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숲길'에 해당되는 글 120건

  1. 2015.04.12 동백꽃에 둘러싸인 전설의 절터, 광양 백계산 옥룡사터 (동백나무숲, 도선대사천년숲길)
  2. 2014.11.28 늦가을 억새의 성지, 부산 승학산 억새 나들이
  3. 2014.10.17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곰절이란 애칭을 가진 창원 불모산 성주사
  4. 2014.05.20 도심과 가까운 첩첩한 산중의 오랜 절집 ~ 북한산 승가사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5. 2013.12.13 볼거리와 조망이 일품인 서울의 숨겨진 명산, 호암산 (석구상, 한우물, 칼바위...)
  6. 2013.11.15 늦가을 산사 나들이 ~ 고성 연화산 옥천사 (공룡발자국화석, 연화산 숲길)
  7. 2013.10.25 늦가을도 걸음을 멈춘 아름다운 박물관, 성북동 간송미술관
  8. 2013.06.03 석가탄신일 기념 절 나들이 ~ 늘씬한 숲길과 많은 보물을 간직한 고색의 절집, 정릉 경국사
  9. 2013.05.14 봄맞이 산사 나들이 ~ 아름다운 숲길이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고색의 절집, 곡성 동리산 태안사
  10. 2013.03.04 늦겨울 산사 나들이 ~ 계룡산 갑사 (갑사계곡, 숲길)

동백꽃에 둘러싸인 전설의 절터, 광양 백계산 옥룡사터 (동백나무숲, 도선대사천년숲길)

 


' 광양 동백꽃 나들이 (백계산 옥룡사터, 동백나무숲) '

▲  동백숲에 둘러싸인 광양 옥룡사터


 

봄이 겨울 제국(帝國)을 몰아내고 하늘 아래를 파릇파릇 수놓던 4월 첫 무렵에 전남 광양(光陽)
땅을 찾았다.

아침 일찍 부산서부(사상)터미널에서 광양행 직행버스를 탔는데, 광양과 동광양(東光陽)으로 출
근이나 출장, 통학하는 사람들로 만석을 이룬다. 그렇게 자리를 몽땅 채우고 남해고속도로를 질
주해 섬진강휴게소에서 잠시 바퀴를 접고, 동광양을 거쳐 부산 출발 약 2시간 20분 만에 광양터
미널에 이른다.

광양 땅은 나와 지지리도 인연이 없는 곳으로 2001년 이후 10여 년 만에 와본다. 오랫동안 눈길
조차 주지 않아 미안한 마음이 가득 들지만, 서울과도 거리가 멀고 인연 또한 잘닿지 않으니 나
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래도 이번에 옥룡사터와 동백림을 목표로 왔으니 광양 땅도 서운
함을 어느 정도 잊어 줄 것이라 믿는다.

터미널 바깥 시내버스 정류장(옛 광양역 앞)에서 옥룡 방면 시내버스를 타면 되는데, 마침 옥룡
면 논실로 가는 버스가 1분 뒤에 온다고 정류장 전광판에 뜬다. 읍내에서 추동 방면은 거의 50~
60분 간격으로 다녀 시간표를 따로 확인하지 않고 왔는데, 이처럼 시간이 딱 맞아떨어지니 이보
다 기쁜 것이 없다.
이윽고 논실로 가는 광양시내버스 21-3번이 들어와 활짝 입을 연다. 광양5일장의 영향으로 버스
는 오전부터 노공(老公)들을 가득 태워 만차의 기쁨을 누리며 읍내를 벗어나 옥룡면으로 달린다.

백운산 남쪽에 펼쳐진 옥룡면(玉龍面)의 산하를 가로질러 어느덧 추동에 이른다. 여기서 북쪽으
로 가면 옥룡사터 입구와 백운산자연휴양림이며, 동쪽으로 다리를 건너면 동곡계곡과 백운산(白
雲山)으로 이어진다. 나야 목적지가 옥룡사터이니 북쪽으로 길을 잡는다.


♠  옥룡사 동백나무숲 - 천연기념물 489호

▲  운암사 입구에서 바라본 백계산
(중앙에 보이는 금빛 물체가 운암사 약사여래불)

추동마을에서 북쪽으로 6분 정도 걸으면 운암사 입구이다. 여기서 동북쪽을 보면 금빛을 비추는
커다란 불상이 두 눈을 놀라게 하는데, 바로 그곳에 운암사가 있다. 그곳을 거쳐 동백림과 옥룡
사로 가도 되지만 나의 머리 속에는 운암사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운암사 입구에서 5분 정도 올라가니 옥룡사터 입구이다. 여기서 이정표의 지시로 오른쪽으로 들
어서면 주차장과 해우소(解憂所)가 나오고, 그 뒤로 옥룡사터로 올라가는 오솔길이 나온다. 이
길은 수레가 마음 놓고 절터까지 들어갈 수 있게끔 잘 닦여져 있지만 중간에 볼라드를 설치하여
4발 수레의 통행을 막고 있었다. 어차피 절터까지 거리도 얼마되지 않고, 문화유산 보호 및 동
백림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100번 지당하다.

근래에 둘레길 유행에 따라 주차장에서 옥룡사터를 거쳐 백계산 정상 입구인 금목재까지 이어지
는 산길에 '도선국사 천년숲길(둘레길)'이란 이름을 붙었다. 옥룡사에 딱 어울리도록 말이다.


▲  봄에 완전 물들어진 옥룡면의 산하 (옥룡사터 입구 주변)
고요하고 목가적(牧歌的)인 시골 풍경에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안구는
싹 정화되고 마음도 조금씩 평안을 누린다. 봄이 한참 붓질을 하고
지나간 천하는 싱그러운 녹색의 세상이다.

▲  옥룡사터 입구 주차장에서 만난 벚꽃

▲  순백의 아름다움으로 봄에게 보답하는 배꽃의 위엄
광양 땅이 오랜만에 찾은 나에게 보답 차원에서 봄꽃 구경을 시켜주는 모양이다.

▲  옥룡사 동백나무숲 바로 직전 (수레의 통행을 막는 볼라드의 위엄)

주차장에서 별로 급하지 않은 오르막길을 7분 정도 가면 속인(俗人)들의 농가가 끝나면서 푸르
게 우거진 동백나무 숲이 진하게 모습을 드러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혹여 건방진 수레의 발길
을 막고자 길 가운데를 버티고 선 철기둥(볼라드)을 지나면 본격적인 동백나무 숲에 들어서게
된다.


▲  옥룡사 동백나무숲길 (1)
동백나무와 속인들의 경작지가 숲길을 사이에 두고 팽팽히 경계를 이룬다.

▲  옥룡사 동백나무숲길 (2)

▲  옥룡사 동백나무숲길 (3)
이제 완전하게 동백나무 숲에 들어섰다. 친겨울 성향이 강한 동백은 겨울부터
4~5월까지 순홍(純紅)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  옥룡사 동백나무숲길 (4)

▲  옥룡사 동백나무숲길 (5) - 옥룡사터를 코 앞에 둔 지점

옥룡사터를 넓은 바다의 외딴 섬처럼 꽁꽁 둘러싼 옥룡사 동백나무숲은 백계산(白鷄山) 남쪽 자
락에 자리한다. 옥룡사터 주변과 운암사 북쪽까지 펼쳐진 이 숲은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동백나
무 군락지로 옥룡사를 세운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땅의 기운이 약한 것을 보완하고자 비보풍수(
裨補風水)의 일환으로 동백을 심어 숲을 조성했다고 전한다.
허나 도선대사 시절만큼 오래된 동백나무가 하나도 남아있지를 않아 그가 과연 조성했는지는 의
문이다. 하지만 이곳을 메운 동백은 100년에서 수백 년 이상 묵은 것들로 초창기 동백들이 계속
후손을 뿌린 것으로 보이며, 계속해서 씨를 주변에 내려 보내 7,000여 그루의 나무가 15만㎡의
장대한 숲을 이루었다. 나무의 높이는 5~6m, 줄기는 20~40cm에 이른다.
남부지방 사찰 동백나무숲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 '광양 옥룡사 동백나무숲'이란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489호
의 지위를 얻었으며, 산림청에서 정한 제7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함께
나누고픈 1,000년의 숲'으로 선정되어 아름다운 공존상(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우리나라 동백숲의 성지(聖地)로 동백이 전성을 누리는 3~4월에는 아름다움이 절정을 이루어 속
인들의 눈과 마음을 완전히 앗아가 돌려줄 생각을 않는다. 제아무리 어여쁜 미녀라 한들 순홍의
동백 앞에서는 두 다리 달린 동물에 불과할 것이다.


▲  옥룡사터 샘터

동백나무 숲을 지나면 옥룡사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절터 밑에는 약수터가 있어 이곳을 찾은
속인들의 갈증을 해소시켜준다. 백계산이 베푼 약수로 네모난 석조(石槽)에는 언제나 물이 넘쳐
흐르는데, 가뭄 때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이 샘터는 옛 옥룡사의 샘터로 근래에 정비되었으며, 옛날 광양고을의 사또가 즐겨 마셨다고 전
한다. 그만큼 물맛이 좋다는 뜻인데, 동백의 향기나 기름이 첨가되서 그런 것일까? 허나 마셔보
니 딱히 다른 맛은 없어 보이며, 옛날에는 약수에서 숯가루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  연꽃들의 와신상담(臥薪嘗膽)의 현장 - 옥룡사터 연못
동백의 향연이 끝나면 연꽃이 그 자리를 대신해 9월까지 화려한 연(蓮)의 향연을 펼친다.
그 이후에는 늦가을의 향연이 펼쳐지고, 그것이 끝나면 바로 동백의 시대가 열린다.
옥룡사터는 1년 내내 대자연이 베푸는 향연(饗宴)의 장인 것이다.


♠  도선국사가 창건하여 머물던 유서 깊은 고찰, 지금은 동백나무 속에
터만 남아 옛날의 영화를 아련히 들려주는 백계산 옥룡사(玉龍寺)
- 사적 407호

광양의 듬직한 진산(鎭山)인 백운산(1228m), 그의 남쪽을 이루고 있는 백계산(505m) 서남쪽 자
락에 동백숲에 감싸인 옥룡사터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옥룡사는 864년에 도선국사(827~898)
가 창건한 것으로 그가 세운 것이 100% 확실한 천하에 몇 안되는 절로 의미가 대단한 곳이다.

그는 동리산 태안사(泰安寺, ☞ 관련글 보러가기)를 찾아가 혜철대사(惠徹大師)에게 선종(禪宗)
을 배웠고, 운봉산(雲峯山)과 태백산(太白山)에 들어가 불도를 닦다가 백계산에 들어오게 되었
다. 이곳에 오니 풍경이 그야말로 그윽한지라 '지네가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형국이요,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극찬하며 여기서 평생 머물기로 작정하고 864년에 옥룡사를 짓고 정
착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옥룡자(玉龍子)라 칭하며 절 이름도 옥룡사라 했는데, 여기서 34년을
머물다가 898년 71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그가 열반에 들자 신라 효공왕(孝恭王)은 요공선사(了空禪師)란 시호를 내렸고, 고려 태조(太祖
) 왕건의 스승이었던 인연 탓에 숙종(肅宗, 재위 1095~1105)은 대선사(大禪師)에 왕사(王師)의
호를 추가했다. 그리고 인종(仁宗, 재위 1122~1146)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追封)했으며,
의종(毅宗, 재위 1146~1170)은 그의 비석까지 세웠다.

도선이 이곳에 들어왔을 때 절터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그 안에 9마리(또는 2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 절을 세우고자 하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용 8마리는 <2
마리 전설에서는 황룡(黃龍)이 응해줌> 별말없이 응하려고 했으나 백룡(白龍)이 크게 반발하며
대들자 열받은 도선이 활을 쏘아 그의 왼쪽 눈을 맞추니 (또는 지팡이로 두들겨 팼다고 함) 백
룡은 인근 구룡소(九龍沼)로 도망쳤다. (다른 전설로는 용 9마리가 이곳에 머물며 인근 백성들
을 괴롭히자 도선이 그들을 몰아냈다고 함)
이들 전설을 통해 옥룡사 자리에는 토착신앙이나 다른 종교가 들어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걸
도선이 들어와 그들과 일종의 싸움을 벌여 그 자리를 차지하거나 그들을 설득하여 불교의 일원
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백룡으로 상징되는 존재가 비협조로 일관하자 일종의 폭력으로 그를 강제
로 추방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걸 적당히 전설로 다듬어서 창건설화로 삼은 것이다.

용을 몰아낸 도선은 연못을 메우고자 속세에 안질(眼疾)을 널리 퍼뜨렸다. 그리고 연못에 숯 한
덩이를 넣고 그 물로 눈을 씻으면 낫는다는 이야기를 퍼뜨리자 사람들이 몰려와 숯을 넣고 눈을
씻으면서 금세 연못이 메워졌다고 하며, 바로 그 자리에 옥룡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당시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던 신라 후기 상황을 이용해 창건 시주를 하면 복을 받는다
는 식으로 말을 퍼뜨려 얻은 재원으로 창건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숯을 넣어 눈을 씻는다
는 것은 시주금이나 집을 지을 때 땅 속에 묻는 숯을 제공하면 도선이 법문을 주거나, 예불 관
련 의식을 제공하거나, 절을 하고 소망을 빌었다는 뜻으로 보면 될 듯 싶다. 참고로 예전 옥룡
사 샘터에서 숯가루가 종종 섞여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옥룡사를 세운 도선은 차밭을 일구어 차(茶)를 참선 수행에 사용토록 했고, 절터의 기운
이 약한 것을 채워주고자 동백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또한 그가 이곳에 머물며 명
성을 떨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제자 되기를 청했으며, 이때 '옥룡사파(玉龍寺派)'란 지파(
支派)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사람들이 얼마나 몰려왔는지 그들을 수용하고자 동백림 동쪽에 별
도로 운암사를 세웠다고 한다.

898년 도선이 입적하자 부도와 탑비를 만들어 모셨는데, 그의 제자인 경보대사(慶甫大師, 동진
대사)가 도선의 법맥(法脈)을 이어 옥룡사를 지켰고 그 또한 이곳에 뼈를 묻었다.
도선은 죽음에 임할 때 '백(白)씨 성을 가진 애꾸눈 중을 들여서는 안된다' 유언을 남겼다고 한
다. 19세기까지 그런데로 법등(法燈)을 유지하던 옥룡사는 1878년에 화재를 만나 완전히 망하고
말았는데, 이는 그 당시 백암(白庵)이란 애꾸눈 승려가 들어와 그리 되었다고 한다.

절이 망할 때 용케도 살아남았던 도선국사와 경보대사의 부도와 비석도 1920년을 전후하여 장대
한 세월의 태클과 무지한 이들의 테러로 모두 파괴되어 넘어졌으며, 비석의 내용마저 크게 훼손
되어 내용을 알기가 어려워졌다. (조선금석총람에 다행히 비문의 내용이 있음)

이후 순천대 박물관에서 절터 일대를 조사하면서 도선과 경보대사의 부도 자리와 비석 자리, 건
물터, 석탑의 부재(部材), 깨진 비석 조각 90여 점을 발견했으며, 도선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과
그 유골을 안장한 것으로 보이는 석관(石棺)이 발견되어 신라 후기 고승(高僧)의 장례 풍습을
알게 해주었다.
발굴을 마치고 절터에 풀을 입혀 산듯하게 정비했으며, 약수터 동쪽에 문화유산해설사가 머무는
안내소를 만들어 필요할 때는 그의 해설을 들을 수 있다. 현재 절터에는 건물터와 석탑의 부재
등이 남아있고, 운암사로 넘어가는 길목에 근래에 복원된 도선국사와 경보대사의 부도/탑비가
있다. 또한 그 남쪽에는 운암사가 있어 옥룡사터를 지키고 있다.

절은 없고, 전설과 역사, 황량한 절터만 남아 속인들의 상상을 무한대로 살찌우는 옥룡사터, 동
백의 그윽한 향기가 절터의 허전함을 보듬어주며, 내가 가본 수많은 절터 가운데서도 꽃밭에 둘
러싸인 천하 제일의 동백꽃 명소이자 행복한 자리가 아닐까 싶다.

※ 옥룡사터, 옥룡사 동백나무숲 찾아가기 (2015년 4월 기준)
① 광양까지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광양행 고속버스가 1일 7~8회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광양행 고속버스가 60~9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사상)에서 광양행 직행버스가 40~9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부천, 수원, 성남, 안산에서 광양행 직행버스 이용
* 대전(복합), 대구(서부), 광주, 진주, 마산, 여수에서 광양행 직행버스 이용
* 부전역, 창원역, 마산역, 진주역, 광주송정역에서 경전선 열차를 타고 광양역 하차, 운행횟수
  가 별로 없으며(편도 1일 4회 이내) 역에서 광양터미널까지 버스나 택시로 나와야 된다.
* 순천시내(삼산동, 순천대, 순천터미널, 순천역)에서 77, 777번 시내버스를 타고 광양터미널
  종점 하차
② 현지 교통
* 광양터미널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21번 시내버스를 타고 옥룡사 입구 하차 (1일 5회 운행) 옥
  룡사터까지 도보 15분 / 21-2, 21-3번 버스를 타고 추동 하차 (1일 13회 운행), 추동에서 옥
  룡사터까지 도보 25분
③ 승용차 (옥룡사터와 운암사에 주차장 있음)
* 남해고속도로 → 광양나들목을 나와서 광양읍내로 우회전 → 우시장4거리에서 우회전 → 옥룡
  입구에서 우회전 → 옥룡면사무소 → 추동에서 직진 → 옥룡사터 또는 운암사

* 도선국사 천년숲길(둘레길)은 옥룡사터 주차장에서 옥룡사터를 거쳐 백계산 정상과 금목재를
  지나 백운산자연휴양림에 이르는 약 7km의 산길이다. (백계산 정상은 둘레길 범위 아님)
* 옥룡사터 소재지 -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304-1 (백계1길 71 ☎ 061-762-3578)

▲  복원된 도선국사, 경보대사 탑/탑비

▲  언덕 너머로 보이는 운암사 약사여래불


♠  전설의 옥룡사터 둘러보기

▲  잡초에 묻힌 옥룡사터 앞부분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옥룡사터는 제법 넓은 규모이다. 찬란했던 절이 화마(火魔)의 좋은 먹
이가 되어 끔찍하게 유린당했던 1878년의 대혼돈을 간직한 절터에는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는 주춧돌과 석축이 고개를 내밀며 세월을 원망한다. 봄의 기운을 받아
성장한 잡초들은 옥룡사의 그 아픔을 덮고자 절터를 푸르게 수놓으며 그 허전함을 약간이나마
달래준다.

절터는 남쪽이 낮고 북쪽이 높은 형태로 남쪽에는 천왕문이나 중요성이 낮은 건물이 포진해 있
었을 것이고, 중간 부분에 법당(法堂)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쪽에 삼성각(三聖閣)이나
도선국사와 경보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일종의 영각(影閣)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터
만 앙상하게 남았을 뿐, 건물터의 구체적인 정체는 밝혀지지 못했다. 그저 상상 속에서 '이곳은
이 런 건물이 있었고, 이렇게 생겼겠구나?' 스케치 할 수 밖에는 없다. 그 가운데 정답은 있겠
지만 어느 누구도 100% 정답은 알 수 없다. 그저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라~~!


▲  절터 뒤쪽 석축 - 절터와 동백숲의 경계 역할을 하고 있다.

▲  절터 한복판에 있는 이것은 무엇인고?

예전 시골에서 김치나 숙성을 요하는 음식을 담던 공간과 비슷하게 생겼다. 허나 사람들이 떠나
간 절터에서 그런 공간은 전혀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위한 공간일까? 옛날
절터 한가운데에 있었다는 샘터의 흔적이 아닐까 여겨진다. (절터 남쪽에 있는 샘터의 조상으로
여겨짐) 이럴줄 알았으면 문화유산 해설사에게 물어보는 건데, 그만 깜박했네..


▲  붉은 주춧돌이 3열 종대를 이룬 건물터 - 무슨 건물이 있었을까?

▲  붉은 주춧돌의 위엄 - 주춧돌의 피부가 유난히 붉다. 저들은
1878년 이곳에서 일어난 기억 밖으로 꺼내기 조차 껄끄러운
대재앙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  유난히 넓은 건물터 - 법당과 그 부속 건물이 있던 자리는 아닐까?

▲  절터에서 가장 높은 부분 - 무슨 건물이 있었을까?
나한테만 살짝 이야기해주면 안될까?

▲  절터에 버려진 기와 조각들 - 기와조각을 맞추며 잃어버린
옥룡사의 모습 맞추기 퍼즐을 해보고 싶다.

▲  가장 높은 곳에서 바라본 옥룡사터 전경
옥룡사터가 동백숲에 단단히 묻혀 있어 속세에서는 절터의 속살이 보이지 않는다.

▲  절터에서 수습된 석탑 부재와 여러 석재(石材)들

옛 석탑의 일부를 이루던 돌(지붕돌과 탑신 부분)과 건물 주춧돌 등으로 쓰인 석재를 이곳에 수
습했다. 절이 그리 곱지 않게 파괴되었음을 알리는 증인들로 절이 파괴되고 절터에 대한 도굴과
속인들의 석재 절도 행위, 장대한 세월과 자연의 괴롭힘으로 형편없이 뜯겨져 초췌한 모습이 되
고 말았다. 보금자리를 잃은 저들을 도와줄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세상의 버림을 받은 그들은 이곳에 모여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왼쪽에 세워진 돌기둥은 석
련(石蓮)이나 그릇 형태의 석물을 받치던 기둥으로 여겨지며, 조금의 힘만 가해도 흔들거린다.
그러니 괜히 때려 눕히지 말기 바란다.


▲  가까이서 본 석탑의 부재들
그 모습이 마치 파괴된 지 수백 년이 넘은 탑 같다.

▲  절터에서 수습된 기와조각들이 한데 모여 그들만의 조그만 세상을 이루었다.

▲  절터 동쪽 부분

▲  동쪽 부분에서 바라본 절터 전경
속세를 바라보며 자리했을 옥룡사의 모습은 자못 웅장했을 것이다.
지금은 대머리처럼 빈 자리만 요란하니 그 실감이 적을 뿐이다.

▲  절터 동쪽에 있는 토굴

절터 동쪽의 동백림을 보면 동백림 밑에 조그만 토굴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암석을 깨고 뚫은
토굴은 완전 몸을 반으로 접고 들어가야 될 정도로 입구가 좁다. 내가 들어가다가는 굴이 무너
질 것 같아서 몸도 사릴 겸 바깥에서 내부를 살폈으나, 내부가 어두워 보이는 건 거의 없다. 그
런데 절터에 왠 생뚱 맞게 굴이 있는 것일까? 설마 북한이나 왜열도 애들이 여기까지 굴을 파고
내려온 것은 아니겠지?
언제 생긴 굴인지는 모르겠으나 옥룡사 시절부터 있었다면 식량을 보관하던 창고나 독한 수행을
위한 공간이 아닐까 싶다. 몇몇 고승들은 절 부근에 굴을 파고 들어가 수행하면서 1주 정도에 1
번씩 음식을 들이는 것 외에는 바깥에서 굴을 막게 했다. 오로지 수행에 전념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수행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판사인 효봉(曉峰, 1888~1966)이 있다.


♠  동백나무숲 산책

▲  옥룡사 동백숲 서쪽 산책로

옥룡사터에서 동백숲 산책로는 2갈래가 있다. 연못을 거쳐 동백숲 서쪽으로 가는 산책로는 나무
로 신작로를 내어 경사도 완만하다. 허나 5분 정도 가면 철조망 앞에서 길은 끊어지고 만다. 마
치 휴전선 철조망처럼 말이다. 철조망 너머는 어느 개인의 땅으로 그 구역에는 동백나무는 없고
그냥 숲과 초원만 있다. 예전에는 동백숲까지도 개인 소유였으나 이제는 광양시청에서 관리하며,
관람객들은 여기서 길을 180도 돌아 다시 옥룡사터로 나와야 된다. 굳이 철조망을 넘어봐야 볼
것도 없으니 괜히 무리하지 않도록 한다.


▲  순홍의 아름다움으로 천하를 매혹시킨 동백꽃의 위엄

▲  동백숲 동쪽 산책로 고개

옥룡사터에서 오르막으로 된 동쪽 산책로(운암사 방면)를 오르면 바로 고개 중턱이다. 길은 여
기서 2갈래로 갈리는데, 동쪽 내리막으로 가면 운암사이며, 왼쪽으로 가면 도선국사 천년숲길로
백계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정상까지는 2.7km, 금목재는 3.7km이다. 나는 절터와 동백숲을 보러
온 터라 등산은 하지 않았다.

고개 갈림길에는 동백나무 밑에 쉼터를 만들어 잠시 두 다리를 쉬어가게 배려했다. 쉼터에는 고
개가 꺾여 떨어진 동백꽃이 정신없이 흩어져 있어 한폭의 멋드러진 수채화를 자아낸다.


▲  고개에서 바라본 천하 - 삼삼한 동백숲 너머로 하늘과 천하가 보인다.

▲  복원된 도선국사탑/탑비와 경보대사 탑/탑비

고개에서 동백숲을 가로질러 운암사 방면으로 내려가면 부도 2기와 비석 2기를 만나게 된다. 처
음에는 근래에 지어진 운암사 관련 승려의 탑/탑비로 생각했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그게 아니었
다. 바로 옥룡사를 세우고 꾸리던 도선국사와 경보대사의 복원된 탑/탑비였다.

도선국사와 경보대사의 탑/탑비는 1920년대에 처참하게 파괴되어 쓰러졌으며, 탑비의 비문(碑文)
도 훼손되었다. 다행히 1919년 왜정(倭政)에서 발간한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비문의 내
용이 있어 도선과 경보의 인생을 조금이나마 알려준다. 이후 순천대에서 절터를 조사할 때 탑과
탑비의 조각을 수습했고, 도선/경보의 유골을 안장한 것으로 보이는 석관이 발견되어 화재가 되
기도 했다.
지금의 탑과 탑비는 옥룡사터를 정비하면서 신라 후기와 고려 초기의 부도/비석 양식에 맞게 복
원된 것이라 원래 모습과는 좀 다를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나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  선각대사 도선 징성혜등탑(澄聖慧燈塔)

▲  동진대사(洞眞大師) 경보 보운탑(寶雲塔)

도선국사야 워낙 유명한 인물이니 따로 설명은 필요없을 듯 싶다. 그가 898년에 세상을 뜨자 효
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와 함께 징성혜등(澄聖慧燈)이란 탑 이름을 내렸으며, 탑비
는 고려 의종 때 세워졌다.

경보대사(869~948)는 도선과 고향이 같은 전남 영암(靈岩)에서 알찬(閼粲) 김익량(金益良)의 아
들로 태어났다. 19세에 팔공산 부인사(符仁寺)로 출가했으며, 옥룡사에 들어와 도선의 1등 제자
가 되어 선율(禪律)을 익혔다. 화엄사(華嚴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정식 승려가 되었고
보령 성주사(聖住寺)와 강릉 굴산사(掘山寺)에서 선종(禪宗)을 배웠다.

892년 당나라로 건너가 이름 있는 절을 돌아다니다가 무주<撫州, 강서성(江西省)> 소산에서 조
동종(曹洞宗)의 광인(匡仁)을 만났다. 광인은 '가자미 바다에서 온 용'이라고 하면서 선법(禪法
)을 전했다. 이후 광인의 소개로 강서 지방의 노선(老善)을 찾아갔는데, 그가 '흰구름에 가리어
길이 막혔네' 운을 띄웠다. 그러자 경보가 '본디 푸른 하늘 길에 흰구름이 어찌 있나?' 답을 하
니 노선이 감동해 곁에 있게 해주었다.

거기서 얼마 동안 있다가 노선의 만류를 뿌리치고 당나라 전국을 돌아다녔으며, 921년 귀국하여
임피군(臨陂郡, 전북 군산)에 발을 내리니 후백제(後百濟)의 군주 견훤(甄萱)이 남복선원(南福
禪院)에 머물게 하면서 스승으로 예우했다. 이후 다시 옥룡사에 들어왔다가 936년 견훤이 숨을
거두자 태조 왕건(王建)이 왕사(王師)로 삼았다.

943년 태조가 붕어(崩御)하자 혜종(惠宗)과 정종(定宗)의 왕사가 되었으며, 정종의 명으로 개경
(開京)에 머물다가 옥룡사로 다시 내려와 상원(上院)에 머물렀다. 948년 열반에 임하면서 제자
들에게 '옷차림을 바로 하고, 음식을 평등히 하고, 선열(禪悅)로써 맛을 삼아라'는 임종게(臨終
偈)를 내리며, '탑과 비석을 세우지 말아라' 당부하고 눈을 감으니 그때 나이 79세 법랍(法臘)
62세였다.

그가 입적하자 정종은 옥룡선화상(玉龍禪和尙)이라 부르고, 동진대사란 시호와 보운(寶雲)이란
탑 이름을 내렸다. 비석은 958년 김정언(金廷彦)이 짓고, 비문은 제자인 현가(玄可)가 썼으며,
계묵(繼默)이 새겨서 옥룡사에 세웠다.

나말여초 시절에 크게 활약한 그들의 탑/비가 잘 살아있었다면 정말 국보급에 대접을 받았을 것
이고, 우리나라 미술사/역사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그래도
그 유명한 도선국사가 고이 잠든 승탑(僧塔)을 보니 유명인사를 만난 듯 감개가 무량하다.


▲  운암사에서 도선/경보대사 탑으로 인도하는 동백숲길


♠  동백나무숲 동쪽 끝에 자리한 옥룡사의 이웃 사찰
백계산 운암사(雲岩寺)

▲  1칸 크기의 단촐한 운암사 산신각(山神閣)

도선/경보대사 탑에서 동쪽으로 3분 정도 내려가면 새집 냄새가 물씬 진동하는 운암사가 나온다.
옥룡사 동백나무숲은 운암사에서 더 이상 가지를 뻗지 못하고 길을 멈추는데, 여기가 바로 동백
숲의 동남쪽 한계선이다. 

운암사는 겉으로 보면 아주 최근에 지어진 역사도 거의 없는 절집으로 보인다. 나도 그렇게 생
각을 했으니까. 게다가 절을 알리는 안내문도 없으니 그런 생각을 더욱 키우게 한다. 하지만 겉
보기와는 달리 옥룡사와 관련이 있는 오래된 절로 도선국사가 옥룡사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수용
하고자 865년(옥룡사는 864년에 창건)에 창건했다고 한다. 옥룡사와 동백숲을 사이에 두고 이웃
한 절로 도선은 두 절에 머물며 제자를 양성했으며, 그 이후 쭉 옥룡사와 생사고락을 같이 했을
것이다. (옥룡사의 부속 사찰로 생각됨)

17세기까지 법등을 이어왔으나 차차 기울다가 18세기(또는 1878년)에 망하고 말았다. 망한 이유
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리고 100여 년 뒤에 옥룡사마저 망하니, 도선이 세운 두 절은
100년 간격(또는 비슷한 시기)으로 사라져버렸다.

옥룡사와 달리 터도 희미하게 남아있던 것을 1969년에 승려 박득수가 이 자리를 매입해 절을 짓
고 운암사라 했다. 한때 옥룡사 재건을 위해 절터에 조그만 건물도 들어섰으나 운암사의 탄생으
로 말미암아 그곳에 모두 통합되었다. 어차피 동백림에 있는 절이고 역사도 거의 같으니 옥룡사
까지 무리하면서 지을 필요는 없다. 운암사가 옛 운암사와 옥룡사의 뒤를 이어 지금의 자리를
지키면 그만인 것이다.

다시 태어난 운암사는 옥룡사와 동백숲 덕분인지 짧은 시간에 벌써 많은 건물을 지어올렸다. 특
히 2007년에 완성된 황동(黃銅) 약사여래입상은 우리나라 최대 규모로 무려 40m에 이르며, 속리
산 법주사(法住寺)의 청동미륵불보다 13m가 높다. 허나 아래 10m는 약사전(藥師殿)으로 쓰이고
있어 실질적인 불상 높이는 30m이다. 그래도 법주사보다는 키다리이다. 황동이 자그만치 75톤이
소요되었다고 하며, 도선국사의 도선비기(道詵秘記)에 따라 만들었다고 한다. (도선비기의 내용
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경내에는 대웅전과 조사전, 약사전, 삼성각, 명부전, 요사 등 8~9동의 건물이 있으며, 고색(古
色)의 내음은 전혀 없다. 소장 문화유산은 하나도 없으며, 건물도 모두 새것이라 새집 냄새가
진동한다. 그리고 하나같이 규모가 장대하고 돈을 꽤나 들인 듯, 장엄하고 화려하다.


▲  산신각 산신탱 - 산신(山神)과 호랑이, 동자 2명 등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인다.

▲  조사전(祖師殿) - 운암사를 세운
도선국사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있다.

▲  산신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이 봉안된
삼성각

▲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된
명부전(冥府殿)

▲  똥배와 축쳐진 귀가 매력인
포대화상(布袋和尙)


▲  운암사의 법당인 대웅전(大雄殿)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석가3존불과 문수,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  3불 2보살이 봉안된 대웅전 불단(佛壇)

▲  정면에서 본 약사전과 약사여래불

▲  약사여래불 주변

운암사의 명물인 황동 약사여래불은 2006년 여름에 짓기 시작하여 2007년 5월에 완성을 보았다.
이 땅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무려 30m의 장대한 키를 자랑하며, 불상 밑에는 약사전이 있는데,
그 건물 높이가 10m로 일종의 대좌(臺座) 역할을 한다. 그 높이까지 합치면 40m에 이르는 거구
이다.

불상이 큰 것까지는 좋은데, 너무 높이에 연연하다보니 약사불의 표정이 영 어색하다. 보는 이
의 눈에 따라 얼마든 달리 보일 수 있겠으나 그 흔한 미소도 없고, 표정도 그리 밝아보이진 않
는다. 게다가 지나치게 크다보니 그리 정감도 가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느라 애궂은 고개만 아
프다. 그냥 외형만 중시하는 그런 분위기인 것이다. 물론 한참의 시간이 지나면 21세기 초반 불
상 양식을 잘보여준다며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누릴 것이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그의 왼손에는 그의 필수품인 약합이 들려져 있고, 오른손은 시무외인 비슷
한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  절 남쪽 언덕 너머로 본 약사여래불
마치 언덕 위에 서 있는 듯 시각을
혼란시킨다.

▲  코끼리를 탄 관음보살상
약사전 앞에 2기의 코끼리를 탄 관음보살상이
있다. 이들도 장대한 규모인건 마찬가지~~
불교가 인도에서 태어난 존재이다 보니 자연히
코끼리가 많이 등장한다. (부처의 법을 상징)


▲  약사전(藥師殿)에 봉안된 약사여래불과 후불탱화

▲  운암사 연못

경내 남쪽이자 약사전 동쪽에는 동그란 모습의 큰 연못이 기를 질리게 한다. 처음 그를 봤을 때
는 무슨 수영장인 줄 알았다. 절에 왠 수영장 같은 것이 있나 싶었는데, 물 속을 살펴보니 물이
잔뜩 오른 물고기가 꼬리를 흔들며 순찰하는 모습을 보고 비로소 연못인 줄 알았다.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 아닌 완전 새로운 형태의 연못으로 그 동쪽에 기도를 하고 물고
기를 방생(放生)하는 공간이 있으며, 연못 주위로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자 철난간을 빙 둘러 삼
엄한 분위기까지 자아낸다. 연못을 짓더라도 전통 양식에 맞춰 정겹게 만들었으면 좋으련만 지
나치게 옥의 티를 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  연못을 순찰하는 물고기의 위엄
다양한 피부의 잉어들이 회, 매운탕 생각을 간절하게 만든다.
오늘 저녁은 정말 매운탕 1그릇 먹어야겠다.

▲  옥룡사터, 운암사를 뒤로 하며~~

운암사를 둘러보고 약사전에 들어가 3배를 올리며 일종의 신고식을 마친 다음, 절을 나섰다. 이
제 내가 있어야 될 아비규환의 속세(俗世)로 돌아가야 될 시간이 온 것이다. 옥룡사터와 동백나
무 숲, 거기에 덤으로 운암사까지 둘러보고 나오니 어언 3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제자리로 돌아
가야 될 시간이 이르면 왜 이렇게 한숨이 나오고 다리에 힘이 빠지는지 모르겠다.
이제 4월이건만 여름의 제국이 벌써 도래했는지 날씨가 초여름 수준이다. 그래서 동백숲 적당한
곳에 자리 피고 한숨 자고 갈려고 했으나 그런 여유까지는 부리지 못했다.

추동으로 나와 버스 시간을 알아보니 20분 뒤에 있다고 한다. 마땅히 쉴 공간도 없어서 버스정
류장 옆인 보건지소 부근에 머물며 차를 기다리는데, 무려 15분씩이나 늦게 온다. 장날 때문에
늦은 것이라고 한다. 그 버스를 타고 광양읍내로 나와 순대국으로 점심을 먹고 광양터미널에서
순천시내버스 77번을 타고 순천시내로 이동했다.

순천(順天)도 정말 오랜만에 오는 곳인데, 어디로 갈까 궁리를 하다가 날씨가 시간 개념도 없이
덥다보니 지치기도 하고, 전날 잠을 적게 자서 피곤도 하고, 시간도 애매하고, 거기에 오늘 너
무 많은 곳을 둘러보면 탈이 날 것 같아서 내키지는 않지만 일찍 철수하기로 했다. 그래서 순천
역으로 이동하여 용산(龍山)행 무궁화호를 타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광양 동백꽃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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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억새의 성지, 부산 승학산 억새 나들이

 


' 부산 승학산(乘鶴山) 억새 나들이 '

▲  억새밭 너머로 보이는 승학산 정상

 


늦가을이 한참 절정을 누리던 10월 끝 주말에 오랜만에 부산(釜山)을 찾았다. 경북 안동과 의
성(義城) 지역을 답사하고 오후 늦게 부산으로 내려가 광안동(廣安洞) 선배 집에 여장을 풀고
매년 10월 말에 광안리해수욕장과 광안대교에서 열리는 부산불꽃축제를 구경했다.
광안리 해변으로 나가서 구경하려고 했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거
친 물결을 뚫고 나가기 힘들 것 같아서 그냥 집(빌라 5층)에서 구경을 했지. 집에서 해변까지
는 1km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라 주변 빌라들이 시야를 좀 방해해서 그렇지 보일 것은 거의 다
보인다.
그렇게 불꽃축제를 구경하고 곡차(穀茶) 1잔을 겯드리며 달이 기울도록 회포를 풀다가 다음날
10시 스르륵 잠이 깨었다. 12시에 간단히 점심을 먹고 어디를 갈까 궁리하다가 철이 철인만큼
억새의 향연을 보고자 억새의 주요 성지(聖地)인 승학산으로 길을 향했다.

광안역에서 부산좌석버스 1001번(청강리↔하단,동아대)을 타고 부산 도심을 가로질러 하단 동
아대입구에서 발을 내린다. 시내에서 승학산으로 오르는 길이 여럿 있지만 제일 쉬운 길은 구
덕꽃마을에서 오르는 것이고, 가장 가파른 길은 동아대에서 오르는 것이다. 허나 꽃마을 코스
는 거리가 긴 반면, 동아대 코스는 가파른 만큼 코스가 짧고 굵직하다.

동아대(東亞大)는 승학산 서쪽 자락에 터를 닦은 학교라 경사가 좀 급하다. 학교 정문에서 가
장 위쪽인 한림생활관까지는 거의 해발 60~70m 차이가 나면서 벌써부터 숨이 차려고 한다. 시
내와 살을 맞대고 있는 학교의 아랫부분과 승학산 숲과 이웃한 윗부분과는 정말 공기도, 온도
도 확연히 틀린 것 같다. 만약 전공/교양수업이 윗부분에서 주로 이루어진다면 학생들은 정말
고역이겠지. 허나 다행히도 하단역에서 교내 공과대학까지 사하구 마을버스 10번이 10분 내외
간격으로 다녀주어 학생들에게 그야말로 한줄기 빛이 되어 준다.

주말이라 썰렁한 동아대 경내를 가로질러 한림생활관에 이르니 학군단 건물 뒤로 산길이 보인
다. 여기는 대략 해발 170m고지로 그 길로 접어들면서 비로소 승학산의 품으로 들어서게 되며,
동아대와 사하구 일대, 남해바다가 훤히 두 눈에 박힌다.


♠  승학산 등산 (동아대에서 정상까지)
`
▲  승학산 등산로 (동아대 방면)

동아대를 벗어나 10분 정도 오르니 능선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승학산 능선의
가장 서쪽 봉우리(해발 210m)가 나오고, 동쪽으로 가면 승학산이다. 갈림길 주변에는 어느 산악
회에서 행사를 요란하게 벌리고 있어 꽤나 번잡했다.

승학산으로 가는 산길은 동아대 만큼은 아니지만 가파르기는 마찬가지다. 힘들긴 하지만 등산이
다 그런거 아니겠는가? <그래도 북한산(삼각산), 관악산, 금정산보다는 애교 수준임> 바람에 흔
들리는 억새를 꿈꾸며, 노릇노릇 익어가는 단풍을 구경하며, 산 아래 펼쳐진 천하를 관망하며,
그렇게 산에 임하면 금세 승학산의 서쪽 봉우리에 이른다. 여기는 약 400m 고지이다.


▲  승학산 서쪽 봉우리에서 굽어본 천하 (1)
엄궁동과 사상(沙上)공단, 낙동강

▲  승학산 서쪽 봉우리에서 굽어본 천하 (2)
사하구(하단, 괴정, 감천, 신평)와 을숙도, 남해바다가 보인다.

▲  승학산 서쪽 봉우리에서 굽어본 천하 (3)
- 낙동강 위에 길게 누운 을숙도(乙淑島)
섬 가운데로 낙동강하구둑이 무심히 옥의 티를 내며 지나간다.

▲  승학산 서쪽 봉우리에서 굽어본 천하 (4)
사하구(괴정동, 감천동) 지역

▲  세모처럼 솟은 저 봉우리가 승학산 정상이다.
정상 서쪽 봉우리에서 정상까지는 넉넉히 20분 정도 잡으면 된다.

▲  정상으로 오르면서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
정상 서쪽 봉우리가 보인다.

▲  승학산 정상(496m) 표석

동아대 입구를 출발하여 쉬엄쉬엄 오른 끝에 드디어 승학산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다른 산
과 마찬가지로 산의 이름과 해발이 쓰인 표석이 세워져 있는데, 실제 정상은 표석에서 동쪽으로
10m 정도 떨어진 곳이다.

승학산은 부산 본토 서남쪽에 솟아난 산으로 해발 496m이다. 산의 이름은 고려 후기에 무학대사
(無學大師)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산세를 살폈는데, 이곳의 산세가 준엄하고 기세가 대단해 마치
학이 나는 듯하다 하여 학을 탄다는 뜻의 승학산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산세가 대단한 건 사실이다.

