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국사의 보물 창고, 만월보전과 명부전
▲ 봉국사 만월보전(滿月寶殿) |
석가탄신일 분위기로 흥겨운 경내를 말없이 굽어보고 있는 만월보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이곳의 법당이다. 경내에서 가장 큰 집으로 만월보전이란 약사여래의 거처인
약사전(藥師殿)의 다른 이름인데, 봉국사가 약사도량을 칭하다 보니 자연히 약사여래와 그의
거처가 절의 중심이 되었다.
만월보전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에 쓰인 만월보전 현판이 있어 조선 후
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현판은 종무소(보관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에 있으며, 그 글
씨를 확대한 새 현판이 대신 걸려있다. |
▲ 만월보전 옆에서 발견한 길쭉한 괘불함 |
봉국사에는 서울 유형문화유산 351호로
지정된 '아미타괘불도'란 괘불(掛佛)이 있다. 19세기
말에 왕실 상궁과 사대부 등 26명의 지원으로 14명의 화승이 그린 것으로 괘불은 석가탄신일
같은 불교의 주요 행사날에만 잠깐씩 모습을 드러내는 진짜 만나기 어려운 존재이다. 그나마
석가탄신일이 친견 확률이 조금 있으나 봉국사를 그날을 이용해 2번이나 찾았음에도 아직 친
견하지 못했다.
다만 이번에는 만월보전 옆에 괘불함이 나와있었는데, 그가 나와있는 것을 보니 오전에 잠깐
외출을 했던 모양이다. 나를 피해 괘불함으로 숨어든 괘불이 야속하여 마음 같아서는 괘불함
을
열어 괘불을 깨우고 싶으나 나에게 그럴 권한이 없으니 괘불함을 이렇게 본 것으로 만족하
고 쿨하게 발길을 돌렸다. |
▲ 만월보전 식구들과 붉은 닫집
불단 가운데가 석조여래좌상, 왼쪽에 보관을 쓴 이가 관세음보살,
그리고
오른쪽이 목조석가여래좌상이다.
▲ 해맑은 표정의 만월보전 석조여래좌상 - 서울 문화유산자료 57호 |
만월보전의 주인장인 석조여래좌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불이다. 그의 얼굴은 거의 동그랗
고 볼에는 살이 좀 있어 보이며,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선의 미학을 선사한다. 눈
썹 사이에는 백호가 살짝 찍혀 있고, 두 눈은 길고 가늘게 뜨며
중생과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
진 제물을 바라본다. 코는 끝이 두툼하고 붉은 입술은 얼굴 크기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감이
있으나 입술에 드리워진 미소는 얼굴 전체를 환하게 만든다.
두 귀는
중생들의 소망을 모두 경청하려는 듯, 어깨까지 늘어졌으며, 머리칼은 꼽슬인 나발이
고,
그 가운데로 무견정상(無見頂相)이 솟아 있다.
목에는 불상에 흔한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지 않고, 몸에 걸친 옷은 어깨를 감싼 통견(通肩)
으로 가슴 밑에는 군의(裙衣)가 보이는데, 그 옷깃과 띠가 직사각형으로 정형화되어 표현된
것은
조선 후기 불상에서 많이 나타나는 양식이다.
그리고 두 손은 다리 위에 모아 금색이 칠해진 무언가를 소중히 들고 있는데, 이는 약사여래
의 필수품인 약합(藥盒)으로 근래에 금색을 입혔다.
