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140건

  1. 2023.04.27 서울의 서남쪽 끝으머리, 오류동 류순정 류홍부자묘역~항동철길~푸른수목원 봄나들이
  2. 2023.04.16 서울 도심의 꿀명소, 인사동~북촌한옥마을 나들이 (천도교중앙대교당, 관상감관천대, 정독도서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종친부 경근당옥첩당)
  3. 2023.04.08 늦겨울 산사 나들이 ~ 안양 삼성산 염불사, 비봉산 망해암 <안양예술공원, 망해암 석조여래입상>
  4. 2023.03.28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강원도의 깊은 내륙, 양구 방산면 나들이 <수입천, 직연폭포, 양구백자박물관>
  5. 2023.03.17 서울의 부드러운 동쪽 지붕, 아차산 봄나들이 <서울둘레길2코스, 아차산4보루, 3보루, 2보루, 1보루>
  6. 2023.03.05 서울의 상큼한 남쪽 지붕, 삼성산~호암산~목골산 <관악산호수공원, 성주암, 서울둘레길5코스, 독산자락길>
  7. 2023.02.26 송파구 한복판에 자리한 상큼한 푸른 쉼터, 오금공원 <문양군 류희림묘역, 신선경과 류인호묘역, 오금공원 인공폭포>
  8. 2022.05.29 석가탄신일 기념 도심 사찰 나들이, 홍은동 백련산 백련사 (백련사 괘불)
  9. 2022.05.18 서울 도심 근대문화유산의 1번지, 정동~덕수궁돌담길 역사 기행 (심슨기념관, 유관순우물, 구 신아일보별관, 구러시아공사관, 정동교회)
  10. 2022.05.05 도심 속에 깃든 그림 같은 호수, 석촌호수 봄꽃 나들이 (송파나루공원, 삼전도비)

서울의 서남쪽 끝으머리, 오류동 류순정 류홍부자묘역~항동철길~푸른수목원 봄나들이

구로구 오류동 봄나들이 (류순정 류홍묘역, 항동철길)



' 구로구 오류동 봄나들이 '
(류순정 류홍 부자 묘역, 항동철길)
 

류순정 류홍 부자묘역

▲  류순정, 류홍 부자 묘역

항동철길 (오류선) 류홍 신도비와 류사필 묘갈

▲  항동철길 (오류선)

▲  류홍 신도비와 류사필 묘갈

 


 

서울 서남쪽 끝으머리를 잡고 있는 구로구 오류동(梧柳洞)에는 류순정, 류홍 부자 묘역과
항동철길, 천왕산 등의 명소가 있다. 이들은 아직까지도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어 나의
심기를 적지 않게 건드리고 있는데, 별처럼 무수히 뿌려진 이 땅의 미답처를 다 지우지는
못해도 내가 있는 서울만큼은 미답처를 싹 지우고자 매년 부지런히 행동에 옮기고 있다.
남들 훨씬 이상으로 서울 구석구석을 다녔다고 자부하나 아직도 미답처가 차고 넘치니 겨
우 605㎢에 불과한 서울 땅이 실로 우주 이상만큼이나 장대해 보인다.


 

♠  서울에서 유일한 부자(父子) 2대 공신 묘역
류순정, 류홍 부자 묘역 - 서울 지방기념물 22호

▲  무덤들이 물결을 이루는 류홍 묘역 (제일 위쪽에 류홍 묘가 있음)

구로구의 대표 지붕인 천왕산(天旺山. 144m) 북쪽 끝자락 구석에 류순정(유순정), 류홍(유홍)
부자를 중심으로 한 진주류씨(유씨) 묘역이 넓게 누워있다.

류순정과 류홍은 조선 초기 인물로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해 부자가 나란히 공신(功臣)이
되었다. 1512년 류순정이 병사하자 중종(中宗)은 매우 슬퍼하며 3일 동안 조회(朝會)를 열지
않았으며, 왕족들에게만 주던 장생전<長生殿, 장흥고(長興庫)>의 관곽(棺槨)을 특별히 내주어
장례를 도왔다. 또한 오류동과 온수동(溫水洞), 부천시(富川市) 여월동과 작동 지역에 300만
평(9,917,355㎡)에 이르는 너른 땅까지 내렸는데, 류순정은 그 땅 중에서 제일 명당으로 꼽히
는 천왕산 자락에 유택(幽宅)을 썼다.
1551년 류홍이 사망하자 아비 묘 서남쪽 자락에 묻혔으며, 이후 후손들은 중종에게 하사받은
다른 동네 땅에 묻혔다.

20세기 이후, 묘역 주변을 조금씩 처분하면서 묘역 규모가 줄어들었고, 속세로 떨어져나간 묘
역 동북쪽에는 동부제강에서 사원용 아파트로 세운 동보아파트가, 동남쪽에는 금강수목원아파
트와 주택이 들어섰다. 그렇게 해서 남은 묘역은 26,531㎡로 비록 옛날만큼은 못해도 여전히
넓은 편이다.
묘역 서북쪽과 서쪽, 서남쪽은 딱히 건드리지 않아 자연 지대로 남으면서 개발의 칼질에 완전
히 고립되는 꼴은 면했으며, 주변에 흩어진 류순정의 후손 묘 5기도 그 땅을 처분하면서 모두
류홍 묘 밑으로 가져와 7대가 모여있는 문중 묘역이 되었다.

20세기가 끝나도록 묘역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아 적지 않게 훼손이 되었으나 2004년에 서울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더 이상 망가지는 꼴은 면했다. 또한 후손들은 집안의 보물로 16세
기에 제작된 류순정의 영정 4점과 류홍의 영정 1점을 안전하게 후대에 전하고자 서울시에 흔
쾌히 기증해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 보관되고 있다. 이들은 이 땅에 흔치 않은 16세기
초상화로 그림 바닥에 채전이 등장하는 최초의 예로 가치가 대단해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솔직히 국가 보물급임)
이들 영정은 고약했던 6.25 시절 진주류씨 종손인 유종식(柳宗植)이 목숨을 걸고 지킨 것으로
그때 식솔과 가재도구는 챙기지도 않고 오직 영정함만 챙겨 어깨에 맸다. 그의 부인이 피난길
에 가솔은 안중에도 없고 영정만 챙기냐고 따지자. 집안의 종손으로 그것을 잃어버리면 조상
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고 답을 했다고 한다.
어쨌든 영정과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던 서적들, 필요한 가재도구를 챙겨 가솔들과 무사히 피
난을 떠났고, 그렇게 영정은 살아남아 그 가치는 백두산에 붙어있을 정도로 커졌다.

류순정, 류홍 묘역은 후손들의 배려로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다. 묘역 밑에 후손이 거처하는
집이 있으며, 그 집을 중심으로 북쪽에 묘역의 주인공인 류순정 묘, 서쪽에 류홍과 후손들의
묘가 자리해 있다. 류홍과 류순정 묘는 16세기 무덤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무덤 석물과
신도비도 그 시절 것으로 가치가 높다. 그리고 후손들의 무덤도 묘비 등 일부를 제외하고 옛
날 것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류홍 묘는 뒤쪽에 숲이 있으나 류순정 묘는 바로 북쪽과 동쪽 담장 너머로 동보아파트가 들어
앉아 묘역을 굽어보고 있어 보기에도 좀 딱해 보인다. 적어도 류순정 묘 주변 땅은 지켰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 했던 것이다.


▲  진흥군(晋興君) 류식(柳寔)과 청풍김씨(오른쪽 무덤)의 합장묘,
류중광(柳重光)과 나주정씨(왼쪽 무덤) 합장묘


류식은 류돈의 손자이자 류시경의 아들로 류순정의 7대손이며, 류중광은 류준의 아들로 류순
정의 4대손이다. 무덤을 지키고 있는 문인석(文人石)과 망주석(望柱石), 동자석(童子石), 상
석(床石), 혼유석(魂遊石)은 조선 중기 것으로 고색의 때가 역력하며, 묘비는 1989년 이후에
새로 장만했다.

▲  진흥군 류식과 청풍김씨의 묘비

▲  류중광과 류식 묘 (남쪽에서 본 모습)


▲  류사필(柳師弼)과 청주한씨의 합장묘(왼쪽),
류준(柳浚)과 연안이씨의 합장묘(오른쪽)


류중광, 류식 묘 바로 위에는 류사필과 류준의 묘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류사필(1501~1559)
은 류홍의 아들로 어머니(풍양조씨)가 2살에 사망하자 외가에서 자랐는데, 공신의 자손으로
과거시험도 거치지 않고 음보(蔭補)로 관리가 되어 사복시 주부(司僕寺 主簿), 사헌부 감찰(
司憲府 監察), 금성현령, 김포현령, 예빈시 주부, 온양군수를 지냈다. 부인은 청주한씨로 영
의정을 지낸 한효원(韓效元)의 딸이다.

류준은 류사필의 아들로 아버지나 할아버지 만큼의 공적은 없으나 그들의 신도비를 세우지 못
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하여 1567년에 증조할아버지인 류순정의 신도비를 마련했고, 류
홍 신도비를 세우고자 친분이 있던 강령군(江寧君) 홍섬(洪暹)에게 신도비의 비명(碑銘)을 부
탁했다. 그래서 홍섬이 흔쾌히 글을 짓고 당대 문장가였던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이 글씨
를 써서 1573년 신도비를 완성시켰다.
또한 1574년에는 그들(홍섬, 송인)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인 류사필의 묘갈까지 장만했으니 묘
역 관리만큼은 아주 100점 감이었다. 이들 묘갈과 신도비는 류홍 묘역 밑에 나란히 자리해 있
다.

류중광, 류식의 묘처럼 문인석과 망주석, 키 작은 동자석, 상석, 묘비를 지니고 있으며, 1989
년 이후에 세운 묘비 정도를 제외하고 모두 16세기 것들이라 고색이 넘친다.

▲  류준과 류사필묘 (북쪽에서 본 모습)

▲  450년 가까이 묵은 류사필 묘갈(墓碣)


▲  류돈(柳焞)과 삭녕최씨묘
류돈은 류중광의 아들로 류중광묘 바로 남쪽에 자리해 있다. 묘비와
상석을 제외하고 16세기 것을 유지하고 있다.

▲  류홍(柳泓)묘

류홍 묘역 제일 높은 곳에는 류홍 묘가 자리해 후손들의 무덤을 굽어보고 있다. 류순정과 더
불어 이곳 묘역의 터줏대감으로 구름무늬 이수를 갖춘 늙은 묘표(묘비)와 문인석, 장명등, 망
주석, 상석을 지니고 있으며, 묘역 밑에는 높은 사람만 장만할 수 있던 신도비까지 두어 그의
높은 위치와 행적을 알려준다.

류홍(1483~1551)은 류순정의 아들로 어머니는 안동권씨<권효충(權孝忠)의 딸>이다. 자는 자연
(子淵)으로 1506년 중종반정 때 반정에 가담한 아버지를 도와 부자가 나란히 정국공신(靖國功
臣) 4등에 책록되는 위엄을 보였다. 그 인연으로 그들 부자의 무덤은 서울에서 유일한 부자 2
대 공신 묘역으로 천하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반정 이후 사복시주부, 형조정랑(刑曹正郞) 등을 거쳐 공조정랑(工曹正郞)이 되었으며, 1510
년 부산포와 제포(薺浦), 염포(鹽浦)에서 왜인(倭人)들이 소란을 일으킨 삼포왜란(三浦倭亂)
이 터지자 남정도원수(南征都元帥)로 파견된 부친을 따라가 왜인을 토벌했다. 그들 부자는 무
예에 아주 능했는데 특히 활을 잘 쏘았다고 전한다.

삼포왜란을 평정하고 내자시(內資寺)와 군기시(軍器寺)의 첨정(僉正)이 되었다가 1511년 무과
에 급제해 사복시 부정(副正)에 올랐으며, 훈련원부정을 거쳐 제포첨사(薺浦僉使, 창원 웅천)
가 되었다.
그는 역대 첨사들이 왜인들에게 뇌물을 받고 그들에게 발급한 도서(圖書)의 검사를 소홀히 한
점을 지적하고 왜인들의 왜관(倭館) 출입과 왜선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이듬해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오위장(五位將)을 겸임했다.
1519년 이후 원주와 정주 목사를 거쳐 훈련원도정, 충청도병마사, 수군절도사, 경상우도병마
사, 전라도수군절도사, 회령부사, 북병사(北兵使) 등의 주요 군직을 지냈으며, 1544년 진산군
(晋山君)에 봉해지고 부총관(副摠管)을 겸했다.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는 위사원종공
신(衛社原從功臣)에 책록되어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었으며, 1547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
府事)가 되었다.

무인이지만 문인, 선비들과 많은 교류를 하였고, 청렴하고 검소하여 공조정랑으로 있을 때 선
임자들이 관청의 기명(器皿)을 멋대로 사용하던 폐습을 근절시켰다.

   ◀  류홍 묘의 동그란 봉분과 묘표(墓表)
비좌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구름
무늬가 물결치는 이수(螭首)를 두었다. 비신과
이수에는 무심한 세월이 강제로 달아놓은 검은
주근깨와 온갖 상처들로 가득하여 고색의 향기
를 깊이 뿌린다.

        ◀  류홍 묘 문인석과 망주석
문인석은 고된 세월에 지쳤는지 일그러진 표정
을 짓고 있으나 대체로 멀쩡한 모습이다. 허나
그 옆의 망주석은 장대한 세월의 칼날을 정통
으로 맞아 밑둥만 일부 남은 가련한 신세이다.


  류홍 묘에서 바라본 류순정, 류홍 묘역 일대
가운데 부분에 보이는 집이 후손이 사는 집(재실)으로 그 너머 언덕에
아파트에 둘러싸인 류순정 묘가 있다.

▲  류홍의 행장이 적힌 류홍 신도비(神道碑)

류홍 신도비는 1573년에 손자 류준이 세웠다. 그는 류홍이 사망한지 20년이 넘도록 신도비를
장만하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워 좌의정을 지낸 강령군 홍섬에게 비명(碑銘)을 부탁했고, 여
성군 송인에게 글씨를 부탁하여 비로소 신도비를 세우게 되었다.
비좌(碑座) 윗면에 엎드린 연꽃잎 모양의 복련(伏蓮)을 새기고 비신 앞뒤에는 3구획의 안상(
眼象)과 그 밑에 당초문(唐草紋)을, 옆면에는 두 구획의 안상과 당초문을 새기고, 머리에 지
붕돌을 얹혔다. 그 곁에는 아들 류사필의 묘갈이 나란히 있는데 그 모습이 서로 비슷하나 비
석의 명칭은 다르다. (신도비는 3품 이상의 당상관과 왕족들의 무덤에만 쓸 수 있음)
류순정 묘에도 신도비가 있으며, 오랜 풍상에 시달린 비신에는 검은 주근깨가 여기저기 피어
나 중후한 멋을 보인다.


▲  류순정의 후처, 평창이씨묘

류홍 묘역과 류순정 묘역 중간 산기슭에는 류순정의 부인인 평창이씨묘가 홀로 자리해 있다.
류홍과 류순정 묘역은 2기 이상의 무덤이 몰려있어 심심치는 않아 보이나 평창이씨묘의 무덤
만 그 중간에 외롭게 자리해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마도 풍수지리에 따라 그렇게 묘를
쓴 것 같다. 
여기서는 류홍과 류순정 묘역은 물론 금강수목원아파트, 천왕산이 훤히 두 망막에 들어와 묘
역에서 위치가 아주 좋으며, 봉분(封墳)과 묘표, 상석, 문인석을 지니고 있는데, 이들은 16세
기 것으로 묘표 같은 경우 조선 초에 많이 나타나는 연꽃 봉오리 지붕돌로 작고 앙큼한 형태
이다.

▲  뒷쪽에서 바라본 평창이씨묘

▲  연꽃 봉오리 지붕돌을 지닌
평창이씨묘표

▲  눈이 유난히도 크고 귀여운 평창이씨묘의 꼬마 문인석
왼쪽 문인석은 피부가 덜 탔지만 오른쪽 문인석은 세월을 너무 예민하게 탔는지
피부가 아주 검다.

▲  평창이씨묘에서 바라본 류홍 묘역
제일 왼쪽 모퉁이에 류돈 묘, 바로 오른쪽에 류중광 묘와 류식 묘, 그 위쪽에
류사필 묘와 류준 묘가 차곡차곡 들어앉았다. 그리고 그 한참 위에
류홍 묘가 자리하여 후손의 무덤을 굽어본다.

▲  류순정(柳順汀)묘

묘역 북쪽에는 이곳의 시조인 류순정묘가 있다. 짙은 숲을 뒤에 둔 류홍묘와 달리 묘 북쪽과
동쪽에 아파트가 비집고 들어와 그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무덤을 굽어본다. 무덤과 키다리 아
파트의 어색한 조화. 이는 개발의 칼질이 개념 없이 자행되는 이 땅의 씁쓸한 현실의 산물로
이곳과 비슷한 처지의 조선시대 묘역이 서울과 수도권에 비일비재하다.

류순정(1459~1512)은 류양(柳壤)의 아들로 어머니는 정즙(鄭楫)의 딸이다. 자는 지옹(智翁),
호는 청천(菁川)이며, 부인은 안동권씨와 후처인 평창이씨가 있다.
청년 시절에는 김종직(金宗直)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활쏘기를 비롯한 무예에 뛰어나 그와 대
적할만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1487년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전적
(弘文館典籍)이 되었으며, 훈련원정(訓鍊院正)이 되어 전라도에 들어온 왜구를 수색하여 잡아
들이는데 공을 세웠고, 1491년 함경도평사로 도원수(都元帥) 허종(許琮)의 막료가 되어 평안
도평사를 역임했다.

연산군 시절에는 임사홍(任士洪)의 잘못을 논박했고, 평안도절도사 전림(田霖)의 권력 남용을
추궁했으며, 북방 야인 문제에 대한 대책을 진언했다. 그 뒤 홍문관교리가 되었는데, 문신임
에도 활솜씨가 뛰어나 부응교(副應敎)에 배수되었다. 이어 사헌부집의를 거쳐 의주목사가 되
었는데, 조선의 그늘에 있던 압록강 이북 지역의 야인을 토벌했을 때, 적정 탐지에 큰 공을
세웠다. 또한 군자금 확보와 성곽 수축 등 국경 경비 강화에도 힘썼다.

1503년 공조참판(工曹參判)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며, 1504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 이때 연산군에게 밤사냥에 대해 진언하다가 임사홍의 모략으로 추국을 당하기도 했다.
1506년 연산군에게 불만을 품은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등과 반란을 모의하여 그 유
명한 중종반정을 일으켰다. 그 공으로 정국공신 1등에 청주부원군(淸州府院君), 숭정대부(崇
政大夫)란 큰 감투를 받았다.

반정 이후 병조판서가 되어 영경연사(領經筵事)를 겸임했으며, 연산군 시절에 폐지된 경연 부
활에 앞장섰다. 이후 우의정과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으며, 1507년 이과(李顆) 등이 견성
군(甄城君)을 추대하려고 역모를 꾀하자 이를 처리해 정난공신(定難功臣) 1등에 봉해졌다.
1508년 평안도 인산(麟山)과 강계(江界) 지역에 둔전(屯田)을 설치했으며, 좌의정(左議政) 시
절에는 인천과 김포, 통진 지역에서 도둑들이 설치자 박영문(朴永文)과 유담년(柳聃年)을 포
도대장으로 삼아 그들을 토벌케하고 유민의 안집책을 마련했다.
1510년 삼포왜란이 터지자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병사를 총괄했으며, 다시 도원수가 되
어 왜란을 토벌하고 삼포(부산포, 제포, 염포)에 비왜방략(備倭方略)을 마련했다. 이때 대간
들이 재물을 늘린다는 명목으로 그를 탄핵했으나 오히려 군공(軍功)을 인정받아 영의정(領議
政)까지 올랐지만 불과 2달 뒤에 53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중종은 크게 슬퍼하며 장흥고의 관곽까지 내주는 등, 장례를 특별히 챙겨주었으며, 무안(武安
)이란 시호를 내려주었다가 나중에 문정(文定)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후 중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  류순정 묘표

▲  류순정 묘를 지키는 꼬마 동자석

류순정 묘는 이수를 갖춘 묘표와 상석, 동자석, 망주석을 갖추고 있다. 이들은 16세기에 조성
된 것들로 고색이 흠씬 묻어나있는데, 묘 바로 밑에는 부인 안동권씨 묘가 있으며, 서쪽 산자
락에는 앞서 언급한 부인 평창이씨묘가 있다. 부인 묘에는 모두 문인석을 갖추고 있어 류순정
묘에는 작은 동자석으로 대신했다. (장명등은 안동권씨 묘에만 세웠음)


▲  류순정 묘의 뒷통수 (뒷쪽에서 바라본 모습)

▲  류순정의 부인 안동권씨 묘
안동권씨 부인은 류홍의 어머니로 그가 불과 2살 때 세상을 떠났다. 봉분과 묘표,
상석, 문인석, 장명등을 지니고 있으며, 동자석과 망주석은 류순정 묘가
대신 지니고 있어 따로 갖추지는 않았다.

▲  뒷쪽에서 본 안동권씨 묘

▲  이수를 지닌 안동권씨 묘표

▲  얼굴과 왼쪽 어깨에 세월의 때가
가득 낀 안동권씨묘 문인석

▲  고된 세월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은
안동권씨묘 장명등


▲  류순정 신도비

안동권씨묘 옆구리에는 류순정 신도비가 우두커니 서 있다. 류순정 묘 바로 동쪽까지 아파트
가 들어서고 묘역과 아파트 경계에 돌담이 둘러지면서 신도비 정면 공간이 좀 야박하게 되었
다. 하여 부득불 옆에서 그를 담았다.

신도비의 모습은 류홍 신도비와 비슷한데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낸 진천군(晉川君) 강
혼(姜渾)이 글을 짓고 여성군 송인이 글씨를 썼다. 허나 글만 받았지 비석을 세우지 못한 상
태로 50년 정도가 흐른 1567년에 류준이 비로소 비석을 세웠다. 비좌와 비신, 지붕돌로 이루
어진 형태로 비좌 윗면에 복련을 새겼고, 전면에 안상 3구획을, 측면에 안상 2구획을 새겼다.

* 류순정, 류홍 부자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동 산 43-31, 43-32(오리로13가길
  42)


▲  류순정 묘역에서 바라본 류홍과 후손들의 묘역
저 공간에 류홍을 비롯한 6대의 유택이 둥지를 틀었다.


 

♠  서울에서 유일하게 마음 놓고 거닐 수 있는 철길 명소,
항동(航洞)철길(오류선)

▲  오류2동 주택가를 지나는 항동철길 ①

금강수목원아파트 바로 남쪽에는 오리로11길과 나란히 달리는 철길이 있다. 속세에서는 그 철
길을 항동철길이라 부르는데 정식 명칭은 오류선(梧柳線)으로 '경기화학선'이란 별칭도 지니
고 있으며, 경인선 오류동역(1호선)에서 광명시(光明市) 옥길동에 있던 경기화학을 잇는 4.5
km의 단선 철로이다.
경기화학주식회사는 이 땅 최초의 비료 공장으로 1954년 옥길동에 설립되었다. (그 시절 지명
은 부천군 소래면 옥길리) 원료와 비료 운송을 위해 1957년 9월 26일에 철길을 닦기 시작하여
1959년 5월 30일에 완성을 보았는데, 경기화학 외에도 한때 오류동에 있던 삼천리연탄공장과
동부제강도 이 철로의 신세를 졌다.

경기화학은 울주 온산공장으로 통합, 이전되면서 광명 옥길동 공장은 문을 닫았으며, 그로 인
해 열차가 다닐 일이 없어져 완전 한가한 신세가 된다.
그렇게 열차의 기적소리도 거의 사라지고 열차의 바퀴자국도 녹이 슬면서 철로에는 잡초가 덥
수룩하게 끼었으며, 무쓸모급 철길로 전락했지만 주변에 천왕산 공원, 푸른수목원이 조성되면
서 그들을 수식하는 철길 명소로 덕을 보게 되었고, 2014년 이후 방송매체에서 이곳을 줄기차
게 홍보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항동철길은 오류동역에서 1호선 경인선에서 살짝 갈라져 나와 서해안로와 오리로가 만나는 광
덕4거리를 지난다. 여기서부터 뚜벅이들이 거닐 수 있다. (광덕4거리~오류동역 구간은 접근
금지) 오리로11길 골목길이 바로 남쪽에 붙어있으며, 금강수목원아파트와 맞닿은 철길 북쪽에
는 짧게 숲길을 닦아놓아 눈길을 부드럽게 배려했다.
철길은 주택가의 끝인 우창굿모닝아파트를 지나면 숲에 감싸인 야트막한 고갯길을 지난다. 천
왕산 산세가 움푹 낮아진 곳에 산의 살을 파서 생긴 틈으로 그 고개를 지나면 푸른수목원 항
동철길 쪽문과 천왕산 등산로가 나온다. 보통 여기서 철길 산책을 시작하거나 접거나 하지만
서쪽으로 더 들어가 푸른수목원 정문까지 이동할 수 있으며, 그 이상은 어렵다. 즉 광덕4거리
에서 푸른수목원 정문까지 1.3km 구간만 뚜벅이들이 자유롭게 거닐 수 있다.

비록 버려진 철길로 지금은 관광지로 꽤 바쁘게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열차가 완전히 끊긴 것
은 아니다. 가뭄에 콩나듯 아주 가끔씩 다닌다고 하며, 만약 산책 중에 열차를 만났다면 꼭
복권을 사보기 바란다. 그만큼 열차를 보기 힘들다. (나도 몇 번 가봤지만 열차 구경도 못했
음)
한때 이 철길을 두고 관광지로 두느냐 안전을 위해 접근 불가로 봉인하느냐를 두고 말이 많았
으나 이제는 관광지로 완전히 무게가 쏠렸다.

이 땅에 철길 명소가 여럿 있지만 서울은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게다가 주거지와 골목길 속
을 거리낌없이 지나가므로 매우 친숙하게 다가온다. 철길 주변 풍경도 주택가와 자연(천왕산,
푸른수목원)이 어우러진 모습이라 가히 싫지는 않으며, 특히 우창굿모닝아파트에서 푸른수목
원으로 넘어가는 숲에 감싸인 그늘진 고갯길은 이곳의 백미로 소박한 자연 풍경을 보여준다.


▲  오류2동 주택가를 지나는 항동 철길 ②

▲  오류2동 주택가를 지나는 항동 철길 ③

▲  항동철길과 금강수목원아파트 사이에 닦여진 짧은 숲길

▲  천왕산의 북쪽 틈을 지나는 항동철길 (푸른수목원 방향)
철길을 닦고자 산세가 낮은 이곳을 손질했다. (나쁘게 말하면 천왕산 북쪽
산줄기를 철길로 끊어버림) 철길 좌우로 뚜벅이길이 닦여져 있는데,
뚜벅이길로 가던 철길로 가던 그건 각자의 취향대로 하면 된다.

▲  천왕산의 북쪽 틈을 지나는 항동철길 (금강수목원아파트 방향)

▲  푸른수목원 옆구리를 지나는 항동철길 (수목원 정문 방향)

항동철길에 한참 빠져들 무렵이 되면 푸른수목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철길도 그렇고 주변 풍
경도 잠시 서울과 속세를 잊게 할 정도로 전원(田園) 풍경을 그려냈지만 안타깝게도 이 변두
리까지 개발의 칼질이 자행되어 아파트가 마구 들어서면서 그 흥이 많이 깨졌다.
게다가 철길은 수목원 정문까지만 거닐 수 있으니 그 이상은 가지 않기 바란다. (뚜벅이길도
없음) 저 철길의 끝에는 우리가 꿈꾸던 세상이 아닌 공장이나 군부대가 있으니 더 갈 이유가
없다.

푸른수목원 정문까지 항동철길(오류선)의 신세를 지고 남쪽에 닦여진 산길을 통해 천왕산 품
으로 들어섰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마무리를 지으며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항동철길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2동, 항동


▲  항동철길에서 바라본 천왕산과 푸른 봄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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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꿀명소, 인사동~북촌한옥마을 나들이 (천도교중앙대교당, 관상감관천대, 정독도서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종친부 경근당옥첩당)

서울 북촌 나들이



' 서울 도심의 한복판, 북촌 나들이 '

소격동 비술나무

▲  소격동 비술나무

천도교 중앙대교당 종친부 경근당

▲  천도교 중앙대교당

▲  종친부 경근당

 



 

♠  안국역 주변 명소들

▲  천도교 중앙대교당(天道敎 中央大敎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호

서울 도심 한복판에 넓게 자리한 북촌(北村)은 청계천 이북 동네를 일컫는다. 한옥(기와집)이
많이 몰려있는 안국역(3호선) 이북 동네(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를 흔히 북촌한옥마을이라 부
르고 있으며, 내 즐겨찾기 목록에도 일찌감치 등록되어 이미 200번 넘게 발걸음을 했다.
오랜 세월 지겹도록 찾다 보니 이제는 두근거리는 마음도 예전만은 못하나 그래도 잊지 않을
정도로 가끔씩 발걸음을 하여 나의 변함없는 마음을 비추고 있다.

이번 북촌 산책은 조계사(曹溪寺)에서 시작하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마무리를 지었는
데, 이미 여러 번씩 복습을 했던 곳이라 이제는 눈 감고도 그들을 그려내고 찾아갈 정도이다.
하지만 좋은 곳은 자꾸 가도 질리지 않는 법, 그들이 잘 있나 확인도 할 겸 해서 겸사겸사 북
촌 마실에 나섰다.


▲  옆에서 바라본 천도교 중앙대교당의 위엄
한참 후배들인 현대식 고층건물 속에서 의연함을 잃지 않으며
100년 묵은 고색의 향기를 마음껏 뿜어댄다.


운현궁(雲峴宮) 서쪽 맞은편에는 천도교의 중심 건물인 수운회관과 붉은 피부를 지닌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나란히 자리해 있다.
중앙대교당은 종교의식과 행사를 치루는 천도교의 중심 교당으로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
孫秉熙)가 세웠다. 그는 300만 교인에게 1가구당 10원씩을 목표로 돈을 거둬 무려 22만원의
거금을 장만해서 지었는데, 설계는 왜인(倭人)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가, 시공은 중
원대륙에서 온 장시영(張時英)에게 시켰다. 1918년 12월에 공사를 시작했으나 1919년에 일어
난 3.1운동으로 다소 지체되었다가 1921년 2월에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처음에는 400평 규모로 크게 지으려고 했지만 조선총독부가 교당이 너무 크고 중앙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는 개소리를 떠들며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부득이 지금의 규모로 축소
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붉은 피부의 벽돌과 화강석으로 다져진 지상 2층, 중앙탑부 4층, 연면적 280.68평 규모로 아
르누보(Art Nouveau)의 한 부류인 비엔나 세제션(Vienna Secession)풍으로 지어 외형이 견고
하고 이색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은 212평, 2층은 45.6평, 3층은 14.44평, 4층은 7.84
평이며, 정면 좌우대칭으로 뒷면에 강당을 연결한 'T'자형 구조를 취하고 있다.

강당 지붕은 맞배지붕 형태로 종탑의 바로크 형식 지붕과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외벽은 대부
분 붉은 벽돌을 쓰고 부분적으로 화강석을 썼다. 중앙 현관부는 화강석으로 반원아치를 들여
쌓았는데 고딕 양식의 성당 출입문과 비슷하며, 현관 양쪽 끝에는 화강석의 부축벽을 세워 장
식했다.
정면 1층 창은 사각형으로 머리 부분에 3개의 화강석, 2층 반원형 아치창에는 7개의 화강석을
넣어 조형미를 갖추었으며, 탑 중앙부에도 반원아치의 큰 창과 그 위로 3개의 작은 반원아치
창을 내었다.