이 산은 부산에서 억새 명소로 매우 유명하다. 정상 동쪽 제석골에 수만 평에 달하는 억새밭(억
새군락)이 장엄하게 깔려 있는데, 가을에 아주 장관을 이루며, 강원도 정선(旌善) 민둥산의 억
새밭과 비교하여 전혀 손색이 없다. 또한 억새가 바람에 따라 흔들릴 때 그 특유의 바람 스치는
소리는 속세에 오염된 청각을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다.

부산 도심에는 대도시임에도 승학산이나 구덕산처럼 400~500m급 산이 즐비해 산을 타다보면 정
말 강원도나 내륙 산간 지역으로 순간이동을 한 기분이다. 게다가 이렇게 너른 억새밭까지 있으
니 이는 하늘이 바다와 더불어 부산에 내린 크나큰 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승학산의 이름 3자가 부산에서만 알 정도로 인지도가 낮다는 것이다.

승학산은 동쪽으로 구덕산(九德山, 565m), 시약산(時藥山, 523m)과 이어져 있으며, 등산은 동아
대학교와 구덕꽃마을, 사하구청 북쪽 제석골(제석골 산림공원)에서 올라가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그 외에 동네 주민들이 살짝 이용하는 소소한 등산로가 여럿 있으며, 동아대에서 정상을 찍고
구덕꽃마을까지는 2시간 정도 걸린다. 거기서 욕심을 더 내서 엄광산과 구봉산을 거쳐 대청공원
(민주공원)이나 수정산, 동구까지 산을 탈 수 있다.

※ 승학산 찾아가기 (2014년 11월 기준)
① 동아대 : 부산1호선 하단역 9번 출구에서 사
하구마을버스 10번을 타고 동아대 공대2호관에
서 하차, 한림생활관을 지나면 바로 승학산의
품이다. 정상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림
② 당리동(제석골) : 부산1호선 당리역(사하구
청) 3번 출구에서 사하구마을버스 2-1번을 타고
동원베네스트2차아파트 종점에서 하차
③ 구덕꽃마을 : 부산1호선 서대신역 4번 출구
에서 구덕운동장 방면으로 100m 정도 걸으면 마
을버스 정류장이 있다. 거기서 서구마을버스 1
번을 타고 구덕꽃마을 종점 하차. 거기서 서쪽
길로 오르면 구덕산과 승학산으로 이어진다.
* 소재지 -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동, 당리동
/ 사상구 엄궁동
 

◀  사하구청에서 승학산 정상에 심은
새천년미래웅비사하(千年未來雄飛沙下) 표석


▲  승학산 정상에서 바라본 동쪽 능선
저 초원 같이 넓은 곳이 바로 승학산 억새밭(군락)이다.


♠  억새의 성지, 승학산 억새밭

▲  승학산 억새밭을 거닐다

악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10분 정도 가면 이곳의 명물인 억새밭(억새군락)에 이른다. 대장관을
이루며 능선에 드넓게 터를 닦은 억새밭은 멀리서 보면 양이나 말이 풀을 뜯는 초원처럼 보인다.
산바람과 바닷바람이 어우러진 이곳 억새는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내는 바람 스치는
소리가 청각을 제대로 정화시킨다. 겉으로 보면 약해 보이지만 군락을 이룬 억새는 아무리 강한
바람이 불고 비가 와도 강인한 협동심을 발휘하며 그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지키는 강인한 존재
이다. 흔히 억새와 갈대를 햇갈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둘이 생긴 모습은 비슷하다. 허나 갈대는
물가에 자라는 존재이고, 억새는 물과 거리가 먼 곳에 사는 존재이다.

넓은 억새밭 가운데에 전망대를 두어 천하를 굽어볼 수 있게 했는데, 조망(眺望)이 가히 천하(
天下) 일품이다. 억새밭은 억새의 보호를 위해 지정된 길 외에는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니 괜히
들어가서 억새와 사람들의 눈초리를 받지 않도록 한다.


▲  산등성이를 가득 메운 억새밭의 위엄

▲  억새밭 사이에 난 산책로
억새의 격한 환영(?)을 받으며 산책로를 거닌다.

▲  억새밭 너머로 승학산 정상이 보인다 ▼


▲  억새밭 한쪽에 마련된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 돌탑
억새밭을 찾은 속인들이 조그만 소망을 빌며 쌓은 돌이 모이고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  억새밭 너머로 승학산 동쪽 줄기와 구덕산이 보인다.
하늘은 당장이라도 비를 투하할 기세로 일그러진 인상을 보이고 있다.

▲  억새의 즐거운 가을 향연

▲  비탈진 억새밭 너머로 사하구 지역이 바라보인다. (바로 밑이 제석골)

▲  시간 도둑이 따로 없는 억새밭 - 돌아서기 싫은 발길을
억지로 잡아 떼며 억새밭과 작별을 고한다.

▲  구덕산을 가리고 선 승학산 동쪽 봉우리
해발 487m로 구덕산의 서쪽 봉우리이기도 하다.


♠  승학산 마무리

▲  검게 그을려진 구름과 안개 사이로 사상구 지역이 흐릿하게 보인다.

▲  승학산 동쪽 봉우리를 넘다 - 저 너머로 보이는 산은 구덕산

승학산 억새밭을 넘으면 수레가 들어올 수 있는 쉼터가 나오는데 여기서 동쪽으로 가는 길은 2
개이다. 하나는 동쪽 봉우리(구덕산 서쪽 봉우리)를 직접 넘는 것, 다른 하나는 봉우리 허리에
둘러진 길을 가는 것이다. 후자는 길이 포장되어 있고, 큰 오르막이 없어 편하긴 하나, 많이 돌
아가야 된다. 반면 전자는 산을 직접 넘어야 되지만 그 산을 넘으면 바로 구덕산 서쪽으로 이어
진다. 그래서 우리는 우회길 대신 산을 넘는 편을 택했다. 어차피 지금까지 오른 승학산 정상이
나 서쪽 봉우리보다는 완만하며, 비에 젖은 산길을 10분 정도 오르니 봉우리 정상이다.

봉우리를 넘어 동쪽으로 내려가면 구덕산 아래에 이르는데,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구덕꽃마을,
오른쪽 오르막길이 구덕산(九德山, 565m) 정상, 오른쪽 내리막 길이 억새밭으로 가는 허리길이
다. 구덕산 정상은 군사/방송 관련 시설이 자리해 있어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  구덕꽃마을로 내려가는 길

인생은 올라갈 때가 있으면, 반드시 내려갈 때가 있다. 지금까지 승악산 능선을 타며 서쪽 봉우
리와 승학산 정상, 동쪽 봉우리까지 신나게 올랐으니 이제는 슬슬 내려가야 된다. 더 이상 올라
갈 곳도 없다.

내려가는 길은 봉우리 허리길과 구덕꽃마을 방면 길이 있는데, 꽃마을까지는 1차선 크기의 길이
포장되어 있어 통행에 불편은 없다. 구덕산 정상에 자리한 군/방송 시설 때문에 길을 포장한 것
이다.

여기서 꽃마을까지는 대략 2km로 순전히 내리막길이기 때문에 내리막 가속을 덧붙이면 금세 내
려간다. 길 주변에는 울긋불긋 타오른 단풍과 푸른 옷을 걸친 나무들이 앞에서는 환한 모습으로
뒤에서는 장차 다가올 겨울 제국(帝國)을 걱정하며 시름에 잠겨 있다. 이제 올해도 다 갔구나!!
좀 있으면 강제로 1살이 얹혀질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시름 속에 들어가 버린다. 새해가 시
작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연말이 코앞이니 세월이란 참 유수처럼 빠르다는 말이 허언은 아
닌 듯 하다. 고려 후기 문신인 우탁(禹倬)의 탄로가(嘆老歌)처럼 한 손에 막대를 잡고, 다른 한
손에 가시를 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백발은 막대로 막으려고 했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온다는 시가 점점 실감이 난다.

꽃마을로 열심히 내려가고 있으려니 구덕문화공원을 알리는 이정표가 오른쪽에 나온다. 이 공원
에 대한 정보가 나에게는 없던 터라 근래에 만든 공원이겠지 싶어 그냥 직진을 고수했는데, 꽃
마을이 슬슬 모습을 보이면서 강제로 구덕문화공원이 내 앞에 나타난다. 아까 전 이정표는 공원
으로 바로 내려가는 지름길 계단이었던 것이다. 계단으로 가나 포장 길로 가나 어차피 구덕문화
공원은 꼭 거쳐야 된다.


▲  구덕문화공원(九德文化公園) 목석원예관

구덕문화공원은 꽃마을 서쪽, 구덕산 북쪽 자락에 터를 닦은 공원이다. 2004년 11월 교육역사관
과 다목적관 개관을 시작으로 문을 연 이 공원은 2005년 11월 목석원예관을 열었고, 2006년에는
민속생활관과 다목적광장을 만들었다. 특히 2005년 11월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
회의 때는 참가국 우두머리의 부인들이 방문한 곳이기도 하며, 구덕산과 승학산을 후광으로 한
도심 속의 자연/문화공간으로 정감이 가득 일어나는 곳이다.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싱그러운 공간으로 나무가 무성하며, 공원 곳곳에 장독대와 석탑, 석등
, 문인석 등의 석인을 비롯하여 여러 조각물을 배치하는 등, 아기자기하게 꾸며 소소하게 볼거
리를 제공한다. 석물들이 집중 분포하고 있는 공간을 옛돌마당이라 불리는데, 이곳의 석물은 오
래된 것은 없고, 공원을 닦으면서 만든 것들이다. 다만 석등(石燈) 가운데 우리식이 아닌 왜식(
倭式)으로 만든 것이 적지 않아 상당히 눈에 거슬린다.
그리고 전시실(교육역사관, 민속생활관, 목석원예관)과 옛돌마당 외에 편백숲 명상의 길, 솟대
동산, 인공폭포와 놀이마당, 산마루쉼터 등을 갖추고 있다.

공원에 있는 전시관 중 가장 먼저 문을 연 교육역사관은 이 땅의 교육 역사를 다룬 공간으로 디
오라마와 유물 등으로 옛날 교육을 설명하고 있다. 삼국시대와 조선시대 교육내용과 과정, 서예
용품 등을 전시하고 있고, 개화기 이후에 편찬된 교과서와 60~70년대 초등학교 교실 재현, 6.25
시절 천막 학교 등이 재현되어 어린 시절의 향수를 진하게 불러일으킨다. 전시자료는 약 600점
정도 된다.

그 다음 문을 연 목석원예관은 나무와 돌, 꽃을 다룬 공간이다. 괴석류와 돌과 나무로 만든 작
품들, 수목과 지피식물(地被植物) 등이 원예관을 가득 메우고 있으며, 민속생활관은 옛날 생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농기구와 짚풀용품, 주거생활용품, 호패와 민화(民畵, 속화), 초가집
모형 등 유물 4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허나 이들 전시관의 전시물은 다른 데서도 지겹게 볼
수 있는 것들이라 딱히 특별한 것은 없으며, 다만 공원을 이루는 숲이 삼삼하고 산책로도 괜찮
게 깔려져 있어 산책이나 데이트, 산림욕 장소로 아주 적당하다. 게다가 위치도 구덕산과 승학
산 가는 길목에 있어 산을 타고 내려와 잠깐 안겨보는 것도 괜찮다.

※ 구덕문화공원 찾아가기 (2014년 11월 기준)
*
부산1호선 서대신역 4번 출구에서 구덕운동장 방면으로 100m 정도 걸으면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다. 거기서 서구마을버스 1번을 타고 구덕꽃마을 종점 하차. 거기서 서쪽 길(승학산 방면)
  로 오르면 나온다.
* 일반인 차량은 공원까지 들어올 수 없으므로, 꽃동네에 주차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 관람시간 : 9시 ~ 18시 (11~2월에는 17시까지)
* 관람료는 없으며, 3개의 전시실은 매주 월요일 문을 닫아 걸고 쉰다.(단 공원 관람은 가능함)
* 소재지 - 부산광역시 서구 서대신3가 산18-15 (꽃마을로 163번길 73, ☎ 051-240-3521~23)
* 구덕문화공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목석원예관에서 유일하게 사진에 담은 사후천년이란 작품
나무가 죽어 돌로 굳은 화석(化石)이라고 한다.

▲  밋밋하게 솟아난 솟대
솟대 위에 오리는 인간과 하늘을 이어주는 중간 역할을 상징한다.

▲  다양한 석물들이 반기는 구덕문화공원 옛돌마당 산책로
장승(벅수)과 온갖 석인들, 석등, 석탑 등이 주변을 수식한다.

▲  무인의 기개는 온데간데 없는 싱글벙글 무인석(武人石)

▲  웃음을 머금은 문인석(文人石)의 물결

▲  산책로에서 만난 왜식 석등
석등을 만들려면 우리식으로 제대로 만들 일이지 그냥 왜식으로 대충
만들어 공원에 갖다 두었다. (대충 전시행정의 표본)

▲  구덕문화공원 남쪽 산책로

우리는 목석원예관만 둘러보고 내려왔는데, 글쎄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가 내리는 것이다. 처음
에는 적게 내리더만 시간이 가면서 정비례로 빗방울도 주먹만큼 굵어진다. 그래서 속보로 꽃마
을로 내려오니 마침 시내로 나가는 서구마을버스 1번이 사람들을 태우고 있다. 버스는 이미 가
축수송 지경이라 다음 차를 탈까 했지만 빗방울의 눈치도 있고 해서 그 버스에 올라타 짐짝의
일원이 되었다.

오랜 만에 찾은 부산 도심 속의 산골마을 구덕꽃마을, 등산객을 상대로 하는 주막들이 가득 늘
어서 있는 모습은 정말 산이나 산사 입구에 터를 닦은 관광단지를 방불케 한다. 도심이 바로 밑
인데, 도심과 지척에 이런 곳이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손님을 가득 실은 마을버스는 이제야 만족을 한 듯, 시동을 걸고, 그 자리에서 유턴하여 마을을
등지고 시내로 내려간다. 휴일이라 등산/나들이 손님들이 많으니 그날 입금은 정말 상당할 것이
다. 운행을 마치고 아마도 고기회식을 하지 않았을까?

내려가는 고갯길이 구불구불하여 손잡이를 잡으며 어여 도착하기를 소망했다. 어차피 사람들은
구덕운동장과 서대신역까지 가야 내리니 자리가 생기는 것보다는 빨리 도착하여 내리는 것이 낫
기 때문이다.
산에서 내려온 마을버스는 부산시내로 들어서 구덕운동장에서 우리를 내려놓는다. 여기서 시내
버스를 타고 서면(西面)에서 환승하여 광안동으로 돌아오니 시간은 대략 17시 30분, 이렇게 하
여 부산 승학산 나들이는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 채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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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곰절이란 애칭을 가진 창원 불모산 성주사

 


' 한여름의 산사 나들이 ~
창원 불모산 성주사(聖住寺) '
창원 불모산 성주사
▲  영산전에서 바라본 대웅전 뜨락과 불모산

 


여름의 제국이 한참 위엄을 부리던 성하(盛夏)의 한복판에 창원(昌原) 제일의 고찰, 성주사를
찾았다. 원래 창원도 그렇고 성주사도 갈 계획이 없었으나 어찌어찌하여 그곳까지 흘러들어가
게 되었다. 창원에 오랜만에 발을 들이니 2001년에 가봤던 성주사 생각이 불끈 솟아나 미련없
이 그곳으로 길을 향했다.

마산터미널에 이르러 창원시내버스 115번(평성마을↔성주동)을 타고 시내를 가로질러 시내 동
쪽 변방인 성주동 두산인프라 종점(안민터널4거리 직전)에 두 발을 내린다. 
여기서 성주사까진 불모산의 물을 꾸역꾸역 먹고 사는 진해저수지를 지나 불모산 자락으로 올
라가야 되는데, 수레로 가면 금방 가지만 두 발에 의지해서 가려면 족히 40분은 걸린다. 창원
도심과 가까운 절이고 창원의 꿀단지 같은 곳이라 거의 1~2분 간격으로 수레가 굉음을 울리며,
내 곁을 지나갔으며, 진해저수지 직전은 경사도 각박하여 뚜벅이의 진을 거진 빼놓는다. 허나
자존심과 불만을 곱게 접고 묵묵히 길을 임하면 깊은 산주름에 묻힌 성주사가 가슴을 피며 모
습을 비춘다.


▲  성주사 1번째 주차장에 있는 '불모산 성주사' 표석의 위엄


♠  성주사 용화전(龍華殿), 마야원(摩耶園) 주변

▲  지금은 추억이 되버린 궁색한 모습의 용화전

성주사 1번째 주차장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어느 길로 가든 성주사로 통하지만 왼쪽은
사람을 위한 숲길이고, 오른쪽은 2번째 주차장으로 인도하는 수레를 위한 길이다. 수레의 눈치
와 핍박이 싫다면 숲길로 가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동화처럼 아름다운 숲길을 거닐면 담장에 둘러싸인 작고도 허름한 용화전을 만나게 된다. 얼마
나 건물이 궁색한지 깨지거나 부실한 기와들이 많고, 지붕 한복판에 풀까지 자라나고 있다. 게
다가 용화전에 안긴 석불도 무슨 죄를 그리도 많이 지었는지 자물쇠로 봉해둔 철창 안에 갇힌
고독한 처지라 안타까움을 더해준다. 물론 석불이 오래된 보물이라 문화유산 도난이 다반사(茶
飯事)처럼 터지는 이 땅의 현실에서 어쩔 수 없이 취한 필요악이긴 해도 저건 좀 너무했다. 무
슨 죄수도 아니고 말이다. 허나 다행히도 근래에 경내 명부전 뒷쪽에 새 용화전을 마련해 그곳
으로 자리를 옮겼다. 늦게나마 처우개선이 이루어진 셈이다. (기존 용화전은 철거됨)


▲  성주사 관음보살입상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335호

용화전의 주인장은 관음보살(觀音菩薩)이라고 한
다. 고려 때 조성된 석불로 키는 약 148cm인데,
당시 석불 치고는 작은 편이다. 몸 뒤에는 길다
란 광배(光背)를 달고 있으며, 발 밑에는 대좌(
臺座)도 갖추고 있다. 이들을 관음보살과 함께
하나의 돌로 만들어 돋음새김으로 새겼지만, 장
대한 세월 앞에 이리저리 치여 마모가 심하다.

용화전에 궁색하게 자리한 그는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다. 인근에 진해저수지를 만들 때
발견되는데, 가까운 이곳으로 옮겨와 성주사의
어엿한 일원이 되었다. 용화전이란 건물 명칭은
그가 관음보살이기 때문에 지어진 것이다. 허나
건물이 절집이라기보다는 시골마을 당집 같은 소
박한 분위기이다.
석불의 형태를 보면 머리 위에 보관(寶冠)을 쓰
고 있으며, 얼굴은 원만하고 목에는 목걸이가 새
겨져 있다. 둥근 어깨와 굵은 곡선으로 새겨진 '
U'자형의 옷 주름은 부드러운 느낌을 주지만 상
체에 비해 하체가 짧아 신체비례가 다소 떨어진
다.

◀  용화전 우측의 부도군(浮屠群)
조선 후기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초월한 다양한 부도들이
어깨를 나란히 한다.


▲  성주사 가는 숲길
살랑살랑 불어오는 산바람이 여름 제국의 부산물(땀)을 말끔히 털어주고
녹음이 깃든 숲길의 아름다움에 중생의 마음도 앞다투어 녹는다.

▲  마야원(2층)과 고란야(1층)

용화전과 숲길을 지나면 길은 왼쪽으로 90도 꺾이면서 담장에 가려진 경내 외곽이 조금씩 모습
을 비추기 시작한다.
꺾이는 지점에서 그대로 직진하면 기와집이 하나 나오는데, 그 집은 불교 서적을 판매하는 마야
원이다. 이 건물은 2003년에 지어진 것으로 겉으로 보면 1층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2층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으며, 밑층에는 고란야(皐蘭野)란 전통 찻집이 있다. 찻집 뜨락에는 동그란
연못이 있고, 그 곁에는 창원에서 가장 깨끗한 계곡이자 창원의 주요 상수원인 성주사계곡이 흘
러간다. 이 계곡은 진해저수지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가 남해바다로 흘러간다.


▲  정와당
마야원 옆에 자리한 정와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붕 색깔이 퇴색되어 근래 건물임에도 조금은 오래되어 보이며,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 두 발을 잠시 쉬어가기에 적당하다.

▲  숲속에서 미끄러지듯 흘러나오는 성주사계곡
성주사계곡은 상수원 보호구역과 성주사 관할 구역에 묶여있어 출입이
통제된 금지된 계곡이다. (계곡 탐방은 성주사 종무소에 문의 요망)


♠  성주사 범종각(梵鍾閣), 연지(蓮池) 주변

▲  담장 너머로 슬쩍 고개를 내민 성주사 경내

▲  연꽃의 보금자리 연지(蓮池)

마야원에서 경내로 들어서면 길 왼쪽에 연잎으로 가득한 연못, 연지가 있다. 연꽃은 거의다 꺾
여 푸른 연잎만이 무성히 보일 뿐이고, 홍련(紅蓮)과 백련(白蓮)은 가뭄에 콩 나듯 구경하기도
힘들다. 그나마 보이는 것도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에 있으니 사진에 담는 것도 여간 어렵
지 않다.


▲  물이 철철 넘치는 약수터
불모산이 중생들에게 내린 약수로 가뭄에도 거의 마를 날이 없다고 한다.
바가지에 물을 한가득 담아 목구멍에 넣으니 내 몸을 유린하던
무더위도 싹 가시고 몸속도 시원하다며 쾌재를 부르짖는다.

▲  동종의 보금자리, 범종각


▲  성주사 동종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267호

6각형의 범종각에는 1783년(정조 7년)에 조성된
조선 후기 동종(銅鍾)이 소중히 담겨져 있다.
높이 111cm, 안지름 84cm, 무게 약 600근의 조
그만 종으로 종의 머리 부분인 용뉴는 2마리 용
이 서로를 등지고 있으며, 음통은 없다. 종 가
운데 부분에 9개의 유두를 단 유곽(乳廓)을 달
았으며,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두광(頭光)을 지
닌 보살상을 두었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가 없다.

조선 후기에는 조성 연대가 새겨진 작은 종들이
많이 출현했는데, 성주사 동종 역시 그중의 하
나로 조선 후기 범종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
한다.


▲  5층석탑(석가진신사리탑)과 석등(石燈)
하얀 피부의 늘씬한 5층석탑은 부처의 사리를 머금은 사리탑으로 원래는
대웅전 앞에 있었으나 불사를 벌이면서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5층 탑신(塔身) 위에 있는 노반(露盤)은 탑신처럼 생겨서
자칫 6층탑으로 오인하게 만든다.

▲  경내로 오르는 33계단

얕아 보이는 저 계단을 오르면 담장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던 경내가 속시원히 속살을 비춘
다. 계단은 5단계로 각각 3,4,6,8,12단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2007년에 산만하게 늘어선 계단을
손질하면서 주지승의 의견에 따라 그리 만든 것이다. 물론 숫자도 모두 의미가 있지. 이들 숫자
는 불교의 교리인 삼학(三學)과 사성제(四聖制), 육바라밀(六波羅蜜), 팔정도(八正道), 12연기(
緣起)를 상징하며, 계단 옆에 기와담장을 두르고 자연석을 이용해 차곡차곡 계단을 쌓아 그야말
로 전통식으로 만들었다.


▲  춤추는 분수대와 연못, 그리고 누각

계단 담장 밑에는 네모난 연못을 두고, 남쪽을 바라보는 2층 누각을 두어 연못을 지켜보게 했다.
연못만 있고 주변을 담장과 석축으로 둘렀다면 5% 허전했을텐데 누각을 배치하고 연못 주변에
꽃과 식물을 심는 등, 공간과 시각의 미를 최대한 배려했다.


▲  네모난 연못 중앙에는 바위를 두어 조촐하게 분수대로 삼았다.

경내 중심부로 들어서기 전에 잠깐 성주사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 곰절, 성주사의 역사
불모산(佛母山) 자락에 포근히 터를 닦은 성주사는 인구 100만을 지닌 경남 최대의 도시, 창원
의 대표적인 고찰이다.
창건시기에 대해서는 2가지의 설이 전해온다. 1번째는 가락국(駕洛國, 금관가야) 수로왕(首露王
)이 처남이 되는 허보옥<許寶玉, 장유화상(長游和尙)>을 위해 창건했다는 설로 허보옥은 수로왕
의 왕후인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의 오라비이다. 허보옥이 가락국 뒷산에 들어가 불법
(佛法)을 펼치니 그 연유로 불모산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수로왕의 아들 7명이 불모산에서 수도
하여 성인(聖人, 또는 승려)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성인이 머무는 절이란 뜻에서 성주사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2번째는 827년(신라 흥덕왕 2년)에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창건했다는 설이다. 왜구가 남해바다
를 침범하자 흥덕왕(興德王)은 신하들과 왜구를 격퇴할 방안을 모색했으나 허약한 신라의 국력
앞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근심에 싸인 왕은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지리산에
무염이란 승려가 있으니 그를 불러 상의해 보시오'
1마디를 듣고, 바로 무염을 소환해 방안을
물었다.
그러자 무염은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를 세우고 왼손으로 자신의 배를 치니 천지가 진동하는 소
리가 나면서 철갑옷을 입은 신병(神兵)이 온 산을 뒤덮었다. 그 광경을 본 단순한 왜구들은 혼
비백산하여 바로 줄행랑을 치니 크게 기뻐한 흥덕왕은 그에게 밭 360결과 노비 100호를 하사하
여 성주사를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허나 둘 다 막연히 전해오는 구전일 뿐, 정답은 없다.

1번째 설 같은 경우는 인도의 불교가 바로 가야로 전래되었다는 소위 남방전래설에 따른 것인데,
그 역시 여전히 의견이 분분해 국사 관련 서적에는 아예 거론조차 되질 않는다. (우리나라는 불
교 최초 전래시기를 여전히 372년으로 보고 있음) 게다가 가락국의 중심지인 김해(金海)와도 산
하나를 사이에 둘 정도로 가까운 편이지만 정작 창건 시기를 입증할 적당한 근거가 없으니 가락
국과 관련된 절로 내력을 꾸미고 역사를 끌어올리려는 의도로 지어낸 설로 보인다.

어쨌든 창건 이후 그런데로 법등(法燈)을 유지하다가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으며, 1604년 진경(
眞鏡)이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웠다. 원래 자리는 지금보다 400m 안쪽 산자락에 있었는데, 옛
절터에서 석탑과 석등을 찾아내어 중창을 벌인 것이다. 또한 절을 중창할 때 곰이 나타나 도와
주었다고 하는데, 그 설화는 다음과 같다.

진경은 원래 옛 절터에다가 중창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곰이 나타나 모든 목재를 하
룻밤 사이에 400m 떨어진 지금의 자리로 옮겨다 놓았다. 이에 진경은 부처의 뜻으로 여기고 곰
이 목재를 옮겨놓은 현재의 자리에 중창을 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웅신사(熊神寺)','곰절'
이라 불리기도 했다. '웅신사'란 이름은 옛날에만 쓰인 듯 싶으며, '곰절'이란 이름은 여전히
성주사의 애칭이자 상징으로 조금씩 쓰이고 있다.
이렇게 다시 몸을 일으킨 성주사에는 곰절에 어울리게 곰과 관련된 이야기가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불모산에 살던 곰이 시장기가 돌아 성주사를 찾았다. 그 곰은 재주를 잘부려 가끔 법회
때 승려 뒷자리에 앉아 수행 포즈를 흉내내기도 했는데, 마침 승려들은 모두 참선 중이었다. 그
래서 배고픔을 잊고자 참선(參禪)을 흉내내니, 이것이 공덕이 되어 나중에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사람으로 환생한 그는 그 인연 때문인지 성주사에서 부목(負木, 절에서 땔나무를 하는 사람) 일
을 하게 되었다. 배가 고플 때는 자신도 모르게 참선에 열중해 배고픔을 잊곤 했는데, 한 번은
주지승이 그 모습을 보고는 지팡이로 머리를 치니, 그 순간 깨달음을 얻어 더욱 정진해 고승(高
僧)이 되었다고 한다. (또는 부목이 미련하여 자주 밥을 태워먹자 탄 밥에 열불이 난 주지승이
'이 곰 같은 놈아' 소리를 지르며 지팡이로 등줄기를 후려치니 그 이후 부목은 용맹정진하여 고
승이 되었다고 한다)


중창 이후 1681년(숙종 7년)에 중수를 벌였으며, 구한말에는 부산 범어사(梵魚寺)에 있던 등암
찬훈(藤巖璨勛)이 이곳으로 넘어와 절을 중건하고 불모선원(佛母禪院)을 창설했다.
1997년에 원종이 설법전과 요사 등을 새로 지었고, 2002년에 성주사 진입도로가 확장되어 재흥(
再興)의 기운이 슬슬 도래함에 따라 다시 불사를 벌였다. 2003년에 마야원을 짓고, 2004년과 그
이듬해에 지장전을 신축했으며, 2007년에 입구 계단을 손질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지장전과 영산전, 설법전, 삼성각, 마야원 등 10여 동의 크
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2011년에 보물로 지정된 감로왕도와 목조석가여래3불좌상, 몽산화상육
도보설(蒙山和尙六道普說, 보물 1737호) 등 국가지정 보물 3점과 대웅전과 3층석탑, 동종, 관음
보살입상, 감로왕탱, 석조석가3존16나한상, 석조지장시왕상, 지장보살상 복장물 전적류(典籍類)
등의 지방문화재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불모산 안쪽에 숨겨진 성주사 옛터에는 조선시대 부도
여러 기가 전하고 있는데, 이곳은 통제구역이라 답사를 원한다면 성주사 종무소에 문의하기 바
란다.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이지만 시내와도 2km 정도의 거리를 두며 깊숙한 산주름 속에 조용
히 묻혀있다. 그래서 마치 심산유곡(深山幽谷) 벽지에 들어선 기분이다. 게다가 밑 세상과는 공
기가 확연히 틀려 공업도시 창원을 무색케 하며, 불모산이 베푼 청정한 성주사계곡이 절 옆구리
를 살짝 스치며 속세로 내려간다.

성주사는 속인들을 대상으로 템플스테이를 열고 있으며,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보리수학교를 방
학기간에 운영한다. 그리고 매년 10월에는 곰절산빛가람제를 개최하는데 산사음악회와 사진전,
그림전시회 등 다채로운 행사를 열어 도시인들의 안구와 귀를 정화시켜준다.

※ 창원 성주사 찾아가기 (2014년 10월 기준)
① 창원까지
* 서울역과 광명역, 천안아산역, 대전역에서 마산/진주행 고속전철 이용, 창원이나 마산역 하차
* 서울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대전역, 구미역, 동대구역, 부전역, 구포역, 진주역, 순
  천역, 광주송정역에서 마산/창원 경유 경전선 열차 이용
*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마산/창원행 고속버스 이용 (마산행은 20~30분 간격, 창원행은 20~40
  분 간격)
* 부산(사상, 노포동, 동래전철역), 대구(서부, 동대구), 울산, 광주, 대전(동부복합)에서 창원
  이나 마산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인천, 고양, 의정부, 성남, 수원, 부천, 원주, 청주, 천안, 전주, 포항, 진주, 구미에서 창원
  /마산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현지교통
* 마산역입구, 마산시외터미널에서 115번 시내버스를 타고 두산인프라 하차
* 창원역에서 115, 151, 213, 757번 시내버스를 타고 두산인프라 하차
* 창원터미널에서 115, 151번 시내버스 이용
* 두산인프라에서 도보 45번 (두산인프라 → 안민터널4거리에서 좌회전 → 성주사입구에서 우회
  전하여 직진)
③ 승용차 이용 (주차공간은 두둑함)
* 남해고속도로 → 장유나들목 → 창원 방면 1020번 지방도 → 창원터널 → 삼정자육교에서 진
  해 방면 → 성주사입구에서 좌회전 → 성주사
* 남해고속도로 → 동마산나들목을 나와서 창원역 방면 → 소계광장교차로에서 우회전 → 창원
  대로 직진 → 삼정자육교에서 진해 방면 우회전 →성주사입구에서 좌회전 → 성주사

★ 성주사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성주사 템플스테이는 1박 2일 일정으로 운영하는 프로그램형과 짜여진 일정이 없이 자유롭게
  머물다 가는 휴식형(평일에만 운영)을 운영한다. 자세한 일정과 가격은 성주사에 문의 요망!
* 소재지 -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천선동 102 (곰절길 191, ☎ 055-262-0108~10)


♠  성주사 경내 둘러보기

▲  귀여운 복돼지 1쌍

33계단을 오르면 깜찍한 돌돼지 1쌍이 중생을 맞이한다. 이들은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성주사의
자리가 풍수지리상 제비가 알을 품는 형상이고, 앞산은 그 제비집을 노리는 뱀의 형세라고 하여
뱀의 상극이나 다름이 없는 돼지상을 배치한 것이다. 그러니 풍수지리상 부실한 부분을 보충하
는 이른바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 된다. 허나 돼지상이 너무 귀여워 아무리
뱀이라도 그들 앞에서는 길을 접고 돌아갈 것 같다.

◀  승려의 생활공간인 안심료(安心寮)


▲  대웅전과 뜨락

계단을 올라서면 경내의 중심인 넓직한 대웅전 뜨락이 펼쳐진다. 대웅전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
준으로 우측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인 안심료가 있고, 좌측에는 교육과 강당의 역할을 하는 설법
전(說法殿)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다들 규모가 크다. 뜨락을 바라보며 자리한 맞배지붕의 대
웅전은 좌우로 삼성각과 영산전을 거느리고 있고 그 앞에 3층석탑이 서 있으니 이는 조선 중기
가람배치로 1604년 중건 이후부터 계속 유지하고 있다.


▲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대웅전의 절반도 안되는
조촐한 크기이다. 언제 지어졌는지는 전하는 기록이 없으나 문과 기둥에 고색의 때가 만연한 것
으로 보아 빠르면 1604년 중창부터, 늦어도 18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후 퇴락된
것을 1966년에 보수했다.

삼성각은 중생과 무척 친근한 산신(山神),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그
들이 그려진 그림이 내부를 장식한다. 이들 그림은 근래에 제작된 것으로 조금은 낡아 보이는
삼성각과는 시기가 많이 차이가 나서 예전에는 다른 용도로 쓰인 듯 싶다.

▲  삼성각 중앙을 장식한 칠성탱

▲  독성탱

◀  산신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  속시원히 속살을 드러낸 영산전(靈山殿)

대웅전 좌측 옆구리에는 삼성각과 비슷한 크기의 영산전이 자리해 있다. 삼성각과 같은 정면 3
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대웅전의 절반도 안되는 크기이며, 1939년에 지어졌다.


▲  영산전 석조석가3존불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500호(16나한상 포함)

영산전 불단에는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나란히 협시해 있는데. 이들은 1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불상의 생김새가 대웅전
불상과 비교하면 너무 형식적이다. 거의 네모난 얼굴은 신체에 비례해 너무 크고 표정도 모두
똑같다. 게다가 앉아있는 모습도 약간은 자연스럽지 않아 보인다. 불상의 위엄과 중생을 다독거
리는 흐드러진 미소보다는 33계단의 돼지상처럼 귀여움이 가득해 중생들로 하여금 웃음을 머금
게 한다.

▲  영산전 우측 부분 (16나한상과 나한도)

▲  영산전 좌측 부분 (16나한상과 나한도)

영산전 불단 좌우에는 나한상(羅漢像)이 각각 11상씩, 22상이 배열되어 있다. 이들은 부처의 열
성제자인 16나한으로 우리나라 7,000만 인구만큼이나 다양한 표정과 자세를 지녀 똑같은 모습이
없다. 그들 뒤에는 나한도(羅漢圖) 6개가 든든히 자리한다.


▲  대웅전(大雄殿)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134호

삼성각과 영산전을 옆구리에 거느린 대웅전은 성주사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다포(多包)식 건물이다. 1681년에 지어졌으며, 1817년에 중수를 했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촘촘하면서도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뒷면 내부의 공포만 간략하게 설치된 교두형(
翹頭形)으로 만들어져 있으니 이는 조선 후기 불전의 특징이다.
 
내부 불단에는 17세기 중반에 조성된 석가여래3불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그 좌우로 신중단(神
衆壇)과 무염국사의 진영(眞影), 지금의 성주사를 있게 한 서봉당 의정과 등암친훈의 진영이 나
란히 자리한다. 건물 외부 벽화 가운데 왼쪽 면에 1604년 절을 중창했을 때 도와주었다는 곰과
그의 일화가 그려져 있다.


▲  대웅전 목조석가여래3불좌상 - 보물 1729호

대웅전 불단을 장식하고 있는 석가3불좌상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협시
하고 있다. 중생의 고통과 소망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으려는 듯,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쭉하고
커다란 귀가 인상적이다. 이들은 수인(手印)과 덩치를 제외하고는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엷은
미소가 드리워진 얼굴은 거의 네모나며, 그들 뒤로 후불탱화가 든든히 자리한다.

이들 불상은 1655년에 조성된 것으로 봄에 불상 제작에 들어가 가을에 완성하여 복장(腹臟) 점
안을 마쳤다고 한다. 조성에 참여한 승려는 녹원(
元)과 현지(知玄), 찬인(贊印), 혜정(惠淨),
도성(道聖), 명신(明信), 긍성(肯聖) 등이며, 17세기에 활약했던 녹원의 최초 작품이다.

    ◀  성주사에서 가장 오래된 3층석탑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25호

지금까지 살펴본 성주사는 조선 중기 이후 보물
이 주류를 이루었다. 용화전 관음보살도 있지만
원래 이곳과 관련이 없는 존재이니 논외로 친다.

대웅전 앞뜰에 뿌리를 내린 3층석탑은 고려 초
기에 조성된 탑으로 성주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
물이자 곁에 있는 석등(石燈)과 더불어 옛 성주
사의 유일한 증인이다. 탑의 높이는 3.1m로 2중
의 기단(基壇)위에 탑신을 올렸다.
그들은 1604년 진경이 절을 일으킬 때 옛 절터
에서 수습해 온 것으로 옆에 고르게 자리한 석
등은 고려 초기 것이다.

탑 앞에는 네모난 돌이 놓여져 있는데 배례석(
拜禮石)이다. 탑과 배례석 사이에는 석등을 놓
았던 대석(臺石)이 있다.

고색의 때가 적절히 입혀져 중후함이 엿보이며, 상태도 괜찮다. 다만 탑이 대웅전의 완전 정면
이 아닌 좌측으로 다소 치우져진 점을 볼 때 탑 2개를 나란히 세우는 이른바 1금당 2탑 형식으
로 하려고 했던 듯 싶다.


▲  오관당 앞에 놓인 샘터
둥근 넓적한 바위를 가져와 샘터로 만들었다. 좌측에 앉은 고양이로 보이는
동물이 바가지를 들며 하염없이 물을 쏟아낸다.

▲  물을 쏟아내는 고양이상 - 표정이 곰처럼 귀엽다
그가 주는 물을 바가지에 담아 들이키니 정말 시원하기 그지 없다.

▲  지장전(地藏殿)

경내 동쪽에 자리한 지장전은 경내 불당 가운데 가장 큰 40평 규모를 자랑한다. 원래는 설법전
앞쪽에 있었으나 1997년 이후 불사를 벌이면서 요사로 옮겼다가 2006년에 새로 지었다.

지장전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
구들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들은 석조지장시왕상이란 이름으로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501호로 지
정되었다. 또한 좌측 벽에는 2011년에 지방문화재에서 보물로 승진된 감로왕도가 있다.


▲  빛바랜 감로왕도(甘露王圖) - 보물 1732호

빛바랜 일기처럼 오래된 티가 풍기는 감로왕도는 죽은 이의 극락 천도를 위한 목적과 함께 나쁜
짓을 경계하고 속세의 여러 가지 풍물을 표현하는 성격을 담고 있다.

지장전 한쪽 벽을 장식하고 있는 이 그림은 1729년(영조 5년)에 신정(愼淨), 한영(漢英), 인행(
印行), 세관(世冠), 국영(國暎) 등이 그린 것으로 조성시기와 참여한 승려의 이름은 그림 한쪽
에 쓰인 화기(畵記)에 소상히 나와있다. 삼베 바탕에 홍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여 채색했으며,
그람 상단에는 칠불(七佛)과 관음보살을, 중앙에는 아귀(餓鬼)를 중심으로 그 밑에 지옥(地獄)
을 담았다. 하단에는 인간 세상의 여러 고통스런 장면을 담아 속세살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
게 했다. 허나 솔직히 그림의 내용을 모르면 뭐가 뭔지도 모른다. 뭐 알아야 경각심을 느낄 것
이 아닌가..? 나에게는 그저 조선 후기 불화일 뿐이다. 그만큼 옛 그림은 어렵다.


▲  지장전 좌측의 네모난 연못
연꽃이 드문드문 보일 뿐, 푸른 연잎의 세상이다.

▲  집으로 고이 훔쳐오고 싶은 아름다운 숲길을 지나
다시 아비규환의 속세로~~!


내가 성주사를 찾은 날은 마침 보리수학교 첫날이었다. 앳된 티가 보이는 초등학생들로 경내는
그야말로 시장통처럼 시끄럽다. 절은 참선과 수양을 중시하는 공간이라 조용히 머물다 가는 것
이 정석이지만 가끔은 이렇게 고정관념에 돌을 던지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 천진난만한 애들로
활기가 불어난 경내를 애써 뒤로하며 1시간 30분에 걸친 성주사 관람을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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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과 가까운 첩첩한 산중의 오랜 절집 ~ 북한산 승가사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  석가탄신일 맞이 산사 나들이 ~ 북한산 승가사(僧伽寺) '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승가사 약사전 (석조승가대사좌상) 승가사 호국보탑

▲  승가사 약사전

▲  호국보탑


높은 바위 산길은 험한데, 지팡이 짚고도 등라(藤蘿) 휘어잡네
처마가엔 가던 구름 머물고, 창앞엔 쏟아지는 폭포 많을세라
차를 끓이니 병에서 가는 소리나고, 물을 길으니 우물에 작은 물결지네
두어명 높은 스님 있어 공(空)한 것 보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네

* 조선 초기 문신 정인지(鄭麟趾)가 승가사에서 지은 시


 

5월 공휴일의 하나인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이 드디어 코앞에 다가왔다. 이번 초파일은 주말
과 겹쳐서 자연스럽게 여러 날 연휴가 형성되었는데, 초파일이 그 연휴의 끝이었다. 그래서 초
파일 전날에 사전 몸풀기용으로 서울에 있는 적당한 고찰을 물색하다가 가본지 20년이 넘은 북
한산(삼각산) 승가사를 찾기로 했다.

