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산'에 해당되는 글 126건

  1. 2019.09.24 서울의 동북쪽 지붕을 거닐다. 수락산 구석구석 나들이 ~~~ (노원골, 수락산보루, 서울둘레길, 동막골, 도선사)
  2. 2019.08.25 연꽃의 달달한 향연 속으로 ~ 서울연꽃축제의 성지,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
  3. 2019.08.14 기름진 논두렁과 밭두렁을 간직한 서울의 두메산골, 도봉산 무수골 ~~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전주이씨영해군파묘역, 무수골계곡)
  4. 2019.08.05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산과 숲, 호수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옛길, 괴산 산막이옛길 (괴산호, 등잔봉, 한반도지형, 앉은뱅이약수)
  5. 2019.07.07 민통선에 묶여있는 강화도 옆구리의 커다란 섬, 교동도 여름 나들이 ~~ (교동읍성, 교동향교, 성전약수, 화개사, 강화나들길 9코스)
  6. 2019.06.24 북한산둘레길2코스 순례길, 구천계곡 여름 나들이 ~~~ (수유동 분청사기가마터, 신익희선생묘, 가인 김병로묘, 단주 유림묘)
  7. 2019.05.31 중랑구의 북쪽 지붕이자 서울 도심의 상큼한 뒷동산, 봉화산 둘러보기 ~~ (숙선옹주묘, 아차산봉수대터, 봉화산도당, 충익공 신경진묘역)
  8. 2019.05.22 봄맞이 산사 나들이 ~ 비봉능선 밑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금선사 (목정굴)
  9. 2019.04.21 남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옛 탐라의 현장, 제주도 새해 나들이 (외도 월대, 수산리곰솔, 납읍 금산공원, 제주올레길15,16,17코스)
  10. 2019.02.03 새해 해돋이 명소이자 우리나라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나들이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서울의 동북쪽 지붕을 거닐다. 수락산 구석구석 나들이 ~~~ (노원골, 수락산보루, 서울둘레길, 동막골, 도선사)



~~~~~  서울의 동북쪽 지붕, 수락산 여름 나들이
~~~~~
(수락산보루, 도선사, 동막골)

   
서울둘레길 수락산 동막골 구간

▲ 수락산보루
◀ 서울둘레길 동막골 구간
▶ 동막골 숲길
▼ 도선사 석삼존불상

   

 


 

서울의 동북쪽 지붕을 이루고 있는 수락산(水落山, 638m)은 상계1동에 살던 10대~20대 시
절 나의 뒷동산이다. 지금은 바로 옆 동네인 도봉동(道峰洞)에서 도봉산(道峯山, 720m)의
그늘을 받으며 살고 있지만 수락산이 뻔히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라 종종 그의 품을 찾
곤 한다. 그곳에는 계곡과 명소, 오래된 절 등 구수한 볼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수락산 서울 구역에 남아있는 미답처(未踏處)를 일부라도 지우고자 아직 발자국
을 남기지 못한 수락산 보루터와 서울둘레길 수락산 구간 일부, 그리고 오래된 석불을 간
직한 도선사를 찾았다.


 

♠  수락산 노원골과 수락산보루터

▲  노원골 (노원골약수터 주변)

이번 수락산 나들이는 수락산의 주요 기점의 하나인 노원골에서 시작했다. 상계1동에 살 적에
노원골과 인근 수락골(벽운동계곡)을 많이 이용했는데, 물을 뜨러 갈 때는 보통 노원골을 선
호했다. 수락골은 제대로된 샘터를 만나려면 상당히 올라가야 했지만 수락골은 조금만 올라가
도 샘터가 무수히 나왔기 때문이다.

노원골은 수락산을 장식하는 주요 계곡으로 노원골 북쪽 능선과 남쪽 능선 사이에서 발원(發
源)하여 중랑천(中浪川)으로 흘러간다. 허나 계곡 밑까지 주거지가 형성되면서 수락산과 속세
의 경계선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한 채, 중랑천으로 넘겨지고 있다. 이는 인근 수락골도 마찬
가지로 서울에 있는 많은 계곡의 잔인한 현실이기도 하다. 겨울 제국(帝國)이 씌운 얼음은 소
쩍새가 울 때면 알아서 녹기 마련이지만 인간이 씌운 복개천의 굴레는 좀처럼 벗기기가 힘들
다.

노원골이 수락골보다 골짜기는 작아도 바위와 반석이 많고, 계곡을 완전히 가릴 정도로 숲이
짙으며, 수심도 얕아 아이들 물놀이 장소로도 아주 좋다. 게다가 경관 또한 아름다워 예로부
터 지역 피서지로 격하게 추앙을 받아왔다. 작지만 매우 야무진 계곡이었던 것이다. 특히 노
원골약수터 주변은 풍경이 아주 일품으로 반석이 넓게 깔려있다.
허나 여름 제국이 무더위로 천하를 너무 쥐어짜면서 계곡을 불리던 냇물은 거의 말라버렸다.
제아무리 잘생긴 바위도, 아름다운 계곡 풍경도 다 물이 있어야 빛을 발하기 마련이거늘, 물
이 별로 없으니 바위와 반석도 일개 돌덩어리 밖에는 되지 않는다. 심술쟁이 여름 제국이 이
멋드러진 계곡을 무더위란 폭격으로 그야말로 쑥대밭을 만든 것이다.

노원골 기점에서 8~9분 정도 오르면 노원골약수터가 모습을 비춘다. 한때 수락산에서 잘나가
던 약수터였으나 약수터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부적합 판정을 받은 이후, 완전 죽은 샘터
가 되었다. 물이 마지막으로 용솟음친지 꽤 되었는지 물기 조차 더듬기가 어렵다. 상계1동 시
절에 이곳 물도 참 많이 마셨는데, 이렇게 맥없이 끊기고 말았다.


▲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
이곳을 오가던 사람들이 소망을 넣으며 하나, 둘 쌓은 돌무더기가 어느덧
큰 돌탑으로 성장했다. 소박한 중생들의 소망을 먹고 자란 돌탑이라
그 모습 또한 소박하기 그지 없다.
 

노원골약수터에서 남쪽 산길을 오르면 노원골 남쪽 능선과 수락산보루로 이어진다. 경사는 그
리 각박하지는 않은데, 그 길을 1분 오르면 왼쪽(동쪽)으로 빠지는 샛길이 있다. 그 길로 접
어들면 바로 조그만 샘터가 하나 있었다. 한때 나의 즐겨찾기 약수터였으나 노원골약수터처럼
숨통이 끊어져 참 애석하기 그지 없다.
인간의 탐욕과 개발의 칼질이 춤추는 속세의 악한 기운이 어느덧 이곳까지 구렁이 담 넘듯 들
어와 수락산을 위협하고 있던 것이다.

여기서 조금 올라가면 운동 시설을 갖춘 약수터가 나오고, 길은 좀 각박해진다. 하지만 그만
큼 능선으로 가는 길도 빨라, 상계1동 시절에 이 산길을 자주 오르곤 했다. 잠깐의 고통을 감
내하면 완만한 능선길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드디어 노원골 남
쪽 능선에 이르고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귀임봉은 동쪽으로 가면 되고, 수락산보루
는 서쪽으로 서서히 내려가면 된다.


▲  노원골약수터 남쪽 산길에서 바라본 수락산 산줄기
가운데 왼쪽 봉우리가 수락산 정상이다. 같은 수락산이지만 노원골은
수락산 정상과 거리가 제법 멀다.

▲  수락산보루(堡壘)터 - 사적 455호

노원골 남쪽 능선이 귀임봉을 거쳐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상계동 아파트단지를 바로 앞에 두고
마지막 용솟음을 치는 봉우리에 고구려(高句麗)가 남긴 작은 점, 수락산보루가 살짝 깃들여져
있다.
이곳은 수락산에서 가장 서남쪽이자 시내와 가장 가까운 봉우리로 수락산 영역에서 가장 전방
에 자리해 있다. 높이는 192.5m로 수락산의 제일 막내 봉우리이지만 수락산 산줄기와 이어진
동북쪽과 북쪽을 제외하면 모두 평지라 조망이 썩 일품이다. 그래서 봉우리에 올라서면 남쪽
과 동남쪽으로 불암산(佛巖山)과 노원구 일대, 멀리 중랑구와 봉화산(烽火山)이 시야에 들어
오고, 서쪽으로 옛 마들평야를 회색빛으로 물들인 상계동(上溪洞) 아파트단지와 도봉구, 강북
구, 북한산(삼각산), 도봉산이 시야에 잡힌다.
이처럼 위치가 휼륭하니 옛 사람들이 그냥 둘리는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 거의 전쟁을 잊고
살지만 옛날, 특히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에는 전쟁이 빈번했다. 그때는 이런 봉우리가 천금
보다 비싼 법이라 일찍이 고구려는 이곳에 보루를 심어 서울 지역을 지켰다.

만주에서 일어난 고구려가 서울 강북을 점유한 것은 고구려의 위대한 정복군주인 광개토태왕(
廣開土太王, 재위 392~413) 시절이다. 그는 재위 초반에 백제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서울 강
북과 경기도 이북을 점령했는데, 백제(百濟) 또한 산동반도(山東半島)를 비롯한 중원대륙의
넓은 해안 지역과 왜열도(倭列島)를 점유한 무시못할 나라라 더 이상 남하를 못하고 한강을
두고 대치했다. 대신 말발굽을 서쪽과 북쪽, 동쪽으로 돌려 신나게 영토 확장을 벌였다.

광개토태왕의 뒤를 이은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보호국인 북연(北燕)을 완전히
접수하고 라이벌인 북위(北魏)를 위협하며 황하 유역과 내몽골 지역인 지두우(地豆于)까지 영
역을 넓혔다. 그리고 숙적인 백제를 공격하고자 아차산성(阿且山城) 주변에 보루를 주렁주렁
닦고 바로 한강 너머로 보이는 백제의 국도(國都), 한산<漢山, 위례성(慰禮城) 서울 송파/강
동 지역>을 수시로 염탐하며 때를 찾다가, 드디어 475년 한강을 건너 한산을 점령, 백제 개로
왕(蓋鹵王)을 처단하고 한산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리고 경기 남부와 충북, 경북 포항(浦項
)까지 거침없이 내달렸다.


▲  봉긋 솟은 봉우리에 자리한 수락산보루

서울과 한강 유역을 장악한 고구려는 이 지역을 다스리고 백제와 신라(新羅)의 공격에 대비하
고자 전략적 요충지인 서울과 경기 북부에 많은 성과 보루를 구축하거나 백제가 쓰던 것을 수
리하여 사용했다. 여기서 보루란 성보다 작은 요새로 돌과 목책으로 구축했는데, 작은 것은
수십 명, 큰 것은 수백 명이 주둔하며 산성(山城) 못지 않은 시설을 갖추기도 했다.

보루는 주로 서울 동쪽 산줄기에 주렁주렁 달렸는데, 한강과 가까운 구의동 홍련봉(紅蓮峰)을
시작으로 아차산과 용마산(龍馬山), 망우산(忘憂山), 봉화산 산줄기에 크고 작은 보루를 닦아
아차산성(阿且山城)을 보조했다. 그리고 수락산에도 보루를 설치해 북쪽(사패산)과 남쪽 아차
산을 연결했다. 수락산보루에서 남쪽을 보면 봉화산이, 서북쪽으로 사패산을 품은 도봉산이
바라보여 이곳에 보루를 둔 고구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만하다.
그리고 북쪽으로 사패산(賜牌山), 의정부 천보산(天寶山), 양주 불곡산(佛谷山), 도락산(道樂
山), 독바위(양주시 옥정동)에 보루를 설치했는데, 아차산부터 천보산까지는 중랑천과 3번 국
도를 쭉 따라가고 있어 이들이 당시 주요 교통로였음을 귀뜀해준다. 양주 이북은 보루는 거의
없고, 연천 호로고루(瓠蘆古壘)와 은대리성, 당포성, 포천 반월성(半月城) 등의 온갖 성곽을
지어 경계망을 촘촘히 했다.

허나 그렇게 강성했던 고구려는 6세기 이후, 백제와 신라, 중원대륙의 여러 나라, 돌궐(突厥)
등의 도전을 받게 되면서 많은 땅을 잃고 만다. 551년 경에는 백제와 신라에 의해 한강 유역
을 상실하게 되었고, 아차산성까지 신라에 떨어지면서 결국 경기 북부로 물러나게 된다. 백제
의 뒷통수까지 치며 서울 지역을 장악한 신라는 고구려 보루 상당수를 내버렸고, 불곡산보루
등 일부만 수리해서 쓴 것으로 보이나 끝내는 모두 버려지게 된다.
아무리 인간이 만든 대단한 건축물이라 해도 사람의 손때가 식은 것은 그리 오래 못간다. 결
국 세월의 장대한 흐름과 대자연의 태클 앞에 모래성처럼 녹아내리고 말았다.


▲  대머리처럼 허전한 수락산보루터 (그 너머로 귀임봉이 보인다)

수락산보루는 장수태왕 시절인 5세기 중/후반에서 6세기 초에 구축된 것으로 여겨진다. 보루
가 둥지를 튼 봉우리 정상부는 평탄하며, 북쪽과 동서쪽은 조금 급경사를 이루고 있고, 남쪽
은 완만한 경사이다.
이 보루는 상계동에 있다고 해서 상계동보루라 불리기도 했는데, 요즘은 수락산보루로 널리
불린다. 이곳은 6세기 중반 이후 버려져 터만 남아오다가 왜정(倭政) 때 발견되었으며, 왜정
이 1942년에 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상계동 성터가 2개소로 나와있어 이곳이 그중 하
나로 여겨진다.

보루는 봉우리 정상부에서 3~4m 아래로 빙돌아가며 돌을 쌓았는데, 전체 둘레는 약 150m 정도
이며, 북쪽 부분이 약간 찌그러진 타원형이다. 그리고 집수시설로 보이는 함몰 부분이 2곳이
있다.
보루의 밑도리만 간신히 남아 흙에 묻히고 잡초와 섞여졌으며, 보루의 존재가 잊혀진 채, 오
랜 세월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히면서 석축은 흩어지거나 가루가 되었다. 심지어 정상부에 체
육시설까지 들어서면서 간신히 남은 보루의 흔적마저 숨기가 바빴다.
그러다가 1990년대 말 이후, 아차산과 용마산, 망우산에서 많은 보루가 발견되었고, 봉화산과
수락산, 사패산, 불곡산 등 땅속에 잠자던 보루들이 대거 밖으로 나오면서 수락산보루도 다시
금 빛을 보게 되었다. 게다가 고구려앓이가 전국적인 유행을 타면서 아차산성과 아차산~용마
산 보루는 고구려의 장대한 유적이자 남한의 대표 고구려 흔적으로 단단히 덕을 보게 되었다.

수락산보루를 발굴조사하면서 많은 고구려 토기와 성돌, 보루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조사가
끝나자 이들을 모두 흙으로 덮고 그 위에 나무와 풀을 심어 가려놓았다.


▲  서쪽에서 바라본 수락산보루터

그렇다면 보루의 왕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워낙 단단히 녹아내려 그 모습을 상상하기는 좀
무리가 있지만 근래 복원된 아차산4보루를 참고로 하여 그 모습을 크게 축소하면 대충 그림은
그려질 것이다. 봉우리가 작고 보루의 둘레도 고작 150m 내외라고 하니 그냥 이 땅에 흔한 봉
수대 규모 정도로 보면 될 듯 싶다. 거기에 군사들이 머물 공간과 무기 창고, 보루를 보호할
목책 정도 갖추고 있었을 것이며, 규모가 작기 때문에 50명 내외가 머물며 수비한 것으로 여
겨진다.

보루가 우뚝 서있던 봉우리 정상은 풀만 좀 돋아 있다. 거기에 누런 흙바닥마저 황량히 드러
나고 있어 대머리처럼 허전하기까지 하다. 그 주변은 여름 제국의 기운을 먹고 자란 수풀과
들꽃이 짙게 우거져 고구려의 흔적을 가리고 있어 안내문이 아니면 이곳이 정녕 보루가 있던
곳인지 조차 햇갈린다. 그만큼 자연에 쏙 동화되어 버린 것이다.


▲  수풀로 가득한 수락산보루터 남쪽
숲 너머로 상계동과 노원구 지역, 봉화산이 바라보인다


수락산보루는 2004년 10월에 아차산과 용마산, 망우산 보루와 더불어 '아차산 일대 보루군'이
란 이름으로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 묶음에 들어간 보루는 총 17기인데, 수락산은 아차산과
거리가 제법 있음에도 그 묶음에 넣어버렸다. 차라리 이곳은 별도로 사적으로 지정하거나 서
울 지방기념물로 삼아 관리하는 것이 좋을 듯 싶은데, 굳이 먼 거리를 무릅쓰고 한 덩어리로
모은 것이 궁금하다. 만주와 요동(遼東), 북한을 제외한 이 땅에 흔치 않은 고구려 유적이니
너무 짜게 굴지 말고 후하게 등급을 매겨 관리했으면 좋겠다.


▲  수락산보루터에서 바라본 귀임봉과 수락산 산줄기

▲  수락산보루터에서 바라본 불암산(507m)의 위엄

수락산보루를 지닌 봉우리의 이름은 아직 없다. 보루터가 있으니 편하게 보루봉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봉우리지만 그 옛날 고구려가 남긴 한 줄기 점 때문에 비록
아차산만큼은 아니더라도 조촐하게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아직 이름을 지니지 못한 봉우리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우리의 자랑스런 고구려
가 백제를 뚫고 이곳을 차지해 보루를 씌우고 남방을 경영했던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니더냐~!
내가 서식하는 근처에 비록 완전하지는 못해도 이런 고구려 유적이 있다는 것이 참 반갑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 산 105-1


 

♠  수락산 서울둘레길과 동막골

▲  수락산보루에서 온곡초교로 내려가는 숲길

수락산보루와 이렇게 첫 인연을 짓고 온곡초교 방면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은 계단이 닦
여져 있으나 경사가 속세를 닮은 듯, 조금 가파르다. 허나 소나무가 하늘과 속세(俗世)를 가
릴 정도로 삼삼하게 우거져 솔내음의 향도 진하며, 그늘의 깊이도 크다. 숲 너머로 보람아파
트를 비롯한 상계동의 회색빛 아파트들이 가까이 바라보여 도심 속 산길을 거니는 기분을 진
하게 선사하는데, 산길 중간에 그 유명한 서울둘레길과 만난다.

서울둘레길은 서울시가 야심차게 닦은 둘레길로 서울 주위를 1바퀴 도는 길이다. 총 8개의 코
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거리는 157km에 이르는데, 그 1코스가 도봉산역에서 시작해 수락산
과 불암산 허리를 지나 화랑대역에서 끝을 맺는 길로 거리는 14.3km이다. 2개의 산을 들락거
려야되서 서울시에서는 난이도를 상급으로 책정해 사람들을 괜히 긴장을 타게 만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무섭거나 걱정할 수준은 절대 아니다. 다만 산 구간이 길어서 상급으로 책정된
것이다. 길도 잘 닦여져 있고,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나 거닐 수 있는 대중적인 둘레길이니
너무 겁은 먹지 말자~!
또한 도봉산역 동쪽인 창포원 관리사무소 앞과 불암산 우회코스 갈림길, 그리고 화랑대역(6호
선) 4번 출구 앞 공원에 서울둘레길 스탬프가 있으니 완주를 하거나 그곳을 지나가면 기념 도
장을 찍고 가기 바란다.


▲  잘 닦여진 수락산 서울둘레길 (수락산보루 부근)

수락산보루에서 동막골 도선사까지는 서울둘레길을 타기로 했다. 귀임봉과 학림사(鶴林寺)를
경유해서 가는 것이 조금은 빠르겠지만, 수락산 허리에 깔아놓은 서울둘레길 1코스도 엄연한
미답처이므로 미답처를 하나라도 더 지울 겸, 느긋한 둘레길을 이용했다.
수락산보루 주변과 상계3동 일부 구간은 끊긴 길을 잇고자 새로 길을 뚫거나 나무로 길을 내
었고, 시내가 잘 보이는 곳에는 조망대를 설치하여 두 눈까지 호강을 시켜준다. 게다가 숲도
짙어 시원한 산바람이 적당히 땀까지 털어준다.


▲  수락산 서울둘레길 (학림사 부근)

▲  석천(石泉)약수터
학림사 동남쪽 계곡에 묻힌 석천약수는 바위 밑에서 물이 나오는 샘터이다.
하여 이름도 석천이다. 아직은 적합 판정을 유지하고 있어 마음껏
마셔도 되며, 졸고 있는 컵을 깨워 실타래처럼 답답하게 나오는
샘물을 가득 담아 들이키니 목구멍이 뻥뚫린 듯 시원해진다.

▲  석천약수터 부근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노원구 지역

▲  수락산 서울둘레길 동막골 서쪽 구간
서울 시내가 바로 지척임에도 마치 지방의 깊은 산골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  수락산 동막골

수락산 남쪽에 자리한 동막골은 수락산의 주요 골짜기이다. 이곳 동막골은 골짜기가 깊고 숲
이 무성해 일찌감치 유원지로 개발이 되었다. 그래서 동막골유원지라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수락산 보호를 위해 행락 시설은 거의 철거되고 나무를 짙게 깔았으며, 골짜기에 도선사와 송
암사, 도안사 등 많은 절이 둥지를 틀어 계곡 중류까지 포장길이 닦여져 있다.

동막골은 경관이 아름답고 자연 환경이 잘 남아있는 현장으로 2010년에 노원구청이 저수량 4
만8천톤 규모의 저수지를 계곡에 만들려고 생난리를 치다가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된 바
가 있다. 서울시도 그 사업에 타당성이 없다고 노원구에 공문을 보낸 터라 다행히 전시행정의
부질없는 삽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2014년에 서울시 보건환경연구원에서 동막골과 북악산(백악산) 삼청동천(삼청공원), 북
악산 백사실계곡(백사골), 인왕산 백운동천(白雲洞天)의 생태계 조사를 벌였는데, 모두 1급수
를 유지하고 있음이 나타났다.
특히 동막골에서는 북방산개구리와 좀주름다슬기 등 도시에서는 만나기 힘든 수중 동물이 크
게 무리 지어 살고 있었다. 비록 이곳이 수락산의 주요 길목이라 산꾼과 나들이 수요가 높아
때는 많이 벗겨지긴 했으나 아직 청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  동막골 도선사입구

▲  도선사를 알리는 표석

동막골에서 울창한 숲길을 따라 윗쪽으로 가면 도선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을 한다. 여기
서 그의 안내를 받아 동쪽 길로 가면 얼마 안가 '수락산 유아숲 체험장'이 모습을 비춘다.


▲  수락산 유아숲 체험장

수락산 유아숲은 서울시가 동막골에 조성한 이름 그대로 어린이를 위한 숲체험장이다. 유아를
둔 가족과 유치원, 어린이집의 소풍 장소로 수풀과 꽃을 심은 초화원을 비롯해 올챙이숲속교
실, 모험놀이마당, 교구놀이마당, 모래놀이터, 계곡물놀이마당, 숲속휴게소 등을 갖추고 있으
며, 먹거리를 가져와 섭취하는 것은 괜찮으나 밥 짓는 등의 취사행위는 절대로 안된다.
유아숲 체험장도 좋지만 동막골이 골도 깊고 숲도 짙으므로 넓게 범위를 잡아 산림욕장을 닦
는 것은 어떨까 싶다. 마침 서울에는 호암산(虎巖山) 외에는 마땅한 산림욕장도 없고 자연휴
양림도 없다.
자연휴양림은 서울 땅에서는 좀 무리가 있고 숲이 넓은 이런 곳에 제대로 된 산림욕장을 닦고
자연보호를 더 엄격히 하여 도심 속의 신선한 청량제로 가꾸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  귀여운 개구리가 인상적인 수락산 유아숲 체험장 안내도

▲  유아의 꿈을 먹고 자란 들꽃들의
조그만 세상, 초화원

▲  유아숲 놀이터와 쉼터


▲  동막골계곡에 자리한 계곡물놀이마당 ▼


▲  도선사로 인도하는 숲길


 

♠  동막골에 둥지를 튼 조촐한 산사, 오래된 석불을 후광으로
삼아 절을 꾸리는 수락산 도선사(導善寺)

수락산 동막골에는 수락산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절들이 많다. 이들은 대부분
역사가 짧은 절집으로 그중 도선사가 동막골 상류 구석에 살짝 둥지를 틀었다.

도선사하면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도선사(道詵寺)를 떠올릴 것이다. 도선대사의
이름을 딴 북한산 도선사는 서울 뿐 아니라 천하에도 널리 알려진 오래된 절이기 때문이다.
허나 수락산 도선사는 이름은 같지만 한자는 완전 다르다. 이름을 풀이하면 선함으로 인도하
는 뜻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역사가 짧고 인지도도 매우 적다.
내가 현대 사찰인 도선사를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오래된 석불을 보기 위함이다. 솔
직히 그거 때문에 온 거지 그것도 없었다면 아마 영원히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도선사에 오래된 석불이 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문화유산을 간직한 20세기 절들 상당수가 속
세에 배타적인 기질(외지인 경계, 사진 촬영 금지 등)이 짙어 사전에 어떤 곳인지 인터넷에서
살펴보았다. 아주 적게나마 도선사 관련 데이터들이 나왔는데, 절을 찾은 이들이 담은 석불
사진도 제법 나왔다. 그래서 속세에 그리 경계적인 곳은 아니라 판단되어 출동한 것이다.

같은 동막골에 있음에도 산꾼과 피서객으로 분주한 유아숲 체험장과 동막골 산길과 달리 이곳
은 꽤 한적하다. 수락산이 부는 산바람 소리가 그야말로 전부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소리를
깨고 혜성처럼 나타난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도선사에서 기르는 멍멍이들이다. 덩치도 쥐방
울만한 것들이 나를 보자 세상이 꺼지도록 짖어대는데, 그 소리가 귀신마저 도망치게 할 정도
로 매서웠다.
내가 도둑질하러 온 것도 아니고, 영 좋지 않은 사람도 아니건만, 단지 저들에게 익숙치 않다
는 이유로 단순한 저것들의 견제를 받으니 참 당황스럽기 그지 없다.

그래서 주차장 옆에 보이는 종무소(宗務所)로 달려가 도움을 청했으니 아무도 없어 간신히 개
들의 견제를 뚫으며 계곡(동막골) 다리를 건너 경내로 진입했다. 다행히 주지승이 나와 그들
을 제지하니 그것들도 이내 멍멍~ 개소리를 멈추고 꼬랑지를 살랑거리며 경계를 푼다. 승려는
절에 잘 왔다면서 쭉 둘러보라고 하길래, 석불을 보러 왔다고 솔직히 털어놓으니 마음껏 사진
에 담아가라고 그런다. 그런데로 인심도 있는 셈이다. 이렇게라도 해야 도선사의 인지도가 조
금은 올라가는 것을 그는 안 것이다.


▲  도선사 요사(寮舍)와 2층으로 이루어진 뒷쪽 법당

도선사는 이 땅에 흔치 않은 조동종(曹洞宗) 소속으로 1920년경 청운대선사(靑雲大禪師)가 여
기서 수행을 하다가 세운 절이다. 이곳에는 원래 조그만 석굴이 있었다고 하며, 많은 승려와
사람들이 찾아와 불도를 닦거나 산신에게 기도를 올린 곳이라고 전한다. 그래서 도선사는 산
신기도도량을 칭하고 있다.
1970년대까지는 볼품 없는 모습이었으나 현주지인 대은(大隱)이 30년간 꾸준히 불사(佛事)를
벌여 지금의 모습으로 불렸으며, 2005년에는 천하에서 가장 큰 천수천안관세음보살상을 봉안
하여 크게 위엄을 보이기도 했다.

경내에는 2층 법당을 비롯해 산신각과 범종각, 천고루, 요사, 종무소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
며, 2층 대웅전에는 절의 꿀단지이자 유일한 문화유산인 석3존불상이 봉안되어 있어 절의 듬
직한 후광 역할을 한다. 이제 100년 남짓 된 현대 사찰이라 딱히 내세울 것도 없고, 인근 학
림사와 흥국사(興國寺), 동막골에 묻힌 여러 절 등 쟁쟁한 절이 많다보니 이런 오래된 불상이
라도 하나 옆구리에 끼고 있어야 그나마 경쟁이 된다. 비록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 이곳의 새
로운 명물이라고 하나 석3존불상에 비하면 아직 한참이나 경력이 짧다.

보이는 것이 그야말로 하늘과 숲이 전부일 정도로 첩첩한 산주름 속에 깊숙히 묻혀있으며, 찾
는 이도 별로 없어 고적한 산사의 멋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도선사 윗쪽 계곡과 주
변 숲은 자연생태가 매우 양호하여 서울시에서 2008년 12월에 '수락산 야생동물,식물 보호구
역'으로 지정했다. (서울시 고시 제2009-496호) 하여 절 윗쪽 숲과 계곡은 출입이 통제되었고
그 덕에 도선사는 청정한 환경 속에서 법등(法燈)을 유지하고 있다.

▲  다양한 손짓의 관세음보살상 3자매

▲  큰 북과 운판을 지닌 천고각(天鼓閣)

▲  커다란 석축 위에 세워진 6각형 범종각
석축 밑도리에는 옷자락을 휘날리며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상(天人像)이 새겨져 있다.

▲  인조 암벽으로 이루어진 산신각(山神閣)
어엿하게 기와집으로 만들지 않고 특이하게
인조 암벽으로 산신각을 꾸몄다.


▲  2005년에 조성된 청동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天眼觀世音菩薩)상

경내 남쪽에는 도선사의 새로운 명물로 등극한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 자리해 있다. 이름도 허
벌나게 긴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란 무려 1,000개의 손과 눈을 지닌 관세음보살로 이 땅의 천
수천안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그만큼 도선사에서 모든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존재
인 것이다.
인자함이 깃든 관세음보살의 큰 얼굴 위에는 그의 조그만 얼굴이 가득 달려있고, 그 위에 부
처의 작은 머리가 있다. 이들 얼굴은 1,000개의 눈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리고 보살상 뒷쪽에
는 손과 팔이 수두룩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그중 두 손이 지팡이와 극으로 보이는 무기를 들
고 있다. 그를 반짝반짝 빛내주는 광배(光背)는 금색과 검은색이 서로 대비를 이루고 있는데,
광배 아랫쪽은 마치 칼로 싹둑 자른 듯, 생략되어 있고, 윗쪽은 봉긋 솟아있어 보주형을 이룬
다. 그가 앉은 연꽃 대좌(臺座)는 검은색을 띄고 있으며, 그 밑에 돌로 만든 큰 기단을 두고
팔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겼다.


▲  꽃을 든 남자의 새로운 버전? 꽃을 든 산신상 (산신각 내부)

붉은 옷을 입은 수염 지긋한 산신이 포근한 표정을 지으며, 왼손에 꽃을 들고 호랑이 등에 앉
아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산신상과 산신도(산신탱)을 봐왔지만 저런 색다른 산신은 처음이다.
절을 찾은 여심(女心)을 위한 도선사의 배려이자 마켓팅은 아닐까? 뭔가 크게 개성적이고 독
특해야 눈에 띄는 법이니 말이다.

 ◀  지붕만 한옥, 나머지는 양옥인 2층 법당
요사 뒷쪽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법당은 경내
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1층은 극락전(極樂殿,
큰법당) 및 영가(靈駕)들을 위한 납골당(納骨
堂)으로 쓰이고 있는데, 요즘 많은 절에서 납
골당을 운영하여 수익을 내고 있다.

2층은 대웅전(大雄殿)으로 석삼존불상과 금동석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원래는 석3존불
이 대웅전의 중심이었으나 새로 금동석가불을 만들면서 조금은 뒷전으로 밀려난 기분이다. 그
래도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석3존불이 보이니 금동석가불보다 가장 먼저
중생들의 인사를 받고 있다.


  도선사 석삼존불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1호

대웅전 서쪽 불단에 자리한 석3존불상은 도선사의 듬직한 후광이자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도
선사에서는 그들을 '천년의 미소'라 하여 격하게 띄워주고 있는데, 고된 세월에 지쳐 얼마나
울었을까? 얼굴이 거의 지워져 미소 여부는 알 수 없다.

이들은 돌로 다진 석불(石佛)로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다. 속사정이야 알 수는 없지
만 어찌어찌하여 이곳까지 흘러들어와 도선사의 보물로 묻어가고 있다. 그들이 앉은 복련(伏
蓮)대좌는 도선사에서 마련한 것이고, 그들 뒤로 돌로 다져진 후불탱이 병풍처럼 자리하고 있
으며, 그 주변을 인조 암벽으로 둘러 석굴 분위기를 자아낸다.

  석3존불상의 본존불(가운데 석불)

  석3존불상의 향우측 협시상

석3존불 중앙에 자리한 석불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있는데,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
頂相)이 두툼히 솟아있고, 동그란 얼굴은 마멸이 심해 눈썹과 코 정도만 확인이 가능하다. 목
은 매우 두꺼우며, 옷은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偏袒右肩)식이고, 어깨와 무릎에는 넓은 띠
주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아랫도리는 부처상의 흔한 앉은 자세인 결가부좌(結跏趺坐)로 보
이나 너무 축약되었다.

가운데 석불 왼쪽(향우측 협시상)에 자리한 보살상은 머리에 원통형 보관(寶冠)을 쓰고 두 손
은 다리 위에 대고 화염보주(火炎寶柱) 같은 물건을 들고 있으며, 양 어깨 위에는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눈과 코, 눈썹 정도 확인이 가능하나 너무 지워진 상태이며, 허리가
너무 짧고 아랫도리가 낮아, 마치 윗도리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석3존불상의 향좌측 협시상

  2층 대웅전 내부

오른쪽 보살상(향좌측 협시상)은 머리가 날라가 없어진 것을 석고로 대충 만들어 붙였다. 그
래서 옆 석불과 달리 눈과 코, 입이 그런데로 달려있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고, 몸통 정
면은 통견식으로 법의(法衣)를 입은 듯 하며, 양쪽 어깨에는 옷주름이 있으나 뒷면에는 편단
우견식으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었다. 그리고 두 손은 무릎 위에 대소 선정인(禪定印) 비슷
한 제스쳐를 취하고 있다.

이들 석불은 너무 간결하게 표현되어 덩치도 매우 작으며, 얼굴도 거의 지워지고 훼손도 심하
다. 게다가 신체 비례도 너무 떨어져 근래 대충 만든 석불이나 장난감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
나 그들은 전체적으로 양감이 있고 안정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어 고려 석불의 전통을 계승
한 고려 말~조선 초기 석불로 보고 있다. 특히 이 시대에 조성된 석불이 별로 없어 2009년 3
월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대웅전 금동석가3존불
남쪽을 바라보고 앉은 이들은 근래 조성된 것
으로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이 어엿하게 3존불을 이루고 있다.
석3존불보다 더 화려하고 덩치도 있지만 고색
을 밝히는 나의 두 눈에는 오로지 석불만 보일
뿐, 저들에게 간 시선의 양은 별로 되지 않는
다.


  도선사를 뒤로하며 (사진을 클릭하면 도선사 홈페이지가 번쩍 뜸)

도선사를 둘러보니 어느덧 18시가 다 되어간다. 이날 수락산에서 목적한 곳과 모두 인연을 지
었으니 더 이상 욕심 부릴 것도, 미련 둘 것도 없다. 이것으로 충분히 보람찬 하루를 보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한여름에 벌인 수락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그렇다고 수락산과의 인연이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 산153-1 (덕릉로145길 103 ☎ 02-936-0419)
* 도선사 홈페이지는 윗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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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의 달달한 향연 속으로 ~ 서울연꽃축제의 성지,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

 


' 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봉원사 연꽃 나들이 '
(서울연꽃문화축제)

▲  연꽃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는 대웅전 뜨락


 

여름 제국(帝國)이 한참 패기를 부리는 7~8월에는 하늘 아래 곳곳에서 연꽃축제가 열린다.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도 괜찮은 연꽃축제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봉원사에서 열리는 '서울연꽃문화축제'이다. <조계사에서도 연꽃축제가 열림>
벌써 10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연꽃축제로 2012년 이후 매년 인연을 짓고 있는데, 여름
이 왔으니 친(親) 여름파인 연꽃을 구경해야 나중에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
을 것이다. 그만큼 여름 제국을 대표하는 꽃이 바로 연꽃이다.

드디어 고대하던 연꽃 축제날이 다가왔다. 경복궁역(3호선)에서 후배 여인네를 만나 서울
시내버스 272번(면목4동↔남가좌동)을 타고 이대부고(봉원동)에서 하차, 다시 7024번으로
환승하여 봉원사 종점에 두 발을 내렸다.
보기만해도 숨이 막히는 서울 도심이 바로 지척이건만 그것을 통쾌하게 비웃듯 종점 주변
은 완전 자연에 감싸인 산골 마을이다. 서울이라고 해서 꼭 높은 빌딩과 번잡한 시가지만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거늘 서울에 대한 뿌리 깊은 고정관념 때문에 그런 풍경과 완전 대
비되는 곳을 만나면 '왠 뚱딴지 같은 풍경인가?' 눈을 먼저 의심하게 된다.

버스 종점으로 쓰이는 봉원사 주차장에서 봉원사로 이어지는 동북쪽 길을 조금 가면 오른
쪽으로 승탑(僧塔)과 비석이 즐비하게 늘어선 부도전이 잠시 발길을 붙잡는다. 석종형(石
鐘形)부터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의 승탑들 7~8기와 비석 9기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다들 20세기 것들이라 때깔이 무지 곱다.
그런 부도전을 지나면 봉원사 밑에 자리한 마을의 중심에 이르게 된다. 사찰 밑에 자리한
마을을 유식한 말로 사하촌(寺下村)이라 부르는데,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집 상당수는 봉원
사 승려의 거처로 대부분 처자 등의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승려가 왜 부인과 자식이 있어??' 고개가 갸우뚱 하겠지만 봉원사는 승려의 혼인을 대놓
고 허용하는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라 자신만의 가정을 눈치 없이 꾸릴 수가 있으며 그들
은 보통 자신이 일하는 절 밑에 집을 마련하여 절로 출퇴근을 한다. 그러니 이 마을은 봉
원사의 또다른 일원이자 확장판으로 봐도 무리는 없다.

마을은 절 턱 밑까지 펼쳐져 있어 절과 마을이 붙어있으며 나무도 많아 산골마을 같은 분
위기이다. 여기가 이렇게 도심 속의 산골로 남게 된 것은 이곳 일대를 봉원사가 소유하고
있으며, 개발제한구역에도 묶여 있어 개발의 칼질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  승탑과 비석이 옹기종기 모인 부도전(浮屠殿)


 

♠  봉원사 입문

▲  조낭자 희정 유애비(趙娘子 熺貞 遺哀碑)

부도전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 길로 가야 바로 봉원사에 이르는데, 조그
만 구멍가게를 지나서 오르막길을 오르면 길 오른쪽에 조금은 빛바랜 하얀 비석이 애타게 눈
길을 구걸한다. 허나 구석에 자리한 탓에 봉원사가 있는 정면만 죽어라 쳐다보고 가는 중생의
심리상 태반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그는 '조낭자 희정 유애비'로 비석에 얽힌 사연은 대략 이러하다.

