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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 산책 '
(부암동 뒷골마을 ~ 북악산길 ~ 창의문)
부암동 뒷골마을(능금마을)
▲ 부암동 뒷골마을


서울 도심 북쪽에 자리한 부암동(付岩洞)은 북한산(北漢山)과 북악산, 인왕산(仁王山)에 둘러
싸인 도심 속의 전원(田園) 동네이다. 번잡한 시내(市內)라기 보다는 자연에 감싸인 시골마을
이나 조그만 읍내 같은 포근하고 여유로운 곳이다. 조선시대부터 도성(都城)과 가까운 지리적
인 위치와 넋을 잃을 정도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그곳에 반한 왕족과 양반들이 별장을 지어 피
서를 즐기고 자연을 벗삼던 현장이다. 그 현장 중에는 북악산 북서쪽에 숨겨진 백사골(백사실
)이 있다.

백사골에는 18세기에 조영된 별서유적이 있는데, 이들 유적과 백사골을 한덩어리로 묶어 백석
동천(白石洞天, 명승 36호)이라 부른다. 그 풍류의 현장에는 바위글씨 2개와 사랑채터, 연못,
정자터가 전하고 있으며, 원시림처럼 우거진 북악산 숲과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골 계곡이 졸
졸 흐른다. 이 계곡에는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도롱뇽과 가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살아
간다.

백석동천의 중심인 연못과 정자터에서 졸졸졸~♪ 흐르는 백사골 계곡을 따라 5분 정도 올라가
면 계곡 건너 오른쪽에 비닐하우스와 밭이 나온다.'이런 곳에 왠 비닐하우스가?'도심 속의 생
소한 풍경에 어리둥절한 두 눈을 진정시키며 가다 보면 사람들이 사는 집이 나타난다. 처음에
는 부암동 주택가의 일부로 생각을 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주택가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
어진 외딴 산골마을이었다. '도심이 바로 코앞인데 이런 두멧골이 있었다니?' 내심 놀라며 마
을로 들어섰다. 그곳은 바로 부암동 뒷골마을(능금마을)이다.


▲ 백사골 상류의 풍경
모든 것을 싹 털어낸 나무가 하늘이 두려운지 감히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허리를 푹 숙여 자라고 있다. 저 산길을 넘으면 서울 도심 속의
산골마을인 뒷골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 뒷골마을 비닐하우스
마을 사람들이 애지중지 키운 농작물이 숙성의 과정을 밟는 비닐하우스는
눈이불을 뒤집어 쓰며 겨울에 잠겨 있다.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산골마을 ~
부암동 뒷골마을(능금마을)

부암동 뒷골마을(능금마을)은 백사골 상류, 북악산 북서쪽 자락에 둥지를 튼 두메산골이다. 행
정구역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으로 주소는 분명 서울 종로구가 맞는데, 분위기는 번잡한
도심을 제대로 비웃듯 첩첩한 산주름에 박힌 외딴 산골마을이다. 그야말로 서울 도심 속의 산골
마을인 셈이다. 예로부터 능금나무가 많아 능금나무골, 능금마을이라 불렸으며, 지금은 18가구
에 50명 정도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곳의 지형은 백사골이 흐르는 북쪽은 내리막이고, 나머지 서쪽과 남쪽, 동쪽은 산으로 막혀있
다. 자하문에서 넘어오는 남쪽 수레길은 속세살이처럼 조급한 고개를 넘어야 된다. 지형이 이러
니 시내보다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며, 아랫 세상보다는 조금은 춥다.

마을의 중앙 부분에는 자하문으로 나가는 골목길의 종점이 있다. 그 종점이 마을 사람들의 수레
가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으로 여기서 더 이상 수레가 들어갈 수 없다. 주차장 북쪽에는 슬레
이트 지붕 2채와 2층짜리 빌라 1동, 그리고 비닐하우스 여럿이 있으며, 동쪽에는 덩치가 큰 가
건물과 여러 조그만 집들이 있다. 경사진 곳과 집들 중간에는 소소하게 밭이 펼쳐져 있으며, 백
사골이 마을을 동쪽에서 북쪽으로 감싸며 백석동천과 홍제천(弘濟川)으로 흘러간다.

