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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정릉동 북한산 봉국사 (봉국사의 부처님오신날 풍경, 북한산동네숲)

정릉 봉국사



' 부처님오신날 도심 사찰 나들이, 정릉동 북한산 봉국사 '
정릉동 봉국사
▲  봉국사 경내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4월 초파일)이 다가왔다. 설레는 마음
을 진정시키며 멀리 갈 것도 없이 내가 살고 있는 서울 땅에서 적당한 절 투어 메뉴를 물
색했으나 어렸을 때부터 서울 구석구석을 박박 긁으며 다닌 탓에 미답(未踏) 상태의 고찰
(古刹, 100년 이상 묵은 절)은 이제 씨가 말랐다.
어느새 많이 좁아진 서울을 벗어나 수도권으로 나갈 생각도 했으나 그날만큼은 멀리 가기
가 귀찮다. 하여 인연을 지은 서울 장안의 절 중에서 적당한 곳을 찾다가 정릉동(貞陵洞)
봉국사가 크게 당겨서 간만에 그곳을 복습하기로 했다. 봉국사는 4~5번 정도 인연이 있던
곳으로 집에서 10km 거리이며, 버스로 40분 내외가 걸린다.



 

♠  봉국사 입문

▲  봉국사 일주문(一柱門)

서울의 북서쪽과 북동쪽을 이어주는 정릉로에 봉국사의 정문인 일주문이 나와있다. 차량의 왕
래가 빈번한 정릉로와 내부순환로가 바로 앞이라 차량의 굉음이 두 귀를 종일 때려대는데, 맞
배지붕을 지닌 일주문은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북한산(삼각산)이 있는 북쪽을 물끄러미 바라
본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경내까지 200m 정도 각박한 오르막길이 펼쳐져 숨을 약간 헐떡이게 하는데
, 경내로 인도하는 길이 그곳뿐이라 꿩 대신 닭을 택할 권리는 애당초 없다. 그저 자존심과
불만을 곱게 접고 묵묵히 길을 오르면 나올 것 같지 않던 봉국사 경내가 알아서 모습을 비춘
다.


▲  천왕문(天王門)과 범종루(梵鍾樓)를 품고 있는 일음루(一音樓)

일주문을 들어서면 2층 규모의 기와집이 마중을 한다. 1층에는 천왕문 현판이, 2층에는 범종
루 현판이 있어 한 지붕 두 가족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을 통틀어 일음루라 부른다.
일음루는 범종루의 별칭으로 여기서 일음(하나의 소리)이란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세지를
뜻한다.

이 건물은 1979년 10월 주지 현근(玄根)이 세웠으며, 일음루 편액과 주련은 청사 안광석(晴斯
安光碩)이 썼고, 천왕문 현판은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의 글씨이다.

▲  천왕문 사천왕상(四天王像) ▲
천왕문 양쪽에 늘어서 중생들을 검문하는 사천왕, 허나 일음루 옆에 차량을
위한 길이 닦여져 있어 사천왕의 눈치를 굳이 볼 필요는 없다.


일음루를 지나면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나온다. 그곳을 지나면 길은 180도로
크게 구부러지며 그 길의 끝에 산중턱에 자리한 봉국사 경내가 자리해 있다. 그럼 여기서 잠
시 봉국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북악산(백악산)과 맞닿은 북한산(삼각산) 남쪽 끝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봉국사는 1395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예전에는 고려 말인 1354년에 나옹선사(奈翁禪師)
가 창건했다고 우겼으나 이제는 무학대사 창건설로 완전 굳어진 모양이다.
무학은 이곳에 절을 짓고 약사여래불을 봉안하여 약사사(藥師寺)라 했다고 전하며, 1468년에
는 세조(世祖)의 지원으로 절을 중창했다고 전한다. 허나 그 이후 정릉(貞陵)이 복원된 17세
기 중반까지 200년 동안 적당한 내력이 없어 창건 시기에 의구심을 던지게 한다. 게다가 조선
초기 유물은 하나도 없으니 무학이 정녕 창건한 것인지 아니면 세조의 지원으로 지어진 것인
지, 정릉이 복원된 이후에 지어진 것인지는 좀더 예민한 조사가 필요하다.

