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24.04.19 조선 최초의 왕릉, 정릉 봄꽃 나들이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

조선 최초의 왕릉, 정릉 봄꽃 나들이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

조선 최초의 능, 정릉



' 정릉 봄맞이 나들이 '

정릉
▲  정릉

정릉 금천교 정릉 숲길

▲  정릉 금천교

▲  정릉 숲길

 



 

봄이 겨울 제국을 몰아내고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어루만지던 4월의 한복판에 조선 최
초의 능인 정릉을 찾았다.
서울 장안에는 도봉산(道峯山)부터 호암산(虎巖山)에 이르기까지 봄꽃 명소들이 무지하
게 많지만 역사와 자연이 오지게 어우러진 조선시대 왕릉(정릉, 의릉, 태강릉, 선정릉,
헌인릉 등)도 봄꽃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다. 하여 간만에 왕릉 봄 산책이
나 즐길 겸, 적당한 곳을 찾다가 집에서 가까운 정릉으로 길을 잡았다. 정릉은 이미 3~
4번 인연을 지었으나 다들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  정릉(貞陵) 입문

▲  정릉 세계문화유산 표석 앞 갈림길

정릉과의 첫 인연은 중학생 시절인 1990년대 초반이다. 지금이야 이정표가 잘 되어있고 인터
넷 지도가 아주 훌륭하여 지독한 길치가 아닌 이상은 쉽게 찾을 수 있지만(우이신설선 정릉역
2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정릉 이정표가 있음) 그때는 이정표가 너무 부실하여 찾기가 어려웠
다.
하여 2번에 시도 끝에 정릉동 골짜기에서 태연하게 숨바꼭질을 즐기던 정릉을 찾아내 술래 신
세를 면하게 되었다. 그 시절 정릉은 지금처럼 입장료를 받던 공개 구역이었으나 인지도가 낮
아 탐방객은 별로 없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정릉의 존재감은 슬슬 커져갔고 탐방객도 정
비례로 늘어갔다.

정릉 정문에 이르니 매표소가 나그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본다. 정릉이 성북구 영역이라
성북구 주민은 50%를 깎아주나 나는 도봉구 사람이라 그 혜택을 전혀 받을 수가 없어 입장료
전액을 지불하여 유료의 공간, 정릉으로 들어섰다. (도봉구는 1973년 7월 성북구에서 분리되
었음)


▲  정릉 재실 앞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2호

정릉으로 들어서니 왼쪽(남쪽)으로 재실과 보호수로 지정된 큰 느티나무가 눈짓을 보낸다. 정
릉에는 서울의 다른 조선 왕릉에는 없는 2가지가 있어 눈길을 끄는데, 바로 보호수 나무와 약
수터이다. (약수터는 지금 사라지고 없음)
보호수는 2그루가 있는데, 재실 앞 느티나무는 나이 약 380년, 나무 둘레 360cm, 높이 21m로
정릉에 있는 나무 중 가장 크고 늙었다. 4~5월에 황록색 꽃이 핀다고 하나 봄 햇살이 정릉 구
석구석을 넓게 어루만지는 4월의 한복판임에도 아직도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해 꽃은커녕 잎
도 없다. 이미 다른 나무와 꽃들은 봄의 향연에 한참인데 말이다.


▲  정릉 재실(齋室)의 행랑 외곽 모습

재실은 정릉을 관리하는 능참봉(陵參奉)의 생활공간이자 능 제사를 준비하던 공간이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대문 좌우로 창고와 하인 방, 마구간, 집사방(執事房)을 갖춘 행랑(行廊)이
나오고, 안쪽 기와문을 들어서면 제사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재실 본채가 있다.

정릉 재실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터만 남아있던 것을 2012년에 발굴조사를 벌여 2014년에
복원했다. 그러다 보니 고색은 채 여물지 못했다. 비록 복원은 되었으나 딱히 놀려두기도 뭐
하여 다례체험 등 여러 전통교육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  대문과 다양한 공간이 있는 행랑

▲  재실과 제기고로 인도하는
안쪽 기와문

▲  2칸짜리 제기고(祭器庫)
제사도구를 보관하던 창고이다.


