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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2.04.13 대구 팔공산 북지장사, 대구올레팔공산1코스, 시인 이상화고택 나들이
  3. 2022.04.07 광주 남한산성 봄맞이 나들이 ~~~ (남한산 장경사, 망월사, 지수당, 연무관, 개원사)
  4. 2022.03.28 고양 최영장군묘, 고양동누리길, 성녕대군묘 역사기행 (대자산, 경안군 및 임창군묘)
  5. 2022.03.18 서울 도심의 오랜 우백호, 인왕산~인왕산둘레길 나들이 (탕춘대성, 기차바위, 한양도성, 석굴암)
  6. 2022.03.07 우면산 대성사, 방배동, 우면동 동네 나들이 <성안공 상진묘역, 월산대군태실, 우면동석불, 우면동유적, 식유촌>
  7. 2021.05.15 서울 도심의 우백호, 인왕산 남쪽 자락을 거닐다 ~~ 인왕사 국사당, 선바위, 해골바위 나들이
  8. 2021.05.08 길상화와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깃든 도심 속의 고즈넉한 산사, 성북동 길상사
  9. 2021.04.26 서울 도심의 한복판, 서촌(웃대) 봄나들이 ~~~ 옥인동 박노수미술관(박노수가옥), 윤동주하숙집터
  10. 2021.04.17 안성맞춤의 고장, 안성 죽산 나들이 ~~~ 태평미륵(매산리석불입상), 죽주산성, 비봉산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북악산 부암동 백사실계곡 (백석동천)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계곡)



' 부암동 백석동천(백사실) 늦가을 나들이 '

백석동천 별서터
백사실계곡 백사폭포 백사실계곡 외나무다리

 



 

가을이 한참 익어가던 11월의 첫 무렵, 후배 여인네와 부암동 백석동천(백사실)을 찾았다.
백석동천은 내 오랜 즐겨찾기의 하나로 매년 3~4회 이상 발걸음을 하며 나의 수줍은 마음
을 비추고 있는데, 내 즐겨찾기의 일원인 부암동(付岩洞)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세검정
초교 정류장에서 홍제천 다리(신영교)를 건너 '세검정로6다길' 골목길로 들어섰다.

백사실의 요즘 인기를 보여주듯 그를 알리는 이정표가 수시로 나타나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인도를 해주는데, 골목길 끝에 자리한 빌라 옆으로 높게 닦여진 계단을 오르면 혜
문사입구이다. 여기서 동쪽으로 야트막한 길을 넘으면 바로 백사실의 남쪽인 현통사와 백
사폭포가 모습을 비춘다.
이곳은 마치 속세를 버리고 신선의 세계로 들어선 듯, 아랫 세상과 공기와 풍경부터가 확
연히 틀리다. 그것도 무려 서울 도심 지척에서 말이다.


▲  혜문사입구 골목길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인왕산(仁王山)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감싸인 산악 분지(盆地)이다.


▲  혜문사입구에서 백사실계곡(백석동천)으로 인도하는 산길
저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바로 현통사와 백사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  백사실계곡(백석동천)의 속살로 들어서다

▲  현통사 앞에 자리한 백사폭포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려진 현통사(玄通寺) 대문(일주문) 밑에
는 하얀 피부의 너른 반석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매끄러운 바위 피부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백사폭포가 수줍은 모습으로 이곳을 찾은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시 들었다
놓는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지도 모른다.

백사폭포는 높이 4m 정도의 작은 폭포로 웅장하거나 수려한 멋은 딱히 없다. 그저 수수하게
생긴 폭포로 하얀 반석과 잘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내며 나그네로 하여금 백사실계
곡에 대한 첫 인상을 긍정적으로 인도하고 그곳에 대한 기대감을 크게 돋군다.
서울 도심에서 거의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라 그 희소성이 높은데, 그가 만약 설악산이나 금
강산, 주왕산(周王山) 등 일품 폭포가 즐비한 곳에 있었다면 주목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
러니 사람이나 폭포나 때와 자리를 잘 잡아야 덕을 본다.
백사폭포란 이름은 내가 백사실계곡(백사골)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예전 이름이 동령폭
포란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폭포는 자신의 이름까지
저 멀리 흘려보내고 만 것이다.

비도 거의 내리지 않아서 폭포수가 실보다 가늘고 누런 낙엽이 짙게 깔려있지만 비가 많이 오
면 폭포수도 제법 패기를 보인다. 한여름에는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한 물놀이 현장이 되며, 사
람들이 돗자리를 피고 낮잠을 자거나 쉬는 등, 도심 속의 이색 공간이자 꿀피서지로 인기가
높다.


▲  백사폭포와 하얀 반석

▲  가을과 낙엽을 속세로 흘려보내는 백사폭포 아랫 못

겨울 제국(帝國)의 차디찬 시련을 견뎌내고자 나무들이 속절없이 털어낸 낙엽들이 폭포 주변
에 수북히 쌓여있다. 이들 낙엽은 폭포 밑에 모여 이곳에서의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며, 올해
도 변함없이 도래한 겨울을 원망한다. 몇몇 낙엽은 한이 골수까지 맺혔는지 폭포 중간에 철썩
같이 달라 붙어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겠지만 자연은
그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게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아래로 흘러가거나 썩어 문드
러질 것이니 그런 낙엽의 발악을 보면 인생무상이 정말 허언이 아님을 실감한다.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실계곡 냇물은 넓은 세상을 꿈꾸며 폭포를 타고 내려와 폭포 밑에
마련된 소(沼, 못)에서 큰 세상을 향한 기나긴 여정을 준비한다. 다시는 오기 힘들 그리운 고
향, 북악산(백악산)의 그리움을 털어내며 길을 재촉한 그들은 다리 밑 조그만 폭포를 통해 아
랫 못으로 흘러가며 여기서 신나게 바위를 타고 내려가 홍제천, 한강을 거쳐 서해바다로 종점
없는 여행을 떠난다.

폭포 주변 나무들은 못을 거울로 삼아 늦가을의 절정을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열
심히 매무새를 다듬는다. 저들의 처절한 아름다움 뒤에는 겨울의 혹독한 시련이 기다린다. 잔
잔한 수면에는 귀를 접은 낙엽들이 둥실둥실 떠 가을의 저물어감을 아쉬워하며 백사실에 머문
늦가을도 낙엽을 데리고 계곡을 통해 저 밑으로 그렇게 흘러간다.


▲  백사폭포 위에 둥지를 튼 현통사(玄通寺)

백사실계곡 밑에 둥지를 틀어 백사폭포를 굽어보는 현통사는 20세기 이후에 지어진 조그만 산
사(山寺)로 정확한 내력(來歷)은 모르겠다.
이 시대 큰 승려의 하나였던 일붕(一鵬)이 머물렀던 절로 백사실을 오갈 때마다 늘 지나치기
만 했을 뿐, 경내로 발을 들인 적은 겨우 2~3번이다. 그 이유는 오래된 절도 아니고 나를 애
타게 만들만한 구석도 없기 때문이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백사실의 시원한 산바람이 낮잠에 잠긴 풍경물고기를 살짝 건드리며 그윽
한 풍경소리가 주변의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여
산신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며, 기와를 얹힌 불전 밑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한 덩어리로 몰려있다.


▲  늦가을이 깃든 백사실계곡 숲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 속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다.
바람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찾는 이로 하여금 절로 시상에 물들게 한다.

▲  운치가 진한 백사실계곡 숲길 (백사폭포~백석동천 별서터 구간)

간만에 백사실을 본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 잡으며 백사폭포를 지나면 청정한 내음
과 솔내음이 두루 나래를 펼치는 백사실 숲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 발을 들이면 1폭의 수묵
담채화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가히 숨이 지릴 지경이다.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대단
하다 한들, 이곳의 풍경을 완벽히 표현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또한 인간의 한낱 언어로 억지로 표현하려 드는 것은 어쩌면 백사실과 그것을 빚은 대자연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 나는 감히 언어로 이곳을 희롱하지 않고 그저 탄
성만 연거푸 지르며, 조용히 백사실계곡을 거닌다.
 
숲에 깃든 청명한 기운은 속세의 때를 말끔히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숲길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실에는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도롱뇽,
가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그들이 설 땅은
점점 줄어들고 서울에서는 이곳을 비롯한 일부 계곡에만 겨우 살아가고 있다. 만약 그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다면 그 다음은 바로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  백사실계곡 별서터 직전 계곡 풍경

▲  별서터 돌다리에서 바라본 백사실계곡
바로 앞에 보이는 크고 견고하게 생긴 바위들 피부에는 일정하게 긁힌
흔적이 있는데, 이는 별서를 닦을 때 필요한 돌을 떼던 흔적들이다.


계곡에 누워있는 바위들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자라고 있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저런
무성한 이끼를 만나는 것은 정말 어렵지, 이처럼 백사실계곡은 마치 서울 도심의 별천지처럼
청정함과 순수함을 여실히 간직하고 있다.

백사실계곡은 백석동천, 백사실, 백사골 등이라 불리는데, 어느 이름을 쓰든 크게 상관은 없
다. 정식 명칭은 백사실계곡으로 이곳 지명이 백사실이며, 백사골은 백사실계곡을 줄여 표현
한 이름이다. 그리고 백석동천은 이곳에 퐁당 반한 선비와 양반들이 붙인 칭호이자 백사실의
다른 이름이다.


▲  별서터 옆을 지나는 백사실계곡 (별서터 징검다리 주변)

백사실계곡 안내도와 자연보호 안내문이 있는 별서터 직전 갈림길에서 정겹게 펼쳐진 계곡 징
검다리나 돌다리를 건너면 바로 사랑채터와 연못이 있는 백석동천 별서터이다. 이토록 아름다
운 계곡에 콘크리트로 닦은 둑이 조금은 눈에 거슬리는데, 둑 바로 위에 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을 보면 옛날에 별서 주인이 돌과 흙으로 쌓은 둑이 있었던 모양이다.


▲  백석동천 돌다리
백석동천 별서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통돌 2개로
이루어진 단출한 모습이다.

▲  별서터에서 바라본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를 코 앞에 두고 별서터 맞은 편인 서쪽 산자락의 윗부분을 유심히 살펴보면
언덕 정상에 큰 바위 하나가 나무들 사이로 어렴풋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
를 잘 살펴보면 글씨 같은 것이 화석처럼 깃든 것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이 바위는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중 가장 발이 닿기 어려운 궁색한 곳에 자리해 있다. 별서
터 바로 서쪽 산자락에 있지만 그를 알리는 이정표도 없고 짙은 숲에 가려져 있어 이곳을 찾
은 사람들의 99% 이상은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다. 나무들이 벌거벗은 11월 중순 이후나
겨울에는 침침한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다 보면 눈에 들어오기라도 하겠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파고 그 안에 월암(月巖) 2자를
새겼는데, 18세기에 백석동천의 존재를 기록으로 남긴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씨로 추
정되나 확실한 것은 아니며,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습은 가히 명필이라
하겠다.

백사실계곡은 나무가 울창해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할 수 없다. 곡차 1잔 걸치러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굳이 이
광여가 자신의 호를 새기지 않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 바위에 달바위(월암)란 이름을 붙여
주고 글씨를 새겼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  북악산(백악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부암동 백석동천(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 별서(別墅)터

서울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벗어나
면 여기가 서울이 맞는지 고개가 갸우뚱거릴 정도로 고운 경치가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
인 부암동과 신영동(新營洞),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
산)에 포근히 안긴 분지로 서울의 일부라기보다 지방의 산골 마을이나 깊은 산에 푹 묻힌 조
그만 읍내 같은 분위기이다.
도심이 바로 지척임에도 도심과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산속에 자리한 탓도 있겠
지만 나라의 예민한 곳이 동네 주변에 많아 개발의 천박한 칼질을 크게 잠재웠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서울 근교 경승지로 이름이 높았던 부암동은 양반사대부와 왕족들의 별서(별장) 및
피서지로 인기가 대단했다. 세종의 3번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인 무계정사(武溪精
舍)를 비롯해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휴식과 풍류의 장소로 지어진 세검정(洗
劍亭), 연산군(燕山君)이 사냥과 여가의 장소로 만든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
까지 옛 사람들의 별장, 풍류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백석동천은 북악산(백악산) 북서쪽 백사실계곡에 푹 묻혀있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별장이 있었다고 해서 백사실이라 하나 그는 이곳과 관련이 없으며, 백사실계곡과 별서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백석동천이라 부른다. 그 이름은 북악산(백악산)에서 비롯되었으나 계곡에
하얀 바위가 많고 경치도 고와 굳이 북악산이 아니더라도 백석동천의 이름 자격은 충분하다.
여기서 동천(洞天)이란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부여되는 경승지의 명예로운 칭호이다. <동학(
洞壑)이라 불리기도 함>

▲  연못 정자터

▲  사랑채터

백석동천과 관련된 첫 기록은 18세기 인물인 월암 이광여(1720~1783)의 이참봉집(李參奉集)에
있다. 그 책에는
'비가 온 뒤 북한산(삼각산)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가 폭포수를 보았다. 세검정으로 빠지
는 계곡 위쪽에 근원을 알 수 없는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가느다란 폭포(백사폭포)가 있는데
그 위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다. 그곳의 편액은 간정료(看鼎寮)였다'
여기서 간정료는 '솥을 보는 집'이란 뜻으로 차를 끓이는 다조(茶俎)를 말한다. 허씨의 초가
정자가 일찌감치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여기서 허씨는 허필(許佖)로 여겨진다. 그는 시
문과 그림, 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손가락으로 그리는 지두화(指頭畵)를 잘했다. 1737년 '북
한산 남쪽 백석별업(別業)에서 정윤, 강세황(姜世晃)과 함께 짓다'
는 제목의 시를 지으니 그
때 이미 '백석(백석동천)'이란 지명이 있었음을 살짝 밝혀주고 있다.

개화파로 유명한 박규수(朴珪壽)도 14살이던 1820년에 외할아버지를 따라 한양도성 북쪽의 여
러 명소를 거닐었는데, 그때 백석동천에도 들려 시문을 남겼다. 그는 석경루 위쪽에 백석정의
옛 터가 있는데 허씨 성을 가진 진인(眞人)이 살던 곳이라 하였고, 백석정은 허도사가 단약(
丹藥)을 달이던 곳이라 언급하며 백석정은 이미 사라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허씨(허도
사)는 허필로 보이며, 백석정은 간정료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2012년에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백석동천에 손을 댄 기록이 발견되었다. 김정희
는 금헌(今軒)이란 친구와 읊은 시에서
'하찮은 문자에도 정령이 배었으니 선인이 살던 백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다','나의 북쪽 별서
는 백석정의 옛터에 있다'
는 문구가 나온 것이다. 김정희가 백석동천을 북쪽 별서<북서(北墅)
>라 한 것은 이미 한양도성 동남쪽 금호동(金湖洞)과 경기도 과천(果川)에 별서가 있었기 때
문이며, 김유근(金逌根)에게 보낸 편지에도 백석동천 별서를 산루(山樓)라고 표현했다.

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가 1960년대에 낸 '동명연혁고(洞名沿革攷)'에는 이곳 별서가 1830년
대에 지어진 것으로 나와있는데 추사가 그때 이곳을 사들여 정자를 짓고 600평 규모의 별서를
지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허나 추사가 이곳을 계속 소유하지 않은 듯 싶으며, 이후 이곳
관련 기록에는 주인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친일파로 변절한 윤치호(尹致昊)는 1926년 11월, 이곳을 유람했는데, 그의 '윤치호일기'에 '
백석실'이라 나와있어 백석동천(백사실)의 다른 명칭이 있음을 알려주고 잇으며, 1930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에는 '북악8경'의 하나인 '백석곡 팔각정'이 나왔는데, 백석곡은 백석동천의
별칭으로 그 신문에 정자의 사진이 나왔다. 그것이 백석동천 별서터의 유일한 생전의 사진이
다.

이곳에는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채를 비롯해 정자와 동그란 연못, 별서를 둘러싸던
담장이 있었다. 안채는 4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는데,
안채는 1917년 집 한쪽이 기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6.25때 이곳까지 총탄이 날라와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은 기능을 잃었다.
사랑채와 안채는 1970년대까지 살아는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월의 무게를 감당치 못
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하여 지금은 사랑채터와 안채터, 동그란 연못, 정자터, 담장터, 돌다
리, 돌계단, '백석동천'과 '월암' 바위글씨 2개가 남아 이곳의 정취를 아련히 전한다.

옛날(1960년대까지)에는 마음 놓고 발을 들일 수 있던 열린 공간이었으나 북한이 저지른 1968
년 1.21사태(김신조 공비사건)로 북악산(백악산) 일대와 백사실계곡이 금지된 곳(청와대 경호
구역)으로 꽁꽁 묶이면서 사람들의 발길은 거의 끊기게 된다. 이후 동네 사람들이나 오갈 정
도로 비밀의 공간으로 있다가 2004년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로 통제구역에서 해방되었고
, 그 시절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이곳을 두고
'조선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이 땅의 휼륭한 전통
정원'
임을 강조해 비지정문화재에서 국가 사적 462호로 특진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명승 36
로 변경되었다.

2010년과 2011년에 별서터 일대를 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를 확인했으며, 깨
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량으로 수습했다.

▲  사랑채터에서 바라본 연못

▲  백석동천 바위글씨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보석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거니와
여름의 녹음과 피서삼매, 늦가을 단풍, 겨울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이 고루고루 몸살
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 숲이 매우 삼삼하여 강렬한 여름 햇살도 고개를 숙이며, 나무가 베푼
신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고, 백사실계곡의 졸졸졸~♪ 교향곡을 들으며 계곡에 살짝 다리를
담구거나, 침침한 두 눈을 비비며 독서를 하거나, 돗자리를 피고 낮잠을 청하면 정말 피서의
성지가 따로 없다.
거기에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터를 둘러보며 자연의 일부로 살고 싶었던 옛 사람(주로 지
배층들)들이 여기서 무엇을 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살았을까? 상상하며 그들의 생활과 마음 속
으로 들어가 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바램이지만 이런 곳은 대중적인 명소보다는 소수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쭉
남았으면 좋겠다. 찾는 이가 늘면서 바람직하지 못한 작자들까지 섞여 들어와 사랑채터 주춧
돌에 낙서를 하고 계곡을 괴롭히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다행히 2019년 이후 관리인을 두어
이곳을 지키고 있다.
또한 2013년에 종로구에서 별서터를 복원하겠다며 이곳을 들쑤실 생각까지 했었는데, 괜히 복
원하려 들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두기 바란다. 비록 폐허가 되었어도 지금의 모습이 더 운
치가 진하며, 옛터 위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 수 있다. 그리고 백사실계곡은 서울시에
서 지정한 도룡뇽 보호구역이나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부로 냇물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않기 바란다.


* 백사실계곡(백석동천)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 부암동 산25일대


▲  사랑채터와 안채터가 깃든 언덕

백사실계곡 안내도가 있는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검은 피부의 백석동천 안내문이 마
중을 한다.
안내문 너머로 사랑채터와 안채터가 있는 언덕과 그곳으로 이어주는 돌계단이 있는데 장대한
세월의 태클로 계단돌이 좀 헝클어진 했으나 경사가 완만해 통행에는 별로 어려움은 없다. 다
만 연못 쪽에서 오르는 돌계단은 거칠게 다듬은 큰 돌을 계단처럼 얹혀 높이가 고르지 못해
어린이나 다리가 짧은 사람은 다소 진땀을 빼야 된다.


▲  선명하게 남아있는 사랑채터

연못이 잘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ㄱ' 구조의 5량집 사랑채가 있었다. 허나 아쉽게도 생전
의 사진이나 그림도 남기지 못한 채, 1970년경에 무너져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주춧돌과
건물터는 잘 남아있으며, 2010년 발굴조사로 새롭게 드러난 흔적을 더해 지금의 모습으로 정
비되었다.

사랑채 서쪽 부분은 누마루로 주춧돌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에서 별서 주
인은 연못을 바라보며 책을 보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들이 오면 여기서 곡차를 대접
하여 1잔씩 걸쳤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채 동쪽 부분에는 키 작은 주춧돌 6개와 석축(石築)이
남아있다.


▲  석축 위에 닦여진 사랑채터 누마루 주춧돌
누마루가 사라지면서 주춧돌은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옆에서 바라본 사랑채터

▲  사랑채터 옆에 자리한 네모난 우물터
2010년 발굴조사 때 발견된 것으로 우물(또는 작은 연못)로 여겨진다. 지금은
낙엽과 잡석만 가득 널려 황폐의 극치를 보여준다.

▲  공터로 남아있는 안채터
안채가 가고 없는 허전한 터를 잡초와 낙엽이 서로 보듬으며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 이후 그 자리에
는 엉뚱하게 배드민턴장이 들어섰고,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적지 않게 파괴되어 생매장을 당
했다.
그렇게 별서터를 깔고 앉던 배드민턴장은 서울시와 문화재청에서 2010년 여름부터 별서터 일
대를 발굴하면서 없앴으며, 땅에 묻힌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건
졌다. 그리고 2011년 3월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땅속에 고이 묻고 그 위를 풀로 덮
어 완전히 가렸으며, 사랑채와 안채터에서 수습된 주춧돌 등의 돌덩어리들은 안채터 서쪽 구
석에 모아두었다.

비록 기와를 입힌 사랑채와 안채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
춧돌은 사랑채의 기품과 분위기를 흐릿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또한 사랑
채에서 연못에 비친 달과 별을 바라보며 곡차 1잔과 시상에 잠겼을 별서 주인을 머리 속에 그
려보니 정말로 부러움이 가득 돋아 오른다.


▲  사랑채터와 안채터 일대
이곳에 있던 집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어디까지나 상상에서만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백석동천 별서터의 운치를 크게 말아먹을 수 있다.

▲  사랑채 뒷쪽 석축과 담장터

사랑채터와 안채 동쪽 산자락에는 석축과 담장의 흔적이 있다. 석축은 별서 주변을 다지면서
쌓은 것으로 높이는 1.5~2m 정도 되며, 석축 윗쪽에는 별서와 속세(俗世)의 경계를 가르던 담
장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세월의 무심한 태클에 거진 무너지고 안채터 뒷쪽에서 연못 동쪽까
지 담장의 밑도리만 옛 산성(山城)의 잔해처럼 남아있다.

▲  사랑채로 오르는 헝클어진 서쪽 돌계단

▲  연못에서 사랑채로 오르는 돌계단



 

♠  백석동천 별서터의 중심, 연못

▲  사랑채터에서 바라본 연못

사랑채터에서 바라보이는 연못은 물고기가 수영하고 연꽃이 살며시 떠있는 그런 연못이 아니
라 나무들이 털어놓은 낙엽과 잡초로 가득한 모습을 보인다. 애미도 몰라본다는 장대한 세월
의 흐름은 연못의 성격과 구성원까지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옛날에 정자터 옆에 배수로를 만들어 백사실계곡 물을 가져와 동그런 연못을 채웠으며 연못을
채운 물은 2개의 통돌로 이루어진 돌다리 밑 수로를 통해 계곡으로 빼면서 연못은 계속 물갈
이가 되었다.
허나 이 땅을 쑥대밭으로 만들던 6.25전쟁 때 조용하던 이곳까지 총탄이 날라와 정자가 파괴
되고 연못 또한 손상을 입어 배수가 불가능하게 되면서 무늬만 연못이 되버렸다.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연못, 허나 저 연못에도 자연의 생명력
은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나고 있다. 게다
가 비가 많이 오면 비록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그런데로 연못티를 풍긴다.
잡초로 가득한 연못의 모습도 나름대로 초록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며, 늦가을에는 낙엽
이 한가득 공간을 채우면서 누런 연못이 된다.

연못의 둘레는 약 100m 정도로 주변은 나무들
로 삼삼하여 두텁게 시원한 그늘이 펼쳐진다.
거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 후원(後園)
도 울고 갈 정도로 울창한 삼림은 이곳을 찾은
나그네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여기
가 서울이 아닌 지방이었다면 그 감동은 그리
크지 못했을 것이다.

▲  별서터를 지켜온 늙은 물푸레나무
(나이는 약 150~200년 정도)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六茅亭)이라 부른다.

연못에 발을 담궜던 정자는 윗도리와 중심부는
모두 사라지고 6개의 돌기둥과 돌계단만 남아
있다. 정자터 옆구리에는 계곡물을 끌어들이던
배수구의 흔적이 작게 남아있는데, 6.25전쟁으
로 손상되면서 더 이상 물을 소환할 수 없게
되었다.

백석동천 별서터 식구 증 유일하게 생전의 모
습을 남긴 운이 좋은 존재로 1930년 7월 19일
자 동아일보에 백석곡 팔각정으로 등장했다.

▲  옆에서 바라본 정자터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혼자 혹은 벗들과 시를 읊거나 세상 이야기
를 하며 차나 술을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과 기둥에 몸을 기대며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꽃을 바라보며 유유자적 했을 것이다.
비록 터만 남아있으나 지금의 모습도 그리 싫지는 않으며 괜히 복원하려고 난리치지 말고 지
금 모습 그대로 둬야 이곳의 운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  물푸레나무 밑에 누운 바위

연못 우측에는 키가 약 15~20m에 이르는 커다란 물푸레나무가 연못과 그 주변에 그늘을 드리
운다. 나이는 약 150~200년 정도로 여겨져 추사 김정희가 심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이는데 나
무 밑에는 커다란 바위가 누워있어 별서를 닦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두었으니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원과
별서를 꾸몄던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이 바위는 어쩌면 별서 노비들이 연못을 구경하며 신세를 한탄하던 자리는 아니었을까? 그들
은 주인처럼 사랑채나 정자에서 놀지 못하니 이곳에 앉아 연못에 돌이나 던지며 자신의 신세
를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  별서터에서 수습된 돌로 이루어진 소박한 쉼터 (연못 정자터 옆)

별서터 일대에서 수습된 크고 견고한 돌덩어리들을 이곳에 모아두었다. 이들은 아마도 사랑채
와 안채, 정자에 쓰인 석재로 보이는데, 시커먼 피부를 지닌 큰 돌을 가운데 두고, 그보다 작
은 돌덩어리 2개를 좌우에 두어 마치 탁자와 의자와 같은 모습이 되어 조촐하게 이곳의 쉼터
역할을 한다.
나도 둘이나 여럿이서 이곳을 찾았을 때 여기서 앉아 쉬거나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을 섭취하
고는 했는데, 저곳에 앉은 횟수는 최소 50회는 넘을 것이다. 저 돌덩어리들과 별서터 유적은
거의 그대로이거늘 나와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계속 늙어가고 변해가니 정말 인상무상이로다.


▲  통돌 2개로 이루어진 작은 돌다리

정자터 옆에 있던 배수구를 통해 백사실계곡 물을 가져와 연못을 채우고 채워진 물은 돌다리
(윗 사진)가 있는 작은 수로를 통해 계곡으로 내보내 고인물을 경계했다.
이곳 돌다리는 인왕산 수성동계곡(水聲洞溪谷, ☞ 관련글 보기)의 기린교처럼 길쭉한 통돌 2
개로 이루어진 단출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은근히 정감을 가게 한다. 별서가 조성되던 1830년
에 수로, 연못과 함께 닦여진 것으로 보이며, 수로에는 더 이상 물이 나갈 일이 없어 낙엽만
가득하다.


▲  연못을 중심으로 한 백석동천 별서터

▲  늦가을이 고스란히 담긴 별서터 옆 백사실계곡 (능금마을 방향)

▲  연못 동쪽 산비탈에 닦여진 석축의 흔적



 

♠  백석동천 마무리

 별서터에서 백사실계곡 상류로 인도하는 산길

백사실계곡은 별서터 옆에서 백사실약수터 입구까지 도룡뇽과 맹꽁이 등의 수중동물 보호를
위해 금줄을 둘러 접근을 막고 있다. 하여 별서터에서 계곡 상류로 가려면 별서터를 등지고
다시 계곡을 건너 솟대 돌탑이 있는 별서터 입구로 나와야 된다. 이 구간을 제외한 계곡은 접
근은 물론 발을 담구는 것도 가능하다.
허나 통제의 줄이 느슨하여 금줄의 경고를 무시하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고 있고,
특히 여름에는 피서객들의 침입이 빈번해 오히려 도룡뇽이 짐을 싸고 나가야 될 지경이다.

별서터 입구에는 2012년에 마련된 산불방제 구제함과 솟대를 품은 돌탑이 있는데, 솟대 돌탑
은 백석동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그냥 백석동천 수식용으로 달아놓은 것이다. 돌탑을 지
나면 소나무숲과 늦가을에 잠긴 은행나무숲이 반짝 펼쳐지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동쪽)으로
가면 백사실계곡 상류와 능금마을, 북악산길로 이어지고, 오른쪽(남쪽)으로 가면 백석동천 바
위글씨가 나타난다.


▲  오리 솟대 돌탑
예로부터 오리 등의 새는 하늘과 인간 세상을 이어주는 중간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소도(蘇塗)에서 비롯된 솟대 꼭대기에는 오리 모양을 달아두어
하늘과의 연락을 간절히 꾀했다.

▲  백석동천의 경관을 한몫 돕고 있는 짧은 은행나무숲길

▲  아직도 선명한 백석동천(白石洞天) 바위글씨

은행나무숲에서 오른쪽(남쪽) 길로 가면 서쪽을 향해 95~100도 정도 약간 고개를 숙인 큰 바
위가 나타나는데, 그 피부에 '白石洞天' 바위글씨가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여기서 '백석'은
북악산(백악산)을 뜻한다.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백석동천 바위글씨는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북악산(백악산) 산신
도 모른다. 아마도 월암 바위글씨와 비슷한 시기로 여겨지는데, 정말로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다. 조선 때 선비와 양반 등 지배층들은 경관이 수려한 곳에 저렇게 낙서를 남기는 습
성이 있었는데 백석동천 역시 그들의 낙서가 2개나 전하고 있으니 그만큼 이곳 풍경이 그들의
마음을 통 크게 훔쳐갔기 때문일 것이다.


▲  늦가을에 잠긴 백사실계곡 숲길 (능금마을 방향)
동화 속에 나오는 숲길도 저곳만은 못할 것이다. 비록 짧은 거리지만 알록달록
익어가는 숲길을 거닐며 나무들과 잠시 말벗이 되어 본다.

▲  너른 반석들이 가득 펼쳐진 백사실계곡 상류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능금마을로 이어지는 숲길을 조금 가면 별서터에서 잠시 떨어졌던 백
사실계곡이 나타난다.
이곳은 진정한 계곡 상류로 하얀 피부의 너른 반석부터 이끼 옷을 걸친 바위까지 줄줄이 이어
져 탄사를 자아내게 하는데, 비록 설악산과 금강산, 주왕산, 지리산 등 큰 산의 계곡만은 못
해도 서울 도심 지척에 이런 계곡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꿀단지나 다름이 없다.
때묻지 않은 냇물이 바위를 타고 흐르면서 운치를 진하게 우려내는데, 이렇게 순수함을 지닌
백사실계곡 물은 백사아랫폭포부터 속세의 기운을 강제로 받기 시작하면서 점차 속물로 변해
간다.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간직한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하
겠는가?

한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및 수중생물의 탄압 현장이 되고, 시민들의 소풍/나들이 장소로
돗자리를 피고 물에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하며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석에 걸
터앉아 시를 읊거나 탁족(濯足)을 하며 신선놀음을 즐겼을 것이다.


▲  숲과 잡초로 가득한 백사실계곡 상류

▲   백사실계곡 외나무다리

백사실계곡 상류의 너른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지어진 외나무다리가 깊은 산골의 고적하고
도 달달한 풍경을 자아낸다. 길쭉한 목재 2개를 엮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다닐 정
도로 좁은데 만약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나면 어찌해야 될까. 다리 길이도 짧고, 다리 밑
수심도 매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 굳이 다리를 두고 싸울 필
요는 없다.
사람도 오지게 많고, 차량도 허벌나게 많으며, 키다리 빌딩도 많고, 복잡하고 각박하게 보이
는 서울 도심 지척에 이런 다리가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신기할 따름이다. 백사실계곡(백석동
천)은 그 존재 자체로도 예사롭지 않지만 캐면 캘수록 보물이 더 나올 것 같은 마르지 않는
샘이나 신세계 같다. 백사폭포에서 시작된 백석동천은 이곳 외나무다리에서 끝나며, 백사실계
곡은 능금마을 안쪽까지 이어진다.


▲  능금마을 방향 백사실계곡 상류와 마을 밭두렁(오른쪽)

▲  폭이 매우 좁아진 백사실계곡 상류 (능금마을 직전)

외나무다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1~2m 정도로 폭이 줄어든다. 계곡 건너
에는 생뚱맞게도 비닐하우스와 밭, 과수원이 펼쳐져 두 눈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데, 그들을
지나면 집들이 나오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분명 이곳은 서울 도심의 한복판 종
로구가 맞는데 이런 두멧골이 있었나. 마음을 설레게 하니 그곳은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메
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이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백사실계곡(백석동천)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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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팔공산 북지장사, 대구올레팔공산1코스, 시인 이상화고택 나들이

대구 팔공산 북지장사, 이상화 고택



' 대구 겨울 나들이 '
(팔공산 북지장사, 시인 이상화 고택)

팔공산1코스 북지장사 가는 길

▲  팔공산1코스 북지장사 가는 길

북지장사 지장전 대구 이상화고택

▲  북지장사 지장전

▲  이상화 고택

 



 

겨울의 차디찬 한복판인 2월의 첫 무렵, 오랜만에 대구(大邱) 땅을 찾았다. 올해도 변
함없이 미답처 지우기에 열을 올리며 어디로 갈까 궁리하던 중, 대구에서 적당한 미답
처가 감지되었다. 바로 팔공산에 있는 북지장사와 근래 무섭게 뜨고 있는 중구의 근대
문화유산들이다. 그래서 북지장사를 먼저 들렸다가 대구 도심으로 나와서 햇님이 떨어
질 때까지 중구의 근대문화유산을 최대한 챙겨보기로 했다.

햇님이 등청하기가 무섭게 서울을 출발,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4시간 가까이를
달려 대구의 대표 관문인 동대구역에 두 발을 내렸다.
사람들로 늘 북새통인 동대구역을 서둘러 벗어나 동대구역 지하도 정류장에서 대구 급
행좌석 1번(동화사↔다사,매곡리)을 타고 북쪽으로 30분 정도를 올라가 동화사로 넘어
가기 직전인 방짜유기박물관에서 하차했다.



 

♠  팔공산 북지장사(北地藏寺) 둘러보기

▲  북지장사 소나무숲길 ①

북지장사는 방짜유기박물관 정류장에서 도장길을 따라 40분 정도 들어가야 된다. 전국적인 도
보길 유행에 따라 대구시는 북지장사 길을 '대구올레 팔공산1코스(북지장사 가는 길)'로 포장
하여 세상에 내놓았는데 거리는 2.5km(방짜유기박물관 입구↔북지장사)로 느긋한 길의 연속이
라 걷는 마음도 가볍다.
북지장사 길을 그대로 둘레길로 삼은 탓에 전 구간이 포장길로 박물관입구에서 약 0.9km 정도
는 보행길을 갖춘 2차선 길이나 그 이후부터는 굽이굽이 이어진 1차선 시골길이다. 그 모습이
정겹기 그지 없어 무리하게 길을 넓히지 말고 이대로 두었으면 좋겠다. 더군다나 길 중간에
두툼함 소나무 숲도 있으니 더욱 그렇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북지장사 소나무숲길 ②

▲  북지장사 소나무숲길 ③

북지장사 길 중간에는 짙게 우거진 소나무 숲길이 있다. 소나무들이 얼마나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던지 하늘이 거의 보이질 않아 어두울 정도인데 그들이 베푼 솔내음이 속세의 번뇌를 거
의 털어주어 나의 돌머리와 어지러운 마음에 한 줄기 평화를 준다. 시작부터 이런 명품급 숲
길을 내밀며 중생을 맞이하니 북지장사에 대한 첫 인상과 기대감을 적지 않게 높여준다.


▲  북지장사 숲길과 겨울 가뭄으로 고통받는 계곡(숲길 왼쪽)

▲  드디어 도착한 북지장사 용호문(龍虎門)

도장길(북지장사 가는 길) 끝에는 나를 이곳으로 부른 북지장사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주
차장을 지나면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려진 용호문과 그 좌우에 딸린 기와집이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는데 절에 따로 일주문(一柱門)이 없기 때문에 용호문이 일주문(정문)의 역할을 도
맡고 있다.
그 문을 들어서면 경내의 중심인 지장전이 나타나고 그 뒤쪽에 대웅전이, 동쪽에는 오래된 3
층석탑이 있다. 그럼 여기서 북지장사의 내력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팔공산 동남쪽 끝자락이자 노족봉(老足峰, 600m)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북지장사는 팔공산에
무수히 널린 늙은 절의 하나이다. 같은 팔공산(八公山) 식구인 동화사(桐華寺), 파계사(把溪
寺, ☞ 관련글 보기), 갓바위(선본사, ☞ 관련글 보기)의 명성에 크게 가려져 있고 규모도 작
지만 그들 못지 않게 유구한 역사와 문화유산을 오롯하게 지니고 있으며 산 속에 고적하게 자
리해 있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꽤 깊다.
북지장사란 이름은 '북쪽에 있는 지장사'란 뜻이다. 원래 이름은 '지장사'이나 대구의 동남쪽
끝인 가창면 우록리에도 오래된 지장사가 있어 그들을 구분하고자 팔공산 것은 북지장사, 우
록리 것은 남지장사(南地藏寺)를 칭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두 절이 특별한 사이도 아님)

북지장사는 485년에 극달화상(極達和尙)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흔쾌히 밝혀줄 사료
(史料)와 유물은 없으며 그 시절 대구 지역을 다스렸던 신라의 소지왕(炤知王, 재위 479~500)
은 고구려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고구려에서 전해준 불교를 때려잡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
니 팔공산(八公山)에 절이 세워질 근거가 전혀 없다.
1040년 최제안(崔齊顔)이 쓴 경주 천룡사(天龍寺) 중창 관련문서에는 북지장사의 밭이 200결
이나 된다고 쓰여있어 고려 초에도 제법 잘 잘나갔음을 알려준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공산(公山) 지장사'로 나와있고 신라 후기에 지어진 석조지장보살좌상과 3층석탑이 있어 절
이 우후죽순 들어섰던 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동화사의 말사(末寺)로
조용히 있지만 왕년에는 오히려 동화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1192년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이 중창했다고 하며 지장전(옛 대웅전) 기와 중 1623년
과 1665년에 만들어진 것이 있어 17세기에 여러 차례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한때 부속 암자
를 여럿 거느리고 있었으나 동화사와 파계사 등 쟁쟁한 절에 밀려 19세기 초에 동화사의 그늘
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후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지장도량으로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지장전, 요사, 산령각 등 8~9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지장전을 비롯해 3층석탑과
석조지장보살좌상(대구 지방유형문화재 15호), 아미타삼존불좌상(대구 지방문화재자료 51호),
금고(金鼓,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55호) 등이 있다. 허나 정보 부족으로 아미타3존불과 금고는
만나지 못했으며, 조선 후기 지장탱(지장보살도)과 지장사유공인 영세불망비, 옛 석재(石材)
와 주춧돌 등이 전하고 있다.


▲  북지장사 지장전(地藏殿) - 보물 805호

단출하고 날씬하게 생긴 지장전은 북지장사의 상징 같은 존재이다. 정면 1칸, 측면 2칸의 겹
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과 뒷면에 사잇기둥을 세워 3칸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그 3칸을 다
합쳐봐야 겨우 일반 기와집 1칸 정도 크기이다. 홀쭉해 보이는 건물에 비해 지붕이 육중하게
보여 이를 받치고자 추녀가 있는 네 모서리에 붉은 피부의 기둥을 세웠는데, 그 기둥을 활주
(活柱)라고 한다.

