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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삼각산) 화계사


' 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화계사 '
화계사 대웅전과 명부전
▲  화계사 대웅전과 명부전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의 한복판에 북한산(삼각산) 화계사를 찾았다. 화계사는
20번 넘게 인연을 지은 절로 도봉동(道峰洞) 집에서 10리 정도로 아주 가까운 곳인데, 문
득 그곳이 크게 목말라져 간만에 발걸음을 했다.
집에서 가까우니 일찍 나설 필요도 전혀 없어 햇님이 중천에 걸린 16시에 천천히 집을 나
섰다.


▲  화계사입구에 뿌리를 내린 오래된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9-5호

한신대교차로에서 화계사로 인도하는 도로(화계사길)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넓게 그늘을 드
리우며 정자나무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그가 보호수로 지정된 때는 2006년 7월로 그 당시
추정 나이가 12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140년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나무의 높이 17.7m,
둘레는 3.5m이다.


♠  화계사 입문

▲  화계사 일주문(一柱門)

속세와 북한산(삼각산)의 삼삼한 숲이 경계를 맞대고 있는 곳에 화계사의 정문인 일주문이 자
리해 있다.
이 문은 1998년에 지어진 것으로 화계사의 국제적인 명성에 걸맞게 문의 규모도 참 장대하다.
현판에는 '삼각산(三角山) 화계사'라 쓰여 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주며, 문을 들어서면 오른
쪽(북쪽)으로 숭산행원선사와 고봉선사, 덕산선사, 적음선사의 사리를 간직한 부도탑의 공간
이 있으며, 화계사의 모습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다.


▲  화계사에서 북한산(삼각산)으로 올라가는 화계사계곡 산길

화계사 경내 직전에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절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등산이 목적이
라면 절로 들어가지 말고 여기서 미련없이 계곡으로 내려가야 된다. 절과 등산로 사이에는 계
곡이 가로막고 있어 이어지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  계곡 옆에 뿌리를 내린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9-1호
나이는 약 450년, 높이 20.5m,
가슴 둘레 336cm

▲  대적광전(국제선원) 뒤쪽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9-3호
나이는 약 460년, 높이 20m,
가슴 둘레 368cm


▲  대적광전(국제선원) 옆에 자리한 늙은 느티나무들
왼쪽 나무는 앞서 계곡 옆에 뿌리를 내린 느티나무(서울시 보호수 9-1호)이며,
오른쪽 나무는 서울시 보호수 9-2호로 나이는 약 460년, 높이 28m,
가슴 둘레 316cm의 큰 덩치를 지녔다.


화계사에는 유난히 늙은 느티나무가 많다. 입구에 1그루, 대적광전 주변에 3그루가 포진해 있
는데, 입구를 제외한 이들 3그루는 모두 400년이 넘는 지긋한 나이를 지니고 있다. 제일 오래
된 나무는 보호수 9-2호와 9-3호로 약 460년을 헤아리며, (1981년 보호수 지정 당시 추정 나
이가 약 415년) 가장 키가 큰 것은 보호수 9-2호 나무, 제일 둘레가 큰 것은 보호수 9-3호 나
무이다.
화계사는 1522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데, 9-2호와 9-3호 나무의 나이를 거슬러 올라가면 거
의 1560년이 된다. 굳이 1522년이 아니더라도 이들을 통해 적어도 16세기부터 법등(法燈)을
밝혔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산증인들로 절에서 정자나무 또는 풍수지리에 따라 심은 것으로 여
겨진다.


▲  대적광전(大寂光殿)

보호수 느티나무와 키를 겨루고 있는 대적광전은 4층 규모에 웅장한 건물이다. 겉으로 보면 3
층으로 보이겠지만 지붕에도 공간이 있어 총 4층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은 1991년에 짓기 시작하여 1993년에 완성을 본 화계사의 자존심 같은 존재로 복합적
인 역할을 하고 있는데, 1층은 공양간과 국제선원 사무실로, 2층은 강의실(제일선원)과 요사
(寮舍), 3층은 대적광전, 4층은 국제선원 및 일요영어법회와 템플스테이 장소로 쓰인다. 특히
공양간은 300여 명을 동시에 담을 수 있는 규모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화계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경내 북쪽 언덕에서 바라본 화계사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화계사는 1522년 신월선사(信月禪師)가 창건했
다고 전한다. 신월은 정체가 아리송한 서평군 이공(西平君 李公)의 도움을 받았는데, 벌채를
하지 않고 인근 부허동(浮虛洞)에 있었다고 전하는 보덕암(普德庵) 건물(법당과 요사 50칸)을
가져와 절을 세웠다. 아마도 서평군이 그곳을 매입하거나 빼앗아 절 건립에 제공했던 모양이
다.