▲  재실 본채
정면 6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능을 지키는 능참봉의 거처이자
영(令)이 능 제사를 준비하던 공간이다.

▲  관리사무소 앞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7호

관리사무소 앞에 있는 보호수 느티나무도 앞서 보호수처럼 벌거숭이 상태이다. 추정 나이 200
년, 높이 17m, 나무 둘레 320cm로 정릉에서 2번째로 크고 늙은 나무인데, 계절 감각이 둔해진
것인지 아니면 게을러진 것인지 모르겠다. 어여 겨울에서 깨어나 봄의 향연에 동참했으면 좋
겠다. (느티나무는 5월 초까지도 벌거숭이인 경우가 있음)


▲  금천교(錦川橋)

정릉 중심부로 들어서려면 계곡에 걸린 금천교를 건너야 된다. (금천교가 아니더라고 계곡은
꼭 건너야 중심부로 진입할 수 있음)
금천교는 속세와 성역(聖域)의 경계 역할 및 능으로 인도하는 돌다리로 현종(재위 1659~1674)
시절 정릉을 손질하면서 지어졌다. 다리 좌우 끝에 석축을 다지고 그 사이에 묵직하게 돌기둥
을 세운 다음 길쭉한 통돌을 걸쳐 놓은 단출한 형태로 다리 피부에는 세월이 입혀놓은 고색의
때가 자욱하여 고풍스런 멋을 한층 올려준다.


▲  금천교 주변 계곡

조선 왕릉과 궁궐에는 금천의 역할을 하는 물줄기가 꼭 있기 마련이다. 정릉은 북악산길(북악
스카이웨이) 북쪽에서 발원한 계곡이 그 역할을 담당하여 정릉을 촉촉히 어루만지고 있는데,
정릉 중심부 북쪽을 거쳐 바깥으로 흐른다. 허나 정릉 동쪽에 빼곡히 들어찬 주택가로 능 정
문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한 채, 정릉천으로 흘러가며, 북한산(삼각산) 정릉계곡에서 나온 정
릉천 또한 정릉2동부터 어둠의 경로로 흐르다가 종암동(鍾岩洞)에서 다시 햇살을 본다.

정릉 계곡은 크기는 작지만 바위와 암반이 적당히 섞여있고 흙이 많아서 어린이들이 놀기에는
아주 좋다. 허나 문화유산인 정릉 내부이니 요란하게 노는 행위는 절대 삼가하기 바라며, 손
만 담구는 정도에서 멈춰야 될 것이다.

▲  붉은 피부의 홍살문

▲  홍살문 옆에 닦여진 배위(拜位)

금천교를 건너면 길은 오른쪽으로 급하게 꺾인다. (정면 길로 가면 관리사무소) 그 길을 들어
서면 쌀쌀맞게 생긴 붉은색 홍살문이 나타나 나그네로 하여금 절대 엄숙을 강조한다. 그는 왕
릉과 관아, 향교, 왕족과 사대부의 사당과 묘역 등 권력과 관련된 곳에 세우는 비싼 존재로
그를 들어서면 비로소 정릉 중심부에 이르게 된다.

홍살문 옆에는 돌로 다져진 네모난 배위<판위(板位)>가 누워있다. 이곳은 정릉을 찾은 제왕이
능 주인에게 절을 하는 곳으로 보통 4번 절을 했으며, 이를 국궁사배(鞠躬四拜)라고 한다. 현
재는 정릉 제향일에만 반짝 쓰이고 있어 꽤 한가해졌다.

그럼 여기서 잠시 정릉과 이곳 주인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정릉 정자각 주변 (수라간, 수복방 등)

정릉은 서울의 영원한 진산(鎭山)인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으로 정릉2동 서쪽 골짜기에 넓
게 누워있다. 능역(陵域) 동쪽과 남쪽은 정릉2동 주택가와 맞닿아있고, 북쪽은 정릉의 원찰(
願刹)이었던 봉국사(奉國寺, ☞ 관련글 보기) 남쪽에 이르며, 서쪽은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
이)과 정릉3동에 닿는다.
주택가와 매우 가깝지만 겉보기와 다르게 깊은 산골로 짙은 숲을 지니고 있으며 조촐한 계곡
과 그림 같은 숲길, 그리고 늙은 보호수도 2그루를 지녔다.

