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3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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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7.11.17 우이령의 첩첩한 산주름 속에 외롭게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양주 오봉산 석굴암 ~~~ (유격광장, 우이령길)
  3. 2017.07.24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더울 때는 땅 속이 최고!! 수도권 유일의 동굴 관광지, 광명시 광명동굴 (가학산)
  4. 2017.07.06 정조 임금이 만든 도심 속에 아름다운 호수, 수원 서호 ~~ (서호공원, 항미정)
  5. 2017.03.17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서해바다 포구, 인천 소래포구 나들이 ~~~ (소래철교, 장도포대지, 논현포대)
  6. 2016.11.17 오랜 세월 굳게 잠겨있던 아름다운 고갯길, 북한산 우이령 늦가을 나들이 (우이령길)
  7. 2016.08.01 피서 성지 순례 ~~~ 경기 북부 제일의 명품 계곡, 포천 백운산 백운계곡 (흥룡사)
  8. 2016.03.13 금빛 와불상과 우담바라를 간직한 고즈넉한 산사, 의왕 청계산 청계사
  9. 2015.12.23 서울의 듬직한 뒷산, 북한산~북한산성 겨울 산행 (태고사, 행궁터, 대남문, 문수사)
  10. 2013.02.13 한겨울 산사 나들이 ~ 영조 임금의 효심이 깃든 파주 고령산 보광사

경기도 안양의 상큼한 꿀단지를 거닐다 ~ 삼성산 안양예술공원, 김중업 건축박물관, 안양사지 겨울 나들이 (석수동 마애종, 안양사)


 

' 묵은 해의 끝에 찾아간 안양예술공원, 안양사터 나들이 '
(김중업건축박물관, 석수동 마애종, 안양사)


▲  안양사지와 김중업박물관

▲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3층석탑

▲  석수동 마애종


 

새해가 시작된 지 정말 엊그제 같건만 벌써 연말의 끝에 이르렀다. 이제 며칠이 흐르면
올해는 완전히 끝나고 새해로 포장된 날이 밝아와 연말 우울감에 빠진 인간들에게 새해
의 부질 없는 희망을 안겨줄 것이다. 그렇게 우리네 인생은 챗바퀴처럼 비슷한 데를 돌
고 또 돈다. 하여 연말의 우울감도 잠시 잊을 겸, 올해의 마지막 나들이로 삼성산 남쪽
에 길게 누운 안양예술공원을 찾았다.

안양예술공원은 삼성산(三聖山)과 관악산(冠岳山)으로 오르는 주요 기점으로 경관이 아
름답고 볼거리가 풍부하여 소풍 및 등산/답사/출사/피서 수요가 대단하다. 게다가 접근
성도 매우 좋고 서울과도 지척이라 계절과 날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로 마를 날이 없다.
관악산과 삼성산이 사이좋게 빚어놓은 삼성천을 따라 서울대 관악수목원까지 길게 이어
져 있는데 비록 예술공원을 칭하고 있지만 원래는 안양유원지로 70여 년의 기나긴 역사
를 간직한 서울 근교에서 가장 오래된 유원지이다.
1950년대에 벌써부터 수영장이 생겼을 정도로 서울 근교의 제일 가는 유원지로 미친 존
재감을 드날렸으나 1990년대 이후 서서히 망해가던 것을 2005년에 안양시에서 유원지의
명성을 되찾고자 안양예술공원으로 새롭게 간판을 갈아치우고 제1회 '안양공공예술프로
젝트'를 도입했다.
그 프로젝트에 따라 국내외 예술 작가의 예술 작품 50여 점을 공원에 설치하여 '지붕이
없는 미술관'으로 시민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었고, 삼성천과 산책로, 편의시설 등을 정
비하고 조명시설까지 갖추어 야경(夜景)까지 배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존의 유원지
기능을 완전히 내버린 것은 절대 아니다. 원래부터 삼성산과 관악산을 배경으로 형성된
유원지라 그 성격을 완전히 갈아엎는 것은 어렵다. 휴양과 나들이, 유원지의 기능을 바
탕으로 문화와 예술을 얹힌 것이 지금의 안양예술공원이 되겠다.


▲  안양예술공원을 촉촉히 어루만지는 삼성천 (안양워터랜드 주변)


 

♠  칙칙한 공장을 걷어내니 숨겨진 절터가 기지개를 켜는구나~~!
제약공장에서 역사와 문화의 공간으로 거듭난 상큼한 현장
~ 안양사터(安養寺)터와 김중업건축박물관(안양박물관)

안양예술공원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옛 유유산업과 안양사터를 만나게 된다. 예술공원의 젖줄
인 삼성천 북쪽에 자리한 이들은 예술공원의 어귀로 예술공원로(공원 산책로)에서도 훤히 바
라보이는데 예전에는 유유산업이란 제약 공장이 들어앉아 고얀 연기로 하늘과 삼성산을 찌르
던 현장이었다.
삼성산과 안양유원지의 아름다운 경관을 적지 않게 들쑤시던 유유산업은 1959년에 유특한 회
장이 세웠다. 비나폴로 등의 비타민을 생산하던 제약 공장으로 공장 건물은 당시 건축의 1인
자로 삼일빌딩과 평화의문, 프랑스대사관 등을 설계했던 김중업(金重業, 1922~1988)이 설계했
으며, 굴뚝과 경비실까지 모두 그의 손에서 디자인되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공장이 들어앉은 터는 안양의 지명 유래가 되었던 안양사터였다. 허나 그
때까지만 해도 바깥으로 드러난 절터의 흔적은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3층석탑, 약간의 주춧돌
뿐이었고 오로지 경제 개발이 우선이었던 시대라 절터를 싹 밀고 공장을 닦았다.

이후 안양유원지 초입에서 의약 발달을 향한 집념의 연기를 내뿜던 유유산업은 2007년, 공장
증축을 꾀했으나 인허가 제한으로 어렵게 되면서 48년 동안 기대던 안양 공장을 버리고 충북
제천(堤川)으로 둥지를 옮겼다.
유유산업이 그렇게 자리를 뜨자 안양시는 공장과 부지를 240억에 매입했으며, 문화재청의 권
고에 따라 김중업이 설계한 건물 5동을 제외하고 모두 부셨는데, 그 과정에서 공장에 가려져
고통받던 절터가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여 2008년부터 2011년까지 4차에 걸쳐 발굴조
사를 벌인 결과 '안양사(安養寺)'라 쓰인 기와가 출토되어 이곳이 안양사터임이 밝혀졌으며,
중초사와 안양사가 별개의 존재가 아닌 같은 존재임이 드러났다.

안양사터의 등장으로 잔뜩 흥이 오른 안양시는 이곳을 김중업박물관과 안양사지 전시관을 갖
춘 복합문화공간이자 안양예술공원을 수식하는 상큼한 꿀단지로 꾸미기로 마음 먹고 2013년에
발굴로 어수선했던 안양사지를  복원했다. 그리고 김중업이 설계한 건물 5동을 손질하여 드디
어 2014년 3월 28일, 안양 최초의 박물관이자 안양사터까지 아우른 김중업건축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이때 제4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가 2달 동안 열렸으며 2017년 9월에는 평촌에 있
던 안양박물관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2개의 박물관이 공존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김중업의 일생과 작품을 다룬 김중업건축박물관, 안양사지에서 출토된 유물과 관련
문헌 자료, 안양시의 역사와 문화를 머금은 안양박물관, 그리고 특별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이들 전시관은 모두 김중업이 설계했던 옛 유유산업 건물을 다듬은 것으로 뜨락에는 옛
안양사터가 펼쳐져 있어 신라 후기와 고려, 조선, 현대까지 모두 아우른 문화/역사의 공간이
다.


▲  중초사지(中初寺址) 3층석탑과 당간지주

유유산업이 멋모르고 깔고 앉았던 안양사터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 시절인 826
년에 창건된 중초사(中初寺)에서 비롯되었다.
중초사는 당간지주(幢竿支柱)와 약간의 건물터를 남겼는데 당간지주의 겉모습은 그저 흔한 모
습이지만 이 땅에서 유일하게 조성 시기와 공사 참여자 이름, 절 이름이 담긴 명문이 새겨져
있어 그것만으로 이미 다른 당간지주와 크게 차별화된 가치가 높은 보물이다. 특히 안양사에
묻혀 잊혀질뻔한 중초사의 이름 3자를 고맙게도 밝혀주고 있으며, 바로 그 명문 덕에 일찌감
치 보물 4호라는 큼지막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조성 명문은 서쪽 돌기둥 바깥쪽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826년 8월 6일, 절 동쪽 승악(僧岳, 관악산으로 여겨짐)의 돌 하나가 둘로 갈라져 이를 얻었
다. 같은 달 28일, 두 무리가 돌을 가져와 9월 1일 이곳에 이르렀으며, 827년 2월 30일에 완
성되었다.
이때 황룡사(皇龍寺) 주통<州統, 승려의 직책으로 국통(國統) 밑임>인 항창화상(恒昌和尙)이
공사를 지휘했으며, 상화상(上和上)은 진행법사, 정좌<貞坐, 승직(僧職)의 하나>는 연숭법사,
사사<史師, 승려를 통솔하고 사무를 돌보는 자리>는 2명으로 묘범법사와 칙영법사. 전도유내
<典都唯乃, 승직의 하나>는 2명으로 창악법사와 법지법사, 도상(徒上)은 2명으로 지생법사와
진방법사, 작상<作上, 승직의 하나이나 역할은 확실치 않음>은 수남법사이다'


당간지주 동쪽 돌기둥의 윗쪽은 살이 좀 뜯겨져 있는데, 이는 해방 이후 석수장이들이 석재로
쓰고자 뜯어간 것이라고 한다.


▲  중초사지 당간지주 - 보물 4호

중초사는 후삼국시대에 고려 태조(太祖)의 지원으로 크게 몸집을 불리게 된다. 안양사 창건설
화에 따르면 900년에 태조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남쪽(후백제)으로 출정하면서 안양을 지나던
중, 삼성산 꼭대기에 오색구름이 채색을 이루며 떠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를 이상히 여겨 산
을 살펴보다가 구름 밑에서 능정(能淨)이란 나이 지긋한 승려를 만났다.

능정과 이야기를 나눈 왕건(王建)은 서로 뜻이 잘 통하자 너무 기분이 좋았던지 그를 만난 자
리에 절을 세웠다. 그것이 안양사의 시초라는 것이다. 허나 900년이면 왕건의 왕씨 세력은 고
작 송악(松嶽, 개성) 일대가 전부였고, 황해도(黃海道)의 여러 지방 세력과 더불어 당시 한참
신라 북부를 평정하고 있던 궁예(弓裔)와 싸울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를 두고 고심하던 시기
였다. 그러니 900년은 전혀 맞지가 않다.
하지만 왕건의 지원을 받은 것은 확실해보이며 연도(年度)의 오류는 흔한 일이므로 고려를 세
운 918년 이후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또한 설화에는 복종하지 않는 자를 정벌하러 가던
중이라고 했으니 후백제를 치러 가던 중에 잠시 들렸음을 알 수 있다.

그때 중초사 주지로 여겨지는 능정과 마음이 잘맞자 두둑히 지원을 내려 절을 중창케 했고 경
내 남쪽에 벽돌로 7층전탑을 세웠다. 그리고 천하를 통일하여 좋은 세상을 이루고 싶은 심정
을 담아 극락정토(極樂淨土)를 뜻하는 안양(安養)으로 절 이름을 바꾸게 했다. 제왕(帝王)이
발걸음을 하고 지원을 내렸을 정도면 절도 어느 정도 명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며, 능정 또
한 도선국사(道詵國師)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명망을 갖춘 승려였을 것이다.
참고로 극락정토는 이 세상에서 서쪽으로 10만억 불토(佛土)를 지나야 나온다는 이상의 세계
로 안양세계(安養世界), 안양정토(安養淨土)라고도 한다. 수도권 굴지의 도시로 인구 70만을
지닌 안양시의 이름도 바로 이 안양사에서 유래되었다. 불교색이 진한 이름이긴 하지만 의미
만큼은 정말 일품이다.

고려 중기에는 천태종(天台宗)을 일으킨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잠시 들려서 능정의
영정에 참배한 적이 있으며, 특히 고려의 마지막 보루인 최영(崔瑩, 1314~1388)장군과도 인연
이 꽤 깊었다.
그는 젊었을 때 안양사에서 하룻밤 머문 적이 있었는데, 전탑을 바라보며 태조가 안양사를 경
영했던 의미를 되새기고 스스로에게 '제가 나중에 잘되고도 이 탑을 새로 세우지 않는다면 하
늘에 계신 신령이 내려다 보실 것입니다'
다짐을 했다.

이후 우왕(禑王, 재위 1374~1388) 시절, 제일 높은 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자 안양
사 주지인 혜겸(惠謙)과 함께 옛 시절의 다짐을 실행코자 전탑을 새롭게 중수했다. 그는 자신
의 재물과 신도들의 지원을 모아 쌀과 콩, 베 등을 마련했고 양광도(楊廣道, 경기도와 충청도
) 안렴사(按廉使)에게 명을 내려 군납미(軍納米)를 감액하여 경비를 마련하고 장정을 모았다.
그래서 1381년 8월 공사를 시작해 그해 10월 완성을 보았는데, 완성이 되자 우왕이 내시 박원
계(朴元桂)를 보내 향을 하사하고, 승려 1천여 명으로 성대하게 불사(佛事)를 치르면서 사리
12개와 불아(佛牙) 1개를 탑에 봉안하는 의식을 가졌다.
이때 탑 중수에 시주를 한 관리와 귀족, 부자가 3천 명에 이르렀으며, 1382년 탑에 단청을 장
식하고 1383년에는 탑 안에 그림을 그렸는데, 동쪽 벽에는 약사회(藥師會), 남쪽 벽에는 석가
열반회(釋迦涅槃會), 서쪽에는 미타극락회(彌陁極樂會), 북쪽에는 금경신중회(金經神衆會)를
그리고 탑을 둘러싼 회랑(廻廊) 12칸에는 벽마다 부처와 보살, 인천(人天)을 그려놓았다. 이
들 단청과 그림을 그리는데 동원된 인원은 400여 명, 소요된 쌀은 595석, 콩 200석, 베 1,155
필에 이르렀고, 전탑 중수가 완료되자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은 자신의 도은집(陶隱集)에
'금주 안양사탑 중신기(衿州安養寺塔重新記)'를 남기며 최영을 찬양했다.

조선으로 들어와서도 왕실과 사대부와의 교류는 빈번하여 1411년 태종(太宗)이 충청도 온양(
溫陽)으로 온천욕을 가다가 잠시 들렸으며, 안양사와 관련된 여러 수의 시가 전해오고 있다.
이렇게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찬란하게 광을 냈던 안양사는 16세기
중반 이후 갑자기 사라지고 마는데, 아마도 임진왜란 때 파괴되거나, 억불숭유(抑佛崇儒)의
거친 파도를 극복하지 못하고 쫄딱 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후 안양사터는 당간지주와 3층석탑 등을 속세에 드러낸 채, 땅 속에 묻혀있다가 1959년
엉뚱하게 유유산업이 절터를 깔고 앉았고 공장 주변에는 집들이 들어찼다. 하여 제자리에 안
양사 재건이 어렵게 되자 1960년대에 동북쪽 산자락에 새 안양사를 짓고 안양사의 유물로 여
겨지는 승탑과 귀부를 업어와 옛 안양사의 뒤를 자처하고 있다.


▲  중초사지 3층석탑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64호

당간지주 옆에는 조금 부실하게 생긴 3층석탑이 멀뚱히 서 있다. 높이 약 3.6m의 석탑으로 당
간지주보다 다소 늦은 고려 중/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때는 중초사가 아닌 안양
사 시절이니 '안양사지 3층석탑'이 적당한 명칭이겠으나 아직 바로 잡히지는 않았다.

이 탑은 원래 지금보다 동쪽에 있었으나 공장이 들어서면서 지금의 자리로 강제로 옮겨졌으며
탑의 기단(基壇)은 단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탑신부(塔身部)에 비해 기단부가 훨씬 커서 전체
적으로 균형이 떨어지고 볼품이 좀 떨어진다. 하지만 당간지주의 후광(後光) 덕인지 보물 5호
라는 큼직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나 1997년 1월 문화재지정등급 재조정으로 결국 지방문화재
로 등급이 떨어지고 말았다. (현재 보물 5호의 자리는 비어있음)


▲  삼성천을 향해 누워있는 중문(中門)터

안양사터의 구조는 남쪽에 중문터와 남회랑터를 두어 경내를 감싸고, 중문을 들어서면 전탑터
와 금당이 나온다. 금당 북쪽에는 설법단터와 승방터가 있고, 동쪽에는 동회랑터, 서쪽에 서
회랑터를 두었다.
하지만 공장 건물을 모두 철거하지 못했고 공장 주변에 집과 건물이 가득하여 아쉽게도 절터
를 모두 파내진 못했다. 겨우 금당(법당)과 전탑, 그 주변만 속살을 캤을 뿐이다. 허나 지금
까지 드러난 모습도 충분히 입을 벌어지게 만드니 나중에 나머지를 싹 뒤집으면 지금보다 훨
씬 장대한 안양사터의 진면목을 만나게 될 것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중문터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안양박물관 사이에는 중문터가 누워있다. 옛 유유산업 건물을 밀어버린
이후에 모습을 드러낸 건물터의 하나로 지금까지 확인된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 정도인데
절 바깥에서 법당(法堂)으로 가려면 거의 반드시 중문을 거쳐야 된다.
중문 앞에는 삼성천이 흐르고 있는데 절로 인도하는 돌다리가 있던 것으로 여겨지며, 중문 옆
건물(안양박물관)을 밀어버리지 않고 박물관으로 활용하면서 중문터 일대를 완전히 캐내진 못
했다. 대략 중문의 전체적인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여겨지며, 중문지 북쪽 13m 거리
에 안양사의 명물인 전탑터가 있다.


▲  중문터 남쪽에 널려있는 석물들
안양사터 발굴로 다시 햇살을 본 주춧돌과 계단, 석탑, 석등의 석재 등
여러 석물이 놓여져 있다.


▲  남회랑(南回廊)터

중문터를 들어서면 바로 북쪽에 전탑터가 있고 그 서쪽에 남쪽 회랑터가 있다. 김중업박물관
남쪽에 자리한 남회랑은 북쪽으로 강당터와 이어지는데, 회랑 동서방향으로 2차에 걸쳐 중복
된 건물터 형태를 보여준다. 회랑 남측 건물터에 추가적으로 흙을 얹힌 사실이 확인되어 북측
건물터가 먼저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며, 북측 건물터는 남북 3.21m, 동서 26.6m에 달한다.
동회랑터는 안양박물관과 담장으로 인해 완전하게 조사를 벌이지 못했으며, 서회랑터는 남북
약 70m, 동서 6m로 추정된다. 또한 남회랑터 일대에서 신라 후기 기와조각과 막새, 토기파편
등이 출토되어 중초사 시절부터 절찬리에 쓰였던 현장임을 귀뜀해준다.


▲  안양사의 명물, 전탑터

금당터와 중문터 사이에는 네모난 터가 바짝 누워 있다. 이 자리가 바로 고려 태조가 세우고
최영장군이 중수했다는 7층전탑이 어깨를 활짝 피며 푸른 하늘을 받쳐든 현장이다.
금당터 정면 6m 앞에 자리한 이 탑은 그 동안 기록에만 있었으나 안양사터 발굴로 인해 전탑
터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 전탑은 전설이 아닌 사실이 되었다. 비록 그 장대했던 전탑의 모
습은 녹아없어지고 그 터만 메마르게 남았지만 발굴 결과 남북 9.62m, 동서 5.29m에 이르러
백제의 미륵사지5층석탑 이상만큼이나 웅장한 탑이었음이 밝혀졌다.

전탑터 기단부는 암갈색 사질점토층에 삼성천 냇돌을 섞어서 다졌고, 그 위에 냇돌과 사질점
토층을 채워서 다졌다. 전탑터 남쪽 답도시설 일부에 벽돌과 기와편들이 확인되었는데, 전탑
옥개석(屋蓋石) 위에는 기와가 덮혀있었음이 밝혀졌으며, 고려시대 백자와 분청자 연봉 등이
기와와 함께 출토되어 최영장군 중수설을 진하게 뒷받침해준다. 안양사의 상큼한 상징이었던
이 탑은 조선 초/중기 때 무너져 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전탑터와 금당터

▲  두 터의 공존 ~ 금당(金堂)터와 옛 유유산업 공장터의 기둥

전탑터 북쪽에 자리한 금당(법당)은 안양사의 중심 건물로 건물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안
양사의 위엄에 걸맞게 금당도 제법 컸을 것으로 여겨지나 동쪽에 자리한 옛 공장 건물을 모두
부시지 않고 기둥과 지하 구조물을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남겨두어 겨우 반쪽만
조사를 벌인 탓에 정확한 규모는 아직 모른다.
금당터에서는 9개의 적심이 확인되었으며, 적심은 정면 1칸, 측면 4칸 규모로 기둥간의 거리
는 정면 360~370cm, 측면은 270~280cm 정도이다. 공공예술도 좋지만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기
둥의 모습도 썩 좋아보이진 않는다. 어차피 이 땅에 흔한 콘크리트 건물 기둥이니 그들을 싹
뽑아 주변으로 옮기고 금당터의 나머지 부분을 모두 들추었으면 좋겠다.


▲  강당터와 동회랑터, 특별전시관

▲  강당터

금당터 북쪽에 자리한 강당터는 교육 공간으로 정면 9칸(동서 39.5m), 측면 4칸(남북 14.4m)
에 이르는 거대한 터이다. 건물 어칸(가운데 칸)에서는 대좌(臺座) 시설이 양쪽으로 마련된
형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경주 황룡사터 강당터의 내부와 비슷하여 안양사의 높은 품격을
보여준다.
건물을 받치던 초석은 자연석을 일부 손질했으며, 기둥 자리에는 40~50cm의 원주가 사용되었
다. 그리고 초석 밑에 예전 건물터(중초사 시절 건물)의 원형 초석이 발견되어 이전보다 50~
60cm 정도 높아졌음이 드러났으며, 강당 좌우로는 동회랑과 서회랑을 이어주는 조그만 건물터
가 배치된 것으로 여겨진다.


▲  강당터 북쪽에 수북히 쌓인 기와편들
절터에서 발견된 기와편을 한데 수습하여 그들만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었다.
이리 깨지고 저리 깨지고, 보잘 것 없는 기와 파편을 저렇게 쌓아두니
왠만한 대(臺)와 단(壇)이 부럽지가 않다.

▲  승방(僧房)터

강당터 북쪽에 자리한 승방은 승려들의 생활공간이다. 정면 9칸, 측면 1칸의 동/서향 장방형(
長方形) 건물로 터 전체를 모두 들추지 못해 완전한 규모는 파악하지 못했다. 건물터 남쪽과
북쪽 기단부에선 기와편들이 많이 나왔는데 조선 중기에 어떤 연유로 절이 파괴되어 건물이
내려앉으면서 지붕의 기와들이 그대로 떨어져 쌓인 것으로 보인다.
기둥 간의 거리는 4.05~4.25m, 측면은 5.1m로 기와편 가운데 '안양사'라 쓰인 기와가 발견되
어 이곳의 정체를 살짝 알려주었다.

안양사터는 양주 회암사(檜巖寺)터, 북한산 삼천사(三千寺)터와 더불어 서울 인근에 몇 남지
않은 커다란 절터 유적(조그만 절터는 제외)으로 그 가치는 중초사지 당간지주 못지 않다. 사
적(史蹟)이나 지방기념물로 삼아도 전혀 손색이 없으며, 나중에 여건이 된다면 주변을 싹 밀
고 안양사터의 숨겨진 속살까지 모두 들추었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들춰낸 것은 기껏해야 절
반 정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갔을 당시는 박물관의 공통 휴일인 월요일이라 박물관은 언제가 될 지 모를 다음으로
미루고 안양사터만 둘러보고 나왔다.

※ 안양사터, 김중업건축박물관(안양박물관) 찾아가기 (2018년 1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석수역(1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관악역(2번 출구)에서 5530, 5624, 5625,
  5626, 5713, 1, 51, 900번 시내버스를 타고 안양예술공원에서 하차, 도보 10분 (관악역 2번
  출구에서 도보 20분)
* 지하철 1호선 안양역(1번 출구)에서 안양마을버스 2번 안양예술공원행 차량을 타고 안양박
  물관(김중업건축박물관) 하차 (반드시 예술공원행을 타야됨)

★ 안양사터, 김중업건축박물관, 안양박물관 관람정보 (2018년 1월 기준)
* 박물관 관람시간 : 9시 ~ 18시 (17시까지 입장 / 매주 월요일, 설날, 한가위 당일 휴관)
* 박물관 입장료는 없음 (특별 전시 때는 상황에 따라 유료 입장)
* 안양사지는 언제든 관람 가능
*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1 (안양예술공원로 103번길4 ☎ 031-687-0909)
* 김중업건축박물관과 안양박물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옛 안양사의 유물로 천하에서 단 하나뿐인 바위 종
석수동 마애종(石水洞 磨崖鐘)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92호

▲  석수동 마애종을 품은 보호각

안양사터 동쪽이자 안양예술공원 주차장 북쪽에는 기와 보호각에 감싸인 석수동 마애종이 조
용히 웅크리고 있다. 마애종을 품은 바위에는 사람들이 치성을 올린 흔적(촛불이나 불에 그을
린 흔적)이 많은데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질 만큼 범상치 않은 자태를 지녔다. 그런 탓일
까? 그의 남쪽 피부에는 승려와 종을 묘사한 마애종이 새겨져 있는데, 바위에 새긴 마애불(磨
崖佛)은 기러기의 털처럼 많이 널려있지만 바위 종은 천하에서 오직 이것 뿐이다.

종각(鐘閣)을 묘사한 듯 'ㅍ'자 공간 안에 두툼히 새겨진 마애종은 9개의 유두가 달린 2개의
유곽을 지닌 범종으로 종 위에 쇠사슬이 단단히 묘사되어 있으며, 범종의 기본 메뉴인 음통, 상대, 유곽, 당좌, 하대 등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종 우측에는 종을 치는 승려가 새겨져 있
다.
공중에 높이 떠있는 듯한 마애종은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느껴지며, 조각 수법과 종류, 종신(
鐘身)의 표현으로 보아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곳은 안양사터 바로 옆에 자리해 있어
안양사의 유물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예전
에는 중초사의 유물로 여겨졌는데, 조선총독부
에서 1924년에 만든 '고적급유물등록대장'에도
'중초사지 마애종'으로 표시했다.
중초사나 안양사나 같은 곳이니 어느 이름이든
크게 상관은 없겠지만 이제 안양사의 정체가
훤히 드러난 만큼 '안양사지 마애종'으로 이름
을 바꾸는 것이 어떨까 싶다.

▲  서쪽에서 바라본 마애종 보호각


▲  바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석수동 마애종

무려 1,000년 가까운 지긋한 나이에도 마애종의 건강 상태는 썩 양호하며, 승려와 종의 모습
을 무난히 살펴볼 수 있다. 무슨 이유로 바위에 이런 독특한 것을 새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땅의 유일한 존재로 서울 가까이서 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토록 희소성이 큰 보물이건만 아직도 국가지정 보물이 아닌 지방문화재 등급에 머물러 있다
는 현실에 고개가 좀 갸우뚱하지만 그까짓 인위적인 등급이 무슨 대수겠는가. 비록 보호각 때
문에 마애종 앞까지는 다가갈 순 없지만. 종을 향해 귀를 쫑긋 기울이면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올 것만 같다.

참고로 관악산 동쪽 문원계곡 입구에는 이 땅의 유일한 마애 승려 얼굴상이 있다. <마애승용
군(磨崖僧容群)이라고 함> 이렇게 관악산 자락에는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존재가 1종류도
아닌 무려 3종류(중초사지 당간지주, 마애종, 마애승용군)씩이나 있다는 것이 참 흥미로운데
예로부터 잘생기고 험준한 산은 산악신앙(山岳信仰)과 불교의 성지(聖地)로 널리 추앙을 받았
으니 관악산 또한 그중의 하나로 그 덕을 제대로 본 것 같다.

* 석수동 마애종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32


▲  안양사 입구 삼성천 바위에 닦여진 어느 예술작품 (무슨 작품일까?)


 

♠  옛 안양사의 뒤를 이은 조촐한 절집,
삼성산 안양사(安養寺)

▲  경내 입구에 자리한 안양사 표석

석수동 마애종에서 동쪽으로 3~4분 정도 가면 안양사입구이다. (안양예술공원입구에서 예술공
원로를 따라 10분 정도 들어가면 안양사 이정표가 나옴) 사람들로 늘 붐비는 예술공원길과 달
리 안양사 길은 종종 스치는 산바람 소리와 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나그네의 두 귀를 간지럽힐
뿐, 거의 고적한 편으로 그 길의 끝에 안양사가 왕년의 영광을 꿈꾸며 조용히 둥지를 틀었다.

경내 입구에는 마치 서예 작품을 보듯 기품이 넘치는 안양사 표석이 서 있는데, 그 표석을 지
나면 버려진 집 1채와 다소 볼품이 떨어지는 연못이 나오고, 이어서 계단을 오르면 주차장과
안양사 경내에 이른다.
이곳 안양사는 앞서 언급한 안양사(안양사터)의 뒤를 이은 사찰로 원 자리를 잃음에 따라 지
금의 자리에 새롭게 자리를 닦았다.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비구니 사찰로 고색의 내음은
아직 여물지 않았으나 옛 안양사의 유물로 여겨지는 승탑과 귀부를 업어와 고색의 향기를 조
금이나마 보태고 있다.
경내는 크게 명부전이 있는 남쪽과 대웅전이 있는 북쪽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가람
이 허벌나게 큰 것도 아니며, 단지 둘 사이에 소나무 숲이 자리해 있어 자연히 구분이 된 것
뿐이다.

▲  푸른 지붕을 지닌 요사(종무소)

▲  소나무 밑에 자리한 샘터

명부전(冥府殿)을 중심으로 한 남쪽 구역에는 종무소와 명부전, 기묘한 자세로 솟아나 명부전
을 지키는 소나무가 있다. 소나무 밑에는 산사(山寺)의 필수품인 약수터가 있는데, 삼성산이
베푼 청정한 샘물이 쉬지 않고 뿜어져 나와 조그만 석조(石槽)를 가득 채운다. 마침 목도 마
르고 해서 바가지에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몸 속의 체증이 싹 가신 듯 개운하다.
 
남쪽 구역의 유일한 불전(佛殿)인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지장보살
(地 藏菩薩)과 저승<명부(冥府)>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으며, 명부전을 지나 솔내음이 진동하
는 오솔길을 오르면 미륵불과 대웅전이 있는 북쪽 구역이 모습을 드러낸다. 경내가 숲을 경계
로 둘로 나눠진 점이 이곳의 큰 특징이다.


▲  안양사 명부전과 소나무

▲  홀쭉하고 넉넉한 표정의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명부전 내부를 가득 채운다.

▲  경내 북쪽 구역으로 인도하는 짧은
소나무 숲길

▲  심검당과 경내를 지키는 호랑이상

안양사의 알맹이라 할 수 있는 북쪽 구역에는 심검당과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을 비롯해 이
곳의 오랜 보물인 승탑과 귀부가 있다. 심검당 주변에 자리한 호랑이상과 두꺼비상은 이곳을
지키는 용도로 배치해 놓은 것으로 무섭다기보다는 귀여운 인상이 강하다. 절에 볼일이 있어
서 찾아온 나쁜 기운도 그들의 귀여운 표정 앞에 자신의 소임도 깜빡 잊고 길을 돌아설 것이
다.


▲  안양사 대웅전(大雄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금동을 입힌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  잘 다듬어진 수작(秀作), 하지만 중요한 탑신 부분을 잃어버린
안양사 승탑<僧塔, 부도(浮屠)>

대웅전 앞에는 장대한 세월의 때로 자욱한 승탑과 귀부가 단짝처럼 자리해 있다. 승탑(부도)
은 머릿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진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 고려 때 조성되었다. 그의 인
생이 그리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주듯, 승탑의 알맹이인 탑신(塔身)은 오래 전에 상실되어 머
리 부분과 아랫도리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다.
탑의 높이는 1.4m로 누구의 승탑인지는 귀신도 모르는 실정이며, 원래 인근 숲에 있던 것을
업어왔다. 옛 안양사의 유물로 여겨진다.


▲  안양사 귀부(龜趺)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93호

승탑을 바라보며 넓직하게 앉아있는 귀부는 안양사의 제일 가는 보물이자 유일한 지정문화재
로 비석의 일부이다. 용머리가 받쳐들던 비신(碑身)과 2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두고 다투
는 모습이 묘사된 비석의 머리 부분은 거친 세월의 흐름 속에 이미 사라진 상태이다.
이 귀부는 고려 중기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원래 위치는 확실하지 않으나 안양사와 관련
된 유물로 여겨진다. 비석의 성격은 그 중요한 비신이 없어 헤아리기는 힘들지만 대략 승려의
탑비(塔碑)나 안양사의 사적비(事蹟碑)로 여겨지며,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저술한 김부식(金
富軾)이 비문을 썼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귀부의 등에는 등껍데기가 세세히 묘사되어 있고 비신이 심어져 있던 비좌(碑座)는 치아가 빠
진 모양처럼 무척 허전해 보인다. 엄금엄금 기어갈 것 같은 용머리(귀부)의 높이는 1m, 길이
3m, 너비 2.18m로 머리와 수염, 4개의 발, 등껍데기, 살랑살랑 흔드는 꼬랑지 등이 섬세히 표
현되어 조각 솜씨가 예사롭지가 않다. 그리고 귀부 주위로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석주(石柱)
18개를 심었다.

귀부의 원래 위치는 확실치 않으나 1942년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수
록된 경기도 시흥군(始興郡) 고적유물에 석비귀부(현 안양사 귀부)와 고분(현 석수동 석실고
분)의 관한 기록이 있다.

24. <석비귀부(石碑龜趺), 석등(石燈)> 동면 안양리(東面 安養里, 현 안양시) 불곡(佛谷, 국
유림) - 석비귀부는 길이 10척, 폭 7척, 높이 3척5촌으로 석비는 분쇄되어 파편의 일부만 남
아 곁에 넘어져 있으며, 석등 하나와 폐정(廢井) 하나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불곡이라는 사
찰이 있었다고 하지만 절의 이름 등은 알지 못한다.

35. <고분(古墳)>, 동면 안양리 국유림(國有林) - 석수동 동방의 산록 제24호 귀부(龜趺) 후
방에 석곽(石槨)이 노출된 것 2, 3개가 있다.

▲  꼬랑지가 옆으로 늘어진 귀부의 뒷모습

▲  당당한 자태의 귀부 앞모습

▲  귀부의 옆 모습

▲  미륵불 곁에 새로 지은 나한전(羅漢殿)


▲  속세를 굽어보는 안양사 미륵불(彌勒佛)

대웅전 뒷쪽이자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는 안양사의 든든한 후광인 미륵불이 있다.
1976년에 조성된 안양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높이는 거의 20m에 이르며 얼마나 키다리던지 바
로 밑에서 바라보니 고개가 아파서 뚝 떨어질 것 같다.
온몸이 온통 하얀 피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에는 면류관(冕旒冠)과 비슷한 보관(寶冠)을
쓰고 오른손에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제스처를 취했으며,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높다랗
게 서서 남쪽을 굽어 본다. 석불 양쪽으로 계단을 만들었고, 그 앞에 넓게 기도처를 닦았다.

▲  미륵불 옆에 자리한 1칸짜리
산신각(山神閣)

▲  대웅전에 봉안된 금동석가3존불

경내를 이렇게 둘러보고 미륵불에게 3배를 올리며 소망을 슬쩍 들이밀어본다. 기도를 올리니
소망이 들어진 듯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진다. 나는 저 미륵불에게 해준 것이 전혀 없는데 염
치없이 나의 소망만을 요구하니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긴 하지만 정작 그 소망도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 (미륵불도 공무원들처럼 민원만 받고는 모르쇠로 일관~~)
안양사를 끝으로 연말에 벌인 안양예술공원 주변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안양사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28 (안양예술공원로 131번길 ☎ 031-471-
  4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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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령의 첩첩한 산주름 속에 외롭게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양주 오봉산 석굴암 ~~~ (유격광장, 우이령길)


' 늦가을 산사 나들이, 양주 오봉산 석굴암 (우이령길) '

▲  오봉산 석굴암


 

늦가을이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수놓던 10월의 한복판에 친한 여인네들과 우이령 석굴
암을 찾았다.

우이령(牛耳嶺)은 서울 우이동(牛耳洞)과 경기도 양주시 교현리(橋峴里)를 잇는 고개로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道峯山) 뒷통수에 자리한다. 이들 산의 경계선이기도 한데 6.
25 시절에는 경기도 북부 피난민들이 이 고개를 넘어 피난길에 올랐으며 전방으로 군병
력과 군수물자를 수송하고자 미군 공병대에서 길을 닦으면서 지금의 우이령길을 이루게
되었다.
6.25 이후에도 지역 사람들이 이용했으나 북한이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진 이른바 1968
년 1,21사태(김신조 공비패거리 사건)로 1969년에 금지된 길로 꽁꽁 묶이고 만다. 그렇
게 서울 근교의 숨겨진 고갯길로 없는 듯 지냈던 우이령은 2009년 7월, 40년 만에 다시
빗장을 열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비추었다.