내부는 기둥이 없어 넓은 공간을 이루고 있는데, 천도교의 중심 교당임에도 딱히 장식이 없어
소박하고 썰렁한 모습이다. 내부와 외부 공간에는 우리 겨례를 상징하는 박달나무꽃과 무궁화
문양이 새겨져 있으나 그리 화려하지는 않으며, 비록 조선총독부의 개소리 태클로 작게 지어
졌지만 왕년에는 명동성당(明洞聖堂), 조선총독부 청사와 더불어 서울 시내 3대 건축물로 꼽
혔던 위엄 돋는 건물이다. 또한 1920년대를 대표하는 근대 건축물로도 가치가 높다.

이곳은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바쁘게 살기도 했으며,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1899~1931)이
중심이 된 어린이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 천도교 중앙대교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 88 (삼일대로 457, ☎ 02-735-7579)


▲  천도교 중앙대교당 내부
위엄 돋는 겉모습과 달리 1층 속살은 생각보다 조촐하다. 내부 관람은 가능하나
종교의식과 행사가 있을 경우 제한될 수 있으며, 2~4층은 아무나
올라갈 수 없으니 함부로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  늦가을에 잠긴 천도교 중앙대교당 뜨락 은행나무들
은행나무 너머로 보이는 한옥은 친일 매국노로 악명을 떨친 민영휘(閔泳徽)가
아들인 민병옥에게 지어준 '경운동 민병옥 가옥'이다.

▲  현대빌딩 그늘에 묻힌 관상감 관천대(觀象監 觀天臺) - 보물 1,740호

안국역(3호선)에서 창덕궁(昌德宮)으로 가는 길목에 하늘 높이 솟은 현대빌딩이 있다. 그 앞
에는 현대빌딩의 위엄에 눌려 초췌해 보이기까지 하는 견고한 돌덩어리의 늙은 존재가 손짓을
하고 있으니 그가 조선 때 천문과 기상을 담당했던 관천대(觀天臺)이다.

관천대란 돌로 만든 시설로 해와 달, 별의 움직임은 물론 일식과 월식, 비와 눈 등의 기상현
상을 두 눈으로 살피던 관상감의 관측시설이다. 관천대는 우리나라에 딱 2개 남아있는데, 하
나는 창경궁(昌慶宮)에 깃든 관천대(보물 851호)로 조선 숙종(肅宗) 때 만들어졌고, 다른 하
나가 바로 이곳이다.

이 관천대는 1434년에 설치되었으며, 원래는 현대빌딩 동쪽 부분과 그 동쪽에 있는 언덕(현대
원서공원)에 있었다. 높이 4.2m, 가로 2.8m, 세로 2.5m 크기로 대(臺) 위에 돌난간이 둘러져
있고 그 안에 화강석대(花崗石臺)가 놓여 있으며, 여기에 소간의(小簡儀)와 해시계 등의 천문
기기를 올려 24시간 하늘의 눈치와 표정을 살폈다.
소간의를 올려 놓는 곳이라 소간의대(小簡儀臺)라 불리기도 하며, 별을 관측하는 곳이라 하여
첨성대(瞻星臺)란 별칭도 가지고 있는데, 가만 살펴보면 경주 첨성대와도 조금은 닮았다.

원래는 대 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었으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없으며, 현대
빌딩 자리에 휘문고보(휘문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그 교정으로 옮겨졌다. 이후 1978년 학교
가 강남으로 건너가면서 1983년 지금의 현대빌딩이 들어섰고, 1984년에 현재 자리에 지금의
모습으로 해체/복원되었다.

관천대를 복원할 당시, 원래 있던 자리와 땅의 높이를 맞추고자 평지에 2단의 석축을 닦아 대
를 만들고 그 위에 올려놓았는데, 바로 뒤에 현대빌딩이 공룡처럼 버티고 있으니 마치 햇님과
달님의 부질없는 격차를 보는 듯 하다. 원래 자리에 두기가 힘들다면 현대원서공원으로 옮기
면 좋으련만 개발의 칼질은 그것마저 용납하지 않고 있다.
현역에서 물러난 천문시설의 옛 원로로 현대빌딩 그늘에 가려져 천문관들이 바쁘게 왔다 갔다
하며 하늘을 살피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물건이든 현역에서 물러
나 앉은 모습은 초라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대 동쪽에는 관천대로 오르는 계단이 있으며, 처음에는 국가 사적 296호의 지위를 지니고 있
었으나 2011년 7월 국가 보물로 승진되었다.

* 관상감 관천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140-2 (율곡로 75)

▲  경우궁(景祐宮)터 표석

▲  계동궁(桂洞宮)터 표석

참고로 현대빌딩 자리에는 관상감과 휘문고등학교 외에 경우궁이 빌딩 북쪽에, 남쪽에는 계동
궁이 있었다.

경우궁은 제왕을 낳은 후궁이나 제왕의 친할머니를 봉안한 왕실의 사친묘(私親廟)로 순조(純
祖)의 생모이자 정조가 가장 사랑했던 수빈박씨(綏嬪朴氏)의 사당이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이
터진 날(양력 1884년 12월 4일), 개화당(開化黨)의 재촉으로 고종과 명성황후 등이 경복궁을
나와 경우궁에서 하루 머물렀는데, 날씨도 오지게 춥고, 사당이다 보니 편의시설도 부족해 다
음 날, 그 남쪽에 있던 계동궁으로 옮겼다. 계동궁은 흥선대원군의 장조카인 이재원(李載元)
의 집이다.

갑신정변으로 크게 고생을 했던 고종은 개화당 역적들이 침범하여 더럽혀졌다며, 1886년에 경
우궁을 인왕산 동쪽으로 옮겼으며, 1908년에 국가 제단과 사당을 정리하면서 육상궁(毓祥宮)
에 통합되었다. 경우궁의 건물 일부는 왜정 때까지 남아있었으며, 휘문고보가 이곳에 뿌리를
내리면서 경우궁과 계동궁, 관상감이 모두 학교 부지에 들어갔다.



 

♠  정독도서관(正讀圖書館)과 감사원 주변

▲  정독도서관으로 거듭난 구 경기고등학교 - 국가 등록문화재 2호

북촌한옥마을 한복판인 화동(花洞)에는 서울 사람들의 지식 쉼터인 정독도서관이 있다. 화동
은 화개동(花開洞)의 줄임말로 조선 때 과일과 화초(花草)를 관장하고 궁궐에 조달하던 장원
서(掌苑署)란 관청이 있었다.

정독도서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곳으로 1900년 10월 고종
의 칙령(勅令)으로 개교한 관립중학교(官立中學校)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원래는 김옥균(金玉均)과 서재필(徐載弼)의 집이 있었으나 갑신정변 이후, 나라에서 모두 몰
수했으며, 1900년 관립중학교 부지에 포함되면서 집은 사라졌다. 개교(開校) 때 지은 건물의
정면 삼각지붕 벽면에 태극기를 교차하여 그린 것으로 유명했으며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가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06년 관립한성고등학교로 개편되고 왜정 때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로 바뀌었으며, 본관 뒤
쪽에 있던 을사5적의 하나인 박제순(朴齊純)의 집을 땅을 바꾸는 조건으로 매입하여 평탄작업
을 벌였다. 이때 기존 3,000평에서 11,000여 평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도서관 건물로 쓰이고 있는 옛 경기고교 건물은 1938년에 지어진 것으로 경기고가 1976년 청
담동(淸潭洞)으로 둥지를 옮기자 서울시에서 그해 1월 옛 건물과 땅을 사들여 1년 간 손질을
거쳐 1977년 1월 4일 서울시립 정독도서관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현재 50여 만 권의 서적과 2.7만점의 비도서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도서관 남쪽 건물을 손
질하여 서울교육박물관으로 삼았다.

서울에서 어느 정도 공부 좀 했다는 사람은 꼭 거쳐갈 정도로 역사와 유서가 깊은 서울 제일
의 도서관으로 단골이 많으며, 평일과 휴일 가리지 않고 자리를 잡기 힘들 정도이다. 나 역시
여러 번 이곳에서 공부를 한답시고 책을 펴놓고 엉뚱하게 꿈나라만 허우적거린 얇은 추억이
있다.
다른 도서관과 달리 뜨락이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우며, 나무가 무성하여 굳이 공부나 서적 대
출이 아니더라도 산책이나 나들이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하여 북촌의 주요 꿀단지로 관광객
들의 발길이 상당해 이 땅에서 처음으로 관광지화된 도서관이기도 하다. 게다가 보호수로 지
정된 늙은 회화나무와 여러 역사의 현장들, 오래된 우물 등이 있어 옛 볼거리도 넉넉하다.
예전에는 종친부터에서 넘어온 경근당과 옥첩당도 있었으나 2013년 말에 제자리로 돌아가 지
금은 빈 자리만 있다.

관광객들이 많다 보니 시끄러워서 과연 공부와 독서가 되겠는가 싶겠지만 도서관 분위기가 고
즈넉하고 차분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도서관이니 만큼 고성방가나 독서를 방
해하는 행위는 절대 삼가기 바란다.

* 정독도서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 2 (북촌로5길 48 ☎ 02-2011-5799)

* 정독도서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늦가을도 흔쾌히 머물다 가는 정독도서관 산책로
햇님이 커튼을 치고 달님이 세상을 검게 만들어도 자신을 처절하게 불태우는
단풍나무의 배려에 나무 주변은 대낮처럼 밝을 것이다. 즉 낮과 밤을
가리지 말고 열심히 책을 보라는 자연의 뜻인 모양이다.

▲  정독도서관 정문 밑에 자리한 화기도감(花器都監)터
임진왜란 이후 조총과 화포(火砲)를 만들고자 화동에 조총청(鳥銃廳)을 설치했다.
이후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고 북벌(北伐)을 위해 조총청을 화기도감으로
개편해 육성했으나, 효종(孝宗)이 승하한 이후 완전 흐지부지되고 만다.

▲  화기도감터 표석 부근에 자리한 성삼문(成三問)집터 표석
사육신(死六臣)의 하나로 명성을 날린 성삼문의 집이 이곳에 있었다.

▲  중등교육발상지 표석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학교인 경기고 자리를 알리는 표석이다.

▲  정독도서관 정원에 있는 김옥균 집터

갑신정변을 일으켜 역적으로 몰렸던 김옥균과 홍영식, 어윤중(魚允中), 서광범(徐光範) 등은
1910년 7월 시호가 내려지면서 역적의 굴레에서 비로소 벗어났다. 이때 김옥균의 연시예식(延
諡禮式)이 옛 집터이던 한성고등학교에서 열렸는데, 김옥균의 부인인 유씨가 옛 집터를 돌려
줄 것을 청원했으나 거절당했다.

          ◀  정독도서관 회화나무
이 나무는 3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높이 11m,
둘레 3.6m의 덩치를 지니고 있다.
이곳을 거처간 건물과 인물이 한둘이 아니라
정신이 없지만 회화나무만은 그 자리를 계속
지키며 이곳에 깃든 이야기 보따리를 마음껏
풀어준다. 또한 시원한 그늘까지 드리우며 독
서를 장려한다.
(서울시 보호수 1-7호)


▲  정독도서관에 전하는 늙은 우물

정독도서관 본관(1관)과 2관 사이에는 조금은 생뚱 맞은 늙은 우물이 하나 있다. 우물이 있는
자리는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하나로 꼬질꼬질한 이름을 남긴 평제(平齊) 박제순의 저택이 있
던 곳으로 1900년 집 정원을 손질하다가 이 우물돌을 발견했다. 의외의 유물이 튀어나온 것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는지 시 1수를 짓고 돌 피부에 24자를 새겼는데, 그 내용을 풀이하면
'둥근 우물돌이다. 아마도 전조(고려) 때 것 같은데, 샘은 메어져 흔적이 없고, 다만 돌만 우
뚝하구나. 광무(光武) 4년(1900년) 겨울, 평제(박제순)가 적다'

그때도 우물돌에 낀 고색의 때가 짙었는지 막연히 고려 때 우물 같다고 그랬는데 고려까지 갈
것도 없이 조선 초나 중기에 쓰였던 것 같다. 허나 그에 대한 정보는 박제순의 시 외에는 아
무 것도 없으니 그저 딱할 따름이다.


▲  우물 피부에 새겨진 24자의 또렷한 글씨

매국노 박제순의 글씨가 자신의 피부에 박힌 것에 꽤 불쾌했던지 우물의 표정이 다소 일그러
져 보인다. 그렇다고 저것을 지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참고로 박제순의 손자인 박승유(朴勝裕, 1924~1990)는 친조부와 아버지의 더러운 매국노 행위
를 수치스럽게 여겨 20살에 몸 담고 있던 왜군에서 탈영, 광복군(光復軍)에 들어가 많은 활약
을 했다.
그 공로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아 집안의 죄업을 조금이나마 씻었으며, 음악 교수
및 성악가로도 절찬리에 활동했다.


▲  감사원 옆에 심어진 취운정(翠雲亭)터 표석

북촌의 지붕이라 할 수 있는 감사원 길가에는 취운정터를 알리는 표석이 누워있다. 이곳은 북
악산(백악산)을 등진 높은 곳으로 북촌 일대와 도심이 두 눈에 바라보여 도성(都城) 안 경승
지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다. 특히 제왕이 경복궁에서 종묘(宗廟)나 창덕궁으로 또는 그 반대
로 행차했을 때, 백성들의 번거로움을 덜하고 이목을 피하고자 인적이 드문 이곳을 많이 거쳐
갔다.

미끄러지듯 펼쳐진 도심을 정원으로 삼고 북악산을 베게로 삼은 취운정은 1870년대 중반에 민
씨 패거리의 하나인 민태호(閔台鎬, 1834~1884)가 지은 정자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開化
黨) 인물들이 여기서 자주 모임을 가지며 갑신정변을 논의했다고 전한다.
명성황후가 소환한 청나라군의 공격으로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싱겁게 막을 고하자, 창덕궁
북장문으로 쫓겨나온 왜국 공사와 왜군, 그리고 개화당 인물들은 창덕궁 후원 뒷길과 취운정
을 거쳐 경운동에 있던 왜국공사관으로 줄행랑을 쳤다.

한편 정변 소식을 들은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이 1885년 미국에서 귀국하자, 정변과 관련
된 인물로 찍혀 체포되고 말았다. 당시 포도대장(捕盜大將)이던 한규설(韓圭卨)의 도움으로
다행히 풀려나긴 했으나 대신 7년 동안 조그만 취운정에 갇혀 지내는 시련을 감당해야 했다.
1885년 12월부터 시작된 그의 연금생활은 1892년 11월에 마무리가 되었는데, 길고 긴 그 시간
동안 지루함을 달래고자 그 이름 돋는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썼다. 서유견문은 1889년에 완
성되어 1895년에 정식 출판되었다.


▲  취운정터 부근에 있는 백록정(白鹿亭)터 표석

취운정터 인근에는 도심의 경승지였던 백록정터가 있다. 백록정은 18세기에 경기감사(京畿監
司)를 지냈던 심상훈(沈相薰)이 세운 정자로 취운정과 함께 개화당 인물들이 자주 모여 정변
을 모의하던 곳이다.
빼어난 경승을 자랑했던 취운정과 백록정, 그들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개발의 칼질에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그 터를 알리는 표석만이 그들의 이름 3자를 아련히 속삭일 뿐이다.



 

♠  옛 종친부(宗親府)터 주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주변)

▲  종친부 경근당(敬近堂)과 옥첩당(玉牒堂) - 보물 2,151호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동쪽에는 2013년 11월에 문을 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하
서울관)이 자리해 있다. 지금은 현대미술을 다루는 미술관이 들어서 있지만 그곳은 원래 조선
때 관청인 종친부의 옛터이다.
종친부는 제왕의 어보(御寶)와 영정을 보관하고, 제왕 내외의 의복을 관리하며, 왕족들의 관
혼상제와 봉작(封爵), 벼슬 등의 인사문제, 기타 그들과 관련된 업무를 보던 관청이다. 처음
에는 제군부(諸君府)였으나 1433년에 종친부로 이름을 갈았으며, 1864년에는 종부시(宗簿寺)
와 합쳐졌고. 1894년에 종정부(宗正府)로 개편되었다.

1907년 순종(純宗)의 칙령(勅令)으로 황실과 국가의 주요 문서를 보관하던 규장각(奎章閣)으
로 쓰였으며, 왜정은 이곳에 있던 서적들을 경성제국대학(서울대)으로 모두 옮겼다. 그리고
이승당(貳丞堂)과 천한전(天漢殿), 아재당(我在堂) 등 상당수의 건물을 부셔버리고 종친부의
중심 건물인 경근당과 옥첩당 등 달랑 2동만 남겨 망국 황실을 제대로 욕보였다.

20세기 중반 이후, 이곳에는 국군서울병원(기무사)이 들어서 통제구역으로 꽁꽁 묶였으며, 경
근당과 옥첩당은 그런데로 자리를 유지했으나 1981년 전두환 정권이 기무사에 테니스장을 지
으면서 죄없는 그들을 추방해버렸다. 하여 가까운 정독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30년 이상 샛
방살이를 하게 된다.
기무사는 2012년 다른 곳으로 흔쾌히 이전되었고 그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들어서
게 되었는데, 미술관을 짓기에 앞서 발굴조사를 벌여 옛 종친부 건물의 주춧돌과 기초 시설이
다시금 햇살을 보게 되었다. 경근당을 중심으로 좌측에 이승당, 우측에 옥첩당이 익랑(翼廊)
으로 이어져 나란히 배치되었으며, 경근당 앞에는 돌로 다진 월대(月臺)가 있었다는 옛 기록
과 같은 형태의 기초 유구가 나온 것이다.
하여 문화재청은 정독도서관에 있는 경근당과 옥첩당을 제자리로 돌리기로 결정, 37억의 돈을
들여 기초 유구가 발견된 자리에 그대로 갖다 놓아 2013년 12월에 완성을 보았다. 그리고 국
립고궁박물관에 가있던 경근당과 옥첩당의 옛 현판도 손질을 거쳐 제자리로 돌렸다.


▲  남쪽에서 바라본 옥첩당과 경근당

서울관 동쪽 뜨락에 자리하여 경복궁을 바라보고 있는 경근당은 종친부의 중심 건물로 정면 7
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그 앞에는 마치 칼로 싹둑 다듬은 듯, 반듯하게 지어진 월
대가 1단 낮은 높이로 누워있으며, 그 옆에는 부속건물인 옥첩당이 익랑으로 연결되어 왕족과
궁궐 일을 돌보던 관청의 위엄을 보여준다.
옥첩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저들을 정독도서관에서 보던 것이 정말 엊그
제 같은데, 이렇게 제자리로 돌아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휼륭한 장식물이 되었다. 비록
그들이 이곳의 원래 주인이나 조선이 망하고 세상이 여러 번 엎어지면서 주인과 부속물이 완
전히 바뀐 것이다.

이들은 서울관 경내에 있으나 주변에 따로 담장을 두르지 않은 열린 공간이라 24시간 언제든
둘러볼 수 있다.


▲  경근당 옆에서 날개짓을 하는 옥첩당
경근당과 옥첩당은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호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으나
2021년 12월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다.

▲  종친부 이승당터 표석
경근당 좌측에 있던 이승당은 고약한 왜정에 의해 사라지고, 이곳이 속세에
완전히 해방된 2013년 이후, 표석을 세워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진
그를 붙잡는다.

▲  종친부터 소나무 - 서울시 보호수 1-31호

기무사 이전으로 옛 종친부 자리가 해방되면서 그곳에 깃든 늙은 소나무와 비술나무, 우물터
등도 모두 속세에 공개되었다.
이승당터 주변에 푸르게 솟은 소나무는 120년 정도 묵은 것으로 높이 4.5m, 나무둘레 1.9m이
다. 위치를 보아 종친부 관리들이 심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옛날에는 종친부 뜨락, 기무사 시
절에는 기무사 뜨락, 그리고 지금은 서울관 뜨락에 꾸준하게 솔내음과 그늘을 베푼다.


▲  종친부터 우물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3호

소나무 부근에 종친부터 우물이 동그랗게 누워있다. 그는 1984년 기무사 뜨락 공사 때, 지하
3m에서 발견된 것으로 왜정 때 종친부가 크게 고통을 당하는 과정에서 사라진 것으로 여겨진
다.
우물 윗도리의 화강암 2개가 전부로 그것을 현재 위치로 옮겨 붙여넣었는데, 돌 상부에 네귀
가 조출(彫出)되어 있으며 우물 내부는 자연석을 쌓아 둥글게 쌓았다. 물받이 돌로 사용되었
을 구조물 1점이 우물 안에 놓여져 있는데 그는 네 귀가 조출되어 있지 않다.
이 우물처럼 화강암 2덩이를 동그랗게 이어 붙인 우물은 창덕궁과 운현궁 이로당(二老堂) 후
원에도 있으며, 그의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개화기 이전에 조성된 우물로 여겨진다. 또한
위치한 곳이 종친부 자리라 조선시대 관청 우물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비록 우물이긴 하나 제자리를 잃었고 그 윗도리만 수습해 놓은 것이라 완전히 죽은 우물이다.
그 안에는 물 대신 잡석만 가득 들어있는데, 저리 우울하게 둘 것이 아니라 밑부분을 좀 파서
우물 티는 내게 했으면 좋겠다. 옛날처럼 물을 내지는 못해도 겉모습 정도는 챙겨 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 종친부 경근당, 옥첩당, 우물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소격동 165-10 (삼청로 30)


▲  소격동 비술나무 3형제 - 서울시 보호수 1-23, 1-24, 1-25호

서울관 서쪽에는 늙은 비술나무 3형제가 나란히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기무사 시절에는 아무
나 볼 수 없던 나무였으나 이제는 해방되어 마음껏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시대가 많이 변하긴 변했다.

비술나무란 존재가 꽤 생소한데, 그는 느릅나무과의 큰키나무로 우리나라와 우리의 옛 땅인
중원대륙과 몽골, 연해주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주로 중부 이북의 평지
와 하천 주변에 분포하고 있는데, 지리산(智異山) 등 남부지역에도 드물게 자란다. (영어식
학명은 'Ulmuspumila L.)
추위와 공해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어 가로수와 녹음수, 공원수로 드물게 쓰이며, 경북 영
양군 주남리의 비술나무 숲이 '영양 주사골 시무나무와 비술나무숲'이란 이름으로 국가 천연
기념물 476호
로 지정되어 있다.
3~4월에 잎이 나기 전에 양성화가 피며, 열매는 5~6월에 익는데, 잘 자란 나무는 높이 20m,
둘레 2m까지 성장한다. 음지나 양지에서 모두 잘 자라며, 토심이 깊고 배수가 양호한 사질양
토(沙質壤土)에서 생육하지만 건조에는 약하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느릅나무과 식물들 중에서 잎이 가장 작은 편에 속하며, 잎 뒷면에 털
이 없다. 또 나무껍질은 느릅나무와 달리 세로로 깊게 갈라지며, 어린 가지가 아주 많은 특징
을 가진다.
늦가을에 잎이 떨어지고 나면 가지가 회백색으로 변하며, 회백색이 된 가지는 약효가 있어 한
방에서 통증, 대소변불통 등의 치료제로 쓰인다. 그리고 수피(樹皮) 및 근피(根皮)는 유백피(
楡白皮), 잎은 유엽(楡葉), 꽃은 유화(楡花)라 하여 약용으로 쓰인다.
유백피는 보통 나무껍질을 벗기고 속껍질을 잘 말린 뒤 달여 복용하는데, 이수(利水), 소종(
消腫), 통림(通淋)에 효능이 있으며, 유엽은 석림(石淋)을 치료하는데 쓰이고, 유화는 소아의
간질(癎疾), 소변불리(小便不利), 상열(傷熱) 치료제로도 쓰인다. 비술나무의 어린잎은 국으
로 끓여 먹기도 한다. 목재는 건축재나 가구재, 선박재 등으로 이용된다. (비술나무는 함경북
도 방언으로 다른 이름은 비슬나무임)

이곳 비술나무 3형제는 서로가 너무 붙어있어 애정이 돈독한 형제처럼 보이는데, 1996년 8월
16일에 모두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그때 추정 나이가 15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170여
년 정도 된다. 높이는 17m, 18m, 19m, 나무둘레는 190cm, 240cm, 210cm으로 정자나무 용으로
심어진 듯 싶다.

이곳까지 오니 시간은 어느덧 18시, 햇님은 퇴근을 서두르고 땅꺼미는 서서히 짙어진다. 햇님
의 퇴근을 붙잡으며 더 출사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자칫 햇님의 노여움을 살 수 있어 지구
의 안전을 장담하기 어렵다. 햇님이 수틀리면 지구 하나 사라지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래서
그를 고이 보내주고 나도 북촌 산책을 마무리 지으며 저녁을 먹으러 갔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에 벌인 북촌 산책은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남쪽에서 바라본 소격동 비술나무 3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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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겨울 산사 나들이 ~ 안양 삼성산 염불사, 비봉산 망해암 <안양예술공원, 망해암 석조여래입상>

안양 삼성산 염불사, 망해암



' 늦겨울 산사 나들이 '
(안양 삼성산 염불사, 망해암)

삼성산 염불사

▲  삼성산 염불사(염불암)

망해암 석조여래입상 염불사에서 바라본 천하 (비봉산, 안양시내, 수리산)

▲  망해암 석조여래입상

▲  염불사에서 바라본 안양 지역
(비봉산, 수리산)

 



 

천하를 놓지 않으려는 욕심꾸러기 겨울 제국과 차디찬 겨울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려는 봄
이 팽팽히 맞붙던 3월의 첫 무렵, 친한 후배와 안양(安養)에 있는 염불사와 망해암을 찾았
다.

삼성산(三聖山, 480m) 남쪽 자락에 자리한 염불사를 가려면 안양 제일의 명소로 추앙을 받
는 안양예술공원을 거쳐야 된다. 예술공원을 가르며 안쪽으로 들어서면 염불사로 인도하는
포장길(예술공원로245번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20~25분 정도 묵묵히 오르면 염불사가 활
짝 모습을 비춘다.


▲  소나무 그늘 밑에 앉아 삼성천을 굽어보는 안양정(安養亭)
<안양사입구 동쪽에 자리함>

▲  염불사로 인도하는 숲길(예술공원로245번길)
봄의 해방군이 거의 문턱까지 이르렀지만 삼성산 숲은 여전히 겨울 속을 방황한다.
허나 소쩍새가 울 때면 저들도 겨울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활짝 기지개를
켤 것이다.



 

♠  삼성산 남쪽 자락에 깃든 고즈넉한 산사, 절벽을 병풍처럼
두르며 안양을 굽어보고 있는 ~ 삼성산 염불사(念佛寺)

삼성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깃든 염불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삼성산에서 삼막사(三幕
寺, ☞ 관련글 보기) 다음으로 큰 절이다. 오랫동안 삼막사의 부속 암자로 있으면서 염불암(
念佛庵)이라 불렸으나 근래에 그 그늘에서 벗어나 '암(庵)'에서 '사(寺)'로 칭호를 높였다.

절의 이름은 신라 중기에 의상(義湘)과 원효(元曉), 윤필(潤筆)이 이곳에 있던 토굴(土窟)에
서 불도를 닦으며 염불을 올렸다고 해서 유래된 것이라 전한다. 윤필이 이곳에 절을 짓고 수
도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하고 있으나 다들 신빙성이 없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
다.
또한 926년(또는 936년)에 고려 태조(太祖)가 후백제(後百濟)를 치고자 삼성산 옆을 지나다가
안양사 창건설화(☞ 관련글 보기)에도 등장하는 능정(能正)이 삼성산 자락에서 좌선(坐禪)에
들어있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염불사의 전신(前身)인 안흥사(安興寺)를 세웠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하고 있다.
하지만 고려 때 유물이 전혀 없고 안양사(安養寺) 창건 설화와도 상당수 비슷해 이 역시 신빙
성은 떨어진다. 1407년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고자 왕명으로 관악산의 여러 절과 함께
중창했다고 전하는데, 경내에 500년 묵은 보리수나무가 있어 이때쯤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
다.

창건 이후 오랫동안 사적이 없다가 1857년에 이르러 청허(淸虛)와 도인(道人)이 칠성각을 세
웠다. 1904년과 1927년에 중수했으며, 1930년에는 세심루(洗心樓)를 세우고, 1932년에 산신각
, 1941년에 대웅전과 칠성각을 중수했다. 그리고 1964년에 미륵불을 세우고, 1992년에 대웅전
을 옮겨 크게 중창했으며, 2000년에 나한전을, 2008년에 석조관음보살상을 지었다.

석축을 높게 다져 크고 작은 건물을 심었는데, 칠성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20세기에 지어진
것들이라 겉에서 풍기는 고색의 내음은 거의 없다. 소장문화유산은 비록 지정문화재는 없으나
500년 묵은 보리수와 19세기에 조성된 승탑(부도) 3기, 바위에 새겨진 마애승탑(磨崖僧塔, 마
애부도) 2기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준다. (마애부도는 못봤음)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해 나한전, 염불전, 칠성각, 영산전, 산신각 등 약 10동
의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 뒷쪽에는 소나무가 솟은 멋드러진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데,
그 벼랑에도 조그만 건물과 미륵불을 주렁주렁 달아놓아 일대 장관을 연출한다. 그렇다고 요
란하게 벼랑을 밀어버린 것은 아니며 약간의 손질만 가해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안양예술공원에서 삼막사, 삼성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황금 길목이라 자연히 절을 둘러보는 수
요도 제법 되는 편이며, 벼랑에 닦여진 산신각과 칠성각에서 바라보는 삼성산과 안양시내 풍
경은 두 안구와 마음을 시원하게 어루만져준다.

* 염불사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41-52 (예술공원로245번길 150, ☎ 031-
  471-2300)

▲  옛 대웅전 자리에 세워진 염불전(念佛殿)

▲  염불전 앞쪽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  요사(寮舍) 앞뜨락과 질서정연하게 들어선 장독대들(왼쪽)
장독대에는 어떤 먹거리들이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을까? 살짝 뚜껑을
열어 그 속살을 들춰보고 싶다.

▲  염불사 대웅전(大雄殿)

돌계단을 타고 경내로 들어서면 남쪽을 굽어보는 대웅전과 염불전이 제일 먼저 모습을 비춘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원래는 그 우측 염불전 자리에 있
었는데, 1992년에 주지 성수화상이 의상과 원효, 윤필 3명의 고승이 수도를 했던 터로 여겨진
다는 현재 자리로 옮겨 크게 지었다.
현재 염불사의 사세를 보여주듯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며 지붕을 받치며 촘촘히 박혀있는 공포
는 그 아름다운 섬세함에 감탄이 새어 나오게 한다. 건물 주변으로 하얀 피부의 난간석을 둘
렀으며, 계단 앞에는 석사자 2기를 배치해 혹시 모를 화마(火魔)의 공습에 대비했다.

대웅전 내부에는 금빛 찬란한 석가여래3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제
스처를 취한 석가여래 좌우로 수려한 자태의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시
립(侍立)해 있는데, 이들은 1992년에 은행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며, 그들 뒤에는 색채가 고운
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  대웅전 좌측 석조관세음보살상

대웅전 좌측에는 2008년에 새로 지은 석조관세음보살상이 있다. 파리도 능히 미끄러질 정도로
매끈한 하얀 피부를 지닌 그의 좌측에는 육환장(六環杖)이란 긴 지팡이를 쥐어든 지장보살(地
藏菩薩)이 관세음보살보다 훨씬 낮은 연화대(蓮花臺)에 서 있고, 우측에는 산신(山神)이 의자
에 앉아 있다. 그들 뒤에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병풍처럼 들러져 있는데, 벼랑 윗쪽 소나무
사이로 독성각이 아찔하게 버티고 있다.


