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117건

  1. 2022.02.09 서귀포 제주올레길8코스, 대포주상절리대, 대포연대, 약천사 겨울 나들이
  2. 2022.02.01 서울 도심에 숨겨진 달달한 뒷길, 창덕궁 후원 뒷길 (후원 돌담길, 옥류정, 명륜동 장면가옥) 1
  3. 2022.01.21 호랑이해 기념) 호랑이를 닮은 서울의 숨겨진 바위 명산, 호암산 (석구상, 한우물, 호암산성, 호암산폭포, 서울둘레길5코스)
  4. 2022.01.09 서울 도심의 영원한 남주작이자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남산야외식물원, 남산공원길, 남산팔각정, 한양도성)
  5. 2022.01.02 한겨울 산사 나들이, 안양 삼성산 삼막사 ~~~ (삼막사 남녀근석, 안양예술공원, 석수동 석실분)
  6. 2021.12.27 늦가을 산사 나들이 ~ 우이동 윗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도선사 (붙임바위, 우이동계곡)
  7. 2021.12.18 대전의 첩첩한 남쪽 지붕을 거닐다. 만인산~만인산자연휴양림 (태조대왕태실, 대전둘레산길, 대전천발원지)
  8. 2021.12.08 조선시대 교육의 중심지이자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깃든 곳, 성균관 늦가을 나들이 (문묘 은행나무, 성균관대성전 은행나무)
  9. 2021.02.07 서울의 상큼한 동쪽 지붕, 아차산~서울둘레길 나들이 (상부암 석보살입상,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온달샘석탑)
  10. 2021.01.25 북촌에서 2번째로 큰 고래등 기와집, 가회동 백인제가옥

서귀포 제주올레길8코스, 대포주상절리대, 대포연대, 약천사 겨울 나들이

서귀포 대포주상절리대, 제주올레길8코스, 약천사



' 서귀포 겨울 나들이 '
(대포 주상절리대, 제주올레길8코스, 약천사)

중문, 대포 해안 주상절리대

▲  대포 주상절리대 (중문, 대포해안 주상절리대)

약천사 대적광전 대포연대

▲  약천사 대적광전의 뒷모습

▲  대포연대



묵은 해가 저물고 새해가 열리던 1월의 첫 무렵,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인 제주도(濟
州島)를 찾았다.

하늘을 타고 오랜만에 발을 들인 제주도에서 3일을 머물며 여로(旅路)를 듬뿍 살찌웠는
데, 첫날에는 제주시 서부 지역(외도, 애월, 한림, 한경)을 돌았고, 둘째 날은 서귀포(
西歸浦) 중문 지역으로 들어서 천제연폭포(天帝淵瀑布)를 시작으로 제주올레길8코스(월
평~대평포구, 19.6km)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했다. 본글은 제주올레길8코스의 일원인 대
포주상절리대 서쪽에서부터 시작된다. (대포 주상절리대 이전과 약천사 이후 내용은 별
도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음)


♠  제주올레길8코스 대포해안 주상절리대(柱狀節理帶) 주변

▲  대포 주상절리대 서쪽 산책로 (제주올레길8코스)

제주올레길8코스 대포 주상절리대 서쪽 구간은 도시 속의 큰 공원(ex. 여의도공원)처럼 길이
잘 닦여져 있다. 숲길과 쉼터, 온갖 소소한 볼거리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고, 남쪽에는 늘 바
다가 함께하고 있으며, 북쪽에는 제주부영호텔앤리조트(Hotel and Resort)와 제주국제컨벤션
센터가 넓게 자리잡고 있다.


▲  남국(南國)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산책로 (올레길8코스)
뾰족한 잎을 지닌 야자수가 길게 가로수를 형성하며 따스한 남쪽 풍경을 진하게
그려낸다. 바다 건너 북쪽은 겨울 제국(帝國)의 핍박으로 아주 죽을 맛인데
여기는 몸에 걸친 잠바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덜 쌀쌀하다.

▲  옹기종기 모인 선인장들

제주도는 이 땅에서 유일하게 선인장이 뿌리를 내린 곳이다. 제주도 선인장의 고향은 한림읍
월령리로 그곳 선인장이 사람과 자연의 의해 제주도 전역으로 세력을 넓혔다. 이들의 원산지
는 이역만리 떨어진 멕시코로 그 씨앗이 바다를 타고 무려 여기까지 들어와 싹을 틔운 것으로
보고 있다.
아무리 해류를 잘타더라도 엄청난 시간이 필요한 머나먼 거리인데 그들의 강인한 근성과 이곳
으로 그들을 인도한 대자연 형님의 조화에 적지않은 경외심이 솟구친다.

▲  올레길8코스에서 만난 돌기둥 장식물과
붉은 피부의 항아리들

▲  슬슬 모습을 비추는 지삿개
대포해안 주상절리대


올레길8코스가 지나는 지삿개 해변에는 '대포 주상절리대(대포 주상절리)'라 불리는 명품급의
해안 벼랑이 깃들여져 있다.
요즘은 '대포 주상절리대'로 속세에 너무 알려져 이곳의 원래 이름은 '지삿개'가 거의 잊혀질
정도인데, 칼로 싹둑 다듬은 듯 4~6각형 형태의 돌기둥과 돌무늬가 계단처럼 늘어서 신비로운
경관을 자아내고 있다. 이들은 한라산(漢拏山) 등이 흥분하여 뿜어낸 용암이 이곳으로 내려와
바다와 만나면서 급히 냉각되어 형성된 것인데, 반대 성향을 지닌 뜨거운 용암과 차가운 성질
의 바닷물이 격하게 부딪쳐서 이루어진 현장이다.
현무암질(玄武巖質) 용암류에서 나타나는 수직 절리(節理)로 높이는 10~40m, 해변 길이는 1km
정도이다. 허나 소소하게 펼쳐진 주상절리까지 포함하면 약 3.5km로 이 땅의 주상절리 중 최
대 규모를 자랑한다. 현무암 용암이 굳어질 때 일어나는 지질현상과 해식작용에 의한 해안지
형의 발달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고마운 지질자원으로 그 가치가 뛰어나 '중문,대포해안 주
상절리대
'란 이름으로 국가 천연기념물 443호로 지정되었다.

그 길쭉한 주상절리대 해안 중의 가장 핵심부가 이곳 지삿개 해변이다. 예전에는 해안과 벼랑
밑도리까지 접근이 가능했으나 천연기념물의 감투를 받은 이후에는 접근이 통제되었으며, 지
정된 길로만 고분고분 움직여야 된다. 허나 그 길만 따라가도 주상절리대의 멋진 경관을 충분
히 누릴 수 있다.
서귀포시는 지싯개 해변 주변에 담장을 둘렀는데, 가파른 벼랑으로 이루어진 서쪽 해안과 동
쪽 해안은 담장을 두지 않고 그 벼랑 자체로 경계선을 삼았다. 그리고 동쪽과 서쪽에 출입문
을 내어 바로 북쪽에 지나가는 올레길8코스와 연결을 시켰다.
허나 주상절리대 내부를 유료의 공간으로 삼아 수입을 챙기고 있다는 함정이 있다. 입장료는
어른 기준으로 무려 2,000원, 대자연이 오랫동안 부린 재주로 서귀포시가 호주머니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쿨하게 무료 공간으로 바꾸거나 입장료 1,000원이 적당해 보이는
데, 싹수가 있는 곳에 담장을 두르고 대놓고 입장료를 받아먹는 행태가 영 좋아보이지는 않는
다.

서귀포시의 지나친 상업주의 본능에 크게 혀를 차며 그냥 지나칠까 했으나 고양이가 생선가게
를 그냥 못지나친다고 한번 둘러보기로 했다.

* 대포주상절리대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 2768-1, 2769 (이어도로 36-30,
  ☎ 064-738-1521) 


▲  인공이 가해진 듯, 신비로운 모습의 대포 주상절리대
사람이 빚은 것보다는 자연산이 훨씬 우수하고 섬세하다.

▲  거친 물놀이를 즐기는 주상절리대 밑 부분

마치 불규칙한 계단처럼 켜켜히 들어선 돌기둥들, 그 기둥이나 벼랑에 부딪친 파도는 아주 심
할 때는 높이 20m까지 솟구친다고 한다. 허나 내가 갔을 때는 절리대의 밑도리만 살짝 어루만
지는 정도로 순한 모습을 보였다.
이곳 해안은 대자연의 완성된 작품이 아닌 여전히 미완(未完)의 현재진행형이다. 제주도의 거
센 바람과 파도에 의해 굼벵이 속도로 조금씩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0,000년 뒤에는
지금보다 10~20% 정도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싶다.


▲  대포 주상절리대에서 바라본 남해바다와 중문 서쪽 지역
<저 멀리 우뚝 솟은 산은 산방산(山房山)>

▲  층층이 주름진 주상절리대 밑도리
거친 피부나 두꺼운 껍질을 지닌 무시무시한 생명체가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 같다. 밤에 와서 보면 염통이 제대로 쫄깃해질 것 같은 기분.

▲  주상절리대 밑도리에 계속 채찍질을 가하는 바다
파도가 뽀얀 거품을 내며 주상절리대를 거칠게 어루만진다. 그렇게
절리대는 아주 조금씩 세월을 타며 늙어간다.

▲  방파제처럼 튀어나온 주상절리대 밑도리
예전에는 낚시터로 쓰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지체 높은 천연기념물
구역이라 사람들의 발길을 금하고 있다.

▲  주상절리대 동쪽 자갈해안
이곳은 언제든 발을 들일 수 있는 자유 구역이다. 저 주름진 벼랑을 넘으면
바로 주상절리대 핵심부이나 저 벼랑 역시 엄연한 금지된 구역이니 애써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자갈해안만 자유 구역임)

▲  자갈해안과 바다의 끊임없는 속삭임, 그리고 그 속삭임을
훔쳐 듣는 나.

▲  율동을 부리며 경쾌하게 흘러가는 제주올레길8코스 (대포연대 방향)

▲  야자수가 펼쳐진 올레길8코스
(대포연대 방향)

▲  올레길 속으로 자꾸 나를 집어넣다.
(대포연대 방향)


♠  제주올레길 8코스 대포연대, 대포포구

▲  대포연대(大浦煙臺) - 제주도 지방기념물 23-12호

올레길을 거닐다가 남쪽 소나무 숲에 시커먼 피부를 지닌 무엇인가가 눈에 아른거린다. 예사
로운 피사체가 아닌 듯 싶어 올레길을 잠시 버리고 그에게 다가서니 봉수대처럼 생긴 커다란
대포연대가 나를 반긴다.

연대(煙臺)는 제주도 스타일의 옛 통신수단으로 봉수대와 비슷하다. 제주도는 봉수대 외에도
연대까지 갖추어 섬 수비에 만전을 기했는데, 이들이 다른 점이 있다면 봉수대는 산꼭대기에
있었고, 연대는 조망이 좋은 해변과 구릉에 설치되었다. 횃불과 연기로 주변과 연락을 취했으
며, 평상시에는 1개, 수상한 배가 나타나면 2개, 그 배가 땅으로 접근하면 3개, 육지에 발을
들이면 4개, 전투가 벌어지면 5개를 올렸다. 이는 봉수대와 같다.

대포연대는 조선 후기에 현무암으로 지어진 것으로 근래에 정비되었으며, 동쪽으로 마희천 연
대, 서쪽으로 별노천 연대와 신호를 주고 받았다. 연대의 높이는 4m 정도로 북쪽으로 계단을
늘어뜨렸는데, 계단이 협소하고 안전시설이 없어 주의가 필요하다. 계단을 통해 정상으로 오
르면 바로 남쪽으로 바다가 보이며, 서쪽으로 중문해변과 산방산, 동쪽으로 월평포구가 시야
에 들어와 조망도 그런데로 괜찮다. 게다가 주변에 높은 존재가 없다보니 마치 허허벌판에 홀
로 솟은 봉우리에 오른 기분이다.

▲  대포연대 돌계단
계단 폭이 좁으니 통행에 주의하기 바란다.

▲  대포연대 정상부
정상부 테두리에는 낮게 돌담을 둘렀다.


▲  대포연대에서 바라본 서쪽 (중문, 산방산 방향)

▲  정면에서 바라본 대포연대

올레길과 가까운 곳에 있지만 조금 구석진 곳이라 찾는 이는 거의 없다. 소나무숲에 홀로 자
리해 고독을 즐기는 연대 정상에 오르니 시원한 바닷바람이 나를 감싼다. 이곳이 문화재보호
구역이라 출입금지를 알리는 붉은 테두리의 금표가 붙어있으나 돌계단 앞에 뻥 뚫린 문이 있
어 사실상 해방된 상태이다. 딱히 해코지를 하지 않는다면 올라가도 상관은 없다.

* 대포연대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포동 2506


▲  대포연대 동쪽 해변

▲  올레길8코스(대포 포구 서쪽)에서 만난 제주도 스타일의 무덤
제주도는 현무암으로 무덤 테두리에 낮게 경계선 돌담을 다진다.

▲  평화로운 모습의 대포포구
북쪽과 서쪽은 해안, 동쪽은 방파제로 감싸인 조그만 포구로 여기서는
요트 투어와 제트보트, 제트스키 등의 해상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  대포포구에서 만난 절터 주춧돌

대포포구를 지나려니 검은 주근깨가 다소 피어난 하얀색 큰 돌이 발길을 붙잡는다. 얼핏 보면
그냥 버려진 자연석처럼 보이나 자세히 보면 인공(人工)이 가해진 돌임을 알 수 있는데, 옆에
자리한 안내문에 따르면 이곳에는 고려 때 조그만 절이 있었다고 하며, 저 돌은 그 절의 주춧
돌이었다고 한다.
이곳에 둥지를 틀며 바다를 바라봤을 절은 어느 세월이 급하게 잡아갔는지 이름을 남길 틈 조
차 주지 않았으며, 절터의 흔적도 마을이 닦이면서 겨우 저것만 남았다. 절의 비밀을 저 돌은
다 알고 있겠지만 워낙 충격이 커서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에 절이 있었던 것만 살짝
알려줄 따름이다.

제주도는 제주올레길 외에 '불교성지순례 절로가는 길'이란 도보길도 내놓았는데, 그중 4구간
이 이곳을 지나간다. 4구간은 '선정(禪定)의 길'이란 간판을 내걸고 있으며, 천제연폭포 동남
쪽에 있는 천제사에서 주상절리, 대포연대, 대포포구 주춧돌, 약천사를 거쳐 법화사(法華寺)
까지 이어지는 10km의 길이다. 그중 천제사~약천사 구간은 제주올레길8코스의 신세를 지며,
약천사에서 법화사까지 4.1km 구간은 독자적인 길을 이용한다.


▲  대포포구 동쪽 해안

대포포구에 이른 올레길8코스는 편한 신작로를 잠시 버리고 울퉁불퉁한 해안길을 따라 대포동
2356-1(이어도로)까지 이어진다. 이 구간의 해안 풍경도 제법 일품으로 검은 피부의 바위들이
파도와 온갖 풍상을 견디며 소소하게 눈요깃감이 되어준다.


▲  올레길8코스가 지나는 대포포구 동쪽 해안 ①

▲  올레길8코스가 지나는 대포포구 동쪽 해안 ②

대포포구 동쪽 해안을 지난 올레길8코스는 '이어도로'와 다시 짧은 만남을 갖는다. 배튼개 입
구 정류장에서 올레길은 북쪽으로 빠지나 나는 올레길을 버리고 편안한 이어도로를 택해 동쪽
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걸으니 왼쪽(북쪽)으로 커다란 기와집이 내 침침한 두 눈에 들어온다. 그
곳이 제주도 현대 사찰의 하나인 약천사로 그곳은 원래 일정에도 없었고, 20세기 현대 사찰에
는 별로 관심이 없어 쿨하게 지나치려고 했으나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지나칠 수가 없다고 잠
깐 살펴보기로 했다. 허나 그 잠깐이 무려 1시간이 될 줄은 누가 알았으랴, 고색도 익지 않은
겉모습과 달리 은근 시간 도둑이었던 것이다.


♠  동양 최대 규모의 법당을 지닌 제주도의 대표적인 현대 사찰
약천사(藥泉寺)


▲  남쪽 '이어도로'에서 바라본 약천사

서귀포 대포동에는 제주도의 대표적인 현대 사찰인 약천사가 크게 둥지를 틀고 있다. 절 뒷쪽
에 숲이 우거진 야트막한 언덕이 있으나 그 덩치는 매우 작으며 주변이 거의 경작지와 들판이
라 거의 평지 사찰이나 다름이 없다.
절은 바다가 있는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남쪽 전방 1리 거리에 바다가 넝실거리고 있어 여기
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이 아주 진국이다. 게다가 경내 주변으로 제주도의 특산품인 감귤(柑橘
)나무가 귤을 가득 머금고 있어 따스한 남쪽 사찰의 이색 풍경을 진하게 보여준다.

약천사란 이름은 이름 그대로 약수(藥水)란 뜻이다. 머나먼 옛날부터 절 자리에는 '돽새미'란
우수한 수질의 약수터가 있었는데, 샘터 주위로 그 물을 먹고 자라는 논과 감귤나무 밭이 펼
쳐져 있었다. 돽새미는 이후 '도약샘(道藥泉)', '돽샘'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을 '절터왓'이란 부르기도 했는데, 고려 후기부터 '약천사'라 불리는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 절은 돽새미란 약수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꾸려진 것으로 보이며, 제주도
2대(또는 3대) 사찰의 하나였던 법화사와 가까워 그에 속한 조그만 절이 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역사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어 아직은 뜬구름 같은 이야기이다.

1960년대에 '김형곤'이란 학자가 병을 치료하고자 이곳의 조그만 굴에서 100일 관음기도를 올
리다가 꿈에서 약수를 받아마시고 병이 나았다고 한다. 하여 그 인연으로 작게 약수암(藥水庵
)이란 조그만 암자를 짓고 포교에 전념하다가 입적했다.
이후 18평짜리 초가 법당만 남아있던 것을 혜인이 이곳 일대를 사들여 절을 크게 일으켜 세웠
으며, 이곳에 있던 약수터의 존재감을 살려 절 이름을 약천사라 했다.

혜인은 제주도에 국제적으로 큰 사찰을 짓고자 적당한 터를 물색하다가 현재 자리에 퐁당퐁당
빠졌다. 하여 1981년부터 열심히 벌어들인 돈으로 약수암 주변을 조금씩 매입했으며, 지역 주
민들과 신도들, 그리고 우리의 옛 해양 영토인 왜열도에 거주하는 재일교포와 왜인(倭人)들까
지 그의 뜻에 호응해 많은 돈을 보내왔다.
1988년 어느 정도의 토지를 확보하자 3층 규모의 큰 법당을 짓기 시작하여 1991년 9월 완성을
보았다. (법당 설계와 조감도는 혜인이 직접 했음) 법당이 완성된 그해 상별당이 지어졌으며,
이듬해(1992년) 자모당을 짓고, 큰법당에 단청(丹靑)을 그렸다. 이는 단일 건물로는 가장 큰
규모의 단청불사로 꼽힌다.

1993년 3월에는 인근 마을 노인들을 초청해 제1회 경로잔치를 열었으며, (경로잔치는 매년 가
지고 있음) 1993년 큰법당에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봉불식(奉佛式)을 가졌다. 이 불상을 만
들고자 백두산에서 가져온 나무로 조성을 했으며, 단일 목불좌상에서는 국내 최대 규모이다. 그리고 1996년에는 대웅전 낙성대법회와 나한전 상량식을 가져 비로소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1997년 혜인은 약천사 회주(會主)로 물러나고 덕조가 새 주지가 되었으며, 1998년 영천 은해
사(銀海寺)의 말사로 등록하여 조계종의 일원이 되었다. 이때 절 건물과 토지는 모두 조계종
소유가 넘어갔다.

2001년 10월, 새 범종을 만들어 공개했는데, 그 소리가 매우 맑고 아름답기로 명성이 자자했
다. 2001년 10월 30일에는 오백나한 봉안식과 국제가사불사 회향대법회를 열었으며, 이때 국
제사찰음식 교류전을 가졌는데, 이 행사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었다.
2002년 5월 템플스테이(Temple Stay)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으며, 특히
외국인의 참여가 많다.
2007년 1월에는 문화관광부 지정 전통사찰이 되었으며, 2009년 11월 26일에는 제주도의 지원
을 받아 태평양전쟁희생자 위령탑을 세웠다.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중증장애인요양시설인 자
광원을 설치해 복지사업에도 손을 뻗었다.

새집 냄새가 진동하는 경내의 대지 면적은 12만㎡로 법당인 3층짜리 대적광전을 비롯해 요사
채, 후원, 칠보각, 삼성각, 나한전, 굴법당, 상별당, 자모다원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
이 있으며, 요사채와 후원 앞에는 연못이 닦여져 있다.
고색이 아직 여물지 못해 문화유산은 없으나 대적광전에 깃든 목조비로자나불과 목각탱이 아
주 어린 나이임에도 서귀포시 지정 향토유형유산 5호의 작은 지위를 지니고 있다. 또한 제주
올레길8코스가 경내를 가로질러 동,서로 흐르며 '불교성지순례 절로가는 길' 4구간이 여기서
법화사로 흘러간다.

대적광전은 제주도에서 가장 큰 목조 건물로 유명한데, 절 자체가 서귀포 지역의 주요 관광지
로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무척 잦다. 또한 대적광전과 경내에 있는 많은 불/보살상과 탱
화는 전통 양식을 지닌 1990년대~2000년대 불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어 100년 이후에는 불
교미술사에서 크게 다뤄질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존재를 미리 잘 봐두는 것도 좋을 듯 싶다.

* 약천사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포동 1165 (이어도로 293-28 ☎ 064-738-5000)
* 약천사 홈페이지와 템플스테이 정보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야자수가 마중을 하는 약천사 극락교 주변

▲  주황색 감귤이 주렁주렁 열린 경내 앞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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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쭉하게 자리한 요사(寮舍)채 (동쪽은 후원)

경내 중심부로 들어서러면 요사채 가운데에 뚫린 문이나 요사채 옆구리를 지나야 된다. 이곳
요사는 2층 규모로 그 꼭대기에 대적광전 앞뜨락이 있는데, 가운데 문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후원과 공양간이 있으며, 나머지 공간은 요사에 걸맞게 모두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예
불 편의를 위해 대적광전을 잇는 지하 통로를 닦아 날씨에 상관없이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

요사 양쪽 모서리에는 팔작지붕의 1층 누각을 달아놓아 범종과 법고를 봉안하여 범종루(梵鍾
樓)와 법고루(法鼓樓)로 삼았다. 범종루에 담긴 범종은 2001년에 장만한 것으로 1997년에 조
성된 범종이 있었으나 종소리가 영 좋지가 못해 새로 만들었다.
법고는 지름 2.4m의 큰 북으로 하루에 3번(새벽예불, 사시예불, 저녁예불) 종과 함께 몸을 풀
며, 여기서 바라보는 바다와 주변 풍경은 약천사 제일로 일컬어진다. 또한 요사채 앞에는 연
못이 누워있고 그 복판에 다리가 놓여져 있으며, 연못 남쪽에는 키가 큰 야자수가 1렬로 늘어
서 이색 풍경을 자아낸다.

▲  요사채 앞 연못과 야자수들

▲  약천사 나한전(羅漢殿)

경내 서쪽에 자리한 나한전은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오백나한(五百羅漢)의 거처이다. 2
층 규모로 2층이 나한전으로 쓰이고 있는데, 오백나한전, 영산전(靈山殿)이라 불리기도 하며,
오백나한은 2001년에 봉안된 것으로 이 땅의 5,000만 인구처럼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녔다.


▲  나한전의 주인인 금동석가여래상
석가여래의 체격이 꽤 늠름하고 단단해 보인다. 그의 좌우로 조그만 500나한이
길게 늘어서 그를 호위한다.

▲  오백나한의 일원들
표정과 자세가 참 여유로워 보인다. 저들은
나처럼 생계 걱정은 없으니 그런듯..

▲  나한전 오백나한상
표정과 손에 들고 있는 물건 등 어느
하나 같은 모습이 없다.

       ◀  약천사 샘터 <수각(水閣)>
약천사의 이름 유래가 된 샘터로 이곳을 찾은
나그네들의 갈증 해소를 책임진다. 약천(藥泉)
이라고 해서 내가 요즘 환장하는 탄산약수는
아니며, 이 땅의 흔한 약수의 맛이다.
대자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듯, 물은 늘 끊
이지 않고 나와 연꽃 석조를 가득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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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천사의 상징, 대적광전(大寂光殿)의 위엄

대적광전은 이곳의 법당(法堂)이자 상징물로 지하 1층, 지상 3층(실제는 5층) 규모의 팔작지
붕 집이다. 조선 초기 불교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그는 높이 29m에 키다리로 단일 법당 중에
동양에서 가장 크다. 그리고 면적은 지하 강당을 포함해 1,043평(3,380.84㎡)에 이른다.
화엄사(華嚴寺) 각황전(覺皇殿)의 웅장한 구조를 기본으로 하고, 금산사(金山寺) 미륵전(彌勒
殿)의 3층 구조를 응용해 설계한 것으로 이 땅에서 가장 큰 목불(木佛)인 비로자나불이 봉안
되어 있다. 그의 좌우에는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이 자리해 있는데, 약사여래불은 이곳에 있
던 약수를 마시고 많은 이들이 병치료를 했다는 이야기를 토대로 약사여래불이 그 역할을 계
속 해주길 바라는 뜻에서 봉안했고, 아미타불은 서귀포라는 이름이 서방정토(西方淨土)로 귀
의하려는 사람들의 소망에서 유래된 것이라 하여 그를 봉안했다. (서방정토의 주인이 아미타
불임)
건물을 받치고 있는 4개의 기둥에는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황룡과 청룡의 모습이 깃들여져
있으며, 2층에는 절을 세울 때 돈을 낸 사람들의 원불인 8만 개의 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사람을 개미로 만들 정도로 아주 크고 콧대가 높은 건물로 이를 두고 절의 지나친 외형 키우
기와 무조건적인 큰 건물, 큰 불상 일변도(一邊倒)에 혈안이 된 오늘날 불교계를 꼬집기도 한
다. 하지만 크게 만드는 것도 다 시대적 유행이라고 보면 되며, 우리 역사를 보더라도 고려시
대까지 궁궐과 관아, 왕족과 귀족들의 저택, 절, 불상 등은 정말 크게 만들었다. 그게 조선시
대로 오면서 규모가 싹 작아진 것이다.
사찰 건축물 같은 경우 그 성격에 충실하게 활용하고 공익에 위배되는 행위를 경계한다면 굳
이 쓴소리를 낼 이유는 없다고 본다. 약천사가 유명해진 가장 큰 이유도 저 커다란 대적광전
때문이다.


▲  대적광전 1층에서 만난 관세음보살상

비로자나불 불단(佛壇) 좌우에는 뒷쪽 방으로 인도하는 문이 있는데, 그 문을 들어서면 관세
음보살(觀世音菩薩) 누님의 공간이 있다.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 관세음보살상, 18,000불
등 봉안된 존재들도 참 많고 공간도 연병장처럼 넓다보니 각 공간마다 보살 아줌마들이 지키
고 있는데, 그들은 각자의 공간을 관리하고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절과 예불을 친절하게 안
내하며 커피와 티백차를 제공한다. (의자와 쉼터가 마련되어 있음)

나는 관세음보살 공간을 지키는 보살 아줌마와 불교와 제주도 관련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홀
로 나들이나 답사를 다닐 때면 객수(客愁)도 달랠 겸, 절이나 답사지 등에서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나그네들과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이는 나홀로 답사의 재미 중 하나로
그 이야기를 통해 그 지역과 해당 명소에 대한 많은 정보를 챙길 수 있다. 여기서도 보살 아
줌마와 20여 분 이야기꽃을 피우며, 절과 제주도의 여러 정보를 들었다. 물론 커피와 녹차 티
백도 얻어마시고 말이다.


▲  3층에 있는 잘생긴 윤장대(輪藏臺)
대적광전 3층에는 4개의 윤장대가 있다. 윤장대란 서적을 보관하는 책장으로
이것을 돌리면 불경을 이해한 것과 같고, 소원도 이루어진다며 속세에
오랫동안 영업을 벌이면서 기존의 성격과는 많이 달라졌다.

▲  3층에서 바라본 비로자나3존불의 위엄

대적광전의 주인장인 비로자나불은 백두산에서 가져온 나무로 1993년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는
4.5m, 대좌의 높이는 4m에 이른다. 이 땅에서 가장 큰 목불로 3층에서 봐도 저 정도로 후덜덜
한 크기인데, 1층에서 보면 제대로 주눅이 들어 내 자신이 한없이 작아진다.
그들 뒤에는 거대한 후불목각탱이 든든히 자리해 있는데, 목조비로자나불과 목각탱 4점은 이
제 30년 남짓 묵은 어린 나이임에도 서귀포시 지정 향토유형유산 5호의 지위를 지니고 있다.
이들 목각탱은 문경 대승사(大乘寺)에 있는 늙은 후불탱을 참조하여 만들었다.


▲  1층에서 바라본 비로자나3존불과 후불목각탱의 위엄

▲  대적광전 3층에서 바라본 요사채와 남해바다
대적광전은 3층까지 싹 둘러볼 수 있다. 내부 계단을 통해 오르면 되며, 3층에서
비로자나불과 창 밖에 펼쳐진 경내와 바다를 바라보는 재미도 쏠쏠하니
꼭 3층까지 둘러보기 바란다.

▲  굴법당 주변 감귤나무 숲길

▲  굴법당 바깥에 자리한 하얀 피부의 마애불
마애불 좌우로 굴법당으로 인도하는 굴이 있고, 마애불 앞에는 연꽃
석조(石槽)를 지닌 샘터가 있어 시원한 약수를 제공한다.

▲  굴법당(窟法堂) 내부

경내 뒷쪽 숲속에는 컴컴한 동굴 스타일의 굴법당이 있다. 이곳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
운 곳으로 대적광전이 지어지기 이전에 조성되었는데, 정교한 최신 공법으로 지어져 제주도에
널린 용암동굴과 비슷한 모습이다. 허나 현실은 인공 땅굴이다.
불단에는 약사여래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그 좌우로 백의관세음보살(白衣觀世音菩薩)과 지장
보살이 자리하여 약사3존상을 이룬다. 그들 옆에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두광(頭光)을 지
닌 존재가 있는데, 그는 부동명왕(不動明王)으로 약천사의 모든 재앙을 물리쳐주기를 바라는
뜻에서 봉안했다.

굴법당을 끝으로 1시간에 걸친 약천사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처음에 10여 분 정도 생각하
고 발을 들였는데, 그게 6배 가까이 늘어나 그만큼의 시간을 앗아간 것이다. 그래도 생각 밖
으로 볼거리도 많고 여수(旅愁, 객수)도 조금 풀었으니 들리길 잘했다.

약천사 주차장으로 나오니 서귀포시내버스 645번(약천사↔중앙로터리)이 바퀴를 접고 쉬고 있
었다. 이곳이 그들의 종점이라 그런 것인데, 마침 버스 1대가 기지개를 켜고 있어 타려고 하
니 운전사가 어디로 가냐고 물어본다. 하여 시내(중앙로터리 주변)로 간다고 답을 했으나 이
버스는 신시가지로 크게 돌아간다며 다른 것을 타라고 그런다. 나는 괜찮다고 그랬으나 끝까
지 이것을 타면 큰일이 날 것처럼 말을 하며 저기 입구로 나가면 520번과 521번이 많이 다니
니 그것을 탈 것을 강하게 권했다.
하여 645번을 포기하고 약천사 입구로 나와서 버스를 기다리니 서귀포시내버스 520번(제주국
제컨벤션센터↔효돈중학교)이 나타나 활짝 입을 벌린다.

그 버스를 타고 서귀포 시내로 들어갔는데, 처음에는 외돌개를 오랜만에 볼까 했으나 버스는
그 부근으로는 가지를 않아서 마냥 타고 가다가 서귀포 원도심으로 진입, 천지연폭포 부근인
솔동산입구에서 내렸다.
일몰까지는 1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어 천지연폭포 남쪽에 있는 새섬을 이날의 마지막 메뉴로
보려고 햇으나 시커먼 구름이 나를 겨낭했는지 서귀포의 하늘을 가득 메우며 빗방울을 투하한
다. 빗방울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았고 만약을 대비해 우산도 챙겨왔으나 시커먼 날씨에 새섬을
보려는 의지가 뚝 떨어졌다. 게다가 너무 여로를 살찌웠는지 몸도 무척 무거워 새섬은 내일로
쿨하게 미루고 오늘은 일찍 쉬기로 했다.
그래서 천지연폭포 입구에 적당한 모텔을 잡아 여장을 풀고 다음날 아침까지 푹 쉬었다. 이렇
게 하여 제주도 둘째 날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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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에 숨겨진 달달한 뒷길, 창덕궁 후원 뒷길 (후원 돌담길, 옥류정, 명륜동 장면가옥)

창덕궁 후원 뒷길, 명륜동 장면 가옥



' 서울 도심의 숨겨진 뒷길, 창덕궁 후원 뒷길 '
(후원 돌담길, 명륜동 장면 가옥)
창덕궁 후원 돌담
▲  창덕궁 후원 돌담
 



 

사계절 풍경 중의 오색 단풍이 천하를 곱게 물들이는 늦가을 풍경이 단연 으뜸이 아닐까
싶다. 이런 늦가을은 하루하루를 그냥 흘려보내기가 너무 아까워 틈이 날 때마다 카메라
를 들고 서울 곳곳을 누비며 뒤안길로 꽁무니를 빼려는 늦가을 풍경을 붙잡는다.
그렇게 뛰어다닌 곳 중에는 나의 즐겨찾기인 북촌(北村)과 서촌(웃대), 은행나무 명소인
성균관(成均館), 그리고 북촌과 성균관을 빠르게 이어주는 창덕궁 후원 뒷길도 있었다.

북촌(북촌한옥마을)은 이미 200번을 넘게 발걸음을 한 곳이지만 복습의 즐거움이 대단하
여 그날 땡기는 곳을 여럿 둘러보고 취운정(翠雲亭)터 주변 감사원로터리에서 동쪽 길로
들어선다. 그 길이 고려사이버대학교 정문 겸 중앙중고등학교 후문으로 차단봉이 내려앉
은 주차장 정산소 직전에 시야가 확트인 조망대가 있다.
그곳은 중앙중학교 바로 뒷쪽(서쪽) 벼랑으로 여기서는 바로 앞에 중앙중고를 비롯해 창
덕궁과 종로구, 중구 지역이 훤히 두 눈에 바라보인다.


▲  창덕궁 후원 뒷길, 중앙중고 뒷쪽으로 이어지는 길 (주차장 정산소)

도로에 차단봉이 설치되어 있고, 얼핏 봐도 길이 막혀 보여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길을 돌리고 싶은 충동이 생길 수 있다. 허나 그것이 이곳의 함정,
차단봉은 고려사이버대학과 중앙중고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차량들의 주차비 징수를 위한
것이라 뚜벅이들은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으며 길은 성균관대까지 이어져 있으니 걱정
은 곱게 접어 하늘로 날려보내기 바란다.


▲  중앙중학교(中央中學校) 뒷쪽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 옥상이 중앙중학교이다. 옥상 오른쪽 너머로 보이는 근대 건축물
은 중앙고등학교 건물이며, 푸른 잔디가 입혀진 운동장 너머로 펼쳐진 너른 숲은 창덕궁
이다. 그런 창덕궁과 중앙중고교 너머로 천하 제일의 대도시인 서울의 심장부, 종로구와
중구 지역이 시야에 잡힌다.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호젓한 뒷길 ~
창덕궁(昌德宮) 후원 뒷길 (후원 돌담길)


▲  중앙중고 후문

주차장 정산소를 지나면 고려사이버대학교와 중앙중고로 내려가는 길(후문)이 나온다. 이들은
모두 고려대 계열로 중앙고교 북쪽에 새롭게 중앙중학교를 만들고 그 뒷쪽 언덕에 고려사이버
대학교를 만들면서 중/고/사이버대학이 한 자리에 있게 되었다.

중앙중고를 놔두고 계속 직진하면 길은 서서히 경사를 보이기 시작하는데, 기와가 얹혀진 창
덕궁 돌담이 궁궐 돌담의 당당한 모습을 드러내며 오른쪽으로 따라붙는다. 이 돌담은 사람이
다니는 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나란히 제 갈 길을 가는데, 동쪽으로 갈수록 돌담의 해발
높이도 높아진다. 또한 돌담 너머로 삼삼하게 우거진 창덕궁 후원이 숨겨진 속살을 드러내면
서 도심의 속된 기운을 정화시킨다.

통일부 남북회담본부(고려사이버대학 북쪽)를 지나면 길이 얼핏 끊긴 듯 보여 '넘어가는 길이
과연 있을까??'
주저하게 된다. 허나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길은 계속 이어지기 때문
이다.


▲  층층이 이어진 창덕궁 후원 돌담 ▼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궐 후원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창덕궁 후원을 속세로부터 열심히
가리고자 지형을 이용하여 높이 돌담을 둘렀다. 지형이 낮은 곳은 돌담 너머로 후원의 속살이
일부 보이기도 하나 보이는 것은 그저 숲밖에 없다. 참으로 고약했던 왜정(倭政)에 의해 고의
적으로 비원(秘苑)이라 놀림을 받았던 창덕궁 후원, 그는 후원<또는 금원(禁苑), 북원(北苑)>
이지 절대 비원이 아니다.


▲  북악산(백악산)의 물을 받아들이는 후원 수구문(水口門)

창덕궁 후원에는 연못이 참 많다. 그 연못을 살찌우는 물은 바로 북악산(백악산)이 베푼 것으
로 그가 내린 물이 이 수구문을 거쳐 후원으로 들어가 후원 곳곳에 물을 공급한다.


▲  늦가을에 잠긴 후원 뒷길 (너른 공터 직전)

▲  후원 뒷길의 전환점(너른 공터) - 여기서부터 좁은 산길로 변한다.

포장길로 된 뒷길은 고개 정상부 너른 공터에서 끝이 난다. 여기서 길은 산길로 180도 돌변하
며, 차량은 더 이상 바퀴를 들일 수 없다.
너른 공터를 지나면 근래 지은 나무데크 계단길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길은 2개로 갈리
는데, 오른쪽은 후원 돌담을 따라 성균관대 내부로 이어지며, 왼쪽은 옥류정과 성대후문 마을
버스 종점으로 이어진다.

창덕궁 후원 뒷길(후원 돌담길)은 북촌 권역에서 성균관대, 대학로를 빠르게 이어주는 도심의
상큼한 뒷길로 아는 이가 거의 없어 사람들의 왕래가 적고 한적해서 좋다. 하여 내가 좋아하
는 길의 하나이기도 한데 다만 가로등 시설이 부족하여 햇님이 퇴근한 이후에는 꽤 어둑어둑
하니 통행에 조금 주의가 필요하다.


▲  나무데크 계단길 - 너른 공터를 지나 저 계단을 오르면 된다.
(어차피 오르는 길도 하나 밖에 없음)

▲  옥류정으로 향하는 짧은 산길과 계곡

옥류정으로 인도하는 짧은 산길은 경사가 느긋하다. 그 옆에는 갈증에 시달리고 있는 조그만
계곡이 있는데, 그는 북악산(백악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로 적지 않게 인공이 가해진 점이 다
소 옥의 티이다.


▲  옥류정 산길과 계곡

▲  현대적 정자 스타일로 지어진 옥류정(玉流亭)

맑은 물이 흐른다는 뜻의 옥류정, 그 어여쁜 이름 마냥 후원 뒷쪽에 숨겨진 늙은 경승지로 착
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1956년에 지어진 8각형 모습의 현대식 정자(亭子)이다. 그래도 후원 뒤
쪽에 자리한 위치상 내가 알지 못하는 오래된 사연을 머금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그런 것은 없
었다. 위치와 정자의 이름이 나그네의 마음을 잠시 설레게 만든 것이다.

이곳은 북악산(백악산) 와룡고개(와룡산) 밑으로 바로 동쪽 언덕에 성대후문 마을버스 종점이
있으며, 북쪽 높은 곳에는 와룡공원길이 흘러간다. 북악산에서 발원한 계곡은 옥류정에서 잠
시 묻혔다가 남쪽 연못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데, 옥류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은 북악
산의 맑은 계곡이 옆구리에 흘러서 붙여진 이름 같기도 하고, 계곡이 후원 옥류천(玉流川)과
도 살짝 이어져있어 그렇게 붙여진 것 같기도 하다. 정자 정면에는 푸른 색깔의 옥류정 현판
이 걸려있는데, 글씨에 생명을 단단히 불어넣은 듯, 아주 명필급이다.

옥류정은 숲에 둘러싸인 구석이라 늘 그늘이 머물고 있으며, 주변 경치는 좋지만 와룡고개가
바로 뒷쪽이라 차량들의 굉음이 수시로 두 귀를 때린다. 그래도 숲바람과 산바람이 교차하는
곳이라 한여름에는 더위를 잊기에 좋다. (정자 동쪽에 성대후문 종점으로 가는 길이 있음)


▲  계곡을 막아서 만든 옥류정 연못

옥류정 앞에는 북악산 물을 머금은 조그만 연못이 닦여져 있다. 2015년에 조성된 것으로 옥류
정에서 잠시 묻힌 계곡은 여기서 다시 속살을 드러내며 졸졸졸~♪ 밑으로 흘러가는데 연못 주
변에는 나무에게 버림 받은 나뭇잎들이 낙엽이란 우울한 존재가 되어 귀를 접고 쓸쓸히 누워
들 있다. 연못은 바로 그들의 인생을 처리해주는 블랙홀인 모양이다.