건물 정면에는 꽃살창호를 달고 옆면과 뒷면에 띠살창호를 달았는데 기단(基壇)은 2단으로 다
지고 그 위에 막돌로 주춧돌을 닦은 다음 건물을 올렸다. 기둥 윗쪽에 창방과 평방을 두르고
그 위에 공포를 안팎 4출목(出目)으로 촘촘히 짜서 다포(多包) 양식을 취했다.
공포의 세부 처리는 조선 중기 스타일이나 용봉(龍鳳) 머리는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수법이다.
내부는 바닥에 우물마루를 깔아 불단을 마련했고 가구(架構)는 도리칸이 1칸으로 대들보는 사
용하지 않고 사각귀틀맞춤으로 짠 다음, 둘레는 빗천장으로, 가운데는 우물천장으로 했다. 이
런 기법은 정자(亭子)에서 많이 쓰이는 것으로 사찰 건물로써는 흔치가 않아 처음에는 목탑으
로 지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건물 지붕에서 1623년과 1665년에 만들었음을 알리는 글씨가 깃든 기와가 발견되어 1623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2011년 해체보수 때 1761년에 지장전으로 상량(上樑)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원래부터 지장전으로 출발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대웅전이 화마(火魔)의 장난으
로 쓰러지자 그 앞에 있던 지장전이 그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대웅전과 극락전으로 간판을 바
꾸기도 했으며, 대웅전이 새로 지어지자 그에게 법당(法堂)의 역할을 넘기고 지장전으로 돌아
왔다.

▲  방향에 따라 조금씩 모습을 달리하는 지장전

지장전에는 신라 후기에 조성되었다는 석조지장보살좌상과 조선 후기 지장탱이 들어있다. 그
들을 모두 친견했으나 지장전 내부를 찍지 말라는 절 관계자의 당부로 굳이 사진에 담지 않고
나의 침침한 자연산 망각에 살짝 담고 나왔다.

나의 촬영을 거부했던 석조지장보살좌상은 대웅전 뒤쪽 땅 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그의 정체는
아리송하긴 하나 머리의 형태나 손에 든 보주(寶珠) 등으로 보아 지장보살(地藏菩薩)로 여겨
진다. 단정한 모습과 온화한 인상으로 신라 말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경내에서 가장 늙은
보물로 북지장사의 불투명한 창건 시기를 최대 신라 후기까지 끌어올려준다.


▲  지장사유공인 영세불망비(地藏寺有功人 永世不忘碑)

지장전 바로 앞에는 약간 빛이 바랜 조그만 비석 하나가 멀뚱히 서 있다. 그는 운암당 옥준대
사(雲巖堂 玉峻大師)의 공적을 기리고자 1731년에 세워진 것으로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니
다.
17~18세기 지장사 승려들은 세금으로 종이를 만들어 관아에 바쳤는데 그 수고로움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것을 운암당이 조금 해소해주자 이를 감사하게 여겨 비석까지 세웠고 나중에는
지장전 앞에까지 두어 그 고마움을 두고두고 기린다.
비석이 심어진 비좌(碑座)는 높이 30cm, 92x60cm 규모이며, 빗돌은 높이 101.5cm, 상부 폭 50
cm, 하부 폭 47cm로 빗돌 윗부분이 둥글게 처리되었다.

▲  지장전 뜨락 우측에 자리한
설선당(設禪堂)

▲  아직도 연꽃무늬가 생생한 옛 석재
(석등의 일부로 여겨짐)


▲  지장전 뒷통수에 자리한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근래에 마련했다. 예전 대웅전이 화재로 맥
없이 쓰러지자 지장전이 그 역할을 맡게 되었으나 그가 다시 지어짐으로써 법당의 자격을 다
시 찾아왔다. 허나 북지장사에서 지장전의 존재감이 거의 독보적인 수준이라 대웅전이 절의
중심 건물임에도 지장전의 보조 건물 정도로 작게만 보인다. 게다가 지장전의 뒤쪽에 있으니
그런 기분에 더욱 부채질을 한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산령각(山靈閣)
대웅전 뒷통수에 있는 산령각은 1칸짜리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에게
꽤 친숙한 산신의 공간이다.

▲  북지장사 3층석탑(동탑)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6호

지장전 뜨락 동쪽에는 고색이 깊게 묻어난 3층석탑 형제가 있다. 이들은 2중의 기단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얹히고 머리장식으로 마무리를 지은 것으로 높이는 모두 3.8m이며 옥개석과 탑
신이 같은 돌로 지어졌다.
신라 후기 또는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1981년 5월 해체복원을 했는데 이때 땅 속에 묻혀있
거나 주변에 흩어져 있던 탑의 살을 갖다붙였다. 아무리 복원을 했다고 해도 고된 세월의 흔
적까진 어쩌질 못하여 군데군데 장대한 세월이 할퀴고 간 상처들이 역력하다.

▲  정면에서 바라본 3층석탑 동탑

▲  3층석탑 서탑


▲  북지장사를 뒤로하며

생각보다 꽤 작고 아담했던 북지장사를 30분 정도 둘러보고 다시 속세로 나왔다. 사전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간 탓에 금고와 아미타삼존불좌상을 놓치는 실수를 범해 다시 와야될 구실
을 빚고 말았으나 아직도 이 땅에는 나의 발이 닿지 않은 미답지들이 우주의 별만큼이나 즐비
하여 이곳과의 재 인연은 솔직히 장담할 수가 없다.

북지장사를 나오다가 이 땅의 유일한 방짜유기 전문 박물관인 대구방짜유기박물관에 잠시 발
을 들였다. 방짜유기는 구리와 주석을 78:22 비율로 녹여서 만든 유기의 일종으로 징과 꽹과
리 등은 오로지 방짜기법으로 만들어진다. <박물관 내부는 사진에 담지 않아서 이 정도 언급
으로 쿨하게 선을 긋겠음, 방짜유기박물관 ☎ 053-606-6171~4, ☞ 홈페이지 보기>
그곳을 둘러보고 백안3거리로 나와 뜨끈한 순두부찌개로 늦은 점심을 섭취했다. 점심과 저녁
사이의 시간임에도 손님들이 제법 되었고 후식으로 커피 외에 식혜도 준비되어 있어 후식 인
심도 넉넉했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중구(中區) 지역의 근대문화유산을 보고자 대구시내버스 401번(갓바위↔
범물동)을 잡아타고 대구 도심 한복판인 반월당(半月堂)으로 나왔다.
허나 햇님이 적지 않게 기운 상태라 근대문화유산을 얼마나 잡을 수 있을지 장담을 할 수가
없다. 햇님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게 꽉 붙잡고 싶지만 인간 주제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길을 서둘렀다.

* 북지장사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6225 (도장길 243, ☎ 053-985-5217)



 

♠  빼앗긴 들에서 민족혼을 일깨운 대구의 대표적인 민족시인
상화 이상화(尙火 李相和) 고택

▲  시인 이상화 고택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어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에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쁜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잡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반월당역(반월당교차로)에서 달구벌대로를 따라 서쪽으로 500m 정도 가면 계산5거리이다. 여
기서 오른쪽(북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시인 이상화 고택과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한 서
상돈(徐相燉) 선생의 고택이 나란히 마중을 나온다.
이들은 대구 도심 근대문화유산의 대표 성지(聖地)로 원래 그들을 볼 계획은 없었다. (존재
조차 몰랐음) 그저 청라언덕과 계산동성당만 생각을 했었지. 그러다가 생각치도 못한 그들의
깜짝 등장에 두 다리가 얼어붙으면서 그들을 덤으로 둘러보게 되었다.


▲  주인이 가고 없는 이상화 고택 안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아주 유명한 민족시인 이상화(1901~1943)는 1901년 4월 5일,
여기서 가까운 서문로2가 11번지에서 이시우(李時雨)와 김신자(金愼子)의 4남 중 2남으로 태
어났다.

그의 아호는 무량(無量)이며, 호는 상화(尙火, 想華), 백아(白啞)이다. 1908년 아버지를 잃자
14살까지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훈도(訓導)를 받으며 한문을 익혔다. 1915년 서울로 올
라가 경성중앙학교(중앙중고등학교)에 입학, 1918년 3학년을 수료하고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방랑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1919년 3.1운동 때 대구 지역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서울로 급히
피신, 박태원이 운영하는 하숙집에서 머물렀으며, 그해 10월 서순애(徐順愛)와 혼인을 했다.

1922년 현진건(玄鎭健)의 소개로 박종화(朴鍾和)를 만나 홍사용(洪思容), 나도향(羅稻香) 등
과 함께 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말세의 희탄','단조','가을의 풍경' 등을 발표해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으며, 보다 넓은 문학의 세계를 익히고자 바로 그해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
아테네프랑세에서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다.
1923년 3월 아테네프랑세를 수료하여 프랑스 유학을 추진하던 중, 그해 9월 동경을 중심으로
관동대지진이 터졌다. 그때 관동 지역에 살던 조선 사람들이 왜열도 원숭이들에게 잔인하게
탄압을 당하는 꼴을 보고 크게 분노해 프랑스를 포기, 1924년 3월 서울로 건너와 가회동(嘉會
洞)에 있는 취운정(翠雲亭)에 머물며 그 유명한 '나의 침실로'를 '백조' 3호에 발표했다.

1925년 김기진(金基鎭) 등과 함께 파스큘라(Paskyula)란 문학연구단체에 가담했으며, 그해 8
월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1926년에는 '개벽' 70호에 그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했는데 그 시에 발작한 왜정(倭政)이 태클을 걸어
'개벽'은 판매 금지 처분을 당했다.

1928년에는 신간회(新幹會) 대구지회 출판간사로 있었는데, 자신의 집 사랑방을 담교장(淡交
莊)이라 칭하며 많은 항일 인사들과 교류를 했다. 그러다가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한 'ㄱ당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했다.
1930년 '대구행진곡'을 '별건곤(別乾坤)' 10월호에 냈으며 1933년 교남학교에 들어갔으나 이
내 사임하고 1934년 조선일보 경상북도 총국을 경영하다가 실패했다. 1935년 시 '역천'을 '시
원' 2호에, '나는 해를 먹다'를 '조광' 2호에 발표했다.

1936년 큰 형인 이상정(李相定)을 만나고자 중원대륙(서토)으로 건너가 남경과 북경, 상해 등
을 3개월 동안 여행했으며 1937년 3월 귀국하자 왜경에게 바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그해
11월 석방되었다.
이후 교남학교에 복직하여 3년 동안 교편을 잡으면서 권투부를 창설했으며, 1939년 6월 계산
동(桂山洞)2가 84번지(현 자리)로 집을 옮겼다. 허나 교가(校歌) 가사 문제로 왜정에게 가택
수색을 당하면서 시 원고와 고월 유고까지 압수를 당했으며, 그 충격으로 1941년 학교를 그만
두었다.

이후 시 '서러운 해조'를 '문장' 폐간호에 발표했고 '춘향전'을 영역했으며, 국문학사와 불란
서시정석 등을 시도했으나 완성을 하지 못한 채, 1943년 4월 25일 아침 8시 45분 경, 위암으
로 계산동 집에서 안타깝게 숨을 거두고 만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42살이었다.

가만히 보면 정의롭게 살아온 문학인들은 거의 명줄이 짧고<이상화, 김영랑, 윤동주, 정지용,
이육사 등> 불의(不義)와 어울리며 자신의 배때기를 채우느라 여념들이 없던 작자들<서정주,
이광수 등>은 너무 쓸데없이 오래 산다. 언능 가야될 잡것들은 늦게 가고 정작 오래 살아야
될 사람들은 일찍 죽으니 그래서 이 나라의 정의가 제대로 안서는 모양이다.

1948년 달성공원에 그의 시비가 최초로 건립되었고, 1985년 죽순문학회가 '상화시인상'을 제
정하여 '2009기념사업회 설립'에 따라 시인상을 승계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
되었다.


▲  이상화 고택 안채 마루 (뒤주와 이상화의 흉상)

이상화 고택은 왜정 때 지어진 개량한옥으로 사랑채와 안채 등 2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
고 마당에는 감나무가 자라고 있어 감나무 마당이라 불렸다.

이상화가 저 세상의 별로 홀연히 사라진 이후, 비록 주인도 바뀌고 모습도 조금 변화를 겪었
지만 집은 계속 그 자리를 지켰다. 허나 이곳이 대구 도심 한복판의 금싸라기 땅이다보니 천
박한 개발의 칼질이 군침을 흘리며 집을 위협하기에 이르렀고, 2001년 대구 중구청이 고택이
있는 계산동2가 84번지 일대 도로계획을 추진하면서 개념없이 집을 밀어버리려고 하였다.
이에 고택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방송국에 제보를 하여 2002년 1월, 대구MBC, 매일신문, 영남
일보, 한겨례신문 등에서 이를 보도했고, 윤순영(분도예술대표), 이상규(경북대 교수), 공재
성(대구MBC) 등 3명이 앞장서 고택보존운동 100만인 서명운동으로 중구청 철밥통들을 참교육
시키면서 그 마수를 부려뜨렸다.
허나 2003년 5월, 이번에는 (주)L&G에서 32층 주상복합 건물을 짓고자 다시 고택을 괴롭히자
'민족시인 이상화 고택보존운동본부'에서 대구시를 설득, 상화고택 보존을 조건부로 신축을
허가했다. 이에 (주)L&G는 상화고택과 인근 부지 1필지를 매입해 착공 전에 대구에 기부채납
하겠다며 대구시에 공증을 제출했다.

2004년 6월 (주)L&G와 상화고택 소유자간의 고택 매매계약이 체결되었고, 7월에 군인공제조합
이 그 신축건물 공사를 맡게 되자 상화고택 기부채납 기본 협약을 다시 체결, 2005년 6월 상
화고택과 인근 부지 1필지를 대구에 기부채납하였다.
그렇게 해서 고택이 완전히 살아남게 되자 '민족시인 이상화 고택보존운동본부'는 해산되었고
그동안 모은 이상화 시집 1,729권과 모금액 8,600만원을 대구시에 기증했다. 또한 이상화의
후손들과 그를 흠모하는 문인들이 그의 유품과 자료를 흔쾌히 기증하여 이상화 고택을 아낌없
이 꾸며주었다.

2007년 5월 상화고택 보수공사에 들어가 11월 완성을 보았으며, 2008년에도 3달간 내부 공사
를 벌여 2008년 8월 12일, 속세에 개방되었다. 이후 대구 중구의 대표적인 근대 명소이자 문
학의 성지로 뜨겁게 추앙을 받으며 대구 도심 투어의 필수 명소로 자리매김하였다.


▲  책상과 의자가 놓인 안채 방 ①
사랑채에는 이상화의 시집과 유품, 사진, 그의 작품과 일생을 다룬 안내문을
배치하여 그의 조그만 전시관을 이루고 있다.

▲  이상화의 여러 문서와 유품이 담긴 안채 방 ②

▲  이상화의 여러 문서와 유품이 담긴 안채 방 ③

▲  무늬만 남은 부엌
이상화의 문학 작품은 바로 이곳에서 지어진 음식의 힘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2007년 이후 고택을 손질하면서 부엌이 조금 변형되었으며, 부뚜막은 더 이상
연기를 피울 일이 없어 그저 먼지만 가득하다.

▲  감나무 그늘에서 한가로운 인생을 보내는 장독대
왕년에는 다양한 음식들을 숙성시키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지금은 빈 껍데기이다.

▲  이상화 고택 서쪽에 자리한 계산예가(桂山禮家)
계산예가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중구 계산동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
근대문학 등을 사진과 자료, 영상물 등으로 엮어낸 근대문화체험관이다.
(기념스탬프 코너도 있음)

▲  계산예가 옆 골목길 (계산동성당 방향)

시민과 문학인들이 개발의 칼질과 중구청 철밥통들을 참교육시키며 지켜낸 이상화 고택을 둘
러보고 바로 이웃에 자리한 서상돈 고택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은 여기서 흔쾌히 휘장을 걷는다.


* 이상화고택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84 (서성로 6-1, ☎ 053-256-3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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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남한산성 봄맞이 나들이 ~~~ (남한산 장경사, 망월사, 지수당, 연무관, 개원사)

남한산성 늦겨울 나들이 (장경사, 망월사, 지수당, 개원사, 연무관)



' 남한산성 늦겨울 나들이 '

남한산 장경사
▲  남한산성 장경사

지수당

남한산성 연무관

▲  지수당

▲  연무관

 



 

차디찬 겨울 제국이 드디어 그 끝물을 보이던 3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광주(廣州) 남
한산성을 찾았다.
오전 11시에 집을 나서 지하철을 3번씩이나 갈아탄 끝에 남한산성의 서쪽 입구의 하나
인 산성역(8호선)에 이르렀다. 이 역은 해발 100m 고지에 자리해 있어 신금호역(5호선
), 만덕역(부산3호선)만큼이나 장대한 깊이를 자랑한다. 하여 역을 빠져나오는데만 한
참이 걸린다.

어두컴컴한 지하를 벗어나 산성역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성남시
내버스 52번(성남동 대형주차장↔남한산성)을 잡아탔다. 산성역에서 남한산성 내부(산
성리)로 들어가는 버스는 9번과 9-1번, 52번, 53번이 있는데, 52번은 평일에만 바퀴를
굴리는 노선으로 남한산성 안으로 바로 들어가나 배차간격이 2시간 이상이라 절망적인
수준이다. 그리고 9번은 20분대 간격이나 성남시 양지동과 은행동 지역 강제투어가 심
하다.
9-1번은 52번처럼 남한산성으로 바로 들어가나 토요일과 휴일에만 운행하며,(배차간격
은 10~20분대) 53번도 휴일에만 운행하나 배차간격이 우울하다.

남한산성 나들이객과 산꾼을 가득 머금은 버스는 마치 뱀의 허리에 올라탄 듯, 구불구
불한 고갯길(남한산성로)을 지나 산성 남문<南門, 지화문(至和門)>을 통해 남한산성으
로 진입, 남한산성 종점인 산성로터리에서 두 발을 내린다.

남한산성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산성로터리에서 남한산성로를 따라 동쪽으로 15분 정
도를 가면 남한산성 동문<東門, 좌익문(左翼門)>이 마중을 한다. 여기서 장경사까지는
2갈래의 길이 있는데, 하나는 남한산성 성곽길을 따라가는 것이고, 다른 것은 동문 서
쪽에 있는 포장길을 이용하는 것이다. 성곽길이 조금은 지름길로 20분 정도 걸리나 경
사와 성곽길이 다소 거칠며, 포장길도 시작부터 각박한 경사로 진을 제대로 빼게 하나
장경사/망월사 갈림길 이후부터 점차 순해진다. (포장길은 25분 정도 걸림)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남한산성 동문에서 장경사, 망월사로 인도하는 각박한 포장길

▲  망월사 입구 (장경사, 망월사 갈림길)

▲  장경사, 망월사 갈림길에서
장경사를 알리는 표석



 

♠  남한산성 10개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자리를 지키며 살아남은
조선 중기 산사(山寺), 남한산 장경사(南漢山 長慶寺)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5호

▲  장경사 숲길 (장경사/망월사 갈림길에서 장경사 방향)

동문 서쪽 포장길을 6~7분 오르면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장경사 표석과 망월사 표석이 서
로 자기네 절에 오라며 호객 행위를 벌이고 있는데, 우선 구석에 자리한 장경사를 둘러보고
나오면서 망월사에 들리기로 했다, (갈림길에서 직진하면 망월사, 오른쪽 길은 장경사로 이어
짐)

장경사 표석의 손을 들어주어 오른쪽 길로 향했지만 산길의 흥분은 여전하여 숨을 제대로 헐
떡이게 만든다. 다행히 한 굽이를 지나니 길은 서서히 진정을 되찾으며 다소 순화되었고, 다
시금 1굽이를 크게 도니 동문에서 서로 떨어졌던 남한산성 성곽길이 바로 옆에 붙는다. 여기
서 잠시 나란히 이어지다가 곧 갈라져 제 갈 길을 간다. 어디로 가든 장경사로 이어지나 빠르
게 가고 싶다면 숲길(왼쪽)로 가면 된다. 성곽길은 절 주차장 남쪽으로 이어진다.


▲  장경사 곁을 흐르는 남한산성(사적 57호) 동쪽 성곽 (북쪽 방향)

▲  남한산성 동쪽 성곽에서 바라본 한봉(漢峰, 418m)

한봉은 남한산성(청량산)을 지키는 동쪽 봉우리로 산성의 동쪽 가지 성(枝城)인 한봉성(漢峰
城)을 품고 있다. 이 성은 산성 동장대터와 벌봉(봉암성) 능선에서 한봉 정상까지 이어지며
지형이 각박해 수비에 용이하다.


▲  장경사 일주문(一柱門)

성곽길과 떨어지면 얼마 안가서 장경사 정문인 일주문이 마중을 나온다. '남한산 장경사' 현
판을 정면에 내밀며 절의 정체를 널리 드러내고 있는데, 다른 일주문과 달리 지붕과 현판이
달린 평방(平枋)의 높이가 너무 낮다. 그 문을 들어서면 여태까지 보이지 않던 장경사의 속살
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럼 여기서 잠시 장경사의 내력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남한산성 내에서 제일 동쪽 구석 360m 고지에 자리한 장경사는 병자호란 직후인 1638년에 창
건되었다.
1624년 전국의 승려를 소환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수축했는데, 공사가 끝나자 그들을 제
자리로 보내지 않고 산성에 눌러앉게 하여 산성 수비와 관리의 임무를 맡겼다. 허나 그 시절
산성 안에는 망월사와 옥정사(玉井寺) 등 2개의 절 밖에는 없어서 수용 공간이 너무 딸렸다.
그러니 승려들의 불만과 원성은 대단했다. 하여 1638년에 장경사와 개원사, 한흥사(漢興寺),
국청사(國淸寺), 천주사(天柱寺), 동림사(東林寺), 남단사(南壇寺) 등 7개의 절을 새로 지어
이들을 수용했고, 그로 인해 남한산성에는 9개의 절이 둥지를 틀게 되었다. 그중 장경사는 충
청도 출신 승려(승군)들이 머물렀다.
병자호란이 한참이던 1637년 1월 19일 청나라군이 동문 주변을 공격했는데 어영별장 이기축(
李起築)이 장경사 자리에 있다가 죽을 힘을 다해 그들을 격퇴했다. 이에 인조가 찾아와 그를
위로하고 가선(嘉善)의 품계를 더하고 완계군(完溪君)에 봉했다.

1907년 왜군이 남한산성을 찾아와 9개 사찰의 무기고와 화약고를 모두 정리했는데, 그것들이
화약을 폭파하는 과정에서 8개의 절이 몽땅 파괴되었으나 장경사는 그나마 피해가 덜해 유일
하게 살아남았다. 하여 창건 당시의 모습과 가람 배치를 많이 유지하고 있으며, 1975년 화재
를 만나 소실된 것을 다시 중창했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심향각, 삼성각, 대방, 요사, 범종각, 무심당 등 8~9동 정도의 건
물이 있으며, 이중 대웅전은 19세기 건물이나 20세기 후반에 너무 변형을 주면서 고색의 향기
는 거의 말라버렸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강희21년명 동종이 있는데, 이 종은 오랫동안 삼성
동 봉은사(奉恩寺)에서 객지생활을 하다가 2013년에 겨우 돌아왔다.

▲  검은 피부를 지닌 똥배 포대화상
그의 배를 어루만지면 아들을 낳는다고??

▲  경내를 가리고 앉은 무심당(無心堂)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  범종의 보금자리, 범종각(梵鍾閣)

▲  선방과 요사로 쓰이는 심향당(心香堂)

남쪽을 바라보고 앉은 장경사는 남쪽을 제외하면 모두 산으로 막혀있다. 남한산성을 대표하는
절이긴 하지만 가장 동쪽 외진 곳에 자리해 있고 숲에 완전 감싸인 곳이라 적막하고 고즈넉한
산사(山寺)의 분위기를 제대로 누릴 수 있다. '절간답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말이다.

법당(法堂)인 대웅전 앞에는 뜨락이 있는데, 뜨락에는 1995년에 조성된 9층석탑이 파리도 미
끄러울 정도로 매끄러운 하얀 피부를 드러내고 있다. 그 좌우에 심향당과 요사가 서로 마주보
고 있으며, 대웅전 맞은편에는 무심당이란 건물이 있는데, 예전 진남루(鎭南樓)로 근래에 지
금의 모습으로 변형되었다.

▲  장경사 현판을 내건 요사(寮舍)

▲  법당 뜨락에 세워진 9층사리탑


▲  장경사의 빛바랜 과거 (1958년 사진)
지금과 달리 뜨락이 좁고 동쪽 요사 건물과 대웅전이 많이 달랐음을 알려준다.

▲  장경사의 법당인 대웅전(大雄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너무 변형을 많이 주어 옛 모습을 다소
잃었다. 1958년 사진과 비교하면 오히려 젊어진 느낌이랄까~~! 저 안에
이곳의 보물인 강희21년명 동종이 들어있으니 꼭 살펴보도록 하자.

▲  대웅전 석가여래3존상
살짝 미소를 던지고 있는 석가여래가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거느리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그들 뒤에는 붉은 색채의 후불탱이 있으며, 그 좌우로 조그만
원불(願佛)이 빼곡히 자리를 채워 장관을 이룬다.

▲  강희(康熙) 21년명 장경사 동종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282호

대웅전 안에는 이곳의 유일한 문화유산인 동종이 있다. 그의 시커먼 피부에는 '강희 21년명~'
글씨가 있어 1682년 3월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종이 작아 보여 거뜬히 들 수 있을
듯 싶지만 그의 무게는 300근(약 180kg)에 이르니 괜한 생각은 하지도 말자.

1907년 왜군이 장경사에서 무기를 압수하고 절을 파괴했는데 그때 동종까지 집어가 삼성동 봉
은사에 넘겨버렸다. 이후 봉은사에서 100년 이상 타향살이를 하다가 2013년 제자리로 돌아왔
으며 2014년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그는 강제로 타지로 넘어간 문화유산이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힘든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꼽히며, 그의 무사 귀환 덕분인지 2014년 6월,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의 지위를 얻
게 되었다. (종의 위치는 절의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음)


▲  장경사 9층사리탑
월정사(月精寺) 8각9층석탑을 많이도 닮은 9층사리탑은 1995년에 조성된 것으로
부처의 사리를 머금고 있다. 그 이전에는 경내에 탑이란 존재가 없어서
무척 허전했었는데, 그를 장만함으로써 허전함이 많이 가셨다.

▲  티벳 불교 스타일로 지어진 동그란 경통(經筒)

경통이란 불경을 넣어두던 통으로 티벳 불교에서 많이 쓰이고 있다. (경통을 티벳어로 '마니
차'라고 함)
우리의 윤장대(輪藏臺)와 비슷한 것으로 손으로 저것을 돌리며 염불을 하거나 소망을 빌면 경
전을 모두 읽거나 이해한 것과 같다고 하며 소망도 이루어진다고 한다. 옛날에는 글자를 모르
는 까막눈이 많다보니 저런 것을 이용해 영업을 한 것이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뒷쪽에 자리한 삼성각은 산신과 칠성, 독성(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  경내 밑에 닦여진 돌탑
돌탑 중앙에 일종의 감실(龕室)까지 갖추고 있어 마치 경주 첨성대(瞻星臺)의
축소판을 보는 듯 하다.

* 장경사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22-1 (남한산성로 676 ☎ 031-743-6548)


▲  돌탑 감실을 장악한 조그만 존재들의 위엄
동자승과 돌하루방, 불상까지 다양한 군상들이 모여 그들만의
조그만 세상을 이루었다.



 

♠  남한산성에서 가장 오래된 절, 망월사(望月寺)
- 망월사지(경기도 지방기념물 111호)

▲  가파른 곳에 세워진 망월사 일주문

장경사를 40분 정도 둘러보고 다시 갈림길(망월사, 장경사 갈림길)로 나왔다. 이번에는 장경
사 때문에 미루어둔 망월사로 길을 잡았는데, 이곳 역시 각박한 경사를 내밀고 있어 숨을 또
헐떡이게 한다. 장경사는 어느 정도 길을 오르면 흥분을 가라앉지만 망월사는 경내 끝까지 가
파른 경사의 연속이라 속세에 은근히 까칠한 모습을 보인다.

장경사보다 더 하늘과 가까운 420m 고지 가파른 곳에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망월사는 남한
산성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남한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
이나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우면서 서울(한양)을 도읍으로 꾸밀 때, 서울에
있던 장의사(莊義寺)를 밀어버리고 그곳에 있던 불상과 금자(金字)로 된 화엄경(華嚴經), 금
솥 등을 수습해 남한산에 망월사를 지었다고 한다.
허나 불교를 신봉하던 이성계가 도성을 닦을 자리에 있었다는 장의사를 밀어버렸다는 것도 그
리 신뢰가 가지 않으며, 서울 4대문 안에는 장의사란 절도 없었다. 다만 창의문(彰義門) 바깥
인 세검정(洗劍亭) 부근에 연산군(燕山君) 때 사라진 장의사가 있어(절터에 당간지주가 남아
있음) 거기서 가져온 것을 봉안하려고 지었거나 기존에 있던 망월사에 옮겨놓고 장의사의 뒤
를 이었다는 식으로 둔갑시킨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처음 이름은 망월암이었다고 하며, 남한산성의 역사가 담긴 남한지(南漢誌)에는 남한산성 9개
사찰 중 가장 늙은 절로 나왔다. 또한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이 쓴 가람고(伽藍考)에는
망월사가 폐사(廢寺)터로 나와 18세기에 잠시 망한 것으로 보이며, 1907년 왜군이 남한산성에
있는 절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강제 폐사되고 만다.
그러다가 1990년부터 폐허의 절터에 중창불사를 일으켜 대웅보전(1994년)과 극락보전(1993년)
, 범종각(2003년), 요사 등 4~5동의 건물을 갖추었으며, 특히 대웅보전과 극락보전, 요사는
하나같이 규모가 장대하여 아직은 조촐한 절의 규모를 능히 커버하고도 남는다. 그 외에 인도
인디라 간디 수상에게서 받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머금은 13층 사리탑이 있다.

남한산성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라 자부하나 소장 문화유산은 하나도 없으며 돌로 쌓은 축대가
곳곳에 남아있고 늙은 대형 맷돌 1기가 전할 따름이다. 또한 절터라고 해봐야 그 위에 모두
건물을 올렸기 때문에 제대로 확인하기가 어려우며, 극락보전 자리가 옛 망월사 법당이 있던
터이다. 현재 망월사는 망월사터란 이름으로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부도, 비석군에서 바라본 망월사 (극락보전과 13층석탑)

망월사는 경사진 곳에 자리해 있어 석축을 다지고 건물을 주렁주렁 지어 올렸다. 그래서 밑에
서 보면 자못 웅장해 보인다. 건물은 몇 채 안되지만 대웅보전과 극락보전 등이 한 덩치를 자
랑하니 더욱 그렇다.
절 뒷쪽은 남한산성 동장대(東將臺) 쪽이나 이어지는 산길은 없으며, 각박한 경사지라 이곳도
사실상 막다른 곳이다. 하여 절을 둘러봤으면 미련 없이 다시 왔던 길로 나가야 된다.

▲  수미당 본견의 부도탑과 망월사 복원에
공헌한 이들을 기리는 공덕비들

▲  옛 법당터 자리에 우뚝 선 극락보전
(極樂寶殿) - 1993년에 지어졌다.

▲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망월사 요사

▲  극락보전 아미타3존상
(아미타불과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  범종을 비롯한 사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각

▲  1994년에 지어진 대웅보전(大雄寶殿)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  망월사의 자랑, 13층사리탑의 위엄

대웅보전 옆구리에 세워진 13층사리탑에는 인도 인디라 간디 수상이 선물한 부처의 진신사리
가 깃들여져 있다. 그러다보니 온갖 정성을 다해 지어올린 망월사의 야심작으로 밑도리 3층은
동그란 모습, 중간의 3층은 8각형, 나머지 윗층은 4각형으로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조각
수법도 매우 현란하며, 최근에 조성된 탓에 피부가 매끌매끌하다.


▲  경내에서 산신각으로 인도하는 계단

▲  바위 밑에 자리한 산신각(山神閣)

망월사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에 산신의 보금자리인 산신각이 있다. 산신각이라 해서 번
듯한 기와집이 있는 것은 아니며, 원래 바위 밑에 그의 노천 거처를 마련했다가 석고를 이용
해 홍예 모양의 굴을 만들어 그 안에 봉안했다.
흑백 피부의 산신은 역시나 같은 피부색인 호랑이 등에 앉아 수염을 어루만지고 있는데, 그
옆에 색이 입혀진 별도의 산신상이 따로 있어 특이하게 2개의 산신상을 간직하고 있다. 허나
덩치 면에서 흑백 산신이 훨씬 우위를 점하며 정면에 앉아있고, 그에게 밀려난 칼라 산신은
뒷전에 있으니 산신 세계도 속세처럼 경쟁이 치열한 모양이다.

산신각 뒤에는 예사롭지 않은 큰 바위와 벼랑들이 포진해 있어 절이 있기 전에도 기도처나 민
간신앙의 애듯한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 망월사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4 (남한산성로 680, ☎ 031-747-3312)
* 망월사 홈페이지는 위의 산신각 사진을 클릭한다.



 

♠  지수당과 연무관

▲  지수당(池水堂)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4호

망월사를 둘러보고 다시 동문으로 내려와 지수당으로 이동했다. 남한산성의 조그만 꽃이라 할
수 있는 지수당은 1672년 광주부윤 이세화(李世華, 1630~1701)가 지었다.
이곳은 연못 3개와 지수당, 관어정 등 정자 2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의 중심인 지수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정자(亭子)로 연못을 바라보며 연회를 즐길 수 있도록 사방이
뻥 뚫려 있다. 허나 20세기 이후 연못 하나는 쥐도새도 모르게 매몰되었고, 관어정 또한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말았다.


▲  지수당 느티나무 (추정 나이 250년, 높이 25m, 둘레 3.5m)

지수당 동쪽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 근래 건강에 이상이 생겨 시름시름 앓던 것을 경기
도와 LG상록재단에서 외과수술을 벌이고 그의 삶터 확보를 위해 울타리를 치면서 생육환경이
크게 개선되었는데, 이후 예전처럼 왕년의 모습을 보이며 지수당에 시원한 그늘을 베푼다.

▲  옆에서 바라본 지수당과 연못

▲  연못 너머에서 바라본 지수당

지수당 동쪽 연못은 지수당을 중심으로 하여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지수당이 있는 대
지가 연못의 중심부로 크게 튀어나와 있어 3면에서 연못을 즐길 수 있도록 했으며, 연못 테두
리를 돌로 정연하게 다져 안정감을 주었다.


▲  동그란 섬을 띄워놓은 지수당 서쪽 연못

지수당 서쪽 연못은 네모난 모습을 하고 있다. 연못 복판에는 동그란 섬을 두둥실 띄워 풍치
를 돋구고 있으니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상징하
는 것 같다.
맨물을 드러낸 동쪽 연못과 달리 겨울 제국이 씌워놓은 두꺼운 봉인(얼음)이 입혀져 있어 봄
이 코앞에 이르렀음에도 아직까지도 겨울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연못 섬은 남한산성
의 유일한 섬으로 소나무들이 바깥 세상의 간섭을 거부하며 그들만의 작은 세상을 일구고 있
다.

지금은 자연의 공간이 되었지만 섬 중앙에는 1804년에 지어진 관어정(觀魚亭)이 있었다. 생전
의 모습을 남기지 못해 생김새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네모난 정자로 여겨지며, 지수당과 마
주보면서 서로 아름다움을 견주었다. 바깥에서 섬까지는 다리를 놓지 않고 조그만 배를 이용
해 섬을 오갔으며, 관어정이란 이름은 중원대륙(서토)의 개허접 소설인 삼국지에 지겹도록 나
오는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이 못에 임(臨)하여 방책을 결정하며 적을 헤아렸다는 고사
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현재 섬으로의 접근은 거의 불가능하며, 연못 바깥에서 그림의 떡처럼 바라봐야 된다. 허나
바깥에서도 섬 내부가 훤히 보이니 굳이 깊은 연못을 무릅쓰면서까지 들어갈 이유는 없다.

* 지수당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24-1


▲  지수당 서쪽 연못과 관어정터를 품은 동그란 섬
섬 중앙에 관어정이 자리하여 동쪽에 있는 지수당을 바라보았다.

▲  연무관(演武館) - 보물 2,154호

지수당에서 산성로터리 방면으로 4~5분 가면 오른쪽 언덕(남한산초교 동쪽)에 기와집 하나가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그가 남한산성 군사훈련장으로 살았던 연무관이다.
연무관은 남한산성에서 가장 늙은 측에 속하는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보기만 해도 시
원스런 팔작지붕을 날개처럼 펄럭이고 있다. 군사 훈련장이라 자못 위엄이 있는 규모로 남쪽
(앞면)은 뻥 뚫려있어 군사 훈련을 지휘하거나 감독하기에 좋다. 나머지 3면은 문이 달린 벽
으로 막혀있으나 건물 뒷쪽은 화살을 쏘거나 창검술을 익히던 곳이었으며 서쪽에는 이아(貳衙
)가 있었다.

이 건물은 1624년 남한산성을 손질했을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처음에는 연무당(演武堂)
이라 불렸다. 그러다가 숙종 시절에 수어사(守禦使) 김재호(金在好)가 건물을 수리하자 숙종
임금이 연병관(練兵冠)이란 편액을 내리면서 연병관 또는 연무관으로 이름이 갈렸다. 정조 때
는 수어영(守禦營)으로 이름이 바뀌기도 했으나 이후로도 쭉 연병관, 연무관으로 불려왔다.
장수와 군사들이 몸을 풀던 훈련장이지만 가끔씩 무과(武科)나 문과(文科)가 열리기도 했으며,
여기서 무예가 뛰어난 사람을 뽑아 서울로 보냈다. 그리고 무기 시연과 주조, 야조 등의 군사
훈련도 이루어졌다.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천정은 연등천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면은 여러 번의 보
수공사로 지금처럼 뚫린 형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연무관은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2021년 12월 국가 보물로 승진되
었다.

▲  연무관 현판의 위엄
1762년에 쓰인 현판으로 글씨들이 마치
군사들이 몸을 푸는 모습 같다.

▲  연무관의 뒷모습
군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하던 곳으로
지금은 무늬만 남아있다.


▲  주춧돌만 일부 남은 이아(貳衙)터

연무관 옆에는 이아 또는 제승헌(制勝軒)이라 불리던 관청이 있었다. 1748년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이아에 있던 작청(作廳)은 중간 관리층인 이방과 아전들이 남한산성과 광주부(廣州府)
관내의 행정 업무를 보던 곳이다.
관리와 민원을 넣는 백성들로 시끌시끌했을 이아는 장대한 세월(왜정 때 없어진 것으로 여겨
짐)에 녹아 없어지고 겨우 터만 희미하게 남아있으며, 그 터의 상당수는 농경지로 쓰이고 있
어 옛 기억 마저 희미하게 만든다.


▲  봄을 향한 몸부림, 연무관 느티나무 - 광주시 보호수 13호, 14호

연무관 밑에는 500년 이상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애타게 봄의 해방군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
중 광주시 보호수 13호인 나무는 추정 나이 510년(1983년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는 470년),
높이 23m, 둘레 7m이며, 광주시 보호수 14호인 나무는 추정 나이 550년(1983년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는 510년), 높이 24m, 둘레는 8.9m에 달한다.
아무리 먹어도 고갈되지 않는 세월을 무한리필로 씹어먹어 이렇게 장대한 나무로 성장했는데,
이들도 한때 건강의 적신호가 켜졌던 것을 2008년 LG상록재단의 보살핌으로 생육환경 개선사
업을 받아 예전의 생기를 되찾았다.
3월도 왔으니 빨리 잎을 피워야 되겠지만 겨울 제국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여전히 앙상한
가지만이 가득하다.

