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계곡'에 해당되는 글 55건

  1. 2020.06.01 북한산둘레길3구간 흰구름길~삼성암 늦봄 나들이 (빨래골에서 구름전망대, 화계사까지) 2
  2. 2020.05.09 서울의 북쪽 끝 지붕,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계곡, 원통사, 우이암 관음봉까지]
  3. 2020.01.11 모악산 눈꽃 나들이 [선녀폭포, 대원사, 수왕사, 전북도립미술관]
  4. 2019.12.19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달달한 숲길, 인왕산자락길 (청운문학도서관, 청운공원에서 수성동계곡까지)
  5. 2019.10.29 서울 북쪽 끝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 (도봉산 능원사, 도봉사, 진주류씨묘역, 무수골)
  6. 2019.09.24 서울의 동북쪽 지붕을 거닐다. 수락산 구석구석 나들이 ~~~ (노원골, 수락산보루, 서울둘레길, 동막골, 도선사)
  7. 2019.08.14 기름진 논두렁과 밭두렁을 간직한 서울의 두메산골, 도봉산 무수골 ~~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전주이씨영해군파묘역, 무수골계곡)
  8. 2019.07.16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봉화 오전약수와 약수탕, 석천계곡, 석천정사 여름 나들이 (휴천동 지석 및 입석)
  9. 2019.04.08 늦겨울 산사 나들이, 치악산 구룡사의 은빛 설경 ~~~ (거북바위, 구룡사계곡, 구룡폭포)
  10. 2018.10.23 군포 수리산, 반월호수에서 가을을 맞이하다 ~~~ (철쭉동산, 수리산산림욕장, 수리산둘레길, 수리사)

북한산둘레길3구간 흰구름길~삼성암 늦봄 나들이 (빨래골에서 구름전망대, 화계사까지)

 


' 북한산 늦봄 나들이 (빨래골, 삼성암, 흰구름길) '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과 도봉산

▲  삼성암(삼성사)

▲  빨래골 숲길


 

북한산(삼각산, 836m)은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의 듬직한 진산(鎭山)으
로 나의 오랜 즐겨찾기의 하나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그의 품을
드나들면서 그가 품고 있는 수많은 명소를 섭렵했지만, 아직도 미답처(未踏處)가 무수히
남아있어 나를 무척 애를 태우게 한다.
미답처 식구 중에는 북한산 동쪽 자락(수유/우이지구)에 안긴 삼성암과 빨래골도 포함되
어 있는데, 이들을 뼛속 깊이 새겨두었다가 5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길을 나섰다.

빨래골은 도봉동 집에서도 무척 가까운 곳이라 여유롭게 15시에 길을 나섰다. 수유역(수
유리)으로 이동하여 강북구 마을버스 03번(빨래골↔수유역)에 나를 담아 수유1동 구석에
자리한 빨래골 종점으로 보냈다.


▲  북한산(삼각산)의 싱그러운 품으로 인도하는 관문, 빨래골공원지킴터
여기서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과 만난다.


 

♠  북한산 빨래골

▲  봄가뭄으로 부실한 모습을 비추는 빨래골 (수유리 빨래터)

빨래골은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에 묻힌 조그만 골짜기이다. 작은 냇가 같은 모습으로 딱
히 유별난 구석은 없으며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을 거닐 때 아주 잠깐 스쳤을 뿐, 제대로 살
펴본 적은 없었다. 그저 골짜기 이름을 통해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동네 아낙네
들이 빨래를 하던 곳으로만 막연히 알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곳이 왜 빨래골이 되었을까?

북한산 동쪽 밑에 자리한 수유동(水踰洞)은 북한산 계곡 물이 많아 '무너미'라 불렸다. 무너
미란 저수지 물이 나태하게 고여있는 것을 막고자 한쪽 둑을 조금 낮추어 물이 넘치면 자연히
흐르게끔 만든 것으로 물이 풍부하다보니 일찌감치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 마을이 이제는 서
울 동북부 부도심이자 강북구(江北區)의 중심지로 어엿하게 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수유동(
수유리) 아낙들이 여기서 빨래를 해서 빨래골이 된 것일까? 물론 그들도 빨래를 하긴 했으나
단순히 그것 때문은 아니다.

조선 왕궁에는 궁궐의 허드렛일을 처리하던 무수리들이 많았다. 그들은 제왕(帝王) 내외와 왕
족들, 궁궐에서 일하는 환관(내시)과 상궁(尙宮), 궁녀, 군사의 옷을 개천(청계천)이나 인근
산골에서 빨았는데, 궁궐 식구들이 많다보니 하루에 나오는 빨래 양이 어마어마했다. 이들 빨
래 중에는 속옷 등의 예민한 옷이나 특별히 다뤄야 되는 빨랫감도 많아 청계천에서 같이 처리
하기가 그랬다. 하여 그런 것들은 특별히 이곳 빨래골에서 처리를 했다. 그래서 '빨래골'이라
불리게 된 것이며, 지역 이름을 따서 '수유리 빨래터'라 부르기도 했다.
여기서 그나마 가까운 궁궐인 창경궁(昌慶宮)까지는 약 7km 거리인데, 계곡 물이 풍부하고 매
우 구석진 한적한 곳이라 이곳을 고른 것 같다. 어쨌든 무수리들은 무거운 빨랫감을 짊어지고
동소문(東小門, 혜화문)을 나와 단장의 미아리고개(또는 아리랑고개)를 넘어 여기까지 낑낑대
고 올라왔다.
그들은 빨래를 마치면 잠시 달콤한 휴식을 취하며 궁궐에서 누리기 힘든 자유를 만끽했고, 한
여름에는 조촐히 물놀이도 즐겼을 것이다. 비록 궁궐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은 고단하지만 휴
양도 누릴 수 있으니 일종의 휴가나 마찬가지라 무수리들의 선호도 대단했을 것이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들의 휴식시설도 있었다고 전하며, 환궁(還宮)이 여의치 않은 경우
인근 화계사(華溪寺)에서 숙박 신세를 지기도 했다.

* 빨래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 127-1일대


▲  윗쪽에서 바라본 빨래골

▲  2004년에 심어진 빨래골 표석
이곳 빨래골은 궁궐 무수리 뿐 아니라 지역 아낙들의 즐겨찾기 빨래터였다.

▲  녹음(綠陰)이 짙은 삼성암 숲길
속세의 번뇌와 먼지를 털기에는 좋은 길이다. 잔잔히 불어오는 산바람에 번뇌를
실어 멀리 날려보내고 싶으나 그 번뇌가 너무 무거워 결국 내가 내려가는
길목에 매복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삼성암 일주문(一柱門)

빨래골 숲길을 오르면 삼성암으로 인도하는 잘 닦여진 오르막길이 나온다. 경사는 그리 각박
하지는 않지만 약간의 더위로 인해 조금은 지친다.
자존심을 곱게 접고 그 언덕길을 조금 오르면 삼성암의 정문인 일주문이 마중한다. 오르막길
에서 봐서 그런지 한층 웅장해보이는데, 이곳의 정체를 알려주는 일주문 현판에는 '삼각산 삼
성암'이 아닌 '삼각산 삼성사'라 쓰여있다. 근래 암(庵)에서 사(寺)로 격을 높이면서 삼성사
를 칭하고는 있으나 속세에서도, 절에서도 삼성암이란 이름을 많이 쓴다. (심지어 삼성암 홈
페이지에도 삼성암이라 나옴)


▲  8각형으로 이루어진 만월당 현종종사탑(滿月堂 玄宗宗師塔)

일주문을 지나 한 굽이 오르면 숲속에 때깔이 고운 부도<浮屠, 승탑(僧塔)> 2기와 비석이 뜨
겁게 눈길을 보낸다. 그들 중 8각형으로 이루어진 맵시가 고운 탑은 '만월당 현종종사'의 사
리가 담긴 승탑으로 만월당은 20세기 후반, 삼성암 주지로 있으면서 절을 크게 일으킨 승려이
다. 그러다보니 그의 제자와 신도들이 크게 정성을 기울여 아름다운 승탑을 지었다.

◀  보광당 중현대선사비(寶光堂 重玄大禪師碑)
중현대선사(박중현)는 왜정 후기에 삼성암
대방을 지은 승려이다.

◀  본공당 성학대선사탑(本空堂 性學大禪師塔)
본공당은 1961년 이후 만월당을 도와
여러 건물을 지은 승려이다.


▲  활짝 열린 삼성암 정문


 

♠  북한산 동쪽 자락에 둥지를 튼 조그만 산사, 독성도량을 칭하고 있는
삼성암(三聖庵, 삼성사)

▲  삼성암 외경

삼성암은 빨래골 상류 숲속에 묻힌 조그만 산사로 1872년에 고상진(高商鎭) 거사가 창건했다
고 전한다. 원래 삼성암 자리에는 천태굴이란 조그만 굴이 있었는데, 북한산(삼각산)에 숨겨
진 기도처로 많은 승려가 수도를 했다고 전한다. (천태굴이란 이름은 삼성암이 독성도량을 칭
한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임)

19세기 후반, 서울에 살던 박선묵은 16세에 불교에 귀의했다. 그는 1870년 봄, 고상진, 유성
종 등 7명과 이곳 천태굴에 들어와 3일 동안 독성기도를 올리고 돌아오다가 '이곳의 지세가
절을 지으면 딱 좋은 터요!'
절을 지을 것을 제안, 2년 동안 준비하여 1872년 봄, 여러 칸의
건물을 짓고 작은 절이란 뜻에 '소난야(小蘭若)'라 하였다. 이후 주변 산지를 조금씩 매입했
고 1881년에 독성각을 장만해 절 이름을 삼성암으로 갈면서 본격적으로 독성도량을 칭했다.

1936년 봄, 한동운(韓東雲)이 신도 김용태의 지원으로 칠성각을 다시 짓고, 돌다리와 계단을
닦았으며, 요사를 수리하고 기와를 바꾸는 등 절의 규모가 한층 커졌다. 허나 1942년 7월 폭
우의 희롱에 잔뜩 흥분한 뒷산이 산사태를 일으켜 절을 덮치면서 그만 폐허가 되고 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화계사 주지 박회경(朴會鏡)이 중창의 뜻을 밝혔고, 삼성암 승려 박중현
(보광당), 김성섭 등과 함께 쓰러진 절을 일으켜 세웠다. 이때 김용태가 목재를 지원했고, 인
근의 여러 절이 흔쾌히 도움을 주어 1943년 3월 대방 등 12칸을 세웠으며, 그 기념으로 승려
김태흡(金泰洽)이 '화계사삼성암중건기'를 지었다. 그리고 그해 7월 독성각을 다시 세웠다.
현재의 가람은 1961년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본공당, 세민(世敏), 현종(만월당) 등이 계속해
서 규모를 불렸다. 세민은 주지가 되자 대웅전을 고치고 범종루를 지었으며, 현종이 그 마무
리를 지어 지금의 삼성암을 이루게 되었다. 근래에 '사(寺)'로 격을 높였으나 여전히 삼성암
으로 많이 불린다.

삼성암은 초창기부터 독성도량을 칭했다. 그래서 중부 지역의 이름난 독성 기도도량을 자처하
고 있고 그 명성을 누리고 있는데, 독성이 머무는 곳으로 알려져 독성기도를 하러 많은 이들
이 온다. 아직 절의 내력도 짧고 문화유산도 빈약하니 독성도량을 내세워 절의 존재를 천하에
홍보하는 것이다. 나 역시 삼성암의 이름 3자만 아련히 듣고 있었을 뿐, 관심도 보이지 않다
가 그런데로 묵은 절임을 알고 뒤늦게 살짝 찾아온 것이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독성각, 명부전, 칠성각, 요사 등 8~9동 정도의 건물이 있
으며, 겉보기와 달리 건물도 제법 있고, 면적도 넓다. 소장 문화유산은 아직 없으나 1908년에
조성된 산신탱과 철원(鐵原) 심원사에서 넘어온 조그만 아미타불, 그리고 상궁윤씨의 헌답기
념비 등이 절의 100년 내력을 살짝 귀뜀해준다.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지만 숲속에 짙게 감싸여 있어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기분이며, 사람
들의 발길도 그리 많은 편이 아니라서 고적한 산사의 멋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 바람에 잠을
깬 풍경물고기의 풍경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로 말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1동 산164-5 (인수봉로23길 235 ☎ 02-988-9300, 1996)
* 삼성암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청기와를 눌러쓴 삼성암 명부전(冥府殿)

활짝 열린 정문을 들어서 온갖 봄꽃이 미소 짓는 오르막 길을 오르면 청기와를 지닌 2층 명부
전이 나온다. 2층이긴 하지만 1층은 종무소(宗務所) 등으로 쓰이고 있어 2층이 진짜 명부전인
데, 원래 이름은 지장전(地藏殿)이었다. 그 뒷쪽에는 요사, 선방(禪房) 등이 자리해 있고, 옆
에는 범종각이 있다.


▲  범종을 비롯한 사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각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 등이 담겨져 있다.

▲  북한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샘터

▲  대웅전 맞은편에 자리한 영월각(소법당)


▲  탐스럽게 익은 불두화(佛頭花)의 위엄

▲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관세음보살상
약간은 통통해 보이는 관세음보살 누님이 어진 표정으로 정병(政柄)을
쥐어들며 중생들을 맞이한다.

▲  청기와로 단장된 대웅전(大雄殿)

명부전에서 1단 더 오르면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나온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머리에 푸른 청기와를 입혀 고급지게 꾸몄으며, 내부에는 아미타3존불과 철원 심원사(深
源寺)에서 넘어온 조그만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그곳 천불전(千佛殿)에 봉안된 천불(千
佛)의 하나였으나 6.25전쟁으로 심원사가 파괴되자 승려들이 부랴부랴 그것을 챙기고 이곳으
로 넘어왔고, 그 불상을 아미타불로 삼아 대웅전의 중심 불상으로 삼은 것이다. 현재 서울에
는 심원사에서 넘어왔다는 불상과 보살상이 여럿 있어 심원사가 왕년에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허나 그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온 나는 그만 대웅전 내부를 살피지 않고 지나쳤다. 모두 근래
에 조성된 따끈따끈한 불상과 불화만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웅전은 20세기 중반에 지어진 것으로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남쪽에는 삼성암의 자랑
인 독성각이 있고, 북쪽에는 칠성각과 관세음보살상, 헌답기념비 등이 있다.


▲  오색 연등이 하늘을 가린 대웅전 뜨락
곧 다가올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일찌감치 오색 연등으로 대웅전 뜨락을 곱게
수놓았다. 하늘을 훔친 연등의 위엄으로 대웅전 머리는 가려져 마치
자욱한 하얀 안개로 산 윗부분이 가려진 것 같다.


▲  바위 위에 자리한 '상궁 청신녀(淸信女) 윤씨 실상행(實相行)
헌답기념비(獻畓紀念碑)'
약간 검은 피부로 이루어진 조그만 비석으로 구한말에 상궁 윤씨가 전답을
시주한 것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다. 그 전답은 삼성암의 살을
찌우는데 크게 보탬이 되었다.

▲  산신각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좌측 안쪽에는 칠성각이 자리해 있다. 산신(山神)과 칠성의 보금자리로 '칠성각' 현판
외에 주원영 거사가 쓴 '영모각(靈母閣)' 현판도 내밀고 있는데, 여기서 '영모(靈母)'는 산신
할매의 다른 표현 같다.

칠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그 역시 청기와를 지니고 있는데, 19세기 말
에 지어진 것으로 1936년에 수리한 것을 근래에 산뜻하게 청기와를 입혔다.
건물 바로 뒷쪽에는 벼랑이 바짝 붙어있어 산사태에 다소 취약해 보이는데, 1984년 여름 장마
의 희롱으로 산사태가 일어나 적지 않은 흙과 물이 거세게 칠성각을 향해 밀려왔다. 붕괴 직
전에 놓였으나 뿌리채 뽑혀 떠내려오던 소나무 1그루가 마치 문어가 감싸듯 그 줄기와 뿌리가
칠성각을 감싸 무너지지 않게 지켜준 이변이 발생했다. 우연인지 칠성/산신의 가호인지는 모
르겠으나 어쨌든 산신각은 위기를 모면했고, 절에서는 그 소나무를 치우고 3일 동안 산신 기
도를 올렸다.


▲  등장 인물이 많은 칠성탱 (왜정 때 그려짐)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고색이 느껴지는 산신탱은 1908년 석옹 철유(石翁 喆裕)가 출초(出草, 초안을 그림)하고 두흠
(斗欽)과 윤오(允旿) 등이 참여해 구산동 수국사(守國寺)에서 그린 것으로 나중에 삼성암으로
넘어왔다.
붉은 옷을 입고 하얀 수염을 휘날리는 산신은 호랑이에 기대 앉아있는데, 꼬랑지를 살랑살랑
거리는 호랑이가 고양이처럼 귀엽기만 하다. 산신의 왼손에는 잘생긴 부채가 있고, 그들 뒤에
는 그의 활동무대인 산이 그려져 있다. 심원사에서 넘어온 아미타불을 제외하면 경내에서 가
장 늙은 보물로 아직 그 흔한 지정문화재 등급은 얻지 못했다.


▲  벼랑 위에 자리한 독성각(獨聖閣)

대웅전 우측 벼랑 위에는 삼성암의 얼굴이자 후광(後光)인 독성각이 걸려 있다. 보통 절에서
산신각이나 산신이 봉안된 삼성각(三聖閣)이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기 마련이나 삼성각
은 독성도량답게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의 거처인 독성각을 가장 하늘 가까이에 두어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다.

독성각은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조그만 팔작지붕 건물로 그 역시 청기와를 쓰고 있
다. 1881년에 처음 지어졌다고 전하며, 1942년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이듬해 7월에 다시 지었
다. 현재 건물은 근래 손질된 것으로 지형적인 탓에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정면에 유리창을
내어 비록 좁지만 경내를 굽어볼 수 있게 했다. 들어앉은 위치가 경사가 각박하고 자리가 협
소해 지그재그로 돌계단을 내었는데, 비록 그 거리는 짧으나 계단이 우중층하니 주의가 좀 필
요하다.


▲  독성각에서 바라본 대웅전 옆구리

▲  목각으로 이루어진 독성탱

독성각에는 나무로 조각되어 곱게 채색을 입힌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그림 가운데에 두광(
頭光)을 갖춘 독성 할배가 앉아있고, 그 옆에 동자가 서 있으며, 독성 좌우에는 늙은 큰 소나
무가 있고, 뒷쪽에는 독성의 활동 무대인 천태산(天台山)이 주름진 선을 이루고 있다.

독성각이 19세기 후반부터 있던 것으로 보아 그와 연배가 비슷한 독성탱이 있었을 것이나 지
금 독성탱은 20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여물지 못했다. 삼성암은 독성을 주
인으로 삼아 독성도량을 칭하고 있으며, 중부 지방 제일의 독성 도량을 자처하고 있지만 역시
나 아는 사람만 찾을 뿐이다. 나도 이곳에 오기 얼마 전에야 겨우 그 사실을 접했다.

독성탱 앞에는 중생들의 소망이 담긴 조그만 원등(願燈)이 무리를 지어 모여 장관을 이루는데,
이들이 강인한 협동심으로 몸을 불사르며 독성각 내부를 환히 밝힌다.


▲  마치 자수를 놓은 듯, 꽃잎과 새 등이 그려진 독성각 우물천정

▲  삼성암을 뒤로하며... (일주문 부근)


 

♠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  삼성암 일주문 밑에 자리한 세심천 약수터

그날의 목적지인 삼성암을 둘러보고 뿌듯한 마음을 품으며 절을 나왔다. 다음 인연이 언제가
될지는 장담할 수 없으나 그때가 되면 이번에 놓친 대웅전의 조그만 아미타불을 꼭 친견하고
싶다. 
절을 뒤로 하며 일주문에 이르니 부근에 세심천약수터가 있다. 산에 왔다면 뫼가 베푼 약수는
꼭 마셔봐야 그 산의 맛과 마음을 아는 법, 하여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들이킨다. 허
나 봄가뭄으로 물이 답답하게 나와 조그만 바가지를 채우는데 꽤 인내를 요했다. 삼성암은 그
래도 물이 넉넉했는데, 이곳은 그렇지가 못하다.
약수터 주변에는 운동시설과 의자 등의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오랫동안 동네 사람들의 몸
풀기 장소로 쓰였던 듯 싶다.


▲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약수터를 나와 빨래골로 내려가지 않고 화계사로 질러가는 산길로 방향을 잡았다. 숲에 묻힌
그 길을 정신없이 내려가면 천하 둘레길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는 북한산둘레길이 모
습을 비춘다.
북한산둘레길은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道峯山), 사패산(賜牌山)의 밑도리를 지나는 21개
구간, 71.5km의 장대한 산길인데, 삼성암 입구와 빨래골을 지나는 길은 그 둘레길의 일원인
흰구름길이다. 이름도 참 어여쁜 흰구름길(북한산둘레길 3구간)은 이준열사묘역입구에서 북한
산(삼각산)과 속세의 경계를 넘나들다가 북한산생태숲(성북생태체험관)에 이르는 4.1km의 산
길로 구름을 만날 것 같은 길 이름과는 달리 현실은 해발 100~150m를 왔다갔다하는 구름도 만
질 수 없는 얕은 높이이다. 그러니 괜히 이름에 속지 말자~~!

흰구름길은 북쪽으로 순례길(북한산둘레길 2구간), 서남쪽으로는 솔샘길(둘레길 4구간)과 이
어지며, 그리 각박한 경사가 없는 정말 착한 산길이다. 별로 힘들지 않은 코스라 마실 삼아
가다보면 길게 잡아도 1시간 20분 내외면 완주할 수 있는데, 이 구간에는 화계사(☞ 관련글
보기)와 본원정사(☞ 관련글 보기), 삼성암 등의 오래된 절과 냉골, 빨래골 등의 계곡, 조병
옥(趙炳玉, 1894~1960)박사묘, 구름전망대 등의 명소가 있어 무작정 앞사람의 뒷통수만 보며
산길만 걸을 것이 아니라 이들을 여럿 겯드려서 거닐면 정말 영양가 높은 둘레길 산책이 될
것이다.

흰구름길 구간에는 냉골(화계사와 본원정사 중간)이란 깊은 골짜기가 있다. 도로가 냉골 윗쪽
에 자리한 영락교회기도원까지 닦여져 있어 차량들도 마음 편히 바퀴를 굴릴 수 있는데, 냉골
공원 지킴터에서 칼바위능선으로 조금 오르면 현대사의 주요 인물인 유석(維石) 조병옥박사의
묘소가 있다.

또한 화계사 남쪽 산자락에는 속세를 향해 고
개를 든 3층짜리 전망대가 있다.
이 전망대는 둘레길의 이름을 따서 구름전망
대라 부르는데, 그렇다고 구름까지 닿는 높이
는 아니다. 전망대 꼭대기까지는 계단이 빙글
빙글 늘어져 있으며, 20m 내외의 높이인 전망
대 꼭대기에 올라서면 강북구와 도봉구, 성북
구, 노원구를 비롯해 북한산(삼각산) 동쪽의
주요 봉우리와 도봉산, 수락산(水落山), 불암
산(佛巖山) 등이 거침없이 들어와 조망이 제
법 일품이다.


◀  나무로 지어진 구름전망대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 동쪽 자락과 도봉산(오른쪽 산줄기)

녹색 물결이 일렁이는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 그 너머로 이 산의 대표 봉우리인 백운대(
白雲臺, 북한산 꼭대기)와 인수봉(仁壽峯)을 비롯해 북한산 동쪽 봉우리 능선이 흔쾌히 시야
에 들어온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유동, 우이동, 도봉구, 노원구 지역)
정면 왼쪽에 보이는 산이 도봉산, 오른쪽에 멀리 보이는 산이 수락산이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유동, 쌍문동, 도봉구, 노원구 지역)
정면에 멀리 보이는 산이 수락산, 그 오른쪽이 불암산이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유동, 미아동, 월곡동, 성북구 지역)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미아동, 길음동, 월곡동, 성북구 지역)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잘 닦여진 흰구름길 (화계사 남쪽)

▲  화계사 직전 (흰구름길과 만나는 구간)

간만에 찾은 흰구름길은 화계사까지만 거닐었다. 햇님의 퇴근 시간도 슬슬 임박했고 종종 왔
던 곳이라 그렇게까지 무리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멀리 가고 요란하게 간다 한
들 그 일정의 끝은 언제나 집이다.
이렇게 하여 삼성암을 겯드린 북한산둘레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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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북쪽 끝 지붕,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계곡, 원통사, 우이암 관음봉까지]

 


'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 우이암)'


▲  도봉산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원통사

▲  무수골 숲길


 

봄이 파릇파릇 익어가던 4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친한 여인네들과 서울의 영
원한 북쪽 지붕, 도봉산(道峯山)을 찾았다. 도봉산은 내가 살고 있는 도봉동(道峰洞)과
도봉구의 듬직한 뒷산으로 우리집에서도 훤히 보이는 천하의 명산(名山)이다.

둥근 해가 하늘 가운데에 걸린 13시, 집에서 가까운 도봉역(1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분
식집과 마트에서 김밥과 간식을 두둑히 사들고 도봉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이번 산행은
무수골에서 시작하여 원통사와 우이암(관음봉), 문사동계곡을 거쳐 도봉산 종점에서 마
무리를 지었는데, 소요시간은 4시간 정도이다.


▲  너른 암반이 많은 무수골 하류 무수천(無愁川)


 

♠  서울에 숨겨진 별천지이자 아름다운 산골 마을, 무수골

▲  무수골길 (무수골 주말농장 부근)

무수골을 겯드린 도봉산 나들이는 도봉역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도봉역 1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도봉역4거리인데, 여기서 도봉산이 바라보이는 서쪽으로 길을 건너면 바로 무수골로 인
도하는 무수천 둑방길(도봉로169길)이 나온다. 여기서는 문사동계곡에서 시작된 도봉천과 무
수골에서 시작된 무수천이 만나며 이들은 도봉천으로 합쳐져 중랑천으로 흘러간다.

무수천 둑방길을 10분 정도 가면 도봉초등학교가 나온다. 여기까지는 단독주택과 빌라가 많은
서울에 흔한 주택가 풍경이나 여기서부터 속인(俗人)들의 집이 크게 줄어들면서 서서히 시골
풍경으로 그림이 바뀐다. 그런 풍경 뒤로 북한산(삼각산) 북쪽 봉우리와 도봉산의 지붕이 바
라보여 뒷배경도 아주 탄탄하며, 무수골 마을버스 종점(도봉08번)을 지나면 완전한 산골 분위
기로 풍경이 변한다.

무수천은 수심이 매우 얕은 하천으로 비가 많이 내릴 때만 잠깐 물이 불어날 뿐, 평소에는 물
이 적은 마른 하천<건천(乾川)>이다. 그러다보니 가뭄 때는 갈증을 너무 심하게 타서 툭하면
맨바닥을 드러내기도 한다. 2007년 이후, 무수골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을 벌이면서 무
수골 아랫쪽(도봉초교 주변) 주거 환경이 어느 정도 개선이 되었는데, 이때 무수천을 정비하
여 하천 양쪽에 중랑천과 이어지는 산책로를 내었다. (무수골 주말농장 동쪽까지 이어짐)


▲  세일교 주변 (오른쪽 길은 무수골 북부, 도봉옛길 방면)

도봉산 동남쪽 자락에 포근히 묻힌 무수골은 도봉산에 널린 수많은 골짜기의 하나이다. 허나
그저 숲과 계곡, 바위만 있는 계곡이 아닌 밭두렁과 산골마을, 심지어 논두렁까지 지닌 산골
마을로 좁게는 도봉산과 도봉구, 넓게는 서울의 숨겨진 비경으로 꼽힌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백두산만큼 높은 서울 바닥에 그런 서울을 비웃는 뜻밖의 별천
지가 있다니? 무수골에 발을 들인 나그네는 그곳의 뜻밖에 풍경에 무한 감동을 먹으며 넋을
잃고 만다. 흔히 서울 하면 사람과 차량, 키다리 건물로 즐비한 번잡한 대도시로만 생각하기
일쑤이니 그 감동의 정도는 더욱 클 것이다. 솔직히 서울이라고 해서 꼭 시가지만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무수골이 이렇게 때 묻지 않은 산골로 남게 된 것은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에
포함되어 개발의 칼날을 부러뜨렸기 때문이다.

무수(無愁)골이란 이름은 근심이 없는 골짜기란 뜻이다. 바깥 세상은 늘 근심의 연속인데, 이
곳은 근심이 없는 이름을 지니고 있으니 이 얼마나 극락정토(極樂淨土)다운 이름인가? 그 유
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조선 4대 군주인 세종(世宗)이 이곳에 왔다가 원터약수터에서 약수를 마시고 '물도 좋고 풍경
이 좋은 이곳이야말로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다!'
찬양하여 무수골이 되었다고 하며, 세종
이 그의 아들인 영해군 이당(李瑭)의 묘역을 둘러보고 원터약수터에서 물을 마시며 근심 없는
곳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허나 영해군은 1477년에 죽었고 세종은 1450년에 죽었으니 서
로 시기가 맞지 않으며, 성종이 영해군의 묘역이 완성되자 직접 찾아와 참배하며 근심이 없는
곳이라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근심이 없는 노인네인 무수옹(無愁翁) 이야기도 한토막
전해오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때는 조선의 어느 시절, 나랏일로 골치가 아프던 왕은 세상에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의문을 품으며 이른바 무수인(無愁人)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아무리 잘나가는 부자도,
사대부도, 왕족도, 어린이도 몇 가지씩 가지고 있는 것이 걱정이니 찾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다가 드디어 무수인 자격에 맞는 노인을 찾았다. 그 노인은 아들이 무려 12명으로 모두
장가를 보냈으며, 아들과 며느리의 효성이 지극하여 노인은 만사가 즐거웠다. 하여 주변 사람
들은 그를 무수옹이라 불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왕은 급히 그를 소환해 이유를 물으니 노인
이 머리를 조아리며
'소인은 아직 몸도 멀쩡하고, 마누라가 잘 보살펴주고 있으며, 자식과 며느리가 효도하고, 벗
들도 많고, 자손들도 건강하고, 전하께서 나라도 잘 다스려 주시고, 봄과 여름, 가을, 겨울도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샘이 단단히 난 왕은 그를 시험할 생각으로 구슬을 건네주며 1달 후에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
다. 노인은 왕에게 성대한 대접을 받고 집으로 오다가 한강에서 배를 탔는데, 뒤에 따라오던
사람이 노인에게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하여 구슬을 꺼내 보이니 그때 그 사람이
실수인양 팔꿈치를 치는 바람에 구슬이 한강에 빠지게 되었다. 그 사람은 구슬을 물에 빠트리
게 하려고 왕이 보낸 사람이었다.

구슬을 잃어버린 노인은 구슬을 어떻하나? 노심초사하다가 결국 식음을 전폐하고 몸저 눕게
되었다. 가족들이 이유를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으니 결국 건강까지 극도로
나빠졌다. 걱정이 된 자식들은 잉어를 잡아 푹 고아주려고 했는데, 그 잉어 배에서 구슬이 나
왔다. 알고보니 강에서 잃어버린 그 구슬이었던 것이다. 노인은 너무 기뻐 그동안의 근심을
다 털어버리고 잉어 요리를 폭풍 섭취해 건강을 되찾았고, 1달 뒤, 궁궐에 들어가 구슬을 바
쳤다. 왕이 낸 숙제를 휼륭하게 소화한 것이다.
깜짝 놀란 왕은 그 사연을 듣고 감복했고, 이후 노인은 잘 먹고 잘 살며 쓸데없이 오래 살았
다고 전한다. 이런 무수옹 이야기는 이곳 무수골 뿐 아니라 전국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옛
전설의 하나이다.


무수골은 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무수(無袖)골(무수동)이란 이름도 있다. 이는 무수골에 묻힌
영해군 이당의 무덤 자리가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형국인 선인무수지형(仙人舞袖之
形)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춤을 뜻하는 '舞'가 '無'로 바뀜)
또한 영해군이 묻히기 이전에는 대장장이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들이 운영하는 대장간이 계곡
에 즐비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쇠골', '수철동(水鐵洞, 무쇠골을 한자로 표현)'이라 불리다
가 영해군이 묻힌 이후 무수골(무수동)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또한 무수골에 있던 무수울에 서낭당이 있어 이 마을을 '서낭당(성황당)'이라 불렸는데, 그게
무수골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체로 성황당은 무수골 하류(도봉초교 주변)를 일컬으
며 그 이름은 아직까지 살아남아 버스정류장 이름(도봉역, 성황당)으로도 절찬리에 쓰이고 있
다.

참고로 무수골은 무수울, 무시울, 모시울, 성황당 등으로도 불렸는데, 무수울은 무수골 마을
의 대표 이름으로 조선 때 양주목 해등촌면(海等村面)을 이루던 12개 리의 하나였다. 무수골
은 윗말(무시울), 중간말, 아랫말로 나눠졌으며, 개성이씨가 먼저 터를 닦은 이후, 전주이씨
(영해군의 후손들), 안동김씨, 함열남궁씨, 진주류씨도 이곳에 무덤을 쓴 인연으로 정착하여
오랜 토박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무수골은 도봉산으로 인도하는 기점의 하나로 굳이 등산이 아니더라도 답사와 나들이, 피서,
농촌 체험 등으로도 안길 수 있는 꿀단지 명소이다. 전주이씨영해군파 묘역을 비롯해 무수골
에 가장 먼저 묻힌 개성이씨의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과 의령옹주(義寧翁主) 묘역, 200여
년 묵은 느티나무, 진주류씨묘역(도봉옛길 중간에 있음), 함열남궁씨 묘역 등의 문화유산이
즐비해 답사지로도 손색이 없으며(옛 무덤 답사지로 아주 좋음;) 서울시는 무수골 입구에서
윗무수골을 거쳐 자현암까지의 길을 테마 산책길로 지정하여 '무수히 전하길(숲이 좋은 길)
'이란 간판을 달아주었다.
또한 무수골 하류(세일교 동쪽)에는 밭두렁이 넓게 펼쳐져 있는데, 시민들을 위한 주말농장도
여럿 있어 농촌 체험도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무수골 계곡은 물도 깨끗하고 암반도 즐비하며
상류로 갈수록 숲이 짙어져 피서의 성지로도 아주 좋다. 계곡 상류는 '원통사계곡(또는 보문
사계곡)'이라 불리는데, 문사동계곡, 원도봉계곡(망월사계곡)과 더불어 도봉산 3대 계곡의 하
나로 추앙을 받고 있다.


▲  무수골의 속살로 인도하는 무수골길 (세일교에서 윗무수골 방향)

▲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 (윗무수골, 원통사 방향)

무수골주말농장을 지나면 세일교가 나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오른쪽(북쪽)으로
가면 무수골 북쪽 마을과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로 이어지고, 세일교를 건너면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북쪽 시작문과 무수골 안쪽, 원통사, 우이암 방면으로 이어진다.


▲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 (도봉역 방향)

방학동길 북쪽 시작점을 지나면 바로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길 왼쪽
에 돌담이 펼쳐졌다가 절반 정도 들어서면 자리를 바꾸어 오른쪽으로 돌담이 펼쳐지는데, 비
록 덕수궁(德壽宮, 경운궁) 돌담길만은 못해도 그런데로 운치를 자아내고 있으며, 나무도 무
성해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한다.
어디론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난향원 돌담길, 그 돌담길을 지나면 무엇이 나올까? 무수골
초행이라면 더욱 짙어진 숲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도봉산 산길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할 것이
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다. 무수골이 괜히 무수골이 아니거든..


▲  봄을 맞이하여 슬슬 기지개를 켜는 윗무수골 남쪽 논두렁

난향별원 돌담길을 지나면 흔히 생각하는 그늘진 숲 대신 햇살이 내리쬐는 뻥 뚫린 공간이 나
온다. 그 공간이란? 다름 아닌 논두렁이다. 짙은 숲속에 자리한 윗무수골 논두렁, 설마 이런
첩첩한 산골에 무려 논두렁이 있을 것이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논두렁의 크기는 바깥 세상과 비교하면 턱없는 수준이나 산골치고는 그런데로 큰 편이다. 마
치 강원도나 경북의 산골 논두렁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인데, 길을 중심으로 남쪽에 조그
만 논이 펼쳐져 있고, 북쪽에 큰 논두렁이 여럿 있다. 그리고 영해군파묘역 밑에도 논두렁이
여럿 있다.
이들 논두렁은 무수골의 오랜 상징이자 꿀단지로 무수골 사람들은 조선시대부터 이 논을 통해
곡물을 생산했으며 그 생산량이 많아 배불리 먹고 살았다. 이렇게 산골에서 먹는 문제가 거뜬
히 해결되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식(食)은 걱정할 것이 없으니 근심이 없다는 무수골이란
이름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  호수처럼 보이는 윗무수골 북쪽 논두렁

윗무수골 논두렁은 여전히 논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우리가 갔을 때는 아직 모를 심지 않은
상태라 물만 가득해 마치 조그만 호수처럼 보였는데, 보통 5월에 모를 심어서 10월에 수확을
한다.
친환경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들이 황금색으로 숙성되
는 9월 이후 논두렁 풍경은 무수골 풍경의 가히 백미(白眉)로 꼽힌다
.


▲  느티나무 주변 윗무수골 (원통사 방면)

200년 이상 묵은 무수골 느티나무 앞에서 느티나무를 바라보는 기준으로 오른쪽(북쪽)에 느티
나무가든 문패를 내건 문을 들어서 직진하면 무수골에 가장 먼저 뼈를 묻은 개성이씨 집안의
호안공 이등 묘역이 있고, 오른쪽(북쪽)으로 식당을 가로질러 숲속으로 들어가면 영해군의 묘
역(영해군파묘역)이 있다.
그리고 느티나무에서 산꾼 왕래가 빈번한 왼쪽(서남쪽) 길로 가면 자현암과 원통사, 우이암으
로 이어지는데, 하늘을 가리며 쭉쭉 뻗은 나무들이 아름드리 숲길을 이루어 마치 강원도 원시
림을 방불케 한다. 아름다운 숲길 100선까지는 아니더라도 200선에 넣어도 손색이 없는 품질
로 성신여대 난향원 일부가 이곳에 자리해 있어 길 옆에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또한 숲의 옆
구리를 흐르는 무수골 계곡은 청정하기 이를 데 없어 피서의 성지로 아주 제격이다.


▲  수해(樹海)의 파도 속을 거닐다~~ 윗무수골 숲길

▲  윗무수골에 자리한 자현암(慈賢庵)

햇살도 슬금슬금 피해가는 윗무수골 숲길을 지나면 무수골공원지킴터가 마중을 한다. 여기서
오른쪽 길을 3분 정도 오르면(왼쪽으로 가면 함열남궁씨1묘역과 후손들의 거처) 윗무수골 가
장 윗쪽에 자리한 조그만 비구니 암자 자현암이 나타나며, 그곳부터는 완전한 자연의 공간으
로 바뀐다.


