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산사'에 해당되는 글 136건

  1. 2023.04.08 늦겨울 산사 나들이 ~ 안양 삼성산 염불사, 비봉산 망해암 <안양예술공원, 망해암 석조여래입상>
  2. 2023.03.05 서울의 상큼한 남쪽 지붕, 삼성산~호암산~목골산 <관악산호수공원, 성주암, 서울둘레길5코스, 독산자락길>
  3. 2023.01.31 늦겨울 산사 나들이, 강화도 마니산 정수사 (정수사 법당, 사기리분청사기요지, 사기리탱자나무, 이건창생가)
  4. 2022.12.31 한겨울 산사 나들이 ~ 작은 계곡과 폭포를 지닌 고즈넉한 산사, 부산 백양산 선암사
  5. 2022.12.14 동양 최대의 황금법당을 지닌 고즈넉한 산사, 구산동 수국사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만난 수국사의 늙은 보물들)
  6. 2022.10.19 성북동 북쪽 끝에 숨겨진 고즈넉한 산사, 삼각산 정법사 (복천암터, 산사길, 북악산길)
  7. 2022.09.24 서울의 북쪽 지붕이자 우리 동네 뒷동산, 도봉산 <무수골, 우이암(관음봉), 관음암, 천축사>
  8. 2022.09.12 늦여름 산사 나들이, 문경 운달산 김룡사 (운달계곡)
  9. 2022.09.04 한여름 산사 나들이, 안성 고성산 운수암 (무한성, 무양성)
  10. 2022.08.24 연꽃의 달달한 향연 속으로, 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문화축제)

늦겨울 산사 나들이 ~ 안양 삼성산 염불사, 비봉산 망해암 <안양예술공원, 망해암 석조여래입상>

안양 삼성산 염불사, 망해암



' 늦겨울 산사 나들이 '
(안양 삼성산 염불사, 망해암)

삼성산 염불사

▲  삼성산 염불사(염불암)

망해암 석조여래입상 염불사에서 바라본 천하 (비봉산, 안양시내, 수리산)

▲  망해암 석조여래입상

▲  염불사에서 바라본 안양 지역
(비봉산, 수리산)

 



 

천하를 놓지 않으려는 욕심꾸러기 겨울 제국과 차디찬 겨울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려는 봄
이 팽팽히 맞붙던 3월의 첫 무렵, 친한 후배와 안양(安養)에 있는 염불사와 망해암을 찾았
다.

삼성산(三聖山, 480m) 남쪽 자락에 자리한 염불사를 가려면 안양 제일의 명소로 추앙을 받
는 안양예술공원을 거쳐야 된다. 예술공원을 가르며 안쪽으로 들어서면 염불사로 인도하는
포장길(예술공원로245번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20~25분 정도 묵묵히 오르면 염불사가 활
짝 모습을 비춘다.


▲  소나무 그늘 밑에 앉아 삼성천을 굽어보는 안양정(安養亭)
<안양사입구 동쪽에 자리함>

▲  염불사로 인도하는 숲길(예술공원로245번길)
봄의 해방군이 거의 문턱까지 이르렀지만 삼성산 숲은 여전히 겨울 속을 방황한다.
허나 소쩍새가 울 때면 저들도 겨울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활짝 기지개를
켤 것이다.



 

♠  삼성산 남쪽 자락에 깃든 고즈넉한 산사, 절벽을 병풍처럼
두르며 안양을 굽어보고 있는 ~ 삼성산 염불사(念佛寺)

삼성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깃든 염불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삼성산에서 삼막사(三幕
寺, ☞ 관련글 보기) 다음으로 큰 절이다. 오랫동안 삼막사의 부속 암자로 있으면서 염불암(
念佛庵)이라 불렸으나 근래에 그 그늘에서 벗어나 '암(庵)'에서 '사(寺)'로 칭호를 높였다.

절의 이름은 신라 중기에 의상(義湘)과 원효(元曉), 윤필(潤筆)이 이곳에 있던 토굴(土窟)에
서 불도를 닦으며 염불을 올렸다고 해서 유래된 것이라 전한다. 윤필이 이곳에 절을 짓고 수
도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하고 있으나 다들 신빙성이 없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
다.
또한 926년(또는 936년)에 고려 태조(太祖)가 후백제(後百濟)를 치고자 삼성산 옆을 지나다가
안양사 창건설화(☞ 관련글 보기)에도 등장하는 능정(能正)이 삼성산 자락에서 좌선(坐禪)에
들어있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염불사의 전신(前身)인 안흥사(安興寺)를 세웠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하고 있다.
하지만 고려 때 유물이 전혀 없고 안양사(安養寺) 창건 설화와도 상당수 비슷해 이 역시 신빙
성은 떨어진다. 1407년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고자 왕명으로 관악산의 여러 절과 함께
중창했다고 전하는데, 경내에 500년 묵은 보리수나무가 있어 이때쯤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
다.

창건 이후 오랫동안 사적이 없다가 1857년에 이르러 청허(淸虛)와 도인(道人)이 칠성각을 세
웠다. 1904년과 1927년에 중수했으며, 1930년에는 세심루(洗心樓)를 세우고, 1932년에 산신각
, 1941년에 대웅전과 칠성각을 중수했다. 그리고 1964년에 미륵불을 세우고, 1992년에 대웅전
을 옮겨 크게 중창했으며, 2000년에 나한전을, 2008년에 석조관음보살상을 지었다.

석축을 높게 다져 크고 작은 건물을 심었는데, 칠성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20세기에 지어진
것들이라 겉에서 풍기는 고색의 내음은 거의 없다. 소장문화유산은 비록 지정문화재는 없으나
500년 묵은 보리수와 19세기에 조성된 승탑(부도) 3기, 바위에 새겨진 마애승탑(磨崖僧塔, 마
애부도) 2기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준다. (마애부도는 못봤음)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해 나한전, 염불전, 칠성각, 영산전, 산신각 등 약 10동
의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 뒷쪽에는 소나무가 솟은 멋드러진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데,
그 벼랑에도 조그만 건물과 미륵불을 주렁주렁 달아놓아 일대 장관을 연출한다. 그렇다고 요
란하게 벼랑을 밀어버린 것은 아니며 약간의 손질만 가해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안양예술공원에서 삼막사, 삼성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황금 길목이라 자연히 절을 둘러보는 수
요도 제법 되는 편이며, 벼랑에 닦여진 산신각과 칠성각에서 바라보는 삼성산과 안양시내 풍
경은 두 안구와 마음을 시원하게 어루만져준다.

* 염불사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41-52 (예술공원로245번길 150, ☎ 031-
  471-2300)

▲  옛 대웅전 자리에 세워진 염불전(念佛殿)

▲  염불전 앞쪽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  요사(寮舍) 앞뜨락과 질서정연하게 들어선 장독대들(왼쪽)
장독대에는 어떤 먹거리들이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을까? 살짝 뚜껑을
열어 그 속살을 들춰보고 싶다.

▲  염불사 대웅전(大雄殿)

돌계단을 타고 경내로 들어서면 남쪽을 굽어보는 대웅전과 염불전이 제일 먼저 모습을 비춘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원래는 그 우측 염불전 자리에 있
었는데, 1992년에 주지 성수화상이 의상과 원효, 윤필 3명의 고승이 수도를 했던 터로 여겨진
다는 현재 자리로 옮겨 크게 지었다.
현재 염불사의 사세를 보여주듯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며 지붕을 받치며 촘촘히 박혀있는 공포
는 그 아름다운 섬세함에 감탄이 새어 나오게 한다. 건물 주변으로 하얀 피부의 난간석을 둘
렀으며, 계단 앞에는 석사자 2기를 배치해 혹시 모를 화마(火魔)의 공습에 대비했다.

대웅전 내부에는 금빛 찬란한 석가여래3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제
스처를 취한 석가여래 좌우로 수려한 자태의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시
립(侍立)해 있는데, 이들은 1992년에 은행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며, 그들 뒤에는 색채가 고운
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  대웅전 좌측 석조관세음보살상

대웅전 좌측에는 2008년에 새로 지은 석조관세음보살상이 있다. 파리도 능히 미끄러질 정도로
매끈한 하얀 피부를 지닌 그의 좌측에는 육환장(六環杖)이란 긴 지팡이를 쥐어든 지장보살(地
藏菩薩)이 관세음보살보다 훨씬 낮은 연화대(蓮花臺)에 서 있고, 우측에는 산신(山神)이 의자
에 앉아 있다. 그들 뒤에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병풍처럼 들러져 있는데, 벼랑 윗쪽 소나무
사이로 독성각이 아찔하게 버티고 있다.


▲  대웅전 앞 3층석탑

대웅전 앞뜰에는 독특한 모습을 지닌 새하얀 3층석탑이 자리해 있다. 8각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조그만 기단을 깔고, 그 위로 부처가 새겨진 8각의 탑신(塔身)을 얹
힌 다음 보주(寶珠)로 마무리를 했는데, 그가 있기 전에는 경내에 그 흔한 탑조차 없었다.

        ◀  염불사 보리수(菩提樹)
탑 옆에는 염불사에서 가장 늙은 존재인 보리
수가 자라고 있다.
보리수의 원래 이름은 '보디 브리크샤(Bodhivr
iksa)'로 부처가 붓다가야 보리사에 있는 보리
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불교에서
매우 애지중지하는 나무이다. 무화과와 흡사한
뽕나무과 상록수로 인도대륙 힌두교에서도 신
성시 여기는 나무이기도 하다.

보리수는 우리나라에는 그리 많지 않은 나무로
아무리 부처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의미심장한
나무라고 해도 겨울 제국 앞에서는 예외가 없
다. 제국의 시련을 겪어야 되기 때문이다. 나
무를 감싸던 푸른 잎들은 모두 녹아 없어졌고,
가지만 앙상하게 드러내며 봄의 해방군을 간절
히 염원한다.

이 나무는 15세기에 이곳에서 수도하던 승려가 심었다고 전하며, 이를 통해 적어도 조선 초기
에 염불사가 숨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람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할 500년의 장대한 나이를
먹었지만 높이 12m, 둘레 1.2m로 비슷한 나이의 다른 나무에 비해 체격은 조그만 편이며, 
양시 보호수 5-2호
의 작은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나한전(羅漢殿)
염불전 뒤쪽에는 1990년대에 지어진 나한전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2000년에 조성된 500나한과 16나한이 봉안되어
있다.


▲  염불사 산신각(山神閣)

대웅전과 나한전 뒤쪽에는 기암괴석으로 그윽한 높은 벼랑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염불사의
든든한 후광이자 절을 더욱 장엄하게 꾸며주는 그 벼랑에는 산신각, 칠성각, 독성각, 영산전,
미륵불 등이 군데군데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미륵불과 칠성각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마치 천
하가 내 발 밑에 펼쳐진 듯, 천하 일품을 자랑한다.

대웅전 뒷쪽 나무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면 제일 먼저 절벽 사이 좁은 공간에 들어앉은 산신
각을 만나게 된다. 경내를 굽어보는 산신각은 1칸에 불과한 조촐한 맞배지붕 집으로 조선 후
기부터 전해오던 것을 1932년에 중수했다. 지붕은 목조이나 건물 벽은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부에는 1970년대 후반에 그려진 산신도가 걸려 있다.
이곳에 서면 경내는 물론이고 삼성산 남쪽 산줄기인 비봉산(295m)과 안양을 서쪽에서 보듬은
수리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산신각에서 바라본 천하
삼성산 남쪽 산자락과 비봉산, 안양시내, 수리산이 두 망막에 들어온다.

▲  산신 가족이 담겨진 산신탱

▲  독성각(獨聖閣)

산신각에서 동쪽으로 난 조그만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면 벼랑 위에 조마조마하게 버티고 앉
은 독성각이 나온다. 석조관세음보살상 바로 뒷쪽 벼랑으로 경내에서 가장 궁색하고 위험한
곳에 자리해 있는데, 그 많은 자리 가운데 굳이 이곳에 힘들게 독성각을 닦았는지 의문이다.
독실한 불심(佛心)이 낳은 결과일까? 아니면 경내의 명물로 키우려는 욕심의 산물일까?

독성각은 산신각과 거의 쌍둥이꼴 모습으로 1칸짜리 맞배지붕 집이다. 지붕은 목조로 이루어
져 있고 벽은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건물 바로 앞이 천길 낭떠러지라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
다. 비록 난간이 둘러져 있긴 해도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으며 촘촘하지 못하기 때문
이다.

산신각과 비슷한 시기에 중건된 것으로 여겨지
며, 건물 내부에는 근래에 그려진 독성탱이 걸
려있다.
독성탱에는 독성(獨聖) 할배와 동자, 사슴, 소
나무, 그의 본거지인 천태산(天台山)이 담겨져
있다.

