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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칠불사 영지

칠불사 경내 밑에 자리한 영지는 동그란 연못이다. 그림자 연못을 뜻하는 영지는 칠불사 초창기 설화

에도 흔쾌히 등장할 정도로 오래된 존재인데,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깃들여져 있다.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가락국(금관가야)의 초대 군주 수로왕(김수로왕)에게는 10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중 7명이 불도에 뜻을 밝히고 칠불사에 들어와 수도를 했는데, 그들이 무지하게 보고 싶던 수로왕

내외는 이곳을 찾아왔다. 그러자 그들을 수행 지도하던 장유화상(수로왕의 처남이자 허왕후의 오라버

니라고 함)이 그들은 출가한 몸이라 만날 수 없다고 제지를 하면서 굳이 보고 싶다면 절 밑에 연못을

파라고 건의했다.

하여 연못을 팠더니 연못 수면에 수행 정진 중인 아들 7명이 비췄다고 한다. 그 현상에 큰 환희감에

잠긴 수로왕 부부는 안심하고 왕도로 돌아갔다고 하며, 그때 수로왕 내외가 머물고자 행궁을 지은 곳

이 칠불사 아래 동네인 범왕리라고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며, 가야와 가락국의 위치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다. 아마도 조

선 때 절의 내력을 꾸미고자 칠불사에서 만든 전설로 여겨진다. 어쨌든 영지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

지 사라지고 없는 것을 근래 다시 못을 파고 그에게 영지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2. 칠불사 복원사적비(왼쪽)와 제월당통광대선사비

칠불사 복원을 기리고자 1995년에 세운 것으로 거북 머리의 귀부와 비신, 이수를 갖춘 크고 당당한

비석들이다.

 

3. 칠불사 경내를 가리고 앉은 보설루

잘 다듬어진 돌계단의 끝에 2층 누각 스타일의 보설루가 자리잡고 있다. 보설루는 설법, 교육 공간으

로 바깥쪽으로 '동국제일선원'이란 간판을 내밀고 있는데, 그의 밑도리를 들어서면 아자방, 대웅전을

비롯한 경내 중심부에 이르게 된다.

 

4. 팔작지붕을 휘날리는 첨월각

달을 바라본다는 뜻의 집으로 선방, 요사로 살아가고 있다.

 

5. 칠불사 찻집 (구름 위의 찻집)

여기서는 전통차를 판매한다. 지리산 중턱에 위치해 있어서 '구름 위의 찻집'이란 근사한 이름을 내걸

고 있는데, 휴일 낮이라 내부에는 차 1잔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6. 바로 밑에서 바라본 보설루

칠불암의 오랜 자존심, '동국제일선원' 현판을 내건 보설루가 물끄러미 나를 굽어본다.

 

7. 경내 밑에 닦여진 산책로

 

8. 칠불사 대웅전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이곳의 법당이다. 대웅전 내 불상은 동국대 교수이자 승려인

청원이 조성했고, 현판과 주련의 글씨는 여초 김응현(1927-2007) 선생이 썼으며, 글씨의 서각은 정

도화(?-2010) 교수가 일도각으로 새겼다.

 

9. 오호라 통재라 보수공사에 들어간 칠불사 아자방

아자방은 칠불사의 오랜 상징이자 명물 같은 존재이다. 신라 효공왕 시절(재위 897~911)에 담공선사

가 선방인 벽안당에 만든 방으로 '亞' 모양으로 구들을 만들어서 아자방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 구들에 불을 한번 때면 온기가 100일간 지속되었는데, 그 명성은 당나라는 물론 천하에 널리 퍼졌

다고 전한다.

 

아자방의 길이는 약 8m의 이중 온돌방 구조로 방 안 네 모퉁이와 앞뒤 가장자리 높은 곳에서 좌선을

하고 십자형으로 된 낮은 곳에서는 좌선으로 고통 받은 다리를 풀며 쉬었다고 한다. 방 구조가 무지

하게 특이하고 신비하여 1979년 세계건축협회에서 작성한 세계건축사전에도 수록되었다.

 

이렇게 착했던 아자방은 1948년 지리산 공비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칠불사를 불지르면서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터만 남은 것을 1983년 복원했으며, 2017년 이후 아자방을 더 확실하게 파악

하고자 기존 건물을 부시고 아자방 일대를 다시 발굴조사하여 건물을 다시 세웠다. 하필이면 그 공사

기간에 내가 온 것이다. (현재 조사와 복원은 완료되었으며, 2023년에 '칠불사 아자방 온돌'이란 이름

으로 지방문화재에서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특진되었음)

 

10. 아자방에 걸려있던 주련의 내용들

 

11. 칠불사 문수전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문수보살의 공간이다. 조선 중기에 무지하게 나태해졌던 칠불

사 승려들을 정신 차리게 해주었다는 문수보살을 기리고자 만든 것으로 매년 음력 4일에 문수재일을

연다. 칠불사는 이 문수전과 문수보살 이야기를 통해 문수도량을 내세우고 있다.

 

12.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여래3존상과 금동후불탱

 

13. 문수전에 봉안된 금동문수보살상

 

14. 나란히 자리한 대웅전(왼쪽)과 문수전(오른쪽)

마치 어미와 새끼를 보는듯 정겨운 모습인데, 그런 대웅전 왼쪽에는 한참 발굴조사, 복원정비중인 아

자방이 있다.

 

16. 칠불사 전래석(수석)들

칠불사는 옛날부터 수석이 유명했다. 이곳 수석의 역사는 16세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때 서산대사가 절을 중창했다는 기록이 있고, 추월이 어깨에 늘 메고 다녔다는 제수마석(잠을 쫓는

돌)이 쌍계사 주지실에 있었다고 전한다.

초의선사는 1828년 칠불암 선원에 머물며 다신전을 작성했는데, 그는 수석과 차의 정신을 명상에 비

유하는 철리를 터득하고 이곳에 수석을 많이 수집했다고 한다.

 

허나 20세기 혼란기를 겪으면서 좋지 못한 손에 의해 많이 도난을 당했으며, 1948년 이후 절이 파괴

되면서 남아있던 수석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현재 주지인 도웅이 칠불사의 수석 역사를 다시 일으키고자 수준급 돌을 수집했으며, 1995년 한

국애석문화연구소의 구산과 두연이 칠불사 수석을 모아두던 자리를 발견하여 그 자리에 이렇게 수석

을 배열했다. 이때 복원에 필요한 비용은 칠불사에서 지원했으며, 한수연우회와 고운초우회가 협력해

석단을 조성했다.

 

20세기 말까지만 해도 속세에서 수석 수집붐이 대단했으나 이후 움츠려들면서 지금은 많이 시들시들

해졌다. 본인 부친도 그 시절 수석을 엄청 수집했는데, 특히 제천과 단양 등 남한강 수몰 지역에서 가

져온 수석이 많았다. 그 많은 수석들은 집 이사, 관리 소홀, 그리고 약간의 도난 등으로 인해 지금은 일

부만 집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