▲  대웅전 앞 3층석탑

대웅전 앞뜰에는 독특한 모습을 지닌 새하얀 3층석탑이 자리해 있다. 8각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조그만 기단을 깔고, 그 위로 부처가 새겨진 8각의 탑신(塔身)을 얹
힌 다음 보주(寶珠)로 마무리를 했는데, 그가 있기 전에는 경내에 그 흔한 탑조차 없었다.

        ◀  염불사 보리수(菩提樹)
탑 옆에는 염불사에서 가장 늙은 존재인 보리
수가 자라고 있다.
보리수의 원래 이름은 '보디 브리크샤(Bodhivr
iksa)'로 부처가 붓다가야 보리사에 있는 보리
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불교에서
매우 애지중지하는 나무이다. 무화과와 흡사한
뽕나무과 상록수로 인도대륙 힌두교에서도 신
성시 여기는 나무이기도 하다.

보리수는 우리나라에는 그리 많지 않은 나무로
아무리 부처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의미심장한
나무라고 해도 겨울 제국 앞에서는 예외가 없
다. 제국의 시련을 겪어야 되기 때문이다. 나
무를 감싸던 푸른 잎들은 모두 녹아 없어졌고,
가지만 앙상하게 드러내며 봄의 해방군을 간절
히 염원한다.

이 나무는 15세기에 이곳에서 수도하던 승려가 심었다고 전하며, 이를 통해 적어도 조선 초기
에 염불사가 숨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람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할 500년의 장대한 나이를
먹었지만 높이 12m, 둘레 1.2m로 비슷한 나이의 다른 나무에 비해 체격은 조그만 편이며, 
양시 보호수 5-2호
의 작은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나한전(羅漢殿)
염불전 뒤쪽에는 1990년대에 지어진 나한전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2000년에 조성된 500나한과 16나한이 봉안되어
있다.


▲  염불사 산신각(山神閣)

대웅전과 나한전 뒤쪽에는 기암괴석으로 그윽한 높은 벼랑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염불사의
든든한 후광이자 절을 더욱 장엄하게 꾸며주는 그 벼랑에는 산신각, 칠성각, 독성각, 영산전,
미륵불 등이 군데군데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미륵불과 칠성각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마치 천
하가 내 발 밑에 펼쳐진 듯, 천하 일품을 자랑한다.

대웅전 뒷쪽 나무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면 제일 먼저 절벽 사이 좁은 공간에 들어앉은 산신
각을 만나게 된다. 경내를 굽어보는 산신각은 1칸에 불과한 조촐한 맞배지붕 집으로 조선 후
기부터 전해오던 것을 1932년에 중수했다. 지붕은 목조이나 건물 벽은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부에는 1970년대 후반에 그려진 산신도가 걸려 있다.
이곳에 서면 경내는 물론이고 삼성산 남쪽 산줄기인 비봉산(295m)과 안양을 서쪽에서 보듬은
수리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산신각에서 바라본 천하
삼성산 남쪽 산자락과 비봉산, 안양시내, 수리산이 두 망막에 들어온다.

▲  산신 가족이 담겨진 산신탱

▲  독성각(獨聖閣)

산신각에서 동쪽으로 난 조그만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면 벼랑 위에 조마조마하게 버티고 앉
은 독성각이 나온다. 석조관세음보살상 바로 뒷쪽 벼랑으로 경내에서 가장 궁색하고 위험한
곳에 자리해 있는데, 그 많은 자리 가운데 굳이 이곳에 힘들게 독성각을 닦았는지 의문이다.
독실한 불심(佛心)이 낳은 결과일까? 아니면 경내의 명물로 키우려는 욕심의 산물일까?

독성각은 산신각과 거의 쌍둥이꼴 모습으로 1칸짜리 맞배지붕 집이다. 지붕은 목조로 이루어
져 있고 벽은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건물 바로 앞이 천길 낭떠러지라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
다. 비록 난간이 둘러져 있긴 해도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으며 촘촘하지 못하기 때문
이다.

산신각과 비슷한 시기에 중건된 것으로 여겨지
며, 건물 내부에는 근래에 그려진 독성탱이 걸
려있다.
독성탱에는 독성(獨聖) 할배와 동자, 사슴, 소
나무, 그의 본거지인 천태산(天台山)이 담겨져
있다.

   ◀  독성 가족의 단란함이 깃든 독성탱

산신각을 지나면 절벽에 등을 대며 남쪽을 바
라보고 선 석조미륵불이 모습을 비춘다. 1960
년에 주지인 기석화상의 꿈속에 미륵불이 나타
나 이마를 쓱쓱 어루만지며
'마애석불을 만들어 널리 중생을 구제하라'

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당시 기석은 낡고 퇴락한 염불암을 다시 일으
킬 궁리를 했었는데, 미륵불의 현신에 용기를
얻고 1964년부터 5년간 공을 들여 석불을 완성
하고 공덕비를 세웠다.
미륵불은 연꽃이 새겨진 연화대 위에 서 있으
며, 전체적으로 풍만한 느낌을 던진다. 머리에
는 2중으로 된 보관(寶冠)을 썼고, 얼굴은 다
소 경직되어 보이며, 입가에는 넌지시 미소가
드리워져 중생을 살짝 위로한다.
오른손으로 시무외인, 왼손으로 여원인을 취하
며 안양 시내를 굽어보는 미륵불 옆에는 산신
각과 쌍둥이 꼴인 영산전이 있다.

▲  염불사 석조미륵불

미륵불에서 더 올라가면 그 계단의 끝에 칠성
각이 수비병처럼 자리해 경내를 굽어본다.
칠성각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겉보기와 다르게 1857년에 지어져 염불사에서
가장 늙은 집이다.
벼랑 사이에 간신히 비집고 들어앉았으나 산신
각과 독성각보다는 조금은 여유로워 정면 2칸,
측면 1칸의 구조를 지녔으며, 내부에는 1979년
에 제작된 칠성탱이 있다.

▲  벼랑 위에 자리한 칠성각(七星閣)


▲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펼쳐진 칠성각 칠성탱

▲  칠성각에서 바라본 천하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이라 앞서 산신각보다 조망의 품질이
조금은 높아졌다. (그래봐야 보이는 범위는 비슷함)

▲  19세기에 조성된 염불사 부도(승탑)들

영산전에서 대웅전으로 내려가는 계단 대신 서쪽 산길로 내려가면 나한전 서쪽에 자리한 부도
<浮屠, 승탑(僧塔)> 3형제를 만날 수 있다.
이들은 이 땅에 흔한 석종형(石鐘形) 부도로 왼쪽부터 도일당(道日堂), 인봉당(印奉堂), 서영
당(西影堂) 탑인데, 원래는 절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싹 집합시킨 것이다. 그들
모두 1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탑신 피부에 탑 주인과 조성 관련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조
성 시기를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단 도일당은 조성 시기 부분이 마멸됨)

▲  도일당탑

▲  인봉당탑

◀  서영당탑에 깨알처럼 새겨진
글씨들

왼쪽에 자리한 도일당탑은 높이 167cm로 바닥돌은 없다. 장대한 세월의 무심한 장난으로 탑이
두 동강이 난 것을 다시 붙였는데, 중간에 난 금이 그 흔적이다. 탑 중앙에는 얇게 홈을 파서
깨알처럼 글씨를 넣었으나 마멸이 심하며 탑 꼭대기에는 동그란 보주(寶珠)를 두었다.

중앙에 있는 인봉당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늘씬한 자태에 탑신을 올리고 반구형 보주로 마
무리를 지은 탑으로 높이 143cm, 조성 시기는 1816년이다. 도일당탑처럼 탑 앞쪽을 다듬어 글
씨를 넣었는데, 글씨가 아직은 선명하여 한자를 조금 안다면 알아보는데 그리 무리는 없다.
그리고 오른쪽에 자리한 서영당탑은 1810년에 조성된 것으로 바닥돌이 탑의 거의 2/3를 차지
할 정도로 무척 크고 견고하다. 자연석을 가져와서 조금 손질을 가해 바닥돌로 깔고 탑과 반
구형 보주를 올렸는데, 옆에 있는 승탑과 비슷한 모습이다.

이들은 19세기 초반 염불사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알려주는 존재이자 경내에서 보리수 다음으
로 오래된 존재로 이들 외에도 경내 부근에 바위에 새겨진 19세기 마애승탑 2기가 있으나 인
연이 닿지 못해 만나지 못했다. (그때는 그들의 존재를 전혀 몰랐음)


▲  염불사를 뒤로하며



 

♠  삼성산 남쪽 비봉산 자락에 높이 들어앉은 고즈넉한 산사
일몰 풍경과 조망이 일품인 망해암(望海庵)

▲  망해암으로 인도하는 비봉산 숲길(임곡로)

안양예술공원 남쪽에는 삼성산과 관악산의 남쪽 산줄기인 비봉산(295m)이 누워있다. 그 서쪽
자락 가파른 곳에는 망해암이란 고찰(古刹)이 안양시내를 바라보며 자리해 있는데 그곳에 늙
은 석불 하나가 깃들여져 있고 조망과 일몰이 천하일품이라는 풍문을 익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곳과는 계속 인연이 닿지 않았고, 어느 3월 첫 무렵에 이르러 억지로 인
연을 붙여 오랜 세월 목말라했던 그곳을 찾았다. (삼성산 염불사와 같은 날에 간 것은 아니나
같은 지역에 있고 서로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어서 편의상 본글에 넣었음)

안양역(1호선)에서 안양마을버스 3-1번을 타고 비산1동 임곡주공아파트 종점에서 내렸다. 여
기서부터 두 다리에 의지해 오르막길(임곡로)을 올라가야 되는데, 처음에는 아파트와 학교,
주택들이 좌우에 펼쳐져 있으나, 5~6분 정도 오르면 싱그러운 비봉산 숲길이 펼쳐져 속세의
번뇌를 털어준다.
차량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절까지 포장길이 닦여져 있는데, 구불구불한 숲길을 20여
분 오르면 해발 200m 고지에 들어앉은 망해암이 활짝 모습을 비춘다. 임곡주공아파트 종점에
서 도보 30분 정도 걸리며, 안양예술공원에서도 망해암까지 산길이 이어져 있다.


▲  일몰을 온몸으로 받고 있는 망해암 종무소(宗務所)
가파른 지형을 이용해서 만든 2층 건물로 윗층에서 바라보는 조망과
일몰 맛이 아주 좋다. (윗층 바깥 통로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음)

▲  한 지붕 두 가족, 2층 건물
윗층은 천불전(千佛殿), 아랫층은 지장전

▲  지장전(地藏殿) 석조지장보살좌상
큰 바위를 다듬어 그의 거처를 닦았다.


망해암은 북쪽으로 안양예술공원과 삼성산이 보이고, 완전히 확 트인 서쪽으로 안양시내와 수
리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날씨가 정말 좋으면 수리산 너머로 서해바다까지 시야에 들어오는데
, 서해바다가 강제로 땅으로 매립되면서 바다를 볼 기회는 많이 줄었다. 어쨌든 바다까지 보
이는 매력 때문에 절의 이름도 바다를 바라보는 절이란 뜻에 망해암이 되었으며, 여기서 바라
보는 조망과 일몰, 안양 야경(夜景)이 아주 진국이라 안양9경의 제4경이자 으뜸으로 오랫동안
찬양을 받고 있다.

이곳은 조계종 소속으로 화성 용주사(龍珠寺)의 말사(末寺)이다. 신라 중기에 원효대사(元曉
大師)가 창건했다고 내세우고 있으나 신빙성은 전혀 없으며, 경내에 고려 초/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늙은 석조여래입상이 전하고 있어 신라 후기나 고려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407년 서울을 위협하는 관악산의 산천기맥(山川氣脈)을 싹 누르고자 관악산과 삼성산 주변의
절을 중창했는데, 이때 중건의 혜택을 받았다고 전하며, 1803년에 헌경왕후(獻敬王后) 홍씨(
혜경궁홍씨)의 지원으로 중창했다. 그리고 1863년 대연화상이 증수했으며, 이후 6.25때 파괴
된 것을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용화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천불전, 지장전, 종무소 등 6~7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고려 때 지어진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그는 용화전에 들
어있는데, 그의 보개에 1479년에 조성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그때 지어진 것으로 봤으나
석불의 감정 결과 고려 전기 것으로 판명되었다. 하여 보개에 쓰여진 내용은 석불 중수나 석
불 보개를 씌운 시기로 보인다.
안양과 삼성산 일대에서 꽤 늙은 석불이고, 그와 관련된 글씨를 품고 있음에도 그 흔한 지방
문화재의 지위도 얻지 못했다가 2022년 5월에 비로소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망해암과 관련해서 재미난 전설이 하나 전해오고 있으니 내용을 대략 이렇다. 조선 세종 시절
, 남부지방에서 조세를 싣고 서울로 향하던 배가 인천 월미도(月尾島) 부근을 지나다가 거센
풍랑으로 침몰 위기에 빠졌다. 선원들은 크게 당황하며 우왕좌왕하던 그때 뱃머리에서 난데없
이 승려가 나타나 혼란에 빠진 선원들을 진정시켰고, 그 사이 풍랑은 멈추었다.
선원들은 승려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어느 절에서 왔는지를 물었고, 승려는 관악산 망해암에서
왔다고 답을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선원들은 서울에 도착해 조세 수송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그 승려에게 답례를 하고자 망해암
을 찾았다. 허나 승려는 없고 그와 비슷하게 생긴 석불만 법당에 덩그러니 있는 것이다. 하여
그들은 깨달은 바가 있어 나라에 상소를 올려 이 사실을 고하니 이를 가상히 여긴 세종이 매
년 공양미 1섬씩을 석불에게 보냈으며, 조선 후기까지 계속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이를 통해 배로 조세나 쌀을 나르던 선원이나 관리가 절에 시주를 하며 뱃길의 안녕을 기원한
것으로 여겨진다. 게다가 여기서 인천 앞 서해바다까지 바라보이니 기원을 하기에도 딱 좋다.
그들의 건의로 나라에서도 조세 수송의 안전을 위해 공양미를 보냈던 것으로 보이며, 그것을
픽션이란 양념을 적당히 넣어 전설로 다듬은 것이다.

* 망해암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 55-1 (임곡로245, ☎ 031-443-5559)

▲  삼성각(三聖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건물로
산신, 독성, 칠성이 봉안되어 있다.

▲  석불입상의 거처인 용화전(龍華殿)
용화전 밑에는 2층 건물을 두어 요사,
선방 등으로 사용한다.


▲  용화전에 봉안된 망해암 석조여래입상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383호

용화전에 소중히 깃든 석조여래입상은 망해암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자 이곳의 대표 보물이다.
이렇게 보면 어깨와 얼굴, 보개(寶蓋)만 있는 것처럼 보이나 저것은 불단 때문에 가슴 아래가
강제로 가려진 것일 뿐, 나머지 부분은 잘 남아있다. 하여 불단 옆에서 봐야 그의 가려진 옆
구리와 아랫도리 모두 확인할 수 있다.
(2021년 6월에 건물 마루에 오랫동안 가려진 밑도리를 들춰내 그의 다리와 발, 대좌 일부를
새로 확인했음)

이 석불은 높이 3.4m로 보개 밑에 '성화(成化) 15년 4월'이라 쓰여있어 1479년 4월에 석불을
중수하거나 보개를 씌웠음을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예전에는 그때 조성된 석불로 봤으나
평가 결과 고려 초/중기 것으로 나와 안양과 삼성산 일대에서 제일 오래된 석불로 꼽힌다.
육계(무견정상)가 솟은 머리에는 둥근 모습의 보개가 씌워져 있으며, 머리와 보개는 검은색을
칠했으나 지금은 많이 지워졌다. 상호와 신체는 하얀색으로 분을 칠했으며, 나발을 갖춘 머리
는 다소 마모되었다.
머리 정면 중앙에는 계주가 있으며,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듯한 두 눈은 반쯤 떠서 아래를 보
고 있고, 입과 코는 두툼하다. 양쪽 귀는 매우 크며,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통견으로 두껍
게 처리했다. 왼손은 가슴 앞에 대고 엄지과 검지를 맞대고 있으며, 오른손은 오른쪽 다리로
내렸다. 20세기 이후 조금 변형되긴 했으니 상태는 괜찮은 편으로 조성 관련 명문이 새겨진
탓에 고려와 조선 초기 석불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앞서 망해암 전설에서 선원을 구한 승려의 화신으로 나오며, 조정에서도 공양미를 보내 그를
챙겨줄 정도로 그가 있기에 망해암도 이렇게 무탈하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망해암에 왔다면
이 석불도 꼭 챙겨보기 바란다. 그를 놓치면 망해암의 50%를 놓친 것과 다름이 없다.

▲  옆에서 바라본 석조여래입상의 위엄
불단에 가려 보이지 않던 부분이 싹 모습을 비춘다. 약간의 변형과
세월을 탄 흔적이 좀 있으나 건강상태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  용화전 지킴이, 신중탱(神衆幀)

▲  망해암에서 바라본 안양시내와 수리산


▲  오늘도 해는 진다. 망해암에서 바라본 일몰

천하를 따사롭게 대피던 햇님은 퇴근시간이 다가오면서 그만의 공간으로 가고자 슬슬 휘장을
거두고, 진하게 보이던 안양시내도 그만큼 흐릿하게 다가온다. 그 틈을 타서 달님이 주관하는
어둠이 내려앉으니 사람도, 도시도, 산도 어둠을 몰아내고자 불빛을 여기저기서 발산하고 검
게 익은 안양의 산하는 그것을 얼굴에 바른다.
하여 여기서 바라보는 일몰과 조망 외에도 안양의 야경도 정말 일품인데, 이날 야경까지는 생
각이 없고 날씨도 추우므로 야경은 언제가 될지 모를 막연한 미래로 내던지고 안양예술공원으
로 쿨하게 내려갔다.

이렇게 하여 늦겨울 삼성산 염불사, 망해암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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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강원도의 깊은 내륙, 양구 방산면 나들이 <수입천, 직연폭포, 양구백자박물관>

양구 직연폭포, 백자박물관



' 강원도 양구 여름 나들이 '
(직연폭포, 양구 백자박물관)
양구 직연폭포
▲  양구 직연폭포
 



 

여름이 점점 깊어가던 6월의 끝 무렵, 한반도의 정중앙이자 배꼽을 자처하는 강원도 양구
(楊口) 땅을 찾았다.

양구는 거의 9년 만에 방문으로 이번이 4번째 인연인데, 양구읍내 북쪽에 있는 '양구근현
대사박물관'과 '양구 선사박물관', 선사박물관의 깜찍한 마스코트인 '가오작리 선돌', 파
로호 상류에 떠있는 '한반도섬' 등을 간만에 복습했다. 이들은 거의 한곳에 몰려 있어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면 편하다. (☞ 관련글 보러가기)

그들을 모두 둘러보고 양구 읍내로 나오니 어느덧 15시, 점점 흥분이 더해가는 여름 제국
의 기운과 10km에 가까운 행군으로 몸은 다소 지쳐 있었다. 읍내 다음으로 방산면 지역의
직연폭포와 백자박물관을 정처(定處)로 두고 있었으나 날도 덥고 피곤도 하려니와 하루에
너무 많은 것을 봐버리면 내 침침한 두 망막이 과부하(?)가 걸릴 것 같아서 마음을 싹 비
우고 철수하려고 했다.
그래서 양구시외터미널로 들어가 양구를 뜰 궁리를 하던 찰라, 방산(오미리)으로 가는 군
내버스가 나타나 나의 그런 태만에 빵빵 제동을 건다.
'그래! 오늘 죽더라도 방산면과 인연을 짓자' 마음을 고쳐먹고 그 버스에 올라 미답(未踏
)의 공간인 방산면으로 이동했다.

방산면(方山面)은 양구 지역의 서북부를 이루고 있는 고장으로 읍내에서 방산면 중심지인
현리까지 30여 분 정도 걸린다. 서쪽은 남북분단이 빚은 어이없는 작품, 평화의댐에 이르
고 북쪽은 미움의 선, 휴전선으로 막힌 외로운 곳으로 두타연(頭陀淵)이 있는 고방산리까
지는 오로지 북만 보고 달리다가 거기서부터 급격히 서남쪽으로 길이 꺾인다.

방산면사무소(현리)에서 내려 남쪽으로 가면 방산면의 대지를 적시며 파로호로 흐르는 수
입천(水入川)이 마중을 한다. 수입천은 휴전선 이북에 강제로 잡힌 수입면 청송령(靑松嶺
)에서 발원한 34.8km의 하천으로 두타연과 직연폭포 등의 걸출한 명승지를 간직하고 있으
며, 수질 또한 전방 지역의 특수로 인해 청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  칠전1교에서 바라본 수입천 (서쪽 방향)
방산면의 중심지인 현리 마을 남쪽을 굽이쳐 북한강으로 흘러간다.

▲  칠전교에서 바라본 칠전1교와 수입천 (서쪽 방향)

▲  칠전교에서 바라본 직연폭포 방향
멀리 보이는 다리 밑에 나를 이곳으로 부른 직연폭포가 누워 있다. 물이 얼마나
맑은지 주변 나무는 물론이고 하늘과 구름, 달까지 그를 거울로 삼으며
매뭇새를 다듬는다.



 

♠  수입천이 빚은 대작품, 직연폭포(直淵瀑布)

▲  직연폭포로 인도하는 수입천 산책로

칠전교에서 수입천 산책로를 따라 동쪽으로 조금 가면 귀신이 놀라 도망칠 정도로 소리가 요
란한 직연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금강산(金剛山) 밑에서 발원한 수입천이 두타연을 거쳐 흐르다가 바위가 팽팽하게 들어선 이
곳에서 격한 흥분을 보이며 빚은 폭포로 동면 팔랑폭포(八郞瀑布, ☞ 관련글 보기)와 더불어
양구 지역을 대표하는 자연산 폭포이다.
팔랑폭포처럼 높이는 낮은 편이나 폭포 주위로 주름진 암벽들이 기묘하게 펼쳐져 있어 마치
조그만 대협곡을 보는 듯 하며, 폭포수가 고인 못은 깊이가 무려 20m가 넘어 많은 물고기가
살아가고 있다. 예전에는 물이 바로 떨어지는 못이란 뜻의' 직소(直沼)폭포'라 불렸으나 19세
기에 양구현감을 지냈던 '김구현'이 이곳을 다녀가면서 '직연(直淵)'으로 이름을 갈고 인근
바위 피부에 '직연' 바위글씨를 남겼다. (그 글씨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남아있지 않음)

암벽 한복판에서 요란하게 몸을 푸는 직연폭포에는 옛 사람들이 달아놓은 그럴싸한 전설이 있
을 법도 하지만 딱히 마땅한 전설은 없다. 다만 1922년 폭포 부근 칠전리에 살던 '김왈용'이
란 사람의 6개월 된 송아지가 직연에 빠져 죽은 일이 있었는데, 3자 이상이나 되는 메기들이
그 몸뚱이를 먹어치웠다는 소름 돋는 일화가 1토막 전해온다. 1자의 크기가 30cm 정도이니 대
략 90~100cm 정도 되는 메기들이 소고기 회식을 즐긴 것이다.

폭포 위에는 다리가 닦여져 있으며, 다리 너머에는 벼랑을 깎아 지은 방산백자폭포와 전통가
마 등이 있고, 다리 북쪽에는 양구 백자박물관과 백자공원이 닦여져 있다. 백자박물관 바로
남쪽에 폭포가 있으니 이들을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면 된다.

* 직연폭포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칠전리


▲  층층이 주름진 암벽 사이를 패기 있게 흐르는 직연폭포

▲  대자연이 시퍼런 물감을 풀어놓은 직연폭포 못(직연)
물에 둥둥 떠있는 하얀 것은 비누 거품이 아니라 폭포에서 쏟아진 물의
자연산 거품이다. 수질이 청정하긴 하지만 워낙 깊이가 있고
시퍼런 기운이 가득해 밑바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  수풀 너머로 바라본 직연
산 속에 숨겨진 것이 아닌 주변에 훤히 드러난 곳이라 하늘나라 선녀 누님도
마음껏 놀러오지는 못할 것이다.

▲  직연폭포의 허공을 가르는 다리
폭포를 가까이서 보고 싶다면 이 다리를 이용하자. 다리 바로 밑에 폭포가
무섭게 입을 벌리며 하얀 실타래 같은 물을 풀어놓는다.

▲  다리 바로 위에서 바라본 직연폭포의 위엄

▲  다리 남쪽에서 바라본 직연폭포와 직연소

▲  직연폭포 동쪽 수입천

폭포 동쪽 보 너머에는 백사장이 닦여진 완만한 공간이 있다. 그곳은 수심도 얕은 편이라 어
린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피서객들에게 아주 그만인 곳이다. (내가 갔을 당시 한 가족이 텐트
를 치고 놀고 있었음) 다만 주변에 깊은 곳이 지뢰처럼 도사리고 있으니 조심은 필수이다.


▲  방산백자폭포에서 바라본 직연폭포 다리와 폭포 주변

▲  방산백자폭포 앞에 축소 재현된 황포 돛배

조선시대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황포돛배를 통해 양구 지역의 백토와 여러 물자를 서울과 경기
도로 수송했다. 하지만 화천댐과 춘천댐 등 여러 댐이 북한강에 걸쳐지면서 물길이 모두 막혔
고, 도로가 닦이면서 육상교통이 그 역할을 대신하니 이제는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지기가 바
쁜 추억 속의 풍물시(風物詩)가 되어버렸다.


▲  말라버린 방산백자폭포

직연폭포 남쪽에는 또 다른 폭포인 방산백자폭포가 주름을 가득 보이며 자리해 있다. 직연폭
포가 대자연이 빚은 작품이라면 백자폭포는 인간이 지은 인공폭포로 높이만큼은 직연을 훨씬
능가하지만 나머지는 대자연 형님 작품에 모두 밀린다.
이 졸작스러운 폭포는 직연폭포 주변에 백자박물관과 백자공원, 전통가마를 닦으면서 그 수식
용으로 지은 것으로 내가 갔을 때는 물은커녕 물기조차 느낄 수 없는 우울한 상태였다. 물이
좀 흐르고 있거나 자연산 비슷하게 만들었다면 좀 봐줄 만하겠지만 꽤 어색해 보이는 주름선
만이 가득하니 주변 풍경과 너무 맞지 않는 것 같다. (서울의 홍제천인공폭포와 순창 강천산
의 여러 인공폭포를 보고 배워야 될 듯함)


▲  백자를 굽던 전통가마

백자폭포 서쪽에는 백자박물관에 딸린 전통가마가 길게 누워있다.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비바
람을 막고자 그 허공에 길쭉하게 지붕을 씌웠으며 지붕 용마루 2곳에 연기를 배출하는 장치를
달았다. (지금도 가마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

양구 지역, 특히 방산면은 고려시대부터 도자기 생산지로 명성이 높았다. 도자기 제조에 필요
한 백토(白土)와 도석(陶石)이 매우 풍부한데다 백토의 질도 매우 우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려 말부터 가마터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이곳을 꽤 애지중지하
여 많은 관요(官窯)를 설치해 백자를 생산했다. 조선 초에는 분청사기(粉靑沙器), 조선 말에
는 청화백자(靑華白瓷)도 생산했으나 백자가 그 중심을 이루었으며, 양구에서 만든 백자를 '
양구백자'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 양구에서 40기의 가마터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상무룡리의 9기를 빼면 모두 방산면
(장평리, 칠전리, 현리, 송현리, 오미리, 금악리)에 분포하고 있어 방산면이 그 중심지였음을
알려준다. 이렇듯 풍부한 백토 덕에 반짝 흥한 것이 아닌 20세기 중반까지 600년 이상 두고두
고 도자기 산지로 위엄을 떨쳤으며 이렇게 오랫동안 도자기를 만든 현장은 천하에서 양구 방
산면이 거의 유일하다.

이곳에서 태어난 백자 등의 도자기는 한강을 통해 서울로 운송되어 상당수 왕실과 귀족들에게
납품되었는데, 서울에서 가까운 광주(廣州)에 백자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마('광주분원'이라
고 함)가 많이 설치되면서 양구와 방산 지역 가마터는 조금 한가해졌다. 그래서 지역 사람들
을 대상으로 여러 그릇과 도자기를 만들어 판매했다.
허나 나라에서는 여전히 양구 백토를 선호하여 중심 안료로 계속 인기를 누렸다. <광주 지역
수토도 적지 않게 사용했음>
양구 백토는 매년 500~550석(72~79.2톤) 정도 채굴했는데, 이를 채굴하고자 양구의 민호(民戶
) 500호가 동원되었다. 백성을 닥달하여 백토를 캐내고 거기서 괜찮은 것을 선별한 다음 한강
을 이용해 봄과 가을에 2번 운송을 했는데, 이때는 북한강 주변의 인제, 화천, 춘천, 홍천 지
역 백성들이 동원되었다. 양구 백성들도 운송에 동원되었으나 1709년 이후 빠지게 된다. 백토
채굴도 힘든데 수송까지 시켜먹으니 백성들의 고단함이 컸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지역의 백토를 쓰려고 했으나 광주분원을 관리하던 사옹원(司饔院)에서 양구 백
토가 아니면 그릇이 거칠어지고 흠이 생긴다고 하자 계속 양구 것을 썼다. 이후 백성들의 고
통을 덜어주고자 상정미(詳定米)를 나누어 주고 백토 값을 올려주기도 했다.

백토를 수송할 때는 보통 배 10척에 25석씩 나눠 실었으며 화천이 110석, 춘천 220석, 인제
60석, 홍천이 12석을 나누어 운반했다. 또한 가뭄으로 물이 마르거나 제때 수송하지 못하는
경우는 말을 이용해 육로로 수송하기도 했고, 수송비를 주고 민간업자에게 맡기기도 했다.


▲  누런 황토로 닦여진 전통가마



 

♠  양구백자와 방산면 가마터를 집대성한 양구 백자박물관

▲  양구 백자박물관

직연폭포 북쪽에는 양구군에서 세운 백자박물관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양구는 기초자치
단체(군청, 시청, 구청)에서 세운 군립(시립) 박물관이 다른 군(郡)이나 인구가 적은 시(市)
에 비해 아주 많은 편으로 이번 나들이는 기이하게도 양구의 군립박물관 3곳(근현대사, 선사,
백자)과 한꺼번에 인연을 지었다.
 
방산면 중심지(현리) 동남쪽에 자리한 백자박물관은 2006년 6월 27일에 문을 열었다. 2003년
박기병(현재 명예관장)이 수집한 양구백자 50여 점을 양구군에 흔쾌히 기증을 했는데, 그것을
계기로 양구백자를 취급할 박물관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어 양구백자의 대표 생산지인 방산
면 한복판에 그들을 전시하고 다룰 박물관을 세우게 되었다.
양구군은 박기병의 기증 이후 많은 이들의 문화유산과 자료 기증이 잇달아 그 방대한 자료로
근현대사박물관을 차리고, 선사박물관에 삼엽충(三葉蟲) 화석 전시실까지 닦았으며, 거기에
양구백자박물관까지 차렸으니 정말 기증 복은 많은 고장이다.

전시 유물은 50여 점 정도로 양구백자실과 도자역사문화실 등의 전시실 2개를 지니고 있으며,
전시실 외에 전기가마, 가스가마, 장작가마를 갖추어 도자기 체험을 선사하는 체험실, 양구
지역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를 판매하는 박물관(뮤지엄) 샵, 영상실, 전통가마, 칠전리 1호 가
마터, 백자공원을 갖추고 있다.
(예전에는 입장료가 없었으나 요즘에는 어린이(8세 이상)/청소년/군인/65세 미만 성인들에게
일률적으로 3,000원을 받고 있음)


▲  백자박물관에서 직연폭포로 이어지는 하얀 길
길바닥에는 백자박물관에 걸맞게 백자 등의 도자기 파편들이 박혀있다.

