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117건

  1. 2014.12.07 관봉 정상에 우뚝 자리한 거대한 석불, 팔공산 갓바위 (선본사)
  2. 2014.11.28 늦가을 억새의 성지, 부산 승학산 억새 나들이
  3. 2014.03.23 3.1운동의 영원한 성지 ~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 (순국기념관)
  4. 2014.03.02 늦겨울 산사 나들이 ~ 대구 비슬산 용연사
  5. 2014.02.12 눈꽃의 향연 속으로 ~ 태백산 눈꽃 나들이 (당골, 눈꽃축제장, 석탄박물관)
  6. 2013.12.13 볼거리와 조망이 일품인 서울의 숨겨진 명산, 호암산 (석구상, 한우물, 칼바위...)
  7. 2013.02.13 한겨울 산사 나들이 ~ 영조 임금의 효심이 깃든 파주 고령산 보광사

관봉 정상에 우뚝 자리한 거대한 석불, 팔공산 갓바위 (선본사)

 


' 팔공산(八公山) 갓바위 '
팔공산 갓바위(관봉 석조여래좌상)
▲  갓바위(관봉 석조여래좌상)의 위엄

 


겨울의 제국(帝國)이 가을을 몰아내며 천하를 거의 접수하던 11월 끝 주말에 소원을 들어주기
로 명성이 자자한 팔공산 갓바위를 찾았다.
아침 일찍 서울강남고속터미널에서 대구행 일반고속버스를 타고 약 3시간 30분을 달려 서대구
고속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경산시내버스 708번을 타고 대구(大邱) 시내를 동서로 가르며
1시간 정도를 달려 경산시 하양읍(河陽邑)에 도착, 다시 갓바위로 올라가는 경산시내버스 803
번(경산역,중산동↔갓바위)을 타고 약 40분을 달려 비로소 갓바위 종점에 이르렀다.

갓바위 종점은 해발 600m 고지로 선본사 바로 밑이다. 시내버스는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지만
일반 수레들은 약 1km 밑에 닦여진 주차장에서 바퀴를 멈춰야 된다. 물론 종점까지 진입도 가
능하나 수레를 세울 공간이 여의치 않다.
이 땅의 주요 불교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 받는 갓바위와 가까운 곳이라 아랫 세상과 공기
부터가 확연히 틀리다. 청정한 기운이 감돌아 잡다한 번뇌에 유린당한 나의 머리와 마음을 깨
끗하게 정화시켜준다. 물론 속세로 나가면 정화된 번뇌는 다시금 나를 범할 것이다.

갓바위 종점에서 길은 2갈래로 갈라진다. 왼쪽 길은 갓바위, 오른쪽은 선본사로 통하는데, 선
본사는 종점 바로 윗쪽이라 접근은 편하다. 그곳은 갓바위를 보고 내려올 때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무척이나 보고싶은 갓바위로 길을 잡는다. 여기서 갓바위까지 공식적인 거리는 800m이나
체감거리는 그 2배 이상으로 넉넉잡아 30분 정도 걸린다. 게다가 산길이 좀 가파르고 계단 또
한 많아 오르기가 썩 만만치는 않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갓바위를 향한 중생(衆生)들의 발길
을 막지는 못한다.

갓바위를 향해 20분 정도 오르다 보면 칠성각과 요사가 있는 갓바위 하단(下段)에 이른다. 갓
바위를 비롯하여 선본사에서 갓바위로 오르는 길목에 건물들은 모두 선본사 소속인데, 그중에
서 아래쪽에 있는 요사와 칠성각 구역은 하단이라 부르며, 하단과 갓바위 중간의 대웅전 구역
은 중단(中段), 갓바위를 상단이라 부른다. 이들 하단과 중단은 갓바위를 관리하고 그를 찾아
온 중생들의 편의를 위해 조성되었다. 그리고 선본사 경내와 갓바위 일대를 구분 짓고자 편의
상 선본사는 '본절', 갓바위 일대는 '웃절'이라 부른다. 쉽게 풀이하면 선본사는 본점(本店),
갓바위는 일종의 지점(支店)이 된다. 하지만 본점보다는 지점이 훨씬 사람이 많으며 그로 인
하여 지점의 규모는 본점을 훨씬 능가한다.


▲  갓바위로 오르는 산길 (계단길 이전)

◀  갓바위로 오르는 계단길
오색영롱한 연등이 갓바위까지 대롱대롱
이어져 중생들이 그릇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인도한다.


♠  갓바위 하단 (칠성각, 요사)

▲  'ㄱ' 모습의 요사

갓바위 종점에서 20분 정도 오르면 갓바위 하단에 이른다. 오르는 길은 처음에는 경사가 완만하
지만 중간에 계단길로 돌변하면서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조금 급해진다. 허나 바람이 불면 날아
갈 정도의 허약 체질이 아닌 이상은 누구든 오를 수 있으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갓바위 하단은 1973년에 조성된 것으로 가파른 산자락에 터를 닦아 요사(寮舍)와 칠성각(七星閣
)을 지었다. 요사는 그런 경사에 지어진 탓에 3층이 되었으며, 칠성각과 맞닿은 제일 위층에는
공양간이 있는데, 갓바위를 찾은 중생에게 공양(供養)을 제공한다. 굳이 공양이 아니더라도 두
다리를 쉬며 이야기꽃도 피울 수 있는 휴식처의 역할도 하고 있으며, 갓바위 수요가 많은 탓에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시간은 변동될 수 있음)까지 언제든지 공양을 할 수 있다. (초파일과 대
학입시철, 기타 행사일에는 보통 새벽 1시까지 공양 가능)


▲  3가지의 이름과 용도를 지닌 칠성각(七星閣)

공양간 맞은편 높다란 기단(基壇) 위에는 칠성각이 자리해 있다. 이 건물은 1973년에 지어진 것
으로 1990년에 중수했다.
칠성각이라고 하지만 그건 건물 가운데인 어칸에만 해당되며, 건물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은 산신각(山神閣), 우측은 용왕각(龍王閣)이다. 건물은 하나인데, 각 칸마다 건물의 이름
을 달리한 특이한 구조이다. 허나 칠성(七星)이 그 건물의 중심이기 때문에 칠성각으로 불린다.

칠성각은 칠성신(七星神)이 그려진 칠성탱화(幀畵)가, 산신각에는 산신탱화와 산신상, 용왕각은
바다를 지키는 용왕의 탱화와 용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바다와 멀리 떨어진 산사(山寺)가 별로
연관도 없어보이는 용왕을 위한 공간을 둔 것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1802년 4월 초파일에 제작
된 200년 묵은 신중탱화(神衆幀畵)가 용왕탱 옆에 걸려있으나 건물 접근이 불가하여 보기가 힘
들며, 건물 밑에 촛불이 가득한 곳은 수각(水閣)이라 부른다.
칠성각 좌우로 돌로 만든 12지신상이 건물을 지키고 있고, 각기 모습이 다른 석등이 자리해 있
다. 예전에는 건물에 들어가 예불을 올렸지만 찾는 사람에 비해 건물이 너무 좁아 건물 접근을
통제하고 공양간 사이 뜨락에 넓게 예불 장소를 마련해 예불의 편의를 제공했다.
(매월 초순 음력 1~8일에만 삼성각을 개방함)

▲  칠성각 우측 계단에 늘어선 12지신상

▲  갓바위 하단에서 갓바위로
오르는 계단길


초를 피우는 공간에는 약 1,000개의 초가 앞다투어 자신을 불사르고 있고, 향을 피우는 공간에
는 향을 꽂을 공간이 없을 정도로 무수한 향이 연기를 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초와 향이 가득
한 것은 석가탄신일 외에는 정말 처음 본다. 향은 공짜로 이용할 수 있지만, 초는 기도비를 내
야 된다. 물론 그냥 가져가도 된다. 하지만 적지 않게 눈치가 보인다. 시주금은 정해진 것은 없
지만, 많으면 많을 수록 절에서 기뻐할 것이다. 실제로 갓바위에서 일하는 신도 아줌마들이 기
도비를 많이 내라고 종용한다는 내용이 선본사 홈페이지에 올라와 시끄러운 적도 있었다.

시간은 어느덧 점심시간을 지나 13시이다. 시장한 배를 달래고자 공양간에 발을 들이니 많은 이
들이 공양을 하고 있었고, 공양간 한쪽 구석에는 등산객과 참배객 등이 삼삼오오 앉아 쉬고 있
었다. 공양줄도 길어서 2분 정도 지나야 비로소 공양밥을 가져올 수 있었다. 갓바위를 든든한
후광으로 삼아 수입도 짭짤하므로 공양밥도 제법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밥을 보고 그야말
로 경악을 하고 말았다. 겨우 밥에 씨레기국, 그리고 아주 잘게 썰은 시어빠진 무김치가 전부였
기 때문이다. 예전에 경기도 이천 영월암(映月庵, ☞ 관련글 보러가기)에서 먹은 저녁공양은 반
찬이 무려 10가지에 이르렀고, 다른 절집들도 그런데로 괜찮게 나왔는데, 돈을 그야말로 삽으로
쓸어담는 곳에서 그들의 소중한 손님인 중생들에게 제공하는 공양은 그들만도 훨씬 못한 것이다.
그 돈은 다 어디에 쓰이는지 공양 예산이 기껏해야 얼마나 된다고 중생에게 쓰기가 아까운 것일
까? 그렇다고 상다리가 아작날 정도의 진수성찬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나
와야지 달랑 시어빠진 무김치는 뭐라 말인가..? 평소에도 공양밥이 저 지경으로 나오는지? 아니
면 그날의 메뉴가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공양밥에 대한 보다 세심한 배려와 관심이 필요하다
고 여겨진다. 그것이 바로 갓바위부처의 뜻일 것이다.

하지만 공양이 저 따위로 나온다고 해서 나에게 꿩 대신 닭을 고를 여유는 없었다. 우선은 시장
한 배를 달래줘야 되니 그거라도 말끔히 먹어치웠다.

이곳은 공양을 마치면 자신이 먹은 그릇과 쟁반, 수저는 씻어야된다. 씻는 곳에도 버젓히 불전
함이 놓여져 애타게 돈을 원한다. 설거지를 하고 그릇과 쟁반, 수저 자리에 놓고 갓바위로 다시
길을 재촉한다.


♠  갓바위 중단 (대웅전, 3층석탑)

▲  갓바위 대웅전(大雄殿)

하단에서 계단을 5분 정도 오르면 가파른 산자락에 터를 닦은 중단에 이른다. 이곳은 해발 750m
고지로 웃절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이 있는데,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2층 규모의 맞배지
붕 건물로 윗층은 대웅전, 아랫층은 갓바위를 관리하는 사무실이 있다.
이들 모두 근래에 조성되었으며, 조망(眺望)이 일품이라 선본사를 비롯하여 그곳을 둘러싼 산줄
기와 봉우리가 거침없이 바라보여 눈과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대웅전 뜰에는 석가탑을 닮은 3층석탑이 서 있으며, 높은 곳에 있어서 그런지 천상세계의 석탑
처럼 장엄하게 다가온다. 대웅전에는 자비로운 모습의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文殊
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대동한 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앞 3층석탑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3존불


▲  하단에서 중단 가는 길목에 자리한 애자모지장굴

대웅전으로 오르기 직전 오른쪽 바위에 조그만 굴이 있는데, 이를 애자모지장굴이라 그런다. 굴
안에는 유난히도 동자상이 많은데, 굴의 이름도 그렇고, 동자상도 그렇고, 아마도 어린 나이에
죽은 넋들을 달래는 공간인 듯 싶다.
동자상 외에도 다보탑과 부처상, 지장보살상, 금동불 등이 중간중간 자리를 채우고 있으며, 이
들은 모두 중생들이 손수 갖다놓은 것으로 굴 바로 앞에 저들을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한
불전함이 옥의 티처럼 놓여져 있다.


▲  대웅전 뒤쪽에서 바라본 능성재 산줄기
능성재에서 서쪽으로 가면 팔공산과 동화사로 이어지며, 동쪽은
은해사(銀海寺)와 백흥암(百興庵)으로 이어진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선본사 남쪽 산줄기

▲  중단에서 갓바위로 오르는 도중에 잠시 뒤를 돌아보다.

저 아래 까마득하게 보이는 절이 바로 선본사이다. 내가 저기서 여기까지 올라왔다니 거리는 고
작 800m 남짓인데, 정말 땅에서 하늘로 오른 것처럼 지극히 멀어 보인다. 갓바위는 수레가 오를
수 없기 대문에 저 밑에서 갓바위까지 케이블을 연결하여 물건을 실어 나른다.


♠  소원을 들어주기로 명성이 자자한 신라 후기 불상, 약사불의 성지(聖地)로
일컬어지는 갓바위(관봉 석조여래좌상) - 보물 431호

중단에서 5분 정도 오르면 관봉(冠峰, 852m) 정상인 갓바위이다. 선본사에서는 이곳을 상단이라
부르는데, 매서운 산바람이 석불을 희롱하는 800m 고지임에도 영험한 갓바위부처를 친견하러 구
름처럼 모여든 중생들로 갓바위의 열기는 태양처럼 뜨겁다. 이곳은 하늘과도 가깝고 주변이 모
두 눈 밑에 펼쳐진 산봉우리라 마치 수미산(須彌山) 정상의 부처의 세계나 하늘 세계에 들어선
기분이며, 아랫 세상과는 차원이 틀린 청정한 기운이 갓바위 주변을 진하게 맴돈다. 거의 신성
하고 거룩한 성지(聖地) 같은 갓바위부처는 근엄한 표정으로 힘들게 올라온 중생을 맞는다.

중생이 그들의 소망을 들이밀며 켜놓은 촛불은 주변의 산하(山河)를 능히 태우고도 남을 정도로
막대하며, 향의 냄새는 관봉 주변을 가득 맴돈다. 촛불에서 녹아 내린 촛농은 하루 몇 가마에 이
를 정도이고. 하루 동안 소비되는 향은 가히 천하 최대급이다. 휴일에는 수천 명이 찾아와 예를
올리며, 평일에는 적어도 수백 명이 다녀간다. 특히 대학입시철에는 자식의 대학 급제를 소망하
고자 수능일 한달 전부터 수험생 부모들이 몰려들어 관봉이 무너질 지경이며, 4월 초파일에도 발
디딜 틈이 없다.
상황이 이러니 이곳에 뿌려지는 시주금과 기도금은 그야말로 엄청나다. 성수기에는 최대 억단위
의 돈이 움직일 것이고, 비수기에도 최저 수백만 원이 갓바위 주변 불전함에 들어갈 것이다. 갓
바위를 배경으로 그렇게 돈을 쓸어담는 선본사가 중생들에게 제공하는 공양음식은 왜 저 모양인
지 그 많은 돈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사뭇 궁금할 따름이다.

지금은 갓바위부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지만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불상은 신라 후기
에 만들어진 이래 계속 그 자리에 있었지만 인근 사람들이나 찾아올 정도로 인지도는 낮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0년 팔공산 북쪽에서 제2석굴암이 발견되면서 팔공산 일대에 불교문화유산을
본격적으로 뒤적거리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1962년 갓바위부처가 발견되었는데, 그 당시 동
아일보를 비롯한 각종 신문들이 갓바위 발견을 특필로 다루었다.
그후 선본사에서 갓바위를 적극적으로 영험있는 석불로 홍보하면서 그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
어 지금에 이른 것이다. 지금처럼 성지화 된 것은 길어봐야 60년도 되지 않는다.

갓바위부처의 문화재청 지정 이름은 관봉석조여래좌상(冠峰石造如來坐像)이다. 갓바위란 이름은
불상이 머리 위에 쓰고 있는 넓적한 돌덩이가 갓을 닮아서 유래된 것으로 관봉이란 이름은 갓바
위가 있는 봉우리란 뜻이다. 여기서 관(冠)은 모자, 갓을 뜻한다. 그가 둥지를 튼 관봉은 팔공
산(八公山)의 동남쪽 봉우리로 대구와 경산의 경계선이다. 높이가 852m(어떤 자료에는 851m)에
이르며, 산 정상에 자리하여 조망 하나는 끝내준다.

갓바위의 정체는 약사불(藥師佛)이다. 그의 왼손에 약사불의 필수품인 약합(藥盒)이 들려져 있
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본사는 갓바위를 내세워 약사도량(藥師道場)임을 내세운다. 허나 불상의
정체에 대해서 일부에서는 미륵불(彌勒佛),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이 무슨 대수랴? 갓바위는 그런 쓰잘데기 없는 소모전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중생들의 소망
을 접수하고 처리하는 데에 바쁘다.

불상의 조성시기는 선본사의 주장에 따르면 7세기 중반이라고 한다.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수제
자인 의현대사(義玄大師)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고자 638년(선덕여왕 7년)에 조성했다는 것이다.
의현은 직접 불상을 제작했는데, 밤에는 학이 와서 그를 따스히 감싸주고, 낮에는 식량을 가져
와 먹여 살렸다는 거짓말이 전설로 전해온다. 허나 불상의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신라 후기인
8~9세기 석불로 보고 있다. 허나 그 장대한 세월에 비해 건강 상태는 제법 양호하여 나이에 비
해 많이 젊어보인다.

석불의 높이는 4m로 관봉에 있는 바위를 다듬어서 만든 것이다. 머리부터 그가 앉아있는 대좌(
臺座)까지 모두 하나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광배(光背)는 따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뒤
쪽에 병풍처럼 선 바위가 자연스럽게 광배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광배를 만들지 않았다.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큼직하다. 바로 그 위에 두께 15cm 정도의
얇은 돌이 모자처럼 얹혀져 있다. 물론 그 돌과 몸통은 하나의 돌이다. 얼굴은 미소는 전혀 찾
아볼 수 없는 석굴암(石窟庵) 본존불(本尊佛)보다 더 근엄하다. 위엄이 강하게 배여난 그 앞에
서는 감히 시선 조차 나누는 것도 두려울 정도로 나도 모르게 머리가 조아려진다.
얼굴의 양쪽 볼은 두툼하게 살이 있어 풍만해 보이며, 입술은 굳게 다물어 근엄함을 더욱 올려
준다. 눈은 살짝 감고 있고, 눈썹은 무지개처럼 곡선이 졌다. 그런 눈썹 사이로 둥그런 백호(白
毫)가 있다. 두 귀는 중생의 소원을 빠짐없이 듣기 위해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게 그어져 있다.

그의 어깨는 반듯하고 당당하며, 오른손을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을 아래로 향하고
있어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과 비슷한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이 수인은 석굴암 본존불과 비
슷하다. 왼손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왼쪽 발 부근에 손바닥을 위로 향하며 조그만 약합을 들
고 있다.
불상이 입은 옷은 통견(通肩)인데 두 팔을 거쳐 두 무릎을 덮고 대좌 아래로 흘러내렸으며, 가
슴 앞에는 속옷의 일종인 승가리(僧伽梨) 혹은 군의(裙衣)의 띠매듭이 보인다. 불상 뒷면에는
옷의 표현이 없고 그냥 평면이다. 그가 앉은 대좌는 불상에 비해 작다.

거의 성지나 다름이 없는 갓바위, 허나 찾아오는 길이 쉽지가 않다. 험한 산을 올라야 되고, 그
길 또한 속세살이처럼 가파르다. 갓바위 주변은 바위가 많고 낭떠러지가 많아 늘 산악사고가 도
사렸다. 또한 예전에는 불상 바로 앞에 마련된 공간에서 예를 올렸는데, 그 공간이 매우 좁았다.
그러다가 최근에 석불 전방에 80평의 넓은 공간을 닦았으며, 바닥에 돌을 깔고 주위에 난간을
둘렀다. 그리고 선본사에서 갓바위로 오르는 길을 정비하여 예전보다 많이 넓어졌으며, 계단과
철제 난간을 많이 보완했다. 그래서 예전에 비해 접근하기가 조금은 쉬워졌다.

석불 앞에 넓게 예불 공간을 마련하면서 석불 주변은 출입이 통제되어 그의 앞까지 다가설 수가
없게 되었다. 예불 장소와 석불 사이에는 초와 향을 피우는 장소가 좌우로 길게 마련되어 있으
며, 초를 팔고 그곳을 통제하는 신도 아줌마가 늘 자리를 지킨다. 불상 좌측 바위에는 중생이
붙여놓은 동전이 가득하며, 그 맞은편에 갓바위 주변을 관리하는 절 건물이 있다. 불상 우측에
는 청색을 띈 조그만 동종(銅鍾)이 있으며, 대구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다.


▲  갓바위부처 좌측 바위
중생이 붙여놓은 무수한 동전이 바위 여기저기에 자석처럼 붙어있다.

▲  갓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선본사 북쪽 산줄기와 남쪽 산줄기 사이로 갓바위지구(경산 쪽)가 보인다.


갓바위를 보러 멀리서 왔으니 인사는 해야겠지, 그래서 향을 피우고 초에 불을 심어 거기에 소
박한 소망을 하나 붙여 인사를 올린다. 이렇게 하면 소망이 접수되는 것일까? 지성으로 기도를
올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그 지성에 정도가 궁금하다. 정말 108배나 3,000배를 해야
소원이 접수가 되는 것인가? 그것도 아리송하다. 주변을 보니 방석을 펴고 염불을 외며 온종일
절을 올리는 이들이 많다.

초는 갓바위 좌측 건물에 있는데, 시주금을 내고 가져 가라고 쓰여 있다. 나는 가난한 중생이라
그냥 가져와서 사용했다. 설마 소망도 돈을 낸 만큼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아무리 영험하다고 해도 예불을 하고 싶지 않다. 부처가 언제부터 돈장사를 했단 말인가?
부디 소망이 처리되기를 간절히 염원하며 기도로 뜨거운 성스러운 현장 갓바위를 떠났다. 그가
정말 명성대로 무병장수를 비롯한 소원 하나는 꼭 들어주는지는 알 수 없다. 소망이 이루어진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절반만 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예 안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 소원
은 이루어지지 않았음ㅠㅠ) 하지만 그들의 소망을 모두 처리하는 것은 갓바위 부처에게도 은근
히 부담이 될 것이다. 괜히 선본사에서 요란하게 홍보한 탓에 갓바위만 피곤하게 된 것은 아닐
까 싶다.

참고로 믿거나 말거나 설화를 더 덧붙이자면 갓바위 밑동네인 와촌에 가뭄이 들면 팔공산 관봉(
갓바위)에 불을 지르고 새까맣게 태운다. 그러면 용이 갓바위를 씻고자 비를 내린다고 한다. 또
한 갓바위(양)와 불굴사(음)를 같은 날에 찾아 예불을 하면 소원성취를 한다고 한다. 왜냐면 풍
수지리적으로 갓바위는 팔공산의 양의 기운을 품고 있고, 불굴사(佛窟寺) 자리는 팔공산의 음의
기운을 품고 있는 요지라서 그렇다고 한다.


▲  갓바위를 뒤로하고 선본사로 내려가다.


♠  갓바위를 후광으로 든든하게 절을 꾸리는 오랜 절집
약사도량을 표방하는 ~ 팔공산 선본사(禪本寺)

갓바위 종점과 지척인 선본사는 팔공산에 둥지를 튼 오랜 절집의 하나이다. 조계종(曹溪宗) 소
속으로 갓바위를 든든한 밥줄로 삼아 절을 꾸리고 있는데, 갓바위로 올라가는 길목에 여러 건물
들은 모두 선본사 소속이며, 갓바위 역시 이곳에서 관리하고 있다. 선본사란 절 자체는 작지만
그 범위는 상당하며, 갓바위 지구와 구별하기 위해 선본사를 본절(본점), 갓바위를 웃절(지점)
이라 부른다. 허나 지점이 더 손님이 많고 수입이 훨씬 많다. 그리고 건물의 규모도 본점을 능
가한다. 그에 비해 본점은 인적이 드물다. 그래서 본점보다는 지점에 더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
고 있는 실정이다.

선본사는 신라 소지왕(炤知王) 13년인 491년에 극달화상(極達和尙)이 세웠다고 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증거를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극달화상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으며, 그 시절에는 신라에 고구려 불교가 전파되긴 했으나 서출지(書出池)의 전설처럼 고구려
불교는 한참 축출되던 시기이다. 상황이 그러하니 어찌 신라의 영역인 이곳에 절이 세워질 수
있겠는가? 참고로 산 너머의 대구 제일의 고찰 동화사(桐華寺)도 극달화상이 창건했다고 우기고
있다.

그럼 언제 창건되었을까? 경내와 주변에 흩어진 여러 석조유물(불상 대좌와 석등, 극락전 뒤쪽
의 오래된 석축)과 절 남쪽 노적봉에 있는 3층석탑을 통해 신라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3층석탑은 8세기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비록 절과 떨어져있지만 이곳과 관련이 있는 유
물로 여겨진다. 석조유물 역시 8~9세기 것으로 보이며, 절을 세운 극달이란 인물은 신라 후기에
활동했던 승려로 짐작된다.

