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132건

  1. 2022.08.16 충북의 한복판, 음성 겨울 나들이 (설성공원, 경호정, 미타사 지장대불, 가섭산 미타사의 설경)
  2. 2022.08.08 태백 검룡소, 구문소 여름 나들이 (금대봉골, 황지천)
  3. 2022.07.30 서울의 동쪽 지붕이자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거닐기 (아차산둘레길, 긴고랑계곡, 아차산4보루, 서울둘레길2코스)
  4. 2022.07.19 신라 왕릉 나들이, 경주 괘릉 (경주 원성왕릉)
  5. 2022.07.09 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성지이자 서울의 동쪽 지붕, 아차산 초여름 나들이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5보루, 아차산1보루)
  6. 2022.06.29 국립서울현충원 뒷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서달산 호국지장사
  7. 2022.06.20 전주한옥마을, 전주향교, 승암산 동고사, 문학대 겨울 나들이 (남천교, 한벽굴)
  8. 2022.06.13 옛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부여 늦겨울 나들이 (의열사, 금성산, 조왕사, 국립부여박물관, 궁남지와 서동공원)
  9. 2022.06.02 아름다운 숲길을 지닌 고즈넉한 산사, 정릉동 북한산 경국사 (경국사의 석가탄신일 풍경, 경국사 공양밥)
  10. 2021.08.20 한여름 산사 나들이, 남양주 불암산 불암사

충북의 한복판, 음성 겨울 나들이 (설성공원, 경호정, 미타사 지장대불, 가섭산 미타사의 설경)

음성 겨울 나들이 (경호정, 읍내리모전5층석탑, 미타사)



' 충북 음성 겨울 나들이 '

  음성 설성공원 경호정  
음성 읍내리 5층모전석탑

▲ 설성공원 경호정
◀ 음성 읍내리 5층모전석탑
▶ 미타사 지장대불
▼ 미타사 마애여래입상

미타사 지장대불
  미타사 마애여래입상  

 


 

겨울 제국(帝國)의 차디찬 한복판인 2월의 첫 무렵, 충북 음성(陰城)을 찾았다. 내 마음도
모르고 수북하게 쌓여만 가는 미답처(未踏處)를 하나라도 더 지우고자 수도권과 가까운 적
당한 메뉴를 물색하다가 충북 음성에서 격하게 반응을 보여 그곳으로 길을 정했다.
충북 한복판에 자리한 음성군은 오래전에 1번 지나간 것이 전부일 정도로 지지리도 인연이
없던 곳이다. 하여 고려시대 마애불을 간직한 미타사를 비롯한 음성의 여러 소소한 명소를
둘러보며 그동안의 부족한 인연을 조금 채워보기로 했다.

햇님이 아직 등청하지 않은 이른 아침에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동서울터미널로 달려갔
다. 거기서 음성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1시간 40분 정도를 달려 음성읍의 관문인 음성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음성에 이르니 새벽까지 눈이 왔는지 천하가 온통 은빛세계였다.

음성터미널에서 미타사가 있는 비산리(碑山里) 방면 군내버스 시간을 확인하니 무려 1시간
20분 뒤에 차가 있다. (시외직행버스도 비산리에 정차하나 그것까지는 미처 몰랐음;) 그래
서 시간이나 때울 겸 터미널과 가까운 설성공원을 찾았다. 이곳은 미타사 후식용으로 보려
고 했던 곳인데, 버스 시간 관계로 후식을 먼저 맛보게 되었다.


 

♠  음성읍내의 소중한 휴식처, 경호정과 3층석탑 등을 간직한
음성 설성공원(雪城公園)

▲  설성공원의 중심인 경호정

음성터미널과 가까운 음성읍내 한복판에 설성공원이 자리해 있다. 이 공원은 음성읍민의 포근
한 휴식처이자 설성문화제, 음성품바축제 등이 열리는 지역 축제의 장으로 공원의 꽃인 경호
정을 비롯하여 3층석탑, 독립기념비, 이무영(李無影)문학비, 야외음악당, 음성청소년문화의집
, 음성군 향토민속자료전시관 등을 갖추고 있다.

공원 이름인 설성(雪城)은 음성의 다른 이름으로 고려 때 잠시 쓰였다. 지역 축제도 그 이름
을 따서 설성문화제라 했으며, 음성을 상징하는 옛 이름으로 서서히 되살아나고 있다. 
공원 북부에는 테니스장과 게이트볼장, 야외음악당 등이 자리해 있는데, 매년 5월에는 이 음
악당에서 음성품바축제가 열린다. 그리고 공원 남부에는 동그란 연못과 경호정, 읍내리3층석
탑, 음성청소년문화의집, 음성군 향토민속자료전시관 등이 자리잡고 있다.

공원 면적은 27,669㎡(8,370평)로 공원 동쪽에 음성천이 음성의 산하를 촉촉이 어루만지고 있
으며, 공원 내에 쉼터와 의자가 넉넉히 깔려있고, 경호정과 읍내리3층석탑, 읍내리5층모전석
탑 등 볼거리도 풍부해 음성 나들이 때 꼭 들려볼 만하다. 겉보기에는 시내에 흔한 공원처럼
보여 발길이 잘 가지 않겠지만 속은 제법 알찬 것이다.


▲  경호정과 얼어붙은 연못

설성공원의 갑(甲)은 뭐니뭐니해도 경호정이다. 공원 남쪽에 1,500평의 연못을 파고, 그 중심
에 200평 정도의 섬을 띄웠는데, 그 섬에 경호정과 읍내리3층석탑, 독립기념비를 두었다. 비
록 자연산은 아니지만 섬을 구경하기 힘든 음성 땅의 거의 유일한 섬으로 경호정과 어우러져
상큼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으며, 섬 서쪽과 동쪽에 속세와 섬을 잇는 돌다리를 놓아 운치를
더욱 우려낸다. 거기에 공원의 이름값을 하는 듯, 눈까지 깔려있으니 정말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  경호정(景湖亭) -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9호

돌다리를 건너 섬으로 들어서면 경호정이 반갑게 마중을 한다. 경호정은 정면과 측면이 2칸인
팔작지붕 정자로 1934년에 지어졌다. 당시 이름은 인풍정(仁風亭)으로 1955년에 음성군수 민
찬식이 중건해 경호정으로 이름을 갈았으며, 1997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했다. 그리고 그
해 4월 중건기(重建記)를 작성하여 정자 내부에 걸었다.

경호정은 정확히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연못 중간 섬에 자리해 있고, 사방이 개방된 형
태라 늘 시원한 바람이 앞다투어 머문다.

▲  경호정 동쪽 돌다리

▲  경호정 서쪽 돌다리


▲  독립기념비와 음성 읍내리3층석탑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129호

경호정 맞은편에는 독립기념비와 음성 읍내리3층석탑이 경호정을 바라보며 서 있다. 독립기념
비는 1945년 8월 해방을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지어진 지 80년도 되지 않은 젊은 비석이나 비
석 머리 부분에 검은 때가 가득하여 마치 몇백 년 묵은 비석처럼 고색의 멋을 풍긴다.

그런 독립기념비 옆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읍내리3층석탑이 있다. 그는 높이 2.4m로 읍내
부근 평곡리 절터에 있던 것을 1934년에 현재 자리로 가져와 경호정의 장식물로 삼았다.
1층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얹힌 형태로 지붕돌은 밑면에 3단 받침을 두었고, 지
붕돌 귀퉁이는 아주 살짝 들려져 있으며, 3층 위에는 연꽃 모양의 머리장식을 두었는데,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적지 않은 나이를 지녔지만 아직까지는 별다른 손상이 없이
무탈한 모습을 보인다.


▲  음성 읍내리 5층모전석탑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9호

경호정에서 남쪽으로 가면 음성군 향토민속자료전시관이 나오는데, 그 옆구리에 음성에서 가
장 늙은 탑인 읍내리5층모전석탑이 자리해 있다.
모전탑(模塼塔)이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은 것으로 벽돌로 쌓은 전탑(塼塔)과 조
금 비슷하다. 돌을 다듬어서 만든 석탑은 매우 흔하나 전탑과 모전탑은 거의 흔치 않은 존재
로 전탑의 성지(聖地)로 일컬어지는 경북 안동(安東)과 영양(英陽), 의성(義城), 경주(慶州)
지역에 간간히 남아있을 뿐이다.

이 모전탑은 원래 음성향교 부근 교동(校洞) 절터<'읍내리 사지(寺址)'라고도 함>에 있던 것
으로 1946년 수봉초교 교장인 이철세가 학교 교내로 옮긴 것을 1995년 현재 자리에 안착시켰
다. 탑이 있던 교동 절터는 고려 중기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탑의 구조를 보면 땅에 네모난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1층 기단과 5층 탑신을 차례대로 올렸
는데, 2층과 5층 탑신의 몸돌은 없어진 상태이며, 1층 탑신 4면에는 얇게 감실(龕室)을 팠다.
지붕돌은 위와 아랫면 모두 전탑처럼 층단을 이루고 있고, 네 귀퉁이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
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탑의 조성시기는 고려 초~중기로 여겨지며, 안동 지역 모전탑의 영향
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탑 옆에는 비석의 아랫도리인 비좌(碑座)가 누워있는데, 대머리처럼 허전한 모습으로
오래전에 가출한 비신(碑身)을 애타게 기다린다.


▲  읍내리 5층모전석탑과 성문처럼 생긴 음성군 향토민속자료전시관

5층모전석탑 옆에 자리한 음성군 향토민속자료전시관은 음성 군립(郡立) 박물관으로 1994년 4
월에 문을 열었다. 소장 유물은 950점 정도로 음성의 역사와 문화, 생활, 민속을 아낌없이 담
고 있지만 아직까진 인지도가 낮아 관람객은 별로 없다. 내가 들어선 시간은 주말 낮 11시였
는데, 관람객은 나홀로 뿐이었다.

전시관 1층(향토역사실)은 음성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테마로 관련 자료와 사진, 디오라마 등
을 전시하고 있으며, 음성 지역의 지정문화재와 향토문화재를 축소 재현한 것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2층(민속유물실)은 음성의 풍습과 민속, 농민문학가 이무영을 테마로 관련 자료와 사
진, 이무영의 작품과 유품 등을 두었으며, 전시관에 대한 내용은 이쯤에서 선을 긋는다.

* 설성공원 소재지 -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 향토자료전시관 소재지 -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817-12 (설성공원길 10-7 ☎ 043-
  871-5931)


 

♠  가섭산 미타사(迦葉山 彌陀寺) 아랫 구역
(느티나무, 지장대불, 마애여래입상)

▲  미타사로 인도하는 소이로61번길
저 멀리 금동 피부의 지장대불이 보인다


설성공원을 둘러보고 음성터미널로 돌아오니 비산리를 경유하여 후미리로 가는 음성군내버스
가 막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일요일 낮시간이라 승객은 노인 2명 뿐, 그 상태로 버스는 외마디 부릉소리를 터미널에 남기
며 육중한 바퀴를 움직인다. 음성읍내를 돌아 음성향교 고개를 넘어 10분 정도 가니 왼쪽 창
밖으로 미치도록 거대한 불상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것은 바로 미타사 금동지장대불로 천하에
서 가장 큰 지장보살상(높이 41m)이라 멀리서도 제법 크게 보인다.

버스는 비산1리 정류장을 지나 비산4거리에 이르렀는데, 운전사에게 미타사 길을 문의하니 여
기서 내리라고 그런다. 하여 버스에서 내려 충청대로를 건너 미타사로 인도하는 소이로61번길
로 들어섰다.


▲  미타사입구에 자리한 비선거리 느티나무 - 음성군 보호수 3-14호

비산리 미타사입구에서 미타사로 걸음을 재촉하면 제일 먼저 늙은 느티나무가 발길을 붙잡는
다.
이 나무는 2004년에 음성군 보호수로 지정된 것으로 그때 추정 나이가 약 20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20년 가량이 보태져 대략 220년 정도 된다. 높이는 10m, 둘레 130cm로 미타사에서 관
리하고 있으며, 겨울 제국에게 몽땅 털린 초췌한 모습으로 간절하게 봄의 해방군을 염원한다.

나무 그늘에는 구름무늬 이수(螭首)를 갖춘 오래된 비석 2기가 멀뚱히 서 있는데, 이들은 조
선 후기에 음성 고을을 다스렸던 음성목사(牧使, 현재 군수나 시장) 엄씨와 이씨의 송덕비(頌
德碑)이다. 이들 비석 때문에 이곳을 이 땅에 흔한 지명의 하나인 '비석거리'라 불리게 되었
으며, 그것이 1글자 와전되어 지금은 '비선거리'라 불린다.


▲  후평소류지(구룡연)와 구생범종루(사진 왼쪽 누각)
하얀 눈옷을 걸친 나무들이 호수를 거울 삼아 겨울에 지친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느티나무를 지나면 미타사에서 운영하는 밝은언덕노인요양원과 추모공원(가족납골공원)을 관
리하는 건물이 나온다. 미타사 길은 여기서 동쪽으로 크게 구부러지며 그 옆에 후평소류지(비
산소류지)라 불리는 저수지가 그림 같은 풍경을 드리운다. 미타사에서는 그를 구룡연(九龍淵)
이라 부르고 있는데, 원래는 농지로 이곳에 큰 샘터가 있었다.
이후 1970년대에 농사를 위해 버들골을 막아서 소류지(沼溜地)를 만들었으며, 지금의 절이 있
도록 도와준 비산1리 마을 사람들을 위해 미타사에서 공사 비용을 많이 내주었다.

후평소류지 북쪽에는 2층 규모의 팔작지붕 누각이 있다. 그는 범종(梵鍾)을 품고 있는데, 그
냥 범종루(梵鍾樓)도 아닌 무려 중생을 구한다는 뜻의 '구생(求生)범종루'를 칭하고 있다. 범
종루에 안긴 범종은 2001년에 주지 명안(明岸)이 미타사를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한 지장성지
로 다지는 차원에서 마련한 것으로 범종의 높이는 3.3m, 두께 20cm, 지름 2.1m, 무게 18톤에
청동범종이다.

2006년에 명안이 입적하자 2007년 그의 열반일에 맞춰 범종루를 완성시키며 그를 기리는 회향
(回向) 타종식을 가졌다.


▲  천하 최대의 지장보살상으로 명성이 높은 지장대불(地藏大佛)

구생범종루 북쪽에는 지장대불을 중심으로 한 추모공원이 넓게 닦여져 있다. 이곳은 2001년에
주지 명안이 진공당 탄성(眞空堂 呑性)과 쌍계사(雙磎寺)의 조실(祖室)인 고산(高山)의 도움
으로 만든 것으로 이 일대에 있던 밭과 평평한 모습의 마당바위를 밀어버리고 자리를 닦았다.

공원 북부에는 금동으로 치장된 지장대불이 육환장(六環杖)을 쥐어들고 장엄한 모습으로 납골
당 영가(靈駕)들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의 높이는 불교에서 좋아하는 숫자인 108척(41m)으로
1998년 4월에 짓기 시작하여 2000년 10월에 완성을 보았으며, 천하에서 가장 큰 지장보살상으
로 미타사의 자부심이 담긴 큰 보살상이자 듬직한 후광(後光)이다.
그가 어찌나 크던지 멀리 충청대로에서도 시야에 보이며, 그 앞에 서면 정말 주눅이 잔뜩 들
정도이다. 특히 거구의 지장보살이 서 있는 연화대(蓮花臺)도 그 덩치에 못지 않게 상당하여
높이가 3m에 이르며, 그 밑의 기단석에는 사천왕(四天王)과 팔부중(八部衆) 등의 여러 호법신
(護法神)들이 새겨져 영가들을 보살피는데 정신이 없는 지장보살을 지킨다.

참고로 이 자리는 백룡이 여의주를 품은 최고의 명당(明堂)이라고 한다. 뒤에는 가섭산의 오
색비단 장막이, 동에는 좌청룡, 서에는 우백호가 지켜주고 탁트인 남쪽에는 여의주가 뚜렷하
다는 것이다.

▲  동쪽에서 바라본 지장대불

▲  지장대불의 연화대와 기단부


▲  그윽한 설경에 미타사 숲길 (미타사 마애불 남쪽)

▲  미타사 마애여래입상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130호

지장대불을 지나면 설경에 잠긴 오르막 숲길이 잔잔한 감동의 물결을 선사한다. 푸른 나뭇잎
대신 하얀 눈꽃을 가득 머금으며 순백의 아름다움이 어떤지를 잘 보여주는 그 숲길을 조금 오
르면 미타사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자 옛 미타사의 오롯한 흔적인 마애여래입상이 보호각의 보
호를 받으며 중생을 맞이한다.

미타사 마애불은 마치 현신하듯 바위에 진하게 새겨져 있다. 높이는 405cm로 머리에는 무견정
상(無見頂相)이 두툼히 솟아있으며, 머리 스타일은 민머리이다. 눈은 지워진 듯 보이지 않고,
코는 형태만 남아있으며, 입도 그 형태만 있다. 볼살은 두터워 보이고, 얼굴 양쪽에 달린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청력 하나는 정말 대단할 것 같다.
어깨는 유연하며,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고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제스쳐를 취했다. 옷은 왼
쪽 어깨를 시작으로 발까지 덮고 있고, 주름은 사선으로 흐르고 있으며, 형식화된 신체 표현,
직선적인 윤곽,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 옷주름과 옷자락에서 신라 후기 불상 양식을 따른 고
려 중기 마애불로 여겨진다.

마애불의 보호를 위해 2002년에 맞배지붕 보호각을 씌워 눈과 비를 막아주고 있으며, 보호각
이 사방으로 뚫린 오픈식이라 답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불상 앞에는 예를 올리는 공간이 있는
데, 하얀 눈이 가득 입혀져 있어 예를 표하지는 못했다.


▲  멀리서 바라본 미타사 마애여래입상과 그의 조촐한 거처

▲  표정을 잃어버린 듯한 마애여래입상
눈과 눈썹은 거의 지워졌고, 코와 입, 귀만 형식적으로 남아있다.


 

♠  미타사 경내


▲  미타사 경내 직전 (돌담길)

마애불에서 각박한 경사의 오르막길을 한 굽이 오르면 가섭산(해발 710m) 동남쪽 자락에 안긴
미타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미타사는 이 땅에 아주 흔한 절 이름의 하나로 서울에만 보문동(普門洞), 옥수동(玉水洞), 개
화동(開花洞)에 오래된 미타사가 있다. 미타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뜻하며, 아미타불의 절
이 바로 미타사가 된다.

음성 미타사는 옛 절터에 지어진 것으로 조계종(曹溪宗) 소속의 비구니 수행도량이다. 미타사
란 이름은 1964년 창건 이후에 붙여진 것으로 옛 이름은 유룡사(有龍寺)라고 하나 확실한 것
은 없다.
630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지만 신빙성은 없으며, 876년에 도선국사가 중창하고, 1370
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창했다고 하지만 이 역시 심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하지만
경내에 고려 후기 석불이, 경내 밑에 고려 중기 마애불이 있고, 절터에서 고려 때 기와조각과
분청사기, 백자 파편, 금동불상 등이 출토되고 있어 적어도 고려 초~중기에 문을 연 것은 확
실하다.

1584년에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절을 중건했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36년 병자
호란 때 각성(覺性)이 의병 3천으로 청나라군을 물리친 공로로 그의 소망에 따라 절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허나 1724년(또는 1723년) 화재로 파괴되면서 오랫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이후 마애불만 속세에 드러낸 채, 간신히 터만 남아있다가 19세기에 비산리에 살던 만석꾼 경
주최씨가 '나를 좀 꺼내줘' 외치는 불상 꿈을 꾸고 땅을 파서 석불을 발견했다. 그것이 인연
이 되어 경주최씨는 아들을 얻었고, 그 소문이 퍼지면서 석불은 동네 사람들의 우상이 되었다.
허나 불상의 적당한 거처를 만들진 못하고 김치광처럼 앞가림을 하거나 토굴을 만들어 봉안했
으며, 경주최씨 일가에서 계속 불상을 관리했다.

1964년 인근 충주에 사는 어느 무당이 석불을 가져가려고 인부를 동원했으나 불상이 이상하게
도 너무 무거워서 하루 동안 겨우 지장대불 밑에 있는 비산소류지 밖에 가지 못했다. 그 소식
을 들은 동네 사람들은 죄다 몰려가 무당을 쫓아내고 불상을 되찾았는데, 이상하게도 불상이
가벼워져 금방 제자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해 예산 수덕사(修德寺)에 있던 비구니 명안은 음성에 왔다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이
곳 절터의 존재와 무당 사건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의 안내로 절터를 답사하게 되었는데, 석
불 관리인인 경주최씨 일가 최봉락은 그에게 석불을 모시며 이곳에 머물러 줄 것을 부탁했다.
그래서 일단 땅 주인이 절터에 지은 원두막을 대충 손질하여 머물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명안에게 머물 곳과 먹을 거리를 지원해주었고, 같이 절을 짓기로 의견을 모았
다. 하여 명안과 마을 사람들은 '미타사 창건 기성회'를 조직하여 가가호호 돈을 모으고, 일
일이 공사 자재를 짊어지며 집을 지어 1965년 4월, 8칸의 법당과 산신각이 지어졌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미타사의 시작으로 다른 절과 달리 온 마을 사람들이 나서 절을 지은 점
이 특이하다. 이는 마을 사람들이 석불을 수호신으로 무척 애지중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
당이 석불을 몰래 빼돌리려는 사건까지 터졌으니 더욱 그렇다. 하여 이곳에 온 명안에게 석불
봉안을 부탁하고 절까지 지어준 것이며, 석불과 운 덕분에 수덕사 비구니의 일원이었던 명안
은 자기 이름으로 절을 운영하게 되었다.

1965년 절 창건 당시 고려시대 기와조각과 분청사기, 백자 조각 등이 출토되었으며, 1973년에
는 고려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금동불이 나왔고, 1976년에는 대형 맷돌이 나오기도 하
여 옛 절의 위엄을 어느 정도 가늠하게 해준다.
1979년에는 법당인 극락전과 삼성각을 세웠고, 1980년에 선방과 3층석탑을 세웠으며, 납골당
사업에도 손을 뻗쳐 2001년에 추모공원과 지장대불, 구생범종루 등을 만드는 등, 나날이 사세
를 확장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절을 꾸리게 된 명안 이정화(李貞和)는 2006년에 입적했는데, 다비식
(茶毘式)을 하자 연꽃 봉오리 모양의 사리가 나왔다. 현재는 그의 제자인 희원이 주지로 있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약사전, 선방 등 6~7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절
입구에 지장대불과 관련 건물, 복지시설인 밝은언덕노인요양원 등이 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
는 지방문화재인 마애여래입상을 비롯해 지금의 절을 있게 해준 석조여래좌상, 대형 맷돌 등
이 전하고 있으며, 고색의 내음은 채 익지도 못했지만 첩첩한 산자락에 묻힌 산사(山寺)로 경
내가 정갈하고 깔끔하다.


▲  미타사 경내 (대광명세존진신 사리탑과 극락전)

돌담길을 지나면 경내의 중심인 극락전(極樂殿)이 나온다. 극락전 뜨락에는 특이하게도 6각형
을 띈 날씬한 모습의 3층석탑이 서 있는데, 탑의 이름이 무려 '대광명세존진신사리탑'으로 그
이름 그대로 부처의 사리를 머금고 있다.
탑에 봉안된 사리는 인도의 네루 수상이 영국 대영박물관에서 찾아온 것으로 미얀마 만다래힐
사원에 전달했다. 만다래힐 주지승은 이중 3과를 조계종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인 일타에게
주었고, 일타는 다시 미타사에 기증했다. 이에 미타사는 1992년 사리를 봉안할 탑을 만들어
봉안함으로서 부처의 사리를 보유한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탑의 구조는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2중의 기단을 얹혔으며, 4기의 석사자를 모서리에 두어 3
층 탑신을 지탱한다. 그리고 탑 꼭대기에는 보륜(寶輪) 등을 갖추며 탑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피부가 하얗고 탱탱하지만 100~200년에 시간이 지나면 20세기 후반
을 대표하는 석탑의 하나로 크게 다뤄질지도 모른다.


▲  미타사의 법당인 극락전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9년에 새로 지었다. 지붕이 건물의 무려
⅔를 차지할 정도로 너무 육중한 탓에 건물이 꽤 커 보이며, 내부에는 1965년에 조성된 석가
여래상과 아미타여래좌상,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절의 창건주인 명안(이정화)의 영정이 봉
안되어 있다.

극락전 자리에는 원래 오래된 돌배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무를 베려고
연장질을 하면 사람들이 계속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통에 나무에 귀신이 있는 것으로 여겨 아
무도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미타사 주지 명안은 우리가 나무를 처리할테니 연장을
빌려달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청했으나 빌려주는 사람까지 해를 입을까봐 아무도 호응하지 않
았다.
하여 명안은 나무에 제를 지내 절을 지키는 옹호신장이 되어줄 것을 청했고, 연장을 빌려 나
무를 건드리니 글쎄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한다. 20세기 한복판에 옛날에나 있을 법한 일이 있
었다니 정말 고개가 갸우뚱할 따름이다.

▲  극락전 아미타3존상

▲  미타사의 창건주 명안의 진영

▲  청기와를 눌러쓴 요사(寮舍)
종무소의 역할도 겸하고 있으며, 지하에는
공양간이 있다.

▲  눈이 잔잔히 입혀진 얼어붙은 샘터
겨울에게 털린 물지갑을 쥐어든 동자상의
뻘쭘함은 언제쯤이나 끌날까?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극락전 뒷쪽 좌측에는 삼성각이 높이 들어앉아 경내를 굽어본다.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
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79년 기존의 산신각을 부시고 새로 만들었으며, 칠성탱을 중심으로
산신탱과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  등장 인물로 빼곡한 칠성탱

▲  산신과 호랑이, 동자 등이 그려진 산신탱

  독성(나반존자)과 동자, 천태산이
그려진 독성탱

  극락전 옆구리에 자리한
약사전(藥師殿)


▲  약사전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

극락전 우측에 자리한 약사전은 동방정토(東方淨土)의 주인인 약사여래(藥師如來)의 보금자리
로 절터에서 나온 석불을 약사여래로 삼아 봉안하고 있다.

1724년(1723년) 절이 화재로 붕괴되자 그 충격으로 머리와 양손을 잃은 채, 지옥보다 더 어두
컴컴한 땅속에 갇혀 기나긴 외로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에 비산리에 사는 경주최
씨의 꿈속에 나타나 꺼내달라고 애원하면서 그의 의해 비로소 다시 속세로 나오게 된다.
당시 경주최씨는 마을의 부호(富戶)였으나 불상을 관리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그냥 노천
에 김치광처럼 덮개를 씌우거나 토굴을 파서 봉안을 했고, 그 후손인 최봉락이 비구니 명안에
게 이 절터와 석불을 보여주면서 석불을 모시고 살 것을 권해 지금의 미타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사라진 양손과 머리는 1964년에 새로 만들어 끼었으며, 왼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있는 점이 약
사여래로 여겨져 약사전을 짓고 그 건물의 주인으로 삼았다. 석불 높이는 90cm, 어깨폭 50cm
이며,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후기로 여겨져 절 밑에 있는 마애여래입상 다음으로 오래된
존재이다.

석불의 머리와 손은 새로 했기 때문에 세월의 고된 때로 자욱한 기존 부분과 확연히 색깔 차
이가 난다. 하얀 얼굴에는 미소가 환하게 번져 있고, 몸에 걸친 통견(通肩)은 마치 겨울에 조
성된 듯 매우 두꺼워 보인다. 그리고 아랫도리는 너무 작게 표현되어 윗도리와 아랫도리의 균
형이 지나치게 떨어진다.

이렇게 미타사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다시 속세로 나왔다. 솔직히 경내 밑에 자리한 마애불이
땡겨서 이곳에 온 것이지 미타사 자체에 반응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니다. 아무리 늙은 절터에
다시 세웠다 한들, 지금의 미타사는 분명 새 절이기 때문이다.
마애불의 인도로 찾아온 미타사. 거기에 겨울 제국이 폭풍처럼 선사한 눈이 천하를 순백으로
채색하면서 산사의 그윽한 설경까지 이리 챙기니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와 마음이
싹 정화되는 것 같다.

이렇게 하여 한겨울 음성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미타사 소재지 :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 (소이로61번길164 ☎ 043-872-0522)
* 미타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미타사를 뒤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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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 검룡소, 구문소 여름 나들이 (금대봉골, 황지천)

태백 검룡소, 구문소



' 태백 검룡소, 구문소 여름 나들이 '

태백 검룡소
▲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

태백 구문소 검룡소 숲길

▲  태백 구문소

▲  검룡소 숲길

 



 

1년의 절반이 뉘엿뉘엿 저물던 6월의 끝 무렵, 태백산맥 한복판에 자리한 고원(高原)의
도시, 태백(太白)을 찾았다.

아침 일찍, 청량리역에서 동해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3시간 반을 달려 태백역에
도착, 여기서 일행을 만나 택시를 잡아타고 20분 정도를 달려 태백시 북쪽 끝에 자리한
검룡소로 들어갔다.



 

♠  한강의 고향이자 발원지, 태백 검룡소(儉龍沼) - 명승 73호

▲  한강의 발원지임을 강조하는 검룡소 표석

대덕산(大德山, 1307m)과 금대봉(金臺峰, 1418m) 사이 골짜기(금대봉골)에 묻힌 검룡소는 한
강의 고향이자 발원지로 유명하다. 정확히는 남한강(南漢江)의 시작점으로 여기서 작은 계곡
으로 시작된 물줄기는 점차 하천, 강으로 몸집을 불리며 정선과 평창, 영월, 단양, 충주, 여
주, 양평, 남양주, 서울, 고양을 거쳐 서해바다로 흘러간다.
한강의 길이는 약 514.4km로 잃어버린 땅을 제외한 이 땅에서 낙동강(洛東江) 다음으로 길며,
1987년 국립지리원(국토지리정보원)에서 도상실측 결과 검룡소를 최장 발원지로 공식 인정했
다.

검룡소는 1억 5천만 년 전, 백악기(白堊紀)에 형성된 석회암동굴 소(沼)로 매일 2,000~3,000
톤의 지하수를 내뿜고 있으며, 수온(水溫)은 4계절 모두 9도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작은 계
단식 폭포가 20m 이상 줄지어 있고, 깊이 1~1.5m, 폭 1~2m 정도로 암반이 파여 그곳으로 물이
흐르는데 그 모습이 마치 용틀임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옛 사람들이 그 모습에 맞게 적
당한 전설을 지어 붙이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아가던 어느 옛날, 서해바다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려고 한강 물줄기
를 열심히 거슬러 올라갔다. 한참을 가다 보니 어느덧 종점인 검룡소에 이르렀는데, 더 갈 곳
이 없어 몸부림을 치니 그 흔적이 바로 검룡소 폭포라는 것이다.
이후 이곳에 살면서 목이 말라서 찾아온 소를 잡아먹는 등, 말썽을 피우자 열받은 동네 사람
들이 소를 메워버렸다고 한다. 전설이야 어쨌든 소(못)가 메워진 것은 사실이며 1986년에 태
백문화원에서 메워진 못을 복원하고 주변을 정비해 예전의 모습을 거의 되찾았다.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는 일이 거의 없으며 늘 비슷한 양의 물이 나와 한강수를 채
우니 자못 신기하기 그지 없다.

참고로 태백은 한강 뿐만 아니라 낙동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태백시내에 있는 황지(黃池)가
낙동강의 시작점으로 천하의 큰 물줄기 2개가 태백을 고향으로 하고 있으니 태백산 그늘에 자
리한 태백이 예사로운 지역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주차장에서 검룡소까지 20~25분 정도 걸리며 탐방로가 잘 닦여져 있다. 중간에 대덕산으로 이
어지는 산길이 있으며 문화재 및 상수원 보호구역이라 검룡소와 계곡(금대봉골) 주변은 출입
이 통제되어 있다. 또한 검룡소는 태백산국립공원의 일원이기도 하다.


▲  검룡소 숲길에 들어서다.

검룡소 일대는 숲이 매우 빽빽하다. 예사롭지 않은 계곡과 못(소), 그리고 완전 청정한 대기
와 계곡물까지 갖추고 있어 도끼자루가 금방 썩어난다는 난가(爛柯) 속 세상은 바로 이런 곳
이 아닐까 싶다. 이런 곳이라면 신선이나 선녀(仙女) 누님이 살아도 이상할 것은 없다.


▲  늘씬하게 솟아나 하늘을 찌르는 나무들
이곳의 맑은 기운을 맡으니 잠시나마 10년은 젊어진 것 같다.
(무심한 세월에 언제나 고통받는 우리네 인생 ㅠㅠ)

▲  하늘도 쌈 싸 먹을 정도로 깊게 우거진 검룡소 숲
숲이 얼마나 빽빽한지 한낮에도 거의 어두울 정도이다.

▲  검룡소의 깊은 숲속으로 ①

▲  검룡소의 깊은 숲속으로 ②

▲  숲 사이로 보이는 금대봉골(검룡소계곡)
계곡 일대는 금지 구역으로 꽁꽁 묶여있다. 그러니 계곡과 자연이
고통받지 않도록 멋대로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한다.

▲  푸른 이끼가 두텁게 낀 금대봉골
따닥따닥 붙은 푸른 물이끼는 이곳이 때묻지 않은 청정한 곳임을 보여준다.

▲  하늘의 조그만 거울 같은 금대봉골
하늘과 지나가는 구름, 햇님, 달님, 주변 수목들이 앞다투어 거울로 삼으며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  검룡소 나무데크길
나무데크길을 닦은 것은 탐방과 이동 편의도 있지만 흙과 식물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목적도 있다. 저들을 닦음으로써 흙과 그 흙에 의지한 식물들이 인간의 발에서
다소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대신 데크길 관리는 철저히 해야됨)

▲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한강의 원초적 고향, 검룡소

검룡소 탐방로의 끝에는 이곳의 중심인 검룡소가 있다. 이곳은 해발 900~950m대 고지로 검룡
소를 이루는 저 조그만 폭포와 개울에서 한강이 거룩하게 시작된다. 저 작은 물줄기가 내가
살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까지 간다니 참으로 신기하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곳은 탐방로의 끝으로 더 이상 길은 없으며 검룡소를 비롯한 탐방로 바깥은 금지된 공간이
라 넘어가서는 안된다.