▲  박물관 잔디밭에 심어진 커다란 도자기 파편들 (오래된 것들은 아님)

▲  진지하게 도자기를 빚고 있는 도공의 모형

▲  '순(順)' 글씨가 쓰인 백자 접시 파편
작살난 파편에 깨알처럼 쓰인 '순'은 태종 말엽에 잠시 있었던
'순승부(順承府)'로 여겨진다. (자세한 것은 사진 참조)

▲  새가 나무가 그려진 백자청화수명호 (조선 중기)

▲  '구(龜)'가 쓰인 백자청화 대발 (조선 후기)
거북이처럼 장수하라는 의미에서 대발 피부에 '龜'를 넣은 것 같다.

▲  여러 자연물이 그려진 백자청화초화문호의 수수한 자태

▲  양구 백토를 먹고 자란 여러 백자들

▲  천하에서 가장 좋은 백토로 꼽히는 양구 백토의 위엄
저 하얀 가루가 바로 백자를 야무지게 해주었던 양구 백토이다. 지금도 많이 나오고
있으며, 저 백토로 양구와 방산 지역 가마는 600년이 넘는 역사를 유지했다.

▲  백자박물관 바깥에 마련된 전통가마
전통 방식으로 도자기를 불에 다지는 공간이다.


전시실에서 순백의 미와 몸매를 뽐내고 있는 백자들을 구경하며 일부를 사진에 살짝 담고 영
상실에서 지친 두 다리에게 잠시 자유를 주며 양구백자 관련 영상을 시청했다. 전시실 바깥에
있는 전통가마를 구경하고 백자박물관을 마무리 지었는데, 그만 칠전리 1호 가마터를 놓치고
말았다.
야무지게 본다고 했음에도 하나를 놓치고 말았으니 아직 내공이 멀었나 보다. 그 가마터는 언
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넘기고 장평리(방산면소방서) 정류장으로 나왔다. 시간은 벌써 18시
, 햇님은 여름 제국의 눈치를 격하게 보며 아직까지 퇴근을 못해 세상은 훤하다.

백자박물관을 끝으로 양구 땅에 목적한 곳을 모두 둘러보았다. 한동안은 양구에 오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다. 버스를 기다린 지 10여 분 뒤, 양구 읍내로 가는 군내버스가 모습을 드러
내며 내 앞에서 입을 벌린다. 그것을 타고 다시 읍내로 나가 춘천(春川)으로 나가는 직행버스
에 고된 몸을 실으며 나의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렇게 하여 양구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양구백자박물관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장평리 344 (평화로 5182 ☎ 033-480-7238)
* 양구백자박물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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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부드러운 동쪽 지붕, 아차산 봄나들이 <서울둘레길2코스, 아차산4보루, 3보루, 2보루, 1보루>

아차산 보루 나들이 (4보루, 3보루, 6보루, 2보루, 1보루)



' 아차산 봄나들이 (아차산 보루 식구들) '

아차산 정상(아차산3보루)

▲  아차산 정상부 (아차산3보루)

아차산4보루 아차산2보루

▲  아차산4보루

▲  아차산2보루

 



 

아차산(峨嵯山, 295.7m)은 수도권 고구려(高句麗) 유적의 대표 성지(聖地)이자 서울의 부
드러운 동쪽 지붕이다. 내 즐겨찾기 뫼의 일원으로 아침과 낮, 그리고 일몰 이후(야간 등
산)까지 고루고루 찾아와 변치 않은 마음을 비추고 있는데, 이미 200번 넘게 찾은 아차산
이지만 갈 때마다 늘 마음이 설레고 새롭다.

기나긴 겨울 제국이 드디어 저물고 봄의 해방군이 천하를 해방시키자 아차산의 봄 풍경이
문득 그리워 간만에 그의 품을 찾았다. 이번 나들이는 구의동(九宜洞) 기원정사에서 시작
을 했는데, 분량상 본글에서는 아차산4보루 이후 구간만 다루도록 하겠다.
(이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고구려 보루의 정석, 아차산4보루(堡壘) - 사적 455호

▲  아차산4보루 남쪽 2중치와 동남쪽 성곽

아차산4보루는 용마산(龍馬山)과 망우산(忘憂山)을 제외한 아차산 식구 보루 중 가장 북쪽에
자리해 있다. 잃어버린 땅을 제외한 우리나라(남한)의 고구려 성곽 유적 중 건물터와 성벽의
구조가 제대로 밝혀진 최초의 현장으로 의미가 아주 남다른 곳인데, 아차산~용마산~망우산 보
루 중 거의 유일하게 성벽의 흔적이 조금 남아있었다.
복원 이전 성벽의 최대 잔존 높이는 1.8m로 남벽과 동벽은 잘 다듬은 성돌을 이용한 탓에 그
런데로 남아있었으나 북벽과 서벽은 훼손이 심해 남아있던 높이가 0.8m를 넘지 못했으며, 부
정형의 석재를 사용해 조잡하게 축조되었다.


▲  들여쌓기의 정석을 보여주는 4보루 남쪽 2중치

구리시가 4보루에 숨겨진 옛날 이야기를 풀고자 1997년부터 문화재청과 경기도의 도움을 받아
1998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였다. 하여 온돌과 배수로, 저수조 등을 갖춘 건물터를 확인했으며,
'後部○兄'이라 쓰인 토기가 나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반에 닦여진 보루임이 명백해졌다. 여기서 후부(後部)는 고구려 5부의 하나이며, '○兄'은
고구려 관등의 하나로 여겨진다. 고구려에는 '형(兄)'자가 들어가는 관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2007년에 다시 조사를 벌여 숨겨진 치성을 발견했고, 보루 형태와 성벽 축성 방식을 확
인하면서 복원 가능성이 높아졌다. 4보루 사이로 서울시와 구리시의 경계선이 무심히 지나가
절반은 서울시, 나머지 절반은 구리시 영역인데, 구리시가 2008년부터 복원을 적극 추진하여
2년의 공사 끝에 2010년 12월 24일 복원 준공식을 가졌다. 아차산일대 보루 중 처음으로 복원
된 행운의 보루인 것이다. (나중에 시루봉 보루도 복원되었음)

보루 복원을 위해 보루터에서 나온 늙은 성돌을 주로 사용했으나 수량이 적어서 부득이 새 성
돌로 모자란 부분을 때웠다. 그러다보니 고색이 짙은 옛 돌과 하얀 피부의 새 돌이 어색하게
조화를 이룬다. 허나 이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발굴조사를 토대로 고구려 축성 양식에 맞춰
왕년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했고, 건물터와 온돌 유구 등은 보존을 위해 모두 흙속에 묻었다.
그리고 보루 중앙 쪽에 탐방로를 내고 건물터 쪽에는 금줄을 쳤으며, 보루 북쪽과 남쪽에 보
루로 오르는 계단을 냈다.

보루의 둘레는 약 249m, 성벽 높이는 최소 4m 이상이다. 허나 탐방객의 안전을 고려하여 2.5~
3.1m 높이로 크게 축소 재현하여 마치 역사 왜곡의 현장 같은 아쉬움을 준다. 지형의 경사면
을 이용해 바깥 쪽에 성벽을 쌓고, 안쪽 경사면에는 뒷채움돌과 흙으로 다졌는데, 방어력을
높이고자 동/서/남/북에 5개의 치성(雉城, 치)을 두었다.
치성(치)은 성곽 방어를 위해 앞쪽으로 다소 튀어나온 성벽으로 고구려표 축성 양식의 하나이
다. 그 양식은 백제와 신라, 고려, 조선은 물론 왜열도와 서토(중원대륙)까지 전해져 절찬리
에 쓰였다.


▲  4보루로 올라가는 남쪽 계단

▲  아차산4보루의 독특한 구조물, 남쪽 2중치

4보루 남쪽에는 2중 구조를 지닌 독특한 치가 남쪽으로 길게 나와있다. 그는 전체 길이 13.2m
로 중간에 목책(木柵)이 둘러진 2.5m 정도 들어간 공간이 있는데, 그것을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 치로 구분된다.
뚫린 공간에는 치의 성벽에 잇대어 4개의 후대 석축단이 축조되었고, 그 좌우로 목책을 세웠
는데, 보루의 출입구로 여겨진다. 이런 구조는 용마산2보루와 개발의 칼질로 허무하게 사라진
구의동보루에서도 일부 확인되고 있으나 사실상 아차산4보루가 유일하며, 고구려 보루의 독특
한 구조를 보여줌과 동시에 보루의 끝이 들여쌓기로 차곡차곡 닦여져 안정감을 준다.


▲  4보루 서남쪽 치

보루 내부에서는 건물터 7곳, 온돌 유구 2기, 배수로, 저수조 흔적, 치성 5곳이 발견되었다.
여기서는 항아리와 글씨가 새겨진 토기, 시루, 투구, 찰갑(가벼운 갑옷), 창, 도끼, 화살촉,
낫, 쇠스랑, 말에 물리는 재갈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와 아차산3보루와 함께 아차산의
병참기지로 추정된다.


▲  한강을 향해 약간 튀어나온 4보루 동쪽 치

4보루로 올라서니 그런데로 너른 보루 내부가 펼쳐진다. 이곳에는 군사들이 머물던 숙소와 창
고, 방어시설 등이 있었는데,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 형님의 꾸준한 괴롭힘 앞에
모두 휩쓸려 사라지고 터만 아련히 남아 사람들의 상상력을 살찌워준다.
이곳을 재현한 모형이 서울대박물관에 있으나 이 역시 100% 정답은 아니니 고구려 건축 양식
에 맞춰서 적당하게 4보루의 모습을 상상해보기 바란다. 이것이 4보루가 우리에게 주는 숙제
이다.


▲  4보루 1호 건물터

4보루의 7개 건물터 중 남쪽에 있는 1호 건물터가 가장 높다. 여기서는 온돌 유구 2기와 주춧
돌이 나왔는데, 온돌 아궁이 주변에서는 글씨가 새겨진 토기, 철제투구 등이 나와 4보루를 관
리하던 높은 장수나 지휘관의 숙소로 여겨진다.
1호 건물터 주변에는 6호 건물터와 7호 건물터, 2호 건물터 등이 있으며, 3호 건물터 밑에서
는 'ㅡ'자형 온돌유구 2기가 나왔다. 층위(層位)로 보아 건물터보다 먼저 조성되었음이 밝혀
져 4보루 내부 구조물이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이 결코 아님을 보여준다. 보루를 먼저 쌓고
나중에 온돌과 내부 시설을 얹혔던 것이다.


▲  4보루 내부 (북쪽 방향)

▲  4보루 내부 (남쪽 방향)

탐방로 좌우로 잔디와 흙이 두툼히 덮여진 건물터와 저수시설 유적이 있고, 키가 작은 금줄을
둘러놓아 고구려의 거룩한 흔적을 지키고 있다. 금줄의 의미처럼 줄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되나
지키는 사람이 딱히 없다 보니 안에 버젓이 들어가 자리를 펴고 쉬거나 음식을 처묵처묵하는
골 빈 작자들이 적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  4보루 저수시설터

4보루에서는 물을 저장하는 2개의 저수조(貯水槽) 흔적이 나왔다. 이들은 깊이 3.5m 정도 수
직으로 암반 흙을 파내고 바닥과 벽에 입자가 고운 회색 뻘흙을 발라 물이 새지 못하도록 방
수처리를 한 것으로 규모는 '430x300x깊이230cm','350x310x깊이240cm'이다.


▲  한강을 향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4보루 동북쪽 치
치 너머로 한강과 구리, 남양주, 하남, 강동구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4보루는 북쪽을 제외하고 동/서/남이 확 트여있어 조망이 아주 일품이다. 여기서는 광진구와
성동구, 동대문구, 종로구, 중구, 송파구, 강동구, 한강은 물론 하남시와 구리시, 남양주시
지역이 훤히 시야에 들어오며, 해돋이와 일몰을 모두 맞이할 수 있어 해돋이 수요와 일몰 수
요, 야간 등산 수요가 많다. (1월 1일에는 새해 해돋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정말 미어터짐)
게다가 아차산과 용마~망우산을 이어주는 매우 중요한 위치라 아차산 주능선의 목구멍 같은
곳이다. 그러니 고구려가 이곳에 큰 보루를 쌓아 무척 애지중지했던 것이다.


▲  4보루 동북쪽 치에서 바라본 천하
한강과 강동구, 하남시 지역

▲  4보루 북쪽 치

▲  4보루 서쪽 성곽

▲  4보루 북쪽 치

4보루 바깥에는 우회 산길이 있다. 4보루 속으로 들어가기 싫다면 그 우회길을 이용하면 되나
아차산에 왔다면 4보루는 무조건 찍고 가는 것이 이곳의 관례처럼 되어있다. 그러다보니 여기
서 휴식을 취하거나 간식을 먹는 이들도 적지 않다. (특히 저녁에는 이곳에 자리를 잡고 단체
로 먹거리를 섭취하는 등산 동호회 사람들이 많음) 휴식과 음식 섭취는 좋으나 쓰레기를 버리
거나 금줄을 넘어가는 행위는 하지 말자.

아차산4보루를 비롯한 아차산 보루 6곳과 용마산 보루 7곳, 망우산1보루, 시루봉 보루, 홍련
봉 보루 2곳은 한 덩어리로 '아차산일대 보루군'이란 이름으로 사적 455호로 지정되었다.

고구려(고구리)는 경기도와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요동반도, 만주(길림성, 흑룡강성) 일대
, 연해주, 하북성, 산서성(山西省), 내몽고(內蒙古) 일대를 차지한 북쪽의 크나큰 나라였고,
백제(百濟)는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제주도, 왜열도(倭列島), 산동반도, 강남과 오월(吳
越) 등 중원대륙의 무수한 해안 지역, 월남 일대까지 장악한 남쪽의 크나큰 나라였다.
그 두 나라가 크게 충돌한 곳의 하나가 바로 한강 유역이며, 한강 남쪽의 송파/강동구 지역에
는 백제의 국도(國都)였던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또는 그에 버금가는 주요 도시가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는 강력한 라이벌인 백제를 견제하며 한강 유역을 지키고 필요에 따라 백제 본
토로 바로 넘어갈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인 아차산~용마산~망우산 일대에 보루 등의 군사시설
을 주렁주렁 달아 애지중지했던 것이다.

이들 보루는 6세기 중반 이후 신라가 차지하여 고구려 견제용으로 활용하다가 8세기 이후 전
략적인 가치가 상실되면서 모두 버려지게 된다. 그 시절 신라는 북쪽으로 최소 요동반도까지
차지했으며, 산동반도와 강남, 오월 지역에도 적지 않은 지분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 아차산4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4동,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52-2



 

♠  아차산 정상과 3보루

▲  소나무가 무성한 아차산 주능선길 (4보루에서 정상 방향)

아차산4보루에서 낙타고개(아차산성 북쪽)까지는 완만한 능선길의 연속이다. 오르막 길도 일
부 있으나 거의 내리막 일색이라 천하에서 가장 부드러운 능선길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구려
가 심어놓은 보루(4보루, 3보루, 5보루, 6보루, 1보루)들이 주렁주렁 깃들여져 멀게만 느껴지
던 고구려를 직접 체험하게 해준다. 또한 좌우로 시야가 확 트여 조망이 아주 예술이며 여기
서 바라보는 야경 맛과 일출, 일몰 풍경이 참 진국이다.

이처럼 길이 좋고 조망 또한 일품이니 새해 해돋이와 아침, 낮, 일몰 직후 야간 등산까지 상
당한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하여 너무 깊은 밤(23시 이후)이 아닌 이상은 늘 사람들이 있으
며 서울에서 남산(南山), 인왕산(仁王山) 다음으로 저녁 수요가 많은 뫼가 아차산~용마산일
것이다. (나도 아차산 야간 등산을 100번 넘게 했음)
또한 천하 둘레길의 대표 성지로 격하게 추앙받는 서울둘레길2코스(화랑대역↔광나루역, 12.3
km)도 이곳을 흠모하며 아차산 주능선을 타고 남북으로 흘러간다.

▲  아차산3보루 북쪽 오르막길

▲  아차산 정상을 알리는 나무 기둥


▲  아차산의 지붕, 아차산3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 정상(295.7m)에 깃든 아차산3보루는 성벽 둘레 약 450m, 내부면적 약 6,500㎡로 정상
부에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어 아차산 보루 중 가장 규모가 크다. 2005년에 보루 일부를 들추
면서 배수로와 건물터, 기단, 성벽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디딜방아의 불씨로 여겨지는 존재가
나와 이곳이 아차산의 식량 창고로 추정된다.
허나 겨우 보루터의 일부만 꺼낸 상태라 나머지를 모두 들춰야만 이곳에 정확한 기능과 숨겨
진 이야기를 캐낼 수 있을 것이다.


▲  대머리처럼 허전한 아차산3보루

3보루 외곽은 나무가 무성하나 3보루 안쪽은 땅에 바짝 붙은 잡초와 탈모된 흔적처럼 풀이 벗
겨진 흙길, 그리고 잘려진 나무 밑둥이 대부분을 이루어 말끔하면서도 뭔가 허전한 기분이다.
이는 보루터 보존을 위해 그렇게 밀어버린 것이다.
보루터 한복판으로 탐방로를 내었고, 그 좌우로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낮은 금줄을 설치
했는데, 지키는 이가 없다 보니 금줄을 넘는 이가 종종 눈에 띈다. 이곳은 아차산 정상이긴
하지만 완만한 능선이라 정상 같은 느낌은 별로 나지 않으며, 3보루 동쪽에 우회길이 있다.
 
* 아차산3보루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산49-1,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  아차산3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①

아차산4보루 못지않은 일품 조망을 보여주는 3보루, 한강(아리수)을 중심으로 왼쪽에 구리시
와 남양주시(도농, 다산, 덕소) 지역이 펼쳐져 있고, 오른쪽에는 강동구와 하남시가 무성한
아파트숲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누가 아파트의 농도가 진한지 경쟁하듯이 말이다.


▲  아차산3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②
한강과 강동구, 하남시, 그리고 남한산과 검단산 등

▲  아차산3보루에서 수습된 보루터 성돌들
이곳에 있었을 3보루의 생전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 상상의 나래를 한번
살찌워보자. 그것이 아차산이 우리에게 건네는 영원한 숙제이다.

▲  바위들이 울퉁불퉁 펼쳐진 아차산 주능선길
(아차산3보루에서 아차산5보루 방향)

▲  아차산 주능선길(3보루~5보루 구간)에서 바라본 천하 ①
광진구와 성동구, 한강, 송파구, 강남구 등 (멀리 보이는 산은 관악산)

▲  아차산 주능선길(3보루~5보루 구간)에서 바라본 천하 ②
용마산 너머로 멀리 남산서울타워를 지닌 남산과 인왕산(仁王山),
북악산(백악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아차산 주능선길(3보루~5보루 구간)에서 바라본 천하 ③
가운데 움푹 들어간 부분이 아차산의 일품 계곡으로 꼽히는 긴고랑계곡이다.
그 오른쪽 뫼는 용마산, 왼쪽은 아차산이며, 그들 너머로 광진구와
성동구, 동대문구 지역이 흐릿하게 두 망막에 박힌다.



 

♠  아차산 마무리 (6보루, 2보루, 1보루)

▲  아차산6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3보루에서 주능선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보면 '범굴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살짝 손짓
한다. 여기서 주능선을 버리고 그 손짓을 따라가면 바로 봉긋 솟은 언덕이 나타나는데, 그는
아차산 주능선 바로 동쪽으로 그 언덕에 아차산 보루의 막내인 6보루가 깃들여져 있다.

6보루는 2005년에 3보루 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사람이 우연히 발견했다. 생김새가 마치 옛 무
덤이나 보루터처럼 생겨서 눈썰미가 좀 있다면 정말 의심을 가져볼만한 존재로 아차산 보루의
발견 순서대로(남쪽을 기준으로 함) 아차산6보루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추정 둘레는 약 80m 정도로 아직 발굴조사는 벌이지 않았으며, 여기서 발견된 옛 불씨는 흙을
덮어서 보존하고 있다. 그가 보루인지 다른 존재인지는 아차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생김
새가 자연산 같지 않아서 속히 조사를 벌여 이곳의 정체를 밝혀주었으면 좋겠다. 6보루를 처
음 본 것이 2013년인데 아직까지도 조사를 받지 못했으니 아차산 보루 유적과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크게 떨어진 것 같아 실로 우려스럽다.


▲  아차산2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6보루에서 범굴사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소나무가 우거진 북쪽 봉우리(해발 276.2m)가
있다. 봉우리 주변에는 금줄이 둘러져 있고, 안내문 1개가 나그네들의 관심을 호소하고 있는
데, 금줄 너머 봉우리에 고구려가 심어놓은 아차산2보루가 깃들여져 있다.

이곳은 아차산 주능선에서 동쪽으로 갈라져 나온 산줄기로 봉우리를 활용해 보루를 다졌는데,
둘레 50m 정도의 조그만 보루이다. 그 보루는 영원한 분해자인 자연과 세월에 의해 모두 와해
되고 돌탑 남쪽에 치로 여겨지는 성벽 3단이 바깥에 노출되어 분해자의 압박을 견디다가 보존
을 위해 흙으로 덮어 묻었으며, 그 주위로 금줄을 둘러 사람들의 통행을 막는다.

보루터 주변에서는 고구려 토기인 몸통긴항아리의 조각들이 발견되었고, 보루터 복판에 돌탑
이 있는데, 지나가는 이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모이고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돌탑
을 이루고 있는 돌 상당수는 2보루터 성돌로 보루를 이루던 돌이 돌탑의 일원으로 새로 거듭
난 것이다.

2보루터는 인근 6보루터와 비슷하게 숲이 자리해 있다. 2보루터에 깃든 고구려의 장대한 기상
과 이곳의 유구한 역사를 무럭무럭 먹고 자란 탓일까? 소나무가 숲을 이루며 대머리처럼 허전
한 2보루터의 새로운 녹색 머리칼로 그 공간을 보듬는다.


▲  아차산2보루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①
한강과 구리, 남양주, 강동구, 하남 지역


아차산2보루 옆에는 동쪽을 향해 고개를 내민 조망 좋은 곳이 있다. 이곳은 범굴사(대성암)로
인도하는 너럭바위 윗쪽으로 여기서는 한강을 비롯해 구리시, 남양주, 하남, 강동구, 송파구,
성남 지역과 아차산성(阿且山城) 등이 훤히 두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조망 범위는 앞서 4보루, 3보루와 많이 비슷하여 감흥은 그리 크지 않다. 비슷한 조망
이 4보루부터 계속 따라왔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서쪽과 북쪽이 빠지고 남쪽으로 아
차산성과 송파구, 성남 지역이 조망권에 추가된 정도..


▲  아차산2보루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워커힐 뒷통수(골프장)가 바로 앞에 보이고 푸르른 한강 너머로 강동구와
하남시, 남한산(南漢山), 검단산, 예봉산~운길산 산줄기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온다.

▲  아차산2보루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정면에 솟은 산에 아차산성이 안겨져 있다. 그 너머로 강동구와 송파구,
멀리 성남 지역까지 두 눈에 들어온다.

▲  서울 속의 작은 민통선, 아차산성 - 사적 234호 (확대해서 바라본 모습)

아차산은 200번이 넘게 인연을 지었으나 정작 아차산성 내부는 아직까지 발을 들이지 못했다.
아차산성은 아직까지도 금지된 구역으로 몇 년 전부터 광진구청에서 저곳을 해방시킬 계획을
세웠고, 꾸준히 개방 떡밥이 나오고는 있으나 아직까지도 희망고문에 머물러 있다. 아차산성
의 적지 않은 땅을 가진 워커힐이 소국적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아차산성이 휴전선 등 예민한 곳에 있거나 군부대에 있다면 금지된 구역이 이해가 가나 저곳
은 그런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 누가 들으면 아차산성이 휴전선 부근에 있는 걸로 알겠다.
속히 속세에 개방되어 자유롭게 발자국을 찍었으면 좋겠다.


▲  아차산1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2보루에서 다시 주능선으로 나와 남쪽으로 하염없이 내려가면 두툼히 살이 오른 봉우리
가 나타난다. 그가 아차산1보루이다. (중간에 아차산5보루가 있으나 여기서는 통과함)
1보루가 넘버원 1보루가 된 것은 아차산 보루 식구 중 가장 잘나서가 아니다. 남쪽을 기준으
로 발견된 순서대로 정리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해발 250m에 자리한 1보루는 봉우리를 활용해 닦은 것으로 1994년 발굴조사 때 고구려 토기가
여럿 나왔다. 동쪽과 남쪽에서 보루 성벽이 확인되었는데, 보루의 정체가 알려지기 훨씬 이전
부터 보루의 남쪽 성벽 흔적을 밀어버리고 산길을 냈으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는 보루 주변
에 목책을 둘러 접근을 통제하고 그 옆구리에 우회길을 내었다. 그러다가 2015년 이후로 다시
보루를 개방했다.

아차산 보루 중 가장 남쪽으로(홍련봉 보루 제외) 5보루와 함께 아차산성과 아차산 정상(3보
루)을 이어주었으며, 동쪽과 남쪽, 서쪽이 확 트여있어 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다.


▲  작은 봉우리 같은 아차산1보루

이곳에 들어앉아 천하를 굽어봤을 1보루는 장대한 세월의 매서운 흐름과 대자연의 오랜 괴롭
힘 앞에 완전히 녹아내리고 그 터만 겨우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알려줄 따름이다.
보루의 구체적인 생김새는 아직 파악되지 못했으나 고구려의 축성 양식과 복원된 4보루를 참
고해 보루의 모습과 거기서 머물던 고구려 군사의 모습을 머리 속에 한번 그려보는 것도 의미
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폐허의 현장이고, 그들의 모습을 남긴 뚜렷한 사진이나 기록도 없으
니까 말이다.

* 아차산1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143-127


▲  아차산1보루의 남쪽 끝

아차산1보루를 둘러보고 낙타고개와 영화사(永華寺)를 거쳐 속세로 내려왔다. 사진에 담는 것
은 1보루에서 완전히 마무리를 지어 더 이상 다룰 것은 없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복습한 아차산 나들이는 기분 좋게 마무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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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상큼한 남쪽 지붕, 삼성산~호암산~목골산 <관악산호수공원, 성주암, 서울둘레길5코스, 독산자락길>

삼성산, 호암산, 목골산 초여름 나들이



' 삼성산, 호암산, 목골산 초여름 나들이 '

호암산
▲  호암산

삼성산 성주암 호암산 북쪽 능선길

▲  삼성산 성주암

▲  호암산 북쪽 능선길

 



 

여름 제국이 서서히 고개를 쳐들던 6월의 끝 무렵, 내 즐겨찾기 뫼의 하나인 호암산(虎
巖山, 393m)을 찾았다.
툭하면 찾아오는 호암산 앓이도 잠시 해소하고 호암산과 삼성산(三聖山)에 아직까지 살
아남아 내 속을 긁는 몇 남지 않은 미답처들도 싹 정리하고자 찾은 것으로 햇님의 고개
가 서서히 꺾이던 15시에 서울대 정류장에서 길을 시작했다.
(산행시간 약 3시간, 산행거리 약 9~10km)



 

♠  관악산호수공원과 삼성산 성주암(聖主庵)

▲  삼성산과 관악산으로 인도하는 신림로 숲길

삼성산과 관악산(冠岳山, 632m)의 주요 북쪽 기점인 서울대 정류장에서 짙은 숲에 감싸인 도
로를 따라 15분 정도 가면 관악산호수공원이 잘빠진 호수와 자하정, 귀여운 석구상을 내밀며
마중을 한다.
오로지 성주암 등의 미답처(未踏處)에 정신이 팔려 그냥 넘어가려고 했으나 고양이가 생선가
게를 그냥 못 지나친다고 못이긴 척 잠시 발을 들였는데, 이곳은 서울대에서 관악산, 삼성산
으로 오를 때 꼭 거쳐가는 곳으로 바쁘면 돌아가라는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잠깐 들린다고
큰일 날 것은 없다.


▲  관악산 호수공원의 귀염둥이, 석구상(石狗像)
관악산 호수공원을 조성하면서 장만한 것으로 호암산 한우물 부근에 있는
석구상을 축소, 재현했다. 그런데 기분 탓일까? 실물보다는 이곳
석구상이 훨씬 귀엽게 다가온다.

▲  관악산 호수공원의 이름값을 하는 호수

지금은 상큼한 호수공원으로 있지만 예전에는 계곡물을 이용한 수영장이 있었다. 그 수영장은
문을 닫았으나 오랫동안 방치되어 흉물스럽게 있던 것을 1996년 12월부터 거의 1년에 걸쳐 손
질을 하여 1997년 12월 자연과 어우러진 호수공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공원에는 그 이름값을 하는 호수와 자하정, 석구상(1997년 11월 제작됨), 나무다리 2개, 분수
대, 쉼터 등이 있으며, 소나무 외 18종 9,180주, 초화류 수련 등 3,190본을 심어 아름답게 다
듬었다. 이렇게 싱그러운 공간이건만 바람직하지 않게도 옥의 티가 하나 있어 심히 불편함을
준다. 바로 왜정(倭政)과 독재 세력에 철저히 빌붙어 영혼을 팔고 부귀영달을 누렸던 서정주(
1915~2000)의 시비(詩碑)가 있다는 것이다.

서정주는 관악구 남현동(南峴洞)에서 30년이나 서식하여 관악구와도 인연이 깊다. 게다가 20
세기 주요 시인으로 쓸데없이 꼽히다보니 관악구청이 그의 그릇된 점을 살피지도 않고 문학적
업적만 내세우며 이렇게 개념도 없이 시비를 세운 것이다. 또한 서울시는 그보다 한술 더 떠
그의 남현동 2층 양옥을 인수해 내부 손질을 거쳐 그의 유품과 문학작품을 취급하는 기념관으
로 세상에 내놓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오히려 때려 부시고 연못을 파야 될 판에<예로부터 역적(逆賊)의 집은 말끔히 부시고 그 자리
에 연못을 팠음> 관악구와 서울시가 앞장을 서서 그의 흔적을 붙잡아 찬양하고 있으니 행정관
청 철밥통들의 역사의식과 개념들이 이렇게도 없다. <관악구는 낙성대(落星垈) 강감찬 장군의
영정이 도난을 당하자 이것도 쉬쉬하여 크게 욕을 먹은 화려한 전력이 있음>


▲  오늘도 평화로운 호수

호수는 거의 생태연못 수준으로 수초(水草)가 많고 오리와 물고기들이 유유자적 거닐고 있어
평화롭고 고요한 풍경, 그 자체이다. 세상이 시끄럽든 말든 여기서는 그저 다른 세상의 이야
기 같다. 섬 복판에는 동그란 섬까지 띄워놓아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숲 너머로 서울대 농업
생명과학대학 건물이 고개를 내밀며 이곳의 경치를 시샘한다.

    ◀  연못에 두둥실 띄워진 동그란 섬
섬에는 소나무 1그루가 바깥 세상을 거부하며
고고하게 솟아있다. 인간의 손길이 거의 미치
지 않는 곳이라 마음껏 나래를 펼치며 그 섬의
주인 노릇을 한다.

◀  호수공원의 화려한 입술, 자하정(紫霞亭)
1997년에 지어진 1칸짜리 팔작지붕 정자로 살
짝 들려진 처마의 선이 꽤 경쾌하고 아름답다.


