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제주도 한라산 (백록담~탐라계곡~서해바다)


' 제주도 한라산(漢拏山) 기행 - 2005년 8월 26 ~ 28일'
'하편 ― 언제나 분화(焚火)를 꿈꾸는 한라산 백록담
백록담 ~ 왕관릉 ~ 탐라계곡 ~ 서해바다 1000리 ~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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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담에서' ~신석정(辛夕汀)

한라산은 구름 속에 산다
좀체 얼굴을 내놓지 않는다
176센티미터의 내 키에도 보이고 걸리는 게 하도 많아
자주 눈을 감아야 하는데
아무리 너그러운 한라산이기로
1950미터의 키다리고 보면
때론 지치도록 아니꼬와
자주 구름으로 낯을 가리는 수 밖에.....

나비 한 마리 옴낫 없고
휘파람새도 울지 않는 태고(太古) 속
빗발을 몰고 가는 바람에
구름도 백록담에 내려 앉는다
물안개 자욱한 백록담에 손을 씻는
8월 한 낮이 으시시 치웁다.
인젠 섣불리 악수(握手)할 수 없는
손을 자랑하리라

나도 이대로 한라산 백록담 구름에 묻혀
마소랑 꽃이랑 오래도록 살고파
까마득 하산(下山)을 잊어버리다.


♠ 한라산의 얼굴, 그러나 그 조용한 얼굴 뒤로 화산 분화의 야욕을 꿈꾸는 ~ 백록담(白鹿潭)



우리나라―북한 제외―에서 제일 높은 곳, 그리고 하늘과 제일 가까이 맞닿은 곳은 해발 1950m의 한라산이다.
그 꼭대기의 아랫쪽 그러니까 해발 1850m고지에는 한라산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백록담(白鹿潭)이 신비와 고요에
둘러쌓인 채 그렇게 자리해 있다.

백록담은 말 그대로 하얀 사슴의 못이라는 뜻으로 지금은 저렇게 평범한 웅덩이처럼 보이지만 2000년 전까지만
해도 화산폭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무시무시한 분화구(噴火口)였다.

백록담 주변에는 온갖 고산식물들이 자라고 있는데 특히 '눈향나무덩굴'이 백록담을 수비하듯 빼곡히 깔려져
있으며, 봄에는 진달래의 황홀한 향연(饗宴)이 연출되는 곳이기도 하다.
한라산 정상을 물들인 진달래가 지면 녹음(綠陰, 여름)이 되고, 그것이 지나면 온 산은 알록달록 단풍으로
불타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단풍이 낙엽으로 화(化)해지면 보통 이듬해 4~5월까지 겨울 제국주의(帝國主義)의
상징인 눈의 지배를 받는다.
이처럼 한라산 정상에 쌓인 봄 눈을 녹담만설(鹿潭晩雪)이라 하여 제주 12경 중, 제 6경으로 꼽는다.

백록담을 바라보는 한라산의 꼭대기, 즉 주봉(主峯)을 '부악'이라고 부른다. 보통 제주도는 산(山)이나 봉(峰)
대신 악(岳)이나 '오름'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하는데, 간도(間島)의 장백산맥(長白山脈)에서 시작된 백두대간
(白頭大幹)의 힘찬 줄기는 지리산에서 남해바다를 훌쩍 뛰어넘어 이 곳 한라산에서 그 끝을 맺는다.

우리나라의 삼신산(三神山)―금강산(金剛山), 지리산(智異山), 한라산―의 하나로 신성시되고 있는 한라산
(漢拏山)의 뜻은 별을 끌어당긴다. 은하수를 끌어당긴다는 뜻으로 손을 들어 은하수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산이란 뜻이다. 그만큼 하늘과 가깝다는 이야기, 그래서 꼭대기에 서면 하늘이 매우 가깝게 보여 잘만 하면
꿈에 그리던 천상세계(天上世界)가 보일 지도 모른다.