* 연무관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400-1



 

♠  한때 남한산성의 중심 사찰이었던 개원사(開元寺)
- 개원사터(경기도 지방기념물 119호)

▲  개원사 일주문인 조계문(曹溪門)

연무관에서 다시 지수당 쪽으로 가다가 지수당 못미쳐에서 남쪽 길로 빠지면 개원사로 인도하
는 길이 살짝 손을 내민다.
절을 목전에 둔 속세의 마지막 유혹이랄까? 온갖 음식 냄새로 사람들의 후각을 희롱하는 식당
들을 지나면 높은 키의 개원사 일주문이 마중을 나온다. '청량산(淸凉山) 개원사 조계문'이라
쓰인 현판을 정면에 내밀고 있어 이곳의 정체를 말해주고 있는데, 여기서 조계문은 일주문의
이름이다.
그런 일주문을 지나면 남옹성(南甕城)으로 유혹하는 산길이 나오고, 곧이어 문짝이 달린 커다
란 문이 길을 막는다. 그 문은 천왕문으로 이 땅에 흔한 천왕문의 모습이 아닌 여닫는 문짝으
로 이루어져 있으며, 문짝에 사천왕(四天王)을 그려 넣어 그런데로 천왕문의 기능을 수행한다.
허나 방패 같은 그 문짝은 차량 통행이나 석가탄신일 등 큰 행사가 있을 때만 열리며, 보통은
오른쪽 문짝에 조그맣게 달린 출입문으로 오가면 된다. (보통 18시까지만 열어둠)


▲  큰 문짝으로 이루어진 개원사 천왕문(天王門)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속세의 기운을 막고자 저렇게 문을 지은 모양이다.

▲  개원사 사적비(事蹟碑)와 절 중창에
기여한 이들을 기리는 공덕비들

▲  구석에서 홀로 오후 햇살을 즐기는
조선 후기 석종형 부도(石鐘形 浮屠)

▲  승장조사전(僧將祖師殿)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병자호란 때 산성을
지켰던 벽암대사의 사당이다.

▲  경내 밑에 자리한 조그만 연못
절 주변 나무들이 연못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있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바로 옆에 절의 내력을 담은 사적비와 절 중창에 기여한 이들을 기리는 공
덕비 등 비석 3기가 때깔 고운 모습으로 나란히 환영을 해준다. 그들을 지나면 왼쪽 숲에 홀
로 자리한 맞배지붕 건물이 홀로 보일 것인데, 그 건물은 승장조사전으로 1624년에 승려들을
독려해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승려의 거처 해결을 위해 산성 안에 여러 절을 지었으며, 병자호
란 때 성을 지켰던 벽암대사(碧巖大師)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있다.
이곳에 이렇게 조사전을 둔 것을 개원사가 조선 후기에 전국 승병을 지휘하던 곳이었기 때문
이다. 지금 건물은 근래 지어진 것으로 절이 비록 뒷전으로 물러나 초야에 묻힌 신세나 다름
이 없지만 한때는 천하 승병을 주름잡고 지휘하던 왕년의 영광을 고스란히 추억하고 있다.

경내 앞에 이르니 개원사 안내문과 돌에 새겨진 2기의 석불입상이 마중을 하고 그 뒤로 개원
사 건물들이 모습을 비춘다.


▲  경내 앞에 자리한 석불입상과 개원사 안내문

앞서 장경사가 남한산성의 가장 동쪽 구석에 자리해 있다면, 개원사는 가장 남쪽 구석에 자리
해 있다. 그러니까 남한산성 성내(城內)를 동에서 남으로 바쁘게 가로지른 셈이 된다.

1624년 남한산성을 보수하려고 전국의 승려들을 징발했는데, 그들에게 산성 수비와 관리의 임
무까지 떠맡기면서 그들의 편의를 위해 1638년에 7개의 절이 새로 지어졌다. 기존에 있는 2개
의 절로는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개원사는 바로 그 7개 절의 하나로 으뜸을 연다는 절의
이름처럼 1894년까지 남한산성 본영(本營) 사찰 및 조선 승병의 총지휘소로 위엄을 떨쳤다.
그리고 전국 사찰의 승풍(僧風)을 감찰하는 규정소(糾正所)의 역할까지 도맡으면서 조선 불교
의 중심격 사찰로 명성을 누렸다.

허나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의승방번(義僧防番)이 폐지되자 승병의 총지휘소, 규정
소의 감투를 강제로 내려놓게 되었으며,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왜군이 남한산성 사찰의 무기
고를 강제로 정리했을 때 개원사에 보관 중이던 화약을 처리하다가 미련하게도 절을 홀라당
태워먹어 졸지에 망하고 말았다. 허나 그것들이 실수가 아닌 고의로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쓰러진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나 1970년에 또 큰 화재가 발생하여 건물 1동을 제외하
고 몽땅 태워먹었다. 이후 선효화상(禪曉和尙)이 신도들과 함께 10여 년 간 불사(佛事)를 일
으켜 대각전과 요사, 범종루 등 건물 다수를 다시 세웠다.

숲에 감싸인 경내에는 법당인 대각전을 비롯해 불유각, 범종루, 승장조사전,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2차례에 걸친 대화재로 절의 장대한 역사와 유물이 죄다 흩어져 지금은 승군
들이 사용했던 유분(鍮盆) 1점과 석장(石杖). 옹기, 함지를 비롯해 석종형 부도, 조선 후기
것으로 보이는 불유각 석불입상, 조선 중기 것으로 보이는 화현전 석불좌상 등이 있다, 그리
고 군기고터와 누각터, 종각터 등의 건물터와 돌계단, 박석 등 옛 흔적이 남아 개원사의 왕년
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또한 지금은 전설이 되어 버렸지만 남한산성 사찰 중, 유일하게 대장경(大藏經)을 지닌 절로
1638년 이후부터 쭉 보관되어 왔다. 그 대장경을 실은 배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서호(西湖)
에 닿았는데, 사람은 없고 배 위에 '중원개원사간(中原開元寺刊)'이라 쓰인 책함만 있는지라
그 말을 들은 소심한 인조(仁祖)는 전국에 개원사란 절을 찾아 봉안하도록 지시했다.
허나 그 이름을 지닌 절이 오로지 남한산 개원사가 전부라 거기에 봉안했다는 거짓말 같은 전
설이 덧붙여 전해온다. 그 대장경은 금란보 10벌에 싸서 애지중지 보관했으나 1970년 화재로
모두 날라가버려 안타까움을 더해준다. 만약 살아남았다면 아무리 못해도 지방문화재의 지위
를 누렸을텐데 말이다.

현재 개원사는 개원사터란 이름으로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절 건물이 버젓이 있
는데도 터를 붙인 것은 대화재로 건물이 몽땅 날라가 새로 지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앞서
망월사도 마찬가지이다.

* 개원사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98-5 (남한산성로 731-73, ☎ 031-743-
  6568)


▲  청기와를 두룬 대각전(大覺殿)
개원사의 법당으로 그 흔한 대웅전이 아닌 크게 깨닫는다는 뜻의
대각전을 칭하고 있다.
 

▲  불유각(佛乳閣)과 화현전(化現殿)

보통 불유각이라 하면 우물이나 샘터가 있기 마련이나 여기는 그런 것은 없고 조선 후기 것으
로 여겨지는 석불입상이 있다. 원래부터 이곳 석불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넉넉한 표정과 온화
한 미소를 머금고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선보이며 중생들을 위로한다.


▲  불유각의 주인, 석불입상
피부에 검은 때가 많이 낀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 늦어도 구한말
석불로 여겨진다. (확실한 정보는 없음)

▲  화현전에 봉안된 누런 피부의 석불좌상
돌에 마치 현신한 듯 진하게 자리한 석불로 조선 중기 석불로 여겨진다. 그 역시
자세한 정보는 없으며, 원래부터 이곳 석불이었는지도 분명치 않다.
 

이름도 참 생소한 화현전은 누런 피부를 지닌 늙은 석불좌상과 산신탱, 독성탱 등이 봉안되어
있다. 석불좌상 뒤에는 색채가 곱게 입혀진 목조후불탱이 든든히 자리해 있으며 중생들이 올
린 쌀과 과일, 과자 등의 음식 제물이 가득하여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이다.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  나무 조각에 색을 입힌 독성탱

▲  대각전 뜨락에 세워진 3층석탑

▲  2층 범종루

개원사를 이리저리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8시 턱 밑에 이르렀다. 마침 아줌마 신도가 나오
더니 곧 문닫을 시간이라고 그런다. 다시는 안와도 아쉽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둘러본 상태라
물론 승군이 사용했다는 조선 후기 유물들은 만나지 못했지만 그런 조그만 것들은 보기도 힘
든 존재들이니 애시당초 포기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그렇게 개원사와 작별을 고하고 다시 산성리로 나와 산성로터리 서쪽에서 열리고 있는 사진전
을 구경했다. 낮이 많이 길어지긴 했지만 18시부터는 어두운 기운이 적지 않게 도사리고 있는
지라 더 이상의 사진 촬영은 어려웠다. (찍어봐야 다 흐리게 나오니)
인근에 자리한 침괘정(枕戈亭)이 잠시 들렸다 가라며 꼬리를 치지만 몸도 좀 지친 상태라 남
한산성과의 그날 인연을 쿨하게 정리하고 성남시내로 나갔다.

이렇게 하여 오랜만에 찾은 남한산성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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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최영장군묘, 고양동누리길, 성녕대군묘 역사기행 (대자산, 경안군 및 임창군묘)

고양 최영장군묘, 대자동 나들이



' 고양 최영장군묘, 대자동 나들이 '
최영장군묘
▲  최영장군묘



 


겨울 제국의 차디찬 한복판인 1월의 첫 무렵, 친한 후배와 고양시 대자동(大慈洞)을 찾았다.

서울에서 파주, 개성으로 이어지는 1번 국도(통일로)변에 자리한 대자동은 조선 태종의 4째
아들인 성녕대군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대자사(大慈寺)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다. 전원(田
園) 분위기 가득한 이곳에는 나를 여기로 부른 최영장군묘를 비롯하여 성녕대군묘와 온녕군
묘, 경안군묘, 임창군묘 등 늙은 무덤이 즐비해 무덤 답사의 숨겨진 성지(聖地)로 꼽힌다.


▲  겨울잠에 잠긴 대자동 들판



 

♠  고려의 마지막 보루, 풀이 자라지 않는 무덤으로 유명했던
최영장군묘(崔瑩將軍墓) - 경기도 지방기념물 23호

▲  최영장군묘로 인도하는 대양로(고양동누리길)

최영장군묘를 비롯한 대자동 지역의 무덤 답사는 1번 국도(통일로)변에 자리한 필리핀참전비
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3,6호선 불광역과 연신내역, 3호선 구파발역, 3호선 삼송역에서
벽제, 내유동, 금촌, 문산 방향 시내버스와 마을버스 이용>
필리핀참전비 동쪽에는 대자동 안쪽으로 인도하는 2차선 길(대양로)이 있는데, 고양동과 중부
대학교 고양캠퍼스로 이어지는 길로 단풍나무가 길게 가로수를 이루고 있어 늦가을에 오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특히 고양시(高陽市)가 닦은 지역 둘레길인 '고양누리길'의 '고양
동누리길(필리핀참전비~만장고개, 7.56km)'이 이 길을 거쳐 최영장군묘와 대자산으로 흘러가
며, 최영장군묘와 성녕대군묘, 고양향교, 중남미문화원, 대자산 등의 여러 명소를 끼고 있어
볼거리도 풍부하다.

대자동 산하에는 최영장군묘역을 비롯해 성녕대군과 경혜공주, 경안군, 이성군(利城君), 온녕
군(溫寧君), 임창군 등의 조선 왕족들, 김홍집(金弘集)과 김주신(金柱臣) 등의 조선 후기 인
물 등, 오래된 무덤이 즐비하다.
이곳에 이토록 옛 사람들의 무덤이 많은 것은 고려 후기 이후 명당(明堂) 자리로 명성이 자자
했던 탓이다. 처음에 최원직(최영의 부친)이 이곳에 묻혔고, 그 다음 최영장군이, 조선시대로
들어와서는 성녕대군이 최영장군묘 밑에 둥지를 틀기 시작해 많은 왕족과 사대부들이 대자동
산천에 비빌 구석을 마련했다. 이렇게 한 동네에서 고려 말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의 무덤을 만날 수 있어 옛 무덤 답사지로 아주 그만이다.

필리핀참전비에서 1km 정도 들어가면 대자동회전교차로(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무민로
로 들어서(오른쪽으로 가면 고양동) 3분 정도 가면 대자동 마을회관인데, 여기서 오른쪽 성녕
길로 7분 정도 들어가면 농가와 주차장이 나오고, 그곳을 지나면 최영장군묘로 인도하는 대자
산 숲길이 활짝 마중을 한다.


▲  최영장군묘, 대자산 입구 (고양동누리길)

대자산(大慈山)은 고양시 대자동과 고양동(高陽洞)에 걸쳐있는 해발 210m의 나지막한 뫼이다.
최영장군과 성녕대군, 경안군 묘역을 품고 있는데, 최영장군묘 밑에서 대자산 정상부를 찍고
고양향교까지 2.5km의 숲길이 달달하게 펼쳐져 있으며, 고양동누리길이 이곳의 신세를 진다.
그 길을 7~8분 정도 들어가면 최영장군묘 안내문과 묘역으로 인도하는 계단이 모습을 비춘다.


▲  겨울에 잠긴 대자산 고양동누리길

대자산 남쪽 자락에는 고려의 마지막 보루였던 최영장군 묘역이 포근히 자리해 있다. 묘역에
는 2기의 무덤이 있는데, 위쪽에는 그의 아버지인 최원직(崔元直)묘가 있으며, 그 밑에 최영
과 부인 문화유씨의 합장묘(合葬墓)가 자리잡고 있다.

최영(崔瑩, 1316~1388)은 워낙 유명하여 모르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는 동주최씨 집안
으로 동주(東州,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사헌규정(司憲糾正)을 지낸 최원직,
어머니는 지씨이다. 그리고 그의 5대조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최유청(崔惟淸, 1095~1174)
이다.

최영은 문인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과 무예가 뛰어났으며, 윤관
(尹瓘)장군처럼 병서(兵書)를 늘 옆에 끼고 살았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는 조언을 받고 그것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하여 재물과는 담을 쌓고 살
았으며, 조선 초기 청백리(淸白吏)인 맹사성(孟思誠)에 버금갈 정도로 검소하고 강직하여 백
성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  누렇게 시든 대자산 고양동누리길 (최영장군묘 안내문 직전)

청년 시절 양광도(楊廣道) 도순문사(都巡問使) 휘하에 있으면서 왜구와의 싸움에서 많은 전공
을 세웠는데, 생포한 왜구가 꽤 되었다. 하여 그 공으로 우다치(亏達赤)에 임명되었다.

1352년 공민왕(恭愍王)의 측근이던 조일신(趙日新)이 반란을 일으키자 안우(安祐), 최원(崔源
)과 함께 이를 때려잡아 크게 존재를 드러냈다. 그 공으로 호군(護軍)에 임명되었으며, 1354
년에 대호군(大護軍)으로 승진되었다. 그리고 그해 중원대륙<서토(西土)>에서 홍건적(紅巾賊)
이 크게 난을 일으켜 온갖 민폐를 부리자 원나라(몽골)에서 고려에 급히 원군을 요청했다. 하
여 공민왕은 최영을 대장군으로 삼아 군사 2,000명을 딸려 원나라로 파견했다.

최영은 원나라에서 살던 고려인 2만 명을 휘하에 넣었으며, 고우(高郵)를 정벌하는 등, 28번
의 전투를 벌이며 많은 공을 세웠다. 허나 이에 배가 아프던 원나라 승상 톡토(脫脫)가 참소
하면서 전쟁이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1355년 회안로(淮安路, 강소성 회안시)에서 홍건적을 방어하면서 팔리장(八里莊)에서 여러 차
례 승리를 거두었으며, 사주(泗州. 강소성 우이현)와 화주(和州, 안휘성 화현)에서 홍건적들
이 8,000여 척의 배로 무더기로 회안성을 포위하자 밤낮으로 수비해 그것들을 잘 다져진 고깃
덩어리로 만들었다. 이후 적들이 다시 침범하여 성을 넘으려고 하자 최영은 여러 번 창에 찔
렸음에도 친히 앞장서 적들을 무수히 때려죽이며 성을 지켰다.

그렇게 홍건적의 난에서 크게 명성을 날리며 대륙의 정세를 살피다가 귀국하여 공민왕의 명으
로 인당(印璫)과 함께 원나라(몽골)를 공격했다. 공민왕은 원나라에게 빼앗긴 요동(遼東)과
남만주 지역을 회복할 큰 계획을 세웠는데, 이때 최영과 인당은 요동과 요서(遼西)의 8개의
참(站)을 점령하여 이후 추진될 공민왕의 요동정벌에 큰 발판이 된다.
또한 왕명으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함경도와 두만강 이북 지역)를 공격하자 원나라(몽골)
의 벼슬을 지내며 쌍성 지역을 관리하던 이자춘(李子春), 이성계(李成桂) 부자가 투항하면서
쉽게 쌍성을 점령했다. 하여 고려의 영토는 함경도와 두만강 이북(길림성, 연해주 지역)까지
크게 확장되었다.


▲  최영장군묘 밑 (안내문과 묘소로 인도하는 계단)

1357년 체복사(體覆使)가 되어 서해, 평양, 니성(泥城), 강계 지역을 살폈으며, 1358년 왜구
가 400여 척의 배로 오차포(吾叉浦)를 공격하자 군사를 매복시켜 승리했다. 그리고 1359년 서
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있던 중, 홍건적 패거리들이 4만의 군사로 쳐들어오자 생양역(生
陽驛), 철화현(鐵和縣), 함종현(咸從縣), 서경(西京, 평양) 일대에서 크게 격파했다.

1360년 평양윤(平攘尹) 겸 서북면순문사(西北面巡問使)가 되었는데, 전쟁의 여파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자 진제장(賑濟場)을 여러 곳에 설치해 양식과 종자를 나눠주면서 농사를 장려
하고 전사자의 유골을 매장해주었다.
1361년 홍건적이 다시 쳐들어와 국도(國都)인 개경(開京)이 함락되자 이방실(李芳實)과 함께
개경을 탈환하고 그들을 때려잡았다. 그때 목을 붙잡고 도망친 홍건적은 불과 수백에 불과했
으며, 그 공으로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승진되었다.
1362년 안우, 이방실과 함께 홍건적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어 공신각(功臣閣)에
초상이 안치되었으며,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고 부모와 부인도 모두 작위를 받았다.

1363년 공민왕의 측근이던 김용(金鏞)이 반란을 일으켜 흥왕사(興王寺) 행궁(行宮)을 침범했
다. 최영은 그 소식을 듣고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 그들을 모두 처단했으며, 그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어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았다. 이후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승진되고 진충분의좌
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의 칭호가 내려졌으며 평리(評理)로 전임되었다.

한편 고려의 요동정벌과 반원정책에 뚜껑이 단단히 뒤집힌 원나라 기황후<奇皇后. 고려인 기
철(奇轍)의 여동생이자 원나라 순제(順帝)의 왕비>는 공민왕을 철저히 응징하려고 했다. 하여
원나라에 머물던 덕흥군<德興君, 고려 26대 군주인 충선왕(忠宣王)의 3번째 아들>을 고려 왕
으로 내세우며 최유(崔濡)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고려를 공격하게 했다.
처음에는 선주(宣州)까지 점령하며 승승장구했으나 공민왕이 최영을 도순위사로 임명해 안주
(安州)로 보내면서 상황은 크게 반전되었다. 결국 최유의 원나라군은 최영에게 크게 털려 최
유 등 일부만 간신히 목을 붙잡고 도망쳤다. 적을 토벌하자 공민왕은 크게 기뻐하며 말 1필,
은 2정을 내렸다.

동녕로만호(東寧路萬戶)인 박바이에다이(朴伯也大)가 연주(延州, 평안북도 영변)를 공격하자
최영이 휘하 장수를 보내 단죄했으며, 1365년 왜구가 교동도(喬桐島)와 강화도까지 기들어와
소란을 피우자 최영이 동/서강 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가 되어 동강을 지키며 왜구를 토벌
했다.


▲  석축 위에 터를 다진 최영장군 묘역

한편 공민왕의 신임이 두터웠던 신돈(辛旽)은 예전에 밀직(密直) 벼슬에 있던 김란(金蘭)이
딸을 자신에게 바치자 최영이 크게 꾸짖은 일로 인해 그에게 안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 최영이 고봉현(高峯縣, 고양시)으로 사냥을 나갔는데, 그것을 구실로 왕에게 참소하니
공민왕은 그를 계림윤(鷄林尹)으로 좌천시켜 내쫓았다.
신돈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최영과 이구수(李龜壽) 등이 환관과 결탁해 왕과 신하를 이간시킨
다고 무고하자 왕은 신돈과 친한 이득림(李得林)을 보내어 최영을 국문케 했다. 최영은 이제
끝난 듯 싶어 거짓 자복하며 죽여달라고 청하자 마음이 약해진 왕은 3품 이상의 작위를 삭탈
하고 그의 전민(田民)을 몰수하여 유배를 보냈다.
이득림은 최영을 어떻게든 죽이려고 난리를 쳤으나 정사도(鄭思道)가 죽기를 각오하고 이득림
의 부당성을 주장했다. 이에 이득림이 신돈에게 보고하여 정사도까지 파면시켰다.

이후 1371년 다시 복귀하여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1373년, 6도 도순찰사(六道都巡察使)가
되어 군적(軍籍)을 작성하고 전함(戰艦)을 건조했으며, 장수들의 계급을 진급 또는 강등시키
고 죄지은 수령들을 독단으로 단죄하자 사람들의 비판이 대단했다. 또한 70살 이상 노인들부
터 차등을 두어 쌀을 징수하여 부족한 군량을 충당하자 백성들의 원성까지 자자했다.
1374년 경상도와 전라도, 양광도 도순문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를 두고 헌사(憲司)에서 예전
도순찰사로 있을 때 6도를 소란하게 했다며 반대했다. 이에 최영이 울면서 한탄하며 벼슬을
받지 않자 공민왕은 그를 비판한 대사헌 김속명(金續命) 등을 파면하고 최영에게 '진충분의선
위좌명정난공신(盡忠奮義宣威佐命定亂功臣)'의 칭호를 내려주며 그를 달랬다.

한편 그해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임밀(林密) 등을 제주도에 보내 말 2천 필을 보내라
고 했다. 당시 제주도는 원나라의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 관할로 원나라의 잔여 세력<목호(
牧胡)>들이 지방 세력과 결탁해 고려 조정의 명을 거부하며 따로 놀고 있었는데, 겨우 300필
을 보냈다는 소식에 공민왕은 제주도를 공격해 탈환하기로 했다.
그래서 최영을 총대장으로 삼아 양광도와 전라도, 경상도 도통사(都統使)로, 염흥방(廉興邦)
과 이희필(李希泌), 변안열(邊安烈), 목인길(睦仁吉), 임견미(林堅味)를 원수(元帥)로 삼아
314척의 배와 25,600명의 군사를 보냈다.

제주해협을 건널 때 태풍으로 조금 고생을 했으나 제주도에 무사히 상륙, 명월포(제주시 한림
읍)에서 목호 세력 3천여 기를 격파해 30리를 추격했다.
날이 저물자 명월포로 되돌아와 해변에서 숙영을 했는데, 목호들이 기습해 안무사(安撫使) 이
하생(李下生)을 죽였고, 목호 우두머리 3명<시데르비스(石迭里必思), 촉투부카(肖古禿不花),
관음보(觀音保)>이 고려군을 살살 야골리며 유인하려고 했으나 최영이 이를 간파하고 즉시 정
예군을 보내 재빠르게 추격하니 적장은 유인책을 쓸 겨를도 없이 서귀포 남쪽 호도(虎島)로
줄행랑을 쳤다.
최영은 전 부령(副令) 정룡(鄭龍)을 보내 빠른 전함 40척으로 섬을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정
예군을 이끌고 뒤쫓았다. 호도에 포위된 시데르비스는 처자와 일당 수십 명을 이끌고 섬 밖으
로 도망쳤으나 생포되었고, 촉투부카와 관음보는 항복을 해도 처형을 면치 못할 듯 싶어 쿨하
게 벼랑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생포된 시데르비스와 그의 아들 3명은 허리를 잘라 죽이고 자
살한 적장의 머리를 베어 조정에 바쳤다.
동도(東道)의 카치(哈赤), 시도시멘(石多時萬). 조장홀고손(趙莊忽古孫) 등은 수백의 무리로
끝까지 저항했으나 모두 토벌했으며, 잔당까지 모두 찾아내 죽이니 적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
다. 이렇게 목호 토벌로 금패(金牌) 9개, 은패(銀牌) 10개, 인신(印信) 30개, 말 1,000필을
노획했고, 포로들은 지역 세력에게 주었으며, 말은 여러 고을에 분산해 기르게 했다. 또한 군
율을 엄하게 하니 군사들은 벌벌 떨며 군율을 어기지 않았다.
그렇게 제주도를 토벌하고 10월에 귀환했으나 그 사이에 공민왕은 시해되고 말았다. 하여 왕
의 빈소에 들어가 제주도 토벌 경과를 보고하다가 끝내 주저앉아 통곡했다.


▲  뒷쪽에서 바라본 묘역 (제일 앞에 보이는 묘가 최원직묘)

공민왕이 시해되자 그의 큰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우왕(禑王, 1374~1388)이다. 우왕은
1375년 최영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삼았으며, 1376년 왕명으로 조정에서 폄직(貶職)되었던
강순룡(康 舜龍)과 정사도(鄭思道), 염흥방(廉興邦), 정몽주(鄭夢周) 등에게 관용을 베풀고자
했다.
그 결정이 내릴 당시 최영은 마침 사냥 중이라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녹사(錄事)가 관련
서류를 가져와 서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최영은 나라의 큰 일을 왜 대신(大臣)들과 합
의하지 않고 멋대로 하냐며 서명을 해주지 않았다.
또한 그의 조카사위인 판사(判事) 안덕린(安德麟)이 사사롭게 사람을 죽였는데, 최영의 권력
이 대단한 터라 어쩌지는 못하고 최영이 관장하던 순위부(巡衛府)로 보냈다. 그러자 최영은
크게 노하며 헌사(憲司)로 보내 죄값을 받도록 했다.

1376년 왜구가 충청도에 칩입했다. 연산 개태사(開泰寺)를 불지르고 조정에서 보낸 관군까지
때려잡는 등 위세가 대단하자 최영은 왕에게 출정을 요청했다. 허나 왕이 나이가 많음을 내세
우며 출정을 거부하자 2~3차례 간청하여 겨우 허가를 받았다.
최영은 급히 군사를 꾸려 왜구가 머물던 홍산(鴻山, 부여 홍산)으로 내려갔는데, 그는 좁은
험로에 의지해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허나 3면이 절벽이고 왜구의 위세가 대단하므로 장졸들
이 쉽게 나서려고 하지 않자. 최영은 정예병을 이끌고 제일 선두로 달리며 간만에 몸을 푸니
왜구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며 도망치기 급급했다.
그때 적 하나가 수풀 속에 숨어 화살을 쏘아 최영의 입술을 맞추었는데, 피가 낭자하게 흐름
에도 아무 일도 없듯 화살로 그 적을 쏘아 죽이고 입술에 박힌 화살을 뺐다. 그리고 다시 왜
구 사냥에 나서 왜구 대부분을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와 머리고기로 만들었다. 이 전투가 그
유명한 홍산대첩(鴻山大捷)으로 왜구들은 최영을 머리가 하얀 최만호(崔萬戶)라 부르며 매우
두려워했다.

승리의 소식을 들은 우왕은 크게 기뻐하며 백금 50냥과 의복, 술, 안마(鞍馬)를 하사하고 의
원 어백평(魚伯評)을 보내 상처를 치료하게 했다. 최영이 개경으로 개선하자 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교외에서 영접했는데, 그 의장 행렬이 실로 대단했다.
왕은 그에게 시중(侍中) 벼슬을 주려고 했으나 최영은 시중이 되면 자유롭게 지방으로 나갈
수 없으니 왜구가 평정된 후에 받겠다고 거절했다. 이에 그를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으로 봉
하고 전쟁에 나선 장졸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1377년 왜구가 남해바다를 넘어 강화도, 김포까지 쳐들어와 소란을 피웠는데, 최영은 강화도
와 교동도가 전략적 요충지임에도 권세가들이 토지를 점유해 제대로 활용을 하지 못한다면서
사전(私田) 혁파를 건의했다. 그래서 그 지역의 사전을 몰수하여 장정을 남겨 농업에 종사하
게 했다. 그리고 지역 수비를 소홀히 한 장수와 관리들의 처벌을 건의했으나 우왕은 받아들이
지 않았다.
우왕은 왜구의 침입을 우려하며 내륙지역으로 천도를 하려는 엉뚱한 계획을 했다. 이에 최영
은 반대했으나 왕은 똥고집을 부리며 철원에 궁성을 축조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자 태후(太
后)의 거처만 철원으로 옮기자고 건의하니 왕은 이를 받아들여 천도 해프닝은 마무리 되었다.

1378년 왜구가 다시 쳐들어 승천부(昇天府, 개경 인근)를 점령하며 장차 개경까지 쳐들어가겠
다고 위협을 했다. 최영은 이성계와 전략을 짜고 방어태세를 갖추었는데, 왜구는 오로지 최영
만 격파하면 개경을 점령할 수 있다 여기고 고려군이 진을 친 곳을 죄다 지나쳐 최영이 지휘
하는 중군(中軍)이 머물던 해풍군(海豊郡, 개경 인근)으로 진격했다.
최영은 찬성사(贊成事) 양백연(楊伯淵)과 함께 맞서 싸우다가 뒤로 빠졌는데, 그 틈에 이성계
가 기병을 이끌고 협공했다. 그때 최영이 측면에 나타나 왜구를 후려치니 왜구는 거의 전멸을
당했다. 왕은 최영의 전공을 기려 안사공신(安社公臣)으로 봉했다.
그리고 1380년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를 겸하게 되었고, 1381년 수시중(守侍中)으로 승진되
었다.


▲  약간 옆에서 바라본 최영장군묘

1381년 잠시 한양(漢陽, 서울) 천도가 논의되었는데, 최영은 서울을 빨리 옮기자며 성문도감
(城 門都監)을 설치해 5부(五部)의 정남(丁男)들을 동원해 한양 성곽을 수리했다. 허나 얼마
안가 무너지나 도감 일을 맡은 윤순(尹順) 등을 탄핵하고 성곽 수리를 중지시킨 후 귀가 조치
시켰다.
우왕은 교서를 내려 최영을 찬양하면서 최영의 아버지 묘소 주변 토지 230결과 장원정(長源亭
, 개경 근처)의 토지 50여 결을 내렸다.

계속 되는 왜구의 침략의 경상도와 강릉도(江陵道, 강원도), 전라도 지역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해졌다. 최영은 이들 3도에 시여장(施與場)을 설치해 선량한 사람을 선발하여 관리하도록
하고, 관청의 쌀로 미음과 죽을 쑤어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또한 함선 건조를 위해 군사와
승려를 동원하여 1년 안에 130여 척을 건조했다. 함선 건조에 동원된 사람과 승려들은 불만이
대단했으나 그 배를 요충지에 분산 배치하면서 수군 군사력이 증대되었고, 그로 인해 왜구의
침입이 크게 줄었다.

1384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었다. 우왕은 토지를 내렸으나 최영은 받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쌀 200석을 군량으로 제공했다. 그리고 퇴직을 청했으나 우왕이 도리어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임명하자 병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으며, 도통사(都統使)의 직인을
반납하려고 했으나 우왕이 계속 곁에 있어줄 것을 청했다.
그러자 궁궐로 나가 왕에게 재상들이 백성들의 토지를 겸병하는 폐해를 극렬히 성토한 후, 겸
병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만들어 다 함께 서명하게 하고는 재상들을 둘러보며
'이후로는 다시 과거처럼 겸병할 자가 있겠소?'라고 다짐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늙어서 사리(事理)에 어두우니 내 행동이 의에 합당하지 않거든, 입을 다물지 말고 이
늙은이에게 충고해 주시오'
하였다.

최영은 이성림(李成林), 이자송(李子松) 등과 조성도감판사(造成都監判事)가 되어 수창궁(壽
昌 宮)을 축조하여 5년 만인 1384년에 완성을 보자 왕에게 하례를 올렸다. 그러자 왕이 무엇
으로 보답할지 물어보니 최영이
'대신들과 국정을 의논하지 않고 소인배와 어울리며 사냥을 일삼으시니 소신들이 장차 어디를
우러러보며 신하의 직분을 다하겠습니까?'
답을 하니 우왕은 부끄러워하며 최영을 판문하부사
(判門下府事)로 삼았다.

1386년 우왕이 서해도(西海道)로 사냥을 가자, 지봉주사(知鳳州事) 유반(柳蟠)이 왕에게 필요
한 물자를 공급한다며 백성들의 재물을 많이 뜯었다. 그러자 최영은 백성들을 괴롭히는 행위
라며 그에게 장형(杖刑)을 가했다.

1387년 장방평(張方平) 등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명나라가 거절하여 요동에서 되돌아왔
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고려를 심히 두려워하며 경계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병이 발
작 수준으로 심해져 고려를 더욱 자극시켰다.
좌시중(左侍中) 반익순(潘益淳)이 최영에게
'공께서는 선왕(先王)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온 나라의 신망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나라
가 위태로운데, 어찌 대책을 세우지 않습니까?'
이에 최영은
'집권자가 이익만 밝히고 악생을 거듭해 패망을 스스로 속히 불러들이고 있으니 이 늙은이가
장차 무엇을 하겠소?'
탄식했다. 그때 요동에서 넘어온 어떤 사람이 명나라가 장차 처녀와 수
재(秀才) 및 환관 각 1,000명과 소와 말 각 1,000 마리를 요구할 거라며 제보를 했다. 그 말
을 들은 최영은 '명나라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서 그것들을 쳐야 된다'
주장했다.

1388년 임견미, 염흥방 등이 반란을 도모했으나 최영과 이성계에게 진압되었다. 최영은 다시
시중에 임명되었는데, 임견미와 염흥방이 등용했던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려고 했으나 이성계
가 덕과 은혜를 베풀어야 된다고 반대했으나 듣지 않았다.

우왕은 최영을 더욱 신뢰하고자 그의 늦둥이 딸을 왕비로 삼으려고 했다. 이에 최영은 눈물을
흘리며
'소신의 딸은 인물도 누추하고 측실 소생이라 제왕의 배필이 안됩니다. 만약 왕비로 삼으려고
하신다면 소신은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허나 우왕이 또 고집을 부리며 최영 집까지 찾아가 말을 하사하자 왕에게 안마와 의대를 바치
며 결국 왕의 뜻을 받아들였다. 우왕은 예전에는 최영의 곧은 성품이 싫어서 그의 집은 찾아
가지도 않았으나 이후로는 영비(寧妃, 최영의 딸)를 총애하여 자주 들렸다.

▲  최영장군묘 서쪽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文人石), 묘표(墓表)

▲  최영장군묘 동쪽 문인석과
망주석, 무민공충혼비


한편 명나라는 고려의 기를 더욱 누르고자 1387년 12월, 예전 원나라가 점령했던 철령<鐵嶺,
요동반도 심양(瀋陽) 남쪽> 이북 땅에 멋대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했다. 그리고 1388년 3월
요동백호(遼東百戶) 왕득명(王得明)을 고려로 보내 철령위 설치를 통고했다.
이때 명나라는 철령위지휘사사(鐵嶺衛指揮使司)를 봉집현(奉集縣)에 설치하고 승차(承差) 이
사경(李思敬)을 보내 철령 이북과 동쪽, 서쪽 지역은 원래 원나라(몽골) 땅이므로 그곳에 사
는 여진, 몽골, 고려, 한인(漢人)의 모든 군인은 요동에 귀속시킨다는 방을 부쳤다.

명나라의 도발에 발끈한 최영은 조정 회의를 열어 명나라 공격과 화친을 두고 의논하니 대신
들 상당수는 화친을 지지했다. 하여 일단 조림(趙琳)을 명나라에 보냈으나 명나라에서 입국을
거절하자 최영은 철령 이북 땅을 줘야 되는가 가부를 물으니 대신들 모두 안된다고 하였다.
이에 우왕은 최영과 독대하여 요동 공격이 어떠냐고 묻자 최영은 찬성했다. 그러자 이자송이
최영을 찾아가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고 했으나 최영은 그가 임견미 패거리라 하여 곤장을 쳐
서 유배를 보냈다가 곧 죽여버렸다.

명나라는 철령위 설치를 행동으로 옮기고자 요동도사 소속 지휘(指揮) 2명과 군사 1천을 파견
해 방을 붙이고 철령위를 설치하려고 했다. 하여 최영은 전국의 군사를 징발하고 개경 동쪽
교외에서 군대를 열병했으며, 얼마 뒤 명나라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요동백호(遼東百
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한 사실을 통보했다.
이에 최영은 우왕에게 보고하여 방문(榜文)을 가지고 북쪽 양계(兩界)에 온 요동기군(遼東旗
軍) 21명을 죽이고 이사경(李思敬) 등 5명을 구금시켜 감시했다. 우왕은 사냥을 내세우며 봉
주(鳳州, 황해도 봉산군)에서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요동을 공격할 것을 주문했다. 이에 이성
계가 4가지의 불가론을 내세워 반대했으나 최영과 우왕은 정벌을 강행했다. 드디어 고려의 대
륙을 향한 마지막 몸부림이 일어난 것이다.

우왕은 서경(西京, 평양)으로 왕림하여 군사들을 독려하고 대호군(大護軍) 배구(裴矩)에게 압
록강에 부교 설치를 맡겼다. 몰수한 임견미와 염흥방의 재산을 배에 실어 군수물자와 상금으
로 쓰게 했으며, 승려도 징발했다.
또한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삼아 요동정벌의 총대장으로 삼고, 조민수(曹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았다. 마침 명나라의 영향력
이 조금 미치던 요동 북부 지역에는 명나라군은 거의 없고 성 안에는 지휘 등 일부만 있었다.

최영은 왕에게 자신이 직접 출진하겠다고 했으나 왕은
'선왕께서 장군이 부재 중일 때 시해되셨소. 장군께서 가신다면 누가 짐을 지켜줄 것이고 누
구와 국정을 다스린단 말이오!'
하소연 했다.
하여 최영은 자신은 평양에서 장수들을 지휘할테니 왕에게 개경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허
나 우왕이 또 똥고집을 피우자 결국 우왕 곁에 남기로 했으니 그것이 바로 화근이었다. 최영
이 총대장이라 직접 군을 이끌고 가야 하건만 왕이 걱정되어 차마 가지 못했던 것이다.

정벌군은 군사 10만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좌,우군 38,830명 그에 딸린 인원이 11,634명, 말은
21,682필이다. 즉 5만 정도의 병력이었다. 한때 광군(光軍) 30만을 육성하고 17만의 별무반(
別武班)으로 동북쪽의 너른 땅을 종횡무진했던 고려건만 그 고려의 위엄이 그새 많이 낡았던
것이다.
또한 정벌군 출진 직후 잠시 사용했던 명나라의 홍무(洪武) 연호를 폐하고 백성 일부에게 원
나라 의복을 입게 하니 이는 명에 대한 적개심을 강화시켜 명을 반드시 응징하겠다는 강한 의
지의 표현이었다.