창건 이후 조선 중기까지는 내력이 남아있지 않으며, 17세기에 들어와서 비로소 사적이 보인다.
우선 1614년에 수청(秀廳)이 절을 중수했다. 1766년 기성화상(箕成和尙)이 중건했으며, 1802년
(순조 2년)에 일암당(日庵堂)이 국성(國成) 등과 함께 신중탱화를 조성했다. 그 탱화는 현재 갓
바위 칠성각에 있다. 그 이후 1820년과 1877년에 중수했으며, 1970년 이후 갓바위 부근에 불전
을 조성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산신각과 요사, 선방 등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갓바위 지
구(웃절)에는 8~9동의 불전이 있다. 소장문화유산은 관봉 꼭대기의 갓바위부처(관봉석조여래좌
상)와 노적봉 부근의 3층석탑(경북지방유형문화재 115호)이 있으며, 불상의 대좌와 석등의 좌대
(座臺) 등 신라 후기 석조 유물이 여러 점 존재한다.

갓바위를 관리하는 본절이지만 오히려 갓바위의 그늘에 제대로 가려 경내는 썰렁하다. 허나 고
요하고 고즈넉한 산사의 분위기를 제대로 누릴 수 있으며, 사람들로 늘 북적거려 기도를 올리는
것도 쉽지 않은 갓바위와 달리 마음 편히 예불을 올릴 수 있다.

※ 갓바위, 선본사 찾아가기 (2014년 12월 기준)
① 하양 경유
* 대구 1호선 안심역(4번 출구)에서 55, 508, 518, 555, 708, 808, 814, 818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양터미널이나 하양초교 하차, 길 건너에서 갓바위행 803번 시내버스(30분 간격) 이용
* 동대구역에서 708번(역 맞은편 정류장) / 814, 818번(역 바로 앞) 시내버스를 타고 하양에서 
  803번으로 환승
* 갓바위 종점에서 선본사는 바로 보이며, 갓바위까지 걸어서 30분 소요
② 경산시내 경유
* 대구 2호선 영남대역(4번 출구)과 경산역(경부선)에서 803번 시내버스 이용
③ 대구 갓바위 경유
* 대구 1,2호선 반월당역(2,13번 출구), 대구역(대구역전우체국) 맞은편, 동대구역(북쪽 지하도
  정류장), 1호선 아양교역(2번 출구)에서 401번 시내버스를 타고 갓바위 종점 하차, 갓바위까
  지 등산 1시간 소요
* 주말과 휴일에는 401번 축소판 노선인 팔공2번 시내버스(갓바위↔아양교역↔동대구역 북쪽 지
  하도 정류장)가 추가 운행된다. (평일과 겨울에는 운행안함)
④ 승용차로 가는 경우
* 경부고속도로 → 경산나들목을 나와서 하양 방면 → 금락4거리에서 우회전 → 동서교차로에서
  와촌 방면(한사들길) 좌회전 → 동강교차로에서 갓바위 방면 좌회전 → 신한교차로에서 우회
  전 → 갓바위 주차장
* 포항대구고속도로 → 청통와촌나들목을 나와서 하양방면 → 동강교차로에서 우회전 → 신한교
  차로에서 우회전 → 갓바위 주차장
* 대구시내 → 영천방면 4번 국도 → 동서교차로에서 와촌 방면(한사들길) 좌회전 → 동강교차
  로에서 좌회전 → 신한교차로에서 우회전 → 갓바위 주차장

★ 갓바위, 선본사 관람정보 (2014년 11월 기준)
* 갓바위 지구(경산)에 넓은 주차장이 있다. (주차비 있음)
* 갓바위까지 걷는 시간을 줄이고 싶다면 경산 쪽을 추천한다.
* 매년 10월에는 선본사와 갓바위 주차장 일대에서 '갓바위 소원성취 축제'가 열린다. 소원기원
  제와 산사음악회, 다례봉행, 법회, 민속놀이와 전통체험, 다례봉행, 승무공연, 연등만들기 등
  의 프로그램이 있으며, 보통 3일 일정으로 진행된다.
* 선본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 587
 (선본사 종무소 ☎ 053-851-1868, 중단 종무소 ☎ 053-853-9877, 갓바위 ☎ 053-851-1869)

* 선본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아래서 바라본 선본사 선정루(禪定樓)

경내로 들어서려면 선정루의 아랫도리를 지나야
된다.
이 건물은 가파른 언덕에 지은 것으로 자연히 3
층을 이루고 있는데, 아래층에는 부처의 경호원
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있으며, 건물 위쪽은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세지가 담긴 사물(四
物, 범종, 운판, 법고, 목어)의 보금자리로 종
각의 역할을 한다. 이 건물은 1988년에 지어졌
으며, 그 이전에는 계단만 덩그러니 있었다.

▲  선정루의 측면

 


▲  청기와가 입혀진 선본사 극락전(極樂殿)

선정루를 올라서면 극락전 앞뜰이다. 좌우로 종무소와 공양간이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극락전
좌측에는 조촐한 모습의 산신각이 있다.

극락전은 선본사의 법당으로 1985년에 지어졌다. 불단에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 아미타불
(阿彌陀佛)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로 대동하고 앉아 있으며, 뒤쪽에 후불탱화가 든든하
게 자리해 있다. 후불탱화 외에 신중탱화와 관음보살도, 문수보살도와 보현보살도 등이 내부를
수식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1987년에 제작되었다. 다른 불전과 달리 푸른 기와가 입혀져 있
어 단연 돋보인다.

▲  종무소(宗務所)

▲  공양간을 갖춘 선방(禪房)


▲  갓바위와 달리 자애로운 모습의 극락전 아미타3존불

▲  극락전 계단 우측의 석등 아랫도리

▲  극락전 계단 좌측의 석등 아랫도리

극락전 계단 좌우에 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석등의 아랫도리가 있다. 윗도리는 장대한 세월의 거
친 흐름 속에 휩쓸려 사라지고 간신히 좌대(座臺)라 불리는 아랫도리만 간신히 남아 신라 석등
의 아름다움과 선본사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기단에는 연꽃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
연꽃의 향기가 아련히 풍기는 듯 하다.


▲  단촐한 모습의 산신각(山神閣)

극락전 좌측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단촐한 크기의 산신각이 있다. 예전에는 산령각(山靈閣)
이라 불렸으며 지금의 건물은 1985년에 새로 지었다. 내부에는 산신탱과 독성탱이 나란히 자리
를 지키고 있으며, 건물 왼쪽 벽화에는 조선 철종(哲宗) 때 효성이 지극했던 도효자(都孝子)가
어머니가 원하는 홍시를 구하고자 호랑이를 타고 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니 살펴보기 바란다.


▲  산신탱(왼쪽)과 독성탱(오른쪽)

▲  저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서로를 등진 석불과 동자상,
이제는 제발 화해를 하고 서로를 챙겨주면 좋지 않을까?


선본사는 갓바위와 달리 관람이 금방 마무리되었다. 종점으로 나오니 속세로 나가는 803번 시내
버스가 막 중생을 태우고 있었다. 다음 차를 탈까하다가 선본사에 더 이상의 미련이 없어 그 차
를 타고 아비규환의 속세로 내려갔다.
갓바위로 들어올 때와 달리 하양을 지나 경산역에서 내렸으며, 경산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무궁
화호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이렇게 하여 갓바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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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억새의 성지, 부산 승학산 억새 나들이

 


' 부산 승학산(乘鶴山) 억새 나들이 '

▲  억새밭 너머로 보이는 승학산 정상

 


늦가을이 한참 절정을 누리던 10월 끝 주말에 오랜만에 부산(釜山)을 찾았다. 경북 안동과 의
성(義城) 지역을 답사하고 오후 늦게 부산으로 내려가 광안동(廣安洞) 선배 집에 여장을 풀고
매년 10월 말에 광안리해수욕장과 광안대교에서 열리는 부산불꽃축제를 구경했다.
광안리 해변으로 나가서 구경하려고 했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거
친 물결을 뚫고 나가기 힘들 것 같아서 그냥 집(빌라 5층)에서 구경을 했지. 집에서 해변까지
는 1km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라 주변 빌라들이 시야를 좀 방해해서 그렇지 보일 것은 거의 다
보인다.
그렇게 불꽃축제를 구경하고 곡차(穀茶) 1잔을 겯드리며 달이 기울도록 회포를 풀다가 다음날
10시 스르륵 잠이 깨었다. 12시에 간단히 점심을 먹고 어디를 갈까 궁리하다가 철이 철인만큼
억새의 향연을 보고자 억새의 주요 성지(聖地)인 승학산으로 길을 향했다.

광안역에서 부산좌석버스 1001번(청강리↔하단,동아대)을 타고 부산 도심을 가로질러 하단 동
아대입구에서 발을 내린다. 시내에서 승학산으로 오르는 길이 여럿 있지만 제일 쉬운 길은 구
덕꽃마을에서 오르는 것이고, 가장 가파른 길은 동아대에서 오르는 것이다. 허나 꽃마을 코스
는 거리가 긴 반면, 동아대 코스는 가파른 만큼 코스가 짧고 굵직하다.

동아대(東亞大)는 승학산 서쪽 자락에 터를 닦은 학교라 경사가 좀 급하다. 학교 정문에서 가
장 위쪽인 한림생활관까지는 거의 해발 60~70m 차이가 나면서 벌써부터 숨이 차려고 한다. 시
내와 살을 맞대고 있는 학교의 아랫부분과 승학산 숲과 이웃한 윗부분과는 정말 공기도, 온도
도 확연히 틀린 것 같다. 만약 전공/교양수업이 윗부분에서 주로 이루어진다면 학생들은 정말
고역이겠지. 허나 다행히도 하단역에서 교내 공과대학까지 사하구 마을버스 10번이 10분 내외
간격으로 다녀주어 학생들에게 그야말로 한줄기 빛이 되어 준다.

주말이라 썰렁한 동아대 경내를 가로질러 한림생활관에 이르니 학군단 건물 뒤로 산길이 보인
다. 여기는 대략 해발 170m고지로 그 길로 접어들면서 비로소 승학산의 품으로 들어서게 되며,
동아대와 사하구 일대, 남해바다가 훤히 두 눈에 박힌다.


♠  승학산 등산 (동아대에서 정상까지)
`
▲  승학산 등산로 (동아대 방면)

동아대를 벗어나 10분 정도 오르니 능선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승학산 능선의
가장 서쪽 봉우리(해발 210m)가 나오고, 동쪽으로 가면 승학산이다. 갈림길 주변에는 어느 산악
회에서 행사를 요란하게 벌리고 있어 꽤나 번잡했다.

승학산으로 가는 산길은 동아대 만큼은 아니지만 가파르기는 마찬가지다. 힘들긴 하지만 등산이
다 그런거 아니겠는가? <그래도 북한산(삼각산), 관악산, 금정산보다는 애교 수준임> 바람에 흔
들리는 억새를 꿈꾸며, 노릇노릇 익어가는 단풍을 구경하며, 산 아래 펼쳐진 천하를 관망하며,
그렇게 산에 임하면 금세 승학산의 서쪽 봉우리에 이른다. 여기는 약 400m 고지이다.


▲  승학산 서쪽 봉우리에서 굽어본 천하 (1)
엄궁동과 사상(沙上)공단, 낙동강

▲  승학산 서쪽 봉우리에서 굽어본 천하 (2)
사하구(하단, 괴정, 감천, 신평)와 을숙도, 남해바다가 보인다.

▲  승학산 서쪽 봉우리에서 굽어본 천하 (3)
- 낙동강 위에 길게 누운 을숙도(乙淑島)
섬 가운데로 낙동강하구둑이 무심히 옥의 티를 내며 지나간다.

▲  승학산 서쪽 봉우리에서 굽어본 천하 (4)
사하구(괴정동, 감천동) 지역

▲  세모처럼 솟은 저 봉우리가 승학산 정상이다.
정상 서쪽 봉우리에서 정상까지는 넉넉히 20분 정도 잡으면 된다.

▲  정상으로 오르면서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
정상 서쪽 봉우리가 보인다.

▲  승학산 정상(496m) 표석

동아대 입구를 출발하여 쉬엄쉬엄 오른 끝에 드디어 승학산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다른 산
과 마찬가지로 산의 이름과 해발이 쓰인 표석이 세워져 있는데, 실제 정상은 표석에서 동쪽으로
10m 정도 떨어진 곳이다.

승학산은 부산 본토 서남쪽에 솟아난 산으로 해발 496m이다. 산의 이름은 고려 후기에 무학대사
(無學大師)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산세를 살폈는데, 이곳의 산세가 준엄하고 기세가 대단해 마치
학이 나는 듯하다 하여 학을 탄다는 뜻의 승학산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산세가 대단한 건 사실이다.

이 산은 부산에서 억새 명소로 매우 유명하다. 정상 동쪽 제석골에 수만 평에 달하는 억새밭(억
새군락)이 장엄하게 깔려 있는데, 가을에 아주 장관을 이루며, 강원도 정선(旌善) 민둥산의 억
새밭과 비교하여 전혀 손색이 없다. 또한 억새가 바람에 따라 흔들릴 때 그 특유의 바람 스치는
소리는 속세에 오염된 청각을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다.

부산 도심에는 대도시임에도 승학산이나 구덕산처럼 400~500m급 산이 즐비해 산을 타다보면 정
말 강원도나 내륙 산간 지역으로 순간이동을 한 기분이다. 게다가 이렇게 너른 억새밭까지 있으
니 이는 하늘이 바다와 더불어 부산에 내린 크나큰 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승학산의 이름 3자가 부산에서만 알 정도로 인지도가 낮다는 것이다.

승학산은 동쪽으로 구덕산(九德山, 565m), 시약산(時藥山, 523m)과 이어져 있으며, 등산은 동아
대학교와 구덕꽃마을, 사하구청 북쪽 제석골(제석골 산림공원)에서 올라가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그 외에 동네 주민들이 살짝 이용하는 소소한 등산로가 여럿 있으며, 동아대에서 정상을 찍고
구덕꽃마을까지는 2시간 정도 걸린다. 거기서 욕심을 더 내서 엄광산과 구봉산을 거쳐 대청공원
(민주공원)이나 수정산, 동구까지 산을 탈 수 있다.

※ 승학산 찾아가기 (2014년 11월 기준)
① 동아대 : 부산1호선 하단역 9번 출구에서 사
하구마을버스 10번을 타고 동아대 공대2호관에
서 하차, 한림생활관을 지나면 바로 승학산의
품이다. 정상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림
② 당리동(제석골) : 부산1호선 당리역(사하구
청) 3번 출구에서 사하구마을버스 2-1번을 타고
동원베네스트2차아파트 종점에서 하차
③ 구덕꽃마을 : 부산1호선 서대신역 4번 출구
에서 구덕운동장 방면으로 100m 정도 걸으면 마
을버스 정류장이 있다. 거기서 서구마을버스 1
번을 타고 구덕꽃마을 종점 하차. 거기서 서쪽
길로 오르면 구덕산과 승학산으로 이어진다.
* 소재지 -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동, 당리동
/ 사상구 엄궁동
 

◀  사하구청에서 승학산 정상에 심은
새천년미래웅비사하(千年未來雄飛沙下) 표석


▲  승학산 정상에서 바라본 동쪽 능선
저 초원 같이 넓은 곳이 바로 승학산 억새밭(군락)이다.


♠  억새의 성지, 승학산 억새밭

▲  승학산 억새밭을 거닐다

악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10분 정도 가면 이곳의 명물인 억새밭(억새군락)에 이른다. 대장관을
이루며 능선에 드넓게 터를 닦은 억새밭은 멀리서 보면 양이나 말이 풀을 뜯는 초원처럼 보인다.
산바람과 바닷바람이 어우러진 이곳 억새는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내는 바람 스치는
소리가 청각을 제대로 정화시킨다. 겉으로 보면 약해 보이지만 군락을 이룬 억새는 아무리 강한
바람이 불고 비가 와도 강인한 협동심을 발휘하며 그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지키는 강인한 존재
이다. 흔히 억새와 갈대를 햇갈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둘이 생긴 모습은 비슷하다. 허나 갈대는
물가에 자라는 존재이고, 억새는 물과 거리가 먼 곳에 사는 존재이다.

넓은 억새밭 가운데에 전망대를 두어 천하를 굽어볼 수 있게 했는데, 조망(眺望)이 가히 천하(
天下) 일품이다. 억새밭은 억새의 보호를 위해 지정된 길 외에는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니 괜히
들어가서 억새와 사람들의 눈초리를 받지 않도록 한다.


▲  산등성이를 가득 메운 억새밭의 위엄

▲  억새밭 사이에 난 산책로
억새의 격한 환영(?)을 받으며 산책로를 거닌다.

▲  억새밭 너머로 승학산 정상이 보인다 ▼


▲  억새밭 한쪽에 마련된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 돌탑
억새밭을 찾은 속인들이 조그만 소망을 빌며 쌓은 돌이 모이고 모여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  억새밭 너머로 승학산 동쪽 줄기와 구덕산이 보인다.
하늘은 당장이라도 비를 투하할 기세로 일그러진 인상을 보이고 있다.

▲  억새의 즐거운 가을 향연

▲  비탈진 억새밭 너머로 사하구 지역이 바라보인다. (바로 밑이 제석골)

▲  시간 도둑이 따로 없는 억새밭 - 돌아서기 싫은 발길을
억지로 잡아 떼며 억새밭과 작별을 고한다.

▲  구덕산을 가리고 선 승학산 동쪽 봉우리
해발 487m로 구덕산의 서쪽 봉우리이기도 하다.


♠  승학산 마무리

▲  검게 그을려진 구름과 안개 사이로 사상구 지역이 흐릿하게 보인다.

▲  승학산 동쪽 봉우리를 넘다 - 저 너머로 보이는 산은 구덕산

승학산 억새밭을 넘으면 수레가 들어올 수 있는 쉼터가 나오는데 여기서 동쪽으로 가는 길은 2
개이다. 하나는 동쪽 봉우리(구덕산 서쪽 봉우리)를 직접 넘는 것, 다른 하나는 봉우리 허리에
둘러진 길을 가는 것이다. 후자는 길이 포장되어 있고, 큰 오르막이 없어 편하긴 하나, 많이 돌
아가야 된다. 반면 전자는 산을 직접 넘어야 되지만 그 산을 넘으면 바로 구덕산 서쪽으로 이어
진다. 그래서 우리는 우회길 대신 산을 넘는 편을 택했다. 어차피 지금까지 오른 승학산 정상이
나 서쪽 봉우리보다는 완만하며, 비에 젖은 산길을 10분 정도 오르니 봉우리 정상이다.

봉우리를 넘어 동쪽으로 내려가면 구덕산 아래에 이르는데,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구덕꽃마을,
오른쪽 오르막길이 구덕산(九德山, 565m) 정상, 오른쪽 내리막 길이 억새밭으로 가는 허리길이
다. 구덕산 정상은 군사/방송 관련 시설이 자리해 있어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  구덕꽃마을로 내려가는 길

인생은 올라갈 때가 있으면, 반드시 내려갈 때가 있다. 지금까지 승악산 능선을 타며 서쪽 봉우
리와 승학산 정상, 동쪽 봉우리까지 신나게 올랐으니 이제는 슬슬 내려가야 된다. 더 이상 올라
갈 곳도 없다.

내려가는 길은 봉우리 허리길과 구덕꽃마을 방면 길이 있는데, 꽃마을까지는 1차선 크기의 길이
포장되어 있어 통행에 불편은 없다. 구덕산 정상에 자리한 군/방송 시설 때문에 길을 포장한 것
이다.

여기서 꽃마을까지는 대략 2km로 순전히 내리막길이기 때문에 내리막 가속을 덧붙이면 금세 내
려간다. 길 주변에는 울긋불긋 타오른 단풍과 푸른 옷을 걸친 나무들이 앞에서는 환한 모습으로
뒤에서는 장차 다가올 겨울 제국(帝國)을 걱정하며 시름에 잠겨 있다. 이제 올해도 다 갔구나!!
좀 있으면 강제로 1살이 얹혀질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시름 속에 들어가 버린다. 새해가 시
작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연말이 코앞이니 세월이란 참 유수처럼 빠르다는 말이 허언은 아
닌 듯 하다. 고려 후기 문신인 우탁(禹倬)의 탄로가(嘆老歌)처럼 한 손에 막대를 잡고, 다른 한
손에 가시를 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백발은 막대로 막으려고 했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온다는 시가 점점 실감이 난다.

꽃마을로 열심히 내려가고 있으려니 구덕문화공원을 알리는 이정표가 오른쪽에 나온다. 이 공원
에 대한 정보가 나에게는 없던 터라 근래에 만든 공원이겠지 싶어 그냥 직진을 고수했는데, 꽃
마을이 슬슬 모습을 보이면서 강제로 구덕문화공원이 내 앞에 나타난다. 아까 전 이정표는 공원
으로 바로 내려가는 지름길 계단이었던 것이다. 계단으로 가나 포장 길로 가나 어차피 구덕문화
공원은 꼭 거쳐야 된다.


▲  구덕문화공원(九德文化公園) 목석원예관

구덕문화공원은 꽃마을 서쪽, 구덕산 북쪽 자락에 터를 닦은 공원이다. 2004년 11월 교육역사관
과 다목적관 개관을 시작으로 문을 연 이 공원은 2005년 11월 목석원예관을 열었고, 2006년에는
민속생활관과 다목적광장을 만들었다. 특히 2005년 11월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
회의 때는 참가국 우두머리의 부인들이 방문한 곳이기도 하며, 구덕산과 승학산을 후광으로 한
도심 속의 자연/문화공간으로 정감이 가득 일어나는 곳이다.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싱그러운 공간으로 나무가 무성하며, 공원 곳곳에 장독대와 석탑, 석등
, 문인석 등의 석인을 비롯하여 여러 조각물을 배치하는 등, 아기자기하게 꾸며 소소하게 볼거
리를 제공한다. 석물들이 집중 분포하고 있는 공간을 옛돌마당이라 불리는데, 이곳의 석물은 오
래된 것은 없고, 공원을 닦으면서 만든 것들이다. 다만 석등(石燈) 가운데 우리식이 아닌 왜식(
倭式)으로 만든 것이 적지 않아 상당히 눈에 거슬린다.
그리고 전시실(교육역사관, 민속생활관, 목석원예관)과 옛돌마당 외에 편백숲 명상의 길, 솟대
동산, 인공폭포와 놀이마당, 산마루쉼터 등을 갖추고 있다.

공원에 있는 전시관 중 가장 먼저 문을 연 교육역사관은 이 땅의 교육 역사를 다룬 공간으로 디
오라마와 유물 등으로 옛날 교육을 설명하고 있다. 삼국시대와 조선시대 교육내용과 과정, 서예
용품 등을 전시하고 있고, 개화기 이후에 편찬된 교과서와 60~70년대 초등학교 교실 재현, 6.25
시절 천막 학교 등이 재현되어 어린 시절의 향수를 진하게 불러일으킨다. 전시자료는 약 600점
정도 된다.

그 다음 문을 연 목석원예관은 나무와 돌, 꽃을 다룬 공간이다. 괴석류와 돌과 나무로 만든 작
품들, 수목과 지피식물(地被植物) 등이 원예관을 가득 메우고 있으며, 민속생활관은 옛날 생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농기구와 짚풀용품, 주거생활용품, 호패와 민화(民畵, 속화), 초가집
모형 등 유물 4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허나 이들 전시관의 전시물은 다른 데서도 지겹게 볼
수 있는 것들이라 딱히 특별한 것은 없으며, 다만 공원을 이루는 숲이 삼삼하고 산책로도 괜찮
게 깔려져 있어 산책이나 데이트, 산림욕 장소로 아주 적당하다. 게다가 위치도 구덕산과 승학
산 가는 길목에 있어 산을 타고 내려와 잠깐 안겨보는 것도 괜찮다.

※ 구덕문화공원 찾아가기 (2014년 11월 기준)
*
부산1호선 서대신역 4번 출구에서 구덕운동장 방면으로 100m 정도 걸으면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다. 거기서 서구마을버스 1번을 타고 구덕꽃마을 종점 하차. 거기서 서쪽 길(승학산 방면)
  로 오르면 나온다.
* 일반인 차량은 공원까지 들어올 수 없으므로, 꽃동네에 주차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 관람시간 : 9시 ~ 18시 (11~2월에는 17시까지)
* 관람료는 없으며, 3개의 전시실은 매주 월요일 문을 닫아 걸고 쉰다.(단 공원 관람은 가능함)
* 소재지 - 부산광역시 서구 서대신3가 산18-15 (꽃마을로 163번길 73, ☎ 051-240-3521~23)
* 구덕문화공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목석원예관에서 유일하게 사진에 담은 사후천년이란 작품
나무가 죽어 돌로 굳은 화석(化石)이라고 한다.

▲  밋밋하게 솟아난 솟대
솟대 위에 오리는 인간과 하늘을 이어주는 중간 역할을 상징한다.

▲  다양한 석물들이 반기는 구덕문화공원 옛돌마당 산책로
장승(벅수)과 온갖 석인들, 석등, 석탑 등이 주변을 수식한다.

