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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화림동계곡 농월정, 동호정


~~~ 함양 화림동계곡 (농월정, 동호정) ~~~
함양 농월정
▲  함양 농월정
 


겨울 제국(帝國)의 차디찬 한복판인 1월의 끝 무렵, 일행들과 사흘 일정으로 따뜻한 남쪽
으로 피신을 떠났다.

겨울 제국의 핍박을 피해 이틀 동안 충남, 전북, 전남 동부, 경남 서부의 여러 지역을 둘
러보고 사흗날 오전에 아쉬운 마음을 애써 삼키며 나의 제자리로 길을 재촉했다. 허나 그
냥 가기에는 99% 허전하여 마지막 메뉴를 물색하다가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한 화림동계곡
식구들이 격하게 당겨 그들을 잡으러 잠시 함양(咸陽) 속으로 들어갔다.
(본글은 화림동계곡의 농월정과 동호정만 다루며, 나머지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
음)


♠  화림동계곡의 으뜸 풍경, 농월정(弄月亭)

▲  주름진 벼랑이 일품인 농월정계곡 (농월교 동쪽)

이름도 어여쁜 화림동계곡(花林洞溪谷)은 서하면 봉전리에서 안의면 중심지인 금천리까지 이
어지는 물줄기로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남강<南江, 남천강(南川江)>의 일원이다.
주름진 바위와 반석, 벼랑, 계곡, 숲이 싹 어우러져 화림동이란 이름 그대로 꽃숲 같은 상큼
한 풍경을 지니고 있으며, 변화무쌍한 경치를 보여주고 있어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
터 함양, 안의 지역의 경승지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다.
특히 안의삼동(安義三洞)의 하나로 명성을 누렸는데, 안의3동이란 안의(安義) 지역의 3대 명
승지인 심진동(尋眞洞)과 원학동(猿鶴洞), 화림동을 일컫는다. 심진동에는 그 유명한 용추폭
포와 용추계곡이 있으며 지금은 거창(居昌) 땅이 된 원학동에는 수승대(搜勝臺)가 있다. 이들
모두 대자연 형님이 약을 거하게 빨고 빚은 휼륭한 작품들이다. (☞ 수승대 보러가기)
안의는 지금은 함양군에 속한 면(面)에 불과하나 조선 후기까지는 함양 북부와 거창 서부 지
역을 관리했던 고을이다.

화림동에는 8개의 잘생긴 담(潭, 못)과 8개의 누정(樓亭)이 있어 이들을 8담8정이라 했는데,
풍경이 일품인 곳에는 꼭 옛사람들이 닦아놓은 누정이 있었다. 지금은 농월정과 동호정, 군자
정, 거연정, 경모정, 광풍루 정도가 남아있으며 다들 한 풍경들하고 있어 조선 중/후기 누정
문화의 보고로 찬양을 받는다.

▲  속세와 농월정을 이어주는 농월교
(농월정 주차장 방향)

▲  농월교에서 바라본 화림동계곡
(농월정 방향)


화림동계곡 동쪽 부분에 자리한 농월정은 지족당 박명부(知足堂 朴明傅, 1571~1639)가 세웠다
. 박명부는 광해군 시절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죽음에 크게 열이 받았고, 영창대군의 생모(生
母)인 인목대비(仁穆大妃) 유폐 사건에 다시 뚜껑이 열려 그 부당함을 직간(直諫)하다가 파면
되었다. 하여 고향인 안의 성북마을로 내려와 은거 생활을 했는데, 병자호란 삼전도(三田渡)
굴욕(1637년) 소식을 전해 듣고 크게 분개했다.
