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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9.10 서울 도심의 허파이자 신선한 명소 ~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2. 2012.08.13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별천지 ~ 북악산 백석동천 (백사실계곡)

서울 도심의 허파이자 신선한 명소 ~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 서울 도심의 허파이자 신선한 명소,
북악산(北岳山)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산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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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악산 김신조루트 남마루에서 굽어본 서울시내


봄이 한참 익어가던 5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북악산을 찾았다. 4호선 한성대입구역(4호선)에
서 일행들을 만나 1111번(번동↔성북동)시내버스를 타고 성북동 명수학교 종점에 발을 내린다.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인 성북동(城北洞)은 내가 즐겨찾는 동네의 하나로 볼거리가 정말 풍
성하다. 십주원<최사영(崔思永) 고택>과 한국가구박물관, 정법사(正法寺) 등을 빼고는 지겹도
록 둘러봤지만 갔다오면 금세 또 가고 싶고, 뒤돌아서면 또 생각나고, 자꾸 가고 싶은 생각만
들게 만드는 그야말로 내 마음을 제대로 훔친 동네이다. 길상사(吉詳寺) 같은 경우는 매년 5~
6회나 찾아갈 정도이고, 간송미술관은 봄, 가을 특별전마다 약속이나 한 듯 찾아간다.

성북동 종점에서 만국기(萬國旗)가 아낌없이 펄럭이는 '우정의 공원'을 지나 삼청각으로 가는
조그만 길로 들어선다. 서울 도심이 바로 지척이건만 도심을 비웃듯 시골 풍경을 여실히 비춘
다. 길 왼쪽에는 북악산 계곡이 졸졸졸♪~~노래를 하며 흘러가는데, 이 계곡은 성북천이란 간
판을 달고 속세로 흘러가며, 북악산에서 잔잔히 이는 산바람은 몸에 비친 땀과 더위를 털어가
며 심신을 시원하게 해준다.

길의 막다른 부분에 이르면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함께 약간의 산길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데, 그 산길을 오르면 바로 삼청터널 북쪽이다. 삼청터널은 성북동과 삼청동(三淸洞), 도심을
이어주는 터널로 수레의 왕래가 잦다. 허나 길은 2차선으로 좁고 신호등은 황색점멸만 일삼아
모른 척 하니, 통행에 주의가 필요하다. 또한 수레 전용 터널이라 도보 통행이 금지되어 있다.
여기서는 북악산 주능선(한양성곽 능선)과 김신조루트로 불리는 북악산 북쪽 산길(북악하늘길
)이 시작되며, 홍련사(紅蓮寺)와 삼청각이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자리해 있다.


  삼청각 주변

▲  도심과 성북동을 가까이 이어주는 삼청터널

삼청터널은 성북동 서쪽에서 도심인 삼청동을 이어주는 2차선 터널이다. 보통 성북동을 드라이
브한다면 삼선교(한성대입구역)에서 성북동을 가로질러 삼청터널을 지나 삼청동으로 가던가 혹
은 그 반대로 가면 된다. 터널이 뚫리기 전에는 이곳은 성북동의 가장 막다른 곳이었다. 

이 터널은 군사정권이 절정을 누리던 1969년에 삽을 뜨기 시작하여 1970년 12월 30일에 완성되
었다. 그 시절 성북동에는 차지철을 비롯한 군사정권의 실세들이 여럿 살았는데 그들의 청와대
접근 편의와 땅값 상승을 노리고자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솔직히 당시 성북동과 삼청동은
매우 한적한 동네로 두 동네를 이을 터널의 필요성은 그다지 없었다.
터널이 뚫린 이후, 성북동 땅값은 하늘을 향해 들썩였고, 성북동에서 청와대와 정부청사, 서울
도심과의 접근이 편해지면서 대원각, 삼청각 등의 고급요정이 호황을 누렸다. 

산간지방에 조촐한 터널 같은 삼청터널은 길이가 짧고 폭이 좁아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고 있다. 오로지 수레들만 통행이 가능하다. 예전에는 지배층과 졸부들이 주로 오가던 그들
의 전용 터널이자 청와대의 후문, 도심 속에 숨겨진 터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적
하던 터널이지만, 시대가 바뀌고 성북동이 도심 관광지로 명성을 얻으면서 수레의 발길도 제법
늘었다. 그래서 휴일에는 꼬리에 꼬리를 잡고 버벅거리는 수레의 행렬을 쉽게 구경할 수 있다.
수레의 양은 늘었지만 터널은 아직도 옛날 2차선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터널을 지나면 바로 삼청동과 북촌으로 이어지지만 도보가 금지되어 있으므로 터널에 발을 들이
지 않도록 한다. 차라리 택시를 타고 삼청공원으로 넘어가던가 아니면 숙정문안내소 동남쪽으로
나있는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를 타면 산길 중간에 한양성곽이 모습을 진하게 비추면서 성곽 안
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으로 성 안으로 넘어가면 말바위안내소(쉼터) 동쪽
인데, 여기서 삼청공원(三淸公園)으로 내려가면 바로 삼청동과 북촌으로 이어진다.


▲  삼청각(三淸閣) 정문

성북동의 가장 서쪽 구석이자 삼청터널 북쪽에는 으리으리한 한옥으로 치장된 삼청각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햔양도성이 지나는 북악산 본줄기와 북악산길이 지나는 북쪽 능선(북한산의 남쪽
줄기이기도 함) 사이 150m고지로 성북동에서 제일 막다른 곳이다.

삼청각은 겉모습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처럼 원래는 고급요정이었다. 1972년에 지어진 이곳은 군
사정권 시절 악명을 떨친 3대 요정<청운각(淸雲閣), 대원각(
大元閣), 삼청각>의 하나로 삼청각
이란 이름은 북악산 남쪽에 있는 삼청동(三淸洞)에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주로 국빈(國賓)의 접대와 정치적 회담을 위한 요정으로 운영되었으며, 1972년 7월 4일
7.4남북공동성명 직후 남북적십자대표단의 만찬을 열었던 뜻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권력실세의
공간으로 30년 가까이 폐쇄적으로 이어오다가 2001년 서울시가 인수하여 리모델링을 거쳐 도심
속의 전통문화 공간으로 속세에 활짝 문을 열었으며, 현재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한때 백성들은 감히 명함도 들이밀지 못했던 고급 요정이 누구나 자유롭게 오가고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대중적인 공간으로 탈바꿈된 현장으로 이는 인근 대원각과 비슷하다. 대원각은 그곳을
관리하던 김영한(金英韓, 1916~1999)이 법정에게 통째로 기증하여 절로 변신한 곳으로 비록 과
정은 다소 다르지만 결과는 비슷하다.

이곳은 오래된 문화유산도 아니고 비록 속세에 개방된 공간이라 해도 여전히 고급요정의 이미지
가 깃들여져 있다. 한식당과 다원의 얄미운 음식/차 가격에 경악을 금치 못하지만 서울의 허파
인 북악산의 품에 포근히 안긴 곳으로 20세기로 전승된 현대 한옥의 아름다움과 기품, 전통 정
원의 미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 삼청각
☞ 관련 글 보러가기~~*
* 삼청각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


▲  북악산 전면개방 기념조림 표석 - 숙정문 안내소 부근

▲  숙정문안내소 - 여기서 산길은 숙정문 방면과 북악산길 방면으로 갈린다.

홍련사와 삼청터널 사이에 난 산길을 오르면 북악산 전면개방 기념 조림(造林)을 기념하는 커다
란 표석(標石)이 나그네를 맞는다. 지금은 이 땅에 없는 대통령의 업적이라 그를 좋아하는 사람
들은 여기서 기념촬영을 하고 등산에 임한다.

표석을 지나면 숙정문안내소(☎ 02-747-2152~3)가 나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안내
소를 지나 직진하면 한양도성의 북문인 숙정문(肅靖門)으로 통한다. 숙정문에서 북악산의 주능
선을 따라 와룡공원이나 창의문(彰義門, 자하문)으로 이어지며, 북악산의 정상인 백악마루(342m
)에서 아시아 최대 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도심을 두 눈 아래에 두며 굽어볼 수 있다.
서울을 방어하고자 오랫동안 금표(禁標) 지역으로 있던 북악산이 2006년 속세에 개방이 되었지
만 아직까지는 제약이 많아 숙정문안내소와 창의문안내소, 말바위안내소를 통해 들어가야 되며,
적어도 15시까지는 출입해야 된다. 반드시 신분증을 가져가야 되며, 출입신고서를 작성하고 출
입증을 받아서 가슴에 달거나 목에 걸고 입장해야 된다. 또한 17시까지 등산을 마쳐야 된다.
허나 본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곳은 북악산 주능선이 아닌 북악하늘길이다. (북악산 주능선 관련
정보는 ☞ 이곳을 클릭하여 북악산 관람정보 부분을 참조하거나 숙정문안내소에 문의 요망)
숙정문안내소를 코앞에 두고 오른쪽(홍련사에서 숙정문 방향) 산길로 가면 북악산 북쪽 능선으
로 통하는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이다. 김신조루트라 불리는 제2산책로는 안내소에서 200m 떨어
진 성북천발원지에서 시작된다.