▲  확대해서 바라본 검룡소

▲  금대봉골을 가로지르는 나무데크 다리 (검룡소 직전)

이렇게 검룡소를 둘러보고 다시 주차장으로 나왔다. 한강과 관련된 검룡소를 봤으니 이제 낙
동강과 관련된 현장을 보는 것이 딱 적당할 것이다. 낙동강은 앞서 이른데로 태백 도심인 황
지에서 시작되는데 황지는 여러 번 인연을 지었던 곳이라 그리 땡기지가 않아서 그곳 대신 태
백 남쪽 끝에 자리한 구문소를 찾기로 했다.

검룡소에서 구문소까지는 태백 땅을 완전 남북으로 가로질러 가야되는데 시내까지 가는 버스
편도 여의치 않아 앞서 탔던 택시를 소환하여 가기로 했다. (택시 운전사가 연락처를 알려주
고 갔음)
하여 택시를 부르니 거의 20분 만에 나타났고, 그를 타고 남쪽으로 40분 가까이를 달려 구문
소에 이르렀다.

* 검룡소 소재지 :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산1-1 (☎ 033-550-2828)



 

♠  낙동강이 오랜 세월 빚은 작품, 고생대의 환경과 지형에 대해
아낌없이 해답을 주는 태백 구문소(求門沼) - 천연기념물 417호

▲  거대한 돌문과 깊은 못으로 이루어진 구문소

태백 구문소는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의 최상류, 황지천과 통리(通里) 서쪽 산자락에서 시작
된 철암천(鐵岩川)이 만나는 곳이다. 석회동굴이 땅 위에 드러난 커다란 동굴로 '구문'은 구
멍, 굴의 강원도 방언이며 '구무소'라 불리기도 한다.

구문소를 이루는 석회암에는 건열, 물결의 자국, 소금 흔적 등의 퇴적구조와 삼엽충(三葉蟲),
완족류(完足類), 두족류(頭足類) 등의 옛 생물들의 화석(化石)이 나오고 있어 하부 고생대의
퇴적환경과 생물상을 살펴 볼 수 있다. 또한 구문소 동굴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산이 황지천
(낙동강) 물줄기에 의해 뚫린 굴로 하천 물길의 변천을 연구하기에 아주 그만이며 주변 암벽
등과 함께 침식지형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해발 550m에 자리한 이곳은 약 5억년 전에는 적도 부근 바다였다고 하며 한반도의 고향이 어
디였는지를 알려주는 현장으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천천(穿川, 구멍 뚫린 하
천)'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어 오래전부터 적지 않게 존재감이 있던 곳이다.

구문소 서쪽과 동쪽에는 마치 단단한 성벽처럼 깎아지른 벼랑이 있으며, 서쪽 벼랑 밑도리에
도 굴이 있다. 허나 그 굴은 사람과 차량 통행을 위해 인간이 뚫은 것으로 그 앞에 콘크리트
덩어리가 두텁게 깔려져 적지 않게 옥의 티를 선사한다.
지금이야 우회도로가 생겨 차량 통행이 많이 줄었지만 예전에는 태백에서 석포, 봉화(奉化)로
넘어가는 길은 여기 밖에 없었다. 그래서 부득이 이곳에 굴을 뚫고 콘크리트 길을 깐 것이다.
(지금은 태백시내, 장성 방향만 통행 가능, 반대 방향은 서쪽 동점터널을 이용해야 됨)


▲  구문소에 있는 2개의 굴 (왼쪽은 차량 통행을 위해 인공으로 뚫은 굴)

구문소의 신비로운 절경에 대한 탄성 만큼이나 구문소에 얽힌 전설도 참 많다.
① 구문소는 수심이 깊어 자살하는 사람이 종종 있었는데 그러면 며칠 안에 꼭 비가 내려 자
살한 이의 부정함을 말끔히 씻는다고 한다.

② 안동(安東)에 영호루(映湖樓)를 지을 때, 대들보로 쓸 싸리나무를 화전동 싸리밭골에서 구
해 황지천에 띄워 운반하던 중, 갑작스러운 홍수로 급류에 휩쓸리며 정신없이 떠내려가다 이
곳 절벽을 세게 때리면서 그 충격으로 큰 구멍이 뚫렸다고 한다. 그래서 부근으로 우회하던
황지천의 물줄기가 이 구멍으로 흐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천 유수에 의해 구문소가 형성되었
음을 보여주는 전설임)

③ 온 세상이 거의 워터월드였던 초고대 시절, 중원대륙(서토) 고대 전설에 나오는 하우씨(夏
禹氏)가 이곳에 와서 칼을 내리치니 그 충격으로 물이 모두 빠져 태백 지역은 비로소 바다 위
로 솟아났다고 한다. <중원대륙 모화사상(慕華思想)에 빠진 어느 생각 없는 선비나 유생이 지
어낸 것으로 여겨짐>

④ 구문소에 구멍이 뚫리기 전, 석벽(石壁)을 사이에 두고 동쪽 철암천(鐵岩川) 큰 소(沼)에
청룡이 살고 있었고, 서쪽 황지천에는 백룡(白龍)이 있었다. 그들은 낙동강의 지배권을 두고
항상 티격태격 싸웠으나 좀처럼 승부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백룡이 편법으로 석벽 밑에 굴
을 파고는 석벽 꼭대기에서 싸우는 척 하다가 그 굴로 청룡을 기습하여 몰아냈는데 그 여세를
몰아 하늘로 승천했다고 한다.
그가 승천할 때 지나친 산을 '용우이산'이라고 하며 바로 구문소 앞에 솟은 산이다. <경치가
멋드러진 곳의 전설에는 선녀나 신선, 용이 단골로 등장한다>

⑤ 옛날에 이곳에서 고기를 잡아 생활하던 엄종한(嚴宗漢)이란 어부가 있었다. 하루는 구문소
에 쳐놓은 그물이 사라져 그물을 찾던 중, 실수로 물에 빠지고 말았는데 물 속으로 한없이 빨
려 들어가면서 용왕이 사는 용궁(龍宮)에 이르게 되었다.
어부는 용왕이 사는 곳이라 여기고 용궁으로 들어갔는데 궁문(宮門)에 자기가 찾던 그물이 걸
려있어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물을 가져가려고 하니, 안에서 노인(용왕)이 나와
'여기는 인간들의 세상이 아닌데 어떻게 왔냐?'
물었다.
이에 엄씨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노인이
'내 아들이 그물 때문에 자칫 죽을 뻔했다. 너가 그물의 주인인 걸 알면 반드시 가만두지 않
을 터이니 어여 도망쳐라'

엄씨 왈 '길을 모르는데 어찌 가란 말이냐? 제발 도와주셔~'
용왕 왈 '흰 강아지 1마리를 줄테니 따라 가라. 그리고 배고프면 이 떡을 먹도록 ~~'

엄씨는 강아지를 따라 떡을 먹으면서 주변 경치를 구경하다가 드디어 물 밖으로 나왔다. 밖으
로 나와보니 무당 굿소리와 함께 조문객들이 왔다 갔다 해서 무슨 일인가 살펴보니 글쎄 그의
두 아들이 부친이 물에 빠져 죽은 지 3년이 되었다며 3주기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
물을 찾아 잠깐 수중에 갔다 왔을 뿐인데 그 잠깐 동안 무려 3년이 훌쩍 가버린 것이다.

이후 강아지는 천수를 누리다 죽었고 그 강아지를 관에 넣어 산에 묻어주었다. 그리고 용궁에
서 가져온 남은 떡은 딱딱한 돌이 되어 용궁 여행 기념으로 길이 간직해 두었더니 날이 갈 수
록 가세(家勢)가 번창하여 부자가 되어 잘 살았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니 용궁을
보겠다며 구문소로 풍덩하는 일이 없기를 바람)

* 구문소 소재지 : 강원도 태백시 동점동 산6-3 (동태백로 11)


▲  동굴 안 구문소의 위엄
소 안에 신룡(神龍)이 살던 굴이 있다고 하는데 못이 하도 깊어서 어느 누구도 깊이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그만큼 구문소는 옛 사람들의 호기심과 함께 두려움도 듬뿍
안겨주던 곳으로 용왕에게 제를 지내던 민간신앙의 현장이기도 하다.

▲  구문소 안쪽 암벽에 새겨진 바위글씨
배가 아니면 접근도 불가능한 저곳에 옛 사람들의 낙서가 새겨져 있다. 눈이
침침하여 무슨 글씨인지는 모르겠으나 못 수심이 깊고 사방이 깎아지른
벼랑이라 보기만 해도 염통이 쫄깃해진다.

▲  구문소 전설에 나오는 백룡상

편법으로 청룡을 몰아내고 낙동강과 하늘을 거머쥐었다는 그 백룡이다. 불의(不義)가 판치는
이 땅에서는 편법과 불법을 써야 잘 먹고 잘 살 수 있으니 옛 사람들이 만든 백룡과 청룡 전
설이 정말로 소름이 돋는다.


▲  구문소 북쪽에서 바라본 구문소 동굴
이렇게 보니 어두운 어딘가로 통하는 무시무시한 구멍 같다.
마치 지옥의 문 같은...

▲  주름진 바위들이 켜켜히 자리한 구문소 북쪽 황지천
(한복판에 보이는 검은 구멍이 구문소)

▲  구문소 북쪽 황지천 ①

건열 구조와 물결 흔적 등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은 신기한 흔적들이 역력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 구문소 일대는 '태백 구문소 오르도비스기 지층과 제4기 하식지형(河蝕地形)'
란 긴 이름으로 국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  구문소 북쪽 황지천 ②

이곳 바위와 암반은 거의 석회암으로 마치 화산 용암이 곳곳을 들쑤시며 흐르다가 그대로 굳
어버린 듯 꽤나 울퉁불퉁하다. 이곳 이전까지는 하천 폭이 넓어 사이좋게 흘러갔으나 이곳에
이르러 그 폭이 현저히 좁아지고 물줄기 또한 비포장처럼 완만하지 못하면서 서로 먼저 갈려
고 아우성을 치는 통에 물 흐르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요란벅적하다. 옆 사람과의 대화
가 거의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  구문소 북쪽 황지천 ③
왼쪽에 보이는 하늘색 존재는 자개루로 인도하는 다리이다.

▲  자개루로 인도하는 다리

다리 바로 옆에는 황지천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구문소 일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비
싼 공간이라 거의 금지된 구역으로 묶여 있으나 이곳만큼은 개방이 되어있어 황지천 주변 암
반으로 직접 발을 들일 수 있다.
그곳에는 대자연의 오랜 메세지가 바위에 겹겹히 담겨져 있어 직접 살펴보는 것도 좋다. 그러
니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여행이거나, 지구과학과 자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북쪽에
있는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과 이곳 황지천 암반은 꼭 살펴보기 바란다. (단 황지천 물살이
꽤 성질이 있고 바위 피부가 거칠고 미끄러우니 주의하기 바람)


▲  자개루로 인도하는 다리에서 바라본 황지천
구문소 북쪽에는 태백 고생대자연사박물관이 있다. 그곳도 보려고 했으나
시간 부족과 귀차니즘을 구실로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넘겨버렸다.

▲  구문소 자개루(子開樓)

구문소 언덕 정상에는 자개루란 팔작지붕 누각(樓閣)이 있다. 구문소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이곳에 오르면 구문소 주변과 황지천이 훤히 발 아래로 펼쳐지고 주변 뫼들도 나와 비
슷한 눈높이로 나를 바라본다. 단 구문소와 동굴은 바로 밑에 있으므로 보이지 않는다.

자개루는 태백 고생대자연사박물관에서 올라가는 길과 구문소 주차장(구문소 버스정류장)에서
올라가는 길이 있어 주차장 쪽으로 내려가 구문소 주변을 다시 복습하고 10년 만에 다시 찾은
구문소와 작별을 고한다. 다음 인연은 언제쯤 닿을지는 태백산 산신(山神)도 모르는 실정이나
최소 1번 이상은 닿지 않을까 싶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은 여기서 흔쾌히 마무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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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C) 202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서울의 동쪽 지붕이자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거닐기 (아차산둘레길, 긴고랑계곡, 아차산4보루, 서울둘레길2코스)

아차산, 긴고랑계곡 봄나들이



' 아차산, 긴고랑계곡 봄나들이 '

아차산둘레길과 용마산

▲  아차산둘레길과 용마산

긴고랑계곡 벚꽃나무길 아차산4보루

▲  긴고랑계곡 벚꽃나무길

▲  아차산4보루



 


아차산(峨嵯山, 295.7m)은 수도권 고구려(高句麗) 유적의 대표 성지(聖地)이자 서울의 커
다란 동쪽 지붕으로 용마산(龍馬山, 348m)과 망우산(忘憂山, 282m), 시루봉, 홍련봉을 식
구로 거느리고 있다.
아차산 식구들은 내 즐겨찾기 뫼의 일원으로 매년 적지 않게 재활용을 하여 어느덧 200회
가 넘게 안겼는데, 그렇게 안겼음에도 갈 때마다 늘 마음이 설레고 새롭다.

기나긴 겨울 제국이 저물고 봄이 겨울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자 아차산의 봄 풍경이 문득
그리워 간만에 그의 품을 찾았다. 야심 차게 추진된 이번 나들이는 아차산 기점의 하나인
구의동(九宜洞) 기원정사에서 시작했다.



 

♠  아차산둘레길 (기원정사~긴고랑 구간)

▲  기원정사에서 아차산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기원정사 방향)

아차산역(5호선) 1번 출구에서 바로 나오는 골목길(천호대로 129길, 영화사로11길)을 10분 정
도 쭉 들어가면 그 길의 끝에 기원정사(祇園精舍)란 조그만 현대 사찰이 있다. 천호대로129길
구간에는 온갖 식당들이 즐비해 후각과 미각, 식욕을 마구 들쑤시는데, 아차산을 타고 기원정
사나 영화사(永華寺)로 내려오면 이 골목길에서 많이 저녁 뒷풀이를 한다.

기원정사 옆구리에는 아차산으로 끌어주는 나무데크 계단길이 손을 내밀고 있다. 하얀 피부의
벚꽃과 노란 피부의 개나리가 마중하는 그 계단을 오르면 이내 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직
진하면 아차산 주능선으로 이어지며, 좌/우 길은 아차산둘레길이다. 나는 긴고랑 방향인 왼쪽
길로 접어들어서 긴고랑계곡으로 이동했다.


▲  아차산둘레길 나무데크길

아차산 남쪽과 서남쪽, 서쪽 허리에 둘러진 아차산둘레길은 고구려정 밑 평강교에서 시작하여
용마산 너머 중곡지구까지 이어지는 3.8km의 달달한 숲길이다.
아차산에는 이미 주능선을 따라가는 서울둘레길2코스(용마, 아차산코스)와 아차산 주능선과
아차산 동쪽 자락을 도는 구리둘레길이 있으나 아차산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다보니 광진구(廣
津區)도 아차산 광진구 구역에 둘레길을 그어 아차산둘레길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평강교(친수계곡)에서 기원정사 윗쪽까지는 나무데크길이 깔려있어 안산자락길 못지 않은 편
한 둘레길의 정석을 보여주며, 기원정사 윗쪽에서 긴고랑 구간은 나무데크길과 흙길, 바위길,
오르막길, 내리막길이 고루고루 섞여있어 걷는 재미를 더해준다. 일부 구간에 경사가 조금 있
을 뿐, 그 외에는 착한 수준이며, 긴고랑에서 중곡지구까지는 용마산의 각박한 산길을 넘어야
되는데, 이 구간에는 용마산1보루와 2보루가 깃들여져 있다.
기원정사 윗쪽~긴고랑 구간에는 유난히도 진달래가 많이 피어나 봄의 완연한 기운을 전해주며
개나리와 벚꽃도 이따금씩 나와 지나가는 나그네를 격려한다.


▲  연분홍 진달래가 화사하게 마중하는 아차산둘레길 (긴고랑 방향)

▲  부드럽게 이어지는 아차산둘레길

▲  아차산둘레길에서 바라본 작은 천하 (구의동과 중곡동 지역)
사진 가운데로 큰 기와집 같은 것이 보이는데 그곳이 내가 출발했던
기원정사 그 절이다.

▲  아차산둘레길에서 바라본 중곡동과 군자동, 광진구, 동대문구 지역

바로 밑에 보이는 동네가 중곡동(中谷洞) 긴고랑이다. 둘레길을 1굽이 지날 때마다 조망의 질
과 보이는 범위가 조금씩 달라지는데 이렇게 보니 서울이 정말 빽빽하긴 빽빽하다. 사진 가운
데로 어렴풋이 보이는 뫼는 서울 도심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인 남산(南山)이다.


▲  아차산둘레길에서 바라본 용마산 산줄기의 위엄

▲  슬슬 가까워지는 긴고랑계곡과 용마산

▲  아차산둘레길에서 만난 주름진 바위 벼랑

첩첩한 주름선을 휘날리는 바위 벼랑이 까칠한 경사를 보이고 있다. 아차산의 산세가 대체로
부드러운 편이나 저런 벼랑과 바위도 곳곳에 포진해 있어 아차산의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아차산 석실고분이 있는 너럭바위가 아주 일품임) 둘레길 조성으로 보호 난간이 둘러
져 있어 저 난간을 넘지 않는다면 별일은 없을 것이다.


▲  벼랑을 타고 긴고랑으로 급하게 내려가는 조그만 폭포
아차산이 빚은 물이 켜켜이 주름진 벼랑을 타고 속세로 흘러간다.


▲  개나리와 소나무 사이를 지나는 아차산둘레길

▲  긴고랑 직전 아차산둘레길 나무데크길
길이 각박한 곳은 나무데크를 깔아 각박함을 크게 순화시켰다.

▲  바위 벼랑 밑을 지나는 아차산둘레길 (긴고랑 직전)

▲  벚꽃들이 반갑게 마중하는 긴고랑길
길 좌우로 벚꽃들이 길게 늘어서 이곳에 온 것을 격하게 환영한다.



 

♠  아차산의 일품 계곡, 긴고랑(긴고랑계곡)

▲  긴고랑에서 만난 벚꽃의 향연
벚꽃들이 상큼하게 봄의 향연을 뿌려댄다.


기원정사 윗쪽에서 둘레길을 따라 20분 정도 가면 긴고랑계곡에 이른다. 이곳은 아차산과 용
마산 사이에 깊게 들어간 골짜기로 그 계곡이 길어서 긴골, 진골이라 불렸으며, 점차 긴고랑
으로 변화되었다. (긴 골짜기란 뜻이나 실제로는 별로 길지 않음)
아차산의 대표적인 계곡이자 몇 없는 자연산 계곡으로 계곡 하류에 제방이 다소 닦여져 옥의
티가 적지 않으나 자연산 풍경도 그런데로 남아있다. 게다가 계곡도 어느 정도 크기가 있는
편이며, 지나친 가뭄이 아닌 이상은 수량도 풍부하여 여름 제국 시절에는 도심 속 피서지로
북새통을 이룬다. (계곡 물놀이도 가능함)

* 긴고랑계곡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143-146


▲  개나리와 진달래가 손짓하는 긴고랑계곡 하류
평화롭게 흐르던 긴고랑계곡은 계곡 주차장에서 강제로 생매장을 당해
어둠의 경로를 통해 중랑천으로 흘러간다. 이곳과 중랑천 사이에는
주택가가 빽빽하게 들어찼기 때문이다.

▲  인공 조미료가 과하게 들어간 긴고랑계곡 하류 제방

▲  긴고랑의 따사로운 봄 풍경

▲  개나리들이 무성한 긴고랑계곡

인공이 다소 가해진 계곡 주변으로 개나리의 노란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계곡 하류에 인공이
크게 씌워진 것은 심히 안타까우나 상류와 중류는 자연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  아차산 주능선으로 인도하는 긴고랑계곡 산길

긴고랑에서 아차산 주능선까지는 20~30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주능선 직전을 제외하면 세상
에서 가장 편한 오르막길 수준으로 계곡이 중간 정도까지 따라가주며, 온갖 봄꽃과 나무들로
무성하다. 초봄이라 그렇지 5월 이후에서 늦가을까지는 거의 숲터널 수준이다.


▲  긴고랑계곡 중류
물놀이나 아이들을 동반한 피서지로 적당한 곳이다. 긴고랑계곡은 딱히 통제구역이
없어 적당한 곳에 들어가 쉬거나 피서에 임하면 된다. 단 계곡을 더럽히거나
다녀간 흔적은 남기지 않도록 한다.

▲  졸졸졸~♪ 흘러가는 긴고랑계곡과 그 옆에 닦여진 나무데크길

▲  진달래와 소나무, 주름진 벼랑이 어우러진 긴고랑계곡 상류

▲  긴고랑계곡 상류
계곡 상류는 다른 계곡과 마찬가지로 물이 별로 없다. 봄의 해방군에 크게
들뜬 밑과 달리 하늘과 가까질수록 봄과 겨울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나무들이 많이 늘어난다.

▲  아차산 주능선으로 끌어주는 긴고랑 산길

▲  아차산 주능선 직전

긴고랑계곡 하류에서 20여 분을 오르면 주능선 갈림길에 이른다. 여기서 북쪽으로 오르면 용
마산과 망우산, 시루봉으로 이어지며, 남쪽은 아차산4보루와 아차산 정상, 그리고 동쪽 내리
막길은 구리시 아천동으로 통한다. 나는 남쪽 길로 들어서 아차산4보루로 이동했는데, 아차산
에 왔다면 4보루와 정상은 찍고 가는 것이 이곳의 관례처럼 되어있다.



 

♠  고구려 보루의 정석, 아차산4보루(堡壘) - 사적 455호

▲  아차산4보루 남쪽 2중치와 동남쪽 성곽

아차산4보루는 용마산과 망우산을 제외한 아차산 보루 식구 중 가장 북쪽에 자리해 있다. 잃
어버린 땅을 제외한 우리나라의 고구려 성곽 유적 중 건물터와 성벽의 구조가 제대로 밝혀진
최초의 현장으로 의미가 아주 남다른 곳인데, 아차산~용마산~망우산 보루 중 거의 유일하게
성벽의 흔적이 다소 남아있었다.
복원 이전 성벽의 최대 잔존 높이는 1.8m로 남벽과 동벽은 잘 다듬은 성돌을 이용한 탓에 그
런데로 남아있었으나 북벽과 서벽은 훼손이 심해 남아있는 높이가 0.8m를 넘지 못했으며, 부
정형의 석재를 사용해 조잡하게 축조되었다.


▲  들여쌓기의 정석을 보여주는 4보루 남쪽 2중치

구리시가 4보루에 숨겨진 옛날 이야기를 풀고자 1997년부터 문화재청과 경기도의 도움을 받아
1998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였다. 하여 온돌과 배수로, 저수조 등을 갖춘 건물터를 확인했으며,
'後部○兄'이라 쓰인 토기가 나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반에 닦여진 보루임이 명백해졌다. 여기서 후부(後部)는 고구려 5부의 하나이며, '○兄'은
고구려 관등의 하나로 여겨진다. 고구려에는 '형(兄)'자가 들어가는 관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2007년에 다시 조사를 벌여 숨겨진 치성을 발견했고, 보루 형태와 성벽 축성 방식을 확
인하면서 복원 가능성이 높아졌다. 4보루 한복판으로 서울시와 구리시의 경계선이 지나가 절
반은 서울시, 나머지 절반은 구리시 영역인데, 구리사가 2008년부터 복원을 적극 추진하여 2
년의 공사 끝에 2010년 12월 24일에 복원 준공식을 가졌다. 아차산일대 보루 중 처음으로 복
원된 행운의 보루인 것이다. (나중에 시루봉 보루도 복원되었음)

보루 복원을 위해 보루터에서 나온 늙은 성돌을 주로 사용했으나 수량이 적어서 부득이 새 성
돌로 모자란 부분을 때웠다. 그러다보니 고색이 짙은 옛 돌과 하얀 피부의 새 돌이 어색하게
조화를 이룬다. 허나 이는 어쩔 도리가 없다. 발굴조사를 토대로 고구려 축성 양식에 맞춰 왕
년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했고, 건물터와 온돌 유구 등은 보존을 위해 모두 땅으로 덮었다.
그리고 보루 중앙에 탐방로를 내고 건물터 쪽에는 금줄을 쳤으며, 보루 북쪽과 남쪽에 보루로
오르는 계단을 냈다.

보루의 둘레는 약 249m, 성벽 높이는 최소 4m 이상이다. 허나 탐방객의 안전을 고려하여 2.5~
3.1m 높이로 축소 재현하여 마치 역사 왜곡의 현장 같은 아쉬움을 준다. 지형의 경사면을 이
용해 바깥 쪽에 성벽을 쌓고, 안쪽 경사면에는 뒷채움돌과 흙으로 다졌는데, 방어력을 높이고
자 동/서/남/북에 5개의 치성(雉城, 치)을 두었다.
치성(치)은 성곽 방어를 위해 앞쪽으로 다소 튀어나온 성벽으로 고구려표 축성 양식의 하나이
다. 그 양식은 백제와 신라, 고려, 조선은 물론 왜열도와 서토(중원대륙)까지 전해져 절찬리
에 쓰였다.


▲  4보루로 올라가는 남쪽 계단

▲  아차산4보루의 독특한 구조물, 남쪽 2중치

4보루 남쪽에는 2중 구조를 지닌 특이한 치가 남쪽으로 길게 나와있다. 그는 전체 길이 13.2m
로 중간에 목책(木柵)이 둘러진 2.5m 정도 들어간 공간이 있는데, 그것을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 치로 구분된다.
뚫린 공간에는 치의 성벽에 잇대어 4개의 후대 석축단이 축조되었고, 그 좌우로 목책을 세웠
는데, 보루의 출입구로 여겨진다. 이런 구조는 용마산2보루와 개발의 칼질로 무자비하게 사라
진 구의동보루에서도 일부 확인이 되고 있으나 사실상 아차산4보루가 유일하며, 고구려 보루
의 독특한 구조를 보여줌과 동시에 보루의 끝이 들여쌓기로 차곡차곡 닦여져 안정감을 준다.


▲  4보루 서남쪽 치

보루 내부에서는 건물터 7곳, 온돌 유구 2기, 배수로, 저수조 흔적, 치성 5곳이 발견되었다.
여기서는 항아리와 글씨가 새겨진 토기, 시루, 투구, 찰갑(가벼운 갑옷), 창, 도끼, 화살촉,
낫, 쇠스랑, 말에 물리는 재갈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와 아차산3보루와 함께 아차산 일
대 병참기지로 추정된다.


▲  한강을 향해 약간 튀어나온 4보루 동쪽 치

4보루로 올라서니 그런데로 너른 보루 내부가 펼쳐진다. 이곳에는 군사들이 머물던 숙소와 창
고, 방어시설 등이 들어서 있었는데,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 형님의 꾸준한 괴롭
힘 앞에 모두 사라지고 터만 황량이 남아 사람들의 상상력을 살찌워준다.
이곳을 재현한 모형이 서울대박물관에 있으나 이 역시 100% 정답은 아니니 고구려 건축 양식
에 맞춰서 적당하게 4보루의 모습을 상상해보기 바란다. 이것이 4보루가 우리에게 주는 숙제
이다.


▲  4보루 1호 건물터

4보루의 7개 건물터 중 남쪽에 있는 1호 건물터가 가장 높다. 여기서는 온돌 유구 2기와 주춧
돌이 나왔으며, 온돌 아궁이 주변에서는 글씨가 새겨진 토기, 철제투구 등이 나와 4보루를 관
리하던 높은 장수나 지휘관의 숙소로 여겨진다.
1호 건물터 주변에는 6호 건물터와 7호 건물터, 2호 건물터 등이 있으며, 3호 건물터 밑에서
는 'ㅡ'자형 온돌유구 2기가 나왔는데, 층위(層位)로 보아 건물터보다 먼저 조성되었음이 밝
혀져 4보루 내부 구조물이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이 결코 아님을 보여준다. 보루를 먼저 쌓고
나중에 온돌과 내부 시설을 닦았던 것이다.


▲  4보루 내부 (북쪽 방향)

▲  4보루 내부 (남쪽 방향)

탐방로 좌우로 잔디와 흙이 두툼히 덮여진 건물터와 저수시설 유적이 있고, 키가 작은 금줄을
둘러놓아 고구려의 거룩한 흔적을 지키고 있다. 금줄의 의미처럼 줄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되나
지키는 사람이 딱히 없어서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펴고 쉬거나 음식을 처묵처묵하는 골 빈 작
자들이 적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  4보루 저수시설

4보루에서는 물을 저장하는 2개의 저수조(貯水槽) 흔적이 나왔다. 이들은 깊이 3.5m 정도 수
직으로 암반 흙을 파내고 바닥과 벽에 입자가 고운 회색 뻘흙을 발라 물이 새지 않도록 방수
처리를 한 것으로 규모는 '430x300x깊이230cm','350x310x깊이240cm'이다.


▲  4보루 동북쪽 치
치 너머로 한강과 구리, 남양주, 하남, 강동구 지역이 두 망막에 들어온다.

▲  한강을 향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4보루 동북쪽 치

4보루는 북쪽을 제외하고 동/서/남이 확 트여있어 조망이 아주 예술이다. 여기서는 광진구와
성동구, 동대문구, 종로구, 중구, 송파구, 강동구, 한강은 물론 하남시와 구리시, 남양주시
지역까지 시야에 들어오며, 해돋이와 일몰을 모두 맞이할 수 있어 해돋이 수요와 일몰 수요,
야간 등산 수요가 많다. (1월 1일에는 해돋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완전히 미어터짐)
게다가 아차산과 용마~망우산을 이어주는 매우 중요한 위치라 아차산 주능선의 목구멍 같은
곳이다. 그러니 고구려가 이곳에 큰 보루를 쌓아 무척 애지중지했던 것이다.


▲  4보루 동북쪽 치에서 바라본 천하
한강과 강동구, 하남시, 남한산성 등

▲  아차산4보루에서 바라본 북쪽 방향 (아차산 주능선과 용마산)

▲  4보루 북쪽 치

▲  4보루 서쪽 성곽

▲  4보루 북쪽 치

4보루 바깥에는 우회 산길이 있다. 4보루의 속살로 들어가기 싫다면 그 우회길을 이용하면 되
는데, 아차산에 왔다면 4보루는 무조건 찍고 가는 것이 이곳의 관례처럼 되어있다. 그러다보
니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람이 많으며,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을 먹는 이들도 적지 않
다. (특히 저녁에는 이곳에 자리를 잡고 단체로 먹거리를 섭취하는 등산 동호회 사람들이 많
음) 휴식과 음식 섭취는 좋으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금줄을 넘어가는 행위는 하지 말자.

아차산4보루를 비롯한 아차산 보루 6식구, 용마산 보루 7식구, 망우산1보루, 홍련봉 보루 2식
구, 시루봉보루는 한 덩어리로 묶어 '아차산일대 보루군'이란 이름으로 사적 455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마무리를 짓는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 아차산4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4동,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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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릉 나들이, 경주 괘릉 (경주 원성왕릉)

경주 괘릉



' 경주 괘릉(원성왕릉)
'
경주 괘릉(원성왕릉)
 



 

여름이 한참 제국의 기틀을 다지던 6월의 한복판에 서라벌의 옛 도읍, 경주(慶州)를 찾았
다.
경주는 그 유명한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부터 이름 없는 문화유적까지 무려 160곳 이상
을 답사했다. 하지만 그렇게 다녔음에도 아직도 미답지(未踏地)가 상당하여 내 마음을 여
전히 두근거리게 하면서도 두렵게 한다.
이번에는 어디로 갈까 적당한 곳을 물색하다가 울산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괘릉
을 찾기로 했는데, 그곳은 이미 10여 년 전에 인연을 지은 곳으로 괘릉과 그 인근에 자리
한 미답지 절터 2곳도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기로 했다.



 

♠  신라 왕릉의 백미, 경주 원성왕릉<元聖王陵, 괘릉(掛陵)>
- 사적 26호

▲  도로에서 본 괘릉 능역

괘릉 서쪽에는 주차장이 있고, 그 옆에 문화유산해설사가 머무는 관광안내소(이하 안내소)가
있다. 주차장은 평일이라 공간의 여유가 넘치며, 안내소에는 괘릉을 맡은 해설사가 답사객이
없는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인근 문화유적 관련 공부를 하고 있었다.

예전에 왔을 때는 괘릉 주변으로 길게 담장을 둘렀고, 삼문(三門)을 통해 괘릉 능역(陵域)으
로 들어섰다. 관람시간은 9시부터 18시까지(겨울은 17시)였으며, 관람비는 그때나 지금이나
없었다. 허나 20년 가까운 세월이 무심히 흐르면서 괘릉을 지키던 담장은 사라지고, 담장 대
신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은 푸른 철책이 도로와 화표석 사이에 둘러져 있다. 해설사
에게 이유를 물으니 경주시청에서 관람 편의를 이유로 담장을 철거했다고 한다.

담장 철거로 그 안에 가려진 괘릉은 그 속살을 시원히 드러냈으나 그래도 신라 후기 제왕(帝
王)의 능인데, 능을 보호하고, 능역과 속세를 가르는 담장이 필요하다 여겨진다. 특히 문화유
산 도난이 비일비재로 일어나는 이 땅의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보물급의 지위를 간직한
괘릉의 석인(石人)과 석사자상, 화표석 같은 것은 아무리 무겁고 견고한 돌이라고 해도 방심
은 금물, 그들 또한 도난의 마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멋드러지게 우거진 송림(松林)에 둥지를 튼 괘릉은 북쪽에 능이 있고, 능이 바라보는 남쪽에
넓게 터를 닦아 좌우 2열로 석인 2쌍과 석사자 2쌍, 화표석(華表石) 1쌍을 두어 서로 마주보
게 했다. 화표석 앞에는 도로가 굽이쳐 지나가는데, 이는 괘릉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 키 작
은 철책을 둘러 경계로 삼았으며, 화표석과 도로 사이가 너무나 가까워 옥의 티를 진하게 풍
긴다.
도로를 길 남쪽 하천 너머로 밀어내고, 기존 도로에는 잔디와 소나무 등을 심어 능역을 확장
하고 담장을 두르는 것이 훨씬 좋을 것 같다. 그래서 해설사에게 내 생각을 이야기하니 안그
래도 경주시에서 그럴 계획이 있다고 그런다. (계획만 있는 모양임)


▲  서쪽 석물들 (왼쪽부터 화표석, 석인들, 석사자들)

괘릉은 경주에 기러기처럼 널린 신라 고분의 하나이다. 그냥 커다란 봉분만 있던 신라왕릉이
무열왕릉(武烈王陵)에서 최초로 능비(陵碑)가 생기는데, 이는 당(唐)나라 능묘(陵墓) 양식에
군침을 흘리며 도입했기 때문이다.
신문왕릉(神文王陵)에 이르면 봉분 아랫도리에 호석(護石)을 두르면서 무덤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고, 성덕왕릉(聖德王陵)에는 비어있던 호석 판석(板石)에 12지신상을 만들고, 무덤 주
변을 돌난간으로 두르며, 석상(石床)과 함께 석인 2쌍과 석사자 1쌍을 능 앞에 펼쳐놓는다.
거기서 더 발전한 모습이 바로 괘릉과 흥덕왕릉(興德王陵)이다. 그중에서도 괘릉이 신라 왕릉
의 백미(白眉)라 통할 정도로 완비된 능묘제도를 자랑하는데, 그래서 봉분만 달랑 있는 다른
왕릉과 달리 볼거리가 많다.

