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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21.06.03 한탄강 언덕에 살짝 깃든 고구려의 작은 흔적, 연천 은대리성
  9. 2020.08.26 서울의 단단한 북쪽 지붕, 도봉산 계곡 나들이 ~~ 무수골계곡에서 우이암 관음봉, 문사동계곡, 도봉계곡, 도봉동문까지
  10. 2020.08.16 제주도의 아름다운 서쪽 끝 ~ 제주올레길12코스 당산봉, 고산리유적, 엉알해안, 수월봉 나들이 (차귀도, 산방산탄산온천)

조선시대 공동묘지였던 도심의 달달한 뒷동산, 초안산 (초안산분묘군, 월계동 비석골근린공원)

서울 도심의 상큼한 뒷동산이자 조선시대 공동묘지, 초안산 나들이 (초안산 분묘군)



' 서울 도심의 상큼한 뒷동산이자 조선시대 공동묘지, 초안산 '

초안산 숲길

▲  봄이 무르익은 초안산 숲길

초안산의 조선시대 무덤들 비석골근린공원

▲  초안산 조선시대 분묘군

▲  비석골근린공원



 

봄이 한참 무르익던 4월 한복판의 어느 화창한 날, 집에서 무척 가까운 초안산(楚安山)을
찾았다.

초안산(114.1m)은 도봉구 창동(倉洞)과 노원구 월계동(月溪洞)에 걸쳐있는 야트막한 뫼로
내가 서식하고 있는 도봉구(道峰區)의 남쪽 끝을 붙잡고 있다. 모래와 진흙으로 이루어진
흙산으로 산세는 아주 느긋하며, 서쪽에는 우이천(牛耳川)이, 동쪽에는 중랑천(中浪川)이
흘러 마치 산을 둘러싸고 도는 모습이다. 그러다보니 동쪽과 서쪽은 자연히 배산임수라는
착한 지형을 띄면서 무덤이나 마을, 집 자리로는 아주 그만이다. 그래서 초안산 주변에는
안골, 녹천, 벼루말, 각심사 등 여러 마을이 둥지를 틀었다. (현재는 개발의 칼질에 모두
날라가 이름만 희미하게 남아있음)
또한 조선시대에는 한양도성 밖 10리 안<성저십리(城底十里)>에는 대놓고 무덤을 닦을 수
가 없어 천상 도성 10리 밖에 무덤을 써야 했는데 배산임수의 조건을 지닌 초안산이 10리
밖에서 가장 가까운 것이다. 그런 조건들이 묘하게 맞아 떨어져 구파발의 이말산(莉 茉山)
과 더불어 서울 사람들의 공동묘지가 되었다.

이곳에는 양반사대부부터 내시, 상궁, 중인,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이 신분을 초
월하며 묻혀 있는데, 지금까지 확인된 조선시대 무덤만 1,100여 기에 이르러 천하 최대의
조선시대 공동묘지를 이루게 되었다. 산 전체가 거의 무덤밭인 것이다. (무덤은 20세기까
지 들어섰음) 초안산이란 이름도 죽은 이들의 편안한 안식처를 정한다는 뜻이니 그야말로
이곳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라 하겠다.
비록 서울 지역 최대의 조선시대 공동묘지란 조금은 후덜덜하고 우울한 성격을 가지고 있
지만 그 덕에 2000년 이후 조금씩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조선시대 무덤 양식과 변천
을 한 자리에서 더듬을 수 있는 소중한 현장으로 뒤늦게 인정을 받으면서 '서울 초안산분
묘군'이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 440호로 지정되었다. <산 전체가 아닌 무덤이 몰려있는 곳
들이 사적으로 지정됨, 사적으로 지정된 면적은 319,503㎡>
초안산에 안긴 무덤 가운데 내시 무덤이 무려 100여 기에 이르러 '내시산(內侍山)','내시
네 산'이란 별명도 지니고 있다. 그들의 무덤은 거의 서쪽(서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
는 그들이 일했던 궁궐과 충성을 바쳤던 제왕이 서쪽<정확히는 서남쪽~>에 있어 죽어서도
그 일편단심을 보이고자 함이라 한다.

그렇게 산을 가득 뒤덮은 무덤들은 아쉽게도 예안이씨묘역(정간공 이명 묘역) 등 극히 일
부를 제외하고 관리 소홀과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사람들의 못된 손장난 등으로 적지
않게 고통과 파괴를 당했다. 하여 형체를 온전하게 남긴 무덤은 별로 없으며 문인석과 상
석, 묘표 등 석물만 일부 남아있거나 납작해진 봉분이 고작인 무덤이 태반이다. 그러다보
니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이 태반이다. 
다행히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나라와 관할 구청(도봉/노원구)의 보호를 받게 되어 고
통도 많이 줄었지만 워낙 무덤이 많다보니 그 관리도 여간 어렵지가 않다.

초안산은 북한산(삼각산)까지 산줄기가 이어져 있었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이 그 주변을
마구 들쑤시면서 서로 끊긴 상태이다. (산줄기의 윤곽만 남아있음) 게다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인 1971년 '초안산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었음에도 행정관청의 오랜 무관심과 관
리 소홀로 적지 않은 살을 인간에게 내주면서 그 영역도 많이 줄어들었다. 다행히 서울시
가 늦게나마 정신을 차리면서 1990년대 후반부터 자연의 기운이 많이 살아났다.
그 결과 맹꽁이, 무당개구리, 청개구리 등 다양한 양서류와 파충류가 안기는 공간이 되었
으며, 2006년에는 서울에서 최초로 멸종위기종인 표범장지뱀이 발견되기도 했다. 도시 한
복판에 외로이 자리한 초안산에서 말이다. 또한 2012년에는 생태계 복원 차원에서 두꺼비
, 도룡뇽, 산개구리 등 3종 1,500여 마리를 방사하기도 했다.
한때 골프연습장이 이곳에 숟가락을 얹히고자 난리법석을 피우기도 했으나 지역 주민들의
노력으로 산을 지켰다. 그만큼 창동, 월계동 사람들의 소중한 쉼터이자 꿀단지로 뿌리 깊
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초안산은 녹천역(1호선)과 창동주공3단지, 창동주공4단지, 도봉문화정보도서관 서쪽 생태
다리, 창3동어린이집, 초안1단지아파트, 비석골근린공원, 청백1단지, 초안산체육공원에서
올라가면 된다. 정상까지는 넉넉잡아서 15~30분 정도 걸리며, 창동주공3단지에서 오를 경
우에는 30~40분 정도 잡으면 된다.

초안산에는 조선시대 무덤군을 비롯해 비석골근린공원과 각심재, 정간공 이명 묘역, 허공
바위, 잣나무숲, 세대공감공원, 초안산공원캠핑장 등의 명소가 있으며 축구장과 배드민턴
장 등의 체육시설도 닦여져 있다.
아직까지는 인지도가 낮아 지역 사람들이 주로 찾는 쉼터이자 명소로 머물러 있으나 주머
니 속의 뾰족한 송곳처럼 언젠가는 서울의 잘나가는 명소로 거듭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다. 게다가 늙은 무덤들이 산자락과 산길 도처에 헝클어진 모습으로 흩어져 있으니 내 염
통 상태도 체크하고 소소하게 납량특집도 즐길 겸, 한여름 밤에 야간 산책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달님도 등을 돌린 어둑어둑한 밤이면 효과가 더 좋을 듯 싶다. 혹시 아는가 무덤
이나 문인석 등에서 귀신 형님이나 누님이 확 튀어나와 반가이 맞이해줄지도??


▲  녹천역에서 초안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



 

♠  초안산 둘러보기 (녹천역에서 정상 주변까지)

▲  봄이 시정(詩情)을 뿌리는 초안산 산길 (녹천역에서 정상 방향)

녹천역(1호선) 1번 출구를 나오면 초안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손짓을 한다. 경사도 느긋하여
그리 힘든 것은 없으며, 개나리와 진달래, 벚꽃은 다양한 색채로 봄 풍경의 아름다움을 돕고
나무들은 녹색 옷을 걸치며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들이 없다.
봄이 겨울 제국(帝國)을 힘겹게 몰아내고 따스한 기운으로 천하를 해방시키니 세상만물의 찬
양과 우러름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그 봄이 너무 짧다는 것. 봄이 되기가 무섭게 겨
울에 상반되는 여름 제국이 천하를 삼키니 말이다.


▲  느긋한 산길의 정석, 초안산 산길 (녹천역에서 정상 방향)

▲  초안산 북쪽 능선길 ▼

녹천역에서 초안산 정상으로 오르는 산길에는 오래된 무덤이 없다. 중간에 생태공원으로 거듭
난 세대공감공원과 창동4단지로 내려가는 산길이 실핏줄 만큼이나 복잡하게 엉켜 있으며 이정
표가 많이 부실하여 잘 골라서 움직여야 된다.


▲  초안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 초안산 정상

녹천역에서 20분 남짓 오르니 드디어 초안산 정상(114.1m)에 이르렀다. 정상에는 삼각점과 태
극기, 정자, 헬기장 등이 있는데, 나무가 울창하여 조망은 별로이며 나지막하게 누운 뫼의 꼭
대기라 그런지 마치 고양이가 주인 배 위에 올라가 야옹거리며 두리번거리는 기분이다.

여기서 길은 여러 갈래로 갈리는데, 동북쪽은 녹천역과 창동4단지, 서북쪽은 도봉문화정보도
서관과 창1동, 창3동, 서남쪽은 창3동, 남쪽은 매봉과 월계동이다. 초안산의 오랜 문신이나
다름없는 조선시대 무덤을 보려면 서북쪽과 서남쪽, 남쪽으로 내려가면 되며 정상 남쪽 헬기
장 부근부터 무덤의 흔적들이 초췌한 모습으로 마중을 나온다.

▲  정상에 자리한 4각형 정자

▲  'H'마크가 박힌 헬기장


▲  헬기장 남쪽에 자리한 무덤 2기와 묘비

헬기장 남쪽 산길 옆에는 무덤 2기가 납작하게 누워 있다. 이들은 원래 저거보다 더 컸지만
후손들의 손길에서 벗어난 이후, 대자연과 장대한 세월의 의해 저런 몰골이 되버렸다. 하긴
천하에 어느 누가 대자연과 세월을 이기겠는가?
주변에 비석과 비석을 세우던 비좌(碑座) 등이 널려있어 얼핏 봐도 무덤 티가 나는데, 묘비와
비좌는 제자리를 약간 벗어나 무덤 옆과 뒷쪽에 널부러져 있다.

▲  무덤 뒷쪽에 누운 비좌
비좌에 의지했을 비석은 온데간데 없고,
그 빈자리에는 빗물이 고여 있다.

▲  헬기장 부근에 외로이 서 있는
문인석 1기


▲  헬기장 남쪽에 있었던 체육시설 (2015년)

헬기장 남쪽에는 체육시설과 너른 공터가 있다. 이 주변에는 자연의 일부로 동화된 무덤의 흔
적과 문인석이 적지 않게 방황하고 있어 무덤이 여럿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초안산의 옛
무덤에 대한 인식이 바닥이었던 20세기 중~후반, 동네 사람들이 그들을 밀어내고 체육시설을
닦았고 상태가 괜찮은 문인석을 주위에 갖다 놓아 이곳의 장식물로 삼았다.
이처럼 무덤 문인석으로 주변을 치장한 체육시설은 천하에서 이곳이 유일할 것인데, 다행히도
근래에 무덤 유적 보호를 위해 배드민턴장을 밀어버렸으며, 지금은 체육시설 일부가 남아있다.


▲  초안산 정상에서 창3동으로 내려가는 산길
이 산길 주변에도 무덤들이 많다.

▲  무덤 봉분(封墳)은 대자연의 의해 완전 가루가 되었지만 상석과
향로석, 혈(穴)에 해당되는 봉분 뒷쪽은 그런데로 남아있다.



 

♠  초안산 서남쪽 둘러보기 (창3동 구역)

▲  창3동 산자락에서 만난 무덤 3기

초안산 창3동 구역에는 늙은 무덤이 많다. 산자락은 물론이고 산길에도 세월의 무게로 납작해
진 무덤이 널려있어 한밤에 오면 정말 기분이 오싹해질 정도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시 초안
산 분묘군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초안산에 깃든 무덤 가운데 가장 늙은 것은 좌의정을 지낸 이명(李蓂, 1496~1572)의 무덤이다.
그의 묘는 월계동 예안이씨 묘역(각심재 주변)에 있는데, 예안이씨 외에 밀양박씨(창3동 지역
), 태안이씨(창3동 지역) 묘역 등 3개의 사대부 집안 묘역이 초안산에 둥지를 틀고 있다. 그
들은 후손들의 보살핌이 각별하여 무덤 상당수가 양호하게 남아있다.
이들 외에는 내시, 상궁, 중인, 서민들의 무덤으로 산 곳곳에 흩어져 있는데, 상당수는 관리
의 손길이 끊겨 초췌한 몰골이다. 특히 100여 기에 이르는 내시 무덤 중에는 김계한(金繼韓,
?~1624)과 김광택(金光澤)의 묘가 제일 오래되었으나, 1993년 김계한의 13세손이 경기도 양주
시 광적면 효촌리로 이장시키면서 이제는 인덕대학 뒷쪽 매봉에 자리한 승극철(承克哲) 부부
묘가 제일 늙은 내시의 무덤이 되었다. 묘비에 의하면 1634년에 조성되었다고 나온다.

현재까지 산에서 확인된 오래된 무덤은 2000년 기준으로 1,154기로 상석 511기, 향로석(香爐
石) 210기, 석인상 169기, 묘비 182기, 비석 대좌 123기, 망주석(望柱石) 58기, 초석 2기, 장
명등 1기이다. 하지만 아직도 땅 속에 잠긴 묘와 석물이 적지 않아 그 갯수는 계속 변동된다.
상황이 이리된 것은 후손에게 버려진 묘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그런 묘들은 대자연과 몰지각
한 인간들의 희롱으로 대부분 우울한 몰골이 되기 일쑤이고 심지어 도굴까지 당한 무덤도 적
지 않다.

높은 사람들이나 쓸 수 있던 신도비(神道碑)는 앞서 언급한 집안 묘역에 조금 있고, 그 외의
무덤은 묘표(墓表, 묘비)를 지녔다. 묘표는 15세기 형식인 하엽방부형(荷葉方趺形)은 일부이
고, 17~18세기 형식인 원수방부형(圓首方趺形)의 묘표가 대부분이다. 특히 방형(方形)의 비대
만 남은 것이 많은데 윗면에는 연판문이나 당초문(唐草紋), 옆면에는 안상문이나 운문(雲紋)
을 새기거나 아무 문양도 없는 것이 많았다. 이는 중인과 내시, 상궁, 서민의 무덤이 많기 때
문으로 풀이된다.

남아있는 석인상은 3대 가문 묘역을 비롯해 적지 않게 흩어져 있고 쌍계를 갖춘 동자석(童子
石)도 많다. 이들 석인은 대부분 17~18세기 것으로 18세기 중반 이후 사실주의 양식의 석물도
적지 않아 무덤 석물의 변천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상석(床石)은 장방형의 상석 받침을
지닌 형태거나 향로석이 상석 받침과 연결되어 겸용으로 만들어진 형태가 많다. 이러한 석상
의 형식은 17세기 이후에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상석 받침과 겸용으로 만든 향로석은 18세기
이후 초안산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들 석물을 통해 빠르면 15세기에 무덤이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17~18세기에 폭발적으로 늘
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 넓지 않은 산에 무덤이 마구 들어서니 자연히 묘역 구성은 간소
한 밀집형이 주류를 이루며 석물들은 단순하고 실용적인 형태로 제작되었다.

이곳은 특히나 내시묘가 많이 분포하고 있는데, 조선 제일의 법전(法典)인 경국대전(經國大典
)에 내시의 묘는 도성 10리 밖에 두라는 규정이 있어 그거에 맞는 이곳과 구파발 이말산(莉茉
山)이 무덤 자리로 격하게 선호되었다.
초안산에 안긴 1,100여 기의 무덤들은 '서울 초안산 분묘군'이란 이름으로 사적 440호로 지정
되었으며, 조선 중/후기에 걸쳐 긴 시간에 조성된 조선시대 공동묘지로 비록 상태가 양호한
석물은 별로 없으나 나름대로 무덤과 석물의 변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초안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1동, 창3동 / 노원구 월계2동
* 초안산 분묘군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산202-1, 노원구 월계동 산8-3번지 등


▲  문인석과 동자석까지 갖춘 무덤들 - 이들은 사대부의 무덤으로
무덤의 상태는 그런데로 양호하다.

▲  오랜 세월 표정을 잃지 않으며 주인
무덤을 지키는 문인석의 일편단심

▲  비석과 상석, 동자석을 갖춘 무덤
비석에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라 쓰여있어
통정대부로 추증된 이의 무덤임을 알려준다.

▲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 무덤 앞에
자리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무덤

▲  산자락에 가득 깔린 옛 무덤의 물결


▲  봄이 곱게 붓질을 한 생생한 수채화, 창3동 주택가와 초안산 경계선

▲  창3동 주택가에서 초안산으로 오르는 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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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안산 창3동 산자락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가까이에 창3동 지역을 비롯해 쌍문동(雙門洞)과 수유동(水踰洞) 지역이
낮게 바라보인다. 그들 너머로 보이는 장대한 산줄기는 서울의 듬직한
진산(鎭山)인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이다.

▲  초안산 창3동 산자락에서 바라본 북한산의 위엄
북한산(삼각산) 인수봉과 백운대, 만경대 등이 거뜬히 시야에 잡힌다.
그만큼 이곳과 저곳은 가깝다.

▲  봉분은 사라지고 석물만 남은 무덤 ①
인간이 빚은 봉분은 사라지고 감쪽같이 대자연의 일부로 녹아들어 나무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결국 무덤도 인생처럼 부질 없는 것이다.

▲  봉분은 사라지고 석물만 남은 무덤 ②

▲  봉분은 사라지고 석물만 남은 무덤 ③

▲  봉분은 사라지고 상석만 덩그러니
남은 무덤 3기

▲  고된 세월에 지쳐 쓰러진 망주석
하늘을 향해 우뚝 섰던 망주석은 땅바닥에
쳐박혀 산길의 일부가 되었다.


▲  창3동 산자락의 작은 소나무숲

▲  소나무숲에 이리저리 뒹굴고 있는 무덤 상석들
이곳에는 상석을 갖춘 무덤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소나무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  마치 칼질을 당한 듯, 윗도리가 잘려나간 가련한 문인석

▲  산길의 일부가 되버린 무덤의 비애
봉분은 말끔히 파괴되어 겨우 흔적만 남아있고, 누렇게 뜬 낙엽이 그 자리에 한가득
쌓여 허전함을 달래준다. 무덤 주변에는 문인석 1기와 윗도리만 겨우 남은
상석이 제자리를 지켜 이곳에 무덤이 있었음을 강하게 어필한다.

▲  피부가 누렇게 뜬 비석(묘표)
피부가 손상되어 글 해독이 불가능하다.

▲  세월에 지쳐 쓰러진 비석이 상석을
베게 삼아 하늘을 바라본다.



 

♠  초안산 동남쪽 둘러보기 (월계동 구역)

▲  초안산 정상에서 비석골근린공원으로 내려가는 산길

초안산 정상에서 남쪽 길로 내려가면 월계동 청백1단지와 비석골근린공원으로 이어진다. 이
구간에도 늙은 무덤이 적지 않게 흩어져 있는데, 4각형 정자 쉼터에 이르면 산길 동쪽으로 철
조망이 빙 둘러져 있다. 그 안쪽은 예안이씨 땅으로 정간 이명을 중심으로 한 예안이씨 묘역
이 둥지를 틀었다.

▲  산길에 널부러진 상석들

▲  수풀에 파묻힌 고적한 상석


▲  파괴된 무덤에 남아있는 조그만 문인석과 상석 (바로 옆이 산길)
문인석이 상석보다 작은 경우는 처음 본다.

▲  4각형 정자 쉼터 (왼쪽 철조망 너머가 예안이씨 묘역)

▲  장대한 세월을 예민하게 탄 시커먼 피부의 문인석
무덤은 사라지고 문인석만 남아 있는데, 자신의 우울한 처지에
너무 울었던 탓일까? 얼굴이 거의 지워졌다.

▲  숲속에서 숨바꼭질을 당하고 있는 상석과 묘표

▲  세월의 때가 진하게 낀 검은 피부의 묘표와 상석
무덤 봉분은 진작에 녹아 없어지고 그 자리에 산길이 뚫렸다. 무덤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무덤 자리를 밟고 지나가니
저 세상에서도 속이 편치 않을 것이다. '내가 이럴려고 무덤을
썼나~~!' 자괴심이 들 정도로 말이다.

▲  산비탈의 일부가 되버린 무덤 (묘표와 상석)

▲  월계고등학교 뒷쪽 숲길 (비석골근린공원 부근)

▲  비석골근린공원 서쪽 산자락에 안긴 옛 무덤들 (내시묘로 추정됨)



 

♠  초안산 비석골근린공원과 궁중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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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석골근린공원 내부 ▼

초안산 남쪽 끝에는 비석골근린공원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염광여자메디텍고등학교와
월계고등학교 사이로 비석이 많다고 해서 비석골이라 불렸는데, 그 비석이란 다름 아닌 초안
산에 널린 묘표(묘비)들이다.

이곳은 초안산을 비롯해 노원구 곳곳에서 수습된 문인석과 동자석, 묘표를 옮겨와 보존하고
있다. (공원 주소가 '노원구 월계동'이라 노원구 석물만 있음) 그래서 자연히 문화유산을 겯
드린 상큼한 시민공원이 되었는데, 매년 4월 하반기에는 '임금님과 충신의 만남이 시작된다'
는 주제로 '태강릉 • 초안산 궁중문화제(이하 궁중문화제)'가 열린다.
궁중문화제는 딱히 축제가 없어 애를 태웠던 노원구청이 개최하는 지역 축제로 태강릉(泰康
陵, 중종의 왕후인 문정왕후 윤씨의 능인 태릉, 명종과 인순왕후 김씨의 능인 강릉>
과 비석골
근린공원 일대에서 열리는데, 태강릉은 제왕과 왕후의 지체높은 무덤이고 초안산은 궁궐에서
일했던 내시와 상궁들이 많이 묻혀있으니 이들을 하나로 묶어 궁중문화제란 그럴싸한 행사를
지어낸 것이다.

이 행사에는 어가행렬과 다양한 전통체험, 안골 치성제, 음악회, 포토존, 장터 등이 열리는데
, 내가 이번에 초안산을 찾은 이유 중의 하나도 궁중문화제를 약간이나마 맛보기 위함이다.
허나 내가 도착한 시간은 벌써 17시, 행사도 완전 끝 무렵에 이르러 음악 공연의 끝부분과 약
간의 전통 체험만 남아있던 상황이었다.


▲  신명나는 궁중문화제 음악 공연 (통기타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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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철수해버린 관상보기 체험장
나는 과연 무슨 상일까? 물론 관상이나 손금, 사주는 100% 믿으면 곤란하다.

▲  역시나 텅 비어버린 초안산 안골치성제 천막

서울 도심과 한참이나 떨어진 초안산, 1980년대까지만 해도 안골, 녹천(鹿川), 각심절, 벼루
말 등의 오래된 마을이 있었으나 1990년대 이후 불어닥친 개발의 칼질로 죄다 사라지고 그 이
름마저도 이제 희미해져 기억 속으로 꼴까닥하기 직전이다. 그나마 녹천역 남쪽에 있던 녹천
마을이 시골 풍경을 간드러지게 드러내며 늦게까지 자리를 지켰으나 자비 없는 개발의 칼질에
결국 2015년에 역사의 뒤안길로 강제 퇴장당하고 만다.

옛날 마을에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 의식이 하나씩은 있었다. 치성제나 당제(堂祭)
등 이름은 틀리지만 본질은 비슷한 마을 제사로 안골 역시 치성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단
합을 도모했다. 안골 치성제는 조선 초기 이후부터 전래된 것으로 소 1마리가 7개의 칼을 맞
고 쓰러져 있던 것을 잡아서 안골, 각심사(각심절), 벼루말 사람들이 매봉 남쪽 허공바위에서
제를 지내니 그것이 안골 당제(치성제)의 시초라고 한다.
그 사연으로 제를 지낼 때는 꼭 7개의 식칼을 놓는다. 왜 하필이면 7개의 칼을 맞은 소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름 상서로운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소만 불쌍함;;)

옛날에는 소 1마리를 통째로 잡아서 제를 지냈으나 20세기 이후 약식으로 지내고 있으며 제각
(祭閣)을 두어 제사 도구를 보관하고 음식을 준비했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고 말았다.
제는 1년에 3회를 지냈는데, 2월 초하루는 통합적으로 제를 지냈고, 6월 초하루는 할머니산제
라하여 간소하게 소 내장을 갖추어 지냈으며, 10월 초하루에는 소를 통째로 잡아서 지냈다.
제주(祭主)는 마을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나이 많은 남자를 뽑았는데, 3일간 바깥 출입을 금
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제를 준비했다.

허나 1980년대 이후 개발의 칼질로 마을이 강제로 사라지면서 마을 사람 대부분은 다른 곳으
로 가버리고 9대째 안골에 살고 있는 박점순 할머니가 마을 제사를 지키고 있어 다행히 치성
제 전통은 유지되고 있다. 요즘은 10월 초하루에만 제를 지내며 그날이 되면 각지에 흩어진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허공바위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제단에는 대추, 밤, 사과의 3색 과일
과 생소고기를 올리고 향과 초를 켜 옛날부터 전해오던 식칼 7개와 놋숟가락을 놓는다.


▲  비석골근린공원을 장식하고 있는 문인석과 망주석들 ▼

공원 한쪽에는 문인석 13기가 무리지어 있다. 이들은 염광학원과 옛 경춘선 철로변, 영축산(
靈鷲山), 수락산(水落山)에서 가져온 것으로 16~19세기에 조성된 것들인데 세월의 때를 진하
게 탄 문인석부터 피부가 하얀 문인석까지 다양한 모습들이라 문인석의 변천 과정을 살피기에
는 아주 좋은 곳이다.


▲  서로 상반된 피부 색깔을 지닌 문인석들

▲  망주석들 - 염광학원과 불암산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  키 작은 동자석들 - 염광학원과 영축산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  빛바랜 묘표(묘비)와 하얀 피부의 상석, 향로석
비석이 너무 낡아서 글씨는 확인할 수 없다. 저들을 거느리던 봉분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저들만 겨우 남아 공원에 안착했다.

▲  비석골근린공원에서 시내로 나가는 길 (초안산로5길, 청백3단지 옆)

축제 막바지라 짐싸기 바쁜 비석골근린공원을 벗어나 초안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각심재(恪心
齋)와 정간 이공묘를 찾았다. 허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보수 공사 중이라 온 몸을
가리고 있었다. (정간 이공 묘역과 신도비도 접근이 통제된 상태)
그래서 별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굳이 무리를 하면서까지 사진에 담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
다. 어차피 내 서식지와도 가까운 곳이니 그들의 몸단장이 끝난 이후에 다시 인연을 지어도
상관 없다.

이렇게 하여 초안산 봄나들이는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 채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비석골근린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월계동779 (월계로45가길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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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서귀포 천제연폭포, 제주올레길8코스 나들이 (천제연관개수로, 선임교, 베릿내오름)

서귀포 천제연폭포



' 서귀포 천제연폭포 겨울 나들이 '

천제연폭포 제1폭포

▲  천제연폭포 제1폭포 (천제연)

천제연폭포 제2폭포 천제연폭포 제3폭포

▲  천제연폭포 제2폭포

▲  천제연폭포 제3폭포



 

겨울 제국의 차디찬 한복판인 1월의 첫 무렵,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인 제주도(濟州
島)를 찾았다.

아침 일찍 김포공항에서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1시간을 내달려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정말 오랜만에 제주도에 나를 던져놓았으나 정처(定處)는 싹 정해둔 상태라
그곳만 얌전히 찾아가면 되는데, 첫날은 계획대로 외도동 월대(月臺)를 시작으로 서일
주선을 따라 모슬포(摹瑟浦)까지 여러 주옥 같은 명소와 올레길을 둘러보고 20시 넘어
서 산방산(山房山) 부근에 자리한 '산방산 탄산온천 게스트하우스(게하)'에 여장을 풀
었다.
첫날 여로(旅路)가 너무 배불렀는지 눕자마자 바로 꿈나라로 직통하여 9시간 가까이를
푹 잤다. 여관(모텔)이나 호텔, 펜션, 민박 등은 많이 이용해보았으나 게하는 첫 이용
인데, 그렇게 게하란 존재를 체험하고 아침 일찍 탄산온천에서 몸을 푹 끓이고 말리고
다진 다음 길을 나섰다. (탄산온천 숙박객에게 온천 이용권을 줌)

둘째 날은 첫날 못지 않게 아주 빵빵한 수준의 답사 코스를 준비했다. 천제연폭포를 시
작으로 서귀포(西歸浦) 시내까지 움직이는 일정으로 외도 월대부터 이곳까지 신세를 쭉
진 제주도 간선 202번을 타고 20분 정도를 달려 천제연폭포 정류장에 두 발을 내렸다.



 

♠  천제연폭포(天帝淵瀑布) 제1폭포와 제2폭포

▲  천제연폭포 정문

천제연폭포 정문에 이르니 매표소가 나그네의 호주머니를 부담스럽게 노려본다. 여기서 입장
료를 내야 폭포로 들어설 수 있기에 비싼 입장료를 치루고 유료의 공간으로 들어선다.

제주도의 남부를 이루고 있는 서귀포에는 천제연폭포와 천지연폭포(天地淵瀑布), 정방폭포(正
房瀑布) 등 3개의 유명 폭포가 있다. 이들은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지역 명소로
크게 두각을 보인 존재로 그중 천지연폭포와 정방폭포는 까마득한 과거가 되버린 초등학교 시
절(1988년)에 인연을 지었고 천제연폭포는 무려 30여 년이 지난 이제서야 인연을 짓는다. (이
들 폭포 외에 소정방폭포와 엉또폭포, 원앙폭포도 있음)

정문을 지나면 천제연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오고 이내 2갈래로 갈라져 오른쪽(북쪽)은 천
제연폭포(1폭포), 왼쪽(남쪽)은 천제연2폭포, 3폭포로 이어진다. 제2폭포 남쪽에 걸린 선임교
를 건너 여미지식물원과 롯데호텔제주 일대까지 접근이 가능하며, 제3폭포를 지나 제주올레길
8코스와 베릿내오름, 대포 해변(주상절리)까지 접속이 가능하다. 그래서 천제연폭포만 보고
돌아갈 요량이 아니라면 '폭포 정문 → 제1폭포 → 제2폭포 → 선임교 주변과 천제루 → 제3
폭포 → 폭포 후문 → 제주올레길8코스(베릿내오름, 대포해변)' 순으로 이동하길 권한다. 그
러면 영양만점의 여로가 될 것이다.

* 천제연폭포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동 2232 (천제연로 132, ☎ 064-760-6331)


▲  천제연폭포 제1폭포

제주도 최대의 관광단지인 중문관광단지 한복판에 천제연폭포가 자리하고 있다. 천지연폭포와
정방폭포는 1개의 폭포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곳은 무려 3개의 폭포를 지녀 조금은 단조로운
저들과 크게 차별화된 모습을 보인다.
천제연폭포 3형제는 편의상 제1폭포, 제2폭포, 제3폭포라 불리나 제1폭포가 원래 천제연폭포
이다. 폭포의 높이는 22m에 이르며, 그 앞에 펼쳐진 못을 천제연(天帝淵, 웃소)이라 부르는데
, 못의 밑바닥이 흔쾌히 보일 정도로 수질이 좋으나 겉보기와 달리 21m의 깊이를 지녀 만만히
보면 안된다.

호랑이가 담배를 알기 훨씬 이전에 옥황상제 직속의 선녀 7명이 밤이면 이곳에 내려와 목욕을
했다고 한다. 그 선녀의 주인이 옥황상제라 그 명칭을 따서 '천제연'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
는데, 이는 상상 속의 존재인 선녀와 옥황상제가 군침을 흘릴 정도로 빼어난 절경을 지녔다는
뜻이다. (옛 사람들은 경승지에 학이나 용, 신선, 선녀 등을 엮어놓는 것을 좋아했음)
조선시대에는 천제연 동쪽에 중문원(中文院)을 두었는데, 제주목사(濟州牧使, 현 제주시장)가
이곳에 쉬면서 폭포의 경치를 즐겼다. 이때는 폭포 양쪽 언덕에 표적을 세우고 군사들에게 활
쏘기를 시켰으며, 양쪽 언덕 사이로 긴 줄을 걸어놓고 줄에 매달려 건너가 화살을 수거하도록
했다. 바로 중문원에서 서귀포 시내의 서부를 이루는 중문(中文)이란 지명이 생겨났으며, 천
제연폭포를 빚은 계곡을 중문천이라 부른다.