비석의 주인공인 조희정(趙熺貞)은 1904년 경남 진주(晋州)에서 태어났다. 고명딸이던 그녀는
8살 때 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기생이 되었는데, 기생이 된 이후 늘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살 때 첩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으나 남편이 사업이 바쁘다는 이유로 1년에 1~2번
정도만 그녀를 찾을 정도로 소홀히 대했다. 그렇게 구중궁궐의 버려진 능소화처럼 고독한 외
로움에 묻혀 살던 희정은 결국 21살이란 꽃다운 나이에 내세(來世)에 다시는 이런 인생을 살
고 싶지 않다는 유서 1장을 남기고 음독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그녀의 죽음에 충격을 먹은 남편은 봉원사에서 그녀를 화장(火葬)하고 약간의 전답을 절에 기
증해 극락왕생을 기원했으며 이 비석을 세워 그녀의 빈 자리에 대한 슬픈 마음을 표현했다.
비신(碑身) 뒷쪽에는 비석을 세운 이유가 쓰여 있는데, 단순히 기생이란 신분을 극복하지 못
하고 자살했다고 적어놓아 자신의 직무유기(?)를 적지않게 부정하고 있다. 물론 희정이 기생
시절부터 자주 신세 한탄을 하는 등 부정적인 모습도 있었으나 남편의 부족했던 애정이 그녀
를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비석 주변에는 네모난 주춧돌 4개가 멀뚱히 서 있는데, 이는 비석을 씌우던 비각(碑閣)의 주
춧돌로 그 비각은 6.25전쟁 때 파괴되었다고 전한다.


▲  봉원사 느티나무 ① - 서울시 보호수 13-3호

유애비를 지나면 바로 경내 직전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중을 한다. 오르막길에 있다보니 풍
채가 자못 대단해보여 나그네를 적지 않게 주눅을 들게 하는데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나이가
30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40년이 고스란히 더해져 약 340~350년의 지긋한 나이를 먹었다. 높
이는 18m, 둘레 4.3m로 주변에 넓게 그늘을 드리워 무더위의 패기를 단죄한다.


▲  봉원사 느티나무 ② - 서울시 보호수 13-1호

앞서 느티나무를 지나면 비슷한 덩치의 느티나무가 연거푸 마중을 나온다. 앞서에서도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속세의 기운과 번뇌를 다시 한번 털어주는 역할인지 촘촘한 간격으로 나무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나무를 지나면 비로소 봉원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봉원사가 서울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절이지만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갖추지 못했다. 하
여 이들 나무가 자연히 일주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느티나무는 앞 나무보다 100년 정도 더 숙성되어 약 440~45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지며
앞 나무보다 키는 좀 작지만 몸집은 크다. 그 옆에는 삼천불전 밑에 지은 종무소(宗務所) 겸
찻집이 있는데, 다양한 전통차와 불교용품과 공양물, 불교 서적을 판매한다.

▲  좌측 16나한상

▲  우측 16나한상

연못 윗쪽에는 부처의 열성 제자인 16나한상(羅漢像)이 있다. 이들은 2001년 6월에 봉안된 것
으로 나한상 북쪽에 그들을 조성한 이유를 담은 16나한 조성연기문(造成緣起文) 비석이 있다.
그럼 여기서 연꽃은 잠시 접어두고 봉원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서울 도심에서 북쪽으로 뻗어가는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
산(仁王山)과 마주하고 있는 안산<鞍山, 295.9m, 무악산(毋岳山)이라고도 함> 서남쪽 자락에
는 서울에 이름난 고찰(古刹)인 봉원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봉원사는 태고종의 총본산으로 신라가 한참 망해가던 889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금의 연
세대<연희궁(延禧宮)터>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명쾌히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
이 전혀 없는 실정이며, 그나마 조선 초기에 정도전(鄭道傳)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져 도선의 창건설은 거의 신빙성이 없다고 봐야 된다.
어쨌든 창건 이후 적당한 내력이 없다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시절에 보우대사<普
愚大師, 원증국사(圓證國師)>가 크게 중창하면서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 중생들로부
터 크게 찬양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때 보우가 창건한 것이 아닐까 싶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색(李穡)에게 명해 보우대사(원증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
스로 그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니 그 이름이 봉원사에 기록되어 있다. 허나 이색은 고려가
망하자 초야에 숨으며 조선과 담을 쌓았던 삼은(三隱)의 하나인데, 왜 나라를 뒤엎은 이성계
의 명을 받아 보우대사의 비문을 썼는지가 의심스럽다. 아마도 잘못된 기록인 듯 싶다.
1396년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3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했고, 태조가 승하한 이후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해 왕실의 원찰로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렸다.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어 1651년에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했으나 동,서 요사채가 불타자 극
령(克齡)과 휴엄(休嚴)이 중건했으며, 1748년 영조(英祖)가 현재 절 자리를 하사하며 절을 옮
길 것을 명하자 찬즙(贊汁)과 증암(增岩)이 얌전히 절을 이전했다. 이에 영조가 친히 '봉원사
' 친필 현판을 내렸다. (그 현판은 6.25때 사라짐) 그리고 원래 자리에는 1764년에 영조의 후
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映嬪)이씨의 묘역<수경원(綏慶園)>이 들어앉았다.
(수경원은 20세기 후반, 서오릉으로 이전되어 정자각과 약간의 석물만 남아있음)
 
봉원사를 흔히 '새절'이라 부르는데, 이는 영조 때 터를 옮기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 지은
절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며, 수경원의 원찰 역할까지 자연스레 맡게 되면서 굶어 죽을 일
은 없게 되었다.

1788년에는 전국 승려의 풍기를 단속하고자 8도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가 봉원사에 설치되었
으며, 1856년에는 은봉(銀峯), 퇴암(退庵)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잠시 머물며 여러 현판을 써주기도 했다. (대방에 그의 현판 2개가 남아있음)
고종(高宗) 초기에는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開化派)의 지도자로 활약했던 이동인
(李東仁)이 5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던 김옥균(金玉均)과 박
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이 찾아와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에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세웠으나 곧 불에 탔으며, 1908년 8월에는 한글학회가
이곳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1911년에 주지 보담(寶潭)이 중수를 했고, 땅을 더 확보하여 경내를 넓혔으며, 1945년에는 해
방을 기념하고자 주지 기월(起月)이 광복기념관을 세웠다.
1950년 천하의 비극인 6.25가 터졌다. 초반에는 절이 무탈했으나 한참 서울 수복을 벌이던 그
해 9월 말, 무심한 총탄의 세례로 광복기념관이 소실되고 영조의 현판과 이동인 등 개화파 인
물들의 유물이 화마(火魔)의 덧없는 먹이가 되어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대웅전과
몇몇 건물, 조선 후기 탱화들은 많이 살아남았음)

6.25이후 주지 영월(映月)이 1966년 염불당을 중건했는데, 그 목재는 1962년에 공덕동(孔德洞
)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를 구입하여 충당했
다. 당시 친일 식민사학의 두목이던 이병도와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유적을 부시고자 봉원
사에 판 것이다.

1991년 젊은 주지승인 김성월이 삼천불전을 짓는다고 난리를 피우다가 누전으로 이곳의 유일
한 지정문화재였던 대웅전을 홀랑 태워먹었다. (당시 뉴스에 요란하게 나왔음) 이후 새로 부
임한 주지 혜경이 신도들과 함께 쓰러진 대웅전을 1994년에 복원하고 삼천불전까지 같이 완성
을 보았다.
2009년에는 봉원사에서 전문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영산재(靈山齋)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
정되었으며, 2011년 전통사찰의 지위를 받았다.

넓직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천불전, 명부전, 염불당, 극락전, 만월전, 미륵
전, 칠성각, 운수각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아미타괘불
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3호)와 범종(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호), 반야암 목조관음보살좌
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9호), 반야암 목조석가여래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0호), 반야
암 석조보살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1호) 등 지방문화재 5점이 있다. 그들 중 범종만 속
시원하게 관람이 가능하다.
또한 중요무형문화재 48호인 단청장(丹靑匠) 기능 보유자 만봉이 주석하고 있고, 중요무형문
화재 50호
인 영산재(靈山齋)를 지키는 영산재보존회가 이곳에서 후학을 기르고 있다. 그 외에
명부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 대방 아미타불,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탱
화가 여럿 전하며, 오래된 보호수 5그루가 경내 외곽에서 사이 좋게 그늘을 드리워 절의 오랜
내력을 묵묵히 속삭인다.

봉원사는 2003년부터 매년 한여름에 연꽃축제를 선보인다. 2019년을 기준으로 벌써 17회를 맞
이했는데, 서울 최초의 연꽃축제로 '서울연꽃문화축제'라 불린다. 허나 봉원사 연꽃축제라 간
단히 일컬어도 상관은 없다. 이곳이 다른 연꽃축제와 다른 것이 있다면 연못이나 논두렁에 연
꽃을 닦지 않고 커다란 수조(水槽)를 동원해 연꽃을 심어 경내에 배치했다.
축제날에는 연꽃의 향연 외에 전통차와 떡 제공, 국수 공양, 산사음악회, 영산재 등이 열리며
연꽃은 축제가 끝난 이후에도 8월 중/하순까지 경내에 선보인다.

서울 도심에서 매우 가까운 절로 숲이 무성해 깊은 산골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선사하며 접근
성 또한 착해 언제든지 안길 수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26 (봉원사길 120 ☎ 02-392-3007~8)
* 봉원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붉은 연꽃의 요염한 자태


 

♠  어찌 꿈엔들 잊으리요 ~ 연꽃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과 대방

▲  서울연꽃문화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은 연꽃축제장의 심장으로 연꽃을 머금은 수조들이 가득 널려 거대한 연꽃 밀림을
이룬다. 천하의 연꽃을 싹 소환한 것일까? 수련(睡蓮)을 제외한 갖은 연꽃들이 서로 아름다움
을 견주며 연꽃축제의 열기를 여름보다 더욱 뜨겁게 달군다. 어여쁜 꽃잎을 펼쳐보인 연꽃들
은 정처없는 중생의 마음에 제대로 불을 지피며,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와 마음을
싹 정화시켜준다.


▲  삼삼하게 우거진 연꽃 밀림
이렇게 보니 연지(蓮池) 한복판에 퐁당 빠진 기분이다.

▲  활짝 미소를 머금은 홍련

▲  서로 키와 아름다움을 견주는 홍련들
 

▲  연잎 속에서 숨바꼭질을 즐기는 홍련들

▲  붉게 물든 홍련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 누님이 저 연꽃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보기만 해도 마음이 두근두근...


▲  대방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과 삼천불전

▲  하얀 피부와 연분홍 피부가 적절히 섞인 청초한 연꽃

▲  웃음 짓는 홍련 - 하루살이보다 못한 찰라와 같은 삶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으며 이곳을 찾은 중생들을 격려한다.

▲  연밥을 드러낸 홍련

▲  잘 익은 홍련의 요염함

▲  다양한 인상의 홍련들

▲  오늘도 방긋 웃는 연잎들
한 마리의 개구리가 되어 연잎에 앉아 개굴개굴 노래를 부르고 싶다.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① 연꽃 밀림 너머로 보이는 대방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②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③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④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⑤


▲  대웅전 우측에서 바라본 연꽃축제장
대웅전 바로 앞에도, 계단에도 연꽃 수조를 갖다 놓아 연꽃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었다.

▲  봉원사 대방<(大房) = 염불당(念佛堂)>

대웅전 뜨락 좌측에 자리한 대방(염불당)은 넓직한 팔작지붕 건물로 공덕동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의 본채 건물을 업어와 만든 것이다.

1960년대에 봉원사 주지였던 영월은 6.25 때 파괴된 절 건물을 다시 짓고자 궁리를 하였는데
마침 이병도를 비롯한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흔적을 산산조각 내고자 아소정을 헐값에 내
놓았다. 하여 아소정 본채를 구입하여 도화주 김운파 등과 1966년에 축소/변형하여 대방으로
삼았다. 내부는 절 스타일에 맞게 변형을 주더라도 외형은 원래 모습으로 했으면 좋으련만 당
시 인식 부족으로 인하여 그리 하지 못한 점이 참 아쉽다.
비록 아소정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지 못한 채, 또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유일하게 남
은 아소정의 흔적으로 건물 자재는 대부분 아소정 것이며, 그 시절 현판이 걸려있어 그런데로
대원군 할배의 독한 향기를 뿜어낸다. 게다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기존 크기에서 축소했
다는 것이 저 정도이니 원래 모습은 대원군의 생전의 위엄처럼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  대방에 봉안된 하얀 피부의 아미타불(阿彌陀佛)

대방은 승려의 생활공간 및 손님 공간, 유가족을 위한 49재, 그리고 영산재를 지도하는 공간
으로 두루 쓰인다. 범패와 영산재를 배우는 이들의 음악 소리가 늘 끊이지 않고 구수하게 새
어나와 이곳이 영산재의 성지임을 실감케 한다.
대방 불단에는 아기처럼 매우 조그만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는 17~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원래 철원 심원사(深源寺)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6.25때 심원사가 파괴되면서 그곳에
많은 불상과 보살상이 전국에 흩어졌는데 그때 업어온 것으로 보이며, 예로부터 영험이 있다
고 전해져 불상에 대한 기도 수요가 적지 않다.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쓴 현판을 비롯해 인간문화재인 이만봉 승려의 신장도(神將圖, 부엌문
에 있음) 등이 건물 외부를 아낌없이 수식한다.

▲  운강 석봉이 쓴 봉원사 현판의 위엄

▲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  추사 김정희가 쓴 산호벽루(珊瑚碧樓)

▲  추사의 청나라 스승인 옹방강(翁方鋼)의
현판 ~ 무량수각(無量壽閣)

추사체(秋史體)를 일군 김정희는 말년에 불교에 크게 관심을 가지며 많은 절을 찾았다. 방문
한 절마다 친필 현판을 남겼는데 봉원사에도 그의 현판 2개가 고스란히 전해온다. 파란 글씨
로 쓰인 그의 필체는 160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으며, 추사는 비록 가고 없지
만 그의 힘찬 필력을 느끼는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  대방 앞에 놓인 연꽃무늬 석조물
범상치 않아 보이는 석물이다. 조선 후기
것으로 여겨지나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  봉원사 대웅전(大雄殿)과 삼천불전 주변

봉원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연세대 자리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1748년 이곳으로 옮겨오
면서 조금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18세기 중반 건축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8호의 지위
를 누리고 있었는데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린 사찰 건축물
은 화계사(華溪寺, ☞ 관련글 보러가기) 대웅전, 흥천사(興天寺, ☞ 관련글 보러가기) 극락전
과 명부전이 고작이었다. 그만큼 일찌감치 서울 지역 조선 후기 사찰 건축물의 대표작으로 평
가를 받았던 것이다.

그렇게 착했던 봉원사 대웅전은 1991년 삼천불전을 무리하게 짓는 과정에서 전기 누전으로 홀
라당 태워먹고 말았다. 그때 영조가 내린 봉원사 현판을 비롯하여 건물 내부를 장식하고 있던
조선 후기 탱화들이 죄다 잿더미가 되었으니 6.25 시절의 피해만큼이나 그 안타까움은 실로
컸다. 봉원사가 축적했던 많은 보물들이 또 부질없이 사라진 것이다.
이후 2년 동안 공사를 벌여 1993년에 생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일으켜 세웠지만 떠나간 지방문
화재의 지위는 되찾지 못했으며, 승려 이만봉이 탱화와 단청 대부분을 그려 건물 내부는 매우
화려하다.


▲  봉원사 범종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호

대웅전 안에는 조그만 범종이 하나 깃들여져 있다. (찾기는 매우 쉬움) 그는 예산 덕산(德山)
에 있던 가야사(伽倻寺)의 것으로 1760년에 조성되었다. 여기서 가야사는 흥선대원군의 명당(
明堂) 욕심으로 파괴된 그 절이다.
종 높이는 84.5cm, 입지름 61cm으로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동종 중의 규모가 큰 편에 속하며,
전체적으로 짙은 검은색이 감돌고 있다. 또한 종형도 천판에서 시작된 외선(外線)이 종신(鐘
身) 2/4부분까지 완만한 곡선으로 올라가다가 3/4부분에서 종구까지 완만하게 떨어지고 있다.

편평한 천판(天板) 위에 음통을 갖추지 않는 2마리의 용의 용뉴를 표현했으며, 그 아래 종신
은 2줄의 횡선을 이용하여 종신을 크게 3부분으로 구획하였는데, 그 가운데 상단에만 다양한
도안을 장엄하였다.
천판 아래에는 내부에 '옴'자가 새겨지고 외곽에 돌기를 표현한 원권(原權)의 범자 8개가 부
조되었다. 그 아래에는 사다리꼴 형태인 연곽 4개가 있는데, 사선문으로 연곽대를 구획하고,
그 안에는 연뢰(蓮蕾) 9개를 표현했다. 그리고 연곽 사이에 빈 공간에는 구름을 타고 내려오
는 보살입상 2구가 배치되어 있으며, 그 옆에 '준제진언(準提眞言)'을 간략하게 표기했다.

종 피부에는 종의 탄생시기와 봉안처 외에 덕산과 예산, 대전(회덕, 진잠), 천안, 결성, 옥천
지역 사람들의 후원을 받았고, 사장(私匠)인 이만돌(李萬乭), 신덕필(申德必), 최종취(崔宗就
) 등 3인이 참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종의 상태가 양호하고 경상도 이씨 일파의 대표적 장인인 이만돌이 만든 작품 양식을 살펴볼
수 있으며, 명문을 통해 종의 자세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어 18세기 후분 동종의 양식과 사장
에 대한 계보, 활동을 연구하는제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흥선대원군은 가야사를 불지르고 그 자리에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이전했는데, 그 과
정에서 범종만 겨우 살아남았다. 그 종은 서울로 올라와 봉원사에 안착하면서 서울살이를 하
고 있는데, 언제부터 이곳에 말뚝을 박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43년 승려 안진호가 작성
한 '봉원사지' 제9절 제3항에 봉원사의 재산으로 기재되어있어 늦어도 20세기 초에 들어온 것
으로 여겨지며, 대원군이 왕실 원찰의 하나인 이곳에 넘겼을 가능성도 있으나 범종이 묵비권
을 행사하고 있으니 알 도리가 없다.

과연 가야사 자리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제왕이 되었지만 결국 자신을
포함 3대 만에 나라를 제대로 말아먹고 그 휴유증이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으니 명당의 치명
적인 함정이라고나 할까..?


▲  대웅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관음보살(觀音菩薩)이 3존불을 이룬다.
색채가 고운 후불탱이 든든하게 그들을 받쳐주고 있으며, 붉은 지붕의
닫집이 매우 호화롭기 그지없다.

▲  대웅전 산신탱
이 산신은 돈이 좀 있는지 앳된 동자와 동녀를 4명씩이나 거느리고 있고
호랑이는 귀여운 것이 토실토실하여 귀티가 넘쳐 보인다.
(다른 산신탱은 동자가 1~2명 정도임)

▲  대웅전 천정을 바라보는 여유 ~ 용이 새겨진 천정보개(寶蓋)
저들이 있는 한 대웅전은 더 이상 화마의 덧없는 반찬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인간들 하기에 달려있지만 말이다.

   ◀  대웅전 계단 좌우에 배치된 해태상
대웅전을 화마로부터 굳게 지키고자 계단 양쪽
에 귀여운 해태상까지 두었다. 연꽃에 둘러싸
인 탓에 해태상의 표정이 씨익 해맑기 그지 없
어 대웅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그의
표정에 이곳에 온 소임도 잊고 돌아갈 것이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관세음보살상

▲  물이 졸졸 쏟아져 나오는 수각(水閣)


▲  봉원사 삼천불전(三千佛殿)

경내 우측에 자리한 삼천불전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름 그대로 3,000불을 머금고 있다.
이곳에는 1945년에 지은 46칸짜리 광복기념관이 있었으나 1950년 9월 25일 서울 수복을 둘러
싼 우리군과 북한군과의 싸움에서 무심한 총탄에 쓰러졌으며, 그때 영조의 봉원사 현판과 이
동인, 김옥균의 유물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이후 터만 남아오다가 1988년 삼천불전을 짓기 시작하여 1997년 완성을 보았다. 무려 9년
에 걸쳐 지은 이 건물은 210평 규모로 대들보 무게만 7톤을 헤아린다고 하며, 멀리 알래스카
에서 227년 이상 묵은 나무를 수입하여 만들었다. 또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 본 건
물의 특징인데, 절을 크게 돋보이게 할 겸, 삼천불전을 짓는 것까지는 좋으나 이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누전으로 소중한 대웅전을 화마로 떠나보내는 비극을 겪었다. 그런 대웅전의 희생으
로 태어난 것이 바로 삼천불전이 되겠다.

건물 중앙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가 이 큰 건물의 주인장이다. 그
를 중심으로 좌우에 조그만 금동불(金銅佛) 3,000불을 가득 채워 두 눈을 부시게 하는데 모두
중생의 돈을 받아 지은 원불(願佛)이다. 그 외에 내부 우측에는 조그만 납골당이 있어 영가(
靈駕)들을 위한 공간을 두었으며, 건물 내부가 워낙 넓어서 1,000명은 능히 구겨 넣을 수 있
다.

▲  봉원사 3층석탑(진신사리탑)

▲  이동인이 이곳에 머물던 것을 기리고자
세운 두 손가락 조형물

절에 필수 요소인 석탑은 보통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다. 허나 봉원사는 풍수지리 때문인지
오랫동안 탑이 없는 허전함을 안겨주었지. 그러다가 1991년 7월 봉원사 승려와 신도 75명이
스리랑카의 초청을 받아 캔디의 불치롬보에 있는 강가라마사(寺)를 방문했는데, 그곳 대승정
(大僧正)인 그나니사라가 부처의 사리 1과를 선물로 주면서 봉원사도 어엿한 진신사리 보유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사리는 가져왔으나 정작 탑을 세우지 못해 애 태우다가 삼천불전이 세워진 이후 신도들의 지
원으로 석가탑(釋迦塔)을 닮은 3층석탑을 세우게 되었다. 대웅전 앞에 세우면 좋으련만 삼천
불전에 대한 기대가 큰지 그 앞에 세워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뽀송뽀송한 하얀 피부를 마음
껏 뽐낸다.


▲  3층석탑에서 바라본 연꽃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

삼천불전 앞에는 연꽃축제의 일원인 산사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산사라고 늘 고적(적막)만
고집해야 될 이유는 없지, 1년에 며칠 정도(절 축제나 석가탄신일)는 산사음악회로 떠들썩하
게 즐기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고 사찰 홍보와 영업에도 도움이 된다.
봉원사 산사음악회는 이곳의 자랑인 영산재와 범패, 그리고 다양한 전통공연과 퓨전음악, 서
양음악, 초청 가수 공연 등이 준비되어 있으며, 보통 전통 공연을 처음에 내밀고, 초청 가수
(대부분 트로트) 공연을 제일 뒤에 내민다.

3층석탑 옆에는 떡과 전통차를 제공하는 공간이 있는데, 18시 이전에 마감을 하여 서둘러 가
야 떡과 전통차를 먹을 수 있다. (무료로 제공하나 상황에 따라 제공하지 않는 경우도 있음)
그리고 17시(또는 18시)부터 1시간 정도 삼천불전 지하층 공양간에서 국수 공양을 제공한다.
연꽃축제 기간 외에도 평일과 일요일에도 제공하니 시간이 맞거든 한 숟가락 들며 이곳의 인
심을 확인해보자. (공양은 상황에 따라 제공되지 않을 수 있으며, 비빔밥 공양을 제공하는 경
우도 있음)
우리는 국수 1그릇과 떡, 전통차를 무한정 즐기고 산사음악회도 전부는 아니지만 1/3 정도 구
경을 했다. 이렇게 사찰 축제를 이용해 전통공연과 서양음악 공연 등 문화생활을 무료로 즐겨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  봉원사 마무리

▲  봉원사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칠성각은 그 이름 그대로 칠성(七星)의 보금자리이다. 허나 이상하게도
칠성(치성광여래)이 아닌 하얀 피부의 약사여래상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 건물의 이름을 무
색하게 만든다.

칠성각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고색이 짙은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방문화재로 삼아도 전혀 손색은 없어 보이는데, 내부에는 약사여래
상을 중심으로 19세기 말에 조성된 칠성탱이 그 뒤를 지켜주고 있으며,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八相圖)와 호법신들이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산신 가족이 담긴 산신탱 등이 있다.


▲  칠성각 약사여래좌상
붉은색의 약합(藥盒)을 쥐어들며 흐릿한 눈빛을 보내는 그 뒤에 칠성탱이 걸려있다.
보통 존상과 탱화는 일치하기 마련인데, 여기는 서로가 따로 놀고 있다.


▲  한글학회 창립 기념비

봉원사는 우리 글 지킴이인 한글학회 창립 총회가 열렸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1908년 8
월 주시경(周時經)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한글학회
(국어연구학회)를 세웠는데, 그들은 개화파 선구자인 이동인이 머물던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
를 열어 봉원사를 근거지로 삼았다.
2008년 8월 한글학회 창립 100돌을 기념해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사업회'와 봉원사가 표
석을 세워 그날을 기리고 있다.


▲  봉원사 명부전(冥府殿)

삼천불전과 극락전 사이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두툼한 맞배지붕 건물로 지
장보살과 저승의 10왕(시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이 중 지장보살
상과 시왕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며, 10왕 끝에는 패기가 짙은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자리해 명부의 식구들을 지킨다.

명부전에 왔다면 지장보살과 시왕상도 좋지만 명부전 현판은 꼭 눈에 넣도록 하자. 조선 태조
때 삼봉(三峯) 정도전이 쓴 것이라 전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맞다면 무려 620년을 묵은 경내
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 된다. 하지만 내 눈으로 봐서는 그리 오래되어 보이진 않는다. 비록
현판 구석에 '정도전 필(鄭道傳 筆)' 4글자가 아주 작게 쓰여있긴 하나 옛 사람들은 이름보다
는 '호'나 '자'를 우선적으로 썼던지라 역시 의구심이 든다.
하지만 봉원사가 태조의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았고, 그의 어진까지 봉안했던 절이니 그를 도와
새 나라를 연 정도전도 봉원사를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온 기념으로 한 글
자 남겼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 현판이 세월을 너무 타자 필사(筆寫)를 해 새 것으로 교체
했는데, 그가 쓴 것을 강조하고자 실수로 이름만 덩그러니 썼던 모양이다.
그리고 원래 봉원사 것이 아닌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貞陵)에 설치된 명부전의 현판이라
는 이야기도 있다. 태종이 정릉을 외곽으로 추방하면서 명부전을 때려부셨고, 그 현판이 여기
저기 떠돌다가 봉원사로 흘러들어와 이곳 명부전의 현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명부전은 정도전의 글씨로도 빛이 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꼭 있다고 기둥에 달
린 주련 4개는 친일매국노로 악명이 높은 이완용(李完用)이 쓴 것이다. 조선을 세우고 명나라
(요동)를 정벌하여 보다 큰 나라를 꿈꾸었던 나라의 창업 공신과 그 조선을 말아먹고 왜정에
빌붙은 작자의 흔적이 한 자리에 공존하고 있는 점이 참 이채로운데, 광복 이후 친일파를 제
대로 단죄하지 못한 휴유증으로 점점 기형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 땅의 더러운 현실이 매국
노의 고약한 흔적을 남겨두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봉원사도 생각이 있다면 속히 이들을 뜯어
내 장작으로 쓰거나 내버리기 바란다.


▲  명부전 지장보살과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
녹색 승려머리의 지장보살과 좌우에 봉안된 10왕(十王)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나름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들이다.

▲  정도전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의 위엄
왼쪽 구석 위쪽에 '정도전 필' 4자가 쓰여 있다.

▲  명부전 옆구리에서 만난 아리따운 홍련들

▲  봉원사 미륵전(彌勒殿)

칠성각 뒷쪽에 자리한 미륵전은 기와집이 아닌 현대식 건물로 마치 강당이나 체육관 같은 모
습이다. 그 안에는 근래에 조성된 하얀 피부의 미륵불(彌勒佛)이 서 있는데, 건물도 그를 닮
아 죄다 하얀색이라 조촐하게 순백(純白)의 세계를 자아내고 있다. 미륵불 주위에는 기름을
먹고사는 인등(引燈)이 가득 자리해 건물 내부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며, 그 인등으로 인하여
인등각이라 불리기도 한다.
미륵전 앞에는 날씬한 몸매의 7층석탑이 서 있는데 왜정(倭政) 이후에 많이 나타나는 석탑 양
식으로 언제 세워졌는지는 모르겠다.


▲  미륵전 미륵불입상

부처가 사라지고 막연히 56.7억년 후에 나타난다는 미륵불, 이 땅은 점점 아비규환 그 이상으
로 흘러가고 있는데 중생의 고통을 나몰라라하며 어딘가에 숨어있을 미륵불이 한없이 밉기만
하다. 그렇게 나오기가 싫으면 다른 이를 보내 구제해 주던가 해야지. 꼭 56.7억년 후에 나타
나야 되는가? 미리 땡겨서 나오는 센스 좀 보여주기를.. 자꾸 숨어있는 것도 미륵불의 직무유
기이다.


▲  극락전(極樂殿)과 자애수(慈愛樹)

명부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선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그리 오래된
존재는 아니다. 아미타불과 박정희 전대통령 내외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 우측에는 자
애수란 이쁜 이름을 지닌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나이는 150~200년 정
도 된 것으로 여겨지나 왜 자애수라 불리는 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극락전에 그늘을 제공하는
것 때문은 아닌 듯 싶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있는 만월전(滿月殿)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자 외진 숲속에 만월전이 있다. 이 건물은 약사불을 봉안하고 있는데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그의 곁에 둔 것이 특징이다. 1904년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독성탱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내가 갔을 당시는 애석하게도 문이 잠겨 있어 내부는 살피지 못
했다. (만월전은 올 때마다 문이 잠겨 있었음)


▲  삼천불전 앞 산사음악회 무대에서 펼쳐진 즉석 그림 전시회
봉원사 화승이 무대에서 즉석으로 그린 그림을 삼천불전 앞에 펼쳐보이고 있다.
그림에 담겨진 붉은 꽃은 이곳 축제의 주인공인 연꽃이다.


연꽃축제 현장을 몇 바퀴나 돌면서 부지런히 사진에 담느라 정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연
꽃이 그야말로 시간 도둑인 셈이다. 허나 그런 어여쁜 도둑은 봐줄 만하다.
그 사이 세상은 낮에서 밤으로 바뀌고 시커먼 땅거미가 짙게 드리워지면서 여름 제국의 혹독
한 기운도 조금은 꺾였다. 햇님이 커튼을 치자 음악회가 열리는 삼천불전 앞은 그 어둠을 몰
아내고지 일제히 조명을 틀었고, 산사음악회는 점점 숙성이 되어 분위기는 더욱 솟아오른다.

마음 같아서는 음악회를 끝까지 관람하고 싶지만 저녁밥이 그리울 시간이라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버렸다. 그러니 아무리 음악회가 신명이 나도 그저 흐릿하게 보일 뿐이다. 봉원사에서
이미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고, 연꽃축제의 주인공인 연꽃을 실컷 눈에 넣었으니 그리 아쉽지
는 않다. 하여 꿈에도 잊지 못할 연꽃의 즐거운 향연을 뒤로 하며 그곳을 나왔다.

이렇게 하여 봉원사 연꽃 나들이는 내년을 기약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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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진 논두렁과 밭두렁을 간직한 서울의 두메산골, 도봉산 무수골 ~~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전주이씨영해군파묘역, 무수골계곡)



' 서울의 두멧골, 도봉산 무수골 '

▲  무수골 논두렁 (초가을)

▲  전주이씨 영해군파묘역

▲  무수골길 (성신여대 난향별원)

 


 

 

♠  서울의 숨겨진 별천지이자 논까지 간직한 상큼한 두멧골,
도봉산 무수골

▲  세일교 주변 (오른쪽 길은 무수골 북부, 도봉옛길 방면)

도봉산 동남쪽 자락에 포근히 묻힌 무수골은 도봉산에 널린 수많은 골짜기의 하나이다. 우리
집에서 매우 가까운 상큼한 곳으로 그저 숲과 계곡, 바위만 있는 계곡이 아닌 밭두렁과 산골
마을, 심지어 논두렁까지 담고 있는 산골마을로 좁게는 도봉산(道峯山)과 도봉구, 넓게는 서
울의 숨겨진 비경으로 꼽힌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백두산만한 서울 바닥에 그런 서울을 비웃는 뜻밖에 별천지가
있었다니? 무수골에 발을 들인 나그네는 그곳의 뜻밖의 모습과 아름다운 풍경에 무한 감동을
먹으며 넋을 잃고 만다. 흔히 서울 하면 수많은 사람과 차량, 키다리 건물이 즐비한 번잡한
회색빛 풍경만 생각하기 일쑤이니 그 감동의 정도는 더욱 클 것이다. 솔직히 서울이라 해서
꼭 시가지만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무수골이 이렇게 개발의 칼질이 거의 닿지 않은 때 묻
지 않은 시골로 남게 된 것은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에 포함되어 개발의 칼날을 부러뜨렸기 때
문이다.

무수(無愁)골이란 이름은 근심이 없는 골짜기란 뜻이다. 바깥 세상은 늘 근심의 연속인데, 이
곳은 근심이 없는 이름을 지니고 있으니 이 얼마나 극락정토(極樂淨土)다운 이름인가? 그 유
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조선 4대 군주인 세종(世宗)이 이곳에 왔다가 원터약수터에서 약수를 마시며 '물도 좋고 풍경
이 좋은 이곳이야말로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다!'
찬양을 하여 무수골이 되었다고 하며, 세
종이 그의 아들인 영해군 이당(李瑭)의 묘역을 들러보고 원터약수터에서 물을 마시며 근심 없
는 곳이라 했다고 한다.
허나 영해군은 1477년에 죽었고 세종은 1450년에 붕어(崩御, 제왕의 죽음)했으니 서로 시기가
맞지 않으며, 성종이 영해군 묘역이 완성되자 직접 찾아와 참배하면서 근심이 없는 곳이라 했
다는 이야기도 있다. 거기에 근심 걱정이 없는 노인네인 무수옹(無愁翁) 이야기도 한 토막 덧
붙혀 전해오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때는 조선의 어느 시절, 나랏일로 골치가 아프던 왕은 세상에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의문을 품으며 이른바 무수인(無愁人)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아무리 잘나가는 부자도,
사대부(士大夫)도, 왕족도, 어린이도 몇 가지씩 가지고 있는 것이 걱정이니 찾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다가 드디어 무수인 자격에 맞는 노인을 찾았다. 그 노인은 아들이 12명으로 모두 장가를
보냈으며, 아들과 며느리의 효성이 지극하여 노인은 만사가 즐거웠다. 하여 주변 사람들은 그
를 무수옹이라 불러 부러워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왕은 급히 그를 소환하여 이유를 물었다.
이에 노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소인은 아직 몸도 멀쩡하고, 마누라가 잘 보살펴주고 있으며, 자식과 며느리가 효도하고 벗
들도 많고, 자손들도 건강하고, 전하(殿下)께서 나라도 잘 다스려 주시고, 봄과 여름, 가을,
겨울도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샘이 단단히 난 왕은 그를 시험할 생각에 구슬을 건네주며 1달 후에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다.
노인은 왕에게 성대한 대접을 받고 집으로 오다가 한강에서 배를 탔는데, 뒤에 따라오던 사람
이 노인에게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하여 구슬을 꺼내보이니 그때 그 사람이 실수
인양 팔꿈치를 치면서 구슬이 한강에 빠지게 되었다. 그 사람은 구슬을 물에 빠트리게 하려고
왕이 보낸 사람이었다.

구슬을 잃어버린 노인은 구슬을 어떻하나 노심초사하다가 결국 식음을 전폐하고 몸저 눕게 되
었다. 가족들이 이유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으니 결국 건강까지 극도로 나빠졌
다. 걱정이 된 자식들은 잉어를 잡아 요리해주려고 했는데, 그 잉어 배에서 글쎄 구슬이 나온
것이다. 알고보니 강에서 잃어버린 그 구슬이었다. 노인은 너무 기뻐서 그동안의 근심을 흔쾌
히 털어버리고 잉어 요리를 폭풍 흡입하며 이내 건강을 되찾았다.
그리고 1달 후, 궁궐에 들어가 구슬을 바쳤다. 왕이 낸 숙제를 휼륭히 소화한 것이다. 깜짝
놀란 왕은 그 사연을 듣고 무한 감동을 먹었고, 이후 노인은 잘먹고 잘살았다고 한다. 이런
무수옹 이야기는 무수골 뿐 아니라 전국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옛 전설의 하나이다.


무수골은 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무수(無袖)골(무수동)이란 이름도 있다. 이는 무수골에 묻힌
영해군의 무덤 자리가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형국인 선인무수지형(仙人舞袖之形)에
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춤을 뜻하는 '舞'가 '無'로 바뀜)
또한 영해군이 묻히기 이전(15세기 후반 이전)에는 대장장이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들이 운영
하는 대장간이 계곡에 즐비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쇠골', '수철동(水鐵洞, 무쇠골을 한자로
표현)'이라 불리다가 영해군이 묻힌 후 무수골(무수동)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무수골에 있던 무수울에 서낭당이 있어 이 마을을 '서낭당(성황당)'이라 불렸는데, 그
게 무수골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체로 성황당은 무수골 하류(도봉초교 주변)를 일컬
으며 그 이름은 아직까지 살아남아 버스정류장 이름(도봉역, 성황당)으로도 절찬리에 쓰이고
있다.

참고로 무수골은 무수울, 무시울, 모시울, 성황당 등으로도 불렸는데, 무수울은 무수골 마을
의 대표 이름으로 조선 때 양주목 해등촌면(海等村面)을 이루던 12개 리의 하나였다. 무수골
은 윗말(무시울), 중간말, 아랫말로 나눠졌으며, 개성이씨가 먼저 터를 닦은 이후, 전주이씨
(영해군 후손들), 안동김씨, 함열남궁씨, 진주류씨도 이곳에 무덤을 쓴 인연으로 정착하여 오
랜 토박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무수골은 도봉산 산길 기점의 하나로 굳이 등산이 아니더라도 답사와 나들이, 피서, 농촌 체
험 등으로 안길 수 있는 꿀단지이기도 하다. 전주이씨 영해군파 묘역을 비롯해 무수골에 가장
먼저 묻힌 개성이씨 집안인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과 의령옹주(義寧翁主) 묘역, 오래된 느
티나무, 진주류씨묘역(도봉옛길 중간에 있음), 함열남궁씨 묘역 등의 문화유산이 즐비해 답사
지로도 손색이 없으며(옛 무덤 답사지로 아주 좋음) 서울시는 무수골 입구에서 윗무수골을 거
쳐 자현암까지의 길을 테마 산책길로 지정하여 '무수히 전하길(숲이 좋은 길)'이란 간판을 달
아주었다.
또한 무수골 하류(세일교 동쪽)에는 밭두렁이 넓게 펼쳐져 있는데, 시민들을 위한 주말농장도
여럿 있어 농촌 체험도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무수골 계곡은 물이 깨끗하고 암반도 즐비하며
상류로 갈수록 숲이 짙어져 피서의 성지(聖地)로도 아주 바람직한 곳이다.
이 계곡은 문사동계곡, 원도봉계곡(망월사계곡)과 더불어 도봉산 3대 계곡의 하나로 추앙받으
며, 우이암 부근 원통사(圓通寺)에서 시작되어 '원통사계곡(또는 보문사계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무수골은 '무수천'이란 간판을 달고 무수골의 만물을 촉촉히 어루만지며 흐르다가 도봉
역 서쪽에서 문사동계곡에서 시작된 도봉천에 흡수되어 중랑천(中浪川)으로 흘러간다.

* 무수골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도봉초교 주변 무수골 하류 (무수골 상류 방향)
도봉산 산줄기 너머로 북한산(삼각산) 백운대(836m)와 인수봉 등이 바라보인다.

▲  도봉초교 주변 무수천 (무수골 하류)
무수천 양쪽에 자전거 통행이 가능한 산책로를 내었는데, 무수골 주말농장
동쪽에서 시작되어 도봉역 북쪽을 거쳐 중랑천까지 이어진다.