정벌군은 압록강을 건너 현재 단동(丹東) 북쪽의 위화도(威化島)란 곳에 이르렀다. 이곳은 3
면이 강에 접하고 1면만 땅으로 이어진 지형인데, (신의주 압록강에 있는 그 위화도가 아님)
여름 홍수와 군량 부족 등을 이유로 더 이상 진군하지 않고 회군을 청하자 최영은 직접 위화
도로 가려고 했다.
허나 우왕이 또 반대하여 가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진군을 독촉했다. 또한 최영은 몽골초원으
로 도망친 원나라의 잔여 세력과 함께 요동과 명나라를 치기로 했으나 그 세력이 완전 털린
상태라 신뢰하기 어렵고, 출진한 장수들이 딴 마음을 품지 못하게끔 그들의 가족을 인질로 잡
으려고 했으나 이 역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위화도에 머물던 정벌군의 불만이 늘어나자 그윽하게 딴 마음을 품었던 이성계는 이를 기회로
삼아 장수들을 설득해 군사를 돌렸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하고도 한스러운 위화도회군으로 칼
의 방향을 명나라에서 개경으로 돌렸다.

갑자기 반란군이 되어 돌아온 5만의 군사가 개경으로 들이닥치자. 나라는 그야말로 벌집을 쑤
신 듯 난리가 났다. 최영와 우왕은 서둘러 개경으로 돌아왔고, 반란군은 최영을 내쫓을 것을
요구했으나 우왕은 거절했다. 그러자 반란군은 성문을 뚫고 개경에 칩입했고, 최영은 안소(安
沼)와 함께 개경을 수비했으나 군사가 얼마 없어 결국 개경은 함락되고 만다.


▲  무민공충혼비(武愍公忠魂碑)

최영과 우왕은 화원(花園)으로 피했으나 반란군이 담을 무너뜨리고 뜰로 난입하자 급히 팔각
전(八角殿)으로 피했고 결국 포위되고 만다. 우왕은 최영의 손을 잡고 우니 최영이 2번 절을
하고 미련 없이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이성계가
'이번 일은 내 본심이 아닙니다. 요동을 공격하는 것은 대의에 어긋날 뿐 아니라 나라를 위태
롭게 하고 백성을 괴롭혀 그 원망이 하늘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부득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부디 잘 가십시오!'
최영을 바라보며 울었다.

반란군은 최영을 고봉(高峯, 고양시)으로 유배보냈다가 다시 합포(合浦, 마산)로 보냈다. 그
리고 그와 가깝던 이들을 모두 귀양을 보내고 우왕을 폐위하여 그의 어린 아들 왕창(王昌)을
왕위에 올리니 그가 고려 33대 군주인 창왕(昌王)이다.

창왕이 즉위하자 최영을 순군(巡軍)에 가두어 신문하고 다시 충주로 유배를 보냈다. 최영을
싫어하던 사람들과 반란파들은 최영의 처형을 주장했고, 반란파와 이성계 입장에서는 그의 존
재 자체가 이롭지가 않기 때문에 서둘러 개경으로 압송하여 처형시켰다.

최영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던 날, 개경 사람들은 자진해서 모두 철시(撤市)했으며, 개경 사
람들은 어린 아이부터 부녀자, 노인, 청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만큼 그에 대
한 민심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망나니의 칼을 받는 순간까지 최영의 말씨나 얼굴빛은 전혀
흔들리지 않아 마지막까지 역전 노장의 위엄을 보여주었으며, 망나니의 칼이 볼일을 끝내자
백성들의 통곡 소리는 더해 갔다.
이렇게 하여 그는 72세의 적지 않은 나이로 강제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시신이 길가에 버려
지자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말에서 내렸으며, 조정에서는 쌀과 콩, 베, 종이를 부의로 보냈
다.

이성계는 그와의 옛정 때문인지 최영의 부모가 묻힌 이곳에 그를 안장했으며, 무민(武民)이란
시호(諡號)를 올렸다. 무덤을 만들고 풀을 심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풀은 자라지 않아 풀이 돋
지 않은 무덤으로 유명했는데, 그 사연은 이렇다.

이성계 패거리가 최영에게 부정한 짓으로 재물을 모았다고 몰아세우자, 최영은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부정을 저지른 적이 없다. 만약 그랬다면 무덤에 풀이 날 것이며, 그
렇지 않으면 풀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유언을 남겼다.

그가 죽자 무덤을 만들었는데, 그의 유언대로 봉분(封墳)에는 풀이 돋아나지 않았다. 아무리
흙을 덮고 금잔디를 심어도 잔디는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76년부터 풀이 돋아나
지금은 무성한데, 이를 두고 억울하게 죽은 최영의 한이 풀린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최영은 고려를 지킨 마지막 방패로 일생 동안 80여 회의 전쟁을 치루면서 통한의 위화도회군
을 제외하고 모두 이긴 불패(不敗)의 장수였다. (80승1패) 북쪽으로는 요동과 요서, 서쪽으로
중원대륙(서토), 동쪽은 함경도, 남쪽은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원나라(몽골)와 홍건적, 왜구
등 다양한 적과 싸워 무용(武勇)을 떨쳤으며, 조금도 두려움 없어 늘 앞장서서 적들을 때려잡
았다.
또한 청렴결백한 인물로 재산을 늘리려 하지 않았고 집이 아무리 누추해도 그에 맞춰 편안하
게 살았다. 의복과 음식은 검소했으며, 오랫동안 병권을 장악하고 높은 벼슬을 지냈으나 뇌물
과 청탁을 받지 않아 세상 사람들은 그의 청렴함에 탄복했다. 항상 큰일에 주로 신경을 써 사
소한 일에는 구애받지 않았으며, 전쟁터에 나가서 종종 시를 짓기도 했다.
남의 의롭지 못한 행위를 보면 배척하고 질타했으며, 어떤 사람이 최영에게 벼슬을 구하자 '
너가 공장(工匠)이나 장사꾼의 일을 배웠다면 절로 벼슬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라 했다. 이
는 권력을 잡은 자들이 뇌물이나 받아먹는 족속들이라 비꼰 것이다.

그는 공로와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천거할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은 모두 물리쳤
다.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 중 재산을 늘리고 사사로운 정으로 공직 기강을 해치는 사람이 있
으면 반드시 바로 잡고자 했는데, 이인임(李仁任)도 그에게 한마디 잔소리를 듣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성품이 고지식하고 학문이 좀 부족했으며, 독단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간
대부(諫大夫) 윤소종(尹紹宗)이 최영을 두고
'공은 한 나라를 뒤덮었으나 죄는 천하에 가득 찼다' 논평하니 세상 사람들이 명언이라 했다.

또한 백성을 보살피고 그들에게서 아낌없는 지지를 누리며 나라를 지킨 무인으로 진정한 무인
의 도(道)를 실천한 위인이다. 비록 반란파에게 목숨을 내주고 말았지만 백성들에게 신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으며 우리나라 토속신(土俗神)의 일원이 되었다. 무당(巫堂)이 모시는 신 중
에 최영장군은 거의 꼭 있으며, 오래된 당집을 보면 그의 그림이 있다.
또한 연평도(延坪島)를 비롯하여 부산, 남해, 추자도(楸子島) 등 해안 지역에는 그를 봉안한
사당이 많이 전해오고 있는데, 이는 최영이 왜구를 토벌하면서 그 지역 백성을 살펴준 것이
인연이 되어 그를 신으로 높여 사당을 짓고 마을과 바다의 수호신으로 떠받들었던 것이다.

후손의 지극정성 관리로 정갈하게 손질된 묘역
은 야트막한 오르막에 석축을 쌓아 터를 다지
고 그 위에 네모난 호석(護石)을 만들어 봉분
을 올렸다. 이는 고려시대 무덤 양식으로 조선
초기까지 나타나는 양식이다.

무덤의 크기는 검소하게 살았던 최영 부자에
걸맞게 작고 조촐하다. 봉분 앞에는 상석이 누
워있고, 무덤 서쪽에는 오래된 묘표가, 동쪽에
는 근래에 만든 충혼비가 자리한다.
그 앞에는 홀을 쥐어든 문인석 1쌍과 망주석 1
쌍이 자리해 있는데, 문인석은 근래 것으로 옛
날 스타일이 아닌 훤칠한 키의 듬직한 어깨,
경직된 표정, 그리고 어색하게 자라난 수염 등
은 최영장군묘와 그리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조상의 묘를 관리하고 꾸미고 싶은 후손의 마
음이야 이해는 하지만 그런 욕심이 너무 앞선
나머지 구두를 신은 고려시대 장군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옛날 묘는 어지간해서는 있는 그
대로의 모습으로 보존하는 것이 더 가치가 클
텐데 말이다.

▲  최영장군 묘표(墓表)


▲  아들 묘역을 굽어보는 최원직 묘

묘역 윗쪽에는 최영의 아버지인 최원직의 무덤이 있다. 무덤의 모습은 아들묘와 비슷하며, 봉
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香爐石)을 세우고, 그 옆에 지붕돌 묘표(묘비)를 세웠다. 묘비에는
고색의 때가 가득하며, 무덤 뒤로는 곡장이란 담장을 둘렀고, 주변으로 소나무가 울창하여 묘
역에 그늘을 드리운다.

최원직(?~1332)은 사헌규정까지 지냈으나 아들의 명성에 너무 가려 인지도가 거의 없다. 죽음
에 임하면서 아들에게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유언을 남긴 인물로 아들과 아비 모두 재
물과는 담을 쌓으며 청렴결백하게 살았다. 오늘날 이 땅의 위정자들이 그들 부자(父子)의 청
렴함과 공명함을 좀 배워야될텐데 그딴 것은 애시당초 관심도 없으니 참 나라의 앞날이 오리
무중(五里霧中) 그 자체로다.

* 최영장군묘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70-2



 

♠  최영장군묘 주변에서 만난 후식거리들
(경안군 및 임창군묘역, 성녕대군묘역)

▲  경안군(慶安君) 묘

최영장군묘 입구 남쪽에는 높은 신분이 느껴지는 늙은 무덤이 있다. 경사가 급한 높은 언덕에
자리한 묘는 경안군의 무덤이고 그 밑에 누운 것은 그의 아들인 임창군(臨昌君)묘이다. 그리
고 경안군 무덤 뒷쪽 숲속에는 아들인 임성군(臨城君)의 묘가 숨겨져 있다. 즉 최영장군 묘역
처럼 부자의 묘가 한곳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  경안군 묘의 우측 석물들

▲  경안군 묘의 좌측 석물들

경안군(1644~1665)은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昭顯世子)의 3째 아들로 이름은 이회(李檜)이다.
그는 태어난 이듬해(1645년)에 아비를 잃고, 그 다음해(1646년)에 어머니 강빈(姜嬪)까지 사
사(賜死)되면서 졸지에 고아가 되버렸다. 이는 병자호란 삼전도(三田渡) 굴욕으로 머리가 이
상해진 인조가 청나라를 멀리하고 망한 명나라에 쓸데없이 사대(事大)의 미련을 둔 자신에게
반했다는 이유로 아들 소현세자 내외를 죽였기 때문이다. 특히 소현세자의 사망 원인은 아직
까지도 미스테리이다.
인조는 아들 내외를 처리한 것으로도 모자라 부모가 지은 죄를 갚으라며 1647년에 경안군 3형
제를 자비 없이 제주도로 귀양을 보냈다. 그들 형제의 귀양살이가 혹독하여 큰 형과 2째 형은
일찍 죽고 만다.

그렇게 개쪼잔했던 인조가 1649년에 골로 가자 그의 2째 아들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효종(孝宗)이다. 그는 1650년 경안군을 도성(都城)에서 가까운 강화도로 옮기고
바로 교동도로 옮겼는데,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 김집(金集) 등 많은 이들이 강빈의 복권
과 경안군의 석방을 줄기차게 건의하면서 1656년 악몽 같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게 된다.
1659년 경안군에 봉해져 팔자가 좀 좋아지나 했으나 어린 시절부터 겪은 귀양살이의 휴유증
때문에 1665년 불과 21살의 창창한 나이에 인생의 휘장을 거뒀다. 그의 부인은 분성군부인(盆
城郡夫人) 김해허씨로 슬하에 임창군과 임성군의 아들을 두었다.

경안군 묘는 부인과 합장된 합장분(合葬墳)으로 봉분 뒤로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곡장을 둘렀
는데, 이는 근래에 만든 것이다. 묘 앞에는 무덤의 주인을 알리는 묘비가 있고, 상석과 향로
석(香爐石)을 두고, 좌우로 망주석과 조그만 동자석, 문인석을 1쌍씩 배치했다.
묘 좌측에 서 있는 검은 돌의 신도비(神道碑)는 1704년 아들 임창군이 세운 것으로 이무기가
여의주를 두고 서로 다투는 모습을 담은 이수(螭首)를 갖추었다. 비석 높이는 196cm이며, 신
도비와 석물에는 장대한 세월의 때가 가득해 고색의 멋을 아낌없이 연출한다. 무덤이 있음을
알리는 망주석과 문인석 사이에 자리한 키 작은 동자석의 모습에는 귀여움이 진하게 묻어난다.

▲  현란한 이수와 고된 세월의 때를
듬뿍 간직한 경안군 신도비

▲  이수 대신 지붕돌을 지닌
임창군 신도비


임창군(1663~1724)은 경안군의 아들로 이름은 이혼(李焜)이다. 부인은 응천군(凝川君) 부인
박씨로 경안군과 마찬가지로 부부가 합장되어 있다. 봉분 주변으로 묘비와 상석, 향로석, 망
주석, 문인석 등을 갖추었으며, 지붕돌을 갖춘 묘비가 무덤의 주인을 소상히 알려준다. 묘비
는 1725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박사수(朴師洙)가 짓고 글씨는 임창군의 아들인 이감(李堪)
이 썼다.


▲  경안군묘 좌측에 자리한 임성군묘

임성군(1665~1690)은 경안군의 3째 아들로 이름은 이황(李滉)이다. 부인인 익성현부인(益城縣
夫人) 남양홍씨와 합장되어 있으며, 주변으로 상석과 혼유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을 갖추
었다.
문인석은 화려한 꽃무늬가 새겨져 눈길을 끈다. 세상에 훤히 모습을 드러낸 경안군과 임창군
의 묘와 달리 숲에 묻혀 있어 조금은 초라하게 다가온다. 앞의 두 묘와 달리 묘비가 봉분 앞
에 있으며, 비석의 높이는 163cm으로 앞의 묘비보다는 작다.
경안군 부자의 묘역은 경안군 및 임창군 묘역이란 이름으로 고양시 향토유적 5호로 지정되었
다.

* 경안군, 임창군 묘역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65-2


▲  성녕대군(誠寧大君) 묘역 - 고양시 향토유적 2호

경안군 묘역을 둘러보고 다시 나오면 길이 남북으로 갈라진 3거리이다. 여기서 북쪽 길(성녕
길)로 들어서면 기와집 하나가 마중을 나오는데, 그는 성녕대군묘의 재실(齋室)이다. 그 재실
을 지나 동쪽 언덕을 오르면 대자동에서 최영장군묘 다음으로 늙은 성녕대군 묘역이 활짝 모
습을 비춘다.

성녕대군(1405~1418)은 조선 태종(太宗)의 4째 아들로 이름은 이종(李種)이다. 그 유명한 양
녕대군(讓寧大君)과 효녕대군(孝寧大君), 충녕대군(忠寧大君, 세종)의 친동생으로 모후는 원
경왕후(元敬王后) 민씨인데, 세상에 너무 크게 알려진 친형(양녕, 효녕, 충녕대군)들에 비해
인지도는 거의 없다. 워낙 잘난 형들이라 그 그늘에 가리기도 했지만 너무 일찍 죽은 것도 큰
원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행동이 의젓했으며, 글씨를 잘썼다. 하여 태종과 원경왕후가 금지
옥엽처럼 아꼈으나 그만 13살에 어린 나이에 홍역으로 요절하고 만다. 태종 내외는 매우 비통
해하며 무덤 주변에 대자암이란 절을 세워 아들의 명복을 빌었으니 대자동이란 지명은 바로
대자암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녕은 창녕성씨인 성억(成抑)의 딸과 혼인을 했으며, 성녕군에 봉해졌다가 1414년 대군(大君
)에 봉해졌다. 대광보국대부(大匡輔國大夫)의 위계까지 오르기도 했는데, 만약 그가 일찍 죽
지 않았다면 충녕대군과 좋은 라이벌 관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태종 부부의 관심이
컸던 인물이다.

▲  성녕대군의 사당인 대자사(大慈祠)

▲  성녕대군 신도비가 담긴 비각

재실을 지나면 성녕의 사당인 대자사가 나온다.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사당 앞에는 삼문(三門)
이 있고 사당의 이름을 알리는 큼지막한 표석
이 있다.

사당 좌측에는 3개의 비석이 담긴 비각이 있는
데, 가장 우측 비석이 성녕의 신도비이다.
신도비는 왕족과 3품 이상의 고위 관리의 무덤
에만 쓸 수 있던 비싼 비석으로 보통 신도(神
道)로 통한다는 무덤의 동남쪽에 세운다. 이곳
역시 성녕대군의 유택(幽宅)을 기준으로 동남
쪽에 자리하여 그 법칙을 따랐다.

신도비는 보통 용머리의 귀부와 이무기가 여의
주를 두고 다투는 이수를 갖추기 마련이나 여
기는 이수 대신 지붕돌로 비석 머리를 마무리
했다. 비신(碑身)은 경안군의 묘비처럼 검은
돌로 만들었는데, 양 옆으로 만든 화강암 우주
석에 비신을 끼워 넣은 것이 특이하다.

▲  성녕대군 신도비

이 신도비는 묘를 만들던 1418년 4월에 세운 것으로 변계량(卞季良)이 글을 짓고 장인인 성개
가 글씨를 썼다. 비석의 높이는 3m로 큰 편이다.


▲  원천군(原川君) 묘역 (앞쪽 무덤이 부인 한양조씨, 뒷쪽 무덤이
원천군과 백천조씨 합장묘)


대자사 뒤쪽 언덕에는 성녕대군 묘역이 자리잡고 있다. 묘역은 보통 일반에 개방되어 있으며,
사당 옆에 묘역으로 오르는 계단길이 있다.

묘역에는 3기의 무덤이 있는데, 모두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묘역 가장 위쪽에는 성녕대군의
무덤이 있고, 아래쪽에는 그의 양자인 원천군 내외의 무덤이 있는데, 원천군은 원래 효령대군
의 6번째 아들로 이름은 이선(李宣)이다. 성녕이 어린 나이에 죽자 원천군을 그의 양자로 삼
아 후사를 잇게 하면서 이곳에 무덤을 쓴 것이다.

원천군 내외 묘는 근래 크게 손질되어 꽤 젊어졌는데, 그로 인해 고색의 기운이 많이 사라졌
다. 무덤은 좌우로 배치된 것이 아닌 앞뒤로 자리한 부후묘(附後墓) 형태라 각 무덤마다 묘비
와 문인석, 장명등을 따로 갖추고 있는데, 앞쪽 묘는 그의 2번째 부인인 한양조씨의 무덤이며,
뒷쪽은 원천군과 부인 백천조씨의 합장묘이다. 백천조씨가 죽자 한양조씨를 새로 부인으로 맞
아들여 묘가 2개가 된 것이다.


▲  성녕대군과 부인 성씨의 합장묘

▲  뒷쪽에서 바라본 성녕대군묘

묘역의 가장 뒷쪽이자 높은 곳에는 묘역의 주인공인 성녕대군 내외의 무덤이 자리해 있다. 앞
서 최영장군묘처럼 4각의 호석(護石)을 쌓고 그 위에 봉분을 다졌는데, 봉분 주위로 작은 석
호(石虎)와 석양(石羊)을 1쌍씩 배치했고, 묘 앞에는 장명등과 문인석 1상을 두었다. 좌측에
는 근래에 세운 때깔이 고운 묘비를 세웠으며, 무덤 뒤쪽에는 'ㄷ' 모양의 곡장을 둘렀다.

석호와 석양은 무려 600년이 넘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여기저기 상처도 많이 생겼
지만 그 모습을 알아보기에는 별 무리는 없으며, 조그만 양의 새끼와 호랑이 새끼를 보듯, 귀
여움마저 묻어나 손으로 쓱쓱 쓰다듬고 싶다. 곡장에 둘러진 석축에는 오랜 세월의 때가 수북
히 끼여 고색의 멋을 아낌없이 풍긴다.

성녕대군묘를 끝으로 최영장군묘를 중심으로 한 대자동 무덤 기행은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성녕대군 묘역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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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오랜 우백호, 인왕산~인왕산둘레길 나들이 (탕춘대성, 기차바위, 한양도성, 석굴암)

서울 도심의 우백호, 인왕산 (탕춘대성, 기차바위, 석굴암)



' 서울 도심의 오랜 우백호, 인왕산 '
(탕춘대성, 기차바위, 한양도성, 석굴암)

인왕산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인왕산 한양도성길

인왕산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  인왕산 한양도성길

▲  인왕산에서 바라본 북한산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은 나의 즐겨찾기 뫼의 하나이다. 하여 그의 품을
지겹도록 오갔지만(100번은 넘게 갔음) 아직까지 발길이 닿지 않은 미답처(未踏處)들이
여럿 남아있어 나를 참지 못하게 한다. 하여 그들을 미답 목록에서 흔쾌히 지우고자 겨
울 제국이 서서히 이빨을 보이던 11월 끝 무렵에 그곳을 찾았다.

이번 인왕산 나들이는 세검정교차로에서 첫 발을 떼었다, 거기서 세검정로를 따라 남쪽
으로 조금 가면 홍지문(弘智門)이 나오는데, 그 남쪽에 탕춘대성과 인왕산 산길(인왕산
둘레길)이 있다. 그 길이 인왕산 북쪽 기점의 하나(홍지문 기점)이자 인왕산의 가장 북
쪽 끝으로 아직 미답의 상태로 남아있었다.

홍지문 기점으로 접근하려면 세검정교차로에서 세검정길 남쪽 보도로 가거나, 홍지문
·
옥천암 정류장(홍은동에서 세검정 방향)세검정 방향)에서 보도로 접근해야 된다.



 

♠  인왕산(仁王山) 북쪽 능선과 탕춘대성(蕩春臺城)

▲  탕춘대성과 인왕산둘레길 (홍지문 기점 남쪽)

홍지문 기점 코스는 탕춘대성과 인왕산 북쪽 능선을 거쳐 기차바위로 이어진다. 시작부터 사
람들의 기를 꽉 잡으려는 듯, 경사가 각박하여 숨을 적지 않게 헐떡이게 하는데, 처음 10~15
분 정도가 좀 고통스러울 뿐, 산길은 서서히 진정을 되찾는다. 게다가 산이 크게 흥분을 보이
는 구간은 나무데크 길과 계단을 닦아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다. (중간에 가
파른 구간이 여럿 있음)
홍지문에서 기차바위를 거쳐 한양도성이 흐르는 인왕산 주능선까지 35~45분 정도 걸리며, 정
상은 거기서 10~15분 정도 추가하면 된다.

산길을 따라 이어진 빛바랜 성곽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이어주던 탕춘대성이다. 연
산군(燕山君)이 세검정(洗劍亭) 부근에 지었다는 탕춘대(蕩春臺)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으로
한양(서울) 서쪽(정확히는 북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성(西城)이라 불리기도 했고, 겹성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었다.
이 성은 숙종(肅宗) 임금이 만약에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서울의 방어력을 높이고
비상시 북한산성 행궁(行宮)으로 신속히 도망칠 수 있는 시간 확보를 위해 조성되었다. 1702
년에 신완(申琬)이 성곽 축성을 제의했는데, 북한산성(北漢山城) 증축과 행궁 조성, 한양도성
보수가 마무리되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짓고자 1715년 홍제천(弘濟川)에
홍지문을 먼저 닦았다. 그런 다음 1718년 8월 26일 성곽 공사에 들어갔으나, 겨울이 다가오면
서 10월 6일에 일단 공사를 멈추고 1719년 2월 다시 공사에 들어갔다. 허나 처음보다 사업이
크게 축소되면서 3월에 공사를 종료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탕춘대성은 인왕산 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 능선, 홍지문, 탕춘대능선을 거쳐
비봉능선 서쪽 수리봉(향로봉 부근)까지 이어진 4km 규모로 원래는 북한산성까지 이으려고 했
으나 비봉능선이 험준하여 포기했으며, 북한산성 대남문에서 보현봉, 형제봉능선, 북악산(백
악산) 북쪽 능선을 거쳐 한양도성을 잇는 탕춘대성 동쪽 성곽도 계획했으나 취소되었다.


▲  산길과 잠시 분리되는 탕춘대성
성곽에 뿌리를 내린 나무와 수풀을 위해 동쪽으로 짧게 우회길을 냈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 경계인 홍제천에는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두었으며, 탕춘대능선에
는 암문(暗門) 1개를 내었다. 그리고 성 안에는 훈련장인 연융대(鍊戎臺)와 선혜청(宣惠廳),
평창(平倉) 등의 창고를 설치했으며, 총융청(摠戎廳) 본부도 이곳에 두었다.
탕춘대성이 들어앉은 위치 대부분은 각박한 경사지로 거의 천험(天險)을 자랑한다. 하여 홍지
문을 제외하고는 성을 높이 구축하지 않았으며, 현재는 인왕산 북쪽 능선과 홍지문, 탕춘대능
선에 성곽이 그런데로 남아있다.

탕춘대성 인왕산 구간은 홍지문에서 북쪽 능선 사이에 남아있는데, 홍지문 기점에서 5분 정도
올라간 정도까지만 여장이 복원되어 있고 그 이남은 성곽만 남아있다.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홍지문 및 탕춘대성'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로 지정되어 있음>

* 탕춘대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4 외


▲  키 작은 돌담처럼 남아있는 탕춘대성
인왕산 쪽 탕춘대성은 거의 키가 작다. 워낙 각박한 지형에 나무도 무성하여
높이 다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최대 높이는 2~3m 정도)

▲  소나무숲에 묻힌 탕춘대성 (오른쪽 돌무더기가 성곽)
이곳 이후로는 성곽 대부분이 사라진 상태라 흔적을 더듬기도 힘들다.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① <내부순환로와 홍은동 지역>

왼쪽에 부드럽게 곡선을 보인 도로가 서울 도심 주변을 챗바퀴처럼 도는 내부순환로이다. 차
량들의 통행이 빈번하여 그들이 내는 굉음이 나의 두 귀를 마구 때려댄다.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② <북한산 탕춘대성 남쪽 능선>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③ <북한산 산줄기와 부암동,
홍지동, 신영동, 평창동 지역>
부암동(付岩洞)과 홍지동(弘智洞), 평창동(平倉洞), 신영동(新營洞) 지역은
인왕산과 북한산, 북악산(백악산)에 포근히 감싸인 분지 지형으로
마치 산악 도시나 마을 같은 아늑한 분위기이다.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④ <부암동과 북악산>
사진 가운데 산속에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백사실계곡(백석동천, 백사골)이
묻혀있다. 그 너머로 성북동과 더불어 이 땅의 0.1%가 산다는 졸부 마을
평창동이 곱지 않게 바라보인다.

▲  벼랑을 오르는 계단길 (인왕산 북쪽 능선)

▲  인왕산 북쪽 능선 중간쯤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북쪽 능선은 탕춘대성에서 기차바위능선 북쪽까지로 그 중간쯤에 동쪽(기차바위 방향
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철조망이 쳐진 구간이 있다. 그 철조망 안쪽이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유명한 석파정(石坡亭)을 품고 있는 서울미술관 땅이다. (철조망만 있을 뿐, 문이나 개구멍은
보이지 않았음)


▲  인왕산 북쪽 능선 중간쯤에서 바라본 북악산 북쪽 자락과
북한산(삼각산), 형제봉능선

▲  솔내음이 깃든 인왕산 북쪽 능선길
인왕산은 바위도 많지만 소나무도 제법 우거져 있다.

▲  인왕산 북쪽 능선 남쪽에서 바라본 홍은동과 은평구 지역
서울과 은평구의 서쪽 벽이자 서울둘레길이 흐르는 앵봉산(235m)과
봉산(烽山, 209m)도 덩달아 시야에 들어온다.

▲  기차바위 북쪽 갈림길
여기서 부암동(성덕사)과 홍제동 개미마을, 환희사(歡喜寺)에서 올라온 길이
하나가 되어 기차바위로 이어진다.

▲  기차바위 북쪽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의 위엄
내가 천하를 스케치하는 조물주라면 그 밑에 지저분하게 붙어있는 졸부들의
흔적을 지우개로 지워 북한산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다.

▲  기차바위 북쪽에서 바라본 인왕산 정상(338m)



 

♠  인왕산 기차바위와 인왕산 주능선(한양도성)

▲  인왕산의 북쪽 하늘길, 기차바위 (기차바위능선)

인왕산 바위의 갑(甲)으로 찬양받는 기차바위는 기차처럼 길쭉한 바위 능선이다. 절대 기차처
럼 생기지는 않았으며, 그저 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 것 같다.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래에도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이런 구절이 있다. 그만큼 기
차는 이 땅에서 길쭉한 존재의 대명사이다.
기차바위 능선은 약 300m 정도로 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거닐면 실감이 덜하겠지만
세검정초교에서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로 올라가는 길이나 부암동 산복길(백석동길)에서 바
라보면 정말 단단하고 두툼한 바위임을 알 수 있다. 사방이 확 트여있어 조망은 1등급이나 양
쪽이 자비심이 없는 낭떠러지이니 난간을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한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①
바로 앞에 부암동과 북악산(백악산), 서울 도심부는 물론 멀리 동대문구와
중랑구, 광진구, 아차산~용마산 산줄기, 강동구, 송파 지역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와 두 눈이 호사를 누린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② 북악산(백악산)
서울의 영원한 북현무(北玄武) 북악산과 부암동, 청운동 지역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③ 인왕산 그늘에 묻힌 부암동
부암동 일대가 인왕산 그늘에 푹 잠겨 있다. 그 너머로 북악산(백악산)과
평창동, 북한산(삼각산), 형제봉능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④ (서대문구, 은평구 지역)
인왕산 북쪽 자락과 홍은동, 홍제동, 백련산, 은평구, 앵봉산~봉산 산줄기가
시야에 들어온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⑤
서울 도심과 서촌(웃대), 그리고 멀리 강동, 송파, 강남 지역까지;;

▲  인왕산 한양도성에서 바라본 기차바위 능선

기차바위를 지나면 한양도성 전까지 내리막이 펼쳐진다. 성곽 앞에 이르면 잠시 오르막이 펼
쳐지면서 계단이 나타나는데, 그 계단을 오르면 한양도성이 흐르는 인왕산 주능선에 발을 들
이게 된다. (기차바위 갈림길)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인왕산 정상이며, 동쪽은 창의문(彰義門, 자하문)과 북악산(백악산)으
로 이어진다. 그날은 정상에 대한 미련이 없었고 눈 감고도 갈 정도로 익숙해진 곳이라 바로
동쪽으로 내려갔다. 정상이란 자리가 탐이 나는 자리긴 해도 그렇다고 늘 좋은 것은 아니다.


▲  기차바위 갈림길 계단 밑에서 바라본 한양도성 (여름 사진)
성벽과 여장의 피부색이 너무 차이가 난다. 성벽은 조선 때 것으로 고색의 때가
자욱한 반면, 여장은 근래에 새로 붙인 것이라 피부가 매우 하얗다.


▲  인왕산 한양도성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이미 인왕산의 어깨와 목 부분까지 올라탄 상태라 조망이 가히 천하일품이다.
마치 하늘을 배회하는 큰 새의 등에 강제로 업힌 기분이다.

▲  인왕산 한양도성 북쪽 성곽길 - 창의문 방향 ①
성곽길은 계단이 좀 팍팍하여 통행이 조금 고통스러우며, 그 옆에 급한 경사를
조금 순화시킨 계단길이 있어 그 길을 많이 이용한다.


인왕산하면 빼놓을 수 없는 서울의 든든한 갑옷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적 10호), 그럼 여기서
한양도성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1388년 압록강을 건너 단동(丹東) 북쪽 위화도(威化島, 현재 압록강에 있는 그 위화도가 아님
)에서 그 유명한 위화도회군을 일으켜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 그는 1394년 남경(
南京)이라 불리던 한양(서울)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 천도 프로젝트에는 천하 제일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정도전(鄭道傳)이 그 중심에 서서
도읍 천도와 도성 축조계획을 세웠는데, 1395년까지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 대략적인 한양(
서울) 시가지 등을 지어놓고 1396년 1월 도성 축조에 들어갔다. 한양도성 코스는 정도전이 짰으며, 도읍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사산(內四山)인 북악산(
北岳山, 백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駱山, 낙타산)을 모두 끼게 했다. 성곽 길이는 59,500
자(18.2km)로 고려의 도읍인 개경<開京, 나성(羅城) 길이만 23km>보다는 작으며, 평지는 토성
(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지었다. 이때 천하에 징발령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을 완성했고, 농사철
이 다가오자 축성을 잠시 멈추고 집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했다. 농사를 지어야 뜯어먹을
세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는 8월 다시 79,400명을 콩 볶듯이 동원, 49
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지어 축조를 마무리 지었다.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업그레이드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여 1422년 1월, 무려 32만 2천명의 인부와 기술자 2,200명을 동원해 공사에 들어갔
다. 그 시절 한양 인구가 10만 정도였다고 하니 그 3배의 인원이 동원된 것이며, 이는 조선
최대의 공사로 꼽힌다.
또한 공사를 너무 닥달하여 죽어나간 일꾼이 872명에 달했으며, 그 공사 결과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6곳, 곡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춘 아주 늠름
한 도성으로 새로 태어났다. 그 도성을 관리하고자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
었으며, 워낙 성곽을 단단하게 다진 덕에 20세기까지 스스로 붕괴된 적도 없었다. 그리고 성
곽 보수도 1704년 숙종이 벌인 1차례가 전부이다.


▲  인왕산 한양도성 북쪽 성곽길 <창의문 방향 ②>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조선의 심장, 한양(서울)의 든든한 갑주로 위엄을 드러내던 한양
도성은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던 구한말 이후 팔자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1899년 조선 황실은 미국 양이(洋夷)인 콜브란(Corlbran)과 합작해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들
었다. 콜브란은 고종(高宗) 황제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인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거둥
하라며 전차(電車)의 필요성을 건의, 그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홍릉 남쪽인 청량리(
淸凉里)까지 이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 통행을 위해 부득이 동대문과 서대
문의 양쪽 성벽을 싹둑 자르면서 성곽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龍山)을 잇는 전차 노선이 생기면서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려
나갔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제왕의 명으로 시내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하지만 문제는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이다.
을사늑약 이후 왜는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 그 소속으로 1908년 '성벽처리위원회'라
는 해괴한 기관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도성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1910년 이후 서소문<소의문
(昭義門)>과 서대문<돈의문(敦義門)>은 물론 동소문<혜화문(惠化門)>까지 밀어버리면서 망국
(亡國)의 서울을 욕보인 것이다.

그렇게 빼앗긴 들에서 차디찬 시련을 견디며 35년 만에 봄을 찾았건만 바로 무섭게 6.25가 발
발하면서 왜정이 남긴 상처만큼이나 무거운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6.25이후까지 살아남은 성
문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하문), 숙정문(肅靖門), 광희문(光熙門)
뿐이며, 성벽은 북악산과 성북동, 낙산, 장충동, 남산, 인왕산 등 10.5km 정도만 남았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품고 쓰러진 성곽을 1975년부터 중수하기 시작해 광희문과 숙정문을 손
질하고 남아있던 성곽을 수리했다. 이후 동소문을 제자리 북쪽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사라진
성곽에 대한 복원에 착수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되찾고 있다.
또한 2010년 이후에는 시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탐방로를 닦았는데, 북악산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 출입이 가능하다. (인왕산 성곽길은 매주 월요일은 못감) 다만 성곽이 사
라진 부분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  한양도성 여장 너머로 보이는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
부암동, 평창동 지역


예전에는 서울성곽이라 불렸으나 2011년 7월에 '서울성곽'에서 '한양도성'으로 문화재청 지정
명칭이 갈렸다.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
기가 전해온다. (인왕산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도성을 어떤 코스로 쌓을지 고심을 했다. 그러던 어느 밤, 난데없이 큰 눈
이 내렸는데,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이 쌓여져 있었다
. 그래서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 쌓인 자리에 성곽을 쌓게 했다. 눈
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를 따라 성을 쌓았다고 하여 설울
이라 했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허나 신라의 중심지인 서라벌에서 서울이란 말이 유래된 것으로 크게 보고 있다.


▲  소나무 사이로 모습을 비춘 서울 도심 (인왕산 한양도성 성곽길)



 

♠  인왕산 동쪽 자락에 숨겨진 작은 석굴 암자, 흔한 이름에 비해
존재감이 매우 낮은 석굴암(石窟庵)

▲  만수천약수터

기차바위 갈림길에서 성곽길을 5분 정도 내려가면 신교동(新橋洞)으로 내려가는 산길이 슬쩍
손을 내민다. 석굴암을 가려면 여기서 성곽과 헤어져야 되기에 그를 버리고 신교동 방향으로
가다가 중간에 석굴암 입구로 이어지는 길로 빠져 2~3분 내려가니 만수천약수터가 마중을 나
온다.

만수천은 인왕산 동부의 대표적인 약수터이나 가뭄으로 물이 마르면서 부적합 주홍글씨를 받
은 상태였다. 이곳이 아무리 도심 지척이라고 해도 비가 적당히 내려주고 약수터 주변을 잘
관리하면 충분히 적합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비가 가뭄에 콩 나듯이 거의 내리지를
않으니 물순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영 좋지 않은 존재들이 샘물에 활개를 치는 것이
다.
약수터 주변에는 쉼터와 간단히 몸을 풀 수 있는 운동기구들이 있으며, 커다란 바위도 여럿
포진해 있어 인왕산이 바위의 산임을 실감케 한다. 그중 북쪽에 있는 바위에는 작은 자연산
굴이 있는데, 지금은 들어가지 못하게 철창을 씌웠지만 예전에는 기도나 굿을 벌이는 장소로
널리 쓰였다. 인왕산에 잘생긴 바위가 많고 기가 센 산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
전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이자 굿터로 유명했다.

▲  만수천약수터 쉼터

▲  겨울잠에 잠긴 석굴암1약수터

만수천약수터에서 조금 내려가다가 오른쪽 길로 질러가면 석굴암약수터가 나온다. (왼쪽은 석
굴암입구 초소로 이어짐) 이 샘터는 물낭비를 줄이고자 수도꼭지를 달아 놓았는데, 이곳 역시
바가지들이 무색할 정도로 부적합의 고통을 받고 있었다. 석굴암 부근에도 약수터가 있어 이
를 구분하고자 편의상 석굴암1약수터라 부르기도 한다.


▲  석굴암으로 인도하는 나무데크 계단길

석굴암1약수터에서 석굴암까지는 나무데크 계단길이 닦여져 있다. 마치 하늘로 이어진 것일까
? 계단이 얼마나 길던지 거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는데 경사 또한 각박하여 오르는 길이
조금은 무겁게 느껴진다. 그래도 계단을 닦아놓아 길이 좀 순해진 것으로 예전에는 경사지고
울퉁불퉁한 산길에 의지해 힘겹게 올라가야 했다.
저 계단의 끝에는 하늘 대신 석굴암이 자리해 있으며, 길 중간에 조망이 괜찮은 장소(바위)가
하나 있다.


▲  서울에 석양이 진다. 석굴암 밑 바위에서 바라본 도심
이곳은 인왕산에 숨겨진 조망 포인트이다.