▲  자현암 이후 원통사계곡 산길


 

♠  도봉산의 으뜸 계곡, 원통사계곡(보문사계곡)

▲  숲속에 묻힌 원통사계곡

무수골의 최상류를 이루고 있는 원통사계곡은 보문사계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원통사의 다른
이름이 '보문사'라 그런 이름도 지니게 되었는데 그냥 편하게 무수골계곡이라 불러도 상관은
없다.
이곳은 도봉산 3대 계곡의 하나로 원통사 부근에서 발원하여 무수골을 촉촉히 어루만지며 중
랑천으로 흘러간다. 골짜기는 조촐하지만 주름진 바위와 반석, 수심이 얕은 못이 가득해 아기
자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도봉산의 마음이 담긴 듯, 물이 맑고 허공을 덮을 정도로 숲
이 삼삼하다.
오랫동안 서울 근교 경승지로 계곡 밑에 왕족과 사대부의 묘역이 즐비하다보니 자연히 그들의
발길이 빈번해 오랫동안 그들의 입과 기록에 오르내리던 현장이며, 무수골공원지킴터에서 계
곡을 거쳐 원통사까지는 약 30분 거리로 처음에는 경사가 느긋하다가 막판에 잠깐 각박해진다.
허나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는 초급 코스이니 그리 걱정은 안해도 된다.


▲  바위와 암반을 가득 품은 원통사계곡

▲  힘차게 쏟아지는 원통사계곡의 위엄

전날까지 비가 적지 않게 내린 탓에 계곡 수량이 매우 풍부했다. 풍부하게 쏟아진 봄비로 간
만에 포식을 즐긴 계곡은 기분이 좋은지 패기가 돋는 물소리를 베풀며 속세를 향해 두둑하게
물을 흘려보낸다. 이게 얼마만에 들어보는 계곡의 당찬 물소리던가.? 산길은 계곡을 따라 이
어지기 때문에 물소리는 늘 우리를 따라다녔다.


▲  원통사계곡과 그를 쫓아가는 산길

▲  원통사계곡의 조촐한 여흥거리, 조그만 폭포와 주름진 벼랑들

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진리에 따라 우리는 잠시 길을 멈추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아 김밥 등의 간식거리를 섭취했다. 하늘과 조금이나마 가까운 곳에서 낭랑한
물소리를 들으며 먹으니 꿀을 두르지 않았음에도 다들 꿀맛 같다.
그렇게 뱃속을 달래고 힘이 넘치는 계곡에 속세에서 딸려온 번뇌를 살짝 맡기니 시름이 잠시
나마 잊혀진 듯 하다. 하지만 그 번뇌는 우리가 내려올 장소에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해탈(解脫)은 정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  원통사계곡 상류 부분

▲  경쾌하게 흘러가는 조그만 폭포

▲  원통사계곡에서 바라본 보문능선

▲  계곡 징검다리


▲  원통사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길

계곡과 나란히 이어진 느긋한 산길은 계곡 최상류에 이르면 잠시 매정한 모습을 보인다. 여기
서 계곡과 완전히 떨어지게 되는데, 각박한 산자락에 닦여진 나무데크 계단길을 오르면 우이
동에서 올라온 산길과 만나면서 다시 진정을 되찾으며, 원통사와 우이암(관음봉)이 서서히 모
습을 드러내 보인다.


▲  하늘의 요새 같은 원통사 (밑에서 바라본 모습)
하늘과 한 발자국 가까워질 때마다 성큼성큼 커져 보이는 원통사, 그 뒤로
원통사의 든든한 후광, 우이암(관음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  원통사 앞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 동북부 지역)

▲  우이암으로 이어지는 원통사 앞 길


 

♠  서울 지역 사찰 중 2번째로 조망이 우수한 높은 산중의 절집,
~ 도봉산 원통사(圓通寺)

도봉산의 제일 남쪽 봉우리인 우이암(관음봉, 542m) 동남쪽 자락 400m 고지에 원통사가 포근
히 둥지를 틀고 있다.
원통사는 서쪽과 북쪽이 산과 바위로 모두 막혀있지만 대신 동쪽과 남쪽은 조망이 훤히 트여
있으며, 흰구름이 손에 잡힐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의 품질만큼은 아주 우수하다.
여기서는 도봉동과 도봉구, 강북구를 비롯해 노원구, 성북구, 중랑구, 광진구, 동대문구, 수
락산과 불암산, 봉화산, 아차산 산줄기, 북한산(삼각산)이 아낌없이 바라보여 속세에서 오염
되고 상처받은 두 안구와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서울에는 많은 산사(山寺)가 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북한산 보현봉 밑 560m 고지에 둥지를
닦은 일선사(一禪寺)가 서울에서 1등으로 조망이 좋은 절이다. 원통사가 도봉구와 동대문구,
중랑구 등 서울 동북부와 한강 이북의 동부 지역 중심으로 보인다면 일선사는 도봉구와 노원
구, 은평구, 강서구, 몇몇 구석진 지역을 제외한 서울의 상당수 지역을 커버하고 있다. 그러
니 조망(眺望) 부분에서는 이곳을 따라올 절집이 없다. 그 다음이 원통사이며, 3위는 호암산(
虎巖山) 남쪽 자락에 안긴 불영암(佛影庵)일 것이다. <불영암은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등
서울 서남부와 광명 지역이 바라보임>
조망은 일품이지만 그만큼 궁벽한 산중이라 가파른 곳에 간신히 자리를 닦고 석축을 쌓아 터
를 다졌으며, 뒷쪽 바위에도 약사전, 삼성각 등의 조그만 건물을 주렁주렁 올렸다. 거북바위
밑에는 샘터가 있는데, 물이 귀할 것 같은 바위 밑임에도 수량이 넉넉하다. 그렇다면 원통사
는 언제 창건되었을까?

원통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864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여 원통사라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관련 기록과 유물, 흔적이 전혀 없어 창건 시기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가져다
준다. 또한 1053년 관월대사(觀月大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나 이 역시 신뢰도가 떨어진다. 다
만 1392년에 천은선사(天隱禪師)가 중창했다고 하니 아마도 이때쯤 창건된 것이 아닐까 싶으
며,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현재 나한전으로 쓰이는 조그만 동굴에서 태조 이성계가 기도
를 올렸다고 전한다.
하지만 굳이 이성계가 아니더라도 이런 동굴은 승려나 도를 닦는 이의 수행처로 사용되기 마
련이다. 게다가 관세음보살 누님이 부처를 향해 기도를 올리는 형상이라는 우이암(관음봉)이
뒷쪽에 있어 지역 사람들은 그 봉우리를 관세음보살의 성지(聖地)로 여겼다. 바로 그들을 후
광(後光)으로 삼아 고려 말이나 조선 초에 조촐히 절을 짓고 관세음도량(관음도량)을 뜻하는
원통사를 칭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영조 때 유인(宥牣)이 중수를 했고, 1810년 청화(淸和)가 중수를 했는데, 중창 이후 나
라에 큰 경사가 있자 나라와 산천의 은혜를 갚았다는 뜻에서 보은사(報恩寺)로 이름을 갈았다.
1887년 응허 한규(應虛 漢奎)가 중창했으며, 1928년 자현(慈賢)이 주지로 들어와 퇴락한 절의
중건을 발원하고 설악산에 머물던 춘성(春城)을 청해 1,000일 관음기도를 올려 1929년에 절을
중건했다.
이후 보경 보현(寶鏡 普賢)을 데려와 아미타불과 지장보살상을 조성했으며, 1931년에 비로소
1,000일 기도가 끝나자 그해 겨울 보응과 함께 다시 만일 염불회를 시작하여 1933년 칠성각을
세우고 1936년 법당 일부와 큰방을 중수했으며, 이때 절 이름을 잠시 보문사(普門寺)로 갈았
다가 원래 이름인 원통사로 돌렸다. 그리고 1988년 약사탱과 칠성탱, 산신탱, 독성탱 등을 만
들어 봉안했다.

원통사는 양반사대부들이 즐겨 찾던 명소로 인근 방학동(放鶴洞)과 무수골에 별장과 집을 지
어 머물던 그들이 이곳까지 올라와 조망을 즐겼는데, 영조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조현명
(趙顯命)과 서명균(徐命均)이 나라 일을 논하며 마음을 가다듬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태조 이성계가 이곳 석굴에서 기도를 했다고 하는데, 기도 마지막 날에 꿈 속에서 하늘
나라의 상공(相公, 정승)이 되어 옥황상제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고 하여 이를 기리고자 새겨
진 상공암 바위글씨가 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원통보전을 비롯하여 약사전과 삼성각, 정해료, 범종각, 자연산 석굴
을 활용한 나한전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이미 여러 개의 100년이 지났지만 그에 비
해 고색의 기운은 모두 말라버려 지정문화유산은 하나도 없는 실정이다. 다만 조선 말에 새겨
진 상공암 바위글씨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고, 왜정 때 지어진 원통보전과 탱화 여러
점이 전하고 있다. 또한 나한전 석굴은 태조가 기도를 했다는 전설이 깃들여져 있으며, 오랫
동안 승려들의 수행처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앞서 이른 데로 조망 하나는 아주 최상급이라 서울 동북부와 동부 지역이 훤히 시야에
바라보이며, 절 뒷쪽에 자리한 우이암(관음봉)을 들이밀며 관음도량을 내세우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46 (도봉로169길 520 ☎ 02-954-9944)

◀  서울을 굽어보는 범종루(청화대)
매일 새벽 4시와 18시에 은은한 종소리를
서울로 흘려보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가히 일품급이다.

원통사는 산정(山頂)에 자리한 탓에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두지 못했다. 그래서 범종루를
대신 정문으로 내밀고 있는데, 절 남쪽 경계에는 돌담을 둘렀고, 동쪽 경계에는 석축을 2m 높
이로 다져 속세의 기운을 경계한다.
절로 들어서려면 범종루의 밑도리를 지나야 된다. 이 길이 속세와 원통사를 잇는 유일한 길로
범종루는 청화대(淸和臺)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  범종루(청화대) 앞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지역

▲  오색 연등을 늘어뜨린 원통보전(圓通寶殿)

남쪽을 바라보고 선 원통보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
물이다. 1929년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나 여러 번 손질을 더하면서 90
년 숙성된 기운은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내부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로 이루어진 아미타3존불을 중심으로 호
법신들의 무리를 머금은 신중탱과 백의관세음보살을 담은 관음탱을 두었는데, 원통전은 관음
전(觀音殿)의 다른 말로 관세음보살 누님이 중심이 되야 맞지만 이곳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삼았다. 대신 관세음보살을 그림으로 1폭, 존상(尊像)으로 1기 등 총 2개를 두어 건물의 이름
값은 조금이나마 하고 있다.


▲  원통보전 내부 (왼쪽부터 백의관세음보살탱, 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 신중탱)

▲  바위에서 샘솟는 원통사 샘터

▲  자연산 석굴에 자리한 나한전

원통보전에서 약사전을 향해 1단계 올라가면 거북바위 밑에 이곳의 소중한 젖줄인 샘터가 있
다. 산사에는 늘 샘터가 있기 마련이라 꼭 1모금 챙겨 마시는 편인데 바위 밑 산정에 있음에
도 물이 풍부한 편이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목구멍에 들이키니 몸 속이 싹 시원해진다.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하늘이 내린 이슬 맛이 담긴 탓일까? 물맛도 그런대로 괜찮은 기분이다.


 ▲  나한전(羅漢殿) 내부

샘터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약사전, 왼쪽은 바위 밑도리에 묻힌 나한전으로 이어진다. 나한
전 석굴은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했다는 현장이라 우기고는 있으나 신뢰성은 없으며, 오랫동
안 승려들의 기도처로 쓰였던 것을 근래 손질하여 돌로 만든 석가3존불과 보살입상, 나한상(
羅漢像)을 봉안해 나한전으로 삼았다.
석굴 내부는 더위 두 글자를 잠시 잊게 할 정도로 시원하며, 촛불이 어둠을 조금이나마 밀어
내고 있으나 다소 어두운 편이다.


▲  거북바위에 둥지를 튼 약사전(藥師殿)
샘터 뒷쪽에는 거북바위가 있다. 그의 등에는 약사여래의 거처인 1칸짜리 약사전이
둥지를 틀고 있는데, 바로 그 앞 바위 피부에 '상공암' 3자가 새겨져 있다.

▲  밑에서 바라본 약사전

▲  약사전 약사여래좌상과 약사후불탱


▲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상공암(相公岩) 바위글씨

약사전 바로 앞에 깃든 상공암 바위글씨는 직각으로 선 바위 피부에 새겨진 것이 아닌 누워있
는 바위에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여기서 상공이
란 정승(正承)을 뜻하는 것으로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엎어버리기 이전 원통사에 들어와 기도
를 하다가 그 마지막 날 꿈에 하늘나라 상공이 되어 옥황상제를 알현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기념으로 이곳에 상공암 바위글씨를 남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전설은 신뢰하기가 어려우며, 태조(太祖)가 과연 이곳까지 올라와 기도를 올렸는지
는 심히 회의적이다. 다만 도봉산 천축사(天竺寺)와 회룡사(回龍寺)는 이성계와 인연이 깊은
절로 그 절의 설화를 가져와 적당히 빚은 것으로 보이며, 조선 후기에 이곳을 찾았던 사대부
가 그 전설을 전해 듣고 꿈 속에서 하늘나라 상공이 된 태조를 찬양하고자 거북바위 위에 '상
공암' 바위글씨를 새겼다.

75x230cm 크기로 네모나게 외곽 선을 긋고 그 안에 3자를 새겼는데, 서체는 해서체(楷書體)이
며, 마치 꿈틀거리는 듯 필체가 우수하고 투박하다. 원통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절 경내
에 바위글씨가 있는 경우는 거의 흔치가 않은데, 그 글씨는 선비와 사대부, 왕족들이 즐겨하
던 낙서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원통사에 그들의 왕래가 잦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약사전 앞에서 꺼꾸로 지켜본 상공암 바위글씨
태조의 하늘나라 꿈 전설을 상징하고자 하늘이 잘 바라보이는 이곳에
글씨를 새겼다.

▲  삼성각(三聖閣) 앞에서 바라본 천하
도봉산 동남쪽 자락과 도봉구, 강북구, 노원구, 불암산, 아차산 산줄기,
성북구, 동대문구, 중랑구 등이 아낌없이 바라보인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칠성과 산신, 독성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 칠성탱 (1988년 작)
치성광여래와 칠성(七星)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져 정신이 없다.

▲  삼성각 산신탱 (1988년 작)
흰 수염의 산신 할배와 호랑이, 동자 등
산신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  삼성각 독성탱 (1988년 작)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
존자)과 그의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  도봉산의 남쪽 지붕이자 대자연의 걸출한 작품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우이암<牛耳岩, 관음봉(觀音峯)>

원통사가 우이암(관음봉) 바로 밑이긴 하나 이전보다 더 각박해진 산길을 10여 분을 올라가야
된다. 지도상의 거리는 200m 정도라 금방 이를 듯 싶었으나 체감거리는 거의 1km가 넘어 벌써
부터 땀 육수를 제대로 배출했다.
우이암 그늘이라 그런지 올라가는 길목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유난히도 많았다. 하나같이 생겨
먹은 것들이 예사롭지가 않아 몇몇 바위는 세상이 달아준 이름도 있을 법도 한데 사람들의 귀
차니즘 때문인지 다들 이름표가 없다. 허나 그것이 무슨 대수랴?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일이지 바위들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칼처럼 솟은 우이암의 밑도리를 지나면 우이암을 바라보는 서쪽 봉우리에 이르게 된다. 드디
어 하늘 아래 우이암에 이른 것이다. 허나 우리가 발을 딛은 곳은 정상부가 바위로 이루어진
우이암 서쪽 바위 봉우리일 뿐, 여기서 동쪽으로 보이는 바위 산이 바로 우이암이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도봉산의 위엄
칼바위와 주봉 능선, 만장봉, 자운봉 등이 두 눈에 바라보인다.


도봉산 남쪽 끝 봉우리인 우이암(해발 542m)은 아주 잘생기고 위엄도 대단한 순 100% 바위 봉
우리이다. 대자연 형님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으로 약 2억 년 전인 중생대 쥐라기
중엽 시절에 일어났던 대보조산운동(大寶造山運動)으로 도봉산 산줄기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바람과 비 등이 계속 산을 깎고 다듬으면서 산 정상부는 화강암이 노출된 채 바위산이 되었고
, 그것이 지금의 도봉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여 도봉산은 자연히 서울 근교의 대표적인 화강암 바위 산으로 자운봉, 선인봉, 만장봉, 칼
바위 등 걸출한 바위와 암봉(岩峰)이 즐비하며, 우이암(관음봉)도 바로 그중의 하나로 대자연
이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의 손길을 꺼렸는지 완전히 난공
불락의 요새로 지어놓았다. 허나 그렇게 단단하게 만들었음에도 하늘과 가까워지고 싶은, 봉
우리를 정복하고 싶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 앞에 결국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①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지역


봉우리 자체가 거의 수직 절벽으로 아무나 범할 수 없는 천험의 요새이며, 내려가는 것 또한
까마득한 그야말로 하늘의 감옥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나 올라갈 수는 없고 장비를 갖춘 암벽
꾼에게만 제한적으로 길을 내주고 있다. 특히 암벽 타기에 최적화된 곳이라 암벽꾼들로 늘 부
산하며, 전국 암벽 등반대회가 열렸던 암벽 등반의 성지이기도 하다. 대자연이 인간의 접근을
막고자 만든 바위 봉우리가 졸지에 암벽 등반을 위해 내려준 선물의 모양새가 되버린 것이다.

지금은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에서 아무렇지 않게 우이암이라 불리고 있지만 원래 이름은 관
음봉이다. 관세음보살이 부처를 향해 기도하는 모습과 비슷해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쓰고 있는 모습과도 비슷하여 '사모봉'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다.
도봉산에는 호랑이와 코끼리, 두꺼비, 코뿔소, 학 등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지닌 바위들이 많
은데 이들이 관음봉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
전부터 도봉산 제일의 관음성지(觀音聖地)로 조촐히 추앙을 받았다. 아마도 원통사에 있던 석
굴(현재 나한전)에서 수행하던 승려나 도봉산에 머물던 승려들이 발견하여 성지로 격하게 추
켜세웠을 것이다. 바위 자체가 아주 휼륭한 관음성지이니 그 후광(後光)을 놓치지 않고자 바
위 밑 적당한 곳에 원통사가 둥지를 틀고 관음도량을 칭하고 있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②
우이동을 중심으로 방학동, 강북구, 성북구,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이
바라보인다.


조금 밋밋해 보이면서도 순백의 아름다움이 묻어난 이 봉우리에도 왜정(倭政)의 추악한 잔재
가 서려있다. 왜정은 관음봉의 위엄을 욕보이고자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의 우이암으로 강제
로 이름을 갈아버린 것이다. (우이동, 우이시장에서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바꾸었다고도 함)
아무리 봐도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왜정은 왜 그리 눈이 삐딱한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 이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사람의 망각 속에 완전히 굳어져 버렸고, 관음봉이란
이름은 흐릿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원통사와 불교 단체, 뜻있는 이들은 원래 이름으로
다시 갈아야 된다며 천하에 호소하고 있어 차차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

하긴 왜정에 의해 고의로 왜곡되고 격하된 지명이 어디 한둘이던가? 비록 관음봉이 불교식 이
름이긴 하나 왜정의 나쁜 의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니 원래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맞다. 그들
의 썩은 잔재가 이 봉우리 속에도 깃들여져 천하를 비웃고 있으니 기분이 다소 씁쓸하며, 이
렇게 잘생긴 바위가 소의 귀로 머물러 있는 것도 좀 위엄이 서질 않는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③ 북한산(삼각산) 백운대와 영봉

앞서 원통사가 아무리 조망이 좋다고 해도 우이암만은 못하다. 해발도 벌써 140m나 차이가 나
며 그만큼 하늘과 맞닿은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머리 위로 푸른 하늘과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과 별이 바라보이고, 저 밑으로는 서울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동대
문구, 수락산과 불암산, 아차산 산줄기가 시야에 잡혀 여기까지는 원통사 조망과 비슷하다.
허나 이곳에서는 의정부 일부(호원동, 장암동, 민락1,2지구 등)와 상계1동, 도봉동 북부가 추
가로 시야에 들어와 조망의 범위는 조금 넓어졌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④
도봉동과 상계1동, 수락산을 비롯해 의정부 호원동, 민락1,2지구(수락산 너머로
보이는 곳)까지 시야에 잡힌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보다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
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두 발 밑에 펼쳐진 천하를 바라보니 도봉산과 수락산부터 점
보다 작게 아른거리는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즐거운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현실은 편히 드러누울 땅도 시원치 않은 시궁창이라는 것..
저 천하에서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땅이 없다.


우이암에는 마침 한 무리의 암벽꾼들이 줄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봉우리를 희롱하고 있었다.
하늘의 감옥 같은 봉우리 정상에 올라선 기분은 어떠할까? 하지만 정상부는 좁고, 그 주변은
죄다 수직 벼랑이니 자칫 실수라도 하는 순간에는 정말 답이 없을 것이다. 내가 저기로 순간
이동을 당한다면 아찔한 위치 때문에 염통이 쫄깃해져서 오래 있기도 어려울 것 같다. 그냥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⑤
무수골이 저 밑에 아득하게 바라보여 참 많이 올라왔음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에서 두 다리를 푹 쉬었다.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이 솔솔 불어
주는 산바람이 땀과 이른 무더위를 싹 털어가고 대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일품 조망을 실컷 누
리니 두 안구와 마음이 싹 위로받은 것 같다. 하긴 이보다 좋은 정화감은 없지.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이라 20분 정도 머물다가 우이암능선으로
길을 잡았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우이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과 서울시내
약 50~60도 경사로 비스듬히 기대며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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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4월 1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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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산 눈꽃 나들이 [선녀폭포, 대원사, 수왕사, 전북도립미술관]



' 모악산 연말 나들이 (대원사, 수왕사) '


▲  모악산 대원사

 


 

겨울 제국(帝國)의 나날이 강성해가던 연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전북 한복판에 자리한 모
악산을 찾았다.
이번 해가 새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지 정말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묵은 해가 되어 다시
금 새로운 해를 맞이해야 된다. 그래서 묵은 해를 정리할 겸, 올해 마지막 답사지를 물색
하다가 모악산 대원사가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쿨하게 길을 잡았다.

아침 일찍 차디찬 새벽 공기를 가르며 서초동 남부터미널로 이동하여 전주로 가는 직행버
스를 나를 담았다. 버스도 추위가 싫었는지 남쪽을 향해 질주하여 2시간 20분만에 전주시
외터미널에 도착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말이 있듯이 미리 점심을 먹고 움직이고자
전주(全州)에 올 때마다 거의 꼭 들리는 단골 콩나물국밥집(전주한옥마을 부근)에서 전주
의 명물인 콩나물국밥으로 뜨끈하게 배를 채웠다. 거기에 디저트로 주는 커피까지 섭취하
니 식곤증이 밀려와 나를 희롱한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나오니 하늘이 순간 시샘을 벌인 듯,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비의 양
은 다행히 적었지만 나들이에서 비가 오면 이것만큼 열받는 것도 없다. 어쨌든 비의 방해
공작을 원망하며 전주시내버스 970번(송천동↔전북도립미술관)을 타고 모악산으로 이동했
다.
모악산관광단지(전북도립미술관 종점)에 이르니 귀찮게 하던 비도 다행히 그쳤으나, 하늘
이 일그러진 인상으로 세상을 굽어보고 있어 언제 비나 눈이 투하될지 모를 상황이었다.

  모악산 표석의 위엄


 

♠  모악산(母岳山) 입문

▲  모악산 대원사계곡(시앙골, 물레방아골) 하류

전북 한복판에 장엄하게 누워있는 모악산(794m)은 전주와 완주(完州), 김제(金堤)에 걸쳐있는
산으로 호남평야와 전북 내륙 산간지대의 경계 역할을 하고 있다. 1971년 모악산 일대 42.44
㎢가 모악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정상 밑에 있는 '쉰길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
니의 모습이라 하여 '엄뫼'라 불렸는데, 그걸 한자로 표현하여 어머니의 산이란 뜻의 모악산
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신라 후기에는 '금뫼','금산'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모악산의 원래
이름으로 보는 설도 있다.

신라 후기부터 세상을 구할 미륵(彌勒)의 출현을 열망하던 미륵신앙(彌勒信仰)의 성지(聖地)
인 금산사(金山寺)를 비롯해 귀신사(歸信寺), 대원사, 심원암 등 굵직한 오래된 절이 안겨져
있으며, 왕년에는 80여 개의 절과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새로운 종교들이 모악산을 기
반으로 여럿 생겨났는데, 증산교(甑山敎)가 그 대표적이다.
모악산은 봄 풍경이 아름다운데, 특히 금산사 입구 벚꽃길이 매우 유명하다. 하여 변산반도(
邊山半島)의 여름 풍경, 내장산(內藏山)의 가을단풍, 백양사(白羊寺)의 설경과 함께 호남4경
의 하나로 격하게 찬양을 받는다.

모악산 산행은 김제 금산사나 전주 중인동, 완주 모악산관광단지에서 시작하면 편하며, 산에
안긴 명소로는 금산사와 귀신사, 대원사, 심원암, 수왕사 등의 오래된 절과 전북도립미술관,
금산사 벚꽃길, 명당(明堂)으로 소문났으나 이곳에 묘를 쓰면 가뭄이 든다고 전하는 장군봉,
선녀폭포, 전주김씨 시조묘 등이 있다.


▲  전주김씨 세덕비(世德碑)와 전주김씨 종중공덕비(오른쪽 비석)

모악산 동쪽 자락 원기리에는 '모악산관광단지'가 넓게 터를 닦았다. 모악산을 든든한 후광(
後光)으로 삼은 이곳은 다른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토속 음식을 내세운 식당과 가게(편의점),
까페, 등산용품점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관광단지 남쪽에는 전라북도에서 2004년 10월
에 세운 전북도립미술관이 자리하여 전북 지역 현대 미술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허나 미술관은 애당초 계획이 없었기에 쿨하게 통과했다. 나의 미련한 머릿속에는 오로지 모
악산과 대원사 뿐이었기 때문이다. 혹여 대원사를 보고 나올 때 시간이 남으면 들릴까도 했으
나 역시 인연이 닿지 않았다.

평일이라 썰렁한 관광단지를 지나면 눈에 뒤덮힌 모악산의 설경이 나타나면서 전주김씨 세덕
비와 종중공덕비가 슬쩍 모습을 내민다.
여기서 가까운 산자락에 전주김씨 시조인 김태서(金台瑞)의 무덤이 있다. 그래서 이곳에 이들
비석을 주렁주렁 닦아놓은 것인데, 김태서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4째 아들인 김은열(金殷
說)의 후손으로 그의 터전인 경주가 몽골의 침략으로 고통을 받자 1254년에 가솔을 이끌고 전
주로 넘어와 정착했다. 이후 그는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고, 그를 시조로 한 전주김씨가 생
겨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남북분단의 원흉으로 북한이란 괴뢰 정부를 세운 김일성이 그의 후손이라는 점
이다. 1993년 손석우란 사람이 '터'란 책을 냈는데, 김일성이 시조 무덤의 지기(地氣)를 받아
북한을 세워 집권했으며, 음력 1994년 9월에 죽을 거라는 내용을 다루었다. 비록 달은 틀리지
만 1994년 7월 김일성이 갑자기 골로 가면서 그 책과 전주김씨 시조묘는 잠시 세상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전주김씨 시조묘는 대원사로 올라가는 길목 부근에 자리해 있어 잠시 들릴까 했으나 눈의 방
해가 심해 올라가지는 못했다. 어차피 계획에도 없던 곳이다.


▲  선녀폭포(仙女瀑布)와 폭포를 품은 사랑바위

전주김씨 세덕비에서 대원사계곡(시앙골)을 옆에 끼고 산길을 오르다보면 선녀폭포와 사랑바
위가 모습을 비춘다.
선녀폭포는 높이 5m도 안되는 조그만 폭포로 볼품은 떨어지나 무려 선녀란 이름까지 지닌 것
을 보면 옛 사람들의 마음을 많이도 앗아간 모양이다. 이런 폭포에는 꼭 옛 사람들이 심심풀
이로 지어놓은 전설이 있는 법, 그 믿거나 말거나 전설은 다음과 같다.

아주 먼 옛날, 보름달이 뜨면 하늘나라 선녀들이 선녀폭포로 내려와 목욕을 했다. 다른 유사
전설에서는 그냥 목욕만 하고 돌아갔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목욕 외에 수왕사에 들려 약수도
마시고 모악산 신선과도 어울려 놀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뭇꾼이 우연히 폭포 옆을 지나다 목욕 중인 선녀를 발견했고 그들의 아름
다운 자태에 미치도록 넋이 나간 그는 결국 상사병 비슷한 병을 얻어 몸저 눕게 되었다.

병으로 힘들어하던 나뭇꾼은 기왕 이 지경이 된 거 선녀의 모습을 1번만 더 보고 죽자며 보름
달이 뜬 날 폭포를 찾아와 그들을 훔쳐봤다. 그러다가 뜻밖에 한 선녀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
는데, 그 선녀도 나뭇꾼이 좋았는지 둘만 살짝 대원사 백자골 숲으로 자리를 옮겨 사랑을 속
삭이며 예민한(?) 일을 벌이려는 찰라, 갑자기 뇌성병력이 그들을 내리치면서 선녀와 나뭇꾼
은 돌이 되고 말았다.
하늘의 시샘에 돌이 된 그들의 모습이 마치 떨어질 줄 모르고 사랑을 속삭이는 듯 하다 하여
사랑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여기서 치성을 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산길에
서 보면 폭포의 모습이 그리 실감나진 않으나, 바로 앞에서 보면 조금은 그럴싸하게 보인다.


▲  대원사계곡(시앙골)을 따라 이어진 모악산 산길

▲  겨울에 잠긴 모악산 산길
겨울 제국에게 모든 것을 털린 나무들은 숨죽이며 봄을 잉태하고 있다.

▲  속세를 향해 흘러가는 대원사계곡(시앙골)
소쩍새가 울 때면 겨울에 묻힌 계곡도 얼음을 박차고 일어날 것이다.


모악산관광단지에서 20분 정도 야트막한 산길을 오르면 대원사가 반갑게 모습을 비춘다. 시앙
골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오른쪽에 경내로 인도하는 계단이 놓여져 있고, 그 길을 오르면
비로소 대원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  대원사 직전에 걸린 크리스마스 축하 현수막

▲  대원사 경내로 인도하는 시앙골다리와 계단길


 

♠  모악산 동쪽 자락에 안긴 고즈넉한 산사
대원사(大院寺)

모악산 동쪽 자락에는 고색과 숲내음이 깃든 대원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겨울 제국이
내린 두터운 눈을 뒤집어쓰며 겨울 산사의 고적함을 진하게 우려내고 있는데, 종종 나타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와 추녀 밑에 달린 풍경(바람방울)이 들려주는 그윽한 풍경소리가 고요
한 경내를 살짝 어루만진다.

대원사는 670년에 보덕(普德)의 제자인 일승(一乘), 심정(心正), 대원(大原)이 창건했다고 전
한다. 보덕은 고구려 승려로 열반종(涅槃宗)의 개산조(開山祖)인데, 고구려의 대막리지(大莫
離支)인 연개소문(淵蓋蘇文, ?~666)이 당나라에서 도교(道敎)를 받아들이자 이를 개탄하며 백
제로 넘어갔다. 이때 신통력으로 완주 고덕산(高德山)으로 날라와 경복사(景福寺)를 세웠다고
하며, 절을 세운지 얼마 안가서 고구려가 망했다.

보덕의 제자인 일승, 심정, 대원은 경복사가 보이는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워 대원사(大原寺)
라 했다고 전한다. 보덕의 설화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나와있지만 대원사 창건까지는 나
와있지 않아 670년 창건설(또는 660년)에 썩 신뢰는 가지 않는다. 게다가 창건 시기를 입증해
줄 신라 후기 유물과 유적은 전혀 없으며, 1066년에 원명국사(圓明國師)가 중창했다는 이야기
가 있어 이때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374년 나옹(懶翁)이 중창을 했다고 하며, 1415년에 다시 중창을 벌였다. 그러다가 1597년 정
유재란으로 말끔히 파괴되자 1606년 부처로 추앙받는 진묵(震默)이 다시 일으켜 세웠고, 1733
년 동명 천조(東明 千照)가 중창을, 1886년에는 금강산 건봉사(乾鳳寺) 승려인 금곡(錦谷)과
인오 등이 중창했다. 금곡은 함수산(咸水山) 거사와 함께 대웅전과 명부전을 중건했으며, 내
원암(內院庵)에 있던 염불당을 가져왔다.

1950년 6.25전쟁으로 대부분이 파괴된 것을 덕운이 1959년부터 불사를 일으켜 하나씩 건물을
일으켜 세웠다. 1993년 칠성각을 부시고 요사채를 지었으며, 삼성각을 다시 지었다. 그리고
2001년 이후 명부전과 대웅전 수미단을 손질해 지금에 이른다.

예전에는 비록 음은 같지만 가운데 한자만 살짝 다른 대원사(大圓寺)였으나 근래 지금의 한자
로 갈렸으며, 대웅전과 삼성각, 명부전, 나한전, 범종각, 요사 등 약 10동 정도의 건물이 조
촐한 경내를 메우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삼세불좌상과 용각부도가 있고, 1606년에 조성
된 목각사자상(전북 지방민속문화재 9호)도 있었으나 1988년에 도난을 당했다. 그러다가 1999
년에 서울 가회동(嘉會洞)의 어느 화랑에서 발견되었으나 공소시효를 주장하며 돌려주지 않았
으며, 서울 인사동에 어느 작자에게 넘어가면서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1999년에
지방문화재에서 정리되었음) 그 밖에 오래된 5층석탑 2기와 승탑(부도) 6기가 절의 숙성된 내
력을 알려준다.

이곳은 천하대복지(天下大福地)의 최길상(最吉祥)으로 치는 명당으로 효의 절, 어머니 절, 발
원을 이루는 기도처로 꼽히며, 특히 증산교를 세운 증산 강일순(甑山 姜一淳, 1871~1909)이
도를 깨우친 현장이기도 하다.
매년 1월 1일에는 '촛불기원 해맞이 타종제' 행사가, 4월에는 '모악산 진달래 화전축제'를 열
어 속세에 큰 호응을 받고 있는데, 화전축제는 이곳의 백미(白眉)로 꼽힌다.

▲  매점과 찻집으로 쓰이는 소화당(笑話堂)

▲  소화당 현판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소화당이란 조그만 목조집이 마중한다. 이 건물은 불교용품과 기
념품, 커피, 전통차를 파는 매점으로 커피는 무려 3,000원대를 받는다. 건물 옆에는 잠시 쉬
어갈 수 있도록 파라솔이 달린 탁자와 의자가 놓여져 있고, 건물 정면에는 소화당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는데, 마치 미소를 머금고 있는 듯한 상큼한 모습이다.


▲  겨울 산사의 내음을 진하게 보여주는 대원사 경내

▲  대원사 아랫쪽 5층석탑

소화당을 지나면 바로 대웅전 뜨락이다. 정면에는 대웅전이 마주보고 있고, 오른쪽에는 요사
와 모악당, 샘터, 왼쪽에는 5층석탑과 범종각, 명부전 등이 뜨락을 둘러싸고 있다.
바로 왼쪽에 보이는 5층석탑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20세기 중반 이후에 손질하면서 4
사자5층석탑으로 성형되었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내음이 다소 떨어진다. 그 뒷쪽에는 범종(梵
鍾)의 보금자리인 범종각이 있다.


▲  대원사 대웅전(大雄殿)

동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은 대원사의 중심 건물(법당)로 석축 위에 높이 자리해 있다. 정면
과 측면이 각각 3칸인 주심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법당치고는 매우 작은 덩치인데 1886년에 지
어졌으나 6.25때 불탄 것을 1959년 이후에 다시 지었다.
불단(佛壇)에는 목조3세불좌상과 삼신후불탱 등이 있으며, 지금은 없지만 괴목(槐木)으로 만
든 목각사자상이 있었다. 이 사자상은 진묵대사가 축생(畜生)들을 천상(天上)으로 천도하고자
만든 것이라 하며 그 위에 북을 올려놓고 쳤다고 한다. 허나 1988년 불의의 도난을 당했고 다
행히 1999년에 서울 가회동에서 발견되었으나 소유자인 이영옥이 이현수란 사람에게 팔아먹는
등 우여곡절이 심해 아직까지 제자리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  대원사 목조삼세불좌상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215호

대웅전 불단에는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목조3세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얼굴부터 밑도
리까지 하나 같이 두텁게 생긴 이들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로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약
사불(藥師佛)을 거느린 3세불(三世佛)로 17세기에 조성된 것이다.
석가여래와 약사불, 아미타불로 이루어진 3세불은 조선 중/후기에 많이 나타나는 불상 형태로
중앙에 자리한 석가여래는 중심 불상답게 키가 제일 크며(130cm), 좌우 불상은 116cm 정도이
다. 앞으로 조금 내민 얼굴은 다소 경직되고 딱딱한 표정으로 볼살이 많고 이마가 넓으며, 꼽
슬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수인(手印)만 서로 다를 뿐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의 비슷한 모습이며, 윗도리가 아랫도리보다
다소 살이 찐 모습으로 17세기 호남에서 활동하던 조각승들의 조각 스타일이 잘 반영되어 있
다. 그들 뒤에는 화려한 색채의 삼신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  대원사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우측에는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된 명부전이 대웅전을 바라보
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1887년에 금곡이 지었으며, 2001년
에 중수했다.


▲  조선 후기에 조성된 명부전 지장보살상
그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그를 보좌한다.

▲  명부전 10왕(시왕)과 판관(判官), 금강역사상

▲  명부전 윗쪽에 자리한 적묵당(寂默堂)

▲  종무소로 쓰이는 모악당(母岳堂)

▲  모악당 뒷쪽에 자리한 나한전(羅漢殿)

▲  나한전에 봉안된 석가여래와 거울 광배

나한전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羅漢)의 거처이다. 석가
여래의 광배(光背)가 매우 특이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광배 테두리는 검은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광배 중앙에 거울까지 달려있어 잠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아마도 그런 의
도로 거울을 갖추었을 것이다.

