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117건

  1. 2023.02.16 대구 도심 근대문화유산 나들이 <서상돈고택, 계산동성당, 청라언덕, 선교사 스윗즈 주택...>
  2. 2023.02.06 서울 도심의 북현무를 거닐다. 북악산 한양도성 나들이 <창의문, 백악마루, 청운대, 숙정문, 말바위>
  3. 2023.01.31 늦겨울 산사 나들이, 강화도 마니산 정수사 (정수사 법당, 사기리분청사기요지, 사기리탱자나무, 이건창생가)
  4. 2023.01.23 서귀포 서귀포층패류화석산지, 새섬, 혼인지, 제주올레길2코스 겨울 나들이 (새섬공원)
  5. 2023.01.12 은평구의 작은 지붕들, 봉산 ~ 백련산 나들이 <봉산 봉수대, 서울둘레길7코스, 백련근린공원>
  6. 2022.12.31 한겨울 산사 나들이 ~ 작은 계곡과 폭포를 지닌 고즈넉한 산사, 부산 백양산 선암사
  7. 2022.12.29 무등산 뒷쪽에 깃든 호남 가사문학의 성지 ~ 광주 환벽당, 취가정, 담양 식영정
  8. 2022.12.14 동양 최대의 황금법당을 지닌 고즈넉한 산사, 구산동 수국사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만난 수국사의 늙은 보물들)
  9. 2022.02.26 서울 도심의 상큼한 서쪽 뒷동산, 안산 나들이 (홍제천인공폭포, 연희숲속쉼터, 안산자락길, 안산메타세콰이어숲길)
  10. 2022.02.18 진천의 꿀명소를 거닐다 ~ 진천 농다리, 보련산 보탑사, 연곡리석비

대구 도심 근대문화유산 나들이 <서상돈고택, 계산동성당, 청라언덕, 선교사 스윗즈 주택...>

대구 도심 근대문화유산 나들이



' 대구 도심 근대문화유산 나들이 '

대구 계산동성당
▲  대구 계산동성당

청라언덕 사과나무 선교사 스윗즈주택

▲  청라언덕 사과나무

▲  선교사 스윗즈주택

 



 

겨울 제국의 차디찬 한복판인 2월의 첫 무렵, 간만에 대구(大邱) 땅을 찾았다. 팔공산
남쪽 자락에 깃든 북지장사(北地藏寺, ☞ 관련글 보기)와 방짜유기박물관을 먼저 둘러
보고 대구 도심으로 나와 후식거리로 여러 근대문화유산을 더듬었다.

대구시는 중구 지역의 근대문화유산을 손질하고 코스를 여러 개 엮어서 '대구 근대(近
代)로의 여행'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았는데, 그것이 크게 주목을 받으면서 근대문
화유산의 1급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을 받게 되었다. 그 풍문이 내 두 귀까지 들려오
면서 그곳의 위엄을 내 침침한 두 망막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예전부터 알고 있던 계산동성당으로 이동하다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로 유명한 이상화(李相和) 시인의 고택이 마중을 나와 그를 먼저 둘러보았고, 그 옆에
도 기와집이 하나 있어 살펴보니 구한말 민족 기업가인 서상돈의 고택이다. 본글은 서
상돈 고택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상화 고택은 북지장사글 참조)



 

♠  구한말 대구 지역 민족기업가이자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던
서상돈 고택(徐相燉 古宅)

▲  서쪽에서 바라본 서상돈고택

이상화 고택 동쪽에는 이상화만큼이나 대구에서 자랑스러워하는 인물, 서상돈의 재현된 고택
이 조용히 자리해 있다.

서상돈(1850~1913)은 구한말에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던 인물로 1850년 10월 17일 경북 김천
마잠(지좌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달성서씨 집안으로 집안이 유난히도 천주교와 인연이 깊어
천주교 박해로 고통을 겪거나 죽음을 당한 인물이 많았다. 그 역시 집안의 피는 못속여 일찍
부터 천주교를 신봉했다.
1859년 아버지 서광수(徐光修)가 병사하자 어머니는 서상돈 형제를 데리고 외가가 있는 대구
새방골 죽전으로 이사를 갔다. 거기서 외할아버지인 김후상(金厚詳)의 교육과 보살핌을 받았
으며, 시내 상점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며 어머니를 도왔다.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터지자 큰아버지 서인순과 삼촌인 서익순, 서태순이 처단을 당
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서상돈은 나중에 큰 부자가 되면 꼭 천주교 전교와 자선사업을 하기
로 결심을 했다고 한다.
1868년 대구 천주교 원로회장 서용서(김수환 추기경의 외할아버지) 등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
을 받아 보부상(褓負商)을 시작했다. 그는 사업 수완이 뛰어나 사업이 나날이 번창했고 1880
년대 중반에는 수많은 보부상을 거느리며 매년 3만 석 이상의 수입을 올리는 대구에서 제일
잘나가는 대상(大商)이 되었다. 하지만 너무 사업에 열중한 나머지 혼기를 놓쳐 1880년, 30세
의 늦깎이 나이로 수안김씨와 혼인을 올렸다.

1885년 경상도 지역 천주교 영업을 담당하던 로베르<Robert, 김보록(金保祿)> 신부가 신나무
골 교우촌(칠곡군 지천면 연화리)을 찾았다. 이에 서상돈은 사촌 여동생 서마리아와 그를 도
왔고 1891년 12월 대어벌에 임시성당을 세웠다. 그 성당은 1897년 계산동 초가로 자리를 옮겼
으며 1899년 로베르가 십자형 기와집 성당을 세우자 흔쾌히 많은 비용을 제공했다.

1894년 통정대부(通政大夫)의 대우로 탁지부(度支部) 세무시찰관<稅務視察官, 봉세관(封稅官)
>에 임명되어 대구를 비롯한 경상도의 세정을 관리하기도 했으며, 1896년 독립협회가 설립되
자 거기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또한 그는 교육사업에도 큰 관심을 보이며 돈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1899년 계산동성당 부속
건물에 한문 서당인 해성재(海星齋)를 지어 주었고, 그 학교는 1908년 봄, 성립학교로 간판을
바꾸었다. 그리고 1905년 이일우를 도와 달서여학교 설립을 도와주었고, 1910년에는 성립여학
교를 세웠으며 1906년에 출판사인 대구광문사(大邱廣文社)를 설립해 학교 교과서와 계몽잡지.
신문, 교양서적을 발간하는 등 대구 지역 근대교육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  서상돈 고택 모형도
여기서는 생가로 나와있으나 그가 태어난 곳은 경북 김천이므로 '생가'란 명칭은
맞지가 않다. 엄연히 '서상돈고택'을 칭하고 있으면서 여기서는 생가라고
쓰고 있으니 고택 관리자들의 초보적인 실수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1906년 비리비리한 조선(대한제국) 정부는 왜열도에 1,300만원의 거금을 빌렸는데 그 돈을 갚
지 못해 총체적 난국에 빠지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서상돈은 돈을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
한다고 인식하고 1907년 1월 29일, 그 유명한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했다. 하여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국채를 갚자는 단연회(斷煙會)를 설립했고 군민대회를 개최해 나라의 빚을 갚자고 호
소했다.
그래서 4월 말까지 외국 동포를 포함해 4만여 명이 흔쾌히 참여해 230만원의 돈을 모았다. 허
나 모처럼의 대동단결도 친일매국노인 일진회와 왜 통감부(統監府)의 방해로 결실을 맺지 못
했다.

1911년 로마교황청이 주교 소재지를 전주와 대구를 놓고 고심을 하자 대구로 낙점될 수 있도
록 힘을 썼으며 임시 주교관(主敎館) 부지를 기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1913년 6월 30일 새벽
2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63세의 조금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1999년 광복절에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기리고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으며, 대구
매일신문사를 중심으로 '서상돈상'을 제정했다. 그리고 2002년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고 2011년 10월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이 개관되어 늦게나마 그의 자주자강 민족정신을
기린다.

▲  서상돈 고택 사랑채

▲  서상돈 고택 관리사무소

서상돈 고택은 개량한옥 스타일로 여러 동의 집을 지닌 고래등 기와집이었다. 서양식 수목을
심고 연못과 석탑을 두었으며, 서양식과 우리식이 절충된 정원을 지니고 있는 등 대구 제일의
부잣집으로 위엄을 날렸다. 허나 아쉽게도 왜정을 거치면서 집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
라졌고, 서상돈 일가의 빛바랜 사진을 통해 고택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더듬어 볼 수 있을 따
름이다.

현재 고택은 2008년에 원래 자리 부근에 크게 축소하여 재현한 것으로 건물 3동과 문, 벽돌문
이 전부이다. 키다리 빌딩 뒤쪽에 조그맣게 자리해 있다 보니 초라한 기분도 적지 않게 드는
데 아무래도 마련된 자리가 좁고 고택에 대한 자료도 부족해 되는대로 이렇게나마 재현을 한
것이다. (복원보다는 재현이 맞을 듯)

   ◀  정면이 꽉 막힌 고택 대문과 벽돌문
문은 바로 앞에 신성미소시티아파트가 높이
들어앉아 있어 굳게 닫혀 있다. 하여 뻥 뚫린
고택 서쪽을 통해 내부로 들어서야 된다.

* 서상돈 고택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100 (달구벌대로 2051)



 

♠  대구 최초의 근대 건축 스타일의 천주교 성당
대구 계산동성당(桂山洞聖堂) - 사적 290호

이상화고택 북쪽에는 계산동성당(주교좌 계산대성당)이 이국적인 멋을 드러내며 자리해 있다.
주변에 기라성처럼 널린 키다리 건물들에게 절대로 꿇리지 않는 위엄을 보이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계산동성당은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자 최초의 근대식 성당이며, 이 땅에서 3번째로
지어진 근대식 성당으로 고딕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을 취하고 있다.

앞서 서상돈 고택에서 언급한 로베르(김보록) 신부가 1891년 대어벌 임시성당(인교동)을 지었
는데 1897년 현 성당 자리에 있던 초가를 매입하여 성당을 옮겼다. 1899년 그 초가를 부시고
서상돈의 후원으로 번듯하게 십자형 기와집 성당을 지었으나 1901년 2월 지진으로 화재가 나
서 무너지고 말았다.
하여 로베르는 제대로 된 서양 스타일의 성당을 짓기로 마음을 먹고 서상돈의 도움을 다시 받
아 1902년 지금의 성당을 세우게 된다. 설계는 로베르가 했고 서울 명동성당(明洞聖堂) 공사
에 참여했던 청나라 애들을 잡아와 공사를 시켰다.
1911년 주교좌 성당이 되면서 종탑을 2배로 크게 높였고 계속해서 건물을 불려나가 1918년 12
월 24일, 현재의 우람한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성당 정면은 라틴십자형으로 2개의 종각(종탑)이 우뚝 솟아 있어 지역 사람들은 '뾰족집'이라
불렀다. 종탑부에는 8각의 높은 첨탑(尖塔) 2개를 대칭구조로 세웠는데 첨탑을 포함하여 성당
높이가 거의 10층 건물에 버금간다. 앞면과 양측에 장미창으로 장식을 했으며, 화강석 기단(
基壇) 위에 붉은 벽돌로 건물을 닦고 그 위를 검은 벽돌로 고딕적인 장식을 다졌다.


▲  장엄함이 묻어난 계산동성당 내부

성당 내부는 자유 관람 및 출사가 가능하다. (단 예배와 미사시간은 안되며, 성당의 여러 사
정으로 개방되지 않는 경우도 있음) 하여 성당 정문을 통해 내부로 들어서면 되는데 마치 유
럽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듯, 분위기가 정말 서양틱하다.
비록 천주교에 일말에 관심도 없지만 잠시 의자에 앉아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불끈 모아 기도
를 하고 싶은 마음이 피어 오른다. 허나 기도를 해봐야 천주교 주인이 리플이나 댓글도 달아
주지 않을 것이고, 난 어디까지나 답사를 가장한 나그네이니 이 정도로 내부를 살피고 밖으로
나왔다.


▲  1984년 5월 5일, 로마교황청의 주인 요한 바오로2세가 이곳을 다녀간
것을 기리고자 성당에서 달아놓은 동판과 석조 조형물

▲  계산동성당의 다양한 옆문들 ▲
(성당 내부는 정문으로 들어가기 바람)

▲  계산동성당의 뒷모습
성당이 동서로 길쭉한 모습이라 마치 커다란 4발 동물이 고개를 쳐들고
꼬랑지를 흔들며 앉아있는 모습 같다.

▲  계산동성당의 꼬리 부분

▲  성립여학교 2회 졸업식 사진(1913년)

성립여학교는 서상돈이 계산동성당에 지어준 여학교이다. 이 사진은 수녀들이 찍은 것으로 수
녀(2명)와 앳된 모습의 여학생(10명), 교회와 학교 관계자들(3명)이 나란히 촬영에 임하고 있
다. 남는 것은 정말 그림과 사진밖에 없다고 하더만 이미 저 세상으로 훌쩍 가버린 저들은 이
렇게 그들의 생전의 모습을 남겼다.

* 계산동성당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71-1 (서성로10, ☎ 053-254-2300)
* 계산동성당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대구사과의 고향이자 근대 건축물을 3개나 품은 대구 도심의
상큼한 언덕, 청라(靑蘿)언덕

▲  3.1운동계단 윗부분

계산동성당에서 서성로를 건너면 청라언덕으로 인도하는 계단이 손을 내민다. 속세에서는 그
를 3.1운동계단(3.1만세운동 계단)이라 부르는데 1919년 대구 지역 3.1운동의 현장으로 지역
사람들은 왜정의 감시를 피해 이 계단으로 계산동성당과 도심으로 들어가 만세운동에 참여했
다. 90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계단의 끝에 청라언덕 정상이 있다.


▲  청라언덕과 동무생각 노래가 담겨진 표석

'동무생각'
봄의 교향곡이 울려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대구 도심의 상큼한 언덕인 청라언덕은 20세기 초반 동산의료원과 계명대를 꾸렸던 미국 선교
사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그들은 푸른 담쟁이를 많이 심어서 푸른 담쟁이덩굴을 뜻하는 청라
언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달성(達城, 달성공원) 동쪽에 있다고 해서 오랫동안 동산
(東山)이라 불렸다. 달성과 더불어 대구 도심의 야트막한 지붕으로 한때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대구사과의 고향이기도 하다.
현재 언덕에는 선교사들이 살았던 늙은 주택 3동과 3.1운동계단, 사과나무,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歌曲)인 동무생각 노래비, 동산의료원 구관 현관, 동산의료원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무
덤인 은혜정원이 있다. 대구에서 꼭 가봐야 되는 근대문화유산 명소로 시간이 흐르다가 잠시
졸도하여 정지된 듯, 고풍스런 모습을 지니고 있어 촬영지로도 많이 등장한다.

청라언덕하면 박태준(朴泰俊, 1901~1986)의 '동무생각'이란 노래가 유명하다. 그는 대구 출신
작곡가로 청라언덕 부근에 있던 신명학교의 어느 여학생을 짝사랑했는데 결국 사랑은 이루어
지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를 추억하고자 직접 작곡을 했고 이은상(李殷相)이 노랫말을 붙여주
었다. 가사에 나오는 백합과 동무는 그 여학생을 뜻하며 그녀에 대한 그리움의 고통이 너무나
컸던 나머지 이런 명곡이 태어났다.


▲  선교사 챔니스(Chamness) 주택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25호

청라언덕을 장식하고 있는 근대 주택 3동 중 챔니스 주택이 가운데에 자리해 있다. 마치 너른
정원의 별장처럼 이색적으로 생긴 그는 1910년경 미국 선교사들의 주거용으로 지어진 것으로
1907년 대구 도심을 품던 대구읍성이 철거되면서 거기서 가져온 안산암(安山巖) 등의 성돌로
기초를 닦고 붉은 벽돌로 미국식 2층주택을 지었다.

남북으로 약간 긴 사각형 형태로 서쪽 중앙에 있는 현관을 들어서면 바로 2층으로 오르는 계
단홀이 있고 그 홀을 중심으로 거실과 서재, 부엌, 식당을 배치했다. 2층에는 계단실을 중심
으로 좌,우측에 각각 침실을 두고 욕실, 벽장 등을 설치했으며, 지붕은 삼각형으로 2개의 굴
뚝이 있는데, 1층 동남쪽에는 넓은 베란다를 설치했다. 이런 양식의 건물은 그 시절 미대륙
캘리포니아주 남부에서 유행한 방갈로풍으로 당시의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집의 이름인 챔니스는 이곳에 살았던 미대륙 북장로교 선교사로 우리식 이름은 차미수(車米秀
)이다. 1925년 부인과 이 땅에 들어와 대구에서 16년을 살았으며, 1927년 딸 바바라를 얻었으
나 생후 3달 만에 잃고 만다. 1941년 왜정에게 추방당해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1993년까지 동
산의료원 의료원장을 지냈던 모페트(H.F Moffett)가 거주했다. 그러다가 지금은 의료선교박물
관으로 활용하여 개방하고 있으나 내가 갔을 때는 이미 17시가 넘은 때라 문은 굳게 닫혀져
있었다.

계명대에서 세운 의료선교박물관은 조선 후기에서 20세기까지의 우리나라 의학 역사와 의학자
료, 대구 지역 기독교와 선교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전자는 챔니스 주택에, 후자는 스윗즈
주택에 두었다.
* 의료선교박물관 관람문의 : ☎ 053-250-8700

▲  챔니스 주택의 뒷모습
앞에 하얀 피부의 공간은 20세기 중반
이후에 덧붙여진 것이다.

▲  챔니스 주택의 앞모습


▲  챔니스 주택 산책로와 장식물로 놓인 돌확 등의 석물들

▲  선교사 블레어(Blair) 주택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26호

챔니스 주택 남쪽에는 비슷하게 생긴 2층짜리 블레어주택이 있다. 1910년에 지어진 미국 선교
사 주택으로 블레어란 선교사가 거주했다고 해서 블레어주택이라 불린다.
대구읍성 성돌로 기초를 닦은 챔니스와 스윗즈주택과 달리 콘크리트로 기초와 지하실 부분을
닦고 그 위에 미국식으로 붉은 벽돌 집을 다진 것으로 남북으로 약간 길쭉한 네모 형태를 이
루고 있으며, 1층 서쪽에 현관으로 이어지는 베란다가 있고 현관홀을 들어서면 맞은편에 2층
으로 오르는 계단실이 있다. 그 오른쪽이 집 중앙으로 거실과 응접실이 앞뒤로 있으며 그 좌
우로 침실과 부엌, 식당 등을 두었다.
2층에는 계단홀을 중심으로 3개의 침실과 욕실을 두었고 현관홀 위에는 빛을 받아들이는 선룸
(Sun room)을 설치했다. 지붕은 삼각형으로 2개의 굴뚝을 지니고 있으며, 집의 전체적인 모습
에서 그 시절 미국 양이(洋夷)들의 주택 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챔니스와 스윗즈주택은 사진을 여럿 담았으나 블레어주택은 저거밖에 없었다. 다른 것을 우선
담고 나중에 담는다는 것을 깜박했던 모양이다.


▲  1899년을 강조하는 동산병원(동산의료원) 구관 현관(포치, Porch)

머리에 'Since 1899'라 쓰인 이 포치는 동산병원의 구관 중앙입구이다. 동산병원의 전신인 제
중원(濟衆院)은 1899년에 세워진 것으로 1931년 구관(舊館)이 세워졌으며, 2010년 대구지하철
3호선 공사로 인해 부득이 포치를 떼어와 이곳에 두면서 이렇게 허전한 모습을 하게 되었다.
(구관은 그대로 있음)

▲  구관 현관(포치)의 옆 모습

▲  1970년대 고압산소 치료기

구관 현관 안에는 현역에서 물러난 고압산소 치료기가 전시되어 있다. 그는 연탄가스에서 많
이 배출되는 일산화탄소 급성 중독환자 치료에 쓰였던 것으로 1970년대 초 미대륙 북장로교의
밴 클레브(Van Cleve) 선교사가 가져온 설계도를 바탕으로 대구 한성메디칼(구 한성공업사)의
고(故) 최운한 대표가 이 땅 최초로 제작했다.
1972년 동산의료원 응급실에 설치되어 2012년까지 활약했으며 그를 모델로 전국에 고압산소치
료기가 많이 보급되었다. 1970~1990년대에 연탄보일러의 대중적인 공급으로 겨울 제국의 핍박
에서 조금은 벗어났으나 대신 바람직하지 않은 대기물질인 일산화탄소 배출로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빈번히 일어나 죽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내 주변에도 여럿 있었음) 바로 이 치료기
가 그들을 저승의 문턱에서 많이 꺼내주었다.


▲  사각사각 소리를 내는 청라언덕 대나무군락

겨울 제국(帝國)의 핍박으로 식물들이 모두 누렇게 뜨거나 가지만 앙상한 가운데 유일하게 푸
른 빛을 내는 고고한 존재가 있다. 바로 스윗즈주택 부근의 작게 우거진 대나무군락이다. 대
나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의 기독교 일변도가 되버린 청라언덕에서 대나무숲을 보니 마치
서라벌 경주(慶州)에서 조선시대 유적을 만난 기분인데 동산의료원 초창기에 여기서 100여m
떨어진 곳에 대나무군락지가 있었다.
허나 그들은 싹 사라지고 뿌리만 땅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것을 의료원 개원 100주년이 되는
1999년에 지금의 자리에서 푸르게 돋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을 '기적의 나무'라 부르고
있는데, 동산의료원과 계명대는 구한말과 왜정 시절에 서양 선교사들이 이 땅의 사람들에게
준 은혜와 사랑이 대나무 뿌리처럼 깊고 단단하게 여기에 뿌리 내린 것이라며 말하고 있다.


▲  선교사 스윗즈(Switzer) 주택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24호

스윗즈 주택은 1906~1910년경에 지어진 2층 벽돌 양옥이다. 지어진 이유는 앞서 두 주택과 같
으며 대구읍성 철거로 나온 성돌을 가져와 터를 다지고 그 위에 지었다.
스윗즈(스위처) 여자 선교사(1880~1929, 한국명 성마리다)는 1911년 이 땅에 들어와 살았으며
이후 계성학교 4대 교장인 핸더슨 해롤드(한국명 현거선), 계명대 초대학장인 캠벨 등의 선교
사가 머물렀는데 전통 한식과 서양식이 조화를 이룬 모습으로 지붕은 한식 기와를 이은 박공
지붕이었으나 나중에 함석으로 개조되었고 다시 기와지붕으로 바뀌었다.
계단을 여러 단 설치하여 바닥을 높인 현관(포치)을 들어서면 남면 중앙에 거실, 동쪽에 응접
실과 이어지며, 남쪽 벽을 일부 밀어 창을 설치한 거실은 응접실과 서쪽의 침실, 북쪽의 계단
실과 통하게 되어있다. 계단실의 좁은 마루에서 식당과 화장실로 연결되며 뒤쪽 주방은 작은
홀을 지나 외부로 출입할 수 있다. 그리고 2층에는 계단실 남쪽에 침실 2개를 두고 서쪽에 욕
실을 두었으며, 지붕에는 2개의 굴뚝이 멀뚱히 자리해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시절을 그리워
한다.

1981년 동산의료재단이 인수해 챔니스 주택과 함께 의료선교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주
로 기독교와 선교 관련 유물과 역사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곳 역시 관람시간에 닿지 못해
내부를 구경하지 못했다.

▲  정면에서 바라본 선교사 스윗즈 주택

▲  선교사 스윗즈 주택의 옆 모습


▲  개원 100주년 기념 종탑
전국 담장 허물기의 첫 행사로 동산의료원의 정문 및 중문의 기둥과 담장 일부를
이곳으로 옮기고 동산의료원이 초창기에 세운 교회 종을 가져와
개원 100주년(1999년) 기념 종탑으로 삼았다.

▲  대구사과의 고향, 청라언덕 사과나무 - 대구 보호수 01-01호

청라언덕은 대구사과의 고향이다. 1899년 동산의료원 개원 기념으로 초대병원장인 존슨 박사<
Woodbridge O. Johnson, (우리식 이름, 장인차)>는 미대륙 미조리주에서 사과나무를 주문하여
이곳에 심으니 그것이 이 땅 최초의 서양식 사과나무이다. 그 나무에서 나온 사과씨앗이 대구
일대로 널리 보급되면서 대구는 사과의 도시가 되었다. (지금은 많이 퇴색됨)
그때 심어진 나무는 벌써 세월이 잡아갔고 그의 아들 나무가 뿌리를 내려 자리를 지키고 있으
며, 높이 7m, 둘레 0.9m로 나이는 약 90년이다. (2000년에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70년) 벌써부터 몸이 부실한지 지탱할 수 있는 시설을 여럿 설치했는데, 사과나무는 대체
로 수명이 짧아서 그런듯 싶다.


▲  여호와 이레의 동산 표석
청라언덕은 대구 기독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하여 기독교 측에서는
이곳을 여호와 이레의 동산이라 부르며 애지중지하고 있다.

▲  동산의료원 외국인묘지 (은혜정원)

청라언덕 서쪽에는 난데없이 조그만 서양식 공동묘지가 들어앉아 있다. 엄연한 대구 도심 한
복판이고 청라언덕의 일원인 알짜배기 땅에 왜 무덤들이 있나 살펴보니 동산의료원과 계명대
에서 의료, 교육, 기독교 선교를 벌인 20세기 초/중기 미국/유럽 선교사와 그 가족들 16명의
무덤이다.
이곳에 묻힌 사람 중에 생후 1년 남짓 만에 죽은 아기가 5명이나 되는데, 그중 4명은 반년도
못 채웠다. 어쨌든 그들 선교사들에게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무려 은혜정원이라 치켜세우고
있는데 그들에 대한 언급은 여기서 쿨하게 생략한다. (내용이 너무 많음)

청라언덕은 서양식 근대주택과 대구사과 시조의 자손나무, 대나무숲, 3.1운동계단, 거기에 서
양식 공동묘지까지 갖춘 참으로 이색적인 명소이다. 계산동성당만 생각하고 왔는데 서상돈 가
옥에 청라언덕 일대까지 싹 둘러보니 그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지려고 한다.

외국인묘지를 둘러보니 어느덧 18시, 햇님은 그만의 공간으로 쏙 들어가며 커텐을 치고 세상
은 달님의 검은 세상이 되었다. 다시 밤을 만난 겨울은 다시 기세가 드세져 코와 귀 끝이 다
시 얼얼해진다. 그날 목적한 것을 훨씬 초과하여 이룬 상태라 즐거운 기분으로 서울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담아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대구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청라언덕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424 (달구벌대로 2029)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3년 2월 3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티스토리(tistory)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3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서울 도심의 북현무를 거닐다. 북악산 한양도성 나들이 <창의문, 백악마루, 청운대, 숙정문, 말바위>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



'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 '

북악산(백악산)

▲  북악산(백악산)

말바위에서 바라본 서울도심 북악산 청운대

▲  말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  북악산 청운대

 



 

가을이 늦가을로 한참 숙성되어 가던 11월의 첫 무렵, 서울 도심의 북현무(北玄武)인 북
<北岳山, 백악산(白岳山)>을 찾았다.

북악산은 내 즐겨찾기 뫼의 하나로 매년 여러 번씩 그의 품을 구석구석 찾고 있는데, 이
번에는 한양도성이 흐르는 주능선(창의문~말바위)을 복습하기로 했다. 이미 지겹도록 복
습한 곳이지만 돌아서면 또 생각나고 몸살 나게 그리워지니 내 전생이 아마도 북악산 고
양이나 산짐승이었던 모양이다.


 

♠  북악산 창의문~백악마루 구간

▲  창의문(彰義門) - 보물 1,881호

북악산(백악산) 주능선의 서쪽 관문이자 북악산과 인왕산(仁王山) 경계에 자리한 창의문은 자
하문고개를 오랫동안 지켜온 성문이다.
성밖 부암동(付岩洞)의 계곡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서울 도심을
둘러싼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적 10호)의 8개 성문의 하나이자 4소문(小門)의 하나이다. 여기
서 4소문이란 동소문<東小門, 혜화문(惠化門)>과 서소문<西小門 ,소의문(昭義門)>, 남소문<南
小門, 광희문(光熙門)>, 그리고 창의문으로 혜화문과 소의문, 광희문은 각각 동소문. 서소문,
남소문이라 불렸으나 유독 창의문은 북소문(北小門)이라 불린 적이 거의 없다.

창의문은 1396년 한양도성을 닦으면서 조성된 것으로 문의 이름인 창의(彰義)는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다. 1413년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건의하여 1416년 문을 닫아걸었다. 다만 1422년 군인들의 통로로 사용되었고, 1617년 창덕궁
을 보수할 때 이 문을 통해 석재를 운반했다. 또한 문 북쪽인 부암동과 신영동, 홍지동 지역
에 왕족과 양반사대부들의 별서와 그들이 즐겨 찾던 경승지가 즐비하여 그들의 은밀한 통행로
로 쓰이기도 했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등은 세검정(洗劍亭)에서 칼을 씻으며 역적질을 모의, 역촌동(驛村洞) 별서에 있
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 인조)을 앞세워 도성에 쳐들어가 광해군을 폐위시킨 이른바 인조
반정(仁祖反正)을 저질렀다. 그때 그 반역도당들이 부시고 들어간 문이 바로 창의문이다. 그
래서 문루에는 인조반정을 저지른 작자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문이 백성들에게 전격 개방된 것은 1741년이다. 그때 훈련대장 구성임(具星任)이 인조반정
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라며 성문을 중수하고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문루를 다시 세
울 것을 건의해 지금의 문루가 지어졌다.

창의문은 한양도성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서소문은 왜국 통감부(統
監府)가 만든 성벽처리위원회에서 1908년에 무단 철거하여 정확한 위치조차 아리송하고 동소
문은 왜정 때 없어진 것을 근래에 다시 지었다. 남소문인 광희문은 성문만 늙었을 뿐, 문루와
성곽은 1970년 이후에 복원되었다.
그에 비해 창의문은 6.25 때도 총탄이 알아서 비켜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1958년에
중수한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 정정함을 과시한다. 바로 그런 점이 인정되어 2015년 12월,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다. 비록 일찌감치 국보와 보물 1호의 지위를 누린 남대문(숭례문), 동
대문(흥인지문)에 비해 다소 늦은 감도 있고 늦게 빛을 본 서글픔도 있지만 역시나 인생은 끝
까지 살아남고 봐야 된다.

▲  창의문에 걸린 인조반정
반역자들의 명단 현판

▲  창의문 성문 천정에 그려진 봉황
(혹은 닭)과 구름무늬


1960년대 이후 자하문고개를 밀어내고 신작로를 닦았는데, 그 과정에서 문 서쪽 50m 남짓 성
곽이 끊어지게 되었다. 하여 끊어진 반대쪽<현재 윤동주시인의 언덕과 청운공원이 들어서 있
음>
을 애타게 바라보는 인왕산 쪽 성곽이 견우와 직녀를 보듯 애처롭기까지 하다. 끊어진 구
간은 도로 위에 성벽을 세우지 않는 이상은 복원은 어려우며, 창의문 바로 앞에는 북악산길이
지나가 시야를 제대로 방해한다.

창의문은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문의 모습이라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그만의 매력이자
특징이 2가지가 있다. 그러니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눈여겨 봐야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우선 빗물이 잘 흘러가도록 문루 바깥 쪽에 설치된 1쌍의 누혈(漏穴) 장식이 있다. 이것은 연
꽃잎 모양으로 조각되어 성문의 매력을 수식해주고 있으며, 성문 천정에는 화려하게 날개짓을
펼치는 봉황(鳳凰) 1쌍이 그려져 있는데 속설에는 봉황이 아닌 닭이라고 한다. 성문 밖 부암
동의 지형이 지네를 닮았다고 해서 비보풍수에 일환으로 그 천적인 닭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
림을 가만히 보면 머리와 목, 날개는 닭을 많이 닮았고, 몸통과 꼬리는 닭과는 거리가 먼 봉
황의 모습 같다.
봉황이 1마리가 아닌 둘이 있는 것을 보면 암수 1쌍일 것이다. 그들 주변으로 와운문(渦雲紋)
이 가득 그려져 있는데,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
센 소용돌이를 보는 듯하다.