북악산 북쪽 능선 주변은 북악산 주능선과 달리 백성들의 출입이 자유로웠다. 그러다가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공비패거리 31명이 북한산을 넘어 창의문을 거쳐 시내로 침투했
는데, 그들의 침투 소식을 접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 1932~1968)은 경찰을 청와대 길목
에  배치하고 직접 현장을 지휘했다.
드디어 공비패거리가 청와대 서쪽 청운동(淸雲洞)에 나타나자 최서장은 그들이 공비임을 눈치채
고 검문을 한다며 길을 막았다. 들통났음을 직감한 공비들은 발작하여 외투 속에 숨긴 기관단총
을 꺼내 선제공격을 가하면서 총격전이 발생했고, 최서장은 불행히도 가슴과 배에 관통상(貫通
傷)을 입고 쓰러지면서 '끝까지 청와대를 사수하라!' 부대원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리고는 장
렬한 최후를 마쳤다.
서장의 죽음에 애끓는 복수심에 불탄 우리 경찰의 반격으로 공비들은 거의 벌집이 되었고 살아
남은 이들은 인왕산(仁王山)과 북악산으로 도주했다. 이후 14일 동안 수색을 벌여 북악산 북쪽
능선를 끝으로 토벌을 완료했으며, 생포된 김신조와 도주 1명을 뺀 29명을 사살했다.

김신조 사건을 계기로 뚜껑이 단단히 폭발한 박정희 전대통령은 북악산 북쪽 능선 주변을 완전
히 통제하여 군사지역으로 삼았으며, 북악산과 인왕산 허리에 군작전 및 관광을 겸한 북악스카
이웨이(북악산길)를 급하게 닦게 했다.

통제를 당하고 무려 41년이 지난 2009년부터 삼청각에서 와룡공원 방면과 성북동과 평창동, 정
릉에서 북악산 북쪽 능선인 북악산길로 이어지는 산길들이 속속 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2010년
2월 27일 삼청각에서 북악산길로 오르는 산길을 손질하여 속세에 개방했다. 그 산길이 이른바
북악하늘길이다. 이 중 제2산책로는 김신조 패거리가 도망친 루트라 하여 김신조루트란 이름으
로 속세의 주목을 받고 있으며, 북악하늘길의 백미이자, 안보관광지로 가장 볼거리가 많은 산길
이다. (실제로 김신조는 이 길로 가지 않았다고 함)
이곳이 주능선과 다른 점이 있다면 24시간 언제든 출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행히 내가 팔팔
한 시절에 공개되어 이렇게 가게 되니 기쁘기 그지 없다. 북한이나 휴전선처럼 기약할 수 없는
곳에서 벗어났으니 말이다.

무려 40여 년 동안 폐쇄되어 속인들의 발길이 닿지 못한 탓에 북악산 북쪽 능선의 자연은 군부
대로 인한 몇몇 훼손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잘 보존되고 있다. 그러 인해 생태적인 가치가 높고
자연경관이 우수하며, 서울 도심을 비웃듯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어 '서울 속의 비무장
지대','도심의 허파','도심 속의 신세계' 등의 신선한 별명까지 지니게 되었다. 또한 마천루(摩
天樓)의 빌딩들이 즐비한 도심 속의 이색 장소로 한나절 나들이 코스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제1산책로와 제2산책로(김신조루트)는 출입통제 시절 군인들이 오가던 산길로 쓰여 군사시설과
그 당시 만들어진 계단길이 있으며, 산길이 조금은 험하고 경사가 속세살이처럼 급하여 등산객
의 편의를 위해 나무로 만든 등산로를 곳곳에 설치하여 통행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다.

참고로 북악산 북쪽 능선을 개방하면서 조성된 북악하늘길 코스는 다음과 같으며, 본글에서 북
악산길과 북악하늘길을 절대 혼돈하지 않도록 한다. (북악산길은 북악스카이웨이 도로, 북악하
늘길은 성북동에서 북악산길로 이어지는 산길)
*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 : 말바위쉼터 ~ 한양성곽 북쪽산길(중간에 성곽 안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이 있음) ~ 숙정문안내소 ~ 성북천발원지 ~ 북악팔각정 (1.4km)
* 북악하늘길 제2산책로(김신조루트) : 성북천발원지 ~ 계곡마루 ~ 호경암 ~ 하늘전망대 ~ 북까
  페 ~ 하늘교 ~ 하늘마루 (2km)

*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 : 북까페 ~ 동마루 ~ 숲속다리 (640m)


▲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 계단길 (군사통제시절에 만든 계단)

▲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와 그뒤로 보이는 북악산 북쪽 능선

▲  울창한 숲너머로 삼청각 일화당(一和堂)이 고개를 내민다.


  삼삼한 숲에 묻힌 북악산 김신조투르 둘러보기 (1)
성북천발원지 ~ 서마루 ~ 솔바람교


▲  성북천(城北川) 발원지

숙정문안내소에서 200m 정도 오르면 성북천발원지가 나온다. 성북천은 북악산 동북쪽 자락에서
발원(發源)하여 성북동과 삼선교, 보문동, 제기동을 거쳐 청계천으로 흐르는 7.7km의 하천으로
지방 2급하천이다. 조그만 하천의 발원지라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儉龍沼)나 낙동강의 발원지
인 황지(黃池)처럼 뭔가 특별하거나 요란한 것은 없으며, 속세를 향해 흐르는 계곡 주변에는 하
얀 피부의 바위들이 누워 있고, 수심은 대충 무릎이 닿을까 말까 할 정도로 얕다.
성북구청에서는 이곳을 생물서식처로 가꾸고자 수변(水邊)식물과 조류, 곤충류의 먹이식물을 심
었으며, 성북구를 가로 질러 흐르는 성북천의 시작점인 만큼 계곡으로의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

이곳에서 산길은 2개로 갈리는데, 직진하면 기존의 제1산책로로 바로 북악팔각정과 빠르게 이어
지며, 오른쪽은 김신조루트라 불리는 제2산책로로 호경암을 거쳐 하늘교까지 이어지는 2km 산길
이다. 길 중간중간 조망(眺望)이 괜찮은 곳에 '~~마루'와 '하늘전망대'라 불리는 조망대를 두어
천하를 굽어볼 수 있게 했다.


▲  마치 끝이 없는 하늘로 이어진듯한 김신조루트 계단길 (통제시절의 유물)

▲  서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1)
북악산 주능선 너머로 서울 도심과 남산이 보인다.
아직까지는 조망이 속시원하지는 못하다.

▲  서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2)

북악산 정상(백악마루)이 오른쪽에 보이고, 그 너머로 도심과 용산구, 마포구 지역이 시야에 보
인다. 남산 뒤로 희미하게 관악산(冠岳山)이 모습을 비추며 늘 북악산을 응시한다. 관악산은 풍
수지리적으로 서울을 위협하는 산으로 북악산은 서울을 지키는 주산(主山)인데, 높이로 보나 덩
치로 보나 관악산의 적수가 되질 못했다. 그래서 이를 보완하고자 북한산(北漢山)을 북악산을
돕는 든든한 진산(鎭山)으로 삼아 관악산의 기운을 경계했던 것이다.


▲  서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3)
성북구와 동대문구를 비롯한 서울 동부 지역

성북천발원지에서 서마루까지는 오르막길이다. 서마루에는 두 다리를 쉬어갈 수 있도록 의자와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잠시 숨을 고르며 천하를 관망하기에 좋다. 이곳에선 북악팔각정이 가
까이에 보이며, 북쪽으로 난 금지된 계단길이 있는데, 이는 군부대로 가는 길이다.
여기서 길은 동쪽으로 급하게 내리막길이 펼쳐져 있어 '벌써 다 올라온거야? 정말 싱거운데..!'
싶은 착각과 방심을 불러 일으킨다. 허나 그건 북악산이 내린 일종의 속임수였다.


