록 모형이지만 오금을 지리게
하는데 동아시아에 살던 검치호랑이는 서양보다 검치의 크기가
작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구석기 사람과의 기념촬영 코너
의자는 구석기 스타일에 걸맞게 동물 뼈와 가죽으로 이루어져 있다.
(뼈와 가죽은 가짜임)

▲  매머드 뼈로 지어진 뼈다귀 집

구석기시대 후반(1~2만년 전)에 구석기 사람들이 메머드를 때려잡아 그 뼈로 만든 집으로 이
때부터 집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크라이나에서 발견된 매머드뼈 집터를 복원한 것으로 그
안에 불을 피운 흔적이 발견되었다.


▲  사냥감을 들고 귀가하는 구석기 사람들
사슴 같은 것을 잡은 모양이다. 저 사람들은 그날 고기 회식을 했겠지.

▲  겨울 제국에게 영혼까지 싹 털린 연천자생식물원 (야생화단지)
전곡리 선사유적 동편에 야생화 등을 심어놓은 자생식물원을 닦아놓았다. 허나
그러면 뭐하랴? 겨울 제국에게 몽땅 털려 황량한 벌판이 되버린 것을..
이곳의 진면목을 보려면 봄과 여름, 가을에 오기 바란다.

▲  축제장 북쪽에 자리를 닦은 얼음숲 연천 (얼음조각품)
한겨울에 걸맞게 축제장 한쪽에 얼음 조각품을 배치하여 겨울 축제의 분위기를
한껏 드높이고 있다. 이들을 한 덩어리로 '얼음숲 연천'이라 이름지었는데,
전곡리 선사유적지의 캐릭터인 고롱이와 미롱이, 매머드를 비롯하여
재인폭포, 움집, 연천의 특산물을 형상화 하였다.

▲  고롱이(왼쪽)와 다롱이(오른쪽) 얼음 조각품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린이 모습에 구석기 스타일을 입혀 이곳의
귀여운 캐릭터로 삼았다.

▲  얼음으로 재현된 매머드

▲  연천의 명물, 재인폭포(才人瀑布)를 겨울 버전으로 형상화하였다.

▲  얼음 미끄럼
바닥이 차갑기 때문에 포대자루 같은 것을 깔고 타면 된다. 타고 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그놈의 나이 때문에 그냥 구경만 했다. 얼음 미끄럼을 신나게 타고
내려오는 어린이들의 표정에 화창함이 가득하다.

▲  알록달록 소원지를 달아놓은 현장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소망을 하나씩 머금은 소원지가 차디찬 삭풍에
몸을 떨고 있다. 적당하게 소원지가 들어차면 불에 태워버린다.


 

♠   전곡리 선사유적지 마무리

▲  아슐리안 주먹도끼를 정면에 내세운 토층전시관

토층전시관은 발굴조사를 벌였던 땅 속 지층(토층) 구조와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 그리고 다
른 나라에서 업어온 구석기 유물을 다루고 있다. 현관 윗쪽에는 전곡리 선사유적의 상징이자
인도 동쪽 아시아에서 최초로 발견된 아슐리안 주먹도끼 황금색 모형을 달아놓았다.


▲  토층전시관 내부에 있는 지층(토층) 구조
저 밑에서 장대한 세월의 의해 봉인되어 있던 구석기 유물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  전곡리 유적에서 나온 구석기 유물들
그 시대 원시인들의 유물은 거의 대부분 돌이다. (동물뼈 일부) 얼핏 보면
그냥 일반 돌맹이처럼 보여 보통 사람들은 구분하기가 어렵다.

◀  아프리카 케냐에서 가져온 구석기 유물


▲  토층전시관 옆에 자리를 닦은 선사체험마을 (연천마당)
이곳은 선사시대 및 전통 체험 공간으로 쓰인다. 마당 한쪽에 옹기종기 모인
초가집은 전통 체험 공간으로 그 남쪽에 선사 체험 공간이 있다. 이곳은
주로 어린이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선사시대 기술, 생활방식 등을 체험할 수 있다.

▲  겨울에 잠겨 한적한 연천마당 (선사체험마을 잔디밭)

▲  선사체험공간 한쪽에 자리한 귀여운 고롱이와 다롱이

▲  토층전시관 옆에 닦여진 움집과 원시인 모형 기념 촬영장
가운데 원시인 모형에 얼굴을 대고 기념촬영을 하면 된다. 그때만큼은
정말 구석기나 신석시기대로 순간 이동을 당한 기분일 것이다.

▲  전곡리 선사유적지 산책로 (정문으로 나가는 길)

▲  유럽 양이 스타일의 성(城) 눈조각품

전곡리 유적 정문 남쪽에는 인공눈을 빚어 만든 눈조각품이 막바지 눈 호강을 시켜준다. 옛날
유럽 성을 비롯하여 피라미드와 동굴 등이 재현되어 있는데 눈조각품 주변에는 인공눈이 짙게
깔려 있어 설원을 거니는 기분을 들게 한다.


▲  피라미드, 스핑크스 눈조각품(오른쪽)과
호주 오페라하우스 눈조각품 (그 뒷쪽)

▲  거대한 하얀 언덕 눈조각품 - 저 안에 얼음 동굴이 있다.

▲  하얀 언덕에 새겨진 재미난 형상들
창을 든 원시인과 매머드, 현대인으로 보이는 형상, 그 형상이
내뱉은 수상한 연기(?)가 새겨져 있다.

▲  하얀 언덕 - 왼쪽과 오른쪽에 언덕 동굴로 인도하는 문이 있다.
동굴 내부는 무척 시원하여 여름에 가면 아주 극락이 따로 없겠으나
여름에는 날씨 관계로 눈조각품을 운영하지 않는다.

▲  역 이름이 구석기역(?)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유적지 외곽을 도는 관광 레일카를 운행하고 있다.
그 레일카는 구석기역에서 타면 되며, 속도가 너무 굼뱅이라
1바퀴 도는데 20분 정도 걸린다.

▲  전곡리 선사유적지 정문 주변에서 다시 만나는 고롱이와 미롱이
칼라버전 모형들

▲  전곡리 선사유적지 정문
동굴처럼 생긴 정문 위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은 구석기 원시인의 얼굴상을
달아놓았다. 역시나 전곡리 스타일에 걸맞는 정문이다.


정문을 나섬으로써 2시간에 걸친 전곡리 선사유적지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시간도 벌써 16
시가 넘은 상태, 햇님도 고단한지 벌써부터 칼퇴근을 준비하면서 슬슬 땅꺼미가 어슬렁거리기
시작한다.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껍데기만 남은 딱딱한 선사유적지를 탈피하여 선사시대 관련 다양한 체
험을 누릴 수 있는 현장으로 특히 돼지고기 바비큐 체험이 인상적이었다. 집안에 아이나 조카
들이 있다면 구석기 축제 기간에 맞춰 가족 나들이로 한번 가보기를 바란다.
이렇게 하여 구석기시대로의 짧은 나들이, 전곡리 선사유적지 겨울 나들이는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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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 수리산, 반월호수에서 가을을 맞이하다 ~~~ (철쭉동산, 수리산산림욕장, 수리산둘레길, 수리사)

 