▲  옥류정에서 창덕궁 후원 뒷길로 내려가는 길
이렇게 보니 정말 첩첩한 산주름 속에 깊숙하게 묻힌 기분이다. 여기가 과연
서울 도심 한복판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  다시 창덕궁 후원 뒷길로 (직진하면 돌담길, 중간에 왼쪽으로 가면
성대후문 마을버스 종점, 오른쪽은 중앙중고와 북촌 방향)

▲  창덕궁 후원 돌담길 (돌담과 만나기 10m 전)

창덕궁 후원 뒷길은 중앙중고 후문(고려사이버대학교)에서 후원 뒷쪽 돌담길을 따라 성균관대
로 이어지는 1리 남짓의 짧은 고갯길이다. 이곳은 감사원에서 성북동(城北洞)을 이어주는 와
룡고개(와룡공원) 밑부분인데, 봄과 늦가을 풍경이 아주 일품으로 달달하게 그려진 수채화처
럼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그도 그럴 것이 돌담 너머로 후원의 청정한 숲이 펼쳐져 있고 돌
담길 주변 역시 나무들이 가득하니 그 아름다움의 농도는 더욱 짙어질 수 밖에 없다.


▲  후원 뒷길 고개
이곳은 창덕궁 후원의 가장 최북단이자 제일 높은 곳으로 여기서는
돌담을 손으로 더듬으며 갈 수 있다.

▲  후원 뒷길 고개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창덕궁의 뒷통수인 후원 뒷길 고개는 돌담 바로 옆구리라 돌담을 만지면서 갈 수 있다. 그 고
개를 넘으면 급하게 펼쳐진 울퉁불퉁한 산길이 나오고, 돌담 너머로 도심의 허파인 창덕궁 후
원이 속살을 비춘다. 숲 너머 동쪽에는 바로 성균관대 건물이 보이는데, 그 산길을 내려가면
돌담과 조금씩 멀어지면서 성균관대 서쪽 부분인 법학관과 주차장, 대운동장에 이른다.
서울에 있는 궁궐 돌담길 중 가장 호젓하고 담백한 길을 꼽으라면 나는 이곳을 추천하고 싶다
. 그만큼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길이다.


▲  성균관대로 내려가는 후원 뒷길
산길을 넘어서 들어간 대학교는 이곳이 처음이다. 이 고개를 넘으면 바로
성대 교정으로 따로 문이나 철조망은 없다. 그냥 들어가면 된다.

▲  가파른 길을 내려가면 평탄한 길이 부드럽게 펼쳐진다.
이곳은 성균관대에서 '사유(思惟)의 길'로 삼고 있다.

▲  창덕궁 후원 뒷길의 동쪽 '사유의 길'

후원 뒷길이 숲이 삼삼하다보니 성균관대에서 뒷길의 교내 구간을 '사유의 길'로 삼았다. 번
잡함이 크게 덜한 후원 숲길에서 책도 보고 명상도 즐기며 속세(俗世)의 온갖 유혹에 취약한
자신의 머리와 정신을 가다듬으라는 뜻으로 보면 될 것이다.
사유의 길이란 이름이 어울릴 정도로 숲도 짙고 산바람도 그윽하여 옛날 선비들 같았으면 공
부를 한다며 정자 하나를 짓고도 남았을 것이다.


▲  성대로 넘어온 후원 돌담 (돌담 안쪽은 창덕궁 후원)

▲  잊혀진 제국의 궁궐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후원 돌담

▲  후원 뒷길을 마무리 짓다.

창덕궁의 보이지 않는 뒤쪽을 가리고 있는 후원 돌담은 새로 손질한 부분이 여기저기 있어 옛
날 것과 어색한 조화를 이루는 부분이 적지 않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후원 북부는 후원 특별 관람 때나 들어갈 수 있는 아주 비싼 곳으로 대운
동장 주차장에서 후원의 북쪽을 이루고 있는 태극정(太極亭) 구역이 시야에 들어오고, 후원의
북문인 북장문도 가까이에 바라보인다.

대운동장 서쪽 주차장에 이르면 지금까지 사각사각 밟고 지나간 흙길과 바위길이 밋밋한 포장
길로 바뀌며, 후원 돌담과도 바다 너머의 섬을 보듯 멀어져 간다. 게다가 주차장부터 학교 돌
담과 철책이 생기면서 둘 사이에 깊숙한 틈이 생기는데, 이는 성균관대가 교내를 넓히면서 후
원 돌담보다 높게 또는 비슷한 높이로 터를 다지는 바람에 그리 된 것이다.
비슷한 높이인 경우에는 후원 돌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돌담의 북쪽 언덕을 끊어 멀리서 보
게끔 했으며, 둘 사이에 생긴 틈은 마치 휴전선이나 성곽(城郭) 주위에 두룬 해자를 보는 듯
하다.


▲  후원의 북문인 북장문(北墻門)

북장문은 후원 북쪽에서 유일하게 속세와 이어지는 문으로 보통 궁궐의 문은 암문(暗門)이라
할지라도 팔작지붕을 얹혀 문의 형식을 갖추는데 반해 이곳은 여닫는 문짝을 만든 것이 고작
이다.

북장문은 갑신정변(甲申政變)의 막바지 현장으로 정변 3일 째(양력 1884년 12월 6일)에 창덕
궁에서 고종(高宗)을 호위하며 머물던 개화당(開化黨) 패거리와 왜군은 명성황후(明成皇后)가
급히 소환한 청군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후원을 거쳐 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왜국공사는 꼬랑지를 내리며 군사를 이끌고 급히 후원 뒷길로 도망쳤고, 김옥균(金玉均)과 박
영효(朴泳孝), 서재필(徐載弼)도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들을 따라갔다. 단 홍영식(洪英植)과
박영교, 그들을 따르는 군인 7명은 고종을 호위하며 북묘(北廟)로 들어갔으나 결국 청군에게
살해되고 만다.

* 창덕궁 후원 뒷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명륜동/와룡동



 

♠  현대사의 살아있는 현장, 명륜동 장면(張勉) 가옥
- 국가 등록문화재 357호

▲  장면 가옥 외경

명륜동(明倫洞)에 자리한 장면 가옥(장면총리가옥)은 서울에 서려있는 현대사의 주요 현장의
하나이다. 바로 제1,2공화국 시절 정치/외교가로 활동했던 장면(장면 총리, 장면 박사라고 많
이 불림)이 살던 집으로 속세의 때가 조금씩 묻어가던 고등학교 시절 4.19와 한 덩어리로 국
사 관련 시험에 단골로 등장했던 인물인데, 이름도 참 외우기 쉽다. 그래도 익히기가 어렵다
면 대중 음식의 하나인 짜장면이나 영화의 한 장면이란 식으로 외우면 연상도 쉽게 된다.

이 집은 장면이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장 시절에 지은 것으로 건축가 김정희가 한옥과 양옥의
장점, 그리고 약간의 왜식(倭式)까지 절충하여 지은 개량 한옥의 일종이다. 1930~40년대 서울
중산층의 주거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서울 종로구에서 인수하여 가옥 손질을 거쳐 2012
년 12월 실외가 우선 개방되었다.
이후 건물 내부를 손질하고 장면의 유물 중 괜찮은 것을 선별하여 2013년 4월 19일 사랑채와
안채 내부가 장면기념관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날짜를 4월 19일로 잡은 것은 이승
만의 자유당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4.19혁명과 장면의 정치 개혁 의지를 기리
고자 함이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 관람료 없음)


▲  활짝 열린 장면 가옥 대문


▲  경호원동과 나무 1그루


▲  장면의 흉상(胸像)
▼  안채 동쪽에 자리한 장식용 장독대

돌로 1m 높이의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터를 다져 들어앉은 장면 가옥은 안채(92.56㎡)를 중심
으로 사랑채(56.2㎡)와 경호원실(9.92㎡), 수행원실(6.61㎡) 등 4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고위관료까지 지낸 사람이라 집이 좀 클 줄 알았더니만 두 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조촐해 졸
부들의 고래등 저택에 비해 거부감도 별로 없고 정감도 많이 간다. <같은 시대를 누볐던 자유
당의 우두머리 이기붕(李起鵬)의 집은 저택이었음>
가옥을 둘러싼 담장은 남쪽과 서쪽은 하얀 피부, 동쪽은 붉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담장
의 높이는 2m 정도이다. 가옥 서쪽에는 키다리 빌라가 자리해 가옥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동
쪽에는 2차선 길인 혜화로가 나있다.

가옥과 바깥 세상을 이어주는 대문은 주택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문으로 개방시간에 한해
문짝 하나를 열어둔다. 문의 높이는 담장만큼 낮으며, 문 우측 기둥에는 주소가 쓰인 패가 있
고, 좌측 기둥에는 집주인의 이름이 적힌 명패가 이 집의 주인을 알려준다. 명패에는 5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옛 주인 장면의 이름 2자가 한자로 쓰여 있어 문을 두드리면 (초인종은 없
음) 그 장면이 스르륵 달려 나와 우리를 맞이해줄 것 같은 기분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담장이 집 안채를 가리며 길을 막아 서는데, 여기서 가족과 친척, 친분
이 두터운 사람들은 왼쪽으로, 언론기자와 기타 손님은 오른쪽으로 갔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사랑채에 딸린 대기실이 나오며, 대기실에서 기다렸다가 옆칸에 있는 응접실에서 장면을 접견
했다.
대문에서 왼쪽으로 가면 조그만 경호원동과 앞마당으로 이어진다. 경호원동은 장면의 경호원
들이 대기하던 공간으로 겉으로 보면 1층이지만 안에 3㎡ 정도의 좁은 지하가 있다. 현재는
이곳을 지키는 관리인이 머물고 있으며, 건물 우측에는 2012년에 조성된 장면의 흉상이 서 있
고, 좌측에는 장면이 심었다고 전하는 높이 7~8m의 작은 나무 1그루가 주인이 가고 없는 집뜨
락에 조촐히 그늘을 드리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장면의 생애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운석 장면(雲石 張勉. 1899~1966)의 간략한 생애
장면은 옥산(玉山) 장씨로 1899년 8월 28일, 서울 종로구에서 장기빈(張箕彬)의 맏아들로 태
어났다. 장기빈은 왜정 때 부산세관장을 지낸 관리로 집안 살림은 넉넉한 편이었다.
8살에 인천성당이 운영하는 박문학교(博文學校)에 들어가 한학(漢學)을 배웠고, 1917년에 수
원고등농림학교(서울대 농생대의 전신)를 졸업, 1919년 서울기독교청년회관 영어학과를 수석
으로 마쳤다.
이후 한국천주교청년회 대표자격으로 미국 맨해튼 카톨릭대 문과에 들어가 1925년에 졸업했으
며, 로마교황청에서 열린 '한국79위 순교복자 시복식(諡福式)'에 참석했다. 그리고 귀국하여
천주교 평양교구에서 근무하다가 동성상업학교에 들어가 교편을 잡았고, 1936년 그곳의 교장
이 되었다. 또한 계성학교의 교장까지 겸임해 1945년까지 교육계에서 일했고, 천주교청년회연
합회 회장이 되어 '구도자의 길','조선천주공교회약사' 등을 출간했다.

해방이 되자 1946년 정계에 진출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과 과도입법의원의 의원을 역임했으
며, 우익의 일원이 되어 좌익세력과 싸웠다. 또한 미소공동위원회에 대비한 정책 수립 등의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48년 서울 종로을에서 제헌의원에 당선되었고, 그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
에 조병옥(趙炳玉)과 함께 한국수석대표로 참석하여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국제적 승인을 받았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특사로 로마교황청을 방문했고 귀국 길에 미국 맨
해튼대학에 들려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 초대 주미대사가 되어 2년 동안 외교관 생활을 했으며, 6.25전쟁이 터지자 미국을 설
득해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냈다. 1951년 국무총리로 임명되면서 귀국했으나 바로 이듬해 물
러났으며, 야당의 일원이 되어 이승만/이기붕의 자유당(自由黨) 독재정권과 싸우기 시작했다.
1955년 신익희(申翼熙), 조병옥과 민주당을 결성해 최고위원이 되었고, 1956년 대선 때 신익
희가 대통령 후보에, 장면이 부통령(副統領) 후보로 나가 정권교체를 노렸다. 이때 자유당은
8년 이상 대통령을 해먹고 있는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고, 야망이 쓸데없이 높던 이
기붕이 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백성들의 지지에 힘입어 열심히 유세를 벌이던 신익희는 호남으로 내려가다가 열차 안에서 돌
연 급사를 하면서 정권교체의 꿈은 물 건너갔다. 다행히 신익희 사망에 따른 동정표로 장면이
이기붕을 여유롭게 따돌리고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56년 9월 민주당전당대회에서 자유당 정치깡패인 최훈과 김상붕에게 저격을 당했으나 다행
히 경상으로 그쳤으며, 1957년에 미국 시튼홀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59년 민주
당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60년 대선 때 조병옥이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유세 도중 위암으로 사망했으며, 장면은 또
다시 부통령 후보에 나섰다. 그리고 그 유명한 3.15부정선거로 이기붕이 억지로 당선되자 뿔
이 단단히 난 민중들이 봉기하여 마산(창원)과 대구에서 독재정권/부정선거 반대 시위가 일어
났고, 서울에서 4.19가 터지면서 이승만과 자유당정권은 길거리에 나앉게 된다.

4.19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장면의 민주당은 의원내각제(議院內閣制)를 실시했고, 장면은 제5
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됨과 동시에 제2공화국 국무총리가 되어 국정을 이끌었다. 하지만 장면
정권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백성들이 피를 흘리며 내려준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욕
심과 이해관계에 얽혀 혼란에 빠졌다. 그 와중에 민주당의 구파가 떨어져나가 신민당을 창당
했으며, 그렇게 1년을 쓸데없이 소비하다가 1961년 5.16으로 장면 내각은 싹 털리고 만다.

5.16이후 박정희 군사정권은 장면을 연금시켰고, 이주당(二主黨)사건인 반혁명음모사건에 연
루시켜 징역 10년을 선고했으나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이후 5년간 집에 틀어박혀 신앙생활
에 몰두하다가 1966년 6월 4일 간염으로 67년의 인생을 마감했다. 그의 장례는 국민장(國民葬
)으로 치뤄졌으며, 경기도 포천 카톨릭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면은 미국 대사로 2년 가량 외국에 나가있던 시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이 집에서 살았다. 그
러니 거의 27년 동안 살았던 셈이다. 집 구석구석 그의 손때가 닿지 않은 곳이 없으며, 그가
심은 나무가 어엿하게 성장해 주인의 빈자리를 지킨다. 이렇게 보면 장면이 꽤 옛날 인물처럼
비춰지기도 하겠지만 그는 나와 아주 가까운 시대의 인물이다. 그가 가고 10여 년 뒤에 내가
이 세상에 나왔고, 내 부모 세대들은 장면의 모습과 이름 2자를 모두 기억하기 때문이다.


▲  앞마당에 있는 작두펌프(우물펌프)

그리 넓지 않은 앞마당에는 소나무 1그루와 작두펌프가 자리하고 있다. 작두펌프는 우물펌프,
옛날펌프, 무쇠펌프, 작두샘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는데, 1980년대까지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기구였다.
이 기구는 장면과 그의 가솔(家率)들, 경호원들이 쓰던 것으로 지하에 관정(管井)을 묻고 지
하수를 끌어올리는 공기압의 원리를 이용한 수동식 펌프이다. 패킹이 낡거나 펌프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공기의 압이 빠져 지하수를 끌어올릴 수 없게 된다. 이때 정신줄을 놓은 펌
프를 깨우고자 붓는 한 바가지의 물을 '마중물'이라고 한다.


▲  장면 가옥 안채 (장면기념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안채는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장면 가족의 생활공간이다. 장면기념관의
중심으로 거실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 안방, 우측에 건너방이 있고, 안방 북쪽에는 부
엌, 건너방 북쪽에는 욕실이 있다. 그리고 대청마루 북쪽과 남쪽에는 미닫이문을 냈다.

대청마루 남쪽 미닫이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되는데, 실내화가 준비되어 있어 그걸 신고
움직이면 된다. 대청마루와 안방, 건너방에는 장면의 체취가 서린 온갖 문서와 사진, 유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문서 같은 경우 상당수가 복제품이라 아쉬움을 준다. 장면 외에도 그의 부
인 김옥윤이 쓰던 유품도 같이 전시되어 있어 당시 정치인 가족의 생활상을 아련히 알려준다.


▲  장면 가옥 안채 대청마루 (오른쪽이 사랑방, 북쪽이 부엌)

▲  장면의 유품이 깃든 안채 사랑방

▲  장면의 유품이 깃든 안채 건너방

▲  1948년 9월 6일에 발급된 대한민국 외교관 1호 여권 (복제품)

이 여권은 1948년에 '유엔 파견 대한민국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부여 받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외교관 여권이다. (복제품이란 것은 함정)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외교관이기도 하며,
미국과 프랑스 등의 입국사증이 찍혀 있다.


▲  유엔총회 연설문(복제품)과 바티칸 교황청 훈장(오른쪽)

유엔총회 연설문은 1949년 12월 7일, 유엔 정치위원회에서 대한민국 독립 승인을 요구하는 영
어 연설문의 한글 번역본이다. (장면이 직접 썼음) 연설 직후 찬성 48표, 반대 6표, 기권 1표
로 한국 독립 승인이 통과되었다.


▲  영어로 쓰인 유엔총회 대한민국 승인서 (복제품)
유엔에서 찬성 48표를 얻어 합법 정부로 승인을 받은 그 순간을 기록한 문서로
미국 국무부 고문 달레스의 친필 사인이 들어있다.

▲  바티칸 교황청에서 준 훈장의 위엄 (진품임)
1951년 5월 22일 국무총리 재직 중에 교황청에서 받은 훈장이다.

▲  재외국인등록증 (복제품)
장면의 50대 모습 사진이 담긴 문서로 주미국대사 재직시(1949년 10월 16일)에
발급 받은 것이다. 지금과 달리 한자가 꽤 많으며, 양력 대신 단기(檀紀)를
쓰고 있는 점도 무척 이채롭다.

▲  주미대사 신임장 (복제품)
1949년 3월 25일 장면 초대 대한민국 주미특명 전권대사가 당시 미국 대통령인
트루먼에게 제정한 신임장(信任狀)이다. 이 문서에도 단기가 쓰여 있다.

▲  장면이 사용했던 영문 타자기

▲  장면이 번역했던 천주교 서적들

2년 동안 주미대사를 지냈을 때 쓰던 타자기이
다. 지금이야 한가롭게 있지만 그 시절에는 정
말 불이 날 정도로 바쁜 시간을 지냈다.

왼쪽은 제임스 기본스가 1876년에 저술한
'교부들의 신앙'으로 장면이 1944년에
번역판을 내놓았다.


▲  장면이 사용했던 기도서와 십자가 목걸이

1921년 성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한 후 얻은 것으로 장면은 이 책을 늘 손에서 놓지 않았다
고 전한다. 기도서 위에 십자가 목걸이 역시 그가 기도를 할 때 쓰던 것이다.


▲  장면이 썼던 실크모자 (오른쪽에 실크모자를 쓴 장면의 사진이 있음)

장면이 1949년 미국 트루먼 대통령 취임식 때 썼던 모자이다. 그저 말로만 듣고 바보상자에서
만 보던 그 실크모자를 여기서 처음 그 실물을 접하니 모자가 은근 멋있어 보인다.


▲  무늬만 남은 안채 부엌

안채 부엌은 전통 부엌 양식에 서양식이 더해진 형태로 타일을 깐 아궁이와 부엌 벽, 그리고
그릇과 음식을 씻는 일종의 싱크대까지 갖추고 있다.
장면과 그의 가솔, 경호원들은 이곳에서 만들어진 밥과 온갖 음식의 힘으로 혼란했던 20세기
중반을 살아갔다. 허나 장면 가족이 집을 떠난 이후, 그 껍데기만 남아 모락모락 밥 연기와
국 연기를 뿜어내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장면이 부통령 당선 기념으로 받은 놋그릇(왼쪽)과
바깥 활동 때 늘 가지고 다니던 동그란 도시락통(오른쪽)

▲  장면이 손님 접대용으로 사용했던 그 비싼 신선로(神仙爐)
장면 일가의 넉넉했던 형편을 보여주는 산증인이다.

▲  장면, 김옥윤 부부의 약력과 기도문이 담긴 카드,
김옥윤이 사용했던 옥비녀와 옥반지

▲  김옥윤이 사용했던 안경과 반짇고리, 그리고 이쁜 꽃신
바느질을 하는 김옥윤 여사의 사진도 같이 있다. 조그만 꽃신에서는 그의
파릇파릇했던 젊은 시절의 향수가 불어오는 듯 하다.

▲  장면이 쓰던 돋보기와 명함, 그의 싸인, 손목시계, 만년필, 수표책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장면의 조촐한 쉼터, 안락의자와 거북선마크 베게

거북선이 그려진 노란색 베게는 그가 애용했던 물건으로 안락의자와 함께 그의 편안한 휴식과
숙면을 인도해주었다. 국정으로 늘 잠이 부족했던 그에게 저 의자와 베게는 소중한 쉼터였으
리라.


▲  3대가 다 모인 장면 가족 사진

▲  장면 가옥 사랑채

앞마당 동쪽에 자리한 사랑채는 사랑방과 응접실, 대기실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는 장면이
손님을 접대하거나, 민주당과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회의나 다과를 하거나, 기자회견을 하던
그의 공무(公務) 공간으로 현재는 장면기념관의 일부로 그의 유품과 여러 사진이 전시되어 있
다. (내부 관람 가능)


▲  1956년 부통령 선거 때 쓰인 장면 포스터와 약력

그 당시 민주당 구호는 이랬다. '배고파서 못살겠다. 죽기 전에 갈아보자', 그에 대응하는 자
유당 떨거지들의 구호는 '갈아봤자 별 수 없다. 사탕발림에 속지 말자'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가 과로로 갑자기 죽는 바람에 정권 교체는 이루지 못했지만, 장면이
이기붕을 여유있게 누르고 부통령에 당선되면서 그런데로 체면은 세웠다.


▲  장면이 4대 부통령 시절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과 그에 대한
이승만의 답신(복제품)

▲  1956년 장면을 저격했던 최훈과 김상붕이 장면에게 보낸
참회의 편지(복제품)

장면은 1956년 자유당에서 사주한 최훈과 김상붕의 총격으로 왼쪽 손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
들은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국무총리가 된 장면은 그들의 감형을 주선하여 사형은 면하게 했는
데, 최훈은 1964년 7월 27일 장면에게 1통의 봉함 엽서를 보내 자신의 심경을 드러냈다.

'인간에게 가장 귀하다는 생명마저 빼앗겼던 저희들은 4.19가 일어난 그해 10월 관대하신 은
총으로 생명이 부활되었고, 그해 12월 친히 오셔서 주신 따뜻한 털내의로 몸을 녹이며 살아온
불초 소인은 하루라도 그 은총을 잊을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 조차 효도한 기억이 없는 제가
왜 조석으로 박사님의 온정을 못잊어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박사님께서 원수를 사랑하
라는 예수의 사상을 친히 시범하신 사도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탓입니다'


장면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저격범까지 관용의 정신을 베풀어 살려주는 등, 그의 넉넉한 마음
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  왼쪽은 1960년 8월 27일 민의원에서 열린 제2공화국 국무총리 취임사에서
장면이 발표한 6개항의 시정 방침을 밝힌 시정 연설문(복제품)
오른쪽은 5.16쿠데타 이후 나온 제1차 경제계발 5개년 계획서(복제품)

▲  손님을 맞이했던 사랑채 응접실 (왼쪽 에어컨은 2012년 이후에 설치됨)

▲  장면이 주로 머물렀던 사랑채 사랑방 (이불장, 가구 등이 있음)

▲  1999년 8월 13일, 장면에게 추서된 대한민국 건국훈장(복제품)

▲  자신의 일대기를 직접 저술한 친필 연보(복제품)
어린 시절부터 1965년까지 자신의 일생을 친필로 정리한 일기이다.
자신의 가족과 국내에서의 행적은 물론 자신이 직접 겪은
국제 정세도 소상히 기재해 놓았다.

▲  한자로 쓰인 자신의 좌우명(왼쪽, 복제품) 그리고 장면 사망 8달 뒤
(1967년 2월)에 발간된 그의 기고문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  문과 복도로 이어진 사랑채 내부


* 장면 가옥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1가 36-1 (혜화로5길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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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해 기념) 호랑이를 닮은 서울의 숨겨진 바위 명산, 호암산 (석구상, 한우물, 호암산성, 호암산폭포, 서울둘레길5코스)