백록담은 예로부터 사슴들이 뛰어 놀던 곳이라고 하는데, 아주 먼 옛날 한라산에 신선(神仙, 그가 한라산의
산신인지 아니면 별개의 인물인지는 모르겠음)
이 살고 있었다.
매년 복(伏)날이 되면 선녀들은 하늘에서 하강(下降)하여 백록담에서 목욕을 했는데 신선은 그 날만 되면
반강제로 한라산의 북쪽인 방선문(訪仙門)으로 내려가 그들이 하늘로 올라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던 어느 복날, 미처 방선문으로 내려가지 못한 신선은 그만 선녀의 옷 벗는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
황홀에 빠져 정신을 잃은 채 그들을 바라보는 신선의 모습을 선녀들이 발견하고는 혼비백산하여 서둘러 하늘로
올라가 옥황상제(玉皇上帝)에게 그 사실을 고자질하니 이제 발끈한 옥황상제는 그 불쌍한 신선을 사슴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후 사슴으로 변해버린 신선은 매년 복날마다 백록담에 나타나 슬피 울부짖었다고 한다. 아마도 옥황상제와
그 선녀에 대한 원망에 표현이겠지.
그래서 흰 사슴의 연못이란 뜻에서 백록담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예전에는 '부악(정상)'과 백록담까지 접근이 가능했으나 속인(俗人)들의 무수한 왕래로 인해 정상과 백록담
주변 능선이 붕괴될 위험에 이르게 되었고, 백록담 또한 속인들의 더러운 때가 묻힌 손과 발로 점점 더러워지니
몇년 전부터 천연기념물 보호를 내세워 백록담과 정상 부분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그래서 백록담의 동쪽 봉우리(1938m)만 접근이 가능하며 거기서 백록담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데, 대신 겨울에는
백록담까지 접근이 가능하다고 한다. 새하얀 눈이 정상과 백록담을 보이지 않게 가려놓으므로..

'백록담의 물을 반드시 마시고 말겠다' 의지를 다지며 힘들게 올라온 사람들, 그저 영월 선돌에서 아래 서강
(西江)을 바라보듯 해야 되니 그 아쉬움은 매우 크다 할 것이다. 그냥 백록담을 바라보며 마음으로 그 물을
마시는 수 밖에.. 그렇지만 이는 모두 우리 인간들이 자초한 일이다.

* 한라산 주요 등산로
1. 성판악 ~ 사라악 ~ 진달래 대피소 ~ 백록담 (9.6km, 약 3시간 30분 ~ 4시간)
2. 관음사 주차장 ~ 탐라계곡 ~ 용진각 대피소 ~ 백록담 (8.7km, 약 5시간)
3. 어리목 ~ 윗세오름 대피소 (4.7km, 약 2시간)
4. 영실 주차장 ~ 윗세오름 대피소 (3.7km, 약 1시간 30분)

* 한라산 오를 때 유의사항
1. 지정 코스를 멋대로 벗어나거나 통제구역에 함부로 들어가면 한라산의 큰 노여움을 받을 수 있다.
집에 곱게 돌아가고 싶다면 지정 코스만 이용해라.
2. 지정 시간 내에 특정 장소에 도착을 못하거나 못할 것 같다면 과감히 미련을 버리고 내려가라.
3. 샘터가 거의 없으므로 물은 두둑히 가져가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이다.
4. 한라산 등산로는 거의 돌밭이므로 한라산 전용 등산화를 신고 가는 것이 발에 편하다.
5. 한라산의 날씨는 정말 지멋대로이다. 혹 비가 내릴지도 모르니 우의를 가져가라.
(다행히 우리가 갔을 때는 비가 내리지는 않았다)
6. 쓰레기는 성판악 휴게소나 관음사 주차장에 버리도록 해라.
7. 한라산 전체는
천연기념물 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담배를 피거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돌, 식물, 동물
채취 등을 하지 마라. 문화재 보호법에 걸린다.
8. 한라산 종주(성판악 ~ 백록담 ~ 관음사)를 하고 난 후, 몇 일간은 다리가 꽤 고달플 것이다. 그것을 각오하고
산행을 하라. 그 때 같이 올라간 이는 그 휴유증으로 한달 가까이 병원에 다니고 한약방가서 침을 맞았다고
하더라.


