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117건

  1. 2021.01.18 우주와 은하계를 꿈꾸다. 고흥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외나로도)
  2. 2021.01.08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한양도성, 남산서울타워, 목멱산봉수대, 백범광장)
  3. 2020.12.31 깊은 산골에 푹 묻혀있는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백화산 반야사 (석천계곡, 반야사 호랑이, 문수전, 망경대)
  4. 2020.12.21 한강변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두뭇개승방이라 불렸던 옥수동 미타사 2
  5. 2020.12.10 도심 속의 푸른 공간이자 너른 초원, 올림픽공원~몽촌토성 늦가을 나들이 (나홀로나무, 충헌공 김구묘역, 성내천)
  6. 2020.11.25 인왕산자락길, 황학정, 서촌(한양도성) 늦가을 나들이 ~~ (택견수련터, 감투바위, 단군성전, 행촌동 은행나무)
  7. 2020.11.14 늦가을에 찾아간 청송 주왕산 단풍 나들이 ~~~ (절골에서 가메봉, 용연폭포, 절구폭포, 용추폭포, 자하성터, 대전사까지)
  8. 2020.11.03 대웅전 꽃창살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논산 불명산 쌍계사 (송불암 미륵불)
  9. 2020.10.22 거닐기 좋은 강동구의 상큼한 북쪽 지붕, 고덕산~서울둘레길3코스 나들이 (양지마을, 광주이씨광릉부원군파묘역, 강동그린웨이, 양천허씨묘역) 2
  10. 2020.10.14 듬직하게 생긴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 인왕산 나들이 (인왕산길, 한양도성, 치마바위, 기차바위)

우주와 은하계를 꿈꾸다. 고흥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외나로도)

 


~~~ 우주를 꿈꾸며, 고흥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나로호(KSLV-1)
▲  나로호(KSLV-1)


 

겨울 제국의 차디찬 바람이 옷깃을 더욱 여미게 하던 1월의 끝 무렵, 겨울의 핍박에서 잠
시 벗어나고자 일행들과 따스한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아침 일찍 번잡한 서울을 떠나 충북과 충남, 전북의 여러 지역을 거쳐 저녁 늦게 전남 여
수(麗水)에 이르렀다. 여수는 원래 계획에 없었으나 광양(光陽) 땅에 이르다보니 바다 남
쪽에 아른거리는 여수 땅이 갑자기 땡기는 것이다. 하여 그 마음 뜻대로 이순신대교를 건
너 여수로 진입, 환상적인 야경을 보여주는 여천공단을 가로질러 여수 도심부에서 흔쾌히
1박을 청했다.
첫날의 여독이 대단했는지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어 거의 9시간을 잔 것 같다. 아침 햇살
의 보챔으로 겨우 꿈나라에서 벗어나 둘째 날 여로(旅路)를 배불리 채우고자 서둘러 길을
재촉했는데 이번에는 인연이 참 지지리도 없던 고흥(高興)으로 길을 향했다. (고흥은 20
여 년 전에 잠시 스쳐 지나간 것이 전부임)

고흥의 관문인 벌교읍(筏橋邑)에 이르자 점심으로 그 지역의 별미(別味)인 꼬막정식을 섭
취했다. 10가지가 넘게 나온 반찬을 거뜬히 비우며 배를 남산처럼 불리고 고흥 땅으로 진
입, 적당한 곳을 찾다가 내가 좋아하는 고색의 명소를 잠시 접어두고 21세기 스타일에 걸
맞게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으로 길을 잡았다.
그곳은 고흥읍내에서 1시간 가까이 들어가야 되는 고흥의 동남쪽 구석으로 바다를 무려 2
번(나로1대교, 나로2대교)이나 건너고 고개도 여러 번을 넘어야 되며, 내나로도(內羅老島
)란 큰 섬을 가로질러야 된다. 게다가 외나로도(外羅老島)로 들어서 15분 이상 들어가야
되니 그 길이 참 파란만장하다. 또한 거기서 나올 때도 왔던 길로 다시 나와야 되므로 외
지에서 들어가려면 적지 않은 시간을 내던져야 된다.


 

♠  외나로도에 둥지를 튼 우리나라 우주 진출의 중심지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입문

▲  북쪽에서 바라본 우주과학관

외나로도 동쪽 구석인 예내리에는 우리나라 우주 개척의 중심지인 나로우주센터가 있다. 우주
진출을 향한 강인한 집념이 서린 특별한 현장으로 그 북쪽 해안에 우주 개척과 우주과학의 이
해를 돕고자 2009년 6월 12일 우주과학관을 닦아 세상에 내놓았다.

동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 과학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상설전시관에는 우주에서의
기본적인 운동원리와 로켓, 인공위성, 우주탐사(태양계), 달 탐사를 다루고 있으며, 기획전시
실에는 우리나라 로켓의 역사와 로켓의 실물을 다루고 있다. 3D영상관은 우주에 관한 프로그
램을 상영하고 있으며, 4D영상관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우주영상 콘텐츠와 직접 몸으
로 느끼는 체험효과를 선보이고 있다. (3D, 4D영상관은 별도 관람비가 있음)
야외전시장은 로켓광장, 포물면통신, 태양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로켓광장에는 나로호 관
련 로켓 모형을 전시하여 속인(俗人)들의 호기심을 건드리고 있으며, 매년 5월 초에는 우주를
주제로 고흥우주항공축제를 연다. (보통 어린이날을 끼고 함)
입장료는 성인 3,000원, 청소년과 어린이는 1,500원으로 과학관 내부만 적용되며, 야외전시장
과 예내리 앞바다는 무료이다. 또한 주차비도 받지 않는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어린이와 청소년을 동반한 가족 나들이 명소로 아주 좋다. 그러다보니 가
족 단위 관광객들이 거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우주과학교실
과 우주체험교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과학관 동쪽에는 부드러운 곡선의 몽돌해변(예내리 앞바
다)이 펼쳐져 자연적 운치를 더한다.

이곳은 어디까지나 나로우주센터에 속한 우주과학관으로 여기서 남쪽으로 3km 이상 들어가야
나로우주센터의 중심지가 나온다. 그곳에서 로켓과 인공위성을 하늘로 날려보낸다. 허나 우주
개척의 야망이 담긴 국가의 예민한 곳이라 금지된 구역으로 굳게 잠겨 있으며, 일반인은 우주
과학관 주차장까지만 발길을 허용하고 있다. (그 이상은 못들어감)
단 나로우주센터 발사현장과 발사통제동은 고흥우주항공축제를 비롯한 일부 기간에 한해 제한
적으로 열어두고 있어 사전 예약을 통하여 들어갈 수 있다. 이때는 우주과학관 관람권 구입자
에 한해 입장이 가능하며, 셔틀버스를 타고 들어간다. 발사 현장과 발사통제동은 촬영이 엄격
히 금지되어 있어 사전에 핸드폰과 카메라를 수거하며 미성년자는 반드시 보호자와 동반해야
입장이 가능하다. 또한 한국 국적 사람만 접근이 가능하므로 검은 머리 외국인을 비롯한 다른
나라 사람은 접근 불가이다.


▲  크게 펄럭이는 태극기와 나로호(오른쪽)

고색의 향기와 자연, 산, 길(둘레길, 산길), 역사가 대부분을 이루는 본인 여행기에서 이렇게
과학관을 다룬 것은 2003년 1월 국립서울과학관 이후 2번째이다. (해당 글은 분실됨) 과학 분
야(물리, 화학, 지구과학, 생물)는 학창 시절부터 관심도 매우 적었고, 그러다보니 지식의 깊
이도 밑바닥이라 시험 점수는 늘 50점 이하를 맴돌았다. (20점을 맞은 적도 있음 ㅠ) 아무리
벼락치기로 죽어라 외워도 과학 쪽은 통 효과가 없었으며 찍기 신공 또한 형편없었다.
그렇게 본인과 과학은 영 좋지 못한 궁합이라 본인의 돌머리로 비록 일부만 다루었다고 해도
본글을 풀어나가는 것이 적지 않게 고통스러웠다. 허나 오랜만에 찾은 과학관이고 언젠가 우
주도 한번 나가봐야 되기에 미리 예습 차원에서 이곳을 찾은 것이다.

내 어렸을 적에 21세기가 되면 하늘을 나는 차가 생기고, 로보트를 만들어 지구를 지키며, 인
공지능이 일상화되어 버튼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고, 우주 여행은 지하철을 타듯 쉬워지며,
다른 행성에서 집과 도시를 짓고 사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라 배웠다. 또 그런 식의 공상영화
와 만화가 홍수를 이루며 21세기만 되면 완전한 신세대가 펼쳐질 것 마냥 어린이와 10대들에
게 주입을 시켰다.
허나 21세기가 밝은지 벌써 20년이 넘었으나 하늘을 나는 자동차 그리고 우주 여행, 모두 어
림도 없다. 10년은 커녕 100년 안에도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지구에서 가까운 달 조차 마음
놓고 부리지를 못하니 말이다. 그렇게 어릴 적부터 품고 있던 그 동심과 환상은 생각보다 더
딘 과학기술의 속도 앞에 보기 좋게 아작나고 말았으니 어릴 적 공상 속의 세상은 여전히 상
상 속에나 머물러 있다. 마치 당장이라도 우주를 잡아먹을 기세였던 오만한 인간들의 실수였
던 것이다.

*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소재지 : 전라남도 고흥군 봉래면 예내리 480 (하반로 490)
*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061-830-8700)


▲  목성에서의 내 몸무게는?
상설전시관 1층에는 수성, 금성, 목성, 토성 기준으로 몸무게를 재는 공간이 있다.
내가 지구에서는 70kg대인데, 목성에서는 그 2배 이상인 189kg이나 나왔다.

▲  귀엽게 표현된 우리나라 우주인 인형

▲  우주에서 멋대로 보내온 선물들 ①
이들은 운석으로 우주가 우리나라로 던진 것들이다. 우주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우주과학관의 전시물로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  우주에서 멋대로 보내온 선물들 ②
저들 중 왼쪽에 잘생긴 운석이 고흥군 두원에 떨어진 '두원운석'이다. 운석은
우주의 비밀을 조금이나마 알려주는 고마운 존재들로 우주에서 던진 것이
전부일 정도로 희소성이 크기 때문에 금덩이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  우주선 발사를 내 손으로~~! 나로우주센터 발사통제센터 모형

나로호 발사를 주관했던 나로우주센터의 발사통제센터를 재현한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
주발사체인 나로호(KSLV-1)는 2013년 1월 30일에 발사되어 탑재 위성인 나로과학위성(STSAT-
2C)이 성공적으로 궤도에 진입했는데, 이를 통해 우주기술개발의 기본 인프라를 구축했으며,
이 기술을 기반으로 순수 국산 발사체인 한국형발사체(KSLV-II)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  나로우주센터 발사통제센터 모형 바깥 모습

▲  나로과학위성
2013년 1월 나로3호에 실렸던 나로과학위성의 실제 크기 모형품이다. 무게는 100kg,
크기는 763x1033x1167mm로 300km~1,500km 타원궤도에서 1년 정도 임무를 수행한다.

▲  우리별1호
이름도 상큼한 우리별1호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이다. 한국과학기술원
인공위성 연구센터와 영국 써리대학이 같이 만든 것으로 1992년 8월
남미 쿠루기지에서 우주로 날려보냈다.

▲  우주인들이 먹는 우주식량들 (모형)

주로 날라간 사람들은 무엇을 섭취했을까? 그들이 우주선과 우주정거장에서 먹는 음식들이
재현되어 있다.
처음에는 분말 음식 위주로 먹었으나 점차 호박파이, 육류, 피자, 과자 등으로 종류가 확대되
었으며, 우주정거장에서 오븐 등을 통해 간단한 조리도 가능하게 되었다. 단 무중력 공간이라
음식물 찌꺼기와 물은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캔이나 튜브 같은 밀폐된 용기를 사
용해 밥을 먹는다.

 ◀  우주인 화장실 (밑에 좌식 변기가 있음)
아무리 우주라고 해도 쌀 것은 싸야 된다. 하
여 우주선과 우주정거장에 화장실을 두었는데,
무중력 공간이라 배설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
하면 그것들이 공간 내부를 둥둥 떠다니는 최
악의 사태가 발생할 수가 있다.
그래서 소변용 진공수거기와 대변용 수거기로
나누어서 취급하고 있는데, 강력한 흡입력으로
배설물을 빨아들여 저장탱크에서 폐기한다. 속
편하게 우주선 밖으로 배출하는 것으로 알았더
만 그게 아니었다.

       ◀  우주인 샤워실 (샤워부스)
우주에서 지구처럼 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 하여 젖은 스펀지 등으로 몸을 닦거나 목욕
수건에 물을 묻혀 닦아내는 방식으로 몸을 씻
는다. 그야말로 고양이식 세수 방식이다.
머리를 감을 때는 린스 기능이 있는 샴푸를 사
용하며, 이를 닦을 때는 먹을 수 있는 치약을
사용하여 삼키거나 진공튜브로 처리한다. 샤워
부스에서 이용한 물은 폐수탱크에 연결된 진공
흡입기로 처리하며, 우주선 밖으로는 배출하지
않는다.
이렇게 우주선 생활이 생각 이상으로 고통스럽
고 그나마 개선된 것이 저 정도이니 아직 우주
개척의 길은 한참이나 멀었다. 솔직히 저런 공
간에서는 하루도 지내고 싶지 않다.


▲  우주 도시(Space city) 상상모형도

언제가 될지 모를 막연한 미래에 달과 화성, 금성 등에 우주 도시를 만든다면 저런 모습이 된
다고 한다. 지구와는 대기부터가 틀리니 저런 보호막 식의 도시를 닦은 다음 태양발전소나 원
자력 발전소로 에너지를 충당하고 양극에 얼어붙어있는 드라이아이스에서 탄산가스를 만들어
산소를 추출하면 100년 안에 지구의 대기층과 비슷한 대기권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때가
되면 보호막은 싹 거둬도 될 것이다.


▲  재현된 달 표면과 우주탐사로봇

▲  한없이 착하게 쓰인 우주윤리

우주 공간은 인류 공용의 공간으로 어느 우주도, 어느 별도 영유권과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
다고 쓰여있다. 허나 저것은 어디까지나 미국과 러시아 등 우주에 조금이나마 손을 대고 있는
나라들이 편의상 만든 윤리이다. 다른 행성과 은하계의 생명들로부터 동의를 받은 것도 아니
며, 어디까지나 윤리적인 내용이라 강제구속력은 없다.
지금이야 달 하나 다루는 것도 벅찬 상태라 저 윤리가 잘 지켜지고 있지만 나중에 우주를 마
음대로 하는 세상이 오면 저것은 일개 휴지조각이 될 것이다. 지구도 그렇지만 우주에서도 강
한 것이 장땡이다. 그러니 우리도 우주 개척을 착실히 준비하여 꼭 장땡이 되어야 한다.


▲  아리랑3A호 (KOMPSAT-3A)
2015년 3월 26일 러시아 야스니 발사장에서 쏘아올린 인공위성으로 2019년
봄까지 우주에서 몸을 풀었다.

▲  아리랑위성1호 (KOMPSAT-1)

▲  아리랑위성5호 (KOMPSAT-5)


▲  호버만의 구(Hoberman Sphere)

1층과 2층이 확트인 과학관 중심부에 '호버만의 구'라 불리는 아름답고 요염하게 생긴 동그란
물체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제작된 그는 우주의 역동적인 팽창과 수축의 반복원리로 구성
되어 있는데, 우리의 우주 개발에 대한 의지와 염원이 담겨져 있으며, 우주 탄생의 신비로움,
우주 개발을 위한 도전 정신, 우주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 우주의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인도하는 상징적 조형물로 삼고 있다.
호버만의 구는 평상시에는 가만히 있다가 2층에 특정 장소에 멈춰서면 율동을 부리며 움직인
다. (2층에 안내문이 있음)


 

♠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 마무리

▲  과학로켓 KSR-III

KSR-III은 1997년 12월부터 5년에 걸쳐 개발된 우리나라 최초의 액체연료로켓이다. 그의 추진
기관은 액체산소와 케로신을 추진제로 사용하는 지상 추력(推力) 13톤급의 액체엔진으로 가압
식 추진제 공급방식을 채택했다.
가압식 사이클은 액체연료 로켓의 연료 공급 방식 중의 하나로 기체를 이용해 추진체 탱크 내
의 추진체를 연소기로 밀어내는 방식을 말하며 구조가 간단하고 저렴해 신뢰성이 높다.


▲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 여행자인 이소연이 우주선에서 먹었던 식량과
실험도구들

▲  나로호 2차 발사 실패와 원인 규명을 위해 만든
비행종단시스템 2단 로켓


나로호 2차 발사는 2010년 6월 10일 17시 1분에 있었다. 허나 발사된 뒤 겨우 136,6초만에 1
차 진동이 생겼고, 1초 뒤인 137.3초에 내부 폭발로 보이는 2차 진동으로 원격측정이 중단되
면서 실패했다. 통신이 두절되었을 때 그의 고도는 67.73km였다.

사고 발생 원인을 파악하고자 에네르고마시 관계자들이 포함된 한,러 공동위원회가 구성되어
3번의 FTS-킥모터 연계실험을 실시했는데, 그 결과 FTS 오류였음이 밝혀졌다. 이곳에 전시된
것은 FTS-킥모터 연계실험 때 사용한 것이다.


▲  우리나라의 첫 우주발사체인 나로호의 위엄 (2013년 1월 30일에 발사됨)

▲  75톤급 액체로켓 개발모텔 엔진 목업
한국형발사체의 기본 엔진으로 4기를 묶어 한국형발사체의 1단에 적용하고 확대
노즐을 적용한 엔진 1기로 2단을 구성했다. 2015년부터 나로우주센터에서
지상연소시험 등의 개발 과정을 거치고 있으며, 장차 국가 우주개발을
위한 핵심 부품으로 삼을 예정이다.

▲  7톤급 액체로켓 엔진 목업

▲  하얀 피부의 잘생긴 나로호와 로켓 형제들

우주과학관 내부에는 볼거리들이 많이 깔려있다. 그중에는 호기심을 흥분시키는 것들도 여럿
있으나 본인이 우주과학 지식이 일천하여 그들을 모두 다루지 못하고 겨우 일부만 본글에 끄
집어냈다.

야외전시장에는 크고 견고한 무쇠덩어리들이 하늘을 찌를 듯한 모습으로 자리들 하고 있는데,
그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발사체인 나로호와 KSR로켓 형제들의 모조품이다. 그중 훤칠한
외모를 자랑하는 나로호는 2009년 8월 25일 1차 발사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2010년 6월 10
일 또 실패했으며, 2013년 1월 30일 드디어 성공하여 우주로 날려보냈다.
나로호의 몸매는 길이 33m, 지름 2.9m, 무게 140톤으로 2단형(1단은 액체추진 로켓으로 러시
아에서 개발함, 2단은 고체추진 로켓으로 우리나라가 개발했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를 우
주로 보낸 현장이 바로 나로우주센터이며, 이때 나로과학위성을 실어보냈다.


▲  나로호의 굵직한 밑도리와 KSR로켓 형제들(KSR-1, KSR-2, KSR-3)

나로호보다 키가 작은 무쇠덩어리들은 KSR시리즈의 로켓이다. 그중 KSR-1은 길이 6.7m, 지름
0.42m, 무게 1.2톤으로 1단형 무유도 고체추진 로켓이며 1993년 6월 4일 1차 발사하고, 그해
9월 1일에 2차 발사를 했다. 추진관과 구조체, 탑재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오존농도 관
측장비를 포함한 탑재물을 지상에 각종 관측자료를 송신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KSR-2는 길이 11.1m, 지름 0.42m, 무게 2.02톤으로 2단형 고체추진 로켓이다. 1998년 6월 11
일에 발사되었으며, KSR-1보다 더 높은 고도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그리고 KSR-3
은 길이 13.5m, 지름 1m, 무게 6.1톤으로 2단형 액체추진 로켓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액체추
진엔진의 로켓으로 한국형 인공위성 발사체를 쏘아올리기 위한 기반기술 확보 차원에서 제작
되었다. 추력 13톤의 액체로켓엔진이 부탁되었으며, 탑재부와 유도조종장치, 자세조종장치,
가압용 고압가스 탱크, 연료 및 산화제탱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  소나무숲이 어우러진 예내리 앞바다(몽돌해변)

우주과학관 동북쪽에는 300m 정도의 잘생긴 몽돌해변이 펼쳐져 있다. 흥미롭지만 그만큼 머리
가 아픈 우주과학관 관람으로 나의 돌머리가 지끈거리던 상태였는데, 이 해변을 보니 그 통증
이 싹 해소되는 것 같다. 역시 인간에게는 대자연이 빨간약이고, 자연만큼 좋은 것은 없다.
게다가 과학관 앞에 이렇게 좋은 자연 공간이 있으니 자리 하나는 정말 잘 잡은 것 같다.

우주과학관 앞 몽돌해변(예내리 앞바다)은 잔잔한 바다와 밟는 느낌이 좋은 몽돌, 짙게 띠를
이루며 해안을 둘러싼 소나무숲이 어우러진 곳으로 물놀이 장소로도 아주 좋다. 허나 이곳에
부여된 '~~해수욕장'이란 명칭은 없고 외나로도에서도 아주 구석진 곳이라 그냥 아는 사람만
찾아오는 숨겨진 해변이었던 모양이다. 그랬던 것이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이 들어서면서
과학관의 후식용으로 들렸다가는 명소가 되었다. 나로우주센터와 우주를 든든한 후광(後光)으
로 삼았으니 나로우주센터를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우주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사람이 끊길
일은 전혀 없다.


▲  부드러운 곡선미를 보이는 예내리 앞바다와 북쪽 방파제
사람들이 몽돌 해변을 사각사각 밟으며 겨울 바다의 낭만을 누린다.

▲  몽돌해변과 바다의 부드러운 만남, 그리고 그들만의 속삭임

▲  예내리 앞바다 남쪽 부분
저 산줄기 너머에 금지된 구역인 나로우주센터 중심지가 있다. 예내리 앞바다도
해변 남쪽 방파제까지만 접근이 가능하며 그 이상은 발을 들일 수 없다.


몽돌해변에서 잠시 멍 좀 때리다가 햇님의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부랴부랴 다음 답사
지로 길을 떠났다. 안그래도 겨울 제국 시절이라 낮이 짧은데 칼출근과 칼퇴근을 좋아하는 햇
님이 날씨 변화 등으로 일찍 퇴근하면 낭패이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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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2월 3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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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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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한양도성, 남산서울타워, 목멱산봉수대, 백범광장)

 


'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

▲  남산서울타워

▲  남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  백범광장 주변


 

여름이 빠르게 익어가던 6월 끝 무렵,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南山)을
찾았다.
서울 한복판에 누워있는 남산은 내 어릴 적 즐겨찾기 장소로 고등학교 1학년까지 남산 인
근에 살면서 뒷동산 삼아 활보했던 추억 깊은 현장이다. 나는 남산의 물을 먹고 자랐으며,
남산에서 친구들과 뛰어놀고, 남산 정상에 올라 천하를 바라보며 나름대로의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 이후 남산과 먼 곳에 살게 되면서 다소 뜸해졌고, 가끔 찾는 정도에서 머물다가
2015년 이후 오후와 저녁, 평일, 휴일을 가리지 않고 발걸음을 크게 늘리고 있다.

햇님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14시, 동대입구역(3호선)에서 출발하여 장충단공원을 거쳐 국
립극장으로 이동했다. 국립공원교차로에 이르니 남산의 너른 품으로 인도하는 남산공원길
이 가파른 경사를 들이밀며 우리를 맞이한다.


 

♠  남산 품에 안기다 ~~~

▲  남산공원길 (남산북측순환로 입구)

국립극장 정문을 지나면 남산의 대동맥인 남산공원길이 시작된다. 길은 2갈래로 북쪽 길은 남
산북측순환로 입구에서 남산 북쪽 자락을 거쳐 회현동(會賢洞) 소파로로 이어지며, 예전부터
오로지 뚜벅이 전용 산책로로 이용되어 차들의 바퀴 자국을 철저히 금하고 있다. 크게 오르락
내리락 부분이 없는 느긋한 길로 장충단공원과 필동(筆洞), 남산1호터널로 내려가는 길이 있
으며,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諸葛亮)을 봉안한 와룡묘(臥龍廟)란 오래된 사당이 있다.
그리고 남쪽 길(2차선)은 남산 정상과 남산서울타워로 인도하는 길로 차량 통행이 가능하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왕복 운행이었으나 일방통행으로 변경하면서 '국립극장→남산서울타워→
남산도서관' 방향으로만 바퀴를 굴릴 수 있다.

내가 남산에서 무척 가까운 신당동과 금호동(金湖洞)에 살던 시절, 가족이나 친구와 남산에
물을 뜨러 많이 갔었는데, 가족과 갈 때는 주로 평일 저녁을 이용했다. 그때는 약수터 입구까
지 차를 끌고 가서 약수를 뜬 다음 북측순환로 입구에 있던 차량 매표소까지 후진하여 국립극
장으로 내려갔지. 일방통행로라 그렇게 가는 것은 위법이긴 하나 거리도 그리 길지 않고, 매
표소 아저씨의 쿨한 묵인도 있어서 몇년을 그렇게 했었다.
이후 남쪽 길의 40% 정도를 뚜벅이길로 만들고 남산의 건강을 위해 차량 통행의 크게 제한을
두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반 차량은 절대로 바퀴를 들일 수 없게 되었으며, 오로지 시내버스
(02, 04번)와 시티투어버스, 관광버스, 공원/긴급 차량만 들어올 수 있다. 차를 끌고 온 경우
에는 국립극장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걸어서 이동하거나 02, 04번 시내버스를 타야 된다.


▲  뚜벅이들의 낙원이 된 남산 남측순환로

남산북측순환로입구에서 남쪽 길로 접어들면 숲 사이로 빛바랜 한양도성이 모습을 비춘다. 그
리 멀지 않은 과거(2010년 이후)에 성곽 옆에 탐방로를 내었는데, 남산 정상까지 질러 가고
싶다면 그 길을 이용하면 된다. 다만 경사가 좀 각박하여 조금은 힘들 수 있으나 짧은 거리라
서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거닐 수 있다. 게다가 숲이 짙어서 대낮에도 그늘이 가득해 한여
름에는 시원하다.

성곽 앞에 난 산길의 일부는 예전부터 있던 길이다. 그 길의 끝에는 남산에서 제법 잘나갔던
남산약수터가 있었다. 남산산악회가 관리하는 곳으로 어린 시절 여러 번 가봤었지. 그곳은 입
구에 철문까지 설치했으며, 오로지 이른 아침에만 문이 열려 아무 때나 접근이 어려웠다. 다
행히 그곳 산길이 개방되어 이제는 자유의 공간이 되었으며, 약수터 주변에는 남산산악회 건
물과 체력 단련시설이 있다.

성곽길(남산산악회 입구)을 지나 5분 정도 가면 오른쪽에 계단길이 나온다. 그 계단을 2~3분
오르면 운동시설을 갖춘 상춘약수터가 나오는데, 예전 신당동, 금호동 시절 우리집 단골 약수
터였다. 약수터 옆에는 약수로 몸을 씻는 노천탕이 있었는데, 약수로 냉수마찰을 하면 겨울에
감기가 안걸린다고 해서 한때 인기가 대단했었다.
예전에는 서울에 노천 목욕터를 가진 약수터가 적지 않았는데, 대중이 이용하는 약수터에 아
저씨와 노공(老公)들이 벌고 벗고 씻는다는 것이 오랫동안 문제로 지적되었다. 하여 차츰 사
라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기억 속의 풍물시(風物詩)가 되어버렸다.


▲  남산 남측순환로 (4월 풍경)

상춘약수터입구를 지나 계속 남측순환로를 따라 가면 크게 구부러지는 남쪽에 2개의 조망대가
있다. 이 구간은 남쪽이 확 트여있어 조망이 일품인데, 바로 밑에 용산구 지역을 비롯해 한강
과 동작구, 강남/서초구, 관악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대기만 청정하다면 보이는 범위는 더욱
넓어진다. 그럼 여기서 잠시 남산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서울의 한복판이자 도심 남쪽에 누운 남산(262m, 270m)은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낙산(낙타
산)과 더불어 한양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다. 서울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으로 북현무(北
玄武)인 북악산(백악산)을 바라보고 있으며, 도성 남쪽에 있어서 남산이란 아주 평범한 이름
을 지니고 있다.
천하에는 남산이란 산이 참 많은데, 이들의 공통점은 시내와 아주 가깝고 시민들이 많이 안기
는 휴식처이며, 경주(慶州) 남산(468m)을 제외하면 산세가 낮고 완만해 누구든 편히 오를 수
있는 친근한 산이라는 것이다. 서울 남산도 대체로 편히 안길 수 있는 스타일로 그 걷는 것도
싫다면 남산을 오르는 시내버스나 시티투어버스,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금세 정상까지 간다.

남산의 원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으로 그 옛말인 '마뫼'는 남산을 뜻한다. 인경산(引慶山),
잠두봉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1395년 태조 이성계가 남산을 높여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
하고 그를 위한 사당인 목멱신사(木覓神祠)를 산꼭대기에 세웠다. 이후 매년 제를 올리면서
국사당(國師堂)으로 이름을 갈았다.
남산 능선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한양도성이 걸쳐져 있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전국에
서 날라오는 봉화를 받았다. 조선시대 봉화는 5개 노선이 있었는데, 그 종점이자 중심지가 바
로 남산이다.

임진왜란 때는 한양을 점령한 왜장이 산허리에 왜장대(倭將臺)란 성을 쌓았으며, 병자호란 이
후 어영청(御營廳)과 금위영(禁衛營) 분영이 남산에 설치되어 서울을 지켰다. 왜정 때는 왜군
헌병대가 산자락에 있었고, 1945년 이후에는 중앙정보부가 1호터널 북쪽에 말뚝을 박으며 갖
은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남산은 도성 경승지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양반들이 세운 정자와 그들이 새긴 바위글씨가 즐
비했는데, 지금은 바위글씨 극히 일부를 빼면 남아있는 것이 없다. 또한 가난한 선비와 하급
관리들이 산자락에 많이 살았으며, 개화기 이후 왜인들이 남산 북쪽과 남촌(南村)이라 불리는
청계천 이남에 두루 터를 닦고 살았는데, 왜정 때는 남산도서관 자리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 남산 중턱에는 왜성대공원과 경성신사(京城神社)를 지어 그들의 성지(聖地)로 만들었다.
특히 조선신궁을 짓는 과정에서 남산의 오랜 성역인 국사당이 신궁보다 높은 곳에 있다며 왜
정이 속좁게 징징거려 어쩔 수 없이 인왕산으로 자리를 옮기는 비운을 감당해야 했다. 그렇게
남산의 중심은 토박이 목멱대왕에서 왜열도의 온갖 잡귀들로 바뀌게 된다.
그렇게 왜정이 남긴 자국들은 1945년 이후 대부분 지워졌으나 조선신궁 계단과 일부 소소한
흔적들은 자신의 정체를 꼭꼭 숨기며 1945년 8월 패전 때 연합군에 살려달라고 징징거린 왜왕
(倭王)처럼 구차한 목숨을 연명한다.

196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케이블카가 놓여 남산의 이름 두 자를 떨쳤고, 1965년 조선신궁
자리에 남산도서관을, 1969년에는 백범 김구(白凡 金九)의 동상을 세워 주변을 백범광장으로
삼았다. 1973년에는 국립극장이 지어졌으며, 1975년에는 6년의 대공사 끝에 천하 최대의 타워
인 남산서울타워가 완성되어 남산의 높이를 배로 높였다. 이 타워는 1980년에 공개되어 남산
과 서울의 굳건한 상징이 되었다.


▲  남측순환로 아랫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한남동과 보광동(普光洞), 한강을 비롯하여 강남 일대가 상쾌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우리 애국가에 보면 '남산 위에 저 소나무'란 구절이 나온다. 그 구절에서 보이듯 남산은 북
악산(백악산)과 더불어 소나무로 유명했는데, 특히 금송(金松)이 많이 자랐다. 소나무 외에도
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며 산을 아름답게 수식하고 있고, 도심 한복판에 솟아있어
학의 등에 올라탄 듯 국보급의 조망은 물론 도심 야경도 풍족하게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산 곳곳에 약수터가 뿌리를 내려 나그네의 목을 아낌없이 축여주었는데, 그중에서 부
엉바위 약수터가 제일 유명했다. 허나 이 약수는 남산3호터널이 뚫리면서 그 혈이 막혀 사라
진 상태이며, 다른 약수터도 상당수 문을 닫거나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그 흔한 계곡도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겨우 실처럼 흐르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여럿 있을 뿐
이다.

남산은 남산공원길 남측순환로와 북측순환로, 여러 갈래의 계단길이 있는데, 계단길은 장충단
공원에서 정상까지, 백범광장에서 정상까지 이어지는 계단길이 대표적이며, 남산1호터널과 남
산동, 후암동(厚岩洞)에서 오르는 계단길이 있다. 길 외에는 싹 철조망을 쳐놓아 산으로에 접
근을 막았으나 근래에 모두 풀어버렸다. 허나 철조망을 없앴다고 해서 산자락 곳곳을 쑤시고
다니면 안된다. 무조건 지정된 길로 가야 남산도 좋고, 사람도 좋은 것이다.

남산에는 한양도성과 장충단공원, 와룡묘, 남산봉수대, 한양공원 표석, 남산골한옥마을 등의
문화유산과 백범광장, 안중근의사기념관, 남산야외식물원, 남산서울타워 등의 명소가 있으며,
산 전체가 남산공원(남산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심 속 나들이 명소이자 조촐한
등산 명소로 그 인기가 식을 줄을 모르며, 예로부터 서울에 오면 꼭 가봐야 되는 서울의 상징
적인 명소로 지방 사람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까지 평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수십만 씩 몰려
드는 서울 관광의 성지이다. 하여 한적한 분위기는 좀 누리기가 어렵다. (서울을 찾은 외래
관광객의 1/3 이상이 남산을 찾는다고 함)

남산이 없는 서울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아니 상상하기도 싫다. 도심 속의 허파이자 꿀단
지로 남산이 있으니 인근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조선 왕궁이 합세해 도심의 녹지 비율이
좀 되는 편이지 그가 없었다면 서울은 더 지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개인적으로 내 옛
추억이 몇 권씩 녹아있는 현장으로 나에게도 꽤 의미심장한 곳이라 할 수 있는데, 내가 제일
많이 오른 산이 바로 남산으로 어림잡아도 500번 이상은 올랐을 것이다.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 지점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한남동과 보광동, 강남, 관악산과 우면산 산줄기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 지점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해방촌과 이태원, 용산구 지역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 지점 조망대에서 바라본 남산서울타워
서울타워는 동양에서 제일 높은 타워로 높이가 236.7m에 달한다. 하늘을
찌를 듯 늘씬하게 솟은 저 타워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보면 볼수록
신기할 따름이다.

▲  다시 만난 한양도성 - 성곽 밑에도 탐방로가 닦여져 있다.

남산 정상을 코앞에 둔 남산서울타워 종점(02, 04번 종점)에 이르니 온갖 관광객들로 뒤엉켜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룬다. 여기서는 오로지 시내버스만 길게 바퀴를 접을 수 있으며 나머지
버스는 승하차가 끝나자마자 바로 자리를 떠야 된다. (주차 공간이 별로 없음)
무수한 인파 속으로 몸을 던져 하나의 점이 되어 서쪽 오르막길을 3분 정도 오르면 남산 정상
과 남산서울타워 밑에 이르며, 오르막길 대신 서남쪽 남측순환로를 내려가면 남산도서관으로
이어진다.

* 남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남산동, 회현동 / 용산구 용산동2가, 후암동 
* 남산공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02-3783-5900)


▲  남산서울타워 종점에서 바라본 서울타워
남산 어디서든 구석진 곳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서울타워가 바라보인다.


 

♠  남산 정상

▲  정상 동쪽 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도심과 서울 북부)

하늘과 맞닿은 남산 정상에는 남산서울타워와 팔각정, 남산봉수대가 둥지를 틀고 있다. 남산
서울타워(N서울타워)는 남쪽에, 팔각정은 중앙, 남산봉수대는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중
에서 인파가 가장 많은 곳은 남산서울타워와 팔각정 주변이다.

남산서울타워는 236.7m의 키다리 타워로 아시아 최대를 자랑한다. 남산을 든든한 기반으로 삼
아 기둥과 철탑 하나로 하늘을 받들고 있는 웅장한 탑으로 TV와 라디오 방송을 수도권으로 송
출하고자 1969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 전파탑으로 세워졌다. 1971년 공중선 철탑이 완
성되었고, 1975년 7월에 최종 마무리가 되어 전국 인구의 48%가 이 타워의 전파탑을 통해 방
송을 시청하고 있다고 한다.

1980년 10월 속세에 개방되어 남산의 소중한
꿀단지이자 야경과 조망의 진정한 성지로 자리
매김을 했는데,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道峯
山). 수락산(水落山). 관악산(冠岳山), 불암산
(佛岩山) 정상을 빼고 서울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다. 그러다보니 콧대가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밑에서 그를 보려면 고개가 그냥 까
딱 넘어가 버린다.
게다가 입장료도 꽤 야박한 편, 그래도 관광
수요는 늘 꾸준하여 외국인 선정 서울 명소 1
위의 지위(2012년 서울시청 설문조사 결과)를
누리기도 했다.

 

◀  바로 밑에서 바라본 남산서울타워의 위엄

남산을 안방처럼 들락거린 나도 초등학교 시절에 가족, 친척과 2~3번 타워에 오른 적이 있었
다. 허나 그 이후에는 이상하게도 인연이 닿지 않아 그의 품에 오른 적이 없었다. 정상에 오
더라도 그냥 타워 밑도리와 정상 주변에서 좀 머물다가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막상 가려
고 해도 이상하게 땡기지가 않는다.

* 남산서울타워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2가 산1-3 (남산공원길 105 ☎ 02-3455-
  9277)
* 남산서울타워 홈페이지는 아래 팔각정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남산 팔각정(八角亭)

팔각정은 남산서울타워와 더불어 남산의 주요 장식물로 이곳에는 원래 1959년에 이승만 대통
령을 치켜세우고자 세운 우남정(雩南亭)이 있었다. 여기서 우남은 이승만의 호로 1960년 4.19
의거로 그가 물러나자 바로 철거되었다.
이후 1968년 11월 탑골공원 팔각정을 모델로 삼아 지금의 팔각정을 지었으며, 남산 정상을 수
식하는 존재로 삼았다. 정자 서쪽에는 한양도성 여장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산바람이 주변
에늘 머물고 있어 한여름에도 시원하다. 정자 자체는 60년도 채 안된 존재이지만 관광객들로
늘 붐비며, 매년 1월 1일 새해 해맞이 행사가 성황리에 열린다.


▲  옛 국사당(國師堂)터 표석

남산 정상은 늘 사람들로 미어터지나 팔각정 부근 구석에 누운 국사당터 표석에 눈길을 주는
이는 거의 없다. 애처로운 눈빛을 보이며 눈길과 관심을 호소하지만 맨날 외면을 받는 그 표
석, 표석에 쓰인 국사당은 남산의 수호신인 목멱대왕의 사당으로 1395년에 태조가 세웠다.
1404년 목멱대왕을 호국(護國)의 신으로 높이면서 목멱신사(木覓神祠)라 불리기도 했던 남산
의 성역이자 중심이었으나 1925년 왜정이 조선신궁을 지을 때 국사당이 그보다 높은 곳에 있
는 것에 쓸데없이 아니꼬움을 드러내면서 다른 데로 옮기라고 난리를 쳤다. 그래서 태조와 무
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를 했던 곳이라 전하는 인왕산 선바위 밑으로 눈물을 머금고 이사를
가게 되었고, 목멱대왕의 남산은 왜열도의 온갖 잡귀들이 판을 치는 일그러진 현장이 되었다.

국사당을 핍박했던 왜정도, 조선신궁도 다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그곳에 건방지게 들어앉던 왜
열도의 잡귀들도 추방되었지만 남산의 주인인 국사당은 끝내 제자리로 오지 못하고 인왕산에
뿌리를 내려 선바위와 함께 기도처의 성지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로 미어터
지는 이곳에 다시 와봐야 너무 시끄러운 나머지 국사당 신들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다. 그
만큼 남산은 많이도 변했다.


▲  남산 목멱산봉수대(木覓山烽燧臺) - 서울 지방기념물 14호

정상 북쪽에는 남산의 오랜 상징물인 남산봉수대가 도심을 바라보고 있다. 남산의 옛 이름을
취해 목멱산봉수대('목멱산봉수대터'가 문화재청 지정 명칭임)라 불리기도 하며 서울에 있다
고 해서 '경(京)봉수대'란 별칭도 있으나 그냥 속편하게 남산봉수대라 불러도 문제는 없다.

봉수대란 불을 피우거나 연기를 이용해 변방의 소식을 알리던 옛날 통신 수단으로 산꼭대기에
주로 설치되었다. 낮에는 연기로 알리고, 밤에는 불을 피워 소식을 전했으며, 비가 많이 오는
경우에는 봉수지기가 직접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봉수대는 크게 5개 노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변경인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
滿江), 남해바다에서 시작하여 이곳 남산을 종점으로 삼았으며, 평소에는 봉화 1개, 적이 나
타나면 2개, 경계에 다다르면 3개, 경계를 넘으면 4개, 전쟁이 터지면 5개를 올렸다.

남산봉수대는 1394년에 설치되어 하루도 연기가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았으며, 동
쪽에서부터 서쪽을 향해 5개소가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1895년 봉수제도가 폐지되면서 문
을 닫았고, 왜정 때 말끔히 철거되면서 그 위치를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청구도(靑
邱圖)를 통해 봉수대터 1곳을 발견하니 그곳이 지금 봉수대로 철저한 고증을 통해 1994년 복
원되었다. (나머지 4곳은 아직도 위치가 아리송하다고 함;;;)

이곳 봉수대는 벽돌로 쌓은 5개의 봉수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금은 불과 연기를 피울 일이
없는 죽은 봉수대로 남산 정상을 수식하는 상징적인 존재이자 조선시대 봉수제도의 중앙봉수
대 의미 밖에는 없다. 그것이 현역에서 은퇴한 사물의 쓸쓸한 뒷모습이다. 봉수대는 관람이
가능하며, 여기서 바라보는 조망이 가히 차관도 아닌 장관이라 이곳이 왜 조선 봉수대의 중심
이 되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남산이 서울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고 조망이 뛰어나 사방에
서 날라오는 봉수대 연락을 받기에 아주 좋기 때문이다.
참고로 서울에는 남산 외에도 무악봉(毋岳峰) 동봉수대와 봉화산(烽火山) 봉수대, 봉산 봉수
대, 개화산 봉수대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근래에 복원된 따끈따끈한 상태로 무악산 동봉
수대와 봉화산 봉수대는 서울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8-1


▲  목멱산봉수대 내부
불을 피우는 봉수대는 벽돌로 쌓고 그 밑도리는 성벽처럼 돌을 다듬어서 쌓았다.
1994년에 복원된 상태라 고색의 때는 채 익지 못했으며 아직까지는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피부를 지녔다.

▲  남산봉수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서울 도심 동부와 성북/강북/도봉 권역과 동대문/중랑/성동 권역을 비롯하여
멀리 수락산과 불암산 등이 흔쾌히 두 눈에 잡힌다.

▲  남산봉수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바로 앞에 보이는 것은 남산케이블카 승차장이다. 그 너머로 서울 도심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줄기가 바라보인다.


 

♠  남산 마무리

▲  성곽길에서 바라본 용산과 여의도, 서울 서남부 지역

산 정상에서 남산도서관, 백범광장으로 내려가는 성곽길은 경사가 매우 급한 편이다. 내려
갈 때야 상관은 없지만 올라갈 때는 거의 혼이 다 빠진다.

남산케이블카를 지나면 도심을 향해 튀어나온 잠두봉 전망대가 손짓을 하는데, 여기서 바라보
는 조망 맛이 아주 일품이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달까지 올라간 서울의 심장부를
바로 발 밑에 두며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가까이로 남산3호터널을 오가는 차량의 물결이
개미들의 행진처럼 보이며, 키다리급의 온갖 성냥갑 건축물들이 여기서만큼은 손가락보다 작
게 다가온다.


▲  남산 정상에서 남산도서관으로 내려가는 성곽길
장충단공원에서 올라가는 것보다 거리는 매우 짧지만 대신 경사가 좀 각박하다.
남산 산길 가운데 가장 경사진 곳으로 장충단공원이나 국립극장에서 올라가
정상을 찍고 남산도서관 방면으로 내려가는 것을 추천한다.
(그래봐야 넉넉히 2시간이면 족함)

▲  잠두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서울 도심과 인왕산,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  잠두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서울 도심 동부와 동대문, 성북/강북/도봉 권역과 수락산, 불암산 산줄기 등

▲  잠두봉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남대문시장과 시청,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서울 도심과 안산(鞍山), 인왕산 등


정상에서 서쪽 성곽길을 따라 20분 정도 내려가면 시립남산도서관이다. 이제 남산도 다 내려
온 것이다.

여기서 안중근의사기념관과 2020년 11월에 닦여진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을 지나면 백범 김구
선생을 기리고자 닦은 백범광장이 나온다. 공원을 이루고 있는 광장 남쪽에는 한양도성이 복
원되면서 나무와 온갖 꽃을 심은 녹지 공간이 대폭 늘어났다. 바로 옆이 키다리 빌딩이 즐비
한 도심이건만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완전 딴 세상을 이루고 있으니 그 역시 남산이 있으니
가능한 것이다.


▲  백범광장 터널과 서울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한양도성과 남산을 복원하면서 예전에 도로 공사로 줄기가 끊긴 백범광장과
남산 사이의 산줄기를 다시 이어붙여 그 밑에 터널(소월로3길)을 냈다.

▲  휴일 오후 한가로움이 느껴지는 백범광장과 서울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  백범광장 남쪽에 다시 재현된 한양도성 - 사적 10호

백범광장 남쪽과 서쪽에는 근래 복원된 아주 따끈따끈한 성곽이 있다. 이들은 한양도성의 일
원으로 왜정 때 끊어진 남대문과 남산 구간의 일부이다.
오랫동안 잊혀진 이들을 끄집어내고자 백범광장 주변을 싹 뒤집어 조사를 벌였고, 땅속에 묻
힌 성터가 발견되어 그 자리를 바탕으로 성벽과 여장을 복원했다. 재현된 구간은 200m 정도로
최근 지어진 탓에 피부가 아주 하얗고 반질반질하여 마치 벽에다 그린 성벽 벽화 같다. 남산
도서관 북쪽 성곽터를 조사하여 2020년 11월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을 내었으며, 나머지 사라진
구간도 복원 계획에 있다.


▲  한양도성 백범광장 구간
하얀 피부의 성곽 여장 너머로 서울역 동쪽에 자리한 여러 키다리 빌딩이 보이며,
성곽 안쪽에도 탐방로를 내어 억새를 비롯한 온갖 나무와 꽃을 심었다.

▲  한양도성 백범광장 구간 서쪽 부분
성곽은 계속 달리고 싶다~~!! 허나 왜정과 개발의 칼질로 끊어진 구간이
적지 않고 복원 속도도 굼벵이보다 느려 그런 날은 아직도 멀었다.

▲  한양도성에서 바라본 후암동과 이태원, 용산구 지역
천하를 비추던 햇님은 엄청난 광을 쏟아부으며 슬슬 커텐을 칠 준비를 하고
회색빛 도시도 석양이 짙어지면서 점차 검은 도화지 속에 묻혀간다.

▲  온갖 야생화가 살랑거리는 백범광장 서부

▲  도동3거리에 있는 남산공원 마크

백범광장과 한양도성 백범광장 구간을 뒤로하고 남산공원 출입구의 하나인 도동3거리로 나오
니 시간은 18시가 넘었다. 햇님도 그 기운이 다했는지 84,000광 보다 더 진한 석양을 비추며
슬슬 꽁무니를 내빼고 토끼의 달나라가 하늘 높이 떠올라 땅꺼미의 기운을 북돋는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찾은 남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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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2월 2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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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골에 푹 묻혀있는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백화산 반야사 (석천계곡, 반야사 호랑이, 문수전, 망경대)

 


' 봄맞이 산사 나들이, 영동 백화산 반야사 '

반야사3층석탑
▲  반야사3층석탑과 배롱나무

▲  영천과 망경대

▲  반야사계곡(석천계곡)

 


 

♠  백화산(白華山)의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반야사(般若寺) - 영동군 향토유적 9호

▲  반야사 경내
경내 뒷쪽으로 꼬랑지를 든 호랑이를 닮았다는 돌너덜(반야산 호랑이)이 보인다.


영동 고을의 동부를 맡고 있는 황간(黃澗), 그 황간 북쪽 우매리에서 석천계곡(반야사계곡)을
따라 들어가다보면 그 길의 끝에 반야사가 그림 같은 모습으로 반겨준다.

백두대간의 일원이기도 한 백화산이 베푼 석천계곡이 태극문양으로 산허리를 감아 돌면서 연
꽃 모양의 지형을 이루는 그곳 한복판에 둥지를 닦은 반야사는 백화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고
있다. 절을 둘러싼 주변 경관이 매우 곱고 절의 옆구리를 간지럽히는 계곡은 수량이 풍부하고
청정하기 이를 데 없어 영동(永同) 지역 경승지이자 피서의 성지로 오랜 세월 찬양을 받고 있
다.

경관 하나는 아주 일품인 반야사는 신라 말에 무염(無染, 800~888)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가 황간 지역 어딘가에 있었다는 심묘사(深妙寺)에 주석하고 있었을 때, 현재 절 자리에 있던
연못에 나쁜 악룡(惡龍)이 머물며 갖은 민폐를 부리자 사미승(沙彌僧) 순인(純仁)을 보내 그
들을 쫓아내고 연못을 메워 절을 닦으니 그것이 반야사의 시작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 용(龍)이 진짜로 있을 리는 없을 터이니 아마도 백화산에서 설치던 산적을 교화하
거나 때려잡고 그들의 본거지에 절을 세운 것으로 여겨지며, 비록 무염이 창건했는지는 의문
이나 대웅전에 신라 후기에 조성되었다는 불상이 있어 9~10세기에 창건된 것은 확실한 것 같
다.
무염의 창건설 외에도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원효(元曉)가 세웠다는 설과 의상(義湘)의 10
대 제자 중 하나인 상원(相源)이 세웠다는 설도 덩달아 전하고 있으나 원효와 의상의 창건설
은 이 땅에 많은 절에서 사골이 되도록 우려먹는 흔한 소재이다. 반야사도 예전에는 그들이
창건했다고 우겼으나 요즘은 한 발자국 물러나 그 부분을 생략하고 신라 후기에 크게 활약했
던 무염을 창건주로 내세우고 있다.
절 주변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무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절의 이름을 반야사라 했으며 산
이름을 지장산에서 백화산으로 바꾸어 문수도량임을 내세웠다.

창건 이후 오랫동안 사적(事績)이 전해오지 않다가 1352년에 중건되었다고 하며, 1464년 신미
(信眉)가 세조(世祖)의 허락을 받아 절을 크게 중창했다. 세조는 법주사(法住寺)를 방문했다
가 신미의 청을 받아 반야사에 들려 새로 지은 대웅전에 참배하고 '반야'란 현판을 내렸다고
하며 그때부터 절 이름이 '반야사'가 되었다고 한다. ('반야'는 문수보살의 지혜를 뜻함)
그 이후 500년 가까이 잠수를 탔다가 6.25전쟁 때 거의 파괴된 것을 1970년대 이후부터 꾸준
히 불사를 벌여나갔고 1993년에 새 대웅전과 요사를 지어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극락전, 산신각, 지장전, 심검당 등 10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경
내에서 다소 떨어진 망경대 벼랑 위에는 이곳의 상징인 문수전이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닦았다.
절이 들어앉은 특성상 대웅전과 극락전 등 주요 건물들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고, 문수전은 북
쪽을 향하고 있다, (경내에서 계곡 건너 서쪽에 전답과 관세음보살상이 있음)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이곳의 유일한 국가 지정문화재인 3층석탑을 비롯해 영동군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대웅전 불상, 조선 후기 부도 2기가 있으며, 그 외에 500년 묵은 배롱나무 2그루와 신
중탱이 전하고 있다.
또한 절 뒷쪽 계곡 너머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파쇄석이 모인 돌너덜이 있는데,
마치 꼬랑지를 세운 호랑이 모습이라 절에서는 그를 '반야사 호랑이'로 삼으며 호랑이로 화현
(化現)한 산신(山神)으로 내세우고 있다. 경내에서도 그 돌너덜이 보이며, 그 너덜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자 이곳에 절을 닦은 모양이다.

반야사는 풍경도 좋고, 볼거리도 넉넉하나 교통편이 영 좋지 못한 것이 큰 흠이라 대중교통으
로 오려면 여간 힘들지가 않다. 허나 그만큼 첩첩한 산속으로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
거나 마음을 싹둑 다듬고 싶을 때 안기면 아주 좋은 곳이다. 게다가 이곳은 템플스테이도 운
영하고 있으니 세상사 잠시 내려놓고 고적한 산사에 묻혀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 소재지 :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 151-1 (백화산로 652 ☎ 043-742-4199, 7722)
* 반야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주차장 남쪽에서 바라본 반야사 경내

문수도량과 산신기도 도량까지 내세우는 이곳에는 재미난 전설이 여럿 전하고 있는데, 그중 2
가지를 우선 꺼내보겠다. (다른 1가지는 영천 부분에서)

① 고려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3~1330, 1332~1339) 시절 글재주가 좋은 황도령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황간 관아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여했는데, 웃기는 것은 아주 쉬운 한자인 '수(
水)'와 '산(山)' 2자를 몰라서 백일장에서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이에 크게 발끈한 황도령은 바로 반야사로 달려가 그곳에 있던 일우에게 학문을 배웠다. 일우
는 학식이 뛰어난 승려로 그에게 많은 학문을 전해주었는데 언제부터인가 황도령의 얼굴색이
나날이 나빠지고 있어 얼굴을 살펴보니 글쎄 처녀귀신에게 씌인 것이 아닌가? 그냥 방치하다
가는 황도령이 골로 갈 수 있기에 그의 옷을 벗겨 온몸에 금강경(金剛經) 5,149자를 빼곡히
적어넣고 옷을 입혔다.
그날 밤, 황도령을 찾아온 처녀귀신은 도령 몸에 쓰인 금강경을 보고는 크게 발작했다. 금강
경의 위엄에 너무 괴로워한 나머지 황도령의 귀를 물어뜯고 줄행랑을 쳤는데 이는 일우가 금
강경을 쓸 때 귀 부분을 실수로 빼놓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황도령은 귀는 잃었지만 스승 덕
분에 살아날 수 있었고 그 인연으로 출가를 하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 무이법사(無耳法師)라
했다. 귀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이다.

② 불교 탄압이 극성이던 조선 성종~연산군(燕山君) 시절, 벽계선사(碧溪禪師)는 그 소나기를
피하고자 머리를 기르고 속인(俗人)으로 가장하여 살았다. 그는 과부를 맞아들여 같이 살았는
데 어디까지나 위장 혼인일 뿐, 3년을 살아도 여전히 남남처럼 살았다. 부부의 재미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에 완전히 뿔이 난 과부는 어느 날 '야~ 나 갈꺼야~~!!'
선사 왈 '왜?'
과부 '이름만 부부지 과부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이래서 살겠냐?'
선사 '그러면 말리지 않겠다. 그래도 3년 동안 밥해주느라 고생했는데 수고비로 이거나 가져
가셔~!'
하면서 은으로 만든 표주박을 주었다.

과부는 표주박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와 동구 밖 샘물가에서 그것으로 물을 떠마시며 팔자 한
탄을 간드러지게 하였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있던 표주박이 갑자기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자 그만 포기하고 3년 동안 천하를 돌아다니며 적당한 재혼처를 물
색했으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벽계선사를 다시 찾아갔다.
선사는 '내 다시 올 줄 알았다'
그 말에 과부는 '어찌 알았누?'
선사 '그 이유가 궁금함? 그런데 3년 전에 내가 준 표주박은 어따 팔아먹었노?'
과부 '아 그거... 마을 동구 밖 샘터에서 잃어버렸어. 쩝'
선사 '그 자리에 다시 가봐라. 아직 그대로 있을 것이다'
과부가 놀라서 '어째서?'
선사 '내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 중이 되기를 500번이나 했는데, 처음 중이 되면서 지
금까지 남이 주지 않는 것은 가져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 인덕으로 무엇이든 내것이라 이
름만 지어놓으면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지~~!'

과부는 웃기고 있네~~! 표정을 지으며 그 샘터로 가보니 과연 그 표주박이 3년 전 모습 그대
로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본 과부는 다시는 다른 마음을 품지 않으며 선사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잘살았다고 한다.

▲  반야사 심검당(尋劍堂)
2층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종무소, 공양간의
역할도 하고 있다.

▲  반야사 용머리 연꽃 석조
백화산이 베푼 옥계수로 늘 가득하여
그의 넉넉한 마음을 비춘다.

▲  반야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大雄殿)
1993년에 지어진 것으로 그 이전에는
극락전이 대웅전 행세를 하였다.

▲  맞배지붕을 지닌 지장전(地藏殿)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불단과 붉은 닫집, 그리고 석가3존상
(대웅전 불상 - 영동군 향토유적 12호)


대웅전 불단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普賢菩薩)로 이루어진 조그만 석
가3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은 경주 옥석(玉石)으로 조성되어 산뜻하게 도금을 입힌 것으
로 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가운데 석가여래상은 검은 머리칼을 드러내고 있고
좌우 보살상은 화려한 보관을 눌러쓰며 석가여래 좌우를 받쳐준다. 그들 뒤로는 검은 바탕으
로 이루어진 석가후불탱이 든든하게 후광이 되어준다.

▲  대웅전 신중탱
대웅전을 지키는 온갖 호법신의 무리가
그려진 것으로 석가후불탱과 비슷한
스타일로 조성되었다.

▲  산신각(山神閣)
2단으로 다져진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은
산신각은 산신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의 보금자리이다.


▲  반야사3층석탑 - 보물 1371호

극락전 앞에는 하얀 피부의 3층석탑이 소박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지금이야 반야사의 일원
으로 완전히 묻혀있어 이곳의 오랜 유물로 봐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그는 원래 북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석천계곡 탑벌에 쓰러져 있었다. 그러던 것을 1950년에 주지 성학(性學)이 수습
하여 일으킨 것이다. 그 덕분에 반야사에 오래된 존재가 하나 늘었다.

이 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힌 다음 머리장식
으로 마무리를 한 형태로 밑에서 머리까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으며, 높이는 335cm이다. 바
닥돌은 모두 6매의 판석(板石)으로 이루어졌으며, 바닥돌 윗면 네 모서리에는 합각선이 돌출
되어 있고, 중심부에는 깊이 3cm 정도의 홈을 파 기단면석이 꼽히도록 하였다.
기단부는 4매의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隅柱)와 탱주가 모각되었다. 갑석 윗
면은 1매의 판석으로 조성했으며, 중앙에는 깊이 3cm 정도의 홈을 파서 1층 탑신을 꼽도록 조
성했다. 그리고 갑석의 네 모퉁이에도 합각선이 돌출되어 있다.
1층 탑신은 4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를 새겼으며, 남/북쪽 면석은 새
로 끼워 넣었다. 2,3층 탑신은 모두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2층 탑신에 모각된 우주에서는 엔
타시스 수법을 볼 수 있다. 3층 탑신은 현상으로 보아 새로 끼운 것으로 여겨진다.

옥개석(屋蓋石)은 1층에서 3층까지 모두 1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각층 옥개석의 낙수면은 길이
가 짧고 경사가 급해 보이며, 옥개석 받침은 1층 5단, 2/3층은 4단으로 되어 있다. 추녀는 비
교적 두껍게 조성되었는데, 직선화되는 보편적인 수법과는 달리 둥글게 표현되어 전각의 반전
은 예리한 편이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찰주(刹柱)가 관통된 노반(露盤)과 복발 등의 머리장식
이 남아있다.
이 탑은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 초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
으로 보기도 함) 1층 탑신의 결구 수법은 신라 석탑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기단 면석과
1층 탑신을 꼽도록 하면에 홈을 판 점은 백제계 석탑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제자리를
떠나긴 했지만 탑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고 건강 상태도 좋으며, 반야사의 보물로 묵묵히 살
아가고 있다.

▲  서쪽에서 바라본 3층석탑과 배롱나무
, 극락전

▲  범종을 비롯한 4물의 보금자리
범종각(梵鍾閣)


▲  배롱나무 - 영동군 보호수 13호

극락전과 3층석탑 사이에는 오래된 배롱나무 형제가 꿈틀거리고 있다. 이들은 추정 나이가 약
530년(1994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500년) 정도로 높이는 각각 8m, 7m, 나무 둘
레는 각각 0.8m, 0.6m이다.
경내에서 대웅전 불상 다음으로 늙은 존재(3층석탑은 제외)로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자신이
가지고 댕기던 주장자(柱杖子)를 꽂아 둔 것이 둘로 갈라져 쌍배롱나무로 자랐다는 믿거나 말
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한여름(7~8월)에 왔더라면 배롱나무(백일홍)의 아름다운 붉은 향연을 제대로 누릴수 있을텐데
겨울과 봄의 팽팽한 경계선에 오다 보니 그 아름답다는 나무도 다른 나무와 비슷하게 그저 알
몸만 있다. 사람이나 나무나 걸치는 옷을 빼버리면 다 똑같거늘 왜 그리도 욕심을 부리고 계
급을 나누는지 모르겠다.


▲  배롱나무의 여름 모습 (반야사 홈페이지 참조)
배롱이의 향연은 기껏해야 2달 정도이다. 6~7개월 정도는 푸른 옷을 걸치고 있으나
나머지 5~6개월은 겨울 제국에게 모든 것을 공출당한 채, 알몸으로 살아간다.


▲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 반야사 극락전(極樂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원래는
이곳의 대웅전이었으나 1993년 바로 옆에 새 대웅전이 지어지면서 법당에서
물러나 아미타불의 거처인 극락전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  석천계곡(반야사계곡)과 반야사의 상징, 문수전

▲  석천계곡 (반야사계곡)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고 '이제 다봤구나~!' 싶어서 발길을 돌리려고 하니 문수전을 알리는 이
정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발길을 붙잡는다. 문수전이라?? 반야사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나
싶어서 살펴보니 그곳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경내 뒷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기왕 온 것이니 다
음에 안와도 될 정도로 말끔히 둘러봐야 나중에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
다.

문수전으로 인도하는 산길은 석천계곡을 따라 이어지는데, 계곡 풍경이 반야사 이전보다 더욱
장관이었다. 물은 깊고 청명하며, 바위와 벼랑이 적당히 나타나 여흥거리가 되어준다. 그리고
누런 갈대가 바람에 펄럭이며 나그네의 마음을 간지럽히고, 소나무 등 나무도 삼삼해 이런 곳
이야말도 진정한 신선(神仙)의 세계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이다.
신선의 세계는 인간계보다 시간이 빛의 속도만큼 빠르다고 한다. 신선의 장기를 구경하는 동
안 몇 대(代)가 흘러갔다는 난가(爛柯)의 전설도 있을 정도이니 괜히 이 계곡에 발을 들였다
가 기백 년 뒤에나 나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였다.


▲  대자연이 빚은 작품, 돌너덜 (반야사 호랑이)

반야사의 명물 중에는 '반야사 호랑이'라 불리는 돌너덜이 있다. 그 모습이 마치 호랑이가 꼬
랑지를 치켜든 모습과 비슷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이들은 순 자연산으로 수 만년
동안 흘러내린 파쇄석이 산자락에 자연스럽게 쌓이고 쌓여 높이 80여m, 길이 300여m에 이르는
돌너덜을 이루게 되었다. 근데 하필이면 호랑이 모습을 이루고 있어 대자연의 기가 막힌 작품
솜씨에 그저 놀라울 따름인데, 반야사는 그를 산신의 화현으로 삼고 있으며, 산신각 산신탱에
그려진 호랑이 모습과도 비슷하다.


▲  문수전으로 이어지는 계곡 숲길

▲  망경대(문수바위) 위에 아슬아슬하게 둥지를 튼 문수전(文殊殿)

문수전으로 이어지는 계곡 숲길은 아주 느긋하다. 허나 그것도 잠시, 착했던 길은 영천을 앞
에 두고 갑자기 180도 흥분하여 아주 각박한 오르막길로 돌변한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 위에
맞배지붕 건물 하나가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들어앉은 건물처럼 장엄하게 보이는데, 그것이
반야사의 상징인 문수전이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벼랑 옆에 닦여진 가파른 길을 올라가
야 되는데, 경내에서도 다소 떨어져 있고, 길도 각박하여 문수전을 건너뛰는 사람도 있다.
허나 이는 갈비탕에서 고기를 빼먹는 거와 같을 정도로 어리석은 일이다. 비록 문수보살에게
관심이 없다고 해도 그 주변 풍경이 가히 일품이니 조금은 힘들더라도 발품을 팔만하다.


▲  망경대 밑에 자리한 석천계곡 영천(靈川)

문수전을 강제로 머리에 이고 있는 망경대(문수바위) 밑 계곡을 영천이라 부른다. 이곳은 세
조와 문수보살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서려 있으니 내용은 이렇다.

세조가 신미의 청을 받아 반야사를 방문하니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홀연히 나타났다. 세조
가 예를 차리자 그는 왕을 영천으로 인도하여 몸을 씻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는
'왕이 불심(佛心)이 갸륵하니 부처의 자비가 따를 것이오'

한 마디 남기고는 사자를 타고 망경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다가 사라졌다.

왕이 목욕을 마치고 계곡 밖으로 나오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하며, 병을 낫게 해준 문수
보살을 기리고자 절 이름을 반야사로 갈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설화는 가만보면 오대산 상원
사(上院寺)에 서린 세조와 문수동자 전설과 여러모로 비슷하다. 아무래도 거기 설화를 가져와
서 반야사 스타일로 다듬은 듯 싶다.
세조가 과연 여기서 목욕을 했는지는 의문이나 그만큼 왕실의 인연과 지원이 각별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절 부근 경치 좋은 곳에 이런 전설을 갖다 붙인 듯 싶으며, 그 전설로 인해 영천
옆 벼랑을 문수바위 또는 망경대(望京臺)라 불리게 되었다. 여기서 망경대는 서울을 바라본다
는 뜻이니 절을 중창시켜준 세조와 왕실의 은혜를 두고두고 기리겠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  망경대 꼭대기에 자리한 문수전의 위엄

문수전은 세조와 문수보살의 설화가 깃든 망경대 벼랑 위 250m 고지에 북쪽을 바라보며 자리
해 있다. 건물을 짓기에는 다소 척박한 곳이지만 그 현장에 문수보살을 위한 건물을 지어야
문수도량의 뽀대가 나므로 그 어려움을 무릅쓰고 건물을 지어올렸다.
문수전에 오르면 백화산 남쪽 자락과 석천계곡, 호랑이 돌너덜 등이 시원스레 시야에 들어오
나 주변이 칼처럼 솟은 높은 산줄기에 둘러싸여 있어 보이는 범위는 그것이 전부이다.


▲  문수전에 봉안된 문수보살상과 문수동자상

문수전은 북쪽을 향해 문이 나 있다. 그 문을 들어서면 늠름한 모습의 문수보살상이 파란 피
부의 목각사자상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려놓고 푸근한 표정으로 중생들을 맞는다. 그 좌우에
는 붉은 옷을 걸친 문수동자와 녹색 옷을 입은 문수동자가 두 손을 모아 합장인(合掌印)을 선
보이고 있어 그야말로 '문수'의 세상이다.
문수보살과 동자상은 근래 지어진 것들이라 고색의 때는 여물지도 못했지만 목각사자상은 조
선 후기 것이라고 하며. 그 좌우에 중생들의 시주를 받아 봉안한 조그만 금동 원불(願佛)들이
빼곡히 자리를 채워 어두운 건물 내부를 환하게 밝혀준다.


▲  문수전에서 바라본 반야사 호랑이(돌너덜)

▲  문수전에서 바라본 석천계곡 북쪽과 백화산 산줄기
다음에 오면 저 계곡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나의 존재를 잠시 지우고 싶다.

▲  백화산의 첩첩한 산줄기 (백화산 정상 방면)

▲  망경대 바로 밑에 펼쳐진 영천
영천 주변에 흙과 자갈이 넓게 깔려 있어 여름 피서 장소로 아주 제격이다.
혹시 아는가 여기서 물놀이를 하면 세조 임금처럼 병이 싹 나을지도~~?

▲  문수전에서 경내로 내려가는 산길

반야사 경내에서 문수전으로 인도하는 길은 2개가 있다. 우리가 이용한 계곡 길을 거쳐서 가
는 것과 경내 동쪽 산길로 오르는 길이 그것인데, 보통 계곡 길로 올라가서 문수전을 찍고 경
내 동쪽 산길로 내려오며 절에서도 그렇게 가기를 적극 권하고 있다. 이유는 계곡 길에서 망
경대 벼랑으로 오르는 길이 좁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도 상관은 없음)
계곡 길은 완만하게 가다가 망경대에서 아주 화끈하게 흥분을 하지만, 동쪽 산길은 서서히 오
르는 형태로 덜 가파르다. 그 길을 내려오면 잠시 떨어졌던 경내가 이내 모습을 드러내며, 주
차장 쪽으로 떨어진다.


▲  동쪽 산길로 내려가면서 바라본 반야사 경내

▲  반야사 부도(浮屠) - 영동군 향토유적 10호, 11호

주차장 남쪽 산자락에 고색이 짙은 부도 2기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이들은 주차장 부근에 있
어 찾기는 쉽지만 구석진 곳에 있어 자칫 놓치기가 쉬우니 꼭 등잔 밑을 살펴보기 바란다.

반야사 부도는 이 땅에 흔한 석종형(石鐘形) 부도로 왼쪽 1호 부도(향토유적 10호)는 검은 주
근깨(이끼)가 가득 핀 네모난 바닥돌 위에 대추알처럼 생긴 탑신을 얹히고 네모난 지붕돌로
마무리를 했다. 그리고 오른쪽 2호 부도(향토유적 11호)는 네모난 바닥돌 위에 8각의 대석(臺
石)과 석종 모양의 탑신을 올리고 그 위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지붕돌과 정체가 아리송한 기둥
모양의 머리장식을 올렸다. 이들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누구의 승탑(僧塔)인지는 귀신
도 모른다.

▲  왼쪽 1호 부도

▲  머리장식이 특이한 오른쪽 2호 부도

▲  주차장에서 부도로 인도하는 돌계단

▲  주차장에서 바라본 석천계곡


▲  봄을 기다리는 석천계곡
백화산 등산을 하려면 저 다리를 건너면 된다. (관세음보살상도 저 다리를 건너면 됨)


부도를 끝으로 그림 같은 절, 반야사 관람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기분 같아서는 계곡 다
리를 건너서 관세음보살상까지도 가보고 싶고, 계곡길을 따라 일주문(주차장에서 우매리로 나
가면 중간에 있음)까지 걸어가며 계곡을 느끼고 싶지만 다음 답사지(경북 어느 지역)로 빨리
넘어가자는 일행의 독촉에 그 좋은 후식거리를 모두 포기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아쉽긴 했지
만 반야사에 깃든 보물과 문수전, 영천과 망경대 등 볼만한 것은 거의 다 보았으니 별로 후회
는 없다.

시간은 어느덧 16시. 해가 많이 길어지긴 했지만 조금씩 어둠의 기운이 피어나 세상을 훔치려
들고 우리는 고적한 산사에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사라졌다.
우리는 반야사란 절을 기억하겠지만 반야사는 잠깐 스치고 지나간 나를 기억이나 할련지 모르
겠다. 다음에 다시 인연이 된다면 (여름에 인연을 잡고 싶음) 계곡도 말끔히 둘러보고 세조가
몸을 씻었다는 영천에도 풍덩해보고 싶다.
이렇게 하여 반야사 나들이는 막을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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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변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두뭇개승방이라 불렸던 옥수동 미타사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옥수동 미타사
~~~~~

