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산'에 해당되는 글 126건

  1. 2020.04.28 서울 도심에 깃든 상큼한 개나리동산, 응봉산 봄꽃 나들이 (응봉산 개나리, 독서당공원, 살곶이다리, 중랑천)
  2. 2020.04.09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에서 무지개를 보다 ~~ (숙정문에서 청운대, 백악마루, 부암동 창의문까지)
  3. 2020.01.24 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성지이자 서울의 부드러운 동쪽 지붕, 아차산~용마산~망우산 나들이
  4. 2020.01.11 모악산 눈꽃 나들이 [선녀폭포, 대원사, 수왕사, 전북도립미술관]
  5. 2019.12.30 본인 제작 여행답사기 모음집 (2019년 12월 30일 기준)
  6. 2019.12.29 호랑이를 닮은 잘생긴 바위산, 해돋이와 일몰 풍경이 일품인 호암산 (호압사, 한우물, 칼바위, 서울둘레길)
  7. 2019.12.19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달달한 숲길, 인왕산자락길 (청운문학도서관, 청운공원에서 수성동계곡까지)
  8. 2019.12.01 서울의 남쪽 지붕, 관악산 늦가을 나들이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사당능선, 거북바위, 관음사] 2
  9. 2019.11.06 한가을에 찾아간 산사 나들이, 화성 비봉산 봉림사
  10. 2019.10.29 서울 북쪽 끝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 (도봉산 능원사, 도봉사, 진주류씨묘역, 무수골)

서울 도심에 깃든 상큼한 개나리동산, 응봉산 봄꽃 나들이 (응봉산 개나리, 독서당공원, 살곶이다리, 중랑천)

 


' 서울 개나리의 성지, 응봉산 봄나들이 (살곶이다리) '


▲  봄티가 물씬 풍기는 응봉산

▲  응봉산 꼭대기 응봉산정

▲  살곶이다리


 

겨울 제국이 저물고 봄이 무럭무럭 익어가던 4월의 첫 무렵, 일행들과 성동구 한복판에
자리한 응봉산(鷹峯山)을 찾았다.
서울숲을 먼저 둘러보고 중랑천에 걸린 용비교를 통해 그날의 주인공이나 다름 없는 응
봉산의 품으로 들어섰는데, 응봉산은 응봉역(경의중앙선)이나 금호동 독서당로, 용비교
에서 접근하면 편하다.


▲  용비교 동측에서 바라본 응봉산의 위엄
(그 밑에 경의중앙선과 중랑천이 있음)


 

♠  응봉산 둘러보기

▲  용비교에서 바라본 중랑천(中浪川)과 응봉교

용비교 밑을 흐르는 중랑천은 경기도 동두천과 양주, 의정부, 서울 동북부 지역의 물을 모두
모아 한강으로 보내는 긴 하천이다. 우리 동네 도봉동(道峰洞)을 지나는 하천이기도 한데 이
곳이 한강과 만나는 지점이라 폭이 왠만한 강 못지 않게 넓다.

중랑천 좌/우 옆구리에는 산책로와 자전거길이 닦여져 있는데, 그의 우측(서쪽)에는 경의중앙
선 복선 철로가 있어 경의중앙선 전철(문산~용산~청량리~용문,지평)과 경춘선 ITX-청춘열차(
용산~춘천), 강릉선 고속전철(서울~강릉,동해)까지 수시로 지나간다. 그러다보니 종종 그들이
버벅대는 모습을 보인다. 선로는 겨우 2개인데 지나는 열차 종류는 허벌나게 많기 때문이다.
(관광열차와 화물열차도 적지 않게 지나다님)
그런 경의중앙선 바로 뒤에 펼쳐진 뫼가 바로 응봉산으로 한강을 향해 우람하고 잘생긴 암벽
을 아낌없이 내밀고 있다. 개나리가 한참일 때는 벼랑을 빼고 거의 노란 천하가 되지만 개나
리의 기운이 70% 이상 빠진 때에 왔기 때문에 녹색 비율이 더 높다.


▲  응봉산과 그 밑도리를 지나는 경의중앙선 전철
바위들이 우럭우럭한 모습으로 포진해 있어 산의 경치를 크게 돋군다. 바위가
마치 사람이 서 있는 모습과 비슷하여 한강, 중랑천과 맞닿은 산 남쪽을
입석포(立石浦)라 불렀다.

▲  응봉산과 경의중앙선, 중랑천 3박자가 어우러진 현장
오직 용비교에서만 그 매력을 누릴 수 있다. 거기에 전철이나 각종 열차가
때맞추어 지나가면 더욱 금상첨화가 된다. 하여 이곳은 그런 풍경을
담으려는 사진쟁이들의 출사 장소로 명성이 자자하다.

▲  용비교 서쪽에서 응봉산으로 인도하는 남쪽 계단길
응봉산의 각박한 남쪽 벼랑을 극복하며 닦여진 길로 이쪽은 약간의 개나리와
하얀 벚꽃, 연분홍 진달래들이 봄의 향연을 이어가고 있다.

▲  응봉산 능선으로 인도하는 남쪽 계단길 (윗쪽에서 바라본 모습)
지그재그로 이어진 계단길을 오르면 바로 서쪽 능선이다.

▲  남쪽 계단길에서 바라본 용비교(왼쪽 다리)와 서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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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봉산 서쪽 능선길 ①
능선길 주변의 수풀은 거의 개나리이다. 개나리가 적지 않게 주저앉은 시기에
와서 실감은 덜하지만 개나리가 한참일 때는 완전 노란 개나리길이다.

▲  응봉산 서쪽 능선길 ②

▲  응봉산 서쪽 능선길 ③ 정상 직전

밑에서는 별로 보이지 않던 개나리들이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정상 주변
은 개나리들이 아직 정정함을 과시하고 있었던 것. 하지만 그래봐야 김옥균(金玉均)의 3일천
하처럼 고작 며칠 연장에 불과하다. 이래서 인생이나 세상만사가 참 부질없는 모양이다.


▲  응봉산 서쪽 능선길 ④

▲  응봉산 서쪽 능선에서 바라본 나지막한 천하 ①
서울숲과 용비교(바로 밑의 다리), 중랑천, 한강, 성수대교,
청담동과 압구정동 지역

▲  응봉산 서쪽 능선에서 바라본 나지막한 천하 ②
한강과 중랑천 하류, 동호대교, 옥수동, 한남동, 압구정동, 신사동 지역

▲  응봉산 정상을 지키고 있는 응봉산정(鷹峯山亭)

응봉산의 나지막한 꼭대기에는 단아하게 생긴 2층짜리 응봉산정이 자리해 있다. 근래에 응봉
산을 꾸미면서 달아놓은 것으로 그 주위로 너른 공터가 있는데 바로 여기가 응봉산 개나리축
제의 중심지로 공연과 먹거리 장터, 전시회 등이 열린다.
이곳에 올라서면 바로 밑에 서울숲과 한강, 중랑천을 비롯하여 성동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
기, 옥수동, 한남동, 한강 너머로 강남구와 서초구 지역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허나 봄
마다 찾아오는 중공산 미세먼지의 역한 내습으로 시야가 적지 않게 꺾여 보이는 것은 평소에
2/3 이하에 불과하다.


▲  옆에서 바라본 응봉산정

응봉산(응봉)은 성동구(城東區)의 한복판이자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곳에 급하게 솟은 해발
94m(95m)의 조촐한 뫼이다.
산의 이름인 응봉(鷹峯)은 매봉우리란 뜻으로 조선 때 제왕과 왕족들이 매사냥을 즐겼던 곳이
다. 1395년에 응봉 기슭에 매를 기르는 관청인 응방(鷹坊)을 설치해 필요한 매를 충당했으며,
태조와 태종, 세종, 성종까지 여기서 자주 매사냥을 즐겨 꿩과 토끼 등을 사냥했다.
매사냥을 벌였던 곳이라 자연히 응봉, 응봉산, 매봉산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산의 모양새가 마
치 매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응봉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중랑천과 한강과 맞닿은 산 남쪽은 각박한 벼랑으로 우럭우럭하게 생긴 암벽들이 많으며 그들
이 마치 사람이 서 있는 모습처럼 보여 산 밑의 포구(浦口)를 입석포(선돌개)라 불렀다. 뒤에
는 응봉이, 앞에는 강이 흐르는 빼어난 경치로 많은 시인묵객들을 홀렸으며,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이라 물고기도 잘 잡혀 낚시터로도 이름이 높았다.
월산대군(月山大君, 성종의 형)과 서거정(徐居正), 성임(成任) 등 조선 초에 이름있는 문인들
들이 서울(한양)의 아름다운 풍경 10곳을 선정하여 한도십영(漢都十詠)이라 칭하고 그에 관한
시를 남기며 격하게 찬양을 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입석조어(立石釣魚, 입석포에서의 낚
시)'이다.

응봉산은 남쪽과 동쪽은 한강과 중랑천으로 막혀 경사가 급하고 서쪽은 옥수역 동쪽 달맞이봉
과 이어져 있으며, 북쪽은 대현산, 금호산, 남산까지 산줄기가 이어져있다. 비록 개발의 칼질
로 중간중간 키다리 아파트와 주택가가 마구 들어서 서로 끊어진 듯 보이지만 엄연히 이어져
있으며, 서울숲에서 응봉산을 거쳐 남산까지 이들을 모두 엮은 도보길이 닦이면서 도시와 산,
숲을 아우른 서울 도심 속의 환상적인 지붕길로 각광을 받고 있다. (단 대현산공원~응봉공원
구간은 부득이 번잡한 도로와 시내를 지나가야 됨)

응봉산에 안겨있던 옛 명소로는 관리들의 학습 장려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동호독서당(東湖讀
書堂)이 서쪽 자락에 있었고, 양반사대부들이 지은 황화정, 유하정 등의 정자가 있었으며, 옥
수역 부근에는 얼음을 보관하던 국립 얼음창고인 동빙고(東氷庫)가 있었다. 또한 산 남쪽에는
앞서 언급했던 입석포가 있었다. (입석포를 제외하고 모두 세월이 잡아가고 없음)

허나 개발이 요란하게 칼춤을 추던 20세기를 거치면서 그렇게나 잘생기고 착했던 응봉산은 영
좋지 못한 모습으로 강제 성형수술을 강요 받게 된다. 응봉동(鷹峯洞)과 금호동 지역에 격하
게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산의 북쪽과 동쪽, 서쪽이 난도질을 당했고, 대현산과 이어지던 북쪽
은 독서당로가 닦이면서 완전 절벽 수준으로 칼질을 당했다.

나는 중학교 시절(1990년대 초반), 여기서 가까운 금호1가에서 여러 해를 살았었다. 그때 응
봉산은 동네 우범지대로 이미지가 별로 좋지 못했지. 하여 가까이 살았음에도 그곳은 쳐다보
지도 않았다. 그만큼 20세기 말, 응봉산의 이미지는 참으로 우울했던 것이다.
게다가 산이 나날이 허약해지면서 모래흙이 자꾸 흘러내리자 그 대책으로 20만 그루의 개나리
를 심었는데 그 개나리가 무럭무럭 자라나 개발의 칼질에 녹초가 다 된 응봉산을 되살려주었
고 그것이 글쎄 전화위복이 되어 도심 속 개나리동산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성동구는 1997년부터 응봉산 개나리축제를 벌여 이제는 서울의 주요 봄꽃 축제로 자리
를 잡게 되었으며, 금호동에 살 적에 단 1번도 오지 않았던 나를 이곳으로 오게 하였다. 사람
은 옷이 날개이듯, 산은 꽃이 날개인 모양이다.


▲  응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성수동과 화양동, 송정동 지역, 아차산~용마산 산줄기

▲  응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차량들로 늘 버벅거리는 용비교와 서울숲, 성수대교 주변


응봉산은 매년 1월 1일 성동구청 주최로 해돋이행사가 열린다. 동쪽과 서쪽이 뻥 뚫려있어 일
출과 일몰을 모두 지켜볼 수 있으며, 개나리가 크게 위엄을 부리는 3월 말~4월 초에는 '응봉
산 개나리축제'가 열려 상춘객들로 완전 시장통을 이룬다. (축제가 열리는 토,일요일에는 개
나리보다 사람이 더 많을 정도임)


▲  응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③ 옛 저자도를 추억하다

윗 사진의 가운데 부분 한강(서울숲과 동호대교 사이)에는 저자도(楮子島)란 섬이 있었다. 그
는 한강의 주요 경승지의 일원으로 종이 제작에 쓰이는 닥나무가 많이 자랐던 곳이다. (섬의
이름인 저자는 닥나무를 뜻함)
그렇게 착했던 저자도는 1970년대 강남 개발과 압구정동 아파트 조성에 필요한 흙을 충당하고
자 무식하게 폭파되어 인간의 시야와 지도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그렇게 영원히 없어진 듯 보
였던 저자도는 대자연의 위대한 힘으로 조금씩 살아나 아주 작지만 섬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하여 몇십 년 또는 10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면 지도에 다시 그를 표시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 응봉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동구 응봉동, 금호4가동


▲  응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④
굉음을 울리며 응봉산 밑도리를 지나는 경의중앙선 전철


 

♠  응봉산 마무리

▲  개나리와 벚꽃이 아른거리는 응봉산 동쪽 능선길 ▼



▲  응봉산 출렁다리 (동쪽)

동쪽 능선길을 내려가면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온다. 그 길은 응봉산의 북쪽 자락을 돌아
응봉산정 북쪽까지 이어지는데 그 중간에 출렁다리가 있다. (길 옆에 있음)
출렁다리는 응봉산정, 인공암벽공원과 함께 응봉산을 수식하는 조촐한 눈요깃감으로 벼랑 사
이에 짧은 허공을 이용해 다리를 놓았다. 천하 출렁다리의 성지(聖地)로 추앙받는 청양 천장
호 출렁다리, 파주 감악산(紺岳山) 출렁다리, 원주 소금산 출렁다리만은 못해도 복잡하기 그
지 없는 서울 도심에 거창할 것도 없이 저 정도의 흔들다리만 있어도 충분하다. 다리를 건널
때 조금씩 흔들거려 염통을 은근히 건드리니 다리의 이름값은 그런데로 하고 있다.


▲  응봉산 출렁다리를 건너다. (출렁다리 서쪽)

▲  개발의 칼질에 고통받는 응봉산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곳
절벽처럼 잘려나간 응봉산 북쪽 부분 (독서당로)


응봉산 서쪽과 북쪽은 개발의 칼질로 그의 살이 적지 않게 깎여나갔다. 특히 대현산과 이어지
는 북쪽은 독서당로가 닦이면서 아예 산줄기를 절단을 내버려 강제로 절벽이 되어버렸다. 흉
하게 깎인 동쪽과 북쪽에 인공암벽공원(동쪽 자락)을 설치하고 풀과 나무로 덮는 등 안간힘을
썼지만 주변과 너무 어색하다.

독서당로로 산줄기가 끊긴 북쪽 벼랑에는 나무데크길을 마치 고산지대의 잔도(棧道)처럼 아슬
아슬하게 걸쳐놓아 보기만 해도 참 아찔하다. 길 북쪽의 신동아아파트를 이어주는 육교가 설
치되어 응봉산 북쪽 산줄기(대현산)와 연결은 시켜놓았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통행로이지 산줄
기는 아니다.
이 땅의 개발이 일찍 철이 들었다면 생태다리 터널 방식으로 도로를 뚫어 산의 피해를 최소화
시켰을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하긴 이 땅의 개발지상주의는 철이 들려면 아직도 멀었다.


▲  응봉산 북쪽에 자리한 독서당공원

응봉산에서 독서당로 육교를 건너 신동아아파트 서쪽 길로 가면 독서당공원이 마중을 나온다.
겉으로 보면 응봉산과 별개처럼 보이지만 이곳 역시 응봉산의 엄연한 일원으로 신동아아파트
와 벽산아파트 사이에 남북으로 가늘게 이어져 있으며, 공원 북쪽은 바로 대현산(대현산공원)
과 맞닿아있다. 또한 서울숲~남산을 잇는 둘레길이 이 공원의 신세를 지며 대현산, 금호산으
로 흘러간다.

공원 이름은 응봉산 자락에 있었다는 독서당에서 따온 것이다. 지금은 산뜻한 모습들을 드러
내고 있지만 1960년대 이후 서울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금호동과 옥수동, 응봉동에 달동
네 스타일의 집들이 마구 들어서 꽤 우울하고 어지러운 모습을 간직했던 곳이다.
1973년 12월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었으나 시행되지는 못했으며, 무허가 건물과 위험 건물이
마구 들어서 말썽이 자꾸만 늘자 2007년 10월 '공원화사업지구'로 지정하여 주변을 모두 갈아
엎고 2009년 12월 공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달동네 시절보다 다소 정비되고 안정적인 모습이긴 하나 공원도 좀 단조롭고 주변이 온통 성
냥갑 아파트 일색이라 지금의 풍경이 참 낯설고 재미가 없다. 기존 시내와 주택가를 싹 밀어
버리고 재개발이 된 곳들은 마치 같은 도장을 찍어낸 듯 다들 비슷한 모습 같다. 나도 서울이
고향이고 약수동과 금호동 산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강제 성형을 당한 곳이 적지 않
아 어린 시절을 추억할 공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이 역시 모든 것을
지우기 좋아하는 심술쟁이 세월의 장난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동구 금호동1가 37-7일대


▲  벚꽃의 순백 향연이 한참인 독서당공원 ①

▲  벚꽃의 순백 향연이 한참인 독서당공원 ②

▲  벚꽃의 순백 향연이 한참인 독서당공원 ③

▲  북쪽(대현산)으로 넘어가는 독서당공원 산책로

▲  독서당공원 북쪽에서 만난 푸른 나무

▲  독서당공원 북쪽 입구 (금봉어린이집 옆)
공원 바로 북쪽에는 대현산을 등에 업은 대현산공원이 있다. 같은 지붕이지만
길(독서당로63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름만 다른 것이다.


 

♠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돌다리, 살곶이다리<전곶교(箭串橋)>
- 보물 1,738호

늦가을이 깊어가던 11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한양대 남쪽 중랑천에 있는 살곶이다리를 찾았
다. (앞의 응봉산과 찾아간 시기는 틀리나 그곳과 가깝고 중랑천 라인이므로 편의상 본글에
넣었음)

살곶이다리는 한자로 전곶교(箭串橋)라 하는데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자 조선시대에
지어진 돌다리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그렇다고 다리 길이가 수백m씩이나 되는 것은 아니
다. 길이 78m(256척), 너비 6m(20척) 정도로 기둥을 4줄로 하여 모두 64개를 세우고 그 위에
받침돌을 올려 대청마루를 올리듯 3줄의 판석을 빈틈없이 깔았다. 가운데 2줄 교각을 낮게하
여 다리의 중량을 안으로 모았으며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고자 마름모형으로 다듬고, 다리
기둥에 무수하게 흠집을 내어 물살의 흐름을 배려했다. 단순해 보이는 겉보기와 달리 과학과
기술이 꽤 들어간 것이다.

이 다리의 탄생 배경은 대략 이렇다. 왕위에서 물러난 태종(太宗)과 정종(定宗)은 서울 동부
지역으로 종종 외출을 나갔다. 하여 세종(世宗)은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위해 1420년 5월, 그
길목인 살곶이에 다리를 지었다. 허나 중랑천 너비가 넓고 여름마다 찾아오는 홍수를 이겨내
기 어려웠으며 때마침 태종도 승하하여 기초 공사 정도에서 공사는 중단되고 만다.
그렇게 50년 이상 방치되어 오다가 백성들의 교통 편의를 위해 다리 가설의 필요성이 계속 제
기되면서 1475년 잠자고 있던 다리에 다시 손질을 가해 1483년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살곶이다리는 서울에서 뚝섬과 광진구, 송파, 경기도 동부와 동남부, 멀리로는 충청도 동부와
강원도, 경상도를 잇는 중요한 다리로 백성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게다가 제왕과 왕족들이 화
양정(華陽亭)과 성덕정(聖德亭, 성수동)으로 사냥이나 군사훈련을 보러 가거나 여주 영녕릉(
英寧陵), 헌인릉(獻仁陵)에 참배하러 갈 때도 꼭 이곳을 거쳐갔다. 이렇게 높은 사람들의 이
용이 높다보니 다리 폭을 넓게 잡았으며, 마치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하여 제반교(濟盤橋)라
불리기도 했다.

고종 때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무리하게 경복궁(景福宮)을 재건할 때, 애궂은 살곶이다
리까지 손을 대어 다리 석재를 절반씩이나 뜯어갔으나 대부분 제대로 쓰이지도 못하고 버려졌
다.
1920년대 대홍수로 다리가 크게 손실되었고 그런 상태로 방치되는 고통을 겪다가 1972년에 서
울시에서 복원을 했다. 허나 중랑천 폭이 그 사이 많이 넓어져 현재 다리로는 감당이 되지 않
자 북쪽 구석으로 옮겼으나 너무 대충 복원하여 원래 모습으로 하지는 못했다. 또한 다리 남
쪽에는 중랑천 물줄기 위에 시멘트로 연결다리를 엮으면서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이게
모두 살곶이다리로 오해하기가 쉽다.
허나 북쪽의 돌로 된 다리가 진짜이며, 중간에 돌로 두텁게 다져진 돌축대와 그 남쪽 다리는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들이니 착오가 없기 바란다.


▲  가까이서 본 살곶이다리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랜만에 찾은 살곶이다리는 보수공사로 다리 북쪽이 다소 어수선했다.
1972년에 서울시 철밥통들이 너무 날림으로 복원을 해서 손댈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통행은 가능하며, 갈대와 온갖 수풀이 출렁이는 다리 밑도리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나 다리
높이가 낮고 물도 없기 때문에 적당히 들어가서 살피면 된다. 


▲  평지처럼 넓어 보이는 살곶이다리

돌다리를 이루고 있는 돌의 피부가 조금 거칠기는 하나 거닐기에는 그리 지장은 없다. 이래뵈
도 조선시대 돌다리 중 가장 크고 단단하며 제왕(帝王)들도 이용했던 비싼 다리이다. 다만 수
표교(水標橋)처럼 다리 양 모서리에 난간 같은 시설이 없으니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기 바란
다.


▲  남쪽 돌축대에서 바라본 살곶이다리와 한양대
돌다리와 시멘트 다리 사이에는 돌축대를 쌓았다. 그곳을 경계로 진짜 살곶이다리와
그를 접선하는 시멘트다리가 갈라진다. 돌축대 역시 1972년에 다져진 것이므로
원래 살곶이다리와는 관련이 없다.

▲  동쪽에서 바라본 살곶이다리
다리 주변에는 갈대와 온갖 수풀들이 늦가을의 막바지 향연을 즐기고 있다.


다리의 이름이 되고 있는 살곶이는 이곳의 지명이다. 살곶이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재미난 설화가 아련히 전해온다.
고려를 뒤엎고 조선이란 비리비리한 나라를 세운 태조 이성계, 그의 5번째 아들인 정안대군(
靖安大君)은 2차례(1398, 1400년)의 왕자의 난을 통해 이복동생(이방석, 이방번)을 때려죽이
고 친형인 이방간(李芳幹)까지 때려잡으면서 결국 1400년 왕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그 유명
한 태종이다.
자식들의 권력 싸움에 뚜껑이 단단히 뒤집힌 이성계는 그의 본거지인 함경도 함흥(咸興)으로
가버렸다가 태종의 계속되는 설득에 못이겨 결국 서울로 돌아오기로 했다. 부왕(父王)의 컴백
소식에 기뻐한 태종은 살곶이 부근에서 부왕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기다렸는데 하륜(河崙)이
혹시 모르니 연회장소에 큰 나무 기둥을 세우라고 했다. 즉 태조의 화가 아직 가라앉지 못해
그의 주특기인 화살을 갑자기 날릴지 모른다는 뜻이다. 하여 큰 기둥을 여러 개 세웠다.

태조 일행이 이곳에 이르자 태종은 너무 반가워 그에게 달려갔는데 태조는 그를 보자 다시금
뚜껑이 뒤집혀 귀신같이 화살을 매겨 쏘았다. 태종 또한 무예를 조금 하는지라 잽싸게 큰 기
둥 뒤로 숨어 화살을 피했다. 이를 지켜본 태조는 껄껄 웃으며 그에게 옥새를 내주었다고 하
며 태조가 화살을 쏜 곳이라 하여 이곳 지명이 살곶이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1가지 이상
한 점이 있다.
함흥에서 서울로 오려면 추가령구조곡(楸哥嶺構造谷)과 평강(平康), 철원(鐵原), 연천(漣川),
양주(楊州), 도봉구를 거쳐 동소문(혜화문)이나 동대문으로 들어서면 된다. 그런데 살곶이를
경유하는 것은 동남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고 좁은 중랑천을 배를 타고 이동
했을 리는 없다. 다만 다리 남쪽인 성수동 성덕정은 군사 훈련을 했던 곳이라 다리 부근에서
제왕이나 귀족들, 군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이 살곶이의 유래가 되
지 않았을까 싶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 성수동1가


▲  살곶이다리의 옛 모습 (다리 남쪽 둑방길 터널에 있음)
저때 중랑천은 딱 살곶이다리 길이에 맞게 흘러갔다.

▲  살곶이다리에서 바라본 중랑천과 내부순환로
중랑천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서식하는 도봉동이 나온다.
그래서 무척 반가운 하천이다.

▲  살곶이다리에서 바라본 성동교와 2호선 철교

▲  늦가을에 물씬 잠긴 중랑천 둑방길

살곶이다리를 건너 중랑천 남쪽에 길게 둘러진 둑방길로 들어섰다. 이 둑방은 성동교에서 송
정동주민센터 부근까지 이어져 있는데, 둑방 위에 산책로를 닦고 긴 생머리의 버드나무와 여
러 나무를 심었다.
늦가을이라 나무들은 처절한 아름다움을 내보이며 둑방 주변을 마치 네온사인마냥 화사하게
물들였다.


▲  중랑천 둑방길 속으로 빠져들다...①

▲  중랑천 둑방길 속으로 빠져들다...②

▲  둑방길 옆에 짧게 펼쳐진 은행나무 숲길
황금색 은행잎이 우수수 내려앉아 우울한 2글자 '낙엽'이란 이름으로
귀를 접고 누워있다.

▲  중랑천 둑방길에서 바라본 중랑천과 동부간선도로
중랑천이 크게 구부러지는 곳 너머가 송정동(松亭洞) 북부이다. 그 너머로
보이는 긴 산줄기는 고구려 유적의 성지인 아차산~용마산 산줄기이다.

둑방길을 끝으로 봄의 응봉산+늦가을 살곶이다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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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에서 무지개를 보다 ~~ (숙정문에서 청운대, 백악마루, 부암동 창의문까지)

 


' 서울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 나들이 '

▲  북악산에 뜬 무지개

▲  숙정문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가을이 막바지 절정을 누리던 11월 중순 주말에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北
玄武)인 북악산(백악산)을 찾았다.

둥근 햇님이 하늘 높이 떠 있던 오후 2시,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서울시내
버스 1111번(번동↔성북동)을 타고 성북동(城北洞) 서울다원학교 종점에서 두 발을 내렸다.
성북동 종점에서 천하 여러 나라의 만국기(萬國旗)가 펄럭이는 '성북 우정의 공원'을 지나
삼청각으로 인도하는 조그만 길(성북로31가길)로 들어서니 숲과 계곡, 주택이 뒤섞인 전원
(田園) 풍경이 펼쳐진다. 길 왼쪽(남쪽)에는 진하게 우거진 숲과 함께 북악산이 베푼 계곡
이 졸졸졸~~♬ 흘러가며, 그 계곡은 성북천이란 간판을 달고 북악산의 청정한 기운을 가득
머금으며 속세로 흘러간다.
그 길의 막다른 부분에 이르면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함께 약간의 오르막 길이 펼쳐지
는데, 그 길을 오르면 바로 삼청터널 북쪽이다. 삼청터널은 성북동과 삼청동, 도심을 이어
주는 터널로 시대가 변했음에도 여전히 2차선 덩치를 고수하고 있어 주말과 휴일에는 버벅
거리는 차량의 행렬을 심심치 않게 본다.
(삼청터널은 차량 전용 터널이라 뚜벅이는 통행 금지임)

삼청터널로 향하는 길(대사관로)을 건너면 홍련사로 가는 길과 북악산으로 가는 길이 나란
히 나타난다. 허나 길이 서로 붙어있어 초행자는 자칫 햇갈리기 쉬운데, 오른쪽 평탄한 길
이 홍련사(紅蓮寺) 길이며, 왼쪽 계단길이 북악산과 김신조루트로 가는 길이다. 그러니 햇
갈리지 않도록 한다.
홍련사로 가는 길은 오로지 홍련사만 이어줄 뿐이며, 절 입구에 정열적으로 타오른 단풍나
무가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에 마구 돌을 던진다. 저 길로 들어서면 나도 저들처럼 붉게
물드는 것은 아닐까..?


▲  늦가을이 화사하게 질러놓은 붉은 단풍이 펼쳐진 홍련사 입구(오른쪽)와
북악산, 숙정문 입구(왼쪽)


 

♠  북악산(北岳山, 백악산) 입문

▲  북악산으로 오르는 산길 (숙정문안내소 직전)

북악산으로 인도하는 계단길을 오르면 2007년에 북악산 개방 기념으로 조림(造林)한 것을 기
리고자 세운 표석이 있고, 그 표석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와 제2산책로(김신조루트)로 이어지며, 직진을 하면 바로 숙정문안내소
가 나온다.


▲  숙정문안내소

숙정문안내소는 말바위안내소, 창의문안내소와 함께 북악산 주능선(한양도성길)으로 인도하는
관문이다. 예전에는 신분증을 무조건 지참하여 출입신청서를 작성해야 했으나 2019년 4월 5일
부터 그런 것이 폐지되어 다소 자유의 공간이 되었다.
허나 북악산에 국가의 예민한 곳이 많다보니 개방 시간에는 여전히 제한을 두어 여름(5~8월)
에는 7~19시(출입은 17시까지), 봄과 가을은 7~18시(출입은 16시까지), 겨울은 9~17시(출입은
15시까지)이다. 또한 쉬는 날도 사라져 요일 가리지 않고 접근이 가능하다.

숙정문안내소를 지나면 속세살이처럼 각박한 길이 숙정문까지 이어진다. 시작부터 힘든 길이
니 북악산이 그리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님을 느끼게 하는데, 그 각박함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나무데크 계단길을 닦아놓았다.


▲  숙정문으로 오르는 산길 (숙정문안내소 이후, 초겨울)


※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白岳山)> - 명승 67호
서울 도심 북쪽에 가파르게 솟아난 북악산(342m)은 서쪽의 인왕산. 동쪽의 낙산(駱山, 낙타산
),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남산)과 함께 서울 도심을 지키는 4대 산의 하나이다. 이들을 내사
산(內四山)이라 부르는데, 그들 중 북악산이 맏형이며, 낙산은 막내 동생이다.

서울 도심의 지형은 내사산에 감싸인 분지(盆地)로 조선 태조 때 개경(開京)에서 서울로 국도
(國都)를 옮기면서 이들 산의 능선을 따라 18.2km의 도성(都城)을 구축했다. 그리고 풍수지리
에 따라 북악산을 북현무로 하여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삼았으며,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
낙산을 좌청룡(左靑龍), 남산을 남주작(南朱雀)으로 삼았다.
이렇게 도성을 만들고 한강 남쪽에 있는 관악산(冠岳山, 629m)을 신하의 산이란 뜻의 조산(朝
山)으로 삼았는데, 그가 주산인 북악산보다 훨씬 높고 산세가 우람해 거의 신하가 왕을 누르
고 있는 형세였다. 게다가 관악산과 그 서쪽에 있는 호암산(虎巖山)이 각각 활활 타오르는 불
의 모습과 호랑이의 모습으로 나란히 서울을 응시하고 있어 조선 위정자들은 비보풍수(裨補風
水)의 일환으로 서울 북쪽에 있는 북한산(삼각산)을 가져와 서울을 지키는 듬직한 진산(鎭山)
으로 삼아 관악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했다. 북한산이 관악산보다 키도 높고 산세 또한 장대하
기 때문이다.

북악산의 옛 이름은 백악산으로 종로구에서는 어디서든 그가 보이는데, 오랫동안 서울을 상징
하는 산으로 남쪽 자락에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을 닦고, 그 북쪽(지금의 청와
대)에는 넓게 후원을 두었다. 지금은 청와대(靑瓦臺)와 국무총리공간이 둥지를 틀어 이 땅의
정치, 행정 1번지의 역할은 변함이 없다.

북악산 주능선에는 한양도성(漢陽都城)이 파노라마처럼 길게 펼쳐져 있다. 정상 동쪽에는 북
문인 숙정문이 있고, 인왕산과 경계를 이루는 자하문고개에는 창의문(자하문)이 고색의 모습
으로 고개 중턱을 지킨다.
이렇듯 예나 지금이나 서울을 지키는 예민한 곳으로 성곽을 낀 주능선과 정상 주변은 사람들
의 발길을 통제했는데, 그래도 해방 이후에는 주능선과 북쪽 능선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으나 1968년 1.21 사건 이후 북악산 대부분이 닫힌 땅이 되고 말았다.

주능선과 조금 떨어진 삼청동(三淸洞)과 청운동(淸雲洞)은 한양도성의 북쪽 변두리로 숲이 무
성했다. 삼청동계곡과 대은암(大隱巖)계곡, 백운동(白雲洞)계곡, 청송당(聽松堂)계곡 등의 계
곡이 흘렀으며, 풍경이 아름다워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 및 풍류 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그리
고 삼청공원과 숙정문 주변은 사대부(士大夫) 여인들의 봄꽃놀이 장소로 유명했다고 한다. 대
은암계곡 바위글씨를 비롯해 당시의 여러 문화유적이 아련히 남아있으며, 북악산 북쪽 백사골
(백사실)에는 백석동천이란 별서(別墅)유적이 전하고 있다.

북악산은 북쪽으로 북한산과 이어져 있고 숲이 무성하다보니 예로부터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
다. 그들은 궁궐 후원과 북촌까지 침투했는데, 태종(太宗)이 경복궁 후원을 거닐다가 호랑이
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북악산 호랑이는 다른 호랑이와 달리 곶감 따위는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하며, 대신 수진궁(壽
進宮) 귀신을 무서워한다고 했다. 하여 인왕산, 북악산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는 속담이 생겨났다. (수진궁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왕족의 사당임)

1968년 이후 속세에 개방을 꺼렸던 북악산은 2006년 4월 1일 홍련사에서 숙정문을 거쳐 촛대
바위까지 부분 개방되었으며, 그것도 인터넷 예약을 통해 1일 4회만 출입이 가능했다. 이후
전면 개방을 위해 쉼터와 의자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어 2007년 4월 5일에 말바위에서 정상을
거쳐 창의문까지 전 구간이 개방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2009년 북쪽 능선인 북악하늘길(김신
조루트)이 활짝 열려 시민의 품으로 들어왔는데, 이 길은 약간의 통제구역이 있긴 하지만 제
약이 심한 주능선과 달리 언제든 자유롭게 안길 수 있다.

북악산은 예로부터 소나무가 유명하여 조선 조정에서 특별히 옆구리에 끼고 관리했으며, 왜정
(倭政) 이후 관리 소홀과 마구잡이 벌채로 지금은 주능선 일대에 조금 남아있다. 그 외에는
간간히 소나무가 목격된다. 또한 오랫동안 금지된 곳으로 있다보니 나무와 식물들이 마음 놓
고 뿌리를 내려 숲이 원시림마냥 울창하다. 게다가 숙정문 주변에는 팔배나무가 군락을 이루
고 있으며, 수목이 무성하여 새들이 많이 산다.
그러다보니 서울 도심의 하늘을 정화시켜주는 허파 역할까지 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인왕산
과 북한산, 관악산과 더불어 대자연이 서울에 내린 소중한 선물이자 꿀단지로 앞으로도 지금
의 모습 그대로 삼삼한 자연의 공간으로 서울 속에 있었으면 좋겠다. 하긴 산 주변에 국가의
예민한 곳이 많다보니 개발의 칼질 또한 그 눈치로 마음껏 칼질을 할 수는 없다.


▲  북악산 김신조루트 남마루에서 바라본 북악산 주능선(가운데 산줄기)과
서울 도심

※ 북악산(백악산) 주능선과 한양도성길
2006년 4월부터 순차적으로 개방된 주능선은 창의문에서 정상을 거쳐 말바위로 이어지는 4.3
km 구간으로 숙정문 안내소와 말바위 안내소, 창의문 안내소를 통해 입장할 수 있다. (그 외
에는 출입금지) 또한 탐방구간(말바위안내소~창의문안내소)을 절대로 벗어나면 안되며 도처에
군인이 지키고 서 있으니 엉뚱한 마음을 품으면 곤란하다. (말바위안내소~말바위~삼청공원/와
룡공원 구간은 완전 개방된 구간이라 시간 제한 없음)

주능선에서 만날 수 있는 명소로는 숙정문과 1.21사태소나무,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촛대바
위, 청운대 등이며, 군사시설이 옥의 티처럼 널려 있어 북악산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실감케
한다. 만약 서울이 수도가 아니었다면 북악산은 꽤나 자유로운 몸이 되었을 것이다.
북악산 정상과 청운대에서는 서울 도심이 두 눈 아래로 펼쳐져 조망(眺望)이 일품이며, 숙정
문과 말바위에서는 성북동과 성북구 지역이 보이고, 한양도성을 따라 평창동(平倉洞)과 부암
동, 인왕산, 북한산이 차례대로 보여 그야말로 움직이는 조망대이다.

* 북악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삼청동 / 성북구 성북동
* 말바위안내소 (☎ 02-765-0297~8, 팩스 02-765-0296)
* 숙정문안내소 (☎ 02-747-2152, 팩스 02-747-2153)
* 창의문안내소 (☎ 02-730-9924~5, 팩스 02-730-9926)


 

♠  숙정문에서 청운대까지

▲  약간 측면에서 올려다본 숙정문(肅靖門) - 사적 10호
숙정문 앞은 바로 각박한 산비탈이라 평평한 공간이 적어 성문을
지키기에는 아주 그만인 곳이다.


