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거리가 풍부한 서울의 듬직한 진산, 북한산성의 속살 둘러보기 (북한산성계곡 주변)

' 볼거리가 풍부한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속살 둘러보기 '
북한산 노적봉
북한산 노적봉(露積峯)


♠ 옛 진국사(鎭國寺)의 유지를 이으며 노적봉의 품에
포근히 안긴 산사 ~ 북한산
노적사(露積寺)

노적봉이 더없이 깨끗하여 티끌하나 없고
만고의 청풍이 노적봉을 불어와 맑고 밝은 기운 돌아오는구나
산영루를 던지고 험악한 산길을 이리저리 찾아 북으로 가면
세 길쯤 되는 돌에 백운동문이라 새겨져 있어
돌길을 따라 진국사 절문에 당도하니
붉은 나무와 흰 돌이 구렁을 이루며 물소리 맑게 들리어라.

* 조선 후기 실학자로 이름이 높은 이덕무(李德懋)가 지은 시로 진국사는
지금의 노적사이다.


서울의 듬직한 진산(鎭山)인 북한산의 품으로 들어가는 주요 기점의 하나인 구파발(舊把撥) 북
한산성입구에서 15분 정도 오르면 북한산성 대서문(大西門)이 등산객을 마중한다. 문을 들어서
15분 가량 가면 산성 안에 터를 닦은 오래된 마을, 북한동(北漢洞) 마을에 이른다. 이곳은 산성
축성과 함께 조성된 마을로 등산객을 상대로 산채비빔밥과 도토리묵, 동동주 등의 먹거리를 파
는 주막들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북한산성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2011년에 말끔히 철거되어 주민
들이 버린 집 일부만 남아 있다.

마을에서 태고사 방면으로 가는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15분 가면 중성문(中城門)이 모습을 드러
낸다. 중성문과 중성은 북한산성의 최대 취약점인 북서쪽을 보완하고자 만든 것으로 이로 인해
산성의 수비력은 업그레이드되었다. 중성문을 지나 10분을 오르면 계곡 위에 두둥실 떠 있는 운
하교(雲河橋)란 다리가 나온다. 그 다리가 노적사의 입구로 구름의 강이란 아름다운 뜻을 지닌
운하교를 건너 10분정도 오르면 노적봉과 노적사가 진하게 그 모습을 비춘다.

노적봉(露積峰)을 든든한 뒷배경으로 그 아래에 아늑하게 들어앉은 노적사는 조계종(曹溪宗) 소
속으로 1712년 승려 성능(性能)이 창건하여 진국사(鎭國寺)라 하였다. 성능은 18세기에 활약했
던 승려로 숙종(肅宗) 시절에 승군(僧軍)의 대장인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 되어 북한산성 보
수공사에 참여했으며, 산성에 자리한 중흥사와 태고사를 보수하고, 노적사(지금의 상운사)와 서
암사(西巖寺) 등 10개의 사찰을 세워 북한산 승병의 보금자리로 삼았다.


노적사 지장전(地藏殿)
지장보살(地藏菩薩)과 10왕의 거처이다.

또한 그는 중흥사와 태고사에 30년간 머물며 북
한산성과 북한산에 있는 사찰,옛 유적, 행궁(
行宮), 관청, 기타 여러 시설 등을 정리한 '북
한지(北漢誌)'를 저술하였다.

창건 이후 이렇다 할 내력(來歷)은 전해오지 않
으며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져 터만 남은 것(아
마도 부근 중흥사, 국녕사와 비슷한 19세기 후
반에 없어졌을 듯)을 1960년승려 무위(無爲)가
여러 신도의 도움으로 절을 다시 세우고 노적봉
밑에 있다는 뜻에서 '노적사'라 하였다.

1977년 승려 종후가 재정을 털어 절을 크게 확
장시켜 삼성각, 나한전(羅漢殿), 종각, 요사 등
을 새로 세웠으며 대웅전을 새롭게 손질했다.
2000년 12월에는 노적사의 오랜 내력이 인정되
전통사찰 201호로 지정되었으며 2002년 6월
에 불의에 화재로 종각과 요사가 전소되었으나
2006년에 다시 세웠다.
또한 그해 4월 주지 종후가 네팔 팔탄타쉬 지하
초사에서 부처의 진신사리 7과를 기증받았으며,
2009년 3층사리탑을 세우고, 극락전을 적멸보궁
으로 이름을 갈았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적멸보궁을 비롯하여 나
한전, 삼보당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며, 고색
의 떼는 모조리 증발하여 소장문화재는없는 실
정이다.