시내에서 마을로 들어가려면 백사골을 거쳐 올라가거나 자하문에서 북악산 허리에 둘러진 산복
(山腹)길을 이용해야 된다. 세검정초교나 하림각에서 백사골을 거쳐 가는 경우는 30분 정도 걸
리며, 자하문에서 갈 때는 부암동 동쪽을 가르는 북악산 산복길을 따라 20분 정도 걸어야 되는
데, 중간에 고개를 하나 넘어야 된다. 수레로 갈 경우에는 자하문에서 부암동 산복길을 타거나
북악산길을 타면 된다. 이곳은 대중교통의 혜택이 미치지 않는 시내에서도 그렇게 편하게 갈 수
없는 벽지이다.

마을 사람들은 시내로 출퇴근을 하거나 농사를 짓는다. 서울에서 공기도 가장 맑고 청정한 계곡
물이 흐르니 소소하게 밭농사나 과수원을 하기에 적당하다. 백사골의 깨끗한 물을 먹고 자란 농
작물(오이나 배추, 상추 등이 주류)은 밭과 비닐하우스에서 성장과 숙성의 과정을 거쳐 시내로
팔려 나간다.

이곳이 인구 1천만 서울 도심에 있음에도 개발의 무자비한 칼질도 고개를 숙인 두메산골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푸른 기와집과 국무총리공관, 수방사 군부대를 비롯한 국가의 예민한 장소를 품
은 북악산 자락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북악산 주변은 개발제한구역 및 군사보호구역이다. 게
다가 인왕산과 더불어 서울 방위의 중요한 곳으로 자하문에서 마을로 들어서는 고갯길에 군부대
가 있으며, 북악산 성곽능선을 따라 철책과 초소가 줄지어 있다. 상황이 이러니 개발의 물결도
감히 침투하지 못하는 것이다. 북악산 북쪽 자락에 안긴 부암동과 성북동(城北洞)에 키다리 건
물이 없는 것도, 녹지의 비율이 두드러지게 높은 것도, 전원의 분위기를 물씬 간직하고 있는 것
도 바로 이 때문이다. 북악산의 성격이 180도 확 달라지지 않는 이상 뒷골마을은 서울 도심 속
의 시골로 우리 곁에 있을 것이며, 영원히 그리 되기를 고대해 본다. 물론 마을 사람들이 생활
에 불편이 없도록 가옥 보수나 신축 등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해줘야 될 것이며, 등산이나 나들
이, 사진 출사를 이유로 그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동은 삼가해야 될 것이다.


▲ 뒷골마을 북쪽 구역
2층 빌라와 슬레이트 기와집이 마을의 북쪽을 이루며, 눈에 덮힌 경사지는 밭이다.

▲ 백석동천에서 뒷골마을로 인도하는 마을 길
겨울의 제국의 의해 하얀 소복을 뒤집어 쓰며 숨을 죽인 마을 길~
소쩍새가 울 때면 눈을 번쩍 뜨며 기지개를 켤 것이다.


▲ 뒷골마을의 동쪽 부분
백사골의 최상류로 커다란 가건물 1채와 조그만 집 여럿이 자리를 닦았다.
문명의 혜택이 전혀 들어오지 못할 것 같은 이 산골에도 전기와 전화는 들어온다.

▲ 자하문에서 뒷골마을로 넘어가는 고갯길

자하문에서 북악산 산복길을 따라 산모퉁이까페를 지나면 고개 정상부에서 길이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접어들어 2분 정도 가면 군초소이며, 이곳에서 직진하여(오른쪽으로 가면 북
악산길) 내리막길을 타면 뒷골마을이다. 길의 경사가 가파른 편이라 눈과 빙판의 농간에 놀아나
지 않도록 주의하기 바란다.


▲ 마을에서 서울로 넘어가는 고갯길
워낙 외진 곳이라 시내와 달리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진다.
햇님도 들어오기 힘들 정도로 이곳은 심산유곡(深山幽谷)이다.