숙정문안내소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숙정문이 모습을 비춘다. 이 문은 한양도성의 북문(北門)
으로 남대문<숭례문(崇禮門)>, 동대문<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돈의문(敦義門)>과 함께
한양 4대문의 하나였다. 북대문(北大門), 북문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가파른 산능선에 자리해
있어 도성의 대문이라기 보다는 산성(山城)의 조촐한 성문 분위기가 진하다.

문의 이름인 숙정(肅靖)은 엄숙히 다스린다는 뜻으로 원래 이름은 가운데 1자만 다른 숙청문(
肅淸門)이었다. 1396년 지금보다 약간 서쪽에 조성되었는데, 1413년에 풍수학자인 최양선(崔
揚善)이 태종에게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 길을 내어 지맥(地脈)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건의하여 이들 문을 닫아걸고 소나무를 잔뜩 심어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래
서 무늬만 문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거 외에도 숙정문을 품은 북악산 주능선은 도성 내부와 바깥이 훤히 바라보이는 예
민한 위치로 서울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러다보니 백성들의 출입을 거의 통제했고,
설령 이 성문을 나와도 이어지는 곳은 숲이 무성한 북악산 북쪽 산줄기와 북한산, 성북동가
고작이었다. <성북동은 동소문(東小門)을 통해 갈 수 있음>
그리고 평소와 비가 많이 올 때는 숙정문을 닫아 걸다가 가뭄이 심할 때 남대문을 닫고 이 문
을 열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는 1416년에 제작된 기우절목(祈雨節目)에 따라서 북쪽은
음(陰). 남쪽은 양(陽)을 상징하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니 통행문으로서의 존
재감보다는 도성 수비와 음양의 원리를 따지는 풍수지리적인 존재감이 훨씬 컸던 것이다.

1504년 성곽을 보수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으며, 숙청문이 언제 숙정문으로 이름이 갈렸
는지는 북악산 산신(山神)도 모르는 실정이나 1523년부터 숙정문 이름이 등장했다. 숙정문 외
에도 북정문(北靖門)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이들 명칭이 같이 쓰이다가 언제부턴가 숙정문으
로 통합되었다.
1968년 1.21사태 이후 북악산 대부분과 숙정문 일대가 금지된 땅이 되었으며, 1976년 북악산
일대 성곽을 손질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문루는 비록 새 건물이지만 성벽을 이
루는 성돌에는 고색의 때가 만연해 중후한 멋을 보인다.
2006년부터 다시 속세에 공개되어 제한적이긴 하지만 성문 관람이 가능해졌다. 허나 문 좌우
성곽길과 숙정문안내소 방면만 통행이 가능하며, 남쪽에는 삼청동으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으
나 금줄이 쳐져 있어 절대로 갈 수 없다.

숙정문 문루에 올라서면 북악산 북쪽 능선과 성북동 일대가 바라보이며, 대자연이 그린 가을
단풍이 산자락을 곱게 수를 놓아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자아낸다. 높은 곳에 자리한 것
은 분명하지만 문 남쪽은 울창한 수목이 시야를 방해하고 있고, 북쪽도 겨우 성북동과 삼청각
, 북악산 북쪽 능선이 전부라 조망은 생각보다 별로다.
매년 봄에는 사대부 여인들이 숙정문 남쪽에서 봄꽃놀이를 즐겼다고 하며, 그거 외에는 딱히
숙정문 주변에 대한 옛 사람들의 시(詩)나 문구(文句)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  숙정문의 수수한 뒷모습

▲  숙정문 서쪽 협문(夾門)


▲  숙정문에서 바라본 천하
눈이 시리게 맑은 가을 하늘 아래로 북악산과 북한산 사이에 포근히 둥지를 튼
성북동이 바라보인다. (왼쪽에 보이는 큰 기와집이 삼청각)

▲  숙정문 서쪽 성곽에서 바라본 천하 (가운데 기와집이 삼청각)

▲  북악산에서 만난 일곱 색깔 무지개의 위엄
비가 잠깐 오더니 이내 일곱 색깔 무지개가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무지개를
본 것이 정말 몇 년 만인지 옛 친구를 만난 듯 무척 반갑고 신기했다.

▲  힘차게 뻗은 숙정문 서쪽 성벽
서울 수비를 향한 굳건한 마음이 뭉쳐 단단한 성벽이 되었다. 성곽을 따라
북악산으로 오르면 시야에 범위도 점차 넓어진다.

▲  촛대바위

숙정문 서쪽에는 촛대바위가 있다. 아마도 촛대처럼 생겨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 듯 싶은데
현실은 바위의 북쪽과 동쪽 면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곳에서 보면 촛대처럼 보이지도 않아
그저 그런 바위로만 보이는데, 그를 제대로 보려면 바로 정면인 남쪽에서 봐야 되지만 남쪽은
금지된 구역이라 발을 못들이게 한다. 또한 바위 정상도 금지된 곳이니 괜히 바위 위에 올라
가는 일이 없도록 한다.

우리가 촛대바위를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왜정(倭政)이 이 땅의 혈을 끊고자 무식하게 쇠말뚝
을 박았던 추악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왜정은 1920년대에 경복궁과 일직선이 되는 이곳에 말뚝을 꽂았는데, 사람으로 친다면 머리의
정수리가 되는 부분이다. 즉 조선 땅의 머리 부분을 아작을 내어 이 땅을 영원히 통치하고 싶
은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다행히 그 말뚝은 제거되었으나 말뚝의 휴유증 때문일까? 이 땅은
아직도 혼돈 속에 잠겨있다. 친일매국노와 그런 것을 추종하는 잡것들이 권력과 부를 챙기고
이 땅을 이간질시켜 나라의 기본부터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언제쯤 촛대바위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까? 그때가 되면 주름진 나라 사정도 좀 펴지겠지.
(왜정의 쇠말뚝에 대해서는 측량용이란 말도 있음)


▲  촛대바위와 그에게로 인도하는 나무데크길
나무 난간 너머와 바위는 감히 발도 들일 수 없는 금지된 구역이다.

▲  촛대바위에서 청운대로 오르는 성곽
성곽을 따라 이어진 북악산의 명물 소나무의 푸른 물결..

▲  북악산 주능선을 따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양도성
(곡장 조망대에서 바라본 모습)
도성 너머로 구름에 감싸인 북한산(삼각산)이 바라보인다.


촛대바위를 지나면 성곽길 경사가 점점 각박해지면서 암문(暗門)이 하나 나온다. 여기서 암문
밖으로 나가서 잠시 성곽 바깥 길을 이용해야 되는데, 이는 성곽에 군사시설이 있기 때문에
부득이 그렇게 길을 낸 것이다.
길 옆에는 철조망이 둘러져 있고, 그 너머로 북한산, 평창동 등이 바라보여 마치 휴전선 너머
의 금지된 땅을 보는 듯 하며, 그 길의 끝에 이르면 성 안으로 인도하는 계단길이 나온다. 거
기서 다시 성곽길이 이어진다.


▲  청운대(靑雲臺) 표석 (해발 293m)

촛대바위에서 성 바깥, 안쪽을 들락거리며 20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백악산)에서 2번째로 높
은 곳인 청운대가 마중을 한다.
청운대는 푸른 구름의 지대란 뜻으로 근래에 붙여진 이름인 듯 싶다. 이곳은 공간이 넓고 의
자가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으며 북쪽으로 성북동과 북한산, 남쪽으로 남산과 서울 도심이
바라보여 조망 또한 괜찮다. (도심 쪽이 괜찮음)


▲  소나무가 짧게 그늘을 드리운 청운대

▲  청운대에서 바라본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 도심과
서울의 영원한 남현무, 남산(목멱산)

▲  청운대에서 바라본 북악산 정상

▲  청운대 주변에서 바라본 평창동과 신영동, 부암동, 북한산

▲  여장 성돌에 새겨진 빛바랜 글씨들

청운대를 지나면 안내문이 하나 나오는데, 그 안내문에 따라 여장을 살펴보면 글씨들이 희미
하게 아른거릴 것이다. 이 글씨들은 도성을 축조하면서 새긴 공사 구역 표시와 공사 담당 고
을,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자의 직책과 이름으로 이런 것이 새겨진 성돌이 한양도성에 여럿
있다.

1396년 한양도성을 만들 때 성곽 전 구간을 600자(약 180m) 단위로 끊어 97구간으로 구획하고
천자문(千字文) 순으로 공사 구역을 표시했다. 북악산 정상에서 천(天)으로 시작하여 지(地),
현(玄)... 순으로 해서 북악산 정상 동쪽에서 조(弔)로 끝나며, 구역 다음에 공사 일자와 공
사 책임자의 직책, 이름을 새겼다. 이런 공사 실명제는 조선 후기까지 계속 되었으며, 이곳
성돌에는 의령시면(宜寧始面)이라 쓰여 있어 의령(경남) 시작 지점을 뜻한다.


▲  남북분단의 쓰라진 비극 - 1,21사태 소나무

성돌글씨 부근에는 1.21사태 소나무라 불리는 소나무가 있다. 북악산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
건이 바로 1968년 김신조 공비 패거리의 서울 침공 사건인 이른바 1.21사태로 그들과 총격전
을 나눈 현장의 하나이다. 북악산에는 그와 관련된 쓰라린 장소가 많은데, 이 소나무와 호경
암이란 바위에는 총탄의 흔적이 있으며, 호경암이 있는 북쪽 능선에는 김신조 일당이 도망친
길인 김신조루트(북악하늘길 제2산책로)가 있다.
1.21사태 소나무에서 우리 군과 공비 패거리간의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그때 이 나무에 총탄
15발이 무심하게 박혔다. 이후 그 자리에 흉물스럽게 동그란 표시를 하여 남북분단의 잔인한
현실과 함께 이곳을 지키는 군인들로 하여금 경계로 삼고 있다.

때는 1968년, 북한은 김신조 일당 31명을 보내 청와대를 공격케 했다. 임진강(臨津江)을 건너
파주와 양주의 여러 산과 북한산 서쪽 자락, 창의문을 거쳐 1월 21일 서울 도심까지 용케 들
어온 김신조 패거리는 청와대를 코앞에 둔 청운동(淸雲洞)에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
1932~1968)이 이끄는 경찰에게 저지를 당했다.
경찰이 검문을 한다며 그들의 길을 막자 공비들은 크게 발작하여 외투 속에 감춘 기관단총을
꺼내 먼저 공격을 가했다. 불행히도 최서장은 가슴과 배에 관통상(貫通傷)을 입어 쓰러졌고
'끝까지 청와대를 사수하라!!'
마지막 명령을 내리며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
서장의 죽음에 애끓는 복수심에 불탄 경찰은 더욱 반격의 속도를 올려 공비들 상당수를 벌집
으로 만들었다. 이때 김신조를 비롯한 살아남은 공비들은 목을 붙잡고 북악산과 인왕산으로
줄행랑을 쳤는데, 그들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바로 이 소나무 부근에서 격전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 북악산 북쪽 능선인 호경암에서 격전이 있었고, 1월 21일 이후 14일의 토벌 끝에 김신조
와 도주 1명을 제외한 29명을 사살했다. 도주 1명은 북한까지 도망을 친 것으로 전해지며, 처
단된 공비의 시신은 파주시 적성면 적군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김신조는 투항해 이 땅 어
딘가에 살고 있다.

김신조 일당의 난입 사건을 1.21사태라 부르며, 이 사건을 계기로 단단히 뚜껑이 폭발한 박정
희 대통령은 바로 그해 4월 1일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군작전도로인 북악스카이웨이를 콩볶
듯 급히 만들게 했다. 이 예비군 창설로 인해 이 땅의 남자들은 군제대를 하고도 8년이나 예
비군 훈련을 받아야 되는 불이익을 받게 된 것이다.


▲  1,21사태 소나무의 총탄 흔적
그때 총탄이 박힌 자리에 빨간색과 흰색으로 좀 흉하게 표시를 해두었다.


북악산에 널린 수많은 소나무의 하나로 이제는 북악산의 명물로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허나
좋은 뜻에서 그리 되면 모르겠지만 호경암과 함께 1.21사건 같은 영 좋지 않은 사건으로 명물
이 된 것이니 소나무 자신도 마음이 그리 편치 않을 것이다. 차라리 이름이 없는 소나무처럼
조용히 묻히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어쩌다가 안좋은 쪽으로 명물이 되었는지 나무나 사람이
나 운과 시간을 잘 만나야 된다.
게다가 호경암처럼 당시에 총탄 흔적까지 안고 있으니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70년 넘게 대치
하고 있는 남북분단의 우울한 비극을 전율이 일도록 느끼게 만든다.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에서 창의문까지

▲  북악산 정상힌 바위 (저 바위가 실질적인 정상임)

청운대에서 10분 정도를 마저 오르면 북악산(백악산)의 정상인 백악마루에 이르게 된다. 백악
마루는 해발 342m로 마루란 순수 우리말로 정상을 뜻한다.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정상 중앙에 백악산 정상 비석과 북악산 옛모습 복
원기념비가 있다. 그리고 정상 북쪽에는 사람 키보다 2배 정도 높은 굵직한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꼭대기가 실질적인 북악산의 머리이다.
정상 남쪽에는 청운대와 마찬가지로 소나무가 가득해 그윽한 솔내음을 전해주며, 테두리 안에
서만 움직이고 사진을 찍어야 된다. 테두리를 넘으면 나라가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굳이 넘을
생각은 하지 않도록 한다.
여기서는 동서남북 어디든 촬영이 가능하며, 북쪽으로는 평창동과 북한산(삼각산), 동쪽은 성
북동과 서울 동북부지역, 서쪽은 부암동과 인왕산(仁王山), 그리고 남쪽으로 서울 도심과 남
산(南山)이 속시원히 바라보여 조망이 일품이다.

이곳에 올라 발아래 펼쳐진 천하를 보고 있자면 그 천하가 마치 내 것이 된 듯, 잠시나마 제
왕(帝王)마냥 즐거운 기분이 밀려온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중의 시궁창..) 세계 최대의 대
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발 아래 두고 굽어볼 수 있는 곳으로 이곳만큼 조망이 좋은 곳도
없다. 또한 서울 도심을 둘러싼 뫼 가운데 가장 높은 산이며, 오랜 세월 서울 땅을 지켜온 북
현무로서의 면모와 위엄도 느껴진다.


▲  하얀 돌로 다듬은 백악산 정상 표석

▲  소나무 너머로 바라보이는 서울 도심과 남산
중공 짱깨산 미세먼지로 조망이 영 시원치가 못하다.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성북동과 서울 동북부 지역
산속에 묻힌 너른 동네가 성북동이고, 그 산 너머로 성북구와 강북구,
노원구 등 서울 동북부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북악산 꼭대기 바위에서 바라본 정상부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평창동과 북한산
북악산을 받쳐주는 서울의 듬직한 진산, 북한산이 북악산을 굽어본다.
그 남쪽 산자락에는 부자 동네 평창동이 크게 둥지를 틀었다.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인왕산
인왕산을 비롯하여 서대문구, 은평구 지역과 서울/고양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봉산, 앵봉산 등)들이 바라보인다.

▲  백악쉼터에서 바라본 북악산 북쪽 산줄기와 평창동,
그리고 북한산의 위용
북악산(삼각산) 북쪽 산줄기는 늦가을이 질러놓은 단풍에 산불마냥 활활
타오르고 있다. 너무 곱게 타올라 깜깜한 밤에도 모두 보일 것만 같다.

▲  백악쉼터에서 창의문으로 내려가는 성곽길
녹음이 짙은 소나무가 아찔한 내리막길을 가려주려는 듯 가운데서 시야를 막는다.

▲  백악쉼터 부근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신영동, 홍지동 지역

북악산 정상에서 창의문으로 가는 성곽길은 북악산에서 가장 고달픈 구간으로 각박한 속세살
이만큼이나 길이 가파르다. 내려갈 때는 올라가는 것보다야 부담이 적겠지만 급하게 펼쳐진
성곽길에 아찔함마저 들 정도이다. 그리고 창의문에서 올라갈 때는 각박한 경사를 자랑하는
성곽길에 '이게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길인가?' 기를 제대로 질리게 만든다. 거의 30~40도 경
사의 야속한 성곽길을 올라야 되니 말이다.
그래서 등산이 딸리거나 노인과 어린이들은 가급적 숙정문이나 말바위에서 오르기를 권한다.
어차피 거기도 힘들긴 마찬가지이나 서서히 경사가 급해지는 구간이라 덜 힘들다. 창의문이
정상과 가까운 지름길이라고 해서 만만히 보면 후회한다.

정상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백악쉼터라 불리는 조촐한 쉼터가 나온다. 여기는 북악산 개방
을 위해 닦은 공간으로 역사적인 의미는 없다. 이곳에서도 사진 촬영은 가능하나 쉼터 자체는
찍을 거리가 없으며 성곽과 성 밖에 펼쳐진 천하를 찍으면 된다.


▲  각박한 경사를 자랑하는 한양도성길 (백악쉼터에서 정상 방향)

▲  돌고래쉼터에서 만난 돌고래바위

백악쉼터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돌고래쉼터가 나온다. 쉼터 바로 옆에 돌고래처럼 생긴 바
위가 누워있어 돌고래쉼터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 이름도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닌 북
악산을 개방하면서 지은 이름이다.
바위가 돌고래를 닮았다며 거의 주입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제 눈이 안경이라고 내 눈에는 물개
처럼 보인다. 바위 동쪽에는 약간의 틈이 있는데, 거의 입처럼 생겼고 그 위에 눈처럼 보이는
자국도 있다. 가만 보면 물개가 꼬랑지를 흔들면서 움직이는 모습 같아 차라리 물개바위라고
했으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나에게는 이름을 갈아치울 힘이 없다.

돌고래쉼터 주변은 촬영이 가능하나 찍을 만한 것은 돌고래바위와 성곽 너머로 보이는 풍경들
뿐이다. 돌고래바위는 통제구역이라 그냥 난간 너머로 보기 바라며, 바위 주변에도 소나무가
그윽하게 운치를 자아낸다. 그런 소나무 사이로 서울 도심이 살짝 속살을 비친다.


▲  창의문 - 보물 1881호
자하문고개를 밀어 만든 신작로(新作路)에 밀려 성문으로의 기능은 다소
떨어졌으나 왕년에 도성 성문으로서의 위엄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서울 도심과 부암동(付岩洞)을 잇는 자하문고개에 옛 한양도성의 성문인 창의문이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킨다. 창의문은 성밖 부암동의 계곡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 부르
기도 하는데, 창의문보다는 자하문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나도 자하문이라 주로 부름)

이 문은 한양도성의 8개 성문의 하나이자 4소문(小門)의 하나인 북소문이다. 4소문은 동소문
<東小門, 혜화문(惠化門)>, 서소문<西小門 ,소의문(昭義門)>, 남소문<南小門, 광희문(光熙門
)>, 그리고 이곳 창의문으로 혜화문과 소의문, 광희문은 각각 동소문. 서소문, 남소문이라 불
리나 유독 창의문은 북소문이라 불린 적이 거의 없다.


▲  창의문 안쪽 (도심 쪽)

창의문은 1396년 한양도성을 지을 때 조성된 것으로 문의 이름인 창의(彰義)는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다. 1413년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
아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건의하여 1416년 문을 닫아걸었다. 다만 1422년 군인들의 통로로 사용되었고, 1617년 창덕궁
을 보수할 때 이 문을 통해 석재를 운반하는 등, 철저히 나라 일에만 문을 열었다. 허나 성
밖 부암동 지역에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과 그들의 즐겨찾기 명소가 즐비해 그들의 은밀한 통
행로로 쓰였다. 즉 국가와 높은 사람들의 전용문이었던 것이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등은 세검정(洗劍亭)에서 칼을 씻으며 역적질을 모의, 역촌동(驛村洞) 별서에 있
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 인조)을 앞세워 도성에 쳐들어가 광해군을 폐위시킨 이른바 인조
반정(仁祖反正)을 저질렀다. 그때 그 반역도당들이 부시고 들어간 문이 바로 창의문이다. 그
래서 문루에는 인조반정을 저지른 작자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문이 백성들에게 전격 개방된 것은 1741년이다. 그때 훈련대장 구성임(具星任)이 인조반정
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라며 성문을 중수하고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문루를 다시 세
울 것을 건의해 지금의 문루가 지어졌다.


▲  창의문안내소에서 바라본 창의문 문루와 협문
하얀 추녀에 잡상(雜像)과 용머리가 걸터앉아 성문을 지킨다. 창의문이 무탈했던
것은 저들의 굳은 직업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  문루에 걸린 인조반정 반역자들의 명단 현판
저들의 우매한 권력투쟁과 명나라에 대한 지극한 사대주의, 국제정세에 우둔함으로
얼마 뒤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삼전도(三田渡) 굴욕의 대치욕을 당하게 되고
그것도 모자라 동아시아의 호구 국가로 이리 털리고 저리 털리다가 결국
나라와 이 땅의 장대한 역사마저 잃게 된다.


창의문은 한양도성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서소문은 왜국 통감부(統監
府)가 만든 성벽처리위원회에서 1908년에 무단 철거하여 정확한 위치조차 아리송하고 동소문
은 왜정 때 없어진 것을 근래에 다시 지었다. 남소문인 광희문은 성문만 오래되었을 뿐, 문루
와 성곽은 1970년 이후에 복원되었다.
그에 비해 창의문은 6.25 때도 총탄이 알아서 비켜가 별다른 피해가 없었으며, 1958년 중수된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 정정함을 과시한다. 바로 그런 점이 인정되어 2015년 12월 2일, 국
가 지정 보물로 특진되었다. 비록 일찌감치 국보와 보물 1호 지위를 누린 남대문(숭례문), 동
대문(흥인지문)에 비해 다소 늦은 감도 있고 너무 늦게 빛을 본 서글픔도 있지만 역시나 인생
은 끝까지 살아남고 봐야 된다.


▲  창의문 문루에서 바라본 창의문 안쪽

겨울 제국의 등쌀에 떠밀려 서서히 손을 놓으려는 늦가을이 잠시 이곳에 걸음을 멈추고 그의
마지막 잎새를 잔뜩 그려놓았다. 단풍이 환대하는 저 오솔길을 거닐면 나도 저들처럼 곱게 물
들지는 않을까? 황색 피부가 졸지에 다색(多色) 피부로 변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  신작로로 강제로 끊어진 창의문 반대쪽 언덕과 성곽
저 언덕에는 2009년에 터를 닦은 윤동주시인의 언덕이 있다. 끊어진 폭은 짧지만
고개를 깊게 깎아놔서 마치 끊어진 강가 절벽을 보는 듯 하다.


오랫동안 도성 성문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으나 1960년 이후 자하문고개를 밀어내고 신작로를
닦으면서 성문의 통행 기능을 잃게 되었다. 요즘이야 산꾼과 답사꾼, 나들이꾼들로 심심치는
않겠지만 그래도 예전 같지는 못하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물건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뒷전에
물러나 앉은 모습은 정말 초라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문 서쪽에 신작로를 내면서 한양도성은 50m 남짓 끊어져 있다. 끊어진 반대쪽<현재 윤동주(尹
東柱)시인의 언덕과 청운공원이 들어서 있음>
을 애타게 바라보는 인왕산 쪽 성벽이 견우와 직
녀를 보듯 애처롭기까지 하다. 끊어진 구간은 도로 위에 흙을 덮어 성벽을 세우지 않는 이상
은 복원은 어려우며, 창의문 바로 남에는 북악산길이 지나가 시야를 제대로 방해한다. 하여
문루에 올라가 북쪽 전방을 뚫어지라 바라봤자 북악산길에 가려 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별로
없다.


▲  창의문 성문 천정에 그려진 봉황(혹은 닭)과 구름무늬

창의문은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문의 모습이라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만 그만의 매력이
자 특징이 2가지가 있다. 그러니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눈여겨 보기 바란다.
우선 빗물이 잘 흘러가도록 문루 바깥 쪽에 설치된 1쌍의 누혈(漏穴) 장식이 있다. 이것은 연
꽃잎 모양으로 조각되어 성문의 매력을 수식해주고 있으며, 성문 천정에는 화려하게 날개짓을
펼치는 봉황(鳳凰) 1쌍이 그려져 있는데 속설에는 봉황이 아닌 닭이라고 한다. 성문 밖 부암
동 지형이 지네를 닮았다고 하여 비보풍수에 일환으로 그 천적인 닭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림
을 가만히 보면 머리와 목, 날개는 닭을 많이 닮았으나 몸통과 꼬리는 닭과는 거리가 먼 봉황
의 모습이다.
봉황이 1마리가 아닌 둘이 있는 것을 보면 암수 1쌍일 것이다. 그들 주변으로 와운문(渦雲紋)
이 가득 그려져 있는데,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
센 소용돌이를 보는 듯하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북악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창의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산1-1 (창의문로 118)


▲  하늘을 향해 경쾌하게 날개짓을 펼치는 추녀마루의 고운 맵시
선의 유연함과 아름다움이 진하게 배여난 창의문,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선이 또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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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3월 1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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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성지이자 서울의 부드러운 동쪽 지붕, 아차산~용마산~망우산 나들이

 


' 아차산, 용마산, 망우산 나들이 '

▲  망우산, 용마산 산줄기

▲  아차산4보루

▲  망우산1보루


 

여름 제국이 저물고 가을이 서서히 고개를 들던 9월의 한복판에 나의 즐겨찾기 산의 하나
인 아차산을 찾았다.
아차산은 고구려(高句麗) 유적의 성지이자 해돋이와 일몰 명소로 유명하여 오랫동안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야무진 산이다. (나들이와 산행, 답사, 야간 등산 팬들이 많음) 산세
가 완만하여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마음 편히 안길 수 있으며, 산 좌우가 죄다 평지
다보니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아주 일품이다.
게다가 고구려의 거룩한 넋이 깃든 보루가 20개 가까이 펼쳐져 있고, 아차산성과 아차산3
층석탑, 온달샘석탑, 석실고분 등의 문화유산과 영화사(永華寺)와 범굴사 등의 오래된 절,
긴고랑계곡, 관룡탑 등 다양한 볼거리가 존재해 눈이 마음이 심심치가 않다.
아차산 북쪽에는 용마산, 그 북쪽에는 망우산이 자리해 있는데, 이름만 다를 뿐, 모두 아
차산 식구들이며, 조선 때는 아차산의 영역이 중랑구 봉화산(烽火山)까지 이르렀다.
(본글은 편의상 아차산4보루부터 시작하겠음)


 

♠  고구려 보루의 정석, 아차산4보루(堡壘) - 사적 455호

▲  용마산에서 바라본 아차산4보루 (사진 가운데가 4보루)

아차산4보루는 아차산(용마산 ,망우산 제외) 보루 중 가장 북쪽에 자리해 있다. 남한에 있는
고구려 성터 중 건물터와 성벽의 구조가 제대로 밝혀진 최초의 현장으로 의미가 꽤 남다른데,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서 발견된 보루 중 거의 유일하게 성벽의 흔적이 조금 남아있었다.
나머지 보루는 터만 간신히 남은 것에 비하면 상태가 다소 나았던 것이다.
복원 이전 성벽의 최대 잔존 높이는 1.8m로 남벽과 동벽은 잘 다듬은 성돌을 이용한 탓에 그
런데로 남아있었으나 북벽과 서벽은 훼손이 심해 남아있는 높이가 0.8m를 넘지 않았으며, 부
정형의 석재를 사용해 조잡하게 축조되었다.


▲  아차산4보루 남쪽 2중치 (2개의 치로 이루어진 부분)

구리시(九里市)가 4보루에 숨겨진 옛날 이야기를 풀고자 1997년부터 문화재청과 경기도의 도
움을 받으며 1998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였다. 하여 온돌과 배수로, 저수조 등을 갖춘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後部○兄'이라 쓰인 토기가 나와 고구려가 5~6세기에 쌓은 보루임이 명백해졌
다. 여기서 후부(後部)는 고구려 5부의 하나이며, '○兄'은 고구려 관등의 하나로 여겨진다.
고구려는 '형(兄)'자가 들어가는 관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2007년에 다시 조사를 벌여 숨겨진 치성을 발견했고, 보루 형태와 성벽 축성 방식을 확
인하면서 복원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래서 구리시(4보루가 구리시 땅임)에서 2008년부터 복원
을 적극 추진하여 2년 동안 공을 들여 2010년 12월 24일 복원 준공식을 가졌다. 아차산 일대
보루 중 처음으로 복원된 행운의 보루인 것이다. (나중에 시루봉 보루도 복원되었음)

보루 복원을 위해 보루터에서 나온 오래된 성돌을 주로 사용했으나 수량이 달려 부득이 새 성
돌로 모자란 부분을 때웠다. 그러다보니 고색이 짙은 옛 돌과 하얀 피부의 새 돌이 어색하게
조화를 이룬다. 허나 이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발굴조사를 토대로 고구려 축성 양식에 맞춰
왕년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을 했고, 건물터와 온돌 유구 등은 보존을 위해 모두 땅으로 덮었
다. 그리고 보루 중앙 쪽에 탐방로를 내고, 건물터 쪽에는 금줄을 쳤으며, 보루 북쪽과 남쪽
에 보루로 오르는 계단을 냈다.

보루의 둘레는 약 249m, 성벽 높이는 최소 4m 이상이다. 허나 탐방객의 안전을 고려하여 2.5~
3.1m 높이로 축소 재현했다. 지형의 경사면을 이용해 바깥 쪽에 성벽을 쌓고, 안쪽 경사면에
는 뒷채움돌과 흙으로 다졌는데, 방어력을 높이고자 동,서,남,북에 5개의 치성(雉城, 치)을
두었다. 남쪽에는 이중치를 두었는데, 두 성벽 사이가 서로 떨어져 있어 보루 출입구로 여겨
지며, 고구려 축성 양식의 하나인 들여쌓기 형식이 잘 깃들여져 있다.


▲  아차산4보루의 독특한 구조물 남쪽 2중치

4보루 남쪽에는 2중 구조로 이루어진 독특한 치가 눈길을 끈다. 전체 길이 13.2m로 나무로 목
책(木柵)이 둘러진 중간에 2.5m의 뚫린 공간이 있어 이를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 치로 구분
된다.
뚫린 공간에는 치의 성벽에 잇대어 4개의 후대 석축단이 축조되었고, 그 좌우로 목책을 세웠
는데, 아마도 보루의 출입구로 여겨진다. 이런 구조는 용마산2보루와 개발의 칼질에 이슬처럼
사라진 구의동(九宜洞)보루에서도 일부 확인되고 있어 고구려 보루의 독특한 구조를 보여주며
보루의 끝이 들여쌓기로 차곡차곡 쌓여져 있어 안정감을 준다.


▲  4보루로 올라가는 남쪽 계단

보루 내부에서는 건물터 7곳, 온돌 유구 2기, 배수로, 저수조 흔적, 치성 5곳이 발견되었다.
여기서는 항아리와 글씨가 새겨진 토기, 시루, 투구, 찰갑(가벼운 갑옷), 창, 도끼, 화살촉,
낫, 쇠스랑, 말에 물리는 재갈 등이 쏟아져 나와 인근 아차산3보루와 함께 아차산 일대 병참
기지로 추정된다.

▲  4보루 서남쪽 치

▲  4보루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남쪽 계단을 통해 4보루로 올라서니 그런데로 너른 보루 내부가 펼쳐진다. 이곳에는 군사들이
머물던 숙소와 창고, 방어시설 등이 들어서 있었는데,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 형
님의 집요한 괴롭힘 앞에 모두 휩쓸려 사라지고 앙상하게 터만 남아 사람들의 상상력을 살찌
워준다.
이곳을 재현한 모형이 서울대박물관에 있으나 이 역시 100% 정답은 아니니 고구려 건축 양식
에 맞춰서 적당하게 4보루 내부가 어땠을지 상상해보기 바란다. 이것이 4보루가 우리에게 주
는 숙제이다.

건물터는 7개가 발견되었는데, 이중 1호 건물터가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 있다. 여기서는 온
돌유구 2기와 주춧돌, 글씨가 새겨진 토기, 철제 투구 등이 나와 높은 사람이 머물던 곳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3호 건물터 밑에서는 'ㅡ'자형 온돌유구 2기가 나왔는데, 층위(層位)로 보
아 건물터보다 먼저 조성되었음이 밝혀졌으며, 이를 통해 4보루 내부 구조물이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보루를 먼저 쌓고 나중에 온돌과 내부 시설을 지었던 것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4보루 1호 건물터

▲  한강을 향해 약간 튀어나온 4보루 동쪽 치

▲  4보루 내부 (북쪽 방향)

▲  4보루 내부 (남쪽 방향)

▲  4보루 저수시설
4보루에는 2개의 저수시설이 나왔다. 이들은 암반 흙을 파내고 바닥과 벽에
뻘을 발라 방수처리를 한 것으로 이들의 규모는 '430x300x깊이230cm',
'670x610x깊이 350cm'이다.

▲  4보루 1호 건물터 앞에서 바라본 한강과 강동구, 하남시 지역

4보루는 아차산 능선 높은 곳에 둥지를 틀고 있어 북쪽을 제외하고 조망이 제법 일품이다. 서
울 광진구와 성동구, 송파구, 강동구, 경기도 하남시, 구리시, 남양주시 지역이 속시원히 시
야에 들어오며 해돋이와 일몰을 모두 맞이할 수 있어 새해 해돋이 수요가 많다. 게다가 아차
산과 용마/망우산을 이어주는 매우 중요한 위치라 아차산 능선의 목구멍과 같은 곳이다.


▲  4보루 동북쪽 치
치 너머로 한강과 구리, 하남 지역이 바라보인다.

▲  4보루 동북쪽 치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①
한강과 구리암사대교, 강동구, 하남시 지역

▲  4보루 동북쪽 치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② 강동구, 송파구 지역

▲  4보루 동북쪽 치

▲  4보루 북쪽 치


▲  4보루 북쪽 치

* 아차산4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4동,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52-2


 

♠  아차산 산줄기 중간에 자리한 용마산(龍馬山)

▲  아차산에서 바라본 용마산

아차산4보루에서 북쪽 능선길을 10여 분 정도 가면 능선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서쪽은 용
마산, 북쪽은 망우산으로 이어지는데, 우리는 용마산 정상을 찍고 망우산으로 가기로 했다.

아차산과 망우산 사이에 자리한 용마산(348m)은 아차산의 일원으로 용마봉(龍馬峰), 장군봉(
將軍峯)이라 불리기도 한다. 봉우리가 커서 대봉(大峰)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으며, 아차산에
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봉우리로 아차산보다 50m 이상 키가 크다.
광진구와 중랑구(中浪區)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울 동부와 구리 지역을 훤히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일찌감치 고구려와 신라가 능선에 보루를 주렁주렁 달아놓았다. 지금까
지 발견된 보루는 7개로 1,2,4,5보루는 고구려, 3,6,7보루는 신라(新羅)가 세운 것으로 여겨
진다. 또한 아차산에서 시작된 아차산장성이 용마산을 거쳐 망우산까지 이어지는데, 군데군데
장성의 흔적이 아련히 남아있다.

용마산에는 아기와 용마의 짧막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데, 삼국시대에는 장사급 아이가 태어
나면 이유 불문하고 그 가족을 역적으로 죽이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그 시절
이곳에서 장사급 아기가 태어났는데, 집안 몰살을 두려워한 부모가 아기를 죽였다. 그러자 용
마봉에서 아기가 타고 다닐 용마(龍馬)가 나타나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하며 (또는 죽었다고도
함) 그 연유로 용마산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
나 전설이며, 다른 곳에서도 이와 비슷한 전설이 여럿 전해오고 있어 아마도 무인(武人)을 차
별하던 고려 중기나 조선시대에 빚어진 전설이 아닐까 싶다.
또한 용마산과 아차산 서쪽 자락에는 왕실에서 운영하던 살곶이말목장이 있었는데, 용마급 말
이 많이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또는 용마가 나왔다고 해서) 용마산이라 했다는 이야기
도 덧붙여 전해온다. 그러니 후자가 맞을 듯 싶다.

* 용마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중랑구 면목4동/면목7동


▲  헬기장이 되버린 용마산4보루 - 사적 455호

용마산 능선 갈림길에서 용마산 정상으로 가다보면 중간에 헬기장이 있다. 바로 이곳에 고구
려가 심어놓은 조그만 점, 4보루가 있었다.
용마산4보루는 성벽 둘레 약 228m로 동쪽 무덤 주변에서 회흑색(灰黑色) 연질토기와 대형 항
아리 조각, 대상파수편이, 북서쪽에서는 철제 화살촉 1개가 발견되었다. 동쪽 능선에 보루를
이루던 석축터가 일부 남아있고, 동쪽과 서쪽의 중간 지점인 저지대는 집수시설로 여겨진다.
1994년 구리문화원에서 조사했을 때는 동쪽과 서쪽을 별개 보루로 여겼으나, 2003년 서울시에
서 다시금 조사한 결과 하나의 보루로 확인되었다. 아직 전체적인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으
며, 하루 속히 주변을 싹 뒤집어 이곳에 숨겨진 구수한 옛날 이야기 보따리를 꺼냈으면 좋겠
다.


▲  용마산4보루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아차산(왼쪽 산)과 용마산 사이 움푹 들어간 골짜기는 긴고랑이다.
그 너머로 광진, 성동, 송파, 강남 지역이 훤히 시야에 잡힌다.

▲  시내를 향하고 있는 용마산 조망대

용마산4보루를 지나 가파른 길을 오르면 용마산 정상이다. 정상에서 남서쪽 길로 내려가면 서
울을 향해 고개를 쳐든 조망대가 있으니 꼭 가보기 바란다. 그곳의 조망 맛이 아주 일품이기
때문이다.
그 조망대는 정면이 확 트인 곳에 자리해 있어 마치 하늘에서 천하를 굽어보는 기분인데, 산
으로 막힌 동쪽을 제외하고 북쪽, 서쪽, 남서쪽이 훤히 시야에 들어오며, 눈 밑으로 천하 최
대의 대도시로 콧대로 높은 서울 시내가 납작하게 바라보인다. 여기서는 광진구와 성동, 중랑
, 동대문, 성북, 도봉, 중구, 송파, 강남, 서초, 동작, 용산구 지역과 남산, 도봉산, 북한산(
삼각산), 북악산(백악산), 관악산, 대모산, 남한산, 한강 등이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오며, 특
히 야경(夜景) 맛이 좋다.