▲  미타사 느티나무


 

올해도 변함없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이 다가왔다. 비
록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그들 이상만큼 그날을 즐기고 산 지도 어느덧 10여 년, 초파
일에 대한 설레감은 다른 날보다 높아 며칠 전부터 초파일 코스를 짜느라 부산하다.
그날만큼은 굳이 멀리 나가지 않고 서울 장안의 오래된 절과 문화유산을 품은 현대 사
찰(20세기 이후)을 대상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이제는 서울에서 미답(未踏) 절이 거의
고갈 상태에 이르렀다. 다행히 이때를 대비하여 남겨두었던 미답의 고찰(古刹)이 여럿
있는데, 그중 2개를 이번에 꺼냈다. (나머지는 이후에 모두 꺼냈음)

드디어 초파일 오전 10시, 도봉동 집을 나서 제일 먼저 불암산 학도암(鶴到庵)을 찾았
다. 학도암은 여러 번 인연이 있던 절로 그곳에 깃든 조선 후기 문화유산을 간만에 친
견하고 점심공양에 후식(수박, 떡, 커피)까지 두둑히 챙겨 먹으며 학도암의 후한 초파
일 인심을 체험했다.
13시 정도에 보문동(普門洞) 미타사로 자리를 옮겨 그곳의 문화유산을 모두 사진에 담
고 공양간에서 공양까지 하였다. 이곳 초파일 인심도 학도암에 못지 않았는데, 초파일
절투어에서 먹는 재미만큼 쏠쏠한 것은 없다
그렇게 미타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벌써 16시를 가르킨다. 왜 이렇게 초파일 해는 짧을
까? 퇴근 본능에 너무 충실한 햇님을 원망하며 지하철을 타고 부랴부랴 옥수동 미타사
로 넘어갔다. 이곳은 3호선과 경의중앙선(문산↔용문,지평)이 만나는 옥수역 북쪽으로
바로 한강 변이다. 학창 시절에 옥수동 북쪽 금호동(金湖洞)에 잠시 서식한 적이 있었
고, 옥수동도 적지 않게 들락거렸지만 그의 존재를 눈치챈 것은 불과 몇 년 전에 일이
다. 그만큼 등잔 밑이 매우 어두웠다.


▲  초파일의 향연 속으로 ~~~ 미타사 정문을 들어서다.


 

♠  1지붕 9가족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비구니 절집
옥수동 미타사(玉水洞 彌陀寺)

▲  청기와를 눌러쓴 천불전(千佛殿)

미타사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미타유치원과 주차장이 마중을 한다. 미타사는 아직 그 흔한 일
주문(一柱門)을 갖추지 못했는데, 노란 피부의 유치원 버스들이 옹기종기 모인 주차장을 지나
면 미타사의 법당(法堂)인 천불전이 우람한 모습을 비춘다.