해가 조금씩 고개가 꺾이던 오후 2시에 길음역에서 후배들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7211번(진관차
고지↔신설동)을 타고 북악터널, 평창동을 지나 구기동(舊基洞)에서 발을 내린다. 여기서 졸부
들의 집과 빌라로 경관이 꼬질꼬질해진 구기동계곡을 20분 정도 오르면 구기탐방지원센터가 나
오며, 이곳을 지나면 비로소 북한산(삼각산)의 품으로 들어서게 된다.
구기동은 옆동네인 평창동(平倉洞)과 더불어 북한산 자락에 안겨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게다가
명당(明堂)의 기질도 있다고 전해져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졸부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와 살았는
데, 문제는 그들의 욕심이 끝이 없어 쥐처럼 계속 북한산(삼각산)의 살을 갉아먹고 괴롭힌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경관이 적지 않게 유린을 당했다.
더 이상 졸부들로 인해 북한산이 망가지지 않도록 신축/증축을 금하는 한편, 기존 집들도 모두
밀어버려 서울의 영원한 허파이자 진산(鎭山)인 북한산의 숨통을 확 트이게 했으면 좋겠다.

구기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졸부들의 집과 무자비한 개발의 칼질에 기가 죽은 구기동계곡도 슬
슬 본성을 되찾아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게다가 숲도 더욱 짙어져 때이른 더위를 잊게 만
든다. 그런 산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구기갈림길인데, 여기서 직진하면 문수암(文殊庵)과 북한
산성(北漢山城)으로 이어지며, 왼쪽으로 가면 승가사와 비봉이다.
우리는 아직 점심을 먹지 못해 여기서 속세에서 사온 김밥과 과자, 음료수 등으로 배를 채운다.
하늘과 조금이나마 가까운 곳에서 먹어서 그런지 꿀을 바른 듯 죄다 꿀맛이다. 우리가 사온 김
밥은 모두 5줄인데, 이중 4줄을 먹었고, 과자와 음료수도 절반 정도 처리하니 포만감의 행복이
일파만파로 몰려와 우리를 희롱한다. 그 희롱에 잠시 무방비로 있다가 자리를 싹 털고 다시 길
을 재촉했다. 승가사까지는 30분을 더 가야되기 때문이다.

구기갈림길에서 승가사까지는 경사가 좀 각박한 편이나, 구기동계곡의 상류인 승가사계곡이 바
로 옆에서 시원한 바람과 냇물로 응원하고 있어 그리힘들지는 않다. 그 산길을 25분 정도 오르
면 승가사 갈림길에 이른다.


▲  승가사 갈림길 - 왼쪽으로 가나 오른쪽으로 가나 모두 승가사로 통한다.
(사람은 왼쪽 계단길 추천, 오른쪽 길은 수레를 위한 길)


♠  승가사 입문

▲  청기와로 치장된 승가사 일주문(一柱門)

승가사갈림길에서 왼쪽 계단길을 오르면 승가사의 내력과 가람배치도가 담긴 안내문과 함께 무
려 청기와로 머리를 장식한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이 문은 1985년에 지어진 것으로 승가사 주변이 국립공원 건축제한구역이라 여러 번 강제 철거
를 당했던 비운의 문이기도 하다. 간신히 국립공원관리공단을 설득하여 지금의 문을 두었으며,
평방(平枋)에는 원담(圓潭)이 쓴 '三角山 僧伽寺'란 현판이 걸려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  경내로 인도하는 청운교 계단길

일주문을 지나면 호국보탑까지는 숨가쁜 계단길의 연속이다. 연등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오르면
청운교(靑雲橋)라 불리는 장대한 계단이 기를 질리게 만드는데 계단 앞 좌우에는 용조각이 입을
벌리며 혹시 모를 나쁜 기운을 경계한다. 계단 중간 오른쪽에는 승가사의 내력이 담긴 사적비(
事蹟碑)가 있으며, 그 계단의 끝에는 승가사의 새로운 명물인 호국보탑이 자리해 있다.


▲  청운교 계단길 (내려갈 때 찍은 모습)
계단 왼쪽에 이수(螭首)를 갖춘 비석이 승가사 사적비이다.

▲  감실 불당까지 갖춘 호국보탑(護國寶塔)

끝없이 펼쳐진 계단에 기가 질린 중생은 그 계단의 끝에 서 있는 호국보탑 앞에서 다시 한번 주
눅이 든다.
인도나 동남아의 불탑(佛塔)처럼 생긴 호국보탑은 승가사가 예로부터 호국기도 도량이었음을 속
세에 강조하면서 조국 통일도 염원하고 절의 위세도 크게 강조하고자 많은 돈을 들여 만든 것이
다. 그러다보니 호국보탑이란 참 아름다운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가 세워짐으로서 탑이 없
던 허전함을 제대로 극복하게 되었다. (정식 이름은 '민족통일호국보탑')

장엄한 모습의 이 탑은 절 밑의 바위와 나무를 싹 밀어버리고 지반을 다져서 만든 것으로 1987
년에 짓기 시작하여 1994년에 완성을 본 승가사의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탑의 높이는 무려 25m
로 9층석탑이며, 탑신(塔身) 밑에는 감실(龕室)을 만들어 경주 석굴암(石窟庵)을 조금씩 재현했
고 사방(四方)에 문을 냈다.
감실 안에는 석굴암처럼 본존불(本尊佛)과 11면(面) 관세음보살상, 10대 제자상을 돋음새김으로
배치하고 연꽃장식 덮개를 씌웠으며, 바깥쪽에는 사천왕(四天王)을 배치해 본존불과 탑을 지키
도록 했다. 감실이 매우 좁기 때문에 승려만 들어가서 예불을 올리며, 탑 주위로는 문수/보현동
자상과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빼곡히 배치했다.

탑신에는 인도 정부에서 기증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1과와 청옥와불(靑玉臥佛) 1좌, 나한(羅漢)
의 사리 2과, 패엽경(貝葉經) 1질, 무구정광다라니경 경판 1질, 철제9층탑 99기, 화엄경(華嚴經
) 9질을 봉안했다.
조그만 감실 불당까지 갖춘 매우 이형적(異型的)인 큰 탑으로 지금이야 과시용이다 뭐다해서 이
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지만 몇백년 이후에는 한국미술사 20세기 석탑 부분에서 크게 이름을 날릴
유명 인사로 등극할 지도 모르니 미리 봐두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  민족통일호국보탑 공덕비

▲  위에서 바라본 호국보탑의 위엄


▲  호국보탑에서 바라본 천하
북악산(北岳山, 사진 중앙에 엷게 보이는 산줄기)과 인왕산(오른쪽), 그들 너머로
서울 도심이 어렴풋이 바라보인다.

▲  산자락에 요새처럼 자리한 승가사 - 호국보탑에서 올려다본 모습

호국보탑에서 경내까지는 2갈래의 길이 있다. 왼쪽 계단길로 가는 길은 호국보탑을 만들면서 새
롭게 닦은 길이고, 오른쪽에 조금 가파르게 형성된 길은 옛길이다. (옛길로 가면 포대화상을 만
날 수 있음)


♠  북한산 제일의 고찰이자 서울 근교 명승지로 명성이 자자했던 곳,
고려시대 보물 2개를 간직한 북한산(삼각산) 승가사(僧伽寺)

▲  산신각에서 바라본 승가사 경내 (대웅전 구역)

북한산(삼각산)의 주요 봉우리이자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국보 3호)가 서있던 비봉(碑峰)
동쪽 450m 고지에 둥지를 닦은 승가사는 빼어난 경관으로 예로부터 많은 문인(文人)들이 찾아와
안긴 명소이다. 조선시대에는 서쪽의 진관사(津寬寺), 남쪽의 삼성산 삼막사(三幕寺), 동쪽의
불암산 불암사(佛巖寺)와 더불어 서울 근교 명승 사찰로 꼽혔는데, 승가사는 그 북쪽으로 그들
가운데 단연 갑(甲)으로 찬양을 받았다.

북한산 제일의 고찰로 손꼽히는 승가사는 756년(신라 경덕왕 14년) 수태(秀台)가 창건했다고 전
한다. 그는 당나라 고종(高宗) 시절에 중생들로부터 생불(生佛)로 칭송 받던 승가대사(僧伽大師
)의 행적에 감명을 받아 그를 기리는 뜻에서 승가사라 했으며, 동문선(東文選)에는 1107년에 이
예(李預)가 쓴 중수기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낭적사(狼跡寺) 스님 수태가 승가대사의 거룩한 행적을 익히 듣고 삼각산 남쪽에 좋은 자
리를 정해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쪼아 형상을 새기니 대사의 어진 모습이 더욱 우리나
라에 비추었다. 나라에서 천지의 재변과 홍수와 한발 등의 재난이 있으면 기도를 드려 물리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언제나 효험이 있었다'

고려의 천하로 바뀐 이후, 1024년(현종 15년)에 지광(智光)과 성언(成彦)이 중창했고, 1090년에
는 구산사(龜山寺) 주지였던 영현(領賢)이 선종(宣宗)의 칙령(勅令)을 받아 중수했다. 1099년(
숙종 3년)에는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숙종(肅宗)과 함께 세검정에 있던 장의사(藏義
寺)와 승가사에 들렸는데, 이때 불상을 개금하고 불당을 중수했다.

1422년 세종(世宗)이 전국의 사찰을 통합해 선종(禪宗)과 교종(敎宗) 2개로 나누자 선종에 속하
게 되었으며, 그 시절 고승(高僧)으로 이름을 날린 함허(涵虛)가 여기서 수행을 했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간신히 일으켜 세웠으나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여기까지 기어올라온
청나라군에 의해 다시 파괴되어 150년 가까이 폐허로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1780년 팔도도승통(八道都僧統)이던 성월선사(城月禪師)가 절터에 뒹굴던 돌을 골라
건물을 재건했으며, 구한말에는 명성황후와 엄귀비의 후원으로 절을 수리했다.

1941년 도공(道空)이 중수를 벌였고, 비구니 도원(道圓)이 절을 꾸려나갔으나 6.25때 모두 파괴
되는 비운을 겪는다. 그러다가 1957년 도명(道明)이 산신각과 향로각, 동정각, 대방, 요사 등을
지어 절을 다시 일으켰고, 1971년에는 상륜(相侖)이 주지로 부임, 마애여래좌상으로 오르는 108
계단을 대리석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절 진입로를 확장하는 한편, 전기를 가설했다.
1976년에는 범종을 만들어 동정각에 봉안했고, 7년 동안 갈고 닦아 1994년에 호국보탑을 지어올
리는 등, 왕년의 위엄을 되찾고자 열심히 불사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각박한 산자락에 터를 닦았지만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정신없이 건물을 지었으며, 비
록 겉으로 보이는 고색의 내음은 거의 말라버렸지만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과 영산전,
향로각, 산신각, 동정각, 적묵당, 승가굴을 개조한 약사전 등 10여 동의 건물이 경내를 가득 메
우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고려시대에 거대한 마애불인 구기동 마애여래좌상과 역시 고려 때 조성된
석조승가대사좌상 등 보물 2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밖에 옛 석탑의 부재(部材)와 비좌(碑座),
그리고 경내 동쪽에 조선 후기 승탑 등이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승가사는 비구니 사찰로 북한산 제일의 선원(禪院)을 칭하고 있으며, 주변 풍경이 빼어나 고려
와 조선의 많은 문인들이 문이 닳도록 찾아와 시와 글을 남겼는데, 고려 고종(高宗)의 스승이던
유원순(兪元淳)은 이곳의 풍경을 8줄의 시로 표현하고 있다.

기구한 돌다리에 구름을 밟고 올라가니 좋은 집 높이 있어 조화의 고장 같아라.
가을이슬 가늘게 떨어지니 천리 안계(眼界) 상쾌하고
석양이 멀리 잠기니 저 강물이 밝게 빛난다.
공중에 오락가락 가는 아지랑이 향불 연기에 이었고
골짜기에서 우는 한가한 새소리 풍경소리를 대신하네.
그보다 부러운 일은 높은 스님의 생각하는 일인 것이
인간세상의 명리에는 도무지 마음에 없다네


구름도 잡힐 듯한 높은 산중에 묻혀 있고 하늘과도 가까워 제아무리 무거운 번뇌라도 감히 따라
오기 힘들며, (번뇌는 절 밑에서 기다리고 있음, 결국 해탈은 꿈임) 속세와도 적당히 거리를 두
고 있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진하다. 또한 절을 둘러싼 숲이 삼삼하여 공기도 청정하며, 서울
도심과도 가까워 멀리 갈 것도 없이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거나 마음을 싹둑 가다듬고
싶을 때 언제든 와서 안기고 싶은 곳이다. 거기에 보물급 문화재를 2점이나 품고 있어 볼거리도
넉넉하며, 비구니의 낭낭한 불경소리를 듣고 있으면 잠시나마 해탈의 기분마저 들게 한다.


▲  나무 장작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이는 서래당 공양간 부뚜막
이제는 시골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그리운 풍경으로 서울에서 저런 풍경을 만나니
무지 신선하고 반갑다. 쇠솥 안에서 모락모락 익고 있는 국의 맛은 어떨까?
나도 모르게 입 안에 군침이 고인다.


※ 북한산(삼각산) 승가사 찾아가기 (2014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각역(1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 6호
  선 역촌역(3번 출구)에서 7212번 시내버스(수색,은평차고지↔옥수동)를 타고 구기동 현대빌라
  나 승가사입구 하차, 승가사까지 도보 약 70분, 현대빌라에서 구기동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것
  이 좀 무난하며, 승가사입구에서 비봉4길(건덕아파트)과 승가산림초소를 거쳐 가는 수레길은
  경사가 좀 각박하다.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시내버스(은평차고지↔이북5도청)를 타고 현대빌
  라나 승가사입구 하차
* 승가사까지 수레길이 닦여 있으나 길이 험하고 상태가 넉넉치 못하며, 일반 차량은 출입을 통
  제한다. (승가사와 국립공원 차량만 통행 가능)
* 승가사 셔틀차량을 이용하면 보다 편리하게 승가사까지 올라갈 수 있다. <승가사입구 정류장
  에서 동북쪽으로 난 비봉4길(승가사 방면)을 오르면 셔틀 타는 곳이 있음, 운행 정보는 승가
  사에 문의 요망>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1 (☎ 02-379-2996)


▲  연등이 허공을 가득 메운 대웅전(大雄殿) 뜨락

동정각의 아랫도리를 들어서면 경내의 핵심인 대웅전 구역이다. 대웅전 뜨락을 중심으로 서쪽에
는 서래당(西來堂), 동쪽에는 적묵당(寂默堂)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뜨락에 들어서니 서래당
앞에서 연등 주문을 받는 아줌마 보살이 밝은 표정을 내비치며 연등 하나 다시라고 그런다. 허
나 연등 시주에는 그리 관심이 없어 가난한 중생이라 돈이 없다고 답을 하니 표정이 180도 싹
바뀐다. 결국 여기도 돈이 갑 중의 갑(甲)이던가? 잠시나마 씁쓸한 기분이 나를 엄습한다.

승가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7년에 지어서 1980
년에 완성을 보았다. 건물 좌우벽과 뒷쪽에는 부처의 전생(全生)을 그린 전생도와 심우도가 그
려져 있는데, 그림 옆에 해석을 달아놓아 이해를 돕게 했다.

뜨락 서쪽에 자리한 서래당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86년에 중창되었다. 겉
으로 보면 1층이지만 엄연한 2층으로 뜨락에 노출된 부분은 종무소(宗務所)와 주지실로 쓰이며
호국대탑에서 경내로 오르는 길목인 아랫층에는 공양간이 있다. 공양간은 장작으로 땐 밥과 국
을 공양(供養)으로 제공하는데, 산꾼과 답사객, 신도 등 누구나 먹고 갈 수 있다.
서래당 맞은편에 자리한 적묵당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비구니의 선방(禪房)
이다. 1985년에 중창되어 매년 100여 명의 비구니가 수행 안거(安居)를 하고 있는데, 내부에는
소조여래좌상 1구와 1966년에 제작된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  연등의 물결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대웅전 뜨락과
그 끝에 자리한 동정각(動靜閣)

대웅전 맞은편에는 범종(梵鍾)의 보금자리인 동정각이 마치 천상(天上) 세계의 누각처럼 높다랗
게 들어앉아 속세를 굽어본다. 동정각은 2층 규모로 아랫층은 경내와 속세를 이어주는 통로이며,
윗층은 범종각으로 기존 범종각과는 다른 6각형 정자(亭子)식 건물인 점이 눈길을 끈다.

동정각에 고이 간직된 범종은 1976년에 봉안된 것인데, 그 종을 운반할 때 15명이 꼬박 매달려
무려 1달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때는 4발 수레가 감히 올라올 수도 없었던 산속이라 종 밑에 나
무 토막을 깔고 밀어올리는 옛 방식으로 종을 운반했기 때문이다. 아침 4시와 저녁 6시가 되면
비구니가 잠든 종을 깨우며 종소리를 속세로 흘려보내는데, 그 종소리가 매우 은은하다.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불과 후불탱화

대웅전 내부는 모조리 개금(改金)을 한 목각(木刻)탱화들로 두 눈이 부실 지경이다. 불단에 봉
안된 석가불은 꽤나 단련을 했는지 어깨가 쩍 벌어져 있으며, 두터운 얼굴은 다소 경직된 표정
을 머금고 있다. 그의 좌우에는 그 흔한 협시불(夾侍佛)도 없지만 대신 뒷쪽에는 호화로운 금동
후불탱을 배치하여 그를 든든히 받쳐준다.
후불탱(後佛幀)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그를 바라보고 있으며, 8대
보살과 아난, 가섭(迦葉)이 그를 에워싸 그의 이야기를 듣는 모습이다. 붉은 지붕의 닫집 또한
화려하기 그지없으며, 극락조(極樂鳥)와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

▲  나한의 일원으로 천태산(天台山)에서
을 일으킨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가
새겨진 독성탱(獨聖幀)

▲  칠성탱(七星幀)과 신중탱(神衆幀)
이들은 김광한, 김광열 형제가 1985년과
1986년에 만든 것이다.

▲  대웅전 좌측 벽에 그려진 전생도의 일부 - 해석은 각자 알아서 ~~


▲  대웅전 계단 우측에 누운 석조(石槽)
석조는 물을 담아두는 통이지만 첩첩한 산골이다보니 물사정이 너그럽지 못해
거의 항상 비워둔다. 물을 마시려면 꼭지를 틀어 바가지에 받아 마시면 된다.


♠  승가사 산신각, 약사전 주변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영산전(靈山殿)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81년에 중창되었다. 석가3존불을 비롯해 석
가후불탱, 16나한탱, 신중탱 등이 있는데, 대웅전의 탱화들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모조리 금색을
입혀 등장인물이 다른 것 빼고는 거기서 거기 같고, 너무 찬란함에 치중한 나머지 거부감과 식
상함마저 적지 않게 들게 한다. (지나친 화려함은 오히려 소박함보다 못함)
이들 탱화는 1987년 김광한, 김광열 형제가 조성했다.


▲  영산전 불단
석가불과 미륵불(미래불), 제화갈라보살(과거불)이 3존불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무려 경주 옥석(玉石)으로 만들었다.

▲  부처의 열성 제자인 16나한이 새겨진 16나한탱


▲  산신각(山神閣)

영산전 좌측 높은 벼랑 위에 산신을 봉안한 산신각이 자리해 있다. 정면과 측면이 달랑 1칸 밖
에 안되는 조촐한 건물로 화재로 무너진 것을 1984년에 다시 지었으며, 그때 서쪽을 바라보고
있던 건물을 남향(南向)으로 조정했다. 내부에는 1986년에 김광한/김광열 형제가 만든 산신탱이
이 있는데, 역시 금칠로 도배를 해놓았다.

산신각에 올라 동쪽(좌측) 밑을 잘 살펴보면 길쭉한 석종형(石鐘形) 승탑과 비석 1기가 눈에 들
어올 것이다. 이들은 1780년에 쓰러진 승가사를 재건한 성월선사(城月禪師)의 탑과 탑비로 비문
에는 '朝鮮國 正憲大夫 城月堂 碑銘竝序(비명병서)'라 쓰여 있어 승탑의 주인을 알려주고 있는
데, 승려임에도 정헌대부의 지위를 받은 것이 이채롭다. 그리고 '嘉慶 七年 壬戌 八月日立' 이
란 내용도 있어 1802년 8월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준다.


▲  산신과 호랑이, 동자 2명, 나무 등이 묘사된 산신탱

▲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우측 옆구리로 들어서면 약사전과 마애여래좌상으로 인도하는 길이 나온다. 그 길을 1단
계 오르면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봉안한 명부전을 만나게 된다.
대웅전과 약사전 사이에 자리한 이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불전(佛殿)으로 1972
년에 착공해 1975년에 완성을 보았다. 1년 정도면 능히 만들고도 남을 규모지만 궁색한 산중이
라 공사가 더뎌 3년이나 걸린 것이다.

건물 내부에는 특이하게도 지장보살상 등의 독립적인 불상은 없고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
의 주요 식구를 한데 몰아 넣은 지장탱화가 전부이다. 이 탱화는 1983년에 김원각, 김석담이 조
성한 것으로 다른 건물의 탱화와 마찬가지로 금칠로 도배를 했다. 다만 다른 것은 지장보살의
머리만 푸른 색을 입혔다는 것이다.


▲  명부전 지장탱화 - 명부전에서 지장탱화만 달랑 있는 경우는 처음 본다.

▲  약사전 앞에 놓인 옛 석탑의 흔적

명부전에서 1단계 더 올라서면 약사전이 나온다. 약사전 앞에는 옛 석탑의 흔적이 우수에 잠긴
채 놓여져 있는데, 두툼하게 생긴 지붕돌과 탑신(塔身)이 겨우 한 덩이씩만 남았다. 탑신이 지
붕돌보다 큰 것을 보면 아마도 제일 아랫층 탑신이었을 것이다.
그들에 대한 속시원한 정보가 없어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나 이 땅에 흔한 3층석탑이 아닐까 싶
은데,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절이 파괴되면서 같이 비극을 맞았을 것이며, 그때의 상황이
얼마나 참담했는지를 저들이 온몸으로 증명해준다.
이후 일부만 남은 채, 버려진 것을 비좌와 함께 수습하여 약사전 앞에 두었으며, 탑의 사라진
부분이 많아서 복원까진 엄두도 못내고 그저 승가사의 옛 유물로 한가로운 여생을 보낸다.


▲  나는 누구일까? 기억상실증에 걸린 비좌(碑座)

향로각 앞에는 비석을 받치던 비좌가 초췌하게 누워있다. 고색의 때로 가득한 이 비좌는 화강암
으로 3단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넓직한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무슨 비석의 아랫도리인지는 밝혀진 바는 없으나 고려 중기 승려인 탄연(坦然, 1070~1159)이 쓴
승가굴 중수비(重修碑)가 아닐까 여겨지며,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파괴되었을 것이다. 그때
윗도리가 몽땅 사라져 비석의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었고, 비좌 자신도 그 당시의 충격으로 기억
조차 상실했다.
 
사라진 비신과 이수(螭首)는 경내와 그 주변을 싹 뒤집으면 일부라도 나오질 않을까 싶은데, 그
작업도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  자연산 석굴인 승가굴에 터를 닦은 약사전(藥師殿)

약사전은 큰 바위 밑에 자리한 자연산 석굴(石窟)이다. 승가사를 세웠다는 수태가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쪼아 승가대사상을 새겼다는 창건 설화가 서린 오래된 굴로 승가굴(僧伽窟)이
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고려 중기에는 탄연이 이곳에서 수행하면서 정체가 아리송한 승가
굴 중수비를 남기기도 했으며, 조선 세종 때는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의 쾌유
를 빈 인연으로 약사전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하니 아마도 쾌유가 됐던 모양이다.

1960년대 이후 석굴을 크게 손질하여 안과 바깥에 돌로 벽을 쌓고, 승가대사상의 불단과 연화대
를 만들었으며, 그 앞에 기도를 올리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인등을 대사상 좌측에 배치해
내부를 환하게 밝혀준다. 석굴은 그리 넓지는 않으나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스하다.


▲  석조승가대사좌상(石造僧伽大師坐像) - 보물 1000호

약사전에는 승가사의 주요 보물인 석조승가대사좌상이 홀로 봉안되어 있는데, 정작 약사전의 주
인인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은 없고, 승가대사상이 약사불의 자리와 직무를 대신하고 있다.

약사전의 주인인 승가대사(僧伽大師)는 인도의 승려로 당나라로 넘어가 활약했다. 그의 덕이 대
단했던지 관음보살(觀音菩薩)의 화신으로 널리 추앙을 받았으며, 그의 인기가 신라까지 전해져
승가사를 세운 수태가 그의 상을 만들어 이곳에 봉안했다고 한다.
허나 이 석상은 전설과 달리 신라 후기가 아닌 1024년(현종 15년)에 지광(智光)이 동량이 되고
광유(光儒) 등이 조각을 했다. 조성 관련 내용은 광배 뒤쪽에 새겨져 있어 고려 초에 만들어진
확실한 조각품으로 당시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석상 높이는 76cm, 광배 높이는 130cm이다.


▲  인등의 강렬한 빛을 즐기고 있는 석조승가대사좌상

승가대사상은 하얀 피부의 석상으로 중간에 호분을 입힌 것으로 여겨진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
고 있어 지장보살의 이미지를 주고 있으며, 손자/손녀를 맞는 할머니와 같이 포근하고도 정이
넘치는 인상으로 그의 표정을 보면 속세에서 상처받은 눈와 마음도 보기좋게 정화될 것만 같고
그 앞에 다가서면 '아이고 힘들지?' 손으로 어루만지며 다독거려 줄 것 같다.

그의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살짝 뜨며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오똑하고
입술은 무척 붉으며, 볼살이 많고 광대뼈가 나왔다. 귀는 두건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고, 몸에
걸친 옷은 목 부분을 빼고는 노출된 부분이 없는데, 부처나 보살의 복장과 비슷하다.
연꽃이 새겨진 연화대(蓮花臺, 근래에 만든 것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오른손을 가슴
앞에 대고 있으며, 충북 제천 빈신사지(頻迅寺址)에 있는 4사자3층석탑의 석상과도 유사한 면을
보인다. 또한 상체가 길고 무릎이 넓어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철불(鐵佛)과도 비슷한 특징을 가
지고 있다.

대사상 뒤에 자리한 광배(光背)도 꽤나 명품이다. 커다란 배의 모양을 한 이른바 주형거신광배
(舟形擧身光背)로 신광(身光)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머리 뒤쪽인 두광(頭光)은 신광과
일부 교집합을 이루면서 둥근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앙증맞은 모습의 연꽃잎을 무늬로 두르고 그
바깥쪽을 덩굴무늬와 모란꽃 무늬로 치장했다. 또한 광배 외곽 부분에는 불꽃무늬를 정교하고
실감나게 새겨 광배의 아름다움을 더했다.

이 땅에 흔치 않은 오래된 승려상으로 약 1,000년의 지긋한 나이와 오랜 세월 어두컴컴한 석굴
에서 일광욕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살았지만 건강과 피부만큼은 젊은 불상이나 석상에 못지
않게 양호하여 대단한 노익장을 과시한다. 조선 중기에 일어난 2차례에 큰 전란으로 절은 사라
지기 바뻤지만 마애여래좌상과 함께 온전하게 살아남아 자리를 지켰고 이렇게 승가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지 꿀단지로 변함없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 석상은 예전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2호였으나 나중에 그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아 보물
로 승진했다. 그런데 지정 번호가 우연히도 딱 1,000호이다. 보물 등급 외에는 아직 1,000까지
간 문화재 등급이 없는데 (국보가 300, 사적이 500, 서울 지방유형문화재가 300단위) 매우 흔한
숫자이지만 결코 쉽게 꿰찰 수 없는 번호를 차지한 것이다. 외우기도 쉽고, 기억하기도 좋고,
게다가 이 땅의 사람들이 많이 쓰는 숫자이니 이런 우연이 참 어디에 있을까 싶다.


♠  고려 초기에 조성된 거대한 마애불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 보물 215호

▲  마애불로 올라가는 108계단의 위엄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약사전을 나와서 향로각 앞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장대하게 펼쳐진 계단이 마음을 놀라게 만
든다. 그 계단은 절에서 좋아하는 숫자인 108계단으로 그 계단의 끝에 승가사의 꿀단지인 구기
동 마애여래좌상이 집채만한 바위에 둥지를 틀었다.

연화교(蓮花橋)란 볼록 튀어나온 조그만 다리를 건너 108계단에 임하면 되는데, 그렇게까지 각
박한 경사도는 아니어서 그리 힘들지는 않다. 속세의 부질없는 삶처럼 서두르지 않고 쓸데없는
자존심을 곱게 접어 천천히 한 계단씩 임하다보면 멀리 보이던 마애불이 마치 해가 떠오르듯 크
고 웅장하게 솟아오르고, 계단의 끝에 이르면 마애불의 거대한 위엄에 다시 한번 눈과 마음을
놀라게 만든다.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의 위엄

승가사 북쪽에 자리한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하 마애불)은 경내와도 1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
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으로 승가대사상과 더불어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의 하
나지만 지정 명칭은 '승가사 마애여래좌상'이 아닌 지역 이름을 딴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다.
보통은 그 불상을 소유하거나 관리하는 절의 이름을 앞에 붙이기 마련인데, 경내와 약간의 거리
를 두고 있고, 승가사의 소유가 아닌 국가 소유로 되어 있어 지역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지정
명칭은 몇년 전까지만 해도 '구기동 마애석가여래좌상'이었으나 지금은 마애여래좌상으로 무려
2글자나 줄였다. (정식 지정 명칭은 '서울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이 마애불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서울에서는 삼천사지(三千寺址) 마애여래입상 다음으로
(또는 비슷한) 연세가 높은 마애불(磨崖佛)이다. 승가대사상과 더불어 승가사의 장대한 내력을
과시하는 산증인으로 승가대사상은 조성 관련 글씨라도 있지만 이 불상은 그것 마저 없어서 누
가 더 형인지는 모른다. (아마도 승가대사상이 1살은 더 오래 살지 않았을까?)

직각을 이루며 솟아난 거대한 바위의 남쪽 피부에 얇게 홈을 파고 돋음새김으로 도드라지게 결
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불상을 새겼는데, 그의 건강을 위해 전실(前室, 보호각)을 만들고
머리 위에 8각의 머릿돌을 끼어 얼굴을 보호했다. 그러다보니 건강 상태는 매우 양호하며, 피부
도 얼굴 일부를 빼고는 하얀 편이다. 거의 20년 만에 만난 그였지만 여전히 정정한데 반해 나는
10대 꼬마에서 30대의 한복판으로 적지 않게 늙어있었다.

그의 갑옷과 같던 보호각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사라지고 보호각을 끼던 구멍 4개만
윗쪽과 중간에 아련하게 남아있다. 조선 중기 전란 때 파괴된 것이 아닐까 싶지만 마애불에 적
당한 외상이나 불에 그을린 흔적이 없어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거나 자연재해로 무너진 것
으로 보인다.


▲  마애여래좌상의 얼굴 (양쪽에 보이는 구멍 4개가 보호각의 흔적)

마애불의 얼굴은 후덕한 인상의 승가대사상과 달리 조금 경직되고 근엄한 표정 같다. 이마 중간
에는 백호가 살짝 찍혀 있고, 진한 눈썹은 무지개처럼 구부러져 있으며, 두 눈은 감겨 있어 눈
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코는 끝이 두툼하고 입술은 두꺼우며, 붉은색을 칠한 흔적이 있는지 빨
간 기운이 조금 남아있다. 귀는 중생의 소리를 모두 들으려는 듯 어깨까지 축 내려왔으며, 볼살
이 좀 많다.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껍게 솟아 있는데, 바로 위에 8각의 머릿돌을 끼워넣어
앞으로 크게 노출시켜 그의 모자로 삼았다. 모자가 큰 덕분에 얼굴에는 세월이 훈장처럼 달아준
검은 여드름이 여럿 있는 것 외에는 멀쩡하며, 피부도 하얗다. 그리고 모자 밑부분에는 연꽃 무
늬를 새겼다.
몸통과 머리를 잇고 있는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어깨는 꽤나 단련을 했는지 당당하
고 듬직한 모습이다. 불상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 어깨와 가슴, 젖꼭지를 속시원히
드러내고 왼쪽 어깨를 옷으로 가린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옷 스타일을 하고 있는데, 우
견편단은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이 단연 으뜸으로 신라 후기부터 고려시대 불상에 많이 나타난다.
몸에 걸친 옷은 얇은 편으로 왼쪽 어깨와 배, 두 다리를 가리고 있으며, 왼팔에 묘사된 옷주름
은 세로로 그어져 있어 기하학적인 추상성(抽象性)을 드러내고 있다.


▲  마애불의 가슴과 아랫부분, 그리고 연화대(蓮花臺)

가슴을 비롯한 상반신은 아주 묵직한 모습으로 거대한 마애불의 위엄을 더욱 드높인다. 허리는
밑부분이 쏙 들어가 괜찮은 몸매를 보이고 있으며, 팔은 강철처럼 매우 두꺼워 보인다. 그리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왼손은 배꼽 밑에 두어 이른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제스쳐를 취했
다. 또한 오른쪽 발바닥은 하늘을 향해 있는데, 발바닥을 훤히 드러낸 불상이 흔치가 않다.

불상이 앉아있는 연화대좌(蓮花臺座)는 꽃잎이 하늘을 향하고 있는 앙련(仰蓮)이 윗쪽에, 반대
로 꽃잎이 땅을 향한 복련(伏蓮)이 밑에 있는데, 연꽃무늬가 2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연꽃잎도 너무 화사하기 그지 없어, 적당하게 색만 입히면 진짜 연꽃이 따로 없을 듯 싶다.

기존 전통의 불상 양식에서 추상성을 조금 보태어 웅장하게 만든 마애불로 고려 초기의 대표적
인 마애불이자 준수한 작품으로 일찌감치 인정받아 북한산에 있는 불교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먼
저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받았다.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과 태고사 원증국사탑비는 1980년
대에 지정됨) 게다가 상태도 양호하고 선각(線刻)도 선명하여 조성된 지 얼마 안된 따끈따끈한
불상 같다.

고려 초/중기에는 전국적으로 커다란 마애불과 석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이는 지방 세력의 일종
의 세력(勢力) 과시용으로 비슷한 모습이 아닌 지역마다 다른 색을 보여 개성도 강하다. 구기동
마애불 역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당시 서울 지역 세력의 지원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기도 하며,
승가사가 고려 왕실과도 적지 않은 인연이 서린 절이라 제왕과 왕실의 지원으로 수준 높은 석공
들을 투입하여 조성했을 가능성도 높다. 당시 서울은 남경(南京)이라 불리는 고려의 주요 도시
의 하나였고, 고려의 제왕들이 종종 순행을 했던 곳이다. (남경의 중심지는 서울 종로구의 경복
궁, 청와대 일대로 여겨짐)

마애불을 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고려 초기에는 지금처럼 장비와 기술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
다고 바위가 불상을 새기기 좋게 일부러 드러누웠던 것도 아니다. 줄을 매달고 올라가 일일히
정을 대고 쪼아야 되는데, 그것도 그리 쉽지가 않다. 거의 몇년에서 10년 이상은 족히 걸렸을
것이며, 지극한 정성이 아니면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고려 석공(石工)의 뛰어난 능력과 정성,
그들이 공사에 전념하게끔 뒤를 받쳐준 승가사와 지원 세력이 합작으로 이루어낸 대작품이라 할
것이며 이런 명품급 마애불이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마애불이 있는 바위 밑에는 근래에 돌로 벽을 쌓았고, 그 앞에 향로와 용이 휘감고 있는 돌기둥
을 만들어 단(壇)을 설치했다. 그리고 그 앞을 돌출시켜 양쪽으로 계단을 내었으며, 기도는 그
앞에 마련된 공간에서 하면 된다. 또한 바위 주변은 문화재 보호를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
으니 괜히 바위 꼭대기에 오르거나 불상을 만지는 짓은 하지 않도록 하며, 매일 오전 10시부터
11시(시간은 변경 가능)까지는 승가사에서 기도를 올리는 관계로 출입을 금하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2-1


▲  마애불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  승가사 마무리

▲  12지신상이 새겨진 동쪽 옛길
(경내 바로 밑쪽)

▲  12지신상의 하나로 어디론가 터벅터벅
가고 있는 말

마애불을 20분 정도 둘러보고 대웅전과 산신각 주변에서 조금 머물다가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
음을 기약하며 등을 돌렸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절이 아닌 속세이기 때문이다.

내려갈 때는 호국보탑으로 바로 내려가는 계단길 대신 동쪽 옛길로 갔다. 옛길은 조금 돌아가는
편이지만 예전에 승가사에 갈 때 꼭 거쳤던 길로 어차피 둘 다 호국보탑으로 이어진다.


▲  쌀가마니를 축내는 쥐새끼들 - 이 땅의 우울한 현실을 제대로 묘사한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
포대화상은 원래 호국보탑 부근에 있었다. 그러다가 호국보탑이 생기면서
옛길 중턱으로 터전을 옮겼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행복에 겨운 모습이
애를 여럿 둔 뚱보 엄마 같다.

▲  소나무가 숲을 이루는 승가산림초소 주변

▲  승가산림초소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길

절을 둘러보고 나오니 배가 슬쩍 고프기 시작한다. 그래서 남은 김밥과 과자, 물을 모두 꺼내서
싹 섭취를 하고 올라올 때와 다르게 수레길로 내려왔다. 수레길은 4발 수레를 위해 닦은 길로
경사가 가파르고 울퉁불퉁해 오르기가 쉽지 않은 길인데, 중간에 승가사 셔틀차량이 노인들을
여럿 태우고 뒤뚱거리며 지나간다. 아무리 수레를 위한 길이라도 경사가 급하고 노면 상태가 고
르지 못해 운전도 꽤 쉽지가 않을 것이다.

수레길을 20분 정도 정신없이 내려가니 승가산림초소에 이른다. 여기서부터 잠시 소나무가 송림
(松林)을 이루는데, 그들이 아낌없이 불어주는 솔내음에 정신과 마음이 약간이나마 개운해진다.
산림초소에서 5분 정도 내려가면 혜림정사란 조그만 절과 함께 빌라와 주택들이 시야를 가린다.
자연에서 아비규환의 속세로 완전히 내려온 것이다. 여기서 빌라를 끼고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구기동계곡이 나오며, 계곡 끝에서 비봉길로 들어서면 구기터널3거리로 이어진다.

비록 찰라와 같은 짧은 코스였지만 엄연히 등산도 했고 시간도 18시가 넘었으니 근사하게 저녁
뒷풀이를 해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디서 먹을까 고심하다가 예전에 가본 적이 있는
옛날민속집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두부음식으로 유명한 식당으로 구기터널에서 신영3거리로 가
는 길목에 있다.


▲  옛날민속집에서 먹은 보리밥의 위엄

무엇을 먹을까 즐거운 고민을 하다가 오랜만에 보리밥을 먹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보리밥을 먹
은 지도 꽤 되었다. 그리고 잠깐이긴 하지만 산도 탔으니 동동주로 목을 시원하게 축여야 밥맛
이 더욱 날 것읻. 그래서 동동주도 1병 주문했다.

5분 정도 지나자 제일 먼저 동동주와 밑반찬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밑반찬이 예전보다 많
아졌네? 알고보니 오른쪽의 전과 김치, 하얀 묵 등 6가지는 원래 밑반찬이고, 왼쪽 5그릇은 보
리밥에 비벼먹을 나물로 콩나물과 당근, 생채, 상추 등 7가지에 이른다. 그래서 찬이 많아진 것
이다.
그리고 잠시 뒤 저녁 식사의 주인공인 보리밥과 비지찌개가 등장한다. 보리밥은 커다란 양은 냄
비에 담겨져 있는데, 담긴 양은 냄비가 아까울 정도로 적다. 보리밥 외에 구수한 된장찌개와 콩
비지가 따라 나왔는데, 이들은 모두 보리밥용으로 보리밥에 딸려 나오는 나물과 찌개가 많으니
가격에 비해 본전 뽑기는 좋다. (단 고기는 없음)

보리밥에 나물 7가지와 콩비지, 된장찌개를 넣고 고추장으로 버무리니 어엿한 비빔밥이 되었고
적어보이던 밥도 그들이 더해져 양이 남부럽지 않게 늘었다. 거기에 누런 동동주까지 겯드리니
정말 제왕의 밥상이 부럽지 않다. 열심히 먹고 보니 밥그릇은 맨바닥을 드러냈고, 나물과 반찬
도 겨우 일부분만 남았을 뿐이다.
식사가 끝나자 누룽지와 수정과가 후식으로 제공되었다. 누룽지는 맛이 구수했고, 수정과는 맛
이 달고 시원해 단숨에 그릇을 비웠다.

이렇게 기분 좋게 저녁을 마치고 신영3거리로 나왔다. 시간은 어느덧 19시 반, 여기서 길음역으
로 넘어가 후배들과 작별을 고하고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니 이리하여 북한산(삼각산) 승가사 나
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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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와 조망이 일품인 서울의 숨겨진 명산, 호암산 (석구상, 한우물, 칼바위...)