▲  용마산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용마산 서남쪽 산줄기와 긴고랑을 비롯해 광진구, 송파구, 강남구,
관악산 등이 바라보인다.

▲  용마산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광진구, 중랑구, 동대문구, 강남구, 한강, 중랑천 등이 바라보인다.

▲  용마산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중랑구, 동대문구, 성북구, 도봉구, 북한산, 도봉산 등이 바라보인다.

▲  밋밋하게 솟은 용마산 돌탑 (아차산~망우산 주능선)
아차/용마산을 꾸미면서 새로 심은 돌탑으로 딱히 의미는 없다.

▲  용마산 돌탑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아차산 동쪽 자락과 구리암사대교, 한강, 하남시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용마산 조망대에서 다시 아차산~망우산 능선길로 나와서 북쪽으로 향했다. 헬기장을 지나 부
드럽게 이어진 능선길을 고집하면 돌탑 하나가 넉넉한 모습으로 마중을 하고, 그를 지나치면
얼마 안가 헬기장이 나오는데, 그곳에도 고구려가 뿌린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용마산5보루
이다.


▲  남쪽에서 바라본 용마산5보루 - 사적 455호

용마산5보루는 아차~망우산 주능선 해발 316m 고지에 자리해 있다. 동,서가 뻥 뚫려있는 곳으
로 서쪽으로 중랑천과 서울 동부 지역이, 동쪽으로는 한강과 구리 지역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
하나는 끝내준다. 그러니 고구려가 이곳에 보루를 세워 아차~용마~망우산 주변을 지켰던 것이
다.
성벽 둘레는 약 132m. 내부 면적은 약 936㎡ 정도의 조그만 보루로 보루 북동쪽 비탈면에 성
벽으로 여겨지는 석축 일부가 약간 드러나 있을 뿐, 흔적은 희미하다. 보루 북쪽에서 고구려
토기인 몸통긴항아리(회흑색 연질토기)가 깨진 채로 출토되었고, 물미로 추정되는 철제품도
발견되어 고구려 보루임이 분명해졌다. 석축과 상층부에 보루 건물터가 있을 것으로 여겨지나
이미 헬기장이 들어앉으면서 상당수가 파괴되었다.
1994년 구리문화원에서 조사하여 고구려 보루임을 확인했고, 2000년 서울대박물관에서 조사했
으며, 2003년 서울시에서 측량 조사를 하였다. 허나 이곳 역시 완전한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
은 상태라 언젠가 이 일대를 싹 뒤집고 조사를 해야 될 것이다.


▲  헬기장에 짓눌린 보루의 현실 - 용마산5보루
산 밑을 바라보며 위엄을 부렸던 보루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H'마크가 새겨진
헬기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정말 세월무상 그 자체로다.

▲  용마산5보루에서 바라본 서울 중랑구와 광진구, 동대문구 지역

▲  용마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동쪽 천하
구리시 아천동과 구리암사대교, 한강, 강동구, 하남시 지역


 

♠  아차산 산줄기 북쪽에 자리한 망우산(忘憂山)

▲  용마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망우산

용마산5보루를 지나면 내리막길이 하염없이 펼쳐진다. 나무로 다져진 나무데크길이 잘 닦여져
있어 통행은 그리 어렵지는 않으나 경사가 좀 각박하고 계단이 많아서 이곳으로 오를 경우 숨
이 제대로 찰 것이다.
그 산길을 쑥 내려가면 용마산 북쪽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면목동 사
가정공원, 동쪽으로 내려가면 구리시 아치울마을과 시루봉, 북쪽 산길을 오르면 망우산이다.
우리는 망우산을 조금 둘러보고 사가정공원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망우산은 해발 281m로 아차산 산줄기의 북쪽을 이루고 있다. 아차산의 엄연한 일원으로 위치
상 망우산으로 불리고 있으며, 북쪽은 망우리고개까지 이어진다. 서울 시민들의 사후 안식처
로 그 유명한 망우리시립묘지(망우리 공동묘지)를 품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현재는 묘지란
이름 대신 망우리공원으로 세탁되었다.

망우산에는 고구려가 심어놓은 보루 유적이 3곳 발견되었다. 허나 1보루만 간신히 흔적만 남
아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중환자 상태이다. 하여 1보루만 아차산보루군의 일원으로 사적 455
호의 지위를 부여했다. 다행히 그곳은 용마산 북쪽 갈림길에서 10분 정도 가면 된다.


▲  망우산 산길 (1보루 방면)

망우산에는 망우리시립묘지가 넓게 누워있다. 이곳이 졸지에 서울 시민들의 사후(死後) 공간
이 된 것은 왜정(倭政) 시절로 이태원(梨泰院)에 있던 공동묘지를 서울 시가지 확장을 위해
1933년 이곳으로 모두 옮겼다.
공동묘지를 옮긴 것까지는 그러려니 하겠는데, 심술 고약한 왜정이 굳이 망우산을 고른 이유
가 있었다. 바로 인근에 자리한 조선 최대의 왕릉(王陵) 밀집 구역 동구릉(東九陵)을 엿먹이
기 위함이었다. 동9릉은 망우산 동북쪽에 자리해 있는데, 동9릉과 한줄기로 이어진 망우산에
공동묘지를 써서 동9릉의 기를 누르려고 했다. 이는 왜정이 산마다 천박하게 말뚝을 박으며,
이 땅을 모욕한 것과 같은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무덤이 많이 조성되어 최대 3만 기 넘게 들어찼으나 이후 이장을 장려하면서
지금은 절반 이하로 크게 줄었다. 특히 이곳에는 독립운동가와 문학가, 정치인들도 적지 않
게 신세를 지고 있는데, 만해 한용운(韓龍雲)과 오세창(吳世昌), 안창호(安昌浩), 종두법으
로 유명한 지석영(池錫永)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사람이 꽤 있다. 안창호 선생 등 일부는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아직도 많은 20세기 초~중반 역사 인물들이 묻혀 있어 그들 무
덤을 찾아다니며 숨바꼭질을 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립묘지를 1바퀴 돌던 5.2km의 순환도로는 손질하여 1998년 5월에 '사색의 길'이란 그럴싸한
간판을 달았는데, 숲이 짙고 기운이 맑아 산책 명소로도 아주 좋으며, 늦가을 풍경이 특히 아
름답다. 단풍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사색의 길은 완전 동화 속의 풍경, 선경(仙境) 그 자체이
다.


▲  망우산1보루 - 사적 455호

망우산1보루는 망우산 남쪽 끝 봉우리(해발 280.3m)에 자리해 있다. 1994년 지표 조사에서 고
구려 토기편이 여럿 나와 고구려 보루로 여겨지며, 보루로 밝혀지기 훨씬 이전부터 헬기장과
군부대 시설, 묘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철저히 고통을 받았다. 그러다가 근래에 헬기장과 참호
를 없애고 보루가 있던 자리를 싹 정리하여 보루터 티를 조금이나마 내게 했다.
안내문이 없다면 그냥 지나쳐도 용서가 될 정도로 보루터 흔적은 딱히 없으며, 여기서 더 북
쪽으로 향하면 2보루와 3보루가 나온다. 허나 이들은 매우 심각한 상태라 문화재청에서도 현
재 손을 놓은 상태이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모두 갈아 엎어야 된다. 그래야 망우산 보루에 대한 진실이 나오기 때문이다.

* 망우산1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3,8동


▲  망우산1보루 옆구리를 지나는 탐방로
보루 보존을 위해 보루 아랫쪽과 윗쪽 옆구리에 탐방로를 냈다.

▲  망우산1보루에 둥지를 튼 조그만 무덤
후손들의 손길이 그쳤는지 무덤이 잡초에 완전 뒤덮여 주변과 동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나마 묘비와 상석(床石)이 있으니 망정이지 그들도
없었다면 이 무덤은 자연 속에 완전히 잊혀졌을 지도 모른다.


망우산1보루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8시가 되었다. 저녁 시장기가 한참 피어오를 시간이
된 것이다. 아차산역에서 시작된 아차산 답사로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치고 배도 고프다. 게
다가 햇님의 퇴근 시간 임박으로 여기서 곱게 길을 접고 용마산 북쪽 갈림길로 돌아왔다.

속세로 내려갈 때는 사가정공원으로 길을 잡았다. 중간에 용마제일약수터가 있는데, 아직은
적합 수준이라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 모금 마시며 갈증을 털어낸다. 산에서 약수터나
샘터만큼 반가운 존재가 없다.


▲  용마제일약수터

▲  사가정공원으로 내려가는 계곡길

용마제일약수터에서 계곡길을 따라 10분 정도 내려가면 망우산 서남쪽에 자리를 닦은 사가정
공원에 이른다. 공원을 지나면 시내의 모습이 더욱 짙게 다가오고 공원 입구인 용마한신아파
트 교차로에서 아차~용마~망우산 나들이의 끝을 맺었다.
이렇게 하여 고구려의 역사가 배인 현장, 아차~용마~망우산 가을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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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12월 2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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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산 눈꽃 나들이 [선녀폭포, 대원사, 수왕사, 전북도립미술관]



' 모악산 연말 나들이 (대원사, 수왕사) '


▲  모악산 대원사

 


 

겨울 제국(帝國)의 나날이 강성해가던 연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전북 한복판에 자리한 모
악산을 찾았다.
이번 해가 새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지 정말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묵은 해가 되어 다시
금 새로운 해를 맞이해야 된다. 그래서 묵은 해를 정리할 겸, 올해 마지막 답사지를 물색
하다가 모악산 대원사가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쿨하게 길을 잡았다.

아침 일찍 차디찬 새벽 공기를 가르며 서초동 남부터미널로 이동하여 전주로 가는 직행버
스를 나를 담았다. 버스도 추위가 싫었는지 남쪽을 향해 질주하여 2시간 20분만에 전주시
외터미널에 도착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말이 있듯이 미리 점심을 먹고 움직이고자
전주(全州)에 올 때마다 거의 꼭 들리는 단골 콩나물국밥집(전주한옥마을 부근)에서 전주
의 명물인 콩나물국밥으로 뜨끈하게 배를 채웠다. 거기에 디저트로 주는 커피까지 섭취하
니 식곤증이 밀려와 나를 희롱한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나오니 하늘이 순간 시샘을 벌인 듯,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비의 양
은 다행히 적었지만 나들이에서 비가 오면 이것만큼 열받는 것도 없다. 어쨌든 비의 방해
공작을 원망하며 전주시내버스 970번(송천동↔전북도립미술관)을 타고 모악산으로 이동했
다.
모악산관광단지(전북도립미술관 종점)에 이르니 귀찮게 하던 비도 다행히 그쳤으나, 하늘
이 일그러진 인상으로 세상을 굽어보고 있어 언제 비나 눈이 투하될지 모를 상황이었다.

  모악산 표석의 위엄


 

♠  모악산(母岳山) 입문

▲  모악산 대원사계곡(시앙골, 물레방아골) 하류

전북 한복판에 장엄하게 누워있는 모악산(794m)은 전주와 완주(完州), 김제(金堤)에 걸쳐있는
산으로 호남평야와 전북 내륙 산간지대의 경계 역할을 하고 있다. 1971년 모악산 일대 42.44
㎢가 모악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정상 밑에 있는 '쉰길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
니의 모습이라 하여 '엄뫼'라 불렸는데, 그걸 한자로 표현하여 어머니의 산이란 뜻의 모악산
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신라 후기에는 '금뫼','금산'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모악산의 원래
이름으로 보는 설도 있다.

신라 후기부터 세상을 구할 미륵(彌勒)의 출현을 열망하던 미륵신앙(彌勒信仰)의 성지(聖地)
인 금산사(金山寺)를 비롯해 귀신사(歸信寺), 대원사, 심원암 등 굵직한 오래된 절이 안겨져
있으며, 왕년에는 80여 개의 절과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새로운 종교들이 모악산을 기
반으로 여럿 생겨났는데, 증산교(甑山敎)가 그 대표적이다.
모악산은 봄 풍경이 아름다운데, 특히 금산사 입구 벚꽃길이 매우 유명하다. 하여 변산반도(
邊山半島)의 여름 풍경, 내장산(內藏山)의 가을단풍, 백양사(白羊寺)의 설경과 함께 호남4경
의 하나로 격하게 찬양을 받는다.

모악산 산행은 김제 금산사나 전주 중인동, 완주 모악산관광단지에서 시작하면 편하며, 산에
안긴 명소로는 금산사와 귀신사, 대원사, 심원암, 수왕사 등의 오래된 절과 전북도립미술관,
금산사 벚꽃길, 명당(明堂)으로 소문났으나 이곳에 묘를 쓰면 가뭄이 든다고 전하는 장군봉,
선녀폭포, 전주김씨 시조묘 등이 있다.


▲  전주김씨 세덕비(世德碑)와 전주김씨 종중공덕비(오른쪽 비석)

모악산 동쪽 자락 원기리에는 '모악산관광단지'가 넓게 터를 닦았다. 모악산을 든든한 후광(
後光)으로 삼은 이곳은 다른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토속 음식을 내세운 식당과 가게(편의점),
까페, 등산용품점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관광단지 남쪽에는 전라북도에서 2004년 10월
에 세운 전북도립미술관이 자리하여 전북 지역 현대 미술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허나 미술관은 애당초 계획이 없었기에 쿨하게 통과했다. 나의 미련한 머릿속에는 오로지 모
악산과 대원사 뿐이었기 때문이다. 혹여 대원사를 보고 나올 때 시간이 남으면 들릴까도 했으
나 역시 인연이 닿지 않았다.

평일이라 썰렁한 관광단지를 지나면 눈에 뒤덮힌 모악산의 설경이 나타나면서 전주김씨 세덕
비와 종중공덕비가 슬쩍 모습을 내민다.
여기서 가까운 산자락에 전주김씨 시조인 김태서(金台瑞)의 무덤이 있다. 그래서 이곳에 이들
비석을 주렁주렁 닦아놓은 것인데, 김태서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4째 아들인 김은열(金殷
說)의 후손으로 그의 터전인 경주가 몽골의 침략으로 고통을 받자 1254년에 가솔을 이끌고 전
주로 넘어와 정착했다. 이후 그는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고, 그를 시조로 한 전주김씨가 생
겨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남북분단의 원흉으로 북한이란 괴뢰 정부를 세운 김일성이 그의 후손이라는 점
이다. 1993년 손석우란 사람이 '터'란 책을 냈는데, 김일성이 시조 무덤의 지기(地氣)를 받아
북한을 세워 집권했으며, 음력 1994년 9월에 죽을 거라는 내용을 다루었다. 비록 달은 틀리지
만 1994년 7월 김일성이 갑자기 골로 가면서 그 책과 전주김씨 시조묘는 잠시 세상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전주김씨 시조묘는 대원사로 올라가는 길목 부근에 자리해 있어 잠시 들릴까 했으나 눈의 방
해가 심해 올라가지는 못했다. 어차피 계획에도 없던 곳이다.


▲  선녀폭포(仙女瀑布)와 폭포를 품은 사랑바위

전주김씨 세덕비에서 대원사계곡(시앙골)을 옆에 끼고 산길을 오르다보면 선녀폭포와 사랑바
위가 모습을 비춘다.
선녀폭포는 높이 5m도 안되는 조그만 폭포로 볼품은 떨어지나 무려 선녀란 이름까지 지닌 것
을 보면 옛 사람들의 마음을 많이도 앗아간 모양이다. 이런 폭포에는 꼭 옛 사람들이 심심풀
이로 지어놓은 전설이 있는 법, 그 믿거나 말거나 전설은 다음과 같다.

아주 먼 옛날, 보름달이 뜨면 하늘나라 선녀들이 선녀폭포로 내려와 목욕을 했다. 다른 유사
전설에서는 그냥 목욕만 하고 돌아갔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목욕 외에 수왕사에 들려 약수도
마시고 모악산 신선과도 어울려 놀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뭇꾼이 우연히 폭포 옆을 지나다 목욕 중인 선녀를 발견했고 그들의 아름
다운 자태에 미치도록 넋이 나간 그는 결국 상사병 비슷한 병을 얻어 몸저 눕게 되었다.

병으로 힘들어하던 나뭇꾼은 기왕 이 지경이 된 거 선녀의 모습을 1번만 더 보고 죽자며 보름
달이 뜬 날 폭포를 찾아와 그들을 훔쳐봤다. 그러다가 뜻밖에 한 선녀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
는데, 그 선녀도 나뭇꾼이 좋았는지 둘만 살짝 대원사 백자골 숲으로 자리를 옮겨 사랑을 속
삭이며 예민한(?) 일을 벌이려는 찰라, 갑자기 뇌성병력이 그들을 내리치면서 선녀와 나뭇꾼
은 돌이 되고 말았다.
하늘의 시샘에 돌이 된 그들의 모습이 마치 떨어질 줄 모르고 사랑을 속삭이는 듯 하다 하여
사랑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여기서 치성을 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산길에
서 보면 폭포의 모습이 그리 실감나진 않으나, 바로 앞에서 보면 조금은 그럴싸하게 보인다.


▲  대원사계곡(시앙골)을 따라 이어진 모악산 산길

▲  겨울에 잠긴 모악산 산길
겨울 제국에게 모든 것을 털린 나무들은 숨죽이며 봄을 잉태하고 있다.

▲  속세를 향해 흘러가는 대원사계곡(시앙골)
소쩍새가 울 때면 겨울에 묻힌 계곡도 얼음을 박차고 일어날 것이다.


모악산관광단지에서 20분 정도 야트막한 산길을 오르면 대원사가 반갑게 모습을 비춘다. 시앙
골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오른쪽에 경내로 인도하는 계단이 놓여져 있고, 그 길을 오르면
비로소 대원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  대원사 직전에 걸린 크리스마스 축하 현수막

▲  대원사 경내로 인도하는 시앙골다리와 계단길


 

♠  모악산 동쪽 자락에 안긴 고즈넉한 산사
대원사(大院寺)

모악산 동쪽 자락에는 고색과 숲내음이 깃든 대원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겨울 제국이
내린 두터운 눈을 뒤집어쓰며 겨울 산사의 고적함을 진하게 우려내고 있는데, 종종 나타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와 추녀 밑에 달린 풍경(바람방울)이 들려주는 그윽한 풍경소리가 고요
한 경내를 살짝 어루만진다.

대원사는 670년에 보덕(普德)의 제자인 일승(一乘), 심정(心正), 대원(大原)이 창건했다고 전
한다. 보덕은 고구려 승려로 열반종(涅槃宗)의 개산조(開山祖)인데, 고구려의 대막리지(大莫
離支)인 연개소문(淵蓋蘇文, ?~666)이 당나라에서 도교(道敎)를 받아들이자 이를 개탄하며 백
제로 넘어갔다. 이때 신통력으로 완주 고덕산(高德山)으로 날라와 경복사(景福寺)를 세웠다고
하며, 절을 세운지 얼마 안가서 고구려가 망했다.

보덕의 제자인 일승, 심정, 대원은 경복사가 보이는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워 대원사(大原寺)
라 했다고 전한다. 보덕의 설화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나와있지만 대원사 창건까지는 나
와있지 않아 670년 창건설(또는 660년)에 썩 신뢰는 가지 않는다. 게다가 창건 시기를 입증해
줄 신라 후기 유물과 유적은 전혀 없으며, 1066년에 원명국사(圓明國師)가 중창했다는 이야기
가 있어 이때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374년 나옹(懶翁)이 중창을 했다고 하며, 1415년에 다시 중창을 벌였다. 그러다가 1597년 정
유재란으로 말끔히 파괴되자 1606년 부처로 추앙받는 진묵(震默)이 다시 일으켜 세웠고, 1733
년 동명 천조(東明 千照)가 중창을, 1886년에는 금강산 건봉사(乾鳳寺) 승려인 금곡(錦谷)과
인오 등이 중창했다. 금곡은 함수산(咸水山) 거사와 함께 대웅전과 명부전을 중건했으며, 내
원암(內院庵)에 있던 염불당을 가져왔다.

1950년 6.25전쟁으로 대부분이 파괴된 것을 덕운이 1959년부터 불사를 일으켜 하나씩 건물을
일으켜 세웠다. 1993년 칠성각을 부시고 요사채를 지었으며, 삼성각을 다시 지었다. 그리고
2001년 이후 명부전과 대웅전 수미단을 손질해 지금에 이른다.

예전에는 비록 음은 같지만 가운데 한자만 살짝 다른 대원사(大圓寺)였으나 근래 지금의 한자
로 갈렸으며, 대웅전과 삼성각, 명부전, 나한전, 범종각, 요사 등 약 10동 정도의 건물이 조
촐한 경내를 메우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삼세불좌상과 용각부도가 있고, 1606년에 조성
된 목각사자상(전북 지방민속문화재 9호)도 있었으나 1988년에 도난을 당했다. 그러다가 1999
년에 서울 가회동(嘉會洞)의 어느 화랑에서 발견되었으나 공소시효를 주장하며 돌려주지 않았
으며, 서울 인사동에 어느 작자에게 넘어가면서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1999년에
지방문화재에서 정리되었음) 그 밖에 오래된 5층석탑 2기와 승탑(부도) 6기가 절의 숙성된 내
력을 알려준다.

이곳은 천하대복지(天下大福地)의 최길상(最吉祥)으로 치는 명당으로 효의 절, 어머니 절, 발
원을 이루는 기도처로 꼽히며, 특히 증산교를 세운 증산 강일순(甑山 姜一淳, 1871~1909)이
도를 깨우친 현장이기도 하다.
매년 1월 1일에는 '촛불기원 해맞이 타종제' 행사가, 4월에는 '모악산 진달래 화전축제'를 열
어 속세에 큰 호응을 받고 있는데, 화전축제는 이곳의 백미(白眉)로 꼽힌다.

▲  매점과 찻집으로 쓰이는 소화당(笑話堂)

▲  소화당 현판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소화당이란 조그만 목조집이 마중한다. 이 건물은 불교용품과 기
념품, 커피, 전통차를 파는 매점으로 커피는 무려 3,000원대를 받는다. 건물 옆에는 잠시 쉬
어갈 수 있도록 파라솔이 달린 탁자와 의자가 놓여져 있고, 건물 정면에는 소화당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는데, 마치 미소를 머금고 있는 듯한 상큼한 모습이다.


▲  겨울 산사의 내음을 진하게 보여주는 대원사 경내

▲  대원사 아랫쪽 5층석탑

소화당을 지나면 바로 대웅전 뜨락이다. 정면에는 대웅전이 마주보고 있고, 오른쪽에는 요사
와 모악당, 샘터, 왼쪽에는 5층석탑과 범종각, 명부전 등이 뜨락을 둘러싸고 있다.
바로 왼쪽에 보이는 5층석탑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20세기 중반 이후에 손질하면서 4
사자5층석탑으로 성형되었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내음이 다소 떨어진다. 그 뒷쪽에는 범종(梵
鍾)의 보금자리인 범종각이 있다.


▲  대원사 대웅전(大雄殿)

동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은 대원사의 중심 건물(법당)로 석축 위에 높이 자리해 있다. 정면
과 측면이 각각 3칸인 주심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법당치고는 매우 작은 덩치인데 1886년에 지
어졌으나 6.25때 불탄 것을 1959년 이후에 다시 지었다.
불단(佛壇)에는 목조3세불좌상과 삼신후불탱 등이 있으며, 지금은 없지만 괴목(槐木)으로 만
든 목각사자상이 있었다. 이 사자상은 진묵대사가 축생(畜生)들을 천상(天上)으로 천도하고자
만든 것이라 하며 그 위에 북을 올려놓고 쳤다고 한다. 허나 1988년 불의의 도난을 당했고 다
행히 1999년에 서울 가회동에서 발견되었으나 소유자인 이영옥이 이현수란 사람에게 팔아먹는
등 우여곡절이 심해 아직까지 제자리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  대원사 목조삼세불좌상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215호

대웅전 불단에는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목조3세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얼굴부터 밑도
리까지 하나 같이 두텁게 생긴 이들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로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약
사불(藥師佛)을 거느린 3세불(三世佛)로 17세기에 조성된 것이다.
석가여래와 약사불, 아미타불로 이루어진 3세불은 조선 중/후기에 많이 나타나는 불상 형태로
중앙에 자리한 석가여래는 중심 불상답게 키가 제일 크며(130cm), 좌우 불상은 116cm 정도이
다. 앞으로 조금 내민 얼굴은 다소 경직되고 딱딱한 표정으로 볼살이 많고 이마가 넓으며, 꼽
슬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수인(手印)만 서로 다를 뿐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의 비슷한 모습이며, 윗도리가 아랫도리보다
다소 살이 찐 모습으로 17세기 호남에서 활동하던 조각승들의 조각 스타일이 잘 반영되어 있
다. 그들 뒤에는 화려한 색채의 삼신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  대원사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우측에는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된 명부전이 대웅전을 바라보
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1887년에 금곡이 지었으며, 2001년
에 중수했다.


▲  조선 후기에 조성된 명부전 지장보살상
그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그를 보좌한다.

▲  명부전 10왕(시왕)과 판관(判官), 금강역사상

▲  명부전 윗쪽에 자리한 적묵당(寂默堂)

▲  종무소로 쓰이는 모악당(母岳堂)

▲  모악당 뒷쪽에 자리한 나한전(羅漢殿)

▲  나한전에 봉안된 석가여래와 거울 광배

나한전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羅漢)의 거처이다. 석가
여래의 광배(光背)가 매우 특이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광배 테두리는 검은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광배 중앙에 거울까지 달려있어 잠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아마도 그런 의
도로 거울을 갖추었을 것이다.

  나한전 석가후불탱(19세기 작)과
색채감이 돋보이는 16나한상

  모악당 옆에 자리한 샘터


  경내 윗쪽에 자리한 5층석탑

경내 뒷쪽 언덕에는 고색이 느껴지는 5층석탑이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대원사는 특이하게 오
층석탑이 2기나 있는데, 법당 앞이 아닌 다들 구석에 자리해 있다. 아마도 비보풍수(裨補風水
)의 일환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이 탑은 2중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석축을 기반 삼아, 네모난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2
중의 기단(基壇)과 5층의 탑신(塔身), 얇은 머리장식을 차례대로 얹혔는데, 탑신 지붕돌이 다
소 헝클어지고, 머리 장식 상당수가 사라진 것 외에는 그런데로 상태는 괜찮다.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용각부도 다음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대원사 아랫 승탑군(僧塔群)

5층석탑에서 경내 뒷쪽을 거쳐 북서쪽 산길을 조금 오르면 녹색 철책에 둘러싸인 승탑군(부도
군)을 만나게 된다.
승탑<부도(浮屠)>이란 승려의 사리를 머금은 탑으로 대원사에는 9기(또는 10기)의 오래된 승
탑이 전하고 있는데, 용각부도 1기만 제외하고 모두 조선 중/후기 것이다. 이중 대웅전 남쪽
밑에 있던 승탑 3기(또는 4기)는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진 상태이고, 경내 윗쪽에 2개 그룹으
로 4기와 2기 등 총 6기만 전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대원사는 잃어버린 것이 참 많다. 절의
초창기 역사도 그렇고, 목각사자상, 거기에 승탑까지 말이다.

  대원사 용각부도(龍刻浮屠)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71호

대원사 승탑 중의 아주 유별나게 눈에 띄는 존재가 있다. 바로 검은 피부로 이루어진 용각부
도(용각승탑)이다.
높이 187cm의 이 승탑은 이름 그대로 용이 새겨진 것으로 옥개석 아랫부분에는 대모양의 무늬
위에 겹잎으로 된 18개의 연꽃무늬가 있으며, 그 위에 구름무늬를 새기고 가운데 부분에 여의
주(如意珠)를 두고 다투는 2마리 용을 진하게 새겨놓았다. 승탑의 피부가 완전 흑백이라 실감
이 덜해서 그렇지 만약에 칼라였다면 진짜 용도 시샘을 했을 것이다. 용의 비늘과 피부, 구름
무늬 등이 아주 실감나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탑은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용무늬까지 새겨진 것으로 보아 어느 고승의 승
탑으로 여겨진다. 그 고승의 덕과 업적이 대단했던지 제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저 탑을 조성해
스승의 넋을 기렸던 모양이다.

장대한 세월을 거치면서 반질반질했던 피부는 검은 피부로 대부분 타버렸고, 군데군데 주근깨
같은 것도 달려있지만 이들은 세월이 달아준 훈장으로 보면 될 것 같다. 머리 장식과 기단부
가 조금 깨진 것을 보면 대부분 잘 남아있는데, 머리 장식은 다른 데서 가져왔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대원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자 제일 가는 꿀단지로 이렇게 화려한 용 문양을 지닌
승탑은 처음 본다. 그러다보니 지닌 다른 승탑은 거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용각부도 주변에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승탑 3기가 있다. 매력 만점의 용각부도에 단단히 묻
힌 탓에 그리 주목은 못받고 있지만 조선시대에 흔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스타일의 탑으
로 용각부도와 긴 시간을 뛰어넘으며 나란히 자리한 모습이 마치, 부모와 자식들 같다. 그 옆
에는 마치 버섯이나 양봉통처럼 생긴 조그만 승탑이 있어 귀엽기 그지 없는데, 이들 탑의 주
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전해오는 것이 없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대원사 윗 승탑군

아랫 승탑군에서 윗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녹색 철책에 둘러싸인 윗 승탑군이 나온다. 이곳에
는 2기의 승탑이 있는데, 검은 때가 자욱한 왼쪽 탑은 기단부와 바닥돌을 갖추고 있고, 하얀
피부가 역력한 오른쪽 탑은 바닥돌 위에 바로 탑을 올렸다. 이들은 조선 중/후기에 조성된 것
으로 탑의 주인에 대해서는 전하는 것이 없다.
이들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해 있어 여기서 더 이상 올라갈 공간이 없다.
주변은 대원사 소유의 숲이며 공식 탐방로도 없기 때문이다. (비법정 탐방로만 있음)


  아랫 승탑군에서 바라본 대원사의 뒷모습

  모악산 산길과 이어진 대원사 남쪽 문

  대원사 돌담을 따라 이어진 모악산 산길

승탑을 끝으로 대원사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원래는 대원사만 보고 전주로 쿨하게 철수하
려고 했으나, 여기서 정상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물맛이 일품이라는 오래된 절, 수왕사가
있다고 하여 시간도 아직 이르고 해서 거기까지 발을 넓혀보기로 했다. 기왕 모악산의 품에
들어섰으니 그 품을 더 파고들어야 아쉬움이 없겠지. 다행히 수왕사까지는 1km 남짓이다. (산
에서 1km는 평지의 1km보다 훨씬 김)
허나 문제는 산에 눈이 많이 쌓여있고 얼음 길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걱정이 좀 되었다. 올라갈 때야 별로 문제는 안되지만 문제는 내
려올 때가 아니던가? (트래킹화를 신고 온 것이 전부임) 허나 이미 내 마음은 수왕사에 올라
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라 거기까지 무작정 올라가기로 했다. 내려갈 때 걱정은 나중이다.

* 대원사 소재지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997 (모악산길 243, ☎ 063-221-8502)


 

♠  모악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고적한 산사
수왕사(水王寺)

  모악산 정상과 수왕사로 인도하는 눈덮힌 산길

대원사에서 수왕사까지는 산길을 20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겨울이 내린 눈과 얼음이 두텁게
깔려있어 올라가고 내려가는 길이 그리 넉넉치가 않은데, 앞만 보고 열심히 오른 끝에 해발
약 560m에 자리한 수왕사입구 쉼터에 이르렀다.
여기서 서쪽으로 난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모악산 정상이고, 남쪽으로 나있는 벼랑길로 가면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고적한 절집, 수왕사가 반갑게 모습을 비춘다.


  수왕사입구 쉼터

  수왕사입구 쉼터에서 수왕사로 인도하는 벼랑길
안전한 통행을 위해 벼랑길에 철난간을 둘러 절을 찾은 이들을 배려했다.


  소박한 모습의 수왕사 경내

해발 570m 고지에 자리한 수왕사는 모악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절이다. 이곳은 약수가 유
명하여 '물왕이절','무량(無量)이절'이라 불렸는데, 680년에 완주 경천사를 지은 보덕이 수도
장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적이나 관련 역사 기록이 전혀 없어 신빙성은
없으며, 이곳 밑에 대원사가 있어 대원사나 금산사 승려의 참선 장소로 쓰였다가 조선 때 건
물을 심으면서 절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1125년에 원명국사(圓明國師)가 중창했다고 하나 이 역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며, 1597년 정
유재란(丁酉再亂)으로 불탄 것을 1604년 진묵대사가 중건하여 머물렀다. 6.25전쟁이 한참인
1951년 1월 10일, 모악산 일대를 어지럽히던 공비를 토벌하고자 작전상 소실된 것을 1953년에
천석진사(千錫振師)가 다시 세웠다.

이곳은 모악산 정상 북쪽 밑으로 가파른 곳에 간신히 터를 닦은 탓에 절이 매우 단출하다. 법
당과 요사, 진묵조사전이 좁은 경내를 이루고 있으며, 근래에 새로 지어진 탓에 고색의 내음
은 진작에 날라가버렸다. 오래된 유물도 없고, 건물도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여염집 스타일이
라 겉으로 보이는 절집 분위기도 다소 떨어진다. 게다가 첩첩한 산속에 묻혀있다보니 머무는
승려도 거의 없고 절을 찾는 신도나 산꾼도 별로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대원사에 많이 의존
을 한다.
또한 수왕사는 완주 지역 전통민속주로 꼽히는 송화백일주(松花百日酒), 송죽오곡주(松竹五穀
酒)를 생산하는 현장으로 주지승인 벽암(碧岩)이 수왕사 약수로 직접 술을 빚는다. 그는 대한
민국 전통식품 명인 1호로 지정된 전통민속주의 장인이자 수왕사의 자랑으로 술을 멀리하는
절에서 곡차(穀茶)로 빗대 표현되는 술을 직접 만든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수왕사 법당

  법당 내부 (석가3존불과 여러 탱화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수왕사 법당은 금동으로 치장된 석가3존불과 석가후불탱, 신중탱, 용왕탱
이 봉안되어 있다. 절은 작고 초라해도 법당 내부에 봉안된 존재만큼은 다른 절 못지 않은데,
바다와 전혀 관련도 없을 것 같은 이곳에 용왕탱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는 수왕사가 거
의 약수로 지탱하는 절이다보니 물을 관리하는 용왕(龍王)이 담긴 용왕탱을 봉안해 매일 좋은
물이 나오도록 기원하는 것이다.

  법당 신중탱(왼쪽)과 용왕탱(오른쪽)

  수왕사 약수터

수왕사의 든든한 후광인 약수터는 겨울 제국의 심술로 얼음에 완전 봉해진 상태이다. 그래서
이곳의 명물인 약수를 마시지 못했지. 선녀도 와서 마신다는 물인데 이렇게 막혀버렸으니 여
기까지 온 보람이 크게 떨어진다.


  진묵조사전(震默祖師殿)

보통 절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산신각이나 삼성각을 두기 마련이나 이곳은 절
을 중창한 진묵대사를 봉안한 진묵조사전을 그 자리에 두었다. 여기서만큼은 산신이나 칠성,
지장보살보다 진묵대사를 더 크게 여기기 때문이다.
바위 밑 가파른 곳에 간신히 자리를 닦고 진묵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1칸 크기의 집을 두었
는데, 그곳까지 인도하는 돌계단을 법당 옆까지 늘어뜨려놓았다.


  하늘색 두광(頭光)까지 갖춘 진묵대사의 진영

진묵(1562~1633)은 수왕사와 대원사의 중창주이자 석가여래의 소화신(小化身)으로 격하게 추
앙을 받는 고승으로 그의 흥미로운 이적과 일화가 많이 남아있다.
그가 동자승이던 시절, 주지승이 그에게 향불을 피우게 하니 주지승 꿈에 제천(諸天) 등이 나
타나 '부처가 향을 피우니 우리는 받을 수 없소!' 했다는 것, 8만대장경을 모두 암송하고 무
슨 책이든 바로 다 외워버려 따로 스승이 필요 없었다는 것. 해인사에 불이 나자 소나무잎에
물을 묻혀 뿌리니 큰 비가 내려 불이 진화되었다는 것, 동네 사람들이 물고기 매운탕을 먹고
가라며 놀리자 탕이 담긴 가마솥을 번쩍 들어 다 흡입한 다음, 엉덩이를 까서 변을 누니 물고
기가 살아서 나왔다는 설화 등, 술을 흔히 곡차(穀茶)라 부르는데, 이는 그가 술을 즐겨 마시
며 곡차라고 했다는 것, 어머니의 무덤을 '무자식 천년향화지지(無子息 千年香火之地)'란 명
당에 썼다는 것 등 재미나고 신비로운 일화가 전해져 온다.

* 수왕사 소재지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산13 (모악산길 246, ☎ 063-287-0485)


  수왕사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나무들이 있어서 시야는 별로)

수왕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5시가 넘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뒷쪽인 모악산 정상까
지 오르고 싶었으나 시간도 늦고 산길도 가파르며 거기에 눈과 얼음까지 덮여있으니 오를 엄
두가 나지 않는다. 아이젠이라도 있었으면 모르지만 그것도 없다. 이럴 때는 건방 떨지 말고
자존심을 곱게 접고 무조건 내려가는 것이 상책, 안그래도 수왕사까지 눈길을 뚫고 무리하게
올라온 터라 내려가는 것도 걱정인데 자꾸 일을 벌여봐야 좋을 것이 없다.

산길을 기어가듯 조심에 조심을 기하며 내려가 별탈없이 대원사에 도착했다. 여기서 관광단지
까지는 길이 완만하기 때문에 별 어려움은 없다. 처음에는 대원사만 보려고 들어왔는데, 수왕
사까지 보너스로 겯드리면서 모악산에서의 일정이 다소 연장되었다.