화계사 건립에 희생된 보덕암은 고려 광종(光宗) 때 법인대사(法印大師) 탄문(坦文)이 지었다
고 전하나 확실한 것은 없다. 보덕암 건물을 단순히 옮겨왔다는 이유로 화계사의 창건 시기를
고려 초로 우기기도 했으나 이는 단순히 건물만 가져왔을 뿐, 절의 이름과 성격은 다르므로
엄연한 별개로 봐야 된다. 그래서 1522년을 창건 시기로 크게 삼고 있으며, 앞서 언급했던
460년 묵은 느티나무는 절의 창건시기를 그런데로 받쳐주는 산증인들이다.

1618년 9월 불의의 화재를 만나 절이 몽땅 잿더미가 되었다. 이때 도월(道月)이 덕흥대원군(
德興大院君) 집안의 지원을 받아 중창 불사를 벌여 1619년 3월 완성을 보았다.
이후 절이 크게 쇠퇴했으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민씨(府
大夫人閔氏)와의 인연 덕분에 다시금 흥한 기운을 얻게 된다. 당시 화계사는 민씨 외가의 원
찰(願刹)로 자주 절을 찾아와 불공을 올렸는데, 그러다 보니 대원군도 부인 손에 이끌려 이곳
을 찾았다. 당시 대원군과 화계사와의 끈끈한 인연, 그리고 대원군의 야망을 엿보게 하는 설
화 한 토막이 세월의 바람을 타며 은은히 전해온다.

때는 바야흐로 안동김씨 세력이 한참 나라를 말아먹던 시절의 어느 여름날<헌종(憲宗) 때로
여겨짐>, 대원군은 남루한 옷차림으로 화계사를 찾았다. 무더운 여름이라 참을 수 없는 갈증
으로 꽤 지친 상태였는데, 절 앞 느티나무에 이르니 왠 동자승(童子僧)이 아무 말도 하지 않
고 꿀물이 든 사발을 내밀었다.
대원군은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 듯, 사발을 신나게 들이키고 물을 준 이유를 물었다. 동자승
이 괜히 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자 동자 왈
'만인(萬印) 스님께서 이러이러한 손님이 오실 것이니 꿀물을 드리고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대원군은 자신이 올 것을 짐작했던 만인의 예지력에 크게 감탄하며 동자승의 안내로 만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대원군과 만인, 이들은 이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지 이번이 초면인지는 모르겠으나 금세 심
금을 터놓고 판이 큰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대원군은 안동김씨를 몰아내고 왕권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며 자신의 야망을 드러냈다. 허나 만인은 그의 야망은 물론이고 장차 나
라를 좌지우지할 인물이 될 것을 예견하고 있던 터라 크게 놀라진 않았다.
그래도 시치미를 한번 떼며,
'이것도 다 인연의 도리인데, 소승이 어찌하겠습니까? 흔쾌히 알려드리지요'


그 방법이란 무엇이냐? 충청도 덕산(德山,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가야사(伽倻寺) 금탑 자리
가 제왕(帝王)이 태어날 명당(明堂)이니 경기도 연천(漣川)에 있는 남연군(南延君, 흥선대원
군의 아버지)의 묘를 그곳으로 옮기라는 것이다. 그러면 장차 제왕이 될 왕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명당 자리를 알려주는 것은 좋으나 그 자리에 이미 절이 있다. 절에 몸담은 승려로써 참으로
몹쓸 말을 한 꼴이 된다. 허나 그렇게 흥선대원군이란 든든한 후광(後光)을 얻게 됨으로써 가
야사에게는 무지하게 미안하지만 화계사는 이전보다 더 흥하게 된다. 그게 바로 만인이 노린
것이다.

대원군은 돈을 마련하여 가야사를 찾아가 그곳 주지승과 흥정했다. 돈에 함빡 넘어간 주지승
은 자기 절에 불을 지르며 탑을 부셨고, 대원군은 남연군 묘를 그곳으로 이전했다. 이후 아들
이재황(李載晃)이 태어났고, 1863년 조대비(趙大妃)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고종
(高宗)이다. 이렇게 대원군의 꿈은 그런데로 이루어진다. 동시에 만인의 꿈도 실현된다. 허나
그러면 무엇하랴? 3대도 못가서 이 나라는 물론 이 땅의 역사까지 죄다 말아먹었거늘...