  나한전 석가후불탱(19세기 작)과
색채감이 돋보이는 16나한상

  모악당 옆에 자리한 샘터


  경내 윗쪽에 자리한 5층석탑

경내 뒷쪽 언덕에는 고색이 느껴지는 5층석탑이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대원사는 특이하게 오
층석탑이 2기나 있는데, 법당 앞이 아닌 다들 구석에 자리해 있다. 아마도 비보풍수(裨補風水
)의 일환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이 탑은 2중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석축을 기반 삼아, 네모난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2
중의 기단(基壇)과 5층의 탑신(塔身), 얇은 머리장식을 차례대로 얹혔는데, 탑신 지붕돌이 다
소 헝클어지고, 머리 장식 상당수가 사라진 것 외에는 그런데로 상태는 괜찮다.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용각부도 다음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대원사 아랫 승탑군(僧塔群)

5층석탑에서 경내 뒷쪽을 거쳐 북서쪽 산길을 조금 오르면 녹색 철책에 둘러싸인 승탑군(부도
군)을 만나게 된다.
승탑<부도(浮屠)>이란 승려의 사리를 머금은 탑으로 대원사에는 9기(또는 10기)의 오래된 승
탑이 전하고 있는데, 용각부도 1기만 제외하고 모두 조선 중/후기 것이다. 이중 대웅전 남쪽
밑에 있던 승탑 3기(또는 4기)는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진 상태이고, 경내 윗쪽에 2개 그룹으
로 4기와 2기 등 총 6기만 전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대원사는 잃어버린 것이 참 많다. 절의
초창기 역사도 그렇고, 목각사자상, 거기에 승탑까지 말이다.

  대원사 용각부도(龍刻浮屠)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71호

대원사 승탑 중의 아주 유별나게 눈에 띄는 존재가 있다. 바로 검은 피부로 이루어진 용각부
도(용각승탑)이다.
높이 187cm의 이 승탑은 이름 그대로 용이 새겨진 것으로 옥개석 아랫부분에는 대모양의 무늬
위에 겹잎으로 된 18개의 연꽃무늬가 있으며, 그 위에 구름무늬를 새기고 가운데 부분에 여의
주(如意珠)를 두고 다투는 2마리 용을 진하게 새겨놓았다. 승탑의 피부가 완전 흑백이라 실감
이 덜해서 그렇지 만약에 칼라였다면 진짜 용도 시샘을 했을 것이다. 용의 비늘과 피부, 구름
무늬 등이 아주 실감나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탑은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용무늬까지 새겨진 것으로 보아 어느 고승의 승
탑으로 여겨진다. 그 고승의 덕과 업적이 대단했던지 제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저 탑을 조성해
스승의 넋을 기렸던 모양이다.

장대한 세월을 거치면서 반질반질했던 피부는 검은 피부로 대부분 타버렸고, 군데군데 주근깨
같은 것도 달려있지만 이들은 세월이 달아준 훈장으로 보면 될 것 같다. 머리 장식과 기단부
가 조금 깨진 것을 보면 대부분 잘 남아있는데, 머리 장식은 다른 데서 가져왔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대원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자 제일 가는 꿀단지로 이렇게 화려한 용 문양을 지닌
승탑은 처음 본다. 그러다보니 지닌 다른 승탑은 거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용각부도 주변에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승탑 3기가 있다. 매력 만점의 용각부도에 단단히 묻
힌 탓에 그리 주목은 못받고 있지만 조선시대에 흔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스타일의 탑으
로 용각부도와 긴 시간을 뛰어넘으며 나란히 자리한 모습이 마치, 부모와 자식들 같다. 그 옆
에는 마치 버섯이나 양봉통처럼 생긴 조그만 승탑이 있어 귀엽기 그지 없는데, 이들 탑의 주
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전해오는 것이 없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대원사 윗 승탑군

아랫 승탑군에서 윗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녹색 철책에 둘러싸인 윗 승탑군이 나온다. 이곳에
는 2기의 승탑이 있는데, 검은 때가 자욱한 왼쪽 탑은 기단부와 바닥돌을 갖추고 있고, 하얀
피부가 역력한 오른쪽 탑은 바닥돌 위에 바로 탑을 올렸다. 이들은 조선 중/후기에 조성된 것
으로 탑의 주인에 대해서는 전하는 것이 없다.
이들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해 있어 여기서 더 이상 올라갈 공간이 없다.
주변은 대원사 소유의 숲이며 공식 탐방로도 없기 때문이다. (비법정 탐방로만 있음)


  아랫 승탑군에서 바라본 대원사의 뒷모습

  모악산 산길과 이어진 대원사 남쪽 문

  대원사 돌담을 따라 이어진 모악산 산길

승탑을 끝으로 대원사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원래는 대원사만 보고 전주로 쿨하게 철수하
려고 했으나, 여기서 정상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물맛이 일품이라는 오래된 절, 수왕사가
있다고 하여 시간도 아직 이르고 해서 거기까지 발을 넓혀보기로 했다. 기왕 모악산의 품에
들어섰으니 그 품을 더 파고들어야 아쉬움이 없겠지. 다행히 수왕사까지는 1km 남짓이다. (산
에서 1km는 평지의 1km보다 훨씬 김)
허나 문제는 산에 눈이 많이 쌓여있고 얼음 길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걱정이 좀 되었다. 올라갈 때야 별로 문제는 안되지만 문제는 내
려올 때가 아니던가? (트래킹화를 신고 온 것이 전부임) 허나 이미 내 마음은 수왕사에 올라
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라 거기까지 무작정 올라가기로 했다. 내려갈 때 걱정은 나중이다.

* 대원사 소재지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997 (모악산길 243, ☎ 063-221-8502)


 

♠  모악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고적한 산사
수왕사(水王寺)

  모악산 정상과 수왕사로 인도하는 눈덮힌 산길

대원사에서 수왕사까지는 산길을 20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겨울이 내린 눈과 얼음이 두텁게
깔려있어 올라가고 내려가는 길이 그리 넉넉치가 않은데, 앞만 보고 열심히 오른 끝에 해발
약 560m에 자리한 수왕사입구 쉼터에 이르렀다.
여기서 서쪽으로 난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모악산 정상이고, 남쪽으로 나있는 벼랑길로 가면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고적한 절집, 수왕사가 반갑게 모습을 비춘다.


  수왕사입구 쉼터

  수왕사입구 쉼터에서 수왕사로 인도하는 벼랑길
안전한 통행을 위해 벼랑길에 철난간을 둘러 절을 찾은 이들을 배려했다.


  소박한 모습의 수왕사 경내

해발 570m 고지에 자리한 수왕사는 모악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절이다. 이곳은 약수가 유
명하여 '물왕이절','무량(無量)이절'이라 불렸는데, 680년에 완주 경천사를 지은 보덕이 수도
장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적이나 관련 역사 기록이 전혀 없어 신빙성은
없으며, 이곳 밑에 대원사가 있어 대원사나 금산사 승려의 참선 장소로 쓰였다가 조선 때 건
물을 심으면서 절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1125년에 원명국사(圓明國師)가 중창했다고 하나 이 역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며, 1597년 정
유재란(丁酉再亂)으로 불탄 것을 1604년 진묵대사가 중건하여 머물렀다. 6.25전쟁이 한참인
1951년 1월 10일, 모악산 일대를 어지럽히던 공비를 토벌하고자 작전상 소실된 것을 1953년에
천석진사(千錫振師)가 다시 세웠다.

이곳은 모악산 정상 북쪽 밑으로 가파른 곳에 간신히 터를 닦은 탓에 절이 매우 단출하다. 법
당과 요사, 진묵조사전이 좁은 경내를 이루고 있으며, 근래에 새로 지어진 탓에 고색의 내음
은 진작에 날라가버렸다. 오래된 유물도 없고, 건물도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여염집 스타일이
라 겉으로 보이는 절집 분위기도 다소 떨어진다. 게다가 첩첩한 산속에 묻혀있다보니 머무는
승려도 거의 없고 절을 찾는 신도나 산꾼도 별로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대원사에 많이 의존
을 한다.
또한 수왕사는 완주 지역 전통민속주로 꼽히는 송화백일주(松花百日酒), 송죽오곡주(松竹五穀
酒)를 생산하는 현장으로 주지승인 벽암(碧岩)이 수왕사 약수로 직접 술을 빚는다. 그는 대한
민국 전통식품 명인 1호로 지정된 전통민속주의 장인이자 수왕사의 자랑으로 술을 멀리하는
절에서 곡차(穀茶)로 빗대 표현되는 술을 직접 만든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수왕사 법당

  법당 내부 (석가3존불과 여러 탱화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수왕사 법당은 금동으로 치장된 석가3존불과 석가후불탱, 신중탱, 용왕탱
이 봉안되어 있다. 절은 작고 초라해도 법당 내부에 봉안된 존재만큼은 다른 절 못지 않은데,
바다와 전혀 관련도 없을 것 같은 이곳에 용왕탱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는 수왕사가 거
의 약수로 지탱하는 절이다보니 물을 관리하는 용왕(龍王)이 담긴 용왕탱을 봉안해 매일 좋은
물이 나오도록 기원하는 것이다.

  법당 신중탱(왼쪽)과 용왕탱(오른쪽)

  수왕사 약수터

수왕사의 든든한 후광인 약수터는 겨울 제국의 심술로 얼음에 완전 봉해진 상태이다. 그래서
이곳의 명물인 약수를 마시지 못했지. 선녀도 와서 마신다는 물인데 이렇게 막혀버렸으니 여
기까지 온 보람이 크게 떨어진다.


  진묵조사전(震默祖師殿)

보통 절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산신각이나 삼성각을 두기 마련이나 이곳은 절
을 중창한 진묵대사를 봉안한 진묵조사전을 그 자리에 두었다. 여기서만큼은 산신이나 칠성,
지장보살보다 진묵대사를 더 크게 여기기 때문이다.
바위 밑 가파른 곳에 간신히 자리를 닦고 진묵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1칸 크기의 집을 두었
는데, 그곳까지 인도하는 돌계단을 법당 옆까지 늘어뜨려놓았다.


  하늘색 두광(頭光)까지 갖춘 진묵대사의 진영

진묵(1562~1633)은 수왕사와 대원사의 중창주이자 석가여래의 소화신(小化身)으로 격하게 추
앙을 받는 고승으로 그의 흥미로운 이적과 일화가 많이 남아있다.
그가 동자승이던 시절, 주지승이 그에게 향불을 피우게 하니 주지승 꿈에 제천(諸天) 등이 나
타나 '부처가 향을 피우니 우리는 받을 수 없소!' 했다는 것, 8만대장경을 모두 암송하고 무
슨 책이든 바로 다 외워버려 따로 스승이 필요 없었다는 것. 해인사에 불이 나자 소나무잎에
물을 묻혀 뿌리니 큰 비가 내려 불이 진화되었다는 것, 동네 사람들이 물고기 매운탕을 먹고
가라며 놀리자 탕이 담긴 가마솥을 번쩍 들어 다 흡입한 다음, 엉덩이를 까서 변을 누니 물고
기가 살아서 나왔다는 설화 등, 술을 흔히 곡차(穀茶)라 부르는데, 이는 그가 술을 즐겨 마시
며 곡차라고 했다는 것, 어머니의 무덤을 '무자식 천년향화지지(無子息 千年香火之地)'란 명
당에 썼다는 것 등 재미나고 신비로운 일화가 전해져 온다.

* 수왕사 소재지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산13 (모악산길 246, ☎ 063-287-0485)


  수왕사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나무들이 있어서 시야는 별로)

수왕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5시가 넘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뒷쪽인 모악산 정상까
지 오르고 싶었으나 시간도 늦고 산길도 가파르며 거기에 눈과 얼음까지 덮여있으니 오를 엄
두가 나지 않는다. 아이젠이라도 있었으면 모르지만 그것도 없다. 이럴 때는 건방 떨지 말고
자존심을 곱게 접고 무조건 내려가는 것이 상책, 안그래도 수왕사까지 눈길을 뚫고 무리하게
올라온 터라 내려가는 것도 걱정인데 자꾸 일을 벌여봐야 좋을 것이 없다.

산길을 기어가듯 조심에 조심을 기하며 내려가 별탈없이 대원사에 도착했다. 여기서 관광단지
까지는 길이 완만하기 때문에 별 어려움은 없다. 처음에는 대원사만 보려고 들어왔는데, 수왕
사까지 보너스로 겯드리면서 모악산에서의 일정이 다소 연장되었다.

전북도립미술관 종점에 이르니 마침 전주시내버스 970번이 바퀴를 접고 쉬고 있어 그것을 타
고 미련없이 전주시내로 나갔다.
이렇게 하여 연말의 모악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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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12월 2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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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달달한 숲길, 인왕산자락길 (청운문학도서관, 청운공원에서 수성동계곡까지)

 


' 서울 도심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 인왕산자락길 '

▲  인왕산자락길 (은행나무숲길)

▲  인왕산자락길 가온다리

▲  이빨바위

 


 

늦가을이 존재감을 진하게 드러내며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물들이던 11월의 어느 평화
로운 날, 인왕산 품에 숨겨진 인왕산자락길(숲길탐방로)을 찾았다.

인왕산자락길은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동쪽 자락에 닦인
둘레길로 2개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제1코스(2.7km)는 인왕산길을 졸졸 따라가는 탐
방로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인왕산길을 따라 사직단(사직공원)까지 이어진다.
경사가 거의 느긋하여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지 마음 편히 거닐 수 있으며, 시내와
도 무척이나 가까워 언제든 도시로의 탈출이 가능하다. 다만 인왕산길이 차량들 왕래가
빈번하다보니 비록 작은 소음이지만 종종 적막을 깨뜨린다.

본글의 주인공인 제2코스는 숲길탐방로(3.2km)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산길을 따라 이빨바
위, 가온다리, 수성동계곡 윗쪽을 거쳐 택견수련터(황학정 북쪽)까지 이어진다. 인왕산
길과 서촌(西村, 웃대) 주택가 사이에 자리한 길로 제1코스와 달리 차량의 눈치와 소음
걱정에서 벗어나 아늑하고 달달한 산길의 멋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오르락 내리락 굴곡
이 다소 있어서 약간은 힘들 수 있다. 하지만 다리만 멀쩡하면 삼척동자도 능히 완주할
수 있으니 걱정 따위는 인왕산 산바람에 날려보내기 바란다.

제2코스는 인왕산길(제1코스)과 서로 만날 듯 가깝게 거리를 두고, 경쟁을 하듯 펼쳐져
있다. (현실은 청운공원과 택견수련터에서만 만남) 아주 편한 길을 원한다면 제1코스를
, 차량의 눈치 없이 아늑한 산길을 꿈꾼다면 제2코스(숲길탐방로)를 이용하자. 특히 제
2코스에는 숨겨진 명소와 계곡, 약수터가 많고 풍경도 고우며, 서울 도심이 늘 옆에 파
노라마처럼 따라다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번 나들이는 제2코스를 이용하여 윤동주문학관에서 사직단(社稷壇, 사직공원)까지 이
동했다. 늦가을이 겨울 제국의 압박으로 생각보다 명이 짧아서 그가 지기 전에 그의 가
랭이라도 붙잡을 겸 서둘러서 찾았는데, 아직은 늦가을 풍경이 여전해 내 정처 없는 마
음과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오감(五感)을 크게 정화시켜 주었다. 역시 사람은 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이후 제2코스는 인왕산자락길이라 표시하며, 제1코스는 인왕산길로 표시함)


▲  윤동주문학관 앞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바로 앞에 붉은 뒷통수를 보인 주택들은 청운벽산빌리지이다.


 

♠  우리나라 최초의 한옥 공공도서관, 인왕산 동쪽 자락에 자리해
문학의 향기를 흩날리는 청운문학도서관 (청운공원)

▲  윗쪽에서 바라본 청운문학도서관

'한옥으로 지어진 도서관이 있다? 없다?'란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 될까? 2014년 11월 중순
까지는 '없다'로 해야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있다'로 바뀌었으니 그 정답을
바꾼 첫 현장이 바로 청운공원에 자리한 청운문학도서관이다.

윤동주문학관에서 청운공원, 인왕산자락길로 이어지는 2차선 길(자하문로35길)을 따라 3~4분
정도 가면 왼쪽(남쪽) 밑에 근래 지어진 산뜻한 한옥들이 모습을 비춘다. 처음에는 전통체험
공간으로 여겼으나 확인해보니 종로구에서 닦은 청운문학도서관이다. 콘크리트 건물이 진리를
이루고 있는 현실에서 한옥으로 도서관을 지을 생각을 하다니 그 생각이 참 기발하다. 그 발
상 덕분에 이 땅 최초의 한옥 공공도서관이란 근사하면서도 변치 않을 타이틀을 지니게 되었
다.

종로구가 '책읽는 종로만들기' 프로젝트를 야심차게 추진하면서 짜투리 공간을 활용하여 조그
만 공공도서관(일반 도서관 11곳, 문학 또는 예술로 특화된 도서관 7곳) 18곳을 지었는데 청
운문학도서관은 문학 특화 도서관으로 2014년 11월 19일에 문을 열었다.
종로구의 16번째 공공도서관으로 문학 특화 도서관이 된 것은 바로 옆에 윤동주문학관과 윤동
주시인의 언덕 등 현대 문학의 성지(聖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히 문학 특화의 목적
을 띄게 된 것이다. 그래서 종종 문학인과 명성이 있는 지식인을 초청해 문학 관련 프로그램
이나 강좌를 운영하고 있으며, 윤동주문학관과 한 덩어리를 이루며 도심 속 문향(文香)의 성
지로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이곳은 인왕산 동쪽 자락이자 청운공원 한복판으로 주변이 온통 싱그러운 자연에 감싸여 풍광
이 곱다. 그러다보니 정녕 이곳이 서울 도심 한복판이 맞는지 고개가 절로 갸우뚱거린다. 마
치 머나먼 산골로 순간이동을 당한 즐거운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변 자연과 흔쾌히 어우러진 모습과 한옥의 미를 잘 드러내고 있어 '서울의 아름다운
건물 찾기 공모전'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건물에 쓰인 기와는 돈의문(敦義門) 뉴타운 개발로
철거된 한옥 기와 중, 괜찮은 것 3,000여 장을 추려내 재활용했다.

도서관의 규모는 734.35㎡로 본관(지하 1층, 지상 1층)과 조그만 별당으로 이루어진 조촐한
모습이며, 열람석 수는 115석, 소장 서적은 21,985권(2018년 1월 1일 기준)이다. 도서관 이용
방법과 책 대출 방법 등은 다른 도서관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관련 홈페이지 참조), 10시부터
22시까지 운영을 한다. (일요일은 19시까지, 매주 월요일은 쉼)

굳이 책을 빌리거나 독서를 하지 않더라도 나들이로 잠시 들릴만하다. 주변에 청운공원과 윤
동주문학관, 윤동주시인의 언덕, 인왕산, 부암동, 창의문, 북악산, 서촌 등의 굵직한 명소가
많고 한옥으로 지어진 매력 때문에 북촌(北村)의 필수 관광지로 꼽히는 정독도서관처럼 자연
스럽게 명소처럼 되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4-20 (자하문로36길 40, ☎ 070-4680-4032~3)
* 청운문학도서관 홈페이지는 아래 '남쪽에서 도서관 본관' 사진을 클릭한다.

▲  남쪽에서 바라본 도서관 본관
본관 지하층 앞쪽에 주차장이 있다.

▲  운치를 더해주는 도서관 돌담


▲  청운문학도서관 본관

도서관 본관은 'ㄱ'자 모습의 팔작지붕 한옥이다. 겉으로 보면 1층 같지만 그 밑에 지하층을
품고 있어서 지상 1층, 지하 1층 규모를 이루고 있다. 지하는 서고(書庫), 지상은 열람실 및
교육 공간으로 쓰이며, 교육이나 강좌 프로그램이 없을 때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책을 읽으며
문향을 즐기면 된다.


▲  온갖 화초와 동물이 새겨진 도서관 담장의 위엄
이보다 우아한 도서관 담장이 또 있을까? 전통식 고급 담장에 충실하고자
다양한 화초와 동물 문양을 넉넉히 담아 넣었다.

▲  메마른 연못에 다리를 담군 1칸짜리 별당(別堂)

본관 서쪽에는 1칸짜리 별당이 자리해 있다. 별당 옆에는 연못이 있으나 내가 갔을 당시에는
물이 없는 휴업 상태였다. 만약 연못에 물이 차있고, 연꽃까지 두둥실 떠있었다면 그 운치가
몸살나게 죽여줬을 것이다.
별당은 늘 열린 공간으로 누구든 들어가서 책을 보면 된다. 가끔 명사들을 초청해 여기서 강
연이 열리기도 한다. 허나 이곳은 엄연한 도서관의 일원이기 때문에 대놓고 낮잠을 자거나 음
식을 섭취하는 행위 등은 하지 말자.


▲  탁자만 외로이 놓여진 별당 내부
여기서 책을 읽는다면 내용이 무엇이든 머릿속으로 술술 잘 들어올 것 같다.
그만큼 독서의 명당 자리이다.

▲  청운문학도서관 서쪽 출입구 (별당 옆에서 바라본 모습)

▲  붉게 타오른 단풍이 마중을 하는 청운문학도서관 서쪽 출입구
(바깥에서 바라본 모습)

▲  붉은 단풍이 진하게 아른거리는 청운공원 숲길 (인왕산자락길)
늦가을 단풍이 소리 없이 내려앉으면서 내 마음도 덩달아 알록달록 물들어간다.
(청운문학도서관 서남쪽, 인왕산자락길)

▲  늦가을의 붉은 수채화 속을 거닐다 (청운공원 인왕산자락길)

청운문학도서관 서쪽 출입구를 나오면 몸을 푸는 운동시설과 분수대가 있는 청운공원 서쪽 구
역이다. 여기서 오른쪽 산길을 오르면 인왕산자락길이 펼쳐진다. (인왕산길과도 연결됨)

청운공원은 종로구의 지붕인 인왕산 동쪽 자락에 자리를 닦은 공원으로 2007년에 인왕산 잡석
들을 모아서 만든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돌아파트)'와 2009년에 공원 동쪽을 떼서 만든 윤
동주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등이 있다. 2014년에는 청운문학도서관까지 지어지면서 공원
을 더욱 알차게 수식해준다.
도심보다 한층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탓에 서울 도심과 남산, 부암동, 홍지동 일대가 훤
히 바라보여 조망도 일품이며,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경계에 자리해 있어 바로 밑에 펼쳐
진 도심보다 청정한 공기를 자랑한다. 또한 서울 장안의 주요 해맞이 명소로 매년 1월 1일 아
침에 해맞이 축제가 열리며, 나무와 각종 꽃이 가득해 봄에는 벚꽃과 진달래, 개나리가 봄의
향연을 열고, 가을에는 오색영롱한 단풍잎이 가을의 향연을 베푼다.

청운공원 서쪽 구역에는 꿈의 분수라 불리는 바닥분수와 넓은 운동장이 있다. 꿈의 분수는 매
일 2회 조촐하게 분수쇼를 선보이는데, 그리 현란한 편은 아니며, 그냥 주변을 시원하게 해주
는 정도이다. 가동 기간은 4월부터 10월까지로 1차는 11시에서 13시까지, 2차는 15시부터 16
시까지이며, 겨울에는 무조건 쉰다. (가동 기간과 시간은 언제든 변경될 수 있음)
분수쇼는 전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분수와 어울려 물놀이를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니
그냥 눈으로만 보기 바란다.

* 청운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7-4 일대


▲  꿈의 분수가 있는 청운공원 서쪽 구역, 그 너머로 서울 도심이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  청운공원 서쪽 구역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의 위엄


 

♠  인왕산자락길 이빨바위에서 해맞이동산까지

▲  인왕산 이빨바위
그저 단단해 보이는 뚜껑돌 위에도 자연은 피어나고 있었다.
 

청운공원에서 인왕산자락길로 들어서 1굽이 지나면 이빨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검은 이빨을 드
러내며 발길을 붙잡는다.
바닥에 누운 커다란 암석과 뚜껑돌처럼 놓인 암석 중간에 마치 동물의 이처럼 생긴 부분이 있
어 눈길을 끄는데 그로 인해 이빨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자락길을 닦으면서 발굴
된 것으로 나도 그의 존재는 처음인데 사람의 틀니나 해골의 입처럼 보이기도 하며, 배가 고
파서인지 모르지만 햄버거처럼 보이기도 한다. 제 눈이 안경이라고 사람마다 눈에 비치는 모
습이 다 같을 수는 없다.

이처럼 잘생기거나 요상하게 생긴 바위에는 꼭 믿거나말거나 전설이 있기 마련이나 눈썰미가
좋은 옛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는지 그에게 깃든 전설은 딱히 없다. 다만 자락길을
닦으면서 초반에 종로구청에서 인왕산 치마바위와 인연이 깊은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와 중
종(中宗)의 이야기를 어거지로 지어서 당당하게 안내문까지 부착했는데, 그 내용이 실로 개판
에 똥판 수준이라 말들이 많자 그 안내문을 떼어버렸다. 대신 '건강한 치아는 오복 중의 하나
! 이빨바위를 보며 건강과 평안을 빌어보십시오'
란 조그만 돌 표석을 달았다. 차라리 엉터리
전설보다는 돌 표석 안내문이 훨씬 깊이가 있어 보인다.


▲  이빨바위 남쪽 쉼터 (운동시설이 여럿 있음)

▲  소나무 숲 사이로 바라보이는 서촌(웃대)과 서울 도심
자락길을 한 굽이 넘을 때마다 서울 도심은 조금씩 모습을 달리한다.

▲  조그만 계곡(청풍계로 여겨짐)을 건너는 나무데크 탐방로
(청운마루와 이빨바위 사이)

인왕산은 단단하게 생긴 바위 산이라 계곡과 샘터가 거의 없을 듯 싶지만 겉보기와 달리 많은
계곡과 샘터를 지닌 부드러운 산이다. 다만 서울 도심에 자리한 탓에 개발의 칼질이 계곡을
마구 끊어버리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거의 없을 뿐이다.

인왕산 품에는 2012년에 복원된 수성동계곡을 비롯해 백운동(白雲洞), 청풍계(淸風溪), 청계
동천(淸溪洞天), 옥류동(玉流洞) 등 서울 장안의 경승지로 명성을 날렸던 계곡들이 많다. 허
나 수성동(水聲洞)을 제외하면 다들 조그만 편이며, 수성동 상류와 홍제동 환희사계곡이 그나
마 제대로 남아있다. 그 외 계곡들은 주택가 등 시가지 확장으로 모조리 강제 생매장을 당해
산 속 상류에만 여리게 물줄기가 남아있을 뿐이다. 인왕산자락길은 시내에서 모두 실종된 듯
보이는 인왕산 서촌(웃대) 방면 계곡들의 상류를 거의 만나볼 수 있는 소중한 현장으로 인왕
산을 달리 보는 계기를 선사해준다.

청운마루 직전에 이르면 넓게 닦인 나무데크 공간이 나온다. 그 밑에도 조그만 계곡이 가늘게
흐르고 있는데, 위치를 봐서는 청풍계(淸風溪) 상류로 짐작된다.
조선 중기 인물인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청풍계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주변 풍경이 수
려해 청풍각(淸風閣)이란 별도의 건물을 지었다. 바로 그 건물로 인해 이곳 계곡이 청풍계란
간판을 달게 되었고, 청풍계와 인근 백운동의 이름을 따서 청운동이 되었다. <옛날에는 장동(
壯洞)이라 불림>

이곳 역시 주택가에 이르러서는 강제 생매장을 당해 청계천으로 흘러가며, 계곡 왕년의 모습
은 겸재 정선
(謙齋 鄭敾)이 그린 장동8경첩에 잘 남아있다.


▲  인왕산자락길의 구름다리인 가온다리

청풍계 추정 계곡을 건너 고개를 넘으면 '청운마루'라 불리는 나무로 다진 조망대가 있고, 바
로 조망대 정면(남쪽)에 인왕산자락길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가온다리가 펼쳐져 있다.
그는 일종의 흔들다리로 지방의 산이나 호수, 섬에서나 볼 수 있는 관광용 흔들다리가 이렇게
서울 도심에 버젓히 나타나 내 앞에 아른거리니 '서울에서 이제 흔들다리나 구름다리를 다 보
는구나~! 내가 너무 오래살았나?' 그저 충격과 놀라움 그 자체였다.
흔들다리의 성지인 파주 감악산(紺岳山), 원주 소금산, 청양 천장호 등 스케일이 큰 흔들다리
만은 못해도 서울에 거의 흔치 않은 흔들 구름다리로 흔들다리의 이름값은 하고 있으며, 이곳
이 깊은 협곡을 이루고 있어 눈요기도 시킬 겸, 이렇게 높이 구름다리를 닦은 것이다.

처음에는 다리 이름이 딱히 없었으나 언제부터인가 '가온다리'란 간판을 달게 되었는데, 사람
의 중량과 다리를 흥분시키는 정도에 따라 흔들리는 강도가 조금씩 다르다. 가벼운 사람이 건
너면 거의 미동 정도로 흔들리고, 무게가 좀 있거나 다리를 막 건드리면 조금은 출렁거려 사
람에 따라 염통이 쫄깃해지는 짜릿함도 느낄 수 있다.


▲  북쪽에서 바라본 가온다리

다리 저 밑에는 계곡이 흐르고 있는데, 위치를 봐서는 옥류동(玉流洞)계곡으로 여겨진다. 옥
류동에는 청휘각(晴暉閣)이란 유명한 정자가 있었는데, '청휘'란 이름은 '비가 개인 뒤에 맑
은 햇살이 비추는 누각'이란 상큼한 뜻으로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집 후원에 지었다.
이후 옥류동의 대표 명소로 이름을 날렸고,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8경첩에 그 존재가 남겨져
있다.
그토록 아름답던 청휘각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흔적 조차 더듬기 어렵게 되었고, 옥류동
도 왕년의 위엄을 잃은 채, 인왕산 숲속에서나 겨우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
고보면 인왕산은 20세기를 거치면서 인간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상실 당했다. 게다가 서울 도
심에 자리해 있으니 그 희생의 정도는 매우 컸다.


▲  남쪽에서 바라본 가온다리

▲  가온다리 남쪽에서 바라본 청운동(淸雲洞) 지역과 북악산(백악산)
그들 너머로 북한산(삼각산) 남쪽 줄기가 살짝 모습을 비춘다.

▲  남쪽 밑 계단에서 바라본 가온다리

▲  청와대를 꿈꾸는 청와마루

가온다리를 건너 고개 1굽이를 넘으면 청와마루가 마중한다. 이곳은 청와대가 정면에 보이는
위치라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청와대와 함께 서촌(웃대)과 북악산(백악산), 서울 도
심부가 사이 좋게 시야에 들어온다.


▲  청와마루에서 바라본 서촌(웃대)과 북악산, 청와대

▲  숲 너머로 보이는 서울 도심 (청와마루 남쪽)

숲 사이로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도심이 모습을 비춘다. 인왕산자락길은 서
울을 잊게 할 정도로 싱그러운 산길이나, 번잡한 도심이 늘 옆에 머물며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는다. 마치 이곳이 시골이 아닌 서울 한복판임을 잊지 말라는 듯이...


▲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은행나무숲길

버드나무약수터와 청와마루 사이에는 은행나무가 조촐히 우거진 숲길이 있다. 비록 숲길의 거
리는 얼마 되지 않으나 은행잎이 황금 비단처럼 깔려 있으니 대자연 형님의 초청을 받아 잔칫
집이나 연회장에 들어서는 기분이다. 그만큼 감동의 너울은 컸다. 이곳의 아름다움은 두고두
고 망막과 가슴 속에 은은히 남아 아른거렸고 그들이 그리워 이후에도 여러 번 찾아왔다.


▲  은행잎이 깔린 은행나무숲길
땅바닥에 귀를 접고 누워있는 은행잎과 온갖 단풍잎들, 우리는 그들을
우울한 이름의 두 글자 '낙엽'이라고 부른다.

▲  은행나무숲길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

▲  버드나무약수터 체육시설

은행나무 숲길에서 1굽이 지나면 버드나무약수터 체육시설이 마중을 한다. 옥인동(玉仁洞) 주
민들의 체력 단련을 위해 닦여진 것으로 늦가을 절정에 잠긴 나무들이 흩날린 누런 낙엽과 은
행잎이 바닥을 잔잔히 덮으며, 흙길의 촉감을 부드럽게 해준다.


▲  샘터의 기능을 잃은 옛 버드나무약수터

버드나무약수터는 인왕산의 유명 약수로 위엄을 떨쳤던 샘터이다. 허나 부적합 판정으로 샘터
의 기능은 끊겼고, 대신 남쪽에 새로 샘터를 파서 버드나무약수터란 간판을 달았으나 그 역시
약수의 기능을 상실해 생태연못으로 새롭게 살아가고 있다.


▲  좁은 샘터에서 유유자적 살고 있는 물고기들
저들은 무엇을 먹고 살아갈까? 좁은 샘터에 마땅한 수초도 없을텐데 말이다.

▲  늦가을도 몸을 푸는 버드나무약수터 체육시설 주변

▲  약수터의 추억을 지닌 옥인동(玉仁洞) 생물서식공간

이곳은 원래 버드나무약수터로 사진에 보이는 돌거북이 인왕산이 빚은 물을 열심히 베풀고 있
었다. 허나 세월을 너무 안좋게 타서 부적합 빨간 딱지를 받게 되었고, 끝내 딱지를 벗어나지
못하자 약수터 폐쇄 대신 여기서 나오는 물을 활용해 그 앞에 조그만 생태연못을 만들어 옥인
동 생물서식공간으로 삼았다. 그래서 조금은 어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약수터가 생태연못(생태공간)으로 거듭난 현장으로 이런 예는 천하에서 이곳이 거의 유일할
듯 싶다.


▲  버드나무약수터에서 수성동으로 이어지는 인왕산자락길

▲  해맞이동산 북쪽 인왕산자락길


 

♠  인왕산자락길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수성동까지)

▲  낙엽이 짙게 깔린 산들수목원약수터 해맞이동산

산들수목원약수터는 버드나무약수터와 수성동 사이에 자리해 있다. 약수터 이름치고는 좀 긴
편으로 단순히 이름만 봐서는 산들수목원에 깃든 약수터로 착각할 수 있으나 그런 이름의 수
목원은 여기에 없으며, 수목원 같은 시설도 전혀 없다. 어찌하여 속칭 낚시성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직까지는 수질이 양호하여 마셔도 무리는 없다.


▲  산들수목원약수터

마침 주변에 있던 아저씨들이 인왕산에서 제
일로 물맛이 좋다며 1모금 권하길래 졸고 있
는 바가지를 깨워 마셔보았다. 약수터는 수도
꼭지로 물을 통제하고 있어 물을 마시려면 꼭
지를 돌려야 된다. 그러면 물이 쏴~ 쏟아진다. 
물을 마셔보니 딱히 특별한 맛은 느껴지지 않
는 이 땅에 흔한 약수 맛이다.

약수터 주변에는 '해맞이동산' 표석이 있는데, 해맞이에 걸맞게 동쪽을 향하고 있다. 여기서
는 매년 1월 1일 해맞이행사가 열린다.


▲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서촌, 남산,
그리고 푸른 하늘

▲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수성동으로 넘어가는 인왕산자락길
늦가을 단풍이 곱게 자연산 터널을 이루며 산책의 흥을 돋군다.

▲  자연산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수성동계곡 상류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자락길을 따라 고개를 넘으면 수성동계곡 상류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는 인왕산길에서 내려오는 산길과도 만나는데, 상류는 복원된 계곡 중심부와 달리 거의 자연
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자연산 바위와 온갖 잡석이 좁은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고,
그 사이를 인왕산이 베푼 계곡물이 거의 소리도 없이 흘러간다.
이곳은 청계천의 주요 발원지이기도 하며 수질이 양호해 도룡뇽, 가재, 개구리, 버들치 등이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좁은 계곡이나 그들에게는 이만한 보금자리가 없을 것이다.

계곡 주변은 나무가 무성하여 한여름에도 더위를 잊게 하며, 산길을 따라 1분 올라가면 인왕
산길(석굴암입구)이 나오고, 반대로 2분 정도 내려가면 수성동계곡 중심부와 그를 내세운 공
원이 나온다.


▲  수성동계곡의 또다른 상류

수성동의 상류는 3개 정도 된다. 석굴암에서 오는 계곡과 그 남쪽에서 오는 계곡, 인왕천약수
터에서 오는 계곡이 서로 상류를 자처하며 수성동으로 내려온다. 수성동은 이들을 통해 인왕
산의 맑은 물을 접수받아 청계천으로 흘려보낸다.

상류 계곡들은 계곡 중심부와 달리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이 계곡 역시 바위
틈의 좁은 협곡을 타고 물이 내려온다. 수량이 많으면 폭포도 신이 나고 폭포 밑에도 많은 물
이 고여 조촐히 담(潭)을 이룰텐데, 가을 가뭄이 풍년 수준이라 간신히 물만 축이는 실정이다
. 물과 흙이 있어야 될 자리에는 잡초만 무성해 폭포의 위기감을 더해준다.


▲  협곡을 그리며 내려오는 수성동의 또 다른 상류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온 계곡


인왕산에서 제법 이름이 있는 인왕천약수터도 수성동에 물을 보태고 있었다. 이 물줄기는 거
의 90도 각도가 진 암벽 사이의 좁은 공간을 타고 내려오는데 그 풍경이 나름 절경을 이루며,
조그만 폭포 앞에는 얕은 못과 모래밭이 있어 어린이들이 흙장난을 하며 놀기에 아주 적당하
다.
모래 옆과 다리 주변에 돌로 쌓은 인공의 흔적이 조금 끼어있어 약간의 어색함을 주나 그 외
에는 예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 수성동 상류의 원초적 모습을 살피는데 도움을 준다.


▲  수성동 중심으로 내려가는 상류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온 물줄기)

▲  수성동 풍경을 더욱 돋보이게 꾸며주는 사모정

수성동계곡 한복판에는 이곳의 구수한 양념인 사모정이란 네모난 정자가 자리해 있다. 사모정
이란 네모난 정자를 뜻하는 것으로 달랑 1칸 크기의 아주 조그만 팔작지붕 건물이다.
새색시처럼 단아한 모습으로 계곡을 굽어보고 있는 그는 옛날부터 이곳을 스쳐갔던 정자는 절
대 아니며 계곡을 복원하면서 장식용으로 달아놓은 것이다.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에도 정
자는 나와있지 않고, 수성동 관련 기록에도 정자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허나 계
곡과 나무만 있는 계곡에 전통 양식의 정자(亭子)를 하나 두니 수성동의 풍경이 한층 더 살아
나는 것 같다. 그럼 여기서 수성동에 대해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  사모정 앞을 흐르는 수성동계곡 - 서울 지방기념물 31호

인왕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수성동계곡은 인왕산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서울의 주
요 경승지로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와 한경지략(韓京識 略) 등에 서
울 명승지로 절찬리에 언급된 곳이다. 이 계곡을 예로부터 수성동(水聲洞)이라 불렀는데, 이
는 계곡에 있는 '기린교' 돌다리 밑에 물소리가 청아하고 좋기로 명성이 자자하여 유래된 이
름이다.