* 창의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산1-1 (창의문로 118)


▲  늦가을에 잠긴 창의문 안쪽(남쪽) 숲길

창의문을 둘러보고 마치 국경 검문소 같은 창의문안내소를 들어서면 북악산(백악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느긋하게 시작되어 방심하기 쉽지만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성곽길은 점차 각박한 모
습을 보인다. 하여 쉬엄쉬엄 가라며 돌고래쉼터와 백악쉼터 등 2곳의 쉼터를 두었다. 가쁜 숨
을 내쉬며 발을 움직여야 되지만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는 초급 코스라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으며, 그 거리도 그리 길지가 않다.


▲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 창의문~돌고래쉼터 구간 (백악마루 방향)

▲  돌고래쉼터와 돌고래바위

성곽길이 슬슬 흥분기를 보일 쯤에 돌고래쉼터가 모습을 비춘다. 쉼터 바로 옆에 돌고래처럼
생긴 바위가 누워있어 돌고래쉼터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 이름도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닌 북악산 주능선을 개방하고 이곳에 쉼터를 닦으면서 붙인 이름이다.
바위가 돌고래를 닮았다며 거의 주입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제 눈이 안경이라고 내 눈에는 물개
처럼 보인다. 바위 동쪽에는 약간의 틈이 있는데, 거의 입처럼 생겼고 그 위에 눈처럼 보이는
자국도 있다. 가만 보면 물개가 꼬랑지를 흔들며 움직이는 모습 같아 차라리 물개바위라고 했
으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나에게는 이름을 갈아치울 힘이 없다.

돌고래바위는 통제구역이라 그냥 난간 너머로 보기 바라며, 바위 주변으로 소나무가 그윽하게
운치를 자아낸다. 그런 소나무 사이로 서울 도심이 살짝 바라보인다.


▲  힘차게 흘러가는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 (창의문 방향)
성 안쪽은 종로구 청운동(淸雲洞), 바깥은 부암동 지역이다.

▲  정상을 향해 숨가쁘게 이어지는 북악산 주능선 한양도성길
(돌고래쉼터~백악쉼터 구간)

▲  돌고래쉼터~백악쉼터 구간에서 바라본 북쪽 방향
부암동과 신영동, 홍지동, 구기동, 평창동 지역, 북악산길,
북한산(삼각산) 향로봉과 비봉능선, 문수봉 등


눈이 시리도록 맑은 푸른 하늘 밑으로 대자연 형님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북악산과 북한산(삼
각산)을 빚었고,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은 그 틈에 평창동
과 신영동, 홍지동, 구기동, 부암동 같은 동네를 닦았다.
사진 왼쪽 동네가 홍지동(弘智洞)과 부암동, 신영동이며, 중앙과 오른쪽은 이 땅에 0.1%가 산
다는 평창동(平倉洞)으로 졸부들의 고래등 저택과 고급 빌라가 즐비해 보는 눈이 썩 즐겁지가
않다.


▲  백악마루입구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부암동과 홍지동, 구기동, 평창동 지역과 북악산 북쪽 자락,
북한산(삼각산) 산줄기


창의문에서 백악마루입구 구간 중에서 '돌고래쉼터~백악마루입구' 구간이 가장 경사가 각박하
다. 안그래도 힘든 가파른 길이 여기서 크게 흥분기를 보이는데, 그도 그럴 것이 백악마루에
서 창의문 구간 산세가 거의 급경사를 보이기 때문이다. 하여 산에 대한 자존심을 곱게 접고
천천히 한 발자국씩 딛다 보면 나올 것 같지 않던 백악마루가 알아서 모습을 드러낸다.


▲  북악산 정상 바위 (백악마루)

창의문안내소에서 20여 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백악산)의 정상인 백악마루(342m)에 이르게 된
다. 여기서 마루는 순수 우리말로 정상, 산꼭대기를 뜻하는데,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가
까운 현장으로 정상 한복판에 백악산 정상 비석과 북악산 옛모습 복원기념비가 있다. 그리고
정상 북쪽에 사람 키보다 2배 남짓 높은 크고 견고한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꼭대기가 실질
적인 북악산의 머리이다. 그러니 정상 인증을 하려면 무조건 바위에 올라가기 바란다.

정상 남쪽에는 소나무와 진달래가 우거져 있으며, 정상 바위와 난간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고
사진을 찍어야 된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숨겨진 산길이 있으나 아주 비싼 길이라 출입을 통제
하고 있으며, 난간 너머는 나라의 예민한 구역이니 애써 넘어가지 않도록 한다.
여기서는 북쪽으로 평창동과 북한산(삼각산), 동쪽은 성북동과 서울 동북부 및 동부 지역, 서
쪽은 부암동과 인왕산, 남쪽으로 서울 도심과 남산, 멀리 관악산(冠岳山)과 호암산까지 두 눈
에 들어와 조망도 일품이다.

천하 최대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발 아래 두고 굽어볼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으로 서
울 도심을 둘러싼 뫼 가운데 가장 높고 오랜 세월 서울을 지켜온 북현무로서의 면모와 위엄이
느껴진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북악산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2-27

▲  백악산 정상 표석

▲  북악산 정상부


※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白岳山)> - 국가 명승 67호
서울 도심 북쪽에 가파르게 솟은 북악산(342m)은 서쪽의 인왕산. 동쪽의 낙산(駱山, 낙타산),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남산)과 함께 서울 도심을 지키는 4대 산의 하나이다. 이들을 내사산
(內四山)이라 부르는데, 그들 중 북악산이 맏형이며, 낙산은 막내 동생이다.
서울 도심의 지형은 내사산에 감싸인 분지(盆地)로 조선 태조 때 개경(開京)에서 서울로 국도
(國都)를 옮기면서 이들 산을 따라 18.2km의 도성(都城)을 구축했다. 그리고 풍수지리에 따라
북악산을 북현무(北玄武)로 하여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삼았으며,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
낙산을 좌청룡(左靑龍), 남산을 남주작(南朱雀)으로 삼았다.

북악산의 옛 이름은 백악산으로 서울 도심(종로구, 중구)에서는 어디서든 그가 바라보이는데,
오랫동안 서울을 상징하는 뫼로 남쪽 자락에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을 닦고, 그
북쪽(현재 청와대)에는 넓게 경복궁 후원을 두었다.
북악산 주능선에는 한양도성이 파노라마처럼 길게 펼쳐져 있다. 정상 동쪽에는 북문인 숙정문
이 있고, 인왕산과 경계를 이루는 자하문고개에는 창의문(자하문)이 고색의 모습으로 고개 중
턱을 지킨다.
북악산 남쪽 자락인 삼청동(三淸洞)과 청운동(淸雲洞)은 한양도성의 북쪽 변두리로 숲이 무성
했으며, 북악산이 베푼 삼청동계곡과 대은암(大隱巖)계곡, 백운동(白雲洞)계곡, 청송당(聽松
堂)계곡 등이 있었고, 풍경이 아름다워 조선 초기부터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 및 풍류 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그리고 숙정문 남쪽 주변은 사대부 여인들의 봄꽃놀이 명소로 바쁘게 살았다.
한양도성과 법흥사(法興寺)터, 대은암계곡 바위글씨, 만세동방성수남극 바위글씨 등 여러 문
화유적이 있으며, 북악산 북쪽 자락 백사실계곡에는 백석동천이란 별서(別墅) 유적이 전하고
있다.

북악산은 북쪽으로 북한산(삼각산)과 이어져 있고 숲이 짙어서 예로부터 호랑이가 자주 나타
났다. 그들은 툭하면 궁궐 후원과 북촌까지 침투했는데, 태종(太宗)이 경복궁 후원을 거닐다
가 호랑이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북악산 호랑이는 다른 호랑이와 달리 곶감은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하며, 대신 수진궁(壽進宮)
귀신을 무서워했다고 한다. 하여 인왕산과 북악산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
는 속담까지 생겨났다. (수진궁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왕족의 사당임)

1968년 1.21사태 이후 굳게 닫힌 북악산은 북악산길과 주택가와 접한 일부 산자락만 겨우 출
입이 가능했으나 2000년대 초반 백사실계곡(백석동천)이 개방되었고, 2006년 4월 1일 홍련사
에서 숙정문, 촛대바위 구간이 해방되면서 굳게 잠겼던 북악산 주능선의 자물쇠가 드디어 열
리기 시작했다.
하여 2007년 4월 5일 말바위에서 창의문까지 주능선 구간(4.3km)이 싹 해방되었으며, 2009년
에 북쪽 능선의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이 열렸고, 삼청공원~말바위 구간 등이 해방되었다가
2020년 11월 '북악산길~청운대쉼터','북악산길~곡장' 구간이 추가로 열렸다. 그리고 2022년
봄에 '삼청공원~청운대쉼터','삼청공원~법흥사터~숙정문','칠궁/춘추관~백악정' 등이 더 열려
지금에 이른다.
이렇듯 북악산의 금지된 속살이 많이 열렸지만 그렇다고 이곳의 예민한 성격까지 가라앉은 것
은 아니다. 하여 여전히 금지 구역은 적지 않으며, 북악산 주능선과 주능선으로 인도하는 길,
청와대 주변 길(칠궁/춘추관~백악정)은 탐방시간에 제한이 있다.

북악산은 예로부터 소나무가 유명하여 조선 조정에서 특별히 옆구리에 끼고 관리했으며, 왜정
(倭政) 이후 관리 소홀과 마구잡이 벌채로 지금은 주능선 일대에 주로 남아있다. 또한 오랫동
안 금지된 곳으로 엄격히 묶여있던 탓에 나무와 식물들이 마음 놓고 뿌리를 내려 숲이 원시림
마냥 울창해 서울 도심의 허파 역할을 하고 있으며, 숙정문 주변에는 팔배나무가 군락을 이루
고 있어 새들이 많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 아차산, 관악산 등과 더불어 대자연이 서울에 내린 소중한 선물이
자 꿀단지로 앞으로도 지금의 모습 그대로 삼삼한 자연의 공간으로 쭉 있었으면 좋겠다. 하긴
산 주변에 국가의 예민한 곳이 많으니 개발의 칼질 또한 그 눈치로 마음껏 칼질을 할 수는 없
다.

북악산(백악산)은 '서울 백악산 일원'이란 이름으로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었으며, 지정된 면
적은 3,598,127㎡에 이른다.

* 북악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부암동, 삼청동, 명륜동 / 성북구 성북동 (창
  의문안내소 ☎ 02-730-9924, 숙정문안내소 ☎ 02-747-2152, 말바위안내소 ☎ 02-765-0297)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그리고 관악산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인왕산과 서대문구, 은평구 지역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북악산 동쪽 자락과 성북동,
성북구, 동대문구, 서울 동부 및 동북부 지역


 

♠  북악산 청운대~말바위 구간

▲  청운대(靑雲臺) 표석의 위엄

북악산 정상(백악마루)에서 동쪽으로 10분 정도 내려가면 청운대(293m)가 마중을 한다. 난쟁
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은 키의 청운대 표석이 이곳의 이름을 알려주고 있는데, 공간이 넓
고 의자가 넉넉히 있어서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특히 말바위나 숙정문, 삼청공원, 북악산길
에서 올라왔다면 여기서 코앞에 보이는 백악마루에 입맛을 다시며 잠시 두 다리를 쉬기 마련
이다.
여기서는 성북동과 북한산(삼각산), 서울 동북부 및 동부 지역, 서울 도심, 남산 등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아주 일품이다.


▲  청운대에서 바라본 천하
북악산 주능선과 동쪽 자락, 성북동, 성북구, 강북구 등 서울 동북부와
동부 지역, 아차산~용마산 산줄기 등이 흔쾌히 시야에 잡힌다.

▲  시원스럽게 뻗은 한양도성 청운대~곡장입구 구간 (동쪽 방향)

성곽 바깥 길 북쪽에는 철책이 꽁꽁 둘러져 마치 휴전선이나 국경선을
거니는 쫄깃한 기분이다.

▲  청운대쉼터
북악산 주능선에서 가장 너른 쉼터로 군부대 운동장을 개조해 나그네들의
쉼터로 삼았다.

▲  한양도성 촛대바위~곡장입구 구간
성곽을 따라 이어진 북악산의 명물, 소나무의 푸른 물결과 향긋한 솔내음

▲  촛대바위와 그에게로 인도하는 나무데크길

숙정문 서쪽에는 촛대바위가 있다. (숙정문과 곡장입구 사이에 있음) 아마도 촛대처럼 생겨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듯 싶은데, 바위 남쪽 밑에서 봐도 그다지 촛대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바위 남쪽 밑 탐방로는 2022년 봄에 해방되었으며, 바위 정상부는 여전히 금지구역임)

천하가 북악산 촛대바위를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왜정이 이 땅의 혈을 끊고자 무식하게 쇠말
뚝을 박았던 추악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왜정은 1920년대에 경복궁과 일직선이 되는 이곳에 말뚝을 꽂았는데, 사람으로 친다면 머리의
정수리가 되는 부분이다. 즉 조선의 머리 부분을 아작 내어 이 땅을 영원히 뜯어먹겠다는 의
도를 드러낸 것이다. 다행히 그 말뚝은 제거되었으나 말뚝의 휴유증 때문일까? 이 땅은 아직
도 혼돈에 잠겨있다. 친일매국노와 그런 것을 추종하는 잡것들이 권력과 부를 챙기고 이 땅을
이간질시켜 나라의 기본부터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언제쯤 촛대바위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까?
그때가 되면 주름진 나라 사정도 좀 펴지겠지.
(왜정의 쇠말뚝에 대해서는 측량용이란 말도 있으나 설령 측량용이라고 해도 그건 일부에 불
과함. 대부분은 추악한 의도로 꽂은 것들임)


▲  숙정문 서쪽에서 바라본 성북동(城北洞)
산자락에 포근히 감싸인 동네가 평창동과 더불어 이 땅에 0.1%가
산다고 하는 성북동이다.

▲  한양도성 숙정문(肅靖門) - 사적 10호
숙정문 앞은 바로 각박한 산비탈이라 성문을 지키기에는 아주 그만인 곳이다.


촛대바위를 지나면 북쪽을 향해 입을 연 숙정문이 마중을 한다. 이곳은 한양도성의 북문(北門
)으로 남대문(숭례문), 동대문(흥인지문), 서대문(돈의문)과 함께 도성 4대문의 일원이다. 하
여 북문, 북대문(北大門)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가파른 산능선에 자리해 있고 규모가 작아 도
성의 대문이라기 보다 산성의 조촐한 성문 분위기가 진하다.

문의 이름인 숙정(肅靖)은 엄숙히 다스린다는 뜻으로 원래 이름은 가운데 1자만 다른 숙청문(
肅淸門)이었다. 1396년 지금보다 약간 서쪽에 조성되었는데, 1413년 풍수학자인 최양선이 태
종에게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건의해 이들 문을 꽁꽁 닫아걸고 소나무를 잔뜩 심어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 연유로 무늬만
문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 외에도 숙정문을 품은 북악산 주능선은 도성 내부와 바깥이 훤히 바라보이는 예
민한 위치로 서울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러다보니 백성들의 출입을 거의 통제했고,
설령 이 성문을 나와도 이어지는 곳은 숲이 무성한 북악산 북쪽 능선과 북한산, 성북동이 고
작이었다. <성북동은 동소문(東小門)을 통해서 갈 수도 있음>
그리고 평소와 비가 많이 올 때는 숙정문을 닫아 걸고 가뭄이 심할 때 남대문을 닫고 이 문을
열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는 1416년에 제작된 기우절목(祈雨節目)에 따라서 북쪽은 음
(陰). 남쪽은 양(陽)을 상징하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니 통행문으로서의 존재
감보다는 도성 수비와 풍수지리적인 존재감이 훨씬 컸던 것이다.

1504년 성곽을 보수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으며, 숙청문이 언제 숙정문으로 이름이 갈렸
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1523년부터 숙정문 이름이 등장한다. 숙정문 외에도 북정문(北靖門)
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이들 명칭이 같이 쓰이다가 언제부턴가 숙정문으로 통합되었다.
1968년 1.21사태 이후 북악산 대부분과 숙정문이 금지된 구역이 되었으며, 1976년 북악산 일
대 성곽을 손질하면서 문루를 세워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숙정문 문루에 올라서면 북악산 북쪽 능선과 성북동 일대가 바라보이며, 높은 곳에 자리한 것
은 분명하지만 문 남쪽은 울창한 수목이 시야를 방해하고 있고, 북쪽도 겨우 성북동과 삼청각
, 북악산 북쪽 능선이 전부라 조망은 생각보다 별로이다.
매년 봄에는 사대부 여인들이 숙정문 남쪽에서 봄꽃놀이를 즐겼다고 하며, 그거 외에는 딱히
숙정문 주변에 대한 옛 사람들의 시(詩)나 문구(文句)는 전하는 것은 없다.

* 숙정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25-22


▲  한양도성 숙정문~말바위 구간

▲  북악산 말바위

말바위안내소를 나와 동쪽으로 조금 가면 성 밖으로 넘어가는 계단길이 있다. 무지 귀한 몸인
성곽 여장을 부시고 길을 낼 수가 없어 부득이 성곽 위로 높게 나무다리를 내어 성밖으로 통
하는 길을 냈다.
다리 북쪽에는 전망대를 설치해 도심 속의 전원 마을인 성북동을 굽어보게 했는데, 삼청각과
길상사(吉祥寺), 북악산 북쪽 능선을 비롯해 성북구, 종로구 동부, 동대문구, 중랑구, 광진구
, 성동구, 수락산~불암산, 아차산~용마산 등이 훤히 망막에 들어와 조망도 진국이다. 특히 여
기서는 성북동 대부분이 시야에 들어와 성북동전망대라 해도 손색이 없다.

여기서 성곽길을 따라 동쪽으로 조금 가면 말바위란 크고 견고한 돌덩어리가 마중을 한다. 그
는 북악산(백악산)의 오랜 명소로 조선 때 문인(文人)과 관료들이 말을 타고 이곳으로 올라와
시문(詩文)을 짓거나 바람을 쐬며 쉬었다고 한다. 하여 말을 타고 올라왔다는 뜻에서 말바위
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는데, 북악산 산줄기가 동쪽으로 좌청룡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그 끝에 있는 바위라 하여 말(末)바위라 했다는 설도 덧붙여 전한다. 즉 말처럼 생겼다고 해
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 것이다. (바위가 말처럼 생기지도 않았음)

1968년 1.21사건 이후 말바위는 금지된 바위가 되어 속세에서 잠시 그 모습이 지워졌다가 39
년에 시간이 흐른 2007년 4월에 다시 공개가 되었고 관람 통제가 심한 북악산 주능선 구간과
달리 이곳은 아침과 저녁에도 접근이 가능하다.
말바위 옆에는 소나무가 바위 쪽으로 가지를 뻗어 바위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며, 서로의
끈끈한 정을 자랑한다.

말바위에서 성곽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오른쪽(남쪽)으로 길이 90도 꺾인다. 성곽과 더 함께
하고 싶어도 군사시설로 길이 완전히 막혀 별수 없이 남쪽 길로 내려가야 되는데, 소나무가
무성한 그 길을 내려가면 북악산 남쪽 자락에 넓게 깃든 삼청공원(三淸公園)이다.

삼청공원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나와 취운정(翠雲亭)터 표석이 있는 감사원교차로에서 왼쪽(북
쪽) 길로 가면 성북동과 성대후문으로 인도하는 와룡공원 고갯길(와룡고개)이 펼쳐진다. 이곳
은 도심과 성북동을 바로 이어주는 지름길로 마치 뱀의 허리에 올라탄 듯, 지그재그로 굴곡의
미를 보여주고 있는데, 숲도 삼삼하고 경치도 아름다우며, 특히 벚꽃이 살랑거리는 봄과 단풍
의 향연이 우울한 마음을 부여잡는 늦가을 풍경은 이곳의 갑(甲)으로 꼽힌다.
게다가 여기서 바라보는 도심 조망과 야경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걸작이다. 길 밑에
는 도심에 숨겨진 뒷길인 창덕궁 후원 뒷길(후원 돌담길)이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너른 숲
이 펼쳐져 있는데, 이들은 서울의 동궐(東闕)인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이다.

이렇게 하여 북악산(백악산) 나들이는 창의문에서 시작하여 와룡공원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
다. 이후 내용은 생략~~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2년 1월 22일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티스토리(tistory)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3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늦겨울 산사 나들이, 강화도 마니산 정수사 (정수사 법당, 사기리분청사기요지, 사기리탱자나무, 이건창생가)

강화도 늦겨울 나들이 (마니산 정수사, 사기리 탱자나무, 이건창생가)



' 강화도 늦겨울 나들이 '
(마니산 정수사, 사기리 지역)

정수사 법당

▲  정수사 법당(대웅보전)

사기리 탱자나무 이건창생가

▲  사기리 탱자나무

▲  이건창 생가

 



 

차디찬 겨울의 한복판인 2월 끝 무렵의 어느 덜 추운 날, 오랜만에 강화도(江華島)를 찾
았다.
강화도(강화군)는 늘 구미가 당기는 곳이라 그곳의 적당한 메뉴를 고르던 중, 마니산 정
수사에 딱 눈이 멈춰섰다. 그곳은 이미 2번이나 인연을 지은 곳이지만 무심한 세월이 훔
쳐간 아련한 옛 추억도 잠시 곱씹을 겸 흔쾌히 그곳을 택했다. 자고로 좋은 곳은 두고두
고 찾아가는 법이다.

오전 늦게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70여km 떨어진 강화도의 동남쪽 중심지, 온수리(길
상면 중심지)에 이르니 어느덧 14시이다. 여기서 정수사까지는 강화군내버스 3번(강화터
미널↔온수리, 1일 9회)이 다니고 있는데, '늦어도 40~50분 기다리면 되겠지' 싶어 방심
을 했으나 정류장에 달린 시간표를 보니 글쎄 1시간 30분 뒤에나 차가 있는 것이다.
방심의 대가치고는 오지게 긴 시간이라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어찌 보
면 덤으로 생긴 그 시간에 늦은 점심이나 섭취하고자 적당한 식당을 찾다가 가격도 착하
고 찬도 넉넉한 뷔페식 기사식당을 발견, 그곳에서 즐겁게 배를 채웠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도 시간이 남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온수리 성공회성당(聖公會聖堂)
을 짧게 둘러보고 정류장으로 돌아와 나머지 시간을 억지로 죽이고 있으니 강화군내버스
3번이 다가와 활짝 입을 벌린다.
버스는 서남쪽으로 10여 분을 달려 정수사입구에 나를 내려놓는다.



 

♠  늙은 툇마루 법당으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마니산 정수사(淨水寺)

▲  겨울에 잠긴 정수사 길(해안남로1258번길) ①

정수사입구에서 정수사까지는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따라 15~20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작은 포장길이 닦여져 있는데, 길 좌우로 겨울에 몽땅 털린 나무
들이 초췌한 몰골로 나그네를 맞이한다. 눈이 내린 지 벌써 여러 날 되었지만, 길가에는 새하
얀 눈이 조금씩 남아 아직까지 겨울 제국(帝國)의 치하임을 강하게 일깨운다.


▲  겨울에 잠긴 정수사 길(해안남로1258번길) ②

▲  겨울에 잠긴 정수사 길(해안남로1258번길) ③

▲  정수사 직전 'S'라인 고갯길
저 고갯길의 끝에 툇마루 법당으로 유명한 아담한 산사, 정수사가 고색의
숨결을 물씬 풍기며 중생들을 맞이한다.


천하의 성산(聖山)으로 오랫동안 추앙을 받는 마니산<摩尼山, 마리산, 해밯 469m> 동쪽 자락
에는 3칸짜리 툇마루 법당으로 유명한 정수사가 포근히 안겨져 있다.

정수사는 639년에 회정선사(懷政禪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마니산 참성단(塹星壇)을
참배하고 동쪽으로 내려가다가 앞이 확 트인 괜찮은 곳을 발견하고는 불제자들이 선정삼매(禪
定三昧)를 정수<精修, 정세하게 학문을 닦음>할 곳이라 격찬하며 그곳에 절을 지어 정수사(精
修寺)라 했다고 한다. (이름은 같지만 한자는 틀림)
허나 아쉽게도 이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이며 '정수사 산령각 중건기(重建記
, 1903년)'와 '강도지(江都誌)'에도 창건시기를 알 수 없다고 나와있어 639년 창건설에 크게
회의감을 들게 한다. 하여 절이 우후죽순 들어섰던 고려 전기나 몽골(원나라)과의 전쟁으로
강화도가 임시 국도(國都)가 되었던 13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423년에 법당을 새로 지었고, 1426년 함허기화(涵虛己和, 함허대사)가 절을 중창했는데, 법
당 서쪽에서 깨끗한 물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맑은 물을 뜻하는 정수사(淨水寺)로 이름을
갈았다. (이름은 그대로 두고 한자와 뜻만 갈아치움)
1688년 절을 중수하여 상량문(上樑文)을 남겼으며<1957년에 발견됨> 1848년 비구니 법진(法眞
)과 만흥(萬興) 등이 화주(化主)가 되어 법당을 중수했다. 이때 부화주(副化主) 승려 20여 명
, 목수 165명, 지역 주민 305명이 자원하여 중창불사에 참여했다.

1878년 비구니 계흔(戒欣)이 제자 성수 등과 불상을 개금(改金)하고 후불탱과 칠성탱, 독성탱
, 산신도 등을 새로 그려 봉안했는데, 금어<金魚, 그림을 그리는 승려> 용계 서익(龍係 瑞翌)
과 대허 체훈(大虛 體訓) 등이 탱화를 조성했으며 1883년 화주 근훈(根訓)이 절을 수리했다.
1888년 비구니 정일(淨一)이 수좌 연오(演梧)와 함께 시주금을 모아 관세음보살상 1위와 후불
탱 1점을 만들어 봉안했다. 정일은 여러 절과 마을을 꾸준히 돌면서 돈을 모아 1903년 산령각
을 중건하고 1905년에 법당을 수리했으며 1916년에는 불상을 개금하고 여러 불화를 봉안했다.
그 시절 정수사에 머물며 그의 불사를 목격했던 이건승(李健昇) 거사는
'뜻을 한가지로 한다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있겠는가. 이 절의 스님을 보니 남자가 여자에
미치지 못하고 사대부가 여승에 미치지 못하고 국가가 사찰에 미치지 못함을 깨달았다!'

감탄을 금치 못하며 그의 공덕을 기리는 글을 쓰기도 했다.


1937년 주지 김선영이 본산<전등사(傳燈寺)> 주지 김정섭과 상의해 대웅전(법당)을 나라의 보
호 건물로 추천했으며, 1942년에 쓰여진 '전등본말사지'에는 대웅전(12칸) 외에 산신각(2칸),
대방(14칸), 노전(6칸), 요사(16칸) 등이 있어 지금보다 건물이 더 풍요로웠음을 알려준다.
6.25 때는 다행히 별 피해는 없었으나 건물들이 고된 세월에 체해 나날이 퇴락하자 1957년에
법당을 중수했으며, 1974년에 소실된 삼성각을 다시 지었다. 이후 여러 건물을 짓거나 새로
손질하여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대웅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오백나한전, 요사, 종무소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법당과 향토유적인 함허대사 승탑을
가지고 있다. 그 외에 19세기에 조성된 탱화들이 여럿 있고 오백나한전에는 고려 때 것으로
전하는 건칠지장보살상이 있다.
또한 절 주변에는 상사화(相思花, 꽃무릇)가 자라고 있는데 보통 붉은 상사화를 생각하기 쉬
우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노란색 상사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노란 상사화는 이 땅에서도 매
우 희귀한 존재로 8월 중순에서 9월 초 사이에 10여 일 정도 반짝 꽃잎을 펼쳐 보인다.

정수사는 함허동천(涵虛洞天)과 함께 마니산(마리산)의 동쪽 기점으로 바로 북쪽 능선을 넘으
면 함허동천이다. 참성단까지는 40~50분 정도 걸리며 중간에 벼랑처럼 이어진 아찔한 바위 능
선을 지나야 된다. 비록 길이 괜찮게 닦여져 사고의 위험은 예전보다 덜하지만 그래도 조심은
해야된다.

* 정수사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467-3 (해안남로1258번길 142 ☎ 032-
  937-3611)
* 정수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정수사 법당(法堂) - 보물 161호

경내 중심에 자리한 법당(대웅보전)은 정수사의 얼굴이자 상징으로 1423년에 지어졌다. 이 땅
의 늙은 법당 중 유일하게 툇마루를 지닌 개성파 법당이자 이 땅에 별로 남지 않은 조선 초기
사찰 건축물로 그 가치가 백두산 꼭대기만큼이나 높다. (법당 덕분에 정수사의 이름값이 크게
올라갔음)

이 법당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측면이 3칸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툇마루를 덧붙이면서 측면이 조금 넓어졌는데 1688년 절을 중수했을 때 닦여진 것으로 여겨진
다. (1688~1689년 법당을 중수하면서 중수 관련 기록을 법당 안에 넣어둠)
절이 한참 어려웠던 시절에는 가운데 칸은 법당으로, 좌우 칸은 승려들 거처로 사용했다고 하
며, 육중한 지붕을 지탱하고자 기둥 꼭대기에 공포를 단 주심포(柱心包) 양식으로 앞/뒷면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으니 이는 후대에 툇마루(퇴칸)를 설치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후면 공포
는 조선 초기 양식임)

건물 천정은 사주(四周)의 귀를 약간씩 접은 우물천정이며 여러 번의 중수를 겪으면서 건물이
조금 변형되긴 했으나 대체로 조선 초기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불단(佛壇)에는 아미타3존
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주위로 아미타후불탱, 칠성탱, 지장시왕도 등의 탱화들이 가득 널려있
다.


▲  옆에서 바라본 정수사 법당

▲  위에서 바라본 법당과 그의 풍만한 맞배지붕

정수사의 존재감을 크게 올려준 법당은 툇마루 앞과 옆구리에 놓인 섬돌에 신발을 벗어두고
들어가면 된다. 가운데(어칸) 문과 좌우 칸 문에는 창살이 곱게 입혀져 있는데 가운데 칸 문
에는 꽃과 꽃병이 묘사되어 있어 화사함을 더해준다.


▲  법당 가운데 문짝에 피어난 꽃창살
아름다운 꽃들이 마치 화석처럼 굳어져 문짝에 달려있는 것 같다.

▲  법당을 크게 돋보이게 만든 툇마루 (옆에서 바라본 모습)

▲  법당 아미타3존상과 지장보살, 관세음보살상
아미타3존상 뒤로 1878년에 제작된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히 자리해 있고 3존상
좌우로 근래 덧붙인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3존상의 옆구리를 가득 채워준다.

▲  법당 칠성탱(七星幀)
1878년에 조성된 것으로 치성광여래 등의 7여래와 일광보살 등 칠성(七星)의
주요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져 있다.

▲  법당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지장탱)

칠성탱과 더불어 1878년에 조성된 것으로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지장보살 두광(頭光) 좌우에 자리한 식구들은 특이하게도 동물 얼굴을 하고 있
는데, 지장보살 앞쪽에 선 왼쪽 동자는 등에 함을 지고 있고, 그 오른쪽 동자는 지장보살이
들어야 될 석장(錫杖)을 대신 들고 있는 점이 이색적이다. 이런 식의 지장탱화는 거의 이곳이
유일하다.