무수골 나들이는 1호선 도봉역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도봉역 1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도봉
역4거리인데, 여기서 도봉산이 바라보이는 서쪽으로 길을 건너면 바로 무수골로 인도하는 무
수천 둑방길(도봉로169길)이 나온다. 이곳에서는 문사동계곡에서 시작된 도봉천과 무수골에서
나온 무수천이 만나는데, 이들은 도봉천으로 합쳐져 중랑천으로 흘러간다.

무수천 둑방길을 따라 7~8분 정도 가면 무수교가 나온다. 이곳까지는 온갖 주택과 빌라가 즐
비한 서울에 흔한 주택가 풍경이나 여기서부터 집들이 크게 줄어들면서 서서히 시골 풍경으로
갈아탄다. 그런 전원 풍경 뒤로 북한산(삼각산) 북쪽 봉우리와 도봉산의 지붕이 바라보여 뒷
배경도 아주 탄탄하다. 이윽고 무수골 마을버스 종점(도봉08번)을 지나면 완전한 전원(田園)
분위기로 그림이 바뀐다.

무수천(무수골)은 수심이 매우 얕은 하천으로 비가 많이 내릴 때만 잠깐 물이 불어날 뿐, 평
소에는 물이 적은 마른 하천<건천(乾川)>이다. 그러다보니 가뭄이 심하면 갈증을 너무 심하게
타서 툭하면 맨바닥을 드러내기도 한다. 2007년 이후 무수골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을 벌
이면서 무수골 아랫쪽(도봉초교 주변) 주거 환경이 어느 정도 개선되었는데, 이를 맞추어 도
봉구에서 무수천을 정비하여 깨끗한 우리 동네 가꾸기 사업을 벌였다. 이때 하천 양쪽에 중랑
천과 이어지는 산책로를 닦았다.


▲  하얀 반석들 사이로 가늘게 흘러가는 무수골 하류 (무수천)

▲  북한산둘레길 방학동(放鶴洞)길 북쪽 관문

무수골주말농장을 지나면 세일교가 나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오른쪽(북쪽)으로
가면 무수골 북쪽 마을과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로 이어지고, 정면의 세일교를 건너면 북한산
둘레길 방학동길 북쪽 관문과 무수골 안쪽, 원통사, 우이암 방면으로 이어진다.

무수골 북쪽에서 온 도봉옛길은 세일교에서 방학동길로 간판을 바꾸고 남쪽으로 흘러간다. 이
길은 방학동 정의공주(貞懿公主)묘역까지 이어지는 3.1km의 산길로 오르락내리락을 여러 차례
반복해야 되지만 그런데로 무난한 산길이다. 방학동길이란 이름은 방학동을 지나기 때문에 붙
여진 이름이다.


▲  무수골의 속살로 인도하는 성신여대 난향별원 돌담길 (무수골길)

방학동길 북쪽 관문을 지나면 바로 성신여대 난향별원 돌담길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길 왼쪽
에 돌담이 펼쳐졌다가 절반 정도 들어서면 자리를 바꾸어 오른쪽으로 돌담이 펼쳐지는데, 비
록 덕수궁(德壽宮, 경운궁) 돌담길만은 못해도 그런데로 운치를 자아내고 있으며, 나무도 무
성하여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한다.
어디론가 끝없이 이어진 것 같은 난향별원 돌담길, 그 돌담길을 지나면 무엇이 나올까? 무수
골 초행자라면 더욱 짙어진 숲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도봉산 산길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할 것
이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다. 무수골이 괜히 무수골이 아니거든..


 

 

♠  윗무수골 논두렁과 느티나무

▲  이제 기지개를 켜는 윗무수골 북쪽 논두렁 ▼

난향별원 돌담길을 지나면 흔히 생각하는 그늘진 숲 대신 햇살이 내리쬐는 뻥 뚫린 공간이 나
온다. 그 공간이란 다름 아닌 논두렁이다. 짙은 숲속에 묻힌 윗무수골 논두렁, 설마 이런 첩
첩한 산골에 논두렁이 있을 것이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논두렁의 크기는 속세와 비교하면 턱없는 수준이지만 산골치고는 그런데로 큰 편이다. 강원도
나 경북의 산골 논두렁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인데, 길을 중심으로 남쪽에 조그만 논이 펼
쳐져 있고, 북쪽에 큰 논두렁이 여럿 있다. 그리고 영해군파묘역 밑에도 2~3개의 논두렁이 있
다.
이들 논두렁은 무수골의 오랜 상징이자 꿀단지로 무수골 사람들은 조선시대부터 이 논을 통해
곡물을 생산했으며 그 생산량이 많아 배불리 먹고 살았다. 이렇게 산골에서 먹는 문제가 거뜬
히 해결되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식(食)은 걱정할 것이 전혀 없으니 근심이 없다는 무수골
이란 이름도 괜히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  윗무수골 남쪽 논두렁

윗무수골 논두렁은 여전히 논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보통 5월에 모를 심어 10월에 수
확을 한다.
친환경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들이 황금색으로 크게 숙
성되는 9월 이후의 논두렁 풍경은 무수골 풍경의 백미(白眉)로 꼽힌다
.


▲  남쪽과 북쪽 논두렁 - 그들 사이로 길이 지나간다.

▲  무수골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0-3호

논두렁을 지나면 바로 정면 약간 높은 곳에 큰 느티나무가 모습을 비춘다. 넓게 그늘을 드리
우며 무더위의 염통을 긴장시키는 그는 높이 22m, 가슴높이 둘레 3.7m로 1981년 보호수로 지
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215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30여 년이 더해져 약 250살로 여겨진다.
계곡 부근 비옥한 땅에서 자라고 있어 왕성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으며, 가지가 꽤 굵고 묵직
하다. 이곳에 살던 영해군파 후손들이 심어 정자나무나 당산나무 용으로 사용했으며, 전주이
씨 영해군파 후손들이 애지중지 관리하고 있다.


▲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으로 인도하는 길

느티나무 앞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산꾼들이 자주 오가는 서남쪽 길은 자현암(慈賢庵)
과 도봉산(원통사, 우이암) 으로 이어지고, 서북쪽 길은 느티나무가든으로 이어진다. 느티나
무가든은 입구에 문패를 내건 뻥뚫인 문이 있고, 좌우로 철책이 둘러져있어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개인 사유지로 오해하기 쉬우나 생긴 것이 그렇게 생겼을 뿐, 들어가도 무방하다. 대중
에게 개방된 식당이고 마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느티나무가든은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당으로 백숙과 파전, 도토리묵, 고기류 등을 취급
하고 있는데, 그 식당 앞에서 길은 또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호안공 이등/
의령옹주 묘역으로 인도하는 길이 나오고, 식당을 끼고 북쪽 숲으로 들어가면 영해군파묘역이
나온다.

호안공 이등/의령옹주 묘역은 입구에 녹색 철책과 문이 둘러져 있으나 대낮에는 거의 열려있
다. (밤에는 닫아둠) 그 숲길을 2분 정도 들어서면 호안공의 후손이 사는 붉은 지붕 기와집이
나오는데, 정말 외딴 산골에 묻힌 시골집이다. 서울에도 이런 곳이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거
리며 계속 걸음을 옮기니 집 앞을 지키고 선 큰 멍멍이가 무섭게 짖어대며 나를 경계한다.
물론 개는 줄로 묶여 있었지만 가까워질수록 멍멍 소리가 커지니 나도 모르게 염통이 쪼그라
든다. 내가 수상한 짓을 하러 온 것도 아니지만 단순한 개는 무작정 적으로 간주하고 맹렬히
멍멍 공격을 가하니 결국 그 공격에 꼬리를 내리고 뒷걸음을 쳤다.
개의 멍멍 소리에 집에서 사람이 나와서 무슨 일로 왔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이유를 말하면 되
지만 시간도 이미 18시가 다 된 상황이라 들여보내줄 것 같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인연
이 아닌 듯 싶어 이쯤해서 쿨하게 물러났다. (그 이후 아직까지 인연이 닿지 않고 있음)

참고로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 1379~1457년)은 개성이씨로 태조의 서장녀(序長女)인 의령
옹주(義寧翁主, ?~1466)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1435년 계천군(啓川君)으로, 1444년 봉헌대부
(奉憲大夫)에 봉해졌으며, 이들 무덤은 무수골에 처음 정착한 무덤으로 조선 초기 무덤 양식
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영해군파묘역 밑에 자리한 논두렁

호안공 묘역을 포기하고 느티나무가든 북쪽 숲에 묻힌 영해군파묘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
해군파묘역 밑에는 느티나무가든에서 관리하는 커다란 야외 단체석과 족구장, 논두렁 등이 있
는데, 이들 논두렁도 아직 모를 심지 않아 마치 큰 연못처럼 보인다. 그들 너머로 나무가 삼
삼히 우거져 있고, 그 숲속에 영해군파묘역이 자리해 있다.


▲  영해군파묘역 20m 전

▲  영춘군 이인묘와 신도비로 올라가는 산길

영해군파묘역으로 가다보면 중간에 왼쪽 언덕으로 올라가는 산길이 있다. (계단처럼 주름진
길이 보일 것임) 그 길로 가면 영춘군 이인묘와 신도비가 나오며, 직진하면 그 산길의 끝에
무리지어 있는 영해군파묘역이 있다.


 

 

♠  조선 초기 무덤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한 조선 왕족들의 묘역
전주이씨 영해군파묘역(寧海君派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6호

무수골 깊숙한 곳에 자리한 영해군파묘역은 세종의 9째 아들인 영해군과 그의 후손들이 묻힌
왕족 일가의 묘역이다.
무수골은 뒤에 도봉산, 앞에 무수천이 흐르는 이른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착한 명당(明堂)
자리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15세기 초반에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가 가장 먼저 이곳을 닦았
고, 영해군, 진주류씨, 함열남궁씨 순으로 무덤을 썼다. 이중 영해군파묘역이 가장 묘역이 넓
은데(1,630.4㎡)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선인무수지형(仙人舞袖之形)의 명당으로 꼽
힌다. (무수골의 이름도 거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음)

영해군파묘역은 크게 4구역으로 나뉜다. 묘가 몰려있는 중앙 구역은 묘역의 시조인 영해군 이
(李瑭) 내외를 비롯해 그의 장인어른인 신윤동(申允童), 영춘군의 아들인 강녕군 이기, 이
기의 노비인 김동(금동)의 묘가 있다. 이당 묘역 뒷쪽 산속에는 영춘군의 장남인
완천군(完川
君) 이희(李禧)와 완천군의 3째 아들인 평성수(平城守) 이질(李耋)의 묘가 있고, 동쪽 능선에
는 길안도정 이의의 묘, 묘역 직전 서쪽 능선에는 영해군의 장남인 영춘군 이인의 묘와 신도
비, 부원정 이이(영해군 손자의 아들) 내외의 묘가 있다.

묘역은 영해군을 시작으로 그의 아들과 손자, 증손자 4대가 묻혀있으며, 묘비가 없는 한참 후
손들의 무덤도 여럿 꼽사리로 끼어있다. 묘역은 영춘군 이인이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원종
공신(原從功臣)이 되면서 더 확대되었으며, 특히 중앙 구역 밑에 아주 조그맣게 충노(忠奴)로
포장된 금동의 묘가 있어 눈길을 끈다. 무덤들은 새로 손질된 부분이 거의 없는 16세기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 조선 초기 왕족들의 무덤 양식과 석물의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  충노 김동(金同)의 묘

묘역 중앙구역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충노 김동(금동)의 묘를 만나게 된다. 이 무덤은 영해군
파묘역의 다른 무덤과 달리 매우 아담한 모습인데, 이는 김동이 노비이기 때문이다. 밋밋하게
솟은 봉분(封墳)은 한 사람이 누우면 딱 적당할 정도로 작고, 풀도 별로 없다. 석물도 네모난
비좌(碑座)를 갖춘 묘비(높이 64cm, 너비 37cm, 두께 13cm)가 전부로 그 역시 꼬마 키보다도
작아 죽어서도 신분 차별을 주었다.
묘비는 비좌 위에 '故 忠奴 金同'이라 쓰인 빗돌을 세워 무덤의 주인을 알렸고, 빗돌 위는 반
원 모양으로 다듬었다. 그리고 그 위에 꽃봉오리 모습의 장식을 달았는데, 마치 위스키병처럼
보인다. (내가 술을 좋아해서 그런가?) 그러면 김동은 누구이고 왜 왕족 묘역 한쪽에 이렇게
무덤까지 있게 된 것일까?

김동은 강녕군(江寧君) 이기의 노비로 원래 이름은 금음동(今音同)이다. 연산군 시절에 흥청(
興淸)에 소속된 세은가이(世隱加伊)가 왕의 총애를 받자 그의 아비인 김숙화(金淑華)가 그 권
세를 믿고 이기의 집과 첩을 빼앗으려고 했다. 이기가 김숙화의 요구를 거절하자 뚜껑이 열린
김숙화는 이기가 노비 금동을 시켜 자신을 욕했다고 왕에게 하소연을 했다. (또는 이기가 노
비 금동과 함께 거친 말을 하며 항의했다고 함)
이에 뚜껑이 폭발한 연산군(燕山君)은 이기의 가족과 장인을 모두 연좌해 잡아들이고 집을 봉
쇄하고 노비까지 모두 압송케 했다. 이때가 연산군의 마지막 해인 1506년이다.

왕은 추관(推官)들에게 명해 낙형(烙刑)을 가하며 이기와 그의 아비인 영춘군 이인을 고문케
했다. 죄가 없는 이기 부자는 억울함을 토로했으나 허공의 메아리로 끝날 뿐, 아무 소용이 없
었다. 그러자 김동은 굳게 마음을 먹으며 '소인이 혼자 한 짓입니다. 나으리는 아무 것도 몰
라요!'
진술을 했다.
그 말을 신뢰하지 않던 왕은 거짓말 말라며 금동에게 6번씩이나 고문을 벌였다. 왕이 듣고 싶
던 말은 바로 이기가 했다고 자백하는 것이었다. 허나 금동은 끝까지 자기 소행이라 주장했고
그의 고집에 지친 왕은 결국 김동의 단독 범죄라 단정하여 그를 처단했다. 그리고 이기 부자
는 장형 100대, 이인은 장형 80대를 때려 유배형에 처했고 이기는 위리안치(圍籬安置)시켰다.
이 사건을 통해 이기와 연산군이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김숙화는 이를
악용해 이기의 집과 첩을 빼앗으려 했고, 연산군은 단순히 그의 무고만으로 이기를 잡아들였
으며, 김동이 자신이 벌인 일이라 자백하자 자신이 바라는 답변을 얻고자 더 고문을 가한 것
을 보면 이번에 아예 이기를 족치려고 작정했던 듯 싶다.

목숨을 건진 이기는 중종반정 이후 복권되었고, 김동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묘역 한쪽에 조촐
하게 그의 무덤과 비석을 만들어주었다. 그의 사연을 전해들은 중종(中宗)은 김동을 의노(義
奴)라 칭찬하며 1508년 4월 5일에 동네 어귀에 문려(門閭)를 세워주었고, 김동 가족의 요역(
徭役)을 면해주었다. 그리고 3년 뒤에 다시 명을 내려 집 앞에 정문을 세워 그의 희생을 길이
길이 기렸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그 공로로 김동과 그의 처자식은 면천이 되어 평민이 되었
고, 김씨 성을 하사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노비 김동의 묘가 무려 조선 왕족인 영해군파묘역 속에서 비록 작은 규모
이지만 주인 일가와 나란히 자리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거의 흔치 않은 노비의 묘로 묘비까지
갖춘 것은 아주아주 드문 케이스로 그 가치는 높다. 하긴 자신의 목숨을 던져 주인을 살렸으
니 이 정도 정성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  강녕군 이기(江寧君 李祺)와 그의 전/후처의 묘

김동 묘 옆에는 그의 주인인 강녕군 이기의 묘가 있다. 비록 무덤의 덩치는 김동 묘보다 크지
만 그와 거의 비슷한 높이에 자리해 있어 죽어서도 김동의 은혜를 잊지 않고 늘 함께 하겠다
는 주인의 지극한 마음이 담겨있는 듯 하다. (자리가 마땅치 않아서 그리 했을 수도 있음, 속
사정이야 당사자만이 알 것이니)
이기와 그의 전/후처 등 3명이 합장된 무덤으로 왕족의 무덤치고는 매우 작은 모습이다. 호석
(護石)을 두른 네모난 봉분과 비좌와 이수를 갖춘 비석, 상석(床石)이 전부로 그 부친대까지
는 봉분도 크고 문인석과 장명등까지 갖추었지만 이기부터 무덤이 간소하게 변화된다. 그만큼
먼 왕족이 되고 벼슬도 크게 못했기 때문이다.

이기는 영춘군 이인의 차남으로 영해군의 손자가 된다. 부인은 양주조씨인 조방우(趙邦佑)의
딸이며, 후처는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다. 그의 태어난 시기와 사망 시기는 전해오는 것이 없
으며, 연산군 말엽인 1506년에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세은가이의 아비 김숙화가 집을 뺏고자
시비를 걸자 이를 지키는 과정에서 그의 무고로 가족과 노비가 모두 압송되어 이기와 이당 부
자는 고문을 당하게 된다.
다행히 노비 김동이 자신을 불태워 이기의 가족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나 이기는 장형 100
대를 맞고 먼 곳으로 쫓겨나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중종반정 이후 복권되었다.

중종 때는 이정숙(李正淑) 등과 폐비 신씨(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청했다가 죄를 받은 김정
(金淨)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조광조(趙光祖) 등과 친분을 쌓았다. 허나 1519년 기묘
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 일당이 모두 아작이 나자 그의 일당이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죽은 이후 그 흔한 시호도 받지 못했다가 1794년 유림에서 그도 기묘사화 때 화를 받은
이른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하나라며 시호를 내리자는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문경(文景)이
란 시호를 내렸다.


▲  영해군 이당의 부인인 평산신씨(平山申氏)묘

강녕군 이기와 노비 금동의 무덤 윗쪽에는 영해군 이당의 부인인 평산신씨묘가 있다. 평산신
씨는 신윤동의 딸로 영춘군 이인과 길안도정 이의를 낳았으며, 남편의 무덤 옆이 아닌 친정
아비의 무덤 밑, 남편 무덤보다 2단계 밑에 따로 자리한 것이 이채롭다.

무덤은 동그란 봉분과 묘비, 상석 외에 장명등(長明燈)과 문인석(文人石) 2기까지 갖추고 있
으며, 이들 석물에는 500년 세월의 때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우측에는 묘비가 없는 후손 무
덤 2기가 봉긋 솟아있다.

▲  평산신씨묘와 묘비, 장명등

▲  고된 세월에 지쳐보이는 우측 문인석

▲  눈망울이 큰 좌측 문인석

▲  평산신씨묘에서 바라본 이기묘(왼쪽)와
금동묘(오른쪽)


▲  영해군의 장인인 신윤동(申允童)묘

영해군묘와 평산신씨묘 중간에는 영해군의 장인인 신윤동 묘가 자리해 있다. 영해군파묘역 중
간 구역에서 2번째로 높은 곳에 자리해 딸과 손자, 노비 금동의 무덤을 굽어보고 있는데, 사
위와 딸 무덤 사이에 둥지를 튼 점이 특이하다. 게다가 영해군 집안(전주이씨) 묘역에 부인도
아닌 다른 성씨의 인물이 잠들어 있는 점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아무리 장인어른이라고
해도 엄연한 다른 성씨이기 때문이다.
허나 조선 초까지는 집안 묘역에 사위나 장인 등 다른 성씨의 인물이 섞여 있는 경우가 흔했
다. 고려의 마지막 자존심이던 정몽주(鄭夢周) 묘역(용인시 능원리 소재)에도 정몽주의 손녀
사위인 저헌 이석형(樗軒 李石亨)과 그 후손이 묻혀 있고, 조선 10대 군주인 연산군은 부인인
거창신씨 집안의 땅에 묻혀있다.

신윤동은 좌의정에 추증된 신효창(申孝昌)의 손자이자 신자경(申自敬)의 아들이다. 그의 집안
은 왕실과 매우 가까워 세종의 왕자들에게 여럿 시집을 갔는데, 고촌사촌인 제안부부인(濟安
府夫人) 전주최씨(全州崔氏)는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부인이며, 숙
부 신자수(申自守)의 딸은 세종의 5남인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에게, 자신의 딸은 세
종의 9남인 영해군 이당에게 시집을 갔다. 그러니 집안도 배경도 다들 탄탄하다.
허나 영해군만큼이나 역사에 요란하게 이름을 남기지 못하여 인지도는 영해군파묘역에 와서야
확인이 될 정도로 매우 낮다.

신윤동의 행적에 대해서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서울시장)을 지내고 죽은 이후 의정부 좌
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는 것 등이며, 그의 할아버지인 신효창은 큰아들인 신자근이
아들을 얻지 못하고 일찍 죽자 막내 신자수를 신자근의 후사로 삼으려 했다. 허나 마음을 바
꾸어 신자경의 아들인 신윤동에게 신자근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는데, 신윤동이 사망하자 신효
창에 대한 제사를 누가 맡을 것인가를 두고 조정 관리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어났다는 내용이
전부이다. 또한 신윤동의 행적이 적혀있을 묘비(묘표)도 안타깝게도 마모가 되어 확인이 불가
능한 실정이다.

무덤의 구조는 동그란 봉분과 묘비, 상석, 문인석 2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석 앞면에 '증 의
정부 좌찬성 신윤동지?(贈議政府左贊成申允童之?)'라 쓰여 있다. 끝 자는 훼손되었으나 다른
묘비의 예를 볼 때 묘(墓)가 분명하며 우측에는 묘비가 없는 후손의 무덤 1기가 조용히 자리
한다.


▲  신윤동 묘의 뒷모습

▲  영해군 이당(寧海君 李瑭) 묘

신윤동 묘역 윗쪽에는 영해군파묘역의 시조인 영해군 이당의 묘가 있다. 묘역 중앙 구역에서
가장 높은 곳에 들어앉아 장인과 부인, 후손의 묘를 굽어보고 있는 이 무덤은 동그란 봉분과
고색의 내음이 진한 묘비(묘표), 상석, 날씬한 장명등, 문인석 2기로 이루어져 있다.

영해군(1435~1477)은 세종의 9째 아들로 신빈김씨(愼嬪金氏) 소생이다. 처음 이름은 이장(李
璋)이었으나 나중에 이당으로 갈았으며, 성격이 화목하여 다투는 일이 없었다고 전한다. 7살
에 영해군에 책봉되어 소덕대부(昭德大夫)의 품계를 받았으며, 1477년 42세의 나이로 죽자 성
종은 안도공(安悼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400년이 흐른 1872년에 영종정경(領宗正卿)
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신윤동의 딸인 임천군부인(林川君夫人) 신씨로 영춘군 이인과 길안도정 이의 등 2남1
녀를 두었으며, 보통 부인과 같은 봉분에 묻히거나 봉분을 달리해서 나란히 배치한 것이 보통
이나 영해군은 2단 밑에 부인의 묘를 두었다.
영해군묘는 정확히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무덤 뒷쪽 숲속에는 그의 손자인 완천군 이희(
영춘군 이인의 아들), 완천군의 3째 아들이자 영해군의 증손자인 평성수 이질 묘가 있으나 찾
지는 않았다. (그때는 몰랐음)
묘비 앞면에는 '영해군시 안도공당지묘(寧海君諡安悼公瑭之墓)'라 쓰여 무덤의 주인을 소상히
알려주고 있으며, 뒷면에는 그의 생애가 적혀있으나 마멸이 심해 확인하기가 어렵다.


▲  뒷쪽에서 바라본 영해군묘
(그 너머로 신윤동, 부인 평산신씨, 이기의 묘가 있음)

▲  영해군묘 우/좌측 문인석
장대한 세월에 제대로 지쳤는지 표정이 그리 밝지가 않다. 좌측 문인석은
세월이 씌워준 검은 때가 가득해 고색의 멋을 제대로 풍긴다. 세월이
달아준 얄미운 훈장이라고나 할까?

▲  길안도정 이의(吉安都正 李義)묘

영해군묘와 신윤동묘에서 동쪽으로 난 산길을 오르면 바로 길안도정 이의의 묘가 모습을 비춘
다. 동그랗게 솟은 봉분에는 이의와 그의 전/후처 등 3명이 잠들어 있는데, 그 앞에는 장대한
세월이 제대로 태워먹어 온통 검은 피부가 되버린 고색의 묘비(묘표)와 새로 세운 묘비, 상석
, 향로석(香爐石), 문인석 2기를 갖추고 있으며, 묘역 앞에 조촐하게 계단이 닦여져 있다.

이의는 영해군의 차남으로 구체적인 생몰시기는 전하는 것이 없다. 그는 여산송씨 집안의 송
자강(宋自剛)의 딸과 청주한씨인 한명회(韓明澮)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했으며, 은계군 이말숙
(銀溪君 李末叔, 한씨부인 소생), 시산군 이정숙(詩山君 李正叔, 송씨부인 소생), 청화수 이
창숙(淸化守 李昌叔), 송계군(松溪君), 벽계도정 이종숙(碧溪都正 李終叔), 옥계군(玉溪君)
등의 아들을 두었다. 그중 특히 벽계도정 이종숙은 황진이(黃眞伊)와 가까웠던 인물로 벽계수
(碧溪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의 묘비에는 '증 명선대부 길안도정행 창선대부 길안정(贈 明善大夫 吉安都正行 彰善大夫
吉安正)'이라 쓰여 있으며, 이의의 손자인 이휘(李徽)는 임진왜란 때 왜군을 격퇴한 공으로
그와 그의 아비, 할아버지 등 3대가 추증되었다. 그리고 이의의 아들인 이말숙의 묘비명에는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 이의와 사별했다고 나와있어 이의는 젊은 나이에 죽은 것으로 여겨진
다.

▲  이의묘의 옛 묘비와 새 묘비

▲  조각 솜씨가 일품인 옛 묘비의 이수(螭首)


▲  영춘군 이인(永春君 李仁)묘

영해군파묘역 중심 구역을 둘러보고 서쪽 산자락에 있는 영춘군 이인묘를 찾았다. 묘역 서쪽
구역에는 이인 내외와 부원정 이이 내외의 묘, 그리고 이인의 신도비가 있는데, 이 신도비는
이 묘역의 유일한 신도비로 이인의 높은 위치를 알게 해준다.

이인의 묘는 이인과 부인 유씨<유양(柳壤)의 딸>의 봉분을 비롯해 묘비 1기, 상석 2기, 혼유
석 2기, 장명등, 문인석 2기, 망주석(望柱石) 2기는 물론 무려 신도비까지 갖추고 있어, 영해
군파묘역 중의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묘역의 시조는 분명 그의 부친인 영해군이지만 그
부친보다 묘가 더 있어보여 이인묘가 이 묘역의 실질적인 주인공 같은 인상이다. (영춘군 이
인 묘역이라 불러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
특히 이들 묘역의 무덤들은 무덤 필수품인 망주석이 하나도 없는데 반해 이인 묘에는 망주석
이 있으며, 무덤도 동그란 형태가 아닌 앞은 네모, 뒷쪽은 세모로 총 5각형으로 이루어진 특
이한 모습이다. 동그란 봉분과 네모난 봉분(조선 초까지 많이 나타남)은 많이 봤어도 5각형은
처음이라 참 신선하며, 봉분 밑에는 호석을 둘러 단단히 다진 다음 두툼하게 봉분을 쌓았다.

영춘군 이인(1465~1507)은 영해군의 아들로 자는 자정(子靜)이다. 어렸을 때 외할머니 이씨(
신윤동의 부인)의 손에서 자라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었다고 하며, 10살 때 정의대부(正義大夫
)의 영춘군에 봉해졌고, 사옹원제조(司饔院提調)를 거쳐 숭헌대부(崇憲大夫)에 올랐다.
1506년 연산군이 총애하던 흥청 소속의 세인가비의 아비 김숙화의 무고로 이인과 이기 부자(
父子)가 압송되어 모진 고문 끝에 이인은 남해로 유배를 갔다. 다행히 중종반정(中宗反正)으
로 풀려나 복권되어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올랐으며, 1507년 4월 27일, 42살에 사망
했다. 하여 그해 8월 임신일에 지금의 자리에 장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목성(穆成)이다.

이인은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대단했는데, 11살에 어머니 신씨가 세상을 뜨자 3년상을 치
렀고, 그 상이 끝나기도 전에 부친 영해군이 사망하자 다시 3년상을 치렀다. 상례를 잘하여
종친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으며, 평상시 생활이 담박하고, 이름난 꽃을 뜨락에 심는 것을 좋
아했다고 한다.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으며, 중종반정으로 원종공신에 오른 덕에 집안 묘역을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  이인 묘비(묘표)
봉분 사이에 묘비 하나를 두었다.

▲  키 작은 장명등

▲  동자승처럼 생긴 우측 문인석

▲  홀을 쥐어든 좌측 문인석 (우측
문인석도 홀을 쥐어들고 있음)


▲  확트인 이인묘 앞부분
영해군이 묻힌 중심 묘역과 길안도정 이의묘는 숲속에 묻혀있어 시야가 좋지 못하다.
(주변에 보이는 건 나무, 위로는 하늘 뿐) 허나 이인묘는 나무의 눈치들이
적어 멀리 수락산과 불암산 산줄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  이인 내외 묘의 뒷모습
앞은 네모, 뒤는 세모를 취한 독특한 모습으로 5각형을 이루고 있다.

▲  이인묘에서 바라본 수락산(水落山, 638m)의 위엄

▲  이인 신도비(神道碑)

이인묘에는 특별한 존재가 하나 있다. 바로 신도비이다. 신도비란 무덤 주인의 생애를 기록한
비석으로 고위 관료와 왕족들의 무덤에만 쓸 수 있던 비싼 존재이다. 이인 역시 부모를 잘만
나 모태부터 왕족이기 때문에 신도비를 지녔다. 하지만 그의 아비인 영해군과 아들의 무덤에
는 신도비가 없으니 이는 중종반정으로 원종공신에 봉해진 탓이 아닐까 싶다.

신도비는 보통 신도(神道)로 통한다는 무덤 동남쪽에 세우지만 이곳은 서남쪽에 비석을 두었
다. 땅바닥에 네모지게 바닥돌을 깔고, 거북 머리인 귀부(龜趺) 대신 연꽃 무늬와 안상이 새
겨진 두툼한 비좌를 얹힌 다음 백일석(白一石)으로 만든 빗돌을 세우고, 그 위에 이무기가 여
의주를 두고 다투는 모습을 다룬 머리장식인 이수(螭首)로 마무리를 지었다.
비석의 높이는 273cm로 장대한 세월이 강제로 달아준 검은 주근깨가 많이 끼어있지만 그 덕에
중후한 멋과 고색의 미가 크게 돋보인다. 특히 이수에 새겨진 이무기는 비대칭적으로 새겨져
있는데, 그 조각수법이 꽤 섬세하여 은근히 탐이 난다.

이 비석은 1509년 9월에 세워진 것으로 당당하고 기품이 넘치는 모습으로 16세기 초를 대표하
는 비석으로 꼽힌다. 도봉산 자락에는 신도비를 갖춘 조선시대 무덤이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
도 이 비석은 단연 갑(甲)이며, 17세기에 세워진 임당 정유길(林塘 鄭惟吉) 신도비(서울 사당
동에 있음)의 모델이 되기도 한다.
빗돌에는 이인의 생애가 빼곡히 담겨져 있는데, 아들 이기의 부탁으로 첨지중추부사 남곤(南
袞, 1471∼1527)이 글을 지었고 글씨는 승정원 주서(注書)인 김희수(金希壽, 1475∼1527)가
썼으며, '목성공신도비명(穆成公神道碑銘)'이란 머리전서는 바로 김희수가 쓴 것으로 여겨진
다. 특히 도봉과 노원, 무수골의 옛 지명인 수철동 등 도봉/노원 지역의 옛 이름과 현재 이름
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 지역 지명을 최초로 언급한 기록으로 여겨져 지역 연구에도 큰 열쇠
를 제공해준다. 겉모습만 착할 뿐 아니라 빗돌에 새겨진 내용들도 착한 것이다.

지금은 영해군과 그의 후손들 묘역이 '전주이씨 영해군파묘역'이란 이름으로 지방문화재로 지
정되어 있지만 원래는 이 신도비만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묘역 전체
로 확장된 것이다.


▲  현란한 조각 솜씨를 드러낸 신도비 이수
소용돌이치듯 흘러가는 구름들 사이로 2마리의 이무기가 재주를 부리며
여의주를 다툰다. 비록 검은 때가 자욱하긴 해도 아직은 정정한
모습을 자랑해 500년 나이를 무색하게 한다.

▲  이인 묘 밑에 자리한 부원정 이이(富原正 李㶊)와 부인 전주유씨 묘역
이이는 영해군 이당의 증손으로 조용히 살다간 사람이다. 이이 부부의 봉분을
비롯해 세월에 검게 그을린 묘비(묘표)와 상석, 향로석 등이 있다.


무수골을 주름잡던 영해군파묘역을 싹 둘러보니 어느덧 19시가 되었다. 햇님도 퇴근본능에 따
라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 너머로 뉘엿뉘엿 저물고 달님과 땅꺼미가 조금씩 드리우기 시작
한다. 오랜만에 찾은 무수골, 개발도 그 칼날을 접은 곳이라 아직 산골과 시골 분위기는 여전
했다.
집에서 도보로 25~30분 정도면 충분히 안길 수 있는 무척이나 가까운 곳이지만 1년에 고작 1~
2번 가는 것이 고작이다. 집 인근에 이런 아름다운 곳이 있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하여 도봉
산의 숨겨진 비경, 무수골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산81-1 (도봉로169라길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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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7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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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산과 숲, 호수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옛길, 괴산 산막이옛길 (괴산호, 등잔봉, 한반도지형, 앉은뱅이약수)

 


' 괴산 산막이옛길 봄나들이 '

▲  등잔봉에서 바라본 신비로운 운해

▲  괴산호

▲  산막이옛길


 

봄이 한참 무르익어가던 4월의 한복판에 괴산(槐山) 지역 제일의 명소로 추앙을 받고 있
는 산막이옛길을 찾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산막이로 가는 그날은 공교롭게도 빗방울이 떨어졌다. 전
날까지는 마음이 싹 정화될 정도로 화창한 날씨였는데, 불과 하루만에 날씨가 안면을 바
꾼 것이다. 하여 비의 대한 불안감을 약간 품은 채,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집결지인 신도
림역(1,2호선)으로 이동했다. 물론 우산은 챙겼다.
신도림역에서 일행들을 만나 관광버스 2대에 나눠 타고 동남쪽으로 길을 향했다. 구름이
당장이라도 비를 투하할 기세로 나를 쫓아왔는데, 안성(安城)을 지날 무렵, 비가 쏟아지
기 시작했다. 버스는 빗속을 가르며 열심히 육중한 바퀴를 굴렸고 서울 출발 2시간 만에
산막이옛길 주차장에 이르렀다.

비가 조금 내리고 있어 우산을 펼치고 산막이옛길 우중(雨中) 산책에 들어갔다. 비는 조
금 내리다가 잠시 그치면서 '이제 날씨가 개인 모양이다' 희망을 주더니만 얼마 가지 않
아서 다시 비가 내린다. 그러기를 수 차례~! 하늘은 그야말로 우리를 희망고문을 시켰다.
나들이와 답사, 등산에서 비가 오는 것만큼 싫은 것도 없다.


 

♠  산막이옛길 입문

▲  산막이옛길의 마스코트
옛날 복장을 한 할머니와 손자 도령, 선비 복장을 한 할아버지와 손녀가 나란히
자리한다. 지팡이를 들고 삿갓을 쓴 할아버지 옆에는 경찰청 마스코트인
포돌이, 포순이 형상이 있다. (사진에는 짤림)


괴산의 새로운 꿀단지로 명성을 누리고 있는 산막이옛길은 괴산호(槐山湖)와 어우러진 아름다
운 경승지이다.
이곳은 원래 연하9곡(煙霞九曲)이라 불리던 명소로 계곡(달천 상류)을 따라 10리 정도의 산길
이 산막이마을까지 이어졌다. 허나 1957년 우리 기술로 지은 최초의 댐, 괴산댐이 마을 북쪽
사은리에 지어지면서 계곡 일대가 강제 수몰되었다. 그래서 산중턱에 새로 길을 내었으니 그
것이 바로 산막이옛길이다. 옛길이란 명칭은 수몰된 산길 윗쪽에 다시 길을 닦았다는 의미에
서 붙여진 것이다.

산막이옛길(이하 옛길)은 3.9km로 괴산호 서쪽에 자리해 있다. 원래는 흙길이었으나 2011년에
천하에 개방되면서 나무데크길을 내었다. 숲과 호수, 산이 어우러진 빼어난 절경에 퐁당퐁당
빠진 사람들이 늘면서 그 존재감이 미치도록 커졌고, 이제는 괴산 제일의 명소로 우뚝 섰다.
호수를 따라 이어진 옛길에는 소나무동산, 노루샘, 호랑이굴, 앉은뱅이약수, 얼음바위골, 괴
산바위, 진달래동산 등의 조촐한 볼거리가 있으며, 유람선이 옛길의 시작점인 차돌바위 나루
터에서 환벽정나루를 거쳐 산막이나루까지 운항한다.

옛길의 종착지인 산막이마을에는 노수신(盧守愼)이 유배 생활을 하였던 적소(謫所)가 있으며,
그곳에는 그의 후손인 노성도(盧性度, 1819~1893)가 세운 수월정(水月亭)이 있다. 그리고 괴
산호가 자연스럽게 빚은 한반도지형에는 환벽정이란 정자가 둥지를 틀었다.

옛길 서쪽에는 국사봉(477m)과 등잔봉, 천장봉, 삼성봉(550m)이 산막이의 지붕을 이루고 있는
데, 옛길에서 등잔봉과 한반도전망대, 진달래능선, 진달래동산을 거쳐 옛길로 내려가도 되고,
(출발점→등잔봉→한반도전망대→산막이마을, 2.9km) 한반도전망대에서 더 욕심을 부려서 천
장봉, 삼성봉을 찍고 '신령참나무'와 '시련과 고난의 소나무'를 거쳐 산막이마을로 내려가도
된다. (출발점→등잔봉→천장봉→산막이마을, 4.4km) 그리고 산을 타기가 귀찮다면 호수를 따
라 이어진 옛길을 이용하면 되며, 그것도 귀찮다면 돈 몇푼 주고 배를 타면 된다.

싱그러운 나무와 풀의 향기, 산에서 낭랑하게 불어오는 산바람과 괴산호에서 불어오는 강바람
에 몸과 마음이 상쾌해지는 즐거운 곳으로 시간이 넉넉하다면 옛길만 살피지 말고, 등잔봉과
천장봉 등의 산도 같이 겯드리면 정말 배터지는 나들이가 될 것이다. 그렇게 둘러봐도 길어봐
야 4시간 이내(천장봉을 경유할 경우 5시간 이내)면 충분하다.

*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 일대


▲  세모로 솟은 산막이옛길 표석

▲  산막이옛길로 들어서다

궂은 날씨임에도 산막이를 찾은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다행히 비가 크게 내리지 않아서 우산
이나 우의, 모자만 걸쳐도 별탈 없이 움직일 수가 있다.
주차장을 출발해 밤, 옥수수 등의 자연산 간식과 지역 특산물을 파는 가게촌을 지나면 본격적
인 산막이옛길 나들이가 시작된다. 소나무가 무성한 소나무동산이 곧 모습을 드러내고 유람선
을 타는 차돌바위 나루터가 걷기의 귀차니즘과 문명의 혜택을 바라는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
것을 타면 산막이까지 10분 정도면 간다. (옛길로 걸어갈 경우 1시간 소요) 하지만 우리는 등
잔봉과 천장봉, 삼성봉을 찍고 산막이마을로 내려가 옛길로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그야말
로 산막이옛길 본전 코스로 돌기로 했다.