수성동계곡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유명한 겸재 정선(鄭敾)이 그린 장동팔경첩(壯洞八景
帖), 즉 장동(壯洞) 지역에 이름난 명소 8곳을 그린 그림의 '수성동'이란 제목으로 어깨를 피
고 등장한다. 여기서 장동은 효자동(孝子洞)과 청운동 일대로 북촌과 더불어 왕족과 사대부(
士大夫)들이 앞다투어 집과 별장을 지었던 금싸라기 땅이다. 특히 이 지역에는 인왕산과 북악
산이 빚은 절경이 많은데, 그중에 장동8경이 대표적이다. (지금은 수성동과 창의문, 대은암
바위글씨 정도만 남아있음)

수성동에 가장 먼저 집을 지은 귀족은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다. 그는 계
곡 아랫쪽 기린교 부근에 비해당(匪懈堂)이란 집을 짓고 살았는데, 나중에 창의문 북쪽에 무
계정사(武溪精舍)란 별장까지 장만했다.
영조(英祖) 시절에는 겸재 정선이 인왕산을 모델로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란 그림
을 남기면서 수성동을 비롯한 장동8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수성동 그림은 계곡 복원에 아주 큰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그 그림에는 기린교를 건넌 선비 3명과 시중을 드는 동자(童子) 1명이
계곡 상류로 걸어가는 모습이 담겨져 있고, 가벼운 붓놀림으로 이끼가 끼어있는 바위와 질감
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도 비오는 날에 이곳을 찾아 '수성동 빗
속에서 폭포를 구경하다(水聲洞 雨中觀瀑)'란 시를 지어 수성동을 격하게 찬양했다.

이 계곡은 첩첩한 산주름 속이 아닌 도성(都城) 안에 자리하여 접근성 또한 아주 착했다. 그
래서 사대부 외에도 중인과 평민들도 많이 발걸음을 했는데, 인근 송석정(宋石亭)과 더불어
조선 후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위항문학(委巷文學, 중인/평민/서얼들이 주도하는 문학활동)
의 성지(聖地)로도 명성을 날렸다.


▲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 (기린교 돌다리가 그려져 있음)

이렇게 인왕산을 든든한 후광으로 두르며 장안의 경승지로 인기를 누렸던 수성동은 1960년대
이후 개발의 칼질이 정신없이 그어지면서 아작나기 시작했다.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 9동이
건방지게 수성동계곡을 깔고 앉았던 것이다. 하여 참으로 아름답고 착했던 수성동의 경관은
99% 망가지고 말았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인근 청풍계나 옥류동처럼 계곡이 거의 증발하는 꼴은 면했지만 아파트
로 인해 계곡 폭도 줄어들고 아파트 사이를 마치 버려진 하천처럼 흘러가면서 완전 천덕꾸러
기 신세가 되어버렸다. 아파트 9동 앞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해 어두컴컴한 지하를 거쳐 역시
나 생매장된 청계천으로 서글프게 흘러가야 했으며, 수성동 뿐만 아니라 도심의 많은 경승지
들이 인간의 욕심 앞에 큰 고통을 받으며 꽃잎처럼 지고 말았다.

그 이후 수성동의 이름 3자는 속인(俗人)들의 뇌리 속에서 점차 시들어가고 동네 사람들만 세
월의 저편으로 잊혀져 가던 계곡의 이름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서울 전문을 자처하는 본인
역시 수성동의 존재를 안 것은 2011년, 그 이전에는 인왕산에 이런 곳이 있는 것도 몰랐고 그
런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존재감이 밑바닥을 기었던 것이다.
 
옥인시범아파트에 깔린 채, 40년 가까이 고통스럽게 살았던 수성동계곡. 개발의 칼질에 빼앗
긴 계곡에도 과연 봄이 올 것인가? 이러다가 수성동 이름 3자가 영구히 지워지는 것은 아닐까
?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계곡을 해방시킬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수성동에게는
절망의 시절이었다.
허나 자연과 인간의 대결에서 거의 자연이 이기듯, 수성동에게도 좋은 소식이 날라왔다. 옥인
아파트가 2008년 재난안전위험시설 C급으로 지정되면서 철거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수성동
의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서울시는 아파트를 밀어버리고 계곡을 복원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우
선 2010년 10월 21일 기린교를 비롯한 수성동계곡 일대를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삼아 늦게나마
문화유산으로 대우를 해주기 시작했다.
이후 인왕산을 가리며 계곡의 목을 조르던 옥인아파트는 입주민을 싹 내보내고 2011년까지 모
두 철거되었으며, 아파트 주변을 통제하고 1년의 복원공사를 벌여 2012년 7월 마무리되었다.

계곡 복원을 위해 전문가와 사회단체, 문화재청에 자문을 구했고 정선의 수성동 그림을 적극
참조했다. 또한 옛 경관을 어느 정도 재현하고자 소나무를 중심으로 상수리나무, 참나무, 산
철쭉 등 우리 고유의 나무 18,477그루를 심었으며, (그중에 구부러진 소나무가 제일 많음) 돌
단풍과 바위취 등 다양한 화초를 심어 주변과의 조화를 꾀했다.
그리고 좁아진 계곡을 크게 넓혀서 계곡 양쪽에 전통 방식으로 돌을 쌓아 암석 지형을 최대한
회복하고자 했으며, 계곡 중간에 전통식 정자를 세워 선비와 지배층의 풍류를 조금이나마 느
끼도록 했다. 그리고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곳으로 추정되는 계곡 아랫쪽(기린교 동쪽)
에 관람공간을 조성해 정선의 눈으로 계곡을 바라볼 수 있게끔 했으며, 계곡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산책로를 닦아 인왕산과 어우러진 시민공원의 성격도 겸하게 했다.

수성동계곡 공원에는 복원된 계곡을 비롯하여 이곳의 터줏대감이자 유일한 오래된 존재인 기
린교가 있으며, 옥인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공원 북쪽에 아파트의 잔재를 일부 남겨 수성
동을 거쳐간 개발 지상주의의 그릇됨을 일깨우게 했다.
상류 부분과 사모정 주변은 계곡 출입이 그런데로 가능하나 계곡 하류와 기린교 주변은 통제
하고 있다. 게다가 계곡을 복원했다고는 하지만 완전 옛날 모습은 아니며 여전히 비슷한 자리
(옛 옥인아파트 9동 자리로 지금은 계곡 관람공간으로 바뀜)에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해 청계
천으로 흘러간다.
청계천까지 이어지는 전 구간을 모두 끄집어내어 복원하면 좋겠지만 이미 시가지가 꽉 들어차
거의 불가능하다. 계곡이 생매장되는 구역은 계곡이 상당히 밑으로 내려간 상태이고, 주변 바
위들도 날카로운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어 사고의 위험이 있다. 기린교 같은 경우는 계곡이 3m
밑에 흐르고 있으므로 조금 아찔하다.

도시 개발의 칼질에 희생된 수성동은 개발의 난도질이 무조건 능사가 아님을 보여준다. 안그
래도 사람도 허벌나게 많고, 빌딩도 많고, 공기도 탁한 서울 도심에 마음 편히 의지할 수 있
는 공간이 하나 더 생겼으니 그 가치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비슷하다 할 것이다.
비록 완전하게 복원된 것은 아니나 가급적 옛 모습을 되살리고자 했고, 복원공사를 벌이는 중
에도 여러 의견을 수렴해 어색함을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그래서 인왕산이 베푼 옥계수를 모
아 계곡을 재현했으니 어설프게 재현되어 전기와 세금만 축내는 청계천과 달리 살아있는 계곡
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79-1, 185-3외


▲  도심을 향해 흘러가는 수성동계곡 (사모정 주변)

인왕산자락길은 수성동계곡 상류를 지나간다. 이번은 어디까지나 자락길이 중심이라 그가 지
나는 부분만 살폈을 뿐, 기린교를 비롯한 나머지는 모두 통과했다. 수성동은 이미 20번을 넘
게 가본 곳이고 자락길 종점까지 아직 갈 길이 멀기 때문에 굳이 자세히 살펴볼 필요는 없었
다.


▲  수성동에서 남쪽으로 넘어가는 인왕산자락길
내용 분량 관계로 본글은 여기서 마무리를 짓는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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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11월 2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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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쪽 끝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 (도봉산 능원사, 도봉사, 진주류씨묘역, 무수골)

 


' 도봉산 봄나들이 '

▲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윗무수골)

▲  능원사 용화전

▲  도봉사

 


 

도봉산(道峯山, 739.5m)이 뻔히 바라보이는 그의 포근한 그늘, 도봉구 도봉동(道峰洞)에서
15년이 넘게 서식하고 있지만 그에게 안긴 횟수는 의외로 매우 적다. 그가 집에서 멀면 모
르지만 버젓히 그의 밑에 살고 있음에도 이렇다. 그렇다고 내가 산을 싫어하거나 돌아다니
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며, 도봉산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상하
게도 손과 발이 잘 가질 않았다. (도봉산 밑도리까지 포함하여 1년에 2~3번, 많으면 4~5번
정도 찾는 편임)
그래도 우리 동네의 듬직한 뒷동산이자 꿀단지 같은 존재인데, 가끔은 가줘야 도봉산도 서
운해 하지 않겠지? 하여 거의 1년 여 만에 그의 품을 찾았다.

해가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3시에 집을 나서 서울시내버스 142번(도봉산↔방배동)을 타
고 도봉산 종점으로 이동했다. 거리는 불과 정류장 4개. 때가 때인지라 내려오는 산꾼들의
행렬이 마치 성난 파도와 같이 밀려온다. 거센 파도에서 아슬아슬하게 요트를 타듯 그들을
뚫고 북한산둘레길 안내도가 있는 통일교에 이른다.
여기서 직진을 하면 도봉서원(道峰書院), 천축사(天竺寺), 도봉산 정상, 포대능선, 만월암
(滿月庵) 방면으로 이어지고, 왼쪽 통일교를 건너면 능원사와 도봉사로 이어지는데 북한산
둘레길은 여기서 '도봉옛길'이란 부속 간판을 달고 남북으로 힘차게 흘러간다.
마음 같아서는 정상까지 가고 싶으나 늘 시간을 구실로 정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능원사
, 도봉사 방면 도봉옛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 길을 5분 정도 오르면 황금색으로 치장한 능
원사가 마중을 한다.


▲  능원사, 도봉사로 인도하는 숲길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구간)


 

♠  황금사원을 꿈꾸는 현대 사찰, 도봉산 능원사(能園寺)

도봉사 동쪽에 둥지를 튼 능원사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창건된(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음) 따끈
따끈한 산사(山寺)로 고색의 내음은 아직 여물지도 못했다. 나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현대 사찰에는 무뚝뚝한 편이라 성북동 길상사(吉祥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문화유산을 간
직한 절을 제외하면 딱히 눈길도 주지 않지만 동양 최대의 황금 사원으로 유명한 서울 구산동
수국사(守國寺, ☞ 관련글 보러가기)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정도로 황금 사원으로 꾸몄다는
점이 꽤나 끌렸다. 솔직히 인간 가운데 황금을 싫어하는 사람이 고려의 마지막 보루(堡壘)인
최영(崔榮)장군 등을 빼고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도봉산 능원사는 여주 능원사의 말사(末寺)로 그들 모두 미륵불(彌勒佛)을 내세운 미륵도량이
다. 근래 지어진 절이라 딱히 볼거리도, 내세울 것도 없지만 불교와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는
황금을 테마로 황금색 단청(丹靑)을 모든 건물에 입혀 찬란한 황금사원임을 속세에 진하게 어
필하고 있다. 절 앞을 지나던 산꾼들도 황금색 건물에 매료되어 자연스레 경내를 기웃거리니
능원사의 마켓팅은 크게 성공한 셈이다.

황금 단청은 중원대륙에서 문을 열거나 대륙을 장악했던 나라의 궁궐에서 즐겨 애용했던 것으
로 그들은 하나 같이 황제(皇帝)를 칭했는데, 황색이 바로 황제를 상징한다. 하여 황금색 단
청과 지붕을 선호했다. (그게 중원대륙의 법칙이기도 했음) 반면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한 배
달 민족은 황금색 단청과 기와를 즐겨하지 않고 다양한 색채를 입힌 이른바 컬러풀(colorful)
한 단청을 선호했다.
근래 들어 수국사와 여수 향일암(向日庵) 원통보전(圓通寶殿), 그리고 이곳 능원사에서 황금
색 단청을 선보이며 단청의 새로운 역사를 열었다. 이렇게 부처를 향한 절대적인 존경심이 금
빛찬란한 단청미를 탄생시켰고, 현대 사찰에 무정한 나를 황금을 미끼 삼아 이곳으로 낚은 것
이다.

능원사는 경내로 인도하는 일주문부터 황금색 단청을 입혀놓아 벌써부터 황금 사원의 냄새를
진동시키는데, 그 문을 들어서면 곧게 깔린 짧은 길이 펼쳐지고 바로 법음각과 용화전, 철웅
당 등이 모습을 비춘다. 경내는 법당(法堂)인 용화전을 비롯해 법음각. 철웅당(鐵雄堂) 등 5~
6동의 건물이 전부인 조촐한 규모이나 건물에 죄다 황금색 떡칠을 하여 마치 조그만 황궁(皇
宮)
같다.

▲  능원사 일주문(一柱門)

▲  일주문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길

▲  범종을 머금은 법음각(法音閣)
그 흔한 범종각 대신 부처의 소리를 뜻하는
법음각을 칭했다. 건물의 모습도 4각형이
아닌 6각형을 취했다.

▲  용화전 뒷쪽에 숨겨진 샘터
능원사에는 2곳의 샘터가 있어 중생들의
목마름을 아낌없이 해소해준다.


▲  능원사 용화전(龍華殿)
지붕 용마루 양쪽 끝에는 무려 용을 잡아먹는다는 금시조(金翅鳥)를 배치하여
화마 등 악귀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다.


능원사의 중심 건물인 용화전은 용화세계의 주인공이자 막연히 56.7억년 후에 나타난다는 미
륵불의 거처이다. 이곳이 미륵도량이다보니 자연히 용화전이 법당의 역할을 도맡게 되었는데,
정면 5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단청과 커다란 지붕을 받치는 공포(空包)는
거의 황금색 일색이라 사치와 장엄함의 깊이를 더욱 짙게 해준다.
건물 내부에는 미륵불을 중심으로 석가세존불, 약사여래불, 관세음보살이 봉안되어 있으며,
다들 자애로운 표정으로 중생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들 뒷쪽에는 헤아림이 무색할 정도로 조
그만 금동불(金銅佛)이 빼곡히 자리를 채우니 건물 전체가 그야말로 금색 투성이다.


▲  용화전 불단에 봉안된 미륵불(가장 큰 불상)과 석가여래(제일 오른쪽),
약사불(미륵불 왼쪽), 관세음보살<가장 왼쪽에 보관(寶冠)을 쓴 보살상>

▲  황금색으로 치장된 용화전 현판과 단청, 공포, 수막새의 위엄

공포와 단청이 죄다 황금색으로 도배된줄 알았더만 가까이서 보니 붉은색, 녹색, 파란색 계열
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어 단청의 고유 맛은 그런데로 살렸다. 용화전 가운데 칸 좌우 기둥
윗쪽에는 봉황을 배치하여 지붕 용마루에 배치된 금시조와 함께 만약에 모를 화마(火魔)의 공
습에 대비한다. 이곳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황금색에 눈이 먼 나머지 불지르기 아깝다
고 판단하여 그냥 돌아서지는 않을까?


▲  용화전의 경쾌한 뒷모습

▲  용화전 뜨락에 세워진 하얀 피부의 5층석탑
근래에 지어진 탑으로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의 매끈함을 자랑한다.

▲  용화전 주차장 - 숲 너머로 수락산(水落山, 638m)이 바라보인다.

▲  능원사의 또다른 샘터

용화전 밑에는 석조를 갖춘 샘터가 놓여져 있다. 앙련(仰蓮)이 새겨진 반원 모양의 석조에는
도봉산이 베푼 물이 호수를 이루고, 그 옆에는 용과 구름무늬 등이 새겨진 네모난 석조가 있
는데, 동그란 여의주(如意珠)를 단단히 물고 있는 용머리 조각이 인상적이다.
용이 되려면 여의주가 있어야 되고 그래야 승천이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석조에 새겨진 무늬
를 보면 용의 손에 여의주로 보이는 동그란 존재가 눈에 띄어 마치 여의주 획득 기념으로 하
늘로 요란하게 비상하는 용의 모습을 담은 듯 하다.

* 능원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02 (도봉산길 87 ☎ 02-954-6060)


▲  여의주를 문 용머리

천하에 무려 300곳이 넘는 절을 돌아다니며 많은 샘터를 보았고 샘터에 달린 용머리, 거북이
조각도 무수히 보았지만 이곳처럼 여의주까지 문 용머리는 처음 본다. 아마도 능원사의 원대
한 꿈을 저 여의주를 문 용머리로 간략하게 표현한 듯 싶은데, 너무 겉모습과 돈에만 연연하
지 말고 부처와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어디선가 숨어서 직무유기를 일삼으나 마음만큼은 속
세 걱정에 잠 못이루는 미륵불의 마음처럼 철저하게 속세를 위하는 공간이 되기를 주문해본다.


▲  능원사에서 도봉사로 올라가는 숲길 (도봉옛길)


 

♠  고려 초기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도봉산의 오래된 고찰 ~
도봉사(道峰寺)

능원사를 둘러보고 도봉옛길을 따라 서쪽으로 2~3분 가면 도봉산의 이름을 그대로 딴 도봉사
가 슬그머니 모습을 비춘다.
도봉산 동남쪽 자락에 자리한 도봉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고려 초인 968년에 혜거국사
(惠居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971년 혜거가 광종(光宗)의 초청으로 궁궐 원화전(元和殿)
에서 대장경(大藏經)을 강의하자 감동을 먹은 광종은 칙령(勅令)을 내려
'국내 사원 중에 오직 3곳만은 머물러 두어 움직이지 말 것이며, 문하의 제자들이 주지를 상
속하여 대대로 단절되지 않도록 이를 규정하라'
하였다.
이때 고달원(高達院, 여주 고달사)과 희양원(曦陽院, 문경 봉암사), 도봉원(道峰院)을 특별선
원으로 삼았는데, 그 도봉원이 바로 도봉사로 여겨진다.

1010년 요(遼)나라(거란) 성종이 강조(康兆)의 난과 목종(穆宗)의 폐위를 이유로 40만의 대군
을 휘몰아 고려를 침공했다. 당시 고려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강조는 직접 30만 군사를 이끌
고 검차(劍車)와 잘 훈련된 군사를 바탕으로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만 방심하는 통에
크게 패하고 만다. 강조는 포로로 잡혀 처단되고 거란군은 그 기세로 폭풍 질주하자 현종(顯
宗, 재위 1009~1031)은 눈물을 머금고 피난길에 올랐다.

현종은 채충순(蔡忠順, ?~1036)의 호위를 받으며 임진강을 건너 창화현(昌化縣, 의정부)에 이
르렀는데, 야밤에 적의 습격을 받자 왕을 시종하던 이들은 뿔뿔히 도망치고 채충순과 지채문(
智蔡文, ?~1026) 등이 적을 격퇴하여 왕을 지켰다.
지채문이 왕의 말고삐를 잡고 지름길로 도봉사에 들어가 여기서 잠시 국정을 살폈으며, 거란
군이 계속 추격하자 한강을 건너 멀리 나주(羅州)까지 내려가게 된다. 이렇게 도봉사에서 잠
시 머문 인연으로 현종은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6천 권 상당수를 그곳에서 제작하게 했다.
또한 고려 중기 때 정각국사 지겸(靜覺國師 志謙, 1145~1229)은 1170년 승과(僧科)의 선선(禪
選)에 급제했는데, 그의 이름은 전학돈(田學敦)이다. 바로 그해 삼각산(북한산)을 찾아 도봉
사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는데, 꿈에서 산신(山神)이 나타나
'화상(和尙)의 이름은 지겸(志謙)인데 왜 지금의 이름을 쓰는가?'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쿨
하게 지겸으로 이름을 갈았다.

2012년 서울문화유산연구원은 도봉사 바로 북쪽 산너머에 있는 도봉서원(道峰書院)을 복원하
고자 기존 건물을 부시고 터를 정비하면서 5개월 정도 발굴조사를 벌였는데, 뜻밖에도 옛 영
국사(寧國寺) 시절의 고려 때 유물 77점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2014년 8월 21일 국립고궁
박물관 강당에서 공개되었는데 그중 '도봉사'라 쓰인 청동제기가 있어 도봉사에서 빌려오거나
(또는 가져오거나) 또는 영국사의 옛 이름이 도봉사인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영국사는 도
봉서원에 있던 도봉산의 대표 사찰로 1573년 유림들이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서원을 깔았다.

여기까지 보면 도봉사는 고려 때 꽤나 잘나갔던 절임을 알 수 있다. 허나 13세기 이후 근대까
지 적당한 발자국을 남기지 못했다. 그냥 단순히 전쟁과 화재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다고 나올
뿐이다. 13
세기 이후 이렇다할 내력이 없는 것을 보면 13세기 중반 몽골(원)의 지긋지긋한 침
공에 때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현재 도봉사는 장대한 내력의 걸맞지 않게 고색의 내음이 전
혀 없고, 오래된 유물도 기껏해야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치성광여래3존도가 고작이다. 하여
고려 때 도봉사가 이곳이 아니라는 의견도 적지 않으며, 도봉서원에 있던 영국사가 도봉사란
의견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히 도봉서원터에서 발견된 도봉사라 쓰인 청동제기는 그런 의
견에 크게 부채질을 한다.

한참 동안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도봉사는 19세기 후반에 벽암(碧巖)이 현 자리에 절을 세우고
도봉사를 칭하면서 그 이름이 다시 살아났다.
한때 산사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를 열어 절의 명성을 아낌없이 드날렸으나 종파 간의 갈등과
주지승의 재정 낭비로 2006년에 절 전체가 경매에 나오는 불상사까지 발생했다. 절이 북한산
국립공원 내부에 있어 경매 수요가 없다가 다행히 적당한 임자를 만나 조금씩 불사를 벌여 지
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2층짜리 대웅전을 비롯해 극락정사, 산신각, 선방 등 약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
장문화유산과 오래된 유물은 19세기 후반에 그려진 치성광여래삼존도(熾盛光如來三尊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9호
, 관람이 거의 어려움)가 고작이다. 그리고 예전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
재 151호
지정된 철불좌상(고려 초기 불상)도 가지고 있었으나 2006년 절 경매 이후 한국불
교미술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애당초 도봉사와 관련이 없는 존재로 왜정 말기에 왜
인(倭人)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해방 이후 종로구 청운동(淸雲洞)에 있던 자명사가 가지고 있
다가 자명사가 철거되자 도봉사로 흘러들어온 것이다.
그밖에 부처의 사리를 담은 뿌리탑과 빈자일등상(貧者一燈像), 심우도 등의 소소한 볼거리가
있고, 절 앞에는 비록 짧지만 메타세콰이어 숲길이 닦여져 있다.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이 절
앞을 지나가고, 경내가 숲에 포근히 감싸인 푸른 지대로 도심이 지척임에도 공기도 청정하다.

도봉산 그늘에 산지 15년이 넘었고, 서울에 흩어진 오래된 절 상당수에 발도장을 찍었지만 도
봉사는 이번이 첫 인연이다. 2005년 석가탄신일에 인연을 지으려고 했지만 무리한 사찰 순례
일정으로 찾지 못하고 이제서야 격하게 인연을 짓는다.


▲  활짝 열린 도봉사 정문

도봉사는 그 흔한 기와집 일주문(一柱門)이 없다. 대신 절과 산길의 경계에 여닫이식 철제 정
문을 두어 일주문의 역할을 담당한다.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는 문이 일주문을 흉내내며 활
짝 열려있지만 달님의 세상이 되면 미련 없이 문을 꽁꽁 걸어잠궈 열린 마음의 일주문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정문 앞 우측에는 금동을 씌운 지장보살상이 육환장(六環杖)을 쥐어들며 중생을 맞이하고 정
문 좌측 담장 벽에는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져 있다.


▲  정문 옆 담장에 그려진 심우도
심우도는 방황하는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야생 소를 길들이는 것에 비유하여 10단계로 표현한 그림이다. 10개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어 십우도(十牛圖)라 불리기도 하며 보통
법당 바깥 벽에 많이 그려둔다.

▲  정문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연등길

정문을 들어서면 뿌리탑까지 곧게 오르막 길이 펼쳐져 있다. 길 좌우로 요사(寮舍), 선방(禪
房) 등으로 쓰이는 건물들이 뿌리를 내렸는데, 그 길의 끝에 이르면 뿌리탑과 대웅전이 모습
을 드러낸다.

▲  계단 옆 경사면에 꽃으로 다듬은
커다란 절 마크

▲  경내 구석에 옹기종기 모인 3층석탑과
여러 공덕비들


▲  도봉사의 명물, 뿌리탑

대웅전 앞에는 불교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부처의 진신사리 3과를 머금은 뿌리탑이 장대한 모
습으로 자리해 있다.
예전에는 진신사리를 봉안한 절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1990년대 이후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하
여 이제는 너무 흔해졌다. 서울만 하더라도 도봉사와 삼천사(三千寺), 승가사(僧伽寺), 조계
사(曹溪寺) 등이 사리를 봉안하고 있다. 부처의 사리가 수만 과가 넘는다고 하더니만 아직도
나눠줄 수량이 많은 모양이다. (상당수 인도와 동남아에서 가져온 것임)

1982년 3월 한국외대 부총장 최창성 교수가 태국(타이) 국립사원 홧벤짜마버핏의 종정(宗正)
프라풋타부이윙을 초빙해 원각회(圓覺會)에서 법회를 연 적이 있었다. 이 인연으로 태국에서
진신사리 3과를 얻게 되었고, 부총장은 도봉사에 이를 기증했던 것이다.

탑의 기단은 특이하게 계란처럼 동그란 모습인데, 이는 공(空)을 뜻한다고 한다. 그 위에 5층
의 몸돌을 세웠으며, 1층 몸돌은 유난히 두텁다. 그 안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고, 동쪽에 관
세음보살, 남쪽에 석가불, 서쪽에 아미타불, 북쪽에 지장보살상을 새기고 그 주변에 16나한상
을 둘렀다. 탑 주위로 12지신을 새긴 난간을 둘렀고, 탑 위에는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를
두었다.

탑의 전체적인 모습은 이 땅에 흔한 탑이 아닌 특이한 모습의 이형탑(異形塔)으로 탑 밑에는
석굴암(石窟庵) 본존불(本尊佛)을 본따서 만든 석가불이 당당한 체격으로 앉아있으며, 그 앞
에는 석등 2기가 서 있다. 그들 좌우로 뿌리탑과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늘어뜨렸는데,
이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뿌리탑의 장엄함을 마음껏 드러낸다.


▲  도봉사 대웅전(大雄殿)

뿌리탑 뒷쪽에 자리한 대웅전은 도봉사의 법당으로 이 땅에 흔치 않은 2층짜리 목조 불전(佛
殿)이다. 근래에 지어진 건물로 겉모습은 2층이지만 속은 1층이며, 불단에는 관세음보살과 지
장보살, 석가불로 이루어진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불 자리에는 원래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철불좌상이 앉아있었으나 그가 절을 떠나자 새로 금동석가불을 만들어 본존불의 자리
를 채웠다.

▲  우측에서 바라본 대웅전

▲  좌측에서 바라본 대웅전과 6층석탑


▲  대웅전 석가3존불

석가불 좌우에는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각자의 상징물인 육환장과 꽃을 쥐어들며 자애로운
표정으로 서 있고, 그들 사이에 석가불이 연꽃대좌(臺座)에 앉아 중생을 굽어본다. 그들 뒤에
는 그 흔한 후불탱 대신 바퀴 모양의 금동 전륜(轉輪)이 두광(頭光)처럼 떠있다.

▲  대웅전 지장탱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대웅전 내부 좌우 벽에는 지장탱과 신중도, 석가불도 등의 탱화 4점이 걸려있다. 이중 지장탱
과 신중도는 빛바랜 때가 좀 낀 것으로 보아 20세기 초~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나머
지 탱화들은 20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아직 여물지 않았다.


▲  대웅전 양쪽에 배치된 가릉빈가 운판(雲版)과 6층석탑

운판은 범종, 법고, 목어와 더불어 불교 의식에 쓰이는 4물(四物)의 일원으로 보통 범종과 같
은 방을 쓰기 마련이다. 허나 도봉사는 절의 필수품인 범종(梵鐘)이 없어서 운판을 범종 대신
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대웅전 좌우에 일주문 축소판 모양의 건물을 세우고 커다란 운판을 북
처럼 걸어두어 아침 3시 새벽예불과 오후 6시에 도봉산에 은은하게 운판 소리를 울린다. 운판
피부에는 불교의 새인 가릉빈가<迦陵頻伽, 극락조(極樂鳥)>를 새겨 조촐하게 조형미를 고려했
다.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극락정사
(極樂精舍, 극락전)

▲  극락정사의 주인인 금동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

         ◀  빈자일등상(貧者一燈像)
대웅전 우측에는 빈자일등상이라 불리는 생소
한 이름의 석물이 자리해 있다. 처음에는 보이
는 모습 그대로 코끼리 등에 용과 연꽃무늬 등
이 새겨진 대좌를 얹히고 그 위에 선 관세음보
살 누님 상이라 생각했는데, 집에 와서 확인해
보니 '가난한 자의 등불 하나'를 뜻하는 빈자
일등상이었다.
빈자일등상은 현우경(賢愚經)의 빈녀난타품(貧
女難陀品)에서 비롯된 것으로 다음의 사연이
깃들여져 있다.
인도 사위국(舍衛國)에 난타(難陀)라는 가난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주로 구걸로 삶을 연명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나라에 석가모니가
찾아왔다. 인도의 대중스타가 된 그의 방문 소
식에 나라 사람들은 앞다투어 몰려가 공양과
등불을 올리며 그를 환영했는데, 난타도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궁색한 형편이
라 그에게 줄 선물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몇푼이라도 벌기 위해 거리로 나가 구걸을 했으나 겨우 1푼 정도의 돈을 마련하
는데 그쳤다. 그 돈을 들고 기름 장수를 찾아가 기름을 청했으나 당시 1푼으로는 어림도 없었
다. 기름 장사도 코웃음을 치며 거절했던 것이다.
그러자 난타가 눈물로 단장의 심정으로 호소하니 기름 장수도 이내 태도를 바꿔 돈하고 상관
없이 많은 양의 기름을 그녀에게 내주었다. 이에 단단히 감동을 먹은 난타는 절을 100번 이상
올리며 감사의 뜻을 표하고 등불을 들고 석가모니를 찾아가 다른 사람들이 갖다 놓은 등불들
사이에 정성스럽게 놓았다. 마치 그가 보아주기를 바라듯이..
그런데 다음 날 이상한 일이 생겼다. 등불의 밥줄인 기름이 말라 감에 따라 하룻밤 사이에 등
불이 죄다 꺼졌으나 이상하게도 난타의 등불만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등불
은 더욱 밝고 힘차게 타오르는 것이다. 그 등불을 본 석가모니는 난타의 사연을 전해 듣게 되
었고 결국 그를 여자 승려인 비구니(比丘尼)로 받아들여 제자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빈자일등의 사연이다. 즉 물질과 풍요로움보다는 빈약하나 정성과 정신이 더 소
중하다는 의미가 되겠다. 돈님을 숭배하고 사는 오늘날 인간들에게 제대로 귀감이 되는 내용
이지만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것이 인간인지라 빈자일등은 여전
히 외면을 받고 있고, 부자1등만 찬양을 받는 것이 현재의 세태이다. (종교도 예외는 아님)
코끼리는 부처의 법을 상징하며, 인도에서 많이 살고 있는 동물이다. 또한 그 위에 있는 여인
은 관세음보살 누님이 아닌 바로 빈자일등의 주인공, 난타이다. 도봉사에서 빈자일등상을 세
운 것도 그 교훈을 닮겠다는 것인데, 지나치게 겉모습과 돈에만 치중하지 말고 비록 소박하더
라도 중생을 위하는 아름다운 공간이 되기를 염원해본다.


▲  가건물로 이루어진 산신각(山神閣)

대웅전 우측 높은 곳에는 가건물로 이루어진 허름한 산신각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
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산신각은 그 이름 그대로 산신을 봉안하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산신
과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같은 자리에 봉안했다. 산신각은 절에 따라 독성 외에 칠성(七聖,
치성광여래)까지 봉안해 삼성각(三聖閣)의 역할을 하기도 하며, 도봉사의 유일한 지정문화재
인 치성광여래3존도가 여기에 있나 싶어 기웃거려 보았으나 값비싼 존재라 이곳에는 없었다.
하긴 도봉사에서 가장 비싼 몸인데, 이런 가건물에 봉안할 리는 없겠지.


▲  산신각 산신과 독성

호랑이 등을 의자 삼아 앉아있는 산신, 그 곁에는 하얀 머리의 독성이 나란히 앉아 마치 경로
당 분위기를 자아낸다. 비록 그들이 앉은 방석은 다르지만 이렇게 산신과 독성이 같은 자리에
봉안된 것을 여기서 처음 본다. 그들 뒤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 소나무, 산이 그려진 산신
탱이 걸려있다
.

* 도봉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494-2 (도봉산길 89, ☎ 02-954-7743)


 

♠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  도봉사 앞에 펼쳐진 메타세콰이어 숲길

능원사와 도봉사를 차례대로 둘러보고 그들 앞
을 지나는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을 타고 무수
골로 넘어갔다.
도봉옛길은 다락원에서 광륜사, 도봉동문(道峰
洞門) 바위글씨, 능원사, 도봉사, 진주류씨묘
역, 윗무수골을 거쳐 무수골 세일교로 이어지
는 3.1km의 산길로 거의 느긋한 수준이며, 통
행이 좀 어려운 곳에는 나무데크길 닦아 통행
의 편의성을 높였다.
게다가 도봉사와 광륜사 등의 오래된 절과 도
봉동문 바위글씨, 진주류씨묘역, 광륜사 느티
나무 등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볼거리도 산재
해 있어 역사의 향기도 진하다.
옛날 서울에서 도봉산과 도봉서원으로 가던 산
길이라 도봉옛길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다락원에서 '다락원길'로 간판을 바꾸어 북쪽
으로 흘러가고, 무수골에서는 '방학동길'로 간
판을 갈고 남쪽으로 흘러간다.

도봉사 앞에는 비록 짧지만 늘씬하게 솟은 메타세콰이어가 조촐하게 숲길을 이루며 하늘과 이
른 무더위를 긴장시킨다. 메타세콰이어는 은행나무와 더불어 천하에서 매우 오래된 화석나무
로 2차 세계대전 시절에 중원대륙에서 발견되었다.
이 나무에 단단히 매료된 아메리카와 유럽 양이(洋夷)들은 그 나무를 가져가 그들 나라에 심
었고, 이렇게 서양식 이름표를 달며 천하에 보급되었는데, 우리나라에는 1950년대에 미국산
나무가 들어와 뿌리를 내렸다.

메타세콰이어 하면 다들 전남 담양(潭陽)에 있는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을 떠올릴 것이다. 그
곳은 이제 담양을 넘어 천하의 메타세콰이어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받고 있는데, 시작은 단
순히 도로 가로수였으나 점차 관광지로 몸값이 높아지면서 이제는 담양 꿀단지로 단단히 자리
를 잡았다.
도봉사 메타세콰이어 숲길은 조성된지 얼마 안된 것으로 나이는 비록 적지만 훤칠한 키를 자
랑하며, 늘씬하게 솟은 모습이 시원스럽기 그지 없다. 참고로 서울에서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이곳 외에 서남물재생센터공원과 용산가족공원, 안산자락길, 하늘공원 등
이 있다.


▲  도봉옛길 도봉사 서쪽 관문

▲  무덤을 잃은 채, 약간 기울어진 문인석(文人石)

도봉옛길을 굳이 2개로 나눈다면 다락원~도봉사 구간과 도봉사~무수골의 남쪽 구간으로 구분
할 수 있다. 도봉사~무수골 구간은 다락원~도봉사 구간보다 완만한 산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간에 조선 전기에 조성된 진주류씨묘역이 자리해 있다. 도봉산 자락이 명당(明堂) 자리로
이름이 높았고, 서울과도 가까워 왕족과 사대부(士大夫)의 무덤 자리로 인기가 높았다. 하여
도봉산 자락인 방학동(放鶴洞)과 도봉동에 조선시대 상류층의 무덤이 즐비하다.
그중 도봉옛길 남쪽에 자리한 무수골에 전주이씨 영해군파(寧海君派)묘역(☞ 관련글 보기)과
과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과 의령옹주(義寧翁主)묘역, 함열남궁씨묘역, 도봉옛길에 자리한
진주류씨묘역 등은 후손들의 지극정성으로 잘남아있지만 관리 소홀로 인해 자연의 일부로 녹
아든 묘도 적지 않다.
도봉사에서 도봉옛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보면 문인석 1기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무덤을 잃
고 홀로 남아있다. 그는 고된 세월에 매우 지쳤는지 옆으로 좀 기운 상태로 이를 안스럽게 본
어떤 사람이 나뭇가지를 세워 문인석의 등을 받쳐들게 했다.
허나 문인석이 아무리 우울한 처지라고 해도 몸을 지탱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지만 무
덤을 잃고 버려진 자신에게 그런 배려를 한 점에서 문인석도 적지 않게 고마움을 느꼈을 것이
다. 문인석이 지켰을 무덤은 그 주변을 파보면 아마 나올 것이다.


▲  무덤이 졸지에 조그만 언덕이 되버린 현장

문인석 부근에는 버려진 무덤이 하나 있다. 무덤 밑에 석축까지 있는 것을 보면 지체 높은 양
반가의 무덤이 분명해 보이는데, 무덤이 버려지면서 봉분(封墳)에는 공자(孔子) 무덤처럼 무
려 나무까지 자라났다. 앞서 문인석이 이 무덤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나 문인석이 입을 열지
않으니 낸들 알 도리가 없다.