봉국사의 사적(事蹟)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7세기 후반이다. 태종(太宗)에 의해 260년
가까이 속세의 뇌리에서 강제로 잊혀진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정릉(
貞陵. ☞ 관련글 보기)은 현종(顯宗)의 명에 따라 1669년에 복원되었다.
이때 정자각(丁字閣)과 전례청(典禮廳) 등 정릉의 부속 건물이 새로 지어지고 인근 경국사(慶
國寺, ☞ 관련글 보기)와 이곳을 정릉의 원찰(願刹)로 삼았는데, 나라를 받든다는 착한 뜻에
서 봉국사로 이름을 갈았다. 봉국사는 정릉과 같은 산자락에 있으며, 정릉에서 바로 북쪽 300
m 거리에 있어 원찰의 자격으로 아주 충분하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성질이 난 군인들에 의해 절이 피해를 입었으며, 1883년에 한
계(漢溪)와 덕운(德雲)이 중건했다. 1885년 3월에는 명부전에 지장탱을 조성했으며, 1898년에
운담(雲潭), 영암(永庵), 취봉(翠峰) 등이 명부전을 중건하고 시왕도를 봉안했다.
1913년 주지 종능(宗能)과 화주 월하봉연(月荷奉蓮)이 칠성각을 중건했고, 1938년 화주 금파(
錦坡)가 조인섭(趙寅燮)의 시주로 염불당을 새로 지었다. 1979년에는 주지 현근이 2층 크기의
일음루를 세워 범종루와 천왕문으로 삼았고, 1986년에 산신각을 중수하고 만월보전에 신중탱
을 봉안했으며, 1991년에 천불전에 신중탱을 봉안했다.
1994년 3월 안심당을 마련하여 승려와 신도의 수행처로 활용하고 있고, 주지 선관과 신도들이
합심해 경내에 나무 1,000여 그루와 온갖 꽃을 심어 도량의 분위기를 화사하게 살렸다. 그래
서 경내에 제법 나무가 무성하여 산사의 티가 진하게 된 것이다.

일주문이 차량 왕래가 빈번한 정릉로 도로변에 있어서 그렇지 일주문과 일음루를 지나면 산사
의 내음이 오각을 간지럽힌다. 정릉로와 내부순환로가 절 앞에 있고 주택가와 가깝지만 숲에
짙게 감싸인 경내는 아늑하고 적막해 깊은 산골에 들어선 기분이다.
일주문은 북한산(삼각산)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경내 서쪽과 남쪽, 동쪽은 야산이
라 정릉천이 있는 북쪽이 그나마 진입이 쉽다. 하여 그곳에 문을 내고 속세와 왕래했으며 일
주문에서 각박한 오르막길을 200m 올라가야 비로소 경내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만월보전을 비롯해 명부전, 천불전, 산신각, 독성각, 안심당 등 10동
남짓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아미타괘불도와 지장시왕도, 명부전 시왕도 및
사자도, 목조석가여래좌상, 석조지장삼존상 및 시왕상 및 권속, 석조여래좌상 등 지방문화재
6점을 지니고 있다.

* 봉국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636 (정릉로 202 ☎ 02-919-0211)
* 봉국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탐스럽게 열린 연두색 불두화의 위엄



 

♠  봉국사의 보물 창고, 만월보전과 명부전

▲  봉국사 만월보전(滿月寶殿)

석가탄신일 분위기로 흥겨운 경내를 말없이 굽어보고 있는 만월보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이곳의 법당이다. 경내에서 가장 큰 집으로 만월보전이란 약사여래의 거처인
약사전(藥師殿)의 다른 이름인데, 봉국사가 약사도량을 칭하다 보니 자연히 약사여래와 그의
거처가 절의 중심이 되었다.

