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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2.01 서울 도심에 숨겨진 달달한 뒷길, 창덕궁 후원 뒷길 (후원 돌담길, 옥류정, 명륜동 장면가옥) 1
  2. 2022.01.18 광주 무등산옛길3구간, 충효동, 광주호 겨울 나들이 (풍암정, 원효계곡, 충효동요지, 충효동 왕버들군, 광주호호수생태원)
  3. 2021.11.29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을 거닐다. 평창동~백사실계곡~부암동 늦가을 산책 (평창동 소나무, 응선사, 창의문)
  4. 2021.09.07 도심 속에 숨겨진 달달한 계곡이자 서촌의 오랜 경승지, 인왕산 수성동계곡 (인왕산자락길)
  5. 2021.06.03 한탄강 언덕에 살짝 깃든 고구려의 작은 흔적, 연천 은대리성
  6. 2021.05.28 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신안군의 상큼한 지붕, 압해도 송공산 (송공산둘레길)
  7. 2021.04.10 울산 무룡산 강동사랑길, 어물동마애여래좌상, 동해바다 당사항 나들이 (길상바위, 용바위)
  8. 2021.01.08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한양도성, 남산서울타워, 목멱산봉수대, 백범광장)
  9. 2020.12.31 깊은 산골에 푹 묻혀있는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백화산 반야사 (석천계곡, 반야사 호랑이, 문수전, 망경대)
  10. 2020.12.10 도심 속의 푸른 공간이자 너른 초원, 올림픽공원~몽촌토성 늦가을 나들이 (나홀로나무, 충헌공 김구묘역, 성내천)

서울 도심에 숨겨진 달달한 뒷길, 창덕궁 후원 뒷길 (후원 돌담길, 옥류정, 명륜동 장면가옥)

창덕궁 후원 뒷길, 명륜동 장면 가옥



' 서울 도심의 숨겨진 뒷길, 창덕궁 후원 뒷길 '
(후원 돌담길, 명륜동 장면 가옥)
창덕궁 후원 돌담
▲  창덕궁 후원 돌담
 



 

사계절 풍경 중의 오색 단풍이 천하를 곱게 물들이는 늦가을 풍경이 단연 으뜸이 아닐까
싶다. 이런 늦가을은 하루하루를 그냥 흘려보내기가 너무 아까워 틈이 날 때마다 카메라
를 들고 서울 곳곳을 누비며 뒤안길로 꽁무니를 빼려는 늦가을 풍경을 붙잡는다.
그렇게 뛰어다닌 곳 중에는 나의 즐겨찾기인 북촌(北村)과 서촌(웃대), 은행나무 명소인
성균관(成均館), 그리고 북촌과 성균관을 빠르게 이어주는 창덕궁 후원 뒷길도 있었다.

북촌(북촌한옥마을)은 이미 200번을 넘게 발걸음을 한 곳이지만 복습의 즐거움이 대단하
여 그날 땡기는 곳을 여럿 둘러보고 취운정(翠雲亭)터 주변 감사원로터리에서 동쪽 길로
들어선다. 그 길이 고려사이버대학교 정문 겸 중앙중고등학교 후문으로 차단봉이 내려앉
은 주차장 정산소 직전에 시야가 확트인 조망대가 있다.
그곳은 중앙중학교 바로 뒷쪽(서쪽) 벼랑으로 여기서는 바로 앞에 중앙중고를 비롯해 창
덕궁과 종로구, 중구 지역이 훤히 두 눈에 바라보인다.


▲  창덕궁 후원 뒷길, 중앙중고 뒷쪽으로 이어지는 길 (주차장 정산소)

도로에 차단봉이 설치되어 있고, 얼핏 봐도 길이 막혀 보여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길을 돌리고 싶은 충동이 생길 수 있다. 허나 그것이 이곳의 함정,
차단봉은 고려사이버대학과 중앙중고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차량들의 주차비 징수를 위한
것이라 뚜벅이들은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으며 길은 성균관대까지 이어져 있으니 걱정
은 곱게 접어 하늘로 날려보내기 바란다.


▲  중앙중학교(中央中學校) 뒷쪽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 옥상이 중앙중학교이다. 옥상 오른쪽 너머로 보이는 근대 건축물
은 중앙고등학교 건물이며, 푸른 잔디가 입혀진 운동장 너머로 펼쳐진 너른 숲은 창덕궁
이다. 그런 창덕궁과 중앙중고교 너머로 천하 제일의 대도시인 서울의 심장부, 종로구와
중구 지역이 시야에 잡힌다.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호젓한 뒷길 ~
창덕궁(昌德宮) 후원 뒷길 (후원 돌담길)


▲  중앙중고 후문

주차장 정산소를 지나면 고려사이버대학교와 중앙중고로 내려가는 길(후문)이 나온다. 이들은
모두 고려대 계열로 중앙고교 북쪽에 새롭게 중앙중학교를 만들고 그 뒷쪽 언덕에 고려사이버
대학교를 만들면서 중/고/사이버대학이 한 자리에 있게 되었다.

중앙중고를 놔두고 계속 직진하면 길은 서서히 경사를 보이기 시작하는데, 기와가 얹혀진 창
덕궁 돌담이 궁궐 돌담의 당당한 모습을 드러내며 오른쪽으로 따라붙는다. 이 돌담은 사람이
다니는 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나란히 제 갈 길을 가는데, 동쪽으로 갈수록 돌담의 해발
높이도 높아진다. 또한 돌담 너머로 삼삼하게 우거진 창덕궁 후원이 숨겨진 속살을 드러내면
서 도심의 속된 기운을 정화시킨다.

통일부 남북회담본부(고려사이버대학 북쪽)를 지나면 길이 얼핏 끊긴 듯 보여 '넘어가는 길이
과연 있을까??'
주저하게 된다. 허나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길은 계속 이어지기 때문
이다.


▲  층층이 이어진 창덕궁 후원 돌담 ▼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궐 후원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창덕궁 후원을 속세로부터 열심히
가리고자 지형을 이용하여 높이 돌담을 둘렀다. 지형이 낮은 곳은 돌담 너머로 후원의 속살이
일부 보이기도 하나 보이는 것은 그저 숲밖에 없다. 참으로 고약했던 왜정(倭政)에 의해 고의
적으로 비원(秘苑)이라 놀림을 받았던 창덕궁 후원, 그는 후원<또는 금원(禁苑), 북원(北苑)>
이지 절대 비원이 아니다.


▲  북악산(백악산)의 물을 받아들이는 후원 수구문(水口門)

창덕궁 후원에는 연못이 참 많다. 그 연못을 살찌우는 물은 바로 북악산(백악산)이 베푼 것으
로 그가 내린 물이 이 수구문을 거쳐 후원으로 들어가 후원 곳곳에 물을 공급한다.


▲  늦가을에 잠긴 후원 뒷길 (너른 공터 직전)

▲  후원 뒷길의 전환점(너른 공터) - 여기서부터 좁은 산길로 변한다.

포장길로 된 뒷길은 고개 정상부 너른 공터에서 끝이 난다. 여기서 길은 산길로 180도 돌변하
며, 차량은 더 이상 바퀴를 들일 수 없다.
너른 공터를 지나면 근래 지은 나무데크 계단길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길은 2개로 갈리
는데, 오른쪽은 후원 돌담을 따라 성균관대 내부로 이어지며, 왼쪽은 옥류정과 성대후문 마을
버스 종점으로 이어진다.

창덕궁 후원 뒷길(후원 돌담길)은 북촌 권역에서 성균관대, 대학로를 빠르게 이어주는 도심의
상큼한 뒷길로 아는 이가 거의 없어 사람들의 왕래가 적고 한적해서 좋다. 하여 내가 좋아하
는 길의 하나이기도 한데 다만 가로등 시설이 부족하여 햇님이 퇴근한 이후에는 꽤 어둑어둑
하니 통행에 조금 주의가 필요하다.


▲  나무데크 계단길 - 너른 공터를 지나 저 계단을 오르면 된다.
(어차피 오르는 길도 하나 밖에 없음)

▲  옥류정으로 향하는 짧은 산길과 계곡

옥류정으로 인도하는 짧은 산길은 경사가 느긋하다. 그 옆에는 갈증에 시달리고 있는 조그만
계곡이 있는데, 그는 북악산(백악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로 적지 않게 인공이 가해진 점이 다
소 옥의 티이다.


▲  옥류정 산길과 계곡

▲  현대적 정자 스타일로 지어진 옥류정(玉流亭)

맑은 물이 흐른다는 뜻의 옥류정, 그 어여쁜 이름 마냥 후원 뒷쪽에 숨겨진 늙은 경승지로 착
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1956년에 지어진 8각형 모습의 현대식 정자(亭子)이다. 그래도 후원 뒤
쪽에 자리한 위치상 내가 알지 못하는 오래된 사연을 머금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그런 것은 없
었다. 위치와 정자의 이름이 나그네의 마음을 잠시 설레게 만든 것이다.

이곳은 북악산(백악산) 와룡고개(와룡산) 밑으로 바로 동쪽 언덕에 성대후문 마을버스 종점이
있으며, 북쪽 높은 곳에는 와룡공원길이 흘러간다. 북악산에서 발원한 계곡은 옥류정에서 잠
시 묻혔다가 남쪽 연못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데, 옥류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은 북악
산의 맑은 계곡이 옆구리에 흘러서 붙여진 이름 같기도 하고, 계곡이 후원 옥류천(玉流川)과
도 살짝 이어져있어 그렇게 붙여진 것 같기도 하다. 정자 정면에는 푸른 색깔의 옥류정 현판
이 걸려있는데, 글씨에 생명을 단단히 불어넣은 듯, 아주 명필급이다.

옥류정은 숲에 둘러싸인 구석이라 늘 그늘이 머물고 있으며, 주변 경치는 좋지만 와룡고개가
바로 뒷쪽이라 차량들의 굉음이 수시로 두 귀를 때린다. 그래도 숲바람과 산바람이 교차하는
곳이라 한여름에는 더위를 잊기에 좋다. (정자 동쪽에 성대후문 종점으로 가는 길이 있음)


▲  계곡을 막아서 만든 옥류정 연못

옥류정 앞에는 북악산 물을 머금은 조그만 연못이 닦여져 있다. 2015년에 조성된 것으로 옥류
정에서 잠시 묻힌 계곡은 여기서 다시 속살을 드러내며 졸졸졸~♪ 밑으로 흘러가는데 연못 주
변에는 나무에게 버림 받은 나뭇잎들이 낙엽이란 우울한 존재가 되어 귀를 접고 쓸쓸히 누워
들 있다. 연못은 바로 그들의 인생을 처리해주는 블랙홀인 모양이다.


▲  옥류정에서 창덕궁 후원 뒷길로 내려가는 길
이렇게 보니 정말 첩첩한 산주름 속에 깊숙하게 묻힌 기분이다. 여기가 과연
서울 도심 한복판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  다시 창덕궁 후원 뒷길로 (직진하면 돌담길, 중간에 왼쪽으로 가면
성대후문 마을버스 종점, 오른쪽은 중앙중고와 북촌 방향)

▲  창덕궁 후원 돌담길 (돌담과 만나기 10m 전)

창덕궁 후원 뒷길은 중앙중고 후문(고려사이버대학교)에서 후원 뒷쪽 돌담길을 따라 성균관대
로 이어지는 1리 남짓의 짧은 고갯길이다. 이곳은 감사원에서 성북동(城北洞)을 이어주는 와
룡고개(와룡공원) 밑부분인데, 봄과 늦가을 풍경이 아주 일품으로 달달하게 그려진 수채화처
럼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그도 그럴 것이 돌담 너머로 후원의 청정한 숲이 펼쳐져 있고 돌
담길 주변 역시 나무들이 가득하니 그 아름다움의 농도는 더욱 짙어질 수 밖에 없다.


▲  후원 뒷길 고개
이곳은 창덕궁 후원의 가장 최북단이자 제일 높은 곳으로 여기서는
돌담을 손으로 더듬으며 갈 수 있다.

▲  후원 뒷길 고개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창덕궁의 뒷통수인 후원 뒷길 고개는 돌담 바로 옆구리라 돌담을 만지면서 갈 수 있다. 그 고
개를 넘으면 급하게 펼쳐진 울퉁불퉁한 산길이 나오고, 돌담 너머로 도심의 허파인 창덕궁 후
원이 속살을 비춘다. 숲 너머 동쪽에는 바로 성균관대 건물이 보이는데, 그 산길을 내려가면
돌담과 조금씩 멀어지면서 성균관대 서쪽 부분인 법학관과 주차장, 대운동장에 이른다.
서울에 있는 궁궐 돌담길 중 가장 호젓하고 담백한 길을 꼽으라면 나는 이곳을 추천하고 싶다
. 그만큼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길이다.


▲  성균관대로 내려가는 후원 뒷길
산길을 넘어서 들어간 대학교는 이곳이 처음이다. 이 고개를 넘으면 바로
성대 교정으로 따로 문이나 철조망은 없다. 그냥 들어가면 된다.

▲  가파른 길을 내려가면 평탄한 길이 부드럽게 펼쳐진다.
이곳은 성균관대에서 '사유(思惟)의 길'로 삼고 있다.

▲  창덕궁 후원 뒷길의 동쪽 '사유의 길'

후원 뒷길이 숲이 삼삼하다보니 성균관대에서 뒷길의 교내 구간을 '사유의 길'로 삼았다. 번
잡함이 크게 덜한 후원 숲길에서 책도 보고 명상도 즐기며 속세(俗世)의 온갖 유혹에 취약한
자신의 머리와 정신을 가다듬으라는 뜻으로 보면 될 것이다.
사유의 길이란 이름이 어울릴 정도로 숲도 짙고 산바람도 그윽하여 옛날 선비들 같았으면 공
부를 한다며 정자 하나를 짓고도 남았을 것이다.


▲  성대로 넘어온 후원 돌담 (돌담 안쪽은 창덕궁 후원)

▲  잊혀진 제국의 궁궐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후원 돌담

▲  후원 뒷길을 마무리 짓다.

창덕궁의 보이지 않는 뒤쪽을 가리고 있는 후원 돌담은 새로 손질한 부분이 여기저기 있어 옛
날 것과 어색한 조화를 이루는 부분이 적지 않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후원 북부는 후원 특별 관람 때나 들어갈 수 있는 아주 비싼 곳으로 대운
동장 주차장에서 후원의 북쪽을 이루고 있는 태극정(太極亭) 구역이 시야에 들어오고, 후원의
북문인 북장문도 가까이에 바라보인다.

대운동장 서쪽 주차장에 이르면 지금까지 사각사각 밟고 지나간 흙길과 바위길이 밋밋한 포장
길로 바뀌며, 후원 돌담과도 바다 너머의 섬을 보듯 멀어져 간다. 게다가 주차장부터 학교 돌
담과 철책이 생기면서 둘 사이에 깊숙한 틈이 생기는데, 이는 성균관대가 교내를 넓히면서 후
원 돌담보다 높게 또는 비슷한 높이로 터를 다지는 바람에 그리 된 것이다.
비슷한 높이인 경우에는 후원 돌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돌담의 북쪽 언덕을 끊어 멀리서 보
게끔 했으며, 둘 사이에 생긴 틈은 마치 휴전선이나 성곽(城郭) 주위에 두룬 해자를 보는 듯
하다.


▲  후원의 북문인 북장문(北墻門)

북장문은 후원 북쪽에서 유일하게 속세와 이어지는 문으로 보통 궁궐의 문은 암문(暗門)이라
할지라도 팔작지붕을 얹혀 문의 형식을 갖추는데 반해 이곳은 여닫는 문짝을 만든 것이 고작
이다.

북장문은 갑신정변(甲申政變)의 막바지 현장으로 정변 3일 째(양력 1884년 12월 6일)에 창덕
궁에서 고종(高宗)을 호위하며 머물던 개화당(開化黨) 패거리와 왜군은 명성황후(明成皇后)가
급히 소환한 청군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후원을 거쳐 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왜국공사는 꼬랑지를 내리며 군사를 이끌고 급히 후원 뒷길로 도망쳤고, 김옥균(金玉均)과 박
영효(朴泳孝), 서재필(徐載弼)도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들을 따라갔다. 단 홍영식(洪英植)과
박영교, 그들을 따르는 군인 7명은 고종을 호위하며 북묘(北廟)로 들어갔으나 결국 청군에게
살해되고 만다.

* 창덕궁 후원 뒷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명륜동/와룡동



 

♠  현대사의 살아있는 현장, 명륜동 장면(張勉) 가옥
- 국가 등록문화재 357호

▲  장면 가옥 외경

명륜동(明倫洞)에 자리한 장면 가옥(장면총리가옥)은 서울에 서려있는 현대사의 주요 현장의
하나이다. 바로 제1,2공화국 시절 정치/외교가로 활동했던 장면(장면 총리, 장면 박사라고 많
이 불림)이 살던 집으로 속세의 때가 조금씩 묻어가던 고등학교 시절 4.19와 한 덩어리로 국
사 관련 시험에 단골로 등장했던 인물인데, 이름도 참 외우기 쉽다. 그래도 익히기가 어렵다
면 대중 음식의 하나인 짜장면이나 영화의 한 장면이란 식으로 외우면 연상도 쉽게 된다.

이 집은 장면이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장 시절에 지은 것으로 건축가 김정희가 한옥과 양옥의
장점, 그리고 약간의 왜식(倭式)까지 절충하여 지은 개량 한옥의 일종이다. 1930~40년대 서울
중산층의 주거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서울 종로구에서 인수하여 가옥 손질을 거쳐 2012
년 12월 실외가 우선 개방되었다.
이후 건물 내부를 손질하고 장면의 유물 중 괜찮은 것을 선별하여 2013년 4월 19일 사랑채와
안채 내부가 장면기념관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날짜를 4월 19일로 잡은 것은 이승
만의 자유당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4.19혁명과 장면의 정치 개혁 의지를 기리
고자 함이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 관람료 없음)


▲  활짝 열린 장면 가옥 대문


▲  경호원동과 나무 1그루


▲  장면의 흉상(胸像)
▼  안채 동쪽에 자리한 장식용 장독대

돌로 1m 높이의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터를 다져 들어앉은 장면 가옥은 안채(92.56㎡)를 중심
으로 사랑채(56.2㎡)와 경호원실(9.92㎡), 수행원실(6.61㎡) 등 4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고위관료까지 지낸 사람이라 집이 좀 클 줄 알았더니만 두 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조촐해 졸
부들의 고래등 저택에 비해 거부감도 별로 없고 정감도 많이 간다. <같은 시대를 누볐던 자유
당의 우두머리 이기붕(李起鵬)의 집은 저택이었음>
가옥을 둘러싼 담장은 남쪽과 서쪽은 하얀 피부, 동쪽은 붉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담장
의 높이는 2m 정도이다. 가옥 서쪽에는 키다리 빌라가 자리해 가옥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동
쪽에는 2차선 길인 혜화로가 나있다.

가옥과 바깥 세상을 이어주는 대문은 주택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문으로 개방시간에 한해
문짝 하나를 열어둔다. 문의 높이는 담장만큼 낮으며, 문 우측 기둥에는 주소가 쓰인 패가 있
고, 좌측 기둥에는 집주인의 이름이 적힌 명패가 이 집의 주인을 알려준다. 명패에는 5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옛 주인 장면의 이름 2자가 한자로 쓰여 있어 문을 두드리면 (초인종은 없
음) 그 장면이 스르륵 달려 나와 우리를 맞이해줄 것 같은 기분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담장이 집 안채를 가리며 길을 막아 서는데, 여기서 가족과 친척, 친분
이 두터운 사람들은 왼쪽으로, 언론기자와 기타 손님은 오른쪽으로 갔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사랑채에 딸린 대기실이 나오며, 대기실에서 기다렸다가 옆칸에 있는 응접실에서 장면을 접견
했다.
대문에서 왼쪽으로 가면 조그만 경호원동과 앞마당으로 이어진다. 경호원동은 장면의 경호원
들이 대기하던 공간으로 겉으로 보면 1층이지만 안에 3㎡ 정도의 좁은 지하가 있다. 현재는
이곳을 지키는 관리인이 머물고 있으며, 건물 우측에는 2012년에 조성된 장면의 흉상이 서 있
고, 좌측에는 장면이 심었다고 전하는 높이 7~8m의 작은 나무 1그루가 주인이 가고 없는 집뜨
락에 조촐히 그늘을 드리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장면의 생애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운석 장면(雲石 張勉. 1899~1966)의 간략한 생애
장면은 옥산(玉山) 장씨로 1899년 8월 28일, 서울 종로구에서 장기빈(張箕彬)의 맏아들로 태
어났다. 장기빈은 왜정 때 부산세관장을 지낸 관리로 집안 살림은 넉넉한 편이었다.
8살에 인천성당이 운영하는 박문학교(博文學校)에 들어가 한학(漢學)을 배웠고, 1917년에 수
원고등농림학교(서울대 농생대의 전신)를 졸업, 1919년 서울기독교청년회관 영어학과를 수석
으로 마쳤다.
이후 한국천주교청년회 대표자격으로 미국 맨해튼 카톨릭대 문과에 들어가 1925년에 졸업했으
며, 로마교황청에서 열린 '한국79위 순교복자 시복식(諡福式)'에 참석했다. 그리고 귀국하여
천주교 평양교구에서 근무하다가 동성상업학교에 들어가 교편을 잡았고, 1936년 그곳의 교장
이 되었다. 또한 계성학교의 교장까지 겸임해 1945년까지 교육계에서 일했고, 천주교청년회연
합회 회장이 되어 '구도자의 길','조선천주공교회약사' 등을 출간했다.

해방이 되자 1946년 정계에 진출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과 과도입법의원의 의원을 역임했으
며, 우익의 일원이 되어 좌익세력과 싸웠다. 또한 미소공동위원회에 대비한 정책 수립 등의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48년 서울 종로을에서 제헌의원에 당선되었고, 그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
에 조병옥(趙炳玉)과 함께 한국수석대표로 참석하여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국제적 승인을 받았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특사로 로마교황청을 방문했고 귀국 길에 미국 맨
해튼대학에 들려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 초대 주미대사가 되어 2년 동안 외교관 생활을 했으며, 6.25전쟁이 터지자 미국을 설
득해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냈다. 1951년 국무총리로 임명되면서 귀국했으나 바로 이듬해 물
러났으며, 야당의 일원이 되어 이승만/이기붕의 자유당(自由黨) 독재정권과 싸우기 시작했다.
1955년 신익희(申翼熙), 조병옥과 민주당을 결성해 최고위원이 되었고, 1956년 대선 때 신익
희가 대통령 후보에, 장면이 부통령(副統領) 후보로 나가 정권교체를 노렸다. 이때 자유당은
8년 이상 대통령을 해먹고 있는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고, 야망이 쓸데없이 높던 이
기붕이 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백성들의 지지에 힘입어 열심히 유세를 벌이던 신익희는 호남으로 내려가다가 열차 안에서 돌
연 급사를 하면서 정권교체의 꿈은 물 건너갔다. 다행히 신익희 사망에 따른 동정표로 장면이
이기붕을 여유롭게 따돌리고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56년 9월 민주당전당대회에서 자유당 정치깡패인 최훈과 김상붕에게 저격을 당했으나 다행
히 경상으로 그쳤으며, 1957년에 미국 시튼홀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59년 민주
당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60년 대선 때 조병옥이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유세 도중 위암으로 사망했으며, 장면은 또
다시 부통령 후보에 나섰다. 그리고 그 유명한 3.15부정선거로 이기붕이 억지로 당선되자 뿔
이 단단히 난 민중들이 봉기하여 마산(창원)과 대구에서 독재정권/부정선거 반대 시위가 일어
났고, 서울에서 4.19가 터지면서 이승만과 자유당정권은 길거리에 나앉게 된다.

4.19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장면의 민주당은 의원내각제(議院內閣制)를 실시했고, 장면은 제5
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됨과 동시에 제2공화국 국무총리가 되어 국정을 이끌었다. 하지만 장면
정권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백성들이 피를 흘리며 내려준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욕
심과 이해관계에 얽혀 혼란에 빠졌다. 그 와중에 민주당의 구파가 떨어져나가 신민당을 창당
했으며, 그렇게 1년을 쓸데없이 소비하다가 1961년 5.16으로 장면 내각은 싹 털리고 만다.

5.16이후 박정희 군사정권은 장면을 연금시켰고, 이주당(二主黨)사건인 반혁명음모사건에 연
루시켜 징역 10년을 선고했으나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이후 5년간 집에 틀어박혀 신앙생활
에 몰두하다가 1966년 6월 4일 간염으로 67년의 인생을 마감했다. 그의 장례는 국민장(國民葬
)으로 치뤄졌으며, 경기도 포천 카톨릭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면은 미국 대사로 2년 가량 외국에 나가있던 시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이 집에서 살았다. 그
러니 거의 27년 동안 살았던 셈이다. 집 구석구석 그의 손때가 닿지 않은 곳이 없으며, 그가
심은 나무가 어엿하게 성장해 주인의 빈자리를 지킨다. 이렇게 보면 장면이 꽤 옛날 인물처럼
비춰지기도 하겠지만 그는 나와 아주 가까운 시대의 인물이다. 그가 가고 10여 년 뒤에 내가
이 세상에 나왔고, 내 부모 세대들은 장면의 모습과 이름 2자를 모두 기억하기 때문이다.


▲  앞마당에 있는 작두펌프(우물펌프)

그리 넓지 않은 앞마당에는 소나무 1그루와 작두펌프가 자리하고 있다. 작두펌프는 우물펌프,
옛날펌프, 무쇠펌프, 작두샘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는데, 1980년대까지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기구였다.
이 기구는 장면과 그의 가솔(家率)들, 경호원들이 쓰던 것으로 지하에 관정(管井)을 묻고 지
하수를 끌어올리는 공기압의 원리를 이용한 수동식 펌프이다. 패킹이 낡거나 펌프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공기의 압이 빠져 지하수를 끌어올릴 수 없게 된다. 이때 정신줄을 놓은 펌
프를 깨우고자 붓는 한 바가지의 물을 '마중물'이라고 한다.


▲  장면 가옥 안채 (장면기념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안채는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장면 가족의 생활공간이다. 장면기념관의
중심으로 거실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 안방, 우측에 건너방이 있고, 안방 북쪽에는 부
엌, 건너방 북쪽에는 욕실이 있다. 그리고 대청마루 북쪽과 남쪽에는 미닫이문을 냈다.

대청마루 남쪽 미닫이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되는데, 실내화가 준비되어 있어 그걸 신고
움직이면 된다. 대청마루와 안방, 건너방에는 장면의 체취가 서린 온갖 문서와 사진, 유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문서 같은 경우 상당수가 복제품이라 아쉬움을 준다. 장면 외에도 그의 부
인 김옥윤이 쓰던 유품도 같이 전시되어 있어 당시 정치인 가족의 생활상을 아련히 알려준다.


▲  장면 가옥 안채 대청마루 (오른쪽이 사랑방, 북쪽이 부엌)

▲  장면의 유품이 깃든 안채 사랑방

▲  장면의 유품이 깃든 안채 건너방

▲  1948년 9월 6일에 발급된 대한민국 외교관 1호 여권 (복제품)

이 여권은 1948년에 '유엔 파견 대한민국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부여 받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외교관 여권이다. (복제품이란 것은 함정)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외교관이기도 하며,
미국과 프랑스 등의 입국사증이 찍혀 있다.


▲  유엔총회 연설문(복제품)과 바티칸 교황청 훈장(오른쪽)

유엔총회 연설문은 1949년 12월 7일, 유엔 정치위원회에서 대한민국 독립 승인을 요구하는 영
어 연설문의 한글 번역본이다. (장면이 직접 썼음) 연설 직후 찬성 48표, 반대 6표, 기권 1표
로 한국 독립 승인이 통과되었다.


▲  영어로 쓰인 유엔총회 대한민국 승인서 (복제품)
유엔에서 찬성 48표를 얻어 합법 정부로 승인을 받은 그 순간을 기록한 문서로
미국 국무부 고문 달레스의 친필 사인이 들어있다.

▲  바티칸 교황청에서 준 훈장의 위엄 (진품임)
1951년 5월 22일 국무총리 재직 중에 교황청에서 받은 훈장이다.

▲  재외국인등록증 (복제품)
장면의 50대 모습 사진이 담긴 문서로 주미국대사 재직시(1949년 10월 16일)에
발급 받은 것이다. 지금과 달리 한자가 꽤 많으며, 양력 대신 단기(檀紀)를
쓰고 있는 점도 무척 이채롭다.

▲  주미대사 신임장 (복제품)
1949년 3월 25일 장면 초대 대한민국 주미특명 전권대사가 당시 미국 대통령인
트루먼에게 제정한 신임장(信任狀)이다. 이 문서에도 단기가 쓰여 있다.

▲  장면이 사용했던 영문 타자기

▲  장면이 번역했던 천주교 서적들

2년 동안 주미대사를 지냈을 때 쓰던 타자기이
다. 지금이야 한가롭게 있지만 그 시절에는 정
말 불이 날 정도로 바쁜 시간을 지냈다.

왼쪽은 제임스 기본스가 1876년에 저술한
'교부들의 신앙'으로 장면이 1944년에
번역판을 내놓았다.


▲  장면이 사용했던 기도서와 십자가 목걸이

1921년 성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한 후 얻은 것으로 장면은 이 책을 늘 손에서 놓지 않았다
고 전한다. 기도서 위에 십자가 목걸이 역시 그가 기도를 할 때 쓰던 것이다.


▲  장면이 썼던 실크모자 (오른쪽에 실크모자를 쓴 장면의 사진이 있음)

장면이 1949년 미국 트루먼 대통령 취임식 때 썼던 모자이다. 그저 말로만 듣고 바보상자에서
만 보던 그 실크모자를 여기서 처음 그 실물을 접하니 모자가 은근 멋있어 보인다.


▲  무늬만 남은 안채 부엌

안채 부엌은 전통 부엌 양식에 서양식이 더해진 형태로 타일을 깐 아궁이와 부엌 벽, 그리고
그릇과 음식을 씻는 일종의 싱크대까지 갖추고 있다.
장면과 그의 가솔, 경호원들은 이곳에서 만들어진 밥과 온갖 음식의 힘으로 혼란했던 20세기
중반을 살아갔다. 허나 장면 가족이 집을 떠난 이후, 그 껍데기만 남아 모락모락 밥 연기와
국 연기를 뿜어내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장면이 부통령 당선 기념으로 받은 놋그릇(왼쪽)과
바깥 활동 때 늘 가지고 다니던 동그란 도시락통(오른쪽)

▲  장면이 손님 접대용으로 사용했던 그 비싼 신선로(神仙爐)
장면 일가의 넉넉했던 형편을 보여주는 산증인이다.

▲  장면, 김옥윤 부부의 약력과 기도문이 담긴 카드,
김옥윤이 사용했던 옥비녀와 옥반지

▲  김옥윤이 사용했던 안경과 반짇고리, 그리고 이쁜 꽃신
바느질을 하는 김옥윤 여사의 사진도 같이 있다. 조그만 꽃신에서는 그의
파릇파릇했던 젊은 시절의 향수가 불어오는 듯 하다.