▲ 저 곳이 해발 1950m, 한라산의 정상인 '부악'
지금은 접근이 통제되어 백록담의 동쪽 봉우리(1938m고지)에서 이렇게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 한라산의 정상인 '부악'
저렇게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백록담에서 정상까지는
해발 90m의 차이가 난다.
마치 커다란 운석에 직격탄을 맞은 듯, 움푹 패인 한라산의 정상부(頂上部),
보면 볼 수록 신기함 그 자체..

▲ 백록담(白鹿潭)
구름이 자신의 얼굴을 비쳐 보며 매무새를 다듬는 하늘의 거울이다.
80m 위에서 바라본 못의 크기가 저만하니 바로 앞에서 보면 얼마나 크겠는가?
비록 백두산의 천지(天池)만은 못하지만, 못의 둘레는 약 300m정도이며 물고기는 살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높은 산꼭대기에 저런 못이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뿐.. 이게 모두 자연의
위대한 힘이 아니던가..?

▲ 2천년 전, 제주도 전체를 비극으로 몰아넣었던 백록담
그저 평범하고 조용해 보이는 하늘의 못, 백록담.. 예전에는 사람들이 저 곳에 들어가 물을
마시기도 하고, 세수도 하고, 심지어는 선녀들을 흉내내며 목욕도 했었다.
이처럼 얌전하기만 해 보이던 백록담, 그러나 2천년 전까지만 해도 저 못은 화산재와 용암으로
뒤덮힌 무서운 분화구(噴火口)였다.

한라산은 전형적인 화산(火山)으로 그의 마지막 정력(?) 발산은 서기 1세기 경에 있었는데
그 화산폭발로 제주도 거의 전역이 화산재와 용암으로 뒤덮이면서 섬에 있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흔히 이탈리아의 폼페이우스 화산의 비극만 생각하는데, 우리나라에도 그에 버금가는 화산
폭발의 대비극이 있었다.

화산폭발로 거의 전멸을 당한 어쩌면 지금의 제주도 사람들의 조상에 대해서 내가 즐겨 읽는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에 의하면
'마한(馬韓)의 서남 해상(海上)에 큰 섬이 있는데, 이를 주호(州胡)라고 한다. 거기 사람들은
덩치가 작고, 모두 머리를 깎아 마치 선비족(鮮卑族) 같다. 소와 돼지를 잘 기르고 옷은 가죽으로
만들었으나 상의(上衣)만 입고, 하의(下衣)는 없으므로 거의 나체와 같다. 언어는 한인(韓人)
과 같지 않으며, 배를 타고 한(韓, 마한, 변한, 진한)에 왕래하면서 교역한다'

화산폭발 이후, 운 좋게 살아남은 몇몇 사람들은 그 폐허 위에서 다시 삶을 일으켰고 그들을
이끌었던 지도자가 삼성혈(三姓穴)에서 솟아났다는 이른바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로 생각된다. 또한 이들이 땅에서 솟아났다는 것은 용암으로 폐허가 된 대지에서
다시 세력을 일으켰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 옛날을 꿈꾸는 못 ~ 백록담
백록담이 일개 못에 불과하다 하여 무시하지 마라.
현재 한라산은 죽은 화산도 아닌 잠시 쉬고 있는 휴화산(休火山)이다.
한라산이 곱게 얌전히 있는다 하여 그를 무시한다면 큰 오산이다.

한라산은 꿈꾼다. 화산폭발을. 그리고 백록담도 화산재와 용암으로 뒤덮이던 자신의 옛 모습을
그리워 한다.
충분히 휴식을 취하며 힘을 모아둔 한라산은 언젠가 다시 젊은 시절을 상기하며 상상하지도
못할 거대한 장난을 부릴 지도 모른다.
만약 그 때가 된다면 한라산의 용암과 화산재가 당신들 곁으로 불쑥 찾아갈지도 모른다.
인간들이여~ 부디 오만에 빠지지 말고 자연에 거역하지 말고, 제발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한라산이 언제 180도 돌변하여 2천년 전의 그 사건처럼 그대들을 처절하리만큼
응징할 지도 모르리라.