그런데 다른 왕릉은 '~~왕릉'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괘릉은 그런 이름 대신 괘릉이란 이
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여 유일하게 능호(陵號)를 가지고 있는 셈인데, 오래 전부터 흘러오
던 속설(俗說)에 따르면 무덤 자리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연못의 원형을 살리면서 제
왕의 관을 수면 위에 걸고, 흙을 쌓아 능을 닦았는데, 그런 연유로 걸어놓는다는 뜻의 괘릉이
되었다는 것이다.
괘릉은 신라가 망하면서 속세의 뇌리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누구의 능인지도 모른 채, 적당한
기록에 오르지도 못하고 버려진 것이다. 그러다가 1669년에 작성된 '동경잡기(東京雜記, 동경
은 고려 때 경주의 이름)'에 괘릉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경주부(慶州府) 동쪽 35리(당시 10리
는 5km)에 떨어진 주인을 모르는 능이라 나오면서 앞서 언급된 괘릉의 유래가 나와있다.

18세기에 이르면서 신라 왕실의 후예인 경주박씨와 경주김씨, 경주석씨들은 앞다투어 경주 땅
곳곳을 들쑤시며, 그들의 조상묘 찾기 프로젝트를 벌였다. 그들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
유사(三國遺事)를 참조하여 묘를 찾았는데, 꼼꼼하게 살피지 않고 대충 기록에 나온 자리를
맞춰가면서 조상묘로 삼았다. 하여 그 시절에 이름 없던 신라 고분 20여 기가 졸지에 '~~왕릉
'이란 가면을 쓰게 된 것이다. (그중에 성덕왕릉, 흥덕왕릉, 무열왕릉 등은 99% 이상 맞음)

한편 경주김씨는 괘릉에 군침을 흘리며 신라 제왕 가운데 가장 위대하다는 문무왕(文武王)의
능으로 삼는 어거지성을 발휘한다. 어느 기록에도 이곳이 문무왕릉이라 나오지도 않았는데 말
이다. 그들은 이곳이 문무왕릉의 허묘(墟墓)일 수 있다면서 비석을 세우고 매년 제를 올렸다
고 한다.
그렇게 문무왕릉이란 가면을 강제로 눌러 쓴 괘릉은 왜정(倭政) 때 이르러 정체성에 대한 중
대한 수정을 받게 된다. 1931년 입실소학교에서 인근 말방리 절터로 소풍을 갔는데, 거기서
깨진 비석 조각을 발견했다. 하여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달려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
總覽)'과 대조하여 비석 조각의 수수께끼를 풀었는데, 그 결과 그곳은 원성왕과 인연이 깊은
숭복사터로 밝혀졌다.
또한 비문에 괘릉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어 원성왕릉 설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허나 경주
김씨 측은 이를 끝까지 무시했으나 1968년 동해바다 대왕암이 문무왕의 수중릉(水中陵)으로
밝혀지고 언론사에서 크게 특집으로 다루면서 괘릉을 포기하게 된다.

그 이후 괘릉<전(傳) 원성왕릉>이라 불리다가 이제는 숭복사비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기
록을 토대로 완전히 원성왕릉으로 99% 이상 굳어진 모양이다. 해설사도 이곳이 원성왕릉이 맞
다고 그런다. 예전에는 아리송하다는 뜻의 전(傳)을 붙였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전'도 쏙 사
라져버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붕어(崩御)하자,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火葬)을 했다고 하며
, 삼국유사에는 능이 토함산(吐含山) 서쪽 동곡사(洞鵠寺)에 있는데, 동곡사는 당시의 숭복사
(崇福寺)라고 한다. 마침 숭복사가 근처에 있었고, 주변에 마땅한 고분이 없으며, 최치원(崔
致遠)이 쓴 숭복사비에는 숭복사의 전신인 곡사(鵠寺=동곡사)가 괘릉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신하들은 원성왕에게 곡사 자리가 능 자리로 좋다고 추천했으나 왕은 거절했다. 허나 신하들
의 계속되는 설득에 곡사를 매입하여 능을 조성했으며, 절은 지금의 숭복사 자리로 옮겨져 헌
강왕(憲康王) 때 대숭복사(大崇福寺, 지금의 숭복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한다.
원성왕의 능자리 매입은 한국경제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이다. 영토 전체가 제왕의 땅
이라는 이른바 왕토사상(王土思想)이 지배적이던 시절에 돈을 주고 그 자리를 매입했기 때문
이다.
얼마의 돈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잠들 자리이고 그곳에 신라가 숭배하던 불교 사원
이 있었으므로 적지 않은 재정이 지출되었을 것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괘릉의 주인인 원성왕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동쪽 석물들 (오른쪽부터 화표석, 석인들, 석사자들)

※ 독서삼품과로 유명한 신라 38대 군주, 원성왕<元聖王 ?~798 (재위 785~798)>
원성왕의 이름은 김경신(金敬信)으로 내물왕(奈勿王)의 12세손이다. 아버지는 김효양(金孝讓)
으로 김경신이 왕위에 오르자 명덕대왕(明德大王)으로 추존했으며, 어머니는 계오부인(繼烏夫
人, 혹은 지오부인<知烏夫人>) 박씨로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올렸다. 부인은 숙정부인 김씨(
淑貞夫人 金氏)로 각간 김신술(金神述)의 딸이다.

780년 상대등 김양상(金良相)과 함께 이찬 지정(志貞)의 난을 평정했으며, 그 과정에서 혜공
왕(惠恭王)이 살해되고 만다. 그래서 김양상에게 힘을 실어 재위에 오르게 하니 이가 곧 신라
37대 군주인 선덕왕(宣德王)이다. 그 공로로 김경신은 상대등(上大等)에 올라 그 이름을 크게
떨친다.
한편 무열왕의 6세손인 김주원(金周元)은 세력과 덕망을 키우며 대권을 노리고 있었는데, 김
경신보다 서열도 높았고 세력 또한 컸다. 마침 선덕왕이 후사도 없이 붕어하자 중신(重臣)들
은 너도나도 김주원을 추대하기에 이르고, 김경신의 자리는 크게 위협을 받게 된다. 그와 관
련해서 재미있는 설화가 한토막 전하고 있으니 다음과 같다.

선덕왕 시절에 김경신은 묘한 꿈을 꿨다. 그는 일상적으로 쓰던 두건를 벗고 소립(素笠, 갓)
을 썼으며, 12줄 거문고를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로 들어가는 꿈이었다. 그래서 점쟁이에
게 물어보니
'두건을 벗는 것은 관직을 잃는다는 뜻이며, 삿갓을 쓴 것은 목에 칼을 쓰는 것입니다. 12줄
거문고를 든 것은 포박되는 것이며, 우물에 들어가는 것은 감옥에 갇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즉 영 좋지 못한 흉몽이라는 것이다. 그 말에 제대로 토라진 김경신은 종일 집에 틀어박혀있
었고. 그 와중에 그와 무척 가까운 여산(餘山)이 찾아왔다.

여산이 김경신의 주눅 든 모습에 이유를 물었다. 대답을 회피하던 김경신은 결국 꿈이야기를
털어놓았는데, 그 이야기가 끝나자 갑자기 옷깃을 여미며 자신에게 큰 절을 올리는 것이다.
김경신은 깜짝 놀라 이유를 물으니 여산이
'그 꿈은 공의 지위가 높아진다는 뜻입니다. 후일에 공이 출세하면 저를 잊지 마십시요!'
김경신이 아직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건 무슨 소리요?'

'두건을 벗는 것은 윗사람이 없어진다는 것이며, 삿갓을 쓴 것은 왕관을 쓴다는 뜻입니다. 12
줄 거문고를 손에 쥔 것은 공이 왕의 12세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고보니 공은 내물대왕
의 12세손이 아닙니까? 또한 우물에 들어가는 것은 물의 도움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김경신은 그 말을 듣고 한편으로 기뻐하면서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며
'무열대왕의 6세손인 김주원이 떡 버티고 있는데, 나에게 그런 자리가 오겠소?'
'저와 공은 친분이 두텁습니다. 어찌 감히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믿어주십시요. 일단 물과 인
연을 두텁게 하기 위해 알천으로 나가 기도를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산의 권유에 따라 매일 알천(경주 시내 북쪽에 흐르는 하천)에 나가 기도를 했다. 말은 기
도이지만 아마도 중신과 귀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고 친분을 두텁게 쌓는 작업이었을 것
이다.

785년이 되자 선덕왕이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에 귀족들은 서열이 제일 높고, 덕망
과 세력을 두루 갖춘 김주원을 제왕으로 추대했다. 그때 김주원은 알천 북쪽에 살고 있었고,
김경신은 남쪽에 있었다.

김주원이 알천을 건너 왕궁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알천이 범람을 하
고 말았다. 중신들과 김주원은 비가 그치길 기다렸으나 폭우는 7일이나 계속 되었다. (폭우라
고 하지만 김경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그의 길을 알천에서 막은 것을 비유한 듯 싶다)
상황이 이러자 중신들은 어떻게 해야 되나 하늘만 쳐다보며 대책을 논의했는데
'하늘이 주원공을 원하지 않아 이런 홍수를 내린 것이 틀림없소! 상대등인 경신공은 선왕 폐
하의 아우로 덕망이 높고, 임금이 될 기상을 갖추고 있으니 그를 추대하는 것이 어떻소?'
이렇게 논의가 나오자 다시 중의를 거쳐 결국 김경신을 새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자 어지럽게
내리던 큰 비는 뚝 멈추었고, 백성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반면 김주원은 알천을 건
너지도 못하고 김경신에게 왕위가 돌아갔다는 말에 격분해 강릉(江陵)으로 내려갔다.
이에 김경신은 그가 모반을 꾀할까 두려워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해 달랬으나, 나중에 김
주원의 아들인 김헌창(金憲昌)이 부친의 한을 갚는다며 웅진(熊津, 공주) 일대에서 반란을 일
으켰다.

이렇게 중신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왕위에 오른 김경신은 바로 그해 아들 김인겸(金仁謙)을 태
자(太子)로 봉하고, 시조대왕<김알지(金閼智)인듯>, 태종무열왕, 문무왕, 조부(祖父)인 흥평
(興平)대왕, 부친 명덕대왕을 제사지내는 5묘를 세웠다. 또한 문무백관의 작위를 1급씩 올려
주고, 충렴(忠廉)을 상대등에, 이찬 제공(悌恭)을 시중(侍中)으로 삼았으며, 총관(摠管)이란
이름을 도독(都督)으로 바꿨다.

786년 4월, 동부 지역에 우박이 내려 뽕나무와 보리가 모두 상했으며, 김원전을 당나라에 보
내 조공(朝貢)을 건네자. 당나라 덕종(德宗)이 왕을 칭송하는 조서(詔書)와 함께 여러가지 선
물을 보냈다.
9월에는 도성에 기근이 심하자 곡식과 조 33,240석을 풀었으며, 10월에 33,000석을 더 풀었다
. 그리고 대사(大舍) 무오(武烏)가 병법 15권과 화령도(花鈴圖) 2권을 바치자 굴압현령의 벼
슬을 내렸다.

787년 2월, 도성(都城)에 지진이 생기자 왕은 신궁(神宮)에 제를 지내고 죄수를 방면했다. 7
월에 황재(蝗災)가 들어 농사를 망쳤다.

788년 봄, 그 유명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시행했다. 독서삼품과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
傳)과 예기(禮記), 문선(文選)에 정통하며, 논어(論語), 효경(孝經)까지 두루 섭렵한 자를 상
품(上品)으로 삼고, 곡예와 논어, 효경에 밝은 자를 중품(中品), 곡예, 효경만 읽은 자를 하
품(下品)으로 삼았다. 그리고 오경(五經)과 삼사, 제자백가(諸子百家)까지 모두 외운 사람은
특별히 등급을 초월하여 썼다. 그 이전에는 활과 무예로 인재를 뽑았는데, 그것이 확 변한 것이다.
가을에 서쪽 지방에 한재와 황재가 들고 도적이 들끓자 사람을 보내 백성을 위무했다.

789년 1월, 한산주(漢山州) 사람들이 기근으로 고생하자 조와 곡식을 보냈으며,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이 또 상했다. 9월에 자옥(子玉)을 양근현(경기도 양평) 소수(小守)로 삼자, 사람들
이 그는 문적(文籍) 출신이 아니라며 반대했으나 시중(侍中)이 그는 당나라에서 공부를 한 사
람이니 괜찮다고 권하자 왕은 그대로 시행했다.

790년 정월, 종기를 시중에 명하고,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하고자 전주(全州)를 비롯한 7주의
백성을 징발해 공사에 들어갔다. 웅천주(熊川州, 공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으며, 3월에
일길찬(一吉粲) 백어를 발해(渤海)에 사신으로 보냈다. 5월에 곡식을 풀어 한산주와 웅천주
백성을 구제했다.

791년 태자 김인겸이 죽자 시호를 혜충태자(惠忠太子)라 했으며, 이찬 제공이 불만을 품고 반
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여 처단했다.
10월에 폭설이 도성에 내려 얼어죽는 사람이 있었으며, 시중 종기를 면직시키고 혜충태자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김준옹<金俊邕, 이후 소성왕(昭聖王)>을 시중으로 삼았다. 손자를 시
중에 삼을 정도라면 원성왕도 제법 나이가 있었다는 소리이다.

792년 7월, 당나라 제왕에게 미녀를 보냈다. 8월에는 왕자 김의영(金義英)을 태자로 봉했으며
, 상대등 충렴이 죽자, 이찬 세강(世强)을 상대등에 삼았다. 그리고 시중 김준옹이 병으로 면
직되자 이찬 숭빈을 시중에 삼았다.

793년 8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꺾이고 벼가 쓰러졌다.

794년 2월, 지진이 생겼고, 태자 김의영이 죽자 시호를 헌평태지(憲平太子)라 했다. 시중을
숭빈에서 언승으로 교체했으며, 7월에 봉은사(奉恩寺)를 창건했다. 한산주에서 하얀 까마귀를
진상했으며, 궁궐 서쪽에 망덕루(望德樓)를 지었다.

795년 정월, 손자 김준옹을 태자로 봉했다. 4월 한재가 들자 죄수를 친히 살폈으며, 8월에 서
리가 내려 곡식이 상했다.

796년 봄, 도성에 기근이 심하고 전염병이 생기자 창고의 양곡을 풀어 구제했다. 4월에 동생
인 김언승(金彦昇, 나중에 헌덕왕)을 병부령(兵部令)으로 삼고 이찬 지원을 시중으로 삼았다.

797년 9월, 도성 동쪽에 황충(蝗蟲)으로 농사를 망쳤고, 홍수로 산이 무너졌다. 시중을 김삼
조로 갈았다.

798년 3월, 궁궐 남쪽 누교가 화재를 입었고, 망덕사(望德寺)의 두 탑이 부딪쳤다. 6월 한재
가 있었고, 굴자군(屈自郡, 경남 창원) 대사(大舍) 석남오(石南烏)의 아내가 3남 1녀의 쌍둥
이를 낳아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29일 왕이 붕어하니 시호(諡號)를 원성(元
聖)이라 했고, 그의 유언에 따라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했다. 삼국유사에는 토함산 서
쪽 동곡사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원성왕은 신라의 마지막 성군(聖君)이자 막바지 전성기를 구가했던 왕이다. 비록 홍수와 한재
, 서리 등의 자연재해가 자주 일어나 농사를 망치긴 했지만 수시로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제
했으며, 벽골제 등의 수리시설을 증축하여 농사의 편의를 도모했다.
그는 자식들의 명이 짧아 태자로 삼은 두 아들이 몇 년도 넘기지 못하고 죽었고, 끝내는 손자
를 태자로 삼아 후계를 잇게 했다. 게다가 아들과 손자, 동생 등 가족과 근친 가족을 주요 요
직에 앉혀 자신의 왕권강화에 주력했다. 그래서 그 덕에 신라왕릉 가운데 가장 화려하다는 괘
릉을 만들어 편히 발 뻗고 눕게 된 것이니 그의 권력과 지지 기반이 그만큼 튼튼했음을 보여
준다.

그는 당나라에 조공을 보내고, 심지어 미녀까지 보내면서 당나라에 아부를 떨었으나, 795년에
당나라 사신이 분황사(芬皇寺) 우물에 살던 신라의 호국용(護國龍)을 몰래 물고기 3마리로 둔
갑시켜 자기네 나라로 빼돌리려 한 것을 그들을 족쳐 빼앗아왔다는 설화가 있어 당나라와 적
지 않은 충돌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호국용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당나라
에서 무척 탐을 내거나 부담을 가진 존재가 아닐까 싶으며, 그 이후로 당에 사신을 보냈다는
내용이 없다.
또한 주목할 것은 발해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이다. <단순히 북국(北國, 발해)에 사신을 보냈
다고 했을 뿐, 자세한 건 모름>

불교에도 관심을 두어 화엄종(華嚴宗) 승려 묘정(妙正)을 내전(內殿)에 두어 늘 곁에 부렸다
고 하며, 봉은사 등의 절을 창건했다. 문학에도 소질이 있었는지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를
지었다고 하는데, 인생 궁원(窮遠)의 변화에 대한 이치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허나 내용이
전하지 않으니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자식들로는 태자로 임명되었다가 죽은 두 아들 외에 대룡부인(大龍夫人)과 소룡부인(小龍夫人
) 등 두 딸이 있었다.


▲  귀여움이 돋보이는 석사자상



 

♠  무덤치고는 볼거리가 풍부한 괘릉 ①
석인, 석사자 둘러보기 - 보물 1,427호

▲  동쪽 석물들 (오른쪽부터 화표석, 석인들, 석사자들)

괘릉 앞이라고 하지만 봉분(封墳)과는 다소 거리를 두어 화표주 1쌍과 석인 2쌍, 석사자 2쌍
이 2열로 서로를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이들은 왕릉을 지키며 수식하는 석물들로 그 가치가
매우 상당하여 2009년 괘릉에서 분리하여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일괄(一括)'이란 이름으로
따로 국가 보물 1427호로 삼았다. 괘릉을 더욱 돋보이게 해준 존재들로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괘릉의 존재는 그리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다.


▲  무뚝뚝하게 서 있는 동쪽 화표석

괘릉 석물 중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이 화표석(華表石)이라 불리는 8각형의 돌기둥이다. 무
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망주석(望柱石)이 여기서 유래된 것으로 처음에는 왕릉에서만 주로
쓰다가 점차 지배층과 민간으로 확산되었다. 그의 역할은 무덤이 있음을 알리는 것으로 그의
기원은 인도 아소카왕의 석주(石柱)라고 한다.
이후 중원대륙(서토)으로 넘어가 왕릉의 화표석으로 절찬리에 세워지게 되는데, 보통 2개를
세웠다. 이후 당나라 따라하기에 분주하던 신라가 이를 가져와 괘릉에 처음으로 만들었다.
화표석을 갖춘 신라왕릉은 괘릉 외에 흥덕왕릉에도 있으며, 고려 태조(太祖)의 현릉(顯陵)에
도 등장한다.

화표석 위쪽에 얇게 솟은 부분이 있는데, 다른 조각이 있었던 듯 싶으며, 달리 두드러진 조각
이나 새김은 없다.


▲  서쪽 서역(西域) 석인

▲  동쪽 서역 석인

화표석 옆에는 이국적이면서도 조금은 무섭게 생긴 석인(石人)이 바닥돌 위에 서 있다. 서쪽
석인은 좀 덜하지만 동쪽 석인은 정말 우락부락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이들은 예전에는 무
인석(武人石)이라 불렸으나 지금은 그냥 석인이라 한다.
그의 얼굴을 보면 이 땅에 흔한 얼굴은 아니며, 서역 사람을 많이 닮았다고 한다. 그런 이유
로 서역 무역상이나 서역 출신 무인(武人) 또는 관리로 보고 있다. 근래에는 아랍인이나 위구
르인, 소그드인이라는 견해도 나오고 있으며, 이들 석인을 내세워 신라와 서역, 아랍과의 활
발한 교류를 증명하는 존재로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처용(處容)의 예처럼 신라로 넘어와 관
리가 된 서역, 아랍인들이 많다고 함>

신라 왕릉에 석인이 처음 등장한 것은 성덕왕릉이다. 그 다음이 바로 괘릉인데, 괘릉 석인의
포즈를 가만히 보면 금강역사(金剛力士)와 좀 비슷해 보인다. 오른손은 거의 가슴 앞에 대고
싸움을 뜰 기세를 취하고 있으며, 왼손에는 길다란 무엇인가를 쥐고 있는데, 그곳은 몽둥이라
고 한다. 머리에는 아랍인들이 많이 쓰는 듯한 터번을 쓰고 있으며, 허리에는 복주머니가 달
려 있는데, 산낭으로 보기도 한다.


▲  서쪽 석인의 얼굴
커다란 눈과 코, 다물어진 입은 약간 구부러져 있다. 턱에는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랐는데, 마치 털을 보는 듯 하다.


서역인 옆에는 문인석(文人石)을 닮은 석인이 서 있다. 처음에는 문인석이라 불렸으나 칼과
갑옷을 착용하고 있어서 지금은 그냥 '석인'이라 부른다. 즉 문무인(文武人)을 같이 표현한
것이다. 서쪽 석인은 제법 날카로운 맵시를 지닌 위엄 돋는 인상으로 웃음은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표정이나 오른쪽 석인은 다소 멀뚱한 표정으로 웃음을 짓게 만든다.

이들은 앞에는 관복을 입고 뒤에는 양당개란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있다. 머리는 관을 쓰고
있는데, 벌이 새겨져 있으며, 벌은 용감함을 상징한다고 한다. 얼굴과 수염이 조금은 이국적
이라 이를 두고 위구르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서쪽 문인석의 매서운 얼굴

▲  동쪽 석사자

석인을 지나 왕릉과 좀 더 가까워지면 석사자 2쌍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정말 귀엽게도 앉아
있는데, 봉분 주변에 있던 것을 옮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자하면 호랑이와 더불어 용맹의
대명사이지만 여기서만큼은 그것도 통하지 않는다. 얼굴하며, 앉아있는 모습하며, 꼬랑지까지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게다가 석인처럼 크지도 않고 조그만하니 더욱 그럴 수
밖에 없다.


▲  동쪽 석사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표정이 완전 '씨익~'이다.



 

♠  무덤치고는 볼거리가 풍부한 괘릉 ②
왕릉 봉분과 12지신상(十二支神像)

▲  난간석 주변에 놓여진 저 돌의 정체는 무엇일까?

괘릉 능역 가장 뒤쪽에 원성왕이 잠들어 있는 괘릉 봉분이 주변 소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두툼
히 솟아 있다. 훍으로 만든 둥근 모양의 봉토분(封土墳)으로 봉분 주위로 난간석이 둘러져 있
는데, 봉분 호석(護石)에는 12지신상이 각 방향 별로 새겨져 있다. 신라가 당나라 왕릉을 적
지 않게 참조를 했지만 12지신상 만큼은 신라의 독창적인 양식으로 12지신상을 갖춘 다른 신
라 무덤(경덕왕릉, 헌덕왕릉, 진덕여왕릉, 성덕왕릉, 김유신묘, 구정동 방형분 등)과 달리 조
각 수법이 매우 수려하고 건강상태도 좋다. 이들은 왕릉을 수호하고 꾸미는 역할을 하며, 각
자의 연장과 갑옷을 갖추고 있다.

봉분은 지름 23m, 높이 6m로 봉분을 받치는 호석은 바닥돌 위에 판석(板石)으로 된 면석(面石
)을 올렸다. 면석 사이에는 우주석을 배치했으며, 2칸 간격으로 12지신상을 조각했는데, 성덕
왕릉은 12지신상 상당수가 훼손되었으나 이곳은 거의 멀쩡하다.
호석 밖에는 길이 110㎝, 너비 40㎝의 부채꼴 판석(板石)을 정연하게 깔아 회랑(廻廊)으로 만
들었으며, 회랑 둘레에 높이 1.7m의 돌기둥을 세워 돌난간을 둘렀다. 돌기둥은 25개가 모두
남아 있으나 돌기둥 사이에 상하 2단으로 원공(圓孔)을 뚫어 끼웠던 관석(貫石)은 거의 유실
되었다.


▲  12지신상 ①

▲  12지신상 ②

▲  12지신상 ③

▲  12지신상 ④

▲  12지신상 ⑤

▲  12지신상 ⑥

▲  12지신상 ⑦

▲  12지신상 ⑧

▲  왕릉 앞에서 바라본 능역
몇몇 소나무들은 하늘로 곧게 솟지 못하고, 구부러지게 자라났다. 이들은
혹시 원성왕을 좌우에서 모시던 신하들의 화신(化身)은 아닐까?


괘릉을 정신없이 둘러보고 해설사가 있는 안내소로 갔다. 거기서 괘릉에 대해 이것저것 문의
하여 궁금증에 적지 않은 단비를 뿌렸는데, 그 사이 시간은 1시간이 훌쩍 지났다. 아무리 햇
님의 근무시간이 가장 긴 6월이라고 하지만 괘릉 후식거리로 2곳의 절터 유적(감산사, 숭복사
)도 준비되어 있어 그들도 오늘 모두 봐야만 된다. 게다가 그들은 그리 가까운 거리도 아니며
, 오로지 두 발로 찾아가야 한다.
하여 해설사에게 궁금증 해소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며, 괘릉을 뒤로 하고 괘릉의 후식거리를
찾으러 다시 길을 떠났다.

본글은 여기서 마무리를 지으며. 이후 감산사와 숭복사 관련 부분은 별도에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경주 감산사, 숭복사 관련글 보기)

* 원성왕릉(괘릉)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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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고구려 유적의 성지이자 서울의 동쪽 지붕, 아차산 초여름 나들이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5보루, 아차산1보루)

아차산 여름맞이 나들이 (아차산성, 아차산5보루, 아차산1보루)


    
' 아차산 여름맞이 나들이 '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  아차산성
◀  아차산1보루
▶  아차산3층석탑

아차산3층석탑

 



아차산(峨嵯山, 285m)은 내 즐겨찾기의 하나로 낮과 저녁(야간 등산)을 가리지 않고 무수
히 안겼던 친숙한 뫼이다. 특히 듣기만 해도 가슴이 꽤 벅차오르는 세 글자. 고구려(高句
麗, 고구리)의 영광스러운 흔적이 풍부히 깃든 현장으로 북쪽 미수복지(북한, 만주, 요동
, 요서, 연해주, 산동반도 등)를 제외한 이 땅의 대표적인 고구려 유적의 성지(聖地)이기
도 하다.

아차산은 용마산(龍馬山, 348m)과 망우산(忘憂山, 282m), 홍련봉(紅蓮峰), 시루봉을 식구
로 거느리고 있는데, 그들의 품을 무려 100회가 넘게 구석구석 더듬었으나 미답처(未踏處
)들이 일부 깨알처럼 남아 나를 참지 못하게 한다. 하여 오랜 세월 목말라했던 그 미답처
들을 여럿 잡고자 여름이 한참 제국의 기틀을 다지던 6월 한복판에 다시 아차산을 찾았다.



 

♠  아차산 남쪽 끝에 자리한 싱그러운 생태공간
~ 아차산생태공원

▲  아차산생태공원 동쪽 연못 (습지원)

아차산의 신세대 명소인 아차산생태공원은 도심 속의 싱그러운 생태공원으로 홍련봉과 더불어
아차산의 남쪽 끝을 잡고 있다.

이곳은 서울시의 공원녹지확충 5개년(1996~2001년) 계획에 일환으로 조성된 것으로 29.5억원
의 사업비가 투입되었다. 2000년부터 토지 보상과 설계 용역, 공사 다지기를 거쳐 2001년 12
월 31일 만남의 광장이 우선 준공되었으며, 2002년 3월 29일에 생태공원이 완성되었다.
공원 면적은 23,450㎡로 생태공원(자생식물원, 나비정원, 습지원, 생태자료실)과 만남의광장,
소나무숲, 생태관찰로, 관상용 논, 재배용 밭,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 야유회장(4개소), 운
동장과 여러 운동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상, 인어공주상 등도 갖추어 공
원의 풍치를 돋구고 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다양한 생태체험학습 프로그램(조류탐험교실, 곤충교실, 식물교실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공원이 닦여진 이후 고라니와 꿩, 해오라기, 쇠박새는 물론 멸종위기종인
맹꽁이까지 종종 관찰되고 있다. 심지어 서울 땅에서 처음으로 금개구리까지 목격되어 이곳의
생태계가 적지 않게 살아났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저 무늬만 생태공원이 아닌 진정한 생태공
원의 이름값을 하고 있다.
공원에는 쉼터가 넉넉히 베풀어져 있으며, 숲이 짙고 그늘의 질이 우수해 잠시 망중한에 잠기
기에 좋다.

* 아차산생태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370 (영화사로 145 ☎ 02-450-1655)
* 아차산생태공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생태공원 위쪽을 장식하고 있는 관상용 논

아차산생태공원의 백미(白眉)이자 아름다운 거울이라 할 수 있는 습지원(연못)은 그 이름 그
대로 습지식물의 삶터이다.
연못 한복판에 나무로 만든 다리가 걸쳐져 있어 시각의 농간으로 2개의 연못으로 보일 수 있
지만 실제는 하나로 주변 나무와 봄꽃, 지나가는 햇님과 달님, 구름까지 연못을 거울로 삼아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그리고 동쪽 못에는 서양 동화의 단골 모델인 인어공주상이
고운 맵시를 드러내며 연못의 운치를 한껏 띄운다.


▲  인어공주가 살고 있는 습지원 동쪽 연못

▲  습지원의 구수한 양념, 인어공주상
인어공주와 분수대 사이로 일곱 색깔 무지개가 반짝 모습을 비추었다.


인어공주는 윗도리는 여자 사람, 아랫도리는 물고기로 서양 동화에서 나오는 상상의 존재이다
. 잘빠진 몸매와 아름다운 가슴을 모두 드러낸 채, 바위에 걸터앉아 두툼한 꼬랑지를 흔드는
모습이 은근 매혹적이라 정처가 없는 나의 두 눈이 자꾸 그에게로 쏠린다.
그는 습지원을 닦으면서 갖다둔 조각품일 뿐, 아차산과는 관련이 없으며, 이곳이 어린이의 생
태학습 체험장의 역할을 하고 있어 순수함의 비중이 아직까지는 높을 그들의 눈높이와 공간의
성격을 배려하여 배치하였다.

그런데 평소에는 만나기 힘든 반가운 손님이 인어공주상과 분수대 사이에 반짝 왕림을 하였다
. 바로 일곱 색깔 무지개이다. 언제부터인가 1년에 1번 볼까 말까 한 존재가 되어버린 무지개
, 올해 들어 처음으로 보는 무지개로 갑작스런 그의 등장은 이번 아차산 미답처 사냥에서 큰
성과를 거둘 것이라는 하늘의 게시이자 복선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날 계획한 미답처는 모두
인연을 지었음)


▲  무거운 동전은 이곳으로?? 연못에 동전을 버리는 공간
인어공주 누님이 바라보는 방향에 동전을 받아먹는 동그란 돌통이 있다. 그곳에
동전이 들어가면 행운이 온다나 뭐라나? 그렇게 모인 동전은 광진구청에서
수거하여 불우이웃돕기에 쓴다고 한다. (과연??)


▲  분수가 한참 나래를 펼치고 있는 습지원 서쪽 못

▲  생태공원 동쪽 산책로 (생태자료실 동쪽)

아차산생태공원 북쪽에는 소나무숲이 닦여져 있다. 소나무와 들꽃이 어우러진 상큼한 공간으
로 이곳 역시 생태공원의 일원인데, 아차산성과 아차산 주능선으로 갈려면 이곳을 거쳐 가면
된다.
소나무가 삼삼하여 따가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힘을 쓰지 못하며 솔내음을 머금은 솔바람이 솔
솔 불어와 벌써부터 피어난 땀과 속세의 무성한 번뇌를 앗아간다. 소나무 그늘에는 들꽃이 가
녀린 미소를 머금으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에 퐁당퐁당 돌을 던지고, 그런 꽃내음과 솔내
음이 어우러져 조촐하게 극락을 연출한다.


▲  아차산 소나무숲



 

♠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흔적이 고루고루 깃든 삼국시대 산성 유적
아차산성(阿且山城) - 사적 234호

▲  아차산성 서벽 ①

아차산 남쪽 자락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차산성이 장대한 세월을 머금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아차산생태공원에서 소나무숲을 지나 10여 분 정도 오르면 그 모습을 드러내며, 덥수룩
하게 자라난 수풀에 거의 묻혀있던 것을 2013년 이후 성곽을 둘러싼 나무와 수풀을 꾸준히 밀
어내면서 북쪽과 남쪽 성벽도 무리 없이 확인할 수 있다.
허나 아무리 꾸준히 이발을 하고 숯을 쳐내도 대자연의 의해 금세 수풀이 자라 성곽을 가리려
드니 역시나 인간의 피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돌이나 모래알에 불과하다.