 

~~~~~  가을맞이 수리산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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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리산 철쭉동산 (5월 군포철쭉축제)

▲  수리산 둘레길

▲  수리산 수리사

 


이 땅의 최대 명절인 한가위(추석) 연휴 끝 무렵에 친한 후배와 군포 수리산(修理山)을
찾았다. 수리산에 대한 사람들의 찬양이 대단하여 얼마나 괜찮은 산인지 직접 확인하고
자 간 것이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14시 무렵, 금정역에서 그를 만나 서울 5623번 버스(군포공
영차고지↔여의도)를 타고 둔전초교에서 군포마을버스 3-1번으로 환승하여 수리산 입구
인 중앙도서관에서 두 발을 내렸다. 수리산 나들이는 여기서부터 막을 연다.


 

♠  수리산(수리산 도립공원) 입문

▲  수리산 산림욕장

수리산은 인구 30만을 지닌 군포시(軍浦市)의 듬직한 진산(鎭山)으로 군포 북서쪽과 안양시(
安養市)의 서남쪽, 안산시(安山市) 동쪽에 넓게 누워있다. 삼성산(三聖山, 480m), 관악산(冠
岳山, 629m)과 더불어 안양권의 이름난 명산(名山)으로 등산/나들이 수요가 상당하며 2009년
에 경기도의 3번째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수리산이란 이름 3자를 들으면 대입 수능시험의 수리영역이나 '수리수리 마수리' 주문이 생각
이 난다. 허나 산 이름은 그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이름 유래에 대해서는 3가지 설이 전해오
는데, 산 바위가 마치 독수리처럼 생겨서 수리산이라 했다는 설이 있고(수암봉 정상에 독수리
의 일종인 검둥수리가 앉아있는 듯한 바위가 있음), 산 남쪽 자락에 안긴 수리사에서 유래되
었다는 설, 그리고 조선시대 때 왕손(이씨)이 수도했다고 하여 수리산(修李山)이라 했다는 설
이 그것이다. 그래서 '修理山'이란 한자 대신 '修李山'이라 하기도 하며, '修理山'으로 바뀐
것은 20세기 중반 때라고 한다.

수리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봉우리는 태을봉(489.2m)이며, 슬기봉(469m)과 관모봉(426m),
수암봉(395m) 등이 수리산을 이루고 있다. 흙으로 이루어진 산으로 산세가 완만하고 숲이 짙
으며 수리사계곡과 창박골(병목안) 등의 계곡이 흘러 조촐한 피서지를 선사한다.
수리산 동남쪽 자락인 군포 수리동 일대에는 산림욕장이 닦여져 있고, 산 주위로 수리산둘레
길과 수리산임도길 등의 둘레길이 닦여져 수리산의 멋을 더욱 돋구고 있으며, 수리사와 철쭉
동산, 2016년에 문을 연 초막골 생태공원 등의 명소가 있다. 특히 철쭉동산은 군포시의 야심
작으로 산자락에 넓게 철쭉밭을 닦아놓았는데 매년 5월 군포철쭉축제가 거하게 열려 사방을
온통 연분홍 천지로 만든다. 서울 근교에 이렇게 너른 철쭉의 공간이 있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  윗쪽에서 바라본 수리산 철쭉동산 (5월 군포철쭉축제)

▲  층층히 이어진 수리산 철쭉동산의 위엄 (5월 군포철쭉축제)

▲  수리산 철쭉동산 (5월 군포철쭉축제) ▲

수리산 등산은 수리산역(4호선)이나 철쭉동산, 군포시 중앙도서관, 태을초교, 수리약수터, 명
학역 등에서 시작하면 되며 군포시가 수리산 일대에 걸쳐놓은 둘레길은 총 4코스로 다음과 같
다.
① 수리산둘레길(군포수릿길 1코스) : 산본역~태을초교~노랑바위~임도5거리~감투봉~밤바위~시
민체육공원~산본역 (16km, 5시간 30분 소요)
② 수리산임도길 구름산책길(군포수릿길 2코스) : 중앙도서관~임도5거리~덕고개~행복쉼터~속
달동 마을길  (4.8km, 1시간 40분 소요)
③ 수리산임도길 풍경소리길(군포수릿길 3코스) : 수리산역~철쭉동산~중앙도서관~임도5거리~
수리사 (5km, 1시간 20분 소요)
④ 수리산임도길 바람고개길(군포수릿길 4코스) : 납덕골주차장~수리사방향~임도입구~바람고
개~에덴기도원~납덕골주차장 (5.6km, 1시간 50분 소요)

끝으로 수리산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6.25전쟁이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이 부분은
거의 모르고 지나치는 실정인데, 6.25 시절인 1951년 1월, 북한에게 서울을 빼앗기자(1.4후퇴
) 서울을 수복하고자 국군 1사단과 미군 25사단, 터키 여단 1개 대대가 수리산 일대에서 북한
군과 머릿수만 무식하게 많은 중공군 수만 명을 상대로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는 그
해 2월 10일 서울 재탈환에 큰 역할을 했으며, 지형적인 불리함과 막대한 인명피해를 극복하
고 강력한 화력과 항공기 지원, 군사들의 투지에 힘입어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2007년부터 산 일대를 조사하여 국군 유해 4구와 유품 600여 점을 수습, 뒤늦게 국립현
충원에 봉안했다.


▲  수리산의 자랑, 숲길 (수리산 임도길)

수리산을 수식하는 명소의 하나인 수리산 산림욕장은 군포시가 1993년부터 조금씩 조금씩 닦
아놓은 것으로 면적은 159.4ha이다.
상수리나무와 때죽나무 등 활엽수림이 주류를 이루며, 리기다소나무 등 침엽수(針葉樹)가 산
중턱을 장식한다. 군포시내(산본, 수리동)와 바짝 붙어있어 접근성 하나는 매우 착하며, 숲이
매우 삼삼해 산림욕에는 아주 좋다. 또한 피크닉장과 자연학습장도 갖추고 있어 가족 나들이
와 소풍지로도 손색이 없다.

우리는 산림욕장 내부까지 들어가진 않고 항아리 겉돌 듯 입구 주변만 살펴보고 바로 수리산
둘레길에 임했다.
산림욕장 남쪽에서 성불사를 거쳐 임도5거리로 인도하는 수리산둘레길은 차량들이 다녀도 충
분할 정도로 폭이 넓다. 순 흙길로 이루어져 있고 햇살이 들어오기 힘들 정도로 숲이 무성하
여 이곳만큼은 무더위와 자외선을 잊어도 좋다. 나무가 베푼 숲내음이 속세에서 오염된 심신
을 어루만져 주며, 산바람이 이따끔 불어와 번뇌와 땀을 단죄한다.

집으로 살짝 훔쳐와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아름다운 숲길로 성불사 직전 구간을 제외하면 경
사는 거의 느긋하며, 뱀처럼 구불구불한 고개를 넘으면 임도5거리에 이른다.


▲  수리산 임도5거리

임도5거리는 수리산 남쪽 요충지로 숲길이 5갈래로 갈리는 곳이라 하여 속편하게 임도(林道)5
거리를 칭하고 있다. 우리의 목적지인 수리사는 여기서 북서쪽 길을 이용하면 되며, 남쪽 큰
길로 내려가면 덕고개와 갈치저수지 방면으로 이어진다. 5거리에는 쉼터와 조그만 정자가 있
고, 소나무와 온갖 나무들이 앞다투어 그늘을 베풀고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  임도5거리에서 수리사로 가는 숲길 (수리산임도길 풍경소리길)

임도5거리에서 수리사입구까지는 앞서 길보다는 좁지만 흙길이 진하게 닦여져 있다. 깊은 산
주름 속에 묻힌 산중이라 완전 산과 푸른 숲, 하늘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가 정녕 수도
권의 주요 도시인 군포시가 맞는지 절로 고개라 갸우뚱할 정도로 마치 강원도 산골로 순간이
동을 당한 기분이다.

자연의 소리가 전부인 숲길로 걷는 길이 지루하지 않으며 경사도 꽤 느긋하다. 우리네 인생이
이런 산길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길을 25분 내려가면 수리사입구에 이른다.


▲  수리산이 베푼 조그만 샘터