▲ 백록담의 남쪽 능선 (2장)
붕괴의 위험이 있어 몇 년째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한라산의 정상 아닌 정상(1938m)에 이르니 정말 헤아리기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나는 이미 올라온 일행들과 합류하여 그들과 함께 열심히 사진 모델이 되었지. 그저 남는 것은 사진
뿐이라면서..
사진을 찍는 건 좋지만 어떤 이들은 출입금지선을 넘는 행동까지 서슴치 않는다. 그만큼 백록담과 가까워지고
싶어서 그렇겠지만. 그런 건 한라산에 대한 무례가 아닐까?

정상에서 출입금지선 난간에 의지하며 저 아래에 펼쳐진 백록담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백록담이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사슴은 좀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다시 용암을 내뿜을 백록담을 보면서 왠지 소름이
끼친다. 저 조용한 못이 과연 180도 그렇게 변할까 싶어서..
자고로 조용한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는데, 백록담도 혹 그런 것일까? 제발 내 세대에는 그런 일이
없기를 마음 속으로 간절히 빌어보았다.

14시 10분, 2명의 여인과 함께 슬슬 관음사(觀音寺) 쪽으로 하산하기 시작했다.
자고로 산의 정상에 왔으면 그 다음 사람들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는 것은 당연한 것. 너무 오래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반드시 그 탈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내려가면서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관음사로 가는 길은 성판악 코스보다 거리도 1km 짧고, 내려가는
길인데 왜 성판악 코스보다 1시간이 더 걸리는 것일까? 그러나 정작 내려가보니 그 이유를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바로 성판악 코스보다 상태가 길의 상태가 더 안좋기 때문이다.

▲ 어지럽게 널려있는 하얀 고사목들 (정상에서 관음사 방면으로 약 10분 거리)
세월의 아픔을 간직한 그들의 처절한 모습..

▲ 조그만 동굴
2000년 전, 용암이 흘러내렸던 흔적으로 지금은 아담한 동굴로 탈바꿈 하였다.

▲ 백록담으로 통하던 옛 길
예전에는 통제된 저 길을 통해 백록담과 정상(부악)까지 갈 수 있었다.
손에 잡힐 듯 매우 가까이 보이는 정상.
언젠가 저 길이 활짝 개방된다면 다시 한번 찾아와 백록담에 내 손을 담구리라..

▲ 백록담의 북쪽 능선


▲ 왕관릉(삼각봉)
마치 거대한 산상(山上)의 요새를 보는 듯 하다.

▲ 어디선가 구름들이 나타나 왕관릉(삼각봉)을 슬슬 가리기 시작한다.
그 불쌍한 한라산 신선을 사슴으로 만들어 버린 그 얄미운 선녀들이 다시 내려온 것일까?
나도 그 신선처럼 그들(선녀)을 감히 훔쳐보고 싶다. 그러나 미련한 그 신선처럼 처량하게 사슴
으로 변하여 이 곳에서 한평생을 썩기는 싫은 걸.. 그런 것을 훔처볼 때는 요령껏 몰래 봐야
뒤탈이 없거늘.. ~ ^^;;

▲ 마치 연기처럼 피어난 구름..
구름에 몸을 가린 신선 / 선녀들이 성급히 하늘로 올라가는 모양이다.
보면 볼 수록 신기함 그 자체..
그렇지만 이 세상에 선녀가 과연 어디있단 말인가? 같이 산에 오른 여인들이
바로 선녀들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혹 전생에 선녀였을지도..

▲ 연기처럼 보잘 것 없던 구름들이 하나둘 모여 하나의 거대한 구름을 형성하였다.
아마도 하늘의 옥황상제가 산에서의 볼일을 마치고 급히 환어(還御)하시는 모양이다.

▲ 용진각 대피소를 지나면 탐라계곡(耽羅溪谷)의 상류가 펼쳐진다.
성판악 코스에도 계곡이 있긴 하나 물은 없고 돌과 흙으로 가득한 계곡 만이 있었을 뿐.
이렇게 내려가는 길에 정말 계곡다운 계곡을 만나니 참말로 반갑기 그지 없다.
시원한 계곡 물에 감히 속세에 찌든 손을 담구며, 잠시 땀을 씻어본다.

