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대구 비슬산(琵瑟山) 나들이 (2006년 10월 7일)'


▲ 현풍석빙고에서 바라본 비슬산

* 익스플로어 새 창으로 보고자 할 경우여기를 클릭바랍니다.
* 간혹 사진이 뜨지 않는 경우가 있으며, 본문 내용 중 틀린 글자, 잘못된 내용이 발견되면 즉시
메일이나 댓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공개일 기준으로 까페에 올린 글은 2달까지만 수정, 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지며, 본 글의
원본이나 블로그는 3달 정도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필요한 경우 축소, 연장 가능)


우리나라 제3의 도시 대구(大邱)에는 그 명성에 걸맞게 2개의 큰 산을 남북으로 품고 있다.
북으로는 신라 5악의 하나이자 동화사(桐華寺), 파계사, 갓바위 등의 굵직한 불교 성지를 지닌
팔공산(八公山), 남으로는 팔공산에 못지 않은 웅장한 자태와 함께 용연사(龍淵寺), 유가사 등
의 가히 만만치 않은 불교 문화유산을 간직한 비슬산(琵瑟山,1084m)이 바로 그 것인데 본 글에
서 다루고자 하는 곳은 비슬산, 거기서도 비슬산을 대표하는 고찰 유가사(瑜伽寺)이다.

2006년 추석, 대구에 아는 후배 여인네(지금은 행방이 묘연)와 함께 유가사를 찾았다. 그 곳은
오랜 명성에 걸맞지 않게 교통이 그리 좋은 편이 못되나서 대구 1호선의 서쪽 종점인 대곡전철
역에서 거의 1시간을 기다려서 11시 40분에 유가사행 달성군내버스 5번을 탔다.

우리가 탄 버스는 화원과 반송리, 달성공단을 지나 현풍터미널에서 잠시 숨좀 돌리다가 다시 길
을 재촉, 하향주(荷香酒)의 고향인 음리(陰里)를 거쳐 비슬산의 품 속으로 계속 파고 들어가서
12시 50분 드디어 산 속 깊히 숨겨진 유가사 종점에 도착했다.

바깥세상과 거의 단절된 듯한 유가사 마을을 지나 계곡 위에 무지개처럼 걸린 돌다리를 건넌다.
절로 들어서는 계류(溪流)에 돌다리를 걸쳐놓은 것은 통행의 편의도 있지만 가람에 들어서기 전
에 자신의 온갖 번뇌를 모두 계곡물에 흘려 보내라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 것들을 물에 히염
없이 떠내려 보내고 싶어도 오랜 가을 가뭄의 영향으로 계곡에 어디 물이 있어야 말이지, 물은
온데 간데 없고 계단식으로 차곡차곡 정비된 계곡에는 그저 돌만이 어지러히 널려 있을 뿐이다.

유가사를 구경하기 전에 우선 유가사의 내력에 대해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겠다.



♠ 고려시대 유가종(瑜伽宗)의 총본산, 비슬산 자락에
아늑히 들어앉은 ~ 유가사(瑜伽寺)



▲ 유가사의 법당인 대웅전(大雄殿)
 

비슬산의 정상인 대견봉 아랫 자락에 아늑히 들어앉은 산사로 827년(흥덕왕 1년) 도성국사(道成
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도성국사는 시공을초월하는 놀라운 도력(道力)을 지녔다고 하며,
비슬산의 바위 모습이 마치 아름다운 구슬과 부처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절의 이름을 '유가
사'라 했다고 한다.

▲ 유가사 찻집

▲ 석등이 심어져 있던 연화대석(蓮花臺石)

고려시대에는 유가종(瑜伽宗)의 총본산으로 3천 명의 승려가 머물 정도로 팔공산 동화사보다 더
큰 규모를 자랑했으나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어 동화사의말사(末寺) 신세가 되었다.
당우(堂宇)로는 대웅전과백화당, 취적루, 용화전, 나한전, 산령각등의 약 10동의 불전이 있으
며,소장 문화재로는 지방문화재인 용화전 석조여래좌상이 있고, 비지정문화재로 조선 후기에 그
려진 16나한도, 부근 절터에서 가져온 고려시대 5층석탑, 유가사의 기나긴 역사가 담겨진 거대한
부도밭(총 15기로 유가사 북쪽 200m지점에 있다. 유감스럽게도 못가봤음 ~~)등이 있다.