아차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나 백제 9대 제왕인 책계왕(責稽王)이 위
례성(慰禮城)과 함께 수축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백제 초기(1~2세기 경)에 국도(國都)
인 위례성 주변 수비와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상당히 늙은
성이다.
처음에는 아단성(阿旦城)이라 불렸는데, 5세기 이후부터 단(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변
해 아차산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 한문은 비슷한 모양으로 인해 금석문(金石文)과 판각인쇄
에서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았으며,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달리 하여 '峨嵯山城'이라 쓰는 경우
도 많았으나 문화재청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한자(阿且山城)를 정식 명칭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아차산의 공식 한자 표기인 '峨嵯山'과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아차산성 외에 장
한성(長漢城), 광장성(廣壯城)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4세기 후반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재위 392~413)이 한강 이북을 말끔히 장악하면서
이곳은 백제의 심장을 겨낭한 고구려의 화살과 같은 기지가 되었다. 위례성으로 여겨지는 서
울 강동/송파 지역이 훤히 바라보이는 잇점을 지닌 아차산을 흔쾌히 활용한 것이다.
그렇게 위례성(한성)을 새가 땅을 바라보듯 감시하며 기회를 엿보던 중 개로왕(蓋鹵王)이 무
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국력을 소모하고 고구려의 최대 라이벌이자 동시에 백제의 라이벌이기
도 했던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같이 고구려를 치자고 요구했다.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그 사건을 구실로 3만의 군사를 휘몰아 한성<漢城, 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을 한성이
라 부름>을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화공(火攻)을 이용해 성문과 도성을 불태웠으며, 개로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을
치던 중, 자신의 장수였던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을 만났다. 이들은 개로
왕의 미움을 받아 고구려에 투항했는데, 왕을 잡고자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의 투항 사실을 알리 없던 개로왕은 크게 안심을 했으나 그들은 왕에게 절을 하더니 바로
그의 얼굴을 향해 침을 3번 뱉고 온갖 육두문자를 요란하게 내뱉은 다음 포박하여 고구려에게
넘겼다.
그렇게 고구려의 포로가 된 개로왕은 아차산성으로 끌려와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왜열도와 중
원대륙(서토)의 무수한 영토를 거느리며 천하의 바다를 장악했던 백제의 도읍 위례성(한성)은
철저히 파괴되어 이 땅에서 영구히 지워지고 말았다. 바로 장수태왕의 그 만행 때문에 후손들
이 위례성을 찾느라 오랜 세월 진땀을 뺀 것이다.


▲  아차산성 서벽 ②

한강 유역을 장악한 고구려는 아차산성을 보조하고 한강과 중랑천, 서울 동부 지역, 구리 지
역을 효과적으로 수비하고자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조그만 보루(堡壘)를 주렁주렁 달아
놓았다. 이곳에 설치된 보루는 발견되지 않은 것까지 고려하여 최대 30개 정도로 여겨지며,
이들 보루는 북쪽으로 봉화산(烽火山)과 수락산(水落山), 사패산(賜牌山), 불곡산, 양주, 연
천 지역까지 이어지는데, 주목할 점은 오직 서울과 경기 북부에서만 발견되는 고구려의 독특
한 요새라는 점이다. 그만큼 이 지역의 중요성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 시절 온달(溫達)이 이곳에서 쳐들어온 신라군과 싸우다
가 전사했다고 전하며, 이후 신라가 접수해 고구려를 막는 요충지로 삼았다. 한때는 북한산성
(北漢山城)이라 불리기도 했고, 7세기 중반까지 고구려가 종종 건드렸으나 결국 점령하지 못
했다.
허나 8세기 이후 아차산의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서서히 버려지기 시작했고, 세월과 자연에 의
해 그 견고하던 산성이 헝클어지면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  아차산성 서벽 ③ 장대터

산성의 둘레는 약 1,038m(길게 잡으면 1,125m)로 산허리에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테뫼식성이
다. 아차산 남쪽 자락에서 워커힐 뒤쪽까지 이어져 있는데, 동문터와 남문터, 서문터, 수구(
水口)터, 곡성(曲城)터, 장대(將臺)터, 건물터, 온달장군이 마셨다고 전하는 우물 등이 남아
있다.
장대(장대터)는 전시에는 장수들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쓰였다고 하
며, 커다란 왕개벚꽃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덩치로 봐서 100~2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진
다. 성벽 높이는 평균 10m, 성 내부 면적은 약 103,375㎡이며, 광나루까지 성을 쌓은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워커힐이 들어서면서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1997년과 1999년 광진구에서 부분 발굴조사를 벌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 토기와 기와파편, 흙
으로 만든 인물상, 철로 만든 솥과 쟁기날 등을 건졌고, 신라의 북한산성이 대략 이곳임이 밝
혀졌다.
그래도 아직 건드리지 못한 숨겨진 부분이 많아 애태우던 중, 2015년 광진구가 문화재청의 예
산을 지원받아 한국고고환경연구소와 함께 아차산성 남벽과 배수구 일대 4,575㎡를 대상으로
발굴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여러 흥미로운 존재들이 햇살을 보았는데, 고구려의 연꽃무늬 기와장식인 '연화문와
당'이 나왔고 (인근 홍련봉 1보루에서 발견된 와당과 비슷한 형태임) 남벽 90m 외벽에서는 신
라 건축의 특징인 외벽 보축(補築) 시설과 물을 내보내는 출수구 3곳, 내벽에서는 입수구 2곳
이 나왔다. 또한 망대터에서는 내외성벽을 비롯한 치성(雉城)과 방대형 시설이 나왔으며, 신
라의 연화문와당 10여 점과 '북한산성'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신라의 북한산성이 이
곳임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었다.

허나 아차산성의 적지 않은 부분이 워커힐 관련 사유지로 묶여 있어 아직까지도 조사하지 못
한 부분이 많다. 산성은 물론 그 주변까지 속시원히 뒤집으면 보다 많은 유물과 숨겨진 이야
기가 쏟아져 나올 것인데 그 점이 몹시 아쉽다.

1999년 이후 헝클어진 산성을 복원 정비하였고, 그들의 건강과 사유지 보호를 위해 산성 주변
에 철책을 둘러놓아 출입을 막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 널린 산성(山城) 유적 중 유일하게 접
근이 통제된 까칠한 성곽이 되었는데<휴전선과 민통선 지역의 성곽 유적은 제외> 2014년 이후
부터 서울시와 광진구, 워커힐이 협의하여 산성을 개방한다는 떡밥이 꾸준히 나오고는 있으나
아직까지도 빗장은 열리지 못했다.

서벽과 북벽 일부, 남벽 일부는 산길에서 휴전선 너머를 바라보듯 만날 수 있으나 그 외는 어
림도 없으며, 워커힐 쪽에서 산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으나 통제되어 있어 대놓고 들어가
기는 그렇다. 하여 아차산성 내부를 정당하게 둘러보고 싶다면 광진구청에서 운영하는 아차산
역사문화해설(역사문화투어)을 이용해보는 것도 괜찮다.
(문의 광진구청 문화체육과 ☎ 02-450-7593)
내가 아차산을 무수히 오갔으나 아직까지 아차산성의 속살은 들어가지 못했다. 아차산성 내부
가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롭게 둘러볼 때를 기다리고 있으나 그 해방이 참으로 힘들다. 마치
이 땅의 민주화가 힘들게 자리를 잡은 것처럼 말이다.

* 아차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5-11


▲  아차산성 서벽 앞 산길 - 철책 너머가 금지된 성, 아차산성이다.

아차산성 서벽을 지나면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직진하면 낙타고개와 아차산 주능선으로 이
어지며, 동쪽은 아차산성 북벽 앞과 우미내계곡, 고구려 대장간마을로 이어진다.
여기서 아차산 동쪽 구역(구리시 아천동)으로 넘어가 우미내계곡과 아차산 큰바위얼굴, 석실
고분(石室古墳), 아차산3층석탑, 범굴사(대성암), 아차산2보루터를 둘러보고 아차산6보루터를
거쳐 서울과 구리의 경계선인 아차산 주능선으로 들어섰다. (아차산 구리 구역은 별도의 글에
서 다루도록 하겠음)



 

♠  아차산 주능선 더듬기 (아차산6보루, 5보루, 1보루)

▲  아차산6보루터 - 사적 455호

범굴사(대성암)에서 뒤쪽 너른 바위를 올라 아차산2보루터를 지나면 주능선 바로 직전에 6보
루가 마중을 한다.

언덕처럼 봉긋 솟은 터가 바로 6보루터로 2005년에 아차산3보루 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사람이
우연히 발견했다. 허나 아직까지 속시원한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 생김새가 보
루터 비슷하게 생겨서 아차산6보루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6보루의 추정 둘레는 약 80m 정도로 여기서 나온 불씨는 흙을 덮어 보존하고 있다. 아차산 주
능선의 바로 동쪽으로 아차산의 옛 과거를 적지 않게 간직하고 있으리라 여겨지며, 속히 발굴
조사를 벌여 6보루의 정체성을 밝혀주었으면 좋겠다.

고구려는 아차산을 비롯하여 구의동(九宜洞), 자양동(紫陽洞), 용마산, 망우산, 수락산, 봉화
산, 사패산, 천보산, 양주 불곡산, 연천 지역까지 많은 보루를 설치했는데, 이들 보루 중, 그
나마 상태가 괜찮은 아차산 보루 6곳, 용마산 보루 7곳, 망우산 보루 1곳, 홍련봉 보루 2곳,
시루봉보루, 수락산 보루 1곳을 '아차산 일대 보루군'이란 이름으로 묶어 국가 사적 455호
지정했다.


▲  소나무가 운치를 자아내는 아차산 주능선길

아차산6보루와 간만에 인연을 짓고 아차산의 하늘길인 아차산 주능선으로 진입했다. 천하 둘
레길의 성지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서울둘레길(157km)도 신세를 지는 능선길로 서울둘레길 2
코스(용마,아차산코스 12.4km)가 지나간다. 여기서 남쪽으로 향하면 아차산5보루터가 깃든 두
툼한 언덕이 마중을 한다.


▲  아차산5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5보루터는 해발 267m 봉우리에 둥지를 튼 보루로 둘레 158m, 내부 면적은 1,818㎡ 정도
이다. 봉우리를 활용하여 보루를 다졌는데, 보루 성벽은 거친 세월의 강물 속에 죄다 휩쓸려
사라지고 겨우 흔적 일부만 있는 형편이다. 북쪽 비탈면에 석축 일부가 남아있으나 보존을 위
해 흙으로 덮었으며, 보루를 잡아먹은 봉우리는 예전보다 다소 살이 두툼해진 상태이다.

그의 정체가 밝혀지기 이전에는 주능선 산길이 보루 복판을 가로질러 흘러갔으나 보루임이 밝
혀진 이후에는 그의 건강을 위해 서쪽에 우회길을 닦았다. 다른 보루와 달리 신라 후기 토기
가 여럿 출토되었고, 봉우리 모습이 마치 신라 스타일의 고분과도 비슷해 이를 두고 신라(新
羅)가 기존의 고구려 보루를 밀어버리고 무덤을 만든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허나 신라는
산능선에 무덤을 잘쓰지 않는 편이라 이 역시 설에 불과하다.
(아차산5보루는 현재 문화유산 보호로 접근이 통제되어 있음)


▲  아차산5보루 정상을 장식하고 있는 돌탑

이곳을 스쳐간 산꾼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돌탑을 이루고 있
는 돌 대부분은 헝클어진 5보루 성돌로 그 성돌이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인 돌탑으로 다
시 태어났다. 그렇게 그들의 삶은 돌고 도는 모양이다.


▲  아차산5보루터에서 바라본 천하 ①
푸른 한강을 사이에 두고 구리시와 남양주시(도농, 금곡, 덕소), 서울 강동구,
하남시가 시야에 들어온다.

▲  아차산5보루터에서 바라본 천하 ②
아차산 남쪽 자락과 한강, 강동구, 하남시 지역

▲  아차산5보루터에서 바라본 천하 ③
아차산 남쪽 자락과 광진구, 강동구, 송파구, 강남구, 성남시 지역

▲  아차산5보루 남쪽 부분

▲  아차산5보루에서 바라본 아차산1보루 (가운데 봉우리)

▲  아차산1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5보루에서 능선길을 조금 내려가면 두툼히 살이 오른 아차산1보루가 나온다. 이곳이 넘
버원 1보루가 된 것은 아주 단순하다. 남쪽을 기준으로 발견된 순서대로 나열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해발 250m에 자리한 1보루는 봉우리를 활용해 닦은 것으로 1994년 발굴조사 때 고구려 토기가
여럿 나왔다. 동쪽과 남쪽에서 보루 성벽이 확인되었는데, 보루의 정체가 알려지기 훨씬 이전
부터 보루의 남쪽 성벽 흔적을 밀어버리고 산길을 냈으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는 보루 주변
에 목책을 둘러 접근을 통제하고 그 옆구리에 우회길을 내었다. 그러다가 2015년 이후로 다시
보루를 개방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아차산 보루 중 가장 남쪽으로(홍련봉 보루 제외) 5보루와 함께 아차산성과 아차산~용마산~망
우산 주능선을 이어주는 요새였으며, 동쪽과 남쪽, 서쪽이 확 트여있어 자리 하나는 기가 막
히게 좋다.
특히 5보루와 남쪽 아차산 해맞이광장과 더불어 서울의 이름난 해돋이 명소로 추앙을 받고 있
으며, 1월 1일만 되면 해맞이광장과 함께 새해 해돋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아주 북새통을 이루
어 발을 디딜 공간 조차 없을 지경이다.

이곳에 들어앉아 천하를 굽어봤을 1보루는 장대한 세월의 매서운 흐름과 대자연의 오랜 괴롭
힘 앞에 완전히 녹아내리고 그 터만 겨우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알려줄 따름이다.


▲  아차산1보루 주변에서 바라본 해질녘에 서울시내

▲  아차산 해맞이광장 주변

아차산1보루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아차산 해맞이광장이 마중을 나온다. 이곳은 묵은 1,000
년이 지고 새로운 1,000년이 도래하던 2000년 1월 1일 아침 7시, 광진구청이 이곳에서 새천년
해맞이 행사를 가졌는데, 그것을 기리고자 비석을 세우고 해맞이 광장으로 삼았다.
여기서는 지는 해는 물론, 뜨는 해도 맞이할 수 있으며, 광진구가 야심차게 닦은 서울의 주요
해돋이 성지로 매년 1월 1일 아침마다 해맞이 축제가 성황리에 열린다.


▲  아차산 해맞이광장 주변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광진구와 송파구, 강남구, 대모산과 관악산 등


아차산 해맞이광장을 벗어나 무덤 갈림길에 이르니 어느덧 19시가 되었다. 햇님의 근무 시간
이 나날이 연장되면서 아직도 대낮과 같은 상태이나 오랜 세월 목말라했던 아차산의 여러 미
답처(온달샘 석탑, 석실고분, 아차산3층석탑)와 쿨하게 계산을 끝낸 상태라 내려가는 발걸음
이 아주 가벼웠다. 비로소 그들과의 술래 신세를 면했기 때문이다.

무덤 갈림길에서 남쪽으로 직진하여 너른 바위 위에 들어앉아 황색 지붕을 휘날리는 고구려정
을 둘러보고, 친수계곡과 동의초교를 거쳐 어린이대공원후문(아차산역)으로 내려왔다.

이렇게 하여 아차산 6월 나들이는 다음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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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현충원 뒷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서달산 호국지장사