가슴을 다시 연 우이령은 인간의 발길이 오랫동안 끊긴 탓에 자연환경이 매우 우수했고
온갖 희귀 동식물이 앞다투어 뿌리를 내려 대자연의 휼륭한 보고(寶庫)로 성장했다. 또
한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길을 자아내는 등, 그야말로 감동의 현장이었다.
허나 지구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인간들이 몰려들면 우이령이 망가지는 것은 시간 문제
이므로 철저하게 탐방객 수를 제한하고 탐방에 적지않은 제약을 주어 우이령 보호에 힘
쓰고 있다.

우이령이 개방된 이후, 애타게 갈 기회를 노렸으나 딱히 인연이 없어 하염없이 잊고 살
다가 친한 여인네의 제안에 힘입어 가게 되었다. 예약은 그가 다했으므로 늦지 않게 가
기만 하면 된다.
연신내역(3,6호선)에서 아침 9시, 일행들을 만나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우이령
으로 다가섰으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북한산(삼각산)과 노고산을 찾는 등산객과 단풍
행락객들이 폭주하여 송추(북한산, 도봉산, 오봉산) 방면으로 가는 시내버스는 계속 가
축수송의 위엄을 보였다. 거기에 행락객 차량들이 구파발역부터 북한산성입구까지 가득
들어차 불과 12km 거리(연신내~교현리 우이령입구)가 거의 120km로 느껴질 정도였다.
고작 집에서 가까운 우이령을 가는데 이렇게 속세살이처럼 힘이 드니 서울의 인구가 참
쓸데없이 많기는 많다.

어쨌든 등산/행락객의 거센 물결을 뚫고 간신히 우이령입구에 이르니 시간은 벌써 11시.
정류장 편의점에 주저앉아 김밥과 과자, 컵라면으로 벌써부터 지치고 놀랜 몸과 마음,
뱃속을 달래고 우이령의 품으로 들어섰다.


 

♠  석굴암 입문

▲  우이령의 북쪽 관문, 교현탐방지원센터

북한산로 우이령(오봉산 석굴암) 입구에서 8분 정도 들어서면 속세와 우이령의 경계를 구분짓
는 교현탐방지원센터가 마중을 한다. 길 주변에는 군부대 시설이 즐비하여 부푼 마음을 품고
찾아온 나그네에게 적지 않은 긴장감을 준다.

교현탐방지원센터는 우이령의 북쪽 검문소로 여기서 소정의 출입 절차를 밟아야 되는데, 예약
자의 신분증과 예약확인증을 보여주면 된다. 그리고 석굴암 탐방객은 따로 예약할 필요 없이
신분증만 지참하면 된다. 우이령이 비록 개방이 되었다고는 하나 아직은 북악산(백악산) 한양
도성 능선처럼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 공간이라 제약이 좀 있다.

교현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본격적인 우이령 탐방이 시작된다. 속인(俗人)들이 이 길을 걷고
자 1969년 이후 40년이나 목마르게 기다렸던 그 금지된 길이 내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가을
도 우이령에 흠뻑 마음을 빼앗겼는지 길을 멈추고 주변을 화사하게 불지른다. 이렇게 늦가을
과 우이령의 만남으로 우이령은 아름다운 비단길로 거듭났다.
우이령길은 시작부터 끝까지 길이 완만하다. 서서히 올라갔다가 다시 서서히 내려가는 느긋한
코스로 각박한 속세살이와는 정반대이다. 게다가 흙길이 잘 닦여져 있고, 주변 풍경이 고와
결코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짧게 느껴져 흔쾌히 왕복을 뛰고 싶은 마음이다.

교현탐방지원센터에서 석굴암입구 유격광장까지는 약 2.3km로 30분 정도 걸린다. 동쪽에는 도
봉산과 오봉이 빚은 우이령계곡이 때묻지 않은 청정함을 간직하며 속세로 흐르는데, 아쉽게도
계곡은 출입금지구역이다. 게다가 길과도 거리를 제법 두고 있어 휴전선 너머 동해바다를 바
라보듯 해야 된다. 하지만 어찌하랴. 이곳을 속세로부터 지키려면 그럴 수 밖에. 앞으로도 계
속 이렇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  늦가을이 온 산천에 알록달록 불을 질렀다.
늦가을의 즐거운 불장난은 11월 이후 겨울 제국에게 모두 진압이 될 것이다.

▲  석굴암입구 유격광장 (유격 표석)

석굴암입구 유격광장은 우이령길에서 가장 넓은 공간이다. 이곳은 군부대의 유격 연병장으로
광장 동쪽에 서 있는 유격 표석이 이곳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여기서 길은 두 갈래로 갈리는
데 석등을 옆구리에 낀 다리를 건너 북쪽 길을 오르면 석굴암이고, 광장 남쪽으로 난 길로 직
진하면 우이령길 정상이다.

우이령에 왔다면 우이령길만 살피지 말고 석굴암도 둘러보기 바란다. 석굴암이 우이령에서 나
름 꿀단지 같은 곳이라 가는 길이 좀 각박해도 1시간 정도만 투자하면 충분히 둘러보고 나올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우이령을 잠시 버리고 석굴암으로 향했다.


▲  석굴암으로 인도하는 길 (석굴암입구)

▲  유격광장에서 바라본 오봉의 위엄 (왼쪽 바위 봉우리는 '관음봉')

우이령길 교현리 구간에서는 어디서든 오봉(五峯, 660m)이 바라보인다. 3글자로 오봉산(五峯
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은 도봉산의 뒷쪽으로 5개의 바위 봉우리가 위엄을 뽐내며 속
세를 굽어본다. 이런 멋드러진 봉우리에는 옛 사람들이 붙인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있는 법,
내용은 대략 이렇다.

호랑이가 담배를 피다 수염 태워 먹던 시절, 양주 땅에 총각 5명이 살고 있었다. 양주목(楊州
牧) 원님(사또)의 외동딸이 이쁘다고 하여 서로 장가를 들고자 시합을 벌였는데 아마도 원님
이 시합을 붙인 듯 싶다. 시합이란 바로 우이령 서쪽 상장능선에 올라 그곳의 바위를 오봉에
던져 올리는 것, 그들 가운데 누가 이겼는지는 전설을 지은 옛 사람의 생각이 짧아 나오지는
않지만 그들로 인해 오봉이 저렇게 묘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사람 주제에 어찌 저런 봉우리를 만들 수 있을까?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작품
을 가지고 사람이 황당한 전설로 가로채려고 드니 한편으로는 좀 괘씸하기도 하다.

우이령에서 뻔히 보이는 오봉이지만 정작 여기서는 오르지 못한다. 그곳에 가려면 무조건 도
봉산(道峯山)을 거쳐야 되며 우이령과 석굴암에서 오르는 길은 모두 자물쇠로 잠겨져 있다.


▲  석굴암 일주문(一柱門)과 오봉

석굴암입구에서 석굴암까지는 각박한 오르막길이다. 길 주변에는 온갖 유격훈련 시설이 가득
한데 바로 절 밑까지 펼쳐져 있어 군부대 내부를 지나는 기분이다. 이들 훈련장은 1969년 이
후 우이령이 통제되면서 형성된 것으로 지금도 절찬리에 훈련용으로 쓰이고 있다. 몇몇 유격
시설은 개방되어 산꾼들이 도시락이나 간식을 먹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눈에 들어오는데, 수
련장 시설이 아닌 엄연한 군사시설인만큼 그런 것은 삼가하는 것이 옳을 듯 싶다.

훈련 시설을 옆구리에 끼고 10분 정도 오르면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주문이 마중을 나온
다. 보통 일주문은 절 이름이 쓰인 현판을 걸지만 이 문은 그런 것도 없다. 그냥 기둥 2개의
평방(平枋), 공포, 팔작지붕이 전부이다.
그런 일주문을 지나면 주지 도일이 조성한 '오봉산 석굴암 토지불사 공덕비(功德碑)'가 나오
고 다시 2분을 고생하면 주차장이 나온다. 이곳은 석축 위에 둥지를 튼 경내 바로 밑인데 여
기서 윤장대를 거쳐 우회하는 길을 오르면 비로소 석굴암 경내에 이르게 된다.

◀ 오봉산 석굴암 토지 불사 공덕비
주지 도일이 땅 2만평을 매입한 기념으로
세운 비석이다.


▲  경내 밑부분에서 바라본 석굴암
석굴암 뒤쪽으로 관음봉(서쪽 바위 봉우리)과 오봉이 병풍처럼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  첩첩한 산골에 묻힌 산중암자, 우이령 개방으로 단단히 덕을 보고 있는
오봉산 석굴암(五峯山 石窟庵)

▲  윤장대 부근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북쪽 산줄기와 상장봉(543m)

흔히 석굴암하면 대부분 경주(慶州) 석굴암을 떠올릴 것이다. 석굴암의 단짝인 불국사(佛國寺
)처럼 말이다. 글을 올릴 때도 지역을 안쓰고 그냥 석굴암이나 불국사라고 쓰면 죄다 경주로
생각하고 살펴본다. 인터넷 용어로 파닥파닥 낚인 것이다. 허나 불국사와 석굴암 그 좋은 이
름을 꼭 경주의 그곳만 써야 된다는 법은 없다. 그들이 이름 특허를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석굴암이란 이름은 석굴을 품었거나 석굴로 이루어진 절로 경주 외에도 석굴암이란 절이 여럿
존재한다. 일단 제2석굴암으로 유명한 군위(軍威) 석굴암이 있고, 도봉산(道峯山)에는 석굴암
이란 절이 무려 3곳이나 존재한다. 의정부 회룡골에 있는 석굴암과 도봉산 만장봉(萬丈峯) 밑
의 석굴암, 그리고 이곳 석굴암이 그것이다. 경주 석굴암이 천하에 널린 석굴암 가운데 가장
인지도가 강해 석굴암의 대명사가 되다보니 다른 석굴암이 제대로 빛을 못본 것이다. 물론 홍
보력 부족과 문화유산이 빈약한 점도 한몫 한다.

이번에 찾은 석굴암은 도봉산 서쪽을 이루는 오봉의 서쪽이자 관음봉(觀音峯) 서남쪽 350m 고
지에 둥지를 틀고 있다. 주변이 온통 수해(樹海)와 산뿐인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외로운 절집
으로 우이령이 통제된 이후 40년 동안은 찾는 이가 별로 없어 더욱 외로웠다. 그렇게 사람과
돈을 몹시나 그리워하다가 우이령의 사슬이 풀린 이후, 방문객이 늘면서 점차 흥하고 있다.
절이 들어앉은 지세는 위로는 도봉이 치닫고 아래로는 삼각산(북한산)이 모여서 마치 여러 별
이 북극성(北極星)을 떠받들고 있는 크고 작은 산세인데 물도 맑고 골이 깊어 속세를 잊고 수
행하기에는 좋은 곳이다. 또한 도봉산은 풍수지리적으로 왕관(王冠)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오
봉은 도봉산을 호위하는 장군기마상(將軍騎馬像)과 같은 모습이라고 한다.

석굴암의 창건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절에서는 신라 중기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
고 우기고 있다. 허나 의상은 화엄종(華嚴宗)과 귀족불교의 발전을 위해 주로 왕경(王京, 경
주)에서 활동하던 짬밥 높은 승려라 당시 고구려(高句麗)와 팽팽하게 접경을 이루던 이곳에
절을 세울 이유도 없었고, 이런 험준한 곳에 개고생을 하며 절을 세울 까닭도 없었다. 의상이
본격적으로 지방에 절을 세운 것은 문무왕 후반대이다. (대표적인 것이 영주 부석사)
또한 신라 후기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이 역시 신뢰도가 없으며 고
려 후기에 나옹화상(奈翁和尙)이 3년 동안 머물며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그 또한 믿기가 어
렵다. 경내에 신라/고려 때 유물이나 주춧돌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그런 건 하나도 없고,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불과 석조나한상이 그나마 제일 오래된 것이니 말이다. 아마도 도봉산의 만
월암(滿月庵)처럼 조용한 석굴 수행처로 전해오던 것을 조선 초나 중기에 건물을 세워 비로소
절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여러 기록이 보이고 있는데 1443년에 무학대사의 제자인 설암 관익대사가
중수했다고 하며, 이때 석굴에 지장보살과 나한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1455년에는 단종(端宗)
의 왕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여기서 1,000일 기도를 올리고 거금 1만냥을 내려 왕후
의 원찰(願刹)로 삼았다고 하지만 그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미루어보면 이 역시 고개를 좌우
로 흔들 수 밖에 없다.
1652년에는 고암(高庵)이 기와를 보수하고 지장보살상과 나한상에 개금(改金) 불사를 했으며,
1872년에 광운(光雲)이 대웅전과 칠성각을 중수했다고 한다.

1920년 신계월(申桂月)이 주지로 들어와 1943년까지 머물며 강화도 옆 석모도 보문사(普門寺,
관련글 보러가기)에서 온 박동암 선사(朴東庵 禪師)와 수행을 했다. 박동암은 상해임시정
부(上海臨時政府)의 김구 선생을 도운 승려로 계월이 입적하자 석굴암의 주지가 되어 선풍(仙
風)의 기강을 위해 계속 수행했다.

▲  윤장대

▲  석굴암 요사(寮舍)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우이령 주변은 최대의 격전지가 되었는데 그 여파로 절은 완전 잿
더미가 되고 만다. 다행히 아미타불과 지장보살상, 나한상, 수구다라니 목판 등은 현재 나한
전에 있던 좁은 석굴 안에 들어가 화를 면했다.
그렇게 파괴된 석굴암을 멋지게 일으킨 이가 박동암의 열성 제자인 초안당(超安堂) 유성대선
사(1926~1998, 본명 송만석)이다. 그는 현역으로 전쟁에 참전했다가 총상을 입었는데 1954년
5월 의병제대(依病除隊)를 하여 스승인 박동암을 찾았다.
스승은 그에게 석굴암 복원을 간곡히 부탁했고, 그 뜻을 받들고자 바로 그달 26일 어머니 조
병길(조삼매심) 보살과 석굴암을 찾았다. 그들 앞에 펼쳐진 석굴암은 완전 처참한 상태라 석
굴 안에 방치된 불상과 목판을 수습하고 임시 움막을 지어 주변에 널린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
해 화장을 하거나 군에 도움을 청하여 안장(安葬)이 되도록 힘썼다.

1954년 후반에는 지병으로 친정인 교현리에 와있던 윤봉순이 석굴암 부처의 현몽을 받고 석굴
암을 찾아와 불사를 도왔고, 절에서 기도를 올린 신도들의 입소문을 통해 절의 존재가 알려지
면서 불사에 동참하는 신도가 늘어났다. 초안당 역시 낮에는 서울로 나가 탁발을 하고 밤에는
밤을 낮으로 삼아 축대를 쌓고 건물을 짓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래서 1964년 기존 석굴
을 넓혀서 나한전으로 삼아 나한도량의 기치를 높이 세웠다.
허나 1969년 이후 우이령길이 통제되면서 통행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고, 이는 석굴암의 족
쇄로 작용했다. 게다가 위치도 궁색해 차량 접근도 힘드니 초안당과 신도들은 쌀과 기와, 생
필품을 짊어지며 송추와 고양 효자동에서 10리가 넘는 산길을 일일이 날랐다.

그렇게 힘겨운 고난을 거쳐 1972년 범종각이 완성되었고, 그 와중에 1977년 어머니를 잃는 아
픔도 겪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1979년 요사채를 증축했다. 그리고 1981년 고대하던 전기가
들어오면서 환경은 크게 나아지게 된다. 그 여세로 삼성각과 봉향각을 증축했고 경내 대지도
152평으로 넓혔으며 절로 들어서는 길을 확장하고 나한전을 넓혔다.
1990년대에는 30사단 92연대에 쌍용사를 세워 군대 포교에 나섰고, 오갈데 없는 고아 11명을
수습해 길렀으며 봉선사(奉先寺) 승려를 위해 써달라며 장학기금을 내놓았다. 그리고 어려운
사찰 살림을 쪼개 복지사업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98년 초안당이 72세에 나이로 입적하자 대중들의 오열 속에 다비식이 거행되었는데 사리가
무려 59과가 나왔다고 한다. 그가 간 이후 그가 친자식처럼 키워온 상좌 도일(度一)이 그 뒤
를 이어 주지가 되었으며, 대지 2만평을 매입하여 제2중창불사를 벌이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
추게 되었다. 이때 지하수를 개발하여 목마름을 해소했고 후불탱화와 불상, 다양한 탱화를 조
성했으며, 건물 기와를 무려 청동기와로 교체하고 설법전을 지었다.
그러다가 2009년 석굴암의 오랜 족쇄였던 우이령 통제가 풀리자 탐방객 수는 더욱 늘어 절의
명성은 조금씩 높아져 갔고, 조선 후기 나한상과 석굴로 이루어진 나한전을 내세워 나한도량
(羅漢道場)을 칭하고 있다. 그리고 매년 10월에 단풍음악회를 여는 등, 속세에 절 이름 3자를
알리고자 애쓰고 있다.

▲  석굴암 범종각

▲  삼성각과 3층석탑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해 삼성각, 나한전, 요사, 설법전 등 7~8동의 크고 작은 건물
이 있으며, 모두 1960년대 이후에 지어진 것들이라 고색의 내음은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조
선 후기에 조성된 석조불좌상(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61호, 아쉽게도 친견하지 못함)과 석조
지장보살좌상, 석조나한상 등 지방문화재 3점을 간직하고 있어 그들을 통해 절의 오랜 내력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다.
또한 이곳은 오봉산 자락에 서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는데 조망이 일품이라 우이령길은 물론
상장봉 등 북한산 북쪽 산줄기가 훤히 바라보여 마음이 시원해지며, 번뇌가 멋모르고 쫓아오
다 졸도할 정도로 깊은 산골이라 풍경소리와 염불 소리, 바람의 소리가 전부인 그야말로 고적
한 절이다.

석굴암은 주말 점심 시간에 중생들에게 공양을 제공하며, 정월대보름에는 오곡밥과 대보름 나
물을, 동짓날에는 팥죽을 주는데 꽤 맛이 좋다고 한다. 그리고 2008년부터 매년 10월마다 단
풍음악제를 여는데 승려 음악가와 절 합창단, 가수, 국악인, 30사단 군악대, 지역 음악가 등
이 출연해 외딴 산사의 분위기를 한층 드높인다. 이때만큼은 고요하던 산사도 우이령길도 꽤
떠들썩해진다.

※ 오봉산 석굴암 찾아가기 (2017년 11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불광역(8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연신내역(3/6호선, 3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3호선 구파발역(1,2번 출구)에서 34, 704번 시내버스를 타고 우이령 오봉산석굴암
  입구에서 하차
* 1,4호선 서울역(4,9-1번 출구), 2호선 을지로입구역(3번 출구), 1호선 종각역(3-1번 출구),
  5호선 서대문역(4번 출구), 3호선 홍제역(2,3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3호선 녹번역(1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704번 시내버스 이용
* 우이령(오봉산석굴암) 입구에서 석굴암까지 도보 1시간. 석굴암 신도와 탐방객은 우이령길
  예약이 필요없으며 교현탐방지원센터에서 신분증 확인을 거쳐 들어가면 된다. 단 우이동(우
  이탐방지원센터)에서 접근할 경우에는 예약을 해야된다.
* 소재지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 1 (석굴암길 519 ☎ 031-826-3573)
* 석굴암 홈페이지는 아래 윤장대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불가의 사치품으로 일컬어지는 윤장대(輪藏臺)를 돌려보자

주차장에서 경내로 오르면 조그만 기와집에 담긴 윤장대가 마중한다. 윤장대는 불경(佛經) 등
의 서적을 담아두는 책장이자 불가의 사치품으로 지금이야 많은 절에서 우후죽순 만들어서 보
기가 쉬워져서 그렇지 예천 용문사(龍門寺)의 윤장대를 제외하면 제대로 오래된 것도 없다.
그만큼 희소성이 크다.
옛날에는 지금보다 문맹률이 높아(거의 90% 이상) 상당수의 백성들은 불경을 읽지 못했다. 그
러니 이해도 힘들었지. 하여 생각한 것이 윤장대를 활용한 것으로 책장 양쪽에 손잡이를 만들
고 그것을 돌리면 경서를 모두 이해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영업을 했다. 또한 윤장대를 돌리면
서 소망을 들이밀면 소망이 이루진다면서 윤장대에 대한 중생들의 관심을 높였다.


▲  경내 밑부분 (왼쪽의 건물은 설법전)

▲  석굴암 대웅전(大雄殿)

윤장대를 지나 경내에 이르면 가장 먼저 이곳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모습을 비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살짝 들려진 지붕 추녀의 맵시가 인상적이다.
이 건물은 1975년에 초안당이 지은 것으로 높이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워 제법 위엄
이 있어 보인다. 건물 중앙에는 1970년 우봉(又峰)이 쓴 대웅전 편액과 주련 4기가 걸려있으
며 내부에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석가3존불을 이루고 있다.


▲  육체미가 넘치는 석굴암 석가모니3존불과 석가모니 후불탱
후불탱은 1998년 회주 초안, 주지 도인, 금어 박갑철이 조성했다.

         ◀  대웅전 신중탱(神衆幀)
부처의 세계를 수호하는 온갖 신들의 무리가
빼곡하게 담긴 탱화로 1991년 금어 김용희가
그렸다. 건물 내부의 기운을 정화하는 역할을
하여 법당에 많이 걸어둔다.


▲  옆에서 바라본 석굴암 대웅전

▲  석굴을 넓혀서 만든 석굴암 나한전(羅漢殿)

대웅전을 지나면 바위 석굴로 이루어진 나한전이 나온다. 이곳은 원래 3명 정도 들어갈 수 있
는 좁은 굴로 석굴암이란 이름도 바로 이 굴에서 비롯되었다.
호랑이가 곶감을 피해 다니던 시절부터 도봉산 동쪽 자락의 만월암이나 북한산 금선사(金仙寺
)의 목정굴(木精窟)처럼 참선 공간으로 쓰였다가 조선시대에 굴 주변에 건물을 짓고 이름도
편하게 석굴암을 칭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6.25전쟁으로 석굴암이 초토화되자 이곳에 서린 석조불좌상과 나한상, 지장보살상 등이 이곳
에 피신을 했으며, 1954년 초안당이 그들을 수습하고 1964년 석굴을 넓혀 나한상의 보금자리
로 삼았다. 이후 도일이 내부를 넓히고 주변을 손질하여 지금에 이른다.

나한전 석굴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조나한상을 중심으로 조그만 나한상이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굴이라 그런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좀 따스하다. 또한 석굴 왼쪽에는 조그만
샘이 있는데 1990년대까지 석굴암의 갈증을 해소해주던 유일한 식수원으로 여기서는 용왕샘이
라 부른다.
지금이야 요사 옆에 지하수를 뚫어 물 걱정은 크게 덜었으나 이 샘은 수량이 적어 자주 바닥
을 드러내곤 했다. 특히 부정한 짓을 하거나 고기를 먹은 이들이 손을 대면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샘이 발끈해 그냥 말라붙었다고 한다.


▲  나한전 내부 - 나한 형님들이 나란히 단체 촬영에 임하고 있다.

▲  석조나한상(石造羅漢像)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62-1호

나한전 불단을 가득 메운 나한상들은 색을 입히지 않아 대부분 하얀 피부이다. 일부는 꺼무잡
잡한 피부를 보이기도 하지만 그리 크게 차이는 안난다. 이들 가운데 정중앙에 자리한 나한이
꽤나 독보적인데 그가 이곳의 주인장인 석조나한상이다. 그러다보니 특별히 연꽃무늬가 새겨
진 대좌와 듬직한 광배(光背)까지 두르고 있으며 검은 색의 옷까지 걸쳐 조그만 나한들의 두
목 역할을 한다.

이 나한상은 앉은 키 60cm, 무릎 폭 40cm의 조그만 모습으로 18세기에 한봉당 창엽(漢峰堂 瑲
曄)과 금곡당 영환(金谷堂 永煥) 등이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석조불좌
상과 달리 표정이 밝고 인자하며 기품 있는 모습으로 중생을 맞이하고 있는데 광배와 대좌는
1970년대 이후에 붙인 것이고 옷 색깔은 근래에 입혔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멋이 좀 떨어지긴
했다.
참고로 이곳 나한들은 생쌀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공양도 생쌀을 올리고 있는데 1950년
대에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던 3명의 노파가 절 사람들이 게을러 생쌀을 공양한다며 초안당에
게 항의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이 기도를 마치고 나한을 보니 글쎄 생쌀이 나한 몸과 입,
무릎에 붙어있었고 생쌀 불기마다 움푹 패인 자국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한의 그런 믿거나 말
거나 영험 사건으로 '석굴암 나한이 생쌀을 먹는다~'는 소문이 퍼져 기도객이 몰려들었고 그
덕에 공양쌀과 시주금이 늘어나 요사채와 삼성각을 무난히 올릴 수 있었다. (과연 나한의 소
행이었을까?)


 

♠  오봉산 석굴암 마무리 (삼성각)

▲  석굴암 석조(石槽)
오봉산이 제공한 옥계수가 쉼 없이 쏟아져나와 중생의 목을 축여준다.
내 목구멍 뿐 아니라 내 인생의 갈증도 싹 축여주면 좋으련만~~

▲  하얀 천막이 설치된 설법전 옥상
설법전은 경내를 받쳐든 석축 앞에 엮은 2층 건물로 그 옥상은 단풍음악제를
비롯한 절의 행사장으로 쓰이고 있다.

▲  석굴암 범종각(梵鍾閣)
초안당이 1980년대에 지은 것으로 1984년에 조성된 범종이 봉안되어있다. 저녁 6시가
되면 자고 있던 범종이 깨어나 우이령 일대에 잔잔하게 종소리를 들려준다.

▲  계단 끝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과 3층석탑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삼성각이 천하를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1
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이름 그대로 3명의 성스러운 존재, 산신(山神)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을 머금고 있어야 되지만 독성은 나한전에 따로 봉안하고 여기서는 약사불과 칠성
탱, 산신탱을 봉안하여 3성을 채웠다.
이들 가운데 석조지장보살좌상과 약사탱이 중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지장보살상 뒤에 있
음에도 지장탱을 안달고 약사탱(1985년에 제작됨)을 단 점이 특이하다. 그들 양쪽 구석에는
1985년에 조성된 산신탱과 칠성탱이 좁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삼성각이란 이름보다는 지장
전을 칭하는 게 더 어울려 보인다. (지장보살이 중심에 있기 때문임)

삼성각 앞 벼랑에는 이곳의 유일한 탑인 3층석
탑이 하얀 맵시를 드러내며 서 있다. 왜 대웅
전 뜨락에 안두고 이런 험한 벼랑에 두었는지
모르겠으나 위치가 위치인지라 조망만큼은 아
주 일품이다.
석굴암에서 제일 조망이 좋은 곳이니 꼭 올라
가 그 멋을 체험하기 바란다.


 

◀  천하를 뜨락으로 삼은 석굴암 3층석탑

▲  산신과 호랑이, 동자가 담겨진 산신탱

▲  색감이 무지 고운 칠성탱


▲  삼성각 내부
석조지장보살좌상과 약사탱의 공간이 꽤 넓어 그들이 삼성각에 중심임을 알 수 있다.
불상 좌우에는 현란한 모습의 옥탑 2기가 자리한다.

▲  석굴암 석조지장보살좌상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62호

약사탱 앞에 자리한 석조지장보살좌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다. 근래에 도금을 입혀 금빛을
찬란히 드러내고 있는데 불상이 주먹 크기 정도로 매우 작고 마치 얼굴이 겉늙은 동자상에 지
장보살 복장을 입혀놓은 듯하여 귀엽기도 하다. 그는 석조불좌상과 마찬가지로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 올린 길상좌를 하고 있는데 얼굴은 뭔가 시름에 잠겨있는 표정 같으며, 눈과 코,
입, 귀, 수염이 뚜렷하다.
그는 6.25시절에 석굴에 들어가 화를 피했으며 초안당이 절을 재건했을 때 삼성각을 세우면서
그 건물에 봉안했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우이령과 상장봉 능선의 장쾌한 위엄
아무리 둘러봐도 주변에 보이는 것은 숲과 칼처럼 솟은 산, 그리고 짙은 파랑색의
하늘 뿐이다. 그만큼 이곳은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고적한 곳이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대웅전 주변
대웅전 앞에는 잠시 발을 멈추고 쉬어갈 수 있도록 쉼터가 닦여져 있다.


석굴암에 발을 들였을 때는 이곳에 문화유산이 있는 것을 몰랐다. 그냥 역사만 좀 오래되었을
뿐, 고색의 향기가 메마른 절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오래된 석
불들을 만나보니 의외에 장소에서 오랜 지기를 만난 듯 반가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석굴암
에 대해 미리 살피지 않고 간 나의 실수에 미안함이 가득했다.
요사와 설법전 내부. 석조불좌상 등을 제외하면 경내에 왠만한 것은 다 살펴봤으며 이곳 공양
밥이 맛있다고 하는데 제공 시간을 지나쳐서 먹지 못했다. 우이령이 나와 아주 먼 곳에 있었
다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인연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와 가까운 곳에 있으니 (직선거리로
7km도 안됨) 겨울 제국이 저물고 소쩍새가 우는 봄이 오면 그때 다시 인연을 만들어 우이령과
석굴암의 품에 퐁당 안기고 싶다.

이 일대가 개발의 칼질도 숨을 죽이는 영역이라 그 칼질로부터 다소 자유롭기는 하지만 우리
나라식 개발의 칼질이 워낙 개념없기로 유명하니 자칫 약을 빨고 우이령 일대를 난도질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이곳은 천지가 개벽해도 대자연의 깊은 공간이자 북한산(삼각산)과 도봉
산에서 가장 한적한 곳으로 우리 곁에 남기를 소망할 뿐이다.

이렇게 석굴암을 1시간 정도 둘러보고 다시 유격광장으로 내려와 우이령을 타고 서울 우이동
으로 넘어갔다. 우이령 나머지 부분은 본글에서는 생략하며 아래 별도로 링크된 글을 참조하
기 바란다. (☞ 우이령길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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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11월 1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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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더울 때는 땅 속이 최고!! 수도권 유일의 동굴 관광지, 광명시 광명동굴 (가학산)



' 수도권 유일의 동굴 관광지, 광명시 광명동굴 '

▲  광명 와인동굴 (광명동굴)

▲  황금폭포

▲  광명동굴의 마스코트, 아이샤


 


서울에서 자연산 동굴을 구경하려면 400~500리나 떨어진 강원도 정선이나 영월, 태백, 충

북 단양까지는 가야 된다. 몸에 좋은 탄산약수만큼이나 보기가 참 어려운데, 2011년 이후
서울 근교에도 드디어 동굴이 하나 생겨 멀리 가야 되는 수고로움이 조금은 덜해졌다. 단
양이나 정선처럼 자연산 동굴이면 참 좋겠지만 현실은 광산(鑛山) 출신의 인공 동굴로 그
주인공은 광명시에 있는 광명동굴(가학광산)이다.
비록 인공으로 다져진 굴이지만 내부는 자연산 굴과 많이 닮았으며, 울산 울주군(蔚州郡)
의 자수정동굴처럼 버려진 광산을 관광용으로 잘 재생한 케이스로 널리 칭송을 받고 있다.
그러니 자연산 동굴이 아니라고 그리 실망할 필요는 없다. 정 자연산을 원한다면 강원도
나 단양, 울진(성류굴), 제주도로 쿨하게 날라가면 된다.

수도권 유일의 동굴 관광지로 오랫동안 입소문을 탄 광명동굴은 2012년 11월에 이미 인연
을 지은 바가 있다. 그때는 가학광산동굴이라 불렸는데, 개방 초창기라 광산 시절 그대로
의 모습을 거의 간직하고 있었다. 허나 볼거리는 별로 없었으며 가이드를 따라 30분 정도
동굴을 둘러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야말로 광산 동굴 산책이다.
이후 광명시의 무한 정성에 힘입어 나날이 진화를 보여 이제는 명실상부한 수도권 제일의
동굴 명소이자 광명시(光明市)의 꿀단지로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하여 그가 얼마나 달라
졌는지 확인도 해볼 겸, 오랜만에 다시 인연을 지었다.

햇님이 하늘 중간에 걸린 늦가을의 어느 날 14시, 개봉역(1호선)에서 후배를 만나 광명동
굴의 발, 광명시내버스 17번(개봉역↔광명동굴)을 탔다.
이 버스는 철산동(鐵山洞)과 하안동, 소하동, 가학동 등 광명 동부와 남부를 정신없이 강
제투어를 시켜주며 거의 1시간 만에 광명동굴 종점(광명시 자원회수시설 앞)에 우리를 내
려놓는다.


 

♠  광명동굴 입문

▲  광명동굴 밑에 자리한 광명시 자원회수시설

버스에서 내리니 하얀 구름 무늬를 지닌 붉은 피부의 거대한 건물이 우리를 맞는다. 하늘을 찌
를 듯 높이 솟은 굴뚝이 적지 않게 위압감을 선사하고 있는데 그는 '광명시 자원회수시설'이라
불리는 존재로 원래는 쓰레기 소각장이다. 광명 지역에서 거둬들인 잡다한 쓰레기를 태우고 처
리하던 현장으로 예전 가학광산 시절에는 광산 폐기물을 무방비로 모아두던 곳이었다.

2012년에 왔을 때는 정말 우중층한 모습 그 자체였는데, 광명동굴의 주변 미관을 위해 구름 무
늬를 겯드려 붉은 색 옷을 입혔다. 그래서 그때보다 밝고 화사하게 보인다. 건물 내부에는 광
명업사이클아트센터, 에코에듀센터가 들어서 폐자원을 활용한 문화/예술/교육 공간으로 쓰이고
있으며 식당 등의 편의 시설도 갖추고 있다. (건물 남쪽에 동굴 주차장이 있음)


▲  주차장 주변에 조성된 귀여운 조형물(사슴과 다람쥐, 광명동굴의
마스코트인 아이샤와 쿠오)과 늦가을에 잠긴 단풍나무


▲  자원회수시설에서 광명동굴로 인도하는 오르막 길

자원회수시설에서 3~4분 오르면 바로 광명동굴 앞이다. 동굴 앞에는 광장이 펼쳐져 있는데, 매
표소와 방문자센터, 쉼터, 광차 모형, 광부 모형 등이 있으며, 북쪽에는 아이샤 숲이라 불리는
조그만 공원이 있다. 광장 남쪽에는 막연히 하늘로 이어질 것만 같은 계단길이 길게 펼쳐져 있
는데, 그 길은 가학산(駕鶴山, 220m) 정상과 서독산, 구름산, 광명둘레길로 이어진다.


▲  동굴 앞에 닦여진 공원(아이샤숲)과 광부석상 (가학산 근린공원)
늦가을도 광명동굴의 소문을 들었는지 살며시 다가와 동굴 주변을 곱게 물들였다.
하얀 피부의 광부상은 한때 이곳의 주인공이었던 광부를 재현한 것으로
열심히 광물을 쏟아내던 옛 시절을 회상하게 한다.

▲  광명동굴 광장 (오른쪽 창구가 매표소, 그 오른쪽이 가학산 등산로)

▲  열려라 참깨~~!! 광명동굴이 활짝 빗장을 열었다.

▲  가학산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여기서 가학산 정상까지는 40분 정도 걸린다.

▲  드디어 동굴의 속살로 들어서다.
(바람길)


※ 칙칙한 광산에서 관광용 동굴로 거듭난 현장, 수도권 유일의 동굴 관광지, 광명동굴
시골 풍경이 진하게 서려있는 광명시의 남쪽 변두리 가학동(駕鶴洞), 그 가학동을 둘러싼 가학
산 서남쪽 자락에 천하의 쟁쟁한 동굴들을 긴장시킨 광명동굴이 웅크리고 있다.
서울 근교의 거의 유일했던 광산이자 유일한 동굴<북한이 남침을 위해 파거나 우리 군에서 작
전상 판 땅굴은 제외>로 1912년 4월 왜인(倭人)이 발견하여 광산 사업을 벌이니 그것이 광명동
굴의 시작이었다.

이곳에서는 구리, 아연, 은, 금 등이 푸짐하게 쏟아져 나왔는데, 여기서 나온 광물은 왜열도로
넘어가 그들의 배때기를 찌우는데 주로 쓰였다. 하지만 지역 사람들로 이루어진 노동자들은 가
혹한 노동 착취에 쥐꼬리보다 못한 저임금을 받으며 힘들게 살아갔다.
왜정(倭政) 말기에는 징용을 피하고자 많은 사람들이 광산을 찾았다. 여기서 일하면 징용 대상
자에서 빠지기 때문이다. 어딘지도 모를 이역만리로 끌려가느니 차라리 고향과 가까운 곳에서
고생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허나 지원자가 얼마나 줄을 섰던지 인맥을 동원해야 겨우 발을
들일 정도였다.