▲  솔바람교 주변

▲  약수터에서 바라본 솔바람교
(다리 중간에 계곡마루가 있음)

▲  정면에서 본 솔바람교와 돌밭이
되버린 계곡


▲  솔바람교 밑에 자리한 약수터

나무 계단길을 내려서면 솔바람교라 불리는 나무다리가 나온다. 다리 이름이 순 우리말에 어여
쁜 표현을 넣어 정감이 깊은데. 주변에 소나무를 비롯한 수목이 삼삼하여 그 이름 그대로 솔바
람이 나를 날려보낼 것 같다. 이래 봬도 계곡 위에 걸린 엄연한 다리이건만 계곡이 워낙 부실하
고 돌만 가득하여 계곡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다리 중간에는 계곡마루라 불리는 쉼터가 있는데,
늘 그늘이 드리우고 있어 시원하다.

다리를 내려와 구석으로 가면 이름 없는 약수터가 있는데, 이곳이 북악하늘길의 유일한 샘터이
다. 산에서의 약수터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라 갈증이 없어도 꼭 물을 한 바가지 마시
는데, 그래도 산을 조금 탔다고 목구멍이 시원하다고 쾌재를 부른다. 물맛은 별로 특별한 것은
없어 보인다.
약수터 주변은 숲이 바다를 이루고 있어 햇빛이 쉽게 손을 뻗지 못하며, 북악하늘길에서 가장
깊은 곳으로 북쪽과 서쪽, 남쪽은 산으로 막혀있고, 남쪽만 가늘게 뚫려있는 고독한 곳이다.

서마루에서 솔바람교까지 220m 구간은 급한 경사의 내리막길이다. 다 올라왔구나 싶겠지만 그건
북악산이 인간들을 속이고 시험하는 것이다. 솔바람교를 지나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무지막지한
오르막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내리막길은 고난 앞에서 잠시 즐기는 여유라고나 할까..? 한라
산(漢拏山)도 관음사 방면으로 한참 내려갈 때 중간에 오르막길이 나와 속인들을 좌절하게 만드
는데, 바로 그 이치이다. 남마루까지는 가파른 길이 계속 이어지니 방심의 늪에 빠지지 말자~~


  삼삼한 숲에 묻힌 북악산 김신조투르 둘러보기 (2)
남마루 ~ 호경암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1)
성북구, 동대문구를 비롯한 서울 동부지역

솔바람교에서 600m 정도 가파른 길을 오르면 남마루라 불리는 조망대가 나온다. 김신조루트에서
제일 숨이 차는 구간이 솔바람교에서 남마루 구간으로 청운동에서 간신히 도망친 김신조 일당이
목을 붙잡고 열심히 줄행랑을 치던 구간이다.

남마루에 각박한 산길에 지친 두 다리를 쉬게 하며 잠시 천하를 굽어본다. 시원한 산바람이 잠
시 얼굴에 비춘 땀을 보기 좋게 앗아간다. 남마루에서 보이는 범위는 서마루와 거의 비슷하지만
거기보다는 하늘과 좀 더 가까운 곳이라 조망은 좀 업그레이드 된다.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2)
북악산 수림 속에 묻힌 삼청각 일화당의 지붕이 보인다.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3)
성북동과 혜화동, 성북구, 동대문구, 성동구, 중랑구 등이 눈에 박힌다.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4)
북악산 주능선 너머로 서울 도심과 남산(南山)이 보인다.

▲  남마루에서 호경암으로 가는 산길
솔바람교 이후 잔뜩 흥분했던 산길은 남마루 이후 다소 진정을
되찾으며 호젓한 산길의 기품을 보인다.

▲  남마루에서 호경암으로 가는 나무 다리길
이 구간은 길이 야박하여 이렇게 나무다리를 놓았다.

▲  김신조루트의 상징물 ~ 호경암(虎京岩)

남마루에서 360m 오르면 길 왼쪽으로 큼직한 바위가 나그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도심을 바라
보며 자리한 이 바위가 바로 김신조루트의 상징인 호경암이다. 바위는 그리 잘생긴 편은 아니고
그저 평범한 수준인데, 이 바위는 김신조 일당과의 처절했던 격전지라 남북분단의 가슴 아픈 비
극을 더욱 끌어올려 준다.

청운동에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이 이끈 우리 경찰과의 전투에서 간신히 도망친 김신조 일당은
북악산을 넘어 성북동 뒷산(북악산 북쪽 능선)으로 줄행랑을 치며 몸을 숨겼다. 39대대 2중대는
호경암 주변을 수색하던 중,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공비 3명을 발견, 호경암에서 교전을 벌이다
가 인근 구진봉(북악산 북쪽 능선 봉우리의 하나) 주변에서 모조리 사살했다.

처리된 김신조 일당 29명은 그 시신을 버리지 않고 파주시 적성면에 있는 적군묘지(敵軍墓地)에
묻었다. 여기서 적군묘지는 6.25때 남한 땅에서 죽은 북한군과 중공 떨거지들의 시신을 안치한
공간으로 김신조 사건과 동해 잠수함 침투 때 죽은 공비를 비롯하여 1987년 KAL기 폭파범도 같
이 묻혀있는 분단 비극의 숨겨진 속살이다.

호경암이란 이름은 처음에는 북악산 주변에 숨겨진 경승지가 많으므로 조선시대에 지어진 이름
이 아닐까 싶었으나 1968년 당시 서울을 지키던 맹호부대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  총알구멍이 선명한 호경암

북악산에 귀족들의 기와집과 별장, 바위글씨들
이 많이 있었지만 그 범위는 북악산 주능선의
서쪽과 남쪽에 치우쳐져 있을 뿐, 북쪽 능선인
이곳까지는 크게 관심을 받지 못했던 모양이다.

바위 밑에는 이곳이 격전지임을 알리는 안내문
이 있는데, 1998년 1월 군장병들의 애국심과 경
각심을 돋게 하고자 설치했다고 하며, 울퉁불퉁
한 바위 피부에는 당시 총격전으로 생긴 50여
발의 탄흔이 진하게 남아 당시의 긴장되고 숨막
힌 상황을 아련히 전해준다.
그런 악연으로 북악산의 이름 없는 바위는 김신
조 사건의 격전지로 이들을 격퇴한 부대 이름을
따서 호경암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고, 이곳이
개방되면서 북악산의 새로운 명물이자 이 땅의
처절한 현실을 말해주는 존재로 몸값과 이름을
크게 올리고 있다. 바위를 보면 조금은 표정이
우울해 보이는데, 통일이 되면 그의 표정도 씨
익~ 펴지지는 않을까?


▲  호경암 머리 부분에 난 당시의 상처들

바위 표면에는 당시 인간들이 낸 상처들이 진하게 서려있다. 피부도 괜찮고 그저 조용히 지내던
그가 무슨 죄가 있다고 총알 세례를 받아야 했는지.? 유명해진 것은 좋지만 그때의 상처는 영원
히 치유하지 못하고 간직하고 살아야 되는 호경암에게 인간의 하나로서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  바위에 깊숙히 박힌 탄흔

같은 민족이지만 나라와 이념이 다른 두 존재들이 서로를 죽이고자 총알을 사정없이 갈기던 그
날의 총성이 들리는 듯 하여 마음이 그리 편치가 못하다. 저 총알이 사정 없이 박힌 날, 바위도
울었을 것이다. 얼마나 울었으면 바위 표면이 울퉁불퉁했을까.. 다시는 이 땅의 그 어느 것이라
도 분단 비극의 현실에 희생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  호경암 정상에 비스듬히 박힌 호경암 표석
표석이 박힌 호경암 정상은 안전을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허나 이곳에 올라
바라보는 천하는 앞에서 본 조망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의 천하 일품이다.

▲  호경암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도심과 남산 등이 보인다. ▼


  삼삼한 숲에 묻힌 북악산 김신조투르 둘러보기 (3)
하늘전망대 ~ 북까페 ~ 북악산길


▲  호경암에서 하늘전망대로 가는 길
호경암을 지나면 오르막길은 거의 나오질 않는다.
녹음에 잠긴 평평한 오솔길만이 조용히 사색을 도울 뿐~

▲  김신조루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하늘전망대

호경암을 지나 230m 가면 하늘전망대라 불리는 조망대가 나온다. 그동안에 나온 '~~마루' 보다
덩치도 넓고 조망도 일품인데, 김신조루트를 포함한 북악하늘길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하늘전
망대란 이름은 북악하늘길에서 따온 것인데, 그만큼 하늘과도 가까운 곳이다 보니 이름이 딱 어
울린다.