▲  무려 1,000원을 구석에 머금은 법당 현왕탱(現王幀)

현왕탱은 관련 화기(畵記)가 없어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략 1851년 정도로 여겨
진다. 그러니 법당을 수식하고 있는 탱화 중 가장 늙은 존재가 된다.
현왕(現王)이란 죽은 사람을 심판하는 존재로 죽은 지 3일 뒤에 심판을 진행한다고 하며 그의
판결 여부에 따라 극락이나 지옥행이 결정된다고 한다. 그는 착하게 산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
니 가급적 선하게 살아야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음.
내가 아직 명부(저승)를 가본 적이 없으니;;>


▲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법당 뜨락 좌측에는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지닌 오백나한전이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름 그
대로 500명의 나한(羅漢)을 머금은 건물로 근래 지어진 것인데 나한 외에 고려 때 것으로 여
겨지는 건칠(乾漆)지장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보살상은 바다 건너 개성 땅에서 왔다고 하며 나는 법당만 생각했지 그의 존재를 알지 못
해 지나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다음에 또 오라는 정수사의 뜻인 모양이다. 하지
만 이곳은 이미 3번이나 인연을 지었고 아직도 지우지 못한 미답처가 천하에 수두룩해 일부러
또 찾을 생각은 별로 없다.


▲  겨울 휴업에 들어간 법당 옆 샘터
정수사의 뜻(맑은 물이 나오는 절)과 한자를 바꾸게 만든 샘터로 하얀 피부의
거북상을 짓고 그 주위를 기와돌담으로 둘러 애지중지하고 있다. 허나
겨울 제국이 물을 꽁꽁 앗아가면서 그 맑다는 샘물은
구경도 하지 못했다.

▲  삼성각(三聖閣)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과 독
성, 칠성 외에 용왕(龍王)까지 봉안되어 있어 사성각(四聖閣)이란 이름이 더 어울려 보인다.
불에 타서 쓰러진 것을 1974년에 다시 세웠으며, 내부에 담긴 산신과 독성, 칠성, 용왕탱은
그 이후에 조성된 것이다.


▲  정수사에서 바라본 천하
마니산의 벌어진 동쪽 틈 사이로 서해바다와 동검도(東檢島)가 진하게 바라보이고
그들 너머로 강화도를 거느린 인천(仁川) 본토가 흐릿하게 시야에 닿는다.


경내 서쪽에는 가건물로 이루어진 매점 겸 종무소(宗務所)가 있다. 10여 년 전 겨울에 왔을
때는 부엌을 갖춘 셀프식 찻집으로 있었는데, 절 신도와 답사꾼, 산꾼까지 누구든 들어와 차
1잔의 여유를 누릴 수 있도록 찻잔과 전통차 티백, 주전자, 물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용료는
없었으며 대신 직접 물을 끓여서 차를 타 마시고 사용했던 찻잔은 씽크대에서 씻으면 된다.
그때 같이 왔던 사람과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며 1시간 정도 머물렀던 기억이 정말 엊
그제 같은데 그 추억은 흩어진 나날의 일부가 되었고 찻집 또한 성격이 변해 더 이상 중생들
에게 무료로 차 1잔의 여유를 주지 않는다. (대신 차와 커피를 팔고 있음)

정수사의 다소 야박해진 인심과 왕년의 추억을 같이 되새기며 더 볼거리가 없나 두리번거리니
그때다 싶어 '함허대사 승탑'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나 나의 허전한 마음을 건드린다.
'정수사에 그런 존재가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정표의 지시에 따라 오백나한전 뒤쪽
으로 가니 눈과 진흙으로 얼룩진 산길이 나오고 그 길을 조금 오르니 언덕배기에 조촐하게 생
긴 부도탑이 나를 맞이한다. 그가 바로 마니산 동쪽 자락에 진하게 흔적을 남겼던 함허대사의
승탑(부도)이다.


▲  함허대사 승탑(涵虛大師 僧塔) - 강화군 향토유적 19호

승탑의 주인인 함허대사(1376~1433)는 조선 초기 승려로 고려 때 아주 잘나갔던 충주유씨 집
안이다. (충주 출신임) 전객시사(典客寺事)를 지냈던 유청(劉聽)의 아들로 어머니는 방씨이며
법호는 득통(得通), 무준(無準), 법명(法名)은 기화(己和), 당호는 함허이다.

1396년 관악산 의상암(義湘庵, 어딘지 모름)에서 출가를 했으며 1397년 양주 회암사(檜巖寺)
에서 무학대사(無學大師)에게 법요(法要)를 듣고 여러 곳을 다니다가 1404년 회암사로 돌아와
수도에 정진했다.
1406년 공덕산 대승사(大乘寺)에서 4년 동안 '반야경(般若經)'을 설법했고, 1410년 개성 천마
산 관음굴에서 선을 크게 진작시켰다. 1411년 절을 중수해 승속(僧俗)들을 지도했으며, 1414
년 황해도 평산(平山)의 자모산 연봉사(烟峯寺)로 자리를 옮겨 작은 방을 함허당(涵虛堂)이라
이름 짓고 '금강경오가 해설의(金剛經五家 解說誼)'를 가르쳤다.

1420년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그곳 사찰에 봉안된 옛 고승과 불상, 보살상에게 공양을 하
며 지내던 중, 영감암(靈鑑庵)에 있는 나옹(懶翁)의 진영(眞影)에 제사를 지내고 깜박 잠이
들었다. 그때 꿈에서 어느 신승(神僧)이 나타나 '기화'란 이름과 '득통'이란 호를 지어주었는
데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자신의 법명과 법호(法號)로 삼았다.
1421년 세종(世宗)의 청으로 개성 대자사(大慈寺)에 머물면서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의 명
복을 빌어주었고, 1424년 길상산(吉祥山)과 운악산(雲岳山), 공덕산(功德山) 등을 돌아다니며
설법과 수도에 힘썼다. 그리고 1426년 정수사를 중수해 머물렀으며, 1431년 문경 봉암사(鳳巖
寺)를 중수하여 머물다가 1433년 입적하니 나이는 57세였다.

그의 사리는 그와 인연이 깊은 가평 현등사(懸燈寺), 문경 봉암사, 황해도 현봉사, 인봉사(어
딘지 모름), 정수사에 분배되었는데 정수사는 경내 뒤쪽에 그의 승탑을 만들어 두고두고 중창
자를 기리고 있다.

함허는 무학대사의 법을 이은 선가(禪家)이지만 교종(敎宗)에 대해서도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교학적인 경향도 크게 지니고 있다. 그의 현정론(顯正論)을 통해 그의 선사상(禪思想)에는 현
실생활과 일상적인 생활을 수용하고 포용하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유학자들이 불교 배척을 주
창하면서 '허무적멸지도(虛無寂滅之道)'라고 비판한 것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그의 유,불,도 삼교일치론은 송나라 계숭(契嵩)이 지은 '보교편(輔敎編)'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불교가 배척당하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주장되었다는 점에 그 차이가 있다.

그의 열성 제자로는 문수(文秀), 학미(學眉), 달명(達明), 지생(智生), 해수(海修), 도연(道
然), 윤오(允悟) 등이 있으며, '원각경소(圓覺經疏)' 3권, '금강경오가해설의' 2권 1책, '윤
관(綸貫)' 1권, '함허화상어록(涵虛和尙語錄)' 1권 등의 저서가 있다. (그 외에 반야참문 1권
도 있으나 전하지 않음)

함허의 넋이 담긴 승탑은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넓게 바닥돌을 깔고 그 한복판에 기단(
基壇)을 다진 다음 탑과 머리장식을 올렸다. 옥개석(屋蓋石)은 6각형이지만 신라 후기~고려
초기 승탑의 기본 형태였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탑의 높이는 156
cm, 바닥돌까지 포함하면 164cm 정도이다. 기단부에는 연꽃 장식이 새겨져 있으며 탑은 작지
만 나름 단단하고 균형 잡힌 모습이다.



 

♠  사기리(沙器里)에서 만난 오래된 명소들

▲  사기리 분청사기요지(粉靑沙器窯址) - 강화군 향토유적 18호

함허대사 승탑을 끝으로 정수사 관람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여기서 바로 북쪽에 있는 함
허동천으로 넘어가 사기리 탱자나무와 이건창 생가로 나갈 생각이었으나 함허동천과 가까운
곳임에도 마땅한 길이 없었고 함허대사 승탑 옆으로 그곳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으나 확신이
서질 않아서 쿨하게 그 길을 포기하고 미련 없이 정수사입구로 나왔다.

차들이 수시로 쌩쌩 지나가는 해안남로를 따라 함허동천입구와 탱자나무까지 가야 했는데 다
행히 뚜벅이를 위한 보도를 길 양쪽 사이드에 닦아놓아 차들의 눈치에서 다소 자유로워졌다. 
정수사입구에서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 8분 정도 가니 식당과 펜션들로 즐비한 함허동천 입구
이고 다시 6분 정도 북진하니 '사기리 분청사기요지'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좀 보고 가라며 발
길을 붙잡는다.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지나친다고 못 이기는 척 그 이정표를 따라 야산
을 조금 오르니 분청사기요지가 폐허의 미학(美學)을 풍기며 바짝 누워있다. (도로에서도 그
존재가 보임)


 ▲  가마터 한복판에 수습된 분청사기 파편과 가마터를 이루던 석재들

이곳은 고려 말~조선 초에 한참 유행했던 분청사기를 만들던 14~15세기 가마터(요지)이다. 가
마터의 모습이 모두 파악되지는 못했으나 지금까지 발견된 규모로 보아 40mx80m 정도로 여겨
지며 깨진 분청사기 파편과 분청사기를 구울 때 쓰였던 굽받침, 가마 벽체로 여겨지는 여러
돌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지금은 비록 폐허의 공간으로 보잘 것은 없지만 이 가마터로 인해 마니산 동쪽 지역이 사기리
가 되었다. 즉 사기그릇을 만들던 동네란 뜻으로 왕년에는 가마터로 제법 바쁘게 살았음을 귀
뜀해준다.

* 분청사기요지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224


▲  사기리 탱자나무 - 천연기념물 79호

분청사기요지를 나와서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3분 정도 가면 이건창생가 정류장 남쪽 들판에
키 작은 나무 하나가 진하게 아른거릴 것이다. 그가 사기리의 오랜 명물인 탱자나무로 그 앞
까지 도보길을 닦아놓아 관람객의 편의를 배려했다.

강화도는 탱자나무가 마음 놓고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북방 한계선으로 늙은 탱자나무 2그루가
전하고 있다. 하나는 갑곶돈대(甲串墩臺)에, 다른 하나는 이곳 사기리로 그중 갑곶돈대(갑곶
진)가 더 북쪽이라 우리나라 탱자나무의 북쪽 끝은 갑곶진이 된다. 나무에 가시가 많아서 성
곽이나 요새에 방어용으로 많이 심기도 하는데 갑곶진 탱자나무는 바로 그 역할로 심어졌다.

사기리 탱자나무는 4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키는 3.8m이다. 2.8m 높이에서 3갈래로 갈라져 마
치 용트림 모습을 하고 있는데 고된 세월에 지친 그를 위해 기둥을 여러 개 깔아 가지를 받쳐
들고 있으나 여전히 정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탱자나무는 보통 4월에 3~5cm 정도의 하얀 꽃이 피며 가을이 되면 열매가 맺으면서 노랗게 변
한다.

* 사기리 탱자나무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135-10

▲  정면에서 바라본 탱자나무

▲  서쪽에서 바라본 탱자나무

▲  동쪽에서 바라본 탱자나무

▲  탱자나무에서 바라본 길상산과
사기리, 선두리 들판


▲  이건창 생가(李建昌 生家) - 인천 지방기념물 30호

사기리 탱자나무 길 건너 북쪽에는 정겹게 토담을 두룬 초가(草家)가 하나 있다. 그 집이 조
선 후기 학자인 이건창의 생가로 'ㄱ' 모습의 9칸 안채와 문간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연석
기단 위에 주춧돌을 닦고 3량 가구로 지은 한옥 구조의 초가이다.
언제 지어졌는지는 마니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이건창이 강화도에서 말년을 보냈던 19세
기 말로 여겨지며 현재 집은 1996년 강화군에서 복원한 것이다. 안채는 명미당(明美堂)이라
불리는데 천정에 걸린 명미당 현판은 이건창과 친분이 있던 매천 황현(梅泉 黃玹)이 쓴 것이
다. 그렇다면 이건창은 누구일까?

이건창(1852~1898)은 전주 이씨 출신으로 나중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이상학(李象學
)의 아들이다. 아명(兒名)은 송열(松悅), 자는 봉조(鳳朝, 鳳藻), 호는 영재(寧齋)로 이곳이
그의 생가로 나와있어 여기서 태어난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원래는 개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인 이시원(李是遠)이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지낼 때 거기서 태어났으며, 선대(先代)
부터 개성에서 계속 살아왔다. 그러니 '이건창 생가'가 아닌 '이건창 가옥'이나 '이건창 고택
','명미당'으로 이름을 갈아야 맞다.
할아버지에게 충의와 문학을 바탕으로 한 가학(家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5살에 문장을 구
사할 정도로 재주가 뛰어나 신동 소리를 많이 들었다.

1866년 불과 14세의 나이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응시해 4등인 병과(丙科)로 급제했으나 나
이가 너무 어려 계속 대기발령 상태로 있다가 18세에 비로소 홍문관직(弘文館織)에 등용되었
다.
187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며 그곳 연경(燕京)에서 황각(黃珏), 장가
양(張家驤), 서보(徐郙) 등과 교유를 했다.

1875년 충청우도(忠淸右道) 암행어사가 되어 충청도를 암행(暗行)했는데, 충청감사 조병식(趙
秉式)의 비행이 적지 않아 그의 비행을 낱낱이 캐다가 오히려 모함을 받아 벽동(碧潼)으로 유
배를 당했다. 다행히 1년 뒤에 풀려났으나 워낙 강직하고 고집이 있으며 불의를 못 보는 성격
이라 벼슬에 미련을 버리고 학문이나 닦으려고 했다.
허나 고종이 그의 명성을 듣고
'내가 그대를 아니 전과 같이 잘해달라'
는 친서를 보내며 출사를 권해 1880년 경기도 암행어
사가 되었다. 그는 경기도를 돌면서 관리들의 비리를 파헤치고 흉년으로 고생하는 농민들을
찾아다니며 구휼에 힘썼다. 특히 세금을 감면해주어 백성들로부터 널리 찬양을 받았으며 그를
기리는 선정비(善政碑)가 도처에 세워졌다.

▲  이건창 생가 대문 (문간채)

▲  어설프게 복원된 우물

1884년 모친상과 부친상을 연이어 당해 무려 6년이나 상을 치렀으며 1890년 복귀하여 한성부
소윤(漢城府小尹)이 되었다.
그 시절 왜인(倭人)과 청국(淸國) 잡것들이 서울과 인천 지역에서 가옥과 토지를 마구 사들이
고 있었는데 무능했던 조선 조정은 이를 방관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안 이건창은 다시 팔을
걷어부치고 백성들의 집과 토지를 오랑캐들에게 팔아먹지 못하도록 법을 마련해야 된다고 건
의했다.
그러자 이홍장(李鴻章)의 부하이자 청나라 공사(公使)인 당소의(唐紹儀)가 그 내용을 듣고 발
끈하여 공문을 보내
'청국 사람과의 가옥이나 토지 매도를 금한다는 조항이 조약상에 없는데 왜 금지 조치를 하시
오?'
항의했다. 이에 그는
'우리가 우리 백성에게 금지시키는 건데 조약이 무슨 상관이오?'
답을 했다.
더욱 발끈한 당소의는 이홍장의 항의를 빙자하여 조선 조정에 압력을 가해 금지령을 포기하게
하였다. 허나 그는 꾀를 부려 오랑캐에게 부동산을 판 사람을 다른 죄목으로 다스려 가중처벌
을 가하니 백성들은 부동산을 그들에게 팔아먹을 수가 없었고 청나라 애들도 자연히 부동산
매입이 여의치 못해 포기했다.

1891년 승지(承旨)가 되었으나 1892년 상소 사건으로 전남 보성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
다. 그리고 이듬해 함흥부(咸興府)의 난민들을 다스리고자 안핵사(按覈使)로 파견, 함경도관
찰사의 죄상을 가려내 그를 파면시키며 백성들의 가려움을 긁어주었다.
그 소식을 들은 고종은 지방관(地方官)으로 파견되는 관리들에게
'그대가 가서 잘못을 하면 이건창이 가게 될 것이다'
겁을 줄 정도였다. 그만큼 공무를 수행
하는 그의 태도는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새로운 관제에 의한 각부(各部)의 협판(協辦), 특진관(特進
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흔쾌히 거절했으며, 1896년 황해도 해주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이 또
한 거절하고 버티다가 오히려 고군산도(古群山島, 고군산군도)로 유배형을 당했다. 허나 2개
월 후 특지(特旨)로 풀려났고 제2의 고향과 같은 강화도로 넘어가 학문을 하며 유유자적하다
가 1898년 44살의 한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매천 황현이 쓴 명미당 현판의 위엄
- 글씨가 아주 큼직하다.

▲  먼지만 가득한 안채 부엌


이건창은 글씨를 아주 잘 썼는데 송나라 때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의 글씨를 많이 참조
했다. 구한말 학자인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이 우리나라 역대 문장가를 추숭(追崇)할 때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라 하여 9명을 선정했는데, 그 끝에 고른 이가 바로 이건창이었다.
또한 정제두(鄭齊斗)가 양명학(陽明學)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학풍을 세운 강화학파(江華學
派)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성품이 곧아 병인양요(1866년) 때 자결한 할아버지의 유지를 따라
쇄국주의를 고집했다.

저서로는 명미당집(明美堂集), 당의통략(黨議通略) 등이 있는데 당의통략은 파당과 문벌을 초
월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다룬 책으로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부모상으로 강화도에 머물던 시절에 저술한 것으로 워낙 내용이 좋아서 왜정(倭政)이 그 서적
을 바탕으로 조선은 당파싸움을 일삼다 망했다는 식으로 역사를 비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
다. 즉 조선시대 붕당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해석을 이미 조선 사람이 내린 것이라 우
기며 그것을 기정사실화 시킨 것이다.


▲  소박한 모습의 명미당(안채)

▲  명미당(안채) 마루
마루는 실내화가 준비되어 있어 들어갈 수 있으며 운이 좋으면 양쪽 방도
들어갈 수 있다. (보통은 잠겨있음)

▲  마루 구석에 있는 빛바랜 뒤주
이건창은 저 뒤주에 담긴 쌀의 힘으로 6년에 걸친 부모상도 치르고
당의통략도 저술하고 양명학도 연구했을 것이다.

▲  이건창 생가 측백나무 - 강화군 보호수 180호

이건창 생가 앞에는 약 350년 묵은 측백나무가 솟아있다. 길 건너편 탱자나무와 비슷한 시기
에 식재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높이 10m, 둘레는 1.8m로 이건창도 그의 그늘 맛을 보며 학문
을 연구하고 여러 서적을 작성했을 것이다.


▲  이시원(李是遠)묘

이건창 생가 옆에는 토담을 사이에 두고 무덤 2기가 자리해 있는데 그중 밑에 있는 무덤이 이
건창의 할아버지인 이시원(1790~1866)의 유택(幽宅)이다.
이시원의 자는 자직(子直), 호는 사기(沙磯)로 개성유수를 비롯한 여러 관직을 지냈는데 1866
년 병인양요가 터지고 강화도가 프랑스 양이(洋夷)들에게 어이없이 함락되자 아우 이지원과
함께 죽어서 귀신이 되어 적을 물리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을 하고 말았다. 그 충
절로 나중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정(忠正)이란 시호를 받게 되었다.

이시원 묘는 원래 길상면 길직리에 있었으나 1985년 그의 부인인 청송심씨와 함께 손자가 살
았던 이곳으로 옮겨져 합장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봉분(封墳), 호석(護石), 상석(床石), 비석
까지 싹 새롭게 갈면서 완전 최근에 닦여진 새 무덤이 되어버렸다. 적어도 비석 정도는 옛 것
을 그냥 썼으면 조금이나마 고색의 기운이 있었을텐데 그 점이 아쉽다.

이건창 생가를 둘러보니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그날 목적한 곳을 모두 소화하여 더 이상 욕
심도 없고 일몰이 지척이라 더 이상 둘러보기도 어렵다. 하여 그 정도로 만족하며 생가 관리
인에게 인사를 건네고 정류장으로 나가 곧 들어선 강화군내버스 3번(강화터미널↔화도, 온수
리)을 타고 강화읍으로 나왔다.

이렇게 하여 강화도 늦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이건창 생가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167-3 (해안남로1114번길6)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3년 1월 17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티스토리(tistory)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3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서귀포 서귀포층패류화석산지, 새섬, 혼인지, 제주올레길2코스 겨울 나들이 (새섬공원)

서귀포 겨울 나들이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새섬, 혼인지)



' 서귀포 겨울 나들이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새섬, 혼인지)

새섬에서 바라본 범섬과 남해바다

▲  새섬에서 바라본 남해바다와 범섬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혼인지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  혼인지

 



 

묵은 해가 극한 아쉬움 속에 저물고 새해가 시작되던 1월의 첫 무렵, 천하에서 가장 대륙
, 제주도(濟州島)를 찾았다.

간만에 발을 들인 제주도에서 3일 동안 미답처(未踏處)를 중심으로 정말 알뜰하게 돌아다
녔는데, 둘째 날 늦은 오후(17시)에 서귀포시내에 있는 천지연폭포(天地淵瀑布) 주차장에
이르렀다.
천지연폭포는 초등학교 시절에 이미 인연을 지었던 곳이라 애써 고개를 돌리며 새섬이 있
는 남쪽 바닷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둘째 날은 새섬까지 소화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허나
약천사(藥泉寺, ☞ 관련글 보러가기) 이후부터 하늘에 주름진 구름들이 꽉 들어차더만 새
섬방파제에 이르자 지독하게 검은 피부를 보이며 빗방울을 투하한다. 상황이 그러자 새섬
이고 나발이고 싹 내일로 내던지고 바로 시내로 나와 적당한 모텔을 잡아 일찍 휴식에 들
어갔다. (20시에 저녁을 먹으러 잠시 서귀포 시내로 나갔음)

거의 16시간 동안(10시간 정도 잤음) 꿀 휴식을 취하고 다음날 10시, 새섬을 잡으러 출동
했다. 모텔 1층 로비에는 감귤의 대표 산지인 서귀포(西歸浦)에 걸맞게 감귤이 든 바구니
가 있었는데, 투숙객들은 마음껏 집어먹으면 된다. 하여 나는 크게 욕심부리지 않고 딱 3
개만 집어서 밖으로 나왔다.
전날 저녁과 달리 광합성에 최적화된 아주 쾌청한 날씨로 관광객들로 벌써부터 정신이 없
는 천지연폭포 주차장을 지나 남쪽으로 조금 가면 새연교와 새섬방파제, 서귀포유람선 선
착장이 나온다. 여기서 잠시 그들에 대한 시선을 접고 벼랑이 펼쳐진 서쪽 해안을 주목해
보자. 그곳에는 매머드(Mammoth)가 담배를 피던 시절, 옛 생물들의 흔적들이 가득 깃들여
져 있다.


▲  연외천과 남해바다가 만나는 천지연폭포 입구
(사진 중앙에 있는 다리가 칠십리교)



 

♠  천지연폭포 남쪽 바닷가에 깃든 옛 생물들의 희미한 흔적들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西歸浦層 貝類化石産地)
- 천연기념물 195호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해변

새섬방파제 서쪽에는 주름진 벼랑과 큼직한 바위들로 가득한 해변이 있다. 얼핏 보면 평범한
해안으로 여기고 지나치기 쉬우나 이곳은 제주도에서만 발견되는 서귀포층(西歸浦層)이 형성
된 벼랑으로 30여m 높이로 약 1km 정도 펼쳐져 있다. 절벽을 따라 약 40~60m 정도 두께를 보
이고 있으며, 그의 피부와 속살에는 조개 등 많은 화석들이 들어있다.

1928년 왜인(倭人) 학자인 하라구치(原口九萬)가 발견하여 지역 이름을 따 서귀포층이라 하였
는데, 처음에는 이곳 등 일부에만 그런 지층이 확인되었으나 1970년대 이후 지하수를 캐내고
자 제주도 곳곳을 들쑤시면서 잠자고 있던 서귀포층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제주도 형성 초기
에 무수히 일어났던 화산활동으로 나온 현무암질 화산재 지층과 바다에 쌓인 퇴적암 지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제주도의 옛날 기후와 해수면 변동을 소상히 알려준다.

서귀포층은 물을 통과시키지 않는 특징이 있어 물이 거의 새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서귀포층
주변은 물이 풍부하여 해안가 지층 틈새로 물이 쏟아져 나오니 이를 용천수(湧泉水)라고 부른
다. 제주도는 누수에 최적화된 현무암 피부의 땅이라 물이 넉넉치가 못한 편인데, 서귀포층은
그 문제를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대자연 형님의 소중한 선물이다.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
기 이전부터 용천수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해안가에 많이 분포하고 있음)


▲  화석들이 고이 잠들어있는 서귀포층 바위들

이곳 벼랑과 바위에는 옛 생물의 화석이 무수히 깃들여져 있다. 이들은 매머드가 뛰어놀던 약
200~300만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조개류가 상당수를 이루고 있는데, 달팽이, 전복, 우렁이 등
의 복족류와 굴족류, 완족류, 성게와 해삼, 불가사리 등의 극피동물, 산호화석, 고래와 물고
기 뼈, 상어 이빨 화석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서울대 김봉균 교수에 의해 저서성유공충(底棲性有孔蟲, 호수나 바다의 바닥을 기어다니
는 유공충) 41속 73종과 부유성유공충<浮游性有孔蟲, 플랑크톤 생활을 하는 원생동물(原生動
物)> 8속 18종 등의 미화석(微化石, 눈으로 확인이 불가능한 미생물 화석)도 쏟아져 나왔다.

여기서 나온 화석 대부분은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생물들이나 현재 서귀포 지역에서는 살지
않는 것들도 여럿 있다. 특히 조개 화석 같은 경우 이곳보다 훨씬 남쪽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그들이 발견된 것을 통해 서귀포층 초창기의 바다가 지금보다 따스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처럼 옛 생물의 화석이 풍부히 담긴 탓에 1968년 국가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얻었다. 하지만
해변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고, 행정당국의 오랜 직무유기로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
면서 마구잡이 화석 채취와 훼손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다. 근래에 벼랑 쪽으로 출입금지
안내문이 세워졌으나 그뿐이며, 그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보호용 난간이나 철책을 두룰 필요가
있어 보인다.
또한 새섬방파제 바로 서쪽에 눈에 띄게 있음에도 천지연폭포나 새섬, 유람선에 눈이 어두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나치기 일쑤이다. 그러니 새섬이나 천지연폭포를 보러왔다면 이곳도 꼭
둘러보기 바라며, 고된 세월에 지친 그들을 눈으로만 살피기 바란다. (저들을 떼거나 만지는
행위는 삼가하기 바람)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서홍동 707 (남성중로 43)


▲  큰 돌에 담긴 화석들
돌에 박힌 하얀 존재들이 모두 화석이다. 물고기 뼈와 조개 화석으로 저들은
죽어서 대자연의 조화를 받아 조촐하게 그들의 흔적을 남겼다.

▲  옛 수중동물의 넋이 서린 서귀포층 바위
마치 회색빛 어항 속에서 올챙이나 송사리 같은 작은 물고기들이 거니는 것 같다.

▲  다양한 화석과 고된 세월의 주름선이 뒤섞인 서귀포층 바위들 ▼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해안에서 바라본 남해바다와 범섬

저 멀리 그림의 떡처럼 자리한 범섬은 이름 그대로 호랑이처럼 생긴 섬이다. 절벽으로 이루어
진 무인도로 고려 끝 무렵인 1374년 최영(崔瑩) 장군이 제주도에 잔류하며 저항을 하던 몽골(
원나라)의 목호(牧胡) 패거리를 최종 처리한 현장이기도 하다.


▲  제주도와 새섬을 잇는 새연교 (새섬방파제 쪽)

새섬을 가려면 무조건 새연교를 통해야 된다. 그는 2009년에 닦여진 다리로 새섬과 제주도를
끈끈하게 붙잡고 있는데, 다리 이름인 '새연'은 새섬을 잇는 연륙교의 줄임말로 알고 있었으
나 알고 보니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는 다리'란 의미라고 한다.
제주도에서 가장 큰 뚜벅이 전용 다리로 서귀포항의 랜드마크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이 다리
가 닦임으로써 바다의 눈치 없이 마음껏 새섬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다.


▲  새섬방파제에서 바라본 남해바다와 범섬(왼쪽), 서귀포층 벼랑

▲  새연교에서 바라본 서귀포항과 서귀포(서귀동) 시내



 

♠  서귀포항 앞바다에 상큼하게 떠있는 작은 섬, 새섬

▲  새섬에서 바라본 새연교와 서귀포층 벼랑

새섬은 서귀포항 앞바다에 바짝 떠있는 작은 섬으로 천지연폭포에서 흘러내려온 연외천과 남
해바다가 만나는 곳에 자리한다.
이름이 새섬이다 보니 새와 관련된 것으로 여기기 쉬우나 실상은 초가 지붕을 잇는 새(띠)가
많이 나와서 새섬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한자로는 초도(草島), 모도(毛島)라 불리며 섬
의 면적은 104,581㎡, 가장 높은 곳은 해발 17.7m이다.

제주도의 심장인 한라산(漢拏山)이 폭발하면서 거기서 나온 암석이 떨어져 섬이 되었다는 전
설이 있으며, 조선 중기에 사람들이 건너가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다고 전한다. 섬으로
들어가려면 간조 때 새섬목을 건너거나 배를 이용해야 했으며, 1960년대 중반까지 사람이 살
았으나 모두 철수하여 금지된 무인도가 되었다.
그러다가 2009년 새연교가 닦이면서 도시자연공원으로 천하에 개방되었으며, 천지연폭포와 서
귀포항을 수식하는 명소로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비록 속세에 개방은 되었으나 새벽 일출시
부터 22시까지만 개방한다. 그러니 21시까지는 입장해야 무난하게 서귀포항 야경(夜景)도 즐
기며 섬 1바퀴를 돌 수 있다. 또한 섬이다 보니 태풍이 오거나 해상 날씨가 영 좋지 않은 경
우에는 출입이 통제될 수 있다.


▲  새섬 산책로에서 바라본 새연교의 위엄 (바로 밑이 새섬방파제)

새연교를 건너면 섬을 1바퀴 도는 1.1km의 산책로가 나오는데, 어느 쪽으로 가던 다시 새연교
로 돌아오게 되어있다. 천천히 둘러보면 최소 20~30분 정도 걸리며, 섬 북쪽은 연외천과 바다
가 만나는 서귀포항, 동쪽은 서귀포항 중심부, 서쪽과 남쪽은 푸른 바다라 주변 풍경도 아름
답다.

섬 전체는 난대림(暖帶林) 보호구역으로 나무가 울창하며, 새섬목, 담머리코지, 새섬뒤, 노픈
여, 안고상여, 섯자릿여, 자릿여, 모도리코지 등의 소소한 명소들이 있다.

* 새섬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산3-2


▲  새섬에서 바라본 범섬과 황우지, 서귀포 서부 해안

▲  해안을 따라 닦여진 새섬 산책로
이곳 산책로는 흙길과 자갈길, 나무데크길로 이루어져 있다. 거의 평지라 누구든
편히 거닐 수 있으며, 주변 풍경이 고와서 체감 거리가 꽤 짧게 느껴진다.

▲  난대림과 소나무 그늘 속을 지나는 새섬 산책로

▲  새섬에서 바라본 문섬

손에 잡힐 듯 진하게 아른거리는 문섬은 서귀포항에서 1.3km 떨어진 작은 무인도이다. 문섬이
란 이름은 옛날부터 유별나게 모기가 많아서 모기를 뜻하는 한자를 취해 그리된 것으로 녹도(
鹿島)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  새섬에서 바라본 서귀포항 방파제와 섶섬
방파제 너머로 보이는 존재가 파초일엽(芭蕉一葉) 자생지로 유명한 섶섬이다.

▲  새섬 동쪽에 자리한 서귀포항 중심부
서귀포항은 새섬과 새섬방파제, 문섬, 서귀포항 방파제가 포근히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항구의 입지로 아주 좋다.