▲  석굴암 석굴법당

석굴암은 인왕산 정상 치마바위 동쪽 밑에 둥지를 튼 작은 석굴 암자이다. 장대하게 생긴 바
위가 석굴암의 거의 모든 것으로 그의 밑도리에는 조그만 자연산 석굴이 깃들여져 있다. 호랑
이가 담배에 호기심을 품던 머나먼 시절부터 산악신앙과 무속이 벌여지던 현장이었으며, 20세
기 중반 이후, 수성동계곡 인근에 자리한 불국사(佛國寺)에서 이곳을 접수해 굴 내부를 손질
하고 부속암자인 석굴암으로 삼았다. 암자 이름은 바로 이 석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어째 경
주의 불국사와 석굴암 관계를 따라한 느낌마저 든다.

석굴을 법당(法堂)으로 삼아 돌로 만든 석가3존상과 여러 보살상을 두었으며, 문을 남쪽과 동
쪽에 내었다. 석굴 서남쪽에는 산신각 공간이 있으며 숙식을 할 수 있는 건물이 따로 없어 불
국사에서 승려와 보살 아줌마들이 왕래하면서 이곳을 관리한다. 보통 일몰 때 불국사로 돌아
가며, 가끔 기도를 위해 절을 지키기도 한다. 허나 내가 갔을 때(17시 이후)는 경내에 아무도
없는 빈 암자 상태였다. (그래도 소중한 불전함을 지키고자 cctv를 달아놓음;;)

비록 조그만 암자이지만 여기서 동쪽과 동남쪽으로 도심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 하나는 좋으며
, 그 도심을 이곳의 너른 뜨락으로 삼고 있다. 절 주위로 치마바위와 매바위, 닭바위 등 대자
연 형님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잘생긴 바위들이 많아 풍경 또한 일품이며, 석굴암 주변은
2007년 12월에 지정된 '인왕산 생태경관보전지역'의 하나로 자연경관이 아주 수려하고 소나무
와 상수리나무, 아까시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또한 박새, 어치, 유리딱새, 소쩍새, 암먹부전나비, 작은주홍부전나비, 노랑나비, 호랑나비
등 다양한 새와 곤충이 서식하고 있는 도심 속의 소중한 자연의 보고이다.


▲  석굴암 석굴법당 내부 (석가3존상)

자연산 굴을 손질한 석굴 내부는 굴의 타고난 본능상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추위를 좀
면할 정도이다. 사람은 없지만 방석과 난방기구, 선풍기 등을 갖추고 있으며, 석굴 허공에는
중생의 소망을 머금은 분홍 연등이 가득 매달려 또 다른 낮은 하늘을 이루고 있다.


▲  북쪽에서 바라본 석굴암과 인왕산 치마바위

▲  산신각(山神閣)의 예전 모습
인왕산 산신의 보금자리로 어엿한 기와집이 아닌 바위 앞에
터를 다지고 가건물을 씌웠다.

▲  산신각 마애산신도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산신각에는 산신(山神) 가족을 담은 마애산신도가 깃들여져 있다. 신선
처럼 생긴 산신 할배가 앉아있고 그 옆에 고양이 같은 호랑이가 꼬랑지를 살랑거리고 있으며,
산신의 비서인 동자와 그의 활동무대인 산이 선각(線刻)으로 처리되어 있다.
산신의 위엄과 진지함보다는 동네에 친근한 노인네를 다룬 것 같은 느낌으로 바위에 산신도
를 새긴 예는 서울은 물론 천하에서도 매우 흔치가 않다. 아쉽게도 20세기 후반에 제작되어
문화재적 가치는 아직 여물지 못했지만 최소 60~70년 이상 숙성되면 거뜬히 지방문화재의 자
리 하나는 따지 않을까 싶다.


▲  석굴암 마애사리탑<磨崖舍利塔, 바위 윗쪽 네모난 구멍>

경내의 서남쪽 바위를 숨은 그림을 찾듯 눈으로 잘 더듬어보자. 그러면 바위 윗쪽에 있는 네
모난 구멍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구멍이 18~20세기에 서울 지역 사찰에서 많이 등장했던
마애사리탑으로 바위 피부에 홈을 파고 그 안에 승려나 신도의 사리함을 봉안한 간편한 사리
탑이다. 이 탑은 돈을 크게 들여 탑을 지을 필요도 없으며, 그저 바위만 있으면 된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사리탑은 불암산 학도암(鶴到庵, ☞ 관련글 보기)에 있는 것으로
19세기 초에 조성된 2기가 있으며, 도봉산 천축사(天竺寺, ☞ 관련글 보기)에도 19세기 사리
탑 2기가 전한다. 그리고 상도동 사자암(獅子庵, ☞ 관련글 보기)과 석굴암에도 20세기 것이
있는데, 석굴암 것은 20세기 초/중반에 지어진 것으로 현재는 달랑 구멍(감실)만 남아있다.

석굴암에서 치마바위와 인왕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었다. 허나 그 길은 금지된 길이
되었으며, 절 북쪽과 서쪽은 바위와 벼랑으로 막혀있고, 오로지 내가 올라온 동쪽 길과 근래
속세에 개방된 남쪽 길이 전부이다.
지금은 비록 뒷전으로 밀려났지만 인왕산은 한때 서울에서 잘나갔던 암장(암벽장)이었다. 서
울 유일의 암장이란 타이틀도 가지고 있었는데, 석굴암에서 시작하여 치마바위 정상까지 올라
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코스로 1968년 1,21사태 이후 인왕산 등산이 통제되었지만 암장은 군부
대에 허가를 받으면 누구든 가능했다. 허나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 불암산이 인기 암장으
로 부상했고 실내 암장까지 많이 들어서면서 이제는 거의 잊혀졌다.


▲  천향암(天香庵) 돌문

숨겨진 볼거리가 더 없을까 싶어 경내를 더 기웃거리니 북쪽으로 가늘게 이어진 산길이 보인
다. 마치 보물을 찾으러가듯 호기심과 기대감을 가득 품으며 그 길로 접어드니 바로 벼랑 길
(밑이 벼랑임)이 나오고 커다란 바위들이 기묘하게 서로 기대선 틈에 자연산 돌문이 나 있다.
서쪽은 그야말로 장대한 바위이고 오른쪽은 그 바위에 몸을 기댄 돌덩어리이다.
그 안으로 들어서면 바위에 둘러싸인 샘터와 기도처가 나온다. 이곳을 '천향암'이라 부르는데,
이름으로 봐서는 암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가건물 같은 것으로 대충 때우다가 사라진 듯 싶으
나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며 석굴암과 비슷하게 오랫동안 무속/산악신앙의 현장으로 쓰였을 것
이다. 지금은 석굴암의 부속 공간으로 딱히 주제는 없으나 샘터가 있는 것으로 봐서 용왕(龍
王)을 위한 공간으로 쓰이는 듯 싶다.
조그만 샘터에는 물이 고여 있으나 원효대사가 마셨다는 해골에 고인 물처럼 상태가 그리 좋
아 보이진 않는다.


▲  암벽에 감싸인 천향암 샘터

벼랑 길은 천향암에서 뚝 끊겼다. 얼핏 보니 북쪽으로 넘어가는 암릉길이 있는 듯 싶은데, 딱
히 안내문도 없고 햇님도 슬슬 커텐을 칠 준비를 하니 감히 살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북쪽
과 서쪽, 남쪽은 암벽으로 막혀있고, 오로지 동쪽만 트여있는 궁벽한 곳으로 여기서 바라보는
조망도 석굴암 못지 않다.


▲  하늘이 지은 기묘한 돌문

서울 한복판에 이런 자연산 돌문이 있다니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 인왕산을 수없이 들락거린
내가 이제서야 이곳을 오다니 그동안 인왕산을 정말 헛 다닌 모양이다. 이런 것을 두고 등잔
밑이 어두웠다고 하는 모양이다.


▲  천향암에서 바라본 일몰녘에 서울 도심

▲  석굴암과 인왕산을 뒤로 하며 (석굴암 계단길)

천향암에서는 왔던 길로 다시 나가야 된다. 바람소리와 낙엽 소리가 전부인 적막한 석굴암과
의 짧은 인연을 정리하고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날 것 같은 계단길을 내려왔다. 석굴암입구에
이르니 햇님은 퇴근 본능에 따라 철수를 했고, 달님이 자리를 이어받아 검은 도화지에 가녀린
한줄기 빛을 선사한다.

이렇게 하여 연말 인왕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그날 목적했던 인왕산의 미답처를
모두 지우긴 했으나 그 기억 또한 흐릿한 과거의 하나로 싹 사라지니 모든 것이 참 부질없는
것 같다.

* 인왕산 석굴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산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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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 대성사, 방배동, 우면동 동네 나들이 <성안공 상진묘역, 월산대군태실, 우면동석불, 우면동유적, 식유촌>

우면산 대성사, 성안공 상진 묘역, 우면동 지역(월산대군이정 태실, 형촌 회화나무, 우면동유적, 식유촌 회화나무)



' 서초구 우면산, 우면동 나들이 '

월산대군 이정 태실, 태실비

▲  월산대군 이정 태실, 태실비

대성사 목불좌상 성안공 상진 묘역

▲  대성사 목불좌상

▲  성안공 상진 묘역

 



 

♠  우면산 북쪽 자락에 안긴 조그만 산사, 대성사(大聖寺)

▲  대성사 대웅보전(윗쪽 건물)과 종무소
사진에 보이는 건물이 대성사의 거의 전부라고 보면 된다. 1층에는 종무소와
극락전, 요사, 선방 등이 들어있고, 윗층에 대웅보전을 두었다.


천하 최대의 명절인 한가위(추석)가 다가왔다. 제아무리 즐겁다는 명절이라고 해도 딱히 정처
(定處)도 없고, 할 일도 없으며, 나를 부르는 곳도 솔직히 없다. 하여 심심함도 달랠 겸, 서
울에 일부 남아있는 미답처(未踏處)를 몇 개라도 지우고자 서초구 우면산(牛眠山, 293m)으로
출동했다.

서초구(瑞草區)의 남쪽 지붕인 우면산은 풍수지리적으로 소가 자고 있는 형국(形局)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나 나는 서울의 북쪽 끝, 도봉동(道峰洞)에
있고 우면산은 한강 남쪽 멀리에 있다. 하여 그의 품을 찾으려면 대중교통으로 적어도 1시간
20분 이상은 가야 된다.
예술의전당 뒤쪽에 자리한 대성사를 그날의 첫 메뉴로 정했는데 그곳은 이미 여러 번 인연을
지은 절이다.

▲  시커먼 피부와 똥배를 드러낸
포대화상의 위엄

▲  우면산이 베푼 물로 가득한
대성사 석조(石槽)


대성사는 우면산 북쪽 자락이자 예술의전당 뒤쪽에 자리한 조그만 산사이다. 절에서 내세우는
믿거나 말거나 창건설화에 따르면 384년에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백제에 불교를 전
하고자 백제의 국도인 한산(위례성)을 찾았다. (마라난타의 불교 전래 부분은 역사 기록에 있
음)

서토(西土, 중원대륙)의 무수한 해안 지역과 왜열도를 다스리던 해양대국 백제(百濟) 조정의
넉넉한 대접을 받으며 불교 전파에 매진하다가 그만 풍토병에 걸려 고생을 했다고 한다. (또
는 바다를 건너 백제로 오다가 병에 걸렸다고 함)
그러다가 대성사 자리에 있던 샘물을 마시고 병이 나았고 이에 감동을 먹어 그곳에 대성초당
을 지으니 그것이 대성사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절
이자 백제 불교의 시작점에 세워진 절로 의미가 참으로 깊어 보인다.
허나 아쉽게도 관련 유물과 기록은 전혀 없다. 조선 명종(明宗) 시절에 보우대사가 머물며 불
교 중흥을 구상했다는 이야기 외에는 20세기 이전 역사는 사실상 없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
이다. 다만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하나인 승려 백용성(白龍城 1864~1940)이 이곳에
머문 적이 있어 빨라도 18~19세기에 법등을 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384년 창건설은 대성
사의 부질없는 메아리이자 욕심일 뿐이다.

     ◀  날씬한 모습의 약사여래3층석탑
기단부와 탑신(塔身) 사이에 작게 공간을 내어
조그만 사자상 4기를 배치하고 그 한복판에 약
사여래를 두었다. 그래서 탑 이름도 약사여래3
층석탑이다.

백용성은 이곳에 머물며 만해 한용운(韓龍雲)과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孫秉熙), 기독교 목사
인 길선주(吉善宙), 이필주(李弼柱) 등과 교류하여 종교 화합을 통한 3.1운동 및 민족중흥을
도모했다. 허나 왜정(倭政)은 그를 탄압했고 그 과정에서 절에 불을 질렀다. 이후 중창을 했
으나 6.25때 파괴되었으며, 1954년에 다시 지었다. (백용성의 사리탑은 합천 해인사에 있음)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大雄殿, 대웅보전)을 비롯해 산신각과 요사채 등 4~5동 정도의 건물
이 있으며 대웅전 밑에는 종무소(宗務所)와 요사(寮舍), 납골당 등을 담은 너른 건물을 닦았
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불좌상이 있으나 그 외에 딱히 늙은 존재는
없으며, 경내 앞에 3중으로 이루어진 석조(石槽)가 있어 우면산이 베푼 물로 늘 가득하다.

  ◀  토굴처럼 지어진 산신각(山神閣) 내부
산신각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 등 산신 식구
들이 들어있다. 호랑이와 동자의 표정이 꽤 익
살스럽고 귀여워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에게
한줄기 웃음을 선사한다.

       ◀  용왕대신(龍王大神)의 거처
산신각 옆에는 작게 굴을 파고 용왕패를 봉안
했다.
바다와 전혀 관련도 없는 이곳에 웬 용왕인가
싶겠지만 용왕은 바다뿐만 아니라 강, 샘물 등
천하의 모든 물을 관리한다. 하여 창건설화에
서 샘물을 강하게 내세운 대성사도 샘물의 무
탈함을 빌고자 이렇게 용왕의 보금자리를 마련
한 것이다.


▲  대웅보전에 봉안된 금동석가여래상과 금빛으로 치장된 닫집
석가여래의 표정이 후덕해보여 무슨 소망이든 다 들어줄 것만 같다.
허나 현실은 소망만 듣고 바로 흘려버리는 모르쇠...

▲  대웅보전 앞에서 바라본 천하
서초구와 강남구 지역을 비롯해 남산과 멀리 북한산(삼각산), 도봉산까지
시야에 들어와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의 가성비는 썩 괜찮다.


▲  극락전(납골당)에 봉안된 조그만 목불좌상과 지장보살(왼쪽),
관세음보살상(오른쪽)

▲  대성사 목불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2호

대성사의 유일한 보물인 목불좌상은 종무소가 있는 대웅보전 밑층에 있다. 신발을 벗고 안으
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종무소와 강당 등이 있고, 왼쪽에 문이 닫힌 납골당(극락전)이 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면 된다.

이 목불은 백용성이 20세기 초(1919년 이전)에 대성사에 주석하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허
나 다른 안내문에는 조선 후기(18~19세기)에 조성된 것이라 나와있어 시대가 약간 차이가 있
다. 아마도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을 백용성이 도금을 입혀 이곳에 봉안한 것으로 여겨지며
몸을 앞으로 약간 숙인 조선 후기 양식을 취하고 있다.

높이는 62cm, 어깨 너비 28cm, 무릎 너비 39cm 정도의 작은 불상으로 몸통에 비해 얼굴이 좀
크다. 표정은 좀 우울해 보이며 나발(螺髮) 스타일의 머리 꼭대기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히 솟아있다.
두 눈은 가늘고 코는 오똑하며 붉은 입술은 다물고 있는데 볼에 살이 많아 보인다. 귀는 어깨
까지 늘어져 있고, 몸에 걸친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옷 주름은 간결하게 처리되었다. 두 손
은 가슴 앞에서 각각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취하고 있어
그가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귀뜀해준다. 하여 그의 공간을 극락전(極樂殿)이라 하였다.


▲  목불좌상이 있는 극락전(납골당) 내부
극락전의 낮은 허공에는 납골당에 걸맞게 죽은 영가(靈駕)를 위한 하얀 연등이
빼곡히 들어차 다소 오싹하고 우울한 기분을 준다.


그의 좌우에는 근래 지어진 승려 머리의 지장보살과 보관(寶冠)을 눌러쓴 관세음보살이 앉아
있다. 이들은 중심 불상(목불)보다 훨씬 덩치가 크나 어디까지나 그의 협시(夾侍) 보살에 지
나지 않는다. 그들은 목불과 함께 대웅보전에 있기도 했으나 지금은 극락전에서 영가들을 지
키고 그들의 극락왕생을 책임지는 역할을 한다.

* 대성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산141-7 (남부순환로328길49 ☎ 02-583-1475)
* 대성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대성사 샘터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멀리 도봉산까지 보임)



 

♠  고등학교 안에 자리한 조선 중기 사대부 묘역
성안공 상진(成安公 尙震) 묘역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0호


▲  서쪽에서 바라본 성안공 상진 묘역 (앞쪽이 상진 부부묘)

대성사를 나와서 근처에 있는 성안공 상진 묘역을 찾았다. 이곳은 상진의 3대가 묻힌 사대부
묘역으로 특이하게도 상문고등학교 교내에 들어있다. 즉 학교 안에 늙은 무덤들이 시퍼렇게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후손인 목천상씨 문중에서 조상들의 묘역도 지키고 교육
사업도 벌이고자 무덤 옆에 학교를 세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1969년 학교법인 상문학원을 세워 1970년 1월 상문중학교를 설립했으며, 1972년 상문
고등학교를 설립해 중/고교를 같이 운영하다가 1975년 중학교를 정리하고 고등학교만 운영하
고 있다. (학교 이사장을 상씨들이 맡고 있음) 그래서 천하에서 거의 유일하게 옛 무덤을 간
직한 고등학교가 되었다.

소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교내 북쪽 언덕에 묘
역과 신도비가 있는데 교문을 들어서면 약간
오른쪽 방향으로 그 언덕이 보여 찾기는 매우
쉽다.
묘역은 속세에 공개되어 있는데, 평일과 수업
을 하는 토요일에는 관람이 제한될 수 있으니
수업이 없는 일요일과 휴일에 찾는 것을 권한
다.

◀  상진 신도비를 머금은 비각(碑閣)


▲  성안공 상진 신도비(神道碑)

묘역 북쪽 밑에는 상진의 신도비가 비각 안에 소중히 감싸여 있다. 신도비는 보통 신도(神道)
로 통한다는 묘역 동남쪽에 쓰기 마련이나 이곳은 묘역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어 지형상 동북
쪽에 비석을 두었다.

비석은 꽃무늬가 새겨진 비좌(碑座)와 상진의 생애와 품성이 정리된 비신(碑身), 지붕돌로 이
루어져 있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비좌와 지붕돌은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총 높이 362cm, 비
신 높이 220cm, 너비 106cm, 두께 36cm이다. 1566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碑文)은 손자 손시손
의 부탁을 받은 홍섬(洪暹)이 지었고,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썼던 여성군(礪城君) 송인(
宋寅)이 썼으며, '成安公 神道碑銘'이란 두전(頭篆)은 상진의 2째 사위인 예문관검열 이제신(
李濟臣)이 썼다.
비각은 원래 없었으나 비석의 건강을 위해 근래 씌웠으며 지금은 신도비를 포함한 묘역 전체
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나 처음에는 신도비만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  동쪽에서 바라본 묘역 (앞에서부터 상시손, 상붕남, 상진 묘)

상진 묘역은 상진 부부와 그의 아들 내외, 손자 내외 등 3쌍 6기로 이루어져 있다. 다들 묘표
(墓表)와 상석(床石), 혼유석(魂遊石), 문인석(文人石), 장명등(長明燈) 등을 갖추고 있어 16
세기 사대부의 무덤 양식을 흔쾌히 보여주고 있다.

묘역의 주인공인 상진(1493~1564)은 자가 기부(起夫), 호는 송현(松峴)과 향일당(嚮日堂), 범
허재(泛虛齋)로 아버지는 찰방(察訪)을 지냈던 상보(尙甫)이고, 어머니는 연안김씨(延安金氏)
로 박사(博士)를 지낸 김휘(金徽)의 딸이다.
그의 집안은 부여 임천 지역의 큰 부자로 증조부인 상영부(尙英孚)는 이자놀이로 크게 배를
불렸다. 허나 말년에 부질없음을 깨닫고 차용증서를 모두 불태워 지역 사람들에게 크게 칭송
을 받았는데, 이후 상진의 벼슬이 높아지자 주위에서 증조부의 선행 덕분이라고 칭송을 했다.

일찍 부모를 잃어 8살 때부터 큰 누님집에서 살았는데 누님의 남편은 하산군(夏山君) 성몽정(
成夢井)이다. 공부와 완전히 담을 쌓으며 말타기와 활쏘기 등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친구
와 주위 사람들로부터 '부모도 없는 아이라서 공부도 안한다!!'는 식으로 개무시를 당하자 너
무 열받은 나머지 15세에 늦깎이 공부를 하여 겨우 10개월 만에 글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1516년에 생원시(生員試)에 붙었고, 1519년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예문관검
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이어서 봉교(奉敎), 예조좌랑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특
진되었다.
1528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는데, 당시 영경전(永慶殿)에서 거행된 세자의 친제(親
祭)에 병으로 불참했다가 탄핵을 받아 물러났다. 이후 재기용되어 장령과 홍문관교리(弘文館
校理) 등을 역임했으며, 지방 관리의 탐학을 제거할 것과 농촌 진흥책을 건의했다.
1533년 대사간(大司諫)이 되었고 이어서 부제학(副提學),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내면서 언
론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형조참판(刑曹參判)과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민정을 살폈다.

1539년 중종(中宗)의 특명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었는데 전
례가 없는 특진이라며 사간원(司諫院)의 탄핵을 받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체직(遞職)되
었다가 대사헌이 되었다.


▲  묘역 위쪽에 자리한 상진과 전주이씨 부부묘
상진 부부묘는 봉분 밑도리에 특별히 호석(護石)까지 둘렀다.
(상붕남, 상시손 묘에는 호석이 없음)


1543년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고, 1544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병조판서(兵曹判書
)가 되었다. 중종의 신임으로 우찬성(右贊成)에 제수되었으나 대간의 탄핵으로 지돈녕부사(知
敦寧府事)에 체직되었으며, 얼마 뒤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윤원로(尹元老)와 결탁한 전력으로
인종(仁宗) 즉위와 함께 경상도관찰사로 떨려났다.

1545년 명종(明宗)이 즉위하고 이기(李芑) 등이 권력을 잡자, 그의 천거와 문정왕후(文定王后
)의 후원으로 병조판서에 중용되었으며, 마정(馬政)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실시에 노력했다.
1548년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우찬성이 되었으나 질병으로 사임했으며, 1549년에 이기와
윤원형(尹元衡)의 추천으로 이조판서가 되었고, 이어 우의정에 올랐다.
이때부터 이기, 심연원(沈連源) 등과 국정을 주관했는데, 문정왕후가 주장한 양종(兩宗) 설립
에 온건론을 펴서 유생들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부민고소법(部民告訴法)을 실시해 민원을 살폈으며, 1551년 좌의정(左議政)에, 1558년에 영의
정(領議政)이 되어 5년 동안 국정을 이끌었다. 이때 황해도 평산에서 임꺽정(林巨正)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했으며, 사림(士林) 패거리들을 적극 등용하기도 했다.
이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전임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궤장(几杖)을 하사받
았다. 그리고 1564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니 명종은 성안(成安)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그
를 위해 도노덕대신(悼老德大臣)이란 시를 짓게 했다.

▲  상진 묘역 우측 문인석과 망주석
고된 세월에도 표정과 하얀 피부는
여전하니 그 비결이 궁금하다.

▲  상진 묘역 좌측 문인석과 망주석
그들 뒤로 보이는 기와집에 상진 신도비가
들어있다.


그는 매우 청렴하여 주로 오두막살이를 했는데 윤원형이 사람을 보내 먹을 것이 풍족한지 염
탐케 했다. 마침 하인이 맷돌에 통밀을 갈고 있어서 물어보니
'우리 나리는 죽으로 저녁을 때웁니다'고 했다. 또한 집에 도둑이 침투하자 그를 잡았는데 관
청에 넘기지 않고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남의 물건에 손 대지 말고 나를 찾아오시오' 타이르며 물건을 쥐
어 보냈다.

상진은 성품이 넉넉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남의 말을 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가 16년 동안 정
승을 지내면서 세운 업적은 그 시절 황희(黃喜), 허조(許稠) 다음 수준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그가 살았던 남대문로3가(남창동) 일대를 상정승골, 상동(尙
洞)이라 불렀으며, 영조 임금도 이곳을 지나갈 때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전한다.

그는 그의 자식들에게 너무 과거 급제와 출세
에 매진하지 말라며 이런 걸쭉한 말을 남겼다.
(연려실기술에 실려있음)

'세상에는 과거에 낙제하고 상심하는 사람이
있다. 허나 어찌 대장부가 시험관 한 사람의
눈으로 결정한 것을 두고 걱정하고 즐거워하
겠는가. 이런 연연함의 폐단이 차츰 벼슬도
잃을까 근심하는데까지 이른다. 하지만 그릇
이 이 정도에 머물면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  세월을 너무 예민하게 타서 검은
피부가 되버린 상진 묘표(묘비)

  ◀  상붕남(尙鵬南)과 전주이씨 부부 묘표
상붕남(1511~1542)은 상진의 아들이다. 유우(
柳藕)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경사(經史)에
밝고 예서(隷書)에 능했으며 음보(蔭補)로 관
직에 등용되어 판결사(判決事)까지 지냈다.
허나 벼슬에 별로 뜻이 없어 시서(詩書)로 일
생을 살았다고 전한다.

   ◀  상시손(尙蓍孫)과 청송심씨 부부묘
상시손(1537~1599)은 상진의 손자이자 상붕남
의 아들이다.
군자감 판관(軍資監 判官)을 지냈으며 죽은 이
후 정3품 사복시정에 추증되었다.
조선 10현상(賢相)의 하나로 격하게 추앙을 받
던 상진이었으나 그의 아들과 손자는 눈에도
거의 띄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수준이었다.

   ◀  상시손 묘 망주석과 검게 탄 동자석
상진과 상붕남묘에는 문인석을 두었으나 상시
손묘에는 난쟁이 반바지 반 접은 정도의 작은
동자석이 그 자리를 대신해 잘나갔던 집안의
무덤치고는 소박한 모습을 보인다.
상시손이 크게 벼슬을 하지 못한 탓도 있으나
상진이 벼슬에 너무 연연치 말고 청렴하게 살
것을 후손에게 부탁했으므로 그 영향도 있다.

* 성안공 상진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 1002 (명달로 45)



 

♠  우면동의 여러 명소들

▲  월산대군 태실을 품은 태봉(태봉근린공원)

우면산 동남쪽에는 서초구의 일원인 우면동(牛眠洞)이 자리해 있다. 서초구의 서남쪽 끝이자
경기도 과천시와 살을 맞대고 있는 변두리로 우면산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는데, 형촌과 식
유촌, 송동, 성촌 등 12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시골이었으나 개발의 칼질이 요란하게 춤을
추면서 주택과 아파트들이 마구 들어섰다. 비록 적지 않게 성형은 되었으나 우면산 자락에 자
리해 있고 녹지가 많아서 전원 분위기는 조금 남아있다.

우면동 한복판에는 태봉이란 조그만 언덕이 있다. 우면지구를 개발하면서 언덕 주변을 손질하
여 태봉근린공원(이하 태봉공원)으로 삼았는데, 그 언덕 정상에 태봉의 주인인 월산대군 태실
이 조용히 자리해 있다.


▲  월산대군 태실로 인도하는 숲길 - 수풀의 패기가 가히 천하를 찌른다.

태실로 가는 산길은 수풀이 살벌하게 우거져서 그렇지 경사는 거의 느긋하다. 숲으로 들어서
니 깊은 산골에 들어선 듯 공기부터가 다르며, 강렬한 햇살도 숲의 기운에 눌려 옆으로 비켜
간다. 공원에서 3분 정도 오르면 그 산길의 끝에 태실이 모습을 비춘다.


▲  월산대군 이정(月山大君 李婷) 태실 - 서울 지방기념물 30호

태봉 정상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월산대군 태실은 태실비(胎室碑)와 석함(石函) 1기로 이루어
져 있다.
태실(胎室)이란 왕족의 탯줄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탯줄을 버리지 않고 태항아리에 넣어 특별
히 엄선된 명당(明堂) 자리에 봉안한다. 조선의 군주는 총 27명, 그들의 아들, 딸까지 합치면
수백 명이 넘으니 태실도 그만큼 조성되었을 것이다. 허나 정작 서울 토박이 태실은 월산대군
태실이 유일하다.

태실비는 난쟁이 반바지를 2번 접은 정도의 매우 작은 크기로 비신(碑身)과 비석 받침이 하나
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신 앞면에는 '월산군정태실(月山君婷胎室)'이라 쓰여있어 태실의
주인을 알려주고 있으며, 뒷쪽에는 '천순6년 5월18일 입석(天順六年五月十八日 立石)'이라 쓰
여있어 1462년 5월에 세웠음을 속삭이고 있다.
태항아리를 머금던 석함은 바깥에 노출되어 있는데, 안에 담긴 태항아리와 지석(誌石)은 왜정
때 싹 털려 지금은 왜열도 아타카(安宅) 콜렉션에 갇혀 있는 실정이다. 그 항아리가 희소가치
가 대단했던지 왜열도의 어느 미술잡지에 세상에 딱 2개 밖에 없는 희귀한 항아리로 소개되기
도 했다. <항아리의 출처도 나와있음 '조선 시흥군 신동면 우면리(현 우면동)'>

서울 유일의 태실이자 제자리에 원형대로 남은 태실이고, 조선 왕실의 안태(安胎) 의식이 담
긴 현장으로 2010년에 서울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럼 월산대군은 누구일까?

월산의 이름은 이정, 자는 자미(子美), 호는 풍월정(風月亭)이다. 1454년 세조(世祖)의 맏아
들로 일찍 죽은 덕종(德宗, 추존된 묘호)과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성종의 친형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할아버지인 세조의 귀여움을 받으며 궁궐에서 자랐다. 1460년 월산군(
月山君)에 봉해졌고, 1468년 동생인 잘산군(乽山君)과 함께 현록대부(顯祿大夫)가 되었다.
1469년 작은아버지인 예종(睿宗)이 승하하자, 왕위 계승 1순위로 지목되었으나 한명회(韓明澮
)와 소혜왕후의 뜻으로 동생인 잘산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성종이다. 성종은 형을 달래고자
1471년 월산대군으로 급을 올렸으며, 그해 3월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봉하여 전지(田地
)와 노비, 구사(丘史) 등을 넉넉히 주는 등 성의를 보였으나, 왕위 계승에서 밀려나 좌리공신
이나 받아야 되는 자신의 처지에 열불이 나 자연으로 뛰쳐나가고 만다.

월산은 양화도(楊花渡, 양화대교 주변) 북쪽 언덕에 있는 희우정(喜雨亭)을 수리해 망원정(望
遠亭)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살림을 차려 매일 책을 읽고 시를 지으면서 팔자 좋은 삶을
누렸다.
그러다가 어머니(소혜왕후)가 병에 걸리자 입궐하여 극진히 간병을 했는데 너무 무리를 했는
지 그만 1488년, 3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인은 평양군(平陽君) 박중선(朴中善)의 딸로 소생은 없었으며, 첩을 통해 아들 2명을
얻었다. 또한 1473년까지 집에 별묘(別廟)를 세워 아버지 덕종의 제사를 주도했으나 덕종이
종묘(宗廟)에 봉안되면서 그의 위치는 종실의 일부로 떨어지게 된다.

월산은 학문을 좋아해 왕족을 위한 종학(宗學)에서 열심히 공부를 했고, 경사자집(經史子集)
을 두루 섭렵했다. 성품은 침착 결백했고, 술과 산수를 좋아했으며 부드럽고 율격(律格)이 높
은 문장을 많이 지었다. 속동문선(續東文選)에 그의 시가 여럿 실려 그의 시심(詩心)을 보여
주며, 저서는 풍월정집이 있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월산의 저택은 지금의 덕수궁(德壽宮, 경운궁) 자리에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도망친 선
조(宣祖)와 신하들은 1593년 2월 서울로 돌아왔으나 궁궐이 모두 파괴된 상태라 머물 곳이 여
의치 않았다. 이에 선조는 크게 발작을 하며 거처를 찾으라고 다그쳤는데 다행히 월산의 저택
이 멀쩡하게 살아있어 그곳을 임시 궁궐로 삼고, 주변 집을 몰수해 궁역(宮域)에 넣었다. 그
것이 바로 덕수궁<경운궁(慶運宮)>의 시작이었다. 이후 궁궐을 보수하면서 월산의 집은 철거
되었으며, 현재 덕수궁을 메운 건물은 모두 고종(高宗) 때 지어진 것이다.

▲  동남쪽에서 바라본 태실과 태실비

▲  서쪽에서 바라본 태실과 태실비

석함에 담겼을 그 귀한 알맹이는 언제나 제자리에 돌아올 수 있을까? 안그래도 작은 태실, 알
맹이까지 강제로 털렸으니 태실의 우울한 그늘은 언제나 거두어질지 모르겠다.

* 월산대군 이정 태실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초구 우면동 291-1


▲  형촌마을 회화나무 - 서울시 보호수 22-28호

태봉 북쪽에는 형촌(荊村)마을이 자리해 있다. 1740년대에 풍양조씨가 들어와 터를 닦은 마을
로 당시 이곳에 가시덤불이 무성하여 가시내꿀(또는 샛말)이라 불렀는데, 그것을 한자로 표시
해 형촌마을이 된 것이다.
풍양조씨의 집성촌(集姓村)으로 현대까지 이어오다가 1963년 경기도 시흥군(始興郡)에서 서울
로 편입되었으며, 강남 개발 이후 마을 개량 사업을 벌여 지금에 이른다. 개량 사업으로 인해
주민 절반 이상이 마을을 떠났고 그 틈을 타 외지인들이 대거 들어왔다. 하여 토박이 주민의
평범한 주택과 졸부들의 현기증 나는 저택과 빌라가 공존하는 어색한 현장이 되었다.

형촌에는 수백 년 묵은 보호수 2그루(회화나무와 돌배나무)와 석불, 성정승묘, 우면산 자연생
태공원 등의 명소가 있는데, 마을 한복판에 자리한 회화나무는 약 230년 묵은 나무로 높이 12
m, 둘레 280cm이다. 골목길 중앙에 자리해 있고 그 좌우로 주택들이 바짝 붙어 있어 나무의
생육 공간은 넉넉치 못하다. 마을의 오랜 내력을 알려주는 존재라 예우 차원에서 나무 주변을
공원으로 꾸며 마음 편히 살게끔 해주는 것이 마땅하나 사람들의 욕심이 그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것이다. 하여 골목길 중앙과 집들 사이에 어정쩡하게 자리해 나무와 사람, 차량 서로가
불편하게 되었다.


▲  회화나무 그늘에 깃든 우면동 석불 (동자상미륵)

회화나무 북쪽 그늘에는 조그만 석불이 우두커니 서 있다. 이곳에선 마을을 지키는 신령한 힘
을 지닌 동자상 미륵 또는 미륵불(彌勒佛)로 여기며 신성시하고 있는데 예전에는 그에게 제를
올렸다.
허나 토박이 주민들이 많이 빠져나갔고 우면동의 오랜 무형자산인 우면두레도 희미해진 상태
라 그에 대한 숭상심도 많이 떨어져 나무의 밑도리나 뚫어지라 바라보며 떨어지는 나뭇잎이나
맞아야 되는 우울한 신세가 되었다. 만약 그에 대한 숭상이 여전했다면 그를 위한 집을 세우
던지 무슨 배려를 했을 터인데 그런 것은 없다. 그러니 석불은 마냥 나무에 의존하고 있다.

석불의 높이는 1m 정도로 그나마 밑도리는 땅 속에 묻혀있다.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모
르겠으나 나무 밑도리를 바라보게 배치한 것도 이상하며 밑도리도 모두 끄집어내 온전한 모습
으로 세상 앞에 섰으면 좋겠는데, 마을 사람들이나 서초구청, 서울시에서 그런 의지까지는 없
는 모양이다.
그의 얼굴은 마모가 심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얼마나 울었길래 얼굴이 죄다 지워진 것일
까? 그저 얼굴과 귀의 윤곽만 확인이 가능하다. 머리에는 돌갓을 쓰고 있는데 고려와 조선의
많은 미륵불들이 돌갓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미륵불로 조성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조성시기는 조선 너머까지는 갈 것 같지는 않고 형촌마을이 형성된 1740년대 이후 마을 수호
신으로 세웠을 가능성도 있으나 얼굴이 저 지경이 된 것을 보면 다른 곳에서 불우한 시간을
보내며 방치되어 있던 것을 이곳으로 가져와 마을 수호신으로 삼았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설
마 마을 사람들이 그의 얼굴에 못된 짓을 했을 리는 없을 것이고, 돌갓을 쓰고 있으니 자연의
괴롭힘의 의한 얼굴 훼손도 적을 것이다.

그가 동자상미륵이 된 것은 키가 어린이처럼 작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거의 유일한 동네 미륵
불로 서울시에서는 그에 대한 조사를 벌여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씌워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의 어두운 얼굴도 조금은 밝아지지 않을까?

* 형촌 회화나무, 석불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초구 우면동 218-4


▲  망루근린공원 정상에 자리한 정자 쉼터

형촌마을에서 형촌천을 따라 펼쳐진 산책로를 타고 바깥으로 나오니 서초네이처힐2단지 서쪽
에 자리한 망루근린공원(이하 망루공원)이 마중을 한다. 처음에는 이 땅에 흔한 근린공원으로
여겨 넘어가려고 했으나 공원 안내도를 보니 그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겉보기와 달
리 이곳에는 구석기시대부터 근대까지 여러 시대를 초월한 유적이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 유적은 우면동 유적이라 불리는데, 망루공원을 중심으로 태봉 주변과 서초네이처힐단지
에 분포되어 있다.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다가 2008년 이후 우면지구와 우면산터널 도로를
닦는 과정에서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는데, 2010년까지 발굴조사를 거치면서 수백 점의 유물
이 쏟아져 나왔으며, 발굴이 끝나자 유적이 집중적으로 나온 서초네이처힐2단지 서쪽을 공원
으로 꾸며 망루공원으로 삼았다.
허나 유적은 모두 흙과 수풀로 덮었고, 그 위에 조그만 표지를 세운 것이 전부라 이곳이 유적
지란 기분이 거의 나질 않는다. 일부 유적에 한해 속살을 드러내고 유리 보호막을 설치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 부분이 참 아쉽다. 게다가 망루공원 외에 유적은 아파트와 도로로 죄다 밀어
버려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땅의 개발의 칼질은 참으로 천박하기 그지 없어 옛 유적이고 사람이고 죄다 갈아버리는 못
된 습성이 있는데 우면동 유적은 그나마 2년 동안 발굴조사라도 했고, 일부는 공원이 되면서
그런데로 살아남아 다행이다.