   ◀  독성 가족의 단란함이 깃든 독성탱

산신각을 지나면 절벽에 등을 대며 남쪽을 바
라보고 선 석조미륵불이 모습을 비춘다. 1960
년에 주지인 기석화상의 꿈속에 미륵불이 나타
나 이마를 쓱쓱 어루만지며
'마애석불을 만들어 널리 중생을 구제하라'

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당시 기석은 낡고 퇴락한 염불암을 다시 일으
킬 궁리를 했었는데, 미륵불의 현신에 용기를
얻고 1964년부터 5년간 공을 들여 석불을 완성
하고 공덕비를 세웠다.
미륵불은 연꽃이 새겨진 연화대 위에 서 있으
며, 전체적으로 풍만한 느낌을 던진다. 머리에
는 2중으로 된 보관(寶冠)을 썼고, 얼굴은 다
소 경직되어 보이며, 입가에는 넌지시 미소가
드리워져 중생을 살짝 위로한다.
오른손으로 시무외인, 왼손으로 여원인을 취하
며 안양 시내를 굽어보는 미륵불 옆에는 산신
각과 쌍둥이 꼴인 영산전이 있다.

▲  염불사 석조미륵불

미륵불에서 더 올라가면 그 계단의 끝에 칠성
각이 수비병처럼 자리해 경내를 굽어본다.
칠성각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겉보기와 다르게 1857년에 지어져 염불사에서
가장 늙은 집이다.
벼랑 사이에 간신히 비집고 들어앉았으나 산신
각과 독성각보다는 조금은 여유로워 정면 2칸,
측면 1칸의 구조를 지녔으며, 내부에는 1979년
에 제작된 칠성탱이 있다.

▲  벼랑 위에 자리한 칠성각(七星閣)


▲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펼쳐진 칠성각 칠성탱

▲  칠성각에서 바라본 천하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이라 앞서 산신각보다 조망의 품질이
조금은 높아졌다. (그래봐야 보이는 범위는 비슷함)

▲  19세기에 조성된 염불사 부도(승탑)들

영산전에서 대웅전으로 내려가는 계단 대신 서쪽 산길로 내려가면 나한전 서쪽에 자리한 부도
<浮屠, 승탑(僧塔)> 3형제를 만날 수 있다.
이들은 이 땅에 흔한 석종형(石鐘形) 부도로 왼쪽부터 도일당(道日堂), 인봉당(印奉堂), 서영
당(西影堂) 탑인데, 원래는 절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싹 집합시킨 것이다. 그들
모두 1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탑신 피부에 탑 주인과 조성 관련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조
성 시기를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단 도일당은 조성 시기 부분이 마멸됨)

▲  도일당탑

▲  인봉당탑

◀  서영당탑에 깨알처럼 새겨진
글씨들

왼쪽에 자리한 도일당탑은 높이 167cm로 바닥돌은 없다. 장대한 세월의 무심한 장난으로 탑이
두 동강이 난 것을 다시 붙였는데, 중간에 난 금이 그 흔적이다. 탑 중앙에는 얇게 홈을 파서
깨알처럼 글씨를 넣었으나 마멸이 심하며 탑 꼭대기에는 동그란 보주(寶珠)를 두었다.

중앙에 있는 인봉당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늘씬한 자태에 탑신을 올리고 반구형 보주로 마
무리를 지은 탑으로 높이 143cm, 조성 시기는 1816년이다. 도일당탑처럼 탑 앞쪽을 다듬어 글
씨를 넣었는데, 글씨가 아직은 선명하여 한자를 조금 안다면 알아보는데 그리 무리는 없다.
그리고 오른쪽에 자리한 서영당탑은 1810년에 조성된 것으로 바닥돌이 탑의 거의 2/3를 차지
할 정도로 무척 크고 견고하다. 자연석을 가져와서 조금 손질을 가해 바닥돌로 깔고 탑과 반
구형 보주를 올렸는데, 옆에 있는 승탑과 비슷한 모습이다.

이들은 19세기 초반 염불사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알려주는 존재이자 경내에서 보리수 다음으
로 오래된 존재로 이들 외에도 경내 부근에 바위에 새겨진 19세기 마애승탑 2기가 있으나 인
연이 닿지 못해 만나지 못했다. (그때는 그들의 존재를 전혀 몰랐음)


▲  염불사를 뒤로하며



 

♠  삼성산 남쪽 비봉산 자락에 높이 들어앉은 고즈넉한 산사
일몰 풍경과 조망이 일품인 망해암(望海庵)

▲  망해암으로 인도하는 비봉산 숲길(임곡로)

안양예술공원 남쪽에는 삼성산과 관악산의 남쪽 산줄기인 비봉산(295m)이 누워있다. 그 서쪽
자락 가파른 곳에는 망해암이란 고찰(古刹)이 안양시내를 바라보며 자리해 있는데 그곳에 늙
은 석불 하나가 깃들여져 있고 조망과 일몰이 천하일품이라는 풍문을 익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곳과는 계속 인연이 닿지 않았고, 어느 3월 첫 무렵에 이르러 억지로 인
연을 붙여 오랜 세월 목말라했던 그곳을 찾았다. (삼성산 염불사와 같은 날에 간 것은 아니나
같은 지역에 있고 서로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어서 편의상 본글에 넣었음)

안양역(1호선)에서 안양마을버스 3-1번을 타고 비산1동 임곡주공아파트 종점에서 내렸다. 여
기서부터 두 다리에 의지해 오르막길(임곡로)을 올라가야 되는데, 처음에는 아파트와 학교,
주택들이 좌우에 펼쳐져 있으나, 5~6분 정도 오르면 싱그러운 비봉산 숲길이 펼쳐져 속세의
번뇌를 털어준다.
차량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절까지 포장길이 닦여져 있는데, 구불구불한 숲길을 20여
분 오르면 해발 200m 고지에 들어앉은 망해암이 활짝 모습을 비춘다. 임곡주공아파트 종점에
서 도보 30분 정도 걸리며, 안양예술공원에서도 망해암까지 산길이 이어져 있다.


▲  일몰을 온몸으로 받고 있는 망해암 종무소(宗務所)
가파른 지형을 이용해서 만든 2층 건물로 윗층에서 바라보는 조망과
일몰 맛이 아주 좋다. (윗층 바깥 통로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음)

▲  한 지붕 두 가족, 2층 건물
윗층은 천불전(千佛殿), 아랫층은 지장전

▲  지장전(地藏殿) 석조지장보살좌상
큰 바위를 다듬어 그의 거처를 닦았다.


망해암은 북쪽으로 안양예술공원과 삼성산이 보이고, 완전히 확 트인 서쪽으로 안양시내와 수
리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날씨가 정말 좋으면 수리산 너머로 서해바다까지 시야에 들어오는데
, 서해바다가 강제로 땅으로 매립되면서 바다를 볼 기회는 많이 줄었다. 어쨌든 바다까지 보
이는 매력 때문에 절의 이름도 바다를 바라보는 절이란 뜻에 망해암이 되었으며, 여기서 바라
보는 조망과 일몰, 안양 야경(夜景)이 아주 진국이라 안양9경의 제4경이자 으뜸으로 오랫동안
찬양을 받고 있다.

이곳은 조계종 소속으로 화성 용주사(龍珠寺)의 말사(末寺)이다. 신라 중기에 원효대사(元曉
大師)가 창건했다고 내세우고 있으나 신빙성은 전혀 없으며, 경내에 고려 초/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늙은 석조여래입상이 전하고 있어 신라 후기나 고려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407년 서울을 위협하는 관악산의 산천기맥(山川氣脈)을 싹 누르고자 관악산과 삼성산 주변의
절을 중창했는데, 이때 중건의 혜택을 받았다고 전하며, 1803년에 헌경왕후(獻敬王后) 홍씨(
혜경궁홍씨)의 지원으로 중창했다. 그리고 1863년 대연화상이 증수했으며, 이후 6.25때 파괴
된 것을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용화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천불전, 지장전, 종무소 등 6~7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고려 때 지어진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그는 용화전에 들
어있는데, 그의 보개에 1479년에 조성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그때 지어진 것으로 봤으나
석불의 감정 결과 고려 전기 것으로 판명되었다. 하여 보개에 쓰여진 내용은 석불 중수나 석
불 보개를 씌운 시기로 보인다.
안양과 삼성산 일대에서 꽤 늙은 석불이고, 그와 관련된 글씨를 품고 있음에도 그 흔한 지방
문화재의 지위도 얻지 못했다가 2022년 5월에 비로소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망해암과 관련해서 재미난 전설이 하나 전해오고 있으니 내용을 대략 이렇다. 조선 세종 시절
, 남부지방에서 조세를 싣고 서울로 향하던 배가 인천 월미도(月尾島) 부근을 지나다가 거센
풍랑으로 침몰 위기에 빠졌다. 선원들은 크게 당황하며 우왕좌왕하던 그때 뱃머리에서 난데없
이 승려가 나타나 혼란에 빠진 선원들을 진정시켰고, 그 사이 풍랑은 멈추었다.
선원들은 승려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어느 절에서 왔는지를 물었고, 승려는 관악산 망해암에서
왔다고 답을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선원들은 서울에 도착해 조세 수송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그 승려에게 답례를 하고자 망해암
을 찾았다. 허나 승려는 없고 그와 비슷하게 생긴 석불만 법당에 덩그러니 있는 것이다. 하여
그들은 깨달은 바가 있어 나라에 상소를 올려 이 사실을 고하니 이를 가상히 여긴 세종이 매
년 공양미 1섬씩을 석불에게 보냈으며, 조선 후기까지 계속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이를 통해 배로 조세나 쌀을 나르던 선원이나 관리가 절에 시주를 하며 뱃길의 안녕을 기원한
것으로 여겨진다. 게다가 여기서 인천 앞 서해바다까지 바라보이니 기원을 하기에도 딱 좋다.
그들의 건의로 나라에서도 조세 수송의 안전을 위해 공양미를 보냈던 것으로 보이며, 그것을
픽션이란 양념을 적당히 넣어 전설로 다듬은 것이다.

* 망해암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 55-1 (임곡로245, ☎ 031-443-5559)

▲  삼성각(三聖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건물로
산신, 독성, 칠성이 봉안되어 있다.

▲  석불입상의 거처인 용화전(龍華殿)
용화전 밑에는 2층 건물을 두어 요사,
선방 등으로 사용한다.


▲  용화전에 봉안된 망해암 석조여래입상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383호

용화전에 소중히 깃든 석조여래입상은 망해암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자 이곳의 대표 보물이다.
이렇게 보면 어깨와 얼굴, 보개(寶蓋)만 있는 것처럼 보이나 저것은 불단 때문에 가슴 아래가
강제로 가려진 것일 뿐, 나머지 부분은 잘 남아있다. 하여 불단 옆에서 봐야 그의 가려진 옆
구리와 아랫도리 모두 확인할 수 있다.
(2021년 6월에 건물 마루에 오랫동안 가려진 밑도리를 들춰내 그의 다리와 발, 대좌 일부를
새로 확인했음)

이 석불은 높이 3.4m로 보개 밑에 '성화(成化) 15년 4월'이라 쓰여있어 1479년 4월에 석불을
중수하거나 보개를 씌웠음을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예전에는 그때 조성된 석불로 봤으나
평가 결과 고려 초/중기 것으로 나와 안양과 삼성산 일대에서 제일 오래된 석불로 꼽힌다.
육계(무견정상)가 솟은 머리에는 둥근 모습의 보개가 씌워져 있으며, 머리와 보개는 검은색을
칠했으나 지금은 많이 지워졌다. 상호와 신체는 하얀색으로 분을 칠했으며, 나발을 갖춘 머리
는 다소 마모되었다.
머리 정면 중앙에는 계주가 있으며,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듯한 두 눈은 반쯤 떠서 아래를 보
고 있고, 입과 코는 두툼하다. 양쪽 귀는 매우 크며,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통견으로 두껍
게 처리했다. 왼손은 가슴 앞에 대고 엄지과 검지를 맞대고 있으며, 오른손은 오른쪽 다리로
내렸다. 20세기 이후 조금 변형되긴 했으니 상태는 괜찮은 편으로 조성 관련 명문이 새겨진
탓에 고려와 조선 초기 석불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앞서 망해암 전설에서 선원을 구한 승려의 화신으로 나오며, 조정에서도 공양미를 보내 그를
챙겨줄 정도로 그가 있기에 망해암도 이렇게 무탈하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망해암에 왔다면
이 석불도 꼭 챙겨보기 바란다. 그를 놓치면 망해암의 50%를 놓친 것과 다름이 없다.