2층 건물의 노적사 삼보당(三寶堂)
아래 층은 승려들의 생활공간인 요사(寮舍)로
쓰이고 있다. (현재 대웅전으로 쓰임)


북한산에는 노적사란 절이 따로 있었는데 19세
기 초반에 상운사(祥雲寺, 원효봉 밑에 있음)로
이름을 갈았다.

절 뒤로 인수봉을 닮은 노적봉이 든든한 모습으
로 절을 지켜주고 있으며, 태고사와 마찬가지로
조촐한 규모로인적도 별로 없어 조용하고 아늑
하다. 북한산의 청정한 기운이 서려 속세에 오
염된 번뇌와 마음을 정화시키기에 충분하여, 풍
경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조용히 사색에 잠기기
에는 딱 그만인 곳이다.


나한전 뜨락 우측에 자리한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

북한산 노적사 찾아가기 (2011년 8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1번 출구)에서 34, 704번 시내버스를 타고 북한산성입구 하차. 주말과
휴일에는 8772번 주말임시노선(8~18시까지 10~15분 간격)이 추가 운행된다.
* 서울역(1,4호선 4,9-1번 출구)과 을지로입구역(2호선 3번 출구), 광화문역(5호선 7번 출구),
서대문역(5호선 3번 출구), 홍제역(3호선 2번 출구), 불광역(3,6호선 1번 출구)에서 704번 시
내버스 이용
* 승용차 이용시 북한산성입구 주차장을 이용해야 되며, 북한동 마을까지 차량 접근 불가
* 북한산성입구 정류장 → 대서문/서암사터 → 북한동마을 → 중성문 → 운하교 → 노적사 (약
4km, 1시간 10~20분)
* 점심시간에는 절을 찾은 누구에게나 점심공양을 제공한다. 오후에도 먹을 수 있으며, 맛이 좋
다고 하니 먹고 가자. 북한산에서 거의 유일하게 일반인에게도 공양을 제공하는 착한 절이다.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332 (☎ 02-353-5016)


노적사 범종각(梵鍾閣)

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범종각이 중생을 맞는다. 2002년에 불에 탄 것을 2006년에 다시 세
운 것으로 아침과 저녁 6시가 되면 고요에 잠긴북한산을 살며시 깨우며 중생 구제를 염원하는
부처의 메세지를 은은하게 전한다.


노적사 극락전(極樂殿)

범종각을 지나면 왼쪽으로 2층 규모의 삼보당이 있고 정면으로 높다란 계단 위에 노적사의 법당
(法堂)인 극락전이 아래를 굽어본다. 예전에는 대웅전(大雄殿)이라 불렸으나 2007년부터 극락전
으로 현판을 갈았다. <현재는 적멸보궁(寂滅寶宮)으로 쓰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多包)계 팔작지붕 건물로 1960년에 지어졌다. 허나 공간이 좁고 퇴
락하여 1986년에 증축하여 지금의 면모를 갖추었다. 내부에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
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갖춘 금동아미타3존불을 봉
안했으며, 그들의 금빛찬란한 모습은 건물 실내를 훤히 밝혀준다. 그 외에 1987년에 그려진 석
가모니후불탱화와 지장탱, 신중탱, 아미타후불탱 등이 내부를 구석구석 수식한다.