이렇게 계곡을 만난 것까지는 좋으나, 계곡을 건너면 하산 길임에도 다시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사람들, 그 오르막길에서 '이거 너무하는거 아닌가. 정말 너무한다'
다들 거의 인생 포기의 상태..

한라산은 내려가는 인간들을 곱게 보내주기 싫어서 이렇게 또다시 혹독한 시련을 내려 주었다.
그렇지만 별 수 있겠는가. 그 오르막길을 오르지 않으면 길이 없는 것을.. 꿩 대신 닭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우리에게는 없었다.

◀ 그 오르막길의 정상 부분..
길은 그나마 나무바닥을 깔아서 발은별로
아프진 않다.
그러나 성판악 코스에서 상당한 힘을 소비한
상태라 그 오르막길은 정말지옥이 따로
없었다.

◀ 구름으로 얕게 몸을 가린 삼각봉
어느 정도 내려오니 여행사 가이드가 뒤를
돌아보라고 그런다. 그래서 확 뒤돌아보니
세상에~ 하늘을 뚫어버릴 것 같은 기세의
삼각봉이나를 근엄하게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삼각봉의 위엄에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예를 표했다.

▲ 한라산을 찾은 속인(俗人)들이 정성스레 쌓은 돌탑들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한 단면들..

▲ 나무가 무성한 탐라계곡 등산로
성판악 코스와 달리 탐라계곡(관음사) 코스는 나무들이 무성하다.
그러나 성판악 코스와 마찬가지로 등산로 거의 대부분이 돌길이다.
내려갈 때도 역시 한라산의 시련을 극복해야 된다.

▲ 탐라계곡 중류 ~ 돌의 무덤을 보는 듯한..
이 계류를 지나면 또다시 한라산의 태클이 시작된다. 바로 오르막 길,
이번 오르막 길은 아까 전에 그것과 달리 상당히 구간이 길다.
사람들의 원성은 정말 하늘을 찌를 듯 하였지.

▲ 나무로 무성한 탐라계곡 등산로
오르막길과 막판 힘겨운 싸움을 벌이다보면 다시 내리막길이 펼쳐진다.
산림은 아까 전보다 더 무성하고.. 여기가 정말 한라산이 맞나 싶을 정도로..

관음사로 내려가는 길, 내려가니까 쉬울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정말 성판악 코스보다 더 힘들다.
한라산이 주는 끊임없는 시련―2차례의 오르막길, 그리고 계속되는 돌길..―으로 성판악보다
거리가 짧음에도 등,하산시간은 약 1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게다가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표도 우리들을 조롱하는 건지, 정말 1km는 내려왔다고 생각이
되는데도겨우 300m 내려 왔다고 나오고,, 한참을 내려가도 거리와 해발(海拔)은 좀처럼 줄어들
줄을 모른다.
세상에 이렇게 1km가 100km처럼 느껴진 적은 처음. 사람들의 마음은 빨리 아래로 내려가서
'大'모양으로뻗고 싶은 생각들.. 그들의 마음에서 한라산은 이미 미움과 지탄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 이끼를 뒤집어 쓴 숯가마터
관음사 주차장을 약 2.5km 앞둔 지점에 위치한 가마터로 1940년대에 조성된 숯전용 가마터이다.
사람들은 앞만 보고 내려가느라 정신이 없는 나머지 이 가마터를 거들떠도 안보고 모두 지나쳐
버렸다.

▲ 탐라계곡 하류
2000년 전, 한라산의 뜨끈뜨끈한 용암이 흘러갔던 자리로 계곡의 모습이 매우 특이하다.
그 특이한 모습이 나의 시선을 붙잡고 좀처럼 놓아주지를 않는다.
그렇지만 사진은 내 뜻대로 잘 나오지를 못해 여기서는 저 1장 만을 공개한다.

고대(古代) 제주도 사람들을 거의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용암이 흘러갔던 그 자리에는
지금은 깨끗한 한라산의 계곡물 만이 가득할 뿐이다.