빨간 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늦더위로 타들어가는 몸 속을 진화한다.

▲  수리사로 올라가는 길 (1)

수리사입구에서 수리사까지는 각박한 오르막길을 10분 정도 올라야 된다. 임도5거리에서 여기
까지 내려온 높이 만큼 말이다. 절까지는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포장길이 닦여져
있으며, 길 옆에는 수리사계곡이 수줍은 모습으로 졸졸졸~~♪ 화음을 선보이며 반월저수지(반
월호수)로 흘러간다. 울창한 숲이 길과 계곡의 지붕이 되어 하늘을 가리고 있으며 바로 그 길
의 끝에 수리사가 자리해 있다.

▲  가늘게 흘러가는 수리사계곡

▲  수리사로 올라가는 길 (2)


▲  수리사계곡에서 만난 조그만 자연산 폭포
계곡은 작지만 수리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갖은 바위와 조그만 폭포들이
아기자기한 풍경을 자아낸다.

▲  드디어 도착한 수리사의 정문, 일주문(一柱門)


 

♠  수리산 서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오래된 절집
~ 수리사(修理寺)

수리사는 수리산 서남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산사(山寺)로 군포에서 가장 산골 벽지이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제대로 묻힌 비구니 절로 화성시 용주사(龍珠寺)의 말사(末寺)인데 6세기
중반인 신라 진흥왕(眞興王) 시절에 신라 왕족인 운산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부처를
친견해 반드시 부처가 된다는 기별(記別)을 받고서 여기서 부처를 만났다고 하며, 그 연유로
산 이름을 견불산<見佛山, 또는 불견산(佛見山)>, 절 이름은 수리사라 했다고 한다.
허나 진흥왕 시절 안양/군포 지역은 백제와 신라의 경계 지역으로 고구려와 밀약을 맺은 신라
가 동맹국인 백제의 뒷통수를 치며 한참 한강 유역과 경기도 지역을 점령하던 시절이다. 게다
가 신라의 불교가 법흥왕(法興王) 때 공인되었다고 하지만 문무왕(文武王) 시절까지 절은 대
부분 왕경(王京, 경주)에만 지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변경이나 다름없는 이곳까지 와서 위험
을 무릅쓰고 절을 지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다만 경내에 오래된 석불 등이 있어 절이 우후죽
순 들어서던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대웅전 등 건물 36동과 12개의 암자(庵子)를 거느린 큰 사찰이었다고 한
다. 허나 이 역시 자료와 유물이 부족해 신빙성은 떨어지며, 절 주변 산세를 보면 그만한 건
물을 짓기에도 벅차 보인다. 비록 그 정도는 아니지만 왕년에는 시흥(始興) 지역(그때는 시흥
고을이었음)에서 그런데로 잘나갔던 모양이며,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앉은뱅이가 되고 말았다.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이끌고 경남 지역에서 크게 활약을 했던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가 쓰러진 절을 재건하고 이곳에서 수도하며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허나 그는 근거지인 현풍
(玄風)과 의령(宜寧)에서 벼슬을 멀리하고 후학을 길렀던 사람이다. 수리사와는 전혀 관련도
없는 그를 왜 이곳 중창주로 등장을 시켰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아마도 그를 흠모하던 이곳
승려가 장대한 세월에 산산히 흩어진 수리사 내력을 손질하면서 그를 살짝 넣은 것은 아닐까?
20세기에 들어서 경허(鏡虛)가 이곳에 주석하여 머물렀으며, 대선사(大禪師)인 금오(金烏)가
이곳에서 출가했다. 6.25 전쟁으로 절이 파괴된 것을 1955년 청운(靑雲)이 중건했으며, 계속
불사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과 산신각, 나한전, 요사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죄다 20세
기 중/후반에 지어진 것이라 고색의 내음은 말라버렸다. 소장문화유산은 하나도 없으며, 오래
된 석불이 하나 전하고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간신히 귀뜀해준다.

절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여기서부터 수리사 경내로 문을 들어서던 우
회길을 이용하던 그건 각자 마음이다. 여기서 주차장까지는 경사가 좀 가파르며 그 경사를 오
르면 수리사 표석과 차량들이 평화롭게 쉬는 주차장이 나온다. 여기서 1단 더 올라가면 요사
(寮舍)이며, 1단 더 오르면 경내의 중심 구역으로 대웅전과 나한전(羅漢殿), 범종각, 약수터
등이 있다.

▲  범종(梵鍾)의 보금자리인 범종각

▲  석가불과 500나한이 봉안된 나한전

▲  나한전 석가3존불
(석가불과 문수,보현보살)

▲  가지각색의 나한전 오백나한들


▲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편강약수 ~ 약수는 어디가고 물통만 있나?

산사에는 늘 샘터가 있기 마련이다. 그만큼 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수리사 역시 그 예외는
아니라서 대웅전 옆구리에 샘터를 두고 이름도 좋은 편강약수라 하였다. 하지만 샘터가 어디
아픈지 물은 막혔고, 대신 철덩어리 물통을 두어 샘터의 역할을 대신하게 했다. 샘터에 놓인
바가지들이 어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속히 샘터와 물줄기를 복구하여 약수터를 되찾기 바란
다.


▲  수리사 대웅전(大雄殿)

이곳의 법당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집으로 경내에서 가장 큰 건
물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위엄 있게 들어앉아 남쪽을 굽어보고 있으며, 내부에는 석가
3존불과 여러 탱화가 봉안되어 있고, 3존불 위로 황금색 닫집이 장엄하게 자리한다.

▲  대웅전 석가3존불과 닫집

▲  단촐한 모습의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뒷쪽 언덕이자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삼성각이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정
면과 측면이 달랑 1칸인 맞배지붕 건물로 3명의 성스러운 존재, 산신과 독성(나반존자), 칠성
(치성광여래)이 봉안되어 있다.


▲  산신(山神) 가족이 담긴 산신탱

▲  삼성각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대웅전과 요사 뒷통수가 보이고, 수해(樹海)를 이루는 수리산
남쪽 줄기 너머로 인구 120만을 지닌 경기도의 중심 도시,
수원(水原)이 시야에 들어온다.

▲  수리사의 숙성된 흔적, 파괴된 석불과 석탑 잔재들

삼성각 옆에는 완전하지 못한 석재들이 고색의 때를 가득 머금으며 옹기종기 모여있다. 넓적
한 돌판에는 주름이 여러 겹 그어진 큰 돌이 있는데, 딱 보니 석불의 흔적으로 보인다. 석불
의 얼굴과 아랫도리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죄다 휩쓸려 사라졌고 옷을 걸친 몸통
부분만 남은 것이다. 그 앞에는 석탑의 잔재로 보이는 돌이 놓여져 있으며, 예전 수리사에 5