1637년 농월정을 지어 후학을 기르며 유유자적 지냈는데, 정자 이름인 농월은 '달을 희롱한다
'는 아주 상큼한 의미로 밤이면 달빛이 물 아래로 흐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삼전도 굴욕으로 혼이 제대로 털린 인조(仁祖)가 벼슬을 내려 올라올 것을 요구했으나 끝까지
응하지 않았으며, 고향에서 6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  바위와 돌 사이를 비집고 흐르는 화림동계곡 (농월정 방향)

▲  소나무가 무성한 농월정 숲길

▲  다시 일어난 농월정

처음에 농월정은 작은 규모였으나 1899년 후손들이 현재의 모습으로 넓혔다. 정자 앞에는 주
름선을 글썽이는 너른 반석이 펼쳐져 있는데, 그 바위가 달바위로 덩치가 무려 3,300㎡에 이
르며, 달바위 옆구리를 흐르는 계곡 못을 월암연(月岩淵, 달바위 못)이라 부른다. 화림동계곡
의 어엿한 일원이나 농월정 주변 계곡을 별도로 '농월정계곡'이라 부르기도 한다.

계곡을 바라보고 선 농월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2층 누각으로 2층 복판에 바람
막이 작은 방을 두고 3면에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렀다. 이렇듯 화림동계곡의 멋쟁이로 거
의 300년 이상 이 자리를 지켰으나 아쉽게도 2003년 화마(火魔)의 장난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사실도 모른 채, 2011년 가을에 그를 보러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분명 농월정에 왔음
에도 그는커녕 비슷한 건물도 보이질 않아 무척 헤매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화마에게
당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 말에 얼마나 허탈했던지 내 혼이 거의 50% 나간 기분이었다.
이후 12년이나 농월정이 없는 농월정계곡(농월정국민관광지)으로 있었으니 이는 갈비가 없는
갈비탕과 다름이 없다. 뒤늦게 함양군청과 박명부의 후손인 밀양박씨 문중이 협력해 복원에
들어갔고 2015년 9월에 완성을 보았다.


▲  옆에서 바라본 농월정

정자를 떠받치는 기둥인 도량주(跳梁柱)는 200년 묵은 참나무를 골라 껍데기만 벗겨내고 자연
스럽게 사용하여 견고함과 멋을 더했으며, 계곡 자연석과 바위를 주춧돌로 삼았다. 그리고 정
자 윗도리 기둥과 마루는 소나무를 사용했다.
소박하면서도 맵시가 고와 탐이 모락모락 솟을 정도이며, 비록 근래 복원되어 고색의 기운은
싹 날라갔으나 10여 년 만에 이렇게 복원이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다시 살아난 그를 보
니 마치 불고기가 불을 만난 듯 너무 기뻤으며, 이번에 만난 화림동계곡 식구 중(농월정, 동
호정, 군자정, 거연정 등) 농월정을 으뜸으로 치고 싶다.

농월정 일대는 함양 제일의 경승지이자 피서의 성지(聖地)로 인기가 높아 일찌감치 유원지화
되었으며 '농월정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 농월정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월림리 산92-1 (농월정길 9-13)


▲  넓게 펼쳐진 달바위
저 주름진 반석을 모두 달바위라고 보면 된다.

▲  울퉁불퉁한 피부를 지닌 달바위

넓게 닦여진 농월정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식당과 펜션 등으로 이루어진 마을을 지나면 계곡
에 걸린 농월교가 나온다. 다리 밑은 수심이 깊어서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며 그 다리를 건너
왼쪽 숲길을 거닐면 농월정과 달바위가 마중을 한다.

고르지 못한 하얀 피부를 지닌 달바위는 장대한 세월이 그어놓은 주름선들이 가득하다. 바로
이 바위가 농월정 풍경의 백미(白眉)로 그 피부에는 대자연이 밟고 간 패인 자국이 널려있으
며, 그 자리에 물이 고여 조그만 못을 이룬다. 그리고 농월정 풍경에 퐁당퐁당 빠진 사람들과
후손들이 남긴 바위글씨가 여럿 전해져 소소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  달바위 피부에 새겨진 바위글씨
농월정을 손질한 박명부의 후손들이 새긴
것으로 왼쪽은 박경환(朴景煥), 오른쪽은
박봉기(朴琫箕)이다.

 ▲  달바위 피부에 새겨진 화림동 글씨와
조그만 글씨들

▲  서쪽에서 바라본 달바위


▲  바위에 화석처럼 깃든 지족당장구지소(知足堂杖屦之所) 바위글씨
붉은 피부를 지닌 이 글씨는 지족당 박명부가 지팡이를 짚고 노닐던
곳이란 의미로 1899년에 후손들이 새겼다.