▲  무인의 기개는 온데간데 없는 싱글벙글 무인석(武人石)

▲  웃음을 머금은 문인석(文人石)의 물결

▲  산책로에서 만난 왜식 석등
석등을 만들려면 우리식으로 제대로 만들 일이지 그냥 왜식으로 대충
만들어 공원에 갖다 두었다. (대충 전시행정의 표본)

▲  구덕문화공원 남쪽 산책로

우리는 목석원예관만 둘러보고 내려왔는데, 글쎄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가 내리는 것이다. 처음
에는 적게 내리더만 시간이 가면서 정비례로 빗방울도 주먹만큼 굵어진다. 그래서 속보로 꽃마
을로 내려오니 마침 시내로 나가는 서구마을버스 1번이 사람들을 태우고 있다. 버스는 이미 가
축수송 지경이라 다음 차를 탈까 했지만 빗방울의 눈치도 있고 해서 그 버스에 올라타 짐짝의
일원이 되었다.

오랜 만에 찾은 부산 도심 속의 산골마을 구덕꽃마을, 등산객을 상대로 하는 주막들이 가득 늘
어서 있는 모습은 정말 산이나 산사 입구에 터를 닦은 관광단지를 방불케 한다. 도심이 바로 밑
인데, 도심과 지척에 이런 곳이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손님을 가득 실은 마을버스는 이제야 만족을 한 듯, 시동을 걸고, 그 자리에서 유턴하여 마을을
등지고 시내로 내려간다. 휴일이라 등산/나들이 손님들이 많으니 그날 입금은 정말 상당할 것이
다. 운행을 마치고 아마도 고기회식을 하지 않았을까?

내려가는 고갯길이 구불구불하여 손잡이를 잡으며 어여 도착하기를 소망했다. 어차피 사람들은
구덕운동장과 서대신역까지 가야 내리니 자리가 생기는 것보다는 빨리 도착하여 내리는 것이 낫
기 때문이다.
산에서 내려온 마을버스는 부산시내로 들어서 구덕운동장에서 우리를 내려놓는다. 여기서 시내
버스를 타고 서면(西面)에서 환승하여 광안동으로 돌아오니 시간은 대략 17시 30분, 이렇게 하
여 부산 승학산 나들이는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 채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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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영원한 성지 ~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 (순국기념관)

 


' 화성 제암리(堤岩里) 삼일절 나들이 '

▲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새해가 밝은지 정말 엊그제 같은데 벌써부터 삼일절(三一節)의 아침이 창 밖을 두드린다. 천
하의 주요 국경일인 3.1절을 맞이하여 무엇을 할까 궁리를 하다가 그날에 맞는 3.1절 유적지
를 찾기로 했다.
3.1절에 3.1절 명소를 찾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 지금까지 그것을 실행한 적은 없다.
석가탄신일에는 불교 신자도 아니면서 시간이 모자를 정도로 하루 종일 오래된 고찰(古刹)들
을 찾아 댕기면서 왜 3.1절에는 그에 어울리는 곳을 가지 않았을까?? 그래서 내 자신에게 질
문을 던지니 그날은 썩 유쾌한 날이 아니라는 답이 마음에서 강하게 메아리를 쳤다. 그렇다.
3.1절은 6.25처럼 그리 기분 좋은 날은 아니다. 이 땅의 한이 단단히 서린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마음이 좋겠는가? 그 오욕의 과거는 잊을 수는 있어도 완전 지울 수는 없다.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 짊어지고 가야되는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 이름난 3.1절 명소로는 서울 탑골공원과 천안(天安)의 독립기념관과 유관순(柳寬順)
누님이 활약했던 병천 아우내, 그리고 화성(華城) 제암리 등이 있다. 이 4곳은 3.1절 명소의
성지(聖地)로 이중에서 제암리는 아직 가지 못했다. 그래서 제암리로 길머리를 잡았다.
우리집에서 화성 제암리까지는 정말 머나먼 길이다. 방학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수원역까
지 쭉 내려가 발안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발안주공아파트에서 걸어가거나 발안에서 조암
방면 시내버스로 갈아타야 된다. 물론 천안보다는 가깝지만 체감 거리는 거의 비슷하다.
이번 제암리 나들이는 후배와 같이 갔는데, 서울역에서 만나 같이 내려갔다. 따스한 봄이 코
앞에 다가왔는지 날씨도 따스해 잠바가 거추장스러울 정도이다.

수원역에서 화성시내버스 33번(수원역↔발안)을 타고 발안으로 갔는데, 발안(發安)이 초행길
이라 정류장을 잘못 내려서 조금 헤맸다. 이렇게 향남읍(鄕南邑) 발안 땅에 대한 혹독한 신
고식을 치르고 버스에서 내린 지 30분 만에 제암리 유적지에 입성했다.


▲  북쪽에서 본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


♠  3.1운동의 영원한 성지 ~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殉國遺蹟)
사적 299호

▲  제암리 사건 현장에 세워진 3.1운동 순국기념탑

◆ 1919년 3.1운동의 시작
화성시 서남쪽 발안(향남)에 자리한 제암리는 3.1운동의 굵직한 성지의 하나이다. 그렇다고 서
울 탑골공원이나 천안 아우내(병천)처럼 독립만세를 외친 현장은 아니다. 왜정(倭政)이 격렬했
던 화성 지역 만세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된 잔악한 학살의 현장으로 이곳의 사연을 접
한 이 땅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든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치가 떨리는 강인한 복수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만약 3.1절 같은 날에 이곳을 찾은 왜인(倭人)이 있었다면 제암리 현장을 보고 격분한 이 땅의
사람들에게 제대로 밟혀 묵사발이 되거나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가 되어 해외로 반출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내 심정도 당장 왜인 하나 아작내고 싶은 마음이었으니 말이다. 그만큼 이곳은 우
리에게는 통한과 오욕의 현장이다. 그리고 제3자인 외국 사람들도 캄보디아의 킬링필드(Killing
Field)처럼 어찌 사람이 이럴 수 있냐며 놀라 넘어질 정도이니 잔인함의 종결지라 할 만 하다.

1910년 8월 동아시아의 오랜 약소국이자 태생부터 비리비리했던 조선이 왜국에 의해 강제로 막
을 고하면서 고난의 왜정(倭政) 시대가 시작되었다. 왜열도는 그 옛날 천하 최대의 해양대국을
일구었던 백제(百濟)와 철로 먹고 살던 가야(伽倻)의 지배를 받던 그들의 별채로 백제가 망한
이후 한반도와 분리되어 독자적인 공간으로 살아왔다.
그들은 다른 나라와 지역을 통치한 경험이 없어 초기에는 강경책이 중심이 된 무단통치(武斷統
治)로 이 땅을 다스렸다. 그래도 하나의 나라가 되었으면 조선 사람도 본토 백성처럼 잘 보살펴
주고 평등하게 대해주어야 마땅하건만 오랫동안 조선에 대한 컴플렉스가 강했고 자국 백성에게
도 제대로 된 선정(善政)을 펼친 적이 없으며, 눈에 거슬리면 무조건 칼질만 일삼는 무식한 개
념의 사무라이의 세상이라 그럴 그릇이 되질 못했다. 왜인 우선의 차별정책을 펼치고 가혹한 수
탈은 물론 토지까지 편법으로 막대하게 뜯어갔으며, 조선에 정착한 왜인들도 꼴에 지배층이라고
횡포와 오만을 부려 조선인들의 원성과 울분은 전 은하계를 뒤덮었다.

그렇게 피지배층으로 살던 조선 사람들은 1918년 미국(米國) 대통령 윌슨(Woodrow Wilson)의 민
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意, National Self-determination)를 듣고 암흑에서 만난 등대불처럼 커
다란 희망과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민족자결주의란 쉽게 말하면 '각 민족은 각자 알아서 해라.
어느 민족이든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민족자결주의를 전해들은 한용운(韓龍雲)과 손병희(孫秉熙) 등의 조선 지식인 및 종교지도자 33
명은 거국적인 독립만세를 계획하고 서울 인사동에 있던 태화관<太華館, 명월관(明月館) 소속의
요리집>에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낭독했다. 그런 다음 2월 28일 조계사 뒤쪽에 있던 천도
교(天道敎) 소속 보성사(普成社)에서 4시간 동안 비밀리에 21,000매를 인쇄하여 전국에 뿌렸으
며, 바로 다음날 탑골공원과 종로를 중심으로 역사적인 3.1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숨죽여 지내던 조선 사람들은 독립에 대한 열망과 그동안 왜정과 친일파에 쌓인 격분과 분노를
마음껏 표출하며<거기에 고종(高宗) 황제의 붕어(崩御, 제왕의 사망)도 한몫함> 너도 나도 태극
기를 쥐어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립만세를 부르니 왜정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단세포
인 왜정은 회유를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무조건 몽둥이와 칼, 총을 들고 진압에 나섰다. 이렇게
조선 민중과 왜군/왜경(倭警, 친일 조선 경찰 포함)은 이리저리 뒤엉켜 난장판이 되었고, 뚜껑
이 뒤집힌 왜군/왜경은 잔인하게 진압을 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가 고문을
하고 옥에 가두었다.


▲  독립만세를 부르는 화성 사람들 (순국기념관 기록화)

◆ 화성 지역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의 처절한 몸부림
화성 지역에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은 서울보다 4주가 늦은 3월 하순이다. 제암리 사람인 안정
옥(安政玉)과 안종린(安鍾麟)은 3월 10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서와 격문(檄文)를 입수하고 고향으
로 내려와 만세 운동을 계획하여 3월 26일 화성시 서부인 사강, 서신 지역 주민 1,000여명과 만
세 운동을 벌였다. 이때 왜경과 충돌하면서 왜인 순사부장 노꾸찌 등을 몽둥이와 돌로 죽여버렸
다.

한편 안정옥과 백낙열, 이정근 등은 발안 5일장이 서는 3월 30일에 다시 독립만세 운동을 벌이
기로 했다. 그래서 그날 정오 이정근의 '대한독립만세' 선창을 시작으로 시위를 전개했으며, 순
식간에 800명(또는 1,000명)이 호응하여 발안경찰주재소로 몰려갔다. 독립만세의 물결에 왜경은
총을 발포해 진입을 막았으며, 군중은 돌을 던져 저항을 했다.
그들이 주재소 코앞에 이르자 염통이 쫄깃해진 왜경은 칼을 휘둘러 이정근과 김경태 등 3명이
피를 흘리고 죽었다. 그 장면을 본 민중들은 더욱 성난 파도라 들이쳐 경찰주재소와 우체국, 왜
인 소학교(小學校)를 불태우고, 왜인 가옥에 돌을 던지니 왜인 43명이 목을 붙잡고 청북면 삼계
리로 줄행랑을 쳤다. 이 사건으로 많은 시위자들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또한 4월 1
일과 2일에는 개죽산 봉화를 신호로 인근 진례산, 천덕산, 당제봉, 쌍봉산, 보금산에서 봉화 시
위를 벌였다.

화성 일대의 시위가 생각 외로 격렬하게 이어지자 수원, 화성 지역 관리들은 총독부에 살려달라
고 징징거렸다. 그러자 경기도 경무부(警務部)에서 헌병과 보병 수십 명을 파견하여 4월 2일부
터 화성 지역을 돌면서 시위 주모자와 가담자를 잡아들이니 안그래도 성난 민중을 더욱 들쑤신
꼴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4월 3일 만세운동이 벌어진다.

4월 3일 장안면과 우정읍(조암) 주민 2,000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장안/우정면사무소 건
물을 불지르거나 파괴하고 화수리 경찰주재소를 공격했다. 왜경이 총을 발포하면서 3명이 죽고,
2명이 부상했는데, 이에 격분한 군중은 총을 쏘던 왜인 순사 가와바다 등을 돌과 몽둥이, 농기
구로 때려죽였다.

시위대의 성난 파도에 잔뜩 발작한 왜경은 치졸한 복수전을 다짐하고 4월 4일 왜군 30명으로 만
세운동의 진원지인 화수리를 공격해 1명을 죽이고, 가옥 수십 채를 모두 불태웠다. 또한, 4월 5
일 새벽 3시에는 진원지의 하나인 수촌리를 공격해 천도교 전교실과 감리교 예배당을 비롯해 민
가 38호를 불태우고 마을 주민 8명을 다치게 했다. 이에 발끈한 민중은 그날 오전에 발안장터에
서 만세운동을 벌였으며, 왜경이 그들을 진압하고 70여 명을 잡아 고문을 했다. 그리고 4월 7일
에도 시위군중 130여 명을 잡아 고문했으며, 정순영 등 13명은 2~10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


▲  제암리 사건 때 숨진 23인이 묻힌 거룩한 무덤

◆ 왜정의 잔인한 뒷끝 (제암리, 수촌리 사건)
4월 13일 발안 지역 치안 유지를 위해 중위 아리타도시오(有田俊夫)가 보병 79연대 왜군 11명을
데리고 발안에 내려왔다. 그는 발안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제암리와 이화리 주모자를 모두 죽
이기로 작정하고 바로 그날 사사까(佐板)의 안내를 받아 우정면 이화리(일월동)를 공격해 김태
경 선생과 하인을 죽이고, 그의 집을 불질렀다. 그리고 20여 명을 잡아갔다.
그리고 4월 15일, 군인 11명과 사사까, 그리고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을 길잡이로 삼아 제암리를
찾았다. 사사까는 3월 30일 발안 장터 만세시위 때 군중의 공격으로 목을 붙잡고 도망친 왜인으
로 정미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군중들에게 보기 좋게 털린 것을 보니 지역 사람들에게 꽤나 진
상을 부렸던 모양이라 그는 그날의 앙갚음을 위해 길잡이를 자처했다.

제암리에 이른 왜군은 조희창과 사사까를 통해 훈시할 내용이 있다면서 40세가 넘는 마을 남자
들은 모두 교회로 모이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어리둥절했고, 다른 마을에서는 바로 총질하고
불지르고 하더니만 여기서는 교회로 모이라고 하니 그들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 싶
다. 그래도 몇몇은 의심이 들어 나오지 않자, 일일이 집을 찾아다니며 15세 이상은 모두 나오라
고 했다. 사람들이 교회 앞에 모이자 사람들의 키를 재어 총길이보다 작은 아이는 돌려보내고
큰 사람만 교회 안으로 들여보내 모두 앉게 했다.
아리타가 교단 앞에 서며 훈계를 가장한 헛소리를 좀 하더니 뜬금없이 기독교의 가르침이 무엇
인가를 물었다. 이에 안씨(안종후로 추정됨)가 일어나 '성서는 인간 상호간에 친밀하게 지낼 것
과 신을 경건하게 섬기고 받드는 것, 그리고 신은 최후의 심판을 가르치고 있다'
답을 했다.

답을 들은 아리타는 뭐라 씨부렁거리면서 교회를 나갔고, 바로 날카로운 구령을 외치자 왜군은
교회를 봉쇄하고 창문을 통해 총질을 가하면서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교회에 갇힌 사람들
은 우왕좌왕하며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총에 맞아 쓰러지고, 홍순진을 비롯한 3~4명이 교회를 탈
출했으나 홍순진은 도망치다가 사살되고, 안상용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집으로 피했다가 들켜서
살해되었다. 겨우 노경태만 필사의 각오로 산을 넘어 목숨을 구했을 뿐이다.
또한 바람이 세게 불면서 교회 밑에 있는 집들에 옮겨 붙었고, 위쪽 집들은 왜군이 일일이 불을
질렀다. 마을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온 강태성의 아내 김씨는 왜군에게 참살되었고, 홍원식
의 부인은 총을 맞고 죽었다. 이 사건이 바로 왜정의 잔악무도함을 천하에 알린 제암리 학살사
건으로 하나하나 체포하고 처리하기가 귀찮은지 교회에 몰아넣고 한꺼번에 몰살을 시킨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울부짖는 여인들까지 죽이면서 마을 사람 태반을 학살했다. 오로지 교회에서 유
일하게 탈출한 노경태와 전동례만 살아남았으며, 마을 주민 23명이 죽고, 마을 가옥 33채가 잿
더미가 되었다. 이때 불의의 죽음을 당한 23명은 다음과 같다.

안정옥(安政玉), 안종린(安鍾麟), 안종악(安鍾樂), 안종환(安鍾煥), 안종후(安鍾厚), 안경순(安
慶淳), 안무순(安武淳), 안진순(安珍淳), 안봉순(安鳳淳), 안유순(安有淳), 안종엽(安鍾燁)·안
필순(安弼淳), 안명순(安明淳), 안관순(安官淳), 안상용(安相鎔), 조경칠(趙敬七), 홍순진(洪淳
晋), 김정헌(金正憲), 김덕용(金德用), 강태성의 부인 김씨·홍원식의 부인 김씨 등 23인


▲  고주리 사건을 재현한 디오라마

제암리에서 잔인하게 일을 처리한 왜군은 가까운 고주리로 쳐들어가 만세운동에 가담한 김흥열
과 그의 가족 6명(모두 남자임)을 모두 뒷간으로 끌고가 칼로 잔인하게 죽이고, 노적가리에 시
신을 얹혀 태워버렸다. 김흥열의 9살짜리 아들인 김덕기는 그 광경을 보고 분연히 뛰쳐나와 '나
만 살면 뭐하나. 나도 죽여라' 왜군에게 달려들었다.
왜군 하나가 구두발로 차면서 울타리 밑 도량으로 굴러 떨어졌으나 다시 일어나 덤비는 것을 김
흥열의 형수가 급히 나와 그를 치마 폭에 감추어 목숨을 건졌다. 이 사건을 고주리 사건이라고
부르는데, 제암리 사태와 같은 날에 일어났기 때문에 제암리 사건에 포함시키기도 하며, 화성시
에서는 이 둘을 묶어 제암리/고주리 사건이라 부르기도 한다.
고주리 사건에 격분한 마을 사람들은 산에서 봉화를 올리며, 왜정에 항의를 하는 한편 김흥열
일가의 죽음을 애도했다.

4월, 1달 동안 화성 일대에서 왜정이 벌인 무자비한 진압에 가옥 329채가 화재를 입었고, 46명
의 사망자와 22명의 부상자, 그리고 442명이 검거되었다. 그리고 다시는 참가하지 않겠다는 서
약을 받고 1,202명을 방면했다.


◆ 제암리 사건 이후
미국인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테일러가 4월 5일에 일어난 수촌리 사건을 조사하고자 자동차를 타
고 가던 중, 우연히 제암리 학살 현장을 목격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때가 제암리 사건 다
음 날인 4월 16일이었다.
거기에 제암리 교회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노경태가 서울에 올라가 증언을 하면서 4월 18일 스
코필드(F.W Scofield) 선교사가 단독으로 제암리와 수촌리를 찾아 현장을 조사했고, 이후 여러
차례 발걸음을 해 현장 뒷수습을 하며 부상자를 도왔다. 그리고 사건 보고서를 캐나다와 미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 '끌수 없는 불꽃'이란 책으로 왜국의 만행을 천하에 알렸다.
또한 감리교 수원지방 감리사(監理師)였던 노블(M.W Noble)은 미국영사관에 왜정의 만행을 조사
하라고 압력을 가했으며, 그의 아내는 제암리로 내려가 복구 작업을 도왔다.

하지만 그들 선교사는 조선의 독립만세운동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왜정의 기독교인 탄압에
관심이 컸기 때문에 단순히 제암리 기독교인의 만세운동에 대한 왜정의 만행이라고만 알려졌다.
허나 제암리에서 죽은 23명 가운데, 천도교인이 11명, 기독교인이 10명이며, 고주리는 6명이 천
도교 지도자 가족이다. 그러니 한쪽 종교로 치우친 것이 아닌 두 종교가 서로 연대한 것으로 봐
야 되며, 통역 과정에서 잘못 전달된 내용도 조금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왜정은 제암리와 수촌리 사건에 대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생긴 우발적인 행동이라고
일축했다. 진압을 하는 과정에서 왜인과 왜경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에 뚜껑이 뒤집힌 왜경과
왜군이 크게 무리를 했다는 것이다. 허나 제암리 사건은 그냥 생각 없이 벌인 것이 아닌 계획된
것이다. 마을에 들어와 마을 사람들을 교회로 집합시킨 것도 그렇고, 마을 사람들의 명단도 이
미 파악하고 있었으며(사람들이 다 안오자 가가호호 찾아가 불렀음) 사건을 지휘한 아리타 중령
은 그들을 교회에 몰아넣어 한꺼번에 처리하기로 머리통 속에 이미 계산을 한 상태였다. 또한
교회를 빠져나온 3~4명도 철저히 잡아 죽였으니, 퇴로까지 미리 계산을 한 모양이다.


▲  현재 이전의 제암리교회의 모습 (2001년 3월 1일 철거됨)

◆ 제암리교회의 역사와 23인의 피를 바탕으로 태어난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
제암리교회는 1905년 사랑방 예배를 시작으로 문을 열었다. 이후 초가로 바뀌었으며, 1919년 제
암리 사건 때 불탄 것을 1938년에 다시 지었다. 1965년 제암리 사건을 들은 왜국 목사 오야마
레이지는 대학생을 이끌고 제암리를 찾아 참배했으며, 당시의 만행을 대신 사죄했다. 그리고 귀
국하여 모금을 벌여 제암리교회에 보냈는데, 애당초 모금 목표액은 1,000만엔이었으나 그 금액
을 채우지 못했다. 어쨌든 왜인이 보낸 돈으로 1970년 위의 사진으로 중수를 했는데, 교회 건물
은 3을, 중앙에 뾰족 솟은 아치탑은 1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교회가 온몸으로 3.1운동을
상징한다.

허나 왜인들의 성금으로 만든 탓에 부정을 탔는지 나중에 부실공사로 판정되어 2001년 3월 1일
에 때려부셨고, 그 자리에 정부 지원금 36억원을 들여 지금의 교회와 기념관을 만들었다. 제암
리 사건 당시 교회는 순국기념관 앞에 자리한 순국기념탑 자리에 있었다.


1982년 정부에서는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으로 제암리 사건 현장을 발굴하여 23위의 유해를 발견
했으며, 그들의 조끼 단추와 당시 왜군이 지닌 것으로 보이는 동전과 병 등이 출토되었다. 유해
가 다시 빛을 본 자리에는 표석을 세우고, 합동장례식을 거행해 그들의 넋을 위로했으며, 서쪽
산자락에 무덤(23인 순국묘지)을 마련해 그곳에 모두 봉안했다.
또한 발굴이 이루어진 그해에 제암리 현장을 사적 299호로 지정해 3.1운동의 성역으로 삼으면서
순국기념탑과 무덤을 비롯해 23인 상징조형물, 순국기념관, 3.1정신교육관을 갖추었고, 유적 주
변을 공원으로 꾸며 3.1정신을 되새기며 잠시 발걸음을 멈춰 쉬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  당시의 참혹함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제암리 사건 현장 출토 유물들
마을 사람들의 유물은 물론 왜군이 지닌 동전과 병도 여럿 나왔다.


◆ 3.1운동의 의의와 결과
약 2달에 걸쳐 벌어진 3.1만세운동은 200만이 동참한 천하 최대급의 시위였다. 비폭력적으로 진
행된 한계로 독립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왜정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사상자가 속출했다. 솔직히
'대한독립만세! 왜는 물러가라!' 함성을 목이 터지라 외친다고 왜국이 이에 쫄거나 감동해 순순
히 물러날 리는 더군다나 없다. 1875년부터 어떻게 공을 들여 먹은 땅인데, 그렇게 시위만 한다
고 스스로 물러가겠는가. 그렇다고 시위군중이 무장을 하여 폭력적으로 나섰으면 어땠을까? 그
럼 조선 전토는 거대한 전쟁터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간도(間島)와 중원대륙에서 독립군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어도 그 수는 적다. 조선에서도 왜정에 대항할 비밀 군대나 의병도 거의 없
으며, 왜군을 상대하기에는 한없이 부족하기만하다. 게다가 시위에 참여한 인파에 학생, 어린이
, 노인, 여인들도 많으니 효과적인 전투력은 기대하기 힘들다. 
그래서 비폭력으로 전개해 조선 민중의 뜻을 천하에 알린 것이다. 물론 곳곳에서 무력충돌이 발
생해 왜경이나 왜인, 친일 경찰/지주 등이 다량으로 맞아죽었으며, 화성 발안이나 조암처럼 경
찰주재소와 우체국, 학교를 공격해 불지르는 상황도 많이 발생하기도 했다.

3,1운동으로 단단히 홍역을 치룬 왜국은 조선 민중의 저력에 크게 겁을 먹었다. 왜인들은 강자
가 협박하면 무조건 엎드려 꼬랑지를 살랑살랑 흔들지만 조선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저 단
순했던 왜는 조선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그리고 그런 시위와 항쟁이 계속 일어나면 왜국도 하
등 좋을 것이 없다. 아무리 총칼로 밀어버려도 전력(戰力)을 비롯한 국력 손실이 적지 않게 발
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급히 회유책과 조선인 대우를 내건 문화통치(文化統治)로 통치 노선을
변경했다.
또한 3.1운동은 중원대륙 민중에게도 크게 영향을 주어 5.4운동이 일어났으며, 인도의 간디도
3.1운동을 모델로 삼아 영국을 향해 비폭력항쟁을 전개했다.

