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후기 금정산 승병(僧兵)의 중심지 ~ 금정산 국청사(國淸寺)
 |
금정산 깊은 산 속에 둥지를 튼 국청사는 조그만 절로 미륵사(彌勒寺), 정수암(淨水庵)과 더불 어 금정산성에 남아있는 3개의 오랜 절집의 하나이다. 이곳은 신라 중기에 의상대사(義湘大師) 가 창건했다고 막연히 전하나 이를 곧이곧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구체적인 창건시기와 이를 입 증할 자료는 전혀 없는 실정이며, 다만 사원(寺院)이 우후죽순 들어서던 신라 후기나 고려시대 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질 따름이다.
국청사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1703년(숙종 29년)이다. 이때 금정산성의 중성(中城 )을 쌓으면서 산성을 지킬 승병(僧兵)들의 편의를 위해 해월사(海月寺)와 이 절을 중창했는데, '청청한 마음으로 국난을 극복하는 데 앞장선다' 또는 '외적의 더러운 발길에 짓밟힘을 막고 깨 끗하게 국토를 수호한다'는 의미로 이름이 국청사로 변경되었다. 또한 이곳에는 금정산성 승병 장(僧兵長)이 사용하던 철로 만든 승장인(僧將印)이 소중히 간직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국청사 가 금정산 승병장이 머무는 금정산 승병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1713년에는 판결사(判決事) 이정신(李正臣)의 건의로 동래와 양산, 기장(機張) 지역의 각 사찰 에 승대(僧隊)를 조직하여 비상시에 금정산성 방위를 맡게 했으며, 평시에는 산성 안에 있는 국 청사와 해월사 승려 1백여 명과 범어사 승려 3백 명으로 수비하였다.
국청사는 호국지장도량(護國地藏道場)으로 나라를 지키다 숨진 이들의 영령을 모시고 제를 봉안 하던 곳이다. 국청사지(國淸寺誌)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전사한 부산진첨사 정발(釜山鎭僉使 鄭 撥), 동래부사 송상현(東萊府使 宋象賢), 다대포첨사 윤흥신(多大浦僉使 尹興信), 승장 만홍(萬 弘), 정안(定安), 성관(性寬), 관찰(寬札) 등 수백 명의 신위(神位)를 봉안하여 제사를 지냈다 고 한다.
1870년 경에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이 중건했으며, 그 이후 간신히 법등(法燈)을 유지해오다 가 1980년대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 등 4~5동의 건물 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부산지방유형문화재 93호인 1666년에 제작된 강희5년명금고(康 熙五年銘 金鼓), 부산지방문화재자료 44호인 금정산 승병장이 사용한 '금정산성승장인(金井山城 僧長印)'이란 철제인,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지는 대웅전 석가모니3존불좌상, 1872년 에 세워진 동래부사 정현덕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있다.
이 땅을 지키다 산화한 이들의 영령을 모시고 제를 지내던 뜻 깊은 곳으로 비록 고찰의 내음은 식었지만 깊은 산골에 자리한 작고 아늑한 절로 잠시 속세의 번뇌를 내려놓고 편하게 안기고 싶 은 절집이다.
※ 국청사 찾아가기 (2011년 1월 기준) * 구포시장(2,3호선 덕천역 5번 출구), 화명역(2호선/4번 출구)에서 금정구 마을버스 1번(8~10 분 간격)을 타고 금성동주민센터 하차 * 온천장역(1호선/3번 출구)에서 203번 좌석버스(10~20분 간격)를 타고 금성동주민센터(중리마 을) 하차 * 금성동주민센터에서 북쪽(부산청소년수련원, 미륵사 방면) 길로 8분 정도 걸으면 국청사다.
★ 국청사 관람정보 * 절까지 차량 접근이 가능하나 주차공간이 넉넉치 못하다. * 대웅전에 1666년에 만들어진 강희5년명금고(쇠로 만든 북)가 있다. (보관장소는 변동 가능) *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397 (☎ 051-517-5003) |

|  |
▲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1987년에 지어진 건물로 산신(山神)과 독성, 칠성신의 보금자리이다. |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요사(寮舍) 국청사 승려의 생활공간이다. |
국청사 표석의 안내로 산내음이 깃든 오솔길로 1분 가량 들어서면 왼쪽으로 200평 규모의 메마 른 연못이 나온다. 봄가뭄이 극심이라 물과 개구리, 수중식물 등은 온데간데 없고 맨바닥에 잡 초만이 무성히 자라나 연못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
 ▲ 국청사 연못에 심어진 호국지장본원 3층석탑 전쟁에서 죽어간 넋들을 위로하고자 세운 탑이다.
|
수심은 1m 정도로 못 주위에 사람들의 접근을 막 기 위해 철책을 둘렀다. 연못 가운데로 하얀 맵 시의 3층석탑이 우아함을 드러내며 서있는데, 호 국지장본원(護國地藏本願) 3층석탑이라 불린다. 이야기에 따르면 법당에서 염불을 할 때마다 전 쟁 중에 죽어간 사람들의 신음소리와 날짐승 울 음소리가 나서 도저히 기도를 드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승려 창봉과 주지 혜성이 그 영혼 을 달래고자 1982년 우물을 연못으로 만들어 아 름답게 꾸미고 그 가운데에 3층석탑을 세웠다. 그 이후로 이상하게 넋들의 울음소리는 사라졌 다고 하며 그들을 위로했다는 뜻에서 3층석탑에 호국지장본원이란 이름을 달았다.