 

~~~ 볼거리가 풍부한 서울의 숨겨진 명산, 호암산(虎巖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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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호암산 석구상

호암산성터

▲  호암산 석구상

▲  호암산성터


서울 시흥동과 신림동, 경기도 안양시에 걸쳐있는 호암산(虎巖山, 385m)은 삼성산(三聖山,
480m)의 일원으로 삼성산 서북쪽에 자리한다. 호암산이란 이름은 산세가 호랑이를 닮았다
고 하여 유래된 것인데, 다음의 사연이 걸쭉하게 전해온다.

때는 바야흐로 1394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가 개경(開京, 개성)을
버리고 서울(한양)로 도읍을 옮겼다. 서울에 와서 주변 지형을 살피니 한강 남쪽에 호랑
이를 닮은 호암산과 활활 타오르는 불 모양의 관악산(冠岳山, 629m)이 사이 좋게 서울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풍수지리(風水地理)적으로 서울을 크게 위협하는 존재로
봤던 것이다.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인 동명성왕(東明聖王)처럼 화살을 잘쏘며 무인(武人)으로써 크게
위엄을 날렸던 이성계, 허나 대자연이 빚은 호암산과 관악산의 패기에 그만 염통이 쫄깃
해지면서 서울을 지키고자 안간힘을 쓰게 된다. 그래서 비보풍수(裨補風水)에 따라 호암
산과 관악산 밑에 절을 짓고 연못을 팠으며, 광화문(光化門) 앞에 해태상을 세우고, 숭례
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우는 등, 그야말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이처럼 호암산에는 산의 매서운 기운을 누르고자 지은 호압사(虎壓寺)를 비롯하여 서울에
서 가장 크고 오래된 우물인 한우물, 비보풍수로 세워진 석구상, 신라 때 축성된 호암산
성터, 흔적만 아련히 남은 제2한우물터와 건물 유적, 호암산의 기운을 잠재우고자 기도를
올린 자리에 세워진 불영암,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처형된 프랑스 신부 3명이 묻힌 삼성
산성지(三聖山聖地) 등, 신라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옛 흔적들이 서려있어 이곳
의 중요성을 새삼 가늠케 한다. 
게다가 조망 또한 천하일품이라 서울 대부분과 안양, 광명, 부천, 인천(仁川)은 물론 북
한산(삼각산)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오며, 호랑이를 닮은 뫼답게 멋드러진 바위가 아
낌없이 포진해 있어 산행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근래에는 호압사 남쪽에 넓게 소나무숲을
조성해 산림욕장을 닦았고, 벽산5단지 기점에는 비록 인공이긴 하지만 호암산폭포가 조성
되어 호암산의 새로운 명물을 꿈꾼다.

호암산은 호압사를 비롯해 벽산5단지, 신우초교, 삼성산성지, 서울대, 석수역, 시흥3동에
서 안길 수 있으며, 깃대봉과 장군봉을 거쳐 삼성산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리고 2011년
11월에는 사당역에서 낙성대(落星垈), 서울대, 호압사, 산림욕장, 호암산폭포, 시흥계곡
을 거쳐 석수역까지 이어지는 관악산둘레길(13km)이 뚫리면서 북한산둘레길에 감히 도전
장을 내밀었다.


  부드러운 곡선의 호암산 남쪽 능선
 

▲  호암산 정상 입구에서 바라본 남쪽 능선

호암산 정상 밑에 자리한 호압사에서 한우물이 있는 호암산 남쪽 봉우리까지는 소나무 산림욕장
을 거쳐가는 것과 호압사 뒤쪽에서 정상 입구를 거쳐 가는 길이 있다. 각 길마다 장단점이 있겠
지만 좀 쉽게 가고자 한다면 산림욕장 길이 좋다.

호압사 남쪽에 넓게 터를 닦은 소나무 산림욕장은 솔내음이 진하게 나래를 펼치는 소나무 숲 사
이로 산책로가 실타래처럼 이어져 있고, 곳곳에 의자와 운동시설이 심어져 속인들의 편의를 제
공한다. 그리고 숲 남쪽에는 약수터가 있어 호암산이 베푸는 약수도 마실 수 있다. 그런데 1가
지 아쉬운 것은 약수터 주변을 흐르는 계곡을 자연 그대로 냅두지 않고 시멘트를 발라 둑과 물
길을 낸 것이다. 얼마나 보기가 흉하던지 애써 가꿔온 송림의 아름다움이 무색할 지경이다.


▲  호암산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시흥2동 벽산아파트를 비롯하여 금천구와 광명시 지역이 눈 아래 펼쳐진다.
 

▲  세상을 향해 머리를 들이민 호암산 남쪽 봉우리

반면 호압사 뒤쪽은 시작부터 꽤나 각박하여 힘겨운 산길을 올라야 되지만 그 거리는 10분 내외
로 짧다. 잠깐의 고통을 딛고 길을 올라서면 금세 호암산 정상 입구에 도달한다. 여기서부터 남
쪽 봉우리까지는 아주 느긋한 능선길(남쪽 능선)의 연속으로 능선을 따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
는 조망을 두 눈에 주어 담으며 거닐면 된다. 이 구간이 바로 호암산의 가장 큰 매력으로 산길
곳곳에 멋드러진 바위가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처럼 포진해 있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
은 정말 꿀맛이다.

내가 호암산에 퐁당퐁당 빠진 것은 잠깐의 고생 끝에 정상과 능선까지 오를 수 있고, 거기서 이
렇게 꿀 빠는 조망을 누릴 수 있으며, 능선의 곡선이 매우 부드럽고 느긋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래된 명소도 풍부하니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착한 산이다.


▲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1)
흐린 하늘 아래로 서울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영등포구 지역이 보인다.
호암산 능선에는 훤칠한 소나무부터 키가 작은 소나무까지 다양한 모습의
소나무가 뿌리를 내려 호암산을 아름답고 푸르게 수식한다.

▲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2)
시흥2동 벽산아파트와 금천구, 구로구, 광명시 지역


▲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3) 서울 금천구와 구로구, 광명시 지역

▲  두툼하게 솟은 호암산 남쪽 봉우리

▲  솔내음이 춤을 추는 호암산 남쪽 능선길


♠  호암산 석구상(石狗像)과 호암산성터 주변

호압사와 정상에서 부드러운 곡선의 능선을 더듬으며 남쪽 봉우리에 이르면 한우물을 200m 가량
앞둔 지점에서 산길이 2개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바로 사방을 난간으로 두룬 돌로 쌓
은 기단(基壇)이 나오고, 그 안에 호암산의 상징물인 조그만 석구상이 북쪽을 바라보며 정말 귀
엽게도 앉아있다.

지금은 돌로 만든 개의 상, 석구상으로 통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정체에 대해 말들이 조금 있는
모양이다. 예전에는 광화문 해태상과 마주 보게 하여 관악산의 화기(火氣)로부터 서울을 지키는
해태상으로 여기기도 했는데, 한우물을 발굴조사하면서 '석구지(石狗池)'라 새겨진 장대석(長臺
石)이 출토되었고, 시흥읍지 형승조(始興邑誌 形勝條)에는
'호암산 남쪽에 석견(石犬) 4두(四頭)를 묻어 개와 가깝게 하고자 하였으며 지금 현남7리(縣南
七里, 시흥동)에 사견우(四犬偶, 개의 형상 4개)가 있다'
란 기록이 있어 해태상이 아닌 석구상
으로 크게 무게가 쏠리고 있다.

석구상의 크기는 길이 1.7m, 폭 0.9m, 높이 1m 정도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발과 꼬랑지 부분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옆에서 바라본 석구상

▲  석구상 뒷부분의 위엄 (꼬랑지가 말려져 있다)

석구상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해태의 모습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고 완벽한 개의 모습이라 하기
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앞 모습을 보면 강아지의 모습 같기도 하지만 양과도 비슷해 보이
며, 어떤 이는 개구리를 닮았다고도 하니, 보면 볼수록 참 답이 안나오는 기이한 상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제 눈이 안경이라 사람마다 보이는 모습이 제각기 다를 것이다. 그의 뒷부분에
는 길다란 꼬리가 말려져 있는데, 이는 개의 꼬리가 아닌 고양이나 호랑이의 꼬리와 비슷하다.

석구상의 탄생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으나 대략 조선 중기 이후로 여겨진다. 그는 정
확히 북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데 정말로 광화문 해태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를
만든 이유도 딱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호암산의 기를 누르고 서울을 지키려는 비보풍수의 일환
으로 여겨진다.

석구상은 그 모습이 참으로 아담하고 깜찍하여 등산객들의 눈길을 제대로 잡아맨다. 보는 이들
마다 귀엽다는 말이 연거푸 터져 나오고,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적지 않은 웃음을 선사하며,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는 등 그의 인기는 좀처럼 식을 줄을 모른다.


▲▼  숲속 오솔길에 묻힌 호암산성터 - 사적 343호

석구상에서 바로 남쪽 능선길을 조금 가면 산길의 일부가 되버린 호암산성의 아련한 흔적을 만
날 수 있다. 흔적이라고 해봐야 성돌과 흙이 뒤섞인 1~2m 높이의 성터 윤곽이 전부로 이리저리
돌이 박혀있어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그냥 산길로 여기며 밟고 지나가기 일쑤다.

호암산성은 호암산 남쪽 봉우리에 둘러진 퇴뫼식 산성으로 자연 지형을 이용했다. 산성의 길이
는 약 1.250m로 지금은 300m 정도만 간신히 살아있다. 성곽은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쭉한 마름모꼴로 축성 시기와 목적은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없으나 1990년 봄, 한우물과 호
암산성 일대를 발굴하면서 우물 2곳과 건물터 4곳이 드러났고, 6,500여 점에 이르는 막대한 토
기와 갖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들 유물과 관련 기록을 통해 신라 중기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금천구청 자료에 따르면 672년(문무왕 11년) 신라가 당나라의 공격을 막고자 세운 요새
로 여기고 있는데, 당시 신라는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와 힘겹게 줄다리기를 하던 상황이었다.

조선시대에도 한우물과 관련된 여러 기록과 제2한우물터, 건물터 등의 흔적을 통해 산성이 그런
데로 구실을 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딱 1번 크게 쓰인 적이 있는데 바로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3년 1월로 이때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 오산 세마대(洗馬臺)>에서 왜군을 격파한 권율(權
慄) 장군이 서울을 수복하고자 행주산성(幸州山城)에 들어가 진을 치고, 전라병사(全羅兵使) 선
거이(宣居怡)에게 군사 4,000명을 주어 호암산성으로 보내 자신의 후방을 지키게 했다. 호암산
은 서울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호랑이 모양의 뫼답게 서울로 공격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왜란 이후, 산성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점차 그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조선 후기에 그 이름이 지
워지고 만다. 이후 산성의 운명은 지금의 상태가 여실히 말해준다. 버림을 받은 호암산성은 관
리 소홀과 자연의 무정한 장난, 그리고 세월의 덧없는 무게까지 더해지면서 서서히 녹아내려갔
고, 등산객들의 속절없는 발길이 성곽을 짓누르면서 담장만도 못한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아무
리 인간이 멋드러지고 견고하게 건축물을 세워도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일개 장난감에 불과하다.


▲  오르막을 타는 호암산성터

▲  호암산성 능선에서 바라본 매끄러운 곡선의 삼성산 줄기
삼성산 줄기 너머로 관악산 정상이 흐릿하게 보인다.

▲  호암산성 능선에서 만난 바위
바위 밑은 천길 낭떠러지이므로 주의 요망~

▲  제2한우물터 북쪽에 뿌리를 내린
옛 사람의 무덤


석구상에서 제2한우물터로 가는 길목에 조그만 무덤 1기가 뿌리를 내렸다. 삼성산이 있는 동쪽
을 바라보는 이 무덤은 대략 100여 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다른 무덤과 달리 산의 기맥이 이어
져 있지 않고 그냥 봉분(封墳)만 올린 조촐한 형태로 그 뒤쪽에는 바위가 누워있다.

무덤 앞에는 묘의 주인을 알리는 묘비가 없어 무덤의 자세한 정보는 알 수 없으며, 별다른 장식
이 없는 소박한 모습으로 보아 인근에 살던 백성의 무덤으로 보인다. 비석과 상석(床石) 대신
돌을 두툼하게 깔아 예를 올리는 공간을 마련했고, 봉분은 자연석으로 네모나게 호석(護石)까지
둘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이가 서로 맞물린 듯 불규칙해 보인다.


▲  호암산성 건물유적

호암산성터를 지나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호암산 남쪽 봉우리의 정상부이다. 이곳에는 잡초가
무성한 드넓은 공간이 있는데, 서쪽에는 제2한우물터가, 동쪽에는 건물유적이 있다.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지 수풀 속에 잠긴 건물유적에는 건물을 받쳤을 주춧돌과 건물터의
윤곽이 떠받들 대상을 상실한 채 옛날을 그리워하고 있으며, 나무에게 버림받은 낙엽들이 그 허
전한 빈터를 따스히 덮어주며 서로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이곳은 조선 때 호암산성을 관
리하던 관청이나 장대(將臺), 또는 군사들의 숙소나 창고로 여겨지며, 조선 후기에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  수풀 속에 묻혀 분간이 쉽지 않은 호암산 제2한우물터

건물유적 맞은편에는 제2한우물터가 있다. 호암산성이 버려진 이후, 땅 속에 묻혀 강제로 기나
긴 잠을 자다가 1990년 발굴조사로 다시금 햇살을 보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우물의 길이는 남북이 18.5m, 동서 10m, 깊이 2m에 이르며
산꼭대기에 하나도 아닌 2개의 커다란 우물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지금은 실
감이 나지 않지만 옛날부터 호암산의 중요성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물로 하늘에
제를 지내거나 기우제 등 여러 의식이 거행된 곳처럼 마냥 신비롭게 보여 우물 가까이 다가서기
가 두려울 정도다. 괜히 저곳에 내려가다가 천벌을 받거나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 같은 기분 말
이다.

제2한우물터는 발굴 이후, 한우물처럼 온전히 재현되지 못하고 풀이 무성하도록 방치되고 있으
며, 석축과 우물을 구성하는데 쓰인 돌들이 무수히 널려있다. 복원할 계획이 있다고는 하는데
그게 언제가 될지는 호암산 산신(山神)도 모른다. 어차피 복원된 한우물이 있으니 제2한우물은
그냥 저대로 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산 정상부에 둥지를 튼 거대한 옛 우물, 호암산 한우물
- 사적 343호

호암산 남쪽 봉우리 서쪽에는 호암산의 또 다른 상징물인 한우물이 누워있다. 여기서 한우물은
큰 우물이란 뜻으로 산 정상부에 이런 거대한 못이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천하가
훤히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해 있어 하늘의 우물인 천정(天井) 분위기도 물씬 풍기며, 이곳에 물
을 대줄 마땅한 수원(水源)도 없다고 하는데, 어디서 그 많은 물이 나오는 것인지 늘 물로 풍부
하다. 특히 가뭄 때도 물이 가득해 그 신비로움을 더욱 끌어올린다.

한우물은 천정, 용복, 용초 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7~8세기 경에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우물 자리 밑에서 신라 못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그 시절에도 못의 규모는 상당하여 동서 약
17.8m, 남북 약 13.6m, 깊이 약 2.5m에 달했다고 하며, 이후 조선 때 그 위에 새롭게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의 장방형 우물을 덧씌웠다.

1990년 봄, 한우물을 발굴할 때 12개 기종의 1,313점의 유물이 햇빛을 보고자 앞을 다투어 쏟아
져 나왔는데, 그중 '仍伐內力 只來..' 글씨가 새겨진 청동 숟가락이 나와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열쇠가 되었다. 또한 지표에서 30cm까지는 백자 파편을 비롯한 조선시대 유물이 많이 나왔다.


▲  불영암에서 바라본 한우물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3년 1월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가 권율 장군의 명으로 군사 4,000명
을 이끌고 호암산성에 머물 때, 이 우물을 사용했으며, 세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
勝覽)에는
'虎岩山 有固城 城內有一池 天早祈雨(호암산에 견고한 성이 있는데 성안에 연못이 있어 일찍이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다)'
란 기록이 있어 평시와 전쟁 때는 식수로 사용하고, 가뭄이 극성일 때
는 기우제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서울의 화재를 막으려는 방화용설(防火庸設)도 설
득력을 얻고 있다.
또한 석구지(石狗池)란 애칭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한우물에서 '석구지'라 쓰인 장대석이 나왔
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남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서는 제2한우물터가 발견되었다.

한우물은 식수용으로 태어난 곳이지만 현재는 그의 보호를 위해 식수로는 쓰지 않는다. 우물 남
쪽에는 갈대가 둥지를 트고 있어 운치를 드리우며, 북쪽에는 소나무 1그루가 우물을 거울로 삼
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그리고 우물의 건강을 위해 그 주위로 돌난간과 철제난간을 2중
으로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한우물이 있는 곳은 호암산 남쪽 봉우리로 천하를 굽어보기 좋은 곳이다. 속세가 한눈에 바라보
이는 벼랑에 한우물조망대가 터를 닦아놓아 이곳에 서면 금천구를 비롯한 서울의 서남부와 경기
도 광명시, 부천시 지역이 거침없이 바라보여 두 눈이 너무 호강을 한다. 우물 주변에는 벤치가
여럿 설치되어있어 간식에 막걸리 1잔 걸치며 잠시 쉬어 갈 수 있다.

한우물은 처음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호였으나 1991년 호암산성과 제2우물터, 건물유적을
한 덩어리로 묶어 사적 343호로 승진되었다. (지정명칭은 '서울 호암산성')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시흥 벽산아파트와 시흥동과 독산동, 광명시 지역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시흥동 벽산아파트와 금천구, 구로구, 광명시 지역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3)
가까이에 벽산1/2단지와 호암산 서북쪽 줄기가 보이고, 그 산줄기 너머로
관악구와 영등포구, 동작구 지역은 물론 멀리 북한산까지 시야에 잡힌다.
사진 오른쪽 부분에는 호암산의 감시초소인 호압사가 바라보인다.


♠  한우물과 명품급 조망을 든든한 후광으로 삼은 조그만 암자
~ 호암산 불영암(佛影庵)

▲  불영암 대웅전(大雄殿)

한우물 옆에는 그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암자, 불영암이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가파른 벼랑 위에 터를 다지며 속세를 향해 훤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호압사나 벽산아파트단
지, 호암로에서도 확 눈에 들어온다.

불영암의 내력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정보가 없어 파악하긴 힘들지만 관악산과 호암산의 기운으
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니 서울에 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런 것을 보면 호랑이가 담배타령을 하던 조선 초기부터 조촐하게 기도처가 있었던 모양으로
호압사가 보일 정도로 가까우니 아마도 호압사 승려의 수행처 역할을 했던 곳으로 보인다. 보통
100년 이상 묵은 절은 그 내력을 담은 안내문을 절 앞에 당당하게 내걸지만 그런 것도 없는 것
으로 봐서는 1950년대 이후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가 무지 짧은 손바닥만한 암자로 대웅전과 산신각(山神閣), 요사(寮舍)로 쓰이는 작은 건물
이 전부이며, 그나마 대웅전만 불전(佛殿)의 분위기가 진할 뿐이다. 게다가 절이 들어앉은 위치
도 건물을 크게 짓거나 사세를 늘리기도 여의치 않은 협소한 수준이다. 허나 한우물이 곁에 있
어 물수급은 어렵지 않고, 벼랑에 자리한 탓에 조망 하나는 몸살이 날 정도로 좋다. 그러니 한
우물과 휼륭한 조망, 그리고 기존의 기도처를 후광으로 삼아 절을 세웠을 것이다.

이곳 높이는 해발 310m 정도로 서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절이다. 예
전에는 대웅전과 요사만 있던 볼품 없는 모습이었으나 2009년 이후 대웅전 뒤쪽 바위에 커다란
불두(佛頭)를 얹히고, 절 앞에 돌탑을 심어 돌탑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2011년에는 제2한우물
터 주변에서 발견된 절구통과 맷돌, 모서리돌 등을 돌탑 앞에 두어 오래된 볼거리를 추가했다.
특히 고려불화의 유일한 전수자인 승려 여지(如智)가 2005년에 그린 '104위 신중탱화(神衆幀畵)
'가 있어 눈길을 끈다.

불영암은 한우물의 이웃으로 그를 지켜주고 있으며, 조망은 천하 일품이라 절의 규모는 눈송이
같지만 뜨락 하나만큼은 천하 제일이다. 게다가 대웅전 옆에는 보기만 해도 정겨운 부뚜막을 설
치해 검은 가마솥으로 밥을 짓고 있는데, 인근에서 가져온 나무 장작으로 불을 땐다고 한다. 부
뚜막 옆에는 장작이 담을 이루고 있어, 심산유곡의 화전민 마을에 들어선 기분이며, 부뚜막이
장작을 먹어 모락모락 구름을 피어내면 나도 모르게 시장기가 돌면서 입 안에 침이 고인다. 또
한 국수와 부침개, 식혜, 커피 등을 파는데, 커피는 500원, 국수와 부침개는 3,000원선이다.


▲  돌탑거리를 이루고 있는 불영암 앞길과 순찰중인 견공(犬公)

▲  바위에 머리만 꽂은 불영암 석불(石佛)

대웅전 우측 바위에 2009년에 만든 석불이 서쪽을 굽어본다. 석불이라고 하나 바위에 커다란 불
두만 심은 형태로 바위는 그의 자연산 몸뚱이가 되었다. 바위에 접착된 불두 주변에 하얀 석고
등이 가득해 다소 이질감은 들지만 장대한 세월의 흐름은 저들을 완연한 하나의 존재로 만들 것
이다. 석불 앞에는 키 작은 소나무가 하늘로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옆으로 쳐져있는데, 그 모습
이 마치 불상에 예를 올리는 듯 하다.


▲  불영암 돌탑거리

▲  제2한우물터 부근에서 수습된 절구통(절구석)의 일부와 모서리돌
불영암 주지승과 처사가 발견한 유물로 신라 후기 것으로 여겨진다.

▲  제2한우물터 건물유적에서 발견된 절구통(절구석)과 맷돌

돌탑 앞에 놓인 절구통과 맷돌은 호암산성 군사들이 쓰던 것들로 시흥동 주민이 발견하여 불영
암에 알렸다. 그래서 2010년 이곳으로 수습했는데, 신라 또는 조선시대 것으로 여겨지며 다른
절구통과 달리 금, 은, 동, 철의 성분이 많아 상당히 무겁다고 한다. 옆에 맷돌은 어처구니를
상실한 채, 열심히 돌아가던 왕년을 그리워한다.


▲  불영암에서 바라본 호암산 북쪽 줄기, 그 중간에 호암산을 감시하는
호압사가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다.


♠  날카로운 모습의 바위이자 호암산의 또 다른 명물 ~ 칼바위

▲  예리한 칼날 같은 칼바위 (바로 밑에 벽산5단지)
서울을 위협하던 호암산의 날카로운 발톱은 아닐까?

불영암에서 5분 정도 내려가면 칼바위 조망대가 나온다. 바로 그 밑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피가
나올 것 같은 예리한 기세의 칼바위가 자리해 있는데, 가파른 산등성이에 아슬아슬하게 자리해
있어 자칫 살짝만 건드려도 밑으로 쿨하게 굴러떨어질 것 같다. 이 바위는 위에서 보는 것보다
는 밑에서 봐야 그 위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데, 그 모습이 당장이라도 속세를 향해 칼질을
벌일 것 같은 기세라 보기만 해도 염통이 긴장을 한다.

이런 바위에는 옛사람들이 붙인 그럴싸한 전설이 있기 마련이라 다음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한토막 전해온다.
때는 임진왜란 시절, 왜군이 시흥(始興) 고을<당시 시흥(금천)의 중심지는 시흥동>까지 쳐들어
오자 장사 1명이 혼자서 왜군을 때려잡으며 분투를 벌였다. 이에 염통이 쫄깃해진 왜장은 장사
가 이기면 무조건 물러가겠다는 조건을 달며 칼바위에서 턱걸이 내기를 제안했다. 그래서 장사
와 왜군 대표 병사와 손에 땀을 쥐는 턱걸이 승부를 벌였는데, 왜군이 100번째 턱걸이를 하려는
순간 힘이 다해 바위 밑으로 떨어져 죽었다. 그때 바위 끝이 쪼개져 나갔다고 전한다.
내기에서 진 왜군은 분을 삼키며 철수를 하자 긴장이 풀린 장사는 소변을 보았는데, 그 줄기가
얼마나 강했는지 바위 한가운데가 움푹 패여 나갔다고 하며, 그 바위가 인근에 있는 팽이바위라
고 한다.

칼바위가 세워진 틈새는 매우 좁아보이지만 속은 매우 넓어서 6.25시절 이곳에 숨어 지낸 사람
도 여럿 있었다고 전한다. 허나 바위는 위치상 출입 통제구역이라 그것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  칼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1) - 벽산5단지와 금천구, 광명시 지역

▲  칼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2) - 시흥동, 광명시 소하동, 구름산과
가학산 산줄기, 그리고 일몰

※ 호암산 찾아가기 (2013년 12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3번 출구)에서 152번 시내버스를 타고 호압사입구나 벽산5단지 하차
*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3번 출구)에서 5517, 6515번 시내버스를 타고 호압사입구나 벽산5
  단지(6515번만 해당) 하차
* 지하철 1호선 금천구청역에서 금천구 마을버스 01번 청색 차량을 타고 호압사입구 하차
* 올라가는 코스
① 호압사 → 소나무 산림욕장 → 약수터에서 왼쪽 → 호암산 남쪽 능선 → 한우물 (35분)
② 호압사 → 호암산 정상 → 호암산 남쪽 능선 → 한우물 (40~45분)
③ 벽산5단지 → 칼바위 → 한우물 → 석구상 → 호암산 남쪽 능선 → 호암산 정상 (45분)
* 한우물에서 내려가는 경우
① 한우물 → 칼바위 → 벽산5단지 또는 시흥5동
② 한우물 → 제2한우물터 → 남서울약수 → 석수역
③ 한우물 → 호암1터널 → 관악산둘레길 경유(시흥계곡) → 석수역

* 호암산성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산 83-1외
* 한우물과 불영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산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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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12월 1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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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산사 나들이 ~ 고성 연화산 옥천사 (공룡발자국화석, 연화산 숲길)

 

' 늦가을 산사 나들이 ~ 고성 연화산 옥천사(玉泉寺) '

  옥천사 대웅전  
옥천사 전나무숲길과 계단

▲ 옥천사 대웅전
옥천사 전나무 숲길과 계단
▶ 옥천사 독성각, 산령각

옥천사 독성각과 산령각


늦가을이 한참 절정을 쏟아내던 10월 끝무렵에 경남 고성(固城) 옥천사를 찾았다. 마산남부터
미널에서 통영행 직행버스를 타고 고성 북쪽 관문인 배둔에서 내려 개천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기다렸다. 차는 거의 1시간 마다 있는데, 마침 20분 뒤에 있다.
차를 기다리기 심심하여 정류장 화단에서 놀고 있는 잠자리를 희롱하며 노닥거렸는데, 화단에
서 놀던 잠자리는 5마리였다. 잡힌 잠자리는 자비를 베풀며 무조건 석방시켰으나 그들은 멀리
가지 않고 주변에서 놀다가 또 내 손에 잡힌다. 그렇게 잡고 풀어주는 것을 반복하여 20여 번
정도 잡았으니 1마리 당 거의 4~5번 나의 거친 손을 거쳐간 셈이다.

드디어 개천행 버스가 정류장에 바퀴를 들이자 한 주먹거리도 안되는 잠자리 사냥을 그만두고
버스에 오른다. 버스 승객은 나를 빼고는 모두 노공(老公)들.. 내가 승객의 평균 연령치를 크
게 깎아준 셈이다.
버스는 외마디 부릉 소리를 배둔정류장에 남기며 1007번 지방도를 따라 마암면을 지나 개천면
으로 간다. 연화산의 품으로 바로 들어서는 듯 싶더니 좌연리에서 갑자기 우회전하여 교행 조
차도 불가능한 조그만 시골길을 거침없이 질주한다. 좌연리에서 바로 질러가면 옥천사 입구인
데 생각치도 못한 곳으로 강제 투어를 당하니 나도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버스는 그런 날 외
면하며 봉치리와 용안리 구석구석을 강제 구경을 시켜주고 나서야 다시 1007번 지방도로 복귀,
옥천사3거리에 나를 내려놓는다.


♠  연화산(蓮花山)의 품으로 들어서다

▲  옥천사 입구에서 바라본 연화산(528m)

옥천사3거리에서 다리를 건너면 본격적으로 연화산 나들이가 시작된다. 가을 추수의 기쁨을 누
린 전답과 시골집들, 옥천사 관광객을 겨낭한 찻집과 주막들을 반대 방향으로 흘려 보내며 15분
정도 살랑살랑 걸으면 계곡 건너로 주차장과 숙박촌이 자리한 연화산 집단시설지구가 나타난다.
공룡상이 있는 다리를 건너 주차장으로 들어서면 서쪽 가장자리에 공룡발자국화석이 있으니 그
것도 반드시 살펴보도록 하자.


▲  주차장 다리 앞에 놓인 귀여운 공룡상

▲  방생장(放生場) 비석과 돌탑들

주차장 입구에는 10여 기의 돌탑과 방생장 비석이 자리해 있다. 방생은 살려서 놓아준다는 의미
로 이곳이 계곡 옆이니 여기서 방생의식을 했던 모양인데, 그 비석 피부에는 붉은 글씨로 '崇禎
紀元後 四 辛酉 四月(숭정 기원후 4신유 4월)'이라 쓰여 있어 1861년 4월에 만든 것 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 의종(毅宗)의 연호로 1628년부터 명나라
가 풍비박산이 난 1644년까지 쓰였는데, 명이 사라진 이후에도 조선 조정과 사대부(士大夫)들은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과 명에 대한 아주 꼴사나운 꼴통 사대주의(事大主義)로 '숭정'이란 연호
는 무려 20세기 초까지 두고두고 우려먹었다. 그리고 '四 辛酉(4신유)'는 1628년 이후 4번째 신
유년이란 뜻으로 계산을 하면 1861년이 된다.


▲  옥천사계곡 공룡발자국 화석지

주차장 서쪽 계곡 암반에는 1억년 전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의 발자국 화석(化石)이 있다. 이들
은 용각류(Sauropoda, 잡식성 공룔) 공룡의 발자국들로 바위 표면이 울퉁불퉁하고 얕게 패인 부
분이 그들의 발자국이다. 그리고 화석이 있는 암반 위쪽에는 중생들이 정성스레 얹힌 돌탑들이
널려 있다.


▲  공룡발자국 화석을 품은 계곡 암반

▲  공룡의 발자국화석
그들의 발자국 하나가 내 얼굴보다 크다. 여기서 뛰어 놀던 그들은 전설처럼
사라지고 그들의 발자국만 남아 아련하게 그 시절을 읊어줄 따름이다.

경남 고성은 스스로 공룡나라를 칭하며 공룡을 고을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고성은 우리나라 최
초로 공룡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곳으로 고을 전역에서 발견된 것만 5,000여 개에 달해 미국 콜
로라도, 아르헨티나 서부해안과 더불어 세계3대 공룡발자국 화석 산지(産地)로 손꼽힌다. 게다
가 바닷가에 있는 상족암은 공룡 화석의 성지(聖地)로 고성공룡박물관까지 들어서 있다. 이렇게
공룡의 흔적이 부지기수로 많으니 고성이 공룡나라를 칭하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하다.


▲  인간의 상상으로 깜찍하게 포장된 공룡

공룡발자국화석지 옆에는 깜찍한 공룡상이 있다. 그들은 우리와 마주칠 일도 전혀 없는 먼 옛날
의 존재로 가볍게들 생각하고 있지만 만약 인간과 공룡이 공존을 한다면 분명 호환마마 그 이상
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렇게까지 귀엽게 만들지도 않았겠지. <공룡(恐龍)의 공(恐)은 매우
두려워한다는 뜻임>


▲  옥천소류지(沼溜地)

▲  매표소 쪽에서 바라본 옥천소류지

집단시설지구 주차장에서 5분 정도 오르면 옥천사계곡물을 모은 저수지가 나온다. 그의 명칭은
옥천소류지로 연화산이 베푼 계곡물이 옥천사를 끼고 졸졸졸~♪ 흐르다가 이곳에 모여 끝없는
대장정을 준비한다. 늦가을의 절정을 누리며 처절한 아름다움을 비치는 나무들과 알을 품은 어
미새처럼 푸근하기 그지없는 연화산 산줄기는 수면에 비친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으며 몸단장에
여념이 없고, 삼삼한 숲에 둘러싸인 호수의 자태는 첩첩한 산중에 안긴 비밀의 호수처럼 신비롭
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옥천소류지의 경치에 취한 것도 잠시~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가 내 흥을 깨뜨리며 발길을 막는
다. 바로 옥천사매표소이다. 매표소에는 아저씨 1명이 지키고 있었는데, 입장료를 보니 무려
1,300원(학생은 1,000원)이다. 입장료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고성읍 무량리(우리 집안 고향임)
가 집안 고향이라 들이대면서 슬쩍 대학생 할인 여부를 물으니 고향과 본관이 고성이란 말에 아
저씨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오늘은 평일이고 하니 그냥 들어가라고 그런다. 뜻밖에 호의에 감
사의 뜻을 표하고 별탈없이 매표소를 통과했다.


▲  옥천사 일주문(一柱門)

매표소를 지나면 옥천사 주차장이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으로 오르면 옥천사의 관문인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이 문은 1984년에 지어진 것으로 현판에는 '연화산 옥천사'라 쓰여 이곳의 정체를
밝혀주며, 문을 들어서면 아름답기 그지 없는 옥천사 숲길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  가는 길목에 중생들의 목을 축여주는 샘터도 있다.

옥천사 숲길은 하늘을 가리며 솟아난 늘씬한 나무들로 거대한 수해(樹海)를 이룬다. 숲 밖은 훤
한 대낮이지만 숲 안은 오히려 그늘지게 어두워 따사로운 햇빛마저 우걱우걱 삼켜버린다. 산사(
山寺)로 가는 숲길 치고 아름답지 않은 길은 거의 없겠지만 옥천사 숲길은 그중에서도 천하 으
뜸이라 할 정도로 아름다움이 깊다. 길을 가다가 선녀 누님이 툭 튀어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나무들이 베푼 선선한 산바람에 번뇌는 날려가지 않으려고 발악을 한다. 허나 결국은 날려간 모
양이다. 마음이 가뿐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멀리 날라가지는 못하고 매표소 밖 소류지에서 물
놀이를 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번뇌의 무게가 참 무겁긴 무거운 모양이다.

숲길 중간에는 샘터가 있다. 연화산이 중생들의 갈증을 우려하여 베푼 옥계수로 석조(石槽)에는
늘 물로 가득하다. 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마시니 몸 속의 온갖 때가 싹 가신 듯 마음이 시원
하다. 샘터를 지나면 길 왼쪽에 사적비와 부도군이 있으며, 부도군에는 조선 후기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의 승탑(부도)들이 시간을 초월하며 어깨를 나란히 한다.


▲  옥천사 사적비와 부도군(浮屠群)
옥천사의 내력이 적힌 사적비와 옥천사와 인연이 깊은 승려의 승탑(僧塔)이
숲속에 터를 닦았다.


♠  옥천사 입문 (천왕문, 범종루 주변)

▲  천왕문(天王門)

일주문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절의 2번 째 문인 천왕문이 마중한다. 이 문은 1989년에 만든 것
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문 안에는 천왕문의 주인이자 부처를 수호하는
사천왕(四天王)이 눈을 부아리고 중생을 검문하며, 문 앞에는 속인(俗人)들이 끌고 온 수레들이
뒷꽁무니를 들이밀며 바퀴를 접고 쉬고 있다.

▲  사천왕(四天王)의 위엄
왼쪽부터 보탑(寶塔)을 들고 선 다문천왕(多聞天王), 비파 연주의 달인 지국천왕(持國天王),
칼의 달인 증장천왕(增長天王), 철쇄(鐵鎖) 비슷한 것을 든 광목천왕(廣目天王)

▲  증장천왕 발에 짓밟힌 악귀(惡鬼)

사천왕은 부처 및 불법을 지키는 경호대장에 걸맞게 대단한 외모과 풍채를 자랑한다. 눈초리가
매섭긴 하지만 쳐다보면 볼 수록 정이 드는 밉지 않은 얼굴이다. 허나 사천왕에 밟힌 악귀들은
사정이 그렇지를 못해 한결같이 인상들이 더러운데 그들 눈빛은 원망과 살기로 가득해 보인다.


▲  붉은 벽돌담에 둘러싸인 비각(碑閣)

        ◀  비각에 안긴 선경비(善敬碑)
천왕문을 들어서면 붉은 벽돌 담장에 둘러싸인
조그만 비각을 만나게 된다. 비각 안에는 지붕
돌을 얹힌 비석이 안겨져 있는데, 이 비는 옥천
사에 시주를 많이 한 어느 사대부를 기리고자
세운 것이다. 비문 내용은 '贈 戶曹判書 安公
善敬碑'라 쓰여 있어 나중에 호조판서로 추증(
追贈)된 안씨 성을 가진 사대부가 비석의 주인
임을 알 수 있는데, 비석이 세워진 것은 1922년
이다.

비각 앞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는데, 그렇
다고 선경비를 위해 세워진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 자리는 원래 제왕의 수복(壽福)을 빌던 축성
전(祝聖殿)이 있던 곳이라 그 앞은 무조건 말에
서 내리라는 뜻의 하마비를 세운 것이다.


▲  축성전터를 지키는 하마비의 위엄
지체 높은 고관대작(高官大爵) 마저 꼼짝 못하게 만든 하마비 3글자에
자못 위엄이 서려 보인다.

◀  경내를 목전에 둔 전나무 숲길

비각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길 좌우로 늘씬하게
솟은 전나무가 조촐하게 숲길을 이룬다. 비록
10m 남짓의 짧은 거리지만 소소하게 멋을 풍기
며 옥천사의 아름다움을 수식하는데 일조한다.
가을도 반하여 머무는 그 숲길 바닥에는 한 시
절 폼나게 살다간 낙엽들이 깔려 알록달록 카페
트를 이룬다. 귀를 접고 누운 낙엽을 보면서 올
해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실감나게 하니
세월의 자비 없는 조급함에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그런 숲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자방루 뜨락이
나온다.


▲  범종각(梵鍾閣)

전나무숲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연병장처럼
넓은 자방루 뜨락이 펼쳐진다. 뜨락 왼쪽에는
범종각이 자리해 있는데, 범종(梵鍾)과 법고(法
鼓), 운판(雲版), 목어(木魚) 등 사물(四物)이
담겨져 있다. 범종 같은 경우는 1776년에 주조
된 대종(大鐘)이 있었으나 현재는 보장각에 있
으며, 1987년 재일교포 박명호가 시주하여 만든
종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박명호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이곳을 자주 찾았다고 하는데 당
시의 추억을 잊지 못해 거금을 시주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물 외에도 조선 때 싸리나무로 만든
큰 구시가 있는데, 이것은 큰 불사나 법회 때
밥이나 물을 담던 커다란 나무 통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옥천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자방루 뜨락 좌측에 자리한 샘터


※ 연화산에 안긴 고성 제일의 고찰, 옥천사(玉泉寺) - 경남 지방기념물 140호
고성 제일의 명산(名山)인 연화산(蓮花山) 북쪽 자락에 고성 사찰의 갑(甲)인 옥천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이 절은 676년(문무왕 15년)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10년에 걸친 당나
라 유학생활을 마치고 670년에 귀국하여 화엄종(華嚴宗)을 널리 알리고자 영주 부석사(浮石寺)
를 시작으로 좁아 터진 신라(新羅) 땅에 10개의 화엄종 사찰을 지었는데, 옥천사는 그중의 하나
로 세워졌다고 한다. 절의 이름은 지금도 이곳의 명물로 꼽히는 옥천(玉泉)이란 샘에서 유래되
었다고 하며, 과연 의상이 창건했는지는 속시원히 입증할 수는 없지만 최치원(崔致遠)이 하동
쌍계사(雙磎寺)에 남긴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 국보 47호)에 '쌍계사는 본래 절
이름을 옥천사라 했으나 근처에 옥천사란 절이 있어 헌강왕(憲康王)이 쌍계사라 제액(題額)을
내렸다'
는 문구가 있어 옥천사가 그 이전부터 숨 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라 말기인 898년에는 창원 봉림사(鳳林寺)를 세운 진경국사(眞鏡國師) 심희(審希)가 낭림선사
(朗林禪師)와 함께 중창을 벌였는데, 이때 크게 가람이 확장된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때는 964년(광종 15년)에 혜거국사(惠居國師)가 혼응(混應)과 더불어 3번째 중창을 벌였고,
1110년(예종 5년) 혜은(慧隱)이 쇠퇴한 절을 다시 일으키니 이것이 4번째 중창이다. 그리고 예
종 시절에는 묘응(妙應)이 이곳에서 천태종(天台宗)을 강의했다고 한다. 1237년 최씨정권이 대
장경(大藏經) 불사를 위해 진주에 대장도감 분사(大藏都監 分司)를 두었는데, 옥천사 보융대사(
普融大師)가 일연대사(一然大師)와 함께 팔만대장경 교정 작업을 벌였으며, 그 공로로 5번째 중
창이 이루어졌다. 1371년(공민왕 20년) 지운(智雲)과 원오(圓悟)가 6번째 중창을 했다.

1392년 천하가 바뀌면서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옥천사는 간신히 명맥만 유지했다. 1592
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옥천사 승려들은 의승군(義僧軍)을 조직하여 왜군(倭軍)과 싸웠으나 1597
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왜군의 공격으로 절 전체가 파괴되는 비운을 겪는다.
그 이후 1640년 학명(學明)이 절 아래 대둔마을에서 하룻밤 머물렀는데, 꿈에 신인(神人)이 나
타나 웅장한 절터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학명은 이튿날 꿈 속에서 갔던 그
곳을 더듬어 찾으니 글쎄 그때 본 거대한 절터가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게다가 자리도
일품이었다. 그래서 친분이 있던 의오(義悟)와 함께 중창불사를 벌이기로 하고 1644년에 우선