제1폭포는 대자연이 절묘하게 빚은 주상절리(柱狀節理)식 벼랑으로 실로 감탄을 머금게 한다.
그런데 그 폭포 위(북쪽)에 천제교란 다리가 걸려있어 적지 않은 옥의 티를 내고 있다. 그 다
리는 서귀포시내와 모슬포를 잇는 다리로 차량의 왕래가 빈번하여 이곳의 적막을 수시로 아작
을 낸다. 도로와 다리를 놓는 것은 좋지만 꼭 폭포 윗도리에 저렇게 볼썽사납게 개설해야 했
는지 의문이 든다. (다리가 보이지 않게 좀 북쪽에 지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폭포라고는 하지만 정작 위에서 떨어지는 물은 없고 음악 무대의 뒷배경처럼 주상절리 벼랑만
덩그러니 있다. 이는 겨울 가뭄으로 중문천 상류에 물이 거의 없어서 그렇다. 그런데 이상한
건 폭포 앞 못(천제연)에는 물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보통 폭포가 쏟아낼 물이 없으면 그 밑
의 못도 갈증을 겪기 마련인데 말이다. 허나 이곳은 절벽과 점토층 사이에서 물이 꾸준히 나
와 천제연을 채우고 있고 폭포 동쪽 동굴에서도 물이 나와 아무리 상류에 물이 증발해도 전혀
물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이곳 물은 제2폭포, 제3폭포를 빚으며 유유히 바다로 흘러간다.

제1폭포의 폭포다운 모습을 보고자 한다면 비가 한바탕 온 직후에 가기 바란다. 그 외에는 병
풍처럼 멀뚱히 서 있어 이곳이 폭포인지 단순히 못인지 햇갈리게 만든다.


▲  천제연폭포 제1폭포와 옥처럼 맑은 천제연(웃소)

폭포 동쪽 벼랑에는 조그만 바위동굴이 있다. 그 천장에서는 얼음보다 차가운 물이 흘러내리
고 있는데, 예로부터 물맞이 명소로 백중(百中)과 처서에 이 물을 맞으면 만병통치가 된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허나 지금은 폭포 보호와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접근을 통제
하고 있어 물맞이를 할 수 없다.


▲  물맞이 명소로 유명했으나 지금은 그림의 떡이 되버린
천제연 동쪽 바위동굴

▲  천제연 제1폭포 앞 계곡(중문천)

천제연폭포와 계곡 좌우에는 푸른 빛의 숲이 짙게 우거져 있다. 제주해협 건너 북쪽은 겨울
제국의 핍박으로 남쪽 바닷가를 제외하고는 자연산 푸른 잎사귀가 거의 사라졌으나 제주도는
겨울의 힘이 미약해 푸른 잎의 나무와 숲을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그만큼 제주도는 따뜻한
남쪽 땅이다.

이곳을 장식하고 있는 숲은 보통 숲이 아닌 따뜻한 기후대에서 뿌리를 내리는 난대성식물(暖
帶性植物)의 보금자리로 희귀식물인 솔잎란과 백량금, 죽절초, 담팔수나무, 구실잣밤나무, 조
록나무, 참식나무, 가시나무, 감탕나무, 바람들칡, 마삭줄, 남오미자, 왕모람 등이 식구를 이
루고 있다. 희귀식물과 난대성식물이 어우러진 이 땅의 대표적인 난대림지대로 '천제연 난대
림(暖帶林)
'이란 이름으로 국가 천연기념물 378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제1폭포 서쪽 벼랑에는 높이 13m, 둘레 2.4m 규모의 담팔수(膽八樹)나무가 있는데, 그는
별도로 '천제연 담팔수나무'란 이름으로 제주도 지방기념물 14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담팔
수나무는 아주 따뜻한 곳에서 자라는 나무로 우리나라에는 제주도에만 있다. 천제연계곡에는
20여 그루의 어린 담팔수가 자라고 있는데, 주변에 여러 나무와 뒤섞인 상태라 일반 사람들은
구별하기가 어렵다.


▲  세월을 간지나게 탄 제1폭포와 제2폭포 사이 계곡(중문천)

▲  제1폭포에서 제2폭포로 인도하는 산책로
천제연계곡(중문천) 벼랑에 닦여진 길이라 벼랑 구간이 많다.

▲  천제연 관개수로(灌漑水路) - 등록문화재 156호

천제연폭포 구역에는 대자연이 빚은 중문천(천제연계곡) 외에 사람들이 만든 조그만 관개수로
도 존재하여 2개의 물줄기를 보여주고 있다.
천제연폭포의 작은 운하인 관개수로는 마르지 않는 샘인 천제연 물을 농업용수로 활용하고자
닦은 것으로 대정군수를 지낸 채구석(蔡龜錫, 1850~1920)이 이재하(李載廈), 이태옥(李太玉)
등과 함께 중문과 창천, 감산, 대포리 지역 사람들을 동원하여 2회에 걸쳐 만들었다.

채구석은 제주도에서 오랫동안 관리를 지낸 제주 토박이로 제주판관(判官)과 대정군수를 지냈
다. 1894년 제주판관 시절에 제주도에 흉년이 들자 자신의 봉급을 털어 백성을 구제했고, 대
정군수 시절인 1895년에는 주민들이 갑오개혁(1894년)으로 생겨난 신제도에 반발해 경무청을
파괴하자 이를 진압했다. 또한 1901년 이재수(李在守)의 난을 진압한 공로가 있으나 군수에서
파직되어 3년간 금고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중문에 거주하면서 바다로 매일 버려지는 천제연 물을 보며 '저 물을 이용해 논 농사를
할 수 없을까?'
궁리하다가 3년 동안 폭포 주변 지세를 직접 조사했고 천제연 물을 활용하여
논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하여 1907년 천제연 토지신(土地神)에게 토신제(土神祭)를 지내고
공사에 들어갔다.
 
천제연계곡에는 암반과 벼랑이 많아서 공사가 꽤 힘들었는데, 소주 원액을 쏟아붓고 장작불로
바위를 폭파하기도 했으며, 제1폭포 주변 창구목과 화폭목은 가장 난공사 구간으로 화약을 구
해 화포를 만들어 바위를 건드리거나 장작불로 바위를 부셨다. 그렇게 1년의 공사 끝에 1908
년 수로가 완성되었고, 성천봉(星川峯, 베릿내오름) 밑에 5만여 평(약 231,000㎡)의 논을 닦
으면서 논농사의 불모지였던 제주도에 한줄기 빛을 선사했다.
그리고 1917년 2월, 2차 공사에 들어갔는데, 이때도 채구석과 이재하, 이태옥이 돈을 내어 추
진했다. 하지만 1920년에 채구석이 사망하는 등, 여러 진통이 있었으나 1923년 공사가 마무리
되어 2만여 평의 논밭이 추가로 개척되었다. 하여 중문마을은 동쪽에 자리한 강정마을과 함께
제주도의 대표 쌀 생산지로 번영을 누렸다. (공사에 참여한 일꾼의 일당은 3돈이었다고 함)

1차 공사 때는 천제연폭포(웃소)에서 베릿내오름골 앞을 돌아 국제컨벤션 앞 밀레니엄관까지
수로를 닦았고, 2차 공사는 천제연 제2폭포(알소)에서 국제컨벤션까지 닦았는데, 이들 수로는
채구석, 이재하, 이태옥이 중심이 된 '성천답회'에서 관리하다가 1957년 국유화되어 서귀포시
에서 관리하고 있다.
천제연의 물을 먹고 자란 성천봉 밑 옥답은 중문관광단지가 닦이면서 싹 사라지고 말았다. 제
주도 논농사의 성지(聖地)와 같은 곳인데 일부를 기념으로 남겨두어 약간의 논농사라도 했으
면 좋았을 것을 개발 지상주의는 그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수로의 길이는 1.9km로 최근 정비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콘크리트 떡칠이 되었으나 논농사가
힘들었던 제주도의 자연환경을 극복한 현장으로 그 시절 농업환경을 전해주는 존재라 등록문
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허나 이제는 물을 대줄 논도 모두 사라져 무늬만 남은 상태이며,
일부 수로는 아예 물이 말라버렸다.
그래도 산책로 옆에 이렇게 100년 묵은 수로가 물을 머금고 흘러가 조촐하게 볼거리를 선사하
니 천제연폭포에서 생각치도 못한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다.


▲  오늘도 묵묵히 흘러가는 천제연 관개수로
한때는 농업용수 수송으로 바쁘게 살았으나 이제는 천제연폭포를 수식하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  제2폭포로 인도하는 벼랑 산책로

산책로 오른쪽(서쪽)은 깎아지른 듯한 천제연계곡 벼랑, 왼쪽(동쪽) 역시 주름선이 진한 벼랑
이다. 저 단단한 벼랑과 암벽을 뚫고 힘들게 관개수로를 닦았으니 제주도 농업 발전과 식량확
보에 대한 강인한 집념이 없었으면 불가능하다.


▲  산책로 옆 바위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관개수로
바위들이 목이 많이 말랐는지 이곳 수로는 물이 말라버렸다.

▲  위에서 바라본 천제연폭포 제2폭포

▲  천제연폭포 제2폭포

제2폭포는 제1폭포와 비슷한 높이로 그 앞에 '알소'라 불리는 못(소)이 형성되어 있다. 제1폭
포와 달리 물이 굉음을 내며 떨어져 귀신도 놀라 도망칠 정도인데, 만약 비가 와서 수량이 많
았다면 지금보다 소리가 더 요란했을 것이다.
알소 남쪽에 닦여진 관람공간까지 접근이 가능하나 그 이상의 접근은 통제하고 있다. 제1폭포
는 그래도 못과 계곡의 물을 만질 수 있으나 아랫 폭포로 내려갈수록 자유의 공간이 절반 이
상씩 줄어든다. (제3폭포는 아예 접근도 불가능하여 위에서 바라봐야됨)


▲  확대해서 바라본 천제연폭포 제2폭포의 위엄
폭포 좌우에 우거진 나무들은 '천제연 난대림'의 일원이다.

▲  제3폭포로 흘러가는 제2폭포 앞 계곡(중문천)



 

♠  선임교(仙臨橋) 주변

▲  선임교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선임교는 천제연협곡(중문천)에 높이 걸린 다리로 제2폭포와 제3폭포 사이에 무지개처럼 걸려
있다. 7명의 선녀가 천제연폭포에서 노닐었다는 전설에 맞추어 다리 밑도리에 하얀 피부의 칠
선녀상을 달았는데, 밑도리 옆구리에 각각 7명씩, 총 14명의 선녀상이 새겨져 있다.
선녀의 길이는 1명당 20m로 각자의 악기를 든 선녀 누님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
을 웅장하게 자아냈다. 하여 칠선녀다리, 칠선녀교, 구름다리 등의 별칭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오작교(烏鵲橋) 스타일의 아치형 다리로 가운데 부분이 하늘로 향해 볼록 솟
아있으며, 다리 길이는 128m, 폭 4m로 230톤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게 설계되었다. 또한 야경까
지 고려하여 100개의 난간 사이로 34개의 석등을 설치해 햇님의 퇴근 이후, 일제히 빛을 쏟아
내게 했다. 하여 이곳 야경은 천제연폭포에서 가장 일품으로 칭송이 자자하다.

천제교와 천제2교 사이, 천제연협곡에 걸린 유일한 다리로 이렇게 구름다리처럼 높이 닦은 것
은 협곡이 깊고, 천제연 난대림이 우거져 있어 그들의 피해가 덜 가게끔 하고자 함이다.
오로지 뚜벅이를 위한 다리로 그것을 건너면 천제루 구역이며, 중문관광단지의 일원인 여미지
식물원과 이어진다. 허나 천제루 구역만 천제연폭포 관람료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 이상을 가
려면 폭포 서문을 나와서 접근해야 된다.

▲  잘생긴 석등이 마중하는 선임교 동쪽

▲  볼록 솟은 선임교 한복판


▲  선임교에서 바라본 바다 방향 천제연협곡(중문천)
계곡은 천연기념물 난대림에 둘러싸여 있어 금지된 공간이 되었다.

▲  선임교에서 바라본 제1폭포 방향과 한라산(漢拏山)
멀리 구름에 감싸인 높은 뫼가 제주도의 심장이자 성역인 한라산이다.
제주도는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한라산이 바라보인다.

▲  선임교에서 바라본 제2폭포와 무성한 천제연 난대림

▲  나그네의 동전을 노리는 오복천(五福泉)

선임교는 그 길이가 128m라고 하지만 다리 높이가 상당해 은근히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다. 하
여 체감거리는 2배 이상으로 다가온다.
다리를 건너면 천제루 구역으로 오복천이란 분수대가 마중을 한다. 여기서 오복(五福)이란 장
수를 뜻하는 거북이와 부자를 뜻하는 돼지, 귀함을 뜻하는 용, 사랑을 뜻하는 원앙, 자식복을
뜻하는 잉어를 뜻한다. 그 동물상 앞에는 복주머니로 포장된 돌통이 각각 설치되어 있어 거기
에 동전이 들어가면 해당 동물상의 복을 받는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그리고 그렇게 긁어
모은 동전은 나중에 불우 이웃을 돕는데 쓴다고 안내문에 당당히 적혀있다. (정말로 그럴까?)


▲  천제연폭포의 칠선녀 전설과 폭포 안내문을 머금은 돌병풍식 석물

▲  꽃길만 걷자~~ 동백이 화사하게 꽃길을 이룬 천제루 주변 산책로
동백(동백꽃)은 친 겨울파의 꽃으로 초봄까지 제주도와 남해안 지역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  천제루 주변 동백 산책로 ①
동백이 붉은 입술을 도도하게 드러내며 나그네의 정처 없는 마음에
마구 돌을 던진다.

▲  천제루 주변 동백 산책로 ②

▲  천제루 주변 동백 산책로 ③

▲  밑에서 바라본 천제루(天帝樓)
선임교 서쪽 높은 곳에 자리한 천제루는 천제연협곡 전망대용으로 세워진 2층
누각이다. 1층은 매점으로, 2층은 전망대로 쓰이며, 2층에 오르면
천제연협곡과 제2폭포가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천제루에서 바라본 천제연폭포 제2폭포와 천제연 난대림

▲  선임교 동쪽에서 바라본 천제연협곡(중문천)과 천제연 난대림

▲  선임교에서 천제연폭포 제3폭포로 내려가는 길

▲  제3폭포로 인도하는 나무데크길

▲  제3폭포 입구 주변 천제연 관개수로
이곳 관개수로는 제2폭포에서 성천봉 옥답을 잇는 수로로 1917년에 닦기 시작하여
1923년에 완성을 보았다.

▲  제3폭포 입구 갈림길



 

♠  천제연폭포 제3폭포와 대포해변

▲  천제연폭포의 막내, 제3폭포

제3폭포는 높이가 10여m로 제2폭포보다 넓은 못(소)을 가지고 있다. 폭포수는 실타래를 굵게
풀어놓은 듯 제2폭포보다 장쾌하게 쏟아지고 있으며 못은 청정하고 요염한 색깔을 보이고 있
다. 아무리 따뜻한 남쪽이라고 해도 엄연한 겨울의 한복판이라 폭포의 유혹이 먹히지 않아서
그렇지 만약 여름의 한복판에 왔더라면 그 유혹에 일부러 넘어가 접근 금지를 무시하고 풍덩
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접근이 어느 정도 허용된 제1폭포, 제2폭포와 달리 폭포 주변 접근이 통제되어 있어 폭
포가 보이는 전망대에서 이렇게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제1폭포와 제2폭포, 선임교 주변까지는 관광객들이 많았으나 선임교 남쪽부터는 사람 구경하
기가 힘들다. 다소 구석진 제3폭포 주변까지는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기 때문이다. 허나 제3
폭포도 엄연한 천제연 식구이고 제2폭포 못지 않은 외모를 지녔으니 꼭 살펴봐야 나중에 저승
이나 하늘나라에 가서 옥황상제에게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보통은 선임교까지만 둘러봐
도 충분하다 여기고 천제루 구역 쪽으로 빠지거나 천제연폭포 정문으로 되돌아감)


▲  시원하게 쏟아내는 제3폭포의 위엄
폭포 앞 못에 모인 중문천(천제연계곡) 물은 여기서 마지막 휴식을 취하고
지척에 보이는 바다로 길을 재촉한다.

▲  제3폭포 입구에 세워진 성천답관개유적비(星川畓灌漑遺跡碑)

천제연폭포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천제연 관개수로를 만들어 제주도 농업사의 커다란 빛
을 주었던 채구석이다. 제3폭포 입구에 채구석을 기리고자 2003년 2월에 세운 '성천답 관개유
적비'가 자리해 있는데, 비좌(碑座)와 검은 피부의 비신(碑身), 이무기가 새겨진 이수(螭首)
를 고루 갖추어 맵시도 좋다.
천제연폭포 정문 주변에도 1957년 8월 대정 지역 유림들이 세운 '통훈대부 채구석기적비(通訓
大夫 蔡龜錫紀蹟碑)'가 있는데 그 기적비는 존재를 몰라서 지나치고 말았다.


▲  제3폭포에서 폭포 후문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와 관개수로(왼쪽)

▲  제주올레길8코스와 만나는 천제연폭포 남쪽 후문

제3폭포 입구에서 나무데크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 뻥뚫린 남쪽 후문이 나온다. 철저하게 금
줄을 치며 입장료를 챙기는 정문, 서문과 달리 후문은 지키는 사람도 없고, 제재하는 시설도
없어 그냥 대놓고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 (내가 갔을 때는 그랬음)
이곳은 밖으로 나가는 문이지 폭포 구역으로 들어가는 문은 아니며 일루 들어가지 말고 정문
을 이용할 것을 권하는 경고판이 인상을 쓰며 지키고는 있으나 정작 지키는 사람이 없으니 그
경고가 먹혀들어갈 턱이 없다.
천제연폭포의 개구멍 같은 곳으로 이곳의 존재를 알았다면 조금 돌아가더라도 이곳을 이용하
는 것인데, 역시 아는 것이 힘이다. 서귀포시는 이렇게 후문을 방치할 것이 아니라 매표소를
두어 후문 수요라도 좀 챙기기 바란다.


▲  베릿내오름 서쪽 자락 제주올레길8코스

남쪽 후문에서 제주올레길 8코스와 만난다. 8코스는 월평에서 대평포구까지 이어지는 19.6km
의 긴 올레길로 천제2교에서 베릿내오름(성천봉) 서쪽 자락을 지나 폭포 후문을 거쳐 베릿내
오름 정상을 찍고 다시 천제2교로 내려간다. 하지만 나는 오름 정상은 가지 않고 서쪽 자락길
을 통해 천제2교로 내려가 한참이나 떨어진 약천사까지 올레길의 신세를 졌다.
제주올레길 장거리 탐방은 전날 절부암에서 수월봉까지 제주올레길12코스에 이어 2번째이다.


▲  베릿내오름 서쪽 자락길에서 바라본 천제연계곡(중문천)
계곡 너머 언덕에는 중문관광단지의 일원인 별내린전망대와 씨사이드아덴리조트가
둥지를 틀고 있다.

▲  중문천을 바다로 흘려보내는 천제2교와 너른 남해바다
(베릿내오름 서쪽 자락길에서 바라본 모습)

▲  베릿내오름 서쪽 자락길 (제주올레길8코스)

▲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제주올레길8코스 (제주부영호텔앤리조트 옆 구간)

베릿내오름을 완전히 내려가면 천제2교가 나온다. 여기서 올레길8코스는 '중문관광로'를 따라
동쪽으로 조금 가다가 제주부영호텔앤리조트 직전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트는데, 그 길을 3분
정도 가면 남해바다와 스킨쉽을 즐기는 대포 해변이 나온다.
대포주상절리까지 제주부영호텔과 제주국제컨벤션센터 남쪽을 지나가는데, 이 일대는 예전 천
제연 물을 먹고 자랐던 제주도 제일의 옥토, 성천답이 있던 터이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 식량
을 조달하던 농업 현장이 이제는 휴식과 여흥의 장소로 싹 바뀐 것인데, 이곳 옥토에 대한 미
련이 없어질 정도로 세상이 조금은 살만해진 모양이다. (밥은 굶지 않게 되었으나 삶이 팍팍
한 것은 여전함)


▲  제주부영호텔앤리조트 옆 제주올레길8코스 (북쪽 방향)

▲  평화로운 바닷가 풍경, 제주올레길8코스 대포 해변 ①
저 멀리 봉긋 손짓을 하는 산이 산방산이다. 내가 저 부근에서 여기까지
이동을 한 것이다. (천제연폭포 정류장부터 여기까지 도보 이동)

▲  평화로운 바닷가 풍경, 제주올레길8코스 대포 해변 ②

▲  제주올레길8코스 대포해변 숲길 (대포주상절리 서쪽)
여기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대포 해변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대포주상절리가 나온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꺼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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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구의 상큼한 지붕, 개화산~꿩고개산 나들이 (강서둘레길, 개화산자락길, 신선바위, 미타사, 치현정)

강서구 개화산 (강서둘레길, 미타사, 치현산)



' 강서구의 상큼한 지붕, 개화산 나들이 '
(강서둘레길, 미타사, 꿩고개산)

  신선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미타사 석불입상

▲ 신선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 미타사 석불입상

▶ 개화산 호국공원(호국충혼비)

개화산 호국공원 (호국충혼비)


 


서울 서쪽 끝에 솟은 개화산(開花山, 128m)은 강서구(江西區)의 상큼한 지붕이자 김포국
제공항의 뒷동산이다.
동쪽에 솟은 치현산(꿩고개산)까지 개화산의 영역으로 북쪽은 한강과 맞닿아 있으며, 동
/서/남은 평지로 비록 산은 작으나 평지 속에 홀로 솟은 잇점으로 낮은 키에 비해 조망(
眺望)이 아주 좋다. 게다가 산세도 느긋하고 숲도 무성해 거닐기에 좋으며, 약사사와 미
타사 등의 오래된 절과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신선바위, 봉화대, 개화산호국공원, 치
현산(꿩고개산) 등의 다양한 명소들, 그리고 강서둘레길과 개화산자락길 등의 일품 숲길
까지 넉넉히 품은 알찬 뫼이다. 그러다보니 그의 매력에 일찌감치 녹아들어 매년 1번 이
상은 꼭 발걸음을 한다.

개화산의 옛적 이름은 주룡산(駐龍山)이라고 한다. 신라 때 주룡이란 도인(道人)이 이곳
에 살았는데, 매년 9월 9일에 친구(또는 동자)들을 데리고 정상에 올라가 술을 마셨다고
한다. 이것을 '9일용산음(九日龍山飮)'이라 불렀는데, 그가 세상을 뜨자 9월 9일마다 술
을 마시던 자리에서 이상한 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또는 그가 죽은 자리에서 꽃이 피어
났다고 함)
그래서 그 터에 절을 세워 꽃이 열린다는 뜻의 개화사(開花寺, 현 약사사)라 했으며, 그
개화사가 있는 산이라 해서 개화산으로 이름이 갈렸다고 전한다. 또한 산의 모습이 꽃이
피는 형국이라 개화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불을 피운다
는 뜻의 개화산(開火山), 봉화뚝이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한다.
그리고 강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과 궁산 양천고성(陽川古城)터와 더불어 한강 하류를
지키는 요충지로 개화산 정상과 꿩고개산 정상에 봉화대를 설치해 변경의 소식을 남산으
로 전달했으며, 6.25때는 치열한 격전지이기도 했다. 특히 양천읍지(陽川邑誌)에는 개화
산이 코끼리, 행주산(幸州山, 행주산성)이 사자의 형상으로 이들이 서해바다에서 들어오
는 액운을 막고, 서울에서 흘러나가는 재물을 걸러서 막아주는 사상지형(獅象之形)으로
크게 소개하고 있다.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선인 계절의 여왕 한복판에 찾은 이번 개화산 나들이는 약사사(
藥師寺)에서 시작해 개화산자락길과 강서둘레길1코스, 신선바위, 미타사를 거쳐 치현산(
꿩고개산)까지 싹 둘러보며 개화산을 철저히 복습했다.



 

♠  개화산 둘러보기 (개화산전망대에서 호국충혼비까지)

▲  약사사에서 개화산전망대로 이어지는 개화산자락길
약사사에서 느긋한 산길을 따라 5~6분 가면 개화산전망대가 모습을 비춘다.


▲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개화산해맞이공원 개화산전망대

약사사 북쪽이자 개화산 북쪽 능선에 개화산전망대가 조촐히 터를 닦았다. 2011년 5월 근교산
환경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는데, 한강과 방화대교를 비롯해 하늘공원과 은평구, 서대
문구, 마포구 지역, 남산, 북한산(삼각산), 가양동 지역이 두 눈에 바라보여 낮은 높이에 비
해 조망의 가성비는 높다.
또한 이곳은 동쪽으로 시야가 트여있어 해맞이에 최적화된 곳이라 개화산해맞이공원이란 이름
으로 살아가고 있다.


▲  개화산전망대에 설치된 겸재 정선의 그림 설명문 ①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은 1740년부터 5년 동안 조선에서 제일 작은 고을, 양천현(
陽川縣)의 현령(縣令)을 지냈다. 그는 양천(서울 강서구, 양천구, 영등포구, 김포시 일부)의
명소를 아낌없이 그림으로 남겼는데, 이들 그림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과 양천8경첩(陽川
八景帖)에 실려있어 무척이나 많이 변한 양천 지역과 한강(염창동~행주산성 구간)의 옛 모습
을 조금이나마 붙잡고 있다.

개화사(약사사)는 벗인 이병연(李秉淵)의 소개로 찾았다가 그곳 경관에 감탄하여 그림으로 남
긴 것이다. 하나는 한강에서 바라본 시점, 다른 하나는 동쪽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린 것이
특징이다.
낙건정(樂建亭)은 당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김동필(金東弼, 1678~1737)의 별서(別墅,
별장)인 낙건정을 그린 것으로 한강 북쪽 덕양산(행주산) 자락에 있었다. 그리고 행호관어(杏
湖觀漁)는 행호(행주산 주변 한강) 주변을 담은 것으로 지금이야 그저 그런 곳이지만 그때는
양반, 귀족들의 별서/유람 장소로 인기가 높았다.


▲  개화산전망대에 설치된 겸재 정선의 그림 설명문 ②

소악후월(小岳候月)은 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거나 살핀다는 뜻이다. 소악루(小岳樓)는 양천
고을의 중심지였던 가양동의 뒷산, 궁산(宮山) 동쪽에 있었는데, 왼쪽 하단에 소악루를 두고
탑산과 두미암, 선유봉, 와우산, 잠두봉(蠶頭峰, 절두산성지) 등의 경강(京江) 서쪽 명소를
담았다. (현재 소악루는 궁산에 복원되어 있음)

금성평사(錦城平沙)는 양천(가양동)에서 바라본 난지도(蘭芝島)를 담은 것이다. 서울의 쓰레
기장이 되기 전에는 홍제천과 불광천이 물머리를 맞대고 들어오는 너른 저지대로 한강의 폭이
넓어져 경치가 꽤 좋은 곳이었는데, 지금은 그 쓰레기를 딛고 하늘공원과 월드컵공원이란 거
대한 자연공원으로 거듭났다.

목멱조돈(木覓朝暾)은 목멱산(남산)에서 아침 해가 떠오른 모습을 담은 것으로 양천에서 바라
본 기준으로 그려진 것이다. 남산 앞에는 만리동고개, 애오개(아현동), 노고산(老姑山) 등이
그려져 있다.


▲  개화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방화대교와 하늘공원(난지도), 고양시 화전 지역, 서울 서북부를 비롯해
멀리 북한산(삼각산)과 남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  개화산전망대 주변 (개화산해맞이공원)
이곳에 있는 헬기장과 군사시설은 군사 훈련과 예비군 훈련용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니 이들 시설은 건드리면 안된다.


▲  재현된 개화산 봉수대(烽燧臺)

조선은 총 5개의 봉수 노선<거로(炬路)라고 함>을 운영했다. 개화산봉수대는 전남 순천(順天)
에서 시작되어 서울 남산 제5봉수대에서 끝을 맺는 5번째 거로로 김포 북성산(北城山) 봉수대
에서 봉수를 받아 남산 제5봉수대로 넘겼다.

개화산봉수대는 원래 개화산 정상에 있었다. 이곳 외에도 동북쪽 꿩고개산(치현산) 정상에도
하나 더 있었는데, 이를 개화산 제2봉수대라 부른다. 이들 봉수대는 1950년대까지 있었으나
6.25 시절, 군부대가 정상 주변에 주둔하면서 싹 밀어버리고 말았다. 하여 지금은 자리만 겨
우 확인할 수 있는 정도로 기와조각과 백자 파편, 도기 파편 등이 여럿 수습되었으며 1994년
11월 개화산 봉수대터에 표석을 세웠다.

개화산은 한자만 달리하여 개화산(開火山)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는 개화산봉수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행주산성, 양천고성(가양동)과 함께 한강 하류를
지키던 군사적 요충지로 임진왜란 시절 행주산성을 지원하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지금까지 군부대가 쭉 주둔하면서 그 역사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강서구청에서 개화산 봉수대를 복원하고자 이
미 복원된 남산 봉수대와 안산 봉수대, 봉화산
(烽火山) 봉수대를 참조하여 2013년 11월에 재
현을 했는데 원래 자리가 금지된 구역이라 북
쪽으로 250m 떨어진 봉화정 맞은 편에 세웠다.
높이 2m, 둘레 4m 규모의 봉수대 2개를 지었는
데, 옛날처럼 불을 피울 일도 없고 어디까지나
모형일 뿐이라 딱히 볼품은 없으며, 나중에 개
화산 정상이 해방되면 그곳으로 옮겨져 크게
손질될 것이다.

▲  봉수대 맞은편에 자리한 봉화정(烽火亭)


▲  상사마을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16-1호

봉화정에서 문득 생각나는 곳이 있어서 개화산숲길을 잠시 접고 강서둘레길 3코스(개화산전망
대↔서남환경공원 북쪽, 4.56km)를 따라 상사마을로 내려갔다.
상사마을은 개화동 북쪽 끝이자 개화산 북서쪽에 자리한 시골 마을로 북쪽에는 행주대교와 한
강이 있고 동쪽은 마을을 포근히 감싼 개화산, 남쪽에는 부석마을과 내촌마을, 서쪽에는 김포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여기서 행주대교와 이어지는 서쪽 도로(개화동로)를 넘어가면 경
기도 김포시임>

마을에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으며, 부석마을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마
을이다. <예전에는 김포공항 서쪽 평야 한복판에 자리한 과해동(果海洞)이 서쪽 끝을 이루었
으나 김포공항 확장으로 마을이 철거됨> 마을 동쪽 끝에는 개화산의 품으로 들어가는 산길이
있으며, 그 앞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마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1971년에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그때 추정 나이가 약 410년이었다. 그
러니 그새 50여 년이 강제로 얹혀져 460년 정도의 적지 않은 나이를 지니게 되었다. 높이 22
m, 둘레 4.45cm로 상사마을이 적어도 400~500년 정도 되었음을 보여주는 산증인인데, 은행나
무는 스스로 싹을 틔우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사람들이 심은 것이다. 그러니 이 나무도
당시 마을 촌장이나 선비가 심었을 것이다.
나무 옆에는 상은약수터가 있으나 이미 옛날에 숨통이 끊겨 물이 마른지 오래되었으며, 지금
은 마을 창고로 쓰여 이곳이 예전 약수터였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  상사마을에서 개화산으로 올라가는 산길 (강서둘레길 3코스)

▲  봉화정에서 개화산숲길로 들어서다 (강서둘레길 1코스, 개화산둘레길)

상사마을 은행나무를 둘러보고 다시 개화산으로 올라와 개화산숲길에 임했다. 도보길이 천하
에 크게 유행을 타면서 강서구에서도 그 야심작을 내놓았으니 바로 강서둘레길이다.

강서둘레길은 개화산을 중심으로 모두 3코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1코스는 개화산을 1바퀴 도
는 3.35km의 상큼한 산길이다. 그래서 개화산둘레길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오르락내리락이 도
돌이표처럼 반복될 뿐, 힘든 구간은 거의 없으며, 60분 이내면 충분히 1바퀴가 가능하다. 여
러 전망대가 닦여져 있어 조망의 기품을 누릴 수 있으며, 약사사 윗쪽과 개화산전망대, 미타
사 윗쪽, 신선바위,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을 지나간다. 하여 이 길과 개화산자락길을 같이
돌면 개화산의 80% 이상을 둘러보는 것과 같다.