부암동 뒷골마을 찾아가기 (2011년 3월 기준)
① 백사골을 거쳐 가는 경우 - 백사골로 들어가는 산길은 하림각, 세검정초교(현통사), 자하문
등 모두 3개가 있으며 하림각과 세검정코스를 많이 이용한다. 2009년 이후 백사골을 알리는 이
정표를 설치하여 예전과 달리 찾기는 편해졌다. 백석동천 연못터에서 계곡을 거슬러 10분 정도
오르면 뒷골마을이다. 따로 이정표는 없지만 계곡은 하나 뿐이므로, 찾기는 쉽다.
* 각 코스별 접근 방법
1. 하림각 코스 - 하림각 건너편에 신도수퍼가 있는데 그쪽에 44번 백석동길 골목이 있다.(백
석동천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음) 그 길은 경사가 상당히 가파른데, 10분 정도를 낑낑대고 오
르면 길 끝에 백사골 산길이 나온다.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림각 하차
2.세검정초교 코스 - 하림각 코스보다 경사가 완만하여 오르기가 편하다. 세검정초교에서 현통
사까지는 10분 정도 걸린다. 세검정초교 정류장 → '44번 홍지천길'로 쭈욱 올라간다 → 혜
문사 입구 →현통사 → 백사골(백석동천)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세검정초교 하차
- 2호선 신촌역(1,3번 출구)에서 110번, 153번 버스 이용
- 3호선 녹번역(4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 이용

② 자하문 코스 - 자하문 정류장에서 북악산길로 접어들면 바로 길이 2갈래로 갈린다. 오른쪽은
북악산길로 가는 찻길, 왼쪽은 북악산 허리를 지나는 골목길(부암동 산복길)이다. 왼쪽 길로 접
어들어 무조건 직진하여 산모퉁이까페를 지나 고개 정상부에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
으로 가서 초소를 지나면 내리막길이다. 그 길의 끝에 뒷골마을이 있다. 산복길 외에도 북악산
길을 거쳐 갈 수 있다. 자하문에서 1km 지점에 도로가 동그랗게 또아리를 트는 구간이 있는데,
그 부분에 길 오른쪽으로 군초소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그 길로 들어서 초소 앞에서 오른쪽으
로 내려가면 마을이다. 수레로 마을까지 접근이 가능하나,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바란다.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18, 7022, 7212번 시내버스 이용, 자하문고
개나 부암동주민센터 정류장에서 도보 15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산50~69


♠ 북악산길과 북악산(北岳山) - 명승 67호

▲ 서울을 지키는 영원한 북현무(北玄武), 북악산의 위엄

뒷골마을 바로 동남쪽 산자락에 북악스카이웨이라 불리는 북악산길이 지나간다. 이 길은 1968년
1월 청와대 인근 청운동까지 침투한 북한무장공비 침투사건(김신조 사건)으로 뚜껑이 폭발한 박
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지시로 서울 수비를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사건이 발생한 다
음달인 2월에 수도 방어를 겸한 관광도로 '스카이웨이(Sky way)'계획을 발표하여 삽질에 들어갔
고 그해 9월 28일에 완성되었다.

이 길은 돈암동 아리랑고개에서 북악산 산허리를 지나 자하문고개와 인왕산 허리를 거쳐 사직공
원에서 그 끝을 맺는 10km의 산악길로 서울 제일로 꼽히는 드라이브 코스이다. 북악산 정상 부
근에는 휴게소인 팔각정(八角亭)을 두었는데, 조망(眺望)이 천하 제일이라 서울 도심이 두 눈에
쏙 맞게 들어온다. 우리나라의 수도이자 아시아 제일의 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의 심장부를 발
아래에 두어 굽어볼 수 있는 몇 안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자하문을 경계로 북악산 쪽은 북악산길, 인왕산쪽은 인왕산길이라 구분하기도 한다. 서울을 지
키는 북현무(北玄武) 북악산과 우백호(右白虎) 인왕산 자락에 뚫은 탓에 산을 파괴한 흉물이자
군사정권의 부산물(副産物)로 안좋게 보는 사람도 많으나 길이 뚫린지 이미 40년이 넘었으니 이
제 와서 길을 갈아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예전에는 오로지 수레만이 다닐 수 있었으나 2006
년 이후 북악산이 개방되면서 도보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북악산길 옆에 산책로를 뚫어 걸어
서 북악산길을 종주할 수 있게 되었으며, 군인들만 다닐 수 있던 서울성곽(사적 10호) 길도 제
약이 있긴 하지만 세상에 활짝 가슴을 열었다.