호암산 나들이 (석구상, 한우물, 호암산성, 칼바위)



~~~ 호랑이를 닮은 서울의 숨겨진 명산, 호암산 ~~~
(석구상, 한우물, 호암산성터, 칼바위)

한우물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호암산 한우물

호암산폭포

▲  호암산 한우물

▲  호암산폭포

 



 

천하를 접수한 가을이 늦가을로 점점 숙성되어 가던 10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호암산
을 찾았다.

호암산(虎巖山, 393m)은 삼성산(三聖山, 480m)의 일원으로 삼성산 서북쪽에 우뚝 솟아 있
다. 서울 금천구(衿川區)와 관악구, 경기도 안양시에 걸쳐있는 그는 산세(또는 산에 있는
바위의 모습)가 호랑이를 닮았다고 해서 호암산이란 좋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옛 금
천<衿川, 시흥(始興)> 고을의 중심 산(主山)으로 금지산(衿芝山), 금주산(衿州山)이라 불
리기도 했다.

호랑이를 닮은 잘생긴 뫼이나 풍수지리적으로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관악산(冠岳山)과 함
께 서울을 위협하는 뫼로 인식되었다. 하여 조선 조정은 그들로부터 서울(한양)을 지키고
자 비보풍수(裨補風水)에 따라 호암산 밑에 절(호압사)을 세우고, 관악산 정상 밑에 절을
짓고 연못을 팠으며,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세우고,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을 세
로로 세우는 등, 그야말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이처럼 호암산에는 호암산성과 석구상, 한우물, 제2한우물터, 삼성산성지 등의 늙은 명소
와 호압사, 약수사, 불영암 등의 오래된 절이 깃들여져 있으며, 시흥계곡과 잣나무산림욕
장, 호암산폭포 등의 싱그러운 자연 명소가 있다. 또한 칼바위와 신랑각시바위 등 잘생긴
바위들도 잔뜩 포진해 있으며, 조망도 가히 천하일품이라 서울의 상당수 지역과 안양, 광
명, 부천, 인천, 서해바다, 북한산(삼각산)은 물론 공기가 좋을 때는 멀리 파주와 금지된
땅인 개성(開城) 지역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호암산 정상부와 능선으로 오르는 길이 잠시 각박할 뿐, 그 잠깐의 고생만 감내하면 부드
러운 능선길과 국보급 조망이 두 망막과 마음, 다리를 즐겁게 해준다. 그리고 서울둘레길
5코스(사당역~석수역, 13.5km)가 호암산을 가로질러 흘러가며, 잣나무 산림욕장을 중심으
로 호암늘솔길이 싱그럽게 닦여져 있어 산은 비록 작지만 매우 알찬 팔방미인 뫼이다. 그
러다보니 일찌감치 호암산에 퐁당퐁당 빠져들었고, 나의 즐겨찾기 뫼의 하나로 매년 여러
번씩 그의 품을 찾고 있다.



 

♠  호암산 서남쪽 능선에서 석구상, 호암산성(사적 343호)까지

▲  호암산 서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①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 등 서울 서남부 지역과 광명, 부천, 김포 지역


호암산은 시작이 좀 빡세서 그렇지 잠깐의 고생으로 정상부와 능선까지 오르면 느긋하고 부드
러운 곡선의 산길을 즐길 수 있다. 내가 호암산을 즐겨찾기하며 종종 찾는 이유의 하나도 바
로 그것이다.

정상 동쪽에 자리한 깃대봉(민주동산)에서 남쪽으로 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동남쪽
으로 가면 장군봉(412m)과 삼성산으로 이어지고, 서남쪽으로 가면 호암산 서남쪽 능선과 남쪽
봉우리로 이어진다. 장군봉이나 서남쪽 능선이나 길은 거의 부드러운 편이다.


▲  호암산 서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②
시흥동 벽산아파트와 금천구, 광명시 지역이 바로 밑에 바라보이고, 광명시의
지붕인 도덕산~가학산 산줄기 너머로 서해바다까지 능히 시야에 잡힌다.

▲  호암산 서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③
호암산 북쪽 산줄기와 서울 서남부 지역

▲  호암산 서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④ 안양시와 수리산
호암산과 삼성산, 수리산(修理山) 사이로 극락정토를 뜻하는 안양시(安養市)가
포근히 뉘어져 있다.

▲  호암산 서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⑤
시흥동 벽산아파트와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 서울 서남부 지역

▲  호암산 서남쪽 능선과 호암산 남쪽 봉우리

호암산 정상에서 남쪽 봉우리까지는 느긋한 능선길(서남쪽 능선)의 연속으로 능선을 따라 파
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조망을 즐기며 거닐면 된다. 산길 곳곳에는 이름이 없는 멋드러진 바위
와 벼랑이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처럼 포진해 있고, 능선과 바위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은 정
말 꿀맛이다.


▲  호암산성 북문터 (북쪽 모습)

호암산 서남쪽 능선을 더듬어 남쪽 봉우리로 올라서면 금줄이 둘러진 공간이 나온다. 이곳은
석구상 북쪽으로 서남쪽 능선에서 석구상, 한우물로 이어지는 길목인데, 근래 이곳이 호암산
성 북문(北門)터로 확인되면서 북문터 보존을 위해 금줄을 빙 둘러 사람들의 통행을 막고 그
서쪽에 계단식 우회길을 내었다.
호암산 남쪽 봉우리로 들어서면 꼭 거치던 곳이었는데, 그동안 100번 이상 무심히 밟고 지나
갔던 곳이 북문터였다니 새삼 놀라고 말았다. 이래서 세상은 오래 살고 볼일이다.


▲  호암산성 북문터 (남쪽 모습)

호암산 남쪽 봉우리(347m) 정상부에는 호암산성의 흔적이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산성의 형태
는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쭉한 마름모꼴로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 석성(石城)
으로 조성되었는데, 축성 방식은 외벽을 돌로 쌓고 뒷면을 잡석과 자갈 등으로 채운 내탁법(
內托法)을 사용했다.
예전에는 산성 둘레를 약 1,250m, 남아있는 길이는 300m로 보았으나 2018년 이후 업데이트되
어 산성 둘레는 약 1,547m, 남아있는 것은 약 1,016m, 산성 면적은 133,790m로 확장되었다.

1990년 봄, 호암산성과 한우물 일대를 조사하면서 우물터 2곳과 건물터 4곳이 발견되었고, 무
려 6,500여 점에 이르는 토기와 다양한 유물(청동숟가락, 철제 월형도끼, 희령원보 등)이 쏟
아져 나왔는데, 신라 중기 것이 많이 나왔다. 하여 신라 중기인 6세기 말~7세기 초에 군사기
지 및 행정치소로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672년에 당나라군의 공격
에 대비하고자 쌓았다는 설도 있다. 그 시절 신라는 옛 고구려(高句麗) 땅인 요동(遼東)과 평
안도를 중심으로 당나라와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산성 서쪽에서는 멀리 서해바다가 바라보이고, 북쪽으로 한강과 북한산(삼각산)이 시야에 잡
힌다. 하여 서해바다와 한강, 내륙을 잇는 요충지로 중요시되었으며, 양천고성(陽川古城, 서
울 가양동)과 행주산성(幸州山城), 오두산성(파주시)를 잇는 거점 성곽으로 여겨진다.

고려 때는 한강과 서해바다를 살피는 요충지로 쓰인 것으로 보이며, 조선으로 넘어와서도 그
런데로 밥값을 하였다. 특히 딱 1번 크게 쓰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3년 1월이다.
그 시절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에서 왜군을 때려잡은 권율(權慄) 장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자 행주산성에 들어가 진을 쳤는데, 전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에게 군사 4,000명을
주어 호암산성으로 보내 자신의 후방을 지키게 하여 서울 수복 작전을 펼쳤다. 호암산은 서울
을 위협하는 호랑이 모양의 뫼답게 서울로 공격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이후로도 산성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그 중요성이 점차 떨어지면서 조선 후기에 그 이
름이 지워지고 만다. 이후 산성의 운명은 현재 상태가 여실히 말해준다. 버림을 받은 호암산
성은 관리 소홀과 대자연의 무심한 장난, 덧없는 세월의 무게까지 더해져 상당수 녹아내렸고,
산꾼들의 무심한 발길이 성곽을 짓누르면서 담장만도 못한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산성 내에 늙은 존재로는 한우물(제1한우물)과 제2한우물, 건물터, 석구상이 있으며, 불영암
이란 작은 절이 있다. 성곽은 동벽이 그나마 잘 남아있고, 북문터 주변과 서문터 주변, 남문
터 주변에 조금씩 남아있다.
특히 2018년 이후 발굴조사에서 석구상 주변에서 북문터, 석수역으로 내려가는 서남쪽 능선에
서 남문터, 불영암 남쪽 가파른 곳에서 서문터가 새롭게 확인되어 3개의 성문(城門)이 있었음
을 알려주며, 자연에 묻혀있던 성벽 흔적도 많이 건져내었다. 이들 성문터와 성벽 흔적은 예
전부터 수없이 지나쳤던 곳인데 그곳이 산성의 흩어진 흔적이자 살점이었던 것이다.

호암산성은 석구상과 한우물, 제2한우물터, 건물터를 모두 한 덩어리로 묶어서 '서울 호암산
성'이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 343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호암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93-8


▲  호암산 석구상(石狗像)

북문터 남쪽 높은 곳에는 호암산의 오랜 명물인 석구상이 있다. 사방이 난간으로 둘러진 기단
(基壇) 위에 북쪽을 바라보며 정말 귀엽게도 앉아있는데, 지금은 석구상으로 통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광화문(光化門) 해태상과 마주 보게 하여 관악산의 화기(火氣)와 호암산의 기운으로
부터 서울을 지키는 해태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허나 한우물을 조사하면서 '석구지(石狗池)'라 새겨진 장대석(長臺石)이 출토되었고, 시흥읍
지 형승조(始興邑誌 形勝條)에
'호암산 남쪽에 석견(石犬) 4두(四頭)를 묻어 개와 가깝게 하고자 하였으며 지금 현남 7리(縣
南 七里)에 사견우(四犬偶, 개의 형상 4개)가 있다'
란 기록이 있어 석구상으로 무게가 크게
쏠리고 있다.

석구상의 크기는 길이 1.7m, 폭 0.9m, 높이 1m 정도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발과 꼬리 부분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가까이서 바라본 석구상의 위엄

석구상의 모습을 살펴보면 해태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해태치고는 너무 작기 때문이다. 그
렇다고 완벽한 개의 모습이라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앞 모습을 보면 강아지의 모
습 같기도 하나 양이나 개구리처럼 보이기도 하여 보면 볼수록 정말 답이 안나오는 기이한 석
상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제 눈이 안경이라 사람마다 보이는 모습이 제각기 다를 것이다.
그의 뒷부분에는 긴 꼬리가 말려져 있는데, 이는 개의 꼬리가 아닌 고양이나 호랑이의 꼬랑지
와 비슷해 손으로 잡아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석구상의 탄생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으나 대략 조선 중기 이후로 보인다. 그는 정
확히 북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데 정말로 광화문 해태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
를 만든 이유도 속시원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호암산의 기를 누르고 서울을 지키려는 비보풍
수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석구상은 그 모습이 참으로 아담하고 깜찍하여 산꾼들의 눈길을 제대로 잡아맨다. 보는 이들
마다 귀엽다는 말이 연성 터져 나올 정도로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작게나마 웃음을 준다.


▲  석구상의 귀여운 뒷부분 (꼬랑지가 말려져 있다)

▲  석구상 남쪽 호암산성 동벽

석구상을 지나면 인공티가 팍팍 느껴지는 다소 부풀어오른 길이 나오는데, 그 길이 호암산성
의 동벽(東壁) 흔적이다. 예전에는 수풀에 감싸여 있었으나 산성을 무수히 깔고 앉던 수풀을
싹 쳐내고 주변을 산뜻하게 정비했으며, 석구상 바로 남쪽 동벽에는 나무데크길을 씌워 헝클
어진 산성 흔적을 보호한다. 그리고 동벽 서쪽에는 제2한우물과 석수역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크고 견고했던 성곽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2m 내외로 움푹 낮아졌고, 산길로 변해버
린 동벽에는 성돌이 이리저리 박혀 단단한 성곽을 이루었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숲 그늘에 자리한 호암산성 동벽
고된 세월에 많이 초췌해진 산성 동벽이 그런데로 산성의 모습을
풍기며, 건물터 유적 동쪽까지 이어진다.

▲  호암산성 동벽 (남쪽에서 본 모습)

거의 앉은뱅이가 되버린 호암산성의 1.5km 구간 중 석구상에서 건물터 유적에 이르는 동벽이
그나마 상태가 좋다. 비록 산성은 헝클어진 상태이나 성곽 밑은 아주 각박한 경사라 성곽 길
을 음미하면서 걸을 경우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안전시설도 전혀 없음)



 

♠  호암산 한우물과 불영암(佛影庵)

▲  윗쪽에서 바라본 한우물

호암산 남쪽 봉우리 정상 서쪽에는 불영암과 호암산의 오랜 명물인 한우물이 있다. 여기서 한
우물은 큰 우물이란 뜻으로 산정(山頂)에 이런 거대한 우물이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
인데, 천하가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해 있어 하늘의 우물인 천정(天井) 분위기도 물씬 풍긴다.
특히 이곳은 물을 대줄 수원(水源)도 마땅치 않다고 하는데, 이런 큰 우물이 1개도 아니고 2
개나 있었음에도 물이 늘 풍부하게 고여 있으며, 가뭄 때도 물이 가득하여 그 신비로움을 더
욱 끌어올린다. (지금은 이곳 우물만 있으며, 제2한우물로 살아가는 다른 우물은 터만 남음)

한우물은 다른 말로 천정, 용복, 용초 등이라 불렸으며, 7~8세기 경에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
다. 현재 우물 자리 밑에서 신라 우물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그 시절에도 못의 규모는 상당
하여 동서 약 17.8m, 남북 약 13.6m, 깊이 약 2.5m에 달했다고 한다. 이후 조선 때 그 위에
새롭게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의 장방형 우물을 닦았다.
1990년 봄, 한우물을 발굴하면서 12개 기종 1,313점의 유물이 앞을 다투어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 '仍伐內力 只來..' 글씨가 새겨진 청동숟가락이 나와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열쇠가 되었
다. 또한 지표에서 30cm까지는 백자 파편을 비롯한 조선시대 유물이 많이 나왔다.


▲  남쪽에서 바라본 한우물

임진왜란 시절인 1593년 1월, 전라병사 선거이가 권율 장군의 명으로 군사 4,000명을 이끌고
호암산성에 머물 때, 이 우물을 군용으로 사용했으며 세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
勝覽)에는
'虎岩山 有固城 城內有一池 天早祈雨(호암산에 견고한 성이 있는데 성안에 연못이 하나 있어
일찍이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다)'
란 기록이 있어 평시와 전쟁 때는 군사 식수로 쓰고, 가뭄이
극성일 때는 기우제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서울의 화재를
막으려는 방화용설(防火庸設)도 설득을 얻고 있다.
또한 석구지(石狗池)란 별칭도 지니고 있는데. 이는 한우물에서 '석구지'라 쓰인 장대석이 나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남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서 커다란 우물터(제2한우물터)가 발견되
어 제1한우물이란 이름도 가지고 있다.

한우물은 식수용으로 태어난 곳이나 현재는 우물 보호를 위해 딱히 손은 대지 않는다. (한우
물로 들어가는 수맥 일부를 불영암에서 쓰고 있음) 우물에 가득 모인 수분은 식수가 아닌 우
물을 채워 연못 분위기를 내는 원초적인 역할이나 할 뿐이다. 우물 남쪽에는 갈대가 둥지를
틀고 있어 운치를 자아내며, 북쪽에는 소나무 1그루가 우물을 거울삼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
는다. 그리고 우물 주위로 돌난간과 철난간을 2중으로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한우물 주변은 천하를 조망하기 아주 좋은 곳이다. 하여 이곳에서는 금천구와 구로구, 영등포
구 등 서울 서남부와 경기도 광명, 부천, 인천 지역이 거침없이 바라보여 두 눈이 너무 호강
을 하며, (대기가 좋을 때는 고양, 파주, 개성까지 시야에 들어옴) 우물 주변에는 의자가 여
럿 있어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로 높은 서울을 굽어보며 잠시 쉬어 갈 수 있다.

한우물은 처음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호였으나 1991년 호암산성과 제2우물터, 건물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사적 343호로 지정되었다. (지정 명칭은 '서울 호암산성')


▲  한우물의 깊은 속살
우물 주변의 모든 것들이 한우물을 거울로 삼아 그들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  한우물에서 바라본 천하 ①
시흥벽산아파트와 시흥동, 독산동 등 금천구와 구로구, 광명시, 부천시 지역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호암산 북쪽인 목골산을 비롯해 금천구와 관악구, 영등포구, 동작구 등 서울 서남부 지역과
한강 너머의 서울 서북부 지역, 북한산(삼각산), 고양, 파주 지역이 시야에 보인다. 그리고
푸른 창공에는 김포공항으로 내려가는 비행기가 하나 떠있다. (호암산은 제주와 부산 등 지
방에서 김포공항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라 비행기 구경에는 아주 좋음)


▲  불영암 대웅전(大雄殿)

한우물 옆에는 그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암자, 불영암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 위에 자리하여 속세를 향해 훤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호압사나
벽산아파트, 호암로에서도 확 눈에 띈다.

불영암의 내력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정보가 없어 파악하긴 힘들지만 관악산과 호암산의 기운
으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기도를 올리니 서울에 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런
것을 보면 오랫동안 승려들의 기도 수행처로 쓰였던 듯 싶으며, 호암산성 서벽에 위치해 있고
조망이 우수하여 산성을 지키며 속세를 살피던 망대의 역할도 했을 것이다. 게다가 100년 이
상 묵은 절들은 그 내력을 담은 안내문을 절 앞에 내걸기 마련이나 이곳은 그런 것도 없어서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금의 절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 무지 짧은 손바닥만한 암자로 대웅전과 산신각(山神閣), 요사(寮舍)로 쓰이는 작은 건
물이 전부이며, 그나마 대웅전만 불전(佛殿)의 분위기가 진할 뿐이다. 게다가 절이 들어앉은
위치도 건물을 크게 불리거나 사세를 늘리기도 여의치 않다.
허나 한우물이 곁에 있어 물수급은 어렵지 않으며, 벼랑에 자리한 탓에 조망만큼은 몸살이 날
정도로 좋다. 그러니 한우물과 일품 조망, 그리고 기존의 기도처를 후광으로 삼아 절을 세웠
을 것이다.
이곳 높이는 해발 310m 정도로 서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절인데, 아
무리 시흥동 벽산아파트가 키다리라고 한들 불영암 앞에서는 어림도 없다.

예전에는 대웅전과 요사만 있던 조촐한 모습이었으나 2009년 이후 대웅전 뒤쪽 바위에 커다란
불두(佛頭)를 얹히고, 절 앞에 돌탑을 심어 돌탑거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2011년에는 제2한우
물터 주변에서 발견된 절구통과 맷돌, 모서리돌 등을 돌탑 앞에 잠시 두어 볼거리를 늘리기도
했다. 특히 고려불화의 유일한 전수자인 승려 여지(如智)가 2005년에 그린 '104위 신중탱화(
神衆幀畵)'가 봉안되어 있어 이곳의 새로운 명물을 꿈꾼다.

* 불영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93-2 (호암로192, ☎ 02-809-3754)


▲  불영암 대웅전 내부
대웅전 내부는 조촐한 외부와 달리 꽤 장엄하다. 불단에는 석가여래상이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대동하여 3존상을 이루고 있고, 우측 벽에는 여지가 그린
104위 신중탱화가 빼곡히 자리를 채우고 있다.

▲  돌탑거리를 이루고 있는 불영암 앞길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  간단하게 이루어진 불영암 범종각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 등 사물(四物)의 보
금자리이다. 6시와 18시가 되면 잠든 범종을
흔들어 깨우는데, 그 종소리가 호압사와 벽산
아파트단지까지 널리 울려퍼진다.

            ◀  산신각 산신상
대웅전 뒤쪽 벼랑에는 산신 식구를 머금은 산
신각이 달려있다.
불영암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벼랑에
나무로 대를 쌓고 그곳에 1칸짜리 산신각을 닦
았는데, 보통 산신 가족은 산신 할배와 호랑이
, 동자 등이 전부이나 이곳은 특이하게 사슴까
지 겯드려 놓아 그의 구성원을 늘렸다.


▲  세모로 솟은 돌탑과 제2한우물터, 건물터에서 발견된
절구통(절구석)과 맷돌

돌탑 앞에 놓인 절구통과 맷돌은 호암산성 군사들이 쓰던 것들로 시흥동 주민이 발견하여 불
영암에 알렸다. 하여 불영암에서 2010년 이곳으로 수습했는데, 신라나 조선시대 것으로 여겨
지며 다른 절구통과 달리 금, 은, 동, 철의 성분이 많이 들어있어 상당히 무겁다고 한다. 그
리고 옆에 놓인 맷돌은 어처구니를 상실한 채, 열심히 돌아가던 왕년을 그리워한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짐)


▲  바위에 머리만 꽂은 불영암 석불(石佛)

대웅전 우측 바위에는 2009년에 만든 석불이 서쪽을 굽어보고 있다. 석불이라고 하나 바위에
커다란 머리만 심은 단출한 형태로 바위는 그의 자연산 몸뚱이가 되었다. 바위에 접착된 머리
주변에 하얀 석고 등이 가득해 다소 이질감을 주나 장대한 세월은 저들을 완전한 하나의 존재
로 만들어 줄 것이다.
석불 앞에는 키 작은 소나무가 하늘로 곧게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쳐져있는데, 그 모습이 마
치 불상에 머리를 숙여 예를 올리는 듯 하며, 석불 머리 옆에는 산신각이 달려있다.


▲  불영암 산신각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밑에 불영암 경내가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강서구, 광명시,
부천시, 인천광역시가 흔쾌히 시야에 들어와 두 망막을 제대로 흥분시킨다.
한우물과 불영암 구역에서 제일 높은 곳이자 가장 조망이 좋은 곳이니 한우물에 왔다면 이곳
에 꼭 들려 국보급 조망을 덤으로 누리기 바란다. 대웅전 옆에서 계단을 조금 올라가면 바로
산신각이다.



 

♠  호암산 마무리

▲  호암산성 서문터 (바깥에서 바라본 모습)

불영암에서 칼바위, 시흥동 방향 산길을 조금 내려가면 호암산성 서문터가 마중을 한다. 호암
산에 오면 거의 이 코스로 내려가는 편이었는데, 예전에는 호암산성이 여기까지 팔을 뻗을 줄
은 생각도 못했고, 여기에 성문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글쎄 여기서
성곽과 성문터가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동안 호암산성이 숨겨왔던 속살이 많이 들춰지면서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호암산성 서문터와 돌탑 하나

서문터는 각박한 경사지에 자리해 있고, 좌우로 벼랑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감히 기웃거릴
수 없는 천험(天險)의 자리이다. 남문은 여기보다 지형이 약간 좋으나 역시 공격에 불리하며,
북문도 능선에 자리하나 적들이 호암산 정상부를 점령하고 치고 들어올 경우 수비가 약간 힘
들 수 있다.


▲  속세를 향해 고개를 내민 칼바위조망대

서문터에서 2~3분 정도 내려가면 칼바위 조망대가 나온다. 바로 그 밑에 살짝 스쳐도 피가 나
올 것 같은 예리한 기세의 칼바위가 있는데, 가파른 산등성이에 아슬아슬하게 자리해 있어 자
칫 살짝만 건드려도 밑으로 미련없이 굴러떨어질 것 같은 모습이다.
이 바위는 위에서 보는 것보다는 밑에서 봐야 그 위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데 그 모습이 당
장이라도 속세를 향해 칼질을 벌일 듯한 기세라 보기만 해도 조마조마하다.


▲  예리한 칼날 같은 칼바위 (바로 밑이 벽산5단지)
서울을 위협하던 호암산의 날카로운 발톱은 아닐까?


이런 바위에는 옛사람들이 붙인 그럴싸한 전설이 있기 마련인데,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급 전설이 한 토막 전해온다.
때는 임진왜란 시절, 왜군이 시흥 고을까지 쳐들어오자 장사 1명이 혼자서 왜군을 무수히 때
려잡으며 분투를 벌였다. 이에 단단히 쫄은 왜장은 그에게 턱걸이 내기를 해서 이기면 물러가
겠다고 제안을 했는데, 바로 이 칼바위에서 내기를 한 것이다.
자신만만하던 왜군 장사는 턱걸이가 100번째에 이를 무렵, 힘이 다 떨어져서 바위 밑으로 떨
어져 골로 갔는데, 그때 바위의 끝이 쪼개져 나갔다고 전한다. 어쨌든 시흥 고을 장사는 내기
에서 이겼고, 약속을 철석처럼 어기기 일쑤였던 왜군이 의외로 후퇴하여 사라지자 긴장이 풀
린 장사는 인근에 소변을 보았는데, 그 줄기가 얼마나 강한지 바위 한가운데가 움푹 패여 나
갔다고 하며, 그 바위가 옆에 있는 팽이바위라고 한다.

칼바위가 세워진 틈새는 매우 좁아보이지만 속은 매우 넓어서 6.25 때 이곳에 숨어 지낸 사람
도 있었다고 전한다. 허나 바위는 위치상 출입이 어려운 구역이라 그것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  칼바위 옆에 있는 팽이바위 (고양이 얼굴처럼 보이기도 함)

▲  칼바위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시흥동 벽산아파트와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구, 광명시, 부천시 지역

▲  칼바위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시흥동 남부와 광명시 동부, 가학산~구름산 산줄기, 인천광역시 등

▲  칼바위 조망대에서 지켜본 햇님의 칼퇴근 현장
햇님은 무수한 빛을 뿌리며 그만의 공간으로 꽁무니를 빼고 천하는
점차 달님의 검은 도화지로 타들어간다.

▲  호암산 산길 (칼바위에서 호암산폭포 방향)

▲  호암산의 새로운 명물, 호암산폭포

칼바위에서 7~8분 정도 내려가면 서울둘레길5코스와 만난다. 여기서 북쪽(호압사입구)으로 조
금 가면 호암산폭포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겉으로 보면 자연산처럼 보여 서울에 이런 실한 폭
포가 있었나? 싶어 감동이 생길 수 있지만 현실은 근래 닦여진 인공폭포이다.

폭포가 있던 곳은 그냥 가파른 산지였으나 2011년 여름에 일어난 산사태로 아주 민망한 모습
이 되었다. 하여 금천구청은 3억원을 투입해 인공폭포로 다져 2012년 8월 11일에 세상에 내놓
았는데, 폭포 높이는 무려 75m, 경사도는 20~70도로 서울에서 가장 큰 폭포가 되었다.
인근 지하수를 소환해 폭포수로 삼았으며, 인공폭포긴 하지만 주변 풍경과 잘 조화를 이루게
최대한 인공미를 배제하여 딱 봐도 인공티가 나지 않게끔 만든 것이 큰 특징이다. 인공폭포란
한계는 있지만 감쪽 같이 자연산처럼 만들어 거부감을 크게 잠재웠으며, 물이 늘 흐르는 것이
아닌 일정 시간에만 잠깐씩 폭포수를 흘려보내 그것이 좀 아쉽다. 폭포 가동 시간은 8시, 9시
, 10시, 12시, 16:30, 17:30분이며, 30분 정도 물을 흘려보내고 닫아버린다. (폭포 가동 시간
은 변경될 수 있으며, 겨울에는 작동하지 않음)

폭포 중간에는 쉼터를 만들어 폭포를 가까이서 느끼도록 했고, 폭포 밑에 서울둘레길이 지나
는 곳에 둑을 쌓고 폭포의 전경을 볼 수 있게 했다. 허나 폭포긴 해도 물줄기가 그리 시원하
진 못하다. 그냥 물이 흐르는구나 여겨질 정도. 그리고 겨울 제국 시절에는 폭포수가 얼어붙
어 거대한 빙폭을 이룬다.


▲  호암산폭포의 전경을 구경할 수 있는 호암산폭포 둑방

▲  벽산5단지 정류장 옆에 있는 호천약수터
호암산에 여러 약수터가 있지만 속세와 가장 가까이 붙은 샘터는 바로 이곳이다.
이곳을 끝으로 가을에 찾아간 호암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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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영원한 남주작이자 포근한 뒷동산, 남산 나들이 (남산야외식물원, 남산공원길, 남산팔각정, 한양도성)

서울 도심의 남주작, 남산 봄나들이



'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봄나들이 '
남산공원 남측순환도로(남산공원길)
▲  남산공원 남측순환도로(남산공원길)
 



 

듣기만 해도 마음이 설레는 그 한 글자 봄, 그 봄이 반년 가까이 천하를 지배했던 겨울
제국(帝國)을 몰아내고 천하 만물을 따스히 어루만지던 4월의 첫 무렵에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이자 상큼한 뒷동산인 남산을 찾았다.

봄이 도래하면서 개나리와 진달래, 벚꽃 등 온갖 꽃과 나무들이 겨울 몰래 잉태했던 꿈
을 펼치며 앞다투어 봄의 나래를 펼친다. 이럴 때는 정말 집에 있기가 너무 섭하지. 하
여 무조건 집을 나서 나들이나 답사, 등산 등으로 봄의 향연(饗宴)을 즐긴다. 그래야만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봄이 비록 겨울 제국과 제국의 부흥을 꿈꾸는 꽃샘추위를 말끔히 토벌했지만 황사와 미
세먼지 등 다른 세력이 극성을 부리며 기껏 해방에 들뜬 천하를 유린한다. 몽골과 고비
사막 등에서 일어난 봄의 단골 불청객인 황사야 봄에는 늘 찝적거리던 존재라 그렇다쳐
도 중공 잡것들이 악의적으로 날려보내는 미세먼지 패거리들이 나날이 세력을 불려나가
맑은 하늘 보기가 점점 우울해지고 있다. 우리가 남산을 찾은 날도 그 먼지가 작렬하여
시야가 곱지 못했다.
이럴 때는 집에 틀어박히는 것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좋다고 하나 날씨도 좋고 봄꽃
이 유혹하니 그러기가 힘들다. 특히 역마살 끼가 단단히 낀 나는 더욱 그렇다.


▲  벚꽃이 만연한 그랜드하얏트(Grand hyatt) 서울호텔 앞 산책로
(경리단길에서 남산야외식물원으로 넘어가는 길)



 

♠  남산 남쪽 끝에 자리한 남산야외식물원

▲  남산야외식물원 동쪽 산책로

이번 남산(南山) 나들이는 경리단길과 가까운 남산야외식물원에서 그 첫 단추를 여밀었다. (6
호선 녹사평역에서 경리단길을 거쳐 남산야외식물원으로 접근했음)
남산야외식물원은 남산 남쪽 끝자락에 넓게 둥지를 튼 싱그러운 공간으로 예전에는 외인아파
트 2동이 건방지게 남산을 가리며 흉물스럽게 자리해 있었다. 그러다가 1994년 그들을 싹 밀
어버리고 9,811㎡ 부지에 야생화공원을 닦으면서 남산야외식물원은 싹을 틔웠다.

1995년 전국 광역단체 시도에서 옮겨온 소나무 80그루로 팔도소나무숲을 닦았으며, 1997년 2
월 야외식물원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2002년 4월에는 이 땅의 산야에서 자라는 야생화 185종
과 나무 93종을 심었고, 생태연못과 조그만 계곡을 덩달아 조성했다. 야생화공원을 포함한 공
원 면적은 59.241㎡, 품고 있는 식물은 10여 개의 주제로 나누어 배치했으며, 현재 식물 269
종 117,132주가 심어져 거대한 야외식물원을 이룬다.

이곳 야외식물원의 중심은 야생화공원이며, 그 외는 그냥 자연공원이다. 숲이 짙고 산책로가
잘 닦여져 있으며, 야외식물원이라고 해서 입장료를 받거나 관람시간에 제한이 있는 것은 절
대 아니다. 언제든 안길 수 있는 포근한 공간이다.


▲  야생화들의 강인한 협동심이 빚어낸 어여쁜 화단

▲  남산야외식물원 야생화공원 산책로

▲  생태계곡 남쪽 종점과 야생화화원
야외식물원 서쪽에는 2002년에 닦여진 생태연못이 있다. 그 연못에서 발원한
조촐한 계곡이 싱그러운 자연을 머금으며 공원을 곱게 수식한다.

▲  생태계곡과 산책로

▲  생태계곡에서 만난 물레방아의 위엄
동그란 물레방아가 이곳의 고운 경치를 크게 돋군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그저 평범한 경치였겠지.

▲  단촐하게 생긴 생태계곡 징검다리
서울 도심에서 거의 흔치 않은 정겨운 징검다리이다.

▲  졸졸졸~~♪ 노래를 부르며 흐르는 생태계곡 (서쪽 구간)

▲  수중식물과 개구리가 나래를 펼치는 생태연못 (동쪽)

2002년에 조성된 생태연못에는 연꽃을 비롯해 많은 수중 동물과 식물이 살아가고 있다. 이제
막 봄에 의해 겨울 제국이 씌운 봉인이 풀린 상태라 수초가 어색한 푸른 머리를 보이며 덥수
룩하게 있지만 곧 여름이 오면 자연 속의 늪지대처럼 무성해질 것이다.
연못은 조촐한 크기로 주변에 산책로와 나무데크길이 닦여져 있으며, 연못 중간에 나무 다리
가 운치를 더한다.

*
남산야외식물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2동 258-148 (소월로323)


▲  생태연못 서쪽

▲  소나무가 무성한 남산 산책로

생태연못을 지나 서쪽으로 가면 남산으로 오르는 산책로가 나온다. 남산 남쪽이 대체로 경사
가 각박한 편이라 그 경사를 다소 순화시켜 길을 냈는데, 애국가에도 나오는 남산의 상징 소
나무가 삼삼하여 솔내음이 아주 진하다. 길 중간에는 약수터와 운동시설이 여럿 있으며, 그
길의 끝은 남산 남측순환도로와 만난다.


▲  솔내음이 진하게 깃든 남산 산책로
(남산야외식물원에서 남측순환도로로 올라가는 길)

▲  남산 남측순환도로(남산공원길)에 들어서다



 

♠  남산의 하늘길 거닐기

▲  하늘로 이어질 것 같은 남산 남측순환도로(남산공원길)

남산의 하늘길이자 서울 도심의 남쪽 하늘길인 남산 남측순환도로에 이르자 여기서 정상 방향
인 왼쪽(서쪽)으로 길을 잡았다. 때가 때인지라 개나리와 진달래, 벚꽃, 산수유 등이 앞다투
어 아름다움을 뽐내며 봄의 향연을 펼치고, 사람들은 그들의 즐거운 향연에 제대로 눈 호강,
마음 호강을 누리며 미세먼지에도 아랑곳 않고 봄꽃놀이를 즐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남산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서울의 한복판이자 도심 남쪽에 누워있는 남산(270m, 또는 262m)은 북악산(백악산), 인왕산,
낙산(낙타산)과 더불어 한양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다. 서울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으로
북현무(北玄武)인 북악산(백악산)을 바라보고 있으며, 도성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산이란 아
주 평범한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천하에 남산이란 산이 참 많은데, 이들의 공통점은 시내와 아주 가깝고 시민들이 많이 안기는
휴식처이며, 경주(慶州) 남산(468m)을 제외하면 산세가 낮고 완만해 누구든 편히 오를 수 있
는 친근한 산이라는 것이다. 서울 남산도 대체로 그런 스타일로 그 걷는 것도 싫다면 남산을
오르는 시내버스나 시티투어버스,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금세 정상까지 간다.

남산의 원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으로 그 옛말인 '마뫼'는 남산을 뜻한다. 인경산(引慶山),
잠두봉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1395년 조선 태조(太祖)는 남산을 높여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그를 위한 사당인 목멱신사(木覓神祠)를 산꼭대기에 세웠다. 그리고 이후 매년 제를
올리면서 국사당(國師堂)으로 이름을 갈았다.
남산 능선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한양도성이 걸쳐져 있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전국에
서 날라오는 봉화를 받았다. 조선시대 봉화는 5개 노선이 있었는데, 그 종점이자 중심지가 바
로 남산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한양을 점령한 왜군이 산허리에 왜장대(倭將臺)란 성을 쌓았으며, 병자
호란 이후 어영청(御營廳)과 금위영(禁衛營) 분영이 남산에 설치되어 서울을 지켰다. 왜정 때
는 왜군 헌병대가 산자락에 있었고, 1945년 이후에는 중앙정보부가 1호터널 북쪽에 말뚝을 박
으며 갖은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남산은 비록 인왕산, 북악산(백악산)만은 못해도 도성 경승지로 명성이 자자하여 양반사대부
들이 세운 정자와 그들이 새긴 바위글씨가 즐비했다. 허나 지금은 바위글씨 극히 일부를 빼면
남아있는 것이 없다.
가난한 선비와 하급 관리들이 산자락에 많이 살았으며, 개화기 이후 왜인(倭人)들이 남산 북
쪽과 남촌(南村)이라 불리는 청계천 이남에 터를 닦고 살았는데, 왜정 때는 남산도서관 자리
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남산 중턱에는 왜성대공원과 경성신사(京城神社)를 지으면서 그들
만의 꼬질꼬질한 놀이터로 만들기도 했다.
특히 조선신궁을 짓는 과정에서 남산의 오랜 성역이던 국사당이 신궁보다 높은 곳에 있다며
왜정이 속좁게 징징거리자 어쩔 수 없이 인왕산(仁王山)으로 자리를 옮기는 비운을 감당해야
했다. 그렇게 남산의 중심은 토박이 목멱대왕에서 왜열도의 온갖 잡귀들로 바뀌었다.
그렇게 왜정이 남긴 잡다한 자국들은 1945년 이후 대부분 지워졌으나 조선신궁 계단과 일부
소소한 흔적들은 자신의 정체를 꼭꼭 숨기며 구차한 목숨을 연명한다.

196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케이블카가 놓여 남산의 이름 두 자를 떨쳤고, 1965년 조선신궁
자리에 남산도서관을, 1969년에는 백범 김구(白凡 金九)의 동상을 세워 주변을 백범광장으로
삼았다. 1973년에는 국립극장이 지어졌으며, 1975년에는 6년의 대공사 끝에 천하 최대의 타워
인 서울타워(남산서울타워)가 완성되어 남산의 높이를 배로 높였다. 이 타워는 1980년에 공개
되어 남산과 서울의 굳건한 상징이 되었다.


▲  벚꽃비가 우수수 대지를 적시는 남산 남측순환도로

비록 친일파 떨거지가 지은 것이긴 하나 우리 애국가에 보면 '남산 위에 저 소나무'란 구절이
나온다. 그 구절에서 보이듯 남산은 북악산(백악산)과 더불어 소나무로 유명했는데, 특히 금
송(金松)이 많이 자랐다. 소나무 외에도 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며 산을 아름답게
수식하고 있고, 도심 한복판에 솟아있어 학의 등에 올라탄 듯 국보급의 조망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산 곳곳에 남산이 베푼 약수터가 뿌리를 내리며 나그네의 목을 아낌없이 축여주고 있
는데, 그중에서 부엉바위 약수터가 제일 유명했다. 허나 이 약수는 남산3호터널이 뚫리면서
그 혈이 막혀 사라진 상태이다. 그 외에 여러 약수터가 있으나 도심 속에 있다는 단점으로 목
숨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이며, 문을 닫은 약수터도 적지 않다. 또한 그 흔한 계곡도 거의 남
아있지 않으며, 겨우 실처럼 흐르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여럿 있을 뿐이다.

남산은 남측순환도로(남산공원길)와 북측순환도로, 그리고 여러 갈래의 탐방로가 있는데, 장
충단공원과 국립극장, 필동(筆洞), 남산골공원, 백범광장, 남산도서관, 남산야외식물원 등에
서 오르는 길이 있다.
또한 한양도성과 장충단공원, 남산봉수대, 와룡묘, 한양공원 표석, 남산골한옥마을(남산골공
원) 등의 문화유산과 백범광장, 안중근기념관, 남산야외식물원, 남산서울타워 등의 명소를 지
니고 있으며, 산 전체가 남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어 도심 속 나들이, 산책 명소로 그 인기가
식을 줄을 모른다. (서울을 찾은 타 지역 사람들과 외국인 잡것들 등 외래 관광객의 1/3 이상
이 남산을 찾는다고 함)

남산이 없는 서울은 감히 상상할 수 조차 없다. 도심 속의 허파이자 꿀단지로 남산이 있으니
인근 북악산과 인왕산, 경복궁 등의 조선 왕궁이 합세해 도심의 녹지 비율이 좀 되는 편이지
그가 없었다면 서울은 더 지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개인적으로 나의 옛 추억이 몇 권
씩 녹아있는 현장으로 나에게도 꽤 의미심장한 곳인데, 내가 제일 많이 안긴 산이 바로 남산
으로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500회 이상은 올랐던 나의 원조 즐겨찾기 명소이다.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지점에서 바라본 천하 (이태원, 용산구 방면)
서토(중원대륙)에서 불법적으로 날라온 더러운 미세먼지에게 서울의 하늘을
도둑질 당했다.

▲  남산 포토아일랜드 남측 지점에서 바라본 남산서울타워
미세먼지 때문에 가까이에 있는 남산서울타워 조차 희미하게 다가온다.

▲  다시 남측순환도로를 거닐다 (정상 방향)

▲  한양도성과 만나기 직전 남측순환도로

▲  고개를 내민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적 10호)
남산 정상을 코앞에 둔 남산서울타워 종점(02, 04번 종점)에 이르니 온갖
관광객들로 뒤엉켜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룬다.

▲  남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길 (남산서울타워 종점에서 정상 방향)
남산서울타워 종점에서 서쪽 오르막길을 3분 정도 오르면 남산 정상과
남산서울타워 밑에 이르게 된다.


▲  서울 도심의 남쪽 머리, 남산 정상(270m)

* 남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남산동, 회현동 / 용산구 용산동2가, 후암동 
* 남산공원 홈페이지는 윗 사진을 클릭한다. (중부공원녹지사업소 ☎ 02-3783-5900)



 

♠  남산 정상 주변

▲  남산 팔각정(八角亭)

하늘과 맞닿은 남산 정상에는 남산서울타워와 팔각정, 남산봉수대가 둥지를 틀고 있다. 남산
서울타워는 남쪽, 팔각정은 중앙, 남산봉수대는 북쪽에 각각 자리해 있는데, 그중 인파가 가
장 많은 곳은 남산서울타워(높이 236.7m)와 팔각정 주변이다.

팔각정은 남산서울타워와 더불어 남산의 주요 장식물로 이곳에는 원래 1959년에 이승만(李承
晩) 대통령을 치켜세우고자 세운 우남정(雩南亭)이 있었다. 여기서 우남은 이승만의 호로
1960년 4.19의거로 그가 물러나자 바로 철거되었다.
이후 1968년 11월 탑골공원 팔각정을 모델로 삼아 지금의 팔각정을 지었으며, 남산 정상을 수