▲  나무데크로 이루어진 개화산숲길 (아라뱃길전망대 부근)

▲  아라뱃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아라뱃길과 김포시 고촌읍 지역
서쪽을 향하고 있는 이곳은 이름 그대로 희대의 세금 낭비의 현장,
아라뱃길이나 구경하라고 만든 의미 없는 전망대이다.

▲  신선바위 윗쪽에서 바라본 천하
비행기가 수시로 들락거리는 김포공항을 비롯하여 김포평야와 부천 북부,
인천 동북부 지역이 두 눈에 들어온다.

  울퉁불퉁하게 생긴 신선바위

개화산은 흙산이라 신선바위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바위가 거의 없다. 서쪽을 향해 크게 누워
있는 이 바위는 개화산 산신(山神)이 호랑이를 타고 내려오는 바위라 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
게 되었는데, 산신이 이곳을 지나는지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확인할 길이 없다. 산신이
나 신선도 결국 인간이 만든 가상의 존재가 아니던가??
이곳은 개화산에서 가장 시야가 넓은 곳으로 이를 두고 신선이 구름을 타고 천하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여겨 신선바위라 불리게 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  개화산 호국충혼비(개화산호국공원)

신선바위를 지나면 미타사로 내려가는 길이 손을 내민다. 여기서 둘레길을 잠시 버리고 그 손
에 이끌려 3분 정도 내려가면 호국충혼비(김포지구 전투위령비)를 지닌 개화산 호국공원이 마
중을 한다. 나그네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이곳은 6.25 때 이곳에서 전사한 국군을 기리고자
세운 것으로 다음의 사연이 깃들여져 있다.

1950년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6.25가 터지자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6.25 이전에는 남한 영역
이었음) 지역을 지키던 1사단은 북한군을 감당하지 못하고 김포를 거쳐 김포공항까지 후퇴했
다.
개화산에 진을 치고 김포비행장을 지키고자 장비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며 싸웠으나 탄약과
식량보급이 끊겼고, 북한군의 대량 공세를 극복하지 못하여 결국 1사단 12연대 3대대 대대장
김무중 소령과 12연대, 13연대와 15연대 일부를 포함 1,100여 명이 안타깝게 전사하고 만다.
이후 호국신(護國神)이 된 그들의 충혼을 기리고자 미타사에서 1993년 12월 31일에 충혼비를
세우고 매년 6월과 가을걷이가 끝나는 11월에 지역 주민들과 1사단 군부대 장병들이 같이 위
령제를 지낸다.

예전에는 충혼비와 태극기, 두 다리를 쉴 수 있는 쉼터가 전부였으나 추모의벽과 명각비, 기
념조형물을 새로 닦고 주변을 산듯하게 정비하여 2017년 12월 개화산 호국공원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충혼비 뒤에 병풍처럼 둘러진 검은 피부의 추모의 벽에는 개화산에서 산화
한 1,100용사의 이름이 쓰여 있으며, 푸른 잔디와 개화산의 녹음(綠陰)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공간으로 호국신들을 기리며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  평화로운 모습의 개화산 호국공원 (호국충혼비 주변)


 

♠  서울에서 가장 서쪽 끝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 개화산 미타사(彌陀寺)

개화산 서쪽 자락에 자리해 김포공항과 김포평야를 바라보고 있는 미타사는 서울에서 가장 서
쪽 끝에 자리한 절이다. 약사사와 함께 개화산에 안긴 늙은 절로 19세기에 '김대공'이 석불입
상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많은 자손을 얻자 집안의 원찰(願刹)로 세웠다고 전한다.
1924년 절 아래 내촌마을 사람들의 꿈에 석불이 나타나 집을 지어줄 것을 청하므로 그해 4월
8일 미륵당(彌勒堂)을 세웠는데, 이때를 절의 실질적인 창건시기로 보고 있다.

그 미륵당이 미타사로 발전했으나 6.25전쟁 때 모두 파괴되었으며, 이후 자리를 조금 달리하
여 절을 재건했다. 1970년 승려 한지일(韓智壹)이 중창을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
며, 제자리를 떠났던 지장보살입상을 1993년에 다시 가져와 새 법당에 봉안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절 뒷쪽에 호국충혼위령비를 세워 6.25때 개화산에서 전사한 이들을 기리고 있다.

숲에 감싸인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과 요사(寮舍) 등 4~5동의 건물과 석불, 5층석탑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금의 미타사를 있게 한 오래된 석불입상이 있다. 바로 그를 보고자 이
곳에 온 것이다.

▲  여염집 모습의 미타사 법당
겉은 이래도 경내에서 가장 큰 집이다.

▲  법당에 신세를 지고 있는
산신탱과 칠성탱


이곳의 법당은 그 흔한 기와집 불전(佛殿)이 아닌 여염집 스타일의 집으로 1970년대에 중건되
었다.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로 이루어진 석가여래3존
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들은 1993년에 조성된 것이며, 산신과 독성, 칠성 식구들도 법당의
신세를 지고 있다. 그리고 왜정(倭政) 때 석고로 만든 지장보살입상(地藏菩薩立像)도 있는데,
그는 석불입상 다음으로 경내에서 늙은 존재로 원래 법당에 있었으나 6.25전쟁 때 절이 파괴
되자 실종되었다.
이후 인근 군부대 장교가 부대 우물에서 불에 그을린 채 망가진 그를 수습하여 군부대에서 가
지고 있다가 경주(慶州)의 어느 절로 넘긴 것을 1993년에 다시 찾아왔다. 무려 40년 이상 타
향살이의 고통을 겪은 그는 개화산을 점령한 북한군이 화풀이용으로 괴롭히다가 우물에 버린
것으로 여겨진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석불좌상
커다란 바위에 들어앉아 비행기가 수시로 뜨는 서쪽을 굽어보고 있다.
김포공항 비행기들이 늘 무탈한 것도 그의 묵묵한 가피 덕이
아닐까 싶다.

▲  미타사 석불입상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김포공항과 김포평야, 인천 동북부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날렵한 몸매의 5층석탑

석불입상 뒤쪽에는 경내의 유일한 돌탑인 5층탑이 있다.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하얀 피부를
지닌 잘생긴 탑으로 석탑은 보통 법당 앞이나 경내 안쪽에 두기 마련이나 이곳은 자리가 여의
치 않아서 석불입상 뒤쪽 산자락에 두었다.
그는 1980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곳의 단골 신도인 석물 판매업자가 1995년에 기증한 것인데,
그로 인해 미타사는 힘들지 않게 탑을 소유하게 되었다.


▲  미타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9호

석불입상은 이곳의 유일한 문화유산이자 가장 늙은 존재로 여기서는 미륵불(彌勒佛)로 애지중
지하고 있다.
고려 후기나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는 다른 데서는 보기 힘든 이형적(異形
的)인 모습으로 밑도리에는 세월의 고된 때가 자욱한 반면, 그 윗쪽 몸통의 3/4 이상은 완전
하얀 피부라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허나 그것은 함정이다. 근래 교체된 대좌(
臺座)을 제외하고 석불 자체는 순수 늙은 석불이다.

미타사가 있기 전부터 이곳을 지켰던 석불로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관리 소홀로 여러 번
땅속에 묻혔다가 빛을 보기를 반복했다. 19세기에 김대공이 그를 보살펴 많은 자손을 얻자 석
불 옆에 절을 세웠다고 전하며, 1924년에 내촌마을 주민들 꿈에 나타나 현 요사 자리에 미륵
당을 지어 봉안했다. 즉 미타사는 석불의 후광(後光)으로 지어진 절이다.
근래에 요사를 새로 지으면서 석불을 지금 자리로 옮겼으며, 그때 대좌를 새로 만들어 교체했
고, 옛 대좌는 석불 주변에 두었다.

석불 머리에는 동그란 갓돌이 씌워져 있고, 얼굴 표정은 좀 일그러져 있다. 아마도 순탄치 못
한 삶을 살아서 그리된 모양이다. 얼굴은 거의 동그란 모습이며, 눈과 눈썹, 입은 선으로 처
리했고, 코는 매우 오똑하다. 그리고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졌다.
얼굴과 몸통을 이어주는 목은 긴 편으로 삼도(三道)는 보이질 않으며, 몸통은 매우 길쭉하다.
두 손은 가슴 앞에 서로 교차되게 모으고 있는데, 그만의 특이한 수인(手印)으로 손가락이 꽤
두껍다.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통견을 하고 있으며, 다리와 발 등의 밑도리는 옷에 가려져
생략되었다.

석불의 높이는 4m 정도로 전체적으로 얼굴이 크고 몸통이 길며, 특이한 신체 표현과 밑도리를
생략하는 센스, 갓돌 모양의 보관(寶冠) 등에서 고려 때 큰 불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오
랜 세월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음에도 피부도 하얗고 건강도 양호하며, 약사사 석불입상과 함
께 서울에 몇 없는 고려 말~조선 초기 석불이란 점이 인정되어 2008년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미타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 산81-24 (개화동로13길 56-33 ☎ 02-2662-4736)


▲  석불입상의 옛 대좌
커다란 석불입상이 사용했던 늙은 대좌로 근래 새 대좌로 갈아탔다. 하여
옛 대좌는 옆으로 물러나 막연히 허공을 이고 있다.


▲  하늘길전망대에서 바라본 김포공항과 김포평야

미타사를 둘러보고 잠시 놓아두었던 강서둘레길1코스(개화산숲길)로 돌아와 남쪽으로 조금 가
면 '하늘길전망대'가 마중을 나온다.
이곳은 나무데크 형태로 닦여진 전망대로 서울의 하늘길을 책임지고 있는 김포국제공항과 그
곳을 오가는 비행기 구경에 최적화된 곳이다. 하여 전망대 이름도 하늘길이다. 여기서는 김포
공항 뿐 아니라 김포평야와 인천 계양구, 계양산(桂陽山), 부천 북부 지역, 김포 고촌읍 지역
이 두 눈에 들어와 조망 수준도 괜찮은 편이며, 국내선과 국제선 비행기가 5분이 멀다하고 공
항을 들락거려 김포국제공항의 높은 위엄을 보여준다.


▲  하늘길전망대에서 바라본 김포평야와 개화동, 계양산

▲  개화산자락길 서쪽 구간 (무장애숲길)

하늘길전망대를 지나 무장애숲길(나무데크길) 남쪽 기점에서 개화산자락길 서쪽 길로 갈아탔
다.
개화산자락길은 '방원중학교~금낭화로17길~약사사 표석~개화산전망대' 구간의 동쪽 길과 '하
늘길전망대~북카페~약사사 표석' 구간의 서쪽 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쪽 길은 북까페 주변
이 무장애숲길로 이루어져 있어 천하에서 가장 편한 둘레길로 찬양 받는 안산(鞍山) 자락길을
긴장시킬 정도로 큰 편안함을 보여준다. 북까페 주변을 제외하고는 흙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경사가 느긋해 거닐기 좋으며, 길 중간에 근래 세운 개화산 정상 표지석이 있다.


▲  방화근린공원 방면 개화산숲길
개화산 자락길 무장애숲길을 지나 약사사 표석에서 다시 개화산 숲길로 갈아타고
방화근린공원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치현산이란 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개화산 동쪽에 솟은 작은 뫼, 치현산(雉峴山, 꿩고개산)

▲  치현산 공원길 입구

개화산 동쪽에는 꿩고개(70.5m)라 불리는 야트막한 산줄기가 있다. 개화산의 일원으로 방화동
(傍花洞) 시내와 한강 사이에 자리하여 강바람을 막아주는 병풍 같은 존재로 동서로 짧게 이
어져 있는데, 순 우리말로는 꿩고개(또는 꿩고개산), 한자로는 치현산이라 부른다.
이곳이 꿩과 관련된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은 2가지 설이 있다. 지금은 실감이 별로겠지만 옛날
에는 꿩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꿩사냥을 하기에 좋은 곳이라 꿩고개라 불렸다는 설이
있고, 다른 하나는 꿩을 뜻하는 한자인 치(雉)가 꿩 외에도 성곽에 달린 방어시설도 뜻한다.
아무래도 개화산이 강 건너 행주산성과 함께 한강 하류를 지키는 요충지였고, 정상에 개화산
동봉수대가 있다보니 방어시설을 뜻하는 치를 사용했다가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새이름 꿩
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꿩고개에는 강서둘레길 2코스인 공원길이 닦여져 있는데, 길 하나로 이루어진 1코스(개화산숲
길)와 달리 2갈래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 시작점은 개화산숲길과 만나는 방화근린공원이며,
여기서 산길과 벚꽃길(수레길)로 분리되어 있다. 분리된 길은 마곡서광아파트 부근에서 잠시
만나지만 여기서 서남환경공원으로 들어가면서 다시 2갈래로 갈려 공원을 1바퀴 돈다. 총 길
이는 4.5km로 서광아파트 서쪽은 산, 동쪽은 평지 공원이라 길은 거의 느긋하다.


▲  주민 혐오 공간에서 친화적인 공간으로 거듭난 방화근린공원 벚꽃길

방화택지 북쪽이자 개화산과 꿩고개산 사이에 넓게 터를 다진 방화근린공원은 1996년에 조성
되었다. 딱히 특별한 것은 없는 이 땅의 흔한 시민공원이나 수목이 울창하고 연못과 분수대, 광장, 물레방아 등이 공원 곳곳을 수식하고 있으며, 쉼터가 많아 소풍 장소로는 아주 제격이
다.
산책로가 개화산과 꿩고개산으로 핏줄처럼 이어져 있고, 불법주차와 덤프트럭의 통행으로 꽤
나 시끄럽던 공원 북쪽 길을 손질하면서 100여 그루의 벚꽃을 심어 상큼한 벚꽃길을 닦았다.
하여 이제는 서울의 어엿한 벚꽃 명소의 성지로 추앙을 받고 있다.


▲  숲이 무성한 치현산 서쪽 능선길 (강서둘레길2코스)

▲  짙은 녹음 속으로~~ 치현산 서쪽 능선길 (강서둘레길2코스)

▲  치현산 북쪽 벼랑에 매달린 치현정(雉峴亭)

치현산에 왔다면 꼭 가봐야 되는 명소가 있다. 바로 산 북쪽 벼랑에 깃든 치현정이란 팔각형
정자이다. 이곳은 겸재 정선의 그림에 나올 정도로 오래된 존재는 아니지만 강서구에서 한참
강서둘레길을 닦던 2012년, 강서구새마을금고협의회에서 만든 것으로 한강이 바라보이는 벼랑
에 자리한 탓에 조망도 제법 괜찮아 사진쟁이들의 발길이 잦다. 특히 야경이 아주 일품이다.
하여 겸재의 '행호관어(杏湖觀漁)'의 현대판 버전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사진으로 말이다.
물론 그때와 비교하면 완전 하늘과 땅 차이겠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이곳도 결코 그
진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  치현정에서 바라본 천하 ① 한강과 행주대교, 일산신도시
치현정 바로 앞으로 올림픽대로와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가 그물망처럼
복잡하게 펼쳐져 차량의 굉음이 대단하다. 그러니 그 소음을
감안하고 이곳의 조망을 누리기 바란다.

▲  치현정에서 바라본 천하 ②
한강 건너에 길게 누운 뫼가 행주대첩(幸州大捷)의 현장인 행주산이다.
행주산 앞 한강을 예전에는 행호라 불렀다.

▲  치현정에서 바라본 천하 ③
방화대교와 고양 화전 지역, 앵봉산~봉산 산줄기, 북한산(삼각산), 노고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잡힌다.

▲  치현산 동쪽 능선길 (강서둘레길2코스)
산은 작지만 숲이 생각 외로 짙어 마치 깊은 산골에 푹 묻힌 기분이다.

▲  치현산을 정리하며, 치현산 동쪽 능선길 (강서둘레길2코스)

치현산 능선을 완전히 가로질러 산 동쪽 끝에 자리한 치현둘레소공원으로 내려갔다. 마곡서광
아파트 북서쪽에 자리한 작은 공원으로 치현산을 중심으로 한 꿩고개근린공원의 일원이다. 강
서둘레길2코스가 이곳을 지나며 동쪽을 서남물재생센터와 서남환경공원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하여 치현산까지 겯드린 개화산 5월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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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평 벌판에 넓게 깃든 백제 후기 유적, 익산 왕궁리유적 (왕궁리5층석탑,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익산 겨울 나들이 (왕궁리유적,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 익산 겨울 나들이 '
(왕궁리유적, 왕궁리5층석탑,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익산 왕궁리5층석탑
▲  익산 왕궁리5층석탑


 

다사다난으로 짙게 얼룩졌던 묵은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한 해가 밝았다. '올해는 정말 고
깃국 좀 먹어야 될텐데~~!' 소망하며 지방의 미답처(未踏處)를 대상으로 새해 첫 답사지
를 물색하다가 익산 왕궁리유적에 크게 구미가 당겨 그곳으로 길을 잡았다.

햇님이 등청하기 전인 이른 아침, 도봉동 집을 나서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익산행 직행버
스에 나를 실어 익산으로 보냈다. 버스는 경부고속도로와 천안논산고속도로, 호남고속도
로를 두루 거쳐 2시간 50분에 익산시외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여기서 익산역까지 10분 정
도를 걸어서 익산시내버스 65번(동산동 동신아파트↔삼례읍)을 잡아타고 다시 30여 분을
달려 1번 국도 변에 자리한 왕궁리유적에 두 발을 내딛었다.


▲  유네스코가 달아준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왕궁리유적' 표석
익산 왕궁리 유적은 공주, 부여의 주요 백제 유적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이란 감투를 받았다.

▲  왕궁리 유적으로 인도하는 남쪽 정문


 

♠  궁궐터와 절터가 공존하는 백제 후기 유적지, 아직도 많은 비밀을 품으며
그 해답을 모두 내놓지 않는 익산 왕궁리(王宮里) 유적 - 사적 408호

▲  왕궁리 유적과 폐허의 옛터에 홀로 핀 꽃, 왕궁리 5층석탑

금마 남쪽 왕궁리에는 왕궁평(王宮坪)이라 불리던 너른 대지가 있다. 왕궁평은 왕검이, 왕금
성, 모질메 등의 별칭도 지니고 있어 결코 심상치 않은 곳임을 귀뜀해주고 있는데, 익산 지역
의 역사를 다룬 금마지(金馬誌)에 마한(馬韓) 시절 조궁(朝宮)터로 왕궁평이라 불렸다는 기록
이 있어 그것을 믿고 오랫동안 마한 관련 왕궁터로 보았다.
허나 왕궁리5층석탑 외에는 그야말로 허허벌판이라 무슨 메세지를 보내려는 듯 그 석탑을 오
랜 세월 바깥에 내밀며 잠수를 타고 있었다. 그러다가 1976년에 비로소 원광대 마한백제문화
연구소에서 처음으로 땅을 파보았는데, 이때 왕궁 담장의 외곽 경계와 석탑 북측에서 금당터
가 발견되어 마한 도읍설과 함께 팽팽하게 거론되던 백제 무왕의 금마저 천도설에 따라 그때
지어진 것으로 콩 볶듯이 결론을 보았다. 그리고 석탑 주변은 왕궁 안에 지은 내불당이 있던
것으로 추정했다.

이후 다시 흙으로 덮어두어 미래로 넘겼다가 1989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다시 왕궁평을
들추었다. 이번에는 20년 이상의 오랜 세월을 두고 조사를 벌였는데, 절터와 궁궐터를 비롯해
그들을 둘러싼 장방형 석성(담장), 후원터, 공방터, 대형 화장실터가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그들을 조사한 결과 멀리 마한까지 갈 필요도 없이 백제 후기에서 신라 후기에 이르는 유적임
이 확인되어 백제 무왕(武王, 재위 600~641) 시절에 조성된 것으로 그 믿음이 크게 굳어졌다.

▲  강당터

▲  건물터

백제 무왕은 금마저(金馬渚, 익산 금마) 출신으로 백제 29대 군주인 법왕(法王. 재위 599~600
)의 아들이다. 옛부터 그의 금마저 천도설이 나돌고 있었는데, 그 증거로
① 삼국유사에 후백제(後百濟)를 세운 견훤(甄萱)이 고려 태조에게 보낸 국서에 백제는 금마
산(金馬山, 금마저)에서 개국했다는 내용이 있음.
②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는 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본래 백제의 금마지(今麻
只)인데 무강왕(무왕) 때 성을 쌓고 별도의 도읍을 두어 금마저라 칭했다고 씀.
③ 육조시대(六朝時代) 때 쓰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백제 무강왕이 지모밀지에
천도하여 새로 제석정사(帝釋精舍)를 지었는데, 639년(당태종 정광 13년)에 큰 뇌우가 있어
제석정사가 불탔다는 기록(여기서 지모밀지는 금마저 지모현)이 있음.

이를 통해 금마저로 도읍을 잠시 옮겼거나 일종의 별도(別都)를 세운 것으로 보이며, 그 현장
의 중심이 바로 왕궁평이다. 물론 마한의 도읍설, 고안승(高安勝)의 보덕국(報德國)설, 후백
제 도읍설도 여전히 공존하며 이곳의 수수께끼를 증폭시키고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금마저 관
련 내용이 없다. 허나 요즘에는 백제 무왕 때 처음 닦여진 궁성으로 거의 자리를 잡은 것 같
다.
사람이란 자신의 고향을 늘 그리워하고 챙기는 편이라 무왕은 비록 천도까지는 아니라도 일종
의 별궁(別宮)을 고향 부근에 조성하여 종종 머물렀고, 의자왕(義慈王) 시절이나 백제가 망한
이후 신라에 의해 기존 궁궐 건물을 대거 밀어버리고 절로 전환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고구려 왕족으로 668년 이후 고구려 부흥운동을 펼치다가 실패하여 신라로 도망친 고안
승이 신라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에게 익산 지역을 다스리는 보덕국왕으로 봉해진 바
가 있어 그의 거처로 이용되었을 수도 있으며, 후백제를 세운 견훤 역시 이곳을 별궁 또는 원
찰로 삼아 종종 왕래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만큼 이곳은 매우 장엄하게 잘지어졌던 것이다.

이토록 장대했던 꿈의 현장이 언제 무상한 폐허의 터가 되었는지는 아쉽게도 기록이 없어 정
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이곳 유적이 고려 때를 끝으로 더 이상 흔적이 나오지 않아 백성들
의 민란이 빈번했던 고려 중기(13세기)나 왜구의 침범이 극심했던 고려 후기에 사라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이곳은 탑만 드러낸 채, 땅 속에 묻혔고 막연히 왕궁평, 왕금성 등의 이름으
로 전해오다가 이제 비로소 조금씩 속살을 보이고 있다.

▲  남측 담장

▲  동측 담장

왕궁리 유적의 면적은 218,155㎡이다. 허나 북쪽으로 계속 발굴 범위를 넓히고 있고, 경작지
로 쓰이는 동쪽이 잠재적인 공간이라 이들을 모두 들추면 지금보다 훨씬 이상의 규모와 성과
가 나올 것이다. 그러니 현재 면적 21만㎡는 지금까지의 임시 성적표일 뿐이다.
왕궁터의 흔적은 용화산에서 뻗어내린 능선의 남측 끝부분(해발 40m 내외)에 자리해 있다. 언
덕을 손질하여 낮은 곳은 흙을 쌓아 다지고 그 위에 궁궐을 닦았는데, 그 주위로 폭 3m의 성
곽 또는 담장을 길게 두르니 규모가 남북 490m, 동서 240m, 둘레 1.5km로 약간 틀어진 네모꼴
이다. 담장 안쪽과 바깥에는 폭 1m의 편평한 돌을 깔아 보도(步道)로 삼았으며, 이런 시설은
궁궐을 지을 때 보통 마무리 단계에 짓는 것들이라 왕궁이 완전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음을 알
려준다.
담장 주변에 기와조각이 즐비해 담장 상부에 기와를 얹힌 것으로 여겨지며, 궁문(宮門)은 남
측 담장에서 3곳, 서측과 동측, 남측에서 각각 1곳이 확인되었다.

왕궁 남측 전반부에는 건물을 짓고자 동서로 석축 4단을 닦았는데 남측부터 폭 75m, 45m의 대
지를 2:1:2:1의 비율로 4개로 분할해 부지를 조성했다. 부지 내에는 크고 작은 건물터 40여
곳이 나왔는데, 백제와 신라 건물터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고려시대 것도 1곳이 발견되어
백제 후기부터 신라 후기, 고려까지 길게 활용되었음을 알려준다.

백제 건물터 중, 제1석축 앞에 왕궁의 정전 또는 주요 건물로 여겨지는 대형 건물터가 확인되
었다. 이곳에서 가장 큰 규모(동서 31m, 남북 15m)로 건물 중심이 남측 중문의 중심축과 일치
하여 왕궁의 중심이 되는 건물임이 분명하다. 나머지 백제 건물터는 제1석축 뒤에 널려있다.
제4석축 동쪽이자 북측 후반부에는 후원(정원)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곳은 왕궁과 연결되는
부분에 괴석과 장대석, 하천석 등을 조합해 물의 흐름을 조절할 수 있도록 지어졌으며, 정원
주변에 정자로 보이는 건물터와 제4석축 위로 연결되는 길이 발견되었다. 또한 공방터와 대형
화장실터, 석축 배수시설도 덩달아 쏟아져 나왔는데, 이들은 왕궁 북서쪽 낮은 곳에 위치해
있어 왕궁에 소속된 공방으로 여겨진다.

공방터에서는 금고리, 금판 등 금제품과 유리제품, 동제품, 이들을 제련하면서 나온 도가니
등이 나왔으며, 대형 화장실은 땅을 3m 깊이로 파고 나무 기둥을 세워 발판을 만들었는데, 구
덩이에서 회충, 편충 등의 기생충알과 똥막대기가 발견되었다. 삼국시대에 정말 많은 유적이
있지만 이처럼 화장실까지 고스란히 보인 것은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  5층석탑 남쪽 건물터

▲  5층석탑 북쪽 건물터

왕궁으로 시작된 이곳은 나중에 절로 바뀌었다. 5층석탑과 금당, 강당 등이 왕궁의 주요 건물
이 있어야 될 자리에 자리해 있고 석탑 밑에서 목탑터와 먼저 지어진 건물터가 나와서 기존의
왕궁 건물을 부시고 절을 깔았음을 보여준다. 왜 왕궁이 절로 전환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의자왕이 부근에 있는 무왕의 능을 지키고자 원찰(願刹)로 삼았을 수도 있고, 신라가 백제를
평정한 기념으로 궁궐을 부시고 절로 삼았을 가능성도 있다.
석탑 1기와 금당, 강당으로 이루어진 1금당 1탑의 가람배치로 왕궁리5층석탑을 통해 고려 때
까지 법등(法燈)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 홀연히 사라져 답답한 수수께끼의 현장이
되었다. 비록 20년 넘게 발굴을 하였지만 아직도 캐내야 될 비밀이 많은 것이다.

석탑만 홀로 남긴 채 공허한 터가 되버린 왕궁평은 발굴 이후 왕궁리 유적으로 간판을 바꾸며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세계문화유산의 지위를 얻어 미륵사지(彌勒寺址)와 더불어
익산의 꿀단지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지금은 터만 남아있어 허전하기 그지 없지만 그 부족한 도화지에 지금까지 발견된 건물터 등
여러 흔적을 바탕으로 이곳의 왕년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은 어떨까? 생전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백제와 신라 건축 양식에 맞춰 상상의 나래를 살찌운다면 그게 바로 정
답이 될 수도 있다.

왕궁리 유적 남쪽에는 이곳의 추가 설명과 발견 유물을 머금은 왕궁리유적전시관이 있으니 같
이 둘러보기 바란다.

▲  왕궁리유적에서 발견된 거대한 항아리

▲  궁궐 남측 동쪽 문터

* 왕궁리 유적 소재지 :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631-30일대
* 왕궁리 유적전시관 소재지 :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562 (궁성로 666, ☎ 063-859-
  4631~32)
* 왕궁리유적전시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왕궁리 유적 모형도 (왕궁리유적전시관)


 

♠  왕궁리유적 둘러보기 ①

▲  남측 담장 중앙문터

거대한 수수께끼 보따리, 왕궁리 유적으로 들어서려면 남측 중앙문터를 지나야 된다. 유적을
둘러싼 담장(성곽)은 동서 약 240m, 남북 약 490m로 둘레는 약 1.5km이며, 담장의 폭은 3m 정
도로 담장 안과 바깥에 돌을 깔아 보도를 만들고 담장 경계인 석렬시설(石列施設)을 닦았다.
허나 담장의 원래 높이는 알 도리가 없어서 1m 높이로 남쪽(남측) 담장과 동쪽(동측) 담장 일
부와 담장 안쪽 보도, 바깥 보도 일부를 복원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돌을 섞어서 지은 토성(
土城) 같다.
남측 담장에서는 문터 3곳, 동/서/북쪽에서는 문터 1곳이 발견되었는데, 남측에 문을 많이 둔
것은 궁궐 건축의 주요 특징이며, 문은 복원하지 않았으나 어설프게 재현하는 것보다는 이렇
게 열려있는 모습으로 두는 것이 좋다. 답사객으로 하여금 문 모습에 대해 알아서 그려보게끔
말이다. 보통 궁궐 문은 중층(2층)이 많으니 이곳 궁문도 2층이 아니었을까 싶다.

▲  남측 담장 (중앙문터 서쪽) ▼

▲  남측 담장 (중앙문터 동쪽) ▼

▲  남측 담장 서문터

▲  남측 담장 동문터

동문은 폭 9.8m 규모로 서문, 중앙문과 달리 오래가지 못하고 없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 자리에는 따로 기초 시설을 두지 않고 바로 담장을 올렸다.

▲  대형건물터

남측 담장 중앙문을 들어서면 커다란 건물터가 마중을 한다. 현재 왕궁리유적에서 가장 큰 건
물터로 정면 31m, 측면 15m 규모인데, 규모나 건축 기법, 위치로 미루어 왕궁의 중심 건물이
거나 대규모 연회를 벌이던 건물로 여겨지며, 건물 기둥을 받치고자 커다란 구덩이를 파서 그
속에 점토를 다진 다음 기둥을 세운 이른바 토심(土心) 기법이 사용되었다.
건물터를 건져내어 조사를 벌인 다음, 주춧돌과 건물터 윤곽은 보호를 위해 땅 속에 고이 묻
고 땅을 두툼히 다진 다음 그 위에 잔디를 입혀 이곳에 건물이 있었음을 귀뜀해준다. (이곳
건물터는 모두 그렇게 봉해져 있음)


▲  왕궁리 유적에서 수습된 건물터 주춧돌의 보금자리
이곳을 조사하면서 발견된 건물터 주춧돌을 대형건물터 인근에 집합시켰다.
왕궁리유적에 서린 장대한 역사를 머금은 존재들로 이곳의 왕년의
모습을 비춰주는 시간의 거울이다.

▲  출입시설로 여겨지는 건물터
석축을 넘나드는 출입시설로 추정되는 건물터이다. 동서 길이 8m, 남북 약 7m,
석축 높이 0.6m 정도로 그 동쪽에도 비슷한 건물터가 있다.

▲  한참 비밀을 들춰내고 있는 굴립주 건물터와 초석 건물터

왕궁리 유적 서남부에는 서쪽 담장과 굴립주 건물터, 초석 건물터, 부엌터, 장랑형 건물터 등
다양한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서쪽 담장을 따라 동서 방향으로 길쭉한 건물터 1기(건물터 37)와 남북 방향으로 긴 건물터 4
기(건물터 38, 40~42)가 나왔는데, 원형 혹은 타원형의 구덩이를 파고 나무를 세워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굴립주 양식이다. 특히 건물터37은 다른 건물과 달리 동서로 아주 기나긴 형태로
규모는 정면 5칸(520cm), 측면 4칸이며, 북쪽 중앙에서 180cm 떨어진 곳에는 출입과 관련된
주공이 210cm 간격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건물터 주변에는 석축 배수로가 나왔다.

굴립주 건물터 주변에는 원형 초석 3매가 1.5m 간격으로 남아있는 건물터 39가 있다. 원형 초
석은 기단과 함께 기초를 조성하면서 지어진 것으로 약 50cm 떨어진 곳에 기단 석재가 빠진
흔적이 확인되어 신라 후기에 가마터가 들어서면서 파괴된 백제 건물로 여겨진다.


▲  왕궁 부엌터, 장랑형 건물터

왕궁 부엌터는 이름 그대로 왕궁의 음식을 담당하던 공간으로 철제솥 2점과 직구단경호 1점,
광견호 2점, 단경병 2점, 철제가래날 1점, 철부 1점, 숫돌 3점과 불을 땐 흔적이 발견되었다.
백제 무왕이나 의자왕이 이곳에 머물 때 제왕 부부와 왕족들에게 올릴 진수성찬을 닦던 곳으
로 건물 양식과 출토 유물을 통해 무왕~의자왕 시절 건물로 여겨진다.