만월보전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에 쓰인 만월보전 현판이 있어 조선 후
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현판은 종무소(보관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에 있으며, 그 글
씨를 확대한 새 현판이 대신 걸려있다.


▲  만월보전 옆에서 발견한 길쭉한 괘불함

봉국사에는 서울 유형문화유산 351호로 지정된 '아미타괘불도'란 괘불(掛佛)이 있다. 19세기
말에 왕실 상궁과 사대부 등 26명의 지원으로 14명의 화승이 그린 것으로 괘불은 석가탄신일
같은 불교의 주요 행사날에만 잠깐씩 모습을 드러내는 진짜 만나기 어려운 존재이다. 그나마
석가탄신일이 친견 확률이 조금 있으나 봉국사를 그날을 이용해 2번이나 찾았음에도 아직 친
견하지 못했다.
다만 이번에는 만월보전 옆에 괘불함이 나와있었는데, 그가 나와있는 것을 보니 오전에 잠깐
외출을 했던 모양이다. 나를 피해 괘불함으로 숨어든 괘불이 야속하여 마음 같아서는 괘불함
을 열어 괘불을 깨우고 싶으나 나에게 그럴 권한이 없으니 괘불함을 이렇게 본 것으로 만족하
고 쿨하게 발길을 돌렸다.


▲  만월보전 식구들과 붉은 닫집
불단 가운데가 석조여래좌상, 왼쪽에 보관을 쓴 이가 관세음보살,
그리고 오른쪽이 목조석가여래좌상이다.

▲  해맑은 표정의 만월보전 석조여래좌상 - 서울 문화유산자료 57호

만월보전의 주인장인 석조여래좌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불이다. 그의 얼굴은 거의 동그랗
고 볼에는 살이 좀 있어 보이며,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선의 미학을 선사한다. 눈
썹 사이에는 백호가 살짝 찍혀 있고, 두 눈은 길고 가늘게 뜨며 중생과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
진 제물을 바라본다. 코는 끝이 두툼하고 붉은 입술은 얼굴 크기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감이
있으나 입술에 드리워진 미소는 얼굴 전체를 환하게 만든다.
두 귀는 중생들의 소망을 모두 경청하려는 듯, 어깨까지 늘어졌으며, 머리칼은 꼽슬인 나발이
고, 그 가운데로 무견정상(無見頂相)이 솟아 있다.

목에는 불상에 흔한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지 않고, 몸에 걸친 옷은 어깨를 감싼 통견(通肩)
으로 가슴 밑에는 군의(裙衣)가 보이는데, 그 옷깃과 띠가 직사각형으로 정형화되어 표현된
것은 조선 후기 불상에서 많이 나타나는 양식이다.
그리고 두 손은 다리 위에 모아 금색이 칠해진 무언가를 소중히 들고 있는데, 이는 약사여래
의 필수품인 약합(藥盒)으로 근래에 금색을 입혔다.

이 석불은 도금을 입히지 않고 원초적인 돌의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신체 비례도 거
의 맞고 세부 묘사도 충실해 조선 후기 석불 중에서 괜찮은 작품으로 점수를 받고 있다. 특히
해맑은 얼굴과 미소는 보물급으로 손색이 없다.

▲  옆에서 바라본 석조여래좌상

▲  근래 조성된 금동 피부의
관세음보살상


왜정(倭政) 때 작성된 '봉은본말사지'에 '만월보전에 봉안된 석질분상(石質紛相)의 약사여래
로 높이는 3.3촌, 너비는 2.3촌이다' 기록이 있어 돌에 호분을 입혔음을 알려주며, 1940년에
작성된 '조선사찰귀중재산목록'에 봉국사에 약사여래상이 1구 있다고 나와 왜정 이전부터 이
곳에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어쨌든 생김새와 손에 든 지물을 통해 약사여래상이 분명하고 절에서도 그렇게 여기고 있음에
도 문화재 지정 명칭은 '석조여래좌상'으로 따로 놀고 있으니 '석조약사여래좌상'으로 명칭
변경이 필요하다. 또한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남양주 수락산 흥국사(興國寺)에도 이와 비슷
하게 생긴 조선 후기 약사여래상이 있어 비슷한 시기에 같은 사람이 조성했을 가능성도 크다.


