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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4.27 서울의 서남쪽 끝으머리, 오류동 류순정 류홍부자묘역~항동철길~푸른수목원 봄나들이
  2. 2023.04.16 서울 도심의 꿀명소, 인사동~북촌한옥마을 나들이 (천도교중앙대교당, 관상감관천대, 정독도서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종친부 경근당옥첩당)
  3. 2023.03.17 서울의 부드러운 동쪽 지붕, 아차산 봄나들이 <서울둘레길2코스, 아차산4보루, 3보루, 2보루, 1보루>
  4. 2023.03.05 서울의 상큼한 남쪽 지붕, 삼성산~호암산~목골산 <관악산호수공원, 성주암, 서울둘레길5코스, 독산자락길>
  5. 2023.02.26 송파구 한복판에 자리한 상큼한 푸른 쉼터, 오금공원 <문양군 류희림묘역, 신선경과 류인호묘역, 오금공원 인공폭포>
  6. 2023.02.06 서울 도심의 북현무를 거닐다. 북악산 한양도성 나들이 <창의문, 백악마루, 청운대, 숙정문, 말바위>
  7. 2023.01.12 은평구의 작은 지붕들, 봉산 ~ 백련산 나들이 <봉산 봉수대, 서울둘레길7코스, 백련근린공원>
  8. 2022.12.14 동양 최대의 황금법당을 지닌 고즈넉한 산사, 구산동 수국사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만난 수국사의 늙은 보물들)
  9. 2022.11.30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홍제천 늦가을 산책 (세검정, 석파정별당, 석파랑, 홍지문 탕춘대성,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2
  10. 2022.11.13 봉천동 낙성대, 관악강감찬축제, 서울둘레길5코스 관악산 구간 늦가을 나들이 (강감찬생가터, 낙성대공원, 무당골)

서울의 서남쪽 끝으머리, 오류동 류순정 류홍부자묘역~항동철길~푸른수목원 봄나들이

구로구 오류동 봄나들이 (류순정 류홍묘역, 항동철길)



' 구로구 오류동 봄나들이 '
(류순정 류홍 부자 묘역, 항동철길)
 

류순정 류홍 부자묘역

▲  류순정, 류홍 부자 묘역

항동철길 (오류선) 류홍 신도비와 류사필 묘갈

▲  항동철길 (오류선)

▲  류홍 신도비와 류사필 묘갈

 


 

서울 서남쪽 끝으머리를 잡고 있는 구로구 오류동(梧柳洞)에는 류순정, 류홍 부자 묘역과
항동철길, 천왕산 등의 명소가 있다. 이들은 아직까지도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어 나의
심기를 적지 않게 건드리고 있는데, 별처럼 무수히 뿌려진 이 땅의 미답처를 다 지우지는
못해도 내가 있는 서울만큼은 미답처를 싹 지우고자 매년 부지런히 행동에 옮기고 있다.
남들 훨씬 이상으로 서울 구석구석을 다녔다고 자부하나 아직도 미답처가 차고 넘치니 겨
우 605㎢에 불과한 서울 땅이 실로 우주 이상만큼이나 장대해 보인다.


 

♠  서울에서 유일한 부자(父子) 2대 공신 묘역
류순정, 류홍 부자 묘역 - 서울 지방기념물 22호

▲  무덤들이 물결을 이루는 류홍 묘역 (제일 위쪽에 류홍 묘가 있음)

구로구의 대표 지붕인 천왕산(天旺山. 144m) 북쪽 끝자락 구석에 류순정(유순정), 류홍(유홍)
부자를 중심으로 한 진주류씨(유씨) 묘역이 넓게 누워있다.

류순정과 류홍은 조선 초기 인물로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해 부자가 나란히 공신(功臣)이
되었다. 1512년 류순정이 병사하자 중종(中宗)은 매우 슬퍼하며 3일 동안 조회(朝會)를 열지
않았으며, 왕족들에게만 주던 장생전<長生殿, 장흥고(長興庫)>의 관곽(棺槨)을 특별히 내주어
장례를 도왔다. 또한 오류동과 온수동(溫水洞), 부천시(富川市) 여월동과 작동 지역에 300만
평(9,917,355㎡)에 이르는 너른 땅까지 내렸는데, 류순정은 그 땅 중에서 제일 명당으로 꼽히
는 천왕산 자락에 유택(幽宅)을 썼다.
1551년 류홍이 사망하자 아비 묘 서남쪽 자락에 묻혔으며, 이후 후손들은 중종에게 하사받은
다른 동네 땅에 묻혔다.

20세기 이후, 묘역 주변을 조금씩 처분하면서 묘역 규모가 줄어들었고, 속세로 떨어져나간 묘
역 동북쪽에는 동부제강에서 사원용 아파트로 세운 동보아파트가, 동남쪽에는 금강수목원아파
트와 주택이 들어섰다. 그렇게 해서 남은 묘역은 26,531㎡로 비록 옛날만큼은 못해도 여전히
넓은 편이다.
묘역 서북쪽과 서쪽, 서남쪽은 딱히 건드리지 않아 자연 지대로 남으면서 개발의 칼질에 완전
히 고립되는 꼴은 면했으며, 주변에 흩어진 류순정의 후손 묘 5기도 그 땅을 처분하면서 모두
류홍 묘 밑으로 가져와 7대가 모여있는 문중 묘역이 되었다.

20세기가 끝나도록 묘역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아 적지 않게 훼손이 되었으나 2004년에 서울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더 이상 망가지는 꼴은 면했다. 또한 후손들은 집안의 보물로 16세
기에 제작된 류순정의 영정 4점과 류홍의 영정 1점을 안전하게 후대에 전하고자 서울시에 흔
쾌히 기증해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 보관되고 있다. 이들은 이 땅에 흔치 않은 16세기
초상화로 그림 바닥에 채전이 등장하는 최초의 예로 가치가 대단해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솔직히 국가 보물급임)
이들 영정은 고약했던 6.25 시절 진주류씨 종손인 유종식(柳宗植)이 목숨을 걸고 지킨 것으로
그때 식솔과 가재도구는 챙기지도 않고 오직 영정함만 챙겨 어깨에 맸다. 그의 부인이 피난길
에 가솔은 안중에도 없고 영정만 챙기냐고 따지자. 집안의 종손으로 그것을 잃어버리면 조상
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고 답을 했다고 한다.
어쨌든 영정과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던 서적들, 필요한 가재도구를 챙겨 가솔들과 무사히 피
난을 떠났고, 그렇게 영정은 살아남아 그 가치는 백두산에 붙어있을 정도로 커졌다.

류순정, 류홍 묘역은 후손들의 배려로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다. 묘역 밑에 후손이 거처하는
집이 있으며, 그 집을 중심으로 북쪽에 묘역의 주인공인 류순정 묘, 서쪽에 류홍과 후손들의
묘가 자리해 있다. 류홍과 류순정 묘는 16세기 무덤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무덤 석물과
신도비도 그 시절 것으로 가치가 높다. 그리고 후손들의 무덤도 묘비 등 일부를 제외하고 옛
날 것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류홍 묘는 뒤쪽에 숲이 있으나 류순정 묘는 바로 북쪽과 동쪽 담장 너머로 동보아파트가 들어
앉아 묘역을 굽어보고 있어 보기에도 좀 딱해 보인다. 적어도 류순정 묘 주변 땅은 지켰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 했던 것이다.


▲  진흥군(晋興君) 류식(柳寔)과 청풍김씨(오른쪽 무덤)의 합장묘,
류중광(柳重光)과 나주정씨(왼쪽 무덤) 합장묘


류식은 류돈의 손자이자 류시경의 아들로 류순정의 7대손이며, 류중광은 류준의 아들로 류순
정의 4대손이다. 무덤을 지키고 있는 문인석(文人石)과 망주석(望柱石), 동자석(童子石), 상
석(床石), 혼유석(魂遊石)은 조선 중기 것으로 고색의 때가 역력하며, 묘비는 1989년 이후에
새로 장만했다.

▲  진흥군 류식과 청풍김씨의 묘비

▲  류중광과 류식 묘 (남쪽에서 본 모습)


▲  류사필(柳師弼)과 청주한씨의 합장묘(왼쪽),
류준(柳浚)과 연안이씨의 합장묘(오른쪽)


류중광, 류식 묘 바로 위에는 류사필과 류준의 묘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류사필(1501~1559)
은 류홍의 아들로 어머니(풍양조씨)가 2살에 사망하자 외가에서 자랐는데, 공신의 자손으로
과거시험도 거치지 않고 음보(蔭補)로 관리가 되어 사복시 주부(司僕寺 主簿), 사헌부 감찰(
司憲府 監察), 금성현령, 김포현령, 예빈시 주부, 온양군수를 지냈다. 부인은 청주한씨로 영
의정을 지낸 한효원(韓效元)의 딸이다.

류준은 류사필의 아들로 아버지나 할아버지 만큼의 공적은 없으나 그들의 신도비를 세우지 못
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하여 1567년에 증조할아버지인 류순정의 신도비를 마련했고, 류
홍 신도비를 세우고자 친분이 있던 강령군(江寧君) 홍섬(洪暹)에게 신도비의 비명(碑銘)을 부
탁했다. 그래서 홍섬이 흔쾌히 글을 짓고 당대 문장가였던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이 글씨
를 써서 1573년 신도비를 완성시켰다.
또한 1574년에는 그들(홍섬, 송인)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인 류사필의 묘갈까지 장만했으니 묘
역 관리만큼은 아주 100점 감이었다. 이들 묘갈과 신도비는 류홍 묘역 밑에 나란히 자리해 있
다.

류중광, 류식의 묘처럼 문인석과 망주석, 키 작은 동자석, 상석, 묘비를 지니고 있으며, 1989
년 이후에 세운 묘비 정도를 제외하고 모두 16세기 것들이라 고색이 넘친다.

▲  류준과 류사필묘 (북쪽에서 본 모습)

▲  450년 가까이 묵은 류사필 묘갈(墓碣)


▲  류돈(柳焞)과 삭녕최씨묘
류돈은 류중광의 아들로 류중광묘 바로 남쪽에 자리해 있다. 묘비와
상석을 제외하고 16세기 것을 유지하고 있다.

▲  류홍(柳泓)묘

류홍 묘역 제일 높은 곳에는 류홍 묘가 자리해 후손들의 무덤을 굽어보고 있다. 류순정과 더
불어 이곳 묘역의 터줏대감으로 구름무늬 이수를 갖춘 늙은 묘표(묘비)와 문인석, 장명등, 망
주석, 상석을 지니고 있으며, 묘역 밑에는 높은 사람만 장만할 수 있던 신도비까지 두어 그의
높은 위치와 행적을 알려준다.

류홍(1483~1551)은 류순정의 아들로 어머니는 안동권씨<권효충(權孝忠)의 딸>이다. 자는 자연
(子淵)으로 1506년 중종반정 때 반정에 가담한 아버지를 도와 부자가 나란히 정국공신(靖國功
臣) 4등에 책록되는 위엄을 보였다. 그 인연으로 그들 부자의 무덤은 서울에서 유일한 부자 2
대 공신 묘역으로 천하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반정 이후 사복시주부, 형조정랑(刑曹正郞) 등을 거쳐 공조정랑(工曹正郞)이 되었으며, 1510
년 부산포와 제포(薺浦), 염포(鹽浦)에서 왜인(倭人)들이 소란을 일으킨 삼포왜란(三浦倭亂)
이 터지자 남정도원수(南征都元帥)로 파견된 부친을 따라가 왜인을 토벌했다. 그들 부자는 무
예에 아주 능했는데 특히 활을 잘 쏘았다고 전한다.

삼포왜란을 평정하고 내자시(內資寺)와 군기시(軍器寺)의 첨정(僉正)이 되었다가 1511년 무과
에 급제해 사복시 부정(副正)에 올랐으며, 훈련원부정을 거쳐 제포첨사(薺浦僉使, 창원 웅천)
가 되었다.
그는 역대 첨사들이 왜인들에게 뇌물을 받고 그들에게 발급한 도서(圖書)의 검사를 소홀히 한
점을 지적하고 왜인들의 왜관(倭館) 출입과 왜선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이듬해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오위장(五位將)을 겸임했다.
1519년 이후 원주와 정주 목사를 거쳐 훈련원도정, 충청도병마사, 수군절도사, 경상우도병마
사, 전라도수군절도사, 회령부사, 북병사(北兵使) 등의 주요 군직을 지냈으며, 1544년 진산군
(晋山君)에 봉해지고 부총관(副摠管)을 겸했다.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는 위사원종공
신(衛社原從功臣)에 책록되어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었으며, 1547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
府事)가 되었다.

무인이지만 문인, 선비들과 많은 교류를 하였고, 청렴하고 검소하여 공조정랑으로 있을 때 선
임자들이 관청의 기명(器皿)을 멋대로 사용하던 폐습을 근절시켰다.

   ◀  류홍 묘의 동그란 봉분과 묘표(墓表)
비좌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구름
무늬가 물결치는 이수(螭首)를 두었다. 비신과
이수에는 무심한 세월이 강제로 달아놓은 검은
주근깨와 온갖 상처들로 가득하여 고색의 향기
를 깊이 뿌린다.

        ◀  류홍 묘 문인석과 망주석
문인석은 고된 세월에 지쳤는지 일그러진 표정
을 짓고 있으나 대체로 멀쩡한 모습이다. 허나
그 옆의 망주석은 장대한 세월의 칼날을 정통
으로 맞아 밑둥만 일부 남은 가련한 신세이다.


  류홍 묘에서 바라본 류순정, 류홍 묘역 일대
가운데 부분에 보이는 집이 후손이 사는 집(재실)으로 그 너머 언덕에
아파트에 둘러싸인 류순정 묘가 있다.

▲  류홍의 행장이 적힌 류홍 신도비(神道碑)

류홍 신도비는 1573년에 손자 류준이 세웠다. 그는 류홍이 사망한지 20년이 넘도록 신도비를
장만하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워 좌의정을 지낸 강령군 홍섬에게 비명(碑銘)을 부탁했고, 여
성군 송인에게 글씨를 부탁하여 비로소 신도비를 세우게 되었다.
비좌(碑座) 윗면에 엎드린 연꽃잎 모양의 복련(伏蓮)을 새기고 비신 앞뒤에는 3구획의 안상(
眼象)과 그 밑에 당초문(唐草紋)을, 옆면에는 두 구획의 안상과 당초문을 새기고, 머리에 지
붕돌을 얹혔다. 그 곁에는 아들 류사필의 묘갈이 나란히 있는데 그 모습이 서로 비슷하나 비
석의 명칭은 다르다. (신도비는 3품 이상의 당상관과 왕족들의 무덤에만 쓸 수 있음)
류순정 묘에도 신도비가 있으며, 오랜 풍상에 시달린 비신에는 검은 주근깨가 여기저기 피어
나 중후한 멋을 보인다.


▲  류순정의 후처, 평창이씨묘

류홍 묘역과 류순정 묘역 중간 산기슭에는 류순정의 부인인 평창이씨묘가 홀로 자리해 있다.
류홍과 류순정 묘역은 2기 이상의 무덤이 몰려있어 심심치는 않아 보이나 평창이씨묘의 무덤
만 그 중간에 외롭게 자리해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마도 풍수지리에 따라 그렇게 묘를
쓴 것 같다. 
여기서는 류홍과 류순정 묘역은 물론 금강수목원아파트, 천왕산이 훤히 두 망막에 들어와 묘
역에서 위치가 아주 좋으며, 봉분(封墳)과 묘표, 상석, 문인석을 지니고 있는데, 이들은 16세
기 것으로 묘표 같은 경우 조선 초에 많이 나타나는 연꽃 봉오리 지붕돌로 작고 앙큼한 형태
이다.

▲  뒷쪽에서 바라본 평창이씨묘

▲  연꽃 봉오리 지붕돌을 지닌
평창이씨묘표

▲  눈이 유난히도 크고 귀여운 평창이씨묘의 꼬마 문인석
왼쪽 문인석은 피부가 덜 탔지만 오른쪽 문인석은 세월을 너무 예민하게 탔는지
피부가 아주 검다.

▲  평창이씨묘에서 바라본 류홍 묘역
제일 왼쪽 모퉁이에 류돈 묘, 바로 오른쪽에 류중광 묘와 류식 묘, 그 위쪽에
류사필 묘와 류준 묘가 차곡차곡 들어앉았다. 그리고 그 한참 위에
류홍 묘가 자리하여 후손의 무덤을 굽어본다.

▲  류순정(柳順汀)묘

묘역 북쪽에는 이곳의 시조인 류순정묘가 있다. 짙은 숲을 뒤에 둔 류홍묘와 달리 묘 북쪽과
동쪽에 아파트가 비집고 들어와 그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무덤을 굽어본다. 무덤과 키다리 아
파트의 어색한 조화. 이는 개발의 칼질이 개념 없이 자행되는 이 땅의 씁쓸한 현실의 산물로
이곳과 비슷한 처지의 조선시대 묘역이 서울과 수도권에 비일비재하다.

류순정(1459~1512)은 류양(柳壤)의 아들로 어머니는 정즙(鄭楫)의 딸이다. 자는 지옹(智翁),
호는 청천(菁川)이며, 부인은 안동권씨와 후처인 평창이씨가 있다.
청년 시절에는 김종직(金宗直)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활쏘기를 비롯한 무예에 뛰어나 그와 대
적할만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1487년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전적
(弘文館典籍)이 되었으며, 훈련원정(訓鍊院正)이 되어 전라도에 들어온 왜구를 수색하여 잡아
들이는데 공을 세웠고, 1491년 함경도평사로 도원수(都元帥) 허종(許琮)의 막료가 되어 평안
도평사를 역임했다.

연산군 시절에는 임사홍(任士洪)의 잘못을 논박했고, 평안도절도사 전림(田霖)의 권력 남용을
추궁했으며, 북방 야인 문제에 대한 대책을 진언했다. 그 뒤 홍문관교리가 되었는데, 문신임
에도 활솜씨가 뛰어나 부응교(副應敎)에 배수되었다. 이어 사헌부집의를 거쳐 의주목사가 되
었는데, 조선의 그늘에 있던 압록강 이북 지역의 야인을 토벌했을 때, 적정 탐지에 큰 공을
세웠다. 또한 군자금 확보와 성곽 수축 등 국경 경비 강화에도 힘썼다.

1503년 공조참판(工曹參判)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며, 1504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 이때 연산군에게 밤사냥에 대해 진언하다가 임사홍의 모략으로 추국을 당하기도 했다.
1506년 연산군에게 불만을 품은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등과 반란을 모의하여 그 유
명한 중종반정을 일으켰다. 그 공으로 정국공신 1등에 청주부원군(淸州府院君), 숭정대부(崇
政大夫)란 큰 감투를 받았다.

반정 이후 병조판서가 되어 영경연사(領經筵事)를 겸임했으며, 연산군 시절에 폐지된 경연 부
활에 앞장섰다. 이후 우의정과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으며, 1507년 이과(李顆) 등이 견성
군(甄城君)을 추대하려고 역모를 꾀하자 이를 처리해 정난공신(定難功臣) 1등에 봉해졌다.
1508년 평안도 인산(麟山)과 강계(江界) 지역에 둔전(屯田)을 설치했으며, 좌의정(左議政) 시
절에는 인천과 김포, 통진 지역에서 도둑들이 설치자 박영문(朴永文)과 유담년(柳聃年)을 포
도대장으로 삼아 그들을 토벌케하고 유민의 안집책을 마련했다.
1510년 삼포왜란이 터지자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병사를 총괄했으며, 다시 도원수가 되
어 왜란을 토벌하고 삼포(부산포, 제포, 염포)에 비왜방략(備倭方略)을 마련했다. 이때 대간
들이 재물을 늘린다는 명목으로 그를 탄핵했으나 오히려 군공(軍功)을 인정받아 영의정(領議
政)까지 올랐지만 불과 2달 뒤에 53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중종은 크게 슬퍼하며 장흥고의 관곽까지 내주는 등, 장례를 특별히 챙겨주었으며, 무안(武安
)이란 시호를 내려주었다가 나중에 문정(文定)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후 중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  류순정 묘표

▲  류순정 묘를 지키는 꼬마 동자석

류순정 묘는 이수를 갖춘 묘표와 상석, 동자석, 망주석을 갖추고 있다. 이들은 16세기에 조성
된 것들로 고색이 흠씬 묻어나있는데, 묘 바로 밑에는 부인 안동권씨 묘가 있으며, 서쪽 산자
락에는 앞서 언급한 부인 평창이씨묘가 있다. 부인 묘에는 모두 문인석을 갖추고 있어 류순정
묘에는 작은 동자석으로 대신했다. (장명등은 안동권씨 묘에만 세웠음)


▲  류순정 묘의 뒷통수 (뒷쪽에서 바라본 모습)

▲  류순정의 부인 안동권씨 묘
안동권씨 부인은 류홍의 어머니로 그가 불과 2살 때 세상을 떠났다. 봉분과 묘표,
상석, 문인석, 장명등을 지니고 있으며, 동자석과 망주석은 류순정 묘가
대신 지니고 있어 따로 갖추지는 않았다.

▲  뒷쪽에서 본 안동권씨 묘

▲  이수를 지닌 안동권씨 묘표

▲  얼굴과 왼쪽 어깨에 세월의 때가
가득 낀 안동권씨묘 문인석

▲  고된 세월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은
안동권씨묘 장명등


▲  류순정 신도비

안동권씨묘 옆구리에는 류순정 신도비가 우두커니 서 있다. 류순정 묘 바로 동쪽까지 아파트
가 들어서고 묘역과 아파트 경계에 돌담이 둘러지면서 신도비 정면 공간이 좀 야박하게 되었
다. 하여 부득불 옆에서 그를 담았다.

신도비의 모습은 류홍 신도비와 비슷한데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낸 진천군(晉川君) 강
혼(姜渾)이 글을 짓고 여성군 송인이 글씨를 썼다. 허나 글만 받았지 비석을 세우지 못한 상
태로 50년 정도가 흐른 1567년에 류준이 비로소 비석을 세웠다. 비좌와 비신, 지붕돌로 이루
어진 형태로 비좌 윗면에 복련을 새겼고, 전면에 안상 3구획을, 측면에 안상 2구획을 새겼다.

* 류순정, 류홍 부자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동 산 43-31, 43-32(오리로13가길
  42)


▲  류순정 묘역에서 바라본 류홍과 후손들의 묘역
저 공간에 류홍을 비롯한 6대의 유택이 둥지를 틀었다.


 

♠  서울에서 유일하게 마음 놓고 거닐 수 있는 철길 명소,
항동(航洞)철길(오류선)

▲  오류2동 주택가를 지나는 항동철길 ①

금강수목원아파트 바로 남쪽에는 오리로11길과 나란히 달리는 철길이 있다. 속세에서는 그 철
길을 항동철길이라 부르는데 정식 명칭은 오류선(梧柳線)으로 '경기화학선'이란 별칭도 지니
고 있으며, 경인선 오류동역(1호선)에서 광명시(光明市) 옥길동에 있던 경기화학을 잇는 4.5
km의 단선 철로이다.
경기화학주식회사는 이 땅 최초의 비료 공장으로 1954년 옥길동에 설립되었다. (그 시절 지명
은 부천군 소래면 옥길리) 원료와 비료 운송을 위해 1957년 9월 26일에 철길을 닦기 시작하여
1959년 5월 30일에 완성을 보았는데, 경기화학 외에도 한때 오류동에 있던 삼천리연탄공장과
동부제강도 이 철로의 신세를 졌다.

경기화학은 울주 온산공장으로 통합, 이전되면서 광명 옥길동 공장은 문을 닫았으며, 그로 인
해 열차가 다닐 일이 없어져 완전 한가한 신세가 된다.
그렇게 열차의 기적소리도 거의 사라지고 열차의 바퀴자국도 녹이 슬면서 철로에는 잡초가 덥
수룩하게 끼었으며, 무쓸모급 철길로 전락했지만 주변에 천왕산 공원, 푸른수목원이 조성되면
서 그들을 수식하는 철길 명소로 덕을 보게 되었고, 2014년 이후 방송매체에서 이곳을 줄기차
게 홍보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항동철길은 오류동역에서 1호선 경인선에서 살짝 갈라져 나와 서해안로와 오리로가 만나는 광
덕4거리를 지난다. 여기서부터 뚜벅이들이 거닐 수 있다. (광덕4거리~오류동역 구간은 접근
금지) 오리로11길 골목길이 바로 남쪽에 붙어있으며, 금강수목원아파트와 맞닿은 철길 북쪽에
는 짧게 숲길을 닦아놓아 눈길을 부드럽게 배려했다.
철길은 주택가의 끝인 우창굿모닝아파트를 지나면 숲에 감싸인 야트막한 고갯길을 지난다. 천
왕산 산세가 움푹 낮아진 곳에 산의 살을 파서 생긴 틈으로 그 고개를 지나면 푸른수목원 항
동철길 쪽문과 천왕산 등산로가 나온다. 보통 여기서 철길 산책을 시작하거나 접거나 하지만
서쪽으로 더 들어가 푸른수목원 정문까지 이동할 수 있으며, 그 이상은 어렵다. 즉 광덕4거리
에서 푸른수목원 정문까지 1.3km 구간만 뚜벅이들이 자유롭게 거닐 수 있다.

비록 버려진 철길로 지금은 관광지로 꽤 바쁘게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열차가 완전히 끊긴 것
은 아니다. 가뭄에 콩나듯 아주 가끔씩 다닌다고 하며, 만약 산책 중에 열차를 만났다면 꼭
복권을 사보기 바란다. 그만큼 열차를 보기 힘들다. (나도 몇 번 가봤지만 열차 구경도 못했
음)
한때 이 철길을 두고 관광지로 두느냐 안전을 위해 접근 불가로 봉인하느냐를 두고 말이 많았
으나 이제는 관광지로 완전히 무게가 쏠렸다.

이 땅에 철길 명소가 여럿 있지만 서울은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게다가 주거지와 골목길 속
을 거리낌없이 지나가므로 매우 친숙하게 다가온다. 철길 주변 풍경도 주택가와 자연(천왕산,
푸른수목원)이 어우러진 모습이라 가히 싫지는 않으며, 특히 우창굿모닝아파트에서 푸른수목
원으로 넘어가는 숲에 감싸인 그늘진 고갯길은 이곳의 백미로 소박한 자연 풍경을 보여준다.


▲  오류2동 주택가를 지나는 항동 철길 ②

▲  오류2동 주택가를 지나는 항동 철길 ③

▲  항동철길과 금강수목원아파트 사이에 닦여진 짧은 숲길

▲  천왕산의 북쪽 틈을 지나는 항동철길 (푸른수목원 방향)
철길을 닦고자 산세가 낮은 이곳을 손질했다. (나쁘게 말하면 천왕산 북쪽
산줄기를 철길로 끊어버림) 철길 좌우로 뚜벅이길이 닦여져 있는데,
뚜벅이길로 가던 철길로 가던 그건 각자의 취향대로 하면 된다.

▲  천왕산의 북쪽 틈을 지나는 항동철길 (금강수목원아파트 방향)

▲  푸른수목원 옆구리를 지나는 항동철길 (수목원 정문 방향)

항동철길에 한참 빠져들 무렵이 되면 푸른수목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철길도 그렇고 주변 풍
경도 잠시 서울과 속세를 잊게 할 정도로 전원(田園) 풍경을 그려냈지만 안타깝게도 이 변두
리까지 개발의 칼질이 자행되어 아파트가 마구 들어서면서 그 흥이 많이 깨졌다.
게다가 철길은 수목원 정문까지만 거닐 수 있으니 그 이상은 가지 않기 바란다. (뚜벅이길도
없음) 저 철길의 끝에는 우리가 꿈꾸던 세상이 아닌 공장이나 군부대가 있으니 더 갈 이유가
없다.

푸른수목원 정문까지 항동철길(오류선)의 신세를 지고 남쪽에 닦여진 산길을 통해 천왕산 품
으로 들어섰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마무리를 지으며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항동철길 소재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2동, 항동


▲  항동철길에서 바라본 천왕산과 푸른 봄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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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꿀명소, 인사동~북촌한옥마을 나들이 (천도교중앙대교당, 관상감관천대, 정독도서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종친부 경근당옥첩당)

서울 북촌 나들이



' 서울 도심의 한복판, 북촌 나들이 '

소격동 비술나무

▲  소격동 비술나무

천도교 중앙대교당 종친부 경근당

▲  천도교 중앙대교당

▲  종친부 경근당

 



 

♠  안국역 주변 명소들

▲  천도교 중앙대교당(天道敎 中央大敎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호

서울 도심 한복판에 넓게 자리한 북촌(北村)은 청계천 이북 동네를 일컫는다. 한옥(기와집)이
많이 몰려있는 안국역(3호선) 이북 동네(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를 흔히 북촌한옥마을이라 부
르고 있으며, 내 즐겨찾기 목록에도 일찌감치 등록되어 이미 200번 넘게 발걸음을 했다.
오랜 세월 지겹도록 찾다 보니 이제는 두근거리는 마음도 예전만은 못하나 그래도 잊지 않을
정도로 가끔씩 발걸음을 하여 나의 변함없는 마음을 비추고 있다.

이번 북촌 산책은 조계사(曹溪寺)에서 시작하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마무리를 지었는
데, 이미 여러 번씩 복습을 했던 곳이라 이제는 눈 감고도 그들을 그려내고 찾아갈 정도이다.
하지만 좋은 곳은 자꾸 가도 질리지 않는 법, 그들이 잘 있나 확인도 할 겸 해서 겸사겸사 북
촌 마실에 나섰다.


▲  옆에서 바라본 천도교 중앙대교당의 위엄
한참 후배들인 현대식 고층건물 속에서 의연함을 잃지 않으며
100년 묵은 고색의 향기를 마음껏 뿜어댄다.


운현궁(雲峴宮) 서쪽 맞은편에는 천도교의 중심 건물인 수운회관과 붉은 피부를 지닌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나란히 자리해 있다.
중앙대교당은 종교의식과 행사를 치루는 천도교의 중심 교당으로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
孫秉熙)가 세웠다. 그는 300만 교인에게 1가구당 10원씩을 목표로 돈을 거둬 무려 22만원의
거금을 장만해서 지었는데, 설계는 왜인(倭人)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가, 시공은 중
원대륙에서 온 장시영(張時英)에게 시켰다. 1918년 12월에 공사를 시작했으나 1919년에 일어
난 3.1운동으로 다소 지체되었다가 1921년 2월에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처음에는 400평 규모로 크게 지으려고 했지만 조선총독부가 교당이 너무 크고 중앙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는 개소리를 떠들며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부득이 지금의 규모로 축소
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붉은 피부의 벽돌과 화강석으로 다져진 지상 2층, 중앙탑부 4층, 연면적 280.68평 규모로 아
르누보(Art Nouveau)의 한 부류인 비엔나 세제션(Vienna Secession)풍으로 지어 외형이 견고
하고 이색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은 212평, 2층은 45.6평, 3층은 14.44평, 4층은 7.84
평이며, 정면 좌우대칭으로 뒷면에 강당을 연결한 'T'자형 구조를 취하고 있다.

강당 지붕은 맞배지붕 형태로 종탑의 바로크 형식 지붕과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외벽은 대부
분 붉은 벽돌을 쓰고 부분적으로 화강석을 썼다. 중앙 현관부는 화강석으로 반원아치를 들여
쌓았는데 고딕 양식의 성당 출입문과 비슷하며, 현관 양쪽 끝에는 화강석의 부축벽을 세워 장
식했다.
정면 1층 창은 사각형으로 머리 부분에 3개의 화강석, 2층 반원형 아치창에는 7개의 화강석을
넣어 조형미를 갖추었으며, 탑 중앙부에도 반원아치의 큰 창과 그 위로 3개의 작은 반원아치
창을 내었다.

내부는 기둥이 없어 넓은 공간을 이루고 있는데, 천도교의 중심 교당임에도 딱히 장식이 없어
소박하고 썰렁한 모습이다. 내부와 외부 공간에는 우리 겨례를 상징하는 박달나무꽃과 무궁화
문양이 새겨져 있으나 그리 화려하지는 않으며, 비록 조선총독부의 개소리 태클로 작게 지어
졌지만 왕년에는 명동성당(明洞聖堂), 조선총독부 청사와 더불어 서울 시내 3대 건축물로 꼽
혔던 위엄 돋는 건물이다. 또한 1920년대를 대표하는 근대 건축물로도 가치가 높다.

이곳은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바쁘게 살기도 했으며,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1899~1931)이
중심이 된 어린이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 천도교 중앙대교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 88 (삼일대로 457, ☎ 02-735-7579)


▲  천도교 중앙대교당 내부
위엄 돋는 겉모습과 달리 1층 속살은 생각보다 조촐하다. 내부 관람은 가능하나
종교의식과 행사가 있을 경우 제한될 수 있으며, 2~4층은 아무나
올라갈 수 없으니 함부로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  늦가을에 잠긴 천도교 중앙대교당 뜨락 은행나무들
은행나무 너머로 보이는 한옥은 친일 매국노로 악명을 떨친 민영휘(閔泳徽)가
아들인 민병옥에게 지어준 '경운동 민병옥 가옥'이다.

▲  현대빌딩 그늘에 묻힌 관상감 관천대(觀象監 觀天臺) - 보물 1,740호

안국역(3호선)에서 창덕궁(昌德宮)으로 가는 길목에 하늘 높이 솟은 현대빌딩이 있다. 그 앞
에는 현대빌딩의 위엄에 눌려 초췌해 보이기까지 하는 견고한 돌덩어리의 늙은 존재가 손짓을
하고 있으니 그가 조선 때 천문과 기상을 담당했던 관천대(觀天臺)이다.

관천대란 돌로 만든 시설로 해와 달, 별의 움직임은 물론 일식과 월식, 비와 눈 등의 기상현
상을 두 눈으로 살피던 관상감의 관측시설이다. 관천대는 우리나라에 딱 2개 남아있는데, 하
나는 창경궁(昌慶宮)에 깃든 관천대(보물 851호)로 조선 숙종(肅宗) 때 만들어졌고, 다른 하
나가 바로 이곳이다.

