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의 세계를 온몸에 담은 바위 ~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 (부처바위) ♠

▲ 부처바위에 깃들여진 탑곡 마애조상군
살아있는 거대한 야외박물관이자 신라 불교문화의 보고(寶庫)인 경주 남산(南山, 468m)은
산 전체가 사적 311호로 경주국립공원의 일원이다.
남산은 크게 동과 서로 나눌 수 있는데, 통일전(統一殿)과 보리사, 부처골이 있는 동북쪽
일대를 동남산(東南山)이라 부른다. 이곳에는 불교풍 이름을 지닌 미륵골과 탑골, 부처골
등의 골짜기가 안겨져 있으며,각 골짝마다 신라인의 걸작품이 하나씩은 숨겨져 있어 경주
에 목말라하는 속인(俗人)들을 유혹한다.
미륵골에는 남산에서 가장 큰 절인 보리사(菩提寺)가 있으며, 고운 자태의 미륵곡 석불좌
상(보물 136호)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부처골(불곡)에는 남산에서 제일 오래된 불상으로
꼽히는 석불좌상(보물 198호)이 바위에 얇게 굴을 파고 은거하고 있으며, 이번에 찾은 탑
골에는 부처의 세계를 담은 커다란 부처바위가 있다.
보리사 입구인 갯마을에서 남천(南川) 둑방길을 따라 북쪽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탑골 아
래에 터를 닦은 조그만 마을, 탑골마을이 나그네를 반긴다. 발자국 소리가 미안할 정도로
적막이 깃든 마을을 벗어나 계곡을 10분 가량 들어가면 부처바위를 품은 불무사가 모습을
비춘다.
탑골은 그리 잘생긴 계곡은 아니지만 숲이 울창하고 남산에서는 별로 없는 조그만 폭포와
넓은 소(沼)도 갖추어져 있어 한여름 쉬어가기에 적당하다.
▲ 불무사(옥룡암) 가는 길 개울을 옆에 끼고 펼쳐진 저 산길의 끝에는 불무사와 탑골의 오랜 주인 부처바위가 있다. 속세와 산속의 외딴 절을 이어주는 길로 인적이 별로 없어 사색의 공간으로 그만이다. 속세의 번뇌를 숲과 개울에 말끔히 털어버리며 불무사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 계곡에 걸쳐진 안양교(安養橋) ~ 다리를 건너면 바로 불무사이다.
 ▲ 불무사 앞에 조그만 폭포와 소(沼) 남산이 베푼 계곡물은 이곳에서 잠시 숨을 돌리다가 넓은 세상을 향한 끝없는 여정에 들어간다. 평소에는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물을 품고 있을 이곳은 여름제국의 무차별 공습으로 마치 인간의 세상을 상징하듯, 흙탕물로 변해버렸다. |
♠ 옛 신인사(神印寺) 자리를 지키고 있는 조그만 산사, 부처바위를 든든한 후광으로 법등을 이어가는 남산 불무사<佛無寺 = 옥룡암(玉龍庵)>
▲ 여염집 같은 불무사 종무소(宗務所) |
탑골 깊숙한 곳에 둥지를 튼 불무사(옥룡암)는 정토종(淨土宗) 소속으로 1924년에 지어진 조촐한 절이다. 은은한 풍경소리와 산새의 지저귐이 전부인 조용하고 아늑한 산사로 왜정(倭政) 시절에 신인사(神印寺)라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신라 때 절인 신인사의 옛터로 드러났다. 법당(法堂) 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칠성각, 종무소(宗務所), 관음전 등 7~8동의 건물을 지녔으며 경내 뒤쪽에 는 절의 든든한 밥줄인 부처바위(탑곡마애조상군)가 병풍처럼 자리한다.
