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182건

  1. 2023.10.23 서울 도심의 상큼한 서쪽 뒷동산, 안산 1바퀴 <무악산 동봉수대, 안산자락길, 안산 메타세콰이어숲길, 흔들바위>
  2. 2023.10.15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서울 도심의 싱그러운 공간,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늦가을 나들이 <북악스카이웨이>
  3. 2023.09.23 동작구의 지붕을 거닐다. 상도동 사자암~국사봉~동작충효길6코스 동작마루길 <상도근린공원, 성현드림숲공원>
  4. 2023.09.12 조선시대 공동묘지였던 서울 변두리의 이색 뒷동산, 구파발 이말산 <금성당 샤머니즘박물관, 최효원묘역, 은평둘레길3코스, 약수사>
  5. 2023.08.13 비봉능선 밑에 포근히 깃든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승가사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6. 2023.07.14 벽오산 자락에 넓게 깃들여진 달달한 시민공원, 강북구 북서울꿈의숲 <창녕위궁재사, 월영지, 청운답원, 북서울꿈의숲아트센터>
  7. 2023.06.24 인왕산 그늘에 깃든 서울 도심의 꿀명소, 서촌~청운공원 나들이 <선희궁터, 옥류동 청휘각터, 백세청풍 바위글씨, 송강정철 집터> 2
  8. 2023.06.13 도심 속에 깃든 고즈넉한 산사, 동대문구 천장산 연화사~청량사 (연화사에서 먹은 초파일 절밥) 2
  9. 2023.05.26 금천구의 상큼한 뒷동산, 호암산 봄나들이 <호암산성, 석구상, 제2한우물, 신랑각시바위, 한우물, 불영암>
  10. 2023.05.09 설렁탕의 탄생지이자 선농대제의 오랜 현장, 제기동 선농단 <선농단 향나무, 선농단역사문화관, 선농대제 설렁탕>

서울 도심의 상큼한 서쪽 뒷동산, 안산 1바퀴 <무악산 동봉수대, 안산자락길, 안산 메타세콰이어숲길, 흔들바위>

서울 안산 (안산자락길, 무악동봉수대)



' 서울 도심의 서쪽 뒷동산, 안산 '
(무악산 동봉수대, 안산자락길)

무악산 동봉수대에서 바라본 안산 남쪽 자락

▲  무악산 동봉수대에서 바라본 안산 남쪽 자락

안산 잣나무숲길 안산 북쪽 메타세콰이어 숲길

▲  안산 잣나무숲길

▲  안산 북쪽 메타세콰이어 숲길

 



 

봄을 몰아낸 여름 제국(帝國)이 서서히 이빨을 드러내던 6월의 끝 무렵, 서울 도심의 서
쪽 뒷동산인 안산(鞍山)을 찾았다.

안산 서남쪽 자락에 깃든 봉원사(奉元寺, ☞ 관련글 보기)에서 길을 시작하여 15분 정도
숲길을 오르니 무악정이란 2층 정자가 마중을 나온다. 무악정은 근래에 지어진 8각형 정
자로 여기서 길은 크게 2갈래로 갈리는데, 북쪽으로 내려가면 홍제1동과 연희동(延禧洞)
으로 이어지며, 동쪽 길을 10여 분 오르면 안산 정상과 무악산 동봉수대이다. 그럼 여기
서 잠시 안산에 대해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녹음에 잠긴 안산 숲길 (봉원사에서 무악정으로 오르는 길)



 

♠  안산의 지붕, 무악산 동봉수대(毋岳山 東烽燧臺)

▲  정상 입구에 자리한 무악정(毋岳亭)

서울 도심 서쪽에 누워있는 안산은 해발 295.9m의 조촐한 산이다. 대륙을 향해 뻗어가는 의주
로(義州路)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仁王山, 338m)과
마주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홍제천(弘濟川)을 사이에 두고 백련산(白蓮山)과 이어진다.
산의 영역은 남쪽으로 천연동(天然洞)과 북아현동(北阿峴洞), 북쪽은 홍제동과 연희동, 동쪽
은 의주로, 서쪽은 서대문구청 뒷쪽과 연세대에 이르며, 남북으로 아무리 길게 잡아봐야 3km
내외이다.

안산이란 이름은 산의 모습이 말이나 소의 등에 짐을 싣고자 걸치는 길마처럼 생겼다고 해서
유래된 것으로 길마재라고도 부른다. <안(鞍)은 안장을 뜻함> 모래내, 추모련, 무악산이란 이
름도 지니고 있으며,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서 봉우재라 불리기도 했다. 그만큼 안산에 대한
속세의 관심이 지대했다는 뜻이다.
서울의 남주작(南朱雀)인 남산(南山, 목멱산)보다는 조금 높으나 인왕산과 서울의 북현무(北
玄武)인 북악산(北岳山, 백악산)보다는 조금 낮으며, 이들 산과 비슷하게 덩치도 고만고만해
아무리 산행을 길게 잡아도 2시간 내외면 충분하다. 또한 바위와 벼랑이 많은 동쪽 정상부를
제외하면 산세가 완만하고 산길이 잘 닦여져 있어 누구든 부담 없이 안길 수 있으며, 조망도
일품이고 수맥도 풍부하여 20여 개의 약수터가 나그네의 목마름을 어루만진다.

지리적인 위치를 보면 인왕산과 함께 서울 도심을 서북쪽으로 둘러싼 형태로 예나 지금이나
서울을 지키는 주요 요충지이다. 하여 산을 둘러싼 다툼도 여럿 있었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1623년에 일어났던 이괄(李适)의 난이다.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의 주역이던 이괄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
으켜 순식간에 서울을 점령했으며, 서인(西人) 패거리에 의해 왕위에 오른 얼떨떨한 인조(仁
祖)는 서인 일당을 데리고 충청도 공주(公州)로 급하게 줄행랑을 쳤다.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은 인조의 어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토벌하고자 안산에
진을 쳤는데, 도성을 점령하여 잔뜩 자만감에 빠진 이괄은 도성 사람들에게
'내가 저것들을 단숨에 때려잡을 것이니 나와서 싸움이나 구경하도록!' 자신감을 강하게 내비
췄다. 그리고 군사를 이끌고 인왕산 서쪽으로 나가 장만의 군사와 대치했다. 도성 백성들은
그 싸움을 구경하고자 인왕산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는데, 사람들이 대체로 하얀 옷을 즐겨입다
보니 산을 가득 메운 그들로 인해 산이 마치 하얀 백로처럼 보였다고 한다.
 
관군을 맞은 이괄은 처음에는 여유롭게 전쟁을 진행했으나 난데없이 불어닥친 강풍에 기가 꺾
여 장만에게 몰리고 말았다. 그래서 서둘러 도성으로 도망쳤으나 백성들이 성문을 죄다 걸어
잠구면서 도성을 포기하고 한강을 건너 이천, 여주까지 줄행랑을 쳤다. 하지만 내부 갈등으로
결국 부하에게 살해되어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이때 살아남은 이괄의 부하들은 목을 붙잡고 후금(後金)으로 도망쳤는데, 그들은 청태종(淸太
宗)에게 광해군(光海君)의 복수를 구실로 조선을 치라고 들쑤셨다. 그래서 그 푸닥거리로 일
어난 것이 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이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청나라군이 안산과 무악재의 눈치를 보며 서울로 진격
했고, 1950년 9월에는 인천(仁川)에 상륙한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되찾고자 북한군과 격전
을 벌였다.

안산의 품으로 들어서려면 서대문구청이나 홍제천 인공폭포(연희숲속쉼터). 봉원사, 천연동,
독립문파크빌, 무악재역, 홍제1동, 한성과학고 등지에서 접근하면 된다. 또한 서대문구청에서
안산자락길이라 불리는 둘레길(7km)을 야심차게 닦아놓았는데, '쉽게 걸을 수 있는 편안한 여
행길 10선'에 꼽혀 국민적인 둘레길로 격하게 칭송을 받고 있다.

안산 서남쪽 자락에는 서울 지역의 주요 고찰(古刹)이자 영산재(靈山齋)의 성지(聖地)인 봉원
사가 있고, 산 동쪽 정상에는 무악산 동봉수대가 있으며, 연희숲속쉼터와 안산자락길, 메타세
콰이어숲길, 잣나무숲길 등의 명소가 준비되어 있어 지루할 틈이 거의 없다.


▲  안산 동쪽 정상 밑에 자리한 헬기장
(서쪽 정상과 동쪽 정상 사이)

▲  안산 동쪽 정상에 씌워진 무악산 동봉수대 - 서울 지방기념물 13호

하늘과 맞닿은 안산의 지붕에는 2개의 봉우리가 봉긋 솟아있다. 이중 서쪽 봉우리가 안산 정
상으로 안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나 그곳에는 군사시설이 있어 출입이 100% 통제되어 있다. 하
여 자유로운 공간인 동쪽 봉우리(동쪽 정상)가 실질적인 정상의 역할을 맡고 있다. 서쪽 봉우
리보다 약간 낮을 뿐, 높이는 거의 비슷하며 바로 그 봉우리에 무악산 동봉수대(문화재청 지
정 명칭은 '무악산 동봉수대터')가 천하를 굽어보며 요새처럼 자리해 있다.

봉수대는 불을 피워 연기와 불빛을 이용해 변방의 소식을 서울로 빠르게 전달하던 것으로 주
로 산 정상에 자리를 닦았다. 지금처럼 전화나 인터넷이 있던 시절이 아니니 봉수대의 역할은
더욱 클 수 밖에 없었고 그 봉수대를 이용한 봉수체제가 그나마 제일 빠른 통신 수단이었다.
비와 눈이 내려 연기가 여의치 못할 때는 봉수지기가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소식을 전했다.

조선시대 봉수제(烽燧制)는 1438년에 확립되었는데, 그때 무악산(안산) 정상에 봉수대가 만들
어진 것으로 보인다. (무악산은 안산의 다른 이름으로 안산과 인왕산 경계에 자리한 무악재에
서 비롯됨)
지금은 동봉수대 1개 밖에 없지만 원래는 2개로 동,서로 구분되어 있었다. 동봉수대는 조선의
제3봉수로(烽燧路)의 경유지로 평안도 강계(江界)에서 시작하여 황해도(黃海道)와 파주, 고양
해포나루, 무악산 동봉수대를 거쳐 남산 훈도방(남산 목멱산 봉수대)에서 그 끝을 맺는다. 이
노선은 직봉 78곳, 간봉 22처를 경유한다. 그리고 서봉수대는 제4봉수로의 경유지로 황해도에
서 시작하여 경기도 해안을 따라 고양시 고봉, 무악산 서봉수대를 거쳐 남산 명래방으로 연결
되며, 직봉 71처, 간봉 22처를 경유한다.

이들 봉수대는 1894년 이후 봉수제가 폐지되면서 귀신도 모르게 녹아 없어졌으며, 그 터만 아
련히 남아 전하던 것을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동쪽 정상에 있던
동봉수대만 복원되었다. 허나 서쪽 정상에 있던 서봉수대터는 군부대가 있는 관계로 복원되지
못했다.

비록 동봉수대가 복원되긴 했으나 주위가 문화유산과 어울리지 않고 추락사고의 위험이 있다
는 문제점이 2008년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하여 그때부터 2011년까지 서울시 문화재위원들
이 현장실사와 고증을 통해 화강석 성곽으로 재현하기로 결정하고 기존의 봉수대를 부시고 2
단의 석축을 다진 다음 그 위에 봉수대를 얹혔다.
허나 이번에는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이 떨어진다고 민원이 들어와 지금의 모습으로 어
색하게 재현되었다. 그러니까 원래의 모습이 아닌 그저 사람들 입맛에 맞게 이리저리 변질을
시킨 꼴이다. 굳이 좋게 포장한다면 융통성이 있고 시대에 맞게 재현된 것이 되겠지.
그러다보니 봉수대를 받치고 있는 석축과 불을 피우던 봉수대, 봉수대 주변 테두리의 돌 피부
가 확연히 차이가 나서 어색하기 그지 없다. 봉수대 석축을 이루는 돌은 고색의 기운이 약간
돌지만 봉수대와 테두리에 쓰인 돌은 하얀 피부로 파리가 능히 미끄러질 정도로 맨질맨질하다.


▲  천하를 굽어보며 왕년의 향수를 달래는 봉수대
연기를 모락모락 풍기며 불빛을 날리던 왕년의 시절이 있었건만 이제는
안산 정상을 수식하는 장식용이자 전망대 그 이상도 아니게 되었다.

    ◀  때깔이 고운 하얀 피부의 봉수대
봉수대 가운데에 있는 네모난 창을 통해 불과
연기를 피웠는데, 그 연기는 봉수대 꼭대기를
통해 하늘로 솟구쳤다.

▲  남쪽에서 바라본 동봉수대

▲  새롭게 둘러진 봉수대 테두리

봉수대를 모자처럼 눌러쓴 안산 동쪽 정상, 그 동쪽은 바위로 이루어진 낭떠러지이고, 북쪽과
남쪽은 경사가 다소 각박해 봉수대 복원 이후 추락사고의 위험이 늘 제기되었다. 하여 2011년
이후 봉수대를 새로 갈면서 주변에 하얀 피부의 테두리를 성곽처럼 두른 것이다. 그러다보니
기존의 봉수대 모습을 다소 잃게 되었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인왕산과 무악재
그날따라 안개가 말썽이라 시야는 다소 흐릿했다. 이렇게 보면 인왕산이
좀 낮아보일 수 있지만 저곳이 이곳보다 무려 40m 이상 높다.
그래도 서울을 지키는 당당한 우백호가 아니던가~~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흐릿한 천하 ①
홍제동과 홍은동, 녹번동, 평창동, 북한산(삼각산) 서남부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흐릿한 천하 ②
바로 밑으로 옛 서대문형무소를 간직한 서대문독립공원과 독립문 주변을
비롯하여 서울 도심부와 남산이 바라보인다. 안개만 아니었다면
시야가 더욱 나래를 펼쳤을 것인데 하늘의 심술이
그저 아쉽기만 하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흐릿한 천하 ③
안산 남쪽 자락과 서울 도심부, 아현동 지역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흐릿한 천하 ④
안산 남쪽 자락과 봉원사, 신촌, 서대문구 지역


안산 정상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아주 휼륭하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장
안을 발 아래 두며 굽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뫼에 오르는 이유의 큰 하나는 바로 이런 조망
맛을 누리고자 함으로 이때만큼은 제왕도, 옥황상제도, 청와대 주인도 부럽지가 않다.
정상에서 보이는 범위는 가까이로 인왕산과 무악재, 독립문, 서울 도심부, 홍제동, 신촌, 북
한산(삼각산), 북악산(백악산)을 비롯해 멀리 서울 동부, 불암산, 아차산, 여의도, 서울 서남
부, 동작구, 강남구, 관악산과 호암산 등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와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두 눈이 제대로 호강을 누린다. 그래서 왜 이곳에 봉수대를 세우고 이괄의 난(1623년)과
6.25전쟁, 그리고 지금까지 군사적인 요충지로 절찬리에 쓰이고 있는지 십분 이해가 간다.

* 무악산 동봉수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



 

♠  안산에 녹아들다 (잣나무숲, 메타세콰이어숲길)

▲  가파른 벼랑을 이루고 있는 안산 북쪽 자락

안산 동쪽 정상에서 시원스러운 산바람과 조망을 누리며 20분 정도 머물렀다. 비록 하늘의 비
협조로 시야는 썩 좋지 못했으나 마치 학의 등에 올라탄 개미처럼 흐릿한 천하를 굽어보니 기
분은 즐겁다.
이곳은 예전에도 가끔씩 찾았던 곳이고 땅꺼미가 자욱한 저녁에도 침침한 두 망막을 무릅쓰고
올라가 도심 야경을 즐기며 일행들과 곡차(穀茶) 1잔 걸치기도 하였다. 지금도 1년에 서너 번
정도 찾으며 안산에 대한 나의 변치 않는 마음을 비춘다.

동쪽 정상에서 다시 무악정 방면으로 내려가면 헬기장이 있다. 여기서 길은 3갈래로 갈리는데
, 서쪽은 무악정으로, 남쪽은 안산 남쪽 능선, 그리고 북쪽은 홍제동으로 이어진다. 그중 북
쪽 길은 아직 미답(未踏)의 상태라 미답지를 하나라도 더 지우고자 북쪽 길을 선택했다. 그
길은 각박한 경사로 가늘게 이어져 있으며 바로 동쪽이 무악재와 접한 벼랑이라 각별한 주의
가 필요하다. (길 중간중간에 바위들이 있음)


▲  안산 정상 북쪽 밑에 자리한 안천약수터 주변

정상 헬기장에서 북쪽 길을 6~7분 정도 내려 가면 안천약수터가 모습을 비춘다. 안산에서 가
장 높은 곳에 자리한 약수터로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있으니 물맛도 좀 특별할 것이라 여겨지
나 내가 갔을 때는 여름 가뭄으로 물은 완전히 말라버렸고, 여러 바람직하지 않은 것들이 검
출되어 '음용 부적합' 빨간 딱지를 받은 상태였다.
하긴 이곳만의 일이랴. 안산을 비롯해 남산과 인왕산, 북악산(백악산)의 많은 약수터도 비슷
한 곤란을 겪고 있어 서울 도심에서 깨끗한 자연산 물을 섭취할 수 있는 공간이 줄고 있다.
그만큼 서울의 건강이 나쁘게 변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샘터 주변에는 간단한 운동시설과 쉼터 등이 닦여져 있으며, 동쪽에는 주름진 바위들이 옹기
종기 모여 있다.

▲  깔끔하게 정비된 보람도 없이 부적합
판정을 받은 안천약수터

▲  샘터 동쪽에는 주름진 바위와 간단한
운동시설이 모여있다.


▲  안천약수터에서 바라본 무악재와 인왕산

▲  안산 북쪽 자락 숲길
인적도 없는 호젓한 산길을 혼자 거닐으니 마치 아비규환의 속세를
벗어난 기분이다. 이런 것이 바로 해탈감이라고나 할까?
비록 잠시뿐이지만..


▲  안산 메타세콰이어 북쪽 숲 직전 숲길

안천약수터에서 북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직진하면 안산자락길과 홍
제동으로 바로 이어지고, 왼쪽(서쪽)으로 가면 메타세콰이어숲이 싱그러운 모습을 드러낸다.

안산에는 북쪽 자락과 서쪽 자락(숲속무대 주변)에 메타세콰이어숲을 닦았는데, 이들은 안산
을 꾸미면서 조성된 안산의 아름다운 얼굴이다. 북쪽 숲은 서쪽 숲에 비해 덩치가 매우 작아
정말 순식간에 숲길이 끝나 조금은 섭섭하다. 허나 늘씬하게 솟아나 하늘을 찌르는 모습이 시
원시원하니 그것이 발음도 어려운 외래종 메타세콰이어의 매력이라 하겠다. 안산자락길은 북
쪽 숲 밑을 지나가며 서쪽 숲 한복판을 가로질러 안산을 1바퀴 휘감는다.


▲  안산 북쪽 메타세콰이어숲길
군살 없이 쭉쭉 솟은 메타세콰이어가 하늘을 가리며 우수한 그늘을 베푼다.


▲  한낮에도 거의 어두운 메타세콰이어숲의 위엄
해가 긴 여름을 우걱우걱 씹어먹으며 낮의 길이를 감소시킨다.

▲  북쪽 메타세콰이어숲에서 잣나무숲으로 이어지는 호젓한 숲길

▲  드디어 이른 안산자락길 (잣나무숲길)

북쪽 메타세콰이어 숲에서 서쪽 산길을 고집하면 무장애길로 이루어진 안산자락길이 마중을
한다.
안산 허리를 따라 이어진 안산자락길은 이 땅에 흔한 둘레길의 하나로 '둘레길' 대신 '자락
길'을 칭하고 있는 점이 이채로운데, 총 길이는 7km로 2010년 10월부터 3단계 과정을 거쳐
2013년 12월 완성을 보았다.
총 사업비는 48억(서울시 지원 33억, 서대문구 15억)으로 노약자와 장애인, 휠체어나 유모차
의 편의를 위하여 전 구간을 무장애자락길(나무데크길, 마사토 포장길)로 싹 닦았다. 그래서
2016년 4월 한국관광공사에서 선정한 '쉽게 걸을 수 있는 편안한 여행길 10선'의 하나로 꼽
혀 국민적인 둘레길로 널리 칭송을 받기도 했다.
허나 너무 편리를 강조하다 보니 산길의 진미인 흙길이 거의 없는 것이 단점이다. 하여 흙길
을 원한다면 다른 산길을 이용하거나 자락길 안쪽에 닦여진 초록숲길을 이용해야 되며, 자락
길이 산자락에 있기 때문에 시내에서 접근하려면 어느 정도 오르막길과 산길을 겪어야 만날
수 있다.

안산자락길은 연희숲속쉼터 윗쪽, 자락길전망대, 천연마당쉼터, 안산천약수터, 숲속무대, 메
타세콰이어숲, 잣나무숲을 두루 거쳐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순환형으로 봉원사나 천연동
뜨란채아파트, 독립문파크빌아파트, 무악재역, 기원정사, 연희숲속쉼터, 서대문구청에서 접근
하면 된다.


▲  잣내음으로 그윽한 잣나무숲길

안산자락길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잣나무숲이 진한 잣내음을 들이밀며 나타난다. 이곳은 연희
숲속쉼터와 메타세콰이어 서쪽 숲 사이에 자리해 있는데, 숲 한복판에 안산자락길이 흘러가
그림 같은 잣나무숲길을 빚어내고 있으며, 숲길의 길이는 0.3km로 메타세콰이어숲과 함께 안
산을 꾸미면서 조성된 안산의 또 다른 얼굴이다.
잣내음이 가득해 상쾌한 느낌을 안겨주며, 잣나무가 베푼 산바람이 비록 약하긴 하지만 속세
의 기운과 여름의 기세를 꾸준히 털어간다. 이 숲을 지나면 바로 메타세콰이어 서쪽 숲길이
펼쳐지나 그곳은 이미 여러 번 인연을 지은 터라 길을 접고 아직 발자국을 남기지 못한 안산
자락길 북쪽 구간으로 방향을 돌렸다.


▲  저 자락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시원스럽게 뻗어가는 잣나무숲길의 위엄

▲  잣나무숲길 남쪽 구간

서울에 대표적인 잣나무숲으로는 이곳 외에도 동작충효길 고구동산 잣나무숲과 호암산(虎巖山
) 잣나무숲이 있다. 이들이 시골에 있었다면 감흥이 덜했겠지만 번잡함이 연상되는 서울 한복
판에 고스란히 박혀 있으니 그 감흥은 클 수 밖에 없다. 그만큼 자연은 인간에게 소중하다.



 

♠  안산자락길 마무리

▲  안산자락길 북쪽 전망대

잣나무숲에서 잠시 자락길을 버리고 서쪽으로 내려가면 넓게 잘 닦여진 안산 산책로(연희로32
길)가 나온다. 그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서 올라온 길로 안산자락길이 이 길의 신세를 잠시
지며 동북쪽으로 흘러가는데 그 길의 끝에서 폭이 확 줄어들면서 북쪽 전망대가 고개를 내민
다.

북쪽 전망대는 안산의 가장 북쪽 끝(모래내로 이북은 제외)으로 비록 조망의 질은 정상보다
엷어도 홍제동과 홍은동, 무악재, 탕춘대능선, 북한산(삼각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앞서 잣나무숲에서 내려온 자락길과 연희로32길이 합쳐지는 곳에서 북쪽 전망대까지 1890년대
부터 고약했던 왜정(倭政) 시절까지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100여 인의 정보가 담긴 안내문이
차례대로 걸려 있어 잠시 옷깃을 여미게 한다. (자락길 전망대에도 일부가 있음)
이들의 안내문을 설치한 것은 안산 동남쪽 밑에 서대문독립공원이 있어서 그런 것인데, 자락
길을 거닐면서 이 땅의 광명을 위해 숭고하고 거룩한 삶을 살다간 그들을 생각하고 기려보자.
그것이 안산이 우리에게 준 의무이자 숙제이다.

북쪽 전망대에서 무악재를 거쳐 독립문파크빌까지 나무로 다진 무장애데크길이 펼쳐지며, 홍
제동과 무악재에서 안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길만 있었을 뿐, 무악재 옆을 가로질러 남북으
로 이어지는 산길은 원래 없었다. 그러다가 자락길이 닦이면서 발길이 어려웠던 안산 무악재
구간 접근이 가능해졌다.


▲  안산자락길 북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홍제동과 홍은동을 위시하여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  안산자락길 북쪽 구간과 무악재 구간이 만나는 곳
길 경계에 계수기(計數機)를 설치하여 안산자락길을 이용하는
사람 수를 조용히 체크한다.

▲  안산자락길 무악재 구간 (북쪽 전망대에서 무악재 방면)

▲  서울에도 흔들바위가?? 귀엽게도 들어앉은 안산 흔들바위

안산자락길 북쪽 전망대에서 자락길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가면 흔들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마
중을 한다.
커다란 암반에 바짝 붙어있는 돌덩어리가 흔들바위로 흔들바위의 대명사인 설악산 흔들바위보
다는 볼품과 위엄이 많이 떨어진다. 허나 손으로 밀면 아주 조금은 흔들거려 흔들바위의 자격
은 그런데로 갖추고 있다. 허나 대부분 사람들이 지나칠 뿐, 그를 밀어 흔들바위의 이름값을
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어 속세의 관심이 시급하다.

이 바위는 안산자락길 조성으로 발견된 것으로 암반 위에 철썩 붙은 것이 충주 미륵리절터의
공기돌바위와 비슷한 폼이다.
안산은 돌이 많은 산이라 동쪽 정상 주변과 동쪽 자락을 중심으로 바위와 벼랑이 즐비하니 이
바위 역시 그중의 하나로 대자연이 안산에 살포시 얹혀놓은 소소한 작품이다. 그 동쪽에도 잘
생긴 바위 하나가 이름도 없이 자리해 있는데, 동쪽에서 보면 거북이가 바위에 웅크리고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모습이다.

▲  흔들바위 동쪽에 있는 이름 없는 바위

▲  너와집쉼터 입구

흔들바위를 지나 무악재 쪽으로 움직이면 너와집쉼터 이정표가 마중한다. 그 이정표의 안내를
받으며 서쪽 산길을 오르면 숲속에 묻힌 너와집이 진하게 모습을 비춘다. 서울 도심에서 너와
집이라니? 흔들바위만큼이나 신선하기 그지 없는데 그는 서대문구청에서 안산자락길을 다지면
서 조촐한 여흥거리로 마련한 것으로 경상북도 산골의 너와집을 현대식으로 조금 손질하여 지
은 것이다.
사람이 거주하는 살림집은 아니라고 하며, 관리하는 사람이 매주 여러 번 찾아와 관리를 하거
나 잠깐씩 머문다. 서울에 거의 유일한 너와집으로 너와집 체험 겸 전통찻집으로 활용하는 것
이 좋을 듯 싶은데, 그냥 눈요깃감으로만 두고 있는 것이 조금 아쉽다.

집 옆에는 하얀 피부의 위성방송 안테나가 귀를 열고 있어 이런 산골까지 TV가 들어오나 놀라
울 따름이다. 허나 생각해보니 여긴 엄연한 서울 한복판이다. 지리산이나 태백산맥, 개마고원
산골이 아니다.
집 앞에는 안산이 베푼 조그만 개울이 속세를 향해 흘러가는데, 그 개울에는 나무다리가 있으
며, 집 주변에는 장독대와 너와집쉼터가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  안산 산골에 숨겨진 너와집
이렇게 보면 강원도나 경북의 첩첩한 산골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엄연한
서울 한복판이다. (서울 4대문이 바로 지척임)

▲  너와집 옆에 자리한 너와집쉼터

▲  너와집 샘터

▲  시원스럽게 뻗은 안산자락길
무악재 구간

▲  무악재 서쪽 벼랑에 닦여진
자락길전망대


자락길전망대는 무악재 서쪽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닦여져 있다. 이곳은 자락길을 닦으면서 달
아놓은 공간으로 필체가 돋보이는 '자락길전망대' 현판이 인상적인데, 이 글씨는 2012년 10월
에 작성된 것으로 글씨 좌우에 도장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는 투구처럼 생긴 바위와 두 다리를 쉴 수 있는 의자가 여럿 설치되어 있고, 바로 밑에
자리한 홍제동을 비롯해 홍은동과 무악재, 인왕산, 북한산(삼각산) 등이 시야에 잡히나 보이
는 범위는 좁다.


▲  자락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회색빛으로 물든 홍제동과 홍은동 지역을 비롯해 북한산(삼각산) 서남쪽 자락과
인왕산 일부가 두 망막에 들어온다.

▲  자락길전망대 바위 (투구바위)
바위 이름은 아직 없으나 일부가 투구처럼 생겨서 투구바위라 불러도 손색은
없어 보인다. 자락길전망대 개설로 바위 아랫도리가 가려져서 그렇지
저 바위 자체가 장대한 바위 벼랑이다.

▲  남쪽에서 바라본 자락길전망대

▲  잠깐 포장길로 안면을 바꾼 안산자락길 무악재 구간 (무악재 남쪽)

▲  숲속에 자리한 조그만 야외 독서실, 자락길 북까페(Book cafe)

자락길 전망대에서 무악재 구간을 넘으면 조그만 책장을 지닌 북까페가 마중한다. 이곳은 책
장과 기와 정자, 그리고 동그란 탁자와 의자 세트가 여럿 놓여져 있는데, 책은 대부분 기증받
은 것으로 누구든 기증과 독서가 가능하다. 허나 그렇다고 책을 소장용으로 가져가지는 말자.
이곳이 공용 북까페의 성격을 잘 유지할 수 있도록 말이다.


▲  북까페에서 바라본 안산 정상 (가운데 보이는 봉우리가 정상)

나는 1시간 전까지만 해도 저 봉우리 정상(무악산 동봉수대)에 서 있었다. 허나 눈을 떠보니
나는 그 한참 밑 북까페에서 서성이고 있는 것이다.
앞서 정상에 있던 것은 혹여 꿈속은 아닐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축지법이나 순간이동을 쓴
것일까? 산과 자락길은 그대로인데 나란 존재는 계속 바뀌니 말이다. 이렇게 보니 정말 안산
을 휘감듯 돌아다녔다.


▲  한성과학고 뒷쪽 안산자락길

▲  한성과학고 뒷쪽 안산자락길에서 바라본 서대문독립공원과 독립문 주변

▲  안산자락길 현저동 구간

무악재를 넘은 안산자락길은 현저동(峴底洞) 구간으로 들어서면서 한성과학고와 독립문파크빌
아파트의 뒤쪽을 지나간다. 이 구간은 벼랑 일색이라 잔도(棧道)처럼 나무데크길을 길게 내었
으며, 벼랑길을 지나면 포장길이 펼쳐진다.


▲  벼랑 밑을 지나는 안산자락길 현저동 구간

안산자락길이 너무 안(安)스럽게 닦여진 탓에 움직이는 길이 정말 순식간이다. 북까페에서 한
성과학고 뒷쪽을 지나 어느덧 독립문파크빌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부터 나무데크길은 끝나고
포장길이 펼쳐져 안산 남부까지 이어지는데, 제아무리 여름이라고 해도 19시가 넘어간 상태라
햇님은 꼴딱꼴딱 지평선 너머로 꽁무니를 뺀다. 그 사이를 비집고 어두운 땅꺼미가 자리를 피
며 천하에 어두운 물감을 물들인다.

독립문파크빌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 독립문삼호아파트 뒷쪽에서 안산자락길과 인연을 정리
하고 시내로 내려왔다. 이렇게 하여 안산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안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천연동, 신촌동, 연희동, 홍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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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10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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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서울 도심의 싱그러운 공간,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늦가을 나들이 <북악스카이웨이>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 서울 도심의 신선한 명소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늦가을이 한참 익어가던 10월의 끝 무렵, 후배 여인네들과 북악산(백악산) 북악하늘길을 찾았
다. 이곳은 김신조루트로 속세에 널리 알려져 있는데, 2010년에 처음 발을 들인 이래 가끔 발
걸음을 한다.

오후 2시에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1111번(번동↔성북동)을 타고
서울다원학교(한용운활동터) 종점에서 두 발을 내렸다. 서울 도심 속의 전원(田園) 마을로 일
컬어지는 성북동(城北洞)은 내 즐겨찾기 명소의 일원으로 대부분의 명소를 지겹도록 가봤건만
갔다 오면 또 가고 싶고, 자꾸만 안기고 싶은 곳이다.

성북동 종점에서 만국기(萬國旗)가 펄럭이는 '우정의 공원(公園)'을 지나 삼청각으로 가는 조
그만 길로 들어선다. 서울의 심장부가 바로 지척이건만 그런 도심을 비웃듯 숲과 계곡이 어우
러진 전원 풍경이 도시에서 오염된 안구를 어루만진다. 길 옆에는 계곡이 졸졸졸♪~노래를 부
르며 흘러가는데, 이 물줄기는 성북천이란 간판을 달고 속세로 흘러간다.

길의 막다른 부분에 이르면 계곡을 건너는 다리와 약간의 산길이 그림처럼 펼쳐지는데, 그 산
길을 오르면 바로 삼청터널 북쪽이다.



 

♠  북악산(백악산) 북악하늘길 입문

▲  도심과 성북동을 바짝 이어주는 삼청터널

삼청터널은 성북동과 도심 북쪽인 삼청동(三淸洞)을 이어주는 2차선 땅굴이다. 이곳은 성북동
의 가장 막다른 구석으로 한양도성이 흐르는 북악산(백악산)의 주능선과 북쪽 능선(북악산길)
이 갈라지는 곳이며, 산세도 칼처럼 솟은 편이라 오르기가 좀 각박한 편이다. 그런 구석에서
다른 곳으로 쉽게 넘어갈 수 있는 한줄기 희망을 선사한 것이 바로 삼청터널이다.

이 터널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절정을 누리던 1969년에 삽을 떠서 1970년 12월 30일 완성을 보
았다. 공사비는 총 2억 4,900만원(민자 1억 9,900만원, 시비 5,000만원)으로 당시 성북동에는
차지철을 비롯한 군사정권의 실세들이 여럿 살았는데 그들의 청와대 접근 편의와 땅값 상승을
위해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솔직히 그 시절 성북동과 삼청동은 한적한 동네로 두 동네를
이을 터널의 필요성은 그다지 없었다.

터널이 뚫리자 안그래도 졸부들로 가득한 성북동의 땅값이 더욱 하늘 높이 치솟아 금싸라기
땅이 되었고, 성북동과 청와대, 서울 도심간의 접근이 편해지면서 대원각, 삼청각 등의 고급
요정과 식당이 생겨났다. 이들은 썩은내와 돈냄새가 풍기는 지배층과 부유층의 공간으로 돈을
포크레인으로 쓸어 담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산간 지방의 조촐한 터널 같은 삼청터널은 길이 302m, 폭 8.5m(2차선)로 오로지 차량만 들락
거릴 수 있다. 예전에는 권력층과 돈 많은 작자들이 주로 이용하던 터널이었지만 시대가 여러
번씩 바뀌고 성북동이 도심 속 명소로 각광을 받으면서 나들이와 드라이브 수요도 크게 늘었
다. 허나 터널도 그렇고 도로도 그렇고 확장은커녕 여전히 2차선을 고수하고 있어 휴일에는
꼬리에 꼬리를 잡고 굼벵이 속도로 버벅거리는 차량의 행렬을 쉽게 구경할 수 있다.

터널을 지나면 바로 삼청동과 북촌(北村)으로 이어지지만 걷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억지
로 터널에 발을 들이지 않도록 한다. (벌금을 내야됨) 차라리 쿨하게 택시를 타고 넘어가던가
숙정문안내소에서 숙정문이나 말바위, 와룡공원을 넘어 북촌으로 넘어가길 바란다.


▲  삼청각(三淸閣) 정문

성북동의 가장 구석이자 삼청터널 북쪽에는 으리으리한 한옥으로 치장된 삼청각이 자리해 있
다. 이곳은 북악산(백악산) 주능선과 북쪽 능선이 갈라지는 150m 고지로 도심이 바로 지척임
에도 이곳을 감싸고 흐르는 공기부터가 무척 산뜻하고 청정하다.

삼청각은 겉모습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처럼 원래는 고급요정이었다. 1972년에 지어진 이곳은
군사정권 시절 악명을 떨친 3대 요정<청운각(淸雲閣), 대원각(大元閣), 삼청각>의 하나로 삼
청각이란 이름은 북악산(백악산) 남쪽에 있는 삼청동(三淸洞)에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주로 국빈 접대와 정치적 회담을 위한 요정으로 운영되었는데, 1972년 7월 4일에 벌어
진 7.4남북공동성명 직후 남북적십자대표단이 만찬을 가졌던 곳이기도 하다. 권력실세들의 공
간으로 30년 가까이 폐쇄적으로 이어오다가 2001년 서울시가 인수하여 리모델링을 거쳐 도심
속의 전통문화 공간으로 속세에 활짝 문을 열었으며, 현재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관리한다.