국립서울현충원 호국지장사



~~~ 국립서울현충원 호국지장사 현충일 나들이 ~~~
호국지장사 지장보살입상 (지장전)
▲  호국지장사 지장전 (지장보살입상)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이 되면 진하게 생각나는 그곳이 있다. 바로 호국(護國)의 신이 봉
안된 국립서울현충원(顯忠園)이다. 내가 애국심이 유별난 것도 아니요. 가족과 일가 중
에 그곳에 묻힌 이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석가탄신일에 그날 본능에 따라 절 투어를 즐
기듯 현충일에는 그날에 맞게 현충원을 찾아가 그곳에 깃든 늙은 문화유산과 숲길(동작
충효길)도 둘러볼 겸, 호국의 신을 기리며 그날의 분위기를 누리는 것 뿐이다.

국립서울현충원은 한강과 관악산 사이에 솟은 공작봉<孔雀峰, 서달산(西達山,197m)> 자
락에 넓게 터를 닦았다. 1954년에 조성되어 천하에 흩어진 6.25 전쟁 전사자를 모아 봉
안했는데, 처음에는 지역 이름을 따서 '동작동 국립묘지'라 했으나 2006년부터 '국립서
울현충원'으로 이름을 갈았다. (본글에서는 '국립현충원' 또는 '현충원'이라 표시함)

이곳은 특히 명당 자리로 명성이 자자한데, 마치 공작이 아름다운 날개를 쭉 펴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며,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형세도 지니고 있어 좀 어려운 말
로 장군대좌형(將軍對座形)이라 부른다. 즉 동쪽인 좌청룡(左靑龍)의 형세를 보면 웅장
한 산맥의 흐름이 마치 용이 머리를 들어 꿈틀거리는 듯, 한강을 호위하는 형상이고 서
쪽인 우백호(右白虎)는 힘이 센 호랑이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며, 전후좌우로
솟은 봉우리와 산허리는 천군만마가 줄지어 서 있는 형상과 같다는 것이다.
정면 앞산을 바라보면 주객이 마주 앉은 모양이고, 멀리 보이는 산은 물소뿔 같으며 한
강은 동에서 서로 흘러가니 명주 폭이 바람에 나부끼듯 하늘거려 공작봉을 감싸 흘러내
려간다. 마치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이라 하여 명당 중의 명당으로 통
한다.
이렇게 의미가 남다른 곳에 호국의 신을 봉안했으니 그들의 후손과 이 나라가 잘되어야
마땅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효과는 시원치가 못한 것 같다. (친일 패거리와 자격 미달자
들이 적지 않게 자리를 축내고 있음)

현충원 내에는 창빈안씨묘역과 부안군 이석수 묘역(扶安君 李碩壽墓域), 호국지장사 등
등의 문화유산이 깃들여져 있는데, 본글에서는 현충원 단골 명소이자 내 즐겨찾기 명소
의 하나인 호국지장사만 다루도록 하겠다. (부안군 묘역은 철책이 꽁꽁 둘러져 있어 들
어갈 수가 없음)



 

♠  국립현충원 뒷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책임지는 서달산 호국지장사(西達山 護國地藏寺)

▲  국립현충원 호국지장사 입구

국립현충원의 꼬리 부분인 공작봉(서달산) 북쪽 자락에는 호국지장사(지장사)가 포근히 둥지
를 틀고 있다.
처음에는 현충원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위해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절로 여기고 거의 관
심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5년 이후 겉보기와 달리 문화유산을 넉넉히 품은 오래된 절임
을 알게 되면서 구미가 확 올랐고 그 이후 현충원을 찾을 때마다 꼭 발걸음을 하고 있다.

호국지장사(이하 지장사)는 신라 끝 무렵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670년
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서로 시기가 틀려먹음)
부동산 전문가인 도선은 북쪽으로 가다가 한강 언덕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니 어디선가 서기
(瑞氣)가 흘러나와 자신을 유혹하고 있었다. 하여 그 서기를 추적하니 그 기운이 나오는 곳에
칡덩굴이 엉켜있고 약수가 나오고 있었다. 하여 자리를 살펴보니 아주 기가 막힌 명당인지라
토굴(土窟)을 짓고 갈궁사(葛弓寺)라 했다고 한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지장사에서 내세우는 설화일 뿐이다. 봉은사(奉恩寺)에서 작성한 '봉은
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1577년 선조가 창빈묘역 부근 산기슭에 절을 창건하고 원찰을 삼으니 갈궁사가 바로 이 절이
다'
내용이 있으며 고려 공민왕(恭愍王) 시절에 보인(寶印)이 중창<또는 창건>하고 화장암(華
藏庵)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덩달아 전해오고 있어 이르면 고려 후기, 늦어도 1577년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절의 내력이 구체적으로 윤곽을 보이는 것은 16세기 말이다. 명종(明宗) 시절 창빈안씨묘역이
양주에서 절 부근으로 이장되었는데 1577년 선조가 친할머니인 창빈의 묘역을 동작릉으로 높
이면서 화장암을 창빈묘역을 지키는 원찰(願刹)로 삼았다. 이때 화장사(華藏寺)로 이름이 갈
렸다고 하며, 그 인연으로 오랫동안 왕실의 지원을 받았다. 또한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
항복(李恒福)과 이덕형(李德馨)이 10대 시절 공부를 했던 곳으로도 전해진다.
1663년 절을 중수했으며, 영조 시절에 신경준(申景濬)이 작성한 '가람고(伽藍考)'에 '동작리
에 화장암이 있다'는 내용이 있어 그때까지도 꾸준히 법등을 지키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1862년 운담(雲潭)과 경해(鏡海)가 중건했으며, 1870년에 경파루(鏡波樓)를 지었고 1878년에
주지 서월(瑞月)과 경해가 대방(大房)을 수리했다. 1893년에는 경운(慶雲), 계향(戒香)이 불
상을 개금하고 구품탱, 지장탱, 현왕탱, 독성탱,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1896년에 칠성각을 새
로 지었다. 그리고 1906년에는 풍곡(豊谷)이 약사전의 불상을 개금 단청하고 후불탱과 신중탱
, 감로탱, 신중탱, 칠성탱 등을 봉안했다.
1911년 왜정(倭政)의 사찰령(寺刹令)으로 봉은사의 말사(末寺)가 되었으며, 1920년에 대방을
수리했고, 1936년 주지 유영송(劉永松)이 능인전(能仁殿)을 중수했다.

1954년 이후 절 밑에 국립묘지가 들어서면서 자연히 호국신을 책임지는 사찰이 되었다. 하여
지장도량(地藏道場)을 칭하게 되었는데 1983년 주지 혜성(慧惺)은 호국신들이 지장보살의 원
력으로 모두 극락왕생이 되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호국지장사<줄여서 '지장사'>로 이름을 갈았
다. 그야말로 현충원 사찰에 아주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이름이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능인보전과 삼성각, 극락전, 지장전, 심우당, 청심당 등 10동 가
까운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과 삼성각 등은 동남향(東南向)을 취하고 있다. 경내 남쪽에는 약
수가 나와 주민들이 많이 물을 뜨러 오며 지장보살입상을 중심으로 3,000좌의 조그만 지장보
살을 봉안해 절 이름 값을 톡톡히 한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철불좌상과 괘불도(掛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3호), 극락9품도, 독
성도, 약사불도 등 무려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지니고 있으며, 한강에서 건져 올렸다는 철불
좌상과 목조여래좌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 후기 탱화들이다. 그 외에 멀리 경주에서 왔다
는 신라 후기 3층석탑이 있는데 그것이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다.

서울 도심과 무척 가깝지만 삼삼한 숲에 감싸여 있어 산사(山寺)의 분위기를 여실히 간직하고
있으며 고즈넉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현충원에 발을 들였다면 꼭 둘러보길 권한다. 또한 짙은
숲에 가려 보이는 범위는 적으나 현충원 일대와 한강, 용산구 지역이 시야에 들어와 경치도
그런데로 괜찮다. 하여 이승만 전대통령도 꽤나 군침을 흘렸던 곳이기도 한데, 그가 국립묘지
를 둘러보고 잠시 절에 들려 사람들에게
'만일 이곳에 절이 없었다면 내가 묻히고 싶은 땅이오~' 했다고 전한다. 그만큼 자리가 좋은
곳이다.

이곳은 절의 마르지 않는 샘이자 든든한 후광(後光)인 현충원이 있는 한 배를 굶거나 문을 닫
을 일은 절대로 없다. 현충원의 일원으로 그와 운명을 함께 하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만
약 현충원이 없었다면 인근 상도동의 사자암(獅子庵, ☞ 관련글 보기)처럼 숲과 주거지의 경
계가 되거나 주거지에 거의 둘러싸여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석가탄신일과 현충일에는 중생들에게 공양밥이나 국수를 제공하는데, 맛이 제법 괜찮다.
(현충일에는 보통 13시 이전에 공양을 제공함)

* 호국지장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305 (현충로 210 ☎ 02-814-5257)
* 호국지장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지장사로 인도하는 오르막길에서 바라본 국립현충원
현충원은 물론 그 너머로 용산구와 남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지장사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20-5호

지장사 입구에서 절로 인도하는 각박한 오르막길을 오르면 커다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시원
한 그늘을 베풀며 마중을 한다.
그는 350년 정도<1985년 10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315년> 묵은 나무로 높이
15m, 둘레 4.5m에 이른다. 오랜 세월 지장사의 이정표 및 정자나무의 역할을 해왔던 그는 아
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양분과 지장사의 보살핌으로 무럭무럭 자라나 현충원에서
가장 장대하고 늙은 자연물이 되었다.
 
지장사에는 일주문(一柱門)이나 천왕문(天王門) 같은 문이 없다. 대신 삼삼한 숲이 일주문의
역할을 대신한다. 숲에서 불어오는 산바람과 절에서 낭랑하게 흘러나오는 염불소리는 천근만
근 무겁다는 번뇌를 참교육시키며 마음 바깥으로 쫓아낸다. 하지만 멀리 가지 않고 절 입구에
서 우두커니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나 또한 그 번뇌를 찾으니 해탈이니 성불이니 하는 것은 그
저 먼 세상의 이야기인 모양이다.


▲  지장사 경내로 인도하는 숲길

▲  석등을 한복판에 띄운 네모난 연못

▲  조촐한 모습의 능인보전(能仁寶殿)

경내로 들어서면 정면에 지장보살입상을 중심으로 한 지장전이, 오른쪽은 대웅전 구역, 왼쪽
에는 단출한 모습을 지닌 능인보전이 있다.
능인보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겉으로 보면 그저 작은 건물로 여기고 지
나칠 수 있다. 허나 그 안에 철불좌상과 신중탱 등 오래된 문화유산이 자리를 채우고 있으니
꼭 둘러보기 바란다.


▲  능인보전에 봉안된 철불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5호
능인보전 약사불도(藥師佛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호


능인보전 불단에 홀로 자리한 철불좌상은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경내에서 3층석탑 다음으
로 늙은 존재이다. 철불(鐵佛)이란 이름 그대로 철로 만든 불상으로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잠깐 등장을 하는데, 그가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다면 도선국사가 세운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을 흔쾌히 입증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아쉽게도 그는 다른 곳에서 온 불상으로 이곳에 들어온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다음과 같
은 전설이 아련하게 전해온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인 어느 옛날, 한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의 꿈에 이 불상
이 나타나 제발 빛 좀 보게 해달라며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어부는 혹시나 싶어 한강으
로 달려가 그물을 치니 녹슨 채로 버려진 그 불상이 걸려들었다. 하여 그를 가져와 깨끗하게
목욕을 시키고 집에 봉안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이상하게도 고기도 잡히지 않고 나쁜 일만 연이어 생기는 것이다. 보통 이
런 전설에선 고기가 잘 잡혀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기 마련인데, 불상이 좀 심성
이 고약한지 그게 아닌 것이다. 그래서 어부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화장사(지장사)에 넘겼다고
하며 그 이후부터 비로소 잘 먹고 잘살았다고 한다.
이 전설을 통해 절이 파괴되거나 도난, 배 침몰 등으로 강에 버려진 불상을 수습해왔음을 알
수 있는데 그의 고향은 현재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고향을 잃은 이 철불은 높이 98cm로 얼굴은 동그랗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눈이 유난히 길고
가는데 보는 위치에 따라 날카롭게 보이기도 하며 머리는 꼽슬인 나발(螺髮)이다. 눈썹은 무
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졌으며, 굳게 다문 입에는 엷게나마 미소가 드리워져 환하게 웃음짓는
표정 같다.
어깨는 꽤 단련을 한 듯 당당하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법
의(法衣)는 주름선이 선명하다. 또한 왼손에는 약합이 들려져 있어 그가 약사여래불임을 알려
주고 있으며, 고려 초에 조성된 천하에 몇 없는 철조약사여래상으로 그 당시 약사여래 신앙에
중요한 자료로 판단되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철불 뒷쪽에 걸린 약사불도는 1906년에 봉감(奉鑑), 정운(禎雲), 긍법(肯法), 경조(敬照) 등
이 그린 것이다. 간략한 아미타존상의 형태와 음영법의 구사, 적색과 녹색의 탁한 색감이나
어두운 군청색을 많이 쓴 점, 불화의 횡적인 구도와 그림에 나타난 상을 간략하게 나타낸 점
등,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철불 좌우에는 조그만 금동불(金銅佛)이 각자의 작은 공간을 지니며 빼곡히 들어앉아 철불을
받쳐주며 건물 내부를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 이들은 중생들의 돈과 소망을 담아 만든 원불(
願佛)로 약 400기 정도 된다.


▲  능인보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호

능인보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도는 약사불도와 같은 시기(1906년)에 같은 화승이 그렸다. 그
림은 수평 3단의 정연한 구도를 보이며, 범천(梵天), 제석(帝釋), 위태천(韋太天) 등 신중탱
의 대표적인 존재들이 모두 묘사되어 있다. 균형이 잡히지 않은 인체나 경직된 자세, 무겁고
탁한 색채 등은 전체적으로 불화의 품격이 떨어지던 20세기 초에 많이 나타난다.


▲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7호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 등 14명의 화승이 그린 것으로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권속들을 계
단식으로 배치했고 화폭 상단으로 갈수록 존상을 작게 묘사하여 원근법의 효과를 살렸다. 원
만한 인물의 형태는 18세기 후반 양식이지만 오색 광선으로 표현된 광배와 도식(圖式)적인 천
의, 단조로운 구름의 묘사는 19세기 불화 양식을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많이 변색되긴 했으나
일부 적색과 녹색은 비교적 밝게 채색되었다. (지장시왕도의 봉안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범종각(梵鍾閣)
범종각은 1975년에 지어진 것으로 저 안에 같
은 해에 조성된 범종이 담겨져 있다. 국립현충
원과 절의 이름에 걸맞게 그 종을 호국범종이
라 부르며 애지중지한다.

     ◀  고색의 무게가 짙어보이는 돌판
대웅전 옆구리에는 고색이 자욱한 네모난 돌판
이 놓여져 호기심을 자극시킨다.
그의 피부에는 한문 여러 자가 새겨져 있는데,
눈이 침침해 제대로 확인은 못했다. 건물 주춧
돌이나 상석(床石)으로 여겨지나 정체가 아리
송하며, 돌판에 화분이 여럿 놓여져 그의 허전
한 머리를 달래주고 있다.


▲  멀리 경주(慶州)에서 왔다는 3층석탑

범종각 옆에 자리한 이 석탑은 멀리 경주 남산(南山)에서 가져온 신라 후기 석탑이라고 한다.
이승만 시절에 국립묘지를 조성하면서 강제로 소환해 경상도를 상징하는 탑으로 삼았다고 하
는데,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버려진 것을 지장사에서 수습해 보수했다.
지장사에서 가장 늙은 존재라고는 하나 겉모습은 완전 20세기 석탑 같으며, 지붕돌과 석재 일
부에만 오래된 티가 보일 뿐, 머리장식과 탑신(塔身) 상당수는 지장사에서 새로 손질을 하여
늙은 돌과 새 돌이 서로 어색한 조화를 보이고 있다.

그는 현충일 기념으로 소원지를 가득 머금고 있는데, 그 앞 탁자에는 소원지와 볼펜, 조그만
불전함이 깨알처럼 놓여져 있다. 탑과 주변 줄에 달아놓은 소원지는 나중에 불에 태워버리는
데, 그래야만 소원지에 쓰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과연 얼마나 이루어졌을까??)


▲  지장전(지장보살입상)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산신과 독성, 칠성 등 삼성(三聖)의 공간으로 1칸짜리 팔작지붕 집이다.

▲  칠성도(七星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호)와 석가여래상

삼성각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는 석가여래상은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동그랗게 표현된 풍만한
가슴과 가슴선이 제법 눈길을 부여잡는다. 그의 두툼한 얼굴에는 미소가 살짝 깃들여져 있고
물레방아처럼 생긴 법륜(法輪)을 왼손에 소중히 쥐고 있는데, 법륜의 8개의 바퀴살은 팔정도
(八正道)를 나타내며, 동그란 모양은 부처의 가르침인 담마(蕁麻)가 완전하다는 것을 뜻한다
고 한다.

그런 석가여래상 뒤에 자리한 칠성도는 1906년 보암긍법(普庵肯法)이 그린 것이다. 화면은 화
폭의 좌우대칭으로 권속들을 배치하고 상하 2단으로 나눈 수평 구조로 경직된 형태와 선, 탁
한 색채 등은 20세기 초 불화 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독성도(獨聖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호)와 독성상(獨聖像)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은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한이다. 승려 비슷한 복장으
로 앉아있는 모습이 안방 마님처럼 편안해 보이는데 머리털이 없어 허전하기만 한 그의 머리
에는 혹 같은 것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독성상 뒤쪽에 깃든 독성도는 소나무 밑에서 바위에 기댄 채 동자(童子)의 공양을 받고 있는
독성 할배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전형적인 19세기 독성도로 폭포와 나무, 꽃 등의 표현이나
늘어진 옷자락의 묘사는 다소 서투르나 독특한 자세와 온화한 얼굴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그
리고 그림의 깊이를 살려준 투명한 광배의 표현 등이 눈길을 끈다.


▲  산신도(山神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호)와 산신상

길쭉한 흰 수염을 지닌 산신 할배는 왼손에 붉은 지팡이를 들고 오른손으로 그의 애완동물인
호랑이를 쓱쓱 쓰다듬고 있다. 호랑이가 아무리 무섭다한들 산신 앞에서는 그저 꼬랑지를 살
랑거리는 고양이에 불과하며, 산신 옆에 있는 동자는 무척 앳돼 보여 마치 할배와 손자처럼
다정해 보인다.

산신상 뒤에 걸린 산신도는 1893년에 금호약효(錦湖若效)가 그렸다. 민화(民畵, 속화)풍의 나
무와 폭포, 호랑이의 모습은 19세기 말 산신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원색적이고 장식적
인 당시의 산신도와는 달리 은은한 중간 색조를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위엄과 격이
담긴 산신의 얼굴 묘사도 제법 돋보인다고 한다.



 

♠  호국지장사 마무리 (지장전, 대웅전 등)

▲  밑에서 바라본 지장전(地藏殿)

지장사의 백미(白眉)이자 최대 명물은 경내 뒤쪽에 자리한 지장보살입상과 3,000좌에 달하는
조그만 지장보살상의 장대한 물결일 것이다.
절에서는 이곳을 지장전으로 삼아 각별히 챙기고 있는데, 비록 건물은 아니나 석불이나 마애
불을 두고 각(閣)이나 전(殿)을 칭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많다. 능인보전과 삼성각, 대웅전 등
에 깃든 늙은 문화유산도 중요하나 지장사의 성격을 분명히 밝혀주는 존재가 바로 이곳 지장
전이다.

지장전은 1983년 주지 혜성이 현충원 호국신들이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극락왕생이 되도록 기
원하고자 조성한 것으로 지장사의 최대 프로젝트였다. 육환장(六環杖)이란 긴 지팡이를 들며
온화한 표정으로 현충원을 굽어보는 지장보살의 뒷통수에는 동그란 두광(頭光)이 그를 빛내주
는데 마치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햇님 같다. 그 뒤에는 그를 멀리서 둘러싸듯, 거대한 석벽을
병풍처럼 만들고 조그만 지장보살을 가득 입혀놓아 장관을 이룬다.


▲  극락전에서 바라본 지장전의 위엄

▲  지장보살상 좌우에 있던 5층석탑들

연꽃이 새겨진 기단(基壇)을 지닌 이들은 고색의 때가 다소 묻어나 보이는데, 그들에 대한 정
보가 딱히 없다. 탑의 생김새로 봤을 때는 왜정(倭政) 때나 20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
겨지며 좌측 탑의 1층 탑신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이들 석탑은 능인보전 앞쪽으로
옮겨짐)

   ◀  지장전 우측에 자리한 극락전(極樂殿)
예전에는 1칸짜리 팔작지붕 집이었으나 근래에
맞배지붕 집으로 새로 갈았다. 아미타불과 관
세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후불탱 등이 봉안
되어 있으며, 대웅전 목조여래좌상 뱃속에서
나온 저고리의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다.


▲  극락전에 있는 불복장(佛腹臟) 저고리(북제품)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38호


이 겹저고리는 2006년 5월 대웅전 목조여래좌상(아미타여래좌상)을 개금하던 중에 그의 뱃속
에서 나왔다.
1630~1650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400년 가까이 먹은 늙은 옷임에도 색깔은 잘 남아
있다. 하여 옷의 원형 훼손을 막고자 유물 보수를 생략하고 나온 모습 그대로 오동나무 상자
에 보관을 했으며, 조계사(曹溪寺) 불교중앙박물관에 관리를 맡겨 지금은 그곳에 있다. 그리
고 단국대 석주선박물관에서 원형에 가깝게 복제품을 의뢰하여 그것을 이곳 극락전에 두어 그
들의 빈 자리를 조금이나마 채워준다.


▲  극락전에 봉안된 아미타3존상과 후불탱

▲  큼직한 맞배지붕을 지닌 대웅전(大雄殿)과 앞뜨락
대웅전 뜨락 주변에는 종무소(宗務所)와 심우당(尋牛堂)이 있고, 대웅전
뒤쪽에는 청심당과 공양간, 요사가 있다.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8호

지장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맞배지붕 집으로 보통은 정면이 더 크지만 이 건물은 반대로
측면이 더 넓다. 2016년에 건물과 지붕, 내부를 손질하여 조금 젊어졌으며, 근래에 또 손질을
했는데, 제법 너른 대웅전에는 목조여래3존상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에 그려진 탱화들이 여럿
걸려있다. <호국지장사는 지방문화재 탱화와 탑의 위치를 자주 옮김>

법당의 필수 그림인 신중도는 인도의 토속신(土俗神)으로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된 호법신(護
法神)의 무리를 조금의 여백도 허용치 않고 꾸역꾸역 집어넣은 탱화이다.
1893년 금호약효, 정련(定鍊) 등이 그린 것으로 위태천과 범천, 제석을 중심으로 비교적 많은
이들을 담았는데, 좌우 대칭구도와 위태천과 제석 등이 이루는 역삼각형 구도가 다소 어수선
해 보인다. 특히 천녀(天女)들이 20여 종에 달하는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은 본그림의 백미라
할만하다. 인체를 불균형하게 표현한 점과 과장된 안면의 묘사 등이 19세기 불화의 특징을 보
이는 작품으로 비록 색이 좀 퇴색되긴 했으나 조화로운 색채 구성으로 그림의 품격을 높였다.


▲  대웅전 목조여래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26호)과 그 뒷쪽에
자리한 아미타불도(阿彌陀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4호


대웅전 목조여래좌상(가운데 금동불)은 좌우로 승려 머리의 지장보살상과 화려한 보관(寶冠)
을 눌러쓴 관세음보살상을 거느리고 있다. 2006년 5월에 개금을 하다가 그의 뱃속에서 후령통
과 저고리 등의 복장유물이 나왔는데, 조성 시기를 알려주는 조성발원문이나 관련 기록은 아
쉽게도 없었다.
다만 후령통은 1639년에 조성된 예산 수덕사(修德寺)의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뱃속에서 나온
은제(銀製) 후령통과 많이 비슷하여 1639년 전후 것으로 여겨지며, 불상 또한 그 시기에 조성
된 것으로 파악된다.
(지장사 목조여래좌상은 '지장사 목조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
재로 지정되었으며, 저고리는 '호국지장사 불복장 저고리'란 이름으로 2021년 11월에 서울 지
방민속문화재 38호
로 지정됨, 복장유물과 저고리는 모두 불교중앙박물관에 가 있음)

목조여래좌상 뒷쪽에 자리한 아미타불도는 1870년에 원명긍우(圓明肯祐), 경은계윤(慶隱戒允)
등 4명의 화승이 그린 것으로 중앙에 아미타불을 두고, 양 옆구리에 그의 식구를 배치했는데,
형태가 풍만하고 정교하며 무늬가 화려하다. 5가지 색깔의 광배(光背)가 눈길을 끌며 옷의 묘
사가 도식화되어 있다. 적색과 녹색 색상은 다소 탁하며 코발트 빛깔의 짙은 청색은 19세기
말 불화 양식을 잘 보여준다.
그는 대웅전 식구이나 한때 능인보전에 가 있기도 했으며, 다시 대웅전으로 돌아왔다. 즉 목
조여래좌상이 탱화갈이를 한 것이다.


▲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6호

감로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 등 3명의 화승이 그렸다. 그림은 상부에 아미타여래 일
행이 지옥에서 온 중생을 맞이하러 가는 장면을 그렸고 중앙에는 성반의식(聖盤儀式, 우란분
경에서 7월 15일 승려 및 십방제불에게 백미를 올리고 발원하는 의식)
을 하는 모습을, 그 주
변에는 아귀(餓鬼)의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하단부에는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들로 가득한 지옥과 현실의 모습을 그렸는데, 7여래
의 장엄하면서도 원만한 얼굴과 옆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 성반의식을 치르는 승려의 모습과
산수의 표현 등은 19세기 초의 양식을 잘 보여주며, 나뭇잎 선의 처리와 산수의 음영처리 등
에서 19세기 말 불화양식이 잘 드러나고 있다.


▲  팔상도(八相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0호

팔상도는 부처의 일대기를 8개의 장면으로 그린 것으로 1893년 한곡돈법(漢谷頓法)이 그렸다.
이곳 팔상도는 부처의 생애 중 가장 극적인 장면을 묘사했으며 형식적인 형태와 탁한 색조는
19세기 말 불화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5호

극락9품도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16관 중의 제14, 15, 16관에 해당되는 9품의 극락왕생
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은 1893년 금호약효 등 3명이 그린 것으로 대구 동화사(桐華寺)의 부속암자인 염불암(
念佛庵)의 극락구품도와 같은 원본을 보고 그린 것이다. 등장 인물의 얼굴 이목구비를 섬약하
게 표현하여 조선 후기 극락구품도의 독특한 유형을 보여주며, 음영의 표현이나 적색과 녹색
의 대비, 화려한 꽃무늬 등은 19세기 불화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  대웅전 앞에 차려진 아기부처상 세트

대웅전 앞에는 거하게 아기부처상 세트를 깔아놓았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아기부처상과 석
조는 연못 부근 옛 샘터에 있던 것으로 대웅전을 손질하면서 그 앞으로 가져왔는데, 임시로
만든 것이 아닌 돌로 단단하게 다진 것들이다. 하여 1년에 대부분을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지
내야 되는 다른 아기부처상과 달리 365일 햇살을 보고 있으며, 매일 관불의식이 가능하다.


▲  공양간에 깃든 현왕도(現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9호

점심 공양을 먹으러 대웅전 뒷쪽으로 가다가 공양간으로 쓰이는 하얀 건물 안에서 늙은 그림
하나가 뜨겁게 시선을 보낸다. 마침 현왕도를 만나지 못했고 이전 지장사 나들이 때 하얀 건
물에서 본 기억이 있어서 살펴보니 현왕도 그가 맞았다.

현왕도는 1893년에 금호약효 등 3명이 그렸다. 현왕(現王)이란 저승의 대표 대왕인 염라대왕(
閻羅大王)을 일컫는 것으로 죽어서 3일만에 그에게 심판을 받는 장면을 담았다. 둥근 구조 안
에 그의 심판 장면을 그렸는데, 현왕의 우람한 체구와 세밀한 얼굴 묘사에서 비교적 예스러운
양식이 나타난다. 얼굴과 옷주름을 획일적으로 묘사했고 꽃무늬와 구름을 단색으로 처리해 19
세기 말 탱화의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 탱화는 보통 대웅전 등의 법당에 걸기 마련인데, 지장사는 특이하게도 하얀 요사(寮舍)에
두었다. 그 요사가 공양간의 역할까지 하게 되었고, 따로 거처를 옮기지 않아 공양간 지킴이
현왕탱이 되버린 것이다. (탱화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아마도 공양간이 대중적인 공간이
라 밥을 먹는 중생들로 하여금 선하게 살라는 경각심을 주고자 공양간에 둔 것이 아닐까 싶다.
공양밥을 먹으면서 현왕탱 염라대왕과 눈이 딱 마주치면 그 기분이 어떠할까? 나는 다행히 바
깥에서 공양을 먹어서 그런 기분은 느끼지 못했으나 조금 뜨끔하면서도 죽어서 지옥으로 떨어
지지 않을까 싶은 불안감이 엄습할지도 모르겠다.


▲  청심당(淸心堂)
대웅전 뒷쪽이자 경내 북쪽에 자리한 청심당은 2016년에 지어진 한옥으로
요사와 선방(禪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청심당에 걸린 화장사 현판의 위엄

▲  지장사에서 섭취한 국수의 위엄

호국지장사는 현충일에 중생들에게 국수 등의 공양을 제공한다. 대웅전 뒤쪽에 있는 공양간(
하얀 건물)에서 13~14시까지 제공하고 있는데, 건물 바깥에서 음식을 제공하며, 주변에 마련
된 탁자에 앉아 즐겁게 공양에 임하면 된다.
이번 공양은 국수가 나왔는데, 국수 외에도 김치와 고사리 등의 나물, 호박전 등의 전, 수박
까지 나와 국수 그릇을 아주 풍성하게 해주었다. 보통 절의 국수 공양은 국수와 김치가 전부
이나 이곳은 현충일 특집인지 그 이상을 제공하는 것이다. 하여 국수가 완전 비빔국수, 비빔
전골이 되버렸다. 국수 국물은 따뜻하며, 김치와 나물, 전까지 모두 담다보니 저 1그릇으로
충분히 배가 차고도 남는다. (수박은 국수를 다 먹고 챙겨 먹었음)


▲  지장사 약수터와 그곳을 지키는 약왕보살(藥王菩薩)

절 남쪽 숲길에는 지장사의 오랜 명물인 약수터가 있다. 그는 원래 경내 연못 서쪽에 있었으
나 그 자리에 아기부처상 등 다른 것을 깔면서 이곳으로 이전된 것이다.
약합을 쥐어든 약왕보살상 앞에 수도꼭지로 된 샘터가 있는데 졸고 있는 꼭지를 틀어서 물을
받아 마시면 된다.

이곳은 물 수요가 많아 아침과 휴일에는 상도동(上道洞)과 사당동(舍堂洞) 사람들이 많이 와
서 물을 담아가며, 가뭄에도 물이 별로 줄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서울 시내에 많은 약수들이
개발의 칼질과 환경오염, 가뭄으로 죽어가고 있으나 이곳 약수터는 아직 정정한 모습을 보이
고 있으니 아마도 호국신과 대자연의 가호가 깃든 모양이다. (지독한 가뭄과 약수터 주변 손
질, 수질 악화 등으로 휴업을 하는 경우도 있음)

이른 무더위에 지친 목구멍을 달래고자 간만에 이곳 약수를 흔쾌히 들이키니 맛은 예전과 비
슷한 것 같다. 2~3모금 정도를 마시며 목구멍을 촉촉하게 적시고 현충원의 남쪽 후문인 상도
출입문(상도통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하여 현충일에 찾아간 국립서울현충원 호국지장사 나들이는 내년을 기약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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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한옥마을, 전주향교, 승암산 동고사, 문학대 겨울 나들이 (남천교, 한벽굴)

전주 겨울 나들이 (전주향교, 동고산, 문학대)



' 전북의 중심지, 전주 겨울 나들이 '

동고사에서 바라본 전주시내와 전주한옥마을
▲  동고사에서 바라본 전주시내와 전주한옥마을

전주향교 대성전

전주한옥마을 전주천동로

▲  전주향교 대성전

▲  전주한옥마을 전주천동로



 


겨울 제국이 가을을 몰아내고 강추위로 천하를 벌벌 떨게 하던 12월 한복판에 호남의 오
랜 중심지, 전주(全州)를 찾았다.
전주는 1년에 1회꼴로 발걸음을 하는 곳으로 이번에는 전주한옥마을 동남쪽에 있는 동고
산(승암봉, 기린봉)을 중심으로 둘러보기로 했다.

햇님이 아직 등청을 하지 않은 이른 아침, 서울 남부터미널로 달려가 삼례(參禮)행 직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전주를 가니 전주행을 타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그날따라 전주 수요
가 오지게 많아서 다소 여유로운 삼례행을 택한 것이다. 어차피 전주행을 타나 삼례행을
타나 전주한옥마을(전주 도심)까지 시내버스를 1회 타야 되며, 삼례(완주군 삼례읍)에서
전주 도심까지 거리도 가깝고 시내버스도 한강수 흐르듯 많이 다닌다.

그렇게 3시간 여의 시간을 던져 전주한옥마을에 이르니 시장기가 요동을 친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크고 아름다운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지. 하여 전주를 찾을 때마
다 거의 꼭 들리는 콩나물국밥집에서 이른 점심으로 뜨끈한 콩나물국밥을 섭취하고 전주
한옥마을을 가로질러 전주천으로 이동했다.
서울의 북촌(北村)한옥마을과 더불어 한옥마을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전주
한옥마을은 쌀쌀한 날씨임에도 10대부터 노인들, 다른 나라 잡것들까지 다양한 관광객들
로 거의 북새통을 이루어 이곳의 국제적인 명성을 실감케 한다.
전주의 명물 간식거리인 수제 초코파이를 하나 구입하여 입에 물고 북적거리는 전주한옥
마을을 주마등(走馬燈)처럼 흘려보내니 기와집 누각(청연루)을 이고 있는 전주천 남천교
가 반갑게 마중을 나온다.



 

♠  전주천과 남천교

▲  전주천(全州川)에 걸려있는 남천교(南川橋)

전주의 젖줄인 전주천은 임실(任實) 관촌평야에서 발원하여 전주시내를 가로질러 만경강(萬頃
江)으로 흘러가는 30km의 하천이다. 한때는 다른 도시의 하천과 마찬가지로 개발의 난도질에
사망 상태까지 갔었으나 1998년 이후 꾸준히 생태계 복원을 추진하여 살아있는 하천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성과가 얼마나 대단한지 2002년 왜열도에서 열린 '강(江)의 날' 대회에서 생태
계를 성공적으로 복원시킨 모델로 꼽히기도 했다.

전주한옥마을의 남쪽 끝을 잡고 있는 전주천에는 '남천교'란 다리가 걸려있다. 다리의 길이는
82.5m, 폭 25m로 전주천 몸매에 맞게 닦여져 있는데, 다리 가운데에는 특이하게 기와집 누각(
樓閣)까지 걸쳐 놓았다. 처음에는 한옥마을을 수식하는 용도로 최근에 지어놓은 별 의미 없는
곳으로 생각하고 지나치려 했으나 알고 보니 나름 사연이 있는 곳이다.

남천교는 조선 중기 쯤에 전주천에 놓여진 돌다리로 인근의 승암산과 한벽당이 어우러져 빼어
난 경관을 자랑했다. 5개의 홍예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지개처럼 생겨 '다섯 무
지개다리','오홍교(五虹橋)'라 불렸고, 다리 윗도리에 용조각이 있어서 '오룡교(五龍橋)'란
별칭도 지니고 있었다. 이들 용조각은 승암산의 화기(火氣)를 막고자 새겼다고 하며, 19세기
이후에는 5개의 창을 가진 안경을 닮았다고 하여 안경다리<안경교(眼鏡橋)>란 별명까지 추가
되었다. 이렇게 별칭이 많은 것은 그만큼 이 다리의 인기가 대단했다는 뜻이다.

1753년 다리가 유실되어 터만 남아오다가 1790년 지역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 복원 공사를 벌
여 1791년 12월에 완성을 보았다. 그렇게 다시 태어난 남천교는 얼마나 잘 지었던지 그 모습
이 마치 하늘이 던져준 듯하고, 땅에서 불끈 솟아난 듯하여 사람이 만든 것 같지가 않았다고
한다.
그 정도로 걸작을 자랑했지만 왜정(倭政) 시절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고, 그 흔적 조차 남아
있지 않다가 2009년 전주시가 옛 지도에 나오는 홍예교의 모습을 참고하여 이전보다 더 크게
재현했다. 또한 다리 한복판에는 팔작지붕을 지닌 청연루(晴烟樓)를 세워 쉼터와 풍류의 장소
로 삼았다.

청연루는 남천교와 달리 오래된 사연은 잡고 있지 않다. 여기서 가까운 한벽당(寒碧堂)이 전
주8경의 하나인 한벽청연(寒碧晴煙)의 현장으로 오랫동안 추앙을 받고 있어 그 이름을 따서
대칭적인 의미로 세웠을 뿐이다.
전주한옥마을의 새로운 명소로 여기서는 갈대와 온갖 식물, 물고기가 춤을 추는 전주천과 승
암산, 승암산 서쪽 자락에 자리한 동고사까지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남천교에서 바라본 전주천과 승암산

▲  남천교 개건비(改建碑)

청연루 옆에는 1790년 남천교 재건을 기리고자 1794년에 세운 개건비가 우뚝 자리해 있다. 네
모난 비좌(碑座)에 해서체(楷書體)로 쓰인 글씨를 머금은 비신(碑身)을 세우고 둥근 지붕돌로
마무리를 한 단출한 모습으로 다리의 재건 과정과 남천교 건립에 돈을 내놓은 사람들의 이름
이 적혀있다.
원래는 한벽당 우측 하천변에 있었으나 남천교가 사라진 이후, 쓸쓸히 방치되어 있던 것을 어
떤 사람이 전주교육대 교정으로 옮겨놓았다. 이후 남천교가 새로 지어지면서 다리 한복판으로
가져와 안착시켰다.

남천교의 빛바랜 일기장 같은 존재로 세월을 탄 검은 때가 자욱해 중후한 멋을 드러내고 있으
며, 비석의 건강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  잘 다듬어진 전주한옥마을 전주천동로

전주천동로는 전주한옥마을의 남쪽 끝 길로 남쪽은 전주천, 북쪽은 한옥들이 늘어서 한옥마을
의 정취를 진하게 우려내고 있다. 상당수 근래 지어진 어린 한옥들이라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
로 피부가 뽀송뽀송한데, 산뜻하게 정비된 그 길을 걸으면 승암산, 한벽당으로 이어지며, 중
간에 전주향교가 홍살문을 내밀며 잠시 들릴 것을 권한다.


▲  전주향교 홍살문과 하마비(오른쪽 비석)

전주향교는 원래 계획에 없었다. 비록 한참 전이긴 해도 들린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붉
은 홍살문의 차가운(?) 유혹에 이끌려 잠시 승암산을 접고 향교로 길을 틀었다.

홍살문은 쌀쌀맞게 생긴 모습 그대로 권위적인 곳을 알려주는 존재이다. 주로 왕릉과 향교(鄕
校), 서원, 지체 높은 사람의 사당, 관청 입구에 세워 엄숙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향교와 관
청, 높은 이의 사당에는 홍살문 보조용으로 하마비를 옆에 두기도 한다. (하마비만 두는 경우
도 있음)
하마비의 거친 피부에는 '이곳을 지나는 높고 낮은 사람 모두 말에서 내려라!' 내용이 담겨져
있으며, 다른 향교의 하마비는 거의 조그만 덩치이지만 이곳 향교는 나보다 키가 크다. 아무
래도 전주가 호남의 중심 고을이자 조선 왕실의 성역(聖域)과 같은 곳이라 그에 걸맞게 향교
와 하마비를 세운 모양이다.
허나 시대가 여러 차례 바뀌면서 하마비와 홍살문의 위엄은 완전히 추락했으며, 이제는 문화
유산의 의미 밖에는 없다. 더 이상 그들의 눈치를 보며 지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위엄이 식어버린 하마비(下馬碑)
윗도리와 아랫도리 피부색이 서로 틀리다.

▲  박진 효자비(朴晉 孝子碑) -
전주시 향토문화유산 5호


홍살문을 지나 향교의 정문인 만화루를 들어서려는 찰라, 향교 담장 서쪽 끝에 조그만 기와집
하나가 손짓을 한다.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지나친다고 그 손짓을 따라가보니 '박진 효
자비'를 머금은 비각(碑閣)이었다.

효자비의 주인공인 박진은 전주박씨로 자는 내신(乃臣)이다. 부친이 중병에 걸려 고생을 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전주로 내려와 부친을 간호했는데, 낮에도 곁을 떠나지 않고 밤에도 허
리띠를 풀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부친이 세상을 뜨자 예법에 맞추어 장사와 제사를 치루고 3
년 동안 시묘살이까지 하여 지역 사람들의 칭송이 대단했다. 하여 조정에서는 1398년 정려비(
旌閭碑)를 세워 그의 효행을 기렸다.
1724년 후손들이 비석을 다시 중각(重刻)했으며, 1805년 후손 박필성(朴必晟)이 '전주부 효자
박진정려기'를 지어 비각 안에 걸어두었다.

향교 앞에 자리해 있어 위치도 좋으며, 향교 유생들을 위한 교육 자료로도 아주 그만이다. 하
여 그를 이곳에 둔 모양이다. (처음부터 이곳에 있지는 않았음) 그 효자비를 둘러보고 만화루
를 통해 공자왈, 맹자왈이 귀를 때릴 것 같은 전주향교로 들어섰다.



 

♠  전주 지역 교육의 옛 중심지, 지방 향교 중 큰 규모를 자랑했던
전주향교(全州鄕校) - 사적 379호

▲  전주향교 대성전(大成殿)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7호

전주한옥마을의 남쪽 끝을 잡고 있는 전주향교는 나라에서 각 고을마다 세운 중등교육기관으
로 1410년에 창건되었다. 고려 때부터 있었다고 전하나 확실한 것은 없으며 원래는 경기전(慶
基殿) 옆에 있었다고 전한다.

1441년 조정에서 향교 옆에 경기전를 짓고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봉안했는데, 향교에서
공부하는 소리가 시끄러워 경기전의 엄숙한 분위기를 저해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여 전주
부(全州府) 서쪽 성 밖, 화산<華山, 황화대(黃華臺)> 밑으로 내보냈다. 졸지에 경기전이란 굴
러들어온 돌에게 자리를 빼앗긴 셈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03년 전라도관찰사 장만(張晩)이 중건했는데, 전주부 성내(城內)
에서 멀다는 민원이 제기되어 향교의 위치가 잘못되었음을 조정에 알리고 지금의 위치로 옮겨
크게 지었다. 이후 1654년과 1832년, 1879년, 1904년에 중수를 하였다.
향교 학생은 액내생(額內生, 정원내 교생, 양반 자제들) 90명, 액외생(額外生, 평민과 서얼로
정원외 교생) 90명 등 총 180명으로 정7품의 훈도(訓導) 1명을 두어 4서5경(四書五經)을 가르
쳤다. 허나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향교의 교육 기능은 점차 사라졌으며 제사 기능
만 남게 되면서 거의 빈껍데기 신세가 되버린다.
전주향교 역시 그 소용돌이를 피하지 못해 뒤로 물러나있다가 1949년 재단법인 명륜학원(明倫
學院)을 설립하여 다시 교육에 나서기 시작했다. 1950년 4월 초급대학인 명륜대학을 설립하여
법학과와 국어한문과를 두었으니 그것이 바로 전주 최초의 대학, 전북대의 시초이다. 즉 전주
향교가 전북대의 산실인 것이다.
처음에는 향교 건물을 이용하여 대학교를 꾸렸는데, 1953년 종합대학교로 승격 인가를 받으면
서 학생 수가 폭주했다. 하여 수용에 한계를 느끼게 되자 전주 시내 북쪽에 덕진캠퍼스를 지
어 1955년 대학교를 그곳으로 옮기게 된다. 이후 향교는 시민을 대상으로 조촐하게 한문과 서
예, 예절 교육을 가르치고 있으며, 봄(3월)과 가을(9월)에 석전제(釋奠祭)를 지내고 매월 초
하루와 보름에 향을 피워 향교의 기능을 계속 지키고 있다.