▲ 유가사 조사당(祖師堂)
천왕문 우측 소나무 사이에 들어앉은 건물로
우리의 토속신앙인 서낭당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안에는 향로만 있을 뿐 승려의 영정이나
불상은 없다.

▲ 언제나 물로 가득한 유가사 석조(石槽)
절을 찾은 중생들을 위해 아낌없이 물을
베푸는 석조, 바로 비슬산을 포함한 대자연과
중생구제를 열망하는 부처의 마음이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그려진 괘불(掛佛)이 있는데 매우영험하기로 소문이 자자하여가뭄이나 여
러가지 어려움이 있을 때, 괘불을 법당에 모셔두고 기도를 드리면 가뭄 등의 어려움이해소되었
다고 하며, 예전에는 비슬산에 호랑이와 늑대등이 많아 사람과가축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고
하는데.괘불을 대웅전 앞에 걸고 제사를 지내니짐승들이 마치 괘불의위용에놀란 듯, 거의 얼
씬거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유가사의 부속 암자로는 수도암, 청신암, 도성암(道成庵)등이 있으며 잘나가던 시절의 옛 명성
을 되찾기 위해대규모의 불사를 구상 중에 있다. (왠만하면 그냥 두지 ~~)

비슬산에 포근히 안긴 조용하고 아담한 산사로 속세의 온갖번뇌와 시름을 잊기에는 매우 좋은
곳이다.이 곳에 와서 마음을 가다듬으며 앞날에 대한 각오를 새롭게 하는 것은 어떨까..?


* 유가사 찾아가기 (2007년 10월 기준)
- 1호선 대곡역(1번 출구)과 현풍터미널에서 달성 5번 버스,1일 15회 운행(60 ~ 90분 간격)
- 휴일, 주말에는 600번 버스 2대를 투입하여 대곡역(1번출구) ~ 현풍터미널 ~ 유가사/비슬산휴
양림 구간을 운행한다. (거의 50 ~ 60분 간격)
* 승용차 - 대구 -> 현풍 -> 음리 -> 유가사
- 구마고속도로 -> 현풍나들목 -> 현풍 -> 음리-> 유가사
- 유가사 버스종점에 주차장이 있으며 유가사 바로 아래에도 조그만 주차장이 있다.
- 입장료 없음 / 관람시간 제한 없음
- 유가사에서 비슬산(대견봉)으로 올라가 휴양림(소재사), 용연사 방면으로 내려갈 수 있다.



♠ 유가사 둘러보기 ~ 일주문에서 천방루까지


▲ 유가사 일주문(一柱門)

다리를 넘으면 속세와 부처의 세계를 구분 짓는 기둥 2개의 일주문이 나온다.
문이라고는 하지만 문을 여닫는 문짝은 없으며 절을 찾은 중생들, 산을 찾은 등산객, 부자와
서민 등 가리지않고 누구나 반가이 맞이해 준다.
우리 현대인들에게 정녕 필요한 건 돈과 명예가 아닌 일주문과 같은 넓은 포용심이 아닐까?

일주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비슬산의 오랜 명물인 암괴류 돌덩어리 서식지를 만나게 된다.


▲ 비슬산 암괴류(岩塊流) - 천연기념물 435호

비슬산에는 특이하게도 온갖 풍파를 겪은 돌덩어리들의 집단 서식지(?)가 곳곳에 포진해 있다.
이들 돌덩어리를 어려운 말로 암괴류라고 하는데 암괴류란 큰 자갈이나 커다란 암석 덩어리가
집단적으로산자락이나 골짜기에 천천히 흘러 내려와 쌓인 것을 일컫는다.
이 곳 암괴류는 주로 중생대 백악기(白堊紀, 1억 4500만년 전부터 ~ 6500만년 전까지)의돌들
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치 산사태가 일어나 와르르 무너져 내린 폐허의 현장을 보는 듯 하다.
비슬산 곳곳에 퍼진 암괴류의 길이는 2km, 폭은 80m 이며 돌덩어리의 직경이 1~2m에 이르러 한
반도에 분포하는 여러 암괴류 중 규모가 제일 커서. 자연 학술적으로 연구 가치가 높아 천연기
념물로보호하고 있다.