장랑형(長廊形) 건물터는 길쭉한 행각(행랑)을 두룬 건물로 기단석 1매, 판형 석재 3매가 발
견되었으며, 그 규모는 정면 10칸(27.5m)으로 여겨진다. 이런 건물 양식은 백제의 별채이자
속방(屬邦)인 왜열도에 전파되어 경도(京都, 교토) 지역 궁궐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  왕궁리 석탑 서쪽 건물터

이 건물터는 규모와 원형 주춧돌을 통해 왕궁의 행정 업무를 돌보던 정청(政廳)으로 여겨진다.
정면 9칸(19.2m), 측면 4칸(11.6m)으로 내부에는 한 변의 길이가 6m인 방이 2개가 있다. 건물
주위로 백제 때 유물인 뚜껑이 있는 접시<개배(蓋杯)>와 토기, 기와파편 등이 발견되어 궁궐
시절에 절찬리에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  배수로(排水路) 흔적

왕궁리 유적에서는 물을 배출하는 배수로의 흔적도 여럿 발견되었다. 윗 사진의 배수로는 0.7
~0.8m 폭에 길이가 약 28m로 배수로 가장자리에는 잘 다듬어진 석재를 1단 높이로 잇대어 연
결해 만들었으며, 배수로 남쪽에 건물터가 자리해 있다, 현재 배수로는 발굴 결과를 토대로
재현한 것이다.


▲  강당터 서쪽에 자리한 남쪽 건물터 ①

강당터 서쪽에 남북으로 나란히 자리한 2개의 건물터로 앞쪽 건물터는 강에서 가져온 자갈돌
을 둥글게 쌓은 동서 1칸, 남북 7칸 규모이며, 대형 항아리를 묻었던 시설이 나왔다. 그리고
뒷쪽 건물터는 불규칙한 모습으로 이들은 승려의 숙소인 승방(僧房)으로 여겨진다.

▲  강당터 서쪽에 자리한 남쪽 건물터 ②

▲  서쪽에 바라본 강당(講堂)터


▲  동쪽에서 바라본 강당터

금당터 뒷쪽에는 강당터가 넓직하게 누워있다. 강당은 설법이나 강연을 하던 교육 공간으로
정면 5칸(17.9m), 측면 4칸(12.6m) 규모이며, 이곳에서 남쪽 10m 지점에 3개의 계단 흔적이
나왔다. 부근에서 공방으로 쓰였던 흔적도 나왔으며, 잘 수습된 주춧돌과 두툼하게 솟은 건물
터만이 허전하게 남아 모든 것이 무상함을 보여준다.


▲  후원터 (유적 북부 언덕)

왕궁리 유적 북부는 야트막한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의 수수께끼를 밝히려는 불굴의
집념이 한참 펼쳐지는 중이라 북부 일대가 금지된 구역으로 묶여 있는데, (후원터는 2017년
7월에 개방됨) 대자연이 뿌려놓은 무성한 잡초와 나무들이 유적을 깔고 앉으며 그들을 꽁꽁
숨기고 있었지만 결국 발견되어 유적을 둘러싼 지루한 수수께끼 놀이가 진행되고 있다. 그 놀
이가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으나 부디 인간이 이기기를 바래본다.

북부 언덕에서는 후원터와 화장실터, 공방터 등이 나왔는데. 그중 후원(後苑)터는 언덕 동북
부에 자리해 있다. 후원 남쪽과 서쪽에는 구불구불한 수로(水路)가 하나 또는 2중으로 설치되
어 있고, 또 다른 수로가 연결되어 후원 연못에 물을 공급해 주었다. 그리고 후원의 동남쪽
모서리 지점은 궁성 전각 구역에서 후원 진입용으로 뚫려 있었다.
후원 내부 남측에는 동서 방향으로 돌을 깐 보도가 있었고, 중앙에는 정면 4칸, 측면 4칸의
건물터가 나왔다. 또한 물을 보관하는 장방형의 수조시설과 물의 양을 조절하는 'ㄱ'자 형태
의 암거시설, 그리고 정원 중심 공간에서 배출된 물을 모으는 네모난 집수시설이 있다.

후원에 있던 연못은 네모난 모습으로 정원 중심 공간에 괴석과 판석(板石)을 이용해 네모난
못을 만들고 조경석과 자갈돌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궁궐터 내부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정원(
후원) 유적으로 자연과 어우러지게 만든 백제의 우수한 조경 기술을 쿨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그들의 조경 기술은 신라와 속국인 왜열도에 많은 영향을 내렸다. 물론 부여 궁남지(宮南池)
도 백제 왕궁의 후원이긴 하지만 그곳은 후원 중심의 별궁(別宮)이었다. 그러니 조금은 다르
게 봐야 된다.


▲  대형화장실1 모형도 (왕궁리유적전시관)

왕궁리 유적은 궁궐 내 후원 유적이 나온 현장으로도 유명하지만 백제시대 화장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현장으로도 가치가 높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늘 예민한 생리현상을 해소하는 공간이 있기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늙은
유적에서는 그와 관련된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곳에서 화장실 유적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 이름도 아름다운 화장실(뒷간), 사람에게 필요한 공간이 분명하지만 한편으로는 다소 예민
하고 껄끄러운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역사에서도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고 조사와 연구
도 부실하며 자료도 빈약하다. 그 빈약한 자료를 크게 보충해준 곳이 이곳 왕궁리이다.

유적 북부인 언덕 동북부에는 후원터가, 서북부에는 화장실터와 공방터가 발견되었는데, 화장
실터는 동서 방향으로 크기가 다른 3기가 나란히 위치해 있다. 이중 가장 큰 것(대형화장실1)
은 길이 10.8m, 너비 1.8m, 깊이가 3.4m로 볼일을 보는 곳에 뒷처리용으로 쓰이는 이른바 똥
막대기가 있었다.
그 외에 목재품과 나무방망이, 백제시대 짚신, 목제칠기 뚜껑 등이 나왔으며, 특히 회충과 편
충 등의 기생충알이 나오니 이들은 대변의 흔적들로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과 질병 상태, 생활
상 등을 조금이나마 보여준다.

깊은 구덩이에 볼일을 본 잔재들은 어느 깊이에 이르면 서측 담장 밖으로 이어지는 긴 수로를
통해 밖으로 배출되며 그 과정에서 조금은 정화되어 인근 개천으로 흘러갔다. 허나 구덩이 안
쪽에 박힌 것들은 어지간해서는 잘 빠지지 않는다. 그러니 위생 문제도 있고, 옷도 지금과 달
리 불편하기 그지 없으니 불편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현대인들 입장에서는 사용하기가 좀
꺼림칙하지만 그 당시로써는 그나마 최신식 화장실이었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이용했다.

이들 화장실 유적은 공방터 남쪽에 있어 공방에서 일하는 사람과 궁궐이나 절에서 잡일을 하
는 사람들과 군사들이 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처럼 칸막이가 있던 것은 아니라서 남
녀공용으로 이용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며, 3개의 화장실터 중 2개는 남자 전용, 1개는 여자 전
용이 아니었을까 싶다.

공방은 남북으로 긴 2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좌측에 공방 관련 원료와 재료, 도구
들을 버리는 공간이 나왔다. 특히 공방 내부의 습기를 제거하려는 독특한 지하 시설이 확인되
었으며, 금과 유리제품, 원재료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곳은 왕궁의 전용 공방으
로 왕족들의 사치품과 생활용품을 제작했으며, 절로 바뀐 이후에도 어느 정도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  와적기단(瓦積基壇) 건물터

와적기단이란 기단 바깥을 기와로 쌓아 장식하는 것으로 6세기 중반 이후 백제에서 널리 유행
하여 부여(관북리 유적, 정림사터)와 익산에서 여럿 발견되었다. 이후 왜열도로 전파되었으며
, 이들 건물터는 백제의 건축기술과 그 변천 과정을 밝혀낼 수 있는 중요한 존재이다.


▲  건물터

왕궁의 주요 건물로 여겨지는 터로 잘 다듬어진 면석을 0.8~0.9m 폭으로 세우고 내부를 진흙
으로 단단하게 다졌다. 주변에서는 길쭉하거나 둥근 형태의 폐기 구덩이가 여럿 나왔는데, 6
세기 중반 중원대륙에서 만들어진 청자파편이 나왔다.


 

♠  왕궁리유적 둘러보기 ②

▲  금당터

왕궁리유적의 한복판이자 왕궁리5층석탑 북쪽에 금당터가 누워있다. 금당(金堂)이란 절의 중
심 건물인 법당(法堂)으로 왕궁 건물을 밀어버리고 새로 지은 것으로 여겨지며, 바로 앞에 5
층석탑이 있어서 1금당 1탑 양식의 가람배치를 취하고 있다.


▲  'ㄱ'자 모습의 건물터

와적기단 건물터 옆에 누워있는 건물터로 둥근 형태의 적심이 1.5m 내지 2.8m 간격으로 배치
되어 있다. 앞쪽 건물터는 너비 약 3m, 길이 약 5m 크기의 2개의 방을 지닌 구조로 인근 미륵
사지와 부여 능산리사지에서도 비슷한 구조가 발견되었는데, 궁궐 건축물로 여겨진다.


▲  남북방향 석축
경사면에 돌을 쌓고 평탄하게 땅을 다지고자 만든 것이다. 현재 길이 약 30m, 높이
0.55m 정도가 남아있으며, 궁궐 관련 건물에서 사용된 석부재(石部材)가
포함되어 있어 절을 닦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  왕궁리5층석탑 북쪽 건물터

왕궁 조성을 위한 기초 시설로 여겨지는 동서 방향 석축 중간에 자리한 건물터이다. 땅을 파
고 잘 다듬은 석재를 1~2단으로 쌓아 터를 다졌는데, 한 변의 길이가 12m인 정사각형 건물로
여겨지며, 건물터 주변에 기와를 잇댄 토판(土版)을 설치하여 배수처리용으로 삼았다. 위치와
구조를 통해 절의 중요 건물로 짐작되며 조그만 주춧돌이 어지럽게 박혀져 있어 그들의 고된
세월을 느끼게 된다.


▲  왕궁리5층석탑 동쪽 건물터
여기서는 땅을 파고 그 위에 주춧돌을 놓은 토심 구조와 나무와 흙으로 단을
쌓아 올린 토축(土築) 기단 구조, 건물 바닥을 지면에서 띄워서 지은
굴립주 구조가 발견되었다.

▲  동그란 모습의 기와 가마터
기와를 굽던 2기의 가마가 동서로 나란히 발견되었다. 기와를 굽던 아궁이와 숯,
불에 탄 흙과 기와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앞쪽 가마터는 너비 1.7m, 길이 2.6m
규모의 반 지하식 가마로 이들은 신라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  건물터

석축을 넘나드는 출입시설로 여겨지는 건물터이다. 동서방향 석축에서 양쪽으로 면을 맞춰 돌
을 쌓았는데, 동서 길이가 약 6m, 남북이 약 4m 정도 남아있으며, 석축 서쪽에도 비슷한 건물
터가 있다. 오른쪽 건물터는 원형 주춧돌 3개와 기초시설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한 정면 3칸
, 측면 1칸의 건물로 여겨진다.


▲  동서 방향 1번째 석축터

석축은 왕궁 안에서 동서 방향으로 4개, 남북 방향으로 2개가 나왔다. 동서 방향의 1번째 석
축은 길이 95m, 높이 0.9m로 원래 높이는 2m 정도로 여겨지며, 석축 부근에서 토기와 기와 조
각, 중원대륙에서 건너온 청자 조각 등이 출토되어 백제 후기 왕궁의 생활상과 축조 시기 등
을 보여주고 있다.

▲  왕궁리 유적 남부 건물터

▲  유적에서 발견된 기와 조각으로 다진
기와 기단 (와적기단을 흉내 낸 듯)


▲  왕궁리 유적의 꽃, 왕궁리 5층석탑 - 국보 289호

왕궁리 유적 한복판에는 이곳의 백미(白眉)이자 백제탑의 후예인 왕궁리5층석탑이 고운 맵시
를 드러내고 있다.
잠들어있던 왕궁리 유적을 깨웠던 장본인으로 바닥돌과 1단의 기단(基壇) 위로 5층의 탑신(塔
身)을 올린 다음 그 위에 약간의 머리 장식을 얹혔는데, 기단이 파묻히고 다소 기울어져 있던
것을 1965년에 해체 수리하면서 기단이 다시금 햇살을 보게 되었다.

탑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으로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크고 길쭉
한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을 쌓아올려 목조탑(木造塔)의 양식을 석탑에 그
대로 펼쳐 보였다.
팔각기둥과 네모난 돌들 사이는 흙을 다져서 메웠는데, 그 속에서 백제 때 기와조각이 발견되
기도 했으며, 발굴 중에 기단 각 면 가운데에 2개씩 기둥조각을 새긴 것이 드러났고, 1층 지
붕돌 가운데와 탑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1965년에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
어 크게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 사리장치는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 있으며,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란 이름으로 국보 123호로 지정되었다.

탑신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고, 지붕돌은 얇고 밑은 반듯하나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위로 치켜 올려져 있으며, 풍경 등의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있다. 그리고 각 층 지붕
돌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고자 다른 돌을 끼워놓았다.

사리장치를 통해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옛 백제 땅(충남, 전라도)에서
고려 때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으로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을 좀 닮기도 했다. 하지만 탑의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백제 후기, 신라 후기 설도 존재하고 있어서 아직은 정체가 아리송하며,
고려 탑이 맞다면 왕궁리 유적은 적어도 고려 중기까지 절로써 밥벌이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근래 유적을 손질하면서 탑 밑에서 목탑터와 건물터가 발견되어 그가 있기 전에 왕궁 건
물이 있었고, 그것을 부시고 목탑을 세웠다가 다시 부시고 그것을 닮은 석탑을 세웠음을 귀뜀
해주고 있으며, 탑의 높이는 8.5m이다. 허나 폐허의 너른 공간에 홀로 피어있다 보니 다소 장
엄하게 다가오며, 오랫동안 보물 44호라는 지위를 누렸다가 1997년 국보로 승진되었다.

▲  북쪽과 남쪽에서 바라본 왕궁리 5층석탑의 위엄
그는 고려 초기 석탑일까? 신라 후기 또는 백제 후기 탑일까? 정답은 오직 탑만이
알고 있으나 좀처럼 말해주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들아 알아서 풀어보셔~~!'
수수께끼를 내듯이..

▲  왕궁리 유적의 동남쪽 모서리
(남측 담장과 동측 담장이 만나는 곳)

▲  남측 담장 (동문터 동쪽)


 

♠  왕궁리유적 둘러보기 ③

▲  동측 담장 (담장 내부 보도, 배수로)

동측 담장은 폭이 3m 정도로 구간마다 돌을 쌓은 방법이 다르다. 폭 6m 정도 되는 문터와 담
장을 보호하는 시설, 보도, 배수로가 발견되었으며, 담장의 높이는 알 수 없으나 남측 담장과
비슷하게 1m 높이로 절반 남짓 거리를 복원했다. 비록 절반 남짓 정도만 복원이 되어 실감이
적겠지만 왕년에는 제법 장대한 규모였다.
최대한 발견된 돌을 이용해 담장과 보도, 배수로를 재현했으나 수량이 충분치 못해 군데군데
새 돌을 끼어 넣으면서 고색이 짙은 돌과 하얀 피부의 어린 돌이 서로 어색한 조화를 보인다.
허나 시간이 상당히 지나면 어린 돌도 늙은 돌을 닮아 고색의 빛을 낼 것이다.

▲  북쪽으로 달리는 동측 담장

▲  동측 담장 배수로 ①

▲  동측 담장 배수로 ②

▲  왕궁리유적전시관

왕궁리 유적 남쪽에는 왕궁리유적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2008년 12월 23일에 문을 연 왕궁
리유적 전문 박물관으로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 1,700여 점이 담겨져 있으며, 그중 300여 점만
꺼내 전시하고 있다. 유물 외에도 유적 관련 디오라마와 모형도, 영상물 등이 유적에 대한 이
해를 흔쾌히 돕고 있으며, 왕궁리5층석탑의 옛 모습이 담긴 오래된 사진도 별도 공간에서 다
루고 있다. 또한 어린이를 위해 목판 찍기 체험 등 다양한 체험도 준비되어 있다.

유물전시관 내부를 제대로 다룬다는 것은 솔직히 무모한 행동이고 또한 사진도 몇 장 담지 않
아서 그 일부만 본글에 꺼내보도록 하겠다. 솔직히 전시관 내용과 앞서에서 길게 언급했던 왕
궁리 유적 내용은 많이 교집합을 이루니 별도로 다룰 필요는 없다.


▲  공방터 모형 (오른쪽이 대형화장실터)

▲  백제시대 소변통 - 요강의 이전
모습으로 남녀 공용이다.

▲  공방터에서 발견된 백제 금도가니

▲  왕궁리 유적에서 나온 온갖 토기들

▲  1917년 왕궁리5층석탑의 모습
(지금과 달리 기단이 묻혀 있음)


▲  왕궁리5층석탑의 흑역사, 1938년에 제작된 석탑 실측도
석탑이 이탈리아의 피사의 사탑처럼 왼쪽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다.
(기단부는 여전히 땅에 묻혀 표시되지 않았음)

▲  1965~1966년 왕궁리 5층석탑을 복원하면서 찍은 빛바랜 흑백 사진
사람과 비교해보면 석탑이 얼마나 장대한 규모인지 알 수 있다.

▲  왕궁리5층석탑 몸 속에서 나온 사리공의 모습 (1965년)

▲  왕궁리 유적 서남부 모서리 (서측 담장과 남측 담장)

왕궁리 유적 서측 담장은 1번 국도와 맞닿아 있다. 2중으로 이루어진 석축 위에 흙을 쌓은 형
태로 남측, 동측 담장과 비슷하며, 이 역시 정확한 높이를 헤아리기가 어려워 1m 정도 높이로
북서부 구역(공방, 화장실터)을 제외하고 그런데로 복원해 놓았다.

유물전시관을 포함해 왕궁리 유적을 2시간 정도 둘러보았다. 유적이 모두 속살을 드러낸 상태
가 아니라서 어디까지나 전체를 둘러본 것은 아니며 허용된 공간만 두 발을 움직였다. 완전히
가늠하기도 어려운 왕궁리 유적은 지금도 비밀 캐내기가 한참이라 나중에 온다면 지금보다 더
넓은 유적을 둘러보게 될 지도 모르고, 유적에 대한 설명도 크게 안면을 바꿀지도 모른다. 혹
시 아는가 마한부터 닦여진 왕궁터일지도?


▲  왕궁리 유적 서측 담장 (1번 국도에서 바라본 모습)


 

♠  하천을 사이에 두고 애타게 바라보고 있는 길쭉한 석불
고도리(古都里) 석조여래입상 - 보물 46호

▲  고도리 동쪽 석불

▲  고도리 서쪽 석불

금마면 중심지(동고도리)와 왕궁리 유적 중간에는 흥미롭게 생긴 고도리 석불이 있다. 왕궁리
유적을 둘러보고 그 석불을 보고자 우회 국도 신설로 무척 한가해진 옛 1번 국도를 조금 따라
가다가 새 국도 밑에 뚫린 굴다리를 지나면 너른 평야가 나온다. 여기서 직진하면 익산천이란
하천이 나오는데, 유유히 흐르는 그 하천을 따라 북쪽으로 길을 재촉하면 하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고도리 석불이 뜨겁게 눈짓을 보낸다. 평야와 비닐하우스가 전부인 곳이
라 쉽게 눈에 띄며 이정표가 잘되어 있어 찾기는 쉽다.

석불이 있는 고도리는 옛 도읍을 뜻한다. 아마도 오랜 세월 마한의 도읍으로 전해오던 왕궁리
유적 부근이라 그런 거창한 이름을 지니게 된 듯 싶은데 현재는 경작지와 시골 마을로 이루어
져 있어 고도리란 이름 값을 무색케 한다.


▲  익산천 둑방길 (고도리 석불 방면)

▲  고도리 동쪽 석불

고도리 석불은 금마 들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익산천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약 200m 거리를 두
며 자리해 있다. 이들은 흙으로 두툼하게 닦여진 조그만 둥근 언덕 위에서 서로 애타게 마주
보고 있는데, 그들 높이는 4.24m로 어깨는 매우 좁으며, 머리에는 2중의 관(冠), 즉 네모난
관 위에 다시 네모난 관을 쓰고 있다.

네모난 얼굴에는 가는 눈과 눈썹, 짧은 코, 작은 입이 있으며, 양쪽으로 두 귀가 희미하게 달
려있다. 목은 겨우 하나의 선으로 처리해 얼굴과 몸통은 완전 붙어있으며 어깨부터 밑도리까
지는 그냥 형식적인 모습으로 손이 배 앞에 있고, 옷자락도 몇 줄의 선이 고작이다. 몸통 밑
에는 앞면을 약간 깎아서 만든 대좌(臺座)가 있으나 이 역시 몸통과 같은 돌로 되어있다.
몸통은 대체로 굴곡이 없는 매우 날씬한 사다리꼴 돌기둥으로 석불이라기 보다는 무덤의 석인
상(石人像)이나 토속적인 마을 수호상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하여 석불과 관련이 없는 존재로
보는 설도 있다.

이들은 가지각색의 석불과 마애불이 많이 등장했던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그 시절에는 개성
이 강하고 거대한 모습을 자랑하지만 반면에 작품성이 다소 떨어지는 거대한 석불이 많이 등
장했다. 이 고도리 석불 역시 그런 예의 하나로 지극히 절제화되고 간략화된 거대한 석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석불에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있는데, 석불 중 하나는 남자이고 다른 하나는 여자라고
한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익산천이 흐르고 있어 평소에는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다가 1년에 1
번, 섣달 그믐날 밤에 개울이 꽁꽁 얼어붙으면 냇물을 건너서 서로 회포를 풀다가 닭이 울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한다.
과연 전설처럼 그들이 움직일리는 없겠지만 마을을 지키는 남녀 수호신의 역할도 하고 있었음
을 알려준다. 즉 마을의 안녕을 위해 이렇게 그들을 배치한 것이다. 또한 왕궁리 유적과도 가
까워 그들을 알리는 이정표 역할도 했을 것이다.

▲  고도리 동쪽 석불

▲  뒷쪽에서 바라본 고도리 서쪽 석불


▲  동쪽을 바라보고 선 고도리 서쪽 석불

하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고도리 석불을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5시가 넘었
다. 제아무리 천하에서 가장 크다는 햇님이라고 하지만 차디찬 겨울 제국(帝國)의 무한 눈치
때문에 16시가 넘으면 어둑어둑해지면서 제국의 쌀쌀한 기운이 칼처럼 불어온다. 어차피 오늘
목적한 바를 모두 이루었기 때문에 더 이상 무리하지 않고 나의 제자리로 길을 재촉했다. 
 
이렇게 하여 한겨울 익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소재지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400-2, 1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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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현충원 6월 나들이 ~~ 창빈안씨묘역과 신도비, 서달산 호국지장사, 현충원숲길

국립서울현충원 창빈안씨묘역, 호국지장사



' 국립서울현충원 현충일 나들이 '
(창빈안씨묘역, 호국지장사)

호국지장사 지장전
▲  호국지장사 지장전 (지장보살입상)

창빈안씨 신도비 호국지장사 팔상도

▲  창빈안씨 신도비

▲  호국지장사 팔상도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이 되면 진하게 생각나는 곳이 있다. 바로 호국(護國)의 신이 봉안
된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顯忠園)이다. 내가 애국심이 유별난 것도 아니요. 가족과 일
가 중에 그곳에 묻힌 이가 있는 것도 아니나 석가탄신일에 그날 본능에 따라 절 투어를
즐기듯 현충일에는 그날에 맞게 현충원을 찾아가 그곳에 깃든 늙은 문화유산과 숲길(동
작충효길)도 둘러볼 겸, 호국의 신을 기리며 그날의 분위기를 누리는 것 뿐이다.

국립서울현충원은 한강과 관악산 사이에 솟은 공작봉<孔雀峰, 서달산(西達山,197m)> 자
락에 넓게 터를 닦았다. 1954년에 조성되어 천하에 흩어진 6.25 전쟁 전사자를 모아 안
장했는데, 처음에는 지역 이름을 따서 '동작동 국립묘지'라 했으나 2006년부터 '국립서
울현충원'으로 이름을 갈았다. (본글에서는 '국립현충원' 또는 '현충원'이라 표시함)
이곳은 특히 명당 자리로 명성이 아주 자자한데, 마치 공작이 아름다운 날개를 쭉 펴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며,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형세도 지니고 있어 좀 어려
운 말로 장군대좌형(將軍對座形)이라 부른다. 즉 동쪽인 좌청룡(左靑龍)의 형세를 보면
웅장한 산맥(山脈)의 흐름이 용이 머리를 들어 꿈틀거리는 듯, 한강을 호위하는 형상이
고 서쪽인 우백호(右白虎)는 힘이 센 호랑이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며, 전후좌
우로 솟은 봉우리와 산허리는 천군만마가 줄지어 서 있는 형상과 같다는 것이다.
정면 앞산을 바라보면 주객이 마주 앉은 모양이고, 멀리 보이는 산은 물소뿔 같으며 한
강은 동에서 서로 흘러가니 명주 폭이 바람에 나부끼듯 하늘거려 공작봉을 감싸 흘러내
려가고 있다. 마치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이라 하여 명당 중의 명당으
로 통한다.
이렇게 의미가 남다른 곳에 호국의 신을 봉안했으니 그들의 후손과 이 나라가 잘되어야
마땅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효과가 시원치가 못하다. (친일매국노와 자격 미달자가 적지
않게 자리를 축내고 있음)

현충원 내에는 창빈안씨묘역과 부안군 이석수 묘역(扶安君 李碩壽墓域), 호국지장사(지
장사) 등의 문화유산이 있는데, 본글에서는 현충원 단골 명소인 창빈안씨묘역과 호국지
장사를 다루도록 하겠다.
(부안군 묘역은 철책이 꽁꽁 둘러져 있어 들어갈 수가 없음~)


 

♠  국립서울현충원의 옛 주인, 허나 지금은 뒷전으로 밀려난
창빈안씨묘역(昌嬪安氏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4호

국립현충원에 발을 들여 제일 먼저 현충원의 배꼽 부분인 창빈안씨묘역을 찾았다. (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 남쪽에 있음)
군인과 애국지사, 역대 대통령의 유택(幽宅) 밖에는 없을 것 같은 이곳에 뜬금없이 조선 왕족
의 늙은 무덤이 있으니 많은 이들이
'저건 뭐지?' 의아해 할 것이다. 하지만 현충원이 들어서
기 훨씬 이전부터 창빈 묘역은 이곳의 오랜 주인으로 현충원 일대를 거느렸다.
그러다가 1954년 이후 국립묘지가 닦이면서 묘역에 딸린 토지 대부분이 호국신의 공간이 되었
으며, 1965년 묘역 북쪽에 이승만 묘역을, 2009년에는 바로 남쪽에 김대중 전대통령의 묘역이
닦이면서 묘역은 더 쪼그라들었다.
게다가 2010년 이전에는 그의 묘역을 알리는 이정표도, 안내문도 전혀 없었다. 외진 곳도 아
니고 현충원 한복판에 있음에도 어떠한 안내문도 없었으니 그 앞을 지나쳐도 전혀 모른 것이
다. 다행히 2010년 이후, 묘역 북쪽에 묘역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졌고 현충원 안내도에도
그의 묘역이 표시되어 뒤늦게나마 약간의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임에도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 잉여로운 신세로 고통받고 있는 창빈묘
역, 그렇다면 묘역의 주인공, 창빈안씨는 누구인가?

창빈(1499~1549)은 조선 11대 군주인 중종(中宗)의 후궁이다. 1499년 경기도 시흥(始興)에서
안탄대(安坦大)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용모가 뛰어났다고 전한다.
집안이 어려워서 1507년에 궁녀로 들어갔으며, 20세에 중종의 사랑을 받아 22세에 상궁(尙宮)
으로 승급되었다. 그녀는 행동이 단정하고 정숙했으며, 자비로운 성품과 근검절약하는 생활태
도로 덕망이 높았다. 하여 중종의 모후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성종의 왕비)의 총애를 받
았으며, 시어미의 후원으로 31살에 숙원<淑媛, 내명부(內命婦) 종4품>이 되고 이어서 숙용<淑
容, 내명부 종3품>까지 올랐다.
중종과의 사이에서 영양군(永陽君), 덕흥군(德興君), 정신옹주(靜愼翁主) 등 2남1녀를 낳았는
데, 그중에서 덕흥군(1530~1559)은 조선 14대 군주인 선조(宣祖)의 아비로 조선 최초의 대원
군(大院君)으로 유명하다.

창빈은 1549년,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처음에는 양주 땅 장흥(현 양주시 장흥면)에
묘역을 썼으나 이듬해 3월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  500년 가까운 세월에도 정정한
모습을 잃지 않은 우측 문인석

▲  눈을 가늘게 뜬 좌측 문인석(文人石)


조선의 수많은 후궁 묘역의 하나로 자칫 잊혀질 뻔했으나 덕흥군의 아들이자 그녀의 손자인
하성군(河城君, 선조)이 왕위에 오르면서 잠시 호강을 받게 된다. 하성군은 왕위 계승권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때마침 적당한 인물이 없어 정말 운이 좋게도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에게
는 행운이었으나 조선과 이 땅에게는 불행이었음)
허나 선조는 적통이 아닌 서자(庶子)의 아들이란 이유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하여 자신
의 권위를 높이고자 아버지와 할머니를 이용하기로 작정하고 그들을 높이는데 지나치게 공을
들인다. 하여 1577년 할머니에게 창빈이란 시호를 올렸으며, 무덤의 격을 능으로 높이고 묘역
을 현충원 일대로 확장시켰다. 능의 이름은 이곳의 지명인 동작진(銅雀鎭)의 이름을 따 동작
릉(銅雀陵)이라 했으며, 아비인 덕흥군의 묘역 또한 백성들의 입소문과 많은 돈을 이용해 잠
시나마 덕릉(德陵)으로 높이는데 성공했다. (덕흥대원군 묘역 ☞ 관련글 보러가기)

그릇도 작고 꽤나 쪼잔했던 선조가 1608년 골로 가자 동작릉은 창빈안씨묘역으로 격하되고 만
다. 허나 이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 뿐이다. 창빈의 성격상 동작릉이란 이름에 꽤 부담을
가지며 손자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 1683년 왕명에 따라 묘역 북쪽에 신도비를 세웠
는데 비문은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낸 신정(申晸, 1628~1687)이 짓고 글씨는 돈령부지사(敦
寧府知事)를 지낸 왕족 출신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썼다.

창빈의 아비인 안탄대는 성품이 매우 유순하고 겸손했다. 딸이 왕의 후궁이 되었음에도 부귀
영화와 출세를 멀리하고 검소하게 살았으며, 겸손이 너무 지나쳐 비굴하게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심지어 어린이한테 잔소리를 들어도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일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성
품을 알만하다.
그는 스스로 천인(賤人)이라 자처하고 계속 가난하게 살았으며, 벼슬은 종7품 유순부위(油順
府尉)가 전부이다.

안탄대가 세상을 뜨자 선조는 우의정(右議政)을 추증했으며, 묘역은 안산시 반월공단에 있다.


▲  고된 세월의 때로 가득한 창빈안씨 묘표(墓表)

▲  구름과 용이 뒤엉킨 고품격 조각의 묘표 이수(螭首)
소용돌이가 치는 듯한 구름 사이로 꿈틀거리는 용이 현란하게 조각되어 있다.
저기에 적당히 색만 입히면 3D영화처럼 실감이 클 것이다.


못난 손자에 의해 한때 능의 대접까지 받았지만 창빈묘역은 조촐하기 그지 없다. 전형적인 후
궁의 무덤 양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적당히 부풀어오른 동그란 봉분(封墳) 앞에는 수려
한 조각의 이수를 지닌 묘표(묘비)와 상석(床石),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그 좌우로 조그만
망주석(望柱石) 1쌍, 그 앞쪽에는 홀(忽)을 쥐어든 문인석 1쌍이 무덤을 지킨다. 봉분 뒤쪽에
는 기와를 지닌 곡장이 둘러져 있다.


▲  소나무 그늘에 자리한 창빈안씨 신도비(神道碑)

묘역 북쪽 소나무숲에는 창빈안씨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1683년에 세워진 것으로 높이는 3m
이며, 귀부(龜趺)와 이수를 갖춘 다른 신도비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모습으로 네모난 바닥
돌에 하얀 피부의 기단석(基壇石)을 얹히고 그 위에 날씬한 몸매의 비신(碑身)을 심어 창빈의
일대기를 적었다. 비석 꼭대기는 지붕돌로 마무리했는데 귀퉁이 추녀가 얕게 들려져 소소하게
경쾌감을 선사한다.