앞에 마루에서는 도심과 남산 등의 남쪽과 중랑구 등의 동쪽이 주로 보였는데, 호경암을 경계로
능선 남쪽에서 북쪽으로 넘어왔기 때문에 하늘전망대에 발을 디디면 그와는 반대인 북한산과 강
북구, 성북구, 도봉구, 평창동 등 서울 동북부와 종로구 북부 지역이 훤히 두 눈에 박힌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북한산 동쪽과 성북구, 강북구 일대는 물론 멀리 도봉구와 노원구,
불암산과 수락산 형제도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성북구와 동대문구는 물론 멀리 중랑구와 노원구 일대가 눈에 박힌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3)
가까이에 북부간선도로가 보이고, 서울 동북부가 눈 아래 펼쳐진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 형제봉

북한산의 남쪽 봉우리인 형제봉이 넌지시 우리를 굽어본다. 북악하늘길과 북한산은 산줄기가 서
로 이어져 있어 마음대로 오갈 수 있으며, 북한산과 북악산은 다 같은 한북정맥(漢北正脈)의 일
원이다. 북악산 북쪽 줄기를 북한산의 최남단 줄기로 보기도 하며, 그런 이유로 길상사과 정법
사가 삼각산(三角山, 북한산)에 있음을 칭하고 있는 것이다.


▲  솔내음이 그윽한 북까페

하늘전망대에서 북쪽으로 110m 가면 북까페라 불리는 공간이 나온다. 이곳은 소나무가 우거져있
고 한쪽에 책장이 있어 소나무 밑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자연을 벗삼아 책을 읽는 곳이다. 북
한산과 북악산의 산바람이 교차하는 곳이라 독서도 무지 잘될 것 같다.
그런데 북까페보다는 '독서마당'이나 '소나무책방','솔내음책방','사색의 공간'이라 했으면 훤
씬 더 좋지 않았을까? 굳이 서양 흰둥이들의 영어로 이름을 지어야 했을까? 웃기는 것은 다른
곳은 '~~마루(마루는 정상을 뜻하는 순 우리말)','하늘전망대' 등의 순 우리말로 이름을 달았으
면서 말이다.

북까페 책장은 달랑 하나인데, 책들로 가득하다. 허나 아직은 많이 부족하니 집에 버려둔 책이
있다면 썩은 내 풍기게 하지 말고 이곳에 기증하는 것도 괜찮다. 다만 이곳의 책은 가져가지 않
도록 한다. 대부분 시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책(주로 어린이와 청소년용)들이다. 그리고 책을
봤으면 책장에 정성을 담아 꽂아두기 바란다.

이곳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북까페를 등지고 직진하면 하늘교가 나오고, 북까페를 가로지
르면 북악하늘길 3산책로가 시작된다. 3산책로는 이곳에서 숲속다리까지 이어지는 겨우 1리 정
도의 짧은 산길이다.


▲  북까페 책장 - 어린이 도서관 같은 분위기다.

▲  김신조루트의 종점, 하늘마루

북까페에서 1분 정도 가면 하늘교란 콘크리트 다리가 나온다. 다리 밑에는 북악산길이 펼쳐져
있는데, 수레들이 1분이 멀다하고 지나간다. 하늘교는 난간은 성곽(城郭) 여장처럼 만든 것이
특징인데, 그 다리를 건너면 하늘마루가 나온다. 이곳이 김신조루트의 북쪽 종점이다.

이렇게 해서 2km의 김신조루트를 깔끔히 완주했다. 허나 그건 북악산 산길의 하나를 지나간 것
에 불과하다. 다음에는 제1산책로의 나머지 부분과 제3산책로, 북한산 형제봉으로 핏줄처럼 이
어진 산길에 죄다 발도장을 찍고 싶다.

하늘마루에는 6각형 정자와 쉼터, 운동기구 등이 흩어져 있으며,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하늘교에
서 위 아래로 떨어져있던 북악산길과 만난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서쪽으로 가면 북
악팔각정과 부암동, 창의문, 인왕산으로 이어진다. 북악산길이 수레 전용도로긴 하지만 도로 옆
에 뚜벅이를 위한 길을 내어 창의문을 넘어 인왕산(仁王山), 사직공원까지 걸어갈 수 있다. 물
론 거리의 압박은 심하다. 그렇지만 북악팔각정을 지나서부터는 내리막길 수준이라 힘든 건 별
로 없으니 거닐만 하다.
반면 동쪽으로 가면 북악정과 성북구민회관, 아리랑고개, 정릉동 방면으로 통한다. 중간에 국민
대나 배밭골, 성북동 길상사로 내려가는 길이 있으며, 하늘마루를 조금 지나면 북한산 형제봉으
로 가는 산길이 있어 북한산으로 넘어갈 수 있다. 이 산길은 북악터널 위쪽을 지나는데, 형제봉
으로 가면 중간에 요즘 인기를 한참 닦고 있는 북한산둘레길과도 만난다.
둘레길은 동쪽으로 수유리와 우이동(牛耳洞), 서쪽으로 평창동과 불광동(佛光洞)과 구파발 쪽으
로 연결되어 있어, 마음만 먹으면 북악산에서 북한산 서쪽이나 동쪽을 잇는 장거리 등산도 가능
하다. 
북한산은 북악산과 북악터널에서 서로 이어져 있고, 북악산 북쪽 능선은 북한산의 남쪽 줄기로
도 볼 수 있다. 그래서 길상사와 정법사(正法寺)가 삼각산(三角山, 북한산의 다른 이름)에 있음
을 칭하는 것이다.

저번에 왔을 때는 창의문으로 내려갔으니 이번에는 반대인 아리랑고개 쪽으로 내려갔다. 내려가
는 길의 연속이라 힘든 건 없다. 북악산길을 옆구리에 끼며 가다가 북악정에서 성북동으로 꺾어
서 한국가구박물관을 거쳐 길상사로 내려왔다.


▲  북악산길
서울 도심 속의 산악도로이자 관광도로로 드라이브 코스로 명성이 자자하다.
특히 야간에는 회색빛 대도시 서울의 야경을 제대로 조망할 수 있다.


41년 만에 속세에 개방된 북악하늘길과 김신조루트, 비록 남북분단의 아픈 상처가 서린 서글픈
현장이지만 서울 도심 속의 상큼한 명소로, 자연이 잘 보존되고 경관이 아름다운 보석과 같은
곳이다. 누가 도심에 이런 호젓한 산길이 있으리라 생각이나 했겠는가..?

김신조루트는 마치 미지의 땅에 들어온 듯한 신선한 기분이었고, 서울 땅에서 안가본 곳이 거의
없는 나에게도 공개된지 1년 밖에 안된 서름한 곳이라 길을 거닐면서도 무엇이 나올까? 늘 마음
이 두근거렸다.
이렇게 하여 도심 속의 허파, 북악산 김신조루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찾아가기 (2012년 9월 기준)
*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동 명수학교 종점 하차.
  여기서 서쪽(삼청각 방면)으로 8분 정도 가면 삼청터널이 나오는데, 홍련사 옆길로 들어가면
  숙정문안내소이다. 안내소 못미쳐에서 우회전하면 북악하늘길 1산책로와 김신조루트이다.
*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116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구민회관 종점 하차. 여기서
  북악산길을 따라 오른다.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18,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자하문고개
  하차, 북악산길을 따라 오른다.

★ 북악산 북악하늘길 관람정보
* 북악산 주능선과 달리 언제든 출입이 가능하다. 단 군부대 등의 출입금지 지역과 등산로 외에
  구간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는다.
* 김신조루트는 약수터 1곳과 화장실 1곳(호경암 부근) 밖에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정릉동
* 문의 : 성북구청 (☎ 02-920-3796) / 숙정문안내소 (☎ 02-747-2152~3, 팩스 02-747-2156)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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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2년 9월 5일부터
* 글을 보셨다면 매정히 가지들 마시구요. 댓글 하나씩 달아주시거나 밑에 있는 View on을
  꼭 눌러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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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최근에 본인 다음 블로그에 올린 글과 사진입니다.
(글 제목을 클릭하시면 해당글로 바로 이어집니다)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별천지 ~ 북악산 백석동천 (백사실계곡)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비밀의 별천지 ~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

▲  백석동천 별서 유적


가을이 한참 여물어가던 10월 중순에 북악산 백석동천(백사골, 백사실)을 찾았다. 이곳은
서울 장안에서 내가 가장 흠모하는 곳으로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곳이기도 하다.
2005년 5월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처음 찾은 이래 매년 3~5차례 정도 발걸음을
하며 그에 대한 변함없는 마음을 비춘다.