이 관천대는 1434년에 설치되었으며, 원래는 현대빌딩 동쪽 부분과 그 동쪽에 있는 언덕(현대
원서공원)에 있었다. 높이 4.2m, 가로 2.8m, 세로 2.5m 크기로 대(臺) 위에 돌난간이 둘러져
있고 그 안에 화강석대(花崗石臺)가 놓여 있으며, 여기에 소간의(小簡儀)와 해시계 등의 천문
기기를 올려 24시간 하늘의 눈치와 표정을 살폈다.
소간의를 올려 놓는 곳이라 소간의대(小簡儀臺)라 불리기도 하며, 별을 관측하는 곳이라 하여
첨성대(瞻星臺)란 별칭도 가지고 있는데, 가만 살펴보면 경주 첨성대와도 조금은 닮았다.

원래는 대 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었으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없으며, 현대
빌딩 자리에 휘문고보(휘문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그 교정으로 옮겨졌다. 이후 1978년 학교
가 강남으로 건너가면서 1983년 지금의 현대빌딩이 들어섰고, 1984년에 현재 자리에 지금의
모습으로 해체/복원되었다.

관천대를 복원할 당시, 원래 있던 자리와 땅의 높이를 맞추고자 평지에 2단의 석축을 닦아 대
를 만들고 그 위에 올려놓았는데, 바로 뒤에 현대빌딩이 공룡처럼 버티고 있으니 마치 햇님과
달님의 부질없는 격차를 보는 듯 하다. 원래 자리에 두기가 힘들다면 현대원서공원으로 옮기
면 좋으련만 개발의 칼질은 그것마저 용납하지 않고 있다.
현역에서 물러난 천문시설의 옛 원로로 현대빌딩 그늘에 가려져 천문관들이 바쁘게 왔다 갔다
하며 하늘을 살피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물건이든 현역에서 물러
나 앉은 모습은 초라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대 동쪽에는 관천대로 오르는 계단이 있으며, 처음에는 국가 사적 296호의 지위를 지니고 있
었으나 2011년 7월 국가 보물로 승진되었다.

* 관상감 관천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140-2 (율곡로 75)

▲  경우궁(景祐宮)터 표석

▲  계동궁(桂洞宮)터 표석

참고로 현대빌딩 자리에는 관상감과 휘문고등학교 외에 경우궁이 빌딩 북쪽에, 남쪽에는 계동
궁이 있었다.

경우궁은 제왕을 낳은 후궁이나 제왕의 친할머니를 봉안한 왕실의 사친묘(私親廟)로 순조(純
祖)의 생모이자 정조가 가장 사랑했던 수빈박씨(綏嬪朴氏)의 사당이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이
터진 날(양력 1884년 12월 4일), 개화당(開化黨)의 재촉으로 고종과 명성황후 등이 경복궁을
나와 경우궁에서 하루 머물렀는데, 날씨도 오지게 춥고, 사당이다 보니 편의시설도 부족해 다
음 날, 그 남쪽에 있던 계동궁으로 옮겼다. 계동궁은 흥선대원군의 장조카인 이재원(李載元)
의 집이다.

갑신정변으로 크게 고생을 했던 고종은 개화당 역적들이 침범하여 더럽혀졌다며, 1886년에 경
우궁을 인왕산 동쪽으로 옮겼으며, 1908년에 국가 제단과 사당을 정리하면서 육상궁(毓祥宮)
에 통합되었다. 경우궁의 건물 일부는 왜정 때까지 남아있었으며, 휘문고보가 이곳에 뿌리를
내리면서 경우궁과 계동궁, 관상감이 모두 학교 부지에 들어갔다.



 

♠  정독도서관(正讀圖書館)과 감사원 주변

▲  정독도서관으로 거듭난 구 경기고등학교 - 국가 등록문화재 2호

북촌한옥마을 한복판인 화동(花洞)에는 서울 사람들의 지식 쉼터인 정독도서관이 있다. 화동
은 화개동(花開洞)의 줄임말로 조선 때 과일과 화초(花草)를 관장하고 궁궐에 조달하던 장원
서(掌苑署)란 관청이 있었다.

정독도서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곳으로 1900년 10월 고종
의 칙령(勅令)으로 개교한 관립중학교(官立中學校)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원래는 김옥균(金玉均)과 서재필(徐載弼)의 집이 있었으나 갑신정변 이후, 나라에서 모두 몰
수했으며, 1900년 관립중학교 부지에 포함되면서 집은 사라졌다. 개교(開校) 때 지은 건물의
정면 삼각지붕 벽면에 태극기를 교차하여 그린 것으로 유명했으며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가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06년 관립한성고등학교로 개편되고 왜정 때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로 바뀌었으며, 본관 뒤
쪽에 있던 을사5적의 하나인 박제순(朴齊純)의 집을 땅을 바꾸는 조건으로 매입하여 평탄작업
을 벌였다. 이때 기존 3,000평에서 11,000여 평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도서관 건물로 쓰이고 있는 옛 경기고교 건물은 1938년에 지어진 것으로 경기고가 1976년 청
담동(淸潭洞)으로 둥지를 옮기자 서울시에서 그해 1월 옛 건물과 땅을 사들여 1년 간 손질을
거쳐 1977년 1월 4일 서울시립 정독도서관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현재 50여 만 권의 서적과 2.7만점의 비도서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도서관 남쪽 건물을 손
질하여 서울교육박물관으로 삼았다.

서울에서 어느 정도 공부 좀 했다는 사람은 꼭 거쳐갈 정도로 역사와 유서가 깊은 서울 제일
의 도서관으로 단골이 많으며, 평일과 휴일 가리지 않고 자리를 잡기 힘들 정도이다. 나 역시
여러 번 이곳에서 공부를 한답시고 책을 펴놓고 엉뚱하게 꿈나라만 허우적거린 얇은 추억이
있다.
다른 도서관과 달리 뜨락이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우며, 나무가 무성하여 굳이 공부나 서적 대
출이 아니더라도 산책이나 나들이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하여 북촌의 주요 꿀단지로 관광객
들의 발길이 상당해 이 땅에서 처음으로 관광지화된 도서관이기도 하다. 게다가 보호수로 지
정된 늙은 회화나무와 여러 역사의 현장들, 오래된 우물 등이 있어 옛 볼거리도 넉넉하다.
예전에는 종친부터에서 넘어온 경근당과 옥첩당도 있었으나 2013년 말에 제자리로 돌아가 지
금은 빈 자리만 있다.

관광객들이 많다 보니 시끄러워서 과연 공부와 독서가 되겠는가 싶겠지만 도서관 분위기가 고
즈넉하고 차분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도서관이니 만큼 고성방가나 독서를 방
해하는 행위는 절대 삼가기 바란다.

* 정독도서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 2 (북촌로5길 48 ☎ 02-2011-5799)

* 정독도서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늦가을도 흔쾌히 머물다 가는 정독도서관 산책로
햇님이 커튼을 치고 달님이 세상을 검게 만들어도 자신을 처절하게 불태우는
단풍나무의 배려에 나무 주변은 대낮처럼 밝을 것이다. 즉 낮과 밤을
가리지 말고 열심히 책을 보라는 자연의 뜻인 모양이다.

▲  정독도서관 정문 밑에 자리한 화기도감(花器都監)터
임진왜란 이후 조총과 화포(火砲)를 만들고자 화동에 조총청(鳥銃廳)을 설치했다.
이후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고 북벌(北伐)을 위해 조총청을 화기도감으로
개편해 육성했으나, 효종(孝宗)이 승하한 이후 완전 흐지부지되고 만다.

▲  화기도감터 표석 부근에 자리한 성삼문(成三問)집터 표석
사육신(死六臣)의 하나로 명성을 날린 성삼문의 집이 이곳에 있었다.

▲  중등교육발상지 표석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학교인 경기고 자리를 알리는 표석이다.

▲  정독도서관 정원에 있는 김옥균 집터

갑신정변을 일으켜 역적으로 몰렸던 김옥균과 홍영식, 어윤중(魚允中), 서광범(徐光範) 등은
1910년 7월 시호가 내려지면서 역적의 굴레에서 비로소 벗어났다. 이때 김옥균의 연시예식(延
諡禮式)이 옛 집터이던 한성고등학교에서 열렸는데, 김옥균의 부인인 유씨가 옛 집터를 돌려
줄 것을 청원했으나 거절당했다.

          ◀  정독도서관 회화나무
이 나무는 3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높이 11m,
둘레 3.6m의 덩치를 지니고 있다.
이곳을 거처간 건물과 인물이 한둘이 아니라
정신이 없지만 회화나무만은 그 자리를 계속
지키며 이곳에 깃든 이야기 보따리를 마음껏
풀어준다. 또한 시원한 그늘까지 드리우며 독
서를 장려한다.
(서울시 보호수 1-7호)


▲  정독도서관에 전하는 늙은 우물

정독도서관 본관(1관)과 2관 사이에는 조금은 생뚱 맞은 늙은 우물이 하나 있다. 우물이 있는
자리는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하나로 꼬질꼬질한 이름을 남긴 평제(平齊) 박제순의 저택이 있
던 곳으로 1900년 집 정원을 손질하다가 이 우물돌을 발견했다. 의외의 유물이 튀어나온 것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는지 시 1수를 짓고 돌 피부에 24자를 새겼는데, 그 내용을 풀이하면
'둥근 우물돌이다. 아마도 전조(고려) 때 것 같은데, 샘은 메어져 흔적이 없고, 다만 돌만 우
뚝하구나. 광무(光武) 4년(1900년) 겨울, 평제(박제순)가 적다'

그때도 우물돌에 낀 고색의 때가 짙었는지 막연히 고려 때 우물 같다고 그랬는데 고려까지 갈
것도 없이 조선 초나 중기에 쓰였던 것 같다. 허나 그에 대한 정보는 박제순의 시 외에는 아
무 것도 없으니 그저 딱할 따름이다.


▲  우물 피부에 새겨진 24자의 또렷한 글씨

매국노 박제순의 글씨가 자신의 피부에 박힌 것에 꽤 불쾌했던지 우물의 표정이 다소 일그러
져 보인다. 그렇다고 저것을 지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참고로 박제순의 손자인 박승유(朴勝裕, 1924~1990)는 친조부와 아버지의 더러운 매국노 행위
를 수치스럽게 여겨 20살에 몸 담고 있던 왜군에서 탈영, 광복군(光復軍)에 들어가 많은 활약
을 했다.
그 공로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아 집안의 죄업을 조금이나마 씻었으며, 음악 교수
및 성악가로도 절찬리에 활동했다.


▲  감사원 옆에 심어진 취운정(翠雲亭)터 표석

북촌의 지붕이라 할 수 있는 감사원 길가에는 취운정터를 알리는 표석이 누워있다. 이곳은 북
악산(백악산)을 등진 높은 곳으로 북촌 일대와 도심이 두 눈에 바라보여 도성(都城) 안 경승
지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다. 특히 제왕이 경복궁에서 종묘(宗廟)나 창덕궁으로 또는 그 반대
로 행차했을 때, 백성들의 번거로움을 덜하고 이목을 피하고자 인적이 드문 이곳을 많이 거쳐
갔다.

미끄러지듯 펼쳐진 도심을 정원으로 삼고 북악산을 베게로 삼은 취운정은 1870년대 중반에 민
씨 패거리의 하나인 민태호(閔台鎬, 1834~1884)가 지은 정자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開化
黨) 인물들이 여기서 자주 모임을 가지며 갑신정변을 논의했다고 전한다.
명성황후가 소환한 청나라군의 공격으로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싱겁게 막을 고하자, 창덕궁
북장문으로 쫓겨나온 왜국 공사와 왜군, 그리고 개화당 인물들은 창덕궁 후원 뒷길과 취운정
을 거쳐 경운동에 있던 왜국공사관으로 줄행랑을 쳤다.

한편 정변 소식을 들은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이 1885년 미국에서 귀국하자, 정변과 관련
된 인물로 찍혀 체포되고 말았다. 당시 포도대장(捕盜大將)이던 한규설(韓圭卨)의 도움으로
다행히 풀려나긴 했으나 대신 7년 동안 조그만 취운정에 갇혀 지내는 시련을 감당해야 했다.
1885년 12월부터 시작된 그의 연금생활은 1892년 11월에 마무리가 되었는데, 길고 긴 그 시간
동안 지루함을 달래고자 그 이름 돋는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썼다. 서유견문은 1889년에 완
성되어 1895년에 정식 출판되었다.


▲  취운정터 부근에 있는 백록정(白鹿亭)터 표석

취운정터 인근에는 도심의 경승지였던 백록정터가 있다. 백록정은 18세기에 경기감사(京畿監
司)를 지냈던 심상훈(沈相薰)이 세운 정자로 취운정과 함께 개화당 인물들이 자주 모여 정변
을 모의하던 곳이다.
빼어난 경승을 자랑했던 취운정과 백록정, 그들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개발의 칼질에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그 터를 알리는 표석만이 그들의 이름 3자를 아련히 속삭일 뿐이다.



 

♠  옛 종친부(宗親府)터 주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주변)

▲  종친부 경근당(敬近堂)과 옥첩당(玉牒堂) - 보물 2,151호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동쪽에는 2013년 11월에 문을 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하
서울관)이 자리해 있다. 지금은 현대미술을 다루는 미술관이 들어서 있지만 그곳은 원래 조선
때 관청인 종친부의 옛터이다.
종친부는 제왕의 어보(御寶)와 영정을 보관하고, 제왕 내외의 의복을 관리하며, 왕족들의 관
혼상제와 봉작(封爵), 벼슬 등의 인사문제, 기타 그들과 관련된 업무를 보던 관청이다. 처음
에는 제군부(諸君府)였으나 1433년에 종친부로 이름을 갈았으며, 1864년에는 종부시(宗簿寺)
와 합쳐졌고. 1894년에 종정부(宗正府)로 개편되었다.

1907년 순종(純宗)의 칙령(勅令)으로 황실과 국가의 주요 문서를 보관하던 규장각(奎章閣)으
로 쓰였으며, 왜정은 이곳에 있던 서적들을 경성제국대학(서울대)으로 모두 옮겼다. 그리고
이승당(貳丞堂)과 천한전(天漢殿), 아재당(我在堂) 등 상당수의 건물을 부셔버리고 종친부의
중심 건물인 경근당과 옥첩당 등 달랑 2동만 남겨 망국 황실을 제대로 욕보였다.

20세기 중반 이후, 이곳에는 국군서울병원(기무사)이 들어서 통제구역으로 꽁꽁 묶였으며, 경
근당과 옥첩당은 그런데로 자리를 유지했으나 1981년 전두환 정권이 기무사에 테니스장을 지
으면서 죄없는 그들을 추방해버렸다. 하여 가까운 정독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30년 이상 샛
방살이를 하게 된다.
기무사는 2012년 다른 곳으로 흔쾌히 이전되었고 그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들어서
게 되었는데, 미술관을 짓기에 앞서 발굴조사를 벌여 옛 종친부 건물의 주춧돌과 기초 시설이
다시금 햇살을 보게 되었다. 경근당을 중심으로 좌측에 이승당, 우측에 옥첩당이 익랑(翼廊)
으로 이어져 나란히 배치되었으며, 경근당 앞에는 돌로 다진 월대(月臺)가 있었다는 옛 기록
과 같은 형태의 기초 유구가 나온 것이다.
하여 문화재청은 정독도서관에 있는 경근당과 옥첩당을 제자리로 돌리기로 결정, 37억의 돈을
들여 기초 유구가 발견된 자리에 그대로 갖다 놓아 2013년 12월에 완성을 보았다. 그리고 국
립고궁박물관에 가있던 경근당과 옥첩당의 옛 현판도 손질을 거쳐 제자리로 돌렸다.


▲  남쪽에서 바라본 옥첩당과 경근당

서울관 동쪽 뜨락에 자리하여 경복궁을 바라보고 있는 경근당은 종친부의 중심 건물로 정면 7
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그 앞에는 마치 칼로 싹둑 다듬은 듯, 반듯하게 지어진 월
대가 1단 낮은 높이로 누워있으며, 그 옆에는 부속건물인 옥첩당이 익랑으로 연결되어 왕족과
궁궐 일을 돌보던 관청의 위엄을 보여준다.
옥첩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저들을 정독도서관에서 보던 것이 정말 엊그
제 같은데, 이렇게 제자리로 돌아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휼륭한 장식물이 되었다. 비록
그들이 이곳의 원래 주인이나 조선이 망하고 세상이 여러 번 엎어지면서 주인과 부속물이 완
전히 바뀐 것이다.

이들은 서울관 경내에 있으나 주변에 따로 담장을 두르지 않은 열린 공간이라 24시간 언제든
둘러볼 수 있다.


▲  경근당 옆에서 날개짓을 하는 옥첩당
경근당과 옥첩당은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호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으나
2021년 12월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다.

▲  종친부 이승당터 표석
경근당 좌측에 있던 이승당은 고약한 왜정에 의해 사라지고, 이곳이 속세에
완전히 해방된 2013년 이후, 표석을 세워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진
그를 붙잡는다.

▲  종친부터 소나무 - 서울시 보호수 1-31호

기무사 이전으로 옛 종친부 자리가 해방되면서 그곳에 깃든 늙은 소나무와 비술나무, 우물터
등도 모두 속세에 공개되었다.
이승당터 주변에 푸르게 솟은 소나무는 120년 정도 묵은 것으로 높이 4.5m, 나무둘레 1.9m이
다. 위치를 보아 종친부 관리들이 심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옛날에는 종친부 뜨락, 기무사 시
절에는 기무사 뜨락, 그리고 지금은 서울관 뜨락에 꾸준하게 솔내음과 그늘을 베푼다.


▲  종친부터 우물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3호

소나무 부근에 종친부터 우물이 동그랗게 누워있다. 그는 1984년 기무사 뜨락 공사 때, 지하
3m에서 발견된 것으로 왜정 때 종친부가 크게 고통을 당하는 과정에서 사라진 것으로 여겨진
다.
우물 윗도리의 화강암 2개가 전부로 그것을 현재 위치로 옮겨 붙여넣었는데, 돌 상부에 네귀
가 조출(彫出)되어 있으며 우물 내부는 자연석을 쌓아 둥글게 쌓았다. 물받이 돌로 사용되었
을 구조물 1점이 우물 안에 놓여져 있는데 그는 네 귀가 조출되어 있지 않다.
이 우물처럼 화강암 2덩이를 동그랗게 이어 붙인 우물은 창덕궁과 운현궁 이로당(二老堂) 후
원에도 있으며, 그의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개화기 이전에 조성된 우물로 여겨진다. 또한
위치한 곳이 종친부 자리라 조선시대 관청 우물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비록 우물이긴 하나 제자리를 잃었고 그 윗도리만 수습해 놓은 것이라 완전히 죽은 우물이다.
그 안에는 물 대신 잡석만 가득 들어있는데, 저리 우울하게 둘 것이 아니라 밑부분을 좀 파서
우물 티는 내게 했으면 좋겠다. 옛날처럼 물을 내지는 못해도 겉모습 정도는 챙겨 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 종친부 경근당, 옥첩당, 우물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소격동 165-10 (삼청로 30)


▲  소격동 비술나무 3형제 - 서울시 보호수 1-23, 1-24, 1-25호

서울관 서쪽에는 늙은 비술나무 3형제가 나란히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기무사 시절에는 아무
나 볼 수 없던 나무였으나 이제는 해방되어 마음껏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시대가 많이 변하긴 변했다.

비술나무란 존재가 꽤 생소한데, 그는 느릅나무과의 큰키나무로 우리나라와 우리의 옛 땅인
중원대륙과 몽골, 연해주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주로 중부 이북의 평지
와 하천 주변에 분포하고 있는데, 지리산(智異山) 등 남부지역에도 드물게 자란다. (영어식
학명은 'Ulmuspumila L.)
추위와 공해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어 가로수와 녹음수, 공원수로 드물게 쓰이며, 경북 영
양군 주남리의 비술나무 숲이 '영양 주사골 시무나무와 비술나무숲'이란 이름으로 국가 천연
기념물 476호
로 지정되어 있다.
3~4월에 잎이 나기 전에 양성화가 피며, 열매는 5~6월에 익는데, 잘 자란 나무는 높이 20m,
둘레 2m까지 성장한다. 음지나 양지에서 모두 잘 자라며, 토심이 깊고 배수가 양호한 사질양
토(沙質壤土)에서 생육하지만 건조에는 약하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느릅나무과 식물들 중에서 잎이 가장 작은 편에 속하며, 잎 뒷면에 털
이 없다. 또 나무껍질은 느릅나무와 달리 세로로 깊게 갈라지며, 어린 가지가 아주 많은 특징
을 가진다.
늦가을에 잎이 떨어지고 나면 가지가 회백색으로 변하며, 회백색이 된 가지는 약효가 있어 한
방에서 통증, 대소변불통 등의 치료제로 쓰인다. 그리고 수피(樹皮) 및 근피(根皮)는 유백피(
楡白皮), 잎은 유엽(楡葉), 꽃은 유화(楡花)라 하여 약용으로 쓰인다.
유백피는 보통 나무껍질을 벗기고 속껍질을 잘 말린 뒤 달여 복용하는데, 이수(利水), 소종(
消腫), 통림(通淋)에 효능이 있으며, 유엽은 석림(石淋)을 치료하는데 쓰이고, 유화는 소아의
간질(癎疾), 소변불리(小便不利), 상열(傷熱) 치료제로도 쓰인다. 비술나무의 어린잎은 국으
로 끓여 먹기도 한다. 목재는 건축재나 가구재, 선박재 등으로 이용된다. (비술나무는 함경북
도 방언으로 다른 이름은 비슬나무임)

이곳 비술나무 3형제는 서로가 너무 붙어있어 애정이 돈독한 형제처럼 보이는데, 1996년 8월
16일에 모두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그때 추정 나이가 15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170여
년 정도 된다. 높이는 17m, 18m, 19m, 나무둘레는 190cm, 240cm, 210cm으로 정자나무 용으로
심어진 듯 싶다.

이곳까지 오니 시간은 어느덧 18시, 햇님은 퇴근을 서두르고 땅꺼미는 서서히 짙어진다. 햇님
의 퇴근을 붙잡으며 더 출사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자칫 햇님의 노여움을 살 수 있어 지구
의 안전을 장담하기 어렵다. 햇님이 수틀리면 지구 하나 사라지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래서
그를 고이 보내주고 나도 북촌 산책을 마무리 지으며 저녁을 먹으러 갔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에 벌인 북촌 산책은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남쪽에서 바라본 소격동 비술나무 3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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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부드러운 동쪽 지붕, 아차산 봄나들이 <서울둘레길2코스, 아차산4보루, 3보루, 2보루, 1보루>

아차산 보루 나들이 (4보루, 3보루, 6보루, 2보루, 1보루)



' 아차산 봄나들이 (아차산 보루 식구들) '

아차산 정상(아차산3보루)

▲  아차산 정상부 (아차산3보루)

아차산4보루 아차산2보루

▲  아차산4보루

▲  아차산2보루

 



 

아차산(峨嵯山, 295.7m)은 수도권 고구려(高句麗) 유적의 대표 성지(聖地)이자 서울의 부
드러운 동쪽 지붕이다. 내 즐겨찾기 뫼의 일원으로 아침과 낮, 그리고 일몰 이후(야간 등
산)까지 고루고루 찾아와 변치 않은 마음을 비추고 있는데, 이미 200번 넘게 찾은 아차산
이지만 갈 때마다 늘 마음이 설레고 새롭다.

기나긴 겨울 제국이 드디어 저물고 봄의 해방군이 천하를 해방시키자 아차산의 봄 풍경이
문득 그리워 간만에 그의 품을 찾았다. 이번 나들이는 구의동(九宜洞) 기원정사에서 시작
을 했는데, 분량상 본글에서는 아차산4보루 이후 구간만 다루도록 하겠다.
(이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고구려 보루의 정석, 아차산4보루(堡壘) - 사적 455호

▲  아차산4보루 남쪽 2중치와 동남쪽 성곽

아차산4보루는 용마산(龍馬山)과 망우산(忘憂山)을 제외한 아차산 식구 보루 중 가장 북쪽에
자리해 있다. 잃어버린 땅을 제외한 우리나라(남한)의 고구려 성곽 유적 중 건물터와 성벽의
구조가 제대로 밝혀진 최초의 현장으로 의미가 아주 남다른 곳인데, 아차산~용마산~망우산 보
루 중 거의 유일하게 성벽의 흔적이 조금 남아있었다.
복원 이전 성벽의 최대 잔존 높이는 1.8m로 남벽과 동벽은 잘 다듬은 성돌을 이용한 탓에 그
런데로 남아있었으나 북벽과 서벽은 훼손이 심해 남아있던 높이가 0.8m를 넘지 못했으며, 부
정형의 석재를 사용해 조잡하게 축조되었다.


▲  들여쌓기의 정석을 보여주는 4보루 남쪽 2중치

구리시가 4보루에 숨겨진 옛날 이야기를 풀고자 1997년부터 문화재청과 경기도의 도움을 받아
1998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였다. 하여 온돌과 배수로, 저수조 등을 갖춘 건물터를 확인했으며,
'後部○兄'이라 쓰인 토기가 나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반에 닦여진 보루임이 명백해졌다. 여기서 후부(後部)는 고구려 5부의 하나이며, '○兄'은
고구려 관등의 하나로 여겨진다. 고구려에는 '형(兄)'자가 들어가는 관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2007년에 다시 조사를 벌여 숨겨진 치성을 발견했고, 보루 형태와 성벽 축성 방식을 확
인하면서 복원 가능성이 높아졌다. 4보루 사이로 서울시와 구리시의 경계선이 무심히 지나가
절반은 서울시, 나머지 절반은 구리시 영역인데, 구리시가 2008년부터 복원을 적극 추진하여
2년의 공사 끝에 2010년 12월 24일 복원 준공식을 가졌다. 아차산일대 보루 중 처음으로 복원
된 행운의 보루인 것이다. (나중에 시루봉 보루도 복원되었음)

보루 복원을 위해 보루터에서 나온 늙은 성돌을 주로 사용했으나 수량이 적어서 부득이 새 성
돌로 모자란 부분을 때웠다. 그러다보니 고색이 짙은 옛 돌과 하얀 피부의 새 돌이 어색하게
조화를 이룬다. 허나 이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발굴조사를 토대로 고구려 축성 양식에 맞춰
왕년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했고, 건물터와 온돌 유구 등은 보존을 위해 모두 흙속에 묻었다.
그리고 보루 중앙 쪽에 탐방로를 내고 건물터 쪽에는 금줄을 쳤으며, 보루 북쪽과 남쪽에 보
루로 오르는 계단을 냈다.

보루의 둘레는 약 249m, 성벽 높이는 최소 4m 이상이다. 허나 탐방객의 안전을 고려하여 2.5~
3.1m 높이로 크게 축소 재현하여 마치 역사 왜곡의 현장 같은 아쉬움을 준다. 지형의 경사면
을 이용해 바깥 쪽에 성벽을 쌓고, 안쪽 경사면에는 뒷채움돌과 흙으로 다졌는데, 방어력을
높이고자 동/서/남/북에 5개의 치성(雉城, 치)을 두었다.
치성(치)은 성곽 방어를 위해 앞쪽으로 다소 튀어나온 성벽으로 고구려표 축성 양식의 하나이
다. 그 양식은 백제와 신라, 고려, 조선은 물론 왜열도와 서토(중원대륙)까지 전해져 절찬리
에 쓰였다.


▲  4보루로 올라가는 남쪽 계단

▲  아차산4보루의 독특한 구조물, 남쪽 2중치

4보루 남쪽에는 2중 구조를 지닌 독특한 치가 남쪽으로 길게 나와있다. 그는 전체 길이 13.2m
로 중간에 목책(木柵)이 둘러진 2.5m 정도 들어간 공간이 있는데, 그것을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 치로 구분된다.
뚫린 공간에는 치의 성벽에 잇대어 4개의 후대 석축단이 축조되었고, 그 좌우로 목책을 세웠
는데, 보루의 출입구로 여겨진다. 이런 구조는 용마산2보루와 개발의 칼질로 허무하게 사라진
구의동보루에서도 일부 확인되고 있으나 사실상 아차산4보루가 유일하며, 고구려 보루의 독특
한 구조를 보여줌과 동시에 보루의 끝이 들여쌓기로 차곡차곡 닦여져 안정감을 준다.


▲  4보루 서남쪽 치

보루 내부에서는 건물터 7곳, 온돌 유구 2기, 배수로, 저수조 흔적, 치성 5곳이 발견되었다.
여기서는 항아리와 글씨가 새겨진 토기, 시루, 투구, 찰갑(가벼운 갑옷), 창, 도끼, 화살촉,
낫, 쇠스랑, 말에 물리는 재갈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와 아차산3보루와 함께 아차산의
병참기지로 추정된다.


▲  한강을 향해 약간 튀어나온 4보루 동쪽 치

4보루로 올라서니 그런데로 너른 보루 내부가 펼쳐진다. 이곳에는 군사들이 머물던 숙소와 창
고, 방어시설 등이 있었는데,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 형님의 꾸준한 괴롭힘 앞에
모두 휩쓸려 사라지고 터만 아련히 남아 사람들의 상상력을 살찌워준다.
이곳을 재현한 모형이 서울대박물관에 있으나 이 역시 100% 정답은 아니니 고구려 건축 양식
에 맞춰서 적당하게 4보루의 모습을 상상해보기 바란다. 이것이 4보루가 우리에게 주는 숙제
이다.


▲  4보루 1호 건물터

4보루의 7개 건물터 중 남쪽에 있는 1호 건물터가 가장 높다. 여기서는 온돌 유구 2기와 주춧
돌이 나왔는데, 온돌 아궁이 주변에서는 글씨가 새겨진 토기, 철제투구 등이 나와 4보루를 관
리하던 높은 장수나 지휘관의 숙소로 여겨진다.
1호 건물터 주변에는 6호 건물터와 7호 건물터, 2호 건물터 등이 있으며, 3호 건물터 밑에서
는 'ㅡ'자형 온돌유구 2기가 나왔다. 층위(層位)로 보아 건물터보다 먼저 조성되었음이 밝혀
져 4보루 내부 구조물이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이 결코 아님을 보여준다. 보루를 먼저 쌓고
나중에 온돌과 내부 시설을 얹혔던 것이다.


▲  4보루 내부 (북쪽 방향)

▲  4보루 내부 (남쪽 방향)

탐방로 좌우로 잔디와 흙이 두툼히 덮여진 건물터와 저수시설 유적이 있고, 키가 작은 금줄을
둘러놓아 고구려의 거룩한 흔적을 지키고 있다. 금줄의 의미처럼 줄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되나
지키는 사람이 딱히 없다 보니 안에 버젓이 들어가 자리를 펴고 쉬거나 음식을 처묵처묵하는
골 빈 작자들이 적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  4보루 저수시설터

4보루에서는 물을 저장하는 2개의 저수조(貯水槽) 흔적이 나왔다. 이들은 깊이 3.5m 정도 수
직으로 암반 흙을 파내고 바닥과 벽에 입자가 고운 회색 뻘흙을 발라 물이 새지 못하도록 방
수처리를 한 것으로 규모는 '430x300x깊이230cm','350x310x깊이240cm'이다.


▲  한강을 향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4보루 동북쪽 치
치 너머로 한강과 구리, 남양주, 하남, 강동구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4보루는 북쪽을 제외하고 동/서/남이 확 트여있어 조망이 아주 일품이다. 여기서는 광진구와
성동구, 동대문구, 종로구, 중구, 송파구, 강동구, 한강은 물론 하남시와 구리시, 남양주시
지역이 훤히 시야에 들어오며, 해돋이와 일몰을 모두 맞이할 수 있어 해돋이 수요와 일몰 수
요, 야간 등산 수요가 많다. (1월 1일에는 새해 해돋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정말 미어터짐)
게다가 아차산과 용마~망우산을 이어주는 매우 중요한 위치라 아차산 주능선의 목구멍 같은
곳이다. 그러니 고구려가 이곳에 큰 보루를 쌓아 무척 애지중지했던 것이다.


▲  4보루 동북쪽 치에서 바라본 천하
한강과 강동구, 하남시 지역

▲  4보루 북쪽 치

▲  4보루 서쪽 성곽

▲  4보루 북쪽 치

4보루 바깥에는 우회 산길이 있다. 4보루 속으로 들어가기 싫다면 그 우회길을 이용하면 되나
아차산에 왔다면 4보루는 무조건 찍고 가는 것이 이곳의 관례처럼 되어있다. 그러다보니 여기
서 휴식을 취하거나 간식을 먹는 이들도 적지 않다. (특히 저녁에는 이곳에 자리를 잡고 단체
로 먹거리를 섭취하는 등산 동호회 사람들이 많음) 휴식과 음식 섭취는 좋으나 쓰레기를 버리
거나 금줄을 넘어가는 행위는 하지 말자.

아차산4보루를 비롯한 아차산 보루 6곳과 용마산 보루 7곳, 망우산1보루, 시루봉 보루, 홍련
봉 보루 2곳은 한 덩어리로 '아차산일대 보루군'이란 이름으로 사적 455호로 지정되었다.

고구려(고구리)는 경기도와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요동반도, 만주(길림성, 흑룡강성) 일대
, 연해주, 하북성, 산서성(山西省), 내몽고(內蒙古) 일대를 차지한 북쪽의 크나큰 나라였고,
백제(百濟)는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제주도, 왜열도(倭列島), 산동반도, 강남과 오월(吳
越) 등 중원대륙의 무수한 해안 지역, 월남 일대까지 장악한 남쪽의 크나큰 나라였다.
그 두 나라가 크게 충돌한 곳의 하나가 바로 한강 유역이며, 한강 남쪽의 송파/강동구 지역에
는 백제의 국도(國都)였던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또는 그에 버금가는 주요 도시가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는 강력한 라이벌인 백제를 견제하며 한강 유역을 지키고 필요에 따라 백제 본
토로 바로 넘어갈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인 아차산~용마산~망우산 일대에 보루 등의 군사시설
을 주렁주렁 달아 애지중지했던 것이다.