▲  북서쪽에서 바라본 자하정과 호수, 그리고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  호수를 순찰하는 압공(鴨公, 오리)의 위엄
오늘도 저들이 있기에 호수는 평안하다.

▲  성주암을 알리는 표석
관악산 호수공원을 둘러보고 성주암으로 이동했다. 공원에서 성주암까지 10분
거리로 관악산119산악구조대를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성주암이 활짝 모습을 비춘다.

▲  성주암 대웅전(大雄殿)

삼성산 북쪽 끝자락이자 돌산 동쪽에 성주암(聖住庵)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원
효대사(元曉大師)가 677년에 창건했다고 하는데, 그가 절을 짓고 머물렀다고 해서 성주암이라
했다고 전한다. 즉 원효대사를 성스러운 존재로 높인 것이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
은 아쉽게도 없는 실정이다.

14세기에 각진국사(覺眞國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는데 태정원년<泰定 元年, 원나라(몽골) 태
정제의 연호, 1324년>이라 쓰인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이때 창건되거나 중창된 것으로 여겨진
다. 그것이 성주암에서 나온 것 중 가장 늙은 유물이다.
조선 성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삼막사(三幕寺), 안흥사<安興
寺, 염불사>, 망일사<望日寺, 망월암>와 더불어 관악산의 4개 사찰로 나오며 성주사(聖住寺)
로 기록되어 있다. (삼성산을 관악산의 일원으로 보기도 함) 또한 조선 후기에 제작된 '시흥
읍지(始興邑誌)'에는 삼막사, 호압사(虎壓寺), 염불사(念佛寺)와 함께 4개 절의 하나로 나와
있어 삼성산 일대에서 제법 인지도가 있던 절임을 알려준다.
1883년 금화형기가 만든 현왕탱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으며 오래된 석탑도 1기 있었으나 왜정
(倭政) 때 왜인이 빼돌렸다.

1897년 만월(滿月)이 폐허가 된 절터에 작은 암자를 지어 법등(法燈)을 다시 켰고 1966년 혜
담(慧潭)이 중창을 했다. 1971년 화강석을 이용해 대방(大房)을 지었고 1981년 종연(宗演)이
3년에 걸쳐 대웅전을 지었으나 1997년 10월 화재로 대웅전 등 목조 건물이 모두 날라가고 말
았다. 이때 서울과 경기도의 40여 사찰이 불의의 방화를 당했다.
이후 주지 재홍(才弘)의 지도 아래 승려와 신도들이 임시 천막을 치고 3년에 걸쳐 불사(佛事)
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으며, 2006년 12월 관악구 전통사찰로 지정을 받았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대방 등 4~5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늙은 유물은 커녕 고색도 다
말라버려 오랜 역사를 무색하게 한다. 절은 북/서/남쪽은 산으로 막혀있고 오로지 동쪽만 확
트여있어 관악산이 훤히 바라보이며 마치 알둥지처럼 자리 또한 포근하다. 게다가 절이 암자
에 걸맞게 아담하여 두 눈에 쏙 넣고 살피기에 별 부담이 없으며 대방 뒤쪽으로 돌산과 호암
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다.

* 성주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198 (신림로 15-250, ☎ 02-877-7180)

▲  성주암 대방(大房)
종무소와 선방, 요사(寮舍), 공양간의 역할을
하는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그 뒤쪽에
호암산으로 넘어가는 산길이 있다.

▲  11면 관세음보살상
큰 얼굴 하나에 작은 얼굴 10개 등, 11개의
얼굴을 지닌 관세음보살이 정병(政柄)을
쥐어들며 관악산을 지그시 바라본다.


▲  대웅전 석가3존상과 화려한 닫집
마침 유가족들이 49재 중이라 들어가지는 못하고 바깥에서 살짝 담았다.

▲  성주암에서 바라본 관악산의 위엄
성주암은 관악산 조망에 아주 최적화된 곳이다. 바로 정면에 관악산이
마치 풍경화처럼 펼쳐져 있으니 말이다.

▲  대웅전 뒤쪽 바위에 주렁주렁 달린 칠성탱과 산신탱, 약사여래상

성주암은 다른 절과 달리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머금은 그 흔한
삼성각(三聖閣)이나 산신각 등의 건물이 없고, 대신 대웅전 뒤쪽의 그늘진 암벽을 활용해 칠
성탱과 산신탱을 두어 노천 삼성각으로 삼았다.
그렇다고 바위 피부를 무작정 깎아서 만든 것은 아니며 별도의 돌판에 그들을 새겨 벼랑 앞에
두었다. 그리고 산신탱 위쪽 벼랑에는 석조(石造) 약사여래좌상을 두었는데 그가 경내에서 가
장 높은 곳을 장식하고 있다.

▲  하얀 피부의 석조 칠성탱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피부가 매끈하다.

▲  산신 가족이 담긴 석조 산신탱(밑)과
석조 약사여래좌상(위쪽)


▲  5층석탑과 마니차

성주암은 바로 눈에 보이는 대웅전 주변이 전부가 아니다. 대웅전 뒤쪽 벼랑에 칠성탱과 산신
탱 등이 있으며, 대방 뒤쪽으로 가면 8각으로 다듬은 참한 모습의 석탑과 그를 반원(半圓) 모
양으로 둘러싼 마니차가 있기 때문이다.

5층석탑은 성주암의 유일한 탑으로 8각의 바닥돌과 연꽃무늬와 팔부중상(八部衆像) 등이 새겨
진 기단석(基壇石) 위에 8각의 탑신(塔身)을 세우고 그 위를 보륜(寶輪) 등의 머리장식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탑 뒤에는 '마니차'란 동그란 돌덩어리가 주렁주렁 달려있는데 그는 티벳불교에서 전래된 것
으로 윤장대(輪藏臺)와 비슷한 것인데, 손으로 저것을 돌리며 염불을 하거나 소망을 빌면 경
전을 모두 이해한 것과 같다고 하며 소망도 같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옛날에는 글자를 모르는
까막눈이 많다보니 저런 것을 이용해 영업을 한 것이다.


▲  티벳 글자가 새겨진 마니차

마니차 밑에 있는 검은 피부의 돌판에는 1997년 이후 절 중창에 도움을 준 이들의 이름이 빼
곡히 적혀있다. 저들이 있기에 성주암이 다시 일어선 것이다. 그러니 너무 외형 확장과 재물
에 욕심내지 말고 오직 사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여 속세(俗世)를 위해 사는 아름다운 절이
되기를 바라면서 성주암과의 첫 인연을 정리한다.



 

♠  호암산과 서울둘레길5코스 거닐기

▲  성주암에서 호암산으로 인도하는 산길

5층석탑을 지나면 돌산, 호암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손짓을 한다. 그 길을 오르면 돌산 북쪽
으로 천하 둘레길의 대표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서울둘레길5코스(사당역↔석수역,
13.5km)와 관악산둘레길 2구간(서울대 정류장↔국제산장아파트, 4.7km)과 만난다.
둘레길 대신 하늘과 가까운 곳을 원한다면 호암산과 장군봉으로 이어지는 서남쪽 산길을 이용
하면 되며 관악산둘레길 2구간이 장군봉 북쪽까지 동행을 한다. (둘레길의 위치상 삼성산둘레
길이 맞지만 관악산둘레길을 칭하고 있음)

나는 산봉우리 대신 성주암과 호암산 북쪽 능선 등의 미답처 개척을 위해 왔으므로 호압사로
빠르게 이어지는 서울둘레길5코스를 택해 길을 재촉했다.


▲  솔내음이 오각을 간지럽히는 돌산 북쪽 산길

▲  서울둘레길5코스 약수사 윗쪽 구간

돌산 북쪽에서 호압사까지 서울둘레길5코스 구간은 느긋한 길의 연속이다. 오르락과 내리락이
반복되지만 호압사 직전 구간을 빼면 그 기복은 별로 없으며 관악산 산림쉼터, 약수사(藥水寺
), 삼성산성지 등의 조촐한 명소들이 연이어 포진해있어 가는 길이 심심치 않다.


▲  관악산 산림쉼터 (약수사 윗쪽~삼성산성지 구간)

잣나무와 메타세콰이아, 단풍나무를 빽빽히 심고 그 짙은 그늘에 쉼터를 닦았다. 숲 그늘에는
의자와 평상 등을 넉넉히 깔아 잠시 쉬어가거나 낮잠, 독서, 간식 섭취에 아주 좋으며 숲속도
서함도 비치하여 독서의 여유도 누리게끔 했다.


▲  관악산 산림쉼터 앞을 지나는 서울둘레길5코스

▲  삼성산성지 동쪽을 지나는 서울둘레길5코스 ①

▲  삼성산성지 동쪽을 지나는 서울둘레길5코스 ②
오로지 정면에 보이는 먹이를 향해 질주하는 맹수처럼 삼성산성지는 쿨하게
통과했다. 어차피 적지 않게 인연을 지은 곳이다.

▲  수풀을 앙증맞게 다져놓은 서울둘레길5코스 (삼성산성지~호압사 구간)

▲  호암산 밑에 이르다 (사진에 보이는 산이 호암산 정상)

삼성산성지에서 10여 분 정도 오르면 호압사 분기점에 이른다. 이곳에는 넓게 쉼터가 닦여져
있는데, 남쪽으로 각박하게 이어진 산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호암산 정상에 이르며 호압사는
쉼터 서쪽에 펼쳐져 있다.
호암산에 가면 보통 호압사를 끼고 가는지라 이곳 분기점은 아주 낯이 익다. 여기서 보통 호
압사와 서울둘레길5코스 석수역 방향인 서쪽, 삼성산성지와 서울둘레길5코스 서울대 방향인
동쪽, 정상과 한우물 방향인 남쪽으로만 주로 갔지 북쪽 길은 단 1번도 가지를 않았다. 아무
래도 동/서/남쪽으로 호압사와 한우물, 석구상, 호암산 잣나무산림욕장, 서울둘레길5코스 등
호암산의 알짜배기 명소들과 잘생긴 바위들, 일품 조망들이 펼쳐져 있고, 삼성산과도 이어지
므로 버릇처럼 자꾸 가던 쪽으로만 간 것이다. 반면 북쪽은 딱히 흥미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북쪽을 개척하고자 찾은 것이다.


♠  호암산 북쪽 능선(독산자락길)과 목달산

▲  호압사분기점 북쪽 헬기장

호암산 북쪽 능선은 시흥동과 독산동(禿山洞), 난곡 사이로 펼쳐진 긴 산줄기이다. 북쪽으로
독산자연공원까지 이어져 금천구(衿川區)의 북쪽 지붕이자 관악구(冠岳區)의 서쪽 지붕을 이
루는데, 선우공원 주변은 따로 목달산이라 불리며, 그 산줄기를 따라 '독산자락길'이 호압사
분기점에서 독산고교(독산자연공원)까지 이어진다.
 
처음에는 독산고교까지 욕심을 냈으나 산길이 생각 밖으로 너무 길었다. '아니 이렇게나 긴
산줄기였나?' 크게 놀라며 1시간이나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그곳 남쪽인 쌍용아파트에서 길을
접고 철수했다. 몸도 지쳤고 햇님의 퇴근시간도 임박했기 때문이다.


▲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①

▲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②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은 북쪽을 향해 천천히 내려앉는다. 그러다보니 길도 완만하
고 숲도 삼삼해 여름 햇살도 눈치를 보며 내려앉는다. 정면만 본다면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산을 거니는 기분이나 좌우로 시가지가 진하게 바라보여 그 감흥을 50% 이상 떨어트린다. 이
는 1960년대 이후 서울이 나날이 비대해짐에 따라 개발의 칼질이 호암산과 목골산의 살을 마
구 후벼 팠기 때문이다.
다행히 늦게나마 도시공원과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이 정도라도 남게 된 것이지 그것도
아니었으면 아마도 호암산 북쪽 능선의 대부분은 절단이 났을 것이다.


▲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③

▲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④

▲  독산자락길(호암산 북쪽 능선길) 시흥4동과 난향동 경계 구간
이쪽에 이르면 시흥4동과 난향동(난곡) 주택가가 능선 좌우로 너무 깊게 들어와
산세 폭이 200m 내외로 확 좁혀진다. 허나 이곳을 지나면 목골산이
나오면서 다시 산세가 넓어진다.

▲  목골산 남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①

목골산(163m)은 호암산의 북쪽 끝이자 삼성산의 서북쪽 끝으머리를 잡고 있는 뫼이다. 독산동
과 시흥4동, 난곡(난향동, 난곡동, 미성동)에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 자락에는 선우공원이 넓
게 자리해 있다.
서쪽과 남쪽은 경사가 조금 있으나 북쪽과 동쪽은 완만하며 선우공원을 중심으로 미성동둘레
길이 별도로 닦여져 있다. 이 둘레길은 독산고교 뒤쪽에서 시작해 정심초교 뒤쪽 → 관악구
민방위교육장 → 목골산 북쪽 자락 → 선우공원 동부 → 영산홍동산을 거쳐 독산고교로 이어
지는 3.4km의 순환형 길이다.


▲  목골산 남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②

▲  목골산에서 만난 이정표 의자
이정표 역할을 하는 의자는 처음 본다. (동네 사람들이 만든 것임)

▲  잠시 하늘로 솟구치는 목골산 능선길

▲  목골산 미성동둘레길

▲  목골산 영산홍동산

선우공원 북쪽에 영산홍이 잔뜩 깃든 영산홍동산이 있다. 영산홍은 4~5월에 홍자색(紅紫色)
꽃을 피우는데 내가 갔던 때는 6월 말이라 영산홍은 커녕 그 떨어진 잎도 없었다. 이는 영산
홍의 잘못이 아닌 철을 맞추지 못하고 찾아온 나의 불찰이다. 다음에 영산홍 철에 다시 한번
찾아와 이곳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맛보고 싶다.


▲  목골산을 내려가며

영산홍동산을 내려가니 쌍용아파트가 나온다. 여기서 북쪽 산이 독산자연공원이나 시간도 이
미 18시가 넘었고 몸도 지친 터라 쿨하게 길을 접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성주암부터 해서 적
지않은 미답지를 지웠으니 그것으로도 충분히 보람을 느낀다.
이렇게 하여 초여름 삼성산~호암산~목골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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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구 한복판에 자리한 상큼한 푸른 쉼터, 오금공원 <문양군 류희림묘역, 신선경과 류인호묘역, 오금공원 인공폭포>

송파구 오금공원



' 도심 속의 푸른 쉼터, 송파구 오금공원 '

오금공원 숲길
▲  오금공원 숲길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 오금공원 인공폭포

▲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

▲  오금공원 인공폭포

 



 

여름 제국이 봄을 몰아내고 천하의 패권을 쥐어들던 6월의 한복판에 송파구 오금동에 자
리한 오금공원을 찾았다.

오금공원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음에도 겨우 2~3번 가본 것이 고작이다. 그냥 숲이나
운동시설, 쉼터가 전부인 단순한 근린공원이 아닌 조선 중기 무덤을 여럿 간직한 곳으로
그들이 문득 그리워져 발길의 본능대로 그들을 찾아 나섰다.



 

♠  오금공원(梧琴公園)에서 만난 늙은 무덤들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 문양군 류희림 묘역)

▲  오금공원 북부 산책로

송파구(松坡區)의 작은 밀림인 오금공원은 오금동(梧琴洞)과 방이동(芳荑洞) 지역에 한참 개
발의 칼질이 그어지던 1990년에 조성되었다. (1983년부터 개발이 시작됨;) 시골 풍경을 이루
던 공원 주변은 죄다 아파트와 주거지로 강제 성형을 당했으나 이곳은 해발 200m 정도의 야산
으로 이루어져 있고 오래된 무덤도 여럿 있어서 거의 자연 그대로의 멋을 살려 근린공원으로
닦여졌다.
인근 올림픽공원과 더불어 송파구 동부의 소중한 오아시스이자 쉼터로 면적은 219,167.4㎡에
이르며 어린이놀이터와 자연학습장, 송파구 다목적경기장과 배드민턴장, 운동장 등의 운동시
설, 송파도서관, 산책로, 쉼터 등을 두루 갖추고 있어 근린공원의 자격을 충실히 갖추고 있다.
게다가 숲(소나무가 많음)도 아주 짙어 조촐하게 삼림욕이나 산책을 누리기에 아주 제격이다.

공원에는 2000년 5월 23일에 조성된 자연학습장이 있는데 은방울꽃, 초롱꽃, 옥잠화, 동자꽃
등 야생 초화류 30종과 자생 관목류 20종을 지니고 있으며, 2005년에는 송파경찰서 교차로와
맞닿은 공원 서쪽 모서리에 정자와 인공폭포를 닦아 시원한 볼거리를 하나 추가했다. 또한 공
원이 조성된 이듬해(1991년)부터 에어로빅 교실이 시작되어 거의 매일 아침 열리고 있는데 이
제는 공원의 명물로 자리를 잡아 아침마다 몸을 푸는 동네 사람들로 아침이 아주 활기차다.

허나 이곳에는 그런 것들보다 더 오래되고 값비싼 존재들이 있으니 바로 거창신씨묘역과 문화
류씨 묘역이다. 이들은 조선 중기 무덤들로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인데 바로 그들 덕분에 오금
공원이 개발의 칼질에서 비켜가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들은 꼭 살펴보기 바란다. 그들이 없
는 오금공원은 갈비가 없는 갈비탕과 같기 때문이다.

나는 오금공원4거리에서 공원 더듬기를 시작하여 거창신씨묘역(신선경과 류인호 묘역), 문화
류씨묘역(문양군 류희림묘역), 인공폭포와 충민정, 공원 남부를 거쳐 송파도서관에서 마무리
를 지었다.


▲  솔내음이 그윽한 공원 소나무숲과 그 속에 닦여진 운동시설들

▲  울퉁불퉁한 지압용 산책로
저 싱그러운 숲속에 나를 자꾸 숨겨본다.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게끔
하지만 나를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함정... 지금까지
뭐하고 살았나 모르겠네 ㅠㅠ

▲  지압용 산책로와 돌탑
건강을 위해 발에 진하게 자극도 줄 겸, 맨발로 거닐어보기 바란다.
(그렇게 하라고 만든 길임)


마치 첩첩한 산골에 숨겨진 어느 신성한 곳으로 강제 인도된 기분이다. 저곳에 옛날 이야기에
나 나오는 삼한시대 소도(蘇塗)나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신선(神仙)의 세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개인적으로 오금공원의 이 산책로가 썩 마음에 든다. 묘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돌탑, 속인들의
건강을 위한 지압용 산길, 거기에 숲까지 어우러진 상큼한 현장이라 그런 모양이다. 이들 돌
탑은 공원 수식용으로 근래에 지어졌다.


▲  지압용 산책로 주변에 솟아난 돌탑들

▲  하늘을 앗아간 울창한 숲길

정말 깊은 산골의 숲길을 거니는 기분이다. 허나 이곳은 엄연히 시가지에 둘러싸인 근린공원
이다. 산도 아니고 궁궐도 아닌 대도시 한복판의 공원이란 말이다. 그만큼 공원을 이루는 숲
의 품격이 아주 높으며 그것이 오금공원의 자랑이다.


▲  문양군 류희림(文陽君 柳希霖) 묘역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9호

오금공원 한복판에는 거창신씨묘역과 문화류씨묘역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들은 1991년에 서
지방유형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는데(거창신씨묘역은 78호, 문화류씨묘역은 79호) 2008년 이들
묘역을 '신선경과 류인호묘역'이란 이름으로 통합을 하여 지정 번호를 78호로 했다. 즉 79호
가 사라진 것인데, 비록 문중은 다르지만 장인(거창신씨)과 사위 집안(문화류씨)으로 묶여진
혈연관계이고 무덤도 6기 밖에 없어서 그렇게 합친 것이다.

허나 문화류씨 문중에서 크게 반발하자 5년이 지난 2013년 7월에 이들을 다시 분리했다. 그래
서 기존의 문화류씨묘역의 무덤 3기는 '문양군 류희림 묘역'이란 이름으로 79호의 번호를 되
찾았으며, 거창신씨묘역의 무덤 3기는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이란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곳에 제일 먼저 둥지를 튼 거창신씨의 신선경 묘역이 북쪽에 있고, 그 뒤쪽에 그의 사위인
문화류씨의 류인호 부부 묘가 있으며, 동남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 류인호의 아들인 류복
룡과 그의 아들인 류희림 묘역이 자리한다.


▲  문원군 류복룡(文原君 柳伏龍)과 평강채씨 부부묘

류복룡은 16세기 인물로 류인호의 아들이다. 딱히 이력은 없으나 잘난 아들(류희림) 덕에 문
원군에 봉해졌으며 이들 묘역에서 유일하게 신도비까지 지니고 있다.
이 묘역은 신도비 외에 풍만하게 솟은 봉분(封墳) 2기와 묘비(묘표), 상석(床石), 향로석(香
爐石), 망주석(望柱石) 1쌍, 문인석(文人石) 1쌍을 갖추고 있다.

▲  검게 빛바랜 류복룡 묘비(묘표)

▲  우측 문인석과 망주석, 신도비

▲  류복룡 신도비(神道碑)
비석을 꽂는 비좌(碑座)와 머리 부분이
동그랗게 다듬어진 비신(碑身)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모습이다.

▲  홀(忽)을 꽉 쥐어든 좌측 문인석
고된 세월에 지쳤는지 표정이 조금은
일그러져 보인다.


▲  류희림(柳希霖)묘

류복룡 묘 뒤쪽에는 그의 아들인 류희림 묘가 있다. 류인호 3대 중 가장 출세한 류희림(1520~
1601)은 자는 경열(景說), 시호는 문양(文陽)으로 부인은 박언량(朴彦良)의 딸이다.

성균관 유생을 지내던 1560년 왕실의 보호로 불교가 다시 뜨려고 하자 1,000여 명의 유생들을
선동, 그 대표로 불교를 비판하고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을 모두 폐지하자는 상소문을 올려
그 존재를 크게 알렸다.
1561년 식년과(式年科)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문한관(文翰官)이 되었으며, 검열(檢閱), 정
언(正言),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을 지냈다. 그리고 1581년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명나
라 연경(燕京)에 동지사(冬至使)로 갔으나 명나라 왕실에서 가져온 선물이 적다고 항의하면서
엉뚱하게 파직되고 말았다.

그 뒤 다시 기용되어 한직에 머물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
事)가 되어 못난 왕(선조)을 호종한 공로로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이어서 동지중추부사(
同知中樞府事)와 예조참판(禮曹參判), 동지돈녕부사(冬至敦寧副使)를 지냈으며, 1601년 81세
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후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봉해지고 문양군(文陽君)에 추봉되었으며, 그의 아버
지(류복룡)와 할아버지(류인호)까지 싹 군(君)의 시호를 받았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류인
호 3대의 묘역은 그저그런 사대부의 묘로 남았을 것이다.

류희림 묘는 상석과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을 갖추고 있으나 문인석은 근래에 새로 단 것들
이라 고색의 때는 아직 여물지 못했다.

* 문양군 류희림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동 51 (오금로 363)


▲  신선경(慎先庚)과 류인호(柳仁濠) 묘역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8호

▲  신선경과 청주한씨 부부묘

신선경은 이곳에 처음 묻힌 인물로 1456년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을 거쳐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허나 그에 대한 자세한 이력은 더 이상 전하는 것이 없으며 그의 딸과 사위(류인호)
가 뒤쪽 좌측에 묻혔고, 그 인연으로 외손주와 외증손자까지 부근에 묻히면서 이곳은 두 집안
4대의 공동 묘역이 되었다.

신선경 묘는 봉분 2기와 묘비, 상석, 문인석 1쌍을 지니고 있으며 묘비(묘표)의 머리 부분에
연화무늬가 새겨져 있어 조선 초기 묘비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이들 묘역이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것은 15~16세기 무덤 양식을 잘 간직한 점도 있지만 신선경의 묘비와 류복룡 신
도비의 영향도 크다.

▲  연꽃무늬가 새겨진 신선경 묘비
비석은 작지만 귀엽고 앙증맞은 모습이다.

▲  홀쭉하고 긴 키를 지닌 신선경묘
우측 문인석

▲  검은 주근깨가 여기저기 피어난
신선경묘 좌측 문인석

▲  류인호와 거창신씨 부부묘


신선경 묘역 뒤쪽 우측에 자리한 류인호는 15세기 인물로 신선경의 사위이다. 죽어서도 그의
사위로 있고 싶었는지 장인과 장모 무덤 뒤쪽에 부인과 함께 묻혀있으며 공조참의(工曹參議)
정도 지낸 것 외에는 딱히 이력은 없다.
사위가 장인/장모 무덤 뒤쪽에 자리한 특이한 케이스로 합장된 봉분과 묘비, 상석, 망주석이
전부인 조촐한 모습이다. 조선 중기까지 이렇게 처가 묘역에 묻힌 양반사대부와 왕족이 적지
않았는데 제왕이었던 연산군(燕山君, 조선 10대 군주)도 처가 집안(거창신씨)에 묻혔다.

*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동 51 (동남로 263)



 

♠  오금공원 마무리

▲  인공폭포 위에 닦여진 충민정(忠愍亭)

송파경찰서 교차로와 맞닿은 공원의 서쪽 끝으머리에 인공폭포와 충민정이 있다. 2003년 서울
시의 지원을 받아 지하수를 개발하고 폭포와 연못을 닦아 2005년 10월에 완성을 보았는데, 폭
포 위쪽에 1칸짜리 팔작지붕 정자인 충민정을 달아놓아 운치를 돋구었다.
'충민'이란 이름은 송파구 출신이라는 임경업(林慶業, 1594~1646) 장군의 시호<충민(忠愍)>에
서 따온 것으로 정자 옆구리에는 지하수를 소환해 채워놓은 연못이 있고 그 밑에 인공 암벽을
다져 인공폭포를 걸쳐놓았다. 연못 너머로 송파경찰서 교차로와 주변 시가지가 바라보이며 정
자 동쪽과 북쪽에는 숲이 우거져 있어 자연히 자연과 속세의 경계 역할을 한다.


▲  충민정 연못과 그 너머로 바라보이는 송파경찰서

▲  충민정 현판의 위엄

▲  수질이 좋은 충민정 연못

충민정은 자리가 자리인지라 이곳에 앉아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이 불어준 바람
을 느끼고 있노라면 정말 피서의 성지(聖地)가 따로 없다. 이제 지어진지 막 20년 남짓 밖에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존재들이지만 1개의 100년이 흐르면 20세기 초, 대표적인 풍류 명소로
크게 도마 위에 오를지도 모른다.


▲  옆에서 바라본 오금공원 인공폭포 (윗쪽에 충민정이 살짝 보임)

▲  힘차게 쏟아지는 오금공원 인공폭포

지하수를 소환해 속세에 내뱉고 있는 이 폭포는 2005년에 조성되었다. 자연산이 아닌 인공(人
工)이라 전기를 먹어야만 왕성히 움직일 수 있는데, 봄과 여름, 초가을에는 보통 18시까지 가
동을 하며 겨울에는 움직이지 않고 그냥 묵혀둔다. 이는 다른 인공폭포도 비슷하다. 하루종일
틀면 전기세 부담이 적지 않아 보통 아침 8~9시부터 전기를 먹인다.

폭포를 품은 암벽은 너무 인공티가 팍팍 난다. 서대문구의 홍제천(弘濟川) 인공폭포처럼 자연
산으로 착각할 정도로 감쪽같이 했으면 좋으련만 그것까지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한여
름의 납량처로 손색은 없으며 직선으로 떨어지는 폭포와 주름진 바위를 굽이쳐 내려오는 폭포
등, 2개의 폭포 줄기가 있다.


▲  주름진 인공 바위를 굽이쳐 흐르는 인공폭포 (이때가 18시 직전)

▲  다시 오금공원의 속살 속으로
인공폭포에서 오금공원 더듬기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으나 공원의 남쪽 부분을
살피지 않아서 다시 공원 속으로 들어갔다.

▲  오금동 유래비 (오금공원 남부)

오금동 유래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옛날 이 지역에는 오동나무가 많았다고 하
는데 그 나무로 거문고나 가구 등을 만드는 장인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하여 오동나무와 거
문고를 뜻하는 오금동이 되었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병자호란 시절(1636~1637년), 청나라의 파상적인 공격에 도성 부근 무악재까지
무기력하게 밀리자 염통이 쫄깃해진 무능한 인조(仁祖)는 서울을 모두 내버리고 서둘러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들이 오금동 백토고개에 이르렀을 때 인조는 너무 힘들어 '아이고 내 오금이야!' 주접을 떨
며 잠시 쉬어갔는데 그 연유로 오금동이라 했다고 한다. 어느 것이 정답인지는 판단하기 어려
우나 나는 전자에 500원을 걸고 싶다.

이곳은 오랫동안 경기도 광주(廣州)에 속해있었으나 1963년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편입되었으
며, 1983년부터 도시계획 구획정리 사업이 이루어져 1990년대 초반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
었다. 그 과정에서 오금공원이 탄생하게 되었고 이곳에 서린 시골 풍경은 거의 전멸되었다.


▲  오금동 유래비 주변 산책로

▲  오금공원 남부에서 만난 나홀로 망주석

구의 무덤을 지켰던 망주석일까? 딱 봐도 오래된 티가 느껴져 이 부근에 사대부의 무덤이
있었던 모양이다. (다른 곳에서 업어왔을 수도 있음)
그를 거느렸던 무덤은 후손들의 관리소홀과 대자연의 집요한 태클로 사라지고 겨우 망주석 하
나만 남아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무덤은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 저 꼬라지가 되버
리니 굳이 많은 돈을 들여 사후(死後) 흔적을 남기는 것도 정말 부질없다.


▲  녹음(綠陰)이 우거진 오금공원 남부 산책로 ①

▲  녹음(綠陰)이 우거진 오금공원 남부 산책로 ②

▲  녹음(綠陰)이 우거진 오금공원 남부 산책로 ③

▲  녹음(綠陰)이 우거진 오금공원 남부 산책로 ④

▲  다양하고 귀여운 모습의 새집 모형들
새집이긴 하나 겉모습만 그렇지 너무 작아서 참새도 들어갈 수 없다.
하여 새들에게는 그저 그림의 집 같은 존재들이다.

▲  녹음(綠陰)이 우거진 오금공원 남부 산책로 ⑤
숲이 얼마나 두터운지 햇살도 제대로 들어오기 힘들어 벌써부터 어둑어둑하다.

▲  오금공원 남부에서 송파도서관으로 인도하는 나무데크 계단길

오금공원의 남쪽 끝인 송파도서관으로 내려오니 어느덧 19시이다. 오금공원의 북쪽 끝인 오금
공원4거리에서 시작된 공원 더듬기는 공원을 완전히 가로질러 남쪽 끝인 송파도서관에서 대단
원의 막을 고한다. 다음에는 늦가을 한복판에 꼭 한번 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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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3년 2월 1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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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 기념 도심 사찰 나들이, 홍은동 백련산 백련사 (백련사 괘불)

홍은동 백련산 백련사



' 석가탄신일 도심 사찰 나들이,
백련산 백련사 '
백련사 약사전
▲  연분홍 연등이 하늘을 훔친 백련사 약사전 앞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왔다. 비록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석가탄신일 앓이가 좀 심한 편이라 그날에 대한 기대감이 큰 편이다.
하여 심쿵(심장이 쿵쿵)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서울 장안에서 적당한 절을 물색했으
나 서울에서 미답(未踏)의 고찰(古刹)은 이제 씨가 마른 상태이다. 그래서 이미 인연을
지었던 절 중에 아직 사진에 담지 않은 곳을 골라 영화사(永華寺)와 백련사 등 여러 절
을 그날의 메뉴로 정했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오전 11시, 기분 좋게 집을 나서 아차산 남쪽 끝에 자리한 영화
사(☞ 관련글 보기)를 둘러보고 비빔밥 스타일의 공양밥을 배불리 섭취한 다음, 홍은동
(弘恩洞) 백련사로 넘어갔다.
영화사에서 백련사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어 서둘러 지하철을 타고 홍제역에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10번(백련사↔홍제역)으로 환승하여 백련사 종점에서 두 발을 내렸다.