백사골의 품으로 들어가고자 수유리에서 서울시내버스 153번(우이동↔보라매공원)을 타고
세검정초교에서 내린다. 거기서 홍제천(弘濟川) 다리를 건너면 백사실계곡을 알리는 이정
표가 나오는데, 그의 지시로 주택가 골목(세검정로6다길)을 비집고 들어가면 빌라 옆으로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바로 혜문사 입구인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 산동네
골목길을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백석동천(백사골)의 남쪽 관문인 현통사와 백사폭
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  혜문사입구에서 백사골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개
저 고개를 넘으면 바로 현통사와 백사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  서울 도심 속에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 작지만 멋드러진 하얀 반석이
인상적인 백사폭포(白沙瀑布)
.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에 오금을 저리게 하는 현통사 대문 밑에 때깔이
고운 하얀 반석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매끄러운 바위면에는 북악산에서 발원한 백사골이 오
랜 세월 빚어놓은 대작품, 백사폭포(백석폭포라 불러도 무관할 듯)가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내
며 별천지를 꿈꾸며 찾아온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시 흔든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이곳을 찾았
던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 지도 모른다.

.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골의 시냇물은 큰 세
상을 꿈꾸며 졸졸졸~♪ 폭포를 타고 살며시 내
려와 폭포 밑에 마련된 못에서 기나긴 여정을
준비한다. 어쩌면 다시는 오지 못할 그리운 고
향, 북악산의 그리움을 털어내며 길을 재촉한
그들은 홍제천을 따라 한강으로, 다시 서해바다
로 종점 없는 여행을 떠난다.

폭포에는 물을 타고 흘러온 누런 낙엽이 가득하
다. 늦가을을 지나 장차 천하를 지배할 겨울 제
국의 시련을 견뎌내고자 나무가 털어낸 낙엽들
은 폭포에 모여 인생의 마지막 물놀이를 즐긴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겨울을 원망하는 그들
의 모습은 인생무상이 허언이 아님을 상기시킨
다.


▲  가을과 낙엽을 속세로 무심히 흘려보내는 백사폭포 서쪽 못

백사폭포는 높이 4m 정도의 조그만 폭포로 웅장하고 장쾌한 편은 아니다. 수수하고 조촐한 모습
이지만 나름대로 수려한 멋을 풍기며 백사골에 대한 첫 이미지를 매우 긍정적으로 인도하고 그
곳에 대한 기대감까지 크게 불러일으켜 심장을 더욱 두근거리게 만든다.
폭포를 빚은 하얀 피부의 너른 바위는 돗자리를 피고 한숨 청하고 싶은 잘생긴 반석(盤石)으로
청정한 계곡물이 끊임없이 바위를 타고 내려와 1폭의 수채화를 자아낸다. 특히 비가 많이 와서
계곡의 수량이 많을 때는 시원한 멋도 풍기는데,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폭포수 소리가 천
하를 뒤흔들 정도로 패기가 넘쳐 귀신도 놀라 도망치게 만든다.

예전 여름에는 동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물놀이 현장 및 동네 주민들의 비밀 피서지였으나 백
사골이 속세에 무심히 알려지면서 폭포 주변에서 자리를 피고 물에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하
며 여름 제국에 대항하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잘생긴 폭포와 반석, 시원
한 산바람까지 갖춘 이곳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여간 쉽지는 않을 것이다.

백사폭포를 거친 계류는 다리 아래에 조그만 폭포를 통해 밑의 못으로 흘러가며 여기서 다시금
바위를 타고 본격적인 세상나들이를 시작한다. 폭포 주변 나무들은 못을 거울로 삼아 늦가을의
절정을 닮아가는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며 매무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저들의 처
절한 아름다움 뒤에는 겨울의 혹독한 시련이 야욕을 드러낸다. 잔잔한 수면에는 낙엽들이 둥실
둥실 떠 가을의 저물어감을 아쉬워하며, 백사골에 머문 늦가을은 낙엽을 데리고 계곡을 통해 저
밑으로 그렇게 흘러간다.


▲  급하게 내려가는 백사골 아랫폭포
서쪽 못에서 경사진 바위를 타고 급하게 내려간 백사골은 주택가 사이를
지나 자하주택 북쪽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해 홍제천으로 흐른다.
.
▲  백사폭포 위쪽에서 굽어본 폭포 주변

백사폭포를 굽어보는 현통사(玄通寺)는 근래에 지어진 조그만 산사(山寺)로 정확한 내력(來歷)
은 모르겠다. 이 시대 큰 승려의 하나인 일붕(一鵬)이 머물기도 했던 절로 백사골을 오갈 때마
다 늘 지나치기만 했을 뿐, 경내로 발을 들인 적은 딱 1번이다. 그 이유는 오래된 절도 아니고
나를 유혹할 만한 매력도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백사골의 시원한 산바람이 낮잠에 잠긴 풍경물고기를 살짝 건드리며 그윽한
풍경소리를 유발시키면서 경내에 깃들여진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
雄殿)을 비롯하여 산신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며, 기와를 얹힌 불
전 밑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한덩어리로 몰려있다. 대웅전은 서쪽
을 바라보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다.

.
▲  금강역사 마크가 새겨진 현통사 대문
금강역사의 무시무시한 망나니 칼에 선뜻 들어가기가 겁난다.
괜히 문을 들어섰다가 칼에 맞는 것은 아닐까..?

. .

▲  조촐한 모습의 대웅전(大雄殿)

▲  산신각 추녀에 매달린 풍경물고기

돌 대신 시멘트로 기단을 만들어 그 위에 대웅
전과 산신각, 칠성각 등을 올렸다. 앞뜰에는 조
그만 3층석탑과 승려의 사리가 담긴 팔각원당형
(八角圓堂形) 부도 2기가 밋밋한 뜨락을 수식한
다.

백사골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가을 단잠에 기지
개를 키며 그윽한 풍경소리를 천하에 흘려 보낸
다. 백사폭포에 앉아 풍경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속세의 더러운 말에 오염된 귀가 말끔히 정화될
지도 모른다.


♠  백사골(백석동천)의 속살로 들어서다

▲  백사골 산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의 끝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고,
바람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나그네로 하여금 절로 시상(詩想)에 물들게 한다.

▲  서울 도심이란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청정한 백사골
시원하고 청명한 산바람에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정신과 마음이
싹 정화되는 것 같다.


오랜만에 백사골을 본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 잡아가며 백사폭포를 지나면 온갖 내음
들이 나래를 펼치는 백사골의 울창한 숲에 들어서게 된다. 제일 먼저 소나무숲이 솔내음을 풍기
며 이곳을 찾은 중생을 소독시킨다.

백사골에 발을 들이면 한폭의 수묵담채화(水墨淡彩畵)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가히 숨이
지릴 지경이다.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이곳의 풍경을 완벽히 표현한다는 것은 힘
들 것이다. 또한 인간의 한낱 언어로 억지로 표현하려 드는 것은 어쩌면 백사골과 그것을 빚은
대자연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감히 글자랑을 하지 않고 그저 탄성만
연거푸 지르며, 조용히 백사골을 거닌다.

숲에 깃들여진 청명한 기운은 속세의 때를 말끔히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산길
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골에는 서울에서는 보기 조차 어려운
도롱뇽, 가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그들이 설
땅은 점점 사라져 가고 이곳은 이제 그들의 마지막 낙원이 되었다. 만약 그들이 이 땅에서 사라
진다면 그 다음은 바로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계곡에 누운 바위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가득 자
라고 있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무성한
이끼를 만나는 것은 정말 보기가 힘들지, 이처럼 백사골은 마치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처럼 청
정함과 순수함을 여실히 간직하고 있다.


▲  자연이 아름답게 채색한 이곳의 풍광은 정말 집으로 살짝 훔쳐와
혼자서만 두고두고 보고 싶다.

▲  언제나 달을 그리는 바위,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유적을 코 앞에 두고 오른쪽 산자락의 윗부분을 유심히 살펴보면 언덕 정상에 커다란
바위가 나무들 사이로 커다란 바위 하나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를 잘 살펴보
면 글씨 같은 것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이 바위는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가운데서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해 있다. 위치는 백석동천 별
서터(연못터 주변) 바로 서쪽 산자락에 자리해 있지만 그를 알리는 마땅한 이정표도 없고 숲에
가려져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모른다. 나무들이 벌거벗은 늦가을이나 겨울에는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다보면 쉽게 시야에 들어오기라도 하겠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그나마도 잘 눈에 띄
지 않는다.