이들 보루는 6세기 중반 이후 신라가 차지하여 고구려 견제용으로 활용하다가 8세기 이후 전
략적인 가치가 상실되면서 모두 버려지게 된다. 그 시절 신라는 북쪽으로 최소 요동반도까지
차지했으며, 산동반도와 강남, 오월 지역에도 적지 않은 지분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 아차산4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4동,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52-2



 

♠  아차산 정상과 3보루

▲  소나무가 무성한 아차산 주능선길 (4보루에서 정상 방향)

아차산4보루에서 낙타고개(아차산성 북쪽)까지는 완만한 능선길의 연속이다. 오르막 길도 일
부 있으나 거의 내리막 일색이라 천하에서 가장 부드러운 능선길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구려
가 심어놓은 보루(4보루, 3보루, 5보루, 6보루, 1보루)들이 주렁주렁 깃들여져 멀게만 느껴지
던 고구려를 직접 체험하게 해준다. 또한 좌우로 시야가 확 트여 조망이 아주 예술이며 여기
서 바라보는 야경 맛과 일출, 일몰 풍경이 참 진국이다.

이처럼 길이 좋고 조망 또한 일품이니 새해 해돋이와 아침, 낮, 일몰 직후 야간 등산까지 상
당한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하여 너무 깊은 밤(23시 이후)이 아닌 이상은 늘 사람들이 있으
며 서울에서 남산(南山), 인왕산(仁王山) 다음으로 저녁 수요가 많은 뫼가 아차산~용마산일
것이다. (나도 아차산 야간 등산을 100번 넘게 했음)
또한 천하 둘레길의 대표 성지로 격하게 추앙받는 서울둘레길2코스(화랑대역↔광나루역, 12.3
km)도 이곳을 흠모하며 아차산 주능선을 타고 남북으로 흘러간다.

▲  아차산3보루 북쪽 오르막길

▲  아차산 정상을 알리는 나무 기둥


▲  아차산의 지붕, 아차산3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 정상(295.7m)에 깃든 아차산3보루는 성벽 둘레 약 450m, 내부면적 약 6,500㎡로 정상
부에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어 아차산 보루 중 가장 규모가 크다. 2005년에 보루 일부를 들추
면서 배수로와 건물터, 기단, 성벽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디딜방아의 불씨로 여겨지는 존재가
나와 이곳이 아차산의 식량 창고로 추정된다.
허나 겨우 보루터의 일부만 꺼낸 상태라 나머지를 모두 들춰야만 이곳에 정확한 기능과 숨겨
진 이야기를 캐낼 수 있을 것이다.


▲  대머리처럼 허전한 아차산3보루

3보루 외곽은 나무가 무성하나 3보루 안쪽은 땅에 바짝 붙은 잡초와 탈모된 흔적처럼 풀이 벗
겨진 흙길, 그리고 잘려진 나무 밑둥이 대부분을 이루어 말끔하면서도 뭔가 허전한 기분이다.
이는 보루터 보존을 위해 그렇게 밀어버린 것이다.
보루터 한복판으로 탐방로를 내었고, 그 좌우로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낮은 금줄을 설치
했는데, 지키는 이가 없다 보니 금줄을 넘는 이가 종종 눈에 띈다. 이곳은 아차산 정상이긴
하지만 완만한 능선이라 정상 같은 느낌은 별로 나지 않으며, 3보루 동쪽에 우회길이 있다.
 
* 아차산3보루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산49-1,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  아차산3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①

아차산4보루 못지않은 일품 조망을 보여주는 3보루, 한강(아리수)을 중심으로 왼쪽에 구리시
와 남양주시(도농, 다산, 덕소) 지역이 펼쳐져 있고, 오른쪽에는 강동구와 하남시가 무성한
아파트숲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누가 아파트의 농도가 진한지 경쟁하듯이 말이다.


▲  아차산3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②
한강과 강동구, 하남시, 그리고 남한산과 검단산 등

▲  아차산3보루에서 수습된 보루터 성돌들
이곳에 있었을 3보루의 생전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 상상의 나래를 한번
살찌워보자. 그것이 아차산이 우리에게 건네는 영원한 숙제이다.

▲  바위들이 울퉁불퉁 펼쳐진 아차산 주능선길
(아차산3보루에서 아차산5보루 방향)

▲  아차산 주능선길(3보루~5보루 구간)에서 바라본 천하 ①
광진구와 성동구, 한강, 송파구, 강남구 등 (멀리 보이는 산은 관악산)

▲  아차산 주능선길(3보루~5보루 구간)에서 바라본 천하 ②
용마산 너머로 멀리 남산서울타워를 지닌 남산과 인왕산(仁王山),
북악산(백악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아차산 주능선길(3보루~5보루 구간)에서 바라본 천하 ③
가운데 움푹 들어간 부분이 아차산의 일품 계곡으로 꼽히는 긴고랑계곡이다.
그 오른쪽 뫼는 용마산, 왼쪽은 아차산이며, 그들 너머로 광진구와
성동구, 동대문구 지역이 흐릿하게 두 망막에 박힌다.



 

♠  아차산 마무리 (6보루, 2보루, 1보루)

▲  아차산6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3보루에서 주능선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보면 '범굴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살짝 손짓
한다. 여기서 주능선을 버리고 그 손짓을 따라가면 바로 봉긋 솟은 언덕이 나타나는데, 그는
아차산 주능선 바로 동쪽으로 그 언덕에 아차산 보루의 막내인 6보루가 깃들여져 있다.

6보루는 2005년에 3보루 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사람이 우연히 발견했다. 생김새가 마치 옛 무
덤이나 보루터처럼 생겨서 눈썰미가 좀 있다면 정말 의심을 가져볼만한 존재로 아차산 보루의
발견 순서대로(남쪽을 기준으로 함) 아차산6보루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추정 둘레는 약 80m 정도로 아직 발굴조사는 벌이지 않았으며, 여기서 발견된 옛 불씨는 흙을
덮어서 보존하고 있다. 그가 보루인지 다른 존재인지는 아차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생김
새가 자연산 같지 않아서 속히 조사를 벌여 이곳의 정체를 밝혀주었으면 좋겠다. 6보루를 처
음 본 것이 2013년인데 아직까지도 조사를 받지 못했으니 아차산 보루 유적과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크게 떨어진 것 같아 실로 우려스럽다.


▲  아차산2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6보루에서 범굴사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소나무가 우거진 북쪽 봉우리(해발 276.2m)가
있다. 봉우리 주변에는 금줄이 둘러져 있고, 안내문 1개가 나그네들의 관심을 호소하고 있는
데, 금줄 너머 봉우리에 고구려가 심어놓은 아차산2보루가 깃들여져 있다.

이곳은 아차산 주능선에서 동쪽으로 갈라져 나온 산줄기로 봉우리를 활용해 보루를 다졌는데,
둘레 50m 정도의 조그만 보루이다. 그 보루는 영원한 분해자인 자연과 세월에 의해 모두 와해
되고 돌탑 남쪽에 치로 여겨지는 성벽 3단이 바깥에 노출되어 분해자의 압박을 견디다가 보존
을 위해 흙으로 덮어 묻었으며, 그 주위로 금줄을 둘러 사람들의 통행을 막는다.

보루터 주변에서는 고구려 토기인 몸통긴항아리의 조각들이 발견되었고, 보루터 복판에 돌탑
이 있는데, 지나가는 이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모이고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돌탑
을 이루고 있는 돌 상당수는 2보루터 성돌로 보루를 이루던 돌이 돌탑의 일원으로 새로 거듭
난 것이다.

2보루터는 인근 6보루터와 비슷하게 숲이 자리해 있다. 2보루터에 깃든 고구려의 장대한 기상
과 이곳의 유구한 역사를 무럭무럭 먹고 자란 탓일까? 소나무가 숲을 이루며 대머리처럼 허전
한 2보루터의 새로운 녹색 머리칼로 그 공간을 보듬는다.


▲  아차산2보루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①
한강과 구리, 남양주, 강동구, 하남 지역


아차산2보루 옆에는 동쪽을 향해 고개를 내민 조망 좋은 곳이 있다. 이곳은 범굴사(대성암)로
인도하는 너럭바위 윗쪽으로 여기서는 한강을 비롯해 구리시, 남양주, 하남, 강동구, 송파구,
성남 지역과 아차산성(阿且山城) 등이 훤히 두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조망 범위는 앞서 4보루, 3보루와 많이 비슷하여 감흥은 그리 크지 않다. 비슷한 조망
이 4보루부터 계속 따라왔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서쪽과 북쪽이 빠지고 남쪽으로 아
차산성과 송파구, 성남 지역이 조망권에 추가된 정도..


▲  아차산2보루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워커힐 뒷통수(골프장)가 바로 앞에 보이고 푸르른 한강 너머로 강동구와
하남시, 남한산(南漢山), 검단산, 예봉산~운길산 산줄기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온다.

▲  아차산2보루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정면에 솟은 산에 아차산성이 안겨져 있다. 그 너머로 강동구와 송파구,
멀리 성남 지역까지 두 눈에 들어온다.

▲  서울 속의 작은 민통선, 아차산성 - 사적 234호 (확대해서 바라본 모습)

아차산은 200번이 넘게 인연을 지었으나 정작 아차산성 내부는 아직까지 발을 들이지 못했다.
아차산성은 아직까지도 금지된 구역으로 몇 년 전부터 광진구청에서 저곳을 해방시킬 계획을
세웠고, 꾸준히 개방 떡밥이 나오고는 있으나 아직까지도 희망고문에 머물러 있다. 아차산성
의 적지 않은 땅을 가진 워커힐이 소국적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아차산성이 휴전선 등 예민한 곳에 있거나 군부대에 있다면 금지된 구역이 이해가 가나 저곳
은 그런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 누가 들으면 아차산성이 휴전선 부근에 있는 걸로 알겠다.
속히 속세에 개방되어 자유롭게 발자국을 찍었으면 좋겠다.


▲  아차산1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2보루에서 다시 주능선으로 나와 남쪽으로 하염없이 내려가면 두툼히 살이 오른 봉우리
가 나타난다. 그가 아차산1보루이다. (중간에 아차산5보루가 있으나 여기서는 통과함)
1보루가 넘버원 1보루가 된 것은 아차산 보루 식구 중 가장 잘나서가 아니다. 남쪽을 기준으
로 발견된 순서대로 정리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해발 250m에 자리한 1보루는 봉우리를 활용해 닦은 것으로 1994년 발굴조사 때 고구려 토기가
여럿 나왔다. 동쪽과 남쪽에서 보루 성벽이 확인되었는데, 보루의 정체가 알려지기 훨씬 이전
부터 보루의 남쪽 성벽 흔적을 밀어버리고 산길을 냈으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는 보루 주변
에 목책을 둘러 접근을 통제하고 그 옆구리에 우회길을 내었다. 그러다가 2015년 이후로 다시
보루를 개방했다.

아차산 보루 중 가장 남쪽으로(홍련봉 보루 제외) 5보루와 함께 아차산성과 아차산 정상(3보
루)을 이어주었으며, 동쪽과 남쪽, 서쪽이 확 트여있어 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다.


▲  작은 봉우리 같은 아차산1보루

이곳에 들어앉아 천하를 굽어봤을 1보루는 장대한 세월의 매서운 흐름과 대자연의 오랜 괴롭
힘 앞에 완전히 녹아내리고 그 터만 겨우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알려줄 따름이다.
보루의 구체적인 생김새는 아직 파악되지 못했으나 고구려의 축성 양식과 복원된 4보루를 참
고해 보루의 모습과 거기서 머물던 고구려 군사의 모습을 머리 속에 한번 그려보는 것도 의미
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폐허의 현장이고, 그들의 모습을 남긴 뚜렷한 사진이나 기록도 없으
니까 말이다.

* 아차산1보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143-127


▲  아차산1보루의 남쪽 끝

아차산1보루를 둘러보고 낙타고개와 영화사(永華寺)를 거쳐 속세로 내려왔다. 사진에 담는 것
은 1보루에서 완전히 마무리를 지어 더 이상 다룰 것은 없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복습한 아차산 나들이는 기분 좋게 마무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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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상큼한 남쪽 지붕, 삼성산~호암산~목골산 <관악산호수공원, 성주암, 서울둘레길5코스, 독산자락길>

삼성산, 호암산, 목골산 초여름 나들이



' 삼성산, 호암산, 목골산 초여름 나들이 '

호암산
▲  호암산

삼성산 성주암 호암산 북쪽 능선길

▲  삼성산 성주암

▲  호암산 북쪽 능선길

 



 

여름 제국이 서서히 고개를 쳐들던 6월의 끝 무렵, 내 즐겨찾기 뫼의 하나인 호암산(虎
巖山, 393m)을 찾았다.
툭하면 찾아오는 호암산 앓이도 잠시 해소하고 호암산과 삼성산(三聖山)에 아직까지 살
아남아 내 속을 긁는 몇 남지 않은 미답처들도 싹 정리하고자 찾은 것으로 햇님의 고개
가 서서히 꺾이던 15시에 서울대 정류장에서 길을 시작했다.
(산행시간 약 3시간, 산행거리 약 9~10km)



 

♠  관악산호수공원과 삼성산 성주암(聖主庵)

▲  삼성산과 관악산으로 인도하는 신림로 숲길

삼성산과 관악산(冠岳山, 632m)의 주요 북쪽 기점인 서울대 정류장에서 짙은 숲에 감싸인 도
로를 따라 15분 정도 가면 관악산호수공원이 잘빠진 호수와 자하정, 귀여운 석구상을 내밀며
마중을 한다.
오로지 성주암 등의 미답처(未踏處)에 정신이 팔려 그냥 넘어가려고 했으나 고양이가 생선가
게를 그냥 못 지나친다고 못이긴 척 잠시 발을 들였는데, 이곳은 서울대에서 관악산, 삼성산
으로 오를 때 꼭 거쳐가는 곳으로 바쁘면 돌아가라는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잠깐 들린다고
큰일 날 것은 없다.


▲  관악산 호수공원의 귀염둥이, 석구상(石狗像)
관악산 호수공원을 조성하면서 장만한 것으로 호암산 한우물 부근에 있는
석구상을 축소, 재현했다. 그런데 기분 탓일까? 실물보다는 이곳
석구상이 훨씬 귀엽게 다가온다.

▲  관악산 호수공원의 이름값을 하는 호수

지금은 상큼한 호수공원으로 있지만 예전에는 계곡물을 이용한 수영장이 있었다. 그 수영장은
문을 닫았으나 오랫동안 방치되어 흉물스럽게 있던 것을 1996년 12월부터 거의 1년에 걸쳐 손
질을 하여 1997년 12월 자연과 어우러진 호수공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공원에는 그 이름값을 하는 호수와 자하정, 석구상(1997년 11월 제작됨), 나무다리 2개, 분수
대, 쉼터 등이 있으며, 소나무 외 18종 9,180주, 초화류 수련 등 3,190본을 심어 아름답게 다
듬었다. 이렇게 싱그러운 공간이건만 바람직하지 않게도 옥의 티가 하나 있어 심히 불편함을
준다. 바로 왜정(倭政)과 독재 세력에 철저히 빌붙어 영혼을 팔고 부귀영달을 누렸던 서정주(
1915~2000)의 시비(詩碑)가 있다는 것이다.

서정주는 관악구 남현동(南峴洞)에서 30년이나 서식하여 관악구와도 인연이 깊다. 게다가 20
세기 주요 시인으로 쓸데없이 꼽히다보니 관악구청이 그의 그릇된 점을 살피지도 않고 문학적
업적만 내세우며 이렇게 개념도 없이 시비를 세운 것이다. 또한 서울시는 그보다 한술 더 떠
그의 남현동 2층 양옥을 인수해 내부 손질을 거쳐 그의 유품과 문학작품을 취급하는 기념관으
로 세상에 내놓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오히려 때려 부시고 연못을 파야 될 판에<예로부터 역적(逆賊)의 집은 말끔히 부시고 그 자리
에 연못을 팠음> 관악구와 서울시가 앞장을 서서 그의 흔적을 붙잡아 찬양하고 있으니 행정관
청 철밥통들의 역사의식과 개념들이 이렇게도 없다. <관악구는 낙성대(落星垈) 강감찬 장군의
영정이 도난을 당하자 이것도 쉬쉬하여 크게 욕을 먹은 화려한 전력이 있음>


▲  오늘도 평화로운 호수

호수는 거의 생태연못 수준으로 수초(水草)가 많고 오리와 물고기들이 유유자적 거닐고 있어
평화롭고 고요한 풍경, 그 자체이다. 세상이 시끄럽든 말든 여기서는 그저 다른 세상의 이야
기 같다. 섬 복판에는 동그란 섬까지 띄워놓아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숲 너머로 서울대 농업
생명과학대학 건물이 고개를 내밀며 이곳의 경치를 시샘한다.

    ◀  연못에 두둥실 띄워진 동그란 섬
섬에는 소나무 1그루가 바깥 세상을 거부하며
고고하게 솟아있다. 인간의 손길이 거의 미치
지 않는 곳이라 마음껏 나래를 펼치며 그 섬의
주인 노릇을 한다.

◀  호수공원의 화려한 입술, 자하정(紫霞亭)
1997년에 지어진 1칸짜리 팔작지붕 정자로 살
짝 들려진 처마의 선이 꽤 경쾌하고 아름답다.


▲  북서쪽에서 바라본 자하정과 호수, 그리고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  호수를 순찰하는 압공(鴨公, 오리)의 위엄
오늘도 저들이 있기에 호수는 평안하다.

▲  성주암을 알리는 표석
관악산 호수공원을 둘러보고 성주암으로 이동했다. 공원에서 성주암까지 10분
거리로 관악산119산악구조대를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성주암이 활짝 모습을 비춘다.

▲  성주암 대웅전(大雄殿)

삼성산 북쪽 끝자락이자 돌산 동쪽에 성주암(聖住庵)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원
효대사(元曉大師)가 677년에 창건했다고 하는데, 그가 절을 짓고 머물렀다고 해서 성주암이라
했다고 전한다. 즉 원효대사를 성스러운 존재로 높인 것이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
은 아쉽게도 없는 실정이다.

14세기에 각진국사(覺眞國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는데 태정원년<泰定 元年, 원나라(몽골) 태
정제의 연호, 1324년>이라 쓰인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이때 창건되거나 중창된 것으로 여겨진
다. 그것이 성주암에서 나온 것 중 가장 늙은 유물이다.
조선 성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삼막사(三幕寺), 안흥사<安興
寺, 염불사>, 망일사<望日寺, 망월암>와 더불어 관악산의 4개 사찰로 나오며 성주사(聖住寺)
로 기록되어 있다. (삼성산을 관악산의 일원으로 보기도 함) 또한 조선 후기에 제작된 '시흥
읍지(始興邑誌)'에는 삼막사, 호압사(虎壓寺), 염불사(念佛寺)와 함께 4개 절의 하나로 나와
있어 삼성산 일대에서 제법 인지도가 있던 절임을 알려준다.
1883년 금화형기가 만든 현왕탱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으며 오래된 석탑도 1기 있었으나 왜정
(倭政) 때 왜인이 빼돌렸다.

1897년 만월(滿月)이 폐허가 된 절터에 작은 암자를 지어 법등(法燈)을 다시 켰고 1966년 혜
담(慧潭)이 중창을 했다. 1971년 화강석을 이용해 대방(大房)을 지었고 1981년 종연(宗演)이
3년에 걸쳐 대웅전을 지었으나 1997년 10월 화재로 대웅전 등 목조 건물이 모두 날라가고 말
았다. 이때 서울과 경기도의 40여 사찰이 불의의 방화를 당했다.
이후 주지 재홍(才弘)의 지도 아래 승려와 신도들이 임시 천막을 치고 3년에 걸쳐 불사(佛事)
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으며, 2006년 12월 관악구 전통사찰로 지정을 받았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대방 등 4~5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늙은 유물은 커녕 고색도 다
말라버려 오랜 역사를 무색하게 한다. 절은 북/서/남쪽은 산으로 막혀있고 오로지 동쪽만 확
트여있어 관악산이 훤히 바라보이며 마치 알둥지처럼 자리 또한 포근하다. 게다가 절이 암자
에 걸맞게 아담하여 두 눈에 쏙 넣고 살피기에 별 부담이 없으며 대방 뒤쪽으로 돌산과 호암
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다.

* 성주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198 (신림로 15-250, ☎ 02-877-7180)

▲  성주암 대방(大房)
종무소와 선방, 요사(寮舍), 공양간의 역할을
하는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그 뒤쪽에
호암산으로 넘어가는 산길이 있다.

▲  11면 관세음보살상
큰 얼굴 하나에 작은 얼굴 10개 등, 11개의
얼굴을 지닌 관세음보살이 정병(政柄)을
쥐어들며 관악산을 지그시 바라본다.


▲  대웅전 석가3존상과 화려한 닫집
마침 유가족들이 49재 중이라 들어가지는 못하고 바깥에서 살짝 담았다.

▲  성주암에서 바라본 관악산의 위엄
성주암은 관악산 조망에 아주 최적화된 곳이다. 바로 정면에 관악산이
마치 풍경화처럼 펼쳐져 있으니 말이다.

▲  대웅전 뒤쪽 바위에 주렁주렁 달린 칠성탱과 산신탱, 약사여래상

성주암은 다른 절과 달리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머금은 그 흔한
삼성각(三聖閣)이나 산신각 등의 건물이 없고, 대신 대웅전 뒤쪽의 그늘진 암벽을 활용해 칠
성탱과 산신탱을 두어 노천 삼성각으로 삼았다.
그렇다고 바위 피부를 무작정 깎아서 만든 것은 아니며 별도의 돌판에 그들을 새겨 벼랑 앞에
두었다. 그리고 산신탱 위쪽 벼랑에는 석조(石造) 약사여래좌상을 두었는데 그가 경내에서 가
장 높은 곳을 장식하고 있다.

▲  하얀 피부의 석조 칠성탱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피부가 매끈하다.

▲  산신 가족이 담긴 석조 산신탱(밑)과
석조 약사여래좌상(위쪽)


▲  5층석탑과 마니차

성주암은 바로 눈에 보이는 대웅전 주변이 전부가 아니다. 대웅전 뒤쪽 벼랑에 칠성탱과 산신
탱 등이 있으며, 대방 뒤쪽으로 가면 8각으로 다듬은 참한 모습의 석탑과 그를 반원(半圓) 모
양으로 둘러싼 마니차가 있기 때문이다.

5층석탑은 성주암의 유일한 탑으로 8각의 바닥돌과 연꽃무늬와 팔부중상(八部衆像) 등이 새겨
진 기단석(基壇石) 위에 8각의 탑신(塔身)을 세우고 그 위를 보륜(寶輪) 등의 머리장식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탑 뒤에는 '마니차'란 동그란 돌덩어리가 주렁주렁 달려있는데 그는 티벳불교에서 전래된 것
으로 윤장대(輪藏臺)와 비슷한 것인데, 손으로 저것을 돌리며 염불을 하거나 소망을 빌면 경
전을 모두 이해한 것과 같다고 하며 소망도 같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옛날에는 글자를 모르는
까막눈이 많다보니 저런 것을 이용해 영업을 한 것이다.


▲  티벳 글자가 새겨진 마니차

마니차 밑에 있는 검은 피부의 돌판에는 1997년 이후 절 중창에 도움을 준 이들의 이름이 빼
곡히 적혀있다. 저들이 있기에 성주암이 다시 일어선 것이다. 그러니 너무 외형 확장과 재물
에 욕심내지 말고 오직 사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여 속세(俗世)를 위해 사는 아름다운 절이
되기를 바라면서 성주암과의 첫 인연을 정리한다.



 

♠  호암산과 서울둘레길5코스 거닐기

▲  성주암에서 호암산으로 인도하는 산길

5층석탑을 지나면 돌산, 호암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손짓을 한다. 그 길을 오르면 돌산 북쪽
으로 천하 둘레길의 대표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서울둘레길5코스(사당역↔석수역,
13.5km)와 관악산둘레길 2구간(서울대 정류장↔국제산장아파트, 4.7km)과 만난다.
둘레길 대신 하늘과 가까운 곳을 원한다면 호암산과 장군봉으로 이어지는 서남쪽 산길을 이용
하면 되며 관악산둘레길 2구간이 장군봉 북쪽까지 동행을 한다. (둘레길의 위치상 삼성산둘레
길이 맞지만 관악산둘레길을 칭하고 있음)

나는 산봉우리 대신 성주암과 호암산 북쪽 능선 등의 미답처 개척을 위해 왔으므로 호압사로
빠르게 이어지는 서울둘레길5코스를 택해 길을 재촉했다.


▲  솔내음이 오각을 간지럽히는 돌산 북쪽 산길

▲  서울둘레길5코스 약수사 윗쪽 구간

돌산 북쪽에서 호압사까지 서울둘레길5코스 구간은 느긋한 길의 연속이다. 오르락과 내리락이
반복되지만 호압사 직전 구간을 빼면 그 기복은 별로 없으며 관악산 산림쉼터, 약수사(藥水寺
), 삼성산성지 등의 조촐한 명소들이 연이어 포진해있어 가는 길이 심심치 않다.


▲  관악산 산림쉼터 (약수사 윗쪽~삼성산성지 구간)

잣나무와 메타세콰이아, 단풍나무를 빽빽히 심고 그 짙은 그늘에 쉼터를 닦았다. 숲 그늘에는
의자와 평상 등을 넉넉히 깔아 잠시 쉬어가거나 낮잠, 독서, 간식 섭취에 아주 좋으며 숲속도
서함도 비치하여 독서의 여유도 누리게끔 했다.


▲  관악산 산림쉼터 앞을 지나는 서울둘레길5코스

▲  삼성산성지 동쪽을 지나는 서울둘레길5코스 ①

▲  삼성산성지 동쪽을 지나는 서울둘레길5코스 ②
오로지 정면에 보이는 먹이를 향해 질주하는 맹수처럼 삼성산성지는 쿨하게
통과했다. 어차피 적지 않게 인연을 지은 곳이다.

▲  수풀을 앙증맞게 다져놓은 서울둘레길5코스 (삼성산성지~호압사 구간)

▲  호암산 밑에 이르다 (사진에 보이는 산이 호암산 정상)

삼성산성지에서 10여 분 정도 오르면 호압사 분기점에 이른다. 이곳에는 넓게 쉼터가 닦여져
있는데, 남쪽으로 각박하게 이어진 산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호암산 정상에 이르며 호압사는
쉼터 서쪽에 펼쳐져 있다.
호암산에 가면 보통 호압사를 끼고 가는지라 이곳 분기점은 아주 낯이 익다. 여기서 보통 호
압사와 서울둘레길5코스 석수역 방향인 서쪽, 삼성산성지와 서울둘레길5코스 서울대 방향인
동쪽, 정상과 한우물 방향인 남쪽으로만 주로 갔지 북쪽 길은 단 1번도 가지를 않았다. 아무
래도 동/서/남쪽으로 호압사와 한우물, 석구상, 호암산 잣나무산림욕장, 서울둘레길5코스 등
호암산의 알짜배기 명소들과 잘생긴 바위들, 일품 조망들이 펼쳐져 있고, 삼성산과도 이어지
므로 버릇처럼 자꾸 가던 쪽으로만 간 것이다. 반면 북쪽은 딱히 흥미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북쪽을 개척하고자 찾은 것이다.


♠  호암산 북쪽 능선(독산자락길)과 목달산

▲  호압사분기점 북쪽 헬기장

호암산 북쪽 능선은 시흥동과 독산동(禿山洞), 난곡 사이로 펼쳐진 긴 산줄기이다. 북쪽으로
독산자연공원까지 이어져 금천구(衿川區)의 북쪽 지붕이자 관악구(冠岳區)의 서쪽 지붕을 이
루는데, 선우공원 주변은 따로 목달산이라 불리며, 그 산줄기를 따라 '독산자락길'이 호압사
분기점에서 독산고교(독산자연공원)까지 이어진다.
 
처음에는 독산고교까지 욕심을 냈으나 산길이 생각 밖으로 너무 길었다. '아니 이렇게나 긴
산줄기였나?' 크게 놀라며 1시간이나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그곳 남쪽인 쌍용아파트에서 길을
접고 철수했다. 몸도 지쳤고 햇님의 퇴근시간도 임박했기 때문이다.


▲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①

▲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②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은 북쪽을 향해 천천히 내려앉는다. 그러다보니 길도 완만하
고 숲도 삼삼해 여름 햇살도 눈치를 보며 내려앉는다. 정면만 본다면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산을 거니는 기분이나 좌우로 시가지가 진하게 바라보여 그 감흥을 50% 이상 떨어트린다. 이
는 1960년대 이후 서울이 나날이 비대해짐에 따라 개발의 칼질이 호암산과 목골산의 살을 마
구 후벼 팠기 때문이다.
다행히 늦게나마 도시공원과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이 정도라도 남게 된 것이지 그것도
아니었으면 아마도 호암산 북쪽 능선의 대부분은 절단이 났을 것이다.


▲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③

▲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④

▲  독산자락길(호암산 북쪽 능선길) 시흥4동과 난향동 경계 구간
이쪽에 이르면 시흥4동과 난향동(난곡) 주택가가 능선 좌우로 너무 깊게 들어와
산세 폭이 200m 내외로 확 좁혀진다. 허나 이곳을 지나면 목골산이
나오면서 다시 산세가 넓어진다.

▲  목골산 남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①

목골산(163m)은 호암산의 북쪽 끝이자 삼성산의 서북쪽 끝으머리를 잡고 있는 뫼이다. 독산동
과 시흥4동, 난곡(난향동, 난곡동, 미성동)에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 자락에는 선우공원이 넓
게 자리해 있다.
서쪽과 남쪽은 경사가 조금 있으나 북쪽과 동쪽은 완만하며 선우공원을 중심으로 미성동둘레
길이 별도로 닦여져 있다. 이 둘레길은 독산고교 뒤쪽에서 시작해 정심초교 뒤쪽 → 관악구
민방위교육장 → 목골산 북쪽 자락 → 선우공원 동부 → 영산홍동산을 거쳐 독산고교로 이어
지는 3.4km의 순환형 길이다.


▲  목골산 남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②

▲  목골산에서 만난 이정표 의자
이정표 역할을 하는 의자는 처음 본다. (동네 사람들이 만든 것임)

▲  잠시 하늘로 솟구치는 목골산 능선길

▲  목골산 미성동둘레길

▲  목골산 영산홍동산

선우공원 북쪽에 영산홍이 잔뜩 깃든 영산홍동산이 있다. 영산홍은 4~5월에 홍자색(紅紫色)
꽃을 피우는데 내가 갔던 때는 6월 말이라 영산홍은 커녕 그 떨어진 잎도 없었다. 이는 영산
홍의 잘못이 아닌 철을 맞추지 못하고 찾아온 나의 불찰이다. 다음에 영산홍 철에 다시 한번
찾아와 이곳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맛보고 싶다.


▲  목골산을 내려가며

영산홍동산을 내려가니 쌍용아파트가 나온다. 여기서 북쪽 산이 독산자연공원이나 시간도 이
미 18시가 넘었고 몸도 지친 터라 쿨하게 길을 접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성주암부터 해서 적
지않은 미답지를 지웠으니 그것으로도 충분히 보람을 느낀다.
이렇게 하여 초여름 삼성산~호암산~목골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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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구 한복판에 자리한 상큼한 푸른 쉼터, 오금공원 <문양군 류희림묘역, 신선경과 류인호묘역, 오금공원 인공폭포>

송파구 오금공원



' 도심 속의 푸른 쉼터, 송파구 오금공원 '

오금공원 숲길
▲  오금공원 숲길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 오금공원 인공폭포

▲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

▲  오금공원 인공폭포

 



 

여름 제국이 봄을 몰아내고 천하의 패권을 쥐어들던 6월의 한복판에 송파구 오금동에 자
리한 오금공원을 찾았다.

오금공원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음에도 겨우 2~3번 가본 것이 고작이다. 그냥 숲이나
운동시설, 쉼터가 전부인 단순한 근린공원이 아닌 조선 중기 무덤을 여럿 간직한 곳으로
그들이 문득 그리워져 발길의 본능대로 그들을 찾아 나섰다.



 

♠  오금공원(梧琴公園)에서 만난 늙은 무덤들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 문양군 류희림 묘역)

▲  오금공원 북부 산책로

송파구(松坡區)의 작은 밀림인 오금공원은 오금동(梧琴洞)과 방이동(芳荑洞) 지역에 한참 개
발의 칼질이 그어지던 1990년에 조성되었다. (1983년부터 개발이 시작됨;) 시골 풍경을 이루
던 공원 주변은 죄다 아파트와 주거지로 강제 성형을 당했으나 이곳은 해발 200m 정도의 야산
으로 이루어져 있고 오래된 무덤도 여럿 있어서 거의 자연 그대로의 멋을 살려 근린공원으로
닦여졌다.
인근 올림픽공원과 더불어 송파구 동부의 소중한 오아시스이자 쉼터로 면적은 219,167.4㎡에
이르며 어린이놀이터와 자연학습장, 송파구 다목적경기장과 배드민턴장, 운동장 등의 운동시
설, 송파도서관, 산책로, 쉼터 등을 두루 갖추고 있어 근린공원의 자격을 충실히 갖추고 있다.
게다가 숲(소나무가 많음)도 아주 짙어 조촐하게 삼림욕이나 산책을 누리기에 아주 제격이다.