▲  장면이 쓰던 돋보기와 명함, 그의 싸인, 손목시계, 만년필, 수표책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장면의 조촐한 쉼터, 안락의자와 거북선마크 베게

거북선이 그려진 노란색 베게는 그가 애용했던 물건으로 안락의자와 함께 그의 편안한 휴식과
숙면을 인도해주었다. 국정으로 늘 잠이 부족했던 그에게 저 의자와 베게는 소중한 쉼터였으
리라.


▲  3대가 다 모인 장면 가족 사진

▲  장면 가옥 사랑채

앞마당 동쪽에 자리한 사랑채는 사랑방과 응접실, 대기실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는 장면이
손님을 접대하거나, 민주당과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회의나 다과를 하거나, 기자회견을 하던
그의 공무(公務) 공간으로 현재는 장면기념관의 일부로 그의 유품과 여러 사진이 전시되어 있
다. (내부 관람 가능)


▲  1956년 부통령 선거 때 쓰인 장면 포스터와 약력

그 당시 민주당 구호는 이랬다. '배고파서 못살겠다. 죽기 전에 갈아보자', 그에 대응하는 자
유당 떨거지들의 구호는 '갈아봤자 별 수 없다. 사탕발림에 속지 말자'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가 과로로 갑자기 죽는 바람에 정권 교체는 이루지 못했지만, 장면이
이기붕을 여유있게 누르고 부통령에 당선되면서 그런데로 체면은 세웠다.


▲  장면이 4대 부통령 시절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과 그에 대한
이승만의 답신(복제품)

▲  1956년 장면을 저격했던 최훈과 김상붕이 장면에게 보낸
참회의 편지(복제품)

장면은 1956년 자유당에서 사주한 최훈과 김상붕의 총격으로 왼쪽 손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
들은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국무총리가 된 장면은 그들의 감형을 주선하여 사형은 면하게 했는
데, 최훈은 1964년 7월 27일 장면에게 1통의 봉함 엽서를 보내 자신의 심경을 드러냈다.

'인간에게 가장 귀하다는 생명마저 빼앗겼던 저희들은 4.19가 일어난 그해 10월 관대하신 은
총으로 생명이 부활되었고, 그해 12월 친히 오셔서 주신 따뜻한 털내의로 몸을 녹이며 살아온
불초 소인은 하루라도 그 은총을 잊을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 조차 효도한 기억이 없는 제가
왜 조석으로 박사님의 온정을 못잊어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박사님께서 원수를 사랑하
라는 예수의 사상을 친히 시범하신 사도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탓입니다'


장면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저격범까지 관용의 정신을 베풀어 살려주는 등, 그의 넉넉한 마음
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  왼쪽은 1960년 8월 27일 민의원에서 열린 제2공화국 국무총리 취임사에서
장면이 발표한 6개항의 시정 방침을 밝힌 시정 연설문(복제품)
오른쪽은 5.16쿠데타 이후 나온 제1차 경제계발 5개년 계획서(복제품)

▲  손님을 맞이했던 사랑채 응접실 (왼쪽 에어컨은 2012년 이후에 설치됨)

▲  장면이 주로 머물렀던 사랑채 사랑방 (이불장, 가구 등이 있음)

▲  1999년 8월 13일, 장면에게 추서된 대한민국 건국훈장(복제품)

▲  자신의 일대기를 직접 저술한 친필 연보(복제품)
어린 시절부터 1965년까지 자신의 일생을 친필로 정리한 일기이다.
자신의 가족과 국내에서의 행적은 물론 자신이 직접 겪은
국제 정세도 소상히 기재해 놓았다.

▲  한자로 쓰인 자신의 좌우명(왼쪽, 복제품) 그리고 장면 사망 8달 뒤
(1967년 2월)에 발간된 그의 기고문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  문과 복도로 이어진 사랑채 내부


* 장면 가옥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1가 36-1 (혜화로5길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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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무등산옛길3구간, 충효동, 광주호 겨울 나들이 (풍암정, 원효계곡, 충효동요지, 충효동 왕버들군, 광주호호수생태원)

광주 무등산 겨울 나들이 (풍암정, 충효동 지역, 광주호 주변)


' 광주 무등산 겨울 나들이 '

  무등산 옛길 3구간  
충효동 2호 가마터 굴뚝

▲ 무등산 옛길 3구간
◀ 충효동 2호 가마터 굴뚝
 ▶ 풍암정

풍암정

 



 

다사다난으로 얼룩졌던 묵은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해가 또다시 밝았다. 새해만 되면 심리
상 긍정적인 기대감이 커지기 마련인데, 올해는 제발 만사가 형통(亨通)하기를 염원하며
시간을 가리지 않고 늘 불끈 솟는 나의 역마살 기운을 풀고자 예전부터 목말라했던 무등
산의 뒷통수(광주 금곡동, 충효동 지역)를 새해 첫 답사지로 정했다.

그나마 덜 추운 날을 가려 길을 나섰지만 겨울 제국(帝國)의 한복판(1월)이라 추운 것은
여전했다. 아침 일찍 매서운 새벽 기운을 가르며 영등포역으로 넘어가 광주로 가는 누리
로<무궁화호 열차와 동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심전심이라고 견고한 무쇠덩어리 열차
도 나처럼 추운 날씨가 싫었는지 따뜻한 남쪽을 향해 불이 나게 바퀴를 굴려 4시간 만에
광주(光州) 도심에 자리한 광주역에 도착했다.

예전과 다르게 많이 초췌해진 광주역을 나와 역 동남쪽 정류장에서 무등산(無等山)의 품
으로 깊숙히 들어가는 광주시내버스 1187번(덕흥동↔원효사)을 탔다. 버스 번호인 '1187
'은 광주의 진산(鎭山)인 무등산의 키 높이로 금남로와 옛 전남도청(국립아시아문화전당
), 산수5거리를 두루 지나 광주에서 제일 험한 고개로 꼽히는 잣고개를 넘는다. 그 고개
를 힘겹게 넘으면 대도시 광주의 모습 대신 무등산에 묻힌 산골 풍경이 싱그럽게 펼쳐져
광주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2차선 도로(무등로)를 따라 옛 무진주(武珍州)의 성곽 유적과 은빛물
결이 출렁이는 제4수원지, 충민사(忠愍祠), 충장사(忠壯祠) 등을 차례로 지나 원효사(元
曉寺) 직전인 풍암정 정류장에서 두 발을 내렸다.

풍암정 정류장은 뭔가 있을 것 같은 이미지와 달리 정류장 표시판이 전부인 완전한 산골
의 한복판이다. 이거 어디로 가야되나 두리번거리니 길 건너에 무등산옛길 3구간을 알리
는 이정표가 반갑게 손짓을 보낸다.



 

♠  무등산 옛길 3구간과 풍암정

▲  사촌 김윤제 재실(齋室) 입구 비석

무등산 옛길은 광주광역시가 무등산에 닦은 도보길로 무등산 북쪽 자락의 여러 길을 잇고 엮
어서 '무등산 옛길'이란 이름으로 천하에 내놓았다. 모두 3코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나는 3구
간(장원3거리~환벽당, 11.3km)의 신세를 잠깐 졌다. 3구간은 중간에 임진왜란 시절 의병을 일
으킨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의 소소한 흔적이 깃든 무등산 의병길과도 만난다.

무등산 옛길로 들어서니 사촌 김윤제의 재실을 알리는 빛바랜 비석이 마중을 한다. 비석을 받
쳐든 네모난 기단석(基壇石)에는 푸른 이끼로 가득해 이곳이 청정한 곳임을 알려주는데, 인적
도 없는 옛길을 더듬어 내려가면 숲속에 묻힌 김윤제의 재실, 귀후재(歸厚齋)를 만나게 된다.
그저 나무 밖에는 없을 것 같은 이런 외딴 곳에 기와집이 묻혀 있으니 마치 전설에 나오는 귀
신의 집이나 폐가를 만난 기분이다.
허나 그 집은 귀신 집도, 버려진 집도 아니며 김윤제의 후손(광산김씨)이 머무는 엄연한 살아
있는 집이다.


▲  담장 너머로 바라본 귀후재

귀후재의 주인인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1501~1572)는 그 유명한 송강 정철(鄭澈)의 스승
으로 충효동 지역에 살면서 이른바 가사문학(歌詞文學)을 크게 일군 사람이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광주호 남쪽에 사촌의 별장이던 환벽당(環碧堂)이 있는데, 그는 거기서 어린 정철
을 발견하여 제자로 삼은 일화는 꽤 유명하다.

매년 음력 3월 3일, 후손들이 귀후재에서 제사를 지내며 사람이 머무는 공간이라 내부 관람은
어렵다. 하지만 고색이 깃든 돌담 너머로 내부가 왠만큼 보이며 귀후재 본채는 근래 손질되어
고색의 기운은 싹 빠져버렸으나 돌담과 대문은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  고색이 깃든 귀후재 대문
지붕은 새로 갈았지만 그 외에는 낡은 모습 그대로이다.

▲  무등산 옛길 3구간 (귀후재 주변)
누렇게 뜬 낙엽들이 가득 깔려 산길의 촉감을 부드럽게 해준다.

▲  무등산에서 가장 예민한 곳, 무등산 지진관측소

귀후재를 지나 편백림으로 들어서면 원효계곡 상류에서 내려온 무등산 의병길(제철유적지~치
마바위~풍암제, 3.5km)과 만난다. 여기서부터는 느긋한 숲길의 연속으로 편백림을 지나면 기
상청에서 설치한 무등산 지진관측소가 왼쪽(북쪽)에 나타난다.

무등산 지진관측소는 이 땅에서 지진 관측이 가장 잘되는 곳이다. 굴을 파고 '초광대역지진계
' 등 여러 관측 시설을 닦았는데, 이곳이 얼마나 예민한 곳인지 지구 반대편의 지진도 잡아내
며, 사람의 발소리까지 실시간 관측되어 기상청에 고스란히 제공된다. (관측소 내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음)


▲  겨울에 잠긴 무등산 옛길 3구간(무등산 의병길) - 풍암정3거리 부근

▲  풍암정으로 인도하는 대나무 길

풍암정3거리(풍암정 입구)에서 잠시 곧게 뻗은 길을 버리고 풍암정으로 인도하는 오른쪽(남쪽
) 길로 들어섰다. 그 길의 끝에는 원효계곡의 백미(白眉)로 추앙을 받는 풍암정이 있는데, 무
등산 옛길 3구간이나 무등산 의병길에 발을 들였다면 풍암정은 꼭 살펴봐야 나중에 명부(저승
)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  풍암정 옆구리로 흘러가는 청정한 원효계곡

▲  풍암정 앞 징검다리

속세에서 풍암정으로 가려면 반드시 원효계곡을 가르는 징검다리를 건너야 된다. 큼지막한 돌
이 잘 놓여져 있어 통행에 그리 어려움은 없으며, 수심도 얕아 설령 발을 헛디뎠다고 해도 크
게 걱정할 것은 없다.
풍암정 입구에서 무등산 옛길 3구간은 풍암정을 거쳐 풍암제 남쪽 산자락으로 이어지며, 무등
산 의병길은 좋은 길을 계속 고집하며 풍암제까지 곧게 펼쳐진다.


▲  계곡 징검다리에서 바라본 풍암정

▲  풍암정(楓巖亭) - 광주 지방문화재자료 15호

풍암정은 원효계곡(元曉溪谷) 하류에서 가장 경치 좋은 곳에 자리해 있다. 좌/우 2칸, 총 4칸
의 조촐한 팔작지붕 정자로 돌로 두텁게 기단(基壇)을 쌓고 덤벙주초를 놓은 다음, 원형 기둥
을 세우고 정자 중앙에는 팔각 기둥을 세웠다.
정자 한복판에는 1명 정도 누울 수 있는 작은 방을 두고 북쪽에 문을 내었으며, 그 주변은 모
두 판자마루로 둘러 여름 별장으로는 아주 좋게 다져 놓았다. 정자의 천장은 연등 천장이며,
가운데는 우물천장으로 닦았다.

마치 신선(神仙) 세계의 축소판처럼 탐이 나는 풍경의 풍암정은 조선 중기에 활약했던 김덕보
(金德普, 1571~1627)가 지었다. 그의 호는 풍암(楓巖), 자는 자룡(子龍)으로 그에게는 애국심
이 매우 높은 형이 둘이나 있었으니 큰 형은 김덕홍(金德弘), 작은 형은 그 유명한 광주 출신
의병장인 김덕령이다.

김덕홍은 1592년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高敬命) 휘하에서 활동했다. 허나 금산(錦山
) 전투에서 고경명의 어리석음으로 크게 패하면서 제대로 몸도 풀지 못하고 전사를 하고 만다.
그리고 2째 형인 김덕령은 직접 의병을 일으켜 여러 곳에서 왜군을 때려잡고 이몽학(李夢鶴)
의 난(1596년)까지 진압하는 등 공이 많았으나 선조(宣祖) 임금과 그 패거리들이 역적으로 몰
아세우면서 혹독한 고문 휴유증으로 29세의 한참 나이로 옥사(獄死)하고 만다.

큰 형은 전쟁에서 죽고 작은 형은 전공이 큼에도 권력층의 농간으로 맥없이 져버리니 김덕보
의 충격은 실로 상당했을 것이다. 그래서 썩어빠진 나라와 세상을 원망하며 은둔생활에 들어
갔다.

▲  옆에서 바라본 풍암정

▲  풍암정사(楓巖精舍) 현판

뒤늦게 형들의 공을 인정한 조정은 그를 달래며 달콤한 벼슬을 주려고 했으나 모두 쿨하게 거
절했다. ('장릉참봉'을 잠시 맡은 것이 전부임) 그리고 고향(충효동) 부근 원효계곡에 정자를
짓고 단풍과 바위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치란 뜻에서 풍암정이라 이름을 지었으며, 그 '풍암
'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정자 내부에는 1614년 정홍명(鄭弘溟)이 쓴 풍암기(楓巖記)와 임억령(林億齡), 안방준(安邦俊
) 등이 쓴 현판이 있으며, 고경명의 '차풍암정액(次楓巖亭額)'이란 시 현판이 있는데, 1614년
이전부터 정자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어 임진왜란 이전(1590년대)이나 1610년대 초반에 지어
진 것으로 여겨진다.


▲  풍암정 옆에 자리한 커다란 바위들
바위들이 푸른 이끼옷을 걸치며 풍암정의 경치를 한껏 수식해준다.

▲  풍암정의 빛바랜 일기장, 1614년에 정홍명이 쓴 풍암기

풍암정은 '풍암정사'란 별칭도 가지고 있는데, 김덕보와 친분이 있는 문인(이안눌, 안방준 등
)들이 놀러와 시문을 남겼으며 이후로도 많은 시인, 묵객들의 마루가 닳도록 찾아왔다. 현재
김덕보의 후손(광산김씨 문중)이 소유하고 있으며, 마루에는 앉거나 들어갈 수 있으나 방은
잠겨있어 들어갈 수 없다.

* 풍암정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718 (풍암제길 117)


▲  풍암정의 탄생 시기를 한층 올려주고 있는 고경명의
차풍암정액 현판 (오른쪽 현판)

▲  곧게 뻗은 그림 같은 길, 무등산 의병길 (풍암정3거리 동쪽)

한여름이나 늦봄에 왔더라면 정자 마루에 벌러덩 누워 낮잠을 청했을 것이다. 무등산 산바람
과 원효계곡 물바람이 사이좋게 무더위를 단죄하여 낮잠 맛이 꿀맛일테니 말이다. 허나 겨울
제국의 한복판에 왔으니 마루에서 괜히 잠을 청했다가는 큰일나는 수가 있다.
그렇게 풍암정을 둘러보고 풍암정3거리로 나와 잠시 잊었던 무등산의병길을 마저 걸었다. 겨
울에 잠긴 숲길을 걷다보면 '풍암제'란 너른 호수가 은빛물결을 글썽이며 풍암정에게 빼앗겼
던 내 마음을 다시금 앗아가는데, 이 호수는 원효계곡의 물을 먹고 자라 아주 청정한 빛깔을
띄고 있다. 허나 아쉽게도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꽁꽁 묶여 있어 호수 접근은 통제되어 있다.


▲  원효계곡의 물을 먹고 자란 금지된 호수, 풍암제(楓巖堤)

▲  풍암제에서 충효동 도요지로 인도하는 길 (풍암제길)

풍암제를 지나면 무등산국립공원 경계선을 알리는 안내문이 나온다. 그 안내문의 서쪽(풍암정
방향)이 무등산국립공원 영역, 동쪽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의 공간이다.



 

♠  무등산의 흙으로 분청사기와 백자를 빚었던 옛 가마터 유적
광주 충효동 요지(忠孝洞 窯址) - 사적 141호

▲  광주역사민속박물관의 일원인 무등산 분청사기(粉靑沙器)전시실

풍암제에서 동쪽(충효동 방면)으로 10분 정도를 가면 무등산 분청사기전시실이 마중을 나온다
. 이곳은 충효동 가마터(4기)와 주변 가마터에서 발견된 분청사기와 백자를 전시하고 이들 유
적을 정리한 곳으로 가마터 자리 위에 터를 다져 1998년 12월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전시실
옆에는 충효동 2호 가마터가 보호각에 감싸여 보존되고 있는데 여기서 많은 분청사기와 백자
들이 무등산이 베푼 양질의 흙을 먹고 태어났다.

무등산 북쪽에 둥지를 튼 충효동 가마터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기록<광주의 자
기소(瓷器所) 1곳이 고을 동쪽 이점(梨岾)에 있음>과 출토 유물의 연도를 통해 늦어도 1430년
정도, 빠르면 고려 후기(1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충효동 2호 가마의 구조는 길이 20.6m, 폭 1.3m의 땅굴 모습으로 사람이 왕래하는 출입시설과
도자기를 집어넣는 번조실, 굴뚝시설를 갖추고 있으며, 진흙을 중심으로 돌을 섞어서 쌓은 형
태이다. 특히 아궁이(번조실)부터 굴뚝 부분까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어 가마의 변화 과정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어준다.

여기서는 분청사기와 백자가 생산되었는데<상감청자(象嵌靑瓷)도 일부 만들어짐> 처음에는 분
청사기가 중심을 이루었다. 분청사기는 작은 것이 주류를 이루던 백자와 달리 크고 작은 것이
모두 있고 종류도 접시와 종지, 잔, 병, 항아리, 벼루, 제기 등 다양하며, 국화와 나비, 모란
, 물고기, 게, 구름 등이 분청사기 피부에 새겨졌다.
이후 백자까지 손을 대었는데, 분청사기는 박지(剝地)와 조화(彫和) 등 장식과 제작이 간단하
고 질이 조잡한 귀얄문이 주류를 이루면서 점차 쇠퇴를 하게 되었고, 반면 백자는 질이 좋은
탓에 크게 흥하면서 생산량이 늘어났다. 하여 분청사기 가마에서 백자 전문 가마로 완전히 바
뀌게 된다. (분청사기는 대체로 16세기부터 생산이 중단됨)
여기서 생산된 도자기는 왕실과 귀족들에게 주로 납품되었으며, 제작지를 알리는 내용과 제작
자의 이름, 제작시기, 수량, 관용(官用) 임을 알리는 '공(公)' 등 명문이 새겨진 백자와 분청
사기가 많이 나왔다. <'어존'이라 쓰인 한글 명문도 발견됨>

그렇게나 잘나갔던 충효동 가마는 16세기 초 정도에 돌연 폐업을 하여 사라지게 된다.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으나 아마도 다른 가마와의 경쟁에서 밀리거나 흙이 고갈되어 사라진 것으로 보
인다.
이후 터만 아련히 남아오다가 왜정(倭政) 시절부터 광주가마, 무등산가마, 석곡면가마 등으로
불렸으며, 막연히 명품 자기를 생산했던 곳으로 전해져 왔다. 허나 딱히 조사는 이루어지지
못한 채, 방치되어 오다가 1961년에 처음 학계에 소개되었으며, 1963년에 이르러 국립중앙박
물관이 가마터의 퇴적층(堆積層) 일부를 들추면서 이곳의 성격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1991년 국립광주박물관이 2차례에 발굴을 벌여 4기의 가마가 확인되었고 높이 3m에 퇴적
층위가 조사되었으며 분청사기가 변화하는 과정과 백자가 발전하는 양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졌
다.
그 4기 중 제일 상태가 좋은 것이 바로 이곳 2호 가마로 그 터를 손질해 특별히 보호각을 씌
우고 속세에 개방했다. 그리고 분청사기 전시실 자리에서 발견된 가마터 등 나머지 3기는 보
존을 위해 땅에 고이 묻었다. (이들 가마터 4기는 '충효동 요지'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됨)

충효동에는 이들 외에도 여러 가마터가 있으며 발견되지 않은 것도 여럿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충효동에서 가까운 담양군 가사문학면(옛 남면) 지역(광주호 주변)에도 가마터가 여럿
전하고 있어서 이 일대가 거대한 분청사기, 백자 생산지였음을 알려준다.
허나 이들 가마들은 16세기 이후 거의 버려지면서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의 괴롭
힘 속에 모두 녹아버렸고 그나마 남은 흔적도 속세의 무관심과 도굴, 천박한 개발의 칼질 등
으로 대부분 목이 떨어졌다.


▲  온전하게 남은 분청사기의 고운 맵시
분청사기는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잠깐 유행했던 도기, 자기 양식이다.

▲  분청사기 접시와 깨진 대접들

▲  분청사기 벼루와 하얀 뚜껑

분청사기 전시실은 독립적인 박물관이 아닌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소속의 전시실이다. <광주역
사민속박물관 무등산 분관으로 보면 됨> 그러다보니 규모는 작은 편이며, 충효동에서 발견된
유물 상당수는 역사민속박물관이나 광주국립박물관에 가 있고 이곳과 주변에서 나온 도기, 자
기와 복제품 등 200여 점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  장대한 세월에 의해 헝클어져 겨우 조각만 남은 분청사기 파편

▲  담양군 경상리 저수지 상류에서 발견된 경상리 유적 토기들

▲  화암마을 백자가마터에서 수습된 백자 파편들

▲  분청사기 접시와 제기(祭器, 가운데), 그리고 백자 접시 파편

▲  백자 잔(위쪽)과 깨진 대접

▲  재현된 충효동 가마의 왕년의 모습 (오른쪽이 2호 가마터)

▲  충효동 2호 가마터를 품고 있는 누런 보호각

분청사기 전시실 옆구리에는 충효동 2호 가마터를 품은 가마터 보호각이 있다. 지금이야 누런
피부의 가마터만 남아 실감도 덜하고 여기서 더 이상 도자기를 빚을 일도 없지만 그 흔적만
보더라도 예사 가마터가 아님을 느끼게 한다. 그 잘나갔던 충효동 가마가 한낱 황량한 가마터
가 되버렸으니 세월이 참 무상할 따름이다.


▲  충효동 2호 가마터 굴뚝과 아궁이 흔적
굴뚝과 아궁이 위에는 흙을 두툼하게 씌워 땅굴 방식으로 그 속살을 가렸다.

▲  옆에서 바라본 충효동 2호 가마터

▲  충효동 2호 가마터 아궁이와 누런 퇴적층위

▲  무등산 분청사기 전시실에서 바라본 충효동, 금곡동 지역
오늘도 무등산의 뒷통수 지역은 평화롭기 그지 없다.
(이 지역은 원래 담양군 땅이었음)


* 충효동 요지, 무등산 분청사기전시실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157 (풍암제길 14,
  ☎ 062-613-5379)



 

♠  충효동 광주호 주변 명소들

▲  충효동 왕버들 군(群) - 천연기념물 539호

충효동 요지를 둘러보고 바로 북쪽에 있는 금곡마을로 이동했다. 여기서 환벽당과 취가정, 왕
버들이 있는 충효동까지 걸어가려고 했으나 거리도 2km에 이르고 뚜벅이 길이 닦여져 있지 않
은 2차선 길(송강로)을 따라가야 되므로 차량의 눈치와 위협을 적지 않게 받아야 된다. 이 길
말고도 금곡에서 평촌 방면 매봉로를 따라 취가정, 환벽당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는데, 차량의
왕래는 적지만 역시나 2km 정도를 걸어야 된다.

걷는 것이 싫다면 약간의 돈을 들여 문명의 이기(利己)인 시내버스를 타면 되지만 배차간격이
무려 50~60분에 이른다는 함정이 있다. 하여 스마트폰 버스어플을 검색해 15분 이내에 차가
오면 충효동으로 넘어가고, 그 이상을 넘거나 시내 방향 버스가 15분 이내에 오면 인연이 아
니라 여기고 쿨하게 광주 시내로 넘어가기로 했다.
다행히 6~7분 뒤에 충효동 방향 버스가 온다고 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는데 기다리는 시간
만큼 길고 지루한 것은 없다. 초고속으로 흘러만 가는 시간의 속도를 조금이나마 늦추고 싶다
면 무언가를 애타게 기다리면 된다. (퇴근시간을 기다리거나, 차를 기다리거나, 누군가를 기
다리거나 등) 그러면 그 시간만큼은 느리고 답답하게 느껴질 테니까. 허나 그 역시 부질없는
시간 장난에 불과하다.
과연 어플의 안내대로 광주시내버스 187번(충효187번, 장등동↔연천리)이 반갑게 모습을 드러
냈다. 그를 타니 불과 5분만에 충효동 동쪽 끝인 환벽당에 이르렀는데, 도보로 갔더라면 아무
리 빨라도 20분은 걸렸을 것이다.

조선 중기 가사문화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는 환벽당과 식영정(息影亭), 취가정(醉歌
亭)을 둘러보고 송강로 주변에 주렁주렁 자리한 여러 명소(왕버들군, 정려비각, 광주호 호수
생태원)를 살펴보았다. 환벽당과 식영정, 취가정은 내용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에서는 왕버들군과 정려비각, 광주호만 간단히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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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의 포로가 되버린 채, 개골(皆骨)
상태로 숨죽이고 있는 충효동 왕버들 -
왕버들의 아름다움을 보려면 늦봄이나 여름,
가을에 와야 된다. 겨울에는 죄다 처량한
개골 상태라 거의 거기서 거기 같다.

광주호 호수생태원 진입광장 맞은편에 장대한 세월을 머금은 왕버들 3형제가 있다. 이들은 충
효동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추정 나이는 약 430~450년에 이르는데, 가장 큰 것은 높이가 13m,
둘레 8.9m, 작은 것은 높이 8m, 둘레 7.2m로 키와 둘레의 차이가 약간 있을 뿐 덩치는 다 고
만고만하다.
이들 나무는 '김덕령나무'라 불리기도 하는데, 김덕령이 태어났을 때 집안에서 심었다고 전한
다. 하지만 단순히 그의 탄생 기념으로 심은 것은 아니며 마을을 지키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
)의 일환으로 심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소나무 1그루, 매화나무 1그루, 왕버들 5그루가 한 식
구를 이루고 있었지만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다들 사라지고 지금은 왕버들 3그루만이 자리
를 지킨다.

* 충효동 왕버들군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1021


▲  충효동 정려비각(旌閭碑閣) - 광주 지방기념물 4호

왕버들 곁에는 기와집으로 된 정려비각이 자리해 있다. 이곳 출신인 김덕령과 그의 부인(흥양
이씨), 그의 형제(김덕홍, 김덕보)의 충(忠), 열(列), 효(孝)를 골고루 기리고자 1789년에 정
조 임금이 세운 것으로 정려비(旌閭碑)의 높이는 220cm, 너비 68cm이다.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비석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비각(碑閣) 안에 고이 깃들여져
있는데, 비각 주변에 기와 돌담을 두르고 북쪽으로 문을 냈다.

김덕령과 김덕홍은 앞서 풍암정에서 언급한 그대로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싸웠고, 김덕보
는 먼저 떠난 형들을 대신해 어머니를 잘 봉양했으며, 흥양이씨 부인은 정유재란(1597)때 담
양 추월산(秋月山)으로 피신을 갔으나 왜군의 추격으로 생포될 위기에 처하자 자결을 하였다.
그래서 충, 효, 열 3가지가 성립되어 뒤늦게나마 정려비를 받은 것이다.

비석 앞면에는 '조선국증좌찬성 충장공 김덕령 증정경부인 흥양이씨 충효지리(朝鮮國贈左贊成
忠壯公 金德齡 贈貞敬夫人 興陽李氏 忠孝之里)'라 쓰여있고, 뒷면에는 김덕령 일가의 충, 효,
열을 찬양하며 충효리의 유래를 담고 있다. 바로 이 정려비에서 충효동의 이름이 비롯된 것이
다. 비각 안에는 정려비 외에 상량문(上樑文), 중수기(重修記) 등이 걸려 있다.

* 충효동 정려비각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440 (충효샘길 7)


▲  정려비각에 소중히 담긴 김덕령 일가 정려비

▲  정려비의 빛바랜 일기장, 상량문

▲  왕버들 옆에 자리한 상징정원

상징정원은 광주의 대표 명물인 무등산 수박을 상징화하여 닦은 조촐한 공간이다. 대나무를
엮어 만든 무등산 수박쉼터와 수박을 형상화한 무등산 수박 토피어리, 무등산 수박밭의 고랑
을 묘사한 무등산 수박밭, 그리고 아름다운 가을꽃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의 존재 이유는
무등산 수박 찬양이다. (그래서 이곳의 주제도 '꽃으로 수박파티'임)


▲  무덤처럼 생긴 충효동 조산(造山) - 광주호 호수생태원 내부
충효동 사람들은 이 조산을 '말무덤'이라 부른다. 비보풍수에 따라 마을의
허한 부분을 달래고자 인공적으로 쌓은 것으로 건너편 입석(조탑)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  푸른 물결 글썽이는 광주호와 그 옆구리에 닦여진 광주호 호수생태원

광주와 전남 담양(潭陽) 경계에 자리한 광주호는 영산강(榮山江)의 주요 지류인 고서천(古西
川)에 광주댐을 닦으면서 조성된 너른 호수이다. 1974년 공사를 시작해 1976년 완성을 보았는
데, 무등산과 하늘이 거울로 삼을 정도로 풍경이 아름다우며, 주변에 소쇄원, 환벽당, 식영정
, 충효동 왕버들 등 쟁쟁한 명소도 즐비해 광주 외곽의 주요 명소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광주호 남쪽 충효동에는 2006년 3월에 닦여진 호수생태원이 있다. 면적은 184,948㎡로 자연관
찰원<수생식물원, 야생초화원, 암석원, 채원(菜園), 생태연못>, 습지보전지, 버드나무 군락지
, 칠성바위, 자미탄, 전망대, 관찰대, 쉼터 등이 있으며 철새를 비롯한 여러 새들이 잠시 들
리거나 살아가는 곳으로 그들의 삶도 훔쳐볼 수 있다.
관람시간은 딱히 제한은 없으나 이곳 생태환경이 너무 좋다보니 야생동물의 출현이 잦다. 하
여 일몰 이후에는 가급적 들어가지 말 것을 권하고 있다. (호수생태원 보호 목적도 있음)


▲  호수생태원 탐방로
탐방로 외에는 자연의 공간이니 애써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  겨울 제국의 심술로 누렇게 뜬 호수생태원

▲  호수생태원에서 바라본 담양 쪽 (소쇄원, 식영정 방면)

호수생태원은 햇님 퇴근 시간이 임박해옴에 따라 간단히 1바퀴 둘러보고 마무리를 지었다. 광
주에 발을 내린 것이 정말 1시간 전 같은데 세상은 벌써 타들어가 검은 도화지로 배경이 바뀌
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겨울 제국의 기운도 높아지고 출사도 어려우니 더 이상 둘러보는
것은 의미가 없지. 그래도 그날 목적한 곳을 다 둘러보았으니 뿌듯하기 그지 없다.