1945년 이후, 광산은 지역 사람에게 넘어가면서 비로소 이 땅을 위해 광물을 내놓기 시작했다.
채광 기록이 부실하여 1955년부터 1972년까지의 기록만 남아있는데 그 17년 동안 동 1,247톤,
아연 3,637톤. 금 52kg, 은 6.070kg을 생산하여 주력 광물인 동, 아연 외에 다양한 광물이 담
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지역 주민들이 광산으로 피난해 화를 면했으며 그 피난 시절에 광산
에서 태어난 아이를 '굴댕이'라 부르기도 했다.

1961~1962년에는 노동운동이 일어나 언론을 타기도 했으며, 그 시절에는 시흥광산이라 불렸다.
(그때는 '경기도 시흥군'이었음) 또한 1960년대 중고등학교 지리, 사회과지도에 주요 광물 생
산지로 절찬리에 등장해 이 땅에서 존재감이 꽤 컸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최대 500여 명이 일
을 했었다.

그렇게 잘나갔던 가학광산은 1972년 한순간의 실수로 거지가 되고 만다. 광산에서 채굴하여 버
린 돌을 광산 서쪽에 무방비로 쌓아두었는데, 홍수로 그것들이 죄다 떠내려가 가학동과 시흥시
목감동의 들판을 들이친 대형사고가 터진 것이다. 돌로 뒤덮힌 경작지는 30~40년 동안 경작이
불가능했을 정도였으니 그만큼 광물 찌꺼기의 맹독성은 심했다.
졸지에 터전을 잃은 농민들이 항의하자 이를 보상해야 했고 만만치 않은 보상금을 치르면서 재
정이 바닥나 결국 망하고 말았다.

다행히 인수자가 있어 폐광은 면했으나 바로 그해 7월, 가학산 주변이 그린벨트로 묶이면서 광
산의 목구멍은 막히고 말았다. 개발이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광산 안에는 수십 년을 쓸 수 있
는 광물이 묻혀 있고, (1950년 조사 때 광산 내 매장량은 약 19,000톤으로 측정됨) 금도 적지
않게 깃들여져 있던 상태에서 그린벨트란 굴레가 씌워진 것이다.
그래서 1978년부터 2010년까지 소래포구에서 의뢰 받은 젓갈을 저장하는 창고로 간신히 연명했
으나 그걸로는 본전도 뽑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1994년 6월, 이름 뿐인 광업권까지 소멸되면서
광물 채굴은 어림도 없게 되었다. 채굴이 불가능한 광산은 천상 입구에 못질을 하고 문을 닫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라질 위기에 처한 가학광산에게 의외의 구원자가 두 손을 내밀었다. 바로 광명시였다.
광명시는 이 기회에 동굴 하나 장만하여 폐광산 테마공원으로 꾸밀 계획을 세우고 2011년 1월
광산과 주변 토지 10만
를 43억원에 매입했다. 마땅히 천하에 내세울 명소가 변변치 못하였던
광명시가 버려진 광산을 주목하고 모험을 건 것이다.
그래서 7개월 동안 갱도 내부를 손질하고 홍보 영상까지 제작해 천하에 널리 뿌렸으며, 그해 8
월 22일 가학광산에 동굴 2자를 붙여 '가학광산동굴'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그동
안 어둡고 칙칙했던 광산 이미지를 확 벗어 던지고 수도권 유일의 동굴 관광지로 새롭게 거듭
난 순간이었다.
이때가 1차 개방으로 그해 12월 11일까지 약 110일 동안 문을 열었으며, 11월에는 최초로 동굴
음악회가 열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개방 기간에 무려 17,000명이 찾아와 이곳의 전망이 결
코 어둡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그해 12월 12일 다시 빗장을 잠구고 2012년 3월 16일까지 보수 작업을 벌여 3월 17일 다시 빗
장을 열었으며 그해 11월 30일까지 2차 개방을 실시했다. 이때는 입장 시간을 변경해 9시부터
16시 20분까지 입장시켰으며, 동굴 100주년 기념 행사와 음악회, 영화 상영, 출판 기념회 등의
이벤트를 가졌다.
그리고 다시 빗장을 잠구고 2013년 3월까지 다시 내부를 손질하여 천하 최초의 '동굴예술의전
당'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 개관 기념으로 동굴문명 특별전이 열렸으며, 최초의 동굴 패션쇼와
보석쇼 등의 이벤트를 열어 동굴의 명성을 드높였다. 또한 국토교통부의 의견을 거쳐 동굴 주
변을 가학산 근린공원으로 조성했다.

2014년에는 국내 최초로 판타지 콘셉트 디자인 공모전을 개최했고, 동굴 최초 영화 '터널3D'를
촬영해 시사회를 가졌다. 또한 볼거리를 계속 확충하여 아쿠아월드, 빛의 세계전, 동굴 레이저
쇼 등을 갖추었으며, 이 해까지 100만 명이 다녀가 동굴의 높은 인기를 보여주었다.
2015년에는 조촐하게 와인동굴까지 선보여 서울 근처에서도 동굴에서 숙성된 와인을 즉석에서
마실 수 있게 되었으며, '반지의 제왕'으로 유명한 뉴질랜드 웨타워크숍과 손잡아 판타지 콘셉
트 디자인 공모전을 벌였다. 그리고 프랑스와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고자 2016년 4월부터 9월
까지 라스코 동굴벽화 국제순회 전시회를 벌이는 등, 천하 제일의 동굴 관광지를 위해 열심히
날개짓을 하고 있다.
또한 동굴 이름도 가학광산동굴에서 광명동굴로 갈면서 광산 이미지를 지웠고, 동굴에 들인 본
전을 뽑고자 2015년 4월부터 달갑지 않은 입장료까지 얹혀 이제는 유료의 동굴이 되었다. 유효
화 이후에는 사람이 줄기는 커녕, 풍부하게 넣어든 볼거리와 수도권 유일의 동굴 관광지란 타
이틀 때문에 오히려 증가하여 광명시의 곳간을 채우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광산 갱도의 총길이는 7.8km, 갱도의 깊이는 275m<해발 180m에서 지하 95m까지>이며, 내부 면
적은 42,785㎡<유역 면적 342,797㎡>, 갱도 폭 2~5m<평균 3.5m>, 갱도 높이 1.5~4m<평균 2.75m
> 이다. 하루 선광량은 350톤, 갱도 재질은 석회규산염암과 편암이며, 동공 수는 50여 개로 동
공에는 위 아래를 연결하는 통로를 두었고, 권양기(捲揚機)라는 기계를 와이어로 감아 크고 작
은 광석을 광차를 이용해 실어날랐다.
광산으로 쓰였던 곳이지만 내부 통풍에는 지장이 없어 산소가 충분하며, 평균 13도 가량을 유
지하고 있다. 그래서 한여름에는 시원해 피서의 성지로 아주 제격이다. 내부로 들어가는 곳은
이곳 외에 소하동(所下洞)에도 있으나 그곳은 닫혀 있으며, 갱도 높이가 들쭉날쭉해 정문에 비
치되어있는 안전모를 필히 써야 머리에 탈이 없다.

광명동굴(가학광산 동굴), 그곳을 처음 접했을 때 동굴이란 2글자가 붙어 있어 자연산과 인공
이 섞인 동굴이라 생각했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단어 장난이었다. 순 100% 사람이 삽질해서
판 인공굴이었던 것이다. 자연이 손댄 부분은 하나도 없으나 굴을 둘러보면 정말 자연산 동굴
처럼 느껴져 사람의 힘이 정말 대단함에 놀라게 된다. 먹고 살기 위한 집념과 노다지를 캐려는
집념이 이런 커다란 동굴을 빚었던 것이리라.
땅굴 파기는 북한이 천하 제일이지만 우리도 그에 못지 않다. 아쉬운 건 이곳이 왜정 때 이 땅
의 백성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현장이라 조금은 씁쓸하다는 것이다.

한때 밀폐된 공간에 무엇을 그리 주섬주섬 만드는가 우려와 비판도 많았지만 그 우려를 잘 소
화하여 이제는 어엿한 동굴 관광지로 내 앞에 섰다. 광명시가 5년 넘게 갖은 정성을 들인 광명
의 진정한 꿀단지이자 서울 근교의 주요 명소로 우뚝 선 현장으로 비록 입장료를 씌운 점은 함
정이지만 그 돈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나날이 진화를 보이고 있는 살아있는 동굴이다.

※ 광명동굴 찾아가기 (2017년 7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개봉역(1번 출구 밖 남부순환로변 정류장), 7호선 철산역(2번 출구 밖 2001아
  울렛 철산점 건너편 정류장), 1호선과 고속전철 광명역(7번 출구)에서 광명시내버스 17번을
  타고 광명동굴 종점 하차, 도보 5분
* 지하철 1,2호선 신도림역(1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7호선 철산역(2번 출구 밖 2001아울렛
  철산점 건너편 정류장)에서 광명시내버스 11-2번을 타고 소하동 광명동굴입구 종점 하차, 광
  명동굴까지 도보 30분 또는 코끼리차 아이샤를 타고 광명동굴까지 이동
  <코끼리차는 광명동굴 후문에서 광명동굴 제2매표소까지 운행하며, 9시20분부터 17시까지 20
  분 간격으로 운행, 요금은 청소년과 어른 2,000원 / 어린이 1,000원 (비나 눈이 오거나 강추
  위 때는 운행안함)>
* 지하철 7호선 철산역(2번 출구)과 광명역(2번 출구)에서 광명투어버스 이용, 광명역에서는 1
  일 4회, 철산역에서는 1일 6회 운행하며, 월요일은 운행하지 않는다.
  (광명투어버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 이곳을 클릭한다)
* 광명동굴 자원회수시설 남쪽(제1,2주차장)과 광명동굴 후문(제3주차장)에 주차장이 있음 (주
  차비 무료)

★ 광명동굴 관람정보 (2017년 7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6,000원(단체 5,000원), 군인 4,000원(3,500원), 청소년 3,500원(3,000원),
  어린이 2,000원(1,700원)  <광명시민은 50% 할인, 단체는 20명 이상>
* 관람시간 : 9시~18시 (17시까지 입장 가능, 매주 월요일 휴관)
* 동굴 체험활동 - 광물(보석) 채광 4,000원, 황금채취 6,000원, 광산모자만들기 3,000원, 동
  굴속 황금패 달기 5000원
* 2017년 7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동굴 안 라스코전시관에서 바비인형전이 열린다. (입장료
  는 별도, 자세한 것은 광명동굴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 산 17-1, 27일원 (가학로 85번길 142 ☎ 1688-3399)
* 광명동굴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온갖 색채의 조명이 길을 비추는 광명동굴 바람길


 

♠  지하 세계, 광명동굴 둘러보기 (바람길에서 황금궁전까지)

▲  한때 소박했던 웜홀광장 (2012년 모습)

우리는 입장권을 구입하고 안전모를 눌러쓴 다음 동굴의 속살로 들어섰다. 사람의 손으로 이룩
된 갱도는 휴전선에 있는 북한의 남침용 땅굴과도 조금은 비슷한 모습인데, 폭 2~5m, 높이 1.5
~4m로 상당수의 갱도는 2m 정도를 유지한다. 촘촘한 간격으로 조명 시설을 달아 다양한 색채로
갱도를 곱게 수식하며, 색이 바뀔 때마다 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동굴의 시작인 바람길을 지나면 웜홀(Wormhole)광장이 나온다. 여기서 길(동공)은 3갈래로 갈
리는데 관람 순서가 정해져 있어 무조건 오른쪽 빛의 공간으로 가야 된다. 동굴을 1바퀴 돌면
다시 웜홀에 이르게 되는데, 그때는 옆 길로 들어서 와인동굴을 거친 다음 다시 웜홀로 나와서
밖으로 나간다. 그러니 동굴 관람 동안 웜홀을 총 3번 찍는 것이다. 그래서 동굴의 과거, 미래
, 현재를 둘러보는 입구라 하여 웜홀(우주에서 불랙홀과 화이트홀을 연결하는 통로)이라 이름
지었다.


▲  빛의 황홀한 터널, 빛의 공간 ▼

빛의 공간은 다양한 색채의 조그만 조명등을 터널처럼 씌운 구간으로 검은 도화지 속에 이렇게
찬란한 터널을 두니 마치 겨울 저녁 빛 축제 현장에 들어선 기분이다.
그렇게 빛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터널을 지나면 동굴 아쿠아리움과 예술의 전당이 모습을 드
러낸다.


▲  빛의 공간 남쪽 종점

▲  '황금동굴의 빛나는 생명체' 모형들

빛의 공간을 지나면 '황금동굴의 빛나는 생명체'란 이름을 지닌 요상한 동물 모형이 빛을 발하
며 나타난다. 이들은 동굴을 꾸미면서 달아놓은 테마 모형으로 그들을 만들고 적당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내용인즉 황금동굴(광명동굴)의 가장 깊은 곳에는 황금을 먹고 빛을 내는 다양한 생명체가 살
고 있는데 동굴 벽면에서 살고 있는 젤리팻 가족과 동굴 안을 부유하는 어비스 피쉬가 대표적
인 빛의 생명체란 것이다. 이들은 LED조명 작가 권영준이 만든 것으로 다양한 조명을 씌워 시
간마다 다른 피부색을 낸다.
지금이야 우스개 소리로 듣고 흘리겠지만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 이야기도 세월만큼이
나 커져 무시무시한 전설로 바뀌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면 동굴에 머물며 사람들을 괴롭힌 괴
물,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런 비슷한 전설이 천하에 제법 많다.


▲  붉은 빛을 내는 '황금동굴의 빛나는 생명체' 모형들

▲  동굴 아쿠아월드(Aqua world)

동굴 속에 물고기를 담은 수족관이 있다면 믿겠는가? 바로 그 믿음의 현장이 광명동굴의 아쿠
아월드이다. 어떻게 동굴 속에 수족관을 만들 생각을 했는지 참 생각이 기발하기 그지 없는데
동굴에서 무한리필로 쏟아지는 지하 암반수를 활용하여 1급수에서 사는 물고기와 천하에 여러
물고기를 담아 조촐하게 아쿠아월드를 꾸몄다. 물론 물고기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  조그만 물고기의 세상, 동굴 아쿠아월드 수족관

▲  브라질 아마존강에서 넘어온 무서운 물고기, 피라냐
피라냐는 아마존 원주민 말로 '이빨이 있는 물고기'란 뜻이다. 날카로운 이로
아무거나 물어뜯는 미친 물고기로 사람까지도 물어뜯어 죽게 만든다.
저 쥐방울만한 물고기가 말이다.

▲  다양한 수족관과 물고기가 있는 동굴 아쿠아월드 내부

▲  스크린이 있는 동굴 예술의전당

동굴 남쪽 구석에는 '동굴 예술의 전당'이라 불리는 공간이 있다. 이곳은 동굴 내부에서 가장
너른 공간으로 광산 시절에는 폭파 등의 위험한 일을 할 때 임시 대피소로 쓰였다. 그랬던 현
장이 문화예술 공간으로 상큼하게 변신하여 영화, 음악회, 뮤지컬, 패션쇼, 3D홀로그램 영상
등이 열린다. (350석 규모임)
2012년에 무대와 객석을 만들고 시범용으로 영화를 여러 차례 상영하여 좋은 호응을 얻었으며,
2013년에 스크린을 설치하여 그해 6월 29일 개관하였다. 이 땅 유일의 동굴 속 예술의전당으로
동굴 속살에 이렇게 극장 겸 공연장을 닦을 생각을 하다니 참으로 깜찍한 아이디어 같다. 계절
과 날씨에 방해 받지 않고 언제든 상영이나 공연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다만 깊은 굴 속이라
만약에 사태에 대비할 재난 메뉴얼은 꼭 필요하다.

* 매일 3D홀로그램 영상을 상영한다. 동굴 요정 아이샤와 쿠오가 동굴을 탐험하는 이야기를 다
  룬 3D입체 영상물로 상영 소요시간은 3분 30분 정도 (상영시간은 30분 마다, 변경 가능)


▲  동굴 예술의전당과 위로 향하는 계단
한여름에 여기서 공포 영화를 본다면 참 효과가 클 것 같다. 거기에 정선
화암동굴에서 여름마다 열린다는 귀신체험도 겯드린다면 아주 몸살날 듯.

▲  황금길

동굴아쿠아월드와 예술의전당에서 북쪽으로 가면 황금길이라 불리는 구간이 나온다. 금이 적지
않게 나왔던 동굴의 이력과 부자를 꿈꾸는 속인(俗人)들의 바램을 담아 황금길이라 했는데, 소
망을 적은 황금패를 걸어두는 소망의 벽이 있으며, 숲속 나무에서 나오는 음이온을 깃들여 놓
아 관람객들의 건강도 조금은 배려해주고 있다.


▲  황금길 구간
이곳을 거닐면 혹여 금이 뚝딱 떨어지지 않을까? 아직도 금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고 하니 곡괭이를 들고 몰래 잠입하여 무한정 캐보고 싶다.

▲  동굴 천정에 뚫린 구멍 - 동굴에 살던 용이 급하게
승천하던 자국은 아닐까?

▲  중생들의 소망을 먹고 자라는 황금길 소망의 벽

소망의 벽에는 중생들의 소망을 머금은 황금패(가짜 황금임)들이 주렁주렁 걸려있다. <황금패
를 5,000원에 구입하여 소망을 적은 다음 벽에 알아서 걸면 됨~~> 이 구간에는 건강에 좋다는
음이온이 깃들여져 있어 수복강녕(壽福康寧)의 길이라 불리기도 한다.


▲  동굴 속에 아름다운 수채화, 황금폭포

소망의 벽을 지나면 동공 속에서 울고 있는 황금폭포가 나온다. 관람객의 손길이 전혀 닿을 수
없는 곳에 자리해 있어 그야말로 그림의 떡 같은 폭포인데, 동굴 지하수를 활용해 높이 3.6m의
멋드러진 폭포를 빚었다.
시간당 약 1.2톤의 물이 흐르고 있어 가뭄으로 신음하는 바깥 세상과 달리 수량은 풍부하며 황
금빛 조명을 달아놓아 늘 황금색을 자아낸다. 다른 동굴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진귀한 폭포
로 광산 시절에는 호퍼(hopper)라고 채굴된 광석을 떨어뜨리던 구멍이 있었다.


▲  가짜 황금이 널부러진 황금의 방

황금폭포를 지나면 황금의 방이라 불리는 공간이 나온다. 이 역시 금이 나왔던 광산의 과거 이
력을 반영하여 지은 것인데, 마치 오래된 무덤의 내부나 숨겨진 공간의 석실(石室)처럼 분위기
를 내고 온갖 황금 덩어리를 그럴싸하게 풀어놓아 황금을 꿈꾸는 속인들의 마음에 불을 지른다.
허나 아쉽게도 저들은 모두 가짜이다. 그러니 가져갈 필요도 없다.


▲  광명동굴의 마스코트, 황금 망치와 황금을 든 아이샤(Aixia)

아이샤는 광산이나 동굴 속에서 산다는 난쟁이 요정이다. 그는 주로 금과 은, 보석이 많이 나
오는 곳에 출현한다고 하며, 그 연유로 그를 광명동굴의 마스코트로 삼아 귀여운 어린 여자아
이로 포장하여 내놓았다. 그의 황금 망치는 아무거나 뚝딱 황금으로 바꾸는 신비한 망치로 보
잘것없는 돌이라고 해도 그의 망치질을 받으면 황금으로 변신한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샤는 광명시의 창작물이 아닌 서양의 옛 신화에 나오는 존재이기 때문에 '쿠오'라
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그와 짝을 짓고 동굴 요정으로 삼아 그럴싸한 이야기를 넣었다.

이야기인즉 쿠오는 동굴을 탐험하다가 간드레(광산에서 사용하던 등)를 줍는 과정에서 인간 세
계로 통하는 입구를 발견하니 그게 바로 광명동굴이라는 것이다. 동굴을 나온 아이샤는 하늘에
떠있는 별들에게 홀딱 반해 매일 동굴에서 별을 닮은 금석(金石)을 만들었다고 한다.

동굴 마스코트를 두는 건 좋지만 굳이 양이(洋夷)들의 캐릭터와 칭호를 쓰지 말고 동굴 자체적
인 캐릭터를 만들고 이름 또한 순 한글로 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지역 이름을 따서
'광명'이라고 하는 것도 좋을 듯 함>


▲  조명빨로 살아가는 황금궁전

황금의 방 부근에는 황금궁전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앞서 황금폭포처럼 탐방로 윗쪽에 붕 떠
있어 만지기가 어려운 존재인데, 황금궁전이라 하여 무슨 궁전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며 2~
3개의 동공이 있는 곳에 조명을 달고 수시로 색을 달리하는 것이 이곳의 전부이다. 그 모습이
제법 아름다워서 황금궁전이라 이름 지은 모양이다.


▲  초록색으로 변한 황금궁전

▲  동굴 지하 세계로 내려가는 길
저 계단의 끝에 지하에 숨겨진 또다른 세상이나 저승이 있는 것은 아닐까?

▲  동굴 지하 세계로

황금 궁전을 지나면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마치 지하 끝으로 이어질 것 같은 기세로 나타난
다. 지금까지는 동굴 입구와 해발 높이가 비슷한 수평 갱도였지만 여기서부터 지하1레벨로 내
려가는 것이다. 아주 잠시 말이다.
이 계단은 광부들이 광석을 채굴하고 그것을 나르던 통로로 경사는 약 32도이다. 광산이 폐쇄
된 이후, 지하 구역에 대한 손길이 끊기면서 지하수가 슬쩍 들어와 오랫동안 물에 잠겨 있었으
나 2013년에 모두 퍼내어 길을 냈다.


 

♠  지하 세계, 광명동굴 둘러보기 (지하세계에서 와인동굴까지)

▲  귀신의 집(공포체험관)과 후덜덜한 귀신 누님 모형

동굴 지하 세계로 내려오니 귀신의 집과 처녀귀신 모형이 으시시한 모습으로 마중을 한다. 시
작부터 아주 쎄게 관람객들의 염통을 건드리고 있는데 소복을 입은 처녀귀신은 진짜 살아있는
여인처럼 보여 염통에 긴장을 더하게 한다.
다행히 움직이지는 않아 긴장의 정도는 이내 떨어지고 말지만 만약 저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면 <모형 대신 귀신이나 저승사자 분장을 한 사람을 배치하여 극적 효과를 높이는 것도 좋을
듯함~> 납량특집이 정말 따로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무서운 소리를 내며 살짝 쫓아오거나 수
평레벨로 오르는 계단을 잠시 끊어 공포 분위기를 높인다면 염통과 한여름의 무더위는 그야말
로 제대로 쫄깃해지겠지~~! 광명시는 한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  아득히 바라보이는 동굴 지하호수

광명동굴은 수평 갱도인 0레벨부터 지하 7레벨까지 총 8개 레벨로 이루어져 있다. 광산이 폐쇄
된 이후, 지하 1레벨까지 지하수가 찼으나 1레벨을 해방시키면서 2레벨 이후부터 물에 잠겨 있
다. 이들 물은 지하3레벨과 5레벨에서 나온다.

저 밑에 아득히 바라보이는 지하호수는 지하 2레벨로 접근하기가 꺼림칙할 정도로 무서운 무엇
인가가 툭 튀어나올 것 같다. 현재는 접근 불가이며 늘 암반수에 잠겨있어 비밀의 호수를 연상
케 한다.


▲  동굴 천정에 나타난 무시무시한 신비의 용

동굴 지하 세계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오면 '신비의 지하조망대'가 나온다. 이곳에는 용을 비
롯하여 여러 가지의 실감나는 모형을 만날 수 있는데, 천정에 붙어있는 용 모형은 마치 실물을
보는 듯 하여, 동굴 속에서 수백 년 동안 웅크리다가 드디어 하늘을 향해 몸을 푸는 모습 같다.
조명이 있으니 망정이지 그것마저 없는 상태에서 그를 봤다면 염통이 그야말로 땅에 떨어졌을
지도 모른다.


▲  윗쪽에서 바라본 신비의 용의 위엄

▲  광명동굴에 스미골이 나타났다~~! ▼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단단히 재미를 보았던 스미골이 광명동굴에 놀러 왔다. 그가 영화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던 공간과 이곳이 많이 비슷하기도 한데 반지의 제왕 이후 재미가 별로인지 요
즘 천하에 뜨고 있는 광명동굴까지 날라와 새롭게 안착을 했다.
나도 반지의 제왕 팬으로 그 모형을 본 것은 이곳이 처음인데 반지의 제왕을 만든 뉴질랜드 웨
타워크숍이 광명시와 손을 잡은 기념으로 간달프와 함께 제공한 것이다. 세계적인 영화의 캐릭
터를 이리 만나보다니 참 반갑기 그지 없다.


▲  네모난 상자 안에 담긴 간달프와 트롤 모형
조명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면서 밝음과 어둠 2가지를 재현한다.

▲  여러 그림과 모형이 전시된 신비의 지하조망대
지하1레벨에서 다시 수평레벨로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한 이곳은 공모전을
비롯하여 다양한 전시 공간으로 쓰이는 지하 갤러리이다.

▲  신비의 지하조망대에 전시된 여러 사진과 그림들 (공모전 작품)

▲  광명동굴 속의 유일한 샘터, 광부샘물

강원도 동해, 정선부터 제주도까지 많은 동굴을 다녀봤지만 굴 안에 샘터가 있는 굴은 광명동
굴이 처음이다. 그러고보면 이 동굴은 여러 번 사람을 놀라게 만든다.

광부샘물은 지하1레벨에서 나오는 암반수로 광산 시절 광부들이 마셨던 물인데 광산 내부는 광
물과 그것을 캐는 도구들로 늘 지저분하기 그지 없어 늘 식수 문제가 도사렸다. 그런 상황에서
이 물은 광부들의 목마름을 오랫동안 달래주던 소중한 물로 수질 검사에서도 적합 판정을 받아
여전히 샘터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샘터라고 해서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약수터가 아니라 공원 음수대와 같은 모습이다. 버튼을
누르면 물이 흔쾌히 나오는데, 한 모금 마셔보니 딱히 특별한 맛은 없다. 그냥 흔한 샘물 맛으
로 나중에 나올 와인 1잔과 함께 동굴에서 공짜로 누릴 수 있는 물이다.


▲  동굴의 빛바랜 흔적, 새우젓 저장고

가학광산이 강제로 광산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1972년 이후, 새우젓 저장고로 간신히 명맥을 유
지했다. 이곳이 깊은 지하인데다가 서늘하여 새우젓 보관에는 아주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광산
주인도 먹고 살고자 인근 소래포구에서 의뢰 받은 새우젓 보관 업무를 해주었는데, 1978년부터
2010년까지 32년 동안 그 역할을 하였다. 그 기간 소래포구를 거쳐간 새우젓은 거의 이곳의 신
세를 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새우젓 저장고의 역할은 2010년 그 막을 내렸으며, 옛 저장고 자리에는 새우젓 통이 재
현되어 이곳을 거쳐간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보여준다.


▲  불로문(不老門)

새우젓 저장고를 지나면 불로문이란 나무 현판을 내민 돌문이 나온다. 불로문 즉 '늙지 않는다
'는 뜻으로 황금 찾기와 더불어 사람들의 오랜 소망이기도 하다. 허나 아무리 늙음을 막으려고
용을 써도 우탁(禹倬)의 탄로가(嘆老歌)처럼 지름길로 알아서 찾아온다.

불로문은 바위를 뚫어서 만들었는데, 한자로 쓰인 불로문 현판은 광명 지역의 대표적인 서예가
인 운계 신성재가 예서체로 쓴 것으로 동굴을 찾은 사람들의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뜻에서 문의
이름을 불로문이라 했다.


▲  빛나는 광부 모형
황금 모형이 가득 담긴 광차를 밀고 있는 하얀 빛의 광부. 광부의 피와 땀이
서린 동굴의 과거와 노다지를 향한 광부의 소망을 그렇게 표현했다.
동굴은 바로 그 2가지 요인으로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다.

▲  옛 광산의 아련한 흔적, 조구통

조구통이란 광부들이 광석을 운반하고자 만든 조그만 구멍으로 통나무로 주변을 받쳤다. 광산
을 동굴로 손질하면서 이제 3군데만 남아있을 뿐인데, 광산 시절에는 필요에 따라 아무 때나
만들고 또한 메꾸었다. 방향에 따라서 '남나굴이','북나굴이'이라 불리기도 했고, 지하 사갱
에 만든 조구통에는 '1번 나굴이','2번 나굴이' 등 갱도의 레벨 번호를 붙이기도 했다.


▲  근대역사관에 전시된 광산 도구들

불로문을 지나 북쪽으로 가면 동굴의 100년 역사 및 옛 시흥/가학광산 시절을 머금은 근대역사
관이 나온다. 광명동굴에 걸맞게 동굴 속 컴컴한 곳에 자리를 닦은 역사관으로 광산 시절에 쓰
인 갖은 도구와 생산된 광물들, 광산을 안팎으로 재현한 디오라마 등이 전시되어 있다.


▲  광산이 토해낸 여러 광물들 (동, 아연 등)

▲  가학광산 내부 모형과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들의 모습

현재 동굴은 수평레벨 상당수와 지하1레벨 일부만 문이 열려 있다. 나머지 지하 레벨과 수많은
가지굴은 여전히 닫혀있는 상태~ (지하2레벨 이후는 물에 잠겨 있음) 이들 닫힌 공간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다 공개하기에는 솔직히 무리인 듯 싶고 적어도 지하2레벨과 소하동 방면 가지굴
까지는 해방이 되지 않을까 싶다.


▲  가학광산 외부 모형 (오른쪽이 광물을 추출하던 선광장)

▲  암석을 뚫는 기구를 이용해 가학산의 속살을 들쑤시던 광부 모형

▲  광산의 이동 공간, 동공

▲  광물을 실어나르던 광차(鑛車)

▲  이제 와인동굴로 (와인동굴 입구)

근대역사관을 둘러보고 서쪽으로 가면 다시 웜홀광장이 나온다. 여기서 관람 방향에 따라 왼쪽
(동쪽)으로 가면 (오른쪽은 바람길과 동굴 정문임) 광명동굴의 명물인 와인동굴이 마중을 한다.
 
와인동굴은 수평레벨 동쪽 굴 194m 구간으로 2015년에 와인셀러, 와인레스토랑, 와인 창고, 와
인바(와인 시음장) 등을 닦았다. 그 동굴의 끝에는 와인들이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와인 창
고가 있으며 이곳에 보관 중인 와인은 170여 종의 1,000병이 넘는다.
와인바에서는 와인을 시음할 수 있는데 무료이긴 하나 어차피 그 비용이 입장료에 포함되어 있
다. 그러니 완전 공짜는 아니며 1인당 1~2잔 정도 마실 수 있다. 물론 와인 구매도 가능하다.
이렇게 굴 속에 와인터널을 둔 것은 깊은 지하라 와인 보관과 숙성에 아주 착한 온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이곳처럼 버려진 터널이나 인공굴을 손질해 와인 숙성 공간으로 활용하여
재미를 보는 곳이 여럿 있다. (무주 머루와인동굴, 청도 와인터널 등~) 그야말로 검은 터널의
화려한 변신인 셈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단순히 와인 숙성/보관 장소로 시작했으나 와인을 체
험하고 구매하는 현장으로 차차 인기를 모으면서 지역의 주요 명소로 대박을 터트렸다.


▲  와인에 대한 설명과 빈 와인병이 좌우에 가득 널린 와인동굴

▲  와인바(와인시음장) 직전

와인바에 이르면 그곳을 지키는 사람이 알아서 와인을 따라준다. (미리 몇 잔씩 차려진 경우도
있음) 그렇게 와인을 1잔 들이키고 와인 리필을 요청하면 어지간해서는 1잔을 더 따라준다. 나
는 1잔으로는 별로 느낌이 안와서 2잔을 마셨음.


▲  와인동굴 스타일의 상큼한 와인 조명등
가만 보니 술잔에 와인을 따르는 모습이다.

▲  바람길 (와인동굴입구~웜홀광장 구간)

▲  온갖 조명등이 길을 비춰주는 바람길 (웜홀광장~동굴 정문 구간)

▲  다시 빛을 보다. (동굴 정문 직전)
우리네 인생도 광산 갱도를 방황하는 것과 비슷하다. 잘 방황하면 금 노다지를
캐는 것이고 잘못 헤매면 광산에 갇히거나 벼랑으로 곤두박질~~


 

♠  광명동굴 마무리

▲  을씨년스러운 선광장(選鑛場) <2012년 모습>

동굴 내부를 1시간 정도 둘러보고 다시 햇살이 춤추는 바깥으로 나왔다. 욕심 같아서는 동굴의
금지된 속살까지 더 누려보고 싶으나 나한테는 그 금지를 풀 수 있는 권한이 없다. 그러니 공
개 구역만 얌전히 둘러보고 나가야 된다.

동굴 남쪽에는 '선광장'이라 불리는 조금은 우울하게 생긴 공간이 있다. 이곳은 광산에서 캐낸
돌을 기계를 이용해 불에 달구거나 수작업으로 돌에 묻힌 광물을 뽑던 현장으로 광물을 빼앗긴
돌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 광산 서쪽에 쌓아두었다.
광산이 버려진 이후, 이곳에 쓰인 기계는 모두 고철로 버려지거나 엿으로 바뀌는 신세가 되었
으며, 그 작업을 했던 돌로 다진 현장과 기초석만 남아있을 뿐이라 마치 폐허가 된 고대 유적
지나 옛 군사시설, 영가(靈駕)를 보내던 화장터처럼 황량하기 그지 없다. 한밤중에 오면 은근
히 오싹할 듯~~
어쨌든 광산과 관련된 100년 이상 묵은 산업 문화유산으로 광산 바깥에 유일하게 남은 광산 시
절 흔적이라 등록문화재나 지방문화재 감으로 전혀 손색은 없어 보인다.


▲  다시 찾은 선광장

▲  광물을 추출하던 곳

▲  선광장 옆에 조성된 쉼터과 체험놀이터


▲  체험놀이터 (광물 채광 체험)

선광장 앞에는 체험놀이터가 닦여져 있다. 옛 광산에 걸맞게 광물 채광과 황금 채취, 광산모자
만들기 체험을 하는 곳으로 매표소에서 원하는 프로그램 체험권을 구입해 체험놀이터 체험부스
로 달려가 그것을 제출하고 체험에 임하면 된다. (체험 자료를 제공함)
이곳 체험 놀이는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대단한데, 모래 속에서 황금(또는 광물)을 찾고자 하는
일념들이 대단하다. 지금이야 저런 방식으로 광물과 숨바꼭질을 하지 않지만 옛날에는 저런 방
식으로 광물을 잡아냈다.

* 체험놀이터 운영시간 : 10~18시까지 (17시까지 표를 구입해야 됨)
* 체험활동 가격 : 광물채광 4,000원 / 황금채취 6,000원 / 광산모자 만들기 3,000원


▲  광명동굴 북쪽 산자락에 있는 황금노두(黃金露頭, 노두바위)

일몰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 동굴 매표소 옆 계단길을 올라 잠시 가학산의 품을 거닐었다. 계
단을 오르면 광명의 지붕인 구름산, 도덕산, 서독산, 가학산의 허리를 이어주는 산길이 나오는
데, 여기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기묘하게 생긴 커다란 바위가 두 눈을 단단히 부여잡는다.

그 바위는 '노두바위'로 근래 '황금노두'로 이름이 갈렸다. 바위 근처에 부엉이가 많이 살았다
고 해서 '부엉이바위'란 별칭도 가지고 있으며, 1912년 광산을 시작했을 때 여기서 뚫고 내려
갔다고 한다. 그러니 광명동굴이 시작된 첫 지점이 된다. 현재 그 시절에 뚫은 동공이 좁게 남
아있으며, 바위 주변에는 자갈과 온갖 조그만 돌이 가득 깔려 있고, 나무와 식물도 바위와 적
당히 거리를 두고 있어 흙과 돌만 가득한 사막이나 황량한 대지의 바위산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이국적인 풍경을 그려낸다.


▲  옆에서 본 황금노두 (바위 꼭대기에 동공이 있음)

▲  가학산 광명동굴 숲길에서 만난 쉼터

가학산 정상까지 가볼까 했으나 일몰이 눈치를 주어 중간에 있는 쉼터(윗 사진)에서 발길을 돌
렸다. 어차피 언젠가는 또 올 것이니 그때 정상까지 올라 천하를 굽어봐도 늦지는 않다.

삼삼하게 우거진 가학산 숲은 늦가을 절정에 퐁당퐁당 빠져 한참 타오르고 있었다. 성질 급한
나무들은 반년 동안 걸치던 잎사귀를 땅바닥에 떨구며 소위 낙엽을 배출하고 있다. 귀를 접고
누운 낙엽들은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하고 사람들은 낙엽 밟는 소리가 좋다며 그들을 무침히 밟
고 지나간다. 그렇게 잎은 가루가 되고, 분해자에 의해 썩고, 땅 속에 스며들어가 식물의 양분
이 되니 이것이 소위 생태계의 법칙이다.