공원에는 2000년 5월 23일에 조성된 자연학습장이 있는데 은방울꽃, 초롱꽃, 옥잠화, 동자꽃
등 야생 초화류 30종과 자생 관목류 20종을 지니고 있으며, 2005년에는 송파경찰서 교차로와
맞닿은 공원 서쪽 모서리에 정자와 인공폭포를 닦아 시원한 볼거리를 하나 추가했다. 또한 공
원이 조성된 이듬해(1991년)부터 에어로빅 교실이 시작되어 거의 매일 아침 열리고 있는데 이
제는 공원의 명물로 자리를 잡아 아침마다 몸을 푸는 동네 사람들로 아침이 아주 활기차다.

허나 이곳에는 그런 것들보다 더 오래되고 값비싼 존재들이 있으니 바로 거창신씨묘역과 문화
류씨 묘역이다. 이들은 조선 중기 무덤들로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인데 바로 그들 덕분에 오금
공원이 개발의 칼질에서 비켜가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들은 꼭 살펴보기 바란다. 그들이 없
는 오금공원은 갈비가 없는 갈비탕과 같기 때문이다.

나는 오금공원4거리에서 공원 더듬기를 시작하여 거창신씨묘역(신선경과 류인호 묘역), 문화
류씨묘역(문양군 류희림묘역), 인공폭포와 충민정, 공원 남부를 거쳐 송파도서관에서 마무리
를 지었다.


▲  솔내음이 그윽한 공원 소나무숲과 그 속에 닦여진 운동시설들

▲  울퉁불퉁한 지압용 산책로
저 싱그러운 숲속에 나를 자꾸 숨겨본다.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게끔
하지만 나를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함정... 지금까지
뭐하고 살았나 모르겠네 ㅠㅠ

▲  지압용 산책로와 돌탑
건강을 위해 발에 진하게 자극도 줄 겸, 맨발로 거닐어보기 바란다.
(그렇게 하라고 만든 길임)


마치 첩첩한 산골에 숨겨진 어느 신성한 곳으로 강제 인도된 기분이다. 저곳에 옛날 이야기에
나 나오는 삼한시대 소도(蘇塗)나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신선(神仙)의 세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개인적으로 오금공원의 이 산책로가 썩 마음에 든다. 묘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돌탑, 속인들의
건강을 위한 지압용 산길, 거기에 숲까지 어우러진 상큼한 현장이라 그런 모양이다. 이들 돌
탑은 공원 수식용으로 근래에 지어졌다.


▲  지압용 산책로 주변에 솟아난 돌탑들

▲  하늘을 앗아간 울창한 숲길

정말 깊은 산골의 숲길을 거니는 기분이다. 허나 이곳은 엄연히 시가지에 둘러싸인 근린공원
이다. 산도 아니고 궁궐도 아닌 대도시 한복판의 공원이란 말이다. 그만큼 공원을 이루는 숲
의 품격이 아주 높으며 그것이 오금공원의 자랑이다.


▲  문양군 류희림(文陽君 柳希霖) 묘역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9호

오금공원 한복판에는 거창신씨묘역과 문화류씨묘역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들은 1991년에 서
지방유형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는데(거창신씨묘역은 78호, 문화류씨묘역은 79호) 2008년 이들
묘역을 '신선경과 류인호묘역'이란 이름으로 통합을 하여 지정 번호를 78호로 했다. 즉 79호
가 사라진 것인데, 비록 문중은 다르지만 장인(거창신씨)과 사위 집안(문화류씨)으로 묶여진
혈연관계이고 무덤도 6기 밖에 없어서 그렇게 합친 것이다.

허나 문화류씨 문중에서 크게 반발하자 5년이 지난 2013년 7월에 이들을 다시 분리했다. 그래
서 기존의 문화류씨묘역의 무덤 3기는 '문양군 류희림 묘역'이란 이름으로 79호의 번호를 되
찾았으며, 거창신씨묘역의 무덤 3기는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이란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곳에 제일 먼저 둥지를 튼 거창신씨의 신선경 묘역이 북쪽에 있고, 그 뒤쪽에 그의 사위인
문화류씨의 류인호 부부 묘가 있으며, 동남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 류인호의 아들인 류복
룡과 그의 아들인 류희림 묘역이 자리한다.


▲  문원군 류복룡(文原君 柳伏龍)과 평강채씨 부부묘

류복룡은 16세기 인물로 류인호의 아들이다. 딱히 이력은 없으나 잘난 아들(류희림) 덕에 문
원군에 봉해졌으며 이들 묘역에서 유일하게 신도비까지 지니고 있다.
이 묘역은 신도비 외에 풍만하게 솟은 봉분(封墳) 2기와 묘비(묘표), 상석(床石), 향로석(香
爐石), 망주석(望柱石) 1쌍, 문인석(文人石) 1쌍을 갖추고 있다.

▲  검게 빛바랜 류복룡 묘비(묘표)

▲  우측 문인석과 망주석, 신도비

▲  류복룡 신도비(神道碑)
비석을 꽂는 비좌(碑座)와 머리 부분이
동그랗게 다듬어진 비신(碑身)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모습이다.

▲  홀(忽)을 꽉 쥐어든 좌측 문인석
고된 세월에 지쳤는지 표정이 조금은
일그러져 보인다.


▲  류희림(柳希霖)묘

류복룡 묘 뒤쪽에는 그의 아들인 류희림 묘가 있다. 류인호 3대 중 가장 출세한 류희림(1520~
1601)은 자는 경열(景說), 시호는 문양(文陽)으로 부인은 박언량(朴彦良)의 딸이다.

성균관 유생을 지내던 1560년 왕실의 보호로 불교가 다시 뜨려고 하자 1,000여 명의 유생들을
선동, 그 대표로 불교를 비판하고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을 모두 폐지하자는 상소문을 올려
그 존재를 크게 알렸다.
1561년 식년과(式年科)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문한관(文翰官)이 되었으며, 검열(檢閱), 정
언(正言),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을 지냈다. 그리고 1581년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명나
라 연경(燕京)에 동지사(冬至使)로 갔으나 명나라 왕실에서 가져온 선물이 적다고 항의하면서
엉뚱하게 파직되고 말았다.

그 뒤 다시 기용되어 한직에 머물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
事)가 되어 못난 왕(선조)을 호종한 공로로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이어서 동지중추부사(
同知中樞府事)와 예조참판(禮曹參判), 동지돈녕부사(冬至敦寧副使)를 지냈으며, 1601년 81세
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후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봉해지고 문양군(文陽君)에 추봉되었으며, 그의 아버
지(류복룡)와 할아버지(류인호)까지 싹 군(君)의 시호를 받았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류인
호 3대의 묘역은 그저그런 사대부의 묘로 남았을 것이다.

류희림 묘는 상석과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을 갖추고 있으나 문인석은 근래에 새로 단 것들
이라 고색의 때는 아직 여물지 못했다.

* 문양군 류희림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동 51 (오금로 363)


▲  신선경(慎先庚)과 류인호(柳仁濠) 묘역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8호

▲  신선경과 청주한씨 부부묘

신선경은 이곳에 처음 묻힌 인물로 1456년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을 거쳐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허나 그에 대한 자세한 이력은 더 이상 전하는 것이 없으며 그의 딸과 사위(류인호)
가 뒤쪽 좌측에 묻혔고, 그 인연으로 외손주와 외증손자까지 부근에 묻히면서 이곳은 두 집안
4대의 공동 묘역이 되었다.

신선경 묘는 봉분 2기와 묘비, 상석, 문인석 1쌍을 지니고 있으며 묘비(묘표)의 머리 부분에
연화무늬가 새겨져 있어 조선 초기 묘비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이들 묘역이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것은 15~16세기 무덤 양식을 잘 간직한 점도 있지만 신선경의 묘비와 류복룡 신
도비의 영향도 크다.

▲  연꽃무늬가 새겨진 신선경 묘비
비석은 작지만 귀엽고 앙증맞은 모습이다.

▲  홀쭉하고 긴 키를 지닌 신선경묘
우측 문인석

▲  검은 주근깨가 여기저기 피어난
신선경묘 좌측 문인석

▲  류인호와 거창신씨 부부묘


신선경 묘역 뒤쪽 우측에 자리한 류인호는 15세기 인물로 신선경의 사위이다. 죽어서도 그의
사위로 있고 싶었는지 장인과 장모 무덤 뒤쪽에 부인과 함께 묻혀있으며 공조참의(工曹參議)
정도 지낸 것 외에는 딱히 이력은 없다.
사위가 장인/장모 무덤 뒤쪽에 자리한 특이한 케이스로 합장된 봉분과 묘비, 상석, 망주석이
전부인 조촐한 모습이다. 조선 중기까지 이렇게 처가 묘역에 묻힌 양반사대부와 왕족이 적지
않았는데 제왕이었던 연산군(燕山君, 조선 10대 군주)도 처가 집안(거창신씨)에 묻혔다.

*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동 51 (동남로 263)



 

♠  오금공원 마무리

▲  인공폭포 위에 닦여진 충민정(忠愍亭)

송파경찰서 교차로와 맞닿은 공원의 서쪽 끝으머리에 인공폭포와 충민정이 있다. 2003년 서울
시의 지원을 받아 지하수를 개발하고 폭포와 연못을 닦아 2005년 10월에 완성을 보았는데, 폭
포 위쪽에 1칸짜리 팔작지붕 정자인 충민정을 달아놓아 운치를 돋구었다.
'충민'이란 이름은 송파구 출신이라는 임경업(林慶業, 1594~1646) 장군의 시호<충민(忠愍)>에
서 따온 것으로 정자 옆구리에는 지하수를 소환해 채워놓은 연못이 있고 그 밑에 인공 암벽을
다져 인공폭포를 걸쳐놓았다. 연못 너머로 송파경찰서 교차로와 주변 시가지가 바라보이며 정
자 동쪽과 북쪽에는 숲이 우거져 있어 자연히 자연과 속세의 경계 역할을 한다.


▲  충민정 연못과 그 너머로 바라보이는 송파경찰서

▲  충민정 현판의 위엄

▲  수질이 좋은 충민정 연못

충민정은 자리가 자리인지라 이곳에 앉아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이 불어준 바람
을 느끼고 있노라면 정말 피서의 성지(聖地)가 따로 없다. 이제 지어진지 막 20년 남짓 밖에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존재들이지만 1개의 100년이 흐르면 20세기 초, 대표적인 풍류 명소로
크게 도마 위에 오를지도 모른다.


▲  옆에서 바라본 오금공원 인공폭포 (윗쪽에 충민정이 살짝 보임)

▲  힘차게 쏟아지는 오금공원 인공폭포

지하수를 소환해 속세에 내뱉고 있는 이 폭포는 2005년에 조성되었다. 자연산이 아닌 인공(人
工)이라 전기를 먹어야만 왕성히 움직일 수 있는데, 봄과 여름, 초가을에는 보통 18시까지 가
동을 하며 겨울에는 움직이지 않고 그냥 묵혀둔다. 이는 다른 인공폭포도 비슷하다. 하루종일
틀면 전기세 부담이 적지 않아 보통 아침 8~9시부터 전기를 먹인다.

폭포를 품은 암벽은 너무 인공티가 팍팍 난다. 서대문구의 홍제천(弘濟川) 인공폭포처럼 자연
산으로 착각할 정도로 감쪽같이 했으면 좋으련만 그것까지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한여
름의 납량처로 손색은 없으며 직선으로 떨어지는 폭포와 주름진 바위를 굽이쳐 내려오는 폭포
등, 2개의 폭포 줄기가 있다.


▲  주름진 인공 바위를 굽이쳐 흐르는 인공폭포 (이때가 18시 직전)

▲  다시 오금공원의 속살 속으로
인공폭포에서 오금공원 더듬기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으나 공원의 남쪽 부분을
살피지 않아서 다시 공원 속으로 들어갔다.

▲  오금동 유래비 (오금공원 남부)

오금동 유래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옛날 이 지역에는 오동나무가 많았다고 하
는데 그 나무로 거문고나 가구 등을 만드는 장인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하여 오동나무와 거
문고를 뜻하는 오금동이 되었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병자호란 시절(1636~1637년), 청나라의 파상적인 공격에 도성 부근 무악재까지
무기력하게 밀리자 염통이 쫄깃해진 무능한 인조(仁祖)는 서울을 모두 내버리고 서둘러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들이 오금동 백토고개에 이르렀을 때 인조는 너무 힘들어 '아이고 내 오금이야!' 주접을 떨
며 잠시 쉬어갔는데 그 연유로 오금동이라 했다고 한다. 어느 것이 정답인지는 판단하기 어려
우나 나는 전자에 500원을 걸고 싶다.

이곳은 오랫동안 경기도 광주(廣州)에 속해있었으나 1963년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편입되었으
며, 1983년부터 도시계획 구획정리 사업이 이루어져 1990년대 초반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
었다. 그 과정에서 오금공원이 탄생하게 되었고 이곳에 서린 시골 풍경은 거의 전멸되었다.


▲  오금동 유래비 주변 산책로

▲  오금공원 남부에서 만난 나홀로 망주석

구의 무덤을 지켰던 망주석일까? 딱 봐도 오래된 티가 느껴져 이 부근에 사대부의 무덤이
있었던 모양이다. (다른 곳에서 업어왔을 수도 있음)
그를 거느렸던 무덤은 후손들의 관리소홀과 대자연의 집요한 태클로 사라지고 겨우 망주석 하
나만 남아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무덤은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 저 꼬라지가 되버
리니 굳이 많은 돈을 들여 사후(死後) 흔적을 남기는 것도 정말 부질없다.


▲  녹음(綠陰)이 우거진 오금공원 남부 산책로 ①

▲  녹음(綠陰)이 우거진 오금공원 남부 산책로 ②

▲  녹음(綠陰)이 우거진 오금공원 남부 산책로 ③

▲  녹음(綠陰)이 우거진 오금공원 남부 산책로 ④

▲  다양하고 귀여운 모습의 새집 모형들
새집이긴 하나 겉모습만 그렇지 너무 작아서 참새도 들어갈 수 없다.
하여 새들에게는 그저 그림의 집 같은 존재들이다.

▲  녹음(綠陰)이 우거진 오금공원 남부 산책로 ⑤
숲이 얼마나 두터운지 햇살도 제대로 들어오기 힘들어 벌써부터 어둑어둑하다.

▲  오금공원 남부에서 송파도서관으로 인도하는 나무데크 계단길

오금공원의 남쪽 끝인 송파도서관으로 내려오니 어느덧 19시이다. 오금공원의 북쪽 끝인 오금
공원4거리에서 시작된 공원 더듬기는 공원을 완전히 가로질러 남쪽 끝인 송파도서관에서 대단
원의 막을 고한다. 다음에는 늦가을 한복판에 꼭 한번 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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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북현무를 거닐다. 북악산 한양도성 나들이 <창의문, 백악마루, 청운대, 숙정문, 말바위>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



'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 '

북악산(백악산)

▲  북악산(백악산)

말바위에서 바라본 서울도심 북악산 청운대

▲  말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  북악산 청운대

 



 

가을이 늦가을로 한참 숙성되어 가던 11월의 첫 무렵, 서울 도심의 북현무(北玄武)인 북
<北岳山, 백악산(白岳山)>을 찾았다.

북악산은 내 즐겨찾기 뫼의 하나로 매년 여러 번씩 그의 품을 구석구석 찾고 있는데, 이
번에는 한양도성이 흐르는 주능선(창의문~말바위)을 복습하기로 했다. 이미 지겹도록 복
습한 곳이지만 돌아서면 또 생각나고 몸살 나게 그리워지니 내 전생이 아마도 북악산 고
양이나 산짐승이었던 모양이다.


 

♠  북악산 창의문~백악마루 구간

▲  창의문(彰義門) - 보물 1,881호

북악산(백악산) 주능선의 서쪽 관문이자 북악산과 인왕산(仁王山) 경계에 자리한 창의문은 자
하문고개를 오랫동안 지켜온 성문이다.
성밖 부암동(付岩洞)의 계곡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서울 도심을
둘러싼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적 10호)의 8개 성문의 하나이자 4소문(小門)의 하나이다. 여기
서 4소문이란 동소문<東小門, 혜화문(惠化門)>과 서소문<西小門 ,소의문(昭義門)>, 남소문<南
小門, 광희문(光熙門)>, 그리고 창의문으로 혜화문과 소의문, 광희문은 각각 동소문. 서소문,
남소문이라 불렸으나 유독 창의문은 북소문(北小門)이라 불린 적이 거의 없다.

창의문은 1396년 한양도성을 닦으면서 조성된 것으로 문의 이름인 창의(彰義)는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다. 1413년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건의하여 1416년 문을 닫아걸었다. 다만 1422년 군인들의 통로로 사용되었고, 1617년 창덕궁
을 보수할 때 이 문을 통해 석재를 운반했다. 또한 문 북쪽인 부암동과 신영동, 홍지동 지역
에 왕족과 양반사대부들의 별서와 그들이 즐겨 찾던 경승지가 즐비하여 그들의 은밀한 통행로
로 쓰이기도 했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등은 세검정(洗劍亭)에서 칼을 씻으며 역적질을 모의, 역촌동(驛村洞) 별서에 있
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 인조)을 앞세워 도성에 쳐들어가 광해군을 폐위시킨 이른바 인조
반정(仁祖反正)을 저질렀다. 그때 그 반역도당들이 부시고 들어간 문이 바로 창의문이다. 그
래서 문루에는 인조반정을 저지른 작자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문이 백성들에게 전격 개방된 것은 1741년이다. 그때 훈련대장 구성임(具星任)이 인조반정
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라며 성문을 중수하고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문루를 다시 세
울 것을 건의해 지금의 문루가 지어졌다.

창의문은 한양도성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서소문은 왜국 통감부(統
監府)가 만든 성벽처리위원회에서 1908년에 무단 철거하여 정확한 위치조차 아리송하고 동소
문은 왜정 때 없어진 것을 근래에 다시 지었다. 남소문인 광희문은 성문만 늙었을 뿐, 문루와
성곽은 1970년 이후에 복원되었다.
그에 비해 창의문은 6.25 때도 총탄이 알아서 비켜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1958년에
중수한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 정정함을 과시한다. 바로 그런 점이 인정되어 2015년 12월,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다. 비록 일찌감치 국보와 보물 1호의 지위를 누린 남대문(숭례문), 동
대문(흥인지문)에 비해 다소 늦은 감도 있고 늦게 빛을 본 서글픔도 있지만 역시나 인생은 끝
까지 살아남고 봐야 된다.

▲  창의문에 걸린 인조반정
반역자들의 명단 현판

▲  창의문 성문 천정에 그려진 봉황
(혹은 닭)과 구름무늬


1960년대 이후 자하문고개를 밀어내고 신작로를 닦았는데, 그 과정에서 문 서쪽 50m 남짓 성
곽이 끊어지게 되었다. 하여 끊어진 반대쪽<현재 윤동주시인의 언덕과 청운공원이 들어서 있
음>
을 애타게 바라보는 인왕산 쪽 성곽이 견우와 직녀를 보듯 애처롭기까지 하다. 끊어진 구
간은 도로 위에 성벽을 세우지 않는 이상은 복원은 어려우며, 창의문 바로 앞에는 북악산길이
지나가 시야를 제대로 방해한다.

창의문은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문의 모습이라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그만의 매력이자
특징이 2가지가 있다. 그러니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눈여겨 봐야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우선 빗물이 잘 흘러가도록 문루 바깥 쪽에 설치된 1쌍의 누혈(漏穴) 장식이 있다. 이것은 연
꽃잎 모양으로 조각되어 성문의 매력을 수식해주고 있으며, 성문 천정에는 화려하게 날개짓을
펼치는 봉황(鳳凰) 1쌍이 그려져 있는데 속설에는 봉황이 아닌 닭이라고 한다. 성문 밖 부암
동의 지형이 지네를 닮았다고 해서 비보풍수에 일환으로 그 천적인 닭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
림을 가만히 보면 머리와 목, 날개는 닭을 많이 닮았고, 몸통과 꼬리는 닭과는 거리가 먼 봉
황의 모습 같다.
봉황이 1마리가 아닌 둘이 있는 것을 보면 암수 1쌍일 것이다. 그들 주변으로 와운문(渦雲紋)
이 가득 그려져 있는데,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
센 소용돌이를 보는 듯하다.

* 창의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산1-1 (창의문로 118)


▲  늦가을에 잠긴 창의문 안쪽(남쪽) 숲길

창의문을 둘러보고 마치 국경 검문소 같은 창의문안내소를 들어서면 북악산(백악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느긋하게 시작되어 방심하기 쉽지만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성곽길은 점차 각박한 모
습을 보인다. 하여 쉬엄쉬엄 가라며 돌고래쉼터와 백악쉼터 등 2곳의 쉼터를 두었다. 가쁜 숨
을 내쉬며 발을 움직여야 되지만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는 초급 코스라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으며, 그 거리도 그리 길지가 않다.


▲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 창의문~돌고래쉼터 구간 (백악마루 방향)

▲  돌고래쉼터와 돌고래바위

성곽길이 슬슬 흥분기를 보일 쯤에 돌고래쉼터가 모습을 비춘다. 쉼터 바로 옆에 돌고래처럼
생긴 바위가 누워있어 돌고래쉼터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 이름도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닌 북악산 주능선을 개방하고 이곳에 쉼터를 닦으면서 붙인 이름이다.
바위가 돌고래를 닮았다며 거의 주입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제 눈이 안경이라고 내 눈에는 물개
처럼 보인다. 바위 동쪽에는 약간의 틈이 있는데, 거의 입처럼 생겼고 그 위에 눈처럼 보이는
자국도 있다. 가만 보면 물개가 꼬랑지를 흔들며 움직이는 모습 같아 차라리 물개바위라고 했
으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나에게는 이름을 갈아치울 힘이 없다.

돌고래바위는 통제구역이라 그냥 난간 너머로 보기 바라며, 바위 주변으로 소나무가 그윽하게
운치를 자아낸다. 그런 소나무 사이로 서울 도심이 살짝 바라보인다.


▲  힘차게 흘러가는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 (창의문 방향)
성 안쪽은 종로구 청운동(淸雲洞), 바깥은 부암동 지역이다.

▲  정상을 향해 숨가쁘게 이어지는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
(돌고래쉼터~백악쉼터 구간)

▲  돌고래쉼터~백악쉼터 구간에서 바라본 북쪽 방향
부암동과 신영동, 홍지동, 구기동, 평창동 지역, 북악산길,
북한산(삼각산) 향로봉과 비봉능선, 문수봉 등


눈이 시리도록 맑은 푸른 하늘 밑으로 대자연 형님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북악산과 북한산(삼
각산)을 빚었고,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은 그 틈에 평창동
과 신영동, 홍지동, 구기동, 부암동 같은 동네를 닦았다.
사진 왼쪽 동네가 홍지동(弘智洞)과 부암동, 신영동이며, 중앙과 오른쪽은 이 땅에 0.1%가 산
다는 평창동(平倉洞)으로 졸부들의 고래등 저택과 고급 빌라가 즐비해 보는 눈이 썩 즐겁지가
않다.


▲  백악마루입구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부암동과 홍지동, 구기동, 평창동 지역과 북악산 북쪽 자락,
북한산(삼각산) 산줄기


창의문에서 백악마루입구 구간 중에서 '돌고래쉼터~백악마루입구' 구간이 가장 경사가 각박하
다. 안그래도 힘든 가파른 길이 여기서 크게 흥분기를 보이는데, 그도 그럴 것이 백악마루에
서 창의문 구간 산세가 거의 급경사를 보이기 때문이다. 하여 산에 대한 자존심을 곱게 접고
천천히 한 발자국씩 딛다 보면 나올 것 같지 않던 백악마루가 알아서 모습을 드러낸다.


▲  북악산 정상 바위 (백악마루)

창의문안내소에서 20여 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백악산)의 정상인 백악마루(342m)에 이르게 된
다. 여기서 마루는 순수 우리말로 정상, 산꼭대기를 뜻하는데,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가
까운 현장으로 정상 한복판에 백악산 정상 비석과 북악산 옛모습 복원기념비가 있다. 그리고
정상 북쪽에 사람 키보다 2배 남짓 높은 크고 견고한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꼭대기가 실질
적인 북악산의 머리이다. 그러니 정상 인증을 하려면 무조건 바위에 올라가기 바란다.

정상 남쪽에는 소나무와 진달래가 우거져 있으며, 정상 바위와 난간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고
사진을 찍어야 된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숨겨진 산길이 있으나 아주 비싼 길이라 출입을 통제
하고 있으며, 난간 너머는 나라의 예민한 구역이니 애써 넘어가지 않도록 한다.
여기서는 북쪽으로 평창동과 북한산(삼각산), 동쪽은 성북동과 서울 동북부 및 동부 지역, 서
쪽은 부암동과 인왕산, 남쪽으로 서울 도심과 남산, 멀리 관악산(冠岳山)과 호암산까지 두 눈
에 들어와 조망도 일품이다.

천하 최대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발 아래 두고 굽어볼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으로 서
울 도심을 둘러싼 뫼 가운데 가장 높고 오랜 세월 서울을 지켜온 북현무로서의 면모와 위엄이
느껴진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북악산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2-27

▲  백악산 정상 표석

▲  북악산 정상부


※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白岳山)> - 국가 명승 67호
서울 도심 북쪽에 가파르게 솟은 북악산(342m)은 서쪽의 인왕산. 동쪽의 낙산(駱山, 낙타산),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남산)과 함께 서울 도심을 지키는 4대 산의 하나이다. 이들을 내사산
(內四山)이라 부르는데, 그들 중 북악산이 맏형이며, 낙산은 막내 동생이다.
서울 도심의 지형은 내사산에 감싸인 분지(盆地)로 조선 태조 때 개경(開京)에서 서울로 국도
(國都)를 옮기면서 이들 산을 따라 18.2km의 도성(都城)을 구축했다. 그리고 풍수지리에 따라
북악산을 북현무(北玄武)로 하여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삼았으며,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
낙산을 좌청룡(左靑龍), 남산을 남주작(南朱雀)으로 삼았다.

북악산의 옛 이름은 백악산으로 서울 도심(종로구, 중구)에서는 어디서든 그가 바라보이는데,
오랫동안 서울을 상징하는 뫼로 남쪽 자락에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을 닦고, 그
북쪽(현재 청와대)에는 넓게 경복궁 후원을 두었다.
북악산 주능선에는 한양도성이 파노라마처럼 길게 펼쳐져 있다. 정상 동쪽에는 북문인 숙정문
이 있고, 인왕산과 경계를 이루는 자하문고개에는 창의문(자하문)이 고색의 모습으로 고개 중
턱을 지킨다.
북악산 남쪽 자락인 삼청동(三淸洞)과 청운동(淸雲洞)은 한양도성의 북쪽 변두리로 숲이 무성
했으며, 북악산이 베푼 삼청동계곡과 대은암(大隱巖)계곡, 백운동(白雲洞)계곡, 청송당(聽松
堂)계곡 등이 있었고, 풍경이 아름다워 조선 초기부터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 및 풍류 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그리고 숙정문 남쪽 주변은 사대부 여인들의 봄꽃놀이 명소로 바쁘게 살았다.
한양도성과 법흥사(法興寺)터, 대은암계곡 바위글씨, 만세동방성수남극 바위글씨 등 여러 문
화유적이 있으며, 북악산 북쪽 자락 백사실계곡에는 백석동천이란 별서(別墅) 유적이 전하고
있다.

북악산은 북쪽으로 북한산(삼각산)과 이어져 있고 숲이 짙어서 예로부터 호랑이가 자주 나타
났다. 그들은 툭하면 궁궐 후원과 북촌까지 침투했는데, 태종(太宗)이 경복궁 후원을 거닐다
가 호랑이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북악산 호랑이는 다른 호랑이와 달리 곶감은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하며, 대신 수진궁(壽進宮)
귀신을 무서워했다고 한다. 하여 인왕산과 북악산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
는 속담까지 생겨났다. (수진궁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왕족의 사당임)

1968년 1.21사태 이후 굳게 닫힌 북악산은 북악산길과 주택가와 접한 일부 산자락만 겨우 출
입이 가능했으나 2000년대 초반 백사실계곡(백석동천)이 개방되었고, 2006년 4월 1일 홍련사
에서 숙정문, 촛대바위 구간이 해방되면서 굳게 잠겼던 북악산 주능선의 자물쇠가 드디어 열
리기 시작했다.
하여 2007년 4월 5일 말바위에서 창의문까지 주능선 구간(4.3km)이 싹 해방되었으며, 2009년
에 북쪽 능선의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이 열렸고, 삼청공원~말바위 구간 등이 해방되었다가
2020년 11월 '북악산길~청운대쉼터','북악산길~곡장' 구간이 추가로 열렸다. 그리고 2022년
봄에 '삼청공원~청운대쉼터','삼청공원~법흥사터~숙정문','칠궁/춘추관~백악정' 등이 더 열려
지금에 이른다.
이렇듯 북악산의 금지된 속살이 많이 열렸지만 그렇다고 이곳의 예민한 성격까지 가라앉은 것
은 아니다. 하여 여전히 금지 구역은 적지 않으며, 북악산 주능선과 주능선으로 인도하는 길,
청와대 주변 길(칠궁/춘추관~백악정)은 탐방시간에 제한이 있다.

북악산은 예로부터 소나무가 유명하여 조선 조정에서 특별히 옆구리에 끼고 관리했으며, 왜정
(倭政) 이후 관리 소홀과 마구잡이 벌채로 지금은 주능선 일대에 주로 남아있다. 또한 오랫동
안 금지된 곳으로 엄격히 묶여있던 탓에 나무와 식물들이 마음 놓고 뿌리를 내려 숲이 원시림
마냥 울창해 서울 도심의 허파 역할을 하고 있으며, 숙정문 주변에는 팔배나무가 군락을 이루
고 있어 새들이 많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 아차산, 관악산 등과 더불어 대자연이 서울에 내린 소중한 선물이
자 꿀단지로 앞으로도 지금의 모습 그대로 삼삼한 자연의 공간으로 쭉 있었으면 좋겠다. 하긴
산 주변에 국가의 예민한 곳이 많으니 개발의 칼질 또한 그 눈치로 마음껏 칼질을 할 수는 없
다.

북악산(백악산)은 '서울 백악산 일원'이란 이름으로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었으며, 지정된 면
적은 3,598,127㎡에 이른다.

* 북악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부암동, 삼청동, 명륜동 / 성북구 성북동 (창
  의문안내소 ☎ 02-730-9924, 숙정문안내소 ☎ 02-747-2152, 말바위안내소 ☎ 02-765-0297)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그리고 관악산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인왕산과 서대문구, 은평구 지역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북악산 동쪽 자락과 성북동,
성북구, 동대문구, 서울 동부 및 동북부 지역


 

♠  북악산 청운대~말바위 구간

▲  청운대(靑雲臺) 표석의 위엄

북악산 정상(백악마루)에서 동쪽으로 10분 정도 내려가면 청운대(293m)가 마중을 한다. 난쟁
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은 키의 청운대 표석이 이곳의 이름을 알려주고 있는데, 공간이 넓
고 의자가 넉넉히 있어서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특히 말바위나 숙정문, 삼청공원, 북악산길
에서 올라왔다면 여기서 코앞에 보이는 백악마루에 입맛을 다시며 잠시 두 다리를 쉬기 마련
이다.
여기서는 성북동과 북한산(삼각산), 서울 동북부 및 동부 지역, 서울 도심, 남산 등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아주 일품이다.


▲  청운대에서 바라본 천하
북악산 주능선과 동쪽 자락, 성북동, 성북구, 강북구 등 서울 동북부와
동부 지역, 아차산~용마산 산줄기 등이 흔쾌히 시야에 잡힌다.

▲  시원스럽게 뻗은 한양도성 청운대~곡장입구 구간 (동쪽 방향)

성곽 바깥 길 북쪽에는 철책이 꽁꽁 둘러져 마치 휴전선이나 국경선을
거니는 쫄깃한 기분이다.

▲  청운대쉼터
북악산 주능선에서 가장 너른 쉼터로 군부대 운동장을 개조해 나그네들의
쉼터로 삼았다.

▲  한양도성 촛대바위~곡장입구 구간
성곽을 따라 이어진 북악산의 명물, 소나무의 푸른 물결과 향긋한 솔내음

▲  촛대바위와 그에게로 인도하는 나무데크길

숙정문 서쪽에는 촛대바위가 있다. (숙정문과 곡장입구 사이에 있음) 아마도 촛대처럼 생겨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듯 싶은데, 바위 남쪽 밑에서 봐도 그다지 촛대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바위 남쪽 밑 탐방로는 2022년 봄에 해방되었으며, 바위 정상부는 여전히 금지구역임)

천하가 북악산 촛대바위를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왜정이 이 땅의 혈을 끊고자 무식하게 쇠말
뚝을 박았던 추악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왜정은 1920년대에 경복궁과 일직선이 되는 이곳에 말뚝을 꽂았는데, 사람으로 친다면 머리의
정수리가 되는 부분이다. 즉 조선의 머리 부분을 아작 내어 이 땅을 영원히 뜯어먹겠다는 의
도를 드러낸 것이다. 다행히 그 말뚝은 제거되었으나 말뚝의 휴유증 때문일까? 이 땅은 아직
도 혼돈에 잠겨있다. 친일매국노와 그런 것을 추종하는 잡것들이 권력과 부를 챙기고 이 땅을
이간질시켜 나라의 기본부터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언제쯤 촛대바위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까?
그때가 되면 주름진 나라 사정도 좀 펴지겠지.
(왜정의 쇠말뚝에 대해서는 측량용이란 말도 있으나 설령 측량용이라고 해도 그건 일부에 불
과함. 대부분은 추악한 의도로 꽂은 것들임)


▲  숙정문 서쪽에서 바라본 성북동(城北洞)
산자락에 포근히 감싸인 동네가 평창동과 더불어 이 땅에 0.1%가
산다고 하는 성북동이다.

▲  한양도성 숙정문(肅靖門) - 사적 10호
숙정문 앞은 바로 각박한 산비탈이라 성문을 지키기에는 아주 그만인 곳이다.