식하는 존재로 삼았다. 정자 서쪽에는 한양도성 여장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산바람이 주변
에 늘 머물고 있어 한여름에도 시원하다. 정자 자체는 60년도 채 안된 존재이나 관광객들로
늘 붐비며, 매년 1월 1일 새해 해맞이 행사가 성황리에 열린다.


▲  옛 국사당(國師堂)터 표석

남산 정상은 늘 사람들로 미어터지지만 팔각정 부근 구석에 누워있는 국사당터 표석에는 눈길
을 주는 이들이 거의 없다. 애처로운 눈빛으로 지나는 이들의 눈길과 관심을 호소하나 거의
외면을 받는 국사당 표석, 표석에 쓰인 국사당은 앞서 언급했던 남산의 수호신 목멱대왕의 사
당으로 1395년에 태조가 세웠다.
1404년에 목멱대왕을 호국(護國)의 신으로 높이면서 목멱신사(木覓神祠)라 불리기도 했던 남
산의 성역이자 중심이었으나 1925년 왜정이 조선신궁을 지을 때 국사당이 그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것에 쓸데없이 아니꼬움을 드러내면서 다른 데로 옮기라고 난리를 쳤다. 그래서 태조와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를 했던 곳이라 전하는 인왕산 선바위 밑으로 눈물을 머금고 이사
를 가게 되었고, 목멱대왕의 남산은 왜열도의 온갖 잡귀들이 판을 치는 일그러진 현장이 되었
다.

국사당을 핍박했던 왜정도, 조선신궁도 다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그곳에 건방지게 들어앉던 왜
열도의 잡귀들도 추방되었지만 남산의 주인인 국사당은 끝내 제자리로 오지 못하고 인왕산에
뿌리를 내려 선바위와 함께 무속신앙의 성지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집과 탑, 비석 등의 부동산 문화유산은 가급적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이 맞겠지만 사람들로 미
어터지는 이곳에 다시 와봐야 너무 시끄러운 나머지 국사당 신들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다
. 그만큼 남산은 많이도 변했다.


▲  남산 목멱산봉수대(木覓山烽燧臺) - 서울 지방기념물 14호

정상 북쪽에는 남산의 오랜 상징물인 남산봉수대가 도심을 바라보며 우뚝 자리해 있다. 남산
의 옛 이름을 취해 목멱산봉수대(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목멱산봉수대터')라 불리기도 하며,
서울에 있다고 해서 '경(京)봉수대'란 별칭도 있으나 그냥 속편하게 남산봉수대라 불러도 크
게 문제는 없다. 어차피 남산이나 목멱산이나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봉수대란 불을 피우거나 연기를 이용하여 변방에 소식을 알리던 옛날 통신 수단으로 주로 산
꼭대기에 설치되었다. 낮에는 연기로 알리고, 밤에는 불을 피워 소식을 전했으며, 비가 많이
오는 경우에는 봉수지기가 직접 다음 봉수대까지 힘들게 달려가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봉수대는 크게 5개 노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변경인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
滿江), 남해바다에서 시작하여 남산을 종점으로 삼았으며, 평소에는 봉화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경계에 다다르면 3개, 경계를 넘으면 4개, 전쟁이 터지면 5개를 올렸다.

전국 봉수대의 종점 남산봉수대는 1394년에 설치되어 하루도 연기가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움직였으며, 동쪽에서부터 서쪽을 향해 5개소가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1895년 봉수
제도가 폐지되면서 문을 닫았고, 왜정 때 싹 철거되면서 그만 그 위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청구도(靑邱圖)를 통해 봉수대터 1곳을 발견하니 그곳이 지금 봉수대로 철저한 고증을
통해 1994년에 복원되었다. (나머지 4곳은 아직도 위치를 모른다고 함;;)

남산봉수대는 벽돌로 쌓은 5개의 봉수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금은 불과 연기를 피울 일이
없는 죽은 봉수대로 남산 정상을 수식하는 상징적인 존재이자 조선시대 봉수제도의 중앙봉수
대란 의미 밖에는 없다. 그것이 현역에서 물러난 사물의 쓸쓸한 뒷모습이다. 봉수대는 관람이
가능하며,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가히 장관이라 이곳이 왜 조선 봉수대의 중심이 되었는
지 이해가 될 것이다. 남산이 서울 한복판에 솟아 있고 조망이 뛰어나 사방에서 날라오는 봉
수대 연락을 받기에 아주 좋기 때문이다.
참고로 서울에는 남산 외에도 무악봉(毋岳峰) 동봉수대와 봉화산(烽火山) 봉수대(아차산봉수
대터), 봉산 봉수대, 개화산 봉수대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근래에 복원된 따끈따끈한
상태로 봉산과 어설프게 재현된 개화산봉수대를 빼고 모두 서울시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
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8-1


▲  벽돌로 잘 지어진 목멱산봉수대
불을 피우는 봉수대는 벽돌로 쌓고 그 밑도리는 성벽처럼 돌을 다듬어서 쌓았다.
1994년에 복원된 상태라 고색의 때는 채 익지 못했으며 아직까지는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피부를 유지하고 있다.

▲  목멱산봉수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서울 도심은 어디로 갔지?)
천하의 최대 민폐덩어리 중공이 보낸 미세먼지의 농간으로 바로 밑인 서울
도심도 짙은 안개에 감싸인 듯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차라리
저게 안개였으면 좋겠다.

▲  남산 정상에 묻힌 85타임캠슐
1985년 10월 17일에 묻은 것으로 딱 500년 뒤인 2485년에 봉인을 푼다고 한다.
500년 전 사람들의 물건을 본 그들의 반응은 과연 어떠할까?
벌써부터 궁금하다.

▲  남산 숲길 (북측순환도로로 내려가는 길)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려고 들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게다가 남산은 어린 시절부터 수
없이 안겼던 곳이라 20분 정도 머물고 왔던 길로 내려가 북측순환도로로 질러가는 숲길로 들
어섰다.
이 숲길은 숲이 울창한 아름다운 길로 남산 정상과 북측순환도로, 장충단공원을 빠르게 이어
준다. 예전에는 시멘트 계단길로 닦여져 있었고, 길 좌우에 철조망이 둘러져 있었으나 길을
순화시키면서 철조망을 없애고 계단을 크게 줄였다. 허나 길의 상당수는 여전히 시멘트로 되
어 있어 그 점이 아쉽다. 산에 걸맞게 흙길로 깔았다면 발걸음이 더 즐거웠을텐데 말이다.


▲  남산의 숨겨진 숲길 (남산약수터 방면)

숲길을 조금 가다보면 샛길 하나가 살짝 손을 내민다. 그 길은 한양도성 남산약수터 주변 구
간으로 이어지는 따끈따끈한 숲길로 근래 닦여졌는데, 2010년 이후 금지된 땅에서 해방된 남
산의 숨겨진 속살로 성곽 조망대로 이어지며, 성곽 조망대에서 한양도성 밑도리를 따라 남측
순환도로 시작점(남산약수터 입구)까지 이어진다.


▲  아직까지 금지된 구역으로 묶여있는 성곽 조망대 남쪽 한양도성

▲  성곽 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국립극장, 장충동 주변)
여전히 미세먼지 밑에 가려져 보이는 것이 별로 없다.


숲길 성곽 부분에는 성 안과 성 밖을 이어주는 나무 계단이 닦여져 있다. 국가 사적으로 지정
된 귀한 몸을 배려해 성곽 여장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통로를 내었는데, 북쪽으로 돌출된
부분에 성곽 조망대가 닦여져 있다.


▲  북쪽을 향해 거칠게 달려가는 한양도성 (성곽 조망대 북쪽)

성곽조망대에서 나무 계단을 통해 성 밖으로 넘어가면 가파른 내리막길이 펼쳐진다. 여기서
남산약수터 입구 갈림길까지는 2010년 이후에 개방된 구간으로 성 바깥에 탐방로를 닦았다.
경사가 다소 거칠어 올라갈 때는 다소 진땀을 빼야 되며, 성곽길(성곽 안쪽)은 성곽 보존과
자연보호 때문에 아직까지 통제의 봉인에서 풀리지 않았다. 하긴 속세에 너무 풀어버리면 남
산의 건강에도 문제가 생긴다.


▲  성곽 바깥 탐방로 (남산약수터 입구 방향)

▲  각박하게 펼쳐진 성곽 바깥 탐방로 (성곽 조망대 방향)

▲  다시 만난 남측순환도로 (남산약수터 입구)

성곽 탐방로를 내려오면 다시 남측순환도로와 만난다. 여기서 오른쪽(남쪽)은 남산 정상, 왼
쪽은 국립극장 방면이며, 성곽은 도로에서 잠깐 끊겼다가 길 건너편에서 다시 부활하여 제 갈
길을 간다.
우리는 왼쪽 길로 접어들어 국립극장을 거쳐 동대입구역(3호선)으로 내려갔다. 이미 정상을
찍고 내려왔으니 또 올라갈 필요는 없고 오로지 뚜벅이 길로 이용되는 북측순환도로(국립극장
~소파로)도 종종 복습을 하는 길이니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다.

이렇게 하여 남산 봄꽃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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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산사 나들이, 안양 삼성산 삼막사 ~~~ (삼막사 남녀근석, 안양예술공원, 석수동 석실분)

안양 삼성산 삼막사, 석수동 석실분



' 한겨울 산사 나들이, 안양 삼성산 삼막사 '
삼막사3층석탑
▲  삼막사3층석탑
 



 

겨울 제국이 늦가을을 몰아내고 천하를 완전히 휘어잡던 12월 한복판에 일행들과 삼성산
삼막사를 찾았다.
삼성산(三聖山, 481m)을 오르면 삼막사는 거의 거쳐가기 마련인데, 햇님이 하늘 높이 걸
려있던 12시에 서울대입구역(2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6515번(양천차고지
↔안양 경인교대)을 타고 관악구청, 서울대를 지나 삼성산성지 정류장에서 두 발을 내렸
다. 바로 여기서 삼막사를 찾기 위한 삼성산 산행을 시작했다.

서울의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聖地)로 꼽히는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를 지나 호암산(虎
巖山, 385m) 정상 부근에서 속세(俗世)에서 가져온 먹거리(김밥, 과일, 과자 등)로 간단
히 점심을 때웠다.
호암산 정상에서 삼성산까지는 부드러운 곡선을 지닌 삼성산 서북쪽 능선이 펼쳐져 있는
데, 능선길이 느긋하고 각박한 구간이 별로 없어 마치 구름 위를 거니는 기분이다. 장군
봉과 운동장바위, 446봉을 지나 15시에 삼성산 정상 서남쪽에 자리한 삼막사에 도착했다.


▲  경내에서 내려다본 삼막사 일주문(一柱門)



 

♠  많은 문화유산을 품고 있는 삼성산의 대표 산사,
~ 안양 삼막사(三幕寺)

▲  밑에서 바라본 삼막사 - 마치 산 위에 닦여진 요새를 보는 것 같다.

삼성산 정상(481m) 서쪽 360m 고지에 둥지를 튼 삼막사는 삼성산(三聖山)의 대표적인 고찰(古
刹)이다. 오래된 절들은 그럴싸한 창건 설화나 사연을 하나씩은 지니고 있기 마련인데, 이곳
역시 창건 설화 한 토막을 내밀고 있다.
때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 시절인 677년, 신라(新羅) 불교의 핵심 인물인 원효
(元曉)와 의상(義湘), 윤필(潤筆) 3명의 고승이 삼성산에서 막(幕)을 치고 수도를 했는데, 원
효가 지은 막이 1막, 윤필은 2막, 의상은 3막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 자리에 절을 세우면서 그들이 막을 지어 수행한 곳이라 하여 삼막사라 하였으며 산
이름도 삼성산이라 했다고 한다. 여기서 삼성(三聖)은 3명의 성인으로 원효, 의상, 윤필을 뜻
한다. 하지만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그의 좌우를 지키는 관세음
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한 덩어리로 묶어 삼성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산 이름을 따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만큼 삼성산에는 절이 많았다. (지금도 많음)

삼성산의 이름은 그렇다쳐도 삼막사 창건설화는 어디까지나 삼막사에서 지어낸 믿거나 말거나
설화일 뿐이다. 창건 시기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상은 당나
라에서 가져온 화엄종(華嚴宗) 보급과 귀족 중심의 불교를 추구하면서 왕경(王京, 경주)과 그
가 지은 영주 부석사(浮石寺) 등 10개 사찰에 주로 머물러 있었으며, 원효 또한 불교 대중화
를 위해 민중에 뛰어들던 시기이므로 그가 지은 절은 정작 거의 없다. 그렇다면 절 이름인 '
삼막'은 어디서 나왔을까?
관음사(觀音寺)로 불리던 신라 후기 또는 고려 때, 절이 나날이 융성하여 도량의 짜임이 송나
라 소주(昭州)의 삼막사(三邈寺)를 닮아 격하게 찬양을 받았다고 한다. 하여 자연스레 삼막사
로 불리다가 언제부터인가 삼막(三幕)으로 바뀌었는데, 절에서 창건 설화를 지으면서 한자를
바꾸고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신라 고승 3명을 강제로 등장시켜 그들이 막을 치고 머물렀다고
설화를 짠 것이다. 그러니 절의 처음 이름도 '삼막'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 후기에 부동산 전문가인 도선(道詵)이 절을 중건하고 불상을 봉안하여 관음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하며, 고려 태조(太祖)가 중수하여 다시 삼막사로 바꿨다고 전한다. 태조는 삼막사
남쪽에 있는 염불사(念佛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안양사(安養寺, ☞ 관련글 보러가기) 창
건 설화에도 절찬리에 등장하는데, 그가 후백제(後百濟)를 치러 갈 때, 그 길목인 삼성산에
여러 절을 짓거나 중수를 도와준 것으로 여겨진다.

1348년 나옹(懶翁)과 지공(指空)이 이곳에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날렸고,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나라의 융성을 기원했는데, 1398년 왕명으로 중건했다. 그 인연으로 북
쪽에 승가사(僧伽寺, ☞ 관련글 보기), 서쪽에 진관사(津寬寺, ☞ 관련글 보기), 동쪽에 불암
사(佛巖寺, ☞ 관련글 보기)와 더불어 서울을 지키는 비보사찰(裨補寺刹)의 일원이 되었으며,
그중 삼막사는 남쪽에 있으므로 서울의 남쪽을 지키는 역할을 했는데, 그 연유로 남왈삼막(南
曰三幕)이라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불을 질렀으나 법당이 타지 않아서 그들은 참회를 하고 철수했다고 전하
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도를 했다고 전한다. 1880년에는 의민(義旻)이 명부전을 짓고,
1881년 칠성각을 지었으며,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의 형인 지운영(池雲英)이 절 옆에 백련
암을 지어 은거하기도 했다.

경내에는 천불전과 명부전, 망해루, 대방, 칠성각, 육관음전 등 10여 동이 있으며, 상당수의
건물이 지형상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
석탑과 명부전, 사적비, 남녀근석, 마애3존불 등이 있고, 삼귀자 바위글씨와 감로정 등의 비
지정문화재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아낌없이 대변해준다. 특히 3층석탑은 이곳에서 가장 늙
은 존재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이라 절이 적어도 고려 중기에 창건되었음을 알려준다.

삼막사는 삼성산 정상부 서쪽 요충지에 자리하여 산꾼과 답사꾼들이 많이 찾아오며, 특히 삼
성산 정상을 가거나 삼성산을 가로지를 경우 거의 꼭 거쳐야되는 황금 길목에 위치해 사람들
로 늘 북적거린다. 게다가 절까지 길이 잘 닦여져 있어 차량 접근도 가능하다. (서울대와 삼
성산성지, 호압사, 경인교대, 안양예술공원에서 등산으로 1~2시간 정도 걸림)
또한 서울과 안양(安養) 도심에서 가깝고 산 정상부에 자리해 있어 조망도 괜찮으며, 공기질
이 좋을 때는 멀리 서해바다까지 시야에 잡힌다.

*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41-54 (삼막로 478, ☎ 031-471-5978)


▲  삼막사 명부전(冥府殿)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60호

서울대와 호압사, 호암산 주변, 경인교대에서 올라오는 길이 만나는 일주문에서 계단길을 오
르면 비로소 삼막사 경내에 이른다. 경내는 일주문 윗쪽에 높이 자리해 있는데, 망해루와 범
종각 등을 바깥에 내밀며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다.

경내 북부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천불전과 망해루 등 다
른 건물들이 죄다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반해 명부전은 거의 혼자 남쪽을 향하고 있다. 남
향(南向) 건물이 이 땅에서 일반적이긴 하지만 이곳만큼은 그 원칙은 서향(西向)이 진리이다.
(물론 지형적인 영향이 크지만;;)
이 건물은 1880년에 의민이 지은 것으로 1975년에 수리를 했다. 네모난 장대석(長臺石)으로
다진 기단(基壇)을 2단으로 깔고 그 위에 집을 얹혔는데, 현재 맞배지붕 건물에 흔치 않은 방
풍판(防風板)이 달려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팔작지붕인 것을 개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공포는 주심포(柱心包) 형태로 귀포의 용머리 조각 등 장식적인 요소가 많으며, 건물 내부에
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상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
중 시왕상은 명부전 이상으로 늙은 보물이다.


▲  중생 구제를 염원하는 4개의 지물, 사물(四物)이 담겨진
범종루(梵鍾樓)

▲  삼막사 망해루(望海樓)

범종루와 함께 경내를 가리고 앉은 망해루는 삼막사의 얼굴과 같은 존재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중기에 지어진 것을 20세기에 중건했는데, 건물 이름 그대로 바
다가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허나 인천(仁川)과 시흥(始興), 안산(安山) 지역의 갯벌이
마구 매립되어 육지가 늘어남에 따라 바다는 그만큼 멀어졌고, 대기오염도 툭하면 말썽을 부
려 이제는 공기질이 아주 좋은 날이 아닌 이상은 바다를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망해루' 이
름 값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삼막사는 서울을 지키는 남쪽 비보 사찰이라 선비와 관리들의 출입이 잦았는데, 그중에는 백
호 윤휴(白湖 尹鑴, 1617~1680)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당시 성리학(性理學)에 쓸데없이 능했
던 송시열(宋時烈) 마저 질리게 만든 문인으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경신환국(庚申換局,
1680년) 직전에 삼막사를 찾아 망해루에 걸터앉으며 시 1수를 지었다.

 푸른 산에 찬 기운 일어 망해루에 바람이 거세고
 강구름이 비를 불러 해는 모래톱으로 사라지네
 이때 높이 올라 바라보는 것도 우연한 충성인데
 눈 들어 산하를 보니 시름을 이길 수 없도다

허나 누가 알았으랴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시가 될 줄은... 이처럼 망해루는 문인들 시에 종
종 등장했으며, 현재는 주로 강당의 역할을 맡고 있다.


▲  망해루 옆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가까이에 경인교대를 비롯하여 안양 석수동, 광명 남부 지역, 시흥시,
그리고 멀리 인천 땅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허나 이날은 아무리 인상을
쓰고 살펴도 서해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  청기와를 지닌 육관음전(六觀音殿)

명부전 옆에는 금동으로 치장된 6명의 관세음보살이 봉안된 육관음전이 청기와 지붕을 뽐내며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서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칸을 구분 짓
는 기둥이 돌로 이루어져 있어 나름 이형(異形)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  다양한 관세음보살을 모아놓은 육관음전 내부

▲  삼막사 3층석탑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12호

육관음전과 천불전 중간 높은 곳에 3층석탑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사람의 손길이 닿기 어
려운 석축 윗쪽 바위에 높이 들어앉아 있어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인데, 보통 석
탑은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나 이곳은 다소 구석진 곳에 두어 사람의 손길을 피하게 했으니
그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다.

이 석탑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삼막사 출신인 승려 김윤후(金允
侯)가 몽골(원나라)의 제2차 침공(1232년) 때 처인성(處仁城, 용인 남쪽)에서 몽골군 우두머
리인 살리타이를 처단하여 대승을 거둔 것을 기리고자 세웠다고 전한다. 그래서 '살례탑'이란
별명도 가지고 있다.
김윤후는 이후 충주(忠州)에서도 대승을 거두어 그 위엄을 크게 떨쳤으며, 나라에서 상장군(
上將軍) 직을 내리려고 했으나 쿨하게 거절했다.

탑의 높이는 2.55m로 조그만 편인데,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혔으며, 3층 탑
신은 옥개석(屋蓋石, 지붕돌)만 겨우 남은 실정이다. 두툼하게 생긴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이 있고 낙수면의 경사는 급하며, 탑 꼭대기에는 1979년에 보수한 머리장식이 하얀 피부
를 드러내고 있다.
지붕돌 받침이 3단으로 줄어드는 등, 고려 탑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탑 뒤에는 소나
무들이 푸르름을 드러내며 탑의 우산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  감로정 석조 옆에 자리한 관세음보살상
삼막사는 육관음전이라 하여 6명의 관세음보살을 두었는데, 밖에도 마애불(磨崖佛)
비슷하게 하얀 피부의 관세음보살상을 두어 관음도량처럼 꾸몄다.

▲  감로정 석조(甘露井 石槽)

3층석탑 바로 밑에는 삼막사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감로정 석조가 누워있다. 삼성산이 베푼 감
로(甘露) 같은 약수가 늘 넘칠 정도로 쏟아져 나와 대자연 형님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주고 있
는데, 감로를 머금은 거북 모양의 석조에는 고색의 때와 주근깨가 자욱하다. 그 역시 삼막사
의 오래된 유물 중 하나로 앞쪽에 '甘露井(감로정)'이란 글씨와 1837년에 조성되었음을 알려
주는 글씨가 있어 그의 이름과 경력을 알려준다.

거북 모양의 석조 옆에 원통형 석조는 근래 마련된 것으로 그가 있기 전에는 뚜껑이 닫힌 거
북 석조에서 직접 물을 떠다 마셨다. 지금은 옆으로 홈을 내서 물이 원통형 석조로 흘러내려
와 그것을 마시면 된다. 특히 이 석조에는 조선 정조 때 인물인 김창영(金昌永)의 탄생 설화
가 전하고 있다.


▲  삼막사의 법당 역할을 하는 천불전(千佛殿)

육관음전 못지 않게 청기와 지붕을 드러내고 있는 천불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역시나 서쪽을 향하고 있다.
천불전이란 이름 그대로 1,000개의 조그만 불상을 지니고 있는데, 그 모습이 이 땅의 7천만
인구처럼 가지각색이다. 귀찮아서 건물 내부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지만 현재 법당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건물 뒷쪽에는 원효가 수행했다고 전하는 토굴(土窟)이 있다.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고 종무소(宗務所) 옆 쉼터에서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 아직까지 남은
식량이 있어서 커피와 과자 등을 꺼내 잠시나마 조촐한 향연을 즐긴다. 서쪽 전방에 펼쳐진
일품 조망에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으며, 잔잔히 불어오는 산바
람은 번뇌와 온갖 상념을 싹 털어간다. 그렇게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다가 삼막사의
나머지 부분을 보고자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보통 천불전과 명부전, 육관음전, 3층석탑이 있는 경내가 삼막사의 전부로 착각하기 쉬우나
그것은 삼막사의 함정이다. 아직 사적비와 삼귀자, 마애불, 남녀근석 등의 문화유산이 남아있
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을 지나치면 삼막사의 절반 밖에는 못보는 것이다. 기왕 여기까지
올라온 거 말끔하게 보고 가는 것이 좋으며, 그것이 삼막사에 대한 작은 예의가 될 것이다.
사적비와 삼귀자는 경내와 가까운 곳에 있으며, 마애불과 남녀근석(칠성각 구역)은 5~6분 정
도 산을 타야 된다.


▲  삼막사 사적비(事蹟碑)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25호

경내에서 칠성각 구역으로 길을 접어들면 바로 왼쪽 높은 곳에 빛바랜 비석 하나가 눈에 아른
거릴 것이다. 그는 삼막사의 일기장인 사적비로 네모난 비좌(碑座)와 비신(碑身), 지붕돌로
이루어진 단촐한 모습인데, 삼막사 창건 설화부터 조선 후기까지 내력이 적혀있으나 아쉽게도
비문(碑文) 상당수가 훼손되어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다.
다만 관악산맥 삼성산 밑에 있다는 것과 절 이름이 삼막사로 향로봉이 왼쪽에 있다는 것, 사
적비를 1707년에 세웠음을 알리는 내용만 간신히 확인이 가능하다.


▲  산신각 - 바위에 새겨진 마애 산신탱

사적비를 지나면 바위에 깃든 산신탱이 마중을 한다. 지팡이를 든 대머리 산신 할배를 중심으
로 동자와 호랑이, 소나무, 구름, 햇님 등을 담았는데, 색을 입히지 않아서 윗쪽을 제외하면
모두 하얀색이다. 마치 흑백사진처럼 말이다.
이렇게 산신탱을 닦고 그 주변을 노천식 산신각(山神閣)으로 삼았는데, 산신탱 앞에는 중생들
이 올린 막걸리와 사탕, 과자, 떡 등이 가득하여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이다.


▲  삼귀자(三龜字) 바위글씨를 머금은 바위

예전에는 경내에서 칠성각 구역으로 가려면 무조건 사적비와 삼귀자 앞을 지나가야 했다. 허
나 지금은 질러가는 길이 생겨서 그들 앞을 굳이 지나갈 필요는 없어졌으나 그들은 삼막사의
오랜 보물들이니 이곳이 초행이라면 꼭 살펴보기 바란다.

산신탱을 지나치면 기묘하게 생긴 삼귀자 바위글씨가 발목을 붙잡는다. 바위 피부에 쓰인 글
씨는 모두 거북 귀(龜)로 그 글씨를 전서체 등 다양한 모습으로 디자인하여 새긴 것인데, 오
른쪽 글씨는 그나마 귀자 비슷하게 생겼으나 무슨 부적 분위기가 나고, 가운데 글씨는 엉금엉
금 기어가는 거북이(또는 무당벌레) 모습 같으며, 왼쪽 글씨 또한 거북이를 닮았다.
이들 삼귀자는 종두법(種痘法)으로 유명한 지석영(池錫永)의 친형 지운영(地雲英, 1852~1935)
이 이곳에 소박하게 백련암(白蓮庵, 지금은 남아있지 않음)을 짓고 은거했을 때 쓴 것으로 지
석영이야 워낙 인지도가 높아 삼척동자도 다 알지만 그에게 형이 있었다는 것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지운영은 여기서 관세음보살 누님을 친견하는 꿈을 꾸고 너무 기뻐 새겼다고 하며, 삼귀자 이
웃 바위에 '관음몽수장수 영자(觀音夢授長壽 靈字)'라 해서 그 소감을 밝혔다.

삼귀자 글씨의 크기는 왼쪽부터 높이 74cm, 77cm, 86cm이며, '불기(佛紀) 2947년 경신중양 불
제자 지운영'이란 글씨가 있어 1920년에 그가 썼음을 귀띔해 준다. 그리고 옆 바위에는 시주
자 명단이 적힌 명문이 있다.


▲  거북귀(龜)의 화려한 변신, 삼귀자(3개의 거북귀) 바위글씨의 위엄
명필가는 이렇게 글씨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악필가는 살아있는 글씨마저
죽여버린다.

▲  삼귀자 안내문 뒷쪽 바위에 새겨진 시주자 명단 바위글씨



 

♠  삼막사 마무리

▲  칠성각 구역으로 올라가는 길 ①

삼막사 경내에서 칠성각 구역까지는 5~6분 정도 발품을 팔아야 된다. 그만큼 외딴 곳에 떨어
져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곳까지는 돌로 길을 잘 닦아놓아 통행에 어려움은 없으며, 혹시나
엉뚱한 길로 빠질까봐 연분홍 연등이 대롱대롱 길을 안내하고 있다.


▲  칠성각 구역으로 올라가는 길 ②

▲  삼막사 남녀근석(남근석) - 경기도 지방민속문화재 3호

삼막사 경내보다 더 하늘과 가까운 곳, 칠성각 구역에 이르면 아주 재미있게 생긴 바위가 마
중을 한다. 바로 삼막사의 백미이자 이곳에서 꼭 봐야 직성이 풀리는 남근석(男根石)과 여근
석(女根石)이다.
이들은 2개의 바위로 남쪽에는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남근석이, 북쪽에는 여인네의 은밀한
부분을 닮은 여근석이 누워있는데,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은 작품으로 특히나 여근
석은 그 부분과 너무 닮아서 강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이렇게 거시기하게 생긴 돌은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이른바 성기신앙(性器信仰)
의 대상으로 격하게 숭배를 받았다. 이 바위를 만지며 기원을 하면 아들 낳기와 출산에 효험
이 있다고 전해져 석가탄신일과 7월 칠석에는 많은 사람들(특히 아줌마들)이 찾아온다.
남근석의 높이는 1.5m, 여근석은 1.1m로 삼막사는 이 바위를 매우 애지중지 다루고 있다. 여
자를 멀리해야 되는 절간에서 예민하게 생긴 바위를 옆구리에 끼고 있다는 점이 참 이채롭기
까지 하는데, 이는 모두 절의 인지도와 수입을 위해 그리 한 것이다. 그리고 18세기에는 그들
옆에 마애불을 세우고 칠성각을 세워 칠성신앙까지 어우러진 현장으로 만들었다.


▲  대자연 형님의 심술궂은 작품, 여근석

▲  바로 앞에서 바라본 여근석의 위엄
앞이나 옆이 아닌 바로 위에서 보면 기가 막히게 실감이 난다. 마치 그 모습 그대로
돌로 굳어버린 듯한 느낌. 나는 쑥쓰러워서(?) 위에서 사진을 담지 않고
약간 옆에서 살짝(?) 담았다. 이거 좀 무안해서 말이지 ~~~!

▲  바위에 씌워진 삼막사 칠성각(七星閣)

칠성각은 바위에 깃든 마애3존불의 거처로 1881년에 지어졌다. 바위와 마애불에 맞게 짓다 보
니 지붕이 2겹이 되어버렸는데, 마애불이 바라보는 서쪽에 문과 성인 키 정도의 계단을 내었
다. 전실(前室)처럼 자리한 건물 내부는 마치 석굴(石窟) 마냥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중
생들이 달아놓은 조그만 인등(引燈)이 강인한 협동심을 드러내며 내부를 환하게 수식한다.


▲  삼막사 마애3존불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94호

칠성각에 담긴 마애3존불은 칠성(치성광여래)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
보살(月光菩薩)로 이루어져 있다. 가운데 존재를 칠성이라 한 것은 건물 이름이 바로 칠성각
이기 때문이다. 건물이 칠성각인데 엉뚱한 존재가 중심에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들은 연화좌(蓮花座)에 앉아있는데, 보관(寶冠)을 눌러쓴 양쪽 보살상은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이고 있으며, 칠성은 두 손을 가부좌(跏趺坐)를 튼 무릎 위에 대고 보륜(寶輪)를 들고 있
다.
수인(手印)을 제외하면 이들은 모두 비슷한 모습으로 얼굴부터 옷주름까지 진하게 남아있어
형태를 알아보는데 문제는 없으며,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가슴에는 내의의
매듭이 표현되어 있다.
마애불 밑에는 고맙게도 '乾隆二十八年癸未八月日化主悟心'이란 명문이 있어 1763년 계미년 8
월에 화주(化主) 오심이 조성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이 땅에 칠성을 담은 그림(칠성탱, 칠
성도)은 많지만 이렇게 바위에 마애불로 새긴 것은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또한 조성 관련 명
문까지 새겨져 있어 당시 마애불 양식을 연구하는데 좋은 단서가 되어준다.

마애3존불의 눈, 입, 귀, 눈썹이 매우 선명하나 코는 닳아져 형태만 남아있다. 이는 그 코를
갈아서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고 해서 아낙네들이 그의 코를 마구 갈아버린 것이다. 게다가 성
기신앙의 현장이 옆에 있으니 그 현상은 심했으리라, 그렇게 중생들에게 코까지 떼였으니 마
애불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허나 마애불이 누구를 위해 있는가? 바로 중생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 중생을 위해 기꺼이 코 하나 내놓는 것은 그들의 임무이며, 코는 나중
에 새로 달아도 된다.


▲  칠성각을 뒤로하며



 

♠  삼성산 서남쪽 능선에 숨겨진 아주 늙은 무덤,
석수동 석실분(石室墳) - 경기도 지방기념물 126호

이렇게 삼막사를 고루고루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6시, 햇님도 이제 고개가 아픈지 슬슬 지
평선 너머로 내려앉을 준비를 한다.
염불사(염불암)를 둘러보고 안양예술공원으로 내려갔는데, 일몰까지는 약간의 여유가 있어 삼
성산의 숨겨진 명소이자 은자(隱者)인 석수동 석실분을 이날의 마지막 메뉴로 둘러보기로 했
다.

석수동 석실분은 안양예술공원 공영주차장 뒷쪽에 있는 석수동 마애종(磨崖鍾)을 기준으로 삼
아서 찾는 것이 편하다. 마애종에서 서쪽 길(예술공원로117번길)로 들어가면 막다른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 길(예술공원로 117번길)로 접어들면 안양노인전문요양원이 나온다.
그곳을 지나면 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 길로 들어서 쭉 올라가면 된다. 이곳은 옛날
에 광산이 있던 곳으로 마을의 밥줄이던 광산이 없어지면서 가옥 몇 채와 폐광의 흔적만 황량
하게 남아 늦은 시간에 오면 으시시함까지 느끼게 한다.

석실분을 알리는 이정표는 다행히 넉넉하게 닦여져 있어 길을 잃을만하면 나타나 길을 비춰준
다. 심지어 무덤 50m 전까지도 이정표가 있다. (석수동 마애종에서 도보 20분 거리)

▲  돌탑 위에 피어난 석실분 이정표

▲  석실분으로 인도하는 산길

▲  북쪽에서 바라본 석실분

▲  동쪽에서 바라본 석실분

석수동 석실분은 삼성산 서남쪽 능선 300m 고지에 둥지를 튼 삼국시대 무덤이다. 보통 고구려
무덤들은 흙무덤과 돌무덤(4세기 이후) 중심으로 주로 평지에 널려있고, 백제 무덤은 거의 흙
무덤 중심으로 바깥은 흙으로, 안은 돌로 돌방(석실)을 만든 구조인데, 대체로 평지와 언덕을
선호했다. (백제 돌무덤도 석촌동고분군을 비롯해 일부 남아있음) 그리고 신라 무덤은 흙으로
다지고 안에 돌방을 넣은 형태로 평지와 언덕을 선호했고, 가야는 특이하게 산자락이나 능선
을 주로 선호했다.

우리가 찾은 석수동 석실분은 산능선에 자리해 있어 가야 무덤이 아닐까 싶지만. 가야의 무덤
은 아니다. 가야(伽倻)의 영역은 경기도에 이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막연히 삼국시대 무덤
으로만 여겨질 뿐, 정확한 조성 시기와 무덤 주인은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을 헤매고 있
으나 무덤 안에 석실을 다지고 윗도리에 흙으로 봉분(封墳)을 씌웠으며, 바깥과 석실(石室)을
잇는 연도(羨道)가 없는 횡혈식고분(橫穴式古墳)인 것으로 보아 6~7세기 이후 신라 무덤으로
여겨진다.
비록 봉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심술쟁이 자연의 손길, 일확천금을 노린 도굴꾼의 검
은 마수로 오래 전에 녹아 없어졌지만 석실까지 갖춘 규모와 안양시내를 바라보는 산자락에
자리한 점으로 보아 안양 지역을 다스리던 관리나 지방 세력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왜 하필이면 이런 첩첩한 산능선에 무덤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안양사 동쪽 산자락에도 늙은
고분이 1기 있다고 하며(이곳은 확인하지 못했음), 지형 조건을 통해 조그만 고분이 더 숨겨
져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허나 아직까지 이 무덤을 포함하여 주변을 싹 뒤집지는 못했다.

무덤은 산 정상부를 향해 남북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옛날에 이미 도굴을 당한 상태라 발견된
유물은 없다. 들리는 풍문에는 여기서 금관(金冠)과 금귀걸이가 나왔다고 전하는데, 진위 여
부는 알 수 없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대단히 높은 인물의 무덤임이 틀림없다.

흙으로 다진 봉분은 무참히 벗겨나가 흔적은 없으며, 석실과 석실 천정을 이루던 거대한 판석
(板石)이 대머리처럼 적나라하게 노출된 상태이다. 석실 내부는 길이가 3.4~4.5m, 폭 1.5~1.7
m, 높이 85~100cm이며, 자연석을 적당히 다듬어서 동/서/북벽을 쌓았고, 남쪽 벽은 커다란 판
석 1매로 축조했다. 그리고 3개의 넓다란 판석으로 석실을 덮었는데, 가운데 판석이 파괴되어
무덤의 속살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인다. 연도가 생기기 이전 형태로 여겨지며, 조선총독부가
1942년에 제작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시흥군(始興郡)
35. <고분>, 동면 안양리 국유림(國有林) - 석수동 동방의 산록 제24호 귀부(龜趺)의 후방에
석곽(石槨)이 노출된 것 2, 3개가 있다. (여기서 귀부는 안양사 귀부로 여겨지나 확실치는 않
음)

▲  세상을 향해 입을 벌린 석실분

▲  돌로 다져진 석실분 내부 ①

◀  돌로 다져진 석실분 내부 ②

무덤 내부는 문화유적 보호 차원에서 들어가면 안되지만, 이미 뚜껑이 열린 상태라 살짝 들어
가 볼 수 있다. 하지만 깊이가 1.5m 정도로 깊고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없어 다리에 무리가
없도록 조심을 기해 내려가야 된다.

주인도 오래전에 떠나버린 무덤 내부는 상석(床石)처럼 놓인 돌을 빼고는 텅 비어 있다. 무덤
이라기보다는 임시 거처나 아지트 같은 기분이다. 소름이 끼치는 무덤의 속살이지만 이곳을
알리는 문화유산 안내문이 없고, 옛 고분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이게 무덤인지 군사시설인지,
숨겨진 아지트인지 헷갈릴만하다. 누가 이런 곳에 무덤을 쓸 것이라 생각을 하겠는가. 죽어서
도 권력과 부귀를 누리고 싶었던 옛날의 어느 부질없는 망족(望族, 귀족)의 욕심이 이 무덤을
탄생시켰고, 그 욕심에 대한 혹독한 대가로 사람과 자연, 세월에 의해 여러 차례 털리고, 파
괴되는 비운을 맞으며 '내가 과연 무덤일까?' 이곳의 성격마저 크게 흔들어 놓았다.

햇살이 조금씩 내려앉은 석실 내부는 오싹하기는 커녕 오히려 아늑한 느낌이다. 학우봉과 삼
막사 방면으로 산길이 나있지만 다소 외진 숨겨진 곳이라 이곳을 지나는 산꾼의 수요는 별로
없으며 석실분 내부는 포근하고 비바람을 피하기에 좋아 간단한 먹거리나 손전등을 갖춘다면
염치불구하고 하룻밤 살짝 머물고 싶은 곳이다. 물론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그리해서는 안되
지만 정말 나만의 비밀 공간으로 삼고 싶을 정도로 욕심이 간다.


▲  석수동 석실분에서 바라본 천하, 안양시내
멀리 바라보이는 산은 안양을 서쪽에서 감싸는 수리산이다.


무덤 밖에서 눈 아래로 펼쳐진 속세를 바라보며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 수리산과 삼성산 사
이에 둥지를 튼 안양시내를 바라보니 그곳이 나의 영지(領地)인양 거만한 착각에 마음이 잠시
즐거워진다. 무덤 주인도 아마 그런 것 때문에 노비와 백성들을 닥달하여 이곳에 무덤을 쓴
것은 아닐까?
천하를 비추던 햇님은 그만의 공간으로 가고자 슬슬 휘장을 거두고, 진하게 보이던 안양시내
도 그만큼 흐릿하게 다가온다. 어둠이 내려앉으니 사람도, 도시도, 산도, 어둠을 몰아내고자
불빛을 여기저기서 발산하면 검게 익은 안양의 산하는 그것을 얼굴에 바르며, 환상적인 야경
을 선보인다. 안양의 야경을 제대로 누리고 싶다면 안양예술공원 남쪽 산자락에 자리한 망해
암(望海庵)도 좋지만 석수동 석실분도 엄지를 강하게 치켜들며 추천하고 싶다.

*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산236-9


▲  석수동 석실분에서 맞이한 일몰
이렇게 하여 삼성산, 삼막사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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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산사 나들이 ~ 우이동 윗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도선사 (붙임바위, 우이동계곡)

북한산(삼각산) 도선사



' 늦가을 산사 나들이, 북한산(삼각산) 도선사 '

도선사 18나한상, 포대화상
▲  도선사 18나한상과 포대화상

도선사 마애불입상

도선사 붙임바위

▲  도선사 마애불입상

▲  붙임바위

 



 

늦가을이 한참 깊어가던 10월 끝 무렵의 어느 평화로운 날, 집에서 가까운 북한산(삼각
산) 도선사를 찾았다.
도선사는 지금까지 10회 남짓 인연을 지었던 절로 그곳의 늦가을 풍경과 늙은 마애불이
문득 그리워 간만에 그곳을 찾은 것인데,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4시에 도봉동(道峰洞
) 집을 나서 방학4거리에서 노원구 마을버스 15번(월계동 청백1단지↔덕성여대)을 타고
우이동 도선사입구에서 두 발을 내렸다.
우이동은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道峯山) 사이에 자리한 동네로 이들 산을 찾는 산꾼
과 나들이꾼들로 늘 북새통을 이룬다.

우이동(牛耳洞) 109번 시내버스 종점 맞은편에는 도선사행 셔틀버스 정류장이 있다. 도
선사까지 걸어가기에는 다소 거리(약 2.3km)가 있고, 이날은 도선사가 목적이라 버스를
기다리는 행렬에 흔쾌히 동참했다. 하여 10분 정도 기다리니 셔틀버스가 기지개를 켜고
내 앞에 나타나 활짝 입을 벌린다.
이 노선은 우이동(109번 종점 맞은편)에서 도선광장까지 운행하는데, 평일에는 30~40분
간격으로 다니며 휴일에는 증차 운행한다. (석가탄신일은 거의 10분 내외 간격, 입석은
안됨) 차비는 무료이나 굳이 내고 싶다면 승차장에 있는 돈통에 알아서 넣으면 되며 신
도와 절에 볼일 또는 예불을 보러 가는 사람만 가려서 받는다. (산꾼들은 거의 받지 않
음)
버스는 각박한 오르막의 연속인 도선사 길(삼양로173길)을 5~6분 정도 낑낑대고 오르다
가 도선광장에 이르러 바퀴를 멈추었다. 우이동에서 도선사를 잇는 신작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닦아준 것으로 그 길로 인해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도선사는 서울 동북부를 대
표하는 고찰(古刹)로 크게 흥하게 된다.

도선광장(마음의 광장)에는 우리나라 최대급의 옥외(屋外) 석불좌상으로 꼽히는 미소석
가불이 이름 그대로 미소를 흩날리고 있다. 그를 중심으로 그 옆에 셔틀 정류장과 주차
장이 있고, 북쪽에는 백운대탐방지원센터와 백운대로 가는 산길이 있으며, 서쪽에는 안