▲  명부전 지장시왕상과 지장보살도

▲  천불오백성전

고종 이후, 화계사는 날개를 겹겹히 달게 되는데, 1866년 대원군의 두둑한 지원으로 절을 중
수했다. 이때 지어진 것이 대웅전과 보화루(화장루)이다. 1870년에는 용선(龍船)과 초암(草庵
)이 대웅전을 중수했고, 1875년에 화산재근(華山在根)이 대웅전의 아미타후불탱을, 성암승의(
性庵勝宜)가 신중탱과 현왕탱, 지장탱 등을 조성했다.
1876년에는 초암이 전년에 궁궐에서 받은 자수(刺繡)로 만든 관음상(觀音像)을 봉안하고자 관
음전을 고쳐지었다. 이 관음상은 1874년 2월 훗날 순종(純宗)이 되는 왕자가 태어나자 그의
수명장수를 기원하고자 모후(母后)인 명성황후(明成皇后)와 조대비, 효정왕후(孝定王后) 홍씨
(헌종의 왕후로 홍대비)의 발원으로 궁녀들이 수를 놓아 만든 것이다. 기존 관음전이 1칸 밖
에 안되는 작은 건물이라 상궁(尙宮)들이 돈을 시주했고, 넉넉한 재정 지원에 장인들도 앞을
다투어 건립에 참여해 건물을 짓고 단청하는데, 불과 며칠 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1877년에는 왕명으로 황해도 배천군(白川郡, 한자는 백천이나 배천이라 읽음)에 있던 강서사(
江西寺)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을 가져와 화계사에 넘겨주었고, 이들을 봉안하고자 1878년 시
왕전을 고쳐지었다.
또한 1880년 조대비가 명부전에 불량답(佛糧畓)을 내렸으며, 1883년 금산(錦山)이 조대비와
홍대비의 지원으로 관음전의 불량계(佛粮契)를 세웠고, 1885년 산신각을 중수했다.
1897년에는 큰 종을 영주 희방사(喜方寺)에서 가져왔으며, 중종(中鐘)은 경도에서 구입하고,
운판은 해남 미황사(美黃寺)에서 옮겨왔다. 이렇게 고종과 순종 시절에는 왕비와 대비, 상궁
의 발길이 빈번해 속세에서는 이곳을 궁(宮)절이라 불렀다. 그만큼 왕실과의 끈이 두터웠던
것이다.

1910년 12월 월명(越溟)이 임종을 맞이하면서 강원도 양양에 있던 논 276두락(斗落)을 절에
헌납하면서 만일염불회가 세워졌으며, 1911년 왜정(倭政)의 사찰령(寺刹令)으로 봉은사(奉恩
寺)의 수반말사로 편입되었다.
1921년 3월 현하(玄荷)와 동화(東化) 두 화주가 김창환, 민준기 등의 시주로 관음전과 시왕전
을 중수 단청했고, 이듬해에 대웅전 개금불사를 벌였다. 1925년에는 주지 한찬우(韓讚雨)가
김종하, 오정근의 지원으로 법당 및 대방 앞뒤 축대를 쌓아 이듬해 7월 완성했으며, 1933년 7
월 한글학회 주관으로 한글맞춤법 통일안 마련을 위한 모임이 이곳에서 열렸다. 그때 논의된
통일안은 그해 10월 세상에 발표되었다.
1937년에는 종식(鍾植)이 낡은 건물을 정비했고, 북한산성으로 올라가는 길목 바위에 마애관
음상을 조성했다. 그리고 1938년에는 승려 안진호가 '삼각산화계사약지(三角山華溪寺略誌)'를
편찬했다.

6.25전쟁 때는 다행히 총탄이 비켜가 별 피해는 없었으며, 1964년 최기남 거사의 가족이 기증
한 최기남의 오백나한을 봉안하고자 천불오백성전을 세웠고, 1972년에 진암(眞菴)이 범종각을
지었다. 1973년에는 대웅전 삼존불을 조성했으나 이듬해 관음전이 불에 타면서 소실되었으며,
1975년 진암화상이 퇴락된 산신각을 증축해 삼성각으로 이름을 갈았다.
1991년 4층 규모의 대적광전을 세웠고, 1992년 국제선원을 개원해 외국인 승려의 필수 수행처
로 자리매김했다. 2001년에는 명부전을 보수하면서 지장보살상을 개금했고, 2005년에 대웅전
을 보수했고, 2018년 12월 미륵존불을 크게 마련해 지금에 이른다.