전북도립미술관 종점에 이르니 마침 전주시내버스 970번이 바퀴를 접고 쉬고 있어 그것을 타
고 미련없이 전주시내로 나갔다.
이렇게 하여 연말의 모악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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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12월 2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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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강남구 봉은사 2 (사월초파일) 200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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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구

세검정, 대원군별장, 홍지문
옥천암 마애좌상

200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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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종로구

북한산 금선사

200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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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금천구

호암산 호압사

200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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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금천구

호암산 (호압사, 석구상, 한우물, 호암산성) 200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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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종로구

선희궁터, 청와대분수대, 청와대앞길,
경복궁신무문, 인사동

200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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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강남구

대모산 불국사 (사월초파일)

200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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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은평구

북한산 삼천사 (사월초파일)

200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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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이종석 별장

200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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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노원구 수락산 학림사 2009, 8 ☞ 블로그글 보기

16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 2009, 12 ☞ 블로그글 보기

17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 2010, 4 ☞ 블로그글 보기

18

은평구 태화산 수국사 2010, 7 ☞ 블로그글 보기

19

종로구 부암동 뒷골마을, 북악산길, 창의문 2011, 3 ☞ 블로그글 보기

20

관악구

관악산 관음사, 효민공이경직묘역,
사당동백제요지, 구벨기에공사관

2011, 4 ☞ 블로그글 보기

21

성북구

돈암동 흥천사

2011, 5 ☞ 블로그글 보기

22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2011, 5 ☞ 블로그글 보기

23

종로구

가회박물관, 삼청동(북촌), 인사동

2011, 9 ☞ 블로그글 보기

24

성북구

성북동 삼청각, 홍련사, 북악산

2011, 10 ☞ 블로그글 보기
25 도봉구

방학동 은행나무, 원당샘, 안맹담/정의공주묘
목서흠묘역

20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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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 2012, 2 ☞ 블로그글 보기
27

종로구

장의사지당간지주, 세검정, 석파정별당, 홍지문

2012, 2 ☞ 블로그글 보기
28

강서구

구암공원(광주바위), 허가바위, 허준박물관

2012, 3 ☞ 블로그글 보기
29

노원구

불암산 학도암, 이윤탁한글영비

2012, 4 ☞ 블로그글 보기
30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2012, 5 ☞ 블로그글 보기
31

동작구

상도동 사자암

2012, 5 ☞ 블로그글 보기
32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창빈안씨묘역, 호국지장사)

2012, 6 ☞ 블로그글 보기
33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백사골)

2012, 8 ☞ 블로그글 보기
34

성북구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북악산길

2012, 9 ☞ 블로그글 보기
35

성북구

성북동 심우장, 최순우옛집, 선잠단터

2012, 10 ☞ 블로그글 보기
36

종로구

북촌문화센터, 관상감관천대, 계동길, 창덕궁길,
요금문, 고희동가옥, 백흥범가옥, 빨래터

2013, 1 ☞ 블로그글 보기
37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 2013, 4 ☞ 블로그글 보기
38 종로구

석파정별당(석파랑), 부침바위터, 무계정사터,
현진건집터, 청계동천, 반계윤웅렬별장

201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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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종로구

재동백송, 재동초교, 백인제가옥, 북촌3경 일대,
정독도서관(서울교육박물관), 안국동 윤보선가

201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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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강북구

북한산 본원정사

201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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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성북구

정릉동 경국사

201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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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종로구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201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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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도봉구

도봉산 (자운봉, 포대능선, 만월암, 도봉서원,
광륜사)

201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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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201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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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금천구

호암산 (석구상, 호암산성터, 한우물, 불영암,
칼바위)

201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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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종로구

윤동주시인의 언덕(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201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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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종로구
중구

서울연등회 (서울연등축제)
조계사, 우정국로, 청계천, 광통교

201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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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종로구

북한산 승가사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201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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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중구

환구단(원구단), 덕수궁 대한문, 성공회 서울성당,
양이재, 구세군 중앙회관

201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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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서대문구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 201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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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종로구

동대문성곽공원, 이화마을, 낙산(낙산공원) 201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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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성북구

성북동 선잠단터, 최순우옛집, 삼청각 201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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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종로구

인왕산 인왕사, 국사당, 선바위, 해골바위 201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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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종로구

서울연등회(연등축제), 조계사 201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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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성북구

정릉 봉국사 201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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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동작구

국립현충원(창빈안씨묘역, 부안군이석수묘역),
동작충효길(현충원길), 이수폭포

201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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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 (백사실)

201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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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성북구
종로구

북악산 주능선 (숙정문, 촛대바위, 청운대,
백악마루, 창의문)

201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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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종로구

배화여고생활관, 이상범가옥, 백호정, 자수궁터,
송석원터

201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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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종로구

창덕궁 후원뒷길, 흥덕사터, 북묘하마비,
우암 송시열집터

201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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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종로구

북촌(고희동가옥, 기기국번사창, 삼청동길) 201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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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중구
용산구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 남산공원길, 남산 정상
(팔각정), 남산야외식물원

201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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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도봉구

도봉산 천축사, 마당바위, 자운봉, 포대능선

201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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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서대문구

인왕산 개미마을, 환희사, 큰절골

201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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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강동구

암사동 선사유적지

201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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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서대문구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

201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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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종로구

인왕산 수성동계곡

201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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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강북구

북한산 구천폭포(구천계곡),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201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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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은평구

북한산 진관사, 진관사계곡

201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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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성북구

심우장, 수연산방, 최순우옛집

201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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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강남구

대모산, 불국사, 구룡산

201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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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종로구

부암동 무계원, 무계정사터(안평대군 이용집터),
청계동천, 반계 윤웅렬별장

201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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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종로구

한양도성, 행촌동 은행나무, 딜쿠샤, 홍난파가옥
, 월암근린공원

201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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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금천구

호암산 (삼성산성지, 호압사, 호암산 정상)

201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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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서대문구

안산, 무악동봉수대 (안산자락길, 무악정)

201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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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종로구

중앙고등학교(본관, 서관, 동관), 창덕궁 신선원전

201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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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성북구

보문동 보문사 201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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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광진구

홍련봉 보루,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1/5/6보루, 고구려정

201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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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동대문구
노원구

회기동 연화사
월계동 기원사

201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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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성북구

개운산 보타사 201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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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동작구

국립현충원 호국지장사 201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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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 (백사실)

201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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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종로구

삼청공원, 북악산 말바위

201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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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은평구

북한산 삼천사 (삼천사계곡)

201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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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관악구

강감찬생가터, 낙성대(안국사), 난곡로 느티나무,
신림동 굴참나무

201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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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종로구
성북구

한양도성, 낙산공원, 비우당, 자지동천,
삼군부총무당(삼선공원)

201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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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종로구

서촌 박노수가옥(박노수미술관), 옛 윤덕영 집

201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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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종로구
은평구

북한산둘레길 옛성길, 구름정원길, 탕춘대성 암문

201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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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강서구

양천향교, 궁산, 소악루, 양천고성터, 관산성황당

201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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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

201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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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종로구

장면 가옥, 흥덕사터, 북묘 하마비, 송시열집터

201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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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강서구

능말 은행나무/느티나무,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개화산 약사사

201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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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종로구
서대문구

세검정, 석파정 별당(석파랑), 홍지문과 탕춘대성
옥천암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201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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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동대문구

선농단(선농대제), 선농단 향나무,
선농단역사문화관

201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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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성북구

안암동 개운사

201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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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종로구

낙산 청룡사

201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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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강북구

북한산 화계사

201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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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은평구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구름정원길,
경천군 송금비, 백화사, 화의군묘역

201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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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노원구

수락산 벽운동계곡, 염불사, 영원암, 귀임봉

201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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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구로구

궁동저수지생태공원, 정선옹주묘역, 구로올레길,
지양산

201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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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종로구

윤동주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201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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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성북구

북악산 북악하늘길1산책로, 2산책로(김신조루트)

201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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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광진구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5보루

201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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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성북구

성북동 최순우옛집, 수연산방(상허 이태준 가옥)

201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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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종로구
서대문구

박종화가옥, 보현산신각, 홍지문, 산모퉁이까페
옥천암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201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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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종로구

북한산 금선사 (목정굴)

201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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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중랑구

숙선옹주묘역, 봉화산(아차산봉수대터),
봉화산둘레길, 충익공 신경진 묘역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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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노원구

불암산 학도암, 중계본동 느티나무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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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강북구

수유동 분청사기가마터, 신익희묘, 김병로묘,
유림묘, 북한산둘레길 순례길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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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도봉구

무수골, 무수골느티나무, 전주이씨영해군파묘역

201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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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서대문구

봉원사(서울연꽃문화축제)

201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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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노원구

수락산 노원골, 수락산보루, 동막골, 도선사

201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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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종로구

북촌문화센터, 김형태가옥, 이준구가옥,
북촌 가회동 일대

201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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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도봉구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능원사, 도봉사, 윗무수골

201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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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종로구

월암근린공원(한양도성), 홍난파가옥, 딜쿠샤,
행촌동 은행나무, 황학정

201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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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관악구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관악산 사당능선,
선유천국기봉, 관음사국기봉, 관음사

201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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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종로구

청운문학도서관, 청운공원, 인왕산자락길
(이빨바위, 가온다리, 산들수목원약수터)
수성동계곡

201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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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금천구

호압사, 호암산, 석구상, 호암산성터,
한우물, 불영암, 칼바위

201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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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인천 - 4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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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천

야인시대촬영장, 루미나리에축제 20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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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양 북한산성(대서문, 중흥사터, 북한산행궁터) 200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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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양 북한산성(태고사, 산영루터, 북한산성계곡) 200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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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남 망경암, 봉국사 (사월초파일) 200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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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오산
수원

오산 물향기수목원 / 수원 팔달문

20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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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남양주

수락산 흥국사

2008, 3 ☞ 블로그글 보기
7 남양주

덕릉마을 산신각, 덕흥대원군 묘역

2008, 5 ☞ 블로그글 보기

8

파주 용미리 마애2불입상, 용암사 2008, 10 ☞ 블로그글 보기
9

안양

안양사, 석수동마애종, 석수동석실고분 2009, 3 ☞ 블로그글 보기
10

안성

서운산 석남사 (사월초파일)

2009, 5 ☞ 블로그글 보기
11

하남

춘궁동동사지(동사지3/5층석탑), 광주향교

2010, 2 ☞ 블로그글 보기
12

안양

삼성산 염불암, 중초사지당간지주, 안양예술공원

2010, 12 ☞ 블로그글 보기
13

양평

용문산 사나사, 사나사계곡

2011, 5 ☞ 블로그글 보기
14

강화

강화도 선원사 (연꽃축제)

2011, 8 ☞ 블로그글 보기
15

고양

북한산성 중성문, 노적사, 중흥사터, 봉성암,
산영루터

2011, 8 ☞ 블로그글 보기
16

포천

반월성, 청성공원, 포천향교

2011, 10 ☞ 블로그글 보기
17

하남

선법사(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

2011, 11 ☞ 블로그글 보기
18

고양

한미산(노고산) 흥국사

2011, 12 ☞ 블로그글 보기
19

고양

중남미문화원, 벽제관터

2012, 5 ☞ 블로그글 보기
20

강화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장정리5층석탑, 고려궁터,
김상용 순절비

2012, 8 ☞ 블로그글 보기
21

이천

관고리 석불입상, 설봉공원(설봉저수지),
설봉서원, 설봉산 영월암

2012, 10 ☞ 블로그글 보기
22

양평

용문산 용문사,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

2012, 11 ☞ 블로그글 보기
23

파주

고령산 보광사

2013, 2 ☞ 블로그글 보기
24

화성

제암리 3.1운동순국유적 2014, 3 ☞ 블로그글 보기
25

파주

용미리 마애2불입상, 용암사 2014, 12 ☞ 블로그글 보기
26

의정부

도봉산 회룡사, 석굴암, 회룡골 2015, 7 ☞ 블로그글 보기
27

고양,
서울
종로구

북한산 북한산성계곡, 태고사, 행궁터,
금위영이건기비, 금위영유영지, 경리청상창터,
대남문, 문수사

2015, 12 ☞ 블로그글 보기
28

의왕

청계산 청계사

2016, 2 ☞ 블로그글 보기
29

강화

외포리, 석모도 보문사

2016, 7 ☞ 블로그글 보기
30

포천

백운산 백운계곡, 흥룡사

2016, 7 ☞ 블로그글 보기
31

양주
서울

우이령길(교현리~우이동), 우이동유원지

2016, 11 ☞ 블로그글 보기

32

인천

소래철교, 소래포구(소래어시장), 장도포대지
(댕구산), 논현포대

2017, 2 ☞ 블로그글 보기

33

수원

서호(서호공원), 항미정 2017, 6 ☞ 블로그글 보기

34

광명

광명동굴, 가학산 2017, 7 ☞ 블로그글 보기

35

양주

오봉산 석굴암, 우이령길 2017, 11 ☞ 블로그글 보기

36

안양

안양예술공원, 안양사지, 김중업건축박물관,
석수동 마애종, 안양사

2018, 1 ☞ 블로그글 보기

37

강화

월곶돈대, 연미정, 강화평화전망대

2018, 6 ☞ 블로그글 보기

38

과천

관악산 문원계곡, 문원폭포, 문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보광사

2018, 7 ☞ 블로그글 보기

39

군포

수리산(철쭉동산, 수리산 산림욕장, 수리산
둘레길), 수리사, 반월호수

2018, 9 ☞ 블로그글 보기

40

인천

양주성금속비, 용궁사, 영종도 백운산

2018, 12 ☞ 블로그글 보기

41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 (구석기 겨울여행축제)

2019, 1 ☞ 블로그글 보기

42

강화

교동도 (교동읍성, 교동향교, 화개사, 화개산)

2019, 6 ☞ 블로그글 보기

43

화성

봉림사, 구봉산 당성

2019, 10 ☞ 블로그글 보기

 

강원도 - 23개

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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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양

낙산사, 홍련암, 오색약수, 성국사, 설악산 주전골 200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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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릉 객사문, 오죽헌, 경포대, 굴산사터, 신복사터 200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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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창 대관령 양떼목장 200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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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릉
동해

경포대해수욕장, 등명낙가사, 묵호항 200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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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동해 감추사, 감추해변 200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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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태백 구문소 200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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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양구

양구 선사박물관 20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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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화천

토고미마을(산천어축제), 딴산 2011, 1 ☞ 블로그글 보기
9

화천,양구
춘천

화천 평화의댐, 세계평화의종공원,
춘천 윗샘밭

2011, 2 ☞ 블로그글 보기
10

평창

남산공원, 송학루, 노산성

2011, 12 ☞ 블로그글 보기
11

삼척

미인폭포(통리협곡), 여래사

2012, 6 ☞ 블로그글 보기
12

정선

정선5일장, 봉양리뽕나무, 아우라지

2012, 7 ☞ 블로그글 보기
13

영월

보덕사, 금몽암, 낙화암, 금강정, 금강공원

2013, 11 ☞ 블로그글 보기
14

태백

태백산 (당골, 석탄박물관, 석장승, 눈꽃축제장,
단군성전)

2014, 2 ☞ 블로그글 보기
15

동해

추암(추암해수욕장, 촛대바위), 해암정,
추암조각공원, 북평5일장

2014, 7 ☞ 블로그글 보기
16

화천

화천 산천어축제(화천읍내, 북한강) 2015, 1 ☞ 블로그글 보기
17

정선,태백

함백산, 만항재 2015, 9 ☞ 블로그글 보기
18

정선

아라리촌, 아우라지 2015, 12 ☞ 블로그글 보기
19

양구

팔랑폭포, 팔랑계곡 2016, 6 ☞ 블로그글 보기
20

삼척

미인폭포(통리협곡), 여래사

2016, 7 ☞ 블로그글 보기
21

홍천

삼봉약수, 삼봉자연휴양림, 운두령

2017, 6 ☞ 블로그글 보기
22

춘천

사명산 추곡약수, 천전리 고인돌

2018, 2 ☞ 블로그글 보기
23

원주

치악산 구룡사, 구룡사계곡, 학곡리 황장금표

2019, 3 ☞ 블로그글 보기

 

충청북도 - 1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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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은
대전

보은 삼년산성
대전 동춘당 / 송애당 / 법동 석장승

20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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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동 영동향토민속자료전시관, 가학루, 황간향교 20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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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충주

단호사, 사문리당산나무숲, 미륵리사터,
하늘재, 충주호

20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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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단양

사인암, 청련암, 중선암, 북상리 시골

20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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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괴산

각연사 (각연사계곡)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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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괴산

원풍리 마애2불병좌상, 홍범식고가, 개심사

20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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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옥천

정지용 생가(정지용문학관), 육영수생가,
죽향리초교 구교사, 죽향리사지3층석탑, 옥천성당

201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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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청주

낙가산 보살사, 명암약수터, 명암저수지

201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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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단양

북상리 시골, 사인암, 청련암

201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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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단양

구인사 (구봉팔문)

201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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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괴산

산막이옛길 (괴산호, 등잔봉)

201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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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충청남도, 세종 - 16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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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안 태화산 광덕사 200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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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진
태안

행담도, 꽃지해수욕장, 방포항, 안면도자연휴양림,
안면암

200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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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전

식장산 고산사

2009. 11 ☞ 블로그글 보기
4 공주

계룡산 동학사

2012. 3 ☞ 블로그글 보기
5 공주

계룡산 남매탑, 삼불봉, 천진보탑, 용문폭포

2012. 3 ☞ 블로그글 보기
6 공주

계룡산 갑사

2013. 2 ☞ 블로그글 보기
7 태안

신진도(안흥외항), 마도, 안흥항, 안흥성(태국사)

2013, 8 ☞ 블로그글 보기
8 홍성

용봉산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용봉산자연휴양림)

2014, 6 ☞ 블로그글 보기

9

당진
아산

장고항, 삽교호관광지, 외암리민속마을

2015, 11 ☞ 블로그글 보기

10

예산

금오산 향천사

2016, 1 ☞ 블로그글 보기

11

대전

계족산(계족산성, 계족산 황톳길), 장동산림욕장

2016, 10 ☞ 블로그글 보기

12

보령

성주사지, 성주천 가로수길

2017, 2 ☞ 블로그글 보기

13

서산

해미읍성, 해미순교성지

2017, 12 ☞ 블로그글 보기

14

대전

장태산자연휴양림, 형제산

2018, 7 ☞ 블로그글 보기

15

천안

태조산 각원사, 성불사 2019, 1 ☞ 블로그글 보기

16

세종

비암사, 도깨비도로 2019, 3 ☞ 블로그글 보기

 

전라북도 - 15개

연번

지역 가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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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안 상록해수욕장, 내소사, 곰소항 200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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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수 의암사(논개사당) 200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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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주
장수

한풍루, 무주향교
의암송, 장수향교

200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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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주 전주한옥마을, 오목대(이목대), 한벽당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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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군산

동국사, 은적사, 발산초등학교

20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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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군산

응항, 선유도, 고군산군도 일주

201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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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순창

강천산(강천산계곡, 구장군폭포), 강천사, 삼인대

201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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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임실

오수 의견비, 오수망루, 오수리석불, 해월암

201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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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김제 망해사, 새만금바람길, 심포항 201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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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부안 변산 내소사 2016, 9

☞ 블로그글 보기

11

무주 적상산(적상호, 적상산성, 적상산사고), 안국사 201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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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무주

무주머루와인동굴, 덕유산무주리조트(곤도라),
덕유산 설천봉

201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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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김제 모악산 귀신사 201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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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완주 종남산 송광사 2018, 4

☞ 블로그글 보기

15

완주 모악산 대원사, 수왕사 201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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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전라남도 - 14개

연번

지역 가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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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성
담양
나주

장성 방울샘,
담양 관방제림 / 담양읍 5층석탑 / 석당간
나주 남고문 / 정수루

200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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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광 내산서원 200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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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주
광주

정수루, 금성관
광주 풍영정

200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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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순천 금전산 금둔사 2009, 11 ☞ 블로그글 보기

5

순천 개운산 동화사 2010, 1 ☞ 블로그글 보기

6

순천 조계산 천자암 2010, 2 ☞ 블로그글 보기

7

장성 백암산 백양사 2011, 9 ☞ 블로그글 보기

8

광주 무등산 원효사 2011, 10 ☞ 블로그글 보기

9

구례 지리산 천은사(천은제) 2012, 4 ☞ 블로그글 보기

10

곡성 동리산 태안사(태안사계곡) 2013, 5 ☞ 블로그글 보기

11

광양 백계산 옥룡사터 (동백나무숲, 운암사) 2015, 4 ☞ 블로그글 보기

12

목포

노적봉, 유달산(목포시사), 달성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갓바위

2017, 9 ☞ 블로그글 보기

13

나주

덕룡산 불회사, 불회사 석장승

2018, 12 ☞ 블로그글 보기

14

영광

불갑산 불갑사(꽃무릇군락지)

2019, 9 ☞ 블로그글 보기

 

대구, 경상북도 - 2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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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주

반월성, 석빙고, 남산 서쪽(용장사터, 천룡사터)

200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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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경 문경새재(여궁폭포, 혜국사, 주흘산, 주흘관) 20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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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달성 비슬산(유가사 / 암괴류), 현풍석빙고 2007, 10

☞ 블로그글 보기

4

구미 의구총, 낙산리고분군, 낙산리3층석탑 2009, 2

☞ 블로그글 보기

5

예천
상주

개심사지5층석탑
용화사(증촌리석불좌상/입상), 전고령가야왕릉

2009, 4

☞ 블로그글 보기

6

경주

남산 불곡 석불좌상, 신문왕릉 2009, 7 ☞ 블로그글 보기
7 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불무사)

2009, 9 ☞ 블로그글 보기
8

영덕
울진

고래불해수욕장, 후포항, 월송정, 월송해변 2011, 6 ☞ 블로그글 보기
9

달성

다람재, 도동서원, 이노정 2012, 12 ☞ 블로그글 보기
10

청도

남산 낙대폭포 2013, 7 ☞ 블로그글 보기
11

달성

비슬산 용연사 2014, 2 ☞ 블로그글 보기
12

예천

회룡포, 비룡산 2014, 7 ☞ 블로그글 보기
13

경산

팔공산 갓바위, 선본사 2014, 11 ☞ 블로그글 보기
14

경주

효소왕릉, 성덕왕릉, 성덕왕릉귀부 2014, 12 ☞ 블로그글 보기
15

경주

남산 보리사(미륵곡 석조여래좌상) 2015, 10 ☞ 블로그글 보기
16

안동

도산서원 2016, 1 ☞ 블로그글 보기
17

대구

팔공산 파계사, 대비암, 성전암 2016, 4 ☞ 블로그글 보기
18

경주

효현동3층석탑, 법흥왕릉, 율동 마애여래3존입상 2016, 11 ☞ 블로그글 보기
19

의성

문소루, 구봉산, 금성산고분군, 문익점면작기념비 2016, 12 ☞ 블로그글 보기
20

예천

개심사지5층석탑, 동본리석조여래입상과
3층석탑, 초간정(초간정 원림)

2018, 3 ☞ 블로그글 보기
21

상주

장각폭포, 오송폭포(성불사), 옥양폭포

2018, 6 ☞ 블로그글 보기
22

영주
봉화

휴천동 지석 및 입석
오전약수, 삼계서원, 석천계곡, 석천정사

2019, 6 ☞ 블로그글 보기
23

경주

감산사, 연지암, 숭복사(숭복사터)

2019, 8 ☞ 블로그글 보기

 

부산 - 17개

연번

지역 가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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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영구
강서구

광안리해수욕장, 가덕도(외양포, 대항, 세바지)

200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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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서구
서구

망상도/유주암, 송도해변, 송도해수욕장

2008, 9 ☞ 블로그글 보기
3

기장군

불광산 (장안사. 장안사계곡) 2009, 1 ☞ 블로그글 보기
4

기장군

불광산 (척판암, 백련암) 2009, 1 ☞ 블로그글 보기

5

서구
북구

내원정사, 만덕사(만덕사 당간지주), 알터유적 2009, 9 ☞ 블로그글 보기

6

금정구

금정산(금정산성, 국청사) 2011, 1 ☞ 블로그글 보기

7

금정구

금정산 미륵사, 금성동 2011, 1 ☞ 블로그글 보기

8

강서구

가덕도(가덕도등대, 외양포, 대항, 새바지) 2012, 7 ☞ 블로그글 보기

9

사상구
강서구

백양산 운수사, 백양산 숲길,
범방동3층석탑, 부산경남경마공원

2012, 12 ☞ 블로그글 보기

10

사하구

몰운대, 다대포

2013, 7 ☞ 블로그글 보기

11

남구

백운포, 오륙도 (오륙도등대, 등대섬) 2014, 1 ☞ 블로그글 보기

12

사하구
서구

승학산, 구덕문화공원 2014, 11 ☞ 블로그글 보기

13

금정구

금정산(고당봉, 금샘), 원효암, 금정산성 2015, 4 ☞ 블로그글 보기

14

해운대구

해운대 동백섬, 해운대해수욕장, 미포,
달맞이길, 문텐로드, 청사포, 구덕포, 송정해수욕장

2015, 7 ☞ 블로그글 보기

15

연제구

배산, 배산성터

2016, 9 ☞ 블로그글 보기

16

기장군

죽성리해송, 죽성리왜성, 황학대, 두호포구,
기장성당, 월전포구

2017, 4 ☞ 블로그글 보기

17

기장군

월전~대변 해안가, 대변항, 죽도, 연하리 해변,
오랑대, 해동용궁사

2017, 7 ☞ 블로그글 보기

 

울산, 경상남도 - 2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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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울산
부산

처용암
옥련선원 / 정묘사(배롱나무)

200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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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창원 무학산(관해정), 가포해변 2006, 11

☞ 블로그글 보기

3

김해

김해 수로왕릉

20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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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진주
사천

진주 금선암
사천읍성(산성공원), 대방진굴항

2008, 1 ☞ 블로그글 보기
5

함안
창원

함안박물관, 말산리/도항리고분군
진해 우체국

2008, 1 ☞ 블로그글 보기
6

창원

불모산 성흥사, 대장동계곡

2008, 9 ☞ 블로그글 보기
7

밀양

밀양 표충비, 무안리 향나무(홍제사) 2009, 1 ☞ 블로그글 보기
8

양산

천성산 홍룡사(홍룡폭포), 원효암 2009, 6 ☞ 블로그글 보기

9

울산 일산해수욕장, 대왕암공원 2009, 7 ☞ 블로그글 보기

10

창녕

창녕석빙고, 송현동석불좌상, 송현동고분군,
진흥왕척경비, 만옥정공원, 남지철교

2010, 5 ☞ 블로그글 보기

11

거창

수승대(귀연서원, 요수정)

2011, 7 ☞ 블로그글 보기

12

울주
밀양

서생 나사리해변,
밀양 얼음골(천황사)

2011, 7 ☞ 블로그글 보기

13

함양

상림공원, 한남군묘역

2012, 7 ☞ 블로그글 보기

14

산청

목면시배유지, 배산서원, 덕천서원, 남명조식유적

2012, 9 ☞ 블로그글 보기

15

남해

호구산 용문사, 남해자생식물단지, 미국마을,
용소리/금평해변

2012, 11 ☞ 블로그글 보기

16

통영

통영 달아공원

2013, 3 ☞ 블로그글 보기

17

울주

가지산 석남사 (석남사계곡)

2013, 9 ☞ 블로그글 보기

18

고성

연화산 옥천사, 공룡발자국화석

2013, 11 ☞ 블로그글 보기

19

창원

불모산 성주사 (성주사계곡)

2014, 10 ☞ 블로그글 보기

20

울주

서생포왜성

2016, 6 ☞ 블로그글 보기

21

산청

덕양전, 전 구형왕릉, 왕산(유의태약수터,
왕산사지)

2018, 10 ☞ 블로그글 보기

 

제주도 - 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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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

외도 월대, 수산봉, 수산리곰솔, 납읍리
납읍 금산공원(납읍리 난대림)

2019, 3 ☞ 블로그글 보기


 

기타 지역 - 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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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열도

동경 지역(긴자, 록뽕키, 우에노, 도쿄도청타워,
아사쿠사<관음사>, 신주쿠, 코쿄, 디즈니랜드)

2002, 6

☞ 블로그글 보


1. 천하에 공개된 글 중에서 하자가 없는 글만 선정해서 지역별로 모았습니다.
2. 2003년 4월 이전 글은 모두 제외했습니다.
3. 답사기 내용과 사진을 전체 혹은 일부라도 퍼갈 경우, 반드시 출처와 원작자(박융) 이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4. 사진이 일부 뜨지 않는 글들이 약간 있습니다. 이 점 널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5. 공개된 글 중, 추후 업데이트 판이 나올 경우, 이전 판은 모음집에서 삭제 될 수 있으며 2개 이상의 시리즈로
   작성된 글 중 추후 본인 필요에 따라 1개나 2개로 통폐합 정리될 수 있습니다.
6. 지역 별로 분류했으나 지역이 2개 이상 겹치는 글은 먼저 간 곳을 기준으로 했습니다.
7. 최종 업데이트 2019년 12월 30일

호랑이를 닮은 잘생긴 바위산, 해돋이와 일몰 풍경이 일품인 호암산 (호압사, 한우물, 칼바위, 서울둘레길)