▲  도봉옛길 고갯길 (진주류씨묘역 북쪽)

▲  도봉옛길 (진주류씨묘역 부근)

▲  진주류씨묘역 류양 신도비(柳壤 神道碑)

도봉옛길 남쪽 구간 중간에는 진주류씨묘역이 자리해 있다. 산길 좌우에 자리해 있어 만나기
도 매우 쉬운데 산길 가에 이 묘역의 제일 어른인 류양 신도비가 있다.
이곳은 진주류씨 류양 일가의 묘역으로 15세기에 활약했던 류양이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
) 이후 무덤 자리로 매입했다. 그 토지에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 류양이 제일 먼저 묻혔고,
그의 아들인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 류첨정
(柳添汀), 류첨정의 아들인 좌의정(左議政) 류보(
柳溥)와 진양군(晉陽君) 류영(柳濚), 류영의 아들인 진명군(晉溟君) 류사기(柳師琦), 류보의
아들인 사헌부 감찰 류사상(柳師尙) 묘 등이 자리한다. 이들은 15~16세기에 활약했던 인물로
근래에 무덤에 다소 손질을 가하긴 했으나 조선 전기 무덤 양식을 그런데로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무수골에는 진주류씨의 제각(祭閣)이 있다.

북한산둘레길 이전에는 한가한 산골로 산꾼의 왕래도 드물었으나 둘레길이 개척되면서 산꾼들
의 왕래가 빈번해졌다. 둘레길이 묘역 중앙을 지나가기 때문이다. 북한산둘레길로 그 존재가
드러난 명소의 하나로 묘역은 다행히 개방되어 이들을 둘러볼 수 있으나 몇몇 몰지각한 산꾼
들이 묘역에 자리를 피고 밥이나 간식을 먹거나 나물을 캐는 행위 등을 벌이고 있어 묘역을
개방한 진주류씨 집안의 뜻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이들 묘역은 그들 조상의 무덤이자 소중
한 문화유산으로 무덤을 둘러보거나 답사를 하는 것 외에 행위는 무조건 삼가해야 된다.
묘역 사진은 본인의 귀차니즘으로 담지는 않았고 최근에 만든 류양 신도비만 담는 선에서 끝
냈다. 도봉산 자락에 널린게 조선시대 상류층의 무덤이다보니 그리 끌리지는 않았다.


▲  도봉옛길 윗무수골 관문

진주류씨묘역을 지나 남쪽으로 조금 가면 윗무수골 관문이 나온다. 그 관문을 지나면 윗무수
골로 무수골 윗쪽에 자리해 있어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곳은 도봉산 자락에 묻힌 산
골마을로 밭과 계곡이 펼쳐져 있고, 숲이 무성해 이곳이 정녕 서울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
든다. 갑자기 지방의 어느 시골로 순간이동을 한 기분이다.


▲  도봉옛길 윗무수골 구간 ①

▲  도봉옛길 윗무수골 구간 ②
도봉옛길 윗무수골 구간은 무수골 세일교까지 1차선 크기의 시골길이
펼쳐져 있다. 서울에서 거니는 시골길의 맛은 참 담백하다.

▲  윗무수골과 무수골이 만나는 세일교 주변

윗무수골 관문에서 7분 정도 시골길을 거닐면 무수골과 만나는 세일교이다. 여기서 도봉옛길
은 묵은 이름을 버리고 방학동길로 간판을 바꾸어 연산군묘 방면으로 흘러간다. 세일교를 건
너 무수골 안쪽으로 들어가면 무수골의 주인인 영해군파묘역이 나오며, 산골을 무색케하는 너
른 논이 펼쳐져 있어 이곳이 꿈인가 생시인가 의심될 정도로 고개를 또 갸우뚱하게 만든다.


본글은 여기서 끝, 무수골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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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10월 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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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동북쪽 지붕을 거닐다. 수락산 구석구석 나들이 ~~~ (노원골, 수락산보루, 서울둘레길, 동막골, 도선사)



~~~~~  서울의 동북쪽 지붕, 수락산 여름 나들이
~~~~~
(수락산보루, 도선사, 동막골)

   
서울둘레길 수락산 동막골 구간

▲ 수락산보루
◀ 서울둘레길 동막골 구간
▶ 동막골 숲길
▼ 도선사 석삼존불상

   

 


 

서울의 동북쪽 지붕을 이루고 있는 수락산(水落山, 638m)은 상계1동에 살던 10대~20대 시
절 나의 뒷동산이다. 지금은 바로 옆 동네인 도봉동(道峰洞)에서 도봉산(道峯山, 720m)의
그늘을 받으며 살고 있지만 수락산이 뻔히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라 종종 그의 품을 찾
곤 한다. 그곳에는 계곡과 명소, 오래된 절 등 구수한 볼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수락산 서울 구역에 남아있는 미답처(未踏處)를 일부라도 지우고자 아직 발자국
을 남기지 못한 수락산 보루터와 서울둘레길 수락산 구간 일부, 그리고 오래된 석불을 간
직한 도선사를 찾았다.


 

♠  수락산 노원골과 수락산보루터

▲  노원골 (노원골약수터 주변)

이번 수락산 나들이는 수락산의 주요 기점의 하나인 노원골에서 시작했다. 상계1동에 살 적에
노원골과 인근 수락골(벽운동계곡)을 많이 이용했는데, 물을 뜨러 갈 때는 보통 노원골을 선
호했다. 수락골은 제대로된 샘터를 만나려면 상당히 올라가야 했지만 수락골은 조금만 올라가
도 샘터가 무수히 나왔기 때문이다.

노원골은 수락산을 장식하는 주요 계곡으로 노원골 북쪽 능선과 남쪽 능선 사이에서 발원(發
源)하여 중랑천(中浪川)으로 흘러간다. 허나 계곡 밑까지 주거지가 형성되면서 수락산과 속세
의 경계선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한 채, 중랑천으로 넘겨지고 있다. 이는 인근 수락골도 마찬
가지로 서울에 있는 많은 계곡의 잔인한 현실이기도 하다. 겨울 제국(帝國)이 씌운 얼음은 소
쩍새가 울 때면 알아서 녹기 마련이지만 인간이 씌운 복개천의 굴레는 좀처럼 벗기기가 힘들
다.

노원골이 수락골보다 골짜기는 작아도 바위와 반석이 많고, 계곡을 완전히 가릴 정도로 숲이
짙으며, 수심도 얕아 아이들 물놀이 장소로도 아주 좋다. 게다가 경관 또한 아름다워 예로부
터 지역 피서지로 격하게 추앙을 받아왔다. 작지만 매우 야무진 계곡이었던 것이다. 특히 노
원골약수터 주변은 풍경이 아주 일품으로 반석이 넓게 깔려있다.
허나 여름 제국이 무더위로 천하를 너무 쥐어짜면서 계곡을 불리던 냇물은 거의 말라버렸다.
제아무리 잘생긴 바위도, 아름다운 계곡 풍경도 다 물이 있어야 빛을 발하기 마련이거늘, 물
이 별로 없으니 바위와 반석도 일개 돌덩어리 밖에는 되지 않는다. 심술쟁이 여름 제국이 이
멋드러진 계곡을 무더위란 폭격으로 그야말로 쑥대밭을 만든 것이다.

노원골 기점에서 8~9분 정도 오르면 노원골약수터가 모습을 비춘다. 한때 수락산에서 잘나가
던 약수터였으나 약수터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부적합 판정을 받은 이후, 완전 죽은 샘터
가 되었다. 물이 마지막으로 용솟음친지 꽤 되었는지 물기 조차 더듬기가 어렵다. 상계1동 시
절에 이곳 물도 참 많이 마셨는데, 이렇게 맥없이 끊기고 말았다.


▲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
이곳을 오가던 사람들이 소망을 넣으며 하나, 둘 쌓은 돌무더기가 어느덧
큰 돌탑으로 성장했다. 소박한 중생들의 소망을 먹고 자란 돌탑이라
그 모습 또한 소박하기 그지 없다.
 

노원골약수터에서 남쪽 산길을 오르면 노원골 남쪽 능선과 수락산보루로 이어진다. 경사는 그
리 각박하지는 않은데, 그 길을 1분 오르면 왼쪽(동쪽)으로 빠지는 샛길이 있다. 그 길로 접
어들면 바로 조그만 샘터가 하나 있었다. 한때 나의 즐겨찾기 약수터였으나 노원골약수터처럼
숨통이 끊어져 참 애석하기 그지 없다.
인간의 탐욕과 개발의 칼질이 춤추는 속세의 악한 기운이 어느덧 이곳까지 구렁이 담 넘듯 들
어와 수락산을 위협하고 있던 것이다.

여기서 조금 올라가면 운동 시설을 갖춘 약수터가 나오고, 길은 좀 각박해진다. 하지만 그만
큼 능선으로 가는 길도 빨라, 상계1동 시절에 이 산길을 자주 오르곤 했다. 잠깐의 고통을 감
내하면 완만한 능선길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드디어 노원골 남
쪽 능선에 이르고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귀임봉은 동쪽으로 가면 되고, 수락산보루
는 서쪽으로 서서히 내려가면 된다.


▲  노원골약수터 남쪽 산길에서 바라본 수락산 산줄기
가운데 왼쪽 봉우리가 수락산 정상이다. 같은 수락산이지만 노원골은
수락산 정상과 거리가 제법 멀다.

▲  수락산보루(堡壘)터 - 사적 455호

노원골 남쪽 능선이 귀임봉을 거쳐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상계동 아파트단지를 바로 앞에 두고
마지막 용솟음을 치는 봉우리에 고구려(高句麗)가 남긴 작은 점, 수락산보루가 살짝 깃들여져
있다.
이곳은 수락산에서 가장 서남쪽이자 시내와 가장 가까운 봉우리로 수락산 영역에서 가장 전방
에 자리해 있다. 높이는 192.5m로 수락산의 제일 막내 봉우리이지만 수락산 산줄기와 이어진
동북쪽과 북쪽을 제외하면 모두 평지라 조망이 썩 일품이다. 그래서 봉우리에 올라서면 남쪽
과 동남쪽으로 불암산(佛巖山)과 노원구 일대, 멀리 중랑구와 봉화산(烽火山)이 시야에 들어
오고, 서쪽으로 옛 마들평야를 회색빛으로 물들인 상계동(上溪洞) 아파트단지와 도봉구, 강북
구, 북한산(삼각산), 도봉산이 시야에 잡힌다.
이처럼 위치가 휼륭하니 옛 사람들이 그냥 둘리는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 거의 전쟁을 잊고
살지만 옛날, 특히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에는 전쟁이 빈번했다. 그때는 이런 봉우리가 천금
보다 비싼 법이라 일찍이 고구려는 이곳에 보루를 심어 서울 지역을 지켰다.

만주에서 일어난 고구려가 서울 강북을 점유한 것은 고구려의 위대한 정복군주인 광개토태왕(
廣開土太王, 재위 392~413) 시절이다. 그는 재위 초반에 백제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서울 강
북과 경기도 이북을 점령했는데, 백제(百濟) 또한 산동반도(山東半島)를 비롯한 중원대륙의
넓은 해안 지역과 왜열도(倭列島)를 점유한 무시못할 나라라 더 이상 남하를 못하고 한강을
두고 대치했다. 대신 말발굽을 서쪽과 북쪽, 동쪽으로 돌려 신나게 영토 확장을 벌였다.

광개토태왕의 뒤를 이은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보호국인 북연(北燕)을 완전히
접수하고 라이벌인 북위(北魏)를 위협하며 황하 유역과 내몽골 지역인 지두우(地豆于)까지 영
역을 넓혔다. 그리고 숙적인 백제를 공격하고자 아차산성(阿且山城) 주변에 보루를 주렁주렁
닦고 바로 한강 너머로 보이는 백제의 국도(國都), 한산<漢山, 위례성(慰禮城) 서울 송파/강
동 지역>을 수시로 염탐하며 때를 찾다가, 드디어 475년 한강을 건너 한산을 점령, 백제 개로
왕(蓋鹵王)을 처단하고 한산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리고 경기 남부와 충북, 경북 포항(浦項
)까지 거침없이 내달렸다.


▲  봉긋 솟은 봉우리에 자리한 수락산보루

서울과 한강 유역을 장악한 고구려는 이 지역을 다스리고 백제와 신라(新羅)의 공격에 대비하
고자 전략적 요충지인 서울과 경기 북부에 많은 성과 보루를 구축하거나 백제가 쓰던 것을 수
리하여 사용했다. 여기서 보루란 성보다 작은 요새로 돌과 목책으로 구축했는데, 작은 것은
수십 명, 큰 것은 수백 명이 주둔하며 산성(山城) 못지 않은 시설을 갖추기도 했다.

보루는 주로 서울 동쪽 산줄기에 주렁주렁 달렸는데, 한강과 가까운 구의동 홍련봉(紅蓮峰)을
시작으로 아차산과 용마산(龍馬山), 망우산(忘憂山), 봉화산 산줄기에 크고 작은 보루를 닦아
아차산성(阿且山城)을 보조했다. 그리고 수락산에도 보루를 설치해 북쪽(사패산)과 남쪽 아차
산을 연결했다. 수락산보루에서 남쪽을 보면 봉화산이, 서북쪽으로 사패산을 품은 도봉산이
바라보여 이곳에 보루를 둔 고구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만하다.
그리고 북쪽으로 사패산(賜牌山), 의정부 천보산(天寶山), 양주 불곡산(佛谷山), 도락산(道樂
山), 독바위(양주시 옥정동)에 보루를 설치했는데, 아차산부터 천보산까지는 중랑천과 3번 국
도를 쭉 따라가고 있어 이들이 당시 주요 교통로였음을 귀뜀해준다. 양주 이북은 보루는 거의
없고, 연천 호로고루(瓠蘆古壘)와 은대리성, 당포성, 포천 반월성(半月城) 등의 온갖 성곽을
지어 경계망을 촘촘히 했다.

허나 그렇게 강성했던 고구려는 6세기 이후, 백제와 신라, 중원대륙의 여러 나라, 돌궐(突厥)
등의 도전을 받게 되면서 많은 땅을 잃고 만다. 551년 경에는 백제와 신라에 의해 한강 유역
을 상실하게 되었고, 아차산성까지 신라에 떨어지면서 결국 경기 북부로 물러나게 된다. 백제
의 뒷통수까지 치며 서울 지역을 장악한 신라는 고구려 보루 상당수를 내버렸고, 불곡산보루
등 일부만 수리해서 쓴 것으로 보이나 끝내는 모두 버려지게 된다.
아무리 인간이 만든 대단한 건축물이라 해도 사람의 손때가 식은 것은 그리 오래 못간다. 결
국 세월의 장대한 흐름과 대자연의 태클 앞에 모래성처럼 녹아내리고 말았다.


▲  대머리처럼 허전한 수락산보루터 (그 너머로 귀임봉이 보인다)

수락산보루는 장수태왕 시절인 5세기 중/후반에서 6세기 초에 구축된 것으로 여겨진다. 보루
가 둥지를 튼 봉우리 정상부는 평탄하며, 북쪽과 동서쪽은 조금 급경사를 이루고 있고, 남쪽
은 완만한 경사이다.
이 보루는 상계동에 있다고 해서 상계동보루라 불리기도 했는데, 요즘은 수락산보루로 널리
불린다. 이곳은 6세기 중반 이후 버려져 터만 남아오다가 왜정(倭政) 때 발견되었으며, 왜정
이 1942년에 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상계동 성터가 2개소로 나와있어 이곳이 그중 하
나로 여겨진다.

보루는 봉우리 정상부에서 3~4m 아래로 빙돌아가며 돌을 쌓았는데, 전체 둘레는 약 150m 정도
이며, 북쪽 부분이 약간 찌그러진 타원형이다. 그리고 집수시설로 보이는 함몰 부분이 2곳이
있다.
보루의 밑도리만 간신히 남아 흙에 묻히고 잡초와 섞여졌으며, 보루의 존재가 잊혀진 채, 오
랜 세월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히면서 석축은 흩어지거나 가루가 되었다. 심지어 정상부에 체
육시설까지 들어서면서 간신히 남은 보루의 흔적마저 숨기가 바빴다.
그러다가 1990년대 말 이후, 아차산과 용마산, 망우산에서 많은 보루가 발견되었고, 봉화산과
수락산, 사패산, 불곡산 등 땅속에 잠자던 보루들이 대거 밖으로 나오면서 수락산보루도 다시
금 빛을 보게 되었다. 게다가 고구려앓이가 전국적인 유행을 타면서 아차산성과 아차산~용마
산 보루는 고구려의 장대한 유적이자 남한의 대표 고구려 흔적으로 단단히 덕을 보게 되었다.

수락산보루를 발굴조사하면서 많은 고구려 토기와 성돌, 보루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조사가
끝나자 이들을 모두 흙으로 덮고 그 위에 나무와 풀을 심어 가려놓았다.


▲  서쪽에서 바라본 수락산보루터

그렇다면 보루의 왕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워낙 단단히 녹아내려 그 모습을 상상하기는 좀
무리가 있지만 근래 복원된 아차산4보루를 참고로 하여 그 모습을 크게 축소하면 대충 그림은
그려질 것이다. 봉우리가 작고 보루의 둘레도 고작 150m 내외라고 하니 그냥 이 땅에 흔한 봉
수대 규모 정도로 보면 될 듯 싶다. 거기에 군사들이 머물 공간과 무기 창고, 보루를 보호할
목책 정도 갖추고 있었을 것이며, 규모가 작기 때문에 50명 내외가 머물며 수비한 것으로 여
겨진다.

보루가 우뚝 서있던 봉우리 정상은 풀만 좀 돋아 있다. 거기에 누런 흙바닥마저 황량히 드러
나고 있어 대머리처럼 허전하기까지 하다. 그 주변은 여름 제국의 기운을 먹고 자란 수풀과
들꽃이 짙게 우거져 고구려의 흔적을 가리고 있어 안내문이 아니면 이곳이 정녕 보루가 있던
곳인지 조차 햇갈린다. 그만큼 자연에 쏙 동화되어 버린 것이다.


▲  수풀로 가득한 수락산보루터 남쪽
숲 너머로 상계동과 노원구 지역, 봉화산이 바라보인다


수락산보루는 2004년 10월에 아차산과 용마산, 망우산 보루와 더불어 '아차산 일대 보루군'이
란 이름으로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 묶음에 들어간 보루는 총 17기인데, 수락산은 아차산과
거리가 제법 있음에도 그 묶음에 넣어버렸다. 차라리 이곳은 별도로 사적으로 지정하거나 서
울 지방기념물로 삼아 관리하는 것이 좋을 듯 싶은데, 굳이 먼 거리를 무릅쓰고 한 덩어리로
모은 것이 궁금하다. 만주와 요동(遼東), 북한을 제외한 이 땅에 흔치 않은 고구려 유적이니
너무 짜게 굴지 말고 후하게 등급을 매겨 관리했으면 좋겠다.


▲  수락산보루터에서 바라본 귀임봉과 수락산 산줄기

▲  수락산보루터에서 바라본 불암산(507m)의 위엄

수락산보루를 지닌 봉우리의 이름은 아직 없다. 보루터가 있으니 편하게 보루봉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봉우리지만 그 옛날 고구려가 남긴 한 줄기 점 때문에 비록
아차산만큼은 아니더라도 조촐하게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아직 이름을 지니지 못한 봉우리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우리의 자랑스런 고구려
가 백제를 뚫고 이곳을 차지해 보루를 씌우고 남방을 경영했던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니더냐~!
내가 서식하는 근처에 비록 완전하지는 못해도 이런 고구려 유적이 있다는 것이 참 반갑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 산 105-1


 

♠  수락산 서울둘레길과 동막골

▲  수락산보루에서 온곡초교로 내려가는 숲길

수락산보루와 이렇게 첫 인연을 짓고 온곡초교 방면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은 계단이 닦
여져 있으나 경사가 속세를 닮은 듯, 조금 가파르다. 허나 소나무가 하늘과 속세(俗世)를 가
릴 정도로 삼삼하게 우거져 솔내음의 향도 진하며, 그늘의 깊이도 크다. 숲 너머로 보람아파
트를 비롯한 상계동의 회색빛 아파트들이 가까이 바라보여 도심 속 산길을 거니는 기분을 진
하게 선사하는데, 산길 중간에 그 유명한 서울둘레길과 만난다.

서울둘레길은 서울시가 야심차게 닦은 둘레길로 서울 주위를 1바퀴 도는 길이다. 총 8개의 코
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거리는 157km에 이르는데, 그 1코스가 도봉산역에서 시작해 수락산
과 불암산 허리를 지나 화랑대역에서 끝을 맺는 길로 거리는 14.3km이다. 2개의 산을 들락거
려야되서 서울시에서는 난이도를 상급으로 책정해 사람들을 괜히 긴장을 타게 만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무섭거나 걱정할 수준은 절대 아니다. 다만 산 구간이 길어서 상급으로 책정된
것이다. 길도 잘 닦여져 있고,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나 거닐 수 있는 대중적인 둘레길이니
너무 겁은 먹지 말자~!
또한 도봉산역 동쪽인 창포원 관리사무소 앞과 불암산 우회코스 갈림길, 그리고 화랑대역(6호
선) 4번 출구 앞 공원에 서울둘레길 스탬프가 있으니 완주를 하거나 그곳을 지나가면 기념 도
장을 찍고 가기 바란다.


▲  잘 닦여진 수락산 서울둘레길 (수락산보루 부근)

수락산보루에서 동막골 도선사까지는 서울둘레길을 타기로 했다. 귀임봉과 학림사(鶴林寺)를
경유해서 가는 것이 조금은 빠르겠지만, 수락산 허리에 깔아놓은 서울둘레길 1코스도 엄연한
미답처이므로 미답처를 하나라도 더 지울 겸, 느긋한 둘레길을 이용했다.
수락산보루 주변과 상계3동 일부 구간은 끊긴 길을 잇고자 새로 길을 뚫거나 나무로 길을 내
었고, 시내가 잘 보이는 곳에는 조망대를 설치하여 두 눈까지 호강을 시켜준다. 게다가 숲도
짙어 시원한 산바람이 적당히 땀까지 털어준다.


▲  수락산 서울둘레길 (학림사 부근)

▲  석천(石泉)약수터
학림사 동남쪽 계곡에 묻힌 석천약수는 바위 밑에서 물이 나오는 샘터이다.
하여 이름도 석천이다. 아직은 적합 판정을 유지하고 있어 마음껏
마셔도 되며, 졸고 있는 컵을 깨워 실타래처럼 답답하게 나오는
샘물을 가득 담아 들이키니 목구멍이 뻥뚫린 듯 시원해진다.

▲  석천약수터 부근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노원구 지역

▲  수락산 서울둘레길 동막골 서쪽 구간
서울 시내가 바로 지척임에도 마치 지방의 깊은 산골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  수락산 동막골

수락산 남쪽에 자리한 동막골은 수락산의 주요 골짜기이다. 이곳 동막골은 골짜기가 깊고 숲
이 무성해 일찌감치 유원지로 개발이 되었다. 그래서 동막골유원지라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수락산 보호를 위해 행락 시설은 거의 철거되고 나무를 짙게 깔았으며, 골짜기에 도선사와 송
암사, 도안사 등 많은 절이 둥지를 틀어 계곡 중류까지 포장길이 닦여져 있다.

동막골은 경관이 아름답고 자연 환경이 잘 남아있는 현장으로 2010년에 노원구청이 저수량 4
만8천톤 규모의 저수지를 계곡에 만들려고 생난리를 치다가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된 바
가 있다. 서울시도 그 사업에 타당성이 없다고 노원구에 공문을 보낸 터라 다행히 전시행정의
부질없는 삽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2014년에 서울시 보건환경연구원에서 동막골과 북악산(백악산) 삼청동천(삼청공원), 북
악산 백사실계곡(백사골), 인왕산 백운동천(白雲洞天)의 생태계 조사를 벌였는데, 모두 1급수
를 유지하고 있음이 나타났다.
특히 동막골에서는 북방산개구리와 좀주름다슬기 등 도시에서는 만나기 힘든 수중 동물이 크
게 무리 지어 살고 있었다. 비록 이곳이 수락산의 주요 길목이라 산꾼과 나들이 수요가 높아
때는 많이 벗겨지긴 했으나 아직 청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  동막골 도선사입구

▲  도선사를 알리는 표석

동막골에서 울창한 숲길을 따라 윗쪽으로 가면 도선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을 한다. 여기
서 그의 안내를 받아 동쪽 길로 가면 얼마 안가 '수락산 유아숲 체험장'이 모습을 비춘다.


▲  수락산 유아숲 체험장

수락산 유아숲은 서울시가 동막골에 조성한 이름 그대로 어린이를 위한 숲체험장이다. 유아를
둔 가족과 유치원, 어린이집의 소풍 장소로 수풀과 꽃을 심은 초화원을 비롯해 올챙이숲속교
실, 모험놀이마당, 교구놀이마당, 모래놀이터, 계곡물놀이마당, 숲속휴게소 등을 갖추고 있으
며, 먹거리를 가져와 섭취하는 것은 괜찮으나 밥 짓는 등의 취사행위는 절대로 안된다.
유아숲 체험장도 좋지만 동막골이 골도 깊고 숲도 짙으므로 넓게 범위를 잡아 산림욕장을 닦
는 것은 어떨까 싶다. 마침 서울에는 호암산(虎巖山) 외에는 마땅한 산림욕장도 없고 자연휴
양림도 없다.
자연휴양림은 서울 땅에서는 좀 무리가 있고 숲이 넓은 이런 곳에 제대로 된 산림욕장을 닦고
자연보호를 더 엄격히 하여 도심 속의 신선한 청량제로 가꾸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  귀여운 개구리가 인상적인 수락산 유아숲 체험장 안내도

▲  유아의 꿈을 먹고 자란 들꽃들의
조그만 세상, 초화원

▲  유아숲 놀이터와 쉼터


▲  동막골계곡에 자리한 계곡물놀이마당 ▼


▲  도선사로 인도하는 숲길


 

♠  동막골에 둥지를 튼 조촐한 산사, 오래된 석불을 후광으로
삼아 절을 꾸리는 수락산 도선사(導善寺)

수락산 동막골에는 수락산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절들이 많다. 이들은 대부분
역사가 짧은 절집으로 그중 도선사가 동막골 상류 구석에 살짝 둥지를 틀었다.

도선사하면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도선사(道詵寺)를 떠올릴 것이다. 도선대사의
이름을 딴 북한산 도선사는 서울 뿐 아니라 천하에도 널리 알려진 오래된 절이기 때문이다.
허나 수락산 도선사는 이름은 같지만 한자는 완전 다르다. 이름을 풀이하면 선함으로 인도하
는 뜻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역사가 짧고 인지도도 매우 적다.
내가 현대 사찰인 도선사를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오래된 석불을 보기 위함이다. 솔
직히 그거 때문에 온 거지 그것도 없었다면 아마 영원히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도선사에 오래된 석불이 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문화유산을 간직한 20세기 절들 상당수가 속
세에 배타적인 기질(외지인 경계, 사진 촬영 금지 등)이 짙어 사전에 어떤 곳인지 인터넷에서
살펴보았다. 아주 적게나마 도선사 관련 데이터들이 나왔는데, 절을 찾은 이들이 담은 석불
사진도 제법 나왔다. 그래서 속세에 그리 경계적인 곳은 아니라 판단되어 출동한 것이다.

같은 동막골에 있음에도 산꾼과 피서객으로 분주한 유아숲 체험장과 동막골 산길과 달리 이곳
은 꽤 한적하다. 수락산이 부는 산바람 소리가 그야말로 전부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소리를
깨고 혜성처럼 나타난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도선사에서 기르는 멍멍이들이다. 덩치도 쥐방
울만한 것들이 나를 보자 세상이 꺼지도록 짖어대는데, 그 소리가 귀신마저 도망치게 할 정도
로 매서웠다.
내가 도둑질하러 온 것도 아니고, 영 좋지 않은 사람도 아니건만, 단지 저들에게 익숙치 않다
는 이유로 단순한 저것들의 견제를 받으니 참 당황스럽기 그지 없다.

그래서 주차장 옆에 보이는 종무소(宗務所)로 달려가 도움을 청했으니 아무도 없어 간신히 개
들의 견제를 뚫으며 계곡(동막골) 다리를 건너 경내로 진입했다. 다행히 주지승이 나와 그들
을 제지하니 그것들도 이내 멍멍~ 개소리를 멈추고 꼬랑지를 살랑거리며 경계를 푼다. 승려는
절에 잘 왔다면서 쭉 둘러보라고 하길래, 석불을 보러 왔다고 솔직히 털어놓으니 마음껏 사진
에 담아가라고 그런다. 그런데로 인심도 있는 셈이다. 이렇게라도 해야 도선사의 인지도가 조
금은 올라가는 것을 그는 안 것이다.


▲  도선사 요사(寮舍)와 2층으로 이루어진 뒷쪽 법당

도선사는 이 땅에 흔치 않은 조동종(曹洞宗) 소속으로 1920년경 청운대선사(靑雲大禪師)가 여
기서 수행을 하다가 세운 절이다. 이곳에는 원래 조그만 석굴이 있었다고 하며, 많은 승려와
사람들이 찾아와 불도를 닦거나 산신에게 기도를 올린 곳이라고 전한다. 그래서 도선사는 산
신기도도량을 칭하고 있다.
1970년대까지는 볼품 없는 모습이었으나 현주지인 대은(大隱)이 30년간 꾸준히 불사(佛事)를
벌여 지금의 모습으로 불렸으며, 2005년에는 천하에서 가장 큰 천수천안관세음보살상을 봉안
하여 크게 위엄을 보이기도 했다.

경내에는 2층 법당을 비롯해 산신각과 범종각, 천고루, 요사, 종무소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
며, 2층 대웅전에는 절의 꿀단지이자 유일한 문화유산인 석3존불상이 봉안되어 있어 절의 듬
직한 후광 역할을 한다. 이제 100년 남짓 된 현대 사찰이라 딱히 내세울 것도 없고, 인근 학
림사와 흥국사(興國寺), 동막골에 묻힌 여러 절 등 쟁쟁한 절이 많다보니 이런 오래된 불상이
라도 하나 옆구리에 끼고 있어야 그나마 경쟁이 된다. 비록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 이곳의 새
로운 명물이라고 하나 석3존불상에 비하면 아직 한참이나 경력이 짧다.

보이는 것이 그야말로 하늘과 숲이 전부일 정도로 첩첩한 산주름 속에 깊숙히 묻혀있으며, 찾
는 이도 별로 없어 고적한 산사의 멋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도선사 윗쪽 계곡과 주
변 숲은 자연생태가 매우 양호하여 서울시에서 2008년 12월에 '수락산 야생동물,식물 보호구
역'으로 지정했다. (서울시 고시 제2009-496호) 하여 절 윗쪽 숲과 계곡은 출입이 통제되었고
그 덕에 도선사는 청정한 환경 속에서 법등(法燈)을 유지하고 있다.

▲  다양한 손짓의 관세음보살상 3자매

▲  큰 북과 운판을 지닌 천고각(天鼓閣)

▲  커다란 석축 위에 세워진 6각형 범종각
석축 밑도리에는 옷자락을 휘날리며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상(天人像)이 새겨져 있다.

▲  인조 암벽으로 이루어진 산신각(山神閣)
어엿하게 기와집으로 만들지 않고 특이하게
인조 암벽으로 산신각을 꾸몄다.


▲  2005년에 조성된 청동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天眼觀世音菩薩)상

경내 남쪽에는 도선사의 새로운 명물로 등극한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 자리해 있다. 이름도 허
벌나게 긴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란 무려 1,000개의 손과 눈을 지닌 관세음보살로 이 땅의 천
수천안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그만큼 도선사에서 모든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존재
인 것이다.
인자함이 깃든 관세음보살의 큰 얼굴 위에는 그의 조그만 얼굴이 가득 달려있고, 그 위에 부
처의 작은 머리가 있다. 이들 얼굴은 1,000개의 눈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리고 보살상 뒷쪽에
는 손과 팔이 수두룩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그중 두 손이 지팡이와 극으로 보이는 무기를 들
고 있다. 그를 반짝반짝 빛내주는 광배(光背)는 금색과 검은색이 서로 대비를 이루고 있는데,
광배 아랫쪽은 마치 칼로 싹둑 자른 듯, 생략되어 있고, 윗쪽은 봉긋 솟아있어 보주형을 이룬
다. 그가 앉은 연꽃 대좌(臺座)는 검은색을 띄고 있으며, 그 밑에 돌로 만든 큰 기단을 두고
팔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겼다.


▲  꽃을 든 남자의 새로운 버전? 꽃을 든 산신상 (산신각 내부)

붉은 옷을 입은 수염 지긋한 산신이 포근한 표정을 지으며, 왼손에 꽃을 들고 호랑이 등에 앉
아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산신상과 산신도(산신탱)을 봐왔지만 저런 색다른 산신은 처음이다.
절을 찾은 여심(女心)을 위한 도선사의 배려이자 마켓팅은 아닐까? 뭔가 크게 개성적이고 독
특해야 눈에 띄는 법이니 말이다.

 ◀  지붕만 한옥, 나머지는 양옥인 2층 법당
요사 뒷쪽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법당은 경내
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1층은 극락전(極樂殿,
큰법당) 및 영가(靈駕)들을 위한 납골당(納骨
堂)으로 쓰이고 있는데, 요즘 많은 절에서 납
골당을 운영하여 수익을 내고 있다.

2층은 대웅전(大雄殿)으로 석삼존불상과 금동석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원래는 석3존불
이 대웅전의 중심이었으나 새로 금동석가불을 만들면서 조금은 뒷전으로 밀려난 기분이다. 그
래도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석3존불이 보이니 금동석가불보다 가장 먼저
중생들의 인사를 받고 있다.


  도선사 석삼존불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1호

대웅전 서쪽 불단에 자리한 석3존불상은 도선사의 듬직한 후광이자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도
선사에서는 그들을 '천년의 미소'라 하여 격하게 띄워주고 있는데, 고된 세월에 지쳐 얼마나
울었을까? 얼굴이 거의 지워져 미소 여부는 알 수 없다.

이들은 돌로 다진 석불(石佛)로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다. 속사정이야 알 수는 없지
만 어찌어찌하여 이곳까지 흘러들어와 도선사의 보물로 묻어가고 있다. 그들이 앉은 복련(伏
蓮)대좌는 도선사에서 마련한 것이고, 그들 뒤로 돌로 다져진 후불탱이 병풍처럼 자리하고 있
으며, 그 주변을 인조 암벽으로 둘러 석굴 분위기를 자아낸다.

  석3존불상의 본존불(가운데 석불)

  석3존불상의 향우측 협시상

석3존불 중앙에 자리한 석불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있는데,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
頂相)이 두툼히 솟아있고, 동그란 얼굴은 마멸이 심해 눈썹과 코 정도만 확인이 가능하다. 목
은 매우 두꺼우며, 옷은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偏袒右肩)식이고, 어깨와 무릎에는 넓은 띠
주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아랫도리는 부처상의 흔한 앉은 자세인 결가부좌(結跏趺坐)로 보
이나 너무 축약되었다.

가운데 석불 왼쪽(향우측 협시상)에 자리한 보살상은 머리에 원통형 보관(寶冠)을 쓰고 두 손
은 다리 위에 대고 화염보주(火炎寶柱) 같은 물건을 들고 있으며, 양 어깨 위에는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눈과 코, 눈썹 정도 확인이 가능하나 너무 지워진 상태이며, 허리가
너무 짧고 아랫도리가 낮아, 마치 윗도리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석3존불상의 향좌측 협시상

  2층 대웅전 내부

오른쪽 보살상(향좌측 협시상)은 머리가 날라가 없어진 것을 석고로 대충 만들어 붙였다. 그
래서 옆 석불과 달리 눈과 코, 입이 그런데로 달려있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고, 몸통 정
면은 통견식으로 법의(法衣)를 입은 듯 하며, 양쪽 어깨에는 옷주름이 있으나 뒷면에는 편단
우견식으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었다. 그리고 두 손은 무릎 위에 대소 선정인(禪定印) 비슷
한 제스쳐를 취하고 있다.

이들 석불은 너무 간결하게 표현되어 덩치도 매우 작으며, 얼굴도 거의 지워지고 훼손도 심하
다. 게다가 신체 비례도 너무 떨어져 근래 대충 만든 석불이나 장난감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
나 그들은 전체적으로 양감이 있고 안정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어 고려 석불의 전통을 계승
한 고려 말~조선 초기 석불로 보고 있다. 특히 이 시대에 조성된 석불이 별로 없어 2009년 3
월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대웅전 금동석가3존불
남쪽을 바라보고 앉은 이들은 근래 조성된 것
으로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이 어엿하게 3존불을 이루고 있다.
석3존불보다 더 화려하고 덩치도 있지만 고색
을 밝히는 나의 두 눈에는 오로지 석불만 보일
뿐, 저들에게 간 시선의 양은 별로 되지 않는
다.


  도선사를 뒤로하며 (사진을 클릭하면 도선사 홈페이지가 번쩍 뜸)

도선사를 둘러보니 어느덧 18시가 다 되어간다. 이날 수락산에서 목적한 곳과 모두 인연을 지
었으니 더 이상 욕심 부릴 것도, 미련 둘 것도 없다. 이것으로 충분히 보람찬 하루를 보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한여름에 벌인 수락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그렇다고 수락산과의 인연이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 산153-1 (덕릉로145길 103 ☎ 02-936-0419)
* 도선사 홈페이지는 윗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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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진 논두렁과 밭두렁을 간직한 서울의 두메산골, 도봉산 무수골 ~~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전주이씨영해군파묘역, 무수골계곡)



' 서울의 두멧골, 도봉산 무수골 '

▲  무수골 논두렁 (초가을)

▲  전주이씨 영해군파묘역

▲  무수골길 (성신여대 난향별원)

 


 

 

♠  서울의 숨겨진 별천지이자 논까지 간직한 상큼한 두멧골,
도봉산 무수골

▲  세일교 주변 (오른쪽 길은 무수골 북부, 도봉옛길 방면)

도봉산 동남쪽 자락에 포근히 묻힌 무수골은 도봉산에 널린 수많은 골짜기의 하나이다. 우리
집에서 매우 가까운 상큼한 곳으로 그저 숲과 계곡, 바위만 있는 계곡이 아닌 밭두렁과 산골
마을, 심지어 논두렁까지 담고 있는 산골마을로 좁게는 도봉산(道峯山)과 도봉구, 넓게는 서
울의 숨겨진 비경으로 꼽힌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백두산만한 서울 바닥에 그런 서울을 비웃는 뜻밖에 별천지가
있었다니? 무수골에 발을 들인 나그네는 그곳의 뜻밖의 모습과 아름다운 풍경에 무한 감동을
먹으며 넋을 잃고 만다. 흔히 서울 하면 수많은 사람과 차량, 키다리 건물이 즐비한 번잡한
회색빛 풍경만 생각하기 일쑤이니 그 감동의 정도는 더욱 클 것이다. 솔직히 서울이라 해서
꼭 시가지만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무수골이 이렇게 개발의 칼질이 거의 닿지 않은 때 묻
지 않은 시골로 남게 된 것은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에 포함되어 개발의 칼날을 부러뜨렸기 때
문이다.