▲  옆에서 바라본 석조여래입상의 위엄
불단에 가려 보이지 않던 부분이 싹 모습을 비춘다. 약간의 변형과
세월을 탄 흔적이 좀 있으나 건강상태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  용화전 지킴이, 신중탱(神衆幀)

▲  망해암에서 바라본 안양시내와 수리산


▲  오늘도 해는 진다. 망해암에서 바라본 일몰

천하를 따사롭게 대피던 햇님은 퇴근시간이 다가오면서 그만의 공간으로 가고자 슬슬 휘장을
거두고, 진하게 보이던 안양시내도 그만큼 흐릿하게 다가온다. 그 틈을 타서 달님이 주관하는
어둠이 내려앉으니 사람도, 도시도, 산도 어둠을 몰아내고자 불빛을 여기저기서 발산하고 검
게 익은 안양의 산하는 그것을 얼굴에 바른다.
하여 여기서 바라보는 일몰과 조망 외에도 안양의 야경도 정말 일품인데, 이날 야경까지는 생
각이 없고 날씨도 추우므로 야경은 언제가 될지 모를 막연한 미래로 내던지고 안양예술공원으
로 쿨하게 내려갔다.

이렇게 하여 늦겨울 삼성산 염불사, 망해암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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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상큼한 남쪽 지붕, 삼성산~호암산~목골산 <관악산호수공원, 성주암, 서울둘레길5코스, 독산자락길>

삼성산, 호암산, 목골산 초여름 나들이



' 삼성산, 호암산, 목골산 초여름 나들이 '

호암산
▲  호암산

삼성산 성주암 호암산 북쪽 능선길

▲  삼성산 성주암

▲  호암산 북쪽 능선길

 



 

여름 제국이 서서히 고개를 쳐들던 6월의 끝 무렵, 내 즐겨찾기 뫼의 하나인 호암산(虎
巖山, 393m)을 찾았다.
툭하면 찾아오는 호암산 앓이도 잠시 해소하고 호암산과 삼성산(三聖山)에 아직까지 살
아남아 내 속을 긁는 몇 남지 않은 미답처들도 싹 정리하고자 찾은 것으로 햇님의 고개
가 서서히 꺾이던 15시에 서울대 정류장에서 길을 시작했다.
(산행시간 약 3시간, 산행거리 약 9~10km)



 

♠  관악산호수공원과 삼성산 성주암(聖主庵)

▲  삼성산과 관악산으로 인도하는 신림로 숲길

삼성산과 관악산(冠岳山, 632m)의 주요 북쪽 기점인 서울대 정류장에서 짙은 숲에 감싸인 도
로를 따라 15분 정도 가면 관악산호수공원이 잘빠진 호수와 자하정, 귀여운 석구상을 내밀며
마중을 한다.
오로지 성주암 등의 미답처(未踏處)에 정신이 팔려 그냥 넘어가려고 했으나 고양이가 생선가
게를 그냥 못 지나친다고 못이긴 척 잠시 발을 들였는데, 이곳은 서울대에서 관악산, 삼성산
으로 오를 때 꼭 거쳐가는 곳으로 바쁘면 돌아가라는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잠깐 들린다고
큰일 날 것은 없다.


▲  관악산 호수공원의 귀염둥이, 석구상(石狗像)
관악산 호수공원을 조성하면서 장만한 것으로 호암산 한우물 부근에 있는
석구상을 축소, 재현했다. 그런데 기분 탓일까? 실물보다는 이곳
석구상이 훨씬 귀엽게 다가온다.

▲  관악산 호수공원의 이름값을 하는 호수

지금은 상큼한 호수공원으로 있지만 예전에는 계곡물을 이용한 수영장이 있었다. 그 수영장은
문을 닫았으나 오랫동안 방치되어 흉물스럽게 있던 것을 1996년 12월부터 거의 1년에 걸쳐 손
질을 하여 1997년 12월 자연과 어우러진 호수공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공원에는 그 이름값을 하는 호수와 자하정, 석구상(1997년 11월 제작됨), 나무다리 2개, 분수
대, 쉼터 등이 있으며, 소나무 외 18종 9,180주, 초화류 수련 등 3,190본을 심어 아름답게 다
듬었다. 이렇게 싱그러운 공간이건만 바람직하지 않게도 옥의 티가 하나 있어 심히 불편함을
준다. 바로 왜정(倭政)과 독재 세력에 철저히 빌붙어 영혼을 팔고 부귀영달을 누렸던 서정주(
1915~2000)의 시비(詩碑)가 있다는 것이다.

서정주는 관악구 남현동(南峴洞)에서 30년이나 서식하여 관악구와도 인연이 깊다. 게다가 20
세기 주요 시인으로 쓸데없이 꼽히다보니 관악구청이 그의 그릇된 점을 살피지도 않고 문학적
업적만 내세우며 이렇게 개념도 없이 시비를 세운 것이다. 또한 서울시는 그보다 한술 더 떠
그의 남현동 2층 양옥을 인수해 내부 손질을 거쳐 그의 유품과 문학작품을 취급하는 기념관으
로 세상에 내놓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오히려 때려 부시고 연못을 파야 될 판에<예로부터 역적(逆賊)의 집은 말끔히 부시고 그 자리
에 연못을 팠음> 관악구와 서울시가 앞장을 서서 그의 흔적을 붙잡아 찬양하고 있으니 행정관
청 철밥통들의 역사의식과 개념들이 이렇게도 없다. <관악구는 낙성대(落星垈) 강감찬 장군의
영정이 도난을 당하자 이것도 쉬쉬하여 크게 욕을 먹은 화려한 전력이 있음>


▲  오늘도 평화로운 호수

호수는 거의 생태연못 수준으로 수초(水草)가 많고 오리와 물고기들이 유유자적 거닐고 있어
평화롭고 고요한 풍경, 그 자체이다. 세상이 시끄럽든 말든 여기서는 그저 다른 세상의 이야
기 같다. 섬 복판에는 동그란 섬까지 띄워놓아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숲 너머로 서울대 농업
생명과학대학 건물이 고개를 내밀며 이곳의 경치를 시샘한다.

    ◀  연못에 두둥실 띄워진 동그란 섬
섬에는 소나무 1그루가 바깥 세상을 거부하며
고고하게 솟아있다. 인간의 손길이 거의 미치
지 않는 곳이라 마음껏 나래를 펼치며 그 섬의
주인 노릇을 한다.

◀  호수공원의 화려한 입술, 자하정(紫霞亭)
1997년에 지어진 1칸짜리 팔작지붕 정자로 살
짝 들려진 처마의 선이 꽤 경쾌하고 아름답다.


▲  북서쪽에서 바라본 자하정과 호수, 그리고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  호수를 순찰하는 압공(鴨公, 오리)의 위엄
오늘도 저들이 있기에 호수는 평안하다.

▲  성주암을 알리는 표석
관악산 호수공원을 둘러보고 성주암으로 이동했다. 공원에서 성주암까지 10분
거리로 관악산119산악구조대를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성주암이 활짝 모습을 비춘다.

▲  성주암 대웅전(大雄殿)

삼성산 북쪽 끝자락이자 돌산 동쪽에 성주암(聖住庵)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원
효대사(元曉大師)가 677년에 창건했다고 하는데, 그가 절을 짓고 머물렀다고 해서 성주암이라
했다고 전한다. 즉 원효대사를 성스러운 존재로 높인 것이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
은 아쉽게도 없는 실정이다.

14세기에 각진국사(覺眞國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는데 태정원년<泰定 元年, 원나라(몽골) 태
정제의 연호, 1324년>이라 쓰인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이때 창건되거나 중창된 것으로 여겨진
다. 그것이 성주암에서 나온 것 중 가장 늙은 유물이다.
조선 성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삼막사(三幕寺), 안흥사<安興
寺, 염불사>, 망일사<望日寺, 망월암>와 더불어 관악산의 4개 사찰로 나오며 성주사(聖住寺)
로 기록되어 있다. (삼성산을 관악산의 일원으로 보기도 함) 또한 조선 후기에 제작된 '시흥
읍지(始興邑誌)'에는 삼막사, 호압사(虎壓寺), 염불사(念佛寺)와 함께 4개 절의 하나로 나와
있어 삼성산 일대에서 제법 인지도가 있던 절임을 알려준다.
1883년 금화형기가 만든 현왕탱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으며 오래된 석탑도 1기 있었으나 왜정
(倭政) 때 왜인이 빼돌렸다.

1897년 만월(滿月)이 폐허가 된 절터에 작은 암자를 지어 법등(法燈)을 다시 켰고 1966년 혜
담(慧潭)이 중창을 했다. 1971년 화강석을 이용해 대방(大房)을 지었고 1981년 종연(宗演)이
3년에 걸쳐 대웅전을 지었으나 1997년 10월 화재로 대웅전 등 목조 건물이 모두 날라가고 말
았다. 이때 서울과 경기도의 40여 사찰이 불의의 방화를 당했다.
이후 주지 재홍(才弘)의 지도 아래 승려와 신도들이 임시 천막을 치고 3년에 걸쳐 불사(佛事)
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으며, 2006년 12월 관악구 전통사찰로 지정을 받았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대방 등 4~5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늙은 유물은 커녕 고색도 다
말라버려 오랜 역사를 무색하게 한다. 절은 북/서/남쪽은 산으로 막혀있고 오로지 동쪽만 확
트여있어 관악산이 훤히 바라보이며 마치 알둥지처럼 자리 또한 포근하다. 게다가 절이 암자
에 걸맞게 아담하여 두 눈에 쏙 넣고 살피기에 별 부담이 없으며 대방 뒤쪽으로 돌산과 호암
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다.

* 성주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198 (신림로 15-250, ☎ 02-877-7180)

▲  성주암 대방(大房)
종무소와 선방, 요사(寮舍), 공양간의 역할을
하는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그 뒤쪽에
호암산으로 넘어가는 산길이 있다.

▲  11면 관세음보살상
큰 얼굴 하나에 작은 얼굴 10개 등, 11개의
얼굴을 지닌 관세음보살이 정병(政柄)을
쥐어들며 관악산을 지그시 바라본다.


▲  대웅전 석가3존상과 화려한 닫집
마침 유가족들이 49재 중이라 들어가지는 못하고 바깥에서 살짝 담았다.

▲  성주암에서 바라본 관악산의 위엄
성주암은 관악산 조망에 아주 최적화된 곳이다. 바로 정면에 관악산이
마치 풍경화처럼 펼쳐져 있으니 말이다.

▲  대웅전 뒤쪽 바위에 주렁주렁 달린 칠성탱과 산신탱, 약사여래상

성주암은 다른 절과 달리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머금은 그 흔한
삼성각(三聖閣)이나 산신각 등의 건물이 없고, 대신 대웅전 뒤쪽의 그늘진 암벽을 활용해 칠
성탱과 산신탱을 두어 노천 삼성각으로 삼았다.
그렇다고 바위 피부를 무작정 깎아서 만든 것은 아니며 별도의 돌판에 그들을 새겨 벼랑 앞에
두었다. 그리고 산신탱 위쪽 벼랑에는 석조(石造) 약사여래좌상을 두었는데 그가 경내에서 가
장 높은 곳을 장식하고 있다.

▲  하얀 피부의 석조 칠성탱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피부가 매끈하다.

▲  산신 가족이 담긴 석조 산신탱(밑)과
석조 약사여래좌상(위쪽)


▲  5층석탑과 마니차

성주암은 바로 눈에 보이는 대웅전 주변이 전부가 아니다. 대웅전 뒤쪽 벼랑에 칠성탱과 산신
탱 등이 있으며, 대방 뒤쪽으로 가면 8각으로 다듬은 참한 모습의 석탑과 그를 반원(半圓) 모
양으로 둘러싼 마니차가 있기 때문이다.

5층석탑은 성주암의 유일한 탑으로 8각의 바닥돌과 연꽃무늬와 팔부중상(八部衆像) 등이 새겨
진 기단석(基壇石) 위에 8각의 탑신(塔身)을 세우고 그 위를 보륜(寶輪) 등의 머리장식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탑 뒤에는 '마니차'란 동그란 돌덩어리가 주렁주렁 달려있는데 그는 티벳불교에서 전래된 것
으로 윤장대(輪藏臺)와 비슷한 것인데, 손으로 저것을 돌리며 염불을 하거나 소망을 빌면 경
전을 모두 이해한 것과 같다고 하며 소망도 같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옛날에는 글자를 모르는
까막눈이 많다보니 저런 것을 이용해 영업을 한 것이다.


▲  티벳 글자가 새겨진 마니차

마니차 밑에 있는 검은 피부의 돌판에는 1997년 이후 절 중창에 도움을 준 이들의 이름이 빼
곡히 적혀있다. 저들이 있기에 성주암이 다시 일어선 것이다. 그러니 너무 외형 확장과 재물
에 욕심내지 말고 오직 사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여 속세(俗世)를 위해 사는 아름다운 절이
되기를 바라면서 성주암과의 첫 인연을 정리한다.