▲  괴산호 유람선을 타는 차돌바위 나루터
적정인원이 차면 바로 배가 출발한다. (따로 시간표는 없음)

▲  고인돌쉼터
고인돌처럼 생긴 바위가 여럿 널려 있다. 이곳은 옛 사오랑 서당에서
한여름에 야외 학당으로 이용했던 곳이다.

▲  가파르게 이어지는 소나무동산 옛길

▲  솔내음이 코와 마음을 찌르는 소나무동산
40년 묵은 소나무가 넓게 군락(약 1만 평)을 이루고 있다.

▲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산막이옛길의 자연산 거울, 괴산호
나무와 꽃, 산, 구름이 호수에 비친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으며 몸단장에 여념이 없다.
산에 둘러싸인 호수의 자태는 첩첩한 산중에 안긴 비밀의 호수처럼 신비롭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  소나무 출렁다리를 타고자 기다리는 사람들

▲  소나무 출렁다리 (1)

소나무동산 남쪽에는 산막이의 명물인 소나무 출렁다리가 있다. 이름 그대로 출렁이고 흔들거
리는 다리로 다리 밑판의 간격이 성인 발 크기 정도로 벌어져 있어 좌우 난간을 잘 붙잡고 밑
판도 잘 챙기며 움직여야 별탈이 없다. 자칫 방심하여 그 틈으로 발이 빠지면 영 좋지 않은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게다가 오르막길, 내리막길이 반복되고, 지그재그 형태로 여타 관광지의 그저 그런 흔들다리
와 완전히 차원이 틀린 거의 훈련/유격용 흔들다리 버전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
니 다리가 짧은 사람이나 어린이, 알콜이 좀 들어간 사람은 출렁다리를 피하기 바란다. 보기
와 달리 다소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어 체감 거리를 더욱 늘려준다.


▲  소나무 출렁다리 (2)

▲  소나무 출렁다리 (3)

▲  변덕스런 하늘과 대조적으로 고요함에 잠긴 괴산호


 

♠  산막이옛길의 지붕을 거닐다 (등잔봉, 한반도전망대)

▲  등잔봉으로 올라가는 길

소나무출렁다리를 지나면 오른쪽에 등잔봉으로 오르는 가파른 산길이 나온다. 호수 옛길만 거
닐면 싱거울 수가 있으니 산막이의 지붕인 등잔봉~천장봉 능선을 거니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
다.

등잔봉으로 오르는 길은 세상살이만큼이나 다소 각박하다. 처음에는 경사가 완만하지만 하늘
과 가까워질수록 점차 각박하게 이어져 숨을 제대로 가쁘게 만든다. 그 각박한 산길은 등잔봉
북쪽까지 이어지는데, 그냥 오르는 것도 힘든 마당에 봄비의 희롱으로 산길이 흥분하여 진흙
탕이 되버렸으니 은근히 질퍽이고 미끄럽다. 게다가 산길 밑 경사는 60도 이상으로 아찔하여
더욱 조심을 기해 움직일 수 밖에 없다.


▲  등잔봉으로 오르면서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
괴산호와 산막이옛길 주변

▲  등잔봉으로 오르는 길

▲  조그만 등잔봉 정상 표석 (해발 450m)

등잔봉은 국사봉과 더불어 산막이의 북쪽 지붕이다. 이곳에 오르면 남쪽으로 천장봉과 삼성봉
이, 동쪽으로는 산막이옛길과 괴산호가 바라보이는데, 비를 가득 품은 비구름이 그 풍경을 모
조리 앗아가버려 보이는 것은 그저 하얀 구름 뿐이다.
궂은 날씨로 인해 내가 기대했던 환하게 펼쳐진 풍경은 아니지만 꿩 대신 닭이라고 구름이 진
하게 그것도 발 밑으로 가득 깔려 있어 고작 해발 450m를 올라왔을 뿐인데, 마치 1,500m이상
봉우리에 올라선 기분이다. 그야말로 3배 이상의 효과라고나 할까? 게다가 천상(天上) 세계의
신선이나 그의 식구가 된 기분까지 교차하니 화창한 날 풍경에 못지 않은 기분이 나를 즐겁게
한다.


▲  등잔봉에서 바라본 장대한 운해(雲海) ①
하늘 세계도 세력 확장을 하는 모양이다. 구름이 해발 400m까지 쑥 내려왔다.
이러다 밑 세상까지 하늘의 침범을 받는 것은 아닐까? 구름이 거대한
하얀 도화지를 이루며 밑 세상을 모두 가져가버렸다.

▲  등잔봉에서 바라본 장대한 운해 ②
저 하얀 구름을 거닐고 싶다. 물론 신선이나 손오공이 아닌 이상은
위험하겠지..

▲  등잔봉에서 바라본 장대한 운해 ③
운해 너머로 구름에 감싸인 산이 있다. 그 자태가 마치 신선이나 천상 세계의
지체 높은 존재만 접근이 허락되는 신비로운 산처럼 보인다.

▲  등잔봉에서 바라본 장대한 운해 ④
대자연이 그린 장대한 수묵담채화, 아무리 천재 화가라고 해도 저 그림을
100% 그대로 담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  등잔봉에서 바라본 천장봉(437m)
엷은 구름을 걸친 모습이 자못 신비로워보인다. 혹 선녀 누님이
구름을 타고 내려온 것은 아닐까?

▲  한반도전망대에서 희미하게 바라보이는 한반도지형

등잔봉과 천장봉 사이에는 한반도전망대라 불리는 조망대가 있다. 이곳은 바로 밑에 아득히
바라보이는 괴산호의 걸출한 작품, 한반도지형을 굽어보는 현장으로 괴산호가 빚은 작품이다.
허나 아무리 걸출하면 무엇하나? 자연이 단단히 시샘을 했는지 비구름과 안개로 싹 가려버렸
으니 말이다. 다행히 구름이 조금 틈을 보여 그 사이로 한반도지형이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한반도지형이란 말그대로 우리나라가 담겨진 한반도를 닮은 지형으로 영월(寧越)의 한반도지
형이 대표적이다. 그것도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그것을 시작으로 천하에 많은 한반도지형이
발굴되어 하나 같이 관광지로 키워지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아주 조그만 축소판
이라 그렇다.
허나 우리는 그 조그만 한반도에서 안주하면 안된다. 그 옛날 선조들이 다스렸던 수많은 실지
(失地, 만주와 요동, 요서, 연해주, 대마도, 왜열도 등)을 되찾아 과거의 광영을 되찾아야 될
것이다. 언제가 될지 모를 그때가 오면 한반도지형은 과감히 버리고 그에 걸맞는 지형을 키웠
으면 좋겠다.


 

♠  산막이옛길 마무리

▲  나무 사이로 보이는 괴산호 (고공전망대 주변)

한반도전망대에서 남쪽으로 1굽이 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그대로 직진하면 천장봉, 왼
쪽으로 가면 진달래능선인데, 비가 계속 내리고 있고, 산길 상태도 좋지 못해 천장봉과 삼성
봉을 빼고 바로 진달래능선으로 내려가 원점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쉽기는 하나 날씨가 계
속 심술을 부리고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럴 때는 욕심을 쿨하게 부리고 코스를 좀 줄이
는 것이 좋지.

진달래능선은 천장봉 북쪽에서 옛길로 내려가는 길로 경사가 조금 패기가 있다. 진달래가 무
리를 이루고 있어 진달래능선이라 불리는데, 진흙이 되버린 산길을 정신없이 내려오니 괴산호
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진달래동산이 마중을 한다. 여기서 잠시 떨어졌던 옛길과 만났다.

진달래능선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북쪽은 괴산호를 따라 출발점으로, 남쪽은 가까이에
보이는 산막이마을로 이어진다. 이곳에 왔으니 산막이마을도 봐야 당연한 도리이지만 코스 단
축에 따라 주어진 시간도 줄어들어 거기를 경유하기에는 상당히 촉박했다. (마을에서 배를 타
고 돌아가면 충분하나 배까지는 생각을 안했음)
개인적으로 왔다면 모두 보고 가야 직성이 풀리겠지만 단체로 온 것이니 시간을 어길 수는 없
다. 게다가 일행들이 가져온 행동식과 간식을 먹느라 중간중간 눌러 앉은 시간이 너무 많아서
정작 필요한 것을 보는 시간이 많이 줄어버렸다. 하여 노수신적소가 있는 산막이마을을 저 앞
에 두고 단장의 마음으로 길을 돌아서야 했다. 아무래도 다음에 다시 인연을 지어 오라는 산
막이의 지극한 뜻이 아닐까? 그래도 너무 아쉽다.


▲  산막이옛길의 잔잔한 거울, 괴산호

▲  물결을 가르며 달리는 괴산호 유람선
산막이마을과 바깥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발이다. 마을까지 빠르게 이동하는
교통수단으로 15~20분 정도 걸리며, 인원이 차면 출발한다.

▲  나무데크길로 무장한 산막이옛길

▲  얼음바람골

호수전망대를 지나면 얼음바람골이라 불리는 조촐한 계곡이 나온다. 돌 피부에 푸른 이끼가
가득하여 이곳이 청정한 곳임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데, 이곳은 한여름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한기를 느낄 정도라고 하여 얼음바람골이라 불린다.
그래서일까?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밀양(密陽) 얼음골의 바람처럼 매우 차갑게 느껴졌다.
여름 제국도 염통을 부여잡고 슬금슬금 피해가는 피서의 성지인 셈이다.


▲  산막이옛길의 유일한 샘터, 앉은뱅이약수

옛날에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가 이 물을 마셨는데 물의 효험을 받아 무려 걸어서 나갔다고 한
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몸에 좋은 무언가가 깃든 물로 명성이 자자
했으며, 수질도 양호하고 1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괴산호의 물을 채워주는
수원(水源)의 하나이기도 하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받아 마시니 몸 속의 때가 싹 가신 듯 시원하다. 내 마음
이 마치 앉은뱅이에서 정상 다리로 된 기분..


▲  귀여운 호랑이 형상이 있는 호랑이굴

호랑이굴은 바위에 뚫린 조그만 자연산 동굴로 1968년까지 호랑이(표범)이 살았던 굴이라 전
한다. 그 이후 주인 없는 굴이 되었으며, 호랑이가 살던 것을 기리고자 그 앞에 색채가 진한
모형 호랑이상을 두었으나 예전 호랑이의 매서운 기운은 커녕 호랑이탈을 쓴 고양이처럼 귀엽
기만 하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스한 바람이 나오며, 옛길에는 이곳 외에도 여우비바위굴도 있
는데, 그곳은 산막이를 오가던 사람들이 여우비(여름 소나기)와 한낮 더위를 피하던 곳이다.


▲  연화담(蓮花潭)
이곳에는 예전에 벼를 키우던 논이 있었다. 높은 곳이기 때문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에 의존해 모를 심었는데, 옛길을 조성하면서 그 자리에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연화담으로 삼았다.


촉박해진 집결시간 때문에 옛길의 많은 명소를 사진에 싹 담지 못하고 겨우 일부만 담는데 그
쳤다.
진달래동산에서 연화담 사이에는 다래숲동굴, 마흔고개, 고공전망대, 괴음정, 괴산바위, 호수
전망대, 얼음바람골, 앉은뱅이약수, 풀과나무의 사랑, 옷벗은 미녀참나무, 여우비바위굴, 매
바위, 호랑이굴, 노루샘 등의 명소가 있는데, 이중 얼음바람골과 앉은뱅이약수, 연화담만 사
진에 담은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둘러보긴 했으나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쳤다.

어쨌든 주차장으로 돌아와 부근 식당에서 버섯소고기전골로 두둑히 배를 채우고, 곡차(穀茶)
도 다수 겯드리며 뒷풀이를 하다가 오후 4시에 잠시나마 정든 산막이옛길을 뒤로하며 다시 서
울로 돌아갔다.
분명 보긴 했으나 많은 것을 놓쳤던 산막이옛길과의 첫 만남, 그야말로 벌처럼 날라가고 돌아
왔던 단체 등산 나들이로 놓친 것이 많은 만큼 아쉬움도 크다. 허나 나중에 다시 인연이 된다
면 그 아쉬움을 모두 풀 것이다. 둘러보지 못한 곳은 잠시 미래에 맡겨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산막이옛길 봄비 산책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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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에 묶여있는 강화도 옆구리의 커다란 섬, 교동도 여름 나들이 ~~ (교동읍성, 교동향교, 성전약수, 화개사, 강화나들길 9코스)

 


~~~~~  강화 교동도 나들이
~~~~~

▲  화개산 숲길

▲  교동향교

▲  교동읍성

 


 

강화도(江華島)와 황해도 사이에는 교동도란 커다란 섬이 떠있다. 예전에는 강화도 창후
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으나 2014년 7월,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1969년에 연륙된
강화도와 더불어 한반도의 어엿한 일원이 되었다. 육지(김포시)와 강화도(강화군), 강화
도와 교동도 등 바다에 놓인 다리를 2개나 건너야 되나 섬을 잇는 다리가 생김으로써 더
이상 날씨와 바다의 눈치 없이 차량으로 마음 편히 오갈 수 있게 되었다.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오랜 세월 목말라오던 교동도와 흔쾌히 인연을 짓고자 여름의 어
느 평화로운 날 아침, 길을 떠났다.
서울 서부와 일산신도시, 김포(金浦), 강화대교를 지나 오전 11시 반에 강화터미널에 도
착했다. 교동도 버스 시간까지는 아직 40~50분 정도 남아있어 환승시간도 연장할 겸, 강
화읍내로 나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 마트에서 간식거리를 여럿 구입하며 시간을 때웠
다. 무더운 날씨긴 했으나 바다에 감싸인 섬이라 여름 제국의 열기(熱氣)는 그리 거세진
않았다.

드디어 교동도(喬桐島)의 새로운 빛이자 발로 등장한 강화군내버스 18번(강화터미널↔월
선포)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허나 버스는 벌써부터 초만원이다. 다리 개통으로 물이 잔
뜩 오른 교동도 나들이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교동도까지 서서가야 되는가?' 우울한 마음 가득했으나 나에게는 꿩 대신 닭을 잡을 권
리는 없었다. 버스 아니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금씩 사람이 빠져 다리 이전
인 인화리에서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교동대교 직전에는 인화리 검문소가 매의 눈으로 섬을 찾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 다
리가 뚫리긴 했어도 교동도는 여전히 예민한 민통선이자 이 땅 최전방의 하나로 마치 군
사정권 시절로 강제 되감기를 당한 듯, 검문도 조금 까칠하다.
검문소에 이르면 군인아저씨의 통제에 따라 승객들은 버스에서 내려 검문소에 마련된 문
서에 이름과 연락처를 쓰고 신분증 검사를 받는다. 여럿이 온 경우에는 1명만 내려 작성
하면 되나, 상황에 따라 모두 검사를 받을 수 있으니 신분증은 꼭 지참해야 뒷탈이 없다.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절대로 들어갈 수가 없다.
개인 차량으로 왔을 경우, 차에서 내려 신분증 검사와 이름, 연락처 등을 적고 통행증을
받는다. 통행증은 섬에서 나올 때 반환하면 된다.

승객이 많은 탓에 검문 시간이 길어져 버스는 약 7~8분 정도 그 육중한 바퀴를 멈추었다.
마치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국경선에서 출국수속을 밟는 기분이랄까?? 그 까칠한 절차가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탑승하자 잠시 늘어졌던 버스는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수
평선 너머의 숨겨진 별천지로 인도할 것 같은 교동대교로 들어선다.

교동대교는 강화도 양사면 인화리와 교동면 봉소리를 잇는 3.44km의 연륙교로 2008년 9월
에 짓기 시작했다. 원래 2012년 개통 예정이었으나 바다 갯벌에 설치된 기초 말뚝이 2011
년 중순 손상되면서 공사 기간이 다소 늘어났다. 2014년 6월 20일 임시 개통을 했고, 10
일 뒤인 7월 1일 정식 개통되어 교동도의 새로운 관문이 되었다.
공사비는 총 904억 원이 소요되었으며, 다리 밑은 서해바다와 검은 갯벌이고, 바다 북쪽
은 바로 황해도(黃海道)로 북한 땅과 가장 가까운 바다 다리가 바로 교동대교가 되겠다.


 

♠  교동도 입문 (교동읍성)

▲  푸르게 익어가는 교동평야 (평야 너머로 보이는 섬이 석모도)

교동대교를 건넌 버스는 봉소리와 고구저수지, 교동도의 중심인 대룡리, 교동향교가 있는 읍
내리(邑內里)를 거처 섬 동쪽에 자리한 월선포에서 바퀴를 접는다. 월선포는 교동도의 옛 관
문으로 2014년 6월까지 강화도 창후리를 잇는 뱃편이 운행했다.

※ 교동도(喬桐島)는 어떤 곳인가?
교동도는 약 47.1㎢(또는 46.9㎢)의 넓은 섬으로 논 25.89㎢, 밭 2.57㎢, 임야 11.45㎢를 지
니고 있다. 다른 섬에 비해 유독 논이 넓은 편이라 마치 육지의 너른 평야를 보는 듯 한데 이
들 논을 교동평야(喬桐平野)라 부른다. 섬에 이렇게 너른 논이 있게 된 것은 고려 말부터 자
급자족을 위해 간척사업과 경지 개척을 꾸준히 벌인 탓이다. 게다가 해발 10m 이하의 땅이 섬
의 약 ⅔를 이루고 있어 경지 개척에도 매우 용이했다.
조선과 왜정(倭政)을 거쳐 현대까지 계속 땅을 다지고 수리시설을 개량하는 등 농업에 전념했
으며, 화개산 북쪽에는 섬 호수치고는 꽤 넓은 고구저수지가 있어 교동평야의 많은 농경지를
적셔주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농업에 집중한 결과, 자급자족을 넘어 다른 지역까지 농산물을 내놓고 있으
며, 교동도 쌀은 질이 좋기로 명성이 높다. 어느 통계를 보니 교동도에서 1년간 생산된 쌀로
교동도 사람들이 약 58년, 강화군민이 약 4년간 먹을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그만큼 땅이 비
옥하다. 그래서 옛날부터 섬에 부자가 많았으며, 육지 사람들에 비해 전혀 아쉬울 것이 없어
교동민국이란 말도 생겨났다. 쌀 외에 보리와 콩, 감자, 인삼, 밤, 대추, 버섯 등의 농산/임
산물도 풍부하게 나온다.

섬 동쪽에 솟은 화개산(260m)은 섬의 지붕이며, 화개산 외에는 띄엄띄엄 거리를 두고 100m 이
하의 구릉들이 여럿 솟아있다. 해안선은 서해안치고는 단조로우나, 죄다 갯벌이다. 게다가 간
만의 차가 커서 선박 출입도 썩 편하지 못하다. 월선포 등의 항구가 있으나 조그만 수준이며,
겨울에는 해안의 유빙(流氷)과 북한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으로 강화도보다 좀 춥다.

교동도 동쪽에는 그를 거느리는 강화도가 자리해 있고, 남쪽에는 역시 강화도에 속한 석모도(
席毛島)가 있다. 그리고 서쪽은 황해도 연안군(延安郡), 북쪽은 황해도 배천군(白川郡)으로
모두 북한이다. 황해도 땅은 섬에서 불과 2~3km 거리에 불과해 섬 북쪽 해안과 화개산에서 뻔
히 바라보인다. 그 땅도 우리 땅이 분명하건만 그곳에는 북한이란 이상한 나라가 들어서 이렇
게 가까운 거리임에도 70년 이상 건너가질 못하고 있다.

교동도는 북방한계선(NLL)의 동쪽 시작점으로 강화도와 교동도 북쪽 바다는 남한과 북한의 완
충지대인 중립구역이다. 교동도 일대는 민통선으로 지금은 그나마 덜해지긴 했지만 출입이 썩
자유롭지 못했으며, 농업 외에는 개발이 어려워 1970~80년대 분위기를 여실히 간직하고 있다.
남북분단의 비극이 교동도의 시간까지 막아버린 것이다.

지금은 하나의 섬으로 되어있지만 호랑이가 담배맛을 알기 이전에는 개화산과 율두산, 수정산
을 중심으로 3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교동평야에는 조수가 흘렀다고 하며, 대자연의
위대한 힘으로 이들 섬은 점차 하나가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석모도 상주산 사이의 바다가
육지화되어 사람들이 내왕했다가 1578년에 다시 바다가 되어 간조 때 외에는 왕래하지 못했다
는 기록이 있어 후빙기(後氷期) 이후 해면 변동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교동도는 고구려 때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불렸으며, 신라 경덕왕(景德王) 시절에 교동(喬
桐)으로 이름이 갈렸다. 이때 혈구진(穴口縣, 강화도)에 속했는데, 고려 명종(明宗) 때 감무
(監務)를 두어 섬을 통치하게 하면서 강화도에서 분리되었다.
고려의 끝 무렵인 우왕(禑王, 재위 1374~1388) 시절에는 피폐된 수군을 재건하고 정신없이 날
뛰는 왜구(倭寇)를 때려잡고자 전라도에서 바다에 익숙한 어부와 바닷가 사람들을 징발했다.
그들에게 경작지를 주는 조건으로 강화도와 교동도로 이주시켜 수군 훈련을 시켰는데, 이때
최무선(崔茂宣)이 개발한 화약을 이용해 화포(火砲) 훈련까지 병행했으며, 최무선은 단련된
그들을 데리고 1380년 금강 하류인 진포에서 왜구 500척을 때려잡는 전과를 올렸다. 이것이
진포대첩(鎭浦大捷)이다.

1395년에는 만호(萬戶)와 지현(知縣)을 두었고, 이후 교동현으로 삼아 현감을 파견했다. 1629
년 경기수영(京畿水營)을 교동도로 이전하면서 강화도에 버금가는 부(府)로 승격되고 수군절
도사(水軍節度使) 겸 교동부사를 두었으며, 1633년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를 교동에 두면서
경기도와 충청도, 황해도의 바다를 관리했다.
1777년 교동부를 현으로 낮추었다가 1779년 삼도통어사를 강화로 옮기면서 교동부 겸 방어사(
防禦使)로 승격되었으며, 1789년 삼도통어영이 다시 교동으로 돌아왔다. 1866년에도 이와 비
슷한 일이 있었고, 1884년 해방영(海防營)에 통어사가 이속되면서 부사 겸 통어사로 격이 조
정되었다.
1895년 행정개편으로 강화에 일시 통합되었으나 1896년 교동군으로 분리되었으며, 1914년 강
화군에 편입되어 개화면과 수정면 2개 면을 두다가 1934년 교동면으로 통합되었다.

해방 당시 인구가 8,600명이었으나 6.25이후 실향민들이 북한과 가까운 이곳으로 대거 넘어오
면서 1965년에 12,443명에 달하기도 했다. 허나 민통선이라 개발도 거의 안되고 점차 낙후되
면서 인구가 감소해 현재는 3,000명대까지 떨어졌다.
6.25이전에는 4개의 정기연락선이 강화도와 황해도를 이어주었으나 6.25이후 강화도 외에 모
두 길이 끊기면서 외로운 섬이 되었다. 게다가 민통선이라 방문도 좀 까다롭고 교동도의 이
름 3자가 천하에 그리 알려지지 못해 실향민 외에 외지인의 방문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교
동대교가 닦이면서 섬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었고, 관광객과 답사/등산/낚시 수요가 늘면
서 차량의 왕래가 폭증했다. 다리로 인해 섬은 서서히 물이 오른 것이다.

교동도에는 등산 명소로 부상하고 있는 화개산을 비롯해 교동향교, 교동읍성, 화개사, 연산군
유배지, 대룡시장 등의 명소가 있으며, 강화도 둘레길인 강화나들길 가운데 2개 코스가 섬에
닦여져 교동도에 새로운 악세사리가 되고 있다. 또한 지엄한 민통선이라 개발도 오랫동안 피
해가면서 1960~80년대 농촌마을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오염원이 없어 그야말로 청정한 곳
이다.
 
섬까지 강화군내버스가 들어오지만 섬의 동부인 화개산 주변 봉소리, 대룡리, 읍내리 지역만
운행할 뿐, 그외 지역은 대룡시장에서 마을버스를 타거나 택시, 도보, 개인 차량을 이용해야
된다.
교동도의 중심은 대룡리로 면사무소가 있으며, 조그만 대룡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섬 서부로
갈때는 이곳에서 들어가면 된다.
육지와는 가깝지만 은근히 진입이 까칠한 곳이라 고려와 조선 때 유배지로 널리 쓰였으며 서
해바다와 예성강(禮成江), 한강이 만나는 지리적 위치로 군사적 요충지이자 교역지로 바쁘게
살아갔다.


▲  교동읍성(喬桐邑城) - 인천 지방기념물 23호

교동도에서 가장 먼저 문을 두드린 곳은 교동도의 옛 중심지인 교동읍성이다. 화개사입구 정
류장에서 남쪽으로 난 시골길을 조금 들어가면 장대한 세월에 형편없이 짓눌린 교동읍성과 남
문이 그 초췌한 모습을 비춘다.

교동읍성은 교동도에 경기수영이 설치된 1629년에 축성되었다. 성의 둘레는 약 430m로 동문과
남문, 북문 등 3개의 성문을 두었으며 모두 옹성(甕城)을 둘렀다. 동문은 통삼루(統三樓), 남
문은 유량루(庾亮樓), 북문은 공북루(拱北樓)라 불렸는데, 1753년 여장을 고쳐 쌓았고, 1884
년에 남문을 수리했다. 바로 이 읍성(邑城) 안에 경기수영과 삼도통어영, 교동 고을의 관아가
있었다.

왜정 때 관리소홀과 왜정의 악의적인 훼손으로 동문과 북문은 쥐도새도 모르게 녹아 없어졌으
며, 성곽 역시 거의 앉은뱅이가 되었다. 남문은 다행히 모습은 건졌으나 1921년 폭풍우로 붕
괴된 것을 1975년에 해체,복원했으며 현재 남문과 그 좌우 성벽, 화개사입구에서 남문으로 넘
어가는 길목 등 약 300m 정도만 헝클어진 모습으로 남아있다. 제 아무리 장대했을 읍성도 결
국 세월과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모래성에 불과했던 것이다.


▲  바다를 향해 입을 벌린 교동읍성 남문(南門)

바다를 바라보고 선 남문은 문루를 상실한 채, 홍예문과 성벽, 옹성 일부만 남아있다. (최근
에 문루가 복원됨)
문 주변은 하얀 피부의 성돌이 상당수를 이루고 있는데, 이들 상당수는 1975년에 복원하면서
새로 끼어 맞춘 것이다. 그 좌우에는 고색의 때로 얼룩진 성돌이 가득해 서로 어색한 조화를
보인다.

▲  남문 서쪽 성곽과 옹성의 흔적

▲  돌담처럼 낮아진 남문 동쪽 성곽


▲  남문 앞에 웅크리고 앉은 비석의 귀부(龜趺)

남문 앞에는 비석의 일부인 조그만 귀부가 누워있다. 거북 머리와 비석을 꽂던 비좌(碑座)만
남아있는데, 정작 알맹이인 빗돌이 없어 무엇을 머금던 비석이었는지는 귀신도 모른다. 아마
도 왜정 때 저 지경이 된 듯 싶은데, 교동읍성 축성/보수 관련 내용을 담은 비석으로 여겨진
다. (정답은 없음)
하지만 귀부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으니 아무리 여기서 답을 내놓은들, 한낱 부질없는 메아리
에 불과하다.


▲  귀부의 뒷모습
귀엽게 표현된 꼬랑지가 살랑살랑 움직이는 것 같다.

▲  풍년예감~! 남문 앞에 펼쳐진 교동평야

▲  남문 안쪽

교동읍성 남문 동쪽에는 교동부 관아터와 황룡우물,  연산군(燕山君) 유배지 등의 명소가 있
다. 나는 이들의 존재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남문 주변만 둘러보고 미련 없이 교동향교로 넘
어가고 말았다.
허나 늘 변명이긴 하지만 다음이란 것이 있으니 그리 아쉽지는 않다. 어차피 서울과 가까운
곳이라 나중에 다시 인연을 지으면 된다.

* 교동읍성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577일원

▲  성문에 새겨진 남루(南樓) 글씨
성문의 성격과 이름을 말해준다.

▲  삼도(三道)~~ 문(門)이라 새겨진 글씨
여기서 삼도는 삼도통어영을 뜻한다.


▲  금지된 남문 안쪽 성벽
한때 잘나갔던 교동읍성은 이제 무너지는 것을 걱정해야 될 처지가 되었다.
읍성 보호를 위해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니 절대로 성벽을 오르지 말자~

▲  교동읍성의 아련한 흔적 (화개사입구에서 남문으로 넘어가는 길목)

▲  화개사입구 정류장에서 바라본 화개산(華蓋山)의 위엄


 

♠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로 꼽히는 교동향교(喬桐鄕校)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28호

▲  교동향교 입구에 자리한 읍내리 비석군(碑石群)

교동읍성을 둘러보고 화개산 남쪽 자락에 안긴 교동향교를 찾았다. 화개사입구 정류장에서 교
동향교와 화개사를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화개산 쪽으로 1분 정도 들어가면 오래된 비석들이
옹기종기 모인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길로 가면 화개산과 화개사, 오른쪽으로 가면 교
동향교이다.

3거리에 무리를 지어 둥지를 튼 이들 비석은 총 40기로 '읍내리 비석군'이란 이름으로 살아가
고 있다. 이들은 읍내리 교동양조장 앞 비석거리에 있었는데, 1970년대에 교동도의 옛 역사를
정립한다는 뜻에서 옛 교동도의 관문인 남산포길로 옮겼다가 1991년 강화군과 교동향교 유림
들이 지금의 위치로 모두 집합시켰다.

비석 대부분이 교동도를 다스린 교동부사와 삼도통어사, 방어사(防禦使)의 선정비(善政碑)와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이다. 즉 그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인 것이다. 그들 중에 정말로 비
석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선정을 베풀고 큰 업적을 남긴 관리도 있겠으나 공덕이 쥐뿔도 없음
에도 강제로 세우게 한 것도 적지 않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비석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돈
을 뜯어가 자신의 배때기를 불린 관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비석의 주인공이 과분에 넘치는 선정비를 누리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곳의 역사를
조금씩 머금은 교동도의 소중한 일기장으로 그들을 통해 누가 언제 이곳을 다스리고 거쳐갔는
지를 귀뜀해준다.

조선 중기와 후기, 20세기 초반에 걸쳐 지어진 비석들로 그중 앞줄에 자리한 3기는 특이하게
가로로 누워있는데, 이들은 거사대(去思臺)라 불리는 비석이다.


▲  교동향교 홍살문

비석군에서 교동향교로 가다보면 향교의 정문인 홍살문이 마중을 한다. 홍살문은 붉은 피부로
이루어진 차가운 모습으로 궁궐과 관아, 향교, 왕릉 입구에 주로 세우는데 문 바로 옆에는 무
조건 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하마비(下馬碑)가 우두커니 서 있고, 그 옆에 주차장이 닦여져 있
다. 문 앞에 바리케이드 같은 것이 쳐져 있고, 차량 출입금지를 알리는 현대판 하마비가 곁에
서 있어 차를 타고 온 이들은 주차장에서 무조건 내려서 걸어가야 된다. 그러니 하마비의 '마
(馬)'만 달라졌을 뿐, 비석의 기능은 여전히 유효하다.


▲  지엄함이 여전한 하마비의 위엄

보통 하마비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쓰여 있으나 이곳은 '수령변장하마비(守
令邊將下馬碑)'라 쓰여 있다. 즉 수령과 변장, 그리고 그 밑은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홍살문과 하마비는 거의 빈껍데기가 되었으나 이곳 하마비의 위엄은 여전하
여 그 앞에서 차를 두고 걸어가야 된다.


▲  교동향교 외경

화개산 남쪽에 터를 닦은 교동향교는 고려 중기인 1127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원래는 화
개산 북쪽 자락에 있었다고 하며, 이 땅에 지어진 최초의 향교(鄕校)로 널리 알려져 있다.

향교란 나라에서 각 고을에 세운 중등교육기관으로 조선시대에는 서당을 졸업한 학생들이 진
학하여 공부를 했다.
1286년에 유학제거(儒學提擧)로 있던 회헌 안향(晦軒 安珦)이 몽골(원나라)에 갔다가 공자(孔
子)의 초상화를 들고 귀국했는데, 배를 타고 개경(開京, 개성)으로 오다가 개경 바로 밑에 자
리한 교동도에 잠시 들려 교동향교에 그 초상화를 봉안했다고 한다. 고려 제일의 국립 교육기
관으로 지금의 서울대와 같은 국자감(國子監)까지 제치고 지역 향교에 불과한 이곳에 가장 먼
저 공자상이 봉안될 정도라면 교동향교가 당시 꽤 잘나갔던 모양이다.
그 이후 각 고을에 공자와 맹자, 최치원(崔致遠) 등 중원대륙과 신라, 고려의 주요 유교 성현
(聖賢)의 위패를 봉안한 문묘(文廟)가 설치되었다. 그러니 이 땅 최초의 향교이자 유교 성현
을 봉안한 최초의 향교란 타이틀까지 지니게 되었다. 향교 문묘는 바로 대성전으로 이때부터
교육과 제사 2가지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1741년에 지부(知府) 조호신(趙虎臣)이 읍성 북쪽인 지금의 자리로 향교를 옮겼으며, 1966년
에 수리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대성전과 명륜당, 동/서무, 동/서재, 제기고, 내삼문,
외삼문 등의 건물이 있으며, 향교 바깥에는 성전약수란 유명한 약수가 있다. 향교 건물은 모
두 18세기 이후 것들로 고려의 흔적은 싹 사라졌으며, 안향이 가져왔다는 공자 초상화도 전설
속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지방의 중등교육을 담당하던 향교는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서서히 교육 기능을 잃
게 되며, 오로지 제사 기능만 남아 거의 빈껍데기가 되어버렸다.


▲  계단을 늘어뜨린 교동향교 외삼문(外三門)

향교는 조선시대에 전 고을에 설치되었다. 그러다보니 옛 고을 중심지에는 꼭 향교가 남아있
기 마련이다. 허나 향교는 고리타분한 유교의 공간이라 건물의 모습도 비슷비슷하고, 볼거리
가 풍부한 절과 달리 두 눈이 호강할만한 볼거리도 별로 없으며, 향교 상당수가 속세(俗世)에
폐쇄적인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어 내부 관람도 그리 쉽지가 않다. 또한 향교의 존재감도 너무
없어 나들이/답사 수요도 별로 없는 실정이다.

허나 교동향교만큼은 사정이 180도 다르다. 처음에는 관람객도 거의 없는 썰렁한 향교를 생각
했으나 정작 와보니 글쎄 관람객들로 북적거리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관람객이 많은 향교는
난생 처음이라 생소한 풍경에 그저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교동대교 개통으로 교동도 관광객의
발길이 늘어나 향교 또한 그 덕을 제대로 본 탓이지만 화개산, 교동읍성과 더불어 섬의 주요
명소이자 교동도를 소개하는 정보에도 교동향교가 크게 다뤄지고 있어 교동도에 왔다면 꼭 들
려야 되는 필수 명소로 등극을 했다.
또한 향교가 화개산 산길의 기점인 화개사와 매우 가깝고 교동읍성과 강화나들길이 지척에 있
어 위치도 좋다. 게다가 문화유산해설사도 머물고 있어 향교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고 있으니
교동도에 왔다면 1번 꼭 들려보도록 하자.

향교는 사방을 돌담으로 둘렀다. 남쪽에 바깥과 이어지는 외삼문을 냈는데, 문 앞에는 3줄로
이루어진 돌계단이 펼쳐져 있다. 외삼문을 이루는 3개의 문 가운데 오로지 동쪽 문만 열려있
어 그 문을 통해 향교로 들어서면 된다.


▲  교동향교 명륜당(明倫堂)

외삼문을 들어서면 바로 명륜당이 정면을 막고 선다. 명륜당은 공자왈~맹자왈~! 공부를 하던
교육 공간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교육 기능은 이제 없어졌으니 명륜
당 또한 한가로운 신세가 되어 섬돌에 신발이 가득했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 한다.

명륜당 좌우에는 향교 학생들의 숙소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다른 향교와 달리 특이하게도 '
ㄱ'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재는 향교 사무실로 쓰이고 있으며, 툇마루가 서재보다 넓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동재 옆에는 방을 따스하게 보듬던 온돌 연기를 내뿜으며 하늘을 긴장시키
던 굴뚝이 서 있는데, 그를 손질하면서 너무 시멘트로 떡칠을 한 점이 다소 아쉽다.

▲  서재(西齋)

▲  동재(東齋)

▲  무늬만 남은 동재 굴뚝

▲  굳게 닫힌 내삼문(內三門)


▲  명륜당 뒷쪽에 비뚤게 자리한 노룡암(老龍巖)

명륜당 뒷쪽에는 노룡암이라 불리는 조그만 돌덩어리가 기울어진 모습으로 서있다. 그의 피부
를 가만히 살펴보면 조그만 글씨들이 깨알같이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원래 축대에 쓰
인 돌로 교동고을 동헌터에 있던 것을 가져온 것이다. 돌의 상태상 반듯하게 세우기가 애매하
여 저리 비뚤어진 모습으로 세운 것 같다. 어차피 이 나라도 단단히 비뚤어져있으니 돌 하나
비뚤어지게 세운다고 문제될 것은 없다. 글씨만 알아보면 되니까 말이다.

노룡암은 교동고을 관아인 동헌(東軒) 북쪽 뜨락 층계 밑에 있었다. 그러니까 뜨락 석축의 일
원으로 있던 것이다. 층계 위에는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는데, 그중 오래된 소나무가 있고, 그
밑에 축대가 있었다. 1717년에 충무공 이순신의 5대손인 충민공(忠愍公) 이봉상(李鳳祥, 1676
~1728)이 그 축대에 늙은 용의 바위란 뜻에 '노룡암' 3자를 새겼는데, 1773년에 이봉상의 손
자인 이달해(李達海)가 이를 기리고자 석축 밑에 글을 새겼다.
1820년 통어사 이규서(李奎書)가 '호거암장군쇄풍(虎距巖將軍灑風)' 7자를 새겼는데, 이는 '
호거암장군이 풍기를 깨끗히 했다'는 뜻이며, 여기서 호거암장군은 이봉상이다. 1831년 봄에
석대로 쌓아있던 것을 1987년 교동향교로 옮겼다.

노룡암 뒷쪽 높은 곳에는 담장을 두른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으로 가려면 내삼문을 거쳐야 되
는데, 내삼문은 향사일(享祀日) 외에는 좀처럼 열리지 않으므로 제기고로 우회해서 들어가면
된다. 제기고는 말그대로 제사 도구를 간직한 창고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
다.


▲  제사 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  향교의 중심, 대성전(大成殿)

향교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향교의 중심 건물인 대성전이 자리해 있다. 남쪽을 바라보
고 있는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동이족 출신인 문선왕(文宣王) 공자
를 비롯해 증자(曾子), 안자(顔子), 맹자(孟子), 자사(子思) 등 초기 유교를 정립한 5명이 봉
안되어 있다.
청록색 피부를 지닌 대성전 문은 굳게 닫혀 있는데, 그 안에는 공자 등 5인의 위패와 위패를
간직한 상(床), 제사 도구 등이 들어있다. 그 앞뜨락 좌우에는 설총(薛聰)과 최치원, 정몽주,
이이(李珥) 등 신라와 고려, 조선의 유학자 20인을 봉안한 동무(東憮)와 서무(西憮)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들은 대성전의 보조 공간이다보니 대성전보다 볼품이 많이 떨어진다.