중원대륙의 허접 고대소설인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보면 공명 제갈량(孔明 諸葛亮)의 남만
(南蠻)정벌 이야기가 나온다. 제갈량은 유비(劉備)가 세운 촉(蜀)나라의 승상(丞相)으로 남만이
군사를 일으켜 후방을 위협하자 손수 군사를 이끌고 남만을 정벌했다.
그는 우수한 전술과 군사력으로 남만군을 격파하고 남만의 우두머리인 맹획을 7번 잡아 7번 풀
어준 이른바 칠종칠금(七縱七擒)을 벌이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남만 백성과 지배층을 위로하
고 그들을 다독거린다. 결국 맹획을 비롯한 남만 지배층과 백성들은 눈물을 흘리며 제갈량에게
진심으로 항복하면서 잠시나마 촉나라의 믿음직한 속국(屬國)이 된다. 물론 삼국지정사에는 225
년 제갈량이 남만을 치고 가을에 돌아왔다는 내용 뿐이고, 연의에서 나오는 부분은 나관중(羅貫
中)을 비롯한 할일 없는 문인들이 지어낸 것이지만 침략전쟁으로 다른 나라와 민족을 점령한 나
라들에게 적지 않게 귀감이 되는 내용이다. 제갈량이 저렇게 공을 들여 자기네 편으로 만들었지
만 남만은 얼마 안가 촉에 반기를 들고 말았으니, 왜국과 같은 무단통치는 어련하겠는가?

끝으로 한심하게도 다른 나라도 아닌 우리나라에서 뉴라이트를 비롯한 뇌에 주름잡힌 꼴통 집단
들이 3.1운동을 폭동이라고 주장해 논란이 대단하다. 물론 왜국의 입장에서 보면 폭동이나 우리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권리를 되찾고자 벌인 정당한 시위이다. 왜정이 제갈량처럼 했으면 모를
까? 제갈량의 발톱의 낀 때만도 못한 것들이 크게 잘못을 했으니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
러니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제발 입좀 다물었으면 좋겠다. 하늘도 저런 것들에게 벼락
을 내려야지 그렇게 벼락을 아껴서 뭐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 찾아가기 (2014년 3월 기준)
① 수원역 경유 제암리까지
* 지하철 1호선, 분당선 수원역(6번 출구, AK플라자)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가면 2줄로 이루어진
  수원역 버스정류장이 있다. 거기서 발안으로 가는 32, 33번 시내버스를 타고 우림아파트에서
  하차, 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에 보이는 제암4거리에서 오른쪽(서쪽)으로 10분 정도 가면
  제암리 유적 입구로 여기서 오른쪽으로 6~7분 가면 제암리 유적이다. <또는 발안3거리(바다마
  트)에서 내려서 길 건너편에서 33-1번 시내버스를 타면 제암리(제암리유적입구)까지 가지만
  대신 향남지구로 빙 돌아서 감>
* 수원역(9번과 10번 출구 중간)에서 조암행 직행버스를 타고 제암리 하차, 도보 5분
② 직행버스 이용
* 수원터미널과 서수원터미널에서 조암행 직행버스를 타고 제암리 하차
* 서울 사당역(4번 출구)에서 조암행 직행버스(20~30분 간격)를 타고 발안마을주공아파트 하차,
  버스가 간 방향으로 4분 정도 가면 제암4거리로 여기서 오른쪽으로 국도를 따라가면 된다.
③ 승용차 이용
* 서해안고속도로 → 발안나들목을 나와서 발안 방면 좌회전 → 제암리 유적
* 수원 → 발안 방면 43번 국도 → 제암4거리 → 제암리 유적

★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 관람정보 (2014년 3월 기준)
* 관람비와 주차비 없음
* 관람시간(순국기념관) : 9시 ~ 18시 (입장은 17시까지) 순국기념관 외에 23인 순국묘지와 야
  외에 있는 조형물은 시간에 관계없이 관람 가능
* 순국기념관 쉬는 날 - 매주 월요일 / 설날과 추석, 1월 1일
* 문화유산해설사가 상주하고 있어 친절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392-2 (제암길 50, ☎ 031-369-1663)
* 화성 제암리 순국기념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23인 상징 조형물


♠  제암리 유적 둘러보기

▲  의연하게 서 있는 3.1운동 순국기념탑

우리가 제암리에 도착한 시간은 16시였다. 그날 11시부터 3.1절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행사는
진작에 끝났고 야외에 깔아놓은 행사 무대를 한참 철거하고 있었다. 오늘이 그래도 3.1절인데
그것을 무색할 정도로 관람객도 별로 없었고, 주차장도 썰렁했다. 나중에 들으니 오전과 오후 3
시 이전에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래뵈도 국사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3.1절 성지인데
사람들이 안오면 어디 쓰겠는가?

수레들이 바퀴를 접고 쉬고 있는 주차장 서쪽에는 3.1운동 순국기념탑이 서 있어 나그네의 마음
을 숙연하게 한다. 1982년 제암리사건 발굴 현장에 심은 탑으로 탑 뒤쪽에는 약간 동그랗게 병
풍석을 둘러 뒤쪽의 허전함을 채워주는 것은 물론 탑을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  23인 상징 조형물

3.1운동 순국기념탑에서 순국기념관으로 가다보면 오른쪽 높은 곳에 서로 키가 다른 파란 피부
의 조형물이 눈짓을 보낸다. 이들은 제암리 사건 때 숨진 23인을 상징하는 존재로 이들 중에 독
보적으로 큰 형상 하나가 나머지 22기를 이끌고 있는데, 그 모습이 청동기시대 청동검(靑銅劍)
을 연상케 한다. 꼭대기에는 동그란 구멍이 있는데, 이 석상은 3.1절을 상징한다고 한다.


▲  제암교회 사택
순국기념관 맞은편에 자리한 건물로 2001년에 지은 것이다.

▲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3.1운동 순국기념관은 2001년 3월 1일에 개관된 건물로 바로 옆에 제암교회가 자리해 있다. 2개
의 전시실과 시청각실을 갖추고 있는데, 본 기념관에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제1전시관에는 제암
리를 비롯한 화성 지역의 만세운동과 전개 과정, 그리고 왜정의 탄압과 학살을 여러가지 전시물
과 사진, 스크랩한 신문 자료나 선교사들의 기록문, 고주리 사건을 재현한 디오라마 등으로 설
명하고 있다. 허나 대부분이 스크랩된 자료와 사진들이고, 제암리와 화성 지역에서 나온 유물은
1982년에 출토된 단추와 동전, 병을 비롯하여 천도교에서 작성한 제암리 사건 기록문, 당시 천
도교에서 쓴 깃발이 전부이다.
제2전시관은 1905년 이후부터 1920년까지에 역사적 내용과 3.1운동에 대한 자료를 다루고 있다.
화성 지역을 비롯한 경기도에서 벌어진 3.1운동과 해외에서 진행된 독립운동,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자료가 있으나 국사 관련 교과서나 여타 3.1관련 기념관에서 접할 수 있는 흔
한 내용들이 주류이다.
 
시청각실은 제암리 사건을 증언을 통해 제작된 프로그램을 상영하고 있으며, 상영시간은 17분이
다. 관람 순서는 시청각실을 시작으로 제1전시관과 제2전시관 순이며 보면 되며, 제일 먼저 시
청각실에 앉아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전시실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그러니 시청각 자료로 예습
을 하고 전시실을 둘러보면서 복습을 하면 이해가 훨씬 빠르다.

순국기념관에 있는 여러 내용 가운데,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란 어록이 무척 마음에 와닿
는다. 허나 용서는 하되, 나중에 반드시 그 몇 배로 응징은 해줘야 된다. 그때가 되면 우리에게
저항하는 왜인들과 구한말과 왜정 때 이 땅을 심히 괴롭힌 왜인의 후손들을 왜국에 널리고 널린
신사(神社)나 왜왕 떨거지가 사는 동경 코쿄에 싹 몰아넣고 제암리처럼 똑같이 처리해주기를 바
란다. 왜열도가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에서 넘어간 이들이 정착한 곳이라 우리와 거의 같은 민족
이지만 계산할 것은 확실히 해야 되지 않겠는가?


▲  화성 지역 만세운동 당시 천도교에서 쓴 깃발과 당시의 일을 기록한
서적들 (제1전시관)

▲  왜정이 독립운동가를 고문할 때 쓴 고문기구와 족쇄 (재현물)
보기만 해도 은근히 소름이 끼친다. (제2전시관)

▲  순국기념관 앞에 선 또다른 3.1운동 순국기념탑

▲  제암리 사건을 깨알같이 담은 순국기념탑의 옆 모습

1919년 제암리 사건이 벌어진 교회는 바로 순국기념관 동쪽에 있는 순국기념탑 자리에 있었다.
탑 정상부에 새겨진 옛 모습의 태극기는 기념관에서 불타오른 나그네의 복수심과 분노, 그리고
애국의 의지를 더욱 가다듬어주며, 탑 밑에는 순국한 23인의 이름이 적혀있고, 그 앞에 조그만
상석(床石) 같은 것이 놓여져 있다.


▲  순국묘지로 가는 계단
계단 양쪽에 천하의 국기인 태극기가 5쌍씩 심어져 계단을 오르는
나그네의 마음을 더욱 엄숙하게 손질해준다.

▲  23인 순국묘지(殉國墓地)

태극기 계단 끝에는 제암리 사건 23인이 잠든 무덤이 있다. 여기서는 23인 순국묘지라고 부른다.
1982년 시신을 수습해 모신 제법 큰 무덤으로 봉분(封墳) 밑에는 간단하게 호석(護石)을 두르고
봉분 앞에는 무덤의 기본 요소인 상석과 비석을 두었다.
무덤 앞에 3.1절을 맞이하여 경기도지사를 비롯해 화성 지역 국회의원과 주요 인사들이 바친 헌
화(獻花) 9개가 놓여져 있는데, 썩 마음에 들지를 않는다. 괜히 무덤만 가리고 있고, 저들이 진
정 그들을 기리고자 놓은 것인지 의심도 간다. 주요 인사 가운데 친일파 후손도 분명 있을텐데,
그들은 저런 형식적인 꽃 대신 자신의 재산을 바치며 조상의 업보를 사죄해야 마땅하다.


▲  가까이서 본 23인 순국묘지

▲  옆에서 본 23인 순국묘지

상석에는 일반 민중들이 바친 국화들이 수북히 쌓여 상석 다리가 휘어질 지경이다. 민중들이 바
친 조그만 국화가 앞에 놓인 덩치만 무식하게 큰 9개의 헌화보다 더 마음이 가는 이유는 무엇일
까?~~ 이 땅에 제대로 개념이 박힌 권력층과 상류층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는
늘 민중들과 뜻 있는 지식인들이 나섰지, 태반의 권력/상류층들은 그냥 손가락만 얹히거나 욕심
만 부려 배를 채웠을 뿐이다. 순국묘지에 묻힌 23명도 모두 일반 백성들이다.


▲  3.1정신 교육관
제암리로 견학 온 학생/일반 단체에게 3.1정신을 심어주는 공간이다.

▲  공원화된 제암리 3.1유적지 북쪽

제암리 유적을 이렇게 둘러보니 어느덧 5시가 넘었다. 3월이라 해가 길어지긴 했지만 저녁이 다
가옴에 따라 찬바람이 날카롭게 불어 우리를 때린다. 혹독한 겨울의 제국에 모든 걸 털려 벌거
숭이가 된 나무들이 가지를 높이 치켜 세운 모습이 마치 독립만세를 외치는 듯 하다. 1919년에
는 이 땅의 백성과 산천초목(山川草木)들은 왜국에 대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지만 지금 나무들
은 겨울에게 독립만세를 외치며, 봄의 해방군을 염원한다.
 
어엿하게 읍(향남읍)으로 성장해 덩치가 커진 발안 시내로 나와 수원시내버스 32번을 타고 수원
으로 나와 서울로 올라갔다. 이렇게 하여 3.1절 제암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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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겨울 산사 나들이 ~ 대구 비슬산 용연사

 


' 늦겨울 산사 나들이 ~ 대구 비슬산 용연사(龍淵寺) '
용연사 석조계단
▲  용연사 석조계단


 

겨울 제국(帝國)의 기세가 슬슬 꺾이던 3월 첫무렵에 대구 지역의 오랜 고찰, 용연사를 찾
았다.

서울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4시간 가까이 달려 대구역에 도착, 대구지하철 1호선을 타
고 서쪽 종점인 대곡역에서 내렸다. 여기서 용연사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야 되는데 배차간
격이 참 아름다운 수준이라 조금 걱정은 되었으나 다행히 대기 10분 만에 그곳으로 들어가
는 달성5번 시내버스(대곡역↔용연사↔현풍,유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옛 지기를 만난 듯, 반가운 표정을 지우며 그 버스를 타고 화원읍, 반송리를 지나 비
슬산 북쪽 골짜리에 자리한 용연사 주차장에 두 발을 내리니 곧바로 용연사 매표소가 흐뭇
한 표정으로 나를 맞는다, '엥 여기도 입장료를 받았었나?' 전혀 생각도 못했는데, 매표소
아줌마가 직업 본능에 따라 밖으로 나와 돈 받을 준비를 갖춘다. 그때 버스에서 같이 내린
아줌마 신도가 있었는데, 그의 뒤를 바짝 뒤쫓으니 나를 같은 신도라 여기고 아무런 제지
없이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매표소에 적힌 입장료를 보니 어른은 무려 1,500원..

매표소를 무사히 지나 7분 정도 오르면 비슬산 계곡물이 한데 모인 용연지(龍淵池)가 나타
나고 이어 일주문도 얼굴을 드러낸다.


♠  용연사 입문 (일주문, 천왕문)

▲  용연사 일주문인 자운문(紫雲門)

용연지를 지나면 수레들의 쉼터인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 중간에는 고색이 깃든 일주문(一柱
門)이 뿌리를 내렸는데, 4발 수레들에게 둘러싸여 약간은 뒷전으로 밀려난 인상이다. 다른 절은
거의 일주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서게 하지만 여기는 일주문 옆에 수레길을 내고 그로 인해 문이
옆으로 상당히 밀려난 형세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문이 아닌 수레길로 경내를 오간다.

절의 일주문은 보통 일주문이라 불리지만 이곳 일주문은 특별히 붉은 구름이란 뜻의 자운문이란
어여쁜 이름을 지니고 있다. 17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지붕은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하고 있
으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空包) 부분이 현저히 커서 공포와 지붕 등 문의 윗부분이 문 높이의
거의 60%를 차지하고 있어 다소 육중해 보인다. 지붕을 받치는 문 기둥은 그런데로 굵직함을 지
녔지만 커다란 윗도리 때문에 오랜 세월 어찌 저들을 받쳤을까? 걱정이 들 정도이다. 공포와 평
방(平枋)에는 단청이 채색되어 있으나 장대한 세월의 흐름 속에 많이 퇴색했다.

▲  적멸보궁, 석조계단 입구

▲  경내로 인도하는 극락교. 다리를 건너면
용연사 경내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용연사 문화유산 해설사가 머무는 관광안내소가 있다. 내가 나타나니 해설사
아저씨가 모습을 비추며 용연사 안내문을 하나 건네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그런다.
그래서 고마움을 표하며 길을 재촉하니 길은 이내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 계단길로 가면
석조계단(적멸보궁), 오른쪽은 경내로 우선은 경내부터 살피기로 하고 오른쪽으로 갔다.

경내 직전에는 계곡에 걸린 극락교(極樂橋)란 다리가 있다. 여기서 절의 주문에 따라 속세의 온
갖 기운과 번뇌를 내려놓고 경내로 임하면 되는데, 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천왕문(天王門)
이 나타난다. 허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온몸을 가리며 보수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그래
서 천왕문은 이용하지 못하고 그 옆으로 우회하여 들어갔다.

천왕문은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그들의 검문을 거치면 바로 2층 규모의
안양루(安養樓)가 나온다. 안양루는 범종(梵鍾)과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 등 사물
(四物)이 담겨져 있는데, 보광루(寶光樓)라 불린 것을 근래에 안양루로 이름을 갈았다.


▲  천왕문 밑에 자리한 둥그런 석조

▲  절에 왠 악어?

천왕문 밑에는 둥그런 석조(石槽)가 있는데 샘물 대신 먼지만 가득한 거의 죽은 샘터이다. 그런
데 그런 석조 옆에는 생뚱맞게도 악어상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자비(慈悲)와 평화를 강조하는
절집에 왠 무시무시한 악어상이 있는 것일까? 악어와 관련된 불교 설화는 딱히 들어본 적도 없
고. 그렇다고 용연사 주변에 악어 서식지나 관련 설화가 있는 것도 아니다. 불교의 발생지인 인
도나 소승불교가 전파된 동남아에 악어가 있으니 그곳에 혹 관련 설화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나
중에 해설사에게 문의를 했다.
그 답변에 따르면 이 악어상은 어느 신도의 집 정원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몇년 전에 절에
기증을 했는데 마땅히 둘 데가 없어서 이 자리에 두었다는 것이다. 사연이 생각 외로 정말 엉뚱
하다. 신도가 준 것이니 차마 안받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경내에 두기에도 조화롭지 않으니 혹
여 찾아올지 모르는 화마(火魔)와 나쁜 기운이나 막으라고 천왕문 밑에 둔 듯 싶다.

그럼 여기서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용연사의 내력을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안양루의 뒷모습

▲  극락전과 뜨락

※ 비슬산 북쪽에 포근히 안긴 고찰, 비슬산 용연사(琵瑟山 龍淵寺)
팔공산(八公山)과 더불어 대구를 크게 보듬은 비슬산(琵瑟山)에는 유서 깊은 고찰(古刹)이 많은
데, 그중에서 북쪽 계곡에 안긴 용연사가 단연 갑(甲)이다. <유가사는 을(乙) 정도>

용연사는 후삼국시대의 한복판인 912년<신라 신덕왕(神德王) 원년> 보양국사(寶讓國師)가 창건
했다고 전한다. 보양은 청도에 운문사(雲門寺)를 세운 인물로 중원대륙으로 건너가 불법을 배우
고 귀국하는 길에 서해바다 용이 용궁(龍宮)으로 초청해 그를 대접했다.
용은 자신의 아들인 이목(璃目)을 딸려 그를 호위케 했는데, 마침 나라에는 가뭄이 극성이라 보
양이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했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설화이지만 그 연유로 절 이름
에 용(龍)이 들어간 것이다.
상상의 동물인 용까지 내세우며 창건설화를 그럴싸하게 지어냈지만 정작 창건 이후 조선 초기까
지 이렇다 할 바퀴자국을 남기지 못했으며, 다만 극락전 앞에 고려 때 지어진 3층석탑이 있어
적어도 고려 때부터 절이 있었음을 살짝 귀띔해준다.

절의 사적(事績)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419년으로 그때 승려 천일(天日)이 망해가던 용
연사의 모습이 슬픈 마음이 솟구쳐 크게 중창을 했다고 한다. 허나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는
비운을 겪었으며, 1603년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인잠(印岑)과 탄옥(坦玉), 경천(敬天)에게 명해
다시 짓도록 했다. 이때 지은 건물이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해 5동이었고 거주하는 승려는 20여
명이었다고 한다.

1650년 어느 날 저녁, 난데없이 별똥이 떨어져 대웅전과 요사가 불에 탔으며, 이듬해 일언(一彦
)과 학신(學信)이 동상실(東上室)과 서상실(西上室)을 세웠다. 1653년에는 홍묵(弘黙)이 대웅전
을, 승안(勝安)이 명부전을 세웠고, 이듬해에 일주(一珠)가 만월루(滿月樓)를 세웠으며, 1661년
까지 함허당(含虛堂)과 관정료(灌頂寮), 관음전(觀音殿), 반상료(返常寮), 명월당(明月堂), 향
로전(香爐殿), 약사전(藥師殿), 두월료(斗月寮) 등을 지었다. 또한 계속 불사를 벌여나가 18세
기 초까지 사리각(舍利閣), 천왕문, 응진전, 영류당(詠流堂), 일주문, 명부전 등이 건립되어 무
려 200칸의 규모를 지닌 대가람을 이루게 되었다. 지금이야 팔공산 동화사(桐華寺)가 대구 지역
사찰의 으뜸이지만 그때는 오히려 동화사가 용연사의 말사(末寺)였다.

1673년에는 임진왜란 때 통도사(通度寺)에서 금강산(金剛山)으로 옮긴 부처의 사리를 다시 통도
사로 가져오면서 그중 1과를 용연사에 봉안하고 사리를 담을 사리탑(舍利塔)과 석조계단(石造戒
壇)을 만들었다. 그와 관련된 내용은 1676년(숙종 2년) 권해(權瑎, 1648-1723)가 쓴 '파사교주
석가여래부도비명(娑婆敎主釋迦如來浮屠碑銘)' 이란 비석에 기록되어 있다.

1708년 사리탑을 중수했고, 1715년 찬화(粲和)가 대웅전과 여러 건물을 중수하고 단청(丹靑)을
새롭게 입혔다. 중수를 마치자 1722년 홍문관(弘文館) 교리(狡吏)인 임수간에게 청해 중수비를
세웠는데, 그 중수비에 의하면 당시에는 부속 암자로 명적암과 은적암, 보리암과 법장암이 있었
으며, 절 계곡에 용문교과 천태교 등 5개의 돌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허나 1726년 1월 불이 나
서 대웅전과 다수 건물이 소실되었고, 1728년에 중건을 했는데, 이때 법당 이름이 대웅전에서
극락전으로 갈린 듯 싶다.


이렇게 대구 굴지의 사찰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용연사는 1911년 왜정(倭政)의 사찰령(寺刹令)
으로 동화사의 수반말사(首班末寺)가 되면서 처지가 서로 뒤바뀌고 만다. 이후 1934년 석가사리
탑을 수리하면서 탑 주위에 석주(石柱)를 둘렀으며, 그 이후 여러 건물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영산전과 삼성각, 안양루, 사명당 등 약 16~17동의 건물이 경내를 가
득 메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 보물로 지정된 석조계단과 목조아미타여래3존좌상과 복장
유물 등 보물 2점과 3층석탑과 극락전 등 지방문화재 2점을 지녔다. 그리고 부속 암자로는 은적
암(隱寂庵)과 명적암(明寂庵), 광선암(廣仙庵)을 거느리고 있다.

대구의 남쪽 지붕인 비슬산 북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틀었고, 절을 둘러싼 숲이 삼삼하여 기
운 또한 청정하며, 티끌 없이 맑은 계곡이 경내를 가로지르며 청정한 기운을 돕는다. 시내와도
멀리감치 거리를 두고 있고, 산새의 지저귐과 바람의 소리가 잔잔하게 경내를 감싸며 산바람에
흥분한 풍경물고기가 그윽한 풍경소리를 베풀어 산사의 고즈넉함을 더해준다.

용연사에서 비슬산을 거쳐 유가사나 비슬산휴양림으로 내려갈 수 있으며, 정상까지는 4시간 정
도 걸린다.

※ 용연사 찾아가기 (2014년 2월 기준)
* 대구지하철 1호선 대곡역(1번 출구)에서 달성2번, 달성5번 시내버스를 탄다. 달성2번은 지선
  이 무지막지하게 많아서 반드시 용연사행(1일 8회)을 확인하고 타야 된다. 잘못탈 경우 엉뚱
  한 곳으로 강제투어를 당할 수 있다.
  달성5번은 용연사를 경유하여 현풍, 유가사(瑜伽寺)까지 다니며 1일 10회 다닌다. 또한 주말
  과 휴일에는 600번 버스 일부가 '대곡역~용연사~비슬산휴양림~유가사' 구간을 1일 10회 운행
  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 일주문에 주차장 있음, 주차비는 공짜)
① 구마고속도로 → 화원옥포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반송리 → 용연사
② 대구시내 → 화원 → 간경교에서 좌회전 (또는 화원에서 명곡지구를 거쳐 명곡로 경유) →
   반송리 → 용연사

★ 용연사 관람정보
* 입장료 : 어른 1,500원 (20인 이상 단체 1,000원) / 청소년 1,200원 (단체 800원) / 어린이
  800원 (단체 400원)
* 용연사 점심공양은 맛이 제법 좋다. 공양시간은 12~13시이며, 음력 초하루나 석가탄신일, 기
  타 절 행사가 있을 때는 연장될 수 있다.
* 용연사 관광안내소에서 문화유산해설사의 용연사 이야기를 들어보자. 2월부터 11월까지 매일
  10시부터 18시까지(겨울 17시) 근무하며, 설과 추석 연휴에는 쉰다. (근무 시간은 변동될 수
  있음)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882 (용연사길 260 ☎ 053-616-8846)


♠  용연사 극락전 주변 둘러보기

▲  요사채와 삼성각

경내 중앙에는 법당(法堂)인 극락전이 뜨락을 굽어보며 좌우로 삼성각과 영산전을 거느리고 있
고, 뜨락에는 3층석탑이 서 있다. 뜨락을 중심으로 극락전과 종무소, 요사채, 안양루가 포근히
감싸는 형태로 법당 하나에 탑이 하나인 이른바 1금당 1탑 형식의 가람배치를 취했다.


▲  용연사 극락전(極樂殿)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41호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653년에 지어졌다. 1726년 화재로 무너진 것
을 1728년에 중건했는데, 이때 대웅전에서 극락전으로 간판이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규모는 그리 크진 않지만 좌우로 반토막 크기의 영산전과 삼성각을 거느리고 있어 중심 건물로
서의 기품은 전혀 부족하지 않다. 건물의 가운데 어칸을 협칸보다 넓게 잡았으며, 불단 위에는
보개(寶蓋)를 얹히고 전면에 운각과 용을 장식해 아름다움을 끌어올렸다. 