* 창빈안씨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299-10


 

♠  국립현충원 뒷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책임지고 있는 서달산 호국지장사(西達山 護國地藏寺)

▲  국립현충원 호국지장사 입구

국립현충원의 꼬리 부분인 공작봉(서달산) 북쪽 자락에는 호국지장사(지장사)가 포근히 둥지
를 틀고 있다.
처음에는 현충원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위해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절로 여기고 거의 관
심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5년 이후 겉보기와 달리 문화유산을 넉넉히 품은 오래된 절임
을 알게 되면서 구미가 확 올랐고 그 이후 현충원을 찾을 때마다 꼭 발걸음을 하고 있다.

호국지장사(이하 지장사)는 신라 끝 무렵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670년
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서로 시기가 틀려먹음)
부동산 전문가인 도선은 북쪽으로 가다가 한강 언덕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니 어디선가 서기
(瑞氣)가 흘러나와 자신을 유혹하고 있었다. 하여 그 서기를 추적하니 그 기운이 나오는 곳에
칡덩굴이 엉켜있고 약수가 나오고 있었다. 하여 자리를 살펴보니 아주 기가 막힌 명당인지라
토굴(土窟)을 짓고 갈궁사(葛弓寺)라 했다고 한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지장사에서 우기는 믿거나 말거나 설화일 뿐이다. 봉은사(奉恩寺)에서
작성한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1577년 선조가 창빈묘역 부근 산기슭에 절을 창건하고 원찰을 삼으니 갈궁사가 바로 이 절이
다'
내용이 있으며 고려 공민왕(恭愍王) 시절에 보인(寶印)이 중창<또는 창건>하고 화장암(華
藏庵)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덩달아 전해오고 있어 이르면 고려 후기, 늦어도 1577년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절의 내력이 구체적으로 윤곽을 보이는 것은 16세기 말이다. 명종(明宗) 시절 창빈안씨묘역이
양주에서 절 부근으로 이장되었는데 1577년 선조가 친할머니인 창빈의 묘역을 동작릉으로 높
이면서 화장암을 창빈묘역을 지키는 원찰(願刹)로 삼았다. 이때 화장사(華藏寺)로 이름이 갈
렸다고 하며, 그 인연으로 오랫동안 왕실의 지원을 받았다. 또한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
항복(李恒福)과 이덕형(李德馨)이 10대 시절 공부를 했던 곳으로도 전해진다.
1663년 절을 중수했으며, 영조 시절에 신경준(申景濬)이 작성한 '가람고(伽藍考)'에 '동작리
에 화장암이 있다'는 내용이 있어 그때까지도 꾸준히 법등을 지키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1862년 운담(雲潭)과 경해(鏡海)가 중건했으며, 1870년에 경파루(鏡波樓)를 지었고 1878년에
는 주지 서월(瑞月)과 경해가 대방(大房)을 수리했다. 1893년에는 경운(慶雲), 계향(戒香)이
불상을 개금하고 구품탱, 지장탱, 현왕탱, 독성탱,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1896년에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그리고 1906년에는 풍곡(豊谷)이 약사전의 불상을 개금 단청하고 후불탱과 신중
탱, 감로탱, 신중탱, 칠성탱 등을 봉안했다.
1911년에는 왜정(倭政)의 사찰령(寺刹令)으로 봉은사의 말사(末寺)가 되었으며, 1920년에 대
방을 수리했고, 1936년 주지 유영송(劉永松)이 능인전(能仁殿)을 중수했다.

1954년 이후 절 밑에 국립묘지가 들어서면서 자연히 호국신을 책임지는 사찰이 되었다. 하여
지장도량(地藏道場)을 칭하게 되었는데 1983년 주지 혜성(慧惺)은 호국신들이 지장보살의 원
력으로 모두 극락왕생이 되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호국지장사<줄여서 '지장사'>로 이름을 갈았
다. 그야말로 현충원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이름이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능인보전과 삼성각, 극락전, 지장전, 심우당, 청심당 등 10동 가
까운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과 삼성각 등은 동남향(東南向)을 취하고 있다. 경내 남쪽에는 약
수가 나와 주민들이 많이 물을 뜨러 오며 지장보살입상을 중심으로 3,000좌의 조그만 지장보
살을 봉안해 절 이름 값을 톡톡히 한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철불좌상과 괘불도(掛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3호), 극락9품도, 독
성도, 약사불도 등 무려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지니고 있으며, 한강에서 건져 올렸다는 철불
좌상과 석가여래삼존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 후기 탱화들이다. 그 외에 멀리 경주에서 왔
다는 신라 후기 3층석탑이 있는데 그것이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다.

서울 도심과 무척 가깝지만 삼삼한 숲에 감싸여 있어 산사(山寺)의 분위기를 여실히 간직하고
있으며 고즈넉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현충원에 발을 들였다면 꼭 둘러보길 권한다. 또한 짙은
숲에 가려 보이는 범위는 적으나 현충원 일대와 한강, 용산구 지역이 시야에 들어와 경치도
그런데로 괜찮다. 하여 이승만 전대통령도 꽤나 군침을 흘렸던 곳이기도 한데 그가 국립묘지
를 둘러보고 잠시 절에 들려 사람들에게
'만일 이곳에 절이 없었다면 내가 묻히고 싶은 땅이오~' 했다고 전한다. 그만큼 자리가 좋은
곳이다.

이곳은 절의 마르지 않는 샘이자 든든한 후광(後光)인 현충원이 있는 한 배를 굶거나 문을 닫
을 일은 없다. 현충원의 일원으로 그와 운명을 함께 하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만약 현충
원이 없었다면 인근 상도동의 사자암(獅子庵,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숲과 주거지의 경계가
되거나 주거지에 거의 둘러싸여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석가탄신일과 현충일에는 절을 찾은 중생들에게 공양밥이나 국수를 제공하는데, 맛이 제
법 괜찮다. (현충일에는 보통 13시 이전에 공양을 제공함)

* 호국지장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305 (현충로 210 ☎ 02-814-5257)
* 호국지장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지장사로 인도하는 오르막길에서 바라본 국립현충원
현충원은 물론 그 너머로 용산구 지역과 남산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지장사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20-5호

지장사 입구에서 절로 인도하는 길은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경사가 다소 급하다. 그 길을 오르
면 커다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베풀며 중생을 맞이한다.
그는 350년 정도<1985년 10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315년> 묵은 나무로 높이
15m, 둘레 4.5m에 이른다. 오랜 세월 지장사의 이정표 및 정자나무의 역할을 해왔던 그는 아
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양분과 지장사의 보살핌으로 무럭무럭 자라나 현충원에서
가장 장대하고 늙은 자연물이 되었다.
 
지장사에는 일주문(一柱門)이나 천왕문(天王門) 같은 문이 없다. 대신 삼삼한 숲이 일주문의
역할을 대신한다. 숲에서 불어오는 산바람과 절에서 낭랑하게 흘러나오는 염불소리는 천근만
근 무겁다는 번뇌를 참교육시키며 마음 바깥으로 쫓아낸다. 하지만 멀리 가지 않고 절 입구에
서 우두커니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나 또한 그 번뇌를 찾으니 해탈이니 성불이니 하는 것은 그
저 먼 세상의 이야기인 모양이다.


▲  지장사 경내로 인도하는 숲길

▲  석등을 한복판에 띄운 네모난 연못
연못에는 여러 물고기들이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  조촐한 모습의 능인보전(能仁寶殿)

경내로 들어서면 정면에 지장보살입상을 중심으로 한 지장전이, 오른쪽은 대웅전 구역, 왼쪽
에는 단출한 모습을 지닌 능인보전이 있다.
능인보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겉으로 보면 그저 작은 건물로 여기고 지
나칠 수 있다. 허나 그 안에 철불좌상과 신중탱 등 오래된 문화유산이 자리를 채우고 있으니
꼭 둘러보기 바란다.


▲  능인보전에 봉안된 철불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5호
능인보전 약사불도(藥師佛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호


능인보전 불단에 홀로 자리한 철불좌상은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경내에서 3층석탑 다음으
로 늙은 존재이다. 철불(鐵佛)이란 이름 그대로 철로 만든 불상으로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잠깐 등장을 하는데, 그가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다면 도선국사가 세운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을 흔쾌히 입증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아쉽게도 그는 다른 곳에서 온 불상으로 이곳에 들어온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다음과 같
은 전설이 아련하게 전해온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인 어느 옛날, 한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의 꿈에 이 불상
이 나타나 제발 빛 좀 보게 해달라며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어부는 혹시나 싶어 그곳으
로 가 그물을 치니 녹슨 채로 버려진 그 불상이 걸려들었다. 하여 그를 가져와 깨끗하게 목욕
을 시키고 집에 봉안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이상하게도 고기도 잡히지 않고 나쁜 일만 연이어 생기는 것이다. 보통 이
런 전설에선 고기가 잘 잡혀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기 마련인데, 불상이 좀 심성
이 고약한지 그게 아닌 것이다. 그래서 어부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화장사(지장사)에 넘겼다고
하며 그 이후부터 비로소 잘 먹고 잘살았다고 한다.
이 전설을 통해 절이 파괴되거나 도난, 배 침몰 등으로 강에 버려진 불상을 수습해왔음을 알
수 있는데 그의 고향은 현재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고향을 잃은 이 철불은 높이 98cm로 얼굴은 동그랗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눈이 유난히 길고
가는데 보는 위치에 따라 날카롭게 보이기도 하며 머리는 꼽슬인 나발(螺髮)이다. 눈썹은 무
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졌으며, 굳게 다문 입에는 엷게나마 미소가 드리워져 환하게 웃음짓는
표정 같다.
어깨는 꽤 단련을 한 듯 당당하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법
의(法衣)는 주름선이 선명하다. 또한 왼손에는 약합이 들려져 있어 그가 약사여래불임을 알려
주고 있으며, 고려 초에 조성된 몇 안되는 철조약사여래불로 그 당시 약사여래 신앙에 중요한
자료로 판단되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철불 뒷쪽에 걸린 약사불도는 1906년에 봉감(奉鑑), 정운(禎雲), 긍법(肯法), 경조(敬照) 등
이 그린 것이다. 간략한 아미타존상의 형태와 음영법의 구사, 적색과 녹색의 탁한 색감이나
어두운 군청색을 많이 쓴 점, 불화의 횡적인 구도와 그림에 나타난 상을 간략하게 나타낸 점
등,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철불 좌우에는 조그만 금동불(金銅佛)이 각자의 작은 공간을 지니며 빼곡히 들어앉아 철불을
받쳐주며 건물 내부를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 이들은 중생들의 돈과 소망을 담아 만든 원불(
願佛)로 약 400기 정도 된다.


▲  능인보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호

능인보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도는 약사불도와 같은 시기(1906년)에 같은 화승이 그렸다. 그
림은 수평 3단의 정연한 구도를 보이며, 범천(梵天), 제석(帝釋), 위태천(韋太天) 등 신중탱
의 대표적인 존재들이 모두 묘사되어 있다. 균형이 잡히지 않은 인체나 경직된 자세, 무겁고
탁한 색채 등은 전체적으로 불화의 품격이 떨어지던 20세기 초에 많이 나타난다.


▲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7호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 등 14명의 화승이 그린 것으로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권속들을 계
단식으로 배치했고 화폭 상단으로 갈수록 존상을 작게 묘사하여 원근법의 효과를 살렸다. 원
만한 인물의 형태는 18세기 후반 양식이지만, 오색 광선으로 표현된 광배와 도식(圖式)적인
천의, 단조로운 구름의 묘사는 19세기 불화 양식을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많이 변색되긴 했으
나 일부 적색과 녹색은 비교적 밝게 채색되었다. (지장시왕도의 봉안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호국범종이 봉안된 범종각(梵鍾閣)
범종각은 1975년에 지어진 것으로 저 안에 같
은 해에 조성된 범종이 담겨져 있다. 국립현충
원과 절의 이름에 걸맞게 그 종을 호국범종이
라 부르며 애지중지한다.

     ◀  고색의 무게가 짙어보이는 돌판
대웅전 옆구리에는 고색이 자욱한 네모난 돌판
이 놓여져 호기심을 자극시킨다.
그의 피부에는 한문 여러 자가 새겨져 있는데,
눈이 침침해 제대로 확인은 못했다. 건물 주춧
돌이나 상석(床石)으로 여겨지나 정체가 아리
송하며, 돌판에 화분이 여럿 놓여져 그의 허전
한 머리를 달래주고 있다.


▲  멀리 경주에서 왔다는 3층석탑

범종각 옆에 자리한 이 석탑은 멀리 경주 남산(南山)에서 가져온 신라 후기 석탑이라고 한다.
이승만 시절에 국립묘지를 조성하면서 강제로 소환해 경상도를 상징하는 탑으로 삼았다고 하
는데,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버려진 것을 지장사에서 수습해 보수를 했다.
지장사에서 가장 늙은 존재라고는 하나 겉모습은 완전 20세기 석탑 같으며, 지붕돌과 석재 일
부에만 오래된 티가 보일 뿐, 머리장식과 탑신(塔身) 상당수는 지장사에서 새로 손질을 하여
늙은 돌과 새 돌이 서로 어색한 조화를 보이고 있다.

그는 현충일 기념으로 소원지를 가득 머금고 있는데, 그 앞 탁자에는 소원지와 볼펜, 조그만
불전함이 깨알처럼 놓여져 있다. 탑과 주변 줄에 달아놓은 소원지는 나중에 불에 태워버리는
데 그래야만 소원지에 쓰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과연 얼마나 이루어졌을까??)


▲  지장전(지장보살입상)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산신과 독성, 칠성 등 삼성(三聖)의 공간으로 1칸짜리 팔작지붕 집이다.

▲  칠성도(七星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호)와 석가여래상

삼성각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는 석가여래상은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동그랗게 표현된 풍만한
가슴과 가슴선이 제법 눈길을 부여잡는다. 그의 두툼한 얼굴에는 미소가 살짝 깃들여져 있고
물레방아처럼 생긴 법륜(法輪)을 왼손에 소중히 쥐고 있는데, 법륜의 8개의 바퀴살은 팔정도
(八正道)를 나타내며, 동그란 모양은 부처의 가르침인 담마(蕁麻)가 완전하다는 것을 뜻한다
고 한다.

그런 석가여래상 뒤에 자리한 칠성도는 1906년 보암긍법(普庵肯法)이 그린 것이다. 화면은 화
폭의 좌우대칭으로 권속들을 배치하고 상하 2단으로 나눈 수평 구조로 경직된 형태와 선, 탁
한 색채 등은 20세기 초 불화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독성도(獨聖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호)와 독성상(獨聖像)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은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한이다. 승려 비슷한 복장으
로 앉아있는 모습이 안방 마님처럼 편안해 보이는데 머리털이 없어 허전하기만 한 그의 머리
에는 혹 같은 것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독성상 뒤쪽에 깃든 독성도는 소나무 밑에서 바위에 기댄 채 동자(童子)의 공양을 받고 있는
독성 할배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전형적인 19세기 독성도로 폭포와 나무, 꽃 등의 표현이나
늘어진 옷자락의 묘사는 다소 서투르나 독특한 자세와 온화한 얼굴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그
리고 그림의 깊이를 살려준 투명한 광배의 표현 등이 눈길을 끈다.


▲  산신도(山神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호)와 산신상

길쭉한 흰 수염을 지닌 산신 할배는 왼손에 붉은 지팡이를 들고 오른손으로 그의 애완동물인
호랑이를 쓱쓱 쓰다듬고 있다. 호랑이가 아무리 무섭다한들 산신 앞에서는 그저 꼬랑지를 살
랑거리는 고양이에 불과하며, 산신 옆에 있는 동자는 무척 앳돼 보여 마치 할배와 손자처럼
다정해 보인다.

산신상 뒤에 걸린 산신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가 그렸다. 민화(民畵, 속화)풍의 나무
와 폭포, 호랑이의 모습은 19세기 말 산신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원색적이고 장식적인
당시의 산신도와는 달리 은은한 중간 색조를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위엄과 격이 담긴
산신의 얼굴 묘사도 제법 돋보인다고 한다.


 

♠  호국지장사 마무리 (지장전, 대웅전 등)

▲  밑에서 바라본 지장전(地藏殿)

지장사의 백미(白眉)이자 최대 명물은 경내 뒤쪽에 자리한 지장보살입상과 3,000좌에 달하는
조그만 지장보살상의 장대한 물결일 것이다.
절에서는 이곳을 지장전으로 삼아 각별히 챙기고 있는데, 비록 건물은 아니나 석불이나 마애
불을 두고 각(閣)이나 전(殿)을 칭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많다. 능인보전과 삼성각, 대웅전 등
에 깃든 문화유산도 중요하지만 지장사의 성격을 분명히 밝혀주는 존재가 바로 이곳 지장전이
다.

지장전은 1983년 주지 혜성이 현충원 호국신들이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극락왕생이 되도록 기
원하고자 조성한 것으로 지장사의 최대 프로젝트였다. 육환장(六環杖)이란 긴 지팡이를 들며
온화한 표정으로 현충원을 굽어보는 지장보살의 뒷통수에는 동그란 두광(頭光)이 그를 빛내주
는데 마치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햇님 같다. 그 뒤에는 그를 멀리서 둘러싸듯, 거대한 석벽을
병풍처럼 만들고 조그만 지장보살을 가득 입혀놓아 장관을 이룬다.


▲  극락전에서 바라본 지장전의 위엄

▲  지장보살상 좌우에 있던 5층석탑들

연꽃이 새겨진 기단(基壇)을 지닌 이들은 고색의 때가 다소 묻어나 보이는데, 그들에 대한 정
보가 딱히 없다. 탑의 생김새로 봤을 때는 왜정(倭政) 때나 20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
겨지며 좌측 탑의 1층 탑신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이들은 현재 능인보전 주변으로
옮겨짐)

  ◀  지장전 우측에 자리한 극락전(極樂殿)
예전에는 1칸짜리 팔작지붕 집이었으나 근래에
1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새로 갈았다. 아미타
불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후불탱 등
이 봉안되어 있으며, 대웅전 목조여래좌상 뱃
속에서 나온 옷의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다.


▲  극락전에 있는 심초록 주 겹저고리

이 겹저고리는 2006년 5월 대웅전 목조여래좌상을 개금하던 중에 그의 뱃속에서 나왔다. 하여
문화재위원의 점검과 자문을 구해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에 보존처리와 보관을 의뢰했다.
1630~1650년 사이에 지어진 옷으로 여겨지는데, 색상이 보존된 몇 안되는 옷으로 원형 훼손을
막고자 유물 보수를 생략하고 펼친 상태로 오동나무 상자에 보관을 했으며, 불교중앙박물관에
보관을 맡기고 그 모조품을 극락전에 두었다. 가짜란 말에 설레던 마음이 90%는 날라가 버렸
으나 그래도 이번에 새로 인연을 지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아야겠다.


▲  큼직한 맞배지붕을 지닌 대웅전(大雄殿)과 앞뜨락
대웅전 뜨락 주변에는 종무소(宗務所)와 심우당(尋牛堂)이 있고, 대웅전
뒤쪽에는 청심당과 공양간, 요사가 있다.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8호

지장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맞배지붕 집으로 보통은 정면이 더 크지만 이 건물은 반대로
측면이 더 넓다. 2016년에 건물과 지붕, 내부를 손질하여 조금 젊어졌으며, 근래에 또 손질을
했는데, 제법 너른 대웅전에는 목조여래3존상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에 그려진 탱화들이 여럿
걸려있다. <호국지장사는 지방문화재 탱화와 탑의 위치를 자주 옮김>

법당의 필수 그림인 신중도는 인도의 토속신(土俗神)으로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된 호법신(護
法神)의 무리를 여백도 허용치 않고 꾸역꾸역 집어넣은 탱화이다.
1893년 금호약효, 정련(定鍊) 등이 그린 것으로 위태천과 범천, 제석을 중심으로 비교적 많은
이들을 담았는데, 좌우 대칭구도와 위태천과 제석 등이 이루는 역삼각형 구도가 다소 어수선
해 보인다. 특히 천녀(天女)들이 20여 종에 달하는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은 본그림의 백미라
할만하다. 인체를 불균형하게 표현한 점과 과장된 안면의 묘사 등이 19세기 불화의 특징을 보
이는 작품으로 비록 색이 좀 퇴색되긴 했으나 조화로운 색채 구성으로 그림의 품격을 높였다.


▲  대웅전 목조여래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26호)과 그 뒷쪽에
자리한 아미타불도(阿彌陀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4호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여래좌상(가운데 금동불)은 좌우로 승려 머리의 지장보살상과 화려한 보
관(寶冠)을 눌러쓴 관세음보살상을 거느리고 있다. 그는 지장사에서 보유하고 있는 10여 점의
지방문화재 중 가장 최근(2018년 8월)에 지정된 것으로 2006년에 그의 뱃속에서 후령통과 저
고리 등이 나왔다.
후령통은 1639년에 조성된 예산 수덕사(修德寺) 목조석가여래3불좌상 뱃속에서 나온 은제(銀
製) 후령통과 많이 비슷해 1639년 전후 것으로 여겨지며, 불상 또한 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목조여래좌상 뒷쪽에 자리한 아미타불도는 1870년에 원명긍우(圓明肯祐), 경은계윤(慶隱戒允)
등 4명의 화승이 그린 것으로 중앙에 아미타불을 두고, 양 옆구리에 그의 식구를 배치했는데,
형태가 풍만하고 정교하며 무늬가 화려하다. 5가지 색깔의 광배(光背)가 눈길을 끌며 옷의 묘
사가 도식화되어 있다. 적색과 녹색 색상은 다소 탁하며 코발트 빛깔의 짙은 청색은 19세기
말 불화 양식을 잘 보여준다.
그는 대웅전 식구이나 한때 능인보전에 가 있기도 했으며, 다시 대웅전으로 돌아왔다. 즉 목
조여래좌상이 탱화갈이를 한 것이다.


▲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6호

감로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 등 3명의 화승이 그렸다. 그림은 상부에 아미타여래 일
행이 지옥에서 온 중생을 맞이하러 가는 장면을 그렸고 중앙에는 성반의식(聖盤儀式,
우란분
경에서 7월 15일 승려 및 십방제불에게 백미를 올리고 발원하는 의식)
을 하는 모습을, 그 주
변에는 아귀(餓鬼)의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하단부에는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들로 가득한 지옥과 현실의 모습을 그렸는데, 7여래
의 장엄하면서도 원만한 얼굴과 옆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 성반의식을 치르는 승려의 모습과
산수의 표현 등은 19세기 초의 양식을 잘 보여주며, 나뭇잎 선의 처리와 산수의 음영처리 등
에서 19세기 말 불화양식이 잘 드러나고 있다.


▲  팔상도(八相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0호

팔상도는 부처의 일대기를 8개의 장면으로 그린 것으로 1893년 한곡돈법(漢谷頓法)이 그렸다.
이곳 팔상도는 부처의 생애 중 가장 극적인 장면을 묘사했으며 형식적인 형태와 탁한 색조는
19세기 말 불화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5호

극락9품도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16관 중의 제14, 15, 16관에 해당되는 9품의 극락왕생
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은 1893년 금호약효 등 3명이 그린 것으로 대구 동화사(桐華寺)의 부속암자인 염불암(
念佛庵)의 극락구품도와 같은 원본을 보고 그린 것이다. 등장 인물의 얼굴 이목구비를 섬약하
게 표현하여 조선 후기 극락구품도의 독특한 유형을 보여주며, 음영의 표현이나 적색과 녹색
의 대비, 화려한 꽃무늬 등은 19세기 불화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  대웅전 앞에 차려진 아기부처상 세트

대웅전 앞에는 거하게 아기부처상 세트를 깔아놓았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아기부처상과 석
조는 연못 부근 옛 샘터에 있던 것으로 대웅전을 손질하면서 그 앞으로 가져왔는데, 임시로
만든 것이 아닌 돌로 단단하게 다진 것들이다. 하여 1년에 대부분을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지
내야 되는 다른 아기부처상과 달리 365일 햇살을 보고 있으며, 매일 관불의식이 가능하다.


▲  수풀 속에 묻힌 지장사 석조 안내문 (1972년 6월 작)

이 석조 안내문에서는 고려 공민왕 때 보인대사가 창건했다고 지장사(화장사) 스스로가 실토
하고 있다. 그러니 도선대사 창건설은 의미가 없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어쩌다가 도선대사
창건설까지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서기 연도(年度)를 쓰기가 참으로 싫었을까? 20세
기 한복판에 640여 년 전이라니, 게다가 강희 2년이니 동치(同治) 원년이니 하는 구닥다리 표
현까지 쓰고 있어 다시 한번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  청심당(淸心堂)

대웅전 뒷쪽이자 경내 북쪽에 자리한 청심당은 2016년에 지어진 한옥으로 요사(寮舍)와 선방
(禪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앞에는 공양간으로 쓰이는 햐얀 피부의 건물이 있는데, 현충
일과 석가탄신일 공양은 여기서 섭취하면 된다. 

이번 나들이에서 현왕도(現王圖)와 괘불을 놓쳤는데, 현왕도는 공양간 건물에 종종 출현하니
그 건물을 살펴보면 된다. 단 괘불은 친견하기가 무척 까다로운 존재라 어지간하면 마음을 비
우기 바란다. 석가탄신일 등 일부 날에만 잠깐씩 외출을 나오기 때문이다. (나도 아직 친견하
지 못했음)


▲  청심당에 걸린 화장사 현판의 위엄

▲  지장사와 국립현충원을 뒤로하며 (상도출입문 방면 숲길)
이렇게 하여 현충일 기념 국립서울현충원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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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6월 12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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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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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삼각산) 형제봉능선, 일선사, 영취사, 정릉계곡 나들이 (형제봉, 보현봉, 청수천약수)

북한산 형제봉능선, 일선사, 영취사



' 북한산 형제봉능선, 일선사, 영취사 봄나들이 ~~~ '

북한산 일선사에서 바라본 서울
▲  일선사에서 바라본 형제봉능선과 서울시내

영취사 5층석탑

형제봉 능선에서 바라본 보현봉

▲  영취사 5층석탑

▲  형제봉능선과 보현봉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을 하루 앞둔 어느 평화로운 봄날, 북한산(삼
각산) 형제봉능선 밑에 깃든 영취사를 찾았다. 영취사는 북한산성 대성문에서 정릉으
로 내려오면서 여러 번 거쳐간 인연이 있는데, 그곳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늙은 5층
석탑이 있다. 허나 그를 제대로 사진에 담은 적이 없어 이렇게 출동한 것이다.

북한산(삼각산) 기점의 하나인 정릉(貞陵) 코스는 어렸을 때부터 익혀온 길이라 이쪽
은 아주 잘 안다고 자부를 했었는데, 시작부터 길을 잘못 들어서 아주 초보적인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날이 초파일 직전이라 절까지 연등이 대롱대롱 달려있기 마련인데,
내가 빠진 길(정릉계곡~신성천약수터 방면)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하지만 약간의 의심만 했을 뿐, '조금만 가면 영취사로 가는 길이 나오겠지' 싶은 안
일한 생각으로 계속 고집을 부리니 신성천약수터와 이상한 능선길이 나온다. 이거 왠
능선인가? 싶어 살펴보니 글쎄 형제봉능선으로 이어지는 길이 아니던가. 길을 완전히
잘못 들어선 것이다.
허나 형제봉능선에서 영취사나 정릉계곡으로 바로 빠지는 길은 헝클어진 수준의 비법
정길 외에는 없어 일선사입구까지 강제 등산을 해야 된다. 거기까지는 가야 영취사로
가는 법정 탐방로가 나온다. 하여 일정에도 없던 일선사(해발 560m)까지 강제로 덤으
로 보고 영취사로 내려가 5층석탑을 친견한 다음 정릉으로 원점 회기했다. 간단히 영
취사만 보려고 출동한 것이 잠깐의 실수로 아주 파란만장한 북한산 등산이 되버린 것
이다.


▲  두 암벽 사이를 비집고 흐르는 북한산 정릉계곡 하류
(정릉탐방지원센터 서쪽)



 

♠  뜻밖에 인연들, 형제봉능선을 거쳐 일선사까지

▲  정릉계곡 하류에서 형제봉능선으로 인도하는 숲길

정릉 코스는 북한산(삼각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주요 기점의 하나로 도심과 매우 가깝고 교통
편 또한 착하여 이곳을 이용하는 등산/나들이 수요가 상당하다. 정릉동 북한산국립공원 종점(
110, 143, 162, 1020, 1113번 종점)에서 4~5분 정도 가면 정릉탐방지원센터가 마중을 하는데,
여기서부터 풍경은 180도 바뀌어 대자연의 공간으로 전환된다.
정릉계곡을 옆에 끼고 5~6분을 더 들어가면 다리 직전에 3거리가 있는데, 여기서 다리를 건너
면 정릉계곡 상류와 북한산성 보국문, 영취사로  이어지며, 서쪽 길은 형제봉능선으로 빠진다
. 허나 오랜만에 정릉 코스를 찾은 탓일까? 아니면 1살을 먹은 휴유증 때문일까? 판단을 잘못
하여 그만 서쪽 길로 빠지고 말았다. (여기서 다리를 건너 더 들어가야 영취사로 가는 산길이
나옴)
아무리 아는 길이라도 돌다리를 꼭 두들겨 패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뒷탈이 없는데, 자만 때
문에 뜻하지 않은 강제 고행의 길을 밟게 되었다.


▲  형제봉능선으로 이어지는 숲길

▲  빨간줄이 그어진 신성천(新盛泉) 약수터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숲이 매우 짙다. 게다가 사람도 별로 없어 고적하기만 하다. 초
파일 연등이 걸려있지 않아 이상하게 여겼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길을 임하니 완전히 숲
속에 묻힌 신성천약수터가 마중한다.
내 데이터에는 전혀 없는 곳이라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이라도 한 모금 축낼까 했더니 안내문
에 빨간색 줄 2개(부적합 판정)이 매정하게 그어져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고 있다. 게다
가 봄가뭄으로 인해 걸려있는 바가지들이 무색할 정도로 물까지 말라버려 목도 축이지 못하고
바로 길을 재촉했다.


▲  형제봉 부근에서 바라본 보현봉(普賢峰)
보현봉 밑에 일선사가 자리해 있고 봉우리 너머에 북한산성이 숨어 있다.


신성천약수터에서 5~6분 정도 오르면 낯설은 능선길에 이른다. '여기는 도대체 뭔가?' 두리번
거리며 상황을 파악하니 뜻밖에도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아니던가. 그 길을 20여 분 오
르면 형제봉 밑도리에 이르게 되고 그 북쪽(형제봉3거리)에서 형제봉능선에 합류하게 된다.

형제봉(兄弟峰)은 평창동(平倉洞) 동쪽에 우뚝 솟은 북한산(삼각산) 남쪽 봉우리로 큰 형제봉
463m)과 작은 형제봉(461m)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모습이 마치 형제처럼 다정하게 보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 남북으로 이어진 능선을 형제봉능선이라 부른다. 이 능선은 종로
구와 성북구(城北區)의 경계선 역할도 하고 있으며, 동서로 조망이 펼쳐져 썩 괜찮은 산길로
추앙을 받는다. 그 조망의 끝판왕은 보현봉 밑에 자리한 일선사이다.


▲  형제봉 부근에서 바라본 칼바위능선
사진 가운데에 바위가 짙게 깔린 곳이 칼바위로 북한산에서 이름난
바위 능선길이다.

▲  형제봉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①
산 밑에 정릉동과 길음동을 비롯하여 성북구, 강북구, 중랑구, 동대문구,
불암산, 아차산~용마산, 구리시 등이 바라보인다.

▲  형제봉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②
성북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동대문구, 아차산 산줄기, 강동구,
구리 지역


형제봉 능선에서 나의 목적지인 영취사로 가려면 천상 일선사입구까지 가야된다. 중간에 동쪽
으로 내려가는 헝클어진 수준의 비법정 탐방로와 비밀 샛길이 일루 오라며 유혹을 건네나 그
길의 속내를 알 수가 없고 괜히 조금이라도 빨리 가겠다고 금지된 그 길로 발을 들였다가 길
이 더 꼬일 수 있다.

형제봉 능선길은 부드러움과 각박함 2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각박하다고 하여 그렇게 절망
적인 길은 아니며 이 땅에 흔한 초급 능선길이다. 형제봉 북쪽에서 잠시 내리막길이 이어지다
가 다시 오르막길이 몇 배 이상으로 펼쳐지며, 일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느긋한 수준이다.


▲  푸른 옷을 두텁게 두른 형제봉(463m)
형제봉 정상은 접근이 가능하다. 허나 시간 관계상 다음으로 미루고 통과했다.