층석탑이 있었다고 하므로 그 탑의 잔재나 옛 건물의 주춧돌로 보인다.
다들 왕년에는 한 가닥 하던 존재들이나 지금은 초췌한 몰골로 지나간 세월을 원망하니 역시
나 인생은 부질 없는 모양이다. 수리사의 오래된 숙성의 흔적으로 20세기 중반 이후 절을 중
수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수습한 것이다.

※ 수리산 수리사 찾아가기 (2018년 9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산본역(2, 3번 출구)에서 군포마을버스 2, 3-1번을 타고 중앙도서관 하차 →
  중앙도서관 정류장에서 수리산임도길(수리산로)을 따라 도보 50~60분
* 지하철 1,4호선 금정역(6번 출구)에서 안양시내버스 15번을 타고 중앙도서관 하차
* 지하철 4호선 대야미역(1번 출구)에서 군포 100-1번<60~80분 간격>, 군포마을버스 1-2번<60
  분 간격>을 타고 납덕골 하차 → 수리사까지 도보 25분
* 지하철 1호선 의왕역 2번 출구 건너편 정류장에서 군포 100-1번 이용
* 승용차 (경내 밑에 주차장 있음)
  ① 군포 → 대야미역 → 갈치저수지 → 덕고개 → 납덕골 → 수리사 
  ② 수원/안산 → 반월동 → 반월호수 → 납덕골 → 수리사
* 소재지 -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329 (속달로 347-181, ☎ 031-438-1823)


 

♠  수리산 마무리 (대야동 시골길, 반월호수)

▲  수리산을 뒤로하며 (수리사입구 남쪽)

수리사를 둘러보고 임도5거리로 다시 나가려고 했으나 사람의 마음은 갈대라고 반월호수로 길
을 잡았다. 수리사입구에서 임도5거리 방면 동쪽 산길 대신 남쪽 길을 쭉 내려가면 되는데 수
리사에서 호수까지 무려 4km를 걸어야 된다.

반월호수 방면 도로(속달로, 둔대로)는 잘 포장되어 있어 걷기는 좋다. 군포시가 서울과 안양
의 배후 도시로 20여 년 동안 크게 성장하여 시가지가 나날이 확장되고 있는데, 이로 인해 겉
으로 보이는 군포는 완전 시가지와 아파트만 있는 도시로 보인다. 허나 시내 서남부에는 산과
논, 밭, 숲이 전부인 시골도 여실히 남아있어 앞만 보고 달려가는 군포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대야동과 속달동 지역으로 이들이 군포의 시골로 남게 된 것은 수리산과 반월호수 덕분
이다. 그들이 이곳을 지킨 든든한 방패인 것이다.


▲  속달동 마을에서 바라본 수리산과 바다처럼 너른 하늘

▲  속달동 시골길(둔대로)

납덕골에서 이르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속달로'를 계속 고집하여 동남쪽으로 가면 갈치저
수지, 덕고개, 대야미 쪽으로 이어지며, 서남쪽 '둔대로'로 가면 반월호수로 이어진다. 둔대
로는 2차선 길에서 이내 조그만 시골길로 변신하여 우리를 인도한다.

가로수인 듯, 아닌 듯, 길가에 자리한 나무들은 슬슬 가을옷을 꺼내들고 있고, 길 주변에 펼
쳐진 논은 푸르게 익어 올해도 변함없이 풍년을 예감하고 있었다. 자고로 이런 시골길과 숲길
은 도시인들에게 청량제이자 꿀 같은 존재로 속세에서 상처받고 오염된 안구와 마음을 정화해
주기에 아주 좋다.


▲  벼들이 푸르게 익어가는 속달동 평야

▲  반월호수 북쪽 개울(반월천)

그림 같은 시골길(둔대로)을 걷느라 시간도, 지루함도 잠시 잊고 있으려니 다리 하나가 나온
다. 다리 밑 반월천에는 나들이객들이 개울 주변에 자리를 피고 소풍을 즐기고 있었다. 어린
이들은 아직까지도 덤벼들고 있는 여름 제국(帝國)의 기운에 맞서고자 개울에 들어가 애궂은
물고기들에게 고통을 주거나 물놀이를 즐긴다. 그런 평화로운 모습을 바라보며 계속 가다보면
영동고속도로가 나오고 그 밑도리를 지나면 반월호수가 펼쳐진다.


▲  서쪽에서 바라본 반월호수(半月湖水, 반월저수지)

▲  북쪽에서 바라본 반월호수

반월저수지는 반월호수라고도 불린다. 안양/안산권의 이름난 호수 관광지로 1957년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조성된 오래된 호수이다. 총 저수량은 118.7만㎥로 만수 면적은 37ha에 이르며, 수리산(집예골, 샘골, 지방바위골)이 베푼 물을 먹고 자라 아주 단단히 물이 올랐다. 수리사
계곡도 바로 이곳으로 내려와 잠시 머문 다음 큰 세상으로 흘러간다.

호수는 농어촌공사 화성,수원지사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호수가 산에 빙 둘러싸여 있어 주변
풍경이 제법 아름답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관광지로 손질되어 산책로와 공원이 닦였으며, 식
당과 분위기를 내세운 까페가 많이 들어서 이제는 수리산 못지 않은 군포시의 꿀단지가 되었
다.
호수 주변은 추석 연휴의 끝을 잡은 나들이 수요와 그들이 끌고 온 차량들로 완전히 시장통을
이루었다. 가족 단위 나들이객과 수리산에서 내려온 산꾼, 사진을 찍으려는 사진꾼들, 이곳으
로 밥이나 차, 커피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까지 다양한 군상들이 몰려들어 호수의 몸값을 더욱
높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 호수는 특히 저녁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반월낙조(半月落照)라 하여 2004년에 군포
3경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또한 다른 호수도 마찬가지겠지만 새벽 물빛에 슬금 피어오르는 물
안개가 아주 장관이다.

▲  오늘도 평화로운 반월호수

▲  호수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매뭇새를 다듬는 산

◀  푸른 하늘과 구름도 잠시 길을 멈춘
반월호수


▲  호수 곁을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고속전철

호수 바로 서쪽에는 경부고속전철 고속선이 닦여있다. 그러다보니 수시로 고속열차(KTX)가 빛
을 가르며 순식간에 지나가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징하던지 호수가 쩌렁쩌렁 울리고, 귀신까
자빠트릴 정도이다. 호수를 거울로 삼은 존재들이 하늘과 구름, 산, 나무, 꽃에다가 고속전철
까지 참 다양하다.
이곳을 지나는 고속전철은 위로는 서울, 용산, 행신역, 아래로는 대전, 동대구, 포항, 부산,
마산, 진주, 익산, 광주송정, 목포, 여수까지 운행하며, 하루에 수백 차례 지나간다.


▲  호수에서 만난 서양 모화사상의 잔재, 풍차

호수 북쪽에는 산책로와 공원이 닦여져 있다. 그 산책로를 거닐다보면 천천히 바람개비를 돌리
고 있는 이색 정취의 풍차를 만나게 된다. 나무로 축소해서 만든 것으로 나름 어울리는 풍물시
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양 모화사상의 잔재이기도 하여 좀 씁쓸하기도 하다. 이 땅의 민중
과 18세기부터 함께한 물레방아를 두었으면 더 정감이 컸을텐데 말이다.

반월호수는 다 돌지는 못하고 1/4 정도만 돌았다. 시간도 이미 17시가 넘은 상태이고 배도 고
프기 때문이다. 호수는 이 정도면 충분히 본 것이기 때문에 나머지는 미련을 버리고 군포마을
버스 1-2번을 타고 대야미로 이동, 대야미역에서 4호선 전철을 타고 오늘의 일정을 정리했다.
이렇게 하여 가을맞이 수리산, 반월호수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반월호수 찾아가기 (2018년 9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대야미역 1번 출구 밖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군포마을버스 1-2, 6-1번을 타고