계곡 위에 걸린 안양교를 건너 경내로 발을 들이니 제일 먼저 툇마루를 갖춘 'ㄱ'자 모습의 종무 소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절집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옥형 태로 여염집 분위기를 진하게 선사한다. 그 주변으로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기와집 2~3채 가 있는데, 이들 모두 속세의 여염집과 비슷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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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의 짓궂은 장난에 만신창이가 된 불무사 석탑 |
대웅전으로 오르는 길목의 오른쪽 수풀 사이로 형편없이 깨지고 닳아버린 신라 석탑 1기가 자리 해 있다. 2중에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얹힌 이 탑은 지금은 2층석탑으로 우중층하게 서 있지만 원래는 신라 탑의 주류를 이루던 3층석탑이다. 1층 탑신은 그나마 온전하지만 2층은 아예 없어졌고, 3층은 옥개석(屋蓋石)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 위로 복발로 보이는 동그란 부분이 있 다. 탑 구석구석에는 장대한 세월이 할퀴고 간 상처들로 거의 성한 데가 없을 지경으로 보는 이 의 마음을 안쓰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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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끄러미 아래를 굽어보는 불무사 대웅전(大雄殿)
▲ 대웅전 내부 |
종무소보다 한층 높은 곳에 놓여진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근래에 지어 진 것이라 고색의 멋은 찾아볼 수 없다. 내부에는 문수, 보현보살을 대동한 석가여래 3존불이 금 빛찬란한 모습으로 앉아 있으며 좌측으로 중생들의 소망이 담겨져 있을 수백 개의 촛불이 불빛을 진하게 드러내어 황홀한 풍경을 연출한다. 좌측 벽에는 조금의 여백도 허용치 않은 신중도(神衆 圖)가 걸려있으며 3존불 뒤로 후발탱화가 든든히 자리한다. |
▲ 칠성각(七星閣) |
▲ 대웅전 좌측 건물로 선방으로 여겨진다. |
대웅전 좌측에는 선방으로 쓰이는 툇마루를 갖춘 건물이 있고 우측에는 칠성각(七星閣)이 있다. 칠성각은 칠성신(七星神)과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건물의 모습은 절집 이 아닌 거의 당집 분위기이다. 칠성각이란 현판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마을의 안녕이나 산신에게 제를 지내는 당집으로 오인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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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성각에 봉안된 빛바랜 칠성도(七星圖) 제법 묵은 티가 풍겨 대략 70~80년 이상은 되어 보인다. |
대웅전 주변에 머무는 사이 갑자기 하늘에서 큼지막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안그래도 하 늘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있었는데, 탑곡 마애조상군으로 넘어가려는 찰라에 여름제국의 공습 이 시작된 것이다. 다행히 절집에서 공습을 받아 다행이다. 피할 곳이 넉넉하기 때문이다. 만약 절로 한참 오르던 도중에 비벼락을 맞았다면 이건 정말 대책이 없다. 불무사의 적막함을 한순간 에 깨뜨린 여름 제국의 공습, 빗방울은 그렇게 절과 남산, 경주 땅을 강하게 적셔댄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소나기라 여기고 대웅전 좌측 건물로 비를 피했다. 허나 공습은 그치기는 커 녕 점점 세차진다. 이러다 탑골이 범람하고 부처바위와 절이 떠내려가는 것은 아닐까? 아직 갈 길은 많은데 우산은 없고 그렇다고 공습을 곧이곧대로 맞으며 다닐 용기까지는 더더욱 없다. 기 왕 이렇게 된 거 절에 잠시 몸을 의탁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속히 그치길 바랬으나 시간이 지나 면서 '오늘 안에는 그치겠지 마음대로 쏟아져라' 체념해버린다.
가방을 베게 삼아 툇마루에 벌러덩 누워 촉촉히 비가 내려앉은 산사의 고즈넉한 풍경을 온몸으로 맞이한다. 운치 가득한 비 내리는 산사의 풍경은 나의 눈을 한없이 감동시키며 비의 합창소리는 나의 귀를 한량없이 기쁘게 한다. 세상 모든 근심 빗물에 떠내려 보내며 누워있던 1시간은 정말 로 극락이 따로 없었다. 빗방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졸음의 희롱까지 즐겼던 것이다. 얼마나 꿈 나라를 헤맸을까? 귓전이 허전해 눈이 뜨이니 제국의 공습은 그새 끝나고, 비가 그친 산사의 풍 경이 고스란히 나를 맞이한다. 남산에 낀 먼지가 싹 씻겨 내려간 듯, 신선하고 상쾌한 기운이 나 를 엄습하면서 나의 기분도 개운해진다.