◀ 비슬산 곳곳에 또아리를 튼 암괴류
(유가사 → 대견사터 방향 약 1km 지점)

비슬산을 한층 신비롭게 만드는 암괴류, 중생
대에 태어난 돌들로 산자락과 계곡으로 물 흐
르듯 흘러 내려와 지금의 암괴류를형성하게
되었다.
마치 버려진 돌들의 무덤을 보는 듯, 황량해
보여 그냥 지나치기 일쑤이나 저들에게는 1억
년 태고의 신비가 고스란히 살아 숨쉬고 있는
비슬산의 진정한 주인이다.


▲ 유가사 해탈문(解脫門)

일주문을 지나 5분 정도 오르면 유가사 주차장이 나온다.
여기서 유가사로 가는 길이 2갈래로 쪼개지는데 왼쪽 길은 해탈문을 거쳐 송림(松林)의 산길을
지나 천왕문으로 통하며 오른쪽은 콘크리트 도로로 유가사 경내의 동쪽으로 통한다.
기왕 산사(山寺)에 왔으니 호젓하게 산길로 가는 것이 더 좋겠지.
얇은 2개의 기둥에 의지한 해탈문의 모습이 꼭 속세의 모든 것을 훌훌 벗어 던지고 해탈에 경
지에이른 듯 홀가분해 보인다.


▲ 유가사로 오르는 돌계단

해탈(解脫)을 꿈꾸며 해탈문을 들어서면 중년 신사처럼 멋드러진 송림길이 나온다.
소나무 사이로 펼쳐진 오솔길을 따라 2분 정도 가면 개성 만월대(滿月臺)의 옛 고려왕궁의 거
대한 계단을 닮은 높다란 돌계단이 우리를 맞이한다.


▲ 유가사 천왕문(天王門)

촘촘히 들어선 계단을 오르면 정면으로 맞배지붕의 천왕문이
나온다.
천왕문은 부처님의 경호원인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보통 '天王門' 현판이 걸려있으나 여기는그냥 '瑜伽寺'라
쓰인 현판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문 안에는 사천왕의 형상(形象) 대신 그들의 모습을 담은 벽
화(壁畵) 4장이 있다.

◀ 수염을 휘날리며 ~ 벽에 그려진 지국천왕(持國天王)


▲ 유가사 천방루(千方樓)

천왕문에서 사천왕의 검문(?)을 받고 나오면 바로 '천방루'라는 황색 지붕의 누각과 마주친다.
지붕이 누래서 마치 자금성(紫禁城)의 건물을 보는 듯하며 유가사의 옛 영화를 꿈꾸는 상징적
인 건물이지만 1층 부분은 가운데 통로를 제외하고 모두 벽으로 봉해버린 탓에 누(樓)의 이미
지가 상당히 떨어진다.
천방루를 들어서면 대견봉을 든든한 뒷배경으로 삼은 유가사 경내가 유감없이 펼쳐진다.

▲ 천방루 내부를 가득 메운 석가여래
3존불을 위시한 5백 금동불(金銅佛)

▲ 천방루 풍경물고기



♠ 유가사 3층석탑


▲ 유가사에서 바라본 비슬산 대견봉

비슬산의 정상 대견봉(大見峰)이 조그마한 산사, 유가사의 든든한 뒷배경이 되어주고 있다.
조선시대 상당수의 절들은 예전 시대에 비해 절을 크게 꾸밀만한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몇몇 절들은 그 허전함을 채우려는 의도로 웅장한 산이 잘 보이는 곳에 절을 세우거나
혹은 이전했다고 한다.

◀ 유가사 3층석탑 (우측 탑)
유가사의 가람배치는 금당(대웅전) ~ 2탑 ~ 중문
(천방루) 형태로 대웅전 앞에는 3층석탑2기가 세
워져 있다.
그 중 우측의 이 석탑은 원래 유가사에서 1리정
도 떨어진 원각사(圓覺寺)라는 옛 절터에 있던 것
으로 절이 파괴되고 탑 또한 산산이 부셔진 채로
뒹굴고 있던 것을 1920년 유가사에서그 탑재(塔
材)를수습하여 복원하였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복원이 잘되어 탑의전
체적인 비례도 알맞고 보물급으로 지정해도손색
이 없을 정도로 돌을 다듬은 솜씨가 정교하다.