▲  새섬 주변 바다의 요염한 속살

▲  새섬 북쪽에서 바라본 서귀포항과 서귀포시내
(연외천과 남해바다가 만나는 곳)

▲  새섬 북쪽 산책로

▲  새섬 서쪽에서 바라본 새연교와 서귀포층 벼랑



 

♠  제주도 시조의 혼인설화를 품고 있는 제주도의 영원한 성역
혼인지(婚姻池) - 제주도 지방기념물 17호


▲  혼인지(혼인터) 표석

새섬에 퐁당퐁당 빠져 거의 1시간을 머물다가 아쉽지만 그곳을 등지며 천지연폭포 주차장으로
나왔다. 주차장에는 시내버스 여러 대가 육중한 바퀴를 접고 쉬고들 있었는데, 서귀포시내버
스 641번(천지연폭포↔서귀포시청2청사)이 먼저 기지개를 켜며 부릉부릉 심장 소리를 낸다.
하여 그것을 타고 시내인 동문로터리로 나왔다. 시내까지 거리는 가까우나 천지연폭포는 바다
와 맞닿은 낮은 곳에 있고 시내는 그보다 훨씬 높은 언덕배기에 있어 지형적인 영향으로 버스
와 차량은 서귀포항과 서귀포초교로 다소 돌아간다.

동문로터리에서 다음 답사지인 혼인지를 가고자 제주도 간선 201번(제주버스터미널↔서귀포버
스터미널)을 잡아탔다. 혼인지까지는 40km 거리로 1시간 정도를 신나게 달려 혼인지입구에서
두 발을 내렸다.
한적하기 그지 없는 혼인지입구에서 혼인지로를 따라 조금 들어가면 혼인지 표석이 마중을 나
온다. 제주올레길2코스(광치기해변↔온평포구, 15.2km)가 이 도로의 신세를 지며 혼인지로 가
는데, 표석에는 하얀 글씨로 '혼인지' 3자가 한문으로 쓰여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연못을
뜻하는 '池'가 아닌 터를 뜻하는 '址'가 쓰여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번지수를 잘못 짚었나
싶어 잠시 혼돈에 빠졌으나 분명 그 혼인지가 맞다. 제주도 시조들이 혼인을 했던 터라 표석
에 그렇게 쓴 것이며, 혼인지입구에서 10분 정도 들어가면 혼인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  남쪽에서 바라본 혼인지

혼인지는 500평 정도의 자연산 못으로 갈대와 수초들이 못 외곽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평
지에 누운 평범한 모습의 못이나 이곳은 제주도의 시조라는 고을나(高乙那)와 양을나(良乙那
), 부을나(夫乙那) 등 이른바 삼신인(三神人)이 장가를 가던 곳이라고 전한다. 하여 그들의
탄생설화가 깃든 삼성혈(三姓穴)과 더불어 제주도에서 가장 유서 깊은 성지로 애지중지되고
있다.

연못 주변에는 제주도에서 넘쳐나는 현무암으로 낮게 담장을 둘러서 속세와 경계를 그었으며,
그 주변을 공원으로 산뜻하게 손질하여 산책로와 숲을 닦았다. 오래된 존재로는 혼인지와 삼
신인이 신방을 꾸렸다는 신방굴이 있으며, 근래에 지은 3공주 추원각과 추원비, 전통혼례관,
탐라생활사료관, 생태연못 등이 혼인지를 수식한다. 그리고 제주올레길2코스가 혼인지 설화를
흠모하며 그의 옆구리를 슬쩍 지나친다.


▲  혼인지 서쪽에 닦여진 탐방로(제주올레길2코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혼인지, 그곳에 서려있는 제주도 시조의 혼인 설화는 대략 이렇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4,300여 년 전, 고을나와 부을나, 양을나가 모흥혈(毛興穴, 삼성혈)이라는
곳에서 갑자기 솟아났다. 그들이 있기 전에는 제주도에 그 흔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가죽옷을 입고 동물 사냥과 어로로 생활을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한라산에 올라가
주변을 살피다가 동쪽 바다에서 자주빛 진흙에 봉해진 오색찬란한 큰 목함(木函)이 떠내려온
것을 발견했다. 목함이 상륙한 곳은 혼인지와 가까운 온평리 연혼포(延婚浦, 갯고랑)라고 한
다.
호기심이 불끈 솟은 그들은 그곳으로 달려가 목함을 열었더니 그 안에 석함(石函)이 들어있었
고, 자주빛 옷에 붉은 띠를 두른 사자(使者)가 나타났다. 그리고 석함을 열었더니 푸른 옷을
입은 15~16세 정도의 아리따운 공주 3명과 송아지, 망아지, 오곡(五穀)의 씨앗이 있었다.


▲  늪지대 기운을 지닌 혼인지 (서쪽에서 본 모습)

이들을 데리고 온 사자는 3신인에
'나는 동해 벽랑국(碧浪國)에서 왔습니다. 우리 군주께서 공주 3명을 두었는데 혼기가 차도록
배필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마침 서해 높은 산(한라산)에 3명의 신인이 나와 장차 나라를 세
우려고 하나 배필이 없다는 것을 듣고 저에게 명해 세 공주를 모셔왔으니 배필로 삼아 대업을
이루십시요~~!'
말을 끝내고는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

기쁨에 잠긴 3신인은 나이에 따라 공주 자매를 배필로 정해 바로 이곳 혼인지에서 혼인과 예
민한(?) 신방을 치루고 삼사석(三射石, 제주시 화북동)에서 활을 쏘아 거처할 곳을 정했다.
또한 공주가 가져온 소(송아지)와 말(망아지)을 기르고 오곡 씨앗을 뿌리니 이때부터 제주도
에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상이 혼인지에 서린 제주도 시조의 혼인 설화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혼인지
누렇게 뜬 갈대와 수초들이 덥수룩하게 자라나 자연산 연못의
풍경을 거들어준다.


삼신인은 앞서 언급한 대로 삼성혈 구멍에서 솟아났다고 한다. 이때가 4,300년 전이라고 하는
데, 우리 역사가 단군조선에서부터 4,300년 이상 묵었음을 강조하고 있어 그것에 맞춘 것으로
보인다. 3신인이 4,300년 이상 되었다는 자료와 유물이 딱히 없기 때문이다.
또한 1세기 경에 한라산 대폭발로 제주도 사람과 동물들이 대부분 강제 죽음을 당했는데, 겨
우 일부가 살아남아 화산재와 용암으로 지옥이 된 제주도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때 3신인
이라 표현된 인물 3명이 사람들을 잘 이끌어 제주도 세력의 군주가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공주를 보냈다는 벽랑국에 대해서도 왜열도설과 동해(東海)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
으며, 왜열도는 공주와 오곡, 소, 말을 보낼만한 수준이 전혀 되지 못한다. 하여 동해안(경상
도나 영동지방, 함경도 등)에 있던 작은 나라나 세력으로 여겨진다. 그곳에서 바다 너머 멀리
떨어진 제주도 세력에게 시집을 보낼 정도라면 서로 많은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탐라(耽羅)라 불리던 제주도 세력은 바닷길을 적극 이용해 4,000리의 영토를 지녔던 삼한(마
한, 진한, 변한)과 백제, 신라, 가야는 물론 멀리 중원대륙과 동남아 제국(諸國)들과도 교역
을 했었다.


▲  삼공주추원비(三公主追遠碑)
어딘지 모를 벽랑국에서 건너와 삼신인의 배필이 되어 제주도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던 3공주를 추모하고자 후손들이 세웠다.


벽랑국이 망하여 그 세력이 제주도로 넘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그들은 가축과 오곡 씨앗, 여
러 좋은 문물을 싣고 떠돌다가 제주도에 상륙했을 것이고, 제주도 세력은 그들을 받아들여 통
합 차원에서 혼인을 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농업과 목축 기술까지 챙기면서 제주도에 제대
로 된 농경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이 남긴 탁라가(乇羅歌)의 2번째 시
김종직이 제주도를 다녀가면서 탁라가 14수를 남겼는데, 그 2번째 시가
바로 혼인지 설화를 머금고 있다.

먼 옛날 신인이 세 곳에 도읍하셔
해돋는 물가에서 배필을 맞으셨다네
그 시절 삼성(삼신인)이 혼인했던 일은
전해내려오는 주진의 전설과 같네

▲  혼인지의 분위기를 한껏 경건하게 다듬어주는
소나무숲길 (신방굴 주변)

▲  소나무 그늘에 자리한 신방굴

혼인지에 왔다면 소나무숲에 있는 신방굴이란 자연산 굴도 꼭 둘러보기 바란다. 혼인지 연못
과 함께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산 존재로 3신인이 벽랑국 공주를 하나씩 품고 예민한(?)
첫날 밤을 보냈다는 곳이다.

굴 내부까지 들어갈 수 있으나 내부가 협소하고 어둡다. 그런 곳을 1쌍도 아니고 3쌍이 좁은
곳에서 예민한 일을 치룬다는 것이 솔직히 말이 되지 않는다. 그들이 동물도 아니고 일명 성
진국(性進國)으로 전세계적으로 손가락질을 받는 천박한 왜열도 원숭이들도 아닌데 말이다.
하여 못 주변에 대충 집을 짓거나 자신들이 살던 집에서 예민한 첫 밤을 보냈을 것이다. 혼인
지가 3신인과 3공주가 혼인을 했던 현장이라 연못 부근에 있는 이 굴까지 설화의 현장으로 넣
었던 것이다.


▲  속세를 향해 입을 벌린 신방굴
신방굴은 땅 바로 밑에 있는 굴이다. 저런 누추한 곳에서 정말 첫날 밤을
보냈을까? 그것도 제주도 세력가와 벽랑국 세력가의 딸이 말이다.

▲  신방굴 내부로 들어서다
굴 높이가 낮으므로 굴에 절대 피해가 없도록 몸을 푹 쑥이고 들어가야 된다.

▲  어두컴컴한 신방굴 내부

▲  신방굴에서 나오는 3신인과 3공주를
재현한 사진


▲  흑백사진에 담긴 1960년대 초 온평리(혼인지마을) 혼례 모습

▲  돌담 너머로 바라본 삼공주 추원사(追遠祠)
2009년 10월에 지어진 것으로 벽랑국 3공주의 위패를 머금고 있다. 돌담 안쪽
오른쪽 건물이 추원사로 매년 6월 10일 후손들이 추원제를 지낸다.

▲  삼공주 추원사

▲  혼인지 남쪽에 세워진 정자

혼인지는 제주도 시조의 혼인 설화 때문에 지역 사람들의 혼인 장소 역할을 했다. 지금도 전
통혼례관을 두어 혼인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비록 속세에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명소이나
제주도에 신혼여행이나 부부여행으로 왔다면 꼭 들러볼 만하다.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한 곳이
다.

* 혼인지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 1693 (혼인지로 39-14, ☎ 064-710-6798)


▲  소나무와 동백꽃이 무성한 혼인지 산책로
동백이 도도한 붉은 피부를 드러내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마구 들었다 놓는다.

▲  혼인지를 마무리 짓다 (전통혼례관 주변 산책로)
혼인지 이후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본글은 여기서 끝~~~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3년 1월 10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티스토리(tistory)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3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은평구의 작은 지붕들, 봉산 ~ 백련산 나들이 <봉산 봉수대, 서울둘레길7코스, 백련근린공원>

서울 봉산, 백련산



' 은평구의 작은 지붕들을 거닐다 (봉산, 백련산) '

봉산 봉수대

▲  봉산 봉수대 (봉산 정상)

백련산에서 바라본 은평구 지역 백련산 능선길

▲  백련산에서 바라본 은평구 지역

▲  백련산 능선길

 



 

♠  봉산(烽山) 둘러보기

▲  수국사에서 봉산 능선으로 이어지는 산길

봄이 막바지에 이르던 5월의 첫 무렵, 친한 후배와 봉산을 찾았다. 둥근 해가 하늘 높이 걸린
14시에 구산동(龜山洞) 버스 종점에서 그를 만나 떡볶이와 순대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황금사
원으로 유명한 수국사에 발을 들였다. (☞ 수국사 둘러보기)
이미 여러 차례 인연을 지었던 수국사는 코 앞으로 다가온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준비에
아주 분주했는데 그런 경내를 20분 정도 둘러보고 서쪽 산길을 통해 봉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수국사에서 완만하게 이어진 산길을 10여 분 정도 오르면 봉산 능선길에 이르는데 여기서 북
쪽으로 가면 벌고개, 앵봉산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 5~6분 정도 가면 봉산 정상이다.


▲  수국사 서남쪽 산자락에 닦인 체육시설과 쉼터

봉산 능선은 수색에서 벌고개까지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북쪽으로 바로 이어진 앵봉산
과 더불어 은평구의 서쪽 벽으로 천하 제일의 둘레길로 콧대가 높은 서울둘레길이 그들의 신
세를 지며 남북으로 흘러가는데, 봉산 능선을 거쳐가는 서울둘레길 7코스<봉산~앵봉산 코스,
가양역↔구파발역 16.4km> 덕분에 그 존재가 널리 알려지면서 외지 탐방객들이 많이 늘었다.


▲  녹음이 익어가는 봉산 능선길 (서울둘레길7코스, 정상 방향)

▲  봉산 정상 직전 능선길 (서울둘레길7코스)

▲  봉산 정상에 세워진 봉화정(烽火亭)

봉산(207.8m)은 서울 은평구와 고양시(高陽市)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약간 작은 산이다. 폭은
좁지만 대신 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어 멀리서 보면 수풀이 걸쳐진 커다란 벽 같다.
봉화대(烽火臺)가 있던 산이라 하여 단순하게 '봉산'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산 정상에
서 좌우로 뻗은 산줄기가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펴고 평화롭게 앉아있는 형상이라 하여 봉령산(
鳳嶺山)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으며, 수국사에서는 '태화산(太華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봉산 북쪽은 벌고개를 경계로 하여 앵봉산과 살을 대고 있고, 남쪽은 경의선 철로를 넘어 하
늘공원과 매봉산으로 이어지는데 정상 동북쪽에 봉산의 대표 명소인 수국사가 안겨져 있으며
정상에는 2011년에 지어진 봉수대와 봉화정이 있어 약소하게 볼거리를 선사한다.
또한 예로부터 봉산 무지개가 아름답기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여름에 소나기가 온 이후, 봉산
과 백련산(응암동) 사이로 일곱 색깔 무지개가 종종 나타났다고 한다. 그 빛깔이 선명하고 고
와 천하 무지개 중 최고였다고 하며, 무지개가 나타나면 동네 아이들은 그것을 타고 선녀 누
님이 내려온다고 하여 설레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
허나 인간의 이기적인 개발의 칼질과 산업화로 선녀도 등을 돌리면서 그 무지개도 거의 자취
를 감추었다.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에는 무지개를 종종 만났지만 다 커서는 자연산 무지개를
제대로 구경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이다. (분수대나 인공폭포에서 생기는 무지개는 제외)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구산동, 갈현동 주민
들이 정상에 모여 횃불을 밝히고 대한독립만세
를 외쳤던 유서 깊은 현장이기도 하며, 2011년
에 은평구에서 정상에 '봉산 해맞이공원'을 닦
으면서 봉화대와 봉화정, 조망데크를 설치했다.
또한 산길을 정비하여 벌고개와 수국사, 구산
동, 신사동(新寺洞), 수색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서울둘레길7코스가 봉산을 지나가면서
산의 명성도 적지 않게 상승했다.

▲  봉산 정상 남쪽 능선길
(신사동, 수색 방향)


▲  봉화정에서 바라본 봉산 봉수대

▲  봉수대 옆에 지어진 조망데크

▲  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고양시 향동동, 망월산


▲  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구산동과 갈현동, 연신내, 북한산(삼각산) 서부


봉산은 동쪽과 동북쪽, 서쪽이 훤히 트여있어 조망이 매우 일품이며, 해돋이와 일몰 구경에도
정말 최적화되어 있다.
여기서는 은평구의 대부분 지역과 북한산(삼각산) 서쪽 산줄기, 백련산, 서대문구 일부, 고양
시 향동동과 용두동, 망월산 등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오는데, 봄에 종종 지독하게 침범하는
중공 잡것들의 미세먼지 패거리가 푸른 하늘을 앗아가면서 마치 하늘이 주저앉은 듯, 시야가
뿌옇다. 구름 밑 세상은 그런데로 보이나 하늘이 미세먼지에 가려 보이지 않으니 두 눈도 편
치 못하고, 코와 입도 괴롭다.


▲  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③
오늘도 중공 잡것들의 미세먼지로 고통 받는 서울의 하늘 (응암동과 신사동,
녹번동, 수색, 백련산, 북가좌동 지역)

▲  봉산 봉수대(烽燧臺)
비록 장식물로 지어지긴 했지만 저들을 다시 세움으로써 봉산이란
이름값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봉산 정상의 상큼한 장식물인 봉수대는 동그랗게 다져진 공간 복판에 자리해 있다. 봉수 2기
가 쌍둥이꼴로 바짝 붙어서 천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꽤 돈독해 보이는데, 그 뒤쪽에 조
망데크가 있고 그 앞에 너른 공터와 봉화정이 있다.

봉산 봉수대는 고려 때부터 있었다고 전한다. '봉현(峰峴) 봉수'라 주로 불렸으며, 세종실록
지리지(1454년)에는 '영서역(迎曙驛) 서산(西山) 봉화'라 나와있다. <영서역은 불광동 지역>
압록강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봉수 제4거(炬)의 경유지로 고양시 고봉산(高峯山) 봉화에서 신
호를 받아 안산(鞍山, 무악산) 봉수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18세기 이후, 인근 해포봉
수(고양시 강매동)로 봉수대가 옮겨지면서 봉산 봉수대는 문을 닫게 된다.

2011년에 은평구에서 봉산 정상에 '봉산 해맞이공원'을 닦으면서 고려 말~조선 초 양식을 참
조해 약 300년 만에 다시 봉수대를 심어 산의 이름값을 다시 하게 했다. 허나 어디까지나 장
식용이라 옛날처럼 모락모락 봉화를 피울 수 없다. 게다가 고색이 아직 여물지 못했고 마치
타일을 붙인 듯한 모습이라 다소 어색해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들의 모습도 점점
익숙해질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약인 모양이다.


▲  봉산을 내려오다 (수국사 서남쪽 산자락 쉼터와 운동시설)

봉산 정상에서 미세먼지를 무릅쓰고 20분 정도 정상의 자리를 누렸다.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탐을 내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이라 적당히 있다가 내려오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허나 사
람은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는 50% 모자란 존재들이라 그 기본적인
것을 모른다.

마음 같아서는 봉산 남쪽 능선을 타고 수색 쪽으로 넘어가고 싶으나 시간도 그렇고 날씨도 그
렇고 해서 나머지 구간은 다음으로 미루고 도돌이표처럼 다시 수국사로 내려왔다.

* 봉산(봉산 봉수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구산동 산136-13일대



 

♠  은평구와 서대문구의 공동 지붕, 백련산(白蓮山)

▲  백련산 동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①
홍은동과 홍제동 지역, 인왕산(왼쪽 산), 안산(오른쪽 산)


여름 제국과 가을의 팽팽한 경계선인 9월의 첫 무렵, 은평구의 동남쪽 지붕이자 서대문구(西
大門區)의 북쪽 지붕인 백련산을 찾았다.
통일로와 세검정로, 연희로가 만나는 홍은4거리에서 서쪽(연희동 방향)으로 100여m 정도 가면
오른쪽(북쪽)으로 골목이 하나 있는데, 그 골목에 백련산으로 인도하는 나무계단길이 숨어있
다. (백련산 동남쪽 기점임) 시작부터 속세살이처럼 경사가 좀 각박하나 계단길을 적당히 닦
아놓아 그 급한 성질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그런 산길을 5분 정도 오르면 바위에 심어진 조그만 네모난 정자가 마중을 한다. 이곳에 올라
서면 동쪽으로 북한산(삼각산) 서남쪽 산줄기부터 홍은동, 홍제동, 인왕산(仁王山), 안산, 연
희동이 좁게나마 시야에 들어온다. 백련산은 통일로와 맞닿은 동쪽 부분(산골고개, 녹번동)에
는 바위와 벼랑이 많으며 응암동과 백련사와 맞닿은 서쪽과 남쪽 부분은 거의 흙산이다.


▲  백련산 동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②
푸른 하늘 밑으로 북한산(삼각산) 서남쪽 산줄기와 탕춘대능선, 홍은동
지역이 바라보인다.

▲  백련산 동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③
홍은동(弘恩洞)과 홍제동(弘濟洞) 지역, 그리고 인왕산

▲  백련산 동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④
홍은동과 홍제동, 연희동, 안산(왼쪽 산), 백련산 남쪽 부분(오른쪽 산줄기)

▲  바위에 걸터앉아 시내를 굽어보는 쉼터 정자
정자는 작고 보잘것은 없지만 위치와 조망만큼은 정말 기가 막힌다. 바로 밑으로
시내가 펼쳐져 있어 마치 세상의 주인이 된 기분인데 이곳에 걸터앉아 시내
야경을 바라보며 곡차 1잔 겯드리는 재미도 꽤 쏠쏠할 것 같다.

▲  솔내음이 율동을 부리는 백련산 동쪽 능선길

바위 정자를 지나서부터 백련산의 하늘길(능선길)이 시작된다. 능선을 따라 백련근린공원, 백
련산 정상(은평정), 백련산근린공원까지 이어지며 대부분 짙은 숲길이라 그늘의 질감도 좋다. 게다가 산길 경사도 거의 느긋하고 은평정과 백련근린공원 동쪽 전망대에서 1급 조망까지 누
릴 수 있어 걸어가는 길이 썩 지루하지가 않다.


▲  대통령이 기념 촬영을 했다는 백련근린공원 동쪽 능선 바위
2017년 5월, 문재인 전 대통령이 이곳에서 기념촬영을 했다고 한다.
<그는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백련근린공원 부근(홍은2동)에 거주했음>

▲  대통령이 기념촬영을 했던 백련근린공원 동쪽 능선 바위의 앞 모습
(바위 이름은 없음)

▲  백련산의 동북쪽 끝을 잡고 있는 백련근린공원 동쪽 전망대

백련근린공원 동쪽 조망대는 백련산의 동북쪽 끝이다. 앞이 확 트여있어 백련산에서 2등으로
일품 조망을 자랑하고 있는데 동북쪽 너머로 북한산(삼각산) 탕춘대능선과 족두리봉, 비봉능
선 등이 보이고 바로 밑에 녹번동을 비롯한 은평구 북부 지역, 봉산~앵봉산 산줄기, 인왕산,
북악산(백악산)까지 싹 시야에 잡힌다.

전망대 주변이 벼랑 일색이라 안전을 위해 난간을 둘렀으며, 전망대 옆으로 내려가는 계단길
이 있는데, 그 길은 통일로와 통일로 허공에 닦여진 산골고개 생태다리로 이어진다. (산골고
개 생태다리를 통해 북한산, 탕춘대능선으로 넘어갈 수 있음)


▲  백련근린공원 동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은평구 북부 지역 (녹번동, 불광동, 구산동, 갈현동, 연신내, 진관동)

▲  백련근린공원 동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북한산(삼각산) 서남쪽 산줄기 (족두리봉, 비봉능선, 탕춘대능선 등)

▲  백련근린공원 동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홍은동과 인왕산, 북악산(왼쪽 산줄기)

▲  백련근린공원 북쪽 능선길

백련근린공원 동쪽 전망대에서 능선길은 서남쪽으로 크게 꺾인다. 생태공원처럼 꾸며진 백련
근린공원을 지나면 숲이 매우 삼삼한 능선길이 펼쳐지는데, 정상 주변에서 경사가 좀 흥분기
를 보일 뿐, 거의 느긋하여 구름 위를 거니는 기분이다. 그런 길을 20분 정도 가면 백련산 정
상에 이른다.


▲  백련산 서쪽 능선길 (백련근린공원~은평정 구간)

▲  백련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정상 직전)

백련산(215m)은 은평구 녹번동과 응암동, 서대문구 홍은동에 걸쳐있는 조촐한 뫼이다. 산 남
쪽 자락에 오래된 절인 백련사(白蓮寺, ☞ 관련글 보기)가 안겨져 있어 백련산이란 이름을 지
니게 되었는데, 조선 때 왕족과 양반사대부들이 매를 날리며 사냥을 했던 매바위가 산자락에
있어 '응봉(鷹峯)'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매바위는 부암동의 붙임바위, 인왕산 선바위 등과 함께 서울의 이름난 바위로 1970년대까
지 있었으나 개발에 눈이 뒤집힌 동네 사람들이 무식하게 폭파시키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백련산은 동쪽 자락을 빼면 산세가 거의 완만하며 흥은4거리에서 백련근린공원, 은평정을 거
쳐 백련산근린공원까지 환상적인 능선길이 이어져 있다. 산 동쪽은 산골고개를 통해 북한산(
삼각산)과 이어지나 나머지는 거의 평지이며, 동남쪽은 홍제천을 사이에 두고 안산과 만난다.

산에 안긴 늙은 명소로는 백련사가 있으며, 산 동북쪽 자락에 백련근린공원이, 그리고 산 남
쪽 자락에는 백련산근린공원이 닦여져 있고, 산 정상에는 은평정이 자리하고 있다.


▲  백련산 정상에 자리한 은평정(恩平亭)

은평정은 한옥 양식과 콘크리트 건축 양식이 조잡하게 섞인 2층짜리 정자로 1989년에 은평구
에서 지었다.
백련산에서 가장 조망이 좋은 곳이며, 앞서 봉산처럼 해돋이와 일몰 구경에 최적화된 곳으로
여기서는 은평구 대부분 지역과 마포구, 서대문구, 고양시 동부, 한강 너머로 강서구와 양천
구, 영등포구, 구로구, 금천구, 인천 지역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백련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은평구 남부와 마포구 서부, 하늘공원, 한강, 강서구, 양천구,
영등포구, 인천 계양산 등

▲  백련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응암동, 구산동, 역촌동, 갈현동 지역, 봉산~앵봉산 산줄기,
봉산 너머로 고양시 지역과 고봉산까지

▲  백련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③
은평구 북부(녹번동, 갈현동, 불광동, 연신내, 진관동 지역) 지역과
앵봉산, 노고산(老姑山) 등

▲  백련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④
녹번동과 진관동, 북한산 서남쪽 산줄기(족두리봉, 비봉능선)

▲  은평정 2층에 걸린 창정기(創亭記)
은평정의 창건 이유가 소상히 적혀있다.

▲  숲터널 속으로 빠져들다 ~ 백련산 남쪽 능선길 (백련사 방향)

▲  내리막의 연속인 백련산 남쪽 능선길 (백련사 방향)

▲  백련산 남쪽 능선길에서 만난 돌탑
백련산을 찾은 중생들이 작은 소망을 담아 쌓은 돌이 쌓이고 쌓여
자유분방한 모습의 돌탑으로 성장했다.


백련산 정상에서 10분 정도 정상의 기분을 누리다가 남쪽 능선길로 내려갔다. 숲터널과 다름
이 없는 그 길을 10분 정도 가면 백련사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직진하면 백련산근린공원
과 홍연초교로 이어지며 오른쪽(서남쪽)으로 내려가면 백련사이다.
여기서 백련사로 내려가면 얼마 안가서 백련사 주차장이 마중을 하며,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백련사, 동쪽은 백련사 마을버스 종점이다. 백련사는 자주는 아니지만 수국사처럼 아주 가끔
씩 찾는 절이라 이번에는 통과하고 백련사 마을버스 종점을 지나 홍연초교 쪽으로 내려갔다.

이렇게 하여 백련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백련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응암동, 녹번동 / 서대문구 홍은동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2년 12월 29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티스토리(tistory)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한겨울 산사 나들이 ~ 작은 계곡과 폭포를 지닌 고즈넉한 산사, 부산 백양산 선암사

부산 백양산 선암사



' 연말 산사 나들이, 부산 백양산 선암사 '
선암사 용왕당과 폭포
▲  선암사의 명물, 용왕당과 폭포
 



 

새해가 밝은지 정말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해의 끝 무렵에 이르렀다. 새해가 묵은 해가
되어 퇴장을 서두르고 또 다른 해가 바로 코앞에 대기를 하고 있으니 세월의 미친 속도
감에 그저 충격과 공포일 따름이다. 하지만 아무리 세월이 번개처럼 흐르며 세상만물을
희롱해도 나의 역마살은 결코 잠재우지 못한다. 올해의 마지막 나들이를 장식할 장소를
두고 고민에 들어간 것이다.

비록 나를 부르는 곳은 단 1곳도 없지만(ㅠㅠ) 가고 싶은 곳은 정말 많다. 천하에 잔뜩
흩어진 명소를 두고 어디를 갈까? 물색하던 중 뜻밖에 선물이 날라왔다. 2016년 12월에
개통된 수서고속전철(SRT)에서 열차 이용 무료 쿠폰을 보내온 것이다. (SRT열차에 한해
어디든 1회 무료 이용) 간만에 좋은 선물을 받으니 흩어진 기분이 하나로 뭉친 듯 마음
이 무지 즐겁다.
그 무료 쿠폰을 등에 업고 여행 범위를 1,000리 밖까지 넓혀 처음에는 목포(木浦) 지역
을 생각했으나 갑자기 부산(釜山)이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흔쾌히 방향을 잡고 아침 표
를 예약했다.

새벽 공기가 무겁던 5시,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시내버스를 1회 환승하여 수서역으
로 이동했다. 시간이 아직 남아있어 주변 편의점에서 간단한 먹거리를 사들고 7시에 부
산으로 가는 고속전철(SRT)에 나를 담았다.

열차는 시속 200~300km로 시원스럽게 질주를 하며 천안아산, 대전, 김천구미, 동대구를
거쳐 9시 24분, 경부선의 영원한 종점, 부산역에 이르렀다. 불과 몇 달 만에 와보는 부
산 땅이지만 마치 처음 발을 들인 듯 마음이 설렌다. 이미 정처(定處)는 정해둔 상태라
부산역을 나와서 부산시내버스 17번을 타고 당감동(堂甘洞) 선암사입구로 이동했다.



 

♠  백양산 선암사 입문

▲  선암사로 인도하는 가파른 언덕길 (백양산로)

선암사입구에서 백양산 선암사까지는 북쪽으로 크게 구부러진 백양산로를 따라 15분 정도 올
라가야 된다. 중간에 당감뜨란채아파트 뒤쪽으로 질러가는 길이 있으나 그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예전처럼 백양산로를 쫓아갔다. (내려갈 때 지름길의 존재를 발견했음)

동양초교를 지나면 울창한 숲이 펼쳐지면서 계곡 흐르는 소리가 나의 멍멍한 두 귀를 때린다.
길 옆으로 선암사계곡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산속에 계곡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나 이곳
이 부산 도심 지척이라 처음에는 '내 귀가 미쳤나?' 착각을 들게 했다. 허나 그는 백양산이
빚은 자연산 계곡이 맞다.
선암사계곡은 상수원 보호구역과 선암사 경내에 묶여있어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하여 그림의
떡보듯 바라보는 선에서 멈춰야 되며 그 이상의 흥분을 보여서는 절대 곤란하다. 선암사를 벗
어난 계곡은 '동천(東川)'이란 이름으로 부산 앞바다로 흘러가며, 절 밑까지 밀려온 시가지에
생매장을 당해 어둠의 경로로 흐르다가 서면(西面) 남쪽 광무교에서 다시 햇살을 보며 바다로
향한다.