 

♠  호암산과 서울둘레길5코스 거닐기

▲  성주암에서 호암산으로 인도하는 산길

5층석탑을 지나면 돌산, 호암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손짓을 한다. 그 길을 오르면 돌산 북쪽
으로 천하 둘레길의 대표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서울둘레길5코스(사당역↔석수역,
13.5km)와 관악산둘레길 2구간(서울대 정류장↔국제산장아파트, 4.7km)과 만난다.
둘레길 대신 하늘과 가까운 곳을 원한다면 호암산과 장군봉으로 이어지는 서남쪽 산길을 이용
하면 되며 관악산둘레길 2구간이 장군봉 북쪽까지 동행을 한다. (둘레길의 위치상 삼성산둘레
길이 맞지만 관악산둘레길을 칭하고 있음)

나는 산봉우리 대신 성주암과 호암산 북쪽 능선 등의 미답처 개척을 위해 왔으므로 호압사로
빠르게 이어지는 서울둘레길5코스를 택해 길을 재촉했다.


▲  솔내음이 오각을 간지럽히는 돌산 북쪽 산길

▲  서울둘레길5코스 약수사 윗쪽 구간

돌산 북쪽에서 호압사까지 서울둘레길5코스 구간은 느긋한 길의 연속이다. 오르락과 내리락이
반복되지만 호압사 직전 구간을 빼면 그 기복은 별로 없으며 관악산 산림쉼터, 약수사(藥水寺
), 삼성산성지 등의 조촐한 명소들이 연이어 포진해있어 가는 길이 심심치 않다.


▲  관악산 산림쉼터 (약수사 윗쪽~삼성산성지 구간)

잣나무와 메타세콰이아, 단풍나무를 빽빽히 심고 그 짙은 그늘에 쉼터를 닦았다. 숲 그늘에는
의자와 평상 등을 넉넉히 깔아 잠시 쉬어가거나 낮잠, 독서, 간식 섭취에 아주 좋으며 숲속도
서함도 비치하여 독서의 여유도 누리게끔 했다.


▲  관악산 산림쉼터 앞을 지나는 서울둘레길5코스

▲  삼성산성지 동쪽을 지나는 서울둘레길5코스 ①

▲  삼성산성지 동쪽을 지나는 서울둘레길5코스 ②
오로지 정면에 보이는 먹이를 향해 질주하는 맹수처럼 삼성산성지는 쿨하게
통과했다. 어차피 적지 않게 인연을 지은 곳이다.

▲  수풀을 앙증맞게 다져놓은 서울둘레길5코스 (삼성산성지~호압사 구간)

▲  호암산 밑에 이르다 (사진에 보이는 산이 호암산 정상)

삼성산성지에서 10여 분 정도 오르면 호압사 분기점에 이른다. 이곳에는 넓게 쉼터가 닦여져
있는데, 남쪽으로 각박하게 이어진 산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호암산 정상에 이르며 호압사는
쉼터 서쪽에 펼쳐져 있다.
호암산에 가면 보통 호압사를 끼고 가는지라 이곳 분기점은 아주 낯이 익다. 여기서 보통 호
압사와 서울둘레길5코스 석수역 방향인 서쪽, 삼성산성지와 서울둘레길5코스 서울대 방향인
동쪽, 정상과 한우물 방향인 남쪽으로만 주로 갔지 북쪽 길은 단 1번도 가지를 않았다. 아무
래도 동/서/남쪽으로 호압사와 한우물, 석구상, 호암산 잣나무산림욕장, 서울둘레길5코스 등
호암산의 알짜배기 명소들과 잘생긴 바위들, 일품 조망들이 펼쳐져 있고, 삼성산과도 이어지
므로 버릇처럼 자꾸 가던 쪽으로만 간 것이다. 반면 북쪽은 딱히 흥미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북쪽을 개척하고자 찾은 것이다.


♠  호암산 북쪽 능선(독산자락길)과 목달산

▲  호압사분기점 북쪽 헬기장

호암산 북쪽 능선은 시흥동과 독산동(禿山洞), 난곡 사이로 펼쳐진 긴 산줄기이다. 북쪽으로
독산자연공원까지 이어져 금천구(衿川區)의 북쪽 지붕이자 관악구(冠岳區)의 서쪽 지붕을 이
루는데, 선우공원 주변은 따로 목달산이라 불리며, 그 산줄기를 따라 '독산자락길'이 호압사
분기점에서 독산고교(독산자연공원)까지 이어진다.
 
처음에는 독산고교까지 욕심을 냈으나 산길이 생각 밖으로 너무 길었다. '아니 이렇게나 긴
산줄기였나?' 크게 놀라며 1시간이나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그곳 남쪽인 쌍용아파트에서 길을
접고 철수했다. 몸도 지쳤고 햇님의 퇴근시간도 임박했기 때문이다.


▲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①

▲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②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은 북쪽을 향해 천천히 내려앉는다. 그러다보니 길도 완만하
고 숲도 삼삼해 여름 햇살도 눈치를 보며 내려앉는다. 정면만 본다면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산을 거니는 기분이나 좌우로 시가지가 진하게 바라보여 그 감흥을 50% 이상 떨어트린다. 이
는 1960년대 이후 서울이 나날이 비대해짐에 따라 개발의 칼질이 호암산과 목골산의 살을 마
구 후벼 팠기 때문이다.
다행히 늦게나마 도시공원과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이 정도라도 남게 된 것이지 그것도
아니었으면 아마도 호암산 북쪽 능선의 대부분은 절단이 났을 것이다.


▲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③

▲  호암산 북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④

▲  독산자락길(호암산 북쪽 능선길) 시흥4동과 난향동 경계 구간
이쪽에 이르면 시흥4동과 난향동(난곡) 주택가가 능선 좌우로 너무 깊게 들어와
산세 폭이 200m 내외로 확 좁혀진다. 허나 이곳을 지나면 목골산이
나오면서 다시 산세가 넓어진다.

▲  목골산 남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①

목골산(163m)은 호암산의 북쪽 끝이자 삼성산의 서북쪽 끝으머리를 잡고 있는 뫼이다. 독산동
과 시흥4동, 난곡(난향동, 난곡동, 미성동)에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 자락에는 선우공원이 넓
게 자리해 있다.
서쪽과 남쪽은 경사가 조금 있으나 북쪽과 동쪽은 완만하며 선우공원을 중심으로 미성동둘레
길이 별도로 닦여져 있다. 이 둘레길은 독산고교 뒤쪽에서 시작해 정심초교 뒤쪽 → 관악구
민방위교육장 → 목골산 북쪽 자락 → 선우공원 동부 → 영산홍동산을 거쳐 독산고교로 이어
지는 3.4km의 순환형 길이다.


▲  목골산 남쪽 능선길(독산자락길) ②

▲  목골산에서 만난 이정표 의자
이정표 역할을 하는 의자는 처음 본다. (동네 사람들이 만든 것임)

▲  잠시 하늘로 솟구치는 목골산 능선길

▲  목골산 미성동둘레길

▲  목골산 영산홍동산

선우공원 북쪽에 영산홍이 잔뜩 깃든 영산홍동산이 있다. 영산홍은 4~5월에 홍자색(紅紫色)
꽃을 피우는데 내가 갔던 때는 6월 말이라 영산홍은 커녕 그 떨어진 잎도 없었다. 이는 영산
홍의 잘못이 아닌 철을 맞추지 못하고 찾아온 나의 불찰이다. 다음에 영산홍 철에 다시 한번
찾아와 이곳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맛보고 싶다.


▲  목골산을 내려가며

영산홍동산을 내려가니 쌍용아파트가 나온다. 여기서 북쪽 산이 독산자연공원이나 시간도 이
미 18시가 넘었고 몸도 지친 터라 쿨하게 길을 접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성주암부터 해서 적
지않은 미답지를 지웠으니 그것으로도 충분히 보람을 느낀다.
이렇게 하여 초여름 삼성산~호암산~목골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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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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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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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겨울 산사 나들이, 강화도 마니산 정수사 (정수사 법당, 사기리분청사기요지, 사기리탱자나무, 이건창생가)

강화도 늦겨울 나들이 (마니산 정수사, 사기리 탱자나무, 이건창생가)



' 강화도 늦겨울 나들이 '
(마니산 정수사, 사기리 지역)

정수사 법당

▲  정수사 법당(대웅보전)

사기리 탱자나무 이건창생가

▲  사기리 탱자나무

▲  이건창 생가

 



 

차디찬 겨울의 한복판인 2월 끝 무렵의 어느 덜 추운 날, 오랜만에 강화도(江華島)를 찾
았다.
강화도(강화군)는 늘 구미가 당기는 곳이라 그곳의 적당한 메뉴를 고르던 중, 마니산 정
수사에 딱 눈이 멈춰섰다. 그곳은 이미 2번이나 인연을 지은 곳이지만 무심한 세월이 훔
쳐간 아련한 옛 추억도 잠시 곱씹을 겸 흔쾌히 그곳을 택했다. 자고로 좋은 곳은 두고두
고 찾아가는 법이다.

오전 늦게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70여km 떨어진 강화도의 동남쪽 중심지, 온수리(길
상면 중심지)에 이르니 어느덧 14시이다. 여기서 정수사까지는 강화군내버스 3번(강화터
미널↔온수리, 1일 9회)이 다니고 있는데, '늦어도 40~50분 기다리면 되겠지' 싶어 방심
을 했으나 정류장에 달린 시간표를 보니 글쎄 1시간 30분 뒤에나 차가 있는 것이다.
방심의 대가치고는 오지게 긴 시간이라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어찌 보
면 덤으로 생긴 그 시간에 늦은 점심이나 섭취하고자 적당한 식당을 찾다가 가격도 착하
고 찬도 넉넉한 뷔페식 기사식당을 발견, 그곳에서 즐겁게 배를 채웠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도 시간이 남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온수리 성공회성당(聖公會聖堂)
을 짧게 둘러보고 정류장으로 돌아와 나머지 시간을 억지로 죽이고 있으니 강화군내버스
3번이 다가와 활짝 입을 벌린다.
버스는 서남쪽으로 10여 분을 달려 정수사입구에 나를 내려놓는다.



 

♠  늙은 툇마루 법당으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마니산 정수사(淨水寺)

▲  겨울에 잠긴 정수사 길(해안남로1258번길) ①

정수사입구에서 정수사까지는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따라 15~20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작은 포장길이 닦여져 있는데, 길 좌우로 겨울에 몽땅 털린 나무
들이 초췌한 몰골로 나그네를 맞이한다. 눈이 내린 지 벌써 여러 날 되었지만, 길가에는 새하
얀 눈이 조금씩 남아 아직까지 겨울 제국(帝國)의 치하임을 강하게 일깨운다.


▲  겨울에 잠긴 정수사 길(해안남로1258번길) ②

▲  겨울에 잠긴 정수사 길(해안남로1258번길) ③

▲  정수사 직전 'S'라인 고갯길
저 고갯길의 끝에 툇마루 법당으로 유명한 아담한 산사, 정수사가 고색의
숨결을 물씬 풍기며 중생들을 맞이한다.


천하의 성산(聖山)으로 오랫동안 추앙을 받는 마니산<摩尼山, 마리산, 해밯 469m> 동쪽 자락
에는 3칸짜리 툇마루 법당으로 유명한 정수사가 포근히 안겨져 있다.

정수사는 639년에 회정선사(懷政禪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마니산 참성단(塹星壇)을
참배하고 동쪽으로 내려가다가 앞이 확 트인 괜찮은 곳을 발견하고는 불제자들이 선정삼매(禪
定三昧)를 정수<精修, 정세하게 학문을 닦음>할 곳이라 격찬하며 그곳에 절을 지어 정수사(精
修寺)라 했다고 한다. (이름은 같지만 한자는 틀림)
허나 아쉽게도 이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이며 '정수사 산령각 중건기(重建記
, 1903년)'와 '강도지(江都誌)'에도 창건시기를 알 수 없다고 나와있어 639년 창건설에 크게
회의감을 들게 한다. 하여 절이 우후죽순 들어섰던 고려 전기나 몽골(원나라)과의 전쟁으로
강화도가 임시 국도(國都)가 되었던 13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423년에 법당을 새로 지었고, 1426년 함허기화(涵虛己和, 함허대사)가 절을 중창했는데, 법
당 서쪽에서 깨끗한 물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맑은 물을 뜻하는 정수사(淨水寺)로 이름을
갈았다. (이름은 그대로 두고 한자와 뜻만 갈아치움)
1688년 절을 중수하여 상량문(上樑文)을 남겼으며<1957년에 발견됨> 1848년 비구니 법진(法眞
)과 만흥(萬興) 등이 화주(化主)가 되어 법당을 중수했다. 이때 부화주(副化主) 승려 20여 명
, 목수 165명, 지역 주민 305명이 자원하여 중창불사에 참여했다.