천불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큰 집이다. 1988년 9월에 지
어진 미타사의 야심작으로 머리에는 푸른 빛을 도도하게 드러낸 청기와가 듬뿍 입혀져 건물의
품격을 높여주고 있으며, 불단(佛壇)에는 장대한 모습의 석가여래상을 위시해 조그만 금동불
1,000상이 금빛 물결을 일으키며 두 눈을 부시게 만든다.


▲  화려함이 가득 묻어난 붉은 닫집과 천불전 석가여래상의 위엄

▲  미타사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4-6, 4-7호

천불전 북쪽에는 천불전보다 더 장대한 모습의 느티나무 2그루가 천불전과 관음암에 짙게 그
늘을 드리우고 있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무럭무럭 자라난 그들은 1982년 10월 20일
에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그때 추정 나이가 약 200년이라고 하니 그새 40년이 더해
져 240년 정도 된다. 경내 한복판에 자리해 있어 미타사 승려가 심은 것으로 여겨지며, 서로
나이도 비슷하고 생김새 또한 거의 비슷한데, 이들의 높이는 20m, 나무둘레는 320cm, 325cm이
며, 경내에서 2번째로 오래된 존재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미타사의 내력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  미타사 용운암(龍雲庵)

옥수역 북쪽에 자리한 미타사는 앞에는 한강이 흐르고 뒤에는 산이 감싸고 도는 전형적인 배
산임수(背山臨水) 자리이다. 미타사는 그 뒷산을 종남산(終南山)이라 칭하고 있는데 원래 이
름은 금호산(金湖山, 응봉)이며, 경내 동쪽에는 달맞이봉이 있다. 지금은 강변도로와 중앙선
철도로 인해 한강과 조금 떨어지긴 하였으나 예전에는 바로 앞이 한강이었다.

옥수동 미타사는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로 888년에 비구니 대원(大願)이 매주골(금호동
)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은 없는 실정이며, 1115년 봉적(奉寂)
과 만보(萬寶) 두 비구니가 종남산 남쪽, 즉 현재의 위치로 옮겨 극락전을 세워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내세웠다. 이때 미타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하니 어쩌면 그 시절에 창건된 것이 아닐
까 여겨진다. 또한 창건주와 1115년 중건 승려 모두 비구니라 시작부터 비구니 절이었음을 알
려준다.

조선 때는 서울 근교 4개 승방(비구니 절)의 하나로 꼽혔는데, 두모포(豆毛浦)에 있다고 하여
두뭇개승방이라 불렸다. (두모포는 동호대교 북단에 있던 포구임)
1827년 환신(幻信)이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세웠으며, 1862년에는 인허(印虛)가 조대비<趙大
妃. 신정왕후(神貞王后)>와 조진관(趙鎭寬, 1739~1808)의 시주를 받아 극락전을 중창하고 요
사를 수리했다고 한다. 허나 그 시절 조진관은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1808년에 죽었기
때문) 하여 아마도 그의 후손이 시주를 하거나 기록의 오류인 듯 싶다.
1873년에는 성흔(性欣)이 법당과 요사를 중수했으며, 1928년에 선담(仙曇)이 7층석탑을 세웠
다. 그리고 1933년에 돈형과 이경화가 산신각을 중수하고 안성훈이 무량수전을 수리했다.

한참 잘나갔던 시절에는 9동 66칸이 있었다고 하나, 20세기 중반 이후 극락전 주변을 제외하
고 여러 암자로 쪼개졌다. 하여 용운암과 금수암(金水庵), 칠성암(七星庵, 칠성각), 토굴암(
土窟庵), 금보암(金寶庵), 관음암(觀音庵), 대승암(大乘庵), 정수암(淨水庵) 등 8개의 암자가
미타사의 상당수를 이루고 있으며, 미타사 본진을 포함하여 1지붕 9가족의 독특한 모습을 지
니게 되었다.
이들은 각자 법당과 생활공간을 갖추고 있으며, 암자를 포함해 건물은 20여 동 정도로 기와집
과 현대식 주택이 두루 섞여있는데, 극락전이 여기서 가장 늙은 집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2017년 10월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금보암 금동관음보살좌상(서울 지방
유형문화재 417호
)이 있는데, 이 땅에 딱 2개 밖에 없는 윤왕좌(輪王坐) 보살상으로 고려 말
이나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오랫동안 숨바꼭질을 벌여 아는 이가 거의 없었으나
2016년 초에 대한불교조계종이 전통사찰 전수조사를 벌이면서 비로소 발견되었다.
그가 순수 미타사 토박이인지 중간에 다른 곳에서 넘어왔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1862년에 개금을 했고 그 사실을 비구 영선(永善)이 증명한다는 발원문(發願文)이 있어 19세
기 중반부터 미타사에 있던 것은 확실하며, 현재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다. (금동관음보
살좌상은 친견하기 매우 어려움)
그 외에 19세기 말에 조성된 탱화가 적지 않게 전하고 있는데, 1883년에 제작된 칠성탱이 가
장 늙었으며(금수암에 있음), 1887년에 학허(鶴虛)가 그린 아미타후불탱, 현왕탱, 감로탱, 신
중탱, 지장탱, 1900년에 보암(寶庵)이 그린 신중탱과 아미타후불탱이 있다. 20세기 초에 그려
진 탱화가 더 있으며, 극락전과 금수암, 칠성암, 대승암에 흩어져 있어 알아서 숨바꼭질을 벌
여야 된다. (극락전에 많이 들어있음) 그리고 경내에서 가장 위쪽에 자리한 대승암에는 1884
년에 제작된 희귀한 형태의 관음탱이 있으며, 앞서 천불전 앞에 240년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전하고 있다.

지금은 실감이 덜하겠지만 옛날에는 절 앞에 한강물이 넝실거리던 두모포가 있고, 절 옆구리
와 뒤쪽에는 금호산과 달맞이봉의 푸른 산줄기와 바위가 펼쳐진 기가 막힌 경승지였다. 이승
만 전 대통령이 자주 찾았던 곳이기도 하며, 도심과 매우 가까운 탓에 개발의 칼질이 절 주변
에 가해지면서 그 착했던 풍경은 이제 전설 속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지하철3호선과 동호대교가 육중한 덩치를 내밀며 절의 서쪽 시야를 완전히 앗아갔고, 그로 인
해 절은 다리 그늘에 들어앉은 처지가 되었다. 또한 옥수현대아파트가 경내 동쪽에 주렁주렁
뿌리를 내려 경내를 굽어보면서 동호대교와 아파트 사이에 끼어있는 도시에 완전히 갇힌 고적
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절 주변에는 아직 숲과 형제바위 등의 자연산 바위가 조금은
남아있어 산사(山寺)의 기운은 조금이나마 뿜고는 있다.

▲  연등을 두룬 용운암 대웅전(大雄殿)

▲  미타사 극락전과 종무소 바깥 모습


▲  미타사 극락전(極樂殿)

극락전은 미타사의 중심 공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천불전과 함께 법
당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종무소(宗務所)와 독성전, 요사를 주변에 갖추고 있으며 1862
년에 중창된 이후 여러 번 수리를 거쳤다.
극락전 안에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제작된 탱화가 여럿 깃들여져 있어 고색의 기운을
더하고 있으며, 건물 앞에는 1928년에 선담이 세운 7층석탑이 날렵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는데,
왜정(倭政) 때 많이 나타나는 석탑 양식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건물을 받치고 있는 석축 기
단(基壇)에는 검은 때가 적지 않아 100년 이상 묵었음을 살짝 귀뜀해준다.


▲  극락전 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

극락전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이다. 그는 서방정토가 있다
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어 그의 거처 또한 서쪽을 향하고 있다.
금동 피부를 지닌 아미타불은 현란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
薩)을 좌우에 거느리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고 있는데, 그들 뒤로 고색이 다소 깃든 아미타후
불탱이 든든히 자리해 있다. 이 후불탱은 1887년에 학허가 그렸다.


▲  극락전 우측에 걸린 현왕탱(賢王幀, 왼쪽 탱화 / 1887년에 '학허'가 그림)

▲  극락전 좌측을 장식하고 있는 지장탱(왼쪽)과 신중탱(오른쪽)
이들 그림은 아미타후불탱과 마찬가지로 1887년에 학허가 그렸다.

▲  극락전 옆구리에 자리한 독성전(獨聖殿)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의 보금자리로 달랑
1칸에 불과한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독성탱과 산신탱이 담겨져 있어
산신각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  근래 조성된 독성탱과 독성상
독성상이 유리막에 꽁꽁 감싸인 탓에 독성상은
안나오고 내 모습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런 민망할 때가...ㅠㅠ

▲  산신 가족이 담겨진 산신탱
흰 수염에 붉은 옷을 입은 산신 할배가
호랑이와 동자를 대동하며 단란한
모습을 보여준다.


▲  곱게 치장된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그리고 짜릿한 돈맛을 원하는 깨알같은 보시함


극락전 앞에는 초파일 행사의 백미(白眉)인 관불(관정)의식의 현장이 닦여져 있었다. 초파일
을 맞이하여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금빛 피부의 아기부처가 즐거움에 잠긴 얼굴로 오른손을
치켜들며 서 있고 그 주위를 꽃으로 치장해 조촐하게 꽃동산으로 꾸몄다. 사람들은 항아리에
마련된 길쭉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그를 살짝 냉수마찰을 시키며 나름의 소망을 들이밀고 그
앞에는 보시함이 깨알처럼 자리해 초파일 특수에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그러니 재주는 아기
부처가 부리고 돈은 절이 가져가는 것이다.


▲  미타사의 빛바랜 일기장, 1930년 중수기(重修記)
1930년(불기 2957년)에 미타사를 중수하면서 작성된 중수기이다. 중수한 사연과
중수에 참여한 사람들, 그리고 돈을 낸 이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  미타사 나머지 부분 (대승암)

▲  느티나무 옆에 자리한 현대 주택 스타일의 관음암

미타사의 구조는 대략 이렇다. 정문을 들어서면 천불전이 나오고, 그 맞은편에 용운암과 극락
전이 별도의 담과 집을 두르고 있다. 천불전을 지나면 동네 골목길 같은 길이 펼쳐지고 그 좌
우로 양옥과 기와집이 늘어서 있는데, 관음전을 시작으로 금보암, 칠성암 등이 차례대로 문을
열고 있으며, 그 길의 끝에 대승암이 위치한다.


▲  관음암에 펼쳐진 관불의식의 현장
통통한 아기부처가 떨어지는 햇님을 원망하며 관불의식을 애타게 원하고 있다.

▲  금보암
미타사에서 가장 늙은 보물인 윤왕좌 금동관음보살좌상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그를 보고자 금보암 법당을 기웃거리며 새가슴마냥 슬쩍슬쩍 살펴봤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다.

▲  대승암 (오른쪽 건물은 칠성암)

미타사 골목 끝에는 대승암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막다른 곳으
로 2층 주택과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무량수전을 갖추고 있는데, 발길을 돌릴까 하다가 이곳은
분위기가 어떤가 궁금하여 한번 들어가 보았다.
무량수전 주변을 대충 둘러보고 '별거 없구나~!' 싶어 나가려고 하니 갑자기 주택에서 나이가
지긋한 노(老) 비구니가 나와 구경 잘했냐며 말을 건넨다. 하여 그렇다고 답을 하니 자연히
서로 말이 이어져 이야기꽃이 주렁주렁 피어날 분위기였다. 그래서 초파일 행사를 위해 무량
수전 뜨락에 깔아놓은 의자에 앉아서 일종의 선문답(禪問答)을 하게 되었다.

그는 70대 중반의 비구니로 원래 천주교였다가 20대에 출가를 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법명(
法名)을 묻지 못했음> 금보암의 어른 승려로 미타사와 대승암, 미타사에 깃든 오래된 탱화들,
그리고 불교 관련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기에 여러 법문까지 겯들여서 말이다. 대화 내
용은 벌써부터 퇴화된 머리의 한계상 1/3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궁금한 것을 마구 쏟아
내었고, 그는 그런데로 그것을 잘 담아주었다.
마침 목이 말라서 물을 청하니 그는 '허허허~! 우리 절 거덜내러 왔어여?' 웃으면서 생수 1병
을 공양간 냉장고에서 꺼내주었다. 그리고는 방금 맞춘 거라며 절편이 두둑히 담긴 비닐 1봉
지와 음료수 1병까지 건네주었다. 미타사는 16시 끝 무렵에 도착한 탓에 초파일 인심을 확인
하기 어려웠는데 이렇게 금보암에서 그런데로 괜찮은 인심을 받았다.


▲  대승암 무량수전 앞에 차려진 관불의식의 현장
앞서 극락전, 관음전과 달리 코끼리 등 위에 아기부처의 자리를 마련했다.


금보암은 경내 구석에 위치해 있고 시간도 17시 이후라 그곳까지 들어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
다. 대부분 천불전이나 관음암 정도에서 돌아섰기 때문이다. 물론 초파일 아침부터 오후 3~4
시까지는 그런데로 사람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저녁이 코 앞이니 외출을 나온 아기부처
도 따분하여 하품을 쏟아낸다.

비구니와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벌써 17시 40분이다. 초파일이 저물어감을 매우 아쉬워
하며 허공을 가득 메운 연등은 이제 어찌 되냐고 물었다. 그러자 내일부터 인부를 고용해 모
조리 철거한다고 하며, 이들 연등은 절 창고에 나누어 보관한다고 한다.
그렇게 선문답을 마치고 무량수전 내부를 잠깐 둘러봐도 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안에 찍을
것들이 많다며 다 찍고 가라고 그런다.


▲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대승암 무량수전

▲  화려한 모습의 무량수전 닫집과 풍만하고 후박하게 생긴 아미타불

무량수전 내부는 노비구니가 이른 데로 정말 볼거리가 많았다. 붉은 지붕의 닫집은 내원궁(內
院宮) 현판을 내밀고 있고, 그 밑에 얼굴 살이 많고 목이 두꺼운 아미타불이 후덕한 표정으로
불단에 앉아 있다.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색채감 넘치는 아미타후불탱이 마치 칼라TV에 나온
만화와 같은 모습으로 생생히 자리해 있고, 불단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온갖 과일들로 불단이
무너질 지경이다.
닫집 지붕 앞에는 극락조(極樂鳥)로 여겨지는 새와 천녀(天女)가 날개를 펄럭이고 있고, 꽃을
비롯한 온갖 무늬들이 그려진 우물천정이 곱게 무량수전의 하늘을 수놓고 있다. 이들 모두 근
래 조성된 것들이라 다들 맨들맨들한데, 여기서 불단 우측 벽과 좌측 벽을 꼭 살펴보자. 그러
면 대승암의 오래된 탱화 2점이 시야에 흔쾌히 아른거릴 것이다.


▲  대승암 관음탱
관세음보살은 그림의 주인공답게 푸른 두광(頭光)과 노란색 신광(身光)을
갖추고 있고, 관세음보살을 향하고 있는 양쪽 협시들은 푸른 두광만을
갖추고 있다.
 

불단 좌측 벽에는 관음탱이 걸려있다. 백의(白衣)를 입은 관세음보살 누님을 중심으로 지장보
살<또는 선재동자(善財童子)>과 용왕으로 보이는 존재를 좌우에 두었다. 이 탱화는 고맙게도
밑에 붉은 화기(畵記)를 두어 조성시기를 알려주고 있는데, 광서(光緖) 10년(1884년) 9월, 북
한산(삼각산) 내원암에서 조성하여 수월도량공화불사(水月道場空花佛事)에 점안봉안하고 종남
산 미타사로 옮겼다. (이후 내용은 너무 흐리게 나와서 내용 파악이 불가함)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에 관세음보살의 협시(夾侍)로 나타나는 선재동자(또는 지장보살)와
용왕을 3존도 구도로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19세기에 잠깐 나타나는 이 땅에 흔치 않은 구도
의 관음탱으로 지방문화재 자격이 충분하다. 하여 비구니에게 이를 이야기하니 문화재 지정도
좋으나 대신 관리가 더 까다로워진다며 아직은 세상에 드러낼 생각이 없다고 한다.
요즘 서울의 많은 절에서 19세기는 물론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탱화, 불상까지도 앞다투어 지
방문화재 신청을 하고 있는 추세인데, 미타사는 그런 것에는 딱히 관심은 없는 모양이다.


▲  대승암 칠성탱

불단 우측 벽에는 8폭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칠성탱이 있다. 1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앞
서 관음탱처럼 아주 특이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쪽 중앙에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와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을 싹 몰아넣은 치성광삼존도가 있고, 나머지 7폭에
는 칠성원군(七星元君, 북두칠성)을 하나씩 담았다. 지금까지 많은 칠성탱(칠성도)를 만났지
만 이렇게 생긴 것은 처음 본다.

이렇게 무량수전 내부를 살피니 벌써 18시가 되었다. 그 비구니는 법회(法會) 때 입는 복장을
갖추고 저녁예불을 위해 무량수전으로 들어왔는데, 저녁예불을 구경하고 가라고 그런다. 그래
서 잠시 예불에 참관했다가 슬쩍 그곳을 나왔다. 나중에 다시 인연이 되면 그때 여러 좋은 법
문을 청해볼 생각이다.


▲  칠성암(칠성각)

대승암을 나와 그 밑에 있는 칠성암도 잠시 들렸다. 칠성암 법당에서도 한참 저녁예불이 이루
어지고 있었는데, 대승암과 달리 아줌마 신도들이 제법 자리를 채웠다.

칠성암에는 1899년에 제작된 현왕탱과 신중탱이 있으나 친견은 하지 못했으며, 형제바위와 접
한 곳에는 산신각을 두었다. 형제바위는 넓직한 바위로 예로부터 치성 및 기도처로 널리 쓰였
다.


▲  호화로운 칠성암 법당 내부
법당 닫집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 현판이 걸려있고, 닫집을 받치는 기둥에는
금색이 칠해져 있어 호화로움의 격을 제대로 높여준다.


칠성암을 끝으로 미타사 관람을 흔쾌히 마무리를 지었다. 미타사 본진을 비롯하여 용운암, 관
음암, 금보암, 대승암, 칠성암 등 5개의 암자만 살펴보았고, 나머지 토굴암과 정수암, 금수암
은 모두 통과했다. 그들은 딱히 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보암의 희귀한 보살상을 친견하지
못해 매우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기대도 별로 하지 않았다. 아직은 그를 볼 인연이 아니기 때
문이다. 그래도 별로 기대하지도 않고 들렸던 대승암에서 뜻밖에 좋은 경험을 했으니 미타사
와의 첫 인연은 그런데로 괜찮았다.

이렇게 하여 옥수동 미타사 초파일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래도 그날 목적한 곳을
모두 가보았고, 그곳에 깃든 문화유산과 초파일 인심까지 마음껏 누렸으니 비록 해가 짧아 아
쉽긴 하지만 미련은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415-1 (독서당로40길 21 ☎ 02-2297-3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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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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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2월 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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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의 푸른 공간이자 너른 초원, 올림픽공원~몽촌토성 늦가을 나들이 (나홀로나무, 충헌공 김구묘역, 성내천)