산을 내려오면서 정말 8.7km가 '서울 ~ 부산'보다 더 길게만 느껴진다.
이정표의 농간에 열받아하며―기분 같아서는 이정표를 부셔버리고 싶었음―'다시는 한라산에 오나봐라'를
외치며 계속 내려간다. 처음에는 한라산과 친해지고자 했던 나의 지극한 마음은 내려가면서 슬그머니 사라져만
가고 그 반대의 생각이 나의 마음을 가득 메워 버린다.

백록담부터 같이 내려온 어느 지인은 다리에 이상이 생겨 손수건을 다리에 묶으며 애처롭게 내려간다.
아마도 한라산이 그에게만은 특별히 그런 선물을 내려준 모양이다. 어쩌면 그가 전생에 백록담에서 놀았던
그 선녀가 아닐까 싶어 혹 심술을 부린 것은 아닐까? ^^;

어느덧 17시 경, 아비규환(阿鼻叫喚)과 같았던 한라산에 영역에서 벗어나 드디어 관음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한라산 보호구역과 속세를 구분짓는 철선(鐵線)을 통과하면서 마치 지옥에서 극락으로 넘어온 듯,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구나.. 지옥과 같았던 한라산에 손아귀에서 벗어나니 정말 하늘을
날아갈 것 같다. 정말 극기훈련이 따로 없었던 한라산 등정.. 역시 한라산은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자신감과 오만으로 산에 오르던 인간들, 그러나 그들은 한라산이 내려준 엄청난 시련 앞에서는 그저 겁 많고,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어린 아이에 불과하였다는 것을..

관음사 주차장에는 이미 우리를 태울 관광버스가 애타게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라산에 질려 버린 사람들은 하나,둘 버스에 올라 뻗기 시작한다. 다행히 일행 40여명 모두 안전하게 산에서
내려와 17시 30분 경, 관음사 주차장을 출발, 산천단(山川壇)과 제주시내를 거쳐 다시 제주여객터미널로 나왔다.
여기서 모두 뱃표를 받고 아침에 타고 온, 오하마나호에 다시 승선을 한다.

◀ 제주에서 인천까지 타고 간 오하마나호

이번에 우리가 배정받은 방은 3등실이긴 하지만, 제주로 내려올 때와 약간 분위기가 다른 방이었다.
게다가 방도 좀 약간 넓고, 방 이름은 이른바 '담화실', 쇼파도 2개나 있고 tv도 있고, 일반 3등실보다
약간은 업그레이드된 방이다.

19시가 되자 육중한 덩치의 오하마나호는 제주도에 대한 미련을 과감히 털어버리며 슬슬 미끄러지듯
남해바다로 나간다. 이로써 또다시 1000리가 넘는 대항해가 시작되었다.

배를 타면서 일행들은 한결같이 '아 정말 피곤하다. 차라리 돈을 더 주고 비행기를 타고 싶어. 언제 13시간을
타고 가지..? 빨리 집에 가서 자고 싶다..'
물론 나도 그런 생각을 하였지.
우리들의 거추장스러운 육신(肉身)은 비록 배에 있었지만 마음 만큼은 벌써 집에 도착해 있었던 것.

19시 30분이 되자 일행들이 라면을 먹자고 그런다. 그러나 한라산에서 엄청난 체력소모를 했는데 저녁으로
겨우 라면이라니.. 그걸로 영양보충이나 되겠나 싶어서 정중히 거절하고 따로 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는데
영업이 끝나갈 시간이 되어서 그런지 반찬을 엄청 많이 준다. 고기에다가 생선까지.. 덕분에 영양보충 좀
실컷 했지.

20시 30분이 되자. 대장과 일행들이 뒷풀이 하러 나가자며 자꾸 보챈다.
나는 저녁 먹고 바로 잘 생각을 했으나, 그렇다고 안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바닷바람이 불어대는 갑판으로
같이 나갔다.

배에 앞쪽 갑판에 자리를 깔고 어디서 구했는지 소주에다가 맥주, 온갖 안주꺼리들.. 이번 제주도 기행의
마지막을 장식할 속칭 뒷풀이 술판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10여명으로 시작되었으나 뒷풀이 술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어 최대 30명 정도가 참여한
것 같다. 그래서 자리를 계속 넒히다보니 안내데스크에 있는 돗자리를 거의 싹쓸이하다 싶이 빌려오고..