촛대바위를 지나면 북쪽을 향해 입을 연 숙정문이 마중을 한다. 이곳은 한양도성의 북문(北門
)으로 남대문(숭례문), 동대문(흥인지문), 서대문(돈의문)과 함께 도성 4대문의 일원이다. 하
여 북문, 북대문(北大門)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가파른 산능선에 자리해 있고 규모가 작아 도
성의 대문이라기 보다 산성의 조촐한 성문 분위기가 진하다.

문의 이름인 숙정(肅靖)은 엄숙히 다스린다는 뜻으로 원래 이름은 가운데 1자만 다른 숙청문(
肅淸門)이었다. 1396년 지금보다 약간 서쪽에 조성되었는데, 1413년 풍수학자인 최양선이 태
종에게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건의해 이들 문을 꽁꽁 닫아걸고 소나무를 잔뜩 심어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 연유로 무늬만
문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 외에도 숙정문을 품은 북악산 주능선은 도성 내부와 바깥이 훤히 바라보이는 예
민한 위치로 서울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러다보니 백성들의 출입을 거의 통제했고,
설령 이 성문을 나와도 이어지는 곳은 숲이 무성한 북악산 북쪽 능선과 북한산, 성북동이 고
작이었다. <성북동은 동소문(東小門)을 통해서 갈 수도 있음>
그리고 평소와 비가 많이 올 때는 숙정문을 닫아 걸고 가뭄이 심할 때 남대문을 닫고 이 문을
열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는 1416년에 제작된 기우절목(祈雨節目)에 따라서 북쪽은 음
(陰). 남쪽은 양(陽)을 상징하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니 통행문으로서의 존재
감보다는 도성 수비와 풍수지리적인 존재감이 훨씬 컸던 것이다.

1504년 성곽을 보수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으며, 숙청문이 언제 숙정문으로 이름이 갈렸
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1523년부터 숙정문 이름이 등장한다. 숙정문 외에도 북정문(北靖門)
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이들 명칭이 같이 쓰이다가 언제부턴가 숙정문으로 통합되었다.
1968년 1.21사태 이후 북악산 대부분과 숙정문이 금지된 구역이 되었으며, 1976년 북악산 일
대 성곽을 손질하면서 문루를 세워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숙정문 문루에 올라서면 북악산 북쪽 능선과 성북동 일대가 바라보이며, 높은 곳에 자리한 것
은 분명하지만 문 남쪽은 울창한 수목이 시야를 방해하고 있고, 북쪽도 겨우 성북동과 삼청각
, 북악산 북쪽 능선이 전부라 조망은 생각보다 별로이다.
매년 봄에는 사대부 여인들이 숙정문 남쪽에서 봄꽃놀이를 즐겼다고 하며, 그거 외에는 딱히
숙정문 주변에 대한 옛 사람들의 시(詩)나 문구(文句)는 전하는 것은 없다.

* 숙정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25-22


▲  한양도성 숙정문~말바위 구간

▲  북악산 말바위

말바위안내소를 나와 동쪽으로 조금 가면 성 밖으로 넘어가는 계단길이 있다. 무지 귀한 몸인
성곽 여장을 부시고 길을 낼 수가 없어 부득이 성곽 위로 높게 나무다리를 내어 성밖으로 통
하는 길을 냈다.
다리 북쪽에는 전망대를 설치해 도심 속의 전원 마을인 성북동을 굽어보게 했는데, 삼청각과
길상사(吉祥寺), 북악산 북쪽 능선을 비롯해 성북구, 종로구 동부, 동대문구, 중랑구, 광진구
, 성동구, 수락산~불암산, 아차산~용마산 등이 훤히 망막에 들어와 조망도 진국이다. 특히 여
기서는 성북동 대부분이 시야에 들어와 성북동전망대라 해도 손색이 없다.

여기서 성곽길을 따라 동쪽으로 조금 가면 말바위란 크고 견고한 돌덩어리가 마중을 한다. 그
는 북악산(백악산)의 오랜 명소로 조선 때 문인(文人)과 관료들이 말을 타고 이곳으로 올라와
시문(詩文)을 짓거나 바람을 쐬며 쉬었다고 한다. 하여 말을 타고 올라왔다는 뜻에서 말바위
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는데, 북악산 산줄기가 동쪽으로 좌청룡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그 끝에 있는 바위라 하여 말(末)바위라 했다는 설도 덧붙여 전한다. 즉 말처럼 생겼다고 해
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 것이다. (바위가 말처럼 생기지도 않았음)

1968년 1.21사건 이후 말바위는 금지된 바위가 되어 속세에서 잠시 그 모습이 지워졌다가 39
년에 시간이 흐른 2007년 4월에 다시 공개가 되었고 관람 통제가 심한 북악산 주능선 구간과
달리 이곳은 아침과 저녁에도 접근이 가능하다.
말바위 옆에는 소나무가 바위 쪽으로 가지를 뻗어 바위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며, 서로의
끈끈한 정을 자랑한다.

말바위에서 성곽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오른쪽(남쪽)으로 길이 90도 꺾인다. 성곽과 더 함께
하고 싶어도 군사시설로 길이 완전히 막혀 별수 없이 남쪽 길로 내려가야 되는데, 소나무가
무성한 그 길을 내려가면 북악산 남쪽 자락에 넓게 깃든 삼청공원(三淸公園)이다.

삼청공원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나와 취운정(翠雲亭)터 표석이 있는 감사원교차로에서 왼쪽(북
쪽) 길로 가면 성북동과 성대후문으로 인도하는 와룡공원 고갯길(와룡고개)이 펼쳐진다. 이곳
은 도심과 성북동을 바로 이어주는 지름길로 마치 뱀의 허리에 올라탄 듯, 지그재그로 굴곡의
미를 보여주고 있는데, 숲도 삼삼하고 경치도 아름다우며, 특히 벚꽃이 살랑거리는 봄과 단풍
의 향연이 우울한 마음을 부여잡는 늦가을 풍경은 이곳의 갑(甲)으로 꼽힌다.
게다가 여기서 바라보는 도심 조망과 야경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걸작이다. 길 밑에
는 도심에 숨겨진 뒷길인 창덕궁 후원 뒷길(후원 돌담길)이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너른 숲
이 펼쳐져 있는데, 이들은 서울의 동궐(東闕)인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이다.

이렇게 하여 북악산(백악산) 나들이는 창의문에서 시작하여 와룡공원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
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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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2년 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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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구의 작은 지붕들, 봉산 ~ 백련산 나들이 <봉산 봉수대, 서울둘레길7코스, 백련근린공원>

서울 봉산, 백련산



' 은평구의 작은 지붕들을 거닐다 (봉산, 백련산) '

봉산 봉수대

▲  봉산 봉수대 (봉산 정상)

백련산에서 바라본 은평구 지역 백련산 능선길

▲  백련산에서 바라본 은평구 지역

▲  백련산 능선길

 



 

♠  봉산(烽山) 둘러보기

▲  수국사에서 봉산 능선으로 이어지는 산길

봄이 막바지에 이르던 5월의 첫 무렵, 친한 후배와 봉산을 찾았다. 둥근 해가 하늘 높이 걸린
14시에 구산동(龜山洞) 버스 종점에서 그를 만나 떡볶이와 순대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황금사
원으로 유명한 수국사에 발을 들였다. (☞ 수국사 둘러보기)
이미 여러 차례 인연을 지었던 수국사는 코 앞으로 다가온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준비에
아주 분주했는데 그런 경내를 20분 정도 둘러보고 서쪽 산길을 통해 봉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수국사에서 완만하게 이어진 산길을 10여 분 정도 오르면 봉산 능선길에 이르는데 여기서 북
쪽으로 가면 벌고개, 앵봉산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 5~6분 정도 가면 봉산 정상이다.


▲  수국사 서남쪽 산자락에 닦인 체육시설과 쉼터

봉산 능선은 수색에서 벌고개까지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북쪽으로 바로 이어진 앵봉산
과 더불어 은평구의 서쪽 벽으로 천하 제일의 둘레길로 콧대가 높은 서울둘레길이 그들의 신
세를 지며 남북으로 흘러가는데, 봉산 능선을 거쳐가는 서울둘레길 7코스<봉산~앵봉산 코스,
가양역↔구파발역 16.4km> 덕분에 그 존재가 널리 알려지면서 외지 탐방객들이 많이 늘었다.


▲  녹음이 익어가는 봉산 능선길 (서울둘레길7코스, 정상 방향)

▲  봉산 정상 직전 능선길 (서울둘레길7코스)

▲  봉산 정상에 세워진 봉화정(烽火亭)

봉산(207.8m)은 서울 은평구와 고양시(高陽市)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약간 작은 산이다. 폭은
좁지만 대신 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어 멀리서 보면 수풀이 걸쳐진 커다란 벽 같다.
봉화대(烽火臺)가 있던 산이라 하여 단순하게 '봉산'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산 정상에
서 좌우로 뻗은 산줄기가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펴고 평화롭게 앉아있는 형상이라 하여 봉령산(
鳳嶺山)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으며, 수국사에서는 '태화산(太華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봉산 북쪽은 벌고개를 경계로 하여 앵봉산과 살을 대고 있고, 남쪽은 경의선 철로를 넘어 하
늘공원과 매봉산으로 이어지는데 정상 동북쪽에 봉산의 대표 명소인 수국사가 안겨져 있으며
정상에는 2011년에 지어진 봉수대와 봉화정이 있어 약소하게 볼거리를 선사한다.
또한 예로부터 봉산 무지개가 아름답기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여름에 소나기가 온 이후, 봉산
과 백련산(응암동) 사이로 일곱 색깔 무지개가 종종 나타났다고 한다. 그 빛깔이 선명하고 고
와 천하 무지개 중 최고였다고 하며, 무지개가 나타나면 동네 아이들은 그것을 타고 선녀 누
님이 내려온다고 하여 설레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
허나 인간의 이기적인 개발의 칼질과 산업화로 선녀도 등을 돌리면서 그 무지개도 거의 자취
를 감추었다.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에는 무지개를 종종 만났지만 다 커서는 자연산 무지개를
제대로 구경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이다. (분수대나 인공폭포에서 생기는 무지개는 제외)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구산동, 갈현동 주민
들이 정상에 모여 횃불을 밝히고 대한독립만세
를 외쳤던 유서 깊은 현장이기도 하며, 2011년
에 은평구에서 정상에 '봉산 해맞이공원'을 닦
으면서 봉화대와 봉화정, 조망데크를 설치했다.
또한 산길을 정비하여 벌고개와 수국사, 구산
동, 신사동(新寺洞), 수색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서울둘레길7코스가 봉산을 지나가면서
산의 명성도 적지 않게 상승했다.

▲  봉산 정상 남쪽 능선길
(신사동, 수색 방향)


▲  봉화정에서 바라본 봉산 봉수대

▲  봉수대 옆에 지어진 조망데크

▲  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고양시 향동동, 망월산


▲  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구산동과 갈현동, 연신내, 북한산(삼각산) 서부


봉산은 동쪽과 동북쪽, 서쪽이 훤히 트여있어 조망이 매우 일품이며, 해돋이와 일몰 구경에도
정말 최적화되어 있다.
여기서는 은평구의 대부분 지역과 북한산(삼각산) 서쪽 산줄기, 백련산, 서대문구 일부, 고양
시 향동동과 용두동, 망월산 등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오는데, 봄에 종종 지독하게 침범하는
중공 잡것들의 미세먼지 패거리가 푸른 하늘을 앗아가면서 마치 하늘이 주저앉은 듯, 시야가
뿌옇다. 구름 밑 세상은 그런데로 보이나 하늘이 미세먼지에 가려 보이지 않으니 두 눈도 편
치 못하고, 코와 입도 괴롭다.


▲  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③
오늘도 중공 잡것들의 미세먼지로 고통 받는 서울의 하늘 (응암동과 신사동,
녹번동, 수색, 백련산, 북가좌동 지역)

▲  봉산 봉수대(烽燧臺)
비록 장식물로 지어지긴 했지만 저들을 다시 세움으로써 봉산이란
이름값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봉산 정상의 상큼한 장식물인 봉수대는 동그랗게 다져진 공간 복판에 자리해 있다. 봉수 2기
가 쌍둥이꼴로 바짝 붙어서 천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꽤 돈독해 보이는데, 그 뒤쪽에 조
망데크가 있고 그 앞에 너른 공터와 봉화정이 있다.

봉산 봉수대는 고려 때부터 있었다고 전한다. '봉현(峰峴) 봉수'라 주로 불렸으며, 세종실록
지리지(1454년)에는 '영서역(迎曙驛) 서산(西山) 봉화'라 나와있다. <영서역은 불광동 지역>
압록강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봉수 제4거(炬)의 경유지로 고양시 고봉산(高峯山) 봉화에서 신
호를 받아 안산(鞍山, 무악산) 봉수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18세기 이후, 인근 해포봉
수(고양시 강매동)로 봉수대가 옮겨지면서 봉산 봉수대는 문을 닫게 된다.

2011년에 은평구에서 봉산 정상에 '봉산 해맞이공원'을 닦으면서 고려 말~조선 초 양식을 참
조해 약 300년 만에 다시 봉수대를 심어 산의 이름값을 다시 하게 했다. 허나 어디까지나 장
식용이라 옛날처럼 모락모락 봉화를 피울 수 없다. 게다가 고색이 아직 여물지 못했고 마치
타일을 붙인 듯한 모습이라 다소 어색해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들의 모습도 점점
익숙해질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약인 모양이다.


▲  봉산을 내려오다 (수국사 서남쪽 산자락 쉼터와 운동시설)

봉산 정상에서 미세먼지를 무릅쓰고 20분 정도 정상의 자리를 누렸다.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탐을 내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이라 적당히 있다가 내려오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허나 사
람은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는 50% 모자란 존재들이라 그 기본적인
것을 모른다.

마음 같아서는 봉산 남쪽 능선을 타고 수색 쪽으로 넘어가고 싶으나 시간도 그렇고 날씨도 그
렇고 해서 나머지 구간은 다음으로 미루고 도돌이표처럼 다시 수국사로 내려왔다.

* 봉산(봉산 봉수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구산동 산136-13일대



 

♠  은평구와 서대문구의 공동 지붕, 백련산(白蓮山)

▲  백련산 동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①
홍은동과 홍제동 지역, 인왕산(왼쪽 산), 안산(오른쪽 산)


여름 제국과 가을의 팽팽한 경계선인 9월의 첫 무렵, 은평구의 동남쪽 지붕이자 서대문구(西
大門區)의 북쪽 지붕인 백련산을 찾았다.
통일로와 세검정로, 연희로가 만나는 홍은4거리에서 서쪽(연희동 방향)으로 100여m 정도 가면
오른쪽(북쪽)으로 골목이 하나 있는데, 그 골목에 백련산으로 인도하는 나무계단길이 숨어있
다. (백련산 동남쪽 기점임) 시작부터 속세살이처럼 경사가 좀 각박하나 계단길을 적당히 닦
아놓아 그 급한 성질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그런 산길을 5분 정도 오르면 바위에 심어진 조그만 네모난 정자가 마중을 한다. 이곳에 올라
서면 동쪽으로 북한산(삼각산) 서남쪽 산줄기부터 홍은동, 홍제동, 인왕산(仁王山), 안산, 연
희동이 좁게나마 시야에 들어온다. 백련산은 통일로와 맞닿은 동쪽 부분(산골고개, 녹번동)에
는 바위와 벼랑이 많으며 응암동과 백련사와 맞닿은 서쪽과 남쪽 부분은 거의 흙산이다.


▲  백련산 동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②
푸른 하늘 밑으로 북한산(삼각산) 서남쪽 산줄기와 탕춘대능선, 홍은동
지역이 바라보인다.

▲  백련산 동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③
홍은동(弘恩洞)과 홍제동(弘濟洞) 지역, 그리고 인왕산

▲  백련산 동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④
홍은동과 홍제동, 연희동, 안산(왼쪽 산), 백련산 남쪽 부분(오른쪽 산줄기)

▲  바위에 걸터앉아 시내를 굽어보는 쉼터 정자
정자는 작고 보잘것은 없지만 위치와 조망만큼은 정말 기가 막힌다. 바로 밑으로
시내가 펼쳐져 있어 마치 세상의 주인이 된 기분인데 이곳에 걸터앉아 시내
야경을 바라보며 곡차 1잔 겯드리는 재미도 꽤 쏠쏠할 것 같다.

▲  솔내음이 율동을 부리는 백련산 동쪽 능선길

바위 정자를 지나서부터 백련산의 하늘길(능선길)이 시작된다. 능선을 따라 백련근린공원, 백
련산 정상(은평정), 백련산근린공원까지 이어지며 대부분 짙은 숲길이라 그늘의 질감도 좋다. 게다가 산길 경사도 거의 느긋하고 은평정과 백련근린공원 동쪽 전망대에서 1급 조망까지 누
릴 수 있어 걸어가는 길이 썩 지루하지가 않다.


▲  대통령이 기념 촬영을 했다는 백련근린공원 동쪽 능선 바위
2017년 5월, 문재인 전 대통령이 이곳에서 기념촬영을 했다고 한다.
<그는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백련근린공원 부근(홍은2동)에 거주했음>

▲  대통령이 기념촬영을 했던 백련근린공원 동쪽 능선 바위의 앞 모습
(바위 이름은 없음)

▲  백련산의 동북쪽 끝을 잡고 있는 백련근린공원 동쪽 전망대

백련근린공원 동쪽 조망대는 백련산의 동북쪽 끝이다. 앞이 확 트여있어 백련산에서 2등으로
일품 조망을 자랑하고 있는데 동북쪽 너머로 북한산(삼각산) 탕춘대능선과 족두리봉, 비봉능
선 등이 보이고 바로 밑에 녹번동을 비롯한 은평구 북부 지역, 봉산~앵봉산 산줄기, 인왕산,
북악산(백악산)까지 싹 시야에 잡힌다.

전망대 주변이 벼랑 일색이라 안전을 위해 난간을 둘렀으며, 전망대 옆으로 내려가는 계단길
이 있는데, 그 길은 통일로와 통일로 허공에 닦여진 산골고개 생태다리로 이어진다. (산골고
개 생태다리를 통해 북한산, 탕춘대능선으로 넘어갈 수 있음)


▲  백련근린공원 동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은평구 북부 지역 (녹번동, 불광동, 구산동, 갈현동, 연신내, 진관동)

▲  백련근린공원 동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북한산(삼각산) 서남쪽 산줄기 (족두리봉, 비봉능선, 탕춘대능선 등)

▲  백련근린공원 동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홍은동과 인왕산, 북악산(왼쪽 산줄기)

▲  백련근린공원 북쪽 능선길

백련근린공원 동쪽 전망대에서 능선길은 서남쪽으로 크게 꺾인다. 생태공원처럼 꾸며진 백련
근린공원을 지나면 숲이 매우 삼삼한 능선길이 펼쳐지는데, 정상 주변에서 경사가 좀 흥분기
를 보일 뿐, 거의 느긋하여 구름 위를 거니는 기분이다. 그런 길을 20분 정도 가면 백련산 정
상에 이른다.


▲  백련산 서쪽 능선길 (백련근린공원~은평정 구간)

▲  백련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정상 직전)

백련산(215m)은 은평구 녹번동과 응암동, 서대문구 홍은동에 걸쳐있는 조촐한 뫼이다. 산 남
쪽 자락에 오래된 절인 백련사(白蓮寺, ☞ 관련글 보기)가 안겨져 있어 백련산이란 이름을 지
니게 되었는데, 조선 때 왕족과 양반사대부들이 매를 날리며 사냥을 했던 매바위가 산자락에
있어 '응봉(鷹峯)'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매바위는 부암동의 붙임바위, 인왕산 선바위 등과 함께 서울의 이름난 바위로 1970년대까
지 있었으나 개발에 눈이 뒤집힌 동네 사람들이 무식하게 폭파시키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백련산은 동쪽 자락을 빼면 산세가 거의 완만하며 흥은4거리에서 백련근린공원, 은평정을 거
쳐 백련산근린공원까지 환상적인 능선길이 이어져 있다. 산 동쪽은 산골고개를 통해 북한산(
삼각산)과 이어지나 나머지는 거의 평지이며, 동남쪽은 홍제천을 사이에 두고 안산과 만난다.

산에 안긴 늙은 명소로는 백련사가 있으며, 산 동북쪽 자락에 백련근린공원이, 그리고 산 남
쪽 자락에는 백련산근린공원이 닦여져 있고, 산 정상에는 은평정이 자리하고 있다.


▲  백련산 정상에 자리한 은평정(恩平亭)

은평정은 한옥 양식과 콘크리트 건축 양식이 조잡하게 섞인 2층짜리 정자로 1989년에 은평구
에서 지었다.
백련산에서 가장 조망이 좋은 곳이며, 앞서 봉산처럼 해돋이와 일몰 구경에 최적화된 곳으로
여기서는 은평구 대부분 지역과 마포구, 서대문구, 고양시 동부, 한강 너머로 강서구와 양천
구, 영등포구, 구로구, 금천구, 인천 지역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백련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은평구 남부와 마포구 서부, 하늘공원, 한강, 강서구, 양천구,
영등포구, 인천 계양산 등

▲  백련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응암동, 구산동, 역촌동, 갈현동 지역, 봉산~앵봉산 산줄기,
봉산 너머로 고양시 지역과 고봉산까지

▲  백련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③
은평구 북부(녹번동, 갈현동, 불광동, 연신내, 진관동 지역) 지역과
앵봉산, 노고산(老姑山) 등

▲  백련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④
녹번동과 진관동, 북한산 서남쪽 산줄기(족두리봉, 비봉능선)

▲  은평정 2층에 걸린 창정기(創亭記)
은평정의 창건 이유가 소상히 적혀있다.

▲  숲터널 속으로 빠져들다 ~ 백련산 남쪽 능선길 (백련사 방향)

▲  내리막의 연속인 백련산 남쪽 능선길 (백련사 방향)

▲  백련산 남쪽 능선길에서 만난 돌탑
백련산을 찾은 중생들이 작은 소망을 담아 쌓은 돌이 쌓이고 쌓여
자유분방한 모습의 돌탑으로 성장했다.


백련산 정상에서 10분 정도 정상의 기분을 누리다가 남쪽 능선길로 내려갔다. 숲터널과 다름
이 없는 그 길을 10분 정도 가면 백련사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직진하면 백련산근린공원
과 홍연초교로 이어지며 오른쪽(서남쪽)으로 내려가면 백련사이다.
여기서 백련사로 내려가면 얼마 안가서 백련사 주차장이 마중을 하며,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백련사, 동쪽은 백련사 마을버스 종점이다. 백련사는 자주는 아니지만 수국사처럼 아주 가끔
씩 찾는 절이라 이번에는 통과하고 백련사 마을버스 종점을 지나 홍연초교 쪽으로 내려갔다.

이렇게 하여 백련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백련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응암동, 녹번동 / 서대문구 홍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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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2년 12월 29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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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최대의 황금법당을 지닌 고즈넉한 산사, 구산동 수국사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만난 수국사의 늙은 보물들)

서울 구산동 수국사


' 서울 수국사 봄나들이 '
수국사 대웅전과 오색연등
▲  하늘을 가득 메운 오색 연등과 그 너머로 살짝
보이는 수국사 황금법당(대웅전)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을 며칠 앞둔 5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친한 후배와 구산동(龜
山洞) 수국사를 찾았다. 그곳은 2009년 석가탄신일에 처음 인연을 지은 이래 여러 번 발
걸음을 했던 곳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탱화들을 아직 못나지 못했다. 하여 그들과 어
떻게든 인연을 지을 겸, 미답지로 남은 봉산까지 싹 처리하고자 겸사겸사 찾았다. (봉산
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겠음)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4시 경, 구산동 종점에서 그를 만나 국민의 대표 간식인 떡볶이
와 순대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봉산 자락에 묻힌 수국사로 들어섰다.



 

♠  동양 최대의 황금사원, 수국사(守國寺) 둘러보기

▲  수국사를 들어서다.
석가탄신일의 슬로건인 '차별없는 세상 우리가 주인공' 말은 참 좋다만
그런 세상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법 앞에 평등 어쩌구
강조하지만 거기서부터 벌써 오류가 발생하고 있으니 말이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석가탄신일에 벌써부터 흥겨움에 달아오른 수국사는 태화산(봉산) 자락에
둥지를 튼 절이다. 이곳은 특이하게도 법당(法堂, 대웅전)을 금으로 거의 도배하여 이 땅 유
일의 황금사원이자 동양 최대의 황금사원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데, 그로 인해 황금절, 황금사
원이란 근사한 별명을 지니고 있다.
법당에 사용된 재료부터가 다른 절과 확연히 틀려 두 눈을 제대로 휘둥그레지게 하지만 아직
은 은평구(恩平區)의 오래된 절 정도로 인지도는 낮은 편이다. 게다가 봉산 자락이라 봉산 또
는 태화산 수국사를 칭해야 되나 산세가 부실하여 믿음이 떨어지는지 거리가 좀 떨어진 삼각
산(북한산) 수국사를 칭하고 있다.

이곳은 겉으로 보면 현대 사찰로 보이겠지만 나름 역사가 있는 절로 1459년 세조(世祖)가 그
의 맏아들인 의경세자(懿敬世子)의 명복을 빌고자 그의 묘인 경릉(敬陵) 동쪽에 세운 정인사
(正因寺)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승려 설준(雪峻)이 절을 지으면서 설계까지 모두 도맡았다.
 
1471년 의경세자의 부인인 인수대비(仁粹大妃, 성종의 어머니)는
'절을 처음 지었을 때 급하게 만들어 재목이 좋지 않고 쓰임새가 정밀하지 못하다'
이르며 판
내시부사 이효지(李孝智)로 하여금 절을 크게 중창하게 했다. 중창된 절의 규모는 119칸으로
단청이 아름다워 광릉(光陵)의 원찰(願刹)인 봉선사(奉先寺)에 버금갔다고 하며, 1472년 석가
탄신일에 낙성법회(落成法會)를 화려하게 베풀자 법회에 참관한 승려 수백 명이 일찍이 없던
일이라며 감탄했다고 전한다.
인수대비가 이토록 정성을 쏟은 것은 그의 남편인 의경세자<덕종(德宗)으로 추존됨>의 원찰이
기 때문이다. 이후 예종(睿宗)의 원찰까지 겸하게 되었고 성종은 봉선사와 비슷하게 쌀 30섬, 면포와 정포를 각각 50필씩 지원했다.

1504년 절에 불이 나자 연산군(燕山君)은 경기감사와 형조참판를 소환하여 불을 낸 이를 국문
하게 하고 놀란 영혼을 위해 위안제(慰安祭)를 지내게 했다.

▲  온갖 연등으로 가득한 대웅전 내부

▲  용왕상(龍王像)과 연못

임진왜란 시절에 파괴된 것으로 여겨지며 이후 다시 중건되어 법등을 이어오다가 1721년 숙종
(肅宗)과 인현왕후(仁顯王后)의 능인 명릉(明陵)의 원찰이 되면서 나라를 지키는 뜻의 수국사
로 이름을 갈게 된다. 허나 다시 지원이 끊기면서 절은 폐허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잠시 속
세의 뇌리 속에서 두리뭉실 잊혀져 갔다.

1897년 북한산성 총섭(摠攝)으로 있던 월초거연(月初巨淵, 이하 월초)은 진관사(津寬寺)에 들
렸다. 진관사는 북한산(삼각산) 서부를 대표하는 절로 왕실의 지원이 각별했던 곳이다.
그는 대웅전에서 예불을 하다가 문득 구석에 처박혀있던 아미타불상 앞에 불기(佛器)가 없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겨 진관사 승려에게 이유를 물으니 그들은 퉁명스럽게
'그 불상은 수국사가 망해서 부득이 우리 절로 가져온 겁니다. 우리 것이 아니라서 차나 향을
공양한 적이 없지요~!'
그 말을 들은 월초는 발끈하여 아미타불 앞에 예불을 올리면서 수국사를 반드시 일으켜 세울
것을 속으로 다짐했다고 한다.

1900년 황태자(皇太子, 훗날 순종)가 중한 병에 걸리자. 다급한 고종이 월초에게 태자의 쾌차
를 기원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월초는 청도 운문사 부근 사리암(邪離庵)에서 100일 동안 나
반존자(那畔尊者) 기도를 올렸는데, 80여 일 되는 날에 늙은 승려가 꿈속에 나타나 금침(金針
)을 한번 놓는 사이에 태자의 병이 말끔히 나았다는 것이다.
이에 크게 기뻐한 고종은 월초에게 소망을 물으니 그는 바라는 것이 없다고 답을 올렸다. 그
러자 황제가 관직과 녹봉을 제의하자 월초는
'폐하의 말씀은 감사하오나 어찌 출가한 승려가 나라의 녹을 받겠습니까? 다만 서오릉 부근에
수국사가 퇴락하여 향화(香火)가 끊긴 것이 애석하오니, 그 절의 중창을 소망합니다'

이에 황제가 '효심과 신심(信心)은 원래 하나다'라 치하하며 어용(御用)목수를 보내 절을 지
금의 자리로 옮겨 중창하게 했다. 또한 황실에서 내린 돈과 관리들이 모금한 26만 8천냥으로
고양군 지도면 내곡리, 중면 산황리 2곳에 땅을 구입하여 절에 제공했으며, 1907년에 황실에
서 하사한 금 1,500원으로 개금, 탱화 불사를 하였다. 이때 진관사에 얹혀 살며 굴욕의 시간
을 보냈던 아미타불을 도로 가져와 봉안했다. (현재 대웅전에 있음)

1908년 석가탄신일에는 월초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여러 승려의 도움으로 괘불탱과 금강번(
金剛幡) 31위를 조성했으며, 양산 통도사(通度寺)에서 금 1천, 부산 범어사(梵魚寺)에서 금 4
백을 지원했다.

▲  초전법륜상

▲  수국사 십육나한도

6.25전쟁 때 말끔히 파괴되는 비운을 겪었으나 2005년 이후 주지 토진과 원담의 노력으로 지
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동양 최대의 황금사원이자 이 땅 유일의 황금사원이란 이미지를 진하게 내걸며 절을 꾸리고
있으며, 초전법륜상과 특이하게 'V'수인(手印)을 취한 성취여래불<成就如來佛>, 여름에만 있
다는 목탁새 등 독특한 명물로 속세에 강하게 손짓한다.

비록 고색의 내음은 녹슬었고 구산동 주택가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고즈넉한 산사(
山寺)의 분위기도 다소 떨어진다. 또한 많은 절집들이 앞다투어 외형을 불리다보니 그에 대한
반감도 적지 않은 편으로 수국사는 사치품인 금으로 법당을 꾸며 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참고로 금은 사악한 것을 몰아낸다고 하며, 불상에 금을 입히는 이유도 바로 그때
문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좋아하는 광물과 색깔이 바로 금과 금색임)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지장전, 삼성각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
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그 뱃속에서 나온 복장유물이 있다. 그리
고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탱화 6점이 있으나 이들은 모두 조계사(曹溪寺)에 있는 불교중앙박물
관에 가 있다.

* 수국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구산동 산135-1 (서오릉로23길 8-5, ☎ 02-356-2001)
* 수국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十'자형의 지장전(地藏殿)

수국사 경내를 들어서면 3층 규모의 문화센터가 마중을 한다. 그를 지나면 오른쪽(북쪽)에 너
른 뜨락과 지장전, 지장보살상이 있고, 정면으로 가면 용왕상이 있는 연못과 삼성각, 대웅전,
봉산 산길이 차례로 이어진다.

문화센터 옆에 자리하여 속세(俗世)를 굽어보고 있는 지장전은 원래 종의 보금자리인 종각(鐘
閣)이었다. 그러다가 잠시 대웅전으로 쓰였고 황금 법당이 지어지자 지장전으로 바뀌었다. 원
래는 '一'자형 건물이었으나 내부를 확장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으며, (이 땅 유일의 '十'자
형 지장전임) 칠성과 산신 등도 같이 있었으나 삼성각이 생기면서 그들은 싹 방을 빼고 지장
보살과 그 식구들만 남아있다.


▲  봄꽃에 감싸인 삼성각 계단

세상에 이보다 고운 계단길이 또 있을까? 계단 좌우로 봄이 곱게 붓질을 한 봄꽃들이 향연을
펼치고 있어 속세에서 오염된 두 안구를 제대로 정화시켜준다. 금색으로 도배된 대웅전보다
여기가 더 화려해 보이고 더 정감이 가니 역시 사람은 자연 속에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  새로 지어진 8각형의 삼성각(三聖閣)
지장전의 신세를 졌던 독성과 산신, 칠성의
보금자리로 아직 단청도 입히지 않은 아주
따끈따끈한 새 건물이다.

▲  삼성각 칠성탱
1960년에 그려진 것으로 칠성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져 있다.

▲  삼성각 산신탱
1960년에 조성된 것으로 마치 100년 이상
묵은 것처럼 꽤 늙어 보인다.

▲  삼성각 천정에 걸린 동그란 장엄등
장엄등에 동자승이 입혀져 있다.

▲  석조미륵불입상
2002년에 조성된 석불로 자비로운 인상이
중생들의 마음을 들었다 놓는다.


▲  꽃으로 치장된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부처가 기쁨을 가득 드러낸 채, 며칠 앞으
로 다가온 그날을 기다린다. 그 기다리는 시간은 정말 1년 같겠지만 정작 석가탄신일 당일은
1시간도 안될 정도로 체감 시간이 짧을 것이다.
혹시 모를 비와 강렬한 햇살의 태클에 대비해 그의 허공에 우산까지 설치했고, 그 앞에는 깨
알같이 불전함을 두어 석가탄신일 특수를 애타게 고대한다.