작고 단정한 맵시가 인상적인 노적사 나한전(羅漢殿)

적멸보궁의 우측 옆구리로 들어서면 나한전이 나온다. 나한전은 부처와 그의 제자인 나한(羅漢)
을 봉안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그 자리에는 뒤쪽으로 물러난 삼성각이 있었
다. 그런 삼성각을 2000년에 철거하고 나한전을 새롭게 지었으며, 건물 외벽을 수식하는 벽화는
2002년에 완성을 보았다. 건물 밑에는
2개의 샘터가 있는데, 노적봉이 아낌없이 베푼 샘물이 콸
콸 쏟아져 나와 중생의 목마름을 흔쾌히 해결해준다. (우측 샘물은 일반인들도 마실 수 있으나,
좌측 샘물은 예불용으로 아무나 마실 수 없음)


나한전 아랫도리에 자리한 2개의 샘터

석조미륵불(石造彌勒佛)

나한전 뜨락 우측에는 약사여래좌상이 좌측에는 석조미륵불이 각각 자리를 지킨다. 미륵불(彌勒
佛)은 56.7억년 후에 나타나 부처를 대신하여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의 부처로 그 유구한 시간
은 과연언제를 기준으로 삼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우리 세대에는 보기 힘들 것 같다. 부처가
사라진 이후, 이 땅에는 미륵을 칭하는 사람들이 숱하게 나타났으나 모두 가짜였다. 언제나 진
짜 미륵이 나타나 누란의 위기에처한 이 세상을 구할 것인가..?

그의 왼손에는 동그란 모양의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데, 바로 우리가 머물고 있는 지구라고 한
다. 그것을 자세히 보면 지구를 위 아래, 좌우로 구분하는 경도와 위도가 나와 있으며, 보주 중
간에 한반도가 선명하게 새겨져 눈길을 잡아맨다. 오른손은 마치 선서를 하듯 시무외인(施無畏
印)을 취한 모습이 충주 미륵리절터에 있는 미륵리석불(彌勒里石佛)을 연상케 한다. 석불 앞에
는 노천 기도처가 마련되어 있으며, 그 좌우로 밋밋한 석등 2기가 미륵불을 비춘다.


특이하게 천막으로 이루어진 삼성각(三聖閣)

나한전에 이르면 '경내는 이게 전부구나, 뒤로는 더 이상 없겠지~' 싶은 마음에 발길을 돌리기
가 쉽다. 바로 나한전이 뒤를 고스란히 가렸기 때문이다. 또한 언뜻 보아도 그 뒤쪽은 아무 것
도 없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나 그것은 함정이다. 나한전 옆구리로 가면 그 뒤로 내부를
가린 넓은 천막이 나온다. 겉으로 봐서는 무슨 창고가 아닐까 싶어 돌아서기 쉽지만 이곳 역시
엄연한 불전(佛殿)으로 칠성(七星)과 독성(獨聖), 산신(山神)을 모신 삼성각이다.

불전 치고 특이하게 천막으로 이루어진 삼성각은 원래 나한전 자리에 있었다. 1963년에 지어진
팔작지붕 건물로 지장전과 비슷한 규모를 지녔으나 2000년에 새롭게 나한전을 지으면서 지금의
자리로 물러난 것이다. 나한전 건립으로 재정이 많이 어려웠던지 기와집으로 만들지 못하고 임
시방편으로 돌을 쌓고 불단을 만들어 천막을 올린 것이다.


석굴 같은 분위기의 삼성각 내부

삼성각 내부는 천막으로 초라해 보일 것 같은 외부와 달리 넓고 아늑하다. 공간 가운데에 난로
가 있어 추운 겨울에도 온기가 감돈다. 불단에는 칠성(치성광여래)을 비롯하여 독성(나반존자)
과 산신이 자리한다. 그들 뒤로는 탱화(幀畵) 대신 커다란 돌이 후광(後光)으로 자리하며 좌우
로 중생의 소망을 담은 초들은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내부를 환하게 비춘다.


노적사 삼보당에서 바라본 건너편 산자락
용출봉과 의상봉 사이 산자락에 1713년 성능이 세운 북한산 10개의 사찰 중 하나인
국녕사(國寧寺)가 바라보인다. 국녕사는 오랫동안 폐허로 있다가 1998년 힘겹게
법등(法燈)을 밝힌 절로 거대한 청동환희불(靑銅歡喜佛)로 유명하다.