마침 시내로 나가는 시내버스 시간이 임박하여 광주호 호수생태원 정류장으로 이동했다. 여기
서 버스 1대를 놓치면 50~60분을 꼼짝없이 강제 대기를 해야 된다. 어두워진 공간에서 추위를
견디며 1시간 가까운 시간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워 발을 재촉하여 정류장에 이르니
광주시내버스 187번이 딱 맞춰서 반갑게 다가선다. 하여 충효동과 무등산에 대한 미련을 흔쾌
히 버리고 차에 올라서니 버스는 외마디 부릉소리를 고적한 충효동에 남기며 광주 시내로 넘
어갔다.

이렇게 하여 새해 시작부터 벌인 광주 무등산 뒷통수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광주호호수 생태원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439-1 (충효샘길7 ☎ 062-613-7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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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을 거닐다. 평창동~백사실계곡~부암동 늦가을 산책 (평창동 소나무, 응선사, 창의문)

늦가을 평창동, 부암동 나들이



' 서울 도심 속의 두멧골, 평창동~부암동
늦가을 나들이 '
부암동에서 만난 늦가을 풍경
▲  부암동에서 만난 늦가을 풍경
 



 

늦가을이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어루만지던 11월 첫 무렵, 늦가을 풍경을 즐기고자 도심
속의 두메산골인 평창동(平倉洞)~부암동(付岩洞) 지역을 찾았다.

평창동은 성북동(城北洞), 한남동(漢南洞)과 더불어 서울의 1급 부자 동네로 이 땅의 0.1
%가 산다는 우스개 소리가 나올 정도로 그들의 고래등 저택과 고급빌라들이 즐비하다. 이
곳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사이에 깃든 산골로 경관이 아름답고 녹지 비율이
높으며,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다. 게다가 명당 중에서 아주 최고로 친다는 대부대귀
(大富大貴)의 명당인 교쇄명당의 자리라고 한다.
교쇄명당(交鎖明堂)이란 톱니바퀴가 엉키듯 교차하면서 혈(穴)을 감싸주는 명당으로 북한
산과 북악산이 서로 잘 교차하면서 에워싸는 명당을 말한다. 그래서 돈 꽤나 만지는 것들
과 권력층들이 그 냄새를 킁킁 맡고 몰려들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 것이다.

내가 평창동을 찾은 것은 북한산과 북악산의 소중한 살을 난도질하며 들어앉은 졸부의 고
래등 집을 보고자 함이 아니라 그곳에 깃든 오래된 소나무와 백사실계곡(백석동천), 부암
동을 거닐고자 함이다. 이들은 내가 믿고 가는 즐겨찾기 명소들로 백사실계곡과 부암동은
1년에 3~4회 이상은 꼭 찾는다.


▲  북악산(백악산) 북쪽 자락으로 파고드는 평창8길 골목길



 

♠  북악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늙은 소나무, 평창동 소나무

▲  평창동 소나무 앞 오솔길 (백사실 능선 방향)

평창동 소나무를 찾으려면 화정박물관에서 묘각사(妙覺寺)로 인도하는 '평창8길' 골목길로 들
어서면 된다. 박물관 남쪽 주택가를 지나면 숲에 감싸인 오르막길이 늦가을 정취를 솔솔 불어
대는데, 그 골목길 끝에 외딴 두멧골처럼 자리한 주택들이 보일쯤 해서 오른쪽(서쪽)으로 백
사실(백사골)로 인도하는 오솔길이 살짝 손을 내민다.
둥근 햇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진한 숲에 감싸인 그 오솔길은 평창동에서 백사실을 이어주
는 지름길로 동네 사람들과 아는 사람들만 기웃거리는 도심 속의 숨겨진 숲길이다. 콘크리트
포장도 씌우지 않은 흙길로 길 남쪽에는 밭과 양봉까지 펼쳐져 있어 이곳이 정녕 서울 한복판
인지? 머나먼 지방의 산골인지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그런 밭과 평창동 너머로 북한
산(삼각산) 남쪽 줄기가 시샘을 하듯 이곳을 쳐다본다.

그 오솔길을 2분 정도 들어서면 3~4m 높이로 닦인 석축이 비슷한 높이로 길게 이어져 있어 옛
산성(山城)이 아닐까 싶은 기대감을 안긴다. 허나 그 석축은 산성도 아니고 건물터 등의 문화
유적도 아니다.
자세한 사연까지는 모르겠으나 군부대나 체육시설 등을 만들면서 넓게 땅을 다지고 석축을 쌓
은 것으로 지금은 배드민턴장과 쉼터가 있어 동네 주민들의 조촐한 휴식처 역할을 한다. 바로
저 안에 오래된 소나무가 있다.


▲  석축 윗쪽에 넓게 터를 다진 배드민턴장

▲  평창동 소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7호

북악산(백악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평창동 소나무는 280년 정도 묵은 늙은 나무이다. 그의
신상이 간단히 적힌 안내문에는 보호수 지정일 기준으로 230년이라 나와있는데, 그가 보호수
로 지정된 것은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인 1968년 7월 3일이다. 그 이후 50여 년이 무심하게
흘렀으니 약 280년(길게 잡으면 290년) 정도로 보면 된다.
무한리필로 쏟아지는 세월을 든든한 양분으로 삼아 높이 13m, 둘레 2.24m의 어엿하고 기품 넘
치는 나무로 성장했는데, 그의 생김새가 속리산(俗離山)에 있는 정2품송(正二品松)과 좀 비슷
하여 그리 낯설지는 않은 모습이다.

서울에서 100~150년 이상 묵은 나무 중, 소나무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은행나무와 느티나
무, 회화나무, 향나무가 대부분을 이룬다. 특히 보호수(保護樹)나 문화재로 지정된 소나무는
서울에서 이곳과 여기서 가까운 석파정(石坡亭) 소나무 정도이며 서울에서 가장 늙은 소나무
라 봐도 무리는 없다.

▲  서쪽에서 바라본 평창동 소나무

▲  오솔길에서 올려다본 소나무

하늘에 대한 경외심 때문일까?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30~40도 정도 고개를 숙였다. 벼도 익으
면 고개를 숙인다고 이 나무 역시 나이를 먹으면서 그렇게 고개를 꺾은 모양이다. 그만큼 숙
성될수록 겸손을 차리라는 대자연 형님의 심오한 뜻이 담긴 것은 아닐까 싶다. 자연물은 그
뜻을 받들고 잘 지키는데, 동물과 신(神)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며 지구와 자연에
갖은 민폐를 아끼지 않는 인간들은 왜 단순한 그것을 지키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인간은 신
이 아닌 늘 애매한 존재로 남아있는 모양이다.

* 평창동 소나무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248-1


▲  서쪽에서 바라본 소나무와 배드민턴장

평창동 소나무와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고 다시 오솔길로 나왔다. 배드민턴장 서쪽 끝이 바로
오솔길과 연결되어 있지만 철책으로 막혀있어 홍길동이 아닌 이상은 넘어가기가 힘들고, 소나
무 남쪽 3~4m 높이의 석축에서 오솔길로 뛰어내리기도 좀 그렇다. 그래서 급하면 돌아가라는
크고 아름다운 진리에 따라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 나갔다.


▲  평창동 소나무 밑 오솔길 (백사실 방향)

▲  평창동 소나무 밑 오솔길 (평창동 화정박물관 방향)

오솔길을 거닐면 백사실 동쪽 능선으로 오르는 산길이 나온다. 벌써부터 누렇게 뜬 낙엽이 주
변에 잔뜩 쌓여 있는데,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단풍도 그리 많이 남지가 않았다. 아직은 늦가
을의 한복판이라 방심하고 있었건만 겨울 제국(帝國)의 보이지 않는 마수는 벌써부터 내 곁에
다가와 밑작업을 하고 있었다.

귀를 접고 쓸쓸히 누운 낙엽을 보니 올해도 이제 다되었구나~! 싶은 우울감이 밀려온다. 늦가
을과 연말에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이 기분, 허나 산바람이 살포시 나를 스치면서 그 우울감
을 조금이나마 털어간다. 오늘은 그저 나들이와 출사에만 열중하라는 듯이...


▲  소나무가 무성한 백사실 동쪽 능선

백사실 동쪽 능선은 북악산길에서 시작되어 백사실약수터, KT기지국, 평창동조망점까지 내려
가듯 이어진다. 백사실의 동쪽 지붕으로 중간중간에 현통사와 백사실(백석동천), 평창동으로
내려가는 산길을 늘어뜨렸으며, 소나무를 비롯한 갖은 나무들이 짙게 우거져 있다.


▲  울퉁불퉁 이어진 백사실 동쪽 능선길

▲  백사실 백석동천 별서터 서쪽 계곡

백사실 동쪽 능선을 조금 올라가면 백석동천으로 인도하는 길이 오른쪽(서쪽)에 나타난다. 그
길을 내려가면 바로 19세기에 조성된 백석동천(白石洞天) 별서유적으로 별서의 안채터와 사랑
채터가 마중을 하며, 이어서 동그란 연못과 6각형 정자터, 백사실계곡(백사골)이 나타난다.
백사실계곡은 북악산(백악산) 북쪽에서 발원하여 도심 속의 두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과
백사실(백석동천), 현통사, 백사폭포를 거쳐 홍제천(弘濟川)으로 흘러가는 작은 계곡이다. 서
울 도심에 몇 안되는 제대로 남은 자연산 계곡으로 개구리와 맹꽁이, 도룡뇽 식구가 서식하고
있으며, 푸른 이끼가 마음 놓고 뿌리를 내리는 청정한 곳이라 이곳에서만큼은 잠시 서울을 잊
어도 좋다. 서울이 아닌 머나먼 산골이라고 우겨도 손색이 없으니 말이다.
(백석동천 별서터와 백사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서는 생략하며 따로 별도의 글을 링크
함 ☞ 관련글 보기)


▲  백석동천 별서터 서쪽에 세워진 오리 솟대 돌탑
예로부터 오리 등의 새는 하늘과 인간 세상을 이어주는 중간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소도(蘇塗)에서 비롯된 솟대 꼭대기에는 오리 모양을 달아두어
하늘과의 연락을 꾀했다.
 

백석동천별서터 계곡 윗쪽 일부는 도롱뇽 등의 수중 생물을 위해 출입을 금하고 있다. 허나
통제의 줄이 느슨하여 들어가는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고 있고, 특히 여름에는 피서객들의 칩
입이 빈번해 오히려 도룡뇽이 짐을 싸고 나가야 될 지경이다.
별서터에서 계곡을 피해 백사실 상류로 올라가는 산길이 있는데, 2012년에 주변 산길을 정비
하고 산불방제 장비를 갖춘 구제함과 솟대를 품은 돌탑을 심어 소소하게 볼거리를 선사한다.
솟대 돌탑을 지나면 황금잎 흩날리는 은행나무숲이 반짝 펼쳐지는데, 그 숲을 지나면 갈림길
이 나온다. 여기서 왼쪽(동쪽)으로 가면 백사실 상류와 능금마을, 북악산길로 이어지고, 오른
쪽(남쪽)으로 가면 백석동천 바위글씨와 백사실 남쪽 입구(응선사, 부암동)로 이어진다.


▲  백사실 소나무숲 (백석동천 별서터에서 능금마을, 부암동 방향)
솔내음이 그윽한 소나무 그늘에 의자 등의 쉼터가 닦여져 있다.

▲  백사실 소나무숲 (능금마을과 부암동 방향 갈림길 직전)

▲  백사실 남쪽 입구 산길

백사실(백석동천)에서 백사실 남쪽 입구로 오르는 남쪽 길은 경사가 완만하다. 백석동천 바위
글씨를 지나 느긋하게 이어진 숲길을 오르면 그동안 숲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햇님과 푸른 하
늘이 방긋 모습을 비춘다.
그들과 함께 부암동 주택들도 덩달아 시야에 들어오는데, 남쪽 입구 양쪽에는 고급지게 지어
진 양옥이 위세를 뽐낸다. 부암동도 부자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은근히 고급 주택이 많다.


▲  늦가을이 짙게 서린 백사실 남쪽 입구
백사실 안쪽은 늦가을의 농도가 많이 떨어졌지만 이곳은 아직 그 농도가 진하다.



 

♠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  부암동 응선사(應禪寺) - '응선사' 현판을 내건 문이 일주문이다.

백사실 남쪽 입구에는 응선사란 조그만 절이 둥지를 틀고 있다. 그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
어진 현대 사찰로 대웅전과 일주문(一柱門)으로 쓰이는 기와집이 전부인데, 대웅전은 겉으로
보면 1층 같지만 그 밑에도 공간이 있어 요사(寮舍)와 선방(禪房), 공양간 등으로 쓰이고 있
으며 대웅전 앞에는 불교용품과 전통차를 파는 공간과 쉼터가 있다. (상황에 따라 차 시음도
가능함)

내가 법등(法燈)의 역사도 무지 짧은 응선사를 기웃거린 것은 대웅전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산신도가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백사실을 드나들던 예전부터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외
부인에게 조금 까칠하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계속 방문을 미루다가 이번에 한번 들려 보았다.


▲  문짝이 달린 일주문에서 바라본 응선사 내부 (쉼터와 불교용품 매점)

▲  응선사 대웅전에 걸린 산신도(왼쪽)와 칠성도, 신중도(오른쪽)

▲  응선사 산신도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4호

산신도는 대웅전 동쪽 벽에 칠성도(七星圖), 신중도(神衆圖)와 나란히 걸려있다. 그들 가운데
자리한 칠성도는 근래에 조성된 것이고, 호법신(護法神)들이 정신 없이 담긴 신중도는 산신도
만큼이나 늙어보여 20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신중도와 산신도는 모두 다른 곳
에서 업어온 것으로 법등의 역사가 짧은 이곳의 소중한 꿀단지이다.

산신도는 1914년 음력 10월 8일에 조성된 것으로 이제 100년이 조금 넘었다. 처음에는 경성부
(서울) 고양군 삼각산 안양암(安養庵)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여기서 안양암은 종로구 창신동(
昌信洞)의 안양암으로 짐작된다. (이곳은 '삼각산 안양암'을 칭하고 있음) 그런데 '고양군'이
란 3글자가 마음에 영 걸려 북한산(삼각산) 어딘가에 있던 절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연응 정순(淵凝 淨旬)을 증명으로 하고 양학 효신(養鶴 孝信)이 별좌(別座) 겸 화주(化主)가
되어 조성했는데, 금호 약효(錦湖 若效)와 향암 성엽(香庵 性曄), 연암 경인(蓮庵 敬仁) 등 3
명의 화승이 제작에 참여했다.

그림에는 주인공인 산신 할배를 비롯해 호랑이와 동자 4명, 소나무, 폭포, 산 등이 그려져 있
는데, 붉은 도포를 입은 산신은 금색의 옷잠이 꽂힌 족두리 같은 것을 쓰고 왼손에는 파초선(
芭蕉扇)을 들고 있다. 산신 뒤에는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귀여운 모습으로 꼬랑지를 살랑
거리고 있고, 산신 좌우에는 비서인 동자 4명이 복숭아나 공양물 등의 물건을 들고 있다.
그림 밑부분에는 붉은 색으로 된 화기(畵記)가 있어 제작 시기와 제작자, 최초 봉안 장소, 시
주자 명단 등의 정보를 소상히 알려준다. 바로 이 화기를 통해 20세기 초반 산신도의 양식과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화기를 남겨준 제작자의
소소한 배려가 그림의 가치를 높여준 것이다.

그림 제작에 참여한 승려 중 금호 약효는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에
서 활동했던 화승으로 70여 점의 그림이 남아있다. 그는 단아한 불신(佛身)과 섬세한 인물 묘
사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이 산신도에도 그의 스타일이 깃들여져 있었다.

* 응선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95-13 (백석동길 227 ☎ 02-396-2476)


▲  부암동의 지붕길, 백석동길(부암동 산복길) - 응선사 남쪽

응선사 앞을 지나는 골목길은 부암동의 지붕길인 '백석동길'이다. 이는 백석동천에서 따온 이
름으로 창의문교차로에서 산모퉁이와 응선사를 거쳐 AW컨벤션센터(하림각) 건너편까지 이어지
는데, 그중 창의문~산모퉁이~응선사 구간을 나는 부암동 산복길이라 부른다.
이 길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길이기도 한데, 부산(釜山)의 산복길보다는 좀 못해도 나름 아
름다운 굴곡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지대가 높아 부암동 일대가 훤히 바라보이며, 그 너머로
인왕산(仁王山)이 가까이에 아른거린다. 비록 산동네긴 해도 서민과 가난이 연상되는 달동네
와는 완전히 차원이 틀리며, 개성이 강한 집들이 많고, 아름다운 뜨락이나 정원을 갖춘 집도
적지 않다.
게다가 길 주변에 숲과 나무도 우거져 있고, 밭도 있으며, 바로 뒤에 북악산(백악산)이 든든
한 후광처럼 자리해 부암동을 보듬고 있어 1폭의 수채화나 풍경화 같은 모습을 자아낸다.

이처럼 이곳이 서울 도심 지척임에도 산골마을 풍경을 진하게 지니고 있는 것은 나라의 예민
한 부분을 많이 품은 북악산 자락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미도 몰라본다는 천박한 개발의 칼
질도 마음 놓고 칼춤을 추지 못한다. 건물을 지어도 다 낮게 지을 수 밖에 없고, 가파른 산자
락이라 집을 지을 공간도 그리 넉넉치 못하다.
허나 요즘 들어 부암동이 관광지로 뜨면서 산복길 주변에 새로 지어진 집이나 리모델링을 하
는 집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상당수 집이 까페나 식당, 미술관 등의 상업 목적임) 다행
히 그 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고 예민한 북악산 주변의 특성상 크게 개발될 일은 없지만 그저
돈 욕심으로 일어난 소소한 변화가 계속 이루어지다 보면 그 역시 무시할 수가 없다. 나는 지
금의 산복길 풍경이 너무 좋은데, 지금 선에서 더 이상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부암동 산복길(백석동길) 갈림길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응선사, 동쪽으로 가면 능금마을(뒷골마을)이다. 백사실을
가고자 한다면 어느 길로 가든 크게 상관은 없지만 능금마을 방면이
조금 지름길이다.

▲  잠시 서울을 잊고 산골 마을을 거니는 기분
부암동 산복길 (산모퉁이 부근)

▲  부암동 산복길 (산모퉁이, 은행나무숲 직전)

▲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은행나무 숲길 (백석동1길)

부암동 산복길을 따라 창의문(彰義門, 자하문) 쪽으로 가다보면 정면에 북악산이 보이면서 길
이 크게 선을 그리며 동쪽(왼쪽)으로 구부러진다. 그쯤에 조촐히 우거진 은행나무숲이 있는데
, 숲 옆에 내려가는 숲길이 살짝 손을 내민다. 얼핏 보면 끊어진 길처럼 보이나 저 밑에 보이
는 주택가까지 엄연히 이어진 길로 '백석동1길'이란 이름을 지니고 있는데, 능금마을이나 백
사실계곡(백석동천, 백사골), 산모퉁이에서 창의문으로 내려갈 때 산복길(백석동길)로 쭉 가
는 것보다 이 길로 갈아타면 조금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다.

산복길 길가에 소소하게 우거진 은행나무숲은 황금빛 은행잎을 흩날리며, 늦가을의 향연을 즐
기고 있다. 은행잎은 노란색의 정석을 보여주며 한참 물이 올라 있고, 주변 숲과 어우러져 눈
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절경을 자아낸다. 이것이 진정한 늦가을의 풍경이지. 아직은 은행잎이
많이 붙어있지만 이제 10여 일만 지나면 거의 7~8할 이상은 낙엽으로 추락될 것이다.
늦가을의 커텐을 열었던 은행나무는 죽음 앞에 처절한 아름다움을 불사르며 슬슬 늦가을의 막
을 닫을 준비를 한다.


▲  늦가을이 소리없이 깃든 부암동 산복길 은행나무 숲
숲은 매우 작지만 은행잎의 농도는 넓고 진하다.

▲  밑에서 바라본 은행나무 숲길 (백석동1길)

은행나무숲 남쪽에는 밭이 펼쳐져 있다.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사이에 포근히 깃든 부암동
에는 산자락 곳곳에 밭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데, 특히 능금마을(뒷골마을) 같은 곳은 오이
나 상추, 배추, 여러 과일을 심어서 시내에 내다팔고 있다.
서울하면 그저 키다리 빌딩과 번잡한 거리, 수많은 인파와 차량들만 생각하는 대다수의 사람
들에게는 다소 충격과 공포와 같은 풍경이라 적응이 가질 않겠지만 서울 안에도 논과 밭, 과
수원이 제법 많다. 다만 그들이 그릇된 고정관념에 빠져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당장 도심과
가까운 부암동과 평창동, 서촌 서쪽, 성북동만 가도 그런 고정관념에 망치질을 할 수 있다.


▲  늦가을이 그린 한 폭의 수채화
감나무와 밭두렁이 어우러진 부암동의 아름다운 전원 풍경

▲  백석동1길 윗쪽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인왕산

▲  늦가을 절정에 잠긴 창의문(자하문) 안쪽 숲길
평창동~부암동 나들이는 창의문에서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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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숨겨진 달달한 계곡이자 서촌의 오랜 경승지, 인왕산 수성동계곡 (인왕산자락길)

인왕산 수성동계곡



' 도심 속에 숨겨진 달달한 쉼터 - 인왕산 수성동계곡 '
인왕산 수성동계곡
▲  인왕산 수성동계곡 (기린교 주변)



 

늦가을이 절정에 이르던 11월 첫 무렵 주말에 일행들과 수성동계곡을 찾았다. 햇님이 하
늘 높이 걸린 14시에 그들을 만나 내 즐겨찾기 명소인 백사실계곡(백사골)과 부암동산복
길(백석동길), 인왕산자락길을 거쳐 16시 넘어서 수성동계곡에 이르렀다.
이곳도 즐겨찾기의 하나로 정말 지겹도록 찾은 곳이라 계곡 윗도리만 주마등처럼 통과하
려고 했으나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못지나친다고 기린교가 있는 계곡 밑도리까지 싹 복습
을 하였다.



 

♠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었다가 다시 복원된 현장, 서울의 경승지로
오랫동안 명성을 누렸던 인왕산 수성동계곡(水聲洞溪谷)
- 서울 지방기념물 31호

인왕산 동쪽 자락이자 서촌(西村, 웃대) 한복판에 자리한 수성동계곡은 한양도성(漢陽都城)에
오랜 경승지로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한경지략(韓京識 略) 등에 서
울의 명승지로 절찬리에 소개된 곳이다. 이곳 계곡(기린교와 공원 일대)을 예로부터 수성동이
라 불렀는데, 이는 계곡에 걸린 기린교 밑의 물소리가 청아하고 좋기로 명성이 자자하여 물소
리가 좋다는 뜻에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이자 거대한 돌산으로 제대로 된 계곡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인
왕산(仁王山)이지만 그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계곡이 제법 있다. 수성동을 비롯해 청풍
계(淸風溪, 청운동), 청계동천(淸溪洞天, 부암동) 등이 명소로 꼽혔으나 개발의 칼질로 죄다
쓰러지고 수성동만 옥인아파트의 압박 속에 간신히 살아남은 것을 2012년에 복원되어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그 외에 환희사계곡과 몇몇 약수터 주변에 조그만 계곡이 있으나 죄다
볼품은 없다.

수성동계곡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가인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8)이 그린 장
동팔경첩(壯洞八景帖)의 '수성동'이란 제목으로 어깨를 피고 등장한다. 여기서 장동은 인왕산
자락인 효자동(孝子洞)과 청운동(淸雲洞) 일대를 말하며, 북촌(北村)과 더불어 왕족과 사대부
(士大夫)들이 집과 별장을 짓고 살던 금싸라기 땅이었다.
특히 이 지역에는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이 빚은 절경이 많은데, 그중에 장동8경이 대표적
이다. (지금은 수성동과 창의문, 대은암 바위글씨만 살아남았음)

수성동에 가장 먼저 집을 지은 사람은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다. 문무(文
武)를 겸비하고 풍류의 1인자였던 안평대군은 기린교 부근에 비해당(匪懈堂)이란 집을 짓고
살았으며, 나중에 창의문 북쪽에 무계정사(武溪精舍)란 별장을 지었다.
영조(英祖) 시절에는 겸재 정선이 인왕산을 모델로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란 그림
을 남기면서 수성동을 비롯한 장동8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수성동 그림은 계곡 복원에 아주
큰 단서를 제공해주었다. 그림을 보면 기린교를 건넌 선비 3명과 시중을 드는 동자(童子) 1명
이 계곡 상류로 걸어가는 모습이 담겨져 있고, 가벼운 붓놀림으로 이끼가 낀 바위와 질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도 비오는 날에 이곳을 찾아 '수성동 빗속
에서 폭포를 구경하다(水聲洞 雨中觀瀑)'란 시를 지어 수성동을 격하게 찬양했다.


▲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 (기린교 돌다리가 그려져 있음)

이곳은 첩첩한 산주름 속의 골짜기가 아닌 도성(都城) 속에 자리해 있어서 접근성도 아주 착
하다. 하여 사대부 외에도 중인과 평민들도 많이 발걸음을 했는데, 인근 송석정(宋石亭)과 더
불어 조선 후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위항문학(委巷文學, 중인/평민/서얼들이 주도하는 문학
활동)의 성지(聖地)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이렇게 인왕산을 든든한 후광으로 삼으며 장안의 경승지로 큰 인기를 누렸던 수성동과 장동8
경은 1960년대 이후 서울 도심이 개발되면서 큰 위기를 맞는다. 오로지 개발 밖에 모르던 천
박한 개발의 칼질은 장동8경의 태반을 가루로 만든 것이다. 대은암 같은 경우는 그 칼질에 희
생되지는 않았으나 엉뚱하게 군사작전지역에 묶이면서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 되었고, 수성
동도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 9동이 계곡 중류 일대에 들어서면서 참으로 아름답던 그 경관은
99% 망가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인근 청풍계나 청계동천처럼 계곡이 대부분 증발하는 꼴은 면했지만 아파
트로 인해 계곡의 폭도 줄어들었고, 아파트 사이를 마치 버려진 하천처럼 흘러가면서 완전 천
덕꾸러기 신세가 되어버렸다. 또한 옥인아파트 9동 앞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해 어두컴컴한 지
하를 거쳐 역시나 생매장 신세가 되버린 청계천(淸溪川)으로 서글프게 흘러가야 했다.

그 이후 수성동의 이름 3자는 속인(俗人)들의 뇌리 속에서 점차 시들어가고 동네 사람들만 세
월의 저편으로 잊혀져가는 계곡의 이름을 간신히 붙잡을 정도로 명성은 크게 하락했다.

▲  수성동계곡 사모정

▲  기린교 돌다리

개발의 난도질로 태어난 옥인시범아파트가 계곡을 건방지게 깔고 앉으면서 수성동계곡은 40년
가까이 어둠에 묻혀 수난의 세월을 보냈다. 이러다가 수성동 이름 3자가 영원히 지워지는 것
은 아닐까? 빼앗긴 계곡에도 과연 봄은 오는가? 수성동에게는 그야말로 절망의 시절이었다.

허나 자연과 인간의 대결에서 거의 자연이 이기듯이, 수성동에게도 끝내 좋은 소식이 날라왔
다. 계곡을 깔고 앉던 옥인아파트가 2008년 재난안전위험시설 C급으로 지정되면서 철거가 결
정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발일변도(一邊倒)로 일관하던 세상도 조금은 변하면서 수성동의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서울시가 아파트를 밀어버리고 계곡을 되살리기로 의견을 모았다.
하여 2010년 10월 21일 기린교를 비롯한 수성동계곡 일대를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삼으면서 뒤
늦게나마 문화유산의 대우를 받게 된다. (서울의 계곡 중 최초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됨)
 
이후 인왕산을 가리던 옥인아파트는 입주민을 모두 내보내고 2011년까지 모두 철거되었다. 그
리고 아파트 주변을 통제하여 그해 여름부터 복원 공사에 착수, 1년 동안 공사를 벌여 2012년
7월 완성을 보면서 시민공원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개발의 칼질에 날라간 계곡을 살리고자
전문가와 사회단체, 문화재청에 자문을 구했고 정선의 수성동 그림을 적극 참조했으며, 옛 경
관을 어느 정도 재현하고자 소나무를 중심으로 상수리나무와 참나무, 산철쭉 등 우리 고유의
나무 18,477그루를 심었다. (그중에 구부러진 소나무가 제일 많음)
그 외에 돌단풍, 띠, 바위취 등 다양한 화초를 심어 주변과의 조화를 꾀했고, 좁아진 계곡을
크게 넓혀 계곡 양쪽에 전통 방식으로 돌을 쌓아 암석 지형을 최대한 회복하고자 했으며, 계
곡 중간에 전통식 정자인 사모정을 세워 선비와 지배층의 풍류를 조금이나마 느끼도록 했다.
그리고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곳으로 여겨지는 계곡 아랫쪽(기린교 동쪽)에 관람공간을
조성해 정선의 눈으로 계곡을 바라볼 수 있게끔 했으며, 게곡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산책로
를 닦아 인왕산과 어우러진 시민공원의 성격도 겸하게 했다.

수성동계곡 공원에는 복원된 계곡을 비롯하여 이곳의 터줏대감이자 유일한 늙은 존재인 기린
교가 있으며, 옥인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공원 북쪽에 아파트의 잔재를 일부 남겨두어 수
성동을 거쳐간 개발 지상주의의 그릇됨을 일깨우게 했다.
비록 계곡을 복원했다고는 하지만 완전 옛날 모습은 아니며 여전히 비슷한 자리(옛 옥인아파
트 9동 자리로 지금은 계곡 관람공간으로 바뀜)에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한다.

이 계곡은 청계천으로 흘러가는데, 기분 같아서는 전 구간을 모두 끄집어내 복원하면 좋겠지
만 이미 회색빛 시가지가 가득 들어차 지금으로써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계곡이 생매장
되는 구역은 계곡이 상당히 밑으로 내려간 상태로 주변 바위들도 날카로운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어 사고의 위험이 있으며, 기린교 같은 경우는 계곡이 3m 밑에 흐르고 있으므로 조금 아찔
하다.
그래도 수성동의 혜성(彗星)과 같은 재등장으로 서울 도심에서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하나 늘었으니 그 가치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비슷하다 할 것이다. 비록 완전하게 복원된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옛 모습을 되살리고자 했고, 복원공사를 벌이는 중에도 여러 의견을 수렴해
어색함을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그렇게 하여 인왕산이 베푼 옥계수를 모아 계곡을 재현했으
니 어설프게 재현된 청계천과 달리 살아있는 계곡이다.