▲  초전법륜상(初轉法輪相) - 오비구상(五比丘像)

대웅전 우측으로 부처가 5명의 승려와 야외학습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눈길을 잡아 맨다. 다
들 진지하게 부처의 설법을 듣고 있는 승려들, 오른쪽 어깨를 훤하게 드러낸 법의를 입은 그
들은 부처의 설법에 기뻐하며, 어떤 이는 합장(合掌)으로 예를 올린다.
이들은 초전법륜상으로 오비구상이라 하는데 부처가 녹야원(鹿野苑)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하
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이 땅에서는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합성수지로 조성
된 것으로 그들의 뜨거운 학습 현장을 인자한 모습의 관세음보살 누님이 묵묵히 지켜본다.


▲  수국사의 상징이자 대표 감성, 황금법당 대웅전(大雄殿)의 위엄

▲  수국사의 하늘을 훔친 오색 연등과 그 너머로 보이는 대웅전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수국사의 감성을 자아내고 있는 대웅전이 금빛을 드러내며 웅장하게
자리해 있다. 계단 위쪽에 높이 들어앉은 탓에 그 위엄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돋보여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 정도이다.
그는 정면 3칸, 측면 7칸, 면적 108평에 이르는 팔작지붕 건물로 청기와를 씌운 지붕을 제외
하고는 기둥과 문짝, 벽, 평방(平枋), 공포(空包) 등 건물 안팎을 99.9%의 순금으로 싹 도배
하여 호화로움을 마음껏 뽐낸다. 그래서 고운 빛깔의 단청은 없으며 건물이 상처가 생기지 않
도록 절에서 꽤나 애지중지한다.
해가 질 무렵이나 어둑어둑한 저녁, 연등 빛에 비친 대웅전의 모습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으
며 그 내부 역시 질식할 정도로 화려함의 극치를 드러낸다. 온통 도금이 입혀진 기둥과 벽,
천정을 희롱하는 연등은 중생의 눈을 잔뜩 흥분시키며 그 황홀한 빛에 두 눈이 머는 것은 아
닌지 걱정이 들 정도이다.
불단에는 각각의 표정과 제스처를 취한 5개의 큰 금동불상을 두었고, 그 사이로 작은 보살상
과 불상 4개를 배치해 특이한 구도를 보여준다.


▲  대웅전의 허공을 가득 채운 장엄등의 찬란한 물결

▲  대웅전의 주연과 조연들 (큰 불상 5기와 작은 불상/보살상 4기)

▲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보물 1580호

대웅전 불단이 가히 무너질 정도로 들어앉은 불상/보살상 가운데 특별히 눈여겨 볼 존재가 하
나 있다. 바로 아미타여래좌상이다.
그는 수국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아미타불 뱃속에서 나온 유물은 제외>로 나무로 다져 금을
입혔다.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앉은 키 104cm
, 무릎 폭 72cm이다. 원래는 철원 심원사(深源寺)에 있었으나 수국사로 넘어왔으며, 조선 후
기에 절이 망하면서 진관사에서 샛방살이를 하기도 했다.
허나 다른 절의 불상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공양도 받지 못하고 구석에 처박혀 굴욕을 당하다
가 그것을 발견한 월초가 발끈하여 그에게 예불을 표하며 수국사 중창을 다짐했다고 한다.

이후 고종의 지원으로 절을 중건하고 그를 다시 가져와 법당에 두었다. 진관사에서의 안좋은
추억 때문인지 약간 인상은 쓰고 있지만 중후하고 넉넉한 얼굴로 고려 후기 불상 양식과 많이
비슷하다고 하며, 예전에는 신변보호를 위해 유리막으로 감쌌으나 지금은 거추장스러운 유리
막을 치우고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수국사 경내 (오른쪽 3층 건물이 문화센터)
오색 연등이 낮게 하늘을 가리며 석가탄신일 분위기를 드높이고 그 너머로
북한산(삼각산) 산줄기가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  조계사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만난 수국사의 보물들

▲  수국사 아미타불도(阿彌陀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2호

수국사의 지방문화재 탱화를 보러 간만에 왔건만 결국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들
이 조계사 불교중앙박물관으로 외출을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랴부랴 그들을 찾아 나섰다.
(지금은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음)
보물로 지정된 아미타여래좌상을 제외한 지방문화재 탱화 6점과 아미타불 복장유물이 나들이
를 나왔는데 그들이 속시원히 공개된 적은 거의 없었다. 하여 이런 상큼한 기회를 놓치면 그
들과의 술래 관계를 영영 청산하지 못할 것이다. (이들 탱화에 대한 지식이 짧은 관계로 문화
재청 정보를 거의 그대로 사용했음)

불교중앙박물관에 들어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수국사 탱화는 아미타불도이다. 그는 1907년
에 편수 보암긍법(普庵肯法), 두흠(斗欽), 금어 봉감(奉鑑), 법연(法沿), 범천(梵天) 등이 그
린 아미타후불탱으로 대시주인 강문환과 강재희가 황명에 따라 고종 황제 성수만세(聖壽萬歲),
황태자(순종) 경수천세(慶壽千歲), 황태자비 윤씨 보령천추(寶齡千秋), 황귀비 엄비 보수제년
(寶壽齊年), 의친왕 보수무강(寶壽無疆), 의친왕비 보록장춘(寶籙長春), 영친왕 보소여해(寶
笑如海)를 기원하고자 제작했다.
존칭 뒤에 붙은 성수만세, 경수천세, 보록장춘 등은 이름만 다를 뿐, 모두 만수무강을 기원한
다는 뜻으로 성수만세는 황제에게만 쓸 수 있었고, 경수천세는 황태자(태자), 그 외에는 황족
에게만 사용했다.

그림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8대 보살, 10대 제자, 사천왕, 팔부중, 천인 등이 배치되어
있는데, 갸름한 얼굴에 가는 눈썹과 눈, 작은 입, 높이 솟은 육계를 지닌 아미타불은 수미좌(
須彌座) 위 청련의 연꽃대좌 위에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보이며 결가부좌를 했다. 신광(
身光) 내부를 금박으로 처리해 마치 빛이 발산되는 듯 하며, 그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
보살이 협시하고 있고 그림 밑 중앙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마주보고 있다. 나머지 보살
은 아미타불을 향하고 있는데 지장보살은 어디로 마실을 갔는지 나오지 않는다.

보살들 위에는 아난존자(阿難尊者)와 가섭존자(迦葉尊者) 등 10대 제자가 있으며 윤곽선 주변
에 음영을 표현하여 입체적이면서도 사실적인 느낌을 준다. 그들 좌우에는 용의 뿔을 들고 있
는 용왕과 공양물이 든 과반을 든 용녀(龍女), 사자관과 코끼리관을 쓴 팔부중, 금강신 등이
표현되었다. 그리고 화면의 하단에는 사천왕들이 각자의 연장과 갑옷 등을 갖추며 서 있다.

탱화의 정보를 담은 화기(畵記)는 그림 좌우 가장자리에 있다. 왼쪽에 황제 가족의 성수만세
를 기원하는 내용이 있으며 오른쪽에 연화질과 시주질을 적었다. 화기에 의하면 1907년 2월 7
일, 13점의 탱화<대웅전 상단탱, 대료(大寮)의 상단탱, 영산탱, 독성탱, 칠성탱, 구품탱, 중
단탱, 감로탱, 산신탱, 신중탱 2점, 현왕탱, 조왕탱>을 조성해 봉안했다고 나와있으나 지금은
6점만 겨우 남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이 아미타불도는 대료의 상단탱으로 여겨
진다.

구한말에 황실 발원 탱화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구도와 다양하고 화려
한 문양, 능숙하고 섬세한 필치가 돋보이며, 구한말 서울 지역에서 활동했던 보암긍법과 두흠
, 봉감 등이 참여하여 그린 작품이다.


▲  수국사 십육나한도(十六羅漢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3호

16나한도는 1907년에 보암긍법, 두흠, 금어 봉감, 법연 등이 조성한 아미타후불탱의 일원으로
조성 목적은 앞서 아미타불도와 비슷하다. (이후에 나올 4개의 탱화도 같음)

그림 중앙의 큰 광배에 들어있는 석가3존상은 결가부좌했는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짓
고 가부좌를 취한 석가여래의 모습은 가는 눈썹과 눈, 좁은 입술, 높게 솟은 육계 등이 수국
사 아미타불도의 본존불과 매우 비슷하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의 대의(大衣)에는
아미타불의 대의와 유사한 색 문양과 금문양 등으로 화려하게 묘사되어 있다.
석가여래 좌우에는 협시보살이 청련의 연화대좌에 편안한 자세로 결가부좌했는데, 이중 왼쪽
협시보살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으나 오른쪽 것은 두 손으로 흰 백련을 받들고 있다. 이들
은 16나한과 함께 묘사된 점으로 미루어 왼쪽은 미륵보살, 오른쪽은 제화갈라보살 등 수기삼
존을 배치한 것으로 여겨지나 지물만으로는 단정하기가 어렵다. 석가삼존상 두르고 있는 신광
내부를 모두 금박으로 붙여 화면 중앙에서 광명이 퍼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석가3존상 좌우로 일정하게 분리된 네모의 틀 속에 다양하게 표현된 16나한은 산 또는 계곡을
배경으로 묘사되어 있다. 제12존자(나가세나)와 제13존자(안가다)를 제외한 나한들은 모두 1~
2명의 동자 또는 공양자를 거느리고 있는데, 사각형 틀 속에 각기 따로 묘사된 나한들의 상황
묘사는 매우 뛰어나며 해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나한들은 유사한 크기로 묘사되었고 그 색
감과 필선은 매우 수려하며 나한의 옷과 각종 지물에는 금니가 많이 쓰였다.

이 16나한도와 같은 화면분할식 구도는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울, 경기도 지역의 팔상도, 나
한도, 구품탱 등에 많이 사용된 구도로 나한들은 일정한 사각형 틀 속에 묘사되고 있어서 전
체적으로 정돈된 느낌을 준다. 또한 이 그림은 왕실 발원의 불화답게 금박과 금니 사용이 많
으며, 안정적인 필선과 형태, 조화로운 채색 등이 돋보인다.


▲  수국사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4호

1907년에 조성된 것으로 극락의 구품연화대(九品蓮花臺)를 담고 있다. 편수 보암 긍법과 두흠
, 금어 재원, 기정, 상은이 그렸으며, 강문환과 김종성, 원일상이 감동(監董)을 맡았다.

이 구품탱은 화면을 9개로 나누어 구품도 관련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런 분할 구도법은 개운
사(開運寺) 팔상도, 흥천사(興天寺) 극락구품도, 고양시 흥국사(興國寺) 극락구품도, 낙산 청
룡사(靑龍寺) 팔상도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구한말 서울, 경기도 지역 탱화에서 많이 나
타나는 구도법이다.
그림 중앙에는 아미타극락회(阿彌陀極樂會)가 묘사되어 있으며 그 주위로 구품 연못이 배열되
어 있다. 높은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보살과 10대 제자, 사천왕, 팔부중
, 천중 등이 둘러싸고 있으며, 권속들은 모두 3단으로 비스듬히 배치되어 있는데 흥천사 극락
구품도, 고양시 흥국사 극락구품도 등 다른 구품도에는 인물만 가득한데 반해 이 구품도에는
화면 좌우에 수목을 배치하여 화면 구성이 훨씬 여유가 있어 보이며, 아미타불의 신광과 화면
하단을 금박으로 처리하여 화려한 느낌을 준다.

극락회 향우에는 보살의 극락정토참예도(極樂淨土參詣圖)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아미타불 회
상에 참여하고자 모여드는 보살의 무리와 동자상, 그리고 무악천인 등을 그린 것으로 전각과
연못에는 극락조(極樂鳥)와 연꽃 등이 있다. 그리고 극락회 향좌의 성중극락정토참예도(聖衆
極樂淨土參詣圖)에는 극락의 주악천인과 아미타불 회상에 참여하고자 찾아온 7인의 성문상 등
이 있으며, 그 배경으로 극락조와 노송, 구름 등의 자연물로 이루어진 전각과 연못이 있다.

극락회 바로 밑에 자리한 극락정토 장면은 16관(觀) 중 제6총관(總觀)에 해당되는 관으로 보
수(寶樹), 소나무, 대나무, 기암괴석, 중층 지붕의 전각이 그려져 있다. 전각 앞에는 활짝 핀
연꽃과 연잎으로 가득한 연못이 있고, 주변 곳곳에 코끼리, 금모사자 등이 보인다. 제6총관의
좌/우 하단의 3면에는 극락왕생의 왕생정토를 표현했다. 왕생장면은 극락정토를 상품(上品),
, 중품(中品), 하품(下品)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각각 상/중/하로 나누어 아홉 장면으로 다루
었다.

하단 중앙의 제14관에 해당되는 상품은 화면의 반이 연못으로 이루어진 구도로 연못에는 관모
에 관복을 입은 왕생자, 동자형의 왕생자 등 4명의 왕생자가 백련 위에 앉아 있다. 왕생자 위
쪽에서는 부처가 구름을 타고 내려오면서 왕생자들을 향해 광명(光明)을 비추고 있다. 왕생자
들이 있는 연못 위 정토(淨土)에는 다양한 전각과 기암괴석, 수목 등이 기린 4마리, 극락조 2
마리와 어우러져 있으며, 제6총관 향우(向右)에 위치한 장면은 제15관 중품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는 동자형의 사람 모습을 한 왕생자 4명을 아미타불이 맞이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아미타불은 오른손을 어깨 위로 치켜들고 왼손은 무릎에 두며 정면을 향해 앉아있는데 그에게
서 뻗어 나온 빛이 연못 속 백련 위에 앉은 왕생자를 비추고 있다.
그들 배경에는 중층의 전각과 기암괴석, 수목, 극락조, 금모사자, 괴석, 오색을 발하는 금탑
이 보인다. 하단의 중품(향우)에는 구름을 탄 2구의 보살입상이 연못 속의 속인형 왕생자 3구
를 맞이하는 장면으로 보살의 지물인 연꽃에서 광명이 나와 왕생자를 비추고 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학과 낙타 등이 정토에서 노닐고 있다.

제6총관의 향좌(向左)에는 제16관 하품이 배치되어 있다. 연못 속에는 붉은 옷을 입은 2명의
왕생자와 옷을 입지 않은 3명의 왕생자가 백련 위에 앉아 합장하고 있으며, 화면 상단 우측(
향좌)에서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구름을 타고 왕생자를 맞이하러 오는 모습이 보인다. 그 주위로 여러 수목과 전각, 극락조와 기암괴석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2층 전각의 지붕을
금니로 칠했다. 그 밑에 묘사된 다른 하품의 연못에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내용을 반
영한듯 왕생자의 모습은 담지 않았다. 이는 십이겁(十二劫)이 지나야 하품왕생자의 연꽃이 핀
다는 내용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배경에는 수목과 괴석, 학, 사슴 등이 있다.

보암 긍법이 1905년에 봉원사(奉元寺) 구품도를 그렸는데 그것을 초본으로 삼아 제작한 것으
로 보이며, 채색은 금니와 함께 진채색을 다양하게 사용하여 매우 화려하면서도 민화의 극채
색을 연상케 한다. 필치 또한 수려하며, 문양의 표현 등 그 표현력이 매우 치밀하다.


▲  수국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5호

등장인물이 빼곡하여 눈과 정신을 쏙 피곤하게 하는 감로도는 1907년에 그려진 것으로 강재희
가 돈을 대고 강문환, 김종성, 원일상이 감동을 맡았으며, 편수 보암긍법, 편수 두흠, 금어
봉감, 계은봉법, 범화정운, 금운정기, 운호재오, 재원, 상은, 상오, 기정, 법연, 범천, 행언,
현상, 종민, 원상 등 많은 이들이 합심하여 그렸다.

죽은 사람의 극락왕생을 위해 봉안된 감로도는 가로 261cm, 세로 157.5cm에 달하는 화면의 하
단에는 아귀(餓鬼) 2마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그 위로는 많은 음식과 공양물이 차려진 제
단과 칠여래(七如來)가 표현되어 있다. 가로로 긴 화면의 상단에는 칠여래가 합장을 하며 나
란히 서 있으며, 좌측에는 아미타삼존과 아난/가섭존자, 왕후장상(王侯將相), 선왕선후(先王
先后), 북채를 든 뇌신(雷神), 우측에는 지장보살과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등이 구름 위에
서 있다.
7여래 밑에 있는 제단 좌우로 높은 기둥을 세운 후 南無百億化身佛(남무백억화신불, 석가모니
), 南無淸淨法身佛(남무청정법신불, 비로자나), 南無圓滿報身佛(남무원만보신불, 노사나) 등
삼신불번(三身佛幡)을 늘어뜨리고 갖은 꽃과 공양물을 두었는데 바람에 휘날리는 삼신번이 현
장감을 준다. 그런 제단 위에는 대황제폐하(고종), 황태자전하(순종), 영친왕전하, 의친왕전
하 등이 적힌 위패 모양의 불전패가 놓여 있다.

제단에 이르는 돌계단 밑 좌우에 놓인 커다란 화병에는 붉은색과 흰색의 모란이 가득 꽂혀있
으며, 제단 우측에는 흰 천막을 치고 승려들이 모여 앉아 독경하거나 큰 북과 바라를 두드리
며 의식을 치르는 모습, 승무를 추는 모습, 커다란 공양물을 머리에 이고 제단으로 가는 사람
들의 모습 등이 표현되었다.

화면의 하단 중앙에는 서로 마주보고 꿇어앉은 1쌍의 아귀가 크게 그려져 있다. 화염이 뿜어
져 나오는 입과 가는 목, 불룩한 배 등 아귀의 특징을 잘 묘사하고 있으나 얼굴 표정 등에서
다소 희화적이다. 아귀 좌우로는 수목으로 분리된 화면 속에 한복을 입은 남녀들이 춤을 추거
나 싸우는 장면, 대장간에서 일하는 장면, 악사들의 반주에 맞춰 광대가 묘기를 부리고 초랭
이가 부채를 들고 춤추는 장면, 죽방울 놀이를 하는 장면, 무당이 굿하는 장면 등 세속의 다
양한 장면들이 묘사되었는데, 음식을 먹거나 술을 받는 모습, 물건을 파는 모습 등은 당시 장
터의 모습을 재현한 듯 싶다.
여기에 표현된 풍속 장면은 주로 장례나 영가천도 등의 행사와 관련된 장면을 중심으로 표현
되어 수륙화로서의 감로도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화면 우측으로는 뇌신을 표현
한 화염 아래로 우산을 쓴 인물과 뱀에게 쫓기는 장면, 관세음보살보문품의 구제난(救濟難)
장면과 더불어 농사짓는 모습, 공부하는 모습,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 소고 등을 가지며 무리
지어 노는 모습, 일하러 가거나 장터에 가는 모습 등의 다양한 일상생활과 죄인을 벌하는 모
습, 전쟁 장면 등이 담겨져 있다.

이 탱화는 남양주 흥국사 감로도(1868년), 개운사 감로도(1883년), 봉은사 감로도(1892년) 등
서울, 경기 지역의 19~20세기 감로도의 도상과 동일한 도상을 취하고 있으며, 전체적인 구도
표현은 다소 복잡다난해 보이지만 풍속화적인 면이 충실하게 묘사되었다. 또한 인물들의 형태
감이 좀 떨어지기는 하지만 필치가 안정되고 다양한 색감에 의한 충실한 풍속 묘사 등이 돋보
인다.


▲  수국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6호

신중도는 호법신(護法神)의 무리를 담은 탱화로 주로 법당에 걸어 법당 수호 및 청정제의 역
할을 한다.
이 탱화는 1907년에 제작된 것으로 편수 보암 긍법과 두흠, 금어 재원, 기정, 상은이 그렸으
며, 강문환과 김종성, 원일상 등이 감동을 맡았다.
화폭이 270cm에 이르는 큰 신중도로 그림 가운데에 위태천(韋太天)과 범천(梵天), 제석천(帝
釋天)을 두고 그 주위로 천부중과 호법신을 배치했는데, 얼굴이 둥글고 넓적한 위태천은 새
깃털을 꽂은 투구와 갑옷을 입고 두 손으로 삼차극(三叉戟)을 세워 들고 있으며 목을 앞으로
내밀고 있다.

범천과 제석천은 화려한 보관과 천신의 복장으로 정면을 향해 합장인을 보이고 있는데 위태천
과 함께 신광 내부를 금박으로 처리해 그림의 중심 인물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들 주위로 주
악천인(奏樂天人)이 피리, 타박, 생황 등을 연주하고 있으며 해와 달이 묘사된 관을 쓰고 있
는 일궁천자(日宮天子)와 월궁천자(月宮天子), 익선(翼扇)을 든 산신과 홀을 든 조왕신, 천동
, 천녀 등이 있다.

위태천 옆에는 좌우 3구씩 6구의 신장(神將)이 배치되어 있다. 뿔을 든 용왕과 칼과 창을 든
호법신이 있는데 특징적인 인물 표정이 신중탱 전체에 다양성을 주고 있다. 채색은 적색, 녹
색을 비롯하여 금색과 갈색, 짙은 청색 등이 같이 사용되었는데 전체적으로 매우 차분하며 그
속에서 보여지는 금박과 여러 문양은 화폭에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필선은 철선묘를 기본
으로 섬세한 필치가 돋보이는데, 호법신의 수염까지 세밀히 묘사되었으며 윤곽선 주위로 선염
(渲染)을 가해 입체감을 표현하는 등 황실 발원 불화의 품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수국사 현왕도(現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7호

현왕도는 사람이 죽은 지 3일 만에 심판을 하는 현왕(보현왕여래)과 그 식구들을 그린 것이다.
1907년에 월초가 화주(化主), 강재희가 대시주가 되어 황제 가족들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봉안
한 것으로 보암긍법과 두흠, 금어 범화정운, 운호재오, 행언이 함께 그렸으며 가로 248.3cmX
세로 150.8cm 크기로 다른 현왕도와 달리 가로가 길어 현왕도 중에서 매우 큰 규모이다.

현왕을 중심으로 대륜성왕, 전륜성왕(轉輪聖王), 판관, 녹사, 천동 등이 그려져 있으며, 각기
바라보는 방향을 달리한 채, 자유로운 몸짓을 하고 있다. 붉은 관복을 갖춘 현왕은 오른쪽으
로 몸을 돌린 채 십자형 문양이 새겨진 천으로 덮힌 의자에 앉아있으며, 머리에는 경전을 접
어 올려 장식한 관을 쓰고 있고 오른손에는 두루마리를 쥐고 있다.
현왕 앞에 놓인 책상에는 화엄경과 벼루, 붓, 연적 등이 놓여있으며. 현왕 주위로는 대륜성왕
과 전륜성왕 등 여러 명의 녹사와 판관이 배치되어 있다. 그림 위쪽에 있는 동자는 부채, 당
번(幢幡), 산개(傘蓋) 등을 들고 있는데 현왕 앞에 있는 2명은 현왕 쪽으로 몸을 굽히고 있다.
그중 1명은 두루마리를 받치고 있고 다른 1명은 두루마리를 받고 있다.

현왕을 중심에 두고 그 가족들을 좌우로 배치했고 가로폭이 넓은 화폭으로 구성되는 등, 안정
감을 보여주고 있으며 금니 사용과 조화된 채색,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문양, 철선묘의 안정적
인 필치 등이 뛰어난 작품이다.


▲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의 하나인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 보물 1580호


대웅전에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고향(철원 심원사)을 잃었고 심지어 남의 절에서 푸대접
을 받으며 샛방살이를 했던 흑역사가 있다. 그 한이 쌓여서 생긴 사리일까? 그의 뱃속에서는
많은 복장(腹臟)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고려부터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온갖 진귀한 것들
이 주류를 이룬다. 하여 그들은 아미타여래좌상과 한 덩어리로 묶여 국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
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이들은 부피가 작은 진귀한 것들이라 신변보호를 위해 비공개로 묶여 있는데 이번에 모두 외
출을 나오면서 속세에 그 도도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다시 수국사로 돌아가면 어지간해
서는 만날 기회가 없을 것이므로 특별히 시간을 내어 찾았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은 아미타불 뱃속에서 나온 문서 중 유일하게 금속활자(金屬活字)로 인쇄된
경전이다.
1457년 세조가 의경세자의 명복을 빌고자 찍어낸 것으로 자신이 큰 글자의 자본을 직접 써서
주성한 정축자(丁丑字)로 경문을 찍었고 오가의 주해문은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로 찍었다.
그리고 책 끝에는 세조의 발문(發文)과 한명회, 조석문(曺錫文), 임원준(任元濬) 등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인 밀교대장(密敎大藏) 권9 - 보물 1580호

밀교대장은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 지은 '밀교대장', 그리고 1424년에 왜열도에 '밀교
대장경판'을 내렸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이 있으나 아쉽게도 관련 실물은 전하지 않았다. 그러
다가 바로 수국사 아미타불 뱃속에서 그 실체가 처음으로 발견되어 이 땅 유일의 밀교대장으
로 크게 추앙을 받고 있다. 그 자체로도 가치가 엄청난 존재로 1389년에 간행된 것으로 파악
되고 있다.


▲  일체여래 전신사리 보협진언(一切如來 全身舍利 寶篋眞言) - 보물 1580호

'기해년(己亥年, 1239년)'과 '시중(侍中) 최종준(崔宗峻)'의 이름이 적힌 다라니이다. 최종준
은 철원최씨 집안인 최유청(崔惟淸)의 손자로 고종(高宗) 때 15년간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
낸 사람인데, 1239년에 집안과 나라의 안녕을 위해 불상과 이 다라니를 조성했다.


▲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진본 권36 - 보물 1580호
11세기에 판각된 사간본(寺刊本)으로 여겨진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조성하면서
집어넣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표지가 떨어져 나가고 권수 일부가 훼손되었으나
그 외에는 잘 남아있다. 권수제는 경제(經題), 품제(品題)가 나눠져 있고
역자가 그 사이에 표시되어 모두 3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  원문(願文) - 보물 1580호
1389년에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개금한 내용과 시주자가 적혀있다.
<1389년 7월 22일에 개금을 시작, 각각 소요된 금과 니금의 양을 표시했음,
화주는 지식행(智識幸), 시주는 영성군부인(寧城郡夫人) 신씨>

▲  몽골에서 넘어온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 - 보물 1580호
14세기에 원나라(몽골) 보령사(普寧寺)에서 간행된 경전으로 일명 보령장(普寧藏)이라
불린다. 권17, 18, 88, 144, 145, 146 등 총 6권6첩이 발견되었는데, 권 17표지에
'주지 계상(戒祥)'이란 묵서가 있어 수국사로 넘어오기 전에 계상이란 승려가
가지고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  절반 이상이 헝클어진 원문(願文) - 보물 1580호
1562년 불상 중수 때 작성된 원문이다. 불상 개금에 니금 2돈이 소요되었다고
나와있으며 1차 중수(1389년)와 달리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나오지
않아 두 보살상은 사라지고 아미타불만 홀로 있었음을 알려준다.

▲  푸른 피부의 발원문(發願文) - 보물 1580호
1562년 불상 중수 때 시주자인 신사지(愼思智)의 발원문이다. 부모와 자손들 모두
정토(淨土)에서 다시 태어나 불법의 소리를 보고 들으며 칠보(七寶)와
안양(安養)의 나라에서 즐겁게 보내기를 소망하고 있다.

▲  불설장수 멸죄호제동자 다라니경(佛說長壽 滅罪護諸童子 多羅尼經)
- 보물 1580호

이름이 무려 14자에 이르는 이 경전은 간단히 줄여서 '장수경'이라 부른다. 석가여래가 문수
보살에게 알려준 일체 중생의 멸죄장수의 법을 적은 것으로 이 경을 독송하면 아픈 아이를 낫
게 하고, 죽은 사람을 위해 49일 이내에 이 경에 향을 사르고 공양하면 현세에서 장수하게 되
며 악도(惡道)의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한다.
서적 끝에 '복위(伏爲) 황제폐하 ~~ 억재(億載)'란 내용이 있어 13세기 정도에 몽골(원)에서
간행된 것으로 여겨지며, 뒷표지에 '성인시납(性仁施納)'이란 내용이 있는데, 성인은 심원사
승려로 1562년 불상 중수 때 많은 불교 서적을 시납했다.


▲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 보물 1580호
1539년에 황주 심원사에서 펴낸 것으로 1541년 불상을 중수했을 때 다시 인출했는데
당시 불상 중수를 담당했던 심원사의 성인이 이런 사실을 기록했다.

▲  약사유리광여래 본원공덕경(藥師琉璃光如來 本願功德經) - 보물 1580호
1528년 강남 봉은사에서 펴낸 판목을 1541년에 화주 법심(法心)이 심원사에서 인쇄한
것이다. 1562년 불상을 중수했을 때 희섬(熙暹)이 지장경과 이 약사경을 시납했다.

▲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뱃속에 넣었던 여러 조선 중기 직물들 - 보물 1580호

▲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뱃속에 넣었던 조선 중기 동경(銅鏡)과
빛깔이 고운 다양한 보자기들 - 보물 1580호

▲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뱃속에 넣었던 하얀 저고리(조선 중기) - 보물 1580호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을 끝으로 수국사의 찬란한 보물 구경은 마무리가 되었다.
수국사를 품은 봉산(烽山, 207.8m)까지 본글에 싹 담고자 했으나 내용이 너무 장대해지므로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이렇게 하여 수국사 5월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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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홍제천 늦가을 산책 (세검정, 석파정별당, 석파랑, 홍지문 탕춘대성,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부암동 늦가을 산책


'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늦가을 나들이 '

홍지문과 탕춘대성

▲  홍지문과 탕춘대성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세검정

▲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  세검정

 



 

종로구 북부에 자리한 부암동(付岩洞)은 북한산(삼각산)과 인왕산, 북악산(백악산)에 포
근히 감싸인 산골 분지이다. 전원(田園) 분위기가 진하여 여기가 과연 서울 한복판이 맞
는지 심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데, 자연과 어우러진 늙은 경승지(세검정, 홍지문. 백
석동천 등)는 물론 미술관 등의 문화공간(환기미술관, 서울미술관, 자하미술관 등)도 풍
부하여 나들이의 깊이와 재미를 더해준다.
바로 그런 매력 때문에 한참 전인 20대의 한복판에 부암동과 백석동천(백사실계곡)에 퐁
당퐁당 빠져버렸고, 이후 1년도 거르지 않고 매년 여러 번씩 발걸음을 하여 나의 마음을
비추고 있다.

사계절 가운데 가장 처절하게 아름답다는 늦가을이 서서히 희미해져 가던 11월 한복판에
어느 볕 좋은 날, 늦가을의 마지막 모습을 사진과 자연산 망막에 하나라도 더 담고자 간
만에 부암동을 찾았다. 이때가 지나면 가을 단풍은 90% 이상 지게 된다. 하여 후회가 없
도록 열심히 늦가을의 바퀴자국을 남겨야 나중에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늦가을 풍경은 4계절 가운데 으뜸이다.



 

♠  서인 패거리들이 반역(인조반정)을 꿈꾸며 칼을 씻던 곳, 도성 밖
경승지이자 서울 시민들의 소풍/피서지로 인기를 누렸던
세검정(洗劍亭) - 서울 지방기념물 4호

신영동3거리에서 상명대, 홍은동 방면으로 5분 정도 걸으면 큰 바위에 걸터앉아 홍제천(弘濟
川)을 바라보고 선 단아한 모습의 세검정이 마중을 나온다.

세검정은 팔작지붕을 지닌 'T'자형 정자로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다소 말들이 많다. 연산군이
1506년에 탕춘대(蕩春臺)를 조성하면서 그 부속 정자로 세웠다는 설도 있고, 숙종(肅宗) 시절
에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성하던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는 설도 있기 때문이다. 허나 둘
다 나름대로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로 연산군 때 세워진 탕춘대 부속 정자가 세검정의 전신(前
身)이 아닐까 싶다.

세검정의 세검(洗劍)은 칼을 씻는다는 뜻이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통치에 쓸데없이 불
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같은 것들이 여기서 광
해군 폐위를 모의하고 그 결의를 다지고자 칼을 물에 씻었다고 한다. (혹은 칼을 갈고 날을
세웠다고 함)
그들은 역촌동(驛村洞)에 별서를 짓고 살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을 앞세워 창의문(彰義門
)을 뚫고 도성(都城)을 침범, 창덕궁(昌德宮)을 점령하여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군주
로 옹립한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저지른다. 이렇게 정권을 빼앗은 서인 일당은 반역을
모의하고 칼을 씻었던(또는 갈았던) 현장을 길이길이 추억하고자 정자 이름을 세검정이라 했
다고 전한다.

1748년 정자를 일부 수리했으며, 1941년 화재를 만나 겨우 주춧돌 하나만 남아있던 것을 1977
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세검정은 '세검정터'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4호로 지정되어 있음)

▲  옆에서 바라본 세검정

▲  세검정의 뒷모습

세검정은 주변 풍경과 조화를 꾀하며 지어진 정자로 규모는 작지만 홍제천과 차일암 등의 잘
생긴 바위들 그리고 북한산(삼각산)의 시원스런 숲이 서로 어우러진 그림 같은 현장이다. 그
러다보니 도성 밖 경승지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도 이곳을 찾아와 세검정의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또한 질 좋은 바위들이 많아
서 덕수궁(경운궁) 석조전(石造殿) 기초공사 때 이곳 화강암을 뜯어와 조성했다.

구한말(舊韓末) 이후에는 양반과 귀족들 외에 일반 백성들도 나들이로 많이 찾아왔으며, 서울
시내의 여러 신식 학교들도 이곳을 소풍지로 삼았다. 특히 1899년 5월에는 이화학당(梨花學堂
) 여학생들이 여기로 소풍을 나왔는데 그것이 이 땅 최초의 여학생 소풍으로 당시 '조선 그리
스도인 화보'에는 그때의 사연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정동 이화학당 여학도들이 1년 동안을 애쓰고 공부하다가 봄빛을 따라 창의문 밖으로 화류(
花柳) 구경 갔더라 하니 우리가 매우 치하하는 것은 여학도의 화류는 500년에 처음이라..'