정릉의 주인은 조선 태조의 계비(繼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1396)이다. 고종(高宗)
이 1897년 황제 위에 오르면서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로 높여졌으며, 태조는 태조고황제(太
祖高皇后)로 올려졌다. (정릉 안내문에는 '신덕고황후'라 나와있음)

신덕왕후 강씨(이하 강씨)는 곡산강씨(또는 신천강씨) 집안으로 판삼사사(判三司使) 강윤성(
康允成)의 딸이다. 강씨의 숙부인 강윤충(康允忠)은 이성계의 큰아버지인 이자흥(李子興)의
사위로 두 집안은 제법 가까웠는데, 드넓은 동북면(東北面, 함경도와 길림성, 연해주 지역)
지역을 장악했던 이성계(李成桂)가 고려 조정에 출사하면서 강씨를 2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
그때 강씨는 이성계보다 약 20살 정도 연하였다고 한다. (에구 부러워라~~)

이성계와 강씨의 첫 만남 설화는 꽤 유명한데 내용은 이렇다.
어느 평화로운 날, 사냥에 나섰던 이성계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다. 마침 우물가에 아리따
운 여인이 있었는데(아마 빨래를 했던 모양임) 그에게 물 한 바가지를 청하니 여인이 바가지
에 물을 담아 버들잎 하나를 물 위에 띄워주었다. 이성계는 이상하여 이유를 물으니
'급하게 마시면 탈이 날까봐 천천히 드시라고 그랬습니다'
답을 했다.
그 말에 이성계는 무한 감동을 먹었고, 마침 여인의 미모도 몸살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던 터
라 그녀를 2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는 것이다.

허나 로맨틱한 설화와 달리 강윤성은 이성계의 미래를 크게 보고 딸과의 혼인을 적극 추진했
고, 이성계 또한 개경(開京)에 마땅한 기반이 없는 상태라 사돈관계에 있고 개경 귀족들과 두
루 가까웠던 강씨 일가의 힘이 필요했다. 즉 두 집안과의 결속 강화와 미래에 대한 투자 차원
에서 혼인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성계는 개경에 있을 때 강씨 집에 머물렀다. 그가 요동반도에 있던 위화도(威化島)에서 회
군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강씨는 포천 철현(鐵峴)에 있는 전장(田莊)에 머물렀고, 만약을
대비해 동북면과 가까운 이천(伊川)의 한충(韓忠)집으로 거처를 옮겨 상황을 지켜보았다.
1392년 3월, 이성계가 해주(海州)에서 말을 타다가 떨어져 크게 다치자 정몽주(鄭夢周)는 이
때다 싶어 그를 제거하려고 했다. 강씨는 이방원(李芳遠)을 급히 해주로 보내 이성계를 개경
으로 오게 했으며, 이방원이 조영규(趙英珪)를 보내 선죽교(善竹橋)에서 정몽주를 살해하자
이성계가 크게 노발대발한 것을 강씨가 무마시켰다. 이렇듯 강씨는 이성계를 힘껏 도와 조선
개국을 이끌어냈으며, 이성계의 첫 부인인 한씨가 조선 건국 1년을 앞두고 세상을 뜨자 조선
의 첫 왕후<현비(顯妃)>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게 되었다.


▲  비각에서 바라본 정릉 능침(陵寢)

강씨는 태조와의 사이에서 경순공주(敬順公主, ?~1407)와 무안대군 이방번(撫安大君 李芳蕃,
1381~1398), 의안대군 이방석(宜安大君 李芳碩, 1382~1398)을 두었다. 그녀는 권력욕이 너무
커서 태조의 최측근인 정도전(鄭道傳)과 연합해 태조를 설득하여 장남도 아닌 막내 이방석을
왕세자(王世子)에 앉히게 했다.
이렇게 후처 소생의 차남을 세자로 책봉하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제대로 뚜껑이 열렸다. 하
여 그들은 이방원<정안대군(靖安大君)>을 중심으로 강씨와 정도전 세력과 팽팽히 대립하게 된
다.