광명동굴 숲길을 끝으로 늦가을 광명동굴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가학산에서 만난 일몰 (시흥시, 인천 방향)
칼출근/퇴근의 달인 햇님은 퇴근 시간이 임박함에 따라 슬슬 그만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꽁무니를 뺀다. 마침 그와 약속이라도 한 듯, 한무리의
구름이 몰려와 그를 가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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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임금이 만든 도심 속에 아름다운 호수, 수원 서호 ~~ (서호공원, 항미정)

 



' 도심 속의 그림 같은 호수, 수원 서호 '




 

지겨운 겨울이 저물고 봄이 완연히 내려앉던 4월의 첫 무렵, 수원에 자리한 그림 같은 호
수, 서호를 찾았다. 서호는 경부선 전철이나 열차를 타고 수원을 지날 때 차창 밖으로 본
것이 전부라 나에게는 아직 미답처(未踏處)나 다름이 없었다.

오후 3시, 화서역에서 후배를 만나 수원역 방향(남쪽)으로 조금 들어서니 봄나들이객들로
분주한 서호공원이 모습을 비춘다. <서호공원은 서호 북쪽과 동쪽에 닦여져 있음>


 

♠  수원 도심 속의 호수, 서호<西湖, 축만제(祝萬堤)>
- 경기도 지방기념물 200호

▲  서호 북쪽길 (서호공원)

인구 120만을 지닌 경기도 제일의 큰 도시이자 행정 중심지인 수원(水原), 그 도심 북서쪽에는
물을 가득 머금은 서호가 은빛물결을 글썽이며 정처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뒤흔든다. 경부선 전
철이나 열차를 타고 수원역~화서역 구간을 지날 때 서쪽으로 너른 호수가 보이는데 그곳이 바
로 서호이다.

서호는 1799년 정조 임금이 내탕금(內帑金) 30,000냥을 쏟아부어 여기산 동쪽에 조성했다. 원
래 이름은 축만제로 오래도록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정조(正祖)는 1764년 창경궁 선인문(宣人門)에서 뒤주에 갇혀 강제로 이승을 떠난 아버지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묘역, 현륭원<顯隆園, 현재 융건릉> 곁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마음에 병점
에 있던 수원부(水原府)를 지금의 수원시내로 옮기고 그 유명한 수원 화성(華城)을 구축했다.

화성을 만들면서 자신의 친위 호위부대인 장용위(壯勇衛)를 주둔시켰는데, 장졸들의 급료와 경
비를 충당하고자 화성 주변에 둔전(屯田)을 두어 경작하게 하고 4개의 호수를 만들어 농업용수
로 사용했다. 축만제는 바로 그 호수의 하나로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호란 단순한 별칭을 갖게
되었으며, 서호 주변에 넓게 둔전을 설치한 연유로 서호 서/남쪽 동네 이름이 서둔동(西屯洞)
이 되었다.
그 시절에 닦여진 4개의 호수 중 북쪽에 있는 만석거(萬石渠)가 가장 먼저 조성되었다. 1795년
5,700냥을 들여 축조했는데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지(北池)로도 불리며 현재 수원시 송죽동 만
석공원에 남아있다. 동쪽의 동지(東池)는 화홍문(華虹門) 동쪽 지동(池洞)에 있었으나 오래전
에 말라버려 체취도 남아있지 않으며 현륭원 앞에는 1797년 남지(南池)인 만년제(萬年堤)를 지
었는데, 지금도 남아있다. 그리고 끝으로 서쪽에 서호(축만제)를 지으면서 수원 화성 주변 4개
의 호수는 완성이 되었다. (그들 중 서호가 제일 넒음)

서호는 제방 길이가 1,246척, 높이 8척, 두께 7.5척, 수심 7척, 수문 2개로 이루어 있다. 제방
남쪽에는 제언절목(堤堰節目)에 따라 심은 것으로 보이는 오래된 나무들이 있으며 1803년에 축
만제둔(祝萬堤屯)을 설치해 서호를 보수,관리토록 했다. 이 관청에는 도감관(都監官)과 감관(
監官), 농감(農監) 등을 두어 관수(灌水)와 전장관리를 맡게 하였고, 도조(賭租, 둔전을 대여
하여 받는 돈이나 벼)를 통해 생기는 수입은 화성 축성고(築城庫)에 납입했다고 하니 제방 남
쪽의 경작지는 국둔전(國屯田)으로 쓰인 듯 싶다.
서호가 생김으로서 232섬지기의 경작지가 혜택을 맛보았으며, 어류자원 확보를 위해 잉어 등의
물고기도 풀었는데, 이곳 잉어는 약용(藥用)으로 점차 유명해져 궁중에 진상되기도 하였다. 또
한 명승지로도 이름을 날려 이곳에서 바라보는 낙조를 천하 일품으로 쳤으며 호수 한복판에 섬
을 띄워놓아 경치를 북돋았다.

1906년 왜(倭)가 이곳에 농사시험장을 설치하면서 조선의 농업 중심지가 되었고, 1945년 이후
에는 농촌진흥청이 들어서 이 물을 이용해 많은 농작물을 연구/개발하니 세계적인 농업학자로
씨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禹長春, 1898~1959)도 이 물의 신세를 졌다.
이처럼 농촌진흥청과 서울대 농생대 경작지(시험답) 외에도 인근 경작지 30만 평에 물을 공급
했으나 수질 오염과 시가지 개발로 경작지가 줄면서 지금은 농촌진흥청과 서울대 농생대만 사
용하고 있으며, 호수도 예전에 비해 덩치가 줄어들었다.
서호를 후광(後光)으로 삼던 농촌진흥청은 원래 서호 북쪽(현 농민회관)에 있었으나 서쪽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전주완주혁신도시로 내려갔으며, 호수 남쪽에는 농촌진흥청과 서울대 농생대
에서 관리하는 경작지가 있어 우리나라 농업 연구/발전의 역할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서호는 농촌진흥청 소유로 인해 오랫동안 속세에 금지된 호수로 있었다. 그러다가 시민들의 개
방 여론에 힘입어 2000년대에 세상을 향해 활짝 문이 열렸다. 2012년에는 서호를 둘러싼 둑방
길에 2.1km 정도의 둘레길을 조성하고 호수 북쪽과 동쪽에 서호공원을, 호수 서북쪽인 여기산
(麗妓山)에 여기산공원을 닦아 시민들에게 선사했다. <여기산에는 우장춘 묘역과 선사유적지,
철새서식지가 있음>

수원 도심에 그림처럼 펼쳐진 서호는 수원, 화성 지역에서 가장 큰 저수지로 지금의 수원을 있
게한 수원의 아버지, 정조 임금이 화성과 더불어 수원에게 남긴 소중한 꿀단지이다. 봄에는 개
나리와 진달래, 벚꽃이 앞다투어 나들이객을 유혹하고 가을에는 오색 단풍이 옛 농촌진흥청과
여기산, 서호 주변을 몸살이 날 정도로 아름답게 물들이며 겨울에는 눈꽃이 하얗게 설경을 이
룬다. (수원시가 선정한 눈꽃 명소 중의 하나임)
서호는 현재 '수원 축만제'란 이름으로 경기도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

※ 서호 찾아가기 (2017년 6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경부선 화서역 5,6번 출구를 나와서 남쪽(수원역 방면)으로 도보 10분 (항미정
  은 화서역에서 도보 25분)
* 수원역(AK플라자)에서 30, 30-1, 42번 시내버스를 타고 숙지중고교(서호공원)에서 하차, 남
  쪽에 바로 보이는 육교를 건너면 서호(서호공원)이다.
* 서호공원 소재지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436-1
* 서호(축만제) 소재지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  서호 북쪽에서 바라본 서호와 섬

서호 한복판에는 호수의 경치를 구수하게 해주는 섬이 외롭게 떠 있다. 섬 이름은 따로 없으며
그곳으로 인도하는 배도, 다리도 없어 접근이 불가능한 그야말로 그림의 떡 같은 섬이다. 그는
서호 초창기 때부터 있었으며 근래에 새롭게 손질되었다.


▲  서호 북쪽에서 바라본 서호 동쪽과 화서동(華西洞)

서호공원을 비롯한 서호 주변에는 봄 기운을 누리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눈이 내리고 강추위가 판을 쳤지만 이제는 봄의 따스한 햇살이 천하를 부드럽게 보듬는다.

우리는 서호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았다. 서호가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넓기
는 마찬가지, 2.1km의 서호 둘레길을 도는데 항미정 관람시간과 휴식시간을 포함해 거의 1시간
반 정도 걸렸다.
호수에서는 잔잔하게 물보라가 피어오르고 은빛물결이 주름을 이루며 글썽인다. 호수에서 불어
오는 바람도 이제는 시원하게 느껴진다.


▲  물결이 주름진 서호 서쪽 ▼


▲  봄나들이객과 산책객들로 북적거리는 서호공원 (서호 북쪽)


▲  서호천이 서호로 변신하는 현장 (새싹교 주변)

서호를 가득 채운 물은 모두 어디서 왔을까? 하늘에서 떨어진 것일까? 아니면 지하수를 쥐어짜
서 채운 것일까? 그는 수원 북쪽 덕성산에서 발원한 서호천(西湖川)을 막아서 만든 것이다.
서호천은 광교산에서 나온 영화천(만석거를 경유함) 물줄기까지 받아들여 서호에서 단체로 모
임을 가진 다음 항미정 옆 수문을 타고 수원 서부와 화성, 평택 땅을 거쳐 서해바다 아산만으
로 흘러간다.


▲  서호로 길을 재촉하는 서호천 (새싹교에서 바라본 모습)
하천 동쪽에 노란 피부의 개나리가 만개해 봄의 기운을 돕고 있다.

▲  녹색과 붉은색이 입혀진 서호 서쪽길
(왼쪽 볏집은 서호 철새간이탐조대)

서호는 상류에서 따스한 물(13도)이 흘러들어와 겨울에도 잘 얼지 않는다. 그래서 일찍이 철새
들이 눈독을 들이면서 4계절 내내 흰뺨검둥오리, 가무우지, 가창오리, 왜가리 등이 무수히 찾
아온다. 이들은 서호 서쪽 여기산에 둥지를 틀고 서호에서 물고기를 잡아 삶을 꾸린다.

수원 도심 속 철새들의 성지로 그들을 관찰하라는 뜻에서 서쪽길에 볏집으로 벽을 만들고 성인
눈 높이 정도에 조그만 구멍을 내어 그들을 훔쳐볼 수 있게 했는데, 대놓고 살펴보면 철새들도
다소 민망해하거나 경계를 품을 것이니 그런 속임수를 쓴 것이다.


▲  서쪽길에서 바라본 서호 - 물결이 참 잔잔하기도 하다.

▲  서쪽길 개나리 너머로 본 서호와 섬 (가운데 보이는 것이 섬)


 

♠  서호의 풍치를 드높이는 양념과 같은 존재, 항미정(杭尾亭)
- 수원시 향토유적 1호

▲  서호 서남쪽 수문에서 바라본 항미정

서호 서남쪽 언덕에는 항미정이란 조촐한 모습의 정자가 호수를 굽어보고 있다. 'ㄱ'(또는 'ㄴ
') 모양의 납도리집으로 홀처마로 이루어진 43.5㎡의 팔작지붕 건물인데 앞쪽(동쪽)은 뻥 뚫려
있고, 뒤쪽(서쪽)은 벽으로 막혀 있다.

이 정자는 서호 초창기부터 있던 것이 아닌 1831년에 생긴 것으로 당시 화성유수(華城留守) 박
기수(朴綺壽)가 서호에서 풍류를 즐기고자 세웠다. 그는 석양에 비치는 여기산의 그림자를 보
고 팔자 좋게 소식<蘇軾, 소동파(蘇東坡)>의 시를 읊었는데, 그 과정에서 '서호는 항주(杭州)
의 미목(眉目)같다'고 해서 항주와 미목의 1글자를 취해 항미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서호의 풍치를 아름답게 해주는 양념으로 서호와 함께 오랫동안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근래 개
방되었으며 개방 이전에 농촌진흥청에서 정자 서쪽 언덕을 뒤집고 도서관을 만들어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항미정은 툇마루를 갖추고 있는데, 화서역을 기준으로 서호 둘레길을 1바퀴 돌 경우 이곳이 거
의 중간 지점이 된다. 그러니 여기서 잠시 쉬어 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단 정자 내부로 들어
가면 안됨) 게다가 그늘진 곳이라 땀도 알아서 줄행랑을 칠 정도로 시원하며 정자 주변에는 푸
른 잔디가 곱게 입혀져 있다.


▲  정면에서 바라본 항미정 - 정자로 인도하는 계단을 오르면
바로 항미정이 몸을 내민다.

▲  남쪽에서 바라본 항미정

▲  북쪽에서 바라본 항미정

◀  항미정 현판과 툇마루
정자 내부는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그러니
툇마루에 잠시 걸터 앉는 수준으로만
머물기 바란다.


▲  항미정에서 바라본 서호와 버드나무

▲  서호 서남쪽 수문 위에 걸린 다리

▲  서남쪽 수문 다리에서 바라본 남쪽 둑방

서호에 모인 물은 서남쪽 수문(항미정 옆)과 동남쪽 수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간다. 서남쪽 수
문은 매일 일정량의 물을 배출하여 서호천의 바다 행을 돕고 있으며, 동남쪽 수문은 농촌진흥
청(국립식량과학원)과 서울대 농생대 경작지에 물을 제공하는 용도로 쓰여 서남쪽 수문보다는
다소 한가하다.


 

♠  서호 마무리

▲  옛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한 서호 남쪽 둑방

서호를 지키고 선 남쪽 둑방은 서울 풍납토성(風納土城) 만큼이나 높고 두껍다. 서호천과 만석
거에서 내려온 막대한 물을 담아야 되기 때문인데, 둑방 남쪽은 여기보다 지대가 낮은 경작지
라 둑방이 자칫 와해된다면 그 경작지는 물론이고 서둔동과 수원역 주변까지 피해를 받는다.
남쪽 둑방길은 서호 동/서/북쪽길보다 조금 넓은 편으로 다른 길과 달리 비포장 흙길을 유지하
고 있어 정겹기만 하다. 또한 오래된 나무들이 둑방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고색의 풍치까지 더
해준다.


▲  둑방에 자라난 오래된 소나무의 위엄

▲  둑방에 세워진 축만제 비석 - 고색의 때가 묻어난 비석 피부에 새겨진
'축만제' 3자가 꽤 패기가 있어 보인다.

▲  남쪽 둑방에서 바라본 서호와 여기산 (오른쪽에 보이는 산)
서호는 여기산과 호수 주변의 동/식물들, 하늘을 떠다니는 온갖 존재들이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는 그들의 커다란 거울이다.

▲  남쪽 둑방길에는 소나무가 여럿 심어져 조촐하게 운치와
그늘을 드리운다.

▲  늘씬하게 잘 빠진 남쪽 둑방길 ▼



▲  둑방 남쪽에 펼쳐진 농촌진흥청(국립식량과학원), 서울대 농생대 경작지
<시험답(試驗畓)> - 서호의 물을 먹고 자라는 시험 경작지로 연구/개발된
다양한 육종(育種)들이 이곳을 거쳐 천하에 보급된다.

▲  남쪽 둑방에서 바라본 서호와 섬

▲  서호 동남쪽에서 바라본 서호와 여기산, 그리고 호수와 마주한
푸른 하늘과 구름의 무리들

▲  갈대가 살랑거리는 서호 동남쪽

▲  서호 동남쪽과 남쪽 둑방

▲  서호 동쪽 산책로

▲  서호 동쪽에서 바라본 서호와 섬

▲  서호 동북쪽 (왼쪽에 보이는 산이 여기산)

▲  서호 동북쪽 산책로

▲  경부선 육교에서 바라본 서호(서호공원)

▲  경부선 육교에서 바라본 경부선과 서호공원

서호를 1바퀴 둘러보니 1시간 30분이 훌쩍 흘렀다. 아직 일몰까지는 여유가 있어 1곳을 더 둘
러보기로 하고 정처를 물색하다가 수원 동북부 우만동에 있는 봉녕사(奉寧寺)가 문득 뇌리 속
에 스쳐 지나가 그곳을 찾기로 했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은 여기서 흔쾌히 마무리를 짓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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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서해바다 포구, 인천 소래포구 나들이 ~~~ (소래철교, 장도포대지, 논현포대)

 


' 서울에서 가까운 바다 포구, 인천 소래포구 나들이 '

▲  옛 수인선의 아련한 흔적, 소래철교


 

겨울 제국(帝國)의 한복판이자 새해 첫 무렵에 친한 후배와 인천 동남부 끝으머리에 자리
한 소래포구와 논현포대를 찾았다.

햇님이 하늘 한복판에 걸려있던 오후 2시에 신도림역(1,2호선)에서 후배를 만나 개봉역(1
호선)에서 광명시내버스 1번(개봉역↔거모동)으로 바꿔타고 광명4거리, 계수동, 은행지구
, 삼미시장을 두루 거쳐 월곶포구에서 두 발을 내렸다.

월곶(月串)은 경기도 시흥시(始興市)이 일원으로 서해 갯벌을 사이에 두고 북쪽으로 인천
관할인 소래포구와 마주보고 있다. 월곶이란 이름은 육지에서 바다로 내민 모습이 반달처
럼 생겼다고 해서 유래된 것으로 달을 뜻하는 '달월'이라 불리기도 했다. (수인선에 달월
역이 있음)
조선 후기에는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설치되어 인근 바다를 지켰으며, 1991년까지 갯벌로
전해오다가 1992년 8월 시흥시가 이 일대 564,938㎡의 갯벌을 생매장시키고 그 위에 위락
시설과 아파트단지, 항구를 갖춘 해안 마을을 만들었다.

월곶은 소래포구와 함께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해안 포구로 종합어시장과 활어회, 조개구
이 등을 취급하는 식당들이 즐비하며, 한때는 소래포구의 염통을 쫄깃하게 건드릴 정도로
잘나갔으나 소래와 오이도(烏耳島)에게 밀려 예전만은 못한 실정이다.
월곶포구의 구조를 보면 북쪽에 2012년에 개통된 수인선 월곶역이 있고, 서쪽에 풍림아이
원1~2차 아파트, 동쪽에는 풍림아이원3~4차아파트가 있다. 그리고 중앙에 월곶동주민센터
가 있고, 남쪽에 어선이 들락거리는 월곶포구가 자리한다.


▲  월곶해안로와 서해 갯벌
거대한 늪지대처럼 무시무시해 보이는 서해 갯벌 너머로 인천 영역인
에코메트로10~12단지가 바라보인다.


 

♠  옛 수인선(水仁線)의 아련한 흔적, 소래철교(蘇來鐵橋)

▲  갯벌에 다리를 담군 새 수인선 다리, 그 너머로 옛 소래철교가 보인다.

월곶에서 소래포구로 넘어가려면 소래의 오랜 명물인 소래철교를 건너야 된다. (수인선 전철을
이용해서 건너는 방법도 있음) 이 철교는 옛 수인선(수원~송도)의 몇 남지 않은 흔적이자 수인
선 협궤(狹軌)열차가 기적소리를 날리며 바퀴자국을 남겼던 다리로 인천 남동구와 시흥시의 경
계를 이루고 있다.

수인선은 1937년 여름에 개통되었는데, 건설비 절약을 위해 일반 궤도(1.435mm)의 절반 정도인
협궤선(0.765m)을 깔았다. 이 철로는 왜정(倭政)이 소래와 달월, 안산 지역에서 생산되는 소금
과 1972년에 없어진 옛 수려선(수원~여주)을 통해 이천과 여주의 쌀을 인천으로 수송하려는 목
적으로 신설되었다. (수려선도 협궤선임)
처음에는 왜인이 세운 경동철도가 운영을 했으나 해방 이후 국가 소유가 되었으며, 인천 송도(
松島)와 논현, 소래, 달월, 군자, 원곡, 사리, 어천, 수원(水原)을 이어주면서 수인선 주변 주
민들의 소중한 발이 되어주었다. 그들은 소금과 농산물, 수산물을 싸들고 인천과 수원으로 이
동하여 판매를 했는데, 송도역 앞에는 그들로 인해 조촐하게 시장이 형성되기도 했다.
허나 승객 감소와 협궤열차 유지의 어려움으로 운행 횟수가 야금야금 줄어들었고, 1992년 '송
도~소래' 구간을 자르고 '소래~수원' 구간만 다니다가 1994년 9월 나머지 구간마저 절단을 내
면서 이 땅에 유일하게 남은 협궤열차와 협궤선은 끄집어내기 어려운 추억의 저편으로 완전히
종적을 감추게 된다.
이후 버려진 수인선을 광역전철로 다시 단장하면서 지루한 공사 끝에 2012년 6월에 '송도~오이
도' 구간이 개통되어 옛 수인선의 뒤를 잇고 있다. <지금은 인천역까지 연장되어 '인천~송도~
원인재~오이도' 구간을 운행하고 있음, 나머지 수원역~한대앞역 구간은 2018년 말 개통 예정>


▲  장도포대지에서 바라본 소래철교

▲  댕구산(소래포구 서쪽이자 장도포대지 뒷산)에서 바라본 소래철교

수인선 열차가 신세를 졌던 소래철교는 1937년에 개통되었다. 철교의 길이는 126.5m, 폭 1.2m
로 수인선이 폐선되자 자연히 사람들의 통행 다리로 활용되었다. 소래포구와 1992년에 개발된
월곶을 바로 이어주는 다리가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철교에서 인도교(人道橋)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소래철교는 소래포구의 명물로 지금까지 변함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으나 인천과 시흥 경계에 자리한 탓에 말썽도 다소 있었다. 2010년 2월
한국철도시설공단에서 철교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내렸는데, 이때 시흥시는 통행 안
전을 이유로 부실 것을 외쳤지만 소래철교로 단단히 재미를 본 인천시는 철교 보존을 외치면서
서로 갈등이 생겼다. 다행히 국토해양부가 다리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철거를 면하게 되었고 철
교의 건강과 통행 안전을 위해 철교를 보수했다.

2011년 여름, 문화재청에서 '인천 소래철교'란 이름으로 등록문화재로 삼으려고 하자 이에 뿔
이 난 시흥시는 '소래철교'로 할 것을 요구하면서 다시 쓸데없는 갈등을 빚었다. 그래서 아직
까지 등록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 (이래서 우리나라는 지방자치제를 하면 안됨)
또한 다리 보강공사가 끝나자 인천시에서 소래포구 축제에 맞춰 철교를 다시 개방했으나 시흥
시에서 소래 관광객의 월곶포구 불법주차와 쓰레기 무단투기로 월곶동 주민들이 고통을 겪는다
며 다리 남쪽에 철조망을 치고 사람들의 통행을 막아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인천에게는 이
철교가 소래포구를 두툼하게 수식해주는 소중한 존재이지만 시흥시에게는 월곶의 관광/외식 수
요를 소래로 빨아들이고 소래의 뒷치닥거리나 하는 인천의 얄미운 빨대로 보았던 것이다.


▲  소래철교를 건너다

소래철교는 비록 철교에서 은퇴하긴 했지만 이 땅의 철도 교량 가운데 가장 폭이 좁다. 그래서
2명이 지나가면 좌우가 꽉 찬다. 협궤열차가 바퀴를 굴렸던 선로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철판
을 깔았다. 그 밑은 썰물 때는 검은 갯벌이, 밀물 때는 서해바다가 넝실거리며 고깃배가 들어
온다. 철교 좌우에는 난간을 둘러 사람들의 안전을 배려했다.

이 철교가 소래의 명물이 되다보니 온갖 이상한 말이 생겨닜다. 소래포구를 찾은 연인들이 손
을 잡고 이 다리를 건너면 헤어지지 않는다는 말부터 해서 다리를 건너면서 소원을 빌 때 포구
로 들어가는 배가 있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까지.. 무슨 불상이나 신앙 대상물도 아닌 철
도가 지나갔던 철교일 뿐인데, 다리의 인기가 높다보니 그런 허무맹랑한 말까지 생겨나 철교를
좀 무안하게 만든다.


▲  소래철교에서 바라본 갯벌과 소래포구 (재래어시장)

소래철교를 건너면 동쪽에 어선들이 정박한 소래포구와 재래어시장, 서쪽에는 근래 복원된 장
도포대지가 있다. (소래포구에는 재래어시장과 종합어시장 등 2개의 어시장이 있음)

소래포구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해안 포구이자 해안 어시장으로 인기가 자자하다. 섬을 제외
한 인천 본토의 거의 유일한 포구이자 서울 근교의 거의 유일한 재래 어항(漁港)으로 썰물 때
는 서해바다가 저멀리 줄행랑을 치면서 검은 갯벌이 고스란히 드러나 포구로써의 실감이 좀 떨
어지지만 밀물이 되면 포구 바로 앞까지 바다가 밀려와 제법 포구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이때 배들이 들어와 바다에서 건져온 것들을 풀어놓는다.

소래는 인천과 월곶을 이어주던 나룻터이자 포구로 주변에 경작지가 많아 제법 괜찮게 살던 어
촌이었다. 왜정 때 인근에 소래염전이 생기고 수인선이 개통되면서 소금 수탈의 현장이 되기도
했으며, 해방 이후 북쪽 실향민들이 모여들어 정착을 했다. 포구 사람들은 바다에 나가 새우와
물고기를 잡아 젓갈을 만들었고, 수인선 열차를 타고 서울과 인천, 수원 등을 오가며 새우젓을
팔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소래는 한산했던 포구였다.
그러다가 1974년 인천내항이 준공되어 새우잡이를 하던 조그만 어선의 출입이 어려워지자 인천
항에서 가까운 소래로 배들이 몰려들면서 졸지에 새우파시로 부상하게 된다. 이때부터 서울/인
천 근교의 대표적인 포구로 두각을 드러냈으며, 매년 500만 명이 넘는 관광객과 장꾼들이 몰려
와 인천의 소중한 관광 꿀단지가 되었다. 포구의 대표적인 특산물로는 젓갈과 새우, 꽃게, 소
라 등이 있다.

비록 포구는 작지만 10톤 미만의 어선 200척 정도를 보유하고 있으며, 어시장에는 300개 정도
의 점포와 식당, 선술집이 들어서 있다. 휴일은 물론 평일에도 이곳을 찾는 수요가 상당하며,
싱싱한 회와 생선찌개, 각종 어패류와 건어류, 생선튀김, 젓갈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생선을
취급하는 점포에서는 즉석에서 회를 쳐주는데, 어시장 남쪽 포구 쪽에 그런 집이 많다.

소래란 이름은 지형이 소라처럼 생겨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와 냇가에 숲이 많은 솔내에서 비
롯되었다는 설, 지형이 좁아서 생겼다는 설이 있으며, 660년에 신라와 당이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군을 이끌고 온 소정방(蘇定方)이 산동 내주(來州)를 출발해 이곳에 상륙하여 머물렀다
고 해서 소래(蘇來)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정답은 아니다.


▲  댕구산에서 바라본 소래포구 재래어시장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소래 지역은 소래포구와 어시장이 전부인 인천의 변두리 어촌이었다.
그러다가 개발의 칼춤이 포구 주변을 싹 뒤엎으면서 어시장과 포구, 말쑥하게 솟은 고층 아파
트와 온갖 빌딩이 어색한 조화를 이루는 현장이 되었다.


▲  소래포구 재래어시장 내부
우리는 어시장을 간단히 둘러보고 바로 이웃에 자리한 장도포대지로 이동했다.


 

♠  소래포구 서쪽에 자리한 장도포대지(獐島砲臺址)
- 인천 지방문화재자료 19호

▲  소래철교에서 바라본 장도포대지와 댕구산

소래포구 서쪽 해안가에는 장도포대지와 댕구산이 자리해 있다. 소래철교에서도 뻔히 바라보이
는 그들은 예전에는 잡초만 헝클어진 언덕이었으나 최근에 산뜻하게 손질을 하면서 소래포구를
한층 꾸며주는 해안공원이 되었다.

장도포대는 1879년 화도진(花島鎭) 소속 포대로 설치되었다. 1876년 2월, 강화도조약(江華島條
約) 이후 왜국(倭國)이 서해바다를 멋대로 측량하며 개항지를 물색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인천
을 개항지로 요구할 것으로 짐작하고 혹시나 모를 외세의 침략에 대비해 어영대장 신정희(御營
大將 申正熙)와 강화유수 이경하(江華留守 李景夏)에게 명해 동인천에 화도진을 설치했다. 이
때 인천과 부평(富平) 해안 요충지에 장도포대, 논현포대 등 여러 포대를 설치해 인천 바다를
지키게 했다.

허나 1894년 화도진이 철폐되자 이들 포대는 거의 철거되었으며, 장도포대도 이때 없어진 것으
로 여겨진다. 워낙에 별처럼 나타나 별처럼 사라진 탓에 생전의 모습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터만 아련히 남아있었는데, 1999년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는 '화도진도(花島鎭圖)'를 살펴본 결
과 포좌(砲座) 2개는 바다를 향하고 있고, 1개는 동남쪽을 향하고 있어 총 3개의 포좌가 있었
음이 밝혀졌다. 이후 2001년 지방문화재로 지정해 개발의 칼질 앞에서 그 터를 구제했으며 근
래에 화도진도를 바탕으로 흙으로 토성을 씌워 포대를 복원했다.

장도포대 바로 옆에는 댕구산이란 조그만 언덕이 소래포구와 서해바다를 말없이 굽어보고 있다.
높이는 고작 40m 정도에 불과하지만 소래 일대가 바다에 접한 낮은 지대다 보니 제법 돋보인다.
그는 원래 한반도와 분리된 소소한 섬으로 그 모습이 마치 노루처럼 생겨서 '장도(獐島)' 또는
'노루목', '노렴'이라 불렸다. 장도포대의 이름도 바로 이 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후 대자연
의 힘으로 한반도의 일원이 되었으며, 왜정이 수인선을 만들 때 언덕 동쪽을 죄다 밀어버려 지
금은 반쯤 남아있는 상태이다.

댕구산이란 이름은 이곳에 포대를 설치하면서 대완구(大碗口)란 대포를 설치했는데, 그 대완구
가 댕구로 통용되면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대포산이란 뜻이다.


▲  공원으로 변신한 장도포대지, 댕구산
소래역사관 건너편에 장도포대지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  복원된 장도포대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현재 장도포대는 2개의 포좌가 재현되어 있다. 돌로 포대를 쌓고 윗쪽과 바깥쪽에 흙을 덮어서
토성처럼 만들었는데, 포좌 2개는 바다 쪽으로 구멍을 내었다. 근래 복원된 탓에 고색의 내음
은 아직 여물지 않았으나 한겨울이라 포대에 기댄 잡초들이 누런색을 발산하고 있고 포대를 이
루고 있는 돌들도 색깔이 제각각이라 조금은 빛바래 보인다.


▲  서쪽에서 바라본 장도포대

▲  동쪽에서 바라본 장도포대와 수인선 전철

▲  바다를 향해 입을 연 장도포대 대포의 소소한 위엄

▲  장도포대에서 바라본 서해 갯벌
마치 석유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 유전처럼 온통 검은색이다. 다가가면 크게
혼이 날 것 같은 무시무시한 모습이지만 차가운 겉모습과 달리
많은 생물들이 의지하며 살아가는 생물의 보고이다.


※ 소래포구, 장도포대지 찾아가기 (2017년 2월 기준)
* 수인선 소래포구역 2번 출구를 나와서 오른쪽 소래역로를 따라 8분 정도 가면 소래역사관이
  다. 여기서 왼쪽(동쪽)으로 가면 바로 오른쪽에 장도포대지 정문이 있고, 곧바로 가면 소래
  철교 입구와 소래어시장이다. (수인선은 인천역에서 1호선, 원인재역에서 인천1호선, 오이도
  역에서 4호선과 연결됨)
* 1호선 개봉역<1번 출구를 나와서 도보 3분>에서 1번 시내버스/ 7호선 광명4거리역<4번 출구>
  에서 1, 510번 시내버스/ 1호선 광명역(고속전철역) 동쪽 정류장에서 11-3번 시내버스를 타
  고 소래포구입구나 월곶해안로에서 하차, 소래철교를 건너 소래포구로 이동한다.
* 인천1호선 선학역(4번 출구), 문학경기장역(2번 출구)에서 754번 시내버스 이용

★ 소래포구, 장도포대지 관람정보
* 매년 10월에는 소래포구축제가 열린다. 꽃게 등의 수산물 시식회, 특산물 판매, 꽃게/전어낚
  시 체험, 소래습지생태공원 갯벌체험, 갈대축제 등이 있으며, 소래철교와 소래빛의거리에서
  는 아름다운 야경이 펼쳐진다. 소래포구축제 홈페이지는 아래 댕구산 정상 사진을 클릭한다.
  (문의 인천소래포구추진위원회 남동구 도시관리공단 ☎ 032-466-3811)
* 장도포대지와 댕구산 관람시간 : 9시~20시 <동절기(11~3월)는 18시까지, 입장료 없음>
* 소래포구 소재지 :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111외
* 장도포대지 소재지 :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111-13 (아암대로 1614)


▲  소래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댕구산 정상
정상에 오르면 소래포구와 어시장, 월곶포구, 소래 주변 아파트들이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호구포에 자리한 조선 후기 국방 유적 - 논현포대(論峴砲臺)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6호

소래포구 일대를 둘러보고 고가식으로 되어있는 수인선을 따라 서쪽으로 걸어갔다. 인천논현역
과 호구포역을 지나면 논현포대근린공원이 나오는데, 그곳에 이날 마지막 행선지인 논현포대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호구포(虎口浦) 남쪽에 자리한 논현포대는 앞서 장도포대와 같은 목적으로 1879년에 화도진 소
속 포대로 축조되었다. 지금이야 주변이 죄다 아파트(논현휴먼시아)와 공장(남동공단)으로 바
다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이곳까지 바다가 거침없이 넝실거렸다. 게다가 포좌 앞
에는 갯골수로가 흐르고 있었는데, 그 수로를 타고 혹여 침투할지 모를 외래 선박을 막으려는
목적도 띄고 있었다.
이 포대는 1894년 화도진이 철폐되면서 문을 닫았으며, 장도포대와 달리 약간의 흔적만 전해오
다가 근래 말끔하게 정비되었다. 포대는 포좌 아랫쪽에 잡석을 깔고 중단과 상단에 장대석(長
臺石)을 쌓았으며, 그 위에 흙을 덮었다. 넓게 다진 포좌에는 이동식 중포 2문이 설치된 것으
로 여겨지며, 예전에는 호구포대라 불렸으나 논현포대로 이름이 갈렸다.

논현포대가 자리한 호구포는 명칭 그대로 호랑이 입이란 뜻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범아가리'
라 불렸는데, 호구포 뒷산인 오봉산(五峯山) 자락에 호랑이 입 모양을 한 커다란 호구암(虎口
岩)이 떡하니 자리해 있었다. 그 바위는 검은 피부를 지니고 있어 주변 바위와는 다소 색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며, 호구포 사람들은 그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기며 무척 애지중지했다.

호구포에는 참으로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세상 만물이란 늘 양면성을 띄고 있는 터
라 누군가에게는 꽤 소중한 존재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징그러운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바로 호
구암이 그렇다.
이 바위는 대부도(大阜島)와 안산(安山)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안산에 무덤을 쓴 지
체 높은 세력가의 자손이 매우 귀하여 대를 잇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끙끙 앓던 차에
마침 집 앞을 지나던 승려가 '호구암이 산소를 향해 입을 크게 벌리며 마치 무덤을 삼킬 기세
라 자손이 귀한 것이오'
알려주었다. 
그래서 자손들은 호구암을 옮기기로 했으나, 바위가 워낙 집채보다 커서 옮기는 것이 불가능하
자 호랑이 입을 부시면 될 것이라 생각, 아예 호랑이 턱에 해당되는 부분을 도끼로 찍어 부셔
버렸다. 그랬더니만 이후부터 자손이 번성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왜정 시절에 호구포에 염전
을 만들면서 바위가 강제로 매몰되어 없어지게 되었는데, 마을의 명물이자 수호신을 잃어버린
호구포 사람들은 곡소리를 냈지만 안산 지역에 조상묘를 둔 이들은 쾌재를 외쳤다고 한다.

그리고 안산의 일원이 된 대부도 역시 호구암의 눈치를 적지 않게 보고 있던 모양이다. 대부도
에서는 이상하게도 개의 번식이 잘되지 않았는데, 이유를 알고보니 호랑이를 상징하는 호구암
이 대부도를 뚫어지라 보고 있어 그 기운 때문에 개들이 금방 죽어 나갔다는 것이다. 개는 호
랑이의 밥이래나 뭐래나?
허나 왜정 때 바위가 사라지자 개의 무덤이던 대부도는 개의 낙원이 되었다고 한다. 호구암이
위엄을 부릴 때는 안산과 대부도 지역은 울상, 바위 인근 주민은 싱글벙글이었지만 바위가 사
라지니 안산과 대부도 지역은 싱글벙글, 바위 인근 주민은 울상이 되었다.