이곳 유적은 구석시시대 사람들의 흔적이 묻어난 문화층부터 신석기시대 야외 화덕 자리, 백
제와 신라의 마을 유적과 무덤 흔적, 신라 후기부터 고려까지 이용되었던 논과 물길의 흔적,
조선시대 구들과 무덤, 기와가마터, 근대 수레길 등이 확인되었다. 구석기 문화층은 태봉 남
쪽과 동쪽에서 나왔는데, 긁개와 밀개, 여러 석기들이 출토되었다. 이곳이 발견됨으로써 서울
의 구석기 유적은 면목동(面牧洞) 유적과 함께 2개가 되었으나 아쉽게도 둘 다 개발의 칼질로
사라졌다.
백제시대 마을 유적은 망루공원 일대에서 11동의 집자리가 확인되었는데, 그중 4호 집자리가
이들 마을 유적의 중심부이다. 여기서는 항아리와 시루, 병, 굽다리 접시, 뚜껑, 장군, 납작
밑단지 등의 토기가 나왔고, 도끼, 끌, 손칼, 화살촉, 창의 물미 등의 철제품과 가락바퀴, 소
형 절구 등의 석물도 나와 당시 생활상을 알려준다. 특히 재가 나온 집터가 많아 화재로 소실
되었음을 알려주는데 아마도 백제와 고구려, 신라와의 전쟁에서 파괴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백제와 신라의 무덤도 여럿 나왔는데, 공교롭게도 집자리 유적과 같은 언덕에서 발견되
었다. 무덤은 마을이 사라진 이후 들어선 것으로 백제의 무덤은 2기가 나왔는데 모두 굴방무
덤이다.
백제 1호분은 네모진 돌방과 다른 돌방으로 연결되는 널길이 덧대어진 모양으로 돌방은 길이
330cm, 너비 336cm이다. 이들 묘는 귀족이나 지방 세력의 묘로 여겨지는데, 돌방 바깥 위쪽에
는 눈썹 모양의 도랑이 둘러져 있으며, 살포와 도끼낫, 창의 물미를 비롯한 여러 철제 유물과
관못, 꺽쇠 등도 나와 목관(木棺)을 사용했음을 알려준다.
신라의 무덤은 신라 중기부터 후기에 이르는 것들로 앞트기식 돌방무덤이 주류를 이룬다. 여
기서는 굽다리사발과 둥근밑항아리, 손칼 등이 발견되었다.


▲  백제시대 집터 1호 자리

망루공원 정상에는 조촐한 정자 쉼터가 있다. 그 안에는 여기서 발견된 삼국시대 마을 유적과
무덤 유적에 대한 설명문, 유적과 출토유물 사진이 걸려있어 이곳에 대한 이해를 조금이나마
도와준다. 정자 주변에는 집터와 고분이 발견된 자리에 조그만 표시를 설치했는데, 유적은 모
두 흙과 수풀로 덮어버렸다.

구석기부터 근대까지 수천 년의 흔적이 복합적으로 담긴 이 땅에서 흔치 않은 유적으로 국가
사적이나 적어도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부여하여 어엿한 사적(史蹟)공원으로 꾸몄으면 좋겠다.
그냥 이렇게 조그만 동네 공원의 일부로 썩히기에는 장대한 세월을 이어져 내려온 그들 유적
이 너무 아깝다.

▲  삼국시대 석실묘 6호 자리

▲  백제시대 집터 5호 자리

▲  백제시대 집터 4호(왼쪽)와
6호(오른쪽) 자리

▲  삼국시대 석실묘(石室墓) 1호 자리

▲  시대가 아리송한 석곽묘 1호 자리

▲  시대가 아리송한 석곽묘 2호 자리


▲  식유촌(植柳村) 회화나무 - 서울시 보호수 22-5호

우면동에서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망루공원을 보너스로 둘러보고 과천 방향 47번 국도(중앙로
)를 따라 식유촌으로 이동했다.
식유촌은 우면동의 서쪽 끝이자 서초구의 서남쪽 끝에 자리한 시골마을로 경기도 과천시가 바
로 코앞이다. 마을 이름은 버드나무를 심는다는 뜻으로 우마니(우면동의 옛 이름) 마을 근처
인 이곳에 버드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해서 유래되었다. 허나 마을 이름과 달리 버드나무는 없
다 싶이 하여 그 이름은 무색해졌다. (종종 이름을 혼돈하여 석유촌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음)
 
식유촌에는 마을의 장대한 내력을 알려주는 늙은 회화나무가 있다. 그는 약 360년 묵은 나무
로 높이 18m, 둘레 3.8m에 이르며 예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존재로 1945년에 나무에서 구렁이
4마리가 튀어나와 사방으로 사라졌다고 하며, 이내 해방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식유촌 회화나무를 끝으로 우면산, 우면동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식유촌 회화나무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초구 우면동 5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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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우백호, 인왕산 남쪽 자락을 거닐다 ~~ 인왕사 국사당, 선바위, 해골바위 나들이

인왕산 국사당, 선바위



' 인왕산 나들이 (선바위, 국사당, 해골바위) '
인왕산 선바위
▲  인왕산의 상징, 선바위의 위엄



 

여름 제국(帝國)이 서서히 이빨을 보이던 6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날, 내 즐겨찾기의
하나인 인왕산 선바위를 찾았다.

독립문역(3호선)에서 선바위로 가는 길목인 무악동(毋岳洞) 지역은 서울에 흔한 달동네의
하나로 주황색 기와를 지닌 달동네 집들이 즐비했다. 그 시절에는 선바위로 가는 길이 사
람의 실핏줄만큼이나 복잡했는데, 개발의 칼질이 무악동 달동네를 싹 밀어버리고 인왕산(
仁王山)의 살까지 야금야금 난도질하면서 밋밋한 회색빛 아파트를 심어놓았다.
하여 달동네의 체취는 크게 가셨고 산으로 올라가는 길도 조금은 직선화되어 찾기는 쉬워
졌다. 허나 주변 경관을 고려하지 않는 개발로 인왕산에 적지 않은 옥의 티를 선사하였으
니 그 점이 무척이나 아쉽다.

인왕사 입구에 이르니 인왕사가 일주문을 내밀며 나를 마중한다.



 

♠  한 지붕 11가족의 특이한 절집이자 불교와 무속이 어우러진
이색 현장 ~ 인왕산 인왕사(仁王寺)

▲  인왕사 일주문(一柱門)

인왕사의 정문인 일주문은 속세살이만큼이나 각박한 경사면에 자리해 있다. 이 문은 다른 일
주문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1.5m 정도 솟은 기단 위에 붉은 피부의 기둥을 심고 그 기둥에
용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지붕의 좌우 길이와 비슷한 평방(平枋) 위에 절의 이름을 알리는
현판을 걸어 이곳의 정체를 속세에 밝힌다.

일주문을 오르면 주차장이 나오고, 여기서 국사당까지 선바위로 인도하는 계단길을 중심으로
조급한 경사면에 잔뜩 건물을 지어놓은 인왕사 경내가 펼쳐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각 건물
마다 다른 종단과 절 이름을 칭하고 있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인왕사는 분명한데,
왜 건물들이 이름을 달리하며 따로 놀고 있을까? 그것이 바로 인왕사가 지닌 개성이자 결점이
다.
인왕사는 5개 종단에 무려 11개의 절이 가람을 이룬 독특한 형태의 절이다. 그러니까 인왕사
란 테두리 안에 서로 다른 절이 각자의 영역을 형성하며 인왕사란 한 지붕을 이루고 있는 것
이다. 그러다보니 종단도 다르고 주지승도 달라 따로 놀고 있는데, 다행히 4년에 1번씩 인왕
사를 총괄하는 주지승을 뽑아 이곳의 전반적인 살림을 맡고 있다.

속세만큼이나 복잡한 인왕사의 고유 건물은 선암정사(본원정사), 대웅전, 관음전, 보광전, 극
락전 등이며, 이들을 중심으로 법회와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외에는 지붕과 이름만 같이
쓰고 있는 다른 절로 보면 될 것이다.


▲  인왕사 경내 (맞배지붕의 큰 건물이 대웅전)

인왕사는 1912년에 창건된 절로 경내 건물은 모두 근래 지어진 것이라 고색의 향기는 누리기
힘들다. 경내 위쪽에 국사당과 선바위 등의 문화유산이 있지만 그들은 원래부터 인왕사와 관
련이 없는 존재들이다.

인왕산에는 원래 조선 초기에 지어진 인왕사가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의 인왕사와는 전혀 관
련이 없는 존재이나 이름이 같다보니 절과 관련된 몇몇 자료에는 옛날 부분까지 언급하고 있
다. 그렇다면 옛날 인왕사는 어떤 절이었을까?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1394년 개경(開京)에서 한양(서울)으로 국도(國都)
를 옮겼는데, 이때 인왕산 동쪽 자락에 인왕사를 세워 궁궐 내원당(內願堂)에 있던 승려 조생
(祖生)을 보내 주지로 삼았다.

인왕사란 이름은 부처의 법을 지키는 인왕상(仁王像)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절의 규모
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절이 있던 골짜기를 인왕동(仁王洞)이라 불렀고, 산
의 이름도 덩달아 인왕산이 되었을 정도이니 절의 규모가 어느 정도는 되었던 모양이다. 게다
가 태조가 세운 절이니 왕실의 지원도 넉넉했을 것이며, 세종(世宗)과 성종(成宗) 때 기록에
도 가끔씩 절의 이름이 등장한다.

연산군(燕山君)은 인왕사를 비롯해 인왕산에 있던 복세암(福世庵)과 금강굴(金剛窟)이 경복궁
(景福宮)보다 높은 곳에 자리해 궁궐을 누르며 바라보고 있다고 하여 인근 민가들과 함께 부
셔버렸다. 연산군은 전제왕권을 추구하던 군주라 절과 민가가 높은 곳에서 궁궐을 바라보고
있는 것에 적지 않게 기분이 뒤틀렸을 것이다. 중종(中宗) 이후에 중건되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소실되었다고 하며, 그 이후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12년 박선묵 거사가 지금의 자리에 선암정사(禪巖精舍)를 세웠다, 아마도 선바위
의 덕을 보고자 그 자리를 택한 듯 싶은데 그때까지만 해도 인왕사란 이름은 쓰지 않았다.
1914년 탄옹(炭翁)이 선암정사 곁에 대원암(大願庵)을 지으니 그때부터 인왕사의 한 지붕 다
가족 시대가 시작되었다.
1922년 극락전(極樂殿)을 지었고, 1924년 자인(慈仁)이 안일암(安逸庵)을 세웠다. 1925년에는
남산 꼭대기에 있던 국사당이 인왕사 윗쪽으로 넘어와 새롭게 둥지를 틀었으며, 1927년 극락
전을 중수하고 1930년 치성당(致誠堂)을 세웠다. 그리고 1942년 각각 분리된 암자를 '인왕사'
란 이름으로 통합하면서 잊혀진 이름 인왕사가 다시 속세에 고개를 들었다. 하여 자연히 옛
인왕사를 계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인왕사 위쪽에는 인왕산의 오랜 명물인 선바위가 있다. 그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던 시절부
터 산악신앙(山岳信仰)과 기자신앙(祈子信仰)이 어우러진 토속신앙(土俗信仰)의 성지(聖地)였
으며, 그 밑에 자리한 국사당은 무당이 굿판을 벌이는 무속의 중심지이다.
또한 선바위 주변에는 대자연이 빚은 개성파 바위들이 즐비하며, 선바위와 국사당의 영향으로
산자락과 바위, 골짜기 곳곳에 자리를 피고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서울에 계룡산(鷄龍山) 같은 곳이자 도심 속의 이채로운 현장으로 속세와도 적당히 거리를 두
고 있어 굿을 벌이기에도 좋다. 인왕사는 바로 이런 토속신앙과 산악신앙이 거리낌없이 어우
러진 무불(巫佛)의 공존 현장으로 색다른 신앙체계를 천하에 보여준다.


▲  국사당(國師堂) - 국가 민속문화재 28호

선바위를 향해 오르다보면 국사당이란 건물이 모습을 비춘다. 겉으로 보면 늙은 티가 그리 와
닿지 않지만 엄연한 조선 후기 건물로 비록 자리를 옮기긴 했어도 조선 초기부터 있던 신당(
神堂)이다.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無學大師)를 비롯해 여러 무속신(巫俗神)을 봉안하고 있
으며, 무학대사를 봉안한 탓에 국사당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국사당은 정면 3칸(협칸을 포함하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목멱산(木覓山
)이라 불리던 남산 꼭대기의 팔각정(八角亭) 자리에 있었다.
태조는 1396년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여 서울을 지키는 존재로 신성시 여겼는데
, 이때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1404년에는 호국(護國)의 신으로 품격을 높이면서 목멱신사(木
覓神祠)라 불렸다.

남산 꼭대기에서 서울 장안을 굽어보며 오랜 세월 살아온 국사당은 왜정(倭政) 때 강제로 정
든 곳을 떠나야 했다. 1925년 왜정이 남산도서관 자리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었는데, 국
사당이 그보다 높은 곳에 들어앉은 것에 쓸데없이 뿔이 나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난리를 쳤기
때문이다. 하여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를 하던 곳이며 명당(明堂) 자리에 속하는 현 자리로
둥지를 옮겼다.
사당의 목재를 옮겨와 원형대로 복원했으며, 자연 암반을 기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하 기초
는 없다. 석재와 흙으로 터를 평탄하게 다지고 단단한 돌을 쌓아서 1m 정도의 전단(前壇)과
동단(東壇)을 만들었으며, 건물 양쪽에 마치 날개를 붙인 듯, 협칸 1칸씩을 달아 마치 큰 새
가 날개짓을 하는 듯 하다. 이 협칸<양측실(兩側室)>은 무당과 기도를 하러 온 이들의 휴식처
및 기도처로 쓰인다.

건물의 면적은 11평 정도로 전체적으로 구조가 간결하고 목재도 튼튼하여 18세기 건축 기법이
잘 드러나있으며, 당시 장인들의 솜씨를 볼 수 있다. 그래서 다른 당집에 비해 건물이 견고한
편이다.


▲  위에서 바라본 국사당

국사당은 자주 굿이 열리는 편이다. 굳이 굿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찾아와 기도를 하는 사
람도 많으며, 정월에 많이들 찾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하는 굿은 사업 번창을 비는 경사굿과
병의 쾌유를 비는 병굿과 우환굿, 부모와 가족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진오귀굿 등이다.
허나 이곳은 무당이 상주하는 곳은 아니며, 김명권이란 사람이 집안 대대로 관리하는 건물로
그가 당주(堂主)라고 한다. 무당의 요청이 있으면 돈을 받고 자리를 빌려주며 굿은 3월과 10
월에 많이 열린다. 반면 음력 섣달은 거의 없다고 한다.
건물 당주는 당에 봉안된 신들을 위해 2년마다 동짓달에 날을 잡아서 '마지'라는 제사를 올리
는데, 이때 무녀(巫女)를 불러 굿을 한다.

국사당 내부 중앙에는 무속신앙의 신을 그린 무신도(巫神圖) 18점이 있는데, 곽곽선생만 빼고
모두 비단 바탕에 그려졌다. 이들은 '국사당의 무신도'란 이름으로 국가 민속문화재 17호
지위를 누리고 있는데, 그림에 담긴 존재들은 태조 이성계인 아태조(我太祖)를 비롯해, 강씨
부인, 호구아씨, 용왕대신(龍王大神), 산신(山神)님, 창부씨(昌夫氏), 신장(神將)님, 무학대
사, 곽곽선생, 단군(檀君), 삼불제석(三佛帝釋), 나옹대사(懶翁大師), 칠성(七星)님, 군웅대
신(軍雄大神), 금성(錦聖)님, 민중전(閔中殿), 최영(崔瑩)장군 등이며, 양쪽 협칸에는 각각
4점과 6점의 무신도가 걸려있어 총 28개의 무신도가 있다. (무신도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또한 명도(明圖)란 이름에 명두(明斗) 7점이 무신도 사이에 걸려있는데, 명두란 무녀를 계승
할 때 넘겨주는 일종의 증표로 큰무당이 자신을 이을 사람을 선정해 그 상징물로 명도를 주고
이것을 받은 무녀는 자신의 수호신처럼 귀하게 여긴다. 이 명두는 놋쇠로 만든 것으로 청동기
시대 제천의식(祭天儀式)에 쓰인 도구들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들 무신도는 한 사람이 그린 것으로 여겨지는 같은 화법의 조선 후기 그림과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그림이 섞여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중 12점은 조선 인조(仁祖) 때인 17세
기에, 나머지 16점은 고종 때 제작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것은 없다.

▲  무신도의 하나인 아태조(이성계)
(문화재청 사진)

▲  강씨(康氏) 부인 (문화재청 사진)

무신도 중 태조 이성계를 머금은 아태조(우리의 태조라는 뜻)는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있는
태조의 영정을 본떠서 그린 것이라고 전한다. 강씨부인은 태조의 부인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로 여겨지나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왕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란 설도 있다. 허
나 태조의 그림이 있고 그림의 주인공이 강씨이니 그 마누라인 신덕왕후일 가능성이 더 크다.

국사당 안에서는 마침 굿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도 문은 닫혀 있어 안에는 들어가
지 못했으며, 기분 같아서는 흔쾌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무신도를 사진과 나의 망막에
싹 담고 싶었으나 외부인에게는 거의 인색한 곳이라 그만두었다. 그러다보니 이곳에 30번 넘
게 왔음에도 내부 구경도 제대로 못했고, 무신도도 아직 사진에 담지도 못했다. (굳이 공개하
지 않는 것을 결례를 무릅쓰고까지 봐야될 이유는 없음, 관람에는 예의가 필요함)

* 국사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산2-12 (통일로18가길 20)


▲  선바위로 인도하는 가파른 경사의 계단
계단 너머로 선바위가 삐죽 얼굴을 내민다. 그런데 계단 양쪽에 있는 석등이
우리 전통식이 아닌 왜식(倭式) 석등인 것이 심히 눈에 거슬린다.
저 석등 좀 갈아치우면 안될까?



 

♠  산악신앙 및 기자(祈子)신앙의 성지로 바쁘게 살고 있는
인왕산 선바위<선암(禪岩)>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4호

▲  앞에서 바라본 선바위(선암)

인왕사 경내 윗쪽 해발 150m 고지에 자리한 선바위는 인왕산의 오랜 명물로 2개의 큰 돌이 마
치 승려가 장삼을 입은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선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제눈이
안경이라고 사람에 따라 보이는 모습은 다를 것이다.
바위 뒷쪽이나 옆에서 바라보면 비옷(우비)이나 모자 달린 잠바 등을 뒤집어 쓰고 고개를 숙
인 모습으로도 보이며, 서양 동화나 영화에 많이 나오는 마법사(판초의 비슷한 걸 입고 나옴)
처럼 보이기도 한다. 공상과학 만화나 오락실 오락을 많이 즐긴 사람이라면 이상한 형체의 괴
물이나 새 대가리 괴물 등이 연상될 수도 있을 것이며, 바위에 길쭉한 구멍이 많이 뚫려있어
유령이나 귀신처럼 보이기도 하여 한밤중에 그를 본다면 정말 오싹할 것 같다.

옛날에는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 태조 이성계 부부의 상으로 여기기도 했으며, 인왕사가
밑에 들어온 이후에는 석불(石佛)로 대우를 받으며 석불님, 관세음보살님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절 신도나 선바위를 받드는 이들은 그 바위를 양주(兩主)라고 부르며, 마땅한 명물이
없어 애태우던 인왕사를 먹여살리는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그에 대한 지극정성이 엄청나다.

이 바위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기묘한 작품으로 보면 볼수록 온갖 감탄사가 나올
따름이다. 이곳 주변에는 해골바위나 모자바위 등 묘하게 생겨먹은 바위가 많아 인왕산이 과
연 바위의 산임을 실감케 한다.
이렇듯 선바위는 그 신비한 자태 때문에 머나먼 옛날부터 산악신앙 및 기자신앙(祈子信仰)의
성지(聖地)이자 기복처(祈福處)로 바쁘게 살았다. 특히 아들을 원하는 부인이 바위에 소원을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많이 찾아와 기도를 했는데, 작은 돌을 바위에 붙이면 효험이 더 크
다고 하여 돌을 문질러서 붙인 자국이 꽤 많다. 그래서 붙임바위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바위 하나에 선바위, 태조 이성계 부부의 상, 태조/무학대사의 상, 석불님, 관세음
보살님, 양주, 그리고 붙임바위까지 많은 이름을 지니고 있으며, 산악신앙과 기자신앙, 무속
신앙, 거기에 불교까지 다양한 성격을 지녀 그야말로 굶어죽을 일이 전혀 없는 팔방미인의 바
위이다. 바위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데, 사람들이 알아서 난리를 피우며 이름과 성격을 붙
이고 떠받드는 것이다. (그의 공식 명칭은 '선바위'임)


▲  이리저리 틈새가 많은 선바위의 윗부분

바위의 형상은 2개의 큰 바위가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으로 높이 7∼8m, 가로 11m 내외, 앞뒤
의 폭이 3m 내외이다. 바위 밑에는 제단이 있으며 바위의 패인 부분에는 비둘기들이 머물고
있다. 매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쌀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있어 비둘기에게 이만한 삶터가
없다. 늘 뷔페(?)를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이곳은 무학대사와 얽힌 이야기가 서려있으며, 바위를 둘러싸고 정도전의 유교와 무학대사의
불교 간의 대립이 일어났던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에서 새로운 도읍(都邑)터를 부탁했다. 하여 무학은 전국
을 뒤적거리다가 지금의 서울(한양) 땅을 찾고 기뻐했다. 허나 자리를 보니 이곳에 도읍을 정
하면 나라가 500년 밖에는 못갈 팔자였다. 하여 선바위에서 나라의 수명 좀 연장시켜달라고
1,000일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500년에서 겨우 18년이 추가된 518년 만에 나라가 쫄
딱 망한 모양이다. 이는 서울이 조선의 국도가 되는 데에 무학대사와 선바위가 어느 정도 역
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한토막 이야기이다.

한양이 수도로 정해지자 이 바위를 성 안에 두느냐 밖에 두느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논쟁을 벌였다. 태조는 무학을 통해 그 바위의 명성을 듣고 있었지만, 정도전도 무학대사 못
지 않게 신뢰하고 있던 터라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침소로 들어와 그냥 자버렸다.
그런데 그날 밤, 초여름인 4월(음력 기준)임에도 눈이 쌓이는 꿈을 꾸었는데, 잠에서 깨어나
밖을 보니 글쎄 눈이 성벽 모양으로 쌓여있었고 안쪽 부분의 눈이 녹아버린 것이다. 이에 태
조는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정도전의 의견대로 선바위를 성밖에 두게 되었다.
그 말을 들은 무학대사는 단단히 뚜껑이 열려 크게 한숨을 쉬면서 '이제 중들은 선비 책보따
리나 짊어지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구나' 한탄했다고 한다.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선바위 사건은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유교(성리학) 패거리와 무학대사로
상징되는 불교 패거리의 충돌로 볼 수 있다. 선바위를 도성 안에 들이면 불교가 흥하는 것으
로 자연히 도성 안에 절이 많아져 고려처럼 불교 국가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 허나 도성
밖으로 밀려나면서 유교가 그 위를 점하게 되면서 불교는 힘을 잃고 밀려나게 된다. 하여 억
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태조와 세종, 세조 때를 제외하고는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되는 것
이다.

이렇게 조선시대 불교 몰락의 우울한 상징까지 떠맡게 된 선바위는 민간신앙의 애뜻한 현장으
로 백성들의 발길이 잦았다. 그러다가 인왕사가 들어와 불교까지 더해지면서 관세음보살, 석
불이란 이름까지 가지게 되었고, 국사당까지 밑에 들어와 무속신앙까지 더해지면서 그야말로
복합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굿은 바위에서 하지 않고, 국사당이나 인근 골짜기에서
한다.

인왕사는 음력 4월 초파일과 7월 칠석날, 그리고 영산제(靈山祭) 때 바위에서 제를 지내고 있
으며, 절을 많이 하면 좋다고 하여 108배를 하는 사람이 많다. 바위 서쪽에는 바위를 지키는
조그만 건물이 있으며, 바위 주변으로 빼곡히 돌담을 둘렀다.

* 선바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3-4 (통일로18가길 26)


▲  선바위의 깜찍한 뒷모습
판초의나 모자가 달린 옷을 입고 웅크리고 앉아 서울 시내를 바라보는 것 같다.

▲  선바위약수터

인왕산에는 남산만큼이나 약수터가 많이 있는데, 선바위 동쪽 계곡에 자리한 선바위약수터도
그중에 하나이다.
인왕산이 속세에 베푼 약수이나 물을 보니 수질이 조금 의심스러워 마시지는 않았다. 이곳은
예전에 굿판 장소로 많이 쓰였으나 굿에 제한을 걸면서 요즘은 약수터 주변에 조촐하게 머물
자리(사진 오른쪽 부분에 파라솔처럼)를 만들어 며칠씩 치성을 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  선바위 동쪽 벼랑
(선바위약수터는 밑에 있음, 윗부분에 솟은 바위가 선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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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바위 뒷쪽 바위 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도심이 저 밑에 펼쳐져 있다.

▲  선바위 뒷쪽 바위 능선에서 바라본 독립문 주변과 서울 도심, 마포구와
서대문구 지역 (멀리 관악산과 삼성산까지 시야에 들어옴)

▲  선바위 뒤쪽에서 만난 해골바위
바위의 모습이 해골이나 투구처럼 생겼다. 그의 피부에는 대자연이 심술궂게
파놓은 구멍들이 여럿 있으며, 바위 정상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  해골바위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인왕산 주능선에 걸쳐진 하얀 피부의 한양도성, 그 너머로 서울 도심과 시가지가 장대하게 펼
쳐져 있으며, 저 멀리 고구려의 장대한 혼이 깃든 아차산과 용마산 산줄기까지 흐릿하게 시야
에 들어온다.


▲  그림의 떡처럼 바라보이는 모자바위
마치 사람이 모자나 고깔을 쓴 모습 같다. 저곳은 금지된 구역이라
밑에서 그림의 바위처럼 바라봐야 된다.

▲  인왕사 윗쪽 마애불(磨崖佛)

모자바위 밑 막다른 바위에 작은 마애불이 깃들여져 있다. 이곳은 선바위에서 6~8분 정도 올
라가야 되는 곳으로 근래 인왕산 한양도성과 개나리동산, 무악재하늘다리를 이어주는 탐방로
가 닦이면서 접근성이 조금 좋아졌다. (마애불 앞을 지나감)

인왕사에는 20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마애불이 2개 정도 파악이 되고 있는데, 이 석불이 그중
의 하나로 절 한참 윗쪽에 있어서 편의상 '인왕사 윗쪽 마애불'(이하 윗쪽 마애불)이라 칭하
도록 하겠다.
이 마애불은 석불이라기보다는 상투를 튼 어린이나 사람 같은 모습으로 거칠게 다듬어져 거의
만들다가 만 모습 같다. 또한 이곳은 막다른 곳이라 더 이상 윗쪽으로 올라갈 수 없다.


▲  윗쪽 마애불 주변에서 바라본 모자바위의 위엄

▲  인왕사 아랫 마애불

선바위에서 서쪽(국사당과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면 큰 바위에 아주 두텁게 새겨진 마애불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인왕사 경내의 서쪽 끝으로 석불 앞에는 건물이 여럿 있는데 그들에게
가려져 있어 쉽게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 (편의상 '인왕사 아랫 마애불'이라 칭했음)

이 석불은 20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머리의 무견정상
(無見頂相)부터 발까지 세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두 손을 무릎에 대고 눈을 지그시 감으며 명
상에 잠겨있는 편안한 모습이다. 특히 배 부분은 볼록 나와있는데, 불상이나 보살상 중 얼굴
살이 많은 것은 많이 봤지만 저렇게 똥배 불상은 처음 본다. 게다가 이 땅에 흔한 마애불 스
타일이 아닌 다소 이형적인 모습이라 마치 동남아나 중남미의 석조 조각 같은 모습이다.
지금은 20세기 마애불로 속세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으나 100년 이상 지나면 불교미술사에
서 크게 다뤄질지도 모른다.

아랫 마애불을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8시가 넘었다. 선바위와 국사당의 안부를 오랜만에
확인을 했고, 선바위 주변의 많은 바위와 마애불도 복습 차원에서 모두 확인을 했으니 나름
의미가 있고 배부른 나들이였다.
이렇게 하여 인왕산 6월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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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4월 2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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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화와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깃든 도심 속의 고즈넉한 산사, 성북동 길상사

성북동 길상사



' 도심 속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성북동 길상사 '

▲  길상사를 키운 법정의 사진과 유품들


봄이 막바지 절정에 치닫던 5월 중순의 어느 평화로운 날, 후배 여인네와 성북동(城北洞)
길상사를 찾았다.
내가 늙은 절을 좋아하다보니 법등(法燈)의 끈이 짧은 절은 문화유산이 없는 이상은 별로
찾지 않는 편인데, 길상사는 예외로 내 즐겨찾기의 일원이 되어 이미 50번이 넘게 인연을
지었다. 이는 이곳이 지닌 상큼한 풍경과 포근하고 편한 분위기가 서로 어우러져 나를 이
곳의 충성 단골로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길상사는 성북동 북쪽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데 성북초교 직전 선잠단(先蠶壇)터에서 선잠
로를 따라 12분 정도 들어가면 절이 모습을 비춘다. 그 짧은 구간은 부자들의 으리으리한
금입택(金入宅)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현장으로 우리 같은 서민들은 보기만 해도 주눅
이 잔뜩 들고 편한 마음마저 사라지는 기분이다. 
이 땅에서 나날이 커져만 가는 빈부격차를 보여주듯 담장은 요새 같으며, 대문은 충차(衝
車, 공성무기의 하나)로도 어림 없을 정도로 견고하다. 또한 그것으로도 마음이 놓이지를
않는지 방범장치를 겹겹이 설치하여 지나가는 나그네를 항시 응시한다.
저택과 고급빌라 뜨락에는 담장 밖으로 손과 얼굴을 내민 나무들로 가득하며 도심과 가까
움에도 분위기도 차분하여 산책 코스로도 아주 좋다. 하여 나는 서울에서 가을이 가장 아
름다운 곳으로 성북동을 1순위로 꼽는다. 비록 서민들에게는 기분이 영 그런 곳이긴 하지
만 그렇다고 졸부들의 하찮은 위엄 앞에 지나치게 꼬리를 내릴 필요는 없다. 괜히 기죽지
말고 당당히 가슴을 피며 나들이객의 입장으로 산책을 즐기면 그만이다.
또한 성북동은 예로부터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의 명당 자리로 명성이 자자했다. 성북동
에 우리나라의 0.1%가 산다고 할 정도로 졸부들이 몰려든 것도 바로 명당(明堂)의 기운을
누리고자 함이다. 그러니 명당의 기운을 졸부나 상류층 따위가 다 누리도록 두지 말고 성
북동을 거닐면서 그 기운을 조금이나마 챙겨가기 바란다.


♠  길상화와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깃든 도심 속의 산사,
북한산 길상사(吉詳寺)

▲  길상사 극락전(極樂殿) 주변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이자 아늑한 산사(山寺)인 길상사는 저택과 고급 빌라가 쓸데없이 홍수
를 이루는 성북동 북쪽에 둥지를 틀고 있다. 비록 주택가에 터를 닦았지만 이곳이 북한산(삼
각산) 남쪽 자락에 해당되어 '삼각산 길상사'를 칭하고 있으며, 나무가 무성하고 계곡이 경내
를 가로질러 첩첩한 산골에 묻힌 산사의 분위기를 진하게 풍긴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절
풍경도 제법 아름답고 도심에 있음에도 공기도 청정하다. 경내는 포근하고 아늑해 중생의 마
음을 다독거려주고,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이채로운 볼거리가 두 눈을 호강시킨다.

길상사는 늙은 절도 아니고 그렇다고 문화유산을 품은 절도 아니다. 역사는 겨우 20여 년, 나
보다 한참이나 어리다. 이곳이 법등이 켜진 시간에 비해 유명세를 크게 탄 것은 군사정권 시
절 권력실세들이 들락거리던 고급요정에서 누구나 의지할 수 있는 절로 거듭난 전대미문의 현
장이며, 무소유(無所有)의 저자이자 불교계의 큰 승려로 추앙받는 법정(法頂)이 가꾼 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급요정을 기증한 김영한(길상화)의 이야기도 속인(俗人)들의 마음에 적지
않은 감동을 선사한다.

이곳을 키운 법정은 2010년 3월 11일 13시 52분께 78세의 나이로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다음
날 순천 송광사(松廣寺)로 운구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입적을 애도했다.


▲  창건주 김영한(길상화)의 영정 (극락전 내부 우측에 있음)

* 길상사의 창건주 김영한(金英韓, 1916~1999)의 생애와 길상사의 과거
길상사는 원래 성북동 서쪽에 자리한 삼청각(三淸閣)과 함께 고급요정으로 악명을 떨쳤던 대
원각(大元閣)이다. 군사정권의 실력자들과 대기업 고위간부들, 부유층들이 찾아와 기생을 끼
고 놀던 요정(料亭)으로 이곳을 세운 사람은 김영한<법명 길상화(吉詳花)>이다.

김영한은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이 일찍이 풍비박산이 났다. 그래서 16세에 궁중아악과
가무(歌舞)를 가르치던 하규일(河圭一, 1867~1937)의 문하로 들어가 진향(眞香)이란 이름으로
기생이 되었다. 그는 바다 건너 왜열도를 여행하다가 문학가로 유명한 백석(白石, 1912~1995)
을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그 당시 그는 조선일보 기자로 그녀를 자야(子夜)라 불렀다. 그들
은 혼인을 약속했으나 백석의 부모가 쌍수를 들고 반대하여 결국 이별하고 만다.

오기가 생긴 그는 악착같이 돈을 벌고 공부에 전념하여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
으며, 몇 편의 수필과 '내 사랑 백석','하규일 선생 약전' 등을 썼다. 또한 예전 기생을 했던
경력을 바탕으로 고급 식당을 차리고자 서울 주변을 물색하다가 계곡이 흐르는 지금의 길상사
자리에 좋은 예감을 얻어 이 일대를 사들여 청암장(靑岩莊)이란 한식당을 냈다. <성북동에 서
린 완사명월형의 명당 기운을 받으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잠시 다른 사람에게 운영을 맡기기도 했다가 이후 대원각으로 이름을 갈아 자신이 직접 챙겼
으며, 군사정권 시절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정권 실력자와 졸부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삼청
각, 청운각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고급 요정으로 우뚝 선다.

대원각 단골들이 정/재계에서 죄다 잘나가는 작자들이라 삽도 모자라 포크레인으로 돈을 쓸어
담을 정도로 대박 수입을 자랑했던 김영한, 허나 그는 혼인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돈과
명예를 위해 악착같이 살았던 그였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그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서서히 깨
달았고 그 와중에 법정의 '무소유'를 읽고 적지 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만나 여러 법문을 들었고, 결국 모든 것을 내놓기로 결심, 1987년 법정에게 절집
으로 써달라며 대원각을 통채로 기증했다. 허나 갑자기 뜬금없는 거액의 기증에 법정은 크게
펄펄 뛰며 거절을 했다. 당시 대원각의 면적은 7천여 평, 시가는 무려 1,000억원을 헤아렸다.

김영한은 8년 동안 끈질기게 기증의 뜻을 보였고, 결국 1995년 법정은 그곳을 받아 순천 송광
사(松廣寺)에 넘겼다. 송광사는 대원각을 대법사(大法寺)로 이름을 고치고 송광사의 말사(末
寺)로 삼았으며, 1997년 송광사의 옛 이름인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고 바로 그해 12월 14일 개
원법회를 열었다.
법회에는 천주교의 고(故)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시민, 불자 4,000여명이 구름
처럼 참석했는데, 법정의 이끌림에 대중 앞에 선 그는 자신의 부질없는 삶을 이렇게 드러내며
대중의 심금을 진하게 울렸다.
'저는 죄가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저쪽에 보이는 팔각정을 보면서)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요정시절 기생들)이 옷을 갈아입던 곳이었습니다. 제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길상사의 창건주가 된 김영한은 법정으로부터 길상화(吉祥花)란 법명(法名)과 함께 염
주(念珠)를 받았으며, 옛 사랑인 백석을 기리고자 2억 원을 내놓아 백석문학상을 만들기도 했
다.

이후 불교에 귀의하여 말년을 보내다가 1999년 11월 14일, 83세의 나이로 외로운 삶을 마감했
다. 그가 죽기 하루 전날, 절에 들어와 목욕재계하고 예불을 올리며, 길상헌에서 인생의 마지
막 밤을 보냈으며, 당시 길상사 주지 청학(靑鶴)에게
'내가 죽으면 눈이 내릴 때 절 마당에 뿌려주세요'
유언을 했다.

중생의 애도 속에 그의 육신은 산산히 화장되고 유골은 49재 이후 유언에 따라 첫눈이 절을
하얗게 채색하던 날,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그 자리에는 공덕비를 세워 그를 기리며,
매년 음력 10월 7일에 기제(忌祭)를 올린다. 또한 절은 그의 뜻을 받들어 대중에 널리 문을
열었고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해마다 30여 명의 중고생에게 장학금을 지원
하고 있다.

김영한은 막대한 재산을 가진 부자였지만, 돈을 신으로 받들며 사람 무시를 예사로 여기는 이
땅의 상당수 졸부들과 상류층과 달리 그 모든 것을 속세에 내버리고 빈털털이가 되어 인생을
마무리했다.
그는 자손도 없고 한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 지 20년이 넘었지만, 그의 눈물 어린 사
연과 함께 아름다운 넋과 마음은 여전히 그의 유작(遺作)이라 할 수 있는 길상사에 고이 깃들
여져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중생의 메마른 마음에 감동의 싹과 눈물을 틔우게 한다.

▲  김영한(길상화)이 숨을 거둔 길상헌

▲  길상화 공덕비

* 길상사의 현재
길상사의 불전(佛殿)은 지장전 등 일부를 제외하고 기존 요정 건물을 개조한 것이다. 경내에
는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해 지장전, 설법전, 종무소, 범종각, 길상선원, 유마선방, 침묵의집,
진영각 등 2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오래된 절이 아니다 보니 딱히 문화유산은 없
고, 다만 200년 정도를 헤아리는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뜨락에 그늘을 드리운다.

또한 시민운동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도량으로 매년 5월에 법회와 길상음악회를 연다. 법회
때는 고(故) 법정이 자주 법회를 주관했으며, 그를 보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길
상음악회는 다양한 테마의 음악을 선보이는 자선음악회로 여기서 나오는 수입은 어려운 이들
을 위해 쓴다고 한다.

휴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넓은 경내에 빈 공간이 없을 지경이며, 평일에도 적지 않게들
찾아와 길상사의 높은 인기를 보여주는데, 그 방문객 수는 서울 굴지의 고찰인 조계사, 봉은
사(奉恩寺), 도선사(道詵寺), 진관사(津寬寺) 다음급 정도는 될 것이다. (조계사가 방문객 수
는 단연 1등일 듯, 그 다음은 봉은사 정도)

* 길상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323 (선잠로5길68 ☎ 02-3672-5945)
* 길상사 홈페이지는 아래 법정 진영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길상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법정의 진영(眞影)


♠  길상사 일주문, 설법전 주변

▲  길상사 일주문(一柱門)

길상사로 들어서려면 '三角山 吉詳寺' 현판을 내민 일주문을 들어서야 된다. 이 문은 2000년
에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을 했는데, 정문을 들어서면 도심 속의 별천지 같은 길상사 경내가 1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고 장엄하게 펼쳐진다.


▲  늦가을이 잔잔히 깃든 경내
늦가을이 길상사와 이곳을 빛낸 인물들을 깊이 흠모했는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봉숭아물처럼 곱게 채색을 들였다.

▲  관세음보살과 성모 마리아를 섞은 길상사 관세음보살상

정문에서 설법전으로 가면 늘씬한 자태의 특이
한 석상이 눈길을 단단히 잡아맨다. 바로 관세
음보살상이다.
그런데 그 흔한 관세음보살처럼 생기지 않아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하는데,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어루만지는 어진 성모(聖母)와 같은 존
재라 아름답게 꾸며지는 경향이 강하지만 대부
분은 거기서 거기이다. 허나 이곳은 네모나게
다듬은 돌을 대좌(臺座)로 삼고 그 위에 소박
하고 날씬한 모습으로 곧게 서 있는데, 천주교
의 성모 마리아와 비슷한 이미지로 지어졌다.