 


~~~ 호암산 늦가을 나들이 ~~~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 서남부)

▲  호압사 8각9층석탑

▲  호암산 남쪽 봉우리

 


서울 시흥동과 독산동, 신림동, 경기도 안양시(석수동)에 걸쳐있는 호암산(虎巖山, 393m)
은 삼성산(三聖山, 480m)의 일원으로 삼성산 서북쪽에 자리한다. 호암산이란 이름은 산세
가 호랑이를 닮았다고 하여 유래된 것으로 옛 금천(衿川) 고을(현재 서울 금천구)의 주산
(主山)이라 금지산(衿芝山), 금주산(衿州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때는 바야흐로 1394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개경(開京, 개
성)에서 서울(한양)로 도읍을 옮겼다. 서울에 와서 주변 지형을 살펴보니 글쎄 한강 남쪽
에 호랑이를 닮은 호암산과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 모양의 관악산(冠岳山, 629m)이 나란히
서울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풍수지리적으로 서울을 위협하는 존재로 봤던 것
이다.
하여 그들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에 따라 호암산 밑에 호압사를 세우
고, 관악산 정상 밑에 연주암(戀主庵)을 짓고 연못을 팠으며,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세우
고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우는 등, 그야말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이처럼 호암산에는 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세운 호압사를 비롯하여 서울에서 가장 크고 오
래된 옛 우물인 한우물, 비보풍수로 세워진 석구상, 신라 때 축성된 호암산성, 흔적만 남
은 제2한우물터, 호암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기도를 했던 자리에 세워진 불영암, 기해박해
(己亥迫害) 때 처단된 프랑스 신부 3명이 안장되었던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 등, 신라부
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절의 흔적들이 존재하여 이곳의 중요성을 크게 일깨
워준다. 게다가 조망 또한 알품으로 서울의 절반 정도와 안양, 광명, 부천, 인천, 북한산
(삼각산)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온다.
또한 호랑이를 닮은 뫼답게 멋드러진 바위가 아낌없이 포진해 있어 산행의 즐거움을 더해
주며, 호압사 남쪽에는 넓게 잣나무숲을 조성해 산림욕장으로 꾸몄고 벽산5단지 기점에는
2012년 8월에 닦여진 호암산폭포가 있으며, 호암산 서남쪽 끝자락에는 시흥계곡이 펼쳐져
있는 등, 볼거리도 풍년이다.

호암산은 호압사를 비롯하여 서울대와 신우초교, 삼성산성지, 벽산5단지, 시흥계곡, 석수
역 등에서 접근할 수 있으며, 깃대봉과 장군봉을 거쳐 삼성산까지 이어진다. 또한 사당역
에서 낙성대(落星垈), 서울대, 호압사, 시흥계곡을 거쳐 석수역까지 이어지는 서울둘레길
(13km)이 닦여져 있다.

호암산은 내 즐겨찾기의 하나로 1년에 여러 번씩 찾아 나의 마음을 비추고 있다. 이번 나
들이는 호압사입구에서 시작하여 호압사, 호암산 정상, 한우물(불영암)을 거쳐 벽산5단지
에서 마무리를 지었는데, 수십 번 인연을 지은 곳이라 호압사만 보고 빠지려고 했으나 고
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지나친다고 여기까지 온 거 더블로 싹 둘러보았다.


▲  호압사 뒤쪽에서 바라본 호암산
늦가을이 지른 단풍불로 산이 매우 화사하다.


 

  호암산의 기운을 누르는 절, 호압사(虎壓寺)

▲  '호암산문(虎巖山門)'이라 쓰인 호압사 일주문(一柱門)

호압사입구 정류장에서 호압사로 인도하는 길로 들어서면 바로 일주문이 마중을 나온다. 팔작
지붕 머리를 한 그는 2000년에 금천구청에서 지어준 것으로 그 당시 금천구가 서울시 25개 자
치구 민원행정실적평가에서 우수구로 선정돼 시상금을 받자 그 돈으로 '활기찬 금천구 만들기
기념'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호압사에 만들어준 것이다.

문 현판에 쓰인 호암산문은 호암산 사찰, 즉 호압사를 뜻하며, 문이라고는 하지만 여닫는 문
짝이 없이 뻥 뚫려있어 누구든 가리지 않고 맞이한다. 문 앞에는 호암산 안내문과 조그만 공
원이 자리해 있다.


▲  호압사로 올라가는 산길

일주문을 지나면 속세살이처럼 각박한 오르막길이 중생의 마음을 잔뜩 주눅들게 만든다. 절까
지 걸어서 10분 거리로 차량들이 편하게 바퀴를 굴리게끔 콘크리트 길이 닦여져 있는데, 경사
의 패기가 짙어 아무리 차량이라 한들 조심스레 바퀴를 굴린다. 특히 눈이 쌓인 날은 울면서
길을 오르락 내리락 해야 된다.

처음에는 경사가 좀 완만하나 서서히 기울기가 커지면서 주차장을 지날 쯤에는 상당히 급해진
다. 주차장을 지나 하늘과 한 발자국 가까워질수록 호압사의 모습이 마치 솟아나듯 보이기 시
작한다. 그럼 여기서 잠시 호압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늦가을의 절정을 누리고 있는 단풍나무 (경내 바로 밑부분)

삼성산의 일원인 호암산 서쪽 자락 230m 고지에 자리한 호압사는 호랑이를 누르는 절이란 뜻
으로 자비를 강조하는 불교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이곳이 호랑이와 무슨 원수를
졌길래 호랑이에게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을까.
지금이야 그리 신경은 쓰지 않겠지만 옛 사람들은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매우 신봉했다. 고려
를 뒤엎고 조선이란 비리비리한 나라를 연 태조 이성계는 개경을 버리고 현재 서울을 도읍으
로 삼고자 땅을 살폈는데,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관악산과 호랑이를 닮은 호암산이 나란히 서
울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잔뜩 기겁을 하게 된다. 이들 산이 서울에 무슨 감정이 있어서 그
런 것도 아니고 조물주 형님이 그렇게 빚어놓은 것 뿐인데, 생긴 모습이 그러하여 풍수지리적
으로 서울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버린 것이다.
그런 이유로 1394년에 태조가 무학대사에게 명해 호암산 밑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호압사
라 했다고 한다. 과연 태조와 무학대사가 지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약사전에 조선 초기
석불좌상이 깃들여져 있어 그런데로 시기는 맞아떨어지며, 조선 조정에서 호암산의 기운을 잡
고자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지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봉은사(奉恩寺)에서 작성한 '봉은사말사지(末寺誌)'에는 1407년에 창건했다고 나와있으며 태
종이 호압
(虎壓)이란 현액(現額)을 하사했다. 이후 400년 동안 적당한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했다가 1841년에 승려 의민(義旻)이 상궁(尙宮) 남씨와 유씨의 시주로 법당을 중창했으며,
1935년에
만월(滿月)이 약사전 6칸을 중건하고 1995년에 삼성각을 지었고, 2008년에 9층석탑
을 세웠다.

서울 금천구의 유일한 전통사찰로 믿거나 말거나 창건설화가 한 토막 전해오고 있다. 이 설화는 이 절이 호암산의 기운을 때려잡고 서울을 수호하는 절임을 강조하고자 후대에 그럴싸하게
지어진 것이다.
때는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궁궐(경복궁)을 지을 때인 1394년, 전국에 잘나가는 장인을 싹 소
환해 궁궐을 짓고 있는데, 건물이 완성되면 이상하게도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계속 무너지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현상이 계속 터지자 뚜껑이 폭발한 태조는 공사책임자를 불러 추궁
했다. 책임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전하, 소인들이 일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면 호랑이를 닮은 커다란 괴물이 나타나 소인들을
위협하고 건물을 죄다 때려부시고 사라집니다. 소인들이 막으려고 해도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어 다들 궁궐 공사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통촉해 주시옵소서~~!!'
그 말을 듣던 태조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너희들이 지금 나를 우롱하냐~~?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책임자는 더욱 오금을 저리며
'어찌 전하께 거짓을 아뢰나이까. 믿기 어려우시면 오늘 밤 몸소 확인하심이 좋을 듯 합니다'

그래서 태조는 직접 확인할 겸, 그날 밤 군사를 이끌고 공사현장에서 괴물을 기다렸다. 과연
어둠이 내려앉자 반은 호랑이고 반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눈에 불을 강하게 뿜으며 현
장에 나타났다. 괴물이 건물을 부시려고 폼을 잡자 태조는 군사들에게 화살을 쏘게 했다. 허
나 괴물은 화살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기껏 만든 건물을 보기 좋게 부시고는 유유히 사라졌
다.
괴물의 기세에 염통이 쫄깃해진 태조는 침소로 돌아와 한숨을 쉬며
'한양은 나와 인연이 아닌가 보구나. 개경으로 다시 돌아갈까?'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인의 우렁찬 목소리
'한양은 정말 도읍지로 제격이다!!'
태조는 깜짝 놀라 소리가 들리는 밖으로 나가보니 아름다운 수염의 노인이 서 있었다.
'공은 뉘시오?'
'허허~ 그런 것은 아실 필요는 없구요. 전하의 근심을 덜어드릴까 하여 왔습니다'
태조가 표정을 바로 하고 그 대책을 문의하자 노인은 저 멀리 보이는 한강 남쪽의 한 산봉우
리를 가리켰다. 태조는 달빛 속에서 노인이 가리킨 곳을 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오매~ 호랑이 머리를 한 봉우리가 한양을 바라보고 있구나!!'
태조는 노인에게 산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물었다.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호랑이는 꼬랑지를 밟히면 꼼짝 못하니 산 꼬리 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입니
다'
알려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태조는 바로 무학대사를 불러 호랑이의 꼬리 부분인 지금 자리에 절을 짓게 하고 호랑이를 누
른다는 뜻에서 호압사라 이름 지었다. 그 이후 궁궐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천 고을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과 같
고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 까닭에 범바위(虎巖)라 부른다. 술사(術士)가 이를 보고 바위
북쪽에다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했다'라고 나와있음. 여기서 호갑은 '호압사'로 호압사의
다른 이름으로 많이 등장한다>

서울 시내와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도심 속에서 아늑한 산사(山寺)의 내음과 분위기를 누리
는데 아주 좋은 곳이며 접근성도 괜찮아 언제든 안길 수 있다. 또한 절의 규모는 작지만 쓸데
없이 으리으리한 것보다는 정감이 가 두 눈에 넣어 살피기에도 그리 부담이 없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좌상과 50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절의 오
랜 내력을 살짝 속삭여주고 있으며, 2008년 이후 8각9층석탑을 만들고, 중생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원두막 쉼터와 풍경소리 도서관을 만드는 등, 경내를 조금씩 채워나가면서 올 때마다
늘 낯선 것들이 하나씩은 보인다. 또한 매주 일요일 점심시간에 국수 공양을 제공하며, 12월
31일 밤에는 제야의 종 타종식 행사를 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234 (호암로 278 ☎ 02-803-4779)
* 호압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호압사에서 바라본 호암산 서남쪽 봉우리
바로 저곳에 호암산의 명물인 석구상과 한우물, 불영암, 호암산성터가
깃들여져 있다.

▲  호압사 서쪽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8-5호

주차장에서 계단을 올라 경내에 들어서면 계단 양쪽으로 50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마중한
다. 이들 느티나무 형제는 약사전에 있는 약사불과 더불어 호압사의 오랜 내력을 밝혀주는 산
증인들로 늦가을도 호압사가 좋은지 나무에 오래도록 머물며 알록달록 작품을 빚었다.
계단 서쪽에 있는 느티나무는 500년 정도 되었으며, 키가 7m, 허리둘레가 4.2m이다. 반면 계
단 동쪽 나무는 비슷한 나이에 키 11m, 허리둘레는 3.6m이다.


▲  호압사 동쪽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8-6호

▲  호압사 심검당(尋劍堂)
건물 앞에 서 있는 굵은 나무가 서울시 보호수 18-5호인 500년 묵은 느티나무이다.


오래된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호압사 경내로 들어서면 서쪽에 2층 규모의 심검당이 있
고, 북쪽에는 법당인 약사전, 그 옆구리 높은 곳에 삼성각, 그 아래쪽에 9층석탑이 조촐하게
경내를 이룬다. 심검당은 호압사의 요사(寮舍)이자 종무소(宗務所), 공양간으로 쓰이는 다용
도 건물로 건물 이름인 심검(尋劍)이란 지혜의 칼을 찾는다는 뜻이다.


▲  호압사 삼성각(三聖閣)과 9층석탑

삼성각 아랫쪽에 자리한 9층석탑은 2008년에 조성되었다.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8각9층석
탑을 유난히도 많이 닮았는데, 호압사의 유일한 탑으로 그가 있기 전에는 이곳에는 그 흔한
탑이 하나도 없었으며, 그 허전함이 달래고자 아주 통 크게 9층석탑을 심었다.
탑에는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데, 1층 탑신(塔身)에 담긴 사리를 친견할 수 있도록
동그란 창을 냈다. 가람 배치의 정석대로라면 법당(약사전) 정면에 탑을 세워야 하나 특이하
게도 좌측 구석에 세운 것이 이상할 따름이다. 하얀 피부의 맨들맨들한 석탑, 늦가을 햇빛에
한층 빛나 보인다.

탑 뒤쪽이자 약사전 옆구리의 높은 곳에는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 삼성각이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
붕 건물인데 1995년 완성을 보았으나 건물을 받치는 석축과 계단은 1999년에 완성되어 2000년
에 비로소 낙성식을 가졌다.
내부를 가득 메운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은 1978년에 제작된 것이며 우측 벽에는 호압사를
세웠다는 무학대사의 영정이 걸려있어 절의 창시자를 기린다.

▲  삼성각에 봉안된 무학대사의 진영(眞影)

▲  삼성각 칠성탱(七星幀)

▲  삼성각 산신탱(山神幀)

▲  삼성각 독성탱(獨聖幀)


▲  호압사의 법당인 약사전(藥師殿)

경내 중심에 자리하여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약사전은 호압사의 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창건 당시부터 있던 것으로 여겨지나 현재 건물은 1935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  호압사 석불좌상(약사불)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8호

호압사는 석가여래 대신 약사불을 중심으로 내세운 약사도량(藥師道場)이다. 그래서 법당 불
단에는 약사불을 봉안했으며, 법당 이름도 약사전을 칭했다. 바로 그 약사전에 이곳의 든든한
밥줄이자 상징인 석불좌상이 협시보살을 주렁주렁 대동하며 자리해 있다.

예전에는 약사불 홀로 불단을 지켰으나 2009년에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좌우에 붙여주어 약사3존불을 이루게 되었으며, 2011년에 그 양쪽에 천진불(天眞佛)이라 불리
는 귀여운 아기부처 2구를 갖다 붙였다.

인상이 온후해 보이는 약사불은 연꽃 대좌(蓮花臺座) 위에 사뿐히 앉아 조용히 명상에 임하고
있다. 아무리 서울에 위협을 주는 호암산 호랑이라 할지라도 그의 덕스러운 표정 앞에선 절로
꼬랑지를 내리며 온순한 호랑이가 될지도 모른다.
15세기에 조성된 그는
얼핏 보면 금동불(金銅佛)로 보이지만 실은 돌로 다져 도금을 입힌 것
이다.
불두(佛頭)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촘촘히 표현했으며 얼굴은 둥근 넓적한 모
습으로 약간의 양감이 표현되어 있다. 선정인(禪定印)을 취한 듯, 다리 위에 모은 그의 두 손
에는 고달픈 중생들을 치료하기 위한 약합(藥盒)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약사불 좌우의 일광/월광보살은 화려한 보관(寶冠)을 머리에 쓰고 각각 꽃을 1송이씩 들고 있
다. 중생을 지그시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은 어린 동자승 마냥 포근하기만 하다. 그들 뒤에는
후불탱이 있으며, 불단 위쪽에 걸쳐진 닫집은 단청(丹靑)과 조각이 화려하여 중생의 눈을 매
료시킨다. 그리고 불단 좌우에는 헤아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조그만 금동 피부의 원
불(願佛)이 빼곡히 벽을 채워 약사전 내부를 화사하게 만든다.


▲  범종각과 쉼터

범종각에는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4가지의 물건, 범종(梵鍾)과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
판(雲版)이 담겨져 있다. 그 옆에는 원두막처럼 생긴 쉼터가 닦여져 있어 누구든 다리를 접고
쉬어갈 수 있다.


▲  원두막 쉼터와 풍경소리도서관 (왼쪽 하얀 책장이 도서관)

범종각 좌측에는 2칸짜리 쉼터와 풍경소리 도서관이라 불리는 하얀 피부의 책장이 있다. 이들
은 호압사에서 동네 사람들과 산꾼, 답사꾼을 위해 2012년에 만든 것으로 누구든 찾아와 독서
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개방형 책쉼터이다.

절에 딱 어울리는 이름을 지닌 풍경소리도서관 책장에는 절과 신도, 동네 사람들이 기증한 책
들이 담겨져 있는데, 소장 권수는 적으나 기증이 늘고 있다고 하니 책장도 조만간 늘어날 것
이다. 책장과 쉼터는 종일 개방하며, 누구든 책장에서 책을 꺼내 쉼터에 앉아 독서의 여유를
누리면 된다. 책을 며칠 빌리고자 하는 경우(대여비는 없음)에는 종무소에 문의하면 되며, 관
리가 느슨하다고 몰래 책을 가져가는 행위는 삼가하기 바란다.
또한 쉼터에서는 독서 외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쉬거나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을 먹어도 된다.


 

  호암산 정상과 석구상 주변

▲  호압사에서 호암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각박한 산길

호압사 뒤쪽(동쪽)에는 호암산 등산로가 여럿 지나간다. 이곳을 편의상 '호압사분기점'이라고
하는데, 서울둘레길이 이곳을 거쳐 석수역과 서울대 방면으로 흘러간다.
여기서 남쪽 오르막 길을 오르면 호암산 정상과 삼성산으로 이어지며, 동쪽으로 내려가는 산
길(서울둘레길)은 삼성산성지로 이어진다. 북쪽 능선길은 난곡(蘭谷)과 목골산으로 연결되며,
서쪽은 호압사와 벽산아파트, 석수역(서울둘레길) 이어지니 취향대로 고르면 된다.
나는 호암산 정상으로 길을 잡았는데, 정상으로 가는 길은 시작부터 경사가 각박하여 만만히
보고 뛰어든 속인(俗人)들의 혼을 제대로 빼놓는다. 그런 길을 10~15분 정도 오르면 정상 입
구이며, 거기서 왼쪽(동쪽)으로 4~5분 가면 호암산 정상이다.


▲  돌로 이루어진 호암산 정상

호암산은 돌의 성분이 많은 산이라 정상도 단단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에는 2개의 커
다란 바위가 비스듬히 매달려 서울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중 오른쪽 바위가 정상으로 호암산의
머리에 해당된다.
서울의 이름난 조망지로 마치 서울을 향해 미사일이나 로켓포를 쏘는 듯한 무시무시한 모습이
다. 대자연은 이미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훨씬 이전부터 인간이 20세기에 발명한 미사일과
로켓포, 그것을 취급하는 기계의 모습을 예견했던 모양이다. 이러니 조선의 위정자들이 이 산
을 경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굳이 미사일이 아니더라도 무엇인가 날릴 것 같은
기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위 꼭대기나 그 부근까지 오르면 서울의 서남부를 중심으로 서북부와 도심부, 동북
부, 강남, 도심 주변의 여러 산들(북한산, 남산, 인왕산, 북악산 등), 그리고 광명과 안양,
멀리 인천과 부천 등 수도권의 주요 도시들이 두 발 밑에 펼쳐지니 굳이 풍수지리나 산의 생
김새가 아니더라도 전략적으로도 꽤 중요한 곳이다. 이곳이 만약 적에게 넘어가면 서울 도심
을 물론 서울의 왠만한 곳이 거의 다 노출되기 때문이다.

하늘나라 선녀 누님의 웃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오가는 신선
이 바로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눈과 발 밑으로 점점히 펼쳐진 천하를 굽어보니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양, 천하를 다스리는 군주가 된 것 같은 즐거운 기분이 솟아 오른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ㅠㅠ)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금천구와 관악구, 구로구, 영등포구를 비롯한 서울 서남부와 광명, 부천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바로 밑에 보이는 곳은 호암산을 감시하는 호압사이다.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관악구와 동작구, 여의도를 비롯하여 서울 도심과 강북 지역이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③
관악구와 동작구, 영등포구, 서울 도심과 서북부, 동북부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정면 중앙에 아득하게 보이는 산은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산(삼각산)이다.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④
관악구와 서울대, 서초구, 강남구, 성동구, 광진구를 비롯하여 서울 동부 지역이
바라보인다. 멀리 까마득하게 보이는 산줄기는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이다.

▲  호암산 남쪽 능선(호암산 정상~불영암)에서 바라본 천하 ①
푸른 하늘 밑으로 서울 서남부 지역과 부천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호암산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②
금천구와 시흥동 벽산아파트단지, 구로구, 광명, 부천 등

▲  호암산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③
 금천구와 시흥동 벽산아파트단지, 구로구 광명, 도덕산 등

▲  호암산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④
금천구와 구로구, 영등포구, 양천구, 부천 지역

▲  세상을 향해 머리를 내민 호암산 남쪽 봉우리

호암산 정상에서 한우물이 있는 남쪽 봉우리까지는 느긋한 능선길의 연속으로 능선을 따라 파
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조망을 즐기며 거닐면 된다. 이 구간이 호암산의 가장 큰 매력으로 산길
곳곳에 멋드러진 바위가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처럼 포진해 있고, 능선과 바위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은 정말 꿀맛이다.
내가 호암산에 퐁당퐁당 빠진 것은 잠깐의 고생 끝에 능선과 정상까지 오를 수 있고, 거기서
이렇게 명품급 조망을 누릴 수 있으며, 능선의 곡선이 매우 유연하고 느긋하기 때문이다. 게
다가 고색의 명소들도 호암산의 매력에 부채질을 하고 있으니 정말로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착한 산이다.


▲  호암산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수리산(修理山, 489m)과
그 사이에 포근히 들어앉은 안양(安養)시내

▲  청정한 솔내음이 나래를 펼치는 호암산 남쪽 능선길


 

♠  호암산 석구상과 호암산성터

▲  호암산 석구상(石狗像)

부드러운 곡선의 호암산 남쪽 능선을 더듬으며 남쪽 봉우리에 이르면 한우물을 200m 가량 앞
둔 지점에서 산길이 2개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동쪽)으로 가면 사방을 난간으로 두룬 돌로
쌓은 기단(基壇)이 나오고, 그 안에 호암산의 상징물인 조그만 석구상이 북쪽을 바라보며 귀
엽게도 앉아있다.

지금은 돌로 만든 개의 상, 석구상으로 통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정체에 대해 말들이 조금 있
는 모양이다. 예전에는 광화문 해태상과 마주 보게 하여 관악산의 화기(火氣)로부터 서울을
지키는 해태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허나 한우물을 발굴조사하면서 '석구지(石狗池)'라 새겨진
장대석(長臺石)이 출토되었고, 시흥읍지 형승조(始興邑誌 形勝條)에는
'호암산 남쪽에 석견(石犬) 4두(四頭)를 묻어 개와 가깝게 하고자 하였으며 지금 현남7리(縣
南七里)에 사견우(四犬偶, 개의 형상 4개)가 있다'
란 기록이 있어 해태상이 아닌 석구상으
로 크게 무게가 쏠리고 있다.

석구상의 크기는 길이 1.7m, 폭이 0.9m, 높이가 1m 정도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발과 꼬리 부
분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정면에서 바라본 석구상의 위엄

▲  석구상 뒷부분 (꼬랑지가 말려져 있다)

석구상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해태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해태치고는 너무 작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완벽한 개의 모습이라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앞 모습을 보면 강아지의
모습 같기도 하지만 양과도 좀 비슷해 보인다. 어떤 이는 개구리를 닮았다고도 하는데, 보면
볼수록 참 답이 안나오는 기이한 석상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제 눈이 안경이라 사람마다
보이는 모습이 제각각 다를 것이다.
그의 뒷부분에는 길다란 꼬리가 말려져 있는데, 이는 개의 꼬리가 아니다. 긴 꼬랑지의 고양
이나 호랑이의 그것과 비슷해 손으로 잡아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석구상의 탄생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으나 대략 조선 중기 이후로 여겨진다. 그는
정확히 북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데, 정말로 광화문 해태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를 만든 이유도 속시원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호암산의 기를 누르고 서울을 지키려는 비보
풍수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석구상은 그 모습이 참으로 아담하고 깜찍하여 등산객들의 눈길을 제대로 잡아맨다. 보는 이
들마다 귀엽다는 말이 연성 터져 나오고,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잔뜩 굳은 표정에서 웃음이
넘쳐나게 해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는 등 그의 식지않는 높은 인기를 보여준다.

▲  호암산성(虎巖山城)터 - 사적 343호

석구상에서 남쪽 능선길로 가면 산길의 일부가 된 채 현역에서 물러난 호암산성의 아련한 흔
적을 만날 수 있다. 석구상 북쪽에서 호암산성의 북문터로 여겨지는 성터 흔적이 있는데, 능
선길 산성터는 성돌과 흙이 섞인 1~3m 높이의 각도가 다소 진 성의 윤곽이 전부로 산길에 이
리저리 돌이 박혀있어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산길로 여기고 밟고 지나가기 일쑤다.

호암산성은 호암산 남쪽 봉우리에 다져진 퇴뫼식 산성으로 자연 지형을 이용했다. 산성의 길
이는 약 1,547m, 산성 면적은 약 133,790㎡에 이른다. 성곽은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
는 길쭉한 마름모꼴로 1990년 봄, 한우물과 호암산성 일대를 발굴하면서 우물 2곳과 건물터 4
곳이 드러났고, 6,500여 점에 이르는 막대한 토기와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들 유물과 관
련 기록을 통해 대략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에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672년에 신라
가 당나라군을 막고자 세운 요새라는 설도 있음>

조선시대에도 한우물과 관련된 여러 기록과 제2한우물터, 건물터 등의 흔적을 통해 산성이 그
런데로 구실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딱 1번 크게 쓰인 적이 있는데 바로 임진왜란이 한
참이던 1593년 1월이다.
그 시절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 오산 세마대(洗馬臺)>에서 왜군을 격파한 권율(權慄) 장군
은 서울을 수복하고자 행주산성(幸州山城)에 들어가 진을 쳤는데, 전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
(宣居怡)에게 군사 4,000명을 주어 이곳 호암산성으로 보내 자신의 후방을 지키게 하면서 서
울 수복 작전을 전개했다. 호암산은 서울을 위협하는 호랑이 모양의 뫼답게 서울로 공격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왜란 이후, 산성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그 중요성이 나날이 떨어지면서 조선 후기에 그 이름이
지워지고 만다. 이후 산성의 운명은 지금의 상태가 여실히 말해준다. 버림을 받은 호암산성은
관리 소홀과 자연의 무정한 장난, 그리고 수백 년 세월의 덧없는 무게까지 더해져 뭉개져 갔
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속절없는 발길이 성곽을 짓누르면서 담장만도 못한 상태가 되어 버
린 것이다.
아무리 인간들이 멋드러지고 견고하게 성곽이나 건물을 지어도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일개 장
난감에 불과하다.


▲  호암산성 건물터

석구상에서 남쪽으로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호암산 남쪽 봉우리의 정상부이다. 이곳에는 잡
초가 무성한 드넓은 공간이 있는데, 오른쪽(동쪽)에는 제2한우물터가, 왼쪽(서쪽)에는 호암산
성 건물터가누워있다.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지 수풀 속에 잠긴 건물터에는 건물을 받쳤을 주춧돌과 건물터의
윤곽이 떠받들 대상을 상실한 채 옛날을 그리워하고 있고, 나무에게 버림받은 낙엽들이 그 허
전한 빈터를 따스하게 덮어주어 서로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호암산
성을 관리하던 관청이나 장대(將臺) 등의 시설, 또는 군사들의 숙소나 창고로 여겨지며, 조선
후기에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  수풀 속에 묻힌 호암산 제2한우물터

건물터 맞은편에는 제2한우물터가 있다. 호암산성이 버려진 이후, 땅 속에 묻혀 강제로 기나
긴 잠을 자다가 1990년 발굴조사로 다시금 햇살을 보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우물의 길이는 남북 18.5m, 동서 10m, 깊이가 2m에 이르
며, 산꼭대기에 하나도 아닌 2개의 커다란 우물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지금
은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옛날부터 호암산의 중요성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물
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기우제, 기타 여러 의식들이 거행된 곳 마냥 신비롭게 보여 우물
가까이 다가서기가 두려울 정도다. 괜히 저곳에 내려가다가 천벌을 받거나 다시는 나오지 못
할 것 같은 기분 말이다.

제2한우물터는 발굴 이후, 한우물처럼 온전히 재현되지 못하고 풀이 무성하도록 방치되고 있
으며, 우물터 곳곳에 석축과 우물을 구성하는데 쓰인 돌들이 무수히 널려있다. 복원할 계획이
있다고는 하는데 그게 언제가 될지는 호암산 귀신도 산신(山神)도 모른다. 어차피 복원된 한
우물이 있으니 그냥 저대로 두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  호암산 마무리 (한우물과 칼바위)

▲  한우물 - 사적 343호

호암산 남쪽 봉우리 서쪽에는 호암산의 또 다른 상징물인 한우물이 누워있다. 여기서 한우물
은 큰 우물이란 뜻으로 산 정상부에 이런 거대한 못이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인데 천
하가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해 있어 하늘의 우물인 천정(天井) 분위기도 물씬 풍긴다. 이곳은
물을 대줄 마땅한 수원(水源)도 없다고 하며, 어디서 그 많은 물이 나오는지 늘 물이 넉넉히
고여 있다. 특히 가뭄 때도 물이 가득하여 그 신비로움을 더욱 끌어올린다.

한우물은 다른 말로 천정, 용복, 용초 등으로 불리며, 신라 중기인 7~8세기 경에 축조되었다
고 한다. 현재 우물 자리 밑에서 신라 못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그 시절에도 못의 규모는 상
당하여 동서 약 17.8m, 남북 약 13.6m, 깊이 약 2.5m에 달했다. 이후 조선 때 그 위에 새롭게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의 장방형 우물을 구축했다.

1990년 봄, 한우물을 발굴할 때 12개 기종의 1,313점의 유물이 햇빛을 보고자 앞을 다투어 쏟
아져 나왔는데 그중
'仍伐內力 只來..' 글씨가 새겨진 청동 숟가락이 나와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열쇠가 되었다. 또한 지표에서 30cm까지는 백자 파편을 비롯한 조선 때 유물이 많이 나왔다.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3년 1월 전라병사 '선거이'가 권율 장군의 명으로 군사 4,000명을 이
끌고 호암산성에 머물 때, 이 우물을 군용으로 사용했으며, 세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
國輿地勝覽)에는
'虎岩山 有固城 城內有一池 天早祈雨 (호암산에 견고한 성이 있는데 성안에 연못이 하나 있어
일찍이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다)'
란 기록이 있어 평시와 전쟁 때는 군사 식수로 쓰고, 가뭄이
극성일 때는 기우제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비보풍수에 따라 서울의 화재를 막으
려는 방화용설(防火庸設)도 설득을 얻고 있다.
또한 석구지(石狗池)란 애칭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한우물에서 '석구지'라 쓰인 장대석이 나
왔기 때문이며, 여기서 동남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서 제2한우물터가 발견되었다.

한우물은 식수용으로 태어난 곳이지만 현재는 그의 보호를 위해 식수로는 쓰지 않는다. 우물
남쪽에는 갈대가 둥지를 트고 있어 운치를 드리우며, 북쪽에는 소나무 1그루가 우물을 거울삼
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이제는 무늬만 우물로 그의 보존을 위해 그 주위
로 돌난간과 철제 난간을 2중으로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한우물이 있는 곳은 호암산 남쪽 봉우리로 천하를 조망하기 좋은 곳이다. 시내가 한눈에 바라
보이는 벼랑에 조망대가 터를 닦고 있어 이곳에 서면 금천구를 비롯한 서울의 서남부와 경기
도 광명시, 부천시 지역, 멀리 인천과 서해바다까지 거침없이 바라보여 두 눈이 너무 호강을
한다. 우물 주변에는 벤치가 여럿 설치되어있어 천하를 바라보며 잠시 쉬어 갈 수 있다.

한우물은 처음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호였으나 1991년 호암산성과 제2우물터, 건물유적
을 한 덩어리로 묶어 사적 343호로 지정되었다. (지정명칭은 '서울 호암산성')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벽산5단지와 시흥동, 독산동, 광명시, 구로구 지역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시흥동 벽산아파트와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 광명시 지역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금천구와 구로구, 관악구, 영등포구, 양천구, 강서구 지역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④
호암산 북부와 관악구, 영등포구, 동작구, 용산구, 멀리 남산과
북한산(삼각산)까지

▲  불영암 대웅전(佛影庵 大雄殿)

한우물 옆에는 그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암자, 불영암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가파른 벼랑 위에 터를 다지며 속세를 향해 훤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호압사와 벽산
아파트단지, 호암로에서도 확 눈에 들어온다.

불영암의 내력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정보가 없어 파악하긴 힘들지만 관악산과 호암산의 기운
으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기도를 올리니 서울에 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런
것을 보면 호랑이가 담배타령을 하던 조선 초기부터 조그만 기도터가 있었던 모양이다. 게다
가 호압사가 보일 정도로 가까우니 호압사 승려가 늘 머물며 기도를 올린 모양이다. 보통 100
여 년 이상 묵은 절들은 그 내력을 담은 안내문을 절 앞에 당당하게 내걸지만 그런 것이 없는
것으로 봐서 1950년대 이후 기도처 자리에 지금의 절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 무지 짧은 손바닥만한 암자로 대웅전과 산신각(山神閣), 요사(寮舍)로 쓰이는 작은 건
물이 전부이며, 그나마 대웅전만 불전(佛殿)의 분위기가 진할 뿐이다. 게다가 절이 들어앉은
위치도 건물을 크게 짓거나 사세를 늘리기도 여의치 않은 협소한 수준이다. 허나 한우물이 곁
에 있어 물 수급은 어렵지 않고, 벼랑에 자리한 탓에 조망 하나는 몸살이 날 정도로 좋다. 그
러니 한우물과 휼륭한 조망, 그리고 기존의 기도처를 바탕으로 삼아 절을 세웠을 것이다.
이곳 높이는 해발 310m 정도로 서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절인데, 아
무리 벽산아파트가 키다리라고 한들 불영암 앞에서는 어림도 없다.

예전에는 대웅전과 요사만 있던 볼품 없는 모습이었으나 2009년 이후 대웅전 뒤쪽 바위에 커
다란 불두(佛頭)를 얹히고, 절 앞에 돌탑을 심어 돌탑거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2011년에는 제
2한우물터 주변에서 발견된 절구통과 맷돌, 모서리돌 등을 잠시 돌탑 앞에 두기도 했다. 특히
고려불화의 유일한 전수자인 승려 여지(如智)가 2005년에 그린 '104위 신중탱화(神衆幀畵)'가
있어 눈길을 끈다. (대웅전 내에 있음)

불영암은 한우물의 이웃으로 그를 지켜주고 있으며, 조망이 일품이라 서울 시내를 넓은 뜨락
으로 삼아 절의 규모는 눈송이지만 뜨락 하나만큼은 천하 제일이다. 게다가 대웅전 옆에는 보
기만 해도 정겨운 부뚜막을 설치해 검은 가마솥으로 밥을 짓고 있는데, 인근에서 가져온 나무
장작으로 불을 땐다고 한다. 부뚜막 옆에는 장작이 담을 이루고 있어 심산유곡의 화전민(火田
民) 마을에 들어선 기분인데, 부뚜막이 장작을 먹어 모락모락 구름을 피어내면 나도 모르게
시장기가 돌면서 입 안에 침이 고인다. 또한 나그네를 대상으로 국수와 부침개, 식혜, 커피
등도 팔고 있다.


▲  돌탑거리를 이루고 있는 불영암 앞길

▲  제2한우물터 건물터에서 발견된 절구통(절구석)과 맷돌

돌탑 앞에 놓인 절구통과 맷돌은 호암산성 군사들이 쓰던 것들로 시흥동 주민이 발견하여 불
영암에 알렸다. 그래서 불영암에서 2010년 이곳으로 수습했는데, 신라 또는 조선시대 것으로
여겨지며 다른 절구통과 달리 금, 은, 동, 철의 성분이 많이 들어있어 상당히 무겁다고 한다.
옆에 맷돌은 어처구니를 상실한 채, 열심히 돌아가던 왕년을 그리워한다. (저들의 보관 위치
는 변경될 수 있음)


▲  제2한우물터 부근에서 수습된 절구통(절구석)의 일부와 모서리돌
불영암 주지승과 처사(處士)가 발견한 것들로 신라 후기 것으로 여겨진다.
(저들의 보관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바위에 머리만 꽂은 불영암 석불(石佛)

대웅전 우측 바위에 2009년에 만든 석불이 서쪽을 굽어본다. 석불이라고 하나 바위에 커다란