  반월호수(둔터) 하차 <6-1번은 산본역 2,3번 출구 밖 정류장에서도 이용 가능>
* 승용차 (호수 주변에 주차장 있음)
① 안양,군포 → 대야미역 → 둔대초교 → 반월호수
② 안산,화성 → 반월 → 팔곡2교차로 → 반월호수
* 소재지 - 경기도 군포시 둔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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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관악산에서 제일 맵시가 좋은 계곡, 과천 문원계곡 둘러보기 (문원폭포, 문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보광사)



' 관악산 문원계곡 여름 나들이 '


▲  문원하폭포

▲  관악산 일명사지

▲  보광사 문원리3층석탑



 

여름이 한참 깊어가던 7월 초에 일행들과 관악산(冠岳山, 632m) 문원계곡을 찾았다. 예전
에는 관악산의 품에 자주 안기곤 했으나 그에 대한 마음이 시들시들해졌는지 기껏 가봐야
그의 외곽만 겉돌 뿐, 그곳 정상<연주대(戀主臺)>을 오른지도 어언 10년이 넘어가 버렸다.
연주대까지는 아니더라도 간만에 관악산과 인연을 짓고자 여름에 걸맞은 정처를 물색하다
가 과천(果川)에 있는 문원계곡을 찾기로 했다. 이곳은 관악산에 몇 남지 않은 미답처(未
踏處)이자 대표적인 피서의 성지(聖地)로 관악산 뒷통수에 자리해 있는데, 문원폭포와 문
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등의 명소가 숨겨져 있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1시에 정부과천청사역(4호선)에서 일행을 만나 관악산의
품으로 들어선다. 넓게 깔린 교육원로를 가다보면 국사편찬위원회가 나오는데, 그곳을 지
나면 오른쪽에 2명이 지나다닐 정도로 비좁은 길이 나온다. 그 길이 문원계곡으로 인도하
는 길로(이정표가 있음) 길 양쪽에는 철책이 둘러져 답답함을 안겨준다.
그런 길을 4분 정도 들어가면 산림초소가 나오면서 비로소 관악산 산길이 펼쳐진다. 여기
서 서쪽으로 가면 백운사(용운암)란 절이 나오고, 직진하면 바위에 새겨진 승려 얼굴상이
, 동북쪽으로 가면 문원계곡 산길이다.


▲  관악산 문원계곡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
두 행정관청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짓눌려 좁고 각박한 길이 되어버렸다.
관악산 탐방객을 위해 길을 조금 트여주면 좋으련만..


 

♠  문원계곡(文原溪谷) 입문

▲  문원계곡의 생매장 현장

문원계곡은 관악산을 수식하고 있는 주요 계곡의 하나이다. 관악산에는 바로 근처에 있는 자
하동천(紫霞洞天) 계곡을 비롯해 관악산계곡(서울대 서쪽), 관음사계곡(남현동), 삼성천계곡
(안양예술공원)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단조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반해 문원계곡은
아기자기한 변화도 좀 보이고 있고, 높이도 제법 되는 자연산 폭포를 2개나 간직하고 있다.

정부과천청사역에서 문원계곡으로 가는 길목에는 식당이나 가게가 전혀 없다. 그들 사이에는
지체높은 정부청사와 여러 공공기관이 단단하게 자리하여 그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막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번잡하지 않아서 좋음) 그러니 먹거리를 사거나 간단하게 요기를 하려면
정부과천청사역 10번이나 11번 출구로 나가거나 KT과천지사 정류장에서 내리기 바란다. 그곳
이 과천의 중심지로 식당과 가게가 많다.

문원계곡은 관악산 남쪽에서 발원하여 정부청사 서쪽으로 흐르는데, 옛 기술표준원 북쪽에서
그만 강제 생매장을 당한다. 강제로 지하에 묻히는 계곡의 한이 얼마나 깊은지 물소리가 귀신
을 쫓아낼 정도로 우렁찬데 아무리 공공기관이라도 계곡이 그리 크지도 않거늘, 계곡에 대한
부족한 배려가 참 아쉽다. 허나 다행히 생매장 구간은 짧아서 옛 기술표준원을 지나면 교육원
로 남쪽에서 다시 햇살을 본다. (기술표준원은 충북혁신도시로 이전되었음)

산림초소를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문원
계곡 하류가 나온다. 생매장 직전인 이곳에 폭
포 2개가 연달아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는데 이
들은 자연산이 아닌 지형을 이용하여 다듬은
인공폭포이니 속지 말자. 문원계곡의 알짜배기
폭포는 여기서 더 들어가야 된다.

▲  인공(人工)이 가해진 문원계곡 하류 폭포

 


▲  각세도의 성지(聖地), 신계 이선평(晨鷄 李善枰)의 묘역

인공폭포를 지나면 산길 오른쪽으로 소나무 그늘에 묻힌 무덤과 안내문이 손짓을 한다. 전혀
정보가 없는 무덤이라 안내문을 기웃거리니 각세도(覺世道)를 세운 이선평의 묘역이다. 각세
도에서는 그를 도조(道祖)로, 그의 묘는 성묘(聖墓)라 추앙하며 애지중지하고 있다.

이선평(1882~1956)은 황해도 문화군(文化郡) 태산촌(泰山村)에서 태어났다. 조선 2대 군주인
정종(定宗)의 16대손으로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에 정진했는데, 평양 근교에서 '천하대보 정
진무외(天下大寶 正眞無外)'라는 글귀가 하늘에 나타난 것을 보고 각세(覺世)의 진리를 깨달
았다고 한다. 그래서 고향 인근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가 10여 년 동안 도를 닦으면서 의술과
복점(卜占), 풍수지리서를 익혔다고 한다.

수도를 마치고 잠시 세상으로 내려와 군의(軍醫)가 되기도 했으나 1907년 군대해산으로 실업
자가 되자 다시 수도를 하다가 뜻한 바가 있어 1913년 비봉산(飛鳳山)에 들어가 1,000일 기도
에 돌입했다.
기도를 벌인지 488일째 정오에 남쪽 하늘에서 황금색으로 쓰인 각세도 3자가 나타났다. 그리
고 다음날에는 서쪽 하늘에 '원각천지 무궁조화 해탈사멸 영귀영계(圓覺天地 無窮造化 解脫死
滅 永歸靈界)'란 16자의 주문이 나타났다고 하며 그 이후 초하루부터 매일 1자씩 하늘에서 글
씨를 받아 30계명과 도기(道旗), 각세훈사(覺世訓詞) 등을 얻었다고 한다. 그렇게 1,000일을
채우고 속세로 내려와 자신이 깨달은 것을 가르치니 그것이 각세도의 시작이다.

왜정(倭政) 말기에는 신도가 3만에 이르렀고, 해방 이후에는 10만까지 늘어났으며, 이선평은
문원계곡 하류에 세심정(洗心亭)이란 초막을 지으며 포교를 벌이다가 마땅한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1956년에 세상을 떴다. 그래서 후계자를 둘러싸고 분열이 일어나 여러 갈래로 갈라지
게 된다. (이선평과 각세도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하겠음)

이선평의 묘는 1976년부터 2년 동안 성역화 사업을 벌였으며, 문인석(文人石) 1쌍과 망주석(
望柱石) 1쌍, 묘비, 봉분(封墳)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존재를 대충 덤으
로 챙기고 서둘러 문원계곡으로 들어섰다.


▲  녹음(綠陰)이 우거진 문원계곡 산길

▲  속세를 향해 흘러가는 문원계곡 중류
한여름에는 피서의 성지로 추앙을 받으며, 피서객들의 욕탕이 되버린다.

▲  문원계곡 바위 산길 - 보호 난간이 등산객의 발길을 지켜준다.

문원계곡 산길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느긋하다. 산길과 계곡과는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