1396년 음력 8월 13일 강씨는 40대의 한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태조는 크게 애통하여 도성
한복판에 능을 쓰게 하고 능호(陵號)를 정릉, 존호(尊號)를 신덕이라 했으며, 개국공신들의
건의로 공신수능제(功臣守陵制)를 받아들여 개국공신 이서(李舒)에게 능 지킴이를 맡겼다.
또한 정릉 곁에 원찰인 흥천사(興天寺)를 크게 지어 매일 같이 찾아가 명복을 빌었으며, 흥천
사의 아침 종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아침 수라를 들었다. 그때 정릉은 덕수궁(경운궁) 북쪽에
닦여진 것으로 여겨지며, 정릉 때문에 정동(貞洞)이란 지명이 생겨났다.

1398년 정도전이 크게 방심한 틈을 노려서 이방간(李芳幹)과 이방원이 난을 일으켰다. 궁궐을
접수한 그들은 이복 동생인 이방번, 이방석 형제와 경순공주의 남편을 처단했고, 형제의 맏이
인 이방과(李芳果, 정종)를 왕위에 올렸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1차 왕자의 난이다. (경순공
주는 이후 비구니가 되었음)
그리고 1400년 이방간의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이방원은 형 이방과의 왕위를 물려받아 꿈에
그리던 옥좌(玉座)를 차지하게 된다.

이방원은 의붓어머니 강씨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태조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크게
정릉을 건드리지 않았으나 1406년 정릉이 너무 넓다는 의견이 있어 정릉 100보 밖까지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이때 하륜(河崙) 등 권력가들이 너도나도 정릉 숲에서 나무를 베어
집을 지으니 그것이 정릉 수난의 시작이었다.
1408년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은 바로 이빨을 드러내며, 정릉 탄압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1409년 의정부(議政府)는 왕의 비위를 맞추고자 정릉이 도성 안에 있는 것이 말이 안되며 명
나라 사신이 묵는 숙소와 가까워 도성 밖으로 옮겨야 된다고 하였다. 굳이 그런 것이 아니더
라도 도성 한복판에 능이 넓게 자리한 것도 솔직히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태종은 의정부의 갸륵한 뜻을 받아들여 정릉을 도성 밖 사을한(沙乙閑)곡으로 추방시켰고, 능
의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은 홍수로 무너지기 바쁜 광통교(廣通橋)를 돌다리로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동원했다. 이는 단순히 광통교 복구가 아닌 백성들이 정릉 석물을 밟고 지나가게 하
여 강씨를 길이길이 욕보이고자 함이었다. 또한 정자각과 일부 석물을 소환하여 태평관(太平
館, 명나라 사신의 숙소)을 짓는데 썼으며, 봉분을 깎아 무덤임을 알아볼 수 없게 하고 석인
(石人)은 생매장시켰다.

능의 제례 또한 폐지되고 봄, 가을 중월제(中月祭)로 격하시켰으며, 서모(庶母)의 기신제(忌
晨祭)의 예에 따라 삼품관이 제사를 지내게 했다. 또한 후궁으로 격하시켜 후궁의 예로 제를
올리게 하였다. 강씨가 지하에서 크게 통곡을 했는지 능이 파괴되던 날, 폭우가 쏟아졌으며,
하늘에서 울음 소리가 들렸다고 전한다.


▲  수라간에서 바라본 정릉 능침과 소전대(燒錢臺, 밑에 보이는 석물)