무수(無愁)골이란 이름은 근심이 없는 골짜기란 뜻이다. 바깥 세상은 늘 근심의 연속인데, 이
곳은 근심이 없는 이름을 지니고 있으니 이 얼마나 극락정토(極樂淨土)다운 이름인가? 그 유
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조선 4대 군주인 세종(世宗)이 이곳에 왔다가 원터약수터에서 약수를 마시며 '물도 좋고 풍경
이 좋은 이곳이야말로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다!'
찬양을 하여 무수골이 되었다고 하며, 세
종이 그의 아들인 영해군 이당(李瑭)의 묘역을 들러보고 원터약수터에서 물을 마시며 근심 없
는 곳이라 했다고 한다.
허나 영해군은 1477년에 죽었고 세종은 1450년에 붕어(崩御, 제왕의 죽음)했으니 서로 시기가
맞지 않으며, 성종이 영해군 묘역이 완성되자 직접 찾아와 참배하면서 근심이 없는 곳이라 했
다는 이야기도 있다. 거기에 근심 걱정이 없는 노인네인 무수옹(無愁翁) 이야기도 한 토막 덧
붙혀 전해오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때는 조선의 어느 시절, 나랏일로 골치가 아프던 왕은 세상에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의문을 품으며 이른바 무수인(無愁人)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아무리 잘나가는 부자도,
사대부(士大夫)도, 왕족도, 어린이도 몇 가지씩 가지고 있는 것이 걱정이니 찾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다가 드디어 무수인 자격에 맞는 노인을 찾았다. 그 노인은 아들이 12명으로 모두 장가를
보냈으며, 아들과 며느리의 효성이 지극하여 노인은 만사가 즐거웠다. 하여 주변 사람들은 그
를 무수옹이라 불러 부러워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왕은 급히 그를 소환하여 이유를 물었다.
이에 노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소인은 아직 몸도 멀쩡하고, 마누라가 잘 보살펴주고 있으며, 자식과 며느리가 효도하고 벗
들도 많고, 자손들도 건강하고, 전하(殿下)께서 나라도 잘 다스려 주시고, 봄과 여름, 가을,
겨울도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샘이 단단히 난 왕은 그를 시험할 생각에 구슬을 건네주며 1달 후에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다.
노인은 왕에게 성대한 대접을 받고 집으로 오다가 한강에서 배를 탔는데, 뒤에 따라오던 사람
이 노인에게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하여 구슬을 꺼내보이니 그때 그 사람이 실수
인양 팔꿈치를 치면서 구슬이 한강에 빠지게 되었다. 그 사람은 구슬을 물에 빠트리게 하려고
왕이 보낸 사람이었다.

구슬을 잃어버린 노인은 구슬을 어떻하나 노심초사하다가 결국 식음을 전폐하고 몸저 눕게 되
었다. 가족들이 이유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으니 결국 건강까지 극도로 나빠졌
다. 걱정이 된 자식들은 잉어를 잡아 요리해주려고 했는데, 그 잉어 배에서 글쎄 구슬이 나온
것이다. 알고보니 강에서 잃어버린 그 구슬이었다. 노인은 너무 기뻐서 그동안의 근심을 흔쾌
히 털어버리고 잉어 요리를 폭풍 흡입하며 이내 건강을 되찾았다.
그리고 1달 후, 궁궐에 들어가 구슬을 바쳤다. 왕이 낸 숙제를 휼륭히 소화한 것이다. 깜짝
놀란 왕은 그 사연을 듣고 무한 감동을 먹었고, 이후 노인은 잘먹고 잘살았다고 한다. 이런
무수옹 이야기는 무수골 뿐 아니라 전국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옛 전설의 하나이다.


무수골은 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무수(無袖)골(무수동)이란 이름도 있다. 이는 무수골에 묻힌
영해군의 무덤 자리가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형국인 선인무수지형(仙人舞袖之形)에
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춤을 뜻하는 '舞'가 '無'로 바뀜)
또한 영해군이 묻히기 이전(15세기 후반 이전)에는 대장장이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들이 운영
하는 대장간이 계곡에 즐비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쇠골', '수철동(水鐵洞, 무쇠골을 한자로
표현)'이라 불리다가 영해군이 묻힌 후 무수골(무수동)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무수골에 있던 무수울에 서낭당이 있어 이 마을을 '서낭당(성황당)'이라 불렸는데, 그
게 무수골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체로 성황당은 무수골 하류(도봉초교 주변)를 일컬
으며 그 이름은 아직까지 살아남아 버스정류장 이름(도봉역, 성황당)으로도 절찬리에 쓰이고
있다.

참고로 무수골은 무수울, 무시울, 모시울, 성황당 등으로도 불렸는데, 무수울은 무수골 마을
의 대표 이름으로 조선 때 양주목 해등촌면(海等村面)을 이루던 12개 리의 하나였다. 무수골
은 윗말(무시울), 중간말, 아랫말로 나눠졌으며, 개성이씨가 먼저 터를 닦은 이후, 전주이씨
(영해군 후손들), 안동김씨, 함열남궁씨, 진주류씨도 이곳에 무덤을 쓴 인연으로 정착하여 오
랜 토박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무수골은 도봉산 산길 기점의 하나로 굳이 등산이 아니더라도 답사와 나들이, 피서, 농촌 체
험 등으로 안길 수 있는 꿀단지이기도 하다. 전주이씨 영해군파 묘역을 비롯해 무수골에 가장
먼저 묻힌 개성이씨 집안인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과 의령옹주(義寧翁主) 묘역, 오래된 느
티나무, 진주류씨묘역(도봉옛길 중간에 있음), 함열남궁씨 묘역 등의 문화유산이 즐비해 답사
지로도 손색이 없으며(옛 무덤 답사지로 아주 좋음) 서울시는 무수골 입구에서 윗무수골을 거
쳐 자현암까지의 길을 테마 산책길로 지정하여 '무수히 전하길(숲이 좋은 길)'이란 간판을 달
아주었다.
또한 무수골 하류(세일교 동쪽)에는 밭두렁이 넓게 펼쳐져 있는데, 시민들을 위한 주말농장도
여럿 있어 농촌 체험도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무수골 계곡은 물이 깨끗하고 암반도 즐비하며
상류로 갈수록 숲이 짙어져 피서의 성지(聖地)로도 아주 바람직한 곳이다.
이 계곡은 문사동계곡, 원도봉계곡(망월사계곡)과 더불어 도봉산 3대 계곡의 하나로 추앙받으
며, 우이암 부근 원통사(圓通寺)에서 시작되어 '원통사계곡(또는 보문사계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무수골은 '무수천'이란 간판을 달고 무수골의 만물을 촉촉히 어루만지며 흐르다가 도봉
역 서쪽에서 문사동계곡에서 시작된 도봉천에 흡수되어 중랑천(中浪川)으로 흘러간다.

* 무수골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도봉초교 주변 무수골 하류 (무수골 상류 방향)
도봉산 산줄기 너머로 북한산(삼각산) 백운대(836m)와 인수봉 등이 바라보인다.

▲  도봉초교 주변 무수천 (무수골 하류)
무수천 양쪽에 자전거 통행이 가능한 산책로를 내었는데, 무수골 주말농장
동쪽에서 시작되어 도봉역 북쪽을 거쳐 중랑천까지 이어진다.


무수골 나들이는 1호선 도봉역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도봉역 1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도봉
역4거리인데, 여기서 도봉산이 바라보이는 서쪽으로 길을 건너면 바로 무수골로 인도하는 무
수천 둑방길(도봉로169길)이 나온다. 이곳에서는 문사동계곡에서 시작된 도봉천과 무수골에서
나온 무수천이 만나는데, 이들은 도봉천으로 합쳐져 중랑천으로 흘러간다.

무수천 둑방길을 따라 7~8분 정도 가면 무수교가 나온다. 이곳까지는 온갖 주택과 빌라가 즐
비한 서울에 흔한 주택가 풍경이나 여기서부터 집들이 크게 줄어들면서 서서히 시골 풍경으로
갈아탄다. 그런 전원 풍경 뒤로 북한산(삼각산) 북쪽 봉우리와 도봉산의 지붕이 바라보여 뒷
배경도 아주 탄탄하다. 이윽고 무수골 마을버스 종점(도봉08번)을 지나면 완전한 전원(田園)
분위기로 그림이 바뀐다.

무수천(무수골)은 수심이 매우 얕은 하천으로 비가 많이 내릴 때만 잠깐 물이 불어날 뿐, 평
소에는 물이 적은 마른 하천<건천(乾川)>이다. 그러다보니 가뭄이 심하면 갈증을 너무 심하게
타서 툭하면 맨바닥을 드러내기도 한다. 2007년 이후 무수골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을 벌
이면서 무수골 아랫쪽(도봉초교 주변) 주거 환경이 어느 정도 개선되었는데, 이를 맞추어 도
봉구에서 무수천을 정비하여 깨끗한 우리 동네 가꾸기 사업을 벌였다. 이때 하천 양쪽에 중랑
천과 이어지는 산책로를 닦았다.


▲  하얀 반석들 사이로 가늘게 흘러가는 무수골 하류 (무수천)

▲  북한산둘레길 방학동(放鶴洞)길 북쪽 관문

무수골주말농장을 지나면 세일교가 나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오른쪽(북쪽)으로
가면 무수골 북쪽 마을과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로 이어지고, 정면의 세일교를 건너면 북한산
둘레길 방학동길 북쪽 관문과 무수골 안쪽, 원통사, 우이암 방면으로 이어진다.

무수골 북쪽에서 온 도봉옛길은 세일교에서 방학동길로 간판을 바꾸고 남쪽으로 흘러간다. 이
길은 방학동 정의공주(貞懿公主)묘역까지 이어지는 3.1km의 산길로 오르락내리락을 여러 차례
반복해야 되지만 그런데로 무난한 산길이다. 방학동길이란 이름은 방학동을 지나기 때문에 붙
여진 이름이다.


▲  무수골의 속살로 인도하는 성신여대 난향별원 돌담길 (무수골길)

방학동길 북쪽 관문을 지나면 바로 성신여대 난향별원 돌담길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길 왼쪽
에 돌담이 펼쳐졌다가 절반 정도 들어서면 자리를 바꾸어 오른쪽으로 돌담이 펼쳐지는데, 비
록 덕수궁(德壽宮, 경운궁) 돌담길만은 못해도 그런데로 운치를 자아내고 있으며, 나무도 무
성하여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한다.
어디론가 끝없이 이어진 것 같은 난향별원 돌담길, 그 돌담길을 지나면 무엇이 나올까? 무수
골 초행자라면 더욱 짙어진 숲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도봉산 산길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할 것
이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다. 무수골이 괜히 무수골이 아니거든..


 

 

♠  윗무수골 논두렁과 느티나무

▲  이제 기지개를 켜는 윗무수골 북쪽 논두렁 ▼

난향별원 돌담길을 지나면 흔히 생각하는 그늘진 숲 대신 햇살이 내리쬐는 뻥 뚫린 공간이 나
온다. 그 공간이란 다름 아닌 논두렁이다. 짙은 숲속에 묻힌 윗무수골 논두렁, 설마 이런 첩
첩한 산골에 논두렁이 있을 것이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논두렁의 크기는 속세와 비교하면 턱없는 수준이지만 산골치고는 그런데로 큰 편이다. 강원도
나 경북의 산골 논두렁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인데, 길을 중심으로 남쪽에 조그만 논이 펼
쳐져 있고, 북쪽에 큰 논두렁이 여럿 있다. 그리고 영해군파묘역 밑에도 2~3개의 논두렁이 있
다.
이들 논두렁은 무수골의 오랜 상징이자 꿀단지로 무수골 사람들은 조선시대부터 이 논을 통해
곡물을 생산했으며 그 생산량이 많아 배불리 먹고 살았다. 이렇게 산골에서 먹는 문제가 거뜬
히 해결되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식(食)은 걱정할 것이 전혀 없으니 근심이 없다는 무수골
이란 이름도 괜히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  윗무수골 남쪽 논두렁

윗무수골 논두렁은 여전히 논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보통 5월에 모를 심어 10월에 수
확을 한다.
친환경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들이 황금색으로 크게 숙
성되는 9월 이후의 논두렁 풍경은 무수골 풍경의 백미(白眉)로 꼽힌다
.


▲  남쪽과 북쪽 논두렁 - 그들 사이로 길이 지나간다.

▲  무수골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0-3호

논두렁을 지나면 바로 정면 약간 높은 곳에 큰 느티나무가 모습을 비춘다. 넓게 그늘을 드리
우며 무더위의 염통을 긴장시키는 그는 높이 22m, 가슴높이 둘레 3.7m로 1981년 보호수로 지
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215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30여 년이 더해져 약 250살로 여겨진다.
계곡 부근 비옥한 땅에서 자라고 있어 왕성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으며, 가지가 꽤 굵고 묵직
하다. 이곳에 살던 영해군파 후손들이 심어 정자나무나 당산나무 용으로 사용했으며, 전주이
씨 영해군파 후손들이 애지중지 관리하고 있다.


▲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으로 인도하는 길

느티나무 앞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산꾼들이 자주 오가는 서남쪽 길은 자현암(慈賢庵)
과 도봉산(원통사, 우이암) 으로 이어지고, 서북쪽 길은 느티나무가든으로 이어진다. 느티나
무가든은 입구에 문패를 내건 뻥뚫인 문이 있고, 좌우로 철책이 둘러져있어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개인 사유지로 오해하기 쉬우나 생긴 것이 그렇게 생겼을 뿐, 들어가도 무방하다. 대중
에게 개방된 식당이고 마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느티나무가든은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당으로 백숙과 파전, 도토리묵, 고기류 등을 취급
하고 있는데, 그 식당 앞에서 길은 또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호안공 이등/
의령옹주 묘역으로 인도하는 길이 나오고, 식당을 끼고 북쪽 숲으로 들어가면 영해군파묘역이
나온다.

호안공 이등/의령옹주 묘역은 입구에 녹색 철책과 문이 둘러져 있으나 대낮에는 거의 열려있
다. (밤에는 닫아둠) 그 숲길을 2분 정도 들어서면 호안공의 후손이 사는 붉은 지붕 기와집이
나오는데, 정말 외딴 산골에 묻힌 시골집이다. 서울에도 이런 곳이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거
리며 계속 걸음을 옮기니 집 앞을 지키고 선 큰 멍멍이가 무섭게 짖어대며 나를 경계한다.
물론 개는 줄로 묶여 있었지만 가까워질수록 멍멍 소리가 커지니 나도 모르게 염통이 쪼그라
든다. 내가 수상한 짓을 하러 온 것도 아니지만 단순한 개는 무작정 적으로 간주하고 맹렬히
멍멍 공격을 가하니 결국 그 공격에 꼬리를 내리고 뒷걸음을 쳤다.
개의 멍멍 소리에 집에서 사람이 나와서 무슨 일로 왔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이유를 말하면 되
지만 시간도 이미 18시가 다 된 상황이라 들여보내줄 것 같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인연
이 아닌 듯 싶어 이쯤해서 쿨하게 물러났다. (그 이후 아직까지 인연이 닿지 않고 있음)

참고로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 1379~1457년)은 개성이씨로 태조의 서장녀(序長女)인 의령
옹주(義寧翁主, ?~1466)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1435년 계천군(啓川君)으로, 1444년 봉헌대부
(奉憲大夫)에 봉해졌으며, 이들 무덤은 무수골에 처음 정착한 무덤으로 조선 초기 무덤 양식
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영해군파묘역 밑에 자리한 논두렁

호안공 묘역을 포기하고 느티나무가든 북쪽 숲에 묻힌 영해군파묘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
해군파묘역 밑에는 느티나무가든에서 관리하는 커다란 야외 단체석과 족구장, 논두렁 등이 있
는데, 이들 논두렁도 아직 모를 심지 않아 마치 큰 연못처럼 보인다. 그들 너머로 나무가 삼
삼히 우거져 있고, 그 숲속에 영해군파묘역이 자리해 있다.


▲  영해군파묘역 20m 전

▲  영춘군 이인묘와 신도비로 올라가는 산길

영해군파묘역으로 가다보면 중간에 왼쪽 언덕으로 올라가는 산길이 있다. (계단처럼 주름진
길이 보일 것임) 그 길로 가면 영춘군 이인묘와 신도비가 나오며, 직진하면 그 산길의 끝에
무리지어 있는 영해군파묘역이 있다.


 

 

♠  조선 초기 무덤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한 조선 왕족들의 묘역
전주이씨 영해군파묘역(寧海君派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6호

무수골 깊숙한 곳에 자리한 영해군파묘역은 세종의 9째 아들인 영해군과 그의 후손들이 묻힌
왕족 일가의 묘역이다.
무수골은 뒤에 도봉산, 앞에 무수천이 흐르는 이른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착한 명당(明堂)
자리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15세기 초반에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가 가장 먼저 이곳을 닦았
고, 영해군, 진주류씨, 함열남궁씨 순으로 무덤을 썼다. 이중 영해군파묘역이 가장 묘역이 넓
은데(1,630.4㎡)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선인무수지형(仙人舞袖之形)의 명당으로 꼽
힌다. (무수골의 이름도 거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음)

영해군파묘역은 크게 4구역으로 나뉜다. 묘가 몰려있는 중앙 구역은 묘역의 시조인 영해군 이
(李瑭) 내외를 비롯해 그의 장인어른인 신윤동(申允童), 영춘군의 아들인 강녕군 이기, 이
기의 노비인 김동(금동)의 묘가 있다. 이당 묘역 뒷쪽 산속에는 영춘군의 장남인
완천군(完川
君) 이희(李禧)와 완천군의 3째 아들인 평성수(平城守) 이질(李耋)의 묘가 있고, 동쪽 능선에
는 길안도정 이의의 묘, 묘역 직전 서쪽 능선에는 영해군의 장남인 영춘군 이인의 묘와 신도
비, 부원정 이이(영해군 손자의 아들) 내외의 묘가 있다.

묘역은 영해군을 시작으로 그의 아들과 손자, 증손자 4대가 묻혀있으며, 묘비가 없는 한참 후
손들의 무덤도 여럿 꼽사리로 끼어있다. 묘역은 영춘군 이인이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원종
공신(原從功臣)이 되면서 더 확대되었으며, 특히 중앙 구역 밑에 아주 조그맣게 충노(忠奴)로
포장된 금동의 묘가 있어 눈길을 끈다. 무덤들은 새로 손질된 부분이 거의 없는 16세기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 조선 초기 왕족들의 무덤 양식과 석물의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  충노 김동(金同)의 묘

묘역 중앙구역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충노 김동(금동)의 묘를 만나게 된다. 이 무덤은 영해군
파묘역의 다른 무덤과 달리 매우 아담한 모습인데, 이는 김동이 노비이기 때문이다. 밋밋하게
솟은 봉분(封墳)은 한 사람이 누우면 딱 적당할 정도로 작고, 풀도 별로 없다. 석물도 네모난
비좌(碑座)를 갖춘 묘비(높이 64cm, 너비 37cm, 두께 13cm)가 전부로 그 역시 꼬마 키보다도
작아 죽어서도 신분 차별을 주었다.
묘비는 비좌 위에 '故 忠奴 金同'이라 쓰인 빗돌을 세워 무덤의 주인을 알렸고, 빗돌 위는 반
원 모양으로 다듬었다. 그리고 그 위에 꽃봉오리 모습의 장식을 달았는데, 마치 위스키병처럼
보인다. (내가 술을 좋아해서 그런가?) 그러면 김동은 누구이고 왜 왕족 묘역 한쪽에 이렇게
무덤까지 있게 된 것일까?

김동은 강녕군(江寧君) 이기의 노비로 원래 이름은 금음동(今音同)이다. 연산군 시절에 흥청(
興淸)에 소속된 세은가이(世隱加伊)가 왕의 총애를 받자 그의 아비인 김숙화(金淑華)가 그 권
세를 믿고 이기의 집과 첩을 빼앗으려고 했다. 이기가 김숙화의 요구를 거절하자 뚜껑이 열린
김숙화는 이기가 노비 금동을 시켜 자신을 욕했다고 왕에게 하소연을 했다. (또는 이기가 노
비 금동과 함께 거친 말을 하며 항의했다고 함)
이에 뚜껑이 폭발한 연산군(燕山君)은 이기의 가족과 장인을 모두 연좌해 잡아들이고 집을 봉
쇄하고 노비까지 모두 압송케 했다. 이때가 연산군의 마지막 해인 1506년이다.

왕은 추관(推官)들에게 명해 낙형(烙刑)을 가하며 이기와 그의 아비인 영춘군 이인을 고문케
했다. 죄가 없는 이기 부자는 억울함을 토로했으나 허공의 메아리로 끝날 뿐, 아무 소용이 없
었다. 그러자 김동은 굳게 마음을 먹으며 '소인이 혼자 한 짓입니다. 나으리는 아무 것도 몰
라요!'
진술을 했다.
그 말을 신뢰하지 않던 왕은 거짓말 말라며 금동에게 6번씩이나 고문을 벌였다. 왕이 듣고 싶
던 말은 바로 이기가 했다고 자백하는 것이었다. 허나 금동은 끝까지 자기 소행이라 주장했고
그의 고집에 지친 왕은 결국 김동의 단독 범죄라 단정하여 그를 처단했다. 그리고 이기 부자
는 장형 100대, 이인은 장형 80대를 때려 유배형에 처했고 이기는 위리안치(圍籬安置)시켰다.
이 사건을 통해 이기와 연산군이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김숙화는 이를
악용해 이기의 집과 첩을 빼앗으려 했고, 연산군은 단순히 그의 무고만으로 이기를 잡아들였
으며, 김동이 자신이 벌인 일이라 자백하자 자신이 바라는 답변을 얻고자 더 고문을 가한 것
을 보면 이번에 아예 이기를 족치려고 작정했던 듯 싶다.

목숨을 건진 이기는 중종반정 이후 복권되었고, 김동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묘역 한쪽에 조촐
하게 그의 무덤과 비석을 만들어주었다. 그의 사연을 전해들은 중종(中宗)은 김동을 의노(義
奴)라 칭찬하며 1508년 4월 5일에 동네 어귀에 문려(門閭)를 세워주었고, 김동 가족의 요역(
徭役)을 면해주었다. 그리고 3년 뒤에 다시 명을 내려 집 앞에 정문을 세워 그의 희생을 길이
길이 기렸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그 공로로 김동과 그의 처자식은 면천이 되어 평민이 되었
고, 김씨 성을 하사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노비 김동의 묘가 무려 조선 왕족인 영해군파묘역 속에서 비록 작은 규모
이지만 주인 일가와 나란히 자리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거의 흔치 않은 노비의 묘로 묘비까지
갖춘 것은 아주아주 드문 케이스로 그 가치는 높다. 하긴 자신의 목숨을 던져 주인을 살렸으
니 이 정도 정성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  강녕군 이기(江寧君 李祺)와 그의 전/후처의 묘

김동 묘 옆에는 그의 주인인 강녕군 이기의 묘가 있다. 비록 무덤의 덩치는 김동 묘보다 크지
만 그와 거의 비슷한 높이에 자리해 있어 죽어서도 김동의 은혜를 잊지 않고 늘 함께 하겠다
는 주인의 지극한 마음이 담겨있는 듯 하다. (자리가 마땅치 않아서 그리 했을 수도 있음, 속
사정이야 당사자만이 알 것이니)
이기와 그의 전/후처 등 3명이 합장된 무덤으로 왕족의 무덤치고는 매우 작은 모습이다. 호석
(護石)을 두른 네모난 봉분과 비좌와 이수를 갖춘 비석, 상석(床石)이 전부로 그 부친대까지
는 봉분도 크고 문인석과 장명등까지 갖추었지만 이기부터 무덤이 간소하게 변화된다. 그만큼
먼 왕족이 되고 벼슬도 크게 못했기 때문이다.

이기는 영춘군 이인의 차남으로 영해군의 손자가 된다. 부인은 양주조씨인 조방우(趙邦佑)의
딸이며, 후처는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다. 그의 태어난 시기와 사망 시기는 전해오는 것이 없
으며, 연산군 말엽인 1506년에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세은가이의 아비 김숙화가 집을 뺏고자
시비를 걸자 이를 지키는 과정에서 그의 무고로 가족과 노비가 모두 압송되어 이기와 이당 부
자는 고문을 당하게 된다.
다행히 노비 김동이 자신을 불태워 이기의 가족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나 이기는 장형 100
대를 맞고 먼 곳으로 쫓겨나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중종반정 이후 복권되었다.

중종 때는 이정숙(李正淑) 등과 폐비 신씨(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청했다가 죄를 받은 김정
(金淨)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조광조(趙光祖) 등과 친분을 쌓았다. 허나 1519년 기묘
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 일당이 모두 아작이 나자 그의 일당이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죽은 이후 그 흔한 시호도 받지 못했다가 1794년 유림에서 그도 기묘사화 때 화를 받은
이른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하나라며 시호를 내리자는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문경(文景)이
란 시호를 내렸다.


▲  영해군 이당의 부인인 평산신씨(平山申氏)묘

강녕군 이기와 노비 금동의 무덤 윗쪽에는 영해군 이당의 부인인 평산신씨묘가 있다. 평산신
씨는 신윤동의 딸로 영춘군 이인과 길안도정 이의를 낳았으며, 남편의 무덤 옆이 아닌 친정
아비의 무덤 밑, 남편 무덤보다 2단계 밑에 따로 자리한 것이 이채롭다.

무덤은 동그란 봉분과 묘비, 상석 외에 장명등(長明燈)과 문인석(文人石) 2기까지 갖추고 있
으며, 이들 석물에는 500년 세월의 때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우측에는 묘비가 없는 후손 무
덤 2기가 봉긋 솟아있다.

▲  평산신씨묘와 묘비, 장명등

▲  고된 세월에 지쳐보이는 우측 문인석

▲  눈망울이 큰 좌측 문인석

▲  평산신씨묘에서 바라본 이기묘(왼쪽)와
금동묘(오른쪽)


▲  영해군의 장인인 신윤동(申允童)묘

영해군묘와 평산신씨묘 중간에는 영해군의 장인인 신윤동 묘가 자리해 있다. 영해군파묘역 중
간 구역에서 2번째로 높은 곳에 자리해 딸과 손자, 노비 금동의 무덤을 굽어보고 있는데, 사
위와 딸 무덤 사이에 둥지를 튼 점이 특이하다. 게다가 영해군 집안(전주이씨) 묘역에 부인도
아닌 다른 성씨의 인물이 잠들어 있는 점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아무리 장인어른이라고
해도 엄연한 다른 성씨이기 때문이다.
허나 조선 초까지는 집안 묘역에 사위나 장인 등 다른 성씨의 인물이 섞여 있는 경우가 흔했
다. 고려의 마지막 자존심이던 정몽주(鄭夢周) 묘역(용인시 능원리 소재)에도 정몽주의 손녀
사위인 저헌 이석형(樗軒 李石亨)과 그 후손이 묻혀 있고, 조선 10대 군주인 연산군은 부인인
거창신씨 집안의 땅에 묻혀있다.

신윤동은 좌의정에 추증된 신효창(申孝昌)의 손자이자 신자경(申自敬)의 아들이다. 그의 집안
은 왕실과 매우 가까워 세종의 왕자들에게 여럿 시집을 갔는데, 고촌사촌인 제안부부인(濟安
府夫人) 전주최씨(全州崔氏)는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부인이며, 숙
부 신자수(申自守)의 딸은 세종의 5남인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에게, 자신의 딸은 세
종의 9남인 영해군 이당에게 시집을 갔다. 그러니 집안도 배경도 다들 탄탄하다.
허나 영해군만큼이나 역사에 요란하게 이름을 남기지 못하여 인지도는 영해군파묘역에 와서야
확인이 될 정도로 매우 낮다.

신윤동의 행적에 대해서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서울시장)을 지내고 죽은 이후 의정부 좌
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는 것 등이며, 그의 할아버지인 신효창은 큰아들인 신자근이
아들을 얻지 못하고 일찍 죽자 막내 신자수를 신자근의 후사로 삼으려 했다. 허나 마음을 바
꾸어 신자경의 아들인 신윤동에게 신자근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는데, 신윤동이 사망하자 신효
창에 대한 제사를 누가 맡을 것인가를 두고 조정 관리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어났다는 내용이
전부이다. 또한 신윤동의 행적이 적혀있을 묘비(묘표)도 안타깝게도 마모가 되어 확인이 불가
능한 실정이다.

무덤의 구조는 동그란 봉분과 묘비, 상석, 문인석 2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석 앞면에 '증 의
정부 좌찬성 신윤동지?(贈議政府左贊成申允童之?)'라 쓰여 있다. 끝 자는 훼손되었으나 다른
묘비의 예를 볼 때 묘(墓)가 분명하며 우측에는 묘비가 없는 후손의 무덤 1기가 조용히 자리
한다.


▲  신윤동 묘의 뒷모습

▲  영해군 이당(寧海君 李瑭) 묘

신윤동 묘역 윗쪽에는 영해군파묘역의 시조인 영해군 이당의 묘가 있다. 묘역 중앙 구역에서
가장 높은 곳에 들어앉아 장인과 부인, 후손의 묘를 굽어보고 있는 이 무덤은 동그란 봉분과
고색의 내음이 진한 묘비(묘표), 상석, 날씬한 장명등, 문인석 2기로 이루어져 있다.

영해군(1435~1477)은 세종의 9째 아들로 신빈김씨(愼嬪金氏) 소생이다. 처음 이름은 이장(李
璋)이었으나 나중에 이당으로 갈았으며, 성격이 화목하여 다투는 일이 없었다고 전한다. 7살
에 영해군에 책봉되어 소덕대부(昭德大夫)의 품계를 받았으며, 1477년 42세의 나이로 죽자 성
종은 안도공(安悼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400년이 흐른 1872년에 영종정경(領宗正卿)
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신윤동의 딸인 임천군부인(林川君夫人) 신씨로 영춘군 이인과 길안도정 이의 등 2남1
녀를 두었으며, 보통 부인과 같은 봉분에 묻히거나 봉분을 달리해서 나란히 배치한 것이 보통
이나 영해군은 2단 밑에 부인의 묘를 두었다.
영해군묘는 정확히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무덤 뒷쪽 숲속에는 그의 손자인 완천군 이희(
영춘군 이인의 아들), 완천군의 3째 아들이자 영해군의 증손자인 평성수 이질 묘가 있으나 찾
지는 않았다. (그때는 몰랐음)
묘비 앞면에는 '영해군시 안도공당지묘(寧海君諡安悼公瑭之墓)'라 쓰여 무덤의 주인을 소상히
알려주고 있으며, 뒷면에는 그의 생애가 적혀있으나 마멸이 심해 확인하기가 어렵다.


▲  뒷쪽에서 바라본 영해군묘
(그 너머로 신윤동, 부인 평산신씨, 이기의 묘가 있음)

▲  영해군묘 우/좌측 문인석
장대한 세월에 제대로 지쳤는지 표정이 그리 밝지가 않다. 좌측 문인석은
세월이 씌워준 검은 때가 가득해 고색의 멋을 제대로 풍긴다. 세월이
달아준 얄미운 훈장이라고나 할까?

▲  길안도정 이의(吉安都正 李義)묘

영해군묘와 신윤동묘에서 동쪽으로 난 산길을 오르면 바로 길안도정 이의의 묘가 모습을 비춘
다. 동그랗게 솟은 봉분에는 이의와 그의 전/후처 등 3명이 잠들어 있는데, 그 앞에는 장대한
세월이 제대로 태워먹어 온통 검은 피부가 되버린 고색의 묘비(묘표)와 새로 세운 묘비, 상석
, 향로석(香爐石), 문인석 2기를 갖추고 있으며, 묘역 앞에 조촐하게 계단이 닦여져 있다.

이의는 영해군의 차남으로 구체적인 생몰시기는 전하는 것이 없다. 그는 여산송씨 집안의 송
자강(宋自剛)의 딸과 청주한씨인 한명회(韓明澮)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했으며, 은계군 이말숙
(銀溪君 李末叔, 한씨부인 소생), 시산군 이정숙(詩山君 李正叔, 송씨부인 소생), 청화수 이
창숙(淸化守 李昌叔), 송계군(松溪君), 벽계도정 이종숙(碧溪都正 李終叔), 옥계군(玉溪君)
등의 아들을 두었다. 그중 특히 벽계도정 이종숙은 황진이(黃眞伊)와 가까웠던 인물로 벽계수
(碧溪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의 묘비에는 '증 명선대부 길안도정행 창선대부 길안정(贈 明善大夫 吉安都正行 彰善大夫
吉安正)'이라 쓰여 있으며, 이의의 손자인 이휘(李徽)는 임진왜란 때 왜군을 격퇴한 공으로
그와 그의 아비, 할아버지 등 3대가 추증되었다. 그리고 이의의 아들인 이말숙의 묘비명에는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 이의와 사별했다고 나와있어 이의는 젊은 나이에 죽은 것으로 여겨진
다.

▲  이의묘의 옛 묘비와 새 묘비

▲  조각 솜씨가 일품인 옛 묘비의 이수(螭首)


▲  영춘군 이인(永春君 李仁)묘

영해군파묘역 중심 구역을 둘러보고 서쪽 산자락에 있는 영춘군 이인묘를 찾았다. 묘역 서쪽
구역에는 이인 내외와 부원정 이이 내외의 묘, 그리고 이인의 신도비가 있는데, 이 신도비는
이 묘역의 유일한 신도비로 이인의 높은 위치를 알게 해준다.

이인의 묘는 이인과 부인 유씨<유양(柳壤)의 딸>의 봉분을 비롯해 묘비 1기, 상석 2기, 혼유
석 2기, 장명등, 문인석 2기, 망주석(望柱石) 2기는 물론 무려 신도비까지 갖추고 있어, 영해
군파묘역 중의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묘역의 시조는 분명 그의 부친인 영해군이지만 그
부친보다 묘가 더 있어보여 이인묘가 이 묘역의 실질적인 주인공 같은 인상이다. (영춘군 이
인 묘역이라 불러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
특히 이들 묘역의 무덤들은 무덤 필수품인 망주석이 하나도 없는데 반해 이인 묘에는 망주석
이 있으며, 무덤도 동그란 형태가 아닌 앞은 네모, 뒷쪽은 세모로 총 5각형으로 이루어진 특
이한 모습이다. 동그란 봉분과 네모난 봉분(조선 초까지 많이 나타남)은 많이 봤어도 5각형은
처음이라 참 신선하며, 봉분 밑에는 호석을 둘러 단단히 다진 다음 두툼하게 봉분을 쌓았다.

영춘군 이인(1465~1507)은 영해군의 아들로 자는 자정(子靜)이다. 어렸을 때 외할머니 이씨(
신윤동의 부인)의 손에서 자라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었다고 하며, 10살 때 정의대부(正義大夫
)의 영춘군에 봉해졌고, 사옹원제조(司饔院提調)를 거쳐 숭헌대부(崇憲大夫)에 올랐다.
1506년 연산군이 총애하던 흥청 소속의 세인가비의 아비 김숙화의 무고로 이인과 이기 부자(
父子)가 압송되어 모진 고문 끝에 이인은 남해로 유배를 갔다. 다행히 중종반정(中宗反正)으
로 풀려나 복권되어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올랐으며, 1507년 4월 27일, 42살에 사망
했다. 하여 그해 8월 임신일에 지금의 자리에 장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목성(穆成)이다.

이인은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대단했는데, 11살에 어머니 신씨가 세상을 뜨자 3년상을 치
렀고, 그 상이 끝나기도 전에 부친 영해군이 사망하자 다시 3년상을 치렀다. 상례를 잘하여
종친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으며, 평상시 생활이 담박하고, 이름난 꽃을 뜨락에 심는 것을 좋
아했다고 한다.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으며, 중종반정으로 원종공신에 오른 덕에 집안 묘역을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  이인 묘비(묘표)
봉분 사이에 묘비 하나를 두었다.

▲  키 작은 장명등

▲  동자승처럼 생긴 우측 문인석

▲  홀을 쥐어든 좌측 문인석 (우측
문인석도 홀을 쥐어들고 있음)


▲  확트인 이인묘 앞부분
영해군이 묻힌 중심 묘역과 길안도정 이의묘는 숲속에 묻혀있어 시야가 좋지 못하다.
(주변에 보이는 건 나무, 위로는 하늘 뿐) 허나 이인묘는 나무의 눈치들이
적어 멀리 수락산과 불암산 산줄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  이인 내외 묘의 뒷모습
앞은 네모, 뒤는 세모를 취한 독특한 모습으로 5각형을 이루고 있다.

▲  이인묘에서 바라본 수락산(水落山, 638m)의 위엄

▲  이인 신도비(神道碑)

이인묘에는 특별한 존재가 하나 있다. 바로 신도비이다. 신도비란 무덤 주인의 생애를 기록한
비석으로 고위 관료와 왕족들의 무덤에만 쓸 수 있던 비싼 존재이다. 이인 역시 부모를 잘만
나 모태부터 왕족이기 때문에 신도비를 지녔다. 하지만 그의 아비인 영해군과 아들의 무덤에
는 신도비가 없으니 이는 중종반정으로 원종공신에 봉해진 탓이 아닐까 싶다.

신도비는 보통 신도(神道)로 통한다는 무덤 동남쪽에 세우지만 이곳은 서남쪽에 비석을 두었
다. 땅바닥에 네모지게 바닥돌을 깔고, 거북 머리인 귀부(龜趺) 대신 연꽃 무늬와 안상이 새
겨진 두툼한 비좌를 얹힌 다음 백일석(白一石)으로 만든 빗돌을 세우고, 그 위에 이무기가 여
의주를 두고 다투는 모습을 다룬 머리장식인 이수(螭首)로 마무리를 지었다.
비석의 높이는 273cm로 장대한 세월이 강제로 달아준 검은 주근깨가 많이 끼어있지만 그 덕에
중후한 멋과 고색의 미가 크게 돋보인다. 특히 이수에 새겨진 이무기는 비대칭적으로 새겨져
있는데, 그 조각수법이 꽤 섬세하여 은근히 탐이 난다.

이 비석은 1509년 9월에 세워진 것으로 당당하고 기품이 넘치는 모습으로 16세기 초를 대표하
는 비석으로 꼽힌다. 도봉산 자락에는 신도비를 갖춘 조선시대 무덤이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
도 이 비석은 단연 갑(甲)이며, 17세기에 세워진 임당 정유길(林塘 鄭惟吉) 신도비(서울 사당
동에 있음)의 모델이 되기도 한다.
빗돌에는 이인의 생애가 빼곡히 담겨져 있는데, 아들 이기의 부탁으로 첨지중추부사 남곤(南
袞, 1471∼1527)이 글을 지었고 글씨는 승정원 주서(注書)인 김희수(金希壽, 1475∼1527)가
썼으며, '목성공신도비명(穆成公神道碑銘)'이란 머리전서는 바로 김희수가 쓴 것으로 여겨진
다. 특히 도봉과 노원, 무수골의 옛 지명인 수철동 등 도봉/노원 지역의 옛 이름과 현재 이름
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 지역 지명을 최초로 언급한 기록으로 여겨져 지역 연구에도 큰 열쇠
를 제공해준다. 겉모습만 착할 뿐 아니라 빗돌에 새겨진 내용들도 착한 것이다.