북악산길을 짊어진 북악산은 해발 342m의 산으로 서울의 북현무이자 주산(主山)이다. 백악산(白
岳山)으로도 불리며, 서울의 흥망성쇠를 말없이 지켜본 산증인으로 예로부터 경치가 아름답고
맑고 청정한 계곡이 흐르며, 숲이 울창하여 귀족들이 앞다투어 별서(別墅)나 정자를 지었다. 대
표적인 것이 바로 백석동천 유적이다. 또한 빼어난 경승지에 낙서를 남기기 좋아했던 옛 사람들
은 북악산 도처에 바위글씨를 남겼는데, 백석동천의 2개의 바위글씨를 비롯하여, 대은암(大隱巖
)계곡 바위글씨, 만세동방성수남극(萬世東方聖壽南極) 바위글씨, 운강대(雲岡臺) 바위글씨, 기
천석(祈天石) 바위글씨 등이 진하게 전하고 있다. 그리고 북악산 능선에 걸쳐진 옛 서울도성과
숙정문(肅靖門),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는 법흥사(法興寺)터가 아련히 남아있으며, 촛
대바위와 삼청공원(三淸公園) 등의 명승지가 있다.
허나 북악산이 국가 보안상 예민한 곳이 되다보니 백석동천이나 삼청공원, 운강대 바위글씨, 김
신조루트, 북악산길 정도만 자유롭게 접근이 가능하고, 숙정문과 촛대바위, 북악산 정상은 낮시
간에 한해 답사가 가능하다. 그외에 명소는 관람이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그래서 상당히 아쉬운
곳이 북악산이다.
(대은암 바위글씨는 효자동에서 자하문으로 오르는 고갯길 부근 군부대 관사
에 묻혀있으며, 만세동방성수남극 바위글씨는 청와대 뒷쪽에 있음)
하지만 비공개 구역이 많은 만큼 적지 않게 신비감이 드는 곳 또한 북악산이다. 산 주변으로 철
책이 촘촘히 둘러져 범인(凡人)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비밀의 별천지 같은 기분이 진하게 든다.
그 안에 서린 여러 바위글씨와 명승지를 접하면 나무와 바위, 성곽만 덩그러니 있을 것 같은 북
악산이 더욱 예사롭지 않게 다가오며, 그곳에 대한 호기심이 한가득 솟구친다.

북악산 일대는 사적 및 명승 10호로 지정되었다가, 사적 및 명승 등급을 폐지하면서 명승 67호
로 변경되었다.


▲ 북악산길의 성격을 고스란히 담은 '서울을 굳게 지키자' 표석
표석에 적힌 8글자가 바로 북악산길의 탄생 배경과 성격이다.

▲ 북악산길 또아리 부분에 걸쳐진 다리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폭설로 인해 북악산길이 통제되어 군부대 차량 외에는 수레의 왕래가 없다.
폭우나 폭설, 비상시에는 북악산길과 인왕산길은 접근이 통제된다.

▲ 북악산길 또아리 부분에 걸쳐진 다리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다리 건너의 황색 점멸 신호등이 있는 곳에서 좌회전하면 군초소이다.
거기서 우회전을 하여 급하게 꺾인 내리막길을 타면 바로 뒷골마을이다.