▲  한쪽 문이 열린 서무

▲  동무 (그 옆에 제기고와 명륜당으로
내려가는 문이 있다)


▲  향교 서쪽에 있는 성전약수(成殿藥水)

교동향교에 왔다면 꼭 맛봐야 되는 존재가 있다. 바로 대성전 서쪽 담너머에 있는 성전약수이
다. 이 땅에 많은 향교를 가보았지만 무려 약수터까지 갖춘 향교는 이곳이 처음이다.

성전약수는 교동도 제일의 약수로 위장병과 피부병, 아토피에 효험이 있다고 전한다. 게다가
향교 유생들이 이 약수 덕분에 과거에 많이 붙고 문성(文成)을 이룬 이가 많았다고 한다. 허
나 물은 평범한 맛을 지닌 약수로 특별한 것은 없으며, 과연 효험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향
교를 수식하는 오랜 명물이자 꿀단지로 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대성전 밑에서 물이 발
원하여 성전약수라 불리니 그야말로 향교 스타일의 약수터 이름이다.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148 (교동남로 229-49 ☎ 032-932-9457)
* 향교 관리소에 문화유산해설사가 있다. 근무시간은 9~18시(겨울은 17시)로 휴일에는 향교에
  늘 머물러 있으며, 아침 시간과 오후 늦은 시간, 그리고 평일에 왔을 경우 관리소를 찾거나
  위의 연락처로 연락을 하면 향교 해설을 들을 수 있다.


▲  가늘게 쏟아지는 성전약수

▲  향교에 왠 하트 모양이??
성전약수 주변에 돌을 모아서 쌓은 하트 모양의 조형물이 있다. 사랑이란 말을
꺼내면 당장이라도 회초리를 1대 맞을 것 같은 그런 공간에서 이런 뜻밖에
존재를 보게 될 줄이야..? 속세를 향한 교동향교의 수줍은 마음은 아닐까?

▲  서쪽에서 바라본 교동향교
향교 서쪽에는 성전약수와 화장실, 관리소, 화개사로 통하는 숲길이 있다.


 

♠  화개산 남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조그만 산사
교동도 화개사(華蓋寺)

▲  교동향교에서 화개사로 이어지는 숲길 (교동다을새길)

교동향교 서쪽에는 화개사로 통하는 울창한 숲길이 있다. 이 숲길은 도보길 유행에 따라 강화
군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강화나들길의 일원인 강화나들길 9코스(교동다을새길)의 일원이다.

교동도에는 강화나들길 9코스와 10코스 등 2개의 길이 닦여져 있는데, 9코스는 월선포에서 교
동향교~화개사~화개산 정상~석천당~대룡시장~남산포~교동읍성~동진포를 거쳐 다시 월선포로
돌아오는 16km의 코스로 화개산 주변을 1바퀴 돈다. 그리고 강화나들길 10코스(교동도 머르메
가는길)는 대룡리에서 난정저수지~수정산~금정굴~애기봉~죽산포~머르메~양갑리마을회관~미곡
처리장을 경유하여 대룡리로 돌아오는 17.2km의 코스로 교동도 서쪽을 돈다. 이들은 교동도의
명물만 골라서 짜놓은 알짜배기 탐방로라 나중에 꼭 거닐고 싶다.

교동향교에서 화개사로 가는 숲길은 선녀(仙女) 누님이 튀어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는 그림 같
은 흙길이다. 나무가 촘촘해 제아무리 뜨거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어림도 없다. 그 길을 2분
정도 가면 화개사로 오르는 포장길이 나타나며, 여기서 오르막길을 6분 오르면 교동도에서 가
장 오래된 절인 화개사가 빼꼼 모습을 비춘다.


▲  교동향교~화개사 숲길 (교동다을새길)

▲  조촐한 화개사 경내 (눈에 보이는 것이 거의 전부임)

화개산 남쪽 자락에 자리한 화개사는 숲에 감싸인 조그만 산사(山寺)이다. 서울 조계사(曹溪
寺)의 말사(末寺)로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화개산 산신도 모를 정도이나 고려 후기에 목은 이
색(牧隱 李穡, 1328~1396)이 이곳에서 독서를 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있어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신진사대부의 핵심인 이색이 찾았을 정도라면 지
금과는 달리 제법 이름이 있던 절임이 분명하다.

조선 후기까지 딱히 전해오는 사적(事蹟)은 없으나 1690년대에 이형상(李衡祥)이 지은 '강도
지(江都誌)'에 절 이름이 나와있고,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이 쓴 가람고(伽藍考)에 화정
사(火鼎寺)라는 이름으로 나와있어, 조선 중/후기에도 그런데로 법등(法燈)을 유지했던 모양
이다.
왜정 때는 전등사(傳燈寺)의 말사가 되었으며, 1915년 절이 붕괴된 것을 1928년에 정운(晶雲)
이 중건했다. 1937년 이후 재정 문제로 문을 닫은 적이 있었고, 1967년 화재로 무너진 것을
이듬해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과 요사(寮舍)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근래에 다시 지어진 탓에
고색의 내음은 진작에 말라버렸다. 지정문화재는 하나도 없으나 조선시대 승탑 1기가 있고,
200년 묵은 장대한 소나무가 서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조금이나마 속삭여준다.

화개산으로 오르는 기점의 하나로 강화나들길 9코스가 이곳을 지나가며, 정상까진 넉넉잡아
30분 정도 걸린다. 산 중턱에 위치하여 서해바다와 석모도가 바라보이며, '절간같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고적한 산사의 멋을 누릴 수 있다.


▲  화개사 승탑(僧塔)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초췌한 모습의 승탑(부도탑) 하나가 마중을 한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무척 초라해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로 겉모습과 달리 무척
값비싼 존재이다. 그러니 꼭 살펴보고 가자.
이 승탑은 언제 지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탑의 양식으로 보아 조선시대 것으로 여겨지며
, 동그란 탑신(塔身)과 지붕돌, 두툼히 솟은 머리장식이 전부인 간결한 모습이다. 탑 밑에는
돌과 흙으로 대충 네모나게 바닥돌을 닦았는데, 근래 닦여진 것이라 아마도 제자리는 아닌 듯
싶다.


▲  화개사에서 바라본 서해바다와 석모도

▲  대웅전 앞에 서 있는 소나무 - 강화군 보호수 4-9-73호

근래 지어진 여염집 모습의 대웅전 앞에는 자태가 아름다운 소나무가 웅장하게 서있다. 나이
가 약 210년 정도로 높이 14m, 둘레 1.6m의 휼륭한 덩치를 지녔는데 나무가 드리운 시원한 그
늘이 조그만 경내를 거의 커버하고 있어 휼륭한 정자나무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의 그늘 앞
에서는 여름 제국도 슬쩍 비켜간다.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489-1 (교동남로 229-9, ☎ 032-932-4140)


▲  문무정(文武井)터

화개사를 둘러보고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을 조금 오르면 문무정터가 나온다. 지금이야 외마
디 전설이 되어 바람결에 사라졌지만 이곳에는 원래 동쪽에 문정(文井), 서쪽에 무정(武井)
등 2개의 샘물이 있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에 따르면 문정에 물이 많으면 문관(文官)이 많이 배출되고, 무정에 물
이 많으면 무관(武官)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샘물의 물빛이 바다 건너
송가도(석모도 북부)까지 비추었는데, 이상하게도 그곳 부녀자들의 풍기가 문란해졌다고 한다
. 그래서 이를 해결하고자 절치부심하던 중, 노승(老僧)이 알려준 방법에 따라 소금으로 우물
을 메우니 비로소 진정이 되었다고 한다.
송가도 사람들은 그 노승이 너무 고마워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는데, 현재는 남아있지 않으
며, 우물은 나중에 하나로 합쳐졌다가 메워졌다. 이후 교동도에서 문관과 무관 배출이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과연 문무정이 교동도 사람들의 문/무과 급제에 크게 영향을 주었는지는
확인할 길은 없으나 앞서 교동향교 성전약수와 더불어 이곳 사람들이 입신양명을 기원하고 이
를 상징하던 곳으로 보면 될 듯 싶다.


▲  정상을 향한 열망 ~ 화개산 산길 (문무정 이후)

▲  돌로 수북한 화개산 돌너덜길

섬 사람들의 출세 욕심이 담긴 문무정을 지나 화개산 정상으로 향했다. 자연이 닦아놓은 느긋
한 산길이 계속 이어져 그리 힘들지는 않는데, 삼삼하게 우거진 나무 사이로 서해바다와 석모
도 등의 섬이 바라보인다.
분량상 본글은 여기서 끝. 화개산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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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둘레길2코스 순례길, 구천계곡 여름 나들이 ~~~ (수유동 분청사기가마터, 신익희선생묘, 가인 김병로묘, 단주 유림묘)

 


' 북한산 구천계곡, 순례길 나들이 '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 신익희 선생묘 주변)


▲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

▲  신익희 선생묘

▲  유림 선생묘


 

♠  북한산 구천계곡에 숨겨진 옛 분청사기 가마터
수유동(水踰洞) 분청사기 가마터 - 서울 지방기념물 36호

▲  밑에서 바라본 분청사기(粉靑沙器) 가마터

1년의 절반이 허무하게 저물고 나머지 절반이 막 시작되던 7월 첫 무렵, 북한산(삼각산) 구
천계곡 주변에 숨겨진 여러 명소와 숨바꼭질을 하였다.
북한산(北漢山)은 나의 즐겨찾기 뫼의 하나로 지금까지 수백 번 이상을 안겼으나 아직도 미
답처(未踏處)들이 적지 않다. 하여 미답지를 하나라도 더 지우고자 신익희 선생묘 서쪽 숲에
숨겨진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를 찾은 것인데, 그거 하나만 보기에는 무척 허전할 것 같아
서 주변에 있는 애국지사의 묘역 여럿을 후식으로 둘러보았다.

북한산 수유동과 우이동 산자락에는 20세기 초/중기에 활약했던 애국지사의 묘역이 많이 있
으나 정작 가본 곳은 손병희(孫秉熙) 선생묘 뿐이다. 암덩어리 같은 근/현대사에 관심이 거
의 없다보니 소중한 백신 같은 그들에게도 딱히 마음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아카데미하우스 종점(강북구 마을버스 01번 종점)에서 신익희 선생묘로 이어지는 길(4.19로
32길)을 가다가 그 묘역 입구에서 오른쪽(북쪽) 숲길로 조금 들어서 왼쪽(서쪽) 산길을 넘으
면 근래 천하에 공개된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가 활짝 마중을 한다. (이정표가 잘되어있어
찾기는 쉬움)


▲  윗쪽에서 바라본 분청사기 가마터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는 북한산(삼각산) 동남쪽 자락으로 구천계곡 바로 북쪽이다. 구천계
곡과 도선사(道詵寺) 밑인 우이동계곡 주변에 조선시대 가마터가 많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들
중의 지방문화재로 지정되고 이렇게 정비까지 받아 천하에 개방된 존재는 오로지 이곳이 유
일하다. 나머지는 세월을 원망하며 죄다 숲속에 묻혀있어 전문가가 아니면 찾기도 어렵다.

이곳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잠깐 등장했던 분청사기를 생산했던 가마터이다.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중기에 짧게 운영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서울(한양)과 아주 가까워 왕족과 귀
족들의 분청사기 수요를 충당하느라 가마터 굴뚝의 연기는 마를 날이 없었다. 이후 분청사기
의 인기가 하락하고 주변에 괜찮은 가마터들이 생겨나면서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15.6도의 경사를 지닌 무계단식 단실요<單室窯, 아궁이의 열이 경사지를 옆으로 지나면서 그
릇을 익힌 후,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구조>로 길이 19.8m, 최대 너비가 1.5m에 이르는 커다란
가마이다. 가마는 벽과 천장을 돌과 점토로 쌓아 다졌는데 가마 입구인 회구부(灰丘部)와 아
궁이, 연소실(燃燒室), 소성실(燒成室), 폐기장, 온돌 등이 확인되었다.
가마는 앞부분은 잘 남아있으나 뒷부분은 상당수 손상되어 붉게 탄 바닥만 확인되었다. 아궁
이는 타원형으로 길이 1.6m, 내폭 1.3~1.6m, 깊이 0.9m 크기이며, 연소실과 소성실 사이에는
높은 불턱이 있다. 소성실은 가늘고 길쭉한 모습으로 여러 자기편이 나왔으며 폐기장은 아궁
이 우측에서 1.5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온돌도 발견되었는데 길이 3.2m, 폭 2m
정도로 자연석을 이용해 조성되었으며, 가마가 문을 닫은 이후에 설치된 것으로 여겨진다.


▲  옆에서 바라본 분청사기 가마터

이곳에서는 여러 종류의 도기와 자기, 흑유자, 도침, 동전 등이 출토되었다. 도기류는 접시
와 발이 제일 많이 나왔고 잔, 배, 호, 매병 등도 조금씩 나왔으며 주요 유물로는 도기방상
씨편(도깨비 문양 비슷한 것), 청자상감용문매병편, '上'과 '德'이 새겨진 자기편, 동전 등
이 있다.
상감청자(象嵌靑瓷)에서 분청사기로 넘어가는 도자생산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유적으로 평
가되어 2011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했으며 2014년 서울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손질되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가마터는 보존을 위해 겉면에 산뜻하게 풀을 씌워놓았다. 하여 가마터 흔적은 저 안에 고스
란히 묻혀있다. 가마터 동쪽에는 조촐하게 쉼터를 닦아 쉴 구석을 마련해주었는데, 이곳의
존재감이 아직은 미약하여 인적은 드물다. 하여 조촐하게 사색을 즐기기에는 아주 그만이다.
가마터 남쪽으로도 산길이 나있으며 그 길은 자연관찰로로 구천계곡을 거쳐 아카데미하우스
로 이어진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127-1


▲  신익희 선생묘 입구
저 숲길의 끝에 해공 신익희 선생의 유택(幽宅)이 둥지를 틀었다.


 

♠  구천계곡 주변에서 만난 독립 애국지사의 묘역들

▲  신익희 선생 묘 직전 계단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왔던 길로 돌아나가 신익희 선생의 묘역을 찾았다. 우리 귀에 너무나도
숙한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 1894~1956), 그는 누구일까?

신익희는 평산신씨 가문으로 경기도 광주 출신이다. 판서를 지낸 신단(申壇)의 6남 중 막내
로 자는 여구(汝耉), 호는 해공이며, 중원대륙에서 사용했던 이명(異名)은 왕해공(王海公).
왕방오(王邦午)이다.
어린 시절 한학을 익히고, 1908년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졸업한 뒤 동경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들어갔다. 유학 시절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學友會)를 조직하여 총무, 회장 등
을 역임했으며 학지광(學之光)이란 잡지의 발간을 담당하여 학생운동을 하였다.
1913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고향 광주에 동명강습소(東明講習所)를 열었으며, 중
동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부터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가 되었다.

1918년 송진우(宋鎭禹), 최남선(崔南善) 등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했으며, 1919년에는 해
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지도자와의 연락을 담당하여 만주, 북경, 상해 등을 오갔다. 그러
던 중 문창범(文昌範), 홍범도(洪範圖)와 연락을 취하고자 만주로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
고 돌아오던 중, 평양에서 3.1운동을 목격하고 서둘러 서울로 돌아와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그래서 제자인 강기덕(康基德), 한창환(韓昌桓) 등과 연락해 3월 5일 남대문역(서울역)에서
만세시위를 추진하니 그것이 제2차 독립만세시위이다. 이 시위는 3.1운동의 지방 확산에 크
게 기여했으나 그로 인해 왜정의 수배를 받게 되자 급히 상해로 망명했다.


▲  신익희 선생 묘 - 등록문화재 520호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헌정 제정 기초위원으로 활약했으며 내무
차장, 외무차장, 국무원비서장, 외무총장 대리, 문교부장 등을 역임했다. 또한 중원대륙 세
력과 합작해 왜를 토벌할 계획을 세우고 중국국민당에 가담하여 중장(中將)이 되었으며, 조
선과 중원의 청년 500명을 모아 유격대인 분용대(奮勇隊)를 조직, 군사훈련을 시키며 본토
진입을 꾀했으나 신익희를 돕던 호경익(胡景翼)이 1924년 사망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하여 장개석(蔣介石)을 찾아가 한,만 국경에 왜군을 토벌해야 된다며 협조를 요청했으나 뜻
을 이루지 못했다.
1929년 한국혁명당을 창당하고 철혈단(鐵血團)을 조직해 무장 독립투쟁을 준비했으며 '우리
의 길'이란 기관지를 발행하여 중원대륙에 살던 동포들에게 민족정신과 독립의지를 심어주었
다.

그는 단일정당으로 민족의 힘을 모아 왜를 때려잡아야 된다고 역설하며 1932년에 한국독립당
, 조선혁명당, 의열단(義烈團), 한국광복동지회 대표와 협의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
對日戰線統一同盟)이란 동맹 단체를 탄생시켰다. 거기서 그는 김규식(金奎植), 박건웅(朴建
雄)과 함께 상무위원으로 활동했다.
1934년 자신의 한국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을 합쳐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창당했으며, 1935
년 7월, 남경 금릉(金陵)대학에서 민족통일전선의 원칙 아래 신한독립당(윤기섭), 의열단<김
원봉(金元鳳)>, 조선혁명당(최동오), 한국독립당<조소앙(趙素昻)>, 대한독립당(김규식) 등 5
당 통합을 이끌어내 민족혁명당이 창당되었다. 허나 1937년 1월 제2차 전당대회로 비(非) 의
열단 계열의 인사들이 탈당하면서 세력이 위축되고 말았다.

1937년 여름, 왜가 중원대륙 침공을 본격화한 이른바 중일전쟁이 터지자 그는 조선민족전선
연맹 결성에 참여했고, 중원대륙 곳곳을 돌면서 대일항전을 지도했다. 그리고 1938년 9월에
조선청년전위동맹에 가담했으며, 1939년 8월 27일 김구와 김원봉의 주도로 사천성(四川省)
기강에서 광복전선과 민족전선 양측의 7당 통합회의가 열리자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허나 그 7당 통합도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조선의용대 병력이 있는 낙양(洛陽)으로 가서 김성숙(金星淑)의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연
합하여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의 결성을 주도했으며, 이들을 지도하면서 1941년 한중합작으로
한중문화협회를 조직하여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1943년 4월, 대한민국 잠행관제에 의해 설치된 선전부의 선전위원회에서 조소앙, 엄항섭, 유
림(柳林) 등과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의 선전계획의 수립과 실행에 나섰으며, 1944년 5월 임시
정부 연립내각 성립 때 내무부장에 선임되어 활약하다가 중경(重慶)에서 광복을 맞이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신익희 선생 묘

1945년 12월 2일 임시정부 요인의 제2차 환국(還國) 때 서울로 돌아왔으며 모스크바 3상 회
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김구(金九)를 도와 반탁운동에 나섰다. 허나 그와는 정치 노
선이 달라 정치공작대, 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해 이승만에 접근했다.

1946년 경복궁 서쪽에 국민대(현재 정릉동에 있음)를 설립했고 자유신문을 발행하여 민족자
주성을 고취시켰다. 미군정 시절에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을 지냈고 1948년 정부수립으로
제헌국회에 들어갔으며 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뒤를 이어 국회의장이 되었다.
1947년에는 지청천(池靑天)의 대동청년단과 합작해 대한국민당을 결성하여 대표최고위원이
되었으며, 1950년 한국민주당과 합당했다. 그리고 이후 개편된 민주국민당의 위원장으로 뽑
혔다.
3선 국회의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나날이 개판을 치며 심지어 그 유
명한 사사오입(四捨五入) 사건까지 일으키자 자유당 타도를 외치며 1955년 장면(張勉), 조병
옥(趙炳玉)과 함께 민주당을 창당했다.

1956년 대선 때 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여 정권교체를 노렸다. 이미 민심도 그에게 돌아선
상태라 승산은 넘치도록 충분했으나 5월 5일 유세차 열차를 타고 전주로 가던 중, 이리(익산
) 정도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 선거 유세로 너무 과로했던 것이 화근이 된 것
이다. 하여 모두가 그리던 정권교체는 물거품이 되었으며, 대신 장면이 이기붕을 누르고 부
통령에 당선되었다.
허나 4년 뒤, 1960년 대선에 조병옥 박사가 출마했으나 그마저 유세 중에 위암으로 사망하여
정권교체의 기회를 또 잃고 말았다. <하여간 이 나라는 오래 살아야 될 사람이 빨리 죽고,
빨리 없어져야 될 것들이 오래 삼, 그래서 발전이 안됨>
1956년 5월 23일,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져 북한산(삼각산) 자락에 안장되었으며 1962년 대
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추서되었다.

그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천하 제일의 싸움꾼으로 널리 알려진 시라소니(이성순)가 그의
경호를 맡았다. 그가 허무하게 죽자 장면 박사의 경호를 맡았는데, 그가 경호하는 동안에는
자유당의 끄나풀인 이정재의 동대문 패거리들이 감히 접근을 못했다.

▲  신익희묘 봉분과 하얀 피부의 상석,
향로석, 장명등

▲  망주석(望柱石)에 새겨진 세호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신익희 묘역은 호석을 두룬 커다란 봉분과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 문인석(文人石) 1쌍, 장명등, 묘비(묘표)로 이루어져 있으며 묘역으로 인도하는 계단 끝
에는 호랑이상 1쌍을 배치하여 악의 기운을 경계한다. 무덤을 지키는 석물들은 파리가 미끄
러질 정도로 매끄럽고 하얀 피부를 드러내고 있으며 고색은 아직 여물지 못했으나 장차 20세
기 중반 무덤 양식의 하나로 교과서에 절찬리에 소개될 것이다.

그는 1945년 12월 귀국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나에게 쓸만한 집이 1칸 없다고 집 1채를 마
련하라고 (주변 사람들이) 권고하나 내가 망명 때 항일독립이 평생의 소원이었고 이제 반 조
각이나마 독립된 조국에서 국사를 맡게 되었으니 더 바랄게 있겠는가'

* 신익희 선생묘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 127-1, 산 74-3


▲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호랑이상
저 패기 돋는 이빨로 친일매국노와 그 쓰레기 같은 후손들, 그리고 이 나라의
적폐들을 싹 물어뜯어주렴.

▲  평산 신하균(平山 申河均) 선생묘

신익희 선생묘 북쪽에는 그의 장남인 신하균(1918~1975) 선생묘가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그는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으로 일찌감치 중원대륙으로 넘어가 상해(상하이) 광화대학 상
과를 졸업했다. 이후 중국국민정부에서 감찰원위임관과 국민정부군의 소교복무원(소령급 문
관), 중앙은행 과원조장, 중앙신탁국조장 등을 지냈으며,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들어가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에 입대해 전지공작, 초모공작 훈련 등 독립운동을 진행하여
정위(正尉)가 되었다.

해방 이후, 늦게 귀국하여 한국연건기업 사장을 지내다가 1955년에는 한국외대 강사를 하기
도 했으며 아버지가 대통령선거 유세 중, 사망하자 정계로 시선을 돌려 경기도 광주 보궐 선
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도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4.19이후 민주당의 구파(舊派)인 신민당에 들어갔으며,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민
정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3선의원이 되었다.

그는 서예에도 뛰어나 1958년 귀국기념서예전에서 이 땅 최초로 중원대륙 고대의 해서체(楷
書體)인 학보자비체(學寶子碑體)를 소개했으며, 여러 차례의 서예전을 열었다.
1950년대 중반 종로구 인사동의 민주당 중앙당사 간판을 신익희가 썼는데 1960년대 중반 관
훈동(寬訓洞)의 민중당 중앙당사 간판은 그 아들인 신하균이 썼으니 이는 보통 인연이 아니
다.

1977년 독립운동 공적이 인정되어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아비도 그렇고 그 아들도 그렇
고 독립운동에 적지 않은 공을 세우고 해방 이후 정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으니 가히 애국
자의 집안이라 할만하다. 처음에는 신익희의 독립운동 경력이 크게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
나 그의 묘역을 거쳐간 이후 조사해보니 생각 외로 경력이 화려했다.
더러운 친일매국노들로 악취가 심했던 그 시절(지금도 크게 다를 것은 없음 ㅠ), 이런 인물
이 있었던 것이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으며, 만약 그가 10년만 더 살았다면 이승만과 자
유당을 단죄하고 이 나라를 크게 부흥시켰을 것이다. 허나 그 기회를 하늘이 앗아가 버렸고
그 휴유증은 지금까지도 여전하니 과연 하늘에게 정의와 양심이 있는지 묻고 싶다.

신하균 묘역은 화려한 그의 아비 무덤과 달리 네모나게 호석이 둘러진 작은 봉분과 상석, 향
로석, 묘비가 전부인 단출한 모습이다.


▲  김병로 선생묘로 인도하는 산길
신익희선생묘에서 운가사, 진달래능선 쪽으로 4~5분 정도 오르면
김병로 선생묘가 쓱 모습을 비춘다.

▲  김병로 선생묘 밑에 자리한 묘비
귀부와 이수(螭首)를 갖춘 당당한 모습으로 묘역 동남쪽에 자리해 있어
신도비(神道碑)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  가인 김병로(街人 金炳魯) 선생묘

대쪽 판사로 유명한 가인 김병로(1887~1964)는 전북 순창에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
낸 김상희(金相熙)의 1남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일찍 여위었으나 할머니가 집안에 독서당(讀書堂)을 만들어 한문 공부
를 시켰으며, 1899년에 불과 12세에 나이로 4살 연상인 연일정씨 정교원의 딸에게 장가를 들
었다. 그가 외아들이고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집안에서 일찍 혼인을 시킨 것이다.

1902년 당대 거유(巨儒)였던 전우(田愚)의 문하가 되었다가 1904년에 처음 신학문을 접했다.
하여 친구 4~5명과 일신학교(日新學校)란 임시 학교를 세웠는데 직접 강사를 초청하여 영어,
산수, 세계사를 익혔다.
1906년 순창을 찾은 면암 최익현(崔益鉉)의 열변을 듣고 크게 감동을 먹어 5~6명의 포수(砲
手)와 함께 그의 의병부대에 들어갔다. 허나 최익현이 의병을 해산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
왔으며, 광양의 백낙구, 담양의 기우만, 정읍의 유화숙 등과 의병투쟁을 모의하다가 채상순
과 함께 김동신의 의병부대에 합류, 7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순창(淳昌)의 왜인 관청을 공격
하기도 했다.
허나 왜가 '호남 대토벌작전'을 펼쳐 의병을 때려잡자 무력 투쟁을 그만두고 고정주가 설립
한 창흥의숙(昌興義塾)에 들어가 다시 신학문을 접했으며, 1910년 왜열도 동경으로 유학을
가 일본대학 전문부 법과 청강생이 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그는 법조인으로 길을 잡게 된다.

허나 생활고로 공부가 어려웠고 때마침 경술국치(庚戌國恥)의 비보까지 전해듣자 충격이 너
무 커 서둘러 귀국했다. 폐결핵으로 1년 동안 쉬다가 1911년 가을, 다시 동경으로 유학을 갔
으며, 명치대학 법과 3학년에 편입하여 1913년 졸업했다.
귀국하여 가산을 정리해 다시 유학길에 올랐는데 이번에는 명치대학과 중앙대학에서 공동운
영하는 법률고등연구과에서 공부를 했다. 이때 '재동경 조선인유학생 학우회' 간사부장과 '
금연회' 운영을 맡기도 했으며 1914년 창간된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스승인 야마우치(山內)의 권유로 왜열도 변호사 시험에 응시했으나 왜인(倭人) 외에는 응시
할 수 없다는 내각회의 결정으로 결국 응시하지 못했다.


▲  남쪽에서 바라본 가인 김병로 선생묘

1915년 법률고등연구과 수료증을 받고 귀국하여 경성전수학교 조교수로 일했으며 1919년 부
산지방법원 밀양지원 판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그만두고 변호사 자격을 얻어 서대문 자택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이후 그는 독립운동 관련자들을 위한 무료 변호에 많이 나섰다. 1923년 이인(李仁), 허헌 등
과 '형사변호공동연구회'를 설립했으며 일반 형사사건에서 나온 수임료로 애국지사의 무료변
론은 물론 그들의 가족까지 챙겨주었다.
그가 맡은 애국지사들의 사건만 보합단 사건(1921년), 김상옥(金相玉) 의거와 제2차 의열단(
義烈團) 사건(1923년), 1926년 6.10만세운동,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과 고려혁명당 사건, 정
의부(正義府) 사건(1927년), 1930년 광주학생독립운동, 제3차 간도공산당 사건(1931년), 수
양동우회 사건(1937년) 등 실로 방대하다. 또한 안재홍(安在鴻), 안창호(安昌浩) 등의 민족
지도자들의 변호도 맡아 왜정의 온갖 악법으로부터 그들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또한 농민과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을 도와주어 1928년 전북 옥구군(沃溝郡)에서 소작쟁의
를 벌인 농민들과 1929년 집단파업을 한 함경남도 원산부두 노동자들과 형평사(衡平社) 조합
원들을 변호했다. 또한 1929년 함경남도 갑산에서 일어난 화전민 박해사건과 1930년 함경남
도 단천에서 농민 살상사건이 터졌을 때 직접 현장을 찾아 조사를 벌여 대책을 강구했다.

또한 교육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여 1920년에 조선교육협회 창립 발기인, 1922년 보성전문학
교 상임이사, 1924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 산하 고등보통학교 기성회 발기인을 맡았으
며 김성수와 함께 민립대학 설립을 위한 회금보관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4년 동아일보사 간부들이 친일파들의 협박을 받은 '식도원' 사건이 터지자 이를 규탄하는
민중대회 발기준비위원을 맡았으며, 1927년 전조선변호사대회에서 신문지법과 출판법 제정을
촉구하는 등 언론의 자유를 지키고자 했다. 또한 1923년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참여했고, 1931
년 충무공유적보존운동기금 관리위원을 맡았으며, 신간회(新幹會)에도 가입해 중앙집행위원
장을 맡았다.
그러다보니 왜정의 훼방이 적지 않아 그가 연사로 나서는 집회가 금지되기도 했고 1931년에
는 6개월간 변호사 정직 처분을 받기도 했다. 하여 잠시 소나기를 피하고자 1934년 경기도
양주군으로 넘어가 잠시 운둔생활을 하였다.
1945년 왜정이 민족지도자들을 살해할 것이라는 괴소문이 돌자 급히 가평(加平)으로 피신했
고 거기서 해방을 맞이했다.


▲  김병로 선생묘의 동그란 봉분과 상석, 향로석

해방이 되자 원세훈, 백관수와 고려민주당을 세우고 이를 확대해 조선민족당을 창당했다. 여
운형(呂運亨)의 건준을 찾아가 좌우합작을 제의하기도 했고, 미군정 아놀드 군정장관이 건준
과 조선인민공화국을 매도하자 이를 비판하는 논평을 내는 등, 좌우세력을 모두 포용하는 자
세를 보였다.
1946년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학생들을 직접 변호해주었으며, 미군정청 사법부
법전 기초위원회 위원과 사법부장 등을 하다가, 1947년 사법부 내 6인헌법기초위원회 위원으
로 활동하며 이 땅의 사법제도의 기초를 닦았다. 1948년 8월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초대 대법
원장이 되었으며,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장, 법조협회 회장을 맡았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관장을 맡아 친일매국노 단죄에 굳은 의지
를 보였다. 친일파에 호의적이던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법 개정을 요청했으나 이를 거부하며
친일파 처벌을 추진했으나 결국 이승만 패거리의 농간으로 무산되고 만다.
1950년 골수염 치료로 왼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으며, 1957년 12월, 70세의 나이로
대법원장에서 정년퇴임했다.

은퇴한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의 계속되는 불의와 독재를 비판했고 동아일보에 '부정선거는
천추의 한이 될 것'이라며 이승만에게 경고하기도 했다. 1960년 대선에 출마한 조병옥이 위
암으로 사망하자 장면 부통령 후보를 중심으로 단결할 것을 기자회견을 통해 호소했다.
4.19혁명이 일어나자 재야 정치인들과 사태수습을 위하여 대정부건의안을 발표했고, 이승만
이 물러나자 과도정부의 개편을 요구했다. 또한 부정선거 관련자와 부정축재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역설해 부정부패를 때려잡을 것을 촉구했다.
1960년 민의원선거로 고향인 순창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며, 1961년 5.16이 터지자 박정희
(朴正熙)의 민정 참여를 반대하고 군정의 종식을 촉구했다.

1963년 윤보선(尹潽善), 이인 등과 단일야당 결성을 추진하다가 여의치 않자 직접 민정당(民
正黨)을 창당해 최고위원을 맡았다. 이후에도 야권통합을 계속 추진했으나 그리 순탄치 못했
으며 민정당과 국민의당 대표최고의원에서 물러났다.
바로 그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 1964년 1월 13일, 인현동 자택에서 77세의 나이
로 별세했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루어 북한산 자락에 고이 안장되었다.

대쪽 같은 성품과 지조를 평생 지키고 나라를 위해 동분서주했던 인물로 천하 법조인의 귀감
으로 추앙을 받는다. 허나 오늘날 그와 같은 법조인이 거의 없다싶이하니 그도 지하에서 통
곡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묘역은 호석을 두룬 봉분과 상석, 향로석, 장명등 2기로 이루어진 조촐한 모습이다. 신
익희 묘역보다 외진 곳이라 찾는 이는 별로 없으나 워낙 짙은 숲속에 감싸여있어 잠시 속세(
俗世)를 잊기에는 좋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86-1


▲  단주 유림묘 입구에 세워진 묘비와 호랑이석

김병로 선생묘에서 북한산둘레길의 일원인 순례길(북한산둘레길 2구간)로 나와 우이동 방향
으로 조금 가면 왼쪽 구천계곡 건너에 훤칠한 비석이 눈에 보일 것이다. 그가 유림 묘비로
묘비 밑에는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호랑이상 2기가 혹시 모를 나쁜 기운을 경계하고 있다.
이 땅은 이상하게도 선한 기운보다 악한 기운이 더 판을 치니 저들의 양 어깨가 꽤 무거울
것이다.
그들의 검문을 거쳐 왼쪽 산길로 들어서면 단주 유림 선생 묘가 모습을 드러낸다.


▲  유림묘 입구 (순례길에서 바라본 모습)

유림(柳林, 1894~1961)은 경북 안동 예안면에서 중소 지주인 유이흠(柳頤欽)의 3남으로 태어
났다. <어머니는 김성옥(金性玉)> 전주유씨 집안으로 호는 단주(旦洲), 월파(月波)이며, 본
명은 유화영(柳華永), 중원대륙에서 사용한 이름은 유림, 고상진(高尙眞)이다.

앞서 신익희, 김병로와 마찬가지로 제일 먼저 한학을 배우다가 경상북도 최초의 신식 중등학
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에서 신학문을 익혔다. 그는 거기서 인생의 스승이 되는 김동삼(金
東三), 유인식을 만나게 된다.
1910년 어둠의 시절이 오자 겨우 16세의 나이로 손을 깨물어 거기서 뿜어져 나온 뜨거운 피
로 '충군애국(忠君愛國)' 4자의 혈서(血書)를 쓰며 독립의지를 불태웠다. 하여 대구와 안동
을 오가며 계몽운동과 비밀결사 조직 활동을 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안동 임동면
편항 장터에서 열린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협동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위를 이끔)

하지만 3.1운동이 왜정의 고약한 탄압으로 더 이상 효과가 없자 가산을 정리한 뒤 가족을 데
리고 만주로 넘어갔다. 우선 만주 봉천성 요중현에 머물 곳을 마련해 가족들을 그곳에 안착
시키고 홀로 남만주 유하현 삼원포로 이동해 미리 와있던 김동삼과 이상룡, 이회영(李會榮)
등이 닦아놓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합류했다. 이때 군자금 마련을 위해 고향에 남아있
던 나머지 재산도 싹 처분한 것으로 여겨진다.
1920년 8월 상해로 이동하여 거기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멤버로 활동하다가 1921년 북경
으로 가서 신채호(申菜浩), 김창숙(金昌淑) 등을 만났다. 그때 신채호가 주관하던 잡지 '천
고(天鼓)'의 발행을 도왔으며 거기서 그의 아나키즘<anarchism,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을
접하고 아나키스트로 노선을 잡는다.


▲  단주 유림 선생묘
'나의 이상은 강제권력을 배격하고 전 민족, 나가서는 전 인류가 최대한의
민주주의하에서 다같이 노동하고 다같이 자유롭게 사상하는 세계를
창조하는데 있다' (1945년 12월 귀국직후 기자회견에서)
 

외국어 수학을 위해 1922년 성도(成都)로 이동하여 성도사범대학에 들어갔다. 허나 학비 해
결이 큰 문제라 중원대륙 정부의 관비생(官費生)이 되고자 이름을 '고상진'으로 바꾸며 중원
사람 행세를 했다. 다행히 그게 잘 통하여 별무리 없이 영문과를 마쳤으며 프랑스로 유학을
가고자 프랑스어도 수강하는 등, 상상 이상의 다양한 외국어를 익혔다. 심지어 '에스페란토'
까지 익혔다고 하니 그야말로 외국어의 신이 따로 없다.

1926년 학교를 졸업하고 간도 길림(吉林)으로 이동하여 김종진과 이을규를 만났다. 그들은
중동선(中東線) 해림역으로 이동하여 김좌진 장군를 만났는데, 그는 김좌진과 민족주의와 공
산주의 사상을 두고 여러 번 격론을 벌이며 양 사상의 갈등을 해결해보고자 했으나 워낙 팽
팽하여 설득을 포기하고 길림 화전현으로 돌아왔다.
이후 본토(국내)의 아나키즘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던 중, 1929년 11월 평양에서 '전
조선 흑색사회주의 운동자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곳으로 달려가 최갑룡, 임중학
등과 함께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했다. 허나 왜정의 탄압으로 대회는 무산되었
고 그는 왜군에 체포되었다. 허나 딱히 혐의가 발견되지 않아 봉천으로 추방되었다.

1929년 가산을 털어 의성학원(義誠學院, 봉천중학)을 세웠다. 중원대륙 각급 학교 입학을 위
한 예과 과정으로 400명의 학생을 수용했으며 학생들의 중원대륙 학교 입학을 알선했고 직접
영어도 가르치면서 평화롭게 지냈다. 허나 그는 1931년 10월 왜군에게 '조선공산무정부주의
연맹'을 조직하고 활동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는 '원산흑색사건'이란 명목으로 최갑룡, 조중복 등과 함께 함흥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었
으며, 1933년 3월 24일, 5년형을 받았다. 그들은 이에 모두 항소를 했고 서울로 이송되어 경
성복심법원과 경성고등법원을 거쳤으나 별 변화없이 원심대로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
고를 치루고 1937년 10월 8일 출옥했다.

이후 만주로 넘어가 재기를 노렸으나 뜻대로 안되자 북경과 천진에서 한중 항일연합군 조직
에 진력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42년 10월,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을 찾았고 임시정부가 치
룬 경상도구 의원선거회에 나서 김원봉, 김상덕 등 6명이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임시정부를 다시 찾은 것은 '독립을 달성하고 이 나라에 아름다운 낙원을 창조하려면 우선
민족을 대표할만한 어떤 근거가 있어야 된다'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외교위원회 연구위원, 선전위원회 선전위원, 건국강령수개위원회 위원 등
을 지냈으며,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의 대표로 주석단의 1명으로 추대되어 활동했다. 또한
미국와 영국이 한국을 국제 보호 밑에 두기로 했다는 보도를 듣고 중경에서 대회를 열어 한
국의 완전한 독립과 외국의 내정 간섭 반대를 외쳤다.