♠ 조선 승군(僧軍)의 중심지이자 북한산성 12사찰을 관장하던 큰 절,
허나 지금은 주춧돌만이 남아 아련히 옛날을 꿈꾸는, 중흥사(重興寺)터
경기도 지방기념물 136호

북한산성 계곡의 상류인 태고사 입구에는 거대한 석축과 주춧돌만 남긴 채, 홀연히 사라진 중흥
사의 옛터가 있다. 중흥사는 고려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고려 후기 불교계를 주름잡았던 보우대
사(普愚大師, 원증국사)가잠시 주지로 머물렀던 곳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의주(義州)까지 줄행랑을 친 선조(宣祖)는 서산대사(西山大師)를 불
러 승병을일으킬 것을 눈물로 호소하는데, 이에 감동을 먹은 서산은 즉시 승병을 일으켜 토왜(
討倭)에 앞장선다. 1593년 초, 겨우 서울로 돌아온 선조는 승병(僧兵)을 격려하기 위해 조선 승
군을 지휘하는 본부를 중흥사에 두게 되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중흥사는 조선 정부의 각별한
지원을 받는국가의 주요 사찰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숙종 시절에는 북한산성을 보수할 때, 승병들을 위한 절들을 손질하면서 중흥사는 136칸으로 확
장되었으며, 산성 안에 뿌리를 내린 12사찰을 관장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허나 중흥사의 운도
다했는지 1904년 원인 모를 화재로 거의 쑥대밭이 되었으며,1915년 대홍수로 절은 말끔히 사라
지고 말았다.그 이후 터만 간신히 드러내 보인 것을 2000년 이후 '한민족 불교 중흥회'에서 중
흥사의 복원을추진, 고양시청과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복원 불사를 진행하고 있으나 별로 신
통치가 못하여 아직까지는 종무소로 쓰이는 가건물 1채와 겨우 형식만 갖춘 목조 전각 1동이 전
부이다.

절터는 산등성이에 자리해 있어 언덕에 석축을 쌓아 2단의 구조로 만들었다. 그 꼭대기에는 당
연히절의 법당(法堂)이 터를 닦았다. 종무소 앞에는 중흥사의 옛 모습이 담긴 사진과 함께 중
흥사터 안내문에 담겨져 있는데, 그 규모가가히 대단하다.그런 절이 마치 아틀란티스 대륙이
바다 속에 쏙 사라진 것처럼 잡초의 제국이 되어 옛터만 덩그러니 남았으니 역시나 인간의 창조
물은 자연 앞에서는 일개 먼지에 불과하다.

※ 중흥사터 찾아가기 (구파발 기준)
* 북한산성입구 정류장 → 대서문 → 북한동 마을 → 중성문 → 중흥사터(4.5km, 1시간 30분)
* 소재지 - 경기도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259


▲ 중흥사의 힘겨운 오늘 ~ 가건물로 이루어진 중흥사 종무소(宗務所)

종무소라고는 하지만 법당 겸요사(寮舍)의 역할까지 도맡고 있다.


▲ 태고사 등산로에서 바라본 중흥사터

법당이 있던 절터의 제일 위쪽 우측 모서리에 복원불사로 지어진 건물이 있다. 기둥과 건물외
곽은 그런데로완성이되었으나 내부 손질까지는이르지 못했다. 잡초만 덥수룩한 절터에는 공
사자재와 주춧돌, 수풀이 한데 뒤엉켜 우울한 모습으로 이리저리뒹굴고 있어 중흥사 복원불사
의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르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 옛날을 꿈꾸는 중흥사터 주춧돌
건물을 받치던 초석(礎石)들로 지금은 받쳐들 대상을 잃어버려 대머리처럼 허전하다.
절터를 이리저리 뒹굴며 세월을 원망하고 있을 저들의 원성이 가득 들려오는 것 같아
마음한 구석이 그리 편치가 않다.


▲ 폐허 속에 피어난 코스모스

그저 황량해 보이던 폐허 속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꽃은 피어났다.어여쁜 미소를 활짝 보이며
나를 바라보는 가녀린 코스모스의 모습에서 몹내 가을이 그리워진다. 지금은 모든 것이 힘겹지
만 중흥사의 미래도 나의 미래도 언젠가는 저 코스모스처럼 환하게 피어날 것이다.


▲ 잡초와 눈 속에 파묻힌 절터 아랫쪽 석축
위대한 대자연은 중흥사의 존재를 완전히 지우려고 꾀했던 것일까? 누런 잡초와
겨울 제국의 전령인 하얀 눈이 절의 흔적을 온통 가려버렸다.