한때 백성들은 감히 발도 들이지 못했던 고급 요정이 누구나 자유롭게 오가고 전통문화를 즐
기며, 식사와 차 1잔, 혼인, 돌잔치 등을 가질 수 있는 대중적인 공간으로 거듭난 현장으로
이는 길상사(☞ 관련글 보기)란 절집으로 변신한 인근 대원각과 비슷하다.
이곳은 오래된 문화유산도 아니고 비록 속세에 개방되었다고 해도 비싼 이미지는 여전히 깃들
여져 있다. 한식당과 다원의 착하지 못한 음식/차 가격과 행사 비용은 서민들에게는 그리 호
락호락한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허나 서울의 허파인 북악산(백악산) 품에 포근히 안긴 곳
으로 20세기로 전승된 현대 한옥의 아름다움과 기품, 전통 정원의 미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 삼청각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330-115 (대사관로 3, ☎ 02-765-3000)
* 삼청각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북악산 전면개방 기념조림 표석 - 숙정문 안내소 부근

▲  늦가을의 처절한 향연이 펼쳐진 북악산(백악산) 등산로
(홍련사와 숙정문안내소 중간)

▲  숙정문안내소

홍련사와 삼청터널 사이로 난 산길을 오르면 북악산 전면개방 조림(造林)을 기념하는 커다란
표석이 나그네를 맞는다. 그 표석을 지나면 북악산 주능선(한양도성 능선)의 주요 관문인 숙
정문안내소(☎ 02-747-2152)가 모습을 비추는데, 여기서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린다.
안내소를 지나 직진하면 숙정문(肅靖門)과 북악산(백악산) 주능선, 북악산 정상(342m)으로 이
어지며, 안내소 직전 왼쪽(남쪽) 길은 한양도성 북쪽 산길로 말바위와 와룡공원으로 통한다.
그리고 오른쪽(북쪽) 길이 김신조루트로 통하는 북악하늘길이다.


▲  숙정문안내소 주변 북악산(백악산) 산림

북악산 북쪽 능선 주변은 북악산 주능선과 달리 사람들의 출입이 자유로웠다. 그러다가 1968
년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공비 패거리 31명이 북한산(삼각산)을 넘어 창의문을 거쳐
시내로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침투 소식을 접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 1932~1968
)은 경찰을 청와대 길목에 배치하고 직접 현장을 지휘했다.
드디어 공비패거리가 청와대 서쪽 청운동(淸雲洞)에 나타나자 최서장은 그들이 공비임을 눈치
채고 검문을 한다며 길을 막았다. 이에 공비들은 크게 발작하여 외투 속에 숨긴 기관단총을
꺼내 이판사판으로 선제공격을 가하면서 총격적이 발생했고, 최서장은 불행히도 가슴과 배에
관통상(貫通傷)을 당해 쓰러지면서
'끝까지 청와대를 사수하라!'
마지막 명령을 내리며 장렬히 최후를 마쳤다.

서장의 죽음에 애끓는 복수심에 불탄 경찰의 반격으로 공비들은 거의 벌집이 되었고 살아남은
것들은 인왕산(仁王山)과 북악산으로 도주했다. 이후 14일 동안 수색을 벌여 북악산 북쪽 능
선을 끝으로 토벌을 완료했으며, 생포된 김신조와 도주 1명을 뺀 29명을 처단했다.
김신조 사건을 계기로 뚜껑이 단단히 폭발한 박정희 전대통령은 북악산 북쪽 능선 주변을 완
전히 통제하여 백성들의 출입을 막고 군사 지역으로 삼았으며, 북악산과 인왕산 허리에 군작
전 및 관광을 겸한 북악스카이웨이(북악산길)를 급하게 만들게 했다.

금지된 곳으로 묶인 북악산 북쪽은 41년이 지난 2009년부터 삼청각에서 말바위, 성북동과 정
릉, 평창동에서 북악스카이웨이를 잇는 산길이 속속 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2010년 2월 27일
에 삼청각에서 북악산 북쪽 능선으로 오르는 산길을 손질해 '북악하늘길'이란 간판을 걸어 속
세에 개방했다. 그중 제2산책로는 김신조 일당이 도망친 루트라 하여 김신조루트란 이름으로
인기를 더하고 있으며, 북악하늘길의 백미이자 안보관광지로 가장 볼거리가 많은 산길이다.
(실제로 김신조는 이 길로 가지 않았다고 함)

이곳이 주능선과 다른 점이 있다면 24시간 언제든 출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행히 내가 팔
팔한 시절에 공개되어 이렇게 발을 들이니 기쁘기 그지 없다. 북한이나 휴전선처럼 기약할 수
없는 곳에서 벗어났으니 말이다.

무려 40여 년 동안 통제되어 속인들의 발길을 금지한 탓에 북악산 북쪽의 자연은 군부대로 인
한 약간의 훼손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잘 보존되고 있다. 그리하여 생태적인 가치가 높고, 자
연경관이 우수하며, 서울 도심을 비웃듯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어 '서울 속의 비무장
지대','도심 속의 허파','도심 속의 신세계'란 별명까지 지니게 되었다. 또한 키다리 빌딩이
즐비한 서울 도심 속의 이색 장소로 한나절 나들이 코스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와 제2산책로(김신조루트) 대부분은 통제 시절 군인들이 오가던 산길로
군사 시설과 그 당시 지어진 계단길이 줄지어 있으며, 제2산책로는 경사가 매우 각박하여 탐
방객의 편의를 위해 나무데크식 등산로를 곳곳에 만들었다.
이렇게 북악산 북쪽 능선을 개방하면서 조성된 등산로 3개는 다음과 같다.

①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 : 말바위쉼터 ~ 한양도성 북쪽 산길 ~ 숙정문안내소 ~ 성북천발원지
   ~ 북악팔각정 (1.4km)
② 북악하늘길 제2산책로(김신조루트) : 성북천발원지 ~ 서마루 ~ 솔바람교 ~ 호경암 ~ 하늘
   전망대 ~ 북까페 ~ 하늘교 ~ 하늘마루 (2km)
③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 : 북까페 ~ 동마루 ~ 숲속다리 (640m)



 

♠  북악하늘길(김신조투르) 둘러보기 ①
삼청각쉼터 ~ 성북천발원지 ~ 서마루 ~ 솔바람교

▲  삼청각쉼터

숙정문안내소에서 북악하늘길로 접어들면 가장 먼저 높다란 계단길이 나그네의 기를 제대로
주눅 들게 만든다. 시작부터 각박한 계단이 펼쳐지는 것이다. 김신조루트는 이렇게 첫 이미지
에서 보이듯 계단길이 유별나게 많아 숨을 적지 않게 차게 하는데, 이건 맛보기 버전이다. 여
기서부터 지친다면 김신조루트 산책은 어렵다. 자존심을 곱게 버리고 악으로 깡으로 올라간다
면 김신조루트는 자신의 속살을 하나씩 벗겨주며 그대를 반겨줄 것이다.

계단을 오르면 가장 먼저 삼청각쉼터가 마중을 한다. 이곳은 삼청각의 서쪽이자 뒷통수로 소
나무의 산인 북악산답게 소나무 1그루가 쉼터 중간에서 운치를 그윽하게 불어주며 솔내음과
선선한 그늘을 드리운다. 여기서 잠시 삼청각을 비롯한 좁은 천하를 굽어보고 더 올라가면 제
1산책로와 제2산책로가 갈리는 성북천발원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  삼청각쉼터에서 바라본 천하 (삼청각과 성북동, 성북구 지역)
이제 시작 단계라 조망 범위는 매우 좁다. 허나 산길을 오르면서 하늘과
보다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품질도 더욱 높아진다.

▲  늦가을의 물감이 야드르르 번진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와
북악산 북쪽 능선 (삼청각쉼터와 성북천발원지 중간)

▲  성북천발원지에 자리한 수고해(水鼓蟹)다리 (가운데에 보이는 다리)

▲  성북천(城北川) 발원지

성북천은 북악산 동북쪽 자락에서 발원하여 성북동과 삼선교, 보문동, 제기동(祭基洞)을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가는 7.7km의 지방 2급 하천이다. 조그만 하천의 발원지라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儉龍沼)나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黃池)처럼 뭔가 특별하거나 요란한 것은 없으며,
계곡 수심은 매우 얕고 주변에는 하얀 피부의 바위들이 벌러덩 누워 있는 그야말로 평화로운
풍경이다.

성북구청에서 이곳을 생물 서식처로 가꾸고자 여러 식물을 심고 수질에 특별히 신경을 쓴 결
과 가재를 비롯한 여러 조그만 수중 동물들이 좀 늘어났다. 그래서 이를 기념하고자 성북천발
원지 남쪽에 있는 다리 이름을 가재가 물에서 물장구를 치는 다리란 뜻에 수고해(水鼓蟹)다리
라 하였다.

이곳에서 산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직진하면 기존의 제1산책로로 북악팔각정과 빠르게 이어
지며, 오른쪽은 김신조루트라 불리는 제2산책로로 호경암을 거쳐 하늘교까지 이어지는 2km의
산길이다. 이 산길은 중간중간 조망(眺望)이 괜찮은 곳에 '~~마루'와 '하늘전망대'라 불리는
조망대를 닦아 천하를 굽어볼 수 있게 했다.


▲  성북천발원지에서 바라본 삼청각 편운정(片雲亭)과 유하정
편운정에서 계곡을 따라 북악하늘길로 바로 접근할 수 있으나, 이 구간은
통제구간으로 철조망이 둘러져 있고, 길이 헝클어져 있어
조금은 거칠다.

▲  김신조루트 서마루

성북천발원지에서 서마루까지는 속절없는 세상살이처럼 고통스런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나무
데크로 지어진 서마루에 오르면 삼청각쉼터보다 1단계 높아진 조망을 누릴 수 있으며, 의자가
넉넉히 베풀어져 있어 잠시 숨을 고르며 천하를 굽어보기에 좋다.
이곳에선 북악팔각정이 가까이에 보이며, 여기서 길은 동쪽을 향해 급하게 내리막길로 돌변한
다. 그래서 처음 온 이들은
'벌써 다 올라왔나? 이거 정말 싱거운데!' 생각을 하며 방심을 하지만 이는 북악산이 내린 일
종의 속임수이니 속지말자. 북악산이 북한산(삼각산)이나 관악산(冠岳山), 수락산(水落山) 등
서울 주변의 쟁쟁한 산들에 비해 키는 낮지만 그래도 악(岳)이 들어가는 서울의 오랜 북현무(
北玄武)이다.


▲  서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①
소나무 너머로 성북동과 성북구, 도심 동부 지역, 동대문구, 중랑구, 광진구,
강동구, 송파구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서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②
북악산(백악산)의 두터운 주능선 너머로 서울 도심과 남산이 바라보인다.

▲  이름도 시원한 솔바람교

서마루에서 솔바람교까지 220m 구간은 각박한 경사의 내리막이다. 다 올라왔구나 싶겠지만 솔
바람교를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흥분하여 무지막지한 오르막길로 나그네의 기를 죽인다. 내리
막길은 고난 앞에서 잠시 즐기는 여유라고나 할까..? 한라산(漢拏山)도 관음사(觀音寺) 방면
으로 한참 내려갈 때 중간에 오르막길이 나와 속인들을 좌절하게 만드는데 바로 그 이치이다.
남마루까지는 가파른 길이 계속 이어지니 방심의 늪에 빠지지 말자~~

솔바람교는 계곡 위에 걸린 나무다리로 그 이름이 순 우리말이라 정감이 참 깊다. 주변은 소
나무를 비롯해 온갖 수목이 삼삼하여 그 이름 그대로 솔바람이 나를 날려보낼 것 같다. 계곡
이라고 하지만 워낙 생긴 것이 부실하고 돌만 가득해 이곳에 올 때마다 늘 황량한 모습을 보
여주어 안타깝기 그지 없다.
 
다리를 내려오면 쉼터가 있으며 다리 북쪽 구석으로 가면 약수터가 있는데, 이곳이 김신조루
트의 유일한 샘터이다. 산에서의 약수터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라 갈증이 없어도 꼭 물
은 섭취하기 마련인데, 무심한 가을 가뭄 때문인지 수분은 이미 실종되었다. 약수터 주변은
숲이 바다를 이루고 있어 햇살이 쉽게 손을 뻗치지 못하며, 북악하늘길에서 가장 궁벽한 곳으
로 북쪽과 서쪽, 동쪽은 산으로 막혀있고, 남쪽만 가늘게 뚫려있는 고적한 곳이다.


▲  솔바람교 밑에 자리한 약수터
이름도 없고, 성도 없는 약수터이다.

▲  솔바람교 쉼터
이곳은 김신조루트의 중간 정도로 속세에서 간식거리를 가져왔다면 여기서
잠시 요기를 하며 쉬었다 가는 것도 괜찮다.



 

♠  북악하늘길(김신조투르) 둘러보기 ②
솔바람교 ~ 남마루 ~ 호경암

▲  솔바람교 쉼터에서 남마루로 올라가는 계단길
보기만 해도 회의가 느껴진다.


솔바람교에서 남마루까지는 다시 지독한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그 거리는 약 600m 정도로 여
기가 김신조루트에게 가장 인생의 회의를 느끼게 만드는 곳이다. 하긴 공비 패거리가 살아 돌
아가려는 일념으로 넘었던 곳인데 오죽 험하겠는가. 게다가 이곳은 산길도 없던 구간으로 각
박한 산세를 극복해 나무데크 계단길을 닦았으며, 적당하게 간격을 두며 쉼터를 만들어 턱까
지 밀려오는 숨을 잠시나마 제자리를 찾도록 했다.

그렇게 잔뜩 흥분한 산길을 오르면 남마루라 불리는 전망대가 나온다. 이곳은 앞서 서마루보
다더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더 휼륭한 조망을 선물로 준다. 이곳 이후 흥분했던 산길은 다소
진정을 되찾으며 호젓한 산길의 기품을 서서히 회복한다.


▲  지옥 끝에 나온 극락, 남마루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성북동과 성북구, 낙산, 도심 동부 지역, 동대문구, 중랑구, 성동구,
광진구, 송파구, 강동구 지역

▲  서서히 진정되고 있는 산길 (남마루와 호경암 사이)

▲  호경암으로 오르는 계단길

▲  김신조루트의 상징물, 호경암(虎京岩)

남마루에서 360m 오르면 길 왼쪽에 상처를 가득 입은 큼직한 바위가 나그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도심을 바라보고 선 이 바위가 바로 김신조루트의 상징인 호경암으로 그가 이곳의 유명
바위가 된 것은 김신조 공비 패거리와 격전을 벌였던 남북분단의 서글픈 현장이기 때문이다.

청운동에서 우리 경찰에게 털린 김신조 패거리는 북악산을 넘어 성북동 뒷산(북악산 북쪽 능
선)으로 줄행랑을 치며 몸을 숨겼다. 39대대 2중대는 호경암 주변을 수색하던 중, 등을 보이
고 도망치는 공비 3명을 발견, 호경암에서 교전을 벌이다가 인근 구진봉 주변에서 모조리 사
살했다.
그렇게 처리된 김신조 패거리 29명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파주시 적성면에 있는 적군묘지(敵軍
墓地)에 묻어주었다. 적군묘지는 6.25 때 남한 땅에서 처단된 북한군과 중공군의 시신을 묻은
곳으로 김신조 사건과 동해 잠수함 침투 때 처리한 공비, 그리고 1987년 KAL기를 폭파시킨 폭
파범까지 이곳에 묻혀 있다.


▲  남북분단의 비극이 안겨준 선물 아닌 선물
총탄 자국으로 가득한 호경암


북악산(백악산)이 서울 근교 경승지로 조선시대부터 왕족과 사대부들의 별장과 기와집, 바위
글씨가 즐비했던 탓에 호경암도 그런 곳이 아닐까 생각을 했었다. 허나 막상 확인해보니 1968
년 때 서울을 지키던 맹호부대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옛 사람들의 손길은 북악
산 주능선과 서쪽(부암동, 청운동), 남쪽(삼청동)에 치우쳐져 있을 뿐, 김신조루트와 북쪽 능
선에는 전혀 없는 것이다. 아마도 금표(禁標) 구역으로 오랫동안 금지된 곳으로 묶인 탓이 아
닐까 싶다.

바위 밑에는 이곳이 격전지임을 알리는 안내문이 있는데, 1998년 1월 호경암 주변에서 복무하
는 군장병들의 애국심과 경각심을 돋게 하려고 안내문을 설치했다고 하며, 바위 피부에는 당
시 총격전으로 생긴 50여 발의 탄흔이 진하게 남아 그 시절 긴장되고 숨막히던 상황을 아련히
전해준다.
그런 악연으로 북악산의 이름 없는 바위는 김신조 사건의 격전지로 이들을 격퇴한 부대 이름
을 따서 호경암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고, 이곳이 개방되면서 북악산의 새로운 명물이자 이
땅의 비극적인 현실을 담고 있는 산증인으로 몸값과 이름을 크게 올리고 있다. 좋은 쪽으로
이름을 높여야지 영 좋지 않은 쪽으로 높이고 있으니 바위 자신도 어이가 없을 것이다. 바위
를 보면 표정이 조금은 굳어져 있는데, 이 땅이 통일이 되면 그의 표정도 씨익~ 펴지지는 않
을까.


▲  이 땅의 비극은 저렇게 깊었다 - 바위에 박힌 탄흔

▲  호경암 표석
표석이 박힌 호경암 정상에 올라서면 지금까지의 조망을 훨씬 뛰어넘는
국보급의 조망이 발 밑에 펼쳐진다.

▲  호경암 표석에서 바라본 천하 ①
북악산 일대와 성북동, 서울 도심, 남산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호경암 표석에서 바라본 천하 ②
성북동과 정릉동, 성북구, 강북구, 중랑구, 성동구, 광진구 등

▲  호경암 표석에서 바라본 천하 ③
평창동과 구기동, 북한산(삼각산) 산줄기, 형제봉 등이 두 망막에 들어온다.

▲  호경암에서 하늘전망대로 내려가는 길
호경암을 지나면 더 이상 오르막길은 나오질 않는다. 늦가을에 물들어가는
잔잔한 숲길만이 조용히 사색을 도울 뿐~



 

♠  북악하늘길(김신조투르) 마무리

▲  김신조루트 북쪽에 자리한 하늘전망대

호경암에서 4~5분 정도 가면 하늘전망대라 불리는 전망대가 나온다. 지금까지 나온 '~~마루'
보다 덩치도 훨씬 크고 조망도 괜찮은 편으로 전망대 이름은 북악하늘길에서 따왔지만 그만큼
하늘과도 가까운 곳이다 보니 이름이 그런데로 잘 어울린다.

서마루부터 호경암까는 성북동과 북악산(백악산) 주능선, 서울 도심, 남산 등의 남쪽과 성북
구와 중랑구, 동대문구, 광진구 등 동쪽이 주로 보였다. 허나 호경암을 경계로 능선 남부에서
북부로 넘어왔기 때문에 하늘전망대부터는 그와는 반대인 북쪽으로 파노라마가 바뀌면서 평창
동과 구기동, 정릉동, 북한산(삼각산) 산줄기를 위시해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서울의 대표 졸부 동네인 평창동을 비롯해 부암동과 구기동, 탕춘대능선,
북한산 서부가 거침없이 시야에 박힌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정릉동과 길음동, 성북구, 강북구 일대는 물론 멀리 도봉구와 노원구,
수락산~불암산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성북구와 동대문구, 중랑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기, 구리시 지역 등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산줄기와 형제봉

▲  솔내음이 그윽한 북까페

하늘전망대에서 북쪽으로 110m 가면 북까페라 불리는 소나무숲이 마중을 한다. 이곳에는 책장
과 의자가 있어 자연을 벗삼아 책을 읽는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데, 북한산과 북악산의 산바람
이 교차하는 곳이라 독서도 무지 잘될 것 같다. 그런데 북까페보다는 '독서마당'이나 '소나무
책방','솔내음책방','사색의 공간'으로 이름을 지었으면 훨씬 부드럽지 않을까 싶다. 다른 곳
은 '~~마루(마루는 정상을 뜻하는 순 우리말)'나 '하늘전망대' 등의 우리말을 쓰면서 왜 이곳
만큼은 두 귀에 거북한 영어로 지었을까?

북까페 책장은 달랑 하나로 책은 많이 담겨져 있으나 상당수는 어린이와 청소년 책이거나 소
설이다. 집에 버려둔 책이 있다면 썩혀두지 말고 이곳에 기증하는 것도 공익 차원에서 괜찮을
것이다.
이곳에서 산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북까페를 등지고 북쪽으로 직진하면 하늘교가 나오고, 북
까페를 가로지르면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가 시작된다.


▲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 동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정릉동과 길음동을 위시해 성북구와 강북구, 도봉구 지역이 바라보인다.


북까페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가면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이다. 이 구간은 북악산길 남쪽으로
중간에 호경암으로 가는 샛길이 있으며, 오르락 내리락을 여러 번 반복하다가 숲속다리를 지
난 체육공원에서 그 막을 내리는 1리 정도의 짧은 산길이다.

산길 중간에 동마루라 불리는 전망대가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북악산 북쪽 자락과 북한산
남쪽 자락을 비롯해 정릉동과 길음동, 성북구와 강북구, 도봉구 등이 훤히 바라보이며, 대자
연이 여기저기 채색한 단풍이 산자락을 곱게 수를 놓으며 1폭의 수채화를 자아낸다.


▲  체육공원에서 마무리를 짓는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 동쪽 종점

동마루에서 북악산길에 걸린 숲속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넘어가면 체육공원이 나온다. 이곳은
동네 주민과 산꾼들이 간단히 몸을 풀 수 있게끔 다양한 운동 기구가 닦여져 있는데,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김신조루트의 북쪽 종점인 하늘마루와 하늘교가 나오며, 그 직전에 형제봉과
북한산둘레길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다. 그리고 하늘마루에서 더 서쪽으로 가면 북악팔각정과
부암동, 창의문, 인왕산으로 이어진다.
반면 동쪽으로 가면 북악정과 성북구민회관, 아리랑고개, 정릉동 방면으로 통하며, 중간에 국
민대나 배밭골, 길상사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우리는 북악산길을 옆구리에 끼며 해가 뜨는
동쪽으로 가다가 북악정에서 성북동으로 진입하여 길상사를 거쳐 속세로 내려왔다.


▲  북악스카이웨이4교
여기서 직진하면 아리랑고개, 성북구민회관으로 이어지며, 아래로 내려가
북쪽으로 가면 국민대와 정릉, 남쪽은 성북동과 길상사으로 연결된다.
이들 모두 2차선 길이지만 보기와 달리 차량의 왕래가 제법 잦다.


41년 만에 속세에 개방된 북악하늘길과 김신조루트, 비록 남북분단의 상처가 서린 서글픈 현
장이지만 서울 도심 속의 허파이자 달달한 명소로 자연이 잘 보존되고 경관도 아름다운 보석
같은 곳이다. 이곳은 마치 미지의 땅에 들어온 듯한 신선한 기분이었고, 서울 땅에서 안가본
곳이 거의 없는 나에게도 꽤 서름한 곳이라 길을 거닐면서도 무엇이 나올까? 늘 마음이 두근
거렸다.
이렇게 하여 도심 속의 허파, 북악산 김신조루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정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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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구의 지붕을 거닐다. 상도동 사자암~국사봉~동작충효길6코스 동작마루길 <상도근린공원, 성현드림숲공원>

상도동 사자암, 국사봉, 동작충효길(동작마루길)



' 동작구 사자암, 국사봉, 동작마루길 봄나들이 '

▲  국사봉 정상

▲  사자암 단하각

▲  동작마루길 (상도근린공원)

 



 

봄이 무럭무럭 익어가던 4월의 어느 따사로운 주말, 오래간만에 상도동(上道洞) 사자암을
찾았다. 사자암을 비롯하여 미답처(未踏處)인 국사봉 정상과 동작충효길6코스(동작마루길
)를 싹 둘러보고자 찾은 것으로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2시에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1호선을 타고 한강을 넘어 노량진역에서 두 발을 내렸다.

노량진역에서 동작구 마을버스 02번(사자암-노량진역)을 추가로 탑승하여 상도3동 뒤쪽에
자리한 사자암 종점에서 내렸는데, 여기서 서쪽으로 조금 가면 왼쪽(남쪽)으로 오르막 숲
길이 나타나니 바로 그 길의 끝에 국사봉 사자암이 걸려있다.


▲  사자암 오르막길 ①
오색 연등이 푸른 허공을 희롱하며 중생들을 사자암으로 인도한다.
만약 길이 햇갈린다면 그저 연등만 믿고 올라가면 된다.

▲  사자암 오르막길 ②



 

♠  국사봉 그늘에 둥지를 튼 아늑한 고색의 암자
상도동 사자암(獅子庵)

▲  사자암 일주문(一柱門)

상도동의 듬직한 뒷산인 국사봉(國思峰, 186.3m) 북쪽 자락에 포근히 터를 닦은 사자암은 조
계종(曹溪宗) 소속으로 1396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태조 이성계는 도읍을 개경(開京)에서 서울로 옮기고자 무학을 미리 보내 풍수지리를 살피게
했는데, 만리현(만리동)이 밖으로 도망가는 백호(白虎)의 형상이고, 호암산(虎巖山)은 북쪽으
로 달리는 호량이의 형국이라 풍수상 서울에게는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여 그 기세를 막
고자 호암산에 호랑이를 누른다는 뜻의 호압사(虎壓寺, ☞ 관련글 보기)를 짓고 사자 형상인
국사봉에 사자암을 세우는 등 야단법석을 떨었다는 것이다.
허나 무학의 창건설은 딱히 근거와 유물은 없는 실정이며,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가 17세
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다. 하여 빠르면 15세기 정도, 늦어도
16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호압사와 함께 서울을 지키는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
로 세워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만큼 옛 사람들에게 있어 풍수지리는 절대 진리나 다름이
없었다. 참고로 절 이름인 사자암은 국사봉 바위가 사자처럼 생겨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어쨌든 창건 이후 300년 이상이나 적당한 내력을 남기지 못했다가 18세기 한복판에 이르러 비
로소 제대로 된 활자 기록이 등장한다.
1726년 숙종의 6째 아들 연령군(延齡君, 1699~1719)의 부인 서씨가 너무 일찍 죽은 남편의 명
복을 빌고자 극락보전 아미타불(목조아미타여래좌상)에 개금불사(改金佛事)를 했으며, 1846년
에 지장탱과 신장탱을 조성하고 1880년에는 현왕탱을 봉안했다.
1910년 경암(敬庵)이 극락전과 산신각, 요사채를 중수했으며, 1936년 성월이 극락전을 보수했
다. 그리고 1977년 원명이 주지로 부임하여 조실당(祖室堂)을 짓고, 1985년에 극락보전과 단
하각, 수세전, 요사 2동을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극락보전을 비롯해 단하각과 수세전, 강당 등 7~8동 정도의 건물을 지
니고 있으며 절이 들어앉은 자리가 협소하여 극락보전 뒤쪽 가파른 언덕에 단하각과 수세전을
닦았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신중도와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지장시왕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00호),
영산회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8호), 현왕도(
울 지방유형문화재 289호), 목조보살좌
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50호) 등 지방문화재 6점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중 신중도와 목조아
미타여래좌상만 속세에 공개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친견이 극히 어렵다. 다만 영산회괘불도(
靈山會掛佛圖, 1909년 작)는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에만 잠깐씩 외출을 나오는 편이다.


▲  사자암에서 바라본 아담한 천하 (상도동, 대방동, 여의도 지역)

상도동이 개발되기 이전에는 숲속에 진하게 묻혀있던 산사였다. 허나 1960년대 이후 서울 인
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그로 인해 서울의 몸집이 지나치게 커짐에 따라 변두리인 이곳까지
거친 밀물처럼 집들이 들어찼다. 다행히 개발의 칼질이 사자암 앞에서 그 꼬랑지를 내리면서
사자암과 국사봉 윗도리는 자연의 공간으로 남게 되었고 사자암은 이렇게 자연(국사봉)과 속
세의 경계를 이루게 된 것이다.

비록 옛날만큼의 운치는 아니어도 국사봉의 푸른 숲이 절을 남쪽에서 감싸고 있어 산사(山寺)
의 내음은 변함이 없다. 절을 이루는 건물은 근래에 지어진 것들이라 겉으로 우러나오는 고찰
의 내음은 말라버렸지만 신중도와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통해 오랜 내력을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으며 시내와도 무척이나 가까워 접근성도 괜찮다. 게다가 암(庵)이란 이름에 걸맞게 절
의 크기도 조촐하여 두 눈에 넣어 살피기에도 그리 부담도 없다.


* 사자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3동 280 (국사봉1길 235-14 ☎ 02-825-1046)


▲  사자암 강당(講堂, 설법전)

사자암 경내로 들어서니 조금은 모를 답답함이 밀려온다. 터가 좀 작다보니<그래도 우리집보
다는 오지게 넓음> 그 좁은 공간에 건물을 꾸역꾸역 심어 여백의 미가 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극락보전도 강당과 좁은 간격을 두고 자리해 있어 탑이나 석등을 세울 공간도 마땅치 않다.

극락보전 맞은편에 자리한 강당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큰
집이다. 교육과 행사 공간으로 대방(大房), 설법전(說法殿)으로 불리며 종무소(宗務所)와 선
방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연등이 허공을 가르고 있는 강당 뒷쪽

▲  공양간을 지닌 동쪽 요사와 그 뒤쪽에 자리한 단하각 (오른쪽 건물)

▲  공양간에 담긴 조왕탱화(竈王幀畵)

사자암 공양간에는 부엌지킴이인 조왕신<竈王神 = 조왕(竈王), 조왕대신(竈王大神)>이 그려진
조왕탱이 있다.
조왕이란 이 땅 고유의 신으로 부엌을 지키는 존재이다. 부엌을 관리하던 여인네들이 주로 숭
상했는데 불교가 산신과 칠성 등의 민간신앙을 거의 흡수하면서 조왕 역시 호법신중(護法神衆
)의 일원으로 스카웃되어 그 모습도 다른 신과 보살에 못지 않게 화려하게 변신했다. 하지만
기존의 호법신중과 조왕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라 별도의 조왕탱으로 독립했다고 하며 그 성
격을 고려해 주로 요사나 공양간에 둔다.

조왕탱을 보면 제왕(帝王)의 복장을 한 조왕신이 수염을 어루만지며 조식취모(造食炊母)가 바
치는 후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노란 천이 깔려 고급진 이미지를 주는 책상에는 서적과 찻잔이
놓여져 있고, 그의 왼쪽에는 땔감 조달을 담당하는 담자역사(擔紫力士)가 항아리와 도끼를 들
고 서 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공양간을 관리하는 조식취모라 불리는 여자가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과일 쟁반을 조왕신에게 바친다.

부엌지킴이가 남자란 것이 매우 눈길을 끄는데, 조왕신이 꼭 남자만 있는 것은 아니며 속세에
서는 조왕할머니를 조왕신으로 많이 받들고 있다.

   ◀  범종(梵鍾)의 거처인 사자후(獅子吼)
극락보전 우측에는 범종의 보금자리인 범종각
이 있다.
범종은 1987년에 조성했고, 범종각은 1985년에
미리 지은 것으로 사자암에서는 범종각을 '사
자후'란 꽤 낯선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
는 모든 사람이 깨달음의 길에 오를 수 있도록
원음(圓音)의 사자후를 토하란 의미라고 한다.
또한 절의 창건 설화와 절의 이름도 그가 사자
후란 이름을 지니게 된 이유 중의 하나이다.


▲  극락보전(極樂寶殿)

강당과 마주하며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극락보전은 사자암의 중심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10년에 중건했으며, 1936년과 1985년에도 손질을 했다.
건물 안에는 극락전의 주인인 아미타3존상을 비롯해 신중도, 지장목각탱 등이 들어있으며 바
깥 벽에는 심우도와 달을 보면서 자신의 본성을 찾아서 본다는 간월견성(看月見性), 그리고
팔을 싹둑 잘라 믿음을 강하게 비췄다는 혜가대사(慧可大師)의 이야기를 다룬 벽화가 있다.


▲  극락보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46호

극락보전 불단에는 머리가 유난히도 큰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장, 아미타불(목조아미타여
래좌상)이 온후한 표정을 머금으며 중생들을 맞이한다. 그의 좌우로 녹색머리의 지장보살(地
藏菩薩)과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관세음보살이 자리하여 아미타3존상을 이루고 있는데,
그들 뒤로 아미타불이 서방정토에서 설법을 하는 장면을 담은 붉은 색채의 아미타후불탱이 든
든히 자리해 있다.

이곳 아미타불은 사자암에서 가장 늙은 보물로 예전에는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졌다
. 허나 근래 재평가를 해보니 17세기 초에 조각승인 현진(玄眞)이나 그의 제자들이 만든 것으
로 파악되고 있다. 다만 불상의 내력을 밝혀주는 복장 발원문(發願文)이나 유물이 없어 더 자
세한 것은 알 수 없으며, 17세기 초반 현진의 조각적 특징을 잘 갖추고 있고, 보존 상태도 양
호한 편이다.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그는 키 108cm로 1726년에 연령군의 부인 서씨가 세상을 떠난
남편과 다시 만날 것을 꿈꾸며 절에 돈을 대어 불상에 금칠을 했다. 1974년에 연화개금을 하
였고, 1980년에 다시 개금(改金)을 했는데, 몸을 가린 대의(大衣)의 옷주름은 배 아래 부분에
서 크게 'U'자형을 그리고 있고 두툼한 옷주름 형태를 나타내고 있으며, 얼굴과 머리 부분이
다소 커 보인다.
머리 중앙에는 육계(무견정상)가 두툼히 솟아있고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
는데 두 손은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  사자암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7호

아미타3존상 좌측에는 신중도가 액자에 고이 담겨져 있다. 이 탱화는 1846년에 조성된 것으로
불교를 지키는 호법신장들이 정신없이 담겨져 있어 그야말로 혼을 빼놓는다.

그림을 살펴보면 금강저(金剛杵)를 든 위태천(韋太天) 동진보살이 그림 상단 오른쪽에 독수리
깃이 달린 투구를 쓰고 있다. 연꽃가지를 든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은 화면의 상단 좌
측 중앙에 두고 토속신을 곳곳에 배치했으니 이는 기존의 토속신을 받아들여 성장한 우리나라
불교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가로 223cm, 세로 162cm의 크기로 지포(紙布) 위에 그려졌으며,
그림을 그린 이는 송은당 수찬(松隱堂 守讚)이다.

사자암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탱화가 4점씩이나 되건만 속시원히 공개된 것은 신중도가 거의
유일하며 이번에도 신중도 밖에는 친견하지 못했다.


▲  단하각(丹霞閣)

공양간(동쪽 요사) 뒤쪽 언덕에는 이름도 낯선 단하각과 수세전이 높게 터를 잡아 경내를 굽
어본다. 이들은 정면과 측면이 달랑 1칸인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로 서로 비슷하게 생겼다.

단하각은 1910년에 중수했다고 하며, 현재 건물은 1985년에 원명이 중건한 것으로 우리에게
꽤 익숙한 산신(山神)과 독성(獨聖, 나반존자)이 봉안되어 있다. 그러니까 산신각과 독성각의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보면 되겠다.


▲  단하각 산신탱(왼쪽)과 독성탱(오른쪽)
20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들로 세월의 때가 좀 끼어서 그럴까.
조금은 늙어 보인다.

▲  수세전(壽世殿)

단하각과 비슷하게 생긴 수세전은 인간의 목숨과 수명, 무병장수를 관장하는 칠성(七星)의 거
처이다. 보통 칠성(치성광여래)을 봉안한 건물을 칠성각이라 부르지만 여기서는 그 흔한 이름
대신 인간의 수명을 뜻하는 수세전을 이름으로 취해 좀 튀어보이게 했다.