▲  유림묘 봉분과 상석, 향로석
봉분에 무궁화 무늬들이 꽂혀있는데 처음에는 진짜 꽃인 줄 알았으나
가까이서 보니 그냥 문양이었다. 애국지사 묘역에 걸맞게
무궁화 무늬를 심은 센스가 돋보인다.


해방이 되자 1945년 12월 주한 미군사령부가 보낸 비행기를 타고 임시정부 요인들과 귀국했
다. 허나 날씨가 좋지 못하여 서울비행장(여의도)에 착륙하지 못하고 군산에 착륙해 거기서
육로편으로 상경했다.
1946년 임시정부의 법통기관인 비상국민회의 부의장이 되었으며, 세계 아나키즘 최초의 아나
키즘 이념정당인 독립노동당(獨立勞農黨)을 창당해 당수로 취임했다. 그리고 노농신문을 발
간하여 노농대중의 계몽과 권익 보호에 힘썼다.
1948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아나키스트 대회'가 열렸는데, 유림은 한국 대표로 초청
을 받았으나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참석하지 못했다.

대한국민의회 의장이 되었으나 국민의회 기능 상실로 다시 '통일독립운동자중앙협의회'를 결
성하고 대표간사가 되었으며, 1952년 7월 임시수도인 부산(釜山)에서 일어난 '발췌개헌안'에
항의하여 신익희, 장면 등과 '한국민주주의자총연맹'을 세웠다.
국회의원 선거에 여러 번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며, 1961년 4월 1일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
났다. 그해 4월 7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루어졌으며 그때 장례위원장인
성균관대 초대총장인 김창숙은 '그대 있어 이 나라가 무겁더니 그대 떠나니 이 나라가 비었
구나'
추도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무덤은 호석을 갖춘 동그란 봉분과 상석, 향로석, 장명등, 망주석 1쌍으로 이루어져 있
다. 특이한 것은 봉분에 무궁화 무늬가 잔뜩 심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곳을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9시 직전에 이르렀다. 아무리 여름이라 해가 길어졌다고 해
도 그건 어디까지나 햇님의 퇴근시간이 늦춰졌을 뿐이다. 달의 사제인 땅꺼미가 모락모락 피
어올라 햇님의 세상을 훔치려고 들고, 무더위에 적지 않게 돌아다녔더니 피로감과 시장기가
달덩이만큼이나 크게 솟아오른다. 이럴 때는 욕심을 부리고 속세로 내려가 저녁을 먹는 것이
진리이다.

이렇게 하여 오후에 짧게 누린 북한산 미답지 나들이는 4곳의 미답처를 싹 지우는 큰 성과를
누리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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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5월 2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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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구의 북쪽 지붕이자 서울 도심의 상큼한 뒷동산, 봉화산 둘러보기 ~~ (숙선옹주묘, 아차산봉수대터, 봉화산도당, 충익공 신경진묘역)

 


' 서울의 상큼한 뒷동산, 봉화산 봄 나들이 '


▲  봉화산 아차산봉수대


 

봄이 보름달처럼 차오르던 5월의 첫 무렵, 친한 후배와 중랑구(中浪區) 봉화산을 찾았다.
둥근 해가 높이 걸린 오후 2시, 태릉입구역(6,7호선)에서 그를 만나 금강산도 식후경(食
後景)이란 크고 아름다운 말에 따라 부근 식당에서 감자탕으로 늦은 점심을 들고 봉화산
의 품으로 들어선다.


 

♠  조선 태종의 후궁으로 조용히 살다 간 여인 ~
숙선옹주 안씨묘역(淑善翁主 安氏墓域)

봉화산 북서쪽 끝으머리에는 숙선옹주 안씨묘역(선빈안씨묘역)이 작게 둥지를 틀고 있다. 너
무 없는 듯 자리하여 아는 이들이 거의 없을 정도인데, 묘역을 알리는 어떠한 이정표도 없어
무심히 지나치기가 쉽다. 다만 근래 닦여진 묘역 북쪽 도로가 '숙선옹주로'를 칭하면서 조금
은 그의 존재를 눈치챌 수 있게 되었다. (나도 숙선옹주로 덕분에 묘역의 존재를 눈치챘음)
묘역은 4차선 숙선옹주로 길가에 자리한 소강회관 뒷쪽 산자락에 서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
는데, 도시와 자연이 팽팽히 경계를 이루는 지점이다. 이 묘역을 경계로 앞쪽은 인간들의 진
흙탕 세상, 뒷쪽은 대자연의 싱그러운 공간이다.

묘역의 주인공인 숙선옹주(?~1468) 안씨는 태종(太宗)의 수많은 후궁 중 하나로 검교한성윤(
檢校漢城尹) 안의(安義)의 딸이다. 1422년에 태종의 8번째 아들인 익령군(益寧君, 1422~1464)
을 낳았고, 태종의 8번째 서녀(庶女)인 소숙옹주(昭淑翁主, ?~1456)와 태종의 10번째 서녀인
경신옹주(敬愼翁主, ?~?), 애기 때 요절한 옹주 1명 등 모두 1남 3녀를 두었다.
옹주들의 탄생 시기를 알 수 있다면 숙선옹주의 나이와 후궁이 된 시기를 대충 짐작해 볼 수
있겠으나 아쉽게도 단서가 부족하다. 다만 태종이 1422년에 55세의 나이로 승하했으므로 3명
의 옹주는 익령군보다 먼저 태어났음이 100% 확실하다. 1년에 1명씩 생산한다고 하면 태종이
세종(世宗)에게 왕위를 넘기고 뒤로 물러앉은 1418년 이후에 후궁으로 들어갔을 가능성도 크
다. 그런 케이스로 연산군묘(燕山君墓) 밑에 잠든 태종의 마지막 후궁, 의정궁주(義貞宮主)
조씨가 있다.

1421년 세종은 안씨를 숙선옹주로 책봉, 그의 아비인 안의에게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제
수했으며, 궁궐 뒷전에서 조용히 살다가 1468년에 약 60대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400
여 년이 흐른 고종(高宗) 때에 이르러 선빈(善嬪)안씨로 추증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그런 옹주(翁主)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통
옹주하면 왕의 후궁이 낳은 딸을 일컫는다. 허나 고려 때는 왕자의 부인을 지칭했으며, 제왕
의 공주와 후궁은 보통 궁주(宮主)라 불렸다. 그러다가 조선으로 바뀌면서 왕비 소생을 공주,
후궁 소생을 옹주로 구분했다. 그리고 후궁은 빈(嬪, 정1품), 귀인(貴人, 종1품), 소의(昭儀.
정2품), 숙의(淑儀. 종2품), 소용(昭容, 정3품), 숙용(淑容, 종3품). 소원(昭媛. 정4품). 숙
원(淑媛, 종4품) 등으로 세분화되었다.
 
숙선옹주도 그렇고 그의 아들 익령군도 그렇고 그저 평범한 수준으로 인생을 마무리했다. 비
록 가늘게 이름은 남겼어도 딱히 두드러지는 것이 없으니 역사는 그들의 대한 기록에 매우 인
색했다. 하여 그들의 대한 정보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  정면에서 바라본 숙선옹주 묘역

▲  옆에서 본 숙선옹주묘 봉분

숙선옹주묘역은 옹주가 잠든 동그란 봉분(封墳)을 비롯하여 묘비 2기, 상석(床石), 향로석(香
爐石), 문인석(文人石) 2기, 장명등(長明燈) 2기, 양석(羊石) 2기, 망주석(望柱石) 2기 등 정
말 있을 것은 다 갖추고 있다. 왠만한 사대부(士大夫)의 묘역과 비슷한 크기로 원래는 지금보
다 약간 북쪽에 누워있었는데, 산자락을 밀고 신작로(숙선옹주로)를 내면서 그 라인에 있던
묘역은 개발의 칼질에 현 자리로 밀려났다.
그때 후손들(숙선옹주 소생인 익령군의 후손)이 묘역을 이전/정비하면서 묘비와 장명등, 문인
석 등 기존 석물 외에 망주석과 양석, 장명등, 비석, 상석, 향로석을 새로 달고 봉분 밑에 무
려 12지신상을 갖춘 호석(護石)까지 둘렀다. (원래 호석은 없었음) 그리고 묘역 밑의 익령군
의 시호인 소강(昭鋼)을 딴 소강회관을 만들어 묘역을 옆구리에 두고 관리한다.

후손들의 지극정성도 좋지만 오래된 무덤에 하얀 피부의 반질반질한 석물을 잔뜩 심어 옛것과
새것이 어색한 동거를 하게 되었고, 봉분까지 깔끔하게 손질하면서 장장 500년이 넘은 무덤을
졸지에 50년 된 무덤으로 만들어버렸다.

▲  묘역 우측 석물

▲  묘역 좌측 석물

묘역을 이루는 석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홀(忽)을 쥐어든 문인석(文人石) 1쌍과 조그만
장명등, 묘비 정도이다. 숙선옹주가 1468년에 세상을 떴으니 무덤과 석물은 적어도 1469년까
지는 닦여졌을 것이다. 그 장대한 세월의 때가 아낌없이 입혀져 다들 월남에서 돌아온 시커먼
김상병처럼 까무잡잡한 피부를 자랑한다.

▲  고색의 기운이 가득한 묘비

▲  근래에 새로 닦은 묘비

무덤의 주인을 알리는 묘비는 무려 2기가 있는데, 이상하게 봉분 바로 앞에 두지를 않고 모두
봉분 좌우에 우두커니 세워 두었다. 묘를 이장하면서 새 묘비를 만들고자 기존 묘비를 옆으로
옮긴 것 같은데, 새 묘비 역시 봉분 앞에 두지 않고 좌측에 비켜 있다.
우측 묘비는 15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바닥돌 위에 비석을 얹힌 단출한 모습이며, 고색의
기운이 역력하고 세월이 달아준 주름이 많다. 그에 비해 젊은 나이의 좌측 묘비는 꽤 말쑥한
모습이다.


▲  묘역 구석에 자리한 오래된 장명등 (지금은 묘역 앞 제자리에 있음)

묘역 구석에는 고색이 매우 짙은 키 작은 장명등(석등)이 서 있다. 이 석등은 원래 무덤 앞에
있었으나 새 장명등을 달면서 한참이나 후배인 그에게 자리를 내주고 뒷전으로 물러나 한가로
운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가 근래에 후배를 밀어내고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금 장명등의 역할
을 수행하고 있다.

조선 초기 왕족과 귀족묘의 장명등의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그는 높이가 1m도 남짓으로 지
금까지 보아온 장명등 가운데 가장 작다.
비록 새옷을 많이 입어 묵은 티가 줄긴 했지만 무덤 초창기에 조성된 석등과 문인석, 묘비 등
이 별다른 상처 없이 잘 남아있어 15세기 무덤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무덤은 그렇더라
도 석등 정도는 지방문화재로 삼아도 손색은 없어보인다. 참고로 이곳은 태조의 계비인 신덕
왕후(新德王后) 강씨의 정릉(貞陵)과 태종의 능인 헌릉(獻陵), 연산군묘 밑에 자리한 의정궁
주묘 다음으로 오래된 왕족 묘역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묵1동 120-3 (공릉로2라길 48)


▲  뒷쪽에서 바라본 숙선옹주묘역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이 소강회관)


 

♠  봉화산 둘러보기

▲  봉화산 산길 (묵동다목적체육관 옆)

숙선옹주묘역에서 숙선옹주로를 따라 신내동(新內洞) 방면으로 조금 가면 묵동다목적 체육관
이 나온다. 체육관 동쪽에는 봉화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푸른 산길이 나있는데, 산 전체가 근
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어 산길이 잘 정비되어 있다. 게다가 산 허리에 요즘 유행하는 둘레길
까지 걸쳐놓아 봉화산 나들이의 재미를 더해준다.

봉화산(烽火山)은 중랑구 북부 한복판에 홀로 솟은 야트막한 뫼로 키는 160,1m이다. 묵동(墨
洞)과 중화동(中花洞), 상봉동(上鳳洞), 신내동에 넓게 걸쳐있으며, 동남쪽의 망우리고개와
아차산(峨嵯山) 산줄기가 있는 것을 제외하면 주변에 마땅한 언덕이 없어 시야가 확 트여 있
다. 하여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꽤 일품이며, 북쪽으로 수락산(水落山)과 도봉산(道峯山),
서쪽은 북한산(삼각산)과 서울 도심, 남쪽은 광진구와 강남 지역, 동쪽은 아차산 산줄기와 중
랑구 일대가 훤히 바라보인다.
그러다보니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시되어 고구려(高句麗)는
정상 남쪽에 보루(堡壘)를 설치하여 주변을 살폈다. 이 보루는 고구려가 사패산에서 수락산을
거쳐 아차산 남쪽까지 보루를 줄줄이 달아놓은 보루 라인의 중간 경유지로 도봉산과 아차산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으며, 이들 보루(약 20여 개가 발견됨)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고 전한다.
(보루 둘레 약 268m, 내부 둘레 약 4,190㎡, 정상 남쪽에 일부 남아있으나 확인하기 어려움)

조선 때는 봉화산 정상에 봉수대를 설치했는데, 함경도(咸鏡道)에서 오는 봉화(烽火)를 한이
산(汗伊山, 남양주시 진접읍)에서 받아 남산(南山)으로 넘겼다. 산의 이름인 봉화도 바로 이
봉화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별칭으로 봉우재라 불리기도 했다. (봉수대 이름은 아차산봉수대)

봉화산 정상에는 봉수대와 도당(都堂)이 있으며, 매년 음력 삼짓날에 도당제를 지낸다. 정상
남쪽에는 천하를 굽어보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고, 묵동과 중화동, 상봉동, 신내동에서 정상
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다. 어디서 출발하던 정상까지는 길어봐야 20~30
분 정도면 닿으며, 정상을 찍고 다른 쪽으로 내려가도 길게 잡아봐야 1시간 이내이다. 게다가
경사도 거의 느긋하여 산의 품이 꽤 포근하다.
산은 작지만 봉화산이 내린 약수터가 즐비해 도처에서 물을 뿜어내고 있고, 소나무가 많아 솔
내음이 그윽하다. 게다가 중랑구의 오랜 특산물인 먹골배가 노릇노릇 익어가는 배나무 농장들
이 북쪽 산자락에 펼쳐져 있다.
중랑구청 뒷쪽에는 '봉화산 신내근린공원'이 넓게 닦여져 있으며, 산 북동쪽에는 근래 옹기테
마공원이 닦여져 신선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  저 산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

▲  묵동 봉화산 성황당(城隍堂)

산길을 10여 분 정도 오르면 '묵동 봉화산 성황당'이라 불리는 돌탑과 제단이 나온다. 이곳은
묵동 주민들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성황제(城隍祭)를 올리는 곳으로 거의 동그랗게 석
단(石壇)을 쌓고 서쪽에 제물을 올리는 상석(床石)을 두었으며, 석단 중앙에는 성황당의 역할
을 하는 돌탑이 두툼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그리고 돌탑 남쪽에는 2005년에 세운 검은 피
부의 '묵동 봉화산 성황당' 비석이 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동네 사람들의 손길과 정성이 여전한지 성황당 주변은 정비가 잘되어 있으며, 지금도 성황제
를 지내 마을의 옛 전통을 지키고 있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에 아직까지
동제(洞祭)와 성황제를 지내는 곳이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인데, (성황제나 산신제 등 마을
제사를 지내는 곳이 아직까지 많이 남아있음) 서울이 20세기부터 사람이 산 것도 아니고 구석
기시대(舊石器時代)부터 살던 터전이라 그런 민간신앙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봉화산 주변도 원래 농사를 짓거나 먹골배를 재배하던 시골로 그들 모두 동제를 지내는 공간
을 갖추고 있었으나 개발의 칼질이 요란하게 거쳐가면서 시골 마을은 모두 사라지고 전통 풍
습도 사라지거나 토박이 주민들만 조용히 지내는 정도로 크게 축소되었다. 그래도 이렇게 남
아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  울창한 숲을 가르며 정상까지 이어진 산길

▲  중간에서 만난 숲속 쉼터 (비봉각 직전)

▲  비봉각(飛鳳閣) - 봉화산도당굿 보존위원회

느긋하게 펼쳐진 산길을 계속 오르면 정상 북쪽에 경쾌한 처마선을 드러낸 3칸짜리 기와집이
마중을 한다. 이 기와집은 '비봉각'이란 현판을 달고 있는데, 겉으로 보면 1층처럼 보이지만
경사를 이용한 2층 건물이다.
그는 2009년 2월에 지어진 아주 따끈따끈한 한옥으로 '봉화산 도당굿 보존위원회'에서 관리하
고 있으며, 2층은 도당굿 보존위원회 사무실과 도당굿을 준비하거나 가르치는 방, 그리고 마
루가 있다. 1층에는 창고와 식당이 있으며, 파전과 동동주, 라면, 간식류를 팔고 있다.

▲  옆에서 바라본 비봉각

▲  봉화산 도당(都堂)과 대문

비봉각 옆에는 봉화산 도당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도당으로 가는 유일한 길로 아차산봉수
대 곁에 도당이 자리해 있지만 도당 주변을 누런색 담장으로 꽁꽁 두르면서 봉수대에서는 뻔
히 바라보임에도 접근할 수가 없다. 봉수대와 도당 서로를 완전 차단한 것이다. (도당이 봉수
대터 일부를 차지하고 있음)

봉화산 도당은 봉화산 정상에 자리해 있는데, 봉화산 산신할머니를 봉안하고 있다. 산신할머
니 외에도 산할머니, 불사할머니, 미륵할머니로도 불리며 보통은 산신으로 통한다. 이렇게 산
신을 봉안하고 있다면 그냥 속편하게 산신각(山神閣)을 칭하면 되겠지만 특이하게도 조선시대
조정의 최고 기관인 의정부(議政府)의 다른 명칭, 도당(都堂)을 칭하고 있다. (한자도 같음)
도당은 부군당(府君堂)과 더불어 서울 지역의 오래된 당집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도당에
서 지내는 제사를 도당제(都堂祭), '도당굿'이라 부르며, 이곳 도당에서 지내는 제사를 봉화
산 도당굿이라 부른다. 산신을 봉안한 공간이다보니 도당굿 외에도 산신제도 같이 지낸다.

봉화산 도당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세종실록 29년(1446년) 3월 4일 부분에 '봉
수대 상단에 가옥을 만들고 병기(兵器)와 아침 저녁으로 공급되는 물과 불을 담는데 필요한
기물을 보관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건물이 도당으로 전환되었다는 설이 있다.
도당은 그 시대에 맞는 건물 스타일로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치면서 원형을 많이 잃었는데, 구
한말 이후로 아차산봉수대가 은근슬쩍 사라지면서 봉수대의 빈터까지 적지 않게 차지하고 있
다. 그러다가 1992년 여름, 화재로 소실된 것을 붉은 벽돌과 시멘트로 새로 지었다. 

이 도당은 400~500년 동안 봉화산 주변 주민들(묵동, 상봉동, 중화동, 신내동)이 마을의 안녕
과 풍년을 기원하던 오랜 성지로 이곳을 통해 서로의 결속과 대동의식을 고취시켰다. 즉 주변
마을 사람들은 봉화산을 구심점으로 뭉쳤던 것이다.
도당굿은 매년 음력 3월 3일(삼짓날)에 지내고 있는데, 처음에는 이들 동네에서 번갈아 지냈
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묵동이 손을 때자, 나머지 신내동, 상봉동, 중화동에서 30여 년 간
번갈아 가면서 제를 지냈다. 허나 시간이 지나고 봉화산 주변에 개발의 칼질이 그어지면서 토
박이들은 줄어들고 그로 인해 도당굿이 나날이 퇴색해가자 2000년부터 중랑문화원에서 '봉화
산 도당제 보존위원회'를 결성하여 직접 도당굿을 챙기고 있다. 그러다가 2005년 1월 '봉화산
도당굿
'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무형문화재 34호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봉수대에서 바라본 봉화산 도당

도당굿은 비록 때가 맞지 않아 구경하진 못했지만 오랜 내력에 걸맞게 평소에도 도당을 찾아
치성을 올리는 아낙네들이 어느 정도 있는 모양이다. 마침 대문이 열려있어서 도당까지 접근
할 수가 있었는데, 도당에는 아줌마 신도 2명이 있었다. 그중 1명은 기도를 하고 있었고, 다
른 1명은 청소를 하고 있었다.

살짝 살펴본 도당 중앙에는 조그만 산신할매상이 빨간 방석에 앉아있었다. 옷은 순 하얀색의
장삼으로 머리에 고깔을 쓰고 있어 마치 승무(僧舞)를 벌이는 승려 같다. 그의 얼굴은 뽀송뽀
송한 하얀 피부로 산신에 걸맞지 않게 귀여움이 적지 않게 묻어나 있고, 그 옆에는 산신의 비
서격인 작은 동자상이 있다. 뒷쪽에는 산신과 관련된 산과 소나무가 그려진 그림이 걸려있는
데, 그림 아래쪽은 산신상과 방석에 가려져 있으나 아마도 산신과 동자가 그려져 있지 않을까
싶다. 그들이 있어야 비로소 산신도를 이루기 때문이다.
산신상이 앳된 것을 보면 근래에 다시 만든 듯 싶다. 초창기 산신상이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이건 정말 국가 민속문화재로 삼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옛것은 진
작에 사라진 모양이다.

산신상을 막 사진에 담으려고 하니 청소하던 아줌마가 이제 문을 닫을 것이니 나가라고 그런
다. 그래서 군소리 내지 않고 대문을 나가니 바로 대문을 굳게 봉해버렸다.


▲  봉화산 도당의 주인장, 산신할머니상

봉화산 도당굿은 굿 하루 전날에 당주가 찾아와 직접 도당굿에 필요한 제물을 점검하며, 바로
다음날(삼짓날) 도당과 아래 공터에 마련된 제단에 제물이 차려진다.
굿 진행 순서는 '거리부정'을 시작으로 주당물림, 앉은 부정, 불사할머니거리, 가망청배, 진
적, 본향, 상산, 별상, 신장, 대감, 산제석, 창부, 군웅, 용신, 대잡이 등이며, 2005년 도당
굿에서는 진적에 앞서 유교식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무녀(巫女)는 도당 안에 들어가 앉아 부
정을 친 후, 봉화산 할머니를 모시는 불사굿을 한다. 당 안에서 청배한 후, 마당에 놓인 물동
이를 타고 공수를 주며, 불사굿이 끝나면 나머지 굿은 도당 밑 비봉각 앞에 차려진 가설 굿청
에서 한다.
군웅굿에서는 소머리 사실을 세우고 그것이 쓰러지는 방향을 주시하는데, 특정 마을 방향으로
쓰러지면 그해 좋지 않다고 믿었다. 대는 참나무를 사용하여 굿청을 1바퀴 돌고 서낭당에 놓
는다.
온갖 잡귀를 풀어 먹이는 뒷전을 끝으로 도당굿을 마무리하며, 보통 아침부터 초저녁까지 하
루 종일 펼쳐진다. 또한 예전에는 음력 6월 초하룻날도 소를 잡아서 치성을 올렸으나 이제는
도당굿만 지낸다.
도당굿 지정 무당은 신위행(1939년생 여자), 지정 악사는 김광수(1945년생 남자)로 이들은 봉
화산 도당굿 기능보유자이며, 굿은 신들린 무당을 불러서 하고 악사(樂士)는 피리, 대금, 해
금을 담당한다.


▲  아차산 봉수대터 - 서울 지방기념물 15호

도당 바로 옆에는 복원된 아차산봉수대가 자리해 있다. 도당과 더불어 봉화산의 정상을 누리
고 있는데, 이상한 것은 봉수대 이름이 봉화산도 아니고 '아차산봉수대'를 칭하고 있다는 것
이다.

이 봉수대는 두만강(豆滿江)에 있는 함경도 경흥(慶興)에서 시작하여 서울 남산까지 이어지는
조선 봉수로의 1번 노선으로 그 노선의 끝이 바로 이곳이다. 바로 직전 남양주 한이산(汗伊山
)에서 봉수를 받아 조선 봉수대의 중심인 남산 봉수대로 넘겼으며, 아차산봉수대로 인하여 이
산은 봉화산 또는 봉우재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활발하게 봉화를 피우던 이곳은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년)으로 봉수제도가 폐지되자 철저하
게 버려졌다. 이후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자연과 사람들의 괴롭힘으로 봉수대는 어느 세
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졌고, 봉화산 도당이 그의 빈 자리를 둥지로 삼았다.
아차산 봉수대가 얼마나 완벽하게 잊혀졌던지 그 위치마저 잃어버렸다. 해방 이후 아차산 봉
수대 자리를 그 이름에 따라 광장동 아차산 능선에 있는 것으로 여겼으나 정작 아차산에서는
봉수대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조선 후기에 제작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등의
지도에 봉화산을 아차산으로 표기하고 있어서 비로소 아차산 봉수대의 위치를 파악하게 되었
고 그로 인해 아차산의 영역이 봉화산까지 이르렀음을 깨닫게 되었다.

1994년 11월 서울 정도(定都) 600주년을 기념하고자 완전히 쓰러진 아차산 봉수대를 그럴싸하
게 복원했는데 애초 5개의 봉수가 있었으나 1개만 재현했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티는 아예 여
물지도 않았고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피부가 너무 반질반질하다. 그래서 문화재청 지정명칭
도 아차산봉수대가 아닌 '아차산봉수대터'이다. 끝에 '터'를 붙여 '터'임을 강조한 것이다.

아차산봉수대가 있는 봉화산은 동남쪽 아차산 산줄기를 제외하면 주변이 죄다 평지라 봉수대
위치로는 아주 좋다. 여기서 봉수를 피면 약 10km 떨어진 남산 봉수대에서 쉽게 확인이 가능
했으며, 눈이나 비가 내리는 경우에는 봉수지기가 직접 남산으로 달려가 상황을 알렸다.

▲  북쪽 밑에서 바라본 아차산봉수대

▲  봉수대의 뒷통수


▲  봉화를 피우던 봉수대
이제는 봉화를 피울 일이 없으니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은 은퇴자 신세이다.
허나 그의 쓸쓸한 체면도 살려줄 겸, 봉화 체험을 벌여보는 것은 어떨까?
어차피 1994년에 복원된 봉수대이니 그리 손해는 없을 것이다.

▲  봉수대 창
동쪽으로 난 창을 통해 봉화를 피웠다. 봉화 연기는 봉수 꼭대기로 모락모락
피어올라 하늘을 긴장시키고 남산 봉수대를 바쁘게 만든다. 특히 두만강
너머 애들이 난을 일으키면 더욱 그렇다.

▲  아차산봉수대에서 바라본 정상 남쪽

봉수대 남쪽에는 쉼터와 조망대가 있다. 남쪽을 바라보고 선 조망대에 올라서면 가까이는 망
우동과 상봉동, 면목동 지역을 비롯해 아차산 산줄기, 동대문구 동부, 광진구, 성동구, 멀리
강남을 품은 대모산(大母山)과 구룡산(九龍山), 우면산(牛眠山) 산줄기까지 훤히 시야에 비친
다.


▲  속세를 향해 고개를 내민 봉화산 정상 조망대

▲  정상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중랑구와 광진구, 성동구 지역)
멀리 대모산, 구룡산, 우면산 산줄기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봉화산 정상에서 상봉동으로 내려가는 소나무 산길

정상이란 자리는 꿀이긴 해도 한편으로는 독성도 적지 않아 오래 머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이다. 하여 적당히 있다가 내려오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그렇게 정상에서의 볼일을 마치고 상봉동 보현정사 방향으로 내려갔다. 이 길은 소나무가 무
성하여 그들이 베푼 솔내음에 속세에서 오염된 후각이 말끔히 정화되는 기분이며, 산길 주변
에는 조그만 바위들이 진을 치고 있어, 오로지 흙길로 이루어진 묵동다목적체육관 기점 산길
보다 덜 차분한 모습이다.


▲  내려가면서 바라본 중랑구 지역
아파트로 거의 도배가 된 신내동(신내택지지구), 그 너머로 망우동과
면목동, 아차산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  상봉동 보현정사 입구

정상에서 15분 정도 내려가니 보현정사(普賢精舍)란 조그만 절이 나온다. 이 절은 20세기 중
반 이후에 지어진 현대 사찰로 역사가 매우 짧고 소장 문화유산이 없는 절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항아리 겉돌 듯 짧막하게 둘러보고 나왔다. 여기서 2~3분 정도 내려가면 중랑구청 서
쪽에 자리한 신내12단지이다.

* 봉화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묵동, 신내동, 상봉동, 중화동
* 아차산봉수대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묵동 산46-19


 

♠  신립의 아들로 조선 중기에 활약했던 무인, 충익공 신경진 묘역
(忠翼公 申景禛 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5호

봉화산을 둘러보고 아직 일몰까지는 여유가 넘쳐서 여기서 멀지 않은 망우동 용마공원으로 이
동했다. 용마공원은 용마산(龍馬山, 348m) 북쪽 자락에 둥지를 튼 공원으로 그 서쪽에 충익공
신경진을 비롯한 그의 평산신씨 묘역이 숨겨져 있다. 그중에서도 신경진 묘역과 신도비는 그
묘역의 갑(甲)이자 상징과 같은 존재로 따로 지방문화재의 특별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신경진 묘역은 묘와 신도비로 이루어져 있는데, 옛날에는 호랑이가 담배를 물고 나타나도 이
상할 것이 없는 깊은 산자락이었다. 그러다가 서울이 나날이 팽창하면서 면목동과 망우동 지
역이 개발되어 묘역 서쪽과 북쪽, 남쪽까지 주거지가 들어찼고, 동쪽으로 가늘게 용마산 산줄
기를 붙잡고 있었으나, 그 동쪽 마저 도로를 내고 주차장을 닦으면서 도로 속에 갇힌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묘역의 주인공인 신경진(申景禛, 1575~1643)은 고려 개국 공신 신숭겸(申崇謙)을 시조로 하는
평산신씨 집안으로 임진왜란 초기 충주 탄금대(단월역) 전투를 거하게 말아먹고 사망한 신립(
申砬, 1546~1592)의 아들이다. 자는 군수(君受)로 서울 출신이며, 전사한 아비의 후광으로 선
전관(宣傳官)에 기용되었다.
오위도총부도사(五衛都摠部都事)로 전보되어 무과에 급제했으며, 태안군수와 담양부사를 거쳐
부산진 첨사(僉使)가 되었다. 그는 왜열도를 장악한 도쿠가와 막부와의 화의를 반대하며 그들
이 보낸 사신을 접대하지 않고 내쫓았는데, 그 일로 체임(녹봉을 당분간 받지 못함)이 되기도
했으며, 이후 함경도 갑산(甲山)부사가 되었고, 함경남도 병마우후(咸鏡南道 兵馬虞候)를 지
내던 중, 체찰사 이항복(李恒福)의 요청으로 경원부사와 벽동군수를 지내 함경도 변방을 관리
했다.

1608년 광해군(光海君)이 왕위에 올라 여진족의 후금(後金)과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 정
책을 펼치자 이에 쓸데없이 불만을 품고 관직을 접고 쉬다가 1620년 광해군에게 반감을 품은
김류(金瑬),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등과 반란을 모의, 그와 인척 관계에 있는 얼떨떨한
능양군(綾陽君, 인조)을 왕위에 세우기로 했다.
그렇게 기회를 엿보다가 1622년 이귀가 평산부사가 되자 그 중군(中軍)이 되기를 자원하여 반
란 준비를 꾀했으나, 계획이 누설되어 효성령별장(曉星嶺別將)으로 쫓겨나면서 이듬해 자행된
인조반정(1623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반정 이후 인조의 명으로 공조참의(工曹參判).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었고, 이어 병조참판(
兵曹參判)이 되어 훈련도감(訓鍊都監), 호위청(扈衛廳). 포도청(捕盜廳) 대장을 겸해 왕실을
호위했다. 또한 반정 공신에 대한 논공행상을 벌이면서 제일 먼저 반정계획을 세운 공로로 이
름도 허벌나게 긴 '분충찬모입 기명륜정사 일등공신(奮忠贊模立 紀明倫靖社 一等功臣)'에 녹
훈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

1624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이 뚜껑이 뒤집혀 난을 일으키자 인조와 서인 패거
리들은 충남 공주(公州)로 줄행랑을 쳤다. 이때 신경진은 훈련대장으로 어가를 호위했고, 난
이 평정되자 이괄이 추대했던 선조의 10번째 아들 흥안군(興安君)을 멋대로 쳐죽여 대간의 탄
핵을 받기도 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터지자 왕을 강화도로 호종했고 이듬해 평성
부원군(坪城府院君)으로 승진했다.

그렇게 출세가도를 달리던 신경진은 자신의 공과 지위를 과시하며 남의 집터 수천 칸을 빼앗
는 등, 영 좋지 않은 행동을 보였으며, 그로 인해 언관의 탄핵을 받았다. 1635년 목릉(穆陵)
과 혜릉(惠陵)의 봉심관(奉審官)이 되었으나 능 보수를 소홀히 하여 파직당했다가 다시 복직
되어 형조판서와 훈련대장을 겸했다. 그리고 이듬해 1636년에는 병조판서까지 겸하게 되었으
나 병을 이유로 사양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터지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급하게 줄행랑을 친 인조를 받들며
청나라군에 대항했다. 허나 청군이 산성을 포위한 채, 소규모의 도발만 벌이며 조선군의 식량
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니 인조는 결국 배겨나지 못하고 45일만에 문을 열고 항복했다.

1637년 이후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최명길의 추천으로 우의정이 되어 훈련도감제조를 겸
했는데 이때 호란 이후 민심수습책을 논의하고 지방 수령 임명에 신중을 기할 것을 건의했다.
1638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오면서 좌의정이 되었으며, 최명길과 의논해 승려 독보(獨步)
를 명나라에 파견, 청나라에 항복하게 된 이유를 소상히 설명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조
선의 명나라를 향한 꼴사나운 사대주의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1641년에 다시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면서 인질로 잡혀있던 김상헌(金尙憲) 등을 옹호했으며,
1642년 청나라의 요구로 최명길이 파직되자 그 뒤를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허나 얼마 가지
않아서 병으로 사퇴했고, 이듬해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10일도 안되어 병사했다.

신경진은 그의 아비를 닮아 무예가 뛰어났다. 그래서 훈련도감, 호위청 등의 친병(親兵) 관리
업무를 담당하면서 왕의 호위를 맡았다. 또한 인조반정을 처음부터 계획하고 주도하여 인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인조 시절에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영의정까지 꿰고 찬
것이다.
그는 외교 활동에도 소질이 있어 청나라에 여러 번 사신으로 가면서 청나라의 과도한 내정 간
섭을 줄이게 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으며,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훈서(勳西)와 청서(淸西)로
분열되어 훈서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자신이 무신임을 내세워 간여하기를 꺼렸다. 또한 송시
열 등의 사림을 천거하면서 그들의 환심을 얻었다.

그의 시호는 충익(忠翼)으로 1651년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그의 은혜를 받았던 송시열이
직접 찬한 내용이 신경진 신도비에 전하고 있다.


▲  신경진 신도비(神道碑)

▲  옆에서 본 신도비

▲  신도비의 뒷모습

신경진 묘역의 백미는 바로 신도비가 아닐까 싶다. 처음에 묘역이 아닌 신도비만 지방문화재
로 지정될 만큼 아주 괜찮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신도비는 보통 신도(神道)로 통한다는 무덤 동남쪽에 세우기 마련이나 이곳은 특이하게 서쪽
에 비석을 두었다. 아마도 신경준묘의 신도는 서쪽이었던 모양이다. 비석 높이는 3.68m로 특
히 귀부(龜趺)의 몸집이 상당해 더욱 장대하게 다가온다.
땅바닥에는 바닥돌과 기단석을 차례대로 깔고, 그 위에 거북 모양의 귀부를 두었다. 그의 얼
굴을 보면 마치 성이 난 듯, 무엇인가를 뿜어낼 듯한 기세 같으며, 입에는 동그란 무언가를
물고 있으니 아마도 여의주가 아닐까 싶다. 앞다리는 바짝 웅크려 앉아있는 모습이며 등짝에
는 세월의 검은 때가 가득 입혀진 거북 등껍질이 새겨져 있다. 뒷쪽에는 뒷다리와 두꺼운 꼬
랑지가 서쪽으로 말려져 있는데, 그 모습이 생동적이고 귀여워 진짜 거북의 꼬랑지 같다.

귀부 위에는 빗돌을 세워 신경진의 생애를 다루었고, 꼭대기에 정교하게 처리된 용머리 장식
인 이수(螭首)를 두었다. 신도비 비문은 송시열이 지었고, 박태유(朴泰維)가 글씨를 썼으며,
머리글인 두전(頭篆)은 이정영(李正英)이 썼다.

비석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에는 커다란 거북받침돌 덕에 '거북비'라 불리웠는데, 귀부가 지나
치게 커서 전체적인 비례는 좀 떨어진다. 허나 귀부와 이수의 조각이 매우 뛰어나 조선 중기
신도비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건강을 위해 비석 주위로 난간을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그도 그럴 것이 신도비 주변이 황당하게도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
이라 차들이 자칫 바퀴를 잘못 굴릴 경우 비석의 안전을 장담하지 못한다.


▲  신경진 묘역

신도비 동쪽 언덕에는 신경진 묘역이 자리를 닦았다. 묘역과 신도비 사이에는 주차장이 닦여
져 있는데, 묘역 주변은 철책을 둘러 속인(俗人)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허나 철책 바깥에서
도 보일 것은 다 보이니 굳이 개구멍을 찾거나 철책을 넘어갈 필요는 없다. 그냥 이렇게 보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신경진 묘역은 호석을 두른 동그란 봉분(封墳)을 비롯하여 묘비,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 조그만 동자석(童子石) 1쌍, 망주석(望柱石) 1쌍, 문인석(文人石) 1쌍으로 이루어진 이 땅
에 흔한 사대부(士大夫) 묘역 스타일로 주변이 나무로 무성하다. 특히 동자상을 상석 주변에
깔고 있어 조선 중기부터 등장하는 새로운 무덤 양식을 보여준다.

묘역 동쪽 산자락에는 신경준의 선조와 후손들 무덤 30여 기가 흩어져 있다. 신경준묘역을 비
롯한 이들 묘역을 덩어리로 묶어 평산신씨 묘역이라 부르는데, 신말평(申末平, 1452~1509)과
그의 아들인 신상(申鏛, 1480~1530), 신경준의 손자 신여철(申汝哲, 1634~1701) 등이 묻혀있
으며, 그중 신상은 신도비도 갖추고 있다.
조선 초부터 후기까지 조성된 묘역으로 조선 초/중/후기 무덤 양식을 고루고루 살펴볼 수 있
으며, 묘역 보호를 위해 철책을 꽁꽁 두른 탓에 접근하지는 못했다. 어딘가 숨겨진 개구멍이
있을 듯 싶지만 그렇게 무리를 해서까지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오로지 신경준묘와 신도비
만 염두에 두었고, 그들을 보았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미련없이 선을 긋고 자리를 정리했다.