동상당(東上堂)이란 초가를 짓고 이듬해 심검당을 세웠다. 허나 재정이 넉넉치 못해 1654년에
겨우 법당을 지었고, 1664년에 정문을 세워 7번째 중창을 마무리 지었다.

1677년 묘욱(妙旭)이 법화회(法華會)를 개설하여 향적전, 만월당을 짓고, 1680년 인근에 청련암
(靑蓮庵)과 백련암(白蓮庵) 등의 암자를 세웠다. 1764년에는 자방루를 짓고 그 앞에 뜨락을 넓
게 닦았는데, 여기서 승병 훈련을 했다. 조선 정부는 승군(僧軍)을 부리고자 바다와 가까운 절
에 의무적으로 승병을 두게 했는데, 영조 시절 옥천사 승군은 3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당시 절 규모는 요사 5동, 산내암자 7개였으며, 물레방아가 12개나 있을 정도로 크게 흥했다.
이때가 8차 중창이었다.

달은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1800년(정조 24년) 나라에 종이를 바치는 어람지 진상사찰(御覽紙
進上寺刹)로 선정되었다. 병역과 각가지 부역(負役)도 힘든데 거기에 종이까지 만들어야 되니
그 부담이 실로 상당했을 것이라 심한 부역을 이기지 못한 승려들이 자꾸 도망을 치면서 절이
크게 기울게 된다. 그래서 1842년 승군의 정원을 170명에서 100명으로 줄이고 종이 물량도 크게
감량해 주었으나 여전히 감당이 되지 않아 1880년에는 겨우 10여 명만 남았다고 한다.
1863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인 신관호(申觀浩)가 절을 방문해 '연화옥천(蓮花玉泉)'
이란 글을 남겼는데, 이때 주지인 농성(聾醒)이 어람지 진상사찰에서 빼줄 것을 호소했다. 그
말이 옳다 여긴 신관호는 바로 조정에 장계(狀啓)를 올리면서 종이 부역에서 해방되었다.

옥천사는 19세기에 진주와 고성 지역 사대부(士大夫)와 여러 관청에서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았다.
그러다보니 지배층과 관(官)과 한통속이라 백성들은 생각을 했던 듯 싶다. 백성들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온갖 수탈로 허리가 아작날 지경인데, 옥천사는 종이 부역과 승병 군역이 있을 뿐,
그런데로 지원을 받으며 먹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862년 진주민란(晉州民亂)이 터지자 농
민들은 절로 몰려와 경내 외곽의 건물과 대종을 파괴했으며, 1888년 동학농민항쟁이 일어났을
때도 농민들이 다시 몰려가 많은 건물에 불을 질렀다. 이에 뚜껑이 열린 용운대사(龍雲大師)가
정면으로 나서
'이 절에는 전하(殿下)의 수복을 비는 축성전이 있소. 더 이상 불을 지르면 당신들을 역적으로
몰아 삼족을 멸할 것이오!!'
호통을 치니 이에 간이 쫄깃해진 농민들은 겁을 먹고 줄행랑을 쳤
다. 그 덕분에 대웅전, 자방루는 온전히 살아남게 된 것이다.

어쨌든 사대부와 관의 지원으로 적묵당과 탐진당을 중수했고, 힘들다고 도망친 승려를 소환하면
서 예전의 명성을 조금씩 되찾기 시작했다. 1890년에는 조정이 전국에 교지(敎旨)를 보내 왕실
을 위해 기도를 올리라고 지시했다. 이에 경상도관찰사이자 진주목사인 박규희(朴珪熙)가 개인
자금을 털어 옥천사에 왕실의 안녕을 비는 건물을 지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흐뭇해하며
축성전이란 사액을 내렸으며, 명부전과 나한전, 칠성각을 끊임없이 중건하면서 이른바 9번째 중
창은 마무리되었다.
이 당시 옥천사 소유 전답은 800여 마지기로 인근 농민들에게 소작(小作)을 주어 5:5 비율로 받
아 매년 1,000석의 수입을 챙겼다. 또한 산을 개간해 560정보를 전답으로 만들었으며, 세곡 수
입을 바탕으로 계속 전답을 불렸고, 승려 수도 나날이 늘어 300명이 넘었다고 한다.

1911년 왜정(倭政)이 사찰령(寺刹令)을 공포하고 전국 31본산(本山)을 정할 때 옥천사가 그 하
나로 지목되었다. 허나 당시 주지인 서응대사<瑞應大師, 채서응(蔡瑞應)>이 서울 주지회의에 참
석하여, 대본산 지정을 거절했다. 그로 인해 옥천사 승려들의 칭송이 대단했다고 한다. 1920년
경에는 진주에 포교당을 만들어 연화사(蓮花寺)라 하였다.

옥천사는 왜국으로 승려 15명을 유학보내기도 했으며, 이들은 장차 절 주지와 교육계로 진출했
다. 그리고 잠시나마 옥천중학교를 설립하기도 했고, 상해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는 등 나라의
독립활동에도 적극 나섰다. 또한 절은 통도사의 말사(末寺)이지만 워낙 파워가 대단하여 통도사
에서 주지를 파견하지도 못했다. 옥천사 자체에서 중론으로 주지를 선출하여 통도사에 승인을
요구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1950년 농지개혁법이 공포되자 사찰답 800여 지기가 소작인들에게 죄다 넘어갔다. 그
로 인해 절은 졸지에 거지가 되고 운영에 큰 위기를 맞았다. 다른 절은 약간의 불량답(佛糧畓)
이라도 건졌으나 옥천사는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허나 연화산 주변 565ha의 산림을
가지고 있어 빈털털이는 그나마 면했다.

근래에 이르러 청담(淸潭)이 불교정화와 신도 교화운동을 벌이면서 전답을 잃어 방황하던 절을
다시 반석 위에 올렸으며, 1984년 일주문을, 1987년 사적비, 1999년 유물전시관과 축성전을 지
으면서 지금에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옥천사 칠성각

▲  옥천사 보장각(성보박물관)

경내에는 대웅전과 팔상전, 자방루, 조사전, 유물전시관 등 20동에 가까운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으며, 청련암과 백련암, 연대암 등의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그외에 고성읍내와 하동에 보광
사, 낙서암 등의 포교원을 운영한다.
소장문화유산으로 보물 495호로 지정된 청동금고(靑銅金鼓)와 보물 1693호인 지장보살도 및 시
왕도 등 국가지정문화재 2점과 대웅전과 자방루, 향로, 대종, 명부전 등 지방문화재 7점을 간직
하여 고색의 짙은 향기와 절의 장대한 역사를 아낌없이 보여준다. 또한 절 전체는 경남 지방기
념물 140호
로 지정되었다.

옥천사는 연꽃처럼 생겼다 하여 이름 붙여진 연화산의 북쪽 자락에 포근히 안겨있으며, 산세가
완만하고 숲이 울창해 경남 남부의 경승지로 명성이 높다. 특히 알록달록 물감이 완연히 번진
가을은 그 백미이다. 첩첩한 산주름에 묻혀있어 고요하기 그지없으며 풍경소리와 산바람 소리,
산새의 지저귐, 범종 소리가 그 고요를 가끔 깨뜨리는 게 전부이다.

절을 품은 연화산은 복분자딸기와 송이버섯이 유명하며, 우리나라 100대 명산의 하나이다. 연화
산 일대는 경남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연화8경의 절경을 간직하고 있다. 

※ 연화산 옥천사 찾아가기 (2013년 11월 기준)
① 고성, 배둔까지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고성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서부터미널과 마산남부터미널에서 배둔 경유 고성행 직행버스가 수시로 떠난다.
② 진주까지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진주행 직행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운행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진주행 고속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운행
* 대전동부터미널, 부산서부터미널, 대구서부정류장에서 진주행 직행버스가 이용
③ 고성/배둔/진주에서 옥천사3거리까지 (옥천사3거리에서 도보 35분)
* 고성터미널과 배둔에서 개천행 군내/완행버스(1일 10여 회)를 타고 옥천사3거리 하차
* 진주시외터미널에서 옥천사3거리 경유 배둔, 고성 방면 완행버스가 1일 11회 다닌다.
④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까지 진입 가능)
* 대전~통영고속도로 → 연화산나들목을 나와 우회전 → 영오 → 개천 → 옥천사3거리 → 옥천
  사 주차장

★ 옥천사 관람정보 (2013년 11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1,300원 / 학생,군인 1,000원 (20인 이상 단체 800원) / 어린이 700원 (단체
  600원)
* 옥천사는 휴식형과 체험형 템플스테이(Temple Stay)를 운영한다. 휴식형은 최대 3박4일까지
  머물 수 있으며, 체험형은 매월 2,4주 주말에 1박 2일로 진행된다. 체험형 참가비는 성인 5만
  원, 초중고 4만원이며, 세면도구와 수건, 운동화 등을 지참해야 된다.
  자세한 문의는 옥천사 종무소(☎ 055-672-0100)나 홈페이지 참조
* 옥천사에서 연화산 정상까지 2시간 정도 걸린다.
* 소재지 -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408 (연화산1로 471-9) <☎ 055-672-0100>
* 옥천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옥천사 승군들이 사용한 언월도(偃月刀)


♠  옥천사 둘러보기 (자방루, 대웅전 주변)

▲  옥천사 건물의 갑(甲)인 자방루(慈芳樓)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53호

경내의 중심인 대웅전으로 가려면 자방루의 옆구리를 싫든 좋든 거쳐야 된다. 옥천사의 속살을
속세에 드러내기가 싫었던지 대웅전 주변을 꽁꽁 가리고 있어 바깥에서는 내부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당당한 모습을 지닌 자방루는 1764년에 지어졌다. 1888년 농성이 중건하
고 1984년에 보수를 벌였는데, 이 건물은 승장(僧將)이 승군을 지휘/통제하던 곳으로 최대 340
명까지 담을 수 있다. 훈련 외에는 불교 강의나 행사 장소로 쓰였으며, 너른 앞뜨락에서는 승병
들이 훈련을 하거나 군사 사열을 받았다.

건물 내부에는 1888년에 그려진 비천상(飛天像)과 비룡상(飛龍像)을 비롯해 새 그림 40여 점이
내부를 수식하며, 자방루란 이름은 꽃다운 향기가 점점 불어난다는 뜻으로 불도를 닦는 누각이
란 뜻이다.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보장각 제외)로 옥천사의 오랜 명성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  단청으로 화사한 자방루 내부

▲  자방루 대들보에 걸린 현판

자방루는 대웅전 방향만 개방된 형태이고 천왕문 방향은 문을 열고 닫는 형태이다. 내부는 누마
루로 바닥을 짰고 단일부재인 대들보에 기둥이 없는 통칸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단순하면서도 간
결한 분위기를 준다. 대들보에는 비룡상과 비천상이 그려져 있으며, 문 위쪽에는 화려한 색채의
그림들이 있으니 잘 살펴보도록 하자.
자방루 현판은 영조 시절 이조참판과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조명채(曹命采, 1700~1764)가 옥천
사에 들렸을 때 쓴 것이다.


▲  자방루 옆문에서 만난 사마귀의 위엄
흑자(黑子, 사마귀)공이 옥천사에는 어인 일로 행차했을까? 사마귀의 위엄 돋는
행차 앞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  옥천사 대웅전(大雄殿)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132호

자방루 옆구리를 지나면 대웅전이 바로 모습을 비춘다. 장대한 규모의 자방루와 드넓은 자방루
뜨락에 비해 대웅전 주변은 정말 협소하다. 뜨락 좌우로 적묵당과 탐진당이 꽉차게 들어앉아 있
어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 4동이 뜨락을 빈틈 없이 포위한 형태이다.

높은 기단 위에 높직히 들어앉아 법당(法堂)의 위엄을 드러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옥천사의 중심지이다. 1649년에 중창되었으며, 1677년 묘욱(妙旭)이 개
수하고 1736년 보수를 했으나 건물이 너무 낡아 1864년 용운대사가 새롭게 만들었다. 대웅전 현
판은 영조 시절 동국진체풍(東國眞體風)의 대가인 동화사(桐華寺) 기성대사(箕城大師)의 글씨라
고 전하며, 대웅전 계단 좌우에는 2쌍의 돌기둥인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서 있는데 이는 괘불이
나 깃발을 거는 용도로 조선 후기에 세워졌다. 기단을 이루고 있는 돌에는 푸른 이끼가 자욱히
끼어 중후한 멋을 선보인다.


▲  조선 영조 시절 기성대사가 쓴 대웅전 현판의 위엄
글씨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듯 활력이 넘쳐 보인다.

▲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3존불
온후한 표정의 석가불이 수려한 보관(寶冠)을 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대동하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  대웅전 외벽에 그려진 벽화 ▼
부처나 관음보살 이야기 대신 꽃과 화병, 채소, 붓 등이 그려져 있다.
무슨 사연이 깃들여진 것일까? 절의 주요 고객이던 사대부를 위한 그림일까?

▲  적묵당(寂默堂)
1764년에 세워진 'ㅁ'구조의 건물로 고참
승려들이 머물던 큰방이었다. 현재는 재를
올리거나 공부를  하는 공간으로 쓰이며,
2006년에 해체보수했다.

▲  탐진당(探眞堂)
1754년에 세워진 건물로 신참 승려들이 머물던
방이었다. 지금은 종무소 및 영가(靈駕)를
봉안한 공간으로 쓰인다.


♠  옥천사 둘러보기 (팔상전, 명부전, 조사전 주변)

▲  옥천사 팔상전(八相殿)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팔상전은 부처의 일생을 담은 8폭의 그림을 담은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
건물은 1890년(고종 27년)에 세워진 것으로 8상 탱화는 도난을 방지하고자 보장각에 따로 보관
하고 있으며, 탱화의 사진을 대신 걸어두었다.


▲  옥천사 명부전(冥府殿) - 경남 문화재자료 146호

대웅전 좌측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를 봉안한 명부전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730년에 지어졌으며, 1895년에 중수했다. 명부전 옆에
는 흙과 기와로 빚은 정겨운 옛 굴뚝이 나란히 자리하여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왕년을 그리워
한다.


▲  명부전 불단에는 포근하고 귀여운 인상의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시립(侍立)해 있다.

▲  옥천사 조사전(祖師殿)

경내에서 가장 뒤쪽에 자리한 조사전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절을 창건했다는 의상대사의 진영
(眞影)과 서응대사<瑞應大師, 채서응(蔡瑞應)>, 청담대종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  조사전 중앙을 장식하는 의상대사의
진영

           ◀  옥천사 나한전(羅漢殿)
대웅전 뒷통수에 자리한 나한전은 16나한(羅漢)
의 거처로 불단에는 정조 시절에 조성된 석가3
존불(석가불,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이 봉안되
어 있다.
나한전은 1895년에 지어진 것으로 16나한 가운
데 9상은 조선 후기 것이고, 7상은 근래에 나한
을 손질하면서 새롭게 붙여 넣었다. 이곳 나한
은 영험이 있다고 전한다.


▲  옥천사 칠성각(七星閣)

조사전 밑에 자리한 칠성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칠성(七星)의 보금자리이
다. 내부에는 1981년에 만든 칠성탱화가 걸려있다.


▲  조촐한 모습의 독성각(獨聖閣)과 산령각(山靈閣)

명부전 뒤에는 눈에 넣어도 적당할 정도로 조그만 모습의 독성각과 산령각이 나란히 자리해 있
다. 이들은 서로 생김새도 비슷하여 마치 쌍둥이 같다.
왼쪽에 자리한 독성각은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1897년에 지어졌으며, 사람 1명이
들어가 앉으면 그냥 꽉 차버린다. 우측 산령각은 산신(山神)의 보금자리로 역시 1897년에 세워
졌는데, 독성각보다도 작아서 사람이 아예 들어갈 수가 없다. 그래서 천상 밖에서 예를 올려야
된다. 두 건물 모두 120년 남짓의 건물이지만 너무 노후해 보여 300년 이상은 되어 보인다.


▲  시원하게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독성도(獨聖圖)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도(山神圖)


▲  옥천각(玉泉閣)

팔상전 뒤쪽에는 옥천각이란 조촐한 건물이 있는데, 바로 그 안 옥천사의 명물인 옥천(玉泉)이
담겨져 있다. 옥천은 물이 솟는 샘터로 절에서는 그를 위해 옥천각이란 수각(水閣)까지 씌웠는
데, 이 샘터는 옥천사 창건시절부터 있었다고 하며, 옥천사란 이름이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창건 이후 물과 함께 일정량의 쌀이 흘러나와 그걸로 공양을 했다고 하며, 어느 욕심꾸러기 승
려가 더 많은 쌀을 취하고자 샘을 파헤쳤는데, 샘이 크게 노해 쌀은 커녕 물도 끊겼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승려가 지극정성으로 잘못했다고 기도를 올리며 샘을 달래니 샘도 화를 풀었는지
연꽃 1송이가 활짝 피어나면서 물이 콸콸 솟아나 만병통치의 약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고성 지역에 이름난 약수로 왕년에는 샘물에서 목욕을 하는 중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
며, 지금은 목욕은 못하고 물만 떠 마실 수 있다.

산사에서 마시는 샘물은 맛이 다 고만고만하지만 부산 미륵사(彌勒寺)와 고성 옥천사의 물맛은
신선이 마시는 물처럼 뭔가 특별해 보인다. 물을 마셔보니 자연이 내린 특별한 양념이 담긴 듯
맛이 달콤하다. 물을 3번이나 떠 마시고, 가져온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 집에서도 두고두고 마
셨다.


▲  옥천사의 명물, 옥천(玉泉)
둥그렇게 파인 샘에서 연화산이 베푼 옥계수가 쉬지 않고 솟구친다.

▲  청담대사 승탑

▲  청담대사 사리탑비

경내에서 보장각으로 가는 길목에 옥천사에서 출가한 근대 불교의 1인자 청담대사의 승탑과 탑
비가 있다. 옥천사에서도 가장 특별한 존재라 경내에 그의 사후 공간을 만들어 두고두고 그를
기린다.
하얀 피부의 수려한 조각을 자랑하는 승탑에는 그의 사리가 담겨져 있으며, 그 옆에 청담의 일
대기를 담은 탑비가 있다. 입에 보주(寶珠)를 물고 오른쪽으로 머리를 돌린 귀부에 생동감이 넘
쳐 보인다.


♠  옥천사의 보물이 담긴 보장각(寶藏閣)

경내 북쪽에는 2층 규모의 보장각이 늠름한 모습을 뽐내며 자리해 있다. 보장각은 옥천사의 귀
한 보물을 간직한 꿀단지로 오래된 큰 절에 흔히 있는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이다. 옥천사 제
일의 보물인 청동금고(임자명반자)와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를 비롯하여 청동향로, 신중탱화, 대
종 등의 불화와 고문서, 불상, 여러 불기(佛器) 등 200여 점의 유물이 소중히 담겨져 있다. 이
중 법고(法鼓)와 시왕탱화 등 119점은 '옥천사소장품'이란 이름으로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299호
로 지정되었다.

보장각은 1999년 정부의 지원으로 세워졌으며, 입장료는 없다. (어차피 옥천사 입장료에 포함됨
) 매주 월요일은 문을 걸고 쉬지만 1층 정도는 상황에 따라 요령껏 관람이 가능하다. (2층은 문
이 잠김) 내가 갔을 때는 공교롭게도 박물관의 공통적인 휴일인 월요일이었다. 1층은 다행히 문
이 열려있어 구경은 했지만 2층은 불이 꺼져 있고 전시실 문도 굳게 잠겨져 들어가지도 못했다.
전시실은 사진 촬영이 통제되어 있으나 요령껏 1층 유물을 사진에 담아 보았다. 허나 태반이 흐
리거나 흔들리게 나와서 건질 만한 것은 거의 없다. 그나마 괜찮게 나온 것 일부만 간단히 소개
한다.


▲  1904년에 제작된 모연문(募緣文)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299호

▲  비변사절목(備邊司節目)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299호

▲  옥천사 청동금고(靑銅金鼓) - 보물 495호

옥천사 보장각 1층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임자명반자(壬子銘飯子)라 불리는 청동금고가 아닐까
싶다. 청동금고는 말그대로 청동으로 만든 쇠북으로 1252년(고려 고종 39년)에 제작된 고려 후
기 금고(쇠북)이다. 다른 말로 반자(飯子)라고도 하나 잘 쓰이지는 않는다. 표면지름 55cm, 측
면너비 14cm로 전면에 굵은 융기선(隆起線)으로 4줄의 동심원(同心圓)을 두르고 후면은 비웠다.

금고는 불교의식 때 사용하는 것으로 금고 측면에는 187자에 이르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
데, 첫머리에 '高麗二十三王 環甲之年 壬子四月十二日 在於京師工人家 中鑄成智異山 安養社之飯
子'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 1252년 고려 황제인 고종(高宗)의 환갑을 기념하여 만들었음을 알
려준다. 만든 이후 지리산에 있던 안양사(安養社)에 두었는데, 그런 금고가 어찌 옥천사까지 흘
러들어 왔는지는 전하는 바가 없다.
금고 제작자인 공인별장(工人別將) 한중서(韓仲敍)는 내소사범종(來蘇寺梵鍾) 등 여러 점의 유
물을 남긴 인물로 고려 후기에 뛰어났던 장인으로 여겨진다. 귀족과 승려들이 발원한 내용이 기
록되어 있고, 안양사의 사(社)라는 이름에서 고려 말에 유행했던 신앙결사(信仰結社)의 한 형태
로 조성된 작품으로 보인다. 이제는 760년이 넘은 노구(老軀)로 현역에서 은퇴하여 이렇게 박물
관의 한 부분을 장식한다.


▲  옥천사 장대청안목책(將大廳案目冊) - 1857년 작

▲  다라니경목판 - 19세기 작

▲  옥천사 인장(印章)

 ◀  옥천사 향로(香爐) -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59호

옥천사 향로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입 안쪽에는 점선으로 '
의령수도사(宜寧修道寺)'란 글씨가 있어 그곳에
서 왔음을 알려주며, 가경(嘉慶) 21년, 즉 1816
년(순조 16년)에 보수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
때 향로 받침을 새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 향로는 무늬를 먼저 새긴 다음 은을 입히는
방법으로 문양을 새겼으며, 표충사(表忠寺) 은
입사 향로와 같은 수법을 보여주는 괜찮은 작품
이다.

보장각 1층을 둘러보고 2층으로 올랐다. 2층은 불이 꺼져 있고 전시실 문은 굳게 입을 봉했다.
문 옆에는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50호로 지정된 대종(大鐘)이 있으나 사진에 담지는 않고 괜히
2층까지 설치다가 무슨 소리를 들을 듯 싶어서 꼬랑지를 내리고 바로 철수했다. 대종은 1701년
에 조성된 것이다.

◀  옥천사에서 누린 차1잔의 여유

옥천사를 살피고 가까운 곳에 있는 청련암(靑蓮庵)을 둘러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핸드폰이 밥기
운이 다되었다며 졸도를 해버렸다. 실신한 핸드폰을 계속 흔들어 깨웠으나 깨기가 무섭게 실신
을 한다. 그래서 청련암종무소에 도움을 청했으나 아무도 없어서 서둘러 옥천사로 내려와 그곳
종무소에 부탁을 넣었지만 충전기가 없다고 그런다. 요즘 무척 잉여로운 몸이라 연락올 때도 거
의 없지만 요즘 세상에 핸드폰이 없으면 그것만큼 허전한 것이 없다.
이거 어찌해야 되나 궁리하다가 문득 보장각 지하층(말이 지하지 지상임)에 있는 찻집을 생각하
고 거기로 갔다. 찻집에는 주인 아줌마와 그의 귀여운 어린 딸이 있었는데, 주인 아지매에게 충
전을 부탁하니 마침 충전기가 있어서 해주겠다고 그런다. 그래서 고마움을 표하고 충전이 되는
(20분 정도) 동안 찻집에서 두 발을 쉬었다. 그런데 그냥 앉아 있으려니 좀 미안한 마음이 들어
가장 저렴한 2,000원짜리 차 1잔을 주문했다. (그때 마신 차 이름은 기억이 안남) 여태까지 찻
집에서 나홀로 차를 마신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 홀로 차 1잔의 여유를 즐기게 된 것이다. 

차(茶)를 주문하니 잠시 뒤 잣이 띄워진 차와 에이스 과자가 담긴 그릇이 앞에 차려진다. 차의
향을 음미하며 산주름에 묻힌 산사에서 오랜만에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린다. 차에는 떡이
찰떡궁합이지만 떡 대신 과자가 나왔으니 다소 조화가 떨어진다. 에이스 과자에는 딱 커피가 어
울리는데 말이다. 에이스는 옛날에 많이 먹었던 과자라 감회가 새롭다.

과자를 먹으며 차를 마시는 동안 30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누구와 같이 왔으면 2시간도 있을
수 있지만 홀로니 더 머물러 있기도 그렇다. 게다가 주인 아줌마는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시간은 17시) 하여 자리를 정리하여 차 계산을 하며, 핸드폰 충전에 고마움을 표하고 밖
으로 나온다.
이제 어디로 가면 될까? 어디긴 내가 있어야 될 아비규환의 속세지~~ 다시 지루한 일상으로 돌
아가야 된다는 생각에 잠시 눈앞에 어둠이 내린다. 허나 안갈 수는 없다. 그게 내 운명인 것을..
속세로 무거운 발걸음을 하며 늦가을 옥천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닫는다. 다음에 다시 인연
이 된다면 이때 못본 보장각 2층도 살펴보고 청련암 보리수(菩提樹)와 백련암, 연화산 정상까지
말끔히 둘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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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도 걸음을 멈춘 아름다운 박물관, 성북동 간송미술관

 


' 늦가을도 걸음을 멈춘 우리나라 박물관의 성지,
성북동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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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송미술관 보화각


늦가을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10월 중순이 되면 나의 이목을 강하게 붙잡는 곳이 하나 있다.
그곳이 어디냐? 바로 성북동(城北洞)에 자리한 간송미술관이다. 우리나라 박물관의 오랜 성지
이자 늦가을이 유난히도 아름다운 명소로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닌 1년에 딱 2번,
5월과 10월 중/하순에만 문을 연다. 그외에는 들어가지 못하며, 아무리 열려라 참깨를 외치고
참깨를 집어던져도 안으로 절대 들여보내지 않는다.
 
문이 활짝 열리면 간송미술관은 다양한 테마로 무료 특별전을 여는데, 그 특별전에 대한 문화
인들의 관심은 지독하기 그지 없어 중독성이 매우 강하다. 그 중독에 빠지면 간송미술관 사립
문이 열리는 날만 애타게 기다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보통 10월 초면 신
문을 통해 특별전 소식이 곳곳에 알려지며, 10월 중순이 되면 빗장이 스르륵 열리면서 방방곳
곳에서 문화인들이 몰려와 박물관의 성지를 순례하며 옛것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한다.

본인 역시 간송미술관 특별전을 기다리는 1인으로 올 봄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들어가지 못
했다. 어쨌든 가을 특별전 소식을 접하고 토요일에 후배 여인네와 그곳을 찾았는데, 이번에도
퇴짜맞는거 아닌가 걱정이 들었으나 다행히 운이 따라주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여 정
말 느긋하게 미술관을 관람했다.

간송미술관은 나무가 무성하여 산골에 묻힌 별장에 들어선 기분이다. 속세와 공기부터가 확연
히 틀려 서울 도심에 있음을 무색하게 하며, 청정한 공기는 속세(俗世)에 오염된 마음과 돌처
럼 굳어버린 머리를 정화시켜 아무리 어려운 그림 이름도 쏙쏙 머리에 들어올 것만 같다.

본글에서는 특별전 그림에 대한 언급은 뺀다. 대신 간송미술관의 내력과 간송 전형필의 생애,
뜨락에 있는 여러 석조 문화유산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  간송미술관 정문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정문의 동쪽 기둥에는 '澗松美術館'이라 쓰인 명패가 있고
서쪽 기둥에는 간송미술관 스타일로 특별전 제목이 쓰인 하얀 종이가 붙여져 있다.



★☆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선생의 생애 ☆★

어둠의 시절,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후학을 양성하고자 자신을 헌신한 진정한 대인(大人)의
정석, 간송 전형필, 그는 1906년 부자집안인 정선 전씨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의동공립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와 휘문고보(현 휘문중고)를 거쳐 왜국 와세다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다.

남들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대신 가족들은 대부분 명줄이 짧아 20대에 친가족 대
부분
-조부모, 친부모, 양부모<養父母, 송의 종숙부(從叔父)인 전명기(全命基)가 후사가 없어
그의 양자로 들어감>, 친형제-
을 잃었다. 심지어는 보통학교와 대학 졸업 때 그의 양부(종숙부
) 상과 부친상을 나란히 당해 상복을 입고 졸업사진을 찍었을 정도다. 이렇게 가족을 죄다 여의
면서 그 집안의 자손은 간송 하나만 남게 되었고, 자연히 일가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 받아 10만
석을 일컫는 조선 최대의 부자가 되었다.


와세다대학교 재학 중, 왜인들에게 무시를 당하며 속국(屬國) 백성의 한을 한을 뼈저리게 느끼
자 '나는 무엇을 해야 되나?' 번민에 빠졌다. 허나 그 답을 구하지 못해 주변 선배와 스승에게
자문을 구했고, 휘문고보 시절 그의 미술 선생이던 고희동(高羲東)이 이 땅의 문화유산을 지킬
것을 권하면서 그의 권유에 감동해 대책 없이 방치된 이 땅의 문화유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고희동은 그런 제자를 기특히 여겨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을 소개시켜 주었다. 간송은 그를
스승으로 받들며 서화와 도기/자기, 불교 문화유산 등 골동품 식견을 쌓아갔으며, 위창은 골동
품 거간(居間)인 이순황(李淳璜)을 소개하여 그를 돕게 했다. 그리고 1930년, 24살에 이른 간송
은 이순황과 함께 본격적으로 문화유산 수호 사업에 뛰어든다.

간송은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여 이순황에게 맡기고, 그곳을 교두보로 수많은 문화유산을
수집했다. 동국정운(東國正韻) 등의 고서적, 고려청자 등의 자기류, 혜원풍속도(蕙園風俗圖) 등
의 서화(書畵), 금동여래입상, 금동삼존불감 등의 불상을 있는데로 사들이고, 1934년 북단장과
함께 1만평 규모의 넓은 뜨락을 조성하면서 석탑과 석불 등을 아낌없이 수집했다.
또한 왜인을 상대로 고미술품을 팔아먹던 인사동(仁寺洞)을 수시로 찾아가 많은 것을 구입했으
며, 왜인들이 군침을 흘리던 문화유산은 미리 선수를 치거나 웃돈을 두둑히 얹혀 사들이니 자연
히 골동품상이 그에게 몰려들어 거래를 했다.
그리고 왜국 동경(東京)에 있던 영국인 변호사 존 갓스비(John Gadsby)가 자기 나라로 귀국하면
서 소유하던 고려청자를 처분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직접 만나 고려청자를 죄다 사들이기도
했으며, 총독부 고위층이 소유한 문화유산을 사들이고자 온고당(溫古堂) 주인인 왜인 골동상 신
보기조(新保喜三)의 도움을 받았다.

그 당시 간송과 그를 돕던 이들의 문화유산 수집 에피소드는 정말로 많았는데, 그중에서 겸재(
謙齋) 정선(鄭敾)의 화첩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왜정 때 이순황과 거래하던 골동상 가운데 장형수(張亨修)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지방을 돌며
서화를 구입해 수집가들에게 팔았는데, 1933년경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추계리를 지나다가 친일
파로 악명이 높은 송병준(宋秉畯)의 고래등 기와집을 구경했다. 마침 양지면장이자 중앙자동차
주식회사를 운영하던 송병준의 손자 송재구(宋在龜, 이하 집주인)가 말을 타고 귀가하다가 누구
를 찾냐고 물었다.
그래서 '유명한 댁이라고 해서 지나다가 구경 좀 하고 있소!' 답을 하니, 악질 친일파의 손자라
발작을 하며 쫓아낼줄 알았더만 뜻밖에도 친절을 보이며 안으로 들어가자고 그런다. 사랑방에
자리를 잡자 직업을 묻길래 골동품을 수집한다고 하니, 집주인이 흥미를 보이며 오원 장승업(吾
園 張承業)의 산수화 병풍을 비롯해 고려청자 향합(香盒), 불상 등을 보여줬고, 서로 말이 잘
통해 늦게까지 대화를 하다가 푹 자고 가라고 잠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잠을 자다가 늦은 밤, 소변이 급해 사랑방 한쪽에 붙은 변소를 가는데 마침 그 집 머슴이 군불
을 때고 있었다. 그런데 문서 뭉치를 마구 아궁이에 쑤셔넣고 있길래 문득 직업 본능이 발동하
여 확인해보니 땔감 가운데 초록색 비단으로 꾸민 책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그 책을 보니 글쎄
42폭으로 이루어진 겸재 정선의 42화첩(畵帖)이 아닌가? 그 안에 그 유명한 금강산도(金剛山圖)
가 들어있었다. 좀만 늦었으면 그 그림은 영영 되살릴 수 없는 전설이 되었겠지. 그렇게 정선의
화첩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니 장형수의 때를 잘타는 생리 현상에 우리들은 정말 감사해야 될
것이다.

그 화첩을 서둘러 들고 집주인에게 보이며, 방금 전의 일을 말하자 '그런 일이 있었소!~ 그런건
우리집에 흔하오'
그러는 것이다. 그래서 '불에 타 없어질 뻔했던 것이니 나에게 파시오' 제안
을 하니 집주인이 흔쾌히 응하자 얼마면 되겠냐고 물으니 '생각해서 낼 만큼만 내시오' 그런다.
그래서 20원을 주고 서울로 가져와 이순황에게 팔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순황은 그 그림을 간송에게 보냈고, 장형수는 간송의 인품에 반해 그의 협력자가 되었다.

간송은 문화유산 수집에만 멈추지 않고 왜정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고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
키고 가꿀 인재를 기르고자 1940년 적자에 허덕이던 보성중학교를 인수했고, 동성학원을 설립하
여 교육 분야에도 아낌없이 돈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 당시 보성중교를 운영하던 고계학원은 학
교 매입금 16만 5천원 외에 학교의 부채와 학교가 소유한 물건까지 값을 매겨 무리한 가격을 요
구했는데, 간송은 쓴소리 하나 없이 장우식, 윤용섭을 통해 대금을 모두 지불했다. 또한 동성학
원 재단설립에 무려 60만원을 들였는데, 이를 위해 황해도 연백군(延白郡)에 있던 3,000석 지기
땅을 처분했다.

1945년 8월 이후 11개월 동안 보성중학교 교장을 지냈는데, 이것이 간송의 유일한 공직생활이었
다. 또한 1950년 이후 고적보존위원회, 문화재보존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했으며 1960년에는 고고
미술동인회를 세워 문화유산 연구와 서적 편찬에 동분서주하였다. 이렇게 평생에 걸쳐 자신의
재산을 내던지며 문화유산과 교육 발전에 헌신했으나 위인(偉人)은 고난 속에 일찍 죽고 간신배
는 배때기에 기름칠하며 아주 지독하게 오래 사는 이 땅의 더러운 법칙에 따라 야속하리만큼 커
다란 시련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1950년 2월 정부는 농지개혁법을 시행하면서 소작농에게 농지를 분배하고 지가증권(地價證券)을
발행하여 땅주인에게 땅값을 치러주기로 하였다. 허나 6.25전쟁으로 지가증권이 모조리 휴지조
각이 되면서 앉아서 농지를 잃어버린 꼴이 되었으며, 전쟁통에 많은 문화유산과 유동자산을 잃
었다.
거기에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북단장 뜨락마저 무심한 총탄과 폭탄으로 파괴되고 만다. 그런 상
황에 전쟁에서 잃어버린 문화유산을 다시 사들이면서 재정 압박은 갈수록 커져만 갔으며, 1959
년 보성중고교 교장 서원출의 방만 경영으로 엄청난 부채가 쌓이자 이를 해결하고자 동분서주하
던 중 그만 병을 얻어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신우염(腎盂炎)으
로 1962년 1월 26일, 56세의 한참인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그가 그렇게 세상을 뜬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는 문화포장(文化褒章)과 문화훈장(文化勳章)을
추서(追敍)했으며, 고고미술 동인회 회원과 간송의 아들, 제자, 벗들이 그의 수집품을 정리하여
그의 호를 딴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박물관인 간송미술관을 열었다.

이곳을 둘러보면서 늘상 생각하는 거지만 그가 없었다면 미술관 수장고와 전시실에 있는 문화유
산 대부분은 일찌감치 해외로 빼돌려지거나 행방불명이 되었을 것이다. 1446년에 반포된 한글의
해설서인 훈민정음(訓民正音)도 예외는 아니었겠지. 다행히 하늘의 뜻이 있었는지 그의 품으로
들어갔으며, 그 덕분에 우리는 편안하게 훈민정음을 구경하고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가 큰 부자였으니 무량(無量)의 문화유산 수집은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수집한 것을 비싸게 팔거나 중개상 노릇을 한 것도 아니며 어떠한 이익 행위도 취하지 않았다.
이 땅의 문화유산을 수집하여 지키고, 그것을 연구하고 가꿀 후학을 양성하고자 거액의 재산을
내던진 것이다. 허나 무리한 지출이 매년 이어지다보니 적지않은 재산을 처분했고 결국 미술관
주변(그래도 꽤나 넒음, 마음 놓고 구경할 수 있는 미술관 보화각 주변은 그 일부에 불과함)
서울 방학동(放鶴洞) 가옥, 그리고 일부 토지만 남게 되었다.
이렇게 이윤을 포기한 그의 문화사업은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 미술사 연구의 큰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의 업적과 문화, 사회적 공헌의 가치는 정말로 값지다 할 것이다.

현재 미술관의 문화유산은 국가 소유가 아닌 간송 일가의 소유이다. 돈과 땅처럼 마음대로 행사
할 수 있는 재산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 유동자산 대부분을 문화유산으로
바꾼 것이다. 그의 수집품은 국보나 보물, 지방문화재로 수두룩하게 지정되었고, 특별전 때 소
장 문화유산을 공개하면서 그들의 가치는 연일 하늘을 치고 있다. 왜정 때 1만원을 주고 산 그
림이 지금은 수천~수억을 호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바꿔 말하면 간송의 재산은 줄어든 것
이 아니라 숫자가 모자를 정도로 크게 증가된 셈이다. (간송미술관의 소유 문화유산이 어느 정
도 되는지 아직 구체적인 보고서도 없음)
허나 간송이 그것을 노리고 문화유산 수집에 나선 것은 아니다. 그는 어둠의 시절을 겪으면서
무방비로 방치된 문화유산을 지키려는 생각만 했었지 수익을 보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에게는
오로지 문화유산 수호와 민족 교육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자손들도 부유층 수준으
로 넉넉히 살고 있으니 궁색해지지 않는 이상은 문화유산을 팔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의 배때기를 채우고자 서민들을 쥐어짜고 나라를 팔아먹고 갖은 간계를 부리는 이 땅의
졸부와 권력층과 달리 간송은 그 돈을 정말 어디에 써야 되는지, 어떻게 써야 가치가 높은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몸소 실현한 선각자이다. 적어도 사회 지도층(부유층)이라면 간송의 그런
예를 본받고 행동에 옮겨야 진정 지도층이 아닐까? 지금 이 땅에 간송 같은 위인이 없는 것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  간송미술관 보화각 2층

★ 간송미술관의 역사
간송 선생은 자신이 사들인 문화유산의 효율적인 보관과 연구를 위한 터전을 짓고자 서울 장안
에서 적당한 터를 물색했다.
1930년대까지 간송미술관 자리에는 구한말에 조선에 들어와 비료장사로 부자가 된 프랑스 사람
브레상이 별장을 짓고 팔자좋게 살고 있었다. 그는 자기 나라로 귀국하고자 별장을 비롯한 인근
숲 1만평을 내놓았는데, 그 소식을 들은 간송이 그 땅을 둘러보니 명당(明堂)의 기운이 넘치는
좋은 터였다.
그래서 그 일대를 모두 사들이고 1934년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북단장(北壇莊)을 세웠다. 북단장
이란 이름은 옛 선잠단(先蠶壇) 부근에 있다는 뜻으로 오세창 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왜정의 민족말살정책이 갈수록 요란해지자 간송은 근대식 박물관을 짓기로 작정하고 1938년 북
단장 옆에 2층 규모의 보화각을 세웠다. 당시 왜정은 전시체제를 이유로 물자통제를 하고 있었
는데, 그것을 비웃듯 이탈리아에서 대리석을 수입해 계단을 깔고, 진열실 바닥은 쪽나무 판자로
마루를 깔았으며, 오사까에서 화류진열장을 들여왔다. 또한 오세창과 박종화(朴鍾和, 간송의 외
종 사촌형) 등 서화계의 원로와 지식인들을 수시로 초빙해 자문을 구했다.
드디어 1938년 7월 5일 보화각 상량식(上樑式)을 가졌는데, 당시 75세였던 오세창은 너무 감격
스러워 다음의 정초명(定礎銘)을 새겼다.
'때는 무인년 윤 7월 5일 간송 전군의 보화각 상량식이 끝났다. 내가 북받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이에 명(銘)을 지어 축하한다. 우뚝 솟아 화려하니, 북곽(北郭, 한양도성)을 굽어본다. 만
품(萬品)이 뒤섞여 새집을 채웠구나, 서화 심히 아름답고, 고동(古董)은 자랑할만, 일가에 모인
것이 천추의 정화로다. 근역(槿域, 우리나라)의 남은 주교(舟橋)로 고구(攷究) 검토할 수 있네,
세상 함께 보배하고, 자손 길이 보존하세'

많은 이의 기대 속에 보화각이 탄생했지만 정작 왜정의 태클로 속세에 공개되지도 못했다. 그러
다가 어느 날,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 부임기간 1936~1942년)가 보화각을 구경하고 싶다
고 연락을 했다. 총독비서인 스즈끼의 청을 받은 김승현 박사가 간송에게 이를 전하니 간송은
마지못해 허락을 했다.
허나 막상 미나미가 보화각에 도착했을 때는 마중 나온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미나미의 표정은
잔뜩 울상이 되었고, 당황한 김승현은 급히 간송에게 달려가 총독이 왔음을 알리니 그제서야 자
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세수를 하고 의관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30분을 기다리게 하고서야 총독을 맞이한 간송은 보화각을 구경시켜주고 응접실에서 홍
차 1잔을 대접해 보냈다고 한다. 민족말살정책으로 조선반도와 만주를 쥐어짠 조선총독이 간송
에게는 그야말로 하찮은 대접을 받고서도 그저 기다릴 대로 기다리고 보여주는 대로 보고 조용
히 돌아간 것이다.

해방 이후로도 어수선한 시대가 계속되어 개방을 하지 못하다가 1950년 6.25가 터졌다. 불과 3
일만에 북한군이 서울을 접수하면서 북단장과 보화각 정원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고 보화각이
품은 막대한 문화유산은 북한에 의해 북송(北送)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북한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하던 최순우(崔淳雨)와 소전 손재형(孫在馨)에게 보화각 문화유산
을 죄다 포장해서 지정된 곳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그들은 문화유산을 어떻게든 지키고자 감
독관으로 온 공산당원 기(奇)씨에게 왜국 판화로 된 춘화(春畵)를 보여주어 흥분시키게 하고 보
화각 지하실에 있던 화이트호스 위스키를 권해 허구헌날 술에 곯아 떨어지게 만들었다. 또한 그
들이 무식한 것을 이용하여 문화유산 선별기준에서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고 속이고