▲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3존좌상 - 보물 1813호

극락전 불단에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
현보살(普賢菩薩)을 거느리며 아미타3존불을 이룬다. 이들은 1655년에 당시 유명한 조각승이던
도우(道祐)가 만든 것으로 근래에 아미타불 뱃속에서 후령통과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 복장전
적(腹臟典籍) 등 발원문 8점과 후령통 3점이 쏟아져 나왔다.
조성발원문을 통해 불상 조성 시기와 조성 주체, 제작자 등이 속시원히 밝혀져 17세기 불상 연
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1762년에 작성된 중수개금기까지 딸려있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올해(2014년) 1월 20일 아미타불과 복장유물이 한 덩어리로 국가지정 보물 1813호로 단
번에 승진되었다.
 
보물의 지위를 누린 아미타불과 좌우 보살의 표정에는 자비로움이 가득하여 속세살이에 지친 중
생을 위로하며 그들 뒤에는 1777년에 제작된 영산회상도가 병풍처럼 자리한다.


▲  용연사 3층석탑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28호

극락전 뜨락에 서 있는 3층석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힌 고려시대 탑
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옥개석 받침이 4단인 것과 옥개 낙수면이 짧고 추녀가 얇
은데 반해 받침이 높은 형식으로 이들을 통해 신라 탑에서 변질된 고려 탑으로 여겨진다.
탑 높이는 3.2m로 근래에 보수를 벌여 깨지거나 부실한 부분을 보충했으며, 장대한 세월의 때가
곳곳에 역력하다.


▲  빛바랜 목조 구시

극락전 곁에는 나무로 만든 길쭉한 목조 구시가 누워있다. 이 구시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나무
통으로 쌀을 담거나 법회나 행사 때 공양용으로 쓰였는데, 왕년에는 거의 100명 분의 밥을 담았
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현역에서 은퇴하여 밥 대신 먼지만 가득하니 사람이든 물건이든 뒷전
으로 밀려난 모습은 정말 쓸쓸하기 그지없다. 구시의 체면도 살려줄 겸, 그를 깨끗히 손질하여
옛날 공양 체험 이벤트를 벌여보는 것은 어떨까?


▲  삼성각 밑에 누운 두꺼비상의 위엄
조각 수법이 아까 전 악어상과 비슷하다. 아마도 악어상을 기증한 신도가
악어와 같이 넘긴 것으로 여겨지는데, 확실한 것은 모르겠다.


▲  선열당(禪悅堂)이라 불리는 요사(寮舍) 정면
승려와 신도들의 생활공간으로 공양간과 넓은 방을 갖추고 있다.
점심공양은 요사 뒤쪽 문으로 들어가면 된다.

▲  종무소(宗務所)로 쓰이는 심검당(尋劍堂)

▲  용연사 영산전(靈山殿)
극락전 우측에 자리한 영산전은 석가3존불과 16나한의 보금자리로 근래에 지어졌다.

▲  영산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 좌우를 협시한다.

▲  극락전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우리에게도 무척 친숙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에 봉안된 그림들
오른쪽부터 산신할배의 산신탱, 등장 인물이 무지 많은 칠성탱, 독성할배의
느긋함이 돋보이는 독성탱


♠  용연사 명부전 주변, 그리고 점심공양

▲  요사에서 명부전으로 넘어가는 불이문(不二門)

용연사는 중심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명부전과 석조계단 등 3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구역
이 한 덩어리로 몰려있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명부전 구역은 경내
의 중심인 극락전 구역 남쪽에 있는데 요사 옆구리와 불이문을 지나 청운교(靑雲橋)란 다리를
건너면 바로 나온다. 이 구역에는 명부전과 사명당, 독산각이 자리해 있다.


▲  불이문에서 바라본 명부전 구역
명부전을 비롯한 건물 3동이 조촐하게 구역을 이룬다.

▲  용연사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十王), 판관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
어 있다. 처마 밑에는 어느 갑술년(甲戌年)에 쓰인 공덕기(功德記)와 관음계(觀音契) 현판이 걸
려 있다.


▲  명부전 지장보살상
온화한 미소를 드리우며 중생들의 극락왕생을 위해 헌신하는 지장보살상
그 좌우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시립해 나란히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인다.

▲  문을 꽁꽁 걸어잠군 사명당(四溟堂)

명부전 곁에 높이 축대를 쌓고 황토색 담장을 걸치며 들어앉은 사명당은 절의 가장 어른인 주지
승이 머무는 주지실이다. 원래는 관음전(觀音殿)이었다고 하며, 임진왜란 이후 절 중창을 지시
한 사명대사(四溟大師)를 기리고자 사명당이라 했다. 사명당 곁에는 독산각(獨山閣)이라 불리는
작은 건물이 있으며, 이들 건물은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  명부전에서 바라본 청운교와 요사채

명부전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 극락전으로 나왔다. 시간은 어언 13시, 1시간 가까이 경내를 방황
하니 시장기가 가득 피어올라 나를 괴롭힌다. 경내에는 적막한 산사의 이미지를 지키듯,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공양간이 있는 요사 뒤쪽으로 들어가니 그 안은 사람들(아줌마와 할머니가
대부분)로 북새통을 이루어 썰렁한 바깥과 완전 대조를 보인다. 그 시간 절에 발을 들인 사람들
2/3 이상이 요사에 있었다고 보면 될 듯 싶다.

점심시간은 13시까지인데, 사람들이 많아 아직도 공양(供養)을 제공하고 있었다. 요사로 들어가
일반인도 공양이 가능한가 물으니 당연히 그렇다며 한숟가락 들고 가라고 그런다. 그래서 기쁜
표정을 띄며 신발을 벗고 요사로 들어가 공양 행렬에 동참했다. 약간 붉은 양파를 비롯한 갖은
채소가 버무려진 그릇에 주걱으로 밥을 담아주는데, 많이 달라고 청하니 2주걱을 더 준다.
밥과 함께 숭늉 1그릇과 떡을 하나씩 거머쥐고 마땅한 자리를 찾았으나 사람들로 미어터져 두
다리를 편히 할 자리가 마땅치가 않았다. 간신히 좁게나마 자리가 하나 생겨 그곳에 낑겨 앉아
열심히 점심 공양에 임했다.


▲  용연사 점심공양의 위엄

공양밥은 다양한 나물이 버무려진 비빔밥이다. 붉은 양파와 콩나물, 시금치, 고사리 등의 나물
이 흰쌀밥과 고추장과 조화를 이루며 어엿한 비빔밥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용연사 공양밥은 공양간 아줌마들의 정성 어린 손길이 담겨 제법 맛이 좋았다. 지금까지 섭취한
공양밥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치켜세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반대로 공양밥 최악의 종
결자는 여기서도 그리 멀지 않은 경산 갓바위(선본사) 공양이었다. 절 나들이에서 공양을 하는
재미만큼 쏠쏠한 것은 없지만 안타깝게도 중생들에게 널리 공양을 펼치는 절이 그리 많지 않다.

밥그릇을 아주 깨끗히 비우고, 숭늉과 떡을 먹고 나니 포만감의 행복과 식곤증이 나를 감싸고
돈다. 그렇게 공양을 마치고 소화도 시킬 겸 5분 정도 머물렀으나 계속해서 사람들이 밀려들어
와 자리를 내주고 방을 나섰다. 동화사나 갓바위처럼 그렇게까지 유명한 절도 아닌데 사람(특히
신도들)이 많은 걸 보아 오늘이 무슨 날인가 싶어 문의를 하니 음력 초하루라고 그런다.
자리를 뜨면서 공양할 때 발견하지 못한 된장국을 1그릇 섭취하고 숭늉도 2그릇이나 더 마신 다
음 내가 먹은 그릇을 목욕시키고 밖으로 나왔다.


♠  용연사 석조계단, 적멸보궁

▲  적멸보궁 입구

▲  적멸보궁으로 인도하는 계단

기분 좋게 점심공양을 마치고 용연사의 나머지 부분인 석조계단(적멸보궁)으로 이동했다. 적멸
보궁 입구에는 일주문을 닮은 문이 서 있는데 '비슬산 용연사 적멸보궁(琵瑟山 龍淵寺 寂滅寶宮
)'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문을 지나 잘 다듬어진 계단을 한발짝씩 오르면 초소가 나오는데 여기서 길은 적멸보궁과 비슬
산으로 갈린다. 초소를 지나니 아까 문화유산 해설사(이하 해설사) 아저씨가 초소에서 나와 구
경 잘했냐고 묻는다.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금세 표정을 바로 하고 잘 둘러
봤다고 답을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주마간산처럼 보고 가는데 반해 1시간 이상 꼼꼼히 본
것 같다며 칭찬의 말을 건네면서 적멸보궁을 안내해주겠다고 그런다. 그래서 그를 따라 적멸보
궁으로 들어갔다.

▲  용연사 주변을 정비한 기념으로 세운 정비불사공덕비(整備佛事功德碑)

▲  시원스런 지붕의 적멸보궁 정문 -
누각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  적멸보궁(寂滅寶宮)

용연사 3대 구역의 하나인 금강계단 구역은 높이 축대를 쌓아 그 위에 적멸보궁과 향로전을 두
고 가장 높은 뒷쪽에 자리를 다져 석조계단과 사리탑을 세웠다.

석조계단을 가리고 선 적멸보궁(이하 보궁)은 극락전에 버금가는 지체 높은 건물로 보통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 앞에 둔다. 사리탑에 불사리(佛舍利)가 있으므로 적멸보궁 불단에는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그냥 빈 자리로 둔다. 살짝 휘어진 2개의 활주가 지붕 추녀를 받들고 있
으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덩어리가 매우 섬세하다. 보궁 어칸(가운데 칸) 앞에는 돌계단이 놓여
있는데, 그 계단은 법회(法會) 때 절의 고참 승려만 이용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계단 외에는 보
궁으로 접근하는 계단이 쉽게 보이질 않아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무심코 그 계단을 오르
락거린다. 허나 건물 양쪽에 보궁으로 가는 계단이 있으니 가운데 계단을 오르는 실례는 범하지
않도록 한다. 물론 제지하는 사람도 없고 법에 저촉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에 가면 어디 법을
지키라는 명언처럼 예의는 되도록 지키는 것이 좋다.


▲  적멸보궁 내부
불단에는 불상이 없고, 대신 뒤에 유리창을 내어 석조계단과 사리탑이 보이게끔 했다.

▲  적멸보궁 곁을 지키는 향로전(香爐殿)
적멸보궁을 관리하는 건물로 승려의 거처로 쓰인다.

▲  적멸보궁 좌우에 자리한 조그만 건물들

적멸보궁 좌우에는 고작 1칸에 불과한 조그만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이들 건물은 따로 이름이
없다고 하며, 사리탑과 석조계단을 관리하던 승려의 숙소나 예불을 하던 공간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굳게 문을 봉한 채, 적멸보궁의 좌우를 호위한다.


▲  용연사 석조계단(石造戒壇) - 보물 539호

적멸보궁 뒤에는 용연사의 상징인 석조계단이 자리해 있다.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고도 하며,
네모난 기단에 석종형(石鐘形) 사리탑을 심어 부처의 불사리를 봉안했다. 계단(戒壇)은 흔히 말
하는 오르락 내리락 계단이 아닌 수계의식(受戒儀式)을 거행하던 곳으로 통도사(通度寺) 금강계
단이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통도사 사리탑을 파괴하자 사명대사가 사리를 수습하여 금강산으로 가져가
스승인 서산대사(西山大師)에게 어찌하면 좋을 지를 문의했다. 서산은 본래 있던 곳에 마땅히
되돌려 줘야 한다고 답을 하니, 사리함 하나는 통도사에 두고 만약을 위해 다른 하나는 제자 선
화(禪和)에게 주어 태백산 보현사(어딘지??)에 봉안토록 했다. 허나 그때는 아직 경상도 지방이
안정되지 못했고, 선조(宣祖)의 명으로 왜열도(倭列島)에 사신으로 가게 되면서 사리를 치악산
각림사(覺林寺)에 임시로 두었다.
그 이후 사명이 입적하자 제자 청진(淸振)이 각림사에 봉안한 사리함을 용연사로 가져와 모시면
서 신도들과 상의하여 사리탑을 만들기로 했다. 그는 서산과 사명의 뜻을 모두 받들어 사리 2과
중 1과를 통도사로 보내고 1과만 용연사 북쪽에 봉안했으며, 사리탑은 1673년에 완성되었다.

이 탑은 2단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큼직한 네모난 괴임돌을 놓고 그 위에 얇은 원형 괴임돌을
2개 포개 석종형 사리탑을 올렸다. 사리탑은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넓어졌다가 중간을 지
나면서 좁아지는 것이 영락없이 범종을 닮았는데, 탑 윗부분에는 구슬 무늬를 1줄로 두르고 겹
으로 된 연꽃 무늬 위에 꽃받침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을 새겼다. 2단의 기단 중 윗층은 두툼한
갑석 아래 사방으로 귀기둥을 세우고 각면 가운데에 탱주를 새겨 4면을 8칸으로 나눈 뒤, 칸마
다 팔부신장(八部神將)을 새겼다. 아래 기단은 아무런 무늬도 없는 장대석으로 마감했다.

기단 네 모서리에는 원래 사천왕상이 있었으나 여러 차례 도난을 당해 지금은 경내 깊숙한 곳에
보관하고 있다고 하며, 기단 주변으로 12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8각으로 깎은 돌을 그 중간에 끼
워 연결했다. 난간에 쇠창살을 꽂은 것은 1934년에 탑을 보호하고자 설치했으나 그리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계단 앞에는 상석(床石)을 두었고, 그 옆에 조금 비뚤어진 석등(石燈)은 계단에 난간을 달았을
때 같이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계단 주변에는 황토 담장을 둘렀고, 계단의 보호를 위해 계단
앞쪽에 보호철책을 두르면서 접근이 어렵게 되었다. (석가탄신일에만 개방한다고 함)

이곳 계단은 통도사 금강계단, 금산사 방등계단(方等戒壇)과 더불어 이 땅의 대표적인 계단으로
꼽히며, 계단에 얽힌 이야기처럼 정말 사리가 들어있는지는 알 수 없다. 수 차례 도굴 시도가
있었다고 하니 도굴이 되었을 가능성도 제법 있다고 한다.


▲  석조계단의 내력이 소상히 적힌 석조계단비 - 비석 이름은
'사바교주 석가여래 부도비명(娑婆敎主釋迦如來浮屠碑銘)'이다.

▲  적멸보궁 부근에 터를 닦은 승탑 형제들

향로전 뒤쪽 담장 너머에 조선 후기 승탑 7기가 1열로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다. 이들은 죄다
석종 스타일로 별도로 비석 2기가 서 있는데, 하나는 송파 각민(松坡覺敏, 1596~1675), 다른 하
나는 동운 혜원(東雲慧遠, 1637~1702)의 비석이다. 승탑의 주인이나 승탑 이름에 대해서는 딱히
전해오는 것은 없으며, 여기서 서쪽으로 300m 떨어진 산자락에도 조선 후기 승탑 5기가 숨겨져
있다.

적멸보궁과 석조계단을 둘러보면서 해설사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궁금한 것은 정말 은하
계에 널린 별만큼이나 많은데 정작 질문 거리가 생각이 안난다. 머릿 속에서 간신히 질문 거리
를 긁어내어 물어보면서 의문 거리를 일부나마 해소했으나 머리가 장식용이라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거의 없다.
해설사는 제법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초청 강연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통
도사에서 해설사를 하다가 용연사로 넘어왔는데 각 절마다 익혀야 될 내용이 너무 많아서 힘들
다고 한다. 간신히 용연사의 모든 것을 꿰었는데. 다른 절로 근무지가 바뀌면 그 절에 대해 처
음부터 공부를 해야 된다. 또한 관람객들이 대충 둘러보고 가는 게 다반사라 너무 사물을 볼 줄
모른다며 따끔한 충고도 건넨다. 상황이 이러니 질문을 건네는 사람도 거의 없을 정도이며, 이
렇게 자신을 귀찮게 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한다. 그의 나이는 50대 후반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대구시티투어버스가 들어왔다. 가이드 2명이 양이(洋夷) 여자 관광
객 2명을 데리고 와서 석조계단을 구경시켜주고 해설사와 인사를 하며 시내로 나갔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더 머물러 많은 가르침을 받고 싶었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한다. 이곳에
발을 들인지 벌써 4시간이 훌쩍 넘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2시간 남짓 있다 갈려고 했는데, 시간
도 참 빠르다. 게다가 부산(釜山)에도 늦지 않게 들어가야 되는 터라 슬슬 떠날 채비를 했다.
속세로 나가는 버스가 20분 뒤에 있길래 매표소 밑 주차장까지 가려고 했으나 마침 해설사와 안
면이 있는 신도 아줌마 3명이 수레를 끌고 속세로 나가려고 하자 해설사가 그들에게 나를 태워
달라고 부탁을 넣으면서 그들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이렇게 짧지만 용연사와 해설사와 작별을
고하고 아비규환의 속세로 나갔다.

나를 태워준 아줌마 신도는 모두 대구 사람<1명은 인천 사람으로 대구로 시집 왔음>이다. 수레
를 끌고 온 아줌마는 시지동에서 왔는데, 그들은 절에서 가져온 고사떡과 사과를 나에게도 아낌
없이 나눠주었다.
화원으로 나와서 아줌마 2명과 작별을 고하고 인천 출신 아줌마 신도와 대구시내버스 655번을
타고 대곡역에서 지하철 1호선으로 환승하여 칠성역에서 나머지 작별을 고했다.

이날은 원래 팔공산 부인사(夫人寺)를 가려고 했으나 교통이 좋지 못해 용연사로 바꿨다. 허나
용연사에서 맛있는 점심공양도 먹고 해설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궁금했던 부분을 해소했으며(해
소하면 뭐하나? 다 까먹는데) 아줌마 신도의 도움으로 쉽게 속세로 나왔고, 그들에게 떡과 사과
를 나눠 받는 등, 푸짐한 인심을 느꼈다. 부인사로 갔으면 아마도 이런 것을 누리진 못했을 것
이다. 용연사로 가게 된 것도 다 이런 인연들과 만나고 많은 것을 배우라는 하늘의 지극한 뜻이
었던 것 같다.
용연사에게 나는 잠깐 스치고 사라지는 존재이고, 내 입장에서도 용연사는 1번 아니면 2번 정도
스치는 그런 장소이지만, 지금까지의 사찰 나들이 가운데 제법 인상과 정이 깊었으며, 여러 좋
은 경험과 넉넉한 인심을 체험했던 것 같다. 용연사에서 겪은 그 추억과 인연을 고이 간직하며
다음의 인연을 애타게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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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의 향연 속으로 ~ 태백산 눈꽃 나들이 (당골, 눈꽃축제장, 석탄박물관)

 

' 태백산(太白山) 눈꽃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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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산 설경

장공(長空)에 뛰어들어 안개 속에 파묻히니
 비로소 정상에 오른 줄 알았네
 둥근 해는 머리 위에 나직하고
 주위의 뭇 산봉우리들이 눈 아래에 내려앉네
 구름 따라 몸이 날으니 학(鶴)의 등에 올라탄 듯
 돌을 밟고 허공에 길이 걸렸으니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인가
 비 그치자 골짜기마다 시냇물이 흘러넘치니
 굽이굽이 오십천(五十川) 건널 일이 걱정스럽네


*
고려 후기 문신인 근재 안축(謹齋 安軸, 1282~1348)이 태백산에 올라 지은 시

 


겨울의 한복판이자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인 설날 연휴를 맞이하여 진한 설경을 맛보고자 강원
도 태백(太白)을 찾았다. 마침 후배 하나가 태백 서쪽 동네인 고한(古汗)에 잠시 머물고 있어
서 그와 함께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인 태백산을 찾기로 했다.

원래는 설 연휴 전날 아침에 일찌감치 열차를 타고 가려고 했으나 급히 일이 생겨서 내려가는
것을 취소했다. 그러다가 그날 오후에 급히 연락을 넣어 심야 열차로 가겠다고 하니 사북역에
서 대기하여 합류하겠다고 그런다.

설날 연휴인지라 태백까지 열차표를 힘들게 예약히고 21시 반에 대문을 나섰다. 방학역에서 1
호선 전철을 타고 회기역에서 신통치 못한 배차를 자랑하는 중앙선 용문(龍門)행 전철로 갈아
타서 근 1시간을 달려 용문역에 두 발을 내린다. 여기서 잠시 대기를 타다가 강릉(江陵)행 심
야 무궁화호 막차에 몸을 싣는다.
거의 2년 만에 타보는 추억의 심야열차, 옛날에는 서울에서 당일로 오가기 버겨웠던 광주, 목
포, 여수, 경주, 부산, 동해 등 장거리를 갈 때 많이 타고 다녔는데, 도로망이 나날이 좋아지
면서 안그래도 비좁은 국토가 더 좁아져 2006년부터 탈 일이 크게 줄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1
년에 1회도 타질 않는다.

용문에서 태백까지는 3시간 반 정도 걸린다. 자리에 앉아 잠을 간곡히 소환해 봤지만 잠이 좀
처럼 강림하질 않으니 아무래도 잠님이 나를 원치 않은 듯 싶다. 한밤중이라 차창 밖 풍경은
온통 검은 도화지라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고 심심치 않게 보이는 불빛이 그런 도화지에
살짝 작은 점을 찍는다. 그렇게 뜬 눈으로 원주와 제천, 영월, 예미를 지나 사북역에 이르니
대기하던 후배가 열차에 올라타 옆 자리에 앉는다.

정선과 태백의 경계를 가르는 두문동재터널을 지나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태백 관내로 들어서
니 창 밖 풍경이 다소 달라지기 시작한다. 정선 땅까지 별로 보이지도 않던 눈이 터널을 지나
서부터는 완전 눈천지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차창 밖 검은 도화지는 하얀 색이 추가되어 2색
의 흑백 도화지가 되었다. 단지 터널 하나에 천지가 뒤바뀐 것이다.

열차는 강원도의 산주름을 열심히 지나 드디어 태백역에 도착했다. 열차가 멈추자 등산복으로
중무장한 사람들이 우루루 나와 적막이 감돌던 태백역에 잠시나마 활력을 불어 넣는다.
밥이나 먹을 겸 식당을 찾아보니 역전 주변 식당은 죄다 자고 있었고, 실비집 한 곳만 환하게
불을 밝히며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집에 들어가니 열차에서 내린 등산객 10여 명 정
도가 밥을 먹으며, 몸을 녹이고 있었다.
우리는 김치찌개를 먹었는데, 생각한 것과 달리 맛이 괜찮았다. 고기도 풍부하게 들어가 있고
밑반찬도 가짓수가 많아서 찬이 제법 풍성했다. 저녁을 먹고 왔지만 다시 시장기가 강하게 돋
으면서 밥을 2그릇이나 먹고 찌개와 반찬을 죄다 비우고서야 식당을 나섰다.

아침이 멀지 않았으니 찜질방에서 잠시 눈이나 붙이자고 했으나 후배는 여관에서 편하게 자자
면서 자기가 방값 내겠다고 그런다. 그래서 터미널(역 앞에 터미널 있음) 인근 여관에 들어가
눈을 붙였다.
아침 8시 반이 되자 찬란한 여명의 재촉에 스르륵 잠에서 깨었다. 4시간 밖에는 못잤지만, 더
이상 잠도 오질 않는다. 나는 태백산을 보러 여까지 온 것이지 잠이나 퍼자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도 꿈나라에서 허우적거리는 후배를 강제로 깨워 9시 반에 여관을 나섰다.

고원(高原)의 도시, 태백이라 제법 추울 줄 알았더만 아침임에도 그다지 춥지는 않다. 터미널
로 들어서니 마침 당골로 가는 태백시내버스 7번이 기지개를 켜고 있어 그것을 잡아타고 태백
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터미널에서 당골 종점(태백산관리사무소)까지는 20~25분 정도 걸린다.


▲  당골 종점(태백산관리사무소 앞)


♠  하얗게 분을 칠한 태백산(太白山, 1567m) 간보기

▲  태백산관리사무소에서 당골광장으로 오르는 길

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매표소를 겸하고 있는 태백산관리사무소 앞이다. 우리나라의 신령스러운
산인 태백산의 안기려면 반드시 매표소를 거쳐야 되는데, 등산객들의 호주머니를 뚫어지라 쳐다
보는 그곳에서 입장권을 구입하고 안으로 들어서니 하얗게 분을 바른 태백산의 모습이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와 마음을 말끔히 정화시켜준다.

이곳에 온 목적은 오랜만(거의 7년 만)에 태백산 정상(1567m)과 천제단(天祭壇, 1561m)을 보고
자 함인데, 후배가 겨울 산행에 아주 바람직하지 못한 신발을 신고 있어서 정상까지 가는 것은
어려웠다. 괜히 그랬다가 119헬기를 불러야 될 상황까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식
총(虎食塚)까지만 갈까 하다가 눈이 제법 많고 미끄러워 후배가 오르기 힘들다고 투정하여 당골
광장에서 1km 정도만 오르고 철수하고 말았다.