신경진 묘역을 끝으로 5월 초, 봉화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충익공 신경진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산 69-1 (망우로70길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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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 산사 나들이 ~ 비봉능선 밑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금선사 (목정굴)

 


' 봄맞이 산사 나들이, 북한산 금선사 '

▲  금선사 목정굴 수월관음보살좌상


 

♠  금선사(金仙寺) 입문 (목정굴)

▲  목정굴 입구

봄이 한참 익어가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일행들과 북한산(삼각산) 금선사를 찾았다. 비봉과
사모바위를 간직한 비봉능선을 오르면서 그 길목에 자리한 금선사를 오랜만에 들리게 되었는
데, 비봉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목정굴을 알리는 표석이 마중을 나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어느 길로 가든 금선사로 이어지나 나는 목정굴 코스를 선호
한다. 그만큼 목정굴은 금선사의 상징으로 그가 없는 금선사는 갈비가 없는 갈비탕과 다름이
없다. (비봉능선으로 바로 가고자 한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됨)


▲  문짝이 없는 무당문(無堂門)

목정굴 방면으로 길을 잡으면 잠시 내리막길이 나타나면서 봄가뭄에 영혼까지 털린 말라버린
계곡이 나온다. 계곡에 액체가 좀 있어야 무거운 번뇌를 잠시나마 흘려보낼 수 있을텐데, 그
럴 물도 없으니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그런 계곡을 건너면 다시 오르막길이 펼쳐지면서 문짝
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무당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문은 2008년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 이름은 무무문(無無門)이다. '무무'란 불법(佛法)의 깊
은 진리를 깨닫는데 한계가 없다는 뜻으로 일주문이 없던 시절에는 나름 일주문의 역할도 하
였으며, 대자연의 넓은 마음이 담긴 듯, 문짝도 담장도 없는 그냥 문의 형태만 취하고 있다.


▲  커다란 바위에 조성된 목정굴

목정굴로 인도하는 계단의 끝에 이르면 3면이 바위로 막힌 막다른 곳이 나온다. 만약 전쟁에
서 이런 곳으로 내몰려 적의 공격을 받으면 그야말로 아작나기 좋은 지형으로 정면에 보이는
바위에 목정굴이란 석굴(石窟)이 깃들여져 있다.

목정굴은 조그만 자연산 동굴로 오랫동안 기도처로 이용된 도심의 숨겨진 굴이다. 태조 이성
계의 국사(國師)이자 금선사를 창건했다고 전하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를 올렸다고 전
하며, 조선 23대 군주인 순조의 탄생설화를 간직한 현장이기도 하다.

석굴 내부는 원래 공터였으나 1996년 동굴을 대폭 손질하면서 수월관세음보살상(수월관음보살
)과 예불공간 등을 만들고 보살상 우측에 경내로 인도하는 계단을 뚫었으며, 수월관세음보살
을 봉안하면서 금선사는 대내외적으로 관음도량을 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목정굴에는 숨겨진 볼거리가 여럿 있는데, 요란하게 비가 내릴 때는 목정굴 앞에 임시
로 폭포가 형성되어 힘차게 물을 쏟아내며, 석굴 앞 우측 바위를 잘 살펴보면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삼매부처상이 있으니 술래의 심정으로 잘 찾아보기 바란다. (난 찾지 못했
음)


▲  목정굴의 주인, 수월관세음보살(水月觀世音菩薩)

목정굴 안에는 수월관세음보살 누님이 환한 미소로 중생을 맞이한다. 석굴 내부는 무척 시원
하여 이른 무더위를 단죄하고 있으며, 겨울에는 수월관음의 따뜻한 마음이 동굴 내부에 가득
서린 듯 추운 몸을 녹이기에는 아주 그만이다. 동굴 천정에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고
석굴 구석으로 흐르는 물과 그들이 내는 졸졸졸~♪ 음악 소리가 경쾌하기 그지 없다.

앙련(仰蓮)으로 뒤덮힌 대좌(臺座) 위에 여인들도 시샘할 정도로 어여쁘게 앉아있는 수월관음
은 왼손에 감로수(甘露水)가 담긴 정병(淨甁)을 쥐어들고 있는데, 병의 크기가 다른 관세음보
살상의 정병보다 조금 커보인다. 그의 정병을 보니
왜 자꾸 동동주나 막걸리 술병 생각이 나
는 걸까? 정말 저게 술병은 아닐까? 설마 그럴리는 없겠지. 관세음보살 누님이 왜 술을 마시
겠는가? 하지만 그의 하얀 얼굴은 술에 약간 취한 듯, 졸린 표정처럼 보이기도 하니 혹 고적
한 석굴에서 건전하게 몰래 마신 것은 아닐까?

수월관음 앞에는 예불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불단에는 꽃 등이 놓여져 있어 중생들의 높인 인
기를 실감케 한다. 그의 우측에는 금선사로 오르는 계단길이 있는데, 높이가 낮고 물이 흐르
고 있어 조심해서 오르기 바란다. 잘못하면 암벽에 머리가 쾅 부딪칠 수 있어 암벽을 아프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  옆에서 바라본 수월관세음보살상

▲  경내로 인도하는 비좁은 계단

목정굴에는 금선사의 대표 설화인 순조 탄생 설화가 전해오고 있으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조선 22대 군주인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첫 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를 잃고 서른
이 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해 늘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788년경, 팔공산 파계사(把溪寺) 승려인 용파(龍波)가 상경하여 정조를 알현하면서
불교계의 폐단과 승려 차별을 시정해 줄 것을 탄원했는데, 정조는 불교 개혁을 약속하면서 대
신 왕자의 탄생을 기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아들을 얻지 못하니 이참에 부
처의 힘을 빌려보고자 했던 것이다.

불교계의 개혁을 위해서라면 지옥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굳었던 용파는 왕의 어려운
숙제를 기꺼이 수용하며 금선사에 머물던 농산(聾山)을 찾아가 같이 기도에 들어갔다. 그들은
같은 곳에서 기도를 하지 않고, 농산은 목정굴에서, 용파는 수락산 동쪽 내원암(內院庵)에서
따로 300일 이상 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한참 무르익을 무렵, 용파는 선정(禪定)에 들어 천하를 살펴보니 왕자의 몸을 받아 태
어날 사람이 농산 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하여 농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이번 기회에
금수저로 태어나 팔자를 필 것을 권하니 농산은 흔쾌히 수락했다. 왕자로 태어나는 것인데 어
느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래서 정조의 후궁인 수빈박씨(綏嬪朴氏)의 꿈에 나타나 왕자로 환생
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기도를 마치고 열반(숨을 거둠)에 들었다고 한다.

이때 왕실에 무기명 서찰 하나가 올라왔는데 그 서찰에는 '경술(庚戌) 6월 18일 세자탄강(世
子誕降)'이라 적혀 있었다고 하며 바로 그날 순조가 태어났다.
순조가 태어나던 날, 도성(都城) 서북쪽으로부터 맑고 붉은 서기(瑞氣)가 궁궐에 닿아 수빈박
씨의 산실(産室)을 휘감았다. 정조는 이상히 여겨 사람을 보내 그 서기의 출처를 찾아보니 바
로 목정굴이었다고 하며, 굴 안을 살피니 좌선을 한 채, 정수리에서 서기를 발산하고 있는 농
산의 시신을 발견했다.
농산이 죽어서 자신의 아들로 다시 태어난 것을 알게 된 정조는 크게 기뻐하며 승려를 차별하
던 폐습을 없애고 내수사(內需司)에 명을 내려 금선사를 크게 중창케 했다. 그 인연으로 지금
까지 순조의 탄신제(誕辰祭)를 지내고 있다.

이 설화대로 농산이 정말 순조로 환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경지가 깊은 승려라고 해
도 그건 사람의 능력 밖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전설이 대구 파계사에도 한 토막 전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내용이 거의 똑같다. 거기서는 숙종(肅宗)이 왕자<영조(英祖)>의 탄생을
부탁하는데, 그 부탁을 받은 승려가 파계사 부근 성전암(聖殿庵)의 현응(玄應)이다. 이 현응
의 법명은 용피<龍被, 또는 용파(龍波)>로 금선사의 용파와 이름까지 같다. 그러니 파계사의
영조 탄생 설화를 금선사에서 등장 인물만 조금 바꾸는 선에서 그대로 모방한 듯 싶다.

설화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곤란하지만 용파로 상징되는 파계사 승려와 농산으로 상징
되는 금선사 승려가 왕자의 탄생을 위해 기도를 올린 듯 싶으며, 그들 기도가 효과를 봤거나
아니면 기도 도중 농산이 사망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을 파계사 전설을 가져와 '농산이 왕
자로 환생했다'는 식의 그럴싸한 전설로 포장한 것이다. 어쨌든 순조 탄생을 기원한 인연으로
왕실의 넉넉한 지원을 받았고, 수락산 내원암 사적기(史蹟記)에는 농산, 용파 두 승려가 주고
받은 서신의 내용이 남아있다고 한다.


▲  목정굴 바위 정상

▲  목정굴 정상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수월관세음보살 우측에 뚫린 좁고 어두운 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면 목정굴 정상이 나오면서
다시금 찬란한 햇살을 보게 된다. 정상에서는 목정굴 밑 계곡을 비롯해 숲 너머로 탕춘대 능
선과 인왕산(仁王山) 등이 시야에 들어오며, 여기서 목정굴 입구에서 갈라진 오른쪽 산길과
다시 하나가 되어 경내로 이어진다.
경내로 향하면 절을 가리고 선 2층짜리 설선당이 나타나고 그 앞에 금선사 발전에 크게 기여
한 민영택 여사를 비롯한 공덕비(功德碑) 3기와 대원각의 승탑이 있어 그들의 이름 3자를 영
원히 기린다.

▲  민영택을 비롯한 공덕비 3형제

▲  절을 크게 일으킨 대원각의 승탑(僧塔)


▲  2층 규모의 설선당(設禪堂)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는 설선당은 근래에 지어진 따끈따끈한 건물로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하에는 밥을 먹는 공양간이 있으며, 1층과 2층은 종무소와 선방(禪房), 템
플스테이 장소로 쓰인다. 휴일 점심에는 산꾼과 답사꾼에게 흔쾌히 공양밥을 제공하는데 맛이
제법 괜찮다. (주로 비빔밥을 제공함)


▲  연등의 고운 물결, 설선당과 반야전 뜨락

설선당 밑도리에 난 문을 들어서면 숲에 감싸인 금선사 경내가 조촐하게 펼쳐진다. 설선당 옆
에는 청기와로 치장된 2층짜리 반야전이 있는데, 그는 2006년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는 그 좌
측 소나무 앞에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이 있었다.
대웅전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석가3존불과 신중도를 머금고 있었으나 2005년 후반에
부셔버리고 옆 공터에 크게 반야전을 지었다. 건물 윗층에는 대웅전에 있던 석가3존불을 가져
와 예전 대웅전의 역할을 담당하게 했고, 아랫층은 별도로 해행당(解行堂)이란 이름으로 요사
(寮舍)와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금선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2층으로 이루어진 반야전(般若殿)

북한산(삼각산) 서남부의 대표적인 능선인 비봉능선 남쪽 밑에 금선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조계종 소속으로 종로1가에 있는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인데, 예로부터
여러 가지 영험담이 전해지고 있는 기도처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것이 앞서 목정굴에서 소개
한 순조 탄생 설화이다.
       
이 절은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의 부탁으로 새 왕조의 도읍지를 정하고자 북한산(삼각산) 일
대를 살펴보던 중, 지금의 절 자리에 북한산의 강인한 정기가 서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부처
가 여기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으로 여기고 절을 세웠다고 한다. 여기서 금선(金仙)은 부처의
별칭으로 창건 설화의 진위여부는 장담하기 어려우나 조선 초나 중기에 산문을 연 것은 분명
해 보인다.

이후 서울 근교 기도도량으로 이름을 떨치면서 많은 왕족과 양반, 상궁(尙宮)들이 자주 찾았
다고 하며, 순조의 탄생을 기원한 인연으로 왕실의 넉넉한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허나 왜
정(倭政) 때 절은 폐허가 되었으며, 1949년 승려 도공(道空)이 중건했다.
1996년 목정굴을 손질해 수월관세음보살을 봉안했고, 2008년에 반야전을 지었으며, 계속해서
설선당과 범종루, 일주문 등을 달아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절의 초창기 영역은 목정굴과 반야전 일대였으나 계곡을 따라 윗쪽으로 영역을 넓히면서 대적
광전과 삼성각을 지었고, 그 중간에 적묵당과 연화당을 지으면서 건물이 한데 몰려있지 않고
서로 떨어져 있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비좁게 자리한 탓에 경내가 길고 가늘게 이어진 것이
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적광전을 비롯해 반야전, 설선당, 삼성각, 연화당, 적묵당, 범종루 등 10
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신중도가 있으나 오래된
유물도 그게 전부이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금선사의 모든 것이 좌초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외에 기도처로 유명한 목정굴이 경내 밑에 자리해 있다.

서울 도심에서 불과 10리도 안되는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고적한 산사의 멋과 여유를 누릴
수 있으며, 풍경도 아름답다. 또한 최근에 템플스테이(Temple stay)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단
단히 재미를 보고 있으며 특히 외국인들의 수요가 많은 편이다.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구기동 196-2 (비봉길 137 ☎ 02-395-9911)
* 금선사 홈페이지는 밑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순조의 탄생설화를 간략하게 담은 반야전 벽화
왼쪽은 용파가 정조를 알현하며 그에게 어려운 숙제를 받는 장면, 중간은
금선사에서 기도에 들어간 용파, 오른쪽은 승려의 육신을 버리고
왕자로 다시 태어난 농산


 

♠  금선사 둘러보기

▲  옛 대웅전터와 오래된 소나무

반야전을 지나면 옛 대웅전이 있던 터와 소나무가 있다. 대웅전은 2005년에 사라졌으나 그 곁
을 지키던 소나무만이 무성하게 솔잎을 피우고 있는데, 나이는 약 200년 정도 묵었다고 한다.

경내에서 목정굴 다음으로 오래된 자연물로 아직 그 흔한 보호수(保護樹) 등급도 얻지 못했지
만 금선사의 오랜 내력을 밝혀주는 몇 안되는 존재라 그가 마음껏 몸을 풀 수 있도록 넓게 공
간을 제공하였다.


▲  옆에서 본 소나무

이 소나무는 장대한 나이에 비해 키는 작다. 하늘로 향하지 못하고 대신 옆으로 몸집을 무한
정 불려 처진소나무처럼 된 것이다. 절에 있는 나이 지긋한 소나무 중에 이런 나무가 적지않
아 참으로 신기할 따름인데, 절에서 주장하는데로 나무에게도 과연 불심(佛心)이란 것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자랄 수 밖에 없는 그들의 팔자인 것일까? 궁금하다.

▲  대적광전으로 인도하는 해탈문
(解脫門)과 108계단

▲  윗층과 아랫층의 이름과 용도가
서로 다른 연화당(蓮華堂)


소나무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왼쪽 해탈문은 대적광전으로 바로 이어지는 108계단길로 근
래에 닦여졌다. 그리고 오른쪽 길은 계곡을 따라 연화당, 적묵당, 삼성각을 거쳐 대적광전으
로 이어지는데, 대적광전까지 빨리 가고 싶다면 약간 각박하긴 하지만 108계단길을 이용하면
되고 느긋하고 편하게 가고 싶다면 계곡길을 이용하면 된다.

계곡길을 따라가면 계곡 건너에 나무 다리를 늘어뜨린 2층짜리 연화당을 만나게 된다. 이 건
물은 1층과 2층이 이름과 성격이 서로 틀린데, 1층은 연화당이라 불리는 납골당(納骨堂)으로
영가(靈駕)를 위한 공간이며, 그 중심에 지장보살좌상이 들어앉아 그들의 극락왕생을 챙겨준
다. 금선사의 든든한 밥줄로 약 600여 기의 유골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2층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인 미타전(彌陀殿)으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
로 한 아미타3존불과 2004년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  연화당 앞에 놓인 나무 다리와 갈증에 빠진 계곡
봄가뭄으로 계곡이 바짝 타들어가면서 물방울도 보이지를 않는다.
계곡 위에 걸린 다리가 무색할 지경..

▲  소나무 뒤에 자리한 적묵당(寂默堂)

연화당 맞은편 석축 위에는 적묵당이 터를 닦았다. 이 집은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저리보면 1
층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3층이니 겉모습에 속지 말자. 팔작지붕을 짊어진 3층은 주지승의 거
처이며 그 밑에 가려진 1층과 2층은 일반 승려의 거처이다.


▲  계곡 위에 무지개처럼 걸린 홍예다리

▲  경내 윗쪽에 자리한 큰 바위와 약수터

적묵당과 연화당을 지나면 계곡 위에 걸린 홍예다리가 나온다. 근래 마련된 돌다리로 비록 고
색의 내음은 익지도 못했지만 여인의 눈썹처럼 선이 아름답다. 거기에 오색영롱한 연등을 잔
뜩 머금고 있으니 더욱 화사해 보인다.
그 다리를 건너면 바로 대적광전과 삼성각으로 이어지며,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곡길을 좀 들
어가면 그 길의 끝에 커다란 바위가 웅크리고 있다. 바위 위에는 비봉능선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으나 여기서는 올라가는 정식 길은 없으며, 바위 밑은 안쪽으로 쑥 들어가 조촐하게 그늘진
공간이 있는데, 비와 눈을 피하기에 아주 좋은 터로 북한산(삼각산)이 베푼 물이 용솟음치는
약수터가 수줍은 듯 자리한다.
금선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곡의 절반은 이곳에서 시작되어 흐르며, 그 옆에는 봄가뭄에 말
라비틀어진 조그만 폭포가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바위에게 주어진 이름은 딱히 없으며, 바위의 준수하고
거대한 용모를 보니 절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  바위 밑에 자리한 샘터 (물은 안마셨음)

▲  연등의 조촐한 향연이 펼쳐진 홍예다리


▲  삼성각(三聖閣)

홍예다리를 건너면 바로 대적광전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이 마중을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
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이 봉안되어 있으며, 원
래는 그들이 각각 별도의 건물을 지니고 있었으나 2005년에 현 건물을 증축하면서 이곳에 싹
모아두었다.


▲  봄 햇살이 내려앉은 대적광전(大寂光殿)

삼성각과 이웃한 대적광전은 금선사의 공식 법당으로 높직한 곳에 들어앉아 경내를 굽어본다.
비로자나불의 거처로 2005년에 지어졌는데, 옛 대웅전에 있던 불상과 신중도, 그리고 2005년
에 마련된 금고(金鼓)를 가지고 있다.


▲  대적광전 비로자나3존불

대적광전 불단에는 비로자나불이 지권인(智拳印)의 제스처를 보이며 앉아있고, 그 좌우로 노
사나불(盧舍那佛), 석가불이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중생을 지그시 바라본다. 그들 뒤로
든든히 자리잡은 후불탱은 2005년에 제작된 것으로 색채가 무지 곱다.

       ◀  금선사 신중도(神衆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61호

대적광전 좌측 벽에는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목정굴과 느티나무 등의 자연물 제외)인
신중도가 액자 속에 소중히 깃들어져 있다.
주위에는 비로사나후불탱과 새로 만든 신중도
등의 번쩍이는 그림이 있으나 고색이 자욱한
신중도에만 오로지 눈길이 쏠린다.

신중도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신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조선 후기에 널리 그려진 불화이
다. 이들은 원래 인도의 토속신이었으나 불교
의 일원으로 흡수되었으며, 지금은 그들의 뜻
과 다르게 부처와 경전을 수호하는 호법신(護
法神)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
르면서 그 수호의 범위가 확대되어 나라를 지
키거나 사람들의 재앙을 막는 역할까지 떠맡게
되어 업무량이 과중하게 늘었다.

이 신중도는 1887년에 제작된 것으로 그림 밑부분에 딸린 화기(畵記)에 따르면 김지(金地)가
책임 화원, 경순과 채준이 각각 출초(出草)와 편수(片手)를 담당했다. 또한' 신중탱(神衆幀)
'이란 명문이 쓰여 있어 그림의 성격까지 소상히 알려준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신중탱이
아닌 '신중도')

그림 윗부분에는 연꽃가지를 비껴들고 있는 제석천(帝釋天)을 중심으로 홀을 들고 선 일월자
천(日月自天), 공양물을 든 천동(天童)과 천녀(天女)가 그려져 있으며, 밑부분에는 위태천(
韋太天)과 팔부중(八部衆), 산신 등이 빼곡히 자리해 있다.
오래되고 괜찮은 신중도로 평가를 받아서 2002년 서울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장대한 내력에 비해 오래된 볼거리가 없어 애태우던 금선사에 한줄기 빛을 선사했
다.


▲  물감이 채 마르지도 않은 대적광전의 새 신중도
대적광전에는 신중도가 무려 2개씩이나 걸려있다. 신중도는 법당을 지키는
그림으로 1개도 아닌 2개나 있으니 제법 든든할 것이다.

▲  반야전에서 대적광전을 이어주는 108계단
누런 털을 걸친 묘공(猫公)이 묵묵히 계단을 오르며 자연을 음미하고 있다. 처음에는
숲으로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으나 내 옆을 유유히 지나쳐 대적광전으로 향했다.
그는 금선사에서 기르는 묘공으로 이 시간대에 늘 경내를 순찰하는 모양이다.

▲  대적광전으로 향하는 묘공의 위엄
대적광전 주변에 그만의 꿀단지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이 옆에
있는데도 경계나 인사는 커녕 마치 무인지경으로 내 옆을 지나간다.

▲  속세를 향해 종소리를 울려라~~!
범종각(梵鍾閣)

▲  현판 글씨가 일품인 일주문(一柱門)


10년이 아니라 단지 몇 년만으로도 거뜬히 강산이 변하는 21세기, 오랜만에 발을 들인 금선사
도 조금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 없던 건물이 마구 솟아나 절을 달리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신중도와 대적광전, 소나무 등 기본적인 존재들은 늘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
니 마치 옛 지기와 오랜만에 상봉한 기분이다.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고 금선사와의 짧은 인연을 마무리 지으며 비봉능선으로 발길을 재촉했
다. 앞서 절에 들어왔을 때는 목정굴로 왔지만 이번에는 목정굴 동쪽 산길로 갔는데, 근래에
지어진 2층 범종각과 일주문이 잘가라며 차례대로 배웅을 한다.
범종각은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시지를 머금은 범종과 목어, 운판, 법고의 보금자리로 1
층은 통로, 2층은 범종각으로 쓰인다. 그 범종각을 지나면 바로 일주문이 나오는데, 그가 있
기 전에는 금선사에 그 흔한 일주문도 없었다.

명필을 자랑하는 일주문 현판은 학정 이돈흥(鶴亭 李敦興)이 쓴 것으로 '金仙寺'가 아닌 '金
僊寺(금선사)'로 쓰여 있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비록 음은 같지만 중간 한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허나 그 금선(金仙)이나 이 금선(金僊)이나 서로 같은 뜻이며, 다른 말로 대선(大
仙)이라 불리기도 한다.


▲  길목에 자리한 동자석(童子石)

일주문에서 한굽이 내려가면 동자석과 아리송하게 생긴 돌 하나가 내 발길을 붙잡는다. 동자
석은 두 손으로 홀을 쥐어들고 있어 문인석(文人石)의 냄새도 풍기는데, 그에 대한 자세한 정
보는 없지만 생김새와 몸에 낀 고색의 때를 봐서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키는 말그대로 어린이 키와 비슷한데, 절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고 귀족들의 묘역에만 사용할
수 있는 동자석이 절로 가는 길목에 떡하니 서 있으니 그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다. 인근에 헝
클어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사대부(士大夫)의 묘에서 가져왔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정작 금
선사 부근과 구기동, 평창동에는 사대부의 묘가 전하지 않는다. (한양도성 밖 10리 이내에는
무덤을 쓸 수 없음)
그러니 절의 수호 의미나 이정표의 역할로 절의 단골 귀족(왕족, 사대부)이 세워준 것으로 여
겨진다. 그렇다고 절 자체적으로 감히 세울 리는 없을테고 말이다. 어쨌든 뭔가 특별한 의미
가 담겨져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며, 그로 인해 금선사의 격이 조금은 달라 보인다.


▲  이 돌의 정체는 무엇인고?

동자석 건너편에는 정체가 아리송한 돌덩어리가 서 있다. 동자석처럼 날씬하게 서 있지만 아
무런 조각이 없기 때문이다. 자세한 사연이야 낸들 알 도리는 없지만 무언가를 만드려다가
만 것 같은 99% 부족한 모습으로 자세히 바라보면 남근석(男根石)과도 비슷해 보인다.


▲  동자석과 정체가 묘연한 돌상의 뒷모습

▲  금선사를 뒤로하며~~~ (동자석과 목정굴 입구 중간)
본글은 여기서 끝. 금선사 이후 내용은 생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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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옛 탐라의 현장, 제주도 새해 나들이 (외도 월대, 수산리곰솔, 납읍 금산공원, 제주올레길15,16,17코스)

 


' 제주도 겨울 나들이  '
(외도 월대, 수산봉, 납읍리 금산공원)

▲  제주해협이 바라보이는 외도 해변

수산리 곰솔 납읍리 금산공원 (납읍리 난대림)

▲  수산리 곰솔

▲  납읍리 금산공원

 


 

묵은 해가 아쉬움 속에 저물고 새해가 막 기지개를 켜던 1월의 첫 무렵, 사흘 일정으로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 제주도(濟州島)를 찾았다.
제주도는 거의 13년 만에 방문으로 비행기나 장거리 여객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야 되는
부담감 때문에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허나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수천~수만 리가 되
는 것도 아니고 고작 500km 남짓에 불과하며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로 1시간 내외면 충분
히 닿는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천하를 마음대로 주유한다는 내가 제주도에게 너무나 소심하게 대한
것 같고, 이러다가는 제주도란 존재를 깜빡 잊어먹을 것만 같았다. 하여 나를 제주도에
팍 떨어트리기로 작정하고 부랴부랴 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해봐야 비행기표 예약밖에
는 없음)

평일 아침 6시대 비행기라 널널하게 새벽 2시에 도봉동 집을 나서 심야시내버스(N버스)
를 1회 갈아타고 다시 일반시내버스로 환승하여 5시에 김포국제공항 국내선청사에 도착
했다. (2시 50분대에 방학사거리에서 N15번 시내버스를 타고 종로2가로 이동 → 3시 50
분대에 N26번 시내버스를 타고 공항시장까지 이동 → 4시 50분대에 공항시장 건너편 정
류장에서 6629번을 타고 김포공항 진입)

공항은 여행 비수기인 겨울 평일임에도 이른 아침부터 제주도를 꿈꾸러 온 사람들로 거
의 북새통을 이루었다. 탑승 수속을 마치고 30여 분 정도 지루하게 시간을 때우다가 제
주로 가는 아시아나항공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시간이 되자 비행기는 그 작은 입을 닫
고 넓은 활주로를 10분 남짓 방황하다가 드디어 하늘 높이 비상한다.
제주도에 처음 발을 들였던 초등학교 시절, 김포공항에서 50분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하
고 있다. 그 소요시간은 여전히 유효하여 제주국제공항에 착륙하여 바퀴를 멈출 때까지
딱 50분이 걸렸다. (보통은 활주로 방황 시간까지 포함하여 1시간~1시간 10분을 소요시
간으로 잡고 있음)

활주로 한쪽에 멈춰선 비행기에서 내려서니 공항청사로 인도하는 저상형 셔틀버스가 대
기하고 있었다. 그 버스를 타고 3분 정도를 달려 공항청사로 이동했는데 공항이 바닷가
와 가까워서 그런지 바람이 다소 매서웠다. 제주도는 여름에만 와봤지 겨울에는 처음이
다. 따뜻한 남쪽이라 별로 춥지 않을 것이라 방심을 하였으나 바닷가는 바람 때문에 오
히려 본토 이상만큼이나 추웠다. (단 내륙 쪽은 따뜻함)

제주도에서 이미 정처(定處)는 정해둔 상태라 그곳만 얌전히 찾아가면 된다. 남들은 렌
트카로 많이 이동을 하지만 난 마음 편하게 대중교통을 선택하여 돌아다녔다. 제주도는
비록 일부 노선을 제외하면 버스 배차간격은 긴 편이나 본토보다 시내버스 차비가 저렴
하고 무료환승제가 아주 휼륭해 섬 1바퀴(180km)를 기본요금(현금 1,200원, 카드 1,150
원)이면 돌 수 있다. (제주도 급행버스와 공항버스는 제외)

제주국제공항에서 첫 답사지인 외도 월대를 가고자 제주시내버스 315번(국제여객선터미
널↔수산리)을 탔다. (다른 노선들도 있으나 그것이 먼저 와서 탔음)
버스는 오랜만에 건너온 나에게 신제주 일대를 신나게 강제투어를 시켜주고 8시가 조금
넘어서 외도초교 정류장에 나를 가져다 주었다. 외도초교에서 남쪽으로 가면 광령천(光
令川)이 있는데 바로 그곳에 나를 여기로 부른 월대가 있다.


 

♠  달놀이와 은어로 유명했던 제주시내 외곽 명승지
외도 월대(月臺)

▲  현무암으로 닦여진 월대

월대는 광령천(외도천)과 도근천<都近川, 수정천, 조공천>이 만나는 곳에 닦여진 명승지이다.
월대 앞을 흐르는 광령천을 따로 월대천이라 부르기도 하며, 남해바다도 이곳까지 손을 대고
있어 자연히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수심이 깊고 청정해 예로부터 은어
와 숭어, 뱀장어가 많이 노닐고 있다. (지금도 많이 서식하고 있음)

월대 주위로 하천을 따라 200~300년 숙성된 팽나무와 해송이 멋드러지게 늘어서 있는데 이곳
지형이 반달과 비슷하다고 하며, 달님이 뜰 때 주위와 어우러져 수면에 비친 달빛이 아주 예
술이라고 한다. 반달을 닮은 곳에 달빛 또한 그윽하니 이곳에 퐁당퐁당 빠진 옛 사람들은 누
대(樓臺)를 짓고 신선이 내려와 달놀이를 하던 곳이란 의미로 '월대'라 하였다.

월대는 제주도에서 가장 흔한 현무암으로 낮게 네모난 기단을 깔고, 그 위에 동그란 낮은 대
를 다져 4각형 위에 동그라미가 있는 모습처럼 되었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돌로 쌓은 석대만 있을 뿐, 건물은 없으며 선비와 관리들, 지역 사람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시
를 짓고 낚시를 하며 풍류를 즐겼다. 그들은 월대를 포함한 외도동(外都洞) 일대에 적당한 풍
경 8곳을 골라 외도팔경(外都八景)이라 이름 짓고 찬양을 하니 그 8경은 다음과 같다.

1. 월대피서(月臺避暑) - 월대에서의 피서
2. 야소상춘(野沼賞春) - 들이소(월대천 남쪽)에서의 봄구경
3. 마지약어(馬池躍漁) - 마지(연대입구 마이못)에서 뛰는 물고기
4. 우령특송(牛嶺特松) - 우왓동산의 큰 소나무
5. 대포귀범(大浦歸帆) - 큰 포구(조공포)로 돌아오는 돛단배
6. 광탄채조(廣灘採藻) - 넓은 여에서 해조를 캐는 모습
7. 사수도화(寺水稻花) - 절물 벼밭에 벼꽃이 핀 모습
8. 병암어화(屛岩漁火) - 병풍바위에서 고기잡이 불구경


▲  시커먼 피부의 월대 비석
비석 피부에 쓰인 '월'이 그 흔한 '月'이 아니라 거의 초승달 같은 모습이다.
(사람이나 동물의 삐뚤어진 눈처럼 보이기도 함)
비석까지도 달을 표현했으니 이곳은 그야말로 달을 찬양하는 공간이다.


월대 주변은 완전 시골이었으나 제주 시내가 동/서/남으로 크게 살을 찌우면서 그 주위로 시
가지가 형성되었다. 하여 옛날의 운치는 다소 깎이긴 했으나 월대와 광령천, 하천을 따라 늘
어선 나무들은 거의 그대로이며, 광령천 동쪽은 전원(田園) 풍경을 여실히 간직하고 있어 월
대의 위엄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 또한 제주도의 야심작인 제주올레길 17코스(제주시내 원도
심~광령, 18.1km)가 이곳을 살짝 지나가며 올레길 뚜벅이들을 인도한다.


▲  월대 주변에 자리한 키 작은 비석 4형제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은 비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이들은
지역 사람들의 공덕비로 기단석은 현무암으로 지어졌다.

▲  월대 해송 - 제주시 보호수 13-1-15-30(2) / 13-1-15-30(3)호

월대 옆에 제주시 보호수로 지정된 해송 2그루가 있다. 이들은 280년 묵은 것들로(1982년 보
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250년) 지정 번호가 앞선 것을 기준으로 높이는 각각 10m와
3m, 나무둘레는 3.2m와 2m이다.


▲  월대 산책로의 평화로운 아침 풍경 (제주올레길 17코스)

▲  월대 산책로와 오래된 해송<제주시 보호수 13-1-15-30(1)호>
정면에 보이는 수형(樹形)이 좋은 소나무가 제주시 보호수인 해송으로 앞서 언급한
해송들과 나이(약 280년)가 비슷하다. 나무높이는 12m, 나무둘레 3.2m

▲  이제는 무늬만 남은 고망물(수정천)

월대가 있는 외도동에는 조부연대(煙臺)와 고인돌(지석묘), 마이못, 고망물, 수정사(水精寺)
터, 제주도에서 유일한 자갈해변인 알작지 등의 소소한 명소들이 전하고 있다.
나는 월대와 수정사터만 알고 있었지 다른 명소는 전혀 몰랐다. 여기서 덤으로 알게 된 그들
을 싹 보고 가면 좋겠으나 언제나 그렇듯이 시간도 여의치 않았고 마음은 벌써부터 다음 행선
지를 재촉하고 있어서 월대에서 가까운 고망물만 보기로 했다. 그곳은 월대교에서 광령천 천
변길(통물길)을 따라 2~3분 정도만 가면 된다. (제주올레길 17코스가 그 길을 따라감)

고망물은 오래된 샘터로 외도동에 크게 둥지를 틀었던 수정사의 샘터로 전해진다. 그래서 수
정천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수정사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 때 원나라(몽고)의 황후(皇后)가 물이 잘 나
오기를 기원하고자 세웠다고 한다. 몽고 왕비(또는 몽고 조정)가 그들과 전혀 관련도 없을 것
같은 머나먼 제주도에 왜 절을 세웠나 싶겠지만 그 시절 고려는 몽고의 그늘에 있었고, 몽고
는 고려의 영역이던 제주도, 함경남도, 평안도, 요동(遼東) 지역을 강제로 접수해 그들 땅에
넣어버렸다. <평안도와 요동에 동녕부(東寧府)를, 함경남도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제주
도에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를 설치하여 통치함>
기마병 중심인 몽고에게 말은 꽤 중요한 전투 자원으로 제주도는 말목장으로 아주 휼륭했다.
그러니 몽고의 제주도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으며, 절도 여럿 설치하여 통치수단으로 삼았다.
그런 배경에서 태어난 수정사는 제주도에서 제법 덩치가 있던 절로 서귀포에 있던 법화사(法
華寺)와 함께 제주도 2대 사찰(또는 3대 사찰)로 꼽혔다. 허나 17세기 말 화마(火魔)의 먹이
가 되어 부질없이 사라졌으며, 20세기 이후에 새로운 수정사가 들어서 작게나마 옛 터를 지키
고 있다.

고망물은 늘 물이 풍부하게 나와 동네 사람들의 식수가 되었으며, 왜정(倭政) 때 지금의 모습
으로 정비하고 그 기념비를 세웠다. 여전히 물은 나오고 있으나 개발의 칼질이 주변까지 미치
면서 수질은 장담이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그러니 아무리 갈증이 나더라도 이곳 물은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


▲  세월이 씌워놓은 온갖 주근깨로 범벅이 된 수정천 신축기념비
왜정 때 고망물을 손질한 기념으로 세워진 것으로 옆구리에 조성시기가 쓰여있다.
허나 시대가 시대인지라 서기 대신 왜왕(倭王)의 연호가 쓰여있었고,
1945년 이후 그 부분은 뜯겨졌다.

▲  고망물에서 바라본 한라산(漢拏山)의 위엄
제주도는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한라산이 바라보인다. 한라산은
제주도를 빚은 장본인이자 제주도의 어머니와 같은 큰 존재이다.

▲  광령천과 바다가 만나는 외도 해변 <조공포(朝貢浦)>

고망물에서 광령천을 따라 월대를 거쳐 외도 해변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고려와 조선 때 제주
도에서 조정으로 보내는 공물선(貢物船)이 오가던 포구로 조공포라 불렸는데, 그 조공선은 도
근천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하여 도근천을 조공천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늘에 점점이 떠있는 구름 밑으로 푸르기 그지없는 제주해협이 넓게 펼쳐져 있다. 혹시나 추
자도(楸子島)나 본토가 보이지 않을까 싶어 주름선이 일그러질 정도로 눈에 힘을 주고 살펴봤
으나 역시나 거리 때문인지 보이지가 않는다. 바다 파도는 조금 흥분기를 보이며 뭍을 때리고
있었고 바닷바람은 그리 춥지 않았다.


▲  외도 해변 (대원암 동쪽)
왼쪽에 보이는 돌탑은 대원암에서 만든 것이다.


외도 해변 서쪽에는 천하 유일의 해수관음보살(海水觀音菩薩) 와상(臥像)을 봉안한 대원암이
있다.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조그만 절집으로 내가 갔을 때는 와상의 존재도 전혀 몰랐
고, 그곳에는 딱히 손이 가지 않아 해변만 잠깐 기웃거리고 외도초교 정류장으로 나왔다.

* 외도 월대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외도2동 230, 240, 241일대


 

  제주해협을 바라보고 있는 조그만 오름(봉우리)
수산봉(水山峰)과 수산리(水山里) 곰솔

▲  수산봉 충혼묘지(모감동) 기점 (제주올레길 16코스)

외도초교 정류장에서 제주도 간선 202번을 타고 하귀를 지나 모감동에서 내렸다. 202번은 제
주터미널에서 제주도 서쪽 일주로(애월, 한림, 고산, 대정, 화순, 중문)를 따라 서귀포 중앙
로터리(서귀포등기소)까지 가는 긴 노선으로 외도부터 다음날 찾아간 천제연폭포(天帝淵瀑布)
까지 쭉 그의 신세를 졌다. (총 5번을 탔음)
이 노선은 달랑 1km를 가던, 40km를 가던, 전 구간을 가던 무조건 기본 요금이며, 제주시내버
스(300, 400번대)와 서귀포시내버스(500, 600번대), 제주시와 서귀포 외곽버스(700번대), 제
주도 장거리 간선버스(200번대)와 무료환승이 가능하다. (100번대 제주도 장거리 급행버스도
환승이 되나 약간의 차액이 나가며 구간요금 있음)

모감동 정류장 남쪽에 야트막한 산이 손짓을 하니 그곳이 수산봉이다. 차량의 왕래가 빈번한
도로(일주서로)를 신호등의 도움을 받아 건너면 수산봉으로 인도하는 길이 마중을 나오는데,
제주올레길16코스(고내~광령, 15.8km)가 그 길을 따라 수산봉 남쪽까지 이어진다. 16코스는
광령에서 17코스로 간판을 갈아 월대와 제주시내로 달려가며, 고내에서는 15코스로 이름을 바
꾸고 한림읍으로 이어진다.


▲  수산봉 북쪽 산길 (1)

수산봉은 해발 122m의 낮은 뫼로 '수산봉오름','수산오름','물메오름','물메' 등의 별칭을 가
지고 있다. 옛날에는 주로 물메라 불렸는데, 이는 봉우리 정상에 못이 있어서 그렇게 불린 것
이다. (물뫼, 물메)
지금은 딱히 특별한 것이 없어보이는 평범한 뒷동산이나 그 태생은 무시무시했던 화산으로 화
산 폭발로 못과 지금의 산이 형성되었다. 이런 식의 산은 제주도에 매우 많다.

조선 때는 정상에 물메봉수를 두었는데 동쪽에 도두봉수, 서쪽으로 고내봉수와 연락을 했으며,
기우제를 지냈던 터가 있어 영산(靈山)으로 추앙을 받기도 했다. 해송이 울창해 솔내음이 그
윽하며 서쪽 자락에는 애월읍 충혼묘지가 닦여져 있어 호국(護國) 신들이 안식을 취하고 있다.