♠ 봉성암 전 성능대사부도(奉聖庵 傳 性能大師浮屠)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88호

태고사 원증국사탑에서 가느다란 동쪽(북한산성 대동문 방면) 산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봉성암
(奉聖庵)이란 조그만 암자가 모습을 비춘다. 태고사와 북한산성 중간 가파른 곳에 둥지를 튼 이
절은 법당과 요사로 쓰이는 2층 건물이 전부인 그야말로 손바닥만한 산중암자로 태고사보다 더
인적이 드물어 바람의 소리 외에는 그저 고요하기만 하다.

봉성암은 숙종 때 북한산성에 세워진 12개 사찰의 하나로 18세기 초에 지어졌다. 6.25전쟁으로
파괴되어 흔적만 아련히 남은 것을 다시 복원하여 인근 노적사(露積寺)처럼 고색의 무게는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깊숙한 벽지라 절을 꾸리기에도 여의치가 않다. 볼거리가 없을 것 같은 그곳
에 발을 들인 것은 법당 옆구리 높은 곳에 있는 조선 후기 부도를 보기 위함이다. 그의 손길이
없었다면 굳이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냥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우리를 불러들인 그 부도는 조선 숙종 때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 되어 북한산성 보수공사에
참여한 성능대사(性能大師)의 부도라고 한다. 부도 이름 앞에 전(傳)을 붙인 것을 보니 확실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성능은 18세기에 활약했던 승려로 태어난 시기와 입적한 시기는 전하지 않는다. 그의 호는 계파
()로 지리산 화엄사(華嚴寺)에 머물러 있다가 숙종 시절에 왕명으로 팔도도총섭(

)이 되어 북한산성 보수공사에 참여했으며, 산성 내에 진국사(鎭國寺, 노적사)를 비롯하여 12개
의 절을 짓거나 보수했다.

1745년 도총섭 자리를 서윤()에게 넘기면서 북한산성에 관한 일 14조()와 북한산에 있는
절과 옛 유적, 행궁, 관청 등을 망라한 '북한지(北漢誌)'를 저술했다. 화엄사로 돌아가 '대화엄
경()'를 판각하고 장육전(殿)을 중수했으며, 1750년에는 통도사(通度寺) 계단탑을
증축하여 석가여래영골사리탑비()를 세웠다. 편저(編著)로는 '자기문절차
조열()이 있다.

그가 입적하자 지금의 자리에 터를 닦아 그의 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여겨진다. 어쨌든 조선 후
기에 조성된 부도로 6.25 시절에 폭격을 받아 일부가 파괴된 것을 전쟁 이후 봉성암을 다시 세
우면서 복원했다. 허나 완전한 상태는 아니며, 탑신부(塔身部)의 부재(部材)는 사라진 상태이다.

부도의 구조는 4개의 판석(板石)을 짜맞춘 네모난 바닥돌 위에 네모난 하대석(下臺石)을 깔고
동그란 중대석(中臺石)과 8각의 상대석(上臺石)을 두었다. 그 위에 8각의 탑신(塔身)을 두었고,
지붕돌인 8각의 옥개석(屋蓋石)과 보주(寶珠)를 갖춘 상륜부(相輪部)로 마무리를 지었다. 옥개
석의 귀꽃 일부는 파괴되었으며, 탑의 전체 높이는 2.8m에 이른다. 탑 앞에는 커다란 돌덩이가
놓여져 있는데, 탑과 같은 재질에 색깔도 비슷하여 탑에서 떨어져 나온 석재로 여겨진다. 지금
은 부도에 향이나 제물을 올리는 상석(床石)의 역할을 한다.

화려함을 자랑하던 신라나 고려의 부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부도의 격식을 갖추었고 별 꾸밈이
없는 수수하고 조촐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특히나 북한산성 보수에 참여하고 8도도총섭까지 지
낸 인물의 부도로 국가의 지원도 상당했을 것이다. 마땅히 내세울 부도가 없던 조선 후기에 저
정도의 부도는 상급에 속한다. 성능의 부도가 맞다면 그의 비도 부근에 있을 법한데, 아직은 발
견되지 않았다.