수성동계곡의 범위는 보통 공원 일대 계곡과 기린교를 일컫지만 인왕산길에서 공원으로 내려
가는 계곡도 수성동 범위에 들어간다. 그 계곡이 있기에 수성동계곡도 있는 것이다. 비록 재
현된 폼이 낯설기는 하나 그것은 장차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옛날의 경치도
슬슬 피어오를 것이요. 도심 속의 상큼한 피서의 성지(聖地)로 잃어버린 왕년의 명성도 되찾
을 것이다.

* 수성동계곡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85-3


▲  2개의 통돌로 이루어진 조촐한 돌다리 - 기린교(麒麟橋)
칼로 싹둑 손질을 했는지 바위들이 90도 절벽을 이루며 무시무시한
모습을 드러낸다.


넉넉한 폭으로 흐르던 수성동계곡은 기린교 이전에서 급격히 좁아지고 하얀 피부의 반석들도
무시무시한 낭떠러지를 계곡 쪽에 빚으면서 제법 날카로운 모습을 보인다. 그 낭떠러지 바위
사이에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짧은 돌다리가 고색의 때를 간직하며 놓여져 있는데, 이
다리가 바로 수성동의 오랜 명물인 기린교이다.

기린교는 길쭉한 통돌 2개로만 이루어진 아주 단촐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다리 남쪽에 다리를
보조하는 커다란 돌 여럿을 둔 것이 전부이다. 다리 폭은 1m 남짓, 길이는 3m로 언제 조성되
었는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겸재 정선의 수성동 그림에 다리가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적
어도 17세기 이전에 닦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계곡을 찾은 귀족과 사대부들의 편의를 위해 닦은 것으로 보이는데, 벼랑으로 이루어진 이 부
분이 계곡 가운데 가장 위험하다.

서울 도심에서 가장 늙은 돌다리는 광통교(廣
通橋)이다. 그리고 수표교(水標橋)와 창경궁(
昌慶宮) 옥천교(玉川橋)가 2위, 3위에 들어간
다.
(중랑천 살곶이다리는 도심이 아니므로 제외)
수표교는 청계천 생매장 때 제자리를 떠나 장
충단공원에 둥지를 틀었고, 광통교는 비록 자
리는 지켰지만 생매장의 치욕을 겪다가 청계천
복원 때 약간 서쪽으로 옮겨졌다.
그에 반해 기린교는 그들보다 한참 후배이지만
제자리를 지키며 원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그 가치가 높다. 게다가 통돌로 만든 다리 가
운데 가장 긴 편이다.


◀  높은 벼랑 위에 걸쳐진 기린교


▲  정면에서 본 기린교의 위엄

▲  바로 앞에서 본 기린교
다리 너머로 수성동계곡의 생매장 현장이 보인다.



 

♠  수성동계곡 둘러보기

▲  잘 닦여진 수성동계곡 북쪽 산책로
계곡 일대를 두 눈으로 살피며 거닐 수 있다. 계곡 복원에 걸맞게 흙길이면
좋으련만 길을 현대식으로 닦은 것이 상당히 아쉽다.

▲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옛 옥인시범아파트의 잔해

수성동계곡 북쪽에는 옛 옥인아파트의 흔적이 아련하게 남아있다. 이 흔적은 아파트 7동의 1
층으로 2008년 철거가 결정되자 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계곡과 조금 떨어진 7동의 아랫도
리 일부만 남겨 이곳의 기념물로 삼았다.

한때 계곡을 깔고 앉아 감히 인왕산을 가리던 옥인아파트의 최후로 이곳을 요란법석 거쳐간
엄연한 역사의 흔적이다. 아파트를 말끔히 밀어버리는 것보다는 이렇게 일부라도 남겨 개발의
난도질에 희생된 수성동의 서글픈 과거를 보여주고, 무분별한 난개발의 폐해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교육의 장으로 삼는 것이 적당하다.
또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20세기 말 서울 지역 아파트의 양식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인
정되어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얻을 수도 있다.

계곡을 유린하던 인간의 창조물은 그 자리를 원주인인 계곡과 자연에게 내주고 이제는 그들의
눈치를 살살 보며 공원 한쪽 구석에 찌그러진 신세가 되었다. 인간이 아무리 용을 쓰고 만들
어도 위대한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귀여운 모래성에 지나지 않는다. 아파트의 남겨진 흔적은
마치 예비군훈련장의 시가전 훈련장이나 전쟁의 폭격으로 주저앉은 건물처럼 보이는데, 그렇
다. 대자연의 보복 폭격에 옥인아파트는 저렇게 주저앉은 것이다.


▲  옛 옥인아파트의 초라한 잔해

▲  계곡 북쪽 산책로 (인왕산길 방향)
지나가던 늦가을도 이곳이 좋았는지 알록달록 봉숭아물을 입혔다.

▲  계곡 북쪽 산책로 (하류 방향, 사모정 옆)

▲  수성동계곡의 구수한 양념, 사모정

사모정은 1칸 밖에 안되는 조촐한 팔작지붕 정자로 2012년에 지어졌다. 사모정이란 이름은 네
모난 정자를 뜻하는 것으로 새색시처럼 단아한 모습으로 계곡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는 이곳
을 스쳐갔던 옛날 정자를 재현한 것이 아닌 수성동계곡 수식용으로 세운 것이다.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에도 정자는 나와있지 않고, 수성동 관련 기록에도 정자가 있었다는 내용은 없기
때문이다.
허나 계곡과 나무만 있는 계곡에 전통 양식의 정자를 하나 두니 수성동의 풍경이 한층 더 살
아나는 것 같다.

계곡 바람과 인왕산 바람이 앞다투어 선선한 바람을 선사하고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며 솔내
음을 불어주는 명당 자리라 저곳에 들어가 낮잠 한숨 청하면 정말 꿀맛일 것 같다.


▲  계곡 상류와 인왕산으로 인도하는 산책로
나무와 꽃들이 산듯하게 가을옷을 입으며 막바지 처절한 아름다움을 불사른다.

▲  수성동계곡 공원 윗쪽 계곡

▲  인왕산 품과 맞닿은 수성동계곡 서쪽 산책로

▲  수성동계곡 상류 -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온 계곡

수성동계곡의 상류는 대략 3개 정도 되는 것 같다. 석굴암에서 내려오는 계곡과 그 남쪽에서
내려오는 계곡, 인왕산에서 꽤 유명했던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오는 계곡까지 서로가 상류를
자처하며 수성동으로 슬금슬금 내려온다. 특히 인왕천약수터에서 온 계곡은 거의 90도 각도의
암벽 사이로 좁은 공간을 타고 내려오는데, 그 풍경이 나름 절경을 이룬다. 그리고 작은 폭포
앞에는 얕은 못과 모래밭이 있어 어린이들이 흙장난을 하며 물놀이하기에 적당하다.
모래 옆과 공원 쪽에는 돌로 쌓은 인공의 흔적이 있어 조금은 어색하지만 이는 계곡을 복원하
면서 끼워놓은 것으로 2012년 복원 이전에는 폭포와 주변 암벽, 모래밭까지만 원래 모습이었
다.


▲  수성동계곡 남쪽 산책로

▲  계곡 남쪽 산책로에서 바라본 사모정

▲  슬럼프에 빠진 사모정 앞 수성동계곡

한때는 밋밋한 성냥갑 아파트 사이로 그들의 눈치를 보며 눈물처럼 흘러야했던 수성동계곡은
이제 누구의 눈치도 없이 가슴을 피며 당차게 흘러간다. 허나 늦가을 비가 적었던 탓에 상류
에서 물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 사모정 앞 계곡은 수풀만 무성한 늪지대처럼 변해버렸다.


▲  계곡 남쪽 산책로 (기린교 방향)

▲  잠시 흙길로 돌아선 계곡 남쪽 산책로 (기린교 부근)

▲  수성동계곡 관람공간에서 바라본 계곡 (계곡 동쪽 광장)

수성동계곡 동쪽에는 넓게 다져진 광장이 있다. 이곳은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위치로 여
겨지는 자리로 그 당시 정선의 눈높이가 되어 기린교를 비롯한 수성동계곡과 인왕산을 한 덩
어리로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상류를 제외한 수성동계곡 일대와 인왕산이 바라보
이는데, 보통은 높은 곳에 전경(全景)을 바라보는 자리를 두지만 이곳은 거꾸로 계곡 밑에 그
자리를 두었다.

인왕산이 빚은 수성동계곡은 기린교 밑도리를 지나 낭떠러지 밑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관람공
간 밑에서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하수구를 통해 칠흙같은 지하로 생매장된다. 계곡을 복원했
다고는 하지만 옛 옥인아파트 주변만 재현된 것이며, 이후 서촌(웃대)을 가로질러 세종로 서
쪽을 거쳐 청계천까지 흘러가는데, 이 구간은 보기만 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복잡한 시가지로
땅을 열기도 힘들다.
이들도 마저 끄집어낼려면 수많은 건물과 도로를 밀어야 되는데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 하
긴 서울 도심에서 수성동계곡만 그렇겠는가? 삼청골(삼청천)이나 청풍계, 창덕궁 빨래터에서
나오는 냇물 등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남산에서 베푼 수많은 물줄기들이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어 대부분 생매장을 당했다.


▲  가로등이 불을 밝히며 어두운 저녁을 대비한다.

계곡을 1바퀴 둘러보고 동쪽 관람공간으로 내려가니 시간은 어언 17시가 넘었다. 햇님이 커튼
을 치고 꽁무니를 빼면 인왕산과 수성동계곡은 검게 익고, 계곡 가로등이 불을 밝히며 어둠에
대항한다. 허나 가로등의 패기가 미약하고 이곳도 엄연한 자연 공간이라 그 어둠을 제대로 극
복하지는 못한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수성동계곡 나들이는 저물어가는 햇님처럼 그렇게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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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강 언덕에 살짝 깃든 고구려의 작은 흔적, 연천 은대리성

연천 은대리성(한탄강)



' 연천에서 만난 고구려의 작은 흔적, 전곡 은대리성 '
연천 은대리성



 

여름 제국(帝國)의 무더위 갑질이 극성이던 7월의 한복판에 경기도 북부에 자리한 연천
(漣川)을 찾았다. 남북분단의 비애가 서린 연천 고을에서 가장 큰 읍내이자 구석기유적
의 성지(聖地)로 추앙받고 있는 전곡읍(全谷邑)까지 어찌어찌 가게 되었는데, 오랜만에
찾은 전곡을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워 마침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는 은대리성을 더듬
기로 했다.

은대리성은 전곡읍내 서쪽에 위치한 연천군보건의료원 서쪽에 자리해 있는데, 그곳으로
가려면 보건의료원 내부를 거쳐야 된다.



 

♠  한탄강 언덕에 깃든 옛 고구려(高句麗)의 조그만 성
연천 은대리성(隱垈里城) - 사적 469호

▲  은대리성 내부

한탄강(漢灘江)과 주상절리로 유명한 차탄천(車灘川)이 만나는 삼각형 지형 강변 언덕에 장대
한 세월이 묻힌 은대리성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한탄강은 용암대지의 하천 침식작용으로
주상절리(柱狀節理) 등의 벼랑이 참 많은데, 그중에서 3각형 모양의 강변 언덕도 적지 않다.
강변은 높은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윗쪽에 평지가 벼랑과 반대 방향으로 점차 넓어지는
형태로 은대리성도 바로 그 지형을 바탕으로 닦여진 것이다.

은대리성은 적당한 기록도 없이 이곳에 오랫동안 묻혀 있었는데, 1995년에 발간된 연천군사료
집에 의해 속세에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과 토지박물관,
국립문화재연구소 등이 이곳을 찾아 간단하게 발굴/지표조사를 벌였고, 2003년에 단국대 매장
문화재 연구소에 의해 정식으로 발굴이 이루어져 성의 실체가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다.

성의 평면은 삼각형으로 3면은 막다른 벼랑이고, 동쪽만 속세로 이어진 평지라 수비하기에는
딱 좋은 요새이나 만약 성이 적군에게 털린다면 이건 정말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항복하기
싫다면 싸우다 죽던지, 아니면 벼랑에 몸을 던지던지 해야 된다. 이는 무조건 성을 사수하고
만약 성이 함락되면 성과 함께 최후를 마치라는 제왕(帝王)의 차가운 배려가 담긴 것이다.

성은 크게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외성의 폭은 동서 400m, 남북 130
m, 둘레 1,005m의 조그만 규모로 외성의 동벽은 평지를 가로질러 축조되었다. 성벽 내부는 점
토와 모래로 다지고 외벽은 돌로 쌓았는데, 다른 성과 달리 현무암(玄武岩)을 사용한 것이 특
징이다.
동벽의 길이는 60~120m, 성벽 높이는 6m 정도로 성벽 상당수가 대자연과 세월의 태클로 녹아
내려 북쪽으로 가면서 2~3m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동벽의 내벽 부분에는 기둥을 설치했던 흔
적이 나왔고, 최소 2번 이상 성을 고쳐 쌓았음이 밝혀졌다.
내성은 길이가 230m 정도로 성의 핵심부이다. 여기서는 대형 건물터가 하나 나왔으며, 외성을
포함하여 문터 3개, 치성(雉城) 3개소(어떤 자료는 2개소), 도랑 흔적이 확인되었다. 치성은
성의 북동쪽과 북문터 서쪽, 남문터 서쪽에 있었으며, 북문터와 남문터 치성은 8x5 규모로 '
ㄷ'자형으로 돌출되었다.

성에서 수습된 유물은 별로 없으나 상당수가 토기 파편이며 소량의 철기편이 나왔다. 토기 상
당수는 고구려 토기(土器)로 약간의 백제 토기도 나왔는데, 동벽을 처음 쌓은 시기와 일치하
는 배수구 바닥에서 고구려 토기가 집중적으로 나와 이곳이 고구려성임을 알려준다.

전곡 지역은 오랫동안 백제(百濟)의 영역으로 북방으로 진출하는 요충지였다. 4세기 후반, 고
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 백제를 공략하면서 한강 이북을 점유했고, 이때 전곡과 연천
지역도 고구려의 그늘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고구려 입장에서는 전곡을 비롯한 한탄강 주변이
남쪽으로 진출하는 요충지이자, 강을 낀 천험의 요새지로 포천 반월성(半月城, ☞ 관련글 보
)과 호로고루(瓠蘆古壘), 은대리성 등 작은 성을 많이 구축했다. 그러니 빠르면 5세기 초/
중반, 늦어도 5세기 후반에 조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가 먼저 세웠을 가능성도 있
으나 요즘은 거의 고구려성으로 몰고 가고 있음)
이후 백제가 신라와 합심해 고구려를 북쪽으로 몰아내면서 6세기 중반에 한강 유역을 차지하
게 되었는데, 한강에 군침을 흘린 신라 진흥왕(眞興王)은 백제의 뒷통수를 후려치며 한강을
가로채는 비열한 짓을 벌인다. 그 기세로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 북부, 함경도 남부까지 북진
을 하였고, 이때 은대리성도 신라에게 털리게 된다.

은대리성을 지키던 고구려군이 신라군과 전투를 벌였는지 아니면 성을 버리고 줄행랑을 쳤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유물이 거의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신라가 잠깐 이용하다가 주변
성과 통폐합시키거나 7세기 중반 이후 버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이곳은 방치되어 수풀이
무성한 자연의 공간이 되었다.

성의 이름은 이곳의 지명인 은대리를 따서 붙인 것으로 2003년 이후 동벽과 북벽 일부를 손질
했다. 허나 완전한 석성(石城)으로 복원하지 못하고 성 밑도리에 돌을 입히는 선에서 끝나버
려 거의 토성(土城)으로 남아있으며, 남벽에는 목책(木柵)을 다시 세웠다. 성 내부와 토성에
는 풀을 곱게 입혀 싱그러운 녹색 도화지가 되었으며, 토성과 목책, 도랑 외에 흔적은 모두
풀로 뒤덮었다.

연천에는 은대리성 외에 고구려가 쌓은 것으로 여겨지는 당포성(堂浦城), 호로고루성 등의 성
곽 유적이 있는데, 모두 3각형 지형의 강가 언덕 평지에 조성된 것이 특징이라 고구려 축성술
의 다른 면모를 보여주며, 남한 땅에 흔치 않은 고구려 유적으로 그 가치와 희소성이 높다.


▲  연천군보건의료원에서 은대리성으로 인도하는 언덕길
(언덕 위가 바로 은대리성)

▲  어설프게 복원된 은대리성 동벽과 남문터

성벽 밑도리는 돌을 끼워 넣었으나 나머지는 그냥 흙만 다져 복원했다. 그래서 졸지에 팔자에
도 없는 토성이 되버린 은대리성. 이러면 이곳이 토성인줄 알지 누가 석성으로 보겠는가? (나
도 토성으로 알았음..)

▲  남벽과 마주한 남문터 서쪽

▲  동벽 중앙 부분

▲  동벽 동쪽

▲  동벽 내부


▲  동벽 남문터에서 바라본 천하 (보건의료원 산책로와 소나무숲, 한탄강)

▲  동벽 동쪽에서 바라본 천하 (보건의료원 산책로, 소나무숲)

▲  토성이 되버린 동벽 윗쪽
지금은 토성이라 이런 곳에서 과연 수비가 가능할까 싶겠지만 나중에 석성으로
재현된다면 지금과 180도 달리 보일 것이다.

▲  동벽과 성 내부

▲  은대리성 내부
지금은 온통 초록 도화지라 실감이 나지 않지만 이곳에는 건물과 군사 주둔지가
있었다. 성 내부와 건물, 주둔지의 모습, 군사들의 삶에 대해서는 딱히
정답이 없는 실정, 그러니 저 푸른 도화지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보자.

▲  푸른 수풀 너머에는 북벽이 있었다. (북벽도 벼랑임)

▲  남벽에 설치된 목책 - 목책이 여장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  수풀과 뒤엉킨 남벽 목책

▲  도랑 흔적
도랑은 빗물이나 생활용으로 쓰인 물을 바깥으로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 성 안에서
아직 우물터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식수는 인근 산이나 한탄강에서
힘들게 운반했을 것이다.

▲  남벽 목책 너머로 보이는 한탄강

▲  서쪽에서 바라본 은대리성 내부

▲  은대리성 내부를 가로지르는 황토색 산책로



 

♠  한탄강전망대와 3형제바위

▲  은대리성에서 전망대로 가는 숲길 입구

은대리성은 조그만 성이라 학술조사나 정밀 답사까지 벌이지 않는 이상은 금방 둘러본다. (길
어봐야 30~40분, 보통 사람은 10~20분 정도) 그래서 좀 싱거울 수 있는데, 이것이 은대리성의
전부는 아니니 너무 아쉬워하지는 말자. 대륙을 누비던 통 큰 고구려의 성곽 유적인데 설마
이것으로 끝나겠는가..? 고구려 유적은 절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성 서쪽을 보면 우거진 숲이 보일 것이다. 솔내음이 그윽한 숲 오솔길을 따라가면 그 길의 끝
에 한탄강전망대가 자리한다. 소나무숲과 전망대도 엄밀히 따지면 은대리성 내부로 성곽 서단
(西端)에 해당된다.


▲  은대리성에서 전망대로 인도하는 숲길 ①

▲  은대리성에서 전망대로 인도하는 숲길 ②

▲  은대리성에서 전망대로 인도하는 숲길 ③

▲  벼랑에 자리한 한탄강전망대

오솔길 끝에 자리한 전망대는 의자가 여럿 있는 것이 전부인 그야말로 친환경적인 전망대이다
. 이곳에 서면 한탄강(왼쪽)과 차탄천(오른쪽)이 하나가 되어 하류로 흘러가는 현장이 보이는
데 여름의 기운을 먹고 자란 수풀 때문에 완전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난간에 오르거나
난간 너머에서 아슬아슬하게 보거나, 겨울에 와서 보던가 해야 제대로 보인다.
한탄강 물소리가 얼마나 패기가 진한지 여기까지 울린다. 차탄천 너머 서쪽은 군남면 지역이
고, 한탄강 너머 남쪽은 전곡읍 고능리이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한탄강 (파주 방향)

▲  수풀에 가려 보일까 말까하는 삼형제바위

전망대에는 조그만 안내문이 있는데, 그 안내문에는 임진강과 차탄천 합류지점에 있는 삼형제
바위에 대한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담겨져 있다. 삼형제란 이름 그대로 조그만 바위 3개가 나
란히 수면 위에 고개를 들고 있는데, 무성한 수풀이 시야를 방해하여 본의 아니게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인 어느 옛날, 어느 과부가 삼형제를 기르고 있었다. 그들 형제
는 우애가 참 깊었는데 어느 날 여름, 일을 하다가 무더위에 지쳐 한탄강에서 물놀이를 했다.
그런데 막내가 부주의로 깊은 곳에 빠져 허우적거리자 그를 구하고자 형들이 다가갔지만 결국
그들 모두 강제로 저승으로 보내지고 말았다.
졸지에 아들을 모두 잃은 과부는 강가로 달려가 3달 동안 대성통곡을 했는데, 3달 뒤에 삼형
제의 형상이 강 가운데에 나타나더니 그대로 바위로 변했다고 한다.
이후 해마다 이곳에서 익사사고가 발생하여 큰 바위에 제단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 그들을 달
랬다고 전했다고 하니 전설을 통해 인근에 살던 삼형제가 강에서 사고를 당하자 그들의 넋을
달래고자 제사를 지내면서 바위를 그들의 화신으로 삼은 모양이다. 설마 그들의 시신이 바위
로 변할리는 없을테니 말이다.

전망대에 잠시 머물며 한탄강의 유유히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있으니 시간은 어느덧 19시가
되었다. 여름이라 낮이 무척 길어 아직도 한낮 같고 더위의 기운도 거의 여전한 것 같다. 다
만 한탄강의 보우로 그 기운이 많이 수그러들었고 땀이 나오기가 무섭게 강바람이 그들을 털
어가니 땀도 나오는 것을 포기한다.

전망대를 나와 은대리성의 나머지 부분을 살펴보고 연천군보건의료원을 거쳐 전곡읍내로 나왔
다. 이렇게 하여 은대리성 여름 나들이는 그 막을 고한다.

* 은대리성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 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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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신안군의 상큼한 지붕, 압해도 송공산 (송공산둘레길)

신안 압해도 송공산



' 압해도 송공산 봄맞이 나들이 '
송공산 남쪽 숲길
▲  송공산 남쪽 숲길



 

천하를 놓지 않으려는 욕심꾸러기 겨울 제국(帝國)과 그 겨울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려는
정의로운 봄이 막판 다툼을 벌이던 3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신안군(新安郡)의 중
심 섬인 압해도(押海島)를 찾았다.

압해도를 가려면 우선 목포(木浦)로 가야 된다. (무안에서 들어가는 길도 있음) 동트기가
무섭게 영등포역에서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에 나를 담아 남쪽으로 보냈는데, 간밤에 잠을
거의 이루지 못해 눈꺼풀은 백두산보다 훨씬 무거워진 상태이다. 그 무거움에 순응하면서
자다깨다를 수 차례 반복하니 어느덧 목포에 이르렀다. (잠만큼 좋은 축지법은 없음)

점심을 먹기가 애매하여 목포역 부근에서 간식거리를 여럿 사들고 신안군내버스 130번(삼
학도↔압해도 송공항)을 타고 압해도로 들어갔다. 목포와 압해도를 철석같이 이어주는 압
해대교를 건너면 섬의 은하계로 일컬어지는 신안군 땅으로 신안 땅은 처음으로 발을 들여
본다. <바다를 제압하는 섬이란 뜻의 압해도는 면적이 48.95㎢, 인구는 약 6,000명대> 섬
으로 들어서 신안군청과 압해읍내, 대천리를 지나 송공리 상촌에서 두 발을 내렸다.

상촌마을 직전 3거리에서 송공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고 하여 찾아봤으나 딱히 보이
지가 않는다. 분명 지도에는 길이 있다고 나와 있는데, 이정표도 없고 길 비슷한 것도 보
이지가 않으니 송공산이 벌써부터 나를 시험하는 모양이다. 결국 그 숨바꼭질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펼쳐진 수락길을 따라 천사섬분재공원으로 이동했다. 분재공원 옆에는 확실하게
산길이 있으니 거기서 송공산의 품으로 들어갈 요량이었다.

수락길은 송공산 남쪽을 도는 2차선 길로 한쪽에는 송공산이, 다른 한쪽에는 너른 서해바
다가 펼쳐져 있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과 이제 막 겨울에서 해방되는 송공산, 그리고
푸르른 바다까지 3박자가 어우러진 착한 길로 지나가는 차량도 별로 없어 내가 이 일대를
잠시나마 장악한 기분이다. 이따금 지나는 차량이 그 흥을 깨뜨려 문제긴 하지만 워낙 고
적한 곳이라 금세 회복이 된다.


▲  오늘도 평화로운 압해도 앞바다 (수락길에서 바라본 모습)



 

♠  송공산(宋孔山) 입문

▲  1004 기둥을 내세운 천사섬분재공원(송공산분재공원) 정문

수락길을 1km 정도 들어가니 송공산의 상큼한 꿀단지인 천사섬분재공원이 마중을 나온다. 입
장료가 없다는 말이 있어 설레는 마음으로 다가섰으나 조금은 비싼 입장료가 나의 빈약한 호
주머니를 차갑게 노려보고 있었다.
입장료의 압박에 정문 양쪽에 가로로 세워진 '1004' 기둥이 참으로 사악하게 보였다. 여기서
공원 이름인 천사(1,004)는 천주교에서 말하는 그 천사가 아니라 신안군의 섬 갯수를 뜻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800여 개로 알려졌으나 200개가 더 추스려져 1,004개가 되면서 신안군은
천사(1,004)의 섬임을 무척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후로도 20여 개의 섬이 더해지면서 대략
1,025개로 파악되고 있다. <유인도 72개, 무인도 953개> 그럼에도 천사섬의 고장임을 계속 강
조하고 있으며, 압해도와 암태면을 잇는 다리의 이름까지 천사대교라 이름을 붙여 천사(1,004
)란 이름에 지나친 집착을 보인다.

분재공원에서는 그냥 화장실(매표소 뒤쪽에 있음)만 구경하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정문에서
동쪽으로 4분 가량 가면 송공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송공산 남쪽 기점)이 손을 내미니 여기서
부터 약 3시간에 걸친 송공산 더듬기가 시작된다.


▲  천사섬분재공원 앞 포구와 주차장

▲  송공산으로 들어서다. (팔각정 방면 소나무숲길)

분재공원 동쪽(송공산 남쪽 기점)에서 송공산 팔각정으로 오르는 길은 경사가 느긋하다. 시작
부터 키가 작은 소나무들이 긴 행렬로 마중을 하며 청정한 솔내음을 불어주고, 뒤를 돌아서면
서해바다가 장엄하게 나타나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마음에 한 줄기 해조음을 선사한다.


▲  잠깐 뒤를 돌아보는 여유 ~~ 송공산 소나무숲과 서해바다

▲  송공산 소나무숲길과 천사섬분재공원의 녹색 철책
분재공원이 엄연한 유료의 땅이라 저렇게 철책을 쳐놓아 무료의 땅과
팽팽히 경계를 그었다.

▲  소나무숲길 속으로 ~~~ ①

▲  소나무숲길 속으로 ~~~ ②

▲  소나무숲길 속으로 ~~~ ③ 팔각정 밑 부분

▲  송공산 팔각정

팔각정은 송공산 남쪽 능선 해발 170m 지점에 자리해 있다. <송공산 남쪽 기점(분재공원 동쪽
)에서 20분 정도 걸림> 이 땅에 흔한 기와집 팔각정이 아닌 8각 모습의 단출한 건물로 남쪽으
로 분재공원과 서해바다, 목포의 여러 섬들(율도, 외달도, 달리도), 해남 화원면(화원반도),
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신안군의 여러 섬들이 싹 시야에 들어와 조망이 아주 일품이다.


▲  팔각정에서 굽어본 천사섬분재공원과 서해바다

▲  확대해서 살펴본 유료의 공간, 천사섬분재공원

▲  팔각정에서 바라본 목포의 여러 섬(외달도, 달리도)과
해남 화원면(화원반도) 지역

▲  팔각정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길
구름 위를 거닐듯 느긋하게 이어진 능선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비로소
송공산 정상에 이른다.

▲  정상 가는 길에서 만난 돌탑
산을 찾은 중생들이 소망을 담아 얹힌 막돌이 모이고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  정상 서쪽 능선부에 자리한 김해김씨 정재 김수영(靜齋 金守榮) 묘

정상 서쪽 직전에는 정재 김수영의 무덤이 누워있다.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무덤 자리
만큼은 아주 기가 막히게 좋다. 산바람과 바다바람이 서로 어우러진 현장으로 조망 또한 휼륭
하며 송공산 서쪽과 남쪽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어 무조건 거쳐가야 된다. 그러다보
니 산꾼의 왕래가 잦아 조금은 시끄럽긴 해도 외로움은 덜 할 것이다.


▲  송공산 정상 (해발 231m)

압해도 서부에 자리한 송공산은 압해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이자 신안군의 주요 지붕의
하나이다. 북쪽과 남쪽은 바다에 접해있고, 서쪽은 송공리 들판, 동쪽은 대천리 들판과 맞닿
아 있는데 평평한 곳에 홀로 솟아 있어 제법 존재감이 커 보인다.

송공산은 산세가 조촐하고 완만하여 어디서든 30분 정도면 충분히 정상에 닿는다. 주변이 온
통 평야와 바다라 조망이 거의 독보적인 수준으로 산 허리에는 명품급 둘레길이 닦여져 있다.
정상 주변에는 옛 송공산성(宋孔山城, 신안군 향토자료 16호)의 흔적이 아련하게 남아있는데
석성과 토성(土城)으로 이루어진 230m 규모의 조그만 테뫼식 산성(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성)
이다.
축성시기는 멀리 가면 삼한시대(마한), 적당히 가면 백제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부속시설
로 우물 1기가 발견되었다. 해양대국 백제 시절에는 압해도에 아차산현(阿次山縣)이 설치되었
는데, 송공산성이 그 중심지로 보이며, 산성 동쪽 대천리 일대에서 고분 58기가 발견되어 압
해도 지방 세력이나 관리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후삼국시대에는 압해도 지방 세력인 능창<能昌, 일명 수달(水獺)>이 서남해를 주름잡고 있었
다. 그는 송공산성을 본부로 하여 전남 서남해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후백제(後百濟)를 세운
견훤(甄萱, 진훤)의 그늘로 들어가면서 그 넓은 서남해가 싹 후백제의 영역이 된다. 허나 후
백제 조정과 서남해/나주 세력과의 갈등이 나날이 커져가자 이를 간파한 후고구려<태봉(泰封)
>의 왕건(王建)은 이간책을 구사해 나주 세력(오씨)과 서남해 상당수의 세력들이 후고구려에
붙어버렸다.
허나 압해도와 안파, 갈도, 염산 지역은 나주를 점령한 후고구려군과 그들에게 붙은 나주/서
남해 세력과 싸우며 후백제의 후방을 지켰다. 허나 910년 능창이 왕건의 수군에 대패하여 철
원(鐵原)으로 압송되면서 압해도까지 후고구려에게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고려와 몽골과의 전쟁이 한참이던 1256년에는 몽골 수군 70여 척이 압해도를 공격했는데, 관
군과 지역 주민들이 송공산성에서 항전하여 그들을 때려잡고 서남해를 지켰다.