▲  만월보전 목조석가여래좌상 - 서울 유형문화유산 354호

석조여래좌상(약사여래상) 옆에 자리한 목조석가여래좌상은 무릎 부분과 얼굴 부분을 붙인 흔
적이 역력한 접목식 불상이다. 항마촉지인을 선보이고 있는 그는 건강상태는 양호하나 등과
머리의 나발이 훼손된 것을 근래 수리했는데, 머리에 봉긋 솟은 육계에 정상계주가 있으며,
머리칼인 나발은 선명하다. 턱이 각지지 않고 둥근 얼굴은 단정한 이목구비를 갖췄으며, 눈꼬
리가 위로 약간 치켜 올라간 눈과 오뚝한 코, 끝이 살짝 올라가 미소가 번져나는 입을 지니고
있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 위를 살짝 덮은 변형 우견편단으로 대의자락은 왼쪽 팔 위에서 'Ω'를 이
루며 좌우로 흘러 무릎을 덮고 발목 부분에서 뒤집힌 뒤 부채꼴로 펼쳐지고 있다. 대의 깃 사
이로 드러난 가슴에는 상단부가 수평을 이루는 군의가 단정하며, 약간 굴곡진 가슴과 볼록한
복부 표현으로 신체의 부피감이 있어 보인다.
두 손 가운데에 별도로 만들어 끼워놓은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
으며,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길게 내리고 있다.

이 불상에서 다라니와 시주목록 등의 복장품이 발견되었으나 정작 조성 시기를 알려주는 문서
는 나오지 않아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넓게 벌어진 둥근 어깨와 머리를 앞으로
살짝 수그려 굽어보는 듯한 자세를 하여 원만하면서도 당당함이 엿보이는 점, 간략해진 옷 주
름으로 신체의 윤곽이 뚜렷하고 부피감이 있어 보이는 점, 단정한 이목구비의 표현으로 인한
활달한 표정 등을 통해 18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옆에서 바라본 목조석가여래좌상과
조그만 금동원불(願佛)들

▲  연등이 곱게 허공을 메운
만월보전 내부


▲  봉국사 5층석탑
만월보전 뜨락에 파리도 능히 미끄러질 정도로 탱탱한 하얀 피부를 지닌
5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그는 근래 장만한 것으로 그가 있기 전에는
봉국사에 그 흔한 석탑도 하나 없었다.

▲  봉국사 명부전(冥府殿)

만월보전의 옆구리를 뚫어지라 바라보는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冥府, 저승) 식구
들의 공간이다. 조선 말에 지어진 것을 1989년에 중건했는데, 석조지장삼존상과 시왕상, 지장
시왕도, 시왕도, 사자도 등 늙은 보물들이 푸짐하게 들어있으니 만월보전과 함께 꼭 둘러보기
바란다.

건물 이름을 알려주는 현판이 가로가 아닌 세로로 걸린 것이 이채로운데, 현판의 색깔도 검은
색이 아닌 붉은색 바탕에 금색으로 된 것이 꽤 돋보인다. 이런 현판은 여기서도 가까운 흥천
사(興天寺) 명부전(☞ 관련글 보기)에도 있어 무슨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거
기 명부전과 여기 명부전이 너무나 닮았다.


▲  명부전 석조지장삼존상과 시왕상 및 권속 - 서울 유형문화유산 355호
그 뒤에 자리한 지장시왕도 - 서울 유형문화유산 352호


명부전 불단에 자리한 석조지장삼존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다. 금동 옷을 입은 지장보살상
은 키 97.7cm의 보살상으로 날카로운 눈매를 보이며 앉아있는데, 지장보살 좌우로 도명존자(
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시립(侍立)해 있다.