▲  계단을 이루고 있는 형제봉 북쪽 능선길
능선 북쪽에 일선사가 자리해 있어서 평창동(동령폭포) 갈림길 이후부터는
길이 괜찮게 닦여져 있다.

▲  숲터널을 이루며 넓게 닦여진 형제봉 북쪽 능선길
숲의 등등한 기세에 뜨거운 햇살도 슬금슬금 눈치를 본다.

▲  일선사 입구

마치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발에 불이 나도록 속도를 내며 오르니 어느덧 일선사입구에 이
르렀다. 여기서 왼쪽 길은 일선사로 이어지고, 오른쪽은 대성문 방면으로 그 길을 조금 가면
바로 오른쪽에 영취사, 정릉으로 내려가는 정식 탐방로가 있다.
여기서 '일선사를 보고 가는가? 그냥 통과하는가?'를 두고 잠시 갈등을 하였다. 아무리 햇님
의 근무 시간이 길어졌다고 하지만 시간은 벌써 17시가 넘었고, 일선사는 막연히 선학원 소속
의 현대 사찰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땡기지가 않았지. 허나 여기까지 올라온 이상 어
찌 생긴 절인지 잠깐 구경이나 하기로 했다.
여기서 일선사까지는 200m 거리, 그 산길의 끝에는 일선사가 일품 조망을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인공티가 너무 거슬리는 대성문 방면 산길 (일선사입구에서 대성문 방면)
산길의 야성을 순화시키고자 인공티를 너무 과하게 넣은 것 같다. 죽도록 힘든
 구간이 아닌 이상은 흙길로 그냥 두는 것이 진정한 산길이 아닐까 싶다.


▲  일선사입구에서 일선사로 인도하는 산길
오색연등만 따라가면 별탈 없이 일선사에 이른다.



 

♠  서울에 있는 사찰 가운데 가장 조망이 우수한 절집, 절은 작지만
대도시 서울을 앞뜰로 삼은 ~ 북한산 일선사(一禪寺)


▲  일선사 대웅전(大雄殿)

일선사는 보현봉(普賢峰) 동쪽 밑 560m 고지에 둥지를 튼 고적한 산사(山寺)이다. 첩첩한 산
주름에 묻힌 진정한 산사로 시내와도 멀리 거리를 둔 산속이라 제아무리 찰거머리 번뇌라도
감히 따라오지 못한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평창동 평창공원지킴터에서도 1시간 이상을 올라
가야 되며 정릉동 종점에서도 비슷한 시간을 내던져야 이를 수 있으니 이곳에 궁벽한 위치를
알만하다.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일선사는 북쪽과 서쪽은 보현봉으로 막혀있어 가파른 벼랑을 이루
고 있고, 남쪽은 낭떠러지에 가까우며, 오로지 동쪽에 바깥 세상과 이어지는 외줄 산길이 있
다. 절은 위치상 도심이 보이는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규모는 비록 작지만 조망(眺望) 하나
는 천하 일품이며,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자연히 앞뜰로 삼고 있어 뜨락
또한 기가 막히게 넓다.
특히 서울 사찰 중 조망 맛집 1위를 거머쥔 산사로 가까이에 평창동과 북악산(北岳山, 백악산
)을 비롯하여 종로구, 중구, 성북구, 동대문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기, 강동/송파구, 강남/
서초구, 동작/관악구, 금천구, 영등포구, 마포구, 관악산~삼성산, 우면산, 대모산 산줄기, 남
한산성까지 아낌없이 시야에 잡힌다. 절과 방향이 다른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은평구, 서
대문구, 강서구, 양천구 등을 제외하면 서울의 상당수가 일선사에 몸을 보이는 셈이다.
그럼 조망 맛집 2위 사찰은 어딜까? 그곳은 400m 고지에 자리한 도봉산 원통사(圓通寺)로 도
봉구, 강북구, 노원구, 성북구, 동대문구, 중랑구, 아차산 산줄기 등이 시야에 들어오며, 조
망 맛집 3위 사찰은 310m 고지에 자리한 호암산 불영암(佛影庵)으로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
구, 광명시, 인천 지역 등이 바라보인다. (1~3위는 그곳을 다녀간 경험을 바탕으로 순위를 매
김)

일선사는 조망도 좋은 만큼 구름과 가까운 곳에 자리해 있어 서울 사찰 중 3번째로 하늘과 가
깝다. 제일 하늘과 맞닿은 절은 북한산 문수사(文殊寺)로 해발 640m에 자리해 있지만 조망은
조망 1~3위 절보다는 못하며, 2위는 도봉산 관음암(觀音庵)으로 해발 560~570m 고지이다. 그
다음이 이곳 일선사가 되겠다. 해발고도와 조망 부분에서 가히 서울 사찰 으뜸의 자리를 차지
하고 있는 일선사는 언제부터 법등(法燈)을 켰을까?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일선사는 그저 현대 사찰로만 알고 있었다. 허나 내 생각과 달리 나이
를 제법 먹은 절이라고 한다. 절에서 들려주는 창건 설화에 따르면 신라 후기에 도선국사(道
詵國師)가 보현봉 밑 보현굴(다라니굴)에 창건하여 보현사(普賢寺)라 하니 그것이 일선사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허나 관련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는 실정이라 그저 믿거나 말거나 수준이
다.
창건 이후 탄연(坦然)이 절을 중창했다고 하나 이 역시 신뢰도는 없으며, 태조 이성계(李成桂
)가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우면서 서울(한양)로 콩 볶듯이 도읍을 옮기자 무학대사(無學大
師)가 보현사를 두고 서울을 지키는 중요한 터로 격하게 띄워주면서 태조의 명으로 중수했다
고 한다.
서울이 조선의 도읍이 된 이후, 서울 주변에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절(호압사, 개운
사, 사자암 등)이 많이 생겨났는데, 일선사도 그때 지어진 절이 아닐까 짐작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옛날의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1600년 이후 서울을 지키
는 외곽 수호사찰로 인정되어 왕명으로 중창했다고 하며, 이후로 300년 이상 뚜렷한 발자국이
전하지 않아 조그만 석굴 암자 규모로 터를 유지하거나 얼마 가지 않아서 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40년에 이르러 절의 화주(化主)인 김만신행이 원래 보현굴 자리에서 300m 정도 떨어진
지금의 자리에 절을 옮기고 절 이름을 관음사(觀音寺)로 갈았는데, 이를 통해 왜정 때 작게나
마 절이 있었음을 살짝 귀뜀해 준다.
 
1957년 시인 고은<高銀, 법명 일초(一超)>)이 이곳에 머물며 절 이름을 도선대사의 '선'. 자
신의 법명인 일초의 '일'을 따서 일선사(一詵寺)로 갈았으며, 1962년 재단법인 선학원의 일원
이 되면서 가운데 한자만 바꾸어 지금의 일선사(一禪寺)가 되었다. 그리고 1966년 정덕(幀德)
이 주지로 들어와 30년 동안 불사(佛事)를 일으켜 지금의 일선사를 이룩했다.
그는 1994년에 옛 법당을 밀어버리고 대웅전과 약사전, 요사를 새로 짓거나 증축했다. 그리고
많은 탱화와 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했으며, 절로 이어지는 길을 정비했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약사전, 요사 등 3~4동의 건물이 있으며, 절의 역사가 오래되었다
고는 하나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산산히 사라져 고색의 유물은 없는 실정이다. 다만
조망은 가히 일품이라 그것으로 절의 부족한 부분이 많이 커버된다. 특히 대웅전은 어느 절
법당(法堂)에 못지 않은 큰 규모라 내심 놀랬다.
원래 절 자리에는 보현굴(다라니굴)이란 석굴이 있는데, 조선 초에 활약했던 기화함허(己和涵
虛)를 비롯해 많은 승려가 그곳의 신세를 졌다고 한다. 현재 절 자리는 1940년 이후이니 일선
사의 과거를 들추려면 보현굴 주변을 뒤집는 수 밖에는 없다.


▲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부처상
초파일을 맞이하여 미리 밖으로 나와 오랜만에 광합성 작용을 받고 있다.

▲  대웅전 석가여래3존상 (석가여래와 문수보살, 보현보살)

대웅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면 앞이 협
소하여 그나마 조금 트인 측면(동쪽)에 대웅전 현판과 출입문을 내어 좁은 측면을 정면으로
삼고 있는데, 건물 내부에는 20세기 후반에 조성된 석가여래3존상을 위시하여 칠성탱과 중생
들의 소망을 머금은 조그만 원불(願佛)이 가득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칠성탱(七星幀)

▲  대웅전 뒷쪽에 자리한 약사전(藥師殿)

대웅전 뒷쪽이자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약사전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하얀 피부의 작은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을 중심으로 풍만하게 생긴 금동관세음보살상,
산신(山神) 가족이 담겨진 산신탱 등이 들어있는데, 이들은 20세기 후반에 마련된 것으로 보
통 산사에는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등 삼성(三聖)의 보금자리를 따로 두기 마
련이나 일선사는 자리가 협소하여 약사전과 대웅전에 나누어 배치했다.

▲  약사전 약사여래불과 약사후불탱,
관세음보살상

▲  산신 가족의 단란한 가족 사진
산신탱(山神幀)


▲  일선사에서 바라본 천하 ①
종로구, 성북구, 동대문구, 중랑구, 광진구, 성동구, 송파/강동구 등


요사(寮舍) 동쪽에는 물통과 의자 등이 있는 쉼터가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이곳은 조망
이 아주 좋은 자리로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이 나의 발 밑에 펼쳐져 올망졸
망 펼쳐져 있어 잠시나마 천하의 주인이 된 듯 즐거운 기분이 든다. 이런 것이 바로 산을 타
는 재미의 하나이지. 허나 현실은 저 너른 땅에서 내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땅은 나의
작은 집 외에는 단 한 뼘도 없다는 것. 그것이 뼈저린 함정이다.


▲  일선사에서 바라본 천하 ②
사진 중앙에 보이는 산이 내가 거쳐갔던 형제봉이다. 그 너머 길쭉한 산줄기는
북악산(백악산)이며, 그 너머로 종로구, 중구, 남산, 성북구, 성동구,
강남/서초구, 대모산, 관악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  일선사에서 바라본 천하 ③
형제봉과 북악산을 중심으로 인왕산, 종로구, 중구, 서대문구, 마포구,
강남/서초구, 동작/관악구, 관악산, 호암산이 바라보인다.


일선사는 하루 앞으로 다가온 초파일 준비로 승려와 보살 아줌마들이 꽤 부산했다. 낼 중생들
에게 제공할 공양밥과 국을 큰 솥에 미리 만들고 있었는데, 이곳 공양밥 맛이 제법 좋다고 한
다. 초파일 외에 동짓날에는 팥죽을 제공하며, 일요일 점심 시간(12~13시)에도 공양을 제공한
다고 하니 그때 이곳을 지날 일이 있다면 잠시 들려서 한 그릇 들고 가는 것도 좋다.

일선사에서 보현봉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으나 비법정으로 묶여서 금지된 산길이 되었다. 그래
서 이제는 완전 막다른 곳이 되어 천상 왔던 길로 돌아나가야 된다. 그렇다고 금지된 길을 무
리해서 가지는 말도록.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유명한 말도 있고, 괜한 모험에 인생을 거는 것
만큼 무모한 것은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산6-1 (평창6길 79-141 ☎ 02-379-8697)


▲  일선사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산길 (일선사입구 방면)



 

♠  늙은 석탑을 지닌 깊은 산골의 절집, 북한산 영취사(靈鷲寺)

▲  영취사 5층석탑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0호

일선사에서 20분 정도 머물다가 다시 입구로 내려갔다. 여기서 정릉 방면 산길로 접어들어 원
래 목적지인 영취사로 내려갔는데 그 길이 속세살이만큼이나 제법 각박한 경사였다. 다행히도
내려가는 길이라 덜 힘들지 만약 이 길로 올라왔다면 제대로 땀을 뺐을 것이다.
햇님의 퇴근 시간도 별로 남지 않았고 지나가는 산꾼도 없는 상태라 걸음을 몇 배로 재촉하여
미끄러지듯 10분을 내려가니 인기척 소리가 조금씩 들리면서 숲 사이로 영취사 지붕이 보인다.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듣는 인기척만큼 썩 반가운 것은 없지~! 그렇게 1굽이를 내려가니 영취
사에 이른다. 이 산길은 영취사 경내를 거쳐가기 때문에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무조건 절을
경유해야 된다.

경내에 이르니 이곳 역시 초파일 준비로 조금은 부산해 보였다. 사람들이 연등을 달거나 청소
를 하면서 내일을 준비하고 있었고 마침 18시가 넘은 상태라 밥 연기도 모락모락 피어올라 나
의 시장기를 자극시킨다. 영취사도 초파일과 동짓날, 그리고 일요일 점심에 산꾼과 중생들에
게 공양밥을 제공한다. 비빔밥 또는 국수를 주고 있는데, 혹여 저녁공양이라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새가슴 마냥 요사 주변을 기웃거려봤지만 결국 먹지는 못했다. 예전에는 공양
1그릇 먹고 가도 되냐고 막 들이밀고 그랬는데 나이를 먹으니 점점 소심해지는 것 같다.

해발 400m 고지에 둥지를 튼 영취사는 '절간답다'는 말이 아주 어울릴 정도로 고적한 산사이
다. 경내 주변이 죄다 숲이라 여기서는 하늘 밖에 보이지 않으며, 남쪽이 확 트여 형제봉능선
에서도 능히 바라보이는 일선사와 달리 숲에 푹 묻혀있어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 정도
로 심산유곡이다.
허나 일선사와 달리 등산로가 경내를 지나가 주말, 휴일에는 지나가는 이들이 많다. 등산로가
접한 경내 밑부분에는 쉼터와 5층석탑이 있고, 거기서 1단계 올라가면 요사가 있으며, 다시 1
단계 오르면 대웅전과 삼성각이 있다.


▲  우중층한 대석(臺石) 위에 자리한 영취사 5층석탑

내가 영취사를 간만에 찾은 것은 경내에 서린 늙은 5층석탑을 보고자 함이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이 석탑은 울퉁불퉁하게 생긴 커다란 대석 위에 작게 서 있는데 2중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얹히고 그 위를 연꽃무늬 석재로 마무리를 했다. 여기서 2중 기단과 5층
탑만 원래 것이고 나머지는 탑의 초라함을 달래고자 20세기 중반 이후에 새로 덧붙인 것들로
탑 자체는 아주 작은 수준이며 어쩌면 천하에서 가장 작은 석탑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원래 요사 앞에 기단부가 묻힌 상태로 있었다고 전한다. 문병대 박사가 직접 찾아와 그
를 평가하니 무려 고려 후기~조선 초기 석탑으로 밝혀졌다. 마침 서울에 토박이 석탑이 별로
없고 고려 말~조선 초기 탑이 매우 희귀하여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어 이곳의 듬직한 꿀단지
가 되었다.
이후 탑은 보다 넓은 지금의 위치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때 여러 장의 돌을 높이 쌓아 대석을
다진 다음 조그만 탑을 올려 키를 높였다. 탑의 왜소함을 극복하고자 대석을 쌓았지만 오히려
대석이 너무 지나치게 커서 탑이 더욱 작아 보인다.
기단은 2중으로 밑 기단은 조금 높으나 고된 세월의 상처가 남아있으며, 손상된 부분 사이에
는 잡석을 끼웠다. 윗 기단은 밑 기단에 비해 높이가 약간 낮으며, 그 위에 5층 탑신을 올렸
는데, 윗층 옥개석(屋蓋石)과 연꽃무늬 석재는 새로 만든 것이다. 탑신은 1층만 달랑 남아있
고 윗층 탑신은 납작하여 무늬만 남은 실정인데, 가장자리에 희미하게 우주(隅柱)가 새겨져
있으며, 1층 탑신 중앙에 감실(龕室) 같은 것이 뚫려 있어 불상을 봉안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옥개석은 두툼하나 장대한 세월이 무심히 할퀴고 간 흔적이 적지 않으며 머리 장식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모두 사라졌고 근래 만든 연꽃무늬 석재만 달랑 놓여있다.

기단부와 탑신의 구성법, 간략화된 옥개석 층급(層級) 표현 등을 통해 고려 후기~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서울에 몇 남지 않은 오래된 토박이 탑으로 가치가 인정되어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  동쪽에서 바라본 5층석탑 (기단과 탑신)

▲  북쪽에서 바라본 5층석탑

늙은 5층석탑을 지니고 있는 이곳 영취사는 1962년에 신정옥(申貞玉)이 세웠다. 그는 1928년
7월 14일 충남 예산군 신례원에서 독립운동가 신현상(申鉉商)의 딸로 태어났는데, 불명(佛名)
은 대지행(大智行), 호는 초일(草一)로 백범 김구(金九) 선생의 수양녀(收養女)이기도 했으며,
1947넌에 마곡사(麻谷寺)에서 칩거 수양을 했다.
1972년 영취사 법당을 중건하고 요사를 신축했으며, 계속 절을 살펴주어 경내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그의 남편은 강성진으로 삼보증권회장 및 대한증권업협
회장을 지냈으며, 자녀 또한 모두 사회에서 듬직한 지위를 누렸다.


▲  정면에서 바라본 5층석탑 (기단과 탑신)
중생들이 갖다놓은 작은 불상과 동자상들이 석탑에 기대어 앉아 그들만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고 있다.

▲  5층석탑 앞에 마련된 관불의식의 현장

5층석탑이 영취사의 유일한 보물이자 듬직한 꿀단지라 그 앞에 관불의식의 현장을 정성스럽게
닦아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은 초파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온갖 꽃으로 아름답게 치장된 의식
의 현장에 주인공인 아기부처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1년 만에 외출을 할 생각에 그도 마음이
너무 설레서 긴장이 된 모양이다. 

▲  영취사 요사 (선방, 공양간)

▲  대웅전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  아주 조촐한 모습의 용왕각(龍王閣)

▲  용왕각에 봉안된 용왕탱

5층석탑에서 대웅전을 향해 1단계 올라가면 오른쪽에는 선방(禪房)과 종무소, 공양간의 역할
을 도맡고 있는 요사가 있고, 왼쪽에는 장난감 집처럼 아주 조그만 용왕각이 있다. 바다와는
전혀 관련도 없는 이런 첩첩한 산골에 바다 용왕(龍王)의 거처인 용왕각이라...? 옛날에 이곳
이 바다였을까?
허나 용왕이라고 꼭 바다만 관리하라는 법은 없다. 그는 바다를 비롯해 천하의 모든 물을 관
리하는 존재라 물이 늘 풍족히 나오기를 바라는 뜻에서 그의 거처를 만들어 봉안한 것이다.
용왕각 옆에는 샘터가 있으나 물이 거의 없었고, 대신 요사 밑에 따로 샘터를 만들어 물을 제
공하고 있다.

▲  대웅전 - 기존 맞배지붕 건물에
1칸을 덧붙인 구조이다.

▲  삼성각(三聖閣) - 산신과 칠성,
독성(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서울
이곳도 결코 낮은 곳은 아니지만 삼삼한 숲의 방해로 겨우 일부만
시야에 들어온다.

▲  대웅전 앞에서 바라본 경내 (바로 밑 지붕이 요사)

▲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여래3존상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3존상을 이루고 있다. 후불탱이
그들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으며, 그 좌우로 신중탱 등 온갖 탱화들이
대웅전 내부를 환하게 비쳐준다.


경내 높은 곳에는 법당인 대웅전과 삼성각이 있다. 건물이 다들 조그만 수준으로 1974년 이후
에 중건을 하여 아직 고색의 때는 익지 못했는데, 대웅전 불단에는 벌써부터 갖다놓은 온갖
공양물로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이다.

* 영취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산1 (☎ 02-911-0005)


▲  대지행 신정옥 영취사 창건 공덕비
창건주 신정옥을 기리고자 절에서 정성을 다해 지은 공덕비이다.



 

♠  북한산(삼각산) 마무리

▲  한데 뭉쳐진 커다란 바위들 (영취사 남쪽)
바위의 모습이 썩 예사롭지가 않아 보여 예로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으로
절찬리에 쓰였던 듯 싶다. 대자연이 그어놓은 주름선들도 멋지고 말이다.


영취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벌써 18시 반이 넘었다. 나날이 길어지는 연장 근무에 입이 한참이
나 삐죽 나왔을 햇님 덕에 아직까지 환한 낮을 유지하고 있지만 산속이 도시보다 밤이 일찍
온다. 그래도 그날의 목적을 모두 이루었고, 거기에 일선사라는 강제 보너스도 받았으니 보람
찬 하루를 보낸 것 같다.

영취사를 뒤로 하고 정릉계곡을 따라 정릉 기점으로 내려갔다. 이제는 오로지 내려가기만 하
면 되는지라 힘든 것은 없으며, 영취사에서 조금 내려가면 삼봉사 입구가 나온다. 이곳은 딱
히 끌리는 것이 전혀 없는 현대 사찰이라 그냥 통과했다.


▲  속세로 인도하는 정릉계곡 산길 (삼봉사 입구 부근)

▲  계곡과 나란히 이어지는 산길 (삼봉사 입구 남쪽)

▲  가늘게 실타래를 풀어내는 작은 폭포 (폭포 이름은 없음)

▲  푸른 숲터널을 이루는 정릉계곡 산길

▲  마이산(馬耳山) 탑사 돌탑의 후예일까? 거대한 돌탑의 위엄
이곳을 오간 수많은 사람들이 소망 하나를 깃들여 돌을 얹혔고,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이렇게 세모 모양의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소망을 향한
중생들의 집념이 오랜 세월을 두고 그려놓은 탑이다.

▲  청수천약수<淸水川藥水, 청수천샘터, 청수약천(淸水藥泉)>

정릉계곡 중류 쯤에 이르면 북한산(삼각산)의 유명 약수의 하나라는 청수천샘터가 마중한다.
샘터의 이름인 '청수'는 정릉계곡의 별칭으로 '청수골','청수계곡'이라 불리기도 하며 계곡
하류에 있었던 유명한 고급 요리집 청수장(淸水莊)의 이름도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청수천샘터는 2개의 샘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왼쪽은 계곡 암반에서 나오고, 오른쪽은 바위
밑에서 나온다. 어느 것을 마셔도 상관없으며 그건 취향에 따라 고르면 된다. 나는 물 욕심
이 많아서 양쪽 물을 모두 마셔보았는데 딱히 특별한 맛은 없는 자연의 물맛 그대로이다.
이곳은 물이 풍부하여 물이 마를 날이 거의 없을 정도이며 관리도 썩 잘되어 있는 편이다. 샘
터 앞에는 의자, 정자 등의 쉼터가 베풀어져 있으며, 샘터 옆구리를 흐르는 계곡 풍경이 바위
와 어우러져 걸쭉한 멋을 자아내고 있다. 계곡 물도 티 하나 없이 맑고 수심도 얕아서 성하(
盛夏)의 한복판에 왔더라면 쿨하게 풍덩하고 싶지만 상수원 보호와 계곡 보호를 위해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여기서 계곡 종점(정릉 기점)까지 계속 금지된 계곡으로 묶여 있으니 괜히 발도 들이지 말기
바라며, 계곡에 정 들어가고 싶다면 청수천샘터 윗쪽으로 가야 된다. 그곳은 해방된 공간이나
계곡 풍경은 다소 별로이다.

▲  청수천약수 왼쪽 샘 (계곡 옆)

▲  보호각을 갖춘 청수천약수 오른쪽 샘


▲  청수천약수 곁을 흐르는 정릉계곡
청수천약수를 빚은 정릉계곡은 청정한 빛을 띄우며 속세로 흘러간다.
여기서부터는 접근이 금지된 계곡이니 들어갈 생각은 하지 말자~~!

▲  밑바닥이 훤히 보이는 청수천샘터 옆 계곡 (수심이 1자도 안됨)

▲  연등이 대롱대롱 길을 비추는 정릉계곡 산길 (청수천샘터 남쪽)

▲  정릉계곡 하류 산길 (보국문 갈림길 직전)

▲  암반들이 층층이 주름진 정릉계곡 하류
조그만 폭포들이 주름진 바위를 타고 속세로 신나게 흘러간다. 산행을 시작했던
정릉으로 다시 내려오니 시간은 19시. 이렇게 하여 초파일 전날
북한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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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 도심 사찰 나들이, 아차산 영화사 (영화사 느티나무, 영화사에서 먹은 공양밥)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아차산 영화사



' 석가탄신일 사찰 나들이, 아차산 영화사 '
연등으로 가득한 영화사 대웅전 뜨락
▲  하늘을 훔친 영화사 연등의 위엄 (대웅전 뜨락)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이 다가왔
다. 비록 불교 신자는 아니나 초파일 앓이가 대단하여 그날에 대한 설레감이 다른 날보
다 매우 크다. 하여 매년 거르지 않고 내가 서식하고 있는 서울 지역의 오래된 절과 문
화유산을 품은 현대 사찰을 중심으로 순례/답사를 내세운 절 투어를 벌이고 있다.

평소에도 많은 절을 찾고 있지만 그래도 1년에 오직 하루 뿐인 날이라 심쿵거리는(심장
이 쿵쿵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적당한 절을 찾아보았으나 이제 서울에 남
아있는 미답(未踏) 고찰(古刹)은 완전히 씨가 마른 상태, 하여 수도권으로 눈을 돌려보
았으나 멀리 나가기도 귀찮아 예전에 갔던 시내 절 중에서 사진에 담지 않은 곳을 골라
보니 아차산 영화사 등 여러 곳이 걸려들었다. 하여 그들을 이번 초파일의 주메뉴로 선
정하고 제일 먼저 아차산 영화사를 찾았다.



 

♠  아차산 영화사(永華寺) 입문

▲  영화사 일주문(一柱門)

아차산(峨嵯山) 남쪽 끝에 넓게 둥지를 튼 영화사는 서울 광진구와 중랑구 지역에서 가장 큰
절이다. 날이 날인지라 사람들로 아주 북새통을 이루어 천하 사람들이 거의 절에 모여든 기분
인데 영화사의 정문인 일주문을 들어서면 본격적인 영화사 경내가 펼쳐진다.
경내 또한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을 지경으로 허공에는 연등이 가득 매달려 초파일 분위기
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으며, 선불장 주변에서는 공양밥을 나눠주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밥
부터 먹고 싶었지만 우선 절을 둘러보고 먹기로 했다. 원래 핵심이 되는 것은 끝에 하는 법이
라고 하지 않던가? 초파일 절 투어는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영화사의 내력
을 간단히 살펴보자.

영화사는 672년에 그 유명한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용마봉(龍馬峰,
용마산) 밑에 절을 짓고 화양사(華陽寺)라 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이를 입증할 유물과 자료
는 전혀 없다. 게다가 그 시절 의상은 부석사(浮石寺)와 옥천사(玉泉寺, 경남 고성) 등 자신
이 키우던 화엄종(華嚴宗) 소속의 절 10개-이른바 화엄십찰(華嚴十刹)-를 짓고 관리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영화사는 그의 화엄십찰이 아님)
그러니 의상의 창건설은 한낱 부질없는 메아리이자 영화사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며 경내에 조
선 초에 조성된 미륵석불이 있어 고려 중기나 조선 초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용마산에 있던 시절, 절 등불이 무려 8km 이상 떨어진 한양도성까지 비쳤다고 한다. 그 정도
면 절이 어느 정도 규모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 등불이 궁성(宮城, 도성)까지 비추
는 것에 영 기분이 좋지 않던 조선 태조(이성계)는 명을 내려 1395년 절을 군자동(君子洞) 어
딘가로 강제 이전시켰다.
이후 중곡동(中谷洞) 산자락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07년 현 자리로 이전되어 영화사로 이름
을 갈았다. 1909년 도암(道庵)이 산신각과 독성각을 세웠으며 1992년 월주(月珠)가 중창하면
서 대웅전을 중수해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미륵전, 선불장, 요사채, 유치원 등 7~8동의 건
물이 있으며, 400년 묵은 느티나무와 하얀 피부의 늙은 미륵석불입상이 있다. 느티나무는 영
화사가 이곳에 둥지를 틀기 이전부터 있던 것이고 미륵석불입상은 중곡동에서 이곳으로 절을
옮길 때 힘들게 옮겨온 것이다.
그 외에 20세기 초에 조성된 독성탱과 산신탱이 전하며, 1909년에 지어진 삼성각이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이다. 허나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를 제외하면 아직 이렇다할 지정
문화재는 없는 실정이다.

절이 들어앉은 위치가 넓어 안정적인 느낌을 주며 학생들의 법회활동이 매우 활발해 제법 젊
은 절이다. 아차산 밑에 있기는 하나 아차산과 이어지는 산길은 절에서 모두 끊어버렸다. 하
여 절을 둘러보고 아차산으로 오르고 싶다면 일주문으로 다시 나와서 절 서쪽이나 동의초교
동쪽에서 산길을 이용해야 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 9 (영화사로 107, ☎ 02-444-4321)


▲  영화사 선불장(選佛場)
대웅전에 못지 않은 우람한 규모로 선방 및 요사의 역할을 하고 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장대한 규모의 영화사 대웅전(大雄殿)
1992년에 중건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  대웅전 석가3존상과 붉은 기와지붕이 켜켜이 이루어진 닫집

▲  오색연등이 새로운 하늘을 이루고 있는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오색 연등을 가득 달아놓아 마치 하늘이 움푹 낮
아진 기분이다. 옛날 이야기를 보면 태초(太初)에는 하늘과 땅이 붙어있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저 정도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 밑에 초파일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관불의식의 현장이 닦여
져 있고 초파일의 흥겨운 분위기를 누리려는 사람들로 꽤나 정신이 없다.


▲  오색연등이 영롱하게 허공을 뒤덮은 대웅전 뜨락
연등 구름 밑은 밤처럼 어둡고, 연등 위는 구름 위의 세상처럼 무척 환하다.

▲  아기부처의 관불(관정)의식 현장

대웅전 계단 앞에는 초파일을 맞이하여 아기 부처가 연분홍 연꽃대좌를 갖춘 코끼리를 타고 1
년 만에 외출을 나왔다. 그 긴 시간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무료하게 지냈던 터라 간만의 화색
이 돈 표정인데 중생들은 그의 머리에 물을 껴얹는 이른바 관불(灌佛)의식을 행하며 그의 생
일을 축하한다. 워낙 사람들이 많아서 정면에서 담지는 못하고 이렇게 측면에서 어설프게 사
진에 담았다.
아기부처 앞에는 불전함이 덩그러니 놓여져 애타게 중생들의 호주머니를 쳐다본다. 마치 오늘
날 돈으로 얼룩진 종교의 한 단면을 보여주듯이... 초파일 특수에 불전함은 거의 터져나갈 지
경이다. (반대로 내 주머니는 나날이 얇아지고 있음 ㅠ)


▲  영화사에서 제일 늙은 집,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옆에는 산신과 독성(나반존자), 칠성의 거처인 삼성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09년에 도암이 지은 경내에서 가장 늙은 집인데, 현판은 물론 겉모습까지
고색의 흔적이 자욱하여 이제 110여 년 되었건만 그보다 훨씬 늙어 보인다. 지방문화재의 자
격이 충분하여 서울시에 문화재 지정을 신청하면 100% 통과될 듯 싶은데 절에서는 아직 그럴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  매우 젊은 칠성탱

▲  20세기 초에 조성된 늙은 독성탱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산신탱은 독성탱과 비슷한 20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산신을 중심으로 그의 애완동물인 호랑
이와 어린 비서인 동자(童子), 그리고 산신(山神)의 활동무대인 산이 그려져 있다. 이곳이 아
차산 자락이니 저 산신은 자연히 아차산 산신이 될 것이다.
거의 고양이처럼 그려진 호랑이는 산신 뒤에 자리해 있는데 얼굴은 산신의 왼쪽, 꼬랑지는 오
른쪽에서 살랑살랑거린다. 탱화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간식과 음식, 과일, 술들이 상다리가
절단이 날 정도로 가득하여 초파일 특수를 제대로 누리고 있다.


▲  하얀 연등이 하늘을 훔친 삼성각 뜨락

죽은 영가(靈駕)들을 위한 하얀 연등이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며 푸른 하늘을 흑백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다보니 하얀 소복을 입은 귀신이 튀어나올 것처럼 우울한 느낌이다. 반면 대웅전
뜨락에는 오색 연등이 펄럭이고 있어 활력도 넘치고 보기에도 좋다. (역시 색이 있어야 보기
에도 좋음)



 

♠  영화사 마무리 (미륵석불입상, 느티나무, 공양밥)

▲  경내에서 미륵전으로 인도하는 숲길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제일 구석진 동쪽 산자락에 미륵석불의 거처인 미륵전이
있다. 오색연등이 대롱대롱 엮어진 숲길을 2분 정도 오르면 미륵전이 활짝 모습을 비추는데,
느긋한 경사의 계단길로 이루어져 누구든 오르기 쉽다.
다만 길 양쪽 수풀에 지네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문이 있고 난간줄도 쳐져 있어 적지 않게
긴장감을 준다.