이렇듯 압해도와 서남해 방어의 듬직한 요새였던 송공산성은 이후 중요성이 상실되어 역사에
서 장렬히 사라졌고 일부 흔적만 겨우 남아있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다. 인간이 만든 것이 제
아무리 대단하다한들 장대한 세월과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모래성에 불과한 것이다.


▲  송공산 정상에서 바라본 송공리와 천사대교

압해도 서쪽 끝(송공리)과 암태도(巖泰島)를 이어주는 천사대교의 등장으로 암태도와 자은도,
추포도, 팔금도, 안좌도까지 한반도와 간접적으로 연륙되어 더 이상 불편한 해상교통에 의지
하지 않고 육상교통으로 흔쾌히 이동이 가능해졌다.


▲  송공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는 산길
정상에서 동쪽 하산길은 경사가 잠깐 각박하다. 그 구간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면
완만한 산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  송공산 둘레길 빙글빙글 돌기

▲  송공산 동쪽 능선길

정상에서 동쪽으로 10여 분 내려가면 송공산 둘레길과 만나는 갈림길에 이른다. 여기서 동쪽
으로 10분을 더 내려가면 송공산 주차장(송공산 동쪽 기점)으로 원래는 정상을 찍고 주차장으
로 바로 내려가려고 했다. 허나 둘레길 북쪽 구간에 출렁다리가 있다고 하여 '이곳에도 그런
다리가 있었나~?'
호기심이 가득 피어나 계획을 조금 수정해 그곳까지만 일단 가보기로 했다.
허나 그곳까지만 간다는 것이 그만 둘레길을 완전히 1바퀴 돌고 말았다. 출렁다리에서 길을
접기에는 90% 아쉬워 계속 전진을 했고 생각보다 너무 잘생긴 송공산둘레길에 퐁당퐁당 빠져
버린 것이다.


▲  송공산둘레길 동북쪽 구간 ①
둘레길을 천천히 1바퀴 돌면 1시간 10~30분 정도 걸린다. 둘레길 북쪽 구간에는
출렁다리도 있고, 차마고도 비슷하게 생겨먹은 벼랑길도 있으며, 어디서든
서해바다가 바라보여 마치 1폭의 수채화 속을 거니는 기분이다.

▲  송공산둘레길 동북쪽 구간 ②

▲  송공산둘레길 북쪽 구간 (출렁다리 이전)

▲  드디어 만난 송공산 출렁다리

송공산 출렁다리는 이 땅에 흔한 흔들다리(출렁다리) 스타일이다. 협곡 위에 걸쳐진 것으로
폭은 성인 2인분 크기이며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다리가 반응을 보여 염통을 은근히 건드
린다. 살살 건너면 다리도 살살 반응을 하지만 격하게 뛰어다니면 다리도 같이 흥분하여 출렁
출렁 파도를 친다. 바로 그런 맛으로 출렁다리나 흔들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  정면에서 바라본 출렁다리

▲  출렁다리 속으로~~


▲  송공산 북쪽 자락에서 바라본 서해바다와 매화도(梅花島)

▲  벼랑이 펼쳐진 송공산둘레길 북쪽 구간 ①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진 벼랑길로 바로 옆은 경사가 급한 벼랑이다. (낭떠러지 수준은 아니지
만 경사가 60도 이상 됨) 어떤 이들은 이 길을 두고 송공산의 차마고도라 부르기도 하는데 출
렁다리를 지나면 만날 수 있는 구간으로 암벽과 소나무, 하늘, 바다가 서로 절묘를 이룬다.


▲  벼랑이 펼쳐진 송공산둘레길 북쪽 구간 ②

▲  송공산둘레길 서쪽 구간에서 바라본 송공리 지역과 천사대교

▲  송공산둘레길 서쪽 구간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그 너머로
팔금도, 안좌도(安佐島)가 희미하게 모습을 비춘다.

▲  송공산 우물터 (송공산둘레길 서쪽 구간)
옛 송공산성의 목마름을 해소해주던 우물로 여겨진다. 지금은 물 대신
누렇게 뜬 낙엽들이 가득 들어가 앉아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한다.

▲  송공산 서쪽 능선길

송공산둘레길을 동에서 서로 거의 절반(약 2.5km 정도)을 돌았다. 둘레길을 1굽이 돌 때마다
풍경은 조금씩 모습을 달리하여 마치 움직이는 거대한 수채화 같다. 길이 너무 곱다보니 걷는
길이 지루하지 않아 만약 늦가을이나 봄의 한복판에 왔다면 2~3바퀴를 돌았을 지도 모른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서쪽 능선길과 만나는 갈림길에 이르자 잠시 고심을 했다. 둘레길을 마저
돌면 지금까지 온 거리 만큼 더 움직여야 되고, 능선길로 진입해 정상으로 질러가면 길은 절
반 가까이 줄어든다. 어느 것이 좋을까 망설이다가 일단 능선길로 접어들기로 했다.


▲  송공산 서쪽 능선에서 바라본 바다와 천사섬분재공원(가운데 부분)

▲  팔각정에서 남쪽 기점으로 내려가는 길 (앞서 올라왔던 길)

서쪽 능선길을 거닐던 중, 낯이 익어보이는 쉼터가 마중을 나왔다. 알고보니 앞서 남쪽 기점
에서 올라갔을 때 만났던 그 팔각정으로 어쩌다보니 산을 1바퀴 돌아 이곳으로 다시 온 것이
다.
팔각정에서 다시 정상으로 갈까 하다가 더 이상의 재방송은 별로 안땡겨 남쪽 기점(분재공원
동쪽)으로 향하는 산길을 다시 내려가다가 중간에서 잠시 작별을 했던 둘레길로 접어들었다.


▲  다시 만난 둘레길 (둘레길 남쪽 구간)

▲  송공산둘레길 남쪽 구간 ①
송공산은 유난히 소나무가 많다. 소나무의 뫼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이러다가 송공의 '송(宋)'이 소나무송(松)으로 바뀌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  송공산둘레길 남쪽 구간 ②

▲  송공산둘레길 남쪽 구간 ③

▲  송공산둘레길 남쪽 구간 쉼터

▲  송공산둘레길 남쪽 구간에서 바라본 천하
(율도, 외달도, 달리도, 해남 화원반도)

▲  송공산둘레길 동쪽 구간 ①

▲  송공산둘레길 동쪽 구간 ②

▲  송공산둘레길 동쪽 구간 ③

▲  송공산 동쪽 기점 (송공산 주차장, 등산로입구)

둘레길 남쪽 구간과 동쪽 구간 약 1.5km를 추가로 도니 다시 낯익은 곳이 마중을 한다. 정상
에서 내려와 둘레길로 진입했던 바로 그곳이다. 출렁다리만 보려고 나선 것이 일이 몇 배로
커져 이렇게 산을 1바퀴 돈 것인데 둘레길은 서남부 구간(약 1km)을 제외하고 거의 3/4를 돌
았다.
<천사섬분재공원→송공산 남쪽 기점→팔각정→송공산 정상→동쪽 능선길→둘레길 북쪽 구간(
출렁다리)→둘레길 서쪽 구간→서쪽 능선→팔각정→둘레길 남쪽 구간→동쪽 능선길 갈림길→
송공산 동쪽 기점>

동쪽 능선 갈림길에서 동쪽으로 7분 정도 내려가면 주차장이 있는 송공산 동쪽 기점이다. 평
일이라 주차장에는 차량 2대가 낮잠을 자고 있을 뿐, 한적하다.
여기서 목포로 나가는 150번 시내버스가 있으나 배차간격이 거의 2시간에 이르고, 차 시간도
모른다. 막연히 기다리며 희망고문을 하는 것보다 송공산입구까지 내려가 1시간 내외로 오는
130번을 타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을 듯 싶어 기왕 벌인 발품, 10분을 더 팔았다.

송공산입구3거리까지 내려와 130번을 기다렸으나 타이밍이 영 좋지 못해 거의 50분을 기다렸
다. 때마침 바다바람까지 거세게 나를 때려대니 겨울 제국이 다시 도래한 듯, 얼마나 추웠는
지 모른다.
그렇게 피곤과 추위로 막바지 고통을 겪고 있으니 목포 130번이 다가와 입을 벌린다. 반가움
과 미움이 교차되는 그와의 만남, 그에게 나를 담아서 다시 목포시내로 보냈다.

이렇게 하여 서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압해도 송공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후의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송공산 소재지 :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읍 송공리


▲  송공산과 작별을 고하다. 송공산입구로 내려가는 수락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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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5월 1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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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무룡산 강동사랑길, 어물동마애여래좌상, 동해바다 당사항 나들이 (길상바위, 용바위)

울산 겨울 나들이 (어물동마애여래좌상, 강동사랑길, 당사항)



' 울산 겨울 나들이 '
(강동사랑길, 어물동 마애여래좌상, 당사항)

어물동 마애여래좌상

▲  어물동 마애여래좌상

당사해양낚시공원과 동해바다 어물동 마애여래좌상

▲  당사해양낚시공원과 동해바다

▲  어물동, 주전 앞바다



 

늦가을을 내치고 천하를 접수한 겨울 제국이 한참 세력을 일구던 12월의 한복판, 남동임
해지역(부산, 울산)을 찾았다.
천하 제일에 항구도시이자 이 땅의 두 번째 대도시인 부산에 볼일(친척 문상)이 있어 오
후 늦게 급히 내려가 이튿날 발인과 후속 과정까지 지켜보고 친척들과 작별을 고했다.
비록 경조사로 오긴 했지만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못지나친다고 기왕 부산까지 왔으니 그
냥 올라가는 것도 좀 허전하다. 하여 부산과 기장(機張) 지역에서 정처를 물색해 보았으
나 부산을 50번 넘게 들락거린 터라 부산 사람들도 거의 안가는 숨겨진 명소까지도 많이
가본 상태이다. 그래서 딱히 끌리는 곳이 없어 울산까지 시야를 올렸다가 적당한 미답처
(未踏處)가 걸려들어 그곳으로 흔쾌히 길을 향했다.

울산(蔚山) 시내에 들어서 울산시내버스 411번(태화강역↔신명)을 타고 학성공원과 염포
동, 남목, 주전을 지나 금천마을에서 두 발을 내린다.
정류장 동쪽에는 이름만 들어도 무척이나 반가운 동해바다가 살짝 넝실거리고 있고 육지
와 바다의 경계에는 자갈돌이 깔린 해변이 조용히 누워있다. 그리고 전혀 생각치도 못했
던 존재의 안내문이 나의 눈을 붙들어맨다.


▲  금천마을 정류장 동쪽에 펼쳐진 동해바다



 

♠  강동사랑길 7-B코스(소망의 사랑길)와 길상바위 여근곡

▲  강동사랑길 7-B코스 (누운소나무 부근)

그 생각치도 못했던 존재는 바로 강동사랑길이다. 울산 북구에서 어물동과 당사동, 정자동 지
역(이들은 행정동명 '강동동'의 관할 동네임)의 산과 바다, 들녘, 개천, 시골길을 엮어서 야
심차게 닦은 도보길로 강동동의 이름을 따서 강동사랑길이라 했다.
코스는 크게 7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징은 이름에 모두 '사랑'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다. 1
코스는 '믿음의 사랑길', 2코스는 '연인의 사랑길', 3코스는 '윤회의 사랑길', 4코스는 '부부
의 사랑길', 5코스는 '배움의 사랑길', 6코스는 '사색의 사랑길', 그리고 7코스는 '소망의 사
랑길'로 이름이 하나 같이 사랑스럽고 정감을 느끼게 한다.

강동사랑길 안내도를 보니 내 목적지인 어물동 마애불까지 7-B코스가 닦여져 있다. 그러니 자
연스럽게 그 코스의 신세를 지면 된다. 강동사랑길 7코스인 소망의 사랑길은 A와 B, 2개의 코
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A코스(3,4km)는 금천마을에서 복골, 까치골을 거쳐 다시 금천마을로,
B코스(2.7km)는 금천교에서 누운소나무, 무룡산, 어물동 마애불. 어물천을 거쳐 금천마을로
돌아온다. 이 코스는 산과 들, 개천, 문화유산이 어우러진 길이다.


▲  누운소나무

강동7-B코스로 들어서니 하천에 바짝 누운 소나무가 마중한다. 하천을 향해 몸을 푹 숙인 그
를 보니 목이 어지간히도 탔던 모양이다. 그렇게 물을 향해 몸부림을 하다가 하늘로 곧게 크
지 못하고 누워 버린 소나무가 되버린 것이다. 허나 그 모습도 나름 운치가 있으며 그덕에 강
동사랑길의 소중한 명물로 이름을 남겼다. 만약 곧게 자랐다면 강동사랑길 안내도에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나이는 100년 내외로 여겨지며, 철없는 사람들의 발에 다치지 않도록 밑둥 위에 다리를
놓아 그를 배려했다.


▲  어물동 마애불로 넘어가는 무룡산 동쪽 자락

누운소나무를 지나면 강동7코스는 2갈래로 갈린다. 직진하면 A코스(복골 방면)이고, 왼쪽 개
천을 건너면 B코스(어물동 마애불 방면)인데, 그 개천을 건너 마치 장대한 성벽처럼 버티고
있는 무룡산 동쪽 산줄기를 넘어야 된다. 높이야 얼마 되지 않지만 초반부터 각박한 경사가
시작되니 은근히 기운이 빠진다. 게다가 일몰시간까지 눈치를 주고 있어 (그때가 16시였음)
길을 서둘러야 된다.
다행히 저 경사만 오르면 약간의 오르락과 내리락이 있을 뿐, 길은 느긋해지며, 평일이라 인
적이 너무 없어 한적하기 그지 없다.


▲  강동사랑길 7-B코스 무룡산(舞龍山) 코스 시작점

▲  솔내음이 너불너불하는 무룡산 산길 (강동7-B코스)

▲  무룡산 산길에 닦여진 108번뇌계단
오래된 마애불로 인도하는 산길이라 적당히 계단처럼 다듬어 108계단으로 삼았다.

▲  어물동의 명물, 길상바위 (가운데 틈이 여근곡)

108번뇌계단을 올라 산굽이를 하나 넘으면 마애불로 인도하는 내리막길이 급하게 펼쳐진다.
그 길을 내려가면 마애불을 품은 방바위와 거대하게 생긴 길상바위가 신비로운 모습으로 마중
을 한다.

울퉁불퉁한 피부를 지닌 길상바위의 가운데 틈이 여근곡으로 그 모습이 여인네의 은밀한 부분
처럼 생겨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나는 순수한(?) 사람이라 잘 모르겠지만 얼핏 봐도 좀 비
슷하게는 보인다. 대자연이 심술궂게(?) 빚어놓은 현장으로 이런 곳은 반드시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민간신앙의 터로 쓰이기 마련이다. 하여 오랫동안 아들을 기원하던 기자
신앙(祈子信仰)과 성기신앙(性器信仰), 용왕신앙(龍王信仰)의 현장으로 쓰였고, 신라 후기에
어물동 마애불이 들어선 이후에는 불교까지 가세하여 여러 신앙이 두루 어우러진 이색 현장이
되었다. 마치 서울 인왕산(仁王山)의 선바위처럼 말이다.
(☞ 인왕산 선바위글 보러가기 )

또한 길상바위는 용왕당(龍王堂)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데, 이는 바다와 가깝기 때문이다. 현
재는 방바위 밑 바위에 용왕당을 두고 있으며, 이런 바위에는 옛 사람들이 붙여놓은 재미난
전설이 있기 마련이다. 그 보따리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먼 옛날 주전 앞바다 섬에는 하느님(하늘님)의 명을 받고 아그락할머니가 내려와 살고 있었다
. 비바람이 불어 높은 파도가 치거나 해적이 쳐들어오면 할머니가 친히 막아주어 바닷가 마을
(금천, 당사, 구암, 주전) 사람들은 안심하며 생업에 종사했다.
아그락할머니가 지켜주는 당사마을에는 뱀이, 구암마을에는 거북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할
머니를 도우며 서로 용이 되려고 경쟁했다. 그들을 오랫동안 살펴본 할머니는 뱀이 더 바람직
해보여 그를 용으로 상승시켜 달라고 하늘에 청했다. 그 청을 받은 하느님은 뱀과 거북이를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해 모두 용으로 승진시켜 주었다.
뱀과 거북은 각자의 영역에서 승천하여 각각 청룡과 황룡이 되었는데, 용의 필수품인 여의주
(如意珠)를 꼭 찾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평가에서 실격이 되는 모양이다. 하여 여의주가
숨겨진 무룡산을 샅샅이 살폈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어느덧 마애불이 깃든 방바위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마애불의 위엄에 단단히 이끌려 여의주를 포기하고 마애불의 수호신을 자처하
여 이곳에 아예 눌러앉았다고 한다.
청룡과 황룡이 여의주를 찾느라 법석을 떨며 춤을 추었던 산은 용이 춤을 추었다 하여 무룡산
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용왕당 청룡과 황룡, 마애불에게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하면 소원이 이
루어진다고 한다. 특히 자손을 얻지 못한 이들이 기도하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기자신앙의
현장으로 애지중지 되었다.


▲  피부가 매우 거친 길상바위와 여근곡 윗쪽

▲  어물동 마애불을 품은 방바위의 뒷통수
바위와 마애불이 남쪽만 죽어라 쳐다보고 있으니 내가 이렇게 뒤로 잠입한 것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  어물동의 명물, 아그락 돌할매

방바위 옆에는 '아그락 돌할매'라 불리는 큰 돌이 있다. 돌 위의 움푹 패인 공간에는 주먹만
한 돌이 놓여져 있는데, 피부가 아주 맨들맨들하여 주먹돌로 오랜 세월 밀었음을 보여준다.

이 돌은 이 지역의 오랜 수호신인 아그락 할매의 화신(化身)으로 여기고 있어 큰 돌 자체를
아그락돌할매라 부른다. 자신의 소망을 들이밀고 돌을 밀었다가 당길 때 돌이 무겁거나 달라
붙어 움직이지 않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하여 이곳을 찾은 중생들은 주먹돌로 열심
히 돌을 문질러 돌할매에게 소원 접수 여부를 알아본 것이다.
언제부터 이 돌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물동 마애불과 함께 해왔다면 무려 1,000년이 넘는
다. 주먹돌은 하도 문질러서 맨들맨들하지만 할매돌은 제법 연식이 있어 보인다.

이곳과 비슷한 경우로는 인천 영종도(永宗島) 용궁사(龍宮寺)가 있는데, 그곳은 돌을 민 다음
들어올릴 때 무거움을 느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전한다.

나도 소원거리가 많은 사람이라 돌을 밀고 당겨보았다. 그런데 돌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바위
에 달라붙어 잘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제발 붙어라' 심리상 그런 것인지 실제인지는 분간이
가지 않지만 어쨌든 붙었다. 그렇다면 내 소원은 접수된 것일까? 과연? 허나 인천 용궁사에서
도 돌이 무거움을 느꼈으나 그 소원은 지금까지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이곳이라고 다르
겠는가. 그냥 이렇게 기복(祈福)행위를 하는 것만으로 잠시나마 마음의 평안을 누리라는 뜻이
돌할매의 뜻일 것이다.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괜히 이곳의 명물, 돌할매에게 해코지는
하지 말자.


 

♠  방바위에 깃든 신라 후기 마애불, 어물동(於勿洞) 마애여래좌상
-
울산 지방유형문화재 6호

하늘을 향해 약간 튀어나온 방바위(방바우) 남쪽 면에는 약사불을 중심으로 한 마애삼존상이
두텁게 깃들여져 있다. 가운데 자리한 큰 존재는 약사여래불이며, 좌우에 조그만 존재들은 일
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로 보관(寶冠)에 해와 달이 새겨져 있어 그들의 정체
를 살짝 귀뜀해준다.

약사불은 높이 5.2m, 어깨 폭 2.9m로 고된 세월에 많이도 울었는지 얼굴은 거의 지워졌다. 허
나 귀와 머리, 입, 코 등은 윤곽이 남아있어 확인은 가능하다. 두터워 보이는 목에는 삼도(三
道)가 그어져 있으며, 몸통은 꽤 단단한 모습으로 옷주름선이 이리저리 그어져 있다.
좌우에 자리한 일광/월광보살 역시 얼굴이 지워져 있으나 얼굴과 눈, 코, 귀, 보관 윤곽은 그
런데로 남아있으며, 바위 모서리에 직각으로 다듬은 흔적이 있는데, 이는 집을 만들고자 서까
래를 걸쳤던 자리라고 한다. 그래서 노천에 자리한 지금과 달리 따뜻한 집에 봉안된 마애불이
었음을 알려준다.

신라 후기에 조성된 마애불로 바로 옆에 자리한 아그락 돌할매와 뒷쪽에 병풍처럼 들어선 장
대한 길상바위, 여근곡과 어우러진 복합 신앙의 현장으로 방바위 자체도 범상치 않은 모습이
라 마애불이 깃들기 전에는 길상바위, 돌할매와 더불어 민간신앙의 현장으로 쓰였을 것이다.
특히 마애불과 길상바위 주변에는 부처의 발자국 모양을 닮은 붉은 불족적(佛足跡)이 여럿 발
견되었는데,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닌 자연산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들을 상대로 숨은그림찾기
를 벌였으나 눈이 나쁜 것인지, 마음이 나쁜 것인지, 불족적이 나쁜 것인지 결국 발견하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다음에 다시 와서 도전하라는 마애불의 뜻은 아닐까? 허나 여기까지 언제
또 오겠는가? 아직도 천하에 미답처가 은하계의 별처럼 수두룩하여 나의 목을 죄거늘.

▲  약사불 오른쪽의 일광보살

▲  약사불 왼쪽의 월광보살


▲  약간 옆에서 바라본 어물동 마애불과 방바위
마애불에 씌웠던 집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기와를 얹힌 팔작지붕 건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집은 장대한 세월 앞에 훌쩍 녹아 없어지고 단단한
바위와 마애불만 남아 자리를 지킨다.

▲  선사시대 사람들의 오리무중 낙서판, 마애사 암각화

이곳에 왔을 때는 오로지 어물동 마애불만 알고 있었고, 그 마애불만 생각하고 왔다. 그런데
전혀 머리 속에 없던 존재들을 덤으로 보게 되었다. 강동사랑길도 그렇고, 길상바위와 여근곡
, 아그락돌할매, 그리고 암각화까지, 그야말로 마애불이 내게 건네준 두둑한 선물꾸러미였다.
이런 뜻밖에 추가 옵션을 받을 때는 참 기분이 좋다.

마애불 밑 바위에 자리한 암각화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남긴 낙서가 깃들여져 있다. 주술적인
흔적인 성혈(聖穴)과 수로(水路), 별자리 모양 등이 있다고 하며, 부귀와 장수를 발원한 거북
형상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볼 때는 그저 굵직한 주름선만 가득 보인다. 어쨌든 수수께
끼의 오래된 돌판으로 그를 통해 이곳 일대가 옛 조선(朝鮮)이 천하를 호령하던 청동기시대부
터 신앙의 현장으로 쓰였음을 알려준다.

이 암각화는 마애사 승려가 발견했는데, 현재 주위로 금줄을 쳐놓아 암각화를 보존하고 있으
며, 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  마애사 주차장에서 어물동 마애불로 인도하는 'S'라인의 오르막길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S라인이 아니던가..


▲  마애불 밑 바위에 자리한 석굴 기도처, 용왕당
넉넉하게 벌어진 바위 틈에 용왕의 거처를 닦아 용왕당으로 삼았다.

▲  밑에서 바라본 어물동 마애불 주변
밑에 보이는 바위가 용왕당, 석축이 깔린 중간 바위가 방바위와 마애불,
가장 윗쪽에 길상바위가 자리한다.

▲  주차장에서 바라본 마애불 주변, 마애불로 인도하는 문과 계단

▲  어물동 마애불을 지키는 조그만 현대 사찰 마애사(磨崖寺) <2015년>

마애불 밑에는 그를 든든한 밥줄로 삼은 마애사가 있다. 오로지 그를 바라보는 절집이라 이름
또한 마애사라 했는데, 2008년에 창건되었으며, 불법으로 절을 등록하고 우물을 파는 등 말썽
이 적지 않아 2010년에 울산 북구청에서 행정대집행으로 강제 철거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타결이 잘되어 철거는 면했고, 승려 휴암이 신도와 불교계의 도움을 받아 주변 4,000
여 평의 땅을 매입, 정식으로 절 등록을 하여 2011년 10월 다시 문을 열었다. 이때 금개구리
가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4~5동 정도의 집과 바위 석굴을 다듬은 용왕당 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연꽃을 심은 연못을 갖추어 여름에는 연꽃의 향연을 선사하며, 마애불과 주변 바
위에 나타났다는 불족적을 내세워 약사기도도량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 어물동 마애여래좌상 소재지 : 울산광역시 북구 어물동 산121 (마애사 ☎ 052-209-0255)


▲  강동사랑길 7-B코스 (어물동 시골길)

어물동 마애불을 둘러보고 강동7-B코스의 나머지 구간(어물천, 어물동 시골길)을 따라 금천마
을로 나왔다. 이 구간은 도로와 비포장 시골길, 어물천 둑방길로 이루어져 있는데, 어물천에
는 갈대가 바닷바람에 살랑살랑 춤을 추고 가을 수확이 끝난 어물동 들녘은 겨울잠을 자며 살
며시 봄을 잉태하고 있다.


▲  강동사랑길 7-B코스 (어물천 구간)

▲  오래된 팽나무(울산 보호수 16호)와 금천마을 서낭당

강동7-B코스 어물천 구간을 걷다보면 잠시 어물천 남쪽으로 길이 넘어갈 때가 있다. 그때 논
두렁 한복판에 오래된 팽나무 하나가 '잠시 나좀 보고 가소!' 눈짓을 보낸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서니 팽나무와 함께 금천마을 서낭당이 나를 맞는다.

팽나무는 느티나무와 더불어 귀신이 좋아하는 나무라 하여 마을 신목(神木)으로 많이 삼는다.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2000년 10월) 추정 나이가 26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280년 정도 되며,
높이는 약 20m 정도, 둘레는 3.7m이다. 오랜 세월 금천마을을 지키던 나무로 그의 그늘에는
현대식으로 지어진 기와집 서낭당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으며, 그들 주위로 담장이 둘러져 혹
여 모를 나쁜 기분을 경계한다.

* 팽나무 소재지 : 울산광역시 북구 어물동 152


▲  굳게 닫힌 금천마을 서낭당
시대가 변하면 서낭당도 마지 못해 변하는 법, 마치 현대 가옥과 같은 모습으로
마을 수호신을 봉안하고 있다.


 

♠  동해바다 거닐기 (용바위, 당사항)

▲  해질녘 금천마을 몽돌해변

어물동 마애불을 둘러보고 다시 금천마을 정류장으로 되돌아왔다. 지금까지는 산과 들녘을 돌
아다녔으니 이제는 바닷가에 온 기분도 낼 겸 바닷가를 거닐기로 했다. 원래는 정자동으로 넘
어가 주상절리해안을 보려고 했으나 햇님이 바로 꼴까닥 직전이라 여기서 당사항까지만 둘러
보고 오늘 나들이를 흔쾌히 끝내기로 했다.

금천마을 해변에는 몽돌이 가득 입혀져 있다. 동대해(東大海)는 파도로 몽돌을 살며시 어루만
지고, 그들의 손길을 받은 몽돌은 더욱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윤기를 낸다. 한여름에 왔다면
바다와의 스킨쉽도 가능하겠지만 혹독한 겨울 제국 시절이라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한다. 아무
리 따뜻한 남쪽 지방이라고 해도 거의 0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해변을 따라 당사항 쪽으로 걷다보면 용바위가 나오고, 바로 당사해양낚시공원이 모습을 드러
낸다.


▲  바다와 몽돌과의 끊임없는 속삭임 - 금천마을 몽돌해변

▲  금천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바라본 금천~주전 해변

▲  바다를 향해 팔을 뻗은 당사해양낚시공원 구름다리

용바위를 지나면 동대해를 향해 팔을 뻗은 다리가 나온다. 넘섬이라는 조그만 바위섬까지 이
어진 220m의 다리로 이 다리가 당사해양낚시공원이다. 즉 바다 구경과 낚시를 위한 해상공원
이다. 그 역시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보너스 같은 존재인데, 울산 북구청에서 35억을 들여 만
든 것으로 2013년 7월 26일에 문을 열었다.
당사마을의 수익 증대와 동대해를 옆에 낀 강동 지역의 관광활성화를 위해 조성된 것으로 처
음부터 유료의 공간으로 운영되었다. 달랑 보이는 것이 전부인 저 구름다리가 말이다. 그래도
초창기에는 1달에 1천 명 내외로 왔으나 입장료의 한계와 주변에 널린 낚시터(당사항 방파제)
로 인해 입장객 수가 나날이 줄어 세금을 축내어 지은 현장이라며 언론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당사어촌계에서 위탁관리를 하고 있으며, 구름다리(낚시잔교, 156m)와 진입도교(64m), 해상전
망대 2개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매년 1월 1일 공원을 중심으로 해돋이행사가 절찬리에 열린
다.

낚시공원 시작이야 어쨌든 당사항의 명물이니 한번 들어가볼까 했으나 여전히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게다가 매표소가 다리 직전에 버티고 서 있어 바다로 가지 않는 이상은 들어가기도
힘들다. 어차피 여기서 보이는 것이 전부인데, 바다와 더 가까워지는 것 외에는 매력이 없어
굳이 들어가지 않았다.


▲  용바위 조망대에서 바라본 당사해양낚시공원 구름다리

▲  당사항에서 바라본 당사해양낚시공원 구름다리

▲  용바위조망대에 세워진 용의 형상

당사해양낚시공원 매표소 맞은편에 낚시도구를 파는 가게가 있고, 그 옆에 용의 형상으로 인
도하는 계단이 있다. 그 계단을 오르면 용바위 조망대인데, 조망대 한복판에 용이 용트림을
하고 있고, 그 꼬랑지 바로 뒷쪽에 용바위가 있다.

용바위는 바닷가에 있는 큰 바위로 그 꼭대기에 소나무가 우거져 있는데, 이미 개인 소유가
되버려 무덤이 자리해 있다. 명당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바닷가 바위까지도 무덤으로 만들어
버린 것. 그래서 용바위 꼭대기는 아쉽게도 발을 들일 수가 없다.


▲  서쪽에서 바라본 용바위

용바위는 당사마을의 오랜 명물로 그에 걸맞게 그럴싸한 전설이 깃들여져 있다. 내용이 앞서
언급했던 어물동 마애불의 아그락할머니 전설과 좀 비슷한데, 아무래도 아그락할머니 전설을
다소 따라한 듯 싶다.