월암은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만들어 그 안에 월암(月巖
)을 새겼다. 이 바위글씨는 18세기에 백사골의 존재를 기록으로 남긴 바 있는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씨로 추정되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
습은 가히 명필 중에 명필이라 하겠다.

백사골은 나무가 울창하여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할 수 없다. 곡차 한잔 걸치러 이곳에 놀러온
선비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굳이 이광
여가 자신의 호를 새기지 않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달놀이 기념으로 글씨를 새겼을 가
능성도 충분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어두운 밤에 곡차(穀茶) 1병 들고 찾아와 달님을 붙잡
으며 함께 잔을 걸치고 싶다.


▲  연못 서쪽을 지나는 백사골 중류 (징검다리)

백석동천 별서터 서쪽 갈림길에서 계곡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면 바로 백석동천의 중심인 별서
터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계곡에 콘크리트로 둑을 두른 것이 조금은 눈에 거슬리는데, 둑 바로
위에 오랜 세월을 머금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짙게 그늘을 드리운다.


▲  별서터로 인도하는 돌다리 - 2개의 통돌로 이루어진 조촐한 모습으로
별서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북악산에 숨겨진 옛 정원, 북악산(北岳山) 백석동천(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의 중심인 6각형 정자터와 연못

옛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지나서면
여기가 서울일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기가 막힌 수려한 경치가 눈 앞에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암동(付岩洞)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과 인왕산(仁王山), 북한산에 안긴 분지
(盆地)로 서울의 일부라기보다는 머나먼 지방이나 산악지대의 소읍(小邑) 같은 분위기이다. 이
곳은 녹지 비율이 서울에서 매우 높은 편이며, 백사골 등의 깨끗한 계곡이 살아 숨쉰다.

예로부터 서울 근교 경승지로 명성이 높았던 부암동은 사대부와 왕족들의 별장 및 피서지로 인
기가 높았다.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인 무계정사(武溪精舍)를 비롯하
여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서울 제일의 경승지이자 피서지였던 세검정(洗劍亭),
연산군(燕山君)이 만든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까지 옛 사람들의 별장, 풍류 유
적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백석동천은 북악산 북서쪽 백사실 계곡(백사골)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별장이 있었다고 하여 그의 호를 따서 백사실, 백사골이라 불리지
만 정작 그는 이곳에 머문 적은 없으며, 조선 중기부터 백사골과 별서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백
석동천이라 부른다. 그 이름은 하얀 피부의 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다워 붙여진 것이다. 동천(洞
天)은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붙이는 명예로운 이름이다.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함>

▲  사랑채터

▲  사랑채터 북쪽의 안채터

백석동천 별서는 19세기 초반(1830년 경)에 지어진 600평 규모의 별서(별장의 일원)이다. 누가
만들었고 이곳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며,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채
, 그리고 정자와 동그란 연못이 있었다. 별서 주변에는 나무와 온갖 화초(花草)를 심어 별서를
최대한 꾸몄을 것이다.
안채는 4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다. 안채는 1917년에 집
한쪽이 기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살아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
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랑채와 함께 폭삭 무너져 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사랑채는 그나
마 주춧돌과 석축이 진하게 남아있으나 안채터는 땅속에 묻혀있다.

동그런 연못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6.25때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도 무거운 상처를 입으
면서 그 휴유증으로 연못의 기능 마저 잃고 말았다. 현재는 사랑채터와 안채터, 정자터, 연못,
담장의 일부 흔적, 바위글씨 2개만이 남아 백석동천의 옛 정취를 아련히 전하며, 이 정도의 별
장을 짓고 소유할 정도면 상당한 재력을 지닌 양반이었을 것이다.

백석동천과 관련된 옛 기록으로 18세기에 활약했던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 1720~1783)의 이
참봉집(李參奉集)이 있다. 그 책에는 '세검정과 탕춘대 계류 고간(高澗) 세폭(細瀑) 위에 동천
이 조성되어 있고, 그곳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었으며, 모정의 이름은 간정료(看鼎寮)였다'
는 내용이 있어 지금의 별서 이전부터 별장이 둥지를 트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허씨의 모정을 그의 후손들이 별서로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하며, 19세기에
상당한 재력이 있는 사대부가 이 일대를 사들여 머물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끝없이 내몰던 백석동천은 2005년까지만 해도 거의 동네(부암동, 신영동)
사람들만 찾아오던 그야말로 동네 사람들의 숨겨진 피서지였다. 그 흔한 지방문화재로도 지정되
지 못한 채,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아무리 은둔(隱遁)해 있어도 휼륭한 재주나 좋은 명
소는 주머니 속에 든 송곳처럼 언젠가는 세상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2005년에 이르러 문화재청
에서 이곳에 대해 조선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우리
나라의 휼륭한 전통 정원임을 인정하면서부터 조금씩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2005년 3월 비지정문화재의 서러움에서 벗어나 바로 사적 462호로 특진되었으며, 2008년
1월에는 명승 36호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제대로 된 안내문이나 변변한 이정표조차도
없었으며, 2009년에 겨우 문화재 안내문과 이정표를 설치했다. 또한 2010년에 별서터 일대를 발
굴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를 확인했으며, 깨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
량으로 수습했다.

▲  사랑채에서 바라본 연못

▲  백사골 중류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숨겨진 보석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거니
와 여름과 가을, 겨울의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에 모두 아름다운 절경지이다. 그중에서
늦봄과 여름에는 도심 속의 조촐한 피서의 성지로 크게 이름을 날리고 있다.
이곳은 숲이 매우 무성하여 무성하여 강렬한 여름의 햇빛도 녹음 속에 녹아내려 시원하며 나무
가 베풀어준 신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고 백사골의 깨끗한 계곡물과 졸졸졸~♪ 음악소리를 들
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거나 독서를 하거나 낮잠을 청하면 정말 피서가 따로 없다. 거기에 지
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유적을 둘러보며 자연의 일부가 되어 신선처럼 살아가고자 했던 그들(
주로 지배층들)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살았을까? 상상하며 그들을 배워보고
그들의 생활과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꽤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사람들의 발길이 쓸데없이 늘면서 정신줄을 놓은 사람들까지 불순물처럼 섞여 들어와 주춧
돌에 흉물같은 낙서를 남기거나, 쓰레기를 버리고, 계곡을 뒤집고, 수목을 괴롭히는 등의 무개
념짓으로 이곳의 건강도 적지 않게 위협을 받고 있어 대책이 절실하다. 아직은 멀쩡하다고 해도
지키는 사람도 하나 없고 외딴 곳에 있으니 언제 더 망가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바램
인데 이곳은 대중적인 명소보다는 소수의 아는 사람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쭈욱 내 곁
에 남았으면 좋겠다. 또한 괜히 별서를 복원하려 들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두었으면 좋겠다.
비록 폐허가 되긴 했지만 지금 모습이 더 운치가 강하고 옛터 위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
수 있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복원을 한다면 이건 그냥 두는 것만 못하다.

참고로 백석동천은 백사실, 백사실계곡, 백사골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어느 이름을 쓰든 상관은
없다. 정식 명칭은 백사실/백사실계곡으로 이곳 지명이 백사실이며, 백사골은 백사실계곡을 달
리 표현한 이름이다. 또한 백석동천은 백사골의 엄연한 일부로 백사폭포에서 백사골 상류 외나
무다리까지를 일컬으며, 외나무다리 윗쪽 계곡과 백사골 동쪽 산줄기는 백석동천의 범위에 들어
가진 않는다.