지붕에 고인 빗물이 낙화(落花)처럼 떨어지던 대웅전을 벗어나 절 뒤쪽에 자리한 부처바위로 다 가선다. 내가 탑골에 들어온 것은 그를 보기 위함이지 불무사 때문이 아니다. 길 중간에 담장에 둘러싸인 관음전(觀音殿)이 있는데, 역시 툇마루를 갖추고 있다. 관음전이라고는 하지만 그 모습 이 서원(書院)이나 양반가의 서재(書齋)와 너무 비슷하여 다소 어색할 따름이다. 솔직히 불무사 의 사우(寺宇)은 대웅전을 제외하고는 불전의 품격과는 이상하리만큼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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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무사 관음전 |
♠ 거대한 바위에 함축된 부처의 세계 ~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塔谷 磨崖彫像群) - 보물 201호
 ▲ 부처바위의 남쪽 면 |
불무사 뒤쪽에는 높이 9m, 둘레 30m 정도의 범상치 않은 큼직한 바위가 있다. 바위 사방에는 불 상을 비롯한 탑과 비천상(飛天像), 승려 등 34점의 조각이 빼곡히 새겨져 가히 장관을 이루는데, 그 연유로 부처바위란 좋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 바위에 새겨진 것들이 바로 탑곡마애조상 군이다.
신라 사람들이 그렇게나 열망하던 부처의 세계를 하나의 바위에 압축해 놓은 우리나라에서 그 유 례가 없는 것으로 남면과 동면, 서면의 삼면(三面)을 이루고 있으며 북면은 언덕의 정상이다. 바 위가 그늘진 곳에 자리해 있어 한여름에는 시원하나 이끼 등이 군데군데 기생하여 바위를 위협한 다. 게다가 오랜 풍상으로 마멸이 심해지고 바위에 금이 가는 등 적절한 건강대책이 요구된다.
바위의 남면은 부처바위의 중심으로 부처가 보살과 나한(羅漢)에게 설법(說法)을 하는 영산정토( 靈山淨土)를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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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남면에는 무엇이 있는가? 우선 바위 가운데로 마애석불좌상이 자리해 있다. 그는 흐드러지 게 핀 연꽃을 대좌(臺座)로 삼아 앉아있는데, 머리 뒤로 연꽃으로 된 동그란 두광(頭光)이 그를 신비롭게 꾸민다. 머리 위로는 사진상으로는 잘 보이진 않지만 천개(天蓋)가 떠 있다. 천개란 귀 족들이 사용하는 일종의 양산으로 천개 위로는 아름다운 천녀(天女) 2명이 묘사되어 부처의 세상 을 칭송한다.
석불 우측에는 어디선가 낯이 익은 듯한 탑(왼쪽 사진)이 하나 있다. 모양새를 보니 석탑보다는 나무로 만든 목탑(木塔)임을 짐작케 해주는데, 2중 기단 위에 탑을 올린 형태는 신라 탑의 전형 적인 양식이다. 게다가 탑의 층수를 세어보니 딱 9층이다. 9층목탑하면 딱 떠오르는 것은?? 그렇 다 바로 신화 속으로 사라진 황룡사(皇龍寺)의 9층목탑이다. 황룡사 목탑은 진흥왕(眞興王)부터 선덕여왕 시절까지 무려 93년(553~646년)을 낑낑대며 만든 높이 224척(약 74m)의 장대한 탑이다. 주변 9개의 나라(당나라 등의 중원왕조, 왜국, 말갈..)를 부처의 힘으로 누르고 싶었던 약소국 신라의 의지와 그들의 천하관(天下觀)이 고스란히 담긴 이 탑은 유감스럽게도 1238년 고려를 침 범한 몽고 애들이 말끔히 불질러 버려 지금은 터만 쓸쓸히 전한다. 비록 800년 전에 한 줌의 재 로 사라졌지만 부처바위 한 쪽에 그의 축소판으로 보이는 목탑이 진하게 남아 그의 왕년을 헤아 리게 해주며, 지금 한참 구상중인 황룡사 목탑 복원프로젝트(오늘날 기술로는 어림도 없다고 함) 에 커다란 단서를 제공한다. 또한 지금은 이 땅에서 사라진 신라 목탑의 형태를 알려주는 소중한 열쇠이기도 하다. 탑 꼭대기에는 온전한 모습의 상륜부(相輪部)가 있으며 탑신의 추녀 부분에는 풍경까지 달려있어 바람이 부는 날에는 풍경소리가 잔잔히 울려퍼질 것만 같다.