 

♣  정토도량 백련사(白蓮寺) 입문

▲  백련사 일주문(一柱門)

백련사 마을버스 종점에서 2분 정도 가면 장대한 모습의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1999년에 짓
기 시작해 2000년 10월에 완성을 본 것으로 일주문의 규모는 서울 사찰 가운데 거의 3위 안에
꼽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
현판에는 '삼각산정토백련사(三角山淨土白蓮寺)'라 쓰여 있어 이곳의 정체를 널리 알리고 있
는데, 엄연히 백련산(白蓮山) 자락에 있지만 조금 거리가 있는 북한산(삼각산)을 가져와 칭하
고 있다. 허나 북한산 탕춘대(蕩春大) 능선에서 갈라진 서남쪽 산줄기가 바로 백련산이라 삼
각산을 칭해도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 (넓게 따지면 이곳도 북한산의 일원으로 볼 수 있음)
그리고 정토는 백련사의 옛 이름이자 이곳에서 내세우고 있는 정토도량을 뜻한다.

일주문을 들어서니 석가탄신일 특수를 노리며 절에서 깔아놓은 커피와 아이스크림 판매 천막
이 지갑 좀 펼쳐보이라며 발길을 붙잡는다. 이제 갓 5월이건만 철모르고 찾아온 더위에 냉커
피 1잔을 사먹었는데 가격이 무려 3,000원대나 한다. 판매를 맡은 이들은 청소년들로 아마 백
련사 승려의 자녀거나 신도로 여겨진다.
참고로 백련사는 승려의 혼인을 대놓고 허용하는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라 절 주변에 승려 가
족들이 사는 집이 잔뜩 깔려있다. 태고종의 중심 사찰인 봉원사(奉元寺, ☞ 관련글 보러가기)
처럼 말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백련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이 땅 최초의 정토도량(淨土道場)을 내세우는 백련산 백련사
백련산 남쪽 중턱에 자리한 백련사는 747년에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부처의 정토사상을 천하에 널리 알리고자 이 절을 세웠다고 하며 절 이름도 그에 걸맞게 정토
사(淨土寺)라 했다고 한다. 그 연유로 이 땅 최초의 정토도량임을 아주 강하게 내세운다.
허나 아쉽게도 진표의 창건설을 밝혀줄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는 실정이라 심히 회의감을 들
게 한다. 게다가 창건 이후 14세기 말까지 이렇다할 기록도 없다. 다만 1399년 무학대사(無學
大師)의 지시로 함허대사(涵虛大師)가 중창했다고 하니 어쩌면 이때 창건된 것이 아닐까 싶다
. (고려 중/후기에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있음)
 
1413년 태종(太宗)의 형인 정종(定宗)이 요양차 이곳에 머물렀으며, 세조(世祖)의 장녀인 의
숙공주(懿淑公主, 1442~1477)가 20세에 남편을 잃고 비통함에 잠겨있던 중, 백련사에서 해동
묵(음나무)를 보고 인생의 참뜻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후 공주의 무덤이 근처에 마련되자 그
의 원당(願堂)이 되면서 백련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전한다. <의숙공주의 묘는 현재 경기도 의
왕시에 있음>
또한 경복궁(景福宮)에서 봤을 때 절이 서쪽에 있어 서방정토(西方淨土)를 뜻하는 '서방정(西
方淨)','정토사'라 불렸는데 어느 여름, 연못에서 하얀 연꽃이 피어올라 백련사라 했다는 설
도 덧붙여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중건했으며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터지자 승려들이 모두 도
망치고 건물은 거의 퇴락했다. 1659년에 3년에 걸쳐 중창을 벌여 1662년 법당을 다시 지었으
며, 1701년 절이 소실되자 1702년에 중건했다.
이곳에서 수행하던 낙창군 이탱(洛昌君 李樘, 선조의 증손자)이 돈을 내어 1774년 크게 중창
했으며, 1891년 경운(慶雲)이 법당과 여러 전각을 다시 짓고 1911년 명부전을 중수했다. 그리
고 서옹이 1914년 삼성전을 중건하고 1917년 사무실을 신축했다.
예로부터 서백련(서쪽의 백련사)이라 하여 동쪽의 청련사<靑蓮寺, 왕십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양주시 장흥으로 자리를 옮김>, 남쪽의 삼성산 삼막사(三幕寺, ☞ 관련글 보기), 북쪽의 북한
산 승가사(僧伽寺, ☞ 관련글 보기)와 함께 한양도성의 4대 비보사찰로 꼽히기도 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무량수전을 비롯해 약사전, 명부전, 관음전, 범종각, 요사 등 10여 동
의 건물이 있으며, 그 주위로 승려 가족들이 사는 집이 무더기로 몰려있다. 지정문화재는 아
직 없는 실정이나 1569년에 만들어진 '융경(隆慶) 9년명 동종'이 가장 오래된 존재이며 19세
기에 조성된 괘불과 여러 탱화들이 전한다. 그리고 500년 묵은 음나무가 있었으나 세월의 고
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몇 년 전 하직하고 말았다.
또한 백련사는 예로부터 약수 맛이 좋았다. (10대 시절에 마셔봤음) 허나 그 착했던 물도 앞
서 음나무처럼 옛말이 되버린 상태이다. 하긴 서울에 이름난 약수들이 천박한 개발의 칼질과
환경오염의 마수(魔手) 앞에 상당수 고통을 받으며 명이 끊겼으니 백련사 약수라고 예외일 수
는 없을 것이다.

* 백련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 산11-155 (백련사길 170-72, ☎ 02-302-0288)
* 백련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무량수전 앞에 펼쳐진 석가탄신일 산사음악회

백련사의 중심인 무량수전(無量壽殿) 뜨락에는 산사음악회가 신명나게 열리고 있었다. 이제는
석가탄신일의 필수 요소로 자리를 잡아 음악회를 여는 절이 많은데 보통은 저녁이나 오후 늦
게 하기 마련이나 이곳은 대낮으로 시간을 잡았다.
공연장 앞에는 하얀 연등과 연분홍 연등을 적절히 조합하여 하늘을 대신하게 했고 그 밑에 넓
게 방석을 깔아 방청석으로 삼았다. 그리고 공연장 뒤쪽에 나를 흥분하게 만든 괘불이 높다랗
게 걸려 시끌벅적한 야단법석(野壇法席)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정말 보기 힘든 괘불이
석가탄신일을 맞아 간만에 외출을 나온 것이다.

천하에 300곳 이상의 절을 들락거렸지만 괘불을 본 것은 정말 손에 꼽는다. 그만큼 보기가 힘
든 비싼 존재로 그나마 석가탄신일이 만날 확률이 좀 크다. (내가 만난 괘불의 대부분이 석가
탄신일에 본 것임)
나를 흥분시킨 백련사 괘불은 1892년(또는 1868년)에 조성된 것이다. 높이는 약 6m 정도로 따
사로운 5월 햇살에 비춰 더욱 윤기가 흘러 보인다.


▲  오랜만에 나들이를 나온 백련사 괘불(掛佛)의 위엄

▲  백련사 괘불과 그 앞에 펼쳐진 산사음악회 현장

▲  원통전(圓通殿)

원통전은 관세음보살 누님의 거처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백련사는 이곳
외에도 칠성각 옆에도 관세음보살의 거처인 관음전을 두었으며 명부전 옆에는 따로 석조관세
음보살입상까지 지어놓아 관세음보살상만 무려 3기나 갖추고 있다. 이곳처럼 관음전(원통전)
계열의 건물을 2개나 지닌 절은 처음 보는데, 정토도량 외에 관음도량까지 염두에 둔 모양이
다.


▲  원통전 내부
늘씬한 몸매의 금동관세음보살상과 백의관음(白衣觀音) 후불탱, 신
중탱이 내부를 장식하고 있다.

▲  백련사의 법당인 무량수전

무량수전은 서방정토의 주인장,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이다. 'ㄱ'모습의 팔작지붕 2층 집
으로 1층은 종무소(宗務所), 공양간 등으로 쓰이며 2층이 바로 무량수전으로 실내가 연병장만
큼이나 넓다. 또한 이곳말고도 동쪽에 극락전이라고 아미타불의 거처를 또 마련하였는데 이는
이곳이 정토도량을 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량수전의 별칭이 바로 극락전임)



 

♠  백련사 마무리

▲  백련사 약사전(藥師殿)

원통전 옆구리에는 약사여래(藥師如來)의 거처인 약사전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
지붕 집으로 내부에 1569년에 조성된 '융경(隆慶) 9년명 동종(銅鍾)'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해 지나치고 말았다. (동종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그가 백련사
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며, 불단에 자리한 석조약사여래좌상과 약사후불탱은 19세기 것이다.


▲  약사전 석조약사여래좌상
하얀 피부를 지닌 밝은 표정의 약사여래좌상이 좌우로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거느리며 약사3존상을 이루고 있고, 그 뒤에는
19세기에 그려진 약사후불탱이 든든하게 걸려있다.

▲  약사전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탱화들 (극락구품도, 신중탱, 현왕탱 등)

▲  석조관세음보살상과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지장보살과 저승(명부)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2017년 5월에 장만한 석조관세음보살상이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매
끄러운 하얀 피부를 자랑하며 자리해 있다.


▲  19세기에 조성된 명부전 지장보살상과 무독귀왕, 도명존자(道明尊者)

▲  명부전 우측 시왕상과 시왕탱

▲  명부전 좌측 시왕상과 시왕탱


▲  한 지붕 세 가족을 이루고 있는 관음전, 칠성각(七星閣), 산신각(山神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3칸짜리 맞배지붕 집이 있다. 이미 원통전이란
관세음보살의 거처가 있음에도 이곳에도 1칸을 떼어나 그의 공간을
추가했으며 가운데 칸은 칠성, 오른쪽 칸은 산신의 공간이다.

▲  극락전과 칠성각 사이를 가득 메운 연분홍 연등의 고운 물결
연등에 의해 하늘이 푹 낮아진 기분이다.

▲  극락전(極樂殿)의 옆구리

극락전은 무량수전과 마찬가지로 서방정토의 주인인 아미타불의 거처이다. 무량수전 다음으로
큰 집으로 백련사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한 정토도량임을 강조하고자 그의 공간을 2개씩이나
두고 규모도 크게 다졌다. (극락전 계열의 집이 2동이나 있는 절은 처음 봄)


▲  극락전 내부

극락전을 끝으로 백련사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이곳의 석가탄신일 인심도 확인할 겸, 공
양밥 1그릇 들고 갈까 했으나 영화사에서 먹은 것이 다 소화되지 않았고, 아무리 둘러봐도 공
양밥을 주는 곳이 보이지 않아 아무래도 공양시간은 끝난 듯 싶었다. (백련사 공양밥이 맛있
다고 함)
두 다리도 잠시 쉴 겸, 잠시 신명나는 산사음악회를 구경하다가 보조 메뉴로 급히 정한 다른
절로 길을 잡았다. 이후에 간 고찰들은 자주 복습했던 곳이라 사진에 따로 담지 않아 본글에
서는 생략한다.

이렇게 하여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나들이는 보다 흥겨운 내년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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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근대문화유산의 1번지, 정동~덕수궁돌담길 역사 기행 (심슨기념관, 유관순우물, 구 신아일보별관, 구러시아공사관, 정동교회)

정동, 덕수궁돌담길 역사 산책



' 서울 도심의 한복판, 정동~덕수궁돌담길
늦가을 산책 '
덕수궁돌담길
▲  덕수궁돌담길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그 도심 한복판에 정동(貞洞)이란 고즈넉한 동
네가 뉘어져 있다.
정동은 서울 도심의 근대문화유산 1번지로 칭송을 받는 곳으로 덕수궁돌담길과 정동길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정동의 대표 명소이자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황궁이었던 덕수궁(
德壽宮, 경운궁)을 핵심으로 구 러시아공사관, 정동교회,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구 대법
원 청사(서울시립미술관), 구 신아일보 별관, 성공회 서울성당, 구세군중앙회관, 배재학
당 동관, 구 미국공사관 등의 근대문화유산이 풍부히 깃들여져 있으며, 국립 정동극장과
서울시립미술관, 이화박물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등의 문화, 전시 공간도 듬뿍 담겨져
있다. (국립정동극장을 제외하고 모두 기존의 근대 건축물을 활용하고 있음)
그 외에 정동 회화나무, 배재학당 향나무, 유관순 우물 등의 문화유산이 있어 정동이 오
랜 시대를 풍미했던 현장임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영국, 러시아, 미국, 캐나다, 뉴질랜
드 대사관 등 외국 공관도 많이 산재해 있어 외교 1번지로도 통한다.

비록 도심의 한복판이나 회색빛 가득한 시청과 광화문, 종로 주변과 달리 번잡함이 조금
덜하며 나무를 머금은 공간이 많아 오히려 아늑함이 느껴질 정도이다. 게다가 현대와 근
대,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600년에 장대한 시간이 녹아든 현장으로 역사, 문화의 향기도
그윽하다. 바로 그런 매력 때문에 오랫동안 서울 사람들의 산책, 나들이 명소로 격한 사
랑을 받아왔으며, 나 또한 이곳을 즐겨찾기 명소로 삼아 종종 재활용을 하고 있다.

정동은 조선 개국(開國) 시절부터 요란하게 꿈틀거렸던 현장이다. 조선 최초의 릉(陵)인
정릉(貞陵,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 이곳에 둥지를 틀었고 그 정릉을 지키
고자 조선 최초의 원찰(願刹), 흥천사(興天寺)가 그 곁에 지어졌다. 정동이란 이름은 바
로 정릉에서 비롯된 것이다. 허나 권력 다툼으로 정릉은 도성 밖 정릉동(貞陵洞)으로 추
방되어 잊혀진 능이 되었고, 흥천사 또한 유생들에게 아작이 나면서 알짜배기 땅에서 방
을 빼야 했다. (지금은 성북구 돈암동에 있음)
성종(成宗)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정동에 저택을 짓고 살았는데, 그 집이 임진왜
란 이후 임시 궁궐<정릉동 행궁(行宮)>이 되었으며, 조금씩 별궁(別宮)으로 몸집을 불려
가다가 1897년 대한제국의 중심 황궁(皇宮)으로 크게 거듭나게 된다. 그 궁궐이 바로 덕
수궁<경운궁(慶運宮)>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3배 이상의 크기로 정동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정동은 조선(대한제국)의 정치, 행정의 1번지이자 제왕이 사는 곳으로 매우 중
요시되었다. <'정동은 황궁과 가까이 있어 만백성이 우러러 보는 지역'이라며 강조했음>

또한 정동은 19세기 후반, 많은 양이(洋夷)들이 정착했던 곳이다. 그들은 서울에 들어와
주로 정동에 서식했는데, 외교관과 군인, 그 가족들, 종교인, 사업가들이 주류를 이루었
으며, 집과 학교, 성당, 교회, 호텔, 공사관 등을 지었다. 바로 여기서 이 땅의 근대 교
육이 시작되었고, 천주교와 기독교 등 여러 서양 종교들이 정동에 본거지를 세워 세력을
확장했다.
그런 인연으로 근대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어 정동길과 덕수궁돌담길만 어슬렁 거려도 근
대사의 주요 부분과 구한말(舊韓末) 건축 양식을 거의 다 꿰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이다.

늦가을을 맞이하여 간만에 정동을 찾았는데, 이번에 찾은 정동의 명소들은 이미 여러 번
씩 복습을 했던 곳이다. 허나 복습이란 예습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라 많이 할수록 좋다.



 

1. 정동 회화나무, 심슨기념관(이화박물관), 구 신아일보 별관

▲  정동 회화나무 - 서울시 보호수 2-3호

정동 나들이는 시청역(1,2호선)이나 정동사거리(5호선 서대문역과 서울역사박물관 중간)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이번에는 정동사거리에서 첫 발을 떼어 정동길로 들어섰는데 그 길을 3~
4분 정도 가면 야무지게 자라난 회화나무가 마중을 나온다. 그가 정동의 오랜 터줏대감인 정
동 회화나무이다.
이 나무는 정동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약 570년 정도 묵었다. (1976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520년) 서울 도심부(4대문 안)에서 가장 늙은 측에 속하는 나무로 500년 이상 제
자리를 지키며 정동의 숱한 변화를 지켜본 유일한 산증인이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과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높이 17m, 둘레 5.16m의 큰 나
무로 성장했는데, 그 기세는 정동길을 뒤덮을 정도이다. 고된 세월에 지쳤을까. 아니면 하늘
이 두려운 것일까.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다소 구부러진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나무가 워낙 나이가 많고 수시로 오가는 차량들이 내뱉은 고약한 기운에 매일 시달리면서 한
때 수세(樹勢)가 많이 기울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2003년 캐나다가 대사관(大使館) 건물을 신
축했는데, 그 대사관이 자칫 나무를 죽이는 칼이 될 수 있었으나 캐나다 양이들이 기특하게도
나무를 배려하여 건축 디자인을 변경하고, 지지대를 세우고, 우물을 확장하는 등 깨어있는 모
습을 보여주어 나무는 다시 건강을 되찾았다.


▲  정동 회화나무와 캐나다대사관(왼쪽 건물)
정릉과 흥천사부터 600년 동안 많은 것들이 창밖에 이슬처럼 정동을 스쳐갔지만
오직 회화나무만이 그 장대한 세월을 극복하며 정동을 지켜왔다.


▲  정동 회화나무 주변 정동길
회화나무의 그늘 맛을 매일 먹고 자라는 정동길, 정동길의 늦가을 풍경은
몸살이 날 정도로 아름답기로 명성이 자자하다.

▲  이화여고 심슨기념관(Simpson Memorial Hall) - 국가 등록문화재 3호

정동 회화나무를 지나면 정겨운 기와 돌담을 두룬 이화여고가 모습을 비춘다. 정문 옆에는 붉
은 피부를 지닌 3층 건물이 눈길을 끄는데 그것이 이화학당에서 가장 늙은 건물인 심슨기념관
이다.

심슨기념관은 1915년에 지어진 지하 1층, 지상 3층, 건평 129.5평의 벽돌 건축물로 언더우드
가 세웠던 '예수교학당' 자리이다. 이화여고에서 유일하게 남은 근대 건축물로 조선에 머물던 
미국 사람 심슨(Sarah J. Simpson)이 사망하자 그가 남긴 재산으로 지었으며, 그를 기리고자
그의 이름을 따서 심슨기념관(씸손기념관)이라 했다.
건물 동쪽에는 '씸손기념관'이라 쓰인 동판이 있으며 1961년과 2006년에 보수했다. 이후 내부
를 손질해 이화학당백주년 기념관으로 삼았다가 이화학당(이화여중고)의 역사를 집대성한 '이
화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곳은 일요일과 공휴일은 문을 닫아걸고 쉬므로 토요일과 평
일에 찾아야 됨)

이화학당(梨花學堂)은 1886년 5월, 미국 선교사 스크랜톤 여사(Mrs. Marry F. Scranton)가 세
운 이 땅 최초의 여자학교이다. 그는 조선에 여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1885년 8월 아펜젤러 선
교사와 현재 이화여고 본관 뒷편 언덕에 올라 적당한 자리를 살피다가 그해 10월 배밭 6,120
평을 구입했다. <현재 정동 32번지 일대>
그 안에 있던 집을 모두 부시고 새로운 한옥을 착공하려고 하니 마침 선교부로부터 예산 지원
이 어렵다는 통보가 날라왔다. 하여 미국 각지에 원조를 요청하여 겨우 3,700달러의 기부금을
모아 건물을 완성했다. 처음 학교 건물은 'ㄷ'자 모양의 195.5칸에 큰 한옥으로 7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당시 장안 사람들은 그 건물을 양국관(洋國館)이라 불렀다.

그 시절 조선은 여자들 교육에는 매우 인색했다. 그래서 스크랜톤은 조선의 그런 현실을 생각
해 6명을 생각했으나 겨우 1명이 지원하는데 그쳤다. 그래서 그 1명으로 교육을 시작하면서
이화학당의 서막은 열리게 된다.
초창기 학당에 들어온 여학생들은 이름이 없어 영어로 편의상 '1st', '2nd', '3rd' 등으로 불
렀다. 허나 학생이 점차 증가하면서 서수(序數)로는 적당치가 않아 '수산나','델리아' 등의
세례명을 붙여주었다.

▲  이화학당을 세운 스크랜톤의 흉상

▲  이화여고 뜨락에 세워진 '한국여성
신교육의 발상지' 표석


1887년 고종은 배꽃처럼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에서 '이화학당'이
란 이름을 내렸다. '이화'란 이름은 부근에 있던 이화정(梨花亭)이란 정자에서 따왔다는 설과
이곳이 원래 배밭이었으므로 거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전하고 있다.

1897년 학생수가 40명을 넘자 페인(J.O Paine) 학당장(學堂長)은 기존 한옥을 부시고 2층짜리
양관인 메인홀(Main Hall)을 지어 1900년 11월 완성을 보았다. 메인홀은 'T'자형으로 900평에
이르는 큰 건물이었다.
바로 이웃에 자리한 배재학당의 아펜젤러는 이화학당 메인홀을 두고 '서울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집'이라며 찬양을 하였다. 허나 그 건물은 6.25 때 파괴되었으며, 1970년에 그 뒤쪽에
이화여고 본관이 세워졌다. 옛 메인홀터에는 '한국 여성 신문화의 발상지'란 표석과 스크랜톤
부인의 흉상이 자리를 지킨다.

1899년 5월에는 학당에서 여학생을 이끌고 창의문 밖 세검정(洗劍亭)으로 소풍을 갔었다. 그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생 소풍이라고 한다. 그 당시 '여학생의 꽃구경은 500년에 처음이
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그들의 소풍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  굳게 닫힌 유관순우물

이화학당하면 유관순(柳寬順) 누님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했
는데, 1919년 3.1운동이 벌어지자 고등과 학생 5명과 몰래 기숙사 뒷담을 넘어 만세운동에 참
여했다.
3월 10일 휴교령이 내려지자 같은 학교에 다니는 사촌언니 유예도(柳禮道)와 고향인 천안 병
천으로 내려가 병천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관했으나 왜경에 체포되어 1920년 서대문형
무소에서 18세의 어린 나이로 옥사(獄舍)하고 말았다.
그의 묘는 이태원(梨泰院) 공동묘지에 있었으나 그 묘지가 망우리 공동묘지(현재 망우리공원)
로 이전되는 과정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아마도 왜정(倭政)이 고의적으로 그의 시신과 무덤을
없앴을 것이다.

심슨기념관 뒤쪽에는 굳게 입을 봉한 동그란 조선 후기 우물이 하나 있다. 서울에 몇 남지 않
은 조선시대 우물로 학교에서는 그 우물을 '유관순우물'이라 부르며 애지중지하는데, 원래는
정동 사람들이 쓰던 우물이었으나 이화학당이 들어서면서 학당 소유가 되었다.
댕기머리 여학생들이 여기서 물을 길어 식수용으로 쓰거나 빨래를 했다고 하며, 유관순 누님
역시 이곳에서 빨래를 했을 것이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의 상징적인 인물이라 그의 이름을 따
서 '유관순우물'이라 했다.


▲  이화학당 사주문(四住門)과 하마비(下馬碑), 그리고 우수수
은행잎을 털어내는 노란 은행나무


이화학당 여학생들이 수다를 떨며 지나다녔을 기와집 사주문, 지금은 문 옆에 넓은 교문이 닦
여져 있어 후문으로 물러나 있다.
사주문은 이화학당의 옛 정문으로 1923년에 전통 한옥의 사주문 형태로 지어졌다. 이후 지금
의 자리로 이전되면서 왜식(倭式)으로 변형된 것을 1954년에 어느 졸업생의 흔쾌한 후원금으
로 팔작지붕 기와문으로 교체했으며, 1999년 8월 원래의 대들보와 상도리, 망와 등 일부를 사
용하여 초기 모습으로 복원했다.
문 좌우로 기와를 머리에 인 돌담이 정겹게 펼쳐져 있고 문 옆에는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
다 작은 비석이 우두커니 서있는데, 그 비석은 아무나 세울 수 없었던 콧대 높은 하마비이다.

하마비 피부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쓰여 있으니 이는 높고 낮은 사람 모두
말에서 내려 지나가란 뜻이다. 조선시대 국립중등교육 기관인 향교(鄕校) 앞에 하마비가 있는
것은 보았어도 신식 학교에 그것이 있는 것이 참 이채로운데 아마도 제왕이 친히 이름을 내리
며 관심을 보인 여학교라 학교 주변 단속도 할 겸, 비석을 내린 모양이다. 이화학당은 제왕(
고종)이 이름도 내려주고 하마비까지 달아준 특별한 학교였던 것이다.

* 이화여고 심슨기념관(이화박물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32-1 (정동길26, ☎ 02-21
  75-1964)
* 이화박물관 홈페이지는 아래 하마비 사진을 클릭한다.

◀  이화학당의 특별함을 보여주는
사주문 옆 하마비의 위엄


▲  구 신아일보 별관(新亞日報 別館) - 국가 등록문화재 402호

이화학당 사주문에서 시청 방향으로 1분 정도 가면 왼쪽(북쪽)에 붉은 피부의 큰 건물이 마중
을 한다. 겉으로 보면 그저 그런 건물로 여기고 지나치기 쉽지만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면 그
역시 고색이 깃든 건물임을 눈치챌 수 있다.
그는 옛 신아일보의 별관으로 1930년대에 지어진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지금과 달리 지하 1
층, 지상 2층, 연면적 2,000.53㎡ 규모로 미국 업체인 싱거미싱회사(Singer Sewing Machine
Company)의 한국지부로 쓰였다가 1969년 신아일보가 매입했다.

신아일보는 1965년 5월 장기봉(張基鳳)이 창간한 신문으로 처음부터 '상업신문'임을 내세웠다.
다른 수익사업을 병행하지 않고 오직 신문 수입으로 경영하여 소수의 인원으로 신문사를 꾸렸
는데, 매일 8면의 지면을 제작해 신문계에서 '기적의 신문'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창간호(創刊
號)부터 다색도인쇄(多色度印刷)로 발행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다색도인쇄 신문으로 명성이 높
다.
독자투고란인 '세론(世論)'을 만들어 독자참여제도의 문을 열었고, 우리나라 최초로 '종교란'
을 만들어 종교계로부터 찬양을 받았다. 또한 '수도권백과','재계화제' 난을 신설하고 '농수
산소식','소비자 페이지','부부교실','부동산' 난을 만들어 생활경제정보를 많이 제공했다.

1975년 기존 건물에 크게 반하지 않는 선에서 4층까지 올리는 등, 잘나가던 시절도 있었으나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으로 강제로 경향신문에 통합되면서 사라지고 만다. 이후
2003년 같은 이름의 신아일보가 여의도에 문을 열었으나 예전 신아일보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한때는 옛 신아일보의 뒤를 이었다고 내세웠으나 옛 신아일보를 세웠던 장기봉의 반발로 그
부분은 쏙 사라짐>

민간 건물 건축기법으로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일방향 장선 슬라브(One-
way Joist Slab) 구조 및 원형철근 사용 등 왜정 시절 건축구법과 구조 등이 잘 남아있어 근
대 건축기술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1980년 신군부의 어거지성 언론통폐합으로 사라진 언
론수난사의 현장으로 나름 가치가 있어서 국가등록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현재는 옛 신아일보를 추억하는 신아기념관으로 일부 쓰이고 있으며, 많은 회사들이 입주하여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 구 신아일보 별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1-28 (정동길 33, ☎ 02-777-9875)


▲  구 신아일보 별관의 정면 모습
정면에 보이는 붉은색 아치형 문은 지하로 이어지며, 그 위의 문은
건물의 현관이다.



 

2. 구 러시아공사관과 정동교회

▲  구 러시아공사관 - 사적 253호
(정동공원에서 바라본 3층 전망탑)


이화학당 사주문 맞은편(북쪽) 길로 조금 들어서면 그 길의 끝, 언덕 위로 하얀 피부의 날씬
한 건물이 두 망막에 들어올 것이다. 그가 바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우울한 현장인 러시아
공사관터 3층 전망탑이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두만강(豆滿江)과 간도를 사이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는데, 흥
선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하여 프랑스를 이용해 소위 이이제이(以夷制夷) 방법으로 러
시아를 막아볼 생각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1884년에 이르러 러시아와 수교를
맺게 되는데, 그때 조선측 대표는 김병시(金炳始), 러시아측 대표는 베베르(K. Waeber)였다.

조선은 1888년 덕수궁(경운궁)의 후원인 상림원(上林園) 일대를 공사관 자리로 내렸다. 러시
아는 그곳을 밀어버리고 그 땅에 공사관과 정교회<正敎會, 동방교회(東方敎會), 1900년에 지
어짐>를 세워 서울 속에 조그만 러시아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공사관은 1888년 공사에 들어가 1890년 8월 완성을 보았는데, 스위스계 러시아 사람인 사바틴
(Sabatine)이 설계했다. 르네상스식 벽돌조 건물로 공사관 본관은 'H'자형 평면으로 지어졌는
데, 남,동,서측 3면에 아치열주가 있는 아케이드를 두어 3면 모두 정면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각 면에 출입문을 내고, 북쪽 끝 모서리에 3층 전망탑을 두었다. 그리고 공사관 초입에 4면이
아치로 된 개선문 형태의 정문을 두었다.

러시아공사관은 간단히 줄여 아관(俄館)이라고 하는데, 이는 러시아를 아라사(俄羅斯)라고 불
렀기 때문이다. <가차자(假借字) 표현으로 '아라사'라고 했음> 전망탑을 비롯해 공사관에 딸
린 건물이 여럿 있었으나 왜정(倭政) 때 상당수 파괴되었으며, 6.25시절에 탑을 제외한 나머
지 건물이 모두 박살이 나고 말았다. 탑 역시 무거운 상처를 입어 기우뚱거린 것을 1973년에
복원했다.
3층으로 이루어진 탑의 면적은 65.2평으로 1981년 탑 동북쪽에서 지하실과 20.3m의 비밀통로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과 이웃한 미국공사관으로 속히 줄행랑을 치
기 위해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덕수궁이 황궁이 된 1897년 이후, 주변에 자리한 여러
나라 공사관과 영사관을 잇는 작은 통로를 닦아 유사시에 대비했다.
그 통로는 1945년 무렵까지 대부분 남아있었다고 하며, 이후 모두 사라졌다가 2019년에 정동
공원에서 덕수궁돌담길(덕수궁길)을 잇는 통로가 일부 재현, 복원되어 '고종의길'이란 이름으
로 속세에 개방되었다.


▲  옆(서쪽)에서 바라본 러시아공사관 전망탑

우리가 보잘것없는 이 하얀 탑에 주목을 해야 되는 이유는 1896년에 일어났던 아관파천의 우
울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1895년 왜국(倭國)이 저지른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고종은 왜를 불신하며 경복궁에
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 친러파였던 이범진(李範晉)과 이완용(李完用), 이
윤용(李允用) 등이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신임공사 스페이어, 손탁과 함께 고종의 파천계획을
모의한다.
그들은 고종의 총애를 받던 엄귀비(嚴貴妃)를 통해 왕에게 접근, 친일패거리들이 왕의 폐위를
꾸미고 있으니 잠시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고종이 흔쾌히 승낙
하며 베베르와 스페이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베베르는 1896년 2월 공사관 수비를 이유로 인천에 머물던 러시아군함에서 포 1문과 군사 120
명을 소환하여 왕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그 준비가 끝나자 2월 11일 새벽, 고종은 왕태자(
순종)와 궁녀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 영추문(迎秋門)을 살짝 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불이 나게
도망쳤다. 이 사건을 바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한다.