이 석불은 도금을 입히지 않고 원초적인 돌의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신체 비례도 거
의 맞고 세부 묘사도 충실해 조선 후기 석불 중에서 괜찮은 작품으로 점수를 받고 있다. 특히
해맑은 얼굴과 미소는 보물급으로 손색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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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에서 바라본 석조여래좌상 |
▲ 근래 조성된 금동 피부의
관세음보살상 |
왜정(倭政) 때 작성된
'봉은본말사지'에 '만월보전에 봉안된 석질분상(石質紛相)의 약사여래
로 높이는 3.3촌, 너비는 2.3촌이다' 기록이 있어 돌에 호분을 입혔음을 알려주며, 1940년에
작성된 '조선사찰귀중재산목록'에 봉국사에 약사여래상이 1구 있다고 나와 왜정 이전부터 이
곳에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어쨌든 생김새와 손에 든 지물을 통해 약사여래상이 분명하고 절에서도 그렇게 여기고 있음에
도 문화재 지정 명칭은 '석조여래좌상'으로 따로 놀고 있으니 '석조약사여래좌상'으로 명칭
변경이 필요하다. 또한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남양주 수락산 흥국사(興國寺)에도 이와 비슷
하게
생긴 조선 후기 약사여래상이 있어 비슷한 시기에 같은 사람이 조성했을 가능성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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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월보전 목조석가여래좌상 - 서울 유형문화유산 354호 |
석조여래좌상(약사여래상)
옆에 자리한 목조석가여래좌상은 무릎 부분과 얼굴 부분을 붙인 흔
적이 역력한 접목식 불상이다. 항마촉지인을 선보이고 있는 그는 건강상태는 양호하나 등과
머리의 나발이 훼손된 것을 근래 수리했는데, 머리에 봉긋 솟은 육계에 정상계주가 있으며,
머리칼인
나발은 선명하다. 턱이 각지지 않고 둥근 얼굴은 단정한 이목구비를 갖췄으며, 눈꼬
리가 위로
약간 치켜 올라간 눈과 오뚝한 코, 끝이 살짝 올라가 미소가 번져나는 입을 지니고
있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 위를 살짝 덮은 변형 우견편단으로 대의자락은 왼쪽 팔 위에서 'Ω'를 이
루며 좌우로 흘러 무릎을 덮고 발목 부분에서 뒤집힌 뒤 부채꼴로 펼쳐지고 있다. 대의 깃 사
이로 드러난 가슴에는 상단부가 수평을
이루는 군의가 단정하며, 약간 굴곡진 가슴과 볼록한
복부 표현으로 신체의 부피감이 있어 보인다.
두 손 가운데에 별도로 만들어 끼워놓은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
으며,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길게 내리고 있다.
이 불상에서 다라니와 시주목록 등의 복장품이 발견되었으나 정작 조성 시기를 알려주는 문서
는 나오지 않아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넓게 벌어진 둥근 어깨와 머리를 앞으로
살짝 수그려 굽어보는 듯한 자세를 하여 원만하면서도
당당함이 엿보이는 점, 간략해진 옷 주
름으로 신체의
윤곽이 뚜렷하고 부피감이 있어 보이는 점, 단정한 이목구비의 표현으로
인한
활달한 표정 등을 통해 18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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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에서 바라본 목조석가여래좌상과
조그만 금동원불(願佛)들 |
▲ 연등이 곱게 허공을 메운
만월보전 내부 |
▲ 봉국사 5층석탑
만월보전 뜨락에 파리도 능히 미끄러질 정도로 탱탱한 하얀 피부를 지닌
5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그는 근래 장만한 것으로 그가 있기 전에는
봉국사에 그 흔한 석탑도 하나 없었다.
▲ 봉국사 명부전(冥府殿) |
만월보전의 옆구리를 뚫어지라 바라보는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冥府, 저승) 식구
들의 공간이다. 조선 말에 지어진 것을 1989년에 중건했는데, 석조지장삼존상과 시왕상, 지장
시왕도, 시왕도, 사자도 등 늙은 보물들이 푸짐하게 들어있으니 만월보전과 함께 꼭 둘러보기
바란다.
건물 이름을 알려주는 현판이 가로가 아닌 세로로 걸린 것이 이채로운데, 현판의 색깔도 검은
색이 아닌
붉은색 바탕에 금색으로 된 것이 꽤 돋보인다. 이런 현판은 여기서도 가까운 흥천
사(興天寺) 명부전(☞ 관련글 보기)에도 있어 무슨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거
기 명부전과 여기 명부전이 너무나 닮았다. |
▲ 명부전 석조지장삼존상과 시왕상 및 권속 - 서울 유형문화유산 355호
그 뒤에 자리한 지장시왕도 - 서울 유형문화유산 352호 |
명부전 불단에 자리한 석조지장삼존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다. 금동 옷을 입은 지장보살상
은 키 97.7cm의 보살상으로 날카로운 눈매를 보이며 앉아있는데,
지장보살 좌우로 도명존자(
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시립(侍立)해 있다.