태종 사후로도 정릉의 고통은 계속되었고 정릉의 존재는 속세의 뇌리 속에서 거의 잊혀져 갔
다. 겨우 후손들이 살짝살짝 제사를 챙겼을 뿐이다.
그러다가 1581년 강씨의 후손인 강순일(康純一)이 선조(宣祖) 임금이 행차하는 수레 앞에 나
가 엎드리면서
'소인은 판삼사사 강윤성의 후손입니다. 지금 군역에 배정되어 있으니 국묘(國墓)에 봉사(奉
祀)하는 사람들의 군역을 면제하는 전례에 따라 면제시켜 주십시요'
하소연했다. 즉 정릉을
지키고 있으니 군역 면제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거의 잊혀졌던 정릉의 존재감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때 삼사(三司)에서는
신덕왕후의 시호와 존호, 정릉을 회복하자는 의견을 올렸으나 수용되지 않았으며 이후로도 계
속 논의를 벌이다가 송시열(宋時烈)에 의해 싹 마무리가 되었다.
송시열은 태종의 잘못된 조치로 정릉이 고통을 당했음을 바로 말하기가 애매해 그 시절 신하
들의 실수로 그렇게 되었다고 돌려 말하며, 정릉과 흥천사기문(興天寺記文)이 있음을 지적하
여 신덕왕후를 종묘에 배향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현종은 그의 뜻을 받아들여 1669년 태조의 왕후로 인정하여 종묘(宗廟)에 봉안했으며, 순원현
경(順元顯敬)이란 시호를 올리고 능을 복구했다.
이때 정릉에서 강씨의 넋도 달랠 겸, 성대하게 제를 지냈는데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내려서
사람들은 이를 두고 '강씨의 원한을 씻는 비'라고 하였다.

정릉 석물은 17세기 후반 것들이나 4각형 장명등(長明燈)과 혼유석(魂遊石)을 받치는 고석(鼓
石) 2개, 그리고 축문을 태우는 소전대는 옛 정릉 것들이다. 즉 14세기 후반 것들로 조선 왕
릉에 설치된 석물 중 가장 늙은 존재들이 된다. 그리고 정자각과 비각 등은 모두 17세기 이후
것들이다.

태조를 도와 조선 건국을 이끌어냈던 강씨, 허나 지나친 권력욕으로 끝내 자식을 잃고, 남편
의 말로를 비참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자신의 묘까지 태웠으니 인생무상, 권력무상이 따로 없
다. 왕후가 되면서 거기서 딱 절제를 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그게 안되었던 것이다. 물론 한씨
소생의 왕자(이방원, 이방과 등)들이 자신의 소생들을 지켜준다는 보장이 없으니 이방원 형제
들과 척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나마 똘똘했던 막내를 세자로 세워 자식들의 불투명한 미래
를 지켜주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궁궐은 그만큼 무서운 곳이니 말이다.
허나 강씨와 그의 친자식들은 결국 패배자가 되어 오랫동안 고통을 당해왔으니 역사의 패배자
가 어찌된다는 것을 아주 몸서리치게 보여준다.

정릉은 중구 정동의 지명 유래가 되기도 했지만 이곳 정릉동의 유래도 된다. 그래서 2개의 지
명이 정릉으로 인해 생겨났다.



 

♠  정릉 중심부

▲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향로(香路)와 어로(御路)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박석이 입혀진 향로와 어로가 닦여져 있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 참
도(參道)라고 하는데, 어로는 제왕이 걷는 길이며, 왼쪽에 조금 높은 향로<신도(神道)>는 제
향 때 향과 축문(祝文)을 들고 가는 길이다.
이곳 참도는 중간에서 'ㄱ'자로 90도 꺾이는데, 이는 지형 탓으로 정자각 정면에서 금천까지
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 직선으로 홍살문을 두기에는 좀 비좁아 보인다. 하여 나름 융통성
을 발휘한 것이다.


▲  정자각(丁字閣)

참도의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정자각이 있다. 싹둑 잘 다듬은 돌로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는데 그 모습이 '丁'처럼 생겨서 정자각이란 쉬운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정자각은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제왕은 좌측 계단으로 올라가 제사를 치르고 반대쪽 우측 계
단으로 내려갔다. 건물 안에는 제향에 쓰이는 여러 상(床)들이 있는데, 거의 황색 피부를 지
니고 있다. 황색은 황제와 황후를 상징하는 색깔로 고종이 신덕왕후를 신덕고황후로 높이면서
제사상의 피부 색깔도 변하였다.

▲  신좌(神坐)
신, 즉 정릉의 주인이 제향 때 머무는
추상적인 자리이다.

▲  관세상(盥洗床)
제관이 손 씻을 물을 올려놓는 상이다.
여기서 관은 대야를 뜻한다.