다가 바위 산길(이선평 묘역과 문원하폭포 중간)에서 잠시 멀어지는데 바위 벼랑 밑으로 아득
하게 계곡이 보인다.


▲  바위 산길에서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
숲 너머로 과천 시내와 청계산(淸溪山)이 두 눈에 들어온다.

▲  문원계곡을 건너는 나무 다리
바위 산길을 지나면 잠시 멀어진 계곡과 다시금 가까워진다. 그 상태는
문원폭포까지 쭉 이어져 서로의 끈끈한 정을 과시한다.

▲  나무다리 주변 문원계곡 중류


 

♠  문원계곡의 꿀단지, 문원하폭포와 문원폭포

▲  관악산 제일의 폭포, 문원하폭포(文原下瀑布)

산림초소에서 천천히 30분 정도 오르면 계곡 상류에 걸린 문원하폭포(이하 하폭포)가 마중을
한다. 나도 처음에는 그를 문원폭포로 알고 있었으나 이는 답이 아니었다. 그 문원폭포는 여
기서 더 올라가야 되며, 그 폭포 밑에 있다고 해서 문원하폭포라 불린다. 허나 외모는 문원폭
포보다 하폭포가 훨씬 잘났다. 그래서 문원폭포보다는 하폭포가 이곳의 중심 폭포이자 관악산
제일의 폭포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니 차라리 하폭포를 문원폭포라 하고, 문원폭포를 문원상
폭포나 윗폭포로 칭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하폭포는 하얀 피부의 바위를 타고 명주 자락을 늘어뜨린 듯 하얀 물보라를 쏟아내는데, 위에
서 바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서 거의 20도 정도로 구부러졌다가 다시 바위
를 타고 힘차게 내려온다. 폭포의 높이는 약 20m 정도로 폭포 밑에는 물놀이 하기에 좋게 얕
은 수심의 못이 형성되어 있으며, 폭포 남쪽에 산길이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고, 폭포가 있는
바위는 안전을 위하여 하얀 금줄을 쳐놓았으나 어기는 산꾼이 적지 않다.

관악산은 산세와 바위는 참 일품이지만 문원계곡과 관악산 제일의 경승지로 추앙받던 자하동
천을 빼면 계곡도 평범하고 폭포도 거의 없다. 그나마 문원계곡이 좀 아기자기한 편이고, 그
곳에 빚어진 하폭포와 문원폭포가 관악산에서 제일 화끈하게 폭포의 패기를 보여준다.


▲  위에서 바라본 하폭포

▲  반석으로 이루어진 하폭포 윗쪽

하폭포 옆구리를 통해 폭포 위쪽으로 오르면 계곡을 둘러싸고 넓게 펼쳐진 반석이 나온다. 문
원계곡을 찾은 산꾼들이 많이 쉬어가는 쉼터로 여기서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리는데, 북쪽으로
난 마당바위를 오르면 일명사지와 연주암으로 이어지고, 계곡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문원폭포
가 나온다. 그리고 서북쪽 길로 오르면 육봉과 팔부능선으로 이어지는데 정상(연주대)이 목적
이라면 북쪽 마당바위로 오르면 된다.


▲  하폭포 윗쪽에 자리한 마당바위

▲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 정경백(鄭景伯) 바위

마당바위 꼭대기에는 큰 바위가 아슬아슬하게 걸터 앉아 천하를 굽어보고 있다. 살짝 밀면 당
장이라도 때굴때굴 굴러떨어질 것 같은 기세인데, 그의 피부에는 한자로 큼지막하게 '정경백'
이라 쓰여 있다. 바로 그 바위글씨 때문에 '정경백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정
경백은 사람 이름으로 뭐하던 양반인지는 모르겠으나 글씨의 폼을 보니 구한말이나 왜정 때
새겨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을 찾은 정경백은 문원계곡의 뛰어난 절경에 퐁당퐁당 빠지면서 마당바위 피부가 아닌 이
바위에 이름 3자를 낙서로 남겼다. 인명사전이나 인터넷 검색에도 그의 정보가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면 그저 평범한 선비거나 글 좀 아는 백성인 듯 싶으며, 바위에 이름을 남긴 인연으로
비록 그의 정체는 몰라도 그의 이름은 바위와 함께 지금까지 남게 되었고, 관악산의 주요 바
위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관악산에 널린 바위 가운데 사람 이름을 취한 바위는 이
것이 유일하다.


▲  정경백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과천과 의왕시내, 청계산, 광교산)

  하폭포에서 문원폭포로 인도하는 산길

   ◀  그늘에 숨겨진 문원폭포(文原瀑布)
하폭포에서 계곡을 따라 5분 정도 오르면 그
늘에 묻힌 문원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하폭
포는 위성지도에도 나올 정도로 그 위용을 속
세에 드러내고 있지만 문원폭포는 숲 그늘 속
에서 수줍게 물보라를 피운다.
폭포의 높이는 10m 정도로 하폭포에 비해 볼
품도 많이 떨어지고 물소리도 차분하다. 거의
90도 각을 이룬 윗부분을 빼면 경사도 거의
40~50도 정도로 물이 미끄럼을 타듯 부드럽게
내려와 착지를 한다.
폭포 옆에는 벼랑이 있는데 그 벼랑 밑에 비
와 눈을 피할 정도로 움푹 들어간 공간이 있
다.
거의 석모도 보문사(普門寺)의 눈썹바위와 좀
비슷한 모습으로 그곳에 태극기를 비롯해 기
도나 굿에 사용하는 물건과 그것을 보관하는
공간이 있어 굿이나 기도터로 몰래 쓰이고 있
음을 알려준다.


▲  시원찮게 떨어지는 문원폭포 윗도리

▲  문원폭포 옆 기도처
깎아지른 벼랑 밑도리에 움푹 들어간 예사롭지 않은 공간이 있어 기도나 굿터로
암암리에 쓰이고 있다. 아마도 이곳의 지기(地氣)가 높거나 지형상의 이유로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승려와 참선하는 사람들의 수행 공간이나
산악신앙의 현장으로 바쁘게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문원폭포 아랫 계곡 (왼쪽은 폭포 옆
기도터로 인도하는 길)


 

♠  하늘과 가까운 곳에 숨겨진 옛 절터, 관악산 일명사지(逸名寺址)
- 경기도 지방기념물 191호

▲  동쪽에서 바라본 일명사터(육봉일명사지)

▲  서쪽에서 바라본 일명사터

하폭포에서 마당바위를 지나 각박한 산길을 6~7분 정도 오르면 긴 석축이 나온다. 그 석축이
바로 옛 일명사터로 석축 앞에 관련 안내문이 서 있어 등산객들의 관심을 호소한다.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일명사터는 육봉(六峰) 밑에 있다고 해서 육봉일명사터라 불리기도 한
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육봉일명사지') 절터의 면적은 400평 정도 되는데, 이곳에 대한
정보가 남아있는 것이 없어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의 비밀을 캐려는 집념으로 1999년 절
터를 뒤집은 결과 연꽃잎이 새겨진 연화문대석(蓮花紋臺石) 2점과 석탑(石塔)의 잔재 1기, 우
물 2곳이 나왔고, 조선시대 암막새기와 조각 20여 점이 나왔다. 또한 범어(梵語)가 새겨진 기
와와 무늬가 없는 조그만 기와 등 신라 후기 기와도 여럿 나와 신라 후기에 법등(法燈)을 켰
음을 짐작케 한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절터의 입을 강제로 열면서 그동안 밝혀진 사실을 정리하면, 신라 후기에
창건되었다가 고려 중기나 후기에 망한 것으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4세기 후반에 다시