▲  숲속에 묻혀있는 미륵석불의 거처, 미륵전(彌勒殿)

영화사에 왔다면 대웅전 주변만 살피지 말고 미륵전에 깃든 미륵석불입상도 꼭 친견하기 바란
다.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자 영험하다고 소문난 석불이기 때문이다.
경내에서 홀로 떨어진 미륵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정도의 팔작지붕 건물로 미륵석불 덩치에
맞게 짜여졌다. 석불의 키가 3.5m라 건물 높이는 5m 정도 되며 건물의 겉모습에서 고색이 제
법 느껴져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미륵전 앞에는 가건물을 길쭉하게 다져 예불
공간으로 삼았는데 새벽부터 19~20시까지 개방해 그를 친견할 수 있게 했다.

미륵전 현판은 불교학자이자 친일매국노로 더러운 모습을 보였던 권상로(權相老, 1879~1965)
가 쓴 것이다. 영화사도 생각이 있다면 그 현판을 떼어내 장작으로 땠으면 좋겠는데 이 땅의
우울한 현실을 보여주듯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곳까지 친일매국노의 흔적이 더럽게 깔려있
어 천하의 정의구현을 소망하는 중생들의 마음을 적지않게 희롱한다.


▲  하얀 피부를 지닌 미륵전의 주인, 미륵석불입상

영화사의 보물이자 든든한 밥줄인 미륵석불은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에 대한 정성이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로 하얗게 떡칠을 하는 통에 원래 모습을 다소 잃었고
그로 인해 구체적인 나이를 측정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조각 수법도 그저 그런 수준이
라 늙은 석불임에도 그 흔한 지방문화재의 지위도 얻지 못했다.
그래도 서울 땅에 몇 남지 않은 고려 말~조선 초기 석불로 그의 몸에 짙게 깔린 하얀 때를 싹
제거하여 인근 광나루에 있는 상부암(上浮庵) 석보살입상(☞ 관련글 보기)처럼 제대로 된 재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다.

불교에 관심이 지대했던 세조(世祖)가 그를 찾
아와 기도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중곡동에
서 여기로 절을 옮길 때 워낙 키다리에 거구로
콧대가 높은 그를 옮기고자 여러 대의 우마차
를 동원해 며칠 동안 낑낑대며 옮겼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경내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그의 거처를 두었으니 여기까지 옮기느라 고생
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석불의 머리는 지나치게 큰 편으로 머리부터
눈, 코, 입, 귀, 검은 수염, 삼도가 그어진 목
까지 표현되어 있으며, 몸통에는 가슴 앞부분
을 드러낸 법의(法衣)를 걸쳤다.
왼손은 바닥을 보이고 오른손은 밑으로 내린
여원인과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있다.
현재 절에서는 그를 미륵불(彌勒佛)로 애지중
지하고 있으나 원래부터 미륵불은 아니었던 듯
싶다.

▲  옆에서 본 미륵석불입상


▲  미륵전 주변 숲길
미륵전 뒤쪽이 바로 아차산이나 그곳으로 가는 길은 철조망으로 무심히 끊겨있어
이곳은 사실상 영화사의 막다른 곳이 되었다. 여기서 아차산둘레길이 뻔히
보이나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처럼 바라봐야 된다.

▲  무엇에 쓰던 물건인고? 미륵전 옆에 놓인 돌덩어리

미륵전 옆 바위에 인공이 가해진 동그란 돌덩어리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생김새를 보아하
니 석불의 모자(갓) 같은 기분인데, 이곳 미륵석불의 것으로 보기에는 크기가 형편없이 작다.
이 돌덩어리에 대한 정보가 좀처럼 걸려들지 않아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나 고색의 때가 별로
끼지 않은 것으로 봐서 영화사가 이곳에 안착된 이후의 것으로 여겨진다.
장대한 세월에게 저것을 지녔을 본체를 빼앗겨 저거만 겨우 남아있으며 정체성까지 상실되어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만큼 무섭고 한심
한 일은 없다.


▲  푸르게 익은 영화사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5-2호

시간도 벌써 13시가 넘었고 경내를 이리저리 뛰다보니 시장기가 아주 극에 달했다. 경내를 다
둘러보았으니 이제 초파일 절 투어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공양을 할 시간.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공양을 하려는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삼성각 앞까지 줄이 길게 형성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공양을 제공하는 곳은 선불장 느티나무 앞으로 줄의 길이는 대략 200m는
넘어보였는데, 내게 꿩 대신 닭을 고를 권리는 없어 할 수 없이 그 줄에 동참했다.
200m는 짧은 거리가 분명하나 그날의 200m는 거의 20km처럼 장대해보였다. 그렇게 30분 가까
이 기다리니 느티나무 앞까지 이르렀고 여기서 10분 정도를 더 소비하여 그제서야 공양밥과
미역냉채국을 손에 거머쥘 수 있었다.

공양 현장을 지켜보고 있는 느티나무는 높이 19.5m, 둘레 4.1m의 덩치로 보호수로 지정될 당
시(1982년 10월) 추정 나이가 약 370년이라고 하니 그새 40년이 덧없이 얹혀져 410살 이상이
된다. 절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기 이전부터 있던 존재로 늘 좋은 질감의 그늘을 드리워 대자
연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준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햇살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기다리는 줄이
꽤 고달팠을 것이다.


▲  영화사에서 힘들게 먹은 공양밥의 위엄

힘들게 공양밥을 받았으나 경내의 어지간한 자리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겨우
미륵전 숲길 입구에 자리를 잡고 즐겁게 공양에 임한다.
이곳 공양밥은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비빔밥 스타일이다. 하얀 쌀밥에 콩나물과 고사리, 시금
치 등 나물에 빨간 고추장을 넣어 잘 비벼먹으면 된다. 어떻게 비비느냐에 따라 맛도 천지 차
이, 게다가 고추장이 위장에도 좋다고 하니 듬뿍 넣어 비벼먹는 것도 좋다. 비빔밥에 딸려 나
온 미역냉채국은 시원하고 개운해 비빔밥의 느끼한 맛을 싹 가시게 해준다. (후식거리는 제공
되지 않았음)

그렇게 점심 공양을 마치고 시장통처럼 번잡한 영화사를 뒤로 하며 다음 행선지로 이동했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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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강 언덕에 살짝 깃든 고구려의 작은 흔적, 연천 은대리성

연천 은대리성(한탄강)



' 연천에서 만난 고구려의 작은 흔적, 전곡 은대리성 '
연천 은대리성



 

여름 제국(帝國)의 무더위 갑질이 극성이던 7월의 한복판에 경기도 북부에 자리한 연천
(漣川)을 찾았다. 남북분단의 비애가 서린 연천 고을에서 가장 큰 읍내이자 구석기유적
의 성지(聖地)로 추앙받고 있는 전곡읍(全谷邑)까지 어찌어찌 가게 되었는데, 오랜만에
찾은 전곡을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워 마침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는 은대리성을 더듬
기로 했다.

은대리성은 전곡읍내 서쪽에 위치한 연천군보건의료원 서쪽에 자리해 있는데, 그곳으로
가려면 보건의료원 내부를 거쳐야 된다.



 

♠  한탄강 언덕에 깃든 옛 고구려(高句麗)의 조그만 성
연천 은대리성(隱垈里城) - 사적 469호

▲  은대리성 내부

한탄강(漢灘江)과 주상절리로 유명한 차탄천(車灘川)이 만나는 삼각형 지형 강변 언덕에 장대
한 세월이 묻힌 은대리성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한탄강은 용암대지의 하천 침식작용으로
주상절리(柱狀節理) 등의 벼랑이 참 많은데, 그중에서 3각형 모양의 강변 언덕도 적지 않다.
강변은 높은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윗쪽에 평지가 벼랑과 반대 방향으로 점차 넓어지는
형태로 은대리성도 바로 그 지형을 바탕으로 닦여진 것이다.

은대리성은 적당한 기록도 없이 이곳에 오랫동안 묻혀 있었는데, 1995년에 발간된 연천군사료
집에 의해 속세에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과 토지박물관,
국립문화재연구소 등이 이곳을 찾아 간단하게 발굴/지표조사를 벌였고, 2003년에 단국대 매장
문화재 연구소에 의해 정식으로 발굴이 이루어져 성의 실체가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다.

성의 평면은 삼각형으로 3면은 막다른 벼랑이고, 동쪽만 속세로 이어진 평지라 수비하기에는
딱 좋은 요새이나 만약 성이 적군에게 털린다면 이건 정말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항복하기
싫다면 싸우다 죽던지, 아니면 벼랑에 몸을 던지던지 해야 된다. 이는 무조건 성을 사수하고
만약 성이 함락되면 성과 함께 최후를 마치라는 제왕(帝王)의 차가운 배려가 담긴 것이다.

성은 크게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외성의 폭은 동서 400m, 남북 130
m, 둘레 1,005m의 조그만 규모로 외성의 동벽은 평지를 가로질러 축조되었다. 성벽 내부는 점
토와 모래로 다지고 외벽은 돌로 쌓았는데, 다른 성과 달리 현무암(玄武岩)을 사용한 것이 특
징이다.
동벽의 길이는 60~120m, 성벽 높이는 6m 정도로 성벽 상당수가 대자연과 세월의 태클로 녹아
내려 북쪽으로 가면서 2~3m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동벽의 내벽 부분에는 기둥을 설치했던 흔
적이 나왔고, 최소 2번 이상 성을 고쳐 쌓았음이 밝혀졌다.
내성은 길이가 230m 정도로 성의 핵심부이다. 여기서는 대형 건물터가 하나 나왔으며, 외성을
포함하여 문터 3개, 치성(雉城) 3개소(어떤 자료는 2개소), 도랑 흔적이 확인되었다. 치성은
성의 북동쪽과 북문터 서쪽, 남문터 서쪽에 있었으며, 북문터와 남문터 치성은 8x5 규모로 '
ㄷ'자형으로 돌출되었다.

성에서 수습된 유물은 별로 없으나 상당수가 토기 파편이며 소량의 철기편이 나왔다. 토기 상
당수는 고구려 토기(土器)로 약간의 백제 토기도 나왔는데, 동벽을 처음 쌓은 시기와 일치하
는 배수구 바닥에서 고구려 토기가 집중적으로 나와 이곳이 고구려성임을 알려준다.

전곡 지역은 오랫동안 백제(百濟)의 영역으로 북방으로 진출하는 요충지였다. 4세기 후반, 고
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 백제를 공략하면서 한강 이북을 점유했고, 이때 전곡과 연천
지역도 고구려의 그늘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고구려 입장에서는 전곡을 비롯한 한탄강 주변이
남쪽으로 진출하는 요충지이자, 강을 낀 천험의 요새지로 포천 반월성(半月城, ☞ 관련글 보
)과 호로고루(瓠蘆古壘), 은대리성 등 작은 성을 많이 구축했다. 그러니 빠르면 5세기 초/
중반, 늦어도 5세기 후반에 조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가 먼저 세웠을 가능성도 있
으나 요즘은 거의 고구려성으로 몰고 가고 있음)
이후 백제가 신라와 합심해 고구려를 북쪽으로 몰아내면서 6세기 중반에 한강 유역을 차지하
게 되었는데, 한강에 군침을 흘린 신라 진흥왕(眞興王)은 백제의 뒷통수를 후려치며 한강을
가로채는 비열한 짓을 벌인다. 그 기세로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 북부, 함경도 남부까지 북진
을 하였고, 이때 은대리성도 신라에게 털리게 된다.

은대리성을 지키던 고구려군이 신라군과 전투를 벌였는지 아니면 성을 버리고 줄행랑을 쳤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유물이 거의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신라가 잠깐 이용하다가 주변
성과 통폐합시키거나 7세기 중반 이후 버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이곳은 방치되어 수풀이
무성한 자연의 공간이 되었다.

성의 이름은 이곳의 지명인 은대리를 따서 붙인 것으로 2003년 이후 동벽과 북벽 일부를 손질
했다. 허나 완전한 석성(石城)으로 복원하지 못하고 성 밑도리에 돌을 입히는 선에서 끝나버
려 거의 토성(土城)으로 남아있으며, 남벽에는 목책(木柵)을 다시 세웠다. 성 내부와 토성에
는 풀을 곱게 입혀 싱그러운 녹색 도화지가 되었으며, 토성과 목책, 도랑 외에 흔적은 모두
풀로 뒤덮었다.

연천에는 은대리성 외에 고구려가 쌓은 것으로 여겨지는 당포성(堂浦城), 호로고루성 등의 성
곽 유적이 있는데, 모두 3각형 지형의 강가 언덕 평지에 조성된 것이 특징이라 고구려 축성술
의 다른 면모를 보여주며, 남한 땅에 흔치 않은 고구려 유적으로 그 가치와 희소성이 높다.


▲  연천군보건의료원에서 은대리성으로 인도하는 언덕길
(언덕 위가 바로 은대리성)

▲  어설프게 복원된 은대리성 동벽과 남문터

성벽 밑도리는 돌을 끼워 넣었으나 나머지는 그냥 흙만 다져 복원했다. 그래서 졸지에 팔자에
도 없는 토성이 되버린 은대리성. 이러면 이곳이 토성인줄 알지 누가 석성으로 보겠는가? (나
도 토성으로 알았음..)

▲  남벽과 마주한 남문터 서쪽

▲  동벽 중앙 부분

▲  동벽 동쪽

▲  동벽 내부


▲  동벽 남문터에서 바라본 천하 (보건의료원 산책로와 소나무숲, 한탄강)

▲  동벽 동쪽에서 바라본 천하 (보건의료원 산책로, 소나무숲)

▲  토성이 되버린 동벽 윗쪽
지금은 토성이라 이런 곳에서 과연 수비가 가능할까 싶겠지만 나중에 석성으로
재현된다면 지금과 180도 달리 보일 것이다.

▲  동벽과 성 내부

▲  은대리성 내부
지금은 온통 초록 도화지라 실감이 나지 않지만 이곳에는 건물과 군사 주둔지가
있었다. 성 내부와 건물, 주둔지의 모습, 군사들의 삶에 대해서는 딱히
정답이 없는 실정, 그러니 저 푸른 도화지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보자.

▲  푸른 수풀 너머에는 북벽이 있었다. (북벽도 벼랑임)

▲  남벽에 설치된 목책 - 목책이 여장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  수풀과 뒤엉킨 남벽 목책

▲  도랑 흔적
도랑은 빗물이나 생활용으로 쓰인 물을 바깥으로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 성 안에서
아직 우물터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식수는 인근 산이나 한탄강에서
힘들게 운반했을 것이다.

▲  남벽 목책 너머로 보이는 한탄강

▲  서쪽에서 바라본 은대리성 내부

▲  은대리성 내부를 가로지르는 황토색 산책로



 

♠  한탄강전망대와 3형제바위

▲  은대리성에서 전망대로 가는 숲길 입구

은대리성은 조그만 성이라 학술조사나 정밀 답사까지 벌이지 않는 이상은 금방 둘러본다. (길
어봐야 30~40분, 보통 사람은 10~20분 정도) 그래서 좀 싱거울 수 있는데, 이것이 은대리성의
전부는 아니니 너무 아쉬워하지는 말자. 대륙을 누비던 통 큰 고구려의 성곽 유적인데 설마
이것으로 끝나겠는가..? 고구려 유적은 절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성 서쪽을 보면 우거진 숲이 보일 것이다. 솔내음이 그윽한 숲 오솔길을 따라가면 그 길의 끝
에 한탄강전망대가 자리한다. 소나무숲과 전망대도 엄밀히 따지면 은대리성 내부로 성곽 서단
(西端)에 해당된다.


▲  은대리성에서 전망대로 인도하는 숲길 ①

▲  은대리성에서 전망대로 인도하는 숲길 ②

▲  은대리성에서 전망대로 인도하는 숲길 ③

▲  벼랑에 자리한 한탄강전망대

오솔길 끝에 자리한 전망대는 의자가 여럿 있는 것이 전부인 그야말로 친환경적인 전망대이다
. 이곳에 서면 한탄강(왼쪽)과 차탄천(오른쪽)이 하나가 되어 하류로 흘러가는 현장이 보이는
데 여름의 기운을 먹고 자란 수풀 때문에 완전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난간에 오르거나
난간 너머에서 아슬아슬하게 보거나, 겨울에 와서 보던가 해야 제대로 보인다.
한탄강 물소리가 얼마나 패기가 진한지 여기까지 울린다. 차탄천 너머 서쪽은 군남면 지역이
고, 한탄강 너머 남쪽은 전곡읍 고능리이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한탄강 (파주 방향)

▲  수풀에 가려 보일까 말까하는 삼형제바위

전망대에는 조그만 안내문이 있는데, 그 안내문에는 임진강과 차탄천 합류지점에 있는 삼형제
바위에 대한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담겨져 있다. 삼형제란 이름 그대로 조그만 바위 3개가 나
란히 수면 위에 고개를 들고 있는데, 무성한 수풀이 시야를 방해하여 본의 아니게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인 어느 옛날, 어느 과부가 삼형제를 기르고 있었다. 그들 형제
는 우애가 참 깊었는데 어느 날 여름, 일을 하다가 무더위에 지쳐 한탄강에서 물놀이를 했다.
그런데 막내가 부주의로 깊은 곳에 빠져 허우적거리자 그를 구하고자 형들이 다가갔지만 결국
그들 모두 강제로 저승으로 보내지고 말았다.
졸지에 아들을 모두 잃은 과부는 강가로 달려가 3달 동안 대성통곡을 했는데, 3달 뒤에 삼형
제의 형상이 강 가운데에 나타나더니 그대로 바위로 변했다고 한다.
이후 해마다 이곳에서 익사사고가 발생하여 큰 바위에 제단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 그들을 달
랬다고 전했다고 하니 전설을 통해 인근에 살던 삼형제가 강에서 사고를 당하자 그들의 넋을
달래고자 제사를 지내면서 바위를 그들의 화신으로 삼은 모양이다. 설마 그들의 시신이 바위
로 변할리는 없을테니 말이다.

전망대에 잠시 머물며 한탄강의 유유히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있으니 시간은 어느덧 19시가
되었다. 여름이라 낮이 무척 길어 아직도 한낮 같고 더위의 기운도 거의 여전한 것 같다. 다
만 한탄강의 보우로 그 기운이 많이 수그러들었고 땀이 나오기가 무섭게 강바람이 그들을 털
어가니 땀도 나오는 것을 포기한다.

전망대를 나와 은대리성의 나머지 부분을 살펴보고 연천군보건의료원을 거쳐 전곡읍내로 나왔
다. 이렇게 하여 은대리성 여름 나들이는 그 막을 고한다.

* 은대리성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 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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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5월 1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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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단단한 북쪽 지붕, 도봉산 계곡 나들이 ~~ 무수골계곡에서 우이암 관음봉, 문사동계곡, 도봉계곡, 도봉동문까지

 


' 도봉산 봄나들이 (우이암, 문사동계곡, 도봉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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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봉산 우이암(관음봉)

▲  문사동 바위글씨

▲  도봉산 (주능선, 자운봉)


 

봄이 막바지 절정에 이르던 5월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일행들과 서울의 북쪽 지붕, 도
봉산(道峯山)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가운데서 방긋거리던 13시, 집에서 가까운 도봉역(1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분식점과 마트에서 김밥과 간식 등을 넉넉히 사들고 무수골을 통해 도봉산의 포근한 품
으로 들어섰다.

서울의 별천지이자 아늑한 산골 마을로 논까지 갖추고 있는 무수골을 지나 원통사계곡(
보문사계곡, 무수골 상류)을 오른다. 계곡은 작지만 바위와 암반이 즐비하고 수심이 얕
아 조촐한 피서의 성지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그 계곡을 30분(무수골공원지킴터 기준)
정도 오르면 우이암(관음봉) 밑에 자리한 원통사(圓通寺)에 이른다.

원통사는 관음성지로 일컬어지는 우이암(관음봉)을 후광(後光)으로 삼은 관음도량(觀音
道場)으로 신라 후기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고려 후기 정도에 창건된 것으
로 여겨짐) 절은 오래되긴 했으나 건물은 죄다 20세기 이후 것들이라 고색의 기운은 말
라버렸으나 대신 조망이 일품이라 서울 사찰 중 북한산(삼각산) 일선사(一禪寺) 다음으
로 우수 조망을 자랑한다. (서울 사찰 조망 부분 2위임)
약사전(藥師殿) 거북바위에 깃들여진 상공암(相公岩) 바위글씨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로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고려를 뒤엎기 전, 여기서 기도를 했는데, 그 마지막 날,
하늘나라의 상공(정승)이 되어 옥황상제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하여 그것을 기
리고자 조선 말에 이곳을 찾은 사대부가 새긴 것으로 전해진다.

원통사에서 20분 정도 머물다가 다시 10여 분 정도 각박한 산길을 올라 드디어 우이암(
관음봉) 서쪽 봉우리에 이르렀다. (우이암 이전의 자세한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도봉산의 남쪽 지붕이자 대자연의 걸출한 작품
~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우이암<牛耳岩, 관음봉(觀音峯)>

도봉산 남쪽 끝 봉우리인 우이암(해발 542m)은 아주 잘생긴 순 100% 바위 봉우리이다. 대자연
형님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으로 약 2억 년 전인 중생대 쥐라기 중엽 시절에 일어
났던 대보조산운동(大寶造山運動)으로 도봉산 산줄기가 형성되었다고 하며 이후 바람과 비 등
이 계속 산을 깎고 다듬으면서 산 정상부는 화강암이 노출된 채 바위산이 되었다.
그래서 도봉산은 서울 근교의 대표적인 화강암 바위 산으로 자운봉과 선인봉, 만장봉, 칼바위
등 걸출한 바위와 암봉(岩峰)이 즐비하다. 우이암(관음봉)도 바로 그중의 하나로 대자연이 신
(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의 손길을 꺼렸는지 완전히 난공불락
의 요새로 지어놓았다. 허나 그렇게 크고 단단하게 만들었음에도 하늘과 가까워지고 싶은, 봉
우리를 정복하고 싶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 앞에 결국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도봉산
칼바위와 주봉 능선, 만장봉, 자운봉 등이 바라보인다.


봉우리 자체가 거의 수직 절벽으로 아무나 범할 수 없는 천험의 요새이며, 내려가는 것 또한
까마득한 그야말로 하늘의 감옥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나 올라갈 수는 없고 장비를 갖춘 암벽
꾼에게만 제한적으로 길을 내주고 있다. 특히 암벽 타기에 아주 최적화된 곳이라 암벽꾼들로
늘 부산하며, 전국 암벽 등반대회가 열렸던 암벽 등반의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대자연이 인
간의 접근을 막고자 만든 바위 봉우리가 암벽 등반을 위해 인간에게 내려준 선물의 모양새가
되버린 것이다.

지금은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에서 아무렇지 않게 우이암이라 불리고 있지만 원래 이름은 관
음봉이다. 관세음보살 누님이 부처를 향해 기도하는 모습과 비슷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
었으며,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쓰고 있는 모습과도 비슷하여 '사모봉'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
다.
도봉산에는 호랑이와 코끼리, 두꺼비, 코뿔소, 학 등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지닌 바위들이 많
은데 이들이 관음봉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
전부터 도봉산 제일의 관음성지(觀音聖地)로 조촐히 추앙을 받았다. 아마도 원통사에 있던 석
굴(현재 나한전)에서 수행하던 승려나 도봉산에 머물던 승려들이 발견하여 불교 성지로 격하
게 추켜세웠을 것이다. 바위 자체가 아주 휼륭한 관음성지라 그 후광(後光)을 놓치지 않고자
바위 밑 적당한 곳에 원통사가 둥지를 틀고 관음도량을 칭하고 있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①
도봉구,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지역


조금 밋밋해 보이면서도 순백의 아름다움이 묻어난 이 봉우리에도 왜정(倭政)의 추악한 잔재
가 남아있다. 왜정은 관음봉의 위엄을 욕보이고자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의 우이암으로 강제
로 이름을 갈아버린 것이다. (우이동, 우이시장에서 바위 봉우리가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바
꾸었다고도 함)
아무리 봐도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왜정은 왜 그리 눈이 삐딱한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 이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사람의 망각 속에 완전히 굳어져 버렸고, 관음봉이란
이름은 흐릿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원통사와 불교단체, 뜻있는 이들이 원래 이름으로
다시 갈아야 된다며 천하에 호소하고 있어 차차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
하긴 왜정에 의해 고의로 왜곡되고 격하된 지명이 어디 한둘이던가? 비록 관음봉이 불교식 이
름이나 왜정의 나쁜 의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니 원래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맞다. 그들의 썩
은 잔재가 이 봉우리 속에도 깃들여져 천하를 비웃고 있으니 기분이 다소 씁쓸하며, 이렇게
잘생긴 바위가 소의 귀로 머물러 있는 것도 좀 위엄이 서질 않는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②
우이동과 방학동, 쌍문동, 강북구, 성북구, 북한산 동쪽 자락 등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③
북한산(삼각산) 백운대와 영봉


앞서 원통사가 아무리 조망이 좋다고 해도 우이암만은 못하다. 해발도 무려 140m나 차이가 나
며 그만큼 하늘과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머리 위로는 푸른 하늘과 유유히 흘러가
는 구름과 햇님, 별님이 바라보이고, 저 밑으로는 서울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
북구, 동대문구, 광진구, 수락산과 불암산, 아차산 산줄기가 시야에 잡혀 여기까지는 원통사
와 비슷하다.
허나 이곳에서는 의정부 일부(호원동, 장암동, 민락1,2지구 등)와 상계1동, 도봉동 북부가 추
가로 시야에 들어와 조망의 범위는 조금 넓어졌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④
도봉산 산줄기와 상계1동, 수락산을 비롯해 의정부 호원동과 민락1,2지구
(수락산 너머로 보이는 곳)가 추가로 시야에 잡힌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로 이
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발 밑에 펼쳐진 천하를 바라보니 산부터 점보다 작게 아른거리는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즐거운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면 얼마나 좋
을까? (현실은 시궁창 인생 ㅠㅠ)


우이암에는 마침 한 무리의 암벽꾼들이 줄에 의지하여 아슬아슬하게 봉우리를 더듬고 있었다.
하늘의 감옥 같은 봉우리 정상에 올라선 기분은 어떠할까? 허나 정상부는 좁고 그 주변은 죄
다 수직 벼랑이니 자칫 실수라도 하는 순간에는 정말 답이 없을 것이다. 내가 저기로 순간이
동을 당한다면 아찔한 위치 때문에 염통이 쫄깃해져서 오래 있기도 어려울 것 같다. 그냥 이
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⑤
무수골이 저 밑으로 아득하게 바라보여 참 많이 올라왔음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에서 두 다리를 푹 쉬었다.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이 솔솔 불어
주는 산바람이 땀과 이른 무더위를 싹 털어가고, 대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일품 조망을 실컷 누
리니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마음과 안구가 제대로 정화되는 것 같다. 이보다 좋은 정
화감은 없지.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20분 정도 머물다가 자리를 털고 우이암
능선으로 길을 잡았다.

* 우이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의 위엄
약 50~60도 경사로 비스듬히 기대며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


 

♠  우이암능선과 문사동계곡(問師洞溪谷)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 <우이암을 중앙으로>

우이암능선은 도봉산의 남쪽 지붕길로 우이암에서 도봉산 주능선(주봉능선) 남쪽까지 짧게 이
어진다. 이곳에서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가 가장 높은데, 동쪽과 북쪽으로 서울 동북부와 의정
부, 도봉산 주능선이, 서쪽과 남쪽으로는 오봉산과 우이령, 북한산(삼각산)이 바라보이며, 특
히 능선에서 바라보는 우이암의 모습이 자못 위엄이 돋는다.

우이암의 자태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서쪽 봉우리와 우이암 능선에서 보는 것이 좋다. 서쪽에
서 보는 것과 능선에서 보는 것이 서로 다르게 보이는데, 마치 유럽식 투구를 쓴 장군이 비스
듬히 기대어 서울을 바라보는 모습 같으며, (하얀색 모자 달린 옷을 입은 사람이 비스듬히 기
댄 모습으로도 보임) 두건을 쓴 관세음보살 누님이 서울을 걱정하는 모습으로도 보인다. 허나
왜정의 비뚤어진 주장처럼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으니 관음봉을 우이암으로 깎아내린 왜정
의 눈이 비정상임을 보여준다. 빠른 시일 내에 제 이름을 회복한다면 우이암능선도 관음봉능
선으로 이름을 갈아야 될 것이다.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도봉동과 상계1동, 수락산,
의정부 호원동과 민락1,2지구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도봉구, 노원구, 강북구, 중랑구,
성북구, 광진구,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 무수골 등)

▲  우이암능선 조망대

우이암능선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면 서쪽을 향해 고개를 내민 우이암능선 조망대가 모습을 비
춘다. 능선길 서쪽 벼랑 위에 닦여진 이곳은 위치상 오봉과 우이령, 북한산(삼각산)의 북쪽
뒷통수(상장봉 등)가 바라보이는데, 특히 오봉이 잘 조망된다.


▲  우이암능선 조망대에서 바라본 오봉(五峯)과 오봉능선
오봉(해발 660m)은 오봉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우이령 북쪽 봉우리로 도봉산이나
송추에서 접근하면 되며, 바로 밑에 있는 우이령에서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  우이암능선 조망대에서 바라본 우이령, 북한산 북쪽 능선(상장봉)

▲  우이암능선 조망대에서 바라본 도봉산 주능선과 칼바위,
만장봉, 자운봉


우이암능선 조망대에서 북쪽으로 마저 내려가면 우이암능선분기점이다. 여기서 직진하면 지붕
길을 따라 칼바위, 오봉, 도봉산 주능선으로 이어지며, 동쪽은 보문능선으로 도봉산 종점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서쪽은 우이령(牛耳嶺)으로 이어지나 금지된 길인 비법정 탐방로이다. 그러
니 도봉산의 건강을 위해 아예 가지도 말자~~!
우리는 목적지인 우이암(관음봉)을 찍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지붕길을 고집하지 않고 쿨하게 보
문능선으로 내려갔다.


▲  보문능선에서 문사동계곡으로 내려가는 산길

▲  산악신앙의 현장, 산꾼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모이고 모여
커다란 돌탑으로 어엿하게 성장했다.

▲  경쾌하게 몸을 푸는 문사동계곡 상류

내려가는 길이긴 하지만 느낌상 가도가도 끝이 없어 보인다. 그 산길에 연두연두하게 익은 나
무들과 진달래 등의 봄꽃들이 우리를 응원하고 산바람이 종종 스쳐가며 조금씩 꿈틀거리는 땀
의 기운을 털어간다. 보이지 않던 계곡도 어디서 나타났는지 살짝 다가와 낭랑한 물소리를 들
려준다. 이 계곡은 문사동계곡 상류로 전날까지 넉넉히 내린 봄비로 인해 물이 아주 넘쳐 흐
른다.

문사동계곡은 무수골(원통사계곡), 원도봉계곡(망월사계곡)과 더불어 도봉산 3대 계곡의 하나
로 추앙을 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문사동계곡이 단연 갑(甲)으로 상류 부분은 작고 조촐한 모
습이라 두드러지는 풍경은 별로 없지만 속세로 내려갈수록 일품 풍경이 펼쳐져 두 눈을 제대
로 호강을 시킨다. 주름지고 잘생긴 바위와 벼랑은 물론 폭포도 여럿 나타나 산행의 여흥을
제대로 돋구며 특히 문사동 바위글씨 주변과 구봉사 주변이 최고의 절경으로 꼽힌다.
이 계곡은 용어천계곡과 합쳐져 도봉계곡으로 간판을 바꾸며, 도봉역에서 무수골에서 나온 무
수천과 하나를 이루며 중랑천(中浪川)으로, 다시 한강으로 흘러간다. 문사동은 도봉계곡과 한
덩어리로 묶어 도봉동천(道峰洞天)이라 불리기도 하며, 계곡 밑에 도봉서원이 자리해 있어서
서원 유생과 선비들의 피서지로 명성을 누렸다.


▲  문사동(問師洞) 바위글씨

문사동계곡의 이름표인 문사동 바위글씨는 하늘을 향해 약간 고개를 든 바위 피부에 깃들여져
있다. 문사동이란 '스승을 모시는 곳','스승에게 묻는 곳'이란 뜻으로 도봉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스승과 함께 학문을 논하거나 경치를 즐기거나 팔자좋게 탁족(濯足) 등의 피서를 즐
겼던 현장이다. 그래서 계곡 이름도 교육에 걸맞게 문사동으로 굳어진 것이다.