이 보살상은 천주교 신자이자 우리나라 조각
계의 거장인 최종태씨가 만든 것으로 관세음보
살을 보살이 아닌 불모(佛母)로 삼아 만들면서
세상에 화제가 되었다. 2000년 4월 28일에 봉
안되었으며, 높이는 1.8m이다. 비록 보살상의
면모는 떨어지나 불교와 천주교가 서로 돕고
교류하여 이루어진 상징물로 그 가치는 크다.

머리에는 관세음보살이 필수로 쓰는 보관(寶冠)을 썼지만 그 모습은 서양식 왕관과 비슷하다.
머리결은 목 뒤쪽까지 내려갔으며, 얼굴은 자애로운 성모의 얼굴이다. 오른손을 들어 시무외
인(施無畏印)을 취했으며, 왼손에는 감로수가 든 정병(政柄)을 들고 있다. 그리고 손 아래쪽
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다.

대좌에는 다음의 메세지가 적혀있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길상사의 뜻과 만든 이의 예술혼이
시절인연을 만나 이 도량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모습을 보는 이마다 대자대비한 관세음보
살의 원력으로 이 세상 온갖 고통과 재난에서 벗어나지이다. 나무관세음보살'


▲  범종각 밑에 자리한 샘터

절을 찾은 중생의 목마름을 해소해주는 고마운 샘터로 가뭄과 겨울을 제외하고 늘 물로 가득
하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담아 한모금 들이키니 몸과 마음에 낀 때와 번뇌가 싹
씻겨 내려간 듯, 속이 시원하다.


▲  길상사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6호

길상사에는 2그루의 늙은 느티나무가 있는데, 윗 사진의 느티나무는 관세음보살 부근에 자리
한 것으로 오랜 세월을 양분으로 먹고 자라 제법 모습을 갖추었다. 경내에 선선한 그늘을 드
리우며 여름 제국도 나무의 기세 앞에 고개를 숙인다.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165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거의 200년 정도 되었으며 높이
는 12m, 둘레 2.5m이다.


▲  관세음보살 옆에 자리한 일그러진 표정의 마애불
커다란 돌에 새겨진 추상화 같은 선각마애상(線刻磨崖像)이 꽤 이채롭다.

▲  샘터 위쪽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이름 그대로 범종(梵鍾)의 보금자리로 길상화가 시주하여 만든 범종이
있었으나 2009년 9월에 새 종을 만들어 달았다.

▲  설법전(說法殿)

길상사 좌측 높은 곳에는 설법전이 자리해 있다. 설법전은 교육과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쓰이
고 있는데, 기존 요정 건물을 개조한 탓에 불전(佛殿)의 이미지보다는 거대한 한옥 민박집이
나 강당 같은 이미지가 강해 보인다.
깔끔하게 정비된 설법전 내부는 연병장처럼 매우 넓고 깨끗하며, 2000년 8월에 조성된 금동석
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  옆에서 바라본 설법전

▲  설법전 내부


▲  저보다 밝은 표정이 있을까? 미소를 한가득 품은 금동석가여래좌상

볼살이 푸짐한 그의 표정은 너무 환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두근거리며 그 모든 것이 금동으로
장엄되어 그 금빛에 두 눈이 멀 지경이다. 석가여래 주변에는 중생의 시주로 하나씩 올린 수
백 개의 작은 옥불(玉佛)이 석가여래를 석굴처럼 에워싸 대장관을 이루는데, 이들은 인도에서
가져온 옥으로 만들었다.


▲  길상사 유일의 석탑인 길상보탑(吉祥寶塔)

설법전 남쪽에는 2012년 11월에 장만한 길상보탑이 길상사의 새로운 명물을 꿈꾸고 있다. 4마
리의 석사자가 7층 탑신(塔身)을 받치고 선 이른바 4사자 7층석탑으로 그가 세워지기 이전에
는 길상사에 그 흔한 석탑도 없었다.
탑이 없는 허전함을 계속 간직하고 있다가 2012년 영안모자 회장이 길상화와 법정의 높은 뜻
을 기리고 길상사와 성북성당, 덕수교회가 함께 한 종교간의 교류의 의미를 널리 전하고자 탑
을 기증하였고 탑 안에 복장봉안품을 넣었다. 이후 2013년 8월 동남아 미얀마에서 1,600년 묵
은 늙은 탑을 해체하면서 나온 석가여래의 오색정골사리와 옹혈사리, 나한사리를 입수하여 탑
에 넣어두었다.
 
탑이 있는 이 자리는 '바람 속 향기' 쉼터가 있던 곳으로 자판기 길다방과 음료수, 조촐한 평
상이 있었는데, 탑에게 밀려나 2012년 10월 정랑 서쪽으로 거처를 옮겼다. 탑은 보통 법당 앞
에 세우기 마련인데, 이곳은 극락전(법당) 대신 경내 동쪽 구석을 내주어 탑을 세웠다. 그렇
다고 극락전 뜨락이 좁은 것도 결코 아닌데, 아마도 다른 탑을 염두에 두고 그러는 것은 아닌
지 모르겠다.


♠  길상사 극락전, 지장전

▲  극락전(極樂殿)

길상사의 법당인 극락전은 옛 대원각의 중심 건물로 'ㄷ'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건물 내부에
는 방이 꽤 많은데, 가운데 칸에는 극락전의 주인장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있고, 우측 칸에
는 길상화와 법정, 절에 의탁한 망자들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좌측 칸은 중생들
이 예불을 올리거나 쉬어가는 쉼터로 방이 꽤 넓다.
좌측 칸에서 챗바퀴처럼 돌아가는 속세를 잠시 잊으며 쉬어가는 재미가 꽤 쏠쏠한데, 미닫이
씩 방문을 조금 열고 밖을 바라보면 정말 집 주인이나 마님이 된 기분이다.


▲  극락전 금동아미타3존상

극락전 불단에 봉안된 아미타3존상은 길상사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1997년 11월에 조성되
어 12월에 봉안되었다. 길상사의 창건을 지켜본 존재로 인자함이 가득 깃들여진 표정으로 중
생을 맞이하고 있는데, 그의 오른쪽에는 육환장(六環杖)이란 지팡이를 든 지장보살(地藏菩薩)
이 있으며, 왼쪽에는 보관을 쓴 관세음보살이 나란히 자리해 아미타3존상을 이룬다.
두 협시불(夾侍佛) 역시 자애로운 표정은 아미타불 못지 않으며, 그들 뒤로 비슷한 시기에 제
작된 금니(金泥)후불탱화가 있다.


▲  극락전 우측의 돌문
궁궐이나 고급 한옥에서 볼 수 있는 품격 높은 돌문으로 옛 요정시절의
화려하면서도 어두웠던 시절을 아련히 전해준다.

▲  극락전 느티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3호
60~70년 정도 묵은 느티나무로 대원각 초창기나 그 이전에 싹을 틔운 것으로 보인다.
계림황엽(鷄林黃葉)처럼 누렇게 뜬 낙엽을 하나, 둘 떨어뜨리며, 허전한
극락전 뜨락을 덮어준다.

▲  코스모스의 마지막 물놀이 현장
그들 생애의 마지막 물놀이지만 그들의 표정은 명랑하기만 하다. 마지막 앞에서도
의연한 모습으로 웃음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이 마치 길상화 공덕주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듯 하다.

▲  길상사의 또 다른 늙은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5호

극락전과 지장전 사이에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인 느티나무가 둥지를 틀었다. 보호수로 지
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27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300~310년 정도 되었으며 높이는 12m, 둘레
3.2m 규모이다.


▲  지장전(地藏殿)

경내 서쪽에는 '나누는 기쁨'이란 찻집과 지장전이 있다. 설법전과 극락전이 기존 요정 건물
을 손질한 건물인데 반해 지장전은 새로 장만한 것으로 2004년 10월 17일, 상량식(上樑式)을
가져 2005년 5월 8일에 완성을 보았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우람한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은 밥을 먹
는 공양간인 선열당(禪悅堂), 2층은 도서관, 3층은 지장전이다. 건물 앞에는 보름달을 닮은
동그란 연못이 놓여져 있고 주위로 푸른 잔디가 곱게 입혀져 있으며, 건물 뒤에는 주차장이
있다.


▲  지장전 지장보살상

지장전 불단에는 고창 선운사(禪雲寺) 도솔암의 지장보살상을 모델로 삼아 만든 지장보살상이
밝은 미소로 중생을 맞이한다. 그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협시하
고 있으며, 붉은 색의 지장후불탱화가 그들의 든든한 후광(後光)이 되어준다.

◀  아미타불 염불이 잔잔히 울려퍼지는 지장
전의 숨겨진 복도 (영가들의 공간)

지장보살 불단과 그 앞에 펼쳐진 공간이 지장
전의 전부는 아니다. 불단 좌우로 보이는 문을
들어서면 불단 뒤쪽에 숨겨진 복도가 마치 보
물이 묻힌 비밀의 석실(石室)처럼 모습을 드러
낸다.
이곳은 죽은 이들, 즉 영가(靈駕)들의 공간으
로 그들의 이름이 적힌 위패가 빼곡히 자리를
채운다. 물론 이들도 돈을 받고 해준 것이다.
동쪽 벽에는 고운 색채로 치장된 석가3존상 벽
화가 그려져 있는데, 복도의 폭이 조금 좁다보
니 꽤 장엄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살아있는 이
의 심금을 자극시키며 잔잔히 흘러 나오는 아
미타불 염불(念佛)은 엄숙한 분위기를 유도해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  지장전 영가들의 공간에 그려진 벽화

황홀한 색채를 자아내는 벽화에 석가여래와 아리따운 모습의 관세음보살이 그려져 있다. 월출
산 무위사(無爲寺) 극락전의 후불벽화나 내소사(來蘇寺) 대웅보전의 후불관음탱화, 세계 최고
의 불화로 손꼽히는 고려불화처럼 현란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  '나누는 기쁨' 찻집

지장전 좌측에 자리한 '나누는 기쁨' 찻집은 녹차와 매실차, 국화차 등 두 귀에 익은 전통차
를 팔고 있다. 길상사 찻집으로도 불리며 보통 16~17시까지 운영하는데, 차의 가격은 인사동
이나 삼청동의 절반 정도 수준이다. 예전에는 리필이 가능했으나 요즘에는 거의 안해주는 편
이며, 가격도 괜찮은 수준이니 잠시 발길을 멈추고 차 1잔의 여유를 누려보는 것도 괜찮다.


▲  계곡 건너 숲속에 묻힌 길상헌(吉詳軒)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요정 시절에는 길상화와 요정 식구들이 생활했다.
김영한이 마지막 밤을 지내며 인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며, 건물 주위를
돌담으로 둘러싸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임을 귀뜀해준다.


경내 우측(일주문을 들어서는 기준으로 왼쪽)은 좌측과 달리 자연의 비중이 꽤 높다. 나무들
이 무성하게 숲을 이루고 있으며, 북한산(삼각산) 남쪽 줄기(정릉 뒤쪽 산줄기)에서 발원한
계곡은 길상사 서쪽을 가로질러 성북천(城北川)으로 흘러간다. 나무로 우거진 언덕에는 조그
만 집들이 가득한데, 이들은 요정 시절 손님 접대 공간으로 지금은 승려 참선 및 처소로 쓰인
다.

제법 풍치가 깃들여진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3개 있는데, 먼저 다리를 건너면 어른 승려가 머
무는 길상헌이, 그 다음 다리를 건너면 길상화의 공덕비가 있다. 그 다음 다리는 나무그늘과
조그만 집들로 이어진다. 경내 북부에는 법정을 기리는 진영각과 승려의 생활공간이 있으며,
극락전 뒤쪽에는 침묵의집, 길상선원, 유마선방 등이 빼곡히 자리를 채운다.


♠  길상사 마무리

▲  창건주 길상화(김영한) 공덕비 (예전 모습)

길상화 공덕비는 창건주 길상화를 기리고자 그의 2주기인 2001년에 세웠다. 비석을 칭하고 있
지만 앞서 관세음보살상처럼 이형(異形)적인 모습이며, 비석 머리에는 사발 2개를 포개놓은
듯한 장식물이 눈길을 끈다.
길상화가 1999년 11월 숨을 거두자 그의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한겨울에 이곳에서 그의
유골을 뿌렸다. 

나도 나중에 졸부들 못지 않은 대부자가 된다면 길상화가 그랬던 것처럼 인생 말년에 모든 것
을 세상을 위해 내놓을 수 있을까..? 그 물음에 '그렇다'는 대답은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보
다는 우선 돈좀 왕창 벌어 정승처럼 써보고 싶다. 부자가 되야 길상화를 따라하지 지금 같은
서민 신세에 그렇게 따라하면 큰일난다. 뱁새가 괜히 황새를 따라하다가는 가랭이가 절단나는
법이다.


▲  길상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곡

이 계곡은 정릉(貞陵) 뒷산에서 발원하여 성북천으로 흘러가는 것으로 약간의 인공이 더해졌
을뿐,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야말로 길상동천(吉詳洞天)을 칭해도 손색이 없는 수려한
풍경이다. 김영한은 바로 이 계곡에 매료되어 이곳을 매입해 대원각을 지었다고 전한다.

계곡 바위는 신선(神仙) 세계에서 몰래 슬쩍한 듯 멋드러진 모습을 자랑한다. 조그만 폭포도
2개 정도 있는데, 물줄기가 실타래처럼 가늘어 속세의 삶처럼 너무 답답하기만 하다.


▲  경내 북서쪽 언덕에 터를 닦은 집들 - 승려의 참선 및 처소로 쓰인다.

▲  경내 북쪽 산책로

경내 북서쪽에는 자연의 내음이 진하게 풍기는 산책로가 그림처럼 펼쳐져 번뇌의 염통을 잠시
나마 쫄깃하게 만든다. 보통은 절로 들어가는 길이 멋드러진 경우<월정사(月精寺) 전나무 숲
길, 내소사(來蘇寺) 전나무숲길>는 많으나 이곳처럼 경내에 어여쁜 길을 둔 경우는 그리 흔치
는 않다. 자연이 어우러진 이 산책로야말로 길상사의 자랑거리이자 얼굴이다,


▲  길상사 진영각(眞影閣)

경내 북쪽 구석이자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진영각은 법정의 진영을 봉안한 건물로
그의 유품이 전시되어있다.
이 집은 원래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행지실(行持室)이라 불렸는데, 2012년 7월부터 법정
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손질하여 11월에 마무리를 보았다. 그가 살았던 강원도의 오두막(수류
산방)에서 쓰던 유품을 비롯해 신도들이 기증한 저서와 서적을 모았고, 개방을 하지 않고 보
류하다가 그의 3주기인 2013년 3월 7일(음력 1월 26일)에 진영 봉안식을 봉행하면서 비로소
속세에 문을 열었다.

비록 늦긴 했지만 법정을 기리는 공간은 필요로 했다. 그의 손에서 자란 길상사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겠지. 그러고 보면 이 절을 탄생시킨 길상화를 위한 건물도 하
나 있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 그의 영정과 유품을 전시해 법정과 더불어 길이길이 기렸으면
좋으련만, 아무리 법정이 이 절을 키워도 길상화가 아니었다면 길상사 자체는 없었다. 너무
법정만 띄우지 말고 길상화도 그에 못지 않게 1:1 비율로 띄워주기 바란다. 그게 길상사의 마
땅한 도리이다.


▲  진영각에 봉안된 법정의 진영

법정 진영은 김호선 화백이 2011년 3월부터 1년 2개월 동안 정성을 다해 그린 것이다. 전 문
화재청장이던 유홍준이 이 그림을 보고 스님이 그림을 뚫고 뚜벅뚜벅 걸어나올 것 같다고 평
가를 했는데, 서예가로 유명한 여초 김응현의 제자인 승려 기현(奇玄)이 진영의 글씨와 진영
각 현판을 썼다.


▲  법정의 사진과 유품, 온갖 서적들

▲  법정의 승려증과 건강보험증 (주민번호도 나와 있음)

▲  법정 관련 서적과 그가 쓰던 다기(茶器)들

▲  법정의 유품들 (불상과 그림, 모자 등)

▲  법정의 유품들 (승복, 염주, 법계증)

▲  법정의 법계증(法階證)


▲  법정의 유골이 뿌려진 곳

무소유의 소유자답게 그의 마지막 안식처는 참 조촐하기만 하다. 제자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그 흔한 승탑(僧塔, 부도탑)도 두지 않고 길상화가 그랬던 것처럼 자연의 일부로 돌아갔기 때
문이다. 조그만 안내문과 돌탑, 그리고 그의 넋을 먹고 자란 꽃과 풀이 그의 영혼터임을 알려
준다.


▲  길상선원(吉祥禪院) 앞길
길상선원은 시민들을 위한 참선 공간으로 선원장(禪院長) 승려의 지도로
참선이 이루어지는 좌선방(坐禪房)이다.

▲  길상선원 부근에서 만난 법정의 어록

▲  여염집 분위기 같은 적묵당(寂默堂)
신행단체 법회장소 및 석가탄신일 연등 작업 등 여러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예전에는 유마선방(維摩禪房)이라 불렸으나 2012년에 적묵당으로
간판을 갈았다.

▲  적묵당 앞 동그란 연못 (가을)
물이 태산처럼 고인 연못에는 한 세상 진하게 살다간 연들이
쓸쓸히 잎을 접고 있다.

▲  길상선원에서 설법전으로 가는 길 - 동네 골목길 같다.

▲  침묵(沈默)의 집

침묵의집은 중생들이 자유롭게 참선을 하거나 명상을 즐길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오전 10시
부터 17시(일요일은 16시부터 17시까지)까지 이용할 수 있으며, 최대 인원은 8명, 인원이 찼
을 경우는 방이 빠질 때까지 목이 빠져라 기다려야 된다.

길상화의 숭고한 뜻과 법정의 무소유 정신, 중생구제를 향해 고행도 서슴치 않았던 석가여래
와 관세음보살 누님, 지장보살 형님의 고귀한 뜻에 따라 세상이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 오로
지 중생을 위해 헌신하며, 세속과 겉멋에 물들지 않는 순수의 불교 도량이자 도심 속의 극락,
길상사로 남기를 고대하며 본글을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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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한복판, 서촌(웃대) 봄나들이 ~~~ 옥인동 박노수미술관(박노수가옥), 윤동주하숙집터

서촌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윤동주 하숙집터



' 서촌의 한복판을 거닐다 '
(박노수미술관~윤동주 하숙집터)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박노수가옥)
▲  옥인동 박노수 가옥



 

봄이 한참 익어가는 4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경복궁(景福宮) 서쪽에 자리한 서촌을 찾았
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깃든 서촌(西村)은 부암동(付岩洞)과 백사실(백사골), 북촌(北村
), 북악산(백악산), 인왕산(仁王山), 북한산(삼각산), 호암산(虎巖山), 아차산 등과 더불
어 내 마음을 제대로 앗아간 곳으로 봄이 겨울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면서 다시금 서촌앓
이가 시작되었다.

서촌은 경복궁과 인왕산, 서대문(돈의문) 사이를 일컫는다. 서촌의 중심지로 꼽히는 인왕
산과 경복궁 사이 동네는 원래 웃대라 불렸으며,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을 병풍으로 삼
아 경관이 아름답고 계곡이 즐비해 조선 초부터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지로 인기가 높았다.
양반들 외에 중인(中人)들도 많이 살았으며, 왜정(倭政) 이후에는 윤동주와 이상(李霜),
박노수 등 문학가와 미술가들이 많이 정착하여 현대 예술/문학의 성지로 격하게 떠오르기
도 했다.
특히 조선 4대 군주인 세종(世宗)이 태어난 인연(1397년 출생)을 내세워 세종마을을 칭하
기도 하는데, 서촌의 명성이 나날이 높아지자 없어지기 바뻤던 한옥들도 다시금 늘어나기
시작했고, 서촌을 수식하는 옛 명소를 비롯하여 통인시장과 금천교시장(세종음식거리) 등
의 전통시장도 손질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특히 시장은 서촌을 뛰어넘어 도심의 대표적인
전통시장이자 먹자 골목으로 1주 내내 북적거린다. 또한 서촌에 살던 남정 박노수 화백은
자신의 집과 유물을 흔쾌히 기증하면서 지금은 종로구립미술관으로 거듭나 서촌의 대표급
명소로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본글에서는 서촌의 꿀단지가 된 박노수 가옥과 윤동주 하숙집터만 다루도록 하겠다.



 

♠  서촌의 새로운 활력소이자 근대 화가 박노수의 삶터,
옥인동 박노수 가옥(玉仁洞 朴魯壽 家屋)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호

▲  미술관으로 쓰이는 박노수 가옥

서촌 한복판에 자리한 통인시장에서 옥인길을 따라 수성동계곡으로 가다보면 오른쪽(북쪽) 골
목 속에 서촌의 상큼한 명소로 등극한 박노수 가옥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집 이름 그대로 우
리나라 미술계의 원로이자 현대 화가인 남정 박노수의 집으로 인근 이상범(李象範) 가옥과 함
께 현대 미술의 산실이었으며, 2013년 9월 이후 속세에 개방되어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이
하 미술관)'으로 새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이야 속세에 공개된 현대 화가의 옛 집이자 미술관으로 입장료만 주면 누구든 안길 수 있
지만 이 집의 태생은 그리 곱지는 못했다. 바로 친일매국노로 추잡한 이름을 날린 윤덕영(尹
德榮, 1873~1940)이 지은 집이기 때문이다.

윤덕영은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큰아버지로 왜정(倭政)에 적극 협
력하여 나라를 팔아먹고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며 배때기에 기름칠 했던 매국노이다. 그와 같
은 시대를 살았고 친일파로 안좋은 뒷끝을 보인 윤치호(尹致昊) 조차도 '이 비열한 매국노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웹스터 사전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라며 그의 만행을 꼬집
었다.
허나 사람이기를 포기한 윤덕영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온갖 손가락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
갖 이권에 개입해 배때기를 불렸고, 집과 땅 욕심도 가히 징그러운 수준이라 송석원(松石園)
을 비롯한 옥인동 일대를 사들여 고래등 양옥 별장인 벽수산장(碧樹山莊)을 짓고, 그 주변에
가족과 첩들을 수용할 14동의 고래등 한옥을 지었다. 박노수 가옥은 그 14동의 하나로 딸과
사위를 위해 이 땅 최초의 근대 건축가인 박길룡(朴吉龍)에게 의뢰하여 1937년경(또는 1938년
)에 지은 것이다.

그런데 박노수 가옥과 미술관 안내문, 홈페이지에도 윤덕영이 지었다는 내용이 모두 빠져있다.
그저 박길룡이 1937년경에 지은 절충식 가옥이라는 점만 강조하고 있다. 윤덕영의 이름 3자가
보기에도 암이 걸릴 지경이고 듣기에도 고약하지만 그렇다고 엄연히 있는 사실을 빼먹는 것도
박노수를 위해서라도 그리 옳지는 못하다.


▲  세상을 향해 활짝 문을 연 박노수 가옥(미술관) 대문

이 가옥은 한옥 양식과 중원대륙 양식, 서양식이 뒤섞인 이른바 절충식 기법의 가옥이다. 2층
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벽돌 건물로 반지하층을 가지고 있으며, 붉은 벽돌로 된 1층에는 온돌
방과 마루, 복도, 응접실이 있고, 하얀 피부로 이루어진 2층은 나무 구조로 지어졌는데, 계단
을 중심으로 마루로 된 방이 널려있다.
그리고 벽난로 3개를 설치하여 온기가 머물 공간을 확보하였고, 집 서쪽에 현관을 두었으며,
벽돌로 포치를 설치하여 집의 운치를 더욱 높였다. 지붕은 서까래를 노출한 단순 박공지붕으
로 되어 있으며, 2층의 증축 부분을 빼면 거의 원형 그대로 잘 남아있다.

박노수가 매국노의 악취가 진동하는 이 집에 들어온 것은 1973년이다. 왜 이곳을 골랐는지는
모르겠으나 스승인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의 집과도 가깝고, 집의 모습도 중후하고 운치가
진해 예술가의 집 분위기로는 아주 좋아 보인다. 게다가 뜨락도 넓고, 인왕산도 가깝고, 도심
과도 매우 가까우니 시내 왕래가 잦았던 그에게도 딱 적당한 장소였을 것이다.
남정은 이곳을 집과 화실로 삼으며 많은 작품을 그려냈으며, 그의 예술적이고 꼼꼼한 손맛이
담긴 뜨락에는 그가 수집했던 수석과 석물, 문화유산을 비롯해 다양한 꽃과 나무를 심어 자연
과 문화, 수석이 어우러진 아주 참한 공간으로 꾸몄다.
 
왜정 때 박길룡이 설계한 건물로 당시 건축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고, 현대 미술화가
인 박노수가 40년 가까이 머물며 작품 활동을 벌였던 현장이라 윤덕영이라는 친일파 괴물이
만든 건물임을 무릅쓰고 1991년 5월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그것도 1호라는 그럴싸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 점이 참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데 1호나 2호, 100호 등은 그저 지정된
번호일 뿐 가치 순위는 아니기 때문에 그리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1호만큼은
신중해야 된다고 본다. 국보 2호는 몰라도 1호는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1호의 의미는 각별하
기 때문이다.
해방이 된지 80년이 되도록 친일매국노 청산은 커녕 그것들이 더 활개치고 있는 이 땅의 현실
을 이 가옥이 보여주는 듯 싶어 마음이 참 쓰라리다.

만약 윤덕영의 후손이 염치없이 계속 서식하고 있었다면 화염병이나 폭탄을 던져 없는 화마(
火魔)라도 억지로 소환해 집과 함께 날려버려야 마땅하겠으나 박노수가 이곳에 살면서 집에
일종의 면죄부가 붙었으니 굳이 때려부실 필요는 없을 것이다. 허나 문화재 지정 후순위로 두
어 천천히 지정을 하던가 등록문화재로 삼는 것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도 살짝 든다.


▲  무늬가 살아있는 석조대좌(臺座)의 위엄 (현관 앞)
무엇을 받치던 대좌였길래 무늬가 저렇게 요염한 것일까? 허나 대좌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채 망연히 뜨락 장식물의 일원이 되었다.
정체성과 역사를 잃어버리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남정 박노수(藍丁 朴魯壽, 1927~2013)의 간략한 생애
박노수는 1927년 2월 17일 충남 연기군(현재 세종시)에서 태어났다. 1940년대에 청전 이상범
의 문하로 들어가 그림을 배웠으며, 해방 이후 서울대 회화과에 진학했다.

그의 작품활동은 주로 국전(國展)에서 이루어졌는데, 1953년 국무총리상, 1955년에 대통령상
을 받았으며, 1957년에는 추천작가를 지냈다. 이후 5.16민족상, 3.1문화상, 대한민국 문화훈
장 등을 받았고, 이화여대(1956~1962)와 서울대(1962~1982)에서 교수를 지냈다.
이후 서울대 명예교수가 되었고,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운영위원을 역임했으며, 1995년
자랑스러운 서울시민 6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왜열도 동경과 스웨덴, 미국에 다수의
국제전과 10여 회의 국내외 개인전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화제를 취하면서도 간결한 문필과 강렬한 색감, 대담한 터치 등 독자적
인 화풍을 구축해 전통 속에서 현대적 미감을 구현한 작가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대표작으로
는 '달과 소년'이 있으며, 많은 작품이 이 미술관에 진열되어 속인들의 정처없는 안구와 마음
을 다독거려준다.

남정은 1973년부터 2011년 말까지 이곳에 살았다. 2011년 죽음이 임박해진 박노수는 집과 소
장품 등 재산의 상당수를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심했다. 하여 그해 11월 11일 자신의 집에서
미술계 인사와 후배들, 제자들, 종로구청 관계자 등이 모여 기증협약식을 갖고 약속대로 집과
소장품을 미련 없이 종로구청에 기증했다.
그가 넘긴 물건은 그의 그림을 포함한 미술 작품 500점, 수석과 여러 석물 379점, 오래된 가
구 66점, 개인 소장품 49점 등 총 994점으로 그의 통 큰 기증은 서민의 쪽박까지 빼앗으려 드
는 졸부와 위정자들로 가득한 이 땅에 한줄기 빛과 같은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가 베푼 대인
의 기운은 친일파 집이라는 굴레를 지닌 이 가옥을 180도 달리 보이게 하는데 충분했다.

종로구청은 남정의 뜻에 따라 기증받은 집을 종로구립 미술관으로 꾸미기로 하고 2012년 10월
에 개관하기로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못해 1년 연기되었다. 그 사이 남정은 그의 소망이던 미
술관 개관을 끝내 지켜보지 못하고 2013년 2월 25일, 86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뜨고 말
았다.
그가 간 이후, 유족과 종로구청의 노력으로 남정의 손때와 예술혼이 서린 그의 집은 2013년 9
월 11일,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 세상에 문을 열었다. 개관 기
념전으로 그의 대표적인 작품을 모아 '달과 소년전'을 가졌으며, 종로구 최초의 구립 미술관
으로 이곳이야말로 남정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유작이자 아름다운 선물이다.

나는 근/현대 미술가에는 그리 관심이 없다보니 왜정과 현대를 거쳐간 원로 화가의 하나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의 깊은 부분까지 파고드니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못지 않은 대인으로
그의 이름 3자가 제법 크게 다가온다.


▲  남정의 손에 이끌려 이곳에 정착한 잘생긴 수석들

▲  미술관 개원 기념으로 종로구청장이 남정에게 바친 메세지

▲  미술관 남쪽 뜨락 (동쪽에서 본 모습)

박노수 가옥은 크게 미술관으로 변신한 2층 가옥과 남쪽 뜨락, 그리고 북쪽 벼랑에 설치된 전
망대로 이루어져 있다.
남쪽 뜨락에는 남정이 수집한 갖은 석물과 문화유산, 수석 등이 가득 흩어져 있고, 소나무와
감나무 등 여러 나무와 꽃이 뿌리를 내려 조촐하게 자연과 문화가 잘 버무려진 야외 전시장을
이루고 있다. 특히 그는 수석 취미가 대단하여 뜨락 안팎으로 수석들이 가득한데, 군침이 돌
정도로 잘생긴 돌도 적지 않으며, 그가 도안해서 만든 돌덩어리 원탁과 의자 6기는 가족과 벗
, 제자/후배들과 이야기꽃을 피웠던 정겨운 현장이다.

▲  남정이 도안해서 만든 견고한
돌덩어리의 원탁과 의자

▲  비석의 지붕돌인 가첨석(加檐石)


▲  귀여움과 고색의 때가 묻어난 조그만 호랑이상
어디서 데리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선 후기 작품으로 여겨진다.

▲  머리 위에 또다른 머리 장식을 둔 특이한 석등(石燈)
피부가 반질반질하고 머리 장식이 특이한 흔치 않은 석등으로 그의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다. (조선이나 왜정 때 조성된 석등 같음)

▲  남정이 모은 자연산 수석들

▲  키 작은 두충나무와 향로석(왼쪽)
두충나무는 중원대륙이 고향으로 최대 자랄 수 있는 높이는 10m이다. 혈압
강하와 진정/진통 작용에 효과가 좋아 한약재로 많이 쓰이며,
10~11월에 열매가 핀다.

▲  물을 머금은 조그만 돌항아리(돌확)

▲  아직까지 겨울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련한 감나무

▲  양옥란(洋玉蘭)이라 불리는
태산목(泰山木)

▲  뜨락 구석에 자리한 어느 문인석

▲  고된 세월을 머금은 커다란 수석


▲  현관에서 나그네를 마중하는 목조 동자상
이들은 불교식 동자상으로 세월이 달아놓은 주름으로 빛이 좀 바래 보이지만
앳된 표정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  가옥 현관과 여의륜(如意輪) 현판의 위엄

박노수 가옥(미술관)은 포치가 달린 현관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된다. 현관문에서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타면 되는데, 반지하층을 제외한 1층과 2층 상당수의 방이 개방되어 있다.
1층에는 미술관 사무실이 있고, 박노수의 생애와 그림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달과
소년'을 비롯한 박노수의 그림은 주로 2층을 장식하고 있다. (내부 촬영은 통제됨)

현관문에는 한자로 쓰인 여의륜 현판이 걸려있다. 글씨가 꽤 큼지막하고 패기가 넘치는 모습
으로 옛 박노수의 집에 있으니 그의 글씨로 착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친필이다. 현판에 담긴 여의륜이란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 세간(世間), 출세간 이익을
더하는 것을 본뜻으로 하는 보살(菩薩)을 의미하는 말로 추사가 말년에 불교에 관심을 가지면
서 서울 봉은사(奉恩寺)와 봉원사(奉元寺), 팔공산 은해사(銀海寺), 해남 대흥사(大興寺) 등
천하의 유명한 절을 많이 돌아다니며 많은 글씨를 남겼다.

현판 우측에는 '승연노인(勝蓮老人)'이란 낙관이 찍혀있는데, 승연노인은 추사의 다른 아호(
雅號)이다. 이 현판을 손에 넣은 박노수는 현관문에 걸어두어 현관부터 미술가의 집 분위기를
진하게 우려냈다.


▲  현관에 놓인 수석
바다에 두둥실 떠있는바위섬의 축소판 같다. (그러고보니 독도와도 비슷하게 보임)

▲  현관 주변에 놓인 수석들

▲  뚜껑이 닫힌 죽은 우물
친일파 윤덕영의 딸 내외와 박노수 가족의 목을 축여주었던 우물로
주변 개발로 수맥이 끊기면서 이제는 껍데기만 남았다.

▲  가옥 동쪽 창고 옆에 자리한 조그만 웅덩이
붉은 빛을 띈 작은 잉어들이 꼬랑지를 휘날리며 웅덩이를 순찰한다. 이 웅덩이는
박노수가 물고기를 기르며 작품을 구상하던 공간으로 웅덩이 위에 걸쳐진
석물의 조각이 마치 살아있는 담쟁이덩굴을 보듯 섬세하고 아름답다.

◀  집 동쪽에 솟아난 늘씬한 소나무
박노수가 생전에 심은 나무로 하늘과 가까운
줄기 끝에 소나무 잎이 덩어리로 몰려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나무의 높이는
거의 가옥 2층 정도 된다.


▲  북쪽 벼랑 전망대로 인도하는 계단

가옥 북쪽에는 수풀이 우거진 가파른 벼랑이 있다. 예술과 문학의 향이 깃든 가옥답게 대나무
도 삼삼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벼랑에 계단과 숲길을 내었고, 그 길의 끝에는 무려
전망대까지 두었다. 아무리 큰 기와집이나 근대 양옥이라고 해도 뜨락에 전망대까지 둔 경우
는 찾아보기가 힘든데, 집 북쪽이 언덕이라 그 경사를 활용해 숲길과 전망대를 설치하고 중간
중간에 석물을 배치해 고즈넉한 산책로를 내었다. 이 언덕 산책로와 전망대야말로 박노수 가
옥만이 가진 강한 매력이자 백미라 칭할 만하다.

산책로 입구에는 고색의 때가 자욱한 조그만 석인이 홀을 쥐어들며 안내인처럼 자리하고 있다.
제자리를 잃고 방황하는 그를 남정이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인데, 고향을 잃은 충격 때문일까
? 석인은 좀처럼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긴 이곳에 이끌려온 석조 문화유산 모
두 제자리를 잃은 가련한 처지이다. 사람이 들을 수 없는 그들만의 속삭임으로 고향을 잃은
동병상련의 한을 달래지는 않을까?
투박하게 닦여진 돌계단을 오르면 북쪽으로 난 아주 짧은 샛길이 있는데, 대나무로 둘러싸인
그곳에는 돌의자가 놓인 조그만 쉼터가 있다. 그리고 숲길을 마저 오르면 나무로 지어진 전망
대(전망데크)가 나타난다.

▲  대나무에 감싸인 북쪽 샛길 쉼터

▲  숲길에서 만난 석등


▲  숲길 끝 벼랑에 자리한 전망대
숲길과 돌의자, 석물은 박노수 시절의 것이고, 전망대는 2013년에 단 것이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가옥의 뒷모습과 지붕
건물의 모습은 양옥이지만 지붕만큼은 거의 한옥 스타일이다. 매국노 윤덕영이
14동의 한옥을 지을 때 자신의 살 벽수산장을 제외하고 모두 한옥으로
지었으면서 왜 딸의 집만 이렇게 이채로운 모습으로 지어주었을까?

▲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가옥 굴뚝
지붕에는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굴뚝 5개가 뿔처럼 솟아나 집의 멋스러움을 한층
수식한다. 1층 지붕에는 2개, 2층에는 3개가 달려있는데, 이중 3개는
벽난로용, 나머지는 부엌용이다.

▲  현관 앞에서 바라본 미술관 정문
조금씩 숨겨진 끼를 드러내며 경쟁자 북촌을 긴장시키는 서촌, 박노수 미술관은
바로 그 서촌의 새로운 활력소이자 허브이다. 평일임에도 제법 많은 이들이
찾아와 짧은 시간에 비해 너무 떠버린 이곳의 높은 인기를 실감케 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68-2 (옥인1길 34, ☎ 02-2148-4171)



 

♠  너무 일찍 져버린 천재 시인 윤동주(尹東柱)의 하숙집터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에서 수성동계곡으로 조금 가면 길 왼쪽(남쪽)에 윤동주하숙집터를 알
리는 금색 피부의 안내문이 있다. (종로구 누상동 9번지)

※ 윤동주(1917~1945년)의 간략한 생애
윤동주는 왜정 시절의 대표급 시인으로 그의 이름 석자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중/
고등학교 국어/문학 교과서에 서시를 비롯한 그의 굵직한 작품들이 정말 지겹게 나오니 말이
다. 지금도 이름이 또렷한 윤동주는 1917년 12월, 두만강(豆滿江) 이북인 북간도(北間島) 명
동촌(明洞村)에서 윤영석()과 어머니 김룡()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대랍자()학교를 다니던 중 용정(龍井)으로 이사를 가면
서 1933년 그곳 은진()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다가 1935년 조선 본토로 넘어와 평양 숭
실(崇實)중학교에 들어갔으나 신사참배 문제로 왜정에 의해 강제로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다
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남쪽으로 내려와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 문과에 진학하여 1941년에 졸업했는데, 학
교 기숙사의 식사가 부실해지면서 후배 정병욱(鄭炳昱)과 함께 누상동에 하숙집을 얻어 잠시
살다가 그해 5월 그믐날에 다른 하숙집을 알아보고자 옥인동으로 내려오던 중, 우연히 전신주
에 붙어있던 하숙집 광고 쪽지를 보았다.
하여 그 집을 찾아가니 문패에는 '김송(金松)'이라 쓰여 있었다. 마침 그는 소설가 김송을 존
경하고 있었는데, 설마 그 김송? 생각하며 문을 두드리니 글쎄 그 김송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김송 집에 들어가 4개월 정도(1941년 5월~9월) 하숙을 했는데, 저녁 식사가 끝나
면 김송 가족과 대청에서 차를 마시며 음악을 즐기거나 문학 이야기를 나누었고, 때로는 성악
가인 김송 부인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듣기도 했다.
김송 집에 머무는 동안 인근 자하문고개를 수시로 올라가 시를 구상했다고 하며, 그 현장이
바로 윤동주시인의 언덕이다. (☞ 관련글 보러가기) 또한 이때 많은 시가 쓰였는데, 마음을
주고 받는 글벗이 곁에 있고, 자신이 존경하는 이의 집에 머물며 그의 가족에게 호의를 받으
니 마음도 흔쾌히 즐거워 덩달아 작품 구상도 잘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붓도 흥분하여 좋은
시가 나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1941년 9월, 김송과 작별하고 왜열도로 넘어가 동경(東京) 릿쿄(敎)대학 영문과에 들어갔으
며, 1942년 도시샤대학(同學) 영문과로 자리를 옮겼다. 허나 1943년 7월 학업을 멈추고
잠시 고향으로 가다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왜경에 급히 체포되었다.
왜경은 그에게 변론의 기회도 제대로 안주고 징역 2년형을 때려 후꾸오카 형무소에 집어넣었
는데 거기서 잔인한 생체 실험의 희생자가 되어 결국 해방을 목전에 둔 1945년 2월, 회한의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28세였다. 목격담에 따르면 그는 정체를 알 수 없
는 주사를 계속 강제로 맞았다고 하니 결국 왜국의 비인간적인 만행에 천재시인 윤동주는 제
대로 꽃도 피우지 못하고 강제로 눈을 감게 된 것이다.