 북악산 백석동천 찾아가기 (2012년 8월 기준)
* 백석동천으로 들어가는 일반적인 산길은 하림각, 세검정초교(현통사), 창의문 등 3개가 있다.
  여기서 가장 접근하기 쉬운 코스는 세검정초교에서 들어가는 것이며, 하림각은 골목길 경사가
  무지 급해 오르지도 전에 맥이 빠진다. 창의문은 많이 걸어가야 되는데, 북악산 등산이나 북
  악산길 산책을 겯드릴 경우 이용하면 편리하다.
* 각 코스별 접근 방법
① 하림각 코스 - 하림각 건너편에 신도수퍼가 있는데 그쪽에 백석동길이 있다. (백석동천을 알
   리는 이정표가 있음) 그 길은 경사가 다소 각박한데, 10분 정도 낑낑대고 오르면 백사골로
   들어가는 산길이 나온다.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림각 하차 (버스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좀 가면 신도수퍼와 백석동천 이정표가 있음)
② 세검정초교 코스 :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홍제천 다리를 건너면 백사실계곡을 알리는 이정
   표가 있다.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시내버스 / 2호선 신촌역
   (1,3번 출구)에서 110번, 153번 버스 이용 / 4호선 수유역, 미아3거리역, 길음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53번 버스 이용 → 세검정초교 하차 (구기터널이나 정릉 방면에서 오는 경우는
   육교를 건너 건너편으로 이동한다. 그러면 바로 남쪽에 홍제천이 있음)
③ 창의문 코스 - 자하문고개 정류장에서 북쪽(부암동 방면)으로 가면 창의문3거리이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북악산길로 인도하는 2차선 찻길로 가지 말고 왼쪽 골목길(산모퉁이 방면
   )로 들어서면 부암동 산복길이다. 이 길을 쭉 올라 산모퉁이까페를 지나면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진입하여 초소를 지나면 내리막길이다. (왼쪽으로 가도 되나, 오른쪽 길
   을 추천함) 그 길의 끝에는 뒷골마을(능금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서 왼쪽 계곡길로 내려
   가면 백석동천이다.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18, 7022,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승용차로 백사골까지 접근도 힘들고 주차 장소도 마땅치 않다. 대중교통이 진리이다.

★ 북악산 백석동천 관람정보
* 백사골은 서울시에서 지정한 도롱뇽/개구리 보호구역이다.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
  부로 냇물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말 것
* 백사골 일대는 의자를 제외하고 어떠한 편의시설도 없다. 약수터는 백사실 동쪽 산줄기 남쪽
  에 하나 숨겨져 있는데, 이곳에 유일한 약수터이다. (백사실약수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일대


♠  별서 주인의 정취가 담긴 ~ 백석동천 사랑채터 주변

▲  사랑채터 서쪽 - 계단 끝 언덕에 사랑채와 안채터가 있다.

▲  윤곽이 진하게 남은 사랑채터
이곳에 있었을 사랑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상상에서만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백석동천 별서터의 운치를 흐트려놓을 수 있다.


길이 여러 갈래로 갈리는 백석동천 별서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사랑채로 오르는 돌계단이 나
온다. 정면에 보이는 계단은 아랫쪽와 윗쪽 2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세월의 태클로 다소 헝클
어져 있지만 경사가 완만하여 계단으로서의 역할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반면 연못 쪽에서 오르
는 계단은 다듬은 돌만 계단처럼 얹혀놓은 수수한 모습이지만 높이가 고르지 못해 어린이나 다
리가 짧은 사람은 오르기 힘들다.

계단 끝 언덕에는 건물을 받치던 주춧돌과 석축의 윤곽이 진하게 남아있는 사랑채터가 있다. 연
못이 잘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지어진 'ㄱ' 구조의 사랑채로 아쉽게도 생전의 뚜렷한 사진조차
남기지 못한 채, 1970년경에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다행히 주춧돌과 건물터는 잘남아있
으나 동쪽 부분이 잡초에 묻혀있던 것을 2010년 발굴조사 이후 새롭게 드러난 흔적을 더해 지금
의 모습으로 산듯하게 정비했다.


▲  2중으로 쌓은 석축 위에 심어진 사랑채터의 높다란 주춧돌
받쳐들 대상을 상실하여 지금은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사랑채로 오르는 서쪽 계단

▲  연못에서 사랑채로 오르는 계단

연못쪽으로 돌출된 사랑채 서쪽 부분은 주춧돌의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은
별서 주인의 생활공간으로 연못을 바라보며 책을 보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들이 오면
여기서 곡차(穀茶)를 대접하여 1잔씩 주고 받았을 것이다. 사랑채 동쪽 부분은 키 작은 주춧돌
과 석축이 남아있는데, 별서 주인의 서재(書齋)로 여겨진다.


▲  사랑채터 옆에서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연못터
2010년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석조유구(遺構)로 연못(또는 우물터)으로 여겨진다.

▲  허전한 공터가 되버린 안채터
안채터의 흔적은 발굴조사 이후 보존을 위해 땅속에 고스란히 묻었다.
그 허전한 터를 푸른 잡초가 따스히 보듬어준다.

.
▲  2010년 발굴조사로 구체적으로 확인된 사랑채터와 안채터

▲  사랑채 뒤쪽 석축과 돌담

▲  돌담의 흔적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넓은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고 한다. 이후
그 자리에는 엉뚱하게도 배드민턴장이 들어섰는데,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강제로 생매장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별서터의 건강을 위협하던 배드민턴장은 서울시와 문화재청에서 2010년 여름부터 별서터 일대를
발굴하면서 갈아 없앴으며, 지하에 묻힌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수
습했다. 이후 발굴을 정리하고 2011년 3월에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다시 땅속에 묻었으며, 한쪽
구석에는 이곳에서 발견되어 다시금 햇볕을 보게 된 주춧돌과 기와조각, 여러 돌을 한데 수습해
조그만 돌탑을 이룬다. 그리고 사랑채와 안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석축과 돌담의 흔적이 옛 산성
(山城)의 잔해처럼 진하게 남아있다.

비록 기와를 입힌 사랑채와 안채는 세월의 용광로에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춧돌은 사랑
채의 기품과 분위기를 흐릿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또한 방문을 열고 연못에
비친 달을 바라보며 곡차 1잔과 시상(詩想)에 잠겼을 별서의 주인을
머리 속에 그려보니 정말로
부러움이 가득 돋아 오른다.


♠  백석동천 연못과 정자터

▲  사랑채터 동쪽 부분에서 바라본 연못

▲  남쪽에서 바라본 연못과 별서터

석동천 별서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연못은 둘레가 약 100m 정도 되는 보름달처럼 큰 못이다.
별서 주인은 자신의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장안에 솜씨 좋은 목공과 석공 등의 기술자를 불러
거처를 만들고 사대부의 지위를 이용해 인근 백성을 동원하여 연못을 팠을 것이다.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여 둥그런 연못을 수시로 채웠으며, 정자터 부근에 계곡 물을 끌여들이던
흔적이 있다. 그리고 물이 팔자좋게 고여있는 것을 막고자 서쪽에 수로를 파 계속 물갈이가 되
도록 유도했다.
연못과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지나가던 해와 달도 그 연못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을 것이요.
주변 나무와 꽃들도 연못을 거울로 삼아 매무새를 다듬고, 별서 주인은 벗을 불러 곡차와 차 1
잔의 여유를 누리며 상팔자를 누렸을 것이다.

그들이 팔자 좋게 놀던 시절은 세상이 한참 아비규환에 젖어있던 시기로 백성들의 삶은 매우 어
려움을 겪고 있었다. 민초(民草)들은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의 가혹한 세금삥과 양반들의 수탈
에 죄다 털려 힘들게 살아가고 있건만 별서 주인은 다른 나라 이야기마냥 신선놀음을 하고 있었
을 것이다.

별서의 주인이 가고 여러 대를 거치면서 풍류의 현장이던 이곳은 서서히 고개를 숙였고, 천하를
쑥대밭으로 만든 6.25전쟁은 조용하게 묻힌 이곳까지 총탄을 선사해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 또한
강제로 고자가 되었다. 땅을 파고 연못 주변에 두른 석축과 정자의 주춧돌은 이곳이 예전 연못
임을 아련하게 알려줄 뿐이다.

6.25이후 연못은 물고기가 수영하고 연꽃이 살며시 떠있던 물 대신 잡초와 조그만 돌이 그 자리
를 메우고 있고, 늦가을에는 나무들이 겨울 제국의 눈치를 보며 싹 털어낸 낙엽들이 가득 연못
을 이루어 낙엽의 마지막 보금자리이자 누런 연못이 된다. 장대한 세월의 흐름은 연못의 구성원
을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세월의 무상함을 진하게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백석동천 연못은 비록 그 기능은
잃었지만 자연의 생명력을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고 있다. 여름의 제국 시절이나 비가 많이
오는 경우 연못에 물이 많이 담겨 비록 예전만큼의 위엄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왕년의 모습을 되
찾기도 한다. 그러니까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이지는 못하고 여름의 제국이나 하늘이 내린 비에
의지해 연못의 티를 되찾는 것이다. 마침 우리가 오기 며칠 전부터 비가 많이 내려 연못에는 물
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수면 위에는 물을 먹고 자란 풀들이 무성하게 돋아나 초록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조그
만 생명체의 또다른 세계를 빚어내고 있다. 마치 늪지대 같은 분위기라 다가서기가 좀 껄끄럽다.
연못에 물이 많이 고였다고는 하나 서쪽에 뚫어놓은 수로로 물이 빠져나갈 정도의 수량은 아니
고 물의 깊이도 겨우 성인 무릎에 닿을 정도이다. 이곳에 담긴 물은 자연에 의해 증발할 때까지
머문다.