중창되어 그런데로 절을 꾸리다가 17세기 후반에 완전 문을 닫고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재정 악화와 주변 사찰과의 경쟁 등이 큰 원인이 아닐까 싶다.
< 무리한 조세와 공납(貢納), 고적한 곳에 위치한 지리적 불리함 등으로> 만약 산사태 등의 자
연재해로 망했다면 절터가 좀 온전하지 못해야 되는데 절터는 너무 선명하다.

절터에는 건물터와 석축, 연화문대석이 있는데, 절이 망한지 꽤 되었음에도 절터가 원형을 잃
지않고 잘 남아있어 관악산 불교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관악산에는 이곳 외에도 연
주암의 전신(前身)으로 여겨지는 관악사(冠岳寺)터가 있으며, 관악산과 삼성산은 신라 후기부
터 절이 많이 생겨나 북한산(삼각산)과 더불어 수도권 불교의 성지로 일컬어진다. 특히 연화
문대석은 관악산에 남아있는 옛 석조물 가운데 가장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칭송받고 있어
일명사도 왕년에 꽤 잘나갔음을 가늠케 한다.
그 잘나가던 절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가늠할 수 없는 전설이 되었고, 건물을 받쳐들던 주춧돌
만 앙상하게 남아 하늘을 받들고 있으니 참 인생무상이 아닐 수 없다. 일명사는 스스로를 태
우며 그 위대한 진리인 인생무상 4자를 우리에게 진하게 일깨워 주고 있다. 허나 그러면 뭐하
나. 인간은 동물과 신(神) 사이에 어정쩡하게 들어앉은 존재라 그것을 죽기 전에나 깨달으니
말이다.

일명사터는 하폭포에서 연주암 가는 길목에 있어 찾기는 쉽다. 연화문대석 2기는 절터 한복판
에 박혀있어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하며, 석탑의 잔재와 우물은 절터 인근 수풀에 묻혀 있다.
석탑은 고려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산11


▲  일명사터 석축

▲  여름 햇살을 즐기고 있는 일명사터 중앙 건물터
다른 건물터와 달리 규모가 크고 절터 중앙에 자리해 있어 절의 중심 건물인
법당(法堂)으로 여겨진다.

▲  일명사터 동쪽 건물터
조그만 건물이 여럿 뿌리를 내렸던 곳으로 산신각(山神閣)이나 명부전(冥府殿),
요사채 자리로 여겨진다.


▲  북쪽에서 바라본 일명사터

▲  화석처럼 박힌 연화문대석 형제
이들은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석불 대좌(臺座)의
일부로 여겨진다. 관악산의 몇 안되는 옛 석조물 가운데 가장 정교하게
새겨진 것으로 천하에 짧게나마 주목을 받았다.

▲  절터 북쪽 석축과 돌다리

절터 북쪽과 동쪽에는 조그만 물줄기를 두어 산에서 내려온 시냇물을 아래로 흘러보낸다. 이
렇게 배수 시설까지 갖추어 식수를 해결하고 언제 문을 두드릴지 모를 화마(火魔)의 공습에도
대비를 했는데, 석축 북쪽에는 통돌을 깔아 조그만 돌다리까지 두었다.

일명사터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다시 속세로 내려갔다. 기분 같아서는 오랜만에 연주암까지 오
르고 싶었지만 거까지 가려면 1시간 이상 각박한 산길을 올라야 되고, 날씨도 무지 덥다. 하
여 쿨하게 포기하고 계곡으로 내려갔다. 오늘 인연도 아님에도 억지로 인연을 짓는 것은 그렇
게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문원계곡 하류인 산림초소로 내려와서 바로 속세로 향가지 않고 근처에 있는 마애승용군을 찾
았다. 그곳은 산림초소와 매우 가까운데, 이정표가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고 있어 찾기는 쉽다.
오르는 길도 그리 힘든 편은 아니라서 2분 정도 수고하면 바위 2개와 소나무가 마중을 나오는
데, 소나무 서쪽 바위에 '용운암 마애승용군'이 자리해 있다.


▲  바위에 새겨진 용운암 마애승용군(磨崖僧容群) - 과천시 향토유적 4호

이름도 참 생소한 마애승용군(이하 승용군)은 과연 무엇일까? 여기서 승용(僧容)은 승려의 얼
굴을 뜻한다. 그러니 쉽게 풀이하면 바위에 새겨진 승려 얼굴상이 된다. 승용군 앞에 붙은 용
운암은 부근에 자리한 절 이름으로 예전에는 승용군 주변에 있었다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홍촌(洪村) 마애승용상'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산 밑에 홍촌이란 마을이 있어서 유래된 것이
다.

보통 불상이나 보살 등을 바위에 새겨 마애불(磨崖佛)로 삼지만 그들 대신 승려의 얼굴을 새
긴 경우는 천하에서 거의 이곳이 유일하다. 바위 윗도리에 얼굴 3구가 새겨져 있고, 밑도리에
2구가 간결하게 스며들었는데, 얼굴이 하나 같이 동자승처럼 밝고 귀여운 표정이다. 3명은 정
면을, 2명은 측면(側面)상을 하고 있으며,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불상도 아닌 승려 얼굴을 새겼을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딱히 해답은 없다. 승려
를 귀족처럼 받들던 고려 때 관악산의 이름 있는 승려를 기리고자 얼굴을 새겼을 가능성도 있
으나 이 역시 부질없는 추측일 뿐이다. 참고로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관악산 서쪽 자락인 안
양예술공원에 마애종(磨崖鍾)이 새겨져 있는데, 범종과 이를 치는 승려가 조각되어 있다. 이
역시 이 땅의 하나 밖에 없는 존재로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새겨진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관악산에만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존재가 1종류도 아닌 2종류가 있다는 것이 참 흥미롭
다.


▲  바위 윗도리를 장식하고 있는 승려 얼굴상 3구
가운데와 오른쪽 승려는 정면을 보고 있고, 왼쪽 승려는 옆을 보이고 있다. 눈썹과
살짝 감긴 눈, 코, 입, 귀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표정이 하나같이 앳된
동자승이나 원숭이처럼 해맑기 그지 없다.

▲  바위 밑도리를 장식하고 있는 승려 얼굴상 2구
귀마개나 이어폰을 낀 것 같은 왼쪽 승려는 정면을, 오른쪽 승려는 옆을 보고 있다.
승려 얼굴 상 외에도 정체가 아리송한 문양들이 여럿 새겨져 있다.

▲  승용군 바위 뒤에 깨알처럼 새겨진 글씨들
이곳에서 예불을 올린 사람들이 남긴 것으로 근래까지 불공 장소로 쓰였음을 보여준다.
참고로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오래된 마애미륵불이 있다.


 

♠  법등의 역사는 짧지만 문화유산 3점을 든든한 후광으로 삼은
과천 보광사(普光寺)

▲  보광사의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

관악산 문원계곡을 뒤로하고 속세로 나오다가 과천중앙고 서쪽에 자리한 보광사에 잠시 발을
들였다.
교육원3거리에서 교육원로를 따라 6~7분 정도 걸으면 길 왼쪽(남쪽)에 보광사를 알리는 이정
표가 손짓을 하는데 그의 손짓에 맞춰 다리를 건너면 바로 보광사가 모습을 비춘다.

이 땅의 흔한 절 이름의 하나인 보광사, 서울과 수도권에만 우이동(牛耳洞) 보광사, 파주 보
광사(☞ 관련글 보러가기), 남양주 보광사, 그리고 이곳까지 60년 이상 묵은 절만 쳐도 최소
4곳이 넘는다.

관악산 남쪽 자락이자 정부과천청사를 바라보고 선 과천 보광사는 1946년에 창건되었다. 이때
법당 6칸과 요사 1동이 닦았는데 현재의 가람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이룩된 것으로 2001년