지장보살 좌우로 시왕상과 사자상, 동자상, 판관상 등 30여 구의 형상이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들은 지장보살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일부는 근래 만들어 추가했
다. 시왕상과 인왕상은 돌로 만들었으나 나머지는 나무로 다졌으며,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닌
시왕상 앞에는 7구의 동자상이 있는데, 새끼사자와 새끼호랑이, 술병과 잔, 벼루 등 다양한
것을 들고 있다. 7구 중 2점은 크기와 모습이 크게 달라 후대에 다른 이들이 만든 것으로 여
겨진다.

지장보살 뒤에 걸린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을 비롯한 명부 식구들을 담은 탱화이다. 지장삼존
을 중심으로 밑에 선악동자(善惡童子), 좌우측 주위로 시왕과 판관(判官), 사자, 옥졸(獄卒),
천동(天童), 천녀(天女), 마두(馬頭), 호두신(戶頭神) 등이 빼곡히 채워져 있는데, 둥근 두광
(頭光)과 큰 신광(身光)을 드러내며 연화좌(蓮花座)에 앉은 지장보살은 너른 어깨를 지닌 건
장한 체격으로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구슬을 들고 있다. 그리고 선악동자 중 왼쪽 동자는
지장보살의 육환장(六環杖)을 어깨에 비켜 잡았고 오른쪽 동자는 어깨에 인장함(印章函) 모양
의 상자를 매고 있다.
지장보살 주위에 자리한 시왕(십대왕)은 관을 쓴 문관(文官) 복장으로 홀이나 지물을 들었으
며, 두건이나 투구를 쓴 사자(使者)는 합장을 하거나 삼지창이나 무기를 들고 있다. 관모(官
帽)를 쓴 판관은 두루마리 형태의 책을 들었고, 천녀는 손에 공양물을 받쳐 들고 있다.
탱화 바깥쪽에는 붉은색과 보라색 머리를 휘날리고 있는 옥졸과 마두, 호두신을 배치했으며,
앞쪽과 뒤쪽 존상의 크기를 달리하여 붉은색 위주로 단조로워지기 쉬운 화면에 변화를 꾀했다.

명부 식구들의 크기를 앞쪽에서 뒤쪽으로 갈수록 작게 표현하고 지장보살 주위를 둥글게 열을
지어 배치한 점, 지장보살 무릎 밑에 선악동자를 둔 점은 19세기 말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
행하던 지장시왕도 양식이며, 이를 통해 19세기 후반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그 시절
서울, 경기 지역에서 탱화를 많이 그렸던 체훈의 화풍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작품이다.

▲  지장보살 좌우에 자리한 시왕상과 사자상, 동자상, ▲
시왕도 및 사자도(서울 유형문화유산 353호)


시왕상과 사자상 뒤쪽에는 그들을 담은 시왕도와 사자도가 고운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 이들
은 1898년에 한봉창엽(漢峰瑲曄)과 명응환감(明應幻鑑), 계은봉법(啓恩奉法), 월선봉종(月船
奉宗), 금곡영환(金谷永煥), 예운상규(禮雲尙奎), 영욱(靈旭), 민호(珉昊), 용담규상(龍潭奎
祥), 선하선명(禪夏善明), 두연(斗演), 추산천성(推算天性), 덕월응륜(德月應崙), 한곡돈법(
漢谷頓法), 금운정기(錦雲正基), 운조(雲照) 등의 화승들이 함께 조성했다.

시왕도는 좌우에 5폭씩 10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향우측에 홀수왕(1,3,5,7,9대왕), 향좌측
에는 짝수왕(2,4,6,8,10대왕)의 그림이 있고 건령대장군(建靈大將軍)과 일직사자(日直使者),
월직사자(月直使者)를 담은 사자도가 걸려있다. 그리고 시왕도 상단에는 명부(저승)의 각 대
왕이 망자를 심판하는 장면을 담고 있으며, 하단에는 각 대왕의 심판에 따라 벌어지는 무시무
시한 지옥 장면을 그려 넣었다.