석불 좌측에도 또 다른 7층목탑(오른쪽 사진)이 있다. 탑의 모양은 우측 9층탑의 축소판 마냥 비 슷하며 2중의 기단 위에 탑을 얹힌 형태이다.
두 탑 아래로는 천마총(天馬塚)에 그려진 천마(天馬)와 닮은 듯한 사자<혹은 용마(龍馬)> 2마리 가 새겨져 있다. 이들은 부처의 세계를 지키는 존재로 9층탑 밑의 사자는 털이 없어서 암사자로 여겨지며 꼬리가 무려 3갈래에 이른다. 7층탑 밑의 사자는 꼬리가 복잡하고 머리 부분이 대관령 양떼목장의 양처럼 털이 복스러워 숫사자로 여겨진다. |
 ▲ 부처바위의 서쪽 면 보리수로 보이는 두 그루의 나무(어떤 자료에는 반야나무와 망고나무라고 함) 밑에서 조용히 선정(禪定)에 든 부처(혹은 승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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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바위의 서쪽 면은 산으로 오르는 가파른 언덕에 자리해 있다. 이곳에는 삼존불과 승려상, 비 천상 6구 등이 바위면을 가득 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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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쪽 면 가운데에 자리잡은 2개의 불상(왼쪽사진 )은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3존불로 왼쪽에 큰 두광을 가진 이가 아미타불이다. 품위를 갖춘 신 라 귀부인을 모델로 한 듯, 기품과 자애로움이 돋보이는 그의 모습에선 좀처럼 눈길이 떼어지질 않는다. 머리 뒤의 두광(頭光)은 햇살같은 연꽃 이 피어있어 그의 웃음이 온면에 흐드러지는 듯 하다. 그의 좌측에는 관음보살이 합장인(合掌印)을 선 보이고 있으며 얼굴은 아미타불을 향해 있다. 3존불이니 당연히 우측에도 불상(아미타3존불이 니 아마도 대세지보살일 듯)이 있어야 되나 장 대한 세월의 거친 소용돌이에 희생되어 지금은 연꽃대좌와 옷자락 일부만 희미하게 전한다.
바위 중심에 아미타불이 있으니 동쪽 면은 당연 서방정토(西方淨土)를 상징한다. 아미타불 위로 는 극락을 찬미하는 6명의 비천상이 제각각의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
 ▲ 부처바위의 북쪽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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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바위의 북쪽은 바위의 정상이다. 이곳에는 바위에 새겨진 삼존불좌상(三尊佛坐像)과 얇은 감 실(龕室)에 자리한 여래상, 얼굴이 파열된 여래입상 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들 앞에는 제멋 대로 생긴 커다란 돌이 뒹굴고 있고, 그 앞에 돈을 넣는 복전함과 기도처가 있다.
바위에 얇게 새겨진 삼존불좌상은 한 가족이 나란히 기념촬영에 임하는 것 같아 무척 단란해 보 인다. 비록 마멸이 심하긴 하나 천진스러운 표정은 잃지 않았다. 그들 모두 두광을 갖추고 있는 데 마치 두꺼운 겨울잠바에 딸린 모자를 뒤집어 쓴 듯 하다. 가운데 불상은 커다란 연꽃대좌 위 에 앉아 있으며 양쪽 보살도 연꽃대좌에 앉아 합장인을 선보이며 가운데 불상을 주시한다. 그들 왼쪽으로 나무로 보이는 조각이 있는데 이들은 능수버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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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존불과 별도로 우측에 서 있는 2.2m의 여래입상(왼쪽 사진)은 얼굴이 절반 가까이 파열되었으나 풍성하고 둥근 인상을 느낄 수 있다. 목에는 삼도가 그어져 있고, 허리는 잘록하고 가슴 부분은 풍만하여 아름다운 여인네를 보듯 그를 보는 눈이 시리도록 즐겁다.