※ 북한산 봉성암 찾아가기 (2011년 8월 기준)
* 북한산성입구 정류장 → 대서문 → 북한리 마을 → 중성문 → 중흥사터 → 태고사 → 봉성암
(약 6km, 2시간)
* 북한산성 동장대와 용암문 사이로 봉성암, 태고사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음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1


♠ 산영루터 주변 명소들

▲ 용학사 주변 바위에 뿌리를 내린 선정비군


돌탑의 아늑한 보금자리가 된
총융사 선정비(善政碑)

적사에서 중흥사터, 태고사 방면으로 열심히
가다보면 근래에 지어진 용학사(龍學寺) 주변으
로 어지럽게 늘어선 비석을 만나게 된다.

이들 비석은 일종의 선정비(善政碑)로 18세기
이후, 북한산성에 설치된 총융청(摠戎廳)을 관
리하는 총융사(摠戎使)의 공덕과 선정(善政)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다. 허나 선정과 공덕에 감
화(感化)되어 세운것은 솔직히 몇 개 안될 것
이다.

일제히 남쪽을 바라보며 세워진 비석들은 바위
에 새겨진 것을 포함하여 21기 정도 된다고한
다. 허나 온전한 비석은 얼마 되지 않으며 태반
은 장대한 세월과 자연이 안겨준 상처를 한아름
씩 안고 살아간다. 어떤 비석은 아예 박살나서
땅바닥에 엎어져 있기도 하다. 왼쪽 사진의 비
석은 그나마 건강이 양호한 것으로 바위 위에
심어진 탓에 그 주변에 나그네들의 소망이 한아
름 안긴돌탑들이 가득 널려 있다.


200년의 세월을 채 버티지 못하고 땅바닥에 화석처럼 박힌 선정비

예전에는 다른 비석처럼 지붕돌을 갖추며 당당히 서 있었을 비석, 허나 세월의 거친 소용돌이를
견디지 못하고 비석은 완전히 깨지고 비신(碑身) 일부만 땅바닥에 화석(化石)처럼 박혀 지나간
세월을 원망한다. 비문(碑文)의 내용을 보니 경리사민공영(經理使閔公永)이라 쓰여 있는데, 경
리사로 북한산성에 파견된 어느 민씨의 선정비로 여겨진다.


바위에 누워있는 빛바랜 역사의 다이어리 ~ 북한승도절목(北漢僧徒節目)

총융사 선정비 뒤쪽 넓은 암반에 새겨진 명문(銘文)이다. 이 절목(節目)은 전국 승려들의대장
인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의 교체과정에서 많은 비리와 폐단이 연거푸 발생하자, 그 폐단을 쇄
신하고 산성 수비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을 다짐하는 내용으로 1855년(철종 6년, 안내문에는 어
이없게도 1885년이라 나와 있음)에 새긴 것이다.


▲ 문인들의 시문 소리가 아련히 들려올 것만 같은 산영루(山映樓)터

중흥사터 부근 북한산성 계곡의 높다란바위 위에 산영루터가 남아있다. 이곳은 숙종 때 북한산
성을 보수하면서 세워진 것으로 처음에는 이곳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근래에 '고양시
시사편찬위원회'가 옛 지도와 문헌을 통해 북한산의 유일한 누각인 산영루의 옛터임을 밝혀냈으
며 2004년 가을에는 동양화가 홍성호화백(畵伯)이 산영루의 사진을 공개하였다.


왜정 때 찍은 산영루의옛 모습 (고양신문
참조)
누각의 모습이 서울 홍지동의 세검정(洗
劍亭)과많이 비슷하다. 누각 뒤로총융사 선정
비들이 보인다.

산영루는 거의 'T'자 형 누각으로 주변 풍경이
빼어나 시인묵객들로 북적거리던 서울 근교 제
일의 명승지였다.조선 후기 이곳에서는 수시
로 시회(詩會)가 열려 우수한 시문(詩文)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는데 추사체(秋史體)의
주인공인 김정희(金正喜)와 목민심서(牧民心書
)의 저자, 정약용(丁若鏞)도 손수 찾아와 산영
루의 아름다움을 시문으로 예찬했다.