 ▲  달바위와 농월정계곡 윗쪽 부분
(바로 밑에 보이는 붉은 글씨가 앞서 언급한 '지족당장구지소')

▲  금줄이 쳐진 농월정계곡 윗쪽 (계곡 서쪽 부분)

농월정계곡은 대체로 수심이 얕아서 가족 나들이, 피서지로 아주 좋다. 단 딱 봐도 깊은 수심
이 느껴지는 농월교 주변과 농월정 서쪽은 수심이 있어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 그러니 피서나
휴식을 즐길 거라면 수심이 얌전한 달바위 주변에서 하기 바란다.


▲  수심이 깊은 농월정계곡 윗쪽 (계곡 서쪽 부분)

▲  물줄기와 바위의 오랜 충돌 현장

농월정에는 달바위 등 너른 암반과 바위가 유난히 많다. 그들의 좁은 틈을 남강 물줄기가 비
집고 흘러가는데 그러다 보니 물살이 거친 구간이 많고 물소리가 아주 우렁차다. 아무리 달바
위 주변이 수심이 얕아도 물살도 급하고 물기가 젖은 바위 피부가 많아 각별히 주의가 필요하
다.


▲  달바위에서 바라본 계곡 서쪽과 농월정관광지
계곡 너머로 집들이 보이는 곳에 식당과 펜션 등의 숙박업소가 늘어서 있다.


♠  화림동계곡 중간 쯤에 자리한 동호정(東湖亭)
- 경남 문화유산자료 381호

▲  정면에서 바라본 동호정

오랜만에 농월정을 둘러보고 그 기세를 몰아 화림동계곡의 다음 식구인 동호정으로 이동했다.
농월정에서 동호정까지는 3km 거리로 남강(화림동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알아서 모습을 비춘
다. 근래에는 계곡 옆에 함양선비문화탐방로가 닦여져 도보 나들이가 가능해졌는데 그 길은
안의 광풍루에서 농월정을 거쳐 거연정, 선비문화탐방관까지 이어진다.

크고 단단한 바위 암반에 둥지를 튼 동호정은 동호 장만리(東湖 章萬里)를 기리고자 그 9대손
인 장재헌 등이 중심이 되어 1890년경(1895년이라는 이야기도 있음)에 세웠다.
동호 장만리는 안의 황산마을 출신으로 동호정 인근 초현마을에서 살았다. 그는 동호정에 있
는 차일암에서 옥녀담에 낚시를 드리우며 산수를 즐겼다고 하는데, 그 연유로 후손들이 이곳
에 그의 호를 딴 동호정을 지은 것이다. 차일암 바위에는 장처사(장만리)가 낚시를 하던 곳임
을 뜻하는 '章處事釣臺'란 바위글씨가 있으나 그의 존재를 몰라 확인하지 못했다.

장만리는 1583년 통정대부 정릉령(通政大夫 定陵令)을 시작으로 관직 생활을 했는데, 임진왜
란이 터지자 못난 선조(宣祖)를 따라 의주(義州)까지 호종(護從)을 했다. 가는 길에 비가 쏟
아지고 왜군이 닿을 듯 말 듯 맹렬히 추격하자 겁에 질린 선조를 등에 업고 수십 리를 달렸다
고 한다.
이후 평양성(平壤城) 탈환에 공을 세웠으며, 선조는 그의 공을 가상히 여겨 '영세불망자(永世
不忘者)'라는 교지(敎旨)와 함께 호성원종공신(扈聖功臣敎書)으로 봉했다. 허나 못난 선조 때
문에 고생을 무지하게 한 탓에 1593년 행재소(行在所)에서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1892년 고종은 그에게 좌승지(左承旨)를 추증했으며, 충신 정려(旌閭)까지 세워 그의 공을 다
시 기렸다.


▲  옆에서 바라본 동호정

동호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2층 누각으로 형태는 앞서 농월정과 비슷하다. 1936
년 중수하여 지금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는데, 2층에는 뒷부분을 막은 판벽(板壁)이 1칸 남아
있으며. 정자 옆구리에 통나무를 자귀로 깎아 계단을 내었다. 그런데 그 계단이 생각보다 다
소 거칠어서 손잡이 난간을 잡고 이동해야 된다.