양암과 도선다원이 있고, 그 남쪽에 도선사로 가는 길이 있다.
도선광장에서 도선사 경내까지는 도보 5분 거리로 길은 느긋한 수준이며 천왕문이 제일
먼저 마중을 나와 중생을 검문한다.



 

♠  도선사(道詵寺) 입문

▲  천왕문(天王門)의 뒷모습

맞배지붕을 지닌 천왕문(사천왕문)은 도선사의 정문으로 1987년 11월에 지어졌다. 봉황문(鳳
凰門)이라 불리기도 하며,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四天王, 다문천왕, 지국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의 보금자리로 그들은 이곳을 지나는 중생들을 검문하느라 여념들이 없다. 그들의
수고로움이 있기에 오늘도 도선사와 북한산(삼각산)은 평화롭다.


▲  천왕문 남쪽에서 바라본 천하 (해발 300m)
정면에 보이는 진달래능선 너머로 강북구와 도봉구, 노원구, 중랑구 지역과
불암산, 아차산, 멀리 남양주 지역의 뫼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왜열도에서 건너온 검은 피부의 청동지장보살상

천왕문을 지나 조금 들어가면 청동지장보살상이 모습을 비춘다. 그는 도선사와 자매결연을 맺
은 왜열도 진언종(眞言宗)의 본사, 고야산 안양원(高野 山 安養院)에서 1983년 11월 15일 청담
대종사 열반재 때 증정한 것인데, 주변 나라와 분쟁이나 일삼으며 툭하면 평화를 깨려고 드는
왜열도 원숭이들의 시커먼 마음을 보여주듯 피부가 아주 검다.


▲  가을 단풍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도선사 경내

경내 직전에 이르면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직진하면 주차장과 도선사 경내로 바
로 이어지며, 오른쪽은 종각과 청담대사비, 청담대종사 사리탑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왼쪽은
북한산(삼각산) 산길로 여기서 해발 260m 정도 오르면 북한산성(北漢山城) 용암문에 이른다.
나는 오른쪽 길로 들어서 청담대종사 사리탑을 둘러하고 경내로 들어섰다.


▲  시원스런 추녀 곡선을 지닌 종각(鐘閣, 범종각)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아리를 머금은 사물<범종(梵鐘)과 목어(木魚),
법고(法鼓), 운판(雲版)>의 보금자리로 여기서 북쪽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청담대종사의 사리탑과 그의 비석을 만날 수 있다.

▲  수수한 모습의 청담대종사 석상

▲  귀부가 꽤 인상적인 청담대사비


▲  화려한 수작(秀作)을 자랑하는 청담대종사(靑潭大宗師) 사리탑과
그의 뒤를 받쳐주는 조그만 삼천(三千)지장보살상


도선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20세기 큰 승려의 하나로 추앙받는 청담대종사<1902~
1971, 청담당 순호대종사(靑潭堂 淳浩大宗師)>이다.

그는 경남 진주 출신으로 이름은 이순호(李淳浩)이다. 3.1운동에도 참여했으며 금강산 마하연
에서 수행했던 승려 박포명을 만나 불교와 강렬한 인연을 맺게 된다.
'왜 불이 뜨겁고 얼음이 찬 줄 아느냐? 마음이 뜨겁다고 생각하고 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의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법문이 청담을 불교의 세계로 고스란히 인도한 것이다.

1924년 왜열도로 건너가 송운사(松雲寺)에서 행자생활을 했으나 왜열도 불교의 좋지 않은 점<
승려가 마누라를 두고 가정을 꾸림>에 크게 경악하여 바로 본토로 돌아와 고성 옥천사(玉泉寺
)에서 석전 박한영(石顚 朴漢永)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가 개운사(開運寺)
불교전수상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하고, 바로 만공(滿空)의 문하에 들어가 수행을 했다.
1928년 조선불교학인대회를 통해 왜정(倭政)에 저항하는 불교에 앞장섰고, 1947년 봉암사(鳳
巖寺) 결사를 통해 왜정의 농간으로 망가진 이 땅의 불교를 정화하고 철저히 계율을 지키며
오로지 참선에 정진하자는 불교정화운동을 추진하게 된다.
허나 청담의 개혁에 발끈한 승려들(대부분 대처승)의 태클도 만만치 않아 그 길은 순탄치 않
았다. 다행히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승(帶妻僧)에 대해 절에서 나가라며 불교의 개혁을 지지했
고 성철(性徹), 자운 등 깨어있는 승려들도 앞다투어 그의 개혁에 동참했다.

1960년 11월 대법원이 비구승(比丘僧)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이상한 판결을 내리자 청담은 비
밀리에 6명의 비구로 이루어진 순교단을 결성, 판결 다음날 대법원청사에서 할복을 감행했다.
이 행위는 여론을 비구승 쪽으로 돌리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1961년 박정희 군사 정권이 들
어서자 '불교 정화는 비구와 대처승 간의 싸움이 아니라 국민사상 개조 운동'이라며 군부를
설득해 1962년 4월 비구승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통합종단이 출범하게 되었다.

1966년 11월 초대 종정(宗正)인 효봉(曉峰)의 뒤를 이어서 청담이 제2대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불교 근대화의 발판을 위해 내세운 역경(譯經), 도제양성, 포교 등 3대 지표를 포함하여
의식의 현대화, 군승제(軍僧制) 촉구, 신도 조직 강화, 석가탄신일 공휴일 제정, 불교회관 건
립 등 6개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또한 포교의 활성화를 위해 절에서 매주 1회씩 정기법회를
개최하는 것과 불교방송국 및 승가대학 설립을 목표로 세웠다.
그 목표를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1971년 11월 15일, 69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 그의 다비
식(茶毘式)에는 무려 20,000여 명의 사부대중이 모여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으며, 1972년
도선사 경내 동쪽 산자락에 자리를 닦고 그의 사리탑과 비석, 석상을 세웠다.

청담의 사리탑은 20세기 후반 제일의 승탑<부도(浮屠)>이라 내세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
주 찬란하고 장엄한 모습이며, 승탑 뒤로 무려 3,000기의 조그만 지장보살을 갖춘 커다란 벽
을 둘러 가히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만큼 청담대사를 향한 도선사와 후학들의 지극정성이 대
단하다. <청담대사의 승탑은 고성 옥천사(☞ 관련글 보러가기)에도 있음>
사리탑 구역은 3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일 밑에 청담의 석상을 두었고, 중간에는 청담대
사비, 윗쪽에는 사리탑을 두었다. 바로 이 구역을 닦으면서 오래된 청동범종과 청동숟가락 5
점, 청동젓가락 1짝, 청동국자 2점, 왜열도에서 건너온 동경(銅鏡, 봉래문경), 상평통보 등
고려 말과 조선 중기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들 유물을 통해 절 건물이 이 자리에 오래 눌러앉았음을 보여주며, 그들 모두 서울 지방유
형문화재 259호
('도선사 청동종 및 일괄유물')로 지정되어 청담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종각에서 경내로 이어지는 호젓한 길

▲  도선사 호국참회원(護國懺悔院)

청담대종사 사리탑을 둘러보고 경내로 들어서니 호국참회원이라 불리는 커다란 팔작지붕 건물
이 마중을 한다.
호국참회원은 지상 3층, 지하 1층의 1,000평 규모로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1968년 11월
청담대종사가 우리나라 불교의 중흥과 평화통일의 염원을 담은 호국참회불교를 제창하며 지은
것으로 1977년 증축을 했으며 단양 구인사(救仁寺)의 건물 스타일과 많이 비슷하다. 아무래도
이곳이 첩첩한 산중이고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이라 추가로 건물을 올리기 어려워 이런 식의 건
물을 다진 것이다.
1층에는 공양간이 들어있고, 2층은 어린이회, 학생회, 도서실, 수련원 등이 있으며, 3층은 대
법당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상이 깃들여져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도선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이자 북한산 3대 봉우리의 하나인 만경대(萬景臺) 밑에 자리한 도선
사는 862년에 부동산 전문가인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이곳 산세가 1,000년 뒤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불법(佛法)을 다시 일으킬 곳이라 예견하
고 절을 지은 뒤, 큰 암석을 주장자(柱杖子)로 갈라 마애불을 새겼다고 한다. 그 연유로 사찰
이름을 도선사라 했다는 것이다. 허나 안타깝게도 이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
이며, 그 마애불 조차도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이미 판명이 났다.
다만 청담대종사 사리탑 자리에서 고려 말과 조선시대 유물이 출토되어 적어도 고려 한복판부
터 절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그곳이 경내의 중심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창건 이후, 어찌된 영문인지 오랫동안 일기장을 남기지 못했으며, 조선 숙종(肅宗) 시절 북한
산성을 수리했을 때 승병(僧兵)들이 이 절에서 보초 임무를 선 기록이 있다. 1863년 안동김씨
의 실세인 김좌근(金左根)이 돈을 대어 칠성각을 지었고, 1887년 동호 임준(東湖 任準)이 7층
석탑을 세우고 그 안에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1903년 혜명(慧明)이 고종의 명으로 대웅전을 중건하고 신중도와 지장도 등 14점의 탱화를 봉
안했으며(이때 불상 2기를 개금하고 1기를 개채함) 1904년 국가기원도량으로 지정을 받았다.
1961년 청담이 주지로 주석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절을 크게 불려나갔
으며, 1963년 도선암을 도선사로 격을 높였고, 1968년에 절과 속세를 이어주는 도로가 닦여지
면서 접근성이 한층 좋아졌다.
2001년 청담대종사를 기리고자 청담기념관을 세웠고, 2002년 그 안에 유물관을 두어 청담대종
사의 유물과 절의 문화유산을 전시/보관하고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해 호국참회원, 명부전, 삼성각, 적묵당, 천불전, 요사채 등 10여 동
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마애불입상과 목아미타불 대세지보살상, 석독성상, '청동종 및
일괄 유물(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59호)',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조관음보살좌상(서울 지방유
형문화재 396호
) 등 지방문화재 5점을 품고 있다.
그 외에 오래된 보리수와 19세기 말에 조성된 지장시왕도, 괘불도, 묘법연화경, 7층석탑, 마
애사리탑 등의 비지정 문화유산도 여럿 지니고 있으며, 청담대종사 사리탑과 청담대사비, 18
나한상과 포대화상, 진신사리탑 등의 조촐한 볼거리도 간직하고 있다.
절의 부설 기구로는 금천구 시흥동(始興洞)에 있는 혜명보육원과 실달학원, 청담종합중고교
등이 있으며, '도선법보'등의 정기 간행물을 내놓고 있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제대로 박힌 고즈넉한 산사로 신작로가 경내까지 뚫려있어 실감이 덜하겠
지만 북한산(삼각산) 서울 구역에 자리한 고찰(古刹) 중 문수사(文殊寺), 일선사(一禪寺) 다
음으로 높은 320~330m 지점에 자리해 있다. 그만큼 이곳은 깊은 산골이다.
만경대와 인수봉(仁壽峯) 그늘에 자리하여 위치도 좋으며, 그곳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산꾼과 답사꾼의 왕래도 빈번하다. 또한 마애불입상이 영험하다고 소문이 자자하여 기도 수요
도 상당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264 (삼양로173길504, ☎ 02-993-3161~63)
* 도선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도선사의 오랜 자랑, 마애불입상



 

♠  도선사 둘러보기 (호국참회원, 삼성각 등)

▲  도선사에서 먹은 공양밥의 위엄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아주 아름다운 말이 있다. 호국참회원 1층 공양간이 마침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 밥과 국 냄새가 나의 후각을 어지럽히니 이곳 공양(供養) 인심이나 확인할
겸, 1그릇 들고 가기로 했다. 어차피 급한 것도 없다.
도선사 공양밥은 다른 절과 비슷한 비빔밥 스타일로 하얀 밥과 김치 등의 나물, 고추장을 먹
을 만큼 담고 별도의 그릇에 미역국을 담아 즐겁게 공양에 임하면 된다. 누구든 무료로 공양
을 할 수 있으며 보통 17시까지 밥을 제공한다. (시간은 상황에 따라 변경 가능) 미역국은 비
록 고기나 해산물은 들어있지 않으나 국물이 진국이다.

어찌하다보니 그릇이 터질 정도로 밥과 나물을 담았는데 이것을 과연 다 먹을 수 있을까? 걱
정이 들었다. 허나 그것은 기우였다. 순간 시장기가 강림하여 거뜬하게 빈 그릇으로 만든 것
이다.
그렇게 공양을 마치고 옆 칸으로 넘어가 내가 먹은 그릇과 수저를 설겆이하고 물 1모금 섭취
한 다음 밖으로 나왔다. 도선사 관람은 이제부터이다.

◀ 청담심지(靑潭心地)
청담대종사가 머물렀던 백운정사 옆에
있던 것으로 2002년에 현 자리로
옮겼다.

◀  돌로 다진 천불전(千佛殿)
종무소(宗務所)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건물로 이름 그대로 조그만 천불이
봉안되어 있다.


▲  배불뚝이 포대화상(布袋和尙)
그의 배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하여 그의 배는 좀처럼 마를 날이 없다.
사람들이 얼마나 문질렀는지 배가 아주 검은 피부가 다 되었으며, 그의
허공에는 조그만 등이 대롱대롱 달려 가을 바람을 즐긴다.

          ◀  도선사 보리수(菩提樹)
명부전 앞에는 불교에서 가장 애지중지하는 나
무인 보리수가 있다. 부처가 보리수 밑에서 깨
달음을 얻었다는 사연 때문이다.
이 나무는 2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어느 승려
가 멀리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과연 그
럴까?) 보리수는 염주나무, 각수(覺樹), 성수(
聖樹)란 별칭도 지니고 있으며, 사진이 너무
흐릿하게 나온 것이 다소 아쉽다. (내 역량이
그것 밖에 안되니 어쩔 수 없음...)


▲  청기와를 눌러쓴 명부전(冥府殿)

보리수 그늘에 자리한 명부전은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
王), 저승의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지금은 명부전이 자리
를 잡고 있으나 이곳은 원래 청담대종사가 머물렀던 백운정사(白雲精舍) 자리이다.

▲  온화한 표정의 금동지장보살상과
19세기에 그려진 지장시왕탱

▲  죽은 이를 심판하는 저승의 10왕과
시왕탱 (지장보살상 좌측)

▲  저승의 10왕과 시왕탱 (지장보살상 우측)

▲  명부전 앞에 자리한 윤장대(輪藏臺)


▲  도선사 대웅전(大雄殿)과 국화전시장

청기와를 지닌 대웅전은 도선사의 중심 건물인 법당(法堂)이다. 절 초창기 시절부터 있었다고
하나 신뢰도는 떨어지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대웅전이라 석가여래상이 중심으로 있어야 되지만 아미타불(阿彌陀佛)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에 거느려 아미타3존상을 이루고 있다. 또한 대웅전
현판은 강창회(姜昶會, 1789~?)가 12살에 썼다고 전한다.

내가 갔을 당시 대웅전 뜨락에는 노란 국화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뜨락 허공에는 연등이 가득
매달려 국화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경내를 둘러싼 단풍과 더불어 늦가을의 멋을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이곳은 매년 11월 경내에서 이렇게 가을 국화전시를 하고 있으며, 석가탄신
일에는 이곳에서 산사음악회와 공연, 법회가 열리는 경내의 광장과 같은 곳이다.


▲  금빛찬란한 대웅전 아미타3존상과 금동후불탱
대웅전 천정에는 하얀 연등이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며 보랏빛 색깔을
연출해 황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  대웅전 앞을 곱게 수식하고 있는
노란 국화들

▲  연등이 하늘을 가린 대웅전 뜨락
(삼성각에서 바라본 모습)


▲  호국참회원 대법당에 봉안된 목아미타불, 대세지보살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91호


호국참회원 3층에 자리한 대법당에는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아미타3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아
미타불을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가지고 있는 점이 참 이채로운데 그렇다고 도선사가 아미타불
도량을 칭하지도 않는다. (도선사는 '호국참회도량'을 칭하고 있음)

대법당 불단에 들어앉아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아미타3존상은 크기가 아주 조그만하여 동자승
처럼 귀엽기 그지 없다. 이들 중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상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
으며, 관세음보살은 근래 새로 지은 것이다.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상 뱃속에서는 고맙게도 그들의 조성시기가 적힌 발원문(發願文)이 나
왔는데, 1740년에 여기서 가까운 도봉산 원통암(圓通庵, 원통사)에서 조성하여 북한산 진관암
(津寬庵, 진관사)에 봉안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하여 18세기 서울 지역 보살상과 아미타불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주며 그 발원문 덕에 지방문화재의 감투까지 받게 되었다. 그리고 아
미타불 이름 앞에 '목(木)'이 붙은 것은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으로 이후 개금을 하여 현재 모
습이 되었다.

북한산(삼각산) 반대편에 있던 이들이 어찌하여 도선사까지 흘러들어왔는지는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다. 다만 1933년 도선사에서 만든 사찰재산대장에 아미타불, 약사불, 관세음보살이 등
장하는데, 그들이 아미타3존상인지는 불투명하며(관세음보살은 입상으로 나와있음) 1960년대
에 촬영된 사진에는 아미타불 옆에 관세음보살이 있는데, 그 역시 진관사에서 넘어왔다고 한
다.
이후 그의 보관(寶冠)이 일부 손상되어 새 관세음보살을 만들어 붙였으며, 기존 관세음보살은
청담기념관 수장고에 넣어버렸다. (그 관세음보살상이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96호인 석조관음
보살좌상임)
아미타3존상 뒤에는 금동으로 치장된 후불탱과 닫집이 듬직하게 자리하여 그들을 반짝반짝 윤
기를 내준다.


▲  연병장처럼 넓은 호국참회원 대법당
중생들의 지원을 받아 달아놓은 조그만 금동원불이 벽을 가득 도배하고 있다.
이곳은 공간이 넓어서 강당 및 행사장의 역할도 도맡고 있다.

▲  대웅전 옆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 석 독성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92호

대웅전 뜨락에서 마애불입상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삼성각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山神)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 치성광여래)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중 독성상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어깨가 딱 벌어지고 체격 또한 단단해 아주 늠름해보이는 이 독성상은 돌로 빚은 것으로 지장
보살처럼 푸른 대머리를 지니고 있다. 시선은 약간 아래로 하고 있으며 무슨 걱정이 있는지
표정이 썩 밝아보이지는 않는다. 몸에 걸친 붉은 가사(袈裟)를 묶은 고리매듭이 왼쪽 어깨에
있으며, 오른손은 바닥에 대고 왼손을 왼쪽 다리를 세운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아줌마 자세처
럼 앉아있다.

그는 원래 마애불입상 주변에 있던 독성각(獨聖閣)에 있었으나 이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으
며, 1962년에 청담이 불교정화운동으로 도선사에 있던 산신각과 칠성각, 용왕당 등 토속신앙
적인 건물을 모두 부시면서 그 건물에 봉안된 산신과 칠성을 모두 독성각에 집어넣고 삼성각
으로 이름을 갈았다.
1992년 독성상의 몸을 새롭게 채색을 했는데, 이때 그의 뱃속에서 1876년에 개분(改紛)했음을
알려주는 '독성나반존자 개분 봉안축원문'이 튀어나왔다. 하여 빠르면 18세기에 조성된 것으
로 여겨지며 조선 후기에 흔치 않은 돌로 만든 독성상이자 그 시절 독성상 연구에 좋은 자료
로 평가를 받는다. (대부분의 독성상은 나무로 만들었음)

▲  삼성각 산신탱과 산신상

▲  삼성각 칠성탱과 석가3존상

▲  삼성각 밑에 자리한 반야굴(般若窟)
쌍용그룹을 세운 김성곤이 돈을 대어 지은
것으로 11면관세음보살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  반야굴을 장식하고 있는 보살들
가운데가 11면 관세음보살, 좌우가
문수보살, 보현보살



 

♠  도선사 마무리

▲  도선사 마애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호

경내 뒤쪽이자 도선사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에 높이 20m 정도 되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바로 그곳에 도선사의 오랜 명물이자 든든한 밥줄인 마애불입상이 짙게 깃들여져 있다. 도선
사에서는 도선대사가 직접 새겼다고 홍보를 하고 있으나(도선이 손으로 바위를 갈라서 만들었
다고 함;) 조사 결과 고려 때 유행했던 마애불 계통을 이어받은 조선 중기 석불로 크게 보고
있다.

돋음새김으로 짜여진 이 석불은 높이 8.43m(머리 부분 2.15m, 어깨 너비 2.88m)의 장대한 규
모로 오랫동안 산골 구석에서 외롭게 지내다가 19세기 후반, 안동김씨의 후원으로 나라의 기
도도량으로 지정되면서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이후 도선사가 '영험한 마애불'로 적극 홍
보하면서 찾는 수요가 나날이 늘어났고, 365일 사람들의 발길이 마를 날이 없다. 완전 서울판
갓바위(관봉 석조여래좌상)가 된 것이다.

이 마애불은 얼굴도 몸통도 모두 두툼하다. 그를 보호하고자 검은 피부의 청동 보호각을 씌워
놓았는데, 그로 인해 얼굴 부분은 거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머리 위에 간단하게 비와 눈을
막을 수 있는 덮개 정도만 설치했으면 좋았을 것을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의 보호각을 씌워놓
아 마치 갇힌 듯한 답답한 모습을 만들어버린 것이 다소 아쉽다.

마애불의 머리는 소발(素髮)로 낮게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솟아있다. 가늘게 뜬 두 눈
은 음각으로 처리해 눈과 주변 살이 두꺼워 보이며, 코는 넓직하고 두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큰 얼굴에 비해 입은 작으며 수염이 살짝 표현되어 있고, 얼굴과 몸통이 딱 붙어있어
목은 아예 없는 것 같다.
몸통에는 옷주름이 이리저리 그어져 율동을 보이고 있으며, 그의 정체는 관세음보살 누님으로
여겨진다. 그 앞에는 넓게 공간을 닦아 예불 공간으로 삼았고, 주변에 1887년에 동호 임준이
지은 7층석탑이 날씬한 모습으로 자리해 뜨거운 예불 현장을 지켜본다.

도선사에서는 마애불 자체를 석불전(石佛殿)으로 삼아 애지중지하고 있으며, 그를 통해 적지
않은 수입을 거둬들이고 있다. 비록 팔공산(八公山) 갓바위만큼은 아니더라도 매일 들어오는
재물이 실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오늘도 중생들의 소망을 접수하랴. 도선사 곳간을 채워주랴.
마애불의 고생이 참으로 크다. 부디 그렇게 벌어들인 돈, 관세음보살 누님의 뜻에 따라 어려
운 중생을 위해, 속세를 위해 모두 내놓기를 바란다. (자고로 종교는 돈과 정치에 너무 욕심
을 부리면 안됨)


▲  평화의 진신보탑(眞身寶塔) (9층석탑)

마애불을 둘러보고 밑으로 내려가면 평화의 진신보탑과 일심광명각 등이 있는 공간이 나온다.
오대산에 있는 월정사(月精寺) 8각9층석탑을 닮은 평화의 진신석탑이 이곳의 중심 역할을 하
고 있는데,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파리와 개미도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하얀 피부
를 자랑하고 있어 월정사8각9층석탑의 젊은 시절을 보는 듯 하다.


▲  일심광명각(一心光明閣)
반야굴 위에 무지개로 화현(化現)했다는 청담대종사를 위해 만든 공간이다.

▲  일심광명각 내부

▲  평화의 불과 괘불(掛佛)

도선사가 호국참회도량을 칭하다보니 평화를 강조하는 석탑과 불까지 갖추고 있다. 짜투리 공
간을 활용하여 경내의 눈요깃감도 조금 늘릴 겸, 평화를 염원하는 도선사의 마음을 살짝 담은
것인데, 평화의 불 뒤에는 근래 장만한 괘불이 걸려있어 활활 타오르는 불을 지켜보고 있다.


▲  포대화상과 18나한상, 그리고 그들을 보듬은 늦가을 풍경

경내 제일 뒤쪽(진신보탑 뒤쪽) 산자락에는 돌로 다진 18나한상과 포대화상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들은 일심광명각과 비슷한 사연으로 조성된 것으로 돌 하나에 나한 1명씩 배치해 다
소 여유로운 모습들을 보이고 있는데, 다들 자유롭고 제각각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포대화상이 그의 치명적인 매력인 똥배를 쑥 내밀고 돈통을 쥐어들며 해
맑은 표정으로 서있어 마치 18나한의 두목 같다.

평화로운 그들 뒤로 늦가을 누님이 질러놓은 고운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져 속세(俗世)에서 오
염되고 상처 받은 두 안구를 제대로 정화시켜준다. 붉게 물든 단풍잎부터 연두색, 녹색, 노란
잎까지 대자연이 물들인 색채들이 너무 곱다. 하여 제아무리 천재 화가라 한들 대자연의 색채
를 감히 흉내내지는 못할 것이다.

▲  윗쪽에 자리한 나한상들

▲  밑쪽에 자리한 나한상들

18나한상까지 모두 둘러보고 잠시 잊었던 청담기념관으로 내려갔다. 그곳은 호국참회원 밑에
자리해 있는데, 문은 이미 굳게 닫힌 상태였다. 알고보니 개방시간은 16시까지이다. (그때가
17시가 넘었음)
이럴줄 알았으면 미리 그곳을 살펴보고 경내를 둘러보는 것인데 그만 방심을 하고 말았다. 이
렇게 중요한 것을 놓쳐버려 다음에 또 와야 되는 구실을 만들고 말았으나 다행히도 집에서 가
까운 곳이라 언제든 쉽게 찾을 수가 있다. (이후 청담기념관도 모두 둘러보았음)


▲  늦가을이 산에 불을 놓았다. 알록달록 타오르는 늦가을 풍경
(도선사 주변)

마음 같아서는 북한산성 용암문까지 훌쩍 올라가고 싶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서 더 이상의 욕
심을 부리지 않고 우이동으로 얌전히 내려갔다.
내려갈 때는 금지된 곳으로 묶은 우이동계곡의 안부를 확인하고자 셔틀버스에 의지하지 않고
걸어서 내려갔는데, 도선광장에서 조금 내려가니 커다란 바위가 잠시 보고 가라며 발목을 붙
잡는다. 바로 붙임바위이다.


▲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고개를 든 붙임바위

도선사까지 신작로가 닦이기 전에는 사람들이 붙임바위에서 많이들 쉬어갔다. 물론 지금도 쉼
터의 역할은 녹슬지 않았다. 산꾼들과 문명의 이기(利器)를 거부하며 두 다리로 오가는 사람
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바위에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바위에 조그만 돌을 붙이고 소망을 들
이밀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하여 바위의 배는 물론 옆구리와 주름선 등 돌
이 안착하기 좋은 자리에는 마구 돌을 갖다 붙였다. 심지어는 그의 피부에 상처를 내고 돌을
얹는 사람도 있었다. 하여 돌을 붙이는 바위란 뜻의 '붙임바위'라 불리게 되었고, 이곳 고개
는 '배바위고개'가 되었다.

바위를 딱 봐도 크고 준수하게 생겼으며, 도선사로 가는 길목에 있다보니 자연스레 주목을 받
은 것이며, 저런 바위는 굳이 절이 아니더라도 산악신앙(山岳信仰)의 대상으로 늘 추앙을 받
기 마련이다. 하여 사람들의 부질없는 소원풀이 도구가 되었고, 옆구리에 신작로가 뚫리면서
5분이 멀다하고 차량들이 소음과 매연을 쏟아붓고 지나가니 그의 고통이 말이 아닐 것이다.
허나 대자연의 넉넉한 마음처럼 딱히 싫은 내색 없이 그 자리를 지키며 도선사의 이정표 역할
을 한다.
지금도 그의 주름과 피부 곳곳에는 사람들이 붙여놓은 돌이 적지 않다. 그만큼 사람들이 속세
의 팍팍한 삶을 그에게 푸는 것이다.


▲  늦가을에 잠긴 도선사 길 (붙임바위 주변)

▲  금지된 계곡, 우이동계곡 (청담폭포, 적취병 주변)

도선사 신작로(청담로, 삼양로173길) 옆에는 우이동계곡(도선사계곡)이 졸졸 흐르고 있다. 북
한산(삼각산) 동부 지역의 이름난 계곡의 하나로 도선사 윗쪽에서 발원하여 속세를 향해 흘러
가는데, 백운천(白雲川)이라 불리기도 하며, 우이동으로 내려가 우이천으로 간판을 갈고 도봉
구와 강북구, 노원구와 성북구의 경계를 이루며 중랑천(中浪川)으로 내려간다.

조선 초부터 서울 근교 경승지로 격하게 찬양을 받았던 우이동계곡은 양반사대부의 피서지로
인기가 높았다. 하여 수재정(水哉亭)과 재간정(在澗亭), 겸산루(兼山樓) 등 그들이 지은 정자
와 별장이 계곡 주변에 즐비했으며, (지금은 다 사라짐) 그들이 남긴 바위글씨가 여럿 전하고
있다.
이곳을 즐겨찾던 사람 중 이계 홍양호(耳溪 洪良浩, 1724~1802)가 있는데, 그는 여기서 9곳의
괜찮은 명소를 뽑아 '우이동구곡(九曲)'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 식구들은 대략 이렇다. <그의
'우이동구곡기(牛耳洞九曲記)'에 실려있음>
제1곡은 '만경폭(萬景瀑)'이란 폭포로 도선사 밑에 있다. 조현명(趙顯命, 1690~1752)과 이주
진(李周鎭, 1692~1749), 그의 아들인 이은(李殷, 1722~1781) 등이 남긴 바위글씨가 전하고 있
으며, 제2곡은 적취병(積翠屛), 제3곡은 찬운봉(瓚雲峯), 제4곡은 커다란 바위인 진의강(振衣
岡), 제5곡은 옥경대(玉鏡臺), 제6곡은 월영담(月影潭), 제7곡은 회영암(淮纓巖), 제8곡은 명
옥탄(鳴玉灘), 그리고 제9곡은 재간정(在澗亭)이다.

왜정 때는 서울 근교 벚꽃 명소로 유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봄꽃놀이를 하러 왔다. 이때만 되
면 경성역(서울역)에서 임시 관광열차를 편성하여 우이동 부근인 창동역(倉洞驛)까지 운행했
는데, 창동역부터 여기까지는 걸어서 이동했다.
이처럼 서울 사람들과 귀족들의 눈과 마음을 시리게 해주었던 우이동계곡은 1970년대 이후 상
수원 보호구역이 되면서 계곡 전체가 금지된 계곡으로 꽁꽁 묶여 있다. 하여 우이동9곡 식구
들 상당수는 접근이 통제되어 제대로 더듬기가 어렵게 되었고, 그저 계곡 옆 신작로에서 바라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2021년에 9곡 명소와 가까운 곳에 관련 안내문과 조망대를 설치
했으나 만경폭과 적취병 등은 너무 거리가 있어서 제대로 보기가 힘듬)
비록 사람들에게는 다소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그 덕에 인간들의 괴롭힘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이렇게 청정하고 때 묻지 않은 구석을 자랑하게 되었다. 선녀 누님도 놀러올 것 같은 계곡이
저 밑에 간드러지게 유혹을 하지만 괜시리 잘못 발을 들였다가 벌금형의 고통을 받을 수 있다.

붙임바위 주변 계곡에는 청담폭포와 적취병이 있는데,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벼랑
과 바위들이 늦가을 단풍과 어우러져 일품 수채화를 자아내고 있었다.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바라보듯 해야 되는 아쉬움이 있으나 굳이 접근 통제의 경고를 무시하면서까지 대자연의
작품에 옥의 티가 되고 싶지는 않다.

붙임바위를 끝으로 도선사 늦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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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1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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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첩첩한 남쪽 지붕을 거닐다. 만인산~만인산자연휴양림 (태조대왕태실, 대전둘레산길, 대전천발원지)

대전 만인산 (만인산자연휴양림)



' 대전의 남쪽 지붕, 만인산 나들이 (만인산 자연휴양림) '

만인산 분수연못
▲  만인산 분수연못

금산 태조대왕태실

만인산휴양림

▲  태조대왕태실

▲  만인산휴양림 숲길

 



 

봄이 겨울 제국의 오랜 압정(壓政)에 지친 생명들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던 3월의 마지막
날, 대전의 남쪽 지붕인 만인산을 찾았다.
만인산은 장태산(長泰山), 계족산(鷄足山)과 더불어 대전 지역의 이름난 뫼이나 일찌감
치 관심을 두어 인연을 지었던 장태산과 계족산과 달리 크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러
다가 그곳이 좋다는 풍문을 전해듣고는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400여 리의 먼 길을
떠났다.

아침 일찍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편으로 대전으로 내려가 대전역에서 대전 501번(비래동
↔마전)을 타고 40여 분을 달려 대전과 금산(錦山) 경계인 추부터널 앞 만인산휴양림에
서 두 발을 내렸다. 버스는 외마디 부릉소리를 만인산에 남기며 칠흑과 같은 터널 속으
로 유유히 사라져 갔고, 나는 만인산의 품으로 길을 재촉했다.



 

♠  만인산(萬仞山) 입문

▲  대전과 충남 금산의 경계를 가르는 추부터널
<터널 뒤쪽 산줄기는 만인산 남쪽 능선(태봉재)>


만인산을 지나는 2차선 도로는 옛 대전~금산 17번 국도이다. 우회도로(금산로)가 생기기 이전
에는 두 지역을 왕래하는 차량들로 꽤나 번잡했으나 지금은 우회도로에게 국도의 자격과 기능
을 대부분 넘기고 '산내로'란 시내 외곽 도로로 조용히 살아간다. 차량 통행도 많이 줄어 다
소 한가한 신세가 되긴 했으나 만인산과 중부대, 상소동과 하소동 지역이 이 도로에 크게 의
존하고 있고 특히 주말에는 만인산 등산/나들이 수요로 왕년의 위엄을 다시금 뽐낸다.

만인산휴양림 정류장에서 만인산의 품으로 들어가는 길은 만인산휴게소로 접근하는 것과 만인
산푸른학습원으로 가는 길, 2갈래가 있다. 어느 길로 가든 취향에 따라 움직이면 되며(만인산
정상이 목적이면 만인산휴게소로 가면 됨) 나는 푸른학습원 쪽으로 접근하여 만인산을 크게 1
바퀴 돌기로 했다.


▲  만인산 푸른학습원으로 인도하는 잘빠진 언덕길

그리 각박하지 않은 오르막길을 10분 오르니 만인산 푸른학습원이 산뜻한 모습으로 마중을 한
다. 이곳은 만인산휴양림을 수식하는 편의시설로 1993년부터 터를 닦아 1997년 8월 26일에 문
을 열었다.
이후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시설물을 손질하고 시스템을 변경했으며, 자연학습전시실과 목공
체험실, 운동장, 천문대.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개인, 단체 숙박 가능)를 갖추고 있다.
여기서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리는데, 동쪽 산길을 오르면 정기봉(580m)이 서남쪽에 잘 닦여진
길은 만인산 남쪽 능선과 태조대왕태실, 남쪽에 가파른 산길은 만인산 남쪽 능선과 정기봉 능
선으로 이어진다. 특히 대전에서 야심차게 닦은 대전둘레산길 2구간(금동고개~만인산휴게소,
13.1km)과 3구간(만인산휴게소~삼괴동 덕산마을, 12.5km)이 만인산휴게소에서 기지개를 켜 학
습원 앞을 지나 각자의 갈 길로 흘러간다. 그럼 여기서 만인산과 만인산휴양림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만인산 푸른학습원 직전 숲길

▲  만인산 푸른학습원

만인산 품에 포근히 둥지를 튼 만인산휴양림(자연휴양림)은 1990년에 문을 열었다. (1989년부
터 휴양림을 닦음) 장태산자연휴양림(☞ 관련글 보러가기), 국립대전숲체원과 더불어 대전에
있는 3개의 자연휴양림 중 하나로 구역 면적은 183만㎡, 조성 비용은 103억(푸른학습원 건립
비용 포함)이 들었으며, 휴양림 범위는 서쪽과 남쪽은 대전천발원지까지, 동쪽은 푸른학습원,
북쪽은 분수연못에 이른다. (대전광역시 만인산푸른학습원에서 관리하고 있음)

이 휴양림은 숲을 전혀 말아먹지 않고 숲과 계곡 물길을 있는 그대로 이용하여 닦았으며, 가
족휴양지구, 청소년지구, 피크닉지구, 푸른학습지구 등으로 나눠 조성했다. 편의시설로는 푸
른학습원과 만인산휴게소, 학습농장, 모험놀이시설 등이 있고, 그 외에 분수연못과 대전둘레
산길 2, 3코스 등 여러 산길을 지니고 있다. 청정함을 자랑하는 계곡은 만인산 서쪽 자락에서
분수연못으로 흘러가며, 활엽수(闊葉樹)가 삼삼한 숲을 이루어 휴양림 및 산림욕장으로 아주
바람직한 조건을 갖추었다.

휴양림을 안고 있는 만인산(538m)은 대전 남쪽 끝에 자리한 산으로 대전과 금산의 경계를 이
루고 있다. 산 이름은 '높고 깊은 산'이란 뜻으로 수많은 골짜기가 모여 산을 이루었다는 뜻
에서 그리 불렸다는 설도 덧붙여 전하며, 산봉우리가 마치 만발한 연꽃을 닮았다고 하여 명당
(明堂) 자리로 명성이 자자했다. 하여 태조 이성계도 이곳에 탐을 내어 자신의 원초적 흔적(
태실)을 이곳에 맡겼는데, 그로 인해 태실산(胎室山), 태봉산(胎峰山)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
으며, 금산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태봉재(태봉고개)라 불렀다.

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들어앉아 전라도에서 올라온 봉화를 받아 서울로 전했으며, 봉수레미골
은 대전천(大田川)의 발원지로 그 대전천에서 대전이란 지명이 유래하였다. (1872년에 제작된
지도에 '산내면 대전리'란 지명이 등장함) 흔히 대전의 옛 이름인 한밭을 왜정(倭政) 때 대전
으로 바꾼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 이전부터 대전이란 지명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봄에는 진달래와 산벚꽃이 산을 곱게 수식하며, 5월의 신록이 볼만하다. 늦가을 풍경도 일품
이며, 겨울의 설경(雪景) 또한 아름다우나 나는 본의 아니게 그들을 모두 피해 와서 그 아름
다운 풍경을 누릴 수가 없었다.
대전둘레산길 2코스와 3코스가 만인산의 신세를 지며, 태조대왕태실과 봉수대터 등의 문화유
산과 만인산휴양림, 만인루, 분수연못 등의 조촐한 명소가 있다. 또한 아름다운 숲길이 거미
줄처럼 펼쳐져 있어 걷는 길이 지루하지 않으며, 만인산휴게소에서 정상까지는 넉넉잡아 40분
정도 걸린다.

* 만인산휴양림 소재지 : 대전광역시 동구 하소동 산47일대 (☎ 042-270-8651,8660)
* 만인산휴양림과 푸른학습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푸른학습원에서 만인산 남쪽 능선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산길

푸른학습원에서 각박하게 펼쳐진 남쪽 산길을 조금 오르면 만인산~정기봉 능선이다. 여기서
동쪽(왼쪽)으로 가면 정기봉과 대전둘레산길 3구간이며, 서쪽(오른쪽)은 만인산과 태조대왕태
실, 대전둘레산길 2구간으로 이어진다. 나는 만인산이 목적이라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  푸른학습원 남쪽 능선에 닦여진 각박한 전망대

능선 갈림길에서 서쪽으로 가면 전망대라 불리는 존재가 마중을 한다. 전망대라고 해서 나무
로 잘 지어진 조망대나 오르기 쉽게 다져진 그런 전망대가 아닌 군사훈련이나 극기훈련용(모
험놀이시설)으로 지어진 것으로 거의 90도의 뻣뻣한 철사다리를 힘겹게 올라가야 된다. 비록
생긴 것이 저 모양이라 그렇지 하늘을 향해 솟아있어 전망대로서의 흠은 거의 없다. 다만 그
를 둘러싼 나무들이 모두 키다리라 그의 조망을 크게 훔치고 있어 보이는 범위는 매우 적다.

저 위로 올라가서 잠시 머물까도 했으나 오르기가 좀 각박해 보이고 굳이 이 나이에 저길 꼭
올라가야 되나 싶어 그 밑 의자에 얌전히 앉아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으로 간단히 요기를 했다.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먹어서일까 모든 것이 다 꿀맛 같으니 대자연 형님이 나도 모르게 간식
에 꿀을 발라준 모양이다.


▲  태봉고개 (마전, 태조대왕태실 방향)

행동식 섭취를 마치고 서쪽으로 내려가니 바로 태봉고개(태봉재)가 나온다. 이곳은 대전과 금
산을 이어주던 옛 고개로 추부터널이 생기기 전까지는 사람과 차량이 이 고개의 신세를 졌다.
하지만 고개 밑도리에 땅굴이 뚫리면서 매우 한가한 신세가 되었고, 지금은 만인산을 찾은 산
꾼과 나들이꾼들이 고개의 심심함을 달래준다.

고개 정상 양쪽에는 바위 벼랑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으며, 고개 하늘에는 극기훈련용 구름다
리가 아슬아슬하게 놓여져 있다. 그리고 저 고갯길을 넘으면 바로 왼쪽(동쪽)에 만인산의 오
랜 명물인 태조대왕태실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  만인산 거닐기 (태조대왕태실, 만인산 정상)

▲  태조대왕태실(太祖大王胎室)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31호

만인산 태봉고개를 기준으로 북쪽은 대전, 남쪽은 충남 금산 땅으로 바로 경계선 남쪽에 태조
의 태실과 태실비가 있다. 바로 그 태실을 보고자 잠시 대전 땅을 벗어났다. (그래봐야 100m
도 되지 않음)
함경도와 두만강(豆滿江) 이북 지역의 너른 땅을 관리했던 지역 세력가 출신의 이성계가 그의
고향이나 서울 부근이 아닌 머나먼 금산 땅에 태실을 둔 점이 꽤 흥미로운데, 그렇다면 왜 그
의 태실이 엉뚱하다 여겨지는 이곳에 박혀있는 것일까?

이성계(李成桂)의 태실은 원래 함경도 함흥(咸興)의 함흥본궁(本宮) 용연(龍淵)에 있었다. 함
흥본궁은 이성계가 그의 조상들이 살던 집터에 새로 지은 집으로 4대 조상들의 신주를 봉안했
던 조선 왕실의 주요 성역이다.
조선이 갓 들어선 시절, 부동산에 눈썰미가 있던 어떤 시인이 만인산을 둘러보았는데, 산세가
깊고 첩첩한 산봉우리는 연꽃이 만발한 것 같으며, 99산의 물이 하나로 모여드는 지형이라 하
여 격하게 찬양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무학대사(無學大師)는 크게 호기심이 일어
직접 찾아가 확인을 해보니 아주 대단한 터였다. 하여 태조에게 건의하여 1393년 차디찬 삭풍
(朔風)이 맴도는 함흥에서 이곳<그때는 전라도 진동현(珍同縣)>으로 옮기고 태실비를 세웠다.