이곳 시왕도는 19세기 말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하던 시왕도 형식으로 비슷한 시기의 다른
시왕도와 달리 유일하게 사자도까지 모두 갖추
고 있다. 또한 그 시절 최고의 화승인 한봉창
엽과 명응환감, 계은봉법, 금곡영환, 예운상규
(禮雲尙奎) 등이 각 폭을 나누어 그린 것도
큰 특징이다.

▲  사자도와 귀엽게 표현된 인왕상



 

♠  봉국사 마무리 (북한산동네숲)

▲  봉국사 천불전(千佛殿)

남쪽을 바라보고 선 천불전은 석가3존상과 조그만 금동불 1,000상을 머금고 있다. 이들이 합
심하여 금빛을 발산하니 그 찬란함에 침침한 두 눈이 마비될 지경이다. 그 앞에는 60년 정도
묵은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높이 약 16m로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9호
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높은 벼랑에 깃든 산신각(山神閣)

만월보전 뒤쪽(서쪽)에는 거의 80도 가까이 솟은 벼랑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그 옹색한 곳
에 계단을 내고 좁은 자리를 간신히 다져 독성각과 산신각을 닦았는데, 산신각은 각박한 계단
을 1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봉국사가 이런 각박한 벼랑에 산신각을 걸친 것은 경내가 그리 넓지 않고, 경내에서 가장 하
늘과 가까운 곳에 산신각이나 삼성각을 두는 원칙 때문이다. 그래서 욕심을 내어 벼랑 윗부분
까지 자리를 개척했다.

산신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예전에는 광응전(光膺殿)이란 생소한 이름을
지녔다. 산신각이니 당연히 산신(山神) 할배가 중심이 돼야겠지만 엉뚱하게도 약사여래가 중
심을 차지하고 있으며, 산신과 관세음보살이 그 좌우에 자리해 있다. 아무래도 이곳이 약사도
량을 내세우다 보니 경내에서 가장 높은 이곳까지 약사여래를 배치한 모양이며, 산신각 식구
들 모두 근래 조성되어 고색의 향기는 아직 피지 못했다.

이곳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각박하지만 다행히 거리는 짧아서 올라갈 만하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워 조망은 좋을 것 같지만 숲의 패기가 드높아 조망은 썩 좋지 못하다. 숲에 가려
경내와 정릉동 일부가 보이는 것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건물 주변이 죄다 낭떠러지라
사고의 위험도 늘 도사리고 있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뒷탈이 없다. 사고가 나면 제아무리
영험하다는 산신이나 약사여래라도 절대 구제해주지 못한다.

▲  금동 피부의 산신각 약사여래상

▲  산신상과 산신탱

▲  고운 모습의 관세음보살상

▲  산신각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울창한 숲에 가려 보이는 것은 별로 없다.


▲  벼랑에 걸터앉은 독성각(獨聖閣)

용왕을 봉안한 용왕단 뒤쪽이자 명부전 옆 벼랑에 둥지를 튼 독성각은 독성(獨聖, 나반존자)
의 보금자리로 근래에 마련된 독성상과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독성각을 가려면 만월보전 좌측에서 계단을 올라가야 되는데 건물 정면 바깥은 낭떠러지이기
때문에 집 내부에서 괜히 뒷걸음질하다가 자칫 골로 가는 수가 있다. 건물 크기도 정면과 측
면이 1칸 밖에 안되는 단출한 규모라 3명만 들어가도 숨쉬기 힘들 정도이며, 추락을 막고자
안전 난간을 둘렀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  독성각에 들어있는 독성상과
독성탱

▲  독성각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만월보전과 천불전 사이 뜨락)


▲  만월보전과 천불전 사이에 곱게 차려진 연등터널
오색연등이 낮게 허공을 메우며 작은 하늘을 이루고 있다.