1878년 비구니 계흔(戒欣)이 제자 성수 등과 불상을 개금(改金)하고 후불탱과 칠성탱, 독성탱
, 산신도 등을 새로 그려 봉안했는데, 금어<金魚, 그림을 그리는 승려> 용계 서익(龍係 瑞翌)
과 대허 체훈(大虛 體訓) 등이 탱화를 조성했으며 1883년 화주 근훈(根訓)이 절을 수리했다.
1888년 비구니 정일(淨一)이 수좌 연오(演梧)와 함께 시주금을 모아 관세음보살상 1위와 후불
탱 1점을 만들어 봉안했다. 정일은 여러 절과 마을을 꾸준히 돌면서 돈을 모아 1903년 산령각
을 중건하고 1905년에 법당을 수리했으며 1916년에는 불상을 개금하고 여러 불화를 봉안했다.
그 시절 정수사에 머물며 그의 불사를 목격했던 이건승(李健昇) 거사는
'뜻을 한가지로 한다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있겠는가. 이 절의 스님을 보니 남자가 여자에
미치지 못하고 사대부가 여승에 미치지 못하고 국가가 사찰에 미치지 못함을 깨달았다!'

감탄을 금치 못하며 그의 공덕을 기리는 글을 쓰기도 했다.


1937년 주지 김선영이 본산<전등사(傳燈寺)> 주지 김정섭과 상의해 대웅전(법당)을 나라의 보
호 건물로 추천했으며, 1942년에 쓰여진 '전등본말사지'에는 대웅전(12칸) 외에 산신각(2칸),
대방(14칸), 노전(6칸), 요사(16칸) 등이 있어 지금보다 건물이 더 풍요로웠음을 알려준다.
6.25 때는 다행히 별 피해는 없었으나 건물들이 고된 세월에 체해 나날이 퇴락하자 1957년에
법당을 중수했으며, 1974년에 소실된 삼성각을 다시 지었다. 이후 여러 건물을 짓거나 새로
손질하여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대웅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오백나한전, 요사, 종무소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법당과 향토유적인 함허대사 승탑을
가지고 있다. 그 외에 19세기에 조성된 탱화들이 여럿 있고 오백나한전에는 고려 때 것으로
전하는 건칠지장보살상이 있다.
또한 절 주변에는 상사화(相思花, 꽃무릇)가 자라고 있는데 보통 붉은 상사화를 생각하기 쉬
우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노란색 상사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노란 상사화는 이 땅에서도 매
우 희귀한 존재로 8월 중순에서 9월 초 사이에 10여 일 정도 반짝 꽃잎을 펼쳐 보인다.

정수사는 함허동천(涵虛洞天)과 함께 마니산(마리산)의 동쪽 기점으로 바로 북쪽 능선을 넘으
면 함허동천이다. 참성단까지는 40~50분 정도 걸리며 중간에 벼랑처럼 이어진 아찔한 바위 능
선을 지나야 된다. 비록 길이 괜찮게 닦여져 사고의 위험은 예전보다 덜하지만 그래도 조심은
해야된다.

* 정수사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467-3 (해안남로1258번길 142 ☎ 032-
  937-3611)
* 정수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정수사 법당(法堂) - 보물 161호

경내 중심에 자리한 법당(대웅보전)은 정수사의 얼굴이자 상징으로 1423년에 지어졌다. 이 땅
의 늙은 법당 중 유일하게 툇마루를 지닌 개성파 법당이자 이 땅에 별로 남지 않은 조선 초기
사찰 건축물로 그 가치가 백두산 꼭대기만큼이나 높다. (법당 덕분에 정수사의 이름값이 크게
올라갔음)

이 법당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측면이 3칸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툇마루를 덧붙이면서 측면이 조금 넓어졌는데 1688년 절을 중수했을 때 닦여진 것으로 여겨진
다. (1688~1689년 법당을 중수하면서 중수 관련 기록을 법당 안에 넣어둠)
절이 한참 어려웠던 시절에는 가운데 칸은 법당으로, 좌우 칸은 승려들 거처로 사용했다고 하
며, 육중한 지붕을 지탱하고자 기둥 꼭대기에 공포를 단 주심포(柱心包) 양식으로 앞/뒷면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으니 이는 후대에 툇마루(퇴칸)를 설치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후면 공포
는 조선 초기 양식임)

건물 천정은 사주(四周)의 귀를 약간씩 접은 우물천정이며 여러 번의 중수를 겪으면서 건물이
조금 변형되긴 했으나 대체로 조선 초기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불단(佛壇)에는 아미타3존
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주위로 아미타후불탱, 칠성탱, 지장시왕도 등의 탱화들이 가득 널려있
다.


▲  옆에서 바라본 정수사 법당

▲  위에서 바라본 법당과 그의 풍만한 맞배지붕

정수사의 존재감을 크게 올려준 법당은 툇마루 앞과 옆구리에 놓인 섬돌에 신발을 벗어두고
들어가면 된다. 가운데(어칸) 문과 좌우 칸 문에는 창살이 곱게 입혀져 있는데 가운데 칸 문
에는 꽃과 꽃병이 묘사되어 있어 화사함을 더해준다.


▲  법당 가운데 문짝에 피어난 꽃창살
아름다운 꽃들이 마치 화석처럼 굳어져 문짝에 달려있는 것 같다.

▲  법당을 크게 돋보이게 만든 툇마루 (옆에서 바라본 모습)

▲  법당 아미타3존상과 지장보살, 관세음보살상
아미타3존상 뒤로 1878년에 제작된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히 자리해 있고 3존상
좌우로 근래 덧붙인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3존상의 옆구리를 가득 채워준다.

▲  법당 칠성탱(七星幀)
1878년에 조성된 것으로 치성광여래 등의 7여래와 일광보살 등 칠성(七星)의
주요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져 있다.

▲  법당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지장탱)

칠성탱과 더불어 1878년에 조성된 것으로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지장보살 두광(頭光) 좌우에 자리한 식구들은 특이하게도 동물 얼굴을 하고 있
는데, 지장보살 앞쪽에 선 왼쪽 동자는 등에 함을 지고 있고, 그 오른쪽 동자는 지장보살이
들어야 될 석장(錫杖)을 대신 들고 있는 점이 이색적이다. 이런 식의 지장탱화는 거의 이곳이
유일하다.


▲  무려 1,000원을 구석에 머금은 법당 현왕탱(現王幀)

현왕탱은 관련 화기(畵記)가 없어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략 1851년 정도로 여겨
진다. 그러니 법당을 수식하고 있는 탱화 중 가장 늙은 존재가 된다.
현왕(現王)이란 죽은 사람을 심판하는 존재로 죽은 지 3일 뒤에 심판을 진행한다고 하며 그의
판결 여부에 따라 극락이나 지옥행이 결정된다고 한다. 그는 착하게 산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
니 가급적 선하게 살아야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음.
내가 아직 명부(저승)를 가본 적이 없으니;;>


▲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법당 뜨락 좌측에는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지닌 오백나한전이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름 그
대로 500명의 나한(羅漢)을 머금은 건물로 근래 지어진 것인데 나한 외에 고려 때 것으로 여
겨지는 건칠(乾漆)지장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보살상은 바다 건너 개성 땅에서 왔다고 하며 나는 법당만 생각했지 그의 존재를 알지 못
해 지나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다음에 또 오라는 정수사의 뜻인 모양이다. 하지
만 이곳은 이미 3번이나 인연을 지었고 아직도 지우지 못한 미답처가 천하에 수두룩해 일부러
또 찾을 생각은 별로 없다.


▲  겨울 휴업에 들어간 법당 옆 샘터
정수사의 뜻(맑은 물이 나오는 절)과 한자를 바꾸게 만든 샘터로 하얀 피부의
거북상을 짓고 그 주위를 기와돌담으로 둘러 애지중지하고 있다. 허나
겨울 제국이 물을 꽁꽁 앗아가면서 그 맑다는 샘물은
구경도 하지 못했다.

▲  삼성각(三聖閣)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과 독
성, 칠성 외에 용왕(龍王)까지 봉안되어 있어 사성각(四聖閣)이란 이름이 더 어울려 보인다.
불에 타서 쓰러진 것을 1974년에 다시 세웠으며, 내부에 담긴 산신과 독성, 칠성, 용왕탱은
그 이후에 조성된 것이다.


▲  정수사에서 바라본 천하
마니산의 벌어진 동쪽 틈 사이로 서해바다와 동검도(東檢島)가 진하게 바라보이고
그들 너머로 강화도를 거느린 인천(仁川) 본토가 흐릿하게 시야에 닿는다.


경내 서쪽에는 가건물로 이루어진 매점 겸 종무소(宗務所)가 있다. 10여 년 전 겨울에 왔을
때는 부엌을 갖춘 셀프식 찻집으로 있었는데, 절 신도와 답사꾼, 산꾼까지 누구든 들어와 차
1잔의 여유를 누릴 수 있도록 찻잔과 전통차 티백, 주전자, 물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용료는
없었으며 대신 직접 물을 끓여서 차를 타 마시고 사용했던 찻잔은 씽크대에서 씻으면 된다.
그때 같이 왔던 사람과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며 1시간 정도 머물렀던 기억이 정말 엊
그제 같은데 그 추억은 흩어진 나날의 일부가 되었고 찻집 또한 성격이 변해 더 이상 중생들
에게 무료로 차 1잔의 여유를 주지 않는다. (대신 차와 커피를 팔고 있음)

정수사의 다소 야박해진 인심과 왕년의 추억을 같이 되새기며 더 볼거리가 없나 두리번거리니
그때다 싶어 '함허대사 승탑'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나 나의 허전한 마음을 건드린다.
'정수사에 그런 존재가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정표의 지시에 따라 오백나한전 뒤쪽
으로 가니 눈과 진흙으로 얼룩진 산길이 나오고 그 길을 조금 오르니 언덕배기에 조촐하게 생
긴 부도탑이 나를 맞이한다. 그가 바로 마니산 동쪽 자락에 진하게 흔적을 남겼던 함허대사의
승탑(부도)이다.


▲  함허대사 승탑(涵虛大師 僧塔) - 강화군 향토유적 19호

승탑의 주인인 함허대사(1376~1433)는 조선 초기 승려로 고려 때 아주 잘나갔던 충주유씨 집
안이다. (충주 출신임) 전객시사(典客寺事)를 지냈던 유청(劉聽)의 아들로 어머니는 방씨이며
법호는 득통(得通), 무준(無準), 법명(法名)은 기화(己和), 당호는 함허이다.

1396년 관악산 의상암(義湘庵, 어딘지 모름)에서 출가를 했으며 1397년 양주 회암사(檜巖寺)
에서 무학대사(無學大師)에게 법요(法要)를 듣고 여러 곳을 다니다가 1404년 회암사로 돌아와
수도에 정진했다.
1406년 공덕산 대승사(大乘寺)에서 4년 동안 '반야경(般若經)'을 설법했고, 1410년 개성 천마
산 관음굴에서 선을 크게 진작시켰다. 1411년 절을 중수해 승속(僧俗)들을 지도했으며, 1414
년 황해도 평산(平山)의 자모산 연봉사(烟峯寺)로 자리를 옮겨 작은 방을 함허당(涵虛堂)이라
이름 짓고 '금강경오가 해설의(金剛經五家 解說誼)'를 가르쳤다.

1420년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그곳 사찰에 봉안된 옛 고승과 불상, 보살상에게 공양을 하
며 지내던 중, 영감암(靈鑑庵)에 있는 나옹(懶翁)의 진영(眞影)에 제사를 지내고 깜박 잠이
들었다. 그때 꿈에서 어느 신승(神僧)이 나타나 '기화'란 이름과 '득통'이란 호를 지어주었는
데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자신의 법명과 법호(法號)로 삼았다.
1421년 세종(世宗)의 청으로 개성 대자사(大慈寺)에 머물면서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의 명
복을 빌어주었고, 1424년 길상산(吉祥山)과 운악산(雲岳山), 공덕산(功德山) 등을 돌아다니며
설법과 수도에 힘썼다. 그리고 1426년 정수사를 중수해 머물렀으며, 1431년 문경 봉암사(鳳巖
寺)를 중수하여 머물다가 1433년 입적하니 나이는 57세였다.

그의 사리는 그와 인연이 깊은 가평 현등사(懸燈寺), 문경 봉암사, 황해도 현봉사, 인봉사(어
딘지 모름), 정수사에 분배되었는데 정수사는 경내 뒤쪽에 그의 승탑을 만들어 두고두고 중창
자를 기리고 있다.