그의 몸을 덮은 옷의 주름은 다리 아래까지 늘어져 있으며 왼손은 배꼽에 대고 오른손은 오른쪽 다리로 내려뜨려 여원인(與願印)의 일종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는 네모의 대석(臺石) 위에 서 있 으며 옷 밖으로 두 발이 나와있다. 그의 뒤로는 승려상 하나가 그를 연모하듯 새겨져 있다.
그들이 바라보는 정면 높다란 곳에는 4.5m의 날렵한 맵시의 3층석탑(오른쪽 사진)이 있다. 이 탑 은 2중의 기단 위에 탑을 얹힌 신라 후기 탑으로 옥개석(屋蓋石) 받침이 3단이고 추녀 부분이 두 툼하여 여타 신라 탑과는 다른 모습이다. 추녀마루에는 못구멍이 1개씩 있는데 아마도 풍경물고 기를 달아놓았던 것으로 여겨지며 세월의 태클에 쓰러져 잇던 것을 1977년 지금의 자리에 복원하 였다. |
 | 부처바위의 동쪽 면은 불상과 비천상 1기, 몇 가 지 장식물이 전부로 다른 면과 달리 매우 썰렁하 다. 그도 그럴 것이 새길 수 있는 공간이 무척 좁기 때문이다.
대나무와 능수버로 보이는 나무 사이로 불상 하 나가 연꽃을 자리삼아 앉아 있는데 그는 약사여 래(藥師如來)로 여겨진다. 그가 만약 약사불이 맞다면 이쪽은 동방정토(東方淨土)가 된다.
그의 머리 뒤에 있는 두광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아 야밤에도 환할 것 같으며, 그 위쪽에는 비 천상 하나가 피리를 불며 허공을 맴돈다.
◀ 부처바위의 동쪽 면 |
이렇게 하여 불무사를 겯드린 탑곡마애조상군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부처바위는 그 모습이 준 수(俊秀)하여 부처의 세계로 둔갑되기 전에는 치성을 드리는 민간신앙의 현장으로 쓰였을 것으로 여겨지며, 신라사람들의 지나치다 싶은 신앙심은 멀뚱한 바위를 그야말로 위대한 작품으로 승화 시켰던 것이다. |
※ 탑곡마애조상군(불무사) 찾아가기 (2009년 10월 기준) ① 대중교통
* 서울강남고속터미널, 동서울터미널에서 경주행 버스가 30~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종합터미널, 동대구고속터미널, 대구동부정류장, 울산, 포항에서 경주행 버스가 수시로 떠 난다. * 서울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대전역에서 경주행 열차가 1일 7회(새마을호 6회, 무궁화호 1회) 떠나며, 청량리역에서 심야 무궁화호 열차가 매일 21시에 떠난다. * 동대구역에서 경주, 서경주행(포항행 열차만 정차) 열차가 각각 1일 10여 회 운행하며, 울산역 과 부전역에서 경주행 열차가 1일 10여 회 다닌다. * 경주시외터미널 건너편, 고속터미널 건너편, 경주역에서 경주시내버스 11번을 타고 갯마을에서 내린다. * 불국사나 보문단지에서 갈 경우는 경주시내버스 10번을 이용하면 된다. * 갯마을에서 남천둑방길을 따라 북쪽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옥룡암(불무사), 탑골마애조상군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그것을 따라 10분 정도 오르면 불무사가 나오며 경내를 지나면 바로 부처바위(탑곡마애조상군)이다. ② 승용차 (절까지 진입 가능) * 경부고속도로 → 경주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배반4거리에서 불국사역 방면 우회전 → 사천왕 사터에서 통일전 방면 → 화랑교를 건너 남천둑방길로 우회전 → 불무사(옥룡암입구)에서 좌회 전 → 불무사(탑곡마애조상군) * 울산 → 경주 방면 7번 국도 → 통일전입구 3거리에서 좌회전 → 통일전에서 우회전 → 화랑교 못미쳐에서 남천둑방길로 좌회전 → 불무사입구에서 좌회전 → 불무사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산 69번지 (불무사 ☎ 054-748-0688) |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0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단 블로그는 한달까지이며, 원본은 2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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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일 - 2009년 10월 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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