에 극락보전을 새로 지어 법당으로 삼았고, 삼성각과 명부전, 설법전 등을 세워 지금에 이른
다.
법등(法燈)이 켜진 역사는 고작 70년 남짓으로 고색의 기운은 아직 싹트지도 못했다. 허나 인
근 문원동 절터에서 오래된 3층석탑과 석조보살입상을 업어와 마땅히 내세울 것이 없는 이곳
의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았고, 1993년에는 조선 후기 불상까지 새로 영입하면서 매우 짧
은 법등에 비해 오래된 문화유산을 3개나 간직하게 되었다. 비록 보광사와 관련이 없는 것들
이지만 바로 그들 때문에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현대에 지어진 그저 그
런 사찰의 하나로 눈길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절의 규모는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크기로 북쪽을 바라보고 선 극락보전을 비롯하
여 명부전과 설법전, 삼성각, 요사, 범종각 등 6~7동의 건물을 갖추고 있다. 설법전(說法殿)
과 요사(寮舍) 같은 경우 겉으로 보면 1층이지만 밑에도 공간을 만들어 2층을 이루고 있다.

▲  2002년에 지어진 보광사 삼성각(三聖閣)
산신과 칠성, 독성의 보금자리이다.

▲  보광사 설법전

◀  관악산이 베푼 물로 늘 만조를 이루는
보광사 샘터과 이끼 옷을 살짝 걸친
석조(石槽)


▲  보광사 경내 동부 <3층석탑과 명부전(冥府殿), 석조보살입상>

▲  보광사 문원리 3층석탑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39호

툇마루를 간직한 주지실 앞에 조그만 3층석탑이 서 있다. 이 탑은 관문동 절터(어딘지는 모르
겠음)에서 가져온 것으로 하얀 피부를 지닌 커다란 바닥돌 위에 얹혀져 있는데 2중의 기단(基
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인 보주(寶珠)로 마무리를 한 맵시 좋은 탑이다.
이중 바닥돌은 시멘트로 지은 것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1층 탑신에는 2중으로 새겨진 자물쇠가 새겨져 있으며, 지붕돌 밑에는 얇게 만든 3단의 받침
이 있고, 지붕돌의 처마 끝은 살짝 올려져 약간 경쾌감을 준다. 기단과 지붕돌의 모습을 통해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탑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시흥 문원리 3층석탑'이다. 허나 과천은 어엿한 시(市)로 시
흥군에서 분리된지도 30년이 넘었고, 그 문원리도 문원동이 되었건만 명칭은 아직도 30여 년
전에 머물러 있다. 그 쾌쾌묵은 이름을 현실에 맞게 다듬어 '보광사 3층석탑'이나 '과천 문원
동 3층석탑'으로 갈아야 될 것인데 말이다. 국가지정문화재는 그래도 시대와 지역에 맞게 이
름이 많이 바뀌고 있으나 지방문화재는 아직도 제자리 걸음이다.


▲  문원리사지 석조보살입상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77호

명부전 앞에는 오래된 석조보살입상이 서 있다. 이 석불은 문원동 15-166번지에서 가져온 것
으로 높이 1.7m 정도 되는 돌에 얇게 선각으로 새기고 그 위에 둥근 갓을 씌우는 선에서 아주
간단히 처리했다. 허나 세월의 태클로 그 선각도 희미해져 자세히 안보면 석불인지 다른 석상
(石像)인지 햇갈릴 정도이다.

갓으로 머리가 가려진 얼굴은 둥근 편으로 눈썹과 눈, 입, 코를 새겼으나 거의 표정이 지워진
상태이고 목은 짧지만 두껍다. 돌을 제대로 깎지 않고 그냥 선각만 했기 때문이다. 왼손은 가
슴에 대어 연꽃 봉오리를 잡고 있고, 오른손은 밑으로 내리고 있는데, 옷은 양쪽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通見)의 법의(法衣)이다.
많이 부실해 보이는 이 석불은 납작한 얼굴과 짧은 어깨, 간략화된 옷주름 등 도식화된 모습
을 통해 고려 후기나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보광사 목조여래좌상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62호

극락보전 불단(佛壇)에는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그중 아미타불(阿彌陀佛)로 삼고 있
는 불상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여래좌상이다. 그 좌우에 자리한 존재들은 대세지보살(大
勢至菩薩)과 관음보살로 2001년에 조성되었다.

포근한 표정을 지으며 중생의 하례를 받고 있는 목조여래좌상은 나무로 만들어서 금칠을 입힌
것으로 원래는 양평 용문사(龍門寺, ☞ 관련글 보러가기)에 있었다고 한다. 6.25가 터지자 어
느 신도가 여주(驪州)로 피신시켰고, 그렇게 개인이 가지고 있다가 1993년 이곳에 기증하여
보광사의 보물을 하나 더 늘려주었다.

불상의 얼굴은 크고 둥근 편인데, 눈썹이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지그시 뜨며 북쪽을 바라
본다. 코는 작고 오똑하며, 붉은 입술 위에 검은 수염이 살짝 그려져 있다. 얼굴이 크다보니
볼살도 많아 보이며, 두 귀는 거의 어깨에 닿는다. 저리 귀가 크니 중생의 민원은 하나도 누
락됨이 없이 잘 들어줄 것이다. (민원도 잘 처리해주는지는 모르겠음)
머리는 나발로 두툼하게 무견정상이 솟아 있으며,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다. 가슴과 배 사
이에는 연꽃이 새겨진 허리띠가 있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왼손은 따로 만들었는데, 가운데
손가락과 약지 손가락을 구부렸다. 불상의 양식을 보아 조선 초기 또는 조선 초기 양식을 간
직한 조선 중기 불상으로 여겨진다.

* 보광사 소재지 -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 산126-21 (교육원로 41, ☎ 02-502-2262)


▲  극락보전 앞에서 바라본 관악산
절은 작지만 관악산을 앞뜰로 품고 있어 앞뜰 만큼은 천하 제일이다.


보광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8시 반이 넘었다. 칼퇴근의 달인 햇님도 뉘엿뉘엿 그만의
공간으로 꽁무니를 빼고, 장대한 관악산도 어둠의 커텐 속으로 사라질 채비를 한다. 이렇게
하여 관악산 문원계곡 여름 나들이는 저물어가는 햇님처럼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관악산 보광사, 문원계곡(문원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찾아가기 (2018년 7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정부과천청사역 6번 출구를 나오면 정부청사입구 교육원3거리이다. 여기서 국
  가공무원인재개발원으로 인도하는 교육원로를 6~7분 가면 왼쪽에 보광사가 있으며, 15분 정
  도 가면 오른쪽에 관악산 문원계곡으로 인도하는 조그만 길이 나온다. 여기서 마애승용군까
  지는 6~7분, 문원하폭포까지는 35~40분, 일명사터와 문원폭포는 40~45분 정도 걸린다.
* 441, 502, 540, 541, 542, 1-1, 9, 9-3, 11-1, 11-2, 11-3, 11-5, 103, 777, 3030번 시내버
  스를 타고 정부과천청사나 과천주공2,3단지 하차
* 문원계곡 소재지 -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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