▲  동쪽에서 바라본 논현포대 - 포대의 모습은 장도포대와 비슷하다.

▲  서쪽에서 바라본 논현포대
흙으로 두툼하게 다진 포대 아랫도리에 대포가 마음껏 포탄을 뿜을 수 있는
조그만 창을 내었다.

▲  강화도 포대를 연상케하는 논현포대 포좌
대포는 어디로 마실 갔는지 보이지 않고 그의 빈 자리에는 겨울 제국을
원망하는 낙엽들로 가득하다.

▲  청동중포(靑銅中砲)와 청동대포(靑銅大砲)의 위엄
청동대포는 1854년, 청동중포는 1876년에 제작된 것으로 1994년에 복원했다.
쟁쟁한 후배 대포들에게 밀려 이제는 뒷전으로 밀려난 녹슨 신세이지만
왕년에 이양선들의 염통을 쫄깃하게 건드린 역전의 대포들로
그 정정함은 아직 잃지 않았다.

▲  논현포대에서 바라본 포대 서쪽 쉼터

▲  논현포대에서 바라본 호구포역

논현포대를 둘러보니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겨울의 한복판이라 햇님도 17시만 넘으면 꽁무니
를 빼기가 바쁘고 겨울을 등에 업은 땅꺼미가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칼바람이 몰아치니 더 이
상 돌아다니기도 고통스럽다. 그래서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따로 없는 인천 논현동(論峴洞)을
뒤로 하며 얌전히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소래포구를 중심으로 한 새해 맞이 인천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논현포대 찾아가기 (2017년 2월 기준)
* 지하철 수인선 호구포역 2번 출구를 나와서 서쪽(원인재역 방향)으로 도보 6~7분, 논현포대
  근린공원 남쪽에 자리함 (관람시간은 제한 없음)
* 소재지 -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648-1 (호구포로 2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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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굳게 잠겨있던 아름다운 고갯길, 북한산 우이령 늦가을 나들이 (우이령길)


' 북한산 뒷통수에 숨겨진 아름다운 고갯길 ~~~
우이령 늦가을 나들이 '

▲ 우이령에서 바라본 오봉

▲ 석굴암입구 유격광장

▲ 우이령길 우이동 구간


 

가을 누님이 눈이 시리도록 곱게 천하를 물들이던 10월의 끝 무렵에 친한 여인네들과 북
한산(삼각산)의 숨겨진 뒷통수, 우이령(우이령길)을 찾았다.

우이령은 개방 이후 애타게 인연을 짓고 싶었지만 딱히 인연이 없어 애태우다가 10월 중순
에 아는 여인네의 제안으로 콩볶듯 계획을 잡게 되었다. 이곳은 미리 탐방예약을 해야되는
데, 평일은 그나마 널널하나 주말에는 자리 구하기가 어렵다. 탐방 인원을 매일 1,000명으
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가 송추 출발로 4명 자리를 확보하여 그냥 흔쾌히 가기만
하면 된다. 하여 친분이 있는 2명을 더 소환하여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비경의 우
이령 탐험을 떠났다.

우이령은 야속하게도 입장시간(오후 2시까지)과 퇴장시간(오후 4시까지)이 정해져 있어 우
이령길 완주에 석굴암 답사까지 널널하게 겯드리려면 가급적 오전에 가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아침 9시부터 입장)
잠시 일상을 접고 떠나는 나들이인데 그것마저 콩볶듯이 가면 좀 그렇겠지. 하여 오전 9시
에 연신내역에서 일행들을 만나 김밥과 간단한 먹거리를 사들고 북한산(삼각산) 등산객 인
파 속으로 들어가 송추로 가는 시내버스를 기다렸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한참 단풍철이다 보니 북한산으로 가는 34, 704번 시내버스
가 타지도 못할 정도로 가축 수송 상태로 오는 것이다. 게다가 여기서 버스를 기다리는 등
산객도 족히 100명은 넘어 육중한 바퀴가 뭉개질 정도로 가득찬 버스에 서로 타고자 경쟁
이 치열하다. 허나 구제받는 사람은 불과 서너 명, 나머지는 강제로 다음 버스를 기다리지
만 오는 버스 모두 무심하게도 가축 수송을 면치 못하고 있다. 마음은 이미 우이령을 헤매
고 있지만 몸은 아직도 서울 연신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연신내에서 40분을 소비하다가 이러면 정말 못갈듯 싶어서 조금이라도 더 전진하고
자 삼천사입구로 가는 701번 시내버스(진관차고지↔종로2가)를 탔다. 그것을 타고 입곡3거
리에서 34, 704번으로 갈아탈 생각이었지. 그렇게 701번에 의지해 입곡3거리(삼천리골입구)
에서 내렸는데, 여기서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한산으로 가는 행락객들의 차량들로 도로
가 거의 혼돈의 상태라 걷는 거나 차를 타고 가는 거나 속도가 비슷할 정도이다.

입곡3거리에서 일말의 희망을 품으며 버스를 기다렸으나, 역시나 자리가 빠지지 않아 여전
히 승차 불가, 그래서 백화사입구와 흥국사입구(노고산)까지 걸어가 기회를 엿보았나 역시
승차 불가, 하여 등산객이 많이 빠지는 북한산성입구까지 걸어갔다. 아직까지도 서울을 벗
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서울 땅을 나가기가 어려웠던 말인가?

북한산성입구 정류장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며 버스를 기다리니 버벅거리는 차량들 행
렬을 쿨하게 뚫고 서울시내버스 704번(부곡리↔서울역)이 구세주처럼 나타난다. 이곳이 북
한산 서부의 대표 기점지라 산꾼들이 많이 빠지기 때문에 그제서야 들어갈 공간이 생긴다.
이제 살았구나 싶어 기쁜 마음에 승차했으나 자리는 없다. 여전히 가득찬 상태. 다행히 도
로를 가득 메운 차량들의 행렬도 여기서 끝을 맺는다. 죄다 여기서 북한산성으로 우회전하
기 때문이다.
그렇게 힘겹게 송추로 가는 버스를 잡아 타고 고양시(高陽市)로 넘어가 효자비와 안골, 사
기동에서 많은 산꾼을 쏟아내니 그제서야 자리가 생긴다.

솔고개를 넘어 양주시(楊州市) 땅으로 진입, 우이령/오봉산석굴암입구 정류장에 발을 내린
다. 연신내에서 이곳까지는 겨우 12km 정도인데 그 짧은 거리를 오는데 무려 2시간이나 걸
린 것이다. 그렇게 모진 과정을 겪고 이곳에 이르니 마치 목적지에 다 온 듯, 안도의 한숨
이 나온다. 버스에서 내릴 때는 정말 기쁨이 가득했지. 허나 내려보니 현실은 시궁창.. 뜻
하지 않은 나들이 강제 전쟁으로 혼과 기운은 2/3 이상 빠졌고 시간도 벌써 11시가 넘었다.
우이령 탐방은 이제서야 시작이거늘, 겨우 그 입구에 온 것에 불과하다.

벌써부터 지친 몸과 마음, 그리고 심심한 뱃속을 달래고자 정류장 부근 편의점에서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었다. 원래는 산책 중간에 먹으려고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먹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아름다운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속세에서 가져온 김밥과 온갖 과자, 그리고 편의점에서 구입한 컵라면 등으로 열심히 몸을
달래니 다시금 사기가 오르기 시작한다. 이제 밥도 두둑히 먹었으니 슬슬 움직여볼까~! 근
데 어느 세월에 저 까마득하게 보이는 우이령을 넘어가나 은근히 막막해진다. 거기에 식곤
증까지 거침없이 희롱을 하니 사기가 다시 떨어지려고 한다. 그래도 우이령을 목적으로 왔
으니 가야지. 힘차게 발걸음을 떼며 우이령의 품으로 들어선다.


 

♠ 우이령의 품으로 (교현리~석굴암 입구 구간)

▲ 교현(송추) 탐방지원센터

우이령(오봉산 석굴암) 입구에서 10분 정도 들어가면 속세와 우이령의 경계를 짓는 교현탐방지
원센터가 나온다. 길 주변에는 군부대 시설이 즐비해 부푼 마음을 품고 찾아온 탐방객에게 적
지 않은 긴장감을 준다.

교현탐방지원센터는 우이령의 북쪽 검문소로 여기서 소정의 출입 절차를 밟아야 되는데, 예약
자의 신분증과 예약확인증을 보여주면 된다. 동행자의 신분증은 상황에 따라 검사를 안하는 경
우도 있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늘 있으니 반드시 지참해야 뒷탈이 없을 것이다. 또한 아무리 예
약을 했어도 예약자의 신분증과 예약확인증이 없으면 최순실이나 대통령급이 아닌 이상은 아무
리 날고 기어도 들여보내지 않는다. 우이령이 비록 개방이 되었다고는 하나 아직은 북악산(北
岳山, 백악산) 한양도성 능선처럼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렇게 출입 절차를 마치고 꿈에도 그린 고갯길, 우이령으로 들어선다. 그럼 여기서 잠시 우이
령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 북한산과 도봉산의 숨겨진 뒷통수이자 비단처럼 아름다운 고갯길, 우이령(牛耳嶺)
우이령은 순 우리말로 소귀고개라고 한다. 높이 600~800m를 다투는 북한산(삼각산) 영역과 도
봉산(道峯山) 영역 사이에 약간 움푹 들어간 고개로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橋峴里)와 서울 우
이동(牛耳洞)을 잇고 있다. 고갯길 정상을 기준으로 서남쪽은 북한산, 동북쪽은 도봉산 영역이
며 그들의 뒷통수에 자리한다.

예로부터 송추(교현리) 지역과 서울 동북부(강북구)를 빠르게 이어주는 고갯길로 그리 주목을
받는 길은 아니었다.
6.25가 터지자 파주와 양주 사람들이 대거 이 고개로 넘어왔으며, 서울을 수복한 이후에는 병
력 이동과 물자 수송을 위해 미군 공병대가 넓게 길을 닦아 탱크와 4발 차량의 통행이 가능하
게 되었다. 1951년 1.4후퇴 때도 많은 피난민들이 이곳을 통해 넘어왔고, 1953년 휴전까지 많
은 군인과 군수물자가 이 고개의 신세를 지면서 반짝 전성기를 누린다.

휴전 이후 지역 사람들이 이용하다가 1968년 북한의 김신조 공비 패거리가 서울 도심을 습격한
이른바 1.21사태가 터지자 1969년 국가 안보와 서울 방어를 이유로 지금의 교현탐방지원센터에
서 우이탐방지원센터에 이르는 4.46km 구간의 통행이 전면 금지된다. 이때 우이령 뿐만 아니라
인왕산(仁王山)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 삼천사계곡, 북한산성 내부까지 통제 구역으로 묶이
는 비운을 겪는다.
그렇게 금지된 고개가 되버린 우이령은 사람의 발길이 뚝 끊기고 군인과 경찰의 훈련지로 이용
되면서 교현탐방지원센터에서 석굴암입구 구간은 물론 석굴암 밑까지 군사시설이 들어섰다.

우이령 개방에 대해서는 1990년대부터 조금씩 이야기가 나왔다. 1994년 4월 17일에는 시민환경
대회를 위해 딱 하루 개방되기도 했으며, 이후 개방 여론이 급물살을 타면서 드디어 2009년 7
월, 제한적이나마 빗장이 열린 것이다. 개방에 앞서 군부대 시설로 망가진 부분은 자연친화적
으로 정비했고 오봉산을 관망하는 전망대를 비롯하여 여러 편의시설과 안내문을 설치했다.

그 망할 북한 공비 때문에 40년이나 강제로 닫힌 우이령, 허나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유명한
말이 있듯이 그 덕분에 지구에 민폐나 끼치며 사는 인간들의 발길이 거의 끊기면서 이곳 생태
계는 매우 우수한 수준으로 보존될 수 있었다. 인간의 개발 칼질에 오갈데 없어진 수리부엉이
와 소쩍새, 산개나리 등 희귀 동/식물이 앞다투어 찾아와 안긴 자연의 보물 창고이자 서울 근
교의 듬직한 허파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들어서면 북한산의 다른 구역보다 공기가 꽤 상
큼하고 청정하다.
물론 우이령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1994년 이후 서울시와 경기도에서 서울 동북 지역과 경기도
서북 지역을 잇는 도로망 개설을 위해 우이령에 도로를 내려고 했다. 이때 길 너비를 현재 5~6
m에서 8m로 넓히려고 했지. 하지만 환경/시민단체, 국방부가 쌍수를 들고 반대했고, 반대 여론
이 상당하여 보기 좋게 무산되었다. 이곳에 도로가 놓이면 양주 서남부지역과 고양/파주에서
서울 강북구 지역을 빠르게 이어주게 되며, 강북구 지역에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를 빠르게
잇는 역할까지 하게 되면서 나름 소중한 길이 되어줄 것이나 대신 우이령의 희생을 감수해야
된다. 1969년 이곳이 통제가 되지 않았다면 진작에 개발의 칼질이 자행되었겠지. 그 인연으로
이곳은 차량의 도로가 되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왓다. 이것이 하늘이 우이령에게 준 운명이다.

우이령을 개방하면서 이곳의 자연환경을 지키고자 매일 탐방인원을 1,000명으로 제한했다. 덕
분에 천하에서 가장 탐방밀도(1㎢당 5만명)가 높은 북한산국립공원에서 가장 인적이 드문 한적
한 곳으로 남게 되었지. 또한 지정된 길(우이령길과 석굴암으로 가는 길)만 이용토록 했으며,
계곡과 숲으로의 통행을 금했다. 그리고 입장시간과 퇴장시간에 엄하게 제한을 두어 혹여 다른
생각을 품지 못하게 했다. 허나 사람이란 존재가 지구에는 도움이 안되는지라 마음대로 샛길을
개척하고 식물을 채취하는 행위가 발생해 종종 문제가 되고 있다.

우이령길은 수도권 도보 나들이의 성지(聖地)로 일컬어지는 북한산둘레길의 일원이다. 북한산
둘레길은 총 21구간 71.5km로 그중에서 가장 으뜸은 바로 우이령길이 아닐까 싶다. (우이령길
찬양~~!!)
우이령길 구간은 교현리 우이령 입구에서 우이동 광장에 이르는 6.8km이다. 이중 4.46km가 아
무나 들어갈 수 없는 예약 탐방구간이며, 교현리 우이령 입구에서 교현탐방지원센터, 우이동광
장에서 우이탐방지원센터 구간은 예약과 상관없이 언제든지 거닐 수 있다. 그럼 지금부터 우이
령길을 둘러보도록 하자.

※ 우이령길 찾아가기 (2016년 11월 기준)
① 송추 교현리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3호선 구파발역(1,2번 출구)에서 서울
704번, 의정부 34번 시내버스를 타고 우이령(오봉산 석굴암입구) 하차
* 1,4호선 서울역(4,9-1번 출구), 2호선 을지로입구역(3번 출구), 1호선 종각역(3-1번 출구),
5호선 서대문역(4번 출구), 3호선 홍제역(2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3호선 녹번역(1번 출
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704번 시내버스 이용
② 서울 우이동
* 지하철 4호선 수유역(3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01, 120, 130, 153번 시내버스 이용
(120번과 130번은 우이동 종점, 나머지는 우이동 도선사입구 하차) / 수유역 6번 출구에서
도봉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우이동 종점 하차
* 지하철 4,7호선 노원역 5번 출구에서 1144번, 7번 출구에서 노원구 마을버스 15번을 타고 우
이동 도선사입구 하차
* 우이동 도선사입구(우이동 광장)에서 우이탐방지원센터까지 도보 35분

★ 우이령 탐방 정보 (2016년 11월 기준)
* 우이령은 국립공원관리공단 홈페이지의 '국립공원 예약' 메뉴에 있는 '북한산 우이령 탐방'
게시판에서 예약을 하면 된다. 예약은 10시부터 하루 전 17시까지 하면 된다.
예약 홈페이지로 이동하기
* 탐방객은 매일 1,000명으로 제한하고 있으며, 송추 500명, 우이동 500명이다. 인터넷 예약은
매일 800명으로 1인당 10명까지 가능하다. 전화 예약자는 200명으로 노령층(65세 이상)과 장
애인, 외국인 관광객에 한한다. (전화예약은 9~17시까지)
* 입장시간은 9시부터 14시까지며, 16시까지 무조건 하산을 마쳐야 된다. (16시까지 교현/우이
탐방지원센터까지 나와야 됨) 늦게 하산하면 자칫 벌금을 뜯길 수 있다.
* 석굴암 신도와 탐방객은 우이령길을 예약할 필요가 없으며, 교현탐방지원센터에서 신분증 확
인을 거쳐 들어가면 된다. (석굴암까지만 이동 가능)
* 교현탐방지원센터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 산47-10 (예약/문의 ☎ 031-855-6559)
* 우이탐방지원센터 -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산74 (예약/문의 ☎ 02-998-8365)


▲ 우이령길 교현리 구간 (1)

교현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본격적인 우이령 탐방이 시작된다. 속인(俗人)들이 이 길을 걷고자
40년이나 기다렸던 그 금지된 길이 내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가을도 우이령이 마음에 들었는
지 길을 멈추고 주변을 온통 화사하게 불지른다. 이렇게 늦가을과 우이령의 만남으로 우이령은
아름다운 비단길로 거듭났다.

우이령길은 시작부터 끝까지 길이 완만하다. 서서히 올라갔다가 다시 서서히 내려가는 아주 느
긋한 코스로 각박한 속세살이와는 정반대이다. 게다가 흙길이 잘 닦여져 있고, 주변 풍경이 매
우 고와 결코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짧게 느껴져 흔쾌히 왕복을 뛰고 싶은 마음이다.

교현탐방지원센터에서 석굴암입구 유격광장까지는 약 2.3km로 30분 정도 걸린다. 동쪽에는 도
봉산과 오봉이 빚은 우이령계곡이 때묻지 않은 청정함을 간직하며 속세로 흐르는데, 아쉽게도
계곡은 금지된 구역이다. 게다가 길과도 거리를 제법 두고 있어 휴전선 너머 동해바다를 바라
보듯 해야 된다. 하지만 어찌하랴. 이곳을 속세로부터 지키려면 그럴 수 밖에.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 우이령길 교현리 구간 (2)
휴일을 맞이하며 북한산과 도봉산의 왠만한 등산로는 늦가을 나들이 인파로 세계
탐방밀도 1위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미어터지는데 반해 이곳은 여기가
북한산의 일부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한적하기 그지 없다.

▲ 우이령길 교현리 구간 (3)

▲ 우이령길 교현리 구간 (4)
숲이 무성해 강렬한 햇빛도 고개를 숙인다.

▲ 우이령길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흘러가는 우이령 계곡
속인의 발길이 오랫동안 금지된 저곳에 선녀(仙女) 누님의 비밀 욕탕이
있는 것은 아닐까? 달 깊은 밤에 몰래 찾아와 확인해 보고 싶다~~

▲ 늦가을이 온 산천에 알록달록 불을 질렀다.
늦가을의 즐거운 불장난은 11월 이후 겨울 제국에 의해 모두 진압될 것이다.
단풍으로 타오르는 산 너머로 바위 봉우리인 오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 우이령 계곡과 오봉 산줄기
우이령길 교현리 구간에서는 어디서든 오봉이 바라보인다.

▲ 우이령길 교현리 구간 (5)


 

♠ 우이령의 심장으로

▲ 석굴암입구 유격광장

우이령길 심장의 서쪽인 석굴암입구 유격광장은 우이령길에서 가장 넓은 공간이다. 이곳은 군
부대의 유격 연병장으로 광장 동쪽에 서 있는 유격 표석이 이곳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여기서
길은 크게 2갈래로 갈리는데, 석등을 옆구리에 낀 다리를 건너 오봉으로 향하는 북쪽 길을 오
르면 석굴암이고, 광장 남쪽으로 난 길을 직진하면 우이령길 정상이다.

유격장은 주로 석굴암으로 오르는 길목에 분포하고 있는데, 군대를 나온 이 땅의 사내들로 하
여금 당시의 향수를 진하게 불러일으킨다. 우이령이 아무리 개방이 되어 탐방 장소로 인기 몰
이를 하고 있어도 이들은 여전히 군사용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니 철조망 안에 있거나 접근이
통제된 유격시설은 괜히 접근치 않도록 한다. 이처럼 우이령은 민간인의 등산/나들이와 군인의
유격장이 공존하는 곳으로 남북분단의 우울한 현실이 담긴 조금은 씁쓸한 현장이기도 하다.

흙이 잘 입혀진 유격광장은 터가 매우 넓어 그늘진 곳에는 산꾼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피고 밥
과 행동식을 먹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우이동까지는 딱히 휴식 장소는 없으니 교현리에서 오를
경우에는 적어도 여기서 먹고 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광장 동쪽에는 우이령 상류를 막아서 만
든 조그만 호수가 있는데, 곱게 몸을 치장한 나무들이 호수를 거울로 삼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
듬느라 여념이 없다. 지금은 서로 아름다움을 뽐내지만 1달 뒤면 겨울 제국에게 영혼까지 털려
호수에 비친 앙상한 모습에 시름에 잠길 것이다.


▲ 석굴암으로 인도하는 길 (석굴암입구)

우이령에 왔다면 오봉 서쪽에 안긴 석굴암(石窟庵)은 꼭 둘러보기 바란다. 첩첩한 산주름에 제
대로 묻힌 석굴암은 우이령 개방과 함께 흥한 기운이 찾아들어 요즘 제법 잘나가고 있는데, 절
로 오르는 길은 좀 각박하지만 경내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꽤나 일품이다. 그리고 점심시간에는
공양을 제공하고 있으니 시간이 맞으면 공양 1그릇 들고 가는 것도 좋다. (정월대보름에는 오
곡밥에 나물을, 동짓날에는 팥죽을 제공함) 또한 매년 10월에는 번뇌가 쫓아오다 졸도할 정도
의 이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 단풍음악회까지 연다. (2016년에는 10월 29일 토요일에 열림)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지나친다고 내가 이곳을 그냥 통과할리는 없을 터, 잠시 우이령을
잊고 석굴암을 찾았다. 석굴암에 관한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유격 표석의 위엄 - 이제는 이곳의 상징물이 되어 우이령길 사진의
단골 모델로 자주 등장한다.

▲ 유격광장에서 바라본 오봉의 위엄 (왼쪽 바위 봉우리는 관음봉)

우이령길 교현리 구간에서는 어디서든 오봉(五峯, 660m)이 바라보인다. 오봉산(五峯山)이라 불
리기도 하는데, 이들은 도봉산의 뒷쪽으로 5개의 봉우리가 위엄을 뽐내며 속세를 굽어본다. 이
런 멋드러진 봉우리에는 옛 사람들이 붙인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있기 마련이라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호랑이가 담배 피다 암에 걸리던 시절, 양주 고을에 총각 5명이 살고 있었는데, 양주목(楊州牧
) 원님(사또)의 외동딸이 참 이쁘다고 하여 서로 장가를 들고자 시합을 벌였다. 아마도 원님이
시합을 붙인 듯 싶다. 시합이란 바로 우이령 서쪽에 있는 상장능선에 올라 그곳의 바위를 오봉
에 던져올리는 것, 그들 가운데 누가 이겼는지는 전설을 지은 옛사람의 생각이 짧아 나오지는
않지만 그들로 인해 오봉이 저렇게 묘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사람 주제에 어찌
저런 봉우리를 만들 수 있을까?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을 사람 따위가 황당한
전설로 가로채려고 하니 한편으로는 괘씸하기도 하다.

우이령에서 뻔히 보이는 오봉이지만 정작 여기서는 오르지 못한다. 그곳에 가려면 무조건 도봉
산을 거쳐야 되며, 우이령과 석굴암에서 가는 길은 모두 통제되었다.


▲ 석굴암입구~우이령길 정상 구간 (1)

석굴암입구 유격광장을 지나면 우이령길은 기존보다 조금 작아지고 길을 둘러싼 숲은 더욱 삼
삼해진다. 여기서부터 우이탐방지원센터까지가 우이령길의 단연 갑(甲)이자 심장과 같은 구간
으로 인간의 언어와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시건방질 정도로 미치도록 아름답다. 벌써부터 누렇
게 뜬 낙엽이 길 주변을 잔잔히 덮어 겨울 제국의 도래가 멀지 않았음을 가늠케 하며, 사람도
별로 없어 뚜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미안할 정도로 한적하다. 그야말로 산바람과 새의 지저귀
는 소리가 전부인 자연의 공간이다. 산내음이 진하게 우려진 이런 길을 거닐면 아무리 문학의
문외한이라도 시(詩) 한 수, 읊어주거나 지어야 되는데, 그럴 실력이 되지 못함이 애석하다.


▲ 석굴암입구~우이령길 정상 구간 (2)

▲ 석굴암입구~우이령길 정상 구간에서 만난 조그만 계곡

▲ 오봉과 우이령 산줄기 너머로 보이는 도봉산의 잘생긴 뒷통수

▲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오봉의 기묘한 위엄

▲ 석굴암입구~우이령길 정상 구간 (3)

▲ 우이령길 정상과 대전차 장애물 (우이동 방향)

▲ 우이령길 정상과 대전차 장애물 (송추 방향)

석굴암입구에서 살랑살랑 20분 정도 오르면 우이령길 정상이다. 여기서부터 경기도 양주시에서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으로 바뀌는데, 행정구역이 싹 바뀐다고 해서 고갯길과 주변 풍경이 죄다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이 편의상 그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우이령길 정상에는 돌로 쌓은 방어시설이 있는데, 이는 탱크의 저지를 막는 대전차(對戰車) 장
애물(고가 낙석)이다. 이 장애물은 6.25 이후 북한의 침공에 대비코자 만든 것으로 전차(탱크)
가 밀려올 때 석축 위에 올려진 콘크리트 덩어리를 떨어뜨려 탱크의 진입을 막는 시설이다. 서
울과 경기도 북부(고양, 양주, 구리, 남양주 방면)로 넘어가는 고개, 경기도와 강원도 북부권
고갯길에 주로 설치되었는데, 다행히 저들이 제대로 쓰인 적은 없으며, 근래에는 서울 주변을
중심으로 도시 개발과 도로 개선으로 조금씩 없어지는 추세다. (파주나 양주, 포천, 연천, 화
천 등 전방 쪽은 많이 남아있음)

남북분단이 빚은 어이없는 작품으로 겉모습은 참 정떨어지지만 20세기 중반을 대표하는 국방
시설로 등록문화재로 삼아 보존할 가치는 충분하다 여겨진다. 혹여 나중에 통일이 되고 주변
나라를 아우르는 놀라운 시대가 와도 꼭 국방 유적으로 남겨야 될 것이다.


 

♠ 우이령 마무리 (서울 우이동 구간)

▲ 우이령정상~우이탐방지원센터 구간 (1)

우이령길 정상을 지나면 길은 내리막으로 변하고 그나마 조금 가까워진 하늘은 다시 멀어져 간
다. 우이동으로 내려가는 길도 앞서 교현리 구간처럼 느긋한 경사로 길도 잘 닦여져 있어 등산
보다는 마실이나 산책의 기분이 진하게 든다.

우이령의 우이동 구간은 딱히 명소나 특별한 존재는 없으며, 그저 삼삼하고 비단처럼 고운 숲
길의 연속이다. 하늘과 멀어질 수록 숲에 가려 보이지 않던 속세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 길을 15분 정도 내려가면 우이령길의 남쪽 검문소인 우이탐방지원센터가 나온다. 이로써
우이령길의 금지된 구간은 모두 완주한 셈이며, 여기서부터 우이동 광장까지는 항시 개방되는
구간이다.


▲ 돌탑의 보금자리
속인(俗人)들이 쌓아올린 산악신앙의 소박한 현장 ▼



▲ 우이령정상~우이탐방지원센터 구간 (2)

▲ 우이령정상~우이탐방지원센터 구간 (3)

▲ 우이령정상~우이탐방지원센터 구간 (4)

▲ 우이탐방지원센터 주변

우이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비로소 자유의 공간이다. 이곳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우이동
유원지의 번잡함을 피하고 싶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되며, 우이령을 넘어온 북한산둘레길은 바
로 오른쪽 길로 해서 내려간다. 그리고 먹거리나 우이동유원지를 원한다면 그냥 직진한다.

둘레길의 일원인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우이동 계곡인데, 다리 주변에 사람들이 쌓아놓은 돌탑
들이 우리나라 7천만 인구 마냥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마이산 탑사(馬耳山 塔寺)의 간지나는 돌
탑을 꿈꾸며 조촐히 장관을 이룬다. 우이동은 우리 동네 옆이라 자주 가는 곳이지만 우이동광
장에서 우이령 구간은 처음 와본다.


▲ 우이동계곡 돌탑들
돌탑이 뿌리를 내린 돌에 푸른 이끼가 가득하니 이곳이 그만큼 청정하다는 뜻이다.

▲ 바위 위에 왠 소나무 분재
돌로 두툼히 석축을 쌓고 키 작은 소나무를 심었다.

▲ 우이동유원지 외곽길 (1)

▲ 우이동유원지 외곽길 (2)

우이령 남쪽에 옥의 티처럼 자리한 우이동유원지는 우이동광장에서 우이탐방지원센터 직전에
이르는 약 1.4km의 길쭉한 산간 마을이다. 이곳은 다른 이름 돋는 산이나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산채비빔밥과 닭백숙, 오리고기, 도토리묵, 동동주, 두부 음식, 고기류, 동동주 등을 다루는
온갖 식당들이 즐비하며, 민박과 산장 등의 숙박시설, 수련원과 연수원 등이 정신없이 들어서
있어 서울 지역 대학교와 직장, 동호회의 당일, 1박 모임 장소로 인기가 높다.

이곳은 엄연히 북한산국립공원 구역이지만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이전부터 형성된 마을이다.
북한산국립공원이 2000년 이후 북한산성(北漢山城) 내부에 오래된 자연 마을인 북한동(北漢洞)
마을을 철거하고 등산로 기점 가운데 어수선한 곳을 많이 정비하는 기염을 토했지만 우이동유
원지는 아직 손을 대지 못했다. 유원지 남쪽에는 훼밀리랜드와 그린파크호텔도 있지만 현재는
망해서 문이 닫힌 상태이다.

우이동유원지의 번잡함을 피하고 싶다면 외곽길(유원지 기준 서쪽 길, 우이탐방지원센터에서
오른쪽 길 이용)을 이용하기 바란다. 수목이 삼삼히 우거진 완연한 숲길로 길 동쪽에는 유원지
식당과 숙박업소의 철담과 나무 담장이 길게 둘러져 있다. 또한 길 중간에 유원지로 들어가는
조그만 길이 여럿 있으니 먹거리를 원한다면 그 길로 들어가면 된다.

그렇게 우이동유원지 외곽길을 정신 없이 내려가 오후 4시 반에 우이동 광장에 도착했다. 우이
탐방지원센터는 3시 반에 통과했다. 산을 탔으니 조촐하게 뒷풀이는 해야 되겠지. 우이동유원
지에 양의 털처럼 널린 식당에서 먹으려고 했으나 이곳이 초행길이고 정보가 어두워 다 지나쳤
다. 그래서 서울 동북부 부도심인 수유역으로 나와 닭갈비에 맥주로 늦은 점심을 배불리 먹고
그날의 일정을 기분 좋게 마무리지었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우이령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우이령이 비록 제약이 많은 공
간이라 아쉬움은 다소 있지만 서울 근교에서 제법 환경이 잘 보존된 구역인만큼 지금처럼 제한
적 탐방제도를 유지했으면 좋겠다. 근래 양주시에서 예약이 필요없는 자유탐방을 요구하고 있
지만 그건 우이령의 숨통을 끊는 행위라고 본다. 하루 예약 인원을 지금보다 조금 늘리는 선에
서 끝내면 좋을 듯 싶으며, 휴식년제를 도입해 적으면 몇 달, 길면 몇년 정도의 휴식기를 주어
속인들로부터 자유를 주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것이 우이령길이 서울 근교의 숨겨진 아름다
운 숲길로 길이 길이 보존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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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 성지 순례 ~~~ 경기 북부 제일의 명품 계곡, 포천 백운산 백운계곡 (흥룡사)



' 포천(抱川) 백운계곡, 흥룡사 여름 나들이 '

▲  포천 백운계곡


 

무더운 여름 제국(帝國)이 한참 번영을 누리던 7월 한복판에 수도권 피서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찬양 받고 있는 포천(抱川) 백운계곡을 찾았다.
그날은 백운계곡 외에도 피서의 새로운 성지로 주목 받고 있는 비둘기낭폭포도 염두에 두
고 도봉동 집을 나섰다. 허나 비둘기낭폭포는 교통이 매우 좋지 않은데다가 포천시청에서
불과 5분이란 시간 차이로 그곳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그 다음 차는 2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되기에 그 폭포는 포기하고 백운계곡으로 길을 잡았다.
이제 피서철의 시작이고 그날은 평화로운 평일이라 사람도 별로 없으므로 혼자 가도 전혀
꿀릴 것은 없었다.

오전 11시에 집에서 포천시내버스 72-3번을 타고 의정부시와, 경기도2청사, 축석고개, 송
우리를 지나 포천시청에 두 발을 내린다. 여기서 달랑 5분 차이로 비둘기낭폭포(대회산리
)로 가는 버스를 놓쳐 바로 백운계곡으로 눈을 돌렸다. 하여 이동으로 가는 포천좌석버스
138-5번(도평리↔의정부역)을 잡아 타고 1시간을 정신 없이 내달려 이동에서 발을 내린다.
이동(二東)은 갈비와 막걸리로 유명한 포천 동북부 끝 동네로 수많은 명산과 계곡을 품고
있다. 그래서 수도권 피서의 성지이자 소고기, 술의 성지로 일찌감치 명성을 날리고 있으
며, 전방과도 가까워 군부대도 많이 포진해 있다. 

이동에서 백운동(백운계곡)까지는 7km 남짓의 가까운 거리이나 시내버스는 겨우 하루에 5
~6번 밖에 없고 시간도 전혀 맞지가 않는다. 그러니 천상 화천군 사창리로 넘어가는 직행
버스의 신세를 져야 된다.
이 직행버스(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는 40~6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데, 운이 좋은지 딱 5~
6분 만에 그 반가운 모습을 비춘다. 그래서 그 버스를 잡아타고 10분 정도를 달려 백운동
에 발을 내린다. 이 노선은 이동 외에도 도평리 버스종점과 일동에서도 승차가 가능하다.


 

♠  백운계곡(白雲溪谷), 흥룡사 입문

▲  백운교에서 바라본 백운계곡 (광덕고개, 사창리 방향)

▲  백운교에서 바라본 백운계곡 (도평리 방향)

경기도(京畿道) 북부권(의정부, 동두천, 연천, 포천)과 동부권(남양주, 가평, 양평)에는 기라
성 같은 계곡들이 즐비하다. 그중에서 단연 으뜸이자 명성이 자자한 계곡은 아무래도 포천 백
운계곡이 아닐까 싶다.
이 계곡은 영평8경의 하나로 조선시대부터 썩 잘나갔던 명소였다. <선유담(仙遊潭)이 영평8경
의 일원임> 그 전통과 위엄은 여전히 녹슬지 않아 지금도 수도권의 이름난 계곡이자 피서의 성
지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것을 반영하듯 372번 지방도(포화로)와 나란히 흐르는 계곡
주변에는 식당과 숙박업소, 캠핑장이 즐비하며, 주말과 피서철에는 등산과 나들이, 피서 수요
가 급증해 여전히 2차선을 고수하고 있는 372번 지방도는 물론 인근 이동, 일동까지 차량들로
단단히 몸살을 앓는다.

백운계곡은
백운산 서쪽 자락에서 발원(發源)하여 흥룡사를 경유하는 계곡과 광덕고개 서남쪽
에서 발원하여 372번 지방도를 따라가는 물줄기('선유담계곡'이라고도 함)를 일컫는데, 이들은
백운교에서 하나가 되어 도평천(都坪川)이 되고, 수입리에서 수입천(水入川)과 합쳐져 영평천
(永平川)으로 간판을 바꾼 다음, 전곡 동쪽에서 한탄강(漢灘江)과 합쳐진다.

직행버스가 바퀴를 멈춘 백운동 정류장은 백운교에서 동쪽으로 약 230m 지점에 있는데, 여기서
찻길을 따라 백운교로 가는 것보다는 정류장 남쪽으로 난 다리를 건너 가기를 권한다. 차량 왕
래가 빈번해 그들의 눈칫밥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약한 매연까지 무심히 떠넘기고 가
버리니 청정한 계곡과 삼삼한 숲으로 이루어진 이곳까지 와서 그런 굴욕을 당하기는 싫다.

백운교 남쪽에는 이동갈비집이 쭉 늘어서 있는데, 그 남쪽에 차량들이 바퀴를 뻗으며 자는 주
차장이 넓게 자리한다. 허나 피서철 직전이고 주중이라 빈 공간이 90%를 넘으며, 식당들도 사
람보다 빈 자리가 훨씬 많아 매우 한산하다. 다들 피서철 대목을 꿈꾸고 있을텐데, 날씨가 그
들의 마음을 몰라주고 비를 마구 퍼부으니 그들도 참 속이 탈 것이다.