물건을 하나 가져다가 풀면서 이건 아니라고 다시 싸게 하고, 목록이 잘못되었다며 다시 하게
했다.
포장이 진행되면서 감독관에게 '상자를 사오시오. 목수가 없소' 등으로 자꾸 태클을 걸었고 손
재형은 일부러 다리에 붕대를 매 뒤뚱뒤뚱 아픈 시늉까지 하면서 9월 28일 서울수복까지 포장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렇게 기가 막힌 지연작전으로 간송미술관의 유물은 모두 북송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북한이 책임자를 보내 추궁하려는 찰라 우리군과 유엔
군이 때마침 서울을 수복함으로써 화를 면하게 되었다.
허나 1951년 1.4후퇴로 간송이 급히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유물 대부분을 챙기지 못해 상당수는
분실되고 말았다. (분실된 것 중 상당수는 전쟁 이후 다시 사들임)
6.25이후로도 그의 생전에는 공개되지 못했으며, 그가 별세한 후, 그의 아들 전성우가 부친의
유업을 이어받아 유물을 정리하여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을 세우면서 비로소
천하에 공개되었다.

1971년 '겸재(謙齋)전'을 시작으로 매년 봄, 가을에 특별전을 열고 있으며, 그 특별전에 한해
달랑 30일만 공개하여 상당한 아쉬움을 건넨다. 또한 관람객은 폭증하고 있는데, 전시 공간은
여전히 보화각 1동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관람객을 위한 편의시설도 많이 부족하고 미술관 홈페
이지도 아직 갖추지 않아 편함을 가중시킨다. 게다가 관람객이 폭풍처럼 밀려오는 경우에는 2~3
시간 심지어는 4~5시간 이상 줄을 서야 되는 등, 관람객을 위한 배려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부디 입장료를 받아도 상관없으니 미술관의 오랜 명성과 간송의 뜻에 걸맞게 이제라도 전시공간
을 확충하고 관람객 편의 제공과 개선에 많은 신경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더 큰 아쉬움은 보화각 주변을 빼고는 관람객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 (통제의 정
도는 나날이 심해지고 있음) 통제 사유는 이 일대가 전씨 일가의 소유로 그 일가의 집이 보화각
을 중심으로 북쪽과 동쪽에 넓게 자리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곳곳에 배치된 상당수의 석조
문화유산과 숨겨진 아름다운 공간을 눈에 넣지 못해 무척이나 섭섭하다. 집 뜨락까진 아니더라
도 일단은 보화각과 가깝고 사생활 침해가 미미한 호랑이상과 괴산 외사리 승탑(僧塔, 보물 579
)까지는 적어도 쿨하게 공개를 해주면 좋겠다. 아니면 2012년 11월에 개방된 부암동 석파정(
石坡亭)처럼 입장료(좀 비싸도 상관은 없음)를 받아도 좋으니 공개 범위를 더욱 넓혀주었으면
좋겠다.

간송미술관은 훈민정음과 동국정운, 청자기린형뚜껑향로,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금동3존불감, 혜
원풍속도 화첩 등 국보 13점과 백자박산형뚜껑향로, 금보(琴譜), 금동여래입상, 문경5층석탑 등
보물 10점, 3층석탑과 석조팔각승탑 등 서울지방문화재 4점을 간직하고 있다.

※ 간송미술관 찾아가기 (2013년 10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나 성북03번 마을버스를 타
  고 성북초교 하차, 버스에서 내려서 왼쪽으로 100m가면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5분 정도 가볍게 걸어가는 것도 괜찮다.
* 미술관 내에 주차시설은 없으며 전시기간 중에는 바로 앞에 있는 성북초교 운동장을 임시로
  개방한다. 하지만 가급적 대중교통 이용을 권한다.

★ 간송미술관 관람정보
*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10시~18시이다. (인원이 많은 경우 관람시간 약간 연장 가능)
* 특별전 기간에는 전시하는 그림과 문화유산를 다룬 도록을 판매한다. 가격은 2만원선, 내용이
  좀 어려운 경향은 있으나, 그런데로 볼만하며 소장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97-1
(☎ 02-762-0442)


♠  간송미술관의 문턱을 들어서다

▲  금지된 곳에 아련히 보이는 호랑이상 (사진 중앙에 있음)

미술관 정문을 들어서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야 미술관의 본관인 보화각에
이르는데, 왼쪽 대신 매서운 기세로 출입금지라 쓰여진 정면의 길을 보면 수풀 너머로 귀여움이
묻어난 석상 2기가 눈에 달려올 것이다. 그들이 바로 이 땅에 흔치 않은 호랑이상이다. 예전에
는 눈치를 살살보며 저들까지 올라가곤 했는데, 열정이 많이 식었는지 이제는 그것도 귀찮다.


▲  호랑이상의 위엄

요즘은 카메라나 스마트폰이 워낙 잘되어있어서 최대한 줌을 땡기면 그들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래도 직접 앞에까지 가서 보는 게 더 좋음)
그들은 무섭고 소름이 돋는 호랑이보다는 밝은 표정에 앙증맞고 귀여운 고양이 같다. 그들은 간
송 선생의 구원으로 이곳에 들어왔는데, 고향과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다.

호랑이상에서 길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가면 숲속에 가려진 주택이 하나 있다. 간송 일가가 머무
는 집의 하나로 여겨지는데, 좀처럼 접근을 못하게 하니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괜히 몰래 접근
하다가 잠복근무중인 멍멍이에게 호되게 쫓기는 경우가 있으니 주의하기 바라며, 적어도 호랑이
상까지는 접근을 허가해도 괜찮을 듯 싶은데,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바라보듯 해야 되니
속이 참 쓰릴 정도이다.

▲  무인석(武人石)들
왕족이나 귀족의 무덤을 지켰을 그들은 간송 선생에 이끌려 지금은 미술관을 지킨다.
칼을 짚고 서 있는 눈맵시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  날렵한 몸매의 3층석탑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基壇)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탑신(塔身)과 노반, 상륜(相輪)을
갖춘 탑으로 그 역시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시대 탑으로 여겨진다.

▲  애꾸눈 석불좌상

간송 선생의 흉상 좌측 수풀 속에 애꾸눈 석불좌상이 숨어있다. 이 불상은 왼쪽 어깨는 옷으로
가리고 오른쪽 어깨는 훤히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을 취하고 있는데, 얼굴은 상당히 망가져
있으며, 오른쪽 눈은 파열되어 거의 애꾸눈처럼 되었다. 머리 부분도 3도 화상을 입었는지 매우
울퉁불퉁하여 무견정상(無見頂相 = 육계)과 머리 스타일은 확인하기가 어렵다.

석불의 조성시기는 신라 후기에서 고려시대로 여겨지나 자세한 신상정보는 모른다. 그 역시 간
송 선생의 구원으로 이곳의 일원이 되었으며, 그가 앉아있는 네모난 대좌(臺座)에는 불법(佛法)
을 지키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다.


▲  애꾸눈 석불좌상 대좌에 새겨진 다문천왕(多聞天王)
사천왕의 하나로 북쪽을 수호하는 다문천왕이 3층보탑(寶塔)과 창을 들고 있다.
이 석불을 미술관에 올 때마다 꼭 사진에 담았지만 다문천왕은 이번에 처음 본다.
왜 이제서야 그를 보게 된 것일까...? 그의 얼굴이 몸의 2/3를 차지할 정도로
신체비례가 맞지 않는 것처럼 나의 눈도 그리 잘 맞지 않는 모양이다.


♠  보화각 주변 둘러보기

▲  간송미술관 보화각(葆華閣)

간송미술관이 뜨락은 참 넓지만 건물은 보화각 하나가 전부이다. (그 외에 집들은 간송 일가의
생활공간)
2층 규모의 보화각은 1938년 북단장 옆에 세운 것으로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대리석으로 계단을
깔고, 진열실 바닥은 쪽나무 판자로 마루를 깔았으며, 오사까에서 화류진열장을 들여 내부를 꾸
몄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건축가인 박길용(朴吉龍, 1898~1943)이 설계한 건물로 의미가 큰데,
이렇게 많은 돈과 정성을 들여 1938년 7월 5일 상량식을 가졌으며, 이때 오세창은 너무 감격하
여 '조선의 보배를 두는 집'이란 뜻에서 보화각이라 이름을 지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간송미술관 전시실로 쓰이고 있는데, 건물이 워낙 단단하여 크게 손을 보거나
수정을 가한 부분이 없이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
관이자 간송의 정신과 체취가 서린 현장으로 요즘 흔한 등록문화재나 사적으로 지정하여 그 예
우를 해줘야 될 듯 싶은데, 아직 그런 소식까지는 들리지 않는다. 2012년에 방학동에 있는 간송
의 가옥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마당에 말이다.

저 작은 건물에 지금까지 수십만 명이 발걸음을 했고 70년이 넘는 연세에도 끄떡이 없으니 20~
30년만 넘으면 비리비리해지는 오늘날 건물과 견주어 참 대단한 건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간
송의 정성과 혼이 아낌없이 담긴 탓일 것이다.

   ◀  미술관(보화각)으로 인도하는 오솔길
보화각으로 가려면 꽃과 나무, 화분으로 가득한
녹음의 오솔길을 지나야 된다. 이 조그만 오솔
길에는 벽돌이 박혀 있으며, 길 양쪽에는 화분
과 수풀이 가득해 분재(盆栽)시장이나 숲속 산
책로를 거니는 기분이다.
여기가 과연 미술관이 맞을까? 의문이 들 정도
로 말이다. 자연물 사이로 망향(望鄕)의 한을
달래는 온갖 석물이 서로를 보듬고 있고, 다른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볼
거리인 공작의 보금자리(사육장)까지 지니고 있
어 관람객의 눈길을 단단히 잡아맨다. 이는 다
른 미술관에서는 감히 상상 조차 거부하는 특이
하고도 살아있는 특별 전시물(?)로 문화와 자연
이 공존하는 간송미술관 만의 묘한 매력이라 하
겠다.


▲  간송미술관 만의 매력, 공작의 보금자리

▲  사람 구경에 한참 넋이 나간 하얀 공작의 위엄

▲  공작의 보금자리 옆에 놓인 녹아버린 2개의 석물
잘 다듬어진 석대(石臺, 무덤의 혼유석이나 석물로 여겨짐) 위에 타다 만
흔적처럼 일부만이 남은 돌덩어리가 초췌하게 놓여져 있다.

▲  항아리나 함처럼 생긴 조그만 석물

 ▲  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호

오솔길을 장식하고 있는 3층석탑은 바닥돌 위에 2중의 기단(基壇)을 얹히고 그 위에 3층의 탑신
을 세운 형태로 1층의 탑신이 2, 3층보다 크다. 지붕돌 받침이 3단으로 이루어져 있어 고려 초
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탑 높이는 약 3m이다. 기단부의 상대갑석(上臺甲石)과 하대갑석(下
臺甲石)에 새겨진 연꽃무늬가 마치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 탑의 고향은 알지 못하며 탑에 관련된 어떠한 정보도 전해 오지를 않는다. 다만 왜인들이 빼
돌리려 한 것을 간송 선생의 구원을 받았으나 결국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기억상실증에 걸
린 양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미술관 뜰의 장식물이 되었다.

◀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1호

3층석탑 옆에는 듬직하게 생긴 석불 1구가 높은
대좌 위에 앉아 있다. 두 손을 위아래로 잡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어 비로자나불
임을 알 수 있는데, 석불의 전체 높이는 약 3m
정도이다. 그의 머리는 꼽슬인 나발(螺髮)로 머
리 꼭대기에는 상투 비슷하게 육계(肉髻 = 無見
頂相)가 솟아 있으며 얼굴은 살이 많아 인심이
후박한 뚱보 아지매 같다.
불상이 앉은 대좌(臺座)에는 연꽃(앙련)이 새겨
져 있고, 대좌 아래 기단(基壇)에는 결가부좌를
한 조그만 석불이 4면에 새겨져 있다, 이들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끝없는 명상에 나래를 누리
고 있는데 그 뒤로 두툼하게 생긴 동그란 두광(
頭光)과 신광(身光)이 눈에 띈다.

불상의 조성시기는 고려 중기로 여겨지며 자세한 정보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 역시 간송 선생
의 구원에 이끌려 이곳에 안착했으며, 평퍼짐한 엉덩이가 인상적인 그의 뒷모습도 풍만스럽다.


▲  대좌 기단에 새겨진 석불 - 선정인의 포즈로 웅크리고 앉아
명상의 나래를 펼친다.

  ▲  주인 잃은 광배(光背)의 비애

광배에 새겨진 꽃무늬들이 마치 살아 숨쉬는 것 같다. 저 광배에 등을 기댔을 석불은 어디로 간
것일까? 광배는 혹여 찾아올지도 모를 자신의 님을 기다리며 오늘도 화사한 무늬를 펼쳐 보인다.
내가 저 앞에 앉으면 나도 광배를 갖춘 부처나 보살이 되는 걸까? 다음에 오면 그 앞에 결가부
좌로 살짝 앉고 싶다. (그러다가 관람객들에게 싸대기 맞는건 아닌지..?)

◀  석조비로사나불 옆에 자리한 석등(石燈)
그 역시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다.


▲  오랜만에 문을 연 보화각 현관

▲  보화각 현관 좌측 석사자

▲  보화각 현관 우측 석사자

보화각 현관 주변에는 제법 무서운 티가 풍기는 3개의 석사자가 미술관을 지킨다. 현관 바로 옆
에 자리한 석사자는 크게 으르렁거리듯 입을 대문만큼 벌리며 관람객들에게 조용히 관람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현관 앞에는 석사자 2개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모습은 비슷하다.

현관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우측 사자는 오른쪽 발로 구슬을 축구공처럼 만지고 있고, 좌
측 사자는 특이하게 그의 새끼와 발을 맞대고 있다. 가만히 살펴보면 발 밑에 새끼 사자가 누워
어미의 발과 맞장구 치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


▲  늦가을도 걸음을 멈춘 보화각 남쪽 산책로

▲  금지된 땅 - 간송미술관 북쪽(서북쪽) 언덕

보화각 북쪽에는 녹음이 짙은 언덕길이 있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사색하며 거닐고 싶은 그 언
덕길의 끝에는 간송 일가의 저택이 있으며, 길이 3갈래로 갈린 중턱에는 석조팔각승탑과 석인(
石人)이 있다. 예전에는 중턱까진 접근이 가능했으나 이번에 갔을 때는 바리케이트도 모자라 사
람까지 배치해 감시를 한다. 그래서 간송미술관에 갈 때마다 무조건 사진에 담는 석조팔각승탑(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9호
)와 괴산 외사리 승탑(보물 579호)을 사진에 담지 못했다. 저렇게 길
을 막는데 내가 권력층이 아닌 이상 무슨 수로 들어가겠는가..?
금지된 구역에 들어가는 경우 관계자의 허가를 받아야 되나 그것도 쉽지가 않다. 눈치껏 살짝
들어가 사진에 담아도 되지만 통제가 심해지니 이러다가는 저 언덕길도 오르지 못하는 것은 아
닌지 모르겠다.

통제구역과 간송 저택 뜰에는 망향의 한을 간직한 석탑, 불상, 승탑, 문인석 등 다양한 석조문
화유산들이 베일에 가린 채 은둔해 있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입장료를 받아도 좋으니 제발
속세에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괜찮은 것들만 추스려 보화각 주변에 끄집어내는 것도 괜
찮을 것이다.

이번에 못본 석조팔각승탑과 괴산 외사리 승탑. 문경5층석탑 등이 궁금하다면 이전에 쓴 간송미
술관 답사기를 쿨하게 참조하기 바란다. (☞ 관련글 보러가기)


▲  내년 봄을 그리며 간송미술관과 작별을 고하다.

이렇게 하여 간송미술관 가을 특별전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미술관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답
사객의 발길은 여전했다. 봄과 가을이 한참이나 머물렀다 가는 도심 속의 별천지 같은 곳, 미술
관을 알록달록 수놓은 늦가을 풍경은 내년 특별전에서도 변치않는 모습으로 문화에 목마른 사람
들을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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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 기념 절 나들이 ~ 늘씬한 숲길과 많은 보물을 간직한 고색의 절집, 정릉 경국사

 


' 석가탄신일 기념 절 나들이 ~ 정릉 경국사(慶國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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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국사 숲길


올해도 변치않고 찾아온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이하 초파일)을 맞이하여 설레는 마음을 다독
이며 순례(巡禮)를 가장한 초파일 절 나들이에 나섰다.
우선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미답(未踏)의 절을 하나라도 지우고자 수유리에 있는 본원정사(本
願精舍, ☞ 관련글 보러가기)를 둘러보고 맛있는 점심 공양으로 배를 두둑히 충전한 다음 정릉
동(貞陵洞)에 있는 경국사로 발길을 향했다.

본원정사에서 경국사까지는 10리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임에도 차편이 시원치가 못하다. 그래서
절 인근에서 바퀴를 돌리는 강북구 마을버스 02번(본원정사↔수유역)을 타고 일단 화계사(華溪
寺)로 나왔다. 화계사는 봉은사(奉恩寺)와 조계사(曹溪寺), 도선사(道詵寺), 진관사(津寬寺)와
더불어 서울 굴지의 사찰이라 폭풍처럼 몰려드는 사람과 수레로 그야말로 대혼돈이었다.
수레들로 완전 마비가 된 화계사입구(한신대)4거리를 간신히 뚫고 화계사종점으로 이동해 서울
시내버스 152번(화계사↔경인교대,삼막사4거리)을 타고 길음역에서 143번 시내버스(정릉↔개포
동)로 환승하여 경국사(정릉4동 주민센터)에 두발을 내린다
(152번을 타고 삼각산동SK아파트 반대편 정류장에서 1166번으로 환승하면 바로 정릉4동으로 넘
어갈 수 있으나 배차간격이 20~30분임;;)

버스에서 내려 북쪽(북한산 방면)을 바라보면 경국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그 지시에 따
라 왼쪽 길로 들어서면 정릉천에 걸린 극락교가 나오는데, 그 다리를 건너면 조그만 주차장과
함께 일주문이 모습을 비춘다. 앞서 둘러본 본원정사는 초파일 대목이라 사람들이 무지 많았는
데, 경국사는 오늘이 초파일인지 물음표를 던질 정도로 한산했다.


▲  속세와 경국사를 이어주는 유일한 다리 극락교(極樂橋)

▲  경국사와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정릉천(貞陵川)

북한산 정릉계곡에서 발원해 큰 세상으로 흘러가는 정릉천은 가뭄의 갈증에 신음하고 있다. 하
천의 물은 누가 죄다 마셨는지 온데간데 없고 돌과 모래만이 가득해 속세처럼 황량하기만 하다.
무게가 아리송한 번뇌를 정릉천에 쿨하게 내던지고 싶은데 액체는 커녕 고체만 보이고 있으니
아무리 던져봐야 소용도 없을 것 같다, (물론 던져도 마찬가지)


♠  경국사 숲길에서 번뇌를 훌훌 털다

▲  경국사 일주문(一柱門)

극락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향하면 바로 눈앞에 경국사의 정문인 일주문이 마중한다. 문이 바로
코앞에서 나를 뚫어지라 굽어보니 안그래도 큰 문이 더욱 장대하게 보여 단단히 주눅을 들게 만
든다. 돌로 만든 굵직한 기둥에는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이 섬세하게 새겨
져 있어 문의 위엄을 더욱
돋구고 있으며, 지붕 밑에는 '삼각산 경국사'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
어 이곳의 정체를 밝힌다.

  극락교 가설기념비(架設記念碑)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있다.


▲  경국사의 싱그러운 보물, 경국사 숲길

일주문을 들어서면 산내음이 진동하는 푸른 숲길이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경국사의 첫
이미지를 긍정으로 인도하고 속세에서 오염된 안구에 한줄기 감동을 선사하는 이 숲길은 이곳의
자랑이자 싱그러운 보물로 비록 거리는 짧으나 서울에 있는 숲길 중의 갑(甲)으로 쳐주고 싶다.
이 숲길은 300년 묵은 소나무까지 100m 정도 곧게 펼쳐져 있고 거기서 서쪽으로 100도 정도 꺾
여 경내로 이어진다. 숲길의 길바닥은 다행히 콘크리트로 밀지 않고 박석(薄石)을 깔아 숲길의
운치를 전혀 해치지 않았다. (흙길이었으면 더 좋으련만..)

숲길에 들어서니 속세(俗世)에서 오염되고 피로감에 찌든 두 눈이 싹 정화되면서 단단히 호강을
누린다. 하늘로 늘씬하게 솟아 하늘과 해를 가린 나무들이 저마다의 빼어난 자태를 뽐내며 앞다
투어 갖은 청정한 기운을 베푸니 머리와 마음마저 어느 정도 정리되는 것 같다. 경국사가 경내
를 앞에 두고 이런 멋드러진 숲길을 내민 것은 극락교와 일주문에서도 살아남은 번뇌와 속세의
기운을 자연의 힘에 의지해 모두 털고 경내에 임하라는 뜻이다.

▲  정처가 없는 내 마음을 제대로 앗아간 경국사 숲길
집으로 몰래 가져와 나 혼자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숲길이다. 허나 조물주가 아닌 이상
그건 불가능하니 사진으로 대신 품으련다. 이 숲길은 봄도 아름답지만 나무들이
처절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늦가을이 단연 백미(白眉)이다.


▲  300년 묵은 소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11호

숲길이 서쪽으로 100도 구부러지는 곳에 숲길의 최고 고참인 소나무가 있다. 나이가 무려 300년
이 넘었다는 오래된 나무로 몸매도 매우 준수하여 키가 무려 20m를 넘는다. 제아무리 잘난 인간
이나 4발 수레도 그의 앞에서는 거의 개미에 불과하다.

하늘을 떠받들며 숲길을 다스리는 이 나무는 매우 지극한 나이임에도 그 흔한 보호수 등급이 아
닌 겨우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등급에 머물러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편
의상 지정하는 등급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 싶겠지만 서울에서는 100~150년이 넘는 나무 가운데
지방기념물 이상의 지위를 가지지 못한 나무들은 거의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300년
이면 100% 보호수로 지정되고도 남을 연세인데 그에 상응하는 적당한 등급을 매겨야 되지 않을
까 싶다. 소나무 앞에는 수레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있다.


♠  경국사를 빛낸 큰 승려의 승탑을 만나다

▲  승탑(僧塔)과 탑비들의 보금자리

소나무 북쪽에는 승탑 2기와 비석(碑石) 3기로 이루어진 너른 공간이 있다. 다들 고색의 때가
얇은 존재로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그냥 지나치기 쉽다. 허나 이들 승탑은 우리나라 현
대 불교 발전에 크게 빛을 선사한 승려 2명의 사리탑으로 경국사에서도 매우 비중이 큰 인물들
이다. 그러니 한번 더듬고 가길 권한다.
비석 가운데 가장 왼쪽에 있는 큰 존재가 경국사의 오랜 내력이 담긴 사적비(事蹟碑)로 1995년
에 지관이 만든 것이다.


▲  자운대율사 계주원명사리탑(戒珠圓明舍利塔)

모난 넓은 기단 위에 마치 범종(梵鍾)이 그대로 돌로 굳어버린 듯한 모습의 석종형 승탑은 자
운대율사(慈雲大律師, 1911~1992)의 사리탑으로 탑 이름은 계주원명사리탑이다.

자운대율사는 왜정(倭政) 이후 계율을 무시하고 아내를 맞이해 가정을 꾸리며, 심지어 고기까지
먹는 등, 불교가 타락의 끝으로 추락하는 모습에 크게 발끈하여 불교 중흥과 율풍(律風) 진작에
팔을 걷어부쳤다.
그는 1940년부터 서울 도심에 있는 대각사(大覺寺)에 머물며 율장과 관련 자료를 찾기 위해 매
일 도시락을 싸들며 국립중앙도서관을 들락거렸다. 그래서 만속장경(卍續藏經)에 수록된 오부율
장(五部律藏)과 그 주소(註疏)를 모두 필사해 연구했으며, 1948년 문경 봉암사(鳳巖寺)에서 처
음으로 보살계(菩薩戒) 수계법회를 열었다.

1949년에는 천화율원 감로계단(千華律院 甘露戒壇)을 설치해 대각사에서 범망경(梵網經), 사미
율의(沙彌律儀), 사미니율의(沙彌尼律儀), 비구계본(比丘戒本) 등의 간행을 준비했으나 6.25전
쟁으로 모두 분실하고 만다. 허나 이에 굴하지 않고 부산에서 다시 율문(律文)을 준비하여 한문
본(漢文本) 25,000권을 포함해 총 48,000권을 간행해 불교의 법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고 1981년부터 단일계단 전계대화상에 추대되어 1991년까지 많은 승려에게 계를
주었으며, 1992년 2월 7일 해인사(海印寺)의 부속암자인 홍제암(弘濟庵)에서 바쁘게 살아온 삶
을 마무리 지었다.
자운이 세상을 뜨자 그와 인연이 있던 경국사에서 그의 승탑을 만들었는데, 2년 동안 공을 들여
2005년에 완성을 보았다. 승탑은 그의 명성과 업적에 걸맞도록 특별하게 계단형(戒壇形)으로 만
들어 두고두고 그의 업적을 기린다.

자운대율사 사리탑 뒤쪽에 자리한 고운 맵시의 승탑은 보경보현대종사(寶鏡普賢大宗師)의 사리
탑으로 정토사지(淨土寺址)에 있던 고려시대 승탑인 홍법국사실상탑(弘法國師實相塔)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 그리고 승탑 바로 옆에 자리한 보경의 행적비는 1991년 지관이 찬(撰)을 하고
세운 것으로 그의 일대기가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보경은 1916년 이곳 주지가 되어 60여 년 동안 경국사를 꾸린 인물로 교학(敎學)과 선지(禪智)
를 두루 익혔고, 계율에도 무지 철저해 승가의 귀감이 되었다. 특히 불화(佛畵)를 잘 그려 화승
(畵僧)으로도 널리 활동을 했는데, 경국사의 불화 상당수는 그의 손길에서 탄생한 것이다.


▲  펼쳐진 책 모양의 불교대사림(佛敎大辭林) 편찬발원문

불교대사림(불교대사전)은 지관이 오랫동안 추진한 편찬 사업으로 10여 권을 편찬했다. 이 발원
문은 지관이 정성을 들여 작성한 것인데, 그 내용에서 그의 지성이 제대로 우러나온다.


▲  경국사 샘터
자연이 내린 샘물의 보금자리로 깊이가 좀 있어서 바가지를 들고 한참 팔을
뻗어야 물에 닿는다. 샘터 위에는 광배(光背)를 갖춘 조그만 석불입상 3개가
있고, 그 뒤에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 쓰인 표석 3개가 나란히 자리한다.

▲  경내로 인도하는 오르막 숲길 (샘터 주변)

◀  보리수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12호
 (나무 너머로 보이는 건물은 관음성전)

주차장에서 서쪽으로 휘어진 오르막길을 오르면
숲속에 숨겨진 경국사가 모습을 비춘다.
경내 앞에는 넓은 공터가 펼쳐져 있는데, 초파
일 행사가 막 끝났는지 천막과 의자로 어수선하
다. 공양밥도 바로 여기서 제공했는데, 본원정
사에서 공양을 먹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지
만 다시 시장기가 밀려와 공양 여부를 물어보니
벌써 마감되었다고 그런다.

이곳에는 3갈래로 솟은 커다란 나무가 있는데,
그는 불교에서 매우 중요시 여기는 보리수나무
이다. 나이는 200년에 이른다고 하며, 앞에 소
나무처럼 보호수 등급도 아닌 성북구의 아름다
운 나무 등급에 머물러 있다. 서울에 거의 흔치
않은 오래된 보리수인데도 말이다.


♠  경국사 관음성전(觀音聖殿)

▲  관음성전의 정면
담장 너머 윗쪽이 관음성전, 천막이 있는 밑쪽이 공양간이다.


▲  관음성전의 뒷모습

보리수나무 뜨락에서 관음성전 좌우로 나있는 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경내에 이르는데, 가장 먼
저 중생을 반기는 건물은 보리수나무를 바라보고 선 관음성전이다. 이 건물은 흔히 말하는 관음
전(觀音殿)으로 이 절은 유난히 '聖'과 '寶' 돌림을 좋아하는지, 그 글자가 첨가된 건물이 많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관음성전은 옛 무량수각(無量壽閣) 자리에 2000년대에 새로 지은 'ㄷ'모양
의 건물로 관음보살의 거처이다. 건물이 워낙 넓어 큰방이라 불리기도 하며, 법회와 강의 장소
로 쓰이기도 한다. 그리고 바로 밑에는 넓게 자리를 파고 공양간으로 삼으면서 졸지에 2층이 되
버렸다.

관음성전 정면에는 불당에서 흔치 않은 툇마루가 있어 두 다리를 잠시 쉬어갈 수 있으며, 연병
장처럼 넓은 건물 안에는 목관음보살좌상과 아미타후불탱, 감로도 등의 여러 탱화를 비롯해 중
생들의 시주로 만들어진 무수한 원불(願佛)이 일제히 금빛 물결을 이루며 내부를 장엄한다. 또
한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 쓴 '화엄회(華嚴會)', '법화회(法華會)' 현판과 이
승만이 쓴 '경국사' 현판이 걸려있다.


▲  관음성전의 중심부

▲  경국사 목관음보살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8호

관음성전 불단에는 이 건물의 주인인 관음보살좌상이 자리해 있다. 어린 동자승이 관음보살 누
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의 보관(寶冠)과 복장, 장식물을 슬쩍 착용한 것일까? 아니면
잠시 관음보살 체험을 하는 것일까? 표정이 어린아이처럼 해맑고 천진난만하다. 게다가 덩치도
쥐방울만하니 귀여움도 가득 묻어나 나도 모르게 쓱쓱 쓰다듬고 싶다.

이 불상은 원래 경국사 것이 아니었다. 1703년 전남 영암 도갑사(道岬寺)에서 조성된 것으로 도
갑사의 부속암자인 견성암(見性庵)에 있었다. 청신(淸信)이 화주가 되어 만든 것으로 어찌어찌
하여 서울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는데,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다. 덕분에 경국사의 오랜 문화유
산이 하나 더 늘었으니 경국사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지, 그가 경국사에 들어온 이후에는 한동안
극락보전 우측에 있던 것을 관음성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불상의 높이는 60cm에 조그만 크기로 그의 뱃속에서 발견된 발원문(發願文)에 따르면 색난(色難
)을 수조각승(首彫刻僧), 순경(順瓊)을 부조각승으로 하여 행원(幸垣), 대원(碓遠), 일기(一機),
대유(大裕) 등이 같이 조성했다고 한다. 색난은 조선 후기에 호남지역에서 활약한 불상 전문 승
려이다.

앳된 표정이 묻어난 얼굴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는데,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으며, 눈은 살
짝 뜨고 있는 것 같다. 코는 끝이 오똑하고, 입은 굳게 다물고 있으며, 머리에는 화려하면서 신
라 금관(金冠)처럼 무거워 보이는 보관을 썼는데, 귀 옆까지 관대자락이 내려와 보관의 수려함
을 더욱 드높인다. 그런 보관 밑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삐죽 나와있는데, 이마 중간에는 백호가
찍혀 있으며, 볼살은 두툼하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다.
신체는 그런데로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작은 어깨에는 법의(法衣)가 걸쳐져 있는데, 목 뒷부분
이 약간 접혀있고, 법의의 왼쪽은 어깨를 완전히 가리고 어깨부터 무릎까지 내려오면서 무릎 위
에 놓인 왼손을 손목부분까지 완전히 덮고 있다. 그리고 법의 오른쪽은 어깨를 덮은 뒤 오른쪽
팔꿈치 아래로 하여 배 부근으로 내려가 왼쪽에서 내려온 법의 안쪽으로 여며진 모습이다. 이런
착의법은 넓게 트인 가슴과 수평 혹은 연꽃형의 군의 표현과 함께 조선 후기 불상의 가장 전형
적인 모습이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고 첫째 손가락과 3째 손가락을 마주잡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에 대고 그
의 필수품인 정병(政柄)을 살짝 쥐고 있다. 앉은 폼은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오른쪽 발이 훤히
드러나 있으며, 무릎 앞쪽으로는 옷자락이 물결치듯이 좌우로 유려하게 흘러내렸다.

조선 후기 목조보살상의 양식을 잘 드러낸 불상으로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혔으며, 그의 뒤에
는 아미타불이 중심이 된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한 후광이 되어준다. 이 후불탱은 1924년에 보경
이 그린 것이다.


▲  경국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1호

관음성전 우측 벽에는 고색의 기운이 제법 넘치는 매우 복잡한 그림이 하나 있다. 이 그림은 죽
은 이의 극락왕생을 염원하고자 만든 감로도로 19세기 중/후반에 서울,경기 지역에서 크게 유행
한 감로왕도(甘露王圖)의 하나이다.
그림을 보면 밑부분은 극락왕생을 못해 방황하는 영가(靈駕, 죽은 사람)들이 그려져 있고, 중간
에는 그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후손들이 있다. 그리고 가장 윗쪽에는 극락으로 들어간 영가의 환
희가 담겨져 있다.

무수히 많은 인물의 표현과 생동감있는 자세 연출로 조금의 공백도 허용치 않고 알차게 채우고
있으며, 서울,경기와 강원도에서 활동했던 화승(畵僧)인 축연과 철유가 상궁(尙宮)들의 시주로
1887년경에 그린 것으로 왕실의 불화 발원 사례를 잘 보여준다. 조선이 비록 대내외적으로는 불
교를 배척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적지 않게 불교를 옆구리에 낀 것이다. 특히 19세기부터 1910년
이전까지 상궁은 물론 왕비와 후궁의 시주로 그려진 불화가 서울과 경기도 사찰에 상당히 존재
한다. 그럼 여기서 잠시 경국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자칫하면 그냥 넘어갈 뻔 했다.

★ 정릉의 원찰이자 현대 불교의 큰 승려들이 주석했던 북한산 경국사(慶國寺)
북한산(삼각산)의 제일 남쪽, 정릉천을 낀 숲속에 둥지를 튼 경국사는 1325년(고려 충숙왕 12년
)에 자정율사(慈淨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절 위치가 북한산 청봉(靑峰) 밑이라 절 이
름을 청암사(靑岩寺)라 했으며, 1330년 무기(無奇)가 이곳에 머물러 천태종(天台宗)의 교풍을
크게 떨치고, 1331년에는 채홍철(蔡洪哲, 1262~1340)이 절을 증축해 승려들의 수행을 도왔다고
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공식적인 기록이나 유물이 없어 신빙성은 떨어지며, 명부전에 있는 요나라에
서 넘어왔다는 철조관음보살좌상이 경내의 유일한 고려 때 유물이다. 하지만 고려 때는 절이 우
후죽순 들어서던 시기라 그 시류를 타고 고려 후기에 문을 열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조선이 들어서면서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서서히 기울다가 결국 중종(中宗) 시절에 풍비
박산이 나고 터만 남았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1545년(인종 원년) 왕실의 도움으로 쓰러진 절을
일으켜 세웠고, 1546년에는 조선의 여제(女帝)로 악명을 날린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지원에 힘
입어 크게 중창을 벌였다. 이때 문정왕후에 잘보이고자 부처의 가호로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을
기원하는 뜻에서 경국사(慶國寺)로 이름을 갈았다고 한다.

1669년(현종 10년) 오랫동안 잊혀지고 철저히 파괴된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
씨의 능인 정릉(貞陵)이 복원되자 근처에 있던 봉국사(奉國寺, 국민대 근처)와 흥천사(興天寺,
관련글 보러가기)와 함께 정릉을 지키는 원찰이 되었다. 이때 경국사로 이름을 갈았을 가능
성도 있다. 어쨌든 정릉의 원찰(願刹)이 되어 망할 일은 없게 된 경국사는 이후 탄탄대로를 누
비게 된다.

1698년 연화승성(蓮華昇城)이 절을 중수하고 천태성전(天台聖殿)을 세웠다. 천태성전은 독성각
의 다른 이름으로 당시의 상량문이 남아있다. 1737년에는 낙암의눌(洛巖義訥)이 주지로 부임하
여 절을 손질했고, 1793년에는 천봉태흘(天峰泰屹)이 크게 중수했다.
1855년에는 예봉평신(禮峰平信)이 법당을 다시 세웠고, 1864년에는 고종(高宗)의 즉위를 축하하
는 재를 열어 왕실에 더욱 굽신거렸다. 그리고 1868년에 칠성각과 산신각을 새로 짓고 호국대법
회를 열었는데 이때 왕실에서 범종(梵鍾)을 하사했다. 1870년에는 큰방을 수리했다.

1878년에는 함홍치능(涵弘致能)이 고종의 지원으로 요사를 중수하고, 철종의 왕비인 철인왕후(
哲仁王后) 김씨의 49재를 지냈으며, 1887년에는 석찬(碩讚) 등이 팔상도(八相圖)와 지장시왕도,
신중도, 현왕도, 감로도 등을 조성하여 봉안했다.

어둠의 시절에는 기송석찰(其松錫察)이 1914년에 극락보전을 다시 세웠고, 1917년 정릉천에 반
야교를 놓았다. 1921년부터는 그 유명한 보경(寶鏡)이 주지로 머물면서 절을 크게 일으켜 세웠
는데, 그는 직접 건물에 단청을 입히고 큰방에 아미타후불탱과 구품탱 등을 그렸으며, 1930년에
는 영산전과 산신각, 큰방을 중수하고, 1936년에는 영산전에 석가모니후불탱과 신중탱, 18나한
탱 4폭, 범종을 조성했다. 그리고 1939년에는 삼성보전에 약사탱, 칠성탱을 봉안했다.

6.25전쟁 이후에는 이승만 전대통령이 이곳에 들렸는데, 보경의 인격에 크게 감동을 먹어 참다
운 승가(僧伽)의 모범이 이곳에 있다면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 인연으로 경국사의 단골이
되어 여러 차례 보경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1953년 11월 닉슨 미국 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
하자 이승만이 한국문화의 참모습이 경국사에 있으니 한번 가자며 그를 끌고 오기도 했다. 이때
닉슨은 경국사에서 참배했던 경험이 한국 방문 일정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밝히며 경국사
를 단단히 추켜세우기도 했다.

보경이 사라진 이후, 현대의 큰 승려로 일컬어지는 지관(智冠)이 주지로 머물면서 관음전과 삼
성보전, 영산전, 산신각, 환희당 등 대부분의 건물을 중수해 경국사를 더욱 반석 위에 올렸다.
또한 1989년에는 극락보전을 크게 넓혔으며, 1991년에 보경의 행적비를 세웠다. 이후 사적비를
세우고, 삼성보전과 관음성전을 새로 만들었으며, 자운의 부도인 계주원명사리탑을 세웠다.
최근에는 2012년 1월 지관이 입적하면서 그의 사리를 공개했는데, 이때 많은 중생이 몰려와 그
를 애도하며 사리를 친견했다.

북한산(삼각산)에 안겨있다고는 하지만 거의 주택가에 둘러싸인 형태로 다행히 절 주변이 수목
들로 삼삼해 심산유곡의 산사에 파묻힌 기분이다. 또한 정릉천이 바로 앞에 흘러 속세와 적당히
경계를 이루며, 도심 속의 조그만 오아시스처럼 포근하고 그윽하기만 하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다. 그때는 학생이라 그런지 수상한 짓도 안했음에
도 승려가 나가라고 성을 냈다. 당시의 기억 때문에 경국사를 매우 불쾌하게 여겼는데, 그래도
뭔가 끌렸는지 이듬해 초파일에 다시 찾은 적이 있다. 허나 또 쓸데없는 잔소리를 들을까 겁이
나 관음성전 앞에서 발길을 돌렸고, 이후 2004년 초파일에 다시 찾아 경내를 둘러보았다. 그때
까지만해도 일주문 앞에 외지인은 들어오지 말라는 차가운 푯말이 있었다.
수행도량의 명성을 누리는 것은 좋으나 대신 외지인에게는 배타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곳이
유명한 곳도 아니고 관광지도 아니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허나 그런 경국사도 지정문화유산
이 늘어나고 점차 이름이 드러나 답사객의 발길이 조금씩 늘면서 외지인에 대한 배타적인 마음
도 조금은 허물어진 듯 싶다.

청정한 승가의 본가임을 자처하는 이곳에는 극락보전과 관음성전, 삼성보전, 무우정사, 명부전,
영산전, 산신각 등 10여 동의 건물이 경내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을 비롯해 팔상도(八相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2호), 괘불도(
掛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4호) 등 지방문화재 6점을 간직하고 있다. (괘불도와 팔상도는
관람이 어려움) 그외에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철조관음보살좌상과 보경이 그린 여러 불
화 등이 전한다.
건물들은 죄다 근래에 새로 손질하여 고색의 멋은 없지만 그 속에는 많은 문화유산들이 고색의
기운을 피우고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해준다.

※ 경국사 찾아가기 (2013년 5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길음역(3번 출구)에서 110, 143번 시내버스나 성북06번 마을버스를 타고 경국사
  (정릉4동주민센터) 하차, 성북06번은 크게 돌아간다.
*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62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과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에서 1020번 이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3동 753 (☎ 02-914-5447)


♠  경국사 극락보전(極樂寶殿) 주변

▲  경국사 극락보전

경국사의 법당(法堂)인 극락보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관음성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있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이 건물은 뜨락보다 한 3m 높은 기단(基壇) 위에 자리해 있
어 자못 웅대해 보이는데, 1989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증축한 것이며, 한때는 건물 앞쪽에 1칸
정도 보태어 공간을 넓혔으나 나중에 철거했다.

법당 앞에는 으례 있어야 될 석탑이나 석등은 없고, 그냥 빈 뜨락만 있으며, 그 좌우로 명부전
과 종무소, 삼성보전 등이 뜨락을 둘러싸고 있다.


▲  화려하게 속살을 비춘 극락보전 불단과 닫집
극락보전 속에 또다른 건물인 닫집(불단 위에 떠 있는 붉은 피부의 장식물)에는 하늘을
나는 극락조와 공작, 백학과 여의주를 문 2마리의 용, 그리고 연꽃봉오리가 조각되어
극락세계를 장엄하게 재현한다. 저런 극락이라면 한번은 가볼만하지 않겠는가?

▲  경국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 - 보물 748호

극락보전 불단에는 눈을 매우 부담스럽게 만드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이하 목각탱)과 조그만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아미타3존불은 근래에 만든 거지만 그 뒤에 든든하게 자리한 목
각탱은 경국사에서 특별히 옆구리에 끼며 자랑하는 이곳의 제일 가는 보물이자 이곳 최초의 지
정문화재로 서울에 거의 유일한 조선 후기 후불목각탱이다.

이 목각탱은 나무를 조각하여 금색을 입힌 것으로 겉으로 보면 꽤 복잡해 보이지만 잘 살펴보면
구조는 단순하다. 탱화 중앙에는 극락전의 주인인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가 두손을 무릎에 댄
이른바 설법인(說法印)을 취하고 있는데, 앙련(仰蓮)이 새겨진 여러 층으로 된 대좌(臺座)에 앉
아있다. 그런데 탱화의 주인공임에도 그를 둘러싼 인물들보다 덩치가 작아 귀여운 인상을 풍긴
다. 그래도 그들과 달리 주형광배(舟形光背)를 달아주어 그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고, 광배의
위,아래가 비슷한 폭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양식이다. 또한 광배 안에는 연꽃을 새기
고 일정한 너비의 주연(周緣), 밖으로는 화염(火焰) 무늬를 생겼는데, 그 무늬는 위로 솟구치고
있고, 그 안쪽에 조그만 불상이 4구 정도 있다. (눈에 잘 띄지는 않음)
 
아미타여래의 옷무늬는 통식(通式)으로 조선시대 양식이며, 그의 좌우에는 아미타8대보살을 각
각 4명씩 배치했다. 그들 가운데 지장보살을 제외히고 모두 가지각색의 보관(寶冠)을 쓰고 연꽃
을 들고 있으며, 앙련 위에 앉아있다. 그 밑의 좌우 끝에는 사천왕(四天王)의 하나인 증장천왕