아주 먼 옛날, 하늘나라에 큰 뱀과 거북이가 살았다. 그들은 워낙 사이가 좋지 않아 볼 때마
다 으르렁거리고 싸웠는데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옥황상제가 열받은 나머지 지상으로 내쫓았다.
누가 더 나쁜지 확인할 수가 없어 모두 벌을 내렸는데, 거북은 뱀을 궁지에 몰고자 일부러 고
개를 안으로 당겨놓고 말없이 지냈다. 그러니 옥황상제는 거북이를 더 믿고 뱀을 더 의심하게
되었다.
거북이의 간계에 열이 받은 뱀은 계속 인내한 결과 끝내 승천하게 되었고, 벼락이 꽈당 내리
치니 용바위가 둘로 갈라지면서 용은 하늘로 올라갔다. 이때부터 바위 때문에 막혔던 물길이
뚫리니 사람들은 용바위라 불렀다. 즉 전설의 결론은 착한 쪽은 뱀, 나쁜 쪽은 거북이다.

▲  용바위 조망대에서 바라본 용바위

▲  바로 앞에서 바라본 용 형상


▲  용바위 조망대에서 바라본 동대해와 주전, 금천 앞바다

▲  동대해에 몸을 기댄 당사항

▲  당사항 남쪽 부분

동대해를 든든한 후광으로 삼은 당사항은 울산 당사동(堂舍洞)에 자리한 조그만 항구이다. 지
방 어항(漁港)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항구에는 수산물 직판장이 있어 싱싱한 물고기를
구입할 수 있다. 그리고 낚시터로도 유명하여 방파제와 해양낚시공원이 주요 포인트이다.
강동사랑길 6코스가 당사항을 지나가며, 주변에 500년 묵은 느티나무가 있고, 근래 마을 골목
과 담벼락에 그림이 그려져 조그만 벽화마을을 이룬다.

내가 당사항에 이른 시간은 17시가 넘은 시간, 일몰 바로 직전이다. 제아무리 천하 제일의 맷
집을 자랑하는 햇님이라 한들 겨울 제국의 눈치는 보는 모양이다. 그 눈치에 못이겨 그 커다
란 몸뚱이를 바다 속에 있을 것 같은 그만의 공간으로 들어가 숨어버리고 달이 그 자리를 대
신해 땅꺼미를 내린다. 어둠이 밀려오자 방파제와 항구의 조명시설이 일제히 몸을 불사르며
조금이나마 어둠을 몰아낸다. 우리는 그것을 야경(夜景)이라고 부른다. 이곳 야경이 그리 대
단하지는 않지만 나름 조촐히 불빛을 뿜어내며 당사항의 밤풍경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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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구에 몸을 기대 고된 몸을 쉬는 어선들과 그들을 지켜주는 방파제

▲  어둠이 밀려온 당사항

▲  당사항의 든든한 갑옷, 방파제와 하얀 등대

▲  다양한 색채로 어둠을 긴장시키는 방파제 등
방파제 등에는 울산의 상징인 고래 형상이 귀엽게 표현되어 있다.

▲  방파제에서 바라본 당사항과 수산물직판장

당사항을 둘러보니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햇님의 기운은 싹 사그라들고 완전 어둠의 세상이 되
었다. 햇님도 그의 집으로 돌아갔으니 나도 내 제자리로 돌아가야겠지. 게다가 다음날부터 날
씨가 더 추워진다고 하니 더 돌아다닐 엄두가 나질 않는다. 이럴 때는 그저 우리집 이불 속이
최고다.

당사항을 끝으로 울산 겨울 나들이는 미련없이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당사항 소재지 : 울산광역시 북구 당사동 378-3 (용바위1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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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3월 22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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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한양도성, 남산서울타워, 목멱산봉수대, 백범광장)

 


'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

▲  남산서울타워

▲  남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  백범광장 주변


 

여름이 빠르게 익어가던 6월 끝 무렵,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南山)을
찾았다.
서울 한복판에 누워있는 남산은 내 어릴 적 즐겨찾기 장소로 고등학교 1학년까지 남산 인
근에 살면서 뒷동산 삼아 활보했던 추억 깊은 현장이다. 나는 남산의 물을 먹고 자랐으며,
남산에서 친구들과 뛰어놀고, 남산 정상에 올라 천하를 바라보며 나름대로의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 이후 남산과 먼 곳에 살게 되면서 다소 뜸해졌고, 가끔 찾는 정도에서 머물다가
2015년 이후 오후와 저녁, 평일, 휴일을 가리지 않고 발걸음을 크게 늘리고 있다.

햇님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14시, 동대입구역(3호선)에서 출발하여 장충단공원을 거쳐 국
립극장으로 이동했다. 국립공원교차로에 이르니 남산의 너른 품으로 인도하는 남산공원길
이 가파른 경사를 들이밀며 우리를 맞이한다.


 

♠  남산 품에 안기다 ~~~

▲  남산공원길 (남산북측순환로 입구)

국립극장 정문을 지나면 남산의 대동맥인 남산공원길이 시작된다. 길은 2갈래로 북쪽 길은 남
산북측순환로 입구에서 남산 북쪽 자락을 거쳐 회현동(會賢洞) 소파로로 이어지며, 예전부터
오로지 뚜벅이 전용 산책로로 이용되어 차들의 바퀴 자국을 철저히 금하고 있다. 크게 오르락
내리락 부분이 없는 느긋한 길로 장충단공원과 필동(筆洞), 남산1호터널로 내려가는 길이 있
으며,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諸葛亮)을 봉안한 와룡묘(臥龍廟)란 오래된 사당이 있다.
그리고 남쪽 길(2차선)은 남산 정상과 남산서울타워로 인도하는 길로 차량 통행이 가능하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왕복 운행이었으나 일방통행으로 변경하면서 '국립극장→남산서울타워→
남산도서관' 방향으로만 바퀴를 굴릴 수 있다.

내가 남산에서 무척 가까운 신당동과 금호동(金湖洞)에 살던 시절, 가족이나 친구와 남산에
물을 뜨러 많이 갔었는데, 가족과 갈 때는 주로 평일 저녁을 이용했다. 그때는 약수터 입구까
지 차를 끌고 가서 약수를 뜬 다음 북측순환로 입구에 있던 차량 매표소까지 후진하여 국립극
장으로 내려갔지. 일방통행로라 그렇게 가는 것은 위법이긴 하나 거리도 그리 길지 않고, 매
표소 아저씨의 쿨한 묵인도 있어서 몇년을 그렇게 했었다.
이후 남쪽 길의 40% 정도를 뚜벅이길로 만들고 남산의 건강을 위해 차량 통행의 크게 제한을
두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반 차량은 절대로 바퀴를 들일 수 없게 되었으며, 오로지 시내버스
(02, 04번)와 시티투어버스, 관광버스, 공원/긴급 차량만 들어올 수 있다. 차를 끌고 온 경우
에는 국립극장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걸어서 이동하거나 02, 04번 시내버스를 타야 된다.


▲  뚜벅이들의 낙원이 된 남산 남측순환로

남산북측순환로입구에서 남쪽 길로 접어들면 숲 사이로 빛바랜 한양도성이 모습을 비춘다. 그
리 멀지 않은 과거(2010년 이후)에 성곽 옆에 탐방로를 내었는데, 남산 정상까지 질러 가고
싶다면 그 길을 이용하면 된다. 다만 경사가 좀 각박하여 조금은 힘들 수 있으나 짧은 거리라
서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거닐 수 있다. 게다가 숲이 짙어서 대낮에도 그늘이 가득해 한여
름에는 시원하다.

성곽 앞에 난 산길의 일부는 예전부터 있던 길이다. 그 길의 끝에는 남산에서 제법 잘나갔던
남산약수터가 있었다. 남산산악회가 관리하는 곳으로 어린 시절 여러 번 가봤었지. 그곳은 입
구에 철문까지 설치했으며, 오로지 이른 아침에만 문이 열려 아무 때나 접근이 어려웠다. 다
행히 그곳 산길이 개방되어 이제는 자유의 공간이 되었으며, 약수터 주변에는 남산산악회 건
물과 체력 단련시설이 있다.

성곽길(남산산악회 입구)을 지나 5분 정도 가면 오른쪽에 계단길이 나온다. 그 계단을 2~3분
오르면 운동시설을 갖춘 상춘약수터가 나오는데, 예전 신당동, 금호동 시절 우리집 단골 약수
터였다. 약수터 옆에는 약수로 몸을 씻는 노천탕이 있었는데, 약수로 냉수마찰을 하면 겨울에
감기가 안걸린다고 해서 한때 인기가 대단했었다.
예전에는 서울에 노천 목욕터를 가진 약수터가 적지 않았는데, 대중이 이용하는 약수터에 아
저씨와 노공(老公)들이 벌고 벗고 씻는다는 것이 오랫동안 문제로 지적되었다. 하여 차츰 사
라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기억 속의 풍물시(風物詩)가 되어버렸다.


▲  남산 남측순환로 (4월 풍경)

상춘약수터입구를 지나 계속 남측순환로를 따라 가면 크게 구부러지는 남쪽에 2개의 조망대가
있다. 이 구간은 남쪽이 확 트여있어 조망이 일품인데, 바로 밑에 용산구 지역을 비롯해 한강
과 동작구, 강남/서초구, 관악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대기만 청정하다면 보이는 범위는 더욱
넓어진다. 그럼 여기서 잠시 남산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서울의 한복판이자 도심 남쪽에 누운 남산(262m, 270m)은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낙산(낙타
산)과 더불어 한양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다. 서울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으로 북현무(北
玄武)인 북악산(백악산)을 바라보고 있으며, 도성 남쪽에 있어서 남산이란 아주 평범한 이름
을 지니고 있다.
천하에는 남산이란 산이 참 많은데, 이들의 공통점은 시내와 아주 가깝고 시민들이 많이 안기
는 휴식처이며, 경주(慶州) 남산(468m)을 제외하면 산세가 낮고 완만해 누구든 편히 오를 수
있는 친근한 산이라는 것이다. 서울 남산도 대체로 편히 안길 수 있는 스타일로 그 걷는 것도
싫다면 남산을 오르는 시내버스나 시티투어버스,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금세 정상까지 간다.

남산의 원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으로 그 옛말인 '마뫼'는 남산을 뜻한다. 인경산(引慶山),
잠두봉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1395년 태조 이성계가 남산을 높여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
하고 그를 위한 사당인 목멱신사(木覓神祠)를 산꼭대기에 세웠다. 이후 매년 제를 올리면서
국사당(國師堂)으로 이름을 갈았다.
남산 능선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한양도성이 걸쳐져 있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전국에
서 날라오는 봉화를 받았다. 조선시대 봉화는 5개 노선이 있었는데, 그 종점이자 중심지가 바
로 남산이다.

임진왜란 때는 한양을 점령한 왜장이 산허리에 왜장대(倭將臺)란 성을 쌓았으며, 병자호란 이
후 어영청(御營廳)과 금위영(禁衛營) 분영이 남산에 설치되어 서울을 지켰다. 왜정 때는 왜군
헌병대가 산자락에 있었고, 1945년 이후에는 중앙정보부가 1호터널 북쪽에 말뚝을 박으며 갖
은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남산은 도성 경승지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양반들이 세운 정자와 그들이 새긴 바위글씨가 즐
비했는데, 지금은 바위글씨 극히 일부를 빼면 남아있는 것이 없다. 또한 가난한 선비와 하급
관리들이 산자락에 많이 살았으며, 개화기 이후 왜인들이 남산 북쪽과 남촌(南村)이라 불리는
청계천 이남에 두루 터를 닦고 살았는데, 왜정 때는 남산도서관 자리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 남산 중턱에는 왜성대공원과 경성신사(京城神社)를 지어 그들의 성지(聖地)로 만들었다.
특히 조선신궁을 짓는 과정에서 남산의 오랜 성역인 국사당이 신궁보다 높은 곳에 있다며 왜
정이 속좁게 징징거려 어쩔 수 없이 인왕산으로 자리를 옮기는 비운을 감당해야 했다. 그렇게
남산의 중심은 토박이 목멱대왕에서 왜열도의 온갖 잡귀들로 바뀌게 된다.
그렇게 왜정이 남긴 자국들은 1945년 이후 대부분 지워졌으나 조선신궁 계단과 일부 소소한
흔적들은 자신의 정체를 꼭꼭 숨기며 1945년 8월 패전 때 연합군에 살려달라고 징징거린 왜왕
(倭王)처럼 구차한 목숨을 연명한다.

196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케이블카가 놓여 남산의 이름 두 자를 떨쳤고, 1965년 조선신궁
자리에 남산도서관을, 1969년에는 백범 김구(白凡 金九)의 동상을 세워 주변을 백범광장으로
삼았다. 1973년에는 국립극장이 지어졌으며, 1975년에는 6년의 대공사 끝에 천하 최대의 타워
인 남산서울타워가 완성되어 남산의 높이를 배로 높였다. 이 타워는 1980년에 공개되어 남산
과 서울의 굳건한 상징이 되었다.


▲  남측순환로 아랫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한남동과 보광동(普光洞), 한강을 비롯하여 강남 일대가 상쾌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우리 애국가에 보면 '남산 위에 저 소나무'란 구절이 나온다. 그 구절에서 보이듯 남산은 북
악산(백악산)과 더불어 소나무로 유명했는데, 특히 금송(金松)이 많이 자랐다. 소나무 외에도
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며 산을 아름답게 수식하고 있고, 도심 한복판에 솟아있어
학의 등에 올라탄 듯 국보급의 조망은 물론 도심 야경도 풍족하게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산 곳곳에 약수터가 뿌리를 내려 나그네의 목을 아낌없이 축여주었는데, 그중에서 부
엉바위 약수터가 제일 유명했다. 허나 이 약수는 남산3호터널이 뚫리면서 그 혈이 막혀 사라
진 상태이며, 다른 약수터도 상당수 문을 닫거나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그 흔한 계곡도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겨우 실처럼 흐르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여럿 있을 뿐
이다.

남산은 남산공원길 남측순환로와 북측순환로, 여러 갈래의 계단길이 있는데, 계단길은 장충단
공원에서 정상까지, 백범광장에서 정상까지 이어지는 계단길이 대표적이며, 남산1호터널과 남
산동, 후암동(厚岩洞)에서 오르는 계단길이 있다. 길 외에는 싹 철조망을 쳐놓아 산으로에 접
근을 막았으나 근래에 모두 풀어버렸다. 허나 철조망을 없앴다고 해서 산자락 곳곳을 쑤시고
다니면 안된다. 무조건 지정된 길로 가야 남산도 좋고, 사람도 좋은 것이다.

남산에는 한양도성과 장충단공원, 와룡묘, 남산봉수대, 한양공원 표석, 남산골한옥마을 등의
문화유산과 백범광장, 안중근의사기념관, 남산야외식물원, 남산서울타워 등의 명소가 있으며,
산 전체가 남산공원(남산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심 속 나들이 명소이자 조촐한
등산 명소로 그 인기가 식을 줄을 모르며, 예로부터 서울에 오면 꼭 가봐야 되는 서울의 상징
적인 명소로 지방 사람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까지 평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수십만 씩 몰려
드는 서울 관광의 성지이다. 하여 한적한 분위기는 좀 누리기가 어렵다. (서울을 찾은 외래
관광객의 1/3 이상이 남산을 찾는다고 함)

남산이 없는 서울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아니 상상하기도 싫다. 도심 속의 허파이자 꿀단
지로 남산이 있으니 인근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조선 왕궁이 합세해 도심의 녹지 비율이
좀 되는 편이지 그가 없었다면 서울은 더 지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개인적으로 내 옛
추억이 몇 권씩 녹아있는 현장으로 나에게도 꽤 의미심장한 곳이라 할 수 있는데, 내가 제일
많이 오른 산이 바로 남산으로 어림잡아도 500번 이상은 올랐을 것이다.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 지점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한남동과 보광동, 강남, 관악산과 우면산 산줄기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 지점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해방촌과 이태원, 용산구 지역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 지점 조망대에서 바라본 남산서울타워
서울타워는 동양에서 제일 높은 타워로 높이가 236.7m에 달한다. 하늘을
찌를 듯 늘씬하게 솟은 저 타워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보면 볼수록
신기할 따름이다.

▲  다시 만난 한양도성 - 성곽 밑에도 탐방로가 닦여져 있다.

남산 정상을 코앞에 둔 남산서울타워 종점(02, 04번 종점)에 이르니 온갖 관광객들로 뒤엉켜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룬다. 여기서는 오로지 시내버스만 길게 바퀴를 접을 수 있으며 나머지
버스는 승하차가 끝나자마자 바로 자리를 떠야 된다. (주차 공간이 별로 없음)
무수한 인파 속으로 몸을 던져 하나의 점이 되어 서쪽 오르막길을 3분 정도 오르면 남산 정상
과 남산서울타워 밑에 이르며, 오르막길 대신 서남쪽 남측순환로를 내려가면 남산도서관으로
이어진다.

* 남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남산동, 회현동 / 용산구 용산동2가, 후암동 
* 남산공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02-3783-5900)


▲  남산서울타워 종점에서 바라본 서울타워
남산 어디서든 구석진 곳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서울타워가 바라보인다.


 

♠  남산 정상

▲  정상 동쪽 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도심과 서울 북부)

하늘과 맞닿은 남산 정상에는 남산서울타워와 팔각정, 남산봉수대가 둥지를 틀고 있다. 남산
서울타워(N서울타워)는 남쪽에, 팔각정은 중앙, 남산봉수대는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중
에서 인파가 가장 많은 곳은 남산서울타워와 팔각정 주변이다.

남산서울타워는 236.7m의 키다리 타워로 아시아 최대를 자랑한다. 남산을 든든한 기반으로 삼
아 기둥과 철탑 하나로 하늘을 받들고 있는 웅장한 탑으로 TV와 라디오 방송을 수도권으로 송
출하고자 1969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 전파탑으로 세워졌다. 1971년 공중선 철탑이 완
성되었고, 1975년 7월에 최종 마무리가 되어 전국 인구의 48%가 이 타워의 전파탑을 통해 방
송을 시청하고 있다고 한다.

1980년 10월 속세에 개방되어 남산의 소중한
꿀단지이자 야경과 조망의 진정한 성지로 자리
매김을 했는데,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道峯
山). 수락산(水落山). 관악산(冠岳山), 불암산
(佛岩山) 정상을 빼고 서울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다. 그러다보니 콧대가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밑에서 그를 보려면 고개가 그냥 까
딱 넘어가 버린다.
게다가 입장료도 꽤 야박한 편, 그래도 관광
수요는 늘 꾸준하여 외국인 선정 서울 명소 1
위의 지위(2012년 서울시청 설문조사 결과)를
누리기도 했다.

 

◀  바로 밑에서 바라본 남산서울타워의 위엄

남산을 안방처럼 들락거린 나도 초등학교 시절에 가족, 친척과 2~3번 타워에 오른 적이 있었
다. 허나 그 이후에는 이상하게도 인연이 닿지 않아 그의 품에 오른 적이 없었다. 정상에 오
더라도 그냥 타워 밑도리와 정상 주변에서 좀 머물다가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막상 가려
고 해도 이상하게 땡기지가 않는다.

* 남산서울타워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2가 산1-3 (남산공원길 105 ☎ 02-3455-
  9277)
* 남산서울타워 홈페이지는 아래 팔각정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남산 팔각정(八角亭)

팔각정은 남산서울타워와 더불어 남산의 주요 장식물로 이곳에는 원래 1959년에 이승만 대통
령을 치켜세우고자 세운 우남정(雩南亭)이 있었다. 여기서 우남은 이승만의 호로 1960년 4.19
의거로 그가 물러나자 바로 철거되었다.
이후 1968년 11월 탑골공원 팔각정을 모델로 삼아 지금의 팔각정을 지었으며, 남산 정상을 수
식하는 존재로 삼았다. 정자 서쪽에는 한양도성 여장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산바람이 주변
에늘 머물고 있어 한여름에도 시원하다. 정자 자체는 60년도 채 안된 존재이지만 관광객들로
늘 붐비며, 매년 1월 1일 새해 해맞이 행사가 성황리에 열린다.


▲  옛 국사당(國師堂)터 표석

남산 정상은 늘 사람들로 미어터지나 팔각정 부근 구석에 누운 국사당터 표석에 눈길을 주는
이는 거의 없다. 애처로운 눈빛을 보이며 눈길과 관심을 호소하지만 맨날 외면을 받는 그 표
석, 표석에 쓰인 국사당은 남산의 수호신인 목멱대왕의 사당으로 1395년에 태조가 세웠다.
1404년 목멱대왕을 호국(護國)의 신으로 높이면서 목멱신사(木覓神祠)라 불리기도 했던 남산
의 성역이자 중심이었으나 1925년 왜정이 조선신궁을 지을 때 국사당이 그보다 높은 곳에 있
는 것에 쓸데없이 아니꼬움을 드러내면서 다른 데로 옮기라고 난리를 쳤다. 그래서 태조와 무
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를 했던 곳이라 전하는 인왕산 선바위 밑으로 눈물을 머금고 이사를
가게 되었고, 목멱대왕의 남산은 왜열도의 온갖 잡귀들이 판을 치는 일그러진 현장이 되었다.

국사당을 핍박했던 왜정도, 조선신궁도 다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그곳에 건방지게 들어앉던 왜
열도의 잡귀들도 추방되었지만 남산의 주인인 국사당은 끝내 제자리로 오지 못하고 인왕산에
뿌리를 내려 선바위와 함께 기도처의 성지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로 미어터
지는 이곳에 다시 와봐야 너무 시끄러운 나머지 국사당 신들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다. 그
만큼 남산은 많이도 변했다.


▲  남산 목멱산봉수대(木覓山烽燧臺) - 서울 지방기념물 14호

정상 북쪽에는 남산의 오랜 상징물인 남산봉수대가 도심을 바라보고 있다. 남산의 옛 이름을
취해 목멱산봉수대('목멱산봉수대터'가 문화재청 지정 명칭임)라 불리기도 하며 서울에 있다
고 해서 '경(京)봉수대'란 별칭도 있으나 그냥 속편하게 남산봉수대라 불러도 문제는 없다.

봉수대란 불을 피우거나 연기를 이용해 변방의 소식을 알리던 옛날 통신 수단으로 산꼭대기에
주로 설치되었다. 낮에는 연기로 알리고, 밤에는 불을 피워 소식을 전했으며, 비가 많이 오는
경우에는 봉수지기가 직접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봉수대는 크게 5개 노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변경인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
滿江), 남해바다에서 시작하여 이곳 남산을 종점으로 삼았으며, 평소에는 봉화 1개, 적이 나
타나면 2개, 경계에 다다르면 3개, 경계를 넘으면 4개, 전쟁이 터지면 5개를 올렸다.

남산봉수대는 1394년에 설치되어 하루도 연기가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았으며, 동
쪽에서부터 서쪽을 향해 5개소가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1895년 봉수제도가 폐지되면서 문
을 닫았고, 왜정 때 말끔히 철거되면서 그 위치를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청구도(靑
邱圖)를 통해 봉수대터 1곳을 발견하니 그곳이 지금 봉수대로 철저한 고증을 통해 1994년 복
원되었다. (나머지 4곳은 아직도 위치가 아리송하다고 함;;;)

이곳 봉수대는 벽돌로 쌓은 5개의 봉수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금은 불과 연기를 피울 일이
없는 죽은 봉수대로 남산 정상을 수식하는 상징적인 존재이자 조선시대 봉수제도의 중앙봉수
대 의미 밖에는 없다. 그것이 현역에서 은퇴한 사물의 쓸쓸한 뒷모습이다. 봉수대는 관람이
가능하며, 여기서 바라보는 조망이 가히 차관도 아닌 장관이라 이곳이 왜 조선 봉수대의 중심
이 되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남산이 서울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고 조망이 뛰어나 사방에
서 날라오는 봉수대 연락을 받기에 아주 좋기 때문이다.
참고로 서울에는 남산 외에도 무악봉(毋岳峰) 동봉수대와 봉화산(烽火山) 봉수대, 봉산 봉수
대, 개화산 봉수대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근래에 복원된 따끈따끈한 상태로 무악산 동봉
수대와 봉화산 봉수대는 서울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8-1


▲  목멱산봉수대 내부
불을 피우는 봉수대는 벽돌로 쌓고 그 밑도리는 성벽처럼 돌을 다듬어서 쌓았다.
1994년에 복원된 상태라 고색의 때는 채 익지 못했으며 아직까지는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피부를 지녔다.

▲  남산봉수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서울 도심 동부와 성북/강북/도봉 권역과 동대문/중랑/성동 권역을 비롯하여
멀리 수락산과 불암산 등이 흔쾌히 두 눈에 잡힌다.

▲  남산봉수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바로 앞에 보이는 것은 남산케이블카 승차장이다. 그 너머로 서울 도심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줄기가 바라보인다.


 

♠  남산 마무리

▲  성곽길에서 바라본 용산과 여의도, 서울 서남부 지역

산 정상에서 남산도서관, 백범광장으로 내려가는 성곽길은 경사가 매우 급한 편이다. 내려
갈 때야 상관은 없지만 올라갈 때는 거의 혼이 다 빠진다.

남산케이블카를 지나면 도심을 향해 튀어나온 잠두봉 전망대가 손짓을 하는데, 여기서 바라보
는 조망 맛이 아주 일품이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달까지 올라간 서울의 심장부를
바로 발 밑에 두며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가까이로 남산3호터널을 오가는 차량의 물결이
개미들의 행진처럼 보이며, 키다리급의 온갖 성냥갑 건축물들이 여기서만큼은 손가락보다 작
게 다가온다.


▲  남산 정상에서 남산도서관으로 내려가는 성곽길
장충단공원에서 올라가는 것보다 거리는 매우 짧지만 대신 경사가 좀 각박하다.
남산 산길 가운데 가장 경사진 곳으로 장충단공원이나 국립극장에서 올라가
정상을 찍고 남산도서관 방면으로 내려가는 것을 추천한다.
(그래봐야 넉넉히 2시간이면 족함)

▲  잠두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서울 도심과 인왕산,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  잠두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서울 도심 동부와 동대문, 성북/강북/도봉 권역과 수락산, 불암산 산줄기 등

▲  잠두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남대문시장과 시청,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서울 도심과 안산(鞍山), 인왕산 등


정상에서 서쪽 성곽길을 따라 20분 정도 내려가면 시립남산도서관이다. 이제 남산도 다 내려
온 것이다.

여기서 안중근의사기념관과 2020년 11월에 닦여진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을 지나면 백범 김구
선생을 기리고자 닦은 백범광장이 나온다. 공원을 이루고 있는 광장 남쪽에는 한양도성이 복
원되면서 나무와 온갖 꽃을 심은 녹지 공간이 대폭 늘어났다. 바로 옆이 키다리 빌딩이 즐비
한 도심이건만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완전 딴 세상을 이루고 있으니 그 역시 남산이 있으니
가능한 것이다.


▲  백범광장 터널과 서울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한양도성과 남산을 복원하면서 예전에 도로 공사로 줄기가 끊긴 백범광장과
남산 사이의 산줄기를 다시 이어붙여 그 밑에 터널(소월로3길)을 냈다.

▲  휴일 오후 한가로움이 느껴지는 백범광장과 서울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  백범광장 남쪽에 다시 재현된 한양도성 - 사적 10호

백범광장 남쪽과 서쪽에는 근래 복원된 아주 따끈따끈한 성곽이 있다. 이들은 한양도성의 일
원으로 왜정 때 끊어진 남대문과 남산 구간의 일부이다.
오랫동안 잊혀진 이들을 끄집어내고자 백범광장 주변을 싹 뒤집어 조사를 벌였고, 땅속에 묻
힌 성터가 발견되어 그 자리를 바탕으로 성벽과 여장을 복원했다. 재현된 구간은 200m 정도로
최근 지어진 탓에 피부가 아주 하얗고 반질반질하여 마치 벽에다 그린 성벽 벽화 같다. 남산
도서관 북쪽 성곽터를 조사하여 2020년 11월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을 내었으며, 나머지 사라진
구간도 복원 계획에 있다.


▲  한양도성 백범광장 구간
하얀 피부의 성곽 여장 너머로 서울역 동쪽에 자리한 여러 키다리 빌딩이 보이며,
성곽 안쪽에도 탐방로를 내어 억새를 비롯한 온갖 나무와 꽃을 심었다.

▲  한양도성 백범광장 구간 서쪽 부분
성곽은 계속 달리고 싶다~~!! 허나 왜정과 개발의 칼질로 끊어진 구간이
적지 않고 복원 속도도 굼벵이보다 느려 그런 날은 아직도 멀었다.

▲  한양도성에서 바라본 후암동과 이태원, 용산구 지역
천하를 비추던 햇님은 엄청난 광을 쏟아부으며 슬슬 커텐을 칠 준비를 하고
회색빛 도시도 석양이 짙어지면서 점차 검은 도화지 속에 묻혀간다.

▲  온갖 야생화가 살랑거리는 백범광장 서부

▲  도동3거리에 있는 남산공원 마크

백범광장과 한양도성 백범광장 구간을 뒤로하고 남산공원 출입구의 하나인 도동3거리로 나오
니 시간은 18시가 넘었다. 햇님도 그 기운이 다했는지 84,000광 보다 더 진한 석양을 비추며
슬슬 꽁무니를 내빼고 토끼의 달나라가 하늘 높이 떠올라 땅꺼미의 기운을 북돋는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찾은 남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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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0년 12월 21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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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골에 푹 묻혀있는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백화산 반야사 (석천계곡, 반야사 호랑이, 문수전, 망경대)

 


' 봄맞이 산사 나들이, 영동 백화산 반야사 '

반야사3층석탑
▲  반야사3층석탑과 배롱나무

▲  영천과 망경대

▲  반야사계곡(석천계곡)

 


 

♠  백화산(白華山)의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반야사(般若寺) - 영동군 향토유적 9호

▲  반야사 경내
경내 뒷쪽으로 꼬랑지를 든 호랑이를 닮았다는 돌너덜(반야산 호랑이)이 보인다.


영동 고을의 동부를 맡고 있는 황간(黃澗), 그 황간 북쪽 우매리에서 석천계곡(반야사계곡)을
따라 들어가다보면 그 길의 끝에 반야사가 그림 같은 모습으로 반겨준다.

백두대간의 일원이기도 한 백화산이 베푼 석천계곡이 태극문양으로 산허리를 감아 돌면서 연
꽃 모양의 지형을 이루는 그곳 한복판에 둥지를 닦은 반야사는 백화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고
있다. 절을 둘러싼 주변 경관이 매우 곱고 절의 옆구리를 간지럽히는 계곡은 수량이 풍부하고
청정하기 이를 데 없어 영동(永同) 지역 경승지이자 피서의 성지로 오랜 세월 찬양을 받고 있
다.