술판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 그러나 다들 한라산이 내려준 선물(?) 덕에 술 몇 잔에 몇 마디 하고는 금방금방
사라져 버린다..
그도 그럴 것이 다들 모두 피곤했거든.. 그래서 하나, 둘, 셋 그렇게 사라지고.. 끝에는 겨우 10명 정도만
남게 되었다. 물론 끝까지 남기를 좋아하는 나도 포함하여..

뒷풀이 술판은 전날보다 더 재미가 있었다.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싫으나 좋으나 이틀을 같이 있었으니.
게다가 소주와 맥주가 몸에 차곡차곡 축적되니 그 재미는 한층 더해지는 것 같다. 그 10명은 좀처럼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자정이 넘도록 술판을 즐겼다. 추위를 앞세운 바닷바람의 심통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일개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불과하였다.
12시쯤 되자 나도 자려고 슬슬 자리를 빠져나왔으나 그만 어느 누구의 강압에 결국 다시 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자정이 넘었음에도 갑판에는 많은 사람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은 한라산을 만나고 돌아오는
사람들.. 그들도 우리처럼 여행이 끝나감을 아쉬워 하듯, 애써 힘차게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날을 그렇게 바다 저편으로 흘려 보냈다.

뒷풀이 술판은 새벽 1시가 되서야 겨우 끝났는데, 그래도 뭔가 아쉬운지 대장이 사람들에게 컵라면을 하나씩
사준다. 시중에서는 1000원 이내인 것을 선내에서는 무려 2000원..

라면을 먹고 방으로 들어오니 방은 이미 꿈나라에 빠져든 어린 아이들의 세상이 되었다.
넓어보이는 방은 그들이 이리저리 영토분할을 시도하면서 좀처럼 틈도 없었지.
나는 2개의 쇼파 중 하나를 차지하며 잠을 청했는데, 한라산에서 땀을 많이 흘려서 땀냄새가 좀 나므로
아무도 없는 샤워실에서 시원하게 샤워하며, 1시 30분에 잠자리에 들었다. 잠도 얼마나 잘 오던지.. 머리를
기대니 바로


잠에서 깨니 어느덧 아침 7시, 전날에는 일찍 일어나 서해 해돋이를 맞이하는 여유까지 부렸던 사람들이
7시가 넘었음에도 태반이 꿈나라의 신민(臣民)에서 좀처럼 벗어나질 못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그 날 해돋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피곤해 죽겠는데, 그까짓 해돋이가 눈에 들어오겠는가?

그런데 일어나보니 다리가 어째 이상하다. 바로 한라산이 내려준 선물, 특히 계단을 내려갈 때 그 압박이
상당히 심하다.

일어난 사람들은 이불을 접어서 한쪽에 모아놓고, 세수하러 갈 사람은 세면실로. 남을 사람은 그대로 방에,
아침 먹으러 갈 사람은 식당으로..

7시 30분이 되니 우울한 내용의 안내 방송이 나온다. '조류의 영향으로 45분 가량 지연되겠습니다. 도착시간은
약 8시 45분입니다'
그 방송에 다들 어안이 벙벙.. 45분을 더 찌그러져 있어야 되는가..?

그렇지만 남국으로 내려갈 때와 달리 인천으로 올라올 때는 시간이 참 빨리 가는 것 같다.
내려갈 때는 1분이 1시간 같더니만 올라올 때는 반대로 1시간이 1분 같으니 말이다.
어느덧 시간은 8시를 훌쩍 넘어버리고, 영영 나오지 않을 것 같던 인천도 우리의 시야에 점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제 제주도 2박 3일의 여행도 그 종점에 이른 것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그날을 서해바다에 그렇게 흘려 보내며 우리도 이제 그 종점을 맞이해야 된다.

근 37시간 만에 다시 찾아온 인천항, 얼마나 반갑던지. 8시 45분이 되서야 배는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에
살짝 그 몸을 갖다 붙인다.