▲  제물을 올려놓는 상
(정자각 뒷쪽에서 바라본 모습)

▲  정자각 좌측 계단
왼쪽 계단은 정릉 주인의 혼과 참배를 온
제왕이, 그리고 오른쪽 계단은 신하와
아랫 사람들이 이용했다.


▲  수복방(守僕房)
정자각을 중심으로 좌측에 수복방과 비각이, 우측에는 수라간이 있다.
수복방은 능을 지키는 수복(守僕)이 근무하는 건물로
2칸짜리 맞배지붕 집이다.

▲  정릉 비각
정릉의 주인을 알려주는 비석의 거처이다.

▲  정릉 비석
'대한(大韓) 신덕고황후 정릉'이라 쓰여있다.

     ◀  수복방과 마주보고 있는 수라간
수복방과 비슷한 2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제
향 때 제사 음식을 데우거나 손질하던 곳이다.
터만 아련하게 있던 것을 근래 복원하여 채워
넣었다.

능침 밑부분에 소전대라 불리는 조그만 돌덩어리가 있다. 소전대란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오
로지 이곳 정릉과 태종의 헌릉(獻陵),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에만 있는 희귀한 존재이다. 태
종 이후, 소전대가 사라지고 '예감'이 그 역할을 하게 된다.

정릉 소전대는 정릉이 이곳으로 추방되면서 같이 왔는데 오랫동안 정릉약수터 주변에 찌그러
져 있던 것을 정릉관리소 김용욱 소장이 발견하여 고증을 통해 이곳에 두었다. 정릉을 옮기는
과정에서 태종의 지시로 능 주변에 두지 않고 고의로 계곡에 처박아둔 것으로 여겨진다.
정릉의 한낱 석물에게까지 화풀이를 한 태종, 그만큼 의붓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컸던 것이며,
정릉이란 존재 자체도 그야말로 눈에 가시와 같았다.


▲  확대해서 바라본 정릉 능침

소나무숲에 감싸인 정릉 능침에는 커다란 봉분(封墳)을 중심으로 문인석 1쌍, 망주석(望柱石)
1쌍, 장명등 1기, 혼유석, 여러 석호와 석양이 배치되어 있다. 이중 장명등은 고려 양식을 이
은 14세기 후반 것이며,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 2개도 옛 정릉 출신이다.
예전에는 능 옆구리까지 접근이 가능했으나 이제는 통제구역으로 묶여 능침 자체를 올라갈 수
없다.


▲  정릉 북쪽 산책로에서 만난 넓적한 바위 (바위 이름은 없음)

▲  봄이 깊어가는 정릉 북쪽 산책로

정릉의 젖줄인 계곡(금천)을 따라 그림 같은 산책로가 서쪽으로 이어져 있다. 이 길을 쫓아가
면 정릉 주변을 도는 2.5km의 숲길이 펼쳐지니 정릉 중심부만 살피지 말고 꼭 1바퀴 둘러보기
바란다. 즉 정릉 외곽을 도는 것으로 산책로 안팎이 모두 정릉 능역(陵域)이다.


▲  생태계가 살아있는 정릉 계곡(금천)

▲  봄 속으로 인도하는 산책로
따뜻한 기운이 소리 없이 내리면서 푸른 잎과 온갖 꽃들이 기지개를 켠다.
그런 봄에 물들고 싶어서 저 속으로 나를 숨기러 간다.



 

♠  정릉 산책로 돌기

▲  정릉 북쪽 산책로 (정릉 정자각 계곡 건너편)

정릉 숲길은 정릉 중심부와 맞닿은 북쪽 산책로만 평지이고 나머지는 모두 산길이다. 능이 첩
첩한 산골에 묻혀있기 때문에 숲길을 거닐다 보면 자연히 약간의 등산도 하게 된다. 허나 경
사가 그리 각박하지 않고 길이 잘 닦여져 있어서 두 다리만 멀쩡하면 어린이와 노인도 거뜬히
1바퀴 돈다.