태백산은 우리나라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남쪽 척추인 태백산맥(太白山脈)의 중심 산으로 위엄
돋는 산의 이름만큼이나 험준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허나 정작 올라보면 별로 힘들지 않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금강산(金剛山)이나 설악산과 달리 순수 흙으로 이루어진 육산(肉山)이
라 능선의 곡선이 완만하고 산세가 부드럽기 때문이다. 게다가 버스와 수레로 800~900m 고지(당
골, 백단사, 유일사, 금천동)까지 올라갈 수 있어 거기서부터 등산에 임하면 되며, 제일 단거리
인 유일사와 백단사에서 정상까지 2시간, 당골에서는 2시간 30분(문수봉 경유는 3시간 30분) 정
도면 충분히 닿는다. (금천에서는 4시간 소요)

매표소에서 당골광장까지는 야트막한 오르막 길의 연속이다. 4발 수레들도 마음껏 바퀴를 굴리
게끔 2차선 도로가 놓여져 있는데, 길이 온통 눈투성이라 수레들도 겁을 먹고 가기를 꺼려한다.


▲  태백산 눈썰매장 입구

▲  한참 몸단장중인 눈조각품

태백산은 사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곳이지만 눈으로 뒤덮힌 겨울이 단연 갑(甲)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겨울 산행의 성지(聖地)로 백설(白雪)이 두텁게 쌓인 겨울 산행의 장쾌함을 누리고자
많은 산꾼들이 몰려온다. 봄과 여름, 가을보다는 겨울 산꾼이 훨씬 많다고 하니 기온이 낮을 수
록 찾는 이가 반비례로 늘어난다. 그리고 겨울의 한복판인 1월에는 눈꽃축제(눈축제)를 벌이는
데, 이 축제는 겨울 축제의 성지이자 대명사로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미국(米國)을 비롯한 여
러 나라에서 이 축제를 찬양했고, 미국의 CNN방송은 한국에서 가봐야 될 50곳의 하나로 선정하
며 찬양의 수준을 높였다. 솔직히 태백산은 국내에서만 머물기는 진짜 아까운 산이다. 국내 명
소/축제를 넘어 세계적인 겨울 축제와 명소의 성지로 우뚝 서기를 고대해 본다.

태백산은 겨울 산행의 성지, 겨울 축제의 성지이지만, 호랑이가 담배맛을 알던 옛날부터 제천의
식(祭天儀式)을 거행하던 성지였다. 산 정상에는 천제단(天祭壇, 중요민속문화재 228호)과 장군
단(將軍壇)이 있는데, 이들은 천하의 국조(國祖)인 단군(檀君)을 비롯하여 어린 나이에 숨져 태
백산신으로 추앙 받은 단종(端宗)에게 제를 올리던 곳으로 돌로 쌓은 조촐한 제단이지만 강화도
참성단(塹星壇)만큼이나 신령스러운 기운이 가득하다. 이렇게 하나도 아니고 3가지의 성지로 일
컬어지니 태백산의 명성은 나날이 하늘을 찌른다.


▲  설송(雪松) 밑에 자리한 석탄박물관 표석

▲  태백석탄박물관(太白石炭博物館)

당골광장 동북쪽에 자리한 태백석탄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탄 전문 박물관으로 1997년 5월
에 문을 열었다. 초창기에는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으나 꾸준히 업그레이드를 벌여 이제는 태백
에서 꼭 가봐야되는 명소로 단단히 부각되었다.

박물관 규모는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8개의 전시실과 야외전시장을 갖추고 있으며, 단순히 석
탄 관련 내용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역사와 지질(地質)을 시작으로 광물(鑛物)의 탄생
과 종류, 화석(化石), 석탄과 탄광 관련 문서와 기계/장비, 탄광 정책 관련 자료, 태백 관련 향
토자료, 탄광 광부들의 생활상, 탄광갱도 체험 등을 다루고 있다. 특히 3층에서 지하로 내려갈
때 엘리베이터는 층수가 아닌 -100m 단위로 거의 -900m까지 수치가 내려가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 마치 탄광 엘리베이터를 탄 듯한 오싹함을 선사한다. 지하층으로 내려오면 탄광 체험 갱도관
이 있으며, 그곳을 나오면 기념품과 특산품을 파는 기념품점이 나온다.

태백석탄박물관은 지금까지 2번 구경을 했는데, 이번에는 내려올 때 관람을 했다. 박물관과 관
련된 내용은 이쯤에서 정리를 하겠으며, 전시실을 모두 둘러보는데, 보통 1시간 반 정도, 길게
는 2시간 정도 잡으면 된다.


▲  제1전시실 지질관에서 만난 자수정(紫水晶)의 위엄
지질관에서는 자수정 같은 귀에 익은 광물부터 낯설은 광물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와 지구 곳곳에서 수집한 광물 진품이 진열되어 있다.


※ 태백석탄박물관 관람정보 (2014년 2월 기준)
* 관람시간 : 9시 ~ 18시 (17시까지 입장해야 됨, 쉬는 날 없음)
* 입장료는 공짜인 듯 싶지만 엄연히 태백산도립공원 입장료에 포함되어 있음
* 소재지 - 강원도 태백시 소도동 166 (천제단길 195 ☎ 033-552-7730 / 033-550-2743)
* 석탄박물관 홈페이지는 위의 자수정 사진을 클릭한다.


▲  당골광장 부근에 조성된 공원과 연못
소쩍새가 우는 그날이면 연못도 거추장스러운 얼음을 박차고 기지개를 켤 것이다.

▲  당골광장에서 문수봉으로 올라가는 길
당골광장에서 산길은 2개로 갈리는데, 왼쪽은 제당골과 문수봉으로, 오른쪽은
호식총과 망경사, 천제단으로 이어진다. 문수봉으로 가도 천제단까지
갈 수 있으나 3시간 30분 정도 잡아야 된다.

▲  막바지 매뭇새를 다듬고 있는 눈축제장

태백산의 백미(白眉) 중 하나인 눈축제는 보통 1월 중순에 열린다. 허나 우리가 갔을 때는 열리
기 직전이라 축제 분위기도 누리지 못하고 축제를 위해 조성된 눈조각품만 바깥에서 보는 것으
로 만족해야 했다.


▲  설림(雪林)으로 들어서다 (문수봉 방면)

▲  설림에 한가운데에 서다.
키가 큰 늘씬한 수목들이 앞다투어 하늘을 가리면서 산길이 좀 어둡다.
나무들은 겨울 제국이 내린 눈을 소복으로 삼으며 묵묵히 봄을 기다린다.

▲  고려 후기 문인인 안축(安軸)이 태백산에 올라 지은 시가 담긴 표석
시의 내용은 앞부분에 있음 (당골광장에서 망경사 방면)


♠  태백산 마무리

▲  태백산의 또 다른 수호신 석장승 - 강원도 지방민속문화재 4호

당골광장에서 단군성전 입구를 지나면 길 오른쪽에 별다른 모양이 없는 석상이 마중한다. 이 석
상은 바로 석장승으로 원래는 북쪽으로 1.2km 떨어진 미루둔지(장승둔지)에 있었는데, 1960년대
에 망경사로 옮겼다가 1987년 태백문화원이 지금의 자리에 안착시킨 것이다. 

장승의 모습을 보면 얼굴 부분이 손상된 문인석(文人石)처럼 보이기도 하며, 미륵상으로 보이기
도 한다. 얼굴이 워낙 심하게 손상되어 원래 모습을 알기 힘들며, 머리에는 관(冠)처럼 생긴 것
을 쓴 것으로 보인다. 얼굴 양쪽에는 귀로 보이는 길쭉한 부분이 있다.
그의 탄생시기는 딱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천제단 가는 길목인 태백산 북쪽에 자리해 있어 성
역(聖域) 임을 알리는 역할과 이정표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덩달아 산신의 수호신상의 역
할까지 겸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코 부분이 많이 닳아있어 마을의 수호신까지 겸한 것으로 여
겨진다. 예전에는 장승 옆에 3마리의 오리가 새겨진 솟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어디로 마실을 갔
는지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석장승이 많이 전해오고 있지만
정작 강원도에는 이 장승이 유일하다. 옛날에는
태백산 정상 천제단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장승
<장생(長生)>을 많이 세워 성역(聖域) 및 이정
표의 역할을 했으며, 장승모랭, 장승백이, 장승
둔지, 장승거리 등의 지명이 남아있어 태백 땅
에 장승이 제법 많았음을 보여준다.
허나 무심한 세월과 몰지각한 사람들의 만행으
로 장승은 죄다 자취를 감추어 이제는 전설 속
의 이야기가 되었으며, 오로지 당골의 석장승만
살아 남아 태백이 왕년에는 장승의 낙원이었음
을 아련하게 귀뜀해줄 따름이다. 참고로 태백의
조선시대 지명인 장생은 바로 장승에서 유래된
것이다.
<태백을 이루는 동네의 하나인 장성(長省)이 장
생에서 변경된 이름임>


▲  태백산으로 올라가는 하얀 숲터널 (석장승에서 망경사 방면)

▲  당골계곡과 함께 이어진 산길
이 세상에 색깔은 하얀색과 하늘색, 갈색(나무 줄기) 밖에 없는 것 같다.

▲  설림 속을 거닐다
집으로 고이 훔쳐와 혼자서만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절경이다. 허나 나는 조물주가
아닌지가 저 풍경을 가져오지는 못하고 대신 사진이란 것으로
그 장면을 복사해 담아가지고 왔다.

▲  단군성전 앞에 마련된 단군상
명세기 우리의 국조(國祖)인데, 보호각 하나 놓아드려야 되는거 아닐까?
저렇게 눈과 바람을 맞게 놔두는 것은 그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  단군성전(檀君聖殿)

석장승을 지나 대략 1km 정도만 전진하고 발걸음을 접고 말았다. 후배가 힘들다고 그러니 더 이
상 끌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 수 없이 다음 인연을 고대하며 발길을 접
었다. 발을 돌린 지점은 아마도 해발 1,000m 정도 될 것이다. (당골광장이 거의 850m임)

내려가는 길에 당골광장 남쪽에 자리한 단군성전에 들렸다. 이 성전은 옛 조선(朝鮮)의 시조이
자 우리의 국조인 단군의 사당으로 1975년에 구성된 '국조단군봉사회'가 1982년에 성금을 모아
창건하고 단군성전이라 하였다. 그의 사당을 이곳에 지은 것은 그에게 제를 지내는 천제단으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1993년에 태백산도립공원 개발계획에 따라 성전을 수리했으며, 매년
10월 3일 개천절(開天節)에 제례를 올리고 있다. 성전 현판의 글씨는 신덕선이 썼다.

비록 오래된 문화유산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뿌리를 생각하게 하는 의미심장한 현장이다. 하지
만 등산객과 탐방객들 대부분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등산로에서 계단을 타고 조금 올라가야 되
는 곳에 있기도 하지만 썩어빠진 이 땅의 권력층에 의해 점차 오염되가는 역사교육의 부실과 무
관심 조장도 한몫한다.


▲  단군성전에 봉안된 단군 영정

오로지 상상으로 그려진 단군의 영정(影幀), 후덕한 인상과 긴 수염, 황색 옷이 인상적이다. 단
군은 옛 조선 군주의 명칭으로 여겨지며, 조선의 군주가 정치와 제사를 모두 관장한 제정일치(
祭政一致) 사회였다.

옛 조선은 기원전 2333년 경에 건국되어 기원전 108년에 문을 닫은 장수국가로 한반도를 비롯하
여<남한 지역에 있던 삼한(三韓)>도 조선의 간접 영역으로 보기도 함> 요동(遼東)과 만주, 요서,
화북(華北) 일부를 다스린 동아시아 강대국이다. 조선의 건국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여전하나
산소도 아까운 식민사관(植民史觀) 패거리들은 기원전 10세기 이내로 창건 연대를 잡고 있으며,
영역도 한반도 북부와 요동으로 크게 축소시켰다.

조선의 중심지는 요동으로 보이며, 춘추전국시대에 연나라를 공격하여 대륙의 지배권을 차지하
려했으나 철기(鐵器)로 중무장한 연나라의 반격에 오히려 크게 밀려 요하(遼河)를 비롯한 서쪽
2,000리의 땅을 잃고 만다. 당시 조선은 청동기 무기였다. 그러니 어찌 게임이 되겠는가?
이후 대륙에서 넘어와 준왕(準王)의 신임을 받은 위만(衛滿)이 반란을 일으켜 준왕을 남쪽으로
쫓아내고 왕이 되었다. 준왕은 그를 따르는 신하와 배를 타고 남쪽으로 건너가 한왕(韓王)을 칭
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마한(馬韓) 영역인 전라도나 충청도로 내려간 것이 아닌가 싶다.

위만이 조선을 장악하자 철기무기를 개발하고 국력을 길러 한나라를 비롯한 주변 나라를 공격해
영토를 확장하고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해 막대한 부를 누렸다. 이에 한나라 무제(武帝)는 조선
이 동방(東方) 무역 독점으로 배를 불리며 나날이 국방력을 다지는 것에 크게 위협을 느끼며 우
선 주변 나라를 말끔히 정복하고 그 자신감으로 조선을 협박했다.
조선이 반발하며 먼저 대륙을 공격하자 한무제는 이때다 싶어 군사를 보내 반격을 가했는데, 한
나라군 내부 분열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했다. 그러자 뚜껑이 단단히 열린 한무제가 다시
군사들을 다그치자 정신을 차린 한군(漢軍)은 정비를 가다듬고 반격을 가해 끝내 왕검성까지 포
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하며 끙끙 앓던 차에 조선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조선의 마지막
군주인 우거왕(右渠王)이 반대파에게 피살되고, 왕을 잃은 조선 조정은 그 혼란을 잠재우지 못
해 결국 성은 함락되고 만다.

이렇게 옛 조선은 망하고, 그 땅 일부에 그 유명한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는데, 그것도 조선
유민들의 끊임없는 비협조와 반발, 그리고 고구려(高句麗)와 부여(夫餘)의 등장으로 그 땅에 제
대로 침도 바르지 못하고 쫓겨나고 만다.
한사군의 존재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은데, 식민계열 쓰레기들은 평안도와 황해도, 요동 일부로
보고 있으며, 강단사학자와 많은 사학자들은 요동과 요서 쪽으로 보고 있다. 한4군의 하나로 유
명한 낙랑(樂浪)이란 존재도 낙랑국과 낙랑군(樂浪郡) 2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아직 의견이 분
분하나 대체로 낙랑국은 평양 지역, 낙랑군은 요서로 보고 있다. 그러니 호동왕자(好童王子)와
낙랑공주(樂浪公主) 설화로 유명한 낙랑은 낙랑군이 아닌 낙랑국으로 보는 것이 맞다. 만약 낙
랑군이라면 낙랑공주는 공주를 칭할 수가 없다. 그냥 군을 다스리는 태수(太守)의 딸일 뿐이다.

옛 조선은 전성기였을 때 인구가 무려 1억 8천만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조선의 문화와 문명
은 중원대륙과 주변의 많은 나라와 민족에 영향을 주었다. 한자(漢字) 같은 경우도 동이족(東夷
族)으로 대표되는 조선에서 만들어 대륙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며, 그 문자가 대
륙으로 넘어가 크게 발전하면서 동아시아 통용 글자가 되었다. 또한 대흥안령산맥 쪽에서 발생
한 홍산문명(紅山文明)도 조선의 찬란했던 흔적이며, 한반도와 만주에서 많이 발견되는 엄청난
양의 고인돌(지석묘) 또한 조선의 청동기시절 흔적이다.


▲  하얀 기와집이 된 단군성전 삼문(三門) - 단군성전에서 바라본 모습
성전 뜨락에는 눈이 수북하게 덮여 설경의 극치를 이룬다.

▲  단군성전 삼문 - 바깥에서 본 모습
눈이 지붕에 가득하니 혹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눈 자체는 거의 무게가 없지만 저리 두툼하게 쌓이면 정말 몇톤이 되버린다.

▲  석장승에서 당골광장으로 내려가는 길

▲  눈축제를 위해 조성된 커다란 눈 이글루
마치 눈을 뒤집어 쓴 거대한 석실고분(石室古墳) 같다.

▲  당골광장에서 당골 종점으로 내려가는 길

▲  당골 통나무집에서 먹은 곤드레밥과 반찬들

정상까지 오르지 못한 아쉬운 마음을 눈 속에 애써 묻으며 당골 종점으로 나왔다. 그때 시간은
12시, 뱃속에서 배고프다고 난리를 친다. 하여 허기진 배를 달래고자 적당한 곳을 찾다가 통나
무집이란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폈다.

이곳은 여행사 단체 손님들로 북적거렸는데, 신발을 벗어야 되는 뜨끈한 방에 들어가 곤드레밥
과 해물파전, 동동주, 소고기국밥을 시켰다. 잠시 뒤 콩나물과 더덕, 김치, 두부 등 8가지의 정
갈한 밑반찬이 앞에 펼쳐진다. 이들 가운데 양념장이 버무러진 커다란 두부는 반찬의 갑(甲)으
로 두부 맛이 좋아 2번 정도 더 시킨 것으로 기억이 난다.

반찬을 먹고 있으니 곤드레밥과 소고기국밥 등의 식사가 나타난다. 곤드레밥은 정선과 평창, 영
월, 태백 지역의 토속음식으로 곤드레나물을 비롯한 산채 나물과 김가루가 버무려진 일종의 비
빔밥이다. 곤드레밥에는 늘 구수한 된장찌개가 짝궁처럼 나타나는데, 이곳의 찌개는 두부가 풍
부하다. 그렇게 먹고 있으려니 동그란 해물파전과 동동주가 3차로 나타난다.
파전은 가격에 비해 좀 커보인다. 허나 반찬과 곤드레밥으로 어느 정도 배가 들어찬 상태기 때
문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파전은 일부를 남기고 거진 다 먹었는데, 뱃속에서 그만
보내라고 북소리가 울린다. 그러다보니 동동주는 둘이서 절반 밖에 마시질 못했다.


▲  해물파전의 위엄

이렇게 풍성하게 점심을 먹으니 졸음이 슬쩍 나를 희롱하며 배 깔고 한숨 자라고 보챈다. 졸음
의 희롱을 과감히 내던지고, 커피와 식당 내부 연탄 난로에서 대핀 보리차를 여러 잔 마시며 식
곤증과 추위를 몰아내고 밖으로 나선다.

이렇게 태백산과의 짧은 인연을 마치고, 어디로 갈까 머리를 굴리다가 미인폭포로 가기로 하고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그곳으로 향했다. 이후 내용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기 바란다.
(☞ 미인폭포 보러가기)

★ 태백산 당골 찾아가기 (2014년 2월 기준)
① 철도 이용
* 청량리역과 양평역, 원주역, 제천역에서 태백역으로 가는 강릉행 무궁화호 열차가 1일 6회(휴
  일에는 7회) 운행한다.
* 강릉역과 동해역에서 청량리행 열차(1일 6회, 휴일 7회)를 타고 태백역 하차
② 시외버스 이용
* 동서울터미널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20~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1일 6회, 대구(북부)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1일 10여 회(직통은
  1일 9회 운행) 떠난다.
* 인천, 고양, 의정부, 부천, 성남, 안산, 수원에서 태백행 직행버스 이용
* 원주, 제천, 삼척, 강릉, 영주에서 태백행 직행버스 이용
③ 현지교통
* 태백역전에 있는 태백터미널에서 당골행 7번 시내/좌석버스가 1일 20여 회 운행
④ 승용차
*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영월 방면 38번 국도 → 영월 → 고한 → 태백시내 →
  당골주차장
*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영월 방면 38번 국도 → 영월 → 상동 → 유일사/백단
  사 → 당골주차장

※ 태백산 관람 정보 (2014년 2월 기준)
* 입장료(단체는 30인 이상) : 어른 2,000원 (단체 1,500원) / 학생,군인 1,500원 (단체 1,000
  원) / 어린이 700원 (단체 500원)
* 주차비 : 대형 4,000원 / 소형 2,000원
* 태백산 눈축제는 1월 중/하순에 2주 정도 열린다. (열리는 시기는 매해마다 다름)
* 당골에는 콘도형 태백산민박촌이 있다. 현재 15동 73실이 있으며, 인터넷에서 예약하면 된다.
  ☞ 태백산 민박촌 홈페이지 가기 (문의 ☎ 033-553-7440~41)
* 태백산 눈썰매장 이용료 : 어른 5,000원 / 어린이 4,000원
* 태백산 당골 소재지 - 강원도 태백시 소도동 (태백산도립공원 사업소 ☎ 033-550-2741~42)
* 태백산도립공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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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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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2월 4일부터
 
* 글을 보셨다면 그냥 가지들 마시고 바로 밑에 있는 네모난 박스 안의 손가락 View on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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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와 조망이 일품인 서울의 숨겨진 명산, 호암산 (석구상, 한우물, 칼바위...)