지금은 영해군과 그의 후손들 묘역이 '전주이씨 영해군파묘역'이란 이름으로 지방문화재로 지
정되어 있지만 원래는 이 신도비만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묘역 전체
로 확장된 것이다.


▲  현란한 조각 솜씨를 드러낸 신도비 이수
소용돌이치듯 흘러가는 구름들 사이로 2마리의 이무기가 재주를 부리며
여의주를 다툰다. 비록 검은 때가 자욱하긴 해도 아직은 정정한
모습을 자랑해 500년 나이를 무색하게 한다.

▲  이인 묘 밑에 자리한 부원정 이이(富原正 李㶊)와 부인 전주유씨 묘역
이이는 영해군 이당의 증손으로 조용히 살다간 사람이다. 이이 부부의 봉분을
비롯해 세월에 검게 그을린 묘비(묘표)와 상석, 향로석 등이 있다.


무수골을 주름잡던 영해군파묘역을 싹 둘러보니 어느덧 19시가 되었다. 햇님도 퇴근본능에 따
라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 너머로 뉘엿뉘엿 저물고 달님과 땅꺼미가 조금씩 드리우기 시작
한다. 오랜만에 찾은 무수골, 개발도 그 칼날을 접은 곳이라 아직 산골과 시골 분위기는 여전
했다.
집에서 도보로 25~30분 정도면 충분히 안길 수 있는 무척이나 가까운 곳이지만 1년에 고작 1~
2번 가는 것이 고작이다. 집 인근에 이런 아름다운 곳이 있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하여 도봉
산의 숨겨진 비경, 무수골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산81-1 (도봉로169라길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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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봉화 오전약수와 약수탕, 석천계곡, 석천정사 여름 나들이 (휴천동 지석 및 입석)

 


' 경북 영주, 봉화 나들이 (오전약수터, 석천계곡) '

▲  오전약수터

▲  석천계곡

▲  석천정사


 

 

여름 제국의 한복판인 7월 중순의 어느 평화로운 날, 몸에 좋은 탄산약수와 시원한 계곡
생각이 간절하여 간만에 수도권을 벗어났다.

청량리역에서 안동(安東)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 나를 담고 원주, 제천, 단양을 거쳐
영주로 내려가는데, 죽령(竹嶺) 이전까지만 해도 장마의 기운이 여전했으나 죽령을 지나
면서부터 차창 밖은 완전 다른 세상으로 바뀌었다. 단지 고개 하나를 지났을 뿐인데, 중
부 지방에서 남부로 지역이 지역이 바뀌었고 장마가 죽령을 넘지 못하면서 그 이남은 벌
써부터 30도를 웃도는 무더위가 판을 치는 것이다.

영주역에 도착해 두 발을 내리니 거의 숨이 막힐 정도로 후덥지근한 날씨가 나를 맞이한
다. 장마로 조금은 선선한 서울 날씨에 익숙해진 탓에 처음에는 좀 난감했지. 하여 인근
편의점으로 들어가 무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벗삼아 컵라면과 삼각깁밥 등으로 조촐하
게 이른 점심을 때우며 더위에 흥분한 몸을 달랬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던 편의점을 나와 무더위를 뚫고 영주여객 종점으로 이동하다가 문득
생각나는 존재가 있어 휴천동 주택가를 기웃거렸다.


 

 

♠  이 땅에 흔치 않은 고인돌과 선돌의 공존 현장
영주 휴천동 지석(支石) 및 입석(立石) -
경북 지방기념물 24호

휴천동(休川洞) 주택가 속 조그만 공원에는 장대한 세월을 머금은 존재들이 있다. 바로 고인
돌<지석묘(支石墓)>과 선돌(입석) 형제이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휴천리 지석 및 입석')
이들은 고인돌 2기와 선돌 1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가 허전한 돌이 여럿 자리해 있어 고
인돌이 더 있었음을 가늠케 한다.
고인돌과 선돌은 학창시절 교과서부터 요란하게 등장하는 존재로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대
표적인 유적이다. 고인돌은 지역과 마을을 다스리던 우두머리의 무덤, 선돌은 세력이나 마을
간의 경계 표시나 기념비, 신앙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선돌이 나중에 장승
으로 변했다고 함) 특히 고인돌은 한반도와 요동(遼東), 만주에 집중 분포하고 있어 우리 역
사의 특허 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인돌 분포지를 옛 조선의 영역으로 보기도 함)
이렇게 고인돌과 선돌이 많이 널려있지만 정작 그들이 같이 있는 현장은 매우 희귀한데, 이곳
휴천동 유적은 바로 그 흔치 않은 두 존재의 흥미로운 공존 현장이다.

2그루의 나무가 넓게 그늘을 드리운 곳에 드러누워 여름 제국을 잊고 사는 이들 고인돌은 조
그만 돌을 기반으로 삼고, 그 위에 넓직한 뚜껑돌을 올렸는데, 아직 학술조사를 벌이지 않아
땅 속 사정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 지역을 주름잡던 고인돌 주인의 시신이 담긴 공간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고인돌 곁에 서 있는 선돌은 남자 성인 키의 절반 정도의 높이
로 예전에는 치성의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  북쪽에서 바라본 고인돌 형제

▲  고인돌 남쪽에 자리한 선돌

오랜 세월을 탄 고인돌은 피부가 까무잡잡하며, 선돌도 비슷하나 남쪽 면은 제법 하얗다. 이
곳은 무려 20여 년 전에 와본 인연이 있는데, 보호 난간과 공원이 조성된 것 외에는 고인돌과
선돌 자체는 딱히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내가 많이 변해 버렸지. (그때는 파릇파
릇했던 10대 시절, 지금은 그저 눈물만 ㅠㅠ)
고인돌 주변은 조촐하게 공원이 닦여져 있으며, 동네 사람들이 일군 조그만 텃밭도 있어 도심
속의 소소한 휴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휴식처는 엄밀히 따지면 고인돌/선돌 형제가 시민
들에게 준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이곳도 진작에 건물이 들어섰을 것이다.

*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 693-1,-2


 

휴천동 지석/입석을 오랜만에 인연 짓고 영주여객 종점(영주시내버스 차고지)으로 이동해 봉
화(奉化)로 가는 영주좌석버스 33번을 탔다. 날씨도 허벌나게 무덥고 가격도 비싼 좌석버스이
건만 무정하게도 냉방을 틀지 않아 창문을 열어 자연산 바람에 의지해 더위를 쫓았다. 
영주시내와 봉화읍내는 30리 남짓의 가까운 거리라 약 30분 만에 봉화읍내에 진입, 읍내 한복
판에 자리한 봉화터미널에서 하차했다.

봉화터미널로 들어가 그날의 주메뉴인 오전약수터행 시간표를 확인하니 40분 뒤에 차가 있다.
하여 그 시간을 억지로 죽이다가 오전약수터(오전약수탕)로 가는 군내버스에 나를 담고 북쪽
으로 향한다.
차가 막힐 일이 거의 없는 곳이라 2차선 도로를 쌩쌩 질주하며, 석천계곡과 북지리 마애여래
좌상, 계서당(溪西堂) 입구를 지나 어느새 물야(物野)에 이른다.
물야에서 사람들은 모두 내리고, 나와 운전사 둘만 남은 상태로 내성천(乃城川)을 따라 북쪽
으로 더 들어가니 물야저수지가 물연기를 모락모락 피우며 그림 같은 표정으로 나를 맞는다.
그 호수를 지나 2분 정도 더 가니 오전약수터 주차장이 나오고, 주차장 북쪽 가게에서 버스는
심장 소리를 멈추었다. 그곳이 바로 오전약수탕 종점이다.


 

 

♠  탄산 약수의 정석, 봉화 오전약수(梧田藥水)터 <오전약수관광지>

▲  오전약수터 주차장에 세워진 오전약수관광지 표석

선달산(先達山, 1,236m) 동남쪽 자락 450m 고지에 자리한 오전약수터(오전약수탕)는 일반적인
약수와 달리 탄산과 철분이 함유된 약수(藥水)이다. 이런 약수는 주로 백두대간(白頭大幹)이
지나는 강원도 영서(嶺西) 지방(춘천, 양구, 인제, 평창, 홍천, 정선)과 경북 산간지대(봉화,
청송)에 분포하고 있는데, 모두 교통이 불편한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혀있다.

오전약수터의 오전은 점심 이전의 오전(午前)이 아니라 쑥밭을 뜻하는 한자어로 조선 성종(成
宗) 때 보부상(褓負商)이 발견했다고 전한다. 그 보부상은 서벽장과 오전리 후평장을 오가며
장사를 했는데, 산을 넘다가 너무 피곤하여 쑥밭에 벌러덩 누워 잠을 청했다. 그때 만병통치(
萬病通治) 약수가 있다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보니 바로 옆에서 약수가 솟는 것이 아닌가. 그
약수가 바로 오전약수라고 한다.
성종 임금은 천하에서 가장 물맛이 좋은 약수를 추천하게 했는데, 오전약수가 그 으뜸으로 뽑
혔다고 전한다. (전국 약수 대회에서 1등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음) 중종(中宗) 시절에는 풍기
군수를 지내며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세운 주세붕(周世鵬)이 즐겨 찾았으며, 그가 남긴 4편의
약수터 찬양시가 전해오고 있다.

영남 북부 제일의 약수터로 오랜 인기를 누렸으며, 탄산과 철분이 강해 피부병과 위장병에 아
주 좋다고 전한다. 이런 약수는 사이다처럼 톡쏘는 맛이 나고, 맛이 일반 약수보다 쓴 편으로
여기에 설탕을 넣으면 거의 사이다가 된다.
약수의 성분은 탄산과 철분이 거의 절반을 이루고 있으며, 마그네슘이 1/3정도 된다. 그래서
약수터 주변이 온통 시뻘겋다. 또한 이런 물로 몸을 씻으면 건강에 좋다고 하여 약수터 부근
에 목욕탕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런 탕을 약수탕(藥水湯)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오전약
수탕이라 부름) 

오전약수 같은 탄산/철분 약수는 일반 약수와 맛이 틀리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이런 약수
를 가장 기피하여 입에 대지도 않았지, 그런데 이런 약수로 지은 밥은 밥이 파랗게 물이 오르
면서 일반 밥과 달리 꼬들꼬들하고 맛이 좋았다. 물은 싫었지만 그 물로 지은 밥은 좋았던 것
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20대 후반에 탄산약수의 하나인 설악산 오색약수(五色藥水)를 오랜만에
가보았는데, 약수터가 마르도록 본전을 뽑았다. 소시(少時)적에 그토록 싫어했던 물맛이 이제
는 달콤한 물맛으로 바뀐 것이다. 물론 몸에 좋다는 이유도 크게 한몫했지, 맛은 좀 쓰지만
몸에 좋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제 슬슬 몸을 생각할 나이대가 된 것이다.
그 이후 오랫동안 그런 약수를 찾지 못했다가 이번에 이렇게 오전약수를 찾게 된 것이다.

약수터에는 거북이 석상이 물을 졸졸 내뱉고 있는데, 몇 바가지를 마셨는지 모른다. 위장병이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니나 물이 몸 속에 들어가니 정말 약수의 효과인지 꼬르륵하던 뱃속이 조
용해진 거 같다. 마치 속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  오전약수터(왼쪽 6각형 정자)와 보부상 석상

▲  탄산 약수의 정석, 오전약수터

오전약수탕 종점에서 무성한 숲길을 3분 정도 들어가면 6각형 정자에 자리한 오전약수터가 활
짝 모습을 드러낸다. 한참을 들어가야 나올 것 같은 신비의 약수가 싱겁게 나와버려 이게 정
말 오전이 맞나? 오후 아닌가? 갸우뚱했지만 오전은 맞다. 의심할 필요가 없다.
약수터 주변에는 그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식당이 여럿 있는데, 한결같이 이 물을 이
용하여 닭백숙을 내놓고 있다. 탄산 약수로 고아 만든 닭백숙은 맛도 일품이고, 몸에도 좋다
고 하여 이곳의 든든한 별미로 크게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다보니 가격이 좀 있는 편인데,
혼자 온 탓에 백숙은 먹지 않았다.

식당은 대부분 민박을 겸하고 있으며, 평일이라 다들 한산하다. 약수터도 덩달아 한산하여 혼
자 거의 전세를 내다싶이하여 물을 섭취했다. 기분 같아서는 이 약수터를 집으로 가져와 혼자
두고두고 마시고 싶지만 그럴 권한과 힘은 나에게 없었다. 선달산 산신령을 뇌물을 구워삶아
약수터를 내게 달라고 청하고 싶지만 산신령이 약을 빨지 않는 이상은 이곳의 꿀인 약수터를
내주지 않을 것이다. 오전약수터는 바로 이곳에 있어야만 그 진가를 발휘하지 다른 데로 가면
죽은 약수가 된다.

오전약수터는 1986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그래서 많은 식당과 민박집이 생겨났으며, 약
수터 동쪽에는 몸을 씻을 수 있는 약수탕이 조성되어있고, 북쪽에는 근래에 인공폭포와 조그
만 공원을 닦았다. 또한 도보길 유행붐을 타고 봉화군에서 야심차게 추진한 외씨버선길이 이
곳을 지나간다.
인공폭포와 공원은 약수터 외에는 딱히 볼거리가 없는 문제점을 해소하고자 조성한 것 같은데
, 솔직히 오전약수와 어울리는 존재는 아니다. 이런 약수터에는 샘터과 계곡, 적당한 양의 편
의 시설(식당, 숙박업소) 정도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보며 이런 어설픈 것까지 굳이 만들어야
했는지 의문이다.

*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99-5, 1212 (오전약수탕길 18-24, 문수로 1601)


▲  오전약수터 옆을 흐르는 오전계곡 (내성천 상류)

▲  오전약수터 북쪽에 조성된 인공폭포
인공폭포 위쪽에는 넓게 공원을 조성하여 정자와 연못, 공연장을 두었다.


오전약수터와 인공폭포 공원에서 1시간 정도 머물다가 버스 시간에 맞춰 종점으로 나갔다. 외
씨버선길을 타고 두내약수탕(두내약수터)으로 넘어갈 생각도 했지만 날씨가 무더워 그건 포기
했다. 하여 일단 읍내로 나가면서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사람의 마음
이 갈대라 이내 변심하여 예전에 갔던 석천계곡(석천정사)으로 메뉴를 바꿨다. 한여름에는 뭐
니뭐니해도 계곡과 바다가 최고 아니겠는가.

봉화읍으로 나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석천계곡 입구이자 읍내 직전인 삼계에서 내렸다. 계곡으
로 들어가려던 찰라에 문득 마을 쪽에서 오래된 기와집 하나가 크게 눈빛을 보낸다. 하여 그
눈빛에 일부러 홀리며 가보니 삼계서원이란 오래된 서원이다.


▲  삼계서원(三溪書院)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417호

석천계곡 입구 북쪽에 자리한 삼계서원은 석천계곡과 닭실을 일군 충재 권벌(沖齋 權橃, 1478
~1548)을 배향한 서원이다.
1588년 안동부사(安東府使) 김우옹(金宇顒)이 권벌을 기리고자 석천계곡 입구에 조촐하게 세
웠는데, 1601년 한강 정구(寒岡 鄭逑)가 건물 이름을 지어주었고, 1660년 삼계란 사액(賜額)
을 받아 국가 공인 서원이 되었다.
1868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통 큰 서원 정리 사업으로 사당과 환성문(喚惺門), 관물루(
觀物樓)가 철거되었으며, 1951년에 중건되었다. 이곳은 특히 을미의병(乙未義兵)이 한참 일어
나던 1895년 안동 유림들이 권세현(權世賢)을 의병(義兵) 대장으로 추대하며 격문(檄文)을 작
성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서원의 구조는 앞에 공부를 하는 강당(講堂)을 두고 뒤에 사당을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
태로 좀 지나치게 커 보이는 2층 누각인 관물루가 서원 앞쪽에 자리해 있는데, 그 가운데 칸
에 문을 두어 환성문이라 했다. 허나 문은 굳게 잠겨있어 좀처럼 열릴 줄을 모른다.
환성문을 들어서면 좌우에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고, 정면에는 강당이 자리해 있는데,
서원 철폐 당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존재로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그래서 고색
의 기운이 진하다. 강당 뒤쪽에는 사당이 자리해 있고, 서재 좌측에는 관리인이 머무는 건물
이 있으며, 동재 옆에는 1906년 사림(士林)에서 세운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

서원 주위로 돌담을 길게 둘렀는데, 오래된 마을의 돌담길처럼 정겹고 푸근한 모습이다. 서원
서쪽에는 관리인이 머무는 건물이 있는데, 그곳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나 어차
피 밖에서도 사당을 제외하고 보일 것은 다 보이므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들어가기도 귀찮
고, 그때 내 마음은 이미 석천계곡에 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삼계서원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삼계리 174 (생기마1길 24)

▲  담장 너머로 바라본 강당과 동/서재

▲  1906년에 세워진 권벌 신도비(神道碑)


 

 

♠  봉화 제일의 경승지, 석천계곡(石泉溪谷) - 명승 60호

▲  석천계곡 입구

삼계서원을 둘러보고 바로 남쪽에 자리한 석천계곡으로 이동했다. 이 계곡은 봉화 제일의 경
승지이자 피서의 성지(聖地)로 추앙받는 봉화의 꿀단지로 아직 본격적인 피서철도 아니고 그
날이 평일인지라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람이 너무 많은 것보다는 이렇게 한적한 것이 더 좋
지, 덕분에 석천계곡과 닭실마을 일대를 참 아늑하고 마음 편하게 둘러보았다.

석천계곡은 가계천(駕溪川)의 일부로 닭실마을<달실, 유곡(酉谷)마을>에서 내성천(乃城川)이
합류하는 삼계교까지 약 1km 구간을 일컫는다. 이곳에는 권벌이 터를 다지고 그의 큰 아들인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가 지은 석천정사(석천정)가 있으며, 울창한 소나무숲과 기암괴석,
계류(溪流)가 어우러진 현장으로 예로부터 봉화 으뜸의 경승지로 찬양이 대단했다.
계곡 상류에 자리한 닭실은 권벌이 개척한 곳으로(또는 권벌의 조상이 1380년대에 개척했다고
함)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파직을 당하자 고향 안동으로 내려와 1520년 집을 짓고 닭
실을 일구었다.
지금은 석천계곡이 자연/답사 탐방로가 되었지만 읍내에서 계곡 남쪽에 신작로(다덕로)를 내
기 이전에는 읍내에서 닭실로 갈 때는 이 계곡을 거쳐서 갔다.

석천계곡과 닭실 일대는 '내성유곡 권충재(乃城酉谷 權沖齋) 관계 유적'이라 하여 사적 및 명
승 3호
로 지정되었으나 그 등급이 명승에 통합되면서 '봉화 청암정과 석천계곡'이란 이름으로
명승 60호로 변경되었다.


▲  석천계곡 하류 (주차장 남쪽)
멋드러진 풍경에 계곡 수심까지 얕은 편이라 피서의 성지로 전혀 부족함이 없다.

▲  석천계곡 (석천정사로 가는 계곡길)

석천계곡 주차장을 지나면 흙과 돌로 이루어진 계곡길이 나온다. 길이 좀 울퉁불퉁하긴 하지
만 너무 깔끔함과 편리함을 추구하는 포장길보다는 운치가 있고 정겹다. 길도 오로지 계곡길
뿐이라 두 다리에 의지하여 갈 수 밖에 없는데, 송림(松林)이 울창해 솔내음이 그윽하며, 계
곡에는 온갖 바위가 계류의 희롱을 즐긴다.


▲  청하동천(靑霞洞天) 바위글씨

석천계곡 주차장과 석천정사 중간 정도에 기묘하게 생긴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중간 도
리에 붉은 피부로 이루어진 청하동천 바위글씨가 있다. 청하동천은 석천계곡의 다른 이름으로
하늘 위에 있는 신선이 사는 마을이란 뜻이다. 그만큼 이곳이 신선(神仙) 세계와 가까울 정도
로 경승지임을 내세우고 있는데, 여기서 동천(洞天)은 빼어난 경승지에 부여되는 명예로운 이
름으로 아무 명소나 가질 수 있는 명칭이 아니다.

이 바위글씨는 권벌의 5대손인 권두옹(權斗應, 1645~1732)이 쓴 것으로 그의 호는 대졸자(大
拙子)이다. 여기서 대졸자는 요즘 흔한 대졸자가 아니라 크게 어리석은 작자라는 뜻으로 자신
을 낮추려는 의도로 지은 것이다. 호부터가 참 특이한데, 그가 살던 시절에 석천계곡의 명성
을 듣고 많은 도깨비들이 몰려와 놀면서 이곳에서 공부를 하던 유생들이 크게 고통을 당했다
고 한다.
그래서 권두옹은 바위에 글씨를 새기고 붉은 칠을 하여 필력(筆力)으로 도깨비를 쫓아내니 이
후 계곡에 평화가 찾아와 유생들의 공부가 더 잘되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설화가 한 토막 전해
온다.
과연 도깨비가 이곳까지 놀러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도깨비도 흥분시킬만큼 이곳이 대단한 경승
지임을 강조하고자 적당하게 지어낸 설화라 하겠다.


▲  청하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구렁이가 움직이는 듯한 생생한 필체이다.

▲  신선이 나올 것만 같은 소나무 숲길

▲  바위에 뿌리를 내리며 장차 석천계곡의
중심을 꿈꾸는 돌탑 무리들

▲  싱그러운 석천계곡 (청하동천 바위글씨와 석천정사 중간 지점)


▲  소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석천정사<(石泉精舍), 석천정(石泉亭)>

▲  석천계곡의 백미(白眉) 석천정사(석천정)

석천계곡 주차장에서 계곡길을 10분 정도 들어가면 계곡 건너에 자리한 석천정사가 모습을 드
러낸다. 석천정은 석천계곡의 상징이자 이 계곡에서 가장 절경이 뛰어난 곳으로 권벌이 1526
년에 세우려고 축대까지 쌓았으나 거기서 공사가 중단되고 대신 청암정을 지었다. 이후 축대
만 남은 이곳을 큰아들 권동보가 춘양목(春陽木)으로 산뜻하게 집을 지었다. 그의 후손과 지
역 유생들이 공부를 하던 배움터이기도 했으며, 여러 번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계곡 동쪽에 돌로 석축을 단단히 다지고 돌담을 두룬 다음 팔작지붕의 석천정을 세워 계곡을
바라보게 했고, 그 옆구리에 익랑(翼廊)을 덧붙여 공간을 넓혔으며, 담장 양쪽에 외부로 나가
는 문을 내고, 북쪽 문 옆에는 유생들의 숙소인 3칸짜리 맞배지붕 건물을 두었다.

계곡길에서 석천정을 가려면 계류 위에 놓인 외나무 다리를 건너야 되는데, 물살의 패기가 조
금 있을 뿐, 수심이 얕아서 폭우로 계곡이 미치지 않는 이상은 누구든 건너갈 수 있는 수준이
다.


▲  석천정으로 인도하는 외나무다리 (다리 건너의 기와집은
석천정의 딸린 건물로 관리인이 머물고 있음)

▲  외나무다리와 무성한 숲을 이룬 계곡 상류

▲  서쪽에서 바라본 석천정의 위엄


▲  석천정에서 바라본 계곡

▲  외나무다리에서 바라본 계곡 (주차장 방향)
이곳은 계곡이 굽이치는 곳이라 물살이 제법 급하다.

▲  석천계곡 상류 방면 (닭실 방향)

석천정은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허나 바깥에서도 왠만한 것은 다 보
이니 굳이 홍길동을 따라하며 월담을 할 필요는 없다. 예전 석천계곡에 왔을 때도 딱 여기까
지만 갔었다.
여기서 뒤쪽으로 조용히 난 샛길을 따라가면 권벌의 후손이 사는 닭실마을이 나온다. 기왕 석
천계곡에 발을 들였다면 샛길을 쭉 따라가 닭실까지 모두 살펴보기 바란다. 닭실과 석천계곡
은 서로 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계곡으로 이어져 있는 하나의 존재이다.

글 분량상 닭실마을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본글은 여기서 끝~~

* 석천정사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945 (충재길 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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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겨울 산사 나들이, 치악산 구룡사의 은빛 설경 ~~~ (거북바위, 구룡사계곡, 구룡폭포)

 


' 늦겨울 산사 나들이, 치악산 구룡사 '

▲  구룡사 소나무 숲길


 

울 제국이 막바지에 이르던 2월 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원주에 있는 치악산 구룡사를
찾았다.
그곳을 찾은 이유는 별거 없다. 서울에서 적은 비용에 간단히 갈만한 강원 영서/충청 지
역 명소를 물색하다가 그곳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치악산(雉岳山)은 이 땅의 국립공원의 하나로 구룡사는 치악산의 대표 관문이다. 그곳은
이미 중학교 때 인연이 있으나 그건 어언 2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래서 간만에 구룡사도
둘러보고 구룡사계곡을 따라 세렴폭포까지 가보기로 했다.

아침 9시에 집 부근 방학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회기역에서 경의/중앙선 전철로 환승
하여 양평역(楊平驛)에서 내렸다. 여기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중앙선 무궁화호 열차로 갈
아탔는데, 좌석이 없어서 강제 입석을 해야 했다.
원주(原州)의 관문인 원주역에 발을 내리니 바람이 칼날처럼 꽤 매섭다. 멀리 보이는 치
악산과 여러 뫼들은 겨울 제국(帝國)이 내린 하얀 옷을 반쪽씩 입고 있어 한겨울로 돌아
간 기분이다.

원주역에서 구룡사로 가는 원주시내버스 41번(관설동↔구룡사)을 타고 시내를 벗어나 변
두리로 나오니 멀리서만 보이던 하얀 눈이 바로 차창 밖에 진을 치고 있었고, 구룡사 종
점에 두 발을 내리니 여기는 시내와 달리 완전 겨울의 한복판 그 자체였다. 사방에 눈이
내려앉아 부질없는 설경(雪景)을 자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소쩍새가 울면서 겨울잠에 잠
든 천하를 깨우고, 천하만물들은 봄 환영에 여념이 없건만 겨울이 다시금 위엄을 보이며
원상태로 돌리니 완전 다된 밥에 재를 뿌린 격이 되었다.


▲  눈에 덮힌 구룡사 종점 주변 (학곡저수지 방향)


 

♠  구룡사 입문 (황장금표, 부도군, 거북바위)

▲  소나무가 무성한 구룡사 매표소 주변

구룡사 종점 주변에는 나들이꾼과 산꾼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
다. 날씨가 구려서 그런지 주말임에도 산꾼이 별로 없어 식당들은 대체로 썰렁하다.
치악산의 자랑인 황장목(黃腸木) 소나무가 훤칠한 키로 하늘을 훔치며, 그의 밑도리에 그늘을
드리운다. 한여름에 왔다면 정말 반가운 그늘이었겠지만, 겨울 끝 무렵이라 그 그늘이 은근히
춥다. 천하를 뒤덮은 눈구름이 잠시 개이고, 구름들 사이로 푸른 하늘과 햇살이 속살을 비추
어 이제 날씨가 개이는구나 싶었지만 그 역시 잠시 뿐이다.

식당 거리 끝에 이르니 썩 반갑지 않은 매표소가 나타나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대놓고 노려본
다. 입장료를 보니 어른은 무려 2,500원, 오기 전에는 막연히 2,000원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먹고 살기가 나처럼 힘든건지 무려 500원이나 높은 가격으로 중생을 맞이한다. 문화유산도 별
로 없는 절이 문화재관람료란 명목으로 고액의 돈을 대놓고 뜯으려 하여 절에서 많이 통용되
었던 여러 할인안을 제시했으나 무조건 정가를 내라고 인상을 쓴다.
그냥 되돌아가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다른 대체 장소를 둔 것도 아니어서 울며 겨자먹고 토하
는 심정으로 입장료를 치루었다. (국립공원 고찰 중 법원의 판결까지 무시하며 입장료를 뜯는
절이 여럿 있음)

이유도 불분명한 소위 구룡사의 입장료삥에 불쾌한 마음을 가득 품으며 유료의 공간으로 들어
서니 바로 왼쪽에 황장금표를 알리는 안내문이 나오고, 그 안쪽 높은 곳에 황장금표가 나그네
들의 시선도 받지 못하며 보호 난간에 둘러싸인 채, 누워있다.


▲  바위에 새겨진 학곡리 황장금표(黃腸禁標) - 강원도 지방기념물 30호

황장금표는 조선 조정에서 황장목이란 소나무를 보호하고자 백성들의 출입과 벌채를 금지하는
경고 안내문이다. 황장목은 나무 수심부분의 색깔이 누렇고, 몸이 단단한 우수한 소나무로 조
선 왕실에 필요한 물건이나 궁궐 건물을 지을 때 사용했다.
이 금표는 황장목이 자라는 곳 경계 지점에 설치되었는데, 폭 110cm, 높이 47cm, 둘레 270cm
크기의 자연산 바위로 그 피부에 '황장금표' 4자가 조금은 뚜렷하게 눈을 뜨고 있다. 근래에
금(禁)과 표(標) 사이에 동(東)이란 글자가 추가로 확인되어 황장금동표(黃腸禁東標) 5글자가
되었는데, 이는 여기서 동쪽이 황장금표 구역이니 건들지 말라는 뜻이다. 여기 외에도 구룡사
입구 주차장 부근 도로에도 황장금표가 하나 더 있다. (땅속에 좀 묻혀 있음)

조선 초에는 전국 60개소의 황장목 봉산(封山)이 있었으며, '관동읍지(關東邑誌)'에 구룡사가
황장소봉지(黃腸所封地)라 나와있다.


▲  구룡교(龜龍橋)

황장금표를 지나 3분 정도 가면 구룡탐방지원센터가 나온다. 여기서 계곡 위에 유연하게 걸린
구룡교를 건너면 소나무 등 온갖 나무로 가득한 구룡사 숲길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구룡교 난
간 양쪽 끝부분에는 용머리 장식이 달려있어 다리의 이름값을
돕는다.


▲  겨울에 잠긴 구룡교 주변 구룡사계곡

▲  북쪽을 바라보는 원통문(圓通門)

구룡교를 건너 얼마 안가면 원통문이란 이름의 일주문(一柱門)이 마중을 한다. 겨울이 채색한
하얀 지붕을 머리에 인 원통문 옆에는 차량을 위한 길이 나있어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은데,
절에 왔으면 절의 정문인 일주문을 이용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속세에서 가져온 거추장스러운 번뇌를 멀리 날려줄 것을 산바람에 부탁하며 문을 들어선다.


▲  구룡사 승탑(僧塔, 부도)들

일주문을 지나 2분 정도 가면 길 오른쪽에 승탑과 비석이 어우러진 공간이 나온다. 이곳은 구
룡사 승려의 넋이 깃든 승탑의 보금자리로 모두 7기가 있는데, 이중 6기가 조선 후기에 조성
된 것이다. 조그만 몸통에 고색의 때가 자욱한 이들은 석종형(石鐘形) 승탑으로 조금씩 모습
을 달리하고 있다.
승탑 사이로 3기의 탑비(塔碑)가 있는데, 세량당 초운대사탑(洗梁堂 楚雲大師塔)과 충허당(沖
虛堂), 뇌파당(雷波堂)의 비석으로 18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조성된 것이다.


▲  무총대선사탑(武總大禪師塔)과 탑비

승탑 무리를 장식하는 승탑 중 가장 앞에 있는 있는 것이 무총대선사의 탑이다. 이곳에서 가
장 큰 승탑으로 뒤쪽에 병풍처럼 늘어선 고참 부도 6기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자리를 지킨다.
이 탑과 탑비는 2005년에 조성된 것으로 탑의 주인인 무총대선사는 구한말(舊韓末)에 활약했
던 승려이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하늘과 땅, 사람, 귀신이 모두 분노하자 썩어빠진 권력층 타
도와 토왜(討倭)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전국적으로 의병(義兵)이 일어났다. 무총은 승병(僧兵
)을 일으켜 의승장(義僧將)으로 경상도로 내려가 승병 봉기를 시도했고, 경북 예천에서 대구
승려 성기(聖基)가 경상도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짜고 의병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그를 응
징하는 등, 많은 활동을 했다.
그의 활약은 원주항일기념사업회에서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을 고증
하는 과정에서 밝혀져 뒤늦게나마 그의 승탑과 비를 만들어 그의 애국충절을 기렸다.


▲  승탑 무리와 국사단 사이에 닦여진 쉼터
숲길 한복판에 너른 공간을 닦아 쉼터 겸 식당을 두었다. 앞 공터에는 둥글게 터를
다지고 조그만 돌탑을 테두리 부분에 쌓아 소소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  구룡사 국사단(局司壇)

쉼터를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은 차량, 오른쪽은 뚜벅이 길인데, 어느 길
로 가든 크게 상관은 없다. 차량의 왕래도 별로 없는 편이고, 어느 길로 가든 구룡사는 나오
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오른쪽 길로 가다보면 길 오른쪽에 높이 터를 다지고 들어선 국사단을 만나게 된다. 이 건물
은 절터를 지키는 신을 봉안한 건물로 여기서 국사(局司)는 절터를 뜻한다. 옛날부터 있던 것
으로 예전에는 1칸짜리 맞배지붕 건물이었으나 근래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덩치를 불렸다.
경내나 경내 인근에 이렇게 국사단을 둔 절은 가야산 해인사(海印寺)가 대표적이다.

평소에는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문창살 사이로 속인들이 낸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 보는 수
밖에는 없는데, 어두컴컴한 내부에는 위패가 봉안되어 있을 뿐, 딱히 다른 것은 보이질 않는
다.


▲  구룡사를 지키던 거북바위

국사단을 지나서 왼쪽을 잘 살펴보면 목과 몸이 끊어진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뚜벅이길보다는 차량길로 가면 찾기가 더 쉬운데 이 바위가 구룡사의 오랜 지킴이인
거북바위이다.
구룡사에는 2개에 재미난 전설이 전하고 있는데, 하나는 창건설화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거
북바위에 얽힌 설화이다. 오랫동안 절의 운을 지키고 선 바위였으나 오히려 사람들의 욕심으
로 목이 끊어져 두 동강이 난 비운의 존재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에는 치악산에서 나오는 산나물 상당수를 왕실에 공납(貢納)했다. 그래서 구룡사 주
지승을 산나물 공납을 담당하는 책임자로 삼았는데, 산에서 나온 모든 산나물은 모두 주지승
의 검사를 받아야 했다. 여기서 통과된 것만 서울로 보냈던 것이다. 그래서 인근 사람들은 어
떻게든 심사에서 통과하고자 또는 나물값을 제대로 받고자 주지승에게 별도의 뇌물을 건넸다.
계속되는 뇌물 공세에 입이 귀까지 걸린 주지승은 욕심이 더욱 커져 돈 챙기기에 급급하였고
그로 인해 절의 이미지가 하락하여 자연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승려가 찾아왔다. 그는 절이 몰락한 것은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이
라고 하면서 그 바위를 쪼개 없애면 좋을 거라고 했다.
그 말에 두 귀가 솔깃해진 주지승은 바로 거북바위를 두 동강냈지만 오히려 신도의 수가 줄었
고, 수입이 줄어 문을 닫아야 될 지경에 이르렀다. 아마도 구룡사에 반감이 있거나 인근 경쟁
사찰의 승려가 거북바위가 절을 지키는 존재임을 눈치채고 절을 망하게 하고자 그런 말을 던
진 듯 싶다. 그걸 주지승이 생각도 없이 받아들여 절 지킴이 바위를 스스로 아작낸 것이다.

이후 어느 날, 도승 하나가 찾아왔다. 주지승이 넋두리를 하니 도승이
'절이 몰락한 것은 그 이름이 맞지 않기 때문이오'

그 말에 주지승이 귀를 크게 하고
'그건 무슨 말씀이오?'

그러자 도승이
'이 절은 절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가 절운을 지켜주었소. 허나 그 바위를 동강을 내어 혈맥을
끊었으니 운이 막힌 것이오'

주지승이 애타게 방안을 묻자. 도승은
'거북바위는 이미 죽었으니 그를 다시 살린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구(九)에서 구(龜)로 바꾸
시오. <그 당시 절 이름은 구룡사(九龍寺)였음>'

그 연유로 지금의 구룡사(龜龍寺)로 이름이 갈렸던 것이다. 이후 절은 그런데로 흥성을 누려
치악산 제일의 사찰이라는 지위를 누리게 된다.

거북바위는 마치 거북이가 오르막을 오르는 모습처럼 보인다. 하여 그의 진면목을 보고자 한
다면 거북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에서 보기 바란다. 그럼 정말 거북바위의 이름이
허언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원래는 목과 몸통 부분이 붙어있었으나, 생각 없는 주지승이
목을 끊어버려 지금의 비통한 모습이 되었다.


▲  하얀 소복을 걸친 구룡사 은행나무 (강원-원주-38호)

거북바위를 지나면 경내를 가리고 선 커다란 은행나무가 중생을 맞이한다. 이 나무는 추정 나
이가 약 200년 정도로 높이 19m, 가슴둘레 1.25m에 큰 나무이다. 봄이 곧 도래할 시기라 봄맞
을 준비에 부산해야 되지만 늦겨울이 내린 하얀 눈송이가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가득 들러 붙
어있으니 진정한 봄은 아직도 멀었다. (보통 겨울은 3월까지 감)

은행나무를 지나면 산자락에 터를 다지고 담장과 보광루 등의 여러 굵직한 건물로 속살을 가
린 구룡사 경내 밑에 이르게 된다.


 

♠  치악산 북쪽에 안긴 원주 제일의 고찰, 구룡사(龜龍寺)

치악산 북쪽 자락 소나무숲에 포근히 둥지를 튼 구룡사는 치악산에서 제일 큰 절이자 원주 지
역에서 가장 큰 절이기도 하다. 흔히 치악산에 가면 구룡사를 많이 거쳐간다. 다른 코스도 있
지만 구룡사가 가장 널리 알려졌고 교통도 괜찮기 때문이다.