함허는 무학대사의 법을 이은 선가(禪家)이지만 교종(敎宗)에 대해서도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교학적인 경향도 크게 지니고 있다. 그의 현정론(顯正論)을 통해 그의 선사상(禪思想)에는 현
실생활과 일상적인 생활을 수용하고 포용하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유학자들이 불교 배척을 주
창하면서 '허무적멸지도(虛無寂滅之道)'라고 비판한 것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그의 유,불,도 삼교일치론은 송나라 계숭(契嵩)이 지은 '보교편(輔敎編)'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불교가 배척당하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주장되었다는 점에 그 차이가 있다.

그의 열성 제자로는 문수(文秀), 학미(學眉), 달명(達明), 지생(智生), 해수(海修), 도연(道
然), 윤오(允悟) 등이 있으며, '원각경소(圓覺經疏)' 3권, '금강경오가해설의' 2권 1책, '윤
관(綸貫)' 1권, '함허화상어록(涵虛和尙語錄)' 1권 등의 저서가 있다. (그 외에 반야참문 1권
도 있으나 전하지 않음)

함허의 넋이 담긴 승탑은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넓게 바닥돌을 깔고 그 한복판에 기단(
基壇)을 다진 다음 탑과 머리장식을 올렸다. 옥개석(屋蓋石)은 6각형이지만 신라 후기~고려
초기 승탑의 기본 형태였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탑의 높이는 156
cm, 바닥돌까지 포함하면 164cm 정도이다. 기단부에는 연꽃 장식이 새겨져 있으며 탑은 작지
만 나름 단단하고 균형 잡힌 모습이다.



 

♠  사기리(沙器里)에서 만난 오래된 명소들

▲  사기리 분청사기요지(粉靑沙器窯址) - 강화군 향토유적 18호

함허대사 승탑을 끝으로 정수사 관람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여기서 바로 북쪽에 있는 함
허동천으로 넘어가 사기리 탱자나무와 이건창 생가로 나갈 생각이었으나 함허동천과 가까운
곳임에도 마땅한 길이 없었고 함허대사 승탑 옆으로 그곳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으나 확신이
서질 않아서 쿨하게 그 길을 포기하고 미련 없이 정수사입구로 나왔다.

차들이 수시로 쌩쌩 지나가는 해안남로를 따라 함허동천입구와 탱자나무까지 가야 했는데 다
행히 뚜벅이를 위한 보도를 길 양쪽 사이드에 닦아놓아 차들의 눈치에서 다소 자유로워졌다. 
정수사입구에서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 8분 정도 가니 식당과 펜션들로 즐비한 함허동천 입구
이고 다시 6분 정도 북진하니 '사기리 분청사기요지'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좀 보고 가라며 발
길을 붙잡는다.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지나친다고 못 이기는 척 그 이정표를 따라 야산
을 조금 오르니 분청사기요지가 폐허의 미학(美學)을 풍기며 바짝 누워있다. (도로에서도 그
존재가 보임)


 ▲  가마터 한복판에 수습된 분청사기 파편과 가마터를 이루던 석재들

이곳은 고려 말~조선 초에 한참 유행했던 분청사기를 만들던 14~15세기 가마터(요지)이다. 가
마터의 모습이 모두 파악되지는 못했으나 지금까지 발견된 규모로 보아 40mx80m 정도로 여겨
지며 깨진 분청사기 파편과 분청사기를 구울 때 쓰였던 굽받침, 가마 벽체로 여겨지는 여러
돌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지금은 비록 폐허의 공간으로 보잘 것은 없지만 이 가마터로 인해 마니산 동쪽 지역이 사기리
가 되었다. 즉 사기그릇을 만들던 동네란 뜻으로 왕년에는 가마터로 제법 바쁘게 살았음을 귀
뜀해준다.

* 분청사기요지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224


▲  사기리 탱자나무 - 천연기념물 79호

분청사기요지를 나와서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3분 정도 가면 이건창생가 정류장 남쪽 들판에
키 작은 나무 하나가 진하게 아른거릴 것이다. 그가 사기리의 오랜 명물인 탱자나무로 그 앞
까지 도보길을 닦아놓아 관람객의 편의를 배려했다.

강화도는 탱자나무가 마음 놓고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북방 한계선으로 늙은 탱자나무 2그루가
전하고 있다. 하나는 갑곶돈대(甲串墩臺)에, 다른 하나는 이곳 사기리로 그중 갑곶돈대(갑곶
진)가 더 북쪽이라 우리나라 탱자나무의 북쪽 끝은 갑곶진이 된다. 나무에 가시가 많아서 성
곽이나 요새에 방어용으로 많이 심기도 하는데 갑곶진 탱자나무는 바로 그 역할로 심어졌다.

사기리 탱자나무는 4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키는 3.8m이다. 2.8m 높이에서 3갈래로 갈라져 마
치 용트림 모습을 하고 있는데 고된 세월에 지친 그를 위해 기둥을 여러 개 깔아 가지를 받쳐
들고 있으나 여전히 정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탱자나무는 보통 4월에 3~5cm 정도의 하얀 꽃이 피며 가을이 되면 열매가 맺으면서 노랗게 변
한다.

* 사기리 탱자나무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135-10

▲  정면에서 바라본 탱자나무

▲  서쪽에서 바라본 탱자나무

▲  동쪽에서 바라본 탱자나무

▲  탱자나무에서 바라본 길상산과
사기리, 선두리 들판


▲  이건창 생가(李建昌 生家) - 인천 지방기념물 30호

사기리 탱자나무 길 건너 북쪽에는 정겹게 토담을 두룬 초가(草家)가 하나 있다. 그 집이 조
선 후기 학자인 이건창의 생가로 'ㄱ' 모습의 9칸 안채와 문간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연석
기단 위에 주춧돌을 닦고 3량 가구로 지은 한옥 구조의 초가이다.
언제 지어졌는지는 마니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이건창이 강화도에서 말년을 보냈던 19세
기 말로 여겨지며 현재 집은 1996년 강화군에서 복원한 것이다. 안채는 명미당(明美堂)이라
불리는데 천정에 걸린 명미당 현판은 이건창과 친분이 있던 매천 황현(梅泉 黃玹)이 쓴 것이
다. 그렇다면 이건창은 누구일까?

이건창(1852~1898)은 전주 이씨 출신으로 나중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이상학(李象學
)의 아들이다. 아명(兒名)은 송열(松悅), 자는 봉조(鳳朝, 鳳藻), 호는 영재(寧齋)로 이곳이
그의 생가로 나와있어 여기서 태어난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원래는 개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인 이시원(李是遠)이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지낼 때 거기서 태어났으며, 선대(先代)
부터 개성에서 계속 살아왔다. 그러니 '이건창 생가'가 아닌 '이건창 가옥'이나 '이건창 고택
','명미당'으로 이름을 갈아야 맞다.
할아버지에게 충의와 문학을 바탕으로 한 가학(家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5살에 문장을 구
사할 정도로 재주가 뛰어나 신동 소리를 많이 들었다.

1866년 불과 14세의 나이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응시해 4등인 병과(丙科)로 급제했으나 나
이가 너무 어려 계속 대기발령 상태로 있다가 18세에 비로소 홍문관직(弘文館織)에 등용되었
다.
187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며 그곳 연경(燕京)에서 황각(黃珏), 장가
양(張家驤), 서보(徐郙) 등과 교유를 했다.

1875년 충청우도(忠淸右道) 암행어사가 되어 충청도를 암행(暗行)했는데, 충청감사 조병식(趙
秉式)의 비행이 적지 않아 그의 비행을 낱낱이 캐다가 오히려 모함을 받아 벽동(碧潼)으로 유
배를 당했다. 다행히 1년 뒤에 풀려났으나 워낙 강직하고 고집이 있으며 불의를 못 보는 성격
이라 벼슬에 미련을 버리고 학문이나 닦으려고 했다.
허나 고종이 그의 명성을 듣고
'내가 그대를 아니 전과 같이 잘해달라'
는 친서를 보내며 출사를 권해 1880년 경기도 암행어
사가 되었다. 그는 경기도를 돌면서 관리들의 비리를 파헤치고 흉년으로 고생하는 농민들을
찾아다니며 구휼에 힘썼다. 특히 세금을 감면해주어 백성들로부터 널리 찬양을 받았으며 그를
기리는 선정비(善政碑)가 도처에 세워졌다.

▲  이건창 생가 대문 (문간채)

▲  어설프게 복원된 우물

1884년 모친상과 부친상을 연이어 당해 무려 6년이나 상을 치렀으며 1890년 복귀하여 한성부
소윤(漢城府小尹)이 되었다.
그 시절 왜인(倭人)과 청국(淸國) 잡것들이 서울과 인천 지역에서 가옥과 토지를 마구 사들이
고 있었는데 무능했던 조선 조정은 이를 방관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안 이건창은 다시 팔을
걷어부치고 백성들의 집과 토지를 오랑캐들에게 팔아먹지 못하도록 법을 마련해야 된다고 건
의했다.
그러자 이홍장(李鴻章)의 부하이자 청나라 공사(公使)인 당소의(唐紹儀)가 그 내용을 듣고 발
끈하여 공문을 보내
'청국 사람과의 가옥이나 토지 매도를 금한다는 조항이 조약상에 없는데 왜 금지 조치를 하시
오?'
항의했다. 이에 그는
'우리가 우리 백성에게 금지시키는 건데 조약이 무슨 상관이오?'
답을 했다.
더욱 발끈한 당소의는 이홍장의 항의를 빙자하여 조선 조정에 압력을 가해 금지령을 포기하게
하였다. 허나 그는 꾀를 부려 오랑캐에게 부동산을 판 사람을 다른 죄목으로 다스려 가중처벌
을 가하니 백성들은 부동산을 그들에게 팔아먹을 수가 없었고 청나라 애들도 자연히 부동산
매입이 여의치 못해 포기했다.

1891년 승지(承旨)가 되었으나 1892년 상소 사건으로 전남 보성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
다. 그리고 이듬해 함흥부(咸興府)의 난민들을 다스리고자 안핵사(按覈使)로 파견, 함경도관
찰사의 죄상을 가려내 그를 파면시키며 백성들의 가려움을 긁어주었다.
그 소식을 들은 고종은 지방관(地方官)으로 파견되는 관리들에게
'그대가 가서 잘못을 하면 이건창이 가게 될 것이다'
겁을 줄 정도였다. 그만큼 공무를 수행
하는 그의 태도는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새로운 관제에 의한 각부(各部)의 협판(協辦), 특진관(特進
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흔쾌히 거절했으며, 1896년 황해도 해주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이 또
한 거절하고 버티다가 오히려 고군산도(古群山島, 고군산군도)로 유배형을 당했다. 허나 2개
월 후 특지(特旨)로 풀려났고 제2의 고향과 같은 강화도로 넘어가 학문을 하며 유유자적하다
가 1898년 44살의 한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매천 황현이 쓴 명미당 현판의 위엄
- 글씨가 아주 큼직하다.

▲  먼지만 가득한 안채 부엌


이건창은 글씨를 아주 잘 썼는데 송나라 때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의 글씨를 많이 참조
했다. 구한말 학자인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이 우리나라 역대 문장가를 추숭(追崇)할 때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라 하여 9명을 선정했는데, 그 끝에 고른 이가 바로 이건창이었다.
또한 정제두(鄭齊斗)가 양명학(陽明學)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학풍을 세운 강화학파(江華學
派)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성품이 곧아 병인양요(1866년) 때 자결한 할아버지의 유지를 따라
쇄국주의를 고집했다.

저서로는 명미당집(明美堂集), 당의통략(黨議通略) 등이 있는데 당의통략은 파당과 문벌을 초
월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다룬 책으로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부모상으로 강화도에 머물던 시절에 저술한 것으로 워낙 내용이 좋아서 왜정(倭政)이 그 서적
을 바탕으로 조선은 당파싸움을 일삼다 망했다는 식으로 역사를 비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
다. 즉 조선시대 붕당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해석을 이미 조선 사람이 내린 것이라 우
기며 그것을 기정사실화 시킨 것이다.


▲  소박한 모습의 명미당(안채)

▲  명미당(안채) 마루
마루는 실내화가 준비되어 있어 들어갈 수 있으며 운이 좋으면 양쪽 방도
들어갈 수 있다. (보통은 잠겨있음)

▲  마루 구석에 있는 빛바랜 뒤주
이건창은 저 뒤주에 담긴 쌀의 힘으로 6년에 걸친 부모상도 치르고
당의통략도 저술하고 양명학도 연구했을 것이다.

▲  이건창 생가 측백나무 - 강화군 보호수 180호

이건창 생가 앞에는 약 350년 묵은 측백나무가 솟아있다. 길 건너편 탱자나무와 비슷한 시기
에 식재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높이 10m, 둘레는 1.8m로 이건창도 그의 그늘 맛을 보며 학문
을 연구하고 여러 서적을 작성했을 것이다.