 

~~~ 볼거리가 풍부한 서울의 숨겨진 명산, 호암산(虎巖山) ~~~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호암산 석구상

호암산성터

▲  호암산 석구상

▲  호암산성터


서울 시흥동과 신림동, 경기도 안양시에 걸쳐있는 호암산(虎巖山, 385m)은 삼성산(三聖山,
480m)의 일원으로 삼성산 서북쪽에 자리한다. 호암산이란 이름은 산세가 호랑이를 닮았다
고 하여 유래된 것인데, 다음의 사연이 걸쭉하게 전해온다.

때는 바야흐로 1394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가 개경(開京, 개성)을
버리고 서울(한양)로 도읍을 옮겼다. 서울에 와서 주변 지형을 살피니 한강 남쪽에 호랑
이를 닮은 호암산과 활활 타오르는 불 모양의 관악산(冠岳山, 629m)이 사이 좋게 서울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풍수지리(風水地理)적으로 서울을 크게 위협하는 존재로
봤던 것이다.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인 동명성왕(東明聖王)처럼 화살을 잘쏘며 무인(武人)으로써 크게
위엄을 날렸던 이성계, 허나 대자연이 빚은 호암산과 관악산의 패기에 그만 염통이 쫄깃
해지면서 서울을 지키고자 안간힘을 쓰게 된다. 그래서 비보풍수(裨補風水)에 따라 호암
산과 관악산 밑에 절을 짓고 연못을 팠으며, 광화문(光化門) 앞에 해태상을 세우고, 숭례
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우는 등, 그야말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이처럼 호암산에는 산의 매서운 기운을 누르고자 지은 호압사(虎壓寺)를 비롯하여 서울에
서 가장 크고 오래된 우물인 한우물, 비보풍수로 세워진 석구상, 신라 때 축성된 호암산
성터, 흔적만 아련히 남은 제2한우물터와 건물 유적, 호암산의 기운을 잠재우고자 기도를
올린 자리에 세워진 불영암,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처형된 프랑스 신부 3명이 묻힌 삼성
산성지(三聖山聖地) 등, 신라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옛 흔적들이 서려있어 이곳
의 중요성을 새삼 가늠케 한다. 
게다가 조망 또한 천하일품이라 서울 대부분과 안양, 광명, 부천, 인천(仁川)은 물론 북
한산(삼각산)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오며, 호랑이를 닮은 뫼답게 멋드러진 바위가 아
낌없이 포진해 있어 산행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근래에는 호압사 남쪽에 넓게 소나무숲을
조성해 산림욕장을 닦았고, 벽산5단지 기점에는 비록 인공이긴 하지만 호암산폭포가 조성
되어 호암산의 새로운 명물을 꿈꾼다.

호암산은 호압사를 비롯해 벽산5단지, 신우초교, 삼성산성지, 서울대, 석수역, 시흥3동에
서 안길 수 있으며, 깃대봉과 장군봉을 거쳐 삼성산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리고 2011년
11월에는 사당역에서 낙성대(落星垈), 서울대, 호압사, 산림욕장, 호암산폭포, 시흥계곡
을 거쳐 석수역까지 이어지는 관악산둘레길(13km)이 뚫리면서 북한산둘레길에 감히 도전
장을 내밀었다.


  부드러운 곡선의 호암산 남쪽 능선
 

▲  호암산 정상 입구에서 바라본 남쪽 능선

호암산 정상 밑에 자리한 호압사에서 한우물이 있는 호암산 남쪽 봉우리까지는 소나무 산림욕장
을 거쳐가는 것과 호압사 뒤쪽에서 정상 입구를 거쳐 가는 길이 있다. 각 길마다 장단점이 있겠
지만 좀 쉽게 가고자 한다면 산림욕장 길이 좋다.

호압사 남쪽에 넓게 터를 닦은 소나무 산림욕장은 솔내음이 진하게 나래를 펼치는 소나무 숲 사
이로 산책로가 실타래처럼 이어져 있고, 곳곳에 의자와 운동시설이 심어져 속인들의 편의를 제
공한다. 그리고 숲 남쪽에는 약수터가 있어 호암산이 베푸는 약수도 마실 수 있다. 그런데 1가
지 아쉬운 것은 약수터 주변을 흐르는 계곡을 자연 그대로 냅두지 않고 시멘트를 발라 둑과 물
길을 낸 것이다. 얼마나 보기가 흉하던지 애써 가꿔온 송림의 아름다움이 무색할 지경이다.


▲  호암산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시흥2동 벽산아파트를 비롯하여 금천구와 광명시 지역이 눈 아래 펼쳐진다.
 

▲  세상을 향해 머리를 들이민 호암산 남쪽 봉우리

반면 호압사 뒤쪽은 시작부터 꽤나 각박하여 힘겨운 산길을 올라야 되지만 그 거리는 10분 내외
로 짧다. 잠깐의 고통을 딛고 길을 올라서면 금세 호암산 정상 입구에 도달한다. 여기서부터 남
쪽 봉우리까지는 아주 느긋한 능선길(남쪽 능선)의 연속으로 능선을 따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
는 조망을 두 눈에 주어 담으며 거닐면 된다. 이 구간이 바로 호암산의 가장 큰 매력으로 산길
곳곳에 멋드러진 바위가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처럼 포진해 있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
은 정말 꿀맛이다.

내가 호암산에 퐁당퐁당 빠진 것은 잠깐의 고생 끝에 정상과 능선까지 오를 수 있고, 거기서 이
렇게 꿀 빠는 조망을 누릴 수 있으며, 능선의 곡선이 매우 부드럽고 느긋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래된 명소도 풍부하니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착한 산이다.


▲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1)
흐린 하늘 아래로 서울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영등포구 지역이 보인다.
호암산 능선에는 훤칠한 소나무부터 키가 작은 소나무까지 다양한 모습의
소나무가 뿌리를 내려 호암산을 아름답고 푸르게 수식한다.

▲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2)
시흥2동 벽산아파트와 금천구, 구로구, 광명시 지역


▲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3) 서울 금천구와 구로구, 광명시 지역

▲  두툼하게 솟은 호암산 남쪽 봉우리

▲  솔내음이 춤을 추는 호암산 남쪽 능선길


♠  호암산 석구상(石狗像)과 호암산성터 주변

호압사와 정상에서 부드러운 곡선의 능선을 더듬으며 남쪽 봉우리에 이르면 한우물을 200m 가량
앞둔 지점에서 산길이 2개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바로 사방을 난간으로 두룬 돌로 쌓
은 기단(基壇)이 나오고, 그 안에 호암산의 상징물인 조그만 석구상이 북쪽을 바라보며 정말 귀
엽게도 앉아있다.

지금은 돌로 만든 개의 상, 석구상으로 통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정체에 대해 말들이 조금 있는
모양이다. 예전에는 광화문 해태상과 마주 보게 하여 관악산의 화기(火氣)로부터 서울을 지키는
해태상으로 여기기도 했는데, 한우물을 발굴조사하면서 '석구지(石狗池)'라 새겨진 장대석(長臺
石)이 출토되었고, 시흥읍지 형승조(始興邑誌 形勝條)에는
'호암산 남쪽에 석견(石犬) 4두(四頭)를 묻어 개와 가깝게 하고자 하였으며 지금 현남7리(縣南
七里, 시흥동)에 사견우(四犬偶, 개의 형상 4개)가 있다'
란 기록이 있어 해태상이 아닌 석구상
으로 크게 무게가 쏠리고 있다.

석구상의 크기는 길이 1.7m, 폭 0.9m, 높이 1m 정도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발과 꼬랑지 부분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옆에서 바라본 석구상

▲  석구상 뒷부분의 위엄 (꼬랑지가 말려져 있다)

석구상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해태의 모습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고 완벽한 개의 모습이라 하기
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앞 모습을 보면 강아지의 모습 같기도 하지만 양과도 비슷해 보이
며, 어떤 이는 개구리를 닮았다고도 하니, 보면 볼수록 참 답이 안나오는 기이한 상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제 눈이 안경이라 사람마다 보이는 모습이 제각기 다를 것이다. 그의 뒷부분에
는 길다란 꼬리가 말려져 있는데, 이는 개의 꼬리가 아닌 고양이나 호랑이의 꼬리와 비슷하다.

석구상의 탄생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으나 대략 조선 중기 이후로 여겨진다. 그는 정
확히 북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데 정말로 광화문 해태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를
만든 이유도 딱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호암산의 기를 누르고 서울을 지키려는 비보풍수의 일환
으로 여겨진다.

석구상은 그 모습이 참으로 아담하고 깜찍하여 등산객들의 눈길을 제대로 잡아맨다. 보는 이들
마다 귀엽다는 말이 연거푸 터져 나오고,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적지 않은 웃음을 선사하며,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는 등 그의 인기는 좀처럼 식을 줄을 모른다.


▲▼  숲속 오솔길에 묻힌 호암산성터 - 사적 343호

석구상에서 바로 남쪽 능선길을 조금 가면 산길의 일부가 되버린 호암산성의 아련한 흔적을 만
날 수 있다. 흔적이라고 해봐야 성돌과 흙이 뒤섞인 1~2m 높이의 성터 윤곽이 전부로 이리저리
돌이 박혀있어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그냥 산길로 여기며 밟고 지나가기 일쑤다.

호암산성은 호암산 남쪽 봉우리에 둘러진 퇴뫼식 산성으로 자연 지형을 이용했다. 산성의 길이
는 약 1.250m로 지금은 300m 정도만 간신히 살아있다. 성곽은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쭉한 마름모꼴로 축성 시기와 목적은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없으나 1990년 봄, 한우물과 호
암산성 일대를 발굴하면서 우물 2곳과 건물터 4곳이 드러났고, 6,500여 점에 이르는 막대한 토
기와 갖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들 유물과 관련 기록을 통해 신라 중기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금천구청 자료에 따르면 672년(문무왕 11년) 신라가 당나라의 공격을 막고자 세운 요새
로 여기고 있는데, 당시 신라는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와 힘겹게 줄다리기를 하던 상황이었다.

조선시대에도 한우물과 관련된 여러 기록과 제2한우물터, 건물터 등의 흔적을 통해 산성이 그런
데로 구실을 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딱 1번 크게 쓰인 적이 있는데 바로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3년 1월로 이때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 오산 세마대(洗馬臺)>에서 왜군을 격파한 권율(權
慄) 장군이 서울을 수복하고자 행주산성(幸州山城)에 들어가 진을 치고, 전라병사(全羅兵使) 선
거이(宣居怡)에게 군사 4,000명을 주어 호암산성으로 보내 자신의 후방을 지키게 했다. 호암산
은 서울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호랑이 모양의 뫼답게 서울로 공격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왜란 이후, 산성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점차 그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조선 후기에 그 이름이 지
워지고 만다. 이후 산성의 운명은 지금의 상태가 여실히 말해준다. 버림을 받은 호암산성은 관
리 소홀과 자연의 무정한 장난, 그리고 세월의 덧없는 무게까지 더해지면서 서서히 녹아내려갔
고, 등산객들의 속절없는 발길이 성곽을 짓누르면서 담장만도 못한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아무
리 인간이 멋드러지고 견고하게 건축물을 세워도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일개 장난감에 불과하다.


▲  오르막을 타는 호암산성터

▲  호암산성 능선에서 바라본 매끄러운 곡선의 삼성산 줄기
삼성산 줄기 너머로 관악산 정상이 흐릿하게 보인다.

▲  호암산성 능선에서 만난 바위
바위 밑은 천길 낭떠러지이므로 주의 요망~

▲  제2한우물터 북쪽에 뿌리를 내린
옛 사람의 무덤


석구상에서 제2한우물터로 가는 길목에 조그만 무덤 1기가 뿌리를 내렸다. 삼성산이 있는 동쪽
을 바라보는 이 무덤은 대략 100여 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다른 무덤과 달리 산의 기맥이 이어
져 있지 않고 그냥 봉분(封墳)만 올린 조촐한 형태로 그 뒤쪽에는 바위가 누워있다.

무덤 앞에는 묘의 주인을 알리는 묘비가 없어 무덤의 자세한 정보는 알 수 없으며, 별다른 장식
이 없는 소박한 모습으로 보아 인근에 살던 백성의 무덤으로 보인다. 비석과 상석(床石) 대신
돌을 두툼하게 깔아 예를 올리는 공간을 마련했고, 봉분은 자연석으로 네모나게 호석(護石)까지
둘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이가 서로 맞물린 듯 불규칙해 보인다.


▲  호암산성 건물유적

호암산성터를 지나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호암산 남쪽 봉우리의 정상부이다. 이곳에는 잡초가
무성한 드넓은 공간이 있는데, 서쪽에는 제2한우물터가, 동쪽에는 건물유적이 있다.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지 수풀 속에 잠긴 건물유적에는 건물을 받쳤을 주춧돌과 건물터의
윤곽이 떠받들 대상을 상실한 채 옛날을 그리워하고 있으며, 나무에게 버림받은 낙엽들이 그 허
전한 빈터를 따스히 덮어주며 서로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이곳은 조선 때 호암산성을 관
리하던 관청이나 장대(將臺), 또는 군사들의 숙소나 창고로 여겨지며, 조선 후기에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  수풀 속에 묻혀 분간이 쉽지 않은 호암산 제2한우물터

건물유적 맞은편에는 제2한우물터가 있다. 호암산성이 버려진 이후, 땅 속에 묻혀 강제로 기나
긴 잠을 자다가 1990년 발굴조사로 다시금 햇살을 보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우물의 길이는 남북이 18.5m, 동서 10m, 깊이 2m에 이르며
산꼭대기에 하나도 아닌 2개의 커다란 우물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지금은 실
감이 나지 않지만 옛날부터 호암산의 중요성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물로 하늘에
제를 지내거나 기우제 등 여러 의식이 거행된 곳처럼 마냥 신비롭게 보여 우물 가까이 다가서기
가 두려울 정도다. 괜히 저곳에 내려가다가 천벌을 받거나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 같은 기분 말
이다.

제2한우물터는 발굴 이후, 한우물처럼 온전히 재현되지 못하고 풀이 무성하도록 방치되고 있으
며, 석축과 우물을 구성하는데 쓰인 돌들이 무수히 널려있다. 복원할 계획이 있다고는 하는데
그게 언제가 될지는 호암산 산신(山神)도 모른다. 어차피 복원된 한우물이 있으니 제2한우물은
그냥 저대로 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산 정상부에 둥지를 튼 거대한 옛 우물, 호암산 한우물
- 사적 343호

호암산 남쪽 봉우리 서쪽에는 호암산의 또 다른 상징물인 한우물이 누워있다. 여기서 한우물은
큰 우물이란 뜻으로 산 정상부에 이런 거대한 못이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천하가
훤히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해 있어 하늘의 우물인 천정(天井) 분위기도 물씬 풍기며, 이곳에 물
을 대줄 마땅한 수원(水源)도 없다고 하는데, 어디서 그 많은 물이 나오는 것인지 늘 물로 풍부
하다. 특히 가뭄 때도 물이 가득해 그 신비로움을 더욱 끌어올린다.

한우물은 천정, 용복, 용초 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7~8세기 경에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우물 자리 밑에서 신라 못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그 시절에도 못의 규모는 상당하여 동서 약
17.8m, 남북 약 13.6m, 깊이 약 2.5m에 달했다고 하며, 이후 조선 때 그 위에 새롭게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의 장방형 우물을 덧씌웠다.

1990년 봄, 한우물을 발굴할 때 12개 기종의 1,313점의 유물이 햇빛을 보고자 앞을 다투어 쏟아
져 나왔는데, 그중 '仍伐內力 只來..' 글씨가 새겨진 청동 숟가락이 나와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열쇠가 되었다. 또한 지표에서 30cm까지는 백자 파편을 비롯한 조선시대 유물이 많이 나왔다.


▲  불영암에서 바라본 한우물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3년 1월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가 권율 장군의 명으로 군사 4,000명
을 이끌고 호암산성에 머물 때, 이 우물을 사용했으며, 세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
勝覽)에는
'虎岩山 有固城 城內有一池 天早祈雨(호암산에 견고한 성이 있는데 성안에 연못이 있어 일찍이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다)'
란 기록이 있어 평시와 전쟁 때는 식수로 사용하고, 가뭄이 극성일 때
는 기우제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서울의 화재를 막으려는 방화용설(防火庸設)도 설
득력을 얻고 있다.
또한 석구지(石狗池)란 애칭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한우물에서 '석구지'라 쓰인 장대석이 나왔
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남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서는 제2한우물터가 발견되었다.

한우물은 식수용으로 태어난 곳이지만 현재는 그의 보호를 위해 식수로는 쓰지 않는다. 우물 남
쪽에는 갈대가 둥지를 트고 있어 운치를 드리우며, 북쪽에는 소나무 1그루가 우물을 거울로 삼
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그리고 우물의 건강을 위해 그 주위로 돌난간과 철제난간을 2중
으로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한우물이 있는 곳은 호암산 남쪽 봉우리로 천하를 굽어보기 좋은 곳이다. 속세가 한눈에 바라보
이는 벼랑에 한우물조망대가 터를 닦아놓아 이곳에 서면 금천구를 비롯한 서울의 서남부와 경기
도 광명시, 부천시 지역이 거침없이 바라보여 두 눈이 너무 호강을 한다. 우물 주변에는 벤치가
여럿 설치되어있어 간식에 막걸리 1잔 걸치며 잠시 쉬어 갈 수 있다.

한우물은 처음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호였으나 1991년 호암산성과 제2우물터, 건물유적을
한 덩어리로 묶어 사적 343호로 승진되었다. (지정명칭은 '서울 호암산성')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시흥 벽산아파트와 시흥동과 독산동, 광명시 지역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시흥동 벽산아파트와 금천구, 구로구, 광명시 지역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3)
가까이에 벽산1/2단지와 호암산 서북쪽 줄기가 보이고, 그 산줄기 너머로
관악구와 영등포구, 동작구 지역은 물론 멀리 북한산까지 시야에 잡힌다.
사진 오른쪽 부분에는 호암산의 감시초소인 호압사가 바라보인다.


♠  한우물과 명품급 조망을 든든한 후광으로 삼은 조그만 암자
~ 호암산 불영암(佛影庵)

▲  불영암 대웅전(大雄殿)

한우물 옆에는 그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암자, 불영암이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가파른 벼랑 위에 터를 다지며 속세를 향해 훤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호압사나 벽산아파트단
지, 호암로에서도 확 눈에 들어온다.

불영암의 내력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정보가 없어 파악하긴 힘들지만 관악산과 호암산의 기운으
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니 서울에 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런 것을 보면 호랑이가 담배타령을 하던 조선 초기부터 조촐하게 기도처가 있었던 모양으로
호압사가 보일 정도로 가까우니 아마도 호압사 승려의 수행처 역할을 했던 곳으로 보인다. 보통
100년 이상 묵은 절은 그 내력을 담은 안내문을 절 앞에 당당하게 내걸지만 그런 것도 없는 것
으로 봐서는 1950년대 이후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가 무지 짧은 손바닥만한 암자로 대웅전과 산신각(山神閣), 요사(寮舍)로 쓰이는 작은 건물
이 전부이며, 그나마 대웅전만 불전(佛殿)의 분위기가 진할 뿐이다. 게다가 절이 들어앉은 위치
도 건물을 크게 짓거나 사세를 늘리기도 여의치 않은 협소한 수준이다. 허나 한우물이 곁에 있
어 물수급은 어렵지 않고, 벼랑에 자리한 탓에 조망 하나는 몸살이 날 정도로 좋다. 그러니 한
우물과 휼륭한 조망, 그리고 기존의 기도처를 후광으로 삼아 절을 세웠을 것이다.

이곳 높이는 해발 310m 정도로 서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절이다. 예
전에는 대웅전과 요사만 있던 볼품 없는 모습이었으나 2009년 이후 대웅전 뒤쪽 바위에 커다란
불두(佛頭)를 얹히고, 절 앞에 돌탑을 심어 돌탑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2011년에는 제2한우물
터 주변에서 발견된 절구통과 맷돌, 모서리돌 등을 돌탑 앞에 두어 오래된 볼거리를 추가했다.
특히 고려불화의 유일한 전수자인 승려 여지(如智)가 2005년에 그린 '104위 신중탱화(神衆幀畵)
'가 있어 눈길을 끈다.

불영암은 한우물의 이웃으로 그를 지켜주고 있으며, 조망은 천하 일품이라 절의 규모는 눈송이
같지만 뜨락 하나만큼은 천하 제일이다. 게다가 대웅전 옆에는 보기만 해도 정겨운 부뚜막을 설
치해 검은 가마솥으로 밥을 짓고 있는데, 인근에서 가져온 나무 장작으로 불을 땐다고 한다. 부
뚜막 옆에는 장작이 담을 이루고 있어, 심산유곡의 화전민 마을에 들어선 기분이며, 부뚜막이
장작을 먹어 모락모락 구름을 피어내면 나도 모르게 시장기가 돌면서 입 안에 침이 고인다. 또
한 국수와 부침개, 식혜, 커피 등을 파는데, 커피는 500원, 국수와 부침개는 3,000원선이다.


▲  돌탑거리를 이루고 있는 불영암 앞길과 순찰중인 견공(犬公)

▲  바위에 머리만 꽂은 불영암 석불(石佛)

대웅전 우측 바위에 2009년에 만든 석불이 서쪽을 굽어본다. 석불이라고 하나 바위에 커다란 불
두만 심은 형태로 바위는 그의 자연산 몸뚱이가 되었다. 바위에 접착된 불두 주변에 하얀 석고
등이 가득해 다소 이질감은 들지만 장대한 세월의 흐름은 저들을 완연한 하나의 존재로 만들 것
이다. 석불 앞에는 키 작은 소나무가 하늘로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옆으로 쳐져있는데, 그 모습
이 마치 불상에 예를 올리는 듯 하다.


▲  불영암 돌탑거리

▲  제2한우물터 부근에서 수습된 절구통(절구석)의 일부와 모서리돌
불영암 주지승과 처사가 발견한 유물로 신라 후기 것으로 여겨진다.

▲  제2한우물터 건물유적에서 발견된 절구통(절구석)과 맷돌

돌탑 앞에 놓인 절구통과 맷돌은 호암산성 군사들이 쓰던 것들로 시흥동 주민이 발견하여 불영
암에 알렸다. 그래서 2010년 이곳으로 수습했는데, 신라 또는 조선시대 것으로 여겨지며 다른
절구통과 달리 금, 은, 동, 철의 성분이 많아 상당히 무겁다고 한다. 옆에 맷돌은 어처구니를
상실한 채, 열심히 돌아가던 왕년을 그리워한다.


▲  불영암에서 바라본 호암산 북쪽 줄기, 그 중간에 호암산을 감시하는
호압사가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다.


♠  날카로운 모습의 바위이자 호암산의 또 다른 명물 ~ 칼바위

▲  예리한 칼날 같은 칼바위 (바로 밑에 벽산5단지)
서울을 위협하던 호암산의 날카로운 발톱은 아닐까?

불영암에서 5분 정도 내려가면 칼바위 조망대가 나온다. 바로 그 밑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피가
나올 것 같은 예리한 기세의 칼바위가 자리해 있는데, 가파른 산등성이에 아슬아슬하게 자리해
있어 자칫 살짝만 건드려도 밑으로 쿨하게 굴러떨어질 것 같다. 이 바위는 위에서 보는 것보다
는 밑에서 봐야 그 위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데, 그 모습이 당장이라도 속세를 향해 칼질을
벌일 것 같은 기세라 보기만 해도 염통이 긴장을 한다.

이런 바위에는 옛사람들이 붙인 그럴싸한 전설이 있기 마련이라 다음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한토막 전해온다.
때는 임진왜란 시절, 왜군이 시흥(始興) 고을<당시 시흥(금천)의 중심지는 시흥동>까지 쳐들어
오자 장사 1명이 혼자서 왜군을 때려잡으며 분투를 벌였다. 이에 염통이 쫄깃해진 왜장은 장사
가 이기면 무조건 물러가겠다는 조건을 달며 칼바위에서 턱걸이 내기를 제안했다. 그래서 장사
와 왜군 대표 병사와 손에 땀을 쥐는 턱걸이 승부를 벌였는데, 왜군이 100번째 턱걸이를 하려는
순간 힘이 다해 바위 밑으로 떨어져 죽었다. 그때 바위 끝이 쪼개져 나갔다고 전한다.
내기에서 진 왜군은 분을 삼키며 철수를 하자 긴장이 풀린 장사는 소변을 보았는데, 그 줄기가
얼마나 강했는지 바위 한가운데가 움푹 패여 나갔다고 하며, 그 바위가 인근에 있는 팽이바위라
고 한다.

칼바위가 세워진 틈새는 매우 좁아보이지만 속은 매우 넓어서 6.25시절 이곳에 숨어 지낸 사람
도 여럿 있었다고 전한다. 허나 바위는 위치상 출입 통제구역이라 그것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  칼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1) - 벽산5단지와 금천구, 광명시 지역

▲  칼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2) - 시흥동, 광명시 소하동, 구름산과
가학산 산줄기, 그리고 일몰

※ 호암산 찾아가기 (2013년 12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3번 출구)에서 152번 시내버스를 타고 호압사입구나 벽산5단지 하차
*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3번 출구)에서 5517, 6515번 시내버스를 타고 호압사입구나 벽산5
  단지(6515번만 해당) 하차
* 지하철 1호선 금천구청역에서 금천구 마을버스 01번 청색 차량을 타고 호압사입구 하차
* 올라가는 코스
① 호압사 → 소나무 산림욕장 → 약수터에서 왼쪽 → 호암산 남쪽 능선 → 한우물 (35분)
② 호압사 → 호암산 정상 → 호암산 남쪽 능선 → 한우물 (40~45분)
③ 벽산5단지 → 칼바위 → 한우물 → 석구상 → 호암산 남쪽 능선 → 호암산 정상 (45분)
* 한우물에서 내려가는 경우
① 한우물 → 칼바위 → 벽산5단지 또는 시흥5동
② 한우물 → 제2한우물터 → 남서울약수 → 석수역
③ 한우물 → 호암1터널 → 관악산둘레길 경유(시흥계곡) → 석수역

* 호암산성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산 83-1외