탑의 상륜(相輪) 부분에는 찰주가 하늘을 향해솟
아 있다.

▶ 유가사 3층석탑 (좌측 탑)

옛 원각사터에서 가져온 탑만으로는 부족
했는지 근래에 그 좌측으로 새로이 3층석
탑을 세웠다.
뽀송뽀송한 하얀 피부와 거기서 반사되는
햇빛으로 눈이 부실 지경이며, 탑의맵시
가 매우 곱다.



♠ 유가사 석조여래좌상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50호


▲ 유가사 용화전(龍華殿)

나한전과 산령각(山靈閣)중간에 들어앉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촐한 모습
을 간직하고 있다.
용화전은 보통 미륵불(彌勒佛)을 모시나 여기서는 유가사의 유일한 지정문화재인 석조여래좌상
을 모시고 있다.

◀ 약간 멍한 표정의 유가사 석조여래좌상
유가사에 유일한 지정문화재로 불상과 대좌(臺座
)가 같은 돌(화강암)로 조성되어 서로 끈끈하게
붙어 있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얼굴 부분과 양 무릎
을 시멘트로 땜방질 한 것을 빼면 대체로 옛모
습을 간직하고 있다.

다소 어벙벙해 보이는 그의 얼굴 주변으로 땜방
질의 검은 흔적들이 불에 그을린 양 옥의 티처럼
남아있다.

어깨는 꽤나 단련을 한 듯, 넓직하며 가슴 부분
은 근육도 우람하여 매우 듬직해 보인다.
대좌에는 조그만 불상들이 조용히 들어앉아 합장
인(合掌印)을 선보인다.



♠ 서서히 단풍철을 준비하는 비슬산을 잠시 오르다 ~~


▲ 비슬산의 꼭대기, 대견봉
산 정상에 마치 난공불락에 거대한 요새가 있는 듯, 그 모습에 위엄이 넘쳐 보인다.


유가사를 둘러보고 그 절을 품 안에 안고 있는 비슬산을 오른다.
처음부터 꼭대기인 대견봉까지 갈 생각이 없던 터라 욕심을 부리지 않고 유가사 기점 2km 정도
까지만 올라가다가 후배가 싸온 김밥과 귤을 먹고 천천히 내려왔다.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숨쉬는 동안은 언제든 비슬산을 찾을 수 있다. 첫 술부터 그 정상까지 올
라가고 산자락 곳곳에 안긴 대견사터, 소재사 등의 명소를 다 보려 든다면 솔직히 지나친 욕심
이 아닐까? 이번은 어디까지나 비슬산 사전답사이다.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먹어서 그런지 김밥은 정말 꿀맛이었다. 그렇다고 김밥에 꿀이 첨가된
것은 아니다. 그냥 1줄에 1000원하는 흔하디 흔한 김밥이지만 산에서 먹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 목구멍으로 술술 잘 넘어간다.

가을이 그 절정을 향해 달려가야 될 시기이건만 마치 여름의 제국이 부활한 듯 마냥 마냥 덥기
만 했다. 땀은 장마가 내리듯 하고, 신발은 등산화가 아닌 운동화라 발은 고달퍼서 못살겠다며
앙탈(?)을 부린다.

산에 오면서 울긋불긋 단풍을 기대했지만
아직까지는 시기상조라 고운 색채의 나뭇
잎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유가사 계곡은 오랜 가뭄으로 인해 물이
말라버린지 오래라 이건 계곡인지 돌들의
무덤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이다.

◀ 녹음으로 가득한 비슬산 등산로
(유가사 출발 0.5km 지점)

◀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 소나무 아래에
솟아난 돌탑
비슬산을 찾은 사람들이 전망이 확 트인 이곳에
그들의 소박한 소망을 담은 돌탑을 쌓아 올렸다.
저 탑에는 과연 어떤 사연과 소망들이 담겨져 있
을까?