▲  백양산로 끝에 자리한 선암사 주차장 (경내 직전)

▲  속세로 길을 재촉하는 선암사계곡 (주차장 부근)

계곡 소리에 속세에서 오염된 청각이 다소 정화는 되었지만 대신 길의 경사는 좀 각박해진다.
허나 그 거리는 그리 길지 않으며, 그 길의 끝에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선암사 주차장이
자리하고 있다.
주차장에 이르면 길은 3갈래로 갈라지는데, 왼쪽은 선암사 추모관과 애진봉, 백양산으로 이어
지고, 정면에 보이는 빡빡한 계단길은 선암사 경내로, 오른쪽은 어린이대공원 방면으로 백양
산나들숲길 5코스(선암길)이다. <선암길이 선암사 앞을 지나고 있음, 애진봉 방면도 그 길의
일원임>

계단을 오르면 그 끝에 대문처럼 생긴 일주문(一柱門)이 있는데, 그 문을 들어서면 계곡 물소
리에 잠긴 선암사 경내가 펼쳐진다. 그럼 여기서 선암사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선방(禪房)

▲  대웅전 우측을 지키는 관음전(觀音殿)

부산 도심의 대표 지붕이자 부산에서 2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백양산(白楊山, 641m) 동남쪽 자
락에 선암사(仙巖寺, 仙岩寺)가 아늑하게 둥지를 틀고 있다.
선암사는 2008년 이후 거의 10여 년 만에 방문으로 이곳은 부산의 한복판이나 다름이 없는 곳
이다. 도심이 바로 지척에서 아른거리고 있건만 삼삼한 숲과 해맑은 계곡, 경쾌하게 흐르는
폭포까지 지니고 있어 첩첩한 산골로 순간 이동을 당한 기분이며 산사의 내음도 꽤 진하다.

선암사는 675년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하여 견강사(見江寺)라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
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은 안타깝게도 없는 실정으로 1867년에 작성된 '선암사 중수기(重修記)
'에는 802년 동평현(부산진구 지역) 성내(城內)에 처음 창건되었다고 나와 있어 이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1400년 부산포(釜山浦) 동북쪽으로 절을 이전하였는데, 이때 선암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한다.
절 뒷산 절벽 바위에서 신라의 국선(國仙)인 화랑도(花郞徒)가 수련을 했다고 해서 선암사라
했다고도 하고, 산이 높고 바다까지 바라보이는 경치 좋은 곳이라 가히 신선이 살만한 곳이라
하여 그리 했다는 설도 있다.
허나 이와 상반되게 견강사에 딸린 산중 암자로 선암사가 이미 존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견
강사는 조선 중기에 초량왜관(草梁倭館) 부근인 자성대(子城臺)로 자리를 옮겼는데, 작은 암
자였던 선암사가 견강사의 자리를 대신하여 몸집을 불리면서 동평현에서 가장 큰 절이 되었다
고 한다. 즉 견강사의 부속 암자가 지역의 중심 사찰로 성장한 것이다.

1483년 각초(覺招)가 중창을 했으며, 1568년 신연이 중수를 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말끔
히 파괴되고 말았다. 이후 1681년 승당(僧堂)을 다시 지어 불상을 개금했고, 1718년 선오가
크게 중수했으며, 1866년 동악과 신겸이 돈을 모아 이듬해 중수를 벌였다.
20세기에는 뛰어난 선승(禪僧)으로 추앙을 받던 승려들이 이곳을 거쳐가며 절을 일구었는데,
혜월(慧月, 1861~1937)이 1921년부터 주지로 머물렀고, 1951년에는 향곡혜림(香谷蕙林, 1912~
1978)이 주지로 있었으며, 1955년에는 석암혜수(昔巖慧修)가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그리고
2002년에는 시민들을 위해 선암도서관을 선보이기도 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과 극락전, 관음전, 조사전, 용왕당, 산신각
, 칠성각, 추모관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모두 20세기 중반 이후에 손질된 것들이라 고
색의 기운은 미약하다. 또한 추모관(납골당)과 공양간은 경내에서 다소 떨어져 있어 절의 영
역이 보기와 달리 제법 넓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괘불탱(부산 지방문화재자료 27호)과 청동북(부산 지방문화재자료 37호)
, 3층석탑,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일괄 등 지방문화재 4점과 조선 후기에 조성된
승탑(부도)군, 500년 정도 묵었다는 나한상 등이 있다. 이중 3층석탑은 많이 퇴락하긴 했지만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자 옛 견강사의 유일한 유물이며, 괘불(掛佛)은 석가탄신일 등 극
히 일부 날에만 외출을 나오는 꽤 만나기 힘든 존재이다.

그밖에 원효대사가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우기고 있는 늙은 철불(鐵佛)과 19세기에 제작된 원
효대사의 진영(眞影)도 있었다. <원효대사는 인도에 간 적도 없으며, 철불은 신라 후기에 잠
깐 등장하는 불상 형태임> 1957년에 간행된 '부산교육'과 1966년에 발간된 '개항90년', 1969
년에 나온 '부산의 고적과 유물'에도 언급되었던 존재로 적어도 1970년대까지 전해오고 있었
으나 관리소홀로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져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다. (언제 없어졌는지도 모름)

예전에는 바다가 보였다고 하나 지금은 키다리 빌딩이 즐비한 시가지에 시야가 막혀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동백나무를 비롯한 온갖 나무들이 짙게 우거져 있으며, 계곡과 폭포가 경내를
가로지르고 있어 경관 하나는 마치 신선 세계처럼 상큼하다. 범어사(梵魚寺)와 마하사(摩訶寺
), 기장 장안사(長安寺)와 더불어 부산의 대표적인 고찰(古刹)로 시내와도 무척 가깝고 접근
성도 좋은 편이다.

* 선암사 소재지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암동 628 (백양산로 138, ☎ 051-803-7573)
* 선암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선암사 대웅전(大雄殿)

선암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지방문화재인 청
동북을 품고 있다. (청동북의 위치는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음) 하여 그것을 보려고 했으
나 마침 오전예불 중이라 들어가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다음에 또 오라는 선암사의 뜻인 모양
이나 또 인연이 닿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  지장보살과 명부(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된 명부전(冥府殿)

▲  용왕당과 극락전 구역으로
인도하는 계단


▲  대웅전과 명부전 사이에 뿌리를 내린 잘생긴 소나무

선암사 경내는 가파른 지형을 따라 크게 4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웅전과 명부전이 있는 대
웅전 구역이 제일 밑이고, 거기서 1단계 높은 곳에 용왕당 구역, 다시 1단계 높은 곳에 3층석
탑이 있는 칠성각 구역, 그리고 제일 위쪽에는 조사전을 두었다.


▲  야외 법당으로 이루어진 용왕당(龍王堂)

용왕당은 병풍처럼 솟은 벼랑 밑 폭포 옆에 자리해 있다. 비록 '당(堂)'을 칭하고 있지만 건
물은 없으며, 이글거리는 동그란 두광(頭光)을 지닌 용왕상과 그에게 예를 표하는 야외 공간
이 전부이다. 특이한 것은 각(閣)이나 전(殿)이 아닌 마을의 용왕당처럼 당을 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암사에 용왕상을 세운 것은 2003년이다. 비록 여기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지만 가까운 곳에
서 바다가 넝실거리고 있고 경내에 계곡이 흐르고 있으므로 일종의 마켓팅과 새로운 명물을
구축하고자 용왕당을 닦은 것이다. 용왕은 물을 관리하는 존재로 불경을 용궁(龍宮)에 모아놓
고 지키는 역할도 겸하고 있는데, 이는 용왕이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되면서 그에게 떠넘긴 의
무이다. 또한 용왕이 물을 관장하고 있으므로 폭포 옆에 그의 거처를 마련했다.

용이 새겨진 의자에 앉아있는 용왕은 마치 사천왕(四天王) 같은 모습으로 조금 무섭게 생겼는
데, 그 앞에는 살짝 구부러진 작은 돌다리를 두었고 그 옆에는 폭포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 높은 벼랑이 칼처럼 솟아 그늘을 드리우며 선암사를 더욱 아름답고 신비롭게
수식해준다. 벼랑 옆에는 돌로 다진 높은 석축이 있는데, 그 위에는 3층석탑과 칠성각이 자리
해 있다.
용왕상 주변에 서면 폭포에서 서늘한 기운이 불어와 마치 동굴에서 부는 바람 같다. 하여 한
여름에 찾아와 이곳에 있으면 정말 피서가 따로 없을 것이다.


▲  선암사 용왕 불사공덕비(佛事功德碑)
2003년에 용왕당을 지은 기념으로 세운 비석으로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피부를 자랑한다.

▲  용왕상과 벼랑 밑에 자리한 폭포
경내에 자연산 폭포를 둔 절은 그리 흔치가 않다. 허나 이곳은 하나도 아닌
무려 여러 개의 작은 폭포를 지닌 특별함을 보이고 있다.

▲  용왕당에서 칠성각으로 인도하는 각박한 계단길
계단이 얼마나 각박한지 계단 옆에 줄까지 달아놓았다. 맨정신으로 오가기가
어렵다면 쓸데없는 자존심을 잠시 날리고 줄의 신세를 지기 바란다.



 

♠  선암사 마무리

▲  선암사3층석탑 - 부산 지방문화재자료 53호

칠성각 구역에는 칠성각과 극락전, 산신각, 3층석탑이 있다. 이중 칠성각 뜨락 한복판에 앉은
뱅이 신세로 자리한 3층석탑을 꼭 살펴보자. 비록 생김새는 우울하지만 고려 말에 조성된 것
으로 여겨지는 탑으로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자 옛 견강사의 유일한 흔적으로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해주는 존재이다.

석탑이라고 하지만 겨우 옥개석(屋蓋石) 3매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하여 그를 3층석탑으로 막
연히 추정하고 있다. 옥개석 사이를 두툼히 채웠던 탑신(塔身)과 탑의 밑도리를 이루던 기단(
基壇)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싹 침몰한 상태이며, 옥개석도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
다. 그러면 최소 5층석탑까지는 되었을 것이다.
부산의 많은 절이 잿더미가 되었던 임진왜란 때 절과 함께 파괴되어 저런 고통스런 모습이 된
것으로 여겨지며 옥개석의 크기를 보아 같은 탑의 부재(部材)가 분명해 보인다. 1층 옥개석은
땅과 맞닿은 밑도리가 흙에 많이 파묻혀 있으며, 낙수면과 옥개석 받침 등의 치석(治石)은 좋
은 편이다. 그리고 탑 꼭대기에 달린 머리장식은 근래에 선암사에서 덧붙인 것이다.

   ◀ 세월의 모진 풍파가 느껴지는 3층석탑
옥개석 피부에는 푸른 이끼 옷이 덮여져 있어
이곳의 청정한 기운과 탑의 장대한 내력을 느
끼게 한다. 비록 앉은뱅이 신세나 다름이 없지
만 선암사의 지긋한 역사를 온 몸으로 알려주
는 산증인이다.

▲  3층석탑을 굽어보는 칠성각(七星閣)
달랑 1칸에 팔작지붕 건물로 칠성 식구들의
거처이다.

▲  칠성각과 산신각 사이를 경쾌하게
흘러가는 선암사계곡

◀  계곡 바람이 지나가는 벼랑 밑에
자리한 산신각(山神閣)
벼랑 그늘에 산신 할배의 거처인 1칸짜리
산신각이 아늑하게 둥지를 틀었다.

             ◀  극락전(極樂殿)
칠성각 좌측에 자리한 극락전은 정면 3칸, 측
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
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깃들여져 있다.


▲  극락전 목조아미타3존상
<가운데 불상이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95호>


극락전의 주인장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고려 후기 것으
로 여겨진다.
선암사의 빛바랜 일기장인 '선암사기(記)'에 따르면 고려 말 왜구들이 빼돌려 그들의 본거지
에 절을 지어 봉안했다고 한다. 허나 강제로 제자리를 떠난 불상이 단단히 뿔이 났는지 그 지
역 사람들이 비명횡사로 계속 죽어나가자 염통이 쫄깃해진 그 잡것들은 다시 배에 실어 웅천
에 있던 성흥사(聖興寺, 창원시 진해구)에 기증했다고 전한다.
이후 선암사로 흘러들어왔으며, 왜구에게 납치당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흔치 않은 불상으로
그 사연이 전해지면서 영험이 있는 불상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전설의 불상이 이것이 아닌
다른 불상이라는 이야기도 있음)

유리막에 감싸인 아미타불은 온화한 표정을 지은 동그란 얼굴로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솟아있으며, 머리칼은 꼽슬인 나발(螺髮)이다. 양 손은 제1손가락과 제3손가락을 맞
댄 채 양팔을 옆구리에 붙이고 있는데, 오른팔은 팔꿈치를 접어 가슴 높이에서 손바닥이 보이
도록 바깥을 향하고 있으며, 왼팔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가슴 밑에 댄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
)을 취하고 있다.
그의 뱃속에서는 고맙게도 복장유물(腹臟遺物)이 나왔는데, 복장개부 입구에서 얼굴 부위까지
책자형 경전과 향, 중수 사실을 기록한 발원문(發願文)이 나왔다. 발원문에는 중수 시기와 참
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으며, 불상의 양식으로 봤을 때 불상과 발원문의 시기가 그
리 일치해 보이지는 않는다. 어쨌든 옛 사람들이 넣어둔 발원문 덕분에 이 불상은 2008년 지
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선암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  선암사의 꼭대기, 조사전(祖師殿)

칠성각 뒤쪽 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의 끝에 조사전이 있다. 이곳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
까운 곳이자 막다른 곳으로 보통 절 꼭대기에는 삼성각이나 산신각을 두기 마련이나 여기는
조사전을 위쪽으로 올리고 그들을 1단계 밑에 깔았다. 정면과 측면이 1칸인 맞배지붕 건물로
원효대사를 비롯해 이곳을 거쳐간 승려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으며, 여기서 길은 벼랑으로 막
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다.


▲  조사전에 봉안된 승려의 진영
가운데 승려가 원효대사인듯 싶다. 좌우는 누구인지 모르겠음..

▲  선암사에서 바라본 백양산 애진봉(589m)

선암사 경내를 둘러보고 명부전 서쪽 길을 가니 너른 밭과 공양간이 나온다. 마침 점심 때라
절의 인심도 확인할 겸, 공양간 앞을 기웃거려 보았으나 외지인은 안된다는 차가운 안내문이
공양간 문에 자석처럼 붙어있었다. (자리 협소를 이유로 제공하지 않는다고 함)
하여 허탈감을 애써 뒤로 하며, 절 뒤쪽에 아른거리는 애진봉이나 잠깐 올라가기로 했다. 애
진봉은 백양산의 일원으로 부산 최대의 철쭉 군락지로 유명한 곳인데, 선암사에서 애진봉 정
상까지 길이 잘 닦여져 있어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다.
허나 몇 발자국 떼기가 무섭게 귀차니즘이 거세게 밀려오면서 선암사 서쪽 소나무숲에서 발길
을 돌렸다. 이렇게 바로 철수하니 정말 밥을 조금 먹다만 기분이다. 허나 땡기지가 않으니 어
쩌겠는가. 이렇게 스치고 지나가는 수밖에...


▲  애진봉으로 인도하는 소나무 숲길

▲  선암사 서쪽 소나무숲

▲  선암사 약수터

다시 공양간으로 내려오니 그 옆구리에는 나그네를 위한 쉼터가 있었다. 쉼터에는 간단한 먹
거리와 염주, 불교용품을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쉼터 의자에는 산꾼 여럿이 속세에서 가져온
먹거리를 섭취하고 있었다.
쉼터 옆에는 선암사 약수터가 있는데 지역에서 꽤 알려진 약수로 물의 낭비를 줄이고자 수도
꼭지를 달아 물을 통제하고 있었다. 졸고 있는 파란 바가지를 깨워 물을 담아 목구멍에 들이
키니 물이 빛의 속도로 목구멍과 폐부를 시원하게 적셔준다.
선암사 경내로 다시 들어가 청동북이나 보고 가려고 대웅전을 기웃거렸으나 아직 예불은 끝나
지 않았다. 새가슴마냥 문 밖에서 청동북의 안부를 확인해 보았으나 내부가 다 보이지 않아
쿨하게 포기하고 일주문과 각박한 계단을 통해 선암사를 나와 다음 정처로 이동했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2년 12월 24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티스토리(tistory)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무등산 뒷쪽에 깃든 호남 가사문학의 성지 ~ 광주 환벽당, 취가정, 담양 식영정

호남 가사문학의 성지 ~~ 환벽당, 취가정, 담양 식영정



' 무등산 뒷쪽에 깃든 호남 가사문학의 성지,
광주 환벽당, 취가정, 담양 식영정

광주 환벽당

▲  환벽당

광주 취가정 담양 식영정

▲  취가정

▲  식영정

 



 

겨울 제국이 한참 위엄을 떨치던 새해의 첫 무렵, 덜 추운 날을 가려서 호남 가사문학의
오랜 성지(聖地)이자 누정(樓亭) 문화의 대명사로 추앙을 받는 환벽당과 취가정, 식영정
을 찾았다.
이들은 증암천(창계천)을 사이에 두고 광주(光州) 땅인 서쪽에 환벽당과 취가정, 그리고
전남 담양(潭陽) 땅인 동쪽에 식영정이 자리하고 있는데 행정구역만 무심히 다를 뿐, 서
로 같은 곳이나 다름이 없다. (환벽당과 취가정이 있는 충효동 지역은 원래 담양 땅이었
음) 게다가 서로 거리도 가까워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면 좋다. <소쇄원(瀟灑園)도 가
까운 곳에 있음>



 

♠  사촌 김윤제의 별서로 송강 정철이 그의 후광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던 곳
광주 환벽당(環碧堂)- 국가 명승 107호

▲  충효교에서 환벽당, 취가정으로 이어지는 오솔길 (환벽당길)

광주호의 동쪽 끝이자 광주와 담양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충효교 남쪽 언덕에 환벽당이 살짝
깃들여져 있다.
환벽당을 품은 언덕은 소나무가 무성하여 솔내음이 아주 그윽한데 창계천(증암천) 너머 식영
정 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거대한 옛 무덤처럼 동그랗고 두툼한 모습이다. 하여 혹시 고분(古
墳)이 아닐까 살짝 의심도 하였지만 생김새가 그러할 뿐, 그냥 자연산 언덕이다. 만약 그가
진짜로 고분이었다면 진작에 무덤 흔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었을 것이다. (옛 무덤을 좋아하다
보니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그렇게 보이는 모양임;;)

충효교에서 환벽당 정문까지 창계천을 따라 담백한 운치를 지닌 오솔길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
다. 그 길을 거닐며 창계천을 살짝 훔쳐보면 반석(盤石)들이 펼쳐진 예사롭지 않은 곳이 눈에
들어올 것인데, 그곳이 '조대', 그 앞 창계천이 '용소'로 환벽당을 수식하는 구수한 양념들이
다.


▲  식영정 앞 도로(887번 지방도)에서 바라본 환벽당 언덕
장대한 고분처럼 생긴 저 언덕 정상부에 환벽당이 살포시 안겨져 있다. 창계천
수면에 환벽당 언덕이 진하게 비춰지고 있어 마치 언덕 2개가 반대꼴의
모습으로 붙어있는 것 같다.

▲  창계천 조대(釣臺), 용소(龍沼)

용소는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이 우연한 물놀이로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1501~
1572)를 만났던 현장이다.
정철은 서울 청운동(淸雲洞)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기묘사화(己卯士禍, 1545년)와 양재역(良
才驛) 벽서사건(1547년)에 나란히 연루되어 적지 않은 고통을 당하게 된다. 아버지 정유침(鄭
惟沈)은 유배형을 당해 유배살이에 정신이 없었고 정철은 양육 관계로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꼬마 시절부터 유배살이의 혹독함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다가 1551년 명종(明宗)이 원자(元子)를 얻은 기쁨에 사면령을 내리면서 비로소 지긋지긋
한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고, 이후 어머니를 따라 할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담양 창평(昌平)
당지산(唐旨山)으로 내려가 살았다.

어머니와 적적하게 살던 정철은 어느 여름 날, 순천에서 처가살이를 하고 있는 친형을 만나고
자 길을 떠났다. 여름의 한복판이라 날씨도 무덥고, 마침 지나는 길에 풍경도 괜찮은 곳이 있
어서 피서본능에 따라 풍덩 들어가 물장구를 쳤는데 그곳이 공교롭게도 이곳 용소였다.
바로 그 시각, 용소 위쪽 환벽당에서는 사촌 김윤제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꿈에 용소
에서 용 1마리가 나타나 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는 청룡 1마리가 하늘로 승천했다고 함)
꿈에서 깨어나자 뭔가 찜찜하여 하인을 시켜 용소를 살펴보게 하니 마침 잘생긴 소년(정철)이
혼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꿈에 나타난 용이 아닌가 싶어 그를 소환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의 영특함
에 흠뻑 반하여 순천(順天)으로 가는 것을 만류하고 자기 슬하에 머물러 공부를 하도록 했다.
또한 그가 17세가 되자 자기 외손녀까지 짝지어주어 외손녀사위로 삼았으며 그의 뒷바라지도
넉넉히 해주어 정철의 앞날을 닦아주었다.

정철은 그렇게 사촌의 흔쾌한 지원에 힘입어 열심히 학문과 문학을 닦았고 27세에 과거에 급
제하면서 비로소 환벽당을 나오게 된다. 용소에서 잠시 물놀이를 한 인연 덕에 그의 인생을
크게 일으켜준 스승을 만났고 거기에 부인까지 얻었으며 조선 중기 가사문학(歌辭文學)을 크
게 달군 문학가로 이름까지 날렸으니 사람의 인생이란 참으로 모를 일이다.
만약 그가 여기서 물놀이를 하지 않았다면 벼슬이야 어떻게든 했겠지만 지금처럼 요란하게 이
름을 날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용소와 접한 반석(盤石)은 조대라 불리는데 김윤제가 낚시를 즐겼던 곳으로 정철을 비롯해 환
벽당을 다녀간 손님들도 낚시를 했다고 전하며 식영정 부근에서 용소까지 창계천 주변은 여름
마다 배롱나무(백일홍)가 장관을 이루어 자미탄(姿媚灘)이라 불리기도 했다.


▲  바로 위에서 바라본 조대와 용소
정철이 여기서 물놀이를 하고 낚시를 했다고 하지만 정작 그의 흔적은 창밖에 이슬처럼
남아있지 않다. 몇 겁의 세월을 견디며 이곳을 지켜온 조대, 그리고 큰 세상을
향해 흘러가는 창계천에게 정철은 기억을 못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수많은 인연의 하나일 뿐이다.

▲  늙은 쌍송(雙松)
사촌 김윤제가 정철을 만난 것을 기리고자 심었다고 전한다. 그만큼
정철이란 탐이 나는 인재를 만난 기쁨이 실로 컸던 것이다.

▲  환벽당 돌담길 (쌍송 주변)
환벽당 주위로 정겨운 기와 돌담을 둘러 바깥과의 경계를 그었다.

▲  활짝 열린 환벽당 정문(대문)

▲  환벽당으로 인도하는 돌계단이
닦여진 언덕 동쪽 부분


▲  수수한 모습의 환벽당

환벽당은 충효동(충효마을) 출신인 사촌 김윤제가 1540년대에 지은 별서(別墅, 별장)이다. 그
는 한참 시절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여기서 휴식과 여가를 즐기며 후학을 길렀는
데, 그를 거쳐간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철과 김성원(金成遠, 1525~1597) 등이 있다.

별서의 이름인 환벽(環壁)은 영천자 신잠(靈川子 申潛)이 지어준 것으로 푸르름이 고리를 두
른 듯 아름다운 곳이란 뜻이다. 별서 주위로 소나무와 배롱나무, 왕벚나무, 모과나무, 대나무
등을 심고 적당히 다듬은 호남의 대표적인 별서 원림(園林)이자 누정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데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의 '환벽당' 시에 환벽당의 초창기 모습이 묘사되어 있고, 김창흡(
金昌翕, 1653~1722)의 남유일기(南遊日記)에는 환벽당에 심어진 식물과 조경 수종이 나와있으
며, 김성원의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에는 환벽당의 모습이 그림으로 남겨져 있다.
부근에 면앙정을 짓고 머물렀던 면앙정 송순(俛仰亭 宋純)은 1563년 식영정의 시를 차운(次韻
)하면서 식영정과 환벽당이 형제의 정자라고 했으며 소쇄원과 식영정, 환벽당을 두고 '한 동
(증암천) 안의 세 명승'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지금은 서로 행정구역이 다르지만 원래 같
은 동네였음) 또한 벽간당(碧澗堂)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었다.

식영정과 더불어 호남 가사문학의 성지이자 광주호 주변의 대표 명소로 답사객의 발길이 꾸준
히 이어지고 있는데 송시열이 쓴 제액(題額)을 비롯하여 임억령(林億齡), 조자이(趙子以), 기
대승(奇大升) 등 16~17세기 사람들이 남긴 시 현판들이 정신 사납게 걸려있다.
정철은 이곳에서 학문을 닦으면서(집은 부근 지실마을에 있었음) 김인후(金麟厚), 기대승, 임
억령(林億齡) 등을 만나 그들에게도 학문과 가사문학을 배웠으며 임진왜란 때 호남의 대표적
인 의병장인 김덕령(金德齡)은 김윤제의 종손(宗孫)으로 할아버지의 정신적인 영향을 깊게 받
았다.

이곳은 김윤제의 후손이 관리해오다가 정철의 4대손인 정수환(鄭守環)이 매입해 그의 후손들(
연일 정씨)이 애지중지하고 있으며 환벽당 옆에 후손들이 사는 집이 있어 관리의 손길이 마를
날이 없다.
환벽당은 처음에 광주 지방기념물 1호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으나 2013년에 부근 용소와 조대,
쌍송과 한 덩어리로 묶여 국가 명승으로 승진되었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광주 환벽당 일
원'
)

▲  서남쪽에서 바라본 환벽당

▲  환벽당의 뒷모습

환벽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방 2칸과 마루를 지니고 있다. 처음에는 정
각(亭閣) 형태였으나 나중에 건물을 손질하면서 지금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하며, 네모난 기단
을 다지고 그 위에 집을 올린 형태로 섬돌에 신발을 벗고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방과 마루
에서 벌러덩 눕거나 음식 섭취는 안됨)

▲  글씨가 몸을 푸는 것 같은
환벽당 현판의 위엄

▲  활짝 열린 방문과 주인이 가고 없는
비어있는 방


▲  환벽당 연못과 김윤제 집이 있었던 너른 공터

환벽당을 받쳐들고 있는 석축 밑에는 3단으로 이루어진 화계(花階)와 네모난 연못이 누워있다
. 보통 별서를 지으면 앞에 연못을 두어 경치를 돋구게 하는데 이곳 역시 그렇다. 허나 연못
밑으로는 나무 몇 그루와 허전한 공터가 전부라 마치 별서를 짓다 만 것 같은데 그 공터에는
김윤제의 집 본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연못은 본채의 후원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 본채는 어느 귀신이 떼어갔는지는 모르지만 건물을 새로 짓지 않고 자연의 공간으로 남겨
두어 환벽당의 앞뜨락 같은 모습이 되었다.

* 환벽당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387 (환벽당길 10)


▲  환벽당에 걸린 어느 검은 피부의 현판 (해석은 알아서)

▲  환벽당 돌담길 (쌍송 방향)

▲  환벽당 돌담길의 끝 부분 (취가정 방향)



 

♠  김덕령 장군의 원통한 넋을 기리고자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정자
광주 취가정(醉歌亭) - 광주 지방문화재자료 30호

▲  취가정으로 인도하는 돌계단

담백한 풍경의 환벽당을 둘러보고 동남쪽으로 향하는 '환벽당길'을 3분 정도 들어가면 취가정
을 품은 언덕이 나온다. 환벽당 돌계단에 비해 조금은 흥분이 덜한 돌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
끝자락에 조촐하게 생긴 취가정이 자리해 있다.

취가정은 김윤제의 종손으로 임진왜란 시절 호남 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꼽히는 김덕령(
金德齡, 1567~1596)의 넋을 기리고자 후손인 김만식 등이 1890년에 지은 것이다. 그를 기리고
자 세운 정자일 뿐, 정작 김덕령과 관련은 없으며, 충효동과 담양 가사문학면(예전 남면) 지
역에 흩어진 정자와 별서 가운데 제일 막내로 정자의 이름인 취가는 술에 취해 부르는 노래란
뜻이다. 근처에 있는 환벽당과 식영정, 풍암정, 소쇄원 등은 모두 자연스러운 이름인데 반해
이곳은 음주와 관련된 이름을 지니고 있는데, 취가정이란 이름은 김덕령이 남긴 취시가(醉時
歌)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 취시가 - 취해서 부르는 노래
此曲無人聞           이를 듣는 이 아무도 없네
我不要醉花月         꽃과 달 아래 취하는 것도 바라지 않고
我不要樹功勳         나는 공훈 세우길 바라지 않네
樹功勳也是浮雲       공을 세우는 것은 뜬 구름이요
醉花月也是浮雲       꽃과 달 아래서 취하는 것도 뜬 구름이네
醉時歌無人知         취해서 부르는 노래, 이 노래 아는 사람 없으니
我心只願長劍奉明君   내 마음 다만 긴 칼 들어 명군 받들기 원하네


김덕령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권필(權韠, 1569~1612)은 어느 날 꿈속에서 김덕령을 만났다.
참고로 이들은 서로 만난 적은 없다고 한다. 김덕령이 억울하게 옥사(獄舍)를 당한 것을 호소
하며 취시가를 들려주었는데 이를 들은 권필이 화답의 시를 지어 위로했다고 한다. 그리고 꿈
나라를 나와서 그의 시를 활자로 남겼고 그 시의 이름을 취해 정자 이름으로 삼았다.

취시가 앞에는 서문(序文)이 쓰여 있는데,
'꿈속에서 작은 책 하나를 얻으니 바로 김덕령 장군의 시집이었다. 그 첫머리에 실린 한 편
제목이 취시가로 나도 2~3번 읽어보았는데 그 가사 내용은 이러하다~~~ 내가 꿈에서 깨어난
뒤 너무 서글퍼서 그를 위해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다'
즉 이 시는 권필이 김덕령을 만난 것이 아니라 김덕령의 시집을 읽은 것이다. 그러니 꿈나라
에서 시를 접한 것이 아니라 김덕령이 남긴 시집을 통해 이미 접한 것으로 봐야 되며 그것을
마치 꿈나라에서 받은 양 표현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사연이야 어쨌든 권필은 뜻을 다
펼치지 못하고 강제로 생을 마감한 그를 위로하고자 다음의 시를 덧붙여 남겼다.

將軍昔日把金戈   장군은 지난날에 창을 잡고 나섰건만 
壯志中摧奈命何   씩씩한 뜻 중도에 꺾이니 운명을 어이하랴 
地下英靈無限恨   지하에서 영령이 품었을 무한한 한이 
分明一曲醉時歌   한 곡조 취시가 속에 분명히 드러나네


▲  취가정의 앞 모습

취가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방 1칸과 툇마루를 지니고 있다. 6.25때 파
괴된 것을 1955년에 중건하여 고색의 기운은 덜하며 설주 송운회(雪舟 宋運會)가 쓴 취가정
현판과 송근수(宋近洙, 1818~1903)의 취가정기, 김만식과 최수화의 시 현판이 걸려있다.

취가정 주위로 굴뚝과 취시가를 머금은 표석, 후손들의 집이 있으며, 동쪽 창계천 너머로 식
영정과 소쇄원 주변이 바라보인다. (방과 마루는 들어갈 수 있으며 섬돌에 신발을 벗고 들어
가면됨, 허나 벌러덩 눕거나 음식 섭취 행위는 자제 바람)

▲  송운회가 쓴 취가정 현판의 위엄

▲  취가정 상량문(上樑文)


▲  김덕령의 취시가와 권필의 화답시를 머금은 현판

▲  적막에 사로 잠긴 취가정 주변
(왼쪽은 굴뚝, 오른쪽은 취시가를 머금은 비석)

▲  취가정 옆구리에 짧게 펼쳐진 메타세콰이어 숲길
늘씬하게 솟은 메타세콰이어가 취가정의 주변 풍경을 화사하게 돋군다.

▲  겨울 제국에게 강제로 봉인을 당한 채, 소쩍새의 울음을 기다리는
충효동 논두렁 - 논두렁 너머로 무등산(無等山)이 바라보인다.