왜정(倭政) 이후, 서울 시민들의 소풍 및 피서지로 발디딜 틈이 없었고, 세검정 주변 신영동
과 홍지동은 자두와 능금 명산지로 유명하여 여름만 되면 그들의 달달한 향기가 동네에 진동
했다. 지금으로서는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을 세검정이 지녔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세검정은 1970년대 이후 모진 변화를 강요 받게 된다. 천박한 개발의 칼
질이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부암동과 신영동 지역에 들이닥친 것이다.
한적했던 동네에 집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서면서 그들이 내뱉은 생활폐수로 세검정을 윤기 나
게 했던 홍제천은 악취가 진동하는 저주받은 하천으로 전락하였고, 능금과 자두가 자라던 곳
도 주택 개발에 밀려나 자취를 감추었으며, 세검정 옆을 지나는 도로(세검정로)가 확장되면서
운치가 적지 않게 깎여나갔다.

현재 세검정은 뒷통수를 지나는 차량들의 소음과 매연, 그리고 아직도 덜 걸러진 홍제천의 쾌
쾌한 냄새로 매일 고통을 받고 있다. 홍제천이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비린
내는 여전하며 하천 너머로 주택들이 가득해 옛날의 운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긴 서울 땅
에서 천박한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거나 고립된 경승지가 어디 한둘이랴. 너무 사람과 개발만
생각하여 일을 저지르다보니 옛 경승지와 자연을 전혀 배려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  세검정의 오랜 단짝, 차일암(遮日巖)

세검정 밑에는 하얀 피부의 넓직한 반석이 누워있는데, 이 바위가 조선 때 사초를 깨끗히 세
초(洗草)했던 차일암이다.
세초란 사초(史草) 등에 적힌 글씨를 물로 빡빡 씻겨 지우고 그 종이를 다시 쓰는 것으로 그
것을 마치면 뒷풀이로 세초연(洗草宴)을 벌였다. 사초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모태
가 되는 데이터로 제왕이 죽으면 바로 사초를 정리하여 실록을 편찬했다.

차일암은 세검정을 수식하며 서울 장안의 이름난 경승지이자 피서지로 바쁘게 살았었다. 무더
운 날씨에 벌러덩 누워 한잠 청하고 싶을 정도로 잘생긴 바위로 근래에 여기서 세검1교 밑도
리로 징검다리가 놓였는데, 그 다리를 통해 홍제천 산책로를 따라 홍지문 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다.


▲  늦가을이 잔잔히 깃든 세검정 산책로

▲  세검정 동쪽 홍제천 산책로
빌라 너머로 보이는 산자락에 백사실계곡(백석동천)이 숨겨져 있다.

▲  세검정 동쪽 산책로(세검정성당 건너편)에서 바라본 세검정
세검정 너머로 상명대와 탕춘대능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 세검정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168-6 (세검정로 244)



 

♠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에서 홀로 떨어져 나온 한옥
석파정 별당(石坡亭 別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3호

▲  석파랑에서 바라본 석파정 별당

세검정에서 서쪽으로 조금 가면 상명대입구인 세검정교차로이다. 여기서 서남쪽 길 건너편으
로 고풍스런 멋이 깃들여진 고래등 기와집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그 집이 석파정별당을 품고
있는 석파랑(石坡廊)이란 고급 한정식당이다.

지금은 비록 식당이지만 원래는 서예가이자 문화유산에 조예가 깊었던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
馨, 1903~1981)이 살았던 곳이다.
그는 6.25시절 서울을 점령한 북한이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담긴 문화유산을 죄다 빼돌리
려고 하자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와 함께 뛰어난 재치로 문화유산의 강제 북송을 막아냈으
며 <자세한 내용은 ☞ 간송미술관 글 참조> 왜열도로 넘어간 김정희(金正喜)의 완당세한도(阮
堂歲寒圖, 국보 180호)를 천신만고 끝에 품에 안고 온 인물로도 유명하다.

소전의 집은 새로 지은 것이 아닌 조선 후기 한옥을 옮겨온 것으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의 옥인동(玉仁洞) 집을 1958년에 매입하여 가져왔다. 이때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이자 바로 근처에 자리한 석파정(石坡亭)에서 별당까지 떼어와 집
뒤쪽에 두었다. 또한 운현궁(雲峴宮)과 덕수궁(경운궁)에서도 돌담과 한옥을 사들였으니 그의
재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당시로는 그리 흔치 않았던 서양개 세퍼드를 여러 마리나 키우
고 있었다고 함)
소전이 1981년 세상을 뜨자 집은 다른 이에게 넘어가 비싼 한정식당으로 바뀌었으며, 석파정
의 이름을 따서 석파랑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오랫동안 손님 외에는 내부 접근이 어려웠으나
2000년대 이후 해방되어 마음 편히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에 이곳은 부암동의 주요 명
소로 성장하여 사진쟁이와 답사객의 발길이 나날이 늘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개인이
운영하는 식당이기 때문에 답사와 출사를 한답시고 별당 등 건물 내부로 마구 들어가서는 안
된다.


▲  석파랑 본채 북쪽에서 바라본 석파정 별당

석파랑 뒤쪽 높은 곳에 자리한 석파정 별당은 맞배지붕의 'ㄱ'자 형태로 3개의 방으로 이루어
져 있다. 가운데 큰 방이 흥선대원군의 방이고 건너 방은 손님을 접대하던 공간이며 대청방은
그의 특기인 사군자(四君子)의 난초를 그릴 때만 특별히 사용했다고 전한다. 사랑채의 마루
안쪽에는 난간을 설치해 고급스러운 한옥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외벽은 벽돌로 도배해
속살을 가리고 가운데에 동그란 창을 냈다. 이는 청나라의 건축 양식을 부분 반영한 것이다.

소전에게 별당을 빼앗긴(?) 석파정은 오랫동안 비공개로 일관하다가 2012년 겨울에 비로소 공
개되었다. (서울미술관 개장으로 개방됨) 문화유산은 제자리에 있어야 된다는 법칙에 따라 별
당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서로 소유자가 달라서 이 또한 쉽지가 않을 것
이다. <석파정은 서울미술관 소유, 석파정에서 떨어져 나온 별당은 석파랑 소유>


▲  석파정 별당 쪽마루와 섬돌
대청방 문을 살며시 열면 열심히 난초를 그리고 있는 대원군 할배가 있는 것은
아닐까? 섬돌에 신발들이 가득 있는 것을 보니 가운데 방에서 사람들이
한정식을 먹고 있는 모양이다.


석파정 별당은 현재 식당의 일부로 쓰이고 있다. 결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던 대원군의 별
장이 졸지에 식당 손님들의 밥먹는 장소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별탈 없이 깨끗하게
보존되고 있으니 이 정도는 뭐 봐줄 만은 하겠다. (아직 방 내부는 구경하지 못했음)
별당으로 다가서는 방법은 석파랑 정문으로 접근하거나 석파랑 전용 주차장에서 스톤힐로 이
어지는 돌계단을 타고 들어가면 된다.


▲  150년 이상 묵은 석파랑 감나무 (가운데 나무)

별당 옆에 조성된 돌계단과 돌문, 성곽처럼 다져진 석축은 석파랑에서 스톤힐이란 건물을 지
으면서 닦은 것들이다. 스톤힐(Stone hill)은 이탈리아 음식과 술을 취급하는 식당으로 석파
랑 주인의 딸이 운영하고 있는데, 전통과 고풍스런 멋이 깃든 석파랑과 180도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그 옆구리에는 홍지동 산신당이 있다.
돌의 언덕을 뜻하는 '스톤힐'에 걸맞게 하얀 돌로 그 길목을 꾸민 것이 참 이색적이다. 하지
만 소나무가 무성한 주변 풍경과는 썩 어울려 보이지 않으며 스톤힐을 만들면서 석파정 별당
의 석축까지 진하게 다져놓아 마치 성곽 위에 집처럼 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  활짝 열린 석파랑 대문(정문)
이곳에서 밥을 먹지 않더라도 사진쟁이와 답사객들에게 석파정 별당과 뜨락을
흔쾌히 개방하고 있다. 허나 예전에는 비싼 밥을 먹으러 오는
손님들에게만 입을 벌리던 차가운 문이었다.

▲  경복궁에서 가져온 만세문(萬歲門)

석파랑 본채는 순정효황후의 집을 옮겨온 것으로 청나라 천진(天津)에서 가져온 청나라식 호
벽이 그대로 남아있다. 뜨락에 세워진 만세문은 고종(高宗)이 황제에 오른 것을 기념하고자
1898년 경복궁에 세운 것으로 궁궐 건축물의 고품격이 고스란히 배여 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뜨락에는 곳곳에 박석(薄石)을 깔아 돌길을 냈으며 조그만 절구통과 다
양한 석물, 꽃, 나무 등을 심어놓아 눈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  석파랑의 중심인 본채
최대 50명까지 밥 손님 수용이 가능하며, 석파랑의 값비싼 한정식을
지어내는 부엌이 이곳에 들어있다.

▲  석파랑 본채 뒤쪽에 숨겨진 붉은 장독대들
저들 속살에는 무엇이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을까? 한번 들춰보고 싶다.
한정식당이니 고추장이나 김치, 간장 같은 것이 들어있을 것이다.

▲  석파랑 뒤쪽에 자리한 홍지동(弘智洞) 산신당

석파랑 뒤쪽이자 스톤힐 옆에는 붉은 피부 벽에 푸른 기와를 지닌 조그만 집이 있다. 얼핏보
면 창고처럼 보여 그냥 지나쳐도 아쉬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문 위에 걸린 '산신당' 현판이
보여주듯 홍지동의 안녕을 오랫동안 지켜주던 산신당이다.

세검정 주변 동네(신영동, 홍지동, 부암동)에는 4개의 산신당이 전하고 있다. 그중 석파랑 뒤
쪽 산신당은 홍지동을 담당하고 있는데, 매년 음력 8월 1일 동네 사람들이 산신제를 지낸다.
특이한 것은 나머지 산신당도 같은 날 제를 지낸다는 것이다. 굳게 닫힌 당집 안에는 산신 부
부가 그려진 그림이 봉안되어 있으며, 오로지 제사날과 일부 날(청소하는 날 정도)에만 잠깐
씩 열어두고 있어 평소에는 내부 관람이 불가능하다.

산신당 주변은 나무와 풀만 있었으나 주변 땅을 소유하고 있는 석파랑이 산신당 바로 옆에 스
톤힐을 지으면서 보기가 좀 딱하게 되었다. 한때는 동네 성지(聖地)나 다름 없던 산신당의 존
재감이 크게 하락한 지금의 세태를 보여주듯이 말이다. 허나 잃는 것이 있다면 얻는 것도 있
다고 스톤힐 덕분에 계단이 닦이면서 접근성 하나는 좋아졌다.

* 석파정별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125-2 (자하문로 309, 석파랑 ☎ 02-395-
  2500)


▲  세월 속으로 사라진 부침바위를 추억하는 표석

부침(붙임)바위는 부암동의 지명 유래가 된 유명한 바위이다. 바위 피부에 난 구멍에 돌을 대
고 비비면서 소원을 빌거나 바위에 붙인 돌에서 손을 떼었을 때 그 돌이 척 붙으면 아들을 낳
거나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아들을 원하는 여인들로 한때 북새통을 이루
었다.

옛날부터 뿌리 깊게 박힌 아들 선호 사상이 빚어낸 기자신앙(祈子信仰)의 애듯한 현장으로 바
위 높이는 2m 정도 되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잘 남아있었으나 개발의 칼질에 무참히 난도
질을 당해 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바위터에 표석을 세워 그가 있던 자리임을
아련하게 전해줄 따름이며, 세검정교차로 공원에 그를 추억하는 표석을 세웠다. 허나 아무리
그런다고 강제로 사라진 그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서울 땅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잘생긴 바위가 참 많았는데, 개발만 앞세운 도
시화의 거친 물결과 인간의 욕심으로 많은 바위가 세월의 저 편으로 강제로 사라지고 말았으
니 실로 안따깝기 그지없다.



 

♠  한양도성과 북한산을 이어주며 도성의 수비력을 높였던 탕춘대성
(蕩春臺城)과 홍지문(弘智門)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


▲  홍지문과 오간대수문

석파랑을 둘러보고 홍은동(弘恩洞)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홍지문이란 성문과 탕춘대성이라
불리는 성곽이 마중을 나온다. (석파랑 옆 세검정교차로에서 훤히 바라보임)

홍지문을 거느린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이어주던 산성(山城)으로 연산군이
세검정 부근에 지은 탕춘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한양(서울) 서쪽(정확히는 북서쪽)에 있다
고 해서 서성(西城)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겹성이란 별칭도 있었다.

이 성은 숙종(肅宗)이 만약에 있을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서울의 방어력을 높이고 비상시
북한산성 행궁(行宮)으로 신속히 도망칠 수 있는 시간 확보를 위해 조성되었다. 1702년 신완(
申琬)이 성곽 축조를 제의했는데, 북한산성(北漢山城) 증축과 행궁 조성, 한양도성 보수가 마
무리되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짓고자 1715년 홍제천에 홍지문을 먼저 닦
았다. 그런 다음 1718년 8월 26일 성곽 공사에 들어갔으나 겨울이 다가오면서 10월 6일에 일
단 공사를 멈추었다가 1719년 2월 다시 공사에 들어갔다. 허나 처음보다 사업이 크게 축소되
면서 3월에 공사를 종료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탕춘대성은 인왕산 북쪽에서 시작하여 인왕산 북쪽 능선, 홍지문, 탕춘대능선
을 거쳐 비봉능선 서쪽 수리봉(향로봉 부근)까지 이어진 4km 규모로 원래는 북한산성까지 이
으려고 했으나 비봉능선이 험준하여 포기했으며, 북한산성 대남문에서 보현봉, 형제봉능선,
북악산(백악산) 북쪽 능선을 거쳐 한양도성을 잇는 탕춘대성 동쪽 성곽도 계획했으나 싹 취소
되었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의 경계인 홍제천에는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두었으며, 탕춘대능선
에는 암문(暗門) 1개를 내었다. 그리고 성 안에는 훈련장인 연융대(鍊戎臺)와 선혜청(宣惠廳)
, 평창(平倉) 등의 창고를 설치했으며, 총융청(摠戎廳) 본부도 이곳에 두었다.
탕춘대성이 들어앉은 위치 대부분은 각박한 경사지로 거의 천험(天險)을 자랑한다. 그래서 홍
지문을 제외하고는 성을 높이 구축하지는 않았으며, 현재는 인왕산 북쪽 능선과 홍지문, 탕춘
대능선에 성곽이 그런데로 잘 남아있다.


▲  홍지문의 당당한 앞 모습
홍지문은 더 이상 서울 수비의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문화유산과 관광지의 의무와 성격만 지니고 있으며,
문은 24시간 열어두고 있다.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은 홍제천 협곡에 지어진 것으로 탕춘대성의 유일한 성문이다. (탕춘대능
선에 있는 암문은 제외)
한북정맥(漢北整脈)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 한북문(漢北門)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는
데, 200년 이상 별탈 없이 살아왔으나 1921년 1월에 지붕에 쌓인 세월의 장대한 무게를 감당
하지 못하고 내려앉고 말았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해 8월에는 홍제천의 물을 흘려
보내는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까지 홍수로 모두 떠내려가면서 터만 겨우 남아오다가 1977년
7월 복원되었다.
홍지문은 홍예 주변에 고색의 때가 탄 성돌만 옛날 것이며 때깔이 하얀 성돌은 1977년 복원할
때 새로 맞춘 것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문루까지 올라가 놀았던 기억이 있다. 허나 지금은 문화유산 보호를 위
해 문루와 오간대수문을 금지 구역으로 삼았으며, 오간대수문에서 탕춘대능선 방향 성곽 300m
정도가 통제되어 탕춘대능선을 가려면 홍지동 주택가나 옥천암 주변으로 돌아가야 된다. 그리
고 문 남쪽으로 세검정로가 지나고 있어 성곽이 잠깐 단절되어 있으나 그 길을 넘으면 성곽은
다시 소소하게 율동을 부리며 인왕산으로 뻗어간다.
성문 앞뒤로 나무가 심어진 짧은 산책로가 닦여져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오간대수문 바로 밑
홍제천 변에 산책로가 닦여져 오간대수문의 속살을 구경할 수 있다. 또한 문을 경계로 성 안
쪽은 종로구 부암동(홍지동), 바깥쪽은 서대문구 홍은동이다.


▲  홍지문의 뒷모습

   ◀  홍지문 천정에 그려진 와운문(渦雲紋)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센 소용돌이를 보는 듯
하다.

▲  홍체천 산책로에서 바라본 오간대수문의
북쪽 홍예문들

▲  오간대수문 북쪽 끝 홍예문


오간대수문 윗도리는 금지된 다리라 두 발을 들일 수 없지만 아랫도리는 근래 홍제천 산책로
가 닦이면서 접근이 가능해졌다. 처음으로 살펴보는 오간대수문의 속살, 비록 하천에서 약간
비린내가 풍기긴 했으나 그 정도 냄새는 이미 익숙해진 상태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서울
사람임)

홍예문 위쪽에는 용머리가 새겨져 있다. 아무래도 물이 흐르는 수문이다 보니 물을 관장하는
용을 수호용으로 넣은 듯싶다. 5개의 수문 중, 북쪽 기준으로 1,2,5번째 문은 바닥에 돌이 입
혀져 있고, 3,4번째 문은 홍제천이 흐르고 있다. 하늘에서 물폭탄이 내려 홍제천이 흥분하는
경우에는 5개 문이 모두 수문이 되버린다.

* 홍지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4



 

♠  하얀 피부를 지닌 거대한 고려시대 마애불
옥천암(玉泉庵) 마애보살좌상 - 보물 1820호

 홍제천 남쪽에서 바라본 옥천암 (왼쪽은 마애보살좌상,
오른쪽이 옥천암)

홍지문에서 한강을 향해 열심히 길을 재촉하는 홍제천을 따라 서쪽으로 7분 정도를 가면 홍제
천변 커다란 바위에 깃들여진 하얀 피부의 커다란 불상이 아른거릴 것이다. 그가 바로 이곳의
명물이자 상서로운 관세음보살로 통하는 보도각 백불이다.

문화재청은 그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으로 다루고 있으나 지역 사람들은 '보도각 백불(普渡
閣 白佛)'로 많이 부르고 있다. (나도 그 명칭이 버릇이 되었음) 여기서 보도각(普渡閣)은 하
얀 마애불과 바위를 보듬은 보호각의 명칭으로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이다. 또
한 홍제천변에 있어서 옛날부터 '해수관음상'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강제로 하얀 피부
가 된 19세기 이후에는 '백의관음(白衣觀音)'과 '백불' 등의 별칭이 추가되었다. 여기서 '백
불'은 구한말에 양이(洋夷)들이 그를 보고 'White Buddha'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유래된 것으
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마애불 옆에는 그를 관리하는 조그만 암자인 옥천암이 둥지를 틀었으며, 그들에게 다가서려면
홍제천에 걸린 보도교(普渡橋)란 유연한 곡선의 다리를 건너야 된다. 다리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작은 문이 있는데, 바로 옥천암의 일주문(一柱門)이다. 일주문이 다리 끝에 달린 흥미로
운 현장으로 그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도각 백불(마애불)이, 오른쪽 언덕에 옥천암이 자리
한다.


 보도각에 깃든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으며 홍제천 바람을 쐬고 있는 이 마애불은 서울에 전하는
늙은 마애불(磨崖佛)의 하나이자 서울에서 딱 4개 밖에 없는 고려시대 마애불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조금 거리가 있는 안암동에 보타사(寶唾寺)란 절이 있는데, 그곳에 옥천암 백불과 비
슷하게 생긴 하얀 피부의 마애불이 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조성 시기도 비슷한 고려 후기로
여기서 가까운 승가사(僧伽寺)의 마애여래좌상과 비슷한 계열의 작품으로 보기도 하며, 개성
(開城)에 있는 관음굴 석조보살반가상과 비교되는 고려 말 불상 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존재
로 평가되기도 한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서울로 천도하고 그를 찾아와 예불을 올렸다고 전하며 그
인연으로 조선 왕실의 주요 기복처(祈福處)가 되었다고 한다. 15세기에는 성현(成俔, 1439~
1504)이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옥천암 백불을 부처바위를 뜻하는 불암(佛巖)으로 기재
했다. 그것이 이곳에 대한 첫 기록이다.
임진왜란 때는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 권율(權慄) 장군이 여기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는
데, 어리석은 왜군은 백불을 그만 조선군으로 잘못 알고 조총을 정신없이 쏘아댔다. 그렇게
탄환을 다 소비한 왜군이 혼란에 빠지자 그때를 틈타 그들을 완전히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홍제천의 물결을 따라 전해오고 있다. 이는 백불을 서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띄우고자 근처
에서 일어났던 권율 장군의 왜군 토벌전을 끌어들여 지어낸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高宗)의 어머니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까
지 찾아와 아들의 천복(天福)을 빌었다고 한다. 그 기념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든 호분(胡粉, 여자들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으로 불상을 하얗게 도배를 하면서 이때부터 팔자에도
없는 백불이 되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얀 피부가 되면서 마애불은 다소 젊어 보이게 되었으나 대신 문화유산의 큰 매력인
고색의 기운이 다소 꺾여 그리 나이가 지긋해 보이지 않는다.

 보도교에서 바라본 보도각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보도교 끝에 자리한 맞배지붕 일주문


백불의 높이는 5m 정도로 그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예로부터 영험이 깊은 석불로 명성이 높았
다. 그 앞에 닦여진 공간에는 그의 영험을 빌리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특히 입시철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다.

백불에게 기댈 수 있는 자리를 내준 커다란 바위는 '붙임바위'라고 불리는데, 생긴 모습부터
가 예사롭지가 않다. 부암동의 유래가 된 부침바위와 비슷하게 돌(또는 동전)을 바위에 붙이
거나 위로 던져서 바위 위에 붙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바위에 매달린 작은 돌과 동전
이 적지 않다. (동전은 계속 수거하고 있어 요즘은 별로 안보임) 그래서 불상이 이곳에 깃들
기 이전부터 민간신앙의 소박한 현장으로 쓰였을 것이다.

보도각 앞에는 홍제천과 경계를 이루는 돌담이 둘러져 있었으나 2016년 이후 그 돌담을 밀면
서 정면이 확 트였다. 키 작은 난간이 돌담 대신 둘러져 있으며 난간 앞에는 나무데크로 지어
진 홍제천 산책로가 닦여져 있고, 그 앞 홍제천에는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반석들이 가득하다.
한때 서울 근교 경승지로 바쁘게 살았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비린내 풍기는 하천으로 떨
어지면서 그 반석이 다소 아깝게 되었다. 아비규환의 속세를 상징하는 그런 하천을 걱정스럽
게 굽어보며 중생을 걱정하는 불상의 모습은 자식을 걱정하는 어미의 따뜻한 모습 같다.

그의 몸은 모두 새하얗지만 그의 장식물은 특이하게도 주황색으로 되어 있다. (예전에는 모두
하얀색이었으나 이후 금색으로 칠했고, 2016년 이후 주황색으로 바뀌었음) 오른손에 걸린 팔
찌, 삼도(三道) 아래로 커다란 목걸이, 주렁주렁 매달린 장식으로 무거워 보이는 보관(寶冠),
그리고 귀에 건 귀걸이까지 정말 관세음보살 누님이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 그의 얼굴은 거
의 포근한 인상으로 중생들의 소원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다 들어줄 것만 같다.


▲  보도각과 붙임바위의 뒷모습

▲  마애보살좌상의 잘생긴 얼굴과 윗도리

홍제천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두 눈은 '一'자 모습으로 지그시 떠 있고, 긴 머리카락은 어깨
까지 닿는다. 살짝 다문 입술은 립스틱을 넘치도록 바른 듯 상당히 찐하다. 불상의 몸을 덮고
있는 옷 주름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어 마치 진짜 옷을 걸친 듯하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선보이고 있고 왼손은 무릎에 대고 있는데 왼
팔이 너무 길어 보이며 앉아있는 모습치고는 아랫도리가 좀 넓게 표현되어 신체 균형이 다소
맞지 않는다.

백불 앞에는 중생들이 정성스레 기도를 올리며 소망을 슬쩍 내밀고 있었다. 그들의 갖은 소망
을 접수하느라 힘도 제법 들텐데 표정 하나 일그러지지 않고 한결 같은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
하며 소망 하나라도 누락될까봐 귀를 쫑긋 세운다. 소망이 이루어질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 정성이 부디 백불과 하늘을 감동시켜 나를 포함한 중생들의 소망이 모두 이루어
지길 간절히 기원해 본다.


▲  백불 옆에 자리한 옥천암

백불 동쪽에는 그를 후광으로 삼은 옥천암이 자리하고 있다. 백불이 관세음보살이라 자연히
관음도량을 칭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3대 관음도량으로 양양 홍련암(紅蓮庵), 남해 보리
암(菩提庵), 강화 석모도 보문사(普門寺)를 꼽는다. 허나 옥천암도 관음도량으로서의 자부심
이 대단한지 비공식적으로 자신들을 포함시켜 4대 관음도량의 하나로 우기기도 한다.

이곳에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약효가 있다는 샘물(혹시 탄산약수가 아닐까?)이
있어 환자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하며, 그 연유로 옥처럼 맑은 샘물을 뜻하는 옥천암을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허나 그 약수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오래전에 사라졌고, 절 앞을 흐르
는 홍제천 또한 세월에 고되게 대이면서 그런 모습은 이제 전설의 한 토막이 되고 말았다.

이 절은 언제 지어졌는지 전해오는 것은 없다. 다만 인근에 조선 초기까지 잘나갔던 장의사(
藏義寺, 세검정초교 일대에 있었음)가 있어 백불을 관리하는 부속 암자로 지어진 듯 싶으며,
세검정 맞은편에는 혜철선사(惠哲禪師)가 1396년에 태조 이성계의 도움으로 세웠다는 소림사
(小林寺)가 있는데, 그 절의 부속암자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모두 부질없는 메아리이다.

이곳의 사적(事績)이 본격적인 등장하는 것은 1868년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으로 정관(
淨觀)이 관음전(觀音殿)을 세워 천일기도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1927년에는 주지 이성우(
李成祐)가 칠성각(七星閣)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32년에 큰방 6칸과 요사(寮舍) 3칸을 고쳤
다.
1942년에는 주지 동봉(東峰)이 관음전을 수리했으며, 이후 삼성각, 요사 등을 추가로 갖추었
으나 1987년 삼성각이 소실되고 1988년 법당인 수덕전(修德殿)을 지으면서 삼성각의 기능은
수덕전에 통합되었다. 1989년에 종각을 만들고 1990년 설법전(說法殿)을 지어 요사의 기능도
겸하게 했으며, 1996년에 홍제천에 보도교란 다리를 닦고, 1998년에 일주문을 지었다.

북한산(삼각산)의 서남쪽 끝으머리를 잡으며 홍제천변에 둥지를 튼 조그만 절로 경내 확장이
좀 어렵다. 바로 동쪽에는 주택가가 붙어있고 뒤쪽(북쪽)과 서쪽은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된
북한산(삼각산) 자락이기 때문이다.

옥천암은 내부까지 들어가지 않고 백불을 보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지금까지 적지 않게
인연을 지었던 곳이고 경내는 백불 외에는 딱히 나를 흥분시킬 존재도 없기 때문이다.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을 끝으로 늦가을에 벌인 부암동 늦가을 만행(漫行)은 흩어진 나날의 일
부가 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옥천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1동 8 (홍지문길 1-38 ☎ 02-395-4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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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동 낙성대, 관악강감찬축제, 서울둘레길5코스 관악산 구간 늦가을 나들이 (강감찬생가터, 낙성대공원, 무당골)

낙성대 늦가을 나들이 (강감찬생가터, 관악 강감찬축제, 관악산 서울둘레길 5코스)


' 낙성대, 관악 강감찬축제, 서울둘레길5코스
늦가을 나들이 '

낙성대 안국사

▲  낙성대 안국사

낙성대3층석탑 관악산 무당골

▲  낙성대3층석탑

▲  관악산 무당골

 



 

늦가을이 익어가는 매년 10월 중/하순에는 강감찬 장군의 유적인 낙성대에서 '관악 강참
찬축제'가 열린다. 관악구(冠岳區) 제일의 축제로 등극한 그의 명성을 나의 침침한 망막
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축제 마지막 날인 일요일에 그곳을 찾았다.

내가 살고 있는 도봉동(道峰洞)에서 낙성대까지는 비록 같은 서울 하늘 밑이라고 하여도
완전 북쪽 끝에서 남쪽 끝이라 아무리 빠른 지하철로 가도 1시간 이상은 걸린다. 낙성대
역(2호선)에서 답답한 땅굴을 벗어나 낙성대로 가다가 문득 생각나는 곳이 있어 길을 동
쪽으로 조금 틀어 낙성대동 주택가로 들어섰다. 밀림 같은 주택가 한복판에 옛 낙성대터
(강감찬 생가터)가 있기 때문이다.



 

♠  강감찬 장군이 탄생했던 유서 깊은 현장, 옛 낙성대<(落星垈),
강감찬 생가터> -
 서울 지방기념물 3호

▲  수목으로 우거진 옛 낙성대 (강감찬 생가터)

지금은 '낙성대동'이란 행정동명을 쓰는 봉천동(奉天洞) 218번지 주택가 속에 옛 낙성대가 묻
혀 있다.
이곳은 관악구 출신으로 귀주대첩의 영웅인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으로 흔히 낙성대하면 여
기서 남쪽으로 1리 정도 떨어진 낙성대공원과 안국사 일대를 일컬으나 원래 낙성대는 이곳이
다. 낙성대란 이름은 별이 떨어진 터란 뜻으로 세종실록(世宗實錄)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
勝覽)에 다음과 같은 탄생설화가 한 토막 전해온다. <낙성대는 절대로 이상한 대학교나 하위
권 대학교의 이름이 아니니 오해가 없기 바란다~~!>

948년 어느 날 밤, 중원대륙 왕조의 사신(使臣)으로 표현된 인물(그냥 사신으로 나오기도 함)
이 근처를 지나다가 하늘에서 큰 별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신기한 광경에 입이 떡 벌
어진 그는 별이 떨어진 곳을 찾아가니 그곳에는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자 금주(衿州,
서울 관악구와 금천구, 옛 시흥군 지역) 지역 세력가인 강궁진(姜弓珍)의 집이 있었다. 마침
그의 부인이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강감찬이라는 것이다.
이후 송(宋)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다가 그를 만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곡성(文曲星)을 못
본지 오래되었는데 여기서 지금 뵈옵니다~'
하며 꾸벅 절을 했다고 한다. 여기서 문곡성은 도
가(道家)에서 말하는 9개의 별 가운데 학문을 관장하는 4번째 별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떨어
진 별이 문곡성이라고 하니 강감찬의 학문이 매우 뛰어났음을 문곡성을 빌려서 표현했을 것이
다.

당시 고려는 중원대륙의 후한(後漢), 진나라 등과 교류를 했는데 고려와 중원대륙의 사신, 무
역 상인들은 개경(開京) 인근 벽란도(碧瀾渡, 예성강 하류)에서 배를 타고 고려의 내해(內海)
나 다름이 없는 서해바다를 오갔다. 그러니 굳이 내륙인 서울로 돌아갈 이유는 없다. 하여 개
경에서 남쪽으로 파견된 관리나 칙사(勅使)가 지나갔을 가능성이 크며, 그것이 세월이 흐르면
서 지나가지도 않았을 중원대륙 사신으로 변질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고려나 조선은 중원
대륙을 동경했고 군침을 흘렸던 것이다.
또한 별은 나라를 세운 시조(始祖)나 영웅의 탄생설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존재기도 하다. 그
들이 태어났을 때 흔히 별이 떨어졌다 하늘이 기뻐서 별을 내렸다는 식으로 탄생을 추켜세우
는 것으로 설화처럼 정말로 별이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짜로 떨어졌다면 강감찬 집은
물론이고 그 주변은 정말 남아나지 못한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은 우스갯소리로 딸 수 있을
정도로 작아 보이나 그게 코앞에 다가왔을 때는 정말 답이 없는 상태가 됨>

이곳에 있었다는 강감찬 생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어떠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
의 집안이 후삼국시대부터 금주 지역을 다스렸던 세력가였으니 집은 제법 컸을 것이다. 허나
세월의 장대한 흐름 속에 집은 형편없이 녹아내리면서 생전의 모습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
러다가 13세기 경, 지역 사람들과 후손들이 그의 공덕과 탄생지를 알리고자 생가터에 3층석탑
을 세우니 그것이 낙성대3층석탑으로 그 탑의 영향으로 이곳 일대를 탑골이라 불렀다.

이후 3층석탑 홀로 이곳을 지키다가 1974년 안국사로 이전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대신 유허비
를 세우고 나무와 꽃을 심어 주변을 산뜻하게 정비했다.
안국사가 조성되면서 그곳이 새 낙성대가 되었고 기존의 낙성대는 옛 낙성대가 되어 '낙성대
유지(遺址)
'란 이름으로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근래에 '강감찬 생가터(낙성대)'로 명칭
이 갈렸다.

현재 이곳에는 낙성대유허비와 옛 강감찬 향나무의 뒤를 이은 160년 묵은 향나무가 있으며 나
무와 꽃이 가득해 조촐하게 소공원 역할을 한다. 강감찬 생가터라고 하지만 생가와 관련된 어
떠한 흔적도 전해오지 않으나 땅을 파보면 건물 주춧돌이나 당시 유물이 고개를 들고 나오지
않을까 싶다. 나중에 이곳 일대를 재개발하거나 싹 밀어버릴 기회가 있다면 꼭 발굴조사를 벌
였으면 좋겠다.