 


~~~ 늦가을 올림픽공원(몽촌토성) 나들이 ~~~


▲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  올림픽공원 보호수 느티나무

▲  몽촌토성 동벽


 

늦가을이 한참 익어가던 11월 첫 무렵, 일행들과 나의 즐겨찾기 명소의 하나인 올림픽공원
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4시에 몽촌토성역(8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올림픽공원으로 들어섰
는데, 너른 공원에는 주말을 맞아 늦가을 정취를 즐기려는 온갖 사람들로 그야말로 북새통
을 이루었다.


 

♠  올림픽공원(Olympic Park) 입문

▲  지구 평화를 위한 웅대한 날개짓, 허나 진정한 평화는
아직도 멀었다 - 세계평화의문


올림픽공원의 정문이자 올림픽공원9경의 제1경으로 손꼽히는 세계평화의문은 1988년 7월 건축
가 김중업이 만든 것이다.
문 높이 24m, 폭(전/후) 37m, 전면 길이 62m(날개 정면 폭)의 장대한 규모로 1988년 가을, 천
하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서울올림픽의 정신을 기리고 지구의 평화를 염원하는 뜻에서 세웠다.
그래서 문 이름도 거창하게 세계평화의문이다.
문의 생김새를 보면 마치 큰 새가 날개짓을 하는 것 같다. 날개 밑부분에 그려진 수려한 색채
의 그림은 서양화가 백금남이 그린 것으로 고구려(高句麗) 사신도(四神圖)를 바탕으로 우측에
는 현무(玄武)와 주작(朱雀), 좌측에는 청룡(靑龍)과 백호(白虎)를 그렸다. 그리고 문 앞쪽
좌/우에는 조각가 이승택이 만든 열주탈이 각각 30개씩 배열되어 장관을 이룬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의 둥근 곡선을 활용해 비상(飛上)과 상승의 이미지를 강조하였다고 하며,
올림픽공원의 얼굴이자 마스코트로 그를 보는 순간 이미 아득한 과거가 되버린 1988년 그 시
절, 그리고 서울올림픽 개최 하루 전, 잠실에서 봤던 성화봉송까지 그때의 추억이 모락모락
떠오른다.


▲  세계평화의문 성화(聖火)

세계평화의문 안쪽에는 서울올림픽 당시 전국을 누볐던 성화의 보금자리가 있다. 나 같은 서
민들은 미친 난방비에 허리가 아작날 지경인데, 성화는 당시를 상징하는 특별한 존재라 하여
매일 비싼 기름을 먹는다. (성화 밑에 기름관이 있음) 늘 넉넉히 제공되는 기름을 먹고 살이
오른 불꽃을 휘날리며 거의 영생(永生)의 삶을 사는데, 1시간도 꺼진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기름 낭비로 비춰지는 것도 사실이라 공원의 빗장을 걸어잠구는 새벽에 한해 불을 꺼
두어 기름도 아끼고 성화도 좀 쉬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저것도 다 눈먼 세금임..)


▲  국기광장과 올림픽운동조형물 '서울의 만남'

세계평화의문을 들어서면 평화의광장이 마중을 나온다. 광장 좌우에는 공원안내센터와 편의점
, 식당, 커피집 등이 늘어서 있고, 여기서 직진하면 몽촌해자로 막다른 곳에 국기광장과 서울
의만남 조형물이 배수의 진을 치고 있다.
국기광장은 서울올림픽에 참여한 161개 나라의 국기가 펄럭이는 곳으로 그 광장 중심부에 '서
울의 만남' 조형물이 자리해 있다. 이 석물은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SLOOC)와 국제올림픽
위원회(IOC)가 서울올림픽 1주년을 맞이하여 올림픽운동의 확산을 염원하고자 세운 것으로 조
형물 바닥에는 올림픽에 참여한 세계 각국의 돌을 깔았는데, 돌 수집을 위해 돌 축제를 기획
했으며, 이 축제를 통해 우리의 전통문화와 풍습을 널리 소개하기도 했다.
그럼 여기서 잠시 서울 올림픽공원의 역사에 대해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서울의 만남' 바닥에 화석처럼 박힌 세계 각지의 돌들

올림픽공원은 1986년 제10회 아시안게임과 1988년 제24회 올림픽을 위해 조성된 공원으로 예
전에는 몽촌마을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1980년대 초반 이곳이 서울올림픽 체육시설 건립지로 확정되자 막연히 백제시대 토성으로 전
해 오던 몽촌토성을 품은 일종의 사적공원으로 꾸미기로 하고 1983년부터 6년에 걸쳐 토성을
발굴조사를 하였다. 1984년 본격적으로 이 일대를 갈아엎으면서 몽촌 사람들은 강제로 고향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1985년 5월 30일까지 이주를 마쳤으며, 1986년 4월 공원이 완성되었
다.
이후 1988년 몽촌토성 발굴조사가 대충 완료되자 토성을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
으며,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을 두루 개최하면서 국제적인 명소로 거듭났다.

공원 면적은 무려 1,674,380.17㎡(506,500평)로 서울에서 제법 큰 공원이다. 공원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서쪽은 몽촌토성과 몽촌해자로 이루어진 자연/역사 공간으로 22만
평에 이르며, 동쪽은 온갖 경기장으로 이루어진 체육 공간으로 23만 평에 달한다. 그 외 5만
평은 체육대 등의 교육 공간으로 쓰인다.

공원에는 온갖 운동 경기와 공연이 열리는 경기장과 공연장을 비롯해 한성백제박물관과 소마
미술관, 몽촌역사관 등의 실내 전시 공간과 지구촌공원 등의 소공원, 공원 곳곳에 놓여진 온
갖 조각품들, 몽촌토성과 충헌공 김구 묘역 등의 문화유적, 몽촌해자와 성내천, 88호수 등의
호수와 생태계 공간, 평화의광장과 세계평화의문 등의 광장과 올림픽 상징물, 서울올림픽파크
텔 등의 숙박시설 등이 닦여져 역사와 문화, 미술, 체육, 음악, 자연, 여가생활을 두루 누릴
수 있는 복합적인 공원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입장료를 받았으나 무료로 해방되었으며, 관람시간도 크게 완화되어 밤
시간(22시~5시)에만 빗장을 걸어둔다.

올림픽공원은 크게 줄여서 '올팍'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공원의 품으로 인도하는 관문은 세계
평화의문과 올림픽공원역으로 이어지는 동1/2문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 북1/2문, 남1/2/3/4문
, 서1/2문이 있다.

* 올림픽공원 9경 명소 (한국사진작가 협회에서 추천한 사진 촬영 명소임)
- 세계평화의문, 엄지손가락 조각품, 몽촌해자 음악분수, 대화 조각품, 몽촌토성 산책로, 나
  홀로나무, 88호수와 팔각정, 들꽃마루, 장미광장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 88-3 등 (올림픽로 424 ☎ 02-410-1114)
* 올림픽공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몽촌해자(夢村垓子, 몽촌호)와 수변무대

▲  남쪽 수변무대 부근에서 바라본 몽촌해자와 몽촌토성

국기광장 뒷쪽에는 몽촌해자라 불리는 호수가 그림처럼 누워있다. 여기서 해자란 방어력을 높
이고자 성 바깥에 닦은 물길로 1983년 이후, 몽촌토성 외곽을 싹 뒤집고 발굴조사를 했을 때
성벽 밑에서 도랑 흔적이 나왔다. 하여 발견된 흔적을 바탕으로 넓게 호수를 조성하여 몽촌해
자라 했다. 물은 성내천(城內川)에서 가져왔으며, 호수 둘레 1,800m, 총면적 53,500㎡, 수심
1.4~2m, 담수량은 무려 76,000톤이다.

남한산(南漢山)에서 발원하여 한강으로 흘러가는 성내천은 송파구의 소소한 젖줄로 송파구의
동부를 흘러간다. 올림픽공원역(5/9호선)을 지나서 올림픽체조경기장, 수영경기장 옆까지 다
가선 성내천은 까치다리 너머로 88호수를 빚고, 올림픽공원 북쪽 경계를 더듬으며 공원과 속
세(俗世)의 경계를 가르다가 성내교 직전에서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직진하면 한강이고, 왼
쪽(서남쪽) 지류가 바로 몽촌해자로 이 해자는 소마미술관 북쪽 물레방아에서 뚝 끊긴다.

해자 중앙에는 포항제철에서 1989년에 달아준 음악분수가 있는데, 물줄기가 최고 30m까지 솟
아 올라 하늘을 긴장시키며, 140여 곡의 멜로디에 맞춰 14종 14,000여 가지의 황홀한 물줄기
를 연출한다. 이 음악분수는 올림픽공원9경의 3경으로 꼽히며, 해자 남쪽에는 국기광장을 사
이에 두고 수변무대 2개를 닦아놓아 다양한 음악회가 열린다. 또한 자연형 호안(湖岸)과 6개
의 식물섬을 띄워놓아 생태계를 적극 배려했다.

* 음악분수 활동 시간 - 5~11월, 11~17시 (매시 10분에 가동)
* 몽촌분수 활동 시간 - 5~11월, 11~17시 (연속 가동)


▲  몽촌해자 남쪽 끝에서 바라본 해자와 토성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호수 너머로 수목이 울창한 언덕이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인 몽촌토성이다. 이 해자는 토성을 지키고자 그 앞에
조성된 것으로 토성이 절찬리에 쓰이던 백제 때와 지금의
모습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

▲  누가 이리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게 방화를 저지른 것일까?
늦가을에 잠긴 놀이터 나무들 (평화의광장 동쪽)

▲  대자연 앞에 한없이 작아보이는 인간의 작품들
아무리 거장이 만든 작품이라 한들 대자연 형님이 지른 늦가을의
향연 앞에서는 일개 장난감에 불과하다.

▲  두 얼굴의 조각품 (올림픽공원9경의 4경인 '대화')

서울 올림픽공원은 세계5대 조각공원의 하나로 추앙을 받고 있다. 88호수 주변과 평화의광장,
소마미술관, 지구촌공원, 조각공원, 만남의광장에 우리나라 조각품 34점과 세계 조각품 177점
이 공원을 아낌없이 수식하고 있는데, 이는 이곳이 88서울올림픽이 열린 현장이자 지역 명소
로 끝나는 것이 아닌 자연과 역사, 문화, 체육이 어우러진 국제적인 명소로 계속해서 가꾸어
진 결과이기도 하다.
물론 88올림픽을 후광(後光)으로 삼아 이곳이 국제적인 명소가 되긴 했지만 그 이후로도 관리
를 꾸준히 했기 때문에 빛은 그때보다 더욱 밝아졌다.

소마미술관에서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면 지구촌공원 건너편에 '대화'란 이름을 지닌 두 얼굴
의 조각품이 마중을 한다. 윗부분이 아작난 얼굴 2개가 서로 귀를 대고 있는 모습인데, 북아
프리카 알제리의 조각가 아마라 모한이 만든 것으로 1987년 7월부터 8월까지 50일 동안 이 땅
에 머물며 화강암을 깎고 다듬었다.
아마라 모한은 똑같이 생긴 쌍둥이가 서로 반목하며 대화를 끊자 발작한 신이 그들의 눈을 없
애 버려 서로를 볼 수 없게 만든 뒤, 평생 옆에 붙어 대화를 하도록 했다는 설화를 소재로 하
여 만들었다. 즉 말하기보다 듣는 것이 대화의 첫걸음이란 심오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이다
.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자 머리가 부딪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모습을 통해 의사소통
을 위한 노력을 표현하고 있다. 단순 작품을 떠나서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참
아름다운 작품인 것이다. 허나 인간은 신과 말 못하는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
는 존재라 그 단순한 진리를 쉽게 깨닫지 못한다. 당장 나도 그렇고, 이 땅의 백성들, 위정자
들이 그렇지 않은가?

▲  온갖 조각품이 누워있는 조각공원과 지구촌공원


 

♠  보호수 느티나무, 88마당, 몽촌토성 동벽 주변

▲  보호수 느티나무와 돌기둥 (오른쪽)

'대화' 작품을 지나면 불끈 솟은 하얀 피부의 돌기둥과 오래된 느티나무가 나란히 마중을 나
온다. 인간의 일개 작품이 감히 대자연이 빚은 작품과 나란히 서 있는 셈인데, 변화를 거부하
며 늘 같은 모습으로 일관하는 밋밋한 돌기둥보다는 계절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자연물이 더
아름답게 보여 자연산 작품에 자꾸 눈길이 간다. 돌기둥은 나무를 수식하는 들러리 정도 밖에
는 안보인다.

올림픽공원에는 늙은 보호수가 3그루 있는데, 이중 2그루가 이곳에 있다. 겉으로 보면 가지가
크게 2개로 된 나무처럼 보이지만 잘살펴보면 서로 별개임을 알 수 있는데, 그들이 너무 달라
붙어 있어서 그런 착시가 생긴 것이다.
이들 가운데 곧게 솟은 좌측 나무는 높이 7.5m, 둘레 300cm이며, 그 옆에 45도로 기운 우측
나무는 높이 12.5m, 둘레 380cm이다. 그들의 나이는 470여 년(1989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 약 430년)으로 이제는 먼지처럼 사라진 몽촌마을 사람들의 정자나무 역할을 했던
존재이나 지금은 공원 탐방객들에게 매일 그늘을 드리운다.


▲  우애가 좋은 형제처럼 너무 붙어있는 보호수 느티나무
(왼쪽이 서울시 보호수 24-5호, 오른쪽이 서울시 보호수 24-6호)

▲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먹고 자란 몽촌유허비
몽촌유허비는 강제로 정든 고향을 떠난 몽촌마을 사람들(몽촌 향우회)이 그리움과
푼돈을 모아 2001년 12월에 장만한 비석이다. 귀부와 검은 피부의 비신(碑身),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이무기가 새겨진 이수(螭首)까지 싹 갖추고 있는
당당한 모습이다.


▲  늦가을에 잠긴 산책로 (88마당, 올림픽체조경기장 방면)

▲  너른 잔디밭인 88마당

88마당은 토성과 자연으로 이루어진 올림픽공원 서부와 경기장, 공연장으로 이루어진 동부의
경계 지점이다. 너른 잔디밭으로 이루어진 공간으로 서쪽에는 몽촌토성이 흐르고 있으며, 동
에는 한얼광장과 여러 경기장이 있다. 광장 구석에는 여러 조각품이 공원의 향수를 돋구며,
이곳은 주로 대형 음악회와 사생대회, 소풍 장소로 널리 쓰인다.

▲  88마당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조각품들
 

▲  한얼광장과 올림픽공원역을
이어주는 한얼교


▲  한얼광장에 놓인 붉은 피부의 조각품
하늘에 뜬 초승달을 잡아와 붉게 박제를 한 것은 아닐까? 한얼광장은 88마당
동쪽으로 체조경기장과 핸드볼경기장 사이의 너른 광장을 일컫는다.

▲  몽촌토성(夢村土城)  동벽 (동문터)

올림픽공원하면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인 몽촌토성(사적 297호)이
다. 몽촌토성은 이곳의 진정한 알맹이로 그가 없는 올림픽공원은 갈비가 없는 갈비탕과 같다.
그가 있기에 이곳이 역사가 깃든 사적공원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고, 역사와 문화, 자연이 어
우러진 싱그러운 자연지대로 서울 부도심에 남게 된 것이다.

올림픽공원의 거의 40%를 장악하고 있는 몽촌토성은 백제 초기에 축성된 것으로 대표적인 한
성백제(漢城百濟)시대의 유적이다. 여기서 한성백제란 한강 유역인 현재 서울 강동구와 송파
구 일대에 있던 것으로 여겨지는 백제의 도읍지 위례성<慰禮城, 또는 한성(漢城)> 시절을 일
컫는 말이다.
둘레 2.3km(2,285m)에 이르는 몽촌토성은 막연히 백제 때 토성으로 전해져 왔을 뿐, 거의 방
치되고 있었다. 토성의 이름인 몽촌은 이곳 지명에서 따온 이름이지 원래부터의 명칭은 아니
었다. 그러다가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 흔쾌히 선정되면서 1980
년대 초에 체육시설을 갖춘 공원을 이곳에 닦기로 했다. 그래서 공사 전에 토성의 비밀을 밝
히고자 1983년부터 서울대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벌였다.
1989년까지 6차에 걸쳐 조사를 받았으며, 그 결과를 토대로 지금의 모습으로 산뜻하게 복원되
었다. (1982년 7월 국가 사적 297호로 지정됨)

몽촌토성은 자연산 언덕과 지형을 이용해 진흙으로 다진 것으로 경주 반월성(半月城)과 대구
달성(達城)과 비슷한 유형을 하고 있다. 자연 암반층을 급경사로 깎아 다듬기도 했으며, 동북
쪽 구릉에서는 외성(外城)의 흔적이 나왔다. 성 바깥으로 나가는 길목에서는 동/남/북문터가
확인되었고, 토성의 지형을 통해 남과 북, 동과 서를 잇는 도로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토성(土城)의 단점을 보완하고 수비력을 높이고자 서북쪽과 동벽 바깥에 목책을 세운
흔적과 서벽과 북벽 앞에 둘러진 도랑(해자)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북쪽 성벽은 성내천을
자연산 해자로 삼았다. 

토성 안에서는 출입구가 달린 6각형 모양의 움집터(12곳)와 건물터(4곳), 연못터(2곳), 저장
용 구덩이(30여 개), 무덤 등이 확인되었으며, 모두 한성백제 때 흔적이다. 그리고 한성백제
시절 유물이 앞을 다투어 무수히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 서진(西晋, 3세기 후반)의 동전무늬
도기조각(陶器片) 3점이 성 내부 퇴적층에서 발견되어 토성 축성시기가 늦어도 3세기 후반 이
전임이 분명해졌다.
움집터는 토성을 지키던 군사들의 막사로 여겨지며, 건물터는 자갈을 다져 기단과 적심을 만
든 정면 3칸 이상, 측면 2칸의 큰 구조로 밝혀졌다. 저장용 구덩이는 입구가 좁고 아랫 바닥
이 넓은 복주머니 모양 구덩이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런 구덩이는 음식물을 저장하기에
아주 좋다. 여기서 220개 이상의 큰 독이 출토되었으며, 부뚜막 시설과 조리용 토기, 배식용
토기 등이 나와 당시 백제인들의 식문화를 보여준다.
그리고 금동제 허리띠 장식과 금귀걸이, 세발토기, 굽다리 뚜껑항아리, 손잡이잔, 돌절구, 쇠
집게, 뼈갑옷, 화살촉 등 왕족과 귀족의 장신구부터 제사 유물, 군사 유물까지 다양한 유물이
나와 안그래도 많이 빈약한 한성백제 시절의 역사 이야기를 조금씩 채워주었다.

그렇다면 몽촌토성은 백제에게 어떤 곳이었을까? 아직 의견이 분분하나 풍납토성을 위례성의
중심으로 본다면 몽촌은 위례성을 보조하던 곳이거나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도읍으로 삼았다
는 한산(漢山)으로 여겨진다.<또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보기도 함> 풍납과 몽촌은 거
의 이웃처럼 자리해 있으니 이름은 조금 다르나 거의 같은 곳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바로
이들을 합쳐서 한성(漢城)이라 부르는 것이다.
발견된 유적과 유물을 통해 몽촌에는 제왕의 별궁과 관청, 군사시설, 왕족, 귀족들의 집이 있
던 것으로 여겨지며, 위례성의 중심으로 여겨지는 풍납은 왕궁과 관청, 귀족들의 집, 백성들
의 집, 시장이 있었다.

백제는 서울 송파/강동 지역(또는 하남시)에 위례성(한성)을 세워 5세기 말까지 아시아 해양
대국으로 크게 번영을 누렸다. 왜정(倭政) 때 확립된 식민사관 쓰레기들과 있는 역사도 왜곡
하고 축소시키는 영 좋지 못한 쓰레기들의 영향으로 백제하면 그저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제주도, 황해도를 차지한 조그만 나라로 생각하고 있다.
허나 백제는 우리의 좁은 생각과 달리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나라였음이 많은 역사자료와 유
물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백제는 일찍이 바다를 활용한 나라이다. 수군을 강화시키고 대외무역을 늘려 중원대륙의 요서
, 산동반도, 강남 지역 등 대륙의 무수한 해안 지역을 점령했고, <저장성을 비롯한 수천 리의
영토를 점유했다는 기록, 탐라 남쪽의 큰 섬(대만?)을 통치했다는 기록, 최치원(崔致遠)이 고
구려와 백제는 강성할 때 군사가 수십만으로 대륙 상당수를 먹었다는 발언 등등> 4세기 이후
가야(伽倻)가 점유하고 있던 왜열도로 진출해 그곳을 백제의 별채로 삼았다. 그리고 중원대륙
을 넘어 동남아까지 힘을 뻗치며 담로(擔魯)를 설치했다는 학설도 크게 지지를 얻고 있다.
특히 동성왕(東城王) 시절 북위(北魏)의 기병 수십 만을 때려잡은 사건이 있었는데, 그 현장
은 바로 산동반도(山東半島)였다. 산동을 둘러싼 백제와 북위와의 싸움에서 백제는 크게 승리
. 남조(南朝)의 여러 나라에 국서를 보내 자랑을 하며 그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렇게 잘나갔던 한성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한강을 건너 위례성을 점령하고
백제 군주인 개로왕(蓋鹵王)을 처단하면서 아주 비참하게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웅진(熊津
, 충남 공주)으로 천도함> 그때 고구려는 위례성 일대를 싹 불지르고 파괴하면서 모두 잿더미
가 되었고, 위례성 3글자는 천하에서 지워지게 되었다. 바로 그 고구려의 만행 때문에 위례성
위치가 오랫동안 아리송했던 것이다. 한산으로 여겨지는 몽촌토성도 그때 철저히 파괴되어 사
람이 살기 어려운 곳이 된 것으로 보인다.


▲  몽촌토성 동문터 (북쪽에서 본 모습)

토성 내부 면적은 216,000㎡로 인근 해자와 성내천까지 합치면 542,542㎡까지 덩치가 올라간
다. 토성에는 산책로가 그림처럼 그어져 걷는 재미가 쏠쏠하며, 예전 송파/잠실이 개발되기
전에는 서벽에서 행주산성(幸州山城)까지 보였다고 전한다. 옛날처럼 왕성(王城) 방어용의 역
할은 상실되었지만 관광/나들이의 성지(聖地)로 바쁘게 살고 있으며, 올림픽공원에 왔다면 꼭
1바퀴는 돌아야 1년이 잘풀리는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 겸 꿀단지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곳을 올림픽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면서 몽촌토성은 그 주인공이 아닌 조
연이 되버린 것이다. (지금 보면 거의 주연처럼 보이긴 함) 물론 이곳이 공원이 되면서 몽촌
토성이 개발의 칼질에서 목숨을 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엄연히 올림픽을 위한 공간으로 조성되
었기 때문에 토성의 동쪽 부분은 죄다 체육시설에 자리를 넘겨주었다. 게다가 서둘러 운동경
기장을 만들고 공원을 닦으면서 발굴 조사도 속시원히 하지 못하고 6년 만에 뚝 멈춰섰다.
그러다가 2013년 11월 몽촌토성 발굴 30주년이 되자,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그 특별전을 기획했
고, 아직도 적지 않게 베일에 가려진 몽촌토성의 속살을 들추고자 2014년부터 다시 발굴 조사
를 벌이고 있다. 현재는 예전 내성농장 일대를 조사하고 있는데, 조사가 마무리 되면 보다 많
은 흔적과 유물이 쏟아져 나올 것이며, 주택가로 뒤덮힌 풍납토성(風納土城) 일대도 싹 뒤집
어 땅속에 묻혀 공백으로 남아있는 한성백제의 나머지 이야기도 싹 맞추었으면 좋겠다.


▲  몽촌토성 동문터 (남쪽에서 본 모습)

토성이라고 해서 만만하게 보면 안된다. 높이는 왠만한 산성(山城)이나 석성(石城) 높이에 버
금가며 경사 또한 각박하기 때문이다. 높이가 낮은 곳은 5~6m, 높은 곳은 무려 10~15m에 달하
며, 몽촌해자와 접한 북벽과 서벽은 높이도 상당하고 경사도 아찔하다.
토성 보호를 위해 성벽 부분은 금줄을 쳐놓아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나 겨울 제국이 눈폭탄을
크게 투하해 은빛세계를 빚으면 포대자루 하나 들고 와서 썰매를 타고 싶은 곳이다. (물론 그
러면 절대로 안됨)


▲  몽촌토성 동벽에서 바라본 88마당

▲  몽촌토성 움집터 유적 (백제집자리전시관)

몽촌토성 동벽에는 백제시대 움집터를 담은 백제집자리전시관이 있다. 1983년부터 1989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이곳을 포함해 12곳의 움집터가 나왔는데, 여기서 발견된 움집터는 총
4곳으로 보존을 위해 특별히 푸른 피부의 보호각을 갑옷처럼 둘러 그들의 보금자리로 삼았다.
이곳이 전시관이다보니 인근 소마미술관이나 한성백제박물관처럼 매주 월요일마다 빗장을 걸
고 쉰다. (마침 그날이 월요일이라 내부는 담지 못했음)

전시관에 담긴 움집터는 6각형 모양으로 동남쪽에 출입구 시설이 있으며, 긴 벽의 높이가 6m,
짧은 벽은 4m 정도 된다. 그리고 주거지 한쪽 벽을 따라 밖으로 나온 온돌 모양의 화덕이 설
치되어 있었고, 벽체 안쪽 바닥에는 20~30cm 정도의 기둥 구멍이 남아있는데, 긴 벽에는 10개
가, 짧은 벽에는 4~5개가 남아 있다.


▲  자연과 역사 속을 거닐다 ~ 몽촌토성 동벽 산책로

▲  나무의 착각 ~ 몽촌토성 동벽
대자연이 여기저기 내던진 씨앗들이 토성에 뿌리를 내려 큰 나무가 되었다.
토성이 얼마나 큰지 나무도 그곳을 언덕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  몽촌토성 동벽~북벽, 옛 내성농장 주변

▲  늦가을이 마지막 춤을 추는 목책 앞 산책로 (몽촌역사관 방향)

▲  자연산 숲터널을 이룬 목책 앞 산책로 (88마당 방향)
무성한 숲터널 사이로 겨울이 슬그머니 들어와 제국의 기반을 닦는다. 조만간
이 아름다운 숲길도 겨울에게 몽땅 털려 뼈와 낙엽만 남게 될 것이다.

▲  몽촌토성 목책(木柵)

몽촌토성 동벽 앞에는 나무를 엮어서 만든 목책이 있다. 목책이란 방어시설의 하나로 몽촌토
성 일대를 조사했을 때, 목책의 흔적이 드러났는데, 생토 암반층에 1.8m 간격으로 직경 30~40
cm, 길이 30~90cm의 구멍을 파고 큰 나무로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 보조 기둥
을 세웠다.
목책의 높이는 정확하진 않으나 2m 이상으로 여겨지며, 이곳 목책은 발굴조사된 목책 기둥 자
리를 따라 그 위에 조촐하게 상상을 얹혀 재현한 것이다.

아무래도 토성이다보니 석성보다는 방어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목책과 해자를 두
룬 것인데, 목책은 동벽과 남벽 일대에 주로 설치된 것으로 여겨진다.


▲  가지런히 재현된 몽촌토성 목책

▲  늦가을이 우수수 떨어지면서 빈 자리도 조금씩 보이고 있다.

▲  올림픽공원 산책로(몽촌토성 산책로 제외) 가운데 가장 으뜸을 꼽으라면
목책에서 옛 내성농장으로 이어지는 구간이 아닐까 싶다. 늦가을의 손길이
가장 아름답게 거쳐간 곳으로 사람들은 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올해도 속절없이 흘러가는 가을의 발목을 붙잡으려 든다.

▲  '무제'라는 이름의 이글루 모양의 조각품 (1988년 박충흠 작)

▲  몽촌토성 북벽 (북문터)

'무제'라는 이름의 작품 앞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토성 북벽과 내
성농장이, 오른쪽은 몽촌역사관과 성내천, 성내천을 앞에 둔 토성의 동쪽 부분이다. 이제 공
원의 40% 정도 돌아본 셈이다.


▲  잠시 과거가 되버린 내성농장 (북문터 안쪽)

토성과 언덕으로 울퉁불퉁한 몽촌토성 속살에는 넓은 편은 아니나 조촐하게 평원이 펼쳐져 있
다. 그 평원은 몽촌토성 북벽 안쪽에 자리해 있는데, 평원 가운데 6,600㎡에 농경지를 닦고
토성 안에 있다는 뜻에서 내성농장이라 했다.

내성농장은 밭벼와 목화, 고구마는 물론 유채꽃과 코스모스, 해바라기 등의 들꽃이 넉넉히 둥
지를 틀던 싱그러운 곳이었으나 몽촌토성과 한성백제의 숨겨진 비밀을 캐고자 3년 넘게 발굴
조사에 들어가 농장은 사라지고 발굴 지역 주변에 펜스가 빙 둘러져 있다. 여기서 많은 백제
유물과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발굴이 마무리가 되면 농장으로 다시 돌아가거나 관련 유적지
보호구역으로 살아갈 것이다.


▲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처럼 솟은 나홀로나무 (사진 가운데)

내성농장 북쪽을 살펴보면 평원 한복판에 다른 나무와 멀리 거리를 두며 고독을 즐기고 있는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는 그를 '나홀로나무'라고 부른다. 어떤 이들은 '외톨이나무',
'왕따나무','연예인나무'라고도 하는데, 올림픽공원9경의 제6경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 나무가 홀로 된 이유는 정말 별거 없다. 1985년 몽촌토성 내부를 싹 갈아엎는 과정에서 키
가 크고 모양이 괜찮은 나무만 남기고 모두 베어버렸기 때문이다. 즉 인간들이 잘생기고 마음
에 드는 나무만 살려두고 모두 밀어버리면서 졸지에 나홀로나무가 된 것이다. 그렇게 친구를
잃고 홀로 되었지만 전화위복(轉禍爲福), 새옹지마(塞翁之馬)란 말이 괜히 허언이 아닌 듯 이
곳의 사진 모델로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낸다.


▲  토성 북벽에서 바라본 내성농장 들판 (예전 모습)

▲  토성 북벽에 뿌리를 내린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24-2호

내성농장에서 토성 북벽을 따라가면 장대하게 자라난 은행나무가 그늘을 내밀며 마중을 한다.
이 나무는 올림픽공원에 깃든 보호수 3그루의 하나로 나이가 무려 580년(1968년 보호수 지정
당시 추정 나이는 530년)에 이르며, 높이 17.5m, 둘레 6m에 이른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
는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이렇게 어엿한 나무로 성장을 했는데, 이곳에 서면 내성농장과 성내
천, 풍납동(風納洞) 일대가 훤히 바라보인다.


▲  몽촌토성에서 가장 높은 북벽 (서쪽 방향)

▲  몽촌토성 북벽 (동쪽 방향)

▲  북벽 쉼터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토성 북벽과 성내동/둔촌동 지역, 내성농장 등)

▲  북벽 쉼터에서 바라본 토성 북쪽 산책로와 성내천
성내천은 양재천(良才川)과 더불어 생태 하천으로 크게 거듭난 현장이다.

▲  늦가을 오색 향연에 잠긴 몽촌토성 북부(올림픽파크텔 동쪽)와
그런 향연을 지켜보는 속세(시내)


 

♠  올림픽공원 마무리

▲  억새가 춤을 추는 몽촌토성 서벽
서벽은 북벽에 비해 높이가 조금 낮고 경사도 포근한 뒷동산처럼 느슨하다.
게다가 다른 구간과 달리 소나무가 무성해 솔내음이 그윽하며,
그늘도 깊다.

▲  소나무로 그윽한 몽촌토성 서벽

몽촌토성 산책로는 경사도 거의 느슨하여 누구든 편히 거닐 수 있는 착한 길이다. 제아무리
걷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이런 길에는 퐁당퐁당 빠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걸
어도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자꾸만 걷고 싶다. 누군가 나를 말리지 않았다면 햇님 주위를 도
는 지구처럼 토성을 몇바퀴씩 돌았을 지도 모른다.
우리집으로 살짝 가져와 나 혼자서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아름다운 길이다.


▲  충헌공 김구 묘역(忠憲公 金構 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9호

몽촌토성 서벽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서 왼쪽을 잘 살펴보면 소나무들 너머로 하얀 철책이 둘
러진 공간이 보일 것이다. 주마간산처럼 움직이면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으니 속도를 조금 줄
이고 잘 살펴보자. 그 철책 안에는 올림픽공원의 숨겨진 옛 명소인 충헌공 김구 묘역이 조용
히 들어앉아 늦가을 햇살을 즐기고 있다.
이 묘역은 약간 구석에 있다보니 기웃거리는 사람이 거의 없어 늘 한적하다. (무덤을 알리는
이정표도 없음;) 올림픽공원에서 몽촌토성, 보호수 3그루 다음으로 늙은 이곳의 토박이로 토
성 산책로를 거닌다면 꼭 챙겨보기 바란다.


▲  소박한 모습의 충헌공 김구 묘

묘역의 주인공은 김구이다. 여기서 김구는 친일파들이 싫어하는 애국지사 김구(金九)가 아니
라 조선 중기에 살았던 김구(金構)로 이름만 같지 한자는 다르다.

김구(1649~1704)는 청풍김씨 집안으로 김징(金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참봉 이의길(李義吉)
의 딸이며, 자는 사긍(士肯), 호는 관복재(觀復齋)이다.
1669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83년 춘당대(春塘臺)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비로소 관
직 생활을 시작했다. 전적과 각 조의 낭관(郎官)를 거쳤고,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에 있을 때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의 계속되는 대립을 조정하려고 만언(萬言)에 가까운 시
무소(時務疏)를 올리는 등 애를 쓰기도 했다.

경연관(經筵官)과 승지(承旨), 황해도와 충청도, 전라도, 평안도관찰사(觀察使)를 지냈고, 대
사간(大司諫)을 거쳐 1697년 강화유수(江華留守)가 되어 장녕전(長寧殿)을 경영해 공을 세웠
다. 허나 흉년으로 모든 역사(役事)가 중지된 마당에 내전(內殿)의 명을 받아 집을 지었다고
해서 오도일(吳道一), 이광좌(李光佐) 등에게 탄핵을 받기도 했다.

김구가 잘한 일을 하나 끄집어 본다면 바로 단종(端宗) 부부의 원통한 넋을 조금이라도 풀어
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판결사(判決事)로 있을 때 노산군(魯山君)의 복위를 숙종(肅宗)에
게 건의했다. 하여 노산군은 강제로 눈을 감은지 241년만인 1698년에 비로소 단종이란 묘호(
廟號)를 받게 된다. 그리고 단종의 부인인 송씨의 묘도 능으로 추봉(追封)할 것을 건의해 사
릉(思陵)이란 능호를 받게 했으며, 사릉 능역(陵域) 공사를 맡아 그 공으로 형조판서(刑曹判
書)가 되었다.
이렇게 단종 부부에게 큰 선물을 준 그는 1703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으며, 1704년에 65세
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숙종은 충헌이란 시호를 내렸다.

김구는 제왕의 위엄에 굽히지 않았고, 의리에 따라 처신했으므로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
게 존경을 받았다. 육도(六韜)와 도가(道家) 관련 서적에 정통했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
가 패기가 넘쳤다. 그가 남긴 글씨로는 강원도 고성(高城)에 있는 '백천교중창비(百川橋重刱
碑)'와 경상도 선산(善山)에 있는 '김주신도비(金澍神道碑)'가 있다.

그는 말년에 몽촌토성에 거주했는데, 광주유수(廣州留守)도 자주 찾아와 인사를 했다고 하며,
비록 죄인이라도 이곳에 들어오면 김구의 허락을 받아야 잡아갈 수 있었다고 하니 몽촌 지역
에서 그의 영향력이 제법 컸음을 알려준다.

묘역에는 커다란 봉분(封墳)과 비석, 상석(上席), 망주석(望柱石) 1쌍과 양석(羊石) 1쌍이 있
으며, 양석은 근래에 조성되었다. 예전에는 공원 산책로에서 묘역이 뻔히 보였지만 그 앞에
야생화단지를 꾸미면서 그 뒤에 숨어버렸다.


▲  충헌공 김구 신도비(神道碑)

묘역 동남쪽에는 김구의 행적이 소상히 적힌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고급 관료와 왕족의 묘
역에만 쓸 수 있던 비싼 비석으로 보통 신도(神道)로 통한다고 전하는 묘역 동남쪽에 세운다.
1743년에 세운 비석으로 비문(碑文)은 이의현이 짓고 글씨는 서명균(徐命均)이 썼다.
270년이 넘은 늙은 비석이지만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하얀 피부를 잘 유지하고 있으며, 네
모난 비좌(碑座)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이무기 2마리가 다투는 모습을 새긴 지
붕돌을 얹혔는데, 조각 솜씨가 매우 현란하다.


▲  코스모스가 넝실거리는 야생화단지

김구 묘역 남쪽에는 야생화단지가 펼쳐져 있다. 가을이라 분홍색과 하얀색 코스모스가 들판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들의 보금자리와 꽃을 짓밟으며 오로지 사진 찍기에 부산하
다. 꽃을 보호하려고 금줄까지 쳐놓았지만 인간들의 욕망은 그 금줄마저 무색하게 만든다.


▲  미로찾기
미로가 속세보다는 덜 복잡하여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치면 거뜬히
통과할 수 있다. 우리네 인생도 다 저런 미로가 아니던가..?

▲  몽촌토성 남벽 (남문터 주변)

충헌공 김구 묘역과 야생화단지에서 잠시 놓고 있었던 몽촌토성 산책로를 다시 더듬는다. 남
벽은 높이도 낮고 경사도 완만한 편으로 숲도 제법 우거져 있어 일부 구간은 숲길 분위기를
자아낸다.


▲  늦가을에 잠긴 산책로 (목책 앞)
마지막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겨울을 경계하고 있는 나무들,
그렇게 다들 늦가을을 붙잡건만 힘이 다한 가을은 결국 짐을 싸고
떠나려고 한다. 나무들은 늦가을의 떠남을 슬퍼하며 낙엽으로
눈물을 대신한다.

▲  성내천 산책로 (피크닉장 주변)

▲  생태계 복원의 정석, 성내천 (둔촌동 방향)

몽촌토성을 반 바퀴 정도 복습을 더 하고 아쉽지만 평지길로 갈아탔다. 목책(木柵)과 피크닉
장, 성내천 남쪽 산책로를 지나 속세와 공원의 경계를 가르는 성내천을 건넌다. 성내천에는
많은 다리가 놓여져 있는데, 우리가 건넌 것은 무지개다리이다.
성내천은 한때 개발의 칼질로 망가진 저주 받은 하천이었으나 오랜 노력에 결과로 자연이 숨
쉬고 온갖 식물과 동물들이 발을 뻗고 자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다시 살아난 성내천을 보니
회색 도시에서 오염된 눈과 마음이 자연을 통해 확 정화됨을 느낀다. 역시 인간은 자연의 일
부로 살아야 별탈이 없다. 부디 복원이 무색하지 않게끔 앞으로도 철저히 관리를 해주어 우포
늪 수준으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다리를 거쳐 속세로 나오니 어느덧 18시. 평온했던 공원에 잠시 익숙해졌다가 다시 속세로 나
오니 정말 딴 세계에 온 기분이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올림픽공원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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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1월 1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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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자락길, 황학정, 서촌(한양도성) 늦가을 나들이 ~~ (택견수련터, 감투바위, 단군성전, 행촌동 은행나무)

 


' 인왕산자락길, 황학정, 서촌 늦가을 나들이 '
인왕산자락길의 만추
▲  인왕산자락길의 만추(晩秋)


 

늦가을이 그 절정에 이르던 11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서울 도심에 숨겨진 상큼
한 자락길 인왕산자락길(숲길탐방로)을 찾았다.

인왕산자락길은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동쪽 자락에 닦인
둘레길로 2개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제1코스(2.7km)는 인왕산길을 졸졸 따라가는 길
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사직단(사직공원)까지 이어진다. 경사가 완만해 그리 힘들이지 않
고 이동할 수 있으며, 인왕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여럿 손짓해 언제든 정상 쪽으
로 방향을 틀 수 있다. 다만 인왕산길이 차량 왕래가 빈번하다보니 비록 작은 소음이지
만 종종 적막을 깨뜨린다. 

본글의 주인공인 제2코스는 숲길탐방로(3.2km)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산길을 따라 이빨바
위, 가온다리, 수성동계곡 윗쪽을 거쳐 택견수련터(황학정 북쪽)까지 이어진다. 인왕산
길과 서촌 주택가 사이에 자리한 길로 제1코스와 달리 차량의 눈치와 소음 걱정에서 벗
어나 아늑하고 달달한 산길의 멋을 누릴 수 있다. 다만 오르락내리락 굴곡이 조금 있어
서 약간은 힘들 수 있다. 하지만 두 다리만 멀쩡하면 삼척동자도 완주가 가능하니 걱정
따위는 인왕산 산바람에 날려보내기 바란다.
제2코스는 인왕산길(제1코스)과 서로 만날 듯 가깝게 거리를 두고, 경쟁을 하듯 펼쳐져
있다. (현실은 청운공원과 택견수련터에서만 만남) 아주 편한 길을 원한다면 제1코스를
, 차량의 눈치 없이 아늑한 산길을 꿈꾼다면 제2코스(숲길탐방로)를 이용하자. 특히 제
2코스에는 숨겨진 명소와 계곡, 약수터가 많고 풍경도 고우며, 서울 도심이 늘 옆에 파
노라마처럼 따라다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번 나들이는 제2코스를 이용하여 윤동주문학관에서 사직단(社稷壇, 사직공원)까지 이
동했다. 늦가을이 겨울 제국의 압박으로 생각보다 명이 짧아서 그가 지기 전에 그의 가
랭이라도 붙잡을 겸 서둘러서 찾았는데, 아직은 늦가을 풍경이 여전해 내 정처 없는 마
음과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오감(五感)을 크게 정화시켜 주었다. 역시 사람은 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이후 제2코스는 인왕산자락길이라 표시하며, 제1코스는 인왕산길로 표시함)


 

♠  인왕산자락길 (수성동 이남 구간, 택견수련터)

▲  수성동에서 남쪽으로 넘어가는 인왕산자락길

수성동계곡에서 잠시 시원한 계곡 바람을 맞은 인왕산자락길은 다시 남쪽으로 각박한 오르막
길을 오른다. (북쪽 방향도 마찬가지임) 길은 잘 닦여져 있지만 그렇다고 오르막길의 야성을
완전히 잠재운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거친 것을 조금 순하게 다듬었을 뿐이다.

그 길을 오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인왕산길이고, 왼쪽 내리막길
이 인왕산자락길이다. 그러니 자락길을 놓치기 싫다면 무조건 왼쪽으로 붙자. 그 길을 내려가
면 서촌의 일원인 누상동(樓上洞) 주택가와 불과 몇 보 차이로 가까워지며 길은 다시 온순해
진다. 이후 이름 모를 계곡과 체육시설을 지나면 길은 다시 오르막을 보이나 그리 각박하지는
않으며, 그 길을 오르면 배드민턴장과 인왕산길이 모습을 비춘다.


▲  다시 오르막은 시작되고 (인왕산길 배드민턴장 방향)

▲  택견수련터로 인도하는 북쪽 계단길

인왕산길 배드민턴장 남쪽에는 화장실을 갖춘 쉼터가 닦여져 있다. 청운공원 이후 가깝게 거
리를 두며 떨어져 있던 인왕산길과 인왕산자락길은 여기서 잠시 만났다가 이내 헤어진다.
쉼터 남쪽 언덕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길이 자락길로 그 계단을 오르면 자락길의 남쪽 종점
인 택견수련터가 마중을 한다.


▲  택견수련터 주변 체육시설
저 산길의 끝에 택견수련터가 깃들여져 있다.

▲  인왕산 택견수련터

황학정 뒷쪽 산자락에 자리한 택견수련터는 이름 그대로 택견을 수련했던 현장이다. 처음에는
막연히 옛날 사람들이 택견을 닦던 곳으로 알았으나 한때 끊어질 위기에 놓였던 우리 고유의
전통 무술인 택견을 지키고 널리 알렸던 조선의 마지막 택견꾼 송덕기(宋德基, 1893~1987)가
택견을 수련했던 현장이다.

송덕기는 조선의 마지막 한량이자 택견꾼으로 유명하다. 그는 1893년 1월 19일, 이곳과 가까
운 필운동(弼雲洞)에서 하급 관리인 송태희(宋泰熙)의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어머니
김씨는 잡화가게를 꾸리고 있어서 생활은 비교적 여유로웠다.
당시 필운동과 사직골, 누상동, 누하동 등 서촌(웃대) 지역은 택견의 성지로 택견을 갈고 닦
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장안 제일의 택견꾼으로 '인왕산 호랑이'라 불리던 임호(林
虎)도 있었다. 그는 지금의 배화여고 앞에 살고 있었으며, 송덕기는 12살부터 또래 동네 아이
들과 그에게 택견을 배웠다.

송덕기는 선천적으로 힘이 장사이고 운동과 무예에 소질이 상당했다. (나와 완전 반대임) 하
여 16살에 마을 택견꾼과 더불어 사직골 대표로 출전하여 유각골, 옥동, 애오개의 택견꾼과
싸워 이겼으며, 이때부터 '결련택견판(택견의 시합을 지칭하는 말)'에서 그 이름을 날리기 시
작했다. 그는 비록 체격은 작았지만 동작이 매우 날쌔어 적을 정확히 타격했으며, 특히 뛰어
오르며 쓰는 발차기는 매우 일품이라 당할 자가 없었다고 전한다.
17세에 장가를 들었고, 곧 군대에 입대했으나 1주에 2~3번 정도만 출근하면 되었으므로 나머
지 시간에는 택견을 수련하여 종종 결련택견판에 나가 몸을 풀었다. 그리고 이때 이 땅에 막
소개된 축구에도 구미가 당겨 축구를 익혔다.

1910년 8월 이후, 왜정(倭政)은 우리의 상무정신이 깃든 결련택견과 온갖 택견 수련을 금지시
켜 그 맥을 끊으려고 했다. 게다가 집안에서도 계속 택견을 그만두라고 압력을 가하면서 택견
수련도 눈치를 보고 해야될 지경이었다. 당시 그의 부모는 그가 자칫 싸움꾼이 될까봐 걱정되
어 택견 수련에 무조건 정색을 표했다고 전한다.
상황이 그러하니 택견 수련 딱 10년이 되는 22살에 잠시 택견을 접어두고 대신 활쏘기로 관심
을 돌려 황학정에서 국궁(國弓)을 닦았다. 그는 궁술(弓術)에도 꽤 소질을 보여 명궁으로 명
성을 날렸는데, 죽기 전까지 활쏘기를 즐겨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을 오래 쏜 사람이자 최초의
국궁심판으로 '한국인물도감(1982년)'에 소개되기도 했다.
또한 군대에서 사병들에게 근대식 체조를 가르쳤고, '조선불교 축구단'에 선수로 스카웃되어
월급 80원을 받으며 축구 선수로 3년 동안 뛰기도 했다. 이때 매년 열리던 평양축구단과의 경
기에 참가해 큰 활약을 보여주었다.

축구를 그만둔 이후 30대 말까지 딱히 두드러지는 행적은 없으며, 40세 때 조선극장(인사동에
있었음)을 운영하던 매부를 도와 극장을 지키는 기도를 하였다. 그래서 극장 주변에서 설치던
건달들을 죄다 때려잡았고, 당시 주먹패 대장으로 유명했던 김두한(金斗漢)과도 맞짱을 뜬 적
이 있다고 한다.
이후 금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으나 소득은 없었으며, 1951년 1.4후퇴 때 경남 밀양(密陽)으