이 연못은 원래 약수가 나오던 우물이었다. 전 설에 따르면 연못 남쪽에 우물이 솟았는데, 위 쪽은 더운 물이, 아래쪽에는 차가운 물이 나왔 다는 영험한 우물이라 하늘나라 선녀(仙女)들이 밤에 살포시 내려와 목욕을 했다고 전한다. 물 론 전설은 전설일 뿐이다. | 
|
연못 속에 외로운 섬으로 자리한 3층석탑, 허나 연못에 물이 없어 자연히 섬 신세를 면하게 되 었다. 연못 가운데에 석불을 배치한 건 많이 보았지만 커다란 탑을 심어놓은 것은 흔치가 않다. 현란한 조각으로 몸을 치장한 그의 맵시에 나의 눈길이 자꾸만 쏠린다. 4마리의 용이 보주(寶珠) 를 희롱하는 장면이 새겨진 아래 기단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물이 너울거렸다면 지금보다 더 욱 빛나 보였을텐데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탑에 용을 새긴 것은 구천(九泉)을 떠도는 넋들을 용에 태워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
 ▲ 연못 우측에 자리한 3개의 석물 (오른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석등, 동래부사 정현덕 영세불망비, 지장보살상)
|
자비로움이 넘쳐흐르는 지장보살상 앞에 고색이 깃들여진 비석이 자리해 있다. 이 비석은 국청 사를 중수한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을 기리기 위해 명신(明信), 평윤(平允) 두 승려가 1872년 에 절 입구에 세운 것이다. 허나 1982년 연못을 만드는 과정에서 감쪽같이 사라졌으며, 나중에 요사채 뒤쪽에서 두 동강이 난 채 버려진 비석을 발견, 이를 손질하여 지금에 자리에 두었다.
정현덕은 1867년 동래로 부임하여 6년 동안 동래고을을 다스렸으며 금정산성과 국청사를 중수하 고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고 전한다. 또한 문장가, 서예가, 외교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비석의 성격은 영세불망비로 말그대로 그의 업적을 영원히 잊지 못하겠다는 뜻의 선정비이다. 비문은 이치영이 썼으며 비석의 높이는 103cm, 너비 39cm, 두께 14cm이다. 앞면에는 '부사정공 현덕영세불망비(府使鄭公顯德永世不忘碑)'라 새겨져 있고 좌우편에 4언시가 남아 있는데, 내용 은 다음과 같다.
相鄕趾美(상향지미) 동래고을에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받아 重建佛宇(중건불우) 절을 중건하고 逢海宣恩(봉해선은) 동래에 은혜를 베풀어 廣置寺屯(광치사둔) 절에 많은 땅을 희사하였다 |
 ▲ 연못을 바라보며 자리한 영령 추모비
|
 ▲ 대웅전 앞뜰에 헝클어진 채 버려진 국청사의 옛 정문
 ▲ 정면에서 바라본 옛 정문과 대웅전
|
연못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소박한 모습의 국청사 경내가 펼쳐진다. 그런데 대웅전 앞뜰에 무너 지기 일보 직전인 조그만 기와문과 담장이 있는 것이다. 문의 높이는 세월의 무게가 얹혀져 아 래로 조금 내려앉은 듯 하며, 문짝은 너덜너덜 떨어져 있다. 담장과 문 지붕의 기와도 온갖 풍 화에 제대로 시달린 듯, 성치가 못하다. 문 밑으로는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지 수풀이 무성하다. 승려의 말로는 거의 몇백 년 묵은 문이라고 하는데, 얼핏 보니 대략 100년 내외로 보인다. 국청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긴 하지만 딱히 안내문은 없다. 이 문은 예전 국청사의 정문으로 지금보다 사역(寺域)이 좁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1980년대 이후 남쪽으로 터를 넓히고 건물 을 새로 지으면서 지금의 규모로 사역이 확장되었으며, 옛 정문은 무슨 영문인지 자리를 옮기거 나 철거하지 않고 대웅전 앞뜰에 일부 담장과 함께 그냥 두었다. 아마도 국청사의 과거가 고스 란히 깃들여진 건물이라 그냥 기념물로 남긴 모양이다.
|
 ▲ 국청사 대웅전(大雄殿)
|
국청사의 가람배치는 법당인 대웅전이 좌우로 요사를 거느린 형태이다. 법당 앞에 으레 세우는 석탑은 없고 대신 낡은 옛 국청사의 정문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탑은 연못에 있는 3층석 탑이 이곳의 유일한 탑이다.
국청사 대웅전은 범어사(梵魚寺)의 대웅전을 본 따서 1990년에 지은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이다. 건물 안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지는 석가3존불좌상을 비롯하여 후불탱 화와 지장탱화, 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으며 절의 귀중한 보물인 금고(金鼓)가 있다. (금고 보 관장소는 변동가능) 대웅전 뒤쪽에는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모신 삼성각이 자리해 있다. |
 ▲ 화려한 닫집이 돋보이는 대웅전 내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