▲  정릉 북쪽 산책로 (옛 정릉약수터 주변)

▲  이제는 과거가 되버린 정릉약수터(정심약수터)

정릉 서쪽에는 정릉약수터가 있었다. 서울에 있는 조선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약수터까지 갖
추고 있던 정릉에서 특별히 맛볼 수 있는 자연산 수분으로 물이 졸졸 알아서 나오는 약수가
아니라서 직접 챙겨 먹어야 된다. 능 제사에 쓰이는 물은 모두 여기서 가져왔으며, 정릉2동
사람들이 많이 물을 떠갔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음)


▲  서남쪽으로 꺾이는 정릉 산책로

▲  봄꽃의 마지막 물놀이 현장 (정릉 계곡)
4월 초를 짧게 주름잡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훔쳐갔던 벚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계곡에서 생애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계곡은
저들의 인생을 정리하는 조그만 블랙홀인 모양이다.

▲  정릉 서쪽 숲길

▲  산길로 변한 정릉 서쪽 숲길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 전까지는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  산길로 변한 정릉 서쪽 숲길

▲  지그재그 율동을 부리는 정릉 서쪽 숲길

▲  동그란 석축에 뿌리를 내린 벚꽃나무 (정릉 서남쪽 숲길)

▲  정릉 서남쪽 숲길 ①

▲  정릉 서남쪽 숲길 ②

정릉 서남쪽 끝에는 서울의 대표 지붕길인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이 흐르고 있다. 정릉에
는 북악산길을 향해 2개의 소방문을 내고 있는데 이들은 업무와 비상용 문이라 관람객에게는
개방하지 않는다. 하여 둘이 맞닿아 있음에도 철책을 사이에 두고 서로 금지된 땅 보듯 해야
된다. 현재 정릉은 정문으로만 통행이 가능하여 무조건 그곳으로 오가야 되는데, 북악산길도
서울의 주요 꿀명소인만큼 비상용문 하나를 따고 매표소를 두어 서로 왕래가 가능하게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정릉~북악산길~성북동(길상사, 삼청각, 간송미술관 등)/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부암동/북한산(삼각산)'으로 이어지는 환상적인 나들이/도보 코스가 만들어진다.

서울시청과 성북구청, 문화재청 철밥통들은 거지 같은 탁상행정으로 세금이나 빼먹지 말고 저
런 것들도 적극 검토해 추진해주었으면 좋겠다.


▲  북악산길(오른쪽)과 맞닿은 정릉 서남쪽 숲길 ①
북악산길을 지나는 차량들의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린다.

▲  북악산길(왼쪽)과 맞닿은 정릉 서남쪽 숲길 ②
북악산길을 코앞에 두고 입맛만 다셔야 되니 은근히 아쉽기만 하다.
서로를 잇는 것이 천하통일만큼이나 어려운 것일까?

▲  정릉 남쪽 숲길 ①
북악산길까지 올라온 숲길은 다시 내리막으로 변신한다.

▲  정릉 남쪽 숲길 ②

▲  정릉 남쪽 숲길 ③

▲  정릉 능침 바로 윗쪽 쉼터

정릉 남쪽 숲길은 중간에 3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서쪽)으로 가면 앞서 서쪽 숲길로 빠
지며, 오른쪽(동쪽)으로 가면 정릉 정문, 그리고 직진(북쪽)하면 위와 같은 쉼터가 나온다.
허나 그 쉼터는 막다른 곳으로 다시 갈림길로 나와야 된다. 허나 쉼터 주변으로 철책이 없어
서 자칫 숲으로 막 내려갈 수도 있는데 여기서 북쪽 숲으로 내려가면 바로 정릉 능침이다. 능
침 주변은 금지된 구역이니 굶주린 공비들처럼 숲을 막 헤집고 들어가서는 안된다. 그냥 쉼터
에서 얌전히 쉬다가 갈림길로 그냥 사라져주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  정릉 남쪽 숲길에서 서쪽 숲길을 잇는 사잇길

갈림길에서 바로 정문으로 내려가기는 다소 아쉬워서 서쪽 숲길로 향하는 사잇길로 우회해서
갔다. 정릉 북쪽 산책로를 거쳐 정릉 정문을 나오면서 2시간에 걸쳐 아주 여유롭게 진행된 정
릉 봄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 정릉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산 87-16 (아리랑로 19길 116, ☎ 02-914-5133)
* 정릉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4년 4월 3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24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