▲  이시원(李是遠)묘

이건창 생가 옆에는 토담을 사이에 두고 무덤 2기가 자리해 있는데 그중 밑에 있는 무덤이 이
건창의 할아버지인 이시원(1790~1866)의 유택(幽宅)이다.
이시원의 자는 자직(子直), 호는 사기(沙磯)로 개성유수를 비롯한 여러 관직을 지냈는데 1866
년 병인양요가 터지고 강화도가 프랑스 양이(洋夷)들에게 어이없이 함락되자 아우 이지원과
함께 죽어서 귀신이 되어 적을 물리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을 하고 말았다. 그 충
절로 나중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정(忠正)이란 시호를 받게 되었다.

이시원 묘는 원래 길상면 길직리에 있었으나 1985년 그의 부인인 청송심씨와 함께 손자가 살
았던 이곳으로 옮겨져 합장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봉분(封墳), 호석(護石), 상석(床石), 비석
까지 싹 새롭게 갈면서 완전 최근에 닦여진 새 무덤이 되어버렸다. 적어도 비석 정도는 옛 것
을 그냥 썼으면 조금이나마 고색의 기운이 있었을텐데 그 점이 아쉽다.

이건창 생가를 둘러보니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그날 목적한 곳을 모두 소화하여 더 이상 욕
심도 없고 일몰이 지척이라 더 이상 둘러보기도 어렵다. 하여 그 정도로 만족하며 생가 관리
인에게 인사를 건네고 정류장으로 나가 곧 들어선 강화군내버스 3번(강화터미널↔화도, 온수
리)을 타고 강화읍으로 나왔다.

이렇게 하여 강화도 늦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이건창 생가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167-3 (해안남로1114번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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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산사 나들이 ~ 작은 계곡과 폭포를 지닌 고즈넉한 산사, 부산 백양산 선암사

부산 백양산 선암사



' 연말 산사 나들이, 부산 백양산 선암사 '
선암사 용왕당과 폭포
▲  선암사의 명물, 용왕당과 폭포
 



 

새해가 밝은지 정말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해의 끝 무렵에 이르렀다. 새해가 묵은 해가
되어 퇴장을 서두르고 또 다른 해가 바로 코앞에 대기를 하고 있으니 세월의 미친 속도
감에 그저 충격과 공포일 따름이다. 하지만 아무리 세월이 번개처럼 흐르며 세상만물을
희롱해도 나의 역마살은 결코 잠재우지 못한다. 올해의 마지막 나들이를 장식할 장소를
두고 고민에 들어간 것이다.

비록 나를 부르는 곳은 단 1곳도 없지만(ㅠㅠ) 가고 싶은 곳은 정말 많다. 천하에 잔뜩
흩어진 명소를 두고 어디를 갈까? 물색하던 중 뜻밖에 선물이 날라왔다. 2016년 12월에
개통된 수서고속전철(SRT)에서 열차 이용 무료 쿠폰을 보내온 것이다. (SRT열차에 한해
어디든 1회 무료 이용) 간만에 좋은 선물을 받으니 흩어진 기분이 하나로 뭉친 듯 마음
이 무지 즐겁다.
그 무료 쿠폰을 등에 업고 여행 범위를 1,000리 밖까지 넓혀 처음에는 목포(木浦) 지역
을 생각했으나 갑자기 부산(釜山)이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흔쾌히 방향을 잡고 아침 표
를 예약했다.

새벽 공기가 무겁던 5시,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시내버스를 1회 환승하여 수서역으
로 이동했다. 시간이 아직 남아있어 주변 편의점에서 간단한 먹거리를 사들고 7시에 부
산으로 가는 고속전철(SRT)에 나를 담았다.

열차는 시속 200~300km로 시원스럽게 질주를 하며 천안아산, 대전, 김천구미, 동대구를
거쳐 9시 24분, 경부선의 영원한 종점, 부산역에 이르렀다. 불과 몇 달 만에 와보는 부
산 땅이지만 마치 처음 발을 들인 듯 마음이 설렌다. 이미 정처(定處)는 정해둔 상태라
부산역을 나와서 부산시내버스 17번을 타고 당감동(堂甘洞) 선암사입구로 이동했다.



 

♠  백양산 선암사 입문

▲  선암사로 인도하는 가파른 언덕길 (백양산로)

선암사입구에서 백양산 선암사까지는 북쪽으로 크게 구부러진 백양산로를 따라 15분 정도 올
라가야 된다. 중간에 당감뜨란채아파트 뒤쪽으로 질러가는 길이 있으나 그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예전처럼 백양산로를 쫓아갔다. (내려갈 때 지름길의 존재를 발견했음)

동양초교를 지나면 울창한 숲이 펼쳐지면서 계곡 흐르는 소리가 나의 멍멍한 두 귀를 때린다.
길 옆으로 선암사계곡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산속에 계곡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나 이곳
이 부산 도심 지척이라 처음에는 '내 귀가 미쳤나?' 착각을 들게 했다. 허나 그는 백양산이
빚은 자연산 계곡이 맞다.
선암사계곡은 상수원 보호구역과 선암사 경내에 묶여있어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하여 그림의
떡보듯 바라보는 선에서 멈춰야 되며 그 이상의 흥분을 보여서는 절대 곤란하다. 선암사를 벗
어난 계곡은 '동천(東川)'이란 이름으로 부산 앞바다로 흘러가며, 절 밑까지 밀려온 시가지에
생매장을 당해 어둠의 경로로 흐르다가 서면(西面) 남쪽 광무교에서 다시 햇살을 보며 바다로
향한다.


▲  백양산로 끝에 자리한 선암사 주차장 (경내 직전)

▲  속세로 길을 재촉하는 선암사계곡 (주차장 부근)

계곡 소리에 속세에서 오염된 청각이 다소 정화는 되었지만 대신 길의 경사는 좀 각박해진다.
허나 그 거리는 그리 길지 않으며, 그 길의 끝에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선암사 주차장이
자리하고 있다.
주차장에 이르면 길은 3갈래로 갈라지는데, 왼쪽은 선암사 추모관과 애진봉, 백양산으로 이어
지고, 정면에 보이는 빡빡한 계단길은 선암사 경내로, 오른쪽은 어린이대공원 방면으로 백양
산나들숲길 5코스(선암길)이다. <선암길이 선암사 앞을 지나고 있음, 애진봉 방면도 그 길의
일원임>

계단을 오르면 그 끝에 대문처럼 생긴 일주문(一柱門)이 있는데, 그 문을 들어서면 계곡 물소
리에 잠긴 선암사 경내가 펼쳐진다. 그럼 여기서 선암사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선방(禪房)

▲  대웅전 우측을 지키는 관음전(觀音殿)

부산 도심의 대표 지붕이자 부산에서 2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백양산(白楊山, 641m) 동남쪽 자
락에 선암사(仙巖寺, 仙岩寺)가 아늑하게 둥지를 틀고 있다.
선암사는 2008년 이후 거의 10여 년 만에 방문으로 이곳은 부산의 한복판이나 다름이 없는 곳
이다. 도심이 바로 지척에서 아른거리고 있건만 삼삼한 숲과 해맑은 계곡, 경쾌하게 흐르는
폭포까지 지니고 있어 첩첩한 산골로 순간 이동을 당한 기분이며 산사의 내음도 꽤 진하다.

선암사는 675년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하여 견강사(見江寺)라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
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은 안타깝게도 없는 실정으로 1867년에 작성된 '선암사 중수기(重修記)
'에는 802년 동평현(부산진구 지역) 성내(城內)에 처음 창건되었다고 나와 있어 이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1400년 부산포(釜山浦) 동북쪽으로 절을 이전하였는데, 이때 선암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한다.
절 뒷산 절벽 바위에서 신라의 국선(國仙)인 화랑도(花郞徒)가 수련을 했다고 해서 선암사라
했다고도 하고, 산이 높고 바다까지 바라보이는 경치 좋은 곳이라 가히 신선이 살만한 곳이라
하여 그리 했다는 설도 있다.
허나 이와 상반되게 견강사에 딸린 산중 암자로 선암사가 이미 존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견
강사는 조선 중기에 초량왜관(草梁倭館) 부근인 자성대(子城臺)로 자리를 옮겼는데, 작은 암
자였던 선암사가 견강사의 자리를 대신하여 몸집을 불리면서 동평현에서 가장 큰 절이 되었다
고 한다. 즉 견강사의 부속 암자가 지역의 중심 사찰로 성장한 것이다.

1483년 각초(覺招)가 중창을 했으며, 1568년 신연이 중수를 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말끔
히 파괴되고 말았다. 이후 1681년 승당(僧堂)을 다시 지어 불상을 개금했고, 1718년 선오가
크게 중수했으며, 1866년 동악과 신겸이 돈을 모아 이듬해 중수를 벌였다.
20세기에는 뛰어난 선승(禪僧)으로 추앙을 받던 승려들이 이곳을 거쳐가며 절을 일구었는데,
혜월(慧月, 1861~1937)이 1921년부터 주지로 머물렀고, 1951년에는 향곡혜림(香谷蕙林, 1912~
1978)이 주지로 있었으며, 1955년에는 석암혜수(昔巖慧修)가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그리고
2002년에는 시민들을 위해 선암도서관을 선보이기도 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과 극락전, 관음전, 조사전, 용왕당, 산신각
, 칠성각, 추모관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모두 20세기 중반 이후에 손질된 것들이라 고
색의 기운은 미약하다. 또한 추모관(납골당)과 공양간은 경내에서 다소 떨어져 있어 절의 영
역이 보기와 달리 제법 넓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괘불탱(부산 지방문화재자료 27호)과 청동북(부산 지방문화재자료 37호)
, 3층석탑,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일괄 등 지방문화재 4점과 조선 후기에 조성된
승탑(부도)군, 500년 정도 묵었다는 나한상 등이 있다. 이중 3층석탑은 많이 퇴락하긴 했지만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자 옛 견강사의 유일한 유물이며, 괘불(掛佛)은 석가탄신일 등 극
히 일부 날에만 외출을 나오는 꽤 만나기 힘든 존재이다.

그밖에 원효대사가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우기고 있는 늙은 철불(鐵佛)과 19세기에 제작된 원
효대사의 진영(眞影)도 있었다. <원효대사는 인도에 간 적도 없으며, 철불은 신라 후기에 잠
깐 등장하는 불상 형태임> 1957년에 간행된 '부산교육'과 1966년에 발간된 '개항90년', 1969
년에 나온 '부산의 고적과 유물'에도 언급되었던 존재로 적어도 1970년대까지 전해오고 있었
으나 관리소홀로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져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다. (언제 없어졌는지도 모름)

예전에는 바다가 보였다고 하나 지금은 키다리 빌딩이 즐비한 시가지에 시야가 막혀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동백나무를 비롯한 온갖 나무들이 짙게 우거져 있으며, 계곡과 폭포가 경내를
가로지르고 있어 경관 하나는 마치 신선 세계처럼 상큼하다. 범어사(梵魚寺)와 마하사(摩訶寺
), 기장 장안사(長安寺)와 더불어 부산의 대표적인 고찰(古刹)로 시내와도 무척 가깝고 접근
성도 좋은 편이다.

* 선암사 소재지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암동 628 (백양산로 138, ☎ 051-803-7573)
* 선암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선암사 대웅전(大雄殿)

선암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지방문화재인 청
동북을 품고 있다. (청동북의 위치는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음) 하여 그것을 보려고 했으
나 마침 오전예불 중이라 들어가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다음에 또 오라는 선암사의 뜻인 모양
이나 또 인연이 닿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  지장보살과 명부(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된 명부전(冥府殿)

▲  용왕당과 극락전 구역으로
인도하는 계단


▲  대웅전과 명부전 사이에 뿌리를 내린 잘생긴 소나무

선암사 경내는 가파른 지형을 따라 크게 4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웅전과 명부전이 있는 대
웅전 구역이 제일 밑이고, 거기서 1단계 높은 곳에 용왕당 구역, 다시 1단계 높은 곳에 3층석
탑이 있는 칠성각 구역, 그리고 제일 위쪽에는 조사전을 두었다.


▲  야외 법당으로 이루어진 용왕당(龍王堂)

용왕당은 병풍처럼 솟은 벼랑 밑 폭포 옆에 자리해 있다. 비록 '당(堂)'을 칭하고 있지만 건
물은 없으며, 이글거리는 동그란 두광(頭光)을 지닌 용왕상과 그에게 예를 표하는 야외 공간
이 전부이다. 특이한 것은 각(閣)이나 전(殿)이 아닌 마을의 용왕당처럼 당을 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암사에 용왕상을 세운 것은 2003년이다. 비록 여기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지만 가까운 곳에
서 바다가 넝실거리고 있고 경내에 계곡이 흐르고 있으므로 일종의 마켓팅과 새로운 명물을
구축하고자 용왕당을 닦은 것이다. 용왕은 물을 관리하는 존재로 불경을 용궁(龍宮)에 모아놓
고 지키는 역할도 겸하고 있는데, 이는 용왕이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되면서 그에게 떠넘긴 의
무이다. 또한 용왕이 물을 관장하고 있으므로 폭포 옆에 그의 거처를 마련했다.