그때 권중화(權仲和)가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 겸 봉안사(奉安使)가 되어 그 임무를 수행했
으며, 태실이 봉안되자 진동현은 지진주사(知珍州事)로 승격되었다.

조선 왕실의 성역으로 나라의 관리와 통제가 매우 엄격했으며 옥계부사(玉溪府使)를 두어 관
리했다. 또한 부근에 비례리(備禮里)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는 거기서부터 예를 갖추어 태실에
참배했다고 해서 비롯된 이름이다. 그만큼 태조 태실에 각별한 공을 들인 것이다.
숙종(肅宗) 시절에 지역 백성들이 태실 주변에서 경작을 하고 벌목한 일을 제외하면 딱히 별
일은 없었으나 1910년 이후 왜정(倭政)은 망국(亡國) 시조의 태실을 욕보이고자 1928년에 태
실을 부시고 태항아리를 창덕궁으로 빼돌렸으며, 태실 주변은 민간에 팔아먹었다. 그나마 남
아있던 태실비와 태실도 개념없는 땅 주인이 죄다 부셔버렸고, 태실 자리에는 자기 선조의 무
덤을 쓰면서 제자리까지 강제로 잃게 된다.

이후 테실 석재들이 주변에 이리저리 흩어져 굴욕의 시간을 보내다가 1993년 금산군청과 주민
들이 수습해 원래 위치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지금 자리에 복원했다. 허나 없어진 석재가 적
지 않아 새 돌을 많이 투입하다보니 헌돌과 새돌이 다소 어색한 조화를 보인다.

▲  서쪽에서 바라본 태실과 태실비

▲  동쪽에서 바라본 태실과 태실비

이성계의 최초의 흔적이 담겼을 태실은 8각형 구조로 윗도리는 원래 것이나 밑도리는 남아있
는 석재가 없어 새로 붙였다. 그리고 태실 주위로 난간을 둘렀는데, 이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태실비는 바닥에 네모난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해태를 닮은 귀부(龜趺)를 둔 다음 이곳의 정
체를 밝히는 빗돌을 세웠다. 그리고 그 위로 교룡(蛟龍, 이무기)이 여의주(如意珠)를 두고 다
투는 모습을 새긴 이수(螭首)로 마무리를 지었다.
빗돌 앞면에는 한자로 '태조대왕태실'이라 쓰여 있으며, 뒷면에는 '강희(康熙) 28년(1689년)
3월 29일'에 중건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빗돌 역시 여러 조각으로 아작 나서 쓰러진 것
을 다시 이어붙여 일으켜 세웠다.

만인산은 태조의 태실을 품게 되면서 태봉산, 태실산이란 별칭을 지니게 되었으며, 태실 옆을
지나는 고개는 태봉재(태봉고개)가 되었다. 또한 태가 묻힌 능선은 쌍봉낙타(雙峯駱駝)형으로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태봉산의 북풍을 막아주고 햇빛 또한 잘 들어 명당자리로 격하게 추앙
을 받고 있다.

* 태조대왕태실 소재지 :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산1-86


▲  태조대왕태실비
귀부가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서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보통은 정면을 바라보기
마련인데 왜 서쪽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쪽에 참한 여인네라도
있는 것일까?

▲  태조대왕태실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 금산 중부대학교 주변

▲  만인산 자연학습체험로 ①

만인산의 유일한 지정문화재인 태조대왕태실을 둘러보고 다시 대전 땅으로 들어와 만인산 남
쪽 능선을 거닐었다. 봄이 겨울 제국을 몰아내고 천하를 해방시켰지만 산록의 나무들은 아직
도 흐릿한 모습들이다. 마치 독재에 오랫동안 쇠뇌당한 민중들처럼 말이다.

능선길을 좀 거닐다가 북쪽길로 내려가니 잘 닦여진 숲길이 나온다. 이 길은 자연학습체험로(
0.7km)로 푸른학습원 운동장에서 대전천발원지 직전까지 이어지는데 오르락과 내리락이 거의
없는 그야말로 편안한 길이다.


▲  굽이굽이 흘러가는 만인산 자연학습체험로 ②

▲  만인산 자연학습체험로 ③
앞에서 아른거리는 노란색 존재는 산수유이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만난 봄꽃들;

▲  만인산 자연학습체험로 ④

▲  수목(樹木) 속을 비집으며 ~~ 만인산 남쪽 능선길

자연학습체험로가 끝나는 지점(대전천발원지)에서 다시 비좁은 남쪽 능선길로 향했다. 만인산
정상까지는 자연학습체험로 같은 편한 길은 커녕 무조건 각박한 능선길의 신세를 져야 되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면 금세 오를 것 같지만 그래도 500m가 넘는 뫼인지라 그리 만만하지가
않다. (대전천 발원지에서 20~30분 정도 걸림)
허나 자존심을 곱게 접고 묵묵히 산길을 걷다보면 보이지 않던 만인산 정상이 흔쾌히 그 모습
을 드러낸다.


▲  서서히 흥분을 보이는 만인산 남쪽 능선길

▲  대전의 남쪽 지붕, 만인산 정상을 향하여 ~~~

▲  드디어 도착한 만인산(538m) 정상 (만인산 봉수대터)

만인산 정상은 대전 남부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다. 사방이 모두 트여있어 조망도 그런
데로 괜찮은 편이라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이곳에 봉수대(烽燧臺)를 두었다.
봉수대는 돌을 이용해 절구통 모양으로 닦았는데, 전라도에서 날라온 봉화를 받아 북쪽(서울
)으로 넘겼으며, 만인산 동쪽 정기봉에도 봉수대를 두어 경상도의 봉화를 전달했다. 평소에는
불을 때워 연기로 신호를 보냈으나 비나 눈이 올 때는 봉수지기가 다음 봉수대까지 뛰어가 소
식을 전했다.

그렇게 바쁘게 살던 봉수대는 1894년 이후 봉수제도가 폐지되면서 더 이상 연기를 피우지 못
했고 장대한 세월의 거친 격류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하나둘 사라져 갔다. 만인산 봉수대와
정기봉 봉수대 역시 그 험난한 과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녹아내려 터만 아련하게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살짝 속삭여준다.


▲  만인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만인산 서쪽 자락을 비롯해 멀리 장태산의 뒷통수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  만인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금산 마전(추부면) 지역과 중부대학교(바로 밑에 보이는 건물들)


대전은 대구(大邱)와 비슷하게 산에 둘러싸인 분지형 지형으로 동북쪽과 동쪽, 남쪽, 서쪽에
높은 뫼들이 가득 포진해 있다. 특히 만인산과 장태산이 있는 남쪽은 산들이 첩첩히 주름진
산악지대로 만인산이 아무리 높다 한들 주변이 온통 산 투성이라 보이는 범위는 높이에 그리
시원치 못하다. 대전 시내도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보이는 범위는 북쪽으로 하소동, 서쪽으로 장태산, 동쪽은 정기봉, 남쪽은 금산 추부면(마전)
북부 정도이다.



 

♠  만인산 마무리

▲  정상에서 만인루로 내려가는 가파른 산길

정상에서 첩첩히 주름진 좁은 천하를 굽어보며 10분 가량 머물다가 동쪽 산길로 내려갔다. 여
기서 길은 3갈래로 갈리는데, 동쪽 길은 만인루와 만인산휴게소, 남쪽 길은 아까 올라왔던 남
쪽 능선, 북서쪽은 대전둘레산길 2구간으로 먹티재와 하소동, 금동으로 이어진다.


▲  동쪽 산길로 내려가면서 바라본 금산 마전(추부면)과 중부대

▲  동쪽 산길로 내려가면서 바라본 정기봉(580m)

▲  만인루로 인도하는 계단길 (만인루 입구)

동쪽 산길을 조금 내려가면 만인루 입구에 이른다. 여기서 길은 3갈래로 갈려 나그네로 하여
금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만드는데 계단길로 직진하면 만인루, 남쪽의 가파른 산길을 내려
가면 대전천발원지, 잘 닦여진 북쪽 길로 내려가면 사방댐이다.
우선 봉우리 위에 지어진 만인루를 보고자 누렇게 뜬 낙엽들이 어수선하게 깔린 계단길을 올
랐다.


▲  만인산의 새로운 장식물, 만인루(萬仞樓)

만인루는 2층으로 이루어진 팔작지붕 누각으로 정상 동쪽 440m 고지에 자리하고 있다. 지붕은
목조 와가(瓦家)로 닦고 나머지는 철근콘크리트로 다진 것으로 서울 신영동(新營洞)에 있는
세검정(洗劍亭)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조금 낯이 익은 모습이다.
대전시가 2001년 5월 10일에 짓기 시작해 그해 11월 30일 완성을 보았으며, 사업비는 1.35억
원이다. 만인산을 수식하는 존재이자 이곳의 새로운 명물로 누각에 올라서면 서쪽으로 만인산
정상, 동쪽은 정기봉, 남쪽은 마전 지역이 시야에 들어오며, 옛날 스타일로 작성된 '만인루
창건기'가 윗쪽에 걸려있으나 글씨가 너무 깨알 같아서 읽기가 힘들다.


▲  만인루에서 바라본 금산 마전(추부면) 지역

▲  만인루에서 바라본 정기봉(왼쪽 봉우리)과 만인산 푸른학습원
(가운데 부분), 그리고 만인산 남쪽 능선(오른쪽 산줄기)

▲  만인루 입구에서 사방댐으로
내려가는 너른 숲길

▲  만인루 입구에서 대전천발원지로
내려가는 각박한 내리막길


만인루를 둘러보고 다시 입구로 내려와 남쪽인 대전천발원지로 내려갔다. 그 길이 얼마나 각
박한 수준이던지 내려가니까 망정이지 만약 이 길로 올라왔더라면 숨이 제대로 찼을 것이다.
만인산에서 가장 흥분한 산길로 앞서 정상으로 가는 길보다 더 가파르며, 그 길을 내려가면
대전천발원지에 이른다.


▲  대전천발원지 방향 산길

▲  대전천발원지(봉수레미골)

앞서 잠깐 스쳐 지나갔던 대전천발원지는 만인산 정상 동쪽 골짜기로 이 일대를 봉수레미골이
라 부른다. 만인산에서 달맞이 행사나 큰 제향(祭享)이 있을 때 정상을 향해 봉화를 올리던
골짜기라 하여 '봉수내미골'이라 했는데 그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봉수레미골로 살짝 바뀌었다
고 한다. 내용이야 어쨌든 만인산 봉수대와 관련된 이름은 분명하다.
봉수레미골은 대전천으로 간판을 바꾸어 대전시내를 굽이쳐 금강으로 흘러가며 그 대전천에서
대전이란 이름이 시작되었다. 그러니 이곳은 대전의 조촐한 성역과 같은 현장이다.

▲  가늘게 흘러가는 봉수레미골

▲  봉수레미골 숲길

▲  봉수레미골에 설치된 모험놀이시설
(외나무다리 타기)

▲  분수가 용솟음치는 분수연못


▲  만인산의 아름다운 거울, 분수연못

봉수레미골 상류에서 내려온 시냇물은 만인산휴게소 옆에 닦여진 분수연못에 모여 종점이 없
는 대장정을 준비한다. 이 연못은 만인산이 베푼 냇물을 십시일반 모아둔 것으로 거의 호수에
버금가는 규모라 연못이란 말을 무색케 한다. 차라리 '분수호수'나 '만인산호수'란 이름이 더
적당해 보인다.
산 속에 숨겨진 그림 같은 호수로 봄맞이에 들뜬 나무와 꽃들이 그를 거울로 삼아 겨울로 초
췌해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들이 없다. 지나가는 구름과 햇님, 달님도 잠깐씩 길을
멈추어 호수를 굽어보며 빗질을 한다.
호수 주위로 산책로를 닦아놓았으며 조촐하게 분수를 깔아놓아 나른한 봄 오후를 깨운다. 여
기서 1차 정모를 한 만인산 냇물은 다시 밑으로 흘러가 사방댐에서 2차 정모를 하며, 거기서
부터 큰 세상을 향한 끝없는 여정이 시작된다.


▲  만인산의 화려한 율동, 분수연못 분수의 위엄 ①
분수 뒷쪽에 보이는 건물이 만인산휴게소이다.

▲  만인산의 화려한 율동, 분수연못 분수의 위엄 ②

▲  하트를 중심으로 펼쳐진 분수연못 포토존

분수연못을 1바퀴 둘러보고 바로 동쪽에 자리한 만인산휴게소로 이동했다. 이 휴게소는 1990
년도에 민간자본으로 지어진 만인산휴양림의 거의 유일한 편의시설로 지상 2층, 반지하 1층
규모이다.
휴게소 앞에는 봉수레미골의 물을 붙잡아 연못을 닦았는데, 휴게소와 자연경관이 조화를 이루
도록 조성하여 이 땅의 휴게소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답고 휼륭한 건축물로 찬양을 받기도 했다.
만인산 자락 복판에 있고, 대전과 금산을 이어주는 도로(산내로)변에 자리해 있어 접근성도
좋으며, 식당과 커피집, 편의점 등이 휴게소를 이루고 있다. 특히 호떡(봉이호떡)이 유명해
이곳에 들린 사람들은 거의 호떡 하나씩 사먹기 마련이다.
마침 출출하기도 하여 나도 흔쾌히 호떡 줄에 동참했는데, 평일이라 대기줄이 적어 금방 손에
쥘 수 있었다. 맛은 시내에서 흔히 먹을 수 있는 일반적인 호떡보다 조금 달달하다고 해야 될
까? 호떡 크기는 그런데로 적당해 보이며, 가격은 1개당 1,000원(지금은 1,200원이라고 함)이
나 받는다. 그렇게 만인산의 명물 비슷하게 되어 매일 소고기 회식을 할 정도로 장사가 잘되
니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

휴게소 주변에는 의자와 탁자가 여럿 놓여져 휴게소에서 먹거리를 구입하거나 속세에서 가져
온 음식과 간식을 먹는 사람들로 가득하며, 연못이 바라보이는 곳에는 전망데크를 깔았다. 그
리고 여기서 '만인산 숲속의 탐방로'란 간판을 내건 고가도로 식의 탐방로가 시작되는데, 그
길은 산내로 허공을 가로질러 도로 동쪽 임도로 연결된다.
요즘 이런 식의 탐방로가 자연휴양림에 많이 닦여져 있어 탐방에는 좋을 지 모르나 은근히 경
관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탐방로의 폭이 좁고 난간도 그리 높지 않아 자칫 추락 등의 사
고 위험도 적지 않다. 특히 고소공포증이 있거나 심신이 부실한 노약자, 음주자는 출입을 자
제하여 하나 뿐인 목숨을 아끼기 바란다.


▲  만인산 숲속의 탐방로(숲속자연탐방로) 동쪽 종점

만인산 숲속의 탐방로는 그런 위험성 때문에 이용시간에 제한을 두고 있다. 3~6월과 9~11월은
9~18시까지 통행할 수 있으며, 7~8월은 9~19시까지, 12~2월은 9~17시이다. (이용시간은 변동
될 수 있음) 그 외에 시간과 눈, 비, 태풍이 엄습할 시에는 문을 닫아건다. 그러니 억지로 들
어가지 말자.
탐방로의 길이는 200m, 높이는 6~10m이며, 만인산휴게소와 산내로 동쪽 임도(숲길)를 이어준
다.


▲  호젓하게 펼쳐진 산내로 동쪽 임도

산내로 동쪽 임도는 푸른학습원 밑 숲속의 교실에서 만인산공원 정류장까지 이어지는 0.95km
의 달달한 비포장 숲길이다. 길 서쪽은 산내로와 접한 벼랑이며, 동쪽 역시 하늘로 솟은 깎아
지른 벼랑이라 만약 이런 곳에서 적의 매복 공격에 걸리면 꼼짝없이 털리기 좋다. 허나 이곳
에서 그럴 일은 1도 없으므로 마음 편히 임도를 거닐며 자연을 즐기면 된다.


▲  산내로 동쪽 임도 ①
왼쪽 낭떠러지 밑에 대전~금산을 이어주는 '산내로'가 있다.

▲  산내로 동쪽 임도 ②
직선으로 가면 재미가 없으므로 종종 굴곡의 미(美)도 보여준다.

▲  산내로 동쪽 임도 ③

만인산에서 만난 숲길 중, 산내로 동쪽 임도가 가장 마음에 든다. 아무래도 나의 정처없는 마
음이 그 길에 퐁당퐁당 빠진 모양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 길을 집으로 훔쳐와 혼자서만 누리
고 싶지만 내가 조물주도 아니고 고위 권력자도 아니니 그건 어림도 없다. 사진으로 두고두고
보거나 다음에 다시 인연을 지어 찾아와야겠다.

동쪽 임도는 서쪽 산내로와 마치 하늘과 땅처럼 높이를 두고 펼쳐지다가 서서히 그 간격이 줄
면서 만인산공원 정류장에서 완전히 같아지게 된다. 이곳은 만인산휴양림과는 관련이 없는 곳
으로 분위기를 내세운 커피집이 하나 있으며, 만인산의 사실상 북쪽 끝이나 다름이 없다. 여
기서 북쪽으로는 산길이 없으며(산내로 도로만 있음) 남쪽 길 건너에 분수연못에서 내려온 물
을 다시 붙잡은 사방댐이 있고, 거기서 분수연못과 만인루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만인산공원 정류장에서 3시간에 걸친 만인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만인산의 알짜
배기를 고루도루 겯드려 제대로 1바퀴 둘러보았는데, 이렇게 좋은 곳을 왜 이제서야 인연을
지었는지 만인산을 낮게 봤던 나의 안목이 정말 쓰레기였음을 통감한다. 만약 다음에도 이곳
과 인연이 닿는다면 만인산 동쪽에 있는 정기봉도 꼭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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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교육의 중심지이자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깃든 곳, 성균관 늦가을 나들이 (문묘 은행나무, 성균관대성전 은행나무)

성균관(문묘) 늦가을 나들이



' 조선시대 교육의 중심지, 성균관(문묘) 늦가을 나들이 '

성균관의 자랑, 문묘 은행나무

▲  성균관의 자랑, 문묘 은행나무

성균관 명륜당 성균관 대성전(문묘)

▲  성균관 명륜당

▲  성균관 대성전(문묘)

 



 

대자연이 우리에게 내린 4계절 가운데 오색 단풍과 황금색 은행잎이 흩날리는 늦가을 풍
경이 단연 갑(甲)이 아닐까 싶다. (그 다음은 4~5월 봄 풍경;)
마치 불고기가 불을 만난 듯 아주 맛있게 익어가는 늦가을은 그 하루하루를 그냥 흘려보
내기가 정말로 아깝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멀리 갈 것도 없이 서울
장안 곳곳과 즐겨찾기 명소, 산을 찾아다니며 늦가을의 짧기만 한 바지 가랑이를 붙잡는
다. 늦가을은 10월 말에서 11월 중순, 길어봐야 11월 말이 고작이라 정말 후딱 간다.

이번에 찾은 늦가을 명소는 조선시대 교육의 중심지인 성균관(문묘)이다. 이곳은 부근의
여러 즐겨찾기 명소(낙산, 북촌, 성북동 등)가 있음에도 이상하게도 손과 발, 마음이 잘
가지 않아서 찾은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인데, 이번에 확실히 그곳을 익히고자 성균관으
로 출동했다.



 

♠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
서울 문묘(文廟)와 성균관(成均館) - 사적 143호

▲  성균관 내부로 인도하는 명륜당 서쪽 문

성균관대학교 교내 동남부에 넓게 자리한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으로 오늘
날의 국립 서울대와 같은 존재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성균관은 고려시대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에서 비롯되었는데, 고려 충렬왕(
忠烈王) 시절인 1289년 성균감(成均監)으로 이름을 갈았다. 여기서 성균(成均)은 음악의 조율
(調律)을 맞춘다는 의미로 어그러짐을 바로 잡아 이루고 과불급(過不及)을 고르게 한다는 것
이다. 즉 쉽게 풀이하면 어느 누구도 편중됨이 없이 모두 균형에 맞게 가르치겠다는 뜻으로
보면 될 것이다. 그러니 의미만큼은 참으로 아름답다.

1308년 성균관으로 이름이 갈렸으며, 1356년 다시 국자감으로 바뀌었다가, 1362년 성균관으로
간판을 바꾸었다. 1392년 천하가 조선으로 바뀐 이후에도 그 이름은 계속 유지되었으며, 국도
(國都)를 개경(開京)에서 서울(한양)로 옮긴 이후, 1395년부터 숭교방(崇敎坊, 지금의 명륜동
)에 새로운 성균관을 닦았다. 이때 대성전과 동무, 서무, 명륜당, 동재, 서재, 양현고(養賢庫
) 등 96칸을 지었으며, 1398년에 완성을 보았는데, 성균관대는 바로 1398년을 학교 창립 연도
로 삼으며 장대한 역사를 내세우고 있다.

성균관은 유교식 교육기관이라 유교의 성현(聖賢)을 봉안하는 제사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그
래서 문묘(文廟)라 불리기도 한다. (대성전만 따로 문묘라 부르기도 함;) 그러다보니 성균관
또는 문묘라 섞어 부르기도 하는데, 어느 것이든 모두 정답이다.
또한 최고의 교육기관이란 뜻에서 태학(太學)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고구려(高句麗) 제
일의 교육기관인 태학에서 따온 것이 아닐까 싶으며, 주(周)나라 때 제후(諸侯)가 다스리던
도시에 설치했던 학교의 명칭인 '반궁(泮宮)'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는 명나라에 대한 지극한
꼴통 사대주의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보인다. 즉 조선 제일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을 일개 제후
국의 학교로 낮춘 것이다.

성균관 최고 책임자는 정3품인 대사성(大司成)이다. 물론 그보다 높은 정2품 지사(知事)와 종
2품 동지사(同知事)도 있으나 이들은 다른 관직을 겸하는 겸관(兼官)이었으며, 어디까지나 대
표는 대사성이었다. 그 밑에 종3품 사성(司成) 2명, 정4품 사예(司藝) 3명, 정5품 직강(直講)
4명, 정6품 전적(典籍) 13명, 정7품 박사(博士) 3명, 정8품 학정(學正) 3명과 학유(學諭) 3명
, 정9품 학록(學錄) 3명을 두었으며(인원은 시기마다 조금씩 틀림) 유생을 가르키는 교수직은
22명에서 나중에 38명으로 증원되었다.
영조(英祖) 때는 정3품 제주(祭酒)가 신설되어 1,2품관을 겸직하도록 했으며, 정조(正祖) 때
는 대제학(大提學)이 지사를 겸직했다.

그렇다면 성균관 입학 자격은 어떠했을까?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 등, 사마시(司馬
試)에 붙은 사람에게 우선 입학 기회가 주어졌다. 이들을 본과생(本科生)이라고 하며, 상재생
(上齋生)이라 부르기도 했다.
입학 정원은 처음에는 150명이었으나 1429년에 200명으로 늘어났으며, 조선 후기에 100명으로
축소되었다. 입학 연령은 15세 이상이나 나이 상한을 따로 두지 않아서 50살 먹은 사람도 들
어오기도 했다.

그러면 성균관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붙은 사람만 들어간 것일까? 그건 아니다. 늘 예외는 존
재하기 때문이다. 사학(四學)을 배운 유생 중 15세 이상으로 소학(小學), 사서(四書)를 배우
고 5경(五經) 가운데 1경 이상 익힌 사람은 입학 시험인 승보(升補)를 통해 입학하기도 했으
며, 공신(功臣)과 3품 이상의 고위 관료, 왕족 중에 소학에 능통하거나 문과(文科) 및 생원/
진사시의 초시(初試)에 붙은 사람은 음서(蔭敍)로 쉽게 들어가기도 했다. 또한 이미 관직에
진출한 사람 중에 입학을 원하는 자도 상황에 따라 입학이 허용되었다.
이렇게 승보나 음서로 들어간 사람을 하재생(下齋生) 또는 기재생(寄齋生)이라 불렀으며, 왕
세자(王世子)나 성균관 입학을 원하는 왕자는 음서제의 극치를 보이며 그냥 들어왔다. 물론
그들은 궁궐에서 기본적인 유교 교육을 받고 오기 때문에 입학 자격은 충분했다.

▲  성균관 신삼문(神三門)

▲  성균관 사람들의 시계, 북

성균관 유생은 명륜당 좌우에 설치된 동재와 서재에서 기숙 생활을 했는데, 매월 1일에는 관
대(冠帶)를 갖추고 문묘에 나가 4배례(拜禮)를 했다.
매일 동트기 전에 북소리가 1번 나면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날이 밝기 시작해 북소리가 2번
나면 의관을 갖추고 책을 읽는다. 한겨울 같은 경우에는 대략 새벽 5~6시에 첫 북이 울리고,
일출이 시작되는 7시에 2번째 북이 울린다.

북소리가 3번 나면 다들 진사식당으로 우루루 달려가 서로 마주앉아 식사를 했는데, 식사 때
마다 원점(圓點)을 하나씩 찍어주었다. 이것이 일종의 출석 체크로 원점 300점을 넘어야 과거
시험 대과(大科)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식사를 마치고 퇴장하면 교수들이 명륜당에 정좌하고, 북소리가 또 나면 입정(入庭)하여 상읍
례(相揖禮)를 하고 자기 방 앞으로 가서 서로 절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유생이 교수에게 일강(日講)을 청하면 상재와 하재에서 각각 1명씩 뽑아 읽는 책을 상대로 강
의를 행한다. 북소리가 2번 나면 모든 유생은 읽는 책을 가지고 사장(師長) 앞에 나아가 배운
것을 논란(論難)하여 그것을 해결한 다음 새 것을 배운다.
이때 많이 배우는 것을 힘쓰지 않고 정밀하게 연찬하는 데에 힘쓴다. 과목당 독서 기간을 정
하고 있는데, '대학'은 1개월, '중용'은 2개월, '논어'와 '맹자'는 각각 4개월, '시경','서경
','춘추'는 각각 5개월, '주역'과 '예기'는 각각 7개월이다.

그렇다고 유생들이 무조건 공부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치적인 활동 단체인 재회(齋會
)를 두었으며, 나라의 일에 적극 나서 집단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으
면 권당(捲堂. 집단 수업 거부), 공관(空館)이라는 실력행사를 벌여 제왕을 피곤하게 만들기
도 했다. 그래서 절대왕권을 추구하던 연산군(燕山君)은 성균관 유생들이 건방지다며 성균관
을 일시 폐쇄시키는 위엄을 보이기도 했다.

성균관 유생들은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라에서 학전(學田)과 외거노비(外居奴婢) 등을
지급 받았다. 그러니 성균관에 머무는 동안은 학비 걱정, 생활비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교
육 경비로 쓰이는 전곡(錢穀)의 출납은 양현고에서 담당했으며, 유생 상당수가 잘사는 양반들
이라 찬이 매우 호화로웠다고 한다. 특히 소고기 소비가 많았다고 하며, 성균관 부근 명륜동
사람들이 성균관에 필요한 고기와 채소, 쌀을 납품하여 돈을 벌었다.

▲  성균관 문묘 은행나무

▲  하연대

성균관 교과 과정은 사서와 오경을 구재(九齋)로 나누어 가르쳤다. 그 밖에 과문(科文)의 제
술(製述)도 부과하였고, 제사(諸史)도 독서하였다. 하지만 노장사상(老莊思想)과 불경(佛經),
기술과 온갖 잡류(雜流), 백가자집(百家子集)은 가르치지 않았다. 오로지 고리타분한 유학만
취급한 것이다.

수업 방식은 먼저 구재 중 1단계인 대학재(大學齋)에 들어가 '대학'을 배웠다. 그것을 마친
다음 예조(禮曹)에 보고하면 예조에서 관원 1명과 대간(大諫,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관원이
각각 1명씩 나와서 성균관 교관과 함께 해당 학생에게 질문을 하여 얼마나 이해했는지 따져본
다. 그것을 통과하면 2단계 논어재(論語齋)로 올라가며, 떨어지면 통과할 때까지 대학재에서
나머지 공부를 하도록 했다. 이런 방식으로 논어재, 맹자재(孟子齋), 중용재(中庸齋), 시재(
詩齋), 서재(書齋), 역재(易齋)로 진재(進齋)하도록 했다.
이렇게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모두 통과하면 명부에 기재하여 성균관에 보관했다가 과거가 열
리는 식년(式年)에 예조에 보고하면 예조에서 왕에게 보고해 문과초시(文科初試)를 보게 했다.
즉 과거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교수와 유생 사이에는 질의응답식의 토론 수업 방식과 개별 지도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교수
1인당 학생 수를 절대로 10명을 넘지 않게 했다.

성균관은 1398년에 완성되었으나 1400년에 화재로 거의 앉은뱅이가 된 것을 1407년에 다시 지
었다. 이후 계속 증축하여 몸집을 불려갔으나 임진왜란 때 죄다 잿더미가 되고 만다.
1601년 성균관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나 재정도 여의치 못했고 성균관이 워낙 넓은 탓에 명륜
당 등 우선 급한 건물부터 공사에 들어가 1607년에 상당수 완공을 보았으며, 그 이후에도 주
변 건물을 계속 재건하여 17세기 중반에 비로소 마무리가 되었다. 이후 1869년에 크게 중건하
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허나 조선 후기에는 성균관 재정이 늘 바닥을 보였고, 안동김씨 세력이 나라를 말아먹으면서
과거제도 또한 불공정하게 운영되어 성균관의 기능은 차차 약화되기에 이른다. 그런 와중에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이 발표되어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1895년 을미개혁(乙未改革) 때
칙령(勅令) 제136호에 따라 전국의 향교(鄕校)와 성균관의 교육 기능을 지우면서 제사 기능만
수행토록 했다. (그래도 교육 기능은 조금 남아 있었음) 그로 인해 지체 높은 성균관도 국가
최고의 교육 기관의 자리에서 떨려나 유교 성현에게 제삿밥이나 올리며 유교 전통이나 지키는
공간으로 크게 축소되고 만다.
이때부터 성균관 교육은 1887년에 부설된 경학과(經學科)에서 전담하게 되었으며, 1910년 이
후 왜정(倭政)은 성균관과 전국 향교의 재산을 분리하여 그나마 남은 교육 마저 못하게 하는
한편, 성균관의 명칭을 경학원(經學院)으로 멋대로 바꾸어 버렸다.
이에 전국 유림들은 성균관을 살리고자 여러 활동을 전개하여 1930년 명륜학원(明倫學院)을
설립했으며, 1933년 명륜전문학원으로, 1942년 명륜전문학교로 이름을 바꾸어 성균관의 전통
을 이어나갔다. 허나 왜정의 방해로 1943년 폐교 조치가 되자 청년연성소(靑年鍊成所)로 간판
을 바꾸었다.

1945년 이후, 명륜전문학교를 다시 열었으며, 1946년 9월 성균관대학이 정식 설립되었다. 그
리고 1953년 성균관대학교로 이름을 바꾸면서 종합대학이 되었는데, 이때 독립운동가인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선생이 초대 학장 및 총장이 되었다.
이후 성균관과 성균관대는 늘 한 몸처럼 지내다가 분리되었으며, (그래도 여전히 한 몸) 전국
에 남아있는 234개의 향교를 관리하고 그들과 함께 유교 사상과 전통문화를 이어가는데 그 역
할을 하고 있다.

▲  묘정비각과 대성전 은행나무

▲  좌측에서 바라본 명륜당

드넓은 성균관은 유교 성현을 봉안하며 제를 지내는 대성전을 앞쪽에 두고, 교육 공간인 명륜
당을 뒷쪽에 둔 이른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형태로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존경각, 육일각,
서월랑, 동월랑, 향관청, 서리청, 정록청, 서벽고, 직방, 진사식당, 서재, 동재, 서무, 동무,
제기고, 삼문, 수복청, 전사청, 비천당, 탕평비각, 묘정비각, 숭보사 등 2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을 지니고 있다. <계성사(啓聖祠) 등 일부 건물은 성균관대 확장 과정에서 사라짐>
경내를 명륜당 구역과 대성전 구역, 성균관의 온갖 일을 돌보던 명륜당 동북 구역 등 3개 구
역으로 나눌 수 있으며, 비천당과 숭보사는 경내 바깥에 깨알처럼 따로 있다.

성균관 전체는 '서울 문묘와 성균관'이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 143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대성전과 동무, 서무, 삼문, 명륜당을 따로 분리해서 '서울 문묘 및 성균관'이란 어정쩡한 명
칭으로 국가 보물 141호의 지위를 부여했다. 그러니까 대성전과 동무, 서무, 명륜당, 삼문은
사적 등급 외에 보물 등급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숭보사는 따로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
위를 누리고 있으며, (현재 성균관과 분리된 상태) 명륜당 뜨락의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로,
대성전 뜨락의 은행나무는 서울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외부에서 성균관으로 들어가는 길은 크게 2개가 있다. 명륜당 서쪽 문을 이용하는 것과 동재
동쪽 향문을 통해 들어서면 되며, 그밖에 문은 굳게 봉해져 있다. 그리고 신삼문은 석전대제
가 열리는 날에만 잠깐씩 입을 연다.
지금은 없지만 성균관 서쪽과 남쪽, 동쪽에 조그만 물줄기가 흘렀는데, 바로 북악산(백악산)
동쪽 종점인 와룡공원 부근에서 흘러내려온 것으로 지금은 생매장당해 흔적 조차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3가 53일대 (성균관로 25-1, ☎ 02-760-1472)
* 성균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늦가을이 살짝 월담을 한 성균관 뒷쪽 돌담



 

♠  성균관 명륜당 동북쪽 구역

▲  존경각(尊經閣)

세상을 향해 활짝 입을 연 명륜당 서쪽 문을 들어서니 바로 명륜당의 육중한 뒷통수가 위압적
으로 다가온다. 그 뒷쪽에는 석축을 쌓고 대나무와 소나무 등 온갖 꽃과 나무를 심어 조촐히
숲을 닦았는데, 그 동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지닌 존경각이 별도의 돌담을
들이밀며 자리해 있다.

존경각은 지금의 도서관으로 성종(成宗) 시절 성균관에 책이 부족하자 한명회(韓明澮) 등의
건의로 1475년에 지어졌다. 보통 장서각(藏書閣)이란 이름을 많이 쓰지만 성종은 유교 경서를
존중한다는 의미로 '존경각'이란 이름을 내리고 많은 책을 하사했다.
책은 보통 교서관(校書館) 등에서 인출되는 것을 받았는데, 책이 부족할 때는 지방에서 인출
되는 책을 납본하게 했으며, 명/청나라에서 수입하기도 했다. 소장 도서는 모두 유교, 성리학
에 관한 것으로 기타 사상과 기술 관련 책은 일절 없었다.

1514년 소실된 것을 재건했으며, 임진왜란 때 책 태반이 잿가루가 되버려 남은 책은 1,2종에
불과했다. 하여 급한데로 더러워지거나 낡은 책이라도 비치해 사용하다가 1626년 건물을 중건
했으며, 조선 후기까지 계속 소장 서적을 불려가다가, 1895년 이후 경학과가 설치되면서 근대
교육기관의 도서관으로 변화했다.
허나 왜정과 6.25를 겪으면서 소장 서적은 대부분 사라지고 건물만 남아있으며, 유교의 폐쇄
적인 본능이 깃들여진 듯, 굳게 봉해져 있어 내부 접근은 불가능하다.


▲  명륜당 뒷쪽 (오른쪽 건물이 존경각)

▲  육일각(六一閣)

존경각 동쪽에는 역시나 굳게 닫힌 육일각이 붉은 피부를 드러내며 자리해 있다. 겉으로 봐도
딱 창고처럼 보이는데, 알고 보니 활과 관련된 도구를 보관하던 일종의 무기고였다.
이곳은 대사례(大射禮) 때 사용된 활과 화살, 웅후(熊候, 곰이 그려진 과녁), 미후(麋侯, 사
슴이 그려진 과녁) 등을 보관했다. 대사례란 제왕이 큰 행사의 뒷풀이 차원에서 신하들에게
베풀던 활쏘기 대회로 성적이 좋으면 상을 내리고, 과녁을 맞추지 못하면 벌주(罰酒)를 내리
거나 행사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성균관 대사례는 세종 때 시작되어 성종 때까지 종종 행해졌으나 이후 중지된 것을 영조 시절
에 다시 시행했는데, 제왕이 성균관에 나가 제를 지내면서 대사례를 실시할 때 육일각에 보관
된 무기를 가져와 행사에 사용했고 행사가 끝나면 다시 이곳에 넣었다.
활쏘기는 사대부들이 익혀야되는 육예(六藝)의 하나로 예(禮)와 악(樂). 사(射, 활쏘기), 어
(御), 서(書), 수(數)를 육예라고 하며, 육예중 하나인 활을 보관하는 곳이라 하여 육일각이
라 했다.

현재는 존경각과 마찬가지로 껍데기로 남아있으며, 그 앞에 덥수룩하게 자란 잡초들이 현재의
처지를 말해준다.


▲  팔작지붕의 정록청(正錄廳)

명륜당 동북쪽 협문을 들어서면 말쑥한 모습의 정록청이 마중한다. 이 건물은 성균관 참하관(
參下官)이 성균관 관련 시정(時政)을 기록하던 곳으로 여기서 기록된 문건은 현책(玄冊)이라
불려 따로 독(櫝) 안에 비장해 출납을 금했다.

1398년에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26년에 재건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참하관들
의 휴식처로 이용되기도 했으며, 석전대제를 관리하는 관원들이 제사를 준비하던 장소로도 이
용되었다. 1945년 이후 성균관 유도회의 중앙사무실로 이용되었으나 지금은 비어있다.


▲  향관청(享官廳)

성균관 가장 뒷쪽에는 향관청이 동/서월랑을 거느리며 자리해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
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대청은 석전대제 때 쓸 향축(香祝)을 봉안했으며, 좌우 방은 제사에 임
하는 향관(享官)들이 향사 전날 재계(齋戒)하며 잠시 머물거나 제사 업무를 담당한 관리들이
머물렀다.

원래 향관청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으나 석전대제 때만 되면 준비 공간이 늘 부족해 제사를 준
비하는 관리들이 동재와 서재를 빌려 머물렀다. 그때 쫓겨난 동/서재 유생들은 성균관 관노(
官奴)의 방을 빌려 거처하니 그 폐단을 고치고자 별도의 향관재(享官齋)를 지어줄 것을 청원
하여 1474년에 부랴부랴 지어진 것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53년에 중건했으며, 1740년에 영조가 석전대제에 참여하여 향관청
현판을 내렸다.

▲  서월랑(西月廊)

▲  동월랑(東月廊)

향관청 앞에는 서로 비슷하게 생긴 월랑 2채가 있다. 서쪽에 자리한 월랑은 서월랑, 동쪽 월
랑은 동월랑이라 하는데, 이들은 서로 벽을 보이며 마치 원수를 대하듯 등지고 있는 점이 이
채롭다. 그래서 툇마루와 방문은 뒷쪽에 가야 있다.

월랑은 석전대제 등 성균관의 주요 행사 때 감찰 집사(執事)들이 머물던 공간이다. 하지만 그
들이 머무는 기간은 행사 때 며칠이 전부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유생들의 숙소로 사용했다. 동
재와 서재의 수용 능력이 늘 부족했던 탓이다.
1966년 동/서월랑과 남쪽에 있던 포주(庖廚)가 무너진 것을 1986년에 동/서월랑만 복원했으며,
동월랑 담장 너머에 지금은 성균관에서 분리된 숭보사가 있다.

▲  정록청 동쪽 창고

▲  서리청(書吏廳)과 비복청(婢僕廳)

정록청 동쪽에는 창고를 비롯해 직방(直房), 서리청, 비복청, 서벽고(西壁庫), 주소 등의 조
그만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서리청은 문서의 기록과 관리를 담당하던 서리(書吏)들이 일을 보던 곳이고, 비복청은 음식을
만드는 여인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이들 공간은 문이 닫혀 있으며, 서벽고에는 오래된 회화나
무가 주변에 그늘을 드리운다.


▲  비복청과 서벽고, 회화나무

▲  성균관 유생들이 제일 좋아했던 곳, 진사식당(進士食堂)

직방 남쪽에는 성균관 사람들의 밥을 책임지던 진사식당이 길게 자리해 있다. 여기서 진사는
유생을 뜻하는데, 성균관 식구들이 유생부터 교수, 관원까지 워낙 많다보니 33칸 규모로 길쭉
하고 넓게 만들었다. 허나 칸을 두지 않고 오늘날 단체를 취급하는 대형 식당처럼 길게 터서
수백 명이 동시에 숟가락을 들 수 있게 했으며, 음식은 비복청 여인들이 만들어서 가져왔다.

세상에 먹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유생도 그 예외는 아니지. 어쩌면 그들이 제일 좋아했
던 공간이 진사식당이 아닐까 싶다. 서로 마주 앉아서 비록 시끄럽게 떠들지는 못해도 온갖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요. 거의 금수저들의 공간이다보니 찬도 호화로워 디룩디룩 살만 찌는
유생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성균관에서는 북을 쳐서 시간을 알렸는데, 3번을 치면 식당으로 모여 식사를 했다. 지금과 달
리 아침과 저녁만 먹었으며, 밥을 먹을 때마다 원점을 하나씩 찍어주어 출석을 점검했다.

식당 내부는 굳게 닫혀 있어 내부를 관람하지 못했으며, 유생과 교수, 관원들이 먹다 남은 음
식들은 노비. 비복청 여인 등 소위 아랫 사람들이 섭취했다.



 

♠  성균관 명륜당(明倫堂) 주변

▲  성균관 명륜당 - 보물 141호

명륜당은 유생들을 교육하던 강당(강의실)이다. 명륜(明倫)이란 '인간 사회의 윤리를 밝힌다
는 뜻'으로 성균관과 향교의 교육 공간은 모두 명륜당을 칭했다.
이 건물은 1398년에 지어진 것으로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다시 지었다. 교육 외에 과거시
험 장소로도 종종 쓰였으며, 나라 제일의 교육기관이다보니 건물 크기도 장대하다. 게다가 지
붕 추녀에는 무려 잡상(雜像)까지 갖추어 건물의 품격을 높였다.

건물 구조는 중앙에 맞배지붕을 지닌 명륜당을 두고 좌우에 날개채를 덧붙여서 마치 새가 날
개짓을 하는 모습 같다. 이렇게 3동의 건물이 합심하여 하나의 명륜당을 이루고 있는데, 그
크기가 정면 9칸, 측면 2칸이다. 허나 보통 한옥의 1칸보다 길이가 길기 때문에 왠만한 한옥
25칸 규모 정도는 된다.

명륜당은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서 유생들이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를 했다.
건물 정면이 뻥뚫려있어 늦봄이나 여름, 초가을에는 공부하기 좋겠지만 늦가을과 겨울, 초봄
에는 추위 때문에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여 그때는 동/서재에 각자 배속된 방에서 공부를
했을 것이다.
좌우에 달린 날개채는 팔작지붕을 띄고 있는데, 이들은 교수(선생)들이 거처하던 공간으로 온
돌방과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  명륜당의 육중한 뒷모습

▲  명륜당 동쪽 날개채


▲  명나라 사신이 휘갈긴 명륜당 현판의 위엄

명륜당이 워낙 장대한 규모라서 그 건물의 정체를 알리는 현판 또한 몇 사람으로는 어림도 없
을 정도로 대단한 크기를 자랑해 보는 이로 하여금 주눅을 들게 한다.

명륜당 현판은 이웃에 자리한 대성전 현판과 더불어 글씨의 신(神)으로 추앙받는 한석봉(韓石
峯)이 썼다. 대성전의 그것은 남아있으나 명륜당 현판은 다른 사람의 것으로 교체되고 말았으
니 사연은 다음과 같다.

1606년 명나라에서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 주지번(朱之蕃)이 사신으로 놀러 왔다. 조선은 초
기부터 명나라에 대해 꼴사나운 사대주의를 보이며 그들의 속국을 자처했다. 심지어 명나라를
표현할 때는 '황명(皇明)','대명(大明)'이라 높여 부르기도 다반사였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재조지은(再造之恩)이란 해괴한 4자까지 더해져 간과 쓸개, 심지어 영혼까지 내줄 정
도로 지극의 정도는 가히 암을 유발할 정도로 심해졌다. 하여 명나라의 사신이 떴다하면 조선
조정과 관리들, 유생들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어쨌든 사신이 온다는 말에 선조(宣祖) 임금은 서경 유근(西坰 柳根)을 원접사(遠接使)로 보
내 의주(義州)에서 그들을 맞이하게 했다.

유근은 명나라 사신에게 잘보이려고 온갖 대접을 아끼지 않았고, 서로 시문(詩文)을 주고받으
며 긴 거리의 지루함을 달랬는데, 충북 괴산(槐山)에 있는 자신의 별장, 고산정<孤山亭, 만송
정(萬松亭)>을 은연중 자랑하니 주지번이
'그렇게 절경이요?'
하면서 화공을 시켜 그려오게 했다. 물론 유근이 그리 하라고 허락했거나
유근이 사람을 보내서 그렸을 것이다.
어쨌든 별장 그림을 보자 주지번은 크게 감탄을 먹고 그림 위에 '호산승집(湖山勝集)' 4자를
써서 정자에 걸어달라고 청했다. 이에 유근은 매우 좋아라하며 가보로 삼았다는 것이다.

주지번이 서울에 도착해 성균관을 둘러봤는데, 명륜당에 걸린 한석봉의 현판이 너무 탐이 나
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달라고 징징거리자 조정 관리들은 그 현판을 내주고 대신 새로 하
나 써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신이 난 주지번은 현판을 써주었다. 그 역시 서화(書畵)에 뛰어나다고 명나라에서 명
성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겨난 것이 지금의 명륜당 현판이다.

현판 좌측에는 '大明萬曆 丙午年 孟夏(맹하, 초여름)'라 쓰여 있는데, 이는 1606년 초여름에
썼다는 뜻이며, 만력(萬曆)은 당시 명나라의 군주이자 임진왜란 때 국고가 바닥날 정도로 조
선에 너무 퍼줘서 조선천자, 고려천자로 조롱을 받던 신종(神宗)의 연호이다. 명나라 사신이
휘갈긴 현판이라 자신의 나라를 '대명'이라 표현했는데, 그 시절 조선 위정자들 역시 명을 '
대명'으로 극존칭하고 있었으므로 그 당시로서는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  온갖 현판(현액)들이 시커멓게 걸려있는 명륜당 내부

명륜당 내부에는 한자로 쓰인 온갖 현판들이 천정을 번잡하게 메우며 나의 침침한 두 눈을 희
롱한다. 조선 중/후기에 작성된 현판부터 20세기 현판까지 시대도 다양하며, 현판에 실린 글
은 죄다 유교와 관련된 재미없는 것들이다.

▲  박문약례(博文約禮)
널리 경을 배워 예를 지키자는 뜻이다.

▲  덕화만방(德化萬邦)
덕이 만방에 펼쳐지라는 뜻으로 1984년
바다 건너 대만에서 보내온 것이다.

▲  안연이 공자에게 인(仁)이 뭐냐고
묻자 공자의 답을 담은 현판
(내용은 모르겠음)

▲  내배성묘서독노론(來拜聖廟書讀魯論)
성묘(문묘)에 와서 절을 하고 글을 읽으며
공자를 논하라는 뜻이다. (고종의 친필)

◀  명륜당 안쪽에 걸린 또 다른 명륜당 현판
이 현판은 송나라 주희(朱熹, 주자)가 쓴 것으
로 명나라에서 넘어온 것이다.


▲  명륜당 월대(月臺)에 세워진 비석

명륜당 앞에 넓게 닦여진 석축을 월대라고 한다. 돌로 4줄의 기단을 쌓고 정면과 좌우에 돌계
단을 두었는데, 보통은 좌우 계단으로 출입했으며, 정면 계단은 제왕 등 높은 사람들이 이용
했다.
월대에는 네모나게 다진 검은 전돌을 깔아 엄숙함을 더했는데, 이곳 역시 유생들이 돗자리를
피고 공부를 하거나 행사를 치르던 장소이다. 명륜당이 넓다고 해도 그 많은 유생과 교수를
모두 수용하기에는 벅차기 때문이다.