(增長天王)과 지국천왕(持國天王)을 배치해 아미타불의 호위를 부탁했고, 보살들 바깥 좌우에는
나한상(羅漢像) 1구씩 두었다.

탱화의 양식으로 보아 18세기 중반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몇 안되는 조선 후기 목각
탱화이자 서울에 거의 유일한 고색의 목각탱화로 그 가치는 대단하다.


▲  경국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3호

극락보전 좌측 벽에는 호법신장(護法神將)들이 빼곡히 그려진 신중도가 자리해 있다. 이 그림은
1887년 상궁들의 시주로 혜산 축연(惠山 竺演) 등이 조성한 것으로 중앙에는 동진보살(童眞菩薩
)과 제석천(帝釋天), 범천(梵天)이 있고, 그 좌우에 명왕(明王)와 신장(神將) 등이 배치되어 있
다. 이들은 인도의 토속신으로 범천은 무려 힌두교의 창조신인데, 불교에서 이들을 모두 영입해
부처의 세계를 지키는 신장으로 꾸몄다. 특이한 것은 산신(山神)과 조왕신(竈王神) 등 우리나라
의 토속신이 위태천(韋太天)의 협시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극락보전을 서성이고 있으니 마침 아줌마 보살이 부처에게 봉양한 길쭉한 떡을 가져와 중생들에
게 나눠준다. 나도 하나 먹었는데, 부처를 거쳐서 온 떡이라 그런지 맛이 좀 다른 거 같다.


▲  삼성보전(三聖寶殿)과 범종각이 하나가 된 현장

극락보전 좌측에는 삼성보전과 범종을 비롯한 사물(四物)을 담은 범종각이 하나가 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삼성보전은 산신과 독성, 칠성을 봉안한 삼성각(三聖閣)의 다른 명칭으로 생각했다. 허나 이곳
은 전혀 엉뚱하게도 약사여래(藥師如來)을 중심으로 미륵불(彌勒佛), 치성광여래(칠성)를 협시
로 배치한 약사3존불을 봉안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명부전 뒤에 산신각과 천태성전을 두면서
산신과 독성을 그곳으로 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빈 자리에 약사여래와 미륵불을 배치했고 따
로 거처가 없는 칠성(七星)만 이곳에 두어 약사여래의 협시로 삼았다.

하얀 피부의 약사3존불 뒤와 좌우에는 1939년에 보경이 그린 약사회탱과 칠성탱, 미륵탱이 뒤를
받쳐준다.

▲  삼성보전 내부 (가운데가 약사회탱,
왼쪽이 미륵탱, 오른쪽이 칠성탱)

▲  관음성전 북쪽에 자리한 종무소 겸
요사(寮舍)


▲  극락보전 뜨락에 마련된 관불(灌佛) 의식의 현장

관불 현장에는 곱게 차려입은 아줌마 신도가 자리를 지키며 의식을 도와주기 마련인데, 여기는
셀프서비스인 모양이다. 각자 알아서 길쭉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아기부처에게 부어주면 된다.
1년 만에 외출을 나와 한참 초파일 환희(歡喜)에 잠긴 그도 저물어가는 해가 무척 아쉬울 것이
다. 오늘이 가면 다시 어두컴컴한 창고로 들어가 1년을 갇혀야 되니 말이다.


♠  경국사 명부전, 영산전 주변

▲  북쪽을 바라보는 명부전(冥府殿)

극락보전 우측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조촐한 건물 내부
에는 죽은 이의 극락왕생을 위해 헌신하는 지장보살상을 비롯하여 시왕(十王)과 판관 등 명부(
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지장시왕도와 사자탱, 시왕탱 등이 걸려있고.

좌측에는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의 철조관음보살좌상이 있다.


▲  명부전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과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0호

푸른 머리의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서 있다.
이들은 보경이 흙으로 직접 빚어서 만든 것으로 그들 뒤에 든든하게 자리한 그림이 지방문화재
로 지정된 지장시왕도이다.
이 그림은 1870년에 안암동 개운사(開運寺)에 있는 지장시왕도를 참고 삼아
혜산 축연(惠山 竺
演)이 그린 것이다. 혜산은 구한말에 강원도와 서울,경기에서 활동하던 화승으로 서울에는 흥천
사와 경국사를 비롯해 그의 불화 20여 점이 전한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릴 때 수화사(首畵師)로
활동하면서 불사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림을 보면 선악동자를 함께 그린 전형적인 지장시왕도 형식으로 유난히 가늘고 긴 눈과 아주
작은 입 등 얼굴 한 가운데로 몰려있는 이목구비, 좁은 미간, 눈 주위와 코/뺨 부분에 음영을
표현해 얼굴의 골격을 강조한 점은 다른 지역의 불화와 구별되는 서울,경기 지역 조선 후기 불
화의 특징이다.


▲  명부전 우측의 시왕상과 시왕탱

▲  명부전 좌측의 시왕상과 시왕탱, 철조관음보살좌상

지장보살상 불단 좌우에는 죽은 이를 심판하는 저승의 10왕이 각각 5왕씩 앉아있다. 복장은 다
비슷하지만 손짓이나 얼굴,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은 서로 다르다. 그들 뒤에는 시왕탱이 있는데,
역시 1왕당 1폭씩 배치하여 총 10폭을 이룬다.

명부전 좌측 벽에는 앉아있는 모습의 커다란 철불(鐵佛)이 있는데, 여기서는 철조관음보살좌상
이라 불린다.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11세기에 거란족의 나라인 요(遼)나라에서 조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요나라의 것인지는 아직 분명치는 않으나 고려와 조선의 불상과는 확연히 차
이를 보이고 있어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것은 확실하며, 언제 무슨 일로 여기까지 들어왔는지는
자세한 사연이 없어 모르겠다.
 
의자에 사람처럼 앉아있는 이 불상은 성인 남자 키 정도 되는데, 얼굴은 그냥 무표정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대고 있는데, 손가락에는 특이하게 반지가 끼여져 있다. 적의
(翟衣) 형태의 옷에는 용과 새, 사자 등이 새겨져 있고 보관에는 모란꽃무늬를 매우 정교하게
나타냈다. 그리고 정병(政柄)까지 새겨져 있어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로 여겨지나 정병은 근래
에 손질한 것이라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허나 경국사에서는 호랑이가 곶감의 눈치를 보던 시
절부터 관음보살로 받들고 있어 한때 관음전에 있기도 했으며,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임에
도 아직까지 지정문화재 등급을 얻지 못하고 있다.


▲  가운데 문을 열어둔 경국사 영산전(靈山殿)

명부전에서 서쪽으로 난 계단길을 오르면 부처와 그의 열성제자 나한들의 공간인 영산전이 모습
을 비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말에 지어진 것을 1930년에 보경이 중
수했다. 어칸 위에 달린 영산전 현판은 해강 김규진이 쓴 것으로 필체가 무척 돋보인다.


▲  영산전 석가3존불과 석가모니후불탱

현란한 보관의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거느린 석가불의 표정이 후덕해 보
인다. 이들 3존불은 보경이 흙으로 직접 빚어서 도금을 입힌 것으로 뒤에 있는 석가모니후불탱
은 1935년에 그가 그린 것이다. 주지승이 직접 불상을 만들고 불화를 그리는 경우는 흔치 않은
데 그림과 조형에 능한 보경이 주지로 있으면서 불상을 조성하고 그림까지 그리니 제작 비용은
크게 절약되었을 것이다.

▲  영산전 18나한상과 18나한탱. 신중도

▲  영산전 18나한상과 18나한탱

영산전 석가3존불 좌우에는 부처의 열성제자인 나한상(羅漢像)과 나한탱이 배열되어 있다. 하얀
피부의 나한상은 좌우에 각각 9개씩 18나한을 이루고 있는데, 16나한은 지겹도록 봤지만 18나한
은 생소하다. 경국사를 찾은 중생처럼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닌 그들 뒤에는 나한탱이 2폭씩, 4
폭이 자리해 있는데, 나한과 동자가 어울려 있는 모습이다.
이들은 모두 보경이 만든 것으로 왼쪽에 1폭은 1966년에 다시 그렸고, 우측 벽 구석에 있는 신
중탱은 1966년에 제작된 것이다.


♠  경국사 마무리

▲  경국사 산신각(山神閣)
극락보전 뒷쪽 언덕에서 경내를 굽어보고 있는 산신각은 산신(山神)을 봉안한
공간으로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조촐한 건물이다.

▲  산신각 산신탱

소나무와 산을 배경으로 한 산신탱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童子) 등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진
하게 우러나온다.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북쪽을 향하고 있는데, 그곳에 꿀단지나 아리따운 처자
라도 있는 것일까? 보는 시선이 예사롭지가 않다. 이 그림은 1980년에 덕문(德文)이 조성한 것
으로 그 앞에 산신의 탈을 쓴 애기 같은 산신상은 근래에 봉안된 것이다.


▲  담장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 천태성전(天台聖殿)

산신각, 영산전보다 1단계 더 높은 곳에 천태성전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건물로 보통은 산신각이나 삼성각이 제일 높은 곳을 차지하고 있는데 반해 이곳은 천태성전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건물 이름이 조금 낯설긴 하지만 천태(天台)란 이름에서 이미 답은 나왔다.
바로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거처이다.

독성의 거처는 독성각(獨聖閣)이란 흔한 이름을 쓰지만 북한산 진관사(津寬寺)의 독성전(獨聖殿
)이나 삼천사(三千寺)의 천태각처럼 다른 이름을 쓰기도 하며, 경국사는 그의 거처를 크게 높여
천태성전이라 부른다.

경내의 다른 건물과 달리 담장을 두르고 있어 특별한 이미지를 선사하지만 담장 안에 담긴 천태
성전은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조그만 건물이다.


▲  담장을 두룬 천태성전

▲  독성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과 독성상
독성탱은 1980년에 덕문이 조성한 것으로 그 앞에 있는 독성상은 근래에 봉안했다.

▲  무우정사로 인도하는 문수원(文殊院) 기와문

▲  무우정사(無憂精舍)와 3층석탑

종무소에서 해우소(解憂所)로 가다보면 종무소 바로 뒷쪽에 무우정사가 있다. 문수원이란 현판
을 인 기와문을 들어서면 극락보전 앞에도 없는 3층석탑이 나오는데, 그 탑을 중심으로 북쪽에
는 무우정사가 있고, 탑 좌우로 승려들이 생활하는 요사가 좁은 뜨락을 둘러싸고 있다.

다소 고급 분위기가 풍기는 무우정사는 주지승이 거주하는 건물로 가운데 칸이 반칸 정도 앞뒤
로 삐죽나와 '十'모양의 구조를 이룬다. 지관이 설계하고 지은 것으로 현관에는 금강반야대(金
剛般若臺)란 현판이 걸려있다. 그리고 뜨락에 자리한 3층석탑은 석가탑(釋迦塔)을 그대로 모방
하여 맵시가 고운데, 경국사의 유일한 석탑으로 근래에 만든 것이다. 왜 극락보전을 놔두고 이
곳에 탑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법당보다 주지승의 거처가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무
우정사 주변을 문수원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중생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참고로 무우정사의 무우(無憂)는 무우수(無憂樹)에서 유래된 말로 아수가수(阿輸迦樹)를 한자로
번역한 이름이다. 부처는 룸비니 동산의 무우수 밑에서 태어났고 과거 1불인 비바시불도 이 나
무 아래에서 성도(成道)했다고 하며, 보리수와 더불어 불교에서 소중히 여기는 나무이다.


▲  경국사를 뒤로하며

오랜만에 발을 들인 경국사를 1시간 반 정도 누비며 문화유산도 괘불도와 팔상도를 빼고는 모두
눈에 넣었다.
경국사를 둘러보고 속세로 나갈 때까지 절을 찾은 중생의 수는 앞서 본원정사보다 훨씬 적었다.
사람은 거의 2~3분 간격으로 꾸준히 들어오긴 했지만 그 수가 적었던 것이다. 흥이 나고 사람들
로 만원을 이루는 초파일 분위기도 좋지만 너무 번잡한 것도 그리 좋지는 않다. 이곳 초파일 분
위기는 기대치에 절반도 안되는 수준이었지만 대신 그리 번잡하지가 않아 울창한 숲에 묻힌 산
사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제대로 누려서 좋았고 사진을 찍으며 살피기에도 크게 곤란하진 않았다.

이렇게 하여 석가탄신일 경국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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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최근에 본인 다음 블로그에 올린 글과 사진입니다.
(글 제목을 클릭하시면 해당글로 바로 이어집니다)

 

봄맞이 산사 나들이 ~ 아름다운 숲길이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고색의 절집, 곡성 동리산 태안사

 


' 봄맞이 산사 나들이 ~ 곡성 태안사(泰安寺) '

▲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겨울 제국의 부흥을 꿈꾸며 1달 넘게 천하를 어지럽히던 꽃샘추위가 봄에게 말끔히 꼬리가 잡
히면서 비로소 진정한 봄의 세상이 도래했다. 하늘 아래 세상을 겨울의 제국주의(帝國主義)로
부터 해방시킨 봄을 찬양하며 연초부터 가고자 했던 곡성 태안사를 찾았다.

전국에 널린 미답지의 하나로 베일의 가려진 곡성에 첫 발을 내리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
침 곡성 5일장이었다. 터미널 근처에 마련된 5일 장터는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고 서울에선 아
직 꽃망울도 피우지 못한 벚꽃이 여기서는 한참 절정을 누리며 순백의 미를 자랑
다.

태안사 버스 시간까지는 여유가 넉넉해 그 사이에 점심을 먹고자 읍내로 들어섰다. 허나 장터
와 달리 읍내는 썰렁함이 감돈다. 먹을 곳도 마땅치 않아 읍내를 이리저리 서성이니 삼기국밥
이란 국밥집이 시야에 들어온다. 순간 순대국 생각이 간절하여 그 집에 들어가 메뉴판을 살피
니 암뽕순대국밥이란 특이한 국밥이 있어 주인 아지매에게 뭐냐고 물어봤다.
이에 아지매는 암뽕은 암돼지를 잡아서 만든 순대국밥이라면서 이 집의 주메뉴라고 설명을 한
다. 그래서 이름도 재밌고 해서 그것을 주문했다.

얼마 뒤 내 앞에 차려진 암뽕순대국밥, 밥은 양이 좀 적었지만, 순대국은 순대와 파, 여러 고
기가 버무려져 정말 풍성했다. 순대는 함경도 순대처럼 꽤 두꺼운데 몇 개를 집어먹으니 뱃속
에서 용량이 초과되었다고 신호가 날라올 정도다. 파가 많아서 맛을 더욱 띄워주며, 팔뚝만한
순대에는 무려 21가지의 재료가 들어갔다고 하며, 고기들도 입 속에서 살살 녹아 목구멍이 즐
겁다. 밑반찬은 김치와 송송(깎두기), 양파, 양념장과 고추장이 나왔다.


▲  한상 차려져 나온 암뽕순대국밥의 위엄

이렇게 점심을 먹고 맛있다고 운을 띄우니 주인 아지매는 커피 1잔을 타주며 환송해준다. 커피
를 마시니 시간은 버스 시간 10분 전, 서둘러 터미널로 뛰어가 태안사행 군내버스를 탔다.

5일 장의 후광으로 상당한 손님을 태운 버스는 읍내로 바로 가지 않고 장터로 갔다. 장터 남문
에 이르니 장을 본 노공(老公)들이 우루루 몰리면서 차는 그야말로 가축수송의 경지에 이른다. 그런데 그 많은 승객 가운데 나를 빼면 모두 노공들, 지방 인구 감소와 농촌 고령화 현상의 심
각함이 버스에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수도권은 지방 인구를 계속해서 빨아먹어 점점 비대해
지는데 지방은 빨대 끝에 있는 쥬스처럼 사람 수가 나날이 홀쭉해지니 이도 참 큰일이다.

곡성역을 지나 오지리까지 노공들은 계속 버스에 오른다. 자리에 앉지 못한 노공들은 장터에서
사온 물건에 몸을 의지하며 주변 사람들과 사투리로 구수하게 이야기꽃을 피운다. 이런 풍경은
서로 인상이 쓰고 경계나 품는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정겨운 광경이지. 그래서 지
방에 가면 가급적 군내/시내버스를 탄다. 지역 사람들의 삶의 향기가 담긴 풍경이 그립기 때문
이다. 비록 나는 그들과 어울리지는 못하지만 그런 현장 속에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즐
겁다.

섬진강(蟾津江)을 따라 이어지는 17번 국도를 달리며 레일 바이크(Rail Bike)로 수입이 쏠쏠한
옛 전라선 철로와 나란히 달리기를 20분, 호남의 대성리/청평으로 일컬어지는 압록에 이른다.
압록에서 오른쪽 18번 국도로 꺾어 보성강(寶城江)을 따라 달리는데, 한참 벚꽃과 보성강에 시
선을 둔 사이 버스는 태안3거리를 지나친다. 다리를 건너야 태안사인데 어디까지 가는 것일까?
의문을 품고 있으니 곧바로 죽곡면주민센터가 있는 태평리에서 차를 돌려 다시 태안3거리로 돌
아와 그제서야 보성강을 건넌다.
이제 다왔구나 안심을 하고 있으니 버스는 그 안심에 먹칠을 하는 듯 태안사가 있는 동쪽을 놔
두고 서쪽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버스가 하는 양을 지켜보니 1차선 크
기의 농로를 한없이 비집고 들어가 비봉에서 바퀴를 돌린다. 알고보니 곡성 장날에만 특별히 1
일 2회 운행한다는 비봉 경유 차였다. (장날 이외에는 들어가지 않음)
덕분에 생각치도 못한 곳을 강제투어 당하고 다시 태안교로 나와 동남쪽으로 10분을 달리니 비
로소 태안사입구에 도착했다. 곡성에서 5일장과 비봉 경유의 여파로 무려 1시간 20분이나 걸렸
다.
(보통은 40분 정도 걸림)


♠  태안사 숲길 (태안사입구 ~ 능파각)

▲  태안사 입구

태안사입구에는 다른 고찰(古刹)과 비슷하게 주막촌이 둥지를 트고 있다. 허나 태안사는 입구에
뿌리를 내린 주막 3~4곳이 전부라 그리 번잡하지는 않다. 게다가 평일이니 그 한적함은 자연히
배가 된다. 속세의 마지막 유혹을 뿌리치며 주막을 지나면 대자연에 잠긴 오솔길이 나타난다.


▲  태안사 입구 벚꽃길

태안3거리에서 태안사 입구까지는 벚꽃가로수길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겨울제국의 오랜 시련
을 극복하고 흐드러지게 꽃망울을 터트린 그들에게 어느새 마음을 내주고 만다. 허나 저들의 천
하도 김옥균(金玉均)의 3일 천하만큼이나 짧으니 사람이든 꽃이든 인생은 무상한 모양이다.


▲  장절공 태사 신선생 영적비(壯節公太師 申先生 靈蹟碑)

주막촌을 들어서면 조촐하게 생긴 비각(碑閣) 하나를 만나게 된다. 절을 찾은 사람들은 다들 무
시하고 넘어가기 일쑤지만 무엇이든 그냥 지나치지 않는 나는 그것이 무엇인가 싶어서 그를 기
웃거렸다. 무슨 사연이 있으니 비석이 있지 않겠는가?

비각에는 '장절공태사 신선생 영적비(壯節公太師 申先生 靈蹟碑)'라 쓰인 비석이 안겨져 있는데,
처음에는 태안사나 마을에 공적이 있는 사람의 비석으로 여겼으나 장절공이란 낯익은 이름이 계
속 마음에 걸려 조사를 해보니 곡성 출신으로 태조 왕건(太祖 王建)을 도운 고려의 개국공신(開
國功臣) 신숭겸(申崇謙)의 영적비였다. 여기서 신선생은 신숭겸을 뜻한다.

그는 927년 후백제의 빛나는 승리, 고려의 무참한 패배로 마무리 된 대구 공산(公山)에서 전사
했다. 그때 그의 말이 잘려진 주인의 머리를 물고 태안사 뒷산으로 달려와 3일 동안 구슬피 울
다가 죽었다고 한다. 이를 발견한 태안사 승려가 신숭겸의 머리와 말의 시신을 수습해 인근에
묻었다고 하며, 그 인연으로 경내에 제단을 두어 그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절 입구에 세워
진 영적비는 절과 고을 사람들이 조선 후기에 세운 것으로 신숭겸에 대한 고장 사람들의 강한
긍지가 묻어나 있다.

▲  비각에 새겨진 동물 장식
비각 좌우에 하얀 동물 장식이 평방(平枋)을
받치고 있다. 토끼로 보이면서도 기지개를
켜는 개로도 보이는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  경내로 인도하는 1번째 다리
자유교(自由橋)


주막촌을 지나면 계곡을 옆구리에 낀 오솔길이 나타난다. 절까지는 2km 거리로 총 4개의 다리를
거쳐야 되는데, 그 1번째가 자유교다.
보통 절에 갈 때 만나는 계곡과 다리는 번뇌를 떠내려 보내고 해탈(解脫)을 하라는 의미가 있다.
허나 그 번뇌란 것은 쉽사리 떠내려가지 않는다. 그래서 태안사는 계곡을 따라 1개도 아닌 4개
의 다리를 놓아 인내를 가지고 번뇌를 내던질 것을 중생에게 주문한다.

자유교는 번뇌와 속세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의미로 다리를 건너면 옛 매표소와 주차장이 나오
고, 길도 비포장길로 변신한다. 대부분의 절은 절 앞까지 포장길을 뚫었는데 반해 이곳은 여전
히 비포장길을 고수하고 있다. 수레들에게는 다소 불편할진 몰라도 그 덕분에 산사로 가는 고적
한 분위기가 진하게 우려져 오히려 정감이 가고 좋다. 길의 폭이 산길처럼 작았다면 그런 느낌
은 더욱 컸겠지만 절도 먹고 살아야되고 수레 편의도 고려해야되니 그것까지는 무리일 것이다.


▲  자유교 건너의 동리산 태안사 표석의 위엄

▲  늘씬한 전나무 숲길
순천 금둔사(金屯寺, ☞ 관련글 보러가기)의 전나무 숲길을 닮은 아름다운 길이다.

▲  겨울에서 느리게 깨어나고 있는 태안사 오솔길

태안사 오솔길은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급한 오르막길도 없고 그냥 평탄한 길의 연속이다. 속인
(俗人)의 집은 절 입구에만 있을 뿐, 절까지는 단 1채도 없다. (중간에 조태일 시문학기념관이
전부임) 숲이 삼삼하고 계곡이 졸졸졸~♬ 노래를 부르며 산새의 지저귐이 오솔길의 적막을 살포
시 깨뜨리는 심산유곡(深山幽谷)이라 산사로 가는 길의 진수를 보여준다. 절까지 2km에 이르는
적지 않은 거리지만 가는 길이 결코 지루하지가 않다. 자연과 동화되어 걷다보면 '어머나 벌써
다왔어?' 싶을 정도로 너무 짧게만 느껴진다.

아직까지 겨울에 잠겨있는 숲길이 처량하기까지 하지만 곳곳에 봄의 기운이 싹트고 나무들도 서
서히 살을 불릴 채비를 한다. 새소리와 물소리에 속세의 오염된 귀가 정화되며, 잔잔히 불어오
는 산바람에 속세의 때가 싹 가시는 듯 하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해탈의 경지로 다가서는 것
같은 기분이 엄습하면서 속세로 나오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진다. 이대로 들어가 다시는 속세에
얼굴을 내밀지 말까? 아 갈등된다~~. 허나 그것이 마음대로 되겠는가? 나는 절과 자연에 영원히
묻히러 가는 것이 아닌 답사를 온 나그네일 뿐이다.

태안사는 볼거리도 풍부하지만 오솔길과 계곡도 태안사의 매력을 수식하는 아름다운 존재이자
얼굴이다. 부디 개발의 난도질이 이곳의 아름다움을 유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봄의 서정이 조금씩 살아나는 태안사 오솔길
비포장길의 위엄이 영원하길 고대한다. 괜히 방문자와 수레의 편의를
위한답시고 콘크리트로 떡칠을 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  3번째 다리인 반야교(般若橋)
다리 난간에는 12지신상이 서로 마주보며 자리해있다.

◀  12지신상의 하나인 말의 위엄
내가 말띠다 보니 ~~~


▲  마지막 다리인 해탈교(解脫橋)

4개의 다리를 필터로 삼아 철저히 번뇌를 거르고 그것을 이룬 사람은 이 다리를 건너면서 해탈
의 기분을 맛보게 될 것이다. 허나 그 경지에 이룬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무리 다리를 4
중, 10중으로 둬도 속세에 길들여진 중생은 물론 승려 상당수도 그것을 맛보기 힘들다. 번뇌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제대로 떠내려가겠는가?


▲  더 큰 세상을 꿈꾸며 열심히 물길을 재촉하는 태안사계곡


♠  태안사의 얼굴인 능파각(凌波閣)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82호

지루하지 않는 오솔길을 20분 정도 걸으면 주차장과 절 안내문이 나오고, 바로 계곡 위에 사뿐
히 걸린 아름다운 능파각이 마중을 나온다.

능파각은 태안사의 얼굴이자 모델로 누각(樓閣)의 역할과 금강문(金剛門)의 기능까지 도맡고 있
는 누각식 다리이다. 그러니까 다리와 문, 누각 3개의 역할을 지닌 셈이다. 주변 풍경이 빼어나
아름다운 여인네의 우아한 걸음걸이를 뜻한다는 능파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850년(신라 문성왕 11년) 혜철대사(惠哲大師)가 지었다고 하며, 941년(고려 태조 23
년)에 광자대사(廣慈大師)가 보수했다고 한다. 그 이후 파손된 것을 1767년(영조 43년)에 다시
지었으며,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특히 일주문과 더불어 6.25전쟁 때도 살아남
은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에 속한다.

능파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다리 양쪽에 바위를 이용해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2개의 큰 통나무를 받쳐 건물을 세웠다. 보통 옛 다리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걸치지
만 능파각은 교각도 없이 지은 나무 다리로 이 땅에선 매우 드문 케이스다. 천정에는 여러가지
동물상을 천정에 조각했으며, 주변 풍경과 조화를 이루며 수려한 풍경을 자아낸다. 


▲  계곡 양쪽에 양 다리를 걸치고 계곡을 굽어보는 능파각

▲  능파각 천정에 매달린 용머리 장식
귀여움이 묻어난 용머리가 눈을 부라리고
입을 벌리며 중생을 검문한다.

▲  능파각의 늘씬한 뒷모습


▲  충의문(忠義門), 문 너머로 경찰충혼탑이 보인다.

능파각에서 절로 가는 길은 2갈래로 갈린다. 능파각을 건너 신선의 세계로 통할 것 같은 오솔길
로 가도 되고, 능파각을 건너지 않고 큰 길로 가도 된다.

능파각을 오른쪽에 두고 길을 오르면 베이지 색이 입혀진 충의문과 함께 경찰충혼탑이 눈에 들
어올 것이다. 이들은 6.25의 뼈아픈 현장으로 그 당시 이곳을 지키다 산화한 우리 경찰의 충혼
이 깃들여져 중생의 마음을 잠시 숙연하게 한다.

때는 1950년 여름, 북한은 남침을 개시한지 겨우 1달 만에 전라도 상당수를 점령했다. 당시 곡
성경찰서장 한정일은 부하 경찰과 함께 곡성을 지키기로 마음 먹고 태안사 보제루를 작전지휘소
로 삼아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1950년 7월 29일 북한군 603기갑연대가 하동에서 남원으로 이동하고자 곡성 압록교를
지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압록교 부근에 매복하여 기습을 가해 북한군 55명을 생포하거나 죽
이고, 트럭과 싸이카 및 총 70여 점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뚜껑이 뒤집힌 북한군은 경찰의 근거지가 태안사임을 알아내고 8월 6일 기습 공격을 했다. 우리
경찰은 그들과 맞섰으나 숫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48명 전원이 전사했으며, 이때 태안사
는 잿더미가 되고 만다.

그 이후 그들의 충혼을 기리고자 성금을 모아 절 옆에 자리를 마련해 충혼탑을 세우고, 매년 8
월 6일에 유족과 지역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다가 나라에서 1985년 현재의 충혼탑과 호국관
을 세워 매년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또한 2000년에는 그들이 승전했던 압록에 승전탑(勝戰塔)
을 세워 그날의 함성을 후대에 전하고 있다.

보통 절에는 나라를 지키다 호국(護國)의 신이 된 이들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 있지만
이렇게 충혼탑까지 둔 곳은 태안사가 거의 유일하다.


▲  1985년에 세운 경찰충혼탑(警察忠魂塔)
그들의 함성과 충혼을 잊고 산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6.25와 같은 쓰라린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부디 저들의 피가 헛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호국관(護國館)

▲  충혼불멸(忠魂不滅) 표석


▲  충혼탑 뒤쪽에 둘러진 병풍석
1950년 당시 어둠에 저항하며 산화한 경찰들의 전투 장면을 어설프면서도
약소하게 처리한 얕음새김의 조각품이 중앙에 자리해 있고, 그 양쪽에는
그들에게 바치는 진혼시(鎭魂詩)가 장엄하게 자리를 차지고 있다.

▲  경찰충혼탑을 지나 경내로 가는 길목에 심어진 커다란 돌탑


♠ 연못에 심어진 태안사3층석탑 - 전남 지방문화재자료 170호

▲  북쪽에서 바라본 3층석탑과 연못
탑이 있는 섬까지는 조그만 나무다리가 놓여져 그에게 인도해준다.

경찰충혼탑에서 잠시 옷깃을 여미고 안으로 향
하면 경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면서 길 왼쪽
에 잔디가 깔린 언덕이 나온다. 언덕 너머로 3
층석탑이 작게 바라보이는데, 그 언덕을 오르면
둥그런 넓은 연못이 나오고, 3층석탑은 연못 중
앙에 두둥실 뜬 동그란 섬에 단아하게 뿌리를
내렸다.

이 연못은 일주문 서쪽에 자리해 있다. 능파각
과 더불어 태안사의 백미(白眉)로 주변 만물들
이 거울로 삼으며 그들의 매무새를 다듬느라 여
념이 없다.
섬에 자리한 석탑은 이전에는 광자대사탑 앞에
있었다. 그때는 기단부 면석 1매와 1층 옥개석,
2/3층 탑신(塔身)이 사라진 상태였지. 그러다가
연못과 섬을 만들어 이곳으로 옮기면서 사라진
부분을 보충해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다.


▲  정면에서 바라본 3층석탑과 연못

이 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혔으며, 그 위에 머리장식을 두었다. 탑을 옮기
면서 바닥돌을 넓게 깔아 탑이 제법 커 보이며, 탑신부는 옛 석재와 새 것을 적당히 섞었고 머
리장식은 노반(露盤)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 붙였다.
신라 말 석탑 양식을 갖춘 고려 초기 석탑으로 여겨지며, 광자대사탑 부근에 옥개석이 하나 더
있고 금강선원 앞 축대에도 옥개석이 있어 쌍탑(雙塔)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탑의 전체 높이는
4.17m로 연못을 굽어보는 탑의 위엄이 자못 넘쳐보인다.


▲  연못 동쪽 바위에 얹혀진 조그만 돌탑들

중생들이 소망을 담아 얹힌 조그만 돌탑들이 모여 그들만의 조그만 세계를 이룬다. 바위 오른쪽
에는 석탑 옥개석이 얹혀져 있는데, 연못에 있는 3층석탑의 일부거나 씽탑의 흔적으로 여겨진다.


♠  태안사 일주문(一柱門)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83호

▲  고색의 무게가 서린 일주문의 위엄
동리산은 태안사를 품고 있는 봉두산(鳳頭山)의 옛 이름이다. 산이 오동나무 줄기 속처럼
아늑하여 동리산이라 불렸으며, 오동나무는 봉황이 서식하는 나무라고 한다.


연못을 지나면 능파교에서 갈라진 길이 다시 합쳐지면서 절의 일주문이 나타난다. 일주문은 속
세와 부처의 세계를 가르는 문으로 절의 정문인 능파각과 200m 정도 떨어져 있다.

이 문은 937년 광자대사가 세웠다고 전하며, 1683년 각현선사가 다시 지었다. 1917년 영월(映月
)선사가 중수하고 1980년에 보수를 하여 지금에 이르는데, 능파각과 더불어 격동의 6.25시절에
도 살아남은 건물로 태안사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문 정면에는 '동리산태안사(桐裏山泰安寺)'라 쓰인 커다란 현판이, 뒤쪽에는 '봉황문(鳳凰門)'
이란 작은 현판이 걸려있다. 민흘림으로 이루어진 일주문 기둥은 중심기둥 외에 각각 2개의 기
둥이 더 있는데, 이는 지붕과 공포를 받치는 보조용 기둥이다. 문을 보면 현판이 걸린 평방 위
쪽 공포(空包)와 지붕이 육중해 기둥 2개로는 어림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별도로 2개씩을 더
두어 중심 기둥을 돕게 한 것이다.
천정 좌우에는 눈을 부릅뜨고 여의주를 문 용머리 장식이 서로 마주보며 달려있어 촘촘히 박힌
공포덩어리와 곱게 입혀진 단청과 더불어 문의 아름다움을 더욱 수식해 준다.

▲  일주문 천정 좌측 용머리 장식

▲  일주문 천정 우측 용머리 장식


▲  일주문에서 속세로 가는 길
집으로 살짝 가져와 두고두고 거닐고 싶은 길이다.

▲  안쪽에서 바라본 일주문
일주문에서 경내까지는 인생처럼 짧긴 하지만 전나무 숲길이 푸르게
펼쳐져 한폭의 그림을 이룬다.


※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중심지 ~ 태안사의 내력
동리산이라 불린 봉두산 서쪽 자락에 포근히 안긴 태안사는 742년(신라 경덕왕 원년)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3명의 신승(神僧)이 창건하여 대안사(大安寺)라 했다고 한다. 9세기 후반에 조성된
'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에 '有舍名曰 大安其寺也'란 기록이 있어 그 이전부터 대안사라 불리는
절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라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 시절에는 혜철대사(惠哲大師)가 절을 크게 일으키고 태안사
로 이름을 갈았다. 그는 이곳에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동리산파(桐裏山派)를 열어 선
종(禪宗) 보급에 열을 올렸는데, 그가 이곳을 택한 것은 경치가 아름답고 속세와 어느 정도 거
리를 두고 있어 수행하기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 풍수지리(風水地理)의 시조
인 도선국사(道詵國師)도 20대 시절 이곳에서 혜철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선종은 교종(敎宗)에 대항하여 신라 말에 유행했던 불교 종파로 교리를 중심으로 한 교
종과 달리 참선(參禪)을 중시하여 경전을 어려워했던 백성과 지방세력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고려 태조 시절에는 혜철의 손제자(孫弟子)인 광자대사 윤다(廣慈大師 允多)가 중창을 벌였는데,
그 규모가 건물 40여 동, 110칸에 이르렀다고 하며, 법당에는 1.4m 높이의 철조약사여래(鐵造藥
師如來)를 봉안했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구례 화엄사(華嚴寺)와 순천 송광사(松廣寺)를 말사(
末寺)로 두었다고 하니 왕년의 위엄이 한때나마 호남 하늘을 가리고도 남았음을 보여준다. (지
금은 화엄사의 말사임)

1223년(고종 10년)에는 최씨정권의 2대 실력자인 최우(崔瑀)가 왕명을 받들어 중건을 했고, 조
선 세종(世宗) 때는 세종의 2째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이곳에 머물며 왕실의 복을 빌고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대바라를 남기기도 했다.
1684년에 중창된 이후 그런데로 법등(法燈)을 유지해 오다가 6.25전쟁 때 이곳에 숨어 곡성 수
비를 꾀하던 곡성경찰서 경찰을 치고자 북한군이 기습을 가하면서 능파각과 일주문을 제외한 모
든 건물이 파괴되는 비운을 겪는다. 당시 화마(火魔)에 사라진 건물이 15동에 이른다.

1969년 대웅전을 복원했으며, 계속 복원불사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현재 대웅전
을 중심으로 약사전, 삼성각, 보제루, 해회당, 적묵당, 천불전 등 15~16동의 건물이 경내를 가
득 채우고 있으며, 적인선사탑, 광자대사탑, 광자대사탑비, 청동 대바라, 동종 등 보물 5점과
지방문화재 3점을 간직하고 있어 고색의 무게를 진하게 간직한다. 또한 절 전체는 전남 지방문
화재자료 23호
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속세의 기운이 범하지 못할 정도로 깊은 산골에 묻혀있고 찾는 이도 별로 많지 않아 한
적한 편이다. 게다가 숲이 무성하고 계곡이 깊으며, 절로 인도하는 오솔길도 사색하기에 좋은
아름다운 길로 신선의 세계로 여겨질 정도이다. 속세에서 나를 잠시 지우고 싶을 때 마냥 묻혀
지내고 싶은 절집으로 속세에 오염된 마음을 가다듬고 정리하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다.


♠  태안사의 장대한 역사가 담긴 승탑(僧塔)과 비석(碑石)의 보금자리

일주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태안사의 장대한 역사가 서린 승탑과 비석의 보금자리가 있다. 광
자대사탑을 비롯하여 고려부터 조선까지를 망라한 승탑 7기와 광자대사탑비, 탑의 옥개석 등이
보금자리를 가득 메우는데, 그중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광자대사탑과 탑비이다.


▲  아찔한 아름다움을 머금은 광자대사탑비(廣慈大師塔碑) - 보물 275호

광자대사비는 태안사에서 가장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화유산으로 새와 용머리, 보주(寶珠), 구름
무늬 등 다양한 문양이 비석의 수려함을 크게 돋보이게 한다. 아쉽게도 비신(碑身)은 오래 전에
도괴되어 우측에 따로 자리해 있으며, 비신이 빠진 것을 빼면 고려 초기 비석의 으뜸급임은 분
명하다.

비석의 주인공인 광자대사 윤다는 혜철의 손제자로 864년에 태어나 8살에 출가했다고 한다. 태
안사에 들어와 혜철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계(戒)를 받고 돌아와 태안
사를 크게 일으켜 세웠다.
945년(혜종 2년) 81세로 입적하자 혜종(惠宗)은 '광자(廣慈)'란 시호를 내리고 그의 행장을 적
어 950년 비석을 세워주었다.

1941년 태안사 사적기에 '1928년 중건 당시 광자대사비의 이수를 옮겨와 적인선사비의 이수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인선사탑비와 광자대사탑비의 이수가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


▲  발을 움직이며 입에서 무언가를 쏟아낼 것 같은 광자대사탑비 귀부

▲  광자대사탑비의 이수 부분

▲  이수 중앙에 새(극락조?) 문양

▲  광자대사탑비의 뒷모습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답고 섬세한 조각의 비석 귀부는 장대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별다른 상
처 없이 건재함을 과시한다.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은 듯 입이 벌려져 있고, 목에는 주름무늬가
세세히 표현되어 적당히 색칠을 가한다면 정말 거북이의 목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비석이 심어
진 비좌(碑座)에는 구름 무늬가 조금의 여백도 허용치 않고 빼곡히 자리를 채우며, 그의 등에는
등껍데기 무늬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고, 꼬리는 하늘로 말려져 있다.

비석 꼭대기를 장식하는 이수에는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이무기 대신 날개를 활짝 편 새가 눈길
을 끄는데, 극락조(極樂鳥)로 일컬어지는 가릉빈가(迦陵頻伽)로 여겨진다. 파괴된 얼굴을 제외
하면 발톱부터 목부분까지 정교하게 박혀있어 하얀 새가 지금이라도 당장 하늘로 날라갈 것 같
다. 새 조각 밑에는 탑비 주인공 이름이 적혀있던 것으로 보이나 파손이 심해 확인이 어렵다.
이수 양쪽 끝에는 용머리가 달려있으며, 새 뒤쪽과 좌우에 3개의 보주(寶珠)를 올려놓았다. 이
수 뒷면에는 구름무늬가 가득 수놓여 있고, 곳곳에 용의 몸통을 조각하여 모서리에 조각된 용과
조화를 꾀했다.

▲  이수 모서리에 용머리와 보주

▲  탑비에서 떨어져 나온 비신(碑身) 부분

광자대사탑비 옆에 나란히 놓인 비석은 원래 광자대사탑비의 비신으로 파손이 심해 판독하기가
거의 어려운 상태다. 허나 다행히도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일부 글자가 빠진 채로 비
문의 내용이 실려있어 그 내용을 알게 해준다. 내용은 광자대사의 생애와 고려 태조로부터 극진
한 대우를 받았던 일, 불가에 입문한 것 등이다.


▲  광자대사탑(廣慈大師塔) - 보물 274호

광자대사비 옆에는 광자대사가 잠들어있는 승탑이 있다. 이 승탑 역시 탑비를 닮아 수려하기는
마찬가지라 바닥돌을 맨 밑에 두고 그 위에 기단부(基壇部)와 8각의 탑신을 차례대로 얹혔으며,
그 위를 머리장식으로 마무리한 8각원당형 부도이다.

덩굴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진 기단부 밑 받침돌 위에 가운데 받침이 올려져 있으며, 윗받침에
는 16잎씩 연꽃을 2줄로 나열하여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탑신은 앞,뒷면 모두 향로 모양을
새겼고, 그 옆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지붕돌의 추녀는 너무 얇게 올려져
있고, 탑 꼭대기에는 보륜(寶輪)과 보주를 비롯한 머리장식이 완전하게 남아있는데, 조각솜씨가
매우 섬세하고 조화로워 고려 초기 부도의 걸작이라 할 만하다.

◀  광자대사탑 옆에 자리한 조선시대 승탑
한참 선배인 광자대사탑과 탑비의 높은
명성에 눌려 거의 무명의 부도로 살아간다.


▲  일주문에서 경내로 오르는 길
하늘 높이 솟은 전나무들이 아늑하게 숲길을 이루며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  태안사 대웅전 주변

▲  경쾌하게 추녀를 들어올린 대웅전(大雄殿)

일주문 전나무숲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태안사 중심부가 모습을 비춘다.
대웅전 뜨락에는 곧 다가올 불교의 경축일 석가탄신일을 대비하여 동서로 길게 줄을 치고 연등
을 달고 있었다.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대웅전은 태안사의 법당으로 광자대사 시절부터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가 6.25때 파괴된 것을 1969년에 다시 세웠다. 내부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한 아
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태안사를 빛낸 혜철국사와 광자대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물
론 상상으로 그려진 영정(影幀)이다. 그리고 부처의 10대 제자의 영정을 비롯해 석가불의 본생
도(本生圖)로 내부 벽을 장엄했고, 내부 좌측에 조그만 동종(銅鐘)이 놓여있는데, 자칫 지나치
기가 쉽다. 하지만 그 종은 1457년에 주조되어 1581년에 다시 만든 조선 초기 종으로 태안사의
주요 보물 중 하나이니 꼭 살펴보자.
이 종에는 제작과 관련된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으며, 조선시대 동종의 변화 과정을 담은 점이
인정되어 보물 1349호로 지정되었다. 그 종을 사진에 담으려는 찰라 갑자기 인천(仁川)에서 단
체로 온 신도들이 대웅전을 빼곡히 점거하는 통에 사진에 담지는 못했다.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아미타3존불
환한 미소로 중생을 맞이하는 아미타불, 그 좌우로 현란한 보관(寶冠)을 갖춘
관음보살(觀音菩薩)과 승려머리의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나란히 자리한다.

▲  대웅전 정면에 자리한 보제루(普濟樓)

보제루는 강당의 역할을 하는 건물로 조선시대 절은 보통 법당 앞에 누(樓)를 두어 그 아랫도리
로 경내를 오르도록 했다. 허나 이곳은 아랫도리 대신 옆구리에 길을 내 돌아가는 형식을 취했
으며, 6.25때는 곡성 경찰이 이 건물을 작전지휘소로 삼아 북한군에 항전했다.

         ◀  보제루에 걸린 목어(木魚)
파란 피부를 지닌 목어는 중생구제를 향한 부처
의 메세지가 담겨져 있다. 보통 절은 사물(四物
)이라 불리는 목어, 범종, 운판(雲版), 법고(法
鼓)를 갖추고 있기 마련이나 이곳은 목어가 유
일하며 그 흔한 범종각도 아직 없다.
지느러미를 살랑살랑 움직이며 허공을 헤엄치는
커다란 목어의 자태가 꽤 인상적이다. 속세로
내려갈 때는 그의 등을 타고 가볼까..?

▲  종무소의 역할을 겸하는 적묵당(寂默堂)

▲  어처구니를 상실하며 옛 추억에 젖은 맷돌


▲  해회당(海會堂)

해회당은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태안사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바라가 있는데, 바라란 불교의식(불교 무용의 하나인 바라춤이나 설법, 큰 행사 등) 때 쓰는 접
시 모양의 악기로 2개가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로 놋쇠로 만드는데, 놋쇠판 중앙에 구멍을
뚫고 끈을 매어 양손에 하나씩 잡고 서로 부딪쳐 소리를 낸다.
 
태안사 바라는 지름이 92cm, 둘레가 자그마치 3m에 이르는 규모로 효령대군이 남긴 것인데, 별
다른 손상이 없어 지금도 별무리 없이 쓰인다. 허나 워낙 무거워 두 사람 이상이 같이 들어서
사용하며, 바라 피부에는 정통(正統) 12년(1447년)에 만들어졌다는 내용과 효령대군이 아우인
세종 내외와 왕세자<훗날 문종(文宗)>의 복을 빌고자 만들었다는 명문이 있다.

대바라는 태안사 일급의 보물인만큼 속세에 공개를 하지 않는다. 혹시나 싶어서 적묵당에 문의