경내에는 대성전과 명륜당을 비롯해 동무와 서무, 만화루, 장판각, 계성사, 양사재(養士齋),
사마재(司馬齋), 수복실(守僕室), 고직사 등 10여 동의 건물이 총 99칸을 이루고 있으며, 그
장대한 규모로 인해 전라도 53고을의 수도향교(首都鄕校)의 역할을 하였다.
또한 늙은 은행나무 4그루가 대성전과 명륜당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명륜당은 전국 향교
의 명륜당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꼽힌다. 또한 계성사는 제주향교와 더불어 천하에 딱 2곳
밖에 없어 나름 희소성이 있으며, 김제향교와 나주향교와 더불어 국가 사적의 높은 지위를 누
리고 있다.

전주의 꿀단지, 전주한옥마을이 천하 굴지의 관광지로 인기를 누리면서 한옥마을 남쪽 구석에
자리한 전주향교에도 볕이 들고 있다. 이곳까지 관광/답사객들이 적지 않게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뒤쪽 부분을 제외한 대성전, 명륜당 구역을 흔쾌히 개방하고 있으며, '성균관스캔들'
,'YMCA야구단' 등의 드라마와 영화도 이곳을 거쳐갔다.
이 땅의 향교 대부분은 폐쇄일변도를 보이며 문을 굳게 잠구고 있으나 이곳은 문을 활짝 열어
살아있는 향교이자 전주한옥마을을 수식하는 관광 명소로 계속 옻칠을 하고 있다. 그런 점은
참 마음에 든다. 그럼 지금부터 은행잎 냄새가 진동하는 향교 내부를 살펴보도록 하자.

* 전주향교 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 26-3 (향교길 139, ☎ 063-288-4548)
* 전주향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전주향교의 정문인 만화루(萬化樓)

2층 누각으로 이루어진 만화루는 전주향교의 정문이다. 1866년 홍수로 붕괴된 것을 다시 지었
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중층 건물로 가운데 문은 굳게 입을 봉하고 있고, 좌/
우 문은 활짝 열려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만화루란 이름은 '공자지도 만물화생<孔子之道
萬物化生, 공자의 도(道)로 만물이 교화된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방이 훤히 뚫린 모습이라 여름에는 강의 공간으로 쓰였으며, 종종 향시(鄕試)를 보는 곳으
로 쓰이기도 했다.

▲  대성전으로 인도하는 일월문(日月門)

▲  일월문 옆 은행나무
전주시 보호수 9-1-7-1호

만화루를 지나면 솟을 삼문(三門)으로 이루어진 일월문이 나온다. 그 문을 지나면 바로 향교
의 중심인 대성전 구역으로 커다란 은행나무 3그루가 쏟아낸 은행잎이 대성전 뜨락에 가득하
여 은행잎 특유의 악취가 아주 코를 찌른다.
이처럼 향교 뜰에 은행목을 심은 것은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강의를 했던 행단(杏壇)의 고
사 때문이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그 나무를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으며, 유교와 관련된 공간(
향교, 서원)에서는 꼭 그것을 심었다. (선비나무라 불리기도 함)
일월문 옆 은행나무는 290여 년 묵은 것으로 대성전 은행나무 3형제 중 막내이다. (1982년 9
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250년) 키는 약 20m, 둘레 3.7m로 겨울 제국의 의해 모
든 것이 싹 털린 채 앙상한 가지를 애타게 드러내며, 봄의 해방군을 염원하고 있다. 허나 이
제 12월이니 그때까지는 무려 4달 가까이 기다려야 된다. 그 시간이 좀 고통스럽기는 하겠지
만 묵묵히 기다리면 어느새 소쩍새가 울 것이다. 내가 전주향교를 과연 갔었는지 햇갈릴 정도
로 시간은 빛의 속도로 흘러가니 말이다.


▲  동무(東廡)와 390년 묵은 커다란 은행나무(전주시 보호수 9-1-5호)

대성전 구역은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동무, 서쪽에 서무를 두고 있다. 이들 '무'자 돌림
의 건물은 대성전에 넣지 못한 유교 성현들을 처리하고 있는데, 동무에는 공자의 주요 제자인
'비공 민손','설공 염옹','려공 단목사','위공 중유','위공 복상' 등 5명과 송조(宋朝) 6현인
'도국공 주돈이','낙국공 정이','미백 장재' 등 3명, 중원대륙<서토(西土)> 7현 중 '평음후
유약','승민백 복승','창려백 한유','문정공 이등' 등 4명, 총 12명의 위패가 들어있다.

정면 9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603년에 지어졌다가 1987년 해체복원했으며, 맞은편
으로 닮은꼴 모습의 서무를 바라보고 있다. 또한 동무 앞에는 390년 묵은 은행나무가 우뚝 솟
아 뜨락에 넓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높이 30m, 둘레 5.5m에 이른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350년)


▲  서무(西廡)와 440년 묵은 은행나무(전주시 보호수 9-1-4호)

동무를 마치 동무처럼 바라보고 선 서무는 정면 9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동무와 완
전히 닮은 모습이다.
이곳에는 공자의 제자인 '운공 염경','제공 재여','서공 염구','오공 언언','영천후 전손사'
등 5명과 송조 6현인 '예국공 정호','신안백 소옹','휘국공 주희(朱熹)' 등 3명, 중원대륙(서
토)의 7현인 '선보후 복불제','강도상 동중서(董仲舒)','온국공 사마광'의 3명 등, 총 11명의
위패가 들어있다.

서무 앞에는 이곳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가 살짝 구부정한 모습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나이는 약 440살(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400년)로 전주향교가
이곳에 안착한 때(1603년)와 거의 비슷해 중건 기념으로 심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높이는 30
~32m, 나무둘레 10.4m의 우람한 덩치로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자 '김해동'이란 사람이 암컷나
무 옆에 수컷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  전주향교 대성전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7호

잘 다져진 석축 위에 들어앉아 남쪽을 향해 3줄기 계단을 짧게 늘어뜨린 대성전은 향교의 중
심 건물이다. 공자(孔子)를 비롯한 유교 성현을 봉안한 공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
지붕 건물인데, 1603년에 지어진 것을 1653년에 새로 지었다. 그때 이기발(李起浡, 1602~1662
)이 중건기(重建記)를 남겼으며, 이후 1907년 수리하여 지금에 이른다.

유교의 중심 인물인 공자를 비롯하여 맹자(孟子) 등의 성인 4명, 공자의 10대 제자<십철(十哲
)>, 송조 6현 등이 봉안되어 있으며, 향교의 다른 건물과 달리 홀로 전북 지방문화재의 지위
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건물 양쪽 끝에 붉은 기둥을 별도로 설치하여 무거운 지붕을 받들게
했다.


▲  대성전 중심에 자리한 공자의 진영(眞影)
동이족(배달민족) 출신인 공자<孔子, 공구(孔丘)>는 문선왕(文宣王)이란
시호를 가지고 있으며, 유교의 1인자로 오랫동안 대접을 받아왔다.

▲  대성전에 들어있는 맹자 등의 사성(四聖)과 십철 등의 위패

▲  대성전 서쪽에 자리한 커다란 느티나무와 여러 돌덩어리들
느티나무의 나이가 약 150~200년 정도 되어 보인다. 그의 그늘에는 여러
견고한 돌덩어리들이 누워있는데, 이들은 1987년 이후 향교 건물을
손질하면서 나온 옛 석재들이다.

▲  명륜당 은행나무 (전주시 보호수 9-1-3호)

대성전 뒤쪽에는 담장이 둘러져 있고 그 너머에 명륜당이 있다. 그 명륜당 앞에도 오래 숙성
된 은행나무가 개골(皆骨) 상태로 마치 하늘을 원망하듯 가지를 높이 쳐들고 있다.
그는 약 420년 묵은 나무로 높이 32m, 둘레 6.6m이다. (1982년 9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
정 나이가 약 380년) 서무 은행나무보다 허리 둘레는 작지만 키도 비슷하고 나이도 그리 차이
가 나지 않으며, 대성전 주변에 있는 늙은 은행나무(3그루)와 달리 명륜당을 혼자 도맡으며
그곳의 그늘을 책임진다.


▲  향교에 흔치 않은 건물, 계성사(啓聖祠)

향교는 20세기 이후에 신설된 시,군 단위 행정구역이 아닌 이상은 전국의 주요 고을에 대부분
남아있다. 기러기의 털처럼 너무나 흔한 향교이지만 '계성사'란 건물을 지닌 향교는 오직 제
주향교와 이곳 전주향교 2곳 뿐이다.

명륜당 서쪽 담장 너머에 자리한 계성사는 정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공자의 부친인 '제국
공 공숙량흘', 안자(晏子)의 부친인 '곡부후 안무유', 증자(曾子)의 부친인 '내무후 증점',
자사 공급(子思 孔伋)의 부친인 '사수후 공리(공자의 아들)', 맹자(孟子)의 부친인 '주국공
맹격'을 봉안하고 있다. 1741년 판관(判官) 송달보가 세웠으며, 상량문(上樑文)은 정광(正匡)
이기보가 남겼다.


▲  장판각(藏版閣)

계성사 뒤쪽에는 창고 모양의 장판각이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87년
에 전주시에서 향교 소장 목판 5,059판의 보호를 위해 지어준 것이다.
이들 목판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1,775판을 위시해 주자대전(朱子大全) 1,471판, 성
리대전(性理大全) 571판, 율곡전서(栗谷全書) 491판, 사기평림(史記評林) 484판, 동의보감(東
醫寶鑑) 151판, 사략(史略) 56판,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 1판, 주서백선(朱書百選) 1판, 증
수무원록 언해(諺解) 53판 등이다.

하지만 이들은 향교 목판이 아닌 전라감영(全羅監營)에서 서적 간행을 위해 가지고 있던 것으
로 감영 내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899년 전라도관찰사 조한국(趙翰國)이 전주향교로
싹 보낸 것인데, 1920년 책고(冊庫)를 지어 관리하다가 장판각을 새로 지었으며, 그들의 보존
과 연구를 위해 대부분 전북대 박물관으로 보냈고, 일부는 향교 동쪽에 있는 완판본문화관에
가 있다. 하여 지금은 간단한 서적과 기물만 들어있다.
(장판각에 있었던 목판들은 '전주향교 소장 완영책판'이란 이름으로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204
로 지정됨)

▲  향교 뒤쪽 부분

▲  향교 후문인 입덕문(入德門)

장판각과 계성사 서쪽에는 뒷간을 머금은 기와집이 있다. 경내에서 가장 구석진 곳이라 볼일
이 아주 급한 사람에게는 조금 고통스러울 수 있으나 시설만큼은 현대식으로 잘 닦여져 있어
원초적 볼일을 보는데 어려움은 별로 없다.
해우소 담장 너머로도 여러 건물이 둥지를 틀고 있어 '향교가 참 지독하게 넓구나!' 혀를 차
게 하는데, 이들은 관리인 숙소와 교육 공간으로 이용되는 건물로 통제구역으로 묶여있다. 허
나 밑에서도 거의 보이므로 굳이 통제를 뚫고 접근할 필요는 없으며, 계성사 앞에는 향교의
후문격인 입덕문이 한쪽 문짝을 열어두고 있다. (향교 사정에 따라 닫아두는 경우도 있음)


▲  날개짓을 하는 것 같은 명륜당(明倫堂)
설마 저대로 허공으로 날라가는 것은 아니겠지?


대성전 뒷통수에 자리한 명륜당은 이곳의 교육 공간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
이다. 제사 공간인 대성전 다음으로 중요한 존재로 명륜(明倫)이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
는 의미이다. 특이하게도 양쪽으로 1칸씩 눈썹지붕을 이어 덧붙였는데, 이는 공간을 넓히고자
그런 것이다. 하여 큰 새가 마치 하늘을 향해 날개짓을 하는 모양 같다.

이 건물은 1603년에 지어진 것으로 이 땅의 명륜당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히고 있으며,
1904년 중수했다. '성균관스캔들','YMCA야구단'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며, 뜨락 좌우에는 동재
와 서재를 두었는데, 이는 유생들이 기숙사이다. 가까이 사는 유생들은 집에서 통학을 했겠지
만 먼 사람들은 여기서 숙식을 하였다. 기숙사 비용은 나라와 전라감영에서 모두 지원을 해주
어서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하면 된다.

▲  옆에서 바라본 명륜당

▲  명륜당 동쪽에 자리한 동재(東齋)


▲  입덕문 서쪽 돌담길 (왼쪽 한옥이 전주전통문화연수원)

명륜당 주변을 둘러보고 입덕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왔다. 입덕문 서쪽과 남쪽에는 돌담을 둘
러 호젓하게 돌담길을 내었는데, 이렇게 양쪽으로 돌담을 두룬 돌담길을 지닌 향교는 이곳이
처음이다. 보통 한쪽만 돌담을 내기 때문이다.
돌담 북쪽은 전주향교 영역이며, 서쪽에 대나무가 우거진 한옥은 전주전통문화연수원이다. 돌
담길의 길이가 우리네 인생만큼이나 짧긴 하지만 이곳의 백미(白眉)로 꼽힐 만큼 강하게 인상
에 남는다.


▲  전주향교를 뒤로하며 (입덕문 남쪽 돌담길)
왼쪽이 전주향교, 오른쪽이 전주전통문화연수원이다. 서로의 성격과 연륜이
틀리다보니 돌담 또한 다른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  승암산(僧巖山) 둘러보기 (한벽굴, 동고사)

▲  한벽당 앞 전주천 (좁은목)

전주향교로 잠시 접어두었던 전주천동로를 다시 꺼내 동쪽으로 걸었다. 한벽당의 주변 풍경을
크게 말아먹은 한벽교의 밑도리를 지나면 전주천이 크게 구부러지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한
벽굴이 있고, 그 위쪽에 한벽청연의 현장인 한벽당이 나를 굽어보고 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한벽당이라 간만에 들릴까 했지만 그곳까지 올라가기 귀찮아서 밑에서
잠깐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한벽당 동쪽에 있다는 승암산 산길을 찾았다. 하지만 그 길이
보이지 않아서 한벽굴을 통해 북쪽으로 넘어가서 승암산으로 진입했다.


▲  열차의 기적소리가 들릴 것 같은 칙칙한 한벽굴

한벽굴은 옛 전라선(全羅線, 익산~여수) 철도의 흔적이다. 지금은 전주시내 동쪽 외곽을 얌전
히 지나가고 있지만 처음에는 전북대와 전주시청, 오목대 등 전주 도심을 거쳐 지나갔다. 이
는 시내 교통 편의도 있지만 한벽당과 태조 이성계의 설화가 깃든 오목대(梧木臺)의 정기를
자르고 욕보이려는 왜정(倭政)의 나쁜 의도가 더 컸다. 그래서 한벽당과 오목대 뒤에 땅굴을
파고 열차를 지나가게 한 것이다.

왜정의 고약한 장난에 한벽당과 오목대가 뿔이 난 것일까? 열차가 한벽굴을 지날 때마다 이상
하게도 속도가 매우 느려졌다고 한다. 하여 그때를 틈타서 많은 무임 승차객들이 열차에서 뛰
어내렸다는 것이다.
이후 전라선은 시내 동쪽으로 옮겨졌고, 한벽굴은 철도가 아닌 뚜벅이를 위한 땅굴이 되어 한
옥마을을 수식하는 명소이자 오목대, 한옥마을에서 전주천을 잇는 역할을 하고 있다. 굴에 들
어가면 한여름에도 매우 시원하며, 옛날에 사라진 열차의 기적 소리가 두 귀에 아련하게 들리
는 듯하다.


▲  한벽굴 왕년의 모습이 담긴 흑백 사진 (인터넷에서 가져옴)

왼쪽은 전주천, 가운데는 한벽당, 오른쪽은 전라선 한벽굴이다. 한벽당은 왜정에 의해 전라선
열차로 고통을 받았고, 2000년 이후에는 한벽당 바로 앞에 신작로(기린대로)가 뚫리면서 다시
고통을 겪고 있다. 인간의 이기(철도, 도로)에 끊임없이 고통받는 한벽당의 비애..


▲  승암산

한벽굴을 지나 낙수정(樂水亭) 방면으로 가면 승암산 숲길이 손을 내민다. 여기서부터 동고사
를 찾기 위한 승암산 산행이 시작되었다.

전주시내 동남부에 듬직하게 자리한 승암산(306m)의 원래 이름은 기린봉이다. 산의 형세가 마
치 상서로운 동물인 기린(麒麟)이 달(또는 여의주)을 토해내는 듯한 모습<기린토월(麒麟吐月)
>이라 하여 유래된 것으로 정상부에 중바위가 있어 승암산, 중바위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전주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뫼로 후백제(後百濟, 892~936) 시절에 지어진 동고산성과 왕궁
터가 남아있어 이곳이 후백제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동고사와 승암사 등의 오래된
절과 치명자산(致命者山) 천주교 성지를 머금고 있다.

낙수정 서쪽(무애사 앞)에서 승암산의 품으로 들어서 10여 분 오르니 동고사로 이어지는 포장
길이 나타난다. 가파른 벼랑 위에 닦인 그 길을 4분 정도 가면 대나무 숲이 나타나고 이어서
윗쪽 벼랑에 자리한 동고사가 모습을 비춘다. 여기서 남쪽으로 고개를 하나 넘으면 바로 치명
자산 성지(천주교 순교자 묘)이다.


▲  승암산에서 바라본 좁은목과 전주천 (전주천 건너편 산이 남고산)

▲  동고사로 인도하는 호젓한 숲길

▲  동고사 밑 대나무숲과 주차장(오른쪽 공간)
겨울을 잊은 푸른 대나무들이 강인한 협동심을 발휘하여 아름다운 풍치를
자아낸다.

▲  동고사(東固寺)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2호

승암산 서쪽 자락 가파른 곳에 동고사가 둥지를 틀고 있다. 전주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절(
해발 210m)로 876년에 도선대사(道詵大師)가 창건하여 전주 동쪽에 있다는 뜻에서 '동고사'라
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은 없는 실정이며, 덧붙여서 신라의 마지막 군주인 경순왕(敬順
王)의 2째 왕자 범공(梵空)이 승려가 되어 이곳에 들어와 불도를 닦으며 나라 잃은 한을 달랬
다 하나 이 역시 신빙성은 장담할 수 없다.

창건 이후에도 오랫동안 적당한 바퀴 자국을 남기지 못했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허주
화상(虛舟和尙)이 1844년 지금의 위치에 중창했다고 한다. 하여 어쩌면 그때가 실질적인 창건
시기가 아닐까 싶다. 이후 1946년 주지 영담 김용욱(暎潭 金容郁)이 대웅전과 요사 등 여러
건물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
현재 경내를 이루고 있는 건물과 석탑, 미륵불은 모두 그때 이후 것이라 고색의 내음은 진작
에 말라버렸으며, 대웅전과 염불원(念佛院) 등 6~7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절이 들어앉은 위치가 각박한 벼랑이라 돌로 단단히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대웅전과 요사 등
여러 건물을 닦았다. 그리고 윗쪽에도 좁은 공간을 활용하여 석가여래의 사리를 머금은 석탑
과 미륵불 등을 층층이 지었고, 경내 밑에는 주차장과 돌탑을 다졌다. 절까지 차량이 마음놓
고 바퀴를 굴리게끔 길이 닦여져 있어 차량 접근은 괜찮은 편이나 길 서쪽이 벼랑 수준이라
바퀴를 잘 굴려야 된다.

▲  경내 밑에 자리한 샘터
여기서 물 1모금 들이키고 경내로 들어선다.

▲  서쪽을 굽어보고 있는 대웅전(大雄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  경내 위쪽 부분
범종각과 3층석탑, 미륵불 등

▲  석가여래의 사리가 깃든 3층석탑
(석가여래진신사리 보탑)


동고사는 오랜 내력에 비해 볼거리가 변변치 못하다. 다만 높은 벼랑에 자리하여 시내가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어 조망만큼은 아주 끝내준다. 여기서는 전주천과 전주한옥마을, 오목대를
비롯해 전주시내 상당수가 시야에 들어오며, 전주한옥마을과 전주 시내를 마음 편히 사진에
담고 싶다면 이곳을 추천한다. 물론 여기서 더 위로 올라가 중바위나 정상부에 이르면 조망의
질은 더욱 높아진다.

* 동고사 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 산10-88 (낙수정2길 103-100 ☎ 063-288-16
  26)


▲  동고사 대웅전에서 바라본 전주 시내 (바로 밑에 보이는 산이
오목대와 이목대)

▲  미륵불에서 바라본 동고사 경내
절은 비록 작고 고색의 내음 또한 모두 날라갔지만 전주 시내를 너른 뜨락으로
삼으며 그들을 굽어보니 뜨락과 조망만큼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미륵불입상

▲  미륵불에서 바라본 동서학동과 완산구
지역 (중앙에 보이는 산이 완산공원)


▲  미륵불에서 바라본 전주 시내와 전주한옥마을(가운데 부분)

동고사를 둘러보고 중바위와 동고산성 등 승암산의 주요 메뉴를 살펴보고자 산 윗쪽으로 길을
향했다. 허나 추운 날씨에 귀차니즘까지 진하게 발동하여 그들에 대한 구미가 99% 떨어지면서
조금 가다가 길을 돌렸다. 하여 낙수정마을로 내려갔는데, 낙수정은 전주 도심이 바로 지척임
에도 산골 마을 분위기가 진하여 그야말로 도심 속의 산골마을 그 자체였다.


▲  낙수정으로 내려가는 숲길

낙수정은 전주시내버스 430번(낙수정↔백구,용지)이 들어오는데, 배차간격이 무려 2시간이 넘
는다. 허나 운이 좋게도 낙수정 종점에 그 버스가 바퀴를 접고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을 굳이 타지 않더라도 전주한옥마을과 오목대, 전동성당까지 조금 나가면 버스는 널려 있다.
승암산 일정이 너무 일찍 마무리가 되어 일몰까지 시간이 좀 있었는데, 만약을 위해 준비했던
'문학대'를 그날의 마지막 메뉴로 살펴보기로 했다. 그곳은 여기와 정반대인 서부신시가지 효
자동에 있는 명소로 그곳을 둘러보고 바로 삼례로 빠질 생각이었다.

버스에 올라타 지친 두 다리에게 휴식을 주고 있으니 운전사가 부릉부릉~♪ 시동을 걸며 지정
시간보다 약 5분이나 일찍 출발을 했다. 승객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그런 것 같은데, 아무
리 그래도 일찍 출발은 좀 아닌 듯 싶다. (버스 시간표는 장식이 아님)
어쨌든 그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를 달려(기린대로, 오목대, 전주천 경유) 남부시장에서 내렸
다. 그런 다음 전주시내버스 61번(비전대↔전주대)으로 환승하여 전동성당, 전주시교육청, 서
신동, 서곡지구를 거쳐 서부신시가지 현대아이파크에서 하차했다. 여기서 북쪽으로 2분 정도
가면 문학대공원이 마중을 하는데, 서쪽은 문학대1공원, 동쪽은 문학대2공원이라 부른다. 바
로 문학대1공원 남쪽 언덕에 공원 이름의 유래가 된 문학대가 있다.



 

♠  고려 후기 대학자인 황강 이문정이 만년을 보냈던 곳
전주 문학대(文學臺) - 전북 지방기념물 24호

문학대는 1357년에 황강 이문정(黃岡 李文挺)이 낙향하여 세운 정자이다. 그는 여기서 만년을
보내며 성리학(性理學)을 강의해 후학을 길러냈고, 상소(上疏)를 통해 불교의 폐단과 나라의
잘못된 정책을 수시로 간해 이를 바로 잡게 하는 등, 멀리 고향에서도 조정 일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터만 남은 것을 1824년 후손들이 중건했으며, 원래는 효자동3가 산 334
-1번지에 있었으나 서부신시가지 개발로 2006년 강제로 제자리를 떠나 황강서원 뒤쪽인 황방
산 자락에 안착을 했다. 문학대 주변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완전 시골이었으나 그곳까
지 개발의 칼질이 밀려오면서 전주 시내는 서쪽으로 크게 팽창을 했다. 그래서 문학대는 한참
이나 후배인 신식 건물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희생을 치루어야 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문학대1공원 언덕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다.
바닥을 돌로 다지고 그 위에 건물을 세웠는데, 건물 네 모서리에 고된 세월이 녹아든 기둥을
설치해 지붕을 받들게 했다. 문이 모조리 닫혀져 있어 내부를 살피지는 못했지만 가운데에 방
을 두고 좌우에 마루를 깐 형태이다.
문학대 앞에는 그의 후손들의 무덤이 펼쳐져 있고, 그 밑에는 이문정을 봉안한 황강서원(黃岡
書院)과 후손이 살고 있는 한옥들이 포진해 조그만 한옥마을을 자아내고 있다. 황강서원은 이
미 문이 닫힌 상태라(내가 갔을 당시 서원 관리인이 막 대문을 닫아걸었음) 굳이 살피지는 않
고 담장 너머로 대충 살피고 넘어갔다.

▲  문학대 이건(移建) 사적비와 황강 이선생
(이문정) 문학대 유적비(오른쪽)

▲  서쪽에서 바라본 문학대
마치 서적이나 목판을 보관하는 창고 같다.

▲  동쪽에서 바라본 문학대

▲  문학대의 뒷모습

문학대는 황강서원과 이문정의 후손(전주이씨)들이 사는 한옥 뒤쪽에 있어 신변에 그리 위험
은 없다. 비록 개발의 칼질에 못 이겨 이곳으로 오긴 왔지만 이곳 역시 서부신시가지에 둘러
싸인 도시 속의 외로운 섬이 되버린 상태이다.
다행히 문학대가 있는 황방산은 그 칼질에서 살아남아 그 숲을 보전할 수 있었고, 문학대 북
쪽과 동쪽은 문학대1공원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특히 공원 동부에는 개발 도중에 나온 마
전(馬田)고분군까지 갖추고 있어 사적공원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문학대에서 바라본 후손들의 묘역과 황강서원(기와집들)
그들 너머로 서부신시가지(효자동)가 바라보인다.


문학대 뒤쪽에 있는 숲길을 통해 마전고분군으로 내려갔다. 이 고분은 5세기 것으로 여겨지는
백제시대 무덤들로 5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래는 더 있었다고 하나 죄다 도굴되어 파괴되면
서 간신히 5기만 수습하여 봉분을 복원했다.
고분 주변에 마전마을이 있어서 마전고분군이라 불리며, 조금이나마 남은 햇님의 기운에 의지
해 무심히 짙어져만 가는 땅꺼미에 저항하며 사진에 담았으나 다들 상태가 좋지 못하다. 하여
본글에서는 부득이 마전고분군은 생략한다. 사진이 엉망이니 안그래도 엉망인 내용이 더 엉망
이 될 수 밖에 없다.
문학대를 끝으로 전주 연말 나들이는 다소의 아쉬움을 뒤로 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문학대 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3가 산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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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부여 늦겨울 나들이 (의열사, 금성산, 조왕사, 국립부여박물관, 궁남지와 서동공원)

부여 늦겨울 나들이 (의열사, 금성산, 조왕사, 궁남지)



' 부여 늦겨울 나들이 '

금성산 성화대에서 바라본 부여읍내

▲  금성산 성화대에서 바라본 부여읍내

궁남지와 포룡정 국립부여박물관 석조여래입상

▲  궁남지와 포룡정

▲  국립부여박물관 석조여래입상



 


천하의 바다를 주름잡으며 거대한 해양대국을 일구었던 백제(百濟), 바다 건너 왜열도를
속방으로 거느리고 중원대륙(서토)의 수많은 해안 지역(요서에서 오월까지)을 점령해 다
스렸으며, <월남(越南, 베트남)과 동남아까지 장악했다는 설도 있음> 5세기 후반에는 산
동반도(山東半島)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북위(北魏)와 자웅을 겨루어 그들의 수십만 기병
을 묵사발로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수백 년 동안 동아시아를 주름잡던 백제는 660년 7월, 신라(新羅)~당(唐) 연합군
의 공격과 나라의 내부 분열로 허무하게 그 막을 내리고 만다.

충남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도읍(都邑)으로 여겨지는 곳으로 그때는 사비성(泗沘城)이라
불렸다. 백제 26번째 군주인 성왕(聖王, 재위 523~554)은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夫餘)로
바꾸고, 538년 웅진(공주로 여겨짐)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겼는데, 왕년에는 15만 호(戶)
의 약 80만 인구를 지녔던 대도시로 명성을 날렸다. (고구려 평양성은 21만 호, 신라 경
주는 17만 호)
허나 지금의 부여읍내를 보면 이곳이 과연 15만 호를 지녔던 현장인지 의문이 벌컥 든다.
터가 좀 작기 때문이다. 하여 사비가 부여가 아닌 다른 곳으로 보는 견해도 적지 않으며,
중원대륙(서토)에 있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그렇게 장엄했던 사비성은 백제 멸망 이후, 조그만 고을로 전락하여 부여란 이름
으로 충남의 조그만 군(郡)으로 살아가고 있다.

겨울 제국의 기운이 조금씩 덜해가던 2월의 끝 무렵, 옛 백제의 영광을 느끼고자 간만에
부여를 찾았다. 거의 11년 만에 방문으로 설레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아침 일찍 남부터미
널로 이동하여 부여로 가는 시외직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서 부여까지는 거의 2시간 거리, 부여시외터미널에 도착하자 바로 첫 답사지인 의
열사로 이동했다. 그곳에 가려면 부여의 대표 명소로 꼽히는 정림사지(定林寺址)의 북쪽
돌담길을 지나가야 되는데, 돌담 너머로 정림사터와 정림사지오층석탑이 잠시 들렸다 가
라며 진하게 유혹의 눈짓을 보낸다.
허나 그들은 20대 시절에 실컷 둘러본 터라 쿨하게 통과했으나 오랜만에 만난 그들의 유
혹을 뿌리치기가 여간 힘들지가 않았다.



 

♠  백제와 고려, 조선의 충신을 봉안한 조그만 사당
의열사(義烈祠)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14호

▲  담장 밖에서 바라본 의열사

부여문화원 뒷쪽이자 금성산 서쪽 자락에는 의열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1575년 부여현감
홍가신(洪可臣)이 백제 의자왕(義慈王) 때 충신인 부여성충(扶餘成忠, 흔히 성충이라 불림)과
흥수(興首), 계백(階伯). 그리고 고려 후기 충신인 이존오(李存吾)를 봉안하고자 세웠다.
홍가신은 그들의 충의(忠義)가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대단함에도 천하에 너무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안타까워 손수 사당을 세웠는데, 1577년 나라로부터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부여 출신
으로 선조 때 활동했던 정택뢰(鄭澤雷), 인조 때 문신인 황일호(黃一皓)를 추가 배향하여 백
제와 고려, 조선을 아우르는 6명의 인물을 봉안하게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6명)

1641년 사당을 새로 지었으며, 1866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가 이후 읍내 부근 용정리 망월산에 다시 지었다. 그러다가 1971년 현 자리로 이전되어 지금
에 이른다.

▲  굳게 닫힌 의열사 삼문(정문)

▲  뒷쪽에서 바라본 의열사

의열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사당 외에 재실(齋室) 1동을 갖춘 조촐한 규
모이다. 내가 갔을 당시는 태극마크가 그려진 삼문(三門)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어서 담장 바
깥에서 까치발로 대충 내부를 살폈다. 담장이 낮기 때문에 바깥에서 봐도 충분하므로 굳이 무
리하면서까지 담을 넘거나 문을 두드릴 필요는 없다.
매년 3월 20일, 9월 20일에 제향을 올리며, 사당 밖에는 의열사의 역사를 담은 의열사비가 있
다.

▲  적막이 스치는 의열사 뜨락

▲  의열사비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46호

의열사와는 실과 바늘의 관계인 의열사비는 1723년에 이간(李柬)이 썼다. 의열사의 건립 과정
과 역사, 이곳에 배향된 인물에 대해 적혀 있는데, 두툼하게 생긴 네모난 기단(基壇) 위에 빗
돌을 세우고 지붕돌로 마무리를 지은 단촐한 모습으로 용정리 망월산에 있던 것을 1971년 이
곳으로 옮겨왔다.

사당 앞에 서면 부여읍내가 전체는 아니지만 상당수 시야에 들어온다. 겨우 조그만 언덕을 올
라왔을 뿐인데도 이 정도까지 보이는 것은 읍내가 금강(백마강) 주변 평지에 둥지를 틀고 있
어서이다. 읍내를 둘러싸고 북쪽에 부소산(扶蘇山), 동쪽에 금성산이 있고, 서쪽과 남쪽은 백
마강에 감싸여 있다.

* 의열사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산3 (의열로29번길 11-33)


▲  금성산의 서쪽과 동쪽을 이어주는 계백문 생태다리

의열사 동쪽에 금성산으로 이어지는 조그만 길이 있다. 그 길을 오르면 쉼터를 갖춘 공원(남
령근린공원)이 나오는데, 여기서 동쪽으로 가면 '계백문'이라 불리는 생태다리가 마중을 한다.

계백문은 계백로 도로 개설로 금성산과 의열사가 있는 산자락이 절단되자 그 끊어진 맥을 잇
고자 도로 위에 만든 일종의 생태다리이다. 온갖 수풀과 소나무를 가득 심고 그 중간에 박석
을 입힌 산책로를 내었는데, 이것이 도로 위에 만든 생태다리인지 그냥 산의 일부인지 모를
정도로 아주 감쪽 같이 만들었다. 다리 양쪽 사이드에는 노란색 바탕에 백제 깃발을 주렁주렁
달아놓아 백제 요새를 거니는 기분과 함께 이곳이 백제의 옛 도읍이었음을 잊지 않게 한다.

이 생태다리가 계백문이 된 것은 바로 계백로에 있기 때문이다. 황산벌(논산시 연산으로 여겨
짐)에서 신라의 5만 대군과 맞서다가 장렬히 전사한 계백 장군의 이름을 딴 도로로 계백에 대
한 부여 사람들의 마음과 자긍심을 진하게 비추고 있으며, 부여군청로터리에는 그의 동상까지
있다.


▲  서쪽에서 바라본 계백문 생태다리

▲  금성산 숲길 (성화대 방향)

계백문을 넘어 경사진 산길을 오르면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느긋하게 펼쳐진 서쪽 숲길로
가면 무로정과 성화대로 이어지는데, 무로정 주변에는 몸을 푸는 운동시설이 여럿 있다.


▲  인간의 제일 큰 꿈, 불로(不老)를 담은 무로정(無老亭)

금성산 서쪽 봉우리에 자리한 무로정은 1977년 12월 부여군수 정연달이 지었다. 정자의 이름
인 '무로'는 늙지 않는다는 뜻으로 인간들의 가장 큰 소망을 머금고 있다.

허나 아쉽게도 이 세상 누구도 늙음에서 자유
로운 존재는 없다. 우탁(禹倬)의 탄로가(嘆老
歌)처럼 아무리 철통 같이 늙음이 오는 것을
막아도 결국 지가 알아서 찾아온다.
그러니 '무로'는 인간의 큰 꿈이면서도 부질없
는 꿈인 것이다. 하지만 이곳이 읍내 중장년층
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라 그들의 희망을 저
격하고자 이런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  필체가 또렷한 무로정 현판의 위엄

 


 

♠  부여읍의 포근한 뒷동산, 금성산(錦城山)

▲  부여읍내를 굽어보는 금성산 성화대

부여읍내 동쪽에 자리한 금성산은 해발 124m의 야트막한 뫼이다. 읍내 사람들의 포근한 뒷동
산으로 낙화암(落花巖)과 고란사(皐蘭寺), 백마강(白馬江)을 품은 부소산은 많이들 알고 찾아
가지만 금성산은 인지도가 낮아 찾는 이는 별로 없다. 아직까지는 지역 사람들의 숨은 뒷동산
인 것이다.

허나 이곳은 낮은 명성과 달리 부여의 꿀단지 같은 산이다. 산세가 넓고 길쭉해 부여읍의 동
쪽 지붕길을 이루고 있으며, 멀리 능산리고분군과 청마산성(靑馬山城)까지 이어진다. 경사도
완만하고 포근하며, 숲이 짙어 정상 주변은 산림공원으로 가꿔지고 있다.
또한 조왕사(금성산) 석불좌상과 의열사, 금성산성터, 백제 와적기단 건물터 등의 늙은 문화
유산과 성화대, 국립부여박물관 등 많은 명소를 품고 있다. 특히 성화대에 오르면 부여읍내와
부소산, 백마강이 훤히 시야에 들어와 조망도 매우 일품이다. 그러니 부여에 왔다면 그 흔한
곳들만 살피지 말고 금성산에도 꼭 안겨 보기 바라며 성화대에서 부여읍내를 굽어보며 한때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위엄을 날렸던 사비성의 모습을 상상 속에서 각자 그려보기 바란다.

* 금성산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가탑리


▲  사비 백제의 상징, 금동대향로가 새겨진 성화대(聖火臺)

금성산은 백제 후기에 오산, 부산(浮山)과 더불어 삼영산(三靈山)의 하나인 일산(日山)으로
깊히 신성시된 산이라 전한다. 백제가 번성했을 때는 이들 삼영산의 신(神)들이 자주 왕래를
했다는 전설이 있어 조촐한 겉모습과 달리 백제와 부여 땅의 중요한 산이었음을 알려주고 있
으며, 부여의 대표적인 축제인 백제문화제가 열리기 전에 이곳 성화대에서 삼신제(三神祭)를
지낸다.


▲  성화대에서 바라본 부여읍내 (정림사지와 백마강, 부산도 바라보임)

금성산은 부여읍내가 훤히 바라보이고, 읍내 동쪽에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부여를 지키는 요
충지로 매우 애지중지되었다. 하여 백제는 이곳에 산성을 쌓아 도성(都城)을 지켰고, 신라~당
연합군과 내부 배신자들에 의해 700년 이상 묵은 백제가 멸망하자 전국에서 백제부흥군이 들
고 일어나 신라~당 연합군을 부소산성 일대로 몰아넣고 금성산에 목책을 세워 도성 탈환을 노
렸다.


▲  성화대에서 바라본 부여읍내 남부 (궁남지 주변과 백마강)

▲  성화대에서 바라본 부여읍내 북부 (백마강과 구드래, 부소산)

성화대는 서쪽으로 펼쳐진 부여읍내를 굽어보고 있다. 읍내 전체는 물론 백마강과 규암면 지
역, 금성산과 함께 삼영산의 하나였다는 부산까지 훤히 시야에 들어오는데, 부소산은 읍내(남
쪽) 방향을 향해 이런 조망을 보기가 어려워 금성산이 부소산도 감당하지 못한 그 조망을 유
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  금성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소나무 숲길

금성산에는 소나무가 많아 솔내음의 품질도 좋은 편이다. 기왕 뫼에 왔으니 그 정상도 가보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그곳은 일정에 없었기 때문에 흔쾌히 통과하고 조왕사로 내려갔다. 솔직히
15분 정도만 가면 금성산 꼭대기로 왕복 30분에 머무는 시간 10분을 더해서 40분이면 충분하
거늘 그것도 귀찮아서 발길을 돌려버렸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다소 후회가 든다. 그렇다
고 나중에 또 간다는 보장도 없거늘 다시 가야 되는 빌미만 만들고 말았다.


▲  조왕사 윗쪽 산길 (성화대 남쪽)

▲  금성산의 소중한 선물, 조왕사 약수터

조왕사 동쪽에는 금성산의 젖줄인 조왕사 약수터가 있다. 부여읍내에서 유명한 약수터로 겨울
가뭄이 극심이지만 금성산의 마음이 넉넉한지 이곳만큼은 가뭄을 잊어도 좋다. 백제 후기부터
부여를 보듬던 금성산이니 그 마음이 오죽하랴.
겨울 단잠에 빠진 빨간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목구멍에 들이키니 갈증과 몸속의 체증
이 싹 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없다.


▲  금성산 조왕사(朝王寺)

조왕사는 금성산 서쪽 자락에 안긴 조그만 산사(山寺)이다. 내가 금성산을 찾은 주된 이유는
바로 조왕사에 머물고 있는 늙은 석불을 보고자 함이다.
그 석불은 1913년 금성산 남쪽 자락의 옛 절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1919년 김병준이란 사람이
석불을 봉안하고자 불당 1칸을 지으니 그것이 조왕사 100년 역사의 시작이었다. 절 이름인 '
조왕'은 '제왕을 조근(朝覲)한다'는 뜻으로 왜정(倭政)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은 조선 왕조를
섬기려는 의도에서 지어졌다고 전한다.
1981년 요사(寮舍)를 새로 짓고, 1984년 왜인(倭人) 불자들이 보낸 돈으로 종각(鐘閣)을 지었
으며, 1987년 홍수로 발견된 옛 석탑의 부재를 수습해 대웅전 앞에 복원했다.

손바닥만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요사, 종각 등 3~4동의 건물이 있으며, 석불좌상과 석탑 등의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다.


▲  조왕사 석탑 - 부여군 향토유적 13호

잔디가 입혀진 대웅전 뜨락에는 고색의 기운이 짙은 엉성한 모습의 석탑이 있다. 그는 1987년
여름 홍수 때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부근에 묻혀 있던 석탑의 부재(部材)들이 거친 홍수로 다
시금 햇살을 보게 되자 그들을 꺼내 3층석탑으로 일으켜 세웠다.
바닥돌과 기단(基壇), 1층 탑신은 전혀 어색함이 없어 하나의 탑이었음을 보여주나 2층과 3층
은 발견된 탑돌과 지붕돌을 대충 끼어 맞추면서 상당히 어색한 모습을 자아내고 있다. 서로가
이토록 맞지가 않으니 아마도 2기 이상의 탑이 뒤엉켜 쓰러져 있던 것으로 보이며, 탑의 양식
으로 보아 조선 때 것으로 여겨진다.


▲  금성산 석불좌상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23호

대웅전 안에는 이곳의 대표 보물인 석불좌상이 소중히 봉안되어 있다. 그는 금성산 남쪽 자락
이름 없는 절터에 묻혀있던 것으로 1913년에 발견되었다.
다시 햇살을 보게 된 이후, 병을 낫게 해주고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영험한 석불로 소문이 나
면서 동네 사람들이 애지중지했으나 딱히 거처가 없어서 이리저리 옮겨다닌 것을 1919년에 비
로소 집이 생겼다. 그것이 지금의 조왕사이다.

그는 고려 때 석불로 거의 하얀 피부를 지니고 있는데, 얼굴 부분이 다소 검게 탄 것을 제외
하면 상태도 그런데로 양호하다.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쥐고 있는 지권인(智拳印) 비슷한 수인
(手印)을 선보이고 있어 비로자나불로 여겨지며, 검은 꼽슬머리에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
이 얕게 솟아있다. 검은 때가 자욱한 얼굴은 마치 뚱보 아지매처럼 풍만한 모습이며, 길쭉한
눈썹과 눈, 코, 조그만 입, 귀가 남아있다.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주름선이 남아있으며, 어깨는 곡선으로 처리되었다. 그리고 그가 앉
은 네모난 대좌(臺座)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비록 확인은 못했지만 대좌 밑부분에
귀꽃이 핀 안상(眼象)과 밑을 향해 잎을 펼친 복련(伏蓮)이 새겨져 있다. (정면이 아닌 옆에
서 보면 연꽃대좌의 밑도리도 볼 수 있음) 석불의 높이는 127cm, 좌대 높이 96cm, 대좌 너비
는 95cm이다.

나는 그에게 삼배를 올리며 슬쩍 나의 민원을 넣어보았다. 접수가 제대로 되었는지는 석불이
무표정으로 일관하여 알 도리가 없지만 마음만큼은 잠시나마 편해진 기분이다. 석불 뒤에는
석가여래후불탱이 있으며, 주위로 신중탱 등의 그림이 법당(法堂) 내부를 환하게 수식한다.

* 조왕사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0-3 (계백로 334-47, ☎ 041-835-4091)


▲  금성산에서 읍내로 내려가는 길 (오른쪽 펜스 너머가 국립부여박물관)

조왕사를 둘러보고 서쪽 길을 따라 읍내로 내려갔다. 길 남쪽에는 국립부여박물관이 넓게 둥
지를 틀고 있는데, 원래는 부소산 남쪽 관북리에 있었으나 1993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면서
규모가 더욱 장대해졌다.
오랜만에 발을 들인 부여 땅이라 그를 그냥 지나치기가 힘들어 1시간 정도 박물관 내부를 둘
러보았다. 게다가 입장료도 없으니 부담도 정말 없다.
(국립부여박물관에 대한 내용은 이쯤에서 쿨하게 자르도록 하겠음)

▲  박물관 뜨락에서 만난 부여 동사리석탑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21호

▲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普光寺 大普光禪
師碑) - 보물 107호

▲  당 유인원 기공비(唐 劉仁願 紀功碑) -
보물 21호

▲  제2전시관에 재현된 백제의 미소
서산마애3존불



 

♠  백제 무왕(武王)이 만든 매우 오래된 백제시대 정원 유적
부여 궁남지(宮南池) - 사적 135호

▲  연꽃의 거대한 보금자리, 서동공원(薯童公園)

부여읍내 남쪽에 자리한 궁남지는 읍내 북쪽에 부소산성(낙화암, 고란사)과 구드래, 읍내 중
간에 국립부여박물관, 정림사지와 더불어 부여에 왔다면 꼭 들려야 되는 이 지역의 대표 명소
이다. 2002년 이후 궁남지 주변에 연꽃을 위한 연못과 논두렁을 가득 만들어 연꽃을 주렁주렁
심으면서 이제는 천하 제일의 연꽃 성지(聖地)이자 축제 장소로 크게 추앙을 받고 있다.

연꽃이 나래를 펼치는 한여름이나 9월에 왔더라면 그들의 즐거운 향연에 두 망막이 제대로 호
강을 누렸을텐데, 비수기나 다름이 없는 겨울 제국의 한복판에 오니 연못과 논두렁에는 누렇
게 뜬 식물만 가득하다. 그들이 바로 연꽃이었다. 비록 지금은 한결같이 우울한 모습이나 겨
울 제국의 압정(壓政) 속에도 몰래 봄을 잉태하며 소쩍새의 울음 소리를 기다린다.

여름 제국의 한복판(7월)에는 천하 제일의 연꽃 축제인 '부여서동연꽃축제'가 성대히 펼쳐진
다. 공원과 축제 이름에 들어간 서동(薯童)은 백제 30대 군주인 무왕(재위 600~641)의 휘(諱,
제왕의 이름, 본 이름은 부여서동)로 그가 궁남지를 닦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넣은 것이다.

서동공원은 궁남지를 포함하고 있으며, 공원 한복판에 궁남지가 연꽃처럼 자리해 이곳의 정취
를 크게 돋군다. 공원 북쪽과 서쪽, 남쪽에 주차장이 닦여져 있고, 담장도 갖추지 않은 사방(
四方)이 개방된 형태로 동,서,남,북 어디로든 자유롭게 접근이 가능하다.

▲  서동공원 연꽃 논두렁 산책로

▲  겨울에 잠긴 연꽃 논두렁 ①

▲  겨울에 잠긴 연꽃 논두렁 ②

▲  겨울에 잠긴 연꽃 논두렁 ③


▲  연꽃의 와신상담 현장
지금은 폐허의 현장이나 다름이 없지만 앞으로 4개월 이후면 사정이 180도 달라진다.
서동공원은 바로 그 여름에 와야 그 진가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  은빛 물결이 출렁이는 궁남지와 부여 속의 조그만 섬, 포룡정(抱龍亭)

궁남지는 634년 백제 무왕이 궁성(宮城) 남쪽에 조성했다. 그 연유로 이곳 이름이 궁남지(宮
南池)가 되었는데, 무왕은 가까운 백마강을 놔두고 멀리 20여 리나 되는 곳에서 물을 끌어들
여 연못을 채웠고, 그 주변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연못 한복판에 섬을 만들어 삼신
산(三神山)의 하나인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했다.