불두만 심은 형태로 바위는 그의 자연산 몸뚱이가 되었다. 바위에 접착된 불두 주변에 하얀
석고 등이 가득해 다소 이질감은 들지만 장대한 세월의 흐름은 저들을 완연한 하나의 존재로
만들 것이다.
석불 앞에는 키 작은 소나무가 하늘로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옆으로 늘어져 있는데, 그 모습
이 마치 석불에 머리를 숙여 예를 표하는 듯 하다.

* 호암산성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산 83-1외
* 한우물, 불영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산93-2 (호암로 192, ☎ 02-809-3754)


▲  불영암 대웅전 내부
대웅전 내부는 조촐한 외부와 달리 장엄하다. 불단에는 석가여래가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대동하여 3존불을 이루고 있으며, 우측 벽에는 여지가 그린
104위 신중탱화가 빼곡히 자리를 채운다.

▲  예리한 칼날 같은 칼바위 (바로 밑이 벽산5단지)
서울을 위협하던 호암산의 날카로운 발톱은 아닐까?


한우물에서 불영암을 지나 5분 정도 내려가면 칼바위 조망대가 나온다. 바로 그 밑에 살짝 스
쳐도 피가 나올 것 같은 예리한 기세의 칼바위가 자리해 있는데, 가파른 산등성이에 아슬아슬
하게 자리해 있어 자칫 살짝만 건드려도 밑으로 쿨하게 굴러떨어질 것 같다. 이 바위는 위에
서 보는 것보다는 밑에서 봐야 그 위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데, 그 모습이 당장이라도 속세
를 향해 칼질을 벌일 것 같은 기세라 보기만 해도 조마조마하다.

이런 바위에는 옛 사람들이 붙인 그럴싸한 전설이 있기 마련이라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한토
막 전해온다.
때는 임진왜란 시절, 왜군이 시흥(始興) 고을까지 쳐들어오자 장사 1명이 혼자서 왜군을 때려
잡으며 분투를 벌였다. 이에 왜장이 시흥 장사와 턱걸이 내기를 해서 이기면 물러가겠다고 제
안을 했는데, 바로 이 칼바위에서 내기를 한 것이다.
왜군 장사는 99번을 하고 100번째 턱걸이를 하려는 순간 힘이 다해 바위 밑으로 떨어졌고, 그
때 바위의 끝이 쪼개져 나갔다고 전한다.
결국 시흥 장사가 이기자 왜군은 약속대로 후퇴를 하였고, 긴장이 풀린 장사는 소변을 보았는
데, 그 줄기가 얼마나 강한지 바위 한가운데가 움푹 패여 나갔다고 한다. 그 바위가 인근에
있는 팽이바위라고 한다.

칼바위가 세워진 틈새는 매우 좁아보이지만 속은 매우 넓어서 6.25시절에 이곳에 숨어 지낸
사람이 여럿 있었다. 허나 바위는 위치상 출입 통제구역이라 그것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  칼바위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벽산아파트와 시흥동,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 광명시
광명시 지역

▲  칼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②
(시흥동과 광명시 하안동, 소하동, 구름산과 가학산 산줄기)
이렇게 하여 늦가을 호암산 나들이는 다음의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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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달달한 숲길, 인왕산자락길 (청운문학도서관, 청운공원에서 수성동계곡까지)

 


' 서울 도심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 인왕산자락길 '

▲  인왕산자락길 (은행나무숲길)

▲  인왕산자락길 가온다리

▲  이빨바위

 


 

늦가을이 존재감을 진하게 드러내며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물들이던 11월의 어느 평화
로운 날, 인왕산 품에 숨겨진 인왕산자락길(숲길탐방로)을 찾았다.

인왕산자락길은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동쪽 자락에 닦인
둘레길로 2개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제1코스(2.7km)는 인왕산길을 졸졸 따라가는 탐
방로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인왕산길을 따라 사직단(사직공원)까지 이어진다.
경사가 거의 느긋하여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지 마음 편히 거닐 수 있으며, 시내와
도 무척이나 가까워 언제든 도시로의 탈출이 가능하다. 다만 인왕산길이 차량들 왕래가
빈번하다보니 비록 작은 소음이지만 종종 적막을 깨뜨린다.

본글의 주인공인 제2코스는 숲길탐방로(3.2km)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산길을 따라 이빨바
위, 가온다리, 수성동계곡 윗쪽을 거쳐 택견수련터(황학정 북쪽)까지 이어진다. 인왕산
길과 서촌(西村, 웃대) 주택가 사이에 자리한 길로 제1코스와 달리 차량의 눈치와 소음
걱정에서 벗어나 아늑하고 달달한 산길의 멋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오르락 내리락 굴곡
이 다소 있어서 약간은 힘들 수 있다. 하지만 다리만 멀쩡하면 삼척동자도 능히 완주할
수 있으니 걱정 따위는 인왕산 산바람에 날려보내기 바란다.

제2코스는 인왕산길(제1코스)과 서로 만날 듯 가깝게 거리를 두고, 경쟁을 하듯 펼쳐져
있다. (현실은 청운공원과 택견수련터에서만 만남) 아주 편한 길을 원한다면 제1코스를
, 차량의 눈치 없이 아늑한 산길을 꿈꾼다면 제2코스(숲길탐방로)를 이용하자. 특히 제
2코스에는 숨겨진 명소와 계곡, 약수터가 많고 풍경도 고우며, 서울 도심이 늘 옆에 파
노라마처럼 따라다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번 나들이는 제2코스를 이용하여 윤동주문학관에서 사직단(社稷壇, 사직공원)까지 이
동했다. 늦가을이 겨울 제국의 압박으로 생각보다 명이 짧아서 그가 지기 전에 그의 가
랭이라도 붙잡을 겸 서둘러서 찾았는데, 아직은 늦가을 풍경이 여전해 내 정처 없는 마
음과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오감(五感)을 크게 정화시켜 주었다. 역시 사람은 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이후 제2코스는 인왕산자락길이라 표시하며, 제1코스는 인왕산길로 표시함)


▲  윤동주문학관 앞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바로 앞에 붉은 뒷통수를 보인 주택들은 청운벽산빌리지이다.


 

♠  우리나라 최초의 한옥 공공도서관, 인왕산 동쪽 자락에 자리해
문학의 향기를 흩날리는 청운문학도서관 (청운공원)

▲  윗쪽에서 바라본 청운문학도서관

'한옥으로 지어진 도서관이 있다? 없다?'란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 될까? 2014년 11월 중순
까지는 '없다'로 해야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있다'로 바뀌었으니 그 정답을
바꾼 첫 현장이 바로 청운공원에 자리한 청운문학도서관이다.

윤동주문학관에서 청운공원, 인왕산자락길로 이어지는 2차선 길(자하문로35길)을 따라 3~4분
정도 가면 왼쪽(남쪽) 밑에 근래 지어진 산뜻한 한옥들이 모습을 비춘다. 처음에는 전통체험
공간으로 여겼으나 확인해보니 종로구에서 닦은 청운문학도서관이다. 콘크리트 건물이 진리를
이루고 있는 현실에서 한옥으로 도서관을 지을 생각을 하다니 그 생각이 참 기발하다. 그 발
상 덕분에 이 땅 최초의 한옥 공공도서관이란 근사하면서도 변치 않을 타이틀을 지니게 되었
다.

종로구가 '책읽는 종로만들기' 프로젝트를 야심차게 추진하면서 짜투리 공간을 활용하여 조그
만 공공도서관(일반 도서관 11곳, 문학 또는 예술로 특화된 도서관 7곳) 18곳을 지었는데 청
운문학도서관은 문학 특화 도서관으로 2014년 11월 19일에 문을 열었다.
종로구의 16번째 공공도서관으로 문학 특화 도서관이 된 것은 바로 옆에 윤동주문학관과 윤동
주시인의 언덕 등 현대 문학의 성지(聖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히 문학 특화의 목적
을 띄게 된 것이다. 그래서 종종 문학인과 명성이 있는 지식인을 초청해 문학 관련 프로그램
이나 강좌를 운영하고 있으며, 윤동주문학관과 한 덩어리를 이루며 도심 속 문향(文香)의 성
지로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이곳은 인왕산 동쪽 자락이자 청운공원 한복판으로 주변이 온통 싱그러운 자연에 감싸여 풍광
이 곱다. 그러다보니 정녕 이곳이 서울 도심 한복판이 맞는지 고개가 절로 갸우뚱거린다. 마
치 머나먼 산골로 순간이동을 당한 즐거운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변 자연과 흔쾌히 어우러진 모습과 한옥의 미를 잘 드러내고 있어 '서울의 아름다운
건물 찾기 공모전'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건물에 쓰인 기와는 돈의문(敦義門) 뉴타운 개발로
철거된 한옥 기와 중, 괜찮은 것 3,000여 장을 추려내 재활용했다.

도서관의 규모는 734.35㎡로 본관(지하 1층, 지상 1층)과 조그만 별당으로 이루어진 조촐한
모습이며, 열람석 수는 115석, 소장 서적은 21,985권(2018년 1월 1일 기준)이다. 도서관 이용
방법과 책 대출 방법 등은 다른 도서관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관련 홈페이지 참조), 10시부터
22시까지 운영을 한다. (일요일은 19시까지, 매주 월요일은 쉼)

굳이 책을 빌리거나 독서를 하지 않더라도 나들이로 잠시 들릴만하다. 주변에 청운공원과 윤
동주문학관, 윤동주시인의 언덕, 인왕산, 부암동, 창의문, 북악산, 서촌 등의 굵직한 명소가
많고 한옥으로 지어진 매력 때문에 북촌(北村)의 필수 관광지로 꼽히는 정독도서관처럼 자연
스럽게 명소처럼 되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4-20 (자하문로36길 40, ☎ 070-4680-4032~3)
* 청운문학도서관 홈페이지는 아래 '남쪽에서 도서관 본관' 사진을 클릭한다.

▲  남쪽에서 바라본 도서관 본관
본관 지하층 앞쪽에 주차장이 있다.

▲  운치를 더해주는 도서관 돌담


▲  청운문학도서관 본관

도서관 본관은 'ㄱ'자 모습의 팔작지붕 한옥이다. 겉으로 보면 1층 같지만 그 밑에 지하층을
품고 있어서 지상 1층, 지하 1층 규모를 이루고 있다. 지하는 서고(書庫), 지상은 열람실 및
교육 공간으로 쓰이며, 교육이나 강좌 프로그램이 없을 때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책을 읽으며
문향을 즐기면 된다.


▲  온갖 화초와 동물이 새겨진 도서관 담장의 위엄
이보다 우아한 도서관 담장이 또 있을까? 전통식 고급 담장에 충실하고자
다양한 화초와 동물 문양을 넉넉히 담아 넣었다.

▲  메마른 연못에 다리를 담군 1칸짜리 별당(別堂)

본관 서쪽에는 1칸짜리 별당이 자리해 있다. 별당 옆에는 연못이 있으나 내가 갔을 당시에는
물이 없는 휴업 상태였다. 만약 연못에 물이 차있고, 연꽃까지 두둥실 떠있었다면 그 운치가
몸살나게 죽여줬을 것이다.
별당은 늘 열린 공간으로 누구든 들어가서 책을 보면 된다. 가끔 명사들을 초청해 여기서 강
연이 열리기도 한다. 허나 이곳은 엄연한 도서관의 일원이기 때문에 대놓고 낮잠을 자거나 음
식을 섭취하는 행위 등은 하지 말자.


▲  탁자만 외로이 놓여진 별당 내부
여기서 책을 읽는다면 내용이 무엇이든 머릿속으로 술술 잘 들어올 것 같다.
그만큼 독서의 명당 자리이다.

▲  청운문학도서관 서쪽 출입구 (별당 옆에서 바라본 모습)

▲  붉게 타오른 단풍이 마중을 하는 청운문학도서관 서쪽 출입구
(바깥에서 바라본 모습)

▲  붉은 단풍이 진하게 아른거리는 청운공원 숲길 (인왕산자락길)
늦가을 단풍이 소리 없이 내려앉으면서 내 마음도 덩달아 알록달록 물들어간다.
(청운문학도서관 서남쪽, 인왕산자락길)

▲  늦가을의 붉은 수채화 속을 거닐다 (청운공원 인왕산자락길)

청운문학도서관 서쪽 출입구를 나오면 몸을 푸는 운동시설과 분수대가 있는 청운공원 서쪽 구
역이다. 여기서 오른쪽 산길을 오르면 인왕산자락길이 펼쳐진다. (인왕산길과도 연결됨)

청운공원은 종로구의 지붕인 인왕산 동쪽 자락에 자리를 닦은 공원으로 2007년에 인왕산 잡석
들을 모아서 만든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돌아파트)'와 2009년에 공원 동쪽을 떼서 만든 윤
동주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등이 있다. 2014년에는 청운문학도서관까지 지어지면서 공원
을 더욱 알차게 수식해준다.
도심보다 한층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탓에 서울 도심과 남산, 부암동, 홍지동 일대가 훤
히 바라보여 조망도 일품이며,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경계에 자리해 있어 바로 밑에 펼쳐
진 도심보다 청정한 공기를 자랑한다. 또한 서울 장안의 주요 해맞이 명소로 매년 1월 1일 아
침에 해맞이 축제가 열리며, 나무와 각종 꽃이 가득해 봄에는 벚꽃과 진달래, 개나리가 봄의
향연을 열고, 가을에는 오색영롱한 단풍잎이 가을의 향연을 베푼다.

청운공원 서쪽 구역에는 꿈의 분수라 불리는 바닥분수와 넓은 운동장이 있다. 꿈의 분수는 매
일 2회 조촐하게 분수쇼를 선보이는데, 그리 현란한 편은 아니며, 그냥 주변을 시원하게 해주
는 정도이다. 가동 기간은 4월부터 10월까지로 1차는 11시에서 13시까지, 2차는 15시부터 16
시까지이며, 겨울에는 무조건 쉰다. (가동 기간과 시간은 언제든 변경될 수 있음)
분수쇼는 전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분수와 어울려 물놀이를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니
그냥 눈으로만 보기 바란다.

* 청운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7-4 일대


▲  꿈의 분수가 있는 청운공원 서쪽 구역, 그 너머로 서울 도심이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  청운공원 서쪽 구역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의 위엄


 

♠  인왕산자락길 이빨바위에서 해맞이동산까지

▲  인왕산 이빨바위
그저 단단해 보이는 뚜껑돌 위에도 자연은 피어나고 있었다.
 

청운공원에서 인왕산자락길로 들어서 1굽이 지나면 이빨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검은 이빨을 드
러내며 발길을 붙잡는다.
바닥에 누운 커다란 암석과 뚜껑돌처럼 놓인 암석 중간에 마치 동물의 이처럼 생긴 부분이 있
어 눈길을 끄는데 그로 인해 이빨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자락길을 닦으면서 발굴
된 것으로 나도 그의 존재는 처음인데 사람의 틀니나 해골의 입처럼 보이기도 하며, 배가 고
파서인지 모르지만 햄버거처럼 보이기도 한다. 제 눈이 안경이라고 사람마다 눈에 비치는 모
습이 다 같을 수는 없다.

이처럼 잘생기거나 요상하게 생긴 바위에는 꼭 믿거나말거나 전설이 있기 마련이나 눈썰미가
좋은 옛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는지 그에게 깃든 전설은 딱히 없다. 다만 자락길을
닦으면서 초반에 종로구청에서 인왕산 치마바위와 인연이 깊은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와 중
종(中宗)의 이야기를 어거지로 지어서 당당하게 안내문까지 부착했는데, 그 내용이 실로 개판
에 똥판 수준이라 말들이 많자 그 안내문을 떼어버렸다. 대신 '건강한 치아는 오복 중의 하나
! 이빨바위를 보며 건강과 평안을 빌어보십시오'
란 조그만 돌 표석을 달았다. 차라리 엉터리
전설보다는 돌 표석 안내문이 훨씬 깊이가 있어 보인다.


▲  이빨바위 남쪽 쉼터 (운동시설이 여럿 있음)

▲  소나무 숲 사이로 바라보이는 서촌(웃대)과 서울 도심
자락길을 한 굽이 넘을 때마다 서울 도심은 조금씩 모습을 달리한다.

▲  조그만 계곡(청풍계로 여겨짐)을 건너는 나무데크 탐방로
(청운마루와 이빨바위 사이)

인왕산은 단단하게 생긴 바위 산이라 계곡과 샘터가 거의 없을 듯 싶지만 겉보기와 달리 많은
계곡과 샘터를 지닌 부드러운 산이다. 다만 서울 도심에 자리한 탓에 개발의 칼질이 계곡을
마구 끊어버리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거의 없을 뿐이다.

인왕산 품에는 2012년에 복원된 수성동계곡을 비롯해 백운동(白雲洞), 청풍계(淸風溪), 청계
동천(淸溪洞天), 옥류동(玉流洞) 등 서울 장안의 경승지로 명성을 날렸던 계곡들이 많다. 허
나 수성동(水聲洞)을 제외하면 다들 조그만 편이며, 수성동 상류와 홍제동 환희사계곡이 그나
마 제대로 남아있다. 그 외 계곡들은 주택가 등 시가지 확장으로 모조리 강제 생매장을 당해
산 속 상류에만 여리게 물줄기가 남아있을 뿐이다. 인왕산자락길은 시내에서 모두 실종된 듯
보이는 인왕산 서촌(웃대) 방면 계곡들의 상류를 거의 만나볼 수 있는 소중한 현장으로 인왕
산을 달리 보는 계기를 선사해준다.

청운마루 직전에 이르면 넓게 닦인 나무데크 공간이 나온다. 그 밑에도 조그만 계곡이 가늘게
흐르고 있는데, 위치를 봐서는 청풍계(淸風溪) 상류로 짐작된다.
조선 중기 인물인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청풍계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주변 풍경이 수
려해 청풍각(淸風閣)이란 별도의 건물을 지었다. 바로 그 건물로 인해 이곳 계곡이 청풍계란
간판을 달게 되었고, 청풍계와 인근 백운동의 이름을 따서 청운동이 되었다. <옛날에는 장동(
壯洞)이라 불림>

이곳 역시 주택가에 이르러서는 강제 생매장을 당해 청계천으로 흘러가며, 계곡 왕년의 모습
은 겸재 정선
(謙齋 鄭敾)이 그린 장동8경첩에 잘 남아있다.


▲  인왕산자락길의 구름다리인 가온다리

청풍계 추정 계곡을 건너 고개를 넘으면 '청운마루'라 불리는 나무로 다진 조망대가 있고, 바
로 조망대 정면(남쪽)에 인왕산자락길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가온다리가 펼쳐져 있다.
그는 일종의 흔들다리로 지방의 산이나 호수, 섬에서나 볼 수 있는 관광용 흔들다리가 이렇게
서울 도심에 버젓히 나타나 내 앞에 아른거리니 '서울에서 이제 흔들다리나 구름다리를 다 보
는구나~! 내가 너무 오래살았나?' 그저 충격과 놀라움 그 자체였다.
흔들다리의 성지인 파주 감악산(紺岳山), 원주 소금산, 청양 천장호 등 스케일이 큰 흔들다리
만은 못해도 서울에 거의 흔치 않은 흔들 구름다리로 흔들다리의 이름값은 하고 있으며, 이곳
이 깊은 협곡을 이루고 있어 눈요기도 시킬 겸, 이렇게 높이 구름다리를 닦은 것이다.

처음에는 다리 이름이 딱히 없었으나 언제부터인가 '가온다리'란 간판을 달게 되었는데, 사람
의 중량과 다리를 흥분시키는 정도에 따라 흔들리는 강도가 조금씩 다르다. 가벼운 사람이 건
너면 거의 미동 정도로 흔들리고, 무게가 좀 있거나 다리를 막 건드리면 조금은 출렁거려 사
람에 따라 염통이 쫄깃해지는 짜릿함도 느낄 수 있다.


▲  북쪽에서 바라본 가온다리

다리 저 밑에는 계곡이 흐르고 있는데, 위치를 봐서는 옥류동(玉流洞)계곡으로 여겨진다. 옥
류동에는 청휘각(晴暉閣)이란 유명한 정자가 있었는데, '청휘'란 이름은 '비가 개인 뒤에 맑
은 햇살이 비추는 누각'이란 상큼한 뜻으로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집 후원에 지었다.
이후 옥류동의 대표 명소로 이름을 날렸고,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8경첩에 그 존재가 남겨져
있다.
그토록 아름답던 청휘각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흔적 조차 더듬기 어렵게 되었고, 옥류동
도 왕년의 위엄을 잃은 채, 인왕산 숲속에서나 겨우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
고보면 인왕산은 20세기를 거치면서 인간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상실 당했다. 게다가 서울 도
심에 자리해 있으니 그 희생의 정도는 매우 컸다.


▲  남쪽에서 바라본 가온다리

▲  가온다리 남쪽에서 바라본 청운동(淸雲洞) 지역과 북악산(백악산)
그들 너머로 북한산(삼각산) 남쪽 줄기가 살짝 모습을 비춘다.

▲  남쪽 밑 계단에서 바라본 가온다리

▲  청와대를 꿈꾸는 청와마루

가온다리를 건너 고개 1굽이를 넘으면 청와마루가 마중한다. 이곳은 청와대가 정면에 보이는
위치라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청와대와 함께 서촌(웃대)과 북악산(백악산), 서울 도
심부가 사이 좋게 시야에 들어온다.


▲  청와마루에서 바라본 서촌(웃대)과 북악산, 청와대

▲  숲 너머로 보이는 서울 도심 (청와마루 남쪽)

숲 사이로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도심이 모습을 비춘다. 인왕산자락길은 서
울을 잊게 할 정도로 싱그러운 산길이나, 번잡한 도심이 늘 옆에 머물며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는다. 마치 이곳이 시골이 아닌 서울 한복판임을 잊지 말라는 듯이...


▲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은행나무숲길

버드나무약수터와 청와마루 사이에는 은행나무가 조촐히 우거진 숲길이 있다. 비록 숲길의 거
리는 얼마 되지 않으나 은행잎이 황금 비단처럼 깔려 있으니 대자연 형님의 초청을 받아 잔칫
집이나 연회장에 들어서는 기분이다. 그만큼 감동의 너울은 컸다. 이곳의 아름다움은 두고두
고 망막과 가슴 속에 은은히 남아 아른거렸고 그들이 그리워 이후에도 여러 번 찾아왔다.


▲  은행잎이 깔린 은행나무숲길
땅바닥에 귀를 접고 누워있는 은행잎과 온갖 단풍잎들, 우리는 그들을
우울한 이름의 두 글자 '낙엽'이라고 부른다.

▲  은행나무숲길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

▲  버드나무약수터 체육시설

은행나무 숲길에서 1굽이 지나면 버드나무약수터 체육시설이 마중을 한다. 옥인동(玉仁洞) 주
민들의 체력 단련을 위해 닦여진 것으로 늦가을 절정에 잠긴 나무들이 흩날린 누런 낙엽과 은
행잎이 바닥을 잔잔히 덮으며, 흙길의 촉감을 부드럽게 해준다.


▲  샘터의 기능을 잃은 옛 버드나무약수터

버드나무약수터는 인왕산의 유명 약수로 위엄을 떨쳤던 샘터이다. 허나 부적합 판정으로 샘터
의 기능은 끊겼고, 대신 남쪽에 새로 샘터를 파서 버드나무약수터란 간판을 달았으나 그 역시
약수의 기능을 상실해 생태연못으로 새롭게 살아가고 있다.


▲  좁은 샘터에서 유유자적 살고 있는 물고기들
저들은 무엇을 먹고 살아갈까? 좁은 샘터에 마땅한 수초도 없을텐데 말이다.

▲  늦가을도 몸을 푸는 버드나무약수터 체육시설 주변

▲  약수터의 추억을 지닌 옥인동(玉仁洞) 생물서식공간

이곳은 원래 버드나무약수터로 사진에 보이는 돌거북이 인왕산이 빚은 물을 열심히 베풀고 있
었다. 허나 세월을 너무 안좋게 타서 부적합 빨간 딱지를 받게 되었고, 끝내 딱지를 벗어나지
못하자 약수터 폐쇄 대신 여기서 나오는 물을 활용해 그 앞에 조그만 생태연못을 만들어 옥인
동 생물서식공간으로 삼았다. 그래서 조금은 어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약수터가 생태연못(생태공간)으로 거듭난 현장으로 이런 예는 천하에서 이곳이 거의 유일할
듯 싶다.


▲  버드나무약수터에서 수성동으로 이어지는 인왕산자락길

▲  해맞이동산 북쪽 인왕산자락길


 

♠  인왕산자락길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수성동까지)

▲  낙엽이 짙게 깔린 산들수목원약수터 해맞이동산

산들수목원약수터는 버드나무약수터와 수성동 사이에 자리해 있다. 약수터 이름치고는 좀 긴
편으로 단순히 이름만 봐서는 산들수목원에 깃든 약수터로 착각할 수 있으나 그런 이름의 수
목원은 여기에 없으며, 수목원 같은 시설도 전혀 없다. 어찌하여 속칭 낚시성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직까지는 수질이 양호하여 마셔도 무리는 없다.


▲  산들수목원약수터

마침 주변에 있던 아저씨들이 인왕산에서 제
일로 물맛이 좋다며 1모금 권하길래 졸고 있
는 바가지를 깨워 마셔보았다. 약수터는 수도
꼭지로 물을 통제하고 있어 물을 마시려면 꼭
지를 돌려야 된다. 그러면 물이 쏴~ 쏟아진다. 
물을 마셔보니 딱히 특별한 맛은 느껴지지 않
는 이 땅에 흔한 약수 맛이다.

약수터 주변에는 '해맞이동산' 표석이 있는데, 해맞이에 걸맞게 동쪽을 향하고 있다. 여기서
는 매년 1월 1일 해맞이행사가 열린다.


▲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서촌, 남산,
그리고 푸른 하늘

▲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수성동으로 넘어가는 인왕산자락길
늦가을 단풍이 곱게 자연산 터널을 이루며 산책의 흥을 돋군다.

▲  자연산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수성동계곡 상류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자락길을 따라 고개를 넘으면 수성동계곡 상류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는 인왕산길에서 내려오는 산길과도 만나는데, 상류는 복원된 계곡 중심부와 달리 거의 자연
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자연산 바위와 온갖 잡석이 좁은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고,
그 사이를 인왕산이 베푼 계곡물이 거의 소리도 없이 흘러간다.
이곳은 청계천의 주요 발원지이기도 하며 수질이 양호해 도룡뇽, 가재, 개구리, 버들치 등이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좁은 계곡이나 그들에게는 이만한 보금자리가 없을 것이다.

계곡 주변은 나무가 무성하여 한여름에도 더위를 잊게 하며, 산길을 따라 1분 올라가면 인왕
산길(석굴암입구)이 나오고, 반대로 2분 정도 내려가면 수성동계곡 중심부와 그를 내세운 공
원이 나온다.


▲  수성동계곡의 또다른 상류

수성동의 상류는 3개 정도 된다. 석굴암에서 오는 계곡과 그 남쪽에서 오는 계곡, 인왕천약수
터에서 오는 계곡이 서로 상류를 자처하며 수성동으로 내려온다. 수성동은 이들을 통해 인왕
산의 맑은 물을 접수받아 청계천으로 흘려보낸다.

상류 계곡들은 계곡 중심부와 달리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이 계곡 역시 바위
틈의 좁은 협곡을 타고 물이 내려온다. 수량이 많으면 폭포도 신이 나고 폭포 밑에도 많은 물
이 고여 조촐히 담(潭)을 이룰텐데, 가을 가뭄이 풍년 수준이라 간신히 물만 축이는 실정이다
. 물과 흙이 있어야 될 자리에는 잡초만 무성해 폭포의 위기감을 더해준다.


▲  협곡을 그리며 내려오는 수성동의 또 다른 상류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온 계곡


인왕산에서 제법 이름이 있는 인왕천약수터도 수성동에 물을 보태고 있었다. 이 물줄기는 거
의 90도 각도가 진 암벽 사이의 좁은 공간을 타고 내려오는데 그 풍경이 나름 절경을 이루며,
조그만 폭포 앞에는 얕은 못과 모래밭이 있어 어린이들이 흙장난을 하며 놀기에 아주 적당하
다.
모래 옆과 다리 주변에 돌로 쌓은 인공의 흔적이 조금 끼어있어 약간의 어색함을 주나 그 외
에는 예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 수성동 상류의 원초적 모습을 살피는데 도움을 준다.


▲  수성동 중심으로 내려가는 상류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온 물줄기)

▲  수성동 풍경을 더욱 돋보이게 꾸며주는 사모정

수성동계곡 한복판에는 이곳의 구수한 양념인 사모정이란 네모난 정자가 자리해 있다. 사모정
이란 네모난 정자를 뜻하는 것으로 달랑 1칸 크기의 아주 조그만 팔작지붕 건물이다.
새색시처럼 단아한 모습으로 계곡을 굽어보고 있는 그는 옛날부터 이곳을 스쳐갔던 정자는 절
대 아니며 계곡을 복원하면서 장식용으로 달아놓은 것이다.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에도 정
자는 나와있지 않고, 수성동 관련 기록에도 정자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허나 계
곡과 나무만 있는 계곡에 전통 양식의 정자(亭子)를 하나 두니 수성동의 풍경이 한층 더 살아
나는 것 같다. 그럼 여기서 수성동에 대해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  사모정 앞을 흐르는 수성동계곡 - 서울 지방기념물 31호

인왕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수성동계곡은 인왕산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서울의 주
요 경승지로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와 한경지략(韓京識 略) 등에 서
울 명승지로 절찬리에 언급된 곳이다. 이 계곡을 예로부터 수성동(水聲洞)이라 불렀는데, 이
는 계곡에 있는 '기린교' 돌다리 밑에 물소리가 청아하고 좋기로 명성이 자자하여 유래된 이
름이다.

수성동계곡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유명한 겸재 정선(鄭敾)이 그린 장동팔경첩(壯洞八景
帖), 즉 장동(壯洞) 지역에 이름난 명소 8곳을 그린 그림의 '수성동'이란 제목으로 어깨를 피
고 등장한다. 여기서 장동은 효자동(孝子洞)과 청운동 일대로 북촌과 더불어 왕족과 사대부(
士大夫)들이 앞다투어 집과 별장을 지었던 금싸라기 땅이다. 특히 이 지역에는 인왕산과 북악
산이 빚은 절경이 많은데, 그중에 장동8경이 대표적이다. (지금은 수성동과 창의문, 대은암
바위글씨 정도만 남아있음)

수성동에 가장 먼저 집을 지은 귀족은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다. 그는 계
곡 아랫쪽 기린교 부근에 비해당(匪懈堂)이란 집을 짓고 살았는데, 나중에 창의문 북쪽에 무
계정사(武溪精舍)란 별장까지 장만했다.
영조(英祖) 시절에는 겸재 정선이 인왕산을 모델로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란 그림
을 남기면서 수성동을 비롯한 장동8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수성동 그림은 계곡 복원에 아주 큰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그 그림에는 기린교를 건넌 선비 3명과 시중을 드는 동자(童子) 1명이
계곡 상류로 걸어가는 모습이 담겨져 있고, 가벼운 붓놀림으로 이끼가 끼어있는 바위와 질감
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도 비오는 날에 이곳을 찾아 '수성동 빗
속에서 폭포를 구경하다(水聲洞 雨中觀瀑)'란 시를 지어 수성동을 격하게 찬양했다.

이 계곡은 첩첩한 산주름 속이 아닌 도성(都城) 안에 자리하여 접근성 또한 아주 착했다. 그
래서 사대부 외에도 중인과 평민들도 많이 발걸음을 했는데, 인근 송석정(宋石亭)과 더불어
조선 후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위항문학(委巷文學, 중인/평민/서얼들이 주도하는 문학활동)
의 성지(聖地)로도 명성을 날렸다.


▲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 (기린교 돌다리가 그려져 있음)

이렇게 인왕산을 든든한 후광으로 두르며 장안의 경승지로 인기를 누렸던 수성동은 1960년대
이후 개발의 칼질이 정신없이 그어지면서 아작나기 시작했다.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 9동이
건방지게 수성동계곡을 깔고 앉았던 것이다. 하여 참으로 아름답고 착했던 수성동의 경관은
99% 망가지고 말았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인근 청풍계나 옥류동처럼 계곡이 거의 증발하는 꼴은 면했지만 아파트
로 인해 계곡 폭도 줄어들고 아파트 사이를 마치 버려진 하천처럼 흘러가면서 완전 천덕꾸러
기 신세가 되어버렸다. 아파트 9동 앞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해 어두컴컴한 지하를 거쳐 역시
나 생매장된 청계천으로 서글프게 흘러가야 했으며, 수성동 뿐만 아니라 도심의 많은 경승지
들이 인간의 욕심 앞에 큰 고통을 받으며 꽃잎처럼 지고 말았다.

그 이후 수성동의 이름 3자는 속인(俗人)들의 뇌리 속에서 점차 시들어가고 동네 사람들만 세
월의 저편으로 잊혀져 가던 계곡의 이름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서울 전문을 자처하는 본인
역시 수성동의 존재를 안 것은 2011년, 그 이전에는 인왕산에 이런 곳이 있는 것도 몰랐고 그
런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존재감이 밑바닥을 기었던 것이다.
 
옥인시범아파트에 깔린 채, 40년 가까이 고통스럽게 살았던 수성동계곡. 개발의 칼질에 빼앗
긴 계곡에도 과연 봄이 올 것인가? 이러다가 수성동 이름 3자가 영구히 지워지는 것은 아닐까
?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계곡을 해방시킬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수성동에게는
절망의 시절이었다.
허나 자연과 인간의 대결에서 거의 자연이 이기듯, 수성동에게도 좋은 소식이 날라왔다. 옥인
아파트가 2008년 재난안전위험시설 C급으로 지정되면서 철거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수성동
의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서울시는 아파트를 밀어버리고 계곡을 복원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우
선 2010년 10월 21일 기린교를 비롯한 수성동계곡 일대를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삼아 늦게나마
문화유산으로 대우를 해주기 시작했다.
이후 인왕산을 가리며 계곡의 목을 조르던 옥인아파트는 입주민을 싹 내보내고 2011년까지 모
두 철거되었으며, 아파트 주변을 통제하고 1년의 복원공사를 벌여 2012년 7월 마무리되었다.

계곡 복원을 위해 전문가와 사회단체, 문화재청에 자문을 구했고 정선의 수성동 그림을 적극
참조했다. 또한 옛 경관을 어느 정도 재현하고자 소나무를 중심으로 상수리나무, 참나무, 산
철쭉 등 우리 고유의 나무 18,477그루를 심었으며, (그중에 구부러진 소나무가 제일 많음) 돌
단풍과 바위취 등 다양한 화초를 심어 주변과의 조화를 꾀했다.
그리고 좁아진 계곡을 크게 넓혀서 계곡 양쪽에 전통 방식으로 돌을 쌓아 암석 지형을 최대한
회복하고자 했으며, 계곡 중간에 전통식 정자를 세워 선비와 지배층의 풍류를 조금이나마 느
끼도록 했다. 그리고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곳으로 추정되는 계곡 아랫쪽(기린교 동쪽)
에 관람공간을 조성해 정선의 눈으로 계곡을 바라볼 수 있게끔 했으며, 계곡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산책로를 닦아 인왕산과 어우러진 시민공원의 성격도 겸하게 했다.

수성동계곡 공원에는 복원된 계곡을 비롯하여 이곳의 터줏대감이자 유일한 오래된 존재인 기
린교가 있으며, 옥인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공원 북쪽에 아파트의 잔재를 일부 남겨 수성
동을 거쳐간 개발 지상주의의 그릇됨을 일깨우게 했다.
상류 부분과 사모정 주변은 계곡 출입이 그런데로 가능하나 계곡 하류와 기린교 주변은 통제
하고 있다. 게다가 계곡을 복원했다고는 하지만 완전 옛날 모습은 아니며 여전히 비슷한 자리
(옛 옥인아파트 9동 자리로 지금은 계곡 관람공간으로 바뀜)에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해 청계
천으로 흘러간다.
청계천까지 이어지는 전 구간을 모두 끄집어내어 복원하면 좋겠지만 이미 시가지가 꽉 들어차
거의 불가능하다. 계곡이 생매장되는 구역은 계곡이 상당히 밑으로 내려간 상태이고, 주변 바
위들도 날카로운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어 사고의 위험이 있다. 기린교 같은 경우는 계곡이 3m
밑에 흐르고 있으므로 조금 아찔하다.

도시 개발의 칼질에 희생된 수성동은 개발의 난도질이 무조건 능사가 아님을 보여준다. 안그
래도 사람도 허벌나게 많고, 빌딩도 많고, 공기도 탁한 서울 도심에 마음 편히 의지할 수 있
는 공간이 하나 더 생겼으니 그 가치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비슷하다 할 것이다.
비록 완전하게 복원된 것은 아니나 가급적 옛 모습을 되살리고자 했고, 복원공사를 벌이는 중
에도 여러 의견을 수렴해 어색함을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그래서 인왕산이 베푼 옥계수를 모
아 계곡을 재현했으니 어설프게 재현되어 전기와 세금만 축내는 청계천과 달리 살아있는 계곡
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79-1, 185-3외


▲  도심을 향해 흘러가는 수성동계곡 (사모정 주변)

인왕산자락길은 수성동계곡 상류를 지나간다. 이번은 어디까지나 자락길이 중심이라 그가 지
나는 부분만 살폈을 뿐, 기린교를 비롯한 나머지는 모두 통과했다. 수성동은 이미 20번을 넘
게 가본 곳이고 자락길 종점까지 아직 갈 길이 멀기 때문에 굳이 자세히 살펴볼 필요는 없었
다.


▲  수성동에서 남쪽으로 넘어가는 인왕산자락길
내용 분량 관계로 본글은 여기서 마무리를 짓는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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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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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11월 2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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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남쪽 지붕, 관악산 늦가을 나들이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사당능선, 거북바위, 관음사]

 


' 늦가을 관악산 나들이 (낙성대역에서 관음사까지) '

관악산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  관악산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관음사국기봉

▲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  관음사국기봉

 


 

늦가을이 절정의 끝을 보이던 11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관악산(冠岳山)을 찾았다. 관
악산이라고 해서 관악산 정상인 연주대(戀主臺)까지 올라간 것은 아니고 사당능선의 관음
사국기봉까지만 짧게 탔는데, 사당능선 북쪽에 숨겨진 봉천동 마애불 생각이 모락모락 피
어올라 오랜만의 그의 얼굴도 볼 겸, 간만에 관악산의 품을 찾았다. 봉천동마애불은 대학
교 재학 시절인 2004년에 2번 찾은 것이 끝이다.

오후 2시에 낙성대역(2호선)에서 후배를 만나 분식집에서 김밥과 만두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길을 재촉했다. 서울대로 들어가는 관악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인헌아파트까지 좀
편하게 가려고 했으나 밥을 먹는 사이에 그만 그 중요한 대중교통 환승할인시간이 초과되
고 말았다. 하여 편하게 갈 생각을 쿨하게 버리고 뚜벅뚜벅 걸었다. 어차피 걸으러 온 것
이니 1.6km를 더 걷는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은 없다.


 

 

♠  관악산 입문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  수목이 빽빽하게 우거진 관악산 산길

인헌아파트는 낙성대와 서울대 호암교수회관 중간 산자락에 자리한 3동 규모의 조촐한 아파트
이다. 아파트의 이름인 인헌(仁憲)은 관악구 출신으로 귀주대첩의 영웅인 강감찬(姜邯贊)장군
의 시호로 이곳이 정녕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이 맞는지 고개가 절로 갸우뚱거릴 정도로 산
속에 묻혀있어 마치 외딴 산골 아파트 같은 분위기이다.

아파트 가게에서 음료수로 목을 축이고, 봉천동 마애불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를 따라 관악산
의 품으로 들어선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산길도 예전과 달리 조금 정비가 되었고, 마
애불을 알리는 이정표도 산길 입구에 세워져 있어 산꾼과 답사꾼의 길눈이 되어준다. 여기서
관악산 연주대까지는 대체로 1시간 40~50분 정도 걸리며, 마애불까지는 25~30분 정도이다.


▲  100m 고지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대 호암교수회관 주변과 관악구 지역)
이제 몇 걸음 시작한 상태라 보이는 범위는 매우 좁다. 첫술에 벌써부터
배가 부를 수는 없겠지.

▲  100m 고지에서 바라본 천하 (인헌동과 사당동, 강남 지역)

▲  울퉁불퉁 산길
마애불로 인도하는 산길은 상당수 느긋한 수준이다. 가끔 흥분한 산길도 튀어나와
숨을 헐떡이게 하지만 그렇게 염려할 정도까지는 되지 않는다.

▲  솔내음이 나래를 펼치는 관악산의 푹신한 산줄기

▲  200m 고지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대와 삼성산, 호암산 줄기)
하늘과 불과 100m 가까워졌을 뿐인데, 조망의 품질은 그만큼 높아졌다.

▲  봉천동 마애불 남쪽에 자리한 상봉약수터 쉼터

인헌아파트에서 25~30분 정도 오르면 250m 고지에 자리한 상봉약수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약
수터 주변에는 온갖 운동 시설과 의자가 놓여져 있어 잠시 몸을 풀며 쉬어가기에 좋다 산속의
아늑한 쉼터로 인근 낙성대동과 인헌동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속세에 지친 심신을 달랜다.
약수터는 원래 봉천동 마애불을 품은 바위 남쪽에 있었으나 이번에 와보니 샘터가 서남쪽으로
옮겨졌다. 아마도 수맥의 문제가 있어서 그런 듯 싶으며, 샘터 주변에 천막을 설치했다. 허나
가는 날이 문닫는 날이라고 약수는 붉은 색의 부적합 판정 도장을 받은 상태.. 거기다가 늦가
을 가뭄으로 물도 말라버려 도저히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물이 풍부하게 나오고 수질만 보
장이 되었다면 전혀 나무랄 데가 없는 100점짜리 안식처가 되었을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이
러다가 이 약수터도 영영 목숨이 끊기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  물이 말라버린 상봉약수터

▲  상봉약수터에서 마애불로 가는 산길

상봉약수터까지 왔다면 봉천동 마애불은 다 온 것이다. 약수터 북쪽에는 큰 바위가 누워있는