▲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인 조실당(祖室堂)

▲  화계사 동종

화계사가 외국인 승려의 성지가 된 것은 숭산행원의 오랜 노력 덕분이다. 그는 1970년대에 미
국으로 건너가 양이(洋夷)를 대상으로 한국 불교를 포교했다.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 많이 방
황하던 양이들은 그의 포교와 설법에 적지 않게 감명을 받았고, 그가 외국에 머무는 동안 5만
명이 넘는 양이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숭산이 외국에 세운 선원은 30개 나라에 120곳이 넘으며, 미국에서 처음 세운 '프로비던스 선
원'에서는 1982년 천하의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 세계평화회의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의 열성
적인 포교로 화계사를 찾는 외국인 승려와 승려 희망자가 나날이 늘자 계룡산(鷄龍山) 무상사
에 제2의 국제선원을 만들어 이들을 수용해 가르치고 있다.

화계사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삼성각, 보화루, 대적광전, 조실당, 천불
오백성전, 교육관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경내를 가득 메우고 있으며, 이중 대적광전
이 단연 규모가 크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동종과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등 국가 보물 2점과 대웅전,
목조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유물, 아미타괘불도 및 오여래도, 천수천안관음변상판, 탑다라니판,
대웅전 상량문 및 복장물 일괄 등 지방문화재 10점을 지니고 있다. 그 외에 400년 이상 묵은
느티나무 3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준다.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고 접근성도 좋으며, 주택가가 바로 지척이지만 삼삼한 숲에 포근히 감
싸여 있어 고즈넉한 산사의 멋을 누리기에는 그리 부족함이 없다. 국제적인 사찰이라 어색한
한국말을 구사하며 인사를 건네는 외국 승려와 수행자의 모습에서 우리나라 불교의 높은 위상
과 인기를 새삼 느끼게 한다.

* 화계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487 (화계사길 117, ☎ 02-902-2663, 903-3361)
* 화계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화계사 범종각, 보화루, 천불오백성전

▲  범종각(梵鍾閣)

대적광전 옆에 자리한 범종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사물(四物)
이라 불리는 범종과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의 보금자리이다.
범종각은 원래 대적광전 서남쪽에 있었는데, 2층으로 이루어진 6각형 건물이었다. 1972년 진
암(眞菴)이 대방(보화루)에 얹혀살던 영주 희방사(喜方寺) 출신 동종과 대웅전 처마 밑에 매
달려 거의 썩기 직전이던 법고를 위해 지은 것으로 기존 건물을 부시고 지금 자리에 번듯하게
새 범종각을 지었다.


▲  승려가 졸고 있는 종을 깨우니 종은 저녁 종소리로
은은하게 화답한다.

▲  화계사 동종 - 보물 11-5호

범종각에는 특이하게 종이 2개나 달려 있는데, 큰 종은 1978년에 진암이 만든 것이며, 그 옆
에 손바닥만한 작은 종은 1898년 희방사에서 상경한 동종이다.

이 작은 동종은 17세기에 활약했던 사인(思印) 비구가 만든 8개의 종 가운데 하나이다. 사인
은 손재주가 좋은 승려로 종을 무지하게 잘만들었는데, 그가 만든 종이 이곳과 강화도(☞
련글 보기
), 안성 청룡사(靑龍寺), 의왕 청계사(淸溪寺, ☞ 관련글 보기), 홍천 수타사(壽陀
寺), 문경 김룡사(金龍寺, ☞ 관련글 보기), 포항 보경사(寶鏡寺), 양산 통도사(通度寺)에 전
하고 있다. 이들 종은 모두 보물 11호 계열의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으나 원래는 강화도 동종
만 11호였다.
그러다가 2000년에 사인이 만든 종을 모두 보물로 삼으면서 화계사 동종도 그 혜택을 받게 되
었다. (이전에는 비지정이었음) 그만큼 사인이 만든 종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우수 종으로
전통적인 신라 범종 양식을 지키면서 거기에 자신만의 독창성을 집어넣었다.