이 땅에 남아있는 가장 늙은 궁궐 정원 유적으로 어떤 자료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
라고 나와있는데, 인공 연못은 이미 삼국시대 초기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백제는 위례성(慰禮
城, 서울 송파구~강동구 지역으로 여겨짐)을 도읍으로 삼던 한성백제(漢城百濟) 시절부터 궁
궐에 연못을 만들었으며, 고구려 또한 그랬다. 다만 남아있는 것이 유감스럽게도 없으며, 궁
남지가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연못 유적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 아닌, 현존
하는 가장 오래된 연못임)

고구려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의 거친 남하정책에 위례성이 싹 털리자 백제는 급
히 웅진(熊津, 공주로 여겨짐)을 새 도읍으로 삼았다. 산동반도에서 북위의 대군을 격파하고
중원대륙(서토)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드높였던 동성왕(東城王)은 웅진 왕궁 안에 크게 연못
을 만든 바 있으며, 이후 무왕이 사비성 궁궐 남쪽에 연못과 별궁(別宮)을 만들어 놀았다.
이렇듯 백제의 조경 기술은 천하 제일의 수준급이라 신라는 물론 백제의 속국이자 별채였던
왜열도에도 전해져 왜열도 조경의 원류(源流)가 되었다.

백제가 사라진 이후, 궁남지는 철저하게 파괴되어 버려졌고, 방장선산을 본따 만들었다는 섬
과 연못 또한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완전히 헝클어졌다. 그러다가 1965년부터 2년 동
안 복원공사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허나 연못은 원래 크기의 ⅓ 이하로 축소
복원되었으며, 섬은 방장선산 대신 포룡정이란 정자를 지어 옛날과는 다소 다른 모습이다. 그
래도 작게나마 연못과 섬이라도 건진 것이 어디랴.


▲  세상을 향해 작게 다리를 내민 궁남지

▲  동쪽에서 바라본 궁남지

▲  서남쪽에서 바라본 궁남지

▲  포룡정으로 인도하는 나무다리

비록 연못이 왕년의 시절보다 덩치가 많이 줄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넓다. 지금도 이러하니 왕
년에는 완전 바다처럼 보였을 것이다. 백제 무왕이 자신의 위엄과 백제의 힘을 천하만방에 강
조하고자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 만들었으니 말이다.
무왕과 그의 뒤를 잇는 의자왕은 여기서 왕족, 귀족들과 화려하게 연회를 벌이며 종종 뱃놀이
까지 즐겼다. 저 연못과 별궁을 짓고자 수많은 백성들이 동원되었고, 적지 않은 이들이 공사
중에 다치거나 죽어갔다. 또한 망족(望族, 왕족, 귀족)들의 여흥을 위해 백성들의 고혈도 적
지 않게 들어갔으니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다. 그래도 이렇게 연못이라도 남겨주어 백제의
우수했던 조경 기술에 대해 작게나마 속삭여준다.

연못 한복판에는 동그란 섬이 두둥실 띄워져 있는데, 이 섬이 옛날 방장선산이 있던 현장이라
고 한다. 부여 속의 작은 섬으로 그곳에 가려면 남쪽을 향해 뻗은 나무 다리를 건너야 된다.
이 다리 역시 궁남지를 복원하면서 경복궁 향원정(香遠亭)의 나무다리를 모방하여 지은 것이
라 백제 것과는 완전히 차이가 있다. 물론 무왕 시절에도 섬을 잇는 다리는 있었을 것이나 다
리와 관련된 존재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지금 다리는 1987년에 유실된 것을 다시 만든 것이다.

섬과 세상을 유일하게 이어주는 나무다리는 두 사람이 교행할 정도로 폭이 좁고 난간 또한 아
주 낮다. 그렇다고 특별히 안전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며 연못의 깊이도 2~4m에 이르니 다리
에서 장난을 치거나 뛰어가는 행위는 절대로 하지 말자.


▲  포룡정 나무다리 한복판

▲  포룡정 서쪽에서 바라본 나무다리

▲  동그란 섬에 지어진 포룡정

▲  김종필이 1973년에 쓴 포룡정 현판

▲  포룡정 동쪽에서 바라본 나무다리

포룡정은 1965년에 섬을 다시 재현하면서 지은 네모난 정자이다. 포룡이란 용을 품고 있다는
뜻으로 무왕의 탄생설화에서 따왔다고 한다. 허나 그 이름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닌 1965년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섬과 포룡정은 백제 시절과는 거리가 멀게 콩 볶듯 재현된 것이라 나중
에 꼭 시대에 맞게 손을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포룡정 현판은 1973년(계축년)에 김종필이 쓴 것이며, 내부에는 2005년에 작성된 포룡정기가
걸려있다.


▲  포룡정에서 바라본 연못 건너 풍경 (사진 중앙에 돛단배가 있음)

▲  버드나무가 심어진 궁남지 연못 산책로

▲  땅에 기대어 고된 몸을 쉬고 있는 돛단배 (주로 주말에 배를 띄움)

▲  궁남지 백제우물 유적

궁남지 남쪽에는 백제우물 유적이 누워있다. 우물은 보존 및 위험방지를 위해 흙과 잔디로 빼
곡히 덮어두어 내부 확인은 불가능하다. (우물유적 옆에 내부 사진을 첨부한 안내문이 있음)
우물의 깊이는 6.2m, 상부 너비 0.9~1m, 하부 너비 1m의 평면원형으로 궁남지 남쪽에 있는 것
으로 보아 별궁 우물로 여겨진다. 우물 속에서는 백제시대 와전과 토기, 농기구의 목제류, 동
물뼈 등 다양한 유물이 나왔으며, 백제시대 우물 양식과 토목기술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존재이다.


▲  궁남지 남쪽 연꽃 논두렁 ①

▲  궁남지 남쪽 연꽃 논두렁 ②

궁남지와 서동공원 일대를 1시간 정도 둘러보고 공원 서쪽에 자리한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
를 찾았다. 하지만 내가 길을 잘못 들었는지 아니면 군수리사지가 다른 데로 마실을 갔는지
찾지를 못했다. 예전에 분명 갔던 곳으로 내가 10년 이상 찾지 않은 사이에 공원 주변 지도가
많이 바뀌긴 했어도 거의 99.99% 이상은 다 찾아가는 편인데, 이상하게도 그를 발견하지 못해
0.01%의 실수율을 보이고 말았다. 나도 이제 늙은 것인가? 아니면 군수리사지의 얄미운 숨바
꼭질 장난인가?

시간은 어느덧 15시 30분, 햇님도 뉘엿뉘엿 퇴근 준비를 서두른다. 그날 일정은 백마강을 건
너 규암리에 있는 수북정(水北亭)과 자온대(自溫臺)까지 보는 것이었는데, 겨울 제국이 심술
을 부리면서 날씨도 좀 추워지고, 몸도 상당히 지쳐서 그들을 다음으로 모두 이월처리하고 나
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언제 또 인연이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숨쉬는 동안에는 반드시 올
것이다.
이렇게 하여 늦겨울 부여 나들이는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궁남지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 (궁남로 52 ☎ 041-830-2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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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숲길을 지닌 고즈넉한 산사, 정릉동 북한산 경국사 (경국사의 석가탄신일 풍경, 경국사 공양밥)

정릉동 경국사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 정릉동 경국사 '
경국사 숲길
▲  경국사 숲길



 


올해도 변함없이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4월 초파일)이 찾아왔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서울 장안에서 100년 이상 묵은 오래된 절을 대상으로 그날의 메뉴를 물색했
으나 서울에서 미답(未踏)으로 남은 늙은 절은 이제 씨가 마른 상태이다.
그래서 서울 밖으로 나갈까도 했으나 멀리 나가는 것도 귀찮고 해서 가본 절에서 적당한
곳을 골라 재활용하기로 했다. 하여 경국사를 시작으로 여러 오래된 절을 돌기로 했는데,
경국사는 이상하게도 이번을 포함하여 석가탄신일에만 무려 5번이나 인연을 지은 석가탄
신일 인연 사찰로 거의 4년 만에 방문이다.

도봉동(道峰洞) 집에서 정릉동(貞陵洞) 경국사까지는 버스로 40~50분 정도 걸린다. 12시
에 집을 나서 경국사 정류장에 두 발을 내리니 그날 같이 움직이기로 한 친한 후배가 대
기를 하고 있었다. 원래 혼자 석가탄신일 절 투어를 하려고 했으나 그가 그날 쉰다고 새
벽에 연통을 보내서 같이 가게 되었다.

경국사는 석가탄신일 대목이라 정류장부터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정릉천에 걸린 극
락교를 건너니 일주문이 중생 맞이에 여념들이 없고, 절로 인도하는 길 좌우에는 오색영
롱한 연등이 길게 이어져 초파일의 흥겨운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  경국사 옆을 흐르는 정릉천(貞陵川)
정릉천은 북한산(삼각산) 정릉계곡에서 발원한 하천으로 경국사 옆구리를
살짝 지나간다. 그 하천에 무게가 백두산만한 나의 번뇌를 내던지고
경국사 경내로 들어선다.



 

♠  경국사(慶國寺) 입문

▲  경국사 일주문(一柱門)

극락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향하면 바로 눈앞에 일주문이 크게 아른거린다. 문이 바로 앞에서
나를 뚫어지라 굽어보니 안그래도 큰 문이 더욱 장대하게 보여 제대로 주눅을 들게 한다. 돌
로 만든 굵직한 기둥에는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이 새겨져 있어 문의 위엄을 더욱
돋구고 있으며, 지붕 밑에는 '삼각산 경국사'라 쓰인 현판을 내걸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  경국사의 싱그러운 보물, 경국사 숲길

일주문을 들어서면 숲내음이 진동하는 푸른 숲길이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경국사의
첫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인도하고 속세(俗世)에서 오염된 망막에 한줄기 감동을 선사하는 이
숲길은 300년 묵은 소나무까지 100m 정도 곧게 펼쳐져 있는데, 거기서 서쪽으로 꺾여 경내로
이어진다. 숲길의 길바닥은 다행히 콘크리트로 닦지 않고 박석(薄石)을 깔아 숲길의 운치를
전혀 해치지 않았다. (흙길이었으면 더욱 좋았겠지;;)

하늘로 늘씬하게 솟아 하늘과 햇님을 가리고 선 나무들이 저마다의 빼어난 자태를 뽐내며 앞
다투어 갖은 청정한 기운을 베푸니 머리와 마음이 싹 정화되는 것 같다. 경국사가 이렇게 경
내를 앞에 두고 숲길을 내민 것은 극락교와 일주문에서도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번뇌와 속세
의 기운을 자연의 힘에 의지해 싹 털고 경내에 임하라는 뜻이다.


▲  정처 없는 내 마음을 제대로 뒤흔든 경국사 숲길
집으로 몰래 가져와 나 혼자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숲길이다. 허나 조물주가 아닌
이상 그건 불가능하니 사진으로 대신 품으련다. 이 숲길은 봄도 아름답지만
처절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늦가을도 단연 백미(白眉)이다.

▲  300년 묵은 소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11호

숲길이 서쪽으로 100도 구부러지는 곳에 숲길의 최고 어른인 소나무가 있다. 나이가 무려 300
년이 넘었다는 늙은 나무로 몸매도 매우 준수해 키가 무려 20m를 넘는다. 
하늘을 떠받들며 숲길을 다스리는 이 나무는 매우 지극한 나이임에도 그 흔한 '서울시 보호수
' 등급이 아닌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등급에 머물러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가지고 있다.
인간들이 제멋대로 정한 등급이 뭐 그리 중요하냐 싶겠지만 서울에서는 100살이 넘는 나무 중
에 지방기념물 이상의 지위를 얻지 못한 나무들은 상당수 '보호수'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그러니 300살이면 99% 보호수로 지정되고도 남을 연세인데 그에 상응하는 등급을 줘야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소나무 그늘에는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있다.

소나무 북쪽에는 부도탑(승탑) 2기와 비석(碑石) 3기로 이루어진 너른 공간이 있다. 다들 고
색의 때가 얇은 존재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그냥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이들 부도탑은 이
땅의 현대 불교 발전에 크게 공헌한 승려 2명의 사리탑으로 경국사에서도 매우 비중이 큰 인
물들이다. 그러니 한번 더듬고 가길 권한다.
비석 가운데 가장 왼쪽에 있는 큰 존재가 경국사의 내력을 머금은 사적비(事蹟碑)로 1995년에
지관이 세웠다.


▲  자운대율사 계주원명사리탑(戒珠圓明舍利塔)

네모난 기단 위에 마치 범종(梵鍾)이 그대로 돌로 굳은 듯한 모습의 석종형 승탑은 자운대율
사(慈雲大律師, 1911~1992)의 사리탑으로 탑 이름은 계주원명사리탑이다.

자운대율사는 왜정(倭政) 이후 계율을 무시하고 대놓고 혼인하여 가정을 꾸리고 심지어 고기
까지 처묵처묵하는 등, 불교가 타락의 극치를 보이자 이에 발끈하여 불교 중흥과 율풍(律風)
진작에 팔을 걷어부쳤다.
그는 1940년부터 서울 도심에 있는 대각사(大覺寺)에 머물며 율장과 관련 자료를 찾고자 매일
도시락을 싸들며 국립중앙도서관을 들락거렸다. 그래서 만속장경(卍續藏經)에 수록된 오부율
장(五部律藏)과 그 주소(註疏)를 모두 필사해 연구했으며, 1948년에 문경 봉암사(鳳巖寺)에서
처음으로 보살계(菩薩戒) 수계법회를 열었다.

1949년에는 천화율원 감로계단(千華律院 甘露戒壇)을 설치해 대각사에서 범망경(梵網經), 사
미율의(沙彌律儀), 사미니율의(沙彌尼律儀), 비구계본(比丘戒本) 등의 간행을 준비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모두 분실하고 만다. 허나 이에 굴하지 않고 부산에서 다시 율문(律文)을 준비
하여 한문본(漢文本) 25,000권을 포함해 총 48,000권을 간행하여 불교의 법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고 1981년부터 단일계단 전계대화상에 추대되어 1991년까지 많은
승려에게 계를 주었으며, 1992년 2월 7일, 해인사(海印寺)의 부속암자인 홍제암(弘濟庵)에서
바쁘게 살아온 삶을 마무리 지었다.
자운이 세상을 뜨자 그와 인연이 있던 경국사에서 그의 승탑을 만들었는데, 2년 동안 공을 들
여 2005년에 완성을 보았다. 승탑은 그의 명성과 업적에 걸맞도록 특별하게 계단형(戒壇形)으
로 만들어 두고두고 그의 업적을 기린다.

자운대율사 사리탑 뒤쪽에 자리한 고운 맵시의 승탑은 보경보현대종사(寶鏡普賢大宗師)의 사
리탑으로 충주 정토사지(淨土寺址)에 있던 고려시대 승탑인 홍법국사실상탑(弘法國師實相塔)
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 그리고 승탑 바로 옆에 자리한 보경의 행적비는 1991년 지관이 찬
(撰)을 하고 세운 것으로 그의 일대기가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보경은 1916년 이곳 주지가 되어 60여 년 동안 경국사를 꾸린 인물로 교학(敎學)과 선지(禪智
)를 두루 익혔고, 계율에도 무지 철저해 승가의 귀감이 되었다. 특히 탱화를 잘 그려 화승(畵
僧)으로도 널리 활동을 했는데, 경국사의 탱화 상당수는 그의 손길에서 탄생했다.


▲  펼쳐진 책 모양의 불교대사림(佛敎大辭林) 편찬발원문

불교대사림(불교대사전)은 지관이 오랫동안 추진한 편찬 사업으로 10여 권을 편찬했다. 이 발
원문은 지관이 정성을 들여 작성한 것인데 그 내용에서 그의 지성이 제대로 우러나온다.


▲  경국사 샘터 위에 자리한 조그만 석불들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조그만 저들도 과일과 떡, 돈으로 초파일 특수를 제대로
누리고 있다. 나보다 저들이 훨씬 돈이 많으니 내가 저 자리에서
석불 흉내를 내며 대신 하고 싶을 정도이다.

▲  공양삼매경에 빠진 경내 앞 (관음성전 공양간 앞)

주차장에서 서쪽으로 휘어진 오르막길을 오르면 숲속에 숨겨진 경국사가 모습을 비춘다. 경내
앞에는 너른 공터가 펼쳐져 있고, 공양 수요를 위해 돗자리가 넉넉히 깔려 있는데, 공양 수요
가 워낙 많아 돗자리는 물론 공터 주변에 앉을 만한 자리는 싹 사람들로 넘쳐난다. 공양은 천
막 뒷쪽 관음성전 밑에 있는 공양간에서 제공하고 있는데, 공양 줄이 길게 이어져 있다. 금강
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크고 아름다운 말이 있지만 줄도 길고 해서 우선 경국사의 보물을
살펴보고 공양에 임하기로 했다.

공양간 앞 천막에서는 믹스커피와 티백 녹차를 제공하고 있는데 무려 500원씩이나 받는다. 그
외에 연등 만들기 체험, 기와 시주, 불교용품 판매로 짭짤하게 초파일 특수를 누린다. 그럼
여기서 잠시 경국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북한산(삼각산)에 제일 남쪽, 정릉천을 낀 숲속에 둥지를 튼 경국사는 1325년에 자정율사(慈
淨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절이 북한산 청봉(靑峰) 밑에 있어서 절 이름을 청암사(靑岩寺)라 했다고 하며, 1330년에 무
기(無奇)가 이곳에 머물러 천태종(天台宗)의 교풍을 크게 떨치었고, 1331년에 채홍철(蔡洪哲,
1262~1340)이 절을 증축해 승려들의 수행을 도왔다고 한다.
1349년 보우대사<원증국사(圓證國師)>가 이곳에 머물다가 공민왕(恭愍王)이 내린 금란가사(金
襴袈裟)와 주장자(柱杖子)를 받고 국사(國師)가 되었다.

조선이 들어서면서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서서히 망해가다가 결국 중종(中宗) 시절에
완전 망하여 터만 남았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1545년 왕실의 도움으로 절을 다시 일으켜 세
웠고, 1546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지원으로 크게 중창을 벌였다. 이때 문정왕후에게 잘보이
고자 부처의 가호로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을 기원하는 뜻에서 경국사(慶國寺)로 이름을 갈았
다고 전한다.

1669년 속세의 뇌리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능
인 정릉(貞陵)이 복원되자 근처에 있던 봉국사(奉國寺), 흥천사(興天寺)와 함께 정릉을 지키
는 원찰(願刹)이 되었다. 이때 경국사로 이름을 갈았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정릉의 원찰이
되어 망할 일은 없게 된 경국사는 이후 탄탄대로를 누비게 된다.

1698년 연화승성(蓮華昇城)이 절을 중수하고 천태성전(天台聖殿)을 세웠다. 천태성전은 독성
각의 다른 이름으로 당시의 상량문이 남아있다. 1737년에는 낙암의눌(洛巖義訥)이 주지로 부
임하여 절을 손질했고, 1793년에는 천봉태흘(天峰泰屹)이 크게 중수했다.
1855년 예봉평신(禮峰平信)이 법당을 다시 세웠고, 1864년 고종(高宗)의 즉위를 축하하는 재
를 열어 왕실에 더욱 굽신거렸다. 그리고 1868년에 칠성각과 산신각을 새로 짓고 호국대법회
를 열었는데, 이때 왕실에서 범종(梵鍾)을 하사했으며, 1870년에 큰방을 수리했다.

1878년에는 함홍치능(涵弘致能)이 고종의 지원으로 요사를 중수하고, 철종의 왕비인 철인왕후
(哲仁王后) 김씨의 49재를 지냈으며, 1887년에는 석찬(碩讚) 등이 팔상도(八相圖)와 지장시왕
도, 신중도, 현왕도, 감로도 등을 조성하여 봉안했다.

1914년 기송석찰(其松錫察)이 극락보전을 다시 세웠고, 1917년에 정릉천에 반야교(般若橋)를
놓았다. 1921년부터는 보경(寶鏡)이 주지로 머물면서 절을 크게 일으켜 세웠는데, 그는 직접
건물에 단청을 입히고 큰방에 아미타후불탱과 구품탱 등을 그렸으며, 1930년에는 영산전과 산
신각, 큰방을 중수하고, 1936년에는 영산전에 석가모니후불탱과 신중탱, 18나한탱 4폭, 범종
을 조성했다. 그리고 1939년에는 삼성보전에 약사탱, 칠성탱을 봉안했다.

6.25전쟁 이후에는 이승만 전대통령이 이곳에 들렸는데, 보경의 인격에 크게 감동을 먹어 참
다운 승가(僧伽)의 모범이 이곳에 있다면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 인연으로 경국사의 단
골이 되어 여러 차례 보경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1953년 11월 닉슨 미국 부통령이 서울을
방문하자 이승만이 한국 문화의 참모습이 경국사에 있으니 한번 가자며 그를 데리고 오기도
했다. 이때 닉슨은 경국사에서 참배했던 경험이 한국 방문 일정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밝히며 경국사를 크게 찬양했다.

보경이 사라진 이후, 현대의 큰 승려로 추앙받는 지관(智冠)이 주지로 머물며 관음전과 삼성
보전, 영산전, 산신각, 환희당 등 대부분의 건물을 중수하여 경국사를 반석 위에 올렸다. 또
한 1989년에는 극락보전을 크게 넓혔으며, 1991년에 보경의 행적비를 세웠다. 이후 사적비를
세우고, 삼성보전과 관음성전을 새로 지었으며, 자운의 부도인 계주원명사리탑을 세웠다. 그
지관이 2012년 1월 입적하면서 그의 사리를 공개했는데, 이때 많은 중생이 몰려와 그를 애도
하며 사리를 친견했다.

북한산(삼각산)에 안겨있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주택가에 빙 둘러싸인 형태로 다행히 절 주변
이 수목들로 삼삼해 심산유곡의 산사에 파묻힌 기분이다. 또한 정릉천이 바로 앞에 흘러 속세
와 적당히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도심 속의 조그만 오아시스처럼 포근하고 그윽하기만 하다.

청정한 승가의 본가임을 자처하는 이곳에는 극락보전과 관음성전, 삼성보전, 무우정사, 명부
전, 영산전, 산신각 등 10동 정도의 건물이 경내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을 비롯해 팔상도, 괘불도(掛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4호
) 등 지방문화재 6점을 간직하고 있다. (괘불도는 관람이 어려움) 그 외에 이곳에서 가
장 늙은 보물인 철조관음보살좌상과 보경이 그린 여러 불화 등이 전한다.
건물들은 죄다 근래에 손질되어 고색의 멋은 별로 없지만 그 속에는 많은 문화유산이 고색의
기운을 피우고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해준다.

* 경국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3동 753 (보국문로 113-10 ☎ 02-914-5447)



 

♠  경국사 둘러보기 (관음성전, 극락보전 주변)

▲  관음성전(觀音聖殿)의 뒷모습

공양간 윗쪽에는 육중한 덩치의 관음성전이 자리하여 경내를 가리고 있다. 이 건물은 그 흔한
관음전(觀音殿)으로 경국사는 유난히 '성(聖)'과 '보(寶)' 돌림을 좋아하는지 그 글자가 첨가
된 건물이 많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관음성전은 옛 무량수각(無量壽閣) 자리에 2000년대에 새로 지은 'ㄷ'모
양의 집으로 관세음보살의 거처이다. 건물이 워낙 넓어 서큰방이라 불리기도 하며, 법회와 강
의 장소로 쓰인다. 그리고 바로 밑에 넓게 자리를 파고 공양간을 닦으면서 졸지에 2층집이 되
버렸다.

관음성전 정면에는 불당에서 흔치 않은 툇마루가 있으며, 건물 안에는 목관음보살좌상과 감로
도 등 여러 탱화와 중생들의 돈을 받아 만들어진 무수한 원불(願佛)이 일제히 금빛 물결을 이
루며 내부를 장엄한다. 또한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 쓴 '화엄회(華嚴會)','
법화회(法華會)' 현판과 이승만이 남긴 '경국사' 현판이 걸려있다.


▲  경국사 목관음보살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8호

관음성전 중심에는 이 건물의 주인장인 관세음보살좌상이 자리해 있다. 어린 동자승이 관세음
보살 누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의 보관(寶冠)과 복장, 장식물을 슬쩍 착용한 것일까
. 아니면 잠시 관세음보살 체험을 해보는 것일까. 표정이 어린 아이처럼 해맑고 천진난만하다
. 게다가 덩치도 쥐방울만하여 귀여움도 가득 묻어나 나도 모르게 쓱쓱 쓰다듬고 싶다.

이 보살상은 원래 경국사 것이 아니었다. 1703년 전남 영암군 도갑사(道岬寺)에서 조성된 것
으로 도갑사의 부속암자인 견성암(見性庵)에 있었다. 청신(淸信)이 화주가 되어 만든 것으로
어찌어찌하여 서울까지 흘러들어왔는데,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다. 덕분에 경국사의 늙은 문화
유산이 하나 더 늘었으니 경국사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지, 그가 경국사에 들어온 이후에는 한
동안 극락보전 불단 우측에 있던 것을 관음성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보살상의 높이는 60cm로 그의 뱃속에서 발견된 발원문(發願文)에 따르면 색난(色難)을 수조각
승(首彫刻僧), 순경(順瓊)을 부조각승으로 하여 행원(幸垣), 대원(碓遠), 일기(一機), 대유(
大裕) 등이 같이 조성했다. 색난은 조선 후기에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불상 전문 승려이다.

앳된 표정이 묻어난 얼굴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는데,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으며, 눈은
살짝 뜨고 있는 것 같다. 코는 끝이 오똑하고, 입은 굳게 다물고 있으며, 머리에는 화려하면
서도 신라 금관(金冠)처럼 무거워 보이는 보관을 썼는데, 귀 옆까지 관대자락이 내려와 보관
의 수려함을 더욱 드높인다. 그런 보관 밑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삐죽 나와있는데, 이마 중간
에는 백호가 찍혀 있으며, 볼살은 두툼하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다.
신체는 나름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작은 어깨에는 법의(法衣)가 걸쳐져 있는데, 목 뒷부분이
약간 접혀있고, 법의의 왼쪽은 어깨를 완전히 가리고 어깨부터 무릎까지 내려오면서 무릎 위
에 놓인 왼손을 손목부분까지 완전히 덮고 있다. 그리고 법의 오른쪽은 어깨를 덮은 뒤 오른
쪽 팔꿈치 아래로 하여 배 부근으로 내려가 왼쪽에서 내려온 법의 안쪽으로 여며진 모습이다.
이런 착의법은 넓게 트인 가슴과 수평 혹은 연꽃형의 군의 표현과 함께 조선 후기 불상의 가
장 전형적인 모습이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고 첫째 손가락과 3째 손가락을 마주잡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에 대고
그의 필수품인 정병(政柄)을 살짝 쥐고 있다. 앉은 자세는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오른쪽 발이
훤히 드러나 있으며, 무릎 앞쪽으로는 옷자락이 물결치듯이 좌우로 유려하게 흘러내렸다.

조선 후기 목조보살상의 양식을 잘 드러낸 보살상으로 나무로 빚어 도금을 입혔으며, 그의 뒤
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중심이 된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한다. 이 후불탱은 1924
년에 보경이 그렸다.


▲  경국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1호

관음성전 우측 벽에는 매우 복잡하게 생긴 탱화가 있다. 이 탱화는 죽은 이의 극락왕생을 염
원하고자 만든 감로도로 19세기 중/후반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크게 유행한 감로왕도(甘露王
圖)의 하나이다.
그림을 보면 밑부분은 극락왕생을 못해 방황하는 영가(靈駕, 죽은 사람)들이 그려져 있고, 중
간에는 그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후손들이 있다. 그리고 가장 윗쪽에는 극락으로 들어간 영가
의 환희가 담겨져 있다.

무수히 많은 인물의 표현과 생동감있는 자세 연출로 조금의 공백도 허용치 않고 알차게 채우
고 있으며, 서울/경기와 강원도에서 활동했던 화승(畵僧)인 축연과 철유가 상궁(尙宮)들의 시
주로 1887년경에 그린 것으로 왕실의 불화 발원 사례를 잘 보여준다. 조선이 비록 대내외적으
로는 불교를 배척했지만 속으로는 적지 않게 불교를 옆구리에 낀 것이다. 특히 19세기부터 20
세기 초까지 상궁은 물론 왕비와 후궁의 시주로 그려진 불화가 서울과 경기도 사찰에 상당히
존재한다.


▲  경국사 극락보전(極樂寶殿)

경국사의 법당(法堂)인 극락보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관음성전의 뒷통수
를 바라보고 있다. 관음성전과 더불어 동쪽을 바라보고 선 그는 뜨락보다 한 3m 높은 기단(基
壇) 위에 자리해 있어 자못 웅대해 보이는데, 1989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증축된 것이며, 한때
는 건물 앞쪽에 1칸 정도 보태어 공간을 넓혔으나 나중에 철거했다.

건물 내에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과 신중도, 팔상도 등의 문화유산이 있는데, 경국사에서 소
장하고 있는 지정문화유산 7점 중 3점이 이곳에 깃들여져 있으니 꼭 살펴봐야 나중에 명부(저
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  경국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
- 보물 748호

극락보전 불단에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이하 목각탱)과 조그만 아미타3존상이 봉안되어 있
다. 아미타3존상은 근래에 달아놓은 것이지만 그 뒤에 든든히 자리한 목각탱은 경국사에서 특
별히 애지중지하는 보물로 서울에서 거의 유일한 조선 후기 후불목각탱이다.

이 목각탱은 나무를 조각하여 금색을 입힌 것으로 겉으로 보면 꽤 복잡해 보이지만 잘 살펴보
면 구조는 단순하다.
목각탱 중앙에는 극락전의 주인인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가 두손을 무릎에 댄 이른바 설법인
(說法印)을 취하고 있는데, 앙련(仰蓮)이 새겨진 여러 층으로 된 대좌(臺座)에 앉아있다. 그
런데 목각탱의 주인공임에도 그를 둘러싼 인물들보다 덩치가 작아 귀여운 인상을 풍긴다. 그
래도 그들과 달리 주형광배(舟形光背)를 달아주어 그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고, 광배의 위, 아
래가 비슷한 폭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양식이다. 또한 광배 안에는 연꽃을 새기고
일정한 너비의 주연(周緣), 밖으로는 화염(火焰) 무늬를 생겼는데, 그 무늬는 위로 솟구치고
있고, 그 안쪽에 조그만 불상이 4구 정도 있다.
 
아미타여래의 옷무늬는 통식(通式)으로 조선시대 양식이며, 그 좌우에는 아미타8대보살을 각
각 4명씩 배치했다. 그들 가운데 지장보살을 제외히고 모두 가지각색의 보관(寶冠)을 쓰고 연
꽃을 들고 있으며, 앙련 위에 앉아있다. 그 밑의 좌우 끝에는 사천왕(四天王)의 하나인 증장
천왕(增長天王)과 지국천왕(持國天王)을 배치해 아미타불의 호위를 부탁했고, 보살들 바깥 좌
우에는 나한상(羅漢像)을 1구씩 두었다.

목각탱의 양식으로 보아 18세기 중반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몇 없는 조선 후기 목
각탱이자 서울에 거의 유일한 늙은 목각탱화로 그 가치는 대단하다. 그런 목각탱을 간직하고
있으니 경국사는 예사로운 절은 아닌 것 같다.


▲  경국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3호

극락보전 좌측 벽에는 호법신장(護法神將)이 빼곡히 담겨진 신중도가 있다. 이 탱화는 1887년
상궁들의 시주로 혜산 축연(惠山 竺演) 등이 그린 것으로 중앙에는 동진보살(童眞菩薩)과 제
석천(帝釋天), 범천(梵天)이 있고, 그 좌우에 명왕(明王)와 신장(神將)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은 인도의 토속신으로 범천은 무려 힌두교의 창조신인데, 불교에서 이들을 모두 영입하여
부처의 세계를 지키는 신장으로 꾸몄다. 특이한 것은 산신(山神)과 조왕신(竈王神) 등 우리나
라의 토속신이 위태천(韋太天)의 협시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  경국사 팔상도(八相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2호

신중도 주변에는 부처의 일대기를 8개의 그림으로 표현한 팔상도가 있다. 이 탱화는 1887년에
상궁들의 시주로 보암 긍법(普庵 亘法)과 금운 순민(錦雲 洵玟), 봉규(奉奎), 종현(宗現) 등
이 그린 것으로 전체적으로 구성이 안정되어 있고 청색 사용을 자제했다.
19세기 말 서울/경기 지역 화승의 새로운 도상과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이곳 팔상도는 다
른 절과 달리 그림 4개를 하나로 하여 2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윗 사진의 4폭은 큰 네모 안에
가로가 조금 긴 직사각형을 두고 그 안에 4폭을 담았으며, 아랫 사진의 4폭은 가로가 매우 길
쭉한 것이 특징이다.


▲  삼성보전(三聖寶殿)

극락보전 좌측에는 삼성보전이 자리하여 나란히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원래는 왼쪽 1칸만 삼성보전이고, 오른쪽 2칸은 범종의 보금자리인 범종각으
로 쓰였으나 범종(梵鐘)을 내보내면서 3칸 모두 완전한 삼성보전이 되었다.
이곳 삼성보전은 산신과 독성, 칠성의 거처인 삼성각(三聖閣)의 다른 명칭이나 현실은 엉뚱하
게도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미륵보살(彌勒菩薩)과 칠성(치성광여래)를 협시로 배치한 약사3존
상의 공간이다. 물론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으나 산신각과 천태성전을 별도로 두면서
산신과 독성을 그곳으로 빼고 그 빈 자리에 약사여래와 미륵보살을 투입하면서 그렇게 된 것
이다.


▲  하얀 피부의 삼성보전 약사여래상과 약사회탱

달랑 1칸에 비좁게 살았던 약사여래와 미륵보살, 칠성 3형제는 범종을 밀어내고 집을 넓히면
서 각각 1칸씩 공간을 누리게 되었다. 약사회탱, 미륵탱, 칠성탱은 1939년에 보경이 그린 것
으로 그들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온갖 과일과 음식들로 불단이 무너질 지경이다.


▲  삼성보전 미륵보살과 미륵탱
하얀 피부의 조그만 미륵보살 뒤로 보경이 1939년에 조성한 미륵탱이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  석가탄신일 행사가 펼쳐지고 있는 극락보전 뜨락
행사 무대 옆에는 아기부처에게 관불(灌佛)을 행하는 관불의식의 현장이 닦여져
있다. 오색 연등이 무리를 지으며 행사장 허공을 낮게 드리우고 있어
하늘이 움푹 낮아진 기분이다.



 

♠  경국사 명부전, 영산전

▲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명부전(冥府殿)

극락보전 뜨락에서 초파일 행사가 열리고 있어 일제히 앞쪽으로 쏠린 시선이 부담스러워 극락
보전 뒷쪽으로 해서 명부전으로 넘어갔다.
극락보전 우측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지장보살상과 시왕(
十王), 판관 등 명부(冥府, 저승)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지장시왕도와 사자탱, 시왕탱 등
이 걸려있고. 좌측에는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의 철조관음보살좌상이 있다.


▲  명부전 지장보살상과 지장시왕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0호)

푸른 머리의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나
란히 서 있다. 이들은 보경이 흙으로 빚어서 만든 것으로 그들 뒤에 자리한 탱화가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지장시왕도이다.

이 탱화는 1870년에 안암동 개운사(開運寺)에 있는 지장시왕도를 참고하여 혜산 축연(惠山 竺
演)이 그린 것이다. 혜산은 구한말에 강원도와 서울/경기에서 활동했던 화승으로 서울에는 흥
천사와 경국사를 비롯해 그의 불화 20여 점이 전한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릴 때 수화사(首畵師
)로 활동하면서 불사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림을 보면 선악동자를 함께 그린 전형적인 지장시왕도 형식으로 유난히 가늘고 긴 눈과 아
주 작은 입 등 얼굴 한 가운데로 몰려있는 이목구비, 좁은 미간, 눈 주위와 코/뺨 부분에 음
영을 표현해 얼굴의 골격을 강조한 점은 다른 지역의 불화와 구별되는 서울,경기 지역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이다.


▲  명부전 우측의 시왕상과 시왕탱

▲  명부전 좌측의 시왕상과 시왕탱, 철조관음보살좌상

지장보살상 좌우에는 죽은 이를 심판하는 저승의 10왕(시왕)이 각각 5왕씩 앉아있다. 복장은
거의 비슷하지만 손짓이나 얼굴,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은 서로 다르다. 그들 뒤에는 시왕탱이
있는데, 역시 1왕당 1폭씩 배치하여 총 10폭을 이룬다.

명부전 좌측 벽에는 시커먼 피부를 지닌 철불(鐵佛)이 사람처럼 앉아있다. 여기서는 그를 철
조관음보살좌상이라 부르는데, 파리도 쑥 미끄러질 것 같은 탱탱한 피부와 달리 경내에서 가
장 늙은 존재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11세기 경에 요(遼)나라에서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요나라는 옛 조선(고조선)과 고구려의 속민(屬民)이자 동이족의 일원인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비록 200년도 버티지 못했지만 요서(遼西)와 만주, 화북 지역을 차지하며 크게 위엄을 떨쳤다.
이 보살상이 과연 요의 것인지 이불의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고려와 조선의 불상, 보살상과
는 확연히 차이를 보이고 있어 물 건너 온 것은 확실하며, 언제 무슨 일로 여기까지 들어왔는
지는 그가 이야기를 해주지 않아 알 도리가 없다.

의자에 앉아있는 그는 성인 남자 키 정도 되는데 얼굴은 그냥 무표정에 가까워 보인다. 두 손
을 가슴 앞에 대고 있으며, 손가락에는 특이하게 반지가 끼여져 있다. 적의(翟衣) 형태의 옷
에는 용과 새, 사자 등이 새겨져 있고 보관에는 모란꽃무늬를 매우 정교하게 나타냈다. 그리
고 정병(政柄)까지 새겨져 있어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로 여겨지나 정병은 근래에 손질한 것
이라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허나 경국사에서는 호랑이가 곶감의 눈치를 보던 시절부터 관세음보살로 받들고 있어 한때 관
음전에 있기도 했으며, 경내에서 가장 늙은 보물임에도 많은 것이 아리송한 상태라 아직 지정
문화재 등급을 얻지 못했다.


▲  경내를 굽어보고 있는 영산전(靈山殿)

명부전에서 서쪽으로 난 계단길을 오르면 부처와 그의 열성제자인 나한(羅漢)들의 공간, 영산
전이 모습을 비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말에 지어진 것을 1930년에
보경이 중수했다. 어칸 위에 달린 영산전 현판은 해강 김규진이 쓴 것으로 필체가 무척 돋보
인다.


▲  영산전 석가3존상과 석가모니후불탱

현란한 보관의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좌우에 거느린 석가여래의 표정이
꽤 후덕해 보인다. 이들 3존상은 보경이 만든 것으로 뒤에 있는 석가모니후불탱도 1935년에
그가 그렸다. 분업 정신이 투철한 불교계에서 주지승이 직접 불상과 보살상을 만들고 불화까
지 그리는 경우는 거의 흔치가 않은데, 그림과 조형에 능한 보경이 주지로 있으면서 불상을
조성하고 그림까지 그리니 제작 비용은 크게 절약되었을 것이다.

▲  영산전 18나한상과 18나한탱

석가3존상 좌우에는 부처의 열성제자인 나한상과 나한탱이 배열되어 있다. 하얀 피부의 나한
상은 좌우에 각각 9개씩 18나한을 이루고 있는데, 16나한은 지겹도록 봤지만 18나한은 생소하
다. 경국사를 찾은 중생처럼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닌 그들 뒤에는 나한탱이 2폭씩, 4폭이 자
리해 있는데, 나한과 동자가 어울려 있는 모습이다.
이들은 모두 보경이 만든 것으로 왼쪽에 1폭은 1966년에 다시 그렸고, 우측 벽 구석의 신중탱
은 1966년에 제작되었다.


▲  경국사 산신각(山神閣)
극락보전 뒷쪽 언덕에서 경내를 굽어보고 있는 산신각은 산신의 공간으로
달랑 1칸에 불과한 조촐한 건물이다.

▲  산신각 산신탱

소나무와 산을 배경으로 한 산신탱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童子) 등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진하게 우러나온다.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북쪽을 향하고 있는데, 그곳에 꿀단지나 아리따운
처자라도 있는 것일까. 보는 시선이 예사롭지가 않다. 이 그림은 1980년에 덕문(德文)이 조성
한 것으로 그 앞에 산신의 탈을 쓴 애기 같은 산신상은 근래에 봉안된 것이다.


▲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민 천태성전(天台聖殿)

산신각, 영산전보다 1단계 더 높은 곳에 천태성전이 자리하고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
까운 건물로 보통은 산신각이나 삼성각이 제일 높은 곳을 차지하고 있는데 반해 이곳은 천태
성전이 그 자리를 누리고 있다. 건물 이름이 좀 낯설긴 하지만 천태(天台)란 이름에서 이미
답은 나왔다. 바로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거처이다.

독성의 거처는 독성각(獨聖閣)이란 흔한 이름을 쓰지만 북한산(삼각사) 진관사(津寬寺)의 독
성전(獨聖殿)이나 삼천사(三千寺)의 천태각처럼 다른 이름을 쓰기도 하며, 경국사는 그의 거
처를 크게 높여 천태성전이라 부른다.
경내의 다른 건물과 달리 담장을 두르고 있어 특별한 이미지를 선사하지만 담장 안에 담긴 천
태성전은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조그만 건물이다.


▲  독성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과 독성상
독성탱은 1980년에 덕문이 조성한 것으로 그 앞에 있는 독성상은
그 이후에 장만했다.

▲  무우정사(無憂精舍)와 3층석탑

종무소에서 해우소(解憂所)로 가다보면 종무소 바로 뒷쪽에 무우정사가 있다. 그 뜨락에는 극
락보전 앞에도 없는 3층석탑이 서 있는데, 그 탑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무우정사가, 탑 좌우로
승려들이 생활하는 요사가 좁은 뜨락을 둘러싸고 있다.

다소 고급 분위기가 느껴지는 무우정사는 주지승이 거주하는 집으로 가운데 칸이 약간 앞뒤로
삐죽나와 '十' 모양의 구조를 이룬다. 지관이 설계하고 지은 것으로 현관에는 금강반야대(金
剛般若臺)란 현판이 걸려있다. 그리고 뜨락에 자리한 3층석탑은 석가탑(釋迦塔)을 그대로 모
방하여 맵시가 고운데, 경국사의 유일한 석탑으로 왜 법당인 극락보전을 놔두고 이곳에 두었
는지는 모르겠다. (극락보전 뜨락이 조금 좁기는 하지만 무우정사 앞보다는 넓음)
무우정사 일대를 문수원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예전에는 중생들의 출입을 통제했으나 이때 가
보니 활짝 열려 있었다.

참고로 무우정사의 무우는 무우수(無憂樹)에서 유래된 말로 아수가수(阿輸迦樹)를 한자로 번
역한 이름이다. 부처는 룸비니 동산의 무우수 밑에서 태어났고 과거 1불인 비바시불도 이 나
무 아래에서 성도(成道)했다고 하며, 보리수와 더불어 불교에서 꽤 애지중지하는 나무이다.


▲  경국사에서 먹은 공양밥의 위엄

경국사 경내를 깔끔하게 복습하고 공양간으로 갔다. 보통은 '금강산도 식후경' 원칙을 지키는
편이나 이번에는 초파일 여로(旅路)와 사진기 데이터를 먼저 살찌우고 그 다음에 뱃속을 찌우
기로 했다.
절을 둘러보는 동안 공양밥을 기다리는 줄은 90% 이상 감소하여 줄에 동참한지 3분 만에 밥그
릇을 손에 쥐었다. 이곳 공양밥은 다른 절과 비슷한 비빔밥으로 밥과 콩나물 등의 여러 나물,
고추장이 담겨져 있다. 밥과 함께 오이냉국과 절편이 옵션으로 제공되었는데, 오이냉국은 물
대신 마시면 되고 절편은 후식거리로 먹으면 된다.
이곳 초파일 공양밥은 보통 14~15시까지 제공하나 수요가 너무 많을 경우 일찍 마감된다. 그
러니 가급적 14시 이전까지는 가야 안전하게 공양밥을 받을 수가 있다. (이는 다른 절도 비슷
함)

우리는 돗자리에 앉아 공양밥을 들었는데, 절을 1바퀴 둘러보고 먹는 밥이라 그런지 맛이 좋
았다. 거기에 절편까지 모두 섭취하니 뱃속은 만땅이 되고 졸음이 슬슬 다가와 한숨 자라며
나를 희롱한다. 커피를 마실까 했으나 믹스커피를 무려 500원에 팔고 있어 바깥에서 캔커피를
사먹기로 하고 졸음의 희롱을 박차며 경국사를 나왔다. 그곳에 머문 시간은 공양시간을 포함
해 1시간 30분 정도.
우리가 나갈 때도 경국사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파도처럼 들어오고 있었다. 물론 그만큼
속세로 빠져나가 경내는 크게 혼잡하지는 않았다. (조금 혼잡한 편)

이렇게 하여 석가탄신일 경국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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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산사 나들이, 남양주 불암산 불암사

불암산 불암사