▲  봉국사에서 먹은 점심 공양밥의 위엄

봉국사를 정신없이 복습하니 어느덧 14시가 넘었다. 경내도 말끔히 둘러보았으니 이제 먹거리
로 지친 몸을 달래줘야 되겠지. 하여 공양밥을 제공하는 요사(寮舍)로 들어갔다.
공양간을 갖춘 요사는 만월보전 남쪽에 있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공양간을 가득 채우며 공
양에 임하고 있었다. 하얀 쌀밥에 갖은 나물, 고추장이 버무려진 이 땅에 흔한 공양밥으로 나
박김치도 딸려 나와 소화를 흔쾌히 도우며 공양간 구석에는 물과 후식용 커피믹스도 준비되어
있다.

구석에 자리를 잡아 공양밥을 붉게 물들이며 즐겁게 섭취에 임한다.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의
백미(白眉)는 바로 공양밥과 떡 섭취, 이를 통해 절의 후한 인심을 잴 수 있다.


▲  봉국사를 뒤로 하며, 천왕문과 범종루를 품은 일음루의 뒷모습

공양밥 섭취를 마치고 달달한 믹스커피로 식곤증을 단죄하며 봉국사를 나왔다. 절에서 머무른
시간은 약 1시간 정도,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 인연을 고대하며 일음루를 지나니 일주문 직전
에 동남쪽 산자락으로 이어지는 나무데크 숲길이 손짓을 한다.

이 숲길은 근래 닦여진 것으로 예전에는 없던 존재이다. 정릉2동 산자락에 자리한 북한산동네
숲이란 공원으로 이어지는데, 이들 모두 미답처로 남아있다.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지나
치지 못한다고 서울의 미답처는 정말 참을 수가 없다. 하여 그 상큼한 숲길 속으로 나를 보낸
다.
숲길의 길이는 약 200m 정도로 숲이 매우 울창해 숲내음이 그윽하다. 언덕 경사를 순화시키고
자 봉국사 쪽은 나무데크 계단길을 닦고, 경사가 완만한 언덕 윗부분은 볏짚을 씌웠는데, 이
숲길의 등장으로 봉국사로 들어가는 길이 하나 늘었다. 허나 가파른 북쪽 언덕길을 올라가야
되는 것은 변함이 없다. 어차피 일주문 안쪽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길은 그 길 뿐이다.


▲  봉국사 동남쪽 나무데크 숲길

▲  녹음 속을 가르는 봉국사 동남쪽 숲길

▲  북한산동네숲 능학정(陵鶴亭)

봉국사 동남쪽 숲길의 끝에는 북한산동네숲이란 언덕 공원이 조촐하게 둥지를 틀고 있다. 이
곳은 정릉2동 정수초교 뒤쪽 언덕이자 봉국사 동쪽 산자락으로 집과 경작지가 어지럽게 섞여
있던 것을 다듬어서 내놓은 생태공원에서 시작되었다.
에코체험관과 사계절테마원, 생태연못, 운동시설을 지니고 있으며, 공원 서쪽과 남쪽에는 봉
국사와 정릉과 이어진 푸른 숲이 무성하게 펼쳐져 있고, 공원 정상부에는 2층 규모의 6각형
정자인 능학정이 자리해 천하를 굽어본다. 21세기 스타일로 지어진 능학정은 공원 서쪽에 자
리한 정릉과 푸른 산에 많이 산다는 학을 따서 지은 것으로 여겨지며 이곳의 지명은 아니다.

* 북한산동네숲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87-102 (정릉로24길 110-14)


▲  달달하게 펼쳐진 북한산동네숲 산책로

▲  큰 바위가 단단하게 박힌 북한산동네숲 사계절테마원

▲  평화로운 모습의 북한산동네숲
미답처인 북한산동네숲을 1바퀴 둘러보고 다음 절로 이동하여 부처님오신날
절 투어를 이어갔다. (이후 일정은 별도의 글에서~~~) 이렇게 하여
봉국사 부처님오신날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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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4년 5월 1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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