* 강감찬 생가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낙성대동) 218-14


▲  낙성대유허비(落星垈遺墟碑)

옛 낙성대 한복판에 자리한 유허비는 3층석탑
이 새 낙성대로 옮겨감에 따라 허전한 옛 자리
를 달래고자 1974년에 세워졌다.
안국사 안에 세워진 강감찬사적비를 모델로 하
여 똑같이 만들었는데, 고개를 높이 쳐들며 엉
금엉금 기어가는 듯한 거북 머리 귀부(龜趺)를
밑에 깔고 그 등에 비좌(碑座)를 만들어 '강감
찬장군 낙성대유허비'라 쓰인 비신(碑身)을 세
웠으며 그 위를 2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두
고 다투는 모습을 담은 이수(螭首)로 마무리를
지었다.

▲  낙성대유허비의 뒷모습

비석 높이는 2~3m 정도로 안국사의 강감찬사적비보다 키가 작고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어 1997년에 다시 손질했다.


▲  강감찬 향나무

옛 낙성대의 명물로는 3층석탑과 함께 나이가 꽤 지긋했던 향나무가 있었다. 향나무는 강감찬
과 더불어 자랐다고 전해져 일명 '강감찬나무'라 불렸는데 그것이 맞다면 나이가 무려 1,100
살 가까이가 된다.
허나 실제 나이는 그 정도까지 미치지 못하며 조선시대에 강감찬을 흠모하던 지역 사람들이나
후손이 심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게 시간이 지나면서 강감찬과 연관된 나무로 엮어진 것이다.
이 나무 외에도 인근 난곡(蘭谷)에 그가 심었다고 전하는 굴참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도 강감
찬나무란 별명을 지니고 있다.

낙성대 향나무는 낙성대와 강감찬을 상징하는 자연 명물로 1968년 서울시 보호수 1-23호로 지
정되었으나 1987년에 장대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숨줄을 놓고 말았다. 그래서
그에게 부여된 보호수 등급은 해제되었고 죽은 몸뚱이도 문드러져 전설 속의 나무가 되었다.
이후 1996년 관악구에서 옛 낙성대를 정비하면서 향나무의 빈자리를 채울 계획을 세웠고 적당
한 나무를 찾다가 그해 11월 경기도 고양시에서 150년 묵은 향나무를 구입해 비록 씨는 다르
지만 강감찬나무의 후예로 삼있다. (나무 앞에 그와 관련된 유래를 머금은 표석이 누워있음)



 

♠  관악 강감찬축제의 현장, 낙성대 안국사 (낙성대공원)

▲  강감찬축제 공연이 열리고 있는 낙성대공원

옛 낙성대를 둘러보고 안국사가 있는 새 낙성대로 향했다. 낙성대역에서 서울대로 가는 길목
에 자리한 이곳은 1974년 6월에 조성된 것으로 크게 안국사와 낙성대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늦가을이 살포시 내려앉은 공원에는 관악구의 대표 축제 '관악 강감찬축제'가 떠들썩하게 열
리고 있었다. 축제를 보고 즐기려는 사람들로 완전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데, 음악 공연과 다
양한 문화/전통 체험, 강감찬을 주제로 한 역사포럼, 장터(먹거리 장터 포함) 등이 주류를 이
룬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문화/전통 체험이 풍성해 아이를 동반한 가족 나들이 장
소로 딱 그만이다.

관악 강감찬축제는 강감찬 장군을 기리고자 벌이는 축제로 안국사에 제를 지내는 '낙성대 인
헌제'에서 비롯되었다. 1988년 추석(9월 20일)에 처음 시작되었으며 관악구의 예전 대표 축제
인 '관악산 철쭉제'와 통합되어 '관악 강감찬축제'로 크게 몸집이 커졌다. (관악산 철쭉제는
사실상 없어짐)
강감찬 추모제향을 시작으로 안국사와 낙성대공원 일대에서 강감찬을 주제로 한 출병식, 전승
행렬 거리 퍼레이드, 역사포험 등의 이벤트, 고려민속촌과 벽란도21, 주민화합 한마당, 다채
로운 문화/전통 체험행사, 음악회, 전시회 등이 열린다. 나는 혼자 간 터라 간단히 1바퀴 둘
러보고 안국사로 넘어갔다.


▲  안국사로 인도하는 싱그러운 숲길
저 숲길의 끝에 안국사와 강감찬전시관이 있다.

▲  강감찬전시관

안국사 앞에는 근래 닦여진 강감찬전시관이 놓여져 있다. 이곳은 강감찬 장군의 생애와 3차례
에 걸쳐 이루어진 고려와 거란(요)과의 전쟁, 그 전쟁을 최종 마무리 지은 귀주대첩(龜州大捷
)을 다루고 있는데, 전시 유물은 모두 모조품이며 해설과 디오라마 중심으로 짜여져 그 시절
의 이해를 최대한 돕고 있다. (전시관 내부는 사진 촬영 가능)


▲  강감찬이 지은 오언절구(五言絶句) 양식의 시(왼쪽)와
강감찬의 일대기를 다룬 강감찬전(姜邯贊傳)


강감찬의 한시는 오세창(吳世昌)이 고려부터 20세기 초까지 옛 사람들의 필적을 모은 근역서
휘(槿域書彙)에 수록되어 있다. 그 부분을 복사해서 이곳에 전시한 것으로 여기서 근역은 조
선을 뜻한다. (즉 무궁화 나라)
옆구리에 놓인 강감찬전은 우기선(禹基善)이 1908년에 지은 것으로 일한주식회사에서 단행본
으로 간행했다. (그 역시 모조품)


▲  안국사의 정문인 안국문(安國門)

윤기가 철철 흐르는 청기와 맞배지붕을 지닌 안국문은 안국사의 정문이자 외삼문(外三門)이다.
사당은 안국문부터 내삼문을 거쳐 본전까지 약간 서북향(西北向)을 하고 있는데, 이는 지형상
에 이유도 있겠지만 강감찬이 고려 때 인물이므로 옛 고려의 국도(國都)인 개경(開京)을 바라
보게끔 서북향으로 설정한 것이 아닐까 싶다. 개경(개성)은 여기서 서북향이다.

안국문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운데 문은 사당 주인만 왕래하는 특별한 문으로 제
향 외에는 닫아둔다. 속인들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왼쪽 문으로 나가면 되며, 계단 남쪽에
는 낙성대 안내문과 낙성대 표석이 있다.


▲  커다란 돌로 이루어진 낙성대 표석

낙성대 안내문 옆에 자리한 낙성대 표석은 낙성대가 완성되자 박정희 전대통령이 남긴 낙성대
3글자를 바위에 새긴 것이다.
1974년 청와대와 서울시는 강감찬 장군을 기리고 그를 통해 백성들의 나라사랑 정신과 충효의
지를 높이고자 그의 사당을 짓기로 했다. 당시 서울에는 옛날에 잘나갔던 장군의 사당이 하나
도 없던 상황. 그런 상황에 관악구 출신인 강감찬은 정말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의
유적인 낙성대는 3층석탑과 향나무만 있었을 뿐, 제를 지내는 어떠한 시설도 없었다.
그래서 관악산 북쪽 자락에 넓게 터를 다져 사당을 지었는데 그해 4월 11일, 상량식을 가졌고
불과 2달 만인 6월 10일에 뚝딱 완성을 보았다. 공사비는 4.5억원이 들었으며 강감찬이 국내
외적으로 크게 불안정했던 고려를 반석 위에 올려 나라가 평안해진 것처럼 나라의 평안을 염
원하는 뜻에서 사당 이름을 안국사라 하였다.

낙성대 표석 밑도리에는 박대통령께서 하사하셨다는 식으로 아주 딱딱하게 쓰여있어 독재시대
의 우울했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허나 어찌하랴 이 역시 이곳을 거쳐간 엄연한 역사인 것을
<사당을 지어 영웅을 기리는 것은 좋으나 그 사당을 짓게 한 이를 너무 높인 것이 옥의 티임>


▲  3층석탑과 마주보고 있는 강감찬장군 사적비(事蹟碑)
1974년에 지어진 것으로 옛 낙성대에 있는 유허비와 같은 모습이다.


안국문을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내삼문(內三門)이 보이고, 좌우로 3층석탑과 강감찬장군사적
비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서울의 유일한 옛 시대 장군의 국립 사당이라 <민간신앙으로 지어
진 원효로 남이(南怡) 장군 사당, 보광동 김유신장군 사당은 제외> 경내가 꽤 깔끔해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  낙성대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호

강감찬사적비 맞은편에는 낙성대의 오랜 상징인 낙성대3층석탑이 자리해 있다.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왜 이곳에 절탑이 있지?','인근 절이나 절터에서 가져온 것인가~?' 고개를 갸
우뚱하지만 그는 겉모습만 그렇지 불교와는 그리 관련이 없는 석탑이다.

이 탑은 고색의 기운이 없는 낙성대 안국사에서 유일하게 고색의 내음을 뿌리는 존재로 13세
기에 지역 사람들과 후손이 강감찬의 공덕을 기리고자 그의 생가터에 세웠다. 공덕을 기린다
고 하면 흔히 비석을 세우기 마련이나 불교 국가인 고려답게 불탑(佛塔) 모양의 탑을 세워 강
감찬을 큰 존재로 추앙한 것이다. 이를 통해 옛 금주(금천) 지역 사람들의 그에 대한 존경심
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가늠케 하며 지금은 금지된 도시로 묶인 개성(開城)에도 그를 위해
세운 석탑이 전하고 있다.

이 땅에서 석탑을 불탑이 아닌 영웅을 기리고자 세운 경우는 강감찬 외에도 경남 남해(南海)
의 정지(鄭地) 장군 석탑이 있다. 그는 14세기 말에 남해 관음포(觀音浦)에서 왜구를 격퇴해
남해 백성을 구했는데 지역 백성들이 그의 전승을 기리고자 세웠다.

탑이 영락없는 불탑 스타일이라 다른 절의 탑을 가져와 이곳 상징물로 삼은 것이 아닐까 여길
수도 있지만 낙성대 주변에는 마땅한 절 흔적이 없다. 오로지 강감찬을 찬양하고자 세운 탑이
라고 봐야된다. 조성시기가 13세기인 것을 보면 그 당시 무척이나 징그러웠던 몽고(원나라)와
의 전쟁에서 거란족(요나라) 토벌의 영웅, 강감찬을 그리며 그의 혼령이 몽고를 보기 좋게 참
교육시켜 나라를 구해주길 바라는 뜻도 담겨져 있을 것이다.

탑 높이는 4.5m로 순 화강암으로 지어졌는데 밑에 바닥돌을 두고 그 위에 길쭉한 기단부(基壇
部)를 세운 다음, 3층 탑신(塔身)을 얹혔다. 1층 탑신에는 '강감찬 낙성대' 글씨가 새겨져 있
어 이 탑의 정체를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으며 머리장식은 훼손되어 남아있지 않다. 거의 800
년 이상 묵은 늙은 탑이나 아직 정정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강감찬의 왕년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이 탑은 옛 낙성대에 있었으나 1974년 제자리를 떠나 이곳에 왔으며 낙성대의 오랜 상징으로
이곳에 왔다면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꼭 살펴보기 바란다. 3층석탑이 없는 낙성대는 갈
비가 없는 갈비탕과 같기 때문이다. 안국사도 그가 있기에 빛을 발하는 것이다.


▲  1층 탑신에 희미하게 새겨진 '강감찬 낙성대(姜邯贊 落星垈)' 6자

▲  푸르게 익은 낙성대 은행나무

1974년 안국사가 완공되자 박정희 전대통령이 그 기념으로 보낸 나무이다. 나무 앞에 관련 내
용이 적힌 표석이 누워있는데 '~~각하께서 ~~하사하시었다~'는 식으로 적혀있어 그 표현에 다
소 거북함을 들게 한다. 허나 역사의 산물이니 어찌하랴. 좋은 뜻에서 안국사를 세운 것은 분
명하니 이런 시대도 있었음을 알리는 뜻에서 그냥 두거나 내용을 좀 순화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표석과 나무를 뽑아버리자는 것은 절대로 아님>


▲  안국사 본전(本殿)

안국사 가장 안쪽에 자리한 본전은 말그대로 이곳의 중심 건물로 강감찬 장군의 영정이 봉안
되어 있다. 가운데 칸에 그의 영정이 자리해 있고, 그 좌우로 그의 주요 장면(탄생, 조정 출
사, 귀주대첩, 영파역에서 현종을 알현하는 모습 등)을 머금은 기록화가 걸려있는데 오직 상
상으로 그려진 것이라 그 당시와는 다소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3중으로 된 기단 위에 높이 들어앉아 서북쪽을 바라보고 선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푸른 청기와를 입혔다. 고려 후기 대표적인 건축물인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을 본떠서 지었는데 그 무량수전의 기둥을 따라서 배흘림 기둥을 취했다.
(기둥 가운데가 볼록함)


▲  닫집 안에 봉안된 강감찬 장군의 영정

강감찬은 키가 작고 외모가 볼품이 없으며 평소에는 해지고 때가 묻은 옷을 입고 다녀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몰라봤다고 전한다. 허나 거란 토벌의 대영웅을 그리 수수하게 그리는 것은 좀
아닌듯싶어 매우 늠름하고 매서운 눈초리로 표현했다.

이 영정은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1912~2005)이 1974년에 그린 것이다. 강감찬 생전의 모
습을 담은 그림이 전혀 없고 달랑 키가 작고 외모가 별로라는 내용만 있으니 나름 상상을 발
휘하여 대충 때려 맞춘 것이다. 그러니 실제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월전이 그린 강감찬 영정이 그의 표준 영정으로 지정되면서 본전에 이렇게 걸리게 되
었다. 게다가 월전은 조선의 마지막 어진(御眞) 화가이자 친일 화가로 추잡한 경력을 남겼던
김은호(金殷鎬)의 제자라 그의 화풍을 조금은 닮은 것 같다.

이곳 영정은 1998년 1월 11일에서 12일 사이에 도난을 당했는데 관리인의 신고를 받은 관악구
청은 이를 신고하지 않고 몰래 월전을 찾아가 새로 그려줄 것을 요청했다. 허나 고령의 나이
를 이유로 거절 당하자, 급하게 신림동에 사는 금광복이란 화가에게 영정과 똑같이 그려줄 것
을 의뢰하며 160만원을 건넸다.
그가 그림을 그려 표구점에 맡기자 구청에서 그 몰래 영정을 가져왔으며, 새로 영정을 봉안할
때 제를 지내 예를 갖춰야 함에도 그런 절차도 없이 3월에 그냥 봉안해버리는 무례를 범했다.
영정 도난 사건은 냄새를 킁킁 맡은 언론사의 취재로 7월에서야 드러나 관악구청은 두고두고
욕을 먹었는데 당시 사건을 맡은 관악경찰서도 무명 화가의 그림이라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
단하여 수사를 일찍 종결시킨 것이 드러나 둘 다 쌍으로 욕을 얻어먹었다. 이에 관악구청 철
밥통 관계자는 좀 무안했는지 무속인이 가져간 것으로 둘러댔으나 영정은 끝내 찾지 못했다.
그래도 상상으로 근래에 그려진 영정이라 망정이지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온 진품이었다면 정
말 관악구청과 관악경찰서는 분노한 대중들에게 크게 털렸을 것이다.


▲  강감찬과 고려 군사들이 일군 대작품, 귀주대첩도(龜州大捷圖)

▲  거란군을 토벌하고 개선한 강감찬 장군과 고려군을 현종이
영파역(迎破驛)에서 맞이하는 모습을 담은 기록화

▲  늦가을에 잠긴 본전 뒷쪽 풍경
관악산에 접해있는 본전 뒤쪽 풍경도 제법 경치가 있으니 앞모습만
살피지 말고 뒷모습도 둘러보기 바란다.

▲  태극마크가 걸린 안국사 홍살문

▲  나른한 늦가을 오후를 깨우는
낙성대공원 분수대


▲  강감찬 장군 동상

낙성대공원 서쪽에는 말을 달리며 칼을 휘두르는 강감찬 장군의 동상이 있다. 1997년 10월 청
동(靑銅)으로 지은 것으로 1990년대부터 관악구 의회와 관악문화원에서 동상 건립을 추진했으
나 돈이 딸려서 계속 연기되었다. 그러다가 1997년 서울시의 지원으로 기존 동상과는 다르게
갖은 요소를 넣어 제법 큰 규모로 건립했다.

★ 강감찬(姜邯贊) 장군(948~1031)의 생애

강감찬은 금천강씨<금주(衿州)강씨>로 금천 지역 세력가인 강궁진의 아들이다. 금천강씨는 진
주강씨에서 분파되었는데 그 시조인 강여청(姜餘淸)이 신라 말에 금천 지역에 자리를 닦았으
며, 그 4세손이 바로 강궁진으로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벽상공신이란 큰 감투를 받았다.

강감찬은 고려 초기 명장(名將)으로 이 땅의 민중들에게 적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
다보니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민중을 통해 신화처럼 미화된 경우가 적지 않은데 앞서 그의 탄
생 설화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강궁진이 휼륭한 아들을 얻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부인에게 가는 도중 여우 부
인을 만나 그를 통해 낳은 것이 강감찬이란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탄생 설화와 여우부인 이
야기는 흔히 시조나 위인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설화라 순진하게 100% 믿으면 곤란하다.

강감찬의 어릴 적 이름은 은천(殷川)이다. 관악구에 '은천로'란 도로가 있고, 그의 이름을 딴
'은천동'이란 행정동명<봉천본동과 봉천9동을 통합한 동네>도 있다. 또한 그의 시호인 인헌(
仁憲)을 딴 '인헌동'이란 행정동명과 학교가 부지기수이며, 그와 관련된 명소도 적지 않아 관
악구가 완전 강감찬의 세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30대까지 금천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고 하며 종종 관악산에 올라가 심신을 단련
했다고 전한다. (그의 30대 중반 이전 기록이 너무 빈약함)

35살이던 성종(成宗, 재위 981~997) 시절, 개경으로 상경하여 과거에 응시, 갑과(甲科)로 급
제해 조정에 출사했다. 이때 예부시랑(禮部侍郞)에 임명되었는데, 그를 장군이라 부르다보니
자연히 무인으로 알기 쉽지만 문과(文科)로 들어온 문인(文人)이었다. 허나 거란과의 싸움에
출전했고 귀주대첩을 이뤄낼 정도로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동북9성 여진정벌의 영웅인 윤관(
尹瓘)과 더불어 문무를 두루 갖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가 문인으로 출사한 것은 광종(光宗, 재위 949~975)이 지방 세력을 때려잡고 왕권을 강화하
는 과정에서 무인들이 대거 털렸기 때문이다. 지방 세력 태반은 병사를 소유한 무인들로 그들
을 털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하고 과거제도를 도입해 인재를 발
탁했는데 조선과 달리 문과만 치루었다. 그러다보니 문과를 거쳐야만 출세가 쉬웠다. 강감찬
도 그런 상황에서는 어찌할 도리 없이 문과에 응시해야 했다.

그의 관직생활과 관련하여 여러 재미난 설화가 전하고 있는데 그 일부를 살펴보면
① 그가 어느 고을에 수령(守令)으로 부임을 했다. 그 고을의 관속(官屬)들은 그가 나이가 어
리다고 무시했는데 강감찬은 그들에게 뜰에 세워둔 수숫대를 소매 속에 다 집어넣으라 했다.
그들이 그건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흔들자 강감찬 왈 '겨우 1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에 다 집어
넣지 못하면서 20년이나 자란 나를 그대들 소매 속에 넣으려고 하시오?'
호통을 치니 관속들
은 그제서야 잘못했다고 빌었다. 허나 강감찬이 35살 이후에 벼슬살이를 했으므로 나이가 크
게 맞지 않는다.

② 그가 강원도 원주(原州)로 출장을 가서 하룻밤 머물렀는데, 객사(客舍) 옆 연못에는 개구
리들이 많아 늘 시끄럽게 울었다. 원주 수령은 강감찬이 편히 잠을 자게끔 하인을 배치해 개
구리의 입을 막게 했으나 아무리 돌팔매질에 나무로 연못 수면을 때려도 오히려 더 크게 우는
것이었다. 이를 본 강감찬은 미소를 지으며 부적을 쓰고 연못에 몰래 넣으니 개구리 울음소리
는 뚝 그쳤다.
이후 개구리 울음 소리는커녕 개구리 구경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원주 강원감영 선화
당 연못 설화)

③ 그가 지방으로 출장을 가다가 충북 옥천(沃川)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그곳은 모기
가 징그럽게 극성이라 백성들이 찾아와 귀주대첩 때 거란군을 쓸어버린 것처럼 모기 좀 어떻
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러자 그가 하천으로 나와 모기들에게 '너희가 아무리 미물이라
해도 백성을 괴롭히는 행위는 용서치 못한다. 씨가 마르기 싫거든 당장 떠나라'
호통을 치니
모기들이 크게 쫄아 다음날 모두 사라졌다. 그곳은 지금도 모기가 거의 없다고 한다. (옥천
청석교 설화)

④ 그가 남경(南京, 서울)을 다스리고 있을 때, 북한산(삼각산)과 남산 등에 호랑이가 득실거
려 호환(虎患) 피해가 극성이었다. 이에 부하를 산으로 보내 승려를 데려오게 하여 그를 크게
꾸짖으니 승려가 호랑이로 변신하여 잘못했다고 굽신거리며 부하 호랑이를 데리고 다른 곳으
로 도망쳤다. (또는 강감찬이 호랑이들에게 새끼도 평생 1번 낳게 하고 몇몇 산에서만 살게
했다고 함)

1009년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폐하고 태조의 손자인 대량원군<大良院君, 현종(顯宗)>을
옹립한 이른바 강조의 난이 일어났다. 고려가 요동반도 일대의 강동6주(江東六州)를 점거하고
재미를 보는 것에 불쾌감을 드러낸 거란<요나라> 성종(聖宗)은 강조의 난을 구실로 30만 대군
을 이끌고 친히 고려에 쳐들어왔다.
강조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검차(檢車)를 이용해 그들을 여유롭게 때려잡았으나 그만 방심하
여 오히려 역전을 당하고 만다. 강조가 패하자 고려 조정은 벌통이 여러 개나 뒤집힌 듯 큰
혼란에 빠졌고 염통이 쫄깃해진 많은 신하들이 항복을 주청했으나 강감찬과 하공진(河拱辰)은
강력히 반대했다.
결국 개경이 함락되었고 현종은 멀리 나주(羅州)까지 힘에 겨운 몽진을 했으나 양규(楊規)와
김숙흥(金叔興), 강감찬의 활약으로 거란은 크게 피해를 입고 줄행랑을 쳤다.

그 이후 한림학사(翰林學士), 서경유수(西京留守),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서북면
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 등을 지냈으며 서경유수와 내사시랑평장사로 임명한다는 현종
의 조서(詔書)에는
'경술년(1010년) 오랑캐(거란) 무리가 우리나라 한강 연안까지 깊숙히 쳐들어온 전란이 있었
다. 그때 강공(강감찬)의 전략을 쓰지 않았다면 온 나라가 오랑캐 옷을 입을 뻔했다'
적혀있
어 그의 공이 엄청났음을 알려준다.

1018년 거란 성종은 강동6주와 고려 굴복시키기에 대한 미련을 다시 드러냈다. 옛 조선과 고
구려, 발해의 그늘에서 오랫동안 살아갔던 거란족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으킨 큰 나라, 요
나라는 10~11세기에 천하 강국으로 위엄을 날렸지만 고려를 비롯한 인접 국가와의 계속되는
전투로 상황이 넉넉치 못했다. 하여 간신히 10만 명을 정예병이라고 쥐어짜 소배압(蕭排押)을
총대장으로 삼아 고려로 보냈다.
참 지긋지긋한 거란의 3번째 침공을 맞이하여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삼고 20만 8
천의 군사를 주어 거란을 막게 했다. 그때 강감찬의 나이는 벌써 칠순이었다.

거란군이 압록강<鴨綠江, 현재 요하(遼河)로 지금의 압록강이 아님>을 넘어 고려의 영역에 들
어오자 강감찬은 재미없는 수성전을 버리고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기병 1만2천을 뽑아 압
록강 하류 흥화진(興化鎭) 동쪽에 매복시켰는데, 거란군은 꼭 거치던 흥화진을 그냥 놔두고
고려군이 매복된 곳으로 기어들어왔다. 이때 강감찬은 기병을 매복시켜 호되게 후려쳤다.

여기서 2만 정도를 잃은 소배압은 자주(慈州)에서 강감찬의 부장인 강민첨(姜民瞻, ?~1021)의
공격에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개경만 점령하면 게임 끝이라는 무모한 생각에 무작정 개경으로
달려갔다. 이에 강감찬은 추격과 매복을 골고루 구사했고, 개경 점령에 눈이 뒤집힌 소배압은
개경과 가까운 신은(新恩)까지 진출했으나 식량도 부족하고 피해가 막대한 아군의 상황을 간
신히 깨닫고는 길을 돌려 열심히 줄행랑을 쳤다.

허나 그 길목에는 이미 고려군이 쫘악 깔려 열심히 그들을 털었고, 거란군이 요동반도 어딘가
로 여겨지는 귀주(龜州)까지 후퇴하자 강감찬은 귀주 벌판에 진을 치며 그들을 기다리니 이윽
고 소배압의 거란군은 병든 닭새끼처럼 귀주에 나타났다. 벌판에 진을 친 고려군을 본 소배압
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와 고려군과 진검 승부를 벌였다.
이에 강감찬은 그들을 크게 포위해서 잡는 작전을 펼쳤다. 기마병을 선두로 하여 보병과 사수
(射手)를 적절히 배치해 그들을 맹렬히 털었으며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金宗鉉)의 군사
도 때마침 합세하여 안그래도 힘이 딸린 거란군은 더욱 밀려 거의 전멸을 당하고 소배압은 간
신히 목을 붙잡고 도망쳤다. 이때 살아서 돌아간 군사는 불과 수천에 불과했으니 그야말로 거
란에게는 개망신의 패배였으며 이 대승을 두고 고려사(高麗史)에서는 '거란의 패함이 이와 같
이 심한 적이 없었다'
고 기록을 했을 정도이다.

거란 성종은 부하를 싹 잃고 돌아온 소배압을 보자 크게 발작하여 '너가 적지에 너무 깊숙히
들어가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다. 무슨 얼굴로 짐을 보려고 하는가? 너의 얼굴 가죽을 벗겨
죽여야 되나 내가 참는다'
질책하고 멀리 귀양보냈다.

강감찬은 부하 장졸과 함께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챙겨들고 개경으로 개선했다. 현종은 너
무 기뻐서 친히 도성 밖 영파역까지 나와 연회를 베풀었으며 금으로 만든 8가지의 꽃을 그의
머리에 친히 꽂아준 뒤 왼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 축배를 들어 위로하고 찬양하니
강감찬은 '폐하의 분에 넘치는 황은(皇恩)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사의를 표했다.

현종은 그에게 식읍(食邑) 300호를 하사하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으로 책봉(
冊封)했다. 1030년에는 개경 주변에 나성(羅城)을 쌓을 것을 건의, 둘레 23km에 이르는 개경
도성(都城)이 구축되었으며 그 공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이후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현종은 오히려 3일에 1번씩 입궐토록 명했다. 그랬던
현종이 그해 붕어(崩御)하고 덕종(德宗)이 제왕이 되자 1031년 6월 사직이 수용되었다.
허나 바로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83세에 나이로 장대했던 삶을 마감하니 왕은 3일 동안 조회
를 멈추고 그를 애도했으며, 인헌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특지검교태사시중 천수국 개국후(開
國侯)를 추증(追增)했다. 이후 수태사 겸 중서령(中書令)까지 더하여 현종 묘정(廟庭)에 배향
(配享)되었다.

강감찬은 키가 작고 외모도 별볼일 없었으나 학문을 매우 좋아하고 무예와 지략, 기개가 뛰어
났다. 그리고 성품이 청백하고 검소해 재산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해지고 때가 묻은 허름한 옷
을 입고 다녀 그의 얼굴을 모르는 이들은 일반 백성으로 오인하기 일쑤였다. 또한 엄숙한 태
도로 국사를 처리하고 국책을 결정할 때는 당당한 국가의 중신으로 그 역할을 다했으며, 백성
들도 잘 보살펴 그들은 나라가 평온한 것이 강감찬의 공으로 여기고 추앙했다.

그는 고려가 한참 거란과의 싸움으로 안정되지 못한 11세기 초반, 안으로는 내정을 살피고 지
지기반이 부실했던 현종을 도왔으며, 밖으로는 거란을 토벌해 국내외적으로 나라를 안정시켜
고려를 강한 나라로 우뚝 서게 했다. 고려와의 3차례 전투에서 모두 깨지고 거기에 귀주대첩
에서 완전히 털린 거란도 이제는 힘이 딸려 더 이상 강동6주 반환과 고려 제왕의 입조(入 朝)
를 요구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고려의 반격을 걱정해야될 판이었다.
고려 역시 오랜 전쟁에 지친 상태라 딱히 거란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강동6주를 완
전히 차지하지는 못했으며, '내원'과 '포주' 등 극히 일부 지역은 거란이 점거했다. 이들 지
역은 요서(遼西)나 요하 주변 지역으로 고려가 여러 번 공격했으나 거란이 굳게 수비하여 점
령하지 못했으며, 예종(睿宗, 재위 1105~1122) 시절에 비로소 회복했다. 그리고 12세기 초까
지 압록강(요하) 가교 사건 등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양국은 별무리 없이 평화로운 외교관
계를 유지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국가가 장차 화패(禍敗)가 올 때 반드시 명현을 내시어 이를
구하시는구나. 목종(穆宗) 말년과 현종 원년에 역신(逆臣)이 난을 일으키고 거란이 내습해 안
으로는 내홍, 밖으로는 환란이 있어 국가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만약 강공(姜公)이 없
었더라면 장차 나라가 어찌됐을지 알 수가 없다'
는 내용이 있어 그의 존재감과 공적이 얼마나
장대했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저서로는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 구선집(求善集) 등이 있으나 전하지는 않아 무슨 내
용의 책인지는 알 수 없으며, 그의 묘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에 있는데 오랫동
안 무덤의 위치를 몰라 애태우던 것을 1963년 지석(誌石)을 발견해 무덤을 복원했다.

* 낙성대 안국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228 (낙성대로 77 ☎ 02-877-6896)



 

♠  짧게 거닐은 관악산 서울둘레길 5코스 (낙성대~남현동)

▲  숲터널을 이루고 있는 낙성대 동쪽 산길 (서울둘레길5코스)

축제로 떠들썩한 낙성대를 둘러보니 어느덧 16시가 넘었다. 다음 정처(定處)는 딱히 정한 것
이 없어 어디로 갈까 궁리하다가 서울둘레길5코스(이하 5코스)가 갑자기 땡겨 그곳으로 길을
잡았다.
천하 둘레길의 대표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고 있는 서울둘레길은 총 8코스 157km로 이루
어져 있다. 이중 5코스는 사당역에서 관악산 북쪽 자락, 낙성대, 서울대 정문, 삼성산(三聖山
) 북쪽 자락, 호암산(虎巖山) 옆구리를 거쳐 석수역까지 이어지는 13.5km의 도보길로 관악산
둘레길과도 조금 겹치는데, 관악산과 삼성산, 호암산 등 뫼 3개를 거치다 보니 오르락내리락
이 무수히 반복된다. 허나 해발도 낮고 길의 난이도도 초급으로 무난하다. 즉 사지만 멀쩡하
면 어린이도 쉽게 완주할 수 있는 코스다. (5코스 완주는 4~5시간 정도 걸림)


▲  5코스에서 바라본 관음사(觀音寺) 능선 (사당능선)

5코스는 낙성대공원을 지나간다. 안국사 남쪽 산길로 접어들면 관악산 북쪽 산자락을 지나 사
당역으로 이어지는데, 속세와 적당히 거리를 두며 해발 100~200m대를 구불구불 지나간다. 길
북쪽은 확 트여있고 딱히 시야를 방해할 뫼나 높은 존재가 없어서 낮은 높이치고는 조망도 괜
찮은 편이다.


▲  5코스에서 바라본 신림동, 봉천동 지역

▲  5코스에서 바라본 낙성대동, 사당동, 동작동, 서초구 지역
멀리 남산과 북한산(삼각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  늦가을에 잠긴 5코스 산길 속으로 (무당골 서쪽)

▲  조촐하게 생긴 무당골 서쪽 계곡

▲  무당골 굴

5코스 낙성대~관음사 구간 중간 정도에 무당골이란 계곡이 있다. 이름 그대로 무당들이 굿을
했던 산악/무속신앙의 현장으로 그 현장의 중심이 바로 무당골 굴이다. 둘레길이 그 앞을 흐
르면서 그의 존재도 덩달아 알려지게 되었고 나도 이렇게 그를 만나게 되었는데 호랑이가 담
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굿과 치성 장소로 바쁘게 살아와 굴 주위 피부가 온통 시커멓다. 굿/
치성에 촛불을 쓰기 때문이다. (특히 저녁과 밤에 치성 수요가 많았음)
비록 간의 기별도 안가는 얇은 수준이지만 작은 굴까지 지니고 있는데, 현재 무속행위는 통제
되어 있으나 치성이나 기도 행위는 밤을 중심으로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우리네 속세살이가 고통스럽기 때문이리라.


▲  촛불 등에 그을린 흔적들이 아주 요란한 무당골 굴

▲  무당골에서 바라본 관악구의 평화로운 모습 (낙성대동, 봉천동 지역)

▲  무당골 동쪽 5코스 구간

무당골을 지나 관음사까지 욕심을 부리려고 했으나 햇님 퇴근시간이 임박했고 몸 또한 지쳐서
관음사 이전인 남현흥화브라운빌아파트(남현동)로 미련없이 내려갔다. 비록 짧게 타긴 했지만
남현동~낙성대 구간 둘레길을 오랜만에 복습했으니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낙성대, 관악산 서울둘레길5코스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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