~~~~~  한여름 산사 나들이, 불암산 불암사
~~~~~
불암산 불암사
▲  평화로운 불암사 경내



 

여름 제국의 무더위 갑질이 속절없이 더해가던 7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친한 후배와 정말
간만에 불암산(佛巖山) 불암사를 찾았다.
햇님이 한참 허공 복판에 머물던 15시에 석계역(1/6호선)에서 그를 만나 간단히 요기를 하
고 서울시내버스 1155번(석계역↔청학리)을 잡아타고 불암산의 남쪽 관문인 불암동(佛巖洞
)에서 두 발을 내렸다.



 

♠  불암사(佛巖寺) 입문

▲  불암사 일주문(一柱門)

불암산(508m)은 서울 근교의 주요 명산(名山)으로 등산/나들이 수요가 엄청나다. 불암산 밑도
리에 터를 닦은 불암동은 일찌기 불암사의 사하촌(寺下村)으로 형성되었는데, 지금은 산꾼과
나들이꾼, 군부대 면회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온갖 식당과 갈비집이 가득해 거의 먹거리촌
이 되었다.
절을 목전에 둔 속세(俗世)의 마지막 유혹이라고나 할까? 식당의 진한 유혹으로 코가 아주 정
신을 못차린다. 간신히 그 유혹을 뿌리치며 길을 걸으니 불암사 일주문이 활짝 열린 모습으로
마중을 하고, 길을 따라 징하게 이어지던 식당의 행렬도 여기서 뚝 그친다.

1994년에 세워진 일주문의 현판에는 '천보산(天寶山) 불암사'라 쓰여있는데, 천보산은 불암산
의 다른 이름으로 조선 세조(世祖)가 산의 수려한 모습에 감동을 먹고 내린 이름이라고 한다.
불암산이란 이름은 산 정상을 이루는 바위가 마치 비구니의 모자를 쓴 부처의 모습이라 하여
유래된 것이니 산 이름이 그야말로 불교 스타일이다. 그리고 필암산(筆岩山)이란 별칭도 가지
고 있으나 지금은 거의 잊혀진 이름이다.


▲  불암사로 인도하는 숲길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깥보다 더욱 짙은 숲길이 펼쳐진다. 여름 제국의 기운을 먹고 자라 녹음
(綠陰)의 질감도 매우 깊은데, 잔잔한 산바람에 번뇌를 강제로 떠맡기며 계속 길을 가면 불암
사 경내가 슬슬 모습을 비춘다.


▲  물줄기가 춤추는 작은 연못 (사적비 옆)

▲  불암사의 빛바랜 일기장, 사적비(事蹟碑)

경내를 가리고 선 제월루 앞에 이르면 사적비와 수초(水草)를 머금은 아기자기한 연못이 마중
을 한다.
고색의 내음이 아낌없이 서린 사적비는 1731년에 세워진 것으로 왕실과 가까운 절의 위상을
보여주듯, 공조판서(工曹參判) 이덕수(李德壽)가 글을 짓고, 승정원(承政院) 부승지(副承旨)
인 조명교(曹命敎)가 썼다. 불암사의 창건과 중건을 다룬 사적(事蹟)을 비롯해 1728년에 거사
각신(覺信)과 정인(淨仁)이 맹세 발원하여 보시한 돈으로 근기(近畿, 수도권) 지역에 전토를
마련해 절이 피폐하지 않도록 하였음을 다룬 내용도 적혀있다.

비신(碑身)과 지붕돌로 이루어진 단촐한 모습으로 지붕돌에는 세월이 달아준 검은 주근깨가
역력해 고색의 멋을 진하게 풍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불암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서울 근교 4대 명찰의 하나, 불암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불암사
불암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남양주 봉선사(奉先寺)의 말사(末寺)이다. 824년에 지증대
사(智證大師)가 창건했다고 하며,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을 연 지
선(智詵)이 창건했다고도 하나 관련 자료와 유물이 전혀 없어 신빙성은 거의 없다. 이후 9세
기 말에 도선대사(道詵大師)가 중건했다고 하며, 조선 초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수했다고
전한다.

세조(재위 1455~1468)는 서울 주변 동서남북에 왕실의 안녕을 비는 절을 하나씩 선정했는데,
서쪽에 진관사(津寬寺, ☞ 관련글 보기), 북쪽에 승가사(僧伽寺, ☞ 관련글 보기), 남쪽에 삼
성산 삼막사(三幕寺), 그리고 동쪽에 불암사를 선택했다. 그로 인해 동불암(東佛巖)이라 불리
기도 했으며, 서울 근교 4대 명찰(名刹)의 하나로 널리 존재를 알렸다.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시절에 중건을 했고, 영조(英祖) 말년에 거의 망하기 직전에 이
른 것을 승려 명관(明瓘)이 크게 중수했다. 1731년에 왕실의 지원으로 사적비를 세워 불암사
의 내력을 기록했으며, 1782년 보광명전과 관음전을 중수하고 제월루를 세웠다.
1844년에 중수를 했고, 춘봉(春峯)이 향로전을 다시 지었으며, 1855년에 혜월(慧月) 등이 중
수했다. 그리고 1910년에는 독성각과 산신각, 동축당(東竺堂)을 세웠다.

6.25때는 다행히 총탄이 비켜가 별 피해를 없었으며, 1959년에 만허(滿虛)가 칠성각을 중수하
고, 낡거나 협소한 건물을 죄다 다시 지으면서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1989년 타이(태
국)와 스리랑카에서 부처의 사리를 기증받아 5층 진신사리탑을 세웠으며, 1991년에 화재로 관
음전이 무너지자 1992년에 다시 지었고, 1996년에 협소하던 동축당을 부시고 그 목재를 포천
보문사(普門寺)에 선물하여 그곳 대웅전 불사에 쓰게 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해 관음전, 약사전, 제월루, 지장전, 칠성각, 요사 등 10여 동의 건물
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 보물 591호로 지정된 석씨원류응화사적 목판(釋氏源流應化事蹟
木板)이 있으나<여기서 석씨(釋氏)는 석가모니를 뜻함> 현재는 연구와 보호를 위해 서울 불교
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그리고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53호로 지정된 '불암사 경판'이 전하고
있는데, 이 경판은 1635년부터 1795년까지 간행된 것으로 관람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밖에 보물로 지정된 목조관음보살좌상과 1895년에 제작된 괘불도(掛佛圖, 경기도 지방유형
문화재 315호
), 석가삼존십육나한도, 목조석가여래좌상 등의 지방문화재가 있으며, 사적비와
지장시왕탱, 칠성탱 등 오래된 비지정 문화유산이 있다.

속세와 가깝긴 하나 깊은 산골에 푹 묻혀있어 산사의 내음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고색
의 내음은 거의 말라버렸지만 사적비와 여러 늙은 문화유산을 통해 절의 오랜 내력을 충분히
가늠케 해준다.

끝으로 불암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6.25시절에 활약했던 '호랑이' 유격
대이다.
1950년 6.25가 터지자 육사 1,2기 생도들은 포천(抱川)과 서울 노원구 지역에서 북한군과 싸
웠으나 패하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했다. 그중 육사 생도 13명(1기 10명, 2기 3명)은 후퇴하지
않고 국군 7명과 의기투합하여 불암산 정상과 석천암 주변 바위 동굴에 은신했다. 그들은 암
호명 '호랑이'란 유격대를 결성했는데, 불암사 주지승 윤응문과 석천암(石泉庵) 주지승 김한
구가 그들을 크게 도와주었다.

허나 호랑이 유격대는 겨우 20명이고 서울과 경기도 지역이 북한군에게 새카맣게 점령된 상태
이다. 하여 산에 은둔하여 치밀하게 기회를 노려 총 4차례에 기습전을 전개했는데, 7월 11일
불암산과 가까운 퇴계원 보급소를 습격해 적 30여 명을 죽이고 기름 50드럼을 폭파하면서 그
들의 첫 작품을 근사하게 치루었다.
7월 31일, 창동(倉洞) 수송부대를 습격해 6명을 죽이고, 보급차량 다수를 폭파했으며, 8월 15
일에는 북한군 훈련소를 기습해 50여 명을 사상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전투인 9월 21일에 북
한군에게 끌려가는 주민 100여 명을 남양주 내곡리에서 구출하고 적 수십 명을 죽였다. 하지
만 적들의 반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만 19명이 장렬히 전사했으며, 강원기 생도(육사 1기)는
중상을 입고 피신해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며칠 안가서 결국 눈을 감고 만다.
딱 7일만 더 버텼다면 서울 수복의 기쁨을 누렸을텐데. 하늘도 참 야속했다. 그러고보면 이
땅의 하늘은 정의로운 사람에게만 화를 주고,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만 주로 복을 주니 참 하
늘값을 제대로 못한다. 그런 하늘은 우리에게는 전혀 필요가 없다.

* 불암사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797 (불암산로 190 ☎ 031-527-8345)
* 불암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동자승에게 둘러싸인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과 깨알 같은 불전함



 

♠  불암사 둘러보기 (대웅전 주변)

▲  불암사 제월루(霽月樓)

경내를 가리고 선 제월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짜리 집이다. 1782년에 지어졌다고 하나
현재 건물은 근래에 다시 지은 것이며, 정면에 걸린 불암사 현판은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835~1919)이 70세 때 쓴 것이다.
1층은 종무소(宗務所)와 기념품 가게가 있고, 2층은 강당(講堂)으로 쓰이고 있는데, '차가람'
이란 현판을 내건 개방된 공간으로 누구든 들어와 잠시 두 발을 쉬거나 차 1잔, 독서의 여유
를 누릴 수 있다. 책장과 평상, 방석, 선풍기, 난로, 자판기 커피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여
름에는 산바람이 솔솔 기웃거려 시원하다.


▲  제월루 2층 내부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대웅전 뜨락과 제월루(왼쪽)

▲  툇마루를 갖춘 약사전(藥師殿)
동방정토(東方淨土)의 주인인 약사여래의 거처로 가운데 3칸은 약사전,
좌우 1칸씩 2칸은 요사(寮舍)로 쓰이는 복합적인 건물이다.

▲  약사전을 마주보며 툇마루를 내민 관음전(觀音殿)
관세음보살 누님의 거처로 1991년에 불탄 것을 1992년에 다시 지었다.
정면 3칸은 관음전, 나머지 2칸은 종무소와 요사로 쓰인다.

▲  관음전 목조관음보살상(보물 2,003호)과 천수천안관음보살탱

관음전에 봉안된 목조관음보살좌상은 1649년에 무염(無染), 성수, 심인, 상림, 경성 등 5명의
조각승이 합심하여 만들었다. 보살상의 뱃속에에서 아주 고맙게도 조성발원문과 중수발원문이
나와 그의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고 있는데, 원래는 전북 대둔산(大芚山) 묘련암(妙蓮庵)에 봉
안하고자 제작되었다. 허나 1900년 무렵 불암사에서 만일회(萬日會)가 열리면서 살짝 이곳으
로 옮겨진 것으로 여겨지며, 1907년 개금 중수했다.

보살상의 높이는 67cm으로 연꽃과 불꽃문양이 장식된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가사
는 2벌을 겹쳐서 입은 이중착의법으로 상반신을 앞으로 구부렸다. 전체적으로 비례가 적당하
고 신체의 자연스런 양감이 돋보이는데, 얼굴은 이마가 넓으며, 턱 부분은 좁아서 역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날렵하고 갸름하게 처리된 턱 선, 높게 돌출된 코, 자비로운 인상에 실
재감 있는 이목구비의 표현 등은 아담하고 현실적인 조형미를 추구했던 무염의 불상/보살상
스타일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보살상은 2018년 10월에 비지정문화재에서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는데, 그의 뱃속에서 나온
조성발원문 1점과 후령통 1점, 중수발원문 1점도 같이 지정되었다. ('불암사 목조관음보살좌
상'이란 이름으로 지정됨) 그가 보물로 지정된 것은 그의 조성 시기와 조성 승려, 봉안처 등
을 알려주는 발원문 덕분이다.


▲  대웅전 뜨락에 세워진 3층석탑과 천진불(天眞佛)
그 주변(사진 오른쪽)에 포대자루를 맨 포대화상이 서 있다.

▲  3층석탑 옆에 핀 한 송이 백련(白蓮)
저 안에서 심청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잘익은 백련 앞에 내 마음은 콩닥콩닥~~♪

▲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불암사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불단에는 석가3
존상을 봉안했는데, 그 뒤로 1907년에 보암긍법, 범화윤익, 법연 등이 그린 아미타후불탱이
걸려있다. 그리고 1982년에 그려진 천불탱과 2001년에 조성된 신중탱, 감로탱 등이 법당 내부
를 장엄하게 꾸며준다.


▲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좌상(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348호)과 석가3존상

대웅전 불단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이 조그만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에 거느리며 석가3존
상을 이루고 있다.

목조석가여래상은 조선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1743년에 개금(改金)을 했다는 기
록이 전하고 있다. 그때 영조의 딸인 화평옹주(和平翁主)가 시주자로 참여하여 왕실과 크게
관련이 있는 불상임을 알려준다.
불상의 상체가 길고 무릎의 높이가 낮아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네모난 얼굴은 양쪽
볼이 두꺼우며, 반쯤 뜬 눈에 우뚝한 콧날과 작은 입술을 지녔다. 머리는 나발로 무견정상(無
見頂相, 육계)이 솟아있으며, 정수리와 이마 사이에 원통형과 반달 모양의 상투 매듭 구슬이
뚜렷하다.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手印)을 취했고, 왼손
은 따로 만들어 끼워 넣었다.
옷자락이 다소 두터워 신체의 양감이 드러나지 않는데, 옷자락은 몇 가닥의 깊은 골주름을 그
리며 좌우로 뻗었으며 그 끝자락은 대좌 위로 드리워져 물결 모양의 부채살처럼 마무리가 되
었다.

그의 좌우에 자리한 문수/보현보살은 근래 만들어 붙인 것이며, 그들 뒤에는 1907년에 그려진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해 있는데,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
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유희좌(遊戱坐)로 앉아있다.

그들 좌우에는 육환장(六環杖)을 든 지장보살과 화려한 보관(寶冠)을 쓴 관세음보살이 한 자
리씩 차지하고 있으며, 그들 뒤에는 붉은색과 하얀 색으로 이루어진 천불탱이 걸려있다.



 

♠  불암사 마무리

▲  한 지붕 다 가족을 이룬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칠성각은 1959년에 중수된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이다. 특이
하게 각 칸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가운데는 칠성각, 그 좌우는 산신각(山神閣), 신통전(神通殿
) 현판을 내밀고 있는데, 그냥 속편하게 그들을 모두 아우른 삼성각(三聖閣)을 칭하면 될 것
을 괜히 복잡하게 현판만 주렁주렁 달고 있다.
칠성과 산신, 독성(獨聖, 나반존자) 외에 16나한과 지장시왕탱, 석가여래상도 봉안되어 있어
완전 한지붕 다가족을 이루고 있으며, 이중 칠성탱과 16나한도, 지장시왕탱은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이다.


▲  석가삼존16나한도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345호

16나한도는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을 담은 탱화이다. 그림 중앙에 석가여래가 있
고, 그 밑에 조그만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 있으며, 그 주위로 16명의 나한(羅漢)이 각자
의 스타일을 드러내며 그려져 있는데. 특이한 점은 나한이 모두 독자적인 칸을 지니며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분할 구도법은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서울, 경기도 지역에서 많이 나타
나는 불화 양식으로 한 화면에 이렇게 구획을 만들어 16나한을 모두 넣은 것은 불암사만의 독
창적 특징이다.

이 탱화는 1897년에 경선응석(慶船應釋), 명응환감(明應幻鑑), 보암긍법(普庵肯法), 범화윤익
(梵華潤益), 설암재오(雪庵在悟), 운조(雲祚) 등이 그린 것으로 고색의 기운을 제법 풍기고
있으며, 그 앞에는 조그만 독성상이 유리막에 감싸여 있다.


▲  유리막에 갇힌 독성상
동자승처럼 귀여운 조그만 독성상이 방석 위에 앉아있다. 다른 절과
달리 독성상만 있을 뿐, 독성탱은 없다.

▲  칠성각의 주인 자리를 차지한 석가3존상과 칠성탱(뒤에 있는 그림)

칠성각 중앙 불단에는 석가여래상이 문수/보현보살을 대동하며 앉아있다. 그 뒤에는 칠성 가
족을 머금은 칠성탱이 석가여래의 후불탱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는 경내에서 가장 늙은 탱화
로 1855년에 퇴운주경(退雲周景), 창엽(瑲曄), 환익(幻益), 민수(旼修), 긍섭(肯攝), 법인(法
仁) 등이 그렸다.
그림 중앙 윗쪽에는 치성광여래가 하얀 사슴이 끄는 수레에 타고 있고, 그 밑에 황색 대의를
걸친 자미대제(紫微大帝)가 있다. 그 옆에는 칠성원군(七星元君)이, 그 뒤로는 일광보살(日光
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 좌우보필성(左右輔弼星), 육성(六星)이 있다. 다시 그 주위로
남두칠성(南斗七星)과 칠성여래(七星如來)가 자리해 있고, 머리에 별을 이고 있는 28숙(宿)이
시립해 있다. 등장인물이 많아 좀 복잡하나 인물이 위로 가면서 작아지는 원근적인 표현을 하
고 있다.


▲  산신탱과 산신상
붉은 옷을 걸친 수염 지긋한 산신 할배가 중앙에 앉아있고, 그 옆에 그의
애완동물인 호랑이가 고양이처럼 앉아있다. 그리고 소나무와
첩첩하게 주름진 산줄기, 학 등이 탱화를 가득 채워준다.

▲  밝은 색채의 지장시왕탱

산신탱 옆에 자리한 지장시왕탱은 1890년에 완송종현(琓松宗顯), 혜조(慧照), 보암긍법(普庵
肯法), 등한(等閑) 등이 제작한 것이다.
연화좌(蓮花座)에 앉은 지장보살은 오른손에 보주(寶珠)를 들고 있고, 왼손은 결가부좌(結跏
趺坐)한 두 발 위에 올려놓고 있으며, 그 좌우로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비롯한 시왕(十王)과 판관(判官), 사자 등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배치되어 있다.
어두운 곳에 사는 존재들이지만 밝은 색채를 주로 사용하여 밝은 느낌을 크게 준다. 저승도
나름 살만한 곳이구나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  하얀 연등을 두룬 지장전(地藏殿)

지장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불암사의 보물인 석씨원류응화사적책
판과 경판을 머금던 장경각(藏經閣)이었다. 허나 석씨원류가 서울로 옮겨지고(현재는 불교중
앙박물관에 있음) 경판 또한 별도의 장소로 이전되면서 빈 공간이 되었다가 2004년에 내부를
손질하여 지장전으로 삼았다.
불단에는 지장보살과 무독귀왕, 도명존자로 이루어진 지장3존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모두 금
동으로 되어 있다. 그 뒤에는 아미타후불탱이 자리하고 있고, 그 좌우 감실(龕室)에는 16명의
나한이 각자의 제스쳐를 취하며 앉아있다.


▲  마애3존불과 12지신상

경내 뒷쪽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여럿 있다. 이중 적당한 바위를 손질하여 마애3존불과 세존진
신사리탑을 세웠는데, 그중 사리탑을 세운 바위에 부처바위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경내에서 마애불로 인도하는 길목에는 돌로 만든 12지신상이 좌우로 6개씩 늘어서 있어 나름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그들의 검문을 받으면 바위에 하얗게 새겨진 마애3존불 앞에 이
르게 된다.
이 마애불은 1973년에 조성된 것으로 마치 바위에서 그대로 현신한듯 자리해 있는데, 중앙에
는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나란히 취한 미륵불이 있고, 그 좌우에 정병(政柄)과 연꽃을 든 관세
음보살과 금강저(金剛杵)란 무기를 쥔 보살상이 있다.


▲  12지신상의 하나인 말상 (내가 말띠라서;;)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피부가 하얗고 매끈하다.

▲  바위에 선명하게 자국을 낸 마애3존불

▲  부처바위 위에 세워진 5층 세존진신사리탑(世尊眞身舍利塔)

마애3존불이 새겨진 바위 뒷쪽에 부처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 부처의 사리를 머금은 5층석탑
이 장대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이 석탑은 1989년 타이(태국)와 스리랑카에서 얻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자 세운 것으
로 2중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을 얹히고, 보륜(寶輪) 등의 상륜부(相輪部)까지 갖춘
당당한 모습이다. 2층 기단에는 팔부중(八部衆)을 새겼고, 1층 탑신에는 동쪽에 여래상을 조
각했다.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절도 거의 30년 만에 발걸음을 한 나
만큼이나 적지 않게 변해있었는데, 다시 안와도 아쉽지 않을 정도로 구석구석 경내를 살폈다.
이제 이곳을 나오면 언제 또 이곳에 오려나? 가깝지만 참 인연이 잘 닿지 않는다. 불암산은
가끔씩 찾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하여 한여름 불암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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