월대 서남쪽 끝에는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늙은 비석이 멀뚱히 서있다. 그에 대한 안내문도
전혀 없고, 피부가 거칠어 글씨 확인도 여의치 않아 나중에 인터넷에서 조사해보니 고종 시절
에 세운 비석이라고 한다.
웃기는 것은 오랫동안 그의 정체를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다. 심지어 성균관 관계자도 몰랐다
고 한다. 비석은 150년 동안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었는데도 말이다. 성균관 유일의 수수께
기 존재로 비석 피부가 뭉개져 글씨 확인이 매우 어려웠던 탓에 그의 오리무중(五里霧中)을
더욱 부추겼다. 근래 비문 일부를 확인하여 역사 기록과 대조하니 1871년 3월 12일 고종실록
에서 40여 자의 글자와 그런데로 일치하는 문장을 발견했다.

그때 고종이 성균관을 찾아와 문묘에 작헌례(酌獻禮)를 했다. 그런 다음 동/서재와 사재(四齋
)의 장의(掌議)를 만나고 유생들에게 말하기를
'서원을 설치하는 것을 말하면, 도학에 대한 학문이나 충성, 절개를 지닌 사람으로서 백세 후
에도 바뀌지 않을 공의가 있어야 비로소 의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그렇지 못
하니 이것이 어떻게 서원을 설치한 본의겠는가? 그리고 한 사람의 서원이 4~5군데에 달하기도
하니 이 또한 매우 의미가 없다.
이제부터는 도학의 학문이 깊고 충성과 절개를 지닌 사람으로서 공론에 부합되는 사람 이외에
는 일체 설치하지 못하게 할 것이며, 설사 서원을 설치한 사람이라도 한 사람에 한해서 한 서
원 외에 중첩하여 세우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도학에 대한 학문과 충성과 절개를 갖춘 사람
을 제외하고는 또한 함부로 서원 설립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흥선대원군의 야심작인 서원 철폐에 대해 유생들이 강한 불만을 제기하자 고종이 이렇게
답을 하고 그 내용을 담아 이 비석을 세우게 했다. 허나 유생들의 불만은 그치지 않았고, 제
왕의 이런 하교에도 건방지게도 어떠한 입장도 밝히지 않았으며, 시간이 흐르자 어리석은 유
생들이 비석에 해코지를 하면서 비석 피부를 마모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왕이 세운 비석에 그
런 망나니짓을 할 정도면 서원철폐에 대한 유생 패거리들의 불만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  동재(東齋) 바깥쪽

▲  동재(東齋) 안쪽

명륜당 뜨락 좌우 끝에는 유생들의 숙소인 동재와 서재가 길게 늘어서 있다. 각각 20칸 규모
로 명륜당 뜨락을 향해 벽을 보이고 있으며, 안쪽(동재는 동쪽, 서재는 서쪽)에 방과 툇마루
가 있다.
방은 은근히 좁은 편인데, 이들 공간에 100~200명의 유생이 머물렀다. 특히 동재 일부는 교수
들이 사용하기도 하여 유생을 수용할 방이 부족해 부득이 동/서월랑에 수용하기도 했다.

동재에서 진사식당으로 넘어가는 문에는 방화수(防火水)를 담은 대포 모양의 통을 두어 심술
궂은 화마(火魔)의 습격에 대비했으나 그 통이 작아서 과연 효과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허나
임진왜란을 제외하면 성균관에 이렇다 할 화재는 없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한가하게 있었을 것
이다. 솔직히 방화수가 쓰일 일이 없어야 좋은 것이 아니던가.

▲  서재(西齋) 바깥쪽

▲  서재 바깥쪽 통로


▲  성균관 황엽(黃葉)인가? 누렇게 뜬 붉은 단풍나무
150~200년 정도 되어보이는 단풍나무가 늦가을 향연을 거두고 슬슬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천하를 불태우며 붉은 입술을 드러낸 단풍잎은 이제
누렇게 뜬 모습으로 그 이름도 우울한 낙엽이 되어
명륜당 뜨락을 어루만진다.

▲  문묘 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59호

명륜당 뜨락에는 성균관의 오랜 명물이자 꿀단지로 추앙받는 거대한 은행나무 2그루가 아낌없
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은행나무는 유교에서 매우 애지중지하는 나무로 성균관과 향교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동이족
출신인 공자<孔子, 이름은 공구(孔丘)>가 은행나무 밑에서 강의를 했다는 행단(杏壇) 설화 때
문이다. 성균관 역시 그 상징인 은행나무를 경내 곳곳에 심었는데, 중종(中宗) 때 윤탁(尹倬)
이 은행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나무는 임진왜란의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것
으로 보이며, 명륜당을 다시 짓던 1602년에 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추정 나이는 420
년 정도이다.

나무 높이는 26m, 가슴 높이 둘레 12.09m, 가지의 길이 동서 약 26.8m, 남북 27.2m로 서울에
서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와 더불어 늙고 장대한 은행나무로 꼽힌다. 실제 와서 보니 정말
웅장하기 그지 없는데, 화재의 흔적이 약간 있긴 하지만, 성장력이 왕성하며, 줄기에 양분을
부여하는 유주(乳柱)가 잘 발달된 흔치 않은 나무로 가치가 높다.

성균관에는 명륜당과 대성전 뜨락에 늙은 은행나무 4그루가 있기 때문에 그들이 황금빛 절정
을 이루는 늦가을 풍경이 단연 으뜸이다. 나무들이 하나 같이 장대하여 성균관을 모두 커버하
고도 남음이 있으며, 은행나무 만큼 늦가을에 민감한 나무도 없다. 은행잎이 낙엽이란 이름으
로 내려앉은 10~11월 풍경은 가히 선경(仙境)이 부럽지 않다.


▲  문묘 은행나무의 밑도리
무한리필이 가능한 장대한 세월과 성균관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서울 제일의
은행나무로 성장했다. 나무의 건강과 은행잎이 마음 놓고 떨어질 수 있도록
밑도리 주변에 넓게 보호 난간을 둘렀다.

▲  서재에서 바라본 문묘 은행나무의 위엄

▲  왕년을 그리워하며 우수에 잠긴 태극무늬 북

동재 남쪽 끝에는 성균관 사람들의 시계 역할을 했던 태극무늬 북이 걸려있다. 그가 1번 울리
면 잠자리에서 일어났고, 2번 울리면 의관을 갖추고 책을 읽었으며, 3번 울리면 진사식당으로
우루루 달려가 밥을 섭취했다. 그만큼 성균관 사람들은 그의 북소리에 충실했던 것이다.
한때는 북에 불이 날 정도로 소리를 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북을 칠 이유도, 울릴 이유도 없
다. 성균관이 현역에서 물러나면서 북 또한 강제 은퇴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북을 치는 방
망이라도 갖다두어 누구든 칠 수 있게 하거나, 관람 종료 시간을 알리는 용도로 활용하면 좋
으련만 그저 허공이나 축내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  성균관 마무리

▲  성균관 대성전(大成殿) - 보물 141호

명륜당 남쪽에는 유교의 성현이 봉안된 대성전이 자리해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
붕 건물로 앞서 명륜당과 비슷하게 장대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는데, 그 역시 지붕 추녀에 무
려 잡상을 갖추고 있어 건물의 품격을 드높였다.

대성전은 1398년에 지어진 것으로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다시 지었는데 대성전 현판은 한
석봉<한호(韓濩)>이 썼다고 전한다. 내부에는 공자와 증자(曾子) 등의 4성, 공문십철(孔門十
哲), 송나라 6현 등이 봉안되어 있었고, 좌우에 자리한 동무와 서무에 서토(西土, 중원대륙)
인물 94위와 신라와 고려, 조선 인물 18위 등 총 133위가 봉안되어 있었는데, 해방 이후 중원
대륙 94위는 모두 추방했으며<이를 출향(黜享)이라고 함> 우리나라 18위를 대성전으로 옮겨
총 35위가 봉안되어 있다. (동/서무는 비어있음) 

대성전과 동/서무를 흔히 문묘라 부르며, 정면에 신삼문을 두었고, 서쪽에 수복청과 전사청,
제기고 등의 부속 시설을 두었다. 동무 옆에는 동삼문을 두었는데, 신삼문과 더불어 현재는
굳게 닫혀 있다. 그리고 명륜당 구역과는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이들 사이에 만든 문 2
개를 북장문이라 부른다.

성균관의 정문이자 남문인 신삼문에서 대성전까지는 일종의 참도가 닦여져 있다. 네모난 검은
피부의 전돌이 깔린 참도는 폭이 좁은데, 대성전까지 곧게 가다가 그 직전 월대에서 서쪽으로
꺾어서 월대 서쪽 계단으로 이어진다.
대성전은 높은 석축 위에 자리해 있는데, 명륜당처럼 석축 위를 월대라고 한다. 정면에 돌계
단 2개, 좌우에도 돌계단을 갖추고 있으며, 동삼문에서 전돌이 깔린 참도가 월대 돌계단과 이
어지니 이 길은 제왕이 주로 이용했다.


▲  동삼문(東三門)과 동무(東廡) - 보물 141호

대성전 동쪽에는 동삼문이 자리해 있다. 말 그대로 동쪽 삼문으로 오직 제왕만 드나들 수 있
던 콧대 높은 문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닫아두었으며 문의 규모는 신삼문보다 작다. 아무리
제왕이라 해도 조선은 엄연한 유교 국가이라 대성전에 봉안된 유교 성현을 1단계 높이 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성균관 만큼은 제왕도 유교 성현에게 양보를 하였다.

동무는 서무와 마찬가지로 이 땅과 서토(중원대륙)의 성현을 봉안하던 공간이었는데, 1945년
이후 모두 방을 빼고, 이 땅의 성현 18위를 대성전으로 옮기면서 현재는 빈 방으로 있다. 동
재와 서재만큼은 아니지만 길쭉한 건물로 맞배지붕을 취하고 있다.


▲  동무의 바깥 부분 (성균관 주차장에서 바라본 모습)

▲  묘정비각(廟庭碑閣)

대성전 뜨락에는 묘정비(廟庭碑)를 머금은 묘정비각이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묘정비는 성균
관(문묘)의 역사를 담은 비석으로 거북 머리인 귀부(龜趺)와 글이 적힌 비신(碑身), 머리 장
식인 이수(螭首)로 이루어진 제법 당당한 모습이다.

이 비석은 1410년에 처음 세워졌다. 그러다가 1511년 중종이 성균관을 수리하면서 비각을 씌
웠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26년에 새로 세웠다. 이때 이정귀(李廷龜, 1564~1635)가
문장을 짓고, 이홍주(李弘胄, 1562~1638)가 글을 썼으며, 제액(題額)은 김상용(金尙容)이 썼
다.
묘정비의 보호를 위해 비각(碑閣)을 씌웠지만 붉은 창살이 너무 촘촘하여 비석의 모습을 온전
히 보기도, 담기도 어렵다. 그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답답하게 보일 따름이다.

▲  답답하게 갇혀있는 성균관 묘정비

▲  성균관 대성전 동쪽 은행나무
- 서울 지방기념물 37호


▲  성균관 대성전 서쪽 은행나무 - 서울 지방기념물 37호

대성전 신삼문 좌우에는 장대하게 자라난 은행나무 2그루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비록 명륜
당 은행나무 만큼의 덩치는 아니지만 그보다 더 숙성된 450~5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중종 때
윤탁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와 시기가 대략 비슷해 어쩌면 그 나무가 아닐까 여겨진다. 하지만
나무가 야속하게도 말을 해주지 않으니 우리로써는 그저 답답할 따름이다. 비밀을 지킬 곳이
니 나에게만 살짝 속삭여주면 안될까?

나무의 높이는 약 25m 정도로 가지가 부러져 성균관 건물에게 상처를 입혔을 때, 나라에서 위
안제를 지내고 건물을 보수했다고 전한다. 일부 외과 수술이 이루어졌으나 원형은 이상이 없
으며, 성균관의 오랜 내력을 묵묵히 알려주는 존재로 뒤늦게 서울시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얻
었다. 성균관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기도 하며, 명륜당 은행나무와 더불어 성균관의 가을 정취
를 크게 돋군다.

▲  굳게 닫힌 신삼문 안쪽

▲  바깥에서 바라본 신삼문


▲  신삼문(神三門)과 대성전 은행나무

대성전 남쪽에 자리한 신삼문은 성균관의 남문이자 정문이다. 석전대제 등 큰 행사가 열리는
날을 제외하고는 늘 닫혀 있으며, 성현들의 넋이 드나드는 문이라 하여 신삼문이라 불린다.
성균관의 정문이다보니 추녀에 잡상까지 주렁주렁 달아놓아 건물의 위엄을 높였다.

▲  제기고(祭器庫)

▲  수복청(守僕廳)

대성전 서쪽에는 제기고와 수복청, 전사청 등의 조그만 부속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그중
제기고는 제사용 그릇과 여러 도구를 보관하던 창고로 건물에 빛바랜 모습이 역력하며, 수복
청은 성균관을 청소하고 관리하는 노비와 하급 관리들이 머무는 곳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재학당(載學堂)이란 현판이 걸려있으며, 온돌방과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
다.


▲  전사청(典祀廳)과 무늬만 남은 굴뚝

수복청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사청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제사와 석전을 준비하는 공
간으로 제물로 올려질 고기를 살생하고 다듬는 곳이기도 하다.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감쪽 같이 사라진 것을 1986년에 복원했으며, 수복청, 제기고와 더불
어 현역에서 물러나 쓸쓸한 모습을 보인다.


▲  전사청과 명륜당, 서재를 이어주는 문

▲  비천당(丕闡堂)

성균관 경내 바깥에는 비천당과 탕평비각, 하연대, 숭보사 등이 있다. 이들도 엄연한 성균관
식구로 비천당 같은 경우 그 테두리 안에 완벽히 있었으나 현재는 경내 바깥에 있어 별도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명륜당으로 들어서는 서쪽 문 서북쪽이자 국제관 서쪽에 자리함)

비천당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664년에 지어졌다. 송시열(宋時烈)이 쓴 '
비천당기'에 따르면 1661년 도성 안에 있던 인수원(仁壽院). 자수원(慈壽院) 등 왕실에서 관
리하던 비구니 절 2곳을 밀어버리고, 거기서 나온 목재를 송준길(宋浚吉)의 제안으로 북학(北
學) 진흥사업에 쓰려고 했다. 허나 그게 여의치 않자 대사성 민정중(閔鼎重)의 건의로 비천당
을 세웠다.
비천당이란 이름은 주자가 성인(聖人)을 찬양한 글 중 '비천대유(丕闡大猷)'라는 글귀에서 따
온 것으로 성균관 유생들이 공부를 하던 곳이다. 또한 제왕이 성균관에 왕림해 과거시험을 시
행할 때 비천당 뜨락을 난장(시험 장소)으로 쓰기도 했다.

건물 중앙을 정청(正廳)으로 삼았으며, 좌우에 협실을 두어 일량재(一兩齋), 벽입재(闢入齋)
라 했는데, 이는 송시열이 지은 것이다. 벽입재는 1784년에 소실되어 그해 9월에 중건했으나
구한말에 일량재와 함께 파괴되었으며, 비천당만 겨우 목숨을 부지하다가 1946년 9월 이후에
는 성균관대 대학본부로 쓰이기도 했다. 허나 6.25때 모두 박살이 났으며, 1988년 8월 기존보
다 조금은 작은 184.4㎡의 규모로 복원되어 제법 새 건물티가 물씬 풍긴다.

비천당 동쪽인 국제관 자리에는 공자의 부친인 제국공 공숙량흘(齊國公 孔叔樑紇), 안자의 부
친 곡부후 안무유(曲阜侯 顔無繇), 증자의 부친 내무후 증점(萊蕪侯 曾點), 자사의 부친 사수
후 공리(泗水侯孔鯉), 맹자의 부친 주국공 맹격(邾國公 孟激)을 봉안한 계성사가 있었으나 해
방 이후 성균관대 건물을 짓고자 부셔버렸다. 그러다가 근래 터 일부를 손질해 계성사 삼문(
三門)과 돌계단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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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균관의 위엄을 드러내던 하마비(下馬碑)

성균관대 정문이자 탕평비각 옆에 단촐하게 생
긴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하마비란 궁궐과 관청, 왕릉, 서원, 향교, 높
은 사람의 사당 앞에 세우던 비싼 비석으로 말
에서 내려 걸어가란 뜻이다.
그의 피부에는 '大小人員 過此者 皆下馬'(높고
낮은 사람은 여기를 지날 때 모두 닥치고 말에
서 내려!)라 쓰여 있는데, 그만큼 성균관의 위
엄은 대단했고, 그 위엄을 등에 업고 하마비도
오랜 세월 가슴을 피며 건방을 떨 수 있었다.
그 앞에서는 누구든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
으니 말이다. 허나 성균관의 기능과 위엄이 추
락하면서 하마비는 그야말로 일개 돌덩어리로
전락해 버렸다.

이 비석은 기묘사화(己卯士禍)가 터졌던 1519
년 4월에 세워졌으며, 성균관에서 은행나무를
제외한 인공물 가운데 가장 늙은 존재이다. 또
한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하마비이기도 하다.

▲  검은 주근깨가 많이 피어난
하마비의 뒷면


▲  탕평비(蕩平碑)를 머금은 탕평비각

하마비 옆에는 1742년에 세워진 탕평비를 머금은 비각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영조 임금은
지나친 당파 싸움을 막고자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관리를 뽑는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했는데,
인재 요람이나 다름 없던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워 자신의 개혁 의지를 널리 알렸다. 비석
내용도 영조가 직접 쓴 것으로
'두루 사귀어 편당(偏黨)을 짓지 않는 것이 군자의 마음이요. 편을 가르고 두루 사귀지 못하
는 것은 소인의 마음이다'
하였다. 그만큼 그 시절에는 당쟁(黨爭)이 심했다.

비석의 구조는 비좌(碑座)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비신을 세웠으며, 지붕돌로 마무리를 한 단촐
한 모습이다. 그 역시 묘정비처럼 비각에 굳게 봉해져 있어 온전하게 담기가 어려웠다.


▲  영조의 개혁 의지가 깃든 탕평비

▲  하연대(下輦臺)

제왕이 성균관을 방문할 때는 연(輦)이라 불리는 제왕 전용 가마를 타고 편하게 이동을 했다.
동삼문 동쪽에 돌로 터를 다지고 가마를 내려놓는 하연대를 닦았는데, 제왕은 거기서 연에서
내려 동삼문을 통해 성균관으로 들어섰다.
하연대 북쪽에는 소나무 3그루가 운치있게 들어서 있으며, 바로 북쪽 한옥은 진사식당이다.


▲  성균관과 남남이 되버린 숭보사(崇報祠)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21호

이렇게 보면 성균관은 이제 다 본 것 같다. 접근이 통제된 진사식당의 속살과 서벽고, 서리청
일대를 제외하면 말이다. 허나 이들 말고도 빠뜨린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숭보사이다.

숭보사는 동월랑 동쪽 담장 너머에 자리한 건물로 그렇게 비중이 있는 존재는 아니다. 예전에
는 성균관의 일원이었으나 20세기 중반 이후, 완전 갈라져 개인 소유가 되어버렸는데, 한때는
집 소유자 이름<명륜동 김종국가(家)>을 따서 문화재 명칭을 삼기도 했다.
엄연한 개인 집이라 내부 관람은 어려운 실정이며, 그저 굳게 닫힌 빛바랜 대문과 돌담, 돌담
너머로 보이는 한옥의 지붕만 바라볼 수 있다.

이 건물은 이름에서 보이듯 원래 문묘 사당의 일원으로 2채로 이루어져 있다. 남쪽 집은 살림
채로 사당 관리인이 살던 공간이며, 북쪽 집은 사당을 지닌 사당채이다. 살림채는 'ㅡ' 구조
로 정면 4칸, 측면 2칸이며, 중앙에 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안방, 동쪽에 건넌방을 두었다.
안방 앞에는 부뚜막이 있고, 대청 앞은 전면이 개방된 토방이 있으며, 건넌방 앞에는 부엌이
있는데, 원래 골방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사당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로 뒷쪽에 신주단을 두어 위패를 봉안했는데, 단 위에 닫집
이 있다. 사당 전면에는 모두 열 수 있는 4짝 문이 있고, 좌우와 뒤쪽은 막혀있다. 사당 안에
닫집과 위패가 그대로 남아있는 점과 옛날에 성균관의 부속 건물이었던 점 때문에 지방문화재
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숭보사를 끝으로 성균관 늦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숭보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3가 15-1 (성균관로 7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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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상큼한 동쪽 지붕, 아차산~서울둘레길 나들이 (상부암 석보살입상,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온달샘석탑)

아차산 봄나들이 (상부암 석보살입상,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온달샘석탑, 우미내계곡)



'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봄나들이 '


▲  아차산 생태공원 소나무숲

▲  아차산성

▲  온달샘 석탑


 

♠  한강변에 숨겨진 오래된 석불, 상부암 석보살입상(上浮庵 石菩薩立像)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0호

▲  상부암 석불의 거처인 상부관음전(上浮觀音殿)

도권 고구려(高句麗) 유적의 성지(聖地)이자 야간 등산의 성지로 추앙받는 아차산(峨嵯山,
295m)은 내 즐겨찾기 뫼의 하나로 1~2달에 1번꼴로 안기고 있다. 그렇게나 자주 안기는 아차
산이지만 며칠도 안가서 아차산 앓이가 도져 그곳에 깃든 미답지(未踏地)를 1개라도 지울 겸
그의 품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바로 산으로 들어가지 않고 광장동 구석에 숨겨진 오래된
석불을 먼저 찾았다.

키다리 아파트와 오피스텔로 즐비한 광장동(廣壯洞) 동쪽 구석 한강변에 늙은 석불 하나가 조
용히 숨어있다. 없는 듯 자리한 그에게 세상이 달아준 이름은 '상부암 석보살입상' 8자. (예
전에는 '상부암 석불입상' 7자였음) 아파트와 오피스텔 등 빌딩으로 가득하여 여유 공간도 없
을 것 같은 곳에 1칸짜리 기와집을 지닌 고색의 석불이 숨어 있었으니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
담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실감케 한다.

석불 이름에 '상부암(上浮庵)' 3자가 들어가 있어 '상부암'이란 암자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허나 그런 절은 없으며 그 석불이 떠내려왔다는
뜻에는 지역 사람들이 '상부암'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니 석불 자체가 그냥 상부암이란
노천 암자이다. 
현재는 옆에 있는 광장노인정에서 '상부관음전'이란 맞배지붕 기와집을 씌우고 주변을 정비하
여 석불을 지키고 있다.

▲  상부암 석불로 인도하는 길
(광장노인정 옆)

▲  잔디와 봄꽃이 잔잔히 입혀진
상부암 석불 뜨락과 쉼터


상부암 석불은 쉽게 눈에 띄지도 않는 광장동 100번지 막다른 곳에 숨겨져 있다. 서쪽과 남쪽
은 키다리 빌딩에 막혀 있고, 북쪽은 벼랑으로 막혀있는데, 그 위에 광나루역과 구리시를 잇
는 아차산로가 닦여져 차량들의 굉음이 종일 귀를 때려댄다. 그나마 한강이 있는 동쪽이 조금
시야가 트여있지만 그마저도 강변북로 아차산대교가 시야를 절반 이상 가리고 있어 그야말로
개발의 산물에 포위된 궁색한 처지가 되버렸다.
바로 그런 장소에 있으니 그 존재가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서울에 대
해 많이 안다고 자부하는 본인 역시 그의 존재를 안 것은 불과 몇 년 전. 그와의 숨바꼭질에
서 이제서야 술래를 면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석불은 언제 생겼을까?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670년에 의상대사(義湘大師
)가 광나루를 건너는 사람들과 주민들의 안녕을 빌고자 세웠다고 전한다. 허나 석불의 나이를
측정해보니 대략 후삼국시대나 고려 초(9세기 후반~10세기 초)로 가늠되어 의상대사 설은 신
뢰성이 없다. 다만 옛날에 큰 홍수로 한강을 타고 이곳까지 떠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
으며, 그로 인해 상부암이란 이름을 달게 되었다. 솔직히 홍수로 불상이나 석불이 떠내려가
새로운 곳에 안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니 떠내려왔다는 설은 그나마 신뢰가 간다.

이곳에 새로 자리를 잡은 석불은 오랜 세월 광나루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지역 사람들의 보호
와 정성이 대단했다. 원래는 지금보다 밑에 있었으나 빌딩이 들어서면서 1989년 현재 자리로
이전되었으며, 이때 석축을 쌓고 터를 다져서 그의 거처와 조촐한 쉼터를 닦았다.
또한 언제부터인가 호분(胡粉, 조개껍데기를 태워 만든 것으로 여자들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
됨)이 두텁게 발라져 하얀 피부의 백불(白佛)로 있었는데, 근래 호분이 벗겨지면서 마치 번데
기에서 벗어난 듯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수백 년 묵은 석불로 짐작을 하고 그를
살펴봤는데 무려 하나의 1,000년을 지낸 아주 늙은 석불이었다.


▲  날씬한 몸매의 상부암 석보살입상

석불은 키가 큰 늘씬한 몸매로 얼굴과 머리가 좀 지나치게 크다. 머리 꼭대기에는 무견정상(
無見頂相, 육계)이 두텁게 솟아 있으며, 머리칼 부분이 너무 넓다. 좁은 이마 밑에는 구부러
진 눈썹과 살짝 뜬 눈, 코가 무늬만 남아있으며, 다물어진 입술에는 조금이나마 미소가 피어
있다. 얼굴 살은 조금 있어 보이며, 두 귀는 길쭉하여 중생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목은 좀 두터워보이며, 목 부분이 절단되어 있던 것을 다시 붙였다. 윗도리는 짧지만 잘록한
허리선이 인상적이고, 밑도리는 두 다리를 분명하게 나타내어 양감이 뚜렷하다. 몸에 걸친 법
의(法衣)는 양팔을 돌아 계단식 옷주름을 보이며, 가슴 앞에서 'U'자형을 이루다가 다리 사이
로 내려와서 다시 'U'자형의 주름을 이루는 이른바 우전왕(優塡王)식 착의법을 하고 있다. 이
는 신라 후기와 후삼국시대 불상에서 많이 나타나는 수법으로 이를 통해 그 시절 조성되었음
을 대놓고 귀뜀해준다. 또한 석불이 딛고 선 대좌(臺座) 역시 그 시절 연화문(蓮花紋)과 유사
한 것으로 여겨진다.
부분적으로 손상된 부분이 있으나 상태는 거의 괜찮으며, 서울 땅에서 거의 유일한 후삼국시
대 석불로 그 희소가치가 인정되어 뒤늦게 지방문화재의 감투를 쓰게 되었다.

석불은 반듯하게 서서 동쪽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다. 아무래도 그가 한강에서 떠내려왔으니
원래 있었던 동쪽 어딘가를 바라보라는 뜻에서
그렇게 방향을 잡은 것 같다.
건물 또한 그를 따라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건
물 이름은 '상부관음전'으로 지역 사람들이 그
를 관세음보살로 애지중지하고 있음을 보여준
다.

석불 뒷쪽은 벽으로 막혀있고, 나머지 3면 또
한 붉은 창살이 배치되어 마치 갇혀있는 듯한
모습이다. 그의 보호도 좋지만 너무 가둬놓은
인상이라 정면 만이라도 창살을 제거하여 중생
들과 보다 가까이 해주었으면 좋겠다.


◀  옆에서 바라본 상부암 석불


▲  희미하게 천 년의 미소를 던지는 상부암 석불의 얼굴
신체 비례는 그리 맞지는 않는다. 머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  상부관음전 현판의 위엄

▲  상부암 석불 부근에 자리한 석불좌상

석불이 홀로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지역 사람들이 별도의 석불좌상을 옆에 갖다두었다.
그의 자세한 정보는 알 수 없으나 몸통과 그의 대좌에 고색의 때가 조금 깃들여진 것으로 보
아서 20세기 초나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머리가 잘려 없어진 것을 새로 만들어서 붙였는데, 몸통과 너무 이질적인 모습이라 서로가 익
숙치가 않다. 그의 표정은 나이 지긋한 노공(老公)이 싱글벙글 웃는 듯 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100


▲  녹음이 짙은 워커힐로 (아차산생태공원 방향)

상부암 석보살입상을 둘러보고 아차산으로 넘어가고자 워커힐아파트를 통해 워커힐로로 올라
갔다.
2차선 크기의 워커힐로는 서울 장안의 주요 벚꽃 명소로 4월이 되면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
이 순백(純白)의 봄 향연을 펼친다. 길 주변은 나무로 가득해 거의 숲길을 이루고 있으며 그
길을 따라 서쪽으로 5~6분 가면 아차산생태공원이 아름다운 연못을 내밀며 마중을 한다.


▲  아차산 숲이 그늘을 드리우는 워커힐로


 

♠  아차산 남쪽 끝에 그림처럼 자리한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

▲  아차산생태공원 연못 (습지원)

아차산의 신세대 명소인 아차산생태공원은 도심 속의 싱그러운 생태공원으로 홍련봉(紅蓮峰)
과 더불어 아차산의 남쪽 끝을 잡고 있다.

이곳은 서울시의 공원녹지확충 5개년(1996~2001년) 계획에 일환으로 조성된 것으로 29.5억원
의 사업비가 투입되었다. 2000년부터 토지 보상과 설계 용역, 공사 다지기를 거쳐 2001년 12
월 31일 만남의 광장이 우선 준공되었으며, 2002년 3월 29일 생태공원이 완성되었다.
공원 면적은 23,450㎡로 생태공원(자생식물원, 나비정원, 습지원)과 만남의 광장, 황톳길과
지압보도, 소나무숲, 생태자료실, 생태관찰로와 자생관찰로, 관상용 논, 재배용 밭, 아차산성
과 보루터에서 발견된 고구려 흔적과 유물을 머금고 있는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을 갖추고 있
으며,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상, 인어공주상 등도 갖추어 공원의 풍치를 돋구고 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다양한 생태체험학습 프로그램(조류탐험교실과 곤충교실, 식물교실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공원을 닦은 이후 고라니와 꿩, 해오라기, 쇠박새는 물론 멸종위기종인 맹
꽁이까지 종종 관찰되고 있다. 심지어 서울 땅에서 처음으로 금개구리까지 목격되어 이곳의
생태계가 적지 않게 살아났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저 무늬만 생태공원이 아닌 진정한 생태공
원의 이름값을 하고 있다.

공원에는 의자와 쉼터가 넉넉히 베풀어져 있으며, 숲이 짙고 그늘의 질이 우수해 잠시 시름과
더위를 잊기에 좋다. 또한 아차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이곳을 기점으로 삼아 등산
/답사에 임하면 편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370 (영화사로 145 ☎ 02-450-1192)
* 아차산생태공원 홈페이지는 아래 습지원 사진을 클릭한다.


▲  동쪽에서 바라본 습지원(濕地園)

아차산생태공원의 백미(白眉)이자 아름다운 거울인 습지원(연못)은 그 이름 그대로 습지식물
의 삶터이다. 연못 한복판에 나무로 다진 다리가 걸쳐져 있어 시각의 농간으로 2개의 연못으
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는 1개로 주변 나무와 봄꽃, 지나가는 달과 구름까지 연못을 거울로
삼아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그리고 동쪽 못에는 동화의 단골 모델인 인어공주상이
고운 맵시를 드러내며 연못의 운치를 한껏 띄운다.

▲  습지원 동쪽 못

▲  습지원 서쪽 못


▲  습지원의 구수한 양념, 인어공주 누님상

인어공주는 윗도리는 여자 사람, 아랫도리는 물고기로 서양 동화에서 나오는 상상의 존재이다.
잘빠진 몸매와 아름다운 가슴을 모두 드러낸 채, 바위에 걸터앉아 두툼한 꼬랑지를 흔드는 모
습이 은근 매혹적이라 정처가 없는 내 침침한 두 눈이 자꾸 그에게로 쏠린다. 비록 하얀 피부
가 전부이나 실감나게 색을 입힌다면 지금보다 감동이 더 할 것이다.
그는 습지원을 닦으면서 갖다둔 조각품일 뿐, 아차산과는 관련이 없으며, 이곳이 어린이의 생
태학습 체험장의 역할을 하고 있어 순수함의 비중이 아직까지는 높을 그들의 눈높이와 공간의
성격을 배려하여 배치했다.


▲  무거운 동전은 이곳으로?? 연못에 동전을 버리는 공간
인어공주 누님이 바라보는 방향에 동전을 받아먹는 동그란 돌통이 있다. 그곳에
동전이 들어가면 행운이 온다나 뭐라나? 그렇게 모인 동전은 광진구청에서
수거하여 불우이웃돕기에 쓴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  생태공원 동쪽 산책로 (생태자료실 동쪽)

▲  아직은 잡초만 무성한 습지원 서쪽 나비정원

▲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

아차산 생태자료실 서쪽에는 아차산의 고구려 유물과 유적을 다룬 역사문화홍보관이 자리하고
있다. 아차산은 좁게는 서울과 구리 지역, 넓게는 미수복지를 제외한 이 땅에서 가장 많은 고
구려 유적을 품은 현장이라 고구려가 아차산에 새겨놓은 영광스런 현장들을 집대성하고 이곳
의 역사적 중요성을 천하에 널리 알릴 공간이 절실했다. 하여 광진구에서 1.45억원의 돈을 들
여 2009년 5월에 조촐하게 그 공간을 마련했다.

아차산성을 비롯해 아차산과 용마산, 홍련봉 일대 보루 유적과 이들이 뱉은 유물 일부를 전시
, 소개하고 있으며, 비록 생태공원에 얹혀있는 미약한 신세이나 아차산과 광대했던 고구려에
대한 세상의 관심이 지대하여 장차 크게 될 싹수를 가지고 있다. 미수복지(북한, 만주, 요동,
연해주, 대마도, 왜열도 등)를 제외한 이 땅에서 고구려를 전문으로 다루는 박물관이나 공간
이 매우 부족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홍보관 내부에는 문화유산해설사가 머물고 있으며, 고구려 귀족의 복장을 입는 체험코너도 있
다. 아직까지는 전시 유물이 꽤 빈약하고, 아차산 일대로 국한된 점은 어쩔 수 없으나 4~5세
기 고구려 강역도가 너무 작게 나와있어 이 땅에 뿌리깊게 박힌 쓰레기 같은 식민사관의 잔재
가 여전함에 씁쓸함을 금할 길이 없다.

아차산성과 보루 유적이 목적이되 초행길이라면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을 우선 둘러보고 답사
에 임하는 것도 좋다. 홍보관이 작기 때문에 아무리 길어봐야 10~20분 내외면 충분하다. (해
설시간은 제외) 그리고 아직까지 금지된 구역으로 묶인 아차산성 내부를 둘러보고 싶다면 이
곳에 문의를 해보기 바란다.

*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 관람정보 : 9시~18시까지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없음)


▲  광진구의 역사와 아차산의 고구려 유적을 머금은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 내부


▲  홍련봉(紅蓮峰) 1,2보루 조감도

아차산 남쪽 끝에 자리한 홍련봉(125m) 정상에는 2개의 보루가 깃들여져 있다. 이들은 5~6세
기에 조성된 것으로 한강과 가까워 아차산의 병참기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가마터
와 저수시설, 배수시설 등이 나왔다. 몇 년에 걸쳐 계속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아직
이곳에 묻힌 이야기 보따리는 다 풀리지 않았다.


▲  홍련봉과 아차산, 용마산 보루에서 나온 고구려 토기와 기와조각 ①

아차산을 점령한 신라는 산성과 보루를 손질하여 계속 사용했다. 하지만 신라 후기 이후 사용
가치가 사라져 모두 버려지게 되었으며, 그렇게 인간의 손때가 사라지면서 대자연의 의해 헝
클어지고 분해되어 끝내 자연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20세기 이후, 1,000년 동안 잠들어있던 그 흔적들이 다시 햇살을 보면서 많은 유물을 토해냈
지만 성한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죄다 깨진 상태이다. 하지만 저들의 깨져버린 역사 퍼즐을
푸는 것이 바로 우리가 꼼꼼히 처리해야 될 숙제이다.


▲  홍련봉과 아차산, 용마산 보루에서 나온 고구려 토기와 기와조각 ②

▲  상큼하게 닦여진 자생식물원 산책로

▲  파릇파릇 새싹이 꿈틀거리는 자생식물원

▲  온달장군과 평강공주 부부상

아차산성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전사했다고 전하는 온달 장군이다.
그래서 만남의 광장 한쪽에 갑옷을 입고 칼집을 높이 들어올린 온달(溫達)과 아리따운 자태의
평강공주(平岡公主)상을 만들어 이곳의 상징적 장식물로 두고두고 기리고 있다.

평강공주는 고구려 25대 군주인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의 딸이며, 온달은 그의 사위인
데, 공주의 휼륭한 내조에 힘입어 온달은 1급 장수로 성장해 많은 공을 세웠다.
신라가 고구려를 북쪽으로 몰아세우며 드디어 한강 하류까지 건드리자 온달은 '죽령(竹嶺) 이
북을 되찾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굳은 다짐을 꺼내 보이며 남쪽으로 달려가 한강
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인 아차산성을 지켰다. 허나 신라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성은 함락
되고 온달 자신은 끝내 전사하고 만다.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해 평양성(平壤城)으로 옮기려고 했으나 죽령 이북을 회복하지 못
한 한 때문인지 아무리 힘센 장정이 들어도 관이 꿈쩍도 하지 않자 평강공주가 급히 달려와
관을 어루만지며 달래니 그제서야 관이 움직였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물론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허나 신라 따위에게 한강 유역과 강원
도, 충북 지역의 많은 땅을 잃고 거기에 고구려의 1급 장수인 온달까지 죽어나갈 정도였으니
이에 대한 고구려의 치욕감이 상당했음을 온달의 설화를 통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며, 온달의
부하들이 온달의 한을 풀기 전(죽령 이북 회복)에는 절대로 관을 운구할 수 없다고 거부한 것
을 우회하여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단양 온달산성에서 전사했다는 설도 있음)


▲  아차산성 남쪽으로 이어지는 자생식물원 북쪽 산책로

▲  그늘로 가득한 자생식물원 북쪽 산책로

▲  아차산 소나무숲 입구

아차산생태공원 북쪽에는 소나무숲이 닦여져 있다. 소나무와 들꽃이 어우러진 상큼한 공간으
로 이곳 역시 생태공원의 일원인데, 아차산성과 아차산주능선으로 가려면 이 길로 가는 것이
빠르다. (아차산생태공원과 광나루역 기준임)
소나무숲이 삼삼하여 따가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힘을 쓰지 못하며 솔내음을 머금은 솔바람이
솔솔 불어와 벌써부터 피어난 땀과 속세의 무성한 번뇌를 앗아간다. 소나무 그늘에는 들꽃이
가녀린 미소를 머금으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에 퐁당퐁당 돌을 던지고, 그런 꽃내음과 솔
내음이 어우러져 조촐하게 극락을 연출한다.


▲  아차산 소나무숲의 한복판

▲  아차산성으로 이어지는 아차산 소나무숲 동쪽 산길


♠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흔적이 골고루 깃든 삼국시대 산성 유적
아차산성(阿且山城) - 사적 234호


▲  아차산성 서벽 ①

아차산 남쪽 자락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차산성이 장대한 세월을 머금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아차산생태공원에서 소나무숲을 지나 10여 분 정도 오르면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덥수
룩하게 자라난 수풀에 거의 묻혀있던 것을 2013년 이후 성곽을 둘러싼 나무와 수풀을 꾸준히
밀어내면서 북쪽과 남쪽 성벽도 무리 없이 확인할 수 있다.
허나 아무리 이발을 하고 숯을 쳐내도 대자연의 의해 금세 수풀이 자라 성곽을 가리려드니 역
시나 인간의 피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돌이나 모래알에 불과하다.

아차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나 백제 9대 제왕인 책계왕(責稽王)이 위
례성(慰禮城)과 함께 수축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백제 초(1~2세기 경)에 국도(國都)인
위례성 수비와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자 닦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상당히 늙은 성이다.
처음에는 아단성(阿旦城)이라 불렸는데, 5세기 이후부터 단(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변
해 아차산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 한문은 비슷한 모양으로 인해 금석문(金石文)과 판각인쇄
에서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달리 하여 '峨嵯山城'이라 쓰는 경우
도 많았으나 문화재청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한자(阿且山城)를 정식 명칭으로 삼았다. 하여 아
차산의 공식 한자 표기인 '峨嵯山'과 달리 산성은 예전 한자로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아차
산성이란 이름 외에도 장한성(長漢城), 광장성(廣壯城) 등의 별칭도 전하고 있다.

4세기 후반 고구려의 위대한 군주,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재위 392~413)이 한강 이북을 말
끔히 장악하면서 이곳은 백제의 심장을 겨낭한 고구려의 화살과 같은 기지가 되었다. 위례성
으로 여겨지는 서울 강동/송파 지역이 훤히 바라보이는 잇점을 지닌 아차산을 흔쾌히 활용한
것이다.
그렇게 위례성(한성)을 새가 땅을 바라보듯 감시하며 기회를 엿보던 중 개로왕(蓋鹵王)이 무
리하게 토목공사를 벌여 국력을 소모하고 고구려의 최대 라이벌이자 동시에 백제 자신의 라이
벌인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같이 고구려를 치자고 들쑤셨다. <동성왕(東城王) 시절에 북
위와 산동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다가 북위의 수십 만 기병을 크게 때려잡은 적이 있음>
이에 뚜껑이 열린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3만의 군사를 휘몰아 한성<漢城, 위례
성과 하남위례성을 한성이라 부름>을 공격하게 된다.

고구려군은 화공(火攻)을 이용하여 성문과 도성을 불태웠으며, 개로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
을 가다가 자신의 장수였던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을 만났다. 그들은 개로
왕의 미움을 받아 고구려에 투항한 장수로 왕을 잡고자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의 투항 사실을 알리 없던 개로왕은 크게 안심을 했으나 그들은 왕에게 절을 하더니 바로
그의 얼굴을 향해 침을 3번 뱉고는 온갖 육두문자를 요란하게 내뱉은 다음 포박하여 고구려에
넘겼다.

고구려의 포로가 된 개로왕은 아차산성으로 끌려와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황해도를 비롯해 왜열도와 중원대륙의 무수한 해안 영토를 거느렸던 백제의 도읍 위
례성(한성)은 철저히 파괴되어 이 땅에서 영구히 지워지고 말았다. 바로 장수태왕의 그 만행