이 건물은 1985년에 지어진 것으로 내부에는 같은 해에 조성된 칠성탱이 있으며, 앞서 산신과
독성이 봉안된 단하각처럼 '각'을 칭하지 않고 '전'을 칭하고 있어 칠성이 그들보다 1단계 높
은 대우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각'보다 '전'이 격이 더 높음)


▲  단하각 앞에 멋드러지게 솟은 소나무의 위엄

▲  사자암 마애사리탑(磨崖舍利塔)

일주문 직전에서 나무가 우거진 산자락(남쪽)을 보면 산비탈에 누운 커다란 바위가 여럿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중 일주문과 가장 가까운 바위를 잘 살펴보면 그 한복판에 네모나게 다져진
홈과 구멍이 마치 바위의 눈 같은 모습으로 시야에 보일 것이니 그가 바로 마애사리탑으로 그
주변에도 1기가 더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마애사리탑이란 바위에 네모지게 홈을 다지고 그 윗도리에 감실(龕室)을 내어 사리나 유골 등
을 넣어둔 것으로 흔히 생각하는 승탑(僧塔, 부도)의 모습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 쉽게 말하
면 바위에 새긴 사리 보관함으로 보면 된다. 이런 사리탑은 18~20세기에 나타나는 양식으로
그럴싸한 승탑(부도)을 짓기 어려운 절에서 절 주변 바위를 이용해 사리탑을 다졌다. 그저 바
위와 그의 피부를 파고 다듬는 도구만 있으면 되니 아주 쉽고 간편하다. (그런 사리탑을 강제
로 문신처럼 지녀야 되는 바위는 좀 고통스러울 듯)

사자암 마애사리탑은 20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승려의 유골함으로 여겨진다. (자세한 정
보가 없음;) 관련 명문이 새겨진 18~19세기 것과 달리 조그만 감실과 홈만 있어 조금은 빈약
하다.


▲  가까이서 바라본 조촐한 마애사리탑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인간의 소소한 마음 같다.

▲  하얀 글씨가 칠해진 또 다른 마애사리탑 (20세기 중~후반)



 

♠  동작구의 지붕, 국사봉(國師峰)의 감성을 누리다.

▲  사자암에서 국사봉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

사자암을 20분 정도 둘러보고 마애사리탑 옆에 있는 산길을 통해 국사봉으로 들어섰다. 사자
암이 상당한 위치라 넉넉잡아 10분 정도면 손쉽게 정상에 이르는데 각박한 속세살이와 달리
경사도 별로 급하지 않고 숲 또한 무성하여 시원한 기운이 주변에 감돈다. 어느 정도 오르면
능선에 이르게 되며 능선에 발을 올리기가 무섭게 정상에 도달하게 된다.


▲  태극기가 휘날리는 국사봉 정상

국사봉(186.3m)은 동작구(銅雀區)의 대표 지붕이자 서쪽 지붕이며, 관악구(冠岳區)의 북쪽 지
붕으로 동작구 상도동과 관악구 봉천동(은천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삼성산(三聖山)의 한
지맥이 북쪽으로 달려가 그 끝에 용솟음친 산으로 산줄기가 동서로 이어져 있으며, 동쪽은 국
립서울현충원을 품은 공작봉(서달산)과 연결된다.

국사봉이란 이름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전하고 있는데, 태종(太宗)의 장자인 양녕대군(讓寧
大君)이 이곳에 올라 멀리 서울과 경복궁(景福宮)을 바라보며 나라와 자신의 아우인 세종(世
宗, 충녕대군)을 걱정했다고 해서 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의 국사봉(國思峰)이 되었다고 하며,
무학대사가 산 북쪽에 사자암을 세웠는데 태조(이성계)가 그를 국사(國師)에 버금가게 대우했
다고 해서 국사봉이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것이 정답인지는 국사봉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두 설 모두 공통되게 서울과 나
라를 걱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사자암은 서울을 지키고자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세웠다고 함
> 비슷한 의미에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국사봉 정상에는 천하 제일의 국기, 태극기가 열심히 휘날리고 있고, 국사봉 표석과 삼각점,
운동시설, 쉼터 등이 닦여져 있다. 서북쪽 자락에는 사자암이, 동북쪽 자락에는 양녕대군 묘
역이 있으며, 동작구의 야심작인 동작충효길의 6번째 코스, 동작마루길(4.8km, 신대방3거리역
↔현충원 상도출입문)이 이 산의 신세를 지며 동서로 흘러간다.
높이는 낮지만 동작구와 관악구 사이에 봉긋 솟아 싱그러운 쉼터가 되어주고 있으며, 숲이 매
우 짙고 산세가 완만하여 산책 코스로도 아주 좋다. 그러다보니 동네 사람들의 왕래와 관심이
높아 휴일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이다. 비록 동네 뒷동산이자 지역 명소의 한계를 극복
하진 못했지만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서울의 이름난 뒷동산으로 거듭나리라 믿는다. 그만큼
싹수가 충분한 뫼이다.

* 국사봉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 관악구 봉천동


▲  국사봉 정상과 삼각점(三角點), 그리고 푸르른 봄하늘

▲  국사봉 정상에서 서쪽(신대방3거리역) 방향 능선길 (동작마루길)

▲  국사봉 정상에서 동쪽(능고개)으로 내려가는 능선길 (동작마루길)

국사봉 정상 주변은 나무가 무성하여 조망은 별로이다. 허나 나무들 사이로 동작구 서부와 관
악구 북부, 관악산 등이 시야에 들어와 그런데로 높이값은 한다.

나는 국사봉 동쪽 능선을 따라 능고개 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이 길은 동작마루길의 일원으
로 동작구의 지붕길<동시에 관악구의 북쪽 지붕길>인데, 인간이 무심히 그어놓은 관악구와 동
작구의 경계선을 따라가거나 서로 넘나든다.


▲  진달래가 연분홍 미소를 드리우는 국사봉 동쪽 능선길 (정상 방향)

▲  약간 흥분된 경사를 보이는 국사봉 동쪽 능선길 (능고개 방향)

▲  숲터널을 이루는 국사봉 동쪽 숲길 (능선길 주변)

▲  국사봉 생태연못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 계단길 (능고개)

▲  능고개에 자리한 국사봉 생태연못
부처꽃과 노랑꽃창포, 부들, 고랭이, 사초류, 버들류 등 다양한 수생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연못 한복판에는 작게나마 바위섬까지 띄워놓아
살며시 운치를 더한다.

▲  능고개 동쪽에서 바라본 국사봉의 위엄

국사봉 동쪽에 움푹 들어간 부분이 능고개이다. 상도4동 양녕대군묘역에서 봉천동으로 넘어가
는 고개로 지금은 그 밑에 4차선 국사봉터널이 뚫리면서 조금 한가해졌지만 고갯길의 기능은
크게 녹슬지 않았다. 국사봉과 상도근린공원, 동작마루길을 가려면 이 고개를 이용해야 되며,
국사봉중학교와 여러 아파트들이 주변에 있기 때문이다.

능고개라고 해서 이곳에 왕릉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제왕이 될 뻔했던 양녕대군의 사당<지덕사
(至德祠)>과 묘역이 있어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원래는 양녕대군의 묘역만 국사봉에 있고
사당인 지덕사(至德祠)는 서울역 동쪽(도동)에 있었으며, 후손들은 지덕사 주변에 모여 살았
다. 처음에야 잘들 살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가산이 거덜나고 살림이 궁핍해져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겨울 날, 노승이 지덕사 앞을 지나다가 하룻밤 묵고 가기를 청했다. 집주인은 흔
쾌히 방을 제공하고 자신이 먹을 죽까지 끓여서 대접을 했다. 다음날 그 사실을 안 노승은 크
게 감동을 먹고 답례를 하겠다며 주인을 데리고 지금의 능고개 자리로 데려가
'죽거든 이곳에 묘를 쓰시오' 알려주었다. 즉 기가 막힌 명당 자리를 잡아준 것이다. 그리고
몇 년 뒤, 집주인이 죽자 그 고개에 무덤을 쓰니 그 이후부터 자손이 번창하고 가세가 크게
살아났다고 한다. (지금도 양녕대군의 후손들은 잘나가고 있음)


▲  능고개 동쪽 능선길 (상도근린공원, 동작마루길)

▲  능고개 동쪽 능선길에서 만난 오리 솟대들
오리는 예로부터 인간 세계와 하늘을 이어주는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신성한 구역을 상징하는 솟대 기둥에 오리 등의 새 모양을
달아 하늘과의 소통을 꿈꾸었다.

▲  상도근린공원 정상에 심어진
4각형 정자

▲  상도근린공원 유아숲체험장 부근
동작마루길


▲  잘 닦여진 상도근린공원 동작마루길 (구암중교 뒤쪽)

▲  상도근린공원 생태터널 (상도로50길)

▲  구암고등학교 뒤쪽 동작마루길
키다리처럼 솟은 고등학교 건물이 그늘을 드리워준다.

▲  구암고등학교 뒤쪽 동작마루길 계단길 (성현드림숲공원 방향)

▲  푸르게 우거진 성현드림숲공원 서쪽 숲

▲  성현드림숲 향기정원 산책로

▲  성현드림숲과 하늘 높이 솟은 관악드림타운 아파트와의 어색한 조화
(철조망 바로 옆이 낭떠러지임)


능고개 동쪽 능선이자 관악드림타운 뒤쪽 산자락에는 성현드림숲공원이 닦여져 있다. 이곳은
무허가 달동네 판자집과 교회 등이 30년 이상 지저분하게 들어섰던 현장으로 2014년 관악구청
과 산림청, 지역 사람들이 협력해 그것들을 싹 밀어버리고 숲과 꽃밭을 다지면서 우울한 풍경
에서 싱그러운 풍경으로 180도 확 달라진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이곳 이름을 두고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성현드림숲'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성현(聖賢)은 이
곳의 행정동명인 '성현동'으로 그 성현이란 관악구 출신인 강감찬(姜邯瓚) 장군을 상징한다.
그리고 드림(dream)은 꿈을 뜻하는 꼬부랑 영어이다. 드림 대신 '성현꿈의숲','성현동 꿈의숲
'으로 했으면 참으로 크고 아름다웠을 것인데, 굳이 해괴망측한 영어로 해야 했는지 관련자들
의 대가리 속이 참으로 궁금해진다. 이 또한 이 땅의 아주 몹쓸 영어 사대주의의 더러운 폐해
이리라..

성현드림숲 남쪽에는 관악드림타운이 회색빛을 풍기며 들어차 있는데 산자락을 요란하게 깎아
서 다졌다. 하여 아파트와 접한 남쪽은 거의 아찔한 벼랑으로 이루어져 안전을 위해 철조망이
높게 펼쳐져 있다. 또한 아파트가 너무 밀착되어 있다 보니 공원에서 떠드는 소리가 아파트에
고스란히 퍼져 아파트 주민들에게 소음의 고통을 선사할 수 있다. 그러니 저녁이나 밤에 산책
할 경우 가급적 조용하게 하자.

성현드림숲을 끝으로 사자암에서 시작된 동작마루길(동작충효길6코스) 나들이는 막을 내린다.
마음 같아서는 현충원 상도출입문까지 가고 싶지만 몸도 지쳤고, 두 눈도 지쳤고, 카메라도
지쳤고, 햇님의 퇴근시간 또한 임박하여 여기서 깔끔하게 철수했다. 굳이 오늘이 아니더라고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비록 자주는 아니어도 언제든 찾을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
너무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다.

* 성현드림숲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1712-6 (성현로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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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공동묘지였던 서울 변두리의 이색 뒷동산, 구파발 이말산 <금성당 샤머니즘박물관, 최효원묘역, 은평둘레길3코스, 약수사>

구파발 금성당, 이말산



' 구파발 이말산 봄나들이 '

이말산 조선시대 무덤군
▲  이말산 조선시대 무덤군

금성당 이말산 숲길

▲  금성당

▲  이말산 숲길

 



 

봄이 겨울을 몰아내고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물들이던 4월의 한복판에 서울의 서남쪽 끝
으머리를 잡고 있는 구파발을 찾았다.

구파발(舊把撥)은 서울 서북부 교통의 요충지로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시골스런 모습
을 여실히 지니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구파발과 진관동 지역의 전원(田園) 풍경을 좋아했
고 그런 풍경이 쭉 유지되기를 바랬지만 개발 지상주의가 지배적인 이 땅의 현실 앞에 결
국 아파트 일색의 은평뉴타운으로 강제 성형을 당하고 말았다.

비록 구파발 주변에서 밭두렁과 논두렁 등의 경작지와 시골 풍경은 많이 사라졌으나 은평
뉴타운을 둘러싼 이말산과 북한산(삼각산), 앵봉산은 크게 건드리지 않아 산 속의 조그만
도시 같은 아늑한 분위기를 준다. 게다가 못자리골천, 구파발천 등의 짧은 하천이 뉴타운
내부를 흘러가고 뉴타운 북쪽에는 창릉천(昌陵川)이 흐르고 있어 은근히 배산임수(背山臨
水)의 형태까지 보인다. 그 뉴타운 한복판에 이말산이 자리해 뒷동산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 남쪽 자락에 조선 후기 무속신앙의 현장인 금성당이 있다. 이번 나들이는 바로 금성당
과 이말산을 잡으러 간 것이다.



 

♠  서울에 숨겨진 옛 무속신앙의 현장, 조선시대 굿당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금성당(錦城堂) - 국가 민속문화재 258호

▲  서쪽에서 바라본 금성당(샤머니즘박물관)의 외경

이말산 남쪽 자락이자 은평뉴타운 우물골 2단지 한복판에 기와집 일색의 금성당이 있다. 회색
피부의 밋밋한 아파트 숲에서 고고한 전통 한옥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곳은 거의 새집처럼
보이지만 이래봬도 19세기 말에 지어진 무속신앙용 기와집으로 그 성격에 걸맞게 샤머니즘박
물관까지 겸하고 있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금성당은 세종의 6번째 아들인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을 주신(主
神)으로 봉안한 당집이다. 그래서 집 이름도 금성당을 칭하고 있는데, 금성대군은 2번째 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이 조카인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한 것에 잔뜩 불만을 품고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순흥부(順興府, 경북 영주시 순흥면)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거기서도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단종 복위를 작당하다가 또 발각되어 형이 보낸 쓰디쓴
사약 1사발을 들이키고 죽게 된다. 그때 이보흠도 처단되었으며, 순흥 백성들까지 복위에 가
담했다는 이유로 대부분 학살을 당하면서 순흥 지역은 완전히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순흥
고을도 강제로 폐쇄되어 풍기, 영주에 임시 통합됨)

이후 백성들 사이에서 금성대군과 단종에 대해 측은한 마음이 생겨났고 제와 굿을 지내 그들
의 넋을 달래주었다. (강원도 남부 지역은 단종을 산신으로 추앙하고 있음) 그러다보니 자연
히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무당들은 영업 차원에서 금성대군을 영험한
신으로 영입하기에 이른다. 서울에서는 진관동(津寬洞)과 망원동(望遠洞), 월계동(月溪洞)의
각심절마을에 그를 위한 금성당이 지어져 서울 토속신의 하나로 굳게 자리를 잡았다.

허나 20세기 중반 이후 무속신앙의 쇠퇴와 개발의 칼질로 망원동과 월계동 금성당이 1970년대
에 사라졌으며, 진관동은 개발제한구역에 묶인 탓에 다행히 살아남아 계속 굿당의 역할을 수
행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구파발 지역에 은평뉴타운이 닦이게 되면서 퇴락된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철밥통 행정당국과 개발업자의 의해 가루가 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다행히 양종승 박사
와 뜻있는 이들이 금성당 구명에 나서면서 간신히 목숨을 유지하게 되었고, 금성당의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문화재청이 2008년 중요민속자료(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하면서 개발의 칼질
로부터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된다.

한때 서울시는 그를 은평뉴타운 밖으로 내보내 복원하려고 했으나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인 그
를 옮기는 것이 영 바람직하지 않아 제자리에 2010년 복원, 정비하고 주변에 작은 공원을 닦
아서 세상에 내놓았다.
비록 복원되어 개방은 되었으나 굿당의 역할은 이미 상실된 상태라 민속촌 한옥처럼 거의 무
늬만 남은 한가한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2016년 5월, 그런 금성당에게 활력을 주는 일이 생
겼다. 바로 양종승 박사가 세운 샤머니즘박물관이 이곳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양종승은 2013년 5월 사재를 털어 정릉동 국민대 남쪽에 샤머니즘박물관을 세웠다. 그는 우리
나라와 중원대륙, 히말리야, 몽골의 무속 유물 2만여 점을 보유하고 있었고 샤머니즘 관련 서
적과 영상/음향자료도 넉넉히 가지고 있었다. 또한 금성당을 없애려는 철밥통과 개발업자들을
보기 좋게 참교육시켜 금성당 보존에 크게 공헌을 한 이력이 있어 은평구청은 그에게 금성당
으로 옮길 것을 제안, 그에 따라 박물관을 이곳으로 가져와 금성당의 완전한 지킴이가 된 것
이다.
무속신앙의 현장과 그 신앙을 다루는 전시/교육 공간까지 그에 걸맞는 두 얼굴을 지닌 의미가
깊은 현장으로 보유한 유물은 많지만 공간이 매우 좁아서 극히 일부만 꺼내 본채, 행랑, 안채
, 본채 뜨락 등에 전시하고 있다.

▲  금성당 대문 (대문채)

▲  본채와 안채 경계에 놓인 오리 솟대

금성당은 인왕산(仁王山), 평창동(平倉洞) 보현산신각과 더불어 서울 지역 무속신앙의 성지(
聖地)로 1880년대 이전에 지어졌다. 지역 주민과 무당들이 무속신앙을 벌이고자 지은 공간으
로 조선 때 무악재에서 구파발까지 많은 무속 당집이 있었는데 서울로 들어오는 명/청나라 사
신과 반대로 중원대륙으로 가는 조선 사신의 안녕을 빌고 악의 기운을 없애는 의미에서 굿을
지냈다. 그러다보니 금성당은 나라에서 많은 지원을 받았다.
금성대군의 생일인 음력 3월 24일에 마을의 대동단결과 나라의 안녕을 위한 당굿을 열어 그의
넋을 기렸으며 왕년에는 서대문과 왕십리 등 서울의 유명한 무속인과 악사들이 문턱이 마르고
닳도록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뉴타운 개발 이전까지 당지기가 집을 지켰고 굿판도 계
속 이루어졌다.

금성당의 구조는 본채와 안채, 아래채, 대문채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는 금성대군과 여러 신
이 봉안되어 있고, 동쪽에 'ㄱ'자의 안채를 두어 금성당을 관리하는 당지기와 시봉자(侍奉者)
가 생활했다. 안채는 중부지방의 흔한 기와집 형태이나 동쪽 방을 '田'자 형태로 크게 지은
것은 금성당만의 특징이다.
본채에 있던 무신도<巫信圖, 금성도(금성대군의 영정)>와 무구(巫具)류, 제사도구 등은 보존
처리를 위해 서울역사박물관에 가 있으며 불화(佛畵)의 명가로 유명한 만봉(萬奉)의 제자 조
영희가 그린 금성도의 복사본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  금성당 본채와 행랑채

대문채를 들어서면 왼쪽(북쪽)에 본채와 행랑이 있다. 본채는 마루로 이루어져 있어 굿과 제
사를 지내기에 좋으며, 대청 뒤쪽에는 벽감(壁龕)을 두어 금성대군(금성님) 등을 봉안했다.
현재 금성도(금성님) 등 이곳의 오랜 유물은 서울역사박물관에 가 있으며, 샤머니즘박물관 유
물과 금성도 사본이 본채와 행랑채에 담겨져 있다. 허나 그들 내부는 매주 목/금(10~17시)에
만 잠깐씩 문이 열리며, 금성당 건물과 뜨락, 안채 서쪽과 마루에 놓인 유물들은 요일에 상관
없이 관람이 가능하다. (금성당 입장은 보통 17시까지, 입장료 없음)

나는 그런 사연을 알지 못한 채, 온 터라 전시 유물은 만나지 못했다. 금성당은 매주 문이 열
려있지만 정작 박물관의 중심인 본채와 행랑 내부는 1주에 딱 이틀만 만날 수 있는 비싼 존재
였던 것이다. 하여 여러 달 이후 금요일에 다시 인연을 지어 내부 유물까지 싹 살폈다.


▲  굳게 닫혀진 금성당 행랑채와 본채

▲  안채 서쪽에 기대어 선 샤머니즘박물관의 무속 유물들
개성 넘치게 생긴 저 작은 존재들은 몽골이나 히말리야, 티벳에서
넘어온 것으로 여겨진다.

▲  'ㄱ'자 모습의 금성당 안채

본채 맞은편에는 아래채가 있다. 현재 관리사무실로 쓰이고 있는데 그 옆구리를 지나 동쪽으
로 가면 안채 뜨락과 안채 정면이 모습을 보인다.
안채는 금성당을 관리하는 당지기와 시봉자가 머물던 공간으로 지금은 박물관 사무실과 자료
실(교육실), 박물관 전시공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허나 그날은 박물관 공개일이 아니므로 전
시 공간으로 쓰이는 부엌 등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고, 민속유물이 있는 마루만 개방되어
있다. 그러니 그날 만난 박물관 유물은 안채 마루와 안채 서쪽 벽에 있는 석조 유물 뿐이다.

▲  금성당 아래채(왼쪽)와 대문채

▲  도자기와 여러 민속유물이 놓인
안채 마루 (왼쪽이 박물관 사무실)


▲  안채 뒤쪽 장독대와 부뚜막, 그리고 낡은 가마솥

안채 옆구리를 통해 뒤쪽으로 가면 장식용으로 놓여진 장독대들이 있다. 그 옆에 부뚜막이 있
는데 금성당이 바쁘게 움직이던 시절, 부엌과 여기서 음식을 했으며, 누렇게 뜬 저 가마솥을
거쳐간 음식과 국거리는 동해바다를 뒤덮을 정도로 많았다. 허나 이제는 은퇴하여 뒷방 마님
처럼 아주 잉여로운 신세가 되었다.


▲  안채 뒤쪽 (굴뚝과 돌로 다져진 화단)
금성당은 보이지 않는 뒷통수 부분도 적지 않게 신경을 썼다. 화단을 닦아서
나무와 꽃을 심었고, 본채 뒤쪽에는 샤머니즘박물관에서 수집한 여러
스타일의 장독대들이 놓여져 빈 공간을 채우고 있다.

▲  본채 뒤쪽에 가득 널린 장독대들 ①

▲  본채 뒤쪽에 가득 널린 장독대들 ②

▲  봄이 내려앉은 금성당 동쪽 돌담

▲  금성당 본채의 뒷모습

금성당 주변은 아늑하게 공원이 닦여져 있다. 그 좌우로 은평뉴타운 우물골2단지가 가득 들어
앉아 아파트 속의 이색 공간을 자아내고 있는데 다른 아파트단지와 달리 녹지 공간이 많고 바
로 뒤에 이말산이 있어 주변이 그리 번잡해 보이지는 않는다.

* 금성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175-836 (진관2로 57-23, ☎ 02-389-6522)
* 금성당 샤머니즘박물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조선시대에 거대한 공동묘지 속으로, 이말산(莉茉山)

▲  최효원 묘역 (해주최씨와 남양홍씨 묘역)

금성당을 둘러보고 이말산의 품으로 들어서고자 은평메디텍고등학교(은평공고) 뒤쪽으로 이동
했다. 그 구석에도 아파트(우물골2단지 7블록)들이 들어차 있는데 그 동쪽 산자락을 올라서니
말끔한 모습의 최효원 묘역이 마중을 나온다.

묘역의 주인공인 최효원(崔孝元, 1638~1672)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아버지이
다. 숙빈최씨와 영조는 많이들 알지만 정작 그들의 뿌리인 최효원은 인지도가 극 밑바닥이라
아는 이가 적다. (나도 여기서 처음 알았음)
그는 해주최씨 집안으로 자는 의경(義敬)이며, 아버지는 최태일(崔泰逸), 어머지는 평강장씨(
平康張氏)이다. 남양홍씨인 홍계남의 딸과 혼인했으며, 무관으로 관직에 진출해 선략장군 행
충무위 부사과(宣略將軍 行忠武衛 副司果, 종6품)까지 지내다가 34살에 사망했다.
그에게는 딸이 둘 있었는데,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하여 막내딸은 궁궐 무수리로 들어갔다. 그
녀는 숙종의 왕후인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잠시 폐위의 고통을 받자 눈물을 흘리며 그의 복귀
를 빌었는데, 그 모습이 우연히 숙종의 눈에 띄면서 예민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 인
연으로 연잉군<延礽君, 영조>를 낳게 되었고 희빈장씨의 모진 구박을 이겨내면서 숙빈최씨로
승급된다.

1734년 영조는 외할아버지인 최효원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하면서 묘비를 세우고 묘역을
손질했다. 딸과 외손주 덕분에 그의 존재와 무덤이 적게나마 호강을 누리게 된 것이다.


▲  최효원과 남양홍씨 합장묘 (오른쪽이 홍계웅 묘, 왼쪽이 홍계남묘)

최효원묘는 묘비와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망주석(望柱石) 1쌍을 지니고 있다. 예전에
는 양석(羊石)도 1쌍 있었으나 1988년경 어느 바람직하지 못한 작자들이 그 무거운 돌덩이를
훔쳐가 버렸다.
묘비는 지붕돌을 갖춘 2면비로 내용은 영조가 친히 쓴 것이며 글씨는 당시 명필로 꼽히던 서
평군 이요(西平君 李橈)가 썼다. 이요는 왕족 출신으로 학문이 깊고 음악과 글씨에 능했는데,
영조(英祖)의 신임이 두텁자 부정하게 재산을 모아 사치향락을 일삼기도 했다.

최효원 묘역에는 총 6기의 무덤이 있는데 그의 아들과 손자, 증손자 뿐 아니라 장인(홍계남)
과 처남(홍계웅)의 묘도 같이 있다. 이는 최효원이 처가 묘역에 묻히면서 두 집안(해주최씨+
남양홍씨)이 같이 있게 된 것으로 장인과 처남 무덤 사이에 아주 눈에 띄도록 큼지막하게 자
리해 있어 딸과 외손주의 덕을 톡톡히 봤음을 알려준다. (최효원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묘는
여기서 가까운 불광2동에 따로 있음)
이들 무덤은 묘비부터 상석, 향로석, 망주석까지 대체로 17~18세기 무덤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으나 후손들의 정성이 너무 과한 탓에 무덤 밑도리에 20세기 스타일의 호석(護石)이 둘러져
옛 무덤으로서의 멋이 다소 떨어졌다. 윗도리는 17~18세기 옷인데 밑에는 20세기 옷을 입혀놓
았으니 그게 어디 어울리겠는가?

* 최효원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85

      ◀  홍계웅(洪繼雄)과 김화김씨 묘
홍계웅은 홍계남의 아들로 최효원의 처남이자
숙빈최씨의 외삼촌이 된다. 최효원보다 낮은
봉분(封墳)과 머리가 둥근 묘비, 그리고 상석
이 전부인 단출한 모습이다.

      ◀  최수강(崔壽崗)과 김해김씨 묘
최수강은 최효원의 손자이자 최후의 아들로 영
조 시절에 무관을 지냈다. 왼쪽 비석은 최수강
의 아들인 최진해(崔鎭海)와 해풍김씨의 묘비
이다.

▲  늘씬하게 생긴 최수강 묘비

▲  최후(崔厚) 묘비


▲  최후와 순흥안씨 묘
최후는 최효원의 아들이자 숙빈최씨의 오라버니로 외할아버지(홍계남) 무덤 바로
앞에 있다. 묘비와 상석, 향로석, 망주석까지 갖추고 있어 최효원 묘 못지
않은 규모를 지녔다.

▲  최효원의 장인인 홍계남(洪繼男) 묘비
세월을 너무 예민하게 탄 것일까? 다른 비석에 비해 피부가 너무 검다.

▲  장대한 세월에게 목을 빼앗긴 가련한 동자석(童子石)

최효원 묘역을 둘러보고 본격적으로 이말산 더듬기를 시작했다. 이말산은 구파발역 동쪽에 자
리한 해발 132.7m의 야트막한 뫼로 군부대가 있는 북쪽 끝을 제외하고 모두 은평뉴타운에 감
싸여 있어 자연히 은평뉴타운의 포근한 뒷동산이 되었다.

산의 이름은 말리화(茉莉花)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리(이말)는 말리화
차, 쟈스민차, 향편으로도 불리며 말리화의 향을 잎차에 스며들게 하여 만든 것이 화차(花茶)
가 된다.
허나 말리화차가 외래종인 것을 감안하면 이 산에 정말 그것이 많았는지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말리화를 재배하는 공간이 있던 것도 아니다. 게다가 이말산에 안긴 무덤 중
숙종~영조 시절에 활동했던 이영수의 묘가 있는데 그 묘비에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다른 이말산
(李末山)이라 쓰여 있어 말리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에 회의감을 던지게 한다.
그런데 영조 시절 무덤인 이세철 묘비와 홍세태(洪世泰)의 묘지명(墓誌銘) 등에는 이말산(茉
莉山)이라 나와있어 18세기부터 한자가 슬쩍 바뀐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두(吏讀)처럼 순
우리말을 한자의 음만 가져와 표기한듯싶다. 참고로 지금 이말산에는 말리화는커녕 비슷한 꽃
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말산은 1977년 진관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시민공원의 역할을 했으나 본격적으로 알려지고
꾸며진 것은 은평뉴타운 개설 이후이다. 둘레길 유행에 따라 은평구는 그 산에 은평둘레길3코
스인 이말산 묘역길(거리 2.7km)을 닦았는데 그 길은 구파발역에서 이말산 주능선을 가로질러
은평한옥마을까지 이어진다.


▲  묘비와 상석만 덩그러니 남은 무덤
무덤 봉분은 장대한 세월이 무심히 밀어버리면서 졸지에 산길이 되어버렸다.


조선 때는 한양도성(서울) 밖 10리 이상부터 무덤을 쓸 수 있었는데, 북서쪽은 이말산, 북동
쪽은 초안산(楚安山, 도봉구 창동, 노원구 월계동 ☞ 관련글 보러가기)이 그 적격지였다. 게
다가 이들은 앞뒤로 하천이 흘러 은근히 배산임수의 형세를 이루고 있어 무덤 선호지로 인기
가 대단했다.
그러다보니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서자인 은언군(恩彦君) 같은 왕족부터 해서 양반사대부, 중
인, 상궁, 내시, 서민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앞다투어 이말산에 뼈를 묻으면서 지금까지
수습된 무덤만 1,700여 기에 달한다. (은언군묘는 파괴되어 사라짐) 이중 무연고가 313기, 나
머지는 연고가 있으며, 묘비와 문인석, 망주석, 상석 등의 석물도 13종 1,488기가 확인되어
산 전체가 거대한 공동묘지이자 살아있는 조선시대 무덤 박물관이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비슷한 성격의 초안산은 조선시대 무덤들이 몰려있는 곳을 중심으로 국가
사적으로 애지중지되고 있고, 각심절 마을에 있는 정간공 이명(貞簡公 李蓂) 묘역은 지방문화
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나 이말산은 그보다 무덤도 더 많고 그에 못지 않은 가치를 지녔음에
도 어떠한 문화재로도 지정되지 못한 채, 버려져 있다는 것이다.
초안산과 더불어 내시(내관) 무덤이 많은 곳으로 꼽히며 조선 초기부터 후기까지 다양한 무덤
과 무덤 석물이 공존하고 있어 무덤 답사지로는 아주 좋다. 또한 산 곳곳에 무덤이 널려있고
심지어 산길에도 파괴된 무덤의 잔해들이 즐비해 산책의 흥미를 유발시키며 여름에는 납량(納
凉) 놀이를 벌이기에도 좋다. 어두컴컴한 산길을 걷다가 갑자기 무덤이나 인상을 쓴 문인석,
동자석이 툭 튀어나온다면 정말로 염통이 제대로 수축될 것이다.


▲  낙엽에 묻혀 고통받고 있는 상석과 향로석
저런 꼴을 보면 무덤을 쓰는 것도 결코 좋은 것은 아니다. (후손의 관리가
끊기면 바로 게임 끝나는 것임)

▲  세상을 등지며 꺼꾸로 엎어진 문인석(文人石)
자신을 살피지 않는 무심한 세월과 세상에 대한 원망의 표현일까? 얼굴을
땅에 묻고 세상을 등진 채, 엎어져 있다.

▲  봄이 뿌려지고 있는 이말산 산길 (이말산 동남쪽 자락)

▲  나란히 목을 잃은 동자석들 ①
망나니의 칼과 세월의 칼날은 모두 목만 취하는 모양이다. 이 세상에 목을 취해야
될 썩은 작자와 무리들이 적지 않거늘 왜 그들은 건드리지 않고
죄없는 저들만 건드리는지 모르겠다.

▲  나란히 목을 잃은 동자석들 ②

▲  이말산 능선길 (북쪽 방향)

▲  부드럽게 펼쳐진 이말산 능선길 ①

이말산은 흙산이라 산길과 능선길이 거의 부드럽다. 산세도 일부를 제외하면 느긋한 편으로
구파발역(3호선)과 진관동주민센터, 진관초교, 약수사, 연화사, 우물골2단지7블록, 삼천사/
진관사입구 정류장 등에서 접근하면 되며, 구파발역에서 산의 동북쪽 끝 봉우리까지 30~40분
이면 충분하다. (거기서 부근으로 하산하면 40~50분이면 끝)


▲  부드럽게 펼쳐진 이말산 능선길 ②

▲  부드럽게 펼쳐진 이말산 능선길 ③
산길 주위로 방치된 옛 무덤들이 적지 않다. 하여 밤에 오면(달이 뜨지 않은
밤이나 비오는 날 밤) 염통이 제대로 쫄깃해질 것 같다.

▲  흙과 나무에 깔린 무덤 상석

▲  머리가 덥수룩한 옛 무덤들
묘비는 사라졌지만 상석과 향로석은 잘 남아있다.

▲  이말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향로봉과 족두리봉
북한산이 남성적인 뫼라면 이말산은 귀여운 여동생 같은 작고 아늑한 뫼이다.



 

♠  이말산 마무리

▲  무덤이 떼거지로 나타나다 (묘비 1기와 상석 6기)

이말산 동북쪽 끝 봉우리에는 네모난 쉼터와 약간의 운동시설이 있다. 여기서 북쪽과 동쪽은
군부대로 막혀있어 서쪽(진관초교)으로 내려가거나 남쪽 능선길로 돌아나가야 되는데, 일몰까
지는 아직 여유가 넘쳐 남쪽 길로 다시 나가면서 옛 무덤들을 보물찾기 하듯 더 찾아보기로
했다.
남쪽을 바라보며 능선길을 거닐다 보니 앞서 보이지 않던 무덤들이 쏙쏙 시야에 걸려든다. 특
히 제각말5-3단지 뒤쪽인 동쪽 산자락에 여러 기가 몰려있는 무덤군들이 여럿 나타나 나에게
적지 않은 흥분감을 주었다. 역시 한쪽 방향으로만 향하면 놓치는 것이 많은 법이다.


▲  이말산 동쪽 자락 무덤군
대부분 묘비(묘표)를 지니고 있다. 그들 중 1기는 문인석까지 지니고 있어
잘나가던 집안의 묘역임을 알려준다. (누구 묘역인지는 확인하지 않았음)

▲  장대한 세월에 꼬꾸라진 묘비
그를 거느렸던 무덤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묘비만 뿌리가 뽑힌 채,
자빠져 있다. 무덤은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 저 꼬라지가 되어 버리니
굳이 많은 돈을 들여 사후(死後) 흔적을 남기는 것도 다 부질없다.

▲  장대한 세월에게 제대로 깨지고 요절난 묘비들

▲  칠원윤씨 윤용(尹鎔) 묘역

윤용은 16~17세기 인물로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1631년 이곳에 무
덤을 썼으며<묘비에는 이곳 지명이 '양주군 신혈리 택사(神穴里 澤寺)'로 나옴> 부인 예안이
씨와 쌍분(雙墳)을 이루고 있다. 묘비(묘표)와 상석, 조그만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을 갖추
고 있으며, 후손들의 손길이 여전하여 호석도 새로 갖추었다.


▲  칠원윤씨 윤응린(尹應麟), 하동정씨 부부묘
윤응린은 16~17세기 인물로 자헌대부 형조판서를 지냈다. 비석과 호석은
20세기에 후손들이 새로 갈아넣은 것들이라 장대한 시간의 무게는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  칠원윤씨 윤용, 윤응린 묘역 전경

▲  상선(尙膳) 노윤천(盧允千) 묘역

노윤천은 16세기에 활동했던 내시(내관)이다. 1545년 명종(明宗) 즉위 때 승전색(承傳色)으로
써 왕명을 전달한 공이 있어 그해 8월, 가자(加資)되었으며 1546년 1월, 위사원종공신(衛社原
從功臣)에 책록되기도 했다.
세월의 불도저 같은 흐름 앞에 무덤 봉분은 사라지고 묘표(묘비)와 상석, 문인석 1기가 남아
있으며, 향우측에 비슷한 모습의 묘표가 있어 이곳이 그의 선영(先塋)이었음을 알려준다. 묘
비는 피부가 많이 손상되어 대부분의 글씨는 확인할 수 없다.