취가정을 둘러보니 벌써 17시 직전이다. 햇님은 무거워진 고개를 자꾸 꺾으려고 하고 달은 그
틈을 타 검은색 물감을 마구 뿌리며 나에게 철수를 강요한다. 허나 그런 것으로 나는 쉽게 무
너지지 않는다. 일몰까지는 약간의 여유가 있어 부근에 있는 식영정을 그날의 마지막 스페셜
메뉴로 정하고 충효교로 나와 다리를 건너 담양 땅으로 넘어갔다.

담양 관할로 넘어가면 바로 한국가사문학관인데 그 서북쪽 언덕에 환벽당과 더불어 호남 지역
가사문학의 성지로 격하게 추앙받고 있는 식영정이 뉘어져 있다.

* 취가정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396-1 (환벽당길 42-2)



 

♠  석천 임억령의 별서이자 정철이 지은 성산별곡의 무대
담양 식영정(息影亭) - 국가 명승 57호

▲  식영정과 성산별곡 시비

환벽당과 쌍벽이자 콤비를 이루고 있는 식영정은 1560년에 김성원이 장인인 석천 임억령(林億
齡)을 위해 지은 것이다. 그때 자신이 머물 서하당(棲霞堂)도 옆에 같이 지었다.
그는 정철의 처외재당숙(장모의 6촌 형제)으로 김윤제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식영정을 거쳐갔
던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高敬命), 정철을 가르켜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렀다. <그 연
유로 식영정을 사선정(四仙亭)이란 부르기도 했음>
그들은 성산(식영정 주변)의 경치 좋은 명소 20곳을 골라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
二十詠)'을 지었는데 정철은 이곳에서 성산별곡(星山別曲)을 비롯해 하당야좌(霞堂夜坐) 1수,
소쇄원제초정 1수, 서하당잡영 4수 등 많은 시와 가사를 내놓으면서 가사문학의 산실로 일컬
어진다.

식영정이란 이름은 '그림자가 쉬어가는 정자'란 아주 문학적인 뜻으로 정철이 자주 놀러온 곳
이다. 환벽당, 송강정(松江亭)과 함께 정철과 깊게 관련된 곳이라 하여 '정송강유적'이라 부
르기도 하며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방과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방은 가
운데가 아닌 귀퉁이에 두었고 앞면과 옆면을 마루로 깔았으며 자연석 기단 위에 두리기둥을
세운 굴도리 5량의 헛집구조이다.
이곳은 전남 지방기념물 1-1호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2009년 '담양 식영정 일원'이란 이
름으로 국가 명승으로 승급되었다.

식영정 옆 창계천 주변에는 노자암(鸕鹚巖), 방초주(芳草洲), 서석대(瑞石臺), 자미탄, 견로
암 등의 명소가 있었으나 광주호가 조성되면서 거의 생매장을 당하거나 파괴되어 전설 속의
존재가 되버렸으며 서하당 등 식영정 주변의 건물도 모두 사라져 식영정 홀로 자리를 지켰다.
예전 2000년에 왔을 때는 식영정과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부용당, 장서각 등이 전부였는데 그
새 서하당 등을 다시 지어 주변이 조금은 채워졌다.


▲  부용당(芙蓉堂)과 연지(蓮池)
식영정에 이런 존재가 있었나 싶어 살펴보니 복원된 것이 아닌 단순히 식영정을
수식하고자 1972년에 지은 것들이다. 2칸짜리 부용당이 연못에 두 발을
담구며 혹독한 겨울살이에 지친 몸을 달랜다.

▲  서하당
1560년에 김성원이 자신의 거처로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터만 남아오다가 근래에 복원되어
새롭게 솟아났다.

▲  장서각(藏書閣)과 고직사(庫直舍)
송강집(松江集) 목판을 보존하고자
1973년에 세웠다.

▲  '송강 정철 가사의 터' 비석
식영정은 정철이 성산별곡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겼던 현장이다.

▲  태극마크가 그려진 성산사 정문(삼문)

▲  성산사(星山祠)

성산사는 석천 임억령, 서창 조흡, 정철의 5대손으로 1721년부터 식영정을 지켜온 소은 정민
하(簫隱 鄭敏河), 소은의 아들인 계당 정근(溪堂 鄭根) 등 7명을 봉안한 사당이다. 수재(水災
)로 파괴된 것을 1861년 정조원(鄭祚源)이 송씨에게서 환벽당을 다시 인수하면서 그 주변에
복원했으나 곧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강제 철거되어 사라진 것을 2005년 담양군에서
원래 자리였던 식영정 뒤쪽에 복원했다.

성산사 뒤에는 대나무가 두텁게 숲을 이루고 있는데 그들이 사각사각 풍월을 선사하며 속세에
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청각을 어루만져 준다. 그리고 숲 사이로 좁게 내려오는 계곡에서는 청
량하면서도 소름 끼칠 정도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겨울이라 그렇지 더울 때는 밀양(密
陽) 얼음골(☞ 관련글 보기)의 차디찬 바람에 못지않다.


▲  성산사를 감싸고 있는 짙은 대나무숲

▲  성산사에서 식영정으로 인도하는 오솔길

▲  멋지게 잘 늙은 식영정
식영정 툇마루와 방은 접근이 가능하다. 아무리 비어있는 정자라고 해도
문화유산의 지체 높은 몸이니 그냥 구경만 하거나 툇마루에
몸을 기대어 쉬기만 하자~~!

▲  글씨가 율동을 부리는 듯한 식영정 현판의 위엄
'정'자는 연이 하늘로 오르거나 개구리가 움직이는 것 같고 '식'자는
하늘로 비상하는 비행물체를 그린 것 같다.

▲  보면 볼수록 정감이 넘치는 식영정의 뒷모습
요즘도 장작을 떼는지 아궁이 주변 피부가 다소 시커멓다.

▲  식영정 안내문에서 식영정으로 바로 이어주는 돌계단길

▲  고직사 밑에 있는 옛 건물터
고직사와 도로 사이에 조금 움푹 들어간 희미한 흔적이 있다. 식영정을
수식하던 건물터로 여겨지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식영정을 1바퀴 둘러보니 어느덧 18시이다. 더 둘러보고 싶어도 검은 기운이 자욱해지고 찬바
람까지 마치 칼처럼 찔러대니 이를 견뎌낼 재간이 없다. 어차피 그날 목적한 것을 모두 보았
고 거기에 식영정까지 덤으로 챙겼으니 여기서 길을 접어도 여한은 없다. 솔직히 눈과 다리가
쉴 겨를도 없이 많은 것을 보아서 머리가 좀 아프다.

이렇게 하여 새해 시작에 찾아간 광주 충효동, 가사문화권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2년 12월 1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티스토리(tistory)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동양 최대의 황금법당을 지닌 고즈넉한 산사, 구산동 수국사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만난 수국사의 늙은 보물들)

서울 구산동 수국사


' 서울 수국사 봄나들이 '
수국사 대웅전과 오색연등
▲  하늘을 가득 메운 오색 연등과 그 너머로 살짝
보이는 수국사 황금법당(대웅전)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을 며칠 앞둔 5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친한 후배와 구산동(龜
山洞) 수국사를 찾았다. 그곳은 2009년 석가탄신일에 처음 인연을 지은 이래 여러 번 발
걸음을 했던 곳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탱화들을 아직 못나지 못했다. 하여 그들과 어
떻게든 인연을 지을 겸, 미답지로 남은 봉산까지 싹 처리하고자 겸사겸사 찾았다. (봉산
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겠음)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4시 경, 구산동 종점에서 그를 만나 국민의 대표 간식인 떡볶이
와 순대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봉산 자락에 묻힌 수국사로 들어섰다.



 

♠  동양 최대의 황금사원, 수국사(守國寺) 둘러보기

▲  수국사를 들어서다.
석가탄신일의 슬로건인 '차별없는 세상 우리가 주인공' 말은 참 좋다만
그런 세상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법 앞에 평등 어쩌구
강조하지만 거기서부터 벌써 오류가 발생하고 있으니 말이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석가탄신일에 벌써부터 흥겨움에 달아오른 수국사는 태화산(봉산) 자락에
둥지를 튼 절이다. 이곳은 특이하게도 법당(法堂, 대웅전)을 금으로 거의 도배하여 이 땅 유
일의 황금사원이자 동양 최대의 황금사원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데, 그로 인해 황금절, 황금사
원이란 근사한 별명을 지니고 있다.
법당에 사용된 재료부터가 다른 절과 확연히 틀려 두 눈을 제대로 휘둥그레지게 하지만 아직
은 은평구(恩平區)의 오래된 절 정도로 인지도는 낮은 편이다. 게다가 봉산 자락이라 봉산 또
는 태화산 수국사를 칭해야 되나 산세가 부실하여 믿음이 떨어지는지 거리가 좀 떨어진 삼각
산(북한산) 수국사를 칭하고 있다.

이곳은 겉으로 보면 현대 사찰로 보이겠지만 나름 역사가 있는 절로 1459년 세조(世祖)가 그
의 맏아들인 의경세자(懿敬世子)의 명복을 빌고자 그의 묘인 경릉(敬陵) 동쪽에 세운 정인사
(正因寺)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승려 설준(雪峻)이 절을 지으면서 설계까지 모두 도맡았다.
 
1471년 의경세자의 부인인 인수대비(仁粹大妃, 성종의 어머니)는
'절을 처음 지었을 때 급하게 만들어 재목이 좋지 않고 쓰임새가 정밀하지 못하다'
이르며 판
내시부사 이효지(李孝智)로 하여금 절을 크게 중창하게 했다. 중창된 절의 규모는 119칸으로
단청이 아름다워 광릉(光陵)의 원찰(願刹)인 봉선사(奉先寺)에 버금갔다고 하며, 1472년 석가
탄신일에 낙성법회(落成法會)를 화려하게 베풀자 법회에 참관한 승려 수백 명이 일찍이 없던
일이라며 감탄했다고 전한다.
인수대비가 이토록 정성을 쏟은 것은 그의 남편인 의경세자<덕종(德宗)으로 추존됨>의 원찰이
기 때문이다. 이후 예종(睿宗)의 원찰까지 겸하게 되었고 성종은 봉선사와 비슷하게 쌀 30섬, 면포와 정포를 각각 50필씩 지원했다.

1504년 절에 불이 나자 연산군(燕山君)은 경기감사와 형조참판를 소환하여 불을 낸 이를 국문
하게 하고 놀란 영혼을 위해 위안제(慰安祭)를 지내게 했다.

▲  온갖 연등으로 가득한 대웅전 내부

▲  용왕상(龍王像)과 연못

임진왜란 시절에 파괴된 것으로 여겨지며 이후 다시 중건되어 법등을 이어오다가 1721년 숙종
(肅宗)과 인현왕후(仁顯王后)의 능인 명릉(明陵)의 원찰이 되면서 나라를 지키는 뜻의 수국사
로 이름을 갈게 된다. 허나 다시 지원이 끊기면서 절은 폐허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잠시 속
세의 뇌리 속에서 두리뭉실 잊혀져 갔다.

1897년 북한산성 총섭(摠攝)으로 있던 월초거연(月初巨淵, 이하 월초)은 진관사(津寬寺)에 들
렸다. 진관사는 북한산(삼각산) 서부를 대표하는 절로 왕실의 지원이 각별했던 곳이다.
그는 대웅전에서 예불을 하다가 문득 구석에 처박혀있던 아미타불상 앞에 불기(佛器)가 없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겨 진관사 승려에게 이유를 물으니 그들은 퉁명스럽게
'그 불상은 수국사가 망해서 부득이 우리 절로 가져온 겁니다. 우리 것이 아니라서 차나 향을
공양한 적이 없지요~!'
그 말을 들은 월초는 발끈하여 아미타불 앞에 예불을 올리면서 수국사를 반드시 일으켜 세울
것을 속으로 다짐했다고 한다.

1900년 황태자(皇太子, 훗날 순종)가 중한 병에 걸리자. 다급한 고종이 월초에게 태자의 쾌차
를 기원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월초는 청도 운문사 부근 사리암(邪離庵)에서 100일 동안 나
반존자(那畔尊者) 기도를 올렸는데, 80여 일 되는 날에 늙은 승려가 꿈속에 나타나 금침(金針
)을 한번 놓는 사이에 태자의 병이 말끔히 나았다는 것이다.
이에 크게 기뻐한 고종은 월초에게 소망을 물으니 그는 바라는 것이 없다고 답을 올렸다. 그
러자 황제가 관직과 녹봉을 제의하자 월초는
'폐하의 말씀은 감사하오나 어찌 출가한 승려가 나라의 녹을 받겠습니까? 다만 서오릉 부근에
수국사가 퇴락하여 향화(香火)가 끊긴 것이 애석하오니, 그 절의 중창을 소망합니다'

이에 황제가 '효심과 신심(信心)은 원래 하나다'라 치하하며 어용(御用)목수를 보내 절을 지
금의 자리로 옮겨 중창하게 했다. 또한 황실에서 내린 돈과 관리들이 모금한 26만 8천냥으로
고양군 지도면 내곡리, 중면 산황리 2곳에 땅을 구입하여 절에 제공했으며, 1907년에 황실에
서 하사한 금 1,500원으로 개금, 탱화 불사를 하였다. 이때 진관사에 얹혀 살며 굴욕의 시간
을 보냈던 아미타불을 도로 가져와 봉안했다. (현재 대웅전에 있음)

1908년 석가탄신일에는 월초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여러 승려의 도움으로 괘불탱과 금강번(
金剛幡) 31위를 조성했으며, 양산 통도사(通度寺)에서 금 1천, 부산 범어사(梵魚寺)에서 금 4
백을 지원했다.

▲  초전법륜상

▲  수국사 십육나한도

6.25전쟁 때 말끔히 파괴되는 비운을 겪었으나 2005년 이후 주지 토진과 원담의 노력으로 지
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동양 최대의 황금사원이자 이 땅 유일의 황금사원이란 이미지를 진하게 내걸며 절을 꾸리고
있으며, 초전법륜상과 특이하게 'V'수인(手印)을 취한 성취여래불<成就如來佛>, 여름에만 있
다는 목탁새 등 독특한 명물로 속세에 강하게 손짓한다.

비록 고색의 내음은 녹슬었고 구산동 주택가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고즈넉한 산사(
山寺)의 분위기도 다소 떨어진다. 또한 많은 절집들이 앞다투어 외형을 불리다보니 그에 대한
반감도 적지 않은 편으로 수국사는 사치품인 금으로 법당을 꾸며 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참고로 금은 사악한 것을 몰아낸다고 하며, 불상에 금을 입히는 이유도 바로 그때
문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좋아하는 광물과 색깔이 바로 금과 금색임)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지장전, 삼성각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
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그 뱃속에서 나온 복장유물이 있다. 그리
고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탱화 6점이 있으나 이들은 모두 조계사(曹溪寺)에 있는 불교중앙박물
관에 가 있다.

* 수국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구산동 산135-1 (서오릉로23길 8-5, ☎ 02-356-2001)
* 수국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十'자형의 지장전(地藏殿)

수국사 경내를 들어서면 3층 규모의 문화센터가 마중을 한다. 그를 지나면 오른쪽(북쪽)에 너
른 뜨락과 지장전, 지장보살상이 있고, 정면으로 가면 용왕상이 있는 연못과 삼성각, 대웅전,
봉산 산길이 차례로 이어진다.

문화센터 옆에 자리하여 속세(俗世)를 굽어보고 있는 지장전은 원래 종의 보금자리인 종각(鐘
閣)이었다. 그러다가 잠시 대웅전으로 쓰였고 황금 법당이 지어지자 지장전으로 바뀌었다. 원
래는 '一'자형 건물이었으나 내부를 확장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으며, (이 땅 유일의 '十'자
형 지장전임) 칠성과 산신 등도 같이 있었으나 삼성각이 생기면서 그들은 싹 방을 빼고 지장
보살과 그 식구들만 남아있다.


▲  봄꽃에 감싸인 삼성각 계단

세상에 이보다 고운 계단길이 또 있을까? 계단 좌우로 봄이 곱게 붓질을 한 봄꽃들이 향연을
펼치고 있어 속세에서 오염된 두 안구를 제대로 정화시켜준다. 금색으로 도배된 대웅전보다
여기가 더 화려해 보이고 더 정감이 가니 역시 사람은 자연 속에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  새로 지어진 8각형의 삼성각(三聖閣)
지장전의 신세를 졌던 독성과 산신, 칠성의
보금자리로 아직 단청도 입히지 않은 아주
따끈따끈한 새 건물이다.

▲  삼성각 칠성탱
1960년에 그려진 것으로 칠성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져 있다.

▲  삼성각 산신탱
1960년에 조성된 것으로 마치 100년 이상
묵은 것처럼 꽤 늙어 보인다.

▲  삼성각 천정에 걸린 동그란 장엄등
장엄등에 동자승이 입혀져 있다.

▲  석조미륵불입상
2002년에 조성된 석불로 자비로운 인상이
중생들의 마음을 들었다 놓는다.


▲  꽃으로 치장된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부처가 기쁨을 가득 드러낸 채, 며칠 앞으
로 다가온 그날을 기다린다. 그 기다리는 시간은 정말 1년 같겠지만 정작 석가탄신일 당일은
1시간도 안될 정도로 체감 시간이 짧을 것이다.
혹시 모를 비와 강렬한 햇살의 태클에 대비해 그의 허공에 우산까지 설치했고, 그 앞에는 깨
알같이 불전함을 두어 석가탄신일 특수를 애타게 고대한다.


▲  초전법륜상(初轉法輪相) - 오비구상(五比丘像)

대웅전 우측으로 부처가 5명의 승려와 야외학습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눈길을 잡아 맨다. 다
들 진지하게 부처의 설법을 듣고 있는 승려들, 오른쪽 어깨를 훤하게 드러낸 법의를 입은 그
들은 부처의 설법에 기뻐하며, 어떤 이는 합장(合掌)으로 예를 올린다.
이들은 초전법륜상으로 오비구상이라 하는데 부처가 녹야원(鹿野苑)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하
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이 땅에서는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합성수지로 조성
된 것으로 그들의 뜨거운 학습 현장을 인자한 모습의 관세음보살 누님이 묵묵히 지켜본다.


▲  수국사의 상징이자 대표 감성, 황금법당 대웅전(大雄殿)의 위엄

▲  수국사의 하늘을 훔친 오색 연등과 그 너머로 보이는 대웅전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수국사의 감성을 자아내고 있는 대웅전이 금빛을 드러내며 웅장하게
자리해 있다. 계단 위쪽에 높이 들어앉은 탓에 그 위엄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돋보여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 정도이다.
그는 정면 3칸, 측면 7칸, 면적 108평에 이르는 팔작지붕 건물로 청기와를 씌운 지붕을 제외
하고는 기둥과 문짝, 벽, 평방(平枋), 공포(空包) 등 건물 안팎을 99.9%의 순금으로 싹 도배
하여 호화로움을 마음껏 뽐낸다. 그래서 고운 빛깔의 단청은 없으며 건물이 상처가 생기지 않
도록 절에서 꽤나 애지중지한다.
해가 질 무렵이나 어둑어둑한 저녁, 연등 빛에 비친 대웅전의 모습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으
며 그 내부 역시 질식할 정도로 화려함의 극치를 드러낸다. 온통 도금이 입혀진 기둥과 벽,
천정을 희롱하는 연등은 중생의 눈을 잔뜩 흥분시키며 그 황홀한 빛에 두 눈이 머는 것은 아
닌지 걱정이 들 정도이다.
불단에는 각각의 표정과 제스처를 취한 5개의 큰 금동불상을 두었고, 그 사이로 작은 보살상
과 불상 4개를 배치해 특이한 구도를 보여준다.


▲  대웅전의 허공을 가득 채운 장엄등의 찬란한 물결

▲  대웅전의 주연과 조연들 (큰 불상 5기와 작은 불상/보살상 4기)

▲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보물 1580호

대웅전 불단이 가히 무너질 정도로 들어앉은 불상/보살상 가운데 특별히 눈여겨 볼 존재가 하
나 있다. 바로 아미타여래좌상이다.
그는 수국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아미타불 뱃속에서 나온 유물은 제외>로 나무로 다져 금을
입혔다.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앉은 키 104cm
, 무릎 폭 72cm이다. 원래는 철원 심원사(深源寺)에 있었으나 수국사로 넘어왔으며, 조선 후
기에 절이 망하면서 진관사에서 샛방살이를 하기도 했다.
허나 다른 절의 불상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공양도 받지 못하고 구석에 처박혀 굴욕을 당하다
가 그것을 발견한 월초가 발끈하여 그에게 예불을 표하며 수국사 중창을 다짐했다고 한다.

이후 고종의 지원으로 절을 중건하고 그를 다시 가져와 법당에 두었다. 진관사에서의 안좋은
추억 때문인지 약간 인상은 쓰고 있지만 중후하고 넉넉한 얼굴로 고려 후기 불상 양식과 많이
비슷하다고 하며, 예전에는 신변보호를 위해 유리막으로 감쌌으나 지금은 거추장스러운 유리
막을 치우고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수국사 경내 (오른쪽 3층 건물이 문화센터)
오색 연등이 낮게 하늘을 가리며 석가탄신일 분위기를 드높이고 그 너머로
북한산(삼각산) 산줄기가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  조계사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만난 수국사의 보물들

▲  수국사 아미타불도(阿彌陀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2호

수국사의 지방문화재 탱화를 보러 간만에 왔건만 결국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들
이 조계사 불교중앙박물관으로 외출을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랴부랴 그들을 찾아 나섰다.
(지금은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음)
보물로 지정된 아미타여래좌상을 제외한 지방문화재 탱화 6점과 아미타불 복장유물이 나들이
를 나왔는데 그들이 속시원히 공개된 적은 거의 없었다. 하여 이런 상큼한 기회를 놓치면 그
들과의 술래 관계를 영영 청산하지 못할 것이다. (이들 탱화에 대한 지식이 짧은 관계로 문화
재청 정보를 거의 그대로 사용했음)

불교중앙박물관에 들어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수국사 탱화는 아미타불도이다. 그는 1907년
에 편수 보암긍법(普庵肯法), 두흠(斗欽), 금어 봉감(奉鑑), 법연(法沿), 범천(梵天) 등이 그
린 아미타후불탱으로 대시주인 강문환과 강재희가 황명에 따라 고종 황제 성수만세(聖壽萬歲),
황태자(순종) 경수천세(慶壽千歲), 황태자비 윤씨 보령천추(寶齡千秋), 황귀비 엄비 보수제년
(寶壽齊年), 의친왕 보수무강(寶壽無疆), 의친왕비 보록장춘(寶籙長春), 영친왕 보소여해(寶
笑如海)를 기원하고자 제작했다.
존칭 뒤에 붙은 성수만세, 경수천세, 보록장춘 등은 이름만 다를 뿐, 모두 만수무강을 기원한
다는 뜻으로 성수만세는 황제에게만 쓸 수 있었고, 경수천세는 황태자(태자), 그 외에는 황족
에게만 사용했다.

그림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8대 보살, 10대 제자, 사천왕, 팔부중, 천인 등이 배치되어
있는데, 갸름한 얼굴에 가는 눈썹과 눈, 작은 입, 높이 솟은 육계를 지닌 아미타불은 수미좌(
須彌座) 위 청련의 연꽃대좌 위에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보이며 결가부좌를 했다. 신광(
身光) 내부를 금박으로 처리해 마치 빛이 발산되는 듯 하며, 그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
보살이 협시하고 있고 그림 밑 중앙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마주보고 있다. 나머지 보살
은 아미타불을 향하고 있는데 지장보살은 어디로 마실을 갔는지 나오지 않는다.

보살들 위에는 아난존자(阿難尊者)와 가섭존자(迦葉尊者) 등 10대 제자가 있으며 윤곽선 주변
에 음영을 표현하여 입체적이면서도 사실적인 느낌을 준다. 그들 좌우에는 용의 뿔을 들고 있
는 용왕과 공양물이 든 과반을 든 용녀(龍女), 사자관과 코끼리관을 쓴 팔부중, 금강신 등이
표현되었다. 그리고 화면의 하단에는 사천왕들이 각자의 연장과 갑옷 등을 갖추며 서 있다.

탱화의 정보를 담은 화기(畵記)는 그림 좌우 가장자리에 있다. 왼쪽에 황제 가족의 성수만세
를 기원하는 내용이 있으며 오른쪽에 연화질과 시주질을 적었다. 화기에 의하면 1907년 2월 7
일, 13점의 탱화<대웅전 상단탱, 대료(大寮)의 상단탱, 영산탱, 독성탱, 칠성탱, 구품탱, 중
단탱, 감로탱, 산신탱, 신중탱 2점, 현왕탱, 조왕탱>을 조성해 봉안했다고 나와있으나 지금은
6점만 겨우 남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이 아미타불도는 대료의 상단탱으로 여겨
진다.

구한말에 황실 발원 탱화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구도와 다양하고 화려
한 문양, 능숙하고 섬세한 필치가 돋보이며, 구한말 서울 지역에서 활동했던 보암긍법과 두흠
, 봉감 등이 참여하여 그린 작품이다.


▲  수국사 십육나한도(十六羅漢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3호

16나한도는 1907년에 보암긍법, 두흠, 금어 봉감, 법연 등이 조성한 아미타후불탱의 일원으로
조성 목적은 앞서 아미타불도와 비슷하다. (이후에 나올 4개의 탱화도 같음)

그림 중앙의 큰 광배에 들어있는 석가3존상은 결가부좌했는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짓
고 가부좌를 취한 석가여래의 모습은 가는 눈썹과 눈, 좁은 입술, 높게 솟은 육계 등이 수국
사 아미타불도의 본존불과 매우 비슷하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의 대의(大衣)에는
아미타불의 대의와 유사한 색 문양과 금문양 등으로 화려하게 묘사되어 있다.
석가여래 좌우에는 협시보살이 청련의 연화대좌에 편안한 자세로 결가부좌했는데, 이중 왼쪽
협시보살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으나 오른쪽 것은 두 손으로 흰 백련을 받들고 있다. 이들
은 16나한과 함께 묘사된 점으로 미루어 왼쪽은 미륵보살, 오른쪽은 제화갈라보살 등 수기삼
존을 배치한 것으로 여겨지나 지물만으로는 단정하기가 어렵다. 석가삼존상 두르고 있는 신광
내부를 모두 금박으로 붙여 화면 중앙에서 광명이 퍼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석가3존상 좌우로 일정하게 분리된 네모의 틀 속에 다양하게 표현된 16나한은 산 또는 계곡을
배경으로 묘사되어 있다. 제12존자(나가세나)와 제13존자(안가다)를 제외한 나한들은 모두 1~
2명의 동자 또는 공양자를 거느리고 있는데, 사각형 틀 속에 각기 따로 묘사된 나한들의 상황
묘사는 매우 뛰어나며 해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나한들은 유사한 크기로 묘사되었고 그 색
감과 필선은 매우 수려하며 나한의 옷과 각종 지물에는 금니가 많이 쓰였다.

이 16나한도와 같은 화면분할식 구도는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울, 경기도 지역의 팔상도, 나
한도, 구품탱 등에 많이 사용된 구도로 나한들은 일정한 사각형 틀 속에 묘사되고 있어서 전
체적으로 정돈된 느낌을 준다. 또한 이 그림은 왕실 발원의 불화답게 금박과 금니 사용이 많
으며, 안정적인 필선과 형태, 조화로운 채색 등이 돋보인다.


▲  수국사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4호

1907년에 조성된 것으로 극락의 구품연화대(九品蓮花臺)를 담고 있다. 편수 보암 긍법과 두흠
, 금어 재원, 기정, 상은이 그렸으며, 강문환과 김종성, 원일상이 감동(監董)을 맡았다.

이 구품탱은 화면을 9개로 나누어 구품도 관련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런 분할 구도법은 개운
사(開運寺) 팔상도, 흥천사(興天寺) 극락구품도, 고양시 흥국사(興國寺) 극락구품도, 낙산 청
룡사(靑龍寺) 팔상도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구한말 서울, 경기도 지역 탱화에서 많이 나
타나는 구도법이다.
그림 중앙에는 아미타극락회(阿彌陀極樂會)가 묘사되어 있으며 그 주위로 구품 연못이 배열되
어 있다. 높은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보살과 10대 제자, 사천왕, 팔부중
, 천중 등이 둘러싸고 있으며, 권속들은 모두 3단으로 비스듬히 배치되어 있는데 흥천사 극락
구품도, 고양시 흥국사 극락구품도 등 다른 구품도에는 인물만 가득한데 반해 이 구품도에는
화면 좌우에 수목을 배치하여 화면 구성이 훨씬 여유가 있어 보이며, 아미타불의 신광과 화면
하단을 금박으로 처리하여 화려한 느낌을 준다.

극락회 향우에는 보살의 극락정토참예도(極樂淨土參詣圖)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아미타불 회
상에 참여하고자 모여드는 보살의 무리와 동자상, 그리고 무악천인 등을 그린 것으로 전각과
연못에는 극락조(極樂鳥)와 연꽃 등이 있다. 그리고 극락회 향좌의 성중극락정토참예도(聖衆
極樂淨土參詣圖)에는 극락의 주악천인과 아미타불 회상에 참여하고자 찾아온 7인의 성문상 등
이 있으며, 그 배경으로 극락조와 노송, 구름 등의 자연물로 이루어진 전각과 연못이 있다.

극락회 바로 밑에 자리한 극락정토 장면은 16관(觀) 중 제6총관(總觀)에 해당되는 관으로 보
수(寶樹), 소나무, 대나무, 기암괴석, 중층 지붕의 전각이 그려져 있다. 전각 앞에는 활짝 핀
연꽃과 연잎으로 가득한 연못이 있고, 주변 곳곳에 코끼리, 금모사자 등이 보인다. 제6총관의
좌/우 하단의 3면에는 극락왕생의 왕생정토를 표현했다. 왕생장면은 극락정토를 상품(上品),
, 중품(中品), 하품(下品)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각각 상/중/하로 나누어 아홉 장면으로 다루
었다.

하단 중앙의 제14관에 해당되는 상품은 화면의 반이 연못으로 이루어진 구도로 연못에는 관모
에 관복을 입은 왕생자, 동자형의 왕생자 등 4명의 왕생자가 백련 위에 앉아 있다. 왕생자 위
쪽에서는 부처가 구름을 타고 내려오면서 왕생자들을 향해 광명(光明)을 비추고 있다. 왕생자
들이 있는 연못 위 정토(淨土)에는 다양한 전각과 기암괴석, 수목 등이 기린 4마리, 극락조 2
마리와 어우러져 있으며, 제6총관 향우(向右)에 위치한 장면은 제15관 중품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는 동자형의 사람 모습을 한 왕생자 4명을 아미타불이 맞이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아미타불은 오른손을 어깨 위로 치켜들고 왼손은 무릎에 두며 정면을 향해 앉아있는데 그에게
서 뻗어 나온 빛이 연못 속 백련 위에 앉은 왕생자를 비추고 있다.
그들 배경에는 중층의 전각과 기암괴석, 수목, 극락조, 금모사자, 괴석, 오색을 발하는 금탑
이 보인다. 하단의 중품(향우)에는 구름을 탄 2구의 보살입상이 연못 속의 속인형 왕생자 3구
를 맞이하는 장면으로 보살의 지물인 연꽃에서 광명이 나와 왕생자를 비추고 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학과 낙타 등이 정토에서 노닐고 있다.

제6총관의 향좌(向左)에는 제16관 하품이 배치되어 있다. 연못 속에는 붉은 옷을 입은 2명의
왕생자와 옷을 입지 않은 3명의 왕생자가 백련 위에 앉아 합장하고 있으며, 화면 상단 우측(
향좌)에서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구름을 타고 왕생자를 맞이하러 오는 모습이 보인다. 그 주위로 여러 수목과 전각, 극락조와 기암괴석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2층 전각의 지붕을
금니로 칠했다. 그 밑에 묘사된 다른 하품의 연못에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내용을 반
영한듯 왕생자의 모습은 담지 않았다. 이는 십이겁(十二劫)이 지나야 하품왕생자의 연꽃이 핀
다는 내용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배경에는 수목과 괴석, 학, 사슴 등이 있다.