를 했으나 역시나 안된다고 그런다. 대바라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문화유산 도난이 다반사처럼
일어나는 이 땅의 현실 앞에선 절대 안심할 수는 없다. 무덤의 육중한 석물도 아무렇지 않게 훔
쳐가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 아니던가? 그래서 깊숙한 곳에 두어 애지중지 보관하고 있다. 그외
에 1770년 고흥 능가사(楞伽寺)에서 만든 금고(金鼓)가 내부에 있는데, 지름이 1m가 넘는다고
한다. 금고는 반자(飯子)라 불리기도 한다.


▲  태안사 청동 대바라 - 보물 956호 (문화재청 사진)

▲  물이 없는 것처럼 나를 속인 석조(石槽)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석조는 늘 맨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수도꼭지
로 물을 통제하기 때문으로 다른 절과 달리 온종일 물이 나와 석조를 메우는 형태가 아니다. 그
래서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중생은 물이 없구나 싶어서 넘어간다. 나 역시 속았지. 허나 절을
다 둘러보고 나오니 신도 1명이 꼭지를 틀어서 물을 마시는 장면을 보고는 정말 한대 맞은 기분
이었다. 꼭지를 틀면 물이 콸콸 나오는 것을 왜 그것까지 생각을 못했을까?

▲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이다.

▲  약사전(藥師殿)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약사전은 근래에 만든
건물로 약사불의 거처이다. 정면 가운데 칸이
좌우 협칸보다 크게 설정되어 있다.


▲  삼성각 좌측에 봉안된 독성도(獨聖圖)


▲  약사전에 봉안된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약사전의 주인인 약사불은 오른손으로 시무외인을 취하며 왼손에는 중생의 고통을 치료할 약이
담겨진 약합(藥盒)을 들고 있다. 남쪽을 지그시 굽어보는 그의 뒤쪽에는 후불탱화(後佛幀畵)가
있는데, 이는 벽에 받친 그림이 아닌 유화(油畵) 그림판이다. 임창수(林昶壽) 화백(畵伯)이 그
린 것으로 전통 안료를 쓰지 않고 유화로 한 것이 특징이며, 닫집이나 불상을 수식하는 장식물
이 없어 대웅전 불단보다 다소 허전하다.

◀  고참 승려의 공간인 염화실(拈花室)과
적인선사탑으로 인도하는 돌계단


♠  태안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 - 적인선사조륜청정탑(寂忍禪師照輪淸淨塔)
보물 273호


▲  적인선사탑 앞에 마련된 배알문(拜謁門)

선원 북쪽,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태안사의 개산조사(開山祖師)라 할 수 있는 혜철대사의
승탑이 넓게 터를 닦았다. 절을 세운 이는 3명의 신승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정체는 딱히 알려진
것이 없다. 그래서 혜철을 태안사의 시조로 여긴다. 그의 승탑은 '적인선사조륜청정탑(寂忍禪師
照輪淸淨塔)'이란 길고 어려운 이름을 지니고 있어 외우기도 좀 어렵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태안사 적인선사탑')

부도에 잠들어 있는 혜철(惠哲)은 성이 박씨(朴氏), 자는 체공(體空)으로 785년 경주에서 태어
났다. 16세에 출가하여 806년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814년 당나라로 건너가 서당지장(西
堂地藏)에게 심인(心印)을 받았다.
839년 귀국하여 태안사에 들어가 절을 크게 일으키고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파를 열어 선종
보급에 크게 기여했으며, 861년 76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경문왕(景文王)은 적인(寂忍)이란 시호
를 내렸다.


▲  적인선사조륜청정탑의 위엄

872년에 조성된 적인선사탑은 태안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이곳에 서린 다른 보물과는 달리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다. 절을 개창한 시조에 걸맞게 규모가 크며, 조각솜씨도 뛰어나 아찔한
아름다움에 두 눈이 마비될 정도이다. 승탑은 네모난 넓은 기단 위에 심어져 있는데, 거의 석가
불의 세존사리탑에 버금가는 대우로 위엄이 철철 넘쳐 흐른다.
탑 앞에는 높은 어른을 뵌다는 뜻의 배알문이 있는데, 높이가 다소 낮다. 하여 키가 큰 사람은
자연히 머리를 숙이고 들어갈 수 밖에 없는데, 이는 머리를 숙여 정중히 예를 표하라는 의미다.

적인선사탑은 광자대사탑과 마찬가지로 8각원당
형의 승탑이다. 2중의 바닥돌 위에 8각 하대석
(下臺石)을 두어 각 면마다 방향과 형태를 달리
한 사자 1구를 새겼다. 중대석(中臺石)은 높이
가 낮으나 격을 잃지 않았으며, 상대석(上臺石)
에는 하늘을 향해 꽃잎을 펼친 앙련(仰蓮)이 3
중으로 조각되어 탑신부를 우러르는 것 같다.

탑신 전면에는 문비(門扉)라 불리는 네모난 문
짝이 새겨져 있고, 탑신 위쪽 지붕에는 지붕선
이 세세히 표현되었다. 탑의 꼭대기인 상륜(相
輪)에는 복발과 앙화(仰花), 보륜이 차례대로
장식되어 있고, 보주로 꼭대기를 마무리 했다.

9세기 후반에 조성된 오래된 승탑임에도 근래 만든 것처럼 정정하며 탑의 피부는 조금 회색 빛
깔을 띌 뿐, 장대한 세월의 때와 상처는 전혀 없다. 온후한 기품이 돋보이고 거의 완전히 보존
되어 신라 후기에 가장 우수한 승탑으로 칭송을 받는다. 특히 6.25 때 북한군이 이곳까지 습격
해 절을 죄다 불질렀음에도 별다른 외상을 입지 않은 것은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  적인선사탑과 동백나무 (승탑 오른쪽 나무가 동백나무)

▲  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

청정탑 우측에는 혜철의 생애와 업적을 담은 청정탑비가 부도를 바라보며 자리한다. 이 비석은
오래 전에 비신(碑身)이 파괴되어 쓰러져 있던 것을 비신을 새로 만들어 근래에 복원한 것이다.
귀부와 이수는 옛날 것이며 비신에 적힌 비문은 다행히 탁본한 것이 경내에 전하고 있다.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으나 광자대사탑비에 비하면 조금은 수준이 떨어진다. 또한 1928년 절
을 중건할 때 광자대사탑비의 이수를 옮겨와 청정탑비의 이수로 썼다는 기록이 있어 서로 뒤바
뀌었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  절을 뒤로하고 속세로 나오다. (일주문에서 능파각으로 가는 길)

▲  솔내음이 충만한 오솔길 (성기암 입구)

태안사 곳곳을 사진에 담으며 머문 시간이 거의 1시간, 시간이 집으로 갈 시간이라며 자꾸 나가
자고 보챈다. 나가기 싫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속세에서 살아갈 운명이기에 마음만은 능파각 기
둥에 살짝 걸어놓은 채, 속세로 길을 떠났다.

절을 나오면서 계곡 동쪽에 있다는 천불전(千佛殿)과 산왕각(山王閣)은 가지 않았으며, 태안사
의 부속암자인 성기암은 가려다가 귀찮아서 통과했다. 이렇게 다음에 다시 찾을 구실을 남기며
자연과 벗삼은 첩첩한 산주름 속의 산사, 태안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마침표를 찍는다.

※ 곡성 태안사 찾아가기 (2013년 5월 기준)
* 용산역, 영등포역, 광명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 익산역, 순천역, 여수엑스포역에서 전
  라선 열차를 타고 곡성역 하차
*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곡성행 고속버스가 1일 1회(15시) 떠난다.
* 광주에서 곡성행 직행버스가 15~40분 간격. 전주에서는 3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곡성터미널에서 태안사입구 경유 원달리행 군내버스가 1일 7~8회 다니며, 곡성역을 경유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능파각까지 진입 가능, 능파각과 조태일시문학관에 주차장 있음)
① 순천완주고속도로 → 황전나들목을 나와서 곡성방면 17번 국도 → 압록교를 건너 좌회전 →
   태안3거리에서 좌회전(다리를 건넘) → 태안사입구 → 태안사
② 남해고속도로 → 석곡나들목을 나와서 좌회전 → 석곡에서 압록 방면 우회전 → 죽곡 → 태
   안교3거리에서 우회전 → 태안사입구 → 태안사
* 소재지 -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20 (☎
061-362-4906,4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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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5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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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최근에 본인 다음 블로그에 올린 글과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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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겨울 산사 나들이 ~ 계룡산 갑사 (갑사계곡, 숲길)

 

' 계룡산 갑사(甲寺) '
갑사 대적전과 승탑
▲  갑사 대적전과 승탑


겨울의 제국이 서서히 저물어 가던 2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계룡산을 찾았다. 중악(中嶽)
이라 불리며 호랑이가 담배 먹던 시절부터 신성시되오던 계룡산의 맑은 정기를 듬뿍 받고 싶
은 마음에서였다. 저번 주만해도 날씨가 겁나게 추웠는데, 이번 주는 좀 포근하여 두꺼운 잠
바에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뫼에 오르면 좀 춥겠지? 그래서 그보다 1단계 낮은 잠바
와 두툼한 장갑을 갖추어 길을 떠났다.

동학사(東鶴寺)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동학사 경내를 둘러보고 오뉘탑이라 불리는 청량사지 5
/7층석탑에서 잠시 속세에서 가져온 먹거리로 배를 채운 다음 삼불봉(三佛峰)으로 올라가 천
하를 굽어본다. 여기서 금잔디고개로 내려와 신흥암(新興庵)에서 잠시 발을 멈추며 천진보탑
(天眞寶塔)을 친견하고 갑사 계곡 상류에 자리한 용문폭포(龍門瀑布)에서 다시 발을 멈췄다.
계룡산 동학사 보러가기 (클릭)
계룡산 오뉘탑, 삼불봉, 천진보탑 보러가기 (클릭)

용문폭포에서 갑사 방면으로 10분 정도 내려가면 대성암이란 작은 암자가 나온다. 여기서 다
리를 건너면 대나무에 둘러싸인 길이 나오고 운치가 서린 그 대나무길을 지나면 슬슬 갑사의
건물이 해가 떠오르듯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서 잠시 갑사에 대한 급한 마음을 접고 왼쪽 길
로 들어가 보자. 보통은 그 길을 외면하고 지나치지만 그건 갑사에 대한 큰 실수이다. 그 길
로 들어서면 갑사계곡의 으뜸인 명월담(明月潭)이 있고 유리 지붕이 얹혀진 공간이 있는데,
바로 그곳에 고려시대 불상인 석조약사여래입상이 자리해 있다.


♠  갑사 석조약사여래입상(石造藥師如來立像)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50호

갑사 경내에서 동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명월담 왼쪽에 큰 바위가 있다. 바위 위쪽에는 대나
무가 삼삼하게 자라고 있고, 바위 밑에는 얕게 판 석굴(石窟)이 있는데, 그 안에 석조약사불이
둥지를 트고 있다.

이 불상은 원래 갑사 동쪽 자락에 자리한 사자암(獅子庵)에 있던 것으로 왜정(倭政) 시절에 악
덕 친일파로 악명 높은 윤덕영(尹德榮)이 옮긴 것이라고 한다. 키가 남자 성인만한 조그만 불상
으로 머리에는 큼직한 무견정상(無見頂相)이 솟아있다. 얼굴은 조금 길며, 중생들의 소망을 하
나도 빠짐없이 접수하려는 듯 귀가 어깨까지 닿았다.

몸에 걸친 옷은 가슴을 약간 드러내고 있으며, 무릎 아래까지 늘어져 있다. 가슴 밑에는 반원형
의 옷주름이 표현되었으며, 왼손에 조그만 약병을 쥐고 있어 그가 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다. 불
상의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바위 석굴에 들어앉아 비와 바
람, 눈 등 자연의 괴롭힘에서 자유로우니 덕분에 건강은 양호하다. 허나 친일파의 의해 강제로
옮겨진 점은 조금은 찜찜한데, 옮겨진 이유에 대해서는 전하는 것이 없다.

예전에는 불상과 기도를 올리는 조그만 노천 공간만 있었으나 그의 건강 및 중생들의 예불 편의
를 위해 유리 지붕을 얹혀 보호각을 만들었다. 또한 예불 공간을 확장했으며, 조그만 석등(石燈
)을 석불 오른쪽(석불이 바라보는 방향 기준)에 주렁주렁 설치했는데, 좀 어색해 보인다.


▲  석조약사여래입상의 조촐한 보금자리

▲  가까이서 본 석조약사여래입상

▲  겨울잠에서 깨어나려는 명월담

석굴에 들어앉은 석불을 가까이서 친견하니 얼굴에 비해 몸이 너무나 커 보인다. 표정도 걱정에
시름하는 중생들처럼 그렇게 밝아 보이진 않는다. 그의 발 밑에는 그의 인기를 보여주듯 꽃 2송
이가 살짝 놓여져 있다.

석불 동쪽에는 갑사계곡의 백미(白眉)인 명월담이 있다. 상류에서 내려온 계곡물이 잠시 한숨을
돌리는 공간으로 옛 사람들이 새긴 '명월담(明月潭)'을 비롯한 여러 바위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이 주변에는 윤덕영의 별장이 있었는데, 그는 나라를 팔아먹고 왜정의 지원의 배때기를 가득 불
리며 명월담의 정취를 누렸다고 한다.
그럼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갑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백제 때 창건된 계룡산 사찰의 으뜸, 갑사(甲寺)
계룡산 서쪽에 안긴 갑사는 420년<백제 구이신왕(久爾辛王) 원년>에 고구려 승려인 아도화상(阿
道和尙)이 창건했다고 한다. 아도는 고구려 불교를 전하고자 신라로 건너갔는데, 그는 일선군(
一善郡, 경북 구미)의 부호(富戶)인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며 신라에 고구려식 불교 포교의 임
무를 수행하고 귀국하는 길에 계룡산을 지나갔다.
그런데 산중에서 상서로운 빛이 하늘까지 오르는 광경에 넋을 잃고 빛이 발하는 곳을 찾아가니
그곳이 바로 천진보탑(天眞寶塔)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보탑에 예를 올리고 갑사를 창건했
다고 한다. 그러니까 천진보탑을 후광(後光)으로 삼은 신흥암과 같은 시기에 창건된 것이다. 허
나 이를 입증할 유물이나 기록은 전혀 없으며, 천진보탑 전설도 허무맹랑하다. 하지만 백제의
국도(國都)인 공주와 부여하고도 가깝고 계룡산의 오랜 명성을 생각해 보면 백제 때 창건된 것
은 확실해 보인다.

창건 이후 556년<위덕왕(威德王) 2년> 혜명(慧命)이 천불전과 보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했다고
하며, 이때 창건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한다. 679년(신라 문무왕 18년)에는 의상대사(義湘大師)
가 불전 1,000칸을 지어 화엄도량(華嚴道場)으로 삼으면서 신라 화엄종(華嚴宗) 10대 사찰의 하
나로 성장했다고 한다.
887년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중창했으며,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킨 영규대사(靈圭大師)
가 잠시 머물렀다. 그는 조헌(趙憲)과 의기투합하여 청주성을 탈환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으나
금산(錦山) 연곤평에서 조헌과 의병 700명과 함께 장렬히 산화하고 만다.

1597년 영규대사에 대한 복수로 왜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1604년 대웅전과 진해당을 중건하고
1654년 크게 중창을 벌였다. 1875년에는 대웅전과 진해당을 중수했으며, 1899년 적묵당을 지었
다. 1911년 사찰령(寺刹令)으로 마곡사(麻谷寺)의 말사(末寺)로 들어갔으며, 6.25전쟁 때는 다
행히 총탄이 비켜가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

갑사란 이름은 으뜸 또는 첫째 가는 절이란 뜻으로 갑(甲)에는 1등의 뜻이 있다. 이외에 한자는
다르지만 갑사(岬寺), 갑사사(岬士寺), 계룡갑사(鷄龍甲寺) 등으로 불리웠으며, 18세기 후반 산
의 이름을 딴 계룡갑사란 이름도 적지 않게 쓰였다.

고색이 만연한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적묵당, 전해당, 삼성각, 보장각, 팔상전, 표충원,
범종루, 강당, 대적전 등 약 20동의 건물을 갖추고 있어 규모도 상당하며, 대성암과 내원암, 신
흥암 등을 부속암자로 거느리고 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국보 298호인 삼신불괘불탱화를 비
롯하여 철당간과 승탑, 동종, 월인석보판목 등 보물 4점과 석조약사여래입상과 사적비, 강당,
대웅전 등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지니고 있다. 장대한 역사에 걸맞게 풍부한 보물을 소장하고
있는 것이다.

절은 크게 경내의 중심인 대웅전 구역과 팔상전이 있는 북쪽 구역, 서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대
적전 구역 등, 3개로 나눌 수 있다. 원래는 대적전 구역이 절의 중심이었으나 1604년 대웅전 구
역에 대웅전을 지으면서 중심지가 그곳으로 이전되고 대적전은 변두리가 되었다. 그 이후 북쪽
으로 영역이 확대되면서 경내가 무지 넓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 넓은 대지에 건물이 대
도시처럼 촘촘히 박힌 것도 아니다. 대웅전 구역을 빼면 다 널널하게 자리해 있다.
계룡산의 주요 사찰이다 보니 사람들의 발길이 잦지만 깊은 속세와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깊은 산골에 터를 잡고 있어 산사의 고요함과 고즈넉함을 누리기에 적당하다. 게다가 절을 둘러
싼 숲도 무성하고 유리처럼 맑은 계곡이 경내를 가로지르면서 청정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또한
역사의 숨결이 서린 볼거리도 매우 푸짐하니 눈과 마음도 배불리 호강을 누리며 정화가 된다.

갑사는 계룡산으로 오르는 3대 기점의 하나로 등산객과 답사객, 신도들의 발길이 빈번하며, 여
기서 금잔디고개를 거쳐 동학사로 내려가거나 연천봉을 거쳐 신원사로 내려가도 된다.

※ 갑사 찾아가기 (2013년 2월 기준)
① 공주 경유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공주행 고속버스가 25~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공주 산성동행 직행버스가 거의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공주 산성동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다닌다.
* 인천, 수원, 성남, 천안, 청주, 대전(서부, 동부, 유성), 보령에서 공주행 직행버스 이용
* 공주 산성동에 있는 시내버스터미널에서 갑사행 공주시내버스 320, 322번이 30~50분 간격으로
  다닌다. 공주시외/고속터미널에서 갈 경우는 시내(산성동 방향)로 들어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금강(공주대교)을 건너자마자 옥룡동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길 건너편 옥룡동주민센터 정류장
  에서 320, 322번 시내버스로 환승하면 빠르다. (공주터미널에서 시내버스터미널까지 택시로 5
  분 거리)
② 대전 유성/논산 경유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유성행 고속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유성행 직행버스가 10~25분 간격으로 다닌다.
* 인천, 성남, 수원, 천안, 청주, 전주, 익산, 광주에서 유성행 직행버스 이용
* 유성시외버스터미널 시내버스 정류장<유성시외터미널에서 서쪽(공주 방면)으로 120m 지점>에
  서 갑사로 가는 공주시내버스 340, 341, 342번 시내버스 이용 (1일 7회 운행, 대전지하철 유
  성온천역(6번 출구)과 현충원역(3번 출구) 경유)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 천안논산고속도로 → 정안나들목을 나와서 공주/논산 방면 23번 국도 → 신공주대교 → 계룡
  → 계룡저수지 → 갑사 주차장
* 호남고속도로(회덕~논산) → 유성나들목을 나와서 공주 방면 32번 국도 → 공암 → 청벽대교
  건너기 전에서 갑사 방면 → 내흥리 → 갑사주차장

★ 갑사 관람정보
* 입장료(단체는 30인 이상) : 어른 2,000원(단체 1,800원) / 청소년,학생,군인 700원(단체 600
  원) / 어린이 400원 (단체 300원)
* 주차비 : 대형 6천원 / 소형 4천원
* 매년 가을(10월)에 영규대사를 추모하는 추모재와 산사음악회를 연다.
* 갑사 템플스테이는 주말에 1박 2일 일정으로 진행된다. 사찰예절과 새벽예불, 사물체험, 숲길
  명상 등을 하며, 참가비는 성인 5만원, 어린이 3만5천원이다. 신청은 갑사 홈페이지의 템플스
  테이 메뉴에서 하면 되며, 자세한 것은 전화로 문의하거나 갑사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2 (☎ 041-857-8981~2)
* 갑사 홈페이지는 아래 갑사 배치도를 클릭한다.


▲  갑사 경내 배치도 (갑사 홈페이지 참조)


♠  갑사 둘러보기 (1) 종각, 강당 주변

▲  갑사 종각(鐘閣)

석조약사불을 친견하고 경내로 들어서면 강당 앞에 단촐한 모습의 종각이 있다. 종각에는 조선
중기에 조성된 동종이 소중히 안겨져 있다.


▲  갑사 동종(銅鍾) - 보물 478호

이 동종은 당시 조선 국왕이던 선조(宣祖)의 만
수무강을 기원하고자 1584년에 만든 것으로 높
이 1.3m, 입지름 91cm의 조그만 종이다. 명세기
왕을 위해 만든 것이니 조선 정부나 공주 관아
의 지원이 적지 않게 있었을 것이다.

종 꼭대기에는 음관(音觀)이 없고 대신 2마리의
용이 종을 들고 있으니 이는 조선시대 종의 특
징이다. (그 이전에는 용통=음관이 있었음)
종의 견대(상대)에는 물결모양의 꽃무늬를 둘렀
고, 밑에는 연꽃무늬와 범자(梵字)가 새겨져 있
다. 범자 역시 조선 동종의 특징.. 상대 밑에는
4곳의 네모난 유곽이 있으며 그 안에 볼록 나온
9개의 유두가 있다. 유두는 종을 옮길 때마다
1개씩 뽑는다고 한다.

종신(鐘身) 아랫쪽에는 동그란 모양의 당좌가
있는데 여기는 종을 치는 부분이며, 4개의 당좌
사이로 구름을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지장보살
(地藏菩薩)이 있다.

어둠의 시절 당시 왜정(倭政)이 헌납(獻納)을 구실로 가져가면서 자칫 그들의 전쟁무기로 사라
질 뻔했으나 해방을 맞이하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이 아름다운 종은
무기의 일부로 변했을지도 모르니 참 다행이 아닐 수 없다.


▲  종각 옆에 있는 약수터

종각 맞은편에는 산사(山寺)에는 으레 있는 약수터가 있다. 고개를 들며 웅크린 거북이가 쉬지
않고 옥계수를 뽑아내 물이 마를 날이 없다. 계룡산이 중생에게 베푼 물로 바가지에 가득 담아
1모금을 들이키면 세상 시름과 몸 속의 떼가 싹 내려간 듯 오장육부와 마음이 시원하다고 쾌재
를 부른다.

▲  강당 옆에 경내로 인도하는 돌문

▲  사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루(梵鍾樓)
2003년에 새로 만들었다.


▲  갑사 강당(講堂)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95호

온몸을 다해 경내를 가리고 있는 강당 자리에는 원래 해탈문(解脫門)이 있었으며, 강당은 해탈
문과 대웅전 사이에 있었다. 그러다가 해탈문을 없애고 강당을 해탈문 자리로 밀어 대웅전 뜨락
을 넓혔다. 해탈문의 빈 공간에는 돌을 채워 강당 전면을 석축 바깥에 돌출시켰고, 나무 기둥을
세우면서 지금의 누각형태로 변하게 되었다. 그외에는 단청이 퇴락하고 문짝이 바뀐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이다.

강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승려들이 공부를 하며 법문(法文)을 강론하던 교
육 공간이다. 조선 초기에 지어졌으며, 1597년에 불탄 것을 조선 후기에 다시 세웠다. 기둥은
가운데가 볼록 나온 배흘림기둥이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 촘촘히 공포를 박은 다포(多包) 양식
이다. 강당 정면에는 갑사의 다른 이름인 '鷄龍甲寺(계룡갑사)'라 쓰인 현판이 당당한 풍채로
걸려 있는데, 이는 충청도절도사(節度使) 홍재의가 썼다고 한다. 글씨는 특이하게 파란색이다.


▲  휘황찬란한 강당 내부

강당 내부에는 동쪽에 불단을 두고 육환장(六環杖)을 든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두었다. 그 뒤에
는 후불탱화 대신 거의 1,000개의 달하는 조그만 금동불을 빼곡히 배치하여 지장보살의 뒤를 든
든하게 받쳐준다. 금동불이 한꺼번에 쏟아내는 금빛 찬란함에 두 눈이 가히 마비될 지경이다.
 


♠  갑사 둘러보기 (2) 사적비, 팔상전 주변

▲  갑사의 보물을 간직한 성보보장각(聖寶寶藏閣)

강당 앞에서 경내로 들어가지 않고 직진하면 성보보장각을 중심으로 한 갑사의 북쪽 구역이 펼
쳐진다. 사람들이 대부분 대웅전 구역만 보고 갈 뿐, 북쪽 구역은 지나치기가 쉽다. 허나 이곳
에는 팔상전과 표충원, 사적비, 성보보장각 등의 볼거리가 있으므로 반드시 눈에 넣고 가길 바
란다.

맞배지붕의 단아한 모습을 지닌 성보보장각은 갑사가 지닌 동산문화유산들이 들어있다. 허나 시
간이 늦었는지 문을 굳게 닫아 걸어 안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  갑사의 역사가 담긴 사적비(史蹟碑)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52호

성보보장각 정면에는 해우소가 있고, 여기서 일주문 쪽으로 조금 가면 오른쪽에 사적비가 자리
해 있다. 바위에 뿌리를 내린 사적비는 갑사의 내력이 담겨져 있으며, 바위 위에 비좌(碑座)를
만들고 그 위에 비석을 세운 다음 솥뚜껑처럼 생긴 지붕돌을 얹혔다. 비석 4면에는 모두 글씨를
새겼는데, 일부는 손상되어 해독이 불가능하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비석에 금이 들어있다는
잘못된 이야기에 사람들이 그것을 캐고자 비석을 괴롭히면서 그리 된 것이라고 한다.

1659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碑文)은 여주목사(驪州牧使) 이이천(李志賤, 1589~1683)이 짓고, 공
주목사 이기징(李箕徵)이 글씨를 썼다.


▲  갑사 표충원(表忠院)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52호

성보보장각 뒤쪽에 담장에 둘러싸인 건물이 있는데, 그 앞쪽은 표충원, 뒤에는 팔상전이 있다.
표충원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738년에 지어졌다.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서산대사(西山大師)와 사명대사(四溟大師), 영규대사(靈圭大師)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으며, 뜨락에는 영규대사비가 세워져 있다.

▲  영규대사비

▲  저 문을 들어서면 표충원이다.


▲  갑사 팔상전(八相殿)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54호

표충원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리한 팔상전은 조선 후기 건물이다. 부처의 일대기를 8부
작으로 나눠 그린 팔상탱화(八相幀畵)가 있어서 흔히 팔상전이라 부른다. 팔상탱화 외에 신중탱
과 석가불을 봉안하고 있으며, 공포가 촘촘히 박힌 다포(多包) 양식으로 나름대로의 격조를 갖
추었다. 팔상전 정면에는 툇마루를 지닌 요사(寮舍)가 있으며, 팔상전을 나와 산을 조금 오르면
내원암(內院庵)이 나온다.


▲  담장 너머로 본 보장각(寶藏閣)

팔상전을 나오면 정면에 담장에 둘러진 대웅전 구역이 보인다. 그중에서 담장도 안심이 안되는
지 녹색 펜스까지 치고 사나운 견공(犬公)까지 옆에 둔 맞배지붕 건물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보물 582호로 지정된 월인석보(月印釋譜)의 판목(版木)을 간직한 보장각이다.

월인석보는 1459년(세조 4년) 세조의 명으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석보상절(釋譜詳節)
을 합쳐 만든 불교대장경이다. 여기서 석보는 부처의 일대기를 뜻한다. 본래는 57매 233장으로
모두 24권이었으나 지금은 전국적으로 21권 46매만이 남아있다. 갑사의 월인석보는 1569년 충청
도 한산(서천군 한산면)에 사는 백개만(白介萬)이 시주하여 활자를 새기고, 논산 쌍계사(雙磎寺
)에서 보관하던 것을 왜정 때 갑사로 넘어왔다.
계수나무에 돋음새김으로 새겼고, 판목의 오른쪽 밑에 시주자의 이름과 새긴 이들의 이름이 있
으며, 내용표기에 있어서는 방점과 글자 획이 닳아 없어져 변모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현재
는 보호를 위해 속세에는 공개하지 않으며, 사자암에서 가져온 석조보살입상도 저 안에 있다.
(성보보장각에 있을 수도 있음)


♠  갑사 둘러보기 (3) 대웅전 주변

▲  갑사 대웅전(大雄殿)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05호

팔상전이 있는 북쪽 구역을 살피고 경내의 핵심인 대웅전 구역으로 넘어갔다. 이 구역은 1604년
절을 중건하면서 새롭게 개척한 곳으로 대웅전은 원래 대적전 주변에 있었다. 절의 법당(法堂)
인 대웅전이 개척지에 생겼으니 그 주변이 흥(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 원래 자리였던 대적
전 구역은 변두리로 밀려나 호랑이가 나타날 정도로 인적이 드물 지경이다.

대웅전은 절의 중심 건물답게 규모가 매우 상당하다. 건물을 받치는 기단도 높이가 거의 2.5m에
이르러 그의 거창함을 더욱 끌어올린다. 대웅전 현판도 내 키에 이를 정도로 큼지막하여 주눅이
앞다투어 밀려온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불전으로 공포가 촘촘히 박힌 다포양식이다. 건물 내
부는 우물천정으로 되어 있고, 불단(佛壇)에는 석가불을 비롯하여 3존불과 4개의 보살상을 봉안
하여 눈길을 끈다. 조선 중기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으며, 뜨락에는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석
탑을 닮은 5층석탑이 서 있었으나 근래에 철거했다.


▲  대웅전 현판의 위엄
현판의 글씨가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다. 현판 글씨는
1669년에 쓰여진 것으로 석봉체 계통의 명필(名筆)을 자랑한다.

▲  대웅전 불단

대웅전 볼단에는 건물만큼이나 육중한 3존불이 자리를 지킨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阿
彌陀佛)과 약사불(藥師佛)이 좌우에 앉아 3존불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은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
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수려한 보관(寶冠)을 쓴 관음보살(觀音菩薩)과 문수보살(文殊菩薩), 보
현보살(普賢菩薩) 등이 서 있는데, 한결같이 자비로운 표정으로 중생들을 맞이한다.

▲  대웅전 뜨락 우측의 진해당(振海堂)
승려들의 생활공간 및 선방으로 쓰인다.

▲  대웅전 뜨락 좌측의 적묵당(寂默堂)
요사 겸 종무소로 쓰이며, 1899년에 세워졌다.


▲  갑사 삼성각(三聖閣)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53호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삼성각은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로 조선 후기
에 지어졌다. 예전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사이에 담장을 놓아 속인의 접근을 통제했으나 이제는
삼성각까지 접근이 가능해졌다. 대신 뒤쪽의 대적선원과 승탑은 여전히 통제 구역이다.

▲  산신탱화와 산신상

▲  칠성탱화


▲  계곡을 바라보며 자리한 갑사 전통찻집
예전 2004년 3월에 왔을 때 일행들과 차 1잔의 여유를 누렸던 기억이 솔솔 떠오른다.


♠  갑사 둘러보기 (4) 대적전, 철당간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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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우탑(功牛塔)

▲  공우탑에 새겨진 '功牛塔(공우탑) 명문

전통찻집에서 계곡을 건너면 조그만 3층석탑이 나온다. 겉으로 보면 3층 탑신(塔身)만 있는 것
으로 보이지만 기단부(基壇部)는 땅 속에 묻혀 윗부분만 햇살을 받고 있다. 이 탑은 원래 갑사
가 아닌 부속 암자에 있던 것을 가져온 것이라고 하는데, 공우탑이란 말 그대로 절 중창 때 크
게 도움을 준 우공(牛公)의 부도탑이라고 하며, 짧막한 전설 한토막이 전해온다.

때는 바야흐로 백제 비류왕(比流王, 재위 304~344) 시절, 이곳에 절을 세울 때에 일이다. 목재
를 운반하던 소가 냇물을 건너다가 갑자기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아마도 과로사인 듯 싶다. 소
가 죽자 지금의 자리에 그를 묻고 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전설의 스토리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
는 일이나 그 시기가 100% 의문이다.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대략 384년으로 전설에 나오는
시기는 그 이전이다. 불교도 들어오지 않은 시절에 어찌 절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이 전설이
과연 사실이라면 이 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탑이 되겠지만 탑의 양식을 보면 전혀 신뢰
성이 없다. 아마도 고려나 조선 때 절을 중건하면서 목재를 운반하던 소가 숨지자 그를 화장하
여 지금의 탑을 세웠을 것이다.
1층 탑신에는 '臥塔起立人道偶合 三層己巳厥功居甲<쓰러진 탑을 일으켜 세우니 인도(人道)에 우
연히 합치되었네, 3번을 수고하고 수고했으니 그 공이 으뜸이다>
이란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으
며 2층에는 '牛塔', 3층에는 '功'이 새겨져 있어 이 탑이 절에 공을 세운 소를 위해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절 건축에 헌신하다 죽은 동물을 위해 탑을 만들어 그의 영혼을 위로했던 승려의 지극한 마음과
심하게 부려먹었던 그들의 미안한 마음까지 느낄 수 있는 정(情)이 담긴 문화유적이라 하겠다.


▲  갑사의 옛 중심지를 지키는 대적전(大寂殿)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06호

공우탑에서 전통찻집으로 나가지 말고 안쪽으로 좀 들어가면 대적전이 나온다. 경내를 3개로 나
누면 이곳은 대적전 구역에 해당된다. 지금은 경내에서도 한참 외곽으로 밀려나 한적하기 그지
없지만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엄연한 갑사의 중심 구역이었다. 대웅전도 원래는 대적전 옆에 있
었다.
그러다가 1597년 절이 파괴되고 1604년 절을 다시 일으킬 때 계곡 건너에 자리를 다져 대웅전을
지었고, 자연히 그 일대가 흥하면서 절의 중심지가 되었다. 반면 원래 중심지였던 대적전 구역
은 대적전과 돌담에 둘러싸인 요사를 다시 짓는 선에서 더 이상의 개발이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경내 변두리로 밀려나고 만다.

대적전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고도 하며, 비로자나불의 거처이다. 허나 이곳에는 비로자나불
대신에 석가불과 문수, 보현보살을 봉안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불단 위에
천정을 1단 올려 닫집의 효과를 내고 있다.

대적전의 창건 시기는 문헌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지금의 대적전은 18세기부터 많이 나타나는 다
포식 공포의 법식화된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공포의 구성에 화려한 초각의 경향을
보이는 등 18세기 이후 불전의 경향을 잘 보여준다. 또한 도리통의 협칸을 어칸에 비해 1/2정도
로 줄인 것은 19세기에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건축 특성과 함께 현판에 쓰인 명문으
로 보아 현판이 씌어진 1826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건물 주변에는 옛 주춧돌과 기와가
널려 있어 옛 시절을 그리워한다.

▲  갑사 승탑(僧塔) - 보물 257호

대적전 뜨락에는 수려한 자태로 속인(俗人)들의 안구를 정화시켜주는 아름다운 승탑(부도)이 서
있다. 이 탑은 원래 갑사의 것은 아니며, 절 뒤편 산자락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17년 지금의 자
리로 수습한 것이다.

8각의 바닥돌 위에 여러 조각을 베푼 3단의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탑신과 지붕돌을 차례로 얹
힌 형태로 기단은 위로 올라갈 수록 줄어든다. 기단 밑부분에는 사자와 용, 구름을 어지럽게 새
겼는데, 승탑을 둘러싸고 심하게 각축전을 벌이는 듯,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다. 기단 중간에
는 각 귀퉁이마다 꽃 모양의 장식이 있고 그 사이에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을 배치했다. 탑신
을 받치는 윗부분에는 연꽃을 둘렀고, 탑신 4면에는 자물쇠가 있는 문을 새겼다. 그리고 다른 4
면에는 사천왕상을 새겨 탑을 지키게 했다. 지붕돌은 기왓골을 표현하여 지붕 모양을 정교하게
따랐으며, 머리 장식은 옛날에 없어지고 나중에 달아놓은 연꽃 모양의 보주(寶珠)로 꼭대기를
마무리했다.

이 탑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비슷한 시대에 만들어진 승탑에 비해 목조건축의
구조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기단부의 화려한 조각은 승탑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
다. 누구의 승탑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오래전 갑사 인근에 터를 닦은 이름 모를 암자가 남긴 유
일한 유물이다.


▲  철당간에서 대적전으로 오르는 길

▲  갑사 철당간(鐵幢竿) - 보물 256호

대적전에서 일주문으로 내려가면 하늘을 찌르는 거대한 철당간을 만나게 된다. 양쪽 2개의 돌기
둥이 가운데에 있는 철기둥을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데, 여기서 양쪽 돌기둥을 당간지주(幢竿支
柱)라고 하며, 가운데 철기둥을 한 덩어리로 묶어 철당간이라 부른다.

철기둥은 현재 24개의 철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래는 28개였다고 하며, 1893년 7월 25일 벼
락을 맞아 4개가 떨어져 사라졌다고 한다. 아무래도 너무 하늘로 노출이 되있다보니 피뢰침 작
용을 받은 듯 싶다. 그것이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웅장했을 것이고, 하늘을 찌르
는 그의 모습에 하늘은 더욱 기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철통을 보좌하는 돌기둥은 별 꾸밈
이 없는 소박한 모습으로 당간지주는 대체적으로 멋대가리가 떨어진다. 꾸밈이나 화려함은 통하
지 않는다.
이 철당간은 680년에 세웠다고 하나 근거는 없으며, 당간의 양식을 보아 신라 후기인 9~10세기
경에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철당간은 갑사를 비롯하여 청주시 도심
에 있는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이 전부로 그만큼 희소가치가 상당하다.

철당간이 얼마나 높은지 주변 나무들을 죄다 압도한다. 그의 높이는 15m가 넘으며, 나무들은 기
껏해봐야 10m가 고작이다. 거기에 겨울 제국의 모든 것을 공출당한 상태이니 그 왜소함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이곳에 철당간을 세웠을까? 풍수지리의 영향 때문은 아닐까?
용두사지 철당간 설화를 보면 청주 고을이 북쪽으로 떠내려가자 이를 막고자 세웠다고 한다. 갑
사의 철당간 역시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곳이 풍수적으로 배의 지형을 상징한다하여 떠
내려가지 말란 의미와 함께 풍수지리적으로 허한 부분을 보충하고 마을과 절의 안녕을 기원하려
는 의미도 담겨져 있을 것이다.


▲  갑사 사천왕문(四天王門)

철당간을 둘러보고 계곡을 건너 일주문으로 향했다. 겨울에 잠긴 갑사 숲길을 거닐면 사천왕(四
天王)의 보금자리인 사천왕문이 모습을 비춘다. 이 문은 2002년에 지은 것으로 내부에는 사천왕
상이 봉안되어 절을 찾은 중생들을 검문한다.


▲  겨울 제국의 신민이 되어 봄을 열망하는 갑사 숲길
소쩍새가 울 때면 겨울의 눈치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던 저들은
환하게 기지개를 켤 것이다.

▲  갑사 숲길 (일주문 → 천왕문 방향)
갑사로 가는 숲길은 갑사가 품은 또다른 보물이다. 겨울이라 그렇지
봄과 여름, 늦가을에는 매우 매혹적인 숲길이다. 

▲  갑사 일주문(一柱門)

갑사 일주문은 1998년에 만든 것으로 현판에는 절의 이름인 '계룡산 갑사'가 쓰여 있다. 문이라
고는 하지만 여닫는 문짝은 없다. 어느 누구든 가리지 않고 맞이하겠다는 부처의 뜻이 담긴 것
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입장료를 받는 매표소가 나오고, 이윽고 등산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주막촌
이 펼쳐진다. 절 밑에 자리한 마을을 유식한 말로 사하촌(寺下村)이라 하는데, 산채비빔밥이나
파전, 도토리묵, 동동주, 백숙, 된장찌개 등을 판매한다. 휴일이면 주막촌이 시끌벅적할텐데 평
일이라 썰렁함이 진하게 감돈다. 몇몇 집은 아예 문을 닫아걸고 쉬었다.
이곳에 오니 시간은 어느덧 6시, 햇님은 달님에게 업무를 넘기고 천하는 다시 땅거미의 세상이
되었다. 오전에 계룡산을 오를 때 점심은 대충 때우고 저녁은 황제처럼 먹기로 했지. 그래서 점
심은 동학사 주막촌에서 산 김밥 4줄과 컵라면, 계란으로 동학사와 남매탑에서 반반씩 먹었다.
이제 저녁시간이고 하니 먹을 곳을 물색하다가 서울식당이란 곳에 들어갔다. 이 집도 다른 집과
마찬가지로 손님이 없기는 마찬가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주인 아줌마가 몇년 만에 맞는 손님처
럼 환하게 맞이한다. 우리가 아니었으면 그날 매출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거의 주말 장사니)

식당에 자리를 피고 된장찌개와 묵밥, 해물파전을 주문했다. 점심을 간단하게 먹었고, 등산을
한 탓에 시장기가 하늘을 찌른다. 드디어 나타난 저녁밥상, 나오기가 무섭게 열심히 숟가락과
젓가락을 총동원해 열심히 배를 채운다. 처음에는 배고픔에 눈이 뵈는 것이 없어 양이 적어 보
였으나 먹고나니 양이 많았다. 파전은 덩어리가 커서 간신히 다 먹었고, 묵밥과 된장조치(찌개)
는 조금 남겼다. 반찬도 맛있는 것은 동이 나고 몇몇은 반 정도 남았다. 동동주나 막걸리도 1잔
하면 좋겠지만 술은 땡기지 않아 그냥 식사만 했다.

그렇게 황제처럼 저녁을 마치고 커피 1잔 뽑아마시며 갑사 주차장으로 갔다. 여기서 속세로 나
가는 시내버스를 타면 된다. 날이 어두워지니 따스한 기운 대신 제법 매서운 산바람이 우리를
희롱한다. 그렇게 20분을 기다려 공주시내버스 320번을 타고 공주시내로 나갔다.
이렇게 하여 오랜만에 찾아간 계룡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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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2월 2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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