▲  무심한 세월 속에서도 표정 하나
잃지 않은 노윤천 묘역 문인석

▲  정체성을 잃은 어느 상석
무덤 상석이 졸지에 잠깐 쉬었다 가는
산길 쉼터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  녹음이 짙어가는 이말산 서쪽 능선길
능선길을 거닐며 무덤과 석물을 찾는 재미가 참 쏠쏠하다. 이번 이말산 더듬기에서
대략 찾아낸 무덤만 어림잡아 200기는 넘을 것이다.


▲  방공호 시설이 있는 이말산 정상

이말산 정상은 산 서쪽 부분에 있다. 정상(132.7m)은 평평한 넓은 공간으로 방공호 등의 군사
시설이 있으나 이곳이 공원으로 해방되면서 버려진 상태이며 은평뉴타운과 앵봉산, 북한산 향
로봉 등이 시야에 보이나 수목(樹木)이 울창하여 조망의 깊이는 별로이다.


▲  소탈한 모습의 이말산 정상 표목(標木)

▲  개나리들이 격하게 반겨주는 약수사 방면 산길 ▼



▲  이말산 서북쪽 자락에 있는 약수사(藥水寺)

이말산 정상에서 구파발역으로 내려가려고 했으나 깜찍하게 손짓하는 개나리들에게 마음이 끌
려 약수사로 길을 틀었다.
4~5분 정도 내려가니 산과 아파트 경계에 자리한 약수사가 마중을 나온다. 이 절은 고색이 아
직 여물지도 못한 20세기 후반 현대 사찰로 20여 일 정도 남은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을
위해 벌써부터 연분홍 연등으로 경내를 곱게 다듬은 상태였다. 그 오색 연등에 순백 벚꽃까지
어우러져 조촐하게 별천지를 구가하고 있어 이말산에서 많은 것을 보고 담느라 힘겨운 두 눈
의 피로감을 크게 덜어준다.


▲  오색 연등으로 정신이 없는 약수사 경내
약수사를 끝으로 4월 한복판에 찾아간 이말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이말산, 진관근린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74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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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능선 밑에 포근히 깃든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승가사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북한산(삼각산) 승가사



' 북한산 승가사 5월 나들이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  승가사 경내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날, 북한산(삼각산) 승가사를
찾았다.
간만에 승가사를 찾은 이유는 별거 없다. 그곳에 깃든 늙은 마애불과 승가대사상이 문득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집에서 2시간대면 충분
히 접근이 가능하다.

햇님이 중천에 머물던 14시, 승가사 아랫 동네인 구기동(舊基洞)에 도착했다. 보통 승가
사에 갈 때는 구기동계곡을 경유했으나 이번에는 지름길인 비봉4길을 이용했는데 지름길
인 대신 경사가 좀 각박하다.
비봉4길은 러시아대사관저와 건덕빌라를 지나면서 숲길로 바뀌는데, 차량 접근을 위해서
길 포장을 해놓았으나 자연과 세월이 할퀴고 간 흔적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어 노면 상태
는 영 좋지가 못하다. 그런 길을 건덕빌라 기준으로 30~40분 정도 오르면 승가사 갈림길
이 나오면서 일주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승가사까지 걸어가기 귀찮거나 체력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러시아대사관저 앞에서 출발하
는 승가사 셔틀 봉고를 타면 된다. (봉고 운행시간은 승가사에 문의 요망) 길 상태가 좋
지 않아 차가 다소 흔들리는 단점이 있으나 그것을 타면 승가사 경내 밑(호국보탑 밑)까
지 태워준다. (차비는 1천원 정도 받음)


▲  소나무가 무성한 승가산림초소 숲길 (비봉4길)



 

♠  승가사 입문

▲  청기와를 눌러쓴 승가사 일주문(一柱門)

승가사 갈림길에서 승가사로 인도하는 길은 2개인데, 그중 왼쪽(북쪽) 계단길을 오르면 승가
사의 내력과 가람 배치도가 담긴 안내문과 함께 청기와로 머리를 장식한 일주문이 마중을 한
다.
이 문은 1985년에 지어진 것으로 승가사 일대가 국립공원 건축제한구역이라 여러 번 강제 철
거를 당하기도 했다. 간신히 국립공원관리공단을 설득해 지금의 문을 마련했으며 그로 인해
북한산(삼각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절 일주문이 되었다. 평방(平枋)에는 원담(圓潭)
이 쓴 '三角山 僧伽寺'란 현판이 걸려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  경내로 인도하는 청운교 계단길

일주문을 지나면 경내까지 숨 가쁜 경사길의 연속이다. 중간인 호국보탑까지는 경사의 패기를
조금이나마 줄이고자 청운교(靑雲橋)란 계단길을 닦았는데, 계단이 장대하여 기를 질리게 한
다. 계단 앞 좌우에는 용조각이 입을 벌리며 혹시 모를 바람직하지 않은 기운을 경계하고 있
고, 계단 중간 오른쪽에는 승가사의 내력이 담긴 사적비가 있으며, 그 계단의 끝에 승가사의
새로운 명물인 호국보탑이 자리해 있다.

▲  청운교 표석

▲  삼각산 승가사 사적비(事蹟碑)


▲  청운교 계단에서 바라본 천하
북악산(백악산) 산줄기와 서울 도심, 강남 지역까지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승가사의 자랑, 호국보탑(護國寶塔)

끝없이 펼쳐진 계단에 기가 질린 중생은 그 계단의 끝에 장대하게 자리한 호국보탑 앞에 다시
한번 주눅에 잠긴다.
인도나 동남아의 불탑(佛塔)처럼 생긴 호국보탑은 승가사가 예로부터 호국기도 도량임을 천하
에 내세우며 조국 통일을 염원하고 동시에 절의 위세도 강조할 겸 많은 돈을 들여서 장만했다.
그러다보니 호국보탑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가 세워짐으로서 탑이 없던 허
전함을 제대로 극복하게 되었다. (정식 이름은 '민족통일 호국보탑')

장엄한 모습의 이 탑은 절 밑의 바위와 나무를 싹 밀어버리고 지반을 다져 만든 것으로 1987
년에 짓기 시작해 1994년에 완성을 본 승가사의 최대 프로젝트였다. 탑의 높이는 무려 25m로
9층석탑이며, 탑신(塔身) 밑에는 감실(龕室)을 만들어 경주 석굴암(石窟庵)을 조금 재현했다.
감실에는 석굴암처럼 본존불(本尊佛)과 11면(面) 관세음보살상, 10대 제자상을 돋음새김으로
배치하고 연꽃장식 덮개를 씌웠으며, 바깥쪽에는 사천왕(四天王)을 배치해 본존불과 탑을 지
키도록 했다. 사방으로 놓인 계단을 통해 감실 내부로 들어갈 수 있으나 다소 좁으며,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된다.
탑 주위로는 문수동자상과 보현동자상,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빼곡히 배치했으며, 탑신 뱃
속에는 인도 정부에서 기증을 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1과와 청옥와불(靑玉臥佛) 1좌, 나한(羅
漢)의 사리 2과, 패엽경(貝葉經) 1질, 무구정광다라니경 경판 1질, 철제구층탑 99기, 화엄경
(華嚴經) 9질을 봉안했다.

조그만 감실 불당까지 갖춘 매우 이형적(異型的)인 탑으로 지금이야 과시용이다 뭐다 해서 이
러쿵저러쿵 말이 많지만 100년 이후에는 한국미술사 20세기 석탑 부분에서 크게 이름을 날릴
유명 인사로 등극할 지도 모른다. 그러니 미래의 문화유산에게 미리 눈도장을 찍어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  온갖 조각들로 정신이 없는
호국보탑 감실

▲  호국보탑 감실에 봉안된
석가여래 본존불


호국보탑에서 경내까지는 2갈래의 길이 있다. 왼쪽 계단길로 가는 길은 호국보탑을 만들면서
새롭게 닦은 길이고, 오른쪽에 조금 가파르게 형성된 길이 기존 길이다. 그럼 여기서 승가사
의 내력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북한산(삼각산)의 주요 봉우리인 비봉(碑峰, 560m) 동쪽 430m 고지에 자리한 승가사는 756년
에 수태(秀台)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당나라 고종(高宗) 시절 중생들로부터 생불(生佛)
로 칭송을 받던 승가대사(僧伽大師)의 행적에 크게 감동을 먹고 그를 기리는 뜻에서 절 이름
을 승가사라 했는데, 동문선(東文選)에는 1107년에 이예(李預)가 쓴 중수기가 있으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옛날 낭적사(狼跡寺) 스님 수태가 승가대사의 거룩한 행적을 익히 듣고 삼각산 남쪽에 좋은
자리를 정해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쪼아 형상을 새기니 대사의 어진 모습이 더욱 우
리나라에 비추었다. 나라에서 천지의 재변과 홍수와 한발 등의 재난이 있으면 기도를 드려 물
리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언제나 효험이 있었다'

1024년 지광(智光)과 성언(成彦)이 중창했고, 1090년에는 구산사(龜山寺) 주지였던 영현(領賢
)이 선종(宣宗)의 명을 받아 중수했다. 1099년에는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숙종(肅
宗)과 함께 남경(南京, 서울 도심부로 여겨지나 확실하지 않음)을 찾아 인근 장의사(藏義寺)
와 승가사에 들렸는데, 이때 불상을 개금하고 불당을 중수했다.

1422년 세종(世宗)이 전국의 사찰을 통합해 선종(禪宗)과 교종(敎宗) 2개로 나누자 선종에 줄
을 섰으며, 그 시절 고승(高僧)으로 이름을 날린 함허(涵虛)가 여기서 수행을 했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간신히 일으켜 세웠으나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이곳까지 기
어들어온 청나라군에게 다시 파괴되고 만다. 이후 중건했으나 숙종(肅宗) 시절, 인현왕후(仁
顯王后) 복귀로 궁지에 몰린 희빈장씨(禧嬪張氏)가 이곳에 관련 죄인을 숨겼는데, 그것이 발
각되자 절은 다시 쑥대밭이 되었다.


▲  동정각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승가사 남쪽 산줄기와 북악산(백악산) 너머로 서울 도심과 강남,
강동, 성남시 지역까지 흔쾌히 바라보인다.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임금은 1782년에 그렇게나 고대하던 아들을 얻었다. 바로 의빈성
씨(宜嬪成氏) 소생인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이다.
1784년 7월 불과 2살에 불과한 그를 세자로 봉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는 경축의 뜻을 보내며 세자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자 미얀마에서 보낸 옥불(玉佛)을 특별히
선물로 보내주었다.
정조는 그 옥불의 거처를 두고 고심하다가 왕실의 원찰이던 승가사를 중건해 그곳에 두었다.
절 중건은 당시 팔도도승통(八道都僧統)이던 성월선사(城月禪師)가 맡았으며, 옥불은 세자의
장수를 기원하는 불상이라 하여 장수불(長壽佛)이라 하였고, 그 불상이 담긴 건물은 장수전(
長壽殿)이라 불렸다.

장수전을 얼마나 화려하게 지었던지 몇백 척 높이의 층층대 위에 우뚝 솟아있으며, 단청은 너
무 화려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빼앗을 지경이었다. 내부에는 천정에 황금구슬을 아로새겼고 한
쌍의 침향등과 술 장식을 드리웠으며, 건륭제가 준 시가 적혀있었다. 그 밑 유리상자 안에 옥
불이 안치되어 있었다.
건물도 으리으리하고 게다가 보기 힘든 미얀마산 불상까지 머금고 있으니 이를 보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절은 그야말로 시장통처럼 시끌벅적하였다. 일반 백성들부터 사대부, 왕족까
지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드니 절은 자연히 예전의 명성을 되찾게 되었다.

허나 옥불의 바램과 달리 문효세자는 겨우 4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가 죽었으니 장수불
과 장수전의 존재 이유는 자연히 사라지게 되었고, 이후 장수전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장수불 또한 행방이 묘연하니 아마도 정조가 화가 나서 슬쩍 없앤 모양이다. (조선의 청나라
에 대한 불편한 감정도 그들이 없어지는데 적지 않게 영향을 줬을 것임)

▲  승가사 승가굴(약사전)

▲  파괴된 비석의 아랫도리(비좌)

19세기 이후에는 명성황후와 엄귀비의 후원을 받아 절을 중수했으며, 1941년에 도공(道空)이
중수를 했다. 이후 비구니 도원(道圓)이 절을 꾸렸으나 6.25 때 절이 싹 파괴되는 비운을 겪
는다.
1957년 도명(道明)이 산신각과 향로각, 동정각, 대방, 요사를 지어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1971년에는 상륜(相侖)이 주지로 부임, 마애여래좌상으로 오르는 108계단을 대리석으로 업그
레이드하고 절 진입로를 확장하는 한편, 전기를 가설했다.
1976년에는 범종을 만들어 동정각에 봉안했고, 1994년에 호국보탑을 지어올려 현재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각박한 산자락에 터를 닦았지만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 정신없이 건물을 닦았으며, 법
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명부전과 영산전, 향로각, 산신각, 동정각, 약사전 등 10여 동의 건물
이 경내를 가득 채우고 있다.
큰 전쟁 때마다 파괴되는 고통을 겪으면서 겉으로 보이는 고색의 내음은 거의 말랐으나 구기
동 마애여래좌상과 석조승가대사좌상 등 국가 보물 2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성월선사의 탑과
탑비, 옛 석탑의 부재(部材)와 비좌 등이 남아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승가사는 비구니 사찰로 북한산(삼각산) 제일의 선원(禪院)을 칭하고 있으며, 경관이 빼어나
고 국보급 조망을 지니고 있어 예로부터 경승지로 명성이 높았다. 조선 때는 서쪽의 진관사(
津寬寺), 남쪽의 삼막사(三幕寺), 동쪽의 불암사(佛巖寺)와 더불어 서울 근교의 명승 사찰로
꼽혔는데, 승가사는 그 북쪽으로 그들 가운데 단연 갑(甲)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다보니 많
은 문인들이 문이 닳도록 찾아와 시와 글을 남겼는데, 고려 고종(高宗)의 스승이던 유원순(兪
元淳)도 이곳에 안겨 다음의 걸쭉한 시를 남겼다.

기구한 돌다리에 구름을 밟고 올라가니 좋은 집 높이 있어 조화의 고장 같아라.
가을 이슬 가늘게 떨어지니 천리 안계(眼界) 상쾌하고
석양이 멀리 잠기니 저 강물이 밝게 빛난다.
공중에 오락가락 가는 아지랑이 향불 연기에 이었고
골짜기에서 우는 한가한 새소리 풍경소리를 대신하네.
그보다 부러운 일은 높은 스님의 생각하는 일인 것이
인간세상의 명리에는 도무지 마음에 없다네.


구름도 능히 잡힐 듯한 높은 산중에 묻혀 있어 제아무리 무거운 번뇌라도 감히 따라오기 힘들
다. (번뇌는 절 밑에서 얌체처럼 기다리고 있음, 결국 해탈은 꿈임) 속세와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진하며, 절을 둘러싼 숲이 삼삼해 공기도 청정하다. 게다가
서울 도심과도 가까워 멀리 갈 것도 없이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거나 마음을 싹둑 가
다듬고 싶을 때 언제든 와서 안기고 싶은 곳이다.

* 승가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1 (비봉4길 213, ☎ 02-379-2996)



 

♠  승가사 둘러보기 (대웅전 주변, 성월선사 승탑과 탑비)

▲  연등이 허공을 가득 메운 대웅전(大雄殿) 뜨락

동정각의 아랫도리를 들어서면 경내의 핵심인 대웅전 구역이다. 대웅전 뜨락을 중심으로 서쪽
에는 서래당, 동쪽에는 적묵당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승가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7년에 짓기 시작
하여 1980년에 완성을 보았다. 건물 좌우벽과 뒷쪽에는 부처의 생애를 머금은 전생도와 심우
도가 그려져 있는데, 그림 옆에 해석을 달아놓아 이해를 돕게 했다.

뜨락 서쪽에 자리한 서래당(西來堂)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1986년 중창되
었다. 겉으로 보면 1층이지만 엄연한 2층으로 뜨락에 노출된 부분은 종무소(宗務所)와 주지실
로 쓰이며 호국대탑에서 경내로 오르는 길목인 아랫층에는 공양간이 있다. 공양간은 장작으로
땐 밥과 국을 공양으로 제공하는데, 일요일과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에는 산꾼과 답사꾼도
공양이 가능하다. (절 사정으로 공양을 주지 않는 경우도 가끔 있음)
서래당 맞은편에 자리한 적묵당(寂默堂)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선방(禪房
)의 역할을 하고 있다. 1985년에 중창되어 매년 100여 명의 비구니가 수행 안거(安居)를 하고
있는데, 내부에는 소조여래좌상 1구와 1966년에 제작된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석가여래좌상과 후불탱

대웅전 내부는 황금색으로 개금(改金)된 목각탱(木刻幀)들로 두 눈이 부실 지경이다. 불단에
자리한 석가여래상은 꽤나 단련을 했는지 어깨가 쩍 벌어져 있으며, 두터운 얼굴은 다소 경직
된 표정을 머금고 있다. 그의 좌우로 그 흔한 협시(夾侍)보살은 없지만 대신 뒷쪽에는 호화로
운 금동후불탱을 배치해 그를 든든히 받쳐준다.
후불탱(後佛幀)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그를 바라보고 있으며
8대 보살과 아난(阿難), 가섭(迦葉)이 그를 에워싸 그의 이야기를 듣는 모습이다. 붉은 지붕
의 닫집 또한 화려하기 그지없으며, 극락조(極樂鳥)와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

   ◀  대웅전 계단 우측에 누운 석조(石槽)
석조는 물을 담아두는 통이지만 첩첩한 산골이
라 물 사정이 너그럽지 못해 거의 항상 비워둔
다. 하여 물을 마시려면 꼭지를 틀어 바가지에
받아 마시면 된다.


▲  연등의 물결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대웅전 뜨락과
그 끝에 자리한 동정각(動靜閣)


대웅전 맞은편에는 범종(梵鍾)의 보금자리인 동정각이 마치 천상(天上) 세계의 누각처럼 높다
랗게 들어앉아 속세를 굽어본다. 동정각은 2층 규모로 아래층은 경내와 속세를 이어주는 통로
이고, 윗층은 범종의 거처로 기존 범종각과는 다른 6각형 정자(亭子)식 건물이다.

동정각에 고이 간직된 범종은 1976년에 봉안된 것인데 그 종을 운반할 때 15명이 꼬박 매달려
무려 1달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때는 차들이 감히 올라올 수도 없었던 산속이라 종 밑에 나무
토막을 깔고 밀어올리는 옛 방식으로 종을 운반했기 때문이다.
아침 4시와 저녁 6시가 되면 잠든 종을 살짝 깨우며 종소리를 속세로 흘려보내는데, 그 종소
리가 매우 은은하다.


▲  동정각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승가사 남쪽 산줄기, 북악산,
서울 도심과 강남, 강동 지역 등)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영산전(靈山殿)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81년에 중창되었다. 석가3존상을 비롯하여
석가후불탱, 16나한탱, 신중탱 등이 들어있는데, 대웅전의 탱화들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모조리
금색을 입혀 등장인물이 다른 것 빼고는 거기서 거기 같고, 너무 찬란함에 치중한 나머지 거
부감과 식상함마저 적지 않게 들게 한다. (지나친 화려함은 오히려 소박함보다 못함) 이들 탱
화는 1987년에 김광한, 김광열 형제가 조성했다.


▲  산신각(山神閣)

영산전 좌측 높은 벼랑 위에 산신의 거처인 산신각이 있다. 달랑 1칸 밖에 안되는 조촐한 건
물로 화재로 무너진 것을 1984년에 다시 지었는데, 그때 서쪽을 바라보고 있던 건물을 남향(
南向)으로 조정했다. 내부에는 1986년에 김광한/김광열 형제가 만든 산신탱이 있으며, 역시
금칠로 도배를 해놓았다. (불교에서 제일 좋아하는 색이 황금색이라고 함)


▲  산신과 호랑이, 동자 2명, 나무 등이 묘사된 산신탱

▲  철책 너머로 바라본 성월선사의 승탑(僧塔, 부도)과 탑비

영산전 동쪽은 통제구역으로 중생들의 발길을 막고 있는데, 그곳에 성월선사의 탑이 있어 살
짝 문을 열고 들어가보았다.

통제구역으로 들어서면 계곡이 나오는데, 그 건너에 푸른 철책이 쳐져 있고 바로 그 안에 성
월대사의 승탑과 비석이 마치 철창 안에 갇힌 양 고적하게 자리해 있다. 그곳을 가려면 철책
문을 지나야 되나 갑자기 새가슴이 되어 그곳까지는 가지 않고 계곡 너머에서 바라보는 것으
로 만족했다.
성월선사의 탑과 탑비는 1802년 8월에 조성된 것으로 비석에 '朝鮮國 正憲大夫 城月堂 碑銘竝
序(조선국 정헌대부 성월당 비명병서)','嘉慶 七年 壬戌 八月日立(가경 7년 임술 8월일입)'이
라 쓰여 있어 탑의 주인과 조성시기를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승려임에도 정헌대부의 지위
를 받은 것이 이채로운데, 서울에 흔치 않은 19세기 승탑이고 조성 관련 내용을 머금은 비석
까지 지니고 있어 지방문화재의 자격은 충분해 보인다.

▲  명부전(冥府殿)

▲  명부전 지장탱

대웅전 우측 옆구리로 들어서면 약사전과 마애불로 인도하는 길이 나온다. 그 길을 1단계 오
르면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봉안한 명부전이 마중을 한다.

대웅전과 약사전 사이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1972년 착공
해 1975년에 완성을 보았다. 1년 정도면 능히 만들고도 남을 규모지만 궁색한 산중이라 공사
가 더뎌 3년이나 걸린 것이다.
건물 내부에는 특이하게도 지장보살상 등의 독립적인 불상/보살상은 없고 지장보살과 명부(冥
府, 저승)의 식구를 싹 몰아 넣은 지장탱이 전부이다. 이 탱화는 1983년에 김원각, 김석담이
조성한 것으로 다른 건물의 탱화와 마찬가지로 금칠로 도배를 했다. 다만 다른 것은 지장보살
의 머리만 푸른 색을 입혀 약간의 차별화를 두었다.


▲  약사전 앞에 놓인 옛 석탑의 흔적

명부전에서 1단계 더 올라서면 승가굴(약사전)이 나온다. 약사전 앞에는 늙은 석탑의 흔적이
우수에 잠긴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두툼하게 생긴 지붕돌과 탑신이 한 덩이씩만 남았다.
그들에 대한 정보가 없어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나 이 땅에 흔한 3층석탑이 아닐까 싶은데, 임
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절이 파괴되면서 같이 비극을 맞았을 것이다.
이후 일부만 남은 채, 버려진 것을 비좌와 함께 수습하여 약사전 앞에 두었으며, 탑의 사라진
부분이 많아서 복원까진 엄두도 못 내고 그저 승가사의 옛 유물로 한가로운 여생을 보낸다.


▲  나는 누군가? 여긴 어딘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비좌(碑座)

향로각 앞에는 비석을 받치던 비좌가 초췌하게 누워있다. 고색의 때로 가득한 이 비좌는 화강
암으로 다진 것으로 3단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넓직한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무슨 비석의 아랫도리인지는 북한산(삼각산) 귀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승가사에 고려 중기 승
려인 탄연(坦然, 1070~1159)이 쓴 승가굴 중수비(重修碑)가 있었다고 하니 그 비석의 아랫도
리가 아닐까 의심된다.
조선 중기 이후 전쟁으로 여러 번 절이 파괴되면서 비석 윗도리가 몽땅 날라가 그의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었고, 비좌 자신도 그때의 충격으로 기억조차 상실했다.

사라진 비신과 이수(螭首)는 경내와 그 주변을 싹 뒤집으면 일부라도 나올 듯 싶은데, 그 작
업도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  승가사의 오랜 보물들 (승가굴,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  자연산 석굴인 승가굴에 터를 닦은 약사전(藥師殿)

약사전은 큰 바위 밑도리에 있는 자연산 석굴이다. 승가사를 세웠다는 수태가 바위를 뚫어 굴
을 만들고 돌을 쪼아 승가대사상을 새겼다는 창건 설화가 깃든 늙은 굴로 승가굴(僧伽窟)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고려 중기에는 탄연이 이곳에서 수행하면서 정체가 아리송한 승가굴 중수비를 남겼으며, 조선
세종 때는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의 쾌유를 빈 인연으로 약사전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전한다.

1960년대 이후 석굴을 크게 손질하여 안과 바깥에 돌로 벽을 쌓고, 승가대사상의 불단과 연화
대를 만들었으며, 그 앞에 기도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인등(引燈)을 대사상 좌측에 배치해
내부를 환하게 밝혀준다. 석굴은 그리 넓지는 않으나 굴의 본능상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
는 따스하다.


▲  석조승가대사좌상(石造僧伽大師坐像) - 보물 1000호

약사전에는 승가대사상이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약사여래(藥師如來)의 역할과 직무를 대
신 하고 있는 그는 인도 출신 승려로 당나라에서 크게 활약했다. 그의 덕이 대단했던지 관세
음보살의 화신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그의 인기가 신라까지 전해져 승가사를 세운 수
태가 그의 상까지 만들어 이곳에 봉안했다고 한다.
허나 이 석상은 전설과 달리 신라 후기가 아닌 1024년에 지광(智光)이 동량이 되고 광유(光儒
) 등이 조각을 했다. 조성 관련 내용은 광배 뒤쪽에 새겨져 있어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확실
한 조각품으로 당시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으며, 석상 높이는 76cm, 광배 높이 130cm로 호분(
胡粉)을 입혀 몸 전체가 하얀 천사처럼 되었으나 근래 호분을 벗겨내어 순백(純白)에서 벗어
났다.


▲  인등의 강렬한 빛을 즐기고 있는 석조승가대사좌상
(호분을 벗기기 전, 2012년 어느 날)


승가대사상은 하얀 피부의 석상으로 나이가 어느 정도 든 후에 호분을 입힌 것으로 여겨진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어 지장보살의 이미지를 주고 있으며, 손자나 손녀를 맞는 할머니와
같이 포근하고도 정이 넘치는 인상이라 그에게 다가서면 '세상 살기 힘들지?' 그러면서 손으
로 어루만지며 다독거려줄 것 같다.

그의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살짝 뜨며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오똑하
고 입술은 무척 붉으며, 볼살이 많고 광대뼈가 나왔다. 두 귀는 두건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
고, 몸에 걸친 옷은 목 부분을 빼고는 노출된 부분이 없는데 부처나 보살의 복장과 비슷하다.
그가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연꽃 대좌는 근래 만들어진 것으로 오른손을 가슴 앞에
대고 있으며 제천 빈신사지(頻迅寺址)의 4사자3층석탑 석상과도 유사한 면을 보인다. 또한 상
체가 길고 무릎이 넓어 고려 초에 유행했던 철불(鐵佛)과도 비슷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의 뒷쪽에 달린 광배(光背)도 꽤나 명품이다. 커다란 배의 모양을 한 이른바 주형거신광배
(舟形擧身光背)로 신광(身光)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머리 뒤쪽인 두광(頭光)은 신광
과 일부 교집합을 이루면서 둥근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앙증맞은 모습의 연꽃잎을 무늬로 두르
고 그 바깥쪽을 덩굴무늬와 모란꽃 무늬로 치장했다. 또한 광배 외곽 부분에는 불꽃무늬를 정
교하고 실감나게 새겨 광배의 아름다움을 더했다.

천하에 흔치 않은 늙은 승려상으로 1,000년의 지긋한 나이와 오랜 세월 어두컴컴한 석굴에서
광합성 작용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살았지만 건강과 피부만큼은 젊은 불상이나 석상 못지
않게 양호하여 방부제 외모를 자랑한다. 조선 중기와 현대에 일어난 3차례에 큰 전란으로 절
은 사라지기 바뻤지만 마애여래좌상과 함께 온전하게 살아남아 자리를 지켰고 이렇게 승가사
의 늙은 보물이지 꿀단지로 변함없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 석상은 예전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2호였으나 나중에 재평가를 받아 국가 보물로 승진
되었다. 그런데 지정 번호가 우연히도 딱 1,000호이다. 매우 흔한 숫자이지만 결코 쉽게 꿰찰
수 없는 번호를 차지한 것이다. 외우기도 쉽고, 기억하기도 좋고, 게다가 이 땅의 사람들이
많이 쓰는 숫자이니 이런 우연이 참 어디에 있을까 싶다.


▲  가양심신(可養心神) 바위글씨

승가굴을 지나면 향로각(香爐閣)이란 돌로 다진 동그란 건물이 있다. 그 직전에 바위가 누워
있는데 그의 피부에 마치 뱀이 기어간 흔적 같은 꼬부랑 바위글씨가 깃들여져 있다.
그는 '가양심신' 바위글씨로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비봉에 있는 진흥왕순수비를 손수 탁본하
고 승가사에 잠시 들렸을 때 남긴 것으로 여겨진다. 이 4자는 마음을 수양하기 좋은 길지라는
뜻으로 승가사가 정신 수양과 독서를 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란 의미로 그렇게 한 글자 남기고
간 모양이다.


▲  마애불로 인도하는 108계단의 위엄 ①

향로각을 지나면 장대하게 펼쳐진 계단이 나타나 중생들을 다시금 주눅을 들게 하는데, 그 계
단은 불교에서 좋아하는 숫자인 108계단으로 그 계단의 끝에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연화교(蓮花橋)란 약간 볼록 튀어나온 조그만 다리를 건너 108계단에 임하면 되는데, 그렇게
까지 각박한 경사도는 아니어서 그리 힘들지는 않다. 속세의 부질없는 삶처럼 서두르지 않고
쓸데없는 자존심을 곱게 접어 천천히 한 계단씩 임하면 까마득하게 보이던 마애불이 마치 해
가 떠오르듯 크고 웅장하게 솟아오르며, 그 계단의 끝에 이르면 마애불의 거대한 위엄이 다시
한번 눈과 마음을 놀라게 만든다.


▲  마애불로 인도하는 108계단의 위엄 ②

▲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 보물 215호

승가사 북쪽에 자리한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하 마애불)은 경내와 10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다. 이곳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비봉능선의 일원인 사모바위의 바로 남쪽
밑이다.
승가사에서 승가대사상과 더불어 경내에서 가장 늙은 보물이나 지정 명칭은 '승가사 마애여래
좌상'이 아닌 지역 이름을 딴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다. 보통은 그 불상을 소유하거나 관리
하는 절의 이름을 앞에 붙이기 마련인데, 경내와 약간 거리가 있고 승가사 소유가 아닌 국가
소유로 되어 있어 지역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문화재 지정 명칭은 '서울 북한산 구기동 마
애여래좌상')

이 마애불은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왜정(倭政) 시절에 왜열도 학
자들이 고려 때 것이라며 지들 멋대로 평가를 했는데, 월북미술가인 김용준이 1947년 12월 14
일자 경향신문 칼럼에
'눈썹과 눈으로부터 코 입술이 모두 예쁘고 시원스런 표현이라든지 신라 석조의 특색인 턱 아
래 한 곡선을 그어 아래턱을 만든 솜씨며, 얼굴 모양의 턱이 꽉 받치고 원만후덕하고 복스러
운 맛이라든지 의복과 가부좌의 자세며 8각형으로 된 천개(天蓋)를 반쯤 돌을 파고 넣은 것과
연좌(蓮座)의 유려한 선'
등을 들어 신라 것이라 평가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인 삼천사지(三千寺址) 마애여래입상도 신라 말~고려 초기 것으
로 여겨지고 있어 이 둘은 서로 나이가 비슷하다.

직각을 이루며 솟은 거대한 바위의 남쪽 피부에 얇게 홈을 파고 돋음새김으로 도드라지게 결
가부좌로 앉은 불상을 새겼는데, 그의 건강을 위해 전실(前室, 보호각)을 만들고 머리 위에 8
각의 머릿돌(천개)을 끼어 얼굴을 보호했다. 그러다보니 건강 상태는 양호하며, 피부도 얼굴
일부를 빼고는 하얀 편이다.
허나 그렇다고 그의 상태가 늘 좋았던 것은 아니다. 1968년 김신조의 공비패거리가 서울에 침
투했을 때, 이들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게 총상을 입었던 것이다. 하여 마애불의 생애
최초로 큰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의 갑옷과 같던 보호각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사라지고 보호각을 끼던 구멍 4개
만 윗쪽과 중간에 아련히 남아있다. 아마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거나 자연재
해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  옆에서 바라본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  마애여래좌상의 얼굴
(양쪽에 보이는 구멍 4개는 보호각의 흔적들)


마애불의 얼굴은 후덕한 인상의 승가대사상과 달리 조금 경직되고 근엄한 표정 같다. 이마 중
간에는 백호가 살짝 찍혀 있고, 진한 눈썹은 무지개처럼 구부러져 있으며, 두 눈은 감겨 있어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코는 끝이 두툼하고 입술은 두꺼우며, 붉은색을 칠한 흔적이 있는지
빨간 기운이 조금 남아있다. 귀는 중생의 소리를 모두 들으려는 듯 어깨까지 축 내려왔으며,
볼살이 좀 많다.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껍게 솟아 있는데, 바로 위에 머릿돌을 끼워 넣어 앞
으로 크게 돌출시켜 그의 모자로 삼았다. 모자가 큰 덕분에 얼굴에는 세월이 훈장처럼 달아준
검은 여드름이 여럿 있는 것 외에는 멀쩡하며 피부도 하얗다. 그리고 모자 밑부분에는 연꽃무
늬가 새겨져 있다.
몸통과 머리를 잇고 있는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어깨는 꽤나 단련을 했는지 당당
하고 듬직한 모습이다. 불상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 어깨와 가슴, 젖꼭지를 속시
원히 드러내고 왼쪽 어깨를 옷으로 가린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옷 스타일을 하고 있는
데, 우견편단은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이 단연 으뜸으로 신라 후기부터 고려시대 불상에 많이
나타난다.
몸에 걸친 옷은 얇은 편으로 왼쪽 어깨와 배, 두 다리를 가리고 있으며, 왼팔에 묘사된 옷주
름은 세로로 그어져 있어 기하학적인 추상성(抽象性)을 드러내고 있다.


▲  마애불의 가슴과 아랫부분, 그리고 연꽃이 활짝 열린 연화대

가슴을 비롯한 상반신은 아주 묵직한 모습으로 거대한 마애불의 위엄을 더욱 드높인다. 허리
는 밑부분이 쏙 들어가 괜찮은 몸매를 보이고 있으며 팔은 강철처럼 매우 두꺼워 보인다. 그
리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왼손은 배꼽 밑에 두어 이른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제스쳐
를 취했다. 또한 오른쪽 발바닥은 하늘을 향해 있는데, 발바닥을 훤히 드러낸 불상이 천하에
그리 흔치가 않다.

불상이 앉아있는 연화대좌(蓮花臺座)는 꽃잎이 하늘을 향해 빵빵 열려있는 앙련(仰蓮)이 윗쪽
에, 반대로 꽃잎이 땅을 향한 복련(伏蓮)이 밑에 있는데, 연꽃무늬가 2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연꽃잎도 너무 화사하기 그지 없어, 적당하게 색만 입히면 진짜 연꽃이 따로 없을
것이다.
기존 전통의 불상 양식에서 추상성을 조금 보태어 웅장하게 만든 마애불로 신라 말~고려 초의
대표적인 마애불이자 준수한 작품으로 일찌감치 인정받아 북한산에 있는 불교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먼저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받았다.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과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는 1980년대에 지정됨> 게다가 상태도 양호하고 선각(線刻)도 선명하여 조성된 지 얼마 안된
따끈따끈한 석불 같다.

신라 말에서 고려 중기까지는 전국적으로 큰 마애불과 석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게다가 비슷
한 모습이 아닌 지역마다 다른 색을 보여 개성도 강하다. 구기동 마애불은 자세한 기록은 없
으나 당시 지방 세력의 지원으로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승가사가 고려 황실과도 인연이 깊
은 절이라 제왕과 황실의 지원으로 수준 높은 석공들을 투입해 조성했을 가능성도 높다.