보암 긍법이 1905년에 봉원사(奉元寺) 구품도를 그렸는데 그것을 초본으로 삼아 제작한 것으
로 보이며, 채색은 금니와 함께 진채색을 다양하게 사용하여 매우 화려하면서도 민화의 극채
색을 연상케 한다. 필치 또한 수려하며, 문양의 표현 등 그 표현력이 매우 치밀하다.


▲  수국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5호

등장인물이 빼곡하여 눈과 정신을 쏙 피곤하게 하는 감로도는 1907년에 그려진 것으로 강재희
가 돈을 대고 강문환, 김종성, 원일상이 감동을 맡았으며, 편수 보암긍법, 편수 두흠, 금어
봉감, 계은봉법, 범화정운, 금운정기, 운호재오, 재원, 상은, 상오, 기정, 법연, 범천, 행언,
현상, 종민, 원상 등 많은 이들이 합심하여 그렸다.

죽은 사람의 극락왕생을 위해 봉안된 감로도는 가로 261cm, 세로 157.5cm에 달하는 화면의 하
단에는 아귀(餓鬼) 2마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그 위로는 많은 음식과 공양물이 차려진 제
단과 칠여래(七如來)가 표현되어 있다. 가로로 긴 화면의 상단에는 칠여래가 합장을 하며 나
란히 서 있으며, 좌측에는 아미타삼존과 아난/가섭존자, 왕후장상(王侯將相), 선왕선후(先王
先后), 북채를 든 뇌신(雷神), 우측에는 지장보살과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등이 구름 위에
서 있다.
7여래 밑에 있는 제단 좌우로 높은 기둥을 세운 후 南無百億化身佛(남무백억화신불, 석가모니
), 南無淸淨法身佛(남무청정법신불, 비로자나), 南無圓滿報身佛(남무원만보신불, 노사나) 등
삼신불번(三身佛幡)을 늘어뜨리고 갖은 꽃과 공양물을 두었는데 바람에 휘날리는 삼신번이 현
장감을 준다. 그런 제단 위에는 대황제폐하(고종), 황태자전하(순종), 영친왕전하, 의친왕전
하 등이 적힌 위패 모양의 불전패가 놓여 있다.

제단에 이르는 돌계단 밑 좌우에 놓인 커다란 화병에는 붉은색과 흰색의 모란이 가득 꽂혀있
으며, 제단 우측에는 흰 천막을 치고 승려들이 모여 앉아 독경하거나 큰 북과 바라를 두드리
며 의식을 치르는 모습, 승무를 추는 모습, 커다란 공양물을 머리에 이고 제단으로 가는 사람
들의 모습 등이 표현되었다.

화면의 하단 중앙에는 서로 마주보고 꿇어앉은 1쌍의 아귀가 크게 그려져 있다. 화염이 뿜어
져 나오는 입과 가는 목, 불룩한 배 등 아귀의 특징을 잘 묘사하고 있으나 얼굴 표정 등에서
다소 희화적이다. 아귀 좌우로는 수목으로 분리된 화면 속에 한복을 입은 남녀들이 춤을 추거
나 싸우는 장면, 대장간에서 일하는 장면, 악사들의 반주에 맞춰 광대가 묘기를 부리고 초랭
이가 부채를 들고 춤추는 장면, 죽방울 놀이를 하는 장면, 무당이 굿하는 장면 등 세속의 다
양한 장면들이 묘사되었는데, 음식을 먹거나 술을 받는 모습, 물건을 파는 모습 등은 당시 장
터의 모습을 재현한 듯 싶다.
여기에 표현된 풍속 장면은 주로 장례나 영가천도 등의 행사와 관련된 장면을 중심으로 표현
되어 수륙화로서의 감로도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화면 우측으로는 뇌신을 표현
한 화염 아래로 우산을 쓴 인물과 뱀에게 쫓기는 장면, 관세음보살보문품의 구제난(救濟難)
장면과 더불어 농사짓는 모습, 공부하는 모습,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 소고 등을 가지며 무리
지어 노는 모습, 일하러 가거나 장터에 가는 모습 등의 다양한 일상생활과 죄인을 벌하는 모
습, 전쟁 장면 등이 담겨져 있다.

이 탱화는 남양주 흥국사 감로도(1868년), 개운사 감로도(1883년), 봉은사 감로도(1892년) 등
서울, 경기 지역의 19~20세기 감로도의 도상과 동일한 도상을 취하고 있으며, 전체적인 구도
표현은 다소 복잡다난해 보이지만 풍속화적인 면이 충실하게 묘사되었다. 또한 인물들의 형태
감이 좀 떨어지기는 하지만 필치가 안정되고 다양한 색감에 의한 충실한 풍속 묘사 등이 돋보
인다.


▲  수국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6호

신중도는 호법신(護法神)의 무리를 담은 탱화로 주로 법당에 걸어 법당 수호 및 청정제의 역
할을 한다.
이 탱화는 1907년에 제작된 것으로 편수 보암 긍법과 두흠, 금어 재원, 기정, 상은이 그렸으
며, 강문환과 김종성, 원일상 등이 감동을 맡았다.
화폭이 270cm에 이르는 큰 신중도로 그림 가운데에 위태천(韋太天)과 범천(梵天), 제석천(帝
釋天)을 두고 그 주위로 천부중과 호법신을 배치했는데, 얼굴이 둥글고 넓적한 위태천은 새
깃털을 꽂은 투구와 갑옷을 입고 두 손으로 삼차극(三叉戟)을 세워 들고 있으며 목을 앞으로
내밀고 있다.

범천과 제석천은 화려한 보관과 천신의 복장으로 정면을 향해 합장인을 보이고 있는데 위태천
과 함께 신광 내부를 금박으로 처리해 그림의 중심 인물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들 주위로 주
악천인(奏樂天人)이 피리, 타박, 생황 등을 연주하고 있으며 해와 달이 묘사된 관을 쓰고 있
는 일궁천자(日宮天子)와 월궁천자(月宮天子), 익선(翼扇)을 든 산신과 홀을 든 조왕신, 천동
, 천녀 등이 있다.

위태천 옆에는 좌우 3구씩 6구의 신장(神將)이 배치되어 있다. 뿔을 든 용왕과 칼과 창을 든
호법신이 있는데 특징적인 인물 표정이 신중탱 전체에 다양성을 주고 있다. 채색은 적색, 녹
색을 비롯하여 금색과 갈색, 짙은 청색 등이 같이 사용되었는데 전체적으로 매우 차분하며 그
속에서 보여지는 금박과 여러 문양은 화폭에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필선은 철선묘를 기본
으로 섬세한 필치가 돋보이는데, 호법신의 수염까지 세밀히 묘사되었으며 윤곽선 주위로 선염
(渲染)을 가해 입체감을 표현하는 등 황실 발원 불화의 품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수국사 현왕도(現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7호

현왕도는 사람이 죽은 지 3일 만에 심판을 하는 현왕(보현왕여래)과 그 식구들을 그린 것이다.
1907년에 월초가 화주(化主), 강재희가 대시주가 되어 황제 가족들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봉안
한 것으로 보암긍법과 두흠, 금어 범화정운, 운호재오, 행언이 함께 그렸으며 가로 248.3cmX
세로 150.8cm 크기로 다른 현왕도와 달리 가로가 길어 현왕도 중에서 매우 큰 규모이다.

현왕을 중심으로 대륜성왕, 전륜성왕(轉輪聖王), 판관, 녹사, 천동 등이 그려져 있으며, 각기
바라보는 방향을 달리한 채, 자유로운 몸짓을 하고 있다. 붉은 관복을 갖춘 현왕은 오른쪽으
로 몸을 돌린 채 십자형 문양이 새겨진 천으로 덮힌 의자에 앉아있으며, 머리에는 경전을 접
어 올려 장식한 관을 쓰고 있고 오른손에는 두루마리를 쥐고 있다.
현왕 앞에 놓인 책상에는 화엄경과 벼루, 붓, 연적 등이 놓여있으며. 현왕 주위로는 대륜성왕
과 전륜성왕 등 여러 명의 녹사와 판관이 배치되어 있다. 그림 위쪽에 있는 동자는 부채, 당
번(幢幡), 산개(傘蓋) 등을 들고 있는데 현왕 앞에 있는 2명은 현왕 쪽으로 몸을 굽히고 있다.
그중 1명은 두루마리를 받치고 있고 다른 1명은 두루마리를 받고 있다.

현왕을 중심에 두고 그 가족들을 좌우로 배치했고 가로폭이 넓은 화폭으로 구성되는 등, 안정
감을 보여주고 있으며 금니 사용과 조화된 채색,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문양, 철선묘의 안정적
인 필치 등이 뛰어난 작품이다.


▲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의 하나인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 보물 1580호


대웅전에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고향(철원 심원사)을 잃었고 심지어 남의 절에서 푸대접
을 받으며 샛방살이를 했던 흑역사가 있다. 그 한이 쌓여서 생긴 사리일까? 그의 뱃속에서는
많은 복장(腹臟)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고려부터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온갖 진귀한 것들
이 주류를 이룬다. 하여 그들은 아미타여래좌상과 한 덩어리로 묶여 국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
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이들은 부피가 작은 진귀한 것들이라 신변보호를 위해 비공개로 묶여 있는데 이번에 모두 외
출을 나오면서 속세에 그 도도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다시 수국사로 돌아가면 어지간해
서는 만날 기회가 없을 것이므로 특별히 시간을 내어 찾았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은 아미타불 뱃속에서 나온 문서 중 유일하게 금속활자(金屬活字)로 인쇄된
경전이다.
1457년 세조가 의경세자의 명복을 빌고자 찍어낸 것으로 자신이 큰 글자의 자본을 직접 써서
주성한 정축자(丁丑字)로 경문을 찍었고 오가의 주해문은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로 찍었다.
그리고 책 끝에는 세조의 발문(發文)과 한명회, 조석문(曺錫文), 임원준(任元濬) 등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인 밀교대장(密敎大藏) 권9 - 보물 1580호

밀교대장은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 지은 '밀교대장', 그리고 1424년에 왜열도에 '밀교
대장경판'을 내렸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이 있으나 아쉽게도 관련 실물은 전하지 않았다. 그러
다가 바로 수국사 아미타불 뱃속에서 그 실체가 처음으로 발견되어 이 땅 유일의 밀교대장으
로 크게 추앙을 받고 있다. 그 자체로도 가치가 엄청난 존재로 1389년에 간행된 것으로 파악
되고 있다.


▲  일체여래 전신사리 보협진언(一切如來 全身舍利 寶篋眞言) - 보물 1580호

'기해년(己亥年, 1239년)'과 '시중(侍中) 최종준(崔宗峻)'의 이름이 적힌 다라니이다. 최종준
은 철원최씨 집안인 최유청(崔惟淸)의 손자로 고종(高宗) 때 15년간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
낸 사람인데, 1239년에 집안과 나라의 안녕을 위해 불상과 이 다라니를 조성했다.


▲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진본 권36 - 보물 1580호
11세기에 판각된 사간본(寺刊本)으로 여겨진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조성하면서
집어넣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표지가 떨어져 나가고 권수 일부가 훼손되었으나
그 외에는 잘 남아있다. 권수제는 경제(經題), 품제(品題)가 나눠져 있고
역자가 그 사이에 표시되어 모두 3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  원문(願文) - 보물 1580호
1389년에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개금한 내용과 시주자가 적혀있다.
<1389년 7월 22일에 개금을 시작, 각각 소요된 금과 니금의 양을 표시했음,
화주는 지식행(智識幸), 시주는 영성군부인(寧城郡夫人) 신씨>

▲  몽골에서 넘어온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 - 보물 1580호
14세기에 원나라(몽골) 보령사(普寧寺)에서 간행된 경전으로 일명 보령장(普寧藏)이라
불린다. 권17, 18, 88, 144, 145, 146 등 총 6권6첩이 발견되었는데, 권 17표지에
'주지 계상(戒祥)'이란 묵서가 있어 수국사로 넘어오기 전에 계상이란 승려가
가지고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  절반 이상이 헝클어진 원문(願文) - 보물 1580호
1562년 불상 중수 때 작성된 원문이다. 불상 개금에 니금 2돈이 소요되었다고
나와있으며 1차 중수(1389년)와 달리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나오지
않아 두 보살상은 사라지고 아미타불만 홀로 있었음을 알려준다.

▲  푸른 피부의 발원문(發願文) - 보물 1580호
1562년 불상 중수 때 시주자인 신사지(愼思智)의 발원문이다. 부모와 자손들 모두
정토(淨土)에서 다시 태어나 불법의 소리를 보고 들으며 칠보(七寶)와
안양(安養)의 나라에서 즐겁게 보내기를 소망하고 있다.

▲  불설장수 멸죄호제동자 다라니경(佛說長壽 滅罪護諸童子 多羅尼經)
- 보물 1580호

이름이 무려 14자에 이르는 이 경전은 간단히 줄여서 '장수경'이라 부른다. 석가여래가 문수
보살에게 알려준 일체 중생의 멸죄장수의 법을 적은 것으로 이 경을 독송하면 아픈 아이를 낫
게 하고, 죽은 사람을 위해 49일 이내에 이 경에 향을 사르고 공양하면 현세에서 장수하게 되
며 악도(惡道)의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한다.
서적 끝에 '복위(伏爲) 황제폐하 ~~ 억재(億載)'란 내용이 있어 13세기 정도에 몽골(원)에서
간행된 것으로 여겨지며, 뒷표지에 '성인시납(性仁施納)'이란 내용이 있는데, 성인은 심원사
승려로 1562년 불상 중수 때 많은 불교 서적을 시납했다.


▲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 보물 1580호
1539년에 황주 심원사에서 펴낸 것으로 1541년 불상을 중수했을 때 다시 인출했는데
당시 불상 중수를 담당했던 심원사의 성인이 이런 사실을 기록했다.

▲  약사유리광여래 본원공덕경(藥師琉璃光如來 本願功德經) - 보물 1580호
1528년 강남 봉은사에서 펴낸 판목을 1541년에 화주 법심(法心)이 심원사에서 인쇄한
것이다. 1562년 불상을 중수했을 때 희섬(熙暹)이 지장경과 이 약사경을 시납했다.

▲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뱃속에 넣었던 여러 조선 중기 직물들 - 보물 1580호

▲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뱃속에 넣었던 조선 중기 동경(銅鏡)과
빛깔이 고운 다양한 보자기들 - 보물 1580호

▲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뱃속에 넣었던 하얀 저고리(조선 중기) - 보물 1580호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을 끝으로 수국사의 찬란한 보물 구경은 마무리가 되었다.
수국사를 품은 봉산(烽山, 207.8m)까지 본글에 싹 담고자 했으나 내용이 너무 장대해지므로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이렇게 하여 수국사 5월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2년 11월 27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서울 도심의 상큼한 서쪽 뒷동산, 안산 나들이 (홍제천인공폭포, 연희숲속쉼터, 안산자락길, 안산메타세콰이어숲길)

서울 안산 (홍제천 인공폭포, 안산자락길, 메타세콰이어숲길)



'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안산 여름 나들이 '

안산 메타세콰이어 숲길

▲  안산 메타세콰이어 숲길

홍제천인공폭포 안산 잣나무숲길

▲  홍제천 인공폭포

▲  안산 잣나무숲길

 



 

여름 제국이 지독한 무더위로 천하만물을 들들 볶던 성하(盛夏)의 한복판에 후배 여인네
와 서대문구 안산을 찾았다.
보통 안산에 안길 때는 봉원사(奉元寺, ☞ 관련글 보기)나 독립문(獨立門)에서 올라갔으
나 이번에는 길을 달리 잡아 홍제천 인공폭포에서 시작했다. 이곳은 안산의 서북쪽 자락
으로 홍제천변에 자리해 있다.

서대문구의 동쪽 젖줄인 홍제천(弘濟川)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인왕산(仁
王山)이 사이좋게 빚은 하천이다. 지금이야 생물이 살아 숨 쉬는 착한 하천으로 있지만
오직 개발만 앞세우던 20세기 후반, 개발의 칼질에 서울의 다른 하천과 마찬가지로 시커
먼 하천으로 전락되어 세상을 향해 온갖 악취를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1999년 내부순환
로가 홍제천에 구축되면서 하천이 자주 마르는 현상까지 발생했다.
그렇게 인간들에게 제대로 만신창이가 된 홍제천은 2008년 이후 하천 정비사업으로 수질
을 개선시키고 꽃과 수풀을 잔뜩 심으면서 생물을 불러들이는 생태하천으로 다시금 살아
났다. 또한 지하수를 소환해 하천을 채우면서 이제는 물이 마를 날이 없으며, 하천 주변
에 산책로와 운동시설, 쉼터, 홍제천폭포, 홍제천 폭포마당 등을 닦아 지역 주민들의 상
큼한 명소이자 쉼터로 착하게 거듭났다.


▲  백련교 주변 홍제천과 그에게 씌워진 칼, 내부순환로
고가 형태로 지어진 내부순환로가 홍제천에 육중한 다리를 걸치고 있다.

▲  멀리서 바라본 홍제천 인공폭포
홍제천과 폭포 주변은 수질이 어느 정도 개선되고 수풀도 무성해지면서
물고기와 새들이 앞다투어 비빌 구석을 마련했다.



 

♠  홍제천과 안산의 새로운 명물, 홍제천 인공폭포

▲  홍제천폭포와 음악분수

홍제천 백련교와 홍연교 사이에는 서대문구의 새로운 명물로 애지중지되고 있는 홍제천 인공
폭포(이하 홍제천폭포)가 여름 제국의 염통을 건드린다.

이 폭포는 2008년부터 진행된 홍제천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2009년 2월에 짓기 시작해 2011년
에 완성을 보았다. 처음에는 백련교 옆에 있다 하여 '백련교폭포'라 하였으나 나중에 '홍제천
인공폭포'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곳은 안산과 홍제천이 만나는 유일한 곳으로 하천변에 20~30m 정도에 벼랑이 형성되어 있는
데, 그 벼랑을 활용해 높이 25m, 폭 60m에 장대한 폭포를 닦았다. 물줄기는 크게 3줄기로 굵
은 실타래마냥 물(지하수)을 뽑아내며 홍제천을 듬뿍 살찌운다.
비록 인공폭포긴 하지만 인공의 느낌이 거의 들지 않을 정도로 아주 감쪽같이 지어져 자연산
폭포로 착각해도 이상할 것은 없으며, 주변 풍경과도 잘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달달한
풍경을 자아낸다.

폭포 앞 하천에는 폭포를 수식하는 음악분수를 매복시켜 하루에 2번씩(12~13시, 17~18시) 1시
간 동안 음악에 맞춰 깜짝 율동을 부린다. 그리고 폭포 맞은편(동신병원 뒷쪽)에는 쉼터인 홍
제천 폭포마당을 2층으로 설치했고, 폭포 남쪽에는 안산으로 인도하는 징검다리와 물레방아를
닦아 조촐하게 볼거리를 선사한다.
홍제천폭포가 자연산 흉내를 제대로 내고 있지만 그래도 엄연한 인공폭포이다. 그러다보니 하
루 종일, 1년 내내 돌리기가 여의치가 않다. 그만큼 전기와 수도 등 유지 비용이 소요되기 때
문이다. 하여 겨울을 제외한 4월부터 10월까지만 폭포와 음악분수를 돌리며, 가동시간은 8시
~19시(6~8월은 20시까지, 비오는 날과 사정이 여의치 않은 날은 가동하지 않거나 단축 운영)
이다. 그 외에는 죽은 폭포로 지낸다.


▲  홍제천 폭포마당에서 바라본 홍제천폭포

이곳은 한때 지상파 방송 날씨예보에 자주 등장했던 곳이다. 서대문구가 야심 차게 지어놓기
는 했으나 문제는 홍보이다. 기껏 잘 지어놓은 것인데 겨우 동네 명소로만 머물면 얼마나 아
깝겠는가. 그래서 홍보에 이용한 것이 바로 지상파 방송사이다.


▲  서남쪽에서 바라본 홍제천폭포의 위엄

하얀 명주처럼 쏟아지는 폭포수 소리가 얼마나 장쾌한지 귀신이 놀라 도망칠 정도이며, 천하
를 쥐고 흔드는 여름 제국도 이곳만큼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니 이곳에 머물고 있는 한, 여름
을 잊어도 좋은 착한 납량처이다.


▲  홍제천 너머에 웬 벽지 산골이? 물레방앗간과 안산
홍제천폭포에서 안산으로 인도하는 숲길이 바로 저곳에 숨겨져 있다.

   ◀  홍제천 징검다리 (홍제천폭포 서남쪽)
잘 다듬어진 큼지막한 돌을 점점이 깔아놓아
정겹게 징검다리를 이루고 있다. 저 다리를 건
너 왼쪽(징검다리)으로 가면 물레방앗간과 안
산으로 이어지며, 오른쪽 나무데크길은 홍제천
동쪽 산책로이다.


▲  징검다리에서 바라본 홍제천폭포와 폭포마당 주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의 맑은 기운을 싣고 한강으로 유유히 흘러가는
홍제천은 오늘도 평화롭기 그지 없다.


홍제천폭포를 둘러보고 서남쪽으로 조금 가면 안산으로 인도하는 징검다리가 나온다. 이들은
홍제천을 정비하면서 닦은 것으로 초등학교 고학년 발걸음에 맞게 돌이 놓여져 있어 덤벙대지
만 않는다면 물에 빠질 위험은 거의 없다. 그리고 설사 빠진다고 해도 수심이 얕아서 그리 위
험하지는 않다.
징검다리는 내를 건너 물레방앗간 이전까지 이어져 있으며 그 길로 가야 안산의 품으로 들어
설 수 있다. 그리고 오른쪽 나무데크길은 홍제천 동쪽 산책로이다.

▲  물레방앗간과 안산으로 인도하는
하천변 징검다리

▲  징검다리가 끝나면 박석이 입혀진 길이
물레방앗간까지 펼쳐진다.

▲  장식물로 놓여진 연자방아

▲  홍제천 물레방아

징검다리를 건너면 박석이 깔린 길이 나오면서 물레방아와 연자방아 등이 자신들 좀 보고 가
라며 발길을 붙잡는다. 그들의 등장은 주변 숲과 어우러져 잠시나마 서울에서 머나먼 첩첩한
산골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을 선사하는데, 이들은 홍제천폭포를 닦으면서 지어진 것들로 비
록 고색의 때는 여물지 못했으나 안산 동쪽 자락에 있는 너와집과 함께 안산 속의 전통 민속
공간으로 소소하게 볼거리를 선사한다.

물레방아는 강원도 물레방아의 백미(白眉)로 추앙받는 정선군(旌善郡) 백전리 물레방아(19세
기에 지어짐)를 모델로 삼아 만든 것으로 물레방아 위에서 쉬지 않고 물이 떨어져 물레방아의
나태함을 경계하고 있다. 그 옆에는 물레방앗간이 있고, 연못과 연자방아, 장독대, 전통식 배
등이 놓여져 있는데, 이중 물레방아만 바쁘게 움직이고 있고, 나머지는 장식용으로 한가로운
여름 오후를 보낸다.


▲  물레방앗간과 전통식 배

20년도 채 익지 않은 방앗간 지붕에는 벌써부터 세월이 달아준 잡초가 무성하다. 그 오른쪽에
자리한 배는 옛날에 바다와 경강(京江, 한강)을 오가던 전통 배를 재현한 것으로 물레방아와
더불어 이곳의 장식물로 살아가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닻을 올리고 홍제천을 따라 당장이라
도 한강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홍제천이 배를 띄울만한 처지가 되지 못한다.

* 홍제천인공폭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170-181



 

♠  연희숲속쉼터와 잣나무숲길

▲  안산의 싱그러운 꽃밭, 연희숲속쉼터 허브정원

물레방아에서 개울을 옆구리에 낀 산길을 조금 오르면 안산의 꽃밭, 연희숲속쉼터 허브정원이
그윽한 허브향기와 시원스런 풍경을 내밀며 마중을 한다. 강동구(江東區)의 일자산(一字山)
허브천문공원과 더불어 서울에 대표적인 허브(Hub)공원으로 산비탈을 이용해 계단식 정원으로
닦여져 있다.

이곳 허브정원은 연희숲속쉼터의 일원으로 2010년에 조성되었다. 순 외래어 투성이인 허브식
물과 허브꽃들이 고운 미소를 머금고 유혹적인 허브향으로 사람들의 후각을 정화시켜주며, 그
런 식물들 사이로 산책로가 산뜻하게 닦여져 있다. 그리고 돌 모양 스피커 8개가 설치되어 있
는데, 여기서는 잔잔한 음악과 가요가 흘러나와 허브공원의 향연을 고조시킨다. 이 음악은 보
통 7시부터 19시까지(주말은 9시부터 19시까지) 운영한다. (운영시간은 변경될 수 있음)


▲  허브정원 아랫부분
애플민트와 파인애플민트, 초코민트, 골드레몬타임 등 귀에 익은
허브식물들이 서로 매력을 겨룬다.

▲  허브정원 윗부분
레몬밤과 에키네시아, 레몬타임, 야로우 등 귀에 그리 익숙치 않은
허브식물이 자라고 있다.

▲  밑에서 바라본 허브정원 윗부분

▲  '허브'라는 공동체로 똘똘 뭉친 허브식물들

▲  허브의 향연장을 거닐다 ~~
부드러운 곡선의 허브정원 윗쪽 산책로

▲  끝없이 이어진 허브정원 계단 산책로

▲  2개의 동그라미처럼 닦여진 허브밭
허브들의 햇님을 향한 마음의 표현일까?


▲  윗쪽에서 바라본 허브정원
허브정원 너머로 연희동과 홍은동 지역, 백련산(白蓮山)이 흐릿하게
바라보인다.

▲  연희숲속쉼터 산책로 (허브정원 윗쪽)

허브정원을 거느리고 있는 연희숲속쉼터는 안산 서북쪽 자락에 자리해 있다. 이곳 동네 이름
이 연희동(延禧洞)이라 '연희숲속쉼터'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쉼터 서쪽에는 허브정원이
곱게 입혀져 있고, 숲이 매우 짙어 풍경도 자못 일품이다. 특히 봄을 책임지는 왕벚나무와 산
벚나무, 수양벚나무 등이 0.5km 정도 벚꽃길을 이루고 있어 매년 4월에는 '안산 벚꽃축제'가
성황리에 열리며, 이곳 벚꽃축제는 서울 장안의 이름난 벚꽃축제로 격하게 손꼽힌다.
허나 봄에만 반짝 순백(純白)의 향연이 열릴 뿐, 그 외에는 푸른 잎으로 다른 나무와 그리 다
를 것이 없다. 그것이 벚꽃의 반짝 인생이다.

이곳은 서대문구에서 추진하는 지역 축제와 행사의 중심지로 벚꽃축제 외에도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벚꽃이 향연을 펼치는 봄에 행사가 집중되어 있으며, 가을에도 여러 행사가 열려 자
연과 문화의 향기를 선사한다.


▲  푸른 옷을 두룬 연희숲속쉼터 벚꽃길 (쉼터 숲길)

▲  드디어 만난 안산자락길 (연희숲속쉼터 윗쪽)

연희숲속쉼터에서 산길을 조금 오르면 서대문구 제일의 야심작, 안산자락길이 모습을 드러낸
다. 안산 허리를 따라 이어진 이 길은 이 땅에 흔한 산 둘레길로 '둘레길' 대신 '자락길'을
칭하고 있는 점이 이채로운데, 자락길의 총 길이는 7km로 2010년 10월부터 3단계 과정으로 닦
아 2013년 12월에 완성을 보았다.
총 사업비는 48억(서울시 지원 33억, 서대문구 15억)으로 노약자와 장애인, 휠체어나 유모차
의 통행 편의를 위해 전 구간을 무장애자락길(나무데크길, 마사토 포장길)로 싹 닦아놓은 점
이 특징이다. 하여 2016년 4월 한국관광공사에서 선정한 '쉽게 걸을 수 있는 편안한 여행길
10선'의 하나로 꼽혀 국민적인 둘레길로 격하게 칭송을 받기도 했다. 그만큼 걷기 편한 길이
라 이보다 편한 둘레길은 천하에 거의 없을 것이며, 비록 서울둘레길, 제주올레길, 지리산둘
레길처럼 전국적인 둘레길은 아니지만 서울 굴지의 둘레길로 인기와 위엄이 대단하다.
허나 편리를 너무 강조하다보니 산길의 진미인 흙길이 거의 없는 것이 단점이라 흙길을 원한
다면 일반 산길을 이용하거나 자락길 안쪽에 닦여진 초록숲길을 이용해야 되며, 자락길이 산
자락에 있기 때문에 시내에서 접근하려면 어느 정도 오르막길과 산길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
다.

안산자락길은 연희숲속쉼터 윗쪽, 자락길전망대, 흔들바위, 북카페, 천연마당쉼터, 안산천약
수터, 숲속무대, 메타세콰이어숲, 잣나무숲을 두루 거쳐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순환형
둘레길로 봉원사나 천연동 뜨란채아파트, 서대문독립공원 서쪽, 독립문파크빌아파트, 무악재
역, 풍진베이스타운아파트, 연희숲속쉼터, 서대문구청에서 접근하면 된다. 우리는 남쪽인 잣
나무숲길로 해서 메타세콰이어숲으로 이동했다.


▲  드디어 나타난 안산자락길 잣나무숲길



 

♠  안산자락길 잣나무숲길, 메타세콰이어숲길
▲  잣내음으로 그윽한 잣나무숲길

안산 잣나무숲은 연희숲속쉼터와 메타세콰이어 숲 사이에 자리해 있다. 숲 한복판에 안산자락
길이 유연히 흘러가 그림 같은 잣나무숲길을 이루고 있는데, 숲길 길이는 0.3km로 메타세콰이
어숲과 함께 안산을 꾸미면서 조성된 안산의 아름다운 얼굴이다.
잣내음과 솔내음이 가득하여 상쾌한 기분을 안겨주며, 잣나무들이 베푼 산바람이 비록 약하긴
하지만 속세의 기운과 여름의 기세를 조금씩 털어간다. 이 숲을 지나면 바로 메타세콰이어숲
길이 나타나 두 눈을 다시금 호강을 시킨다.


▲  삼삼하게 자라나 하늘을 가린 잣나무숲의 위엄

▲  잣나무와 초록 수풀이 어우러진 잣나무숲
숲길이 너무 고와서 0.3km(잣나무 숲길 길이)가 참으로 짧게만 느껴진다.

▲  자락길의 기둥 역할도 도맡은 잣나무들
잣나무의 생명을 위해 그들을 밀어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두었다. 그들의
줄기만큼 구멍을 내어 그들의 삶을 배려한 것이다.

▲  시원하게 뻗은 잣나무숲길

▲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 (잣나무숲길)
그저 보이는 것은 녹음(綠陰)에 깃든 나무들 뿐이다.

▲  허공에 붕 떠있는 잣나무숲길
길이 아닌 곳에 자락길을 내다보니 이런 구간도 적지 않다.

▲  잣나무숲길 남쪽 구간

서울에 대표적인 잣나무숲으로는 이곳 외에도 동작구 서달산 잣나무숲(☞ 관련글 보기)과 호
암산(虎巖山) 잣나무숲이 있다. 이들이 시골에 있었다면 감흥이 덜하겠지만 번잡함이 격하게
연상되는 서울 한복판에 고스란히 박혀 있으니 그 감흥은 클 수 밖에 없다. 그만큼 자연은 인
간에게 소중하다.