연못이 제법 넓기 때문에 물만 더 채운다면 조그만 조각배를 하나 띄워 가볍게 뱃놀이를 즐겨도
무방할 듯 싶다. 내가 만약 개미나 걸리버여행기의 나오는 난쟁이었다면 나뭇잎 하나 마련하여
뱃놀이를 즐겼을 지도 모른다.

연못을 비롯한 별서터 일대는 나무가 울창하여 한여름에도 뜨거운 햇볕이 마음 놓고 내려오기가
힘들다. 서울 도심 속에 별천지이자 보석과 같은 곳으로 예전에 이곳에서 받은 감동이 슬슬 되
살아난다. 거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의 후원(後園)도 울고 갈 정도로 삼삼한 삼림은 이
곳을 찾은 속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이곳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었다면, 그 감
동의 정도는 그리 크지 못했을 것이다.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이라 부른다.

연못에 발을 담구며 아무런 내색도 없이 정자를 떠받치던 6개의 돌기둥들, 허나 지금은 저렇게
허전한 대머리가 되어 버렸다. 어떻게 해야 그 허전함을 달래줄 수 있을까? 그렇다고 정자를 복
원하는 것은 쌍수들고 반대한다. 그냥 저렇게 둬야 백석동천의 운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연
못에 심어진 기둥 4개는 높이가 약 2m로 나머지 2개는 돌계단 옆에 있다.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혼자 혹은 벗들과 시를 읊거나 세상 이야기를
하며 차나 곡차를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며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꽃을 바라보았겠지. 그가 풍류를 좀 안다면 기생들을 불러 정자 안에서 팔자 늘어지게 놀았
을 것이고, 아~ 상상만 해도 정말 부러울 뿐.. 이래서 어떻게든 권력층이나 부자가 되야 되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뜬 구름일 뿐, 상상으로만 끝나버린다.


▲  물푸레나무 밑에 누운 바위

연못 우측에는 높이가 대략 20m에 이르는 물푸레나무가 연못에 그늘을 드리운다. 나이가 약 150
~200년 정도 되었다고 하니 별서 주인이 별서 완공 기념으로 심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무 밑에는 거대한 돌이 누워있는데, 이는 별서를 지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두었는데,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
원을 꾸민 이 땅의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이 바위는 어쩌면 별서 마당쇠들이 연못을 구경하며 신세를 한탄하던 자리는 아니었을까? 그들
은 주인처럼 사랑채나 정자에서 놀지를 못하니 이곳에 앉아 연못에 돌이나 던지며 자신의 신세
를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평등 사회는 언제나 올련지...?


▲  연못 우측 수로에 놓은 소박한 돌다리
길쭉한 통돌 2개로 이루어진 조촐한 돌다리로 다리 밑에 뚫린
수로는 연못의 물을 빼는 역할을 했다.

▲  연못/정자터 옆으로 흐르는 백사골
콘크리트 둑을 두른 것이 너무 거슬린다. 이런 것을 두고 바로 옥의 티라고 한다.


♠  백사골 상류와 백석동천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 입구에서 백사골 상류로 올라가는 산길

▲  오리 모양이 달린 솟대와 그를 품은 백석동천 돌탑

서터에서 계곡 윗쪽 일부는 도롱뇽 등의 수중 생물들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하여 예
전처럼 계곡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다만 윗쪽(백사실약수터 입구)에서 조금 내려오는 것
은 괜찮다. 계곡의 통제로 산길로 조금 우회해서 가야되는데, 2012년에 별서터 입구 주변 산길
을 손질하고 그 길 좌측에 산불 방제 장비를 둔 붉은 색의 구제함과 돌탑을 만들어 조촐하게 볼
거리를 선사한다.
백석동천 돌탑은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탑으로 이곳 외에도 백사골 동쪽 산자락에 여럿 심
어져 있는데, 이 탑은 윗쪽에 오리가 달린 나무 솟대를 심어 조금 차별화를 두었다.

산길을 오르면 우거진 소나무 숲이 나오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으로 가면 백사골 상류와 능금
마을로 이어지고, 오른쪽(부암동 주택가 방면)으로 가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나타난다.


 백석동천의 경관을 한몫 돕고 있는 소나무숲길

▲  백석동천 바위글씨를 간직한 집채만한 바위

▲  너무나 뚜렷한 백석동천 바위글씨

소나무숲에서 부암동 주택가로 이어지는 서쪽 산길로 접어들면 '白石洞天' 4자가 새겨진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동천(洞天)은 신선이 머물 정도로 경관이 수려한 산천에 붙여지는 이름으
로 아무 산천에나 부여하는 이름이 아니다. <비슷한 말로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함> 이곳이
백석동천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하얀 피부의 바위와 암반들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이 글씨는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월암과 비슷한 시
기가 아닐 듯 싶은데, 정말로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다.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기를 꿈꾸었
던 선비와 사대부들은 경관이 기가막힌 경승지에는 저렇게 기념 낙서를 남겼는데, 백사골 역시
그런 낙서가 2개나 있으니 그만큼 이곳의 풍경이 그들을 몹시나 감동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허
나 거창 수승대(搜勝臺)의 귀연암(龜淵岩,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너무 낙서로 도배가 된 것
도 그리 보기는 좋지 않다. 어느 것이든 적당한 것이 좋다.


▲  푸르름이 가득한 백사골의 호젓한 숲길
 동화 속에 나오는 숲길도 저곳만은 못하리라.. 비록 짧은 거리이지만
알록달록 익어가는 숲길을 거닐며 나무들과 잠시나마 말벗이 되어 본다.


▲  넓적한 하얀 바위가 파노라마를
이루는 백사골 상류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능금마을로 인도하는 숲
길을 조금 가면 백사골 상류가 나온다. 하얀 피
부의 넓은 반석들이 줄줄이 나와 탄사를 자아내
게 하며, 때묻지 않은 청정한 냇물이 바위를 타
고 아래로 흘러가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운치를
진하게 우려낸다. 백사폭포까지 순수함을 지닌
물은 백사아랫폭포부터 속세의 기운을 강제로
받기 시작하면서 점차 속물로 변해간다.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
을 간직한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하겠는가?

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및 수중 생물의 탄압
현장이 되고, 시민들도 소풍/나들이로 이곳에
들어와 돗자리를 피고 물에 발을 담구거나 낮잠
을 청하며,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
석에 걸터앉아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놀
음을 즐겼을 것이다.

백사골(백사실)은 능금마을 뒷쪽에서 시작하여 백석동천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홍제천으로 흐른
다. 그리고 백석동천은 윗 사진의 바위를 지나 외나무다리까지로 백사폭포부터 계곡 상류 외나
무다리까지를 백석동천의 구역으로 보면 된다. 다리를 넘어서는 더 이상 괜찮은 바위가 나오질
않고, 옛 사람들의 흔적도 전혀 나오질 않는다.


▲  백사골 상류 - 이 부분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능금마을로 이어지고, 계곡을 건너 동쪽 산길로 들어서면
백사골 동쪽 능선과 백사실약수터로 이어진다.

▲  백사골 상류 외나무다리

백석동천 상류의 넓직한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만든 외나무다리가 깊은 산골의 고적한 풍경을
진하게 우려낸다. 2개의 나무 줄기로 엮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갈 정도로 좁다.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난다면 어찌될까? 허나 다리의 길이도 짧고, 물의 수심도 얕으며, 다리 아랫
쪽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곳이 있어 굳이 다리의 통행을 두고 싸울 필요는 없다.
여기서 오른쪽(서쪽)에는 비닐하우스와 원두막 비슷한 시설, 그리고 여러 경작물이 무럭무럭 자
라는 밭이 길게 펼쳐져 있어 도심 속의 생소한 풍경에 두 눈이 잠시 방황을 한다.

다리를 지나서는 길이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2m 내외로 폭이 좁아진다. 여러 번 계곡을 건너야
되는데,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많이 쌓였을 때는 통행하기가 힘들다. 그런 길을 계속 고집하면
계곡 너머로 집들이 보이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그곳이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
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이다. (☞ 부암동 능금마을 보러가기)

이렇게 하여 백석동천 가을 나들이는 이렇게 마무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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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8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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