유가사 종점으로 내려오니 시간은 16시 20분, 마침 40분에 현풍으로 나가는 달성 5번이 들어와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다.
시간이 되자 약간의 등산객을 태운 달성 5번은 첩첩산중의 깊은 산골, 유가사를 미련없이 출발
하여 20분 만에 우리를 현풍터미널로 데려다 준다.

저녁으로 현풍곰탕을 먹기 위해 곰탕집으로 가던 중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비슬산에서 발원
한 현풍천(玄風川)을 따라 동쪽으로 1리정도 들어가니 현풍향교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그 이정표를 무시하고 하천을 따라 좀더 들어가면 냇가에 커다란 고분(古墳)같은 것이 숨을
죽이며 들어앉아 있으니, 바로 얼음을 보관하던 옛날의 냉동창고, 즉 석빙고이다.


♠ 얼음과 진상품을 보관하던 옛 냉장고, 현풍석빙고(玄風石氷庫)
- 보물 673호

'현풍 곽씨(郭氏)'의 고향이자 '현풍곰탕'의 탄생지인 현풍시내의 동쪽, 현풍천 개울가에는 옛
날에얼음을 보관하던 거대한 냉동창고인 현풍 석빙고가 자리해 있다.
오늘날이야 냉장고 등의 냉동시설이 잘되어 있어 언제든지 얼음을 취할 수 있으나 100년 전까
지만 해도 얼음은 절대적으로 귀하던 시절이라 나라에서 관리, 통제하였다.

그래서 주요 고을에는 개천 주변으로 고분 모양의 거대한 냉동창고(석빙고)를 만들어 겨울철에
강이나 하천에서 얼음을 뜯어내어 저장했다가 여름이나 기타 필요할 때 꺼내 썼으며 서울로 올
리는 진상품과 기타 냉동 보관이 필요한 여러 물품을 보관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여름은 무더웠다.
무더위를 도저히 참지 못하고 석빙고에 몰래들어
와 얼음을슬쩍하거나 그것을 죽부인 삼아 시원하
게 단잠을 자던 사람들은 국가 시설 무단침입 및
절도죄로 거의 대부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만큼
그 형벌은 무척 심했다.
그 많고 많던 석빙고는 현재 이 곳을 비롯하여 경
주, 청도, 안동, 창녕 정도에만남아 있으며서울
에도 서빙고(西氷庫)와 동빙고(東氷庫)가 있었다.
현풍 석빙고는 경주의 그것과 구조와 크기가 많이
비슷하며 예전에 현풍천에서 잡히던 은어(銀魚)를
갈무리했다가 서울로 진상했다고 한다.

▲ 속인(俗人)들이 개척한 등산로(?)를
따라 석빙고 꼭대기에 오르면 돌로
만들어진 석빙고의 통풍시설이 있다.

석빙고를 이루는 돌은 모두 화강암으로 4개의홍
예로 천정을 덮었다. 또한 1982년 이 주변에서 석
빙고의 축조 연대가 적힌 비석을 발견했는데, 비
문(碑文)에는 '숭정 기원후 이경술 11월(崇禎紀元
後二庚戌十一月)'이라 쓰여 있으니 여기서 '숭정
기원후 이경술'은 1730년(영조 6년)이며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왕인 의종(毅宗)의 연호이다.

▲ 굳게 입을 봉한 석빙고

이제는 보물급 문화재로 귀한 몸이 되신지라 더 이상의 얼음 보관은 없다. 상황이 이러니 석빙
고로 들어서는 문은 더 이상 열릴 이유가 없어 보존을 위해 계속 문을 봉하고 있다.
하지만 빙고 내부는 아직도 서늘한 냉기로 가득하여 문 앞으로 다가서면 오히려 한기가 느껴질
정도이며, 문 주변으로 온갖 벌레들로 가득하여 접근하기가 좀 깨름칙하다.