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1958년경. 경무대(청와대)의 이승구 경관이 찾아와 대통령에게 택견 시범을 보여달라고 부탁
을 했다. 당시 택견은 일정한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둘이 맞서서 상대를 때려잡는 실전무
예라 혼자 시범을 보이기가 마땅치 않아 옛날 스승(임호) 밑에서 같이 배웠던 김성한(金成漢)
을 급히 불러 1달 정도 가르친 다음 그해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생신 축하 경찰무도대회'
가 열렸던 소공동(小公洞) 유도회관에서 택견을 선보였다.
당시 권력층과 무도인들은 왜열도식 무술에 익숙해 있던 상태라 택견을 보더니 별로라며 고개
를 돌렸다. 하지만 택견에 관심이 있던 이승만은 우리 무술을 발전시켜야 된다며 당시 경무대
경호원을 가르치던 박철희에게 그를 소개해 택견을 배우도록 지시했다.

박철희는 육군사관학교 초대 태권도 교관을 지낸 사람으로 그를 자주 초청해 경호원들에게 택
견을 가르치도록 도움을 주었다.


▲  택견수련터 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1960년 제17회 로마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대표팀은 우리나라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장에 선보
일 한국 문화로 택견을 선택했다. 그래서 제자 박철희와 함께 경복궁(景福宮)에서 택견 동작
을 사진 촬영했다. (당시 경복궁은 통제구역이었음)

박철희는 경무대 무도사범을 그만두고 '사단법인 택견무도원'을 설립하려고 하였다. 송덕기도
그를 전폭적으로 도왔으나 법인 설립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당시 영향력이 컸던 '수박도협회'
의 방해로 어려움에 빠졌다. 게다가 4.19와 5.16으로 나라가 계속 혼란 속에 잠겼고 법인 설
립도 계속 뜻대로 되지 않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부터 박철희의 조교
이자 같은 사직골 토박이인 김병수가 송덕기의 1등 제자가 되었다.

김병수는 당수도의 고수로 경무대 부사범을 지냈으며, 외국어대학교에 '택견권법부'를 만들었
고, 1963년에는 효자동 오리온다방 3층에 택견도장을 차리기도 했다. 또한 영어에도 능통하여
1964년 '블랙벨트(Black Belt)'와 '가라데 일러스트레이트(Karate Illustrate)'라는 미국의
유명한 무술 잡지에 택견에 대한 기사를 기고한 적이 있다.
허나 그는 해외 진출에 더 무게를 두고 있어서 1968년 1월 미국으로 건너가 버렸고, 미국 휴
스턴에 정착해 '김수가라데'란 타이틀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자연무술류'라는 새로운 체계
의 과학적 무술을 창안해 동양무도인의 대표로 위엄을 날렸다.

1972년 '태권도 가을호'에 송덕기가 '살아있는 태권도인'으로 소개되면서 당시 태권도의 1인
자였던 임창수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찾아가 배움을 받았다. 하지만 제대로 배우려는 사람이
없었고 실생활에도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아 금방 사람들이 나갔다.

그는 슬하에 자녀도 없고, 마땅한 제자도 없어서 이것저것 소일거리로 간신히 척박한 삶을 꾸
려나갔으나 1979년 부인이 세상을 떠나면서 더욱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1970년대 중반 신한승이 택견을 바로 일으켜보고자 송덕기를 찾아와 택견을 배웠다. 그는 택
견이 살려면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길 밖에는 없다고 여겨 문화재관리국을 수시로
찾아가 택견을 홍보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철밥통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저 냉대만 일삼
으며 보다 체계적인 자료를 가져오라고 소위 '갑'질을 벌였다. 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들
의 요구 양식에 맞추고 택견을 약간 변형시켜가며 해당 자료를 제출했다.
그렇게 하여 간신히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76호'의 지위를 얻으면서 택견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허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송덕기는 신한승의 그런 행동을 못마땅히 여기면서 서
로 갈라진 것이다.

송덕기는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1982년부터 젊은 제자를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83년 그 역시 국가 중요무형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이를 기리고자 '택견계승회(현재
사단법인 '결련택견협회')'를 만들었다. 1984년 집 근처에 '박민태권도 도장'을 빌려 제자를
가르쳤고, 제자 중 부유했던 '최유근'의 지원으로 1986년 신촌에 '택견보존회'란 이름으로 본
격적인 택견전수관을 개관하기에 이른다.
송덕기는 너무 기뻐서 매일 나와 제자를 가르쳤는데, 택견이란 존재를 매우 생소해하는 현대
인들의 무관심과 체육관을 운영한 경험이 전혀 없는 제자들의 운영 미숙으로 결국 1년도 안되
어 문을 닫고 말았다. 그나마 남은 제자들도 거의 군대에 들어가면서 죄다 흩어졌고, 1987년
에는 활까지 놓으면서 노인정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우연히 걸린 감기가 커지면서 그해 7월 22
일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9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1981년에 '제1회 대한민국 전통무도예술제'에서 '무도대상(武道大賞)'을 타기도 했으며,
택견을 보존하고 전수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택견의 태반은 이미 사라졌
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 택견수련터는 그가 택견을 닦았던 현장으로 그의 후학들(결련택견협
회)이 표석과 안내문을 세워 택견의 성지로 기리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여러 체육시설이 닦
여져 있어 동네 사람들과 산꾼들이 몸을 풀고 간다. 비록 목적은 다르지만 몸을 푸는 수련터
의 역할은 거의 녹슬지 않은 것이다.


▲  수련터 옆 감투바위 암릉
주름진 바위가 황학정 옆구리까지 느긋하게 내리막을 이루며 펼쳐져 있고,
늦가을이 질러놓은 불(단풍)이 활활 타올라 바위 주변을 화사하게 돋군다.


수련터 옆에는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길게 누워있다. 이들 바위는 저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
라 조촐하게 암릉을 이루며 황학정 동쪽까지 완만하게 내려간다. 그 암릉에 송덕기와 인연이
있는 감투바위가 숨겨져 있으니 한번 숨바꼭질을 해보기 바란다.
그 암릉에 두 발을 딛으면 바로 밑에 황학정을 비롯하여 서울 도심 서부와 남산이 훤히 시야
에 잡혀 조망도 그런데로 괜찮다. 인왕산자락길 개설로 수련터를 찾은 사람들은 늘었으나 정
작 바위의 존재감이 없어 지나치기 일쑤이다. 안내문이 없다보니 수련터 바로 옆에서 바위가
예사롭지 않은 눈짓을 보내고 있음에도 다들 지나치는 것이다.
하여 감투바위 암릉은 인적이 거의 없어 무척이나 한적해 천하 최대의 대도시인 서울 도심을
멍을 때리고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기기에는 아주 좋다.


▲  감투바위

사람들이 매우 좋아한다는 감투, 그 감투를 닮은 바위가 암릉 한복판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 속세에 알려지지 않은 인왕산의 비장의 바위로 송덕기가 택견 수련을 하거나 황학정에서 활
쏘기로 몸을 풀고 이곳에 걸터앉아 나라와 택견의 미래를 걱정했다고 한다. 송덕기의 택견 수
련을 묵묵히 지켜봤을 그는 황학정과 사직단, 서울 도심을 늘 지켜보고 있다.


▲  감투바위의 뒷모습

바위 뒷통수에는 장대한 세월이 무심히 긁고 간 흔적들이 역력하다. 지금은 저런 모습이나 여
러 세대가 흘러간 이후에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지 궁금하다. 대자연 형님의 성형(成形)
속도가 매우 느려서 그렇지 성형 실력만큼은 대자연을 따를 존재가 없다.

택견수련터 서쪽에는 인왕산길과 황학정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내려가면 윤동주문
학관부터 3.2km를 함께 한 인왕산자락길은 그 끝을 맺고 인왕산길에 합쳐진다. 소요시간은 사
진을 찍고 쉬는 시간을 합쳐서 넉넉잡아 1시간 반 정도. 경사가 좀 각박한 구간이 여럿 있지
만, 그것은 산이니까 어쩔 수 없다. 산은 산다워야 오르는 재미가 있지 않겠는가?
도로만 따라가는 인왕산길과 달리 상당수가 흙길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득이한 구간은 나무데
크를 닦아 놓았다. 자락길을 둘러싼 숲은 무성하며 도심을 향해 흘러가는 조그만 계곡들(청풍
계, 옥류동, 수성동 등)을 대부분 거쳐가면서 인왕산에도 계곡들이 꽤 숨바꼭질을 하고 있음
을 귀뜀해준다. 그 계곡들은 시내에 진입하면서 모두 강제 생매장을 당했으며, 2012년에 복원
된 수성동만 제대로 어깨를 피고 있다. (수성동 역시 조금 흐르다가 생매장 당함)
이처럼 인왕산자락길은 인왕산의 숨겨진 속살과 명소를 아낌없이 드러낸 도심 속의 보석이자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사각지대로 이번에 이렇게 인연을 지어 사각지대를 하나 지웠다.

* 인왕산자락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누상동, 사직동


 

♠  옛 경희궁의 흔적이자 전통 국궁(國弓)의 성지, 황학정(黃鶴亭)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5호

▲  등과정(登科亭) 바위글씨

택견수련터에서 인왕산길로 나와 남쪽(사직단 방향)으로 내려가면 황학정으로 내려가는 입구
(후문)가 나온다. 바로 그곳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커다란 바위가 누워있는데 길 쪽에서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가면 그냥 의미없는 바위로 여기고 지나치기 쉬우나 황학정 쪽에서
보면 180도 달리 보일 것이다. 그는 옛 기록에나 남아있던 등과정의 아련한 흔적으로 황학정
방향 바위면에 '등과정' 바위글씨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등과정은 서울 장안의 이름난 활터인 서촌5사정의 하나로 그 오사정이란 등과정과 옥동(玉洞)
등용정. 삼청동 운용정(雲龍亭). 사직동 대송정(大松亭). 그리고 누상동 풍소정(風嘯亭)을 일
컫는다. 이중 삼청동(三淸洞)은 북촌의 일원인데, 어찌 서촌5사정에 꼽혔는지 모르겠다.
조선 때는 활쏘기가 양반사대부와 왕족들이 익혀야 될 교양의 일원으로 인식되어 오사정에는
늘 그들로 붐볐다. 무관 같은 경우는 직업상 여기서 활쏘기 연습으로 몸을 풀었고, 다른 이들
은 교양 및 수련의 일원으로 몸을 풀었던 것이다.
허나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군대 무기에서 활이 제외하면서 이들 오사정은 싹 철
거되었고, 등과정만 유일하게 고종 때 새겨진 바위글씨를 흔적으로 남겨 그의 옛 자리를 귀뜀
해준다. 게다가 경희궁의 활터였던 황학정이 왜정 때 이곳에 안착하면서 자연스럽게 등과정을
계승하였다.


▲  황학정8경(八景) 바위글씨

황학정 후문(등과정 바위글씨)에서 황학정으로 내려가 그 뒷쪽 바위를 잘살펴보면 황학정8경
을 담은 바위글씨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바위에 네모난 홈을 닦고 그 안에 글씨들이 담겨져 있는데, 이들은 1928년 9월 금암 손완근(
錦巖 孫完根)이 쓴 것으로 황학정8경이란 제목을 내세웠지만 정작 황학정은 1개도 없고 모두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경복궁 주변의 풍경을 다루고 있어 제목과 내용이 완전 따로 논다.
여기서 읊은 8경은 다음과 같으며, 이중 금천교와 경복궁 담장 옆 수양버들을 제외하고는 그
런데로 살아있다.

백악청운(白岳晴雲) - 구름이 맑게 갠 북악산(백악산)
자각추월(紫閣秋月) - 자하문(창의문) 문루 위에 가을 달
모암석조(帽巖夕照) - 인왕산 모자바위에 비치는 석양 빛
방산조휘(榜山朝暉) - 인왕산 바위 위의 아침 햇살
사단노송(社壇老松) - 사직단을 둘러싼 노송
어구수양(御溝垂楊) - 경복궁 담장 옆 배수로 둑의 수양버들
금교수성(禁橋水聲) - 금천교 밑을 흐르는 물소리
운대풍광(雲臺楓光) - 필운대의 단풍 광경


▲  사방이 뻥 뚫린 황학정
황학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 밑에 부연을 두어 처마와
추녀의 곡선이 무척 시원스럽다. 정면 중앙에 걸린 황학정 현판은
이승만(李承晩) 전대통령이 쓴 것이다.


사직단 북쪽이자 인왕산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황학정은 이 땅에 몇 남지 않은 전통 활터이
다.
조선 말까지 서울 장안에는 서촌오사정 등 활쏘기를 닦던 사정(射亭)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군대 무기에서 화살이 제외되자 서울과 전국의 많은 사정이 문을 닫았고
황학정 자리에 있던 등과정도 그 거친 흐름을 헤어나지 못해 바위글씨만 남긴 채 휩쓸려 사라
졌다.

활쏘기를 좋아했던 고종 황제는 백성들의 심신단련을 위해 궁술(弓術)을 장려하기로 했다. 하
여 1898년 경희궁 회상전(會祥殿) 북쪽에 황학정을 지어 활터로 삼고 백성에게 개방하여 언제
든 활을 쏘도록 했다.
고종은 자주 황학정을 찾아 활쏘기를 했는데, 그가 사용했던 활 호미(虎尾)와 화살을 보관하
는 전통(箋筒)이 황학정에 전해 내려오다가 1993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천하에 어둠이 내리던 1910년 이후, 왜정은 망국의 황궁(皇宮)인 경희궁을 철저히 산산조각을
냈다. 1918년부터 궁궐을 밀어버리면서 주요 건물을 민간에 팔아먹었고, 1922년 황학정 자리
에 고의로 총독부 전매국 관사를 지으면서 그 황학정까지 밀어버리려고 했다. 이에 국궁을 하
던 사람들이 뜻을 모아 왜정과 협상을 벌여 돈을 건네주고 그 건물을 현 자리로 가져왔다.
앞서 소개했던 택견꾼 송덕기 역시 황학정을 해체 이전했을 때 직접 참여하여 손수 건물을 해
체하고 건물 부재(部材)를 가져와 다시 재조립했다. 또한 황학정 지킴이가 되어 이곳에서 행
패를 부리거나 예의 없이 구는 사람을 혼내주어 당시 사람들은 그를 '사직골 호랑이'라고 불
렀다.

1945년 이후 황학정은 전국 활터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으나 6.25 때 건물이 파괴되면서 활
쏘기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으며, 이후 황학정을 중수하고 한천각(閑天閣)과 국궁전시관 등 여
러 부속 건물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

전통 활터가 많이 사라진 와중에도 여전히 활터 기능을 수행하여 우리나라 전통 궁술의 성지
로 여전히 추앙을 받고 있다.
이곳에서는 궁술 대회(매년 12월에 전국궁술경연대회를 개최함)와 관련 행사, 활쏘기 체험이
열리고 있으며, 평일은 물론 휴일에도 활 쏘는 이들을 자주 구경할 수 있다. 천하 제일의 신
궁(神弓)으로 추앙받는 고구려 동명성왕(東明聖王)과 조선 이성계(李成桂)를 꿈꾸는 궁수들이
실력을 겨루는 모습도 볼만하며, 일반인을 대상으로 궁술 체험 이벤트도 열고 있다. 아직 활
을 만져본 적은 없지만 기회가 생기면 명중률을 떠나서 쏴보고 싶은 마음은 정말 굴뚝 같다.

* 황학정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산1-1 (사직로9길 15-32 ☎ 02-732-1582)


▲  황학정 내부
천정에는 황학정의 내력 등이 적힌 현판 2개가 걸려 있고, 평방(平枋)에는 태극기와
고종 황제의 어진(御眞)이 나란히 자리한다. 황룡포를 입은 그의 어진이
여기에 걸린 이유는 황학정을 세운 그를 기리고자 함이다.

▲  이승만 전대통령이 쓴 황학정 현판의 위엄

▲  화살을 쏘는 동명성왕, 이성계의 후예들

마침 황학정 회원 4명이 활쏘기를 겨루고 있었다. 여기서 과녁까지는 약 130~150m. 평소에는
매우 가깝게 여겼던 그 거리가 여기서 보니 참 까마득하게 보인다. 남산(南山)보다 더 멀리
느껴질 정도. 보는 사람도 그러한데 활을 쏘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그들은 주황색 천을 허리에 묶었는데 이는 황학정 국궁 회원임을 뜻하는 모양이다. 정자 이름
이 누런색, 주황색 학을 뜻하기 때문이다. 과녁까지 거리도 멀고 눈도 침침하여 명중을 했는
지. 외곽에 맞췄는지. 아니면 과녁 밖으로 빗나갔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날라간 화살은 전
동식 미니 케이블카에 실려 황학정으로 옮겨진다.

▲  황학정으로 인도하는 길 (국궁전시관 옆)

▲  황학정 표석 (황학정 정문)


 

♠  단군성전과 행촌동 은행나무

▲  단군성전(檀君聖殿)

황학정에서 다시 인왕산길로 나와 남쪽으로 가면 길 동쪽에 단군성전이 마중을 한다. 단군(檀
君)은 옛 조선을 세운 천하의 시조(始祖)로 그의 단군설화는 3살짜리도 모두 알 만큼 유명하
다. 허접스럽기 그지 없는 양이(洋夷)들의 그리스, 로마 설화를 능가하는 알찬 설화로 삼국유
사(三國遺事)에 그 설화가 실려 있으니 내용을 새삼스레 풀어보면 대략 이렇다.

옛날 천하를 다스리던 최고의 신, 환인(桓因)과 환웅(桓雄) 부자가 있었다. 환웅이 하늘 아래
로 내려가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싶었는데,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지구를 살펴보니 삼위태
백산(三危太白山) 지역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만하다 여겨져 천부인(天符印) 3개와 3,000명
의 무리를 주어 지구로 내려보냈다.
환웅은 태백산 마루 신단수 밑에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 했으며, 바람과 구름, 비를 관
장하는 풍백(風伯)과 우사(雨師) 등 신하를 거느리고 곡식과 인명(人命), 질병, 형벌, 선악(
善惡) 등 사람들의 360여 가지 일을 직접 다스렸다. 이때 굴 속에 함께 살던 호랑이와 곰이
찾아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청하니, 환웅은 쑥 1자루와 마늘 20개를 주며 이를 먹으면서 100
일 동안 햇빛을 안보면 사람이 되리라 했다.
그들은 굴에 들어가 수행을 했으나 호랑이는 이를 견디지 못해 뛰쳐나갔고, 곰은 21일을 버티
면서 여자 사람이 되니 이가 곧 웅녀(熊女)이다.

웅녀는 매일 신단수 밑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기원을 하니 환웅이 잠시 남자로 변해 웅녀
와 결혼하고 아들을 낳았다. 이가 곧 옛 조선의 시조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이다.

단군은 장성하여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여 옛 조선을 세우니 그때가 기원전 2,333년이
다. 우리 땅은 바로 그때를 단기(檀紀) 1년으로 삼아 지금에 이르니 무려 4,350여 년의 역사
를 지니고 있으며 단군은 무려 1,908년을 살았다고 전한다.

▲  단군성전 정문(외삼문)

▲  단군성전 뜨락 은행나무


▲  푸근한 인상의 단군왕검상 (오른쪽에 단군 영정)

※ 단군이 세운 옛 조선(고조선)
오로지 상상으로 제작된 단군상, 그리고 그의 영정, 후덕한 인상과 긴 수염, 황색 옷이 인상
적이다. 단군은 옛 조선(고조선) 군주의 명칭으로 여겨지며, 조선 군주가 정치와 제사를 모두
관장하던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였다.

옛 조선은 기원전 2333년 경에 건국되어 기원전 108년에 강제로 문을 닫은 장수국가로 한반도
를 비롯하여<남한 지역에 있던 삼한(三韓)도 조선의 간접 영역으로 보기도 함> 요동(遼東),
만주, 요서, 연해주, 산동반도를 포함한 화북(華北) 지역을 다스린 천하 대국이었다. (중원대
륙 상당수를 점유하고 있었다는 견해도 있으며, 서안 등 산서성에는 옛 조선이 세운 거대한
무덤 유적이 많이 있다고 함)

조선의 건국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여전해 기원전 2333년 건국설도 솔직히 무리가 있다. 산
소도 아까운 식민사관 패거리들은 기원전 10세기 이내로 창건 연대를 잡고 있으며, 영역도 한
반도 북부와 요동, 남만주로 크게 축소시켰다.
옛 조선의 중심지는 요동으로 보이며, 춘추전국시대에 연나라를 공격하여 대륙에 다시금 영향
력을 행사하려고 했으나 철기(鐵器)로 중무장한 연나라의 반격에 오히려 크게 밀려 요하(遼河
)를 비롯한 2,000리 이상의 땅을 잃고 만다. 당시 조선은 청동기 무기였다. 그러니 어찌 게임
이 되겠는가?
이후 대륙에서 넘어와 준왕(準王)의 신임을 받은 위만(衛滿)이 반란을 일으켜 준왕을 쫓아내
고 왕이 되었다. 준왕은 그를 따르는 신하와 배를 타고 남쪽으로 건너가 한왕(韓王)을 칭했다
고 하는데, 아마도 마한(馬韓) 영역인 전라도나 충청도로 내려간 것이 아닐까 싶다.

위만이 조선을 장악하자 철제무기를 개발하고 국력을 길러 한나라를 비롯한 주변 나라를 공격
해 사방으로 크게 영토를 넓히고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하여 막대한 부를 누렸다. 이에 한나라
무제(武帝)는 조선이 동방(東方) 무역 독점으로 배를 불리며 나날이 커지는 것에 크게 위협을
느끼며 우선 주변 나라를 말끔히 정리하고 그 자신감으로 섭하(涉河)를 사신으로 보내 조선을
협박했다.
당시 조선의 군주는 조선의 마지막 제왕인 우거왕(右渠王)으로 한나라의 요구를 한마디로 거
부하며 비왕(裨王, 제후왕)을 시켜 사신을 전송케 했다. 허나 섭하는 그 호의에 배은망덕하게
도 마부로 가장한 무사를 시켜 비왕을 죽이고 도망쳤다. 이에 한무제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옛
조선과 가까운 요동(지금의 요동이 아님)으로 보내 요동도위(都尉)로 삼았다.

비왕이 암살된 것에 적지 않게 뚜껑이 열린 조선은 섭하가 요동도위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
자 바로 한나라를 공격해 그 요동을 점령하고 섭하를 쳐죽었다. 그렇게 조선이 먼저 공격을
하자 한무제는 그것을 구실로 조선을 공격했다. 아마도 섭하를 떡밥으로 보내 조선을 건드리
려는 수작이 아니었을까 싶다.
허나 조선의 반격과 한나라군 내부 분열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패했다. 하여 뚜껑이 단
단히 폭발한 한무제가 다시 군사를 다그치자 정신을 차린 한나라군은 정비를 가다듬고 공격을
가해 끝내 왕검성까지 포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하며 끙끙 앓던 차에 조선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우거왕이 반
대파에게 피살되고, 왕을 잃은 조선 조정은 그 혼란을 잠재우지 못하여 결국 성은 함락되고
만다.

이렇게 옛 조선은 망하고, 그 땅 일부에 그 유명한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는데, 그것도 조
선 사람들의 끊임없는 비협조와 반발, 그리고 고구려(高句麗)와 부여(夫餘) 등의 등장으로 그
땅에 제대로 침도 바르지 못하고 쫓겨나고 만다.
한사군의 존재에 대해서도 여전히 말들이 많으나, 식민계열 쓰레기들은 평안도와 황해도, 요
동 일부로 보고 있으며, 많은 사학자들은 요동과 요서 지역으로 보고 있다. 한사군의 하나로
유명한 낙랑(樂浪)이란 존재는 낙랑군 외에 비슷한 이름에 낙랑국도 있었다고 하는데, 낙랑국
은 평양 지역, 낙랑군은 요서로 보고 있다.
호동왕자(好童王子)와 낙랑공주(樂浪公主) 설화로 유명한 낙랑은 낙랑군이 아닌 낙랑국이다.
만약 낙랑군이라면 낙랑공주는 공주를 칭할 수가 없다. 그냥 군을 다스리는 태수(太守)의 딸
일 뿐이다.

옛 조선은 전성기였을 때 인구가 무려 1억 8천만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조선의 문화와 문
명은 중원대륙과 주변의 많은 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한자(漢字) 같은 경우도 동이족(東夷族)
으로 대표되는 조선(또는 은나라)에서 만들어 전파했다는 견해가 많으며, 그 문자가 대륙에서
크게 발전하면서 동아시아 통용 글자가 되었다.
또한 흥안령산맥(興安嶺山脈) 주변에서 일어난 홍산문명(紅山文明) 또한 조선의 찬란했던 흔
적으로 보고 있으며, 한반도와 만주에서 많이 발견되는 엄청난 양의 고인돌(지석묘) 또한 조
선의 청동기시절 흔적이다. 그리고 비파형동검도 조선을 상징하는 유물이다.

※ 단군성전(백악전)의 역사
단군성전은 1968년 이숙봉(李淑峰) 여사의 3자매(이정봉, 이숙봉, 이희수)가 세웠다. 이후 사
단법인 현정회(顯正會)로 이관되었으며, 1973년 서울시로부터 보호문화재로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1990년에는 쌍용그룹 김석원 회장의 지원으로 성전을 개축했다.

전체 대지면적 약 800㎡, 성전 52.92㎡, 태극정문(太極旌門), 관리실 등을 갖추고 있으며, 건
물 색깔이 죄다 베이지색을 띄고 있는데, 이는 박정희 시절 그가 좋아하는 색으로 칠했기 때
문이다. 이곳 뿐 아니라 많은 사당과 문화유산이 그 시절 베이지색으로 색 변경을 당했다. 성
전 현판은 김응현, 홍익인간 글씨는 원중식, 내외삼문 간판은 이현종이 썼다.
또한 옛 조선이 열렸던 유서깊은 10월 3일 개천절<어천절(御天節)이라고도 함>에는 이곳에서
개천절대제전(開天節大祭典)이 성황리에 열린다. 전통제례와 전통공연, 온갖 체험행사(제례복
체험, 국궁체험 등) 등이 열리며, 일반인도 참여 가능하다.

* 단군성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1-28 (인왕산로 22, 현정회 ☎ 02-736-6375)


▲  단군성전 앞에 펼쳐진 늦가을 동화

단군성전 남문은 바로 사직공원(사직단)과 이어진다. 허나 평소에는 늘 닫혀있고 사직공원에
서 그곳을 이어주는 길 또한 봉쇄되어 있어 별 수 없이 인왕산길로 우회해 외삼문(外三門)으
로 들어서야 된다. 그 덕분에 사직공원~단군성전 지름길에 인적이 거의 끊기면서 사람의 발자
국 대신 노란 은행잎이 가득 쌓여 늦가을 정취를 아주 진국으로 끌어올린다.
벌써부터 겨울 제국의 보이지 않는 압박이 시작되면서 은행나무와 단풍나무들은 나뭇잎을 하
나, 둘 땅바닥으로 털어낸다. 우리는 그 잎을 낙엽이라고 부른다. 늦가을에 어울리면서도 한
편으로는 우울증을 유발시키는 그 이름 말이다. 은행잎이 금지된 길과 그 주변에 수북히 쌓여
이 일대는 그야말로 노란 세상을 이룬다. 마치 황금색 비단이 쫙 깔린 듯한 모습으로 말이다.

우리야 귀를 접고 누운 그들을 보면서 늦가을 분위기를 즐기지만, 그들은 인생의 마지막을 노
래하며 서서히 끝을 준비한다. 그러고보면 사람이나 은행잎, 인간이 지은 건물이나 인생은 모
두 부질 없는 모양이다. 시작이야 어쨌든 그 종점은 다 같지 않던가.


▲  한양도성 밖 인왕산로1길 (인왕산, 무악동 방향)

▲  인왕산입구 한양도성 탐방로 (인왕산 방향)

단군성전 앞 교차로에서 서쪽 인왕산로1길로 들어섰다. 길 왼쪽(남쪽)은 사직동 주택가와 종
로문화체육센터가 있고, 오른쪽은 인왕산의 싱그러운 숲으로 그 산줄기는 경희궁(慶熙宮)까지
미치지만 숲은 여기서 뚝 끊기고 만다. 그러니 인왕산로1길이 속세와 자연의 팽팽한 경계선인
셈이다.
그 길을 4분 정도 가면 고색이 짙은 한양도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크게 5거리를 이루
는데, 성 밖 북쪽 길(인왕산로1길)은 무악동과 인왕산 쪽으로, 서쪽(사직로1가길)은 독립문
방면, 남쪽(송월1길)은 홍파동, 경희궁 쪽으로 이어지며, 5거리 동쪽(성곽 안쪽) 인왕산입구
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성곽길을 타면 인왕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  송월1길과 한양도성 (홍파동, 경희궁 방향)

▲  사직동 한양도성 (5거리 서남쪽)
인왕산에서 내려온 한양도성은 여기서 잠시 고개를 숙이고 만다.
(사직동~월암근린공원 구간 성곽은 아직 복원되지 못함)

▲  은행잎의 마지막 삶터이자 정모 현장, 한양도성 여장
나무에게 버림받은 은행잎들이 딱딱한 여장 위에 모여 앉아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한다. 여장 뿐 아니라 그 주변은 온통 황금색 은행잎의 세상이다.

▲  여장 위에 내려앉은 은행잎들

▲  행촌동(杏村洞)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0호

사직터널 윗쪽이자 인왕산 남쪽 자락의 끝을 잡은 행촌동은 조금은 빛바랜 산동네이다. 그렇
다고 옛날 달동네처럼 주황색 기와를 지닌 허름한 집들이 즐비한 그런 곳은 아니다. 온갖 빌
라와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찬 서울의 흔한 동네로 그 주택가 속에 행촌동 은행나무와 권율장
군의 집터, 그리고 딜쿠샤란 명소가 숨겨져 있다.

딜쿠샤 곁에 자리한 행촌동 은행나무는 약 420살에 이르는 장대한 나무로 행촌동의 오랜 터줏
대감이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덧없는 양분과 동네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
어 높이 23m, 둘레 6.8m에 이르는 큰 나무로 어엿하게 성장했다. 허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이
이곳까지 미치면서 그의 보금자리는 주택에 밀려 많이 좁아졌고, 주택 사이에 비좁게 자리해
있으나 건강은 아직 양호하다.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이자 이곳에 살았던 권율(權慄)장군이 손수 심었다고 전하며, 주인
은 오래 전에 갔지만 그의 사연을 끈질기게 붙들며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로 이 나
무 때문에 동네 이름이 행촌동(은행나무 마을)이 된 것이다. 참고로 은행나무는 태반이 사람
이 심은 것이며, 자연적으로 싹을 내린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서울에서 오래되고 아름다운 은행나무를 꼽으라면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 성균관(문묘) 은
행나무(대성전 은행나무 포함), 그리고 이곳 은행나무를 격하게 내세우고 싶다.

▲  남쪽에서 바라본 행촌동 은행나무

▲  북쪽에서 바라본 행촌동 은행나무


▲  은행나무 그늘에 자리한 권율장군 집터 표석

은행나무가 있는 곳은 권율(1537~1599)의 집터로 인근 필운동(弼雲洞) 배화여고에도 그의 집
이 있었다. 필운동 집은 그의 사위이자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오성 이항복(李恒福)에게 물
려주었는데 그 집이 필운대(弼雲臺)이다. (현재 필운대 바위글씨가 남아있음)

그럼 임진왜란의 영웅, 권율(權慄)은 누구일까?
권율은 안동 권씨로 자는 언신(), 호는 만취당()과 모악(). 시호는 충장()
이다. 1582년 식년시 문과(式年試 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는데, 임진왜란 시절 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것으로 보아 무예도 제법 갖추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는 승문원정자()와 전적()을 거쳐 1587년 전라도도사(全羅道都使)와 예조정
랑(禮曹正郞), 경성판관(鏡城判官)을 지냈으며, 1591년 평안도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급히 광주목사(廣州牧使)로 임명되어 그곳으로 달려갔으며 전라도
순찰사(巡察使) 이광(李珖)과 방어사(防禦使) 곽영()이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군사 4만을
모아 서울로 올라오자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었다.
이광과 곽영은 수원과 용인에 진을 치고 주변에 있는 왜군을 토벌하고자 했는데, 권율은 주변
에 조금씩 흩어진 적들을 치지 말고 임진강(臨津江)에서 그들의 서진(西進)을 막아 군량미를
운반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다음 적의 빈틈을 노리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고 의견을 냈다. 허나 뇌에 주름이 가득한 이광은 그 말을 무시하고 오로지 머릿수에 의지해
용인에 있는 왜군을 공격했다.
이광의 군사는 4만(왜국은 10만이라고 주장함)에 이르렀으나 대부분이 칼과 창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오합지졸이었다. 그에 반해 왜군은 왜열도에서 나름 알아주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수백 명의 정예 기병으로 저항을 했다.
허나 조선군은 겨우 수백에 불과한 왜군에게 형편없이 깨지고 싸움에 서툴렀던 선봉장 이시지
(李詩之)와 백광언(白光彦)이 전사하는 등,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했다. 허나 권율은 이를 직
감하고 신중하게 처신해 휘하 군사를 잃지 않고 광주로 물러나 후일을 도모했다.

1592년 가을, 전라도 남원으로 내려가 1,000명의 군사를 모집해 동복현감(同福縣監, 전남 화
순)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梨峙)에서 전주(全州)로 진출하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왜군을 막았다. 초반에 황진이 조총에 맞아 부상을 입으면서 군사의 사기가 잠시 떨어졌으나
권율이 군사를 독려하여 왜군을 격퇴하고 승리를 거뒀다. 그 공으로 전라도 감사(監事)로 승
진하게 된다.
1592년 12월, 서울 수복을 위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천안 직산(稷山)에서 머물렀는데, 체찰
사(體察使) 정철(鄭澈)이 그 많은 인원을 먹일 군량이 없으니 돌아가서 관내를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허나 행재소(行在所)에서 북상하라는 명이 떨어지면서 곧바로 군을
이끌고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 오산 세마대(洗馬臺)>에 들어가 진을 쳤다.
한편 권율이 독성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은 왜장 우키타(宇喜多秀家)는 후방과 차단될 것이
두려워 서울에 있던 군사를 이끌고 독산성을 공격했다. 허나 권율은 성문을 굳게 닫고 수비만
할 뿐, 좀처럼 성 밖으로 나오질 않아 왜군의 피해는 나날이 늘어갔다.
뚜껑이 열린 우키타는 사람을 보내 독산성의 약점을 탐지한 결과 물이 부족하다는 정보를 입
수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바로 성 밑에 큰 못을 파니 과연 성 안에 물이 마르면
서 조선군의 식수에 비상이 걸렸다.

허나 권율은 당황하지 않았다. 비범한 인물답게 명쾌한 꾀를 낸 것이다. 그래서 동이 트는 이
른 아침에 왜군이 잘보이는 곳에 말을 세워놓고 쌀을 부어 말을 씻기는 시늉을 벌였다. 그것
을 본 단순한 왜군은 성 안에 물이 부족하다는 것이 거짓임을 알고 크게 동요했다고 한다. 바
로 그때를 이용해 유격전을 펼치며 타격을 가하자 발작한 우키타는 영책(營柵)을 불지르고 바
로 서울로 줄행랑을 쳤다. 그들이 도망칠 때 정예 기병 1,000명을 보내 퇴로를 차단하고 왜군
수천을 죽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세마대 전투)

1593년 1월, 서울 수복을 위해 조경(趙儆)을 보내 근교에 마땅한 곳을 물색하다가 행주산성(
幸州山城)으로 들어가 목책(木柵)을 쳤다. 그곳은 서울과도 가깝고, 한강을 끼고 있으며, 조
망도 좋고, 인근에 여러 요새와 함께 연합 작전을 펴기에 아주 좋은 위치였다. 허나 석성(石
城)이 아닌 야트막한 토성(土城)이라 수비전에는 썩 유리한 편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서둘러
목책을 엮은 것이다.
목책이 완성되자 독산성에 병력 일부를 남기고 모두 불러들였으며, 별도로 4,000명을 뽑아 전
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를 시흥 호암산(虎巖山, ☞ 관련글 보러가기)으로 보내 후방
을 돕도록 했다. 그리고 처영(處英)이 이끄는 승병(僧兵) 1,000명이 행주산성에 합류했다.

권율은 소수의 군사를 보내 서울을 공격했고, 고양 혜음령에서 왜군에게 깨진 명나라군을 도
와 그들의 전멸을 막아주었다. 권율의 활약에 적지않게 염통이 쪼그라든 우키타는 행주산성을
쓸어버리기로 마음 먹고 서울과 인근의 군사를 싹 긁어모아 무려 3만의 대군으로 1593년 2월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그때 행주산성에 있던 조선군은 승병을 합해서 겨우 약 2,800명, 그 외에 군사들을 도우러 성
에 들어온 밥할머니를 중심으로 한 아낙네들과 지역 사람들이 있었다.

왜군은 7부대로 나눠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행주산성이 견고한 성이 되지 못해 여러 번
위기가 있었으나 군사들은 일당백의 위엄을 드러내며 적들을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로 만들었
으며, 화차(火車)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등의 새 무기도 크게 활약을 했다. 또한 밥할머
니의 행주치마 부대는 치마로 돌을 나르고 군사들의 밥을 나르는 등, 서로가 단결하니 왜군은
결국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사한 군사들의 시신을 모아 불태우고 줄행랑을 쳤다.
이 싸움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니 권율과 조경, 처영, 조선군과 승군, 밥할머
니의 아낙네들, 지역 사람들이 빚어낸 대작품이었다.

이후 파주로 옮겨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이빈(李薲)과 함께 후방을 지켰으며, 전라
도로 내려갔다가 그해 6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都元帥)로 승진해 경상도에 주둔했다. 1596년에 도망친 병사를 즉결처분한 것으로 잠시 해직되기도 했으나 바로 한성판윤(漢城判尹)
에 임명되어 호조판서(戶曹判書)와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터지자 명나라군과 함께 왜군이 머무는 울산성(蔚山城)을 공격
했다. 허나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겁에 질려 도망치는 바람에 함락시키지 못했으며, 순천
으로 자리를 옮겨 순천 예교(曳橋)에 있던 왜군을 공격했으나 비리비리한 명나라군의 비협조
로 함락시키지 못했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왔으나 그해 7월 인생을 마감하니 그의 나이
62세였다. 선조(宣祖)는 그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했으며,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
등으로 삼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봉해 그의 공을 기렸다.

권율은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명장으로 바다에 이순신(李舜臣)이 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
鄭起龍)과 곽재우(郭再祐), 권율이 있었다. 비록 초창기 용인 싸움에서 어리버리한 상관들 때
문에 졌고, 정유재란 때는 밥버러지 명나라군 때문에 적지 않은 고생을 했지만 그 외에는 모
두 대승을 거두었다. 특히 행주대첩은 적은 군사로 10배 이상의 왜군을 물리친 우리 전쟁사의
길이 빛나는 장쾌한 대첩이다.
그의 활약과 공훈에 대해서는 '권원수실적(權元帥實蹟)'이란 책이 전하고 있으며, 그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있으나 인근이 유원지화되어 늘 시끄러우니 숙면이나 제대로 취하고 있
을지 모르겠다.

행촌동 은행나무를 끝으로 늦가을 한복판에 달달하게 벌였던 인왕산과 황학정, 행촌동 나들이
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딜쿠샤는 시간 관계로 사진에 담지 않고 통과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행촌동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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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1월 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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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에 찾아간 청송 주왕산 단풍 나들이 ~~~ (절골에서 가메봉, 용연폭포, 절구폭포, 용추폭포, 자하성터, 대전사까지)

 


' 주왕산 늦가을 나들이 '
(절골, 가메봉, 용연폭포, 용추폭포, 주왕계곡)

▲  대전사에서 바라본 주왕산

▲  용추폭포

▲  절골계곡


 

늦가을이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수놓기 시작하던 10월의 한복판에 늦가을 단풍 성지로 격
하게 추앙받고 있는 청송(靑松) 주왕산을 찾았다.
주왕산은 대자연이 경북 한복판에 빚은 크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호남 내장산(內藏山)에 버
금가는 단풍의 대표 성지(聖地)이다. 서울에서 약 600리(옛 10리는 약 5km) 거리로 당일로
가기에는 무리가 있어 좀 넉넉하게 무박 2일 코스로 다녀왔다.

토요일 저녁 10시, 신도림역(1,2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준비된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주
왕산이 있는 동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늦가을 단풍의 화려한 향연과 아직까지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는 주왕산에 대한 강한 설
레임에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고 검은 도화지가 되버린 차창 밖만 열심히 바라보며 나름대
로 주왕산을 그려본다. 말로만 듣던 주왕산의 실물은 어떠할까?? 단풍은 제법 물이 올랐겠
지? 대전사까지 모두 볼 수 있을까? 등등...

서울을 출발하여 약 5시간 30분 만에 주왕산 남쪽 끝에 자리한 주산지 주차장(상이전마을)
에 이르렀다. 아직 새벽 어둠에 잠긴 주차장에는 천하 곳곳에서 산꾼과 나들이꾼을 바리바
리 싣고 온 관광버스로 가득한데,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주차장 모퉁이에서 간단히 아침을
해먹었다.
밥과 반찬을 가져온 이들이 많았고, 취사 도구까지 가져와 라면과 찌개, 오뎅탕 등을 해먹
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렇게 갖은 먹거리들이 모두 모이니 그야말로 출장 뷔페가 따로 없
으며, 주차장 옆에는 식당을 겸한 가게가 환하게 불을 켜며 간단한 먹거리를 팔고 있었다.

그렇게 아침을 때우고 4시 30분에 다시 버스를 타고 서쪽에 자리한 절골교로 이동했다. 그
림 같은 비경을 자랑하는 주산지(注山池)도 봤으면 좋으련만 그곳은 일정에 없었기 때문에
공간의 여유가 있는 주산지 주차장에서 아침만 먹고 바로 철수한 것이다.
절골교에서 모두 버스에서 내려 절골탐방지원센터까지 12분 정도 걸었다. 여기서 주왕산의
빗장이 열리기를 기다리다가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5시, 빗장이 열리기가 무섭게 주왕
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  주왕산 절골, 가메봉, 사창골

▲  주왕산 뒷쪽에 숨겨진 절골

절골(절골계곡)은 주왕산 동남쪽에 깃든 계곡으로 주왕산 뒷통수에 해당된다. 주산천(注山川)
의 상류로 골짜기가 꽤 깊고 숲이 울창하며, 옛날에 절이 있었다고 해서 절골이라 불린다. 계
곡 길이는 8km로 주왕산 동쪽 대관령(731m)에서 발원한 갈전골(갈절골)과 신술골이 한데 모여
절골을 이룬다.
삼삼한 숲에 포근히 감싸여 태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여름 제국도 눈치를 보며 피해갈 정
도로 시원하다. 계곡은 물이 풍부하고 기암괴석과 반석, 간간히 나오는 조그만 폭포가 운치를
더해주며. 상류로 올라갈수록 풍경의 질이 높아지니 꼭 상류(대문다리)까지는 오르기 바란다.
  
절골코스는 절골탐방지원센터에서 계곡을 따라 펼쳐지는데 여러 차례 계곡을 건너야 된다. 반
듯한 다리 대신 징검다리가 놓여져 있으나 부실한 곳이 적지 않아 자칫 물에 빠지기 쉽다. 하
지만 수심이 얕아 그리 위험은 없으며, 계곡 트래킹 및 피서지로 아주 그만이다.

절골은 인근 주산지와 함께 '내주왕계곡'이라 불리며, 풍경이 고와 주왕계곡(周王溪谷) 못지
않다. 계곡을 옆에 끼고 상류로 올라가다가 대문다리를 지나서부터 계곡과 서서히 멀어지며,
산길 경사도 점차 각박해져 깔딱 직전까지 이른다. 그렇게 각박한 산길을 오르면 가메봉 동쪽
갈림길에 이르고, 여기서 서쪽 능선길로 가면 가메봉이다.