데 그 서쪽 옆구리로 가늘게 이어진 산길이 있다. (찾기는 쉬움) 바위를 오른쪽에 바짝 두고
산길을 조금 더듬으면 검은 피부의 문화유산 안내문과 봉천동 마애불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  봉천동 마애불의 거처

▲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磨崖彌勒佛坐像)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9호

활활 타오르는 불 모양으로 서울을 굽어보는 관악산, 그 북쪽 산자락에 관악산의 은자(隱者)
인 봉천동 마애미륵불이 살짝 깃들여져 있다. 상봉약수터 북쪽에 있는 아주 큰 바위 서쪽 면
에 조용히 자리한 그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서울의 100년 이상 묵은 8개의 마애불(磨崖
佛) 가운데 유일하게 한강 이남에 있다.
이곳은 첩첩한 산주름 속으로 접근성이 영 좋지가 않고, 산길을 기본으로 30분 정도 타야 된
다. 다행히 산길은 느긋한 수준이라 그나마 다행인데 외딴 곳에 있다보니 인지도도 밑바닥이
라 그야말로 아는 사람만 살짝 찾아오는 숨겨진 명소이다.

2004년에 2번 인연을 지은 이후 10여 년 만에 방문으로 그새 나는 그만큼 나이가 누적되었으
나 마애불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니 그의 정정함이 부러울 따름이
다. 그가 이토록 정정한 것은 자리가 좋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에는 추운 바람과 눈을, 여름
에는 비를 피하기가 좋으며, 서쪽에서 뜨는 햇님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기에 좋다.

이 마애불은 1630년에 박산회(朴山會)란 사람의 시주(施主)로 조성되었다. 아주 고맙게도 마
애불 옆구리에 조성 관련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그의 정보를 소상히 알 수가 있는데, 명
문에는 '彌勒尊佛 崇禎三年 庚午四月日 大施主 朴山會'라 쓰여 있다. 이를 통해 마애불의 정
체가 미륵불이며, 1630년(숭정 3년) 경오년 4월 박산회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렇게 1630년이라는 절대 연대(年代)를 가지고 있어 조선 중기 불상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
주며, 17세기 마애불을 대표하는 존재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만약 명문이 없었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보다 한참이나 깎였을 것이다. 

대시주 박산회가 어떤 인물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름 앞에 관직이나 작위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평민이나 양반으로 여겨지며, 멀리갈 것도 없이 관악산 밑 금천(衿川) 고을에 살던 사람
으로 파악된다. 그러니까 관악산 외딴 산골에 마애불을 지었을 것이다.

마애불이 의지하고 있는 바위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백성들의 산악신앙(山岳信
仰)의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마애불은 아
무 바위에나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마애불의 정체가 미륵불이라 미륵신앙(彌
勒信仰)이 그 시절 백성들 사이에서 적지 않게
유행하고 있었음을 살짝 귀뜀해준다.
당시 무능했던 인조(仁祖)와 서인(西人)패거리
의 잘못된 국정(國政)과 대외정책으로 나라가
아주 어지럽던 시절이라 이렇게 미륵불을 짓고
자신과 집안의 안녕을 빌며 의지했던 것이다.



   ◀
  미륵불 옆에 선명하게 새겨진 명문


▲  고독을 즐기는 봉천동 마애불

마애불은 바위에 선각(線刻)으로 새겨져 있는데, 머리 스타일은 민머리로 상투 모양의 무견정
상(無見頂相)이 아주 낮게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길고 갸름한 편으로 표정이 썩 밝아보이지
는 않는다. 당시 백성들의 원망이 담겨진 탓일까? 아니면 고독하고 적적한 삶에 지쳐서일까? 그런 얼굴에는 눈썹과 눈, 코, 입이 새겨져 있으며, 입술이 좀 두껍다. 그리고 두 귀는 어깨
까지 축 늘어져 중생들의 소리를 듣는다.
둥글게 깎인 어깨는 작은 편으로 가슴 위를 훤히 드러내고 있는데, 두 가슴이 크게 쳐진 모습
이다. 미륵불은 분명 남자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는 여자인 것일까? 표정도 가만 보면 나이도
제법 깃든 비구니처럼 보이기도 한다. 몸을 감싸고 있는 옷은 어깨와 가슴 아래, 다리를 덮고
있으며, 얼굴 뒤에는 2겹으로 된 두광(頭光)이, 몸통 뒤에는 신광(身光)이 동그란 선을 보이
며 그를 비춘다. 불상 밑에는 연꽃이 새겨진 대좌(臺座)가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신체 비율도 거의 맞아 떨어지고, 조각 수법도 제법 뛰어나 적지 않은 감동
을 선사한다. 국가 보물로 삼아도 손색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허나 미륵불은 그런 시
시콜콜한 속세의 일에는 관심이 전혀 없을 것이다. 56.7억년 이후에 온다는 자신이 중심이 되
는 미륵세계를 어떻게 구상할까 머리와 마음 속에는 온통 그 생각 뿐이니 말이다.

미륵불이 너무 외진 곳에 있어 그의 신상이 적지 않게 염려가 된다. 불온한 자들이 마음만 먹
으면 무슨 짓을 벌이기에 좋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처럼 흉흉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이곳까지 전기를 가져와 CCTV를 달기도 어려울 것이고 참 난감하다. 그저 상봉약수터를 자주
찾는 사람과 마애불 단골 고객들, 그리고 달과 별이 지킴이가 되어 잘 지켜주기를 바랄 수 밖
에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산4-9


▲  봉천동 마애불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대와 관악구 지역)
속세의 소리가 소슬바람을 타고 이곳까지 살며시 날라온다.


마애불 앞에는 절을 할 수 있는 조촐한 공간이 있다. 돌바닥이 약간 경사가 있을 뿐, 절을 하
는 데는 그리 무리는 없으며, 성인 3명 정도 앉으면 자리가 거의 꽉 찬다. 그 앞에는 낮은 벼
랑과 바위가 있으며, 그 바위에 발을 딛으면 서울대와 낙성대 등 관악구 지역이 훤히 바라보
여 조망도 제법 괜찮다.
봉천동 마애불과 오랜만에 상봉의 인사를 나누며 10분 정도 머물다가 언제가 될 지 모를 다음
인연을 기약하며 그를 떠났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이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스쳐
가는 수많은 존재의 하나일 뿐이며, 그도 나에게는 이번 나들이의 엄연한 중간 경유지일 뿐이
다.

상봉약수터에서 7~8분 정도 오르면 사당능선 능선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능선을 타고 남쪽으
로 1시간 정도 오르면 관악산 연주대, 북쪽 능선으로 가면 사당역으로 이어진다. 저만치 아른
거리는 연주대의 뒷통수를 보니 순간 '연주대까지 확 질러버릴까' 싶은 마음이 불끈 솟아올랐
지만, 시간도 어느덧 16시가 넘어 괜히 무리해서 좋을 것도 없다.


▲  능선3거리에서 바라본 천하 (관악구와 영등포구 지역)
능선3거리 북쪽에는 목재로 지어진 전망대가 있다. 이곳은 360m 고지라 앞서 봉천동
마애불보다 조망의 질감이 높다. 하늘과 100m나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  가까이에 보이는 선유천국기봉


 

 

♠  관악산 선유천국기봉, 관음사국기봉

▲  선유천국기봉 헬리포트 (헬기 착륙장)

능선3거리에서 2분 정도 가면 'H'마크가 새겨진 헬기장이 나온다. 여기서 잠시 능선길을 버리
고 북쪽 숲길로 가면 우리의 국기, 태극기가 펄럭이는 선유천국기봉이 모습을 비춘다.
이 봉우리는 해발 약 330m로 육중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관악산과 삼성산(三聖山), 호암
산(虎巖山) 일대에 태극기가 심어진 13개의 국기봉이 있다. 국기봉이란 이름은 태극기가 있어
서 비롯된 것이다.
왜 관악산과 삼성산에 태극기를 지닌 국기봉이 이렇게 많은지 궁금할 따름인데, 이유가 어찌
됐든 평소 잊고 살던 태극기를 산에서 보니 하늘님이 내린 신성한 깃발 마냥 엄숙하게 다가와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  태극기를 휘날리는 선유천국기봉

태극기는 이 좁은 땅에서만 휘날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국기가 분명하다. 이 땅을 넘어서 모
든 천하에 꽂힐 그날을 막연히 염원해본다. 미국 화이트하우스, 영국 버킹엄 궁전, 중원대륙
북경 자금성(紫禁城), 러시아 붉은광장에 그들의 꼬질꼬질한 토종 국기 대신 태극기가 휘날리
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참 마음이 흐뭇해진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  바람 잘 날 없이 늘 분주하게 펄럭이는 선유천국기봉 태극기의 위엄

▲  선유천국기봉에서 바라본 관악산
사진 중앙에 관악산 정상인 연주대의 뒷통수가 바라보인다.

▲  관악산 사당능선 (관음사국기봉)

▲  선유천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서울대와 관악구 지역)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드센 서울이 눈 밑에 내려앉았네~~~
학의 등에 올라탄 듯, 조망이 제법 명품이다.

▲  선유천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②
관악구(봉천동, 신림동)와 동작구, 영등포구 지역

▲  선유천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③
봉천동과 사당동, 관악구, 동작구, 서초구, 강남구와 한강 너머로 남산,
마포구, 성동구, 북한산(삼각산), 아차산 줄기까지 시야에 잡힌다.

▲  선유천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④
사당능선과 사당동과 남현동,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 성동구, 광진구,
아차산~용마산 줄기가 흔쾌히 바라보인다.

▲  선유천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⑤
관악산 동부와 서울경마공원 주변, 청계산(淸溪山, 618m) 산줄기

▲  선유천국기봉 동쪽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관악구와 동작구는 물론 한강 너머로 남산과 서울도심, 북한산이 바라보인다.

▲  바위로 아기자기하게 이루어진 사당능선
경사가 좀 있어서 그렇지 산길은 잘 정비되어 있어 오가기는 편하다.

▲  거북바위
사당능선에 걸터앉아 서울을 바라보며 자리한 탓에 선유천국기봉 못지 않게
조망이 매우 뛰어나다.

▲  거북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1)
봉천동과 사당동, 동작구, 용산구, 남산과 도심 지역

▲  거북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2)
방배동 전원마을과 우면산(牛眠山, 293m)을 중심으로 서초구와 강남구,
우면지구(오른쪽), 대모산 산줄기 등이 시야에 잡힌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거북바위 옆에서 바라본 천하 (3)
관악산 동부와 남태령, 서울경마공원 주변, 청계산(淸溪山, 618m)

▲  속세와 하늘을 이어주는 계단일까? 사당능선 철계단

유천과 관음사국기봉 구간은 바위와 벼랑이 즐비한 까칠한 구간이다. 하여 산꾼의 편의를
위한답시고 철계단을 많이 깔았는데, 위에서 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까마득하게 보이고 밑
에서 보면 마치 하늘과 이어진 계단처럼 장대하게 보인다. 계단은 2명이 지날 정도의 폭으로
계단 밑은 구멍이 쏭쏭 뚫린 철판이라 계단 밑 땅바닥이 정말 아찔하게 보인다. 계단과 땅바
닥이 그리 가까운 편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강심장이라고 해도 염통이 은근히 쫄깃해질 것
이다.


▲  서울을 향해 고개를 내민 관음사국기봉

▲  서울을 향해 고개를 내민 관음사국기봉 전망대

철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가 나타나면서 잠시나마 오르막길이 꿈틀거린
다. 그 바위를 오르면 나무로 지어진 관음사국기봉 전망대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관악산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최전방 봉우리로 서울시내에 아주 가깝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하여 바로
밑으로 서울시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조망이 제법 휼륭하다.


▲  관음사국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관악산 북쪽 자락과 서울대, 낙성대, 관악구 지역

▲  관음사국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봉천동과 사당동, 관악구, 동작구 지역

▲  관음사국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3)
관악산의 힘찬 기운은 시내까지 파고들어가 관악구와 동작구의 경계를 그으며
까치산근린공원, 상도동 살피재를 지나 국립현충원과 노량진까지 이어진다.

▲  관음사국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4)
봉천동과 사당동, 동작구, 서초구, 한강, 남산, 북악산과 북한산(삼각산) 산줄기

▲  관음사국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5)
사당동과 방배동,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와 광진구, 아차산 산줄기

▲  오늘도 바쁘게 펄럭이는 관음사국기봉 태극기

관음사국기봉 전망대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길은 거의 벼랑에 가까운 수준이다. 그래서 철계단
을 밑으로 늘어뜨렸는데, 그 중간에 바위에 뿌리를 내린 태극기가 서울을 향해 부지런히 휘날
리고 있어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게 한다. 태극기 밑으로 바위를 타고 오가는 지름길이 있으
나 다소 위험하므로 우회길을 이용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  관음사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1)
(관악구, 동작구, 영등포구 지역)

▲  관음사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2)
(사당동과 동작구, 강남구, 서초구, 용산구, 남산, 북한산 산줄기)

▲  관음사국기봉에서 바라본 천하 (3)
(서초구와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기)


시나마 가까워졌던 하늘을 등지며 관음사국기봉을 내려가면 흥분했던 산길은 진정을 되찾는
다. 단단하고 자잘한 돌이 많던 산길의 시대는 가고 조금은 촉감이 부드러운 흙길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래도 흥분한 구간이 여럿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관음사까지 방심은 금물이다. 산이
란 자신을 만만하게 대하는 사람에게는 무척 까칠하게 굴기 때문이다.

산길을 직진하면 남현동(南峴洞) 흥화브라운빌아파트로 이어지는데, 관음사로 가려면 동쪽 산
길로 꺾어야 된다. 중간에 체육시설이 여럿 설치된 쉼터가 나오고, 여기서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관음사가 조그만 점처럼 모습을 비춘다. 그렇게 그를 향해 내려가면 절은 그만큼 정비
례로 커져 보이며, 절의 옆구리로 우리를 인도한다.


▲  관음사로 인도하는 산길
속세는 아직도 늦가을의 기운이 완연한데, 산속은 벌써부터 겨울 제국(帝國)의
마수가 심술을 부린다. 벌거숭이가 된 나무가 도처에 보이고, 귀를 접고
누운 낙엽은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하며, 화려한 윤회를 꿈꾼다.


 

 

♠  관악산 동북쪽 자락에 안긴 오래된 관음도량
관악산 관음사(觀音寺)

관악산 남쪽 청계산 북쪽에 절집이 우뚝하여 긴 숲을 눌렀다.
밤비에 고함을 지르니 주린 호랑이가 부르짖는 듯하고
해돋이에 조잘거리니 그윽한 새가 우는 듯하다.
구름이 창밑에서 나니 담장이 덩굴이 얽히고
길이 돌 모퉁이로 소나무, 회나무 우거졌도다.
멀리 생각하건대 혜사(惠師)는 응당 잘 있을 것이고
산 가운데서 밤마다 꿈에 서로 찾는다.

변계량(卞季良)의 '관음사 절경'


관악산 동북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닦은 관음사는 절 이름 그대로 관세음보살을 내세운 관
음도량(觀音道場)이다. '남태령 관음사','승방골 관음사'라 불리기도 하며, 절을 끼고 흐르는
계곡을 절골이라 부른다.

관음사는 895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고자 비보사찰(裨補寺刹)로
세웠다고 전한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이 전혀 없으며, 조선 초에 활
약햤던 변계량(1369~1430)이 지은 '관음사 절경'이란 시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
覽)에 전해오고 있어 절이 우후죽순 생겨나던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와 '가람고(伽藍考)','여지도서(與地圖書)' 등에 관음사가
잠깐 소개되어 있고 1977년 극락전(極樂殿)을 해체하면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는 1716년
4월 21일 극락전을 개축했음을 밝혀주고 있다. 그리고 절 밑에 승방벌(승방뜰)이란 일종의 사
하촌(寺下村)이 있어 절의 규모가 제법 컸음을 가늠케 한다.

1863년 8월 철종(哲宗)의 장인인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의 시주로 절을 정비
했으며, 1883년 봉은사 승려들이 절을 중수했다고 전하나 확실치는 않다. 1924년 승려 석주(
石洲)가 주지로 부임하여 신도들의 시주로 큰방 10칸을 지었고, 1925년 요사를 지었다. 뒤를
이은 주지 태선(泰善)은 1929년에 칠성각, 1930년에 산신각을 짓고, 1932년에 용화전을 세웠
으며, 1942년 극락전을 보수했다.
허나 1950년 이후, 조계종과 태고종(太古宗)간의 재산소유권 분쟁으로 10여 년 간 지루한 송
사에 휘말리게 된다. 승려들이 속세(俗世) 정화와 중생 구제 등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지 않고
종교의 탈을 쓰며 보기 흉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동안 건물은 황폐화되고, 절은 거의 문 닫
기 직전까지 이른 것이다.

대법원이 조계종의 손을 들어주면서 간신히 절의 목을 조르던 재산 다툼이 끝나자 1973년 진
산당 박종하(晉山堂 朴宗夏)가 주지로 부임해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벌였다. 허나 절의 부지가
국유지와 시유지(市有地), 사유지가 뒤섞이면서 소유권 분쟁이 발생했고, 거기다 개발제한구
역과 여러 가지 규제까지 발목을 잡으면서 중창의 길은 거의 쉽지가 않았다.
그런 시련을 간신히 극복하며 1977년 대웅전을 새로 지었고, 1980년대에 범종각을 지었으며, 삼성각과 용왕각을 크게 보수했다. 그리고 1992년 대웅전 밑에 지하 강당과 법당을 만들어 1
천불을 봉안하고, 1997년에는 명부전과 요사, 9층석탑을 지었다. 2001년에는 요사채를 신축하
고 용왕각 부근 지하 150m에서 수맥(水脈)을 찾으면서 그들을 끌여와 석조를 마련했다.
2002년에는 미타전과 관세음보살입상을 만들어 관음도량의 면모를 갖추었고, 2007년 4월 일주
문을 세움으로써 34년에 걸친 중창불사는 그런데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재단법인 불교방
송이 경내에 '불교방송개국기념대탑(불교방송대탑)'을 조성하면서 절의 명성을 드높였다.

절의 규모는 거의 조촐한 수준으로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위시하여 명부전과 용왕각, 삼성각
, 요사 등 약 9~10동의 건물이 경내를 메우고 있으며, 오랜 내력에 비해 고색의 내음은 맡기
가 힘들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파도가 관음사의 고색을 죄다 앗아갔기 때문이다. 소장문화유
산으로는 지방문화재인 석조보살좌상이 있으며, 그것이 경내에서 가장 늙은 보물이다.

시내와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사당역에서 걸어서 20분 정도면 충분히 닿는다. 사당역을 기
점으로 관악산을 오를 경우 반드시 지나쳐야 되는 곳이며, 시내와 지척이지만 숲속에 단단히
묻혀있어 산사의 분위기도 그윽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 519-3 (승방1길 109-80 ☎ 02-582-8609)


▲  관음사 경내 (왼쪽이 불교방송대탑)
불교방송대탑은 1997년 불교방송국 기념대탑으로 세운 것으로
높이는 거의 15m에 달한다.

▲  명부전(冥府殿)과 요사

경내 동쪽에 자리한 명부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
을 비롯한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를 머금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
작지붕 건물로 1997년에 지어졌으며, 우측 옆구리에는 요사 1채를 익랑(翼廊)처럼 거느리고
있다. 그리고 건물 뒷쪽에는 대나무밭이 우거져 있는데, 중간중간에 조그만 석불이 자리를 폈
다.


▲  명부전 불단 - 온후한 표정을 지은 지장보살좌상과 저승의 식구들

▲  삼성각(三聖閣)

명부전과 대웅전 사이에 자리한 삼성각은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이다.
이 건물은 1929년에 태선이 칠성각으로 지은 것으로 1989년 삼성각으로 개축하여 관음사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된 건물로 꼽힌다. 1988년에 조성된 칠성탱 앞에 16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관음사의 유일한 문화유산인 석조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21호)이 있으나 그
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해 지나치고 말았다.


▲  용왕각(龍王閣)과 둥그런 석조(石槽)

성각 뒤쪽에 자리한 용왕각은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아주 단출한 맞배지붕 건물이
다. 이 집은 용왕(龍王)을 봉안하고 있는데, 바다와 강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전혀 연관
성이 없어 보이는 용왕의 거처를 둔 점이 매우 특이하다. 바로 옆에 조그만 계곡이 흐르고 있
고, 앞에는 관음사의 목을 축여주는 석조가 있으니 용왕을 배려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물은 모두 용왕의 관리 대상이기 때문이다.
용왕각은 1930년에 태선이 슬레이트로 지은 것으로 1989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개조했으며, 내
부에는 1989년애 조성된 용왕탱과 비천상 1쌍이 자리를 메운다.

용왕각 앞에 자리한 석조는 관악산이 중생들에게 베푼 조촐한 선물이다. 이곳에서는 그를 수
각(水閣)이라 부르며 대우를 하고 있는데, 하늘을 향해 어여쁜 잎을 펼쳐 보인 연꽃이 새겨진
연화석조로 진짜 꽃을 보듯 아름답다. 석조 위에는 귀여움이 묻어난 동자승이 두 손으로 거북
이를 들고 있는데, 거북이는 관악산의 옥계수를 졸졸졸 뿜어낸다. 이들 석조는 2001년에 지하
150m 지점에서 수맥을 발견하면서 닦은 것이다.


▲  관음사의 이름값을 하는 아름다운 관세음보살입상

삼성각과 대웅전 사이에는 하얀 피부의 관세음보살입상이 자리해 있다. 연화대좌 위에 부드럽
게 서 있는 그는 2002년에 관음도량의 품격을 갖추고자 장만한 것으로 자태도 곱고, 조각 솜
씨도 걸작이라 1번 보고, 2번 보고, 자꾸만 보게 된다. 왼손에는 감로수(甘露水)가 든 정병(
政柄)을 들고 시무외인의 제스쳐를 취했다.


▲  관음사 대웅전(大雄殿)

관세음보살입상 좌측에는 이곳의 법당인 대웅전이 앉아있다. 이곳에는 원래 1942년에 지어진
극락전이 있었으나1977년에 밀어버리고 지금의 대웅전을 앉혔다. 그때 1716년에 극락전을 개
축했다는 상량문이 튀어나와 조선 후기에도 그런데로 법등(法燈)을 꾸렸음을 밝혀주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관음사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불단에는 금
동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3존불 뒤에 1990년에 조성된 석가모니후불탱이 걸려 있는데,
붉은 면바탕에 금니로 초를 내고 부분 채색한 그림으로 매우 생소한 형태이다. 건물 좌측 영
단(靈壇)에는 1974년에 만들어진 조그만 범종이 자리해 있다.


▲  추억의 덤블링
관음사는 지하 강당에 어린이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 뜨락에 어린 시절 많이
봐왔던 정겨운 덤블링을 두어 잠시나마 어린 시절의 향수로 인도한다.

▲  웃음삼매에 빠진 관음대장군/여장군 장승
지하대장군/여장군을 칭한 장승은 많이 보았지만 관음을 칭한 장승은 처음이다.
관음사가 관음도량을 칭하다보니 장승까지도 관음이란 이름을 단 모양이다.


늦가을이 깃든 관음사에서는 약 20분 정도 머물렀다. 이곳은 예전에 여러 번 인연이 있고 구
미가 확 당길만한 유혹거리가 딱히 없다. 게다가 햇님도 퇴근 직전이라 서둘러 속세 귀환을
종용한다.

절을 뒤로하고 속세로 향하면 각박한 경사의 내리막길이 펼쳐진다. 허나 내려가는 것이기 때
문에 눈과 얼음이 없는 이상은 별 무리는 없다. 길 옆에는 새하얀 석등이 주차장까지 이어지
는데, 석등의 모습이 왜열도 양식과 좀 비슷하여 모습 전환이 필요해 보인다. 석등 중간에는
관음대장군과 여장군을 칭한 장승 1쌍이 뻐드렁니를 시원스레 드러내며 해맑은 표정으로 중생
을 환송한다.


▲  관음사 일주문(一柱門)

주차장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관음사의 정문인 일주문이 나온다. 이 문은 2007년에 새로 지어
진 것으로 높이가 상당하여 매우 장엄하게 다가온다. 허나 그 중요한 고색의 향기가 우러나오
질 않으니 나에게는 별로 감흥이 없다.

일주문을 지나면 절골이라 불리는 관음사계곡이 오른쪽에 모습을 드러낸다. 늦가을 가뭄 탓에
물이 넝실거리던 관음사 석조와 달리 계곡은 거의 타들어간 상태이다. 그런 계곡을 따라 5분
정도 내려가면 남현동 주택가이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관악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
다.


▲  관악산을 뒤로하며 다시 속세로 나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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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을에 찾아간 산사 나들이, 화성 비봉산 봉림사

 


' 가을 산사 나들이 ~ 화성 봉림사 (당성) '

▲  비봉산 봉림사


 

가을이 한참 숙성되어가던 10월의 한복판에 화성시 서부에 자리한 봉림사를 찾았다. 수원
역에서 친한 후배를 만나 갈증에 지친 목구멍을 달랠 겸 커피 음료를 섭취하며 갈만한 곳
을 물색하다가 아직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는 남양(南陽) 봉림사를 그날의 메뉴로 정했
다.
수원역(수원역 환승센터)에서 봉림사까지는 수원 400-4번(광교웰빙타운↔마도면 바이오단
지입구)을 타면 되는데 그 버스를 잡아타고 40분 정도를 달려 봉림사입구에 두 발을 내린
다. 예전에는 남양/사강/서신 방면 아무 시내버스나 타고 북양1통에서 40여 분 발품을 팔
아야 했으나 근래에 봉림사입구까지 가는 버스편이 생겨 접근성은 좀 좋아졌다. (단 배차
간격이 좀 긴 것이 함정)

봉림사입구에서 일주문 바로 밑까지는 온갖 공장들로 즐비해 꽤나 어수선한 모습이다. 공
장 굴뚝에는 수시로 연기가 피어올라 하늘을 찔러대고, 온갖 소음이 우리의 두 귀를 연신
때려댄다. 게다가 대형차들이 수시로 들락거려 길바닥은 늘 헝클어진 모습이다. 지금까지
300곳이 넘는 오래된 절을 찾았지만 여기처럼 공장 지대를 한참이나 지나야 되는 절은 처
음이다.


 

♠  봉림사(鳳林寺) 둘러보기


▲  봉림사 일주문(一柱門)


▲  껍데기만 남은 천왕문(天王門)

어미도 몰라본다는 세월의 모진 풍파와 개발의 무자비한 칼질로 아비규환처럼 변해버린 북양
동 바닥을 가로질러 비봉산(飛鳳山)의 품으로 들어선다. 거의 끝이 보이지 않던 공장의 행렬,
이러다가 공장이 절까지 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었지만 다행히 일주문의 위엄 앞에 개발
의 칼질은 푹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애미, 애비도 못알아본다는 이 땅의 천박한 개발주의라
고 해도 양심은 있는지 오래된 절과 그곳을 품은 산까지는 완전히 건드리지는 못했다.
공장과 시가지에 밀려 잔뜩 기가 죽었던 비봉산도 일주문의 응원에 가슴을 피며 호젓한 숲길
을 그려내 보이고 산사(山寺)로 인도하는 산길 분위기도 서서히 회복하면서 일주문 앞까지 펼
쳐진 혼란한 풍경에 제대로 놀란 중생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절의 정문이자 속세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일주문에는 '비봉산 봉림사'란 현판이 있어 이곳의
이름을 알려준다. 바로 옆에 도로가 나 있어 굳이 문의 아랫도리를 지날 필요는 없겠지만 그
래도 절에 왔으니 그의 체면도 세워줄 겸, 문의 밑도리를 지나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얼마 안가서 천왕문이 마중을 한다. 천왕문은 부처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
의 거처로 일주문을 지나온 중생을 검문하는 곳인데, 이곳에 있어야 될 사천왕은 어디로 마실
을 갔는지 보이질 않고 문 안은 텅 비어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절을 들락거렸지만 이렇게 비
어있는 천왕문은 처음이다. 시작부터가 참 이상했던 봉림사. 허나 다행히 사천왕은 멀리 가지
않고 범종루 밑으로 자리를 옮겨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  숲터널을 이루고 있는 봉림사 숲길
숲에서 갑자기 선녀가 튀어나와 나를 잡아가도 모를 정도로 호젓한 숲길이다.

▲  경내를 가리고 선 범종루(梵鍾樓)와 금강역사(金剛力士)상

숲길을 지나면 그 길의 끝에 2층 범종루가 계단을 늘어뜨리며 우리를 마중한다. 범종루 앞에
는 우람한 체격에 성난 표정을 지은 금강역사 4기가 자리하여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우리를 쫄
게 만드는데, 우측 뒷쪽의 금강역사는 무려 바위까지 들며 위협을 한다.
아무래도 개발의 칼질이 일주문 바로 앞까지 밀고 들어와 절을 위협하니 절 입장에서도 그리
마음이 편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두 눈을 부릅뜨며 성난 표정을 지은 저들을 경내 앞에
내세워 속세의 기운을 경계하며 더 이상 선을 넘지 말 것을 경고하는 것 같다.

▲  범종루 1층에 자리한 사천왕들

금강역사의 검문을 거쳐 범종루의 밑도리를 들어서면 사천왕의 검문을 받게 된다. 이들은 원
래 천왕문에 있다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금강역사와 함께 든든하게 절을 지키고 있는데 성
난 포즈의 금강역사와 달리 사천왕의 얼굴은 귀엽기만 하다. 이들의 공간을 따로 사천왕각(四
天王閣)이라 부르며, 그들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매우 조촐한 크기의 봉림사 경내가 펼쳐진다.


▲  봉림사 3층석탑

경내로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법당인 극락전, 왼쪽에는 요사와 선방으로 쓰이는 봉향각, 오른
쪽에는 3층석탑과 1708년에 지어진 'ㄴ'자 건물을 부시고 다시 지은 설법전이 자리한다. 바로
가까이에 자리한 3층석탑은 극락전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뱃속에서 나온 유물 가운데
사리 6과를 봉안하고자 1979년에 세운 것으로 신라 석탑의 백미(白眉)로 통하는 석가탑(釋迦
塔)과 많이도 닮았다.
그럼 여기서 잠시 봉림사의 내력을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  요사(寮舍)와 선방(禪房), 종무소의
역할까지 도맡고 있는 봉향각(奉香閣)

▲  설법전(說法殿)
1883년에 조성된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경기도의 중심 도시인 수원(水原)을 서쪽과 남쪽으로 감싸고 있는 화성시(華城市)의 주요 시
가지이자 화성시청을 품고 있는 남양 동쪽 비봉산 자락에 봉림사가 고즈넉하게 안겨져 있다.

이 절은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 시절,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의 잦은
침공을 부처의 힘을 빌려 물리치려는 심보로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당시 이곳은 신라의 당항
성(黨項城) 지역으로 고구려와 백제와도 가까워 그들과의 싸움이 늘 그치지가 않았다. 특히
당항성은 신라가 당나라와 교역을 하던 무역항으로 이곳이 끊기면 신라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기 때문에 악으로 깡으로 이곳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
절을 창건할 때 궁궐에서 기르던 봉황이 이곳으로 날라와 숲에 앉았다고 하여 봉황의 숲이란
뜻에서 봉림사라 불리게 되었으며, 절을 품은 산도 봉황이 날라왔다는 뜻의 비봉산이라 불리
게 되었다. 허나 신라 중기(7세기)에 창건되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역사 기록이나 유적이 전
혀 없어 과연 그때 지어졌는지는 심히 회의적이다. 다만 목조아미타여래좌상에서 지정(至正)
22년(1362년)이란 묵서명(墨書名)이 발견되어 최소 14세기 이전부터 절이 있었음을 보여주니
절이 우후죽순 들어섰던 신라 후기나 고려 초/중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절의 본격적인 사적(事蹟)이 등장하는 것은 조선 중기이다. 1621년 안모(安暮)와 자현(慈賢)
이 대웅전과 망양루(望洋樓), 봉향각, 범종각을 개축했다고 전하며, 1708년 요사를 중건했다.
그리고 1883년과 1887년 아미타후불탱을 비롯해 지장시왕탱, 신중탱, 칠성탱을 새로 조성했고,
1978년에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새로 개금하는 과정에서 복장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중 사
리 6과를 담고자 뜨락에 3층석탑을 세우고, 나머지 유물은 신변보호를 위해 용주사(龍珠寺)
효행박물관으로 보냈다.
1988년 삼성각을 새로 짓고, 1992년 요사채와 봉향각, 범종각을 개축했으며, 1990년대 후반에
주지로 부임한 성무(性無)가 도로와 주차장을 깔고 가람을 정비하여 지금에 이른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물인 극락
전과 19세기 후반에 조성된 탱화 여럿이 전하고 있다. 법당(法堂)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봉향
각과 설법전, 삼성각, 천왕문 7~8동의 건물이 경내를 메우고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불상을
간직한 오래된 절이라 처음에는 어느 정도 덩치가 있는 절인줄 알았으나 정작 와보니 생각보
다 매우 작은 절이라 다시 한번 놀랬다.
허나 절이 아담하여 두 눈에 넣어 살피기에 별 부담이 없으며, 비록 절 밑까지 속세의 기운이
밀어닥쳤지만 일주문과 천왕문, 비봉산의 가호로 경내 주변은 무성한 숲을 이루며 한적한 산
사의 분위기를 마음껏 드러낸다. 허나 산을 조금만 벗어나면 공장과 시가지 등 속세의 기운이
이빨을 드러내니 졸지에 속세에 갇힌 외로운 처지가 되어버렸다.

*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북양리642 (주석로80번길 139, ☎ 031-356-9117)


▲  봉림사의 법당인 극락전(極樂殿)

범종루의 뒷통수를 바라보며 북향(北向)을 하고 있는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
붕 집이다. 화강암으로 높이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조촐하고 묵직하게 들어앉은 극락전은 조
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예전에는 대웅전(大雄殿)이라 불렸으나 아미타불(阿彌陀佛) 거처에
걸맞게 극락전으로 이름을 갈았다.
불단에는 봉림사의 제일 가는 꿀단지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1883년에 제작
된 아미타후불탱과 지장시왕탱 등이 그를 수식한다. 특히 지장시왕탱은 19세기 후반에 경기도
에서 활약했던 대허체훈(大虛體訓)과 수일(守一), 태삼(台三)이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  봉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가운데 불상) - 보물 980호

극락전 불단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한 3존불이 저마다 미소 경쟁을 벌이며, 온화한 표정으
로 중생을 맞이한다. 아미타불 좌우에 자리한 지장보살상과 관음보살상은 아미타불의 허전한
옆구리를 달래고자 근래에 붙여놓은 협시(夾侍) 보살상이며, 그들 뒤에 든든하게 자리한 아미
타후불탱은 1883년에 제작된 것이다.

극락전의 주인장인 아미타불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1978년에 불상에 다시 금칠을 했을
때, 그의 뱃속에서 수많은 복장유물이 쏟아져 나와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때 지정(至正) 22
년(1362년)이라 쓰인 묵서명이 나와 최소한 1362년 이전에 조성되었음을 귀뜀해주며, 1583년
에 새로 개금(改金)을 했음이 밝혀졌다.
이 불상은 높이 88.5cm, 무릎 폭 78cm의 작지만 단아한 모습으로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이 두툼하게 솟아있으며, 살짝 구부러진 눈썹 사이로 백호가 박혀 있다. 얼굴은 단아하고 온
화한 표정을 머금고 있는데, 코는 작지만 오똑하게 솟았고, 붉고 조그만 입술 위에는 수염이
살짝 그어져 있다. 두 귀는 중생의 민원을 하나도 빠짐없이 접수하려는 듯, 어깨까지 늘어져
있고 굵은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다.
몸에 걸친 옷은 통견(通肩) 스타일로 가슴 부분은 U자형으로 처리되어 있고, 옷은 띠매듭 대
신 3줄의 옷주름으로 처리했다. 고려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뱃속에서
나온 유물은 전적(典籍) 8종과 사리병, 섬유류, 종자류, 각종 구슬, 부적 등으로 이들은 '봉
림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복장전적일괄'이란 어려운 이름으로 보물 1095호로 지정되었다. 이들
가운데 사리와 법화경(法華經)을 제외하고 모두 용주사 효행박물관에 가 있다.

아미타불 좌우에는 가히 1,000기는 넘을 듯한 조그만 금동불이 빼곡히 자리해 일제히 금빛을
발산하고 있는데, 이들은 중생의 돈을 받아 만든 원불(願佛)이다.

▲  조그만 연못과 다리를 갖춘 샘터

▲  봉림사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 칠성탱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삼성각은 달랑 1칸에 불과한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
로 1988년에 지어졌다.
남쪽을 바라보는 곳에는 산신탱과 독성탱이, 서해바다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칠성탱이
자리해 있는데, 칠성탱은 1887년에 제작된 것으로 19세기 후반 경기도에서 활약한 혜산축연의
작품으로 나름 가치가 높다. 그림 중앙에 치성광여래를 두고 그 좌우로 월광보살(月光菩薩)과
일광보살(日光菩薩),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배치했는데, 붉은 색과 청색이 잘 대조를 보이고
있으며, 19세기 후반 경기도 불화 양식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  산신탱과 독성탱
산신과 호랑이, 동자, 소나무, 주름진 산이 표현된 산신탱은 1984년에,
편하게 앉은 독성 할배와 동자, 천태산(天台山)이 그려진 독성탱은
1991년에 조성되었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경내

우리는 삼성각에 들어가 염치불구하고 10분 정도 쉬었다. 건물이 매우 작아서 장정 2명이 들
어가 앉으니 완전 꽉찬다. 여기서 세월과 세상, 근심을 잠시 잊으며 없는 듯 쉬고 있다가 밖
으로 나와 봉향각 툇마루에도 걸터앉아 산사의 고적함을 즐겨본다.

햇님도 슬슬 퇴근할 때가 되었는지 찬 기운이 조금씩 엄습해온다. 우리가 있어야 될 곳은 이
런 절간이 아닌 아비규환의 속세이기에 억지로 발을 떼며 경내를 나왔다.
절에는 하얀 털의 멍멍이 3마리가 절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를 일주문까지 배
웅을 해주고 숲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일부러 배웅해준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는 몰라도 늘
번잡한 일주문 밑과 달리 절은 고적하기 그지 없으니 그도 사람이 그리웠나보다. 그만큼 봉림
사는 한적한 절간이었다.


▲  봉림사를 뒤로하며, 하얀 털의 멍멍이가 일주문까지 배웅을 해주었다.


 

♠  신라의 대외무역항인 옛 당항성, 화성 당성(唐城)
- 사적 217호

봉림사에서 남양, 마도, 사강을 지나 서신 방면으로 조금 가면 당성<唐城, '黨城'이라 쓰기도
함>이란 오래된 산성(山城)을 만날 수 있다. (당성이 봉림사와 가까워 편의상 봉림사 글에 통
합했음, 당성은 몇 년 전 3월 말에 갔었음)