윤동주는 그의 조부(祖父)의 영향으로 시에 천재적인 소질을 발휘했다. 그의 동생인 윤일주(
)와 당숙인 윤영춘()도 시인이었다고 하니 그의 집안은 문학적 소질이 다분한 지
식인 집안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15살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첫 작품은 '삶과 죽음'과 '초한대'이다. 이후 '병아리(
1936년 11월)','빗자루(1936년 12월)''오줌싸개 지도(1937년 1월),'무얼 먹구사나(1937년 3월
)','거짓부리(1937년 10월)' 등을 간도 연길(延吉)에서 발간된 '카톨릭소년'이란 잡지에 소개
했다.
연희전문대학 시절에는 조선일보에 '달을 쏘다'를 냈고, 학교 교지 '문우(文友)'에 '자화상'
,'새로운 길' 등을 실었다. 그리고 '쉽게 쓰여진 시'가 1946년 경향신문에 실렸다.

누상동(樓上洞) 김송의 집에서 하숙을 하던 1941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제목으로 시
집을 내려고 했으나 내지 못하고 대신 3부를 필사해 정병욱과 이양하(李敭河)에게 1부씩 증정
했다.
바로 그 시집의 서문(序文)으로 지어진 것이 그 유명한 서시로 1948년에 이르러 정병욱과 윤
일주에 의해 정음사에서 출간되었다.

그의 시는 청소년 시절에 지은 시와 성년 이후의 시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청소년기에 쓰여진
시들은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고 대체로 어린 시절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
다. 대표작으로는 '겨울'과 '버선본' 등이 있다.
그리고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자아성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왜정 시절 민족의 암
울한 역사성을 담은 시가 주류를 이루니 '서시','자화상','또 다른 고향','별헤는 밤'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대표 시로 어둠의 시절에 깊은 우수 속에
서도 티없이 순수한 인생을 살아가려는 그의 내면 세계를 표현했다.

그는 비록 뜻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그의 시는 우리
나라 뿐 아니라 왜열도와 중원대륙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적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특히 그가 다닌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에는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어 해마다 많은 이
들이 헌화를 하고 그를 기린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아시아를 뛰어넘는 세계 문학계
의 큰 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윤동주가 세상을 뜨자 그의 시신을 간도 용정으로 옮겨 묘를 썼다. 허나 그 무덤도 한때 위치
를 몰라 방황하다가 연길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온 왜인 교수의 노력으로 간신히 묘비를 찾았다
. 이후 우리나라와 중원대륙를 점거한 공산당 정부가 국교를 맺자 가족들은 봉분을 단장하고
묘비도 새로 세웠으며, 그의 명동촌 생가는 1994년에 복원되었다. 또한 그가 다닌 명동소학교
는 윤동주 관련 단체의 지원으로 옛 건물을 복원하여 윤동주기념관으로 거듭났다.

우리나라에 참으로 굵직한 시인들이 많지만 윤동주만큼 인기와 사랑이 큰 시인도 손에 꼽을
것이다. 우리나라를 넘어 다른 나라에서도 그의 팬들이 많으니 말이다. 비록 왜의 잔악무도한
만행으로 일찍 눈을 감았지만 그의 작품을 통해 그의 혼은 우리들 마음 속에 길이길이 깃들여
져 있으며,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히 적셔주는 영원한 문학신(文學神)이다.

김송의 집은 개량한옥으로 1970년대까지 있었으나 이후 개발의 이슬로 사라지고 현재는 3층
주택이 들어섰다. (안내문 사진에 1970년대에 찍은 김송집과 앞 골목길이 나와있음) 그나마
윤동주하숙집터 안내문도 2014년 이후에 비로소 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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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맞춤의 고장, 안성 죽산 나들이 ~~~ 태평미륵(매산리석불입상), 죽주산성, 비봉산

안성 죽산 나들이 (매산리 석불입상, 죽주산성)



' 안성 죽산 나들이 (매산리 석불입상, 죽주산성) '
죽주산성
▲  힘차게 뻗은 죽주산성


 

새해가 밝은지 정말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겨울과 봄의 팽팽한 경계선인 3월 한복판에 이
르렀다.
올해 유난히도 혹독했던 겨울 제국(帝國)은 봄의 해방군에게 밀려 소멸 직전까지 가는 듯
싶었으나 제국의 부흥을 꿈꾸는 겨울의 잔여 세력들이 도처에서 꽃샘추위를 일으켜 시간
이 다시 1~2월로 돌아가는 듯 했다. 이렇게 꽃샘추위의 패기가 잠시 대단했던 시기에 안
성마춤(안성맞춤)의 고장으로 오랫동안 추앙받고 있는 경기도 안성(安城)으로 짧은 여정
을 떠났다.

점심을 간단히 섭취하고 집 부근 방학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2시간 이상을 달려 평택
역에 두 발을 내렸다. 평택역은 경기도 최남단을 장식하고 있는 평택시(平澤市)의 관문으
로 역 남쪽에 있는 평택시외터미널로 이동하여 안성시내버스 370번(평택터미널↔일죽)에
몸을 실어 안성 땅으로 들어갔다.
원래는 안성 남쪽 끝에 자리한 청룡사(靑龍寺)에 가려고 했으나 차 시간이 영 맞지 않아
서 청룡사를 흔쾌히 포기하고 안성시내를 가로질러 죽산(竹山)까지 쭉 이동했다. 죽산에
서 봉업사지(奉業寺址) 5층석탑과 태평미륵, 죽주산성을 보고자 함이다.

죽산에 이르러 제일 먼저 봉업사지5층석탑(보물 435호)을 보려고 했으나 잠깐의 방심으로
한 정거장을 지나쳐 거리가 제법 멀어졌다. 게다가 시간도 17시가 넘어 해가 깔딱하기 직
전이다. 하여 봉업사지는 포기하고 바로 매산리로 들어가 태평미륵을 찾았다. 태평미륵은
죽산에서 용인으로 가는 국도변에 있어 찾기는 매우 쉽다.


▲  태평미륵(매산리 석불입상)의 조촐한 거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태평미륵과 5층석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문의 높이가 조금 낮으므로 키가 큰 사람은 자존심을 곱게 접고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뒷탈이 없다.



 

♠  태평미륵이라 불리는 고려 초기 석불, 매산리 석불입상(梅山里石佛立像)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37호

세상에서는 안성을 안성마춤(안성맞춤)의 고장이라고 부른다. 허나 혹자(或者)는 미륵불의 고
장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안성에 유난히도 미륵불(彌勒佛)이라 불리는 석불이 많기 때문
이다. 이번에 문을 두드린 매산리 석불입상은 안성을 수식하는 주요 미륵불로 오랫동안 태평
미륵(太平彌勒)이란 이름으로 지역 사람들의 숭상을 받았다.

태평미륵은 고려 초에 조성된 석불로 높이가 5.6m에 이르러 안성 지역 미륵불 가운데 가장 키
가 크다. 그의 조촐한 안식처인 미륵당(彌勒堂)도 그의 키에 맞추다 보니 자연히 높이가 올라
가 대략 7m정도 되며, 미륵당이란 이름도 태평미륵의 거처란 뜻에서 생긴 것으로 마을 이름도
미륵당이고 인근 버스정류장 이름도 미륵당이다.


▲  네모난 기단 위에 자리한 태평미륵의 위엄

석불은 제법 높은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데, 보관 밑부분에는 온갖 문양이 새겨져 있고, 네
모난 보관 윗부분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세월의 때가 가득 끼어있어 중후한 멋을
보인다. 근래 세수를 한 듯 보관에 비해 조금은 하얀 얼굴은 길고 넓적한 편이며, 볼살이 좀
있어 보인다.
눈썹과 굳게 감긴 눈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선의 미를 더해주며, 두 눈썹 사이로 백호
가 하얗게 남아있다. 코는 끝부분이 오목하고, 입은 다물어져 있는데, 코와 입이 지나치게 작
고 눈 또한 지나치게 커서 균형이 떨어지며, 삼도(三道)가 그어진 목도 지나치게 비대하다.

몸통은 얼굴에 비해 그리 큰 편은 아니다. 보관을 포함한 얼굴 부분이 몸통의 거의 40%를 잡
아먹기 때문이다. 너무 없어보이는 어깨는 둥글게 내려가 있는데, 왼쪽 어깨를 감싼 옷은 두
껍게 표현되었으며, 하체에는 계단식으로 처리된 U자형의 옷주름이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가
슴 앞에 대고 있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한 듯 싶으며, 손가락을 모두 구부렸다. 왼손은
배 위에 대고 있으며, 양 손목에는 2중으로 된 팔찌를 차고 있다. 몸통을 받치는 두 다리는
꼿꼿하게 서 있으며, 다소 육중하지만 다리 표현은 분명하여 알아보는데 그리 지장은 없다.


▲  태평미륵의 얼굴과 보관

▲  태평미륵의 뒷통수와 보관

▲  태평미륵의 가슴 부분과 손

고려 때 조성된 석불은 유난히 덩치가 크고 각기 제각각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논산 관촉사(
灌燭寺)의 은진미륵(恩津彌勒)처럼 키와 덩치가 대단한 석불도 부지기수이며, 개성이 넘치고
흥미진진한 모습으로 중생들의 인기를 모은다. 그 시절 유난히 커다란 석불과 지역색이 강한
석불이 많은 등장한 것은 지방 세력과 부호(富豪)들이 집안의 안녕을 빌고 자신의 세력을 과
시하려는 차원에서 앞다투어 그런 것이며, 지역 석공(石工)들이 주로 석불을 다듬다 보니 투
박하고 거칠고 조금은 부족해 보이는 토속적인 석불이 많이 나왔다.
안성 지역에 널린 미륵불도 대부분 고려 때 것으로 태평미륵 또한 죽산 지역 세력이나 부호가
장만한 것이다. 처음부터 미륵불은 아니었던 듯 싶으며, 미륵신앙(彌勒信仰)이 크게 대두되면
서 지역 백성들에 의해 미륵불로 숭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태평미륵은 논산 개태사(開泰寺) 석불입상이나 충주 미륵리사지 석불처럼 고려 초기를 대표하
는 석조보살상으로 인정되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미륵당5층석탑 - 안성시 향토유적 20호

미륵불 앞에는 납작한 석탑 하나가 우두커니 자리잡고 있다. 겉으로 보면 3층석탑인데 안내문
에는 5층석탑이라 나와있다.
이 탑은 고려 초인 993년에 조성된 것으로 탑의 조성 시기를 알려주는 탑지석(塔誌石)이 나와
고맙게도 그의 탄생시기를 알려주고 있다. 그 탑지석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있으며, 태
평미륵과 한 덩어리처럼 보이나 그는 인근에서 옮겨온 것이라 태평미륵과는 관련이 1도 없다.

고려 때 흔하게 보이는 석탑과 달리 기단(基壇)이 1층으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며, 바닥돌과
기단부, 1층 탑신(塔身)까지는 온전하게 남아있으나 2층과 3층, 4층은 탑신은 사라지고 지붕
돌만 애처롭게 남아있고, 5층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완전히 사라졌다. 지붕돌은 귀퉁
이가 좀 상한 것 빼고는 거의 멀쩡하다.
탑에는 고된 세월의 때가 가득해 고색의 멋을 드러내고 있으며, 높이는 1.9m에 불과하나 탑신
이 온전하게 남았더라면 가히 5m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 매산리 석불입상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365-3 (미륵당길 32)



 

♠  죽산을 지키던 오랜 갑주이자 1236년 몽골군을 때려잡았던
전승의 현장, 죽주산성(竹州山城) - 경기도 지방기념물 69호

▲  죽주산성 남치성(南雉城)

태평미륵을 친견하고 차량들이 쌩쌩 바퀴를 굴리는 17번 국도를 따라 북쪽(용인 방면)으로 10
분 정도 가면 죽주산성을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을 한다. 그의 지시에 따라 왼쪽의 완만한 산
길을 오르면 한자로 된 죽주산성 표석이 나오고, 몇 굽이를 더 오르면 죽주산성 안내문과 비
봉산 안내도가 있는 너른 공간이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북쪽)에는 근래에 세워진 성은사(聖
恩寺)란 작은 절이 있고, 왼쪽에 산으로 오르는 조금은 각박한 길을 2분 정도 임하면 죽주산
성 동문이 모습을 비춘다.
산성 입구에서 동문까지 계속 오르막길이라 10분 정도 걸리며 길이 포장되어 있어 차량 접근
도 용이하다.


▲  윗도리는 사라지고 아랫도리만 남은 죽주산성 동문(東門)
동문은 윗도리인 문루(門樓)는 없고, 아랫도리인 성곽과 홍예만 남아있어
대머리처럼 허전한 모습이다.


비봉산(飛鳳山, 369m) 동쪽 자락에 둥지를 튼 죽주산성은 신라 후기에 축성된 것으로 외성(外
城)의 둘레가 1,688m, 높이는 2.5m~5m에 이른다. 돌로 튼튼하게 다진 산성(山城)으로 성 내부
중앙에는 1,500m 길이의 내성(內城)과 270m 길이의 중성(中城)을 두어 방어력을 한층 높였다.

죽주산성 남쪽에는 죽산 고을이 있는데, 지금은 안성시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신라 말부터 조
선시대까지 안성을 능가하는 큰 고을로 죽주(竹州)라 불리기도 했다. 산성의 이름은 바로 죽
주에서 비롯된 것으로 죽산 고을의 중심지로 여겨지기도 한다.
신라가 내리막을 타던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 시절에 기훤(箕萱)이 반란을 일으켜
이 성을 접수해 세력을 키웠으며,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세운 궁예(弓裔)가 그의 밑에 들어가
잠시 일하기도 했다.

▲  동문 남쪽 성벽

▲  동문 안쪽

고려 때는 성을 수리하여 관리한 것으로 보이며, 1236년 몽골(원나라)의 3번째 고려 침공 때
몽골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때 죽주산성을 지켰던 장수는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인 송문
주(宋文胄)로 일찍이 1231년 몽골의 1차 공격 때 귀주성<貴州省, 평북 구성시(龜城市)>에서
박서(朴犀)를 도와 몽골군을 크게 때려잡았던 인물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귀주성 싸움을 간
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고려가 몽골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1218년 서경(西京, 평양) 근처인 강동성(江東城) 전투였다.
신라 왕족과 고려 사람, 발해 유민,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에게 털린 거란족의 잔당들이
몽골과 동진국(東眞國) 연합군에게 쫓겨 고려 땅으로 침투해 강동성을 점거하자 당시 고려의
실권자인 최충헌(崔忠獻)은 김취려(金就礪)를 보내 몽골+동진국 연합군과 강동성을 탈환하고
거란 잔당을 토벌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몽골의 강요로 형제국 동맹을 맺었으나 힘만 앞세운 몽골의 무식한 오만함
과 무리한 공물(貢物) 요구에 고려는 그야말로 진절머리가 났다. 심지어는 몽골의 사신이 고
려 제왕의 어좌(御座) 바로 옆까지 가서 국서(國書)를 주는 무례까지 범하는 등, 고려와 몽골
의 관계는 나날이 악화되었다.
그런 와중에 1225년 몽골 사신인 저고여(著古與)가 압록강(鴨綠江) 부근에서 의문의 개죽음을
당하자 몽골은 크게 발작하여 고려의 만행이라 규정했다. 그리고 군사를 꾸려 그 유명한 살리
타이를 총대장으로 삼아 1231년 고려를 공격하니 그 지긋지긋한 반백년의 고려 vs 몽골 전쟁
의 서막이 열린다.

▲  남치성 부근 성곽

▲  내성 북쪽

압록강을 건넌 몽골군은 순식간에 고려의 북계(北界, 평안북도) 몇몇 도시를 점령했다. 허나
정주(定州)와 서경(西京)을 점령하지 못해 북계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고 고려군의 무력 또
한 만만치가 않아 몽골군은 크게 고전을 하게 된다. 절치부심에 빠진 살리타이는 든 것도 없
는 머리통을 열심히 굴려 북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귀주성을 공격해 전세를 만회하기로 했
다.

몽골군이 철주성(鐵州城, 평북 철산군)을 점령하고 귀주를 공격하려하자 주변 지역의 고려 장
수와 군사들, 백성들이 귀주성으로 쏙쏙 모여 결전을 준비했다. 귀주성에는 서북면병마사(西
北面兵馬使)인 박서(朴犀)와 부하 장수인 송문주가 지키고 있었다.
귀주성에 당도한 몽골군은 항복 권고 한마디도 없이 바로 공성전(攻城戰)에 들어갔다. 귀주성
은 산자락에 자리한 탓에 공격이 쉽지 않은데, 단순한 살리타이는 단지 머릿수만 믿고 군사를
나눠 쉬지 않고 돌리면서 공격했다. 그렇게 고려군을 지치게 만들어 나중에 한꺼번에 들이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성을 오르기도 전에 고려군의 화살비에 많은 군사가 죽어나갔다.
이렇게 몽골군이 고전하는 틈을 노려 김경손(金慶孫)이 12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성밖으로 나
가 적군을 무수히 죽였으며, 검은 말을 타고 있던 적장을 화살로 쏘아 죽이자 몽골군은 전의
를 잃고 바로 줄행랑을 쳐버렸다.

1차 공성전에서 단단히 개망신을 당한 살리타이는 잠시 작전을 바꾸어 항복한 위주부사(渭州
副使) 박문창(朴文昌)을 보내 항복을 권했다. 허나 박서는 '어찌 오랑캐에게 항복을 한단 말
이냐. 너도 고려의 신하이거늘 자존심도 없냐!'
답을 하고 그 자리에서 박문창을 죽여 그 목
을 몽골군에게 보냈다.
뚜껑이 단단히 폭발한 살리타이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성을 공격했는데 이번에는 방패차
와 성문을 부시는 충차(衝車)를 앞세워 성문을 집중공격했다. 허나 성이 산자락이고 성 북쪽
과 동쪽에 동문천(東門川)이 흐르면서 행군은 느릴 수 밖에 없었다. 겨우 하천을 건너 성문
앞에 이르렀으나 고려군이 불화살과 큰 돌을 날려 보내면서 충차와 방패차는 산산이 박살이
나고 몽골군은 죄다 사지가 헝클어진 귀신이 되고 말았다.

다시 개망신을 당한 살리타이는 이번에는 성 밑에 굴을 파고 침투하는 방법을 썼다. 이 작전
에는 '두거'라는 물을 먹인 소가죽을 쓴 이동식 상자와 두거 보호용 누차(樓車)를 보냈는데,
고려군은 용광로에 쇠를 녹여 쇳물을 통에 담아 누차를 향해 마구 던졌다. 쇳물을 뒤집어쓴
누차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면서 누차에 탄 몽골군은 죄다 즉석 통구이가 되었다.
또한 몽골군이 판 갱도에 군사를 보내 굴을 떠받치던 목재 버팀목을 불태우면서 갱도가 무너
져 삽질을 하던 몽골군도 죄다 생매장을 당했다. 그리고 날카로운 가시가 있는 나무를 모아
띠로 묶은 다음 불을 붙여 두거 위로 던졌다. 가시나무 가지가 두거에 그대로 박히면서 계속
타오르니 아무리 물을 먹인 소가죽도 소용이 없었고, 그대로 불이 옮겨타면서 작전에 임한 몽
골군은 그대로 폐기처분되고 만다.

▲  서문터 북쪽 성곽

▲  내성(內城)

이렇게 30일 이상 처절하게 공격을 퍼부었지만 귀주성은 건재했다. 기가 확 질러버린 몽골군
은 인근에 있던 군사들까지 싹 소환해 30여 대의 포차(砲車)를 급히 마련하여 다시 성을 공격
했다.
포차가 무수히 돌덩어리를 날리니 성곽 곳곳에 금이 가고 성내(城內)의 건물도 적지 않게 피
해를 입었다. 성벽의 무너진 틈새를 이용해 몽골군이 기들어오려 했으나 그 앞에 검차(檢車)
를 설치해 적군을 쫓아냈다. 그리고 무너진 틈을 쇠사슬을 엮어서 막았다.

몽골군의 끊임없는 공격에 단단하던 귀주성의 성벽도 슬슬 지쳐 내려앉기 시작했다. 하여 박
서는 정예병을 뽑아 성 밖으로 보내 몽골군을 공격했다. 고려군의 기습에 몽골군은 적지 않게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가 되었고, 혼란한 틈을 타 박서가 포차공격을 퍼부으니 그들은 목을 붙
잡고 후퇴했다.

단단히 똥줄을 탄 살리타이는 항복한 고려 왕족의 서신을 이용해 제발 투항좀 해주십사 부탁
을 했으나 박서는 살리타이의 사신을 내쫓았다. 이에 다시 발작한 살리타이는 운제(雲梯) 등
의 공성무기를 모두 동원해 공격에 들어갔다. 허나 고려는 운제 사다리를 파괴하고자 자물쇠
의 걸쇠 모양으로 구부러진 크고 무거운 칼 대우포를 개발해 비치한 상태였다. 대우포의 공격
에 운제는 죄다 박살이 났고, 사다리에 올라탄 몽고군은 목 없는 귀신이 되었다.

천하 최강의 깡패 나라로 악명을 날린 몽골군은 그보다 더 독한 귀주성 앞에 형편없이 꼬랑지
를 내렸고, 결국 공격 1달 만에 공격을 멈추었다. 또한 개경(開京)을 점령하고 돌아오는 몽골
군까지 격파되면서 몽골군의 간이 완전 쫄깃해졌다.
하지만 귀주성과 정반대의 상황이던 고려 조정은 개경이 함락된 휴유증에 몽골과 화의(和議)
를 맺었고, 당시 고려 군주인 고종(高宗)이 지병마사(知兵馬使) 최임수()를 보내 항복
을 종용하는 칙서(勅書)를 전하니 박서는 분을 삼키며 어쩔 수 없이 창칼을 내던지고 몽골군
에게 항복하고 만다.
자신들의 힘이 아닌 고려 군주의 칙명으로 어거지로 귀주성의 항복을 받은 몽골군은 씁쓸한
마음을 금치 못하며 막대한 피해를 입은 채 철수했는데, 당시 전쟁에 참여한 몽골 장수는 이
런 말을 남겼다.
'나는 소년 시절부터 군에 있으면서 천하 곳곳의 성지(城地)에 대한 공성전을 무수히 보았지
만 이처럼 지독한 공격을 당하면서도 항복하지 않은 성을 본 일이 없다. 이 성을 지킨 장수들
은 훗날 모두 장상(將相)이 될 것이다'
역사에 전하지는 않지만 박서도 아마 몽골군에게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내가 전쟁터에서 늙었지만 너희처럼 징글징글한 오랑캐는 처음이다. 너희들도 고생 많았다'

귀주성대첩 이후 박서는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승진을 했고
송문주는 낭장(郎將)으로 특진되었다가 몇 년 뒤 죽주방호별감이 되어 죽주를 지키게 되었다.

1236년 몽골군이 다시 고려를 침범해 죽산 인근에 이르자, 송문주는 백성을 이끌고 죽주산성
으로 들어갔다. 전에 귀주성에서 송문주에게 혹독하게 당한 몽골군은 그의 이름 3자에 잠시
염통이 쫄깃해져 서둘러 항복을 권했으나 거절당하자 포를 쏘면서 맹렬히 성을 공격했다.
성문이 부서지는 피해가 있었지만 고려군도 바로 포로 응수하면서 적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
혔고, 몽골군은 짚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화공(火攻)을 펼쳤으나 송문주는 성문을 열고 그
들을 기습해 수천의 몽골군을 고깃덩어리로 만들었다. 다시 한번 귀주성의 영웅에게 제대로
털린 몽골군은 공격 15일 만에 목을 붙잡고 줄행랑을 쳤다.

▲  송문주 장군의 사당인 충의사

▲  북치성(北雉城), 포루(砲樓)

송문주는 귀주성에서 몽골군을 질리도록 경험하여 그들의 전법을 꿰뚫고 있었다. 그리하여 효
과적으로 대응을 할 수 있었고, 다시 빛나는 승리를 취하게 된 것이다. 죽산 백성들은 그런
그를 '귀신','신명(神明)'이라 부르며 존경했으며, 그 공으로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이 되었
다. 또한 백성들은 그를 기리고자 성 안에 사당을 지어 매년 제사를 올렸다.
참고로 박서는 죽산박씨(竹山朴氏)로 죽산이 고향이다. 바로 그 죽주산성에서 그의 부하장수
였던 송문주가 몽골군을 격퇴했으니 이것도 참 인연인가 보다. 몽골 애들 입장에서는 지독한
곳에서 지독한 적장과 적군을 만나 허벌나게 개고생을 한 것이다.

조선시대로 들어와서는 충청도의 주요 고을인 청주(淸州)와 충주(忠州)에서 서울로 통하는 요
충지라 애지중지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잠시 점거했으나 황진(黃進)이 기습작전으로
탈환하면서 왜군은 더 이상 용인과 이천 지역을 넘보지 못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시절에는 남한산성(南漢山城)을 구하고자 지방에서 올라온 군사들
이 진을 쳤으나 인조(仁祖)가 삼전도(三田渡)에서 머리를 박고 항복하자 분을 삼키며 철수했
다.

조선 후기에는 조정의 무관심과 관리소홀로 방치되어 나무로 다진 문루 등의 건물은 사라지고
견고한 성곽만 남게 되었다. 성곽 대부분이 남아있으나 외성 북부와 중성은 거의 주저앉았고,
외성 남부와 내성도 곳곳이 벗겨지거나 무너져 아픈 속살을 드러냈으나 2006년 이후 보수공사
를 벌여 외성 남쪽과 내성, 치성(雉城)을 손질해 왕년의 위엄을 조금은 되찾았다.

산성에는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으며, 그 외에 성문터 3~4개가 더 있다. 남쪽 끝과 북
쪽 끝에는 치성(남치성, 북치성)을 두었고 외성 북쪽에도 조그만 치성을 3개 정도 만들어 수
비력을 드높였으며, 남치성에는 장대(將臺)터가 아련히 남아있고, 북치성에는 포루(砲樓)터가
있다. 우물은 2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현재 약수터로 쓰인다. 또한 남문 밖에는 도랑을 판
자리가 있어 조촐하게 해자(垓子)를 두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성 내부는 분지(盆地)로 북쪽
과 남쪽을 제외하고는 지형이 평탄해 군사시설과 집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는 송문주 장군의
사당인 충의사와 절 건물로 쓰이는 집 몇 동이 있다.

죽주산성과 비봉산은 근래에 등산로를 정비하면서 이정표와 안내문을 설치했으며, 비봉산 정
상을 거쳐 삼죽면이나 죽산리로 내려가도 된다. 산성은 외성 남쪽과 내성 북쪽을 돈다면 대략
30~40분 정도 걸리며, 아직 복원되지 않은 외성 북쪽까지 모두 돌 경우에는 2시간이 넘는다.


▲  죽주산성 안내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안성의 주요 명소이자 대몽항쟁의 승전지로 의미가 깊은 곳이지만 이리저리 헝클어진 모습을
보면 인간의 창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그저 허술한 모래성임을 뼛속 깊이 느끼게 될 것이다.
근래에 복원을 하였지만 고색의 때가 자욱한 옛돌과 하얀 피부의 새돌이 어색한 조화를 이루
고 있으니 한참의 시간을 흘려보내야 서로가 조화를 이룰 것이다.

남치성에 이르면 죽산면 중심지(죽산리)가 두 눈에 바라보이고, 북치성에는 백암 지역이 시야
에 들어와 조망이 일품이며, 평택과 충주, 청주로 통하는 길목에 가파른 곳에 의지해 자리해
있어 천하의 요새임을 실감할 것이다.

* 죽주산성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산105-1, 106


 

♠  죽주산성 둘러보기 (충의사, 남치성, 서문, 북문)

▲  산성 안 풍경 (동문에서 바라본 모습)

동문을 들어서면 포근하게 분지 지형을 이룬 산성 내부가 조촐하게 펼쳐진다. 바로 정면에는
잡초가 무성한 초지(草地)인데, 이 일대에는 군사시설과 창고(倉庫), 집들이 있었을 것이다.
초지 너머로 집들이 띄엄띄엄 간격을 두고 있는데, 가장 왼쪽에 어렴풋이 보이는 기와집이
송문주 장군 사당인 충의사이다.


▲  죽주산성에 유일한 약수터 (죽주산성약수터)

산성이 축성된 신라 후기부터 있던 것으로 여겨지는 샘터로 오랫동안 이곳의 목을 축여준 소
중한 샘이다. 1236년 송문주가 이끈 군사와 백성들도 저 물을 먹고 몽골군을 때려잡았으니 이
곳을 지킨 고려 사람들의 힘을 무한대로 솟게 만든 신비의 영천(靈泉)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탐방객과 인근 주민들이 마시는 그저 흔한 약수로 특별한 맛은 없으며, 성내에는 우물이 2개
가 있었는데, 지금은 이 약수터만 남았다.


▲  누런 잡초로 가득한 동문 안쪽 초지 (약수터에서 바라본 모습)
바로 이곳에 군사시설과 백성과 군사들의 집이 있었을 것이다. 장대한 세월에
푹 파묻힌 이곳을 똑똑 깨우면 죽주산성의 숨겨진 많은 것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  송문주 장군 사당(충의사)으로 인도하는 오솔길
푸른 갑주를 입은 소나무들이 길 양쪽에 2열로 늘어서 사당 손님들을 마중한다.
혹 송문주 장군의 병사들이나 그를 존경하던 백성들의 혼이 소나무로
부활한 것은 아닐까?

▲  송문주 장군의 사당인 충의사(忠義祠)

성내 서쪽 산자락에 송문주 장군의 사당인 충의사가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돌로 터를
다지고 그 위에 지은 조그만 맞배지붕 집으로 아래를 향해 돌계단을 늘어뜨렸다.
이 사당은 죽산 백성들이 송문주를 기리고자 세운 것으로 백성들은 그를 귀신, 신명이라 부르
며 존경을 표했다. 그리고 나중에 사당까지 손수 지어 그를 길이길이 추모했다.

사당의 조성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송문주가 세상을 뜬 13세기 말 이후로 보이며, 처음에는
조그만 영당(影堂)으로 여러 차례 보수를 했다가 근래에 지금의 건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충
의사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전남 여수(麗水)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타루비(墮淚碑)처럼 백성과 군사들이 송문주의 공덕을
기리고자 세운 백성들의 정이 서린 의미 깊은 사당으로 오늘날 저런 사당을 지어 추모할 위정
자(爲政者)가 없음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  숲속에 자리한 충의사 - 바로 뒤쪽에 내성 남쪽 성곽이 있다.

▲  산비탈에 의지해 닦여진 서남쪽 성곽

▲  중간에 잠시 길을 접은 남치성(南雉城)
성곽이 약간 비스듬히 쌓였는데, 이는 고구려 축성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런 축성 양식을 들여쌓기라고 한다.

▲  남치성 장대(將臺)터

산성 서남쪽을 이루는 남치성에는 장대터가 있다. 이곳에 올라서면 안성의 서부 지역인 죽산
과 일죽 일대가 두 눈에 훤히 바라보여 조망이 일품이며, 지금은 성을 지키고 산불을 감시하
는 조그만 초소가 이곳을 지킨다.


▲  남치성에서 바라본 죽산 일대 (멀리 보이는 산은 도덕산)

▲  남치성에서 바라본 일죽 일대

▲  죽주산성 남문(南門)
남문 앞에 도랑을 둔 흔적이 있어 해자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안그래도
오르기 힘든 산비탈인데, 성 앞에 해자까지 두었으니 어찌 적들이
쉽게 점령할 수 있겠는가.

▲  끊김이 없이 힘차게 질주하는 산성 서남부 성곽 (남치성에서 본 모습)

▲  저렇게 보잘것 없는 자연석들이 모여 견고한 죽주산성이 탄생했다.
사람이나 동물, 사물은 어디에 있고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가치와 팔자가 달라진다.

▲  유연한 곡선을 자랑하는 서쪽 성곽
성곽에는 여장 등의 안전시설이 없고, 성곽길을 이루는 돌도 거칠고 모가 많아서
걷는데 반드시 주의해야 된다. 가급적이면 흙과 성돌 사이 부분으로
걷거나 안쪽 흙길로 걷는 것이 좋다.

▲  외성과 내성이 갈리는 서문(西門)

완만하게 오르막길을 형성하던 성곽길은 서문을 코앞에 두고 갑자기 내리막을 이룬다. 내리막
을 이루기 전인 서문 남쪽이 죽주산성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그 내리막의 끝에 커다
란 장대석을 머리에 인 서문이 있다. 서문에서 성곽은 2갈래로 갈리는데, 서문을 지나 북쪽으
로 흐르는 성곽은 죽주산성의 본성인 외성이고, 서문 남쪽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는 성곽이 내
성이다.


▲  죽주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인 서문 남쪽 부분

▲  서문에서 바라본 비봉산

▲  뼈대만 남은 서문 안쪽

▲  서문 바깥쪽

서문의 높이는 문의 높이는 2m 정도로 비봉산 정상이나 죽산으로 가려면 이 문을 이용하면 된
다.


▲  서문 동쪽으로 흘러내려가는 내성

▲  서문 북쪽 성곽

성곽을 이루는 성돌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애환과 사연이 차곡차곡 깃들여져 있다. 산성
축성에 동원된 백성들의 애환부터 신라 후기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이곳에 웅거한 지방 세력
의 사연, 성을 지키던 병사들의 애환과 장수들의 꿈, 1236년 피를 흘리며 이곳을 지킨 고려군
과 백성들의 함성, 그때 전사힌 이의 원통한 넋, 이곳에서 고깃덩어리가 되어 지옥으로 떨어
진 몽골군의 넋까지, 그 모든 것이 함축적으로 깃들여져 산성의 경력과 가치를 드높인다.


▲  자연과 세월에 의해 헝클어진 서문 북쪽 성곽(외성 북부) ▼

외성 북부는 서문 구간을 제외하면 거의 헝클어진 채, 간신히 산성의 윤곽만 남아있다. 이곳
성곽의 높이는 2m 정도로 성곽을 이루던 성돌은 뒤죽박죽이 되었고 그러다보니 성곽길도 거칠
어져 이동하기가 쉽지가 않다. 아직 여기까지는 복원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성 북부에는 서치성(西雉城)과 동치성(東雉城) 2개가 있으며, 외성 북문터와 수구(水口)터
등이 있다. 성곽길이 별로 좋지 못하고 급내리막길이라 조금만 가다가 바로 서문으로 돌아왔
다.


▲  남쪽으로 90도 꺾은 내성 - 숲 너머에 보이는 성도 내성임

▲  내성 (내성 북문 부근) - 내성은 높이가 2m 정도이다.

▲  내성 북문~북치성 구간은 성곽길을 동네 담장마냥 시멘트로 발라버려
적지 않은 옥의 티를 보인다. 저럴거면 복원의 의미가 없지 않는가.

▲  내성 북문(北門) - 서문과 비슷한 구조이다.


 

♠  죽주산성 마무리 (북치성 주변)

▲  북치성(北雉城) 포대와 겨울에 잠긴 나무 1그루

죽주산성의 동북쪽 끝으머리에는 세상을 향해 고개를 내민 북치성이 있다. 이곳은 서문에서
갈라진 내성과 외성이 다시 만나는 곳으로 내성의 동쪽 종점이기도 한데 가파른 곳에 자리한
남치성과 달리 평탄하고 너른 공간으로 돌로 쌓은 포대와 커다란 나무 1그루가 북치성을 지킨
다.
시야가 확 트인 이곳에 올라서면 안성 죽산면/일죽면 북부 지역을 비롯해 용인 백암면 지역이
바라보여 조망이 좋아 전략적 요충지임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북치성 끝부분에 마련된 포대는 돌을 던지거나 화포(火砲)를 쏘는 대포나 무기를 비치한 곳으
로 1236년에 이곳에서 적군을 향해 무수히 돌을 날려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후 이곳에서는
전쟁이 벌어진 일이 없어 그냥 겉모습만 남아있다가 거친 세월의 흐름 속에 거의 떠내려가면
서 포대의 일부만 남아있던 것을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했다.


▲  북치성 포대

▲  포대 가운데 부분

포대는 'ㄷ'자 모습으로 높이는 1m 정도이며,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끔 그 석축 안에 돌을 날
려보내는 무기를 엄폐시켜 전쟁 때 요긴하게 써먹었다.
포대를 이루고 있는 돌은 주변에서 가져온 큰 돌을 네모나게 다듬은 것으로 석축 밑도리에 동
그란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는 성 밑을 바라보는 용도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포대의 위치가
북치성 끝부분이라 전쟁이 한참일 경우에는 석축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전방을 확인하기에는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포대 정중앙에 주춧돌처럼 놓인 돌은 돌을 날리는 무기를 두
었던 곳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 널린 오래된 산성과 석성(石城) 가운데, 이렇게 포대까지 갖춘 성은 거의 흔치가
않다. 강화도(江華島)를 비롯한 서해바다 쪽에 포대를 둔 성이 많지만 이들은 바다에 설치된
화포용 요새이다.


▲  북치성에서 바라본 천하 - 죽산면과 일죽면 북부 지역과 용인 백암면

▲  북치성에서 동문으로 이어지는 동쪽 성곽
서쪽 성곽과 달리 경사가 좀 완만하여 길이 부드럽다.

▲  동문 북쪽 성곽

동문 주변은 자연과 세월에 의해 가루가 되거나 뭉개진 성돌이 많아 하얀 피부의 새 성돌을
많이 입혀 복원했다. 그러다보니 늙은 성돌과 새 성돌이 어색한 조화를 보인다. 하지만 어쩌
겠는가. 늙은 성돌이 많이 사라져 상황이 여의치가 않은 것을 말이다.

동문을 시작으로 죽주산성을 1바퀴 둘러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니 시간은 어느덧 19시가
되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어느 정도 어두워진 상태였다. 서쪽으로 지는 해를 억지로 잡
아가면서 동문을 들어선 것이 17시 20분이었으니 1시간 30분 동안 둘러본 셈이다. 물론 서문
북쪽인 외성 북부는 조금 가다가 말았지만 거긴 성벽 상태가 영 좋지 못해 그런 것이니 거의
80%는 본 것이나 다름이 없다.

동문을 나와 다시 속세로 내려가니 세상은 비로소 완연한 검정 도화지가 되었다. 상경(上京)
코스를 어떻게 잡을까 머리를 굴리다가 백암에서 저녁을 먹고 용인(龍仁)을 거쳐 올라가기로
했다. 하여 죽주산성 정류장에서 용인시내버스 10-1번을 타고 백암으로 넘어가 저녁으로 백암
의 명물인 백암순대국밥을 섭취했다.
백암 계통의 순대국은 처음 먹어보는데, 내장은 적으면서 고기와 순대 덩어리가 많아 비린내
도 거의 없고, 담백하고 얼큰하여 1그릇을 뚝딱 빈 그릇으로 만들었다. 뜨끈한 국물에 졸음이
몰려와 나를 희롱하니 서비스로 제공되는 커피를 마시며 졸음을 단죄한다. 이렇게 저녁을 먹
고 장거리를 이동하여 집에 들어오니 거의 자정~~

이렇게 하여 꽃샘추위 속에 찾아간 안성 죽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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