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크게 모감동(충혼묘지), 대원정사, 수산리 곰솔 등 3개가 있는데, 산이
작다보니 어디로 올라가든 10분 안에 정상부에 닿는다. 산 정상은 군부대가 있어 금지된 곳이
되었으며, 봉수대터는 그 안에 있어 관람이 어렵다.
내가 수산봉을 찾은 것은 봉우리보다는 산 남쪽에 있는 수산리 곰솔을 보고자 함이다. 그곳으
로 가려면 수산봉을 거쳐가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  수산봉 북쪽 산길 (2)

▲  수산봉 북쪽 산길 (3)
겨울의 한복판이지만 해송 외에도 많은 나무들이 버젓히 푸른 옷을 걸치고 있어
겨울임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만큼 제주도는 따뜻한 남쪽이다.

▲  수산봉 정상부
바다가 바라보이는 정상부에는 쉼터용 정자와 여러 운동시설이 닦여져 있다.

▲  수산봉 남쪽 숲길

▲  수산리 곰솔 - 천연기념물 441호

수산봉 동남쪽에 곱게 늙은 곰솔이 있다. 수산저수지를 거울로 삼으며 도도한 모습을 드러내
고 있는 그는 높이 11.5m, 나무둘레 4.7m, 수관폭 26m로 4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나무의 눈덮힌 모습이 마치 백곰이 물을 마시고자 웅크리고 있는 모습처럼 보여 곰솔이라 불
리며 나무 껍질이 검은색이라 흑송(黑松)이라 불리기도 한다. 또한 바닷가에 많이 자라고 있
어 해송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지상 2.5m 높이에 원줄기가 잘려진 흔적이 있고, 거기서 4
개의 큰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있으며, 호수 쪽 가지가 밑동보다 2m 정도 낮게 물가에 드리워
져 있어 나무의 자태가 곱다.

이 나무는 수산봉 밑에 마을이 지어졌을 때 그 기념으로 심어진 것이라 전하며, 수산리 사람
들은 그를 수호목으로 삼아 애지중지하고 있다. 나무 북서쪽에는 나무에게 당제를 지내는 맞
배지붕 당집이 있다.


▲  물을 향한 마음, 호수로 뻗은 남쪽 가지
물이 많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아니면 갈증이 심했는지도) 나무의 남쪽 가지가
계속 호수로 손을 내밀고는 있으나 호수는 액체라 그의 손을 잡을 만한
것이 없어 서로 뻔히 보임에도 전혀 닿지를 못하고 있다.

▲  수산봉과 곰솔의 잘생긴 거울, 수산저수지

수산저수지는 현무암 피부를 지닌 제주도에서 거의 흔치 않은 저수지이다. 예전에는 유원지가
들어서 한때 시끌벅적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 흔적들이 거의 지워져 고요하다. 다만 그 고요
함을 툭하면 건드리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제주공항으로 착륙하는 비행기들이다.
이곳은 비행기들이 제주국제공항으로 진입하는 길목으로 5분이 멀다하고 지나간다. 비록 소음
이 있긴 하나 형형색색의 비행기들이 날개를 낮추며 들어서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으며, 저렇
게 많은 비행기가 들어오고 그만큼 바깥으로 나가니 제주도의 위엄과 인기를 정말 실감케 한
다. (현재 제주공항은 거의 포화상태임)

수산봉을 넘어온 제주올레길16코스는 저수지 서쪽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가며, 나는 곰솔과 당
집 주변만 둘러보고 다시 수산봉 정상부를 거쳐 모감동 정류장으로 돌아왔다.

▲  수산리 곰솔에게 제를 지내는
마을 당집

▲  곰솔 맞은편에 자리한 무덤들
현무암으로 무덤 경계를 닦았다.

* 수산봉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
* 수산리 곰솔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 1935


 

♠  오래된 난대림을 간직한 납읍리의 상큼한 언덕
납읍 금산공원(錦山公園)


▲  납읍리 돌담길

모감동 정류장에서 다시 202번을 타고 애월을 지나 한림읍내에서 내렸다. 여기서 제주도 간선
291번(제주터미널~한림읍)으로 환승하여 금산공원을 간직한 납읍리에 두 발을 내린다.
모감동에서 여기까지 바로 가는 292번 버스가 있으나 운행횟수가 너무 적고 시간이 전혀 맞지
않아서 부득이 한림으로 돌아간 것이다. (한림읍에서 납읍리로 가는 버스가 30~40분 간격으로
있음)
애월읍 납읍리(納邑里)는 제주도에서 이름난 양반 마을로 꼽힌다. 14세기에 마을이 조성된 것
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납읍을 중심으로 사방 10리 이내에 곽지, 애월, 고내, 상가, 하가, 어
음, 봉성 등 7개의 마을이 들어서 있어 그것을 아우르는 뜻에서 동네 이름에 읍을 쓴 것으로
보인다.
납읍리 지역에서 처음 사람이 산 곳은 곽남(郭南)으로 여겨진다. 그곳의 처음 이름은 곽지남
동으로 그것을 줄여 곽남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이후 '곰팡이','둥덩이' 등지에 사람들이 터
전을 닦으면서 마을이 확대되었다.

현재 납읍리는 본동, 서동, 중하동 등 3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동에 나를 이곳으로
부른 금산공원이 있다. 제주시(북제주)에서 가장 감귤이 잘되는 동네로 제주올레길15-A코스(
한림~납읍~고내, 16.5km)가 납읍리와 금산공원 내부를 지난다.


▲  귤나무밭을 가르는 납읍리 돌담길

▲  금산공원 정문

납읍리사무소 정류장(반대편 정류장은 '납읍리')에서 납읍로2길을 따라 9분 정도 들어가면 무
성한 숲을 드러낸 금산공원이 모습을 비춘다. 납읍리사무소에 이르면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양
쪽 길이 비슷하게 생겨서 햇갈리기가 쉽다. (이정표도 없음) 여기서는 무조건 서쪽(진행 방향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된다.
현무암 돌담과 귤나무, 마을 가옥이 잘 어우러진 제주도의 전형적인 시골 마을로 귤나무 가지
에 감귤이 달린 모습이 심심찮게 눈에 띄어 제주도 한복판에 왔음을 더욱 실감나게 한다.

금산공원은 납읍리의 허파이자 아름다운 뒷동산으로 33,980㎡(약 13,000여 평) 면적에 후박나
무와 생달나무, 종가시나무, 모밀잣밤나무, 동백나무, 식나무, 아왜나무, 자금우, 마삭줄, 송
이 등 200여 종의 식물이 우거진 상록수림(常綠樹林)이다. 다른 말로는 난대림(暖帶林)이라고
도 한다. 제주시 서부에서 평지에 남아있는 유일한 상록수림으로 온난한 기후에 적합한 식물
들이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며 1년 내내 삼삼한 모습을 자랑한다.

허나 금산공원은 원래부터 숲동산은 아니었다. 옛날에는 돌만 가득한 돌언덕으로 볼품이 없었
다고 하며, 그 언덕 건너편으로 금악봉(430m)이 훤히 바라보여 마을에 화재가 잦았다고 한다.
그래서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금악봉이 보이지 않게끔 돌언덕에 나무를 심었고 마을
제사를 지내는 포제단을 담으면서 마을의 성역으로 부상하게 된다. 성역을 품은 숲은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것이 법칙이라, 마을에서는 나무 벌채나 식물 채취를 엄격히 금하여 숲이 마음
놓고 자라게끔 배려했으며, 숲 주위로 돌담을 둘러 속세와 숲의 경계를 분명히 하였다.
처음에는 숲 벌채를 금한다는 뜻으로 금산(禁山)이라 불렸으나 나중에 이름을 순화시켜 비단
뫼를 뜻하는 금산(錦山)으로 한자를 갈았다고 한다.

공원을 덮고 있는 숲은 '납읍리 난대림'이란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375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
으며(예전에는 천연기념물 182-4호였음) 공원 전체가 국가 천연기념물 보호 구역이라 지정된
탐방로 외에는 접근을 금하고 있다. 아무리 공원 감독이 느슨하다고 해도 자연보호를 위해 탐
방로를 벗어나거나 식물을 괴롭히는 행동, 나뭇잎과 식물을 따는 행위는 절대로 해서는 안된
다.


▲  금산공원 정문 갈림길

원시림과 같은 공원으로 들어서면 길은 3갈래로 갈린다. 넓은 흙길로 된 중앙 숲길은 이곳의
성역인 포제청으로 이어지며, 서쪽 숲길과 동쪽 숲길은 흙길과 나무데크길이 섞여있다. 어느
길로 가든 남쪽에서 모두 만나며, 다시 정문으로 돌아오게 되어있다. 공원으로 들어서는 문은
정문 1개 뿐이며, 공원 밖에는 경작지가 펼쳐져 있다. 즉 밭 한복판에 숲이 있는 것이다.


▲  송석대(松石臺)

정문 동쪽(진행 방향 왼쪽)에는 송석대란 높은 대가 있다. 이곳은 정헌 김용징(靜軒 金龍徵)
이 후학을 가르치던 곳으로 1850년대 말에 그의 제자들이 지었다. 구릉지를 다듬어 3개 층으
로 겹돌을 쌓아 터를 다진 다음 반지름 4.5m의 원형 정자를 닦았는데, 현재 정자는 없고 완전
히 개방된 공간으로 있으며 매년 여름마다 애월문학회에서 시낭송회와 출판기념회를 열고 있
어 문학 공간의 기능은 녹슬지 않았다.


▲  인상정(仁庠亭)

송석대 맞은편(정문 서쪽)에는 인상정이라 불리는 공간이 있다. 이곳은 천문에 능했던 현일문
(玄日文)이 공부를 했던 곳으로 1889년 그의 후학들이 구릉지를 다지고 인상정이라 불리는 공
간을 지었다. 송석대처럼 정자가 없는 그냥 열린 공간으로 그 한복판에 오래된 나무가 자리하
여 고품격의 그늘을 선사한다.


▲  난대림 속에 나를 숨기다 (공원 서쪽 숲길)
아무리 따스한 남쪽이라고 해도 동남아나 아프리카가 아닌 이상은 이렇게까지
푸른 잎을 대놓고 드러내며 무성하기가 쉽지가 않은데 이곳은 계절의
변화도 안중에 없는 별천지 같은 곳이다.

▲  밀림처럼 우거진 서쪽 숲길 (1)

▲  밀림처럼 우거진 서쪽 숲길 (2)

통행 편의와 식물 보호를 위해 서쪽 숲길과 동쪽 숲길 일부에 나무데크길을 닦았다.


▲  정낭이 걸쳐진 포제단(酺祭壇) 출입구

금산공원 한복판에는 돌담에 둘러싸인 포제단이 있다. 이곳은 납읍리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
마을의 성역으로 서쪽에 제주도 스타일의 정낭이 있는 출입구가 있어 그곳으로 들어서면 된다.
허나 제삿날을 제외하면 정낭이 모두 걸쳐져 있어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다행히 정낭이
그리 높지가 않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살짝 안으로 발을 들였다.

▲  포제청 건물
제사 때를 제외하고는 늘 적적한 모습이다.

▲  난대림에 둘러싸인 포제단 뜨락
저 끝부분에 3개의 단이 있다.


이곳에서 지내는 제사를 '납읍리 포제','납읍리 마을제'라고 하는데, 남자들이 행하는 유교적
마을제인 포제와 여자들이 하는 무속 마을제인 당굿을 같이 벌이고 있다. 예전에는 음력 정월
초정일(初丁日)에 춘제(春祭)를 지냈고, 7월 초정일에 추제(秋祭)를 지냈으나 20세기 중반 이
후부터는 춘제만 지내고 있다. 그리고 마을에 일이 생겨서 정월 초정일에 제를 지내지 못하는
경우, 그 다음 중정일(中丁日)에 제를 지내는 융통성도 가지고 있다.
포제단으로 들어서면 남쪽(오른쪽)에 포제청이란 기와집이 있다. 이곳은 제를 지내고 준비하
는 건물로 원래는 초가였으나 최근에 기와집으로 손질했다. 북쪽(왼쪽)에는 3개의 조그만 석
단(石壇)이 누워있는데 이들 단은 손님신을 봉안한 포신단(酺神壇), 마을의 수호신을 봉안한
토신단(土神壇), 홍역이나 마마신을 봉안한 서신단(西神壇)이다.
예전에는 포신, 토신, 서신에게 모두 제를 올렸으나 홍역과 마마가 사실상 사라진 상태라 포
신과 토신에게만 제삿밥을 올린다.

이곳 제사는 '납읍리 마을제'란 이름으로 제주도 지방무형문화재 6호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  현무암으로 닦여진 3개의 제단 (서신단, 토신단, 포신단)
제단 앞에는 술이나 향로 등을 두는 조그만 돌이 있고, 단 위에는 위패 역할을
하는 키 작은 돌이 세워져 있다.

▲  금산공원 동쪽 숲길 (1)

▲  금산공원 동쪽 숲길 (2)

▲  주황색 피부를 드러낸 납읍리 감귤

금산공원을 1바퀴 둘러보니 1시간이 훌쩍 지났다. 서쪽 숲길로 들어서 포제청을 찍고 동쪽 숲
길로 나왔으니 공원의 공개된 공간은 모두 본 셈이다. (통제구역은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음)

이렇게 금산공원과의 인연을 마무리 짓고 다음 답사지로 가고자 제주도 간선 291번을 타고 한
림읍으로 나왔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금산공원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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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해돋이 명소이자 우리나라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나들이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 고구려 유적의 성지, 서울 아차산 '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5보루)

▲  아차산 산줄기

▲  아차산3보루

▲  아차산4보루

 


 

아차산은 해발 295.7m의 뫼로 용마산과 망우산을 거느리고 있다. 서울 강북 지역의 동남
쪽 벽으로(동북쪽 벽은 수락산, 불암산 산줄기) 서울 광진구, 중랑구, 경기도 구리시(九
里市)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예전에는 중랑구 봉화산(烽火山)까지 아차산의 영역이었
다. (봉화산에 있는 봉수대를 '아차산 봉수대'라 부름)

아차산은 음은 같지만 한자 표기만 해도 무려 4개(阿嵯, 峨嵯, 阿且. 峩嵯)씩이나 되는데,
삼국시대에는 아차(阿且), 아단(阿旦)이라 불렸으며, 고려 때 지금 널리 쓰이는 '아차(峨
嵯)'란 이름이 나타난다. ('峩嵯'도 이때 나타남)
아단(旦)이란 이름은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세우고 이름을 단(旦)이라 고치자 제
왕의 이름을 피하는 법칙에 따라 '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
으며, 조선 때는 악계산(嶽溪山), 남쪽을 향해 솟아오른 산이라 하여 남행산(南行山)이란
별칭도 있었다.


겉으로 보면 수도권에 널린 흔한 산처럼 보이지만 천하가 서울 도심의 주산(主山)인 북악
산<北岳山, 백악산 342m>보다 더 키가 작은 이 산을 격하게 주목하고 있다. 바로 고구려(
高句麗)의 영광스런 역사가 두텁게 깃든 거룩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특히 차디찬 북방(北
方)을 제외한 남한 영역에서 고구려 유적이 몰린 유일한 곳으로 그 값어치는 남다르다.

양아치 같은 강대국에 둘러싸여 고통받고 있는 우리나라는 안그래도 좁은 땅 남북으로 갈
라져 70년 이상 무의미한 소모전만 벌이고 있다. 그런 우리에게 너른 대륙과 바다를 경영
했던 고구려와 발해(渤海), 백제, 옛 조선(고조선), 금(金)에 대한 향수와 아쉬움은 실로
크다. (저 잃어버린 방대한 옛 땅을 언제나 되찾을꼬??)

1990년대까지만 해도 아차산은 인지도가 낮은 동네 산이었다. 그러다가 1989년 아차산 일
대에 큰 산불이 났는데, 이를 진화하는 과정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이어진 정체 불명
의 돌무지와 산봉우리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파인 구덩이가 여럿 발견되었다. 알고보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아차산 장성(長城)과 보루들이었다.
아차산장성은 아차산에서 용마산, 망우산까지 이어지던 성으로 돌성과 토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차산 주능선을 반달 모양으로 좌우 2겹으로 감싼 형태로 조성되었는데, 중랑천
을 건너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인 배봉산(拜峰山, 해발 110m)까지 이어졌다는 설이 있으며,
백제의 첫 도읍으로 서울 한강 이북 어딘가에 있었다는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의 흔적으
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들로 인해 아차산에 대한 호기심이 커진 구리시는 1994년 아차산 일대를 조사하여 15개
의 보루를 발견했고, 1997년 이후, 아차산4보루를 비롯해 땅 속에 잠긴 보루와 유물을 끄
집어냈는데, 이들이 거의 고구려 것으로 밝혀지면서 고구려 유적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남
한에 한줄기 단비를 선사했다.

보루의 무더기 출현에 힘입어 아차산 일대가 고구려 유적의 성지로 격하게 떠오르자 서울
광진구(廣津區)와 경기도 구리시가 이곳을 둘러싸고 서로 고구려의 도시임을 자처하며 경
쟁을 벌였고, 서울의 새로운 꿀단지로 부상하면서 등산/답사 수요가 크게 늘었다. 게다가
완만한 산세로 야간 등산(야등) 수요까지 늘어나면서 야등의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받게
되었다.
이처럼 든든한 후광인 고구려 유적과 완만하게 아름다운 산세, 그리고 일품 조망(眺望)으
로 관악산과 수락산(水落山)의 염통을 제대로 쫄깃하게 만든 아차산, 하지만 만약 고구려
유적이 없었다면 아차산은 그저 그런 평범한 산으로 조용히 누워있었을 것이다. 그러고보
면 사람이나 산이나 때와 조건을 정말 잘 만나야 된다. 만약 그가 이북이나 만주 같은 곳
에 누워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꿀단지는 되진 못했을 것이다.


 

♠  아차산 소나무숲길과 아차산성(阿且山城)

▲  아차산 표석과 사슴 모형등 (친수계곡 입구)

아차산과의 첫 인연은 1991년 중학교 시절이었다. 이후 20년 동안 인연이 없다가 2011년 야간
등산으로 2~3번을 찾았고, 2014년 여름 이후, 주말과 평일 야간 등산으로 발길이 무척 잦아졌
다가 2017년부터 다시 줄고 있다. (2018년에는 1~2번 정도 찾음)
북한산(삼각산), 호암산(虎巖山)과 더불어 나의 즐겨찾기 뫼의 하나라 아무리 많이 가도 질리
기는 커녕 반갑기만 하다. 그 아차산에 퐁당퐁당 빠진 이유는 그곳에 서린 고구려의 흔적 때
문이 아닐까 싶다. (그 다음은 빼어난 절경과 완만한 산세, 일품 조망)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2시, 아차산역(5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아차산으로 인도하
는 골목길을 쫓았다. 언덕길을 10여 분 오르면 동의초교(영화사입구)가 나오는데, 그곳을 지
나면 친수계곡 입구(고구려정 방면 산길)이며, 워커힐쪽으로 고개를 넘어가면 아차산생태공원
이 모습을 비춘다. 우리는 여기서 소나무숲길을 통해 아차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참고로 아차
산생태공원 남쪽에는 아차산 보루의 남쪽 끝인 홍련봉 보루 유적이 있다.


▲  아차산 소나무숲길 입구

아차산생태공원 북쪽에는 소나무숲이 닦여져 있다. 소나무와 들꽃이 어우러진 상큼한 공간으
로 이곳 역시 생태공원의 일원인데 아차산성과 아차산 주능선으로 가려면 이 길로 가는 것이
빠르다. (생태공원과 광나루역 기준임)
소나무가 삼삼하여 따가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힘을 쓰지 못하며 솔내음을 머금은 솔바람이 솔
솔 불어와 벌써부터 피어난 땀과 속세의 무성한 번뇌를 앗아간다. 소나무 그늘에는 들꽃이 가
녀린 미소를 머금으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에 무책임하게 돌을 던지고, 그런 꽃내음과 솔
내음이 어우러져 조촐하게 극락을 연출한다.


▲  아차산 소나무숲길 (1)

▲  아차산 소나무숲길 (2)
소나무가 삼삼하여 제아무리 뜨거운 햇살이라도 이곳만큼은 힘을 못쓴다.

▲  소나무숲길에서 아차산성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길

▲  아차산의 얼굴, 아차산성 - 사적 234호

아차산 남쪽 자락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차산성이 장대한 세월을 머금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아차산생태공원에서 소나무숲을 지나 10여 분 정도 오르면 그 모습을 드러내며, 덥수룩
하게 자라난 수풀에 거의 묻혀있던 것을 성곽을 둘러싼 나무와 수풀을 꾸준히 쳐내면서 서쪽
과 남쪽 성벽도 무리 없이 확인할 수 있다.
허나 아무리 꾸준히 이발을 하고 숯을 쳐내도 대자연의 의해 금세 수풀이 자라 성곽을 가리려
드니 역시나 인간의 피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돌이나 모래알에 불과하다.

아차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나 백제 9대 제왕인 책계왕(責稽王)이 위
례성(慰禮城)과 함께 수축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백제 초기(1~2세기 경)에 국도(國都)
인 위례성 주변 수비와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고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상당히
오래 묵은 성이다.
처음에는 아단성(阿旦城)이라 불렸는데, 5세기 이후부터 단(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변
해 아차산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 한문은 비슷한 모양으로 인해 금석문(金石文)과 판각인쇄
에서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았으며,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달리 하여 '峨嵯山城'이라 쓰는 경우
도 많았으나 문화재청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한자로 선을 그으면서 아차산성(阿且山城)을 정식
명칭으로 삼았다.
하여 아차산의 공식 한자 표기인 '峨嵯山'과 달리 산성은 예전 한자로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아차란 이름 외에 장한성(長漢城), 광장성(廣壯城)이란 별칭도 있었다.

4세기 후반. 고구려의 위대한 군주,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재위 392~413)이 한강 이북을 말
끔히 장악하면서 이곳은 백제의 심장을 겨낭한 고구려의 화살과 같은 곳이 되었다. 위례성으
로 여겨지는 서울 강동/송파 지역이 훤히 바라보이는 잇점을 지닌 아차산을 흔쾌히 활용한 것
이다.
그렇게 위례성(한성)을 새가 땅을 바라보듯 감시하며 기회를 엿보던 중, 개로왕(蓋鹵王)이 무
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국력을 소모하고 고구려의 최대 라이벌이자 동시에 백제 자신의 라이벌
이기도 했던 북위(北魏)에게 사신을 보내 같이 고구려를 도모하자고 요구했다. <백제는 동성
왕(東城王) 시절에 산동반도를 둘러싸고 북위와 크게 경쟁을 벌여 북위의 수십 만 기병을 보
기좋게 묵사발을 만들기도 했음>
허나 그 소식을 들은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크게 발끈하여 3만의 군사를 휘몰
아 한성<漢城, 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을 한성이라 부름>을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화공(火攻)을 이용하여 한성 성문과 도성을 불태웠으며, 개로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을 치던 중, 자신의 장수였던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을 만났다. 이들
은 개로왕의 미움을 받아 고구려에 투항했는데, 왕을 잡고자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의 투항 사실을 알리 없던 개로왕은 크게 안심을 했으나, 그들은 왕에게 절을 하더니 바
로 그의 얼굴을 향해 침을 3번 뱉고 온갖 육두문자를 요란하게 내뱉은 다음 포박해 고구려에
넘겼다.

고구려의 포로가 된 개로왕은 아차산성에서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왜열도와 중원대륙의 무수
한 영토를 거느렸던 백제의 도읍지, 위례성(한성)은 철저히 파괴되어 이 땅에서 영구히 지워
지고 말았다. 바로 장수태왕의 그 만행으로 조선 이후 지금까지 위례성을 찾느라 그야말로 진
땀을 빼고 있는 것이다.


▲  아차산성 서벽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고구려는 아차산성을 보조하고 한강, 중랑천, 서울 동부, 구리 지
역을 효과적으로 수비하고자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조그만 보루를 주렁주렁 달아놓았다.
이곳에 설치된 보루는 발견되지 않은 것까지 고려하여 최대 30개 정도로 여겨지며, 이들 보루
는 북쪽으로 봉화산(烽火山)과 수락산, 사패산(賜牌山), 불곡산, 양주, 연천 지역까지 이어지
고 있는데, 주목할 점은 오직 서울과 경기 북부에서만 발견되는 고구려의 독특한 요새라는 점
이다. 그만큼 이 지역의 중요성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 시절 온달(溫達)이 이곳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
하며, 이후 신라가 접수하여 고구려를 막는 요충지로 삼았다. 한때는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
불리기도 했고, 7세기 중반까지 고구려가 종종 건드렸으나 결국 점령하지 못했다.
허나 8세기 이후 아차산의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서서히 버려지기 시작했고, 장대한 세월과 자
연에 의해 그 견고하던 산성이 헝클어지면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  아차산성 안내문의 내용들

산성의 둘레는 약 1,125m로 산허리에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테뫼식 성이다. 아차산 남쪽 자락
에서 워커힐 뒤쪽까지 이어져 있는데, 동문터와 남문터, 서문터, 수구(水口)터, 곡성(曲城)터,
장대(將臺)터, 건물터, 온달장군이 마셨다고 전하는 우물이 남아있다. 장대(장대터)는 전시에
는 장수들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제사 공간으로 쓰였다고 하며, 커다란 왕개벚꽃나무가 자라
고 있는데, 덩치로 봐서 100~2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성벽 높이는 평균 10m, 성 내부 면적은 약 103,375㎡이며, 광나루까지 성을 쌓은 흔적이 발견
되었으나 워커힐이 들어서면서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1997년과 1999년 광진구에서 부분 발굴조사를 벌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 토기와 기와파편, 흙
으로 만든 인물상, 철로 만든 솥과 쟁기날 등을 건졌고, 신라의 북한산성이 대략 이곳임이 밝
혀졌다.
그래도 아직 건드리지 못한 부분이 많아 애태우던 중, 2015년 광진구가 문화재청의 예산을 지
원받아 한국고고환경연구소와 함께 아차산성 남벽과 배수구 일대 4,575
를 대상으로 발굴조
사를 벌였다. 그 결과 여러 흥미로운 존재들이 햇살을 보았는데, 고구려의 연꽃무늬 기와장식
인 '연화문와당'이 나왔고 (인근 홍련봉1보루에서 발견된 와당과 비슷한 형태임) 남벽 90m 외
벽에서는 신라 건축의 특징인 외벽 보축(補築) 시설과 물을 내보내는 출수구 3곳, 내벽에서는
입수구 2곳이 나왔다. 또한 망대터에서는 내외성벽을 비롯한 치성(雉城)과 방대형 시설이 나
왔으며, 신라의 연화문와당 10여 점과 '북한산성'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신라의 북
한산성이 이곳임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었다.

2018년 7월에는 망대터 일대에서 건물터 10동과 백제와 고구려, 신라, 고려 초기 토기와 기와
등 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깨진 구리거울 조각과 모형 철제마(鐵製馬), 철촉 등의 철기류도
나와 삼국시대 때 산성 안에서 이루어진 제사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외에 남
벽 일대에서 사다리꼴 형태의 집수시설과 목간, 씨앗 등이 나왔고, 집수시설 위에 닦여진 배
수로에는 부여 부소산성 출토품과 비슷한 대형 철촉이 나옴)

허나 아차산성의 적지 않은 부분이 워커힐 사유지로 묶여 있어 아직까지도 조사하지 못한 부
분이 많다. 산성은 물론 그 주변까지 싹 뒤집으면 보다 많은 유물과 숨겨진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것인데 그 점이 몹시 아쉽다.

1999년 이후 산성을 복원 정비하였고, 그들의 건강과 사유지 보호를 위해 산성 주변에 철책을
둘러놓아 출입을 막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 널린 산성(山城) 유적 중의 거의 유일하게 접근
이 통제된 까칠한 성곽이 되었다. <휴전선과 민통선 지역의 성곽 유적은 제외>
2014년 이후부터 서울시와 워커힐이 협의하여 산성을 개방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나 아
직까지도 감감무 소식이다.

서벽과 북벽 일부, 남벽 일부는 산길에서 휴전선 너머를 바라보듯 만날 수 있으나 그 외는 어
림도 없으며, 산성을 가리고 앉은 수풀을 싹 밀어버려 예전보다 단정한 모습이 되었으나 대자
연의 위대한 힘으로 금세 수풀이 자라나 성벽을 가리려고 드니 그나마 서벽만 제대로 눈에 넣
을 수 있다.
다만 겨울 제국(帝國) 시절에는 겨울이 수풀을 알아서 털어가기 때문에 북벽과 남벽을 그나마
제대로 살필 수 있다.

아차산성 내부를 정당하게 둘러보고 싶다면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아차산 생태공원에 있음)'
을 찾거나 '한강문화재연구원'에 도움을 청해보자. 나도 아직 아차산성 내로 들어간 적이 없
다. 그곳이 민주화(?)되기를 몇 년째 손꼽아 기다리고 있지만 그 민주화란 것이 참으로 힘들
다. 마치 이 땅의 민주화가 힘들게 자리를 잡은 것처럼 말이다.

* 아차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5-11 (워커힐로 177)


▲  아차산성 서벽앞 산길 - 철책 너머가 금지된 성, 아차산성이다.

▲  아차산성 북벽 - 철책과 자연에 꽁꽁 감싸여 들어갈 틈이 없다.

▲  아차산성과 고구려정 사이에 자리한 낙타고개

아차산성 서쪽 옆구리를 지나면 낙타고개가 나온다. 이곳은 아차산성이 있는 남쪽 봉우리와 1
루로 이어지는 능선 사이에 쑥 들어가 있는데, 그 모습이 낙타의 목이나 등부분의 굽은 모양처
럼 생겼다 해서 낙타고개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직진하면 보루가 주렁주렁 달린 아차/용마산 주능선으로 이어지며, 서쪽은 친
수계곡, 동쪽은 구리시 아천동이다.



♠  아차산 주능선 더듬기

▲  무덤 갈림길

낙타고개에서 아차산 정상까지는 야간 등산에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로 길이 잘 닦여져 있다.
그 길을 조금 가면 석축 위에 둥지를 튼 조그만 무덤이 나오는데,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린
다. 아차산 정상과 주능선, 보루가 목적이면 왼쪽 계단길을, 대성암(범굴사)과 구리 지역을
원한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된다.


▲  무덤 갈림길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무덤 갈림길에서 주능선을 오르면서 뒤와 옆을 살짝 돌아보는 여유를 누려보자. 그러면 아주
기가 막힌 조망이 두 눈으로 바로 달려올 것이다. 아차산이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 주
변이 거의 평지라 일품 조망을 누릴 수 있다. 이런 장쾌한 조망은 아차산 정상을 지나 용마산
산줄기까지 이어지는데, 이 일품 조망 때문에 고구려가 보루를 잔뜩 달아 군사기지로 삼았던
것이다.


▲  해맞이광장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1)
광진구와 송파(잠실), 강남, 대모산 지역

▲  해맞이광장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2)
아차산성이 있는 아차산 남쪽 봉우리와 강동, 송파 지역

▲  해맞이광장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3)
한강과 구리, 암사대교, 강동구, 하남시 지역

▲  광진구 해맞이광장 비석

무덤갈림길과 1보루 사이에 해맞이광장이 조촐하게 터를 닦았다. 이곳은 묵은 1,000년이 지고
새로운 1,000년이 도래한 2000년 1월 1일 아침 7시, 광진구청에서 하늘과 가까운 이곳에서 새
천년 해맞이 행사를 가지며 그것을 기리고자 비석을 세우고 해맞이 광장으로 삼은 것이다. 여
기서는 지는 해는 물론 뜨는 해도 맞이할 수 있으며, 광진구가 야심차게 닦은 서울의 주요 해
돋이 성지로 매년 1월 1일 아침마다 해맞이 행사가 절찬리에 열린다. (그때는 산이 무너질 정
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정신이 하나도 없음)


▲  아차산1보루 - 사적 455호

해맞이광장을 지나면 두툼히 살이 오른 아차산1보루터가 모습을 비춘다. 이곳이 넘버원 1보루
가 된 것은 별 이유 없다. 남쪽을 기준으로 발견된 순서대로 나열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해발 250m에 자리한 1보루는 봉우리를 활용해 닦은 것으로 1994년 발굴조사 때 고구려 토기가
여럿 나왔다. 동쪽과 남쪽에서 보루 성벽이 확인되었는데, 보루의 정체가 알려지기 훨씬 이전
부터 보루의 남쪽 성벽 흔적을 밀어버리고 산길을 냈으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는 보루 주변
에 나무 목책을 둘러 접근을 통제하고 그 옆구리에 우회길을 내었다. 그러다가 2015년 이후로
다시 보루를 개방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아차산 보루 중 가장 남쪽으로(홍련봉 보루는 제외) 5보루와 함께 아차산성과 아차산 정상 사
이를 이어주는 요새였으며, 동쪽과 남쪽, 서쪽이 확 트여있어 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다.
특히 5보루와 남쪽 해맞이광장과 더불어 서울의 이름난 해돋이 명소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1
월 1일만 되면 사람들로 완전 북새통을 이룬다.

이곳에 들어앉아 천하를 굽어봤을 1보루는 장대한 세월의 매서운 흐름과 대자연의 오랜 괴롭
힘 앞에 완전히 녹아내리고 그 터만 겨우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알려줄 따름이다.
5보루와 함께 보루의 구체적인 생김새는 아직 파악되지 못했으나 고구려의 축성 양식과 복원
된 4보루를 흔쾌히 참고해 보루의 모습과 거기서 머물던 고구려 군사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
려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폐허의 현장이고, 그들의 모습을 남긴 뚜렷한 사진
이나 기록도 없으니까 말이다.

고구려는 아차산을 비롯하여 홍련봉, 구의동, 자양동, 용마산, 망우산, 수락산, 봉화산, 사패
산, 천보산, 양주 불곡산, 연천 지역까지 많은 보루를 설치하여 아차산성 등의 주요 성을 보
조하며 주변 지역을 지켰는데, 이들 보루 중,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아차산 보루 6곳, 용마산
보루 7곳, 망우산 3곳, 수락산 1곳, 홍련봉 2곳을 '아차산 일대 보루군'으로 한 덩어리로 묶
어 국가 사적 455호로 삼았다.


▲  아차산1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광진, 성동구, 동대문구 지역)

▲  아차산1보루에서 바라본 아차산5보루

▲  아차산5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5보루터는 해발 267m 봉우리에 둥지를 튼 보루로 둘레 158m, 내부 면적은 1,818㎡ 정도
이다. 봉우리를 활용하여 보루를 다졌는데, 보루 성벽은 죄다 사라지고 겨우 흔적 일부만 남
아있는 상태이다. 북쪽 비탈면에 석축 일부가 남아있으나 보존을 위해 흙으로 덮었으며, 보루
를 잡아먹은 봉우리는 예전보다 다소 살이 두툼해진 상태이다.

그의 정체가 밝혀지기 이전에는 주능선 산길이 보루 복판을 가로질러 흘러갔으나 보루임이 밝
혀진 이후에는 그의 건강을 위해 서쪽에 우회길을 내었다. 다른 보루와 달리 신라 후기 토기
가 여럿 출토되었고, 봉우리 모습이 마치 신라 스타일의 고분과도 비슷해 이를 두고 신라(新
羅)가 기존의 고구려 보루를 밀어버리고 무덤을 쓴 것으로 보는 견해도 덧붙여 전해온다. 그
러고보니 정말 신라 무덤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나 신라는 산능선에 무덤을 잘쓰지 않는 편이
라 이 역시 설에 불과하다.

5보루터는 쿨하게 개방되어 있다. 길이 봉우리 남북으로 닦여져 있으며, 그 봉우리에 올라서
면 1보루를 비롯해 아차산 능선과 한강, 서울 강동구와 송파구, 광진구, 강남구, 대모산, 구
리시, 남양주시 서부 지역, 하남시 지역이 훤히 시야에 잡혀 왜 이곳에 보루를 쌓았는지 십분
이해가 된다.


▲  아차산5보루 남쪽 부분

▲  아차산5보루터 돌탑에서 바라본 천하
푸른 한강을 사이에 두고 구리시와 남양주시(도농, 금곡, 덕소), 서울 강동구,
하남시가 사이좋게 시야에 들어온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

5보루를 지나 계속 주능선을 고집하면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로 지정된 키 작은 소나무를 만
나게 된다.
아차산이 광진구의 소중한 꿀단지라 광진구가 그에게 들이는 정성은 참 대단하다. 그만큼 기
대하는 것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 정성의 하나로 2009년 가을, 아차산에 있는 소나무
중 괜찮은 것을 골라 아차산의 새로운 명물로 키우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바로 이 나무가 그
대상이 되어 명품소나무 1호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 소나무는 바위 틈에 단단히 뿌리를 내려 천하를 굽어보고 있는데, 가지는 굴곡이 자연스러
우며, 피부가 붉고 아름다워 단아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나무의 나이는 40~50년 남짓으로
여겨지며, 나무 곁에 천하를 굽어보게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 조망대에서 바라본 용마산, 아차산 북쪽 줄기

▲  아차산 명품소나무 2호

명품소나무 1호를 지나면 바로 명품소나무 2호가 나온다. 이 나무는 밑둥부터 여러 가지로 솟
아 올라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모습이 마치 중원대륙과 만주를 제패하던 고구려의 기상을 담
았다하여 명품소나무 2호로 지정되었다. 그 역시 1호 나무와 함께 광진구청의 보살핌을 받으
며 아차산의 차세대 명물을 꿈꾼다.


▲  명품소나무2호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능선길

▲  아차산의 정상인 아차산3보루 유적 - 사적 455호

명품소나무 2호에서 6보루 입구를 지나면 아차산3보루가 있는 너른 봉우리가 나온다. 이곳은
아차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해발 295.7m(296m)이다.

3보루는 아차산에 깃든 보루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성벽 둘레는 약 450m, 내부 면
적은 약 6,500㎡로 여겨지며, 정상부에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어 아차산 일대 보루 중 가장 규
모가 크다. 2005년 보루 일부를 들추면서 배수로와 건물터, 기단, 성벽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디딜방아의 불씨로 여겨지는 존재가 나와 이곳이 아차산 식량 창고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하지만 겨우 보루터의 일부만 조사된 상태라 하루 속히 나머지를 모두 들춰야만 이곳에 정확
한 기능과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  허전한 모습의 아차산3보루

3보루터를 품은 봉우리는 마치 대머리처럼 황량한 모습이다. 봉우리 외곽은 나무가 무성한데
반해 봉우리 일대는 땅에 바짝 붙은 잡초와 탈모된 흔적 마냥 풀이 벗겨진 흙색 길, 그리고
잘려진 나무 밑둥이 대부분을 이루기 때문이다.


▲  아차산3보루터 봉우리 정상
정상 주변 나무는 보루터 보호를 위해 대부분 밀어버렸다.

▲  아차산3보루터 봉우리
이곳에 있었을 3보루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 상상의 나래를 한번
살찌워보자. 이것이 바로 아차산이 우리에게 주는 숙제이다.

▲  아차산3보루 돌탑
이곳을 스쳐간 사람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돌탑을
이루고 있는 돌의 상당수는 3보루 성돌과 이곳에 있던 건물터
주춧돌로 여겨진다.

▲  아차산3보루 남쪽 끝
남쪽 끝부분은 경사가 조금 각박하다.

▲  아차산3보루 북쪽 끝
계단을 이루고 있는 돌은 보루터의 일부이다.


아차산3보루에서 북쪽으로 10분 정도 더 가면 아차산4보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글의 분량상
본글은 여기서 끝. 4보루 이후부터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아차산4보루 - 사적 455호

▲  아차산4보루 내부

▲  아차산4보루 저수시설터

* 아차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광장동,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 2019년부터 본인 답사기에서 교통정보와 관람정보는 제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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