화계사 동종은 1683년에 제작된 종으로 무게는 300근이다. 원래는 영주 희방사에 있다가 조선
왕실의 뜨거운 화계사 사랑에 힙입어 강제로 고향을 떠나 이곳에 안착하게 되었다. 덕분에 화
계사의 보물은 그만큼 늘어났다.
종 윗부분 용뉴에 쌍용(雙龍)을 배치한 것이 특징이며, 상대(上帶)에는 범자(梵字)를 2줄로
배치했고, 그 밑에 조선 후기 양식을 지닌 유곽(遊廓) 4좌가 있다. 유곽대는 도식화된 식물무
늬로 채우고, 유곽 안에 있는 9개의 유두는 여섯 잎으로 된 꽃받침 위에 둥근 꽃잎을 새겨 넣
었다. 그리고 유곽 사이에는 '종면경석(宗面磬石)','혜일장명(惠日長明)','법주사계(法周沙界
)'란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안성 청룡사 동종에서 같은 내용이 있다. 그리고 종 밑도리에는
가는 두 줄의 띠를 둘렀고, 띠 안에 연꽃을 새겨놓았다.
사실성과 화사함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종 조성과 관련된 명문(銘文) 200자 정도가 새겨져 있
어 종의 탄생 정보를 고맙게도 알려준다.

뜻하지 않게 화계사로 온 이 종은 이곳의 범종 역할을 하며, 하루에 2번 종소리를 날렸다. 그
러다가 1978년 그 곁에 새 범종을 매달면서 그 역할을 후배에게 물려줬고, 국가 지정 보물이
란 큰 명예직을 얻게 되면서 더 이상 종소리를 울리지 않았다. 그의 나이는 이제 340년, 아직
은 한참 몸을 풀 나이이나 절에서 그의 몸을 무척 아끼면서 이제는 거의 무늬만 종이 되었다.
종은 종의 역할을 해야 종다운 것이지, 저렇게 그림의 떡으로 두는 것은 옳지 못하다. (다만
종의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경우는 예외)


▲  고된 세월에 녹초가 다 된 목어(木魚)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손으로 만지면 가루가 될 것 같은
위태로운 모습이다. 그래서 차마 그를 두드리지는 못하고 새로운
목어를 빚어 범종 옆에 두었다.

▲  대적광전 (3층 부분)
이렇게 보면 1층처럼 보이지만 이건 눈속임이다. 엄연한 4층 건물로 대적광전은
흔히 3층을 일컫는다.

▲  호화롭기 그지 없는 대적광전 내부
연병장처럼 넓은 내부에는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盧舍那佛), 석가모니불이
삼신불(三身佛)을 이루고 있으며, 협시보살로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보현/문수보살을 봉안해 장엄함을 한껏 뽐낸다.

▲  보화루<寶華樓, 화장루(華藏樓)>

대웅전과 대적광전 사이에는 보화루가 자리해 있다. 화장루라 불리기도 하는데, 1866년에 지
어진 건물로 대방(大房), 큰방이라 불리기도 한다.
대방은 조선 후기에 왕실의 지원을 두둑히 받던 서울 근교 절에서 많이 나타나는 건물로 이곳
을 비롯해 돈암동 흥천사(興天寺, ☞ 관련글 보기), 남양주 흥국사(興國寺, ☞ 관련글 보기), 고양 흥국사(興國寺, ☞ 관련글 보기), 파주 보광사(普光寺, ☞ 관련글 보러가기) 등에 남아
있다.
대방의 역할은 승려의 숙식 및 예불의 목적도 있지만 서울에서 온 왕족과 사대부의 숙식 편의
를 제공하고, 법당 불상이 바라보이는 마루 또는 대방 내부에 그들만의 별도 예불공간을 두어
법당에서 백성들과 함께 예불을 보는 번거로움을 덜어주려는 것이 주목적이다. 즉 왕족과 귀
족을 위한 조금은 아니꼬운 특별 서비스 공간인 셈이다. 그들이 주요 밥줄이나 다름이 없으니
절 입장에서는 그렇게라도 굽신거려야 절도 꾸리고 속칭 소고기도 사묵을 수 있다.

보화루 현판은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제자인 위당 신관호(威堂 申觀浩)가 쓴 것이며, 화계사
현판은 1866년 대원군이 절 중수 자금과 함께 보내준 친필 현판이다. 이 현판에는 '대원군장
(大院君章)','석파(石坡)'가 쓰여 있는데, 예서체와 해서를 혼합해서 쓴 명필이다.
1933년에는 이희승(李熙昇), 최현배(崔鉉培) 등 한글학회 소속 국문학자 9명이 보화루에 머물
면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집필했던 유서 깊은 현장으로 그해 10월 그 통일안이 발표되었다.