마애불을 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장비와 기술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
다고 바위가 불상을 새기기 좋게 드러누워있던 것도 아니다. 줄을 매달고 올라가 일일이 정을
대고 쪼아야 되는데, 그것도 그리 쉽지가 않다. 거의 몇 년에서 10년 이상은 족히 걸렸을 것
이며, 지극한 정성이 아니면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그 당시 석공(石工)의 뛰어난 능력과 정
성, 그들이 공사에 전념하게끔 뒤를 받쳐준 지원 세력이 합작으로 이루어낸 대작품이라 할 것
이며 이런 명품급 마애불이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마애불이 있는 바위 밑에는 근래에 돌로 벽을 쌓았고, 그 앞에 향로와 용이 휘감고 있는 돌기
둥을 만들어 단(壇)을 설치했다. 그리고 그 앞을 돌출시켜 양쪽으로 계단을 내었으며, 기도는
그 앞에 마련된 공간에서 하면 된다. 그리고 바위 주변은 문화유산 보호를 이유로 출입이 통
제되어 있으니 괜히 바위를 오르거나 마애불을 만지는 등의 짓은 하지 않도록 한다. 또한 매
일 10시부터 11시(시간은 변경 가능)까지는 승가사에서 기도를 올리는 관계로 출입을 금하고
있다.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2-1


▲  구기동 마애불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  쌀가마니를 축내는 쥐새끼들 (경내에서 호국보탑으로 내려가는 길)
이 땅의 우울한 현실을 날카롭게 묘사한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우리나라도 가만 보면 고양이보다는 쥐가 더 살기 좋은 세상 같다.
(이 땅에서 권력도 잡고 돈도 많이 챙기려면 쥐처럼 살아야 됨)

▲  승가사를 뒤로하며 다시 제자리로

마애불을 끝으로 간만에 찾은 승가사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해질녘까지는 시간이 넉넉하게
있지만 이곳은 막다른 곳이라 다른 곳을 가려면 승가사 갈림길로 한참이나 내려가야 된다. 경
내에서 바로 위쪽 사모바위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었다면 그곳을 거뜬히 찍고 내려갔을 것인데,
그 점이 참 아쉽다.
이렇게 하여 5월 승가사 나들이는 다음의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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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오산 자락에 넓게 깃들여진 달달한 시민공원, 강북구 북서울꿈의숲 <창녕위궁재사, 월영지, 청운답원, 북서울꿈의숲아트센터>

북서울꿈의숲 늦가을 산책



' 북서울꿈의숲 가을 나들이 '

북서울꿈의숲 청운답원

▲  북서울꿈의숲 청운답원

창녕위궁재사 북서울꿈의숲아트센터 옥상정원

▲  창녕위궁재사

▲  북서울꿈의숲아트센터 옥상정원

 



 

가을이 깊어가던 10월의 한복판에 강북구 번동(樊洞)에 위치한 '북서울꿈의숲'을 찾았다.
북서울꿈의숲은 집에서 겨우 6km 거리로 아주 가까운 곳이나 그곳은 이상하게도 몸과 마
음이 썩 흥미를 보이지 않아 오랜 세월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었다. 하여 이번에 그곳
을 미답처 목록에서 싹싹 지우고자 햇님이 중천에 걸린 14시에 집을 나섰다.



 

♠  북서울꿈의숲 입문 (창녕위궁재사)

▲  '북서울꿈의숲' 마크

북서울꿈의숲(이하 '북서울숲')은 강북구 번동과 미아동(彌阿洞) 일부에 걸쳐있는 너른 공원
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두 귀에 생생한 '드림랜드'란 서울 북부 최대의 테마파크가 뿌리를 내
려 왕성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2008년 문을 닫았다. 하여 서울시가 인수하여 1년에 걸친
손질 끝에 2009년 10월 시립공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공원 이름은 드림랜드의 분위기를 잇는다는 뜻에서 '드림(Dream)'의 우리말인 '꿈'을 취했으
며, 서울 북부권에 자리해 있어 부르기 좋게 '북서울꿈의숲'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다.
공원 면적은 684,157㎡로 서울에서 월드컵공원, 올림픽공원, 서울숲에 이어 4번째로 큰 공원
이다. 월영지와 초화원, 칠폭지, 허브정원, 사슴장 등 자연 중심의 다양한 공간을 담고 있으
며, 꿈의아트센터와 상상톡톡미술관, 숲속문화전시장 등의 공연장과 전시장도 아낌 없이 갖추
고 있다.
또한 청운답원이란 너른 풀밭도 지니고 있어 보기만 해도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며, 창녕위궁
재사란 늙은 한옥도 지니고 있어 고색의 멋도 잠시 누릴 수 있다. 게다가 오패산과 벽오산(碧
梧山) 자락에 자리한 탓에 울창한 숲도 지니고 있으며, 그 숲속에는 숲길과 여러 운동시설이
닦여져 동네 사람들의 발길도 빈번하다. 그래서 가족 나들이와 소풍, 모임, 산책, 데이트 명
소로 완전 만점급이다.

북서울숲 서남쪽 숲에는 이곳의 옛 주인인 창녕위 김병주와 복온공주의 묘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 지역을 '공주능'이라 불렀으며, 버스정류장 이름 역시 '공주능'이었다. 허나 드림랜
드가 들어서면서 경기도 용인시로 무덤을 이전했고, 무덤을 관리하던 창녕위궁재사만 제자리
에 남게 되었다.
드림랜드는 가본 적은 없으나 수영장과 눈썰매장이 제법 유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허나 어
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공원 시설은 싹 사라지고 자연을 중심으로 한 상큼한 공간으로 다시금
태어나 드림랜드 몇 배 이상으로 왕성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처음으로 발을 들인 북서울숲, 생각보다 크고 아름다운 모습에 놀랬고 볼거리도 꽤 넉넉하여
다시 놀랬으며, 산책로도 아주 그림 같았다. 이렇게 좋은 곳을 왜 이제서야 인연을 지었을까.
그의 존재를 알고 있음에도 가지를 않았으니 그를 하찮게 봤던 내 안목이 정말로 쓰레기였음
을 실감한다. 또한 앞으로 등장 밑도 잘 살펴봐야 되겠다. 등잔 밑에 은근히 월척거리가 많으
니 말이다.

북서울숲은 무료 자유 공간으로 미술관 등 건물을 제외하면 관람시간에 제한은 없다. 접근은
옛 드림랜드 정문이었던 동문(북서울꿈의숲 동문교차로)과 후문이었던 서문에서 접근하면 되
며, 그 외에 동네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소소한 접근로가 10여 개가 있다.


▲  칠폭지(七瀑池)

북서울숲 동문으로 들어서니 칠폭지란 생태연못이 마중을 한다. 이름 그대로 7개의 폭포를 지
닌 연못으로 경사를 이용한 물길 위에 9개의 다리가 놓여져 있다. 옛 드림랜드의 흔적인 풍화
암 주변에 억새와 자작나무길이 닦여졌고, 다양한 수생식물들이 수북히 자라나 서로를 의지한
다. 또한 분수대도 지니고 있는데, 5월부터 9월까지만 짧게 몸을 푼다. (비가 오면 자동으로
분수 가동이 정지됨)


▲  긴 방학에 들어간 칠폭지 분수대와 그 너머로 보이는 방문자센터

▲  창녕위궁재사(昌寧尉宮齋舍) 안채와 제사를 위한
제청(오른쪽에 삐죽 나온 부분)


방문자센터 서쪽에는 고색이 깃든 한옥이 있다. 얼핏 보면 공원을 조성하면서 지은 장식용 한
옥처럼 여길 수 있으나 그는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이자 북서울숲의 유일한 문화유산인 창녕위
궁재사이니 여로(旅路)를 살찌울 겸, 꼭 둘러보기 바란다.

이름도 긴 이곳은 순조(純祖, 재위 1800~1831)의 둘째 딸인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1832)와
공주의 남편인 창녕위 김병주(昌寧尉 金炳疇, 1819~1853)의 묘를 관리하고 제를 지내던 재사(
齋舍)이다. 건물 이름에 무려 '궁(宮)'이 쓰인 것은 공주 부부의 재사라 그런 것인데, 지금은
비록 다른 곳으로 갔지만 서남쪽 산자락에 그들의 무덤이 있었으며, 재사이긴 하나 서울 시내
와 가까워 살림집도 겸하고 있었다.

공주묘의 재실이라 왕실에서 내린 좋은 재료로 지어졌으며, 사랑채와 안채, 대문채, 아래채를
지니고 있었다. 안채는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집으로 그 날개채에 제사 공간인 4칸 반 규모의
제청(祭廳)이 딸려있다. 제청이 사랑채가 아닌 안채에 딸린 것은 거의 흔치가 않은데 6.25 때
아래채와 함께 파괴된 것을 1955년에 재건했으나 아래채는 다시 일으키지 못해 사랑채와 안채
, 대문채만 남게 되었다.

안채 옆에 자리한 사랑채는 다른 곳에서 가져온 건물로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彈琴臺) 전
투를 신나게 말아먹은 신립(申砬)의 아들, 충익공 신경진(忠翼公 申景禛)의 별장에서 가져왔
다고 전한다. 안채와 나란히 자리해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1910년 김병주의
손자인 김석진(金奭鎭, 1847~1910)이 경술국치(庚戌國恥)에 격분하여 자결한 곳으로 널리 알
려져 있다. <그때 고약한 왜정(倭政)은 김석진에게 남작 작위를 주며 회유하려고 했음>

창녕위궁재사는 조선 후기 재사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고 김석진이 자결한 현장으로
가 등록문화재 40호
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복온공주 부부묘는 드림랜드 건설로 용인 지역
으로 자리를 떴지만 재사는 제자리를 지켜 이곳의 옛 이야기를 붙잡고 있다.
재사 관람은 가능하나 사랑채와 안채 내부는 금지된 구역으로 묶여 있어 뜨락과 건물 외부만
살펴야 되며, 9시부터 18시까지만 발을 들일 수 있다. 그리고 재사 서쪽과 뒷쪽으로 대나무가
무성하여 깊은 숲에 묻힌 별서(別墅)에 들어선 기분까지 선사한다.

▲  활짝 열린 대문과 대문채 (바깥쪽)

▲  대문과 대문채 (안쪽)
대문채는 하인들의 생활공간이다.


▲  정면에서 바라본 안채와 그 안채를 가리고 있는 소나무
소나무 자리에는 6.25 때 쓰러진 아래채가 있었다. 그의 빈자리를
잘생긴 소나무가 조금이나마 채워준다.

▲  창녕위궁재사 사랑채
안채와 비슷한 'ㄱ' 구조의 건물로 다른 곳(신경진의 별서로 여겨짐)에서
가져와 사랑채로 삼았다.

▲  사랑채 마루

▲  우수에 잠긴 사랑채 뒤쪽 굴뚝


▲  사랑채 주변에 옹기종기 모인 주춧돌들
고색이 깃든 주춧돌의 높이가 어느 정도 있어 옛 안채와 아래채 것들로 여겨진다.
이제는 받쳐들 상대를 상실하여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사랑채 뒤쪽에 짙게 우거진 대나무숲
살랑거리는 가을 바람에 대나무들이 사각사각 소리를 낸다.

▲  창녕위궁재사의 서쪽 협문과 키 작은 돌담

▲  낮은 돌담 너머로 바라본 창녕위궁재사
(왼쪽이 사랑채, 오른쪽이 안채 부분)

▲  이야기정원 대나무숲길

창녕위궁재사 서쪽과 남쪽에는 이야기정원이 닦여져 있다. 월영지까지 경사지를 활용하여 닦
여진 것으로 대나무숲과 전통화계정원(꽃계단정원), 사랑마당 등이 있으며, 특히 창녕위궁재
사 바로 옆구리에 펼쳐진 대나무 숲길이 백미(白眉)로 비록 거리는 짧지만 이곳을 거닐면 대
나무 관광지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담양 죽녹원이 크게 부럽지가 않다.



 

♠  북서울꿈의숲 월영지, 청운답원 주변

▲  월영지(月影池)

북서울숲 한복판에는 월영지란 너른 수면 공간이 있다. 전통정원 분위기로 조성된 호수와 같
은 큰 연못으로 월영지란 이름 그대로 달 그림자가 수면에 비춘다. 달님뿐만 아니라 햇님과
구름, 벽오산과 나무들까지 모두 거울로 삼아 매뭇새를 다듬는 상큼한 못으로 주변에 월영대
(月影臺), 월광폭포, 월광대, 애월정 등 달과 관련된 이름으로 도배된 명소가 늘어서 있으며,
물속에서 자라는 낙우송(落羽松) 군락지와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 못은 둥글고 섬은 네모난
모습)의 연지(蓮池), 매화가 있는 매대(梅臺) 등이 있다.
이곳도 칠폭지처럼 분수를 품고 있는데, 5월부터 9월까지만 짧게 몸을 푼다. (비가 오면 자동
으로 분수 가동이 정지됨)


▲  애월정(愛月亭)과 월광대(月光臺), 월영지 일대

▲  월영지의 화려한 입술, 애월정

월영지 북쪽 월광대에 자리한 애월정은 1칸짜리 팔작지붕 정자이다. 연못 이름이 월영지라 정
자 또한 달을 사랑하는 이름의 애월정으로 이곳의 운치를 아름답게 돋구는 장식물이다. 정자
에 앉아 월영지와 벽오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누리고 있으면 정말 세상 시름이 절로 잊혀진
다. 물론 잠깐이긴 하지만.

▲  품격이 느껴지는 애월정 현판의 위엄

▲  애월정에서 바라본 월영지와 벽오산


▲  북서울숲의 너른 들판, 청운답원(淸雲踏圓) <남쪽에서 본 모습>

월영지와 창포원 사이로 청운답원이라 불리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완만한 경사의 풀
밭으로 대도시 한복판에서 이런 넓은 초원을 보기가 참 쉽지가 않은데 돗자리를 펴고 김밥과
도시락을 까먹거나, 수다를 떨거나, 모임이나 놀이를 하거나. 한숨 자기에는 정말 좋은 곳이
다.
단 그늘이 없는 것이 흠이라 여름과 햇살이 크게 흥분했을 때는 피해야 된다. 또한 들쥐와 진
드기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존재들도 있을 수 있으므로 풀밭에 그냥 앉거나 벌러덩 눕는 것은
피해야 된다.


▲  북쪽에서 바라본 청운답원

▲  도심 속의 푸른 초원, 청운답원의 위엄
공원 너머로 보이는 회색 도시는 장위동과 석관동 지역으로 저 멀리
아차산~용마산 산줄기까지 시야에 잡힌다.

▲  상상톡톡미술관

청운답원 북쪽에는 이름도 톡톡 튀는 상상톡톡미술관이 있다. 꿈의숲 아트센터에 있는 미술관
을 새로 손질한 2층 규모의 어린이와 어린이 동반 가족을 위한 이색미술관으로 어린이들이 미
술과 함께 자연을 직접 체험하며 창의력과 상상력을 키워주는 것이 이곳의 목적이다. 그러니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나들이객들은 꼭 들려서 자녀들의 창의력과 상상력 경험치를 조금씩 높
여주기 바란다.

이곳은 세종문화회관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동/식물 캐릭터와 숲을 형상
화한 계단, 파이프를 이용하여 만든 난간 등 그들이 흥미를 보일 수 있도록 독특한 인테리어
로 꾸며져 있으며, 작은 전시실 3개와 옥상 야외까페를 지니고 있다. 또한 가족 관람객을 위
해 휴게실과 수유실을 지니고 있으며, 어린이들의 공간은 모두 친환경 소재로 만들었다.
(이곳은 미술관의 특성상 굳이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했음)


▲  서쪽에서 바라본 청운답원과 상상톡톡미술관

▲  북서울꿈의숲아트센터와 전망대(오른쪽에 붕 떠있는 건물)

벽오산 정상과 가까운 북서울숲 북서쪽 산자락에 북서울드림스튜디오와 북서울꿈의숲아트센터
(이하 꿈의숲아트센터), 전망대가 몰려있다.
스튜디오는 언제든 공개 방송이 가능한 라디오 방송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며, 디지털라디오 방
송시스템을 지녀 양질의 방송 품질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꿈의숲아트센터는 스튜디
오 132㎡(조정실 16.5㎡ 포함)와 방청석, MC석, 조정실 등을 지니고 있으며 이곳은 드림랜드
시절에 눈썰매장이 있던 곳으로 눈썰매장 지형 형태를 활용해 다졌다.
또한 옥상에는 들꽃을 가득 머금은 옥상공원이 닦여져 상큼한 볼거리를 선사하는데, 옥상이라
고 해서 꼭 건물을 거칠 필요는 없으며, 건물 옆에 벽오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어 그 길로 접
근하면 된다. 그리고 아트센터 서쪽으로 허공에 떠있는듯한 건물이 있는데, 그는 북서울숲의
지붕인 전망대이다.


▲  북서울꿈의숲아트센터 옥상공원

옥상공원(옥상정원)은 2009년 10월에 조성된 것으로 구절초 등 들꽃 11종, 단풍철쭉 외 7종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들꽃들의 보금자리이다. 면적은 590㎡로 의자 등의 쉼터도 마련되어 있
으며 자유롭게 관람이 가능하다.


▲  해맑게 웃고 있는 가녀린 구절초들
구절초와 벌개미취가 너무 비슷하게 생겨먹어 나 같은 돌머리들은
자주 햇갈린다. (내 머리가 나쁜 것을 어찌하누?)

▲  꿈의숲아트센터 옥상공원에서 바라본 오패산과 북한산(삼각산)

▲  꿈의숲아트센터 옥상공원에서 바라본 번동과 수락산(水落山)

▲  꿈의숲아트센터 옥상정원에서 바라본 청운답원과 상상톡톡미술관



 

♠  북서울꿈의숲 전망대와 벽오산(碧梧山)

▲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전망대 (옥상공원에서 바라본 모습)

북서울숲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에 전망대가 있다. 건물이 일직선이 아닌 크게 비스듬한
모습으로 1층에서 거의 30도 기울어진 길쭉한 부분을 계단이나 경사식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그 끝에서 일직선 엘리베이터나 계단을 타고 꼭대기 전망대로 올라가는 방식이다. 그 모습이
공룡이나 큰 동물이 웅크리고 앉아 긴 목을 길게 쳐든 모습으로 비스듬한 부분 끝에 매달린
전망대는 그것을 받치는 기둥 같은 것이 없어 한편으로는 아찔하면서도 신기하다.

전망대 높이는 49.7m로 면적 860.27㎡, 연면적 1,173.26㎡의 철근철골콘크리트 건물이다. 꼭
대기 3층에는 360도 조망이 가능한 까페가 있으며, 이곳에 올라서면 서울 동북부(도봉구, 강
북구, 노원구, 성북구)와 동부(중랑구, 동대문구) 지역과 북한산(삼각산), 도봉산, 수락산,
아차산 산줄기가 거침없이 바라보여 조망도 꽤 일품이다. 그러니 북서울숲에 왔다면 이곳까지
꼭 들려서 일품 조망을 누려보기 바란다. 입장료는 없으며, 까페에서 커피 한잔의 여유를 누
리며 천하를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서울 야경(夜景) 구경이 백미이다.

▲  전망대로 올라가는 경사식 엘리베이터

▲  크게 비스듬한 부분 끝에 매달린
전망대의 아찔한 위엄


▲  단출한 모습의 전망대 까페 3층
까페에서는 커피 등의 음료를 팔고 있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 산줄기

▲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도봉산(왼쪽 산)과 도봉구, 강북구, 노원구, 수락산(오른쪽 산)

▲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정면에 멀리 보이는 산이 수락산과 불암산이고, 그 앞에 길게 누운 산이
조선시대 서울 근교 공동묘지인 초안산(楚安山)이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④
수락산(왼쪽 끝)과 불암산, 노원구, 중랑구, 장위동 지역

▲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⑤
장위동과 석관동, 성북구, 중랑구, 동대문구, 아차산~용마산 산줄기

▲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⑥
바로 앞에서 시야를 방해하는 뫼가 벽오산이다. 그 뒷쪽으로 장위동, 석관동,
중랑구, 동대문구, 아차산~용마산 산줄기가 두 망막에 들어온다.

▲  전망대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계단길 (오른쪽이 계단식 엘리베이터)
전망대로 올라갈 때는 엘리베이터, 내려갈 때는 계단을 이용했다.

▲  벽오산 숲길

북서울숲을 품고 있는 산은 오패산(123m)과 벽오산(135m)이다. 이들을 같은 뫼로 보기도 하나
보통 북서울숲 북쪽이자 미아역 동쪽 뫼를 오패산, 북서울숲 서남쪽 뫼(전망대가 있는 뫼)를
벽오산이라 구분 짓기도 한다.
벽오산은 매봉산, 빡빡산이라 불리기도 하며, 철종(哲宗, 재위 1849~1863)의 왕비인 철인왕후
(哲仁王后) 김씨가 복온공주의 손자인 김석진에게 '벽오산' 3자를 친필로 써주기도 했다. 이
는 벽오산에 복온공주 부부의 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거 외에는 딱히 옛 이야기는 없다.

전망대 바로 서남쪽에 벽오산의 싱그러운 숲이 펼쳐져 있는데, 숲속에 그어진 숲길(남측순환
로)을 따라 북서울숲 동문까지 이동이 가능하다. 경사는 느긋한 편이며, 숲이 매우 짙어서 햇
살이 들어오기가 힘들다. 중간중간 미아동 동네로 내려가는 길이 있으나 처음 인연을 짓는 뫼
라 혹시 숨겨진 꿀단지가 있을까 싶어 동문까지 싹 살펴보기로 했다.


▲  벽오산 서쪽 자락에 있는 네모난 정자
미아4거리 방향인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곳에 올라서면 미아동과 삼양동,
길음동, 종암동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벽오산에서 만난 이름없는 샘터
이곳 약수는 철뚜껑을 열어 바가지로 떠마시는 형태로 수질 검사 안내문이
없어서 굳이 마시지는 않았다. (안 마시는 것이 좋을 듯)

▲  벽오산 남쪽 자락에서 바라본 일몰 풍경
(장위동과 석관동, 동대문구, 중랑구, 아차산)

▲  벽오산 남쪽 자락에서 만난 주름진 큰 바위
주름선이 범상치 않은 크고 견고한 바위로 그에게 붙여진 이름은 아직 없다.
이 조그만 산에 이런 큰 바위가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  숲에 완전히 파묻힌 벽오산 남쪽 오솔길

이 부근에 벽오산의 옛 주인이던 복온공주와 창녕위 김병주의 묘가 있었다. 드림랜드가 아니
었다면 이곳에 계속 눌러앉아 북서울숲의 문화유산을 1개 늘려주었을 텐데, 이미 떠나간 그들
의 빈자리가 무척 아쉽기만 하다.


▲  칠폭지 서쪽 숲길

벽오산 남쪽 숲길의 끝에 낯익은 곳이 마중을 나온다. 바로 북서울숲 나들이를 시작했던 칠폭
지이다.
시간은 어느덧 18시, 낮 근무인 햇님은 퇴근 준비를 서두르고 야간 근무인 달님이 세상을 인
계 받는다. 비록 초화원 등 놓친 곳이 여럿 있으나 땅꺼미도 짙어지고 몸도 피곤하여 무리를
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우리집과도 가까우니 봄이나 다음 늦가을에 다시 인연을 지으면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북서울꿈의숲 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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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그늘에 깃든 서울 도심의 꿀명소, 서촌~청운공원 나들이 <선희궁터, 옥류동 청휘각터, 백세청풍 바위글씨, 송강정철 집터>

서촌 늦가을 나들이



' 서촌 늦가을 나들이 '
옛 청휘각터에서 바라본 서촌(웃대)과 서울 도심
▲  옛 청휘각터에서 바라본 서촌(웃대)과 서울 도심
 



 

늦가을이 막바지에 이르던 11월 한복판에 서울 도심의 꿀명소로 크게 추앙을 받고 있는
서촌(西村, 웃대)을 찾았다.
서촌은 원래 서대문과 경희궁(慶熙宮) 주변을 일컬었고, 경복궁 서쪽 동네는 웃대라 불
렸는데,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이들 지역은 서촌으로 합쳐졌다. 요즘에는 경복궁(
景福宮)과 인왕산(仁王山) 사이 지역을 서촌이라 크게 부르고 있으며, 세종이 1397년에
태어난 곳이라 해서 세종마을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서촌은 가까운 북촌(北村)과 인왕산, 북악산(백악산), 부암동과 더불어 나의 마음을 계
속해서 훔치고 있는 내 즐겨찾기 명소로 한때는 북촌처럼 구석구석 누비고 다녀 안가본
골목이 없을 정도이다. 허나 사람의 마음은 갈대라고 다른 즐겨찾기 명소들이 생겨나면
서 조금은 시들어졌다.

늦가을이 깊어감에 따라 서촌 앓이가 다시금 도지면서 오래간만에 그곳을 찾았는데, 이
번에는 신교동과 옥인동, 청운동(淸雲洞)의 일부 명소들을 복습했다. (본글에서 선희궁
터와 백세청풍 바위글씨, 청운공원 일부는 늦여름에 담은 사진을 이용했음)


▲  백세청풍 바위글씨

▲  청운공원의 늦가을 풍경



 

♠  영조의 후궁인 영빈이씨의 사묘(私廟), 선희궁터 사우(祠宇)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2호

서촌 북부에 자리한 신교동(新橋洞)에는 국립서울농학교가 있다. 그 학교 교정에는 고색이 깃
든 기와집이 하나 숨겨져 있는데, 그곳이 바로 옛 선희궁터의 사우이다.

선희궁은 영조(英祖, 재위 1724~1776년)의 후궁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신주(神主)를 봉안했
던 왕실의 사묘<私廟, 사친묘(私親廟)라고도 함>이다. 사묘란 왕후(王后) 반열에 들지 못하거
나 추존되지 못한 제왕의 생모(生母)나 친할머니를 위해 지은 사당이다.

영빈이씨는 창경궁 선인문(宣人門)에서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로 1764
년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아들을 죽인 자책감에 늘 괴로워하던 영조는 영빈에게 의열(義
烈)이란 시호를 내리고, 1765년 현재 자리에 사당을 지어 의열묘(義烈廟)라 했으며, 사도세자
의 아들인 정조(正祖)는 선희궁으로 이름을 높였다.

1870년 선희궁 신주를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겼다가 1896년 원위치시켰으며, 1908년 순종(純
宗)이 칙령(勅令)을 내려 나라에서 관리하는 사묘(祠廟)을 대거 정리하면서 육상궁에 통합시
키고 선희궁은 사우를 제외하고 모두 철거했다.
그 빈터에는 1931년 제생원(濟生院) 소속 맹아부(盲兒部)가 둥지를 틀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서울농학교와 서울맹학교의 전신이다.


▲  반지하처럼 살아가고 있는 옛 선희궁터 초석

신교동교차로에서 필운대로를 따라 서울농학교로 다가서면 길 오른쪽(북쪽)에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 듯, 콘크리트 밑에 깔린 길다란 석축(石築)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이들은 선희궁을
받치던 늙은 초석들로 지금은 그 위에 학교 운동장을 깔았다.


▲  왕실 사당으로써의 위엄과 기품을 잃지 않은 선희궁터 사우

▲  벽돌로 3면을 두룬 선희궁 사우의 뒷모습

▲  화려한 단청이 눈을 부시게 하는 사우 내부
텅 빈 내부에는 부질없는 먼지만이 가득하다.


서울농학교 안쪽에 자리한 선희궁 사우는 툇마루를 갖춘 맞배지붕 건물이다.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정면을 제외하고 모두 벽돌로 둘렀으며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무심한 세월의 때가
아낌없이 깃들여진 기단 위에 가지런히 들어앉아 나름대로 위엄과 기품을 드러내고 있지만 한
참 후배인 키다리 학교 건물 속에 파묻혀 오히려 초라하게 다가온다.

교정에는 옛 선희궁의 식구였던 늙은 느티나무와 은행나무가 있다. 은행나무는 사우 부근에, 
느티나무는 학교 정문에 있는데 정문에 있는 느티나무는 나이가 250년이 넘었다. 250년이면
선희궁과 나이가 비슷하니 아마도 선희궁을 짓고 기념 식수로 심은 듯 싶으며, 높이 16m, 둘
레는 4.3m에 이른다. 사람들의 오랜 보살핌과 세월이란 마르지 않는 양분으로 나날이 커져가
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는 올해도 변함없이 교정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준다.


▲  신교동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7호
학교 아이들에게 그늘을 드리우며 삭막한 속세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삶의
희망을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소중한 정자나무이다.


▲  200여 년 묵은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5호
앞의 느티나무와 달리 하늘로 곧게 솟아 늘씬한 자태를 뽐낸다.

▲  서울맹학교 정문과 우당기념관 앞에 자리한 잘생긴 은행나무
나이는 약 100년대로 여겨진다. 그가 걸쳤던 황금옷의 실타래가 풀어지면서
슬슬 앙상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데, 그 모습이 한라산(漢拏山)과
덕유산 고지대에서 볼 수 있는 구상나무와 비슷해 보인다.


* 선희궁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 1-1 서울농학교 내 (필운대로 103)



 

♠  서촌의 주요 명소였던 옛 청휘각(晴暉閣)터

▲  옥인동(玉仁洞) 산자락에 깃든 청휘각터(옥인동 산47번지)

서촌의 서부를 달리는 필운대로에서 옥인동 북서쪽 주택가를 가로질러 인왕산 자락으로 향하
면 자연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골목길(옥인5길)이 나온다. 길 동쪽은 서촌 주거지, 서쪽은
숲이 무성한 인왕산으로 서촌을 비롯한 서울 도심이 훤히 바라보이고, 인왕산 숲속이라 풍경
도 뛰어나 아름다운 절경만 보면 사죽을 못쓰던 옛날 사람들의 흔적이 반드시 있을 듯싶은데,
그 예상대로 청휘각터를 알리는 이정표가 발길을 오래도록 머물게 한다.

청휘각은 인왕산 동쪽 계곡의 하나인 옥류동(玉流洞)에 있던 정자이다. 그 옥류동은 인근 청
풍계와 수성동(水聲洞)과 더불어 혼란의 20세기를 거치면서 거의 생매장을 당해 약간의 시냇
물만 남아있는 정도로 개울은 거의 사라졌지만 숲은 여전하여 옛날의 경치를 조금 간직하고
있다.
청휘각이란 '비가 개인 뒤에 맑은 햇살이 비치는 누각'이란 시적(詩的)인 뜻이다.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이곳에 집을 짓고 그 후원에 지은 누정이 바
로 청휘각으로 겸재 정선은 장동 일대(청운동 지역)의 명소 8곳을 선정해 그림으로 남겼는데,
청휘각 생전의 모습이 바로 그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정선이 아니었다면 청휘각의 생
김새조차 모를 뻔했다.


▲  겸재 정선이 그린 청휘각

정선이 그린 청휘각 그림을 보면 청휘각 주변은 온통 소나무를 비롯한 숲과 개울 뿐이다. 정
자 밑에는 서촌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 청휘각을 후원으로 삼았다는 김수항 집은 나와있
지 않아 그 집은 진작에 사라진 모양이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으로 많은 문인(文人)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청휘각은 대중적인 명
소가 되었으며, 그렇게 착했던 청휘각이 언제 사라졌는지는 인왕산 산신(山神)도 모르는 실정
이나 20세기 초반 어둠의 시절을 겪으면서 슬쩍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해방과 6.25이
후 정자 밑까지 집들이 들어차 달동네처럼 변하면서 옥류동 계곡마저 희생되고 말았다. 허나
다행히도 청휘각 주변은 개발제한구역에 묶여 아직 자연 지대를 유지하고 있어 청휘각 그림에
담긴 풍경의 절반 정도는 아직 유효하다.

청휘각은 서촌에 널린 소소한 명소에 불과하나 풍경만큼은 능히 갑(甲) 수준이다. 서촌의 조
그만 보탬도 줄 겸, 그리고 잃어버린 옛 경승지를 되찾는 차원에서 그림과 관련 자료를 참조
해 청휘각을 복원했으면 좋겠다. 골목길 밑을 제외하면 모두 숲이니 잃어버린 정자를 다시 일
으킬 공간도 충분하며, 숲과 계곡도 옛 모습 그대로 재현을 시킨다면 정말 금상첨화가 될 것
이다. 


▲  청휘각터로 인도하는 옥인5길 골목길
인왕산과 가까운 옥인동 윗동네는 아직 달동네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  인왕산과 서촌(웃대) 주거지의 경계를 가르는 옥인5길 골목길

▲  옥인동에서 바라본 청운동 주택가와 북악산(백악산)



 

♠  김상용(金尙容) 집터와 정철(鄭澈) 집터

▲  김상용 집터에 남아있는 백세청풍(百世淸風) 바위글씨

서촌의 북쪽 끝을 잡고 있는 청운동은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사이에 포근히 자리해 있다.
예로부터 절경을 자랑하던 이곳에는 늙은 바위글씨들이 여럿 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백세청풍 바위글씨다. 바위글씨란 바위에 새긴 글씨로 어려운 말로
각자(刻子)라고 하는데, 요즘은 순수 우리말인 바위글씨로 많이 불린다.

백세청풍 바위글씨는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새긴 것이다. 지금은 달랑 4자만 남아있지
만 원래는 '대명일월(大明日月) 백세청풍' 8글자로 앞의 4글자는 왜정 때 영구히 지워지고 말
았다.
또한 이들 글씨의 보금자리인 바위 위에 높게 석축을 쌓고 커다란 주택을 세우면서 석축에 제
대로 깔린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그 형태가 완전히 사람 발에 깔린 개미 같다. 그나마 뒤늦
게나마 바위 앞에 철책을 둘러 보호에 나서고는 있으니 문화유산 보존에 야박한 이 땅의 현실
에서는 그것으로도 다행이다. 기분 같아서는 바위를 뭉개고 있는 집들과 석축을 말끔히 지워
버려 바위에게 자유를 주고 싶을 정도이다.

바위글씨의 주인공인 김상용은 1607년 이곳에 들어와 집을 짓고 살았는데, 주변 풍경이 수려
해 청풍각(淸風閣)이란 별도의 건물을 짓고 바위에 8글자를 새겼다. 그 연유로 이곳을 흐르던
계곡이 청풍계(淸風溪)라 불리게 되었으며, 청풍계와 인근 백운동(白雲洞)의 이름을 따서 지
금의 청운동이 되었다. <옛날에는 장동(壯洞)이라 불림>
서촌의 경승지이자 서울 굴지의 명소로 찬양을 받았던 청풍계는 고약했던 왜정(倭政) 시절에
왜열도 재벌인 미쓰이(三井)가 이곳을 매입하여 건물을 지으면서 개념없이 마구 아작을 내기
시작했다. 졸졸졸~ 흐르던 개울을 생매장시키고 바위를 깨뜨렸으며, 계곡에 단 1채 남았던 옛
건물인 태고정(太古亭) 마저 인부들의 숙소로 유린하면서 끝내 밀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바
위글씨까지 손을 대어 글씨의 절반을 지워버렸다.

해방 이후 이곳에는 민가들이 들어차 청풍계가 다시 돌아올 여유도 주지 않았고, 졸부들의 저
택까지 백세청풍 바위에 깔고 앉으면서 이제는 전설 속의 이름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인왕제
색도(仁王霽色圖)를 남긴 겸재 정선이 청풍계의 암울한 미래를 예견이나 했는지 이곳의 풍경
을 여러 장의 화폭에 담으면서 옛 모습을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다만 김상용의 집은 정선의 그림에 나오지 않아 겸재 이전에 사라진 모양이며, 이제는 백세청
풍 바위글씨만이 겨우 남아 그의 집터임을 아련히 귀띔해줄 따름이다.


▲  가까이서 본 백세청풍 바위글씨
옛날 글씨는 왼쪽이 아닌 오른쪽부터 읽는다. 괜히 풍청세백이라 읽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자~
 

그럼 바위에 새겨진 백세청풍은 무슨 뜻일까? 백세(百世)는 100세대를 뜻한다. 대략 1세대를
30년으로 잡으니 무려 3,000년이 된다. 쉽게 말하면 오랜 세월을 뜻한다. 청풍에서 청(淸)은
맑고 높다는 뜻이고 풍(風)은 군자의 덕과 절개를 뜻한다. 그러니까 오래도록 부는 맑은 바람
, '영원토록 변치 않는 높은 선비의 절개','대대로 맑은 가풍을 유지한다'는 의미로 그 유명
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백이와 숙제는 옛 조선(고조선)의 제후국이었던 고죽국(孤竹國) 사람들로 여기까지는 별 이상
은 없다. 김상용도 선비이자 양반이므로 그런 글귀를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며, 양반들에게는
이상향과 같은 내용으로 그들이 자주 쓰던 글귀였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은 지워진 대명일월은 무엇일까? 있는 그대로 풀이하면 크고 밝은 해와 달이다. 그
것도 맞긴 하지만 여기서 대명(大明)은 조선이 자존심도 버리며 지극히 섬기고 받들던 명나라
를 뜻한다. 그러니 명나라의 해와 달, 즉 명나라의 세상을 의미하며, 거기에 백세청풍까지 더
하면 명나라에 대한 절개를 지키자는 뜻이 된다.
조선의 위정자들 상당수는 명나라를 '황명(皇明)','대명(大明)' 등이라 높여 불렀다. 게다가
조선의 정치 이념이자 선비와 사대부들이 익혔던 성리학(性理學)도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를
더욱 부추겼다.
성리학이 문치(文治)에는 좋을지 몰라도 문을 강조하고 무(武)를 멀리하는 함정이 있고, 주희
(朱熹)가 몽골 원나라에게 완전히 구겨진 한족(漢族) 잡종들의 체면을 만회하고 한족 중심의
중화사상을 고취시키려는 의도로 만든 학문이다. 그러다보니 조선의 위정자와 사대부들은 점
점 명에 대한 꼴사나운 사대주의에 젖게 되고 국방까지 덩달아 등한시 하면서 명나라도 한때
두려워했고 툭하면 북방 세력(여진족 등)을 초토화시켰던 조선의 군사력은 크게 떨어진다.
게다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 조금 도와준 것을 가지고 '재조지은(再造之恩)'이
라 떠벌리며 더욱 명나라에 딸랑거렸다.