* 절골탐방지원센터 → 대문다리 → 가메봉 (3시간 20~30분 소요)


▲  고요함에 잠긴 절골 (절골 중류)
늦가을 향연을 준비하는 나무들이 계곡을 거울 삼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  벼랑 사이를 흐르는 절골

▲  늦가을 채색이 짙은 절골 상류
너른 반석과 조촐한 폭포가 풍경의 아름다움을 돕는다.

▲  가메봉으로 오르는 길목에서 바라본 주왕산 남쪽 줄기
산 아랫도리와 중간 도리는 단풍의 향연이 한참이나 해발 700m 이후로는 벌써부터
앙상한 분위기를 자아내 올해도 거의 저물었음을 실감케 한다.

▲  주왕산 가메봉(882m) 바위와 그 너머로 보이는 왕거암

가메봉은 주왕산 구역에서 두수람(923m), 왕거암(907m)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이다. 주왕산 동
쪽에 자리한 가메봉은 넓직한 바위로 이루어져 동쪽과 남쪽, 서쪽이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으
며, 하늘에서 가까운 봉우리이나 칼처럼 솟은 뫼에 꽁꽁 둘러싸여 있어 조망의 질은 그리 시
원치 못하다.

우리는 여기서 간단히 행동식을 섭취하고 주왕계곡으로 내려갔다. (일부는 칼등고개를 경유하
여 주왕산 정상으로 이동)


▲  가메봉에서 바라본 천하 (주왕산 남쪽)
가메봉이 아무리 높다한들 하늘 아래 뫼이로다.

▲  가메봉에서 주왕계곡, 사창골로 내려가는 산길


 

♠  주왕산 사창골, 용연폭포

▲  사창골 상류

가메봉에서 울퉁불퉁한 산길을 20~30분 정도 내려가면 사창골이 슬쩍 모습을 비춘다. 가메봉
북쪽에서 발원하여 주왕계곡으로 흘러가는 사창골은 숲이 매우 삼삼하고 바위와 소(沼)가 많
아 절골 못지 않은 고운 매력을 드러내고 있으며, 후리메기3거리를 지나 40~50분 정도 내려가
면 주왕계곡이 모습을 비춘다.


▲  동그랗게 자리를 닦은 조그만 소(못)
해가 지고 밤이 되면 하늘에서 선녀 누님들이 이곳으로 내려와 목욕을
하지는 않을까? 그러고 보니 못의 사이즈도 선녀 누님에 걸맞게
아담하다.

▲  너른 반석과 조그만 폭포
계곡 주위로는 낙엽이란 쓸쓸한 꼬리표를 단 단풍들이 귀를 접고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하고 있다.

▲  풍덩 스킨쉽을 하고 싶은 동그란 소
사창골 냇물은 여기서 숨 좀 고르다가 다시 종점 없는 길을 재촉한다.

▲  사창골 하류 산길
사창골 산길은 하류에 이르러 잠시 계곡과 멀어지고 벼랑길로 돌변한다.
벼랑 밑에는 사창골이 빚은 절구폭포가 있으며, 벼랑길을 지나면
주왕계곡에 이르게 된다.

▲  주왕계곡 용연폭포(龍淵瀑布, 제3폭포)

주왕계곡(주왕천계곡, 주방천계곡)은 주왕산(720m)의 중심 계곡으로 '내주왕계곡'이라 불리기
도 한다. 주왕산 동쪽에서 발원한 큰골에서 시작하여 주왕산 심장부를 구비구비 돌다가 대전
사를 지나서 주방천(周房川)이란 이름으로 속세로 흘러간다.
용연폭포와 용추폭포, 시루봉, 학소대, 급수대 등 대자연이 빚은 온갖 작품이 가득해 눈을 부
시게 하며, 특히 용추폭포 주변은 주왕산의 모든 것을 긁어모은 것처럼 대장관을 이룬다.
깊은 산골에 숲이 울창하고, 계곡 좌우는 높은 벼랑으로 이루어져 협곡이 적지 않은데, 그런
계곡을 둘러싸고 600m가 넘는 많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그래서 주왕산을 석병
산(石屛山)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험한 지형을 지닌 탓에 예로부터 산적들이 많았고, 난리가
날 때마다 이곳으로 피난을 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한다. 특히 바위 봉우리가 많아 설악산,
월출산(月出山)과 더불어 이 땅의 3대 암산(岩山)으로 격하게 꼽히기도 하며, 경북의 금강(金
剛)으로 추앙받기도 한다.

신라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의 족자(簇子)이자 원성왕(元聖王)에게 밀린 김주원(金周
元)이 머물렀다고 해서 주방산(周房山)이라 불렸는데, 이후 그는 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해
졌다. 하여 그 연유로 주왕산으로 이름이 갈린 것으로 보이며, 고려 후기에 나옹화상이 그리
바꾸자고 해서 이름이 갈렸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다른 유래로는 당나라 사람인 주도(周鍍)가 8세기 후반,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을 칭하며
진나라 재건을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당나라군에게 보기 좋게 털렸다. 그래서 요동을 거쳐
신라로 도망, 주왕산이 험하다는 풍문을 듣고 그곳에 들어가 주변을 약탈하며 후일을 도모하
다가 당나라의 토벌 요청을 받은 신라에게 털리고 자신은 잡혀 처단되었다. 그래서 주왕산이
라 했다고 한다.
허나 이 전설은 마땅한 기록도 없고 역사적인 근거가 없으며, 조선 때 명나라에 대한 꼴통 사
대주의(事大主義)에 젖은 지역 유생들이 지어낸 것으로 여겨진다. 명나라가 있던 중원대륙과
청송의 명산인 주왕산을 연결시켜 지역의 자부심을 어떻게든 높이려고 머리를 싸맸던 유생들
의 그릇된 생각이 지어낸 산물인 것이다.

주왕계곡은 '청송 주왕산 주왕계곡 일원'이란 이름으로 국가 명승 11호로 지정되었다.


▲  용연폭포의 위엄 (윗폭포)

주왕계곡 상류에 자리한 용연폭포는 제3폭포, 쌍폭, 용폭이라 불리기도 한다. 예전에는 간단
하게 제3폭포라 불렸으며, 2단으로 이루어진 장대한 폭포가 위엄을 자랑하며 하얀 실타래 같
은 물줄기를 밑으로 뽑아낸다. 폭포 밑에는 푸른 못이 펼쳐져 있는데, 영덕 강구항 앞바다와
이어져 용이 머물렀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있다. 그래서 용연폭포란 간판을 지니게 되었
다.
윗폭포 옆에는 얕게 파인 3개의 동굴이 있어 폭포의 경관을 더욱 신비롭게 꾸며주며, 물소리
가 우렁차 귀신도 도망을 칠 정도이다. 못 남쪽에는 탐방로와 조망대가 있는데, 사람들이 폭
포를 구경하느라 금방금방 빠지지를 않아 정체가 심하다. 그만큼 폭포가 사람들의 마음을 제
대로 앗아간 것이다. 우리도 폭포를 구경하느라 한동안 발을 움직이지 못했지. 대자연의 기묘
한 작품 앞에 우리가 할 일이란 그저 감탄사 연발과 사진 촬영 뿐이다.

▲  용연폭포 옆에 패인 3개의 동굴

▲  푸르게 익은 용연폭포 못 (윗폭포)


▲  용연폭포 아랫폭포
아랫폭포도 윗폭포 못지 않은 장쾌함을 보여준다. 이곳은 못 바로 앞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  주왕계곡의 백미, 절구폭포~용추폭포

▲  절구폭포로 인도하는 좁은 사창골 협곡

용연폭포를 둘러보고 다시 왔던 길로 내려가면 절구폭포로 인도하는 좁은 협곡이 마중을 한다
. 앞서 사창골 산길의 아랫쪽으로 사창골의 하류이기도 한데, 그 협곡을 5분 정도 들어가면
그 길의 끝에 절구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  절구폭포 (제2폭포)

바위 너머 윗쪽에서 2단으로 쏟아지는 절구폭포는 제2폭포라 불리기도 한다. 응회암(凝灰巖)
에 주로 생성되는 절리(암석이 갈라진 틈)에 의해 생긴 폭포로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윗폭
포 밑에는 선녀탕(仙女湯)이 수줍은 듯 숨겨져 있으며, 아랫 폭포 밑에는 수심이 얕은 못이
형성되어 있어 물놀이 장소로 아주 그만이다.
이곳은 사창골 하류로 폭포 주변이 모두 벼랑으로 막혀 길이 없다. 그래서 다시 되돌아나가야
된다. 전쟁 때 만약 이곳으로 몰린다면 정말 몰살을 각오해야 될 정도로 궁벽한 곳이나 주변
풍경이 아름답고 물이 시리도록 맑아서 내 즐겨찾기 명소로 살짝 숨기고 싶다. 현재 선녀탕과
윗폭포는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니 얌전히 아랫폭포 앞에서만 머물기 바란다.


▲  옆에서 바라본 절구폭포

▲  병풍바위

절구폭포를 둘러보고 주왕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주변 풍경이 서서히 흥분을 하면서 나도 모르
게 장대한 벼랑에 감싸이게 된다. 그 벼랑은 병풍바위로 계곡 양쪽으로 거의 직각으로 솟은
낭떠러지가 병풍처럼 둘러져 그야말로 하늘만 보이는데, 벼랑 밑에는 옥처럼 맑은 주왕계곡이
청정함을 자랑하며 힘차게 흐르고 있다.
발을 전혀 들일 수도 없을 이런 험지에 인간들은 산천유람 욕구를 위해 마구 탐방로를 내었는
데, 벼랑 밑부분에는 혹시나 모를 대자연의 테러(낙석)에 대비해 지붕까지 둘렀다. 주왕산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웅장한 멋을 지닌 병풍바위 밑에는 제1폭포라
불리는 용추폭포가 달려있는데, 이곳 풍경은 가히 압권이라 앞서 제2폭포, 제3폭포를 능가한
다.
대자연의 위대한 작품에 혼이 탈탈 털린 속인들은 사진을 찍고 풍경을 구경하느라 좁은 탐방
로는 늘 정체를 빚어 행렬이 다소 버벅거리는데, 풍경이 풍경인지라 정말 그럴 수 밖에 없다.
그게 동물과 신(神)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는 인간들의 인지상정이 아니던가?
아무리 여름 제국이 무더위 갑질로 천하를 뜨겁게 달구어도 이곳만큼은 어림도 없을 정도로
무더위를 잊게 한다. 벼랑에 감싸여 햇살도 마음 놓고 착륙을 못하고, 계곡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주니 땀이 붙어있을 재간이 없다.

용추폭포 윗쪽에는 선녀탕이 있고, 그 위에 구룡소(九龍沼)가 있으며, 탐방로 밑은 계곡과 벼
랑으로 되어있어 계곡과 폭포로의 접근은 통제되어 있다.


▲  대륙의 협곡 같은 병풍바위의 위엄
협곡 사이로 탐방로가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있다. 이렇게 보니 주왕산의 옛 이름인
석병산(石屛山)이란 이름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

▲  용추폭포 구룡소
수심도 깊고 지형도 각박한 이곳에 9마리의 용이 살았다고 전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  구룡소와 용추폭포 사이에 자리한 선녀탕
선녀 누님들이 들어가기에는 수심이 좀 깊다. 하늘나라 선녀들은
키가 나무만 했던 것일까?

▲  용추폭포(제1폭포)
제2폭포, 제3폭포와 달리 폭포의 정면 모습을 담을 수가 없다. 그만큼
이곳은 칼처럼 솟은 벼랑 밑에 무섭게 펼쳐진 첩첩한 협곡이다.
그나마 탐방로가 닦여져 있으니 이 정도로라도 보는 것이다.

▲  가까이에 있으나 그림의 떡처럼 보이는 용추폭포 밑 동그란 못

▲  벼랑 사이로 각박하게 이어진 병풍바위 협곡 (서쪽 부분)


 

♠  주왕산 마무리

▲  주름선이 인상적인 시루봉 ▲

병풍바위 협곡을 지나면 계곡을 건너는 학소교가 나온다. 다리 옆에는 홀로 솟은 날씬한 돌기
둥이 손짓을 하는데, 그 돌기둥이 시루봉이다.
시루봉은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은 작품으로 그 모습이 떡을 찌는 시루처럼 생겼다
하여 시루봉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바위 피부에는 주름선이 많은데 옆에서 보면
어두운 표정을 지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여 신비감을 더한다. 완전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무장된 천험의 돌기둥이라 접근은 정말 어림도 없어 보이는데, 저 봉우리 위에는 주왕산 산신
이나 신선만의 공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들의 숨겨진 보물이라도? 그러니까 대자연
이 사람들이 오르지 못하게끔 저렇게 깎아 놓았을 것이다.

이런 절경에는 꼭 옛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붙여놓은 전설이 하나씩은 꼭 있기 마련, 그 내용
은 대략 이렇다.
옛날 어느 추운 겨울, 한 도사가 바위 위에 올라가 열심히 도를 닦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신선 2명이 하늘에서 내려와 도사가 추위에 떨지 않도록 바위 밑에 불을 지폈는데, 그 연기가
바위 전체를 감싸며 봉우리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이게 끝임.


▲  시루봉 밑 주왕계곡


▲  학소대(鶴巢臺)

시루봉 맞은편에는 학소대라 불리는 커다란 낭
떠러지가 장대한 모습을 자랑하며 시루봉과 자
웅을 겨룬다.

계곡 바로 옆에 직각으로 높이 솟아있어 그 장
엄함에 주눅을 들게 만드는데, 시루봉 마냥 낭
떠러지로 이루어져 있어 철옹성 마냥 범접하기
가 어려워 보인다.
절벽 꼭대기에는 키 작은 나무들이 자라 세상
을 굽어보고 있으며, 학소대의 덩치가 대단하
여 주변 계곡에 늘 그늘을 드리운다.
옛날에 청학(靑鶴)과 백학(白鶴)이 무리를 지
어 살았다고 해서 학소대라 불리며, 그 학소대
밑에 도승(道僧)이 절을 짓고 살았는데, 꿈에
신선이 나타나 빨리 피하라고 재촉하므로 밖으
로 나오니 위에서 바위가 굴러떨어져 절을 덮
쳤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한 토막 전해온
다.


▲  인간이 만든 비루한 작품, 학소교 (학소대 밑)
대자연의 걸쭉한 작품을 쭉 보다가 인간이 만든 콘크리트 다리를 보니 정말로
못봐주겠다. 아무리 아치형으로 만들어도 거기서 거기임..

▲  급수대(汲水臺)

학소대를 지나면 육중한 바위 봉우리인 급수대가 모습을 비춘다. 그 역시 낭떠러지로 이루어
진 30여m의 주상절리(柱狀節理) 바위로 옛날 주왕의 군사들이 바위 위에 무자위를 설치해 계
곡 물을 위로 소환했다는 전설이 있어 급수대란 간판을 지니게 되었다. 물론 주왕의 전설도
거짓이며 급수대의 전설 또한 거짓이다.


▲  주왕계곡 북쪽에 솟아난 벼랑 (이름은 모르겠음)

▲  자하성(紫霞城)터

급수대를 지나 계곡 하류(대전사)로 계속 길을 재촉하면 길 오른쪽에 자하성터가 초췌한 몰골
로 마중을 한다.
자하성은 주왕굴을 중심으로 하여 지형을 이용해 쌓은 산성(山城)으로 주방산성, 주왕산성이
라 불리기도 한다. 주왕이 신라군을 막고자 쌓았다고 하나 현실은 삼국시대 또는 고려 때 축
성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곳을 거쳐 갔다는 신라 왕족 김주원이 자신에게 돌아올 왕위를
가로챈 김경신(원성왕)을 크게 원망하며, 여기서 잠시 딴 마음을 품지 않았을까 싶다. 허나
그 마음도 부질 없음을 깨달았는지 강릉(명주)으로 내려가 거기에 둥지를 틀었다.

성 둘레는 12km에 이르렀다고 하며, 대자연의 끊임없는 태클과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죄
다 무너지고 지금은 일부만 겨우 남아 있다. 그 모습도 돌무더기처럼 남아있어 자하성터 안내
문이 없었다면 그냥 자연산 돌무더기로 지나쳐도 이상할 것이 없다.


▲  주왕계곡의 흥미로운 존재, 아들바위

자하성터를 지나면 계곡 냇가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아들바위를 만나게 된다. 덩치가 큰 네
모난 바위가 다소 기운 모습으로 자리해 있는데, 겉모습은 딱히 유별난 것은 없으며, 그냥 계
곡에 놓인 커다란 바위 정도 외에는 특별한 것은 없다. 허나 어찌된 영문인지 아들을 낳게 해
준다는 신비한 존재로 각인되어 옛날부터 아들바위란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땅의 오랜 고질병이라 할 수 있는 아들 선호 사상이 빚은 산물이라고나 할까? 냇가 한복판
에 저런 커다란 바위가 있으니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돌을 던졌을 것이고, 바위 위에 얹혀지면
마치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것이 점차 확장되어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이
야기까지 생겨난 모양이다.
그런데 다른 바위와 달리 여기서는 그냥 던지면 안된다. 바위를 등지고 다리 가랑이 사이로
돌을 던져 바위에 골인을 해야 아들을 얻는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그냥 왼팔로 던져 골인을
하면 된다고 했는데, 그새 수법이 바뀐 모양이다. 어쨌든 오랜 세월 사람들이 던질 돌이 바위
위에 수북히 쌓여 그의 높은 인기를 실감케 한다.


▲  잠시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다 (주왕계곡 하류와 주왕산 산줄기)

▲  주왕계곡 하류 (대전사 동쪽)

▲  주왕산 서쪽 자락에 자리한 대전사

주왕산에 들어서면서 시간이 되면 주왕굴과 대전사(大典寺)까지 말끔히 둘러보려고 했다. 주
왕산 상의주차장까지 13시까지 모이기로 해서 시간이 좀 넉넉할 줄 알았는데 벌써 12시 반이
넘어버렸다. 상의주차장까지는 앞으로도 30분을 더 가야 된다. 그러니 이들을 제대로 볼 시간
이 없는 것이다.
하여 산을 좀 타야 되는 주왕굴은 다음으로 미루고 상의주차장 직전 길목에 있는 대전사라도
어떻게 해보려고 했다. 이 절은 신라 후기에 창건된 오래된 절로 주왕산의 터줏대감격 존재인
데, 문화유산이 여럿 있어서 사진에 모두 담고 싶었다. 허나 시간 부족이란 현실 앞에 경내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쳐야 했다.
그렇다고 무리를 해서 보는 것도 단체 활동에 대한 예의는 아니며, 너무 시간에 쫓기듯이 보
느니 쿨하게 다음으로 넘기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하지만 얼마나 아쉽던지 아무리 다음에
오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그 다음이란 것이 언제가 될지는 미지수이다. 서울에서 제
법 먼 거리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대전사를 지나니 바로 주왕산의 대표 관문인 상의 매표소이다. 이곳은 대전사 때문에
문화재 관람료란 명목으로 입장료를 뜯고 있는데, 매표소 사람들의 눈빛에는 어느 누구도 그
냥 들여보내서는 안된다는 비장한 각오가 엿보였다. 그 돈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
<주왕산 상의(대전사)매표소만 입장료를 징수함, 나머지(절골, 월외리 등)는 입장료 없음>

상의매표소를 지나니 다른 유명 산과 마찬가지로 먹거리촌이 징하게 펼쳐진다. 도토리묵과 파
전, 송이, 동동주, 산채비빔밥, 백숙 등을 취급하고 있는데, 서둘러 길을 재촉하려는 찰라 낯
익은 얼굴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적지 않은 일행들이 거기서 동동주 1잔에 간단한 요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늦을까봐 대전사 등 많은 것을 두고 왔는데, 이렇게 여유롭게 산행
뒤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이럴줄 알았다면 대전사라도 제대로 보고 오는 건데
갑자기 기분이 허탈해진다.
상황이 뭐 그리 되었으니 다시 대전사로 가기는 틀렸고, 일행들과 어울려 주왕산의 명물인 송
이와 도토리묵, 동동주 1잔을 걸치며 같이 상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  상의주차장에서 바라본 주왕산과 주왕계곡

상의주차장에 도착하니 13시 20분, 늦게 오는 사람들이 속출하여 13시 40분이 되어서야 출발
을 했다. 주차장에는 산꾼과 나들이꾼을 태운 관광버스와 차량들로 홍수를 이루었고 그에 아
랑곳하지 않고 차량들은 계속해서 밀려들어온다. 그러나보니 들어오는 길은 정체가 대단하여
많은 차량들이 마을 밑에 차를 대고 걸어오기도 했다.

주왕산을 벗어난 우리는 안동(安東)으로 넘어갔다. 안동댐 주변에 자리한 식당에 들어가 안동
의 토속 음식인 헛제사밥 정식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는데, 헛제사밥 정식은 일반적인 제삿상
음식과 비슷하다.
헛제사밥의 유래는 조선 때 유생들이 배가 고프거나 비싼 음식을 먹고 싶어서 성현(聖賢)들에
게 제사를 지낸다고 거짓말을 치고 노비와 주변 백성들을 닥달하여 만들게 한 음식상으로 '헛
'이란 접두어를 붙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그 음식상이 이제는 안동의 대표 밥상이 되
어 전국에 불티나게 팔리는 것이다.

이곳 헛제사밥 정식은 나물이 버무려진 놋쇠 그릇에 밥을 비벼 먹는 것인데, 제사 때 쓰는 국
과 간고등어, 전, 떡, 잡채 등이 정식을 이룬다. 맛도 그런데로 괜찮은 편, 순식간에 밥과 반
찬을 비우고, 술도 여러 잔 마시니 졸음이 밀려와 나를 희롱한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식당 남쪽에 자리한 낙동강(落東江)과 월영교에서 잠시 소화 좀 시키다가
16시 30분에 출발했다. 아무리 목적지가 주왕산이라고 해도 마지막 종점은 결국 집이다. 서울
까지는 4시간 정도 걸렸으며, 피곤한 탓에 자다깨다를 무한으로 반복했다.

정말 번개처럼 날라가 재미나게 보냈던 무박 2일, 그곳이 그리워지고 같이한 이들이 보고 싶
은 마음에 비록 보잘 것은 없지만 이렇게 글을 남긴다. 다소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 아쉬움은
다음이란 인연을 잡아 해결하면 될 것이다.

* 절골 소재지 -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주산지리
* 주왕계곡(용연폭포, 용추폭포 등) 소재지 -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상의리
* 주왕산국립공원(☎ 054-870-5300)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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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0월 2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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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꽃창살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논산 불명산 쌍계사 (송불암 미륵불)

 


' 여름맞이 산사 나들이 ~ 논산 쌍계사, 송불암 '

▲  쌍계사 대웅전

▲  쌍계사의 자랑, 대웅전 꽃창살

▲  송불암 미륵불


 

여름이 봄을 몰아내고 제국의 기틀을 다지던 6월의 첫 무렵, 오랜만에 충남 논산(論山)을
찾았다.
논산으로 멀리 발걸음을 한 것은 그곳 쌍계사의 꽃창살이 그렇게나 아름답고 유명하다 하
여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자 함이다. 그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겠지?
다행히 쌍계사입구까지는 시내버스가 1일 10여 회 오가고 있어 접근편도 벽지치고 양호하
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영등포역에서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에 나를 담아 논산역으로 보냈다.
논산까지는 3시간 정도가 걸렸는데, 버스 시간에 아직 여유가 있어 논산역 동쪽에 자리한
논산시내버스 종점(덕성여객)으로 이동해 차를 기다렸다. 논산시내버스는 일부 외곽 지선
을 제외하고 모두 여기서 출발한다. 
 
세월이 무지 빠르다고 하는데 정작 무엇을 기다리는 시간은 반대로 느린 것 같다. 잡생각
을 머리 속에 마구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억지로 시간을 죽이니 어느덧 출발시간이다.
그래서 타는 곳으로 나가니 쌍계사로 가는 논산시내버스 405번(논산역↔임화리)이 다가와
활짝 입을 벌린다.
그 버스를 잡아타고 논산시내를 가로질러 은진미륵(恩津彌勒)으로 유명한 관촉사(灌燭寺),
사육신(死六臣)의 하나인 성삼문(成三問)묘소<이곳에는 그의 다리 한쪽이 묻혀있다고 함>
를 지나 쌍계사입구인 중산리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부터 쌍계사까지 잘 닦여진 2차
선 도로(중산길)를 따라 30분 정도 걸어 들어가야 된다.


▲  중산리에서 쌍계사로 인도하는 중산길


 

♠  쌍계사(雙磎寺) 입문

▲  강병흠과 평택임씨 정려비(旌閭碑)

중산리에서 쌍계사로 가는 길은 인적도 거의 없는 고적한 길이다. 집도 이따금씩 모습을 드러
낼 뿐, 거의 산과 밭으로 이루어진 자연 지대로 살며시 스쳐가는 산바람 소리, 가끔씩 지나가
는 차량 소리가 이곳 소리의 전부이다. 그런 길을 혼자 유유자적 거니니 마치 그 길을 통째로
전세를 낸 듯한 즐거운 기분이 가득 들고 걷는 길도 그리 지루하지가 않다.

그런 길을 약 1km 정도 가면 길 왼쪽에 돌로 만든 특이한 비각(碑閣)과 그 안에 담긴 매끈한
피부의 비석이 잠깐 나좀 보고 가라며 하소연을 한다. 하여 잠시 길을 멈추고 살펴보니 강병
흠(姜抦欽)과 평택임씨(平澤林氏) 부부의 정려비이다.

비석의 주인공인 강병흠은 진주강씨로 구한말과 20세기 초반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첨지중
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를 지냈으며 어려서부터 효성이 대단하기로 명성이 높았다. 어느
한겨울에 부모가 잉어를 먹고 싶다고 투정을 부리자 저수지의 두꺼운 얼음을 깨서 잉어를 잡
은 적이 있으며, 아버지가 병으로 드러눕자 밤낮으로 약을 달이며 병간호를 했는데, 꿈속에서
친할머니가 나타나 아버지의 병에는 산삼이 최고라며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하여 다음날 그
곳에 가보니 정말 산삼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몇 년 뒤 아버지가 사경을 헤매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였으며, 결국 그가 사
망하자 무려 6년씩이나 시묘살이를 했는데, 불효에 대한 자책감으로 옷자락에 항상 돌을 담고
다녔다. 하여 사람들은 그를 포석효자(包石孝子)라 부르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강병흠의 부인인 평택임씨도 대단한 열녀(烈女)라 시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했고, 남편이 죽자
자결을 했다. 그래서 그들 부부의 효행과 열행(烈行)
을 기리고자 1922년에 정려비를 세웠다.

처음에는 1칸짜리 기와 정려각을 씌웠으나 건물이 낡자 1993년에 지금의 석조물을 세우고 내
부에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김용제(金容濟)가 짓고, 이종성(李鍾聲)이 글씨를 썼으며, 비문
에는 '孝子僉知中樞府事 姜抦欽 閭配, 烈女 淑夫人 平澤林氏之閭(효자 첨지중추부사 강병흠
정려, 열녀 숙부인 평택임씨지여)'라 쓰여 있다.

           ◀  열녀 해주오씨 비석
강병흠 부부의 정려비에서 잠깐 옷깃을 여미고
다시 길을 재촉하면 얼마 안가 고색의 때를 절
반 정도 탄 해주오씨 열녀비가 모습을 비춘다.
비석 주인공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비
석의 상태로 보아 19세기 인물로 여겨지며, 앞
서 평택임씨 못지 않은 열녀였던 모양이다.

           ◀  영명각(靈明閣) 입구
쌍계사 주차장을 지나 3분 정도 오르면 늘씬한
숲길과 함께 영명각을 알리는 표석이 마중한다.
영명각은 1975년에 농업진흥공사가 금강(錦江)
유역 300핵타르의 개답(開畓) 공사를 벌이면서
무연고 무덤 유골 3,000기를 수습해 봉안한 납
골당이다.
이후 건물을 확장하여 논산시민의 납골당(논산
시 공설봉안당)으로 바쁘게 살고 있다.


▲  쌍계사 밑에 자리한 그림 같은 호수, 절골소류지(沼溜地)

영명각입구 맞은편에는 너른 호수인 절골소류지가 있다. 작봉산(불명산)이 베푼 청정한 물이
쌍계사를 끼고 졸졸졸~♪ 흐르다가 이곳에 모여 대장정을 준비하는데, 삼삼한 숲에 둘러싸인
소류지의 자태는 정말 아름답기 그지 없다.


▲  영명각 입구에서 쌍계사로 인도하는 숲길
하늘을 가릴 정도로 무성한 숲, 그 숲이 베푸는 숲내음과 그늘, 거기에 옆에
붙은 소류지까지, 이곳만큼은 여름 제국도 눈치를 보며 비켜간다.

▲  쌍계사 부도(浮屠)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80호

길을 거닐다보면 왼쪽 언덕에 옹기종기 모인 부도(승탑)의 무리를 만나게 된다. 부도는 모
두 9기로 원래는 절 주변에 흩어져 있었는데, 20세기 후반에 이곳으로 모두 집합시켰다.
고색의 내음을 깊게 내뿜고 있는 그들은 석종형(石鐘形) 6기, 옥개석(屋蓋石)을 갖춘 탑 3기
로 이루어져 있다. 석종형은 높이 150cm 내외로 4각 또는 6각의 바닥돌을 깔고 그 위의 기단
(基壇)과 석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얹혔는데, 바닥돌과 기단에는 연꽃무늬 장식을 새겨 맨돌
의 식상함을 덜어준다.
옥개석 부도는 높이 130cm 내외로 탑신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대좌를 받치는 바닥돌은 4
각 또는 6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중/하대로 구분된 기단부(基壇部)에는 연꽃무늬 연주문과
화문(花紋)이 새겨져 있고, 탑 꼭대기에는 구슬 장식이
얹혀져 있다.

이들 부도 중 2기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翠峰堂 慧燦大師之屠(취봉당 혜천대사 부도)','梅
憲~~之塔(매현 ~~의 탑)' 정도의 글씨만 확인이 가능하다. 나머지 글씨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크게 흐트러져 알 수가 없으며, 부도의 조성시기는 조선 중~후기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쌍계사 부도

▲  쌍계사 중건비(重建碑)

부도의 보금자리 한쪽에는 중건비라 불리는 비석이 미운 오리새끼 마냥 자리를 잡고 있다. 그
는 1739년에 쌍계사를 중수하면서 세운 것으로 높이 156cm, 너비 78cm이며, 땅바닥에 자연석
을 깔아 비석을 세울 수 있도록 홈을 파고, 그 위에 대리석으로 된 비신(碑身)을 세운 다음에
지붕돌로 마무리를 한 단출한 모습이다.
쌍계사의 내력을 머금은 절의 일기장으로 비석 앞면에 절의 내력을, 뒷면에는 시주자의 이름
이 새겨져 있으며, 김낙증(金樂曾)이 찬(撰)을 하고, 이화중(李華重)이 글씨를, 김낙조(金樂
祖)가 글을 새겼다.


▲  쌍계사 봉황루(鳳凰樓)

숲길을 지나면 주차장과 봉황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숲에 감싸인 주차장 좌우로 2개의 조그만
계곡이 소류지로 흘러가고 있는데, 바로 여기서 쌍계사의 이름이 비롯되었다. 즉 2개의 계곡
이 만나는 절이란 뜻이다.

주차장을 굽어보는 봉황루는 쌍계사의 정문이다. 이곳은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도 아직 장만
하지 못해서 소류지 숲길이 그 역할을 대신하며 속세(俗世)와 절의 경계를 가르고 있는데, 제
아무리 천하의 독종, 번뇌라 한들 삼삼한 숲과 소류지의 경계를 뚫고 절까지 침투하기는 힘들
것이다. 허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 또한 번뇌라 아무리 던져본들 그 자리를 맴돌아 결국
소류지 밑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이 절이 아닌 속세이기 때문이다.

봉황루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누각이다. 정문 외에 조
촐하게 강당(講堂) 역할까지 하고 있는데, 근래 손질을 했는지 딱히 고색의 내음이 느껴지지
않는다. 1층에는 경내로 인도하는 돌계단을 늘어뜨렸으며 그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 마치 해
가 떠오르듯 솟아오른다.
2층에는 북과 '쌍계사 봉황루 등루부운(登樓賦韻)'이란 시가 적힌 현판이 있는데, 이 시는 5
언율시(五言律詩)로 어느 노승(老僧)이 1779년에 이곳을 찾아 지은 것이다. 이를 통해 적어도
18세기에는 봉황루가 있었음을 살짝 귀뜀해준다. 그럼 여기서 잠시 쌍계사의 내력을 짚어보도
록 하자.


▲  봉황루의 뒷모습
봉황루 등루부운(登樓賦韻) - 1779년 어느 노승이 지음

고루에 나홀로 누워                  高樓我獨臥
마음은 하늘을 찾아 날아오르네       心適上飛天
산봉우리들 사이에 흰 구름이 머물고  衆峀雲留白
여러 시내에 달 그림자 비치네        群溪月影輝
석등은 불실을 밝게 비추고           夕燈明佛室
아침 비는 선문을 어둡게 하네        朝雨暗仙扉
날마다 금모래 연못을 감상하니       日賞金沙池
몸은 세속으로 돌아감을 잊네         身忘俗諦歸

▲  봉황루 2층에 있는 태극마크 북

▲  경내 북쪽 석축 위에 닦여진 돌탑들

대웅전 꽃창살로 유명한 논산 쌍계사는 작봉산(鵲峰山, 419m) 북쪽 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다.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이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동/서/남이 모두 작봉산 산줄기
에 막혀있고, 오로지 북쪽만 뚫려있기 때문이다.
쌍계사를 품은 산의 이름은 '작봉산'으로 '불명산(佛明山)'이란 이름까지 지니고 있는데, 이
는 산의 옛 이름이 불명산이기 때문이다. 하여 쌍계사는 절에 어울리게 '불명산 쌍계사'를 칭
하고 있다.

쌍계사는 10세기 후반에 이곳에서 가까운 관촉사의 은진미륵을 세운 혜명대사(慧命大師)가 창
건했다고 한다. 허나 이는 믿을 바가 못되며, 창건자와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
중(五里霧中)을 헤매고 있다. 다만 고려 후기 서화가였던 행촌 이암(杏村 李嵒, 1297~1364)이
발원하여 중건했다는 내용이 중건비에 적혀있어 이때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 끝 무렵에는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절의 연기(緣起)를 썼다고 전하며, 초창기 절 이름
은 백암사(白庵寺) 또는 백암(白庵)이었다.

왕년에는 500~600여 칸의 건물이 있을 정도로 호서(湖西) 제일의 대가람(大伽藍)을 자랑했는
데, 극락전을 비롯해 선원(禪院), 관음전, 동당(東堂), 서당(西堂), 명월당, 백설당, 장경각
등의 건물이 경내를 가득 채웠다고 한다. 허나 그렇게 잘나갔던 쌍계사는 조선시대를 거치면
서 크게 야위어 갔고, 여러 번의 화재로 1716년에 대웅전 등을 중창했으나 1736년 다시 화재
가 찾아와 1739년에 중건을 하고 중건비를 세웠다.
조선 후기와 왜정(倭政) 때는 그런데로 절을 유지했으며, 6.25 시절에는 다행히 총탄이 비켜
가 별 피해는 없었다. 이후 별다른 큰 불사(佛事) 없이 지금에 이른다.

절은 지형을 이용해 넓게 터를 다졌는데, 북쪽과 서쪽, 동쪽에 석축과 돌담을 쌓고, 북쪽 가
운데에 봉황루를 내어 정문으로 삼았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해 봉황루, 나
한전, 칠성각, 명부전, 요사 등 8~9동의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 뜨락이 매우 넓은 것이 특징
이다. 한때는 그 뜨락에도 건물이 가득했으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모두 사라지면서 수풀
만 무성하게 된 것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과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지방문화재인 부도
가 있으며, 계룡산 갑사(甲寺, ☞ 관련글 보러가기)에 머물고 있는 월인석보(月印釋譜) 판각
이 원래 이곳에 있던 것으로 여기서 만들었다고 전한다.

쌍계사에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많이 서려 있다. 그 전설을 모두 다루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므로 그중 일부만 끄집어 보도록 하겠다.

① 창건설화 - 먼 옛날, 하늘의 상제(上帝)가 이 땅에 절을 하나 짓고자 자신의 아들을 내려
보냈다. 아들은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우기로 하고 천하에 진귀한 나무를 구해와서 주변 경치
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절을 세웠다.
② 하마비(下馬碑) 전설 - 때는 고려 후기 어느 날, 쌍계사 주지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승
려 1명이 나타나
'그곳에 쫓기는 승려가 찾아 올 것이니 잘 대접하시오. 허나 임금 왕(王) 자의 성을 가진 사
람이 말을 타고 들어오면 큰일이 날 것입니다!'
이후 세상이 더 혼란해지면서 많은 승려가 난을 피해 쌍계사로 들어오니 주지는 그들을 모두
맞아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산을 뒤흔들 듯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탄 군사가 절을 향해 달
려오고 있던 것이다. 절에 있던 사람들이 불안에 떨자 주지는 목탁을 치며 불경을 외기 시작
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 모두 독경을 외웠는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절로 치닫던 말들이
절 앞에서 서로 뒤엉키며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말을 탄 군사들은 말들의 때아닌 발작 증세
에 모두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후에도 똑같은 일이 계속 생기자 어느 누구도 말을 타고 절에 들어갈 생각을 못했다. 또한
말이 때거지로 죽은 곳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하마비를 세웠는데, 세월이 지나자 엉뚱하게
도 죄 지은 사람의 죄를 풀어주는 영험이 있는 비석으로 둔갑되어 불공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
다.

* 쌍계사 소재지 :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중산리 3 (중산길 192 ☎ 041-741-2251)


▲  봉황루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위엄


 

♠  쌍계사 둘러보기

▲  쌍계사 연리근(連理根)

논산 쌍계사는 솔직히 대웅전만 알았지 나머지는 아는 것이 없었다. 절의 역사도 제법 오래되
고 보물로 지정된 장대한 대웅전도 있으니 절 규모도 어느 정도 될 것이라 생각을 했는데, 정
작 경내로 들어서니 내 생각과는 완전 다른 허전한 모습의 쌍계사가 나를 맞이했다.

봉황루를 들어서면 바로 정면으로 대웅전이 보이는데, 바로 코 앞에 있는 것이 아니다. 거리
도 제법 떨어져 있다. 봉황루와 대웅전 사이에는 뜨락이 넓게 펼쳐져 있으나 그냥 뜨락만 있
을 뿐, 연리근 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옛날에는 그 자리에 건물이 가득 있었겠지만 다 사라
지고 빈 자리만 남은 것이다. 뜨락 서쪽에는 오래된 연리근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고, 동쪽에
는 조그만 요사와 선방이 자리한다. 그리고 건물 상당수는 대웅전 좌우와 뒷쪽에 띄엄띄엄 떨
어져 있다.
이렇게 경내에 놀고 있는 땅이 많으니 요란하게 중창불사를 벌일 만도 한데 아직은 그럴 생각
은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뜨락이 너무 허전하니 조촐하게 건물 몇 개라도 세워 그 공허함을
달랬으면 좋겠다. 세상에 이렇게나 넓은 법당(法堂) 뜨락도 처음 보고, 경내 중심에 이렇게
공터가 넓은 절도 처음이다.


▲  남쪽에서 바라본 쌍계사 연리근

대웅전 뜨락 서쪽을 혼자 차지하고 있는 연리근은 겉으로 보면 1그루 같지만 엄연한 2그루의
느티나무(괴목나무)이다. 이들은 서로 뿌리가 만나 이렇게 하나의 나무처럼 되었는데, 뿌리가
만나면 연리근, 줄기가 서로 겹치면 연리목(連理木), 가지가 하나가 되면 연리지(連理枝)라고
부른다.

이 연리근은 수백 년(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음) 묵은 장대한 나무로 쌍계사의 오랜 내력을 알
려주는 소중한 산증인이다. 나무의 덩치가 대단하여 그늘 또한 넓기 그지 없는데, 나무 밑에
는 쉼터가 조성되어 있으며, 그늘의 질감과 솔솔 불어오는 산바람으로 이곳만큼은 무더위를
잊어도 좋다.


▲  요사(寮舍)와 선방(禪房, 오른쪽 맞배지붕 건물)
선방은 종무소(宗務所)의 역할도 겸하고 있으며, 그 앞에 조그만 건물은
찻집으로 전통차를 무료로 제공한다. (일부는 유료)

▲  동그란 석조(石槽)
작봉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것일까? 석조에는 그가 베푼 옥계수로 작은
바다를 이룬다. 목마름을 단죄하고자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입에 들이키니 목구멍이 시원하다며 쾌재를 외친다.

▲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좌측에는 명부전과 나한전, 칠성각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명부전은 20세기 초에 지어
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무독귀왕(無毒鬼
王), 도명존자(道明尊者), 저승의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는
데, 보통 절 건물은 가운데 문은 닫고 좌/우측 문을 열어두어 통행하게 하나 여기는 그 반대
로 가운데 문을 이용토록 했다.


▲  명부전 중심에 앉아있는 온후한 표정의 지장보살상과
무독귀왕(왼쪽), 도명존자(오른쪽)

▲  명부전 식구들
저승의 10왕과 판관(判官), 금강역사(金剛力士), 동자(童子) 등


▲  나한전(羅漢殿)
20세기 초에 지어진 팔작지붕 건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이
봉안되어 있다.

▲  나한전 석가여래상과 석가후불탱

▲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닌 조그만
16나한(十六羅漢)들

  ◀  나한전의 젊은 버전, 칠성각(七星閣)
경내에서 가장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칠성(七
星)을 비롯해 산신(山神), 독성(獨聖, 나반존
자)이 봉안되어 있다.

▲  칠성각 내부 - 왼쪽부터 산신탱과
칠성탱, 독성탱

▲  칠성각에서 바라본 대웅전 뜨락
(왼쪽 나무가 연리근, 오른쪽 건물이 요사)


▲  석조관세음보살상

경내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최근에 장만한 관세음보살상이 자리를 폈다. 관세음보살의 얼굴이
풍만하고 복스러운 것이 마치 중년 비구니 같은데, 비가 내려도 얼굴 부분은 절대로 젖지 않
는다고 한다. 하여 절에서 신비한 관세음보살상이라며 크게 치켜세우고 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참 어려운 현상 같은데, 그게 계속 되는 것을 보면 단순한 석조보살상은 아닌 모양이다.

관세음보살상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寶冠)이 씌워져 있으며, 얇아보이는 옷을 걸치며 가슴 주
위로 여러 장식을 둘렀는데, 앉아있는 대좌(臺座)에는 연꽃 무늬가 가득하다.


▲  관세음보살상에서 바라본 쌍계사 경내

▲  쌍계사 대웅전 - 보물 408호

쌍계사에 왔다면 꼭 봐야되는 것, 바로 이곳 법당인 대웅전이다. 바깥만 볼 것이 아니라 안에
도 말끔히 살펴보자. 그래야 저승에 가서도 염라대왕 형님에게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
만큼 쌍계사에서 대웅전의 비중은 막대하며 '대웅전은 곧 논산 쌍계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
다.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대웅전은 법당에 걸맞게 경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솔직히 너무 일
방적으로 큼) 이상하리만큼 경내에 노는 공터가 많아 참 허전하기 그지 없는데, 그 허전함과
절의 조촐함을 대웅전이 제대로 커버를 해줄 만큼 든든한 모습이라 사진에 나오는 사람과 대
웅전을 비교하면 크게 실감이 날 것이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살짝 치켜진 추녀마루의 선이 참 곱다. 마
치 큰 새가 날개짓을 하는 모습 같은데, 지붕이 건물 2층과 맞먹을 정도로 육중하기 그지 없
어 건물 밑도리가 그 큰 지붕을 어떻게 받쳐들까? 쓸데없는 걱정이 들 정도이다. 평방(平枋)
위에는 촘촘히 박힌 공포가 그 지붕을 받들고 있는데, 안쪽은 5출목(出目), 밖은 4출목이다.
이처럼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를 심어놓은 양식을 다포(多包)양식이라고 한다.

대웅전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작봉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절이 세워진 고려 때부터 있었을
것이다. 화재로 무너진 것을 1716년에 중창했고 화재로 또 전소된 것을 1739년에 다시 지었다.

건물 기둥은 굵고 희귀한 나무를 사용했는데, 그중 가운데 좌측 2번 째 기둥이 칡덩굴나무로
되어있다. 이 기둥은 윤달이 들은 해(4년에 1번, 2016년, 2020년, 2024년~)에 몸으로 안고 돌
면 죽을 때 고통을 면하게 된다고 한다.
1번을 안고 돌면 하루를 앓다가 가고, 2번을 안으면 2일, 3번 돌면 3일이라고 하는데, 유난히
3을 좋아하는 이 땅의 사람들의 습성상 3일은 앓고 가야 서운하지 않는다며 보통 3번을 안고
간다고 한다.
또한 염라대왕이 논산 쌍계사 출신인지 '자네 논산 쌍계사 다녀왔는가?' 물어본다고 한다. 그
러니 만약을 대비하여 쌍계사를 꼭 챙겨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대웅전 문짝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창살무늬

쌍계사하면 대웅전 꽃창살을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을 다녀간 답사쟁이들은 하나 같이 꽃창살