때문에 후대 사람들이 위례성을 찾느라 오랫동안 진땀을 뺀 것이다.


▲  아차산성 서벽 ②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고구려는 아차산성을 보조하고 한강과 중랑천, 서울 동부, 구리
지역을 효과적으로 수비하고자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보루를 주렁주렁 달아놓았다.
아차~용마~망우산에 닦인 보루는 발견되지 않은 것까지 고려해 최대 30개 정도로 여겨지며,
(현재 17기가 발견됨) 이들 보루는 북쪽으로 봉화산(烽火山)과 수락산(水落山), 사패산(賜牌
山), 불곡산, 양주, 연천 지역까지 이어지는데, 주목할 점은 오직 서울과 경기 북부에서만 발
견되는 고구려의 독특한 요새라는 점이다. 그만큼 이 지역의 중요성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 시절 온달이 이곳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하며,
이후 신라가 접수해 고구려를 막는 요충지로 삼았다. 한때는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 불리기
도 했고, 7세기 중반까지 고구려가 종종 건드렸으나 결국 점령하지 못했다.
허나 8세기 이후 아차산의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서서히 버려지기 시작했고 세월과 자연에 의
해 그 견고하던 산성이 헝클어지면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  아차산성 구조와 관련 사진들

산성의 둘레는 약 1,038m(길게 잡으면 1,125m)로 산허리에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테뫼식성이
다. 아차산 남쪽 자락에서 워커힐 뒤쪽까지 이어져 있는데, 동문터와 남문터, 서문터, 수구(
水口)터, 곡성(曲城)터, 장대(將臺)터, 건물터, 온달장군이 마셨다고 전하는 우물이 남아있으
며, 장대(장대터)는 전시에는 장수들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쓰였다.
또한 커다란 왕개벚꽃나무가 장대터 주변에 자라고 있는데, 덩치로 봐서 100~200년 묵은 것으
로 여겨진다.
성벽 높이는 평균 10m, 성 내부 면적은 약 103,375㎡이며, 광나루까지 성을 쌓은 흔적이 발견
되었으나 워커힐이 들어서면서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1997년과 1999년 광진구에서 부분 발굴조사를 벌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 토기와 기와파편, 흙
으로 만든 인물상, 철로 만든 솥과 쟁기날 등을 건졌고, 신라의 북한산성이 대략 이곳임이 밝
혀졌다.
허나 아직 건드리지 못한 부분이 많아 애태우던 중, 2015년 광진구가 문화재청의 예산을 지원
받아 한국고고환경연구소와 함께 아차산성 남벽과 배수구 일대 4,575
를 대상으로 발굴조사
를 벌였다. 그 결과 여러 흥미로운 존재들이 햇살을 보았는데, 고구려의 연꽃무늬 기와장식인
'연화문와당'이 나왔고 (인근 홍련봉1보루에서 발견된 와당과 비슷한 형태임) 남벽 90m 외벽
에서는 신라 건축의 특징인 외벽 보축(補築) 시설과 물을 내보내는 출수구 3곳, 내벽에서는
입수구 2곳이 나왔다. 또한 망대터에서는 내외성벽을 비롯한 치성(雉城)과 방대형 시설이 나
왔으며, 신라의 연화문와당 10여 점과 '북한산성'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신라의 북
한산성이 이곳임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었다.

허나 아차산성의 적지 않은 부분이 워커힐 관련 사유지로 묶여 있어 아직까지도 조사하지 못
한 부분이 많다. 산성은 물론 그 주변까지 속시원히 뒤집으면 보다 많은 유물과 숨겨진 이야
기가 쏟아져 나올 것인데 그 점이 몹시 아쉽다.

1999년 이후 헝클어진 산성을 복원 정비하였고, 그들의 건강과 사유지 보호를 위해 산성 주변
에 철책을 둘러 출입을 막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 널린 산성(山城) 유적 중 유일하게 접근이
통제된 까칠한 성곽이 되었는데<휴전선과 민통선 지역의 성곽 유적은 제외> 2014년 이후부터
서울시와 광진구청이 워커힐과 협의하여 산성을 개방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나 아직까지
도 감감무 소식이다.

서벽과 북벽 일부, 남벽 일부는 산길에서 휴전선 너머를 바라보듯 만날 수 있으나 그 외는 어
림도 없으며, 산성을 가리고 앉은 수풀을 싹 밀어버려 예전보다 단정한 모습이 되었으나 대자
연의 위대한 힘으로 금세 수풀이 자라나 성벽을 가리려고 드니 그나마 서벽만 제대로 눈에 넣
을 수 있다.
다만 겨울 제국(帝國) 시절에는 겨울이 수풀을 알아서 털어가기 때문에 북벽과 남벽을 그나마
제대로 살필 수 있으며, 1년에 딱 1번 아차산성의 속살이 강제로 해방되는 날이 있다. 바로 1
월 1일 아침으로 그렇다고 정식 개방되는 것은 아니다. 허나 몰지각한 산꾼들이 그 해돋이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철책을 넘어 들어가니 그때 살짝 묻어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 물론 정당한
방법은 아니나 그때는 아차산 일대가 수만 명에 달하는 해돋이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어 단속
반도 거의 손을 못쓴다. 어차피 산성에 해코지만 안하면 된다.

* 아차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5-11


▲  아차산성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부분
이곳에서는 산성을 지휘하는 장대(將臺)터가 발견되었다.

▲  아차산성 서벽 앞 산길 - 철책 너머가 금지된 성, 아차산성이다.

▲  낙타고개 부근에서 바라본 한강과 암사대교

아차산성 서쪽 옆구리를 지나면 낙타고개가 나온다. 이곳은 아차산성과 1보루로 이어지는 능
선 사이에 쑥 들어가 있는데, 그 모습이 낙타의 목이나 등부분의 굽은 모양처럼 생겨서 낙타
고개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직진하면 아차산 주능선과 아차산 정상, 대성암(범굴사)으로 이어지며, 서쪽
은 친수계곡과 영화사(永華寺) 방면. 동쪽은 구리시 아천동으로 대장간마을과 온달샘 석탑으
로 이어진다. 이번에는 줄기차게 들락거렸던 아차산 주능선이나 친수계곡 대신 관심을 1번도
주지 않았던 동쪽 길로 내려갔다.


 

♠  아차산 마무리

▲  너럭바위 전망대

낙타고개 동쪽 길은 구리시 지역으로 아차산에 묻혀있던 미답처였다. 지금까지는 경험하지 못
한 신세계에 발을 들인 듯,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내려가니 동쪽을 향해 가슴을 활짝 연 너럭
바위가 마중을 한다.
너럭바위는 산비탈에 드러누운 넓직한 바위로 그 윗도리에 전망대를 닦아 좁게나마 천하를 굽
어보게 배려했다. 비록 보이는 범위는 한강과 강동구, 구리시, 하남 미사지구 등이 전부이지
만 낮은 높이 치고는 조망은 괜찮은 편이며, 한강 바람과 산바람이 어우러져 시원하기 그지
없다.


▲  너럭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한강을 중심으로 하여 구리시(아천동, 토평동), 강동구 고덕동과 강일동,
하남시 미사강변지구 등이 바라보인다.

▲  온달샘

너럭바위에서 북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숲에 묻힌 온달샘이 나온다. 온달장군이 물을 마셨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과연 그의 손때가 탄 샘터인지는 증명할 방법은 없다. 어
차피 먼저 이름을 쓰는 사람이나 지역이 임자이다.

천하가 봄가뭄으로 심한 갈증을 겪고 있던 때라 샘터의 수량도 그리 시원치는 못하다. 그래도
이곳까지 왔으니 온달 형님이 1,500년 전에 마셨다는 물 맛은 봐야 되겠지. 비록 그때 물맛과
지금 물맛이 같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여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답답하게 쏟아지는
물을 받아 들이키니 갈증이 싹 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 없다.

온달샘 주변에는 이곳을 기반으로 한 온달체육회가 닦은 운동시설이 있으며, 샘터 옆에는 우
미내계곡 상류가 예전에 내린 비를 아껴가며 적은 물을 흘려보내고 있고, 그 건너에 납작하게
엎드린 늙은 석탑 하나가 슬그머니 눈길을 주니 그가 바로 온달샘 석탑이다.


▲  고된 세월에 녹초가 되버린 온달샘 석탑

온달샘 계곡 건너편 바위 밑에 있는 온달샘 석탑은 바닥돌과 기단석(基壇石), 지붕돌(옥개석)
2개가 전부인 초췌한 몰골이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대자연의 끊임없는 괴롭힘에 모든
것이 산산조각나 겨우 일부만 남아 흩어져 있던 것을 구리시와 구리문화원이 있는 석재를 수
습하여 지금의 자리에 일으켜 세웠다.

유실된 부분이 태반이라 탑의 원래 형태를 상상하기는 어려우나 기단석도 그렇고 지붕돌도 작
은 것으로 보아 난쟁이 반바지 접은 정도의 작은 탑이었던 같다.
바닥돌의 양식<높은 사분원(四分圓)과 낮은 각형(角形) 괴임>과 기단석의 수법으로 보아 신라
탑의 전통을 이은 고려 탑으로 여겨지며, 탑 주변에 건물터 주춧돌과 석재가 흩어져 있어 이
곳에 조그만 절집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절 역시 어느 세월에게 잡혀갔는지 알 도리가 없
으며, 탑은 온달샘 옆에 있다고 하여 온달샘 석탑이란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원래
이름은 아니겠지만 현재로써는 모든 것이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니 어쩔 수가 없다.

* 온달샘 석탑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산49-1

▲  뒷쪽에서 바라본 온달샘 석탑

▲  온달샘 옆구리를 흐르는 계곡


▲  온달샘 석탑 주변 (우미내계곡)

▲  두꺼비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한강과 워커힐 골프장, 강동구 지역)

▲  두꺼비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구리 아천동과 토평동, 한강, 강동구 지역)


온달샘에서 대장간마을로 이어지는 동쪽으로 내려가면 두꺼비바위가 마중을 한다. 아차산은
흙과 화강암이 어우러진 산이라 잘생긴 바위들이 많은데, 온달샘과 우미내계곡 주변에는 너럭
바위와 두꺼비바위, 큰바위얼굴, 석실고분이 있는 넓직한 바위(아직 이름이 없음) 등이 잔뜩
포진해 있어 아차산의 매력을 크게 수식해준다.

두꺼비바위에도 조망대를 닦아 천하를 바라보게 했는데, 앞서 너럭바위보다 해발이 좀 곳이라
그곳과 거의 비슷한 분량으로 바라보인다. 여기서 조금 쉬다가 잘닦여진 계단길을 통해 대장
간마을로 내려갔다.


▲  대장간마을에서 두꺼비바위, 온달샘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길

▲  하얀 피부의 반석이 짙게 깔린 큰바위얼굴 밑 우미내계곡

두꺼비바위에서 대장간마을로 내려가는 중간에 아주 큰 벼랑이 있는데, 그곳에 '태왕사신기'
촬영 시절(2007년)에 배용준이 발견했다는 '큰바위얼굴'이 있다. 그 벼랑이 잘보이는 곳에 조
망대를 두었는데, 나는 엉뚱한 것을 그 얼굴로 오인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사진에
담았다. 허나 나중에 알고 보니 아니었다고;;; 아무래도 다시 찾아오라는 아차산의 깊은 뜻인
가 보다.

큰바위얼굴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우미내계곡이 나오고, '태왕사신기'와 '선덕여왕' 촬영지로
유명한 고구려 테마공간인 대장간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허나 시간이 늦은 상태라 쿨하게 다
음으로 몽땅 넘기고 나의 제자리로 길을 재촉했다. 어차피 나의 즐겨찾기 산이니 가까운 시일
에 또 발걸음을 하면 된다.
이렇게 하여 아차산 봄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나를 환송하는 온갖 무리의 장승들 (대장간마을에서 우미내마을 방향)
장승의 표정이 너무 익살스러워 이곳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火魔) 등의
나쁜 악귀들도 그들의 얼굴 앞에 자신의 본분도 내버리며 돌아갈 것이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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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1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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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에서 2번째로 큰 고래등 기와집, 가회동 백인제가옥

 


' 북촌한옥마을에서 만난 고래등 기와집. 가회동 백인제가옥 '

▲  백인제가옥 안채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그 도심 한복판에 한옥마을의 성지(聖地)로 추
앙받고 있는 북촌(北村, 북촌한옥마을)이 있다.

북촌은 안국역 이북이자(원래는 청계천 이북임)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로 1,000채가 넘는
한옥들이 널려있으나 정작 속시원히 개방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북촌
제일의 고래등 기와집으로 꼽히는 가회동 백인제가옥이 2015년 11월, 세상을 향해 그 대
문을 활짝 열었다.
북촌한옥마을에서 고래등급 한옥으로써는 사상 최초로 빗장을 연 의미 깊은 현장으로 이
런 좋은 곳은 미리미리 발자국을 찍어 둬야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 법이
다. 하여 고래등 기와집의 좋은 기운도 훔칠 겸, 늦가을 평일을 이용해 그곳을 찾았다.

나는 자유관람으로 30분 동안 예습 차원에서 1바퀴 둘러보고 바로 가이드투어로 50분 동
안 가옥 내부(안채, 사랑채, 별당 내부까지)까지 말끔히 둘러보았다.


▲  있는 자들의 폐쇄적인 공간에서 시민들의 열린 공간으로 새로 거듭난
백인제 가옥 입구 (오른쪽 한옥은 관리사무소로 예전 바깥채)


 

♠  20세기 초반 상류층 고래등 한옥의 결정체
가회동 백인제 가옥(白麟濟家屋)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22호

▲  백인제가옥 솟을대문과 대문간채

백인제가옥 입구를 들어서면 한옥으로 된 관리사무소와 공터, 그리고 솟을대문이 차례대로 펼
쳐진다.
관리사무소로 쓰이는 한옥은 원래 가옥 바깥채로 세월의 고된 때를 간직한 채, 우중층하게 있
던 것을 손질하여 사무실과 화장실을 두었다. 바깥채 동쪽에는 차량들을 위한 검은 철제 대문
이 있었고 서쪽은 담장과 골목으로 막혀있었으나 바깥채 동쪽이 다른 이에게 넘어가면서 대문
을 밀어버리고 돌담을 둘렀으며, 대신 서쪽을 뚫어서 가옥 입구로 삼았다.

솟을대문 앞 공터 동쪽에는 쉼터가 조촐히 닦여져 있는데, 가이드투어를 신청했을 경우 지정
시간까지 그 쉼터로 와서 대기하면 된다.


▲  예전 백인제 가옥 바깥채 (2011년)

▲  남남이 되버린 바깥채 동쪽 한옥과 담장

바깥채 동쪽 담장 너머에는 깔끔한 모습의 한옥이 있다. 겉으로 보면 아무런 상관도 없는 현
대 한옥처럼 보이지만 그 집도 엄연한 백인제가옥의 일원으로 그 부분만 따로 분리하여 매각
했다.
현재는 친일 성향을 보이는 롯데 회장 일가가 별장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런 도심
한복판 금싸라기 땅에 한옥 별장까지 둔 그것들이 몹시 부러울 따름이다. 백인제가옥의 태생
도 그리 좋지는 못한 편인데 (친일파 한상룡이 지었음) 그 역사는 속일 수가 없는 것인지 친
일 성향 기업이 바로 옆에까지 들어와 북촌의 꿀을 빨고 있었던 것이다.


▲  솟을대문에 걸린 백인제가옥 현판의 위엄

▲  솟을대문과 대문간채 서쪽 부분, 중문간채

가옥이 개방되었다고는 하지만 솟을대문은 여전히 닫혀있었다. 대문도 주인을 닮는다고 졸부
들의 부질없는 자존심이 아직까지 깃들여진 탓일까? 그렇다고 문짝이 사용 불가일 정도로 부
실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쨌든 정면에 보이는 대문이 빳빳하게 닫혀 있으니 처음 온 사람
은 '이거 개방된거 맞어?' 당황할 터, 허나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대문 옆에 난 조그만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되니까.
솟을대문에는 '백인제가옥'이라 쓰인 한글 현판이 높이 걸려있다. 이 현판은 개방 기념으로
달아놓은 것으로 한글로 점잖게 쓰인 점이 이채롭다.

솟을대문을 지닌 건물을 대문간채라고 한다. 대문을 중심으로 5개의 방을 지니고 있는데, 이
들은 궂은 일을 담당하던 아랫 사람들의 생활공간으로 지금은 3개의 방을 활용하여 백인제가
옥의 100년 역사와 이곳을 거쳐간 4명의 인물(한상용, 최선익, 백인제, 최경진)을 다루는 공
간으로 쓰이고 있다. 가옥과 인물에 대한 설명과 사진, 시청각 자료가 있으며, 열린 공간이기
때문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도 된다. 또한 일반 관람시 가옥에서 유일하게 발을 들일 수 있는
방이기도 하다.
그럼 여기서 가옥의 역사와 이곳을 거쳐간 인물에 대해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솟을대문 안쪽 모습과 대문간채

① 시작이 좋지 못했던 백인제 가옥, 가옥의 1대 주인, 친일파 한상룡(韓相龍, 1880~1947)
이 가옥을 지은 한상룡은 돈 꽤나 주무르던 친일파 한관수(韓觀洙)의 아들로 인근 재동(齋洞)
에서 태어났다. 그 부친도 더러운 친일파지만 아들도 그 못지 않은 친일파로 악질 친일파로
악명이 대단한 이완용(李完用) 또한 그의 외삼촌이다. 아주 집안과 외가까지 쌍으로 더러운
존재들인 셈이다.

1898년 왜열도로 유학을 가서 그곳의 고위 인사들과 친분을 맺었으며, 1903년에 왜국(倭國)이
친일파 왕족인 이재완(李載完, 흥선대원군의 조카)을 앞세워 한성은행(漢城銀行)을 세울 때,
총무가 되어 실질적인 경영을 맡게 되었다. 그렇게 된 이유에는 친일파 집안의 배경이 컸을
것이다.
1908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위원으로 참가해 적지 않은 돈을 쥐기도 했으며, 1923년
한성은행 두취(頭取)로 취임했다. 그리고 친일 유력자 모임인 대정실업친목회 초대 평의장(評
議長)을 지냈으며, 그것도 모자라 데라우치 총독의 동상을 세우고, 안중근(安重根)에게 처단
된 이토 히로부미 기념회와 사이토 마코토 기념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는 뻔뻔함까지 보였다.
심지어는 1919년 왜정(倭政)에게 조선 사람들 모두 왜식으로 창씨개명을 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1930년대부터 각종 친일 단체에 빠짐없이 얼굴을 비추며 많은 돈을 전쟁에 내놓았으며, 관동
군(關東軍) 사령부의 사무촉탁을 맡기도 했다. 이런 더러운 공로로 왜정에게 많은 훈장을 받
았고, 중추원(中樞院) 참의, 중추원 고문, 칙선 일본 귀족원 의원에 임명되기도 했으며, 1935
년 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하나로 수록되기도 했다.
또한 그의 부인인 이용경도 애국금차회에 참여하는 등 부부가 쌍으로 왜정에 협력했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反民特委)에 넘겨졌으나 이승만의 농간으로 풀려났으며, 1947년 그 더러
운 목숨을 강제로 놓으며 지옥으로 떨어졌다.

한상룡은 가회동 이곳을 점찍어두고 1906년부터 이 일대를 매입했다. 1907년 경성박람회에 압
록강 흑송(黑松)이 소개되자 그 나무를 대량으로 구입해 7년 동안 터를 다지고 공사를 벌여
1913년 7월 완성을 보았다.
당시 서울 장안에서 가장 큰 기와집으로 악명이 자자했는데, 친분이 있는 왜인 사업가와 왜정
관료를 초청해 연회를 베풀었으며, 왜정 총독도 초청하여 술을 대접했다. 또한 미국인 석유
사업가인 록펠러2세도 다녀가는 등, 집의 위세가 대단했다.
허나 한상룡이 은행을 잘못 굴려 적자가 커지자 1928년 6월 한성은행에 집을 넘겼다. 은행 소
유로 바뀌자 천도교 단체가 손병희(孫秉熙) 집과 가까운 이곳을 종종 빌려 지방에서 상경한
교도들의 숙소 및 회합 장소로 사용했다.


▲  중문간채 앞에서 바라본 솟을대문과 대문간채
대문간채 동쪽 방에는 백인제 가옥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담장 너머로 보이는
한옥은 백인제가옥의 잃어버린 부분이다.


가옥의 2대 주인, 개성 출신 부호이자 민족언론인, 최선익(崔善益, 1905~?)
최선익은 개성 출신 부유층으로 불과 19세인 1924년 조선일보사에 주주이자 기자로 언론 활동
을 시작했다. 1932년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조선중앙일보를 인수했는데, 여운형(呂運亨)을 사
장으로 두고 자신은 부사장을 맡았다.
한성은행에서 매물로 나온 가회동 한옥에 격한 반응을 보이며 1935년 1월 29일 인수했다. 친
일파로 더러운 발자국을 남겼던 1대 주인과 달리 오랜 시간 민족언론인으로 활동했으며 집에
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솟을대문의 위치를 지금처럼 변경하고 필지 정리를 했다.
허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1944년 백인제에게 매각했으며,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어 생사
를 알 수 없다.

③ 가옥의 3대 주인, 집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백인제(白麟濟, 1898~?)
백병원 창립자로 유명한 백인제는 왜정 시절 외과 의사의 1인자이다. 1915년 평북 정주의 오
산학교(五山學校)를 졸업하고,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했으며,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6개월 투옥되면서 퇴학을 당했으나 1921년 복교하여 졸업을 했다. 1921년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수(조교), 총독부의원으로 일하다가 1923년 의사면허증을 받게 된다.

1928년 왜열도 동경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그해 바로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임명되었고, 1935년 조선의사협회가 조직되자 그 간사로 선임되었다. 1936년에 1년 6
개월간 프랑스와 독일, 미국에 유학을 갔었고, 1941년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를 그만두고 백
외과(현재 백병원)를 세워 병원 원장이 된다.

그는 의술, 특히 외과술이 뛰어나 고위층들이 그의 진료를 받고자 줄을 길게 섰다고 하며, 그
로 인해 적지 않게 돈을 벌어들였다. 그 돈으로 1944년 9월 최선익에게서 이 집을 매입해 자
신의 보금자리로 삼았다.

1945년 9월 서울의과대학 외과 주임교수 겸 부속병원장이 되었고, 그해 12월 서울의사회 초대
회장이 되었으며, 1946년 12월 서울대 의과대학 외과주임교수로 임명되었으나 다음달 그만두
었다.
1948년 대한외과학회 제3대 회장을 지냈으나, 6.25전쟁 때 미처 피신을 가지 못해 2대 주인,
최선익처럼 북한으로 납치되어 아직까지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그는 이 땅의 의학 발전에 큰 공헌을 했으며, 사냥을 좋아하여 종종 북한산(삼각산)으로 사냥
을 나가 맷돼지나 토끼 등을 뜨락에 던져놓고는 구워먹기도 했다. 장인과 장모를 위해 집 서
쪽에 별채를 지어주기도 했으며, 서재필 박사를 초청해 연회를 열기도 했다.

④ 가옥의 4대 주인, 백인제의 부인인 최경진(崔炅珍, 1908~2011) 그리고 그 이후
백인제가 납북되자 집의 안주인인 최경진이 집 주인이 되었다. 소유기간이 1968년부터라고 하
니 이때부터 실질적인 소유권을 행사한 듯 싶다.
그는 1928년 백인제와 혼인하여 2남 4녀를 두었으며, 백병원의 2대 이사장으로 병원을 재건하
는데 노력했다. 1988년 8월까지 집을 소유하면서 일부만 손댄 것을 제외하면 거의 원형에 가
까운 모습을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여 1977년 3월 서울시 지방민속자료(현 지방민속문화재)
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1988년 아들인 백낙훤에게 소유권을 넘겼으며, 2009년 11월 서울시에서 인수하여 서울시 소유
가 되었다. 2012년 혜화동(惠化洞)에 있는 시장 공관(公館)이 한양도성 복원과 유네스코 등재
사업으로 인해 개방이 결정되자 공관 대체 장소로 백인제가옥을 정했다. 허나 문화유산 훼손
과 친일파 한상룡이 매국노 행위를 했던 현장이라며 비난이 쏟아지자 2013년 5월 그 야심을
버렸으며, 이곳을 속세에 열기로 결정하고 2015년 10월 부분 개방을 거쳐 11월 완전 개방되었
다.

⑤ 고래등 한옥의 결정체, 백인제가옥의 구조
북촌이 내려다보이는 가회동 언덕 2,460㎡에 닦여진 이 집은 장대한 규모의 사랑채와 안채를
중심에 두고 대문간채, 중문간채, 별채를 지었으며, 집에서 가장 높은 곳에 별당을 두었다.
정원을 넓게 닦고 갖은 화초를 심었으며, 사랑채와 안채를 구별하던 기존의 전통 한옥과 달리
왜식 복도와 다다미방을 두어 서로 연결시켰다. 그래서 굳이 바깥을 나갈 필요가 없이 사랑채
와 안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화장실도 안에 있었음)
또한 붉은 벽돌과 유리창을 많이 사용했으니 이는 당시로는 생소한 건축 자재로 부를 과시하
고자 함이며, 안채 일부가 2층으로 되어있는 점도 이곳의 특징이다.

20세기 초반 근대 개량한옥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북촌 제일의 한옥인 안국동 윤보선
가(尹潽善家, 사적 438호)와 함께 북촌을 대표하는 한옥으로 윤보선가 다음으로 큰 규모를 자
랑한다. (윤보선가는 아직도 비공개임)

끝으로 가옥 이름을 백인제가옥으로 한 것은 별 이유 없다. 백인제와 그의 부인, 자녀들이 60
여 년을 살던 집이라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렇다고 한상룡의 더러운 이름을 붙일 수
는 없지 않은가? 어쨌든 시작은 영 좋지 않았으나 그 다음 인수한 사람들로 인해 일종의 면죄
부를 받게 되어 북촌 제2의 한옥으로 명성을 누리고 있으며, 100년 이상 묵은 잘 남아있는 근
대한옥이니 지방문화재보다는 국가지정 민속문화재로 승급시켜도 손색은 없다고 본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93-1 (북촌로7길16, ☎ 02-724-0232)


 

♠  백인제가옥 바깥 둘러보기

▲  사랑채 (대청마루와 사랑방)

대문간채에서 붉은 벽돌문을 지나면 바로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지닌 사랑채가 마중한다. 사랑
채는 집 주인과 아들 등 남자들의 생활공간으로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거나 책을 보는 서재의
기능도 같이 했는데, 넓직한 대청으로 이루어진 사랑방은 많은 손님을 치르기에 부족함이 없
는 규모이며, 방의 4면이 마루로 둘러싸인 특이한 구조이다. 사랑 대청은 전통 한옥의 우물마
루 대신 장마루를 깔았으며, 사랑채 내부는 가이드 투어 시에만 진입이 가능하다.

▲  솟을대문에서 사랑채로 이어지는
붉은 벽돌문

▲  동쪽 뜨락에서 바라본 사랑채


▲  바깥에서 바라본 사랑채 대청마루 (왼쪽은 사랑방)
집 안에 둔 물건 상당수는 백인제 가족이 쓴 것이 아닌 시중에서 구입한 것이다.

▲  상류층 한옥의 여유로움이 묻어난 사랑채 뜨락
뜨락의 구석 가장자리에는 온갖 화초를 심어 뜨락을 아름답게 수식했고
뜨락 한복판에는 잔디를 입혀 부잣집 뜨락의 위엄을 보이게 했다.

▲  뜨락 동쪽에 심어진 키 작은 소나무
백인제가 심은 나무로 여겨진다. 주인은 오래전에 가고 없지만
나무만은 잘 살아남아 주인의 빈자리를 보듬는다.

▲  뜨락 구석에 조촐히 닦여진 산책로

뜨락 구석에 약간 높게 터를 다져 박석을 깔고 조촐히 산책로를 내었다. 그 주변에는 여러 화
초와 소나무를 심어 아름다움을 더했으니 봄과 늦가을 풍경이 아름답다. 뜨락이 너무 넓어서
박석 산책로까지 냈을 정도이니 왠만한 졸부집 이상급임을 보여준다.
산책로는 사색의 역할도 한다. 비록 그 거리는 짧으나 생각을 하는데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
다. 집을 지은 한상룡은 이 길을 거닐면서 어찌하면 왜정에 잘보여 부귀영화를 누릴까? 그 생
각을 했을 것이고, 백인제는 어떻게 하면 병원이 잘되고 외과술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 생각
을 했을 것이며, 최경진 여사는 납북(拉北)된 남편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  뜨락 구석 산책로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  단풍나무 밑에 자리한 사랑채 뒷쪽 벽돌문
벽돌문에서 사랑채 굴뚝까지 벽돌담이 있었다. 그렇게하여 안주인의 공간인
안채를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끔 완전 가린 것이다. 허나 돌담은 무너져
흔적만 화석처럼 남아있고, 반쯤 열린 벽돌문만 전하고 있다.

▲  사랑채(왼쪽)와 2층 부분(오른쪽)

백인제가옥에는 특이한 공간이 하나 있다. 바로 사랑채 뒷쪽에 달린 2층 공간이다. 한상룡 시
절에 귀빈 접대용으로 주로 사용했다고 전하는데, 아마도 기생까지 소환해 질탕나게 술마시고
놀았던 모양이다. 얼마나 많은 왜정 고위층과 친일파가 저곳을 들락거렸을까?
현재는 2층 보호와 계단 부실을 이유로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  사랑채 위에 덧씌운 2층 부분
집 주인이 살아있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금지된 구역이다.

▲  반쯤 열린 사랑채 뒷쪽 벽돌문과
벽돌담의 흔적

▲  툇마루를 갖춘 안채 뒷쪽 부분


▲  백인제가옥의 뒷쪽, 안채 뒷쪽 주변
뜨락 북쪽에 자연 지형을 이용해 나무를 심고 돌을 다져 조촐하게 동산을 자아냈다.

▲  별당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바라본 안채 뒷쪽 부분

▲  안채 서쪽에 있는 부엌

식구도 많고, 부리는 사람도 많고, 거기에 손님도 늘 많았기에 부엌 또한 넓게 닦았다. 안방
쪽으로 부뚜막을 만들어 솥을 달고 장작을 이용해 불을 피웠는데, 이는 음식도 만들고 안채
난방도 고려한 기능이다. 부엌 바닥은 지표면보다 낮고 거의 흙바닥이며, 옆에는 부엌 살림살
이를 담당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찬방(饌房)이 있다. 부엌에서 일하는 아낙들의 거처이기도 하
다.


▲  완전 박제된 부엌처럼 되버린 안채 부엌 내부

왕년에는 부뚜막에서 연기가 꺼질 일이 없었다. 허나 지금은 언제 모락모락 연기를 피웠는지
가물가물할 정도. 더군다나 이제는 사람이 사는 집도 아니고 지체 높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니 더욱 손대기가 그럴 것이다.
이렇게 박제된 모습으로 방치하는 것보다는 가끔은 부뚜막을 깨워서 체험 이벤트를 해보는 것
은 어떨까 싶다. 부뚜막에서 지은 밥과 누룽지, 숭늉, 국 등을 먹어보는 도심 속에서 즐기는
옛 맛 체험 말이다. 아니면 저렴한 가격에 포장 판매하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그만큼 이렇
게 놀려두기가 아깝다는 뜻이다. (영화 '암살'의 촬영장소로 잠시 쓰인 적이 있음)


▲  안채 서쪽에 자리한 별채

별채는 백인제가 그의 장인, 장모를 위해 지은 공간이다. 별도로 대문을 내어 가옥의 서쪽 문
으로 삼았는데, 처가 어른까지 모두 끌어안고 살 정도로 처가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음을 보여
주며, 그들이 모두 떠난 이후, 집은 빈 공간이 되었다가 현재는 남쪽의 'ㄷ'자형 한옥과 함께
운영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대문은 굳게 닫힌 채 무늬만 남아있다.


▲  부연이 쳐진 운영사무실 한옥과 별채(뒷쪽)

▲  안채 정면과 뜨락 (태극무늬 마크가 달린 부분은 사랑채 복도)

안채는 집의 안주인, 즉 가옥 주인 부인의 생활 공간이다. 부인 뿐 아니라 어머니와 며느리,
딸 등 집안 여인들의 공간으로 안채의 중심인 안방은 오로지 집안 남자만 출입이 가능했다.
백인제가 이북으로 강제로 사라지고 그의 부인 최경진이 집 주인이 된 이후, 안채 안방과 대
청이 집의 중심이 되었고 그 영향 때문인지 가이드투어 때도 바로 안채에서 안으로 들어선다.
(사랑채로 들어가지 않음)


▲  흑백과 칼라의 조화, 사랑채와 안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사랑채 복도 바깥 벽

섬세한 무늬가 새겨진 벽 한복판에 태극무늬 마크가 또렷히 새겨져 있다. 그냥 흑백TV 같은
다른 벽무늬 보다는 태극무늬가 새겨진 부분이 마치 칼라TV처럼 더욱 돋보인다.


▲  안채 서남쪽 부분과 늦가을이 곱게 깃든 단풍나무
가을도 이곳의 공개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온 모양이다. 이렇게 곱게 다녀간
흔적을 남겨놓고 갔네. 안채 서남쪽 끝부분에는 집안 사람들이
사용하던 화장실이 있다.

▲  지붕의 추녀 곡선이 아름다운 중문간채 (가운데가 안채로 인도하는 중문)

▲  뚜껑이 닫힌 술 수장고 (중문 안쪽에 있음)
수장고에는 집주인이 애지중지하던 온갖 귀한 술이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동,서양을 망라한 술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괜히
열어보는 일은 없기 바란다. 인생만큼이나 허무한 짓이니까.


 

♠  백인제가옥 내부, 별당 둘러보기

▲  별당으로 인도하는 산책길

가이드투어 시간까지 백인제가옥을 살랑살랑 둘러보고 시간에 맞춰 솟을대문 밑 쉼터로 내려
갔다. 지금까지는 예습 차원에서 가옥 바깥을 자유롭게 둘러보았지만 이제는 급을 높여 심화
학습 및 복습 차원에서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가옥 내부까지 투어를 하게 된다. 투어 시간이
되자 곱게 개량 한복을 차려 입은 아줌마 가이드가 나와서 인사를 하며 안내를 해준다.

솟을대문과 대문간채, 벽돌담, 사랑채 뜨락을 둘러보고 가옥 북쪽 돌담을 따라 이어진 약간
오르막의 산책로를 오른다.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나무와 화초가 무성해 산속 별장으로 순간
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왼쪽 나무 너머로 안채와 사랑채 2층 부분이 보이며 오른쪽은 돌담으
로 그 너머로 북촌 일대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별당이 손짓한다.


▲  돌담과 함께 이어진 별당 산책길

▲  돌담 너머로 북촌 북부가 바라보인다. (계동, 가회동 지역)

▲  백인제가옥의 조촐한 피서지, 별당(別堂)

백인제가옥에서 가장 북쪽이자 하늘과 맞닿은 곳에 시원스레 팔작지붕을 휘날리고 있는 별당
이 있다. 누마루 형식으로 이루어진 집으로 1층에는 돌기둥과 계단을 세워 건물의 키를 높였
고 그 2층에 방을 두었는데, 정면에 유리창을 내고, 돌담도 1층 높이 밖에 되지 않아서 정면
이 훤히 트여있다. 북촌 북부는 물론 북악산(백악산)까지 시야에 잡히나 시야의 범위는 그렇
게 넓지는 못하다.
집 주인과 가족은 여기서 휴식을 취하거나 조촐하게 피서를 즐겼으며, 창문만 열면 시원한 바
람이 솔솔 들어오는 피서철 명당으로 백인제는 여기서 온갖 상념을 즐겼다고 전한다.


▲  별당 주변에 둘러진 정겨운 토담

집 주인이 별당에 많은 공을 들였는지 별당의 갑옷인 주변 돌담까지 적지 않은 정성을 들였다.
흙과 자연막돌로 담을 쌓아 그 위에 암키와를 올렸는데, 담장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하얀 피부
의 수막새를 엇갈리게 배치해 담장의 아름다움을 고려했다.
담장의 미(美)도 고려하여 아무리 밤손님이라도 저 담장만큼은 아껴줄 것 같다. 비록 무지 오
래된 존재는 아니나 20세기 근대 고래등 한옥의 생활상과 상류층의 팔자 좋던 인생을 보여주
는 현장으로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다. 다행히 시민의 공간으로 해방되었으니 망정이지 계
속 졸부들의 전용 공간으로 남아있었더라면 그 미움은 더했을지도 모른다.


▲  별당 방에 홀로 자리한 병풍 (내용은 모름, 이곳과는 관련 없는 존재)

▲  고래등 기와집 속의 별천지, 별당 누마루

별당 내부는 오로지 가이드 투어 때만 들어갈 수 있다. 즉 아무 때나 갈 수 없는 비싼 구역이
다. 거추장스러운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타 마루를 들어서면 바로 방인데 방 동쪽에는 별
당의 백미인 누마루가 펼쳐져 있다.
누마루는 누각 형태로 이루어진 마루방으로 집 주인은 여기서 손님과 곡차 1잔 하거나 가족들
또는 혼자 휴식을 취했다. 창문을 열어두면 바람이 솔솔 들어와 몸을 간지럽히니 여름 제국(
帝國) 시절에도 이곳만큼은 여름을 잊어도 좋을 정도이다. 또한 가옥 내부에서 조망이 제일
괜찮은 곳으로 담장 너머로 가회동과 계동, 북악산(백악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허나 보이는
범위는 그 뿐이다. 아무리 언덕에 지었다고 해도 높이가 낮기 때문이다.


▲  별당 누마루에서 바라본 북촌 북부 (가회동, 계동)

▲  남쪽에서 바라본 별당과 별당으로 인도하는 날씬한 기와문
집 속에 다른 집이 들어있는 기분이다. 그만큼 이곳은 넓고 크다.

▲  왕비의 방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안채 대청

별당을 둘러보고 안채로 이동했다. 안채 역시 실내화로 갈아타 내부로 들어서면 되는데, 마루
로 이루어진 대청은 안주인의 생활공간으로 그가 앉던 평상(平床) 모습의 높은 의자와 탁자,
방석 등이 놓여져 그들의 높은 위치를 보여준다. 허나 이들은 집을 거쳐간 사람들이 쓴 것이
아닌 서울시에서 구한 늙은 생활 유물로 가옥의 품격에 맞추고자 이런 것을 갖다놓은 것이다.
어쨌든 집 규모부터가 으리으리하니 서민 스타일의 내 눈이 전혀 적응을 하지 못한다.


▲  백인제와 최경진의 빛바랜 혼인 사진 (1928년)
가옥에 있는 물건 대부분은 이곳과 전혀 관련이 없는 존재이나 이 사진만큼은
이곳을 거쳐간 사람(최경진)이 남기고 간 몇 안되는 진품의 하나이다.

▲  안채 대청과 안방

▲  안채 안방
대청마루 옆에 안주인이 머물던 안방이 있다. 지금은 바깥에서 수집한 생활유물이
안방을 채우고 있어 마치 민속마을 한옥 방을 보는 듯 하다.

▲  안채 윗방
안방 바로 북쪽에 자리한 작은 방으로
안주인의 옷과 살림살이, 귀중품을
보관하던 장과 농, 반닫이 등을 두었다.

  ▲  안채 서남쪽을 이루고 있는 할머니방
대청 (오른쪽이 할머니방)


▲  안채 할머니방
안살림을 며느리에게 물려준 시어미가 생활하는 방이다. 문 앞에 별도의 대청과
복도를 두었으며, 안방에서 복도로 연결은 되지만 중간에 양식문이 있어
안방 영역과는 분리된다. 이곳에 있는 물건 역시 서울시에서 수집한
민속 유물이다.

▲  부엌과 연결되던 안방 서쪽의 조그만 방

▲  안방 서쪽에 숨겨진 다락방 (부엌 바로 윗쪽임)
지금은 허공처럼 비어있지만 왕년에는 부엌에서 쓰던 식재료와 생활도구 등을
잔뜩 머금은 창고였다.

▲  안채 건넌방

안채 건넌방은 며느리가 머물던 공간으로 사랑방과 안방 중간에 자리한다. 시아비가 며느리를
이뻐해주니 시아비의 소환에 언제든 달려갈 수 있도록 그렇게 자리를 잡은 듯 싶고, 바로 남
쪽으로 집주인 아들방과도 이어지니 아들 부부를 가까이에 있게 하려는 배려도 은근 엿보인다.
방 북쪽에는 별당처럼 시원한 누마루를 만들어 조촐한 피서처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바깥 외
출이 쉽지 않았던 며느리를 배려하고자 그렇게 만든 모양이다.

▲  안채 건넌방의 특별함, 누마루
여인들의 공간이라 발을 쳐서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끔 했다. 한여름에 저기서
자는 잠은 그야말로 꿀잠이겠지~!

▲  안채에서 사랑채(사랑방, 작은 사랑방,
사랑 대청마루)를 이어주는 복도
복도 끝에는 수세식 화장실과 욕실이 있는데,
이는 최경진이 설치한 것이다.


▲  건넌방 주변 방에서 만난 고풍스런 가구와 동그란 그림
서울시에서 구입한 생활 유물로 우리집으로 살짝 가져가고 싶다.

 ◀  사랑채 뒷쪽 복도와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사랑채와 안채는 복도로 서로 이어져 있고, 그
복도로 경계를 삼고 있다.
저 문을 들어서면 사랑채 구역인데, 왼쪽에 삐
죽 나온 대각선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2층은 한상룡이 왜정의 고위층을 불러 배때기
늘어지게 놀던 현장으로 이후 다락방으로 쓰이
다가 지금은 금지 구역으로 출입을 금하고 있
다. 계단이 오르락내리락하기에는 다소 위험하
고, 2층 공간이 그리 넓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
다.


▲  사랑채 사랑방

사랑채 사랑방은 집 주인의 거처로 서울시에서 수집한 여러 가구와 병풍 등이 주인이 없는 방
을 채워주고 있다. 서랍이 많이 달린 가구 위에는 이곳을 거쳐간 백인제의 흑백 사진 3점이
놓여져 있어 생전의 잘나갔던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  사랑방에 놓인 백인제의 빛바랜 사진들

▲  고급진 모습의 사랑채 대청
집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거나 가족들과 담소를 나누던 공간이다. 개인적인 친분의
사람부터 높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군상들이 여기서 대접을 받았으며,
창 밖으로 사랑채 뜨락이 훤히 바라보여 시야도 좋다.

▲  정면에서 바라본 사랑채 대청 탁자와 의자들

▲  빛바랜 사진 1장

사랑채 대청에는 백인제 가족이 남긴 흑백사진이 하나 놓여져 있다. 백인제가 서재필(徐載弼)
을 집으로 초청해 연회를 열고 사랑채 뜨락에서 기념 촬영을 한 것으로 순 남자들만 있는 가
운데 여자 1명이 사진 중앙에 홍일점이자 옥의티처럼 자리해 눈길을 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은 누구일까? 그는 백인제의 부인인 최경진으로 서재필이 사진 중앙에 있어
야 되지만 사람들의 양보로 부인을 중앙에 앉힌 모양이다. 무릎 밑까지 오는 치마를 입고 긴
머리에 꽃잎으로 보이는 머리 장식을 달고 있는데, 얼굴 또한 괜찮게 생겼다. 남자들 속에 있
어서 다소 부담스러웠던지 시선을 조금 오른쪽으로 향하며 시선 일탈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부인의 왼손 쪽에 앉은 이가 서재필이다. (백인제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음)


▲  중문간채 중문

사랑채를 둘러보고 안채에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안채 뜨락에서 중문까지 나머지 설명을 들
으면서 40여 분에 걸친 가이드투어는 쿨하게 마무리 되었다.
가이드는 관리사무소로 내려갔고, 나는 그냥 사라지기 아쉬워 중문 주변에서 두 발을 멈추었
다. 이렇게 백인제가옥을 최대한 갈 수 있는 범위까지 모두 가본 것이다. 자유관람과 가이드
투어를 포함한 관람시간은 1시간 40분 정도, 서울시는 이곳을 일종의 민속박물관으로 삼으려
고 오래된 생활유물을 수집해 비어있는 방과 부엌에 배치하고 있다. 그들 덕에 방의 허전함은
많이 가셔진 상태. 그들도 없었다면 무척 허전했을 것이다. 특히 안채와 사랑채에는 방이 무
지 많아 숨바꼭질을 벌여도 될 정도이다. 사랑채 지붕 위에 만든 2층 방과 부엌 위에 만든 반
2층짜리 방 등 숨겨진 방도 많으니 말이다.

10여 분 정도 사랑채 뜨락과 솟을대문 주변에 머물다가 다음을 기약하며 쿨하게 고래등 기와
집 대문을 나섰다. 이렇게 하여 백인제 가옥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다음에는 윤보
선가옥도 꼭 개방되어 이렇게 글을 남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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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1월 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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