백운계곡 주차장을 지나면 삼삼한 숲에 묻힌 오솔길이 나온다. 그 길을 접어들면 채 2분도 안
되어 흥룡사 표석이 있는 흥룡사입구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서 왼쪽 계단길을 오르면 바로 흥
룡사 경내가 펼쳐진다. 이곳은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도 아직 갖추지 못하였으나 계곡과 삼삼
한 숲이 속세의 기운을 털어버리기에 딱 그만이라 이것으로도 일주문의 대체 역할은 충분하다.


▲  흥룡사입구

▲  금색 피부를 지닌 포대화상(布袋和尙)과 깨알같은 불전함

흥룡사 경내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금빛 피부를 자랑하는 똥배 포대화상이 불전함을 들이밀며
돈을 요구한다. 어떻게 절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돈부터 요구하고 있는지 절에 대한 이미
지를 순식간에 부정적으로 몰아놓는다.
그런 포대화상을 지나치면 정면에 우람하게 생긴 대웅전이, 왼쪽에는 요사와 찻집이, 오른쪽에
는 샘터와 공양간이 자리해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흥룡사의 내력을 더듬어 보도록 하자.

※ 백운계곡을 옆에 낀 심산유곡의 절집, 세속화된 불교의 씁쓸한 흑역사를 보여주었던 현장,
   ~~ 백운산 흥룡사(白雲山 興龍寺)
부드러운 백운산 봉우리와 삼삼한 숲, 그리고 청결하고 수려한 경치의 백운계곡을 든든한 후광
(後光)으로 삼은 흥룡사는 백운산 자락에 둥지를 튼 조그만 산사(山寺)이다.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신라 말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여 내원사(內院寺)라 했다고 우
기고 있는데, 믿거나 말거나 창건 설화에 따르면 도선은 절 자리를 잡고자 나무로 3마리의 새
를 만들어 날려 보냈고 그중 하나가 앉은 자리가 마음에 들어 절을 세웠다는 것이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절에서 지은 설화일 뿐이며, 조선 초기까지 적당한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어 도선국사 창건설의 물음표를 던지게 한다. 그나마 오래된 유물은 17세기 승탑이고, 몇줄
전해오는 조선 초기 기록도 딱히 신빙성은 떨어져 보이니 아마도 조선 초/중기에 조촐한 암자
나 수행처 수준으로 법등(法燈)을 연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고려 태조 때 비보사찰로 창건되
었다는 설도 있으나 역시나 물음표일 따름..)

조선 초에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창했다고 하며, 1407년에는 왕실의 복을 비는 88개 자복
사(資福寺)의 하나로 선정되었는데, 이때 잠시 천태종(天台宗)의 일원이 되었다고 전한다. 또
한 세조는 그의 어필족자(御筆簇子)를 하사했다고 하나 아쉽게도 그 족자는 어느 세월이 잡아
갔는지 전하지 않는다.
그나마 기록과 유물이 보다 확실해지는 시기는 조선 중기 이후이다. 1638년 무영
(無影)이 제자
시십(時什), 인해(印海) 등과 법당과 시왕전 등 14채, 500여 칸의 건물을 중건했다고 하며, 불
상을 개금(改金)하고 종을 만들어 창건 당시보다 절이 컸다고 전한다. 1639년에는 무영의 제자
지혜(智惠)가 100여 칸의 상선암(上禪庵)을 지었으며, 1648년에는 청암(淸巖)이 50여 칸의 보
문암(普門庵)을 지었고, 1786년에는 태천(泰天)이 절을 중건하고 이름을 백운사(白雲寺)로 갈
았다.

1922년 설하(渫河)가 대웅전을 중수하고 흑룡사로 이름을 고쳤다가 얼마 안가서 흥룡사로 갈았
으며, 6.25때 절이 잿더미가 된 것을 1957년 지금의 위치에 관음전을 지어 절을 재건했다. 이
후 1982년에 백운당을, 1987년에는 대웅전을 중건했으며, 1990년에 요사인 원각당을 새로 지었
다. 그리고 1993년에는 기존의 대웅전과 백운당을 싹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너른 크기의 대웅
전을 지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평범한 내력을 지녔구나 생각을 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우려
하는 종교의 지나친 세속화, 그리고 종교 단체들의 지나친 재물 욕심의 현실을 보여주는 대표
적인 사건이 바로 이곳에서 터져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자고로 승려란 부처와 관음보살,
지장보살의 뜻에 따라 자신을 불태우며 중생을 챙기고 깨달음을 향한 수행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거늘 그것을 역행하는 땡중과 절이 너무 많다.
때는 1987년, 절 주변이 백운계곡 관광지로 지정되자 흥룡사 주지는 크게 돈 욕심을 내며 종단
(宗團)의 승인 없이 멋대로 개발업자와 손을 잡고 그들에게 절 땅을 빌려주었다. 허나 개발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개발업자 또한 하나 같이 비리비리하여 개발 주체가 계속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절과 개발업자와의 손실과 갈등이 커지면서 2015년까지 무려 30여 건의 소송에 휘
말렸고, 개발 실패에 따른 손실이 무려 11억에 이르렀다.
욕심꾸러기 주지는 그 부채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고 법원은 절과 절 토지(약 20만 평)를 경매
에 넘기겠다고 통보를 했다. 그러자 주지는 울상이 되어 흥룡사를 관리하는 윗 사찰인 봉선사
(奉先寺)에 애걸을 했고, 봉선사는 절의 정상화를 위해 심사숙고 끝에 그 돈을 치뤄주고 절을
살렸다. (그 돈도 대부분 중생들이 내준 시주금임)
그런 흑역사를 겪은 흥룡사는 그렇게 벼랑 끝에서 살아났다. 땡중들의 돈 욕심에 중생들의 피
땀어린 시주로 이룩된 절이 자칫 홀라당 날라갈 뻔한 것이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원각당, 요사, 공양간, 청산다원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은 포천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청암당승탑이 고작이다. 그외에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묘화당승탑이 있는데, 이들 승탑이 경내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된 존재이
자 조선시대 유물로 그들 외에는 고색의 내음은 찾기 힘들다.

삼삼한 백운산 숲에 둘러싸여 청정한 기운이 가득하며, 백운계곡의 청아하고 낭랑한 계곡 소리
에 아무리 무서울 게 없다는 번뇌도 염통이 쫄깃해져 좌불안석이 된다.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깊은 산골의 절집으로 절 바로 밑에까지 식당과 숙박업소가 즐비하게 들어섰지만 그들 사이에
짧게나마 숲이 완충지대를 이루고 있어 산사의 분위기는 전혀 녹슬지 않았다. 또한 길손들을
위해 찻집과 쉼터 등을 갖추고 있어 백운계곡 나들이나 백운산 등산 때 잠시 두 발을 쉬어가기
에 좋으며, 원각당 옆에는 불교용품과 전통차를 파는 찻집이 있어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도 누
릴 수 있다.

※ 포천 백운계곡, 흥룡사 찾아가기 (2016년 7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이동 경유 사창리행 직행버스(30~60분 간격, 1일 20여 회 운행)를 타고 백
  운동 하차 (흥룡사는 도보 6~7분 거리)
* 1호선 의정부역(4,5번 출구를 나와서 가능역 방면으로 도보 5분 거리에 정류장이 있음)과 의
  정부터미널에서 138-5, 138-7번 좌석버스를 타고 이동이나 도평리에서 하차, 백운동으로 들
  어가는 3번 시내버스(1일 5회)나 사창리행 직행버스로 환승
* 인천종합터미널, 안양(WK웨딩하우스 앞)에서 와수리행 직행버스(1일 8회)를 타고, 이동이나
  도평리에서 사창리행 직행버스나 3번 시내버스로 환승
*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까지 접근 가능)
① 서울 → 의정부(민락로) → 포천 방면 43번 국도 → 만세교에서 37번 국도로 우회전 → 일
   동교차로에서 이동 방면 47번 국도 → 도평교차로에서 우회전 → 도평3거리에서 좌회전 →
   흥룡사입구(백운교)에서 우회전 → 흥룡사, 백운계곡
② 서울(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 퇴계원나들목에서 이동 방면 43번 국도 → 서파 → 도평교
   차로에서 우회전 → 도평3거리에서 좌회전 → 흥룡사입구에서 우회전 → 흥룡사, 백운계곡
* 흥룡사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도평리 38 (포화로 236-73 ☎ 031-535-7363)
* 매년 겨울에 백운계곡에서 '백운계곡 동장군 축제'가 열린다. 보통 12월 말부터 2월 초까지
  열리며, 눈썰매와 전통 썰매, 얼음성 놀이동산, 전통 팽이, 눈사람 만들기, 모닥불체험, 눈
  조각 전시회, 얼음조각 전시회, 향토음식 체험관, 포천농특산물 판매 등의 행사가 있다.
  (축제 문의 ☎ 031-535-7242, 동장군축제 홈페이지는 ☞ 이곳을 쿨하게 클릭한다)
* 흥룡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흥룡사 찻집(청산다원)과 천막 쉼터


 

♠  흥룡사 둘러보기

▲  대웅전(大雄殿)과 5층석탑

이곳의 법당인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93년에 옛 대웅전과 백운당
을 부시고 만든 것이다. 바깥 벽에는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八相圖)와 십우도(十牛圖)
등이 그려져 있으며, 내부 불단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거느리며
아미타3존불을 이룬다. 그래서 건물도 아미타불의 본거지인 서방정토(西方淨土)를 바라보고자
서쪽을 향하고 있다. (지형상의 이유도 있음)

▲  흥룡사 원각당(圓覺堂)
종무소와 요사(寮舍)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건물로 문수원(文殊院)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  석조지장3존상
대웅전 곁에는 지장보살입상(地藏菩薩立像)이
경내를 굽어본다. 그 좌우에는 도명존자(道明
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나란히
자리하여 야외 지장전의 역할을 한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5층석탑과 뜨락

대웅전 뜨락에 심어진 5층석탑은 근래에 조성되어 피부가 매우 하얗고 부드럽다. 기단부(基壇
部)에는 8명의 금강역사(金剛力士)가 한 자리씩 차지해 앉아 있고 1층 탑신(塔身)에는 사방불
(四方佛)을 새겨 절과 탑의 영원한 안전을 염원한다. 그렇게 철통 같이 지켰건만 내부의 적으
로 인해 절이 경매에 넘어갈
했으니 그들의 가호도 다 부질 없었던 모양이다.


▲  대웅전 아미타3존불과 조그만 원불(願佛)의 금빛 물결
아미타3존불은 1999년에 조성된 것으로 그 좌우에는 원불로 조성된 조그만 원불이
금빛 대물결을 이룬다. (아마도 3천불은 될 듯..? 저게 도대체 다 얼마야..?)

▲  흥룡사 샘터<수각(水閣)>
백운산이 베푼 옥계수로 그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주듯 물이 늘 넘친다.

▲  가까이서 본 샘터(수각)의 위엄
석조 위에 지붕을 씌우고 조촐하게
수각으로 삼았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계단 끝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삼성각이 새롭게 터를 다졌다. 이 건물은 최근에 지어진 것
으로 단청(丹靑)을 칠하지 않아 조금 오래되어 보일 뿐, 대웅전과 원각당에 비해 한참 후배이
다. 내부에는 대웅전에 얹혀살던 산신탱을 비롯하여 독성탱과 칠성탱을 봉안되어 있어 삼성각
이란 이름값을
다.

▲  산신(山神) 가족의 단란함이 묻어난 산신탱

▲  칠성(七星)이 모두 모인 칠성탱

  동자 2명을 거느리며 여유롭게 앉아있는
독성(獨聖, 나반존자) 가족을 담은 독성탱 -
이들 삼성각 탱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산
신탱으로 무려 2000년에 제작되었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흥룡사 경내)

▲  흥룡사에서 만난 새끼고양이의 위엄
(누런 고양이가 알록달록 고양이에게 시비를 걸다)


내를 둘러보던 중 원각당 옆에서 새끼고양이 3마리가 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2마리는 검
은털과 흰털, 누런털이 적절히 섞여있고, 다른 하나는 오로지 누런털 옷을 입고 있다.
이들은 땅바닥에서 풀과 돌을 희롱하고 있었는데, 누런 묘공이 갑자기 풀 희롱에 열중하는 알
록달록 묘공(猫公)에게 시비를 건다. 시비를 건다고 해서 멱살을 잡거나 서로 발톱을 견주며
싸우는 것은 아니다. 그냥 묘공의 흔한 놀이로 쥐나 조그만 동물을 잡기 위한 일종의 훈련도
겸한다.


▲  풀과 나뭇잎을 희롱하다~~

▲  경내 동쪽에 자리한 승탑(부도)들

▲  어깨를 나란히 한 승탑(僧塔)들 - 제일 오른쪽 팔각원당형 승탑이
청암당부도(포천시 향토유적 35호)

경내를 나와 백운계곡 안쪽으로 향하면 왼쪽에 돌담이 둘러진 공간이 있다. 그 안에 3기의 승
탑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자리해 있는데, 이들은 청암당
(淸巖堂)과 묘화당(妙化堂), 운경대선
사자광탑(雲鏡大禪師慈光塔)으로 흥룡사에 왔다면 꼭 봐야되는 이곳의 유일한 고색의 유물이다.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흥룡사의 오랜 내력이 참 무색했을 것이다. (운경대선사탑은 제외)

그들 가운데 뚜껑처럼 생긴 왼쪽 승탑은 운경대선사의 자광탑으로 1905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
나 2000년 2월 남양주 봉선사(奉先寺)에서 열반에 들었다. 그는 1940년에 잠시 이곳 주지를 지
낸 인연이 있어서 이곳과 봉선사에 승탑을 만들었는데, 왜정 시절에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조선
민족해방당을 지원하다 걸려 옥고를 치루기도 했으며, 6.25때 모두 타버린 봉선사를 다시 세우
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가운데 자리한 석종형(石鐘形) 승탑은 묘화당의 것으로 조금은 뾰족한 모습인데, 탑신 앞에 '
묘화당 영조(妙化堂 灵照), 강희 20년(康熙二十年)'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승탑의 주인과 조
성 연대를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강희 20년이면 1681년(안내문에는 1781년으로 한참이나 잘
못 나옴)으로 승탑의 높이는 153cm이다.

오른쪽에 자리한 청암당(淸巖堂)승탑은 동그란 승탑에 8각의 지붕돌을 얹힌 일종의 팔각원당형
승탑으로 탑신 중앙에 '청암당' 3글자가 새겨져 있어 승탑의 주인을 알게 해준다. 그는 1648년
흥룡사의 부속 암자인 보문암을 창건했다고 전할 뿐, 딱히 다른 정보는 없으며, 그곳에 있다가
근래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탑의 높이는 156cm이다.

이들 승탑은 길가에서도 매우 잘 보이므로 (탑신에 새겨진 글씨는 잘안보임) 굳이 담장을 넘을
필요는 없다. (담장 내부는 출입 금지를 권하고 있음) 글씨는 카메라로 최대한 줌을 땡기면 왠
만해선 다 보인다.


 

♠  백운계곡(흥룡사계곡)에서 즐긴 짧은 피서

이렇게 흥룡사를 둘러보고 백운계곡으로 길을 향했다. 백운계곡 중 흥룡사를 거쳐가는 계곡은
편의상 흥룡사계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은 수도권 제일의 계곡답게 수량도 많고, 물도 깨끗하며, 골도 깊고, 바위와 암반도 많다.
예로부터 경승지로 널리 칭송을 받았으며, 백운계곡의 일원인 선유담(372번 지방도에 있음)이
영평8경의 하나로 추앙을 받고 있다. 흥룡사 역시 이 계곡에 퐁당 반해 계곡 옆에 절을 지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백운산 등산도 아니며, 흥룡사 관람과 백운계곡을 조금 따라 올라가 잠시
발을 담구며 쉬는 것이다. 아직 본격적인 피서철이 아닌지라 그 좋은 계곡에는 사람이 거의 없
었다. 만약 1주 뒤에 왔다면 평일이라도 무척 미어터져 정신이 없었을텐데, 그 이전에 와서 한
적한 계곡의 모습에 위안을 받는다. 사람이 많은 것보다는 고적한 것이 보기도 좋고, 자연에도
좋다. 사람이 없으니 계곡에 쓰레기도 없고, 그들의 괴롭힘이 없으니 백운산과 계곡도 더욱 신
이 난다. 그만큼 자연에게 있어 인간은 전혀 도움이 안되는 존재이다.


▲  등산로와 나란히 달리는 흥룡사계곡

흥룡사계곡은 승탑을 기준으로 15분 정도만 올라갔다. 그 정도만 가니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하나는 백운산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계곡을 건너는 것이다. 애당초 산을 타는 것
은 염두에 두지 않아 계곡을 건너려고 했으나 전날까지 계속된 장맛비로 계곡물이 늘어 건너는
것이 거의 어렵게 되었다. 물론 무리를 해서 건너면 가능은 하겠지만 그렇게까지 몸을 혹사시
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 갈림길에서 과감히 길을 멈추고 거추장스러운 운동화와 양말을 벗어던져 계곡에 꼬
질꼬질한(?) 발과 다리를 담구며 그들을 잠시 호강시켜주었다. 얼마나 시원하던지 흘러나온 땀
이 바로 줄행랑을 친다. 비록 온몸으로 계곡과 진한 스킨쉽은 하지 못했지만 혼자 와서 그렇게
노는 것도 좀 처량해보인다. 그냥 발과 다리만 담구며 적절히 피서를 즐기면 그만이다.


▲  내가 잠시 머물던 곳 (이름은 딱히 없음)

▲  바위를 타고 밑으로 내려가는 조그만 폭포

계곡에서 신선놀음을 하고 있으려니 여름의 제국이 꽤나 심술이 난 모양이다. 난데없이 소나기
를 퍼붓는데, 좀 내리나 싶더니만 멈추고, 그러다가 또 쏟아지고, 그렇게 심술을 부린다. 허나
다행히 내리는 양은 별로 없어 물가에 앉을 자리를 만들고 계속 그 자리를 지키며 계곡에 다리
를 담구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거의 15시 40분이 되었다. 거의 1시간 이상을 머문 셈인데 그 사이 지나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완전 나 혼자 이 좋은 계곡을 독점하여 누린 셈이다. 영원히 그러면 좋
을텐데 아쉽게도 일시적인 독점이다. 사람이 없으니 정말 신선(神仙)이 나타나 같이 놀자고 하
거나, 좋은 선녀를 소개시켜주거나, 내기바둑 1판 두자고 청할 것 같았다. 허나 신선은 사람이
만든 상상 속의 존재이니 나타날 일은 없다. 그만큼 이곳은 신선이 반할 경치를 지녔다. 기분
같아서는 속세에서 나란 존재를 잠시 지우며 이곳에 숨고 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그게 현실이
아님을 알기에 잠시나마 정든 마음을 훌훌 털고 계곡을 등졌다.


▲  녹음이 우거진 백운산 산길

▲  흥룡사계곡

▲  숨겨진 조그만 폭포와 소(沼)

흥룡사에서 저녁공양을 17시부터 8시까지 하는데, 좀만 버티면 그 시간이다. 일반인에게도 밥
을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일행도 없고 나 혼자이니 잘만 구워삶으면 저녁 해결도 가능할 듯 싶
었다.
그래서 바로 내려가지 않고, 중간에 등산로를 잠시 벗어나 계곡으로 내려갔다. 조그만 샛길이
호기심을 자극시켰기 때문이다.
그곳으로 내려가니 크기는 작지만 조촐한 폭포와 폭포수가 담긴 소가 있는데, 물의 색깔이 인
간이 만든 비루한 색이 아닌 완전 대자연의 짙은 푸른색이다. 수심은 약 1.5m 내외로 보였는데.
기분 같아서는 정말 풍덩하고 싶은 매혹적인 곳이다. 다음에 여러 명과 피서를 올 일이 있다면
이곳에 진을 치고 놀고 싶으나 과연 그날이 올지는 장담을 못하겠다.

그런 폭포를 뒤로 하고 다시 흥룡사를 찾으니 주춤했던 소나기가 다시 퍼붓기 시작한다. 그런
데 아까와는 달리 매우 쎄차게 쏟아진다. 그래서 비를 피하고자 공양간으로 들어갔는데, (16시
30분 경) 할머니 보살 1명이 열심히 밥과 반찬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반인도 공양을 할 수
있냐고 물으니 혼자 왔냐고 그런다. 하여 그렇다고 답을 하니 그러면 5시 반에 오란다. 승려가
먼저 밥을 먹고 그 다음 신도나 절과 관련된 사람들이 먹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마움을 표하고
모락모락 저녁밥을 꿈꾸며 시간이나 때울 겸, 인적이 없는 삼성각에 들어가 50분 정도 시간을
때웠다.
나무로 만든 건물 내부는 매우 시원하며 잠시 졸음의 희롱을 즐기며 벽에 등을 기대 졸기도 하
였다. 절집에서 조촐하게 나만의 극락(極樂)을 즐긴 셈이다. 다행히 그동안 이곳까지 오는 사
람이 없어 그 시간 동안 삼성각을 마음껏 독차지했다. 

17시 20분이 되자 삼성각을 어슬렁 나와 공양간으로 갔다. 할머니 보살이 나를 보더니 어여 들
어오라고 그런다. 안으로 들어가니 승려 3명과 일꾼 2명이 밥을 먹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합장
(合掌)을 하고, 공양에 들기 시작했다. 이곳 공양밥은 하얀 쌀밥을 기본으로 약 5~6가지의 나
물이 있으며 거기에 무려 김치찌개까지 있다. (물론 고기는 없음) 이들 외에도 보기 힘든 산나
물도 있었는데 이름은 기억이 안난다.
그릇에 밥과 나물을 터질 정도로 담아 꾸역꾸역 비벼먹고 거기에 김치찌개까지 겯드리니 이것
이 정녕 흥룡사 공양 스타일이다. 맛도 그런데로 괜찮았다. 그렇게 즐겁게 배를 채우고 할머니
보살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바깥으로 나왔다. 아까만 해도 먹구름이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
며 소나기를 내던지더만 이제는 평온하다.

절을 나오기 전, 새끼 묘공이 있던 원각당을 찾았다. 절을 지키며 노느라 지쳤는지 원각당 툇
마루에 서로 부비적거리며 달콤하게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행복해 보이던지
정처없는 내 마음을 크게 흔든다. 나도 그 틈에 끼어 같이 자고 싶은데, 그건 민폐겠지. 그들
틈에 끼어서 자면 열대야에 도망친 잠도 무척 잘 올 것 같다.


▲  원각당 툇마루에서 주무시고 있는 새끼 묘공의 위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잠들어 있는 모습 같다.


이번 나들이에서 가장 인상이 깊은 존재는 흥룡사 새끼 묘공과 저녁 공양이다. 공양은 보살의
후한 인심에 다음날 점심까지 밥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배를 채웠고, 새끼 묘공은 묘공 특
유의 귀여움을 보이며 나의 시선을 잡아맸다. 그들이 있어 고색(古色)의 내음도 거의 없고 문
화유산도 빈약하며, 돈 욕심에 얼룩진, 내 입장에서는 썩 끌리지 않는 흥룡사가 또 찾고 싶을
정도로 매우 긍정적으로 다가온다. 다음에 간다면 새끼 묘공은 어른이 되어있으려나...?


▲  흥룡사와 백운계곡의 모든 것을 뒤로하며 속세로 다시 나오다.

흥룡사를 나오니 시간은 6시가 넘었다. 더 이상 정처를 둘 곳도 없기에 백운동 정류장으로 미
련없이 나와 바깥으로 나가는 직행버스에 몸을 담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백
운계곡, 흥룡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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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6년 7월 21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6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금빛 와불상과 우담바라를 간직한 고즈넉한 산사, 의왕 청계산 청계사

 


' 늦겨울 산사 나들이, 청계산 청계사(淸溪寺) '

▲  청계사 와불상


 


겨울 제국(帝國)의 차디찬 위엄이 잠시 느슨해진 2월 끝 무렵에 후배들과 의왕시에 자리한
청계사를 찾았다.
그곳은 예전에 2번 발걸음을 한 적이 있는데, 간만에 그를 찾은 이유는 별거 없다. 그곳에
그냥 마음이 갔기 때문이다.

오후 3시, 안양(安養)의 동쪽 요충지인 인덕원역에서 그들을 만나 분식집에서 만두와 여러
과자 등을 사들고 대기하고 있는 청계산행 의왕시 마을버스 10번에 몸을 담는다. 평일이라
등산 수요는 거의 없지만, 대신 청계지구 주민들로 조그만 마을버스는 만석의 기쁨을 누린
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청계사입구에 조성된 청계지구에서 승객을 모두 쏟아내고 우리만 태운
가뿐한 상태에서 청계산의 품으로 들어갔다. '과천~의왕간 고속화도로'의 밑도리를 지나니
아파트와 시가지 대신 산과 들녘이 전부인 농촌 풍경이 정겹게 펼쳐진다.
청계사천(淸溪寺川)을 따라 계속 들어가던 버스는 청계산 주차장에서 그만 두 바퀴를 멈춘
다. 그곳이 그들의 종점이었던 것. 그래서 여기서부터 별수 없이 걸어가야 되는데, 천천히
가도 20분이면 충분하다.


 

♠  청계사계곡 숲길

청계지구에서 청계사로 가는 길목에는 맛과 분위기를 내세운 식당과 찻집이 즐비하다. 절을 목
전에 둔 속세(俗世)의 마지막 유혹이라고나 할까? 허나 그날이 평일이라 몇몇 식당을 제외하면
대부분 장사를 하는지 안하는지 모를 정도였다.

청계사 종점에서 7분 정도 가면 다리가 나오는데, 그곳을 경계로 더 이상 속세의 흔적은 나오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자연의 비율이 높았지만 여기서부터는 99% 자연 및 부처의 청정한 공간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또한 청계산에서 발원한 청계사계곡도 여기서 청계사천으로 간판을 바꾸며 속
세로 길을 재촉한다.
그 다리를 건너면 그동안 하나로 쭉 이어진 길(청계로)은 수레길과 숲길로 갈리는데, 어느 길로
가든 청계사로는 이어진다. 빨리 가고 싶다면 잘 닦여진 수레길을 이용하면 되지만 4발 수레의
적지않은 눈칫밥과 고약한 매연 냄새를 감당해야 된다. 그러니 차라리 친환경적인 숲길로 가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이 숲길은 통행 편의를 위해 나무로 길을 닦았는데, 늘씬하고 삼삼하게 솟은 나무들이 앞다투어
신선한 숲내음을 베푼다. 산바람이 아직은 차갑지만 청정하고 해맑은 기운이 담겨져 있어 바람
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오히려 심신(心身)이 맑아지는 기분. 게다가 숲길 옆에는 청계사계곡이
졸졸~♬ 흘러 그 나름대로 계곡의 바람을 선사하니 찰거머리같은 번뇌(煩惱)도 여기서만큼은 바
짝 긴장을 탄다. 

숲길 입구에는 의자가 여럿 설치되어 있는데, 여기서 속세에서 가져온 먹을거리를 섭취했다. 원
래 절 밑에서 먹으려고 했지만 다들 시장기가 높아 잠시 청계사를 잊고 여기서 자리를 펼쳤다.

▲  청계사계곡 숲길
겨울이라 실감이 덜해서 그렇지 봄이나 여름, 가을에는 정말 옆구리에 끼고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숲길이다.

▲  소리없이 봄을 잉태하고 있는 청계사계곡
눈과 얼음의 지배를 받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계곡, 허나 소쩍새가 우는
그날이면 거추장스러운 얼음을 박차며 봄의 해방군을 맞이할 것이다.


숲길을 10분 정도 가면 다시 수레길과 만난다. 여기서부터 경사가 잠시 각박해지는데, 그길을 5
분 정도 오르면 청계사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을 지나면 첩첩한 청계산 산주름에 묻힌 청계사
의 바깥 부분이 모습을 드러낸다.


▲  주차장 밑에 자리한 청계사 표석
바위 피부에는 붉은 글씨로 '우담바라 핀 청계사'라 쓰여 있다.

▲  주차장 동쪽에 자리한 승탑과 비석의 보금자리

청계사 주차장 동쪽에는 승탑(僧塔, 부도)과 비석(碑石)의 보금자리가 있다. 이들은 원래 극락
보전 서쪽에 있던 것으로 밑 석축에는 사적비를 비롯한 비석 3기가 심어져 있고, 윗 석축에는
승려의 사리가 담긴 승탑과 승탑 주인의 생애가 담긴 검은 피부의 가로형 비석들이 널려 있다.
이중에서 가장 오래 숙성이 된 존재는 청계사의 내력을 담고 있는 사적비로 고려 후기에 청계사
를 크게 일으킨 조인규(趙仁規)의 11대손 조운
(趙橒)과 조신(趙新)이 1689년에 세웠다. 조운이
문장을 짓고 윤창적(尹昌績)이 글씨를 썼는데, 비석 피부에는 세월이 그어놓은 주름과 검은 때
가 여럿 있지만 아직은 글씨를 알아보는데 지장은 없다.
<청계
사 관련 자료에는 1341년에 세웠다는 조정숙공사당기비(趙貞淑公祠堂記碑)가 있다고 하나
확인하지는 못했음>


▲  아직 정정한 모습을 잃지 않은 청계사 사적비(事蹟碑)

적비와 승탑을 둘러보고 주차장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높은 계단을 오르면 경내 밑부분에 이른
다. 오를 때는 모르지만 계단이 조금 각박하니 내려갈 때는 각별히 주의하기 바란다.
그럼 여기서 잠시 청계사의 내력을 잠시 더듬어보도록 하자.


 

♠  청계산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고색의 절집, 와불과 우담바라를
간직한 청계산 청계사(淸溪寺)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6호

청계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터를 닦은 청계사는 신라 후기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허나 기록이
없어 자세한 것은 알 도리가 없으며, 조선 후기에 봉은사(奉恩寺)에서 엮은 봉은본말사지(奉恩
本末寺誌)에도 단순히 신라 때 창건되었다는 1줄 뿐이다. 다만 신라 후기나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등(石燈)과 승탑의 잔재가 있다고 하니 (확인은 못했음) 적어도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조금은 열어두고 있다.
그래도 뚜렷한 기록과 유물이 없음에도 원효대사(元曉大師)나 의상대사(義湘大師), 자장율사(慈
藏律師),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세웠다고 강력하게 우기는 상당수의 절보다는 좀 양심적이다.

청계사의 본격적인 기록은 고려 후기부터 등장한다. 고려가 몽골(원)의 그늘에 있던 충렬왕(忠
烈王) 시절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을 지낸 조인규(趙仁規, 1227~1308)가 많은 자금을 들여 청
계사를 중창하고 집안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이때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음) 그리고 절 아랫
쪽에 별당(別堂)을 지어 잠시 머무는 등, 청계사를 특별히 옆구리에 끼었다.
이렇게 당대 실력자인 조인규(평양 조씨)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청계사는 오랜 세월 그
의 후손들의 지원에 힘입어 절을 꾸렸는데, 경내에 조인규의 영당(影堂)을 지어 그를 기렸으며,
1431년과 1448년에 영당을 중건했다고 전한다.

천하가 조선으로 바뀐 이후, 1407년 자복사(資福寺)로 지정되면서 천태종(天台宗) 소속이 되었
으며, 1448년 경내에 있던 대장경(大藏經)이 인출되기도 했다. 연산군(燕山君)과 중종(中宗) 시
절에는 흥천사(興天寺)와 원각사(圓覺寺) 등 한양도성의 많은 사찰이 연산군 또는 유생에 의해
대거 박살이 나면서 봉은사를 대신해 선종(禪宗)의 본찰(중심 사찰)인 정법호지도량(正法護持道
場)이 되었다. 그래서 이때 잠시나마 조선 불교의 중심이 된다.
허나 그 영광도 잠시, 광해군(光海君) 시절에는 청계사 소속의 전답과 노비가 나라와 양반들에
게 대거 몰수당하거나 빼앗기는 비운을 겪었으며, 1689년 화재로 건물 대부분이 무너지자 성희
(性熙)가 평양조씨의 도움으로 절을 중건했다. (이때 사적비가 세워짐)

1701년에는 경내 제일의 보물인 동종이 조성되었으며, 정조가 왕세손(王世孫) 시절이던 1761년
친히 이곳을 찾아 원당(願堂)을 짓고, 밤나무 3,000주를 내려 원감(園監)을 두어 관리케 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정조는 1789년 경내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역인 현륭원(顯隆園)의 제각(
祭閣)을 지어 매년 2회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바로 그 해에 평양 조씨인 조심태(趙心泰)의 지
원으로 절을 중창했다.
1862년에는 괘불(掛佛)을 봉안했고, 1876년 3월 무심히 찾아온 화마(火魔)의 위엄 앞에 불전들
이 앞을 다투어 쓰러지자 1879년 주지 은곡(隱谷)이 중건을 벌였으나, 예전만큼은 못하여 간신
히 호흡이나 하는 지경이었다.

1900년 법당인 극락보전을 세웠고, 왜정 시절에는 봉은사의 말사(末寺)가 되었는데, 경허(鏡虛)
를 비롯한 만공(滿空), 월산(月山), 금오(金烏) 등 당대에 유명한 승려들이 주석하면서 선풍(仙
風)을 떨치기도 했다. 1955년 비구니인 아연(娥演)이 주지가 되면서 크게 중창을 벌이기 시작했
고, 1965년에는 용주사(龍珠寺)의 말사로 변경되었다.

1999년에는 와불상을 조성해 경내에 새로운 볼거리를 이끌어냈고, 2000년 이후 주지 종상이 경
내를 대대적으로 손질하고 진입로를 정비해 접근성을 높였다. 그리고 2001년에 극락보전을 중수
했는데, 바로 전년 10월에 극락보전 아미타3존불의 협시(夾侍)인 관음보살상 상호 왼쪽 눈썹 주
변에 불교에서 매우 신성시하는 꽃인 우담바라가 피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우담바라는
아직도 관음보살상 눈썹 주변에 진을 치고 있으며, 20여 송이나 피었다고 한다. 나는 이들의 존
재를 몰라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했지만 청계사에 갈 일이 있다면 그 꽃을 꼭 눈에 담기 바란다.
(우담바라가 풀잠자리 알이라는 이야기도 있음)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삼성각과 지장전, 서요사, 동요사, 동종각 등 10
동 남짓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동종을 비롯하여 지방문화재로 지
정된 신중도와 소장목판(所藏木板, 1622년, 1623년, 1831년에 만든 14종 466판,
경기도 지방유
형문화재 135호
)과 조정숙공사당기비(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76호) 등이 있으며, 그외에 사적
비와 극락보전, 극락보전 아미타3존불, 괘불 등이 앞을 다투며 고색의 향기를 더해준다. (소장
목판은 비공개이며, 괘불은 석가탄신일과 등의 행사일에만 잠깐 얼굴을 비침) 또한 청계사 전체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6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첩첩한 청계산의 산주름 속에 묻혀 산사의 향기도 매우 진하며, 서울이나 안양, 성남, 의왕 등
기라성 같은 도시와 가까이 있음에도 꽤 멀리 나온 듯한 기분을 누리게 한다. 속세에서 잠시 나
를 지우고 싶을 때 어디론가 가서 마음을 싹둑 정리하고 싶으나 멀리 가기가 어려울 때 무작정
찾아와 안기고 싶은 포근한 산사이다.
또한 이곳은 산세가 수려하고 삼삼한 숲에는 산새가 지저귀며, 청정한 계곡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경승지로 수도권 명소로도 명성이 높다. 또한 청계산으로 오르는 주요 기점의 하나이기도
하여, 이곳을 시작으로 응봉을 경유해 과천(果川) 문원동이나 포일2지구로 내려가거나, 청계산
정상을 거쳐 서울 원지동, 옛골 방면이나 양재동 화물터미널로 내려가도 된다.