2층 사방에는 키 작은 계자난간을 둘렀고 기둥은 둥근 나무를 대충 다듬어서 사용했는데, 어
떤 기둥은 조금 휘어진 것도 있다. 그것은 부실공사로 그런 것이 아니라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다. 평탄한 바위에 정자를 세웠으나 주춧돌은 닦지 않고 바위 피부에 기둥을 박았으며,
처마를 받쳐드는 네 귀의 활주는 긴 8각돌기둥을 밑에 두고 그 위에 나무기둥을 세우는 특별
한 모습을 지녔다.

대들보로 쓰인 소나무는 굽힌 모습 그대로 사용했으며, 대들보 위의 충량(衝樑)에는 용머리를
두었는데, 좌우 충량에 여의주를 문 청룡과 물고기를 문 황룡을 새겼다. 그리고 대들보에는 2
마리의 호랑이가 마주 보고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그렸는데, 이들은 모두 학문에 힘쓰라는 메
세지 같다. 천정에는 만개한 국화를 그려넣었으며, 중수기(重修記)와 상량문(上樑文), 시문(
詩文) 등이 담긴 현판이 여럿 걸려있다.

* 동호정 소재지 :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 842


▲  남쪽에서 바라본 동호정의 위엄

이곳은 계곡과 동호정, 주변 풍경이 흔쾌히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치를 그려내고 있다. 농월정
만큼은 아니어도 너럭바위들을 많이 지니고 있는데, 함양~안의 지역의 주요 경승지로 많은 이
들이 찾아와 풍류와 피서를 즐겼으며, 지금은 피서의 성지로 바쁘게 산다.


▲  동호정 계단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잘 다듬지 않고 마치 야생처럼 거칠게 다듬었다. 이것이 동호정의 매
력 중 하나이나 매력만큼이나 단점도 커서 오르고 내릴 때 주의해야 된다. 통행 편의를 위해
계단을 개선할 필요는 있겠으나 저것이 동호정의 상징처럼 되어버렸으니 섣불리 고치는 것도
어렵다. 만약 계단을 좋게 고친다면 그것 더 이상 동호정이 아니다.


▲  동호정 2층에 걸린 빛바랜 상량문

▲  동호정 2층에서 바라본 옥녀담(玉女潭)

▲  차일암과 그곳으로 인도하는 징검다리

동호정 계곡 건너에는 하얀 피부를 드러낸 차일암(遮日巖)이 넓게 누워있다. 차일암이란 세월
을 막는다는 뜻으로 장만리는 여기서 낚시를 하거나 산수를 즐겼다고 전한다. 그도 나이를 먹
기 싫어서 세월에 대한 철벽 방어의 의미로 그런 이름을 붙였으나 그 역시 그 세월에 잡혀가
버렸다. 즉 세월이란 덧없고 부질없는 것이며 세월 앞에 장사는 없는 것이다.

차일암 주변에는 영가대(詠歌臺), 금적암(琴笛岩), 술잔을 기울이는 곳이란 뜻의 주가대 등이
있으나 나는 금적대 바위글씨만 확인했을 뿐, 나머지는 정보 부족으로 알지도 못했다.


▲  선명하게 새겨진 금적암 바위글씨
'금적'이란 거문고와 피리를 뜻한다. 즉 거문고 등의 악기를 연주하며
풍류를 즐긴 현장이다.

▲  차일암에서 바라본 동호정 주변

▲  동호정과 차일암을 잇는 징검다리
자연산 큰 돌을 여럿 심어서 조촐하게 징검다리로 삼았다. 앞서 농월정이 달바위 등
너럭바위와 짙은 소나무숲이 매력이라면 동호정은 거칠게 생긴 누각 계단과
징검다리가 이곳의 주요 매력이라 할 수 있다.

▲  차일암에 크게 패인 자연산 자국들
동호정을 다녀간 대자연 형님의 발자국은 아닐까? 농월정 달바위만큼은
아니어도 대자연에 의해 패인 자국들이 여럿 있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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