▲ 북악산길과 나란히 이어지는 북악산 산책로 입구

▲ 목책(木柵)이 둘러진 북악산 산책로

눈이 바다를 이루며 쌓여있는 인적이 없는 산책로에 나의 발자국을 화석처럼 무수히 남겨본다.
겨울의 제국이 지면 나의 흔적도 눈과 함께 바람처럼 사라지겠지~~ 그래서 인생이란 덧없고 부
질없는 모양이다. 나도 내 주변 사람들도 언젠가는 그렇게 사라질 것이니 말이다.

※ 북악산(북악산 정상과 촛대바위, 서울성곽 능선) 찾아가기 (2011년 3월 기준)
* 북악산 성곽능선은 자하문과 숙정문, 와룡공원(말바위)에서 오를 수 있다.
① 자하문(창의문)안내소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18, 7022, 7212번 시
내버스를 타고 자하문고개 하차, 도보 2분
② 성북동 숙정문(홍련사) 안내소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
내버스를 타고 성북동 종점에서 하차하여 삼청각 방면으로 도보 10분
③ 말바위 안내소 - 지하철 3호선 안국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성대후문
종점에서 하차, 성북동 방면으로 10분 걸으면 서울성곽이 있는 와룡공원이다. 여기서 왼쪽으
로 20분 정도 성곽길을 오르면 말바위안내소이다. 또는 지하철 4호선 혜화역(1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8번을 타고 명륜3가 종점에서 30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 이들 안내소는 주차시설이 없으며, 부근에 딱히 수레를 세울 곳이 없으므로 대중교통을 이용
하기 바란다.

★ 북악산 관람정보 <촛대바위와 숙정문, 서울성곽 능선, 북악산 정상에 한함>
* 북악산 서울성곽능선 출입시간은 하절기(4~10월)는 9시~15시까지, 동절기(11~3월)는 10시~15
시까지이다. 퇴장은 무조건 17시까지 마쳐야 된다.
* 쉬는 날 -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화요일에 쉼)
* 입장료 : 공짜
* 개방 구간 - 탐방시간은 길어봐야 2시간 정도
① 말바위(와룡공원) ~ 숙정문 ~ 청운대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 자하문(창의문)
② 숙정문안내소(홍련사) ~ 숙정문 ~ 청운대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 자하문
* 북악산 탐방 유의사항
① 지정된 코스를 절대로 벗어나면 안된다. 잘못하면 총 맞을 수 있다.
② 탐방로 전 구간은 금연, 금주, 애완동물 출입 제한
③ 탐방은 안내소(창의문, 숙정문, 말바위)에서 출입신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해야 되며, 신분증
을 반드시 지참하기 바란다. 신분증이 없으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못들어간다.
④ 안내소 외에는 딱히 편의시설이 없다. 해우소는 안내소에만 있으며, 매점이나 약수터 등이
없다. 간단한 먹거리는 안내소 주변이나 산길 곳곳에 마련된 쉼터에서 먹으면 된다.
⑤ 숙정문과 북악산 정상, 청운대, 자하문, 와룡공원 등 지정된 곳에서만 사진 촬영이 가능하며
그외의 장소에서는 제약을 받거나 통제된다. 성곽 곳곳에 군인들이 있으므로 그들의 통제에
적극 따르기 바란다.
* 안내소 연락처
① 말바위 (☎ 02-765-0297~8, 팩스 02-765-0296)
② 숙정문 (☎ 02-747-2152~3, 팩스 02-747-2156)
③ 창의문 (☎ 02-730-9924~5, 팩스 02-730-9926)


♠ 옛 서울도성의 북소문(北小門), 인조반정을 일으킨 반란파가
지났던 성문, 창의문<彰義門 = 자하문(紫霞門)> - 사적 10호

▲ 창의문의 바깥쪽 (부암동 쪽)
고개를 밀어 만든 신작로(新作路)에 밀려 성문으로의 기능은 많이 떨어졌지만
왕년에 도성 성문으로서의 위엄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 창의문의 안쪽 (도심 쪽)


서울 도심과 부암동을 잇는 자하문고개에 옛 한양도성의 성문인 창의문이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창의문은 성밖에 있던 계곡(지금은 없음)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이라 부르기도 하
는데, 창의문보다는 자하문으로 많이 불리는 편이다.