현재 보화루는 큰방과 종무소, 다실(茶室)로 쓰이고 있으며, 1974년 화재로 무너진 관음전에
들어있었던 관음보살상의 임시 거처 역할도 했었다. (지금은 비공개로 숨겨두었음) 그리고 건
물을 받치는 석축 높이 때문에 누(樓) 비슷한 성격을 지녔으나 대적광전을 지으면서 계단을
없애고 평평하게 다졌으며, 예전에는 보화루가 외부에서 경내를 감싸서 가리는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대적광전이 그 역할을 몇 배 이상으로 휼륭히 해내고 있다.


▲  보화루에 걸린 '삼각산 제일선원(第一禪院)' 현판

▲  옛 범종각터

예전 6각형 범종각이 있던 자리로 지금은 중생들의 소망이 적힌 종이들이 새끼줄에 잔뜩 매달
려 이색 볼거리를 제공한다. 보화루 옆에 마련된 종이에 소망을 적고 새끼줄에 꾸깃꾸깃 달면
되는데, 저 중에 과연 소원이 이루어진 이는 얼마나 될까..?


▲  천불오백성전(千佛五百聖殿)

대웅전 남쪽에 자리하여 동쪽을 바라보고 선 천불오백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이름도 3글자가 아닌 무려 6글자로 기나긴 이름 그대로 천불과 오백나한을 봉안한
건물로 여기기 싶지만 정작 천불(千佛)은 없고 오백나한(五百羅漢)으로 잔뜩 도배되어 있다.

이 건물은 1964년 최기남(崔基南, 찬하거사)의 가족이 돈을 대어 지어준 것으로 안에는 최기
남이 만든 오백나한이 봉안되어 있다. 최기남은 1915년 관직에서 물러나 금강산(金剛山) 신계
사(神溪寺)에 들어가 수행했는데, 거기서 20년 동안 조국 광복을 염원하는 기도를 올리면서
오백나한을 손수 조성해 화엄각에 봉안했다. 이후 강제적 남북분단으로 그의 가족들이 여주
신륵사(神勒寺)로 옮겨 대웅전에 봉안했다가 1964년 화계사에 기증하여 천불오백성전을 지어
주었다.

오백나한은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내부 좌우에는 최기남의 사진이 걸
려있어 나한과 건물을 기증한 그를 기린다.


▲  금강산 신계사에서 찍은 최기남 거사의 사진

▲  오백나한의 끝없는 물결들


♠  화계사 대웅전, 명부전 주변

▲  삼성각(三聖閣)

천불오백성전 뒤쪽이자 대웅전 우측 높은 곳에는 삼성각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원래는 1885년에 중수된 산신각
(山神閣)이 있었다. 허나 나이를 먹을 수록 퇴락되어 볼품이 없어지자 1975년 주지 진암이 기
존의 산신각을 부시고 새로 지으면서 삼성각으로 이름을 갈았다.
건물 내부에는 산신과 독성, 칠성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을 다시 지은 탓에 고색의 내음은
말라버렸다.


▲  산신상과 산신탱(山神幀)
산신탱은 1920년에 조성된 것으로 산신과 호랑이, 산 등이 그려져 있다.
그림 앞에는 진한 칼라의 산신상이 자리해 있는데, 호랑이의 표정이
고양이처럼 순해 보인다.

▲  독성탱(獨聖幀)
1922년에 조성된 것으로 독성 할배와 동자,
천태산(天台山)이 담겨져 있다.

▲  칠성탱(七星幀)
1975년에 그려진 것으로 칠성의 주요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  화계사 대웅전(大雄殿) - 서울 유형문화유산 65호

좌우로 명부전과 삼성각을 거느리며 동쪽을 굽어보고 있는 대웅전은 화계사의 법당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866년 대원군의 지원으로 지어졌으며, 1870년에 중건했다.
당시 환공야조(幻空冶兆)가 쓴 '화계사대웅보전중건기문(華溪寺大雄寶殿重建記文)'에 따르면
석수(石手) 30명, 목공(木工) 100명이 불과 수개월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건물 정면에는 각 칸마다 사분합(四分閤)의 띠살문이 설치되어 있어 문짝을 위로 올릴 수 있
다. 대웅전 현판은 조선 후기 명필인 몽인 정학교(夢人 丁學敎)의 것으로 여겨지며, 주련(柱
聯)은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인 신관호(申觀浩)가 쓴 것으로 내용은 이렇다.