내릴 때는 제주항과 마찬가지로 배의 아랫쪽 창고 쪽을 통해서 하선하였다.
연안여객 터미널 앞에서 그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한 사람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였고 이내 다들 각자의 집을
향해 뿔뿔히 흩어졌다..

나는 여인 1명과 인천시내버스 14번을 타고, 제물포역으로 나와 전철을 타고 집으로......
집에 이르니 오전 11시..

이렇게 하여 37시간의 제주도 한라산 여행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비록 그 때의 여행은 재방송이 불가능하나,
같이 생사고락을 했던 사람들의 추억 속에는 영원히 남아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또한 나와 그들의 이야기는 한라산에 수많은 전설의 하나가 되어 그렇게 남아있을 것이다.
비록 같이 갔던 사람들의 거의 99%는 그 인연이 길지 못해 그 날을 넘기지 못하고 아침 이슬처럼 그렇게 사라져
갔으나 그 짧으면 짧은 인연, 내게는 그저 소중하고 고마울 뿐이다. 어쩌면 한라산이 내게 내려준 큰 선물들..
다음에 그들과 혹 만나게 된다면 그날의 추억을 상기시키며 곡차(穀茶) 한잔 하고 싶다.

1. 요즘 가끔 8월 말에 갔었던 한라산 여행이 혹 하룻밤의 꿈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정신을 차려보면 컴퓨터 혹은 책상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 때 간 것이 정말일까? 혹 꿈 속에서 간 것을 정말로 간 것이라 우기는 것은 아닐까?
요즘 과학, 의학 논문들도 마구잡이로 조작하는 세상인데 그까짓 기행문 하나 조작하는 거야 솔직히 뭐가
어렵겠는가?

하지만 그 당시 같이 갔었던 많은 사람들의 사진에 나의 모습이 많이 담겨져 있었고, 또한 나의 디지털
카메라에도 나의 모습과 함께 거기서 찍은 수많은 사진들이 있는 걸 보면 정말 꿈은 아닌 것 같다.
세상만사가 그렇듯, 모든 것이 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이다. 그래서 종종 햇갈리는 모양이다.
정말 가기는 간 것 같다. 다만 무심한 세월이 나의 머리를 망각시켜 나로 하여금 햇갈리게 만드는 것이다.
나의 행적을 모조리 남가일몽(南柯一夢)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 세월이란 녀석이 그저 얄미울 뿐이다.

2. 37도 이하 지역에서 제일 높은 한라산의 꼭대기에 내 발자욱을 남김으로써 그 지역에서는 더 이상 높이
올라갈 산이 없어졌다. 그렇다고 그보다 낮은 산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시작인 것을..
태백산(1563m)과 한라산 사이에 공백이 너무 크니 이제 슬슬 그 중간의 산―지리산(智異山), 설악산(雪嶽山),
덕유산(德裕山)..―들을 하나, 둘 찾아갈 것이다.

3. 한라산이 준 애정(?)의 선물―다리 아픈 것―은 몇 일이 지나니 말끔히 사라졌다. 그렇지만 어느 지인은
그 선물의 양이 너무 큰지 근 한달 가까이 고생을 했다고 한다. 한라산이 너무 사람을 가려 선물의 양을
정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한편으로는 매우 씁쓸하다. ^^;;

4. 인천 ~ 제주 13시간의 항해, 비거(飛車)로 1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지만, 빠른 것이 무조건 좋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간혹 13시간의 항해를 즐기며 제주도로 가는 여유를 부려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서해에서의 장엄한 일출과 수많은 은하수들이 그대들을 반가이 맞이해 줄 것이다.

5. 본 글을 작성하면서 그 당시의 추억을 하나,둘,셋 그리고 넷, 그렇게 떠올려 보았다. 정말 재미있던 그
추억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그 당시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어차피 되돌리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 답사, 촬영 일시 - 2005년 8월 27일
* 하편 작성 시작일 - 2005년 11월 3일
* 하편 작성 완료일 - 2005년 11월 14일
* 하편 숙성기간 ~ 2005년 11월 14일 ~ 2006년 2월 21일
* 공개일 - 2006년 2월 21일부터
* 상,중,하편을 상,하편으로 통합 - 2005년 1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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