이 문은 한양도성의 8개 성문의 하나이자 4소문(小門)의 하나인 북소문이다. 4소문은 동소문<東
小門, 혜화문(惠化門)>, 서소문<西小門 ,소의문(昭義門)>, 남소문<南小門, 광희문(光熙門)>, 북
소문으로 혜화문과 소의문, 광희문은 각각 동소문이나 서소문, 남소문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유
독 창의문은 북소문이라 불린 적이 없다.

창의문은 1396년(태조 4년)에 서울도성을 축성할 때 조성된 것으로 문의 이름인 창의(彰義)는 '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다. 1413년(태종 13년)에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창의문과 숙정문(도성의 북문)은 경복궁(景福宮)의 양팔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길을 내어 지맥
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건의하여 두 문을 닫아걸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422년(세종 4년)
에 군인들의 통로로 사용했고, 1617년(광해군 9년)에 창덕궁 등을 보수할 때 석재 운반을 위해
문을 개방했다는 기록이 있어 상시(常時)가 아닌 상황에 따라 임시로 잠깐씩 개방을 했던 모양
이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정치에 불만을 잔뜩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 이괄(李适) 등이 세검정(洗劍亭)에서 칼을 씻으며 역적질을 모의, 역촌동(驛村洞) 별서에 머
물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 인조)을 앞세워 도성에 쳐들어가 광해군을 폐위시킨 이른바 인조
반정을 저지르니 그 반역도당들이 통과한 문이 바로 창의문이다. 그래서 문루에는 인조반정(仁
祖反正)을 저지른 작자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창의문이 백성들이 드나드는 성문으로 본격 개방된 것은 1741년(영조 17년)이다. 그때 훈련대장
구성임(具星任)이 인조반정 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라며, 성문을 중수하고 문루를 세울 것
을 건의하면서 문루(門樓)가 지어졌다.

이 문은 한양도성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서소문은 1908년에 철거되어
정확한 위치조차 아리송하고 동소문은 왜정(倭政) 때 없어진 것을 근래에 다시 지었다. 남소문
인 광희문은 성문만 오래되었을 뿐, 문루와 성곽은 1970년 이후에 복원되었다. 그에 반해 창의
문은 6.25 때도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1958년 중수한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 정정함
을 과시한다. 특히 이곳은 1968년 1월 21일 북한무장공비 31명이 넘었던 현장이기도 하다.

1968년 북한은 김신조 일당 31명을 보내 청와대를 공격케 했다. 북한산을 넘어 1월 21일 창의문
을 거쳐 도심으로 용케 들어온 김신조 패거리는 청와대를 코앞에 둔 청운동에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 1932~1968)이 이끄는 경찰에게 저지를 당했다. 검문을 한다며 길을 막자 들통났
음을 직감한 공비들은 발작한 나머지 외투 속에 감춘 기관단충을 꺼내 먼저 공격을 가하면서 총
격전이 발생했다. 불행히도 최서장은 가슴과 배에 관통상(貫通傷)을 입어 쓰러지고 '끝까지 청
와대를 사수하라!!'
명령을 내리며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
서장의 죽음에 애끓는 복수심에 불탄 경찰은 더욱 반격의 속도를 올려 공비들 상당수를 벌집으
로 만들었다. 이때 김신조를 비롯한 살아남은 공비들은 목을 붙잡고 북악산과 인왕산으로 줄행
랑을 쳤는데, 그들을 추격하면서 북악산 정상 동쪽인 1.21사태 소나무와 호경암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1월 21일 이후 14일의 토벌 작전 끝에 김신조와 도주 1명을 제외한 29명을 사살했다. 도주 1명
은 북한까지 용케도 도망을 친 모양이며, 토벌된 공비의 시신은 파주시 적성면 적군묘지에 안장
되었다. 김신조는 투항하여 현재 목사로 있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은 최규식에게 경무관(警務官)을 추서하고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으며, 전사한 정종
수에게는 경사를 추증하고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했다. 또한 자하문 밖에 최규식의 동상과 정종수
의 순직비를 세워 그들의 충절을 기린다. 또한 김신조 사건 이후 지역 방위를 위해 향토예비군
이 창설되었다.