을 쌍계사 제일로 찬양하기 때문이다. 나도 꽃창살의 풍문을 듣고 이곳에 온 것인데, 직접 그
들을 보니 그 말이 과연 허언이 아니었다. 꽃창살의 갑(甲)으로 칭송받는 부안 내소사(來蘇寺
) 대웅보전의 염통까지 제대로 쫄깃하게 할 정도로 말이다.
회오리 모양과 바람개비 모양의 꽃잎 문양이 문짝마다 주렁주렁 달려있는데, 꽃잎 사이로 나
뭇잎 문양까지 달려 있어 실제 꽃잎이 달려있는 듯하다. 물론 자연산 보다는 좀 못해도 진짜
꽃들도 시샘을 보낼 정도로 정말 정교하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  대웅전 소조석가여래3불좌상 - 보물 1,851호

대웅전 불단에는 장대한 모습의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이 각자 스타일에 맞는 후불탱을 뒤에 걸
치며 후덕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대웅전이 크니 집 주인인 석가여래와 그의 협시불(夾侍佛)
까지 덩달아 장대하여 대웅전과 꽃창살에 놀란 눈과 가슴을 더욱 놀라게 만든다.

이들은 흙으로 빚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조각승 원오(元悟)가 수조각승을 맡아 신현(信玄)과
청허(淸虛), 신일(神釰), 희춘(希春) 등 4명과 함께 1605년에 조성했다. 그때 쌍계사는 무려
2층짜리 건물을 세우고 그 안에 저들을 봉안한 것으로 보이는데, 석가여래 좌우로 약사여래(
藥師如來)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자리해 3불을 이루고 있다.
앙련(仰蓮)과 복련(앙련의 반대)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로 장엄하게 앉아있는데,
석가여래는 오른손을 무릎 밑으로 내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으며, 커다란 덩치
에 비해 손과 팔은 작아 보인다. 옷은 양쪽 어깨를 덮고 있지만 오른쪽이 더 진하며, 이를 변
형 편단우견(偏袒右肩)이라고 부른다. 가슴에는 수평의 승각기가 보이며, 법의(法衣) 자락도
규칙적인 간격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고, 좌우 불상도 크기만 약간 작을 뿐, 대체로 석가여
래를 따라하고 있다. 다만 다른 점은 편삼을 입고 그 위에 법의를 걸쳤다는 것이다.

이들 뱃속에서는 아주 고맙게도 발원문(發願文) 등 복장유물 4점이 나왔는데, 발원문에 통해
1605년이라는 조성 시기와 조성 목적, 제작에 참여한 승려 이름을 알게 되었다. 분명한 제작
시기와 함께 조각승 원오의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어 충남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15
년 3월 국가 보물로 승진되었다.


▲  대웅전 천정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대웅전에 발을 들였다면 고개를 들어 천정을 보기 바란다. 온갖 기묘한 조화로 이루어진 천정
이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두 눈을 어느 정도 정화를 시켜줄 것이다.
천정에는 커다란 들보와 섬세하게 짜여진 공포, 용머리, 닫집, 25개의 네모로 이루어진 우물
천정(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불 천정에 우물천정 하나씩 있음), 극락조<極樂鳥, 가릉빈가
(迦陵頻伽)> 등이 정신없이 짜여져 있다. 들보와 공포에는 단청이 곱게 칠해져 있고, 용은 동
쪽 들보에 몸을 대고 불단을 굽어본다. 불상 위에는 붉은 기와집의 닫집과 천개(天蓋)가 있는
데, 마치 조그만 궁궐을 보는 듯 하며, 하얀 극락조가 날개를 퍼득이며 천정을 날고 있다. 그
야말로 휘황찬란이라 사람들의 정신을 쏙 빼놓는다.


▲  우물천정과 두툼한 들보, 그 들보에 몸을 기댄 용, 그리고
칠보궁(七寶宮)이란 현판을 내건 붉은 기와집의 닫집

▲  극락조가 날아다니는 천정 (들보와 닫집, 보개, 우물천정)
이곳이야말로 불국토(佛國土)의 축소판이 아닐까?

▲  대웅전 천정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불법(佛法)을 지키는 호법신(護法神)들을
빼곡히 담은 그림으로 법당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  대웅전 앞에 놓인 헝클어진 석재들
석탑의 일부로 여겨지는 연꽃무늬 석재와
맷돌의 일부가 나란히 놓여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었다.


▲  이렇게 큰 뜨락을 본 적이 있는가? 대웅전에서 바라본 뜨락과 봉황루

박석이 깔린 길이 봉황루에서 대웅전 앞까지 정연하게 펼쳐져 있다. 지금은 이렇게 허전한 공
간으로 있지만 혹시 아는가? 나중에 조그만 도시처럼 번잡한 공간이 될지도? 허나 너무 복잡
한 모습보다는 이렇게 여백의 미가 넘치는 모습이 더 좋아 보인다.


▲  쌍계사를 뒤로하며 소류지에 버려둔 번뇌와 다시 만나다 ~~

겉모습은 작지만 대웅전 하나로도 알맹이가 큰 쌍계사를 1시간 30분 정도 둘러보았다. 대웅전
내부를 뚫어지라 살펴보았고, 이곳에 서린 문화유산은 불상의 복장유물을 제외하면 모두 눈에
넣었다. 또 오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잠깐이나마 그곳에 정이 들었는지 속세로
나가는 길에도 여러 번씩 뒤를 돌아보았다.

쌍계사에서 중산리로 나와 가게 문에 부착된 버스 시간을 보니 20분 뒤에 온다고 그런다. 딱
히 할 것도 없어서 정류장 주변을 서성이며 안그래도 빠른 시간을 억지로 죽이고 있으니 시내
로 나가는 시내버스가 나타나 활짝 입을 연다. 하여 그 버스를 잡아타고 다시 논산역으로 나
왔다.

아직 일몰까지 여유가 넘쳐서 어디로 갈까 궁리를 하다가 우리나라 서원의 주요 성지(聖地)로
추앙을 받는 돈암서원(遁岩書院)을 가보기로 했다. 허나 서원은 격하게 땡기지는 않아서 다른
곳을 물색하다가 연산에 자리한 송불암 미륵불로 장소를 바꿨다. 서원보다는 절이 볼 것도 많
고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논산시내에서 송불암이 있는 연산(連山)까지는 시내버스와 시외직행버스가 제법 다닌다. 대전
으로 가는 주요 길목인데다가 구한말까지는 충청도의 주요 고을(연산현)이었기 때문이다.

논산역에서 연산, 계룡시 방면으로 가는 논산시내버스 303번을 타고 1번 국도를 신나게 달려
연산에 진입, 연산 남쪽인 연산구4거리에서 내렸다. 여기서 우회국도 개설로 많이 한가해진
옛 1번 국도 2차선 도로(황룡재로)를 따라 동쪽(계룡 방면)으로 6~7분 정도 가면 송불암 입구
이고, 거기서 송불암 이정표를 따라 오른쪽 길로 들어가면 그 길의 끝에 송불암이 모습을 비
춘다.


 

♠  오래된 미륵불과 소나무를 간직한 조그만 절
~ 논산 송불암(松佛庵)

▲  송불암으로 인도하는 숲길

송불암은 옛 절터에 지어진 작은 비구니 절로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이곳에 서린 오래된 미
륵불을 보고자 함이다.

송불암에 있던 옛 절은 미륵불을 통해 고려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보다 동쪽으로
50m 떨어진 산자락에 있었다고 하며, 절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미륵불과 주춧돌만 아련히 남아오다가 1946년에 인근 신양리에 살던 동상태의 어머
니가 2칸짜리 집을 짓고 절로 삼아 미륵불을 관리했다. 이것이 현재 송불암의 시작이다.
이후 1970년에 승려 경연이 절을 물려받아 주지승이 되었는데, 미륵불 바로 옆에 소나무가 석
불과 조화를 이루며 지붕처럼 퍼져 있다고 하여 송불암이라 하였다.

송불암에는 믿거나 말거나 창건 설화가 한토막 전해오고 있으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 어느 날, 법력이 높은 노승(老僧)이 기도를 마치고 걸망을 짊어지며 천하를 돌아다
니다가 연산 고을 인근 황룡산에 올라 땅을 살펴보니 절을 지으면 크게 될만한 명당(明堂) 자
리였다. 하여 그곳을 점찍어두며 주변을 보니 광산김씨가 중심이 된 부자 마을이 있었고, 마
을 외딴 자리에 집이 있었다. 그래서 그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니 광산김씨 청년이 나와 무
슨 일이냐고 물었다.
노승은
'황룡산에 명당 자리가 있다기에 여기서 불법(佛法)을 전할까 하오'

답을 하니 청년은
'이곳은 유생이 많아서 불교를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하였다. 그러자 노승은
'그러면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풀막을 짓고 도를 깨우쳐 볼까 하오'
그러니 청년이
'그러면 무엇을 먹고 입으며 혼자 쓸쓸히 어떻게 살려고 하시오?'
물었다. 노승은
'원래 중은 풀뿌리, 나무열매로 양식을 삼고, 송락과 초목으로 의복을 대신하며, 법당이 없으
면 바위굴을 불당으로 삼소. 그러니 문제될 것이 무엇이 있겠소?'
노승
의 시원스런 답에 청년은 감동을 먹고 오늘 날도 저물었으니 일단 하룻밤 자고 가라며 호
의를 베풀었다.

이렇게 청년집에서 하룻밤을 머문 노승은 다음날 아침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때 청년의
어머니를 보게 되었는데, 얼굴을 보니 3일 뒤에 죽을 상이 아닌가? 이걸 청년에게 말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궁리하다가 한숨을 쉬며 그에게 전해주었다.
'덕분에 잘 쉬었소. 대접에 대한 보답으로 이 말씀을 드리고자 하니 부디 화를 내지 마시오.
아까 당신의 아머니를 잠깐 뵈었는데, 3일 후 아침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실 것이오. 그러면
인근 범바위골에 묘를 쓰되 황금돌을 절대 건드리지 마시오. 그곳이 괜찮은 명당자리요'
그 말을 들은 청년은 갑자기 뚜껑이 뒤집혀
'뭐라고? 이 땡중이 미쳤나? 빨리 꺼져!!'
성을 내며 노승을 쫓아냈다.

그런데 과연 3일 후 아침, 청년의 어머니는 죽고 말았다. 이에 청년은 크게 놀라 통곡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노승이 한 말을 상기시켜 보았다. 범바위골에 묻으라는 말이 생각나 그곳에 묘
자리를 정하고, 땅을 파니 황금돌이 나왔는데, 돌을 건드리지 말라는 말까지는 기억이 안나서
그만 그 돌을 들어내고 말았다.
그러자 그 속에서 수많은 벌이 앵~ 나오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 땅에 흔치 않던 벌명당이었
던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살던 벌들은 노승 때문에 보금자리를 빼앗기게 되었고, 벌의 우두
머리가
'그 땡중 때문에 우리 터전을 빼앗겼다. 빨리 그 작자를 단죄하러 가자~~!'
잔뜩 이를 갈고 무더기로 날라다니며 노승을 찾아 다니다가 인근을 지나던 그를 발견하고 집
중 폭격을 가해 말그대로 벌집을 만들어 죽였다.

이후 노승의 저주가 씌워진 탓인지 연산마을에는 10년 홍수, 10년 가뭄, 10년 전염병으로 완
전 몹쓸 땅이 되버렸다. 마을의 실세이던 광산김씨 집안에서 회의를 열어 상황이 이리 된 것
은 우리들 때문에 노승이 벌에 쏘여 죽은 것이라 규정하고 그의 넋을 위로할 겸 절을 세우고
미륵불을 조성했다. 그랬더니 재앙은 멈추고 마을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고 한다.
또한 미륵불 곁에 소나무 1그루가 홀연히 자라나 그를 향해 가지를 뻗으면서 위로 자라지 않
고 아래로만 자라니 사람들은 그 소나무가 노승의 후신이라 여기며 기도를 올렸고 소원을 성
취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여기서 출가하여 크게 된 승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전
한다.

물론 전설을 다 믿으면 이는 순진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전설을 통해 마을의 평안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절을 세웠음을 알 수 있으며, 딱히 뒷끝이 없는 다른 벌명당 전설과 달리 승려의 말
을 지키지 않다가 명당의 기운은 커녕 오히려 마을이 풍비박산이 나자 그 승려를 위로하고자
절을 세워 간신히 마을의 안녕을 되찾았다는 내용이 이채롭다. 일종의 승려 말을 들으면 자다
가도 떡이 나오니 승려와 절, 불상을 잘 대접하라는 옛 석불사의 뜻이 아닐까?

▲  개구리의 조촐한 운동장, 동그란 연못

▲  대웅전 앞 연꽃 석조

송불암은 대웅전과 요사, 선방 등 4~5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비구니 절이라 경내는 깔끔하
고 정갈하며, 경내 동쪽에 창건 설화에 나오는 소나무와 이곳의 후광이자 든든한 밥줄인 미륵
불이 자리해 있다.

▲  2000년에 새로 지어진 대웅전

▲  대웅전 서쪽에 자리한 요사


▲  미륵불과 소나무가 있는 경내 동쪽

▲  송불암 미륵불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83호

송불암 미륵불은 서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높이는 4.25m, 둘레 1m로 머리에는 네모난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얼굴은 넉넉한 인상으로
눈과 눈썹, 코, 입이 모두 완연하게 남아있으며, 두 귀는 목까지 늘어져 있고, 목에는 삼도(
三道)가 그어져 있다.
몸통에는 법의(法衣)를 걸쳤는데, 얇은 새김으로 새겨진 옷주름선은 발목까지 내려왔으며, 왼
손은 가슴에 대고 있고, 오른손은 몸 옆에 붙이고 있는 모습이 마치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것 같다. 그가 서 있는 대좌(臺座)에는 연화무늬가 있고, 옷자락 밑으로 석불의 발과 발가락
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석불 옆에는 창건설화에 나오는 소나무가 누워있다. 정말 노승의 넋이 담긴 것인지 하늘로 곧
게 자라지 못하고 석불을 향해 아래로만 자라나 끝내는 석불의 하늘을 가린 것이다. 그 모습
이 마치 석불의 불력(佛力)이나 매력에 끌린 듯 그를 덮고 있었는데, 소나무가 갈수록 오버(?
)를 하면서 석불이 마치 소나무를 이고 있는 모습처럼 보이자 2000년에 지금의 자리로 석불을
옮기고 소나무를 싹둑 정리했다.


▲  송불암 소나무 - 논산시 보호수

미륵불과 더불어 송불암의 오랜 명물인 소나무는 미륵불 앞에 마치 절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
을 하고 있다. 그의 미륵불에 대한 마음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석불에게 큰 부담을 주었던 존
재이기도 한데. 2000년에 미륵불을 현 자리로 옮기고 소나무를 크게 손질하여 얌전하게 만들
었다.
나무의 나이는 약 270년으로 그 적지 않은 나이에 비해 높이는 낮다. 다만 아랫쪽으로만 성장
을 하여 지금처럼 처진 소나무가 되버린 것이다.


▲  소나무 그늘에 있는 석탑

소나무 그늘과 석불 주변에는 세월에 지쳐 쓰러진 주춧돌과 석탑의 잔재가 남아있다. 이들은
미륵불과 더불어 옛 석불사의 유물로 석탑은 2기가 있는데, 윗 사진의 탑은 아랫도리만 간신
히 남아있으며, 그 주위에 버려진 주춧돌과 자잘한 돌들이 모여 있어 서로를 의지한다.


▲  석불 옆에 자리한 조그만 석탑
몇층인지는 모르겠으나 탑신의 일부와 옥개석이 이리저리 깨진 채 남아있다.
그 위로 동그란 돌이 마치 공기돌처럼 놓여있다.

▲  미륵불 주변에 흩어진 주춧돌들 ▲
이들은 미륵불을 보호하던 건물의 주춧돌로 거의 정사각형 모양의 보호각이
미륵불을 품고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석불의 높이가 4m가 넘으니 그 건물
또한 장대했을 것이나 임진왜란 이후 사라지고 간신히 주춧돌만 남아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허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  미륵불의 뒷모습과 소나무
미륵불 뒷모습은 딱히 손질을 하지 않아 울퉁불퉁하다.

▲  미륵불의 귀여운 발과 연꽃무늬 대좌
발가락이 상식 밖으로 지나치게 커서 그 모습이 마치 손에 낀 장갑이나
글러브 같다.

▲  송불암과 논산을 뒤로하며~~~

송불암을 30분 정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시간은 어느덧 17시, 더 이상 갈 곳도, 마음을
줄 곳도 없다. 시간이 늦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여름 맞이 논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 송불암 소재지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연산리 36-3 (황룡재로 92-18 ☎ 041-733-6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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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0월 1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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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닐기 좋은 강동구의 상큼한 북쪽 지붕, 고덕산~서울둘레길3코스 나들이 (양지마을, 광주이씨광릉부원군파묘역, 강동그린웨이, 양천허씨묘역)

 


' 강동구의 북쪽 지붕, 고덕산 나들이 '

▲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


 

봄이 아쉬움 속에 저물고 여름 제국이 서서히 이빨을 드러내던 5월의 끝 무렵, 강동구(江
東區) 암사동과 고덕동 지역을 찾았다.
선사시대 유적지의 성지(聖地)로 추앙을 받는 암사동(岩寺洞) 선사유적지(☞ 관련글 보러
가기)을 먼저 둘러보고 양지마을을 거쳐 고덕산으로 이동했다.

양지마을(양지말)은 암사3동에 자리한 시골 마을로 약 90호 정도가 살고 있다. 마을 북쪽
은 고덕산과 이어져 있고 남쪽과 동쪽, 서쪽은 밭과 주말농장 등의 경작지가 펼쳐져 있으
며 암사동 시내와도 거의 200~3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마을 집들은 상당수 전원주택
스타일로 다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과 뜨락을 갖추고 있어 마을에 들어서면 마치 교
외로 나온 듯 즐거운 기분을 안겨준다. 


▲  아리수로에서 바라본 양지마을 주변 전원(田園) 풍경


 

♠  암사3동에서 고덕산까지

▲  도시인의 안구를 제대로 씻겨주는 암사3동 전원 풍경

▲  암사3동 밭두렁

양지마을을 벗어나 시내와 시골의 경계를 이루는 암사동 북쪽 도로(아리수로)를 따라 동쪽으
로 이동했다. 길 남쪽에는 밋밋하게 솟은 키다리 아파트들이 몰려있고, 북쪽은 녹색 물결이
파도를 치는 경작지와 농가들로 시골 풍경을 이루어 서로 180도의 대비를 보인다.


▲  암사정수센터교차로의 전설, 보리밭의 황금 물결 (2012년)

잘익은 보리가 여름 바람에 살랑살랑 몸을 움직인다. 보리밭 남쪽에는 원두막까지 두어 전원
풍경의 패기를 드높였는데, 유감스럽게도 구리암사대교 접속도로 공사로 한 토막의 전설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  고덕산 강동아름숲길에서 바라본 암사동 강동롯데캐슬퍼스트아파트

암사정수센터교차로 동북쪽에 고덕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고덕산(
高德山)은 해발 90m의 작고 낮은 뫼로 강동구의 북쪽 지붕을 이루고 있다. 응봉이라 부르기도
하며, 암사동 선사유적지 동쪽에서 고덕천 서쪽에 이르는 동서로 길쭉한 산줄기로 북쪽은 한
강에 이르고, 남쪽은 암사동과 고덕동 주거지를 보듬고 있다.

아무리 작은 산이라고 해도 오래된 사연은 꼭 있는 법, 이곳은 고려 말 충신인 석탄 이양중(
石灘 李養中)이 숨어 살던 곳이라 전한다. 그는 고려수절신(高麗守節臣)의 하나로 형조참의(
刑曹參議)까지 지냈으나 태조 이성계가 1392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우자 미련없이 벼슬을
내던지고 고덕동으로 내려와 은거했다.
태조는 그를 여러 번 불렀으나 모두 거절을 당했으며, 친분이 있던 태종 이방원(李芳遠)까지
이곳까지 찾아와 설득을 했으나, 석탄은 평복 차림으로 직접 빚은 술을 대접하며 벼슬을 거절
했다. 하여 태종은 고려에 대해 지조를 지킨 그를 찬양하며 그 높은 덕을 기리고자 그가 살던
동네를 고덕리, 그가 살던 산을 고지봉(高志峰)이라 했다. 그 고지봉이 이후 이름이 바뀌면서
지금의 고덕산이 된다. 이후 석탄은 죽어서 고덕동에 묻혔다고 하나 그의 무덤은 어느 귀신이
잡아갔는지 아직 발견되지 못했다.

조선 초기에 활동했던 이극배는 고덕산 자락에 묻혔는데, 그의 후손들이 주변에 덩달아 묻히
면서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을 이루었다. 그 묘역의 일원이던 이시무는 고덕산 정상에
흙으로 단을 쌓고 국난평정을 기원했다고 전한다.


▲  강동아름숲길

아리수로와 맞닿은 암사정수사업소 동남쪽 숲을 강동아름숲이라 부른다. 이곳은 주민들이 가
꾸고 복원한 유서 깊은 숲으로 2010년 9월 광화문과 강남 등 서울 곳곳을 물바다로 만든 태풍
곤파스의 공격으로 이곳에 살던 1,000여 그루의 나무가 절단이 나는 사건이 있었다.
하여 강동구는 2012년 4월부터 숲 복원에 들어갔는데, 지역 주민 1,000여 명이 나무 심기에
참여하여 산벗나무 등 1,500그루를 심어 곤파스의 상처를 대부분 지워버렸다.

나무에는 그를 심거나 기증한 시민의 이름과 사연이 깃든 목걸이가 걸려있으며, 조성된지 얼
마되지 않아서 나무들 대부분은 작고 어리다. 허나 100년의 시간이 지나면 삼삼한 숲으로 변
화하여 여름 제국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것이다. 강동아름숲은 이곳 외에도 부근 샘터근린
공원에도 조성되어 있는데, 그곳 역시 곤파스로 피해를 본 것을 시민들 참여로 복원되었다.


▲  쉬지않고 이어지는 고덕산 서쪽 숲길

2000년 이후 도보길이 크게 유행을 타면서 천하 곳곳에 둘레길 같은 도보길이 닦여지고 있다.
강동구도 그 시류에 합류하여 2011년부터 도보길을 닦아 세상에 내놓았는데, 그 도보길의 이
름은 바로 강동그린웨이(Green Way), 즉 녹색 길이다.
그런데 순수한 우리 말도 많건만 왜 굳이 꼬부랑 영어로 기분 나쁘게 이름을 삼았는지 모르겠
다. 도보길을 만들어 지역 사람들의 마실을 크게 배려한 것은 좋으나 영어로 이름을 삼은 점
에서 적지 않은 옥의 티를 선사하니 역시 철밥통들의 한계는 어쩔 수 없나 보다.

강동그린웨이는 크게 2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1단계는 고덕산에서 시작해 샘터근린공원, 방
죽공원, 명일공원, 일자산, 둔굴을 거쳐 서하남나들목입구교차로까지 이어지며, 2단계는 서하
남나들목입구교차로에서 강동대로, 서울아산병원, 한강, 암사동유적을 거쳐 고덕산으로 이어
진다. 특히 고덕산에서 일자산을 거쳐 서하남나들목입구까지는 서울시의 야심작, 서울둘레길
3코스(고덕,일자산 코스)와도 겹친다.


▲  암사정수사업소 철조망과 나란히 이어진 고덕산 서쪽 숲길
철조망을 따라 걸으니 군작전지역이나 휴전선을 지키는 군인이 된 기분이다.


 

♠  조선 초기에 활동했던 이극배(李克培)와 그의 후손들이 묻힌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廣州李氏 廣陵府院君派 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0호

▲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극배 묘역

고덕산 서쪽 숲길을 거닐다보면 나무 사이로 무덤들이 복병처럼 모습을 비출 것이다. 암사정
수사업소가 보이는 서쪽에는 큰 비석을 머금은 비각도 있는데, 이들은 이극배를 중심으로 한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이다.
무덤은 죄다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묘역의 중심인 이극배 묘 앞에는 암사정수사업소가 철
조망을 치고 있어 마치 휴전선을 앞에 둔 무덤처럼 보인다. 그의 무덤 남쪽에는 고위 관료의
무덤만 지닐 수 있던 신도비와 비각이 있는데, 그 앞에 지나치게 짧은 간격으로 철조망이 쳐
져있어 앞 공간이 좁아 보인다.

※ 이극배(李克培, 1422~1495)는 누구인가?

묘역의 주인공, 이극배는 조선 초기 문신으로 광주이씨이다. 자는 겸보(謙甫), 호는 우봉(牛
峰)으로 이집(李集)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 어머니는 노신(盧
信)의 딸이다.

1447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해 진사(進士)가 되었고, 바로 그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
해 5등인 정과(正科)로 급제했다. 그렇게 관직에 진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
었고, 이어 감찰(監察)이 되었으며, 검찰관(檢察官)의 자격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왔는
데, 직무를 잘 수행한 공로로 병조(兵曹) 겸 좌랑(佐郞)이 되었다가 정랑(正郞)으로 승진되었
다.
1455년 세조(世祖)가 왕위에 오르는데 힘을 보탠 공로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녹훈(錄勳
)되었으며, 1457년 예조참의(禮曹參議) 겸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가선대부(嘉善
大夫)에 직과 광릉군(廣陵君)에 작위까지 받았다.

병조참판(兵曹參判)과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을 지내다가 1460년 두
만강 북쪽에서 세력을 꾸리던 모련위(毛燐衛)의 우량하(兀良哈)를 정벌하고자 신숙주(申叔舟)
의 종사로 출전해 큰 공을 세웠다.
이 전쟁을 경진년에 벌인 북정(北征)이라 하여 경진북정(庚辰北征)이라 하는데, 우량하의 우
두머리인 아비차(阿比車)가 조선에게 처단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며 두만강 유역을 공격했
다. 이에 뚜껑이 열린 세조는 신숙주를 함길도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로 임명해 8,000명의
군사를 주어 시비를 건 우량하 세력을 때려잡도록 했다.

조선군은 회령(會寧)과 두만강 북쪽 간도 지역으로 진출, 2차에 걸친 정벌 끝에 우량하 세력
의 고위급 인물 90여 명을 죽이고, 군인과 백성 430명을 포로로 잡거나 처단했다. 그리고 900
여 채의 집을 불태우며 정벌을 기분 좋게 마무리 지었다. 이때 간도(間島) 지역을 완전히 접
수하여 12세기 초반, 윤관(尹瓘)장군이 일구었던 동북9성의 옛 땅을 차지했으면 좋으련만 땅
에 대한 욕심도 별로 없고 그저 성리학 몰빵에 평화만 추구하던 조선에게 그런 기대는 무리였
다.
물론 조선이 상국(上國)으로 받들던 명나라의 눈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명나라의 영역은
동으로 요동(遼東)이 고작이었고, 압록강 중류 이북부터 두만강 이북까지는 여진족의 땅이었
으므로 여진족 소탕을 구실로 의지만 강했다면 충분히 간도 개척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조선에게 단단히 깨진 우랑하는 살려달라고 빌면서 조공을 바치며 조선의 그늘에 들어왔고 이
를 계기로 조선의 북쪽 변경은 약간이나마 확대되었다. 이때 두만강 안쪽에 있었으나 여진족
의 땅으로 남아있던 무산군(茂山郡) 지역을 점령해 조선의 땅으로 삼은 것이다. 또한 그곳을
개척하고자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 백성을 이주시켜 정착하게 했다.

북정을 마치고 돌아와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으며, 1462년 호조(戶曹)와 공조(工
曹)를 제외한 4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또한 평안도절도사(平安道節度使)가 되어 평안도의
인심을 살폈으며,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등급이 올라가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그
리고 1471년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책훈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1479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되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승진했고, 1481년부터
2년 동안 큰 기근이 일어나자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백성을 살폈다. 1485년에는 우의정(右議
政)에 오르고 1493년 최고직인 영의정(領議政)을 제수받았으나 노병을 구실로 거절했다. 이후
광릉부원군에 봉해져 최고의 관작을 누리다가 1495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
자 연산군은 익평(翼平)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는 도량이 크고 뜻과 생각이 확고했다. 그리고 경학(經學)을 근본을 삼아 도덕 정치를 실천
했고, 관리로써 필요한 지식과 능력, 처신에 뛰어나 약 50년 간 벼슬을 지내면서 영의정을 제
외한 왠만한 고위직은 두루 거쳤다. 게다가 세종부터 연산군(燕山君)까지 7명의 제왕을 섬겼
으니 그 기록은 황희(黃喜)를 능가한다. 또한 사사로이 손님을 맞거나 선물을 받지 않는 공정
함을 지녔고, 가무(歌舞)는 좋지 않다고 하여 멀리 했으며, 나라의 일을 의논할 때는 대체적
인 것에 힘쓰고 세세한 것은 거론하지 않았다고 한다.


▲  이극배 신도비를 품고 있는 맞배지붕 비각(碑閣)


▲  이극배 신도비(神道碑)

이극배 묘역 서쪽에 자리한 신도비는 1496년에
세워진 것으로 명필로 명성이 자자했던 예조판
서 겸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신종호(申從濩,
1456~1497)가 글을 썼다.
장대한 세월이 무심하게 달아놓은 검은 주근깨
가 자욱한 비석 피부에는 그의 일대기가 깨알
같이 적혀있고, 이수(螭首)에 새겨진 구름무늬
와 그 속에서 놀고 있는 용이 매우 정교하게
새겨져 두 눈에 적지 않은 자극을 준다. 거기
에 비문(碑文)의 서체와 정교한 석공기술은 15
세기 후반 비석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여러
가지로 가치가 높다.

원래는 비석만 덩그러니 있었으나 2009년 이후
든든하게 비각을 씌워 그를 지키고 있다.


▲  뱀이 이리저리 또아리를 튼 듯, 섬세하고 복잡한 신도비 이수의 위엄

▲  신도비에서 이극배 묘역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  이극배 묘역

이극배 묘역은 1495년에 조성되었다. 부인인 경주 최씨와 쌍분(雙墳)을 이루고 있으며, 무덤
의 주인을 알리는 묘비를 비롯해 상석(上席),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1쌍과 무인석
(武人石) 1쌍이 묘역을 지킨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체격이 우람하며, 묘비는 특이하게 이극배
의 봉분(封墳) 앞에만 세워져 있다.
그리고 묘역 뒷쪽에는 소나무들이 운치를 자아내고 있어 묘역의 분위기를 크게 북돋는다.


▲  묘역 좌측의 문인석과 무인석

▲  묘역 우측의 문인석과 무인석

묘역을 장엄하게 꾸미는 문인석과 무인석들은 다른 사대부의 석인보다 큰 편으로 이극배의 오
랜 명성을 가늠케 한다. 조선 초기 석인(石人)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이들은 문인석과 무
인석으로 구별은 되고 있지만 둘 다 복장이나 자세가 비슷하여 문인석 2쌍을 배열한 것 같다.
묘역과 가까운 석인은 500년의 장대한 세월에 지쳤는지 표정이 어둡고, 그 옆에 석인은 눈이
크게 충혈되어 재밌는 표정을 보인다. 세월의 검은 때가 점점이 입혀진 것을 빼면 대체로 피
부는 햐얗다.


▲  석인들의 뒷모습

▲  묘역 동쪽에 자리한 후손들의 묘역 (이수겸, 이세충, 이시무 등)

광릉부원군파 묘역 동쪽을 이루고 있는 이극배 후손들의 무덤은 9기 정도 된다. 가장 앞에 선
무덤은 이극배의 아들인 이수겸(李守謙)과 청주한씨 내외의 묘역으로 그는 공조좌랑(工曹佐郞
)을 지냈으나 공적이 즐비한 아비와 달리 딱히 두드러지는 인물은 아니다.

▲  이수겸 묘역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

▲  이세충 묘의 문인석

이수겸과 이세충 형제의 무덤 문인석은 이극배 묘역의 장대한 문인석과 달리 덩치가 매우 작
다. 문인석의 표정은 다소 우울해 보이는데 이수겸 묘 문인석은 관모(官帽)의 윗부분이 부러
졌다.


▲  이수겸 묘역 뒷쪽에 자리한 이세충(李世忠)의 묘
이세충은 이극배의 아들로 크게 벼슬은 못했으며, 나중에 도승지(都承旨)로
추증되었다.

▲  이시무(李時茂)와 이정립(李廷立) 묘역

이시무(?~1593)는 이극배의 현손으로 이건(李乾)의 아들이다. 자는 군우(君遇)로 1576년 별시
(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벼슬은 판결사(判決事)에 이르렀으며, 1593년에 병사했
다.

이정립(1556~1595)은 이시무의 아들이자 이수겸의 증손으로 어머니는 왕족인 의원정(義原正)
이억(李億)의 딸이다. 자는 자정(子政), 호는 계은(溪隱)으로 1576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8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갔다.

1582년 이이의 추천을 받아 이덕형(李德馨),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경연(經筵)에서 통감강목
(通鑑綱目)을 강의해 속칭 3학사의 하나로 칭송을 받았으며, 바로 그해 사관(史官)이 되고 예
조좌랑과 정언(正言)을 지냈다. 1583년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휴가를 받아 독서에 전념했
다.
이조좌랑 시절에는 호남어사(湖南御使)가 되어 백성을 구휼했고, 1589년에는 기축옥사(己丑獄
事)를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되어 선조(宣祖) 임금을 호종하다가 황해도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을 때 종묘사직(宗廟社稷
)의 위판(位版, 위패) 등이 개성(開城)에 남아있음을 알고 서둘러 선조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선조는 크게 발작하여 빨리 그것을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다.
이정립은 서둘러 개성으로 달려갔으나, 피난민들은 이미 왜군이 개성을 접수했으니 가봐야 소
용없다고 말렸다. 허나 이를 듣지 않고 개성으로 홀연단신으로 들어가 위판을 찾아 평양으로
가져오는 기염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1593년 부친 이시무가 죽자 부친상을 이유로 관직을 잠시 떠났고, 1594년 한성부좌윤(漢城府
佐尹)과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여 광림군(廣林君)에 봉해졌다. 1595년 세상을 뜨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 광주이씨광릉부원군파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산12-4외


▲  광릉부원군파 묘역 사이를 지나는 고덕산 산길
이극배묘역 남쪽에 광릉약수터가 있어 지나는 길손의 목을 축여준다.


 

♠  고덕산 마무리

▲  고덕산 서쪽 봉우리 밑 (계단 너머가 봉우리)

광릉부원군파묘역에서 산길을 마저 오르면 'T'자형으로 갈리는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계단길을 오르면 고덕산 서쪽 봉우리(86.3m)인데, 운동시설이 여럿 있어 이곳까지 올라온 나
그네를 심심치 않게 해준다. 허나 더 이상 길이 없는 막다른 곳으로 북쪽은 한강과 강변도로
가 바로 밑에 보이는 천길낭떠러지이다.


▲  태극기가 펄럭이는 고덕산 서쪽 봉우리(86.3m)

▲  고덕산 서쪽 봉우리에서 바라본 천하 (명당의 욕심은 이곳까지..?)

고덕산에서 그나마 하늘과 가까운 곳이긴 하지만 나무의 방해로 겨우 북쪽만 속시원히 바라보
인다. 차량들의 질주 소리로 정신이 없는 올림픽대로가 바로 밑에 보이며, 한강과 암사대교,
강일동 지역. 구리시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고덕산 능선길

고덕산은 광주이씨와 양천허씨 등의 문중 묘역과 사유지가 많다. 게다가 군사구역도 섞여 있
다보니 본의 아니게 속인들의 발길을 주저하게 하는 철조망이 많다. 광릉부원군파 묘역에서
서쪽 봉우리로 오르는 길도 대부분 사유지라 길의 통행을 두고 한때 말썽이 있었으나 광주이
씨 문중은 이극배의 후손답게 광릉부원군파 묘역을 흔쾌히 개방하고 묘역 사이를 가로지르는
산길까지 열어두어 고덕산이 지역 사람들의 포근한 뒷동산이 되도록 배려했다.


▲  가재울에서 한강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만난 전원 풍경

고덕산 서쪽 봉우리에서 능선길을 따라 동쪽으로 15분 정도 가면 높이가 좀 낮아지면서 4거리
가 나온다. 여기서 직진하면 능선길을 따라 고덕산 동쪽과 고덕천으로 이어지며, 오른쪽(남쪽
)은 가재울마을과 고덕동 시내로 나가는 길이다.
그리고 왼쪽은 올림픽대로로 이어지는데, 그 길로 접어들어 1굽이를 넘으니 온갖 채소들이 무
럭무럭 자라고 있는 밭두렁이 진하게 전원풍경을 드러내어 안구를 놀라게 한다. 밭두렁 한쪽
에는 농가도 하나 있는데, 그 주변에 농민 2~3명이 한참 밭을 메고 있었다.

그 밭두렁을 지나 작은 1굽이를 추가로 넘으면 바로 올림픽대로이다. 도로 너머로 한강과 산
책로가 보이나 그곳으로 인도해주는 지하도나 구름다리는 없다. 그러니 뚜벅이로 왔다면 미련
없이 왔던 길로 다시 돌아나가야 되며, 한강이 보고 싶다고 1분에 수백 대씩 지나가는 올림픽
도로를 무단횡단하는 것은 완전 미친 짓이다.

발길을 돌려 나오다가 길 서쪽에 양천허씨묘역을 알리는 안내문이 나를 손짓한다. 안내문 옆
에 나있는 작은 산길로 들어가면 묘역이 있다고 하는데, 오래된 묘역이긴 하지만 비지정문화
재라 그냥 지나칠까 했으나 고덕산이 준 보너스라 여기고 그 산길을 잡았다. 산길을 50m 정도
들어서니 양천허씨묘역이 나타난다.


▲  양천허씨(陽川許氏)묘역

고덕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양천허씨 묘역은 상우당 허종(尙友堂 許琮, 1434~1494)의 손자인
허순(許淳) 3대의 묘역이다. 묘역이 제법 명당(明堂)자리인 듯 싶은데, 한강이 흐르는 북쪽을
애타게 향하고 있으나 나무들은 그들의 뜻도 모른 채, 앞은 물론이고 묘역 주변을 꽁꽁 둘러
싸 숲 너머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양천허씨는 후삼국시대에 서울 가양동(加陽洞) 지역에 터를 잡고 살던 허선문
(許宣文)을 시조
로 한 집안으로 고려 태조(太祖)를 적극 도운 공으로 고을 이름인 양천<그 당시는 공암(孔巖)
>을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이 집안에서는 허종을 비롯하여 허균(許筠), 허준(許浚) 등 삼척동
자도 알만한 유명 인물이 많이 나왔다.


▲  묘역 제일 밑에 자리한 허운(許雲)과 영천이씨 부인의 합장묘(合葬墓)

허순의 아들인 허운의 묘가 묘역 제일 말단에 자리해 있다. 허운은 결성현감(結城縣監, 충남
홍성군 결성면)을 지낸 평범한 인물로 부인 영천이씨와 같이 묻혀 있는데, 무덤 밑에는 근래
에 만든 호석(護石)이 둘러져 있고, 16세기에 조성된 고색의 기운이 넘치는 묘비와 문인석이
묘역을 지킨다.

▲  표정이 밝아보이는 좌측 문인석

▲  우측 문인석


▲  장대한 세월에 의해 검게 타버린 허운 묘비(묘표)

▲  허순의 정부인이자 전처인 한산이씨의 묘
허순 묘와 허운 묘 사이에 자리한 무덤으로 묘비는 봉분 정면이 아닌 정면에서
다소 우측에 치우쳐져 있다. 부인묘라 그런지 묘비와 상석 외에
다른 석물은 없다. (호석은 근래에 두룬 것임)

▲  허순의 무덤 (제일 앞쪽, 바로 뒤에 무덤이 청송심씨 묘)

허순(許淳, 1485~1546)은 허종의 손자이자 허광(許曠, 1468~1534)의 아들이다. 그의 무덤 뒷
쪽에는 후처인 청송심씨의 무덤을 두었고, 앞에는 전처인 한산이씨의 무덤을 만들어 독특한
양식을 보여준다.

양천허씨 제양군공파의 시조인 허순은 정주목사(定州牧使)를 비롯해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
事)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부총관(副摠管)을 지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와 제양군(
齊陽君)에 봉해졌다. 묘역의 주인답게 묘역 중앙에 자리해 있으며, 검은 피부의 묘비와 문인
석이 오랜 세월을 말해준다.

▲  약간 인상을 지은 듯한 우측 문인석

▲  우측 문인석과 많이 닮아 보이는
좌측 문인석


▲  묘역 윗쪽에 자리한 허흔(許昕)과 부인 영월엄씨의 묘

허흔(1543~1622)의 묘는 허순 묘역에서 제일 윗쪽에 자리해 있다. 그는 허순의 손자이자 허운
의 아들로 어머니는 이구정(李龜楨)의 딸이다.

1579년 생원(生員)이 되고 1583년 별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감찰과 형조좌랑, 성균
관직강(成均館直講),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지냈다. 경상도도사(都使) 시절에는 의령
현감(宜寧縣監)인 정인홍(鄭仁弘)이 영송(迎送)에 무례하게 구므로 그 아전을 벌주니 백성들
의 칭송이 대단했다.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정여립(鄭汝立) 일당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감옥에 갇혔으나
혐의가 없어 풀려났으며, 임진왜란 때는 평안도도사로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절도사(節度使)
가 되어 왕실의 신주(神主)를 지켰다. 이후 정주목사가 되었고, 1615년 죽주부사(竹州府使,
안성 죽산)를 제수받았으나 나이가 칠순을 넘어 다른 사람에게 바로 넘어갔다.

광해군(光海君)의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이 조정의 여론을 휩쓸자 크게 상심하여 벼슬을
버렸으며, 1622년 79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는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공신에 녹훈되었다가
인조반정 때 공신 명단에서 떨려나기도 했다.

▲  허흔묘 상석 좌우에 자리한 조그만 동자석(童子石)
다른 무덤과 달리 문인석 대신 작은 동자석 1쌍을 두었다. 고된
세월에 많이도 지쳤는지 그들 표정에 주름이 묻어난다.

▲  허종과 허광 숭모비(崇慕碑)

묘역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는 허종과 허광(許曠)의 숭모비가 자손들의 무덤을 바라보
고 있다.
허종과 허광의 묘는 휴전선 북쪽인 경기도 장단군(長湍郡) 대강면 우근리에 있는데, 남한에
살고 있는 후손들이 성묘길이 막혀 가지를 못하자 상의 끝에 그들의 자손이 묻힌 이곳에 2005
년 숭모비를 세웠다. 남북분단의 비극이 빚어낸 안타까운 현실로 이곳은 양천허씨 제양군공파
를 비롯한 허종의 후손들이 애지중지하는 그들의 조촐한 성지가 되었다.

숭모비 정면 좌우에는 망주석(望柱石) 1쌍을 두었는데, 우측 것은 두툼하게 생긴 세호로 보이
는 동물이 새겨져 있고, 좌측 것은 기둥을 휘감은 용을 새겨 선조에 대한 자긍심과 정성을 보
였다. 허나 너무 이질적인 모습이라 쉽사리 적응이 가려 하질 않는다.

허순 3대의 묘역은 호석과 비석을 새로 한 것 외에는 16~17세기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
고 있어 광릉부원군 묘역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다. 마땅히 지방문화재로 삼아
보호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겨 지는데, 문제는 서울에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는 사대부(士
大夫)와 왕족의 묘역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경쟁이 생겨 어지간해서는 지정
문화재의 명함도 못내밀 정도이다. 게다가 문화재 지정을 환영하지 않는 후손들도 많다고 한
다. (묘역 소유자나 후손 문중, 지역에서 문화재 지정을 신청해야 됨)

* 양천허씨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고덕동 산93-2


▲  가재울 마을

양천허씨묘역을 둘러보고 고덕산 등산로와 만나는 고개를 지나면 전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가재울 마을이 나타난다.
가재울(가재골)은 가재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가재는 커녕 그들이 머물 시냇물도
찾기가 힘들 지경이다. 비록 푸른 숲과 밭두렁, 농장 등이 펼쳐져 있어도 시냇물은 고덕지구
개발로 말라버려 그것만은 제대로 재현을 못하고 있다.

가재울을 지나 고덕동 시내로 나와 이른 더위에 지친 몸을 달래고자 편의점에서 커피 음료를
사서 원샷으로 들이키니 그나마 좀 몸이 시원해진다. 마음 같아서는 고덕산에 둘러진 서울둘
레길을 따라 더 걷고 싶으나 이미 18시가 넘은 상태라 욕심을 곱게 버리고 나의 제자리로 돌
아갔다.

이렇게 하여 5월에 벌린 강동구 암사동/고덕동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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듬직하게 생긴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 인왕산 나들이 (인왕산길, 한양도성, 치마바위, 기차바위)

 