그 명나라가 1644년 풍비박산이 났으니 조선의 선비와 위정자들은 완전 어버이를 잃은 양 크
나큰 충격에 빠졌다. 물론 병자호란의 치욕을 안겨준 청나라에 대한 적대감도 명에 대한 그리
움에 한몫 했다. 명이 사라진 이후 조선 지배층과 유생들 사이에서 '명나라를 회복해야 된다'
,'명나라의 세월로 돌아가야 된다'는 아주 거지 같은 사상이 지배적으로 형성되었는데, 바로
그때 생겨난 단어가 바로 '대명일월' 4자이다. 그들의 꼴통 사대주의로 나라를 말아먹고 백성
들을 도탄에 밀어넣은 지배층과 유학자들의 고리타분하고 시대착오적인 이념이 담겨 있는 것
이다.

그런데 김상용이 글씨를 새긴 것은 명이 망하기 이전이므로 '대명일월'이란 단어는 아직 두드
러지지 않은 상태다. 그가 1637년에 죽었지만 그때까지도 명은 질기게 명줄을 유지하고 있었
다. 그러면 백세청풍은 몰라도 대명일월은 다른 사람이 새겼을 가능성이 큰데, 그의 후손이나
후학들이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도에서 자결한 김상용을 기리고 명나라를 사모하는 뜻에
서 새겼을 가능성이 크다.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에 따르면 명나라에 대한 꼴통 사대주의의 1
인자였던 송시열(宋時烈)의 글씨라는 말이 있다.


※ 김상용(1561~1637)은 누구인가?
김상용은 안동 김씨로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이다. 1590년 증광시(增廣試)에 급제
하여 검열관(檢閱官)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권율(權慄)장군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1598년 승지(承旨)가 되어 명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다녀왔으며, 서인(西人)의 일원으로 대
사성(大司成)을 비롯, 여러 외직을 거쳤다. 1623년 서인패거리가 광해군(光海君)에게 반기를
들며 창의문을 뚫고 도성을 범하는 파렴치한 반란을 일으키자<인조반정(仁祖反正)> 거기에 참
여해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라는 큰 자리를 얻었으며, 예조와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1627년
에 유도대장(留都大將)이 되었다.

1630년 나이가 70살에 이르러 조정에 사직을 청했으나 인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우
의정(右議政)에 임명했다. 드디어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터지자, 그는 빈궁(嬪宮)과 원손(
元孫)을 호종하여 급히 강화도로 줄행랑을 쳤다. 허나 1637년 1월 청나라군이 강화해협을 건
너 손쉽게 강화성을 점령하자 그 분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남문 문루(門樓)에 화약을 잔뜩 쌓
아 불을 질러 자살했다.

그 당시로는 드물게 76살씩이나 살았던 인물로 자살을 택한 덕에 죽어서는 충신의 대접을 제
대로 받았다. 인조는 그에게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강화군 선원면에 그의 사당을
세워 그의 충절을 기렸다. <선원면이란 지명은 바로 그의 호에서 유래됨>


▲  송강 정철 집터

청운초등학교 앞 자하문로 길가에는 송강 정철의 집터를 알리는 표석과 그의 시가 담긴 시비(
詩碑)들이 줄지어 있다. 정철은 조선 가사문학(歌詞文學)의 1인자로 사미인곡(思美人曲)을 비
롯한 그의 작품들은 초,중,고등학교 국어/문학 교과서에 아주 지겹도록 등장해 일명 학생들과
대입 수험생들의 적이라 불리기도 하며, 국문학사에서도 큰 무게를 가진 인물이다.

※ 송강 정철(1536~1593)은 누구인가?
정철은 연일정씨로 서울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시호는 문
청(文淸)이며, 기대승(奇大升)과 김인후(金麟厚)의 제자이다.
그는 맏누이가 인종(仁宗)의 귀인(貴人)이고, 2째 누이가 계림군(桂林君)의 부인이 되면서 궁
중에 자주 들락거렸는데, 나중에 명종(明宗)이 되는 경원대군(慶原大君)과 친했다. 1545년 을
사사화(乙巳士禍) 때 계림군이 연관이 되자 정철 일가는 거의 풍비박산이 나고 정철 부자는
유배형에 처해졌다.

1551년 유배에서 풀려나자 그의 일가는 집안의 고향인 담양 창평(昌平)으로 집을 옮겼다. 송
강은 형이 장가를 들어 살고 있는 순천에 가다가 우연히 김윤제(金允悌)의 별장(환벽당) 밑
창계천에서 목욕을 한 것이 인연이 되어 김윤제(金允悌)의 문하가 되었다.
(환벽당과 창계천 관련 글 ☞ 보러가기)
그는 여기서 10년 동안 공부를 했으며, 이때 기대승 등 당대 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우고 이이
(李珥)와도 교유했다.

1561년 진사시(進士試)에 붙고, 1562년 별시(別試)에 장원으로 붙으면서 전적(典籍) 등을 역
임했으며, 1566년 함경도(咸鏡道) 암행어사를 지낸 뒤 이이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78년 장악원정(掌樂院正)이 되고 도승지(承旨)로 승진했다. 하지만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동인(東人)의 공격을 받으면서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했다.

1580년 강원도 관찰사(觀察使)가 되었고, 3년 동안 전라도와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많은
시를 남겼다. 이때 그 유명한 관동별곡(關東別曲)이 탄생했으며,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 그리고 1585년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4년을 쉬면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續美人曲)을 비롯한 굴지의 작품을 남겼다.

1589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고, 곧 이어 일어난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을 직접 다스리
게 되면서 라이벌인 동인 세력을 철저히 때려잡았다. 그 공로로 1590년 좌의정(左議政)이 되
었다.
1591년 광해군을 세자(世子)로 책봉할 것을 건의했으나 당시 선조(宣祖)는 인빈(仁嬪)김씨 소
생의 신성군(信城君)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송강의 건의에 뚜껑이 뒤집힌 선조는 그를 진주
와 평안도 강계(江界)로 유배를 보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왕의 소환을 받아 왕을 의주(義州)까지 호종했으며, 1593년 명나라
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왔다. 이후 동인의 모함으로 관직에서 떨려나 강화 송정촌(松亭村)
에 머물다가 57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는 조선 가사문학의 상징으로 고산 윤선도(尹善道)와 쌍벽을 이루며, 작품으로는 시조 70수
가 전한다.


▲  송강의 시비 ①
산사야음(山寺夜吟)과 함흥객사에 핀 국화

산사야음(山寺夜吟)
우수수 지는 나뭇잎 소리를
성근 빗소리로 잘못 알고
동자승 불러 나가보랬더니
시내앞 나뭇가지에 달만 걸렸네

▲  송강의 시비 ②
백성들 교화용으로 만든 훈민가

▲  송강의 시비 ③ 사미인곡
임금을 그리며 섬기는 마음을 담은 가사이다.

▲  송강의 시비 ④ 관동별곡

▲  송강의 시비 ⑤ 성산별곡(星山別曲)


* 백세청풍 바위글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52-111
* 정철 집터 표석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123



 

♠  인왕산 중턱에 깃든 상큼한 공원, 청운공원(淸雲公園)

▲  가을옷을 곱게 걸친 청운공원과 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서촌의 북쪽 끝이자 인왕산 중턱에 넓게 자리한 청운공원은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
은 공원이다. <산 전체 또는 대부분이 공원으로 지정된 남산과 안산(鞍山), 낙산공원은 제외>

윤동주시인의 언덕이란 새로운 꿀단지를 북쪽에 달고 있는 이곳은 인왕산 동쪽 자락으로 청운
동 주택가와도 약간 거리를 둔 자연 지대이다. 인왕산길이 공원의 북쪽과 서쪽을 지나며, 자
하문고개에서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로 간판을 바꾸고 북악산(백악산) 뒷쪽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공원을 가로지르는 골목길(자하문로35길)은 윤동주문학관에서 공원을 지나 청운동 주
택가를 거쳐 자하문로로 내려간다.

청운공원은 인왕산 품에 조성된 평범한 시민공원으로 산자락에 조성된 것 외에는 딱히 볼거리
는 없었다. 그러다가 2007년에 인왕산 돌을 모아 일종의 돌아파트를 지었고, 2009년 이후 공
원 북쪽에 윤동주시인의 언덕과 윤동주문학관이 닦였으며, 2014년에 이 땅 최초의 한옥 공공
도서관인 청운문학도서관이 들어서 볼거리도 크게 늘었다.
또한 이곳은 산자락에 있기 때문에 서울 도심과 부암동, 홍지동 일대가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일품이며,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의 청정한 기운이 늘 깃들여져 있어 공기도 맑다. 게다가
서울 장안의 주요 해맞이 성지(聖地)로 매년 1월 1일 해맞이 축제가 열리며, 나무와 꽃이 울
창하여 봄꽃 명소, 늦가을 단풍 명소로 격하게 칭송을 받는다.

청운공원에 가려면 자하문고개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자하문터널 남쪽에서 자하문
로35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도 있는데, 그건 경사가 좀 각박하다. 그리고 청운동 안쪽에 자리
한 유진인재개발원 정문 못미쳐에 청운공원으로 오르는 산길이 가늘게 이어져 있고, 사직공원
과 수성동계곡에서 인왕산길을 타고 접근하는 것도 괜찮다.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의 위엄

늦가을 단풍이 한참 절정을 이르는 때라 나무들이 진한 붉은색과 노란색, 녹색 등으로 단단히
물들었다. 겨울 제국(帝國)의 시련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남은 끼와 기력을 모두 발산한 나무
들. 그리고 죽음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무지개처럼 짧은 삶을 원망하는 나뭇잎
들. 인간은 그들을 통해 늦가을의 정취를 즐기면서도
'올해도 이제 저물었구나, 좀 있으면 강제로 1살을 더 먹네'
늦가을과 연말 우울증에 한숨을
쉰다.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그리고 일몰 직전의 하늘

▲  고양이 같은 인왕산 호랑이상

천하 호랑이의 대명사이자 하늘 아래 제일 무서운 존재였던 인왕산 호랑이, 이제는 숱한 설화
만을 남긴 채, 우리들 뇌리에서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그들을 그리며 만들었다는 인왕산 호랑이상, 어린이들이 울고 갈 정도로 매섭게 좀 만들 것이
지, 너무 순둥이처럼 만들어서 졸지에 호랑이 탈을 쓴 인왕산 고양이상이 되어버렸다. 곶감도
우습게 봤다는 천하 제일의 인왕산 호랑이를 제대로 모욕한 셈이다.


▲  인왕산 돌로 만든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인왕산 돌아파트)'

서시정에서 윤동주문학관으로 내려가면 돌의 거대한 보금자리를 만나게 된다. 이것은 2007년
서울시에서 추진한 '서울 도시갤러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으로 인왕산과 그 주변
에서 주운 돌을 정리하여 그들의 조촐한 아파트로 만들었다.

* 청운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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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깃든 고즈넉한 산사, 동대문구 천장산 연화사~청량사 (연화사에서 먹은 초파일 절밥)

석가탄신일 사찰 나들이 (회기동 연화사, 청량리 청량사)



' 부처님오신날 도심 사찰 나들이 ~ 동대문구 연화사, 청량사 '

천장산 연화사

▲  천장산 연화사

연화사 관세음보살상과 천수관음도 청량사 동별당

▲  연화사 관세음보살상과
천수관음도

▲  청량사 동별당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4월 초파일)이 다가왔다. 그날만 되면
'석가탄신일 사찰 순례'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세우며 내가 살고 있는 서울 장안을 중심으
로 열심히 절 투어를 벌이고 있는데, 이번 초파일에는 예전에 1번 찾았던 연화사와 그 부
근에 미답(未踏)으로 버젓히 남아있던 청량사를 주메뉴로 정했다.
청량사는 연화사보다 더 오래된 절로 그 이름은 익히 듣고 있었으나 나를 몸살 나게 만들
정도의 늙은 유물이 없어 계속 발걸음을 미루다가 이번에 그를 꺼내 들었다.

둥근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1시에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1호선 전철을 타고 회기역
에서 내려 경희대 옆에 자리한 회기동(回基洞) 연화사를 찾았다.



 

♠  경희대 그늘에 자리한 오래된 절, 조선 왕실의 원찰이었던
~ 천장산 연화사(天藏山 蓮華寺)

▲  활짝 열린 연화사 일주문(一柱門)

경희대병원 서쪽에는 연화사란 조그만 절이 둥지를 틀고 있다. 천장산(141m) 남쪽 자락에 자
리한 이곳은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1499년 폐비윤씨의 묘역인 회묘(懷墓)의 원찰(願刹)로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회묘는 원래 경희대병원 자리에 있었는데, 억울하게 죽은 어미를 위해 연산군은 1504년 회묘
를 회릉(懷陵)으로 높여 석물을 심고 회묘를 지키는 절을 세웠다. 하지만 아쉽게도 연화사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그 절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어미를 향한 연산군의 사무친 마음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덧없이 아작이 나버렸고
, 연산군 자신도 교동도(喬桐島)로 추방되어 바로 그해 겨울,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회
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어 방치되었으며, 절도 이때 풍비박산이 난 것으로 보인다. 반정파들은
연산군과 관련된 모든 것을 철저히 깔아뭉갰기 때문이다.

이후 터만 아련히 전해오다가 경종(景宗, 재위 1720~1724)의 능인 의릉이 인근 석관동(石串洞
)에 터를 닦으면서 다시 존재감을 드러낸다. 영조(英祖)가 1725년에 절을 지어 의릉의 원찰로
삼은 것이다. 허나 그 원찰의 이름도 야속하게도 전하지 않는다.
1870년대에 이르러 승려 묘련(妙蓮)이 절을 중수했는데, 그는 성품이 좋아서 인기가 대단했다
. 하여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 절을 묘련사(妙蓮寺, 또는 묘련암)라 부르니 이때부터 절의
이름 3자가 역사에 나타난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파괴된 것을 1883년에 승려 정담(淨潭)이 남화(南化), 완허(玩
虛)의 도움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이때 궁인(宮人) 박씨와 상궁(尙宮) 최씨, 김씨 등이
시주해 여러 탱화를 제작했다. 그렇게 중건이 마무리 되자 1884년 10월에 '천장산 묘련사 중
건기(重建記)'를 남겼다.
이후 절은 연화사로 이름이 갈렸는데, 그 시기가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1993년 자음(慈音)이
지은 '천장산 연화사 삼성각 상량문(上樑文)'에는
'부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 머무는 곳이 연화장(蓮華藏) 세계이고, 중생의 근본적 자성(自
性)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청정한 연꽃과 같아 절 이름을 연화사라 했다'
고 적고 있어 연화
장 세계에서 이름을 따왔음을 귀띔해 준다.

1950년대까지 절 주변은 자연에 묻힌 싱그러운 곳으로 그때는 영휘원<永徽園,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의 묘역>에서 오솔길을 따라 절로 들어섰다. 허나 1955년에
종로1가에 있던 경희대(옛 신흥대학)가 이곳으로 오면서 절 옆에 학교 건물이 들어섰고 덩달
아 주거지까지 조성되면서 절 주변 풍경화는 180도 달라지게 되었다.
하여 절은 경희대에 완전히 포위된 외로운 모습이 되었으며, 연화사의 첫 후광(後光)이던 회
묘는 경희대에 떠밀려 1969년 고양시 서삼릉(西三陵)으로 이전되었다. 또한 절 주변에 가득했
던 숲도 겨우 서북쪽에 일부가 남아 가늘게 천장산과 손을 잡고 있다.

1990년대까지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과 미륵전(彌勒殿), 대방(大房), 종각 등의 기와집들
이 경내를 이루었으며, 극락보전 앞에는 뜨락이 닦여있었고, 경내 뒤에는 약간의 소나무가 운
치를 이루었다. 허나 건물이 낡고 터가 좁아 1993년부터 크게 중수를 벌여 기존의 건물을 부
시고 집약적인 공간인 2층짜리 대웅보전과 삼성각을 새로 지었으며, 그 과정에서 '미륵전 상
량문'과 '묘련암 중수기(1875년)'가 발견되어 절의 숨겨진 역사 일부가 속살을 드러냈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보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무애당, 관음전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
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아미타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2호)와 칠성도, 천수관음도, 신
중도, 지장시왕도, 산신도, 목각석가여래설법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64호), 산신도가 있다.
이중 아미타괘불도(阿彌陀掛佛圖)는 1901년 10월 28일에 제작되어 다음달 11월 20일에 점안된
것으로 대은 돈희(大恩 頓喜)를 중심으로 계은 봉법(啓恩 奉法), 한봉 응작(漢峰 應作), 보암
긍법(普庵 亘法) 등이 참여해 조성했다. 아미타3존불을 비롯하여 가섭존자, 아난존자, 사자와
코끼리를 탄 문수/보현동자상까지 등장시켰는데, 이는 19세기 중반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
했던 괘불 양식이다. 날이 날인지라 괘불의 화려한 외출을 기대했으나 이번에도 그는 나오지
않았다.
그밖에 1880년에 제작된 독성도가 있으며, 지방문화재 탱화들은 괘불을 제외하고 삼성각과 대
웅보전 1층, 관음전에 포진해 있어 찾기는 쉽다. (그들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경내로 인도하는 짧은 숲길
봄이 푸르게 붓질을 한 숲길에 고운 빛깔의 연등이 허공을 가득 메우며
부처님오신날 분위기를 한껏 드높인다.


훤칠하게 솟은 일주문을 들어서 찰라와 같이 짧은 숲길을 지나면 바로 대웅보전 앞이다. 오색
찬란한 연등이 연화사의 좁은 하늘을 가득 메우며 부처님오신날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연화사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좁게 경내를 이루고 있는데, 그 동쪽에 삼성각과 무애당, 관음
전이 있고 서쪽에는 불교용품과 공양미, 전통차를 파는 건물이 있다. 석가탄신일을 즐기러 나
온 수많은 사람들로 좁은 경내는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고, 절은 초파일 특수로 즐거운 비명
을 지른다.


▲  오색 연등이 그늘을 드리운 대웅보전 뜨락
대웅보전 뜨락에는 행사용 천막을 주렁주렁 지어 전통차 시음과 다도(茶道) 체험,
연등 만들기, 불교용품 판매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나는 전통차 1잔을 섭취했음)

            ◀  삼성각(三聖閣)
대웅보전 뒷쪽 구석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
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에게 친
숙한 산신과 독성, 칠성의 보금자리이다.
1993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건물 바로 뒷쪽에
콘크리트로 다져진 언덕이 있는데, 그 언덕에
경희대 건물이 높이 자리하여 절을 대놓고 살
펴본다.


▲  삼성각 석가여래상과 칠성도(七星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3호)

삼성각 중앙에는 평온한 미소를 머금은 금동석가여래상과 고색이 역력한 칠성도가 자리해 있
다.
칠성도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 칠
성불(七星佛), 칠원성군(七元星君), 노인성(老人星), 삼성(三星) 등 칠성 식구들이 복잡하게
담겨져 있는데, 칠성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존재로 오랫동안 이 땅의 토속신앙으로 머물
러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 때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되면서 그를 다루지 않는 절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다.

연화좌(蓮花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칠성도의 주인, 치성광여래는 금륜(金輪
)을 들고 있는데, 양 어깨를 덮은 통견의(通肩衣)를 입고 있으며, 좌우 협시보살은 연화좌 위
에 반가좌(半跏坐) 형태로 앉아 본존불을 향해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인다.
그리고 머리에 쓴 관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붉은 원과 하얀 원이 그려져 있고, 치성광여래
주위로 좌우 대칭되게 배치된 칠성불은 합장한 채 본존불 쪽으로 몸을 향해 있으며, 칠원성군
은 각기 홀을 들거나 합장한 채 치성광여래를 향해 서 있다.

이 탱화는 대한제국 시절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활약한 한곡 돈법(漢谷 頓法)을 중심으로 한
명 환조(漢明 幻照), 두삼(斗三), 태호(太湖), 창호(昌湖) 등이 동참하여 1901년에 그린 것으
로 이때 아미타괘불도와 지장시왕도, 신중도, 천수관음도가 같이 제작되었다.


▲  삼성각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6호

칠성도 우측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 등 산신 가족을 머금은 산신도가 걸려있다. 칠성도만큼
이나 고색이 깃들여져 있으나 그와 달리 등장 인물이 단출해서 보기는 좋다. 언제 제작되었는
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923년에 문성(文性)이 산신각을 짓고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
어 이르면 1880년대 후반, 적어도 칠성도와 비슷한 시기로 여겨진다.

그림을 살펴보면 가운데에 붉은 옷을 걸친 산신 할배가 커다랗게 표현되어 있는데, 머리에 모
자 모양의 두건을 쓰고 있고, 까무잡잡한 얼굴은 둥근 넓적하며 포근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
본다. 왼손에는 깃털로 된 부채를 들고 있으며 오른손으로 그의 수염을 쓰다듬고 있다.
산신 오른쪽에는 그의 비서인 동자 2명이 자리해 있는데, 모두 기물을 들고 있으며, 왼쪽에는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민화(속화)풍으로 익살스럽게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그런데 시
중에 돌고 있는 어느 유명한 민화(民畵)의 호랑이와 많이 닮아서 혹 그를 참조하여 그린 것은
아닐까 싶다. 하여튼 옛 사람들은 호환(虎患)이라 하여 두려움의 대상인 호랑이를 고양이처럼
친근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짙었다.

산신 뒤에는 그의 활동무대인 산이 있는데, 노송과 길게 떨어지는 폭포를 그려 심산유곡(深山
幽谷)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  삼성각 독성도(獨聖圖)

칠성도 좌측에 자리한 독성도는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를
담은 탱화로 아줌마 자세로 편안하게 앉은 백발의 독성 할배와 그의 활동무대인 천태산이 그
려져 있다.
비단 바탕에 채색된 것으로 1880년에 제작되었으며, 삼성각에 깃든 3개의 탱화 중 가장 늙은
존재로 보존 상태도 양호하나 이상하게도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


▲  연등을 두룬 대웅보전

연화사의 법당인 대웅보전은 1993년에 지어진 지상 2층, 지하 1층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하
는 선방(禪房)과 공양간, 2층은 대웅보전, 1층은 강당(講堂)으로 작은 절에 걸맞게 집약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화를 보고 싶다면 1층을 기웃거리면 되며 시장기
를 단죄하고 싶다면 지하로 내려가면 된다.

▲  관음전에서 바라본 대웅보전

▲  대웅보전(2층) 내부

대웅보전 2층 불단에는 금동 피부의 석가여래상이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좌우에
거느리며 자리해 있다.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를 비롯한 후불탱 3점이 그들을 든든하게 받쳐
주고 있으며, 그들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떡과 과일 등으로 불단이 내려앉을 지경이다.


▲  연화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5호

강당으로 쓰이는 대웅보전 1층에는 연화사의 보물인 신중도와 지장시왕도가 액자에 소중히 깃
들여져 있다.

신중도는 호법신(護法神)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등장 인물이 너무 과다하여 정신을 쏙 빼놓는
다. 주로 법당을 지키는 용도로 신중도(신중탱)를 많이 거는데,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
, 위태천(韋太天)을 중심으로 그의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그림 좌우측에 대칭으로 자리한 제석천과 범천은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뒤에 두루고 머
리에 보관(寶冠)을 눌러쓴 채, 두 손으로 꽃을 들고 있으며, 그림 하단에는 위태천을 중심으
로 칼로 무장한 팔부중(八部衆)이 있고, 제석천과 범천 주위로 일월대신(日月大神) 등의 천신
(天神)과 산개(傘蓋) 등을 받쳐든 천동(天童), 악기를 연주하는 천녀(天女)가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1901년에 수화원 한봉 응작(漢峰 應作)을 비롯해 대은 돈희(大恩 頓喜), 계은 봉법
(啓恩 奉法), 보산 복주(寶山 福珠), 보암 긍법(普庵亘法), 재겸(在謙) 등 12명의 화승(畵僧)
이 그린 것으로 이중에서 계은 봉법, 보암 긍법, 돈법(頓法), 두삼(斗三) 등은 20세기 초 경
기도 지역에서 활약한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釋)과 교류를 가진 화승들이다.
그림의 구도와 형태, 필선, 채색 등이 깔끔하게 처리되었으며, 세부묘사가 정교해 19세기 중
반 이후 화풍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연화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6호

신중도 옆에 있는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
者),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신중도만큼이나 정신이 없는
이 그림은 연화사 탱화가 대거 조성되던 1901년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림의 주인공인 지장보살은 수미단(須彌壇) 위에 마련된 연화좌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
아있으며, 투명한 흑색 두건을 쓰고 오른손에는 보주(寶珠), 왼손에는 육환장(六環杖)을 들고
있다. 그 좌우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합장인을 선보이며 지장보살을 향해 서 있고, 지장보
살의 신광 좌우로는 온갖 모습의 시왕이 지장보살을 향해 서 있는데, 시왕 뒤에는 8곡병(曲屛
)이 둘러져 있으며 광배는 금박을 붙여 장식했다.
이렇게 광배를 금색으로 처리한 수법은 대한제국 시절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했던 것으
로 그림의 인물 표현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우두옥졸(牛頭獄卒)과 마두옥졸(馬頭獄卒) 등
인물 상호에 표현된 음영법이다. 이 음영법은 19세기 이후 서울, 경기 지역 불화에서 많이 보
인다.

이 그림은 1867년에 경선당 응석이 그린 낙산 보문사(普門寺, ☞ 관련글 보기)의 지장시왕도
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낙산 청룡사(靑龍寺, ☞ 관련글 보기) 지장시왕도와 유사하며, 대
한제국 시절 서울, 경기 지역 지장시왕도의 도상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작품으로 채색 및
인물 표현에서도 19세기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하여 이를 통해 서울 지역 불화유파(佛畵
流派)의 사승(師僧)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대웅보전 1층 앞에는 초파일을 맞아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 부처가 온갖 꽃으로 치장된
관정대(灌頂臺)에 우뚝 자리해 중생들의 인사
를 받고 있다.
관불의식 수요가 많아서 여기서는 참여를 하지
않고 1층 안에서 살짝 사진에 담았는데, 중생
들이 껴얹은 물을 맞은 아기부처의 표정이 잠
시 환해진 듯 싶었다.
허나 햇님이 퇴근하면 다시 어두컴컴한 창고에
봉인되어 1년을 기다려야 되니 오늘 냉수마찰
을 실컷 받아야 여한이 없을 것이다.
예전 초파일에는 대웅보전 2층 앞에서 관불의
식을 했었는데, 그때 절에서 의식에 참여한 사
람들에게 손수건을 나눠주는 인심을 베풀었다.
(그 손수건은 아직도 가지고 있음)


▲  관음전(觀音殿)

대웅보전 옆구리에 자리한 관음전은 무애당(無礙堂) 머리에 올려놓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경내가 좁다 보니 새로 건물을 닦지 못하고 무애당의 허전한 머리를
활용해 관음전을 닦았는데, 이곳에는 대웅보전에 있던 관세음보살상과 천수관음도가 봉안되어
있다.


▲  연화사 천수관음도(千手觀音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4호

관음전이란 새로운 둥지를 마련한 천수관음도는 1901년에 한봉 응작, 보산 복주, 청암 운조(
淸菴 雲照) 등이 그렸다. 지금이야 천수관음(千手觀音)을 다루는 그림이 많이 생겨나고 있지
만 정작 늙은 천수관음도는 매우 드물게 남아있어 그 희소성이 크다. 그런 그림이 무려 연화
사에 소중히 깃들여져 있는 것이다.

바다 가운데에 봉긋 솟은 연화좌 위에 천수관음이 붉은색 바탕의 옷을 걸치며 앉아있다. 그는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과 경책(經冊)을 받쳐 든 4비(臂) 등 40비를 갖추고 있는데, 그의 커다
란 광배 안에는 무려 1,000개의 손과 눈을 그려 놓아 관세음보살의 위엄을 한층 드높였다. 신
중도와 달리 등장인물은 달랑 1명이지만 그의 찬란한 광배로 인해 이 그림 또한 보는 이의 혼
을 쏙 빼놓는다.

연화사 천수관음도는 고려와 조선 전기 천수관음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 수
월관음도(水月觀音圖)의 도상까지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1925년에 제작된 대산사 천수
관음도가 연화사 천수관음도에서 계승을 받으니 그 가치는 꽤 크다. 특히 관세음보살의 얼굴
은 살이 많고 이목구비가 단정해 경선당 응석의 영향을 조금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  연등의 물결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대웅보전 앞뜨락
(관음전에서 바라본 모습)

▲  연화사 북쪽에 있는 선동호(仙洞湖)

나무가 우거진 경내 서북쪽에는 경희대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 서쪽에는 경희초등학교가 있고
, 동쪽은 경희여고와 경희대 교내로 연화사 주변을 180도 변형시킨 경희대이지만 천장산 자락
에 자리한 잇점을 살려 자연보호를 크게 여기면서 다른 대학교보다 녹지 비율이 엄청 높은 편
이다. 그러다보니 봄에는 봄꽃 명소, 늦가을에는 단풍 명소로 크게 추앙을 받는다.

주차장 북쪽에 무언가 낌새가 느껴져 가보니 조그만 호수가 숲에 무성히 감싸여 그림 같은 풍
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곳에 아름다운 호수가 감쪽 같이 숨어있었다니.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본 것인가?'
나 자
신도 크게 놀라 뒤로 자빠질 정도였는데, 그는 경희대 교내 서쪽 끝에 자리한 선동호로 숲속
에 깊히 묻혀 있어 서울이 아닌 먼 지방의 산골 호수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이런 곳이라면 선녀(仙女) 누님도 흔쾌히 내려와 목욕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그걸
의식하여 호수 이름도 선녀의 동네를 뜻하는 선동호가 되었다.

호수 주변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며, 봄 풍경과 늦가을 풍경이 아름다워 연화사에 왔다면 경
내 북쪽으로 조금 벗어나 이곳까지 둘러보길 권한다. 호수를 둘러싼 나무와 꽃, 햇님과 달님,
구름 등 하늘을 장식하는 식구들까지 호수를 거울로 삼아 그들의 매뭇새를 다듬으며, 여기서
잠시 망중한에 잠겨보는 것도 괜찮다.


▲  연화사 공양밥의 위엄

연화사는 10분이면 능히 다 볼 정도로 조그만 절이지만 그곳에 깃든 문화유산과 신이 나는 초
파일 분위기, 거기에 생각도 못 했던 선동호까지 겯드리니 1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초파일 절투어의 으뜸 백미(白眉)는 뭐니뭐니해도 먹는 재미가 아닐까 싶다. 공양밥과 국수,
과일, 떡, 전통차 등이 풍부하게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눈과 마음을 실컷 호강시
켜주었으니 이제는 입과 뱃속을 달래줘야 지친 몸에 활력을 주어 다음 일정을 수월하게 진행
할 수 있다.

대웅보전 지하층에 공양간이 있는데, 이미 사람들로 만원이다. 절에서 준비한 공양밥과 미역
냉국, 그리고 후식용 절편을 받아 빈 자리에 앉아 즐겁게 공양에 임했는데, 공양밥은 호박과
김치, 콩나물 등 갖은 나물을 밥에 넣고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이 땅에 흔한 공양밥 스타일이
다. 시장기가 강해서 그야말로 꿀맛이 따로 없었는데, 폭풍 흡입으로 불이 나기 직전인 목구
멍을 미역냉국으로 시원하게 진정을 시켰고, 절편은 청량사로 이동하면서 후식으로 섭취했다.
그렇게 연화사의 풍성한 초파일 인심을 확인하고 다음 인연을 기약하며 청량사로 이동했다.

* 연화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109-1 (경희대로3길 56 ☎ 02-962-6186)



 

♠  청량리 뒤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천장산 청량사(淸凉寺)

▲  청량사 대웅전(大雄殿)

연화사를 나와서 빼곡히 들어찬 회기동 주택가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가면 삼육초등학교 남쪽
이자 영휘원 동남쪽에 자리한 청량사가 뒷통수를 보인다. 담장 너머로 청량사가 기와집 머리
를 보이고 있으나 정작 경내로 들어서는 문이 바로 나타나지 않아 나를 잠시 답답하게 만든다
. 그래서 골목길(제기로31길)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니 그제서야 문이 모습을 비추었고
, 그 문을 들어서면 대웅전을 비롯한 청량사 경내가 펼쳐진다.

이번에 처음 인연을 지은 청량사는 서울의 동쪽 철도 관문인 청량리역 북쪽이자 영휘원 동남
쪽으로 천장산 남쪽 끝자락에 안겨져 있다. 연화사가 경희대에 감싸여 있다면 청량사는 주택
가와 삼육초교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는데 간신히 경내 동쪽과 남쪽에 숲 일부가 남아있어 산
사의 분위기를 아주 약간 드러내고 있다.

이곳은 무려 신라 후기에 창건되었다고 내세우고 있다. 허나 신빙성은 전혀 없으며 처음에는
북한산(삼각산)에 있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최근까지 '삼각산 청량사'를 칭했다. 고려 예종(
睿宗)이 1117년 9월 학자이자 승려인 식암 이자현(息庵李資玄, 1061~1125)을 불러 청량사에
머물게 했다는 내용이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나오는데, 그가 머문 절이 과연 이곳인지도
심히 의문이다.
성종실록(成宗實錄) 1471년 부분에 삼각산 청량사 승려에 대한 기록이 나오며, 신증동국여지
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삼각산에 청량사가 있다고 나온다. 그리고 조선 초기 문신인 김정
(金淨)이 1504년에 청량사에 머문 인연이 있다.

이후 절은 홍릉수목원 자리로 이전되었으며,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 자리를 물색했
는데, 공교롭게도 청량사 자리가 명당의 정혈이라 하여 그곳에 능을 쓰기로 했다. 상황이 그
리 되자 절은 강제로 제자리를 떠날 수 밖에 없어 현 자리로 절을 옮겼다.
일부에서는 돌곶이승방인 석관사(石串寺)를 청량사의 전신(前身)으로 보기도 하나 김정호(金
正浩)가 만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홍릉수목원 자리에 청량사가 표시되어 있고, 임업시
험장 쪽에 석관사(돌곶이절)가 따로 나와있어 별개의 절이었음을 알려준다. 허나 홍릉을 조성
하면서 절은 이곳으로 옮겨졌고, 돌곶이절도 청량사에 합쳐지면서 자연히 돌곶이승방의 역사
를 계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돌곶이승방은 서울 주변 4대 비구니 승방의 하나이다.
그렇게 두 절이 합쳐지자 비구니 남채백(南彩白)이 1895년 석관사에서 법당과 칠성각을 가져
와 대니승방(大尼僧房)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이후 김봉학, 신자영, 장동일, 정부연, 신원삼
비구니의 불사가 계속 이어졌다.

이곳은 연화사처럼 완전 숲속의 절이었다. 주변 풍경이 고와서 왜정(倭政) 때는 서울 근교 경
승지이자 휴양지, 집회 장소로 유명해 많은 이들이 찾았는데 특히 애국지사와 고승들의 발걸
음이 많았다.
별건곤(別乾坤) 제23호(1929년 9월)에는 청량사 절밥이 명물이라는 내용이 있고, 개벽(開闢)
에서도 청량사에 소풍을 갔다는 내용이 많이 나오며, 개벽 제38호(1923년 8월)에는
'청량사라고 하면 시원하게 들리지만 그다지 청량하지 않고 인근 홍릉의 수림(樹林)이 있고
교통이 편해서 군중이 몰리는 것이다'
평가하고 있다.