경관 하나는 아주 일품인 반야사는 신라 말에 무염(無染, 800~888)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가 황간 지역 어딘가에 있었다는 심묘사(深妙寺)에 주석하고 있었을 때, 현재 절 자리에 있던
연못에 나쁜 악룡(惡龍)이 머물며 갖은 민폐를 부리자 사미승(沙彌僧) 순인(純仁)을 보내 그
들을 쫓아내고 연못을 메워 절을 닦으니 그것이 반야사의 시작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 용(龍)이 진짜로 있을 리는 없을 터이니 아마도 백화산에서 설치던 산적을 교화하
거나 때려잡고 그들의 본거지에 절을 세운 것으로 여겨지며, 비록 무염이 창건했는지는 의문
이나 대웅전에 신라 후기에 조성되었다는 불상이 있어 9~10세기에 창건된 것은 확실한 것 같
다.
무염의 창건설 외에도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원효(元曉)가 세웠다는 설과 의상(義湘)의 10
대 제자 중 하나인 상원(相源)이 세웠다는 설도 덩달아 전하고 있으나 원효와 의상의 창건설
은 이 땅에 많은 절에서 사골이 되도록 우려먹는 흔한 소재이다. 반야사도 예전에는 그들이
창건했다고 우겼으나 요즘은 한 발자국 물러나 그 부분을 생략하고 신라 후기에 크게 활약했
던 무염을 창건주로 내세우고 있다.
절 주변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무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절의 이름을 반야사라 했으며 산
이름을 지장산에서 백화산으로 바꾸어 문수도량임을 내세웠다.

창건 이후 오랫동안 사적(事績)이 전해오지 않다가 1352년에 중건되었다고 하며, 1464년 신미
(信眉)가 세조(世祖)의 허락을 받아 절을 크게 중창했다. 세조는 법주사(法住寺)를 방문했다
가 신미의 청을 받아 반야사에 들려 새로 지은 대웅전에 참배하고 '반야'란 현판을 내렸다고
하며 그때부터 절 이름이 '반야사'가 되었다고 한다. ('반야'는 문수보살의 지혜를 뜻함)
그 이후 500년 가까이 잠수를 탔다가 6.25전쟁 때 거의 파괴된 것을 1970년대 이후부터 꾸준
히 불사를 벌여나갔고 1993년에 새 대웅전과 요사를 지어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극락전, 산신각, 지장전, 심검당 등 10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경
내에서 다소 떨어진 망경대 벼랑 위에는 이곳의 상징인 문수전이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닦았다.
절이 들어앉은 특성상 대웅전과 극락전 등 주요 건물들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고, 문수전은 북
쪽을 향하고 있다, (경내에서 계곡 건너 서쪽에 전답과 관세음보살상이 있음)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이곳의 유일한 국가 지정문화재인 3층석탑을 비롯해 영동군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대웅전 불상, 조선 후기 부도 2기가 있으며, 그 외에 500년 묵은 배롱나무 2그루와 신
중탱이 전하고 있다.
또한 절 뒷쪽 계곡 너머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파쇄석이 모인 돌너덜이 있는데,
마치 꼬랑지를 세운 호랑이 모습이라 절에서는 그를 '반야사 호랑이'로 삼으며 호랑이로 화현
(化現)한 산신(山神)으로 내세우고 있다. 경내에서도 그 돌너덜이 보이며, 그 너덜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자 이곳에 절을 닦은 모양이다.

반야사는 풍경도 좋고, 볼거리도 넉넉하나 교통편이 영 좋지 못한 것이 큰 흠이라 대중교통으
로 오려면 여간 힘들지가 않다. 허나 그만큼 첩첩한 산속으로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
거나 마음을 싹둑 다듬고 싶을 때 안기면 아주 좋은 곳이다. 게다가 이곳은 템플스테이도 운
영하고 있으니 세상사 잠시 내려놓고 고적한 산사에 묻혀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 소재지 :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 151-1 (백화산로 652 ☎ 043-742-4199, 7722)
* 반야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주차장 남쪽에서 바라본 반야사 경내

문수도량과 산신기도 도량까지 내세우는 이곳에는 재미난 전설이 여럿 전하고 있는데, 그중 2
가지를 우선 꺼내보겠다. (다른 1가지는 영천 부분에서)

① 고려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3~1330, 1332~1339) 시절 글재주가 좋은 황도령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황간 관아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여했는데, 웃기는 것은 아주 쉬운 한자인 '수(
水)'와 '산(山)' 2자를 몰라서 백일장에서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이에 크게 발끈한 황도령은 바로 반야사로 달려가 그곳에 있던 일우에게 학문을 배웠다. 일우
는 학식이 뛰어난 승려로 그에게 많은 학문을 전해주었는데 언제부터인가 황도령의 얼굴색이
나날이 나빠지고 있어 얼굴을 살펴보니 글쎄 처녀귀신에게 씌인 것이 아닌가? 그냥 방치하다
가는 황도령이 골로 갈 수 있기에 그의 옷을 벗겨 온몸에 금강경(金剛經) 5,149자를 빼곡히
적어넣고 옷을 입혔다.
그날 밤, 황도령을 찾아온 처녀귀신은 도령 몸에 쓰인 금강경을 보고는 크게 발작했다. 금강
경의 위엄에 너무 괴로워한 나머지 황도령의 귀를 물어뜯고 줄행랑을 쳤는데 이는 일우가 금
강경을 쓸 때 귀 부분을 실수로 빼놓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황도령은 귀는 잃었지만 스승 덕
분에 살아날 수 있었고 그 인연으로 출가를 하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 무이법사(無耳法師)라
했다. 귀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이다.

② 불교 탄압이 극성이던 조선 성종~연산군(燕山君) 시절, 벽계선사(碧溪禪師)는 그 소나기를
피하고자 머리를 기르고 속인(俗人)으로 가장하여 살았다. 그는 과부를 맞아들여 같이 살았는
데 어디까지나 위장 혼인일 뿐, 3년을 살아도 여전히 남남처럼 살았다. 부부의 재미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에 완전히 뿔이 난 과부는 어느 날 '야~ 나 갈꺼야~~!!'
선사 왈 '왜?'
과부 '이름만 부부지 과부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이래서 살겠냐?'
선사 '그러면 말리지 않겠다. 그래도 3년 동안 밥해주느라 고생했는데 수고비로 이거나 가져
가셔~!'
하면서 은으로 만든 표주박을 주었다.

과부는 표주박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와 동구 밖 샘물가에서 그것으로 물을 떠마시며 팔자 한
탄을 간드러지게 하였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있던 표주박이 갑자기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자 그만 포기하고 3년 동안 천하를 돌아다니며 적당한 재혼처를 물
색했으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벽계선사를 다시 찾아갔다.
선사는 '내 다시 올 줄 알았다'
그 말에 과부는 '어찌 알았누?'
선사 '그 이유가 궁금함? 그런데 3년 전에 내가 준 표주박은 어따 팔아먹었노?'
과부 '아 그거... 마을 동구 밖 샘터에서 잃어버렸어. 쩝'
선사 '그 자리에 다시 가봐라. 아직 그대로 있을 것이다'
과부가 놀라서 '어째서?'
선사 '내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 중이 되기를 500번이나 했는데, 처음 중이 되면서 지
금까지 남이 주지 않는 것은 가져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 인덕으로 무엇이든 내것이라 이
름만 지어놓으면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지~~!'

과부는 웃기고 있네~~! 표정을 지으며 그 샘터로 가보니 과연 그 표주박이 3년 전 모습 그대
로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본 과부는 다시는 다른 마음을 품지 않으며 선사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잘살았다고 한다.

▲  반야사 심검당(尋劍堂)
2층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종무소, 공양간의
역할도 하고 있다.

▲  반야사 용머리 연꽃 석조
백화산이 베푼 옥계수로 늘 가득하여
그의 넉넉한 마음을 비춘다.

▲  반야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大雄殿)
1993년에 지어진 것으로 그 이전에는
극락전이 대웅전 행세를 하였다.

▲  맞배지붕을 지닌 지장전(地藏殿)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불단과 붉은 닫집, 그리고 석가3존상
(대웅전 불상 - 영동군 향토유적 12호)


대웅전 불단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普賢菩薩)로 이루어진 조그만 석
가3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은 경주 옥석(玉石)으로 조성되어 산뜻하게 도금을 입힌 것으
로 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가운데 석가여래상은 검은 머리칼을 드러내고 있고
좌우 보살상은 화려한 보관을 눌러쓰며 석가여래 좌우를 받쳐준다. 그들 뒤로는 검은 바탕으
로 이루어진 석가후불탱이 든든하게 후광이 되어준다.

▲  대웅전 신중탱
대웅전을 지키는 온갖 호법신의 무리가
그려진 것으로 석가후불탱과 비슷한
스타일로 조성되었다.

▲  산신각(山神閣)
2단으로 다져진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은
산신각은 산신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의 보금자리이다.


▲  반야사3층석탑 - 보물 1371호

극락전 앞에는 하얀 피부의 3층석탑이 소박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지금이야 반야사의 일원
으로 완전히 묻혀있어 이곳의 오랜 유물로 봐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그는 원래 북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석천계곡 탑벌에 쓰러져 있었다. 그러던 것을 1950년에 주지 성학(性學)이 수습
하여 일으킨 것이다. 그 덕분에 반야사에 오래된 존재가 하나 늘었다.

이 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힌 다음 머리장식
으로 마무리를 한 형태로 밑에서 머리까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으며, 높이는 335cm이다. 바
닥돌은 모두 6매의 판석(板石)으로 이루어졌으며, 바닥돌 윗면 네 모서리에는 합각선이 돌출
되어 있고, 중심부에는 깊이 3cm 정도의 홈을 파 기단면석이 꼽히도록 하였다.
기단부는 4매의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隅柱)와 탱주가 모각되었다. 갑석 윗
면은 1매의 판석으로 조성했으며, 중앙에는 깊이 3cm 정도의 홈을 파서 1층 탑신을 꼽도록 조
성했다. 그리고 갑석의 네 모퉁이에도 합각선이 돌출되어 있다.
1층 탑신은 4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를 새겼으며, 남/북쪽 면석은 새
로 끼워 넣었다. 2,3층 탑신은 모두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2층 탑신에 모각된 우주에서는 엔
타시스 수법을 볼 수 있다. 3층 탑신은 현상으로 보아 새로 끼운 것으로 여겨진다.

옥개석(屋蓋石)은 1층에서 3층까지 모두 1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각층 옥개석의 낙수면은 길이
가 짧고 경사가 급해 보이며, 옥개석 받침은 1층 5단, 2/3층은 4단으로 되어 있다. 추녀는 비
교적 두껍게 조성되었는데, 직선화되는 보편적인 수법과는 달리 둥글게 표현되어 전각의 반전
은 예리한 편이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찰주(刹柱)가 관통된 노반(露盤)과 복발 등의 머리장식
이 남아있다.
이 탑은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 초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
으로 보기도 함) 1층 탑신의 결구 수법은 신라 석탑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기단 면석과
1층 탑신을 꼽도록 하면에 홈을 판 점은 백제계 석탑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제자리를
떠나긴 했지만 탑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고 건강 상태도 좋으며, 반야사의 보물로 묵묵히 살
아가고 있다.

▲  서쪽에서 바라본 3층석탑과 배롱나무
, 극락전

▲  범종을 비롯한 4물의 보금자리
범종각(梵鍾閣)


▲  배롱나무 - 영동군 보호수 13호

극락전과 3층석탑 사이에는 오래된 배롱나무 형제가 꿈틀거리고 있다. 이들은 추정 나이가 약
530년(1994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500년) 정도로 높이는 각각 8m, 7m, 나무 둘
레는 각각 0.8m, 0.6m이다.
경내에서 대웅전 불상 다음으로 늙은 존재(3층석탑은 제외)로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자신이
가지고 댕기던 주장자(柱杖子)를 꽂아 둔 것이 둘로 갈라져 쌍배롱나무로 자랐다는 믿거나 말
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한여름(7~8월)에 왔더라면 배롱나무(백일홍)의 아름다운 붉은 향연을 제대로 누릴수 있을텐데
겨울과 봄의 팽팽한 경계선에 오다 보니 그 아름답다는 나무도 다른 나무와 비슷하게 그저 알
몸만 있다. 사람이나 나무나 걸치는 옷을 빼버리면 다 똑같거늘 왜 그리도 욕심을 부리고 계
급을 나누는지 모르겠다.


▲  배롱나무의 여름 모습 (반야사 홈페이지 참조)
배롱이의 향연은 기껏해야 2달 정도이다. 6~7개월 정도는 푸른 옷을 걸치고 있으나
나머지 5~6개월은 겨울 제국에게 모든 것을 공출당한 채, 알몸으로 살아간다.


▲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 반야사 극락전(極樂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원래는
이곳의 대웅전이었으나 1993년 바로 옆에 새 대웅전이 지어지면서 법당에서
물러나 아미타불의 거처인 극락전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  석천계곡(반야사계곡)과 반야사의 상징, 문수전

▲  석천계곡 (반야사계곡)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고 '이제 다봤구나~!' 싶어서 발길을 돌리려고 하니 문수전을 알리는 이
정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발길을 붙잡는다. 문수전이라?? 반야사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나
싶어서 살펴보니 그곳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경내 뒷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기왕 온 것이니 다
음에 안와도 될 정도로 말끔히 둘러봐야 나중에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
다.

문수전으로 인도하는 산길은 석천계곡을 따라 이어지는데, 계곡 풍경이 반야사 이전보다 더욱
장관이었다. 물은 깊고 청명하며, 바위와 벼랑이 적당히 나타나 여흥거리가 되어준다. 그리고
누런 갈대가 바람에 펄럭이며 나그네의 마음을 간지럽히고, 소나무 등 나무도 삼삼해 이런 곳
이야말도 진정한 신선(神仙)의 세계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이다.
신선의 세계는 인간계보다 시간이 빛의 속도만큼 빠르다고 한다. 신선의 장기를 구경하는 동
안 몇 대(代)가 흘러갔다는 난가(爛柯)의 전설도 있을 정도이니 괜히 이 계곡에 발을 들였다
가 기백 년 뒤에나 나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였다.


▲  대자연이 빚은 작품, 돌너덜 (반야사 호랑이)

반야사의 명물 중에는 '반야사 호랑이'라 불리는 돌너덜이 있다. 그 모습이 마치 호랑이가 꼬
랑지를 치켜든 모습과 비슷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이들은 순 자연산으로 수 만년
동안 흘러내린 파쇄석이 산자락에 자연스럽게 쌓이고 쌓여 높이 80여m, 길이 300여m에 이르는
돌너덜을 이루게 되었다. 근데 하필이면 호랑이 모습을 이루고 있어 대자연의 기가 막힌 작품
솜씨에 그저 놀라울 따름인데, 반야사는 그를 산신의 화현으로 삼고 있으며, 산신각 산신탱에
그려진 호랑이 모습과도 비슷하다.


▲  문수전으로 이어지는 계곡 숲길

▲  망경대(문수바위) 위에 아슬아슬하게 둥지를 튼 문수전(文殊殿)

문수전으로 이어지는 계곡 숲길은 아주 느긋하다. 허나 그것도 잠시, 착했던 길은 영천을 앞
에 두고 갑자기 180도 흥분하여 아주 각박한 오르막길로 돌변한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 위에
맞배지붕 건물 하나가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들어앉은 건물처럼 장엄하게 보이는데, 그것이
반야사의 상징인 문수전이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벼랑 옆에 닦여진 가파른 길을 올라가
야 되는데, 경내에서도 다소 떨어져 있고, 길도 각박하여 문수전을 건너뛰는 사람도 있다.
허나 이는 갈비탕에서 고기를 빼먹는 거와 같을 정도로 어리석은 일이다. 비록 문수보살에게
관심이 없다고 해도 그 주변 풍경이 가히 일품이니 조금은 힘들더라도 발품을 팔만하다.


▲  망경대 밑에 자리한 석천계곡 영천(靈川)

문수전을 강제로 머리에 이고 있는 망경대(문수바위) 밑 계곡을 영천이라 부른다. 이곳은 세
조와 문수보살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서려 있으니 내용은 이렇다.

세조가 신미의 청을 받아 반야사를 방문하니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홀연히 나타났다. 세조
가 예를 차리자 그는 왕을 영천으로 인도하여 몸을 씻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는
'왕이 불심(佛心)이 갸륵하니 부처의 자비가 따를 것이오'

한 마디 남기고는 사자를 타고 망경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다가 사라졌다.

왕이 목욕을 마치고 계곡 밖으로 나오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하며, 병을 낫게 해준 문수
보살을 기리고자 절 이름을 반야사로 갈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설화는 가만보면 오대산 상원
사(上院寺)에 서린 세조와 문수동자 전설과 여러모로 비슷하다. 아무래도 거기 설화를 가져와
서 반야사 스타일로 다듬은 듯 싶다.
세조가 과연 여기서 목욕을 했는지는 의문이나 그만큼 왕실의 인연과 지원이 각별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절 부근 경치 좋은 곳에 이런 전설을 갖다 붙인 듯 싶으며, 그 전설로 인해 영천
옆 벼랑을 문수바위 또는 망경대(望京臺)라 불리게 되었다. 여기서 망경대는 서울을 바라본다
는 뜻이니 절을 중창시켜준 세조와 왕실의 은혜를 두고두고 기리겠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  망경대 꼭대기에 자리한 문수전의 위엄

문수전은 세조와 문수보살의 설화가 깃든 망경대 벼랑 위 250m 고지에 북쪽을 바라보며 자리
해 있다. 건물을 짓기에는 다소 척박한 곳이지만 그 현장에 문수보살을 위한 건물을 지어야
문수도량의 뽀대가 나므로 그 어려움을 무릅쓰고 건물을 지어올렸다.
문수전에 오르면 백화산 남쪽 자락과 석천계곡, 호랑이 돌너덜 등이 시원스레 시야에 들어오
나 주변이 칼처럼 솟은 높은 산줄기에 둘러싸여 있어 보이는 범위는 그것이 전부이다.


▲  문수전에 봉안된 문수보살상과 문수동자상

문수전은 북쪽을 향해 문이 나 있다. 그 문을 들어서면 늠름한 모습의 문수보살상이 파란 피
부의 목각사자상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려놓고 푸근한 표정으로 중생들을 맞는다. 그 좌우에
는 붉은 옷을 걸친 문수동자와 녹색 옷을 입은 문수동자가 두 손을 모아 합장인(合掌印)을 선
보이고 있어 그야말로 '문수'의 세상이다.
문수보살과 동자상은 근래 지어진 것들이라 고색의 때는 여물지도 못했지만 목각사자상은 조
선 후기 것이라고 하며. 그 좌우에 중생들의 시주를 받아 봉안한 조그만 금동 원불(願佛)들이
빼곡히 자리를 채워 어두운 건물 내부를 환하게 밝혀준다.


▲  문수전에서 바라본 반야사 호랑이(돌너덜)

▲  문수전에서 바라본 석천계곡 북쪽과 백화산 산줄기
다음에 오면 저 계곡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나의 존재를 잠시 지우고 싶다.

▲  백화산의 첩첩한 산줄기 (백화산 정상 방면)

▲  망경대 바로 밑에 펼쳐진 영천
영천 주변에 흙과 자갈이 넓게 깔려 있어 여름 피서 장소로 아주 제격이다.
혹시 아는가 여기서 물놀이를 하면 세조 임금처럼 병이 싹 나을지도~~?

▲  문수전에서 경내로 내려가는 산길

반야사 경내에서 문수전으로 인도하는 길은 2개가 있다. 우리가 이용한 계곡 길을 거쳐서 가
는 것과 경내 동쪽 산길로 오르는 길이 그것인데, 보통 계곡 길로 올라가서 문수전을 찍고 경
내 동쪽 산길로 내려오며 절에서도 그렇게 가기를 적극 권하고 있다. 이유는 계곡 길에서 망
경대 벼랑으로 오르는 길이 좁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도 상관은 없음)
계곡 길은 완만하게 가다가 망경대에서 아주 화끈하게 흥분을 하지만, 동쪽 산길은 서서히 오
르는 형태로 덜 가파르다. 그 길을 내려오면 잠시 떨어졌던 경내가 이내 모습을 드러내며, 주
차장 쪽으로 떨어진다.


▲  동쪽 산길로 내려가면서 바라본 반야사 경내

▲  반야사 부도(浮屠) - 영동군 향토유적 10호, 11호

주차장 남쪽 산자락에 고색이 짙은 부도 2기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이들은 주차장 부근에 있
어 찾기는 쉽지만 구석진 곳에 있어 자칫 놓치기가 쉬우니 꼭 등잔 밑을 살펴보기 바란다.

반야사 부도는 이 땅에 흔한 석종형(石鐘形) 부도로 왼쪽 1호 부도(향토유적 10호)는 검은 주
근깨(이끼)가 가득 핀 네모난 바닥돌 위에 대추알처럼 생긴 탑신을 얹히고 네모난 지붕돌로
마무리를 했다. 그리고 오른쪽 2호 부도(향토유적 11호)는 네모난 바닥돌 위에 8각의 대석(臺
石)과 석종 모양의 탑신을 올리고 그 위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지붕돌과 정체가 아리송한 기둥
모양의 머리장식을 올렸다. 이들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누구의 승탑(僧塔)인지는 귀신
도 모른다.

▲  왼쪽 1호 부도

▲  머리장식이 특이한 오른쪽 2호 부도

▲  주차장에서 부도로 인도하는 돌계단

▲  주차장에서 바라본 석천계곡


▲  봄을 기다리는 석천계곡
백화산 등산을 하려면 저 다리를 건너면 된다. (관세음보살상도 저 다리를 건너면 됨)


부도를 끝으로 그림 같은 절, 반야사 관람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기분 같아서는 계곡 다
리를 건너서 관세음보살상까지도 가보고 싶고, 계곡길을 따라 일주문(주차장에서 우매리로 나
가면 중간에 있음)까지 걸어가며 계곡을 느끼고 싶지만 다음 답사지(경북 어느 지역)로 빨리
넘어가자는 일행의 독촉에 그 좋은 후식거리를 모두 포기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아쉽긴 했지
만 반야사에 깃든 보물과 문수전, 영천과 망경대 등 볼만한 것은 거의 다 보았으니 별로 후회
는 없다.

시간은 어느덧 16시. 해가 많이 길어지긴 했지만 조금씩 어둠의 기운이 피어나 세상을 훔치려
들고 우리는 고적한 산사에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사라졌다.
우리는 반야사란 절을 기억하겠지만 반야사는 잠깐 스치고 지나간 나를 기억이나 할련지 모르
겠다. 다음에 다시 인연이 된다면 (여름에 인연을 잡고 싶음) 계곡도 말끔히 둘러보고 세조가
몸을 씻었다는 영천에도 풍덩해보고 싶다.
이렇게 하여 반야사 나들이는 막을 내린다. ~~~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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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의 푸른 공간이자 너른 초원, 올림픽공원~몽촌토성 늦가을 나들이 (나홀로나무, 충헌공 김구묘역, 성내천)