* 현풍 석빙고 찾아가기 (2007년 10월 기준)
- 1호선 대곡전철역(1번 출구)에서 600번, 달성 5번 이용 현풍터미널에서 도보 10분
- 대구 서부정류장(1호선 성당못역 3번 출구)에서 현풍 방면 직행버스 수시 운행


어느덧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저녁밥이 그리워질 시간이다.
터미널과 가까운 현풍곰탕집은 추석연휴라 문을 굳게 닫아 걸어서 현풍시내 남쪽에 있는 또 다
른 곰탕집을 찾았다.
터미널 부근에 있는 곰탕집도 원조라 그러고 우리가 찾은 이 집도 원조라고 하니 도대체 어느
집이진짜인지 정말 비슬산 산신도 모를 지경이다.
이번에 찾은 곰탕집은 규모가 터미널 부근의 그 집보다 훨씬 넓었다. 2층 규모의 가히 300명은
채우고도 남을 공간, 그리고 넓은 주차장까지.
이 집도 꽤 진국인지 주막 내부에는 곰탕을 먹으러 온 사람들로 넘쳐 난다.

다행히 구석 쪽에 자리를 잡고 곰탕을 먹었는데, 가격이 나주곰탕보다 3000원이나 비싼 9000원
이나한다.
하지만 밑반찬의 종류가 나주는 2가지인데 반해 이 곳은 6가지로 완전 하나의 곰탕 정식으로
나온다. 그래서 가격을 다소 밉게 책정한 것 같다.

곰탕의 영원한 동반자, 송송(깍두기)과 김치, 그 외에 나박김치와 고추 등이 우리의 손길을애
타게 기다린다.
현풍곰탕은 현풍 지역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황해도에 해주곰탕이 있고 전라도에 나주곰탕이 있
다면경상도에는 현풍곰탕이 있다. 곰탕은 설렁탕의 사촌 정도 되는 탕으로 소고기를원료로
하여 국을 진하게 우려서 내는 음식이다.

점심도 김밥 몇 줄과 과자 등으로 때운 것이 전부라 5년 전 현풍할매곰탕에서 먹은 기억을 더
듬으며 열심히 수저를 움직인다.
5년 전 기억으로는 거의 4000원 정도 했던 것 같은데 그새 세월의 무게가 더해졌는지 가격은
9000원이다. 하긴 곰탕 먹으려고 현풍까지 왔는데 9000원이 무슨 대수랴. 그리고 후배가 사주
는 건데.. ~~


처음에는 배가 고파 눈에 뵈는게 없는지 양이 매우 적어 보였으나 먹고 나니 배가 가득 불러온
다. 뜨끈한 탕을 먹고나니 졸음이라는 놈이 배깔고 한숨 자라며 나를 거침없이 희롱해댄다.
마음 같아서는 배때기 깔고 한 숨 자고 싶지만 그런 것은 집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졸음을 떨구고자 서비스로 주는 수정과와 커피 1잔으로 저녁을 깔끔히 마무리 하였다.

동대구 고속터미널에서 후배와 작별을 고하고 20시 40분 일반고속버스를 타고 서울 강남으로
올라와 새벽 2시에 시내버스 막차로 집에 들어오니 시간은 어느덧 새벽 3시.. ~~

-> 이리하여 2006년 추석, 대구 비슬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답사, 촬영 일시 - 2006년 10월 7일
* 작성 시작일 - 2006년 10월 26일
* 작성 완료일 - 2006년 11월 2일
* 숙성기간 ~ 2006년 11월 3일 ~ 2007년 10월 16일
* 공개일 - 2007년 10월 16일부터


★ 본 글은 아래 블로그로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습니다. ~~
☞ daum 블로그 보러가기 ☞ empas 블로그 보러가기
☞ naver 블로그 보러가기 ☞ paran 블로그 보러가기

Copyright (C) 2007 by 박융(Park Yung), All rights reserved

☞ 본 글의 내용(일부만 발췌해가도 마찬가지)과 사진을 퍼갈 때 반드시 그 출처
(글을 가지고 온 까페나 블로그)
와 원작자(박융, 되도록 닉네임 대신 이름으로
써 주세요)
를 모두 밝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대구권 사진,답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슬산 소재사 (비슬산자연휴양림)  (0) 2009.08.04
도동서원  (0) 2009.07.30
현풍 석빙고 / 현풍 곰탕  (0) 2006.10.23
대구 비슬산 유가사 ~  (0) 2006.10.23
대구 경상감영공원  (0) 2006.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