* 한우물과 불영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산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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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산사 나들이 ~ 영조 임금의 효심이 깃든 파주 고령산 보광사


' 한겨울 산사 나들이 ~ 파주 보광사(普光寺)'

▲  보광사 목어


겨울의 제국이 강추위로 천하를 부들부들 떨게 만들던 겨울의 한복판에 파주(坡州)에 있는 보
광사를 찾았다. 이곳은 어린 시절에 2~3번 가본 인연이 있는 곳으로 구파발역에서 파주시내버
스 333번(금촌↔구파발)을 타고 보광사로 들어간다.

보광사에 가려면 고양시(高陽市) 벽제동과 파주시 광탄면(廣灘面) 동부 지역을 잇는 고갯길인
됫박고개를 넘어야 되는데 고개가 제법 패기가 있다. 이 고개는 조선 21대 군주인 영조(英祖)
와 인연이 아주 깊은데, 그는 소녕원(昭寧園,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 묘역)과 소녕원의 원찰
인 보광사를 자주 찾았다. 그때마다 이 고개를 싫든 좋든 넘어야했지.
고개가 제법 험준하여 다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지라 뚜껑이 열린 영조는 '고개를 더 파서
낮추라!'고 명했다. 그 연유로 '더 파기 고개'가 되었다가 나중에 됫박처럼 가파르다 하여 됫
박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4발 수레로 편하게 넘을 수 있다지만 그 수레들도 이 고갯
길만큼은 조심스레 바퀴를 굴리며 몸을 사린다.

버스에서 내리니 보광사 일주문(一柱門)이 여기까지 나와 중생을 맞는다. 문 좌측에는 고령산
에서 발원한 계곡이 숨을 죽여 흘러가고, 일주문을 들어서면 주막과 찻집이 주를 이루는 조그
만 마을이 고개를 내민다. 이곳은 절 밑에 터를 닦은 이른바 사하촌(寺下村)으로 보광사와 고
령산을 후광(後光)으로 삼아 밥장사를 하는데, 보리밥이 꽤 유명하다.

부처의 세계를 코앞에 둔 속세의 마지막 유혹이라고나 할까? 찻집과 주막의 유혹을 벗어나 10
분 오르면 보광사의 산문이 나타난다.


  보광사 일주문을 들어서다

▲  '고령산보광사'라 쓰인 보광사 일주문(一柱門)

대부분의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주문은 절의 정문이다. 보광사의 일주문은 1999년에 지어진
것으로 문이라고는 하지만 문을 여닫는 문짝이 없어 절을 찾은 중생이나, 산을 찾은 등산객, 부
자와 서민 등 그 누구도 가리지 않고 반갑게 맞이한다. 일주문처럼 넓은 포용력을 지니며 살리
라 다짐을 하건만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  보광사의 옆구리를 거쳐 속세로 흐르는 고령산 계곡
얼음 밑으로 숨죽여 흘러가는 계곡, 소쩍새가 울 때면 움츠려든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켤 것이다.

▲  겨울의 정령에 사로잡힌 보광사 가는 길
겨울의 제국 치하에 들어간 나무들은 잔뜩 몸을 움츠리며 봄의 해방군을 기다린다.

▲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

일주문을 지나 8분 정도 오르면 흙담장에 가린 보광사의 모습이 나타나면서 길이 2갈래로 갈라
진다. 길 오른쪽에는 윗 사진처럼 계곡 위에 걸린 돌다리를 건너 흙길과 계단을 거쳐 경내로 들
어가는 길과 경내까지 뚫린 수레길을 이용하여 가는 것이 있다. 어느 길을 이용하든 경내로 통
하지만 돌다리 코스가 운치가 있으며, 수레길이 없던 옛날에는 저 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섰다.

절을 받치고 있는 석축(石築)은 마치 산성(山城)처럼 3중으로 계단식으로 쌓여져 있으며, 그 위
에 담장을 두르고 넓게 터를 닦아 절을 일구었다. 만세루 남쪽은 석축을 1단으로 높게 쌓았다.


▲  보광사 설법전(說法殿)

갈림길에서 2분 정도 오르면 길 왼쪽에 설법전이란 길쭉한 건물이 있다. 이곳에는 찻집인 도솔
천(兜率天)과 종무소(宗務所)가 있으며, 여러 법회(法會)와 강좌가 열린다. 그리고 도솔천에서
는 다양한 전통차와 온갖 불교용품을 판매하고 있는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곳에서 일다경(一
茶頃)의 여유를 누리고 싶다.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명당자리, 영조 임금과의 각별한 인연으로
조선왕실의 원찰로 번영을 누린 ~ 고령산 보광사(古靈山 普光寺)

▲  겨울 햇살의 드넓은 손길이 구석구석 보듬고 있는 보광사

보광사는 서울과 가까운 고령산(621m) 서쪽 자락에 아늑히 안긴 산사(山寺)로 절 이름인 보광(
普光)은 넓은 광명(光明)을 뜻한다고 한다. 그렇게 좋은 뜻을 가지고 있으니 그 이름을 지닌 오
랜 절집만 서울 주변에 4곳(서울 우이동, 파주, 과천, 남양주)이나 된다. 그중에서도 이곳이 가
장 오래되고 제대로 남아있다.

보광사는 신라가 망해가던 894년(진성여왕 7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왕명에 따라 비보(裨補
) 사찰로 창건했다고 전하나 확실한 것은 없다. 창건 이후 1215년 원진국사(元眞國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며, 법민대사(法敏大師)가 불보살(佛菩薩) 5위를 봉안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1388년에
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창을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22년에 설미(雪眉), 덕인(德仁)이 중건하고 1634년 범종을 만들었다.
그 범종이 보광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숭정7년명동종이다. 1667년에는 지간(智侃), 석련(石
蓮)이 대웅전과 관음전을 중수했다.

보광사가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누린 것은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시절이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소생으로 그녀의 무덤인 소녕원(昭寧園)이 보광사 서쪽 영장리에
있다. 그런 인연으로 영조는 보광사를 소녕원의 원찰(願刹)로 삼아 많은 지원을 내렸으며, 그때
대웅보전과 관음전을 중수하고 절에서 가장 큰 건물인 만세루를 세웠다. 또한 소녕원에 참배하
러 갈 때는 보광사에 꼭 들렸다.
이렇게 원찰로서의 지위와 번영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쭉 이어져 1863년에 왕실의 지원에 힘입
어 나한전, 큰방, 수구암을 짓고,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석가3존불, 16나한상 등을 조성했으며,
1864년에는 관음전과 별당을 세우고, 1869년에 절을 중수했다. 1901년에는 상궁(尙宮) 천씨의
시주로 대웅전과 만세루를 중수하여 절의 면모를 크게 하였다.

이렇게 잘 나가던 보광사는 1950년 6.25전쟁으로 대웅전과 별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
되는 비운을 겪는다. 그 이후 꾸준한 중창불사로 관음전을 새로 짓고 만세루를 해체하여 복원했
으며, 1981년에 석불전이라 불리는 거대한 대불(大佛)을 세웠다. 2003년에는 납골당(納骨堂) 사
업에도 손을 뻗쳐 경내 북쪽에 영각전을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고색의 기운이 진한 경내에는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원통전, 어각실, 응진전, 산신각, 지장전,
만세루, 수구암, 설법전, 영각전 등 10여 동의 건물이 가득 들어차 있으며, 대부분이 서향(西向
)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북쪽을 제외하고 경내 주변을 토담으로 빙 둘러 속세와 부처의 세계의
경계를 가른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인 대웅보전과 숭정7년명동종, 목조보살입상(지방유형문화재 248
호)을 간직하고 있으며, 지장탱화와 나한탱화등 19세기에 그려진 불화가 다수 있다. 만세루와
어각실, 응진전도 18~19세기에 지어진 건물이며, 어실각 옆에는 영조가 심었다는 향나무가 무럭
무럭 자라고 있다. 또한 수구암(守口庵)과 영묘암(靈妙庵), 도솔암(兜率庵) 등 부속암자 3곳을
가까이에 거느리고 있다.

서울에서 가깝지만 깊은 산중에 안겨있어 고요함과 고즈넉함이 중생의 마음을 편하게 인도하며,
산새의 지저귀는 소리와 바람의 소리, 그리고 풍경소리와 목탁소리가 전부인 산사이다. 또한 절
을 알처럼 품은 고령산은 숲이 울창하고 봄과 가을에는 꽃과 단풍의 화려한 향연으로 이름을 날
려 휴일에는 많은 등산객이 찾아온다. 고령산을 오르려면 보광사를 거쳐가야 되기에 그날만큼
은 중생들로 경내는 시끌벅적하다.

▲  대웅보전을 옆에서 가린 요사채

▲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응진전 우측의 장독대들

※ 파주 보광사 찾아가기 (2013년 2월 기준)
* 3호선 구파발역(1,2번 출구)이나 삼송역(3호선, 8번 출구)에서 파주시내버스 333번을 타고 보
  광사 하차, 버스는 20~4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까지 수레 접근 가능)
① 서울 → 문산 방면 1번 국도 → 대자3거리에서 의정부 방면으로 우회전 → 고양동에서 광탄
   방면으로 좌회전 → 벽제3거리에서 우회전 → 보광사입구 → 보광사
② 수도권외곽고속도로 → 통일로나들목에서 문산 방면 → 대자3거리에서 의정부 방면으로 우회
   전 → 고양동에서 광탄방면으로 좌회전 → 벽제3거리에서 우회전 → 보광사입구 → 보광사

★ 보광사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으며, 경내와 일주문 부근에 주차장이 있다.
* 보광사 템플스테이(Temple stay)는 부정기적으로 열린다. 개인은 1박 2일, 단체와 어린이는 2
  박 3일 일정으로 진행되며, 자세한 것은 보광사 홈페이지를 참조한다. 참가 신청은 홈페이지
  에서 하거나 전화로 하면 된다.
*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13 (☎ 031-948-7700~1)
* 보광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꾹 누른다.


▲  대웅보전 뜰에서 바라본 고령산

▲  범종각(梵鍾閣)

경내로 들어서면 대웅보전을 가리고 선 요사 서쪽에 단촐한 모습의 범종각이 있다. 범종각 옆에
는 문화재안내판이 멀뚱히 서 있는데, 범종각에 걸린 종이 숭정7년명동종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은 범종각의 종이 그것인줄 안다. 허나 종을 잘 살펴보면 고색의
때도 거의 없을뿐더러 중간중간 한글이 보여 근래에 새로 만든 종임을 알 수 있다. 원래의 종은
최근까지 이곳에 있다가 건강을 이유로 대웅전으로 옮겼다.
범종각은 대웅전에 있던 숭정7년명동종를 위해 1990년에 지어졌으며, 만세루에 있던 목어(木魚)
도 이곳으로 잠시 옮겼으나 다시 원위치시켰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응진전(應眞殿)과 산신각(山神閣), 3층석탑

대웅전 우측 석축 위에는 단촐한 모습의 전각 2개가 오붓하게 자리해 있다. 우측에 자리한 응진
전은 1863년에 중건된 것으로 원래 이름은 나한전(羅漢殿)이었다. 내부에는 1863년에 조성된 것
으로 보이는 석가3존불과 16나한상이 있으며, 나한탱화는 1877년에 금곡영환(金谷永煥), 한봉창
엽(漢峯瑲曄) 등의 화승이 그렸다. 응진전 곁에 자리한 1칸짜리 산신각은 1893년에 중건된 것으
로 근래에 만든 산신상과 산신탱이 있다.
그들 앞에는 맵시가 돋보이는 3층석탑이 서 있는데, 원래는 대웅전 뜨락에 있었다.


▲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원통전(圓通殿)

대웅전 좌측에는 관음보살을 봉안한 원통전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
물로 이곳에는 예전에 쌍세전(雙世殿)이 있었으나 1994년에 부시고 새롭게 원통전을 지었다.
새로 지은 것이다보니 그냥 지나치고 말았는데, 알고보니 보광사의 불화(佛畵) 가운데 가장 오
래된 지장탱화(地藏幀畵)가 들어있었다. 순간의 방심으로 놓친 그 그림은 1802년 승려 경욱(慶
郁)이 그린 것으로 원래는 부속암자인 수구암에 있었다고 하며, 지장탱화와 나란히 있는 삼장탱
화(三藏幀畵)는 1898년에 제작된 것으로 경선응석(慶船應釋), 금화기동(錦華機同), 용담규선(龍
潭奎禪)이 그렸다.


▲  원통전 앞에 자리한 지장전(地藏殿)

지장전은 원통전과 마찬가지로 1994년에 지어졌다. 지장보살과 도명존자(道明尊者), 시왕상(十
王像) 등 저승의 주요 식구들의 존상(尊像)과 그림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중 장군탱화는 1872년
에 제작된 오래된 그림이다. 지장전에 있던 존상과 그림은 원래는 쌍세전에 있었다.

◀  어실각(御室閣)과 향나무

원통전 뒤쪽에는 조그만 1칸짜리 어실각이 있다.
이 건물은 1740년에 보광사를 소녕원의 원찰로
삼으면서 세운 것이라 전하며, 굳게 닫힌 내부
에는 숙빈최씨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건물 옆에는 겨울의 제국에도 아랑곳 않고 푸르
름을 간직한 10m 정도의 향나무가 자라고 있는
데, 이는 영조가 심은 것이라 한다. 세월을 양
분으로 삼아 무럭무럭 자란 향나무에는 영조의
혼이 깃들여 있는 건지 늘 어실각에 시원한 그
늘을 드리운다.


▲  왕실의 어보(御寶)처럼 특별하게 보이는 어실각
영조에 어미에 대한 그리움과 효를 읽을 수 있다.

▲  어실각 뒤쪽으로 끝없이 이어진 토담
흙으로 만든 토담의 모습이 너무 정겹다. 절과 속세의 경계선으로 그어진
토담 너머로 소나무가 속세의 악한 기운과 냄새로부터 절을 지킨다.


  안팎으로 다양한 볼거리와 보물을 간직한 보광사의 보물창고
대웅보전(大雄寶殿)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83호

경내 중앙에는 보광사의 법당(法堂)인 대웅보전(대웅전)이 만세루를 마주보고 있다. 만세루 다
음으로 규모가 큰 건물로 기와부터 기둥까지 고색의 내음이 진하게 묻어나 있다. 법당으로서의
품격과 위엄이 돋보이는 보광사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원래는 창건 시절부터 있었다고 하나 지금의 건물은 1740년에 중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대웅전은 만세루보다 1단계 높은 석축 위에서 서쪽을 바라고 있다. 건물을 받치는 석축은 자연
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이용했으며, 돌마다 기나긴 세월의 때가 가득 입혀져 고색의 향기를
강하게 풍긴다. 건물의 벽은 흙벽이 아닌 나무벽으로 되어 있고, 좌우측벽에는 다른 절에서는
보기 힘든 5개의 색다른 벽화가 눈길을 단단히 붙잡는다. 이들 벽화는 1740년에 건물을 중건하
면서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불단에는 조선 후기 불상인 삼세불을 중심으로 한 5존불이
있으며, 1898년에 그려진 석가모니후불탱화를 비롯한 6개의 불화와 숭정7년명동종, 금고(金鼓)
등 오랜 보물이 깃들여져 있다. 그야말로 보광사의 보물창고인 셈이다.


▲  대웅보전 우측벽화

왼쪽에는 하얀 옷을 입은 백의관음보살이 물결이 출렁이는 바다 위에서 배를 움직이고 있는데,
중생을 이끌며 거친 파도를 헤치고 극락으로 가는 모습을 담은 것 같다. 오른쪽에는 상아가 탐
나보이는 거대한 코끼리와 등에 올라탄 승려가 담겨져 있는데, 코끼리는 부처의 법을 상징한다
고 한다.


▲  대웅보전 좌측벽화

▲  좌측벽화의 좌측 그림
창을 들고 옷자락을 휘날리는 모습이 사천왕의 하나인 광목천왕(廣目天王) 같다.
부처를 지키는 성스러운 존재로 팔에 주름진 근육이 그의 힘을 느끼게 한다.
허나 그의 표정은 천왕(天王)으로서의 위엄과 무서움보다는 귀엽다는
인상을 지을 수 없게 한다.

▲  좌측벽화 가운데의 그림
개와 비슷하게 생겼으면서 이상하게 생긴 커다란 동물과 동자(童子)로
보이는 승려가 그려져 있다.

▲  좌측벽화 우측 그림
갑옷 비슷한 것을 갖춰 입고 비파 같은 것을 연주하는 모습이
사천왕의 일종인 다문천왕(多聞天王) 같다.

▲  대웅전 우측 출입문 위에 걸린 '고령산보광사상축서(上祝序)' 현판

대웅전 우측 출입문 창방에는 낡은 현판이 걸려있다. 이것은 '고령산보광사 상축서(古靈山普光
寺 上祝書)'로 1869년 왕실의 시주로 절을 중수한 것을 기리고자 만든 것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성상(聖上)은 고종, 왕비전하(王妃殿下) 민씨는 명성황후(明成皇后), 대원위(大院位)는 흥선대
원군(興宣大院君)으로 고종(高宗)의 가족이 보광사 중수에 크게 신경쓰고 지원했음을 보여준다.
현판에는 그들의 은혜로 절을 중수하여 그들의 성수무강(聖壽無疆)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
다.


▲  대웅전 불단(佛壇)에 모셔진 5존불

대웅전 불단에는 흔히 있는 3존불이 아닌 5존불이 봉안되어 눈길을 끈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
우에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앉아 있으며, 이들 불상은 이른바 삼
세불(三世佛)이다. 그들 좌우로 현란한 보관(寶冠)을 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서 있는데, 이
들은 마땅히 둘 장소가 없어서 삼존불 옆에 배치하여 졸지에 5존불이 된 것이다. 그들 모두 지
그시 눈을 감으며 은은하게 미소를 드리운 포근한 표정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저보다 편안한 표정이 어디에 있을까?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에 따르면 이들은 1215년 원진국사가 절을 중창할 때 조성했다고 한다. 허
나 저들은 엄연히 조선 후기 불상이다. 그들 뒤로는 석가가 설법을 하고 있는 석가모니후불탱화
가 걸려있는데, 1898년에 예운상규(禮芸尙奎), 경선응석(慶船應釋), 금화기동(錦華機同), 용담
규선(龍潭奎禪) 등의 화승이 그렸다. 후불탱에 깃들여진 빛바랜 고운 색채는 그림의 중후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며 신중탱화와 감로탱화, 칠성탱화, 독성탱화, 현왕탱화 등 5점의 불화(佛畵)
가 대웅전 내부 벽을 화려하게 수식하여 불화미술관을 방불케 한다. 이들 모두 후불탱화와 마찬
가지로 1898년에 제작된 것이다.

▲  독성탱화(獨聖幀畵)
지팡이를 쥐어들고 앉아있는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의 모습이다. 무슨 근심거리가 있는
것일까? 그의 표정에 우수(憂愁)가
서려 보인다.

▲  신중탱화(神衆幀畵)
조금의 여백도 허용치 않고 그림에 한가득
그려진 신들의 모습이다. 저들은 원래 인도의
토속신으로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되었다.


▲  칠성탱화(七星幀畵)
칠성신앙은 우리의 고유 민간신앙으로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되었다. 칠성(북극성)은
산신, 독성과 달리 부처에 준하는 대접을 받으며 치성광여래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여백이 없어 복잡한 신중탱화와 달리 이 그림은 눈이 편할 정도로 간결하다.

▲  현왕탱화(現王幀畵)

저승의 주인인 염라대왕(閻羅大王)이 심판을 하는 장면을 담았다. 여기서 현왕은 염라대왕을 지
칭하며, 대왕 주변으로 판관과 명부(冥府, 저승)의 여러 관리들이 구름처럼 모여있다. 대왕 앞
에 무릎끓고 앉아 있는 이는 이승에서 막 저승으로 들어온 사람인 모양이다. 그는 대왕에게 어
떤 판결을 받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  불단 우측에 있는 숭정7년명동종(崇禎七年銘銅鍾)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58호

단 우측에는 보광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숭정7년명동종이 놓여져 있다. (종의 위치는 바
뀔 수 있음) 이 종은 대웅전에서 계속 생활했으나 1990년 범종각을 지어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
다. 그러다가 근래에 종의 건강과 보호를 위해 다시 대웅전으로 옮기고 새 종을 만들어 범종각
을 지키게 했다.

이 종은 높이가 98.5cm로 범종각에 흔히 달려있는 범종(2~3m)보다 훨씬 작다. 종이 이렇게 작으
니 도난의 위험이 늘 도사리는 것은 당연하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범종으로 종 꼭대기에 2마
리의 용이 서로 뒤엉켜 종을 달리 위한 고리를 형성했다. 종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띠가 둘러져
있고, 그 가운데에 3줄의 띠가 둘러져 있어 종을 상하로 구분한다. 위쪽 부분에는 네모난 유곽(
乳廓) 4개와 보살입상(菩薩立像)이 4구가 있고, 아래쪽에는 파도무늬와 용이 종을 장식한다. 아
래 띠와 가운데 끼 사이에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는데 범종을 만든 시기와 제작자의 이름, 그리
고 보광사의 연혁이 길게 적혀 있다.
명문(銘文)에 따르면 이 종은 숭정7년에 제작되었다. 숭정7년은 1634년(인조 11년)으로 숭정은
명나라 황제인 의종(毅宗, 1611~1644)의 연호이다. 종의 이름은 바로 제작시기인 숭정7년에서
따온 것이다. 범종 불사에는 신관(信寬)이 화주를 맡았고, 설봉천보(雪峯天寶)와 3명의 승려가
범종을 조성했는데, 설봉천보는 1619년(광해군 11년)에 봉선사(奉先寺)의 대종(보물 397호)를
만들기도 했다.

대웅전 한쪽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조그만 종을 치고 싶다. 종을 치면 그는 졸음에서 깨어나
은은한 종소리를 건물 내에 잔잔히 울리겠지, 허나 문화재로 지정된 귀한 존재이자 보광사에 소
중한 보물로 괜히 그를 건드리다가는 된소리를 들을 각오를 해야 된다. 그냥 보는 것으로 만족
하는 것이 쌍방에 이롭다.

사진에는 없지만 불단 좌측에는 조그만 금고(金鼓)가 있다. 가운데에 태극마크를 그리고 가장자
리에 꽃무늬가 있으며, 전면에 '大皇帝陛下萬萬歲(대황제폐하만만세)'란 명문이 있어 고종이나
순종 시절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역시 황실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  영조의 친필이라 전하는 대웅보전 현판의 위엄
빛바랜 하얀 현판에 쓰인 대웅보전의 4글자 마치 글씨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처럼 필체의 힘이 넘쳐 흐른다.

▲  푸른 하늘을 바다로 삼으며 그윽한 풍경소리를 베푸는
대웅전 풍경물고기


  보광사 마무리

▲  승방의 역할을 겸하는 만세루(萬歲樓)의 후면(後面)

대웅보전과 마주보고 있는 만세루는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승방이 딸린 독특한 'T'구조를 하
고 있다. 이 건물은 원래 누각으로 1740년경에 영조의 지원으로 절을 중수할 때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며, 건물은 높은 석축을 발판으로 삼아 자리해 있다. 1913년과 1914년에 대한제국 상궁(
尙宮)의 시주로 중수를 했는데, 그때 만세루 옆으로 툇마루가 딸린 승방을 만들어 지금의 구조
를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정면 9칸의 규모로 '염불당중수시시주안부록(念佛堂重修時施主案付
祿)'이라 쓰인 현판이 있어 한때는 염불당(念佛堂)이란 이름을 지녔음을 알 수 있으며, 누마루
정면에 걸린 '고령산보광사'란 현판은 영조의 친필로 전해진다.


▲  만세루의 정면
누마루 정면에 영조가 썼다는 '고령산보광사' 현판이 있으며, 좌측 가장자리에
만세루란 현판이 걸려있다. 툇마루와 난간까지 갖춘 모습이 제법 품격을 갖춘
양반가를 보는 듯하다.


▲  만세루 목어(木魚)의 위엄
용을 꿈꾸는 목어가 입에 여의주로 보이는 동그란 것을 물고 하늘을 거닌다.
크게 부릅뜬 두 눈과 이글거리는 듯한 지느러미, 살랑거리는 꼬리 등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그를 덥썩 붙잡고 하늘을 날고 싶어진다.

▲  만세루 우측에서 속세로 나가는 문
수겹의 줄무늬가 쳐진 토담 사이로 속세로 안내하는 기와문이 있다.

▲  오색영롱한 연등이 대롱대롱 중생을 맞이하는 문 바깥 부분

▲  경내 서쪽을 빈틈없이 에워싼 토담
2중의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터를 닦아 절을 지었다.
천리장성처럼 끝없이 펼쳐진 토담의 물결 앞에 절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火魔) 등의 악귀도 두 손을 들고 물러갈 것이다.

▲  납골당으로 쓰이는 영각전(靈覺殿)

경내에서 개울 건너 북쪽에는 2003년에 만든 영각전이 자리해 있다. 이 건물은 납골당으로 서쪽
에 납골당으로 들어가는 지하도가 있으며, 위의 건물은 영가(靈駕, 죽은 이들)들을 위한 49재나
천도재를 지내는 공간으로 쓰인다. 내부 중앙에는 아미타불과 아미타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으
며, 외벽에는 고려불화(高麗佛畵)에 그려진 관음보살이 수려하게 그려져 있다.
* 납골당 문의는 보광사 영각전(☎ 031-948-4440)


▲  지하 납골당으로 들어가는 문 위쪽에 걸린 그림

관음보살이 영가를 배에 가득 태우고 넝실거리는 바다를 건너 극락으로 인도하는 장면이다. 판
옥선(板屋船) 비슷하게 생긴 큰 배에는 극락으로 가려는 이들로 가득하며, 배의 정원이 가득 차
서 따로 조그만 배 2척을 마련했다. 푸른 용과 붉은 용이 관음보살과 영가들을 지키며 극락으로
배를 이끈다. 출렁이는 물결이 마치 하늘로 치솟는 바위 산을 보는 듯 하다.


▲  석불전(石佛殿)

영각전 동쪽 높은 곳에 거대한 석불이 속세를 굽어보고 있다. 절에서는 이 석불(石佛)을 석불전
이라 부르는데, 그렇다고 건물은 아니다. 순천 금둔사(金屯寺, ☞ 관련글 보러가기)의 불보전처
럼 석불과 예를 올리는 공간을 통틀어 전(殿)이란 칭호를 준 것 뿐이다.

이 불상은 예전에는 나라를 지키는 호국대불(護國大佛)이라 불렀다. 1980년 1월 대웅보전 보살
상의 복장(腹臟) 유물이 도난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다행히 진신사리만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를 봉안하고자 1980년대 거액의 어음 사기 사건으로 악명이 높은 장영자의 시주로 경내에서
가장 높은 이곳에 터를 닦고 석불을 세웠다. 그리고 6.25전쟁 때 절 부근이 치열했던 격전지였
으므로 그때 죽어간 이들을 위로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호국대불이라 불리게 되었다.

석불의 복장에는 보살상에서 나온 진신사리 11과와 여러 나라에서 가져온 각종 보석, 법화경과
아미타경,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발원문(發願文)이 봉안되어 있으며, 불상의 높이는 대략 15m에
이른다.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잔잔히 미소를 드리운 석불은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서 있으며, 주변에
석등 2기가 그의 광명을 밝힌다. 이곳은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경내가 두 눈에 훤히 들어
온다.


▲  석불전에서 바라본 경내 서쪽 (설법전 구역)

▲  절을 뒤로하며 다시 속세로 나오다.

석불전을 끝으로 정말 오랜만에 찾은 보광사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둘러본 시간은 대략 1시
간 정도로 그냥 경내를 나오지 않고 다시 대웅전과 만세루를 찾아 거기서 조금 다리를 쉬었다가
속세로 아쉬운 발길을 떼었다. 고요하고 평안한 절을 뒤로하고 속세로 나올 때는 마치 돌아오지
못할 전쟁터로 향하는 군인의 처절한 기분이다. 아비규환의 속세에서 살아가는 것은 하루하루가
전쟁이기 때문이다. 속세는 언제쯤이나 극락처럼 평안해질까? 과연 그것이 가능이나 할까? 
이렇게 하여 한겨울 보광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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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2월 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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