그렇게 러시아공사관에 샛방을 튼 고종은 왜와 친했던 김홍집(金弘集) 내각(內閣)을 단죄했다.
그래서 김홍집, 어윤중(魚允中)을 처단하고, 김윤식(金允植)을 제주도로 귀양보내니 이에 염
통이 쫄깃해진 유길준(兪吉濬) 등 10여 명의 고위관리는 왜열도로 줄행랑을 쳤다.
친일내각을 도려내자 친러패거리인 이범진, 박정양(朴定陽), 윤치호(尹致昊) 등이 중심이 된
친러내각이 들어섰다. 그들은 친일파를 역적으로 간주, 단발령(斷髮令)을 보류하고 갑오개혁
과 을미개혁(乙未改革)을 폐지했다.
고종은 이곳에서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을 머물렀는데, 그동안 가까운 서대문(西大門)은 임
시로 폐쇄되었고, 정동 일대는 백성들의 통행을 금했다.

▲  윤곽만 남아있는 러시아공사관터
북쪽 부분

▲  러시아공사관 남쪽 정동공원에 있는
하얀 피부의 8각형 정자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얹혀사는 동안 어전회의는 무도실에서 했으며, 대신들은 공사관 대회
의실에서 병풍으로 칸막이를 삼아 일을 보았는데, 부서별로 회의를 할 때마다 병풍을 이리저
리 옮겼다.
고종은 2층 만찬실을 거처로 삼았는데, 만찬실 벽에는 꽃무늬 융단이 걸려있고 천정 가운데에
7가지 촛불로 이루어진 샹들리에가 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동쪽 벽에는 소파 모양의 용상(龍
床)이 있었고 그 앞에는 호피(虎皮) 1장이 깔려 있었으며, 거실 서쪽 벽에는 왕의 침대가 있
고, 남쪽 벽에는 소파 세트가 있었다. 그리고 만찬실 주변 측실(側室)에는 상궁(尙宮)과 궁녀
들이 거처하여 왕의 시중을 들었는데, 궁녀들은 방이 따로 없어 공사관 복도에서 칸을 설치하
여 아주 불편하게 지냈다.
만찬실 창 밖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대포 1문이 장착되어 있었고, 정문에서 현
관에 이르는 길에는 러시아군 100명이 수비했다. 그리고 정문 밖에는 칼을 찬 조선군이 길목
을 지켰다.

러시아 공사 스페이어는 고종이 불편하지 않도록 갖은 편의를 제공했는데, 명성황후의 제단(
祭壇)까지 마련해주는 등 왕의 가려운 부분을 알아서 긁어주었다. 이에 고종은 러시아에 더욱
친밀을 보이면서 많은 이권을 러시아에 내리게 되며, 그로 인해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
은 커지게 된다.


▲  러시아공사관터 동쪽 부분
주름진 공사관터 동쪽 끝에 지하 비밀통로가 있는데, 이 통로는 미국공사관
(현 미국대사관저)과 이어져 있었다. (지금은 끊김)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형편없이 깨지자 승리한 왜는 러시아공사관을 접수하여 러시아
공사(公使)와 러시아군 80명, 공사 직원을 죄다 러시아로 추방했으며, 인근 프랑스공사관에게
관리를 맡겼다.
그러다가 왜와 러시아가 국교를 다시 맺으면서 러시아영사관으로 쓰였으며, 1945년 이후 소련
영사관이 되었다. 허나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니콜라이 영사가 북한으로 추방되
면서 다시 빈집이 되고 만다.
이후 6.25전쟁으로 전망탑을 빼고 모두 파괴되었고, 1973년 전망탑을 복원하면서 암울했던 근
대사를 나무로 덮으려는 듯, 수양버들 등의 나무를 심어 정동공원을 조성했다. 이후 2009년에
독특한 모습의 하얀 정자를 공원 한복판에 닦아 지금에 이른다. (정동야행 축제 때는 음악회
장소로 많이 쓰임)

러시아와 재수교 이후 그것들은 이곳을 달라고 쓸데없이 요구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요구는
보기 좋게 묵살되었다. 전망탑 남쪽으로 약 1리 남짓 떨어진 정동교회 뒤쪽에 러시아대사관이
이미 자리해 있어 그 땅을 줄 이유가 전혀 없던 것이다.

70년 가까이 홀로 제자리를 지키고 선 하얀 피부의 3층 전망탑, 근대사의 거센 소용돌이의 현
장으로 지금은 그저 평온하기만 하다. 하지만 바로 동쪽 옆으로 높이 담장을 두룬 미국대사관
(대사관저)이 들어앉아 있고 그곳을 지키고자 전/의경들이 항시 주둔해 있어 마치 1896년 그
현장이 재현된 듯, 그리 유쾌하지가 못하다.

* 구 러시아공사관터(정동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15-3


▲  정동교회(貞洞敎會) - 사적 256호

이화학당 사주문에서 덕수궁(경운궁) 쪽으로 3분 정도 가면 오른쪽(남쪽)에 고색이 창연한 붉
은 피부의 교회가 마중을 한다. 그가 이 땅에서 가장 늙은 교회인 정동교회(정동제일교회)로
120년이 넘은 노구에도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동교회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G, Appenzeller, 1858~1902)가 1898년에 세운 것
으로 1887년 10월 현재 한국은행본점 부근에 마련된 배재학당 학생들의 성경공부방에서 비롯
되었다. 이후 교인 수가 200명이 넘자 남녀가 함께 예배를 볼 수 있는 교회 건축을 추진하기
에 이른다. (그 시절에는 남녀가 각각 별도의 장소에서 예배를 봤음)
이에 아펜젤러는 500명 규모의 큰 서양식 예배당을 제안, 이를 실현하고자 미국으로 건너가
모금을 했다. 또한 교인들도 자체적으로 돈을 걷어 8,000달러의 거금을 마련했다.

새 교회는 선교사 스크랜튼의 시약소(施藥所) 병원 자리의 한옥을 헐고 1895년 9월 9일 정초
식(定礎式)을 했는데, 이때 법무대신 서광범(徐光範)이 축사를 했다. 교회 설계는 왜인 요시
자와 토모타로(吉澤友太郞)가 했으며, 심의섭(沈宜燮)이 시공을 했다. 1896년 12월에 지붕을
올리고 1897년 12월 26일 교회 봉헌식을 가졌으나 최종 완공은 1898년 12월 26일에 이루어졌
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이 교회는 정동 거리의 상징적인 건물이자 서울 장안의 명물로 구경꾼
들로 가득했으며, 이 땅 최초의 교회란 뜻에서 'high church'라 불리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독립협회운동과 인권운동 등이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서재
필(徐載弼), 윤치호(尹致昊), 이승만(李承晩) 등 이름만 들어도 귀에 부쩍 익은 사람들이 이
곳의 교인으로 활동하며 기독교에 대한 호기심을 풀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정동교회

▲  정동교회의 뒷모습

1900년 대한제국 정부는 정동교회를 경운궁에 집어넣고자 매입대금 34,000원 가운데 계약금 1
만원을 지불했다. 허나 나머지를 내놓지 않자 이에 뿔이 난 미국공사 알렌이 1901년 5월 나머
지 금액을 속히 처리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편입작업이 무산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115평 규모의 십자형(十字形) 건물이었으나 늘어나는 신자를 감당하지 못해 1926년
에 양쪽 날개부분을 확장하여 삼랑식(三廊式)으로 개축하면서 175평으로 넓어졌으며, 건물의
모양도 직사각형을 이루게 되었다. 1918년에는 이화학당의 하란사(河蘭使)가 미국에서 구입한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했다.

6.25때 교회 건물 절반이 박살이 났으며, 파이프오르간도 이때 파괴되어 다시 복원했다. 서울
수복 이후 바로 '예배당 중수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1950년 11월 23일에 복원했으며, 1970년
대에 이르러 벽돌이 풍화되고 문짝이 망가지면서 교회를 새롭게 지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나왔다. 허나 교단의 내분으로 차일피일 시일만 보내다가 1977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원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  뜨락에 세워진 감리교회 조선 선교(宣敎) 50주년 기념비

정동교회는 다갈색 벽돌로 지어진 것으로 곳곳에 아치형 창문을 내어 고딕 양식의 단순화된
교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돌을 다듬어서 반듯하게 쌓은 기단에는 조선시대 목조 건축
의 솜씨도 다소 배여있다.
마치 서양의 어느 늙은 교회로 뚝 떨어진 듯한 분위기로 하루가 멀다하고 솟아나는 으리으리
한 교회나 성당과 달리 소박한 모습에 아늑하고 정겨운 느낌이며, 비록 나와는 전혀 맞지 않
은 종교의 현장이지만 그것에 개의치 않고 저 안에 들어가 잠시 망중한에 잠겨보고 싶은 곳이
다. 평일 낮과 토요일, 휴일에는 내부 관람이 가능하며, 정동야행 축제 때는 음악회가 열린다.
(교회 사정과 행사에 따라 관람이 어려울 수도 있음)

* 정동교회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4-3 (정동길 46, ☎ 02-753-0001)



 

3. 정동의 백미, 덕수궁돌담길을 거닐다.

▲  덕수궁 서쪽 돌담길

덕수궁(경운궁) 대한문에서 정동교회까지 이어지는 덕수궁 남쪽 돌담길은 길을 거니는 사람들
로 늘 만원이다. 하지만 정동교회에서 미국대사관저 옆구리를 거쳐 덕수초교로 넘어가는 서쪽
돌담길은 전,의경들이 경비를 서고 있어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발길을 주저하게 된다. '이 무
거운 분위기는 뭘까?' 하고 말이다. 허나 그 길은 누구나 거닐 수 있는 자유로운 길이니 안심
하고 거닐도록 하자~! 그곳이 돌담길의 백미와 같은 곳이다.

서쪽 돌담길 중간에는 야트막한 고개가 솟아있는데 이를 영성문(永成門) 고개라고 한다. 영성
문은 덕수궁 북쪽 구역 문으로 새문안길(서대문~광화문을 잇는 도로) 부근에 있었다. 대한문
에 버금갈 정도로 아름다운 문이었는데 덕수궁에서 미국공사관, 러시아공사관, 영국공사관과
이어져 '외교의 문'으로 통하기도 했다.
허나 친일파인 윤덕영(尹德榮)이 왜정과 짜고 영성문 안쪽의 부지를 왜인(倭人)에게 팔아 막
대한 이득을 취했다. 윤치호(尹致昊)는 이 사건에 크게 뚜껑이 열려 1919년 11월 22일에 적은
그의 일기(윤치호일기)에서
'이 비열한 매국노들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웹스터 사전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
라며 강하게 비난했다. (나중에 윤치호도 친일파 떨거지로 변함)

고종이 세상을 뜨기가 무섭게 왜정은 1920년 2월 영성문과 선원전 일대를 철거했다. 이때 영
성문에서 정동교회로 이어지는 언덕을 깎으면서 서쪽 돌담길이 뚫렸는데, 이를 영성문고개라
불렀다. 지금은 그 이름을 아는 이가 손에 꼽을 정도로 잊혀진 상태라 그저 덕수궁 돌담길의
일부로 묻혀져 있다.

▲  호젓하게 펼쳐진 덕수궁 서쪽 돌담길

▲  덕수궁 서쪽 돌담길 (영성문고개)

동쪽의 덕수궁 돌담과 서쪽의 미국대사관저의 높다란 담장 사이로 놓여진 서쪽 돌담길, 좌우
담장 안에는 나무들이 서로 경쟁에 들어간 듯, 앞다투어 담장 밖으로 울창한 가지를 내뻗어
조촐하게 숲길을 이룬다. 도심 한복판임에도 인적도 그리 많지 않아 차분하며 고즈넉한 궁궐
돌담길을 마음껏 누릴 수 있으니 정말 100점짜리 산책로이다.

고갯길이 뚫린 1920년대 이후 이곳은 젊은 남녀들이 남의 이목을 피해 데이트를 즐기던 곳으
로 '사랑의 언덕길'로 통했다. 허나 1950년대 이후 그 명칭도 슬쩍 사라졌으나 여전히 데이트
코스로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항간에서는 돌담길을 거닐면 헤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1973년
가수 진송남이 부른 '덕수궁 돌담길'이란 노래<한산도 작곡, 정두수 작사>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전하는 바로는 작사자인 정두수가 실연을 당하고 비오는 날, 홀로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고 집에 돌아와 자기 심정을 노래로 지었다고 한다.
또한 가정법원이 돌담길 남쪽인 현재 서울시청 서소문별관에 있어서 부부가 이혼하러 오는 길
이라 하여 연인들이 발길을 꺼리기도 했다. 그런 것들이 세상풍파를 타면서 헤어지는 길로 오
해를 받게된 것이다. 그러니 돌담길이 섭하지 않도록 그런 속설은 신뢰하지 말자~~!

이렇게 호젓하고 아름다운 돌담길이건만 길 곳곳에 전/의경들이 배치되어 지나가는 사람과 차
량을 지켜보고 있으며, 미국대사관저의 건방지게 높은 담장은 이곳의 옥의 티로 이 땅의 우울
한 현실이 여실히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때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위엄을 날렸던 덕수궁(경운궁)의 일부였건만 지금은 왕년의 1/3 이
하로 줄어들었으며, 반면 미국의 관할인 미국대사관저는 덕수궁 담장보다 더 높아 망국의 황
궁을 짓누른다. 게다가 그것들이 들어앉은 곳도 덕수궁의 잃어버린 옛 땅이다. 반드시 되찾아
복원시켜야 될 땅인 것이다. 하지만 그 옥의 티는 내가 숨쉬는 동안에는 아마도 지우기 힘들
것 같다.
돌담길을 사진에 담을 때는 미국대사관저 방향은 너무 대놓고 찍지 말기 바란다. (찍으면 제
지를 당할 수 있음) 단 덕수궁 쪽이나 돌담길의 한복판은 간섭을 받지 않는다.


▲  덕수궁의 서쪽 문인 평성문(平成門)

평성문은 덕수궁 중심지(중화전, 함녕전)에서 궁궐 외곽인 중명전 구역과 선원전(璿源殿) 구
역을 이어주던 문이다. 허나 그 구역이 대부분 아작나면서<중명전만 살아남았음> 이제는 덕수
궁의 서쪽 문이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뒷문 신세가 되었다. 문은 활짝 열려있지만 관
람객은 출입할 수 없다.


▲  늦가을이 노릇노릇 익어가는 영성문고개
왼쪽이 옛 덕수궁 땅을 점유하고 있는 미국대사관저이고, 오른쪽이 망국의 황궁인
덕수궁(경운궁)이다. 이곳은 서양 스타일로 지어진 2층짜리 돈덕전(惇德殿)
구역으로 지금은 고갯길로 변해버렸다.

▲  영성문고개 돌담길 (정동 방향)

▲  옛 선원전터를 홀로 지키고 선 200년 묵은 회화나무

영성문고개를 지나면 돌담이 끝나기가 무섭게 구세군 중앙회관이 나온다. 그곳을 지나면 서쪽
담장 너머로 아주 너른 공터가 박혀 있는데, 공터 한복판에 그 허전함을 달래려는 듯, 200년
정도 묵은 회화나무가 홀로 자리해 있다. 이곳은 덕수궁의 옛 땅이자 옛 경기여고 자리로 미
국대사관이 점유하고 있다가 지금은 서울시가 소유하고 있다.
미국 양이들은 2004년 이곳에 대사관 직원들의 숙소를 짓겠다며 한바탕 난리를 부린 적이 있
었다. 이때 많은 시민들이 덕수궁(경운궁) 훼손을 막고자 반대 시위를 벌여 숙소 건축은 보기
좋게 좌절시켰으며, 서울시가 이곳을 살펴본 결과 1897년에 지어진 선원전, 흥복전(興福殿)터
임이 밝혀졌다.
선원전은 고종이 역대 제왕의 어진(御眞)을 봉안하고자 지은 것으로 왜정 때 파괴되었으며 그
어진들은 창덕궁 신선원전(新璿源殿)으로 강제로 옮겨졌다. 그리고 선원전 자리에는 경기여고
가 들어섰다. <현재 경기여고는 개포동에 가 있음>

서울시는 이곳을 해방시켜 덕수궁 복원에 쓸 계획인데, 발굴조사를 벌이는 등 진척이 조금 있
으나 계속 공터로 놀려두고 있다. 서울 도심에 이런 너른 공터가 놀고 있다니 그저 안따까울
따름인데, 예전에는 전/의경들이 공터로 넘어가는 문을 지키고 섰으나 요즘은 경계가 많이 풀
렸다.

이곳을 끝으로 늦가을에 깜짝 방문한 정동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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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깃든 그림 같은 호수, 석촌호수 봄꽃 나들이 (송파나루공원, 삼전도비)

석촌호수 봄꽃 나들이



' 도심 속의 그림 같은 호수, 석촌호수 봄꽃 나들이 '

석촌호수 동호

▲  석촌호수 동호

석촌호수 산책로 삼전도비

▲  석촌호수 산책로

▲  삼전도비

 



 

겨울 제국(帝國)이 드디어 저물고 봄꽃이 나래를 펼치는 4월이 되면(서울 기준) 천하 곳
곳에서 봄꽃을 내건 축제가 산발적으로 열려 사람들의 마음을 한층 들뜨게 한다.
굳이 축제가 아니더라도 '어느 봄꽃은 이곳이 유명하더라' <ex. 개나리는 응봉동의 응봉
산(鷹峯山)과 인왕산이 유명하더라. 수양벚꽃은 국립현충원이 유명하더라!> 식으로 특정
꽃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봄꽃 명소도 적지 않다. 그중에는 잠실 남쪽에 있는 석촌호수가
있으니 그곳은 벚꽃 명소로 오랫동안 명성을 누리고 있다.

석촌호수는 굳이 벚꽃이 아니더라도 서울에 유일한 호수로 장안에 널리 알려진 존재이다.
본인도 그곳을 많이 찾아간 터라 너무 익숙해진 호수가 되어버렸는데, 정작 봄에는 가본
기억이 없어 흐드러지게 핀 벚꽃의 마지막이라도 붙잡고자 그리고 그곳에 깃든 삼전도비
의 안녕도 확인할 겸 서둘러 그곳을 찾았다.
계절의 으뜸으로 칭송받는 늦가을(10~11월)과 봄꽃철(4~5월)은 우리네 인생보다 더 짧게
느껴져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너무나 아깝다. 대자연 형님이 천하에 펼쳐낸 그림 중 이때
가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다. 하여 이들을 제대로 즐기지 않는다면 대자연에 대한 결례가
될 것이요. 한번 지나간 봄과 가을은 다시 1년을 기다려야 되기 때문에 이때만큼은 부지
런히 움직여 나의 침침한 두 망막과 사진에 듬뿍 담아놓아야 후회가 없다.



 

♠  석촌호수 입문 (송파나루공원)

▲  석촌호수 서호 (서호 동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잠실 남쪽에 자리한 석촌호수는 서울에 유일한 순 100% 호수공원이자 반(半) 자연산 호수이다.
서울에 이름난 명소의 하나이자 올림픽공원과 더불어 송파구(松坡區)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서
울 사람이라면 꼭 1번 이상은 가봤을 것이라 여겨진다.

지금은 이렇게 커다란 호수로 누워 있지만 그는 원래 한강 물줄기의 일부였다. 광나루~송파나
루(잠실대교 주변) 구간은 한강(漢江, 아리수)이 크게 구부러지는 구간으로 상류에서 떠내려
온 토사들이 잠실(蠶室) 일대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것이 점차 하나의 섬으로 불어나게 되
었고, 그 섬을 중심으로 한강 물줄기에도 변동이 생겼는데, 큰물(홍수)이 지면 사방에 물이
들고, 오직 이곳만 물 위에 떠있듯 보인다하여 섬 이름을 '부리도(浮里島)'라 하였다.
섬이 빚어지면서 물줄기도 강제 변화를 겪게 되니 부리도 남쪽 샛강은 송파강(松坡江), 북쪽
의 샛강을 신천강(新川江)이라 하였다. 부리도와 이들 샛강은 1969년 이후 한강 본류의 공유
수면(公有水面) 매립 공사를 벌이면서 부리도 북쪽 물길을 넓히고 대신 남쪽 샛강을 매립하여
부리도를 육지로 만들었는데, 샛강을 완전 밀어버리지 않고 그 일부를 남겨두니 그것이 지금
의 석촌호수이다. 그리고 1971년 한강 물로 호수를 채우면서 흐르는 물줄기에서 고여있는 담
수호로 성격이 완전히 전환되었다. 하여 반 자연산 호수가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허허벌판에 그저 그런 호수였으나 잠실과 송파 지역에 개발의 칼질이 그어지던 1981
년 호수 주변에 녹지와 산책로를 조성해 이때부터 도시 속의 호수가 되었다. 그리고 성남시와
잠실을 이어주는 송파대로가 호수 가운데를 지나가면서 호수 중앙 부분이 조금 매립되어 동호
, 서호로 나눠지게 되었으나 중앙부에 서로 물줄기가 이어져 있어 서서 남남의 존재는 아니다.
1990년대 초에는 롯데가 서호에 매직아일랜드를 닦으면서 호수가 크게 오염되어 죄없는 물고
기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갔고 악취까지 심하게 나는 등, 흑역사도 적지 않았다.
다행히 2001년부터 송파구가 72억의 재정을 투입하여 호수 살리기에 나서면서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이때 호수 둘레 2.5km 중 1.88km 구간의 호안(湖岸)시설을 없애고 수생식물을 심어
생태호안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한강물 순환체계를 구축하여 생태 호수를 꾀하면서 이제는 송
파구의 소중한 꿀단지로 단단히 자리매김하였다.

허나 매직아일랜드로 호수를 완전 버려놓았던 롯데가 동호 북쪽에 엉뚱하게 제2롯데월드를 지
으면서 다시금 호수의 염통을 건드리고 있다. 호수의 담수량이 전보다 많이 줄고 있는 등, 말
썽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도심 속의 그림 같은 호수이나 한편으로는 인간의 욕심으로 개발 속
에, 도시 속에 갇혀 실험용 동물 같은 애처로운 신세가 되어 버렸다.

▲  석촌호수 서호와 매직아일랜드

석촌호수는 면적 217,850㎡, 담수량 636,000톤, 평균 수심 4~5m, 둘레는 2.5km이다. 물은 매
일 한강에서 가져오고 있으며, 호수 주위로 나무에 둘러싸인 산책로가 잘 닦여져 걷는 길이
그리 지루하지가 않다. 특히 벚꽃나무가 많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4월에는 벚꽃의 향연이 펼
쳐지며, 그들을 내세운 '석촌호수 벚꽃축제'가 상춘객을 유혹한다. 이곳에서 열리는 벚꽃 축
제는 여의도(汝矣島), 국립현충원, 어린이대공원과 더불어 서울에 이름난 벚꽃축제로 꼽힌다.
또한 여름에는 호수에서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과 숲이 베푸는 숲내음이 어우러져 여름 제국의
염통을 쫄깃하게 해주며, 비록 물에는 들어갈 수 없지만 시원한 호수 바람이 늘 깃들여져 있
어 피서의 성지로 추앙을 받는다. 그리고 가을에는 알록달록 익어간 단풍이 호수 주변을 붉게
적시며 늦가을의 향연을 펼친다. (눈 쌓인 겨울 설경도 아름다움)

호수는 송파대로를 사이에 두고 편의상 동호와 서호로 나눠져 있는데, 서호에는 롯데월드 소
속의 매직아일랜드가 인공섬으로 띄워져 있으며, 호수 주변에는 송파산대놀이(국가 중요무형
문화재 49호
)와 여러 전통놀이가 펼쳐지는 서울놀이마당, 장미원, 롯데월드, 2010년에 옮겨온
삼전도비가 있다. 그리고 동호 주변에는 송파나루터 표석, 송호정, 까페거리, 제2롯데월드 등
이 있다.

서호 남쪽에 서울 근교의 주요 나루터였던 송파나루가 있어 그 이름을 따라 호수 일대를 '송
파나루공원'이라 부르며, '석촌호수공원'이라 불리기도 한다. 서울만의 지역 명소에서 벗어나
전국적인 명소로, 이제는 국제적인 명소로 성장하여 인근 올림픽공원과 롯데월드와 연계하여
찾아오는 외국인 관광객도 제법 많다.

* 석촌호수 소재지 - ① 서호 :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47일대
                    ② 동호 : 서울특별시 송파구 신천동 32일대

▲  석촌호수 서호와 롯데월드(호텔)

▲  서호 서쪽에서 바라본 서호


▲  벚꽃이 터널을 이루는 서호(西湖) 동북쪽 산책로

송파구의 꿀단지 석촌호수(송파나루공원)로 들어가는 길은 꽤 많다. 호수 주변이 모두 열려있
기 때문이다. 나는 송파대로에서 삼전도비 옆을 거쳐 서호 동쪽으로 내려왔는데, 평일 한복판
임에도 산책이나 운동을 나온 지역 주민들, 막바지 벚꽃을 즐기러 나온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
로 가득해 이곳의 높은 인기를 실감케 한다. 도심 속에 그림 같은 호수가 누워져 있으니 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은 셈이다. 그러고보면 사람이든 건물이든 산이든 호수든 자리가 매우
중요하다.
나는 서호 동쪽 산책로에서 바로 동호(東湖)로 접어들어 그곳을 1바퀴 돌고 다시 서호로 넘어
가기로 했다.


▲  송파대로 남쪽 굴다리

석촌호수 가운데 부분에는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인 송파대로가 넓직한 폭으로 흘러간다. 바로
그 도로 때문에 호수 중앙 북부와 남부가 희생되었고, 형식적으로나마 호수가 동/서로 구분되
었다. 다행히 중앙에는 호수가 서로 만나도록 다리(잠실호수교)를 놓아 그들이 영원히 하나의
호수임을 천하에 어필한다.

굴다리 물길 좌우에는 산책로가 놓여져 서호와 동호를 넘나들 수 있는데, 석촌호수와 송파구
의 과거를 담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물길과 산책로 경계에는 철책이 놓여져 호수로의
접근을 차단한다. 어차피 호수의 수심도 깊으니 괜히 넘어갈 생각은 하지 말자. 그게 사람과
호수 쌍방에게 좋다.


▲  동호 서남쪽 산책로 (오른쪽 높은 곳이 송파대로)

서호에는 매직아일랜드란 인공섬이 호수의 경관과 시야를 크게 방해하여 호수의 체감 면적을
적지 않게 잡아먹고 있다. 허나 동호에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어 시야가 확 트여있으며, 호수
의 체감 면적을 늘려주어 보는 이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이것이 진정한 호수의 느낌이다.

호수를 사이에 두고 벚꽃나무 등으로 무장된 산책길이 동화처럼 펼쳐져 있는데, 호수 주위에
는 온갖 건물과 나무들이 호수를 거울로 삼아 봄으로 설레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각자 매뭇새
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허나 벚꽃 끝물 시절에 와서 하얀 꽃잎은 많이 진 상태이고, 산책
로와 호수에는 짧은 인생 폼나게 살다간 벚꽃잎이 우수수 떨어져 인생의 마지막 물놀이를 즐
긴다.

▲  팔작지붕을 지닌 송호정(松湖亭)

▲  송호정 주변 숲길

동호 서남쪽 언덕에는 1칸짜리 정자인 송호정이 맵시를 뽐내며 호수를 굽어본다. 호수를 한참
정비하던 1981년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호수 주변에 세워진 유일한 전통식 정자이다. 아직은
나이가 어려서 고색의 기운은 여물지 못했으나 호수 바람이 앞다투어 머무는 곳으로 벚꽃비가
정자 주변에 우수수 쏟아져 봄의 정취를 한껏 돋군다.


♠  석촌호수 동호 둘러보기

▲  이름 5자만 아련히 남은 송파나루터 표석

송호정 서쪽에는 옛날 송파나루터를 알리는 표석이 자리해 있다.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그
흔적도 말끔히 사라진 송파나루터<송파진(松坡津)>는 서울 근교의 주요 나루터로 원래 서호
남쪽에 있었는데, 송파와 뚝섬을 이어주던 나루터로 삼남지방(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보통 여기서 배를 타고 뚝섬(자양동)으로 넘어가 서울로 들어갔다.
나루터 주변에는 자연히 마을과 시장이 형성되어 종일 북새통을 이루었고, 송파산대놀이 등의
전통 공연도 생겨나 구경거리도 넉넉했다. 또한 바다에서 한강으로 들어온 바닷배는 여기까지
들어와 닻을 내리고 장사를 했다.

송파나루는 1960년대까지 제 밥값을 하였으나 개발의 칼질로 부리도가 육지화되고 주변 샛강
이 죄다 아작이 나면서 나루터도 산소호흡기에 의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가 1972년 잠
실대교가 놓이면서 완전이 사라지게 된다. 송파나루터 마을 역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회색
빛 도시로 변하였고, 나루터가 있던 서호 주변도 숲이 무성한 호수 산책로로 모두 색이 바뀌
면서 나루터의 흔적은 다 말라버렸다.
허나 나루터 이름을 공원의 간판으로 삼아 지도와 세상에 남겼으니 그나마 다행이며, 1989년
12월 30일 나루터를 알리는 표석을 세워 세월의 저편으로 강제로 사라진 나루터의 뒤를 늦게
나마 붙잡고 있다.

현재 서호에 있는 매직아일랜드에서만 조그만 오리배를 띄우고 있으며 그 외에는 정식적인 배
는 없다. (매직아일랜드 호반보트에서만 탈 수 있음)


▲  석촌호수 동호 (동호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육지와 도시에 꽁꽁 갇힌 호수라 수면이 늘 잔잔하다. 아무리 세월과 날씨, 사람, 개발의 칼
질이 호수를 희롱해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바다를 향해 열심히 흐르던 강물이 고인 물
로 변하면서 성질도 많이 죽은 모양이다.


▲  동호 서남쪽에서 바라본 동호와 제2롯데월드 주변

▲  서쪽에서 바라본 동호와 남쪽 산책로

▲  호수(동호 남쪽) 산책로의 평화로운 모습
이런 길은 집으로 몰래 가져와 혼자서만 누리고 싶다. 물론 호수까지 말이다.


▲  평일 봄 오후의 여유로움이 묻어난 동호 남쪽 산책로

▲  동남쪽에서 바라본 동호의 위엄
지금도 이렇게 넓은데, 호수를 2개로 나눠먹은 송파대로 개통 이전에는 오죽했을까.

▲  동북쪽에서 바라본 동호
호수 산책로를 한 굽이, 100보 정도 지날 때마다 호수는 조금씩 풍경을 달리한다.

▲  온갖 벚꽃이 아른거리는 동호 동남쪽 산책로
무한 벚꽃에 잠긴 호수의 풍경은 단연 천하 일품이다. 그 벚꽃이 한참일 때
오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다. 조금만 빨리 올걸;;;

▲  동호 동북쪽에 닦여진 나무데크 쉼터

▲  호수로 물을 흘려보내는 인공폭포


▲  동호 동북쪽 나무데크 쉼터에서 바라본 동호와 호수를 바라보는
높은 건물들 - 현재 석촌호수의 현실이다.


▲  동호 동북쪽에서 바라본 동호와 남쪽 산책로

▲  동호 북쪽 산책로에서 바라본 동호와 오리 가족(사진 왼쪽 아래)

▲  호수를 향해 팔을 내민 벚꽃 (석촌호수 동호)
벚꽃들이 목이 많이 말랐는지 호수를 향해 그 야윈 팔을 내밀었다.