또한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 현장으로도 바쁘게 살았는데, 1929년 왜경은 청량사를 수색하여
폭탄을 제조한 청년들을 검거했고, 1930년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원 수십 명을 체포했으
며, 경성농업전문학교(현 서울시립대학교) 학생 10여 명이 1930년에 여기서 철기단(鐵騎團)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1931년 경성제대(서울대) 학생들의 연구회 조직이 여기서
자주 모임을 가졌고, 1938년 연희전문(연세대) 동지회 흥업구락부가 자주 집회를 가졌다.
만해 한용운(韓龍雲)도 한때 이곳에 머물렀으며, 1939년 8월 29일(음력 7월 1일)에 그의 회갑
연이 여기서 열렸는데, 이광(李珖), 김관호(金觀鎬),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鎭), 안종
원(安鍾元) 등 20여 명의 애국지사들이 참여해 그의 회갑을 축하하면서 망국의 한과 자주독립
의 의지를 다졌다. 불교 학자인 박한영(朴漢永)도 이곳에 머물렀으며, 대방에 걸린 청량사 현
판은 그의 글씨이다.
1970년대 이후 계속 절을 손질했으며, 1988년 전통사찰 5-2호로 지정되어 지금에 이른다. 절
은 연화사보다 넓은 편으로 생각보다 규모가 좀 크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극락보전, 무량수전, 동별당, 칠성각, 관음전 등 10동 정도
의 건물이 있으며, 경내를 크게 대웅전 구역과 동별당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지정문화재는
아직 없는 실정이나 1871년에 제작된 신중탱이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며, 그 외에 1938년
에 조성된 후불탱과 신중탱, 칠성탱 등을 지니고 있다.

청량리의 이름이 바로 청량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 현장을 이제서야 가본다. 절의 인지도가
낮아서 연화사보다 찾는 이는 좀 적으나 한때 서울 근교 경승지이자 애국지사들의 활동터로
바쁘게 살았던 현장이라 다시 왕년의 위엄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청량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61 (제기로31길 10-3, ☎ 02-962-7390)


▲  대웅전 앞에 닦여진 관불의식의 현장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1980년에 지어졌다. 내부에는 금동석가여래
좌상을 중심으로 1938년에 그려진 후불탱과 신중탱 등 여러 탱화가 들어있으며, 건물 앞에는
관불의식의 현장이 차려져 아기부처가 곱게 꽃단장이 된 연화대에서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대웅전 뜨락에는 쉼터를 닦아 절을 찾은 이들에게 커피와 시원한 음료수를 제공하고 있고 연
등 만들기 등의 행사도 열리고 있었다. 나는 시원한 커피 1잔을 받아 쉼터 의자에서 목구멍에
깃든 갈증을 단죄하며 5분 정도 쉬었다.


▲  곱게 연등 옷을 걸친 대웅전 앞 소나무

약 70~80년 정도 묵은 잘생긴 소나무에 오색 연등을 달아놓았다. 낮에는 조용히 웅크리고 있
다가 햇님이 칼퇴근을 하고 땅꺼미가 짙어지면 연등은 일제히 몸을 불사르며 환상적인 연등
야경을 드러낸다.


▲  늠름하게 생긴 대웅전 석가여래상과 뒷쪽에 걸린 후불탱(1938년 작)

▲  대웅전 독성탱과 산신탱

▲  1938년에 제작된 대웅전 신중탱


▲  천장산 청량사 대법전 건립탑(大法殿 建立塔)
1996년 10월 28일에 세워진 것으로 특이하게 8각형 부도탑(승탑)
스타일로 지어졌다.

▲  극락보전 앞에 차려진 관불의식의 현장

보통 석가탄신일 관불의식의 현장은 경내에 1곳 또는 2곳을 두기 마련이나 청량사는 대웅전과
극락보전 앞, 무량수전 옆구리 등 무려 3곳이나 닦아 놓았다. 하여 사람들 눈치 없이 정말 여
유롭게 아기부처에게 냉수욕을 시켜주었다.


▲  극락보전(極樂寶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대웅전과 무량수전 사이에 자리한다.

▲  극락보전 아미타3존상과 후불탱
조그만 덩치의 아미타불이 훤칠한 외모의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에
거느리며 아미타3존상을 이룬다. 그들 뒤쪽에 걸린 후불탱도 제법
고색이 있어 보이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  극락보전 신중도(신중탱)

이곳 신중탱은 청량사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무려 1871년에 조성되었다. 지방문화재감으로 전
혀 손색이 없어 보이나 아직까지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으니 절에서 문화재 신청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  한 지붕 두 가족, 산신각(山神閣)과 칠성각(七星閣)
1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산신과 칠성이 봉안되어 있다. 그들은 각각
산신탱과 칠성탱 간판을 내걸고 있으나 원래 이름은 칠성각이다.

▲  칠성각 산신탱과 칠성탱(오른쪽)
칠성 식구를 가득 머금은 칠성탱은 1938년에 그려졌다.

▲  밑에서 바라본 무량수전(無量壽殿)

동별전 구역 북쪽 높은 곳에 들어앉은 무량수전은 앞서 극락전처럼 아미타불의 거처이다. 이
미 극락전이 있어 그를 봉안했음에도 뜻도 비슷한 별도의 무량수전까지 두어 그의 공간을 또
마련했다. 아마도 나중에 아미타도량를 칭하고자 미리 밑밥을 닦아놓는 모양이다.


▲  무량수전 옆 3층석탑과 관불의식의 현장
하얀 피부의 키 작은 3층석탑 앞에도 관불의식의 현장이 차려졌다. 대웅전과
극락전은 사람이 조금 있었으나 여기는 조금 구석이라 썰렁했다.

▲  무량수전 아미타3존상과 붉은 닫집

▲  동별당(東別堂)


▲  관음전에서 바라본 동별당 방향
기와집이 첩첩히 둘러진 동별당은 청량사가 동쪽으로 확장되면서 닦여진
공간으로 요사, 선방, 공양간 등을 지니고 있다.

▲  관음전
2층짜리 팔작지붕 집으로 건물 외벽을 돌로 견고하게 장식했다.
관음전 공간은 2층이며, 1층은 요사(寮舍) 등으로 쓰인다.

▲  관음전 내부

청량사 경내를 30분 정도 말끔하게 둘러보니 다시 시장기가 피어오른다. 이미 연화사에서 배
부르게 공양밥을 섭취했는데도 말이다. 하여 이곳의 초파일 인심도 확인할 겸, 공양밥 섭취를
문의하니 동별당 지하층으로 가라고 그런다. (처음에는 대웅전 주변에 있는 줄 알았음)
하여 그곳으로 내려가니 공양시간은 20분 전에 끝났다고 그런다. (그때가 14시 20분) 허탈해
하며 발을 돌리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남은 백설기를 1개 건네준다. 하여 그것으로 이곳의 인
심을 조금 느끼고, 관음전을 잠시 둘러본 다음 청량사와의 짧은 첫 인연을 마무리 지었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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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구의 상큼한 뒷동산, 호암산 봄나들이 <호암산성, 석구상, 제2한우물, 신랑각시바위, 한우물, 불영암>

호암산 둘러보기 (호암산성, 석구상, 한우물, 신랑각시바위, 칼바위 등)



' 금천구 호암산 봄나들이 '

호암산

▲  호암산

호암산 신랑각시바위 제2한우물터

▲  호암산 신랑각시바위

▲  호암산 제2한우물터

 



 

봄이 무럭무럭 익어가던 4월의 끝 무렵, 서울 서남쪽에 누워있는 호암산(虎巖山, 393m)을
찾았다.

호암산은 나의 오랜 즐겨찾기 뫼로 매년 여러 번씩 그의 품을 찾아 나의 마음을 꾸준하게
비추고 있다. 20대의 한복판이던 2002년 가을에 첫 인연을 지은 이후, 무려 100회 이상을
오갔으나 뒤를 돌아서기가 무섭게 그가 간절해진다.
나의 마음을 오랫동안 들었다 놓은 호암산은 서울 금천구(衿川區)와 관악구, 경기도 안양
시에 걸쳐있는 뫼로 산세(또는 산에 있는 바위)가 호랑이를 닮았다고 해서 호암산이란 이
름을 지니게 되었다. 금천구 시흥동(始興洞) 지역을 중심지로 삼았던 옛 금천<衿川, 시흥
(始興)> 고을의 듬직한 뒷동산이자 주산(主山)으로 금지산(衿芝山), 금주산(衿州山) 등의
별칭도 지니고 있었다.

호랑이를 닮은 잘생긴 뫼이나 풍수지리적으로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관악산(冠岳山)과 더
불어 서울을 위협하는 뫼로 오랫동안 인식되었다. 그래서 조선 조정은 그들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호암산 밑에 절(호압사)을 세우고, 관악산 정상 밑에 절을 짓고 연못을 팠으며,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세우고,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우는 등, 그야
말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호암산에는 신라 중기에 조성된 호암산성을 비롯하여 한우물과 제2한우물터, 석구상 등의
늙은 문화유산과 호압사(虎壓寺), 약수사, 불영암 등의 오래된 절, 서울에 대표적인 천주
교 성지로 꼽히는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가 있으며, 호암산폭포와 시흥계곡, 호암산잣나
무산림욕장 등의 싱그러운 자연 명소를 품고 있다.
또한 호랑이를 닮은 바위 뫼에 걸맞게 정상부와 서남쪽 능선, 돌산 능선에 잘생긴 바위들
이 잔뜩 포진해 있어 바위 구경에 최적화되어 있으며, 조망도 일품이라 서울의 상당수 지
역과 북한산(삼각산), 안양, 광명, 부천, 인천, 서해바다, 심지어 멀리 파주와 개성 지역
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온다.

호암산 정상부와 능선으로 오르는 길이 잠시 각박할 뿐, 그 잠깐의 고생만 감내하면 부드
러운 능선길과 국보급 조망이 두 망막과 마음, 다리를 즐겁게 해준다. 그리고 서울둘레길
5코스(사당역~석수역, 13.5km)가 호암산 자락을 가로질러 흘러가며, 잣나무산림욕장을 중
심으로 호암늘솔길이 싱그럽게 닦여져 있어 산은 비록 작지만 매우 알찬 팔방미인 뫼이다.
이러니 내가 호암산에게 단단히 퐁당퐁당 빠진 것이다.



 

♠  석구상과 호암산성(虎巖山城) 북문터 주변

▲  호암산 서남쪽 능선길

이번 호암산 나들이는 호암산 북쪽 자락에 안긴 약수사(藥水寺)에서 시작했다. 약수사를 둘러
보고 서울둘레길5코스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가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에서 남쪽 산길을 통해
민주동산(깃대봉)과 호암산 정상으로 이동했다. (약수사와 호암산 정상은 별도의 글에서)

호암산 정상에 올라 발 아래 펼쳐진 서울과 주변 지역을 굽어보며 일품 조망을 배불리 누리다
가 호암산 남쪽 봉우리로 넘어갔다. 호암산에 오면 꼭 남쪽 봉우리는 들리는 편으로 그곳에는
한우물과 석구상, 호암산성 등의 늙은 명소가 깃들여져 있고, 불영암 등의 절과 신랑각시바위
, 칼바위, 호암산폭포 등의 자연 명소도 듬뿍 들어있어 그야말로 호암산의 보물창고 같은 곳
이다.

호암산 정상부에서 남쪽 봉우리까지는 부드럽게 이어진 서남쪽 능선길의 연속으로 그 능선을
따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조망을 즐기며 거닐면 된다. 산길 곳곳에는 이름 없는 멋드러진
바위가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처럼 포진해 있고, 능선과 바위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은 정말
꿀맛이다.


▲  호암산 서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안양시와 수리산(修理山)
호암산과 삼성산, 수리산 사이에 극락정토를 뜻하는 안양시(安養市)가
포근히 뉘어져 있다.

▲  부드럽게 펼쳐진 호암산 서남쪽 능선길

▲  호암산성 북문터 (북쪽 모습)

호암산 서남쪽 능선을 더듬어 남쪽 봉우리로 올라서면 금줄이 둘러진 공간이 나온다. 이곳은
석구상 북쪽으로 근래 이곳이 호암산성 북문(北門)터로 확인되면서 북문터 보존을 위해 금줄
을 둘러 사람들의 통행을 막고 그 서쪽에 계단식 우회길을 내었다.
호암산 남쪽 봉우리로 들어서면 꼭 거치던 곳이었는데, 그동안 밟고 지나갔던 그곳이 북문터
였다니 새삼 놀라고 말았다. 이래서 세상은 오래 살고 볼일이다.


▲  호암산성 북문터 (남쪽 모습)

호암산 남쪽 봉우리(347m) 정상부에 호암산성의 흔적이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산성의 형태는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쭉한 마름모꼴로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 석성(石城)으로
조성되었는데, 축성 방식은 외벽을 돌로 쌓고 안쪽을 잡석과 자갈 등으로 채운 내탁법(內托法
)을 사용했다.
예전에는 산성 둘레를 약 1,250m, 남아있는 길이는 300m로 보았으나 2018년 이후 새로운 곳이
발견되어 산성 관련 자료가 크게 업데이트되면서 산성 둘레는 약 1,547m, 남아있는 것은 약
1,016m, 산성 면적 133,790㎡로 확장되었다.

1990년 봄, 호암산성과 한우물 일대를 조사하면서 우물터 2곳과 건물터 4곳이 발견되었고, 무
려 6,500여 점에 이르는 토기와 다양한 유물(청동숟가락, 철제 월형도끼, 희령원보 등)이 쏟
아져 나왔는데, 특히 신라 중기 것이 많이 나왔다. 하여 신라 중기인 6세기 말~7세기 초에 군
사기지 및 행정 치소로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672년에 쌓았다는 설
도 있다. 그 시절 신라는 당나라를 때려잡으며, 옛 고구려(高句麗, 고구리) 땅의 일원인 요동
(遼東)과 만주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산성 서쪽에서는 멀리 서해바다가 바라보이고, 북쪽으로 한강과 북한산(삼각산)이 시야에 잡
힌다. 그래서 서해바다와 한강, 내륙을 잇는 요충지로 중요시되었으며, 양천고성(陽川古城,
서울 가양동)과 행주산성(幸州山城), 오두산성(파주시)를 잇는 거점 성곽으로 보고 있다.

고려 때는 한강과 서해바다를 살피는 요충지로 쓰인 것으로 보이며, 조선으로 넘어와서도 그
런데로 밥값을 했다. 특히 딱 1번 크게 쓰인 적이 있는데, 그때는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3
년 1월이다.
그 시절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에서 왜군을 때려잡은 권율(權慄) 장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자 행주산성에 들어가 진을 쳤는데, 전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에게 군사 4,000명을
주어 호암산성으로 보내 자신의 후방을 지키게 하면서 서울 수복 작전을 펼쳤다. 호암산은 서
울을 위협하는 호랑이 모양의 뫼답게 서울로 공격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이후로도 산성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그 중요성이 점차 떨어지면서 조선 후기에 그 이
름이 지워지고 만다. 이후 산성의 운명은 현재 상태가 여실히 말해준다. 버림을 받은 호암산
성은 관리 소홀과 대자연의 무심한 장난, 덧없는 세월의 무게까지 더해져 서서히 녹아내렸고,
산꾼들의 발길이 성곽을 짓누르면서 담장만도 못한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산성 내에 늙은 존재로는 한우물(제1한우물)과 제2한우물, 건물터, 석구상이 있으며, 불영암
이란 작은 절이 있다. 성곽은 동벽이 그나마 잘 남아있고, 북문터 주변과 서문터 주변, 남문
터 주변에 조금씩 남아있다.
특히 2018년 이후 발굴조사에서 석구상 주변에서 북문터, 석수역으로 내려가는 서남쪽 능선에
서 남문터, 불영암 남쪽 가파른 곳에서 서문터가 새롭게 확인되어 3개의 성문(城門)이 있었음
을 알려주고 있으며, 대자연에 묻힌 채, 강제로 숨바꼭질을 하던 성벽 흔적을 많이 건져내었
다. 이들 성문터와 성벽 흔적은 예전부터 수없이 지나쳤던 곳인데 그곳이 산성의 흩어진 흔적
이자 살점이었던 것이다.

호암산성은 석구상과 한우물, 제2한우물터, 건물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서울 호암산성터'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 343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호암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93-8


▲  호암산 석구상(石狗像)

호암산성 북문터 남쪽 높은 곳에는 호암산의 오랜 명물로 꼽히는 석구상이 있다. 사방을 난간
으로 두룬 기단 위에 북쪽을 바라보며 정말 귀엽게도 앉아있는데, 지금은 석구상으로 통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광화문(光化門) 해태상과 마주 보게 하여 관악산의 화기(火氣)와 호암산 기
운으로부터 서울을 지키는 해태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허나 한우물을 조사하면서 '석구지(石狗池)'라 새겨진 장대석(長臺石)이 출토되었고, 시흥읍
지 형승조(始興邑誌 形勝條)에
'호암산 남쪽에 석견(石犬) 4두(四頭)를 묻어 개와 가깝게 하고자 하였으며 지금 현남7리(縣
南七里)에 사견우(四犬偶, 개의 형상 4개)가 있다'
란 기록이 있어 석구상으로 무게가 쏠리고
있다.

석구상의 크기는 길이 1.7m, 폭 0.9m, 높이 1m 정도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발과 꼬리 부분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가까이서 바라본 석구상의 위엄

석구상의 모습을 살펴보면 해태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해태치고는 너무 작기 때문이다. 그
렇다고 완벽한 개의 모습이라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앞 모습을 보면 강아지의 모
습 같기도 하나 양과도 비슷해 보이며, 어떤 이는 개구리를 닮았다고도 한다. 하여 보면 볼수
록 답이 없는 기이한 석상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제 눈이 안경이라 사람마다 보이는 모습이 제각기 다를 것이다. 그의 뒷부분에는 길
다란 꼬리가 말려져 있는데, 이는 개의 꼬리가 아닌 고양이나 호랑이의 꼬랑지와 비슷해 손으
로 잡아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석구상의 탄생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으나 대략 조선 중/후기로 보인다. 그는 정확
히 북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으며, 그를 만든 이유도 속시원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호암산의
기를 누르고 서울을 지키려는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석구상은 그 모습이 참으로 아담하고 깜찍하여 산꾼들의 눈길을 제대로 잡아맨다. 보는 이들
마다 귀엽다는 말이 연성 터져 나오며,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적지 않게 웃음을 준다.


▲  석구상의 귀여운 뒷부분 (꼬랑지가 말려져 있다)

▲  석구상 남쪽 호암산성 동벽

석구상을 지나면 인공티가 팍팍 느껴지는 약간 부풀어오른 길이 나오는데, 그 길이 바로 호암
산성의 동벽(東壁) 흔적이다. 예전에는 수풀에 감싸여 있었으나 성곽을 무수히 깔고 앉던 수
풀을 싹 쳐내고 주변을 산뜻하게 정비했으며, 석구상 바로 남쪽 성곽에는 나무데크길을 씌워
놓아 헝클어진 성곽을 보호한다. 그리고 성곽 서쪽에는 제2한우물과 석수역으로 이어지는 산
길이 넓게 자리한다.

크고 견고했던 성곽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2m 내외로 움푹 낮아졌고, 산길로 변해버린
산성 동벽에는 성돌이 이리저리 박혀 단단한 성곽을 이루었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숲 그늘에 자리한 호암산성 동벽
고된 세월에 많이 초췌해진 산성 동벽이 그런데로 산성의 모습을
풍기며, 건물터 부근까지 이어진다.

▲  호암산성 동벽 (남쪽 방향)

앉은뱅이가 되버린 호암산성의 1.5km 구간 중 석구상에서 건물터 동북쪽 벼랑에 이르는 동벽
이 그나마 상태가 좋다. 비록 산성은 헝클어진 상태이나 성곽 밑은 크게 각이 진 벼랑급이라
성곽길을 음미하면서 걸을 경우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안전시설도 전혀 없음)


▲  호암산성 동북쪽 벼랑 바위 (바위 이름은 없음)

호암산성 건물터 동북쪽에는 일품 조망을 지닌 큼직한 바위들이 여럿 있다. 이곳은 호암산성
동벽 구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으로 바위 너머로 호암산 동남쪽 능선과 장군봉, 삼성산
(三聖山), 관악산(冠岳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와 조망은 정말 예술이다.
허나 장미꽃의 가시처럼 바위 밑은 그야말로 천길 낭떠러지라 보기만 해도 염통을 제대로 쫄
깃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산성을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하늘의 요새 같은 낭떠러지라 그 존재
자체로도 인공적인 성곽보다 훨씬 든든하다.



 

♠  제2한우물터에서 호암산성 남문터까지

▲  호암산 제2한우물터

석구상, 북문터에서 석수역으로 이어지는 서남쪽 능선길을 3~4분 정도 가면 제2한우물터와 건
물터가 황량한 모습으로 마중을 한다. (호암산성 동벽 산길로 가도 나옴)

제2한우물터는 남북 18.5m, 동서 10m 이상, 추정 깊이 2m에 이르는 커다란 사각형 우물 유적
이다. 길이 50cm, 너비 35cm, 높이 25cm 크기의 화강암을 '臣'자 모양으로 10단(높이 1.75m)
까지 쌓았는데, 2번에 걸쳐 15cm 정도 물려 쌓은 형태가 확인되었다.
우물 바닥과 석축 쌓기 방식, 석재의 크기와 모양, 전체적인 모양새 등은 북서쪽 밑에 있는
한우물(제1한우물)과 비슷하며, 여기서는 신라 중/후기 것으로 여겨지는 청동제 숟가락이 햇
살을 보았는데, 숟가락에는 정말 고맙게도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내용은 '仍伐內力 只來(잉
벌내역 지래)..'로 여기서 잉벌내(仍伐內)는 고구려 시절 금천 지역의 지명으로 여겨지는 잉
벌노(仍伐奴)와 비슷해 신라가 이곳을 차지한 6세기 이후에도 그 이름은 유지했던 것으로 보
인다.


▲  상큼하게 봄옷을 입은 제2한우물터 (남쪽에서 본 모습)

산꼭대기에 커다란 우물이 1개도 아닌 2개씩이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이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훨씬 이전부터 호암산의 중요성이 매우 컸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큰
우물을 2개나 둘 정도로 물이 풍부했음을 알려준다.

호암산성이 버려진 이후,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의 장난으로 제대로 헝클어져 땅
속에 잠겨있던 것을 1990년 발굴조사로 다시 꺼내놓았는데, 복원된 제1한우물과 달리 복원은
하지 않고 잡초가 무성한 자연 상태로 두고 있어 조금은 우울한 모습이다. 우물터 곳곳에는
우물을 구성하던 돌이 널려있으며, 복원 계획은 예전부터 나오고는 있으나 구체적인 것은 없
다. 허나 제1한우물이 복원되었으니 제2한우물은 어설프게 복원하지 말고 지금 그대로 두는
것이 진리라고 본다. 대자연의 일부로 녹아내린 현재 모습도 그리 싫지는 않으며 현 모습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  옆에서 바라본 제2한우물터
돌로 다진 석축이 없었다면 자연산 늪지대로
봐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만큼
이곳은 대자연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  제2한우물터에 모여있는 수분들
비록 흔적만 남은 늙은 우물이나 비가 내린 이
후에는 약간씩 물이 고여 이곳의 본분을 조금
이나마 회복한다.
하지만 우물터는 제대로 흩어진 상태라 식수는
곤란하며, 우물터 주변 수풀들이 이 물에 의지
해 살아가 늪지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  호암산성 건물터

제2한우물터 동쪽에는 건물터가 수풀을 뒤집어 쓰며 조용히 누워있다. 여기서는 시기가 다른
건물터들이 중복되어 확인되었는데, 제일 처음에는 기단(基壇)을 지닌 건물이 자리했다. 이
건물은 신라 중/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세월에게 잡혀간 이후, 23x27m 범위에
서 기존 건물터의 초석을 옮기고 평지를 닦은 다음, 새로운 건물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신라 후기 기와편과 글씨가 새겨진 기와 등, 많은 기와들이 햇살을 보았으며, 축조
시기가 아리송한 문비석(門扉石)과 네모꼴의 석렬, 외곽의 자취가 확인되었으나 이곳에 깃든
흔적들이 워낙 복잡하여 건물터의 정확한 규모와 형태,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힘들다.
다만 이곳이 호암산성 내부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산성을 관리하던 관청이나 장대(將臺), 장
수와 군사들의 숙소로 여겨진다.


▲  호암산성 건물터 주춧돌
건물을 받치던 주춧돌과 건물터 윤곽이 떠받들 대상을 오랫동안 상실한 채,
윗도리가 묵직했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호암산 신랑각시바위(사랑바위)

제2한우물터에서 석수역 방향 서남쪽 능선길을 6~7분 내려가면 호암산성 남문터가 나온다. 이
곳 직전 서쪽에 천하를 굽어보는 조망대가 있는데, 남문터는 잠시 접어두고 그 조망대로 내려
가보자. 한참 내려갈 것도 없이 성벽터 경사에 닦여진 계단만 내려가면 끝으로 거기서 오른쪽
(북쪽)으로 시야를 돌리면 신랑각시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반갑게 눈인사를 건넬 것이다.

호암산은 호랑이를 닮은 바위 뫼에 걸맞게 잘
생긴 바위와 벼랑이 많다. 신랑각시바위도 호
암산을 수식하는 명품 바위의 하나로 사람 손
과 발이 닿기 어려운 벼랑에 우뚝 솟아 금천구
를 비롯한 천하를 굽어본다.
그는 오랫동안 사랑과 혼인, 심지어 아들까지
얻게 해준다는 특별한 바위로 지역에서 명성이
자자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아련히 전하
고 있다.

▲  신랑각시바위 조망대

호랑이가 담배 맛을 익히기 전인 한참 옛날, 금천 고을(시흥동)에 잘생긴 총각과 아리따운 낭
자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안타깝게도 그들의 집안은 대대로 원수
관계라 부모가 쌍수를 들고 교제를 반대했다. 하여 서로 불이 난 자식들을 떼어놓고자 다른
곳에 혼인을 시키려 했고, 이에 뚜껑이 뒤집힌 낭자는 깊은 밤에 가출하여 호암산에서 자살을
하려고 했다.

이를 늦게 안 총각은 낭자를 찾으러 서둘러 호암산으로 올라갔는데, 이미 날은 어두워진 상태
였다. 허나 다행히도 산중턱 절벽 위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낭자를 발견, 그녀에게 달려가 서
로 격하게 껴안으며 하염없이 눈물즙을 짰다.
그들은 달님에게 세상 끝까지 함께 하겠다며 기도를 올리고 밤을 지샜는데, 이를 엿들은 달님
은 신통력을 부려 서로 마주보며 우뚝 선 바위로 만들어버렸다. 달의 친절한(?) 배려 덕에 영
원히 같이 있게는 되었으나 문제는 돌이라는 것. 혼인은 커녕 움직일 수도 없고, 숨도 못쉬며
, 아주 중요한 예민한(?) 짓도 할 수가 없으니 이것이 해피엔딩인지 그 반대인지 솔직히 판단
이 서질 않는다.

어쨌든 그 전설로 인해 이 바위는 사랑바위, 신랑각시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호암산
그늘에 사는 선남선녀들이 이곳을 찾아 손을 맞잡고 사랑을 고백하면 혼인이 이루어졌다고 한
다. 또한 혼인을 하여 여기서 기도를 하면 옥동자까지 얻을 수 있었다고 하며, 늙어 죽을 때
까지 백년해로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한다.
물론 전설의 내용처럼 그들이 바위로 변한 것은 아니다. 다만 집안의 극심한 반대에 집을 뛰
쳐나와 여기서 사랑을 굳게 다짐하고 인근 산속이나 머나먼 곳에서 살림을 차려 잘 먹고 잘
살았거나 아니면 현실을 비관해 같이 벼랑 아래로 뛰어내린 것으로 보이며, 그 사연이 바위에
씌워져 사랑과 관련된 바위로 포장되었을 것이다.


▲  확대해서 바라본 신랑각시바위의 위엄
호암산 서남쪽 능선 서쪽 벼랑에 자리해 있어 서쪽과 북서쪽이 확 트여있다.
하여 일품 바위와 함께 일품 조망까지 덩달아 누릴 수 있다.

▲  신랑각시바위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시흥동과 독산동, 가산동 등 금천구 지역과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광명시,
부천시, 인천시 지역이 흔쾌히 두 망막에 들어온다.

▲  호암산성 남문터 주변 서쪽 남벽(南壁)터

신랑각시바위 동남쪽에는 호암산성 남문터가 있다. 신랑각시바위 관람용으로 지어진 조망대도
산성 성벽터에 닦여진 것으로 이곳은 석수역에서 호암산, 삼성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이라 산꾼
들의 발길이 무척 잦다.
나도 이 코스를 여러 번 탔었으나 산성의 흔적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근래 발굴조사에
서 교묘하게 숨바꼭질을 벌이던 남문터와 주변 성곽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여 그들을 보존하
고자 기존 산길에는 금줄을 치고 서쪽에 나무데크 계단길을 내었으며(남문터 동쪽에도 오르는
길이 있음) 호암산성 안내문과 안내도를 설치했다.

▲  일부만 남아있는 호암산성 남벽

▲  남문터 서쪽 남벽터

푸르게 우거진 나무와 황토색 흙 사이로 고된 세월에 지친 남벽 성돌이
여기저기 고개를 내밀며 이곳이 옛 산성이었음을 애써 속삭인다.

▲  호암산성 남문터
인공티가 느껴지는 돌들의 무리가 여기저기 모여있으니 그들이 호암산성과
남문을 이루던 성곽의 흔적들이다. 뒤늦게 세상에 잡힌 그들의 보존을
위해 기존 산길에 금줄을 치고 옆에 우회길을 내었다.

▲  경사를 따라 층층이 주름진 남문터

이곳은 오랫동안 호암산 서남쪽 능선길로 바쁘게 살았다. 커다란 바위와 인공티가 다소 느껴
지는 층층이 둘러진 둘들은 이곳이 예사로운 장소가 아니었음을 오랜 세월 동안 눈치를 보냈
으나 나도 그렇고 많은 이들이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무더기로 여기고 무심히 지나쳤다.
허나 그들이 글쎄 호암산성의 숨겨진 흔적들이었다.
그냥 돌무더기가 아닌 늙은 호암산성의 흔적이라니 그들이 정말 180도 달라 보인다. 사람에게
는 옷이 날개이듯, 돌에게는 문화유산 경력이 날개인 모양이다.


▲  호암산성 서남쪽 성곽터

남문터에서 더 이상 내려가지 않고 아직 확인을 하지 못한 서남쪽 성곽길을 쫓아갔다. 이 성
곽길은 서남쪽 능선 서쪽 벼랑을 따라 이어지며 서서히 능선길과 멀어진다.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숨겨진 길이나 성곽터가 얇게 이어져 있고, 사람들의 발길도 이미 적지 않게 들어간 상
태라 그런데로 길 티를 낸다.
벼랑 구간이 많으나 괜찮은 조망지가 많아 금천구와 구로구, 광명시 지역이 늘 시야에 따라와
두 망막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으며 그 길을 계속 따라 가면 서문터 뒤쪽으로 이어진다.


▲  호암산성 서남쪽 성곽터에서 바라본 천하
금천구 지역과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광명시 지역

▲  산성 안쪽에서 바라본 호암산성 서문터 (추정 서문터)

불영암에서 칼바위, 시흥동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산길에 서문터가 있다. 허나 아직까지는 확
신이 부족하여 '추정' 2자를 붙여 회피 조건을 붙이고 있는데, 주변 지세를 보면 이곳이 성문
터는 맞는 듯 싶다. 성문이라고 해서 문루(門樓)까지 달아서 크게 지을 필요는 없으며, 조그
만 암문(暗門) 형태로도 충분하다.
산성 밑으로 난간이 보이는 곳이 있는데, 그 길이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불영암~시흥동 산
길이며, 희미하게 남아있는 산성 흔적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바로 불영암 뒷쪽으로 이어진다.
남문터에서 서남쪽 성곽과 서문터 안쪽을 거쳐 불영암을 바로 잇는 길을 새로 개척하여 호암
산 정보력과 경험치를 크게 살찌웠으니 이번 호암산 복습 산행의 성과가 실로 크다.



 

♠  호암산 한우물, 불영암(佛影庵)

▲  북쪽에서 바라본 한우물

호암산성 북문터에서 서남쪽 길로 내려가면 한우물과 불영암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우물은 석
구상과 더불어 호암산의 오랜 명물로 한우물이란 큰 우물을 뜻한다. 하여 천정(天井), 용복,
용초 등에 별칭도 지니고 있으며, 산 정상부에 자리해 있고, 마땅한 수원(水源)이 없음에도
물은 늘 넉넉하게 나온다. 특히 가뭄 때도 물이 가득해 신비로움을 준다.

이 우물은 신라가 호암산성을 닦던 7~8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우물 자리 밑
에서 7~8세기 우물(못)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못의 규모는 동서 약 17.8m, 남북 약 13.6m,
깊이 약 2.5m였다. 이후 조선 때 서쪽으로 약간 자리를 옮겨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
의 장방형 못(우물)을 구축했다.
허나 조선 후기 이후, 호암산성과 함께 버려져 제대로 망가진 것을 1991년 2차 보수 정비공사
때 신라 우물터와 조선 우물터를 혼합하여 복원했다. 하여 현재 물이 있는 부분은 신라 때 우
물 자리이며, 수풀이 자라는 남쪽 부분은 조선 때 우물 자리이다. 또한 동쪽 산정에도 비슷한
크기의 또 다른 우물 유적이 있는데, 그를 제2한우물, 불영암 옆에 있는 이곳을 제1한우물이
라 부르기도 한다.
 
1990년 봄, 한우물 2개를 발굴하면서 12개 기종의 1,313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에
서 '仍伐內力只來..' 글씨가 새겨진 청동제 숟가락이 나와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열쇠가 되었
다. 또한 지표에서 30cm까지는 백자 파편을 비롯한 조선 때 유물이 많이 나왔다.


▲  윗쪽에서 바라본 한우물의 위엄

임진왜란 시절인 1593년 1월, 전라병사 선거이가 권율 장군의 명으로 군사 4,000명을 이끌고
호암산성에 머물 때, 이 우물을 군용으로 썼으며 세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에는
'虎岩山 有固城 城內有一池 天早祈雨(호암산에 견고한 성이 있는데 성안에 연못이 있어 일찍
이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다)'
란 기록이 있어 평상시와 전쟁 때는 식수로 쓰고, 가뭄이 극성일
때는 기우제도 지냈음을 알려준다. 그 외에도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서울의 화재를 막으려는
방화용설(防火庸設)도 설득을 얻고 있다.
또한 석구지(石狗池)란 별칭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여기서 '석구지'라 쓰인 장대석이 나왔기
때문이다.

한우물은 식수용으로 태어난 곳이나 현재는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딱히 손은 대지 않는다. 우
물에 가득 모인 수분은 식수가 아닌 우물을 채워 연못 분위기를 내는 원초적인 역할을 할 뿐
이다. 우물 남쪽에는 갈대 등의 수풀이 둥지를 틀고 있어 운치를 드리우며, 북쪽에는 소나무
1그루가 우물을 거울삼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그리고 우물 주위로 돌난간과 철난간을
2중으로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한우물은 처음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호였으나 1991년 호암산성과 제2우물터, 건물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사적 343호로 지정되었다. (지정 명칭은 '서울 호암산성')

* 호암산 한우물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93-2 (호암로192)


▲  한우물의 깊은 속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한우물을 거울로 삼으며 그들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한우물과 불영암은 서쪽과 북쪽이 확 트인 벼랑에 자리해 있어 천하를 조망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하여 여기서는 금천구와 구로구, 영등포구, 강서구, 양천구, 한강 이북에 서울 서북
부 지역과 북한산(삼각산), 광명시, 부천시, 인천 지역은 물론 대기가 좋으면 서해바다와 고
양시, 파주시, 심지어 개성(開城) 지역까지 거침없이 바라보여 두 눈이 제대로 호강을 한다.
그리고 한우물 주변과 한우물조망대에는 의자가 여럿 있어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로 높은
서울을 굽어보며 잠시 쉬어 갈 수 있다.


▲  한우물에서 바라본 천하 ①
시흥동 벽산아파트와 독산동, 가산동 등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광명시, 부천시 지역

▲  한우물에서 바라본 천하 ②
호암산 북쪽인 목골산과 금천구, 관악구, 영등포구, 동작구, 한강 너머의
서울 서북부 지역, 북한산(삼각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  불영암 대웅전(大雄殿)

호암산 남쪽 봉우리 서쪽 밑이자 한우물 옆에는 불영암이란 작은 암자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한우물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이곳은 해발 310m 정도로 서울에서 열 손가락 안
에 들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절인데, 가파른 벼랑에 자리해 속세를 향해 훤히 모습을 드러내
고 있어 호압사나 시흥동 벽산아파트, 호암로에서도 확 눈에 띈다.

불영암의 내력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정보가 없어 파악하긴 힘들지만 관악산과 호암산의 기운
으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여기서 기도를 올리니 서울에 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하여 그런 것을 보면 오랫동안 승려의 기도 수행처로 쓰였던 듯 싶으며, 호암산성 서벽에 위
치해 있고, 조망도 우수하여 산성을 지키며 속세를 살피던 망대(望臺)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또한 100년 이상 묵은 절들은 자신들의 내력을 담은 안내문을 절 앞에 내걸지만 이곳은 그런
것이 일절 없어 20세기 중반 이후 지금의 절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 무지 짧은 암자로 대웅전과 산신각(山神閣), 요사(寮舍)로 쓰이는 작은 건물이 전부이
며, 그나마 대웅전만 불전(佛殿)의 분위기가 진하다. 게다가 절이 들어앉은 위치도 건물을 크
게 불리거나 사세를 늘리기도 여의치가 않다.
허나 한우물이 곁에 있어 물 수급은 어렵지 않으며, 벼랑에 자리한 탓에 조망 하나는 몸살이
날 정도로 좋다. 그러니 한우물과 천하를 향한 일품 조망, 그리고 기존의 기도처를 후광으로
삼아서 절을 세웠을 것이다.