 


~~~ 늦가을 올림픽공원(몽촌토성) 나들이 ~~~


▲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  올림픽공원 보호수 느티나무

▲  몽촌토성 동벽


 

늦가을이 한참 익어가던 11월 첫 무렵, 일행들과 나의 즐겨찾기 명소의 하나인 올림픽공원
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4시에 몽촌토성역(8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올림픽공원으로 들어섰
는데, 너른 공원에는 주말을 맞아 늦가을 정취를 즐기려는 온갖 사람들로 그야말로 북새통
을 이루었다.


 

♠  올림픽공원(Olympic Park) 입문

▲  지구 평화를 위한 웅대한 날개짓, 허나 진정한 평화는
아직도 멀었다 - 세계평화의문


올림픽공원의 정문이자 올림픽공원9경의 제1경으로 손꼽히는 세계평화의문은 1988년 7월 건축
가 김중업이 만든 것이다.
문 높이 24m, 폭(전/후) 37m, 전면 길이 62m(날개 정면 폭)의 장대한 규모로 1988년 가을, 천
하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서울올림픽의 정신을 기리고 지구의 평화를 염원하는 뜻에서 세웠다.
그래서 문 이름도 거창하게 세계평화의문이다.
문의 생김새를 보면 마치 큰 새가 날개짓을 하는 것 같다. 날개 밑부분에 그려진 수려한 색채
의 그림은 서양화가 백금남이 그린 것으로 고구려(高句麗) 사신도(四神圖)를 바탕으로 우측에
는 현무(玄武)와 주작(朱雀), 좌측에는 청룡(靑龍)과 백호(白虎)를 그렸다. 그리고 문 앞쪽
좌/우에는 조각가 이승택이 만든 열주탈이 각각 30개씩 배열되어 장관을 이룬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의 둥근 곡선을 활용해 비상(飛上)과 상승의 이미지를 강조하였다고 하며,
올림픽공원의 얼굴이자 마스코트로 그를 보는 순간 이미 아득한 과거가 되버린 1988년 그 시
절, 그리고 서울올림픽 개최 하루 전, 잠실에서 봤던 성화봉송까지 그때의 추억이 모락모락
떠오른다.


▲  세계평화의문 성화(聖火)

세계평화의문 안쪽에는 서울올림픽 당시 전국을 누볐던 성화의 보금자리가 있다. 나 같은 서
민들은 미친 난방비에 허리가 아작날 지경인데, 성화는 당시를 상징하는 특별한 존재라 하여
매일 비싼 기름을 먹는다. (성화 밑에 기름관이 있음) 늘 넉넉히 제공되는 기름을 먹고 살이
오른 불꽃을 휘날리며 거의 영생(永生)의 삶을 사는데, 1시간도 꺼진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기름 낭비로 비춰지는 것도 사실이라 공원의 빗장을 걸어잠구는 새벽에 한해 불을 꺼
두어 기름도 아끼고 성화도 좀 쉬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저것도 다 눈먼 세금임..)


▲  국기광장과 올림픽운동조형물 '서울의 만남'

세계평화의문을 들어서면 평화의광장이 마중을 나온다. 광장 좌우에는 공원안내센터와 편의점
, 식당, 커피집 등이 늘어서 있고, 여기서 직진하면 몽촌해자로 막다른 곳에 국기광장과 서울
의만남 조형물이 배수의 진을 치고 있다.
국기광장은 서울올림픽에 참여한 161개 나라의 국기가 펄럭이는 곳으로 그 광장 중심부에 '서
울의 만남' 조형물이 자리해 있다. 이 석물은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SLOOC)와 국제올림픽
위원회(IOC)가 서울올림픽 1주년을 맞이하여 올림픽운동의 확산을 염원하고자 세운 것으로 조
형물 바닥에는 올림픽에 참여한 세계 각국의 돌을 깔았는데, 돌 수집을 위해 돌 축제를 기획
했으며, 이 축제를 통해 우리의 전통문화와 풍습을 널리 소개하기도 했다.
그럼 여기서 잠시 서울 올림픽공원의 역사에 대해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서울의 만남' 바닥에 화석처럼 박힌 세계 각지의 돌들

올림픽공원은 1986년 제10회 아시안게임과 1988년 제24회 올림픽을 위해 조성된 공원으로 예
전에는 몽촌마을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1980년대 초반 이곳이 서울올림픽 체육시설 건립지로 확정되자 막연히 백제시대 토성으로 전
해 오던 몽촌토성을 품은 일종의 사적공원으로 꾸미기로 하고 1983년부터 6년에 걸쳐 토성을
발굴조사를 하였다. 1984년 본격적으로 이 일대를 갈아엎으면서 몽촌 사람들은 강제로 고향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1985년 5월 30일까지 이주를 마쳤으며, 1986년 4월 공원이 완성되었
다.
이후 1988년 몽촌토성 발굴조사가 대충 완료되자 토성을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
으며,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을 두루 개최하면서 국제적인 명소로 거듭났다.

공원 면적은 무려 1,674,380.17㎡(506,500평)로 서울에서 제법 큰 공원이다. 공원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서쪽은 몽촌토성과 몽촌해자로 이루어진 자연/역사 공간으로 22만
평에 이르며, 동쪽은 온갖 경기장으로 이루어진 체육 공간으로 23만 평에 달한다. 그 외 5만
평은 체육대 등의 교육 공간으로 쓰인다.

공원에는 온갖 운동 경기와 공연이 열리는 경기장과 공연장을 비롯해 한성백제박물관과 소마
미술관, 몽촌역사관 등의 실내 전시 공간과 지구촌공원 등의 소공원, 공원 곳곳에 놓여진 온
갖 조각품들, 몽촌토성과 충헌공 김구 묘역 등의 문화유적, 몽촌해자와 성내천, 88호수 등의
호수와 생태계 공간, 평화의광장과 세계평화의문 등의 광장과 올림픽 상징물, 서울올림픽파크
텔 등의 숙박시설 등이 닦여져 역사와 문화, 미술, 체육, 음악, 자연, 여가생활을 두루 누릴
수 있는 복합적인 공원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입장료를 받았으나 무료로 해방되었으며, 관람시간도 크게 완화되어 밤
시간(22시~5시)에만 빗장을 걸어둔다.

올림픽공원은 크게 줄여서 '올팍'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공원의 품으로 인도하는 관문은 세계
평화의문과 올림픽공원역으로 이어지는 동1/2문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 북1/2문, 남1/2/3/4문
, 서1/2문이 있다.

* 올림픽공원 9경 명소 (한국사진작가 협회에서 추천한 사진 촬영 명소임)
- 세계평화의문, 엄지손가락 조각품, 몽촌해자 음악분수, 대화 조각품, 몽촌토성 산책로, 나
  홀로나무, 88호수와 팔각정, 들꽃마루, 장미광장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 88-3 등 (올림픽로 424 ☎ 02-410-1114)
* 올림픽공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몽촌해자(夢村垓子, 몽촌호)와 수변무대

▲  남쪽 수변무대 부근에서 바라본 몽촌해자와 몽촌토성

국기광장 뒷쪽에는 몽촌해자라 불리는 호수가 그림처럼 누워있다. 여기서 해자란 방어력을 높
이고자 성 바깥에 닦은 물길로 1983년 이후, 몽촌토성 외곽을 싹 뒤집고 발굴조사를 했을 때
성벽 밑에서 도랑 흔적이 나왔다. 하여 발견된 흔적을 바탕으로 넓게 호수를 조성하여 몽촌해
자라 했다. 물은 성내천(城內川)에서 가져왔으며, 호수 둘레 1,800m, 총면적 53,500㎡, 수심
1.4~2m, 담수량은 무려 76,000톤이다.

남한산(南漢山)에서 발원하여 한강으로 흘러가는 성내천은 송파구의 소소한 젖줄로 송파구의
동부를 흘러간다. 올림픽공원역(5/9호선)을 지나서 올림픽체조경기장, 수영경기장 옆까지 다
가선 성내천은 까치다리 너머로 88호수를 빚고, 올림픽공원 북쪽 경계를 더듬으며 공원과 속
세(俗世)의 경계를 가르다가 성내교 직전에서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직진하면 한강이고, 왼
쪽(서남쪽) 지류가 바로 몽촌해자로 이 해자는 소마미술관 북쪽 물레방아에서 뚝 끊긴다.

해자 중앙에는 포항제철에서 1989년에 달아준 음악분수가 있는데, 물줄기가 최고 30m까지 솟
아 올라 하늘을 긴장시키며, 140여 곡의 멜로디에 맞춰 14종 14,000여 가지의 황홀한 물줄기
를 연출한다. 이 음악분수는 올림픽공원9경의 3경으로 꼽히며, 해자 남쪽에는 국기광장을 사
이에 두고 수변무대 2개를 닦아놓아 다양한 음악회가 열린다. 또한 자연형 호안(湖岸)과 6개
의 식물섬을 띄워놓아 생태계를 적극 배려했다.

* 음악분수 활동 시간 - 5~11월, 11~17시 (매시 10분에 가동)
* 몽촌분수 활동 시간 - 5~11월, 11~17시 (연속 가동)


▲  몽촌해자 남쪽 끝에서 바라본 해자와 토성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호수 너머로 수목이 울창한 언덕이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인 몽촌토성이다. 이 해자는 토성을 지키고자 그 앞에
조성된 것으로 토성이 절찬리에 쓰이던 백제 때와 지금의
모습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

▲  누가 이리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게 방화를 저지른 것일까?
늦가을에 잠긴 놀이터 나무들 (평화의광장 동쪽)

▲  대자연 앞에 한없이 작아보이는 인간의 작품들
아무리 거장이 만든 작품이라 한들 대자연 형님이 지른 늦가을의
향연 앞에서는 일개 장난감에 불과하다.

▲  두 얼굴의 조각품 (올림픽공원9경의 4경인 '대화')

서울 올림픽공원은 세계5대 조각공원의 하나로 추앙을 받고 있다. 88호수 주변과 평화의광장,
소마미술관, 지구촌공원, 조각공원, 만남의광장에 우리나라 조각품 34점과 세계 조각품 177점
이 공원을 아낌없이 수식하고 있는데, 이는 이곳이 88서울올림픽이 열린 현장이자 지역 명소
로 끝나는 것이 아닌 자연과 역사, 문화, 체육이 어우러진 국제적인 명소로 계속해서 가꾸어
진 결과이기도 하다.
물론 88올림픽을 후광(後光)으로 삼아 이곳이 국제적인 명소가 되긴 했지만 그 이후로도 관리
를 꾸준히 했기 때문에 빛은 그때보다 더욱 밝아졌다.

소마미술관에서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면 지구촌공원 건너편에 '대화'란 이름을 지닌 두 얼굴
의 조각품이 마중을 한다. 윗부분이 아작난 얼굴 2개가 서로 귀를 대고 있는 모습인데, 북아
프리카 알제리의 조각가 아마라 모한이 만든 것으로 1987년 7월부터 8월까지 50일 동안 이 땅
에 머물며 화강암을 깎고 다듬었다.
아마라 모한은 똑같이 생긴 쌍둥이가 서로 반목하며 대화를 끊자 발작한 신이 그들의 눈을 없
애 버려 서로를 볼 수 없게 만든 뒤, 평생 옆에 붙어 대화를 하도록 했다는 설화를 소재로 하
여 만들었다. 즉 말하기보다 듣는 것이 대화의 첫걸음이란 심오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이다
.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자 머리가 부딪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모습을 통해 의사소통
을 위한 노력을 표현하고 있다. 단순 작품을 떠나서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참
아름다운 작품인 것이다. 허나 인간은 신과 말 못하는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
는 존재라 그 단순한 진리를 쉽게 깨닫지 못한다. 당장 나도 그렇고, 이 땅의 백성들, 위정자
들이 그렇지 않은가?

▲  온갖 조각품이 누워있는 조각공원과 지구촌공원


 

♠  보호수 느티나무, 88마당, 몽촌토성 동벽 주변

▲  보호수 느티나무와 돌기둥 (오른쪽)

'대화' 작품을 지나면 불끈 솟은 하얀 피부의 돌기둥과 오래된 느티나무가 나란히 마중을 나
온다. 인간의 일개 작품이 감히 대자연이 빚은 작품과 나란히 서 있는 셈인데, 변화를 거부하
며 늘 같은 모습으로 일관하는 밋밋한 돌기둥보다는 계절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자연물이 더
아름답게 보여 자연산 작품에 자꾸 눈길이 간다. 돌기둥은 나무를 수식하는 들러리 정도 밖에
는 안보인다.

올림픽공원에는 늙은 보호수가 3그루 있는데, 이중 2그루가 이곳에 있다. 겉으로 보면 가지가
크게 2개로 된 나무처럼 보이지만 잘살펴보면 서로 별개임을 알 수 있는데, 그들이 너무 달라
붙어 있어서 그런 착시가 생긴 것이다.
이들 가운데 곧게 솟은 좌측 나무는 높이 7.5m, 둘레 300cm이며, 그 옆에 45도로 기운 우측
나무는 높이 12.5m, 둘레 380cm이다. 그들의 나이는 470여 년(1989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 약 430년)으로 이제는 먼지처럼 사라진 몽촌마을 사람들의 정자나무 역할을 했던
존재이나 지금은 공원 탐방객들에게 매일 그늘을 드리운다.


▲  우애가 좋은 형제처럼 너무 붙어있는 보호수 느티나무
(왼쪽이 서울시 보호수 24-5호, 오른쪽이 서울시 보호수 24-6호)

▲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먹고 자란 몽촌유허비
몽촌유허비는 강제로 정든 고향을 떠난 몽촌마을 사람들(몽촌 향우회)이 그리움과
푼돈을 모아 2001년 12월에 장만한 비석이다. 귀부와 검은 피부의 비신(碑身),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이무기가 새겨진 이수(螭首)까지 싹 갖추고 있는
당당한 모습이다.


▲  늦가을에 잠긴 산책로 (88마당, 올림픽체조경기장 방면)

▲  너른 잔디밭인 88마당

88마당은 토성과 자연으로 이루어진 올림픽공원 서부와 경기장, 공연장으로 이루어진 동부의
경계 지점이다. 너른 잔디밭으로 이루어진 공간으로 서쪽에는 몽촌토성이 흐르고 있으며, 동
에는 한얼광장과 여러 경기장이 있다. 광장 구석에는 여러 조각품이 공원의 향수를 돋구며,
이곳은 주로 대형 음악회와 사생대회, 소풍 장소로 널리 쓰인다.

▲  88마당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조각품들
 

▲  한얼광장과 올림픽공원역을
이어주는 한얼교


▲  한얼광장에 놓인 붉은 피부의 조각품
하늘에 뜬 초승달을 잡아와 붉게 박제를 한 것은 아닐까? 한얼광장은 88마당
동쪽으로 체조경기장과 핸드볼경기장 사이의 너른 광장을 일컫는다.

▲  몽촌토성(夢村土城)  동벽 (동문터)

올림픽공원하면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인 몽촌토성(사적 297호)이
다. 몽촌토성은 이곳의 진정한 알맹이로 그가 없는 올림픽공원은 갈비가 없는 갈비탕과 같다.
그가 있기에 이곳이 역사가 깃든 사적공원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고, 역사와 문화, 자연이 어
우러진 싱그러운 자연지대로 서울 부도심에 남게 된 것이다.

올림픽공원의 거의 40%를 장악하고 있는 몽촌토성은 백제 초기에 축성된 것으로 대표적인 한
성백제(漢城百濟)시대의 유적이다. 여기서 한성백제란 한강 유역인 현재 서울 강동구와 송파
구 일대에 있던 것으로 여겨지는 백제의 도읍지 위례성<慰禮城, 또는 한성(漢城)> 시절을 일
컫는 말이다.
둘레 2.3km(2,285m)에 이르는 몽촌토성은 막연히 백제 때 토성으로 전해져 왔을 뿐, 거의 방
치되고 있었다. 토성의 이름인 몽촌은 이곳 지명에서 따온 이름이지 원래부터의 명칭은 아니
었다. 그러다가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 흔쾌히 선정되면서 1980
년대 초에 체육시설을 갖춘 공원을 이곳에 닦기로 했다. 그래서 공사 전에 토성의 비밀을 밝
히고자 1983년부터 서울대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벌였다.
1989년까지 6차에 걸쳐 조사를 받았으며, 그 결과를 토대로 지금의 모습으로 산뜻하게 복원되
었다. (1982년 7월 국가 사적 297호로 지정됨)

몽촌토성은 자연산 언덕과 지형을 이용해 진흙으로 다진 것으로 경주 반월성(半月城)과 대구
달성(達城)과 비슷한 유형을 하고 있다. 자연 암반층을 급경사로 깎아 다듬기도 했으며, 동북
쪽 구릉에서는 외성(外城)의 흔적이 나왔다. 성 바깥으로 나가는 길목에서는 동/남/북문터가
확인되었고, 토성의 지형을 통해 남과 북, 동과 서를 잇는 도로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토성(土城)의 단점을 보완하고 수비력을 높이고자 서북쪽과 동벽 바깥에 목책을 세운
흔적과 서벽과 북벽 앞에 둘러진 도랑(해자)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북쪽 성벽은 성내천을
자연산 해자로 삼았다. 

토성 안에서는 출입구가 달린 6각형 모양의 움집터(12곳)와 건물터(4곳), 연못터(2곳), 저장
용 구덩이(30여 개), 무덤 등이 확인되었으며, 모두 한성백제 때 흔적이다. 그리고 한성백제
시절 유물이 앞을 다투어 무수히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 서진(西晋, 3세기 후반)의 동전무늬
도기조각(陶器片) 3점이 성 내부 퇴적층에서 발견되어 토성 축성시기가 늦어도 3세기 후반 이
전임이 분명해졌다.
움집터는 토성을 지키던 군사들의 막사로 여겨지며, 건물터는 자갈을 다져 기단과 적심을 만
든 정면 3칸 이상, 측면 2칸의 큰 구조로 밝혀졌다. 저장용 구덩이는 입구가 좁고 아랫 바닥
이 넓은 복주머니 모양 구덩이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런 구덩이는 음식물을 저장하기에
아주 좋다. 여기서 220개 이상의 큰 독이 출토되었으며, 부뚜막 시설과 조리용 토기, 배식용
토기 등이 나와 당시 백제인들의 식문화를 보여준다.
그리고 금동제 허리띠 장식과 금귀걸이, 세발토기, 굽다리 뚜껑항아리, 손잡이잔, 돌절구, 쇠
집게, 뼈갑옷, 화살촉 등 왕족과 귀족의 장신구부터 제사 유물, 군사 유물까지 다양한 유물이
나와 안그래도 많이 빈약한 한성백제 시절의 역사 이야기를 조금씩 채워주었다.

그렇다면 몽촌토성은 백제에게 어떤 곳이었을까? 아직 의견이 분분하나 풍납토성을 위례성의
중심으로 본다면 몽촌은 위례성을 보조하던 곳이거나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도읍으로 삼았다
는 한산(漢山)으로 여겨진다.<또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보기도 함> 풍납과 몽촌은 거
의 이웃처럼 자리해 있으니 이름은 조금 다르나 거의 같은 곳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바로
이들을 합쳐서 한성(漢城)이라 부르는 것이다.
발견된 유적과 유물을 통해 몽촌에는 제왕의 별궁과 관청, 군사시설, 왕족, 귀족들의 집이 있
던 것으로 여겨지며, 위례성의 중심으로 여겨지는 풍납은 왕궁과 관청, 귀족들의 집, 백성들
의 집, 시장이 있었다.

백제는 서울 송파/강동 지역(또는 하남시)에 위례성(한성)을 세워 5세기 말까지 아시아 해양
대국으로 크게 번영을 누렸다. 왜정(倭政) 때 확립된 식민사관 쓰레기들과 있는 역사도 왜곡
하고 축소시키는 영 좋지 못한 쓰레기들의 영향으로 백제하면 그저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제주도, 황해도를 차지한 조그만 나라로 생각하고 있다.
허나 백제는 우리의 좁은 생각과 달리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나라였음이 많은 역사자료와 유
물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백제는 일찍이 바다를 활용한 나라이다. 수군을 강화시키고 대외무역을 늘려 중원대륙의 요서
, 산동반도, 강남 지역 등 대륙의 무수한 해안 지역을 점령했고, <저장성을 비롯한 수천 리의
영토를 점유했다는 기록, 탐라 남쪽의 큰 섬(대만?)을 통치했다는 기록, 최치원(崔致遠)이 고
구려와 백제는 강성할 때 군사가 수십만으로 대륙 상당수를 먹었다는 발언 등등> 4세기 이후
가야(伽倻)가 점유하고 있던 왜열도로 진출해 그곳을 백제의 별채로 삼았다. 그리고 중원대륙
을 넘어 동남아까지 힘을 뻗치며 담로(擔魯)를 설치했다는 학설도 크게 지지를 얻고 있다.
특히 동성왕(東城王) 시절 북위(北魏)의 기병 수십 만을 때려잡은 사건이 있었는데, 그 현장
은 바로 산동반도(山東半島)였다. 산동을 둘러싼 백제와 북위와의 싸움에서 백제는 크게 승리
. 남조(南朝)의 여러 나라에 국서를 보내 자랑을 하며 그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렇게 잘나갔던 한성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한강을 건너 위례성을 점령하고
백제 군주인 개로왕(蓋鹵王)을 처단하면서 아주 비참하게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웅진(熊津
, 충남 공주)으로 천도함> 그때 고구려는 위례성 일대를 싹 불지르고 파괴하면서 모두 잿더미
가 되었고, 위례성 3글자는 천하에서 지워지게 되었다. 바로 그 고구려의 만행 때문에 위례성
위치가 오랫동안 아리송했던 것이다. 한산으로 여겨지는 몽촌토성도 그때 철저히 파괴되어 사
람이 살기 어려운 곳이 된 것으로 보인다.


▲  몽촌토성 동문터 (북쪽에서 본 모습)

토성 내부 면적은 216,000㎡로 인근 해자와 성내천까지 합치면 542,542㎡까지 덩치가 올라간
다. 토성에는 산책로가 그림처럼 그어져 걷는 재미가 쏠쏠하며, 예전 송파/잠실이 개발되기
전에는 서벽에서 행주산성(幸州山城)까지 보였다고 전한다. 옛날처럼 왕성(王城) 방어용의 역
할은 상실되었지만 관광/나들이의 성지(聖地)로 바쁘게 살고 있으며, 올림픽공원에 왔다면 꼭
1바퀴는 돌아야 1년이 잘풀리는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 겸 꿀단지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곳을 올림픽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면서 몽촌토성은 그 주인공이 아닌 조
연이 되버린 것이다. (지금 보면 거의 주연처럼 보이긴 함) 물론 이곳이 공원이 되면서 몽촌
토성이 개발의 칼질에서 목숨을 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엄연히 올림픽을 위한 공간으로 조성되
었기 때문에 토성의 동쪽 부분은 죄다 체육시설에 자리를 넘겨주었다. 게다가 서둘러 운동경
기장을 만들고 공원을 닦으면서 발굴 조사도 속시원히 하지 못하고 6년 만에 뚝 멈춰섰다.
그러다가 2013년 11월 몽촌토성 발굴 30주년이 되자,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그 특별전을 기획했
고, 아직도 적지 않게 베일에 가려진 몽촌토성의 속살을 들추고자 2014년부터 다시 발굴 조사
를 벌이고 있다. 현재는 예전 내성농장 일대를 조사하고 있는데, 조사가 마무리 되면 보다 많
은 흔적과 유물이 쏟아져 나올 것이며, 주택가로 뒤덮힌 풍납토성(風納土城) 일대도 싹 뒤집
어 땅속에 묻혀 공백으로 남아있는 한성백제의 나머지 이야기도 싹 맞추었으면 좋겠다.


▲  몽촌토성 동문터 (남쪽에서 본 모습)

토성이라고 해서 만만하게 보면 안된다. 높이는 왠만한 산성(山城)이나 석성(石城) 높이에 버
금가며 경사 또한 각박하기 때문이다. 높이가 낮은 곳은 5~6m, 높은 곳은 무려 10~15m에 달하
며, 몽촌해자와 접한 북벽과 서벽은 높이도 상당하고 경사도 아찔하다.
토성 보호를 위해 성벽 부분은 금줄을 쳐놓아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나 겨울 제국이 눈폭탄을
크게 투하해 은빛세계를 빚으면 포대자루 하나 들고 와서 썰매를 타고 싶은 곳이다. (물론 그
러면 절대로 안됨)


▲  몽촌토성 동벽에서 바라본 88마당

▲  몽촌토성 움집터 유적 (백제집자리전시관)

몽촌토성 동벽에는 백제시대 움집터를 담은 백제집자리전시관이 있다. 1983년부터 1989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이곳을 포함해 12곳의 움집터가 나왔는데, 여기서 발견된 움집터는 총
4곳으로 보존을 위해 특별히 푸른 피부의 보호각을 갑옷처럼 둘러 그들의 보금자리로 삼았다.
이곳이 전시관이다보니 인근 소마미술관이나 한성백제박물관처럼 매주 월요일마다 빗장을 걸
고 쉰다. (마침 그날이 월요일이라 내부는 담지 못했음)

전시관에 담긴 움집터는 6각형 모양으로 동남쪽에 출입구 시설이 있으며, 긴 벽의 높이가 6m,
짧은 벽은 4m 정도 된다. 그리고 주거지 한쪽 벽을 따라 밖으로 나온 온돌 모양의 화덕이 설
치되어 있었고, 벽체 안쪽 바닥에는 20~30cm 정도의 기둥 구멍이 남아있는데, 긴 벽에는 10개
가, 짧은 벽에는 4~5개가 남아 있다.


▲  자연과 역사 속을 거닐다 ~ 몽촌토성 동벽 산책로

▲  나무의 착각 ~ 몽촌토성 동벽
대자연이 여기저기 내던진 씨앗들이 토성에 뿌리를 내려 큰 나무가 되었다.
토성이 얼마나 큰지 나무도 그곳을 언덕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  몽촌토성 동벽~북벽, 옛 내성농장 주변

▲  늦가을이 마지막 춤을 추는 목책 앞 산책로 (몽촌역사관 방향)

▲  자연산 숲터널을 이룬 목책 앞 산책로 (88마당 방향)
무성한 숲터널 사이로 겨울이 슬그머니 들어와 제국의 기반을 닦는다. 조만간
이 아름다운 숲길도 겨울에게 몽땅 털려 뼈와 낙엽만 남게 될 것이다.

▲  몽촌토성 목책(木柵)

몽촌토성 동벽 앞에는 나무를 엮어서 만든 목책이 있다. 목책이란 방어시설의 하나로 몽촌토
성 일대를 조사했을 때, 목책의 흔적이 드러났는데, 생토 암반층에 1.8m 간격으로 직경 30~40
cm, 길이 30~90cm의 구멍을 파고 큰 나무로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 보조 기둥
을 세웠다.
목책의 높이는 정확하진 않으나 2m 이상으로 여겨지며, 이곳 목책은 발굴조사된 목책 기둥 자
리를 따라 그 위에 조촐하게 상상을 얹혀 재현한 것이다.

아무래도 토성이다보니 석성보다는 방어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목책과 해자를 두
룬 것인데, 목책은 동벽과 남벽 일대에 주로 설치된 것으로 여겨진다.


▲  가지런히 재현된 몽촌토성 목책

▲  늦가을이 우수수 떨어지면서 빈 자리도 조금씩 보이고 있다.

▲  올림픽공원 산책로(몽촌토성 산책로 제외) 가운데 가장 으뜸을 꼽으라면
목책에서 옛 내성농장으로 이어지는 구간이 아닐까 싶다. 늦가을의 손길이
가장 아름답게 거쳐간 곳으로 사람들은 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올해도 속절없이 흘러가는 가을의 발목을 붙잡으려 든다.

▲  '무제'라는 이름의 이글루 모양의 조각품 (1988년 박충흠 작)

▲  몽촌토성 북벽 (북문터)

'무제'라는 이름의 작품 앞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토성 북벽과 내
성농장이, 오른쪽은 몽촌역사관과 성내천, 성내천을 앞에 둔 토성의 동쪽 부분이다. 이제 공
원의 40% 정도 돌아본 셈이다.


▲  잠시 과거가 되버린 내성농장 (북문터 안쪽)

토성과 언덕으로 울퉁불퉁한 몽촌토성 속살에는 넓은 편은 아니나 조촐하게 평원이 펼쳐져 있
다. 그 평원은 몽촌토성 북벽 안쪽에 자리해 있는데, 평원 가운데 6,600㎡에 농경지를 닦고
토성 안에 있다는 뜻에서 내성농장이라 했다.

내성농장은 밭벼와 목화, 고구마는 물론 유채꽃과 코스모스, 해바라기 등의 들꽃이 넉넉히 둥
지를 틀던 싱그러운 곳이었으나 몽촌토성과 한성백제의 숨겨진 비밀을 캐고자 3년 넘게 발굴
조사에 들어가 농장은 사라지고 발굴 지역 주변에 펜스가 빙 둘러져 있다. 여기서 많은 백제
유물과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발굴이 마무리가 되면 농장으로 다시 돌아가거나 관련 유적지
보호구역으로 살아갈 것이다.


▲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처럼 솟은 나홀로나무 (사진 가운데)

내성농장 북쪽을 살펴보면 평원 한복판에 다른 나무와 멀리 거리를 두며 고독을 즐기고 있는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는 그를 '나홀로나무'라고 부른다. 어떤 이들은 '외톨이나무',
'왕따나무','연예인나무'라고도 하는데, 올림픽공원9경의 제6경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 나무가 홀로 된 이유는 정말 별거 없다. 1985년 몽촌토성 내부를 싹 갈아엎는 과정에서 키
가 크고 모양이 괜찮은 나무만 남기고 모두 베어버렸기 때문이다. 즉 인간들이 잘생기고 마음
에 드는 나무만 살려두고 모두 밀어버리면서 졸지에 나홀로나무가 된 것이다. 그렇게 친구를
잃고 홀로 되었지만 전화위복(轉禍爲福), 새옹지마(塞翁之馬)란 말이 괜히 허언이 아닌 듯 이
곳의 사진 모델로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낸다.


▲  토성 북벽에서 바라본 내성농장 들판 (예전 모습)

▲  토성 북벽에 뿌리를 내린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24-2호

내성농장에서 토성 북벽을 따라가면 장대하게 자라난 은행나무가 그늘을 내밀며 마중을 한다.
이 나무는 올림픽공원에 깃든 보호수 3그루의 하나로 나이가 무려 580년(1968년 보호수 지정
당시 추정 나이는 530년)에 이르며, 높이 17.5m, 둘레 6m에 이른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
는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이렇게 어엿한 나무로 성장을 했는데, 이곳에 서면 내성농장과 성내
천, 풍납동(風納洞) 일대가 훤히 바라보인다.


▲  몽촌토성에서 가장 높은 북벽 (서쪽 방향)

▲  몽촌토성 북벽 (동쪽 방향)

▲  북벽 쉼터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토성 북벽과 성내동/둔촌동 지역, 내성농장 등)

▲  북벽 쉼터에서 바라본 토성 북쪽 산책로와 성내천
성내천은 양재천(良才川)과 더불어 생태 하천으로 크게 거듭난 현장이다.

▲  늦가을 오색 향연에 잠긴 몽촌토성 북부(올림픽파크텔 동쪽)와
그런 향연을 지켜보는 속세(시내)


 

♠  올림픽공원 마무리

▲  억새가 춤을 추는 몽촌토성 서벽
서벽은 북벽에 비해 높이가 조금 낮고 경사도 포근한 뒷동산처럼 느슨하다.
게다가 다른 구간과 달리 소나무가 무성해 솔내음이 그윽하며,
그늘도 깊다.

▲  소나무로 그윽한 몽촌토성 서벽

몽촌토성 산책로는 경사도 거의 느슨하여 누구든 편히 거닐 수 있는 착한 길이다. 제아무리
걷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이런 길에는 퐁당퐁당 빠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걸
어도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자꾸만 걷고 싶다. 누군가 나를 말리지 않았다면 햇님 주위를 도
는 지구처럼 토성을 몇바퀴씩 돌았을 지도 모른다.
우리집으로 살짝 가져와 나 혼자서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아름다운 길이다.


▲  충헌공 김구 묘역(忠憲公 金構 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9호

몽촌토성 서벽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서 왼쪽을 잘 살펴보면 소나무들 너머로 하얀 철책이 둘
러진 공간이 보일 것이다. 주마간산처럼 움직이면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으니 속도를 조금 줄
이고 잘 살펴보자. 그 철책 안에는 올림픽공원의 숨겨진 옛 명소인 충헌공 김구 묘역이 조용
히 들어앉아 늦가을 햇살을 즐기고 있다.
이 묘역은 약간 구석에 있다보니 기웃거리는 사람이 거의 없어 늘 한적하다. (무덤을 알리는
이정표도 없음;) 올림픽공원에서 몽촌토성, 보호수 3그루 다음으로 늙은 이곳의 토박이로 토
성 산책로를 거닌다면 꼭 챙겨보기 바란다.


▲  소박한 모습의 충헌공 김구 묘

묘역의 주인공은 김구이다. 여기서 김구는 친일파들이 싫어하는 애국지사 김구(金九)가 아니
라 조선 중기에 살았던 김구(金構)로 이름만 같지 한자는 다르다.

김구(1649~1704)는 청풍김씨 집안으로 김징(金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참봉 이의길(李義吉)
의 딸이며, 자는 사긍(士肯), 호는 관복재(觀復齋)이다.
1669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83년 춘당대(春塘臺)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비로소 관
직 생활을 시작했다. 전적과 각 조의 낭관(郎官)를 거쳤고,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에 있을 때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의 계속되는 대립을 조정하려고 만언(萬言)에 가까운 시
무소(時務疏)를 올리는 등 애를 쓰기도 했다.

경연관(經筵官)과 승지(承旨), 황해도와 충청도, 전라도, 평안도관찰사(觀察使)를 지냈고, 대
사간(大司諫)을 거쳐 1697년 강화유수(江華留守)가 되어 장녕전(長寧殿)을 경영해 공을 세웠
다. 허나 흉년으로 모든 역사(役事)가 중지된 마당에 내전(內殿)의 명을 받아 집을 지었다고
해서 오도일(吳道一), 이광좌(李光佐) 등에게 탄핵을 받기도 했다.

김구가 잘한 일을 하나 끄집어 본다면 바로 단종(端宗) 부부의 원통한 넋을 조금이라도 풀어
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판결사(判決事)로 있을 때 노산군(魯山君)의 복위를 숙종(肅宗)에
게 건의했다. 하여 노산군은 강제로 눈을 감은지 241년만인 1698년에 비로소 단종이란 묘호(
廟號)를 받게 된다. 그리고 단종의 부인인 송씨의 묘도 능으로 추봉(追封)할 것을 건의해 사
릉(思陵)이란 능호를 받게 했으며, 사릉 능역(陵域) 공사를 맡아 그 공으로 형조판서(刑曹判
書)가 되었다.
이렇게 단종 부부에게 큰 선물을 준 그는 1703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으며, 1704년에 65세
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숙종은 충헌이란 시호를 내렸다.

김구는 제왕의 위엄에 굽히지 않았고, 의리에 따라 처신했으므로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
게 존경을 받았다. 육도(六韜)와 도가(道家) 관련 서적에 정통했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
가 패기가 넘쳤다. 그가 남긴 글씨로는 강원도 고성(高城)에 있는 '백천교중창비(百川橋重刱
碑)'와 경상도 선산(善山)에 있는 '김주신도비(金澍神道碑)'가 있다.

그는 말년에 몽촌토성에 거주했는데, 광주유수(廣州留守)도 자주 찾아와 인사를 했다고 하며,
비록 죄인이라도 이곳에 들어오면 김구의 허락을 받아야 잡아갈 수 있었다고 하니 몽촌 지역
에서 그의 영향력이 제법 컸음을 알려준다.

묘역에는 커다란 봉분(封墳)과 비석, 상석(上席), 망주석(望柱石) 1쌍과 양석(羊石) 1쌍이 있
으며, 양석은 근래에 조성되었다. 예전에는 공원 산책로에서 묘역이 뻔히 보였지만 그 앞에
야생화단지를 꾸미면서 그 뒤에 숨어버렸다.


▲  충헌공 김구 신도비(神道碑)

묘역 동남쪽에는 김구의 행적이 소상히 적힌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고급 관료와 왕족의 묘
역에만 쓸 수 있던 비싼 비석으로 보통 신도(神道)로 통한다고 전하는 묘역 동남쪽에 세운다.
1743년에 세운 비석으로 비문(碑文)은 이의현이 짓고 글씨는 서명균(徐命均)이 썼다.
270년이 넘은 늙은 비석이지만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하얀 피부를 잘 유지하고 있으며, 네
모난 비좌(碑座)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이무기 2마리가 다투는 모습을 새긴 지
붕돌을 얹혔는데, 조각 솜씨가 매우 현란하다.


▲  코스모스가 넝실거리는 야생화단지

김구 묘역 남쪽에는 야생화단지가 펼쳐져 있다. 가을이라 분홍색과 하얀색 코스모스가 들판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들의 보금자리와 꽃을 짓밟으며 오로지 사진 찍기에 부산하
다. 꽃을 보호하려고 금줄까지 쳐놓았지만 인간들의 욕망은 그 금줄마저 무색하게 만든다.


▲  미로찾기
미로가 속세보다는 덜 복잡하여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치면 거뜬히
통과할 수 있다. 우리네 인생도 다 저런 미로가 아니던가..?

▲  몽촌토성 남벽 (남문터 주변)

충헌공 김구 묘역과 야생화단지에서 잠시 놓고 있었던 몽촌토성 산책로를 다시 더듬는다. 남
벽은 높이도 낮고 경사도 완만한 편으로 숲도 제법 우거져 있어 일부 구간은 숲길 분위기를
자아낸다.


▲  늦가을에 잠긴 산책로 (목책 앞)
마지막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겨울을 경계하고 있는 나무들,
그렇게 다들 늦가을을 붙잡건만 힘이 다한 가을은 결국 짐을 싸고
떠나려고 한다. 나무들은 늦가을의 떠남을 슬퍼하며 낙엽으로
눈물을 대신한다.

▲  성내천 산책로 (피크닉장 주변)

▲  생태계 복원의 정석, 성내천 (둔촌동 방향)

몽촌토성을 반 바퀴 정도 복습을 더 하고 아쉽지만 평지길로 갈아탔다. 목책(木柵)과 피크닉
장, 성내천 남쪽 산책로를 지나 속세와 공원의 경계를 가르는 성내천을 건넌다. 성내천에는
많은 다리가 놓여져 있는데, 우리가 건넌 것은 무지개다리이다.
성내천은 한때 개발의 칼질로 망가진 저주 받은 하천이었으나 오랜 노력에 결과로 자연이 숨
쉬고 온갖 식물과 동물들이 발을 뻗고 자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다시 살아난 성내천을 보니
회색 도시에서 오염된 눈과 마음이 자연을 통해 확 정화됨을 느낀다. 역시 인간은 자연의 일
부로 살아야 별탈이 없다. 부디 복원이 무색하지 않게끔 앞으로도 철저히 관리를 해주어 우포
늪 수준으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다리를 거쳐 속세로 나오니 어느덧 18시. 평온했던 공원에 잠시 익숙해졌다가 다시 속세로 나
오니 정말 딴 세계에 온 기분이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올림픽공원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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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1월 1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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