비로해장전무적(毘盧海藏全無跡) - 비로자나의 법해에는 완전한 자취가 없고
적광묘사역무종(寂光妙士亦無蹤) - 적광묘사 또한 아무런 흔적이 없네.
겁화동연호말진(劫火洞然毫末盡) - 겁화가 훨훨타서 털끝마저 다해도
청산의구백운중(靑山依舊白雲中) - 푸른 산은 옛과 같이 흰구름 속에 솟았네


▲  대웅전 석가삼존상과 아미타후불도(서울 유형문화유산 389호)

대웅전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로 이루어진 금동석가
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은 1873년에 조성된 것으로 포근하고 후덕한 표정을 짓고 있는
데, 그들 뒤로 1875년에 화산당 재근(華山堂 在根)과 응파당 덕순이 그린 아미타후불도가 고
색의 향기를 풍기며, 든든히 자리해 있다. 그리고 불단 우측에는 법당의 필수 그림으로 1969
년에 제작된 신중탱(神衆幀)이 자리를 지킨다.


▲  대웅전을 바라보는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878년 초암이 조대비
의 지원을 받아 지었다.
2001년에 건물을 중수하면서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을 개금하거나 개채(改彩)했으며, 명부전 현
판과 주련 글씨는 대원군의 친필로 전해진다.

불단에는 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十王像)이 봉안되어 있는데, 예전에는 고려 후기에 나옹화
상(奈翁和尙)이 만든 것으로 막연히 전해졌으나 불상 뱃속에서 나온 발원문(發願文)을 통해
1649년에 황해도 배천군 강서사에서 승려 영철(靈哲), 인명(印明), 상원(尙元), 운혜(云惠)
등이 조성했음이 밝혀졌다. 대적광전 주변에 자라난 보호수 느티나무를 제외하고 화계사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지만 이들은 원래부터 화계사 것이 아니었다. 배천군 강서사에서 만들어 광
조사(廣照寺)에 봉안되어 있던 것이다.

부모(흥선대원군, 부대부인민씨)의 영향으로 화계사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던 고종은 그곳에
그 흔한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이 없음을 알았다. 하여 화계사에 가장 뛰어난 지장보살상과 시
왕상을 주고자 천하를 수소문하니 광조사의 것이 무지하게 좋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래서
광조사에 의견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1877년 왕명으로 화계사로 가져왔는데, 불상 운송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설화가 아련히 전해온다.

1877년 왕명을 받은 화계사 승려 봉흔(奉欣)과 위운(威雲), 봉림(奉林)은 광조사를 찾아가 왕
명을 전하고 그곳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일체를 접수했다. 허나 물가에 이르니 준비되어야
될 배가 없었다.
그들은 당황하여 어찌해야 되나 궁리를 하던 중, 배 1척이 나타났다. 그들은 배를 세우고 자
초지종을 설명하니 뱃사공이 흔쾌히 승낙하며
'나도 당신들을 찾은 모양이오! 어젯밤 꿈에 우리 할아버님이 나타나 내일 날이 밝기 전에 배
를 이끌고 강서사로 급히 가라고 하셨는데, 아마도 부처가 지휘했던 모양이오!'
말하면서 불
상을 싣고 서울로 향했다.
보통 배천군에서 서울까지 뱃길이 2~3일 정도 걸렸다고 하는데, 그날은 유난히도 바람이 잘
맞아 불과 반나절도 안되어 뚝섬에 도착했다고 한다. 불상을 화계사로 모두 옮기고 사공에게
배삯을 후하게 주었는데, 사공은 돈을 거절하며
'할아버님의 현몽과 강바람의 순풍으로 보아 부처의 도움이 있었음이 분명한데, 어찌 배삯을
받겠소? 그 돈으로 차라리 시왕전의 내 장등(張燈)이나 하나 해주시오'
부탁을 했다. 그래서
수십 년 동안 시왕전에 그의 장등을 계속 밝혔다고 전한다.