▲  호수 북쪽 나무데크 쉼터에서 바라본 동호 동부

▲  호수 북쪽 나무데크 쉼터에서 바라본 동호 서부와
잠실호수교(송파대로)

▲  잠시 나라를 생각하게 만드는 벚꽃 무늬의 태극기 모형 (동호 까페거리)
태극기도 봄꽃에 신이 난 듯 웃고 있지만 그를 국기로 삼은 이 나라의
현실은 반대로 우울 투성이다.

▲  동호 서북쪽에서 바라본 동호 ①
어느새 저 너른 동호를 모두 돌았다. 풍경과 길이 너무 좋으니 체감 거리도
그만큼 짧게 다가온다.

▲  동호 서북쪽에서 바라본 동호 ②

▲  송파대로 북쪽 굴다리
이렇게 동호를 돌고 석촌호수의 나머지를 돌고자 서호로 넘어갔다.



 

♠  석촌호수 서호

▲  다시 돌아온 서호 산책로

석촌호수 산책로는 호수를 따라 이어진 순환형 길이라 도중에 포기하지 않는다면 처음 시작했
던 현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호수와 봄꽃, 주변 풍경에 취해 소신껏 두 발을 움직이다보
니 어느덧 산책을 시작했던 현장(삼전도비 밑)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앞서 남겨두었던 서호
나머지 부분을 돌고자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  서호 동북쪽 산책로

서호는 확 트인 동호와 달리 호수 한복판에 롯데월드의 일원인 매직아일랜드란 인공섬이 들어
앉아 있다. 그래서 시야와 주변 풍경을 은근히 잡아먹으며 서로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 마치 경복궁(景福宮) 안에 현대식 높은 빌딩이 들어앉은 것처럼 말이다.
매직아일랜드가 들어서면서 호수가 크게 오염되어 물고기들이 대거 죽어나간 흑역사의 현장이
기도 하며, 다행히 호수는 진정이 되어 물고기와 오리들이 살고는 있지만 롯데월드가 천하에
이름난 테마파크라 놀이기구의 굉음과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로 하루도 조용할 날
이 없다. 반면 동호로 넘어가면 그 반대로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라 같은 호수이지만 서로가
너무나 딴 판이다.


▲  서호 서쪽 부분 (매직아일랜드 호반보트)

▲  서쪽에서 바라본 서호와 매직아일랜드 ①
석촌호수와 매직아일랜드가 서로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불편한 동거를 한다.
그들의 불편한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은 오리배를 타고
유유자적 뱃놀이를 즐긴다.

▲  서쪽에서 바라본 서호와 매직아일랜드 ②
호수는 거울처럼 잔잔한데, 인간이 억지로 띄워놓은 인공섬에서는 온갖 기계 소리와
그것을 즐기는 인간들의 비명 소리가 요란하게 귀를 때린다.

▲  매직아일랜드의 온갖 소음에도 늘 평화로운 서호 서쪽 산책로

▲  벚꽃이 무성한 서호 남쪽 호숫가

▲  서호 남쪽 산책로 (동호 방향)

▲  석촌호수 장미원

서호 서쪽이자 서울놀이마당 남쪽에는 장미꽃의 보금자리인 장미원이 둥지를 틀고 있다. 장미
는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5~6월)에 번성을 누리는 꽃으로 개나리, 진달래, 벚꽃 등 봄꽃 1
세대가 지면 그 뒤를 잇고 그가 지면 친 여름파인 연꽃이 9월까지 향연을 펼친다.
아직 봄꽃 1세대가 완전히 저물지 않았고 4월의 한복판이라 장미는 이제 푸른 잎을 보이고 있
을 뿐인데, 이곳에는 32종의 장미가 뿌리를 내리고 있어 앞으로 1달 정도 흐르면 두터운 꽃잎
을 천하에 펼쳐보일 것이다.
서울에는 이곳 외에도 장미의 너른 보금자리를 여럿 닦았는데, 올림픽공원과 중랑천(중랑구
중화동)이 대표적이며 보통 5월 중/하순에 장미축제가 열린다. (석촌호수는 벚꽃축제만 있음)


▲  푸른 신록 속에서 한참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석촌호수 장미원

▲  장미원 동쪽 산책로 (서호 산책로와 장미원 사잇길)



 

♠  그림 같은 호수에 깃들여진 큰 옥의 티, 병자호란(丙子胡亂) 삼전도
굴욕의 상징물인 삼전도비(三田渡碑) -
사적 101호

▲  보호각까지 갖춘 삼전도비

송파대로가 지나가는 석촌호수 서호 동쪽 언덕에 삼전도비라 불리는 큰 비석이 위엄을 부리며
자리해 있다. 그는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년) 못지 않은 병자호란(丙子胡亂) 삼전도 굴욕을
머금은 우울한 존재로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그리 유쾌하지 못한 문화유산이다.
지금은 사방이 훤히 트인 곳에 자리해 있고 무려 보호각까지 두르고 있어 그에 대한 해코지가
많이 줄었지만 석촌동(石村洞) 어린이공원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시절에는 비석에 테러(?)나
해코지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비석을 손상하면 처벌한다는 경고문까지 붙어있었다. 특히
2007년에는 빨간색 페인트로 비석 뒷쪽에 크게 '철거'라고 쓴 사람이 붙잡혔으며, 2008년에는
비석에 불을 지른 사람도 있었다.

나도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저런 것을 뭣하러 국가 사적까지 지정해가며 보호를 하는가 의문
을 품으며 비석을 갈아 없애기를 바랬다. 거기다가 비석 옆에 삼전도 굴욕을 담은 부조비까지
있었으니 그런 마음을 더욱 부풀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발버둥을 친다고 삼전
도 굴욕이란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지나간 역사가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될 우리의 역사이며, 비록 비석의 성격은 심히 불쾌
하나 엄연히 조선이 만든 비석이다.
특히 만주 문자와 몽골 문자, 한문 등 3개 문자를 모두 담은 특이한 비석으로 당시 글자를 연
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으며, 비석의 조각이 수려하고 정교하여 조선 후기 대표적인 금
석문(金石文)으로 꼽히고 있다.

비석인데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남원(南原)의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와 더불어 매우 특이
한 케이스이다. 비석의 보존상태와 다듬은 솜씨가 뛰어나 국가 보물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지
만 비석의 성격 때문에 국가 보물로 삼기에는 속이 심히 뒤틀리고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아까
워서 어정쩡하게 사적으로 삼은 모양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병자호란과 삼전도비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보도록 하겠다.


▲  조선 사람들의 오랜 스트레스이자 발암물질이었던 삼전도비

① 만주족(여진족)의 마지막 몸부림과 병자호란 이전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滿洲族)은 우리의 친척 민족으로 예로부터 말갈족(靺鞨族), 여진족(女
眞族) 등이라 불렸다. 말갈이란 이름은 고구려(高句麗) 때 지방 사람들을 일컫던 말로 오늘날
흔히 부르는 촌사람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옛 조선(고조선)과 고구려, 발해(渤海, 원래 이름은 고려)의 일원으로 살았으며, 신라 왕족이
고려에 반발하여 무리를 이끌고 옛 발해 땅으로 넘어가 정착하여 여진족 등 북쪽 세력과 어우
러졌고, 점차 그들을 통합해 힘을 기르면서 1113년 아골타<阿骨打, 신라 왕족의 후손 또는 고
려 사람 금준(今俊)의 후손>가 금(金)을 세웠다. 금이란 이름은 그들의 성인 김(金)에서 따온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금나라는 옛 발해인과 옛 신라인, 고려인, 여진족 등이 어우러진 나라로 150년
동안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위엄을 떨쳤으나 13세기 중반 몽골의 원(元)나라에게 크게 털리
면서 함경도와 요동(遼東), 만주, 연해주 일대에 흩어져 살았다.
이후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서 그들에게 조공을 바치며 세력을 유지하다가 임진왜란 이후 조선
과 명이 완전 지쳐있는 틈을 이용해 세력을 불렸고, 건주좌위(建州佐衛)의 수장 누르하치가
여진족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1616년 스스로 한(칸, 汗)을 칭하며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고 흥경(興京)에 도읍을 했다. 그가 바로 청태조(淸太祖)이다.

누르하치의 세력이 커지자 명나라는 조선에 원군을 요구했다. 당시 조선 군주였던 광해군(光
海君)은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이를 슬기롭게 해결하고자 1619년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 군사
를 주어 적당히 싸우는 척 하다가 항복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이에 강홍립은 요동으로 넘어가
대충 싸우다가 항복했다.
또한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과의 양면외교정책을 구사하며 국방을 기르고 있었다. 후금을 나
라로 인정하며 호의를 베푸니 딱히 충돌은 없었다. 허나 명나라에 대한 지극한 사대주의에 쩔
어있던 신하들은 그의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었고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준 이른바 재조지
은(再造之恩)을 강조하며 후금을 멀리하라고 귀가 따갑도록 주청했다.
그래도 말이 안통하자 서인(西人) 패거리는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 인조(仁祖)>을 앞세워
광해군의 폭정을 바로잡는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이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이
다.

서울을 점령한 서인 패거리는 광해군을 붙잡아 인목대비<仁穆大妃, 선조의 어린 왕후이자 광
해군의 의붓어머니>가 갇힌 서궁(西宮, 덕수궁)으로 끌고가 대비 앞에 무릎을 끓게 했다. 대
비는 매우 흥분된 표정으로 광해군의 죄 30여 개를 나열하며 꾸짖었는데, 그중에는 명나라에
대한 불경죄도 포함되어 있었다.

반란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서인 패거리의 건의에 따라 광해군의 실용적인 중립외교를 버리
고 명나라를 섬기는 정책으로 외교 방향을 바꿨다. 후금을 치러온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
)에게 요동에서 가까운 철산(鐵山)의 가도(椵島)를 주둔지로 제공하는 등 쓸데없는 지원을 아
끼지 않았던 것이다. 허나 이는 후금을 제대로 자극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당시 후금은 오로지 중원대륙 도모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조선이 배후에서 저리 설쳐대니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인조반정 때 논공행상(論功行賞)에 크게 불만을 품
고 1624년에 반란을 일으키다 털린 이괄(李适)의 부하들이 후금으로 넘어가 광해군이 부당하
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며 조선의 군사력이 약하니 속히 치라고 청나라 태종(太宗)을 들쑤셨
다.

드디어 1627년 1월 청나라 태종은 아민(阿敏)에게 군사 3만을 주어 항복한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 조선을 공격했다. 그들은 '폐위된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 는 명분을 내걸고 압록강을
건넌 것이다. 허나 백마산성(白馬山城)에서 임경업(林慶業)의 저항에 발목이 잡히자 그냥 성
을 버리고 남하, 황해도 황주까지 진출하니 인조는 장만(張晩)을 도원수로 삼아 막게 했으나
패배를 거듭하여 개성까지 밀려났다.
이에 크게 쫄은 인조는 강화도로 줄행랑을 쳤으며, 2월 9일 후금은 유해(劉海)를 강화도로 보
내 명나라의 연호를 폐할 것과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하며 항복을 제의했다. 후금의
파상적인 공격에 염통이 쪼그라든 인조는 바로 교섭에 응했고, 양국이 형제국(후금이 형, 조
선이 아우)의 관계를 맺는 정묘조약(丁卯條約)을 맺고는 바로 군사를 돌렸다. 조선은 왕자 대
신 종실인 원창군(原昌君)을 인질로 보냈다.

② 병자호란 발발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명나라 연경(燕京)까지 쳐들어가 크게 세력을 넓혔다. 이윽고 조선에게
군신(君臣)관계로 고칠 것과 황금과 백금 1만 냥, 말 3천 필, 군사 3만을 요구했으나 인조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자 1636년 2월 용골대(龍骨大)와 마부태(馬夫太)를 보내 다시 군신
관계를 요구하니 후금의 무례에 뚜껑이 뒤집힌 인조는 사신 접견을 거절하고 전국에 비밀리에
선전유문(宣戰諭文)을 내려 후금을 공격할 채비를 한다.

조선의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음을 깨달은 용골대는 겁에 질러 서둘러 도망을 쳤는데, 운이 좋
게도 인조가 평안도에 보낸 선전유문을 입수하여 태종에게 보냈다. 인조의 격문에 뚜껑이 핵
폭탄만큼이나 폭발한 태종은 더욱 강도를 높여 조선을 위협했으며, 1636년 4월 황제를 칭하고
나라 이름을 '청(淸)'이라 하였다. 허나 조선은 여전히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으며 오로지 무
시로 일관했다.

청태종은 조선을 제대로 응징하고자 1636년 12월 2일, 청군 7만과 몽골과 요동에서 징발한 몽
골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12만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의주부윤(義州富潤) 임경업이
백마산성에서 그들을 막아섰으나 정묘호란 때 그에게 크게 혼쭐이 난 적이 있어 그냥 비켜가
버렸다.
빈수레가 요란하듯, 청을 공격하자며 선전유문까지 뿌린 조선 조정은 정작 전쟁준비와 첩보망
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개판이었다. 그들은 12월 13일이 되서야 임경업과 김자점(金自點)이
보낸 장계를 보고 청군의 침입을 알았던 것이다.

12월 14일 청군이 개성을 넘자 엉덩이에 불이 난 조정은 서둘러 강화도로 줄행랑을 치려고 했
다. 허나 그날 밤 청군 선봉이 영서역(迎曙驛, 서울 불광동)에 이르고, 선봉장 마부태(馬夫太)
는 이미 인왕산 서쪽 홍제원(洪濟院)에 도착해 도성(都城)을 노리고 있었다. 게다가 한강까지
차단시켜 강화도로 가는 길을 미리 막아버렸다.
이에 울상이 된 인조와 신하들은 피난길을 멈추고 다시 환궁하여 속절없이 대책을 논의하다가
평안도 철산부사(鐵山府使)를 지냈던 지여해(地如海)가 자신에게 정병 500명을 주면 홍제원을
공격해 청의 선봉부대를 때려잡겠다고 했다.
허나 나약한 신하들의 반대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신 최명길(崔鳴吉)이 술과 고기를 싸가지
고 홍제원 청군 진영을 찾아가 시간을 좀 벌기로 했다. 최명길이 청군 선봉장에게 왜 쳐들어
왔냐고 항의하며 그들의 발을 묶는 동안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도망을 쳤다.


▲  귀부만 남은 비석
귀부 거북의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왜 자신이 그런 굴욕적인 비석이
되어야 했을까? 번민에 잠긴 것은 아닐까? 그의 표정은 오늘날
강대국 틈바구니에 치여 사는 우리의 자화상 같다.


③ 도망치는 인조와 남한산성(南漢山城) 항쟁
12월 14일 인조는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줄행랑을 쳤다. 세자의 말고삐를
잡던 관리가 도망을 치자 세자가 손수 채찍을 잡았을 정도이니 그 꼬라지가 참 말이 아니다.
광희문(光熙門)을 지나자 청군의 침입에 겁을 먹은 서울 백성들의 피난행렬과 뒤범벅이 되었
는데, 인파에 휩쓸리고 엎어지면서 그 곡성은 하늘을 진동했다고 전한다.

저녁 무렵 얼어붙은 송파나루를 건넜는데, 이때 인조를 수행한 사람은 겨우 5~6명, 왕의 체통
은 산산히 구겨졌다. 백성들이 살려달라고 배에 마구 매달리는 것을 매정하게 칼로 내리찍어
백성 여러 명이 죽었다. 그날따라 날씨가 얼마나 춥던지 인조의 발에 동상이 걸려 오금동 백
토고개에 이르렀을 때는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인조는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아이고 내 오금이야'
주접을 떨었는데, 그런 연유로 오금동(梧琴洞)이란 지명이 생겼다. 간
신히 털방석을 하나 마련하여 수행원이 방석 모서리를 들고 인조를 호종했다고 하니 왕을 잘
못 만난 신하들의 노고에 눈물이 날 정도이다.

12월 15일 자정에 이르자 간신히 남한산성 남문에 이르렀다. 성에 들어오자 훈련대장 신경진(
申景禛)에게 성을 지킬 것을 명하고, 8도에 격문(檄文)을 띄워 군사를 모으는 한편, 명나라에
서둘러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구했다. 그리고 영의정 김류(金瑬)의 건의로 야음을 틈타 다시
강화도로 도망치려고 했으나 산길에 얼음이 얼어 왕이 탄 말이 미끄러져 자빠졌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걸어서 갔으나, 여러 번 얼음길에 꽈당하여 체면이 말이 아니므로 다시 산성으로 돌
아왔다.
12월 16일이 되자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 밑까지 들이닥치고, 1637년 1월 1일 청태종의 본
진이 송파에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20만 대군을 집결시키면서 성은 완전히 고
립되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가자 경기도 여러 고을의 수령들은 서둘러 군사를 꾸리고 산성으로 들
어갔다. 이렇게 군사가 모아지면서 성을 지키는 군사는 13,000명으로 늘어났다. 허나 성에서
보유하고 있는 쌀이 14,300석, 장 220항아리로 겨우 50일 정도의 식량 밖에는 없었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탓이다.

탄천에 이른 청태종은 군사를 보내 남한산 동쪽 망월봉(望月峰)에서 성 안을 살피게 하면서
성을 공격하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두며 포위만 했다. 조선군의 식량 사정을 간파한 것이다.
성 안에 갇혀 몸이 근질근질했던 장수들은 군사를 이끌고 종종 성밖을 나와 주변을 서성이던
청군을 죽여 군의 사기를 올렸으나, 겨우 서너 명에서 수십 명을 죽이는데 불과했다. 이건 어
디까지나 청군이 조선군에게 던진 얄미운 미끼였던 것이다.

이렇게 소규모 전투로 승리에 도취해 있던 인조와 신하들은 40일이 지나자 식량부족으로 매우
곤란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못난 왕과 신하들은 그래도 우선 순위로 밥이라도 먹겠지만 군사
들과 내관, 궁녀를 비롯한 소위 아랫 것들은 그러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문을 닫아
걸고 구원군을 애타게 기다렸으나 구원군은 죄다 청군에게 격파 굴욕을 당하면서 그들의 성적
도 시원치 못했다.
① 충청도관찰사 정세규(鄭世規)의 군사는 험천(險川, 성남 분당구 남부)에서 패해 남포현감
이경(李慶)이 전사
②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허완(許完)과 경상우병사 민영(閔泳)의 군사는 광주 쌍령에서 패
배, 두 병사(兵使)가 전사
③ 전라병사(全羅兵使) 김준용(金俊龍)은 수원 광교산(光敎山)에서 청나라 장수 액부양고리(
額駙揚古利)를 죽이고 유일하게 대승을 거뒀으나 방심하여 패주
④ 그 외에 평안도관찰사 홍명구(洪命耉)는 강원도 금화(金化)에서 전사, 부원수(副元帥) 신
경원(申景瑗)은 평안도 맹산(孟山) 철옹(鐵甕)에서 생포됨, 도원수(都元帥) 김자점은 토산(兎
山)에서 패주, 강원도관찰사 조정호(趙廷虎)와 함경도관찰사 민성휘(閔聖徽)의 군사도 패배

게다가 명나라 또한 이미 망조가 들어 원군을 보낼 처지가 아니었다. 겨우 등주총병(登州總兵
) 진홍범(陳弘範)을 시켜 수군이라도 보내려고 했으나 바람과 파도로 보내지도 못했다. 그 외
에 전국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나 정홍명(鄭弘溟) 등이 많은 의병을 이끌고 올라갔으나 너무
늦어서 공주(公州)에서 해산했다.


▲  삼전도 굴욕 장면, 수항대에 높이 앉은 청태종의 위엄이 돋보인다.
(석촌동 삼전도비 어린이공원에 있었음)

④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삼전도 굴욕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면서 사방에서 달려오는 구원군을 격파하는 한편, 주변을 노략질하
면서 아주 느긋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남한산성을 지키는 조선군은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성을 넘어 항복하는 병사가 속출했고, 유난히도 징한 추위로 얼어죽는 병사도 적지 않았
다. 
상황이 이토록 최악에 치닫자 좌의정 홍서봉(洪瑞鳳)과 호조판서 김신국(金藎國)을 청태종에
게 보내 최명길이 작성한 국서를 보내고 화해를 청했으나 청태종은 조선 왕이 직접 자기 군문
에 항복하고 전쟁을 주장한 사람 2~3명을 결박지어 보내라고 답을 보냈다.

그 답에 뚜껑이 뒤집힌 인조는 다시 대책을 강구했으나 항복하자는 주화파(主和派)와 싸우자
는 주전파(主戰派)가 서로 소리를 지르며 논쟁을 벌이니 뾰족한 대책을 없었다. 그러다가 1월
말 강화도가 떨어졌다는 소식이 날라오자 이내 기가 꺾여 항전 45일 만에 성문을 열고 백기를
들고 만다.
항복이 결정되자 김상헌(金尙憲)과 정온(鄭蘊)은 자살하겠다고 난리를 쳤으나 실패했고, 최명
길이 청태종을 찾아가 인조의 항복 문서를 들이밀었다. 허나 청태종은 그동안 조선에게 당한
개무시를 제대로 설욕하고자 다음의 강화조약을 제시했다.

① 청나라에게 군신의 예를 지킬 것
②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명과의 관계를 끊으며, 명에서 받은 고명(誥命)과 책인(冊印)을
   내놓을 것
③ 조선 왕의 장자와 제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심양(瀋陽. 청나라 수도)에 인질로 보낼
   것
④ 성절(聖節, 황제의 생일)과 정조(正朝), 동지(冬至), 천추(千秋, 황후/황태자의 생일), 경
   조(慶弔) 등의 사절(使節)은 명나라 예에 따를 것
⑤ 명나라를 칠 때 군사를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⑥ 청나라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⑦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⑧ 성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⑨ 기묘년(己卯年, 1639)부터 일정하게 세폐(歲幣)를 보낼 것


하나 같이 어처구니가 없는 요구들이지만 인조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청의 요구를 받
아들이고 2일 뒤인 1월 30일, 세자와 신하, 수행원 500명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을 나왔다. 청
태종은 삼전도에 수항단(受降壇)을 쌓고 그 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대국의 위엄을 부리며
인조를 기다렸다.
그곳으로 안내된 인조는 태종의 요구에 따라 무릎을 꿇고 굴욕적인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3
번 절을 하고 절을 할 때마다 3번씩 총 9번 이마를 땅바닥에 박는 것)의 항례(降禮)를 치뤄야
했다. 인조의 머리박기 굴욕에 세자와 신하들은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통곡을 했고, 청나라
장수와 군사들은 통쾌해 했다.

그렇게 삼전도 굴욕을 치른 인조는 서울로 환도했으며, 청나라는 맹약(盟約)에 따라 소현세자
와 빈궁(嬪宮),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인질로 삼고, 척화파 인물인 김상헌을 비롯하여 홍익한
(洪翼漢), 윤집(尹集) 등을 데리고 2월 15일 철군했다. 또한 조선 사람을 무수히 포로로 잡아
갔는데, 그 수가 최대 50만이나 된다는 설이 있다. 특히 사대부와 왕실의 여인을 무수히 잡아
가면서 풀어주는 대가로 상당한 돈을 요구했다.
그들이 돈을 치루고 고생 끝에 귀국을 해도 정작 양반사대부들은 쓸데없는 유교 이념을 내세
워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집으로 데려가지 않고 오히려 손가락질하여 심각한 사회문
제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인조는 무악재 북쪽 홍제천(弘濟川)에서 목욕을 하면 잃었던 정절을 되찾은 것과 같다
며 더 이상 문제 삼지 말라고 왕명을 내리기도 했다. 당시 청에 끌려가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
녀(還鄕女)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바람 피운 여자를 쌍스럽게 표현한 '화냥년'의 유래가 되었
다.

이렇게 하여 병자호란은 청의 빛나는 대승리, 조선의 쪽팔리는 대참패로 막을 내렸다. 광해군
이 이런 비극을 피하고자 중립외교로 실리를 취하며 국방을 키웠건만 명나라에 대한 꼴통 사
대주의에 환장한 지배층과 인조의 그릇된 정책이 이런 화를 자초한 것이다. 조선이 정절처럼
가지고 있던 명에 대한 사대(事大)의 긍지, 그리고 나라의 자존심이 일개 오랑캐로 무시했던
청나라에게 보기 좋게 짓밟힌 것이다.
그 충격은 조선 지배층에게는 실로 엄청났다. 인조도 그렇고 양반사대부와 유생들까지 그 휴
유증에서 오랫동안 허우적거린 것이다. 또한 백성들의 피해도 상당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청
나라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었다.

⑤ 삼전도비의 탄생
1639년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라며 글을 지어 보낼 것을 요구했다. 인조
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글을 쓸 문인을 찾았
지만 아무도 나서질 않자 간신히 장유(張維)와
와 조희일(趙希逸)을 시켜 지은 글을 보냈다.

허나 태종은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다며 계속
퇴짜를 놓았다. 그래서 인조는 특명으로 이경
석(李景奭)에게 글을 쓰게 했고, 그 글을 보고
흡족한 태종은 이를 비석에 새기라고 지시했다.

▲  삼전도비 귀부의 앞모습

1639년 12월 8일 인조는 공조(工曹)를 시켜 삼전도 수항단터에 높게 제단을 만들어 그 위에
삼전도비를 세웠는데, 글씨는 서예가로 명성이 높던 한성판윤(漢城判尹) 오준(吳竣)이 썼다.
글씨 또한 아무도 쓰지 않으려는 것을 그가 억지로 맡아 쓰게 된 것이다.
오준은 자신의 자랑거리인 글재주를 나라의 치욕스런 비문을 쓰는데 사용된 것을 매우 부끄럽
게 여겼다. 하여 비석이 완성되자 바로 벼슬을 버렸으며, 붓을 부러트려 다시는 글씨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런 비문을 써야했던 자신의 오른손까지 돌로 마구 찍어 병신을 만들었
다. 허나 조정 신하들은 비석 제작에 억지로 참여했던 이경석과 오준을 두고두고 우려먹으며
탄핵했다.

비문은 한자와 몽골 문자, 만주 문자 등 3개의 문자로 되어있는데, 비문 뒤쪽의 왼쪽은 몽골
문자 20행, 오른쪽에 만주 문자 20행이 박혀 있으며, 앞쪽에는 칠분해서체 한문으로 쓰여있다.
청나라가 조선을 공격한 이유와 조선이 항복한 경위,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회군(回軍
)한 내용, 침략을 공덕이라 미화한 개소리 같은 내용이 담겨져 있는데, 내용은 대략 이렇다.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리니, 만물을 죽이기도 하고 생육(生育)도 한다. 오직 황제(청태종)
만이 이를 본받아 위엄과 은덕을 아울러 핀다.
황제가 동방(조선)을 정벌하니 그 군사가 10만이라 위세가 뇌성벽력처럼 천지를 진동하니 군
사가 범처럼 용맹하고 맹수처럼 날쌔어라. 서번(西蕃)의 궁발(窮髮)과 북락(北落)이 창을 잡
고 앞에 달리니 그 위세가 더욱 찬란하구나. 지극히 인자한 황제는 은혜로운 말씀을 내리니,
10줄의 조서가 밝아 이미 엄숙하고 온화하기 그지없어라.
처음에는 미혹하여 알지 못해 스스로 재앙을 불렀구나. 황제의 밝은 가르침, 마치 자다가 깨
어난 듯, 우리 임금이 공손히 복종하여 신민을 이끌고 귀순하도다. 위엄이 두려워서가 아닐세.
오직 덕에 의지함이라. 황제가 착하게 여기어 은택이 흡족하고 예우가 융숭하도다. 화(和)한
안색과 기쁜 웃음으로 무기를 거두었네. 무엇을 예물로 주었는가. 경마(輕馬)와 경구(輕裘)를
주었도다.
도성의 사녀(士女)들이 모두 노래하여 황제의 은덕을 칭송하네. 우리 임금이 돌아옴은 황제의
은덕이라. 황제가 회군하여 우리 백성을 살리도다. 우리의 탕잔(蕩殘)함을 불쌍히 여겨 농사
를 권하니, 국토는 옛날과 같이 되고 조정이 새로워졌네.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고 얼어붙은
풀뿌리에 다시 봄이 오도다. 한강 가에 우뚝 선 비석에 아로새긴 황제의 아름다운 공덕, 삼한
(三韓)에 영원토록 빛나리라'

비석은 원래 청나라군이 머물렀던 삼전도(송파나루)에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삼전도
비에 이를 갈던 백성들이 비석을 때려눕혀 묻어버리면서 100년 이상 제자리를 알 수 없게 되
었다. (고종의 명으로 땅에 묻었다고도 함)
그러다가 왜정(倭政)이 1913년 고적(古蹟)이란 이름으로 파내서 다시 세웠고, 1956년 치욕적
인 비석이라 하여 다시 때려눕혀 생매장시킨 것을 1963년 홍수로 얄밉게도 모습을 드러내자
사적으로 지정해서 보호했다. 이후 1983년 5월 석촌동 아름어린이공원으로 옮겼는데, 그때 삼
전도 굴욕을 담은 부조비(浮彫碑)을 만들었다.

문화재보호법으로 비석 반경 100m 안에 건물 재건축이 힘들어 민원이 쇄도하자 송파구청에서
2003년 문화재청에 비석의 이전을 요구했다. 재건축 민원 때문인 것도 있지만 집 부근에 치욕
의 산물이 있다는 점도 지역 주민들에게는 꽤나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만약 고구려의 광개토
태왕(廣開土太王)비였다면 그렇게까지 민원을 때렸을까?
비석 이전을 두고 송파구청과 문화재청 등이 오래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의 제자리를 더듬고자
서울학연구소에 의뢰한 결과 석촌호수 서호 북동쪽 수중이 원래 자리임을 확인했다. 하여 그
곳과 가까운 서호 언덕으로 옮기기로 문화재청과 합의를 보았고 2010년 봄, 지금 자리로 이전
되었다.

현재 비석은 2기로 1기는 귀부만 달랑 있는데, 이 비석이 처음 지어진 것이다. 허나 청나라에
서 더 크게 비석을 세울 것을 요구하여 기존 비석은 그냥 두고 옆에 새로 비석을 세운 것으로
보고 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5.7m, 비신(碑身) 높이는 3.95m, 너비 1.4m이며, 무게는 무려 32톤이나
나간다.


▲  비석의 꼭대기와 이수(螭首) 부분
이수 아래에 쓰인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는 청나라 사람으로 한족
출신인 여이징(呂爾徵)이 썼다. 여의주(如意珠)를 두고 다투는 이무기의
모습이 꽤 생동적이다.


비석의 정식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이다. 허나 그렇게 부르기에는 너무나 열불이 나므로 조
선 사람들은 간단히 '한(汗)의 비'라고 불렀다. 여기서 한은 북방 민족의 우두머리를 뜻한다.
청태종은 큰 나라의 황제가 아닌 일개 북방 오랑캐의 우두머리로 얄잡아 부른 것이다. 1963년
그를 사적으로 지정하면서 지명을 따서 그냥 삼전도비라 불리게 되었다.

수치스러운 비석이라고 마냥 해코지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므로 더욱 보
존에 힘써야 될 것이다. 또한 삼전도비는 우리에게 강하게 경고한다. 말못하는 자신들에게 분
풀이나 저지르지 말고 그런 역사를 거울로 삼아 그런 개망신을 당하지 말라고, 다시는 자신과
같은 비석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고, 더 이상 굴욕의 대상이 아닌 주변 나라를 굴복시키는
주체가 되라고 말이다. 주변 나라가 우리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앞다투어 항복의 예를 올리는
그 순간 귀부의 표정도 씨익~ 밝아질 것이다.

이렇게 하여 4월 석촌호수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삼전도비 귀부의 뒷모습

▲  귀부만 있는 비석의 뒷모습
주저앉은 뒷발과 오그라든 꼬랑지가 귀엽다


* 삼전도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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