▲ 창의문의 서쪽 성벽
성벽에는 오랜 세월의 떼가 가득 입혀져 중후한 멋이 돋보인다.


한양도성의 성문의 하나로 성문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으나, 1950년 이후 고개를 밀어버리고 신
작로를 냈다. 그 이후 통행로의 역할은 한참 후배인 신작로(자하문길)에게 넘기고 현역에서 은
퇴했다. 자하문길과 그 아래에 뚫린 자하문터널에는 사람과 수레의 왕래가 빈번한데 반해 창의
문은 사람의 발길이 적다. 그래서인지 한편으로는 쓸쓸해 보인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물건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뒷전에 앉은 모습은 정말 초라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문 서쪽에 길을 내면서 한양도성은 20m 가량 끊어져 있다. 끊어진 반대쪽
<현재 윤동주(尹東柱)
시인의 언덕과 청운공원이 들어서 있음>
을 애타게 바라보는 인왕산 쪽 성벽이 견우와 직녀를 보
듯 애처롭기까지 하다. 끊어진 구간은 도로 위에 흙을 덮어 성벽을 세우지 않는 이상은 복원은
어렵다. 그리고 창의문 바로 앞에는 북악산길이 지나가 시야를 제대로 방해한다. 문루에 올라가
전방을 아무리 뚫어지라 바라봤자 북악산길에 가려 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별로 없다.


▲ 창의문의 성문 천정에 그려진 봉황(혹은 닭)과 구름무늬


창의문은 흔히 볼 수 있는 성문의 모습이라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만 그만의 매력이자 특징이 2
가지가 있다. 그대로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눈여겨 보기 바란다. 우선 빗물이 잘 흘러가도록 문
루 바깥 쪽에 설치된 1쌍의 누혈(漏穴) 장식이 있다. 이것은 연꽃잎 모양으로 조각되어 성문의
매력을 수식해주고 있으며, 성문 천정에는 화려하게 날개짓을 펼치는 봉황(鳳凰) 1쌍이 그려져
있는데, 속설에는 봉황이 아닌 닭이라고 한다. 문 밖 부암동의 지형이 지네를 닮았으므르 지네
의 오랜 천적인 닭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림을 가만히 보면 머리와 목, 날개는 닭을 많이 닮았
다. 허나 몸통과 꼬리는 닭과는 거리가 먼 봉황의 모습이다.

봉황이 1마리가 아닌 둘이 있는 것을 보면 암수 1쌍일 것이다. 그들 주변으로 와운문(渦雲紋)이
가득 그려져 있는데,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모습이 마치물결의 거센 소
용돌이를 보는 듯하다.


▲ 하늘을 향해 경쾌하게 날개짓을 하는 추녀마루의 고운 맵시
선의 유연함과 아름다움이 진하게 배여난 창의문,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선이 또 어디에 있을까?

▲ 정종수 경사 순직비

▲ 최규식 경무관 동상

※ 창의문(자하문) 찾아가기 (2011년 3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18,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자하문고개
하차, 도로 동쪽(북악산 쪽)에 문이 있으므로 찾기는 매우 쉽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산4-11
* 자하문 부근에 환기미술관(☎
02-391-7701~2
), 아트포라이프(02-3217-9364) 등의 미술공간과
서울식 손만두로 유명한 자하손만두집(02-394-4488)이 있으며, 커피프린스1호점 촬영지인 산
모퉁이까페(02-391-4737) 등의 까페와 찻집이 있다.
* 부암동에는 백석동천을 비롯하여 세검정, 홍지문, 대원군별장(석파랑), 석파정, 무계정사, 반
계윤웅렬별장, 이광수 별장터, 청계동천, 자하미술관(02-395-3222) 등의 명소가 있다.
- 백석동천 관련 정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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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암동 문화유적 관련 정보는 ☞ 이곳을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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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일 - 2011년 3월 1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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