예전에는 대웅전과 요사만 있던 조촐한 모습이었으나 2009년 이후 대웅전 뒤쪽 바위에 커다란
불두(佛頭)를 얹히고, 절 앞에 돌탑을 심어 돌탑거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2011년에는 제2한우
물터 주변에서 발견된 늙은 절구통과 맷돌, 모서리돌 등을 돌탑 앞에 두어 볼거리를 잠시 늘
리기도 했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음) 특히 고려불화의 유일한 전수자인 승려 여지(如
智)가 2005년에 그린 '104위 신중탱화(神衆幀畵)'가 봉안되어 있어 이곳의 새로운 명물을 꿈
꾼다.

* 불영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93-2 (호암로192, ☎ 02-809-3754)


▲  돌탑거리를 이루고 있는 불영암 앞길 (남쪽 방향)

    ◀  간단하게 이루어진 불영암 범종각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 등 사물(四物)의 보
금자리이다. 매일 6시와 18시가 되면 잠든 범
종을 흔들어 깨우는데, 그 종소리가 호압사는
물론 시흥동 벽산아파트단지까지 널리 울려퍼
진다.

▲  돌탑과 오색연등이 늘어선 불영암 앞길
(한우물 방향)

▲  산신 할배의 공간인 산신각

            ◀  산신각 산신상
대웅전 뒤쪽 벼랑에는 산신 식구를 머금은 산
신각이 달려있다. 불영암에서 가장 하늘과 가
까운 곳으로 벼랑에 목재로 대를 쌓고 그곳에
1칸짜리 산신각을 닦았는데, 보통 산신 가족은
산신 할배와 호랑이, 동자 등이 전부이나 이곳
은 특이하게 사슴까지 겯드려 놓았다.


▲  바위에 머리만 꽂은 불영암 석불(石佛)

대웅전 우측 바위에는 2009년에 마련된 석불이 서쪽을 굽어보고 있다. 석불이라고 하나 바위
에 커다란 머리만 심은 형태로 바위는 그의 자연산 몸뚱이가 되었다. 바위에 접착된 머리 주
변에 하얀 석고 등이 가득해 다소 이질감을 주나 세월은 저들을 완연한 하나의 존재로 만들어
줄 것이다.
석불 앞에는 키 작은 소나무가 하늘로 곧게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쳐져 있는데, 그 모습이 마
치 불상에 머리를 숙여 예를 올리는 듯하며, 석불 머리 옆에는 산신각이 달려있다.


▲  불영암 산신각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밑에 불영암 경내가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광명시,
부천시, 인천시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와 두 망막을 제대로 흥분시킨다.
한우물과 불영암 구역에서 제일 높은 곳이자 가장 조망이 좋은 곳이니 한우물에 왔다면 이곳
에 꼭 들려 국보급 조망을 덤으로 누리기 바란다.


▲  호암산성 서문터 (바깥에서 바라본 모습)

불영암에서 칼바위, 시흥동 방향 산길을 조금 내려가면 앞서 지났던 서문터가 다시 마중을 한
다.
앞서에는 산성 안쪽에서 서문터와 불영암~시흥동 산길을 내려다봤지만 이번에는 그 반대가 되
어 산성 바깥에서 이렇게 올려다보는 입장이 되었는데, 호암산에 오면 거의 이 코스로 내려가
는 편이었다. 예전에는 호암산성이 여기까지 팔을 뻗을 줄은 생각도 못 하였고, 아직 추정이
긴 하나 이곳에 성문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안했는데, 여기서 성곽과 성문터가 버젓이
나온 것이다.


▲  호암산성 서문터와 돌탑 하나

서문터는 각박한 경사지에 자리해 있고, 좌우로 벼랑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감히 기웃거릴
수 없는 천험(天險)의 자리이다. 남문은 여기보다 지형이 약간 좋으나 역시 공격에 불리하며,
북문도 능선에 자리하나 적들이 호암산 정상부를 점령하고 치고 들어올 경우 수비가 약간 힘
들 수 있다.

서문터를 둘러보고 칼바위와 호암산폭포를 거쳐 시흥동 벽산아파트로 내려갔다. 이번 호암산
나들이는 약간씩 남아있던 미답 공간과 새로 발견된 호암산성의 숨겨진 부분을 크게 들추는
성과를 거두며 기분 좋게 마무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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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렁탕의 탄생지이자 선농대제의 오랜 현장, 제기동 선농단 <선농단 향나무, 선농단역사문화관, 선농대제 설렁탕>

제기동 선농단 선농대제



' 설렁탕의 고향, 제기동 선농단 (선농대제) '
선농단 선농대제
▲  선농단 선농대제
 


 

봄이 한참 절정에 이르는 4~5월이 되면 천하 곳곳에서 다양한 축제와 문화행사가 열린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에서는 종묘대제(5월 1주 일요일)와 연등회(석가
탄신일 1주 전 토~일), 석가탄신일(음력 4월 8일), 선잠제향(5월 중), 선농대제(4월) 등
이 열리는데(그 외에도 더 있음) 이들 축제 중에서 무려 비싼 설렁탕을 무료로 제공하는
착한 축제가 있어 눈길을 끈다. 바로 제기동 선농단에서 열리는 선농대제(先農大祭)이다.
<3글자로 줄여 선농제(先農祭)라고도 함>


▲  제기동역에서 선농단으로 이어지는 가로수길(왕산로19길)
선농단입구인 함경면옥에서 선농단 방향으로 약 100m의 꿀 같은 숲길이
펼쳐져 있다.

▲  담장 너머로 보이는 선농단 향나무
향나무가 있는 곳이 바로 선농대제의 뜨거운 현장인 선농단이다.


드디어 선농대제가 열리는 4월 말 토요일, 따사로운 오전 햇살의 응원을 받으며 도봉동(
道峰洞) 집을 나섰다.
1호선 전철을 타고 20여 분을 달려 제기동역에서 하차했는데 선농대제 관람과 잘 숙성된
설렁탕을 먹는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랜다.

선농단 입구에 이르니 선농대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시원한 봄바람에 펄럭이며 대제를 구
경하러 온 사람들을 인도한다. 현수막은 촘촘하게 배치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으
며, 이제 막 제왕의 어가행렬이 끝나고 제례를 봉행(奉行)할 시간이 되어 선농단 주변은
제관과 행사요원, 취재진, 나들이객, 동네 사람 등 수천 명의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 회색빛 대도시 속에 조용히 묻혀 지낸 선농단, 국가 지정문화재
란 굵직한 지위를 누리고 있지만 원래 임무인 제단에서 강제로 은퇴한 몸이라 꽤 적적한
신세이다. 그런 그에게도 천하가 미치도록 주목을 하는 때가 1년에 딱 하루가 있으니 바
로 선농대제일이다.



 

♠  설렁탕의 탄생지, 농사의 중요성을 알리고 풍년을 기원하던
조선의 주요 국가 제단, 선농단(先農壇) - 사적 436호

▲  선농단 (선농대제가 끝난 직후의 모습)

선농단은 종암초교 남쪽이자 제기동 주택가 한복판에 고즈넉하게 누워있다. 이곳은 1476년에
조성되었는데, 처음 이름은 관경대(觀耕臺)로 조선의 제왕들이 신하를 거느리고 농사의 소중
함을 알렸다는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제를 지내 풍년을 기원했다. 이 제사를
선농제(선농대제)라고 하며, 거기서 선농단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선농
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청동기시대부터 농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니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은 그때부터 있었다. 하지만
제왕이 직접 제사를 챙기고 농사를 권장했다는 기록은 신라 초인 기원전 41년에 처음 나타난
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왕비와 함께 6부(六部)를 순행(巡行)하여 농사와 잠사(
蠶事)를 권장하고 감독했다고 하며, 매년 경칩(驚蟄)이 지나고 첫 해일(亥日)을 택하여 왕이
제를 지내고 적전을 갈거나 또는 관리를 보내 제를 지냈다.
그러다가 나중에 경주 동쪽인 명활산성(明活山城) 남쪽 웅살곡(熊殺谷)에서 선농제를 지냈으
며, 입하(立夏) 뒤 첫 해일에 후농제(後農祭)를 지냈다. 선농제란 이름은 바로 신라 때 생겨
난 것이다.

고려 때는 983년 1월, 성종(成宗)이 원구단(園丘壇)에서 기곡제(祈穀祭)를 지내고 몸소 적전
을 갈아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제를 지냈다. 하여 이때부터 이 땅의 토속적인 농사 신(神) 대
신에 중원대륙에서 가져온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제를 지낸 것으로 여겨진다.
허나 고려는 제왕이 원구단에 나가 하늘에 제를 지낼 때, 풍년을 같이 기원했고, 매년 열리는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에서도 일종의 기곡제(祈穀祭)를 지내 별도의 선농제는 거의
갖지 않았다.

그러던 선농제가 크게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조선 초부터이다. 태조 때 적경공제지법(籍耕供
祭之法)을 제정하고 태종 때는 적전단(籍田壇)을 수축했으며, 1430년에는 박연(朴堧)의 건의
로 선농지악(先農之樂)에 쓰이는 토고(土鼓)를 대체하고자 가죽 테를 한 북을 만들어 사용했
다. 그러다가 1476년 성종의 왕명으로 관경대를 만드니 그것이 현재 선농단이며, 사직단(社稷
壇), 선잠단(先蠶壇), 영성단(靈星壇)과 더불어 국가의 주요 제단으로 큰 대접을 받았다.

선농제를 지낼 때는 제왕이 직접 신하를 거느리고 제를 지냈으며, 그것이 끝나면 동적전<제기
동과 전농동(典農洞) 일대>으로 이동한다. 거기서 적전을 관리하는 적전령(籍田令)이 푸른 보
자기에 감싸인 쟁기를 제왕에게 올리며, 그것을 받은 제왕은 직접 쟁기를 잡고 밭에 5번 쟁기
질을 하는 이른바 친경(親耕) 쇼를 벌였다.
쟁기가 끝나면 관경대로 올라가 백성 가운데 특별히 선발된 70세 이상 노인들을 위로하고 그
들이 밭을 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농작물 씨앗이 얼어죽는 것을 막는 절차까지 마무리
되면 의식이 끝났음을 선포하고 궁궐로 돌아간다. 이렇듯 친경의례는 농사의 소중함을 제왕이
몸소 보여주고 비록 잠깐이지만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으로도 활용되었다.

허나 친경의례는 성종 이후 어쩌다 1회 벌일 정도로 거르는 경우가 많았으며(연산군 1회, 중
종 2회, 명종 1회, 선조 1회, 광해군 1회) 인조에서 현종까지는 아예 하지도 않았다. 숙종(肅
宗)은 의식을 치루려고 단단히 준비까지 했으나 날씨가 받쳐주지 못해 무산되었으며, 영조 시
절에 비로소 다시 치러지게 된다.

동적전이 있던 제기동과 전농동 지역은 지금은 완전 주택가라 썩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20세
기 초까지만 해도 너른 경작지였다. <제기동(祭基洞)은 제사를 지내는 터란 의미로 선농단에
서 비롯된 이름임>
왕실에서 관리하던 적전(籍田)은 2곳이 있었는데 선농단 근처에 동적전이 있었고, 개성(開城)
동쪽 전농동에 서적전(西籍田)이 있었다. 동적전은 제사용 곡식을 저장했는데, 선농단(관경대
)과 희우정(喜雨亭), 필분각(苾芬閣)이 있었고, 다수의 창고가 있었다. 반면 개성에 있는 서
적전에는 형향각(馨香閣)과 창고가 있었다.
동적전에서 나온 곡물은 종묘제례에 주로 썼으며, 서적전 곡물은 왕실에서 벌이는 온갖 제사
의식에 동원되었다. 이들 적전에서 쓰고 남은 곡물은 백성을 구휼할 때 쓰거나 의약청(議藥廳
), 산실청(産室廳) 및 제왕과 왕비의 예장(禮葬)에 사용했다.

▲  선농단 북쪽 홍살문

▲  선농단 향나무와 설렁탕 부뚜막

이렇듯 왕실의 주요 행사로 바쁘게 살았던 선농제는 1909년까지 잘 유지되었으나 1908년 이후
향사이정(享祀釐正)에 관한 순종의 칙령(勅令)에 따라 국가 제단을 정리하면서 사직단에 통합
되었다. 허나 동적전 친경의례는 1910년 5월까지 이루어졌는데 그때 순종이 신하와 백성을 거
느리고 친경을 하는 장면이 빛바랜 흑백사진으로 남아있다.

왜정(倭政) 때는 지역 사람들에 의해 선농제가 조촐히 진행되었으나 1940년대 왜정이 망국의
제단을 욕보이고자 선농단 주변에 청량대공원(청량대)을 닦으면서 제단을 아작내고 동적전이
있던 곳에는 전농공원을 만들었다. 이때 제단 북쪽 땅이 떨어져나가 보통학교(현재 종암초교,
1922년 개교)가 지어졌고, 1935년 제단 남쪽에 경성여자사범학교(현 서울대 사범대학)가 들어
서면서 남쪽 땅까지 썰려나갔다. 또한 군수물자 징수란 명목으로 제사 도구까지 거의 뜯어가
제사도 중단되고 말았다.

어둠의 시절 이후에도 수난은 여전하여 1946년 이후 제단 주변에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차 30
년 이상 잠수 아닌 잠수를 타며 주택가에 묻혀있었다. 그러는 사이 선농단의 이름도, 존재감
도 모두 희미해져 세상의 뇌리 속에서 완전히 잊혀져 갔다.
그러다가 1979년 제기동에 뜻있는 이들이 '선농단친목회'를 결성하여 자비를 들여 1년에 1번
씩 치제(致祭)를 올리기 시작했다. 세상의 무관심 속에 세월의 저편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선
농단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그렇게 선농단은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고, 동대문구와 같이 제례를 지내다가 1988년 행
정기관장 최초로 동대문구청장이 선농제 초헌관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후 1992년에는 '선
농대제 보존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동대문구의 흔쾌한 지원과 폭풍 홍보에 힘입어 지역의 대
표 축제이자 문화행사로 제대로 거듭났다. 행사 규모도 비록 옛날만큼은 못해도 나날이 커져
갔다.
그러다가 선농단 복원 여론이 강하게 피어나면서 2013년 8월, 선농단 주변에 장막을 치고 복
원 공사에 들어갔고 2015년 4월 공사가 완료되어 옛 모습이 상당수 회복되었다. 그리고 선농
단 북쪽에는 선농단 역사문화관을 닦아 선농단과 선농대제의 이해를 돕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선농단 일대는 선농단 역사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선농단의 구조는 단 주위로 크게 터를 다지고 그 한복판에 단을 두었다. 단이라고 해서 높이
구축된 것은 아니며 땅바닥에서 조금 솟은 정도이다. 제단 테두리는 돌로 잘 다지고 안쪽은
흙으로 다졌는데, 2015년 원래 모습으로 복원되면서 부득이 하얀 피부의 석재가 다소 섞여있
다. 기존에 쓰였던 옛 석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여 늙은 돌과 새 돌이 어색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새 돌도 선배 돌을 닮아가며 고색의 기운을 머금을 것이
다.
제단 외곽에는 낮은 키의 토담을 쌓았고, 동쪽과 서/남/북쪽 테두리 중앙에 붉은 피부의 홍살
문을 세웠는데. 이들 문과 토담은 2015년에 복원된 것이다. 선농단 남쪽에 1단의 석축을 두었
으며, 단 서남쪽에는 500년 이상 묵은 향나무가 영욕의 세월을 견딘 제단을 굽어보고 있다.

▲  선농대제의 한 모습

▲  선농단 동쪽 홍살문

선농대제는 처음에는 정월 길(吉) 해일(亥日)에 했으나 태종(太宗) 때 경칩이 지난 첫 해일로
변경되었다. 그때가 농사가 시작되는 3월이기 때문이다. 음력 2월 첫 신일(辛日)에도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1910년에는 양력 5월에 거행되었다. 그러다가 1979년 이후에는 4월 말~5월
초/중순 사이에 하다가 지금은 4월 하순 토요일에 한다. (2023년은 4월 22일에 했음)

제향(祭享)은 10변(籩) 10두(豆)의 중사(中祀)로 거행하고, 친림제향 때는 아헌관(亞獻官)은
왕세자(王世子)나 황태자(皇太子)가, 종헌관(終獻官)은 영의정이 맡았다. 집례(執禮)의 창홀
(唱笏)에 따라 음악을 연주하고 육일무(六佾舞)를 추며, 제례 봉행 순서는
① 전폐례(奠幣禮) - 농업신에게 예물을 올리는 의식
② 천조례(薦俎禮) - 제신(祭神)에게 음식을 올리는 진찬(進饌)의식
③ 초헌례(初獻禮) - 초헌관이 1번째로 농업신에게 작을 올리는 의식
④ 아헌례(亞獻禮) - 아헌관이 2번째로 농업신에게 작을 올리는 의식
⑤ 종헌례(終獻禮) - 종헌관이 3번째로 농업신에게 작을 올리는 의식
⑥ 음복례(飮福禮) - 제관이 제사를 마치고 신이 내린 제물을 먹는 의식
⑦ 망료례(望燎禮) - 폐백과 축문을 태워 땅에 묻는 의식
순으로 거행된다.

영신악(迎神樂)은 경안지악(景安之樂)을 연주하고 전폐례에는 숙안지악(肅安之樂). 진찬례에
는 옹안지악(雍安之樂), 초헌례에는 수안지악(壽安之樂)을 연주하며 일무생들은 문무(文舞)를
춘다. 이어서 서안지악(舒安之樂)을 연주할 때는 일무생들은 무무(武舞)를 추기 시작하며, 아
헌례와 종헌례 때는 수안지악을 다시 연주하고 철변두(徹籩豆) 때는 옹안지악을, 송신할 때는
경안지악을 연주한다. (절차가 매우 복잡함)

제사 제물로는 소와 돼지, 양의 고기와 피, 쌀과 기장, 과일, 떡, 술 등을 썼으며, 모든 행사
가 끝나면 친경에 쓰인 소를 잡고, 제물로 쓰인 소고기를 넣어 탕을 끓였다. 그리고 제물로
쓰인 쌀과 기장으로 밥을 짓고 돼지고기는 편육으로 썰었는데, 탕에 밥을 말고 편육과 여러
반찬을 겯드려 행사에 참여한 신하와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제물에 김치가 없기 때문에 파를 씻어다 놓았고, 간장도 쓰지 않기 때문에 소금으로 탕의 간
을 맞추었다. 오늘날 설렁탕을 먹을 때 파와 소금을 겯드리는데, 그 전통은 바로 여기서 비롯
된 것이다. 또한 선농단에서 만든 탕이라 하여 '선농탕(先農湯)','설농탕','설롱탕'이라 불렸
으며,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가운데 글자가 살짝 움직여 지금은 '설렁탕'으로 주로 불린다.
우리나라 대표 음식의 하나이자 서울의 토박이 음식 설렁탕은 이렇게 선농대제 뒷풀이 음식으
로 태어났다.

또한 설렁탕의 옛 이름 중 하나인 설농탕의 유래에 대해서 1940년에 홍선표가 쓴 '조선요리학
'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는 앞서 선농탕과는 약간 다른 것이라 햇갈림을 준다.
'세종대왕이 선농단에서 친경하던 때에 비가 심하게 내려서 촌보(寸步)를 옮기지 못할 형편에
이르렀다. 신하들이 배가 고파서 견디기가 힘드니 왕이 친경에 쓰던 소를 잡아서 맹물에 넣고
끓이라 하였다. 고기 끓인 국물에 소금을 넣어 먹으니 이것이 설농탕이다'

그 외에 오랫동안 탕을 끓이면 국물이 흰빛을 띠어 '눈처럼 뽀얗다','눈과 같이 무르녹는다'
는 뜻에서 설롱탕이 되었고, 그것이 설렁탕으로 변했다는 견해도 있다. 허나 보통은 선농탕
유래를 많이 따른다.

동대문구의 대표적인 문화행사로 거듭난 선농대제는 9시부터 시작된다. 왕산로에서 선농단까
지 짧게 어가행렬을 비롯한 제례 행렬을 선보이며 (예전에는 동대문구청에서 출발했음) 보통
10시 반부터 12시 전까지 제례를 봉행한다. (행사시간은 매년 조금씩 다를 수 있음)
제례를 치르는 동안 선농단 북쪽 종암초교에서 동대문구 공무원과 새마을단체 사람들이 점심
을 준비하며 보통 10시 반이나 11시부터 선농대제의 백미(白眉)이자 상징인 '전통 설렁탕 재
현 및 나누기' 시간을 갖는다. 설렁탕은 누구든 먹을 수 있으며, 밥과 김치, 깍두기, 떡, 생
수가 제공된다.
설렁탕은 넉넉히 준비하기 때문에(보통 2,000~3,000명 분을 준비함)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다.
다만 초반에 가면 사람이 너무 미어터져 밥이 내 앞에 오기까지 상당한 인내를 요하니 사람이
어느 정도 빠져나간 30~40분 이후에 먹기를 권한다. 음식은 각자가 알아서 챙기는 것이 아닌
새마을단체 사람들과 자원봉사 학생들이 알아서 갖다준다. 늦게 갔을 경우에는 밥을 먹을 의
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다. (가급적 12시 안에 가야 안전함, 사람이 몰릴 경우 일
찍 떨어짐)

무료 설렁탕이지만 맛은 생각 외로 괜찮아 어지간한 설렁탕 전문점을 울게 할 정도이다. 시중
에서 거의 8,000원~10,000원대를 하는 설렁탕을 선농대제의 일환으로 무료로 먹을 수 있으니
정말 좋은 축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13시부터는 선농단 역사문화관에서 설렁탕 요리대회(설롱 요리대회)가 열리며 요리가
끝나면 시식 기회를 준다. (오후 행사는 매년마다 다를 수 있으며, 2023년에는 하지 않았음)

* 선농단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274-1 (무학로44길 38, 선농단역사문화관 ☎
  02-3285-5560)
* 선농단역사문화관 홈페이지는 이곳을 ☞ 흔쾌히 클릭한다.


▲  남쪽 홍살문에서 바라본 선농단과 선농대제



 

♠  선농단과 선농대제 둘러보기

▲  서남쪽에서 바라본 선농단과 선농대제

선농단에는 푸른색 시트 커버를 걸친 제사상 4개가 놓여져 있다. 이중 큰 상은 선농단 북쪽과
동쪽에 배열하니 이들은 농업신인 선농씨와 후직씨의 밥상이며, 다른 조그만 상 2개는 선농단
밑에 둔다.
제단에서 남쪽 홍살문까지 붉은 카페트를 깔고, 서쪽과 남쪽에도 붉은 카페트를 깔아 바로 남
쪽으로 향하게 했는데, 이들은 제왕을 비롯한 제관이 움직이는 동선이다. 제단 남쪽 정면 길
로 제단으로 들어가 의례를 치른 다음, 서쪽이나 동쪽 카페트를 따라 다시 남쪽 자리로 돌아
오는 것이다.

선농단 주위로 갑옷을 입거나 무관 복장을 갖춘 사람들이 삼엄하게 늘어서 있어 선농제의 엄
숙함을 한껏 고조시킨다. 1시간 반 가까이 저렇게 서 있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을텐데 말이다.
허나 옛날과 달리 그저 자리만 지키면 되며, 옆 사람과 수다를 떠는 모습도 쉽게 목격이 된다.
그것이 옛날과 오늘날 선농대제의 차이이다. 만약 옛날이었다면 바로 파직 또는 징계각이다.


▲  전통 방식으로 재현된 가마솥 설렁탕 부뚜막

선농단 서쪽에는 누런 피부의 부뚜막을 설치하여 정겨운 가마솥을 걸고 설렁탕을 끓이고 있다.
장작을 넣어 부뚜막을 계속 흥분시키며 탕을 숙성시키고 있는데, 선농대제가 무르익을수록 설
렁탕도 그만큼 익어간다.


▲  동남쪽에서 바라본 선농대제

선농단 남쪽 밑에는 금관조복(金冠朝服)을 갖춘 제관들이 홀(忽)을 쥐어들며 3줄로 늘어서 있
다. 이들 상당수는 선농대제 보존위원회 위원들로 석전대제와 사직대제, 종묘대제 보존위원들
도 섞여있다. 제왕은 보통 동대문구청장이 담당하고 있는데, 대례복(大禮服)과 12면류관을 갖
춘 자못 제왕다운 모습으로 대제에 임하고 있다.
제관들은 노천에 멍석을 깔고 앉거나 절을 하지만 제왕은 그들 동쪽에 차려진 노란색 천막 안
에서 햇살을 피하며 대기한다. 그리고 의식을 행할 때는 옆에 자리한 내관이 붉은 일산(日傘)
을 받쳐들고 그를 따르니 역시나 제왕이나 우두머리 자리가 좋긴 좋다.

제관 자리 남쪽에는 하얀 천막이 쳐져 있고 의자가 넉넉히 놓여져 있어 행사 관계자들과 세금
이나 축내는 구의원과 국회의원, 고위 관리 잡것들과 지역 유지들, 관람객들이 앉아있으며 제
관들 서쪽에는 붉은 옷을 입은 여인들이 무리를 지어 앉아있는데 이들은 일무(佾舞)를 맡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 북쪽에는 제례악을 맡은 사람들이 각기 악기 1개 또는 2개씩 거느리
며 악기를 조정한다.


▲  선농대제에 임하고 있는 제관들
전통 행사로 진행되는 지금도 이러한데 옛날에는 정말 숨소리도 내기 힘들 정도로
정성과 엄숙을 다했다. 그때는 조금의 실수나 긴장 풀린 모습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만약 걸리면 파직이나 징계를 주었다.

▲  동쪽 홍살문 남쪽에서 바라본 선농대제
(노란 천막은 제왕이 대기하는 특별 공간)

▲  제례 봉행이 시작되면 제관들은 전폐례부터 망요례까지 무려 7개의
의식을 수행해야 된다. 그때마다 단으로 올라가 의식을 치루고
다시 내려와 대기하다가 다음 의식이 시작되면 또 올라간다.

▲  선농단 남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일무생들
사단법인 아악일무보존회 사람들로 모두 여자들이 맡는다. 앳된 20대부터
중년층에 이르기까지 36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  문무(文舞) 율동을 선보이는 일무생들

▲  제례악을 맡은 사람들 (경기도립국악단)

▲  초헌례를 치르는 모습

▲  북서쪽에서 바라본 선농단과 선농대제

▲  음복례가 진행되고 있는 선농단
음복례는 제관이 제사를 마치고 제물로 올린 술을 마시는(음복) 의식이다.

▲  음복례도 거의 끝나가고

▲  대제의 마지막 단계, 망요례(望燎禮)

음복례가 끝나면 폐백과 축문을 태우고 선농단 북쪽에 마련된 공간에 묻는다. 망요례를 끝으
로 거의 1시간 반에 걸친 선농대제는 마무리가 되며, 원래대로라면 친경 의식도 해야 되나 부
근에 친경을 벌일 경작지가 없기 때문에 계속 생략되고 있다. 그러니 선농대제는 '설렁탕 나
누기'를 포함해 ⅔ 정도만 재현되고 있는 셈이다. 허나 어찌하겠는가? 아무리 전통 행사라고
해도 시대에 맞게 변형과 축소는 어쩔 수가 없다.


▲  망요례를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제관들
다들 속으로 '이제 행사도 끝났으니 밥 묵으러 가자~~!' 이랬을 듯~~

▲  선농대제에서 몸을 푼 전통 악기들
궁중 의례나 종묘제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몸값 비싼 악기들이 주류를 이루어
선농대제의 높은 품격을 보여준다.


대제가 끝나자 선농단 주변의 통금은 모두 풀렸다. 제관들과 행사 요원들, 높은 작자들은 기
념사진을 찍거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하나 둘 밥 먹으러 사라지고, 제단 주변은 관리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어수선한 상황이 되었다. 대제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제단으로 들어와
초롱초롱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제삿상과 제물, 제기, 악기 등을 살펴보고 사진에 담느라 부산
하다. 그렇다고 제물과 제기를 가져가지는 말자~! 그냥 손으로 쓱쓱 어루만지고 끝내면 된다.


▲  선농대제 제삿상 <후직씨에게 올리는 제삿상, 2012년>

▲  금동 빛깔의 장엄스런 제기들
사극에서나 보던 고급 제기들이 속인들의 호기심을 건드린다. 백성들은 감히 쓰지도,
만지지도 못했을 저들을 직접 두 눈에 담으니 기분이 참 새롭다. 저들은 가격이
얼마나 하려나? 몇 개 장만하여 내 밥그릇으로 쓰고 싶다.

▲  제주(祭酒)를 담은 그릇과 의식 때마다
손을 씻는 정화수와 수건들

▲  창고로 퇴장하는 제기들
이제 1년 뒤에나 볼 수 있겠구나



 

♠  선농단 마무리 (향나무, 설렁탕, 선농단 역사문화관)

▲  선농단 향나무 - 천연기념물 240호

선농단 서쪽에는 나이도 지긋한 늙은 향나무가 넓게 그늘을 베풀고 있다. 그는 선농단의 오랜
상징이자 얼굴로 나이가 무려 500년 이상을 헤아린다. 20세기 후반에도 추정 나이가 500년이
었다고 하니 선농단과 나이가 그런데로 비슷할 듯 싶으며, 1476년 선농단을 닦을 때 성종이
기념으로 심거나 15세기 말에 선농대제 기념으로 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천하에 널리고 널
린 나무 중에 유독 향나무를 심은 것은 제사 때 피울 향을 충당하고자 함이다.

아무리 먹어도 줄지 않는 세월이란 무한 양분과 국가 제단에 자리한 잇점으로 관리들과 왕족
들의 보살핌이 대단했다. 게다가 대제 때마다 곡차(穀茶)의 기운을 듬뿍 받으니 키 13.1m, 둘
레 2.28m에 어엿한 나무로 성장했다. 대제가 끝나면 막걸리를 비롯하여 제사에 쓰인 술은 이
나무에 모두 부었다고 하며, 어렸을 때부터 강제로 술에 길들여지다 보니 이제는 내성이 생겨
어지간한 술에도 눈 까딱하지 않을 것이다.


▲  선농단의 흑역사, 바닥에 눕혀진 청량대(淸凉臺) 표석

향나무 북쪽에는 '청량대' 3자가 쓰인 표석이 벌러덩 누워있다. 여기서 청량대는 고약한 왜정
이 선농단을 욕보이고자 제단 주변에 닦은 공원으로 '청량대공원'이라 불렸다. 공원 앞에 청
량대 표석을 세워 선농단의 이름을 억지로 대신했는데, 1945년 8.15이후 제기동과 용두동 주
민들이 왜정이 세운 청량대 표석을 때려눕혀 땅에 묻어버리면서 어둠의 시절에 대한 울분을
조금이나마 달랬다.
그러다가 2013년 이후 선농단을 복원할 때 다시 꺼내 이곳에 눕혀놓았다. 90도로 세워놓으면
왜정 잔재에 기만 살려주는 꼴이 되니 이렇게 눕힌 것이다. 비록 왜정이 남긴 고약한 흔적이
지만 기왕 다시 햇살을 보게 된 거 이런 상태로 선농단 곁에 두어 후대에 경계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허나 이 땅에는 아직도 때려눕혀야 될 왜정의 잔재가 너무나 많다. 그것들을 모두 잡는 그날,
이 땅에 진정한 광명이 올 것이나 그럴려면 아직도 까마득하니 그저 곡소리만 나올 뿐이다.


▲  선농대제는 끝났지만 숙성의 끝을 향해 부뚜막에 몸을 기대며
제 갈 길을 고집하는 가마솥 설렁탕


선농대제도 다 끝나고 사람들도 대부분 빠져나간 선농단에서 유일하게 펄펄 흥분을 내는 존재
가 있다. 바로 황토색 부뚜막에 걸린 가마솥 설렁탕이다. 부뚜막에는 아직도 온기(溫氣)가 여
전해 뜨거운 입김을 불어대며 탕이 아주 사골이 되도록 펄펄 숙성시키고 있는데 탕 국물이 아
주 하얗게 변해 뽀얀 눈이 내려앉은 것 같다.
설렁탕 나누기 행사에서 이 가마솥 설렁탕을 쓸 것 같지만 절대로 쓰지 않는다. 동대문구에서
따로 조리하여 가져와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이 설렁탕은 어디까지나 재현용이며 가마솥 안에
는 국물만 보일 뿐 고기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허나 냄새만큼은 설렁탕 냄새 비슷하여 아
마도 소뼈 등을 넣고 푹 삶은 것 같다.


▲  선농단 북쪽 밑에 자리한 선농단 역사문화관

선농단 역사문화관은 선농단을 복원하면서 새로 닦은 것으로 2015년 4월에 문을 열었다. 이곳
에는 선농단과 선농대제의 역사와 유물, 디오라마를 비롯하여 설렁탕의 유래, 농업의 역사와
농기구들을 다루고 있으며, 어린이를 위해 선농단 탁본 체험, 선농대제 의복 체험, 선농대제
사진 촬영 등의 여흥거리도 준비되어 있다.
지하 2층 규모로 지하 1층에는 선농단과 선농대제, 어가행렬, 제왕의 친경의례 등을 다루었고
, 지하 2층은 설렁탕과 농업 관련 유물과 서적 전시, 체험 코너, 청소년 쉼터와 배움터, 중정
(시간의 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정 같은 경우는 향나무 남쪽에 있었던 옛 선농단을 투
영한 곳으로 내,외부에 24절기를 표현하여 그 24절기에 따라 빛과 그림자가 햇님의 운행에 따
라 시간과 계절, 날씨의 변화된 조건에서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알려주는 공간이다.

선농단 후식거리로 1바퀴 둘러보며 선농단을 복습하는 공간으로 활용하면 적당하며, 특히 아
이들을 동반하여 왔다면 꼭 들려서 체험 코너에서 놀게 해주는 것도 좋다. 그리고 문화관 정
문에는 전통 찻집과 기념품점이 있어 잠시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

* 선농단역사문화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274-1 (무학로44길 38, ☎ 02-3295
  -5560)


▲  선농단과 동적전의 위치

▲  1739년에 작성된 친경의궤(親耕儀軌)

▲  동적전식례(東籍田式禮)
동적전에 관해 기록한 책으로 1824년부터 1853년까지 쓰였다.

▲  신농씨 제례상

▲  선농대제 뒷풀이로 먹은 설렁탕의 위엄

선농단과 선농대제를 둘러보고 그날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설렁탕을 먹으러 종암초교로
이동했다. 선농단 일대를 동분서주하다 보니 시장기가 무척 치솟아 뱃속이 아주 반란 직전이
다.

설렁탕은 동대문구청에서 마련하여 제공하는 것으로 행사 관계자는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무
료로 대접하고 있다. 그러니 누구든 와서 운동장에 설치된 천막에 앉으면 설렁탕과 김치, 깍
두기, 떡, 생수, 1회용 숟가락과 젓가락을 제공받는다. 직접 줄을 서서 음식을 받는 것이 아
닌 자원봉사자들이 직접 갖다주는 방식으로 초반에 가면 자리를 잡기도 힘들뿐 더러, 음식이
내 앞에 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려 조금 늦게 가는 것이 낫다.
11시 30분 이후라 빈 자리들이 많아서 적당한 곳에 앉아 음식을 자원봉사자에게 1그릇 청하니
바로 잘 차려진 설렁탕을 가져다준다. 혹자(或者)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공짜 설렁
탕이니 맛도 별로고 고기도 별로일 것이다'
하지만 동대문구가 지역 이름과 선농단, 선농대제의 이름을 걸고 제공하는 설렁탕인지라 맛은
시중의 유명 설렁탕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그러니 안심하고 먹자. 파도 넉넉히 들어있고, 고
기도 그런데로 담겨져 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설렁탕 섭취를 마치고 나오니 시간은 어느덧 12시가 넘었다. 오랫만에 찾은
선농단에서 2시간 가까이를 머물며 선농단과 선농대제, 선농단 역사문화관, 향나무, 거기에
설렁탕까지 남부럽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눈과 입, 코, 귀 등 5각(五覺)도 즐거웠다.

이렇게 하여 내년 선농대제와 설렁탕을 벌써부터 고대하며 '설렁탕의 고향, 선농단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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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4월 2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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