▲  잣나무숲길 남쪽 끝부분

▲  안산 서쪽 자락 메타세콰이어숲길 (북쪽 시작점)

잣나무숲길이 끝나면 바로 메타세콰이어숲길이 펼쳐진다. 그 잠깐 사이에 대자연이 그린 풍경
화가 색깔을 빼고는 싹 바뀌는 것이다.
이 숲길은 앞서 잣나무숲길과 더불어 안산의 아름다운 얼굴로 안산을 꾸밀 때 야무지게 닦여
졌다. 늘씬하게 솟아나 하늘을 가린 메타세콰이어의 위엄 앞에 잣나무숲보다 더욱 짙은 숲을
선사하고 있으며, 그 기세가 얼마나 당찬지 한낮임에도 꽤 어두울 정도이다.

메타세콰이어 숲은 안산 서쪽 자락과 북쪽 자락에 있는데 이곳은 서쪽 자락이다. 이들 사이를
안산자락길이 무장애 데크길을 내밀며 흘러간다. 흔히 메타세콰이어하면 전남 담양(潭陽)과
전북 순창(淳昌)의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생각하기 쉽지만 이제는 천하에 널리 보급되어 서울
에서도 그들의 시원스런 풍경을 누릴 수 있다. 이곳 외에도 난지도(蘭芝島) 하늘공원과 마곡
동(麻谷洞) 서남물재생센터공원에도 닦여져 있으니 말이다. 허나 숲으로 크게 조성된 것은 이
곳 안산 밖에 없으며, 나머지 2곳은 가로수길 수준이다.


▲  늘씬한 자태로 하늘을 훔친 안산 메타세콰이어숲길의 위엄
숲 사이로 안산자락길이 그들의 기운을 받으며 지그재그로 흘러간다.

▲  하늘과 조금씩 가까워지는 메타세콰이어숲길

안산 서쪽 자락 메타세콰이어숲길은 0.3km 거리로 우리네 인생만큼이나 매우 짧다. 게다가 숲
길이 워낙 고와 정처없는 속인들의 마음을 들었다 놓으니 체감거리는 그보다 짧다. 숲길 중간
에는 숲속무대라 불리는 너른 공간이 있는데, 무장애데크길을 닦으면서 조성된 것이다.

▲  점점 짙어지는 메타세콰이어숲길

▲  메타세콰이어숲길 속으로~~

▲  메타세콰이어숲이 얼마나 삼삼한지 한낮에도 어두울 지경이다.

▲  메타세콰이어숲 숲속무대

메타세콰이어숲 한복판에는 숲속무대가 있다. 목재로 높이 공간을 다져 허공에 떠있는 형태로
비록 무대를 칭하고는 있지만 그 이름과 달리 나그네의 포근한 쉼터로 탁자와 의자가 넉넉히
깔려 있어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과 행동식을 먹거나 쉬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사방이 메타세콰이어로 꽁꽁 감싸여 있어 깊은 숲속에 갇힌 듯한 기분을 선사하며, 숲내음과
산바람도 달콤하여 여기서만큼은 속세의 시름을 잊어도 좋을 것 같다.


▲  지그재그로 펼쳐진 메타세콰이어숲 안산자락길
각박한 경사의 눈치를 줄이고자 길을 지그재그로 펼쳐놓았다.
그래서 오르는 길이 그리 힘들지는 않다.

▲  지그재그 안산자락길 중간 부분 ①

▲  지그재그 안산자락길 중간 부분 ②

▲  지그재그 안산자락길 중간 부분 ③

▲  지그재그 안산자락길 윗쪽

▲  메타세콰이어숲길 남쪽 끝 지점

짧게만 느껴지는 메타세콰이어숲길을 지나면 무악정과 봉원사로 인도하는 숲길이 나온다. 기
분 같아서는 무악정을 거쳐 안산 정상 봉수대(무악산 동봉수대)까지 거침없이 내달리고 싶으
나 날씨가 전혀 내 마음 같지가 않은 폭염 앞에 정상에 대한 욕심을 쿨하게 버리고 봉원사로
내려갔다. 어차피 안산 정상은 무려 100번 넘게 찾은 곳이다. 게다가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
에 있어 언제든 찾을 수 있는 곳이니 굳이 여름 제국에 힘겹게 저항하며 오를 필요가 없다.

이렇게 하여 홍제천인공폭포, 안산자락길, 잣나무숲, 메타세콰이어숲을 겯드린 안산 여름 나
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2년 2월 6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다음(daum)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진천의 꿀명소를 거닐다 ~ 진천 농다리, 보련산 보탑사, 연곡리석비

진천 농다리, 보탑사



' 진천 농다리, 보탑사 봄맞이 나들이 '

진천 농다리
▲  진천 농다리

보탑사 3층목탑

보탑사 금동와불

▲  보탑사 3층목탑

▲  보탑사 금동와불

 



 

반년 가까이 천하를 주름잡던 겨울 제국과 그 겨울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려는 봄이 마
지막 자웅을 겨루던 3월 한복판에 일행들과 충북 진천을 찾았다.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하여 엄청난 출근 차량의 버벅거림을 간신히 뚫고 진천(鎭川) 땅
에 들어섰는데, 그동안 진천은 그저 지나가기만 했지 제대로 둘러본 적은 없었다. 하여
제일 먼저 진천을 찾아 그곳에 깃든 미답처(未踏處)를 몇 개라도 지워보기로 했다.

오전 10시 경, 문백면에 자리한 농다리에 도착했다. 아직은 아침에 가까운 시간이고 농
다리가 발을 담군 미호천에서 물연기도 살포시 피어올라 이른 아침의 청명한 기운이 고
스란히 남아있었다.



 

♠  천하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 - 진천 농다리(籠橋)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8호

▲  서쪽에서 바라본 농다리

진천 구산동리에는 천하에서 가장 늙은 돌다리로 추앙을 받는 농다리(농교)가 미호천(세금천)
에 발을 담구며 정정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농다리는 약 94m 길이의 돌다리로 28개의 마디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마디는 다리 교
각과 같은 존재로 길쭉한 마디 사이에 길이 1m 정도의 통돌을 1~2개 정도 얹혀 다리로 삼았는
데, 각 마디마다 통돌이 일직선으로 놓여있지 않고 아주 약간 구부러진 'S'자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크고 작은 돌<자석(紫石)이 많이 사용됨>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은 다음, 지네
모양처럼 길게 만들었는데, 석회 등을 바르지 않고 오로지 순 100% 돌로만 쌓았다.
교각 마디를 굵게 지었고 지역 사람들이 꾸준히 다리를 보살펴 다리가 크게 무너지는 등의 피
해는 없었다고 하며, 지금도 무난히 다리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농다리를 시기하던 대자연
이 1,000년 이상 비와 눈, 바람을 억수로 퍼부으며 다리를 헝클어뜨리려고 애를 썼지만 지금
까지 28칸의 마디 중 3칸을 지우고, 하천의 수심을 얕게 만들어 원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려워
진 정도가 전부이다. (예전에는 어른이 서서 다리 밑을 통과할 정도였으나 지금은 수심이 많
이 얕아짐;) 그 정도의 피해를 제외하면 거의 양호한 수준이며, 다리가 떠내려가거나 붕괴된
적은 없었다.
그저 자연석으로 구축된 아주 단순해 보이는 돌다리임에도 수십 년을 견디지 못하고 앉은뱅이
가 되버리는 요즘 건축물보다 더 단단하니 옛 사람들의 건축 실력과 농다리의 근성이 신기롭
고 두려울 따름이다.

그렇다면 이 다리는 언제 지어졌을까? 진천의 향토사를 다룬 상산지(常山誌)와 왜정(倭政) 때
이병연(李秉延)이 쓴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따르면 '고려 초 임장군(林將軍)이 축조
했다고'고 쓰여있다. 여기서 임장군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진천 지역의 유력한 세력가로
보이며 통행 편의를 위해 백성들을 동원하여 1,000년 전에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다리 이름이 농다리가 된 것은 단순히 길다는 뜻에 농(long)이 아니라 교각 마디마다 돌을 쌓
으면서 밟으면 움직이고 잡아 당기는 돌이 있어서 농다리라 불리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이 땅
에서 가장 늙은 돌다리이자 다른 돌다리와 완전히 구별되는 특이한 양식을 지니고 있으며, 건
강도 양호하여 고려 초 다리 건축을 연구하는데 아주 착한 자료가 되어준다.
특히 고려 후기 이전 돌다리가 거의 없는 실정에서 매우 희소가치가 높다. 허나 그럼에도 불
구하고 아직까지 지방문화재의 지위에 머물러 있으니 그 이유가 갸우뚱할 따름이다. 국가 지
정 보물이나 사적으로 삼아도 손색이 없는데 말이다.

시골 구석의 늙은 돌다리로 조용히 묻혀 지내던 농다리는 2,000년대 이후 진천군에서 격하게
띄워주면서 이제는 진천 제일의 명소이자 꿀단지로 크게 명성을 누리고 있다. 장대한 세월이
훔쳐간 마디 3칸을 복원하여 예전처럼 28칸으로 회복했으며, 다리 주변에 주차장과 쉼터, 미
르숲을 닦았다.
하여 주말과 휴일만 되면 농다리의 위엄을 보고자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며, 매년 5
월에는 농다리 일대에서 진천의 주요 축제인 '생거진천농다리축제'가 열린다.


▲  동쪽에서 바라본 농다리

농다리가 튼튼하긴 하나 돌로 닦여진 다리라 길이 꽤 울퉁불퉁하다. 게다가 마디(교각) 사이
에 통행을 위한 통돌을 1~2개 붙여놓은 것이 고작이라 반대 방향으로 가는 사람과 마주친다면
괜히 다리를 두고 서로 으르렁거리지 말고 먼저 쿨하게 양보하기 바란다.
그렇게 돌다리를 건너면 진천군청이 현대모비스와 자연환경국민신탁 등과 닦은 미르숲에 이른
다. 미르숲은 농다리 수식용으로 지어진 공원으로 천년정과 농암정, 인공폭포, 징검다리, 쉼
터, 야외음악당, 산길, 미르전망대 등이 닦여져 있으며, 여기서 고개를 하나 넘으면 바로 진
천의 대표적인 호수로 명성이 자자한 초평저수지(미호지)가 모습을 비춰 시간이 넉넉하면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기를 권한다. 다만 초평저수지는 덩치가 꽤 크기 때문에 전체를 둘러보
는 것은 좀 무리가 있으며, 농다리와 이웃한 서쪽 부분과 하늘다리만 둘러보면 충분하다.

▲  마디(교각) 사이에 걸린 2개의 통돌

▲  마디를 이어주는 좁은 통돌

▲  서로 비슷한 모습을 지닌 2개의 통돌

▲  농다리의 단잠을 깨우는 중부고속도로

농다리 서쪽에는 중부고속도로가 흐르고 있다. 통행 수요가 겁나게 많은 도로라 차량들의 질
주 본능 소리로 귀가 따가울 지경인데, 고속도로와 바로 이웃하고 있어 서울 방향(상행선)으
로 이동할 때, 잠시 오른쪽을 살펴보면 농다리가 눈인사를 건넬 것이다. 그렇다고 갓길에 아
예 바퀴를 접고 구경하지는 말자. 갓길은 긴급시를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  미호천의 물살이 혼돈을 이루고 있는 농다리 (천년정에서 바라본 모습)

▲  지네가 징그럽게 기어가는 듯한 모습의 농다리
(동쪽 윗쪽에서 바라본 모습)

▲  농다리를 쌓은 이들의 아련한 흔적, 임장수와 말의 발자국

농다리 동쪽에는 바위들이 주름선을 이루고 있는 조그만 계곡이 있다. 그 계곡에 붉은 피부의
화살표가 밑을 가르키고 있는데, 그곳에 임장수와 말의 발자국이라고 전하는 흔적이 서려있어
다음과 같은 전설을 살짝 귀띔해준다.

때는 고려 초 어느 날, 임장군이 농다리를 만들고자 큰 바위를 짊어지고 말을 탄 채, 용고개(
살고개)를 내려오고 있었다. 농다리에 거의 다 와 갈 무렵, 말이 바위 무게에 너무 지친 나머
지 잠깐 주춤하더니 그때 발을 디딘 바위가 움푹 들어가 말의 발자국이 생겼다. 하여 말이 움
직일 수 없게 되자 임장군이 바위를 든 채, 말에서 뛰어내리니 그가 발을 디딘 곳에도 장군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생겨났다고 한다.
물론 이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다. 하지만 임장군을 바위도 거뜬히 드는 괴력의 사나이로 꾸
밀 정도면 그에 대한 지역 사람들에 높은 추앙을 엿볼 수 있으며, 말이 지쳐 발자국이 생겼다
는 전설은 다리 축조가 그만큼 고단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또한 이들 흔적은 다리를 만드
는 과정(석재를 캐던 현장 정도)에서 생겨난 것으로 여겨진다.


▲  농다리의 신선한 양념, 1칸짜리 천년정(千年亭)
정자의 이름이 천년이 된 것은 별 이유 없다. 농다리가 1,000년 이상 숙성된
늙은 돌다리라 그를 기리고자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  미호천 산책로에서 바라본 농다리와 중부고속도로

▲  미호천 산책로에서 바라본 북쪽 징검다리

농다리에서 미호천을 따라 북쪽으로 산책로가 닦여져 있다.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바로 징
검다리에 이르게 되는데, 보통 농다리를 찾으면 농다리를 건너 징검다리로 원점회귀하는 코스
로 많이 둘러본다. 시간이 넉넉하면 여로(旅路)도 좀 살찌울 겸, 바로 이웃에 자리한 초평저
수지로 잠깐 넘어가도 되겠지만  우리는 진천부터 경북까지 둘러볼 곳을 많이 잡은 관계로 그
냥 징검다리로 돌아왔다.


▲  농다리와 징검다리를 이어주는 미호천 동쪽 산책로

▲  미호천 산책로에서 바라본 농다리와 중부고속도로

▲  21세기판 농다리? 농다리 북쪽에 닦여진 징검다리

징검다리는 미호천에 촘촘히 박힌 큰 돌로 이루어져 있다. 농다리 주변을 꾸미면서 닦은 다리
로 한참이나 선배인 농다리와 서로 경쟁하는 듯 하다. 허나 농다리의 위엄 앞에 이제 10~20년
이 갓 넘었을 징검다리가 어디 감히 이름과 위엄을 내밀겠는가. 그저 묵묵히 농다리를 보조하
는 역할로 그의 곁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  징검다리에서 바라본 농다리와 미호천

▲  서쪽에서 바라본 징검다리


* 농다리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산동리 601-32



 

♠  폐허에 옛 절터에 연꽃처럼 피어난 현대 사찰
~ 진천 보련산 보탑사(寶蓮山 寶塔寺)

농다리를 둘러보고 다리 서쪽에 자리한 농다리전시관도 살펴보려고 했으나 귀차니즘에 휩싸여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내던지고 진천읍내로 나왔다.
원래는 바로 보은(報恩) 땅으로 넘어가려고 했지만 문득 보탑사 3자가 스치듯 생각이 나 그곳
을 그날의 2번째 메뉴로 흔쾌히 정했다. 솔직히 농다리 하나만 보고 진천을 떠나기에는 다소
허전했지. 마치 50%가 부족한 느낌이랄까? 그래서 보탑사로 나머지 50%를 채우기로 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말에 따라 진첩읍내에서 뼈다귀해장국으로 점
심을 때우고 보탑사로 들어갔다. 읍내에서 그곳까지는 약 13km, 진천 지역에서도 매우 첩첩한
산골이자 벽지인 연곡리 골짜기를 굽이굽이 들어가 김유신(金庾信)장군 탄생지와 연곡저수지
(연곡제)를 거쳐 그 길(김유신길)의 끝에 자리한 보탑사에 도착했다.


▲  보탑사 느티나무 - 진천군 보호수 4호

보탑사에 이르니 제일 먼저 늙은 느티나무가 마중을 한다. 겨울 제국을 몰아내고자 봄의 해방
군이 지척에 왔건만 나무는 여전히 겨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봄이 더 분발하여
겨울로부터 천하를 속히 해방시켜야 되지만 겨울 제국 또한 만만치 않은 상대라 아직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보탑사 느티나무는 나이가 약 370년 정도(1982년 11월 보호수로 지정될 때 추정 나이가 327년
)로 높이 18m, 둘레 5.3m의 덩치를 지녔다. 아무리 먹어도 끝이 없는 세월과 비립동 마을(보
탑사 밑에 자리한 마을)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어엿하게 성장했는데, 그의 그늘을 지나면
보탑사의 정문인 천왕문이 두툼한 덩치를 내밀며 중생을 맞이한다. 그럼 여기서 잠시 보탑사
의 짧은 내력을 살펴보자.


▲  보탑사 천왕문(天王門)
천왕문 현판 대신 절 이름이 담긴 현판을 내걸었다.

▲  비파를 연주하는 흰 수염의 다문천왕
(多聞天王)과 칼을 다듬고 있는
지국천왕(持國天王)

▲  작은 용을 쥐어든 증장천왕(增長天王)과
보탑을 들고 있는 광목천왕(廣目天王)


▲  경내 바깥 주차장에서 바라본 보탑사의 위엄
왼쪽 2층 건물이 수련원, 오른쪽 석축 위에 자리한 건물이 범종각,
그리고 그들 사이로 3층 목탑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진천의 명산인 만뢰산(萬賴山, 611m) 남쪽 자락에는 20세기 말 현대 사찰인 보탑사가 우람하
게 둥지를 틀고 있다. 보탑사는 만뢰산을 보련산(寶蓮山)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절을 둘러
싼 도덕봉과 약수봉, 옥녀봉 등 만뢰산의 남쪽 9개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그것이
마치 1송이 연꽃이 피어난 모습처럼 아름답다 하여 유래된 것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연꽃
의 골짜기란 뜻의 연곡리(蓮谷里)가 되었다고 전한다.

현재 보탑사 자리에는 오래된 절터가 아련히 전해오고 있었다. 그 절은 백비로 유명한 연곡리
석비와 석탑을 남긴 채,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에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는데, 절의 이
름과 정보에 대해서는 전해오는 것이 없어 안따까움을 더한다. 그러다가 1988년 보탑사 창건
주인 지광(智光), 삼선포교원 주지인 묘순(妙純), 보탑사 주지가 된 능현(能現) 등 3명의 비
구니가 그 터를 매입해 보탑사를 세워 기백(幾百)년 이상 끊어진 이곳의 법등(法燈)을 다시
켰다.

보탑사란 이름은 법화경(法華經)에서 나온 것으로 석가여래의 법문을 다보여래(多寶如來)가
증명하고자 칠보탑(七寶塔)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비록 그것에 미치지는 못해도
보배탑(3층 목탑)을 세움으로써 모든 이들의 마음에 부처의 가르침을 심어주고 자비심으로 가
득 채워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지었다.
또한 그냥 절만 으리으리하게 닦으면 다소 식상할 수 있으니 통일 기원 도량임을 강조하여 나
름의 절의 성격과 존재의 이유를 부여했다. 이는 부근에 신라 무열왕(武烈王)과 문무왕(文武
王)을 도와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당나라까지 토벌한 김유신장군의 탄생지가 있기 때문이다.

1991년 우람한 규모의 3층 목탑을 세우고자 당시 이름난 한옥 전문가들로 구성된 고건축 문화
재팀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들이 현장을 살피고 건물 설계를 마친 다음 1992년 5월 공사에 들
어가 1996년 8월 완성을 보았으며, 이후 지장전과 영산전 등 여러 건물을 줄줄이 지어올려 절
의 빈 공간을 채워나갔고, 2014년에 불사가 최종 마무리되어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비록 옛 절터에 지었다고 하나 엄연한 현대 사찰로 법등이 켜진지는 이제 30여 년에 불과하다.
현대 사찰에 별로 관심이 없던 내가 보탑사를 몸소 찾은 것은 그곳이 어떻게 생긴 곳인가 궁
금하기도 했고, 국가 보물로 지정된 연곡리석비도 서려있어 그것도 같이 보고자 함이다.

넓게 자리한 경내(부지 규모는 약 13,223㎡)에는 이곳의 법당이자 자랑인 40m가 넘는 3층 목
탑을 비롯해 산신각, 삼소실, 지장전, 해행당, 영산전, 수련원, 천왕문 등 10여 동의 크고 작
은 건물이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연곡리 석비와 비지정문화재인 늙은 석탑 하나가 전
하고 있다.
또한 비구니 절이라 경내가 꽤 산뜻하고 정갈하며, 꽃과 나무를 많이 심어 왠만한 고급 정원
부럽지가 않다. 또한 금낭화와 앵초, 영산홍 등을 화단과 대형 화분에 심어놓아 4~5월에는 그
들의 봄꽃 향연이 펼쳐지며, 여름에는 연꽃의 향연도 펼쳐져 볼거리도 넉넉하다.
 
보탑사에서 눈여겨 볼 존재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연곡리석비와 오래된 석탑을 위시
해 3층 목탑과 목탑 내부(3층까지 관람 가능), 적조전에 봉안된 금빛 와불, 특이한 모양의 지
장전과 산신각, 영산전 정도이며, 봄에 왔다면 야생화를, 여름에 왔다면 연꽃의 향연을 구경
하고, 겨울 동짓날에 왔다면 팥죽과 7개월 묵은 수박을 꼭 먹어보자.

* 보탑사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483 (김유신길 641, ☎ 043-533-6865)


▲  와불이 봉안된 적조전(寂照殿)

적조전에는 부처가 열반에 들 때 반쯤 누운 모습을 재현한 금빛 와불(臥佛)이 봉안되어 있다.
건물 앞에는 동그란 존재가 놓여져 있는데, 그것은 부처의 발자국을 표현했다는 불족석(佛足
石)으로 비가 내릴 때 발자국 안에 물이 고이고 그 위에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면 안에 새겨진
물고기가 움직이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허나 나는 그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
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  적조전에 누워있는 와불의 위엄
와불 뒤에는 그 흔한 후불탱 대신 푸른 초원이 담긴 그림을 걸어두었다.

▲  연꽃 보개(寶蓋) 밑에서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그 유명한 백제의 반가사유상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 다소곳하게 앉은 그는
무슨 생각을 그리 골몰히 하고 있을까?

▲  보탑사 산신각(山神閣)

산신각은 그 흔한 기와집 대신 너와지붕을 얹힌 귀틀집 모양을 하고 있다. 귀틀집이 산악지방
에서 많이 지어진 집이라 산을 근거지로 삼은 산신(山神)의 보금자리인 산신각도 그렇게 지은
모양이다.


▲  산신각 산신탱
수염이 지긋한 산신 할배를 중심으로 동자, 호랑이, 소나무, 산, 폭포 등이
담겨져 있다.

▲  보탑사의 조촐한 여흥거리, 야생화 화단과 화분들
아직 겨울과 봄의 팽팽한 경계선이라 꽃들은 아직 피지도 못했다.

▲  삼소실(三笑室)
승려들의 생활, 참선 공간이다.

▲  양반가 모습의 해행당(解行堂)
주지를 비롯한 선임 승려들의 생활공간이다.


♠  보탑사 마무리 (연곡리석비, 영산전, 3층목탑)

▲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된 지장전(地藏殿)

지장전은 앞쪽에 3칸짜리 맞배지붕 기와집을 배치하고 뒷쪽은 돌로 다져 석굴(石窟)처럼 꾸민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 건물은 고구려 제20대 태왕(太王)으로 북경(北京)을 비롯한 하북(河北) 지역과 내몽골(지
두우), 경상북도까지 너른 영토를 닦았던 장수태왕(長壽太王)의 능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단순히 남북통일 뿐 아니라 북방의 옛 땅까지 모두 아우르는 대통일을 염원하고자 그리
만든 듯 싶다.


▲  동그란 지붕 밑에 자리한 보탑사 석조(샘터)
보련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듯, 석조에는 늘 물이 가득하다.

▲  고된 세월에 완전 떡이 되버린 옛 연곡리절터 석탑

석조 뒷쪽에는 옛 연곡리절터의 흔적인 석탑이 헝클어진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2중의 기단(
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얹힌 형태로 지금은 2층만 남아있는 상태이나 원래는 3층이나 5층
탑으로 여겨진다.
윗 기단은 석재가 떨어져 나간 것을 붙였으며, 1층과 2층 탑신은 그런데로 남아있으나 그 윗
쪽에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산산이 부셔진 머리장식의 잔재가 얹혀져 있어 그의 삶이
순탄치 못했음을 보여준다.
고려 때 탑으로 보이며, 현재 높이는 2.5m 정도로 그나마 보탑사가 수습해주었으니 망정이지
그 이전에는 지금보다 더 헝클어진 모습이었다.


▲  연곡리석비 보호각

▲  하얀 백지로 남아있는 연곡리석비(石碑) - 보물 404호

보탑사 경내 서쪽에는 이곳의 가장 늙은 보물인 연곡리석비가 보호각에 두텁게 감싸인 채 자
리하고 있다.

이 비석은 아무 것도 쓰이지 않은 이른바 백비(白碑)로 유명하다. 무슨 글자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비신(碑身, 빗돌)을 아무리 뚫어지라 바라봤지만 글씨는 커녕 세월이 그어놓은 주름선만
보일 뿐. 글씨 같은 것은 일절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백지로 있는 것일까? 아쉽게도 세
계 7대 불가사의(不可思議)보다 더 불가사의하게도 그 이유는 밝혀진 것이 없다. 처음부터 백
지로 세웠다는 설과 중간에 지워졌다는 설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데, 비석 조각 기법이 우수한
것으로 보아 애당초 백지용으로 세웠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비석을 세울 당시, 귀부와 이수가 완성되고 글씨를 새기려는 찰라 절이 불의의 이유(전
쟁이나 천재지변, 민란)로 파괴되면서 그 작업이 중단된 채, 버려졌을 가능성도 있고 글씨는
있었으나 절을 파괴한 자들이 그 글씨를 빡빡 밀어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허나 어느 것이 정
답인지는 석비만 알 뿐이나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알 도리가 없다.

비석 제일 밑바닥에는 네모난 바닥돌을 깔고, 머리에 귀갑(龜甲)을 갖춘 귀부(龜趺)를 두었는
데, 귀부 머리는 거북이 아닌 말 머리와 비슷해 보인다. 비석 머리에는 9마리 용이 새겨진 이
수(螭首)가 달려 있으며, 조각 기법이 매우 우수하다. 비신 높이는 2.13m로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비신의 윗부분과 용과 구름무늬가 새겨진 이수

▲  8각형을 이루고 있는 영산전(靈山殿)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 제자인 500나한의 거처이다. 이들 500나한은 신도들이
기증한 것으로 각자 다른 얼굴과 옷, 포즈를 취하며 바위처럼 새겨진
자리에 빼곡히 앉아있다.

▲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한 영산전 내부

▲  석가여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들, 500나한의 위엄

▲  정면에서 바라본 3층 목탑의 위엄

나보다 나이가 어린 보탑사가 짧은 시간에 진천 제일의 명소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바로 3층
목탑 때문이다.
보탑사의 야심작이자 자존심이며, 소중한 꿀단지인 3층 목탑은 1991년 이름난 한옥 전문가들
로 구성된 고건축 문화재팀에 의해 설계되어 1992년 5월에 공사를 시작, 1996년 8월에 완성을
본 20세기 최대의 목조 건물이다. 목탑 높이는 42.73m, 꼭대기 상륜부(相輪部)의 높이는 9.99
m로 총 높이는 52.72m에 달한다.

강원도에서 소나무를 가져와 못 1개도 쓰지 않은 전통 방식으로 지어졌으며, 무늬만 3층이 아
닌 실제 3층이다. 1층은 법당(금당)으로 석가여래와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불을 봉안했
고, 2층은 법보전(法寶殿)으로 석가여래의 가르침을 머금은 8만대장경 번역본과 윤장대, 한글
법화경을 새긴 돌판을 봉안하고 있으며, 3층은 미륵전(彌勒殿)으로 미륵불이 기거하고 있다.
그러니까 한 지붕 아래 3개의 성격을 지닌 건물을 담고 있는 셈이다.

지금까지 이 땅에 전해온 목탑 비슷한 건물<법주사 5층 팔상전(八相殿)이나 1983년 불에 타버
린 쌍봉사 3층 대웅전 등>은 무늬만 증충이지 속은 하나의 층이나 다름이 없었으나 보탑사 목
탑은 겉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처럼 3층을 지녔다. (층 중간에 2개의 숨겨진 층이 있음, 일종의
다락방 같은 것)
목탑의 정식 이름은 '보탑사 통일대탑'으로 너무 으리하고 화려하다는 눈총을 조금이나마 피
할 겸, 부근에 있는 김유신 탄생지에서 힌트를 얻어 통일 기원 목탑으로의 성격을 갖추고 있
다.

목탑 자리는 연꽃의 한 가운데 꽃술에 해당하는 지점이라고 하며, 당시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
은 경주 황룡사(皇龍寺) 목탑과 경주 남산 탑곡마애불상군(☞ 관련글 보기)을 참고하여 제작
했다고 한다. 2층과 3층에는 바깥에 마루 난간을 두었으나 위험 때문에 평소에는 문을 닫아
출입을 금하고 있다.

이곳에는 2가지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는데, 석가탄신일 전후하여 1층 약사불 앞에 사람들이
수박을 올린다. 그런데 그 수박을 며칠 사이에 처리하지 않고 그냥 두었다가 12월 동짓날, 팥
죽을 먹을 때 수박을 깨서 나눠먹는다. 그 기간이 최소 7개월이고, 수박을 따로 저장고에 둔
것도 아닌데도 수박은 전혀 상하지 않고 신선함 상태를 유지한다고 한다. 거짓말 같아 보이지
만 사실이다. 이미 여러 번 언론을 타 화제가 된 적이 있으며, 동짓날에 절을 찾은 이들에게
실제로 나눠준다.
또한 절 앞에 자리한 370년 묵은 느티나무에서 올라오는 바람이 바람개비처럼 부속 건물의 지
붕을 타고 북쪽으로 빠져나가도록 만들어 목탑 지붕에 눈이 쌓이는 것을 방지했다고 한다. 실
제로 목탑에는 눈이 발을 붙이지 못한다. 지어진 지 이제 20여 년 밖에 안된 어린 목탑이 벌
써부터 끼를 보이고 있으니 80~90년 정도 지나면 20세기 후반 흥미로운 건축물이라 하여 국사
나 한국미술사 서적에 절찬리에 실릴 것이다.

3층 꼭대기 부분에는 능엄경과 법화경 등 불교 경전과 절의 사적기(事蹟記)를 보관한 일종의
타임캡슐이 있는데, 불기(佛紀) 3,000년이 되는 서기 2,456년에 개봉한다고 한다. (내 생애에
는 어림도 없다는 소리;;) 또한 목탑 머리 부분에는 동자승 4명이 천상에서 줄을 매고 목탑으
로 내려오는 장면을 연출했다.

▲  1층 아미타불(阿彌陀佛)
그 좌우로 문수,보현보살이 시립해 있다.

▲  1층 석가여래3존상
그 좌우로 지장,관세음보살이 서 있다.

▲  1층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  1층 비로자나불

▲  1층에서 2,3층으로 올라가는 통로
실내화를 신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되며
계단은 2개가 있다.

▲  1999년 5월에 봉안된
석가여래후불탱


▲  2층 법보전 중앙에 자리한 윤장대(輪藏臺)

윤장대는 불경이나 불교 관련 서적을 넣어두던 책장이다. 그 윤장대를 돌리면 경전을 이해한
것과 같다고 홍보를 했는데, 이는 티벳불교의 경통과 비슷하다. 지금과 달리 옛날에는 글을
모르는 까막눈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영업을 하고자 윤장대를 적극 활용한
것이다.

▲  원(願) 성취대라 불리는 윤장대

▲  2층 법보전 내부

▲  3층 미륵전 미륵3존불

▲  뒷쪽에서 바라본 3층 목탑

목탑 내부는 햇살이 별로 들어오지 않아 은근히 시원했다. 하여 한여름에 왔다면 정말 조촐한
피서지가 따로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50분 가량 보탑사 경내를 둘러보고 다음 답사지로 길을 향했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은 여기서 쿨하게 선을 긋도록 하겠다. ~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2년 1월 30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다음(daum)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prev 1 2 3 4 5 ··· 12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