▲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지장보살도(서울 유형문화유산 390호)

푸른 승려머리의 지장보살상은 후덕한 표정으로 중생을 맞이한다. 몸의 신체 비례가 잘 맞아
떨어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표현이 부드러워 귀족적인 기풍을 드러낸다. 몸에 걸친 법의(法
衣)는 두께가 상당한데, 옷의 주름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그의 좌우에 서 있는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도 주인을 따라 황해도에서 이
곳으로 강제로 따라왔다. 주인과 마찬가지로 조각 솜씨가 뛰어나며, 그들 좌우에 늘어선 시왕
상과 판관(判官), 동자, 사자, 장군상도 꽤 준수한 수준이다. 조선 중기 불상과 시왕상을 대
표할 만한 존재로 뱃속에서 무려 복장(腹臟) 유물까지 나와 그들의 가치를 더욱 돋구어 주었
다. 하여 이들은 '화계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이란 이름으로 보물 1,822호
지정되었다. 

그리고 지장보살상 뒤에 걸린 지장보살도는 1878년에 화산당 재근이 그린 것으로 왕실 상궁들
이 돈을 내어 조성했다.

▲  우측 시왕상과 시왕탱, 십대왕도

▲  좌측 시왕상과 시왕탱

시왕상 뒤쪽에 걸린 시왕도는 명부(冥府, 저승)의 시왕(十王)을 담은 것으로 2왕 또는 3왕을
하나의 그림에 구성했다. 허나 6왕과 8왕, 10왕을 머금은 그림 1폭이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져 지금은 4폭만 전한다. 이들은 1878년 상궁들의 시주로 화승 승의(勝宜)가 그린 것인데
, 12지신상이 등장하고, 그림에 담긴 지옥의 명칭을 적어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사자도(使者圖)는 화면은 2폭으로 나눠 사자와 지옥장군을 그린 것이다. 시왕도와 장
군도, 사자도를 함께 그려 봉안하는 것은 조선 후기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유행하던 것으로
사자도는 보광사 사자도(1872년)와 같은 초본을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탱화는 '화계사 명부전 시왕도 및 사자도'란 이름으로 서울 유형문화유산 392호의 지위
를 누리고 있다.

또한 우측 시왕상 뒤쪽 구석에서 진하게 붉은 기운을 뿜고 있는 십대왕도(十大王圖)는 명부의
시왕을 그린 것으로 1876년 화산당 재근과 응파당 덕순 등 여러 화승들이 조성했다. 1폭의 화
면에 구름을 배경으로 삼아 시왕만을 그린 그림은 천하에서 매우 희귀한 것으로 이들 시왕은
이름이 적힌 홀이나 명패를 지니고 있어서 각각의 이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체의 비례가
자연스럽고 얼굴 표현이 섬세하며 복장과 관의 장식이 치밀하게 표현되어 '화계사 명부전 십
대왕도'란 이름으로 서울 유형문화유산 391호로 지정되었다.


▲  명부전 앞에 놓인 청동 항아리(드므)

명부전 앞에는 청동 색깔로 자욱한 동그란 항아리가 있다. 이 항아리는 궁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드므로 방화수(防火水)용 청동 항아리이다. 궁궐도 아닌 절에 이런 귀한 것이 있게 된
것은 1904년에 홍대비가 하사했기 때문이다.
이 드므는 창덕궁 인정전(仁政殿)과 대조전(大造殿)의 드므와 비슷하게 생겼으며, 왕실의 지
원이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의 하나로 화계사의 위상을 보여준다.

드므를 바라보니 물이 좀 고여있고 수면 위로 보는 이의 얼굴이 일그러진 물결 사이로 살짝
비춘다. 불을 지르고자 놀러온 화마(火魔)가 드므에 비친 자신의 간드러지는 얼굴을 보고 발
작한 나머지 자신의 본분도 잊고 돌아간다고 한다. 정말 그럴지는 모르지만 옛날 건물이 죄다
불에 취약하니 저거라도 설치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다.

화계사 경내를 오래간만에 이리저리 기웃거리니 시간은 어느덧 19시가 넘었다. 집에 갈 때는
그리 급한 일도 없고 차비도 아낄 겸해서 유유자적 걸어갔는데, 4.19입구와 덕성여대, 쌍문아
파트, 방학동 은행나무(☞ 관련글 보러가기), 도깨비시장을 거쳐 거의 7km 거리를 걸었다.
그렇게 장거리 행군으로 땀육수를 배출하니 몸이 개운하다. 거기에 샤워 한번 시원하게 하고
자면 잠은 그야말로 꿀맛이다.

이렇게 하여 5월 화계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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