※ 청계산 청계사 찾아가기 (2016년 2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인덕원역(2번 출구)에서 의왕시 마을버스 10, 10-1번(10~15분 간격)을 타고 청
  계산 주차장 종점에서 도보 20분. 18시 이후에는 청계산주차장까지 들어가지 않고 그 이전인
  상청계(청계산입구)에서 차를 돌린다, (상청계에서 청계사까지는 도보 30분)
* 분당이나 죽전, 수지에서 접근할 경우에는 103번(분당 도촌동, 야탑역, 판교 백현마을), 303
  번(분당 오리역, 판교 백현마을), 좌석 1303번(모현 외대, 죽전 단대, 분당 오리역/정자역),
  좌석 1550-3번(광교, 수지구청역)을 타고 양지편에서 하차, 건너편 정류장에서 10, 10-1번
  마을버스를 이용한다. 양지편 전 정류장인 청계동주민센터과 한직골(청계농협)에서 내려도
  되지만 여기서는 10-1번 마을버스 밖에 없다.
* 청계사 셔틀버스가 인덕원역(4호선) 3번 출구 인덕원프라자 앞에서 출발한다. 평일에는 9시
  와 10시, 초하루와 석가탄신일, 백중, 칠석, 동지 때는 오전에 5회 운행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 바로 밑에 주차장 있음)
① 서울(과천)/안양/군포/의왕 → 인덕원4거리 → 안양판교로 → 청계사입구4거리에서 좌회전
   → 청계사
② 성남(분당/판교) → 안양판교로 → 청계사입구4거리에서 우회전 → 청계사

* 소재지 -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산11 (청계로 475 ☎ 031-426-2348)
* 청계사는 매일 12~13시에 점심 공양을 제공한다. (가끔 짜장밥이 나오기도 함)
* 청계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청계사 극락보전 주변 (오른쪽이 동종각)

▲  청계사 수각(水閣)

경내 밑에서 높이 5m 정도 되는 계단을 더 딛으면 비로소 경내에 이른다. 극락보전 뜨락은 하얀
피부의 박석(薄石)이 넓게 바닥을 이루어 꽤 깔끔해 보이는데, 그런 뜨락 중앙에는 달랑 1칸 밖
에 안되는 수각이 자리해 있다.
수각은 산사의 필수 요소인 샘터의 보금자리로 동그란 석조(石槽) 주위에 4개의 붉은 기둥을 세
우고 시원한 처마의 팔작지붕을 얹혀 소박하게 건물을 이루었다. 이렇게 샘터에 건물을 씌워 수
각으로 삼은 절이 꽤 되는데, 이는 물에 대한 일종의 보답 차원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싶
다. 그만큼 물은 어디서든 소중하니 말이다. 특히 고적한 곳에 자리한 산사는 더욱 그렇다.

수각 석조에는 청계산이 베푼 옥계수로 늘 넘쳐나는데, 산사에 왔다면 그곳의 샘물은 꼭 마셔줘
야 된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콸콸콸 마시니 그렇게 담백한 맛은 아니지만 몸
속에 낀 때가 싹 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 없다. 다만 석조 안에 사람들이 무심히 투하한 동전이
여럿 잠들고 있어 그냥 마셔도 뒷탈이 없을지 모르겠다. 기분 같아서는 그들을 구제해주고 싶지
만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어서 그냥 두었다. 절에서는 이들 동전을 계속 방치해 수질에 영향
을 주지 말고 속히 구제하여 좋은 곳에 썼으면 좋겠다. 이들 동전도 다 비싼 세금을 들여서 만
든 것이니 말이다.

수각 서쪽에는 2층 규모의 서요사(西寮舍)와 가건물 찻집이 있다. 찻집에서는 전통차와 커피를
판매하고 있는데, 거기서 차와 커피를 구입하여 서요사 앞에 널린 의자에서 마시면 된다. 차와
커피 가격은 2~3천원선으로 속세와 거의 비슷하거나 조금 저렴한 수준, 서요사 앞에는 그보다
더 저렴한 길다방 자판기가 있어 돈이 궁한 경우에는 그를 이용하면 된다. 자판기 커피 가격은
300원선.. (자판기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청계사 동요사

▲  천의를 휘날리며 하늘을 유유자적하는
비천상(飛天像)의 위엄

▲  수각과 극락보전 경계선에 자리한 12지신상(十二支神像)

수각과 동/서요사보다 1단계 높은 곳에 다양한 모습의 12지신상이 자리해 있다. 거의 90도로 서
있는 다른 12지신상과 달리 편안한 포즈로 정면 또는 좌우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데, 특히 쥐 같
은 경우는 쌀가마니 위에 앉아 쌀을 축내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소소하게 웃음을 건네준다. 마치
이 땅의 현실을 그렇게 함축한 것일까? 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  연등을 평방(平枋)에 두룬 청계사 지장전(地藏殿)

뜨락에서 2단계 높은 곳에는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지장전이 자리해 있다. 극락보전 우측
에 자리한 지장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봉안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
는 와불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가 1999년 와불을 조성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  지장전 뒤쪽에서 졸고 있는 청계사 연(輦)
석가탄신일이나 불교 행사 때 불상이나 불경을 운반하는 용도로 쓰인다.

▲  찻집 주변에 누워있는 옛 석조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조로 중간 부분이 깨져 있다. 그래서 새로운 석조에게
수각의 자리를 넘기고 이렇게 뒤로 물러나 물 대신 겨울 제국이 내린
하얀 눈을 강제로 머금으며, 왕년을 그리워한다.

▲  계단 끝에 자리한 청계사 삼성각(三聖閣)

지장전 뒤쪽 언덕에는 삼성각이 조촐하게 자리를 닦고 있다. 달랑 1칸짜리 맞배지붕 건물로 3명
의 성스러운 존재,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봉안하고 있는데, 경내에
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여 천하를 굽어본다.
이 건물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그 뒤쪽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다.

▲  조그만 석불좌상과 칠성탱

▲  산신탱과 독성탱


▲  삼성각에서 바라본 청계사 경내


 

♠  청계사 극락보전, 와불 주변

▲  청계사 극락보전(極樂寶殿)

청계사의 법당인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겉으로 보면 200년 정도
들어보이지만 실상은 1900년에 지어진 것으로 이제 110여 년 정도 되었다. 대들보에서 '
庚子 三
年 三月'이란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그 시기를 따져보니 1900년이다.

불단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아미타3존불과 신중도 등이 봉안되어 있는데, 특히 아미타불 옆에
자리한 관음보살 상호 왼쪽 눈썹 주변에 우담바라가 피어있으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꽃이 조그
만하여 두 눈을 크게 부릅 떠야 시야에 들어올 것이다. 우담바라는 21송이 정도 피어있으며, 길
이가 겨우 1cm 밖에 안되는 가녀린 존재이다.


▲  극락보전에 봉안된 아미타3존불 (아미타불 왼손 쪽이 관음보살)

극락보전 불단을 지키고 있는 아미타3존불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협시해 있다. 중심 불상인 아미타불은 높이 110cm, 협시보살은 107cm
로 다들 조선 후기(19세기 정도)에 조성되었다.


이들은 신체에 비해 얼굴이 다소 커보이는데, 거의 네모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볼살이 매우 푸
짐하다.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선의 미를 더해주고 있고, 눈은 좌우로 길고 가늘게
뜨고 있으며, 코는 작고 오목하다. 붉은 입술은 조그만 하며, 얼굴 좌우에 붙어있는 귀는 중생
의 민원을 하나도 빠짐없이 경청하려는 듯, 어깨까지 축 늘어졌다. 다들 표정도 온후하여 나름
미소를 선보이며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다독거리며, 두터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다.
특히 아미타불 왼손 쪽에 자리한 관음보살상 같은 경우는 우담바라가 피어 화제가 되고 있는데,
대세지보살과 양식에서 다소 차이가 있어 대세지보다 이전에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하체
와 상체, 머리 부분에서 나발의 모습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점은 비슷한 시대의 다른 불상과
는 다소 다른 모습이다.

아미타불을 뒤에서 받쳐주고 있는 아미타후불탱은 아미타3존불을 중심으로
아난(阿難)과 가섭(
迦葉), 타방불(他方佛) 등이 그려져 있는데, 조선 철종(哲宗. 재위 1849~1863) 시절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  신중도(神衆圖)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274호

극락보전 좌측에는 색채가 고운 신중도(신중탱)가 자리해 있다. 신중도는 불법(佛法)을 지키는
신(神)들의 무
리를 담은 것으로 법당의 수호를 위해 법당 내부에 많이 걸어둔다.

이 그림은 1844년에 제작된 것으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경성(京城, 서울)
학파 승려의 화풍이 반영되어 눈길을 끈다. 이목구비에 음영을 주고 코발트색과 금니(金泥)를
사용해 색채가 매우 곱지만 등장 인물이 많아 (어림 잡아 30명은 넘음) 다소 빽빽하게 보인다.


▲  동종이 담긴 동종각(銅鍾閣)

극락보전 좌측에는 조그만 동종각(종각)이 자리해 있다. 범종각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다른 절
의 범종각보다 규모도 좀 작은 편이고, 그 안에 담긴 동종 역시 많이 왜소하다. 허나 작다고 그
냥 지나치지 말자. 이 동종은 경내에서 제일 가는 보물로 국가 지정 보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비싼 몸이다.

▲  청계사 동종(銅鍾) - 보물 11-7호

동종각에 담겨진 동종은 높이 115cm, 입지름 71cm의 조촐한 종으로 그의 청동색 피부에 '康熙四
十年辛已四月日鑄成 廣州靑龍山淸溪寺大鐘七百斤'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어 1701년에 동 700근을
들여 조성되었음을 알려준다. 여기서 광주 청룡산은 청계산으로 이후에 절의 이름을 따서 청계
산으로 이름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 광주(廣州) 고을의 범위가 이곳까지 미쳤음을 알
려준다.
청계사에서 조성된 동종이지만 한동안 봉은사에 머물러 있다가 1975년에 돌아왔으며, 경기도 지
방유형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가 2000년에 사인 비구(
思印 比丘)가 만든 다른 종과 묶어서
보물 11호 계열로 승격되었다.

청계사 동종은 18세기에 활동했던 사인 비구가 만든 조선 후기 종으로 다른 범종에 비하여 작은
편이나 무게가 700근에 이르며, 종 꼭대기에는 2마리의 용이 종을 단단히 붙들고 있고, 종 윗도
리에 보살입상 4구와 9개의 유두가 달린 유곽이 2개 있다. 이 유두는 종을 옮길 때마다 하나씩
떼어낸다.
종 밑도리에는 보상화문(寶相花紋)이 연속으로 새겨져 있어 신라 범종의 제조 기법이 반영되어
있으며, 명/청나라의 범종 양식을 슬쩍 대입한 듯, 2줄의 굵은 횡선이 둘러져 있다. 또한 그 밑
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 종의 신상명세를 알려준다.

이 종을 만든 사인은 종을 매우 잘만들었다. 이곳을 비롯하여 천하에 그가 만든 종이 8개가 전
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보물 11호로 지정되어 있다. 허나 그의 굵직한 작품에 비해 그의 삶
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야말로 세상에 조용히 나타나 조용히 종만 만들다가 조
용히
세상을 뜬 것이다.


▲  청계사 와불상(臥佛像) ▼

극락보전 좌측에는 너른 공간이 있는데, 그곳에 청계사의 새로운 명물인 금빛의 와불상이 있다.
와불은 말그대로 누워있는 불상인데, 완전히 하늘을 보고 누운 것이 아닌 정면을 보며 옆으로
누워있는 자세이다. 이런 불상은 인도와 동남아에서 많이 보이는데, 우리나라에는 기껏해봐야
화순 운주사(雲住寺)의 와불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옆으로 누운 것이 아닌 하늘을 보며 누워있
는 것이다.

이 땅에서는 매우 보기 힘든 와불이 1990년대 이후 거의 유행처럼 번져 이제는 보기가 쉬워졌다.
청계사도 그 유행을 타고 1999년에 하나 장만했는데, 이곳에 있던 지장전을 극락보전 옆으로 밀
어내고 터를 넓게 닦아 와불을 봉안했다. 특히 이곳 와불은 돌을 깎아서 만든 것이 아닌 조그만
자갈을 모아서 만든 것으로 꽤 눈길을 끈다. 보잘 것 없는 자갈이 강인한 협동심을 발휘해 와불
이란 무시못할 작품으로 거듭났으며, 그 자갈을 일일이 모아서 만든 청계사의 노력도 참 대단하
다. 물론 새로운 명물거리를 만들어 절의 명성과 수입을 늘리려는 의도도 크게 작용했다.
처음에는 자갈에 색을 입히지 않아 거의 하얀 피부를 지녔으나 그게 마음에 걸렸는지 죄다 금칠
을 칠해 졸지에 금색 와불이 되었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자갈이 아닌 금동불로 보인다.

와불 앞에는 예불을 올리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고, 와불을 받치고 있는 기단에는 조그만 금동불
을 빼곡히 집어넣어 장관을 이룬다. 이들은 중생의 시주로 넣어둔 원불(願佛)이다.

▲  와불상 뒷쪽

▲  와불상의 발부분

내가 본 와불은 이곳을 비롯해 석모도 보문사(席毛島 普門寺), 기장 장안사(長安寺), 화순 운주
사(雲住寺) 정도이다. 운주사 와불을 제외하면 죄다 근래 조성된 것들로 지금은 그저 그런 존재
로 시선을 받고 있지만 시간이 꽤 흐르고 나면 20~21세기 불상 양식이라 하여 한국 미술사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존재로 애지중지 될 것이다.

와불을 끝으로 간만에 찾은 청계사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서요사에 있는 길다방 커피에서 추
위에 시달린 몸을 달랠 겸, 커피 1잔을 뽑아마시며 잠시 두 다리를 쉬게 했다. 2월 하순이지만
햇님이 산을 싫어하는지 산속에서는 속세보다 해가 일찍 저문다. 이제 5시가 넘었음에도 땅거미
의 정도가 진해졌으며, 해가 기운 만큼 겨울 제국의 기운이 다시 용솟음치면서 찬바람의 패기도
제법 높아졌다.

청계사에서 머문 시간은 약 1시간 40분 정도, 겨울 제국의 차가운 등쌀에 떠밀려 청계사와의 짧
은 인연을 정리하고 속세로 길을 향한다. 우담바라를 친견 못한 아쉬움이 크지만 다음에 인연이
된다면 그때 와서 보면 된다. 내가 서울에 있는 한, 언젠가는 또 오지 않겠는가? 나 또는 청계
사가 멀리 떠나지 않는 이상은 언젠가 또 오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늦겨울 청계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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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듬직한 뒷산, 북한산~북한산성 겨울 산행 (태고사, 행궁터, 대남문, 문수사)

 


' 북한산(삼각산) 겨울 나들이 '

태고사 원증국사탑
 태고사 원증국사탑


 


겨울이 한참 제국(帝國)의 위엄을 보이던 12월 한복판에 일행들과 서울의 듬직한 진산(鎭山)
이자 나의 즐겨찾기 뫼인 북한산(삼각산)을 찾았다.

북한산은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과 그의 위성도시인 경기도 고양(高陽)시를
끼고 있는 수도권 굴지의 자연 명소이자 이 땅의 주요 국립공원(國立公園)이다. 번잡한 지역
에 누워있다보니 본의 아니게 탐방 수요가 엄청난데 1㎢당 탐방밀도가 무려 5만 명으로 탐방
밀도 분야 세계 기네스북 1위를 거머쥐고 있다. 또한 산 전체가 국가 명승 10호로 지정 되어
있어 북한산(삼각산)의 위엄을 한층 실감케 한다.

오전 11시, 구파발역(3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북한산 등산객과 예비군들의 오랜 벗인 서울
시내버스 704번(부곡리,송추↔서울역)을 타고 북한산성입구로 이동했다. 주말이라 버스는 등
산객들로 완전 짐짝수송을 이루었고, 버스는 만원의 기쁨을 누리며 간신히 육중한 네 바퀴를
굴려 북한산성입구에서 승객 7할 이상을 쏟아낸다.

북한산성입구에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북한산성계곡(북한천) 하류를 따라 수구문(水口門
)터, 서암사(西巖寺)터를 거쳐 옛 북한동(北漢洞) 마을에 이르렀다.
북한동은 북한에 있는 동네가 아니라 북한산성(北漢山城) 안에 둥지를 틀었던 산골마을로 북
한산성이 조성되면서 형성된 오래된 마을이다. 지금의 마을은 조선 중/후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주로 군사들과 그의 가족들이 살았다. 마을은 북한동역사관에서 멀리 태고사 근처까
지 형성되었으며, 1930년대에는 100호 이상의 집이 존재했다.

1910년 이후, 왜정의 고의적인 북한산성 방치와 잇따른 자연재해로 인하여 마을이 다소 피해
를 입었으며, 산성 안에 둥지를 틀던 5개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산성(山城) 내부를 관리했다.
당시 주민들은 나무를 땔감으로 팔거나 과실을 팔며 생계를 꾸렸는데, 이중 살구와 감은 북
한동의 특산품이었다.

6.25전쟁이 터지자 인근 사람들이 산성 안으로 많이 피신을 했는데, 북한군 1개 연대가 이곳
에 들어와 숲을 죄다 불태우며 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보였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가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했는데 주민들의 궁핍함을 보고
는 이곳을 유원지로 개발시키기로 했다. 처음에는 대성장, 팔경정 두 곳만 식당 허가가 났으
나 주민들의 항의로 1974년 원하는 집에 죄다 식당 허가를 내주었고, 그로 인해 식당과 등산
용품 가게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마을 사람들은 등산/탐방객을 상대로 음식 장사와 산에서 채집한 나물 등으로 생계를 꾸렸는
데, 그들의 무분별한 장사로 인해 계곡이 오염되고 자연이 훼손되는 등, 계속 말썽이 생기자
골머리를 앓은 행정당국은 북한산을 보존하고 계속되는 민원을 해소하고자 아예 마을을 폭파
시키기로 결정, 2001년부터 마을 강제 이주를 단행했다.
처음에는 주민들의 반대도 많았지만 보상도 심심치 않게 해주었고, 산성 밑에 자리까지 제공
하면서 북한동 마을 55가구는 오래 숙성된 터전을 버리고 모두 그곳으로 이주했다.

그들이 모두 떠나자 북한산성계곡의 오랜 옥의 티였던 집과 식당을 모두 밀어버리고 주변 생
태계를 복원했으며, 옛 마을의 중심지에는 북한동 역사관을 지어 세월의 저편으로 강제로 흘
러간 북한동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솔직히 마을이 없어지니 좀 허전하기는 하지만 마을로 인해 망가졌던 주변 자연 경관이 활짝
피어나니 분위기는 더 밝아진 것 같다. 대신 먹을거리는 북한산성입구나 서울 시내에서 미리
사와야 되는 수고로움이 있으나 그거야 조금 부지런을 떨면 쿨하게 해결된다. 솔직히 마을에
있던 식당의 음식과 간식 가격은 시내보다 좀 비쌌다.

 


♠  보우대사(普愚大師, 원증국사)가 세운 고려 후기 고찰
~ 북한산 태고사(太古寺)


▲  태고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이 암자에 내가 살지만 나도 잘 몰라
                         깊으디 깊고 빽빽하지만 옹색하지 않아
                         하늘과 땅을 모두 가두었으니 앞과 뒤가 있을 리 없고
                         동서남북 어디라도 머물지 않네

               * 보우대사가 태고사에 머물며 지은 태고암가(太古庵歌)의 한 수


북한동역사관에서 북한산성계곡을 따라 중성문(中城門), 노적사(露積寺)입구, 중흥사(重興寺)터
를 거쳐 400m 고지에 둥지를 튼 태고사를 찾았다.

태고사는 1341년 원증국사(圓證國師 = 보우대사)가 창건하여 태고암(太古庵)이라 하였다. 이후
400년 동안 마땅한 내력을 남기지 못했으며, 18세기 중반인 숙종 시절에 북한산성을 정비하고
산성 안에 사찰을 새로 짓거나 중수하면서 다시금 수면 위로 오르게 된다. 당시 태고사에는 경
서(經書) 출판용 목판 5,700여 매와 활자 11두(斗), 그리고 화약용 흑탄 1,600여 석이 비축되었
으며, 절의 규모는 131칸에 이르렀다.
허나 1915년 대홍수와 산사태, 6.25전쟁으로 말끔히 파괴된 것을 1964년 청암(靑岩)이 중창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절의 규모가 조촐해 산중암자의 분위기를 진하게 풍긴다. 비록
겉모습은 초라해도 700년 가까이 꾸준히 명맥을 유지했던 북한산성 내부에 몇 안되는 전통 토박
이 사찰로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산신각과 요사(寮舍) 등, 3~4동의 건물이 있으며,
한참 후배인 인근의 노적사보다 상당히 빈약해 노적사의 부속암자로 착각하기 쉬울 정도이다.
하지만 오랜 사찰에 걸맞게 원증국사탑비와 원증국사탑 등 국가 보물을 무려 2점씩이나 간직하
고 있어 이곳의 높은 명성을 살짝 귀뜀해준다. 그 외에 조선시대 부도 3기가 산신각 부근에 있
고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한 오래된 귀룽나무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하기에 충분하다.

4발 수레도 감히 들어올 수 없는 첩첩한 산중이라 비록 등산의 수고로움을 거쳐야 접근이 가능
한 곳이지만 서울 시내에서도 가까우며. 노적사와 마찬가지로 한적하고 아늑한 산사의 멋과 여
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깊은 산골이라 산새도 넘어오기 힘들고, 제아무리 독종인 번뇌라고
해도 산이 깊고 험해 따라오다가 졸도를 할 정도이다. 그윽한 풍경소리만이 적막에 잠긴 경내를
잔잔히 쓰다듬어주며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을 때, 무거운 번뇌와 잠시 이별하고 싶을
때 며칠 조용히 묻히고 싶은 곳이다.

※ 북한산 태고사 찾아가기 (2015년 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1/2번 출구)에서 34, 704번 시내버스를 타고 북한산성입구 하차. 주말
  과 휴일에는 8772번 주말임시노선(8~18시까지 10~15분 간격)이 추가 운행된다.
* 서울역(1,4호선 4,9-1번 출구)과 을지로입구역(2호선 3번 출구), 광화문역(5호선 7번 출구),  
  서대문역(5호선 4번 출구), 홍제역(3호선 2번 출구), 불광역(3,6호선 8번 출구)에서 704번 시
  내버스 이용
* 승용차 이용시 북한산성입구 주차장을 이용해야 되며, 산성 내부까지 차량 접근 불가
* 북한산성입구 정류장 → 대서문 또는 서암사터 → 북한동역사관 → 중성문 → 중흥사터 →
  → 태고사(약 5km, 1시간 40분)
* 북한산성 동장대와 용암문 사이에 봉성암, 태고사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음
* 매년 음력 9월 22일에 보우대사 헌다식(獻茶式)을 거행한다.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5 (대서문길 406 ☎ 031-384-5589)


▲  겨울에 잠긴 태고사 귀룽나무 ~ 고양시 보호수 17호

태고사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훤칠한 키의 귀룽나무가 중생을 맞는다. 귀룽나무는 이 땅에
서 매우 희귀한 나무로 매년 3월 말이나 4월 초에 나무 전체에 새하얀 꽃이 가득 피어난다. 태
고사에 무수히 발을 들였지만 정작 하얀 꽃으로 치장된 그의 모습은 아직 만나지 못했는데, 그
꽃의 자태가 마치 하얀 눈과 비슷하다고 한다.
나무의 나이는 약 160년, 키 23m, 허리둘레 2.3m에 이르며 다른 나무와 마찬가지로 겨울의 제국
에게 모든 것을 공출당하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 소쩍새가 울 봄만을 애타게 기다린다.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비각(碑閣)

  태고사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 - 보물 611호

대웅보전 좌측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높다란 비각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 태고사 제일의 보
물인 원증국사탑비가 남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둥지를 텄다. <태고사 대웅보전은 서향(西向)임>

탑비의 주인공인 원증국사는 고려 후기를 주름잡던 고승(高僧)으로 1301년 귀족 가문인 홍주홍
씨(洪州洪氏) 일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비는 홍연(洪延), 어미는 정씨로, 13살에 양주 회암사
(檜巖寺)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가지산(迦智山)에서 수도했다.
1325년 승과(僧科)의 하나인 화엄선(華嚴選)에 급제했으나 선수행을 위해 과감히 포기하고 용문
산 상원사(上院寺)를 거쳐 감로사(甘露寺)에서 계속 불도에 정진했다. 그 이후 북한산 중흥사에
들어와 1341년 절 동쪽에 태고사를 지어 머물며 그 유명한 태고암가(太古庵歌)를 지었다.
1346년 원나라로 넘어가 임제종(臨濟宗) 18대 법손(法孫)인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이어받
았으며. 원나라 황제 순제(順帝)의 초청을 받아 반야경(般若經)을 강설(講說)하기도 했다.

1348년 귀국하여 경기도 광주(廣州)에 머물며 일가친척을 죄다 이곳으로 소환하여 살게 했는데,
광주를 현으로 승격시켜 줄 것을 조정에 건의하여 광주에 감무(監務)가 설치되었다. 1356년 공
민왕의 왕사(王師)가 되어 원융부(圓融府)에 머물며 승려의 임명권을 장악, 고려 불교계의 1인
자가 되었으며, 이때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통합을 주장했다. 허나 공민왕은 신돈(辛旽)을 신뢰
하면서 보우대사를 멀리하게 되는데 신돈은 그를 심하게 견제하여 속리산(俗離山)의 어느 암자
에 연금까지 시켰다.
신돈이 신기루처럼 사라진 이후, 공민왕은 그를 국사로 봉하려 했으나 자신을 박대했던 감정 때
문인지 병을 이유로 거절했다.

1381년 양산사(陽山寺)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때 우왕(禑王)으로부터 국사(國師)로 임명되었으며,
1382년 소설사(小雪寺)에서 열반에 드니 그의 나이 81세, 법랍(法臘) 68세이다. 우왕은 그에게
원증(圓證)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탑호(塔號)는 보월승공(寶月昇空)이다.

오랜 세월의 무게와 웅장한 멋이 풍기는 이 탑비는 1385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碑文)은 고려
3은의 하나로 명성이 높은 이색(李穡)이 썼으며, 거북 등의 귀부(龜趺)를 초석으로 삼아 비신(
碑身)을 세우고 그 위를 이수(螭首)로 마무리지었다.

탑비를 보호하는 비각은 옛날부터 있었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어 높다란 주춧돌만 남아있던 것
을 1980년에 복원했다. 참고로 원증국사의 탑과 탑비는 그와 인연이 깊던 용문산 사나사(舍那寺
)에도 있으며, 그의 사리를 2등분하여 태고사와 사나사에 봉안했다.
<사나사 답사기 보러가기 ☞
글보러 가기>


▲  원증국사탑비의 귀부(龜趺)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표정이 밝아 보인다. 그의 왕눈이 눈과
세모난 코는 700년의 세월이 무심히 할퀴고 간 상처들이 배여 있으나
그의 미소 만큼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  청암대종사(靑岩大宗師) 부도

원증국사탑비 곁에는 새롭게 청암대종사 부도가
뿌리를 내렸다. 청암은 1964년 태고사를 중건했
던 승려로 지금의 태고사가 있게 한 인물이다. 그는 2009년에 입적했는데, 태고사 창건주의 비
석 옆에 자리를 만들어 나란히 기리고 있다.


▲  원증국사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태고사 산신각(山神閣)
산신(山神)을 봉안한 공간으로 특이하게도 돌과 바위로 건물을 지었다.

▲  채색된 산신각 산신도(山神圖)

산신각 내부는 현대적인 조명시설이 없어 조금은 어둡다. 다행히도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촛불
들의 희생으로 산신도를 보는 데 그리 어려움은 없다.

산신도는 바위를 쪼아서 그린 벽화로 예전에는 흑백모드였으나 나중에 채색을 하여 칼라모드가
되었다. 색이 입혀져서 예전보다 더 선명하게 보이지만 그려진 폼은 좀 별로인 것 같다.
꼬랑지를 강하게 쳐들며 으르렁거리는 호랑이의 모습은 제법 용맹이 깃들여져 보이며, 하얀 긴
수염을 지닌 산신이 멀뚱한 표정으로 호랑이 앞에 앉아 있다. 그 옆에는 산신의 비서인 동자(童
子)가 찻잔을 들고 서 있는데, 동자라 하기에는 너무 연세가 지긋하게 보인다. 그래서 내가 일
행들에게 우스개 소리로
'저 찻잔을 든 사람은 원래 산신이었는데, 산신들간의 경쟁에 밀려 산을 말아먹었다. 그래서 먹
고 살고자 저 산신의 비서로 취업한 것이다'


▲  석종형(石鐘形)부도 3형제
산신각 뒤쪽 숲속에 숨어 있는 석종 모양의 부도로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다.
고색의 무게를 간직하며 양지 바른 곳에 나란히 있는 모습이 정겹다.

▲  태고사 원증국사탑(圓證國師塔) - 보물 749호

태고사 경내에서 산신각을 거쳐 뒤쪽(봉성암 방면)으로 2분 정도 오르면 수려한 모습의 원증국
사탑을 만날 수 있다. 이 탑은 앞서 언급한 보우대사의 사리가 담긴 부도로 그가 입적(入寂)하
자, 태고사에 사리를 봉안하고 일부는 용문산 사나사로 보내 탑을 만들어 봉안했다.

그는 열반에 들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시를 남겼는데. 그도 죽기 전에야 인생무상을 뼈저
리게 느꼈던 모양이다.
 
    사람의 목숨은 물거품처럼 빈 것이어서   人生命若水泡空
    팔십여 년이 봄날 꿈속 같았네           八十餘年春夢中
    죽음에 이르러 이제 가죽포대 버리노니   臨終如今放皮袋
    둥글고 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네     一輪紅日下西峰

이 부도는 기존의 고려시대 부도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유명한데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그 위에 마치 조그만 부도가 들어앉은 듯한 지붕돌을 두었으며, 그
위에 다시 특이한 모습의 머리 장식을 얹었다.


▲  꽃무늬로 정신이 없는 원증국사탑 기단부

기단의 밑 부분에는 정교한 꽃무늬가 잔뜩 새겨져 있으며 8각의 가운데 받침돌에는 기둥무늬와
꽃무늬로 가득하다. 탑의 조성 시기는 1385년 무렵으로 멋드러진 탑의 모습을 통해 고려 조정의
보우대사에 대한 신뢰와 제자들의 지극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예전에는 이곳에 원증국사부도만이 외로이 서 있었으나 근래에 이르러 어느 승려의 탑을 그 밑
에 나란히 세워 놓았다. 이곳에 탑을 세울 정도면 청암대종사와 더불어 태고사 발전에 크게 기
여했던 승려가 분명하다.

아래쪽 부도는 보우대사에 대한 존경과 일편단심을 표하려는 듯, 원증국사탑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모습도 많이 비슷하다. 특히 충주 정토사(淨土寺) 부도탑과 상당히 비슷한데 시원스레 올려
진 지붕돌의 처마가 꽤 인상 깊다.


▲  오랜 세월을 뛰어넘은 원증국사탑과 새로운 부도탑

 

 


 

♠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 내부에 세운 비상용 행궁
북한산성행궁터(北漢山城行宮址) -
사적 479호

▲  행궁 외전터

중흥사터에서 북한산성계곡을 거슬러 15분 정도 가면 행궁터를 알리는 안내문이 나온다. 여기는
행궁의 외곽 부분으로 남장대(南將臺)로 가는 서남쪽 산길을 꾸준히 오르면 행궁터가 계속 펼쳐
지면서 지금은 주춧돌로 변한 외전터와 내전터가 모습을 비춘다.
행궁(行宮)이란 비상시나 지방 시찰 때 제왕이 머무는 공간이다. 대표적인 조선 때 행궁으로 화
성(華城) 행궁, 온양온천(溫陽溫泉) 행궁, 남한산성(南漢山城) 행궁, 그리고 북한산성 행궁 등
이 있었다.

북한산성 행궁은 1711년(숙종 37년) 북한산성 보수공사를 맡은 김우항(金宇杭)이 국가 비상시 
머물 수 있는 행궁을 세울 것을 건의하면서 조성되었다. 행궁과 더불어 경리창상창, 금위영, 호
조창(戶曹倉), 어영청(御營廳) 등 여러 관청이 행궁 밑에 빼곡히 지어지면서 북한산성계곡 상류
는 그야말로 조그만 도시를 이루었는데, 이는 위급시 이곳으로 피신하여 비상작전을 수행할 임
시 수도의 역할을 하기 위함이다.

행궁의 규모는 124칸 정도로 제왕의 생활공간인 외전(外殿)과 왕비의 거처인 내전(內殿)으로 이
루어졌다. 또한 행궁을 동서로 가르며 조그만 계곡이 북한산성계곡으로 흘러가는데 이를 일종의
금천(
禁川)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행궁에 버금갈 정도로 잘 지어졌으나 정작 제왕들
은 이곳에 온 적이 없었다. 그럴만한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비상 행궁이라 조선이 천하를 다스릴 때는 그런데로 유지가 되었으나 왜정
이후, 방치에
가까운 관리소홀과 1915년 대홍수로 건물들은 하염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6.25를 겪으면서
나머지 남은 것들도 말끔히 붕괴되어 건물을 떠받들던 주춧돌만이 앙상하게 남게 되었다.

현재 행궁터에는 내전과 외전으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축대 일부, 좌우의 담장터 등이 남아 있고
기와조각들이 어지러히 널려 옛날을 그리워한다. 특히 내전터에는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주춧돌이 있고 기단과 석축이 남아 있는데, 성능대사가 작성한 '북한지(北漢誌)'에는 '좌우상방
2칸, 대청 6칸, 사면퇴 18칸, 도사 28칸'
이란 기록이 있어, 정면 5칸, 옆면 2칸 건물에 사방 1
칸씩을 덧단 구조의 전각으로 여겨진다.

행궁터 북쪽 구석에는 잘생긴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피부에 활을 건다는 뜻의 '게궁암(揭弓岩)
' 바위글씨가 있었다. 1992년 겨울, 부친(父親)과 왔을 때 본 기억이 있어 누렇게 뜬 수풀을 비
집고 들어가 보았으나 내가 별로 달갑지 않았는지 아니면 그새 훼손되어 없어졌는지 결국 만나
지 못했다.


▲  1904년경 북한산행궁의 모습 (문화재청 사진)


▲  수풀에 뒤덮힌 행궁터

북한산행궁은 산자락에 터를 닦았기 때문에 돌로 축대를 다져 건물을 지었다. 비록 행궁의 한계
로 서울 궁궐보다는 훨씬 작게 지어졌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규모는 아니다. 124칸이면 사대부나
부자의 고래등 기와집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던 행궁은 제대로 역할도 하지 못한 채, 마치 아틀란티스 대륙이 쏙 사라진 것처럼 나
무와 수풀의 조그만 나라가 되어 옛터만 황량히 남아있으니 역시 인간의 창조물은 그 아무리 대
단하고 견고하다 한들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먼지에 불과하다.


▲  행궁 내전터 ▼

내전터 한쪽에는 조그만 우물이 있다. 아마도 행궁에 물을 공급했던 우물일 것이다. 대머리처럼
허전하기 그지없는 옛터에는 주춧돌과 축대를 이루던 돌이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누렇게 익으며
인생의 말년에 다다른 낙엽이 그 빈 공간을 따스하게 덮어주며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인간의 부질없음이 담긴 공허한 북한산성행궁터는 고양시와 문화재청에서 복원계획을 가지고 있
으나 워낙 첩첩한 산골이라 공사가 그리 여의치가 않다. 다행히 이곳은 생전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놓아 복원에는 문제는 없겠으나 완벽하게 복원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므로 무리하게 벌이
지말고 지금 이대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듯 싶다. 폐허의 현장에서 마음껏 상상의 스케치를 해
보는 것도 답사에 좋은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행궁터에서 실타래처럼 이어진 서쪽 산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남장대터가 나온다. 이곳은 북한
산성 안에서 가장 높은 측에 속하는 해발 700m 고지로 산성 내부와 북한산성 산줄기가 훤히 두
눈에 바라보여 조망이 천하 일품이다.

※ 북한산성행궁터 찾아가기 (2015년 12월 기준)
* 북한산성입구 정류장 → 대서문 → 북한동역사관 → 중성문 → 중흥사터 → 태고사입구 → 행
  궁터 (약 6km, 2시간)
* 대남문과 청수동암문에서 행궁터로 접근해도 된다.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69일대


▲  경리청상창터(經理廳上倉址)와 북한산성계곡 등산로 ▼

북한산성행궁터 입구에서 대남문 방면으로 조금 가다보면 길 오른쪽에 커다란 돌이 박힌 거대하
고 긴 석축이 마중한다. 이곳은 곡식을 보관하던 경리청상창의 옛터로 축대를 이루는 돌이 행궁
터보다 더 장대하여 비록 터만 남았음에도 위엄이 진하게 돋보인다.

경리청상창은 숙종 시절에 북한산성을 보수하고 비상용 행궁과 여러 관청을 지을 때 세워진 양
곡 창고로 '팔비헌'이란 현판이 있었다. 상창(上倉)은 창고 63칸, 내아(內衙) 12칸, 집사청(執
事廳) 3칸, 군관청(軍官廳) 4칸, 서원청(書員廳) 4칸 등 총 86칸 규모로 북한산성 행정업무를
보던 관성소(管城所)를 같이 두었으며, 행궁을 관리하는 관성장(管城將)이 근무했다.

북한산성의 양식 창고는 상창 외에도 호조창(戶曹倉)과 중창(中倉), 하창(下倉), 그리고 평창(
平倉) 등이 있었으며, 상창은 19세기 후반에 파괴되어 사라진 것으로 여겨진다.


▲  잡초만 무성한 경리청상창터 내부

▲  금위영이건기비(禁衛營移建記碑)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87호

경리청상창터에서 대남문으로 10분 정도 오르면 길 왼쪽에 문화재 안내문이 손짓 할 것이다. 안
내문 안쪽에는 적당히 닦인 공터가 있는데, 그 오른쪽 구석에 바위에 비문(碑文)을 새긴 독특한
비석, 금위영이건기비가 수줍은 듯 자리해 있다.