구룡사는 666년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구룡사의 주장과는 달리 당시
의상은 당(唐)나라에 머물며 한참 화엄종(華嚴宗)을 익히던 시절이므로 도저히 시기가 맞지가
않는다. 그는 661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670년에 귀국을 했기 때문이다. 귀국하여 신라 조정의
허가를 받아 세운 것이 영주 부석사(浮石寺)이다.
의상대사 외에도 무착대사(
無着大師)란 인물이 비슷한 시기에 세웠다고 하나 이를 입증할 기
록과 유물은 전혀 없으며, 조선 초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구룡사
의 이름 3자는 나오지 않는다. 또한 경내에 전하는 유물도 모두 조선 후기(18세기 이후) 것으
로 1706년에 만들어진 와당이 제일 오래된 것이다. 그러니 구룡사의 바램대로 신라는 커녕 고
려 때 지어졌을 가능성도 적어 보이며, 조선 초나 중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중기까지도 적당한 사적(事績)이 전해오지 않으며, 18세기 중반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
圖書)에는 85칸의 건물이 있고, 절 앞에 용연(龍淵)이 있어 가뭄이 들었을 때 기도를 하면 항
상 반응이 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이 구룡사의 제일 오래된 기록이다. 그 시절에는 보광
루나 대웅전, 승탑(부도), 삼장탱화 등이 조성되던 때이기도 하다.

1895년 이곳 승려인 총무대선사가 의병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6.25시절에는 총탄도 비켜
가 딱히 피해가 없었다. 1966년 보광루를 해체복원하고, 1968년에 심검당과 요수를 보수했으
며, 2000년 이후에도 꾸준히 불사(佛事)를 벌여 지금의 큰 규모를 이루게 되었다. 허나 2004
년에는 강원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던 대웅전이 화재로 무너져 안그래도 없는 지정
문화재가 하나 줄어들었다.

▲  구룡사 범종각(梵鐘閣)

▲  설선당과 적묵당(寂默堂)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중심으로 천불전, 보광루, 설선당(종무소), 응진전, 관음전, 삼성
각, 사천왕문, 국사단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보광루를 빼면 고색의 기운은 별로 없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광루,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복장유물(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174호), 아
미타설법도(강원도 지방문화재자료 160호), 금고(강원도 지방문화재자료 161호) 등의 지방문
화재와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있으며, 그 외에 삼장보살도(보물 1855호)와 용다사(龍多
寺) 동종(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133호)도 있으나 이들은 신변보호를 위해 멀리 월정사(月精
寺) 성보박물관에 가 있다.
(목조관음보살좌상과 아미타설법도, 금고는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해 모두 지나치고 말았음)

구룡사는 하늘을 가리고 늘어선 수해(樹海) 속에 자리해 있으며, 멋드러진 계곡을 옆에 끼고
있어 경승지로 꼽힌다. 계속되는 불사로 커다란 건물이 마구 들어서면서 예전과 달리 조촐하
고 아늑했던 멋은 좀 떨어지긴 했으나 속세(俗世)와 적당히 거리를 두며 첩첩한 산골에 위치
해 있어 번뇌를 털기에는 좋다.
고색의 기운이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재밌는 창건설화를 간직하고 있어 절을 찾은 중생들에게
웃음을 머금게 한다.

★ 믿거나 말거나 웃고 넘기는 구룡사 창건설화
의상대사(또는 무착대사)는 절을 세울 명당을 찾고자 치악산을 온종일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
가 지금의 절자리를 발견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 이유는 이곳 동쪽으로 치악산의 주봉인 비
로봉(毘盧峯)이 있고, 다시 천지봉의 지맥(地脈)이 앞을 가로지른데다가 수려한 계곡이 흐르
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는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연못이야 메우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그
곳에 9마리에 용이 살고 있었다. 하여 의상은 연못 앞에서 한숨을 쉬며
'연못을 메우고 법당을 지어야겠는데, 용이 살고 있으니 그들을 내보내야 일을 할 수 있겠군,
참 난감하구나~~'

그 말을 엿들은 용들은 뚜껑이 단단히 열려 밖으로 나와 의상에게 시비를 걸었다.
'야 땡중! 너가 우리를 내쫓을 생각인가본데, 우리가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을 것이야. 그러니
서로 내기를 하는 건 어떠냐? 우리가 이기면 너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고, 만약 너가 이기면
흔쾌히 이곳을 넘겨주겠다'
용이 의상을 깔보며 자신만만하게 내기를 제안하자 의상은 빙그레 웃으며
'너희들이 무슨 재주를 부리려고 하느냐?'
그러자 용은
'잠시 뒤에 알게 될 것이다. 각오해라'

답을 하며, 9마리가 모두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뇌성벽력과 함께 장대비를 쏟아 부어 순
식간에 모든 산들이 물에 잠겼다. 한참 동안이나 비를 퍼부은 용은 의상이 물에 빠져 골로 갔
을 것이라 여기고 비를 거두고 내려왔다. 허나 뜻밖에도 의상은 비로봉과 천지봉 사이에 조그
만 배를 띄우고 낮잠을 자고 있었다.

▲  경내 바깥 부분

▲  천불전(千佛殿)

부시시 잠에서 깬 의상은 그의 멀쩡한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진 용을 보며
'너희들 재주가 고작 그것뿐이냐. 실망이구나. 이제 내가 조화를 부릴 차례이니 너희들은 눈
을 크게 뜨고 잘 지켜보아라'

하면서 부적 1장을 그려 연못에 넣었다. 그러자 연못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고, 뜨거
움을 참지 못한 용은 연못 밖으로 뛰쳐나와 한달음에 동해바다로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얼마
나 다급했던지 용 8마리는 구룡사 앞산을 8조각으로 쪼개어 도망을 친 것이다. (현재 구룡사
앞산은 동해를 향해 8개의 골이 패여져 있음)
그리고 나머지 용 1마리는 눈이 매우 침침해 멀리 못가고 절 남쪽 구룡소(용연)에 들어가 살
았다고 한다. 그 용은 가뭄 때 비를 빌면 비를 내려주는 등, 좋은 일을 많이 했다고 하며, 늦
게까지 살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구룡사란 이름은 바로 9마리의 용을 내쫓은 설화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구(九)가 구(龜)로 변경됨>

이 창건설화는 구룡사에서 그럴싸하게 내놓은 전설이라 곧이 곧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하지만
전설의 내용을 통해 현재 절 자리에 9마리의 용으로 표현된 토착 종교 세력이 있었음을 추정
해 볼 수 있다. 절의 창건주는 그 자리가 마음에 들어 평화롭게 살던 그들을 내쫓으려고 했고
서로 신경전을 벌이다가 창건주의 빛나는 승리로 그들을 내쫓고 절을 세운 것을 이런저런 살
을 붙여 전설로 다듬은 것이다.

▲  구룡사 앞 산줄기

▲  구룡소

* 구룡사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1029 (구룡사로 500 ☎ 033-732-4800)
* 구룡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설산(雪山)이 되버린 구룡사 앞 산줄기
8마리의 용이 저 산줄기를 쪼개고 도망쳤다고 한다. 얼마나 놀랬으면 그랬을까..

▲  거대한 사천왕문(四天王門)

구룡사는 지형적인 위치로 법당을 비롯한 상당수 건물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경내 앞에 자
리한 사천왕문 역시 용들이 쪼갰다는 동쪽 산줄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 문은 부처와 절을 지
키는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천왕문치고는 특이하게 중층구조를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2000년 이후에 지어진 그는 겉은 2층이지만 속은 1층으로 마치 성문처럼 규모가 장대하여 속
인들을 잔뜩 주눅들게 만들며, 우리나라 천왕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라고 한다.

▲  사천왕문 좌측에 자리한 보광공덕탑
(普光功德塔)

▲  사천왕문 우측의 석조미륵불상

▲  각자의 애용품을 지니며 문을 지키고 선 사천왕의 위엄
저들의 검문을 거쳐 경내로 들어선다.

▲  보광루(普光樓) - 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145호

천왕문을 들어서 높이 걸린 계단을 오르면 보광루가 바로 경내를 가리며 나타난다. 이 건물은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로 19세기 이후에 지어졌다. 누각이다보니 2층 규모로 되어있는데 아
랫층은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통로를 만들었으며, 윗층에는 우물마루
로 바닥을 만들고 대웅전이 있는 서쪽을 빼고 싹 벽으로 막아 동쪽으로 창문을 내고 강당(講
堂) 및 법회 공간으로 사용했다.
정면 가운데 칸인 평방(平枋)에는 치악산 구룡사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
주며, 누각 아랫층 가운데에 마련된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 마치 태양이 떠오르듯 천천히 위
로 솟아나 웅장한 규모를 드러낸다.
보광루 2층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멍석이 깔려져 있었다. 3명이 3달에 걸쳐 만들었다
고 전하는 이곳의 자랑으로 현재는 보호를 위해 깊은 곳에 꽁꽁 숨겨두어 관람이 어렵다.


▲  보광루 앞에서 바라본 사천왕문 지붕과 치악산 북쪽 줄기
잠시 맑은 하늘을 되찾더니만 곧 구름들이 몰려와 잔뜩 인상을 부린다.
그리고는 다시 폭설을 투하해 치악산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  구룡사 둘러보기

▲  대웅전(大雄殿)

보광루와 마주보고 있는 대웅전은 구룡사의 법당(法堂)으로 한때는 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24
의 지위를 누렸던 존재이다. 허나 2003년 화재로 무너지면서 지방문화재의 지위가 박탈되었
으며, 이후 예전 모습 그대로 복원을 했으나 날라간 지방문화재의 지위는 회복하지 못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커다란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 봉안된 석가3존불과 신중탱, 감로탱 등
은 모두 2004년 이후에 조성된 것들이라 고색의 때는 찾을 수 없다.


▲  대웅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나란히 3존불을 이루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석가불은 2003년 대웅전 화재에 대한 불만일까? 인상을 조금 쓴 듯 보이며 좌우 협시
불(夾侍佛)은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들 뒤에는 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걸려있다.

▲  붉은 지붕의 화려한 닫집
너무 휘황찬란하여 눈이 멀 지경이다.

▲  대웅전 우측 영가단(靈駕壇)에 있는
최규하 전대통령 내외 영정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샘터
평소에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사람이 샘터 주
변 네모난 공간에 다가서면 알아서 물을 쏟아
내는 21세기형(?) 자동시스템의 샘터이다.

     ◀  천불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좌
우에 협시해 있다. 좌우 벽에는 조그만 금동불
(金銅佛) 1,000기가 빼곡히 들어앉아 일대 장
관을 이룬다.


▲  대웅전 앞 3층석탑
대웅전 정면이 아닌 다소 우측에 비켜 자리한 탑으로 근래에 장만했다.

▲  천불전 좌측에 놓여진 탱화 3점
저들에게 맞는 마땅한 자리가 없는지 천불전 좌측 구석에서 잉여 신세를 지내고 있다.
제일 앞에 놓인 것은 산신탱으로 흰 수염의 산신 옆에 앉은 이는 여자 산신이다.
허나 그림으로 봐서는 완전 산신 부부처럼 다가온다.

▲  천불전 뒤쪽 높다란 곳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산신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의 보금자리로 칠성탱은 2000년에,
산신탱과 독성탱은 2002년에 그려졌다.

▲  산신 가족이 그려진 산신탱

▲  칠성 가족이 그려진 칠성탱

▲  소나무 밑에 앉은 독성이 그려진 독성탱

▲  관음보살의 거처인 관음전(觀音殿)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응진전(應眞殿)

대웅전 좌측 뒤쪽에 있는 관음전과 응진전은 2000년 이후에 숲을 밀어내고 일군 공간이다. 응
진전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羅漢), 그리고 조그만 500나한이 봉안되어
있으며, 나한의 모습이 우리나라 7,000만 인구만큼이나 다양하여 눈길을 끈다.


▲  응진전 석가불
석가불 좌우로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이 합장인을 선보이며 서 있다.

▲  나한으로 가득한 응진전 내부


▲  고양이 같은 호랑이를 옆에 품은 나한의 위엄 <나반존자(那畔尊者)인듯?>

▲  눈구름이 몰려오더니 이내 눈폭탄을 투하한다.


 

♠  치악산 마무리

▲  폭설에 시야마저 흐릿한 사천왕문 주변

절을 둘러보는 사이에 겨울의 사주를 받은 구름들이 전력을 다시 가다듬고 하늘을 가렸다. 아
직 오후 한참 시간이지만 이내 저녁처럼 어두워지고 다시 눈폭탄을 투하하면서 천하는 벌집이
몇 번이나 뒤집힌 듯, 혼란에 빠진다. 겨울 산행 장비를 갖추지 못한 나는 여기서 더 올라갈
것인지. 쿨하게 철수할 것인지를 고심해야 했다. (그날 기상청은 눈이 안온다고 예보했음;;;)

그래도 개념없이 비싼 입장료를 치르고 여기까지 왔는데, 구룡소와 선녀탕까지는 올라가야 직
성이 풀릴 듯 싶어서 사천왕문 남쪽에 있는 구룡사 기념품점에서 조금 대기를 하다가 눈의 공
세가 약간 멎은 틈을 타 다시 길을 나섰다.


▲  구룡소(九龍沼)와 구룡폭포

구룡사 기념품점에서 길을 나선지 1분도 안되어 기가 막힌 풍경이 나의 발길을 붙잡고 늘어진
다. 바로 구룡소이다. 이곳은 절 창건주에게 추방된 9마리의 용 중, 시력이 안좋은 용이 살았
다는 현장이다. 그 용은 이곳에 머물며 가뭄에 비를 내려주는 등, 좋은 일을 하다가 승천했다
고 전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전설일 뿐이다.

소의 수심이 깊고, 색감이 아주 연해 용이 살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청정함을 자랑하며, 구
룡소 위에는 조촐한 높이의 구룡폭포가 상류의 물을 실타래처럼 흘려보내고 있다. 구룡소 주
변은 자연보호구역으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니 계곡에 애써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  구룡소 절경에 단단히 시샘한 겨울이 눈을 날리며 그를 가리려고 한다.

▲  구룡소 옆 탐방로 (구룡사 방향)

▲  눈에 뒤덮힌 구룡사계곡 상류
봄을 알리는 소쩍새의 울음소리도 정녕 소용이 없는 것인가?

▲  치악산으로 올라가는 산길
겨울이 그린 수채화에 그저 감탄사만 나올 뿐이다. 인간의 그 잘난 언어와 문자로
감히 대자연의 작품을 표현한다는 것이 건방질 정도로 말이다.

▲  나무로 지어진 구룡자연해설센터

구룡소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구룡자연해설센터가 나온다. 이곳은 치악산의 자연과 생태를 살
펴보고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자연 공부를 하는 공간으로 주변에 여러 꽃과 식물을 심어 자
연학습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겨울에 의해 완전 눈밭이 되버렸으니 현재로써는 할 것
이 없다. 잎이 피고 꽃이 자라는 3월 말 이후에나 그 역할을 제대로 하게 될 것이다.


▲  구룡자연해설센터 주변 계곡

구룡자연해설센터에서 나의 발길은 멈추었다. 세렴폭포와 선녀탕까지 올라가고 싶었으나 날씨
도 영 좋지 못해 가고자 하는 의욕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조금은 아쉽고 여운이 좀 남지
만 어차피 다음이란 것이 있으니 언젠가는 또 오지 않겠는가?

발길을 180도 돌려 구룡사로 나올 때는 길을 좀 달리하여 계곡 동쪽에 있는 대곡야영장을 경
유했다. 야영장과 식수대는 아직도 겨울의 단잠에 빠져 깨어나질 못했다. 한없이 쏟아지던 눈
도 이젠 고갈이 되었는지 완전히 멎었고,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삐죽 속살을 드러낸다.

구룡사를 거쳐 내려오면서 앞서 언급한 거북바위를 둘러보고(올라갈 때는 어디에 있는지 몰라
서 지나쳤음) 일주문과 구룡교, 황장금표를 거쳐 구룡사 종점으로 내려오니 마침 속세로 나가
는 원주시내버스 41-1번(구룡사↔관설동)이 치악산의 청정한 기운을 가득 머금으며 떠날 준비
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에 머뭇거림도 없이 그 버스를 잡아타고 속세로 나왔다.

이렇게 하여 늦겨울 치악산 구룡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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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 수리산, 반월호수에서 가을을 맞이하다 ~~~ (철쭉동산, 수리산산림욕장, 수리산둘레길, 수리사)

 

 

~~~~~  가을맞이 수리산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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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리산 철쭉동산 (5월 군포철쭉축제)

▲  수리산 둘레길

▲  수리산 수리사

 


이 땅의 최대 명절인 한가위(추석) 연휴 끝 무렵에 친한 후배와 군포 수리산(修理山)을
찾았다. 수리산에 대한 사람들의 찬양이 대단하여 얼마나 괜찮은 산인지 직접 확인하고
자 간 것이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14시 무렵, 금정역에서 그를 만나 서울 5623번 버스(군포공
영차고지↔여의도)를 타고 둔전초교에서 군포마을버스 3-1번으로 환승하여 수리산 입구
인 중앙도서관에서 두 발을 내렸다. 수리산 나들이는 여기서부터 막을 연다.


 

♠  수리산(수리산 도립공원) 입문

▲  수리산 산림욕장

수리산은 인구 30만을 지닌 군포시(軍浦市)의 듬직한 진산(鎭山)으로 군포 북서쪽과 안양시(
安養市)의 서남쪽, 안산시(安山市) 동쪽에 넓게 누워있다. 삼성산(三聖山, 480m), 관악산(冠
岳山, 629m)과 더불어 안양권의 이름난 명산(名山)으로 등산/나들이 수요가 상당하며 2009년
에 경기도의 3번째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수리산이란 이름 3자를 들으면 대입 수능시험의 수리영역이나 '수리수리 마수리' 주문이 생각
이 난다. 허나 산 이름은 그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이름 유래에 대해서는 3가지 설이 전해오
는데, 산 바위가 마치 독수리처럼 생겨서 수리산이라 했다는 설이 있고(수암봉 정상에 독수리
의 일종인 검둥수리가 앉아있는 듯한 바위가 있음), 산 남쪽 자락에 안긴 수리사에서 유래되
었다는 설, 그리고 조선시대 때 왕손(이씨)이 수도했다고 하여 수리산(修李山)이라 했다는 설
이 그것이다. 그래서 '修理山'이란 한자 대신 '修李山'이라 하기도 하며, '修理山'으로 바뀐
것은 20세기 중반 때라고 한다.

수리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봉우리는 태을봉(489.2m)이며, 슬기봉(469m)과 관모봉(426m),
수암봉(395m) 등이 수리산을 이루고 있다. 흙으로 이루어진 산으로 산세가 완만하고 숲이 짙
으며 수리사계곡과 창박골(병목안) 등의 계곡이 흘러 조촐한 피서지를 선사한다.
수리산 동남쪽 자락인 군포 수리동 일대에는 산림욕장이 닦여져 있고, 산 주위로 수리산둘레
길과 수리산임도길 등의 둘레길이 닦여져 수리산의 멋을 더욱 돋구고 있으며, 수리사와 철쭉
동산, 2016년에 문을 연 초막골 생태공원 등의 명소가 있다. 특히 철쭉동산은 군포시의 야심
작으로 산자락에 넓게 철쭉밭을 닦아놓았는데 매년 5월 군포철쭉축제가 거하게 열려 사방을
온통 연분홍 천지로 만든다. 서울 근교에 이렇게 너른 철쭉의 공간이 있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  윗쪽에서 바라본 수리산 철쭉동산 (5월 군포철쭉축제)

▲  층층히 이어진 수리산 철쭉동산의 위엄 (5월 군포철쭉축제)

▲  수리산 철쭉동산 (5월 군포철쭉축제) ▲

수리산 등산은 수리산역(4호선)이나 철쭉동산, 군포시 중앙도서관, 태을초교, 수리약수터, 명
학역 등에서 시작하면 되며 군포시가 수리산 일대에 걸쳐놓은 둘레길은 총 4코스로 다음과 같
다.
① 수리산둘레길(군포수릿길 1코스) : 산본역~태을초교~노랑바위~임도5거리~감투봉~밤바위~시
민체육공원~산본역 (16km, 5시간 30분 소요)
② 수리산임도길 구름산책길(군포수릿길 2코스) : 중앙도서관~임도5거리~덕고개~행복쉼터~속
달동 마을길  (4.8km, 1시간 40분 소요)
③ 수리산임도길 풍경소리길(군포수릿길 3코스) : 수리산역~철쭉동산~중앙도서관~임도5거리~
수리사 (5km, 1시간 20분 소요)
④ 수리산임도길 바람고개길(군포수릿길 4코스) : 납덕골주차장~수리사방향~임도입구~바람고
개~에덴기도원~납덕골주차장 (5.6km, 1시간 50분 소요)

끝으로 수리산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6.25전쟁이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이 부분은
거의 모르고 지나치는 실정인데, 6.25 시절인 1951년 1월, 북한에게 서울을 빼앗기자(1.4후퇴
) 서울을 수복하고자 국군 1사단과 미군 25사단, 터키 여단 1개 대대가 수리산 일대에서 북한
군과 머릿수만 무식하게 많은 중공군 수만 명을 상대로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는 그
해 2월 10일 서울 재탈환에 큰 역할을 했으며, 지형적인 불리함과 막대한 인명피해를 극복하
고 강력한 화력과 항공기 지원, 군사들의 투지에 힘입어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2007년부터 산 일대를 조사하여 국군 유해 4구와 유품 600여 점을 수습, 뒤늦게 국립현
충원에 봉안했다.


▲  수리산의 자랑, 숲길 (수리산 임도길)

수리산을 수식하는 명소의 하나인 수리산 산림욕장은 군포시가 1993년부터 조금씩 조금씩 닦
아놓은 것으로 면적은 159.4ha이다.
상수리나무와 때죽나무 등 활엽수림이 주류를 이루며, 리기다소나무 등 침엽수(針葉樹)가 산
중턱을 장식한다. 군포시내(산본, 수리동)와 바짝 붙어있어 접근성 하나는 매우 착하며, 숲이
매우 삼삼해 산림욕에는 아주 좋다. 또한 피크닉장과 자연학습장도 갖추고 있어 가족 나들이
와 소풍지로도 손색이 없다.

우리는 산림욕장 내부까지 들어가진 않고 항아리 겉돌 듯 입구 주변만 살펴보고 바로 수리산
둘레길에 임했다.
산림욕장 남쪽에서 성불사를 거쳐 임도5거리로 인도하는 수리산둘레길은 차량들이 다녀도 충
분할 정도로 폭이 넓다. 순 흙길로 이루어져 있고 햇살이 들어오기 힘들 정도로 숲이 무성하
여 이곳만큼은 무더위와 자외선을 잊어도 좋다. 나무가 베푼 숲내음이 속세에서 오염된 심신
을 어루만져 주며, 산바람이 이따끔 불어와 번뇌와 땀을 단죄한다.

집으로 살짝 훔쳐와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아름다운 숲길로 성불사 직전 구간을 제외하면 경
사는 거의 느긋하며, 뱀처럼 구불구불한 고개를 넘으면 임도5거리에 이른다.


▲  수리산 임도5거리

임도5거리는 수리산 남쪽 요충지로 숲길이 5갈래로 갈리는 곳이라 하여 속편하게 임도(林道)5
거리를 칭하고 있다. 우리의 목적지인 수리사는 여기서 북서쪽 길을 이용하면 되며, 남쪽 큰
길로 내려가면 덕고개와 갈치저수지 방면으로 이어진다. 5거리에는 쉼터와 조그만 정자가 있
고, 소나무와 온갖 나무들이 앞다투어 그늘을 베풀고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  임도5거리에서 수리사로 가는 숲길 (수리산임도길 풍경소리길)

임도5거리에서 수리사입구까지는 앞서 길보다는 좁지만 흙길이 진하게 닦여져 있다. 깊은 산
주름 속에 묻힌 산중이라 완전 산과 푸른 숲, 하늘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가 정녕 수도
권의 주요 도시인 군포시가 맞는지 절로 고개라 갸우뚱할 정도로 마치 강원도 산골로 순간이
동을 당한 기분이다.

자연의 소리가 전부인 숲길로 걷는 길이 지루하지 않으며 경사도 꽤 느긋하다. 우리네 인생이
이런 산길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길을 25분 내려가면 수리사입구에 이른다.


▲  수리산이 베푼 조그만 샘터
빨간 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늦더위로 타들어가는 몸 속을 진화한다.

▲  수리사로 올라가는 길 (1)

수리사입구에서 수리사까지는 각박한 오르막길을 10분 정도 올라야 된다. 임도5거리에서 여기
까지 내려온 높이 만큼 말이다. 절까지는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포장길이 닦여져
있으며, 길 옆에는 수리사계곡이 수줍은 모습으로 졸졸졸~~♪ 화음을 선보이며 반월저수지(반
월호수)로 흘러간다. 울창한 숲이 길과 계곡의 지붕이 되어 하늘을 가리고 있으며 바로 그 길
의 끝에 수리사가 자리해 있다.

▲  가늘게 흘러가는 수리사계곡

▲  수리사로 올라가는 길 (2)


▲  수리사계곡에서 만난 조그만 자연산 폭포
계곡은 작지만 수리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갖은 바위와 조그만 폭포들이
아기자기한 풍경을 자아낸다.

▲  드디어 도착한 수리사의 정문, 일주문(一柱門)


 

♠  수리산 서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오래된 절집
~ 수리사(修理寺)

수리사는 수리산 서남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산사(山寺)로 군포에서 가장 산골 벽지이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제대로 묻힌 비구니 절로 화성시 용주사(龍珠寺)의 말사(末寺)인데 6세기
중반인 신라 진흥왕(眞興王) 시절에 신라 왕족인 운산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부처를
친견해 반드시 부처가 된다는 기별(記別)을 받고서 여기서 부처를 만났다고 하며, 그 연유로
산 이름을 견불산<見佛山, 또는 불견산(佛見山)>, 절 이름은 수리사라 했다고 한다.
허나 진흥왕 시절 안양/군포 지역은 백제와 신라의 경계 지역으로 고구려와 밀약을 맺은 신라
가 동맹국인 백제의 뒷통수를 치며 한참 한강 유역과 경기도 지역을 점령하던 시절이다. 게다
가 신라의 불교가 법흥왕(法興王) 때 공인되었다고 하지만 문무왕(文武王) 시절까지 절은 대
부분 왕경(王京, 경주)에만 지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변경이나 다름없는 이곳까지 와서 위험
을 무릅쓰고 절을 지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다만 경내에 오래된 석불 등이 있어 절이 우후죽
순 들어서던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대웅전 등 건물 36동과 12개의 암자(庵子)를 거느린 큰 사찰이었다고 한
다. 허나 이 역시 자료와 유물이 부족해 신빙성은 떨어지며, 절 주변 산세를 보면 그만한 건
물을 짓기에도 벅차 보인다. 비록 그 정도는 아니지만 왕년에는 시흥(始興) 지역(그때는 시흥
고을이었음)에서 그런데로 잘나갔던 모양이며,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앉은뱅이가 되고 말았다.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이끌고 경남 지역에서 크게 활약을 했던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가 쓰러진 절을 재건하고 이곳에서 수도하며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허나 그는 근거지인 현풍
(玄風)과 의령(宜寧)에서 벼슬을 멀리하고 후학을 길렀던 사람이다. 수리사와는 전혀 관련도
없는 그를 왜 이곳 중창주로 등장을 시켰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아마도 그를 흠모하던 이곳
승려가 장대한 세월에 산산히 흩어진 수리사 내력을 손질하면서 그를 살짝 넣은 것은 아닐까?
20세기에 들어서 경허(鏡虛)가 이곳에 주석하여 머물렀으며, 대선사(大禪師)인 금오(金烏)가
이곳에서 출가했다. 6.25 전쟁으로 절이 파괴된 것을 1955년 청운(靑雲)이 중건했으며, 계속
불사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과 산신각, 나한전, 요사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죄다 20세
기 중/후반에 지어진 것이라 고색의 내음은 말라버렸다. 소장문화유산은 하나도 없으며, 오래
된 석불이 하나 전하고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간신히 귀뜀해준다.

절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여기서부터 수리사 경내로 문을 들어서던 우
회길을 이용하던 그건 각자 마음이다. 여기서 주차장까지는 경사가 좀 가파르며 그 경사를 오
르면 수리사 표석과 차량들이 평화롭게 쉬는 주차장이 나온다. 여기서 1단 더 올라가면 요사
(寮舍)이며, 1단 더 오르면 경내의 중심 구역으로 대웅전과 나한전(羅漢殿), 범종각, 약수터
등이 있다.

▲  범종(梵鍾)의 보금자리인 범종각

▲  석가불과 500나한이 봉안된 나한전

▲  나한전 석가3존불
(석가불과 문수,보현보살)

▲  가지각색의 나한전 오백나한들


▲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편강약수 ~ 약수는 어디가고 물통만 있나?

산사에는 늘 샘터가 있기 마련이다. 그만큼 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수리사 역시 그 예외는
아니라서 대웅전 옆구리에 샘터를 두고 이름도 좋은 편강약수라 하였다. 하지만 샘터가 어디
아픈지 물은 막혔고, 대신 철덩어리 물통을 두어 샘터의 역할을 대신하게 했다. 샘터에 놓인
바가지들이 어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속히 샘터와 물줄기를 복구하여 약수터를 되찾기 바란
다.


▲  수리사 대웅전(大雄殿)

이곳의 법당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집으로 경내에서 가장 큰 건
물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위엄 있게 들어앉아 남쪽을 굽어보고 있으며, 내부에는 석가
3존불과 여러 탱화가 봉안되어 있고, 3존불 위로 황금색 닫집이 장엄하게 자리한다.

▲  대웅전 석가3존불과 닫집

▲  단촐한 모습의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뒷쪽 언덕이자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삼성각이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정
면과 측면이 달랑 1칸인 맞배지붕 건물로 3명의 성스러운 존재, 산신과 독성(나반존자), 칠성
(치성광여래)이 봉안되어 있다.


▲  산신(山神) 가족이 담긴 산신탱

▲  삼성각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대웅전과 요사 뒷통수가 보이고, 수해(樹海)를 이루는 수리산
남쪽 줄기 너머로 인구 120만을 지닌 경기도의 중심 도시,
수원(水原)이 시야에 들어온다.

▲  수리사의 숙성된 흔적, 파괴된 석불과 석탑 잔재들

삼성각 옆에는 완전하지 못한 석재들이 고색의 때를 가득 머금으며 옹기종기 모여있다. 넓적
한 돌판에는 주름이 여러 겹 그어진 큰 돌이 있는데, 딱 보니 석불의 흔적으로 보인다. 석불
의 얼굴과 아랫도리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죄다 휩쓸려 사라졌고 옷을 걸친 몸통
부분만 남은 것이다. 그 앞에는 석탑의 잔재로 보이는 돌이 놓여져 있으며, 예전 수리사에 5
층석탑이 있었다고 하므로 그 탑의 잔재나 옛 건물의 주춧돌로 보인다.
다들 왕년에는 한 가닥 하던 존재들이나 지금은 초췌한 몰골로 지나간 세월을 원망하니 역시
나 인생은 부질 없는 모양이다. 수리사의 오래된 숙성의 흔적으로 20세기 중반 이후 절을 중
수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수습한 것이다.

※ 수리산 수리사 찾아가기 (2018년 9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산본역(2, 3번 출구)에서 군포마을버스 2, 3-1번을 타고 중앙도서관 하차 →
  중앙도서관 정류장에서 수리산임도길(수리산로)을 따라 도보 50~60분
* 지하철 1,4호선 금정역(6번 출구)에서 안양시내버스 15번을 타고 중앙도서관 하차
* 지하철 4호선 대야미역(1번 출구)에서 군포 100-1번<60~80분 간격>, 군포마을버스 1-2번<60
  분 간격>을 타고 납덕골 하차 → 수리사까지 도보 25분
* 지하철 1호선 의왕역 2번 출구 건너편 정류장에서 군포 100-1번 이용
* 승용차 (경내 밑에 주차장 있음)
  ① 군포 → 대야미역 → 갈치저수지 → 덕고개 → 납덕골 → 수리사 
  ② 수원/안산 → 반월동 → 반월호수 → 납덕골 → 수리사
* 소재지 -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329 (속달로 347-181, ☎ 031-438-1823)


 

♠  수리산 마무리 (대야동 시골길, 반월호수)

▲  수리산을 뒤로하며 (수리사입구 남쪽)

수리사를 둘러보고 임도5거리로 다시 나가려고 했으나 사람의 마음은 갈대라고 반월호수로 길
을 잡았다. 수리사입구에서 임도5거리 방면 동쪽 산길 대신 남쪽 길을 쭉 내려가면 되는데 수
리사에서 호수까지 무려 4km를 걸어야 된다.

반월호수 방면 도로(속달로, 둔대로)는 잘 포장되어 있어 걷기는 좋다. 군포시가 서울과 안양
의 배후 도시로 20여 년 동안 크게 성장하여 시가지가 나날이 확장되고 있는데, 이로 인해 겉
으로 보이는 군포는 완전 시가지와 아파트만 있는 도시로 보인다. 허나 시내 서남부에는 산과
논, 밭, 숲이 전부인 시골도 여실히 남아있어 앞만 보고 달려가는 군포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대야동과 속달동 지역으로 이들이 군포의 시골로 남게 된 것은 수리산과 반월호수 덕분
이다. 그들이 이곳을 지킨 든든한 방패인 것이다.


▲  속달동 마을에서 바라본 수리산과 바다처럼 너른 하늘

▲  속달동 시골길(둔대로)

납덕골에서 이르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속달로'를 계속 고집하여 동남쪽으로 가면 갈치저
수지, 덕고개, 대야미 쪽으로 이어지며, 서남쪽 '둔대로'로 가면 반월호수로 이어진다. 둔대
로는 2차선 길에서 이내 조그만 시골길로 변신하여 우리를 인도한다.

가로수인 듯, 아닌 듯, 길가에 자리한 나무들은 슬슬 가을옷을 꺼내들고 있고, 길 주변에 펼
쳐진 논은 푸르게 익어 올해도 변함없이 풍년을 예감하고 있었다. 자고로 이런 시골길과 숲길
은 도시인들에게 청량제이자 꿀 같은 존재로 속세에서 상처받고 오염된 안구와 마음을 정화해
주기에 아주 좋다.


▲  벼들이 푸르게 익어가는 속달동 평야

▲  반월호수 북쪽 개울(반월천)

그림 같은 시골길(둔대로)을 걷느라 시간도, 지루함도 잠시 잊고 있으려니 다리 하나가 나온
다. 다리 밑 반월천에는 나들이객들이 개울 주변에 자리를 피고 소풍을 즐기고 있었다. 어린
이들은 아직까지도 덤벼들고 있는 여름 제국(帝國)의 기운에 맞서고자 개울에 들어가 애궂은
물고기들에게 고통을 주거나 물놀이를 즐긴다. 그런 평화로운 모습을 바라보며 계속 가다보면
영동고속도로가 나오고 그 밑도리를 지나면 반월호수가 펼쳐진다.


▲  서쪽에서 바라본 반월호수(半月湖水, 반월저수지)

▲  북쪽에서 바라본 반월호수

반월저수지는 반월호수라고도 불린다. 안양/안산권의 이름난 호수 관광지로 1957년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조성된 오래된 호수이다. 총 저수량은 118.7만㎥로 만수 면적은 37ha에 이르며, 수리산(집예골, 샘골, 지방바위골)이 베푼 물을 먹고 자라 아주 단단히 물이 올랐다. 수리사
계곡도 바로 이곳으로 내려와 잠시 머문 다음 큰 세상으로 흘러간다.

호수는 농어촌공사 화성,수원지사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호수가 산에 빙 둘러싸여 있어 주변
풍경이 제법 아름답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관광지로 손질되어 산책로와 공원이 닦였으며, 식
당과 분위기를 내세운 까페가 많이 들어서 이제는 수리산 못지 않은 군포시의 꿀단지가 되었
다.
호수 주변은 추석 연휴의 끝을 잡은 나들이 수요와 그들이 끌고 온 차량들로 완전히 시장통을
이루었다. 가족 단위 나들이객과 수리산에서 내려온 산꾼, 사진을 찍으려는 사진꾼들, 이곳으
로 밥이나 차, 커피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까지 다양한 군상들이 몰려들어 호수의 몸값을 더욱
높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 호수는 특히 저녁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반월낙조(半月落照)라 하여 2004년에 군포
3경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또한 다른 호수도 마찬가지겠지만 새벽 물빛에 슬금 피어오르는 물
안개가 아주 장관이다.

▲  오늘도 평화로운 반월호수

▲  호수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매뭇새를 다듬는 산

◀  푸른 하늘과 구름도 잠시 길을 멈춘
반월호수


▲  호수 곁을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고속전철

호수 바로 서쪽에는 경부고속전철 고속선이 닦여있다. 그러다보니 수시로 고속열차(KTX)가 빛
을 가르며 순식간에 지나가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징하던지 호수가 쩌렁쩌렁 울리고, 귀신까
자빠트릴 정도이다. 호수를 거울로 삼은 존재들이 하늘과 구름, 산, 나무, 꽃에다가 고속전철
까지 참 다양하다.
이곳을 지나는 고속전철은 위로는 서울, 용산, 행신역, 아래로는 대전, 동대구, 포항, 부산,
마산, 진주, 익산, 광주송정, 목포, 여수까지 운행하며, 하루에 수백 차례 지나간다.


▲  호수에서 만난 서양 모화사상의 잔재, 풍차

호수 북쪽에는 산책로와 공원이 닦여져 있다. 그 산책로를 거닐다보면 천천히 바람개비를 돌리
고 있는 이색 정취의 풍차를 만나게 된다. 나무로 축소해서 만든 것으로 나름 어울리는 풍물시
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양 모화사상의 잔재이기도 하여 좀 씁쓸하기도 하다. 이 땅의 민중
과 18세기부터 함께한 물레방아를 두었으면 더 정감이 컸을텐데 말이다.

반월호수는 다 돌지는 못하고 1/4 정도만 돌았다. 시간도 이미 17시가 넘은 상태이고 배도 고
프기 때문이다. 호수는 이 정도면 충분히 본 것이기 때문에 나머지는 미련을 버리고 군포마을
버스 1-2번을 타고 대야미로 이동, 대야미역에서 4호선 전철을 타고 오늘의 일정을 정리했다.
이렇게 하여 가을맞이 수리산, 반월호수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반월호수 찾아가기 (2018년 9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대야미역 1번 출구 밖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군포마을버스 1-2, 6-1번을 타고
  반월호수(둔터) 하차 <6-1번은 산본역 2,3번 출구 밖 정류장에서도 이용 가능>
* 승용차 (호수 주변에 주차장 있음)
① 안양,군포 → 대야미역 → 둔대초교 → 반월호수
② 안산,화성 → 반월 → 팔곡2교차로 → 반월호수
* 소재지 - 경기도 군포시 둔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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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8년 9월 2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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