당성은 옛 당항성<唐項城, 또는 黨項城>으로 전해지는 곳으로 당성이란 이름은 모를지언정 당
항성 3글자는 아마 지겹도록 들어봤을 것이다.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허벌나게 등장했던, 그것
도 주관식 문제의 단골로 필수로 외워야 했던 그 이름이다. 그 당항성이 바로 화성시에 있는
당성이다.

당성은 서해바다를 향해 약간 튀어나온 남양반도(南陽半島) 서남쪽 구봉산(九峯山)에 위치한
다. 산 정상부와 동쪽 계곡, 서남쪽 능선에 걸쳐 성벽을 쌓았으며, 지금은 간척으로 많이 메
워졌지만 예전에는 산 서쪽까지 서해바다가 넝실거렸다.
백제가 처음 당항성을 지었으며, 5세기 후반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점령하여 당성군(唐城
郡)이라 했다. 그러다가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장악하여 당항성으로 이름을 갈았
다.
신라는 한강 유역과 당항성을 점령하면서 서해바다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중원(中原)대륙으로
바로 이어지는 통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고구려나 백제를 거치거나 직접 남해바
다를 돌아서 가야 했으니 자연히 대륙과의 교류는 더딜 수 밖에 없었다.

당항성은 대륙을 이어주던 신라의 대외무역항으로 이곳을 통해 중원 왕조와 교류를 했다. 그
런 중요성 때문에 신라는 이곳을 꿀단지처럼 애지중지했다. 문무왕(文武王) 이전까지 이곳만
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고구려, 백제와 매우 가까운 곳이라 그들은 자주 이곳을 공
격했고 빼앗긴 적도 1~2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신라는 국력마저 딸려 그들을 상대하기 벅찼으
나 그런 위험을 감수하며 악으로 깡으로 이곳을 사수했다.

당나라를 비롯한 중원대륙으로 가는 신라 사신과 상인, 승려는 대부분 이곳을 거쳤으며, 나중
에 무열왕(武烈王)이 되는 김춘추(金春秋)도 백제에 대해 복수의 개거품을 잔뜩 물며 이곳을
통해 대륙으로 넘어가 당태종(唐太宗)에게 아부를 떨었다. 결국 나중에 저지르게 되는 고구려
와 백제 멸망의 발판을 당항성을 통해 닦은 셈이다.
문무왕 이후 백제가 거닐던 서해(西海)와 서남해를 장악하게 되었지만 698년 이후 신라 이북
에 발해(渤海)가 들어서 대륙과의 육로가 끊기면서 당항성의 인기는 여전히 식을 줄을 몰랐다.
경덕왕(景德王) 때는 당항성 지역을 당은군(唐恩郡)이라 고쳐 부르며 당나라에 잘보이고자 애
를 썼다. 그리고 신라 후기에는 창궐하는 해적을 막고자 당성진(唐城鎭)을 두었다.

신라가 망하면서 500년 가까이 번영을 누리던 당항성은 풍비박산이 났다. 무역항과 대외교류
의 기능이 거의 사라져 해안기지의 기능으로 크게 축소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성을 수리한
흔적이 있어 방어용으로 조선 중기까지 쓰였음을 보여주나 그 이후 제대로 버려지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쇠퇴하고 만다.

당성은 산 정상을 에워싼 테뫼식과 계곡을 포함한 포곡식(包谷式)이 혼합되었다. 백제는 테뫼
식 성을 만들었는데, 테뫼식 성의 둘레는 약 360m 정도로 기단(基壇) 바깥쪽을 보축(補築)하
여 성벽을 견고하게 했으며, 성 남서쪽 높은 곳에 축조된 흔적이 남아있다. 6세기 이후 신라
가 차지하면서 협소한 산성을 넓히고자 포곡식 성을 쌓아 복합적인 구조를 지니게 된 것이다.
현재의 성은 신라 때 것으로 그 평면은 장방형(長方形)을 이루고 있다. 포곡식 성의 둘레는
약 1.1km로 예전에는 당성의 내성(內城)으로 추정되기도 했으나
신라 후기 유물이 출토되면서
신라 말에 설치된 당성진 성곽으로 여기고 있다.

현재 동문(東門)터와 남문터, 북문터, 우물터, 건물터가 있으며, 서쪽 성곽 정상부에 조선 때
지어진 망해루(望海樓)로 여겨지는 건물 주춧돌이 있다. 성벽은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대체
로 잘 남아있으며, 성벽의 높이는 2~5m 정도이다. 여장 등의 방어시설은 녹아 사라졌고, 성의
지형은 남쪽은 높고 북쪽은 낮다.
당성을 품은 구봉산은 남양반도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산으로 동쪽을 제외하고는 산이 없어
조망이 매우 좋다. 게다가 바다가 지척이라 대륙으로 가는 관문으로 전혀 손색이 없다.


▲  당성으로 가는 숲길

당성 입구인 신흥사 정류장에서 7~8분 정도를 오르면 당성을 지키는 관리소가 나온다. 관리소
동쪽에는 건물터와 성터에서 수습된 돌들이 조그만 보금자리를 이루고 있으며, 그 서쪽에 지
붕돌과 이수(螭首)를 갖춘 당성사적비가
우람한 모습으로 속인을 맞는다.


▲  당성 관리소 동쪽에 모인 옛 당성의 성돌들

신라 제일의 무역항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 참말로 엊그제 같은데 세월과 자연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해 성 안에 모든 것은 주저앉고 성벽과 건물을 이루던 돌은 잔해가 되어 산 곳곳
에서 이리저리 흩어져 당당히 성벽의 일부로 살아가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당항성의 내력이 적힌 당성 사적비(史蹟碑)

▲  당성 은행나무 숲길

당성사적비를 지나면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 숲길이 나그네의 마음을 부여 잡는다. 만추(晩
秋) 때 왔더라면 황금색 은행잎이 흩날리는 그림 같은 현장이겠지만 겨울 제국이 모든 것을
공출해 가면서 앙상히 뼈만 드러낸 채, 봄의 해방군을 기다린다. 봄이 바로 앞까지 온 것 같
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제국의 잔당들이 설치고 있으니 은행나무들도 마음 놓고 은행잎을 틔우
지 못한다. 어여 얼어붙은 뿌리에 완연한 봄이 내려와 메마른 가지에 살이 붙었으면 좋겠다.
(이때가 3월 초였음)
폐허가 되버린 옛 성에서의 허전함을 달래주는 숲길로 늦봄이나 가을에 거닐고 싶은 길이다.

숲길을 지나면 길이 2갈래로 갈린다. 왼쪽으로 가든, 오른쪽으로 가든 상관은 없으며, 넉넉잡
아 30분 정도면 충분히 1바퀴를 돈다. 가파른 구간이 별로 없고, 성 남쪽에서는 궁평항과 제
부도(濟扶島),
서신 앞바다가, 서쪽에서는 땅으로 매립된 서신 서부 지역과 대부도(大阜島)가
시야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그림처럼 박힌 섬들의 파노라마를 볼 수 있었으나 이제는 바다도
겨우 보일 정도이다.

성곽 외에는 장대한 세월에 죄다 휩쓸려 내려가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야말로 폐허의 현장이
다. 중간중간 옛 건물터와 주춧돌, 성돌의 무더기가 눈에 띄며, 은행나무 숲길 끝에는 출토된
기와조각을 차곡차곡 올려 만든 돌탑이 눈길을 끈다.


▲  출토된 기와조각으로 이루어진 돌탑
메마른 수풀을 이불로 삼아 늦겨울을 견디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소복을
걸친 헝클어진 머리의 처녀귀신 누님처럼 보인다.

▲  기와 돌탑 주변의 건물터
건물이 녹아내린 흔적을 자연이 수풀로 보듬으면서 자연의 일부로 녹아들었다.

▲  소나무가 우거진 남쪽 성곽

▲  솔내음이 가득 깃들여진 남쪽 성곽

▲  남문터
성문의 흔적은 없고, 성곽이 끊어진 움푹 패인 부분이 옛날 이곳에
성문이 있었음을 아련히 전해줄 따름이다.

▲  남문터 동쪽 성곽

▲  남문터 서쪽 성곽

▲  서남쪽 성곽

▲  서남쪽 성곽에서 바라본 천하 (서신면 서부 지역과 대부도)
바다가 산 아래 마을까지 넝실거렸으나 거의 육지로 바뀌면서 바다는 저 멀리
밀려나고 말았다. 산 너머로 대부도가 아련히 얼굴을 내민다.

▲  서쪽 성곽 정상부에 자리한 망해루터 주춧돌
당성에서 가장 높은 곳인 이곳에 서해바다를 바라보던 망해루가 있었다.
망해루는 조선 후기에 녹아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누각 주춧돌과
성돌이 한데 고여 커다란 돌무더기를 이룬다.

▲  서쪽 성곽에서 바라본 천하 (서신면 서부)

▲  성곽이 잠시 끊어진 북문터
북쪽을 바라봤을 북문과 문루의 모습이 대충 머리 속에 그려진다.

▲  힘차게 뻗은 동북쪽 성곽

▲  동북쪽 성곽 부근의 건물터

건물 주춧돌과 성돌이 모여 거대한 돌의 나라를 이룬다. 건물터와 성문터에 작게 안내문을 두
어 답사객의 이해를 도왔다면 무척 좋았을 것을 그런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상당히 아쉽다.
저런 식의 건물 유적은 겉으로만 보면 버려진 돌의 의미 없는 공간으로 비춰져 지나치기가 쉽
다.


▲  동남쪽 성곽 (1)

▲  동남쪽 성곽 (2)

보잘 것 없는 돌들이 강인한 협동심을 이루며 거대한 산성을 일구었다. 수석에 끼지도 못하는
저들 자체는 보잘 것이 없지만 그것이 뭉치고 모이면서 하늘까지도 겁을 먹게 만든 요새를 이
루어낸 것이다.
이렇게 하여 당성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 당성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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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쪽 끝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 (도봉산 능원사, 도봉사, 진주류씨묘역, 무수골)

 


' 도봉산 봄나들이 '

▲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윗무수골)

▲  능원사 용화전

▲  도봉사

 


 

도봉산(道峯山, 739.5m)이 뻔히 바라보이는 그의 포근한 그늘, 도봉구 도봉동(道峰洞)에서
15년이 넘게 서식하고 있지만 그에게 안긴 횟수는 의외로 매우 적다. 그가 집에서 멀면 모
르지만 버젓히 그의 밑에 살고 있음에도 이렇다. 그렇다고 내가 산을 싫어하거나 돌아다니
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며, 도봉산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상하
게도 손과 발이 잘 가질 않았다. (도봉산 밑도리까지 포함하여 1년에 2~3번, 많으면 4~5번
정도 찾는 편임)
그래도 우리 동네의 듬직한 뒷동산이자 꿀단지 같은 존재인데, 가끔은 가줘야 도봉산도 서
운해 하지 않겠지? 하여 거의 1년 여 만에 그의 품을 찾았다.

해가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3시에 집을 나서 서울시내버스 142번(도봉산↔방배동)을 타
고 도봉산 종점으로 이동했다. 거리는 불과 정류장 4개. 때가 때인지라 내려오는 산꾼들의
행렬이 마치 성난 파도와 같이 밀려온다. 거센 파도에서 아슬아슬하게 요트를 타듯 그들을
뚫고 북한산둘레길 안내도가 있는 통일교에 이른다.
여기서 직진을 하면 도봉서원(道峰書院), 천축사(天竺寺), 도봉산 정상, 포대능선, 만월암
(滿月庵) 방면으로 이어지고, 왼쪽 통일교를 건너면 능원사와 도봉사로 이어지는데 북한산
둘레길은 여기서 '도봉옛길'이란 부속 간판을 달고 남북으로 힘차게 흘러간다.
마음 같아서는 정상까지 가고 싶으나 늘 시간을 구실로 정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능원사
, 도봉사 방면 도봉옛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 길을 5분 정도 오르면 황금색으로 치장한 능
원사가 마중을 한다.


▲  능원사, 도봉사로 인도하는 숲길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구간)


 

♠  황금사원을 꿈꾸는 현대 사찰, 도봉산 능원사(能園寺)

도봉사 동쪽에 둥지를 튼 능원사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창건된(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음) 따끈
따끈한 산사(山寺)로 고색의 내음은 아직 여물지도 못했다. 나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현대 사찰에는 무뚝뚝한 편이라 성북동 길상사(吉祥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문화유산을 간
직한 절을 제외하면 딱히 눈길도 주지 않지만 동양 최대의 황금 사원으로 유명한 서울 구산동
수국사(守國寺, ☞ 관련글 보러가기)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정도로 황금 사원으로 꾸몄다는
점이 꽤나 끌렸다. 솔직히 인간 가운데 황금을 싫어하는 사람이 고려의 마지막 보루(堡壘)인
최영(崔榮)장군 등을 빼고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도봉산 능원사는 여주 능원사의 말사(末寺)로 그들 모두 미륵불(彌勒佛)을 내세운 미륵도량이
다. 근래 지어진 절이라 딱히 볼거리도, 내세울 것도 없지만 불교와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는
황금을 테마로 황금색 단청(丹靑)을 모든 건물에 입혀 찬란한 황금사원임을 속세에 진하게 어
필하고 있다. 절 앞을 지나던 산꾼들도 황금색 건물에 매료되어 자연스레 경내를 기웃거리니
능원사의 마켓팅은 크게 성공한 셈이다.

황금 단청은 중원대륙에서 문을 열거나 대륙을 장악했던 나라의 궁궐에서 즐겨 애용했던 것으
로 그들은 하나 같이 황제(皇帝)를 칭했는데, 황색이 바로 황제를 상징한다. 하여 황금색 단
청과 지붕을 선호했다. (그게 중원대륙의 법칙이기도 했음) 반면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한 배
달 민족은 황금색 단청과 기와를 즐겨하지 않고 다양한 색채를 입힌 이른바 컬러풀(colorful)
한 단청을 선호했다.
근래 들어 수국사와 여수 향일암(向日庵) 원통보전(圓通寶殿), 그리고 이곳 능원사에서 황금
색 단청을 선보이며 단청의 새로운 역사를 열었다. 이렇게 부처를 향한 절대적인 존경심이 금
빛찬란한 단청미를 탄생시켰고, 현대 사찰에 무정한 나를 황금을 미끼 삼아 이곳으로 낚은 것
이다.

능원사는 경내로 인도하는 일주문부터 황금색 단청을 입혀놓아 벌써부터 황금 사원의 냄새를
진동시키는데, 그 문을 들어서면 곧게 깔린 짧은 길이 펼쳐지고 바로 법음각과 용화전, 철웅
당 등이 모습을 비춘다. 경내는 법당(法堂)인 용화전을 비롯해 법음각. 철웅당(鐵雄堂) 등 5~
6동의 건물이 전부인 조촐한 규모이나 건물에 죄다 황금색 떡칠을 하여 마치 조그만 황궁(皇
宮)
같다.

▲  능원사 일주문(一柱門)

▲  일주문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길

▲  범종을 머금은 법음각(法音閣)
그 흔한 범종각 대신 부처의 소리를 뜻하는
법음각을 칭했다. 건물의 모습도 4각형이
아닌 6각형을 취했다.

▲  용화전 뒷쪽에 숨겨진 샘터
능원사에는 2곳의 샘터가 있어 중생들의
목마름을 아낌없이 해소해준다.


▲  능원사 용화전(龍華殿)
지붕 용마루 양쪽 끝에는 무려 용을 잡아먹는다는 금시조(金翅鳥)를 배치하여
화마 등 악귀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다.


능원사의 중심 건물인 용화전은 용화세계의 주인공이자 막연히 56.7억년 후에 나타난다는 미
륵불의 거처이다. 이곳이 미륵도량이다보니 자연히 용화전이 법당의 역할을 도맡게 되었는데,
정면 5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단청과 커다란 지붕을 받치는 공포(空包)는
거의 황금색 일색이라 사치와 장엄함의 깊이를 더욱 짙게 해준다.
건물 내부에는 미륵불을 중심으로 석가세존불, 약사여래불, 관세음보살이 봉안되어 있으며,
다들 자애로운 표정으로 중생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들 뒷쪽에는 헤아림이 무색할 정도로 조
그만 금동불(金銅佛)이 빼곡히 자리를 채우니 건물 전체가 그야말로 금색 투성이다.


▲  용화전 불단에 봉안된 미륵불(가장 큰 불상)과 석가여래(제일 오른쪽),
약사불(미륵불 왼쪽), 관세음보살<가장 왼쪽에 보관(寶冠)을 쓴 보살상>

▲  황금색으로 치장된 용화전 현판과 단청, 공포, 수막새의 위엄

공포와 단청이 죄다 황금색으로 도배된줄 알았더만 가까이서 보니 붉은색, 녹색, 파란색 계열
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어 단청의 고유 맛은 그런데로 살렸다. 용화전 가운데 칸 좌우 기둥
윗쪽에는 봉황을 배치하여 지붕 용마루에 배치된 금시조와 함께 만약에 모를 화마(火魔)의 공
습에 대비한다. 이곳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황금색에 눈이 먼 나머지 불지르기 아깝다
고 판단하여 그냥 돌아서지는 않을까?


▲  용화전의 경쾌한 뒷모습

▲  용화전 뜨락에 세워진 하얀 피부의 5층석탑
근래에 지어진 탑으로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의 매끈함을 자랑한다.

▲  용화전 주차장 - 숲 너머로 수락산(水落山, 638m)이 바라보인다.

▲  능원사의 또다른 샘터

용화전 밑에는 석조를 갖춘 샘터가 놓여져 있다. 앙련(仰蓮)이 새겨진 반원 모양의 석조에는
도봉산이 베푼 물이 호수를 이루고, 그 옆에는 용과 구름무늬 등이 새겨진 네모난 석조가 있
는데, 동그란 여의주(如意珠)를 단단히 물고 있는 용머리 조각이 인상적이다.
용이 되려면 여의주가 있어야 되고 그래야 승천이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석조에 새겨진 무늬
를 보면 용의 손에 여의주로 보이는 동그란 존재가 눈에 띄어 마치 여의주 획득 기념으로 하
늘로 요란하게 비상하는 용의 모습을 담은 듯 하다.

* 능원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02 (도봉산길 87 ☎ 02-954-6060)


▲  여의주를 문 용머리

천하에 무려 300곳이 넘는 절을 돌아다니며 많은 샘터를 보았고 샘터에 달린 용머리, 거북이
조각도 무수히 보았지만 이곳처럼 여의주까지 문 용머리는 처음 본다. 아마도 능원사의 원대
한 꿈을 저 여의주를 문 용머리로 간략하게 표현한 듯 싶은데, 너무 겉모습과 돈에만 연연하
지 말고 부처와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어디선가 숨어서 직무유기를 일삼으나 마음만큼은 속
세 걱정에 잠 못이루는 미륵불의 마음처럼 철저하게 속세를 위하는 공간이 되기를 주문해본다.


▲  능원사에서 도봉사로 올라가는 숲길 (도봉옛길)


 

♠  고려 초기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도봉산의 오래된 고찰 ~
도봉사(道峰寺)

능원사를 둘러보고 도봉옛길을 따라 서쪽으로 2~3분 가면 도봉산의 이름을 그대로 딴 도봉사
가 슬그머니 모습을 비춘다.
도봉산 동남쪽 자락에 자리한 도봉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고려 초인 968년에 혜거국사
(惠居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971년 혜거가 광종(光宗)의 초청으로 궁궐 원화전(元和殿)
에서 대장경(大藏經)을 강의하자 감동을 먹은 광종은 칙령(勅令)을 내려
'국내 사원 중에 오직 3곳만은 머물러 두어 움직이지 말 것이며, 문하의 제자들이 주지를 상
속하여 대대로 단절되지 않도록 이를 규정하라'
하였다.
이때 고달원(高達院, 여주 고달사)과 희양원(曦陽院, 문경 봉암사), 도봉원(道峰院)을 특별선
원으로 삼았는데, 그 도봉원이 바로 도봉사로 여겨진다.

1010년 요(遼)나라(거란) 성종이 강조(康兆)의 난과 목종(穆宗)의 폐위를 이유로 40만의 대군
을 휘몰아 고려를 침공했다. 당시 고려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강조는 직접 30만 군사를 이끌
고 검차(劍車)와 잘 훈련된 군사를 바탕으로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만 방심하는 통에
크게 패하고 만다. 강조는 포로로 잡혀 처단되고 거란군은 그 기세로 폭풍 질주하자 현종(顯
宗, 재위 1009~1031)은 눈물을 머금고 피난길에 올랐다.

현종은 채충순(蔡忠順, ?~1036)의 호위를 받으며 임진강을 건너 창화현(昌化縣, 의정부)에 이
르렀는데, 야밤에 적의 습격을 받자 왕을 시종하던 이들은 뿔뿔히 도망치고 채충순과 지채문(
智蔡文, ?~1026) 등이 적을 격퇴하여 왕을 지켰다.
지채문이 왕의 말고삐를 잡고 지름길로 도봉사에 들어가 여기서 잠시 국정을 살폈으며, 거란
군이 계속 추격하자 한강을 건너 멀리 나주(羅州)까지 내려가게 된다. 이렇게 도봉사에서 잠
시 머문 인연으로 현종은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6천 권 상당수를 그곳에서 제작하게 했다.
또한 고려 중기 때 정각국사 지겸(靜覺國師 志謙, 1145~1229)은 1170년 승과(僧科)의 선선(禪
選)에 급제했는데, 그의 이름은 전학돈(田學敦)이다. 바로 그해 삼각산(북한산)을 찾아 도봉
사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는데, 꿈에서 산신(山神)이 나타나
'화상(和尙)의 이름은 지겸(志謙)인데 왜 지금의 이름을 쓰는가?'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쿨
하게 지겸으로 이름을 갈았다.

2012년 서울문화유산연구원은 도봉사 바로 북쪽 산너머에 있는 도봉서원(道峰書院)을 복원하
고자 기존 건물을 부시고 터를 정비하면서 5개월 정도 발굴조사를 벌였는데, 뜻밖에도 옛 영
국사(寧國寺) 시절의 고려 때 유물 77점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2014년 8월 21일 국립고궁
박물관 강당에서 공개되었는데 그중 '도봉사'라 쓰인 청동제기가 있어 도봉사에서 빌려오거나
(또는 가져오거나) 또는 영국사의 옛 이름이 도봉사인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영국사는 도
봉서원에 있던 도봉산의 대표 사찰로 1573년 유림들이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서원을 깔았다.

여기까지 보면 도봉사는 고려 때 꽤나 잘나갔던 절임을 알 수 있다. 허나 13세기 이후 근대까
지 적당한 발자국을 남기지 못했다. 그냥 단순히 전쟁과 화재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다고 나올
뿐이다. 13
세기 이후 이렇다할 내력이 없는 것을 보면 13세기 중반 몽골(원)의 지긋지긋한 침
공에 때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현재 도봉사는 장대한 내력의 걸맞지 않게 고색의 내음이 전
혀 없고, 오래된 유물도 기껏해야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치성광여래3존도가 고작이다. 하여
고려 때 도봉사가 이곳이 아니라는 의견도 적지 않으며, 도봉서원에 있던 영국사가 도봉사란
의견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히 도봉서원터에서 발견된 도봉사라 쓰인 청동제기는 그런 의
견에 크게 부채질을 한다.

한참 동안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도봉사는 19세기 후반에 벽암(碧巖)이 현 자리에 절을 세우고
도봉사를 칭하면서 그 이름이 다시 살아났다.
한때 산사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를 열어 절의 명성을 아낌없이 드날렸으나 종파 간의 갈등과
주지승의 재정 낭비로 2006년에 절 전체가 경매에 나오는 불상사까지 발생했다. 절이 북한산
국립공원 내부에 있어 경매 수요가 없다가 다행히 적당한 임자를 만나 조금씩 불사를 벌여 지
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2층짜리 대웅전을 비롯해 극락정사, 산신각, 선방 등 약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
장문화유산과 오래된 유물은 19세기 후반에 그려진 치성광여래삼존도(熾盛光如來三尊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9호
, 관람이 거의 어려움)가 고작이다. 그리고 예전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
재 151호
지정된 철불좌상(고려 초기 불상)도 가지고 있었으나 2006년 절 경매 이후 한국불
교미술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애당초 도봉사와 관련이 없는 존재로 왜정 말기에 왜
인(倭人)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해방 이후 종로구 청운동(淸雲洞)에 있던 자명사가 가지고 있
다가 자명사가 철거되자 도봉사로 흘러들어온 것이다.
그밖에 부처의 사리를 담은 뿌리탑과 빈자일등상(貧者一燈像), 심우도 등의 소소한 볼거리가
있고, 절 앞에는 비록 짧지만 메타세콰이어 숲길이 닦여져 있다.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이 절
앞을 지나가고, 경내가 숲에 포근히 감싸인 푸른 지대로 도심이 지척임에도 공기도 청정하다.

도봉산 그늘에 산지 15년이 넘었고, 서울에 흩어진 오래된 절 상당수에 발도장을 찍었지만 도
봉사는 이번이 첫 인연이다. 2005년 석가탄신일에 인연을 지으려고 했지만 무리한 사찰 순례
일정으로 찾지 못하고 이제서야 격하게 인연을 짓는다.


▲  활짝 열린 도봉사 정문

도봉사는 그 흔한 기와집 일주문(一柱門)이 없다. 대신 절과 산길의 경계에 여닫이식 철제 정
문을 두어 일주문의 역할을 담당한다.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는 문이 일주문을 흉내내며 활
짝 열려있지만 달님의 세상이 되면 미련 없이 문을 꽁꽁 걸어잠궈 열린 마음의 일주문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정문 앞 우측에는 금동을 씌운 지장보살상이 육환장(六環杖)을 쥐어들며 중생을 맞이하고 정
문 좌측 담장 벽에는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져 있다.


▲  정문 옆 담장에 그려진 심우도
심우도는 방황하는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야생 소를 길들이는 것에 비유하여 10단계로 표현한 그림이다. 10개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어 십우도(十牛圖)라 불리기도 하며 보통
법당 바깥 벽에 많이 그려둔다.

▲  정문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연등길

정문을 들어서면 뿌리탑까지 곧게 오르막 길이 펼쳐져 있다. 길 좌우로 요사(寮舍), 선방(禪
房) 등으로 쓰이는 건물들이 뿌리를 내렸는데, 그 길의 끝에 이르면 뿌리탑과 대웅전이 모습
을 드러낸다.

▲  계단 옆 경사면에 꽃으로 다듬은
커다란 절 마크

▲  경내 구석에 옹기종기 모인 3층석탑과
여러 공덕비들


▲  도봉사의 명물, 뿌리탑

대웅전 앞에는 불교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부처의 진신사리 3과를 머금은 뿌리탑이 장대한 모
습으로 자리해 있다.
예전에는 진신사리를 봉안한 절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1990년대 이후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하
여 이제는 너무 흔해졌다. 서울만 하더라도 도봉사와 삼천사(三千寺), 승가사(僧伽寺), 조계
사(曹溪寺) 등이 사리를 봉안하고 있다. 부처의 사리가 수만 과가 넘는다고 하더니만 아직도
나눠줄 수량이 많은 모양이다. (상당수 인도와 동남아에서 가져온 것임)

1982년 3월 한국외대 부총장 최창성 교수가 태국(타이) 국립사원 홧벤짜마버핏의 종정(宗正)
프라풋타부이윙을 초빙해 원각회(圓覺會)에서 법회를 연 적이 있었다. 이 인연으로 태국에서
진신사리 3과를 얻게 되었고, 부총장은 도봉사에 이를 기증했던 것이다.

탑의 기단은 특이하게 계란처럼 동그란 모습인데, 이는 공(空)을 뜻한다고 한다. 그 위에 5층
의 몸돌을 세웠으며, 1층 몸돌은 유난히 두텁다. 그 안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고, 동쪽에 관
세음보살, 남쪽에 석가불, 서쪽에 아미타불, 북쪽에 지장보살상을 새기고 그 주변에 16나한상
을 둘렀다. 탑 주위로 12지신을 새긴 난간을 둘렀고, 탑 위에는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를
두었다.

탑의 전체적인 모습은 이 땅에 흔한 탑이 아닌 특이한 모습의 이형탑(異形塔)으로 탑 밑에는
석굴암(石窟庵) 본존불(本尊佛)을 본따서 만든 석가불이 당당한 체격으로 앉아있으며, 그 앞
에는 석등 2기가 서 있다. 그들 좌우로 뿌리탑과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늘어뜨렸는데,
이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뿌리탑의 장엄함을 마음껏 드러낸다.


▲  도봉사 대웅전(大雄殿)

뿌리탑 뒷쪽에 자리한 대웅전은 도봉사의 법당으로 이 땅에 흔치 않은 2층짜리 목조 불전(佛
殿)이다. 근래에 지어진 건물로 겉모습은 2층이지만 속은 1층이며, 불단에는 관세음보살과 지
장보살, 석가불로 이루어진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불 자리에는 원래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철불좌상이 앉아있었으나 그가 절을 떠나자 새로 금동석가불을 만들어 본존불의 자리
를 채웠다.

▲  우측에서 바라본 대웅전

▲  좌측에서 바라본 대웅전과 6층석탑


▲  대웅전 석가3존불

석가불 좌우에는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각자의 상징물인 육환장과 꽃을 쥐어들며 자애로운
표정으로 서 있고, 그들 사이에 석가불이 연꽃대좌(臺座)에 앉아 중생을 굽어본다. 그들 뒤에
는 그 흔한 후불탱 대신 바퀴 모양의 금동 전륜(轉輪)이 두광(頭光)처럼 떠있다.

▲  대웅전 지장탱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대웅전 내부 좌우 벽에는 지장탱과 신중도, 석가불도 등의 탱화 4점이 걸려있다. 이중 지장탱
과 신중도는 빛바랜 때가 좀 낀 것으로 보아 20세기 초~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나머
지 탱화들은 20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아직 여물지 않았다.


▲  대웅전 양쪽에 배치된 가릉빈가 운판(雲版)과 6층석탑

운판은 범종, 법고, 목어와 더불어 불교 의식에 쓰이는 4물(四物)의 일원으로 보통 범종과 같
은 방을 쓰기 마련이다. 허나 도봉사는 절의 필수품인 범종(梵鐘)이 없어서 운판을 범종 대신
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대웅전 좌우에 일주문 축소판 모양의 건물을 세우고 커다란 운판을 북
처럼 걸어두어 아침 3시 새벽예불과 오후 6시에 도봉산에 은은하게 운판 소리를 울린다. 운판
피부에는 불교의 새인 가릉빈가<迦陵頻伽, 극락조(極樂鳥)>를 새겨 조촐하게 조형미를 고려했
다.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극락정사
(極樂精舍, 극락전)

▲  극락정사의 주인인 금동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

         ◀  빈자일등상(貧者一燈像)
대웅전 우측에는 빈자일등상이라 불리는 생소
한 이름의 석물이 자리해 있다. 처음에는 보이
는 모습 그대로 코끼리 등에 용과 연꽃무늬 등
이 새겨진 대좌를 얹히고 그 위에 선 관세음보
살 누님 상이라 생각했는데, 집에 와서 확인해
보니 '가난한 자의 등불 하나'를 뜻하는 빈자
일등상이었다.
빈자일등상은 현우경(賢愚經)의 빈녀난타품(貧
女難陀品)에서 비롯된 것으로 다음의 사연이
깃들여져 있다.
인도 사위국(舍衛國)에 난타(難陀)라는 가난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주로 구걸로 삶을 연명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나라에 석가모니가
찾아왔다. 인도의 대중스타가 된 그의 방문 소
식에 나라 사람들은 앞다투어 몰려가 공양과
등불을 올리며 그를 환영했는데, 난타도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궁색한 형편이
라 그에게 줄 선물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몇푼이라도 벌기 위해 거리로 나가 구걸을 했으나 겨우 1푼 정도의 돈을 마련하
는데 그쳤다. 그 돈을 들고 기름 장수를 찾아가 기름을 청했으나 당시 1푼으로는 어림도 없었
다. 기름 장사도 코웃음을 치며 거절했던 것이다.
그러자 난타가 눈물로 단장의 심정으로 호소하니 기름 장수도 이내 태도를 바꿔 돈하고 상관
없이 많은 양의 기름을 그녀에게 내주었다. 이에 단단히 감동을 먹은 난타는 절을 100번 이상
올리며 감사의 뜻을 표하고 등불을 들고 석가모니를 찾아가 다른 사람들이 갖다 놓은 등불들
사이에 정성스럽게 놓았다. 마치 그가 보아주기를 바라듯이..
그런데 다음 날 이상한 일이 생겼다. 등불의 밥줄인 기름이 말라 감에 따라 하룻밤 사이에 등
불이 죄다 꺼졌으나 이상하게도 난타의 등불만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등불
은 더욱 밝고 힘차게 타오르는 것이다. 그 등불을 본 석가모니는 난타의 사연을 전해 듣게 되
었고 결국 그를 여자 승려인 비구니(比丘尼)로 받아들여 제자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빈자일등의 사연이다. 즉 물질과 풍요로움보다는 빈약하나 정성과 정신이 더 소
중하다는 의미가 되겠다. 돈님을 숭배하고 사는 오늘날 인간들에게 제대로 귀감이 되는 내용
이지만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것이 인간인지라 빈자일등은 여전
히 외면을 받고 있고, 부자1등만 찬양을 받는 것이 현재의 세태이다. (종교도 예외는 아님)
코끼리는 부처의 법을 상징하며, 인도에서 많이 살고 있는 동물이다. 또한 그 위에 있는 여인
은 관세음보살 누님이 아닌 바로 빈자일등의 주인공, 난타이다. 도봉사에서 빈자일등상을 세
운 것도 그 교훈을 닮겠다는 것인데, 지나치게 겉모습과 돈에만 치중하지 말고 비록 소박하더
라도 중생을 위하는 아름다운 공간이 되기를 염원해본다.


▲  가건물로 이루어진 산신각(山神閣)

대웅전 우측 높은 곳에는 가건물로 이루어진 허름한 산신각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
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산신각은 그 이름 그대로 산신을 봉안하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산신
과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같은 자리에 봉안했다. 산신각은 절에 따라 독성 외에 칠성(七聖,
치성광여래)까지 봉안해 삼성각(三聖閣)의 역할을 하기도 하며, 도봉사의 유일한 지정문화재
인 치성광여래3존도가 여기에 있나 싶어 기웃거려 보았으나 값비싼 존재라 이곳에는 없었다.
하긴 도봉사에서 가장 비싼 몸인데, 이런 가건물에 봉안할 리는 없겠지.


▲  산신각 산신과 독성

호랑이 등을 의자 삼아 앉아있는 산신, 그 곁에는 하얀 머리의 독성이 나란히 앉아 마치 경로
당 분위기를 자아낸다. 비록 그들이 앉은 방석은 다르지만 이렇게 산신과 독성이 같은 자리에
봉안된 것을 여기서 처음 본다. 그들 뒤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 소나무, 산이 그려진 산신
탱이 걸려있다
.

* 도봉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494-2 (도봉산길 89, ☎ 02-954-7743)


 

♠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  도봉사 앞에 펼쳐진 메타세콰이어 숲길

능원사와 도봉사를 차례대로 둘러보고 그들 앞
을 지나는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을 타고 무수
골로 넘어갔다.
도봉옛길은 다락원에서 광륜사, 도봉동문(道峰
洞門) 바위글씨, 능원사, 도봉사, 진주류씨묘
역, 윗무수골을 거쳐 무수골 세일교로 이어지
는 3.1km의 산길로 거의 느긋한 수준이며, 통
행이 좀 어려운 곳에는 나무데크길 닦아 통행
의 편의성을 높였다.
게다가 도봉사와 광륜사 등의 오래된 절과 도
봉동문 바위글씨, 진주류씨묘역, 광륜사 느티
나무 등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볼거리도 산재
해 있어 역사의 향기도 진하다.
옛날 서울에서 도봉산과 도봉서원으로 가던 산
길이라 도봉옛길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다락원에서 '다락원길'로 간판을 바꾸어 북쪽
으로 흘러가고, 무수골에서는 '방학동길'로 간
판을 갈고 남쪽으로 흘러간다.

도봉사 앞에는 비록 짧지만 늘씬하게 솟은 메타세콰이어가 조촐하게 숲길을 이루며 하늘과 이
른 무더위를 긴장시킨다. 메타세콰이어는 은행나무와 더불어 천하에서 매우 오래된 화석나무
로 2차 세계대전 시절에 중원대륙에서 발견되었다.
이 나무에 단단히 매료된 아메리카와 유럽 양이(洋夷)들은 그 나무를 가져가 그들 나라에 심
었고, 이렇게 서양식 이름표를 달며 천하에 보급되었는데, 우리나라에는 1950년대에 미국산
나무가 들어와 뿌리를 내렸다.

메타세콰이어 하면 다들 전남 담양(潭陽)에 있는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을 떠올릴 것이다. 그
곳은 이제 담양을 넘어 천하의 메타세콰이어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받고 있는데, 시작은 단
순히 도로 가로수였으나 점차 관광지로 몸값이 높아지면서 이제는 담양 꿀단지로 단단히 자리
를 잡았다.
도봉사 메타세콰이어 숲길은 조성된지 얼마 안된 것으로 나이는 비록 적지만 훤칠한 키를 자
랑하며, 늘씬하게 솟은 모습이 시원스럽기 그지 없다. 참고로 서울에서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이곳 외에 서남물재생센터공원과 용산가족공원, 안산자락길, 하늘공원 등
이 있다.


▲  도봉옛길 도봉사 서쪽 관문

▲  무덤을 잃은 채, 약간 기울어진 문인석(文人石)

도봉옛길을 굳이 2개로 나눈다면 다락원~도봉사 구간과 도봉사~무수골의 남쪽 구간으로 구분
할 수 있다. 도봉사~무수골 구간은 다락원~도봉사 구간보다 완만한 산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간에 조선 전기에 조성된 진주류씨묘역이 자리해 있다. 도봉산 자락이 명당(明堂) 자리로
이름이 높았고, 서울과도 가까워 왕족과 사대부(士大夫)의 무덤 자리로 인기가 높았다. 하여
도봉산 자락인 방학동(放鶴洞)과 도봉동에 조선시대 상류층의 무덤이 즐비하다.
그중 도봉옛길 남쪽에 자리한 무수골에 전주이씨 영해군파(寧海君派)묘역(☞ 관련글 보기)과
과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과 의령옹주(義寧翁主)묘역, 함열남궁씨묘역, 도봉옛길에 자리한
진주류씨묘역 등은 후손들의 지극정성으로 잘남아있지만 관리 소홀로 인해 자연의 일부로 녹
아든 묘도 적지 않다.
도봉사에서 도봉옛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보면 문인석 1기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무덤을 잃
고 홀로 남아있다. 그는 고된 세월에 매우 지쳤는지 옆으로 좀 기운 상태로 이를 안스럽게 본
어떤 사람이 나뭇가지를 세워 문인석의 등을 받쳐들게 했다.
허나 문인석이 아무리 우울한 처지라고 해도 몸을 지탱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지만 무
덤을 잃고 버려진 자신에게 그런 배려를 한 점에서 문인석도 적지 않게 고마움을 느꼈을 것이
다. 문인석이 지켰을 무덤은 그 주변을 파보면 아마 나올 것이다.


▲  무덤이 졸지에 조그만 언덕이 되버린 현장

문인석 부근에는 버려진 무덤이 하나 있다. 무덤 밑에 석축까지 있는 것을 보면 지체 높은 양
반가의 무덤이 분명해 보이는데, 무덤이 버려지면서 봉분(封墳)에는 공자(孔子) 무덤처럼 무
려 나무까지 자라났다. 앞서 문인석이 이 무덤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나 문인석이 입을 열지
않으니 낸들 알 도리가 없다.


▲  도봉옛길 고갯길 (진주류씨묘역 북쪽)

▲  도봉옛길 (진주류씨묘역 부근)

▲  진주류씨묘역 류양 신도비(柳壤 神道碑)

도봉옛길 남쪽 구간 중간에는 진주류씨묘역이 자리해 있다. 산길 좌우에 자리해 있어 만나기
도 매우 쉬운데 산길 가에 이 묘역의 제일 어른인 류양 신도비가 있다.
이곳은 진주류씨 류양 일가의 묘역으로 15세기에 활약했던 류양이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
) 이후 무덤 자리로 매입했다. 그 토지에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 류양이 제일 먼저 묻혔고,
그의 아들인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 류첨정
(柳添汀), 류첨정의 아들인 좌의정(左議政) 류보(
柳溥)와 진양군(晉陽君) 류영(柳濚), 류영의 아들인 진명군(晉溟君) 류사기(柳師琦), 류보의
아들인 사헌부 감찰 류사상(柳師尙) 묘 등이 자리한다. 이들은 15~16세기에 활약했던 인물로
근래에 무덤에 다소 손질을 가하긴 했으나 조선 전기 무덤 양식을 그런데로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무수골에는 진주류씨의 제각(祭閣)이 있다.

북한산둘레길 이전에는 한가한 산골로 산꾼의 왕래도 드물었으나 둘레길이 개척되면서 산꾼들
의 왕래가 빈번해졌다. 둘레길이 묘역 중앙을 지나가기 때문이다. 북한산둘레길로 그 존재가
드러난 명소의 하나로 묘역은 다행히 개방되어 이들을 둘러볼 수 있으나 몇몇 몰지각한 산꾼
들이 묘역에 자리를 피고 밥이나 간식을 먹거나 나물을 캐는 행위 등을 벌이고 있어 묘역을
개방한 진주류씨 집안의 뜻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이들 묘역은 그들 조상의 무덤이자 소중
한 문화유산으로 무덤을 둘러보거나 답사를 하는 것 외에 행위는 무조건 삼가해야 된다.
묘역 사진은 본인의 귀차니즘으로 담지는 않았고 최근에 만든 류양 신도비만 담는 선에서 끝
냈다. 도봉산 자락에 널린게 조선시대 상류층의 무덤이다보니 그리 끌리지는 않았다.


▲  도봉옛길 윗무수골 관문

진주류씨묘역을 지나 남쪽으로 조금 가면 윗무수골 관문이 나온다. 그 관문을 지나면 윗무수
골로 무수골 윗쪽에 자리해 있어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곳은 도봉산 자락에 묻힌 산
골마을로 밭과 계곡이 펼쳐져 있고, 숲이 무성해 이곳이 정녕 서울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
든다. 갑자기 지방의 어느 시골로 순간이동을 한 기분이다.


▲  도봉옛길 윗무수골 구간 ①

▲  도봉옛길 윗무수골 구간 ②
도봉옛길 윗무수골 구간은 무수골 세일교까지 1차선 크기의 시골길이
펼쳐져 있다. 서울에서 거니는 시골길의 맛은 참 담백하다.

▲  윗무수골과 무수골이 만나는 세일교 주변

윗무수골 관문에서 7분 정도 시골길을 거닐면 무수골과 만나는 세일교이다. 여기서 도봉옛길
은 묵은 이름을 버리고 방학동길로 간판을 바꾸어 연산군묘 방면으로 흘러간다. 세일교를 건
너 무수골 안쪽으로 들어가면 무수골의 주인인 영해군파묘역이 나오며, 산골을 무색케하는 너
른 논이 펼쳐져 있어 이곳이 꿈인가 생시인가 의심될 정도로 고개를 또 갸우뚱하게 만든다.


본글은 여기서 끝, 무수골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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