~~~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 인왕산 나들이 ~~~

▲  인왕산 (가운데 봉우리가 정상)


 

♠  인왕산(仁王山) 입문

▲  인왕산 만수천약수터

봄이 한참 무르익던 4월의 끝 무렵,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이자 내 즐
겨찾기 뫼의 하나인 인왕산을 찾았다.
인왕산은 10대 시절 선바위 답사를 시작으로 50번 넘게 인연을 지었는데, 낮 뿐만 아니라 야
간(19시 이후)에도 적지 않게 올라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나의 마음을 비추고 있다. 특히
인왕산에서 바라보는 서울 도심 야경(夜景)은 아주 일품으로 꼽힌다.

경복궁역(3호선)에서 출발하여 인왕산길로 들어서 창의문(彰義門, 자하문) 방면으로 가다보면
인왕천약수터로 인도하는 길이 살짝 손짓을 한다. 이 코스는 인왕산에서 가장 잘나가는 약수
로 추앙을 받던 인왕천약수터를 거쳐 인왕산 능선(한양도성)으로 이어지는데 길이 좀 각박하
다. 하여 그 코스는 쿨하게 통과하고 다음에 나오는 석굴암입구(수성동계곡 상류)에서 인왕산
의 깊은 품으로 들어섰다.

석굴암입구로 들어서면 바로 조촐한 모습의 정자가 나오면서 길이 2갈래로 갈리는데 직진하면
이름도 꽤 낯이 익은 석굴암(石窟庵)이란 석굴 암자가 나온다. 허나 그곳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사실상 막혀있어 정자 옆 북쪽 산길로 올라가야 된다. (석굴암에서 정상으로 통하는 길
이 있긴 하나 통행 금지임)
석굴암입구 정자에서 북쪽 산길을 5분 정도 오르면 160m 고지에 자리한 만수천약수터가 마중
을 한다. 인왕산에 무수히 널린 약수터의 하나로 부적합 빨간줄과 양호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있어 앞날이 좀 어려워 보인다. 물론 샘터 주변을 계속 관리해주고 비도 적당량 내려주면 청
색 신호가 뜨는 것은 시간문제이나 날씨 변덕도 심하고 서울 도심이 바로 코앞이라 인왕산 지
하수에도 비상이 걸렸다.

약수터 주변은 나무가 삼삼하여 하늘이란 단어를 거의 잊게 할 정도로 덩치가 큰 바위들이 주
변에 여럿 포진해 있어 약수터의 잔잔한 장식물이 되어주고 있으며, 간단한 체육시설과 의자
등이 놓여져 있어 잠시 두 다리를 쉬어가도록 배려했다.


▲  만수천약수터 주변 풍경

큰 바위 밑에는 조그만 자연산 동굴이 있다. 지금은 들어가지 못하게 철창을 씌웠지만 예전에
는 기도나 굿 장소로 쓰였다. 인왕산이 잘생긴 바위가 많고 기가 센 산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
배 맛을 알던 시절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이자 굿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굴 앞을
지나니 동굴이 내뱉은 약간 시원한 바람이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  만수천약수터 뒤쪽 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서촌과 경복궁, 종로)

만수천약수터에서 갑자기 흥분한 산길을 7~8분 정도 오르면 능선(만수천약수터 뒤쪽 능선)에
이른다. 이제부터는 숲속에 가려진 산길이 아닌 천하를 굽어보며 걷는 능선길이 시작되는 것
이다. 그 길을 10분 정도 가면 한양도성이 흐르는 성곽길(인왕산 주능선)과 만나게 된다.

성곽길과 만나는 갈림길에서 오른쪽(동쪽)으로 내려가면 창의문과 부암동(付岩洞)으로 이어지
며, 왼쪽(서쪽)은 인왕산 정상이다. 우리야 정상이 목적이니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성곽길은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경사가 슬금슬금 각박해져 호흡마저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런
길을 10여 분 오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성밖 계단을 내려가면 기차바위 능선이며, 성
곽길을 고수하면 정상이다. 이미 인왕산의 어깨까지 올라탄 상태라 서울 시내가 고루고루 내
려다보여 마치 하늘을 배회하는 큰 새의 등에 올라탄 기분이며,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품질도 더욱 올라간다.


▲  인왕산의 허리를 따라 흘러가는 한양도성(漢陽都城) - 사적 10호

▲  인왕산 북쪽 능선 성곽길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콧대가 높은 천하 굴지의 대도시 서울이 내 발 밑에 펼쳐져 있다. 마치 이 도시가
나의 세상이 된 듯 거만한 착각이 피어올라 잠시나마 기분이 즐거워진다.
허나 현실은 마음 편히 드러누울 땅도 제대로 없다는 것.

▲  정상 북쪽 성곽길 - 저 바위 꼭대기가 인왕산 정상이다.

기차바위로 인도하는 갈림길에서 성곽길은 잠시 진정을 되찾으나 정상을 코 앞에 두고 다시금
격한 흥분을 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존심을 곱게 접고 묵묵히 길을 임하면 좀처럼 닿
지 않을 것 같던 인왕산 정상에 도달하게 된다.


▲  애틋한 사랑 이야기와 어둠의 역사를 안고 있는 인왕산 치마바위

인왕산 정상 동쪽에 붙어있는 커다란 바위는 인왕산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치마바위이다. 병
풍처럼 넓어서 병풍바위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 바위에는 중종과 단경왕후 신씨의 슬픈 사연
이 깃들여져 있다. 그 사연은 서울 장안에서 꽤 알려진 이야기로 내용은 대략 이렇다.

조선 11대 군주인 중종(中宗)의 첫 부인은 신수근(愼守勤, 1450~1506)의 딸인 단경왕후(端敬
王后) 신씨(1487~1557)이다.
1506년 박원종(朴元宗)과 성희안(成希顔), 홍경주(洪景舟) 등이 반란을 일으켜 연산군(燕山君
)을 폐위시키고 그의 이복 동생인 진성대군을 익선관(翼善冠)을 씌운 채로 급히 왕위에 올리
니 그가 곧 중종이다. <이 사건을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고 부름>
단경왕후의 아비인 신수근은 반란파에 협조하지 않아 그 형제가 모두 살해되고 말았다. 그들
에 의해 얼떨결에 왕이 된 중종은 부인을 지키고자 재빨리 왕후로 봉했으나 반란파들은 역적
의 딸을 그냥 둘 수 없다며 당장 내쫓을 것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왕후나 그 소
생 왕자에게 보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종은 그들을 달래고자 반정 때 몰수한 연산군 측근과 반란 비협조 인물들의 재산을 나눠주
고 기녀(妓女) 300여 명을 주며 회유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유자광(柳子光)은 중종의
생모이자 대비(大妃)인 정현왕후(貞顯王后)를 찾아가
'중전 신씨를 쫓아내지 않으면 임금을 내쫓겠습니다!!'

협박을 하기도 했다. 이미 반란으로 왕을 한번 갈아치웠으니 그들에게는 그런 것은 일도 아니
었다.
상황이 점점 고통스럽게 변해가자 신씨는 울면서
'소첩이 전하(殿下)를 위해 나가겠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전하에 대한 변치 않은 마음으로 인
왕산 바위에 치마를 걸어두겠사오니. 상황이 좋아지면 꼭 찾아오세요 ㅠㅠ'


그렇게 말하고는 스스로 경복궁을 나가 옛날에 살았던 인왕산 동쪽 본가에 들어갔다. 그리고
는 매일마다 인왕산에 올라 중종과 같이 살던 시절, 자주 입었던 붉은 치마를 바위에 널었다.
그 소식을 들은 중종은 수시로 경회루(慶會樓)에 올라 치마바위를 바라보며 그녀에 대한 생각
에 눈시울을 붉혔다.
반란파들은 그 꼴이 보기 싫어 서둘러 새 왕비를 맞을 것을 요구했고, 그래서 장경왕후(章敬
王后) 윤씨가 새 왕비로 들어오게 된다. 또한 10여 명의 후궁까지 맞아들이면서 신씨에 대한
추억과 그녀의 존재감은 완전히 흐릿해진다.

신씨는 왕이 사직단(社稷壇)에 사직대제(社稷大祭)를 지내러 올 때를 기다려 말죽을 쑤어 사
직단 정문에서 기다렸다. 그래서 왕의 말에게 직접 먹이는 등 남편에 대한 애정을 표했지만
결국 남편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1557년 70세의 나이로 소생도 없이 한 많은 삶을 마감
하고 만다. (중종은 1544년 56세의 나이로 승하함)
신씨가 죽자 세상에서는 치마를 널었던 병풍바위를 치마바위라 불렀으며, 소년왕 단종(端宗)
의 부인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와 더불어 왕실 여인들의 '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 토
막으로 두고두고 우려먹으며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다.

치마바위 밑에는 20세기에 조성된 미륵마애불이 숨겨져 있으며, 바위 피부에는 옥의 티로 황
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와 왜왕 만세 등의 바위글씨가 요란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들 글씨
는 1939년 가을 '대일본청년단대회'가 열린 것을 기념하고자 왜정과 친일 패거리들이 지원하
여 새겨진 것으로 서울 장안 어디에서든 다 보이는 바위라 하여 이곳에 새겼다고 한다. 글씨
는 해방 이후에 죄다 쪼아 지웠으나 그 흔적은 조금씩 남아 어둠의 시절의 쓰라린 한 단면을
보여준다.


 

♠  인왕산 정상부

▲  정상 동쪽에서 바라본 인왕산 북쪽 자락과 북악산(백악산)
왼쪽에 보이는 바위 능선이 기차바위이다.

▲  인왕산 정상 남쪽
인왕산 정상은 오로지 남쪽으로만 진입이 가능하다. 서쪽은 성곽 바깥이고
동쪽과 북쪽은 꽤 각박한 낭떠러지기 때문이다.


인왕산은 해발 338m(또는 340m)의 바위 봉우리로 북악산(342m)과 낙산(洛山), 남산과 더불어
서울을 안쪽으로 둘러싼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다.
동북쪽으로 자하문고개를 경계로 북악산(백악산)과 이어져있고 서쪽은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안산(鞍山, 295.9m)과 마주보고 있으며, 북쪽은 홍제천(弘濟川)을 통해 북한산(삼각산)과 이
어진다.
인왕산의 다른 이름으로 필운산(弼雲山)이란 명칭이 있는데, 이는 제왕이 있는 궁궐 오른쪽<
제왕이 정전(正殿)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에 있어 '군주는 오른쪽에서 모신다'
는 의미이다. 배화여고 뒷쪽에 있던 이항복(李恒福)의 집 이름인 필운대(弼雲臺)도 여기서 비
롯되었다.


경복궁 서쪽인 서촌(西村, 웃대)과 사직동, 의주로, 부암동, 홍제동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누
워있으나 동서의 폭이 좁아 남북과 달리 경사가 꽤 가파르다. 시내에서 볼 때는 산세가 작아
서 금방이면 올라갈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착시현상을 노린 인왕산의 속임수이다. 그의 품에
들어가보면 보기와 달리 넓고 장대한 모습에 놀라게 된다.
사직공원(사직단)과 독립문역에서 인왕산 정상까지 40~50분 정도 걸리며, 정상을 찍고 홍제동
환희사(歡喜寺)나 개미마을, 홍지문, 창의문 쪽으로 내려가면 보통 2시간 내외면 충분하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견고한 돌산으로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능선을 따라 선바위와 치마바위,
모자바위, 범바위, 기차바위 등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걸쭉한 바위들이 산의 장대
한 경관을 돕고 있으며, 정상을 이루는 바위 봉우리는 북악산에 버금갈 정도로 웅장해 우백호
에 걸맞는 위엄을 드러낸다. 18세기에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명성을 날린 겸재 정선(鄭敾
)은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비롯해 인왕산의 주요 명소와 장면을 그림에 담아
인왕산을 극찬했다.

돌산이다보니 물이 귀할 것처럼 보이지만 약수터가 제법 많아 곳곳에서 나그네의 목을 축여준
다. 하지만 산의 폭이 좁고 경사가 급하여 속시원한 계곡은 거의 없으며, 그나마 개발의 칼질
과 급격한 도시화로 대부분 사라져 수성동(水聲洞)계곡과 큰절골(환희사계곡)만 그나마 좀 남
아있고 청풍계(淸風溪)와 청계동천(淸溪洞天), 백운동천(白雲洞天) 등은 일부만 살아있다.


▲  인왕산 정상 바위
저 바위가 인왕산의 실질적인 정상으로 높이는 1.5m 정도 된다. 바위의 남쪽과
북쪽 피부에는 움푹 패여 하얗게 서린 곳이 많은데, 이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오가면서 생긴 상처이다.


인왕산은 1968년 1.21사건(김신조 공비 패거리 침투 사건)으로 정상 주변과 성곽 능선이 폐쇄
되면서 선바위와 환희사 주변, 인왕산길을 비롯한 산 밑도리만 겨우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러
다가 김영삼 정권 때 다시 속세에 개방되었다. 허나 서울 도심을 지키는 요충지라 군부대 시
설이 성곽 능선과 산자락 곳곳에 남아있어 금지된 땅이 다소 있으며, 사진을 찍을 때도 약간
주의를 기울어야 된다.
또한 매주 월요일은 인왕산 정상 주변과 성곽 능선(인왕산 주능선)은 입산이 통제되며, 월요
일이 휴일인 경우에는 다음 날 통제된다. 다만 성곽 능선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제한이 없
다.

인왕산에는 많은 명소가 있는데, 선바위와 국사당(國師堂), 치마바위, 장안 제일의 경승지였
던 수성동계곡, 벽화로 유명해진 홍제동(弘濟洞) 개미마을, 석굴사원인 석굴암(石窟庵), 지방
문화재 불상을 2기나 간직한 환희사 등이 있다. 또한 국사당과 선바위 일대는 토속신앙과 무
속(巫俗), 불교가 어우러진 이색 현장으로 서울 지역 무속신앙의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600년 동안 서울의 우백호로 있다보니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도 많이 서려있다. 태조 때 서울
을 도읍으로 정하고 궁궐 자리를 정할 때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북악산
과 남산을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로 삼자고 했다. 허나 정도전(鄭道傳)은
'옛부터 제왕은 남면(南面)을 하여 천하를 다스렸지 동향을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태클을 걸면서 무학의 뜻은 꺾이고 만다.
이에 발끈한 무학은
'내 주장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에 다시 도읍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탄식했다고 한다.
또한 신라 후기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었다고 전하는 '산수비기(山水秘記)'에는
'도읍을 정할 때 승려의 말을 들으면 국가가 기운이 연장될 것이나 만일 정씨 성을 가진 사람
의 말을 들으면 5대가 지나지 않아서 혁명이 일어나고, 200년 만에 큰 난리가 터져 백성이 어
육이 될 것이다'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과연 5대(정확히는 6대) 만에 세조(世祖)가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
년)을 일으켜 조정을 갈아 엎었고, 딱 200년 만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이 내용은 19세기에 편
찬된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실려있는데 아마도 불교를 배척한 정도전과 사대부의 억불숭유 정
책을 신랄하게 까고자 불교 쪽에서 그럴싸하게 지은 전설을 그대로 인용한 듯 싶다.


▲  성곽과 벼랑으로 완전히 막혀있는 정상 북쪽 성곽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주역이던 이괄(李适)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반란
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했다. 이에 인조는 서인 패거리를 이끌고 급히 충청도 공주(公州)로 줄
행랑을 쳤다.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은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치고자 인왕산 서쪽 안산
에 진을 치자 도성을 점령하여 잔뜩 자만감에 빠진 이괄은 도성 사람들에게
'내가 저것들을 단숨에 때려잡을 것이니 나와서 싸움이나 구경하도록'
말하며 자신감을 강하게 내비췄다. 그리고 군사<임진왜란 때 투항한 항왜(降倭)들이 많았음>
들을 이끌고 인왕산 서쪽으로 나가 장만의 군사와 대치하니 도성 백성들은 그 싸움을 구경하
고자 인왕산에 잔뜩 모였다. 그 시절 백성들은 하얀 옷을 많이 입었는데, 산을 가득 메운 그
들로 인해 산이 마치 하얀 백로처럼 보였다고 한다.

관군을 맞은 이괄은 처음에는 여유롭게 전쟁을 진행했으나 난데없이 불어닥친 강풍에 기가 꺾
여 장만에게 몰리고 말았다. 하여 서둘러 도성으로 도망쳤으나 백성들이 성문을 걸어잠구면서
결국 도성을 버리고 한강을 건너 이천, 여주로 줄행랑을 쳤다. 허나 부하에게 살해되어 결국
목없는 귀신이 되었고, 살아남은 이괄의 부하들은 목을 붙잡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후금(
後金)으로 도망가 청태종(淸太宗)에게 조선을 치라고 들쑤셨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정묘호란
(丁卯胡亂)이다.

끝으로 인왕산은 호랑이들이 많았는데, 무서운 정도는 천하 제일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궁궐
에 수시로 나타나 난리를 치기 일쑤였고, 심지어 종묘(宗廟)까지 침입했다. 백성들의 피해도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 머리는 인왕산 호랑이 같다'란 말도 나
왔으니 인왕산은 그야말로 조선 호랑이의 성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호랑이는 온데간데 없고
그들의 먼 친척인 고양이만 종종 보일 뿐이다.
또한 북악산과 인왕산을 비롯한 서울 호랑이들은 지방 호랑이와 달리 곶감 따위는 눈도 꿈쩍
안했다고 한다. 그들이 무서워한 것은 다름 아닌 수진궁(壽進宮) 귀신이었다고 하는데, 다음
과 같은 재미난 전설이 걸쭉하게 전해온다.

옛날에 북악산(혹은 인왕산) 호랑이가 먹을거리를 찾으러 경복궁에서 안국동으로 넘어가는 송
현(松峴)고개로 마실을 나왔다. 마침 어느 집에서 애기가 징징거리고 우는데, 그 어머니가
'문 앞에 호랑이가 왔어. 뚝!'
허나 애기는 계속 징징거린다. 그러자
'애기야 곶감 줄께. 뚝!'
곶감이란 말에 호랑이는 잠시 염통이 쫄깃해졌으나 역시 울음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곶감의 시대는 이제 갔구나. 이제 흔쾌히 식사나 해야겠다'
환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수진궁 귀신이닷!!'
외치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물을 뚝 그쳤다는 것이다. 그러자 호랑이가 지례 겁을 먹으

'엥 수진궁 귀신..? 이건 말도 안돼'
꼬리를 접고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는
속담이 생긴 것이다. (참고로 수진궁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조선 왕족의 사당임)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북악산과 인왕산 북쪽 능선

인왕산 정상에 올라서면 서울 도심과 서촌(웃대)를 비롯하여 서대문구, 마포구, 은평구, 여의
도, 영등포구, 강서 지역, 동작구, 강남 지역, 동대문구, 성북구, 광진구, 강동 지역, 국립현
충원, 관악산, 삼성산, 호암산, 우면산, 아차산 등 많은 존재들이 고루고루 시야에 들어온다.
높이는 338m(340m)에 불과하나 조망만큼은 한라산과 백두산이 부럽지 않다.
또한 사방이 모두 트여있어 해돋이와 일몰 풍경이 진국이며, 남산(南山)과 함께 서울 도심의
새해 해돋이 명소로 유명하다. 또한 도심이 바로 밑이라 여기서 바라보는 도심 야경 맛이 아
주 좋다. (서울 도심 야경은 인왕산을 제일로 쳐줌)

* 인왕산 정상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부암동, 서대문구 홍제동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촌(웃대)과 서울 도심.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서울의 장대함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와 남산(가운데 솟은 산)
저 멀리 관악산과 삼성산, 우면산, 대모산, 남한산까지 싹 시야에 잡힌다.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안산과 서대문구, 마포구, 여의도,
영등포, 강서 지역


 

♠  인왕산 기차바위

▲  기차바위 능선

인왕산 정상에서 잠시 머물다가 기차바위 갈림길로 다시 내려와 성곽길을 버리고 기차바위로
방향을 잡았다. 철계단을 타고 성 밖으로 내려가 북쪽으로 가면 인왕산의 으뜸 바위로 추앙을
받는 기차바위가 모습을 드러낸다.


▲  인왕산의 북쪽 하늘길, 기차바위 능선 (북쪽 방향)

인왕산 바위의 갑(甲)으로 칭송을 받는 기차바위는 기차처럼 길쭉한 바위 능선이다. 그렇다고
기차처럼 생기지는 않았으며, 그저 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 것 같다.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래에도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이런 구절이 있다.
그만큼 기차는 길쭉한 존재의 대명사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기차바위 능선은 약 300m 정도로 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거닐면 실감이 덜하겠지만
세검정초교에서 북악산 백사실(백사골)로 올라가는 길이나 부암동 산복길(백석동길)에서 바라
보면 꽤 두툼한 바위 능선임을 알 수 있다. 사방이 확 트여있어 조망은 1급이나 단 양쪽이 일
체의 자비도 없는 낭떠러지이니 난간을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한다.


▲  기차바위 능선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시내

가까이로 북악산(백악산)과 서촌(웃대), 경복궁, 서울 도심부부터 멀리 아차산~용마산~망우산
산줄기, 강동구 지역, 남양주와 하남, 성남 지역 산줄기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와 눈 속에
서 아주 살살 녹는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평창동, 북한산(삼각산) 남쪽 산줄기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로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감싸인 부암
동과 신영동, 평창동(平倉洞), 북악산 북쪽 자락과 북한산 남쪽 산줄기가 장쾌하게 시야에 들
어온다. 이렇게 보니 서울의 한복판이 아닌 산악 지방의 소도시를 보는 기분인데, 뫼를 오르
는 재미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조망 맛을 보기 위함이다.


▲  기차바위 북쪽에서 바라본 인왕산 정상(왼쪽)과 안산(鞍山)

▲  기차바위에서 홍제동, 환희사로 내려가는 산길

▲  옥동약수터

기차바위 능선을 지나 북쪽 갈림길에서 홍제동으로 인도하는 서쪽 길로 내려갔다. 중간에 다
시 왼쪽으로 빠져 환희사 방면으로 내려가다가 옥동약수터를 만났는데, 물이 실타래보다 적게
나오고 수질 또한 부적합 빨간 딱지를 받은 상태라 손을 대지 않았다. 마침 약수터에 있던 노
인이
'약수터 주변 정비를 안해서 그렇지, 마셔도 괜찮다. 난 이 물을 20년 동안 마셨다'
며 괜찮다고 그런다. 허나 부적합이란 단어가 계속 마음에 걸려 끝내 마시지는 않았다.

노인의 말로는 이곳을 관리하는 동네 노인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다들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
거나 생명이 다해 거의 해체되어 관리하는 이들이 없다고 한다. 왕년에는 인왕산의 제일 가는
약수임을 자랑했으나 지금은 많이 초췌해졌다면서 서대문구청에 지속적으로 민원을 넣었지만
철밥통에 걸맞게 앵무새처럼 알겠다고만 할 뿐, 약수터 관리에 그리 신경을 안쓴다고 한다.


▲  옥동약수터 주변 동굴

옥동약수터에서 잠시 두 발을 쉬었다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 가다보니 또 다른 약수터를 만났
는데, 그 약수터는 아예 물이 말라버렸다. 약수터 주변에는 운동시설과 의자들이 있고 그들
뒤로 조그만 자연산 동굴이 있는데, 그곳도 기도와 무속 행위로 말썽이 많자 아예 철조망으로
입을 막아버렸다, 굴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산산이 불어와 몸을 꼬질꼬질하게 뒤덮던 땀방울을
제대로 단죄한다.

동굴을 뒤로하고 5분 남짓 내려가니 인왕산 서쪽 자락에 안긴 조그만 비구니 산사, 환희사(歡
喜寺)가 모습을 비춘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상 2개를 간직한 20세기 현대사찰로 오랜만에
발을 들일까 했으나 이미 18시가 넘어서 쿨하게 통과했다. 환희사는 18시 정도가 되면 대문을
걸어잠군다.
속세애서 절까지는 차량이 마음껏 바퀴를 굴리게끔 길이 닦여져있는데, 그 길을 5분 정도 내
려가면 인왕산을 건방지게 가리고 선 홍제원현대아파트와 인왕산현대아파트가 나온다. 이제
완전히 속세로 내려온 것이다. 두 아파트 사이를 가르는 통일로34길을 내려가니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인 의주로(義州路)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찾은 인왕산 나들이는 다음을 기약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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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9월 2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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