지장보살 좌우로 시왕상과 사자상, 동자상, 판관상 등 30여 구의 형상이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들은 지장보살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일부는 근래 만들어 추가했
다. 시왕상과 인왕상은 돌로 만들었으나 나머지는 나무로 다졌으며,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닌
시왕상 앞에는 7구의 동자상이 있는데, 새끼사자와 새끼호랑이, 술병과 잔, 벼루 등 다양한
것을 들고 있다. 7구 중 2점은 크기와 모습이 크게 달라 후대에 다른 이들이 만든 것으로 여
겨진다.
지장보살 뒤에 걸린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을 비롯한 명부 식구들을 담은 탱화이다. 지장삼존
을 중심으로 밑에 선악동자(善惡童子), 좌우측 주위로 시왕과 판관(判官), 사자, 옥졸(獄卒),
천동(天童), 천녀(天女), 마두(馬頭), 호두신(戶頭神) 등이 빼곡히 채워져 있는데, 둥근 두광
(頭光)과 큰 신광(身光)을 드러내며 연화좌(蓮花座)에 앉은 지장보살은 너른 어깨를 지닌
건
장한 체격으로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구슬을 들고 있다. 그리고 선악동자 중 왼쪽 동자는
지장보살의 육환장(六環杖)을 어깨에 비켜 잡았고 오른쪽 동자는 어깨에 인장함(印章函) 모양
의 상자를 매고 있다.
지장보살 주위에 자리한 시왕(십대왕)은 관을 쓴 문관(文官) 복장으로 홀이나 지물을 들었으
며, 두건이나 투구를 쓴 사자(使者)는 합장을 하거나 삼지창이나 무기를 들고 있다. 관모(官
帽)를 쓴 판관은 두루마리 형태의 책을 들었고, 천녀는 손에 공양물을 받쳐 들고 있다.
탱화 바깥쪽에는 붉은색과 보라색 머리를 휘날리고 있는 옥졸과 마두, 호두신을 배치했으며,
앞쪽과 뒤쪽 존상의 크기를 달리하여 붉은색 위주로 단조로워지기 쉬운 화면에 변화를 꾀했다.
명부 식구들의 크기를 앞쪽에서 뒤쪽으로 갈수록 작게 표현하고 지장보살 주위를 둥글게 열을
지어 배치한 점, 지장보살 무릎 밑에 선악동자를 둔 점은 19세기 말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
행하던 지장시왕도 양식이며, 이를 통해 19세기 후반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그 시절
서울, 경기 지역에서 탱화를 많이 그렸던 체훈의 화풍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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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장보살 좌우에 자리한 시왕상과 사자상, 동자상, ▲
시왕도 및 사자도(서울 유형문화유산 353호) |
시왕상과 사자상 뒤쪽에는 그들을 담은 시왕도와 사자도가 고운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 이들
은 1898년에 한봉창엽(漢峰瑲曄)과 명응환감(明應幻鑑), 계은봉법(啓恩奉法), 월선봉종(月船
奉宗), 금곡영환(金谷永煥), 예운상규(禮雲尙奎), 영욱(靈旭), 민호(珉昊), 용담규상(龍潭奎
祥), 선하선명(禪夏善明), 두연(斗演), 추산천성(推算天性), 덕월응륜(德月應崙), 한곡돈법(
漢谷頓法), 금운정기(錦雲正基), 운조(雲照) 등의 화승들이 함께 조성했다.
시왕도는 좌우에 5폭씩 10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향우측에 홀수왕(1,3,5,7,9대왕), 향좌측
에는 짝수왕(2,4,6,8,10대왕)의 그림이 있고 건령대장군(建靈大將軍)과 일직사자(日直使者),
월직사자(月直使者)를 담은 사자도가 걸려있다. 그리고 시왕도 상단에는 명부(저승)의 각 대
왕이 망자를 심판하는 장면을 담고 있으며, 하단에는 각 대왕의 심판에 따라 벌어지는 무시무
시한 지옥 장면을 그려 넣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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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시왕도는 19세기 말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하던 시왕도 형식으로 비슷한 시기의 다른
시왕도와 달리 유일하게 사자도까지 모두 갖추
고 있다. 또한 그 시절 최고의 화승인 한봉창
엽과 명응환감, 계은봉법, 금곡영환, 예운상규
(禮雲尙奎) 등이 각 폭을 나누어 그린 것도
큰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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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자도와 귀엽게 표현된 인왕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