이 바위글씨는 초서체(草書體)로 쓰여 있어 알아보기가 조금 까다로운데, 마치 뱀이 기어가는
듯한 모습이다. 글씨 크기는 41x16cm으로 예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한 '바위글씨전' 포스
터에 절찬리에 실렸던 명필이기도 하다.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도봉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
나 조선 후기에 서원 유생이 남긴 것으로 여겨지며, 바위글씨 주변은 문사동계곡에서 가장 아
름다운 절경을 자아내고 있어 두고두고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제대로 앗아간다.


▲  가까이서 바라본 문사동 바위글씨의 위엄
동(洞)은 그런데로 알아보겠는데, 나머지 글씨는 진짜 해독 불가 수준이다.
(초서체 글씨들이 그런 경향이 큼)

▲  문사동 바위글씨 주변 풍경

계곡이 흘러가는 글씨 건너편에는 주름진 폭포와 벼랑이 펼쳐져 운치를 진하게 우려낸다. 이
런 절경에는 늘 신선(神仙) 전설이 있기 마련인데 이곳에는 없는 모양이다. 하긴 고리타분한
유생들이 지겹게 찾아와 쓸데없는 사상 논쟁이나 일삼고 있으니 신선 형과 선녀 누님들도 딱
히 오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  층층이 주름진 문사동 바위글씨 주변 폭포

▲  문사동계곡 마당바위 갈림길
이곳에서는 자운봉, 윗마당바위(천축사 윗쪽)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난다.


 

♠  도봉산 마무리 (문사동계곡, 도봉계곡)

▲  문사동계곡 중류

문사동계곡의 절경은 도봉계곡까지 연거푸 이어진다. '과연 도봉산 3대 계곡의 위엄이 전혀
녹슬지 않았구나' 감탄사를 마구 쏟아내며 계곡 풍경에 퐁당퐁당 빠지고 말았다.
대자연이 빚은 아름다운 절경, 그 절경을 인간의 한낱 언어나 문장으로 감히 표현하는 것은
어쩌면 무례가 아닐까? 아무리 좋은 단어를 마구마구 갖다붙여도 이곳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
을지 모르겠다. 이럴 때는 그냥 '와~~!' 탄성만 자아내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른다.


▲  문사동계곡 중류 (보문능선, 성불사입구)

계곡을 옆구리에 낀 넓적바위가 지나가는 산꾼을 유혹한다. 아직 봄이니까 그냥 지나쳤지, 한
여름이었다면 정말 뿌리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온몸으로 풍덩은 하지 않더라도 냄새가 모락
모락 나는 두 발을 꺼내들고 계곡을 휘저으며 피서삼매를 즐겼을 것이다~~!


▲  돌과 계곡이 어우러진 문사동계곡 중류 (성불사입구 부근)

▲  문사동계곡 서광폭포
폭포가 귀신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정도로 굉음을 울리며 굵은 명주실 같은
하얀 물줄기를 뽑아낸다. 그렇게 내려온 폭포수는 폭포 밑에 닦여진
담(潭)에서 잠시 숨 좀 고르다가 다시 긴 여정을 떠난다.

▲  옆에서 바라본 서광폭포의 위엄
폭포의 높이는 5m에 불과하지만 그 매력과 위엄은 어느 폭포 못지 않다.

▲  폭포가 여러 겹으로 펼쳐진 문사동계곡 (구봉사 주변)

서광폭포를 지나면 구봉사(龜峰寺)라 불리는 절집이 나온다. 법당인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요
사(寮舍), 범종각, 커다란 금동미륵불을 지닌 조그만 현대 사찰로 이 주변이 '문사동' 바위글
씨 주변과 함께 문사동계곡의 대표적인 흥미거리로 꼽힌다. 구봉사는 아마도 이들의 후광을
단단히 보고자 이곳에 둥지를 튼 모양인데, 층층이 이루어진 암벽에 키 작은 폭포가 여러 개
걸쳐져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바위를 타고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꽤 청아하다.


▲  주름진 바위를 타고 내려오는 문사동계곡 (구봉사 주변)
대자연이 그어놓은 주름이 주변 바위에 가득하다. 그만큼 도봉산도 늙었다.

▲  문사동계곡과 연등이 둘러진 산길 (구봉사 주변)
나무와 꽃들이 급하게 흐르는 계곡을 천연 거울로 삼으며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들이 없다.

▲  온갖 바위들이 재주를 부리는 문사동계곡 산길 (금강암 주변)

▲  연등이 허공을 가르는 금강암 주변 문사동계곡

구봉사에서 1굽이를 지나면 비구니 절집, 금강암(金剛庵)이 마중을 한다. 이곳 역시 구봉사와
마찬가지로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현대 사찰로 그곳을 지나면 천축사와 포대능선, 자운
봉에서 내려오는 산길과 합쳐져 사람들이 제법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길은 더욱 수월
해져 마치 말에 올라탄 듯, 거침없이 내달려 어느덧 도봉서원터에 이른다.

도봉서원(道峰書院)은 서울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서원으로 1573년 양주목사 남언경(南彦經)이
지역 유림의 뜻을 모아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세웠다. 이곳에는 원래
도봉산에서 가장 잘나갔던 영국사(寧國寺)가 있었으나 유림들이 절을 때려부셨으며, 조선 말
까지 이곳 일대를 영국동(寧國洞)이라 불렀다.
이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진 것을 임시로 단을 설치해 봄과 가을에
제를 지냈으나 6.25전쟁으로 중단되었고, 1972년 사당인 정로사(靜老祠)와 신문(神門)을 복원
했으나 왕년의 1/4도 안되는 규모였다. 허나 서울 유일의 서원이라는 큰 매력 덕분에 서울시
가 39억의 돈을 들여 2011년 기존의 건물을 밀어버리고 2014년 완공을 목표로 복원 공사에 들
어갔다.
하지만 이곳에서 옛 영국사 시절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불교계와 이해관계가 제대로 얽히게
되었고, 그때까지 지어진 건물을 모두 밀어버리고 발굴조사를 벌였다. 이후 계속 허전하게 터
만 남은 상태이며, 터 일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언제 복원이 될지는 모르지만 유교 쪽도
그렇고 불교 쪽도 영국사 복원을 계속 우기고 있는 실정이라 졸지에 뜨거운 감자가 되버렸다.
괜히 벌인 복원공사에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  거친 물살의 희롱을 받는 고산앙지(高山仰止) 바위글씨

도봉서원터에서 잠시 앞 계곡(도봉계곡)을 살펴보자. 그러면 계곡에 반쯤 잠긴 바위에 새겨진
고산앙지 바위글씨가 크게 아른거릴 것이다.
이 글씨는 1700년 7월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죽기 1년 전에 새긴 글씨이다
. 고산앙지란 시경(詩經)에 나오는 구절로 '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한다'는 뜻이다. 하여 김
수증이 조광조의 학덕을 우러러 사모한다는 의미로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도봉서원이 조광조
를 배향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들 글씨는 특이하게도 계곡물의 영향을 받는 자리에 새겨져 있어, 계곡 수량에 따라 보이는
범위가 천차만별인데, 제일 밑에 있는 '지(止)'는 늘 물에 잠겨 있어 심한 가뭄이 아닌 이상
은 보기가 참 힘들며, '앙(仰)'은 물이 많으면 역시나 보기가 힘드나 보통 때는 절반에서 1/3
정도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갔을 당시는 수량이 풍부해 '앙지' 2자는 강제 잠수 중이었다.
물의 희롱을 받는 '앙지'와 달리 '고산(高山)' 2자는 완전히 뭍으로 나와 햇살을 즐기고 있는
데 '산(山)'이 마치 3개의 산봉우리처럼 귀엽게도 새겨져 눈길을 끈다. 고산앙지 옆에는 글씨
가 새겨진 시기<경진 칠월(庚辰 七月)>가 쓰여져 있으며, 그 주변에는 이것 외에도 여러 바위
글씨들이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으니 한번 찾아보기 바란다.
도봉계곡과 문사동계곡 일대에는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권상하, 이재(李縡), 김
수증 등 옛 사람들이 남긴 바위글씨가 14개 전하고 있는데, 조선시대 서예 연구에 중요한 자
료로 인정되어 2009년 10월 도봉서원과 한 덩어리로 묶어 '도봉서원과 각석군(刻石群)'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28호로 지정되었다.

* 도봉서원과 바위글씨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도봉동문(道峰洞門) 바위글씨 - 서울 지방기념물 28호

도봉서원터에서 계곡을 따라 10분 정도 내려가면 200여 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를 간직한 광
륜사(光輪寺)가 나오고 여기서 다시 2분 정도 가면 도봉탐방지원센터 부근 큰 바위에 깃들여
진 도봉동문 바위글씨가 마중을 한다.
이 4자는 대노(大老), 송자(宋子)로 추앙 받던 조선 중기 문인이자 멸망한 명(明)나라에 과한
충성과 사대(事大)를 보인 꼴통 친명(親明) 사대주의의 대가 송시열(宋時烈)의 친필이라고 전
한다. 도봉동문이란 도봉서원과 도봉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뜻하며, 유명 문인이 쓴 글씨라
그런지 필체가 요란하게 율동을 부린다. 도봉서원 단골 고객 중에는 송시열도 있었다.


▲  저녁으로 먹은 삼겹살쌈밥의 위엄

도봉산 종점으로 내려가니 어느덧 17시가 되었다. 모락모락 김이 풍기는 저녁 밥에 곡차(穀茶
) 1잔이 그리워질 시간이라 산행 뒷풀이로 무엇을 먹을까 궁리하다가 종점 부근에 있는 쌈밥
집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고기를 겯드린 쌈밥집으로 우리는 삼겹살 쌈밥을 먹었는데, 삼겹살과 콩나물, 계란찜
, 무채, 김치, 된장찌개를 비롯해 상추, 양배추, 깻잎 등이 푸짐히 쏟아져 나왔다. 밥은 처음
에는 조금 주었으나 필요한 경우 더 제공해준다. 이들을 밥에 버무려 비빔밥처럼 해먹으면 되
며, 상추와 양배추에 노릇노릇 익은 삼겹살을 1점 넣어 쌈을 싸먹어도 된다. 이런 풍성한 찬
에 곡차가 없으면 안되겠지? 하여 막걸리를 시켜서 2병 정도 겯드렸다.

그렇게 기분 좋게 저녁 겸 산행 뒷풀이를 마치며 도돌이표처럼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행히 도
봉산과 내 제자리는 무척이나 가깝다는 것. 이렇게 하여 도봉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
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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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8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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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아름다운 서쪽 끝 ~ 제주올레길12코스 당산봉, 고산리유적, 엉알해안, 수월봉 나들이 (차귀도, 산방산탄산온천)

 


' 제주도 겨울 나들이 '
(제주올레길12코스, 고산리유적, 수월봉)

당산봉에서 바라본 와도와 차귀도

▲  당산봉에서 바라본 와도(앞쪽)와 차귀도(뒷쪽)

제주 고산리유적 엉알해안

▲  제주 고산리유적

▲  엉알해안


 

겨울 제국의 추위 갑질이 한참이던 1월의 첫 무렵,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인 제주도(
濟州島)를 찾았다.

햇님보다 훨씬 일찍 김포국제공항으로 달려가 제주도로 가는 6시대 비행기에 나를 담고
1시간 정도를 움직여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하늘 비행시간 50분, 활주로 방황시간
10여 분)
제주도에서 정처(定處)는 이미 정해둔 상태라 그곳만 얌전히 찾아가면 되는데 제주도에
발을 딛자마자 서쪽으로 길을 잡아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15시 경, 한림읍 용수리에 이
르렀다.
용수리에서 절부암(節婦岩)을 먼저 둘러보고 그날의 주메뉴인 제주올레길12코스(용수리
~무릉리, 17.5km)에 발을 들인다. 12코스의 ⅓ 정도 되는 해안길을 따라 수월봉까지 이
동하기로 했으나 햇님의 칼퇴근 본능으로 일몰 전까지 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물
론 가기야 하겠지만 해가 떨어지면 사진 출사도 거의 불가능해지고 속세와도 떨어진 외
진 곳이라 무서움까지 발생할 수 있다. (외딴 산길이나 제주올레길은 가급적 일몰 전에
마치는 것이 좋음) 하여 일단 수월봉 북쪽인 고산리유적을 1차 목적지로 삼고 12코스에
나를 던져놓았다.
12코스를 따라 용수마을 방사탑 2호와 생이기정 등의 조촐한 명소를 둘러보고 올레길을
1굽이 지날 때마다 포즈를 조금씩 달리하는 차귀도와 와도(누운섬)를 옆구리에 끼며 가
다보니 어느덧 당산봉에 이르렀다. 본글은 바로 당산봉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산봉 이전 절부암, 생이기정, 제주올레길12코스 부분은 ☞ 이곳을 클릭한다)


 

♠  제주올레길12코스 (당산봉, 고산리 유적)

▲  바로 밑으로 바라보이는 와도와 차귀도(遮歸島)

차귀도와 고산리, 남해바다를 굽어보고 있는 당산봉(堂山峰)은 해발 148m의 낮은 뫼이다. 지
금이야 이 땅에 흔한 뒷동산으로 조용히 누워있어 실감은 나지 않겠지만 수억 년 전, 화산이
내뿜은 마그마나 용암이 바닷물과 만나 격하게 이루어진 수성화산체이다.
용암이 물을 만나면 용암은 급히 식고 물은 펄펄 끓는다. 이런 냉각과 가열반응은 격렬히 일
어나 수증기를 포함한 큰 폭발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를 수성화산활동이라 한다. 작은 알갱이
와 수증기로 이루어진 분출은 제법 패기가 있어 이들 화산쇄설물(火山碎屑物)은 멀리까지 날
라가 퇴적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된 오름을 응회구(凝灰邱)나 응회환이라고 한다. 응회
구는 성산일출봉(城山日出峯)이 대표적으로 높이가 꽤 되며 응회환은 그 다음 수준으로 수월
봉, 당산봉, 송악산이 이에 해당된다.

당산봉은 산방산, 용머리와 더불어 제주도에서 제일 오래된 화산체이다. 예전 이름은 당오름
으로 산기슭에 뱀을 신으로 봉안한 차귀당이 있었는데 그 신을 '사귀(蛇鬼, 뱀신)'라고 했다.
바로 그 당집 때문에 당오름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후 그 사귀가 와전되어 '차귀'가
되었고, 봉우리 이름도 잠시 '차귀오름'으로 갈렸다고 전하며, 현재 이름인 당산봉은 당오름
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봉우리 정상에 넓적한 바위가 있는데 마치 닭벼슬처럼 보여 계관산(鷄冠山)이라 했다는 이야
기도 덧붙여 전해오며, 당산봉 서쪽 꼭대기에는 봉수대가 있었는데 북쪽으로 판포봉수, 남동
쪽으로 모슬봉수와 연락을 했다.

올레길12코스는 당산봉 서쪽 기슭을 지나갈 뿐, 꼭대기는 거치지 않는다. 대신 꼭대기와 당산
봉 주위를 도는 둘레길이 별도로 있어 그 길을 이용하면 완벽한 당산봉 투어가 가능하다. 시
간이 되면 당산봉도 보너스로 거닐고 싶었으나 일몰 시간을 구실로 바로 고산리 유적으로 넘
어갔다. 그때 나에게는 그저 수월봉만 보일 뿐, 당산봉 자체는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당산봉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고산리


▲  오르락 내리락이 반복되는 제주올레길12코스 당산봉 구간

▲  드디어 시야에 들어온 수월봉과 고산리유적
바다를 향해 길쭉하게 고개를 내민 해안 언덕이 바로 수월봉이다. 사진 가운데
벌판은 고산리 유적으로 일몰은 코앞인데 아직도 길이 저만치나 남아있어
발걸음의 고삐를 더욱 조이게 한다.


당산봉을 내려가면 고산리 벌판과 함께 2차선 노을해안로가 나타난다. 제주올레길12코스는 그
길의 신세를 지며 차귀도포구(고산포구)로 이어지는데 그 포구와 엉알해안을 거쳐 수월봉으로
달려간다. 12코스를 정석대로 거쳐야 엉알해안까지 둘러볼 수 있으나 시간도 그렇고 수월봉에
너무 정신이 팔려 올레길12코스를 잠시 내버리고 고산리유적으로 바로 질러가는 편법(?)을 썼
다. 난 그때까지 수월봉 밑도리가 엉알해안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수월봉 북쪽 해안이 엉알
해안)


▲  동쪽에서 본 고산리 유적 (억새 너머 벌판이 고산리 유적임)

▲  제주 고산리(高山里) 유적 - 사적 412호

수월봉과 당산봉 사이 벌판에 고산리 유적이 넓게 누워있다. 유적의 면적은 약 98,465㎡로 풀
이 뒤덮힌 들판 수준이라 이곳이 무슨 유적인가 물음표를 던지겠지만 유적은 보존을 위해 그
밑에 고이 묻어두었으며, 유적 변두리에는 개인 경작지가 존재하고 있다.

이곳은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유적으로 제주도의 대표적인 선사시대 유적지이다. 1987년 5
월, 고산리 주민들이 흙을 채취하고자 땅을 파다가 석창과 긁개를 발견했다. 그 소식을 들은
제주대학교는 그것이 발견된 곳을 답사하여 찌르개, 긁개, 돌도끼 1점을 발견하면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고산리유적이 슬슬 깨어나게 된다.
1988년 1월, 영남대학교 대학원생인 강창화가 수월봉에서 북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서 융기
문토기 1점을 수습했다. 그 토기는 빗살무늬토기 이전에 쓰이던 것으로 그때는 기원전 4,000
년 이전 것으로 파악했으나 지금은 기원전 6,000년으로 보고 있다.

1991년과 1992년 겨울,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정밀 지표조사를 벌였다. 그때 자구내포구에서
하천변을 따라 수월봉에 이르는 유물산포지를 확인했고 지번별로 약 6,000여 점의 유물을 건
졌다.
1994년 신창~무릉간 해안도로가 신설되면서 고산리 유적을 관통하게 되자 그해 6월부터 8월까
지 발굴조사를 벌였다. 발굴 범위는 수월봉에서 북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에서 포구에 이르
는 약 200m, 폭 12m 구간으로 출토 유물은 석기와 토기 등 3,000여 점이며, 고산리식 토기라
불리는 섬유질토기의 파편이 확인되는 등 성과가 대단했다. 하여 국제학술세미나를 통해 구석
기시대 후기에서 신석기시대 초기로 넘어가는 과도기 유적으로 평가를 받게 된다.
허나 유물의 절대연대자료가 부족하고 유적의 층위 분석도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경작으로 유
적과 그곳에 깃든 유물이 계속 파괴되고 고통을 받자 1997년 다시 발굴조사를 하였다. 이때는
17,000여 점의 석기와 1,900여 점의 토기를 끄집어내는 성과를 거둔다.

1998년 11월부터 1999년 2월까지 다시 조사를 벌여 170여 점의 타제석기와 토기를 발굴했으며
, 사적으로 지정될 구역 외 지역에 대한 조사를 벌여 유적의 범위를 파악했다. 그리고 이듬해
국가 사적의 지위를 부여받게 된다.

2012년 1구역 시굴조사와 발굴조사를 벌여 원형움집터 26동, 수혈유구 295기, 야외 불피던 곳
10기, 구상유구 2기, 토기류 87점, 석기류 278점을 발견했는데, 1만년 이전 것으로 파악이 되
어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시대 유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특히 석촉과 한쪽을 뚫은
옥귀고리 1점은 그 재료가 제주도에는 없는 것들이라 궁금증을 증폭시켰는데, 2013년 1구역을
다시 조사하여(2차 발굴조사) 주거지 7동, 수혈유구 227기, 야외 불피던 곳 3기, 구상유구 1
기, 유물 215점을 건졌고, 석촉 등의 석기가 남해안 일대 암석으로 확인되면서 전남, 경남 지
역 남해안과 교류가 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2014년 1구역 3차 발굴조사로 주거지 4동, 수혈유구 78기, 소토(燒土)유구 3기, 구상유구 2기
가 추가로 나왔으며, 2구역 조사에서 문화층의 잔존 범위와 지상식 주거지를 확인했다. 특히
남부지방 신석기시대 전기를 대표하는 토기인 영선동식 토기가 나왔으며, 고산리유적 거주기
간이 2,000년 이상으로 늘어났다.
2015년 1구역 4차 발굴조사로 주거지 1동, 수혈유구 19기, 소토유구 1기를 건졌으며, 화덕시
설로 추정되는 돌무지 시설을 중심으로 거의 원형으로 기둥 구멍들이 배치되어 있고 그 안에
석기 제작과 관련된 유물이 나왔다. 그리고 2구역 2차 발굴조사에서도 여러 석기들이 나왔다.
이후로도 계속 조사를 벌여 지금까지 고산리유적이 쏟아낸 유물은 성형 석기 5,000여 점, 박
편 94,000여 점 등 석기 99,000여 점과 토기조각 1,000여 점 등 도합 10만여 점에 이른다.
또한 구석기 후기와 신석기 초기를 연결하는 유적이 없어 무척 애를 태웠는데 그 고통을 바로
고산리가 속시워하게 풀어준 것이다. 기원전 12,000~10,000년경 눌러떼기 수법으로 지어진 석
기와 섬유질 토기가 다량으로 나와 이 땅에서 구석기시대가 신석기시대로 자연스럽게 넘어갔
음이 드러난 것이다.
하여 시베리아와 연해주, 만주 등 우리의 옛 땅과 우리나라 등 동북아시아 신석기 초기 문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며, 우리나라 신석기 초기 문화의 형성 과정을 밝히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애지중지되고 있다.

이곳이 신석기를 비롯한 옛 사람들의 터전이 된 것은 바로 옆 수월봉에서 나온 화산재가 이곳
에 덮히면서 기름지고 평평한 땅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땅에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는
데, 여기서 터전을 일구던 신석기 사람들은 구석기 후기 시절에 수렵과 채집 집단의 석기 제
작 전통을 이어나갔고, 초보적인 형태의 토기를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나온
석기는 석재를 기초 원석으로 직접 타격하여 박편(薄片)을 만든 다음, 간접 타격 또는 눌러떼
기로 2차 가공해 제작했다.
토기는 원시형 적갈색 섬유질 토기 조각과 덧무늬토기 조각 등이 나왔고, 특히 원시형 적갈색
섬유질 토기는 제주도 스타일의 유일한 토기 형식으로 '고산리식 토기'라 불린다.
덧무늬토기는 양양 오산리 신석기시대 유적과 부산 동삼동 패총(貝塚) 등에서 나온 기하학적
태선 덧무늬토기 형식으로 옆면이 굴곡이 있는 선으로 표현되었다.

* 고산리 유적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3628,3650-1 등 (고산리유적안
  내센터 ☎ 064-772-0041)
* 고산리 유적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너른 들판 같은 고산리 유적

▲  고산리 유적에서 바라본 당산봉
내가 용수리에서 저 당산봉을 넘어 여기까지 왔다.


유적 일대는 거의 들판으로 고산리유적안내센터와 안내문이 전부이다. 유적도 그 보존을 위해
모두 흙으로 덮어놓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유적 남부를 가로질러 가면 2차선의 신창~고산 해안도로(노을해안로)가 나온다. 그 도로는 차
귀도포구에서 나온 길로 그 길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가면 수월봉입구가 마중을 한다.


 

♠  제주도의 서쪽 끝을 잡고 있는 수월봉(水月峰)

▲  영산(靈山) 수월봉 표석의 위엄

수월봉입구에서 길은 5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동쪽으로 가면 한경면의 중심지인 고산리로 그
곳에 있는 고산6거리(고산리 중심부)까지 1.1km 거리이다. 대중교통으로 수월봉을 찾을 경우
102, 202번 등 제주도 서일주 노선을 타고 고산환승정류장(고산6거리)에서 내려 도보로 접근
하는 것이 편하다.
북쪽 길은 차귀도포구와 고산리 유적으로, 남쪽 길은 고산리 서남부, 서북쪽은 엉알해안, 서
남쪽은 수월봉이다. 당산봉을 내려와서 잠시 버려둔 제주올레길12코스를 여기서 다시 만나서
수월봉으로 같이 가게 되는데, 설마설마했던 수월봉에 일몰 바로 직전에 도착을 한 것이다.


▲  수월봉 북쪽 엉알해안 (수월봉 화산쇄설층 - 천연기념물 513호)

엉알해안 산책로는 차귀도포구 서남쪽 고산출장소에서 수월봉입구까지 이어지는 1.1km 정도의
해안 벼랑 길이다. 여기서 '엉알'이란 바닷가 언덕 밑을 뜻하는 제주도 사투리로 그 이름 그
대로 벼랑 밑을 지나는 것인데, 이 벼랑이 수월봉의 백미(白眉)이다. 수월봉에 왔다면 수월봉
도 좋지만 이 벼랑길도 꼭 거닐어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엉알해안 벼랑은 제주도 화산들이 한참 몸을 풀던 시절에 당산봉과 수월봉이 수성화산활동(水
性火山活動)으로 빚어지면서 생겨난 것이다. 수월봉과 당산봉은 느긋한 봉우리이나 그 밑 벼
랑은 직각에 가까운 가파른 모습이다. 특히 수월봉은 화쇄난류(火碎亂流, pyroclastic surge)
라 불리는 독특한 화산재 운반작용으로 닦여진 화산체로 화쇄난류층 종류에서 세계 최고의 수
준을 자랑한다. 하여 그와 관련된 논문과 보고서들이 수두룩하게 나와있다.

엉알해안은 수월봉 밑도리까지로 그곳까지는 산책로를 닦지 못하고 수월봉 북쪽 밑까지만 길
을 내었다. 이 산책로도 살펴봐야 했으나 일몰 압박과 코스 혼돈의 무지(無知)로 인해 가지
못하고 이렇게 수월봉 북쪽 입구만 기웃거리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  바다를 향해 고개를 내민 수월봉

▲  수월봉으로 인도하는 길 (제주올레길 12코스)

수월봉은 제주도 본토의 서쪽 끝을 잡고 있는 해발 77m의 해안 언덕이다. (제주도의 서쪽 끝
은 차귀도) 북쪽과 서쪽은 절벽이고 동쪽과 남쪽은 부드러운 산세로 이루어져 있는데, 옛 사
람들이 붙여놓은 수월과 녹고 남매의 슬픈 전설이 속세에서 오염된 두 눈에 이슬을 맺히게 한
다. 수월봉이란 이름은 바로 '수월'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전설은 정보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
으나 살펴보면 대략 이렇다.

조선 중기에 수월과 녹고 남매가 홀어미를 모시고 수월봉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그 어머니가
갑자기 중병에 걸리자 온갖 약을 구해보았으나 좀처럼 차도가 없어 애 태우던 중, 집 앞을 지
나던 승려가 그 사연을 듣고 100가지 약초를 알려주었다.
하여 수월 남매는 제주도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99가지를 구했으나 나머지 하나인 오갈피를 찾
지 못해 마을 앞 수월봉에 올라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봉우리
벼랑에서 오갈피가 눈에 아른거리는 것이다. 오갈피에 난데없는 등장에 그들은 너무 기뻤으나
문제는 절벽 중간쯤에 있다는 것. 그래도 그것을 구하겠다는 신념으로 수월은 남동생인 녹고
의 손을 잡고 벼랑으로 내려가 그것을 뜯어 녹고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은 녹고는 너무 기쁜
나머지 탄성을 지르다가 그만 실수로 수월이의 손을 놓고 말았다. (또는 수월이가 벼랑을 기
어올라 오갈피를 구했다가 떨어져 죽었다고 함)

수월은 그대로 벼랑 밑으로 떨어져 죽었고, 녹고는 넋을 잃고 17일 동안 누이를 부르며 울었
다. 그 눈물이 바위 틈을 거쳐 엉알해안 벼랑으로 떨어지니 세상은 그 물을 '녹고의 눈물'이
라 불렀다. (현실은 해안 절벽의 화산재 지층을 통과한 빗물이 화산재 지층 밑에 진흙으로 된
불투수성 지층인 고산층을 통과하지 못하고 흘러나오는 것임) 그 사연으로 봉우리 이름이 수
월봉이 되었다고 한다.

전설이라고 하지만 현실성이 나름 있는 일이라 아마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이야기를 짓기 좋아하는 지역 선비들이 효도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그럴싸하게 각색하여 수월
봉 전설로 내놓았을 것이다. 허나 병든 어미 때문에 아리따웠을 것으로 여겨지는 딸이 꽃도
피지 못하고 비명횡사를 했고 남동생은 누이를 죽게 했다는 충격의 도가니에 빠져 힘든 삶을
살았으니 그들의 팔자도 나처럼 참 박복하다.


▲  수월봉에서 바라본 차귀도(왼쪽)와 와도(오른쪽)
저들은 용수리 절부암부터 이곳까지 나를 따라다니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어
내 눈을 심심치 않게 해주었다. 누워있는 여인의 모습과 비슷했던 와도는
여기서 보니 그저 그런 모습으로 보인다.

▲  수월봉에서 바라본 와도(왼쪽 섬)와 엉알해안, 당산봉

▲  수월봉 지붕에 자리한 수월정(수월봉 전망대)

수월봉 정상에는 8각형 모습의 수월정과 고산기상대가 자리해 있다. 수월정 서쪽은 벼랑으로
안전펜스가 설치되어 있는데, 여기가 제주도 본토에서 중원대륙과 가까운 곳이다. 우리가 장
차 점유하고 누려야될 중원대륙이 혹여 보일까 싶어 이마에 주름선이 간드러질 정도로 두 눈
을 부릅뜨고 서쪽을 노려봤으나 대륙은 보이지 않았다. 가깝다고는 하지만 실제 거리는 엄청
나다.
바닷바람은 일몰 후광에 힘입어 얼마나 매서운지 내가 날라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
이다.

제주올레길12코스 용수리~수월봉 구간을 일몰 바로 전에 도착하니 마치 수월봉을 모두 가지게
된 듯 무척 기뻤다. 허나 엉알해안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실수를 범했으니 하나를 얻고 하나
를 잃은 셈이 된다. 하여 나중에 또 와야되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허나 이런 곳은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중에 또 오고 싶은 아름다운 곳이다. 


▲  수월봉 지붕 남쪽에 자리한 고산기상대

▲  수월봉 정상에서 바라본 고산리 서남부와 신도리(대정읍) 지역
수월봉은 당산봉을 제외하고 주변이 온통 바다와 들판이라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의 품격은 우수하다.

▲  수월봉 정상에서 바라본 차귀도와 와도, 주름선을 진하게
보이며 뭍과 섬을 세차게 때려대는 남해바다

▲  수월봉 정상에서 바라본 와도와 엉알해안, 당산봉

수월봉을 둘러보니 어느덧 18시, 그날 목적한 곳을 모두 둘러보아 마음이 참 뿌듯하다. 수월
봉입구로 나오면서 앞서 지나쳤던 엉알해안을 잠시 거닐까도 했으나 땅꺼미가 자욱하여 언제
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내던지고 고산리로 움직였다.
바람의 섬인 제주도에 걸맞게 바다 바람이 얼마나 춥고 징한지 바람을 맞은 스마트폰 밧데리
가 순식간에 70%에서 0%로 떨어져 폰이 급 기절하는 참사까지 발생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
라 다소 당황했으나 이내 진정을 되찾고 길을 재촉했다.

고산리에서 제주도 급행버스 102번을 타고 모슬포(대정)로 나가 유명한 밀면집에서 저녁으로
시원한 밀면 1그릇을 섭취했다. 거기서 폰 충전을 꾀하니 잠시 혼절했던 폰이 다시 깨어난다.
이래서 먼 길을 갈 때는 무조건 폰 충전 케이블을 가지고 간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제주도 간선 202번을 타고 산방산(山房山) 서북쪽에 자리한 산방산탄산온
천을 찾았다.
요즘 숙박시설의 하나인 게스트하우스(게하)가 인기라 체험이나 해볼 겸 탄산온천에 딸린 게
하에서 하룻밤 머물렀는데, 말로만 듣던 8인용 도미토리 방에서 잠을 잤다. 숙박비도 모텔에
비해 많이 저렴했고 이곳 같은 경우는 온천 이용권 2장을 서비스로 주어 저녁과 아침에 뜨끈
한 온천물에 들어가 몸을 푹 끓이며 편하게 씻을 수 있는 잇점이 있다. 허나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방에서 잔다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다음날에는 돈 더 주고 마음 편하게
모텔에서 잤음)
내 듣기에는 같은 방에 자는 사람들끼리 술도 1잔 하고, 게하에서 자체적으로 저녁에 파티도
한다고 하나 파티 같은 경우 별도의 돈을 내야 되고, 몸도 완전 방전된 상태라 땡기지도 않는
다. 다행히 내가 잔 방은 딱 절반만 차서 번잡함은 별로 없었고, 다들 자는 분위기라 22시 넘
어서 잠을 청했다.

이렇게 하여 제주도 첫날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후 내용은 별도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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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7월 2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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