금위영(禁衛營)은 병자호란 이후에 서울을 방어하고자 세운 5군영의 하나로 원래는 동소문(東小
門, 혜화문) 안쪽에 있었다. 허나 그 지대가 높고 무너지기가 쉬워서 1715년 북한산성 안 지금
의 위치로 이전하고 그것을 기리고자 이건기비를 세웠다. 비문은 당시 도제조(都提調)를 지낸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이 지었다.

이 비석은 서 있지 않고 길게 누워있는 형태로 화강암 바위면에 비문을 새겼으므로 마애비(磨崖
碑)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비문은 마멸된 부분이 많아서 정상적인 눈으로는 제대로 확인하기가
어렵다. 탁본을 해야 전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 비석 뒷면은 흙에 묻혀있고, 비문 위쪽에는
낙수면(落水面)이 새겨진 지붕돌이 놓여져 있는데, 이곳의 청정함을 자랑하듯 푸른색 이끼 옷을
걸쳤다.

북한산성계곡 상류(중성문~대성암)가 말끔히 개방되기 이전이자 내가 꼬마 시절이던 1990년 이
비석을 보고는 매우 신기하여 이리저리 살폈던 기억이 난다. 당시 계곡 상류는 금지된 구역이라
군인에게 신분증을 맡기고 들어가야 했는데, 1992년 이후 개방되어 자유의 땅이 되었다.


▲  누런 잡초만이 가득한 금위영유영지(禁衛營留營址)

금위영이건기비 남쪽에는 금위영의 유영이 있던 공터가 있다. 서울에 있던 금위영을 1715년 이
곳으로 이전했는데, 금영(禁營), 금창(禁倉)으로도 불렸다. 허나 19세기 후반 북한산성에 대한
관리가 끊어지면서 주변의 여러 건물과 더불어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  이끼의 보금자리가 된 금위영유영지 축대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세월의 장대한 흐름 속에 모든 것이 씻겨 내려간 금위영유영터에는
주춧돌과 석축 일부만이 고개를 들며 지나간 세월을 그리워한다. 마치 옛날을 그리워하는 우리
네 인간들처럼 말이다.

* 금위영이건기비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32

 


♠  북한산성 대남문(大南門)과 보현봉 그리고
서울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절집, 문수사(文殊寺)

▲  북한산성 대남문 - 사적 162호

금위영이건기비에서 대성암을 지나 20여 분을 오르면 북한산성 13성문의 하나인 대남문이 마중
한다. 이 문은 1712년에 세워진 것으로 도성(都城)과 산성을 잇는 중요한 문인데, 문을 경계로
안쪽은 경기도 고양시, 바깥쪽은 서울 종로구이다.

왜정 이후 홍예문만 남아있던 것을 1990년 이후에 문루를 복원했다. 이곳에 서면 가까이에 보현
봉을 비롯하여 서울 도심과 한강(漢江), 멀리 강남구와 동작구 지역까지 두 눈에 거침없이 들어
와 조망 하나는 천하 일품이다.

문을 나서서 직진하면 구기동과 평창동이며, 오른쪽으로 가면 고려시대에 창건된 조그만 산중암
자 문수사(文殊寺)가 나온다.


▲  대남문 앞에서 천하를 굽어보다.
서울 도심과 용산, 강남, 동작 지역까지 훤히 바라보인다.

▲  높은 하늘을 이고 천하를 응시하는 보현봉(普賢峰, 700m)의 위엄


▲  문수사 문수굴에 자리를 편 문수보살(文殊菩薩)

한칸 방 어찌 그리 너무도 고요한가, 일만 인연 모두 적막하네
길은 돌 틈으로 뚫고 가고, 샘은 구름 속에서 새어나네
밝은 달 처마 끝에 걸려 있고, 산들바람 숲 속에서 일어나네
누구 저 스님 따라, 고요히 앉아 참 낙을 배우려나

* 탄연(坦然)이 문수사에서 지은 시


북한산성 대남문을 나와서 오른쪽(서남쪽) 길로 3분 정도 가면 해발 640m 고지에 둥지를 문수사
가 모습을 드러낸다.
문수사는 문수봉(文殊峰) 바로 밑에 터를 닦은 산사로 서울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절이다. 북
한산에 안긴 절 가운데 가장 조망과 경관이 일품으로 경내에 있는 문수굴은 예로부터 영험 있는
기도처로 명성이 자자했다.

이 절은 1109년(고려 예종 4년) 탄연(坦然)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기암괴
석과 경관, 그리고 천연동굴(현재 문수굴)에 반해 절을 세우고, 문수암(文殊庵)이라 했다고 한
다. 1451년(문종 1년) 문종의 딸인 연창공주(延昌公主)가 중창했으며, 그 이후 500년 가까이 적
당한 자취를 남기지 못해 아마도 오래 못 가서 망한 것으로 보인다.
 
1921년 삼성각과 오백나한전을 중수했는데, 이 사실로 봐서는 이때 오랫동안 꺼진 법등(法燈)이
다시 켜진 듯 하다. 허나 6.25전쟁으로 한줌의 재가 되었으며, 1957년 신수(信洙)가 중건하고,
1983년에 주지 혜정(慧淨)이 삼성각과 나한전을 개축했으며, 2002년에 대웅전과 응진전(應眞殿),
요사 등을 새로 건립하여 지금에 이른다.

절 인근에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있던 그 유명한 비봉(碑峰)이 있다. 지금 순수비는 건
강 때문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있지만 그 비석에 '한성(漢城)을 지나 고개를 올라..(중략) 한
도인(道人)이 석굴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내용이 있어 그 석굴을 문수굴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절이 너무 높은 곳에 자리해 있어 오르기는 힘들지만 조망이 국보급이라 문인들이 많이 찾아와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는데, 고려 중기 때 이장용(李藏用, 1201~1272)을 비롯하여 최립(崔岦,
1539~1612), 홍세태(洪世泰, 1653~1725) 등이 이곳을 거쳐갔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의 어머니가
가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이곳까지 찾아와 문수굴에 봉안된 오백나한에게 치성을 올려 이승만
을 낳았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이승만이 80 고령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올라와 '문수사' 현판을
남겼으며, 당시 승려와 찍었던 흑백사진도 아련히 절에 남아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三聖閣), 응진전, 요사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위치가 가파른 곳
이라 사세 확장도 어렵다. 대웅전 옆에는 문수사의 명물이자 지금의 문수사를 있게 한 문수굴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은 아쉽게도 하나도 없다. 다만 대웅전에 봉안된 문수보살좌상이 명성황후
(明成皇后)가 시주한 것이라 하니 그게 제일 오래된 것이며, 대웅전 석가불은 영왕(英王, 영친
왕)이 봉안한 것이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고색의 때는 오래 전에 증발해서 사라졌으나 그 대신 천하 제일의 조망과 주변경
관을 품고 있어 그 아쉬움을 다소 달래준다. 경내에 오르면 가까이로 구기동(舊基洞)과 부암동
부터 서울 도심, 멀리 한강과 관악산(冠岳山)까지 보인다. 또한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곳이라
구름이 아래로 흘러가며, 공기 또한 속세와 틀리다.

서울 도심과도 무척이나 가까우며, 도심의 상징인 종로구에 있음에도 분위기는 180도 확연히 틀
리다. 구기동에서 2시간을 낑낑대고 올라야 이를 만큼 산행의 수고로움을 감내해야 되지만 서울
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지붕으로 굳이 멀리 나갈 필요 없이 산중암자의 고즈넉함과 아늑함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  문수사의 명물 문수굴(文殊窟)

문수사 경내에서 눈여겨 볼 곳은 바로 문수굴이
다. 탄연이 이 굴에 반해 절을 지었을만큼 문수
사의 가장 소중한 꿀단지로 거대한 바위에 나
있는 자연동굴이다.
문수사를 거쳐간 승려들이 수도를 했던 곳이지
만 딱히 옛 흔적은 없으며, 1983년 주지 혜정이
동굴 입구에 목조로 문을 만들었다. 문에 걸린
'삼각산천연문수동굴(三角山天然文殊洞窟)'이란
현판은 달랑 29만원으로 악명이 대단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글씨이다.

동굴 내부에는 문수보살을 중심에 봉안했고, 좌
우로 나무로 만든 조그만 문수보살 20여기가 든
든하게 병풍이 되어준다. 예로부터 영험이 있는
기도처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이곳에 있던 오백
나한은 응진전(오백나한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문수사를 이렇게 둘러보고 구기동으로 내려가
저녁을 먹고 산행을 마무리 지었다.

※ 북한산 문수사 찾아가기 (2015년 12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각역(1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7212번(수색,은평차고지↔옥수동)시내버스를 타고 구기동 현대빌라나 승가사입구 하차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시내버스를 타고 구기동 현대빌라나 승가사입구
  하차
* 산행코스 : 구기동(현대빌라, 승가사입구) → 구기분소 → 승가사갈림길 → 깔딱고개 → 문수
  사 (2시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2 (☎ 02-391-2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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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산사 나들이 ~ 영조 임금의 효심이 깃든 파주 고령산 보광사


' 한겨울 산사 나들이 ~ 파주 보광사(普光寺)'

▲  보광사 목어


겨울의 제국이 강추위로 천하를 부들부들 떨게 만들던 겨울의 한복판에 파주(坡州)에 있는 보
광사를 찾았다. 이곳은 어린 시절에 2~3번 가본 인연이 있는 곳으로 구파발역에서 파주시내버
스 333번(금촌↔구파발)을 타고 보광사로 들어간다.

보광사에 가려면 고양시(高陽市) 벽제동과 파주시 광탄면(廣灘面) 동부 지역을 잇는 고갯길인
됫박고개를 넘어야 되는데 고개가 제법 패기가 있다. 이 고개는 조선 21대 군주인 영조(英祖)
와 인연이 아주 깊은데, 그는 소녕원(昭寧園,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 묘역)과 소녕원의 원찰
인 보광사를 자주 찾았다. 그때마다 이 고개를 싫든 좋든 넘어야했지.
고개가 제법 험준하여 다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지라 뚜껑이 열린 영조는 '고개를 더 파서
낮추라!'고 명했다. 그 연유로 '더 파기 고개'가 되었다가 나중에 됫박처럼 가파르다 하여 됫
박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4발 수레로 편하게 넘을 수 있다지만 그 수레들도 이 고갯
길만큼은 조심스레 바퀴를 굴리며 몸을 사린다.

버스에서 내리니 보광사 일주문(一柱門)이 여기까지 나와 중생을 맞는다. 문 좌측에는 고령산
에서 발원한 계곡이 숨을 죽여 흘러가고, 일주문을 들어서면 주막과 찻집이 주를 이루는 조그
만 마을이 고개를 내민다. 이곳은 절 밑에 터를 닦은 이른바 사하촌(寺下村)으로 보광사와 고
령산을 후광(後光)으로 삼아 밥장사를 하는데, 보리밥이 꽤 유명하다.

부처의 세계를 코앞에 둔 속세의 마지막 유혹이라고나 할까? 찻집과 주막의 유혹을 벗어나 10
분 오르면 보광사의 산문이 나타난다.


  보광사 일주문을 들어서다

▲  '고령산보광사'라 쓰인 보광사 일주문(一柱門)

대부분의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주문은 절의 정문이다. 보광사의 일주문은 1999년에 지어진
것으로 문이라고는 하지만 문을 여닫는 문짝이 없어 절을 찾은 중생이나, 산을 찾은 등산객, 부
자와 서민 등 그 누구도 가리지 않고 반갑게 맞이한다. 일주문처럼 넓은 포용력을 지니며 살리
라 다짐을 하건만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  보광사의 옆구리를 거쳐 속세로 흐르는 고령산 계곡
얼음 밑으로 숨죽여 흘러가는 계곡, 소쩍새가 울 때면 움츠려든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켤 것이다.

▲  겨울의 정령에 사로잡힌 보광사 가는 길
겨울의 제국 치하에 들어간 나무들은 잔뜩 몸을 움츠리며 봄의 해방군을 기다린다.

▲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

일주문을 지나 8분 정도 오르면 흙담장에 가린 보광사의 모습이 나타나면서 길이 2갈래로 갈라
진다. 길 오른쪽에는 윗 사진처럼 계곡 위에 걸린 돌다리를 건너 흙길과 계단을 거쳐 경내로 들
어가는 길과 경내까지 뚫린 수레길을 이용하여 가는 것이 있다. 어느 길을 이용하든 경내로 통
하지만 돌다리 코스가 운치가 있으며, 수레길이 없던 옛날에는 저 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섰다.

절을 받치고 있는 석축(石築)은 마치 산성(山城)처럼 3중으로 계단식으로 쌓여져 있으며, 그 위
에 담장을 두르고 넓게 터를 닦아 절을 일구었다. 만세루 남쪽은 석축을 1단으로 높게 쌓았다.


▲  보광사 설법전(說法殿)

갈림길에서 2분 정도 오르면 길 왼쪽에 설법전이란 길쭉한 건물이 있다. 이곳에는 찻집인 도솔
천(兜率天)과 종무소(宗務所)가 있으며, 여러 법회(法會)와 강좌가 열린다. 그리고 도솔천에서
는 다양한 전통차와 온갖 불교용품을 판매하고 있는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곳에서 일다경(一
茶頃)의 여유를 누리고 싶다.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명당자리, 영조 임금과의 각별한 인연으로
조선왕실의 원찰로 번영을 누린 ~ 고령산 보광사(古靈山 普光寺)

▲  겨울 햇살의 드넓은 손길이 구석구석 보듬고 있는 보광사

보광사는 서울과 가까운 고령산(621m) 서쪽 자락에 아늑히 안긴 산사(山寺)로 절 이름인 보광(
普光)은 넓은 광명(光明)을 뜻한다고 한다. 그렇게 좋은 뜻을 가지고 있으니 그 이름을 지닌 오
랜 절집만 서울 주변에 4곳(서울 우이동, 파주, 과천, 남양주)이나 된다. 그중에서도 이곳이 가
장 오래되고 제대로 남아있다.

보광사는 신라가 망해가던 894년(진성여왕 7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왕명에 따라 비보(裨補
) 사찰로 창건했다고 전하나 확실한 것은 없다. 창건 이후 1215년 원진국사(元眞國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며, 법민대사(法敏大師)가 불보살(佛菩薩) 5위를 봉안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1388년에
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창을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22년에 설미(雪眉), 덕인(德仁)이 중건하고 1634년 범종을 만들었다.
그 범종이 보광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숭정7년명동종이다. 1667년에는 지간(智侃), 석련(石
蓮)이 대웅전과 관음전을 중수했다.

보광사가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누린 것은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시절이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소생으로 그녀의 무덤인 소녕원(昭寧園)이 보광사 서쪽 영장리에
있다. 그런 인연으로 영조는 보광사를 소녕원의 원찰(願刹)로 삼아 많은 지원을 내렸으며, 그때
대웅보전과 관음전을 중수하고 절에서 가장 큰 건물인 만세루를 세웠다. 또한 소녕원에 참배하
러 갈 때는 보광사에 꼭 들렸다.
이렇게 원찰로서의 지위와 번영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쭉 이어져 1863년에 왕실의 지원에 힘입
어 나한전, 큰방, 수구암을 짓고,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석가3존불, 16나한상 등을 조성했으며,
1864년에는 관음전과 별당을 세우고, 1869년에 절을 중수했다. 1901년에는 상궁(尙宮) 천씨의
시주로 대웅전과 만세루를 중수하여 절의 면모를 크게 하였다.

이렇게 잘 나가던 보광사는 1950년 6.25전쟁으로 대웅전과 별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
되는 비운을 겪는다. 그 이후 꾸준한 중창불사로 관음전을 새로 짓고 만세루를 해체하여 복원했
으며, 1981년에 석불전이라 불리는 거대한 대불(大佛)을 세웠다. 2003년에는 납골당(納骨堂) 사
업에도 손을 뻗쳐 경내 북쪽에 영각전을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고색의 기운이 진한 경내에는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원통전, 어각실, 응진전, 산신각, 지장전,
만세루, 수구암, 설법전, 영각전 등 10여 동의 건물이 가득 들어차 있으며, 대부분이 서향(西向
)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북쪽을 제외하고 경내 주변을 토담으로 빙 둘러 속세와 부처의 세계의
경계를 가른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인 대웅보전과 숭정7년명동종, 목조보살입상(지방유형문화재 248
호)을 간직하고 있으며, 지장탱화와 나한탱화등 19세기에 그려진 불화가 다수 있다. 만세루와
어각실, 응진전도 18~19세기에 지어진 건물이며, 어실각 옆에는 영조가 심었다는 향나무가 무럭
무럭 자라고 있다. 또한 수구암(守口庵)과 영묘암(靈妙庵), 도솔암(兜率庵) 등 부속암자 3곳을
가까이에 거느리고 있다.

서울에서 가깝지만 깊은 산중에 안겨있어 고요함과 고즈넉함이 중생의 마음을 편하게 인도하며,
산새의 지저귀는 소리와 바람의 소리, 그리고 풍경소리와 목탁소리가 전부인 산사이다. 또한 절
을 알처럼 품은 고령산은 숲이 울창하고 봄과 가을에는 꽃과 단풍의 화려한 향연으로 이름을 날
려 휴일에는 많은 등산객이 찾아온다. 고령산을 오르려면 보광사를 거쳐가야 되기에 그날만큼
은 중생들로 경내는 시끌벅적하다.

▲  대웅보전을 옆에서 가린 요사채

▲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응진전 우측의 장독대들

※ 파주 보광사 찾아가기 (2013년 2월 기준)
* 3호선 구파발역(1,2번 출구)이나 삼송역(3호선, 8번 출구)에서 파주시내버스 333번을 타고 보
  광사 하차, 버스는 20~4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까지 수레 접근 가능)
① 서울 → 문산 방면 1번 국도 → 대자3거리에서 의정부 방면으로 우회전 → 고양동에서 광탄
   방면으로 좌회전 → 벽제3거리에서 우회전 → 보광사입구 → 보광사
② 수도권외곽고속도로 → 통일로나들목에서 문산 방면 → 대자3거리에서 의정부 방면으로 우회
   전 → 고양동에서 광탄방면으로 좌회전 → 벽제3거리에서 우회전 → 보광사입구 → 보광사

★ 보광사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으며, 경내와 일주문 부근에 주차장이 있다.
* 보광사 템플스테이(Temple stay)는 부정기적으로 열린다. 개인은 1박 2일, 단체와 어린이는 2
  박 3일 일정으로 진행되며, 자세한 것은 보광사 홈페이지를 참조한다. 참가 신청은 홈페이지
  에서 하거나 전화로 하면 된다.
*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13 (☎ 031-948-7700~1)
* 보광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꾹 누른다.


▲  대웅보전 뜰에서 바라본 고령산

▲  범종각(梵鍾閣)

경내로 들어서면 대웅보전을 가리고 선 요사 서쪽에 단촐한 모습의 범종각이 있다. 범종각 옆에
는 문화재안내판이 멀뚱히 서 있는데, 범종각에 걸린 종이 숭정7년명동종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은 범종각의 종이 그것인줄 안다. 허나 종을 잘 살펴보면 고색의
때도 거의 없을뿐더러 중간중간 한글이 보여 근래에 새로 만든 종임을 알 수 있다. 원래의 종은
최근까지 이곳에 있다가 건강을 이유로 대웅전으로 옮겼다.
범종각은 대웅전에 있던 숭정7년명동종를 위해 1990년에 지어졌으며, 만세루에 있던 목어(木魚)
도 이곳으로 잠시 옮겼으나 다시 원위치시켰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응진전(應眞殿)과 산신각(山神閣), 3층석탑

대웅전 우측 석축 위에는 단촐한 모습의 전각 2개가 오붓하게 자리해 있다. 우측에 자리한 응진
전은 1863년에 중건된 것으로 원래 이름은 나한전(羅漢殿)이었다. 내부에는 1863년에 조성된 것
으로 보이는 석가3존불과 16나한상이 있으며, 나한탱화는 1877년에 금곡영환(金谷永煥), 한봉창
엽(漢峯瑲曄) 등의 화승이 그렸다. 응진전 곁에 자리한 1칸짜리 산신각은 1893년에 중건된 것으
로 근래에 만든 산신상과 산신탱이 있다.
그들 앞에는 맵시가 돋보이는 3층석탑이 서 있는데, 원래는 대웅전 뜨락에 있었다.


▲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원통전(圓通殿)

대웅전 좌측에는 관음보살을 봉안한 원통전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
물로 이곳에는 예전에 쌍세전(雙世殿)이 있었으나 1994년에 부시고 새롭게 원통전을 지었다.
새로 지은 것이다보니 그냥 지나치고 말았는데, 알고보니 보광사의 불화(佛畵) 가운데 가장 오
래된 지장탱화(地藏幀畵)가 들어있었다. 순간의 방심으로 놓친 그 그림은 1802년 승려 경욱(慶
郁)이 그린 것으로 원래는 부속암자인 수구암에 있었다고 하며, 지장탱화와 나란히 있는 삼장탱
화(三藏幀畵)는 1898년에 제작된 것으로 경선응석(慶船應釋), 금화기동(錦華機同), 용담규선(龍
潭奎禪)이 그렸다.


▲  원통전 앞에 자리한 지장전(地藏殿)

지장전은 원통전과 마찬가지로 1994년에 지어졌다. 지장보살과 도명존자(道明尊者), 시왕상(十
王像) 등 저승의 주요 식구들의 존상(尊像)과 그림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중 장군탱화는 1872년
에 제작된 오래된 그림이다. 지장전에 있던 존상과 그림은 원래는 쌍세전에 있었다.

◀  어실각(御室閣)과 향나무

원통전 뒤쪽에는 조그만 1칸짜리 어실각이 있다.
이 건물은 1740년에 보광사를 소녕원의 원찰로
삼으면서 세운 것이라 전하며, 굳게 닫힌 내부
에는 숙빈최씨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건물 옆에는 겨울의 제국에도 아랑곳 않고 푸르
름을 간직한 10m 정도의 향나무가 자라고 있는
데, 이는 영조가 심은 것이라 한다. 세월을 양
분으로 삼아 무럭무럭 자란 향나무에는 영조의
혼이 깃들여 있는 건지 늘 어실각에 시원한 그
늘을 드리운다.


▲  왕실의 어보(御寶)처럼 특별하게 보이는 어실각
영조에 어미에 대한 그리움과 효를 읽을 수 있다.

▲  어실각 뒤쪽으로 끝없이 이어진 토담
흙으로 만든 토담의 모습이 너무 정겹다. 절과 속세의 경계선으로 그어진
토담 너머로 소나무가 속세의 악한 기운과 냄새로부터 절을 지킨다.


  안팎으로 다양한 볼거리와 보물을 간직한 보광사의 보물창고
대웅보전(大雄寶殿)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83호

경내 중앙에는 보광사의 법당(法堂)인 대웅보전(대웅전)이 만세루를 마주보고 있다. 만세루 다
음으로 규모가 큰 건물로 기와부터 기둥까지 고색의 내음이 진하게 묻어나 있다. 법당으로서의
품격과 위엄이 돋보이는 보광사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원래는 창건 시절부터 있었다고 하나 지금의 건물은 1740년에 중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대웅전은 만세루보다 1단계 높은 석축 위에서 서쪽을 바라고 있다. 건물을 받치는 석축은 자연
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이용했으며, 돌마다 기나긴 세월의 때가 가득 입혀져 고색의 향기를
강하게 풍긴다. 건물의 벽은 흙벽이 아닌 나무벽으로 되어 있고, 좌우측벽에는 다른 절에서는
보기 힘든 5개의 색다른 벽화가 눈길을 단단히 붙잡는다. 이들 벽화는 1740년에 건물을 중건하
면서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불단에는 조선 후기 불상인 삼세불을 중심으로 한 5존불이
있으며, 1898년에 그려진 석가모니후불탱화를 비롯한 6개의 불화와 숭정7년명동종, 금고(金鼓)
등 오랜 보물이 깃들여져 있다. 그야말로 보광사의 보물창고인 셈이다.


▲  대웅보전 우측벽화

왼쪽에는 하얀 옷을 입은 백의관음보살이 물결이 출렁이는 바다 위에서 배를 움직이고 있는데,
중생을 이끌며 거친 파도를 헤치고 극락으로 가는 모습을 담은 것 같다. 오른쪽에는 상아가 탐
나보이는 거대한 코끼리와 등에 올라탄 승려가 담겨져 있는데, 코끼리는 부처의 법을 상징한다
고 한다.


▲  대웅보전 좌측벽화

▲  좌측벽화의 좌측 그림
창을 들고 옷자락을 휘날리는 모습이 사천왕의 하나인 광목천왕(廣目天王) 같다.
부처를 지키는 성스러운 존재로 팔에 주름진 근육이 그의 힘을 느끼게 한다.
허나 그의 표정은 천왕(天王)으로서의 위엄과 무서움보다는 귀엽다는
인상을 지을 수 없게 한다.

▲  좌측벽화 가운데의 그림
개와 비슷하게 생겼으면서 이상하게 생긴 커다란 동물과 동자(童子)로
보이는 승려가 그려져 있다.

▲  좌측벽화 우측 그림
갑옷 비슷한 것을 갖춰 입고 비파 같은 것을 연주하는 모습이
사천왕의 일종인 다문천왕(多聞天王) 같다.

▲  대웅전 우측 출입문 위에 걸린 '고령산보광사상축서(上祝序)' 현판

대웅전 우측 출입문 창방에는 낡은 현판이 걸려있다. 이것은 '고령산보광사 상축서(古靈山普光
寺 上祝書)'로 1869년 왕실의 시주로 절을 중수한 것을 기리고자 만든 것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성상(聖上)은 고종, 왕비전하(王妃殿下) 민씨는 명성황후(明成皇后), 대원위(大院位)는 흥선대
원군(興宣大院君)으로 고종(高宗)의 가족이 보광사 중수에 크게 신경쓰고 지원했음을 보여준다.
현판에는 그들의 은혜로 절을 중수하여 그들의 성수무강(聖壽無疆)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
다.


▲  대웅전 불단(佛壇)에 모셔진 5존불

대웅전 불단에는 흔히 있는 3존불이 아닌 5존불이 봉안되어 눈길을 끈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
우에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앉아 있으며, 이들 불상은 이른바 삼
세불(三世佛)이다. 그들 좌우로 현란한 보관(寶冠)을 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서 있는데, 이
들은 마땅히 둘 장소가 없어서 삼존불 옆에 배치하여 졸지에 5존불이 된 것이다. 그들 모두 지
그시 눈을 감으며 은은하게 미소를 드리운 포근한 표정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저보다 편안한 표정이 어디에 있을까?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에 따르면 이들은 1215년 원진국사가 절을 중창할 때 조성했다고 한다. 허
나 저들은 엄연히 조선 후기 불상이다. 그들 뒤로는 석가가 설법을 하고 있는 석가모니후불탱화
가 걸려있는데, 1898년에 예운상규(禮芸尙奎), 경선응석(慶船應釋), 금화기동(錦華機同), 용담
규선(龍潭奎禪) 등의 화승이 그렸다. 후불탱에 깃들여진 빛바랜 고운 색채는 그림의 중후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며 신중탱화와 감로탱화, 칠성탱화, 독성탱화, 현왕탱화 등 5점의 불화(佛畵)
가 대웅전 내부 벽을 화려하게 수식하여 불화미술관을 방불케 한다. 이들 모두 후불탱화와 마찬
가지로 1898년에 제작된 것이다.

▲  독성탱화(獨聖幀畵)
지팡이를 쥐어들고 앉아있는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의 모습이다. 무슨 근심거리가 있는
것일까? 그의 표정에 우수(憂愁)가
서려 보인다.

▲  신중탱화(神衆幀畵)
조금의 여백도 허용치 않고 그림에 한가득
그려진 신들의 모습이다. 저들은 원래 인도의
토속신으로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되었다.


▲  칠성탱화(七星幀畵)
칠성신앙은 우리의 고유 민간신앙으로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되었다. 칠성(북극성)은
산신, 독성과 달리 부처에 준하는 대접을 받으며 치성광여래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여백이 없어 복잡한 신중탱화와 달리 이 그림은 눈이 편할 정도로 간결하다.

▲  현왕탱화(現王幀畵)

저승의 주인인 염라대왕(閻羅大王)이 심판을 하는 장면을 담았다. 여기서 현왕은 염라대왕을 지
칭하며, 대왕 주변으로 판관과 명부(冥府, 저승)의 여러 관리들이 구름처럼 모여있다. 대왕 앞
에 무릎끓고 앉아 있는 이는 이승에서 막 저승으로 들어온 사람인 모양이다. 그는 대왕에게 어
떤 판결을 받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  불단 우측에 있는 숭정7년명동종(崇禎七年銘銅鍾)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58호

단 우측에는 보광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숭정7년명동종이 놓여져 있다. (종의 위치는 바
뀔 수 있음) 이 종은 대웅전에서 계속 생활했으나 1990년 범종각을 지어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
다. 그러다가 근래에 종의 건강과 보호를 위해 다시 대웅전으로 옮기고 새 종을 만들어 범종각
을 지키게 했다.

이 종은 높이가 98.5cm로 범종각에 흔히 달려있는 범종(2~3m)보다 훨씬 작다. 종이 이렇게 작으
니 도난의 위험이 늘 도사리는 것은 당연하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범종으로 종 꼭대기에 2마
리의 용이 서로 뒤엉켜 종을 달리 위한 고리를 형성했다. 종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띠가 둘러져
있고, 그 가운데에 3줄의 띠가 둘러져 있어 종을 상하로 구분한다. 위쪽 부분에는 네모난 유곽(
乳廓) 4개와 보살입상(菩薩立像)이 4구가 있고, 아래쪽에는 파도무늬와 용이 종을 장식한다. 아
래 띠와 가운데 끼 사이에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는데 범종을 만든 시기와 제작자의 이름, 그리
고 보광사의 연혁이 길게 적혀 있다.
명문(銘文)에 따르면 이 종은 숭정7년에 제작되었다. 숭정7년은 1634년(인조 11년)으로 숭정은
명나라 황제인 의종(毅宗, 1611~1644)의 연호이다. 종의 이름은 바로 제작시기인 숭정7년에서
따온 것이다. 범종 불사에는 신관(信寬)이 화주를 맡았고, 설봉천보(雪峯天寶)와 3명의 승려가
범종을 조성했는데, 설봉천보는 1619년(광해군 11년)에 봉선사(奉先寺)의 대종(보물 397호)를
만들기도 했다.

대웅전 한쪽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조그만 종을 치고 싶다. 종을 치면 그는 졸음에서 깨어나
은은한 종소리를 건물 내에 잔잔히 울리겠지, 허나 문화재로 지정된 귀한 존재이자 보광사에 소
중한 보물로 괜히 그를 건드리다가는 된소리를 들을 각오를 해야 된다. 그냥 보는 것으로 만족
하는 것이 쌍방에 이롭다.

사진에는 없지만 불단 좌측에는 조그만 금고(金鼓)가 있다. 가운데에 태극마크를 그리고 가장자
리에 꽃무늬가 있으며, 전면에 '大皇帝陛下萬萬歲(대황제폐하만만세)'란 명문이 있어 고종이나
순종 시절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역시 황실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  영조의 친필이라 전하는 대웅보전 현판의 위엄
빛바랜 하얀 현판에 쓰인 대웅보전의 4글자 마치 글씨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처럼 필체의 힘이 넘쳐 흐른다.

▲  푸른 하늘을 바다로 삼으며 그윽한 풍경소리를 베푸는
대웅전 풍경물고기


  보광사 마무리

▲  승방의 역할을 겸하는 만세루(萬歲樓)의 후면(後面)

대웅보전과 마주보고 있는 만세루는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승방이 딸린 독특한 'T'구조를 하
고 있다. 이 건물은 원래 누각으로 1740년경에 영조의 지원으로 절을 중수할 때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며, 건물은 높은 석축을 발판으로 삼아 자리해 있다. 1913년과 1914년에 대한제국 상궁(
尙宮)의 시주로 중수를 했는데, 그때 만세루 옆으로 툇마루가 딸린 승방을 만들어 지금의 구조
를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정면 9칸의 규모로 '염불당중수시시주안부록(念佛堂重修時施主案付
祿)'이라 쓰인 현판이 있어 한때는 염불당(念佛堂)이란 이름을 지녔음을 알 수 있으며, 누마루
정면에 걸린 '고령산보광사'란 현판은 영조의 친필로 전해진다.


▲  만세루의 정면
누마루 정면에 영조가 썼다는 '고령산보광사' 현판이 있으며, 좌측 가장자리에
만세루란 현판이 걸려있다. 툇마루와 난간까지 갖춘 모습이 제법 품격을 갖춘
양반가를 보는 듯하다.


▲  만세루 목어(木魚)의 위엄
용을 꿈꾸는 목어가 입에 여의주로 보이는 동그란 것을 물고 하늘을 거닌다.
크게 부릅뜬 두 눈과 이글거리는 듯한 지느러미, 살랑거리는 꼬리 등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그를 덥썩 붙잡고 하늘을 날고 싶어진다.

▲  만세루 우측에서 속세로 나가는 문
수겹의 줄무늬가 쳐진 토담 사이로 속세로 안내하는 기와문이 있다.

▲  오색영롱한 연등이 대롱대롱 중생을 맞이하는 문 바깥 부분

▲  경내 서쪽을 빈틈없이 에워싼 토담
2중의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터를 닦아 절을 지었다.
천리장성처럼 끝없이 펼쳐진 토담의 물결 앞에 절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火魔) 등의 악귀도 두 손을 들고 물러갈 것이다.

▲  납골당으로 쓰이는 영각전(靈覺殿)

경내에서 개울 건너 북쪽에는 2003년에 만든 영각전이 자리해 있다. 이 건물은 납골당으로 서쪽
에 납골당으로 들어가는 지하도가 있으며, 위의 건물은 영가(靈駕, 죽은 이들)들을 위한 49재나
천도재를 지내는 공간으로 쓰인다. 내부 중앙에는 아미타불과 아미타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으
며, 외벽에는 고려불화(高麗佛畵)에 그려진 관음보살이 수려하게 그려져 있다.
* 납골당 문의는 보광사 영각전(☎ 031-948-4440)


▲  지하 납골당으로 들어가는 문 위쪽에 걸린 그림

관음보살이 영가를 배에 가득 태우고 넝실거리는 바다를 건너 극락으로 인도하는 장면이다. 판
옥선(板屋船) 비슷하게 생긴 큰 배에는 극락으로 가려는 이들로 가득하며, 배의 정원이 가득 차
서 따로 조그만 배 2척을 마련했다. 푸른 용과 붉은 용이 관음보살과 영가들을 지키며 극락으로
배를 이끈다. 출렁이는 물결이 마치 하늘로 치솟는 바위 산을 보는 듯 하다.


▲  석불전(石佛殿)

영각전 동쪽 높은 곳에 거대한 석불이 속세를 굽어보고 있다. 절에서는 이 석불(石佛)을 석불전
이라 부르는데, 그렇다고 건물은 아니다. 순천 금둔사(金屯寺, ☞ 관련글 보러가기)의 불보전처
럼 석불과 예를 올리는 공간을 통틀어 전(殿)이란 칭호를 준 것 뿐이다.

이 불상은 예전에는 나라를 지키는 호국대불(護國大佛)이라 불렀다. 1980년 1월 대웅보전 보살
상의 복장(腹臟) 유물이 도난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다행히 진신사리만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를 봉안하고자 1980년대 거액의 어음 사기 사건으로 악명이 높은 장영자의 시주로 경내에서
가장 높은 이곳에 터를 닦고 석불을 세웠다. 그리고 6.25전쟁 때 절 부근이 치열했던 격전지였
으므로 그때 죽어간 이들을 위로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호국대불이라 불리게 되었다.

석불의 복장에는 보살상에서 나온 진신사리 11과와 여러 나라에서 가져온 각종 보석, 법화경과
아미타경,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발원문(發願文)이 봉안되어 있으며, 불상의 높이는 대략 15m에
이른다.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잔잔히 미소를 드리운 석불은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서 있으며, 주변에
석등 2기가 그의 광명을 밝힌다. 이곳은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경내가 두 눈에 훤히 들어
온다.


▲  석불전에서 바라본 경내 서쪽 (설법전 구역)

▲  절을 뒤로하며 다시 속세로 나오다.

석불전을 끝으로 정말 오랜만에 찾은 보광사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둘러본 시간은 대략 1시
간 정도로 그냥 경내를 나오지 않고 다시 대웅전과 만세루를 찾아 거기서 조금 다리를 쉬었다가
속세로 아쉬운 발길을 떼었다. 고요하고 평안한 절을 뒤로하고 속세로 나올 때는 마치 돌아오지
못할 전쟁터로 향하는 군인의 처절한 기분이다. 아비규환의 속세에서 살아가는 것은 하루하루가
전쟁이기 때문이다. 속세는 언제쯤이나 극락처럼 평안해질까? 과연 그것이 가능이나 할까? 
이렇게 하여 한겨울 보광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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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2월 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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