이처럼 조선 후기 문학의 산실로 유명했던 산
영루는 1920년대에불의의 화마(火魔)를 만나
사라졌으며, 지금은 주춧돌과 문인들의 신발로
가득했을 섬돌만이 멀뚱히 남아 옛 정취를 그
리워 한다. 고양시는 2005년 이곳을 복원하겠
다고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으나 아직 삽조차
뜨지 못했다.

주춧돌 사이로 잡초만이 무성하여 그야말로 세
월무상을 실감케 하며주춧돌에 귀를 귀울이면
옛 사람들이 읊조리던 시(詩)와 문(文)이 아련
히 들려올 것만 같다.


▲ 산영루터 부근 바위에 새겨진 커다란 바위글씨
언제인가 산영루를 방문했던 김성근(金聲根)이란 선비가 남긴 바위글씨
글씨가 큼지막해서 계곡 건너에서도 진하게 바라보인다.


♠ 북한산성의 수비력을 한층 드높인 중성문(中城門) - 사적 162호

북한동마을에서 태고사, 북한산행궁터, 북한산성계곡으로 가려면 반드시 중성문을 지나야 된다.
북한산성은 해발 400m 이상 고지에 그것도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쌓은 난공불락에 가까운 견고
한 요새이다. 하지만 아무리 고구려의 오녀산성(五女山城)에 버금가는 천연의 요새라도 약점은
꼭 하나씩은 있기 마련으로 그 치명적인 단점이 바로 산성의 서북쪽 부분(대서문, 수구문)에 있
었던 것이다. 북한산 지도를 보면 대서문 지역(산성의 서북쪽)이 다른 곳에 비해 뻥 뚫려져 있
음을 알수 있다.

해발 400~800m 산등성이에 골고루 걸쳐진 약 9.5km의 북한산성은 산성의 서북부인 의상봉(義湘
峰)과 원효봉 사이에서 현저히 낮아지는데 대서문은 거의 해발 150m이며 그 북쪽으로 북한산성
의 젖줄인 북한산성계곡이 유일하게 외부로 나가는 수구문(水口門)은 고작 90m에 불과하다. 게
다가그 주변 지형도 대체로 완만하여 적들이 쉽사리 공격할 수 있어 수비는 그만큼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 만약 서북쪽이 뚫리면 산성 전체가 떨어지는 건 그야말로 시간문제로 비상시를
대비하여 행궁과 관청까지 만든 보람이 없어져 버린다. 바로 이점을 북한산성 보수공사가 끝난
1712년 숙종이 친히 시찰을 나와서 지적한 것이다. 그래서 그 결점을 보완하고자 산성 안쪽에
중성을 쌓고 계곡에 중성문을 설치한 것이다.

중성문은 해발 290m 협곡에 들어앉은 성문으로 주변 지형은 문경새재와 대체로 비슷하다. 협곡
양쪽에는 높다란 산이 딱 버티고 있으며,그 협곡 또한 폭이 좁아, 이곳을 죽어라 지키면 아무
리 강한 적이라도 더 이상의 진격이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 중성이 축조됨으로써 산성 서북쪽
에 취약부분을커버할 수 있게 되었고 산성 수비력은 더욱 견고(堅固)해졌다.

중성문은 왜정 이후, 홍예와 성곽만 덩그러니 남아 있던 것을 근래에 문루와 여장을 깨끗히복
원했으며, 문의 규모는 조촐한 크기이다.시원스런 팔작지붕을 머리에 이고 서북쪽을 주시하고
있으며, 문루(門樓)에는 등산객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마루가 베풀어져 있다.

▲ 성곽과 여장을 갖춘 중성(重城)
중성문 서쪽 성곽

▲ 중성문 옆구리를 흐르는 북한산성계곡

◀ 중성문 동쪽 수문터<수구문>
계곡 위에 계곡을 흘러보내던 수문<수구문(水口
門>이 있었으나 지금은 수문으로 내려가는 계단
의 흔적과 계곡 북쪽의 중성의 잔해만이 남아있
다. 수문 주변에 하얀 피부를 지닌 훤칠한 바위
들이 많고 물이 시리도록 깨끗하고 순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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