용이 새겨진 의자에 앉아있는 용왕은 마치 사천왕(四天王) 같은 모습으로 조금 무섭게 생겼는
데, 그 앞에는 살짝 구부러진 작은 돌다리를 두었고 그 옆에는 폭포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 높은 벼랑이 칼처럼 솟아 그늘을 드리우며 선암사를 더욱 아름답고 신비롭게
수식해준다. 벼랑 옆에는 돌로 다진 높은 석축이 있는데, 그 위에는 3층석탑과 칠성각이 자리
해 있다.
용왕상 주변에 서면 폭포에서 서늘한 기운이 불어와 마치 동굴에서 부는 바람 같다. 하여 한
여름에 찾아와 이곳에 있으면 정말 피서가 따로 없을 것이다.


▲  선암사 용왕 불사공덕비(佛事功德碑)
2003년에 용왕당을 지은 기념으로 세운 비석으로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피부를 자랑한다.

▲  용왕상과 벼랑 밑에 자리한 폭포
경내에 자연산 폭포를 둔 절은 그리 흔치가 않다. 허나 이곳은 하나도 아닌
무려 여러 개의 작은 폭포를 지닌 특별함을 보이고 있다.

▲  용왕당에서 칠성각으로 인도하는 각박한 계단길
계단이 얼마나 각박한지 계단 옆에 줄까지 달아놓았다. 맨정신으로 오가기가
어렵다면 쓸데없는 자존심을 잠시 날리고 줄의 신세를 지기 바란다.



 

♠  선암사 마무리

▲  선암사3층석탑 - 부산 지방문화재자료 53호

칠성각 구역에는 칠성각과 극락전, 산신각, 3층석탑이 있다. 이중 칠성각 뜨락 한복판에 앉은
뱅이 신세로 자리한 3층석탑을 꼭 살펴보자. 비록 생김새는 우울하지만 고려 말에 조성된 것
으로 여겨지는 탑으로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자 옛 견강사의 유일한 흔적으로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해주는 존재이다.

석탑이라고 하지만 겨우 옥개석(屋蓋石) 3매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하여 그를 3층석탑으로 막
연히 추정하고 있다. 옥개석 사이를 두툼히 채웠던 탑신(塔身)과 탑의 밑도리를 이루던 기단(
基壇)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싹 침몰한 상태이며, 옥개석도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
다. 그러면 최소 5층석탑까지는 되었을 것이다.
부산의 많은 절이 잿더미가 되었던 임진왜란 때 절과 함께 파괴되어 저런 고통스런 모습이 된
것으로 여겨지며 옥개석의 크기를 보아 같은 탑의 부재(部材)가 분명해 보인다. 1층 옥개석은
땅과 맞닿은 밑도리가 흙에 많이 파묻혀 있으며, 낙수면과 옥개석 받침 등의 치석(治石)은 좋
은 편이다. 그리고 탑 꼭대기에 달린 머리장식은 근래에 선암사에서 덧붙인 것이다.

   ◀ 세월의 모진 풍파가 느껴지는 3층석탑
옥개석 피부에는 푸른 이끼 옷이 덮여져 있어
이곳의 청정한 기운과 탑의 장대한 내력을 느
끼게 한다. 비록 앉은뱅이 신세나 다름이 없지
만 선암사의 지긋한 역사를 온 몸으로 알려주
는 산증인이다.

▲  3층석탑을 굽어보는 칠성각(七星閣)
달랑 1칸에 팔작지붕 건물로 칠성 식구들의
거처이다.

▲  칠성각과 산신각 사이를 경쾌하게
흘러가는 선암사계곡

◀  계곡 바람이 지나가는 벼랑 밑에
자리한 산신각(山神閣)
벼랑 그늘에 산신 할배의 거처인 1칸짜리
산신각이 아늑하게 둥지를 틀었다.

             ◀  극락전(極樂殿)
칠성각 좌측에 자리한 극락전은 정면 3칸, 측
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
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깃들여져 있다.


▲  극락전 목조아미타3존상
<가운데 불상이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95호>


극락전의 주인장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고려 후기 것으
로 여겨진다.
선암사의 빛바랜 일기장인 '선암사기(記)'에 따르면 고려 말 왜구들이 빼돌려 그들의 본거지
에 절을 지어 봉안했다고 한다. 허나 강제로 제자리를 떠난 불상이 단단히 뿔이 났는지 그 지
역 사람들이 비명횡사로 계속 죽어나가자 염통이 쫄깃해진 그 잡것들은 다시 배에 실어 웅천
에 있던 성흥사(聖興寺, 창원시 진해구)에 기증했다고 전한다.
이후 선암사로 흘러들어왔으며, 왜구에게 납치당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흔치 않은 불상으로
그 사연이 전해지면서 영험이 있는 불상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전설의 불상이 이것이 아닌
다른 불상이라는 이야기도 있음)

유리막에 감싸인 아미타불은 온화한 표정을 지은 동그란 얼굴로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솟아있으며, 머리칼은 꼽슬인 나발(螺髮)이다. 양 손은 제1손가락과 제3손가락을 맞
댄 채 양팔을 옆구리에 붙이고 있는데, 오른팔은 팔꿈치를 접어 가슴 높이에서 손바닥이 보이
도록 바깥을 향하고 있으며, 왼팔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가슴 밑에 댄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
)을 취하고 있다.
그의 뱃속에서는 고맙게도 복장유물(腹臟遺物)이 나왔는데, 복장개부 입구에서 얼굴 부위까지
책자형 경전과 향, 중수 사실을 기록한 발원문(發願文)이 나왔다. 발원문에는 중수 시기와 참
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으며, 불상의 양식으로 봤을 때 불상과 발원문의 시기가 그
리 일치해 보이지는 않는다. 어쨌든 옛 사람들이 넣어둔 발원문 덕분에 이 불상은 2008년 지
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선암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  선암사의 꼭대기, 조사전(祖師殿)

칠성각 뒤쪽 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의 끝에 조사전이 있다. 이곳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
까운 곳이자 막다른 곳으로 보통 절 꼭대기에는 삼성각이나 산신각을 두기 마련이나 여기는
조사전을 위쪽으로 올리고 그들을 1단계 밑에 깔았다. 정면과 측면이 1칸인 맞배지붕 건물로
원효대사를 비롯해 이곳을 거쳐간 승려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으며, 여기서 길은 벼랑으로 막
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다.


▲  조사전에 봉안된 승려의 진영
가운데 승려가 원효대사인듯 싶다. 좌우는 누구인지 모르겠음..

▲  선암사에서 바라본 백양산 애진봉(589m)

선암사 경내를 둘러보고 명부전 서쪽 길을 가니 너른 밭과 공양간이 나온다. 마침 점심 때라
절의 인심도 확인할 겸, 공양간 앞을 기웃거려 보았으나 외지인은 안된다는 차가운 안내문이
공양간 문에 자석처럼 붙어있었다. (자리 협소를 이유로 제공하지 않는다고 함)
하여 허탈감을 애써 뒤로 하며, 절 뒤쪽에 아른거리는 애진봉이나 잠깐 올라가기로 했다. 애
진봉은 백양산의 일원으로 부산 최대의 철쭉 군락지로 유명한 곳인데, 선암사에서 애진봉 정
상까지 길이 잘 닦여져 있어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다.
허나 몇 발자국 떼기가 무섭게 귀차니즘이 거세게 밀려오면서 선암사 서쪽 소나무숲에서 발길
을 돌렸다. 이렇게 바로 철수하니 정말 밥을 조금 먹다만 기분이다. 허나 땡기지가 않으니 어
쩌겠는가. 이렇게 스치고 지나가는 수밖에...


▲  애진봉으로 인도하는 소나무 숲길

▲  선암사 서쪽 소나무숲

▲  선암사 약수터

다시 공양간으로 내려오니 그 옆구리에는 나그네를 위한 쉼터가 있었다. 쉼터에는 간단한 먹
거리와 염주, 불교용품을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쉼터 의자에는 산꾼 여럿이 속세에서 가져온
먹거리를 섭취하고 있었다.
쉼터 옆에는 선암사 약수터가 있는데 지역에서 꽤 알려진 약수로 물의 낭비를 줄이고자 수도
꼭지를 달아 물을 통제하고 있었다. 졸고 있는 파란 바가지를 깨워 물을 담아 목구멍에 들이
키니 물이 빛의 속도로 목구멍과 폐부를 시원하게 적셔준다.
선암사 경내로 다시 들어가 청동북이나 보고 가려고 대웅전을 기웃거렸으나 아직 예불은 끝나
지 않았다. 새가슴마냥 문 밖에서 청동북의 안부를 확인해 보았으나 내부가 다 보이지 않아
쿨하게 포기하고 일주문과 각박한 계단을 통해 선암사를 나와 다음 정처로 이동했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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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최대의 황금법당을 지닌 고즈넉한 산사, 구산동 수국사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만난 수국사의 늙은 보물들)

서울 구산동 수국사


' 서울 수국사 봄나들이 '
수국사 대웅전과 오색연등
▲  하늘을 가득 메운 오색 연등과 그 너머로 살짝
보이는 수국사 황금법당(대웅전)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을 며칠 앞둔 5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친한 후배와 구산동(龜
山洞) 수국사를 찾았다. 그곳은 2009년 석가탄신일에 처음 인연을 지은 이래 여러 번 발
걸음을 했던 곳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탱화들을 아직 못나지 못했다. 하여 그들과 어
떻게든 인연을 지을 겸, 미답지로 남은 봉산까지 싹 처리하고자 겸사겸사 찾았다. (봉산
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겠음)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4시 경, 구산동 종점에서 그를 만나 국민의 대표 간식인 떡볶이
와 순대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봉산 자락에 묻힌 수국사로 들어섰다.



 

♠  동양 최대의 황금사원, 수국사(守國寺) 둘러보기

▲  수국사를 들어서다.
석가탄신일의 슬로건인 '차별없는 세상 우리가 주인공' 말은 참 좋다만
그런 세상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법 앞에 평등 어쩌구
강조하지만 거기서부터 벌써 오류가 발생하고 있으니 말이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석가탄신일에 벌써부터 흥겨움에 달아오른 수국사는 태화산(봉산) 자락에
둥지를 튼 절이다. 이곳은 특이하게도 법당(法堂, 대웅전)을 금으로 거의 도배하여 이 땅 유
일의 황금사원이자 동양 최대의 황금사원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데, 그로 인해 황금절, 황금사
원이란 근사한 별명을 지니고 있다.
법당에 사용된 재료부터가 다른 절과 확연히 틀려 두 눈을 제대로 휘둥그레지게 하지만 아직
은 은평구(恩平區)의 오래된 절 정도로 인지도는 낮은 편이다. 게다가 봉산 자락이라 봉산 또
는 태화산 수국사를 칭해야 되나 산세가 부실하여 믿음이 떨어지는지 거리가 좀 떨어진 삼각
산(북한산) 수국사를 칭하고 있다.

이곳은 겉으로 보면 현대 사찰로 보이겠지만 나름 역사가 있는 절로 1459년 세조(世祖)가 그
의 맏아들인 의경세자(懿敬世子)의 명복을 빌고자 그의 묘인 경릉(敬陵) 동쪽에 세운 정인사
(正因寺)에서 비롯되었다. 이때 승려 설준(雪峻)이 절을 지으면서 설계까지 모두 도맡았다.
 
1471년 의경세자의 부인인 인수대비(仁粹大妃, 성종의 어머니)는
'절을 처음 지었을 때 급하게 만들어 재목이 좋지 않고 쓰임새가 정밀하지 못하다'
이르며 판
내시부사 이효지(李孝智)로 하여금 절을 크게 중창하게 했다. 중창된 절의 규모는 119칸으로
단청이 아름다워 광릉(光陵)의 원찰(願刹)인 봉선사(奉先寺)에 버금갔다고 하며, 1472년 석가
탄신일에 낙성법회(落成法會)를 화려하게 베풀자 법회에 참관한 승려 수백 명이 일찍이 없던
일이라며 감탄했다고 전한다.
인수대비가 이토록 정성을 쏟은 것은 그의 남편인 의경세자<덕종(德宗)으로 추존됨>의 원찰이
기 때문이다. 이후 예종(睿宗)의 원찰까지 겸하게 되었고 성종은 봉선사와 비슷하게 쌀 30섬, 면포와 정포를 각각 50필씩 지원했다.

1504년 절에 불이 나자 연산군(燕山君)은 경기감사와 형조참판를 소환하여 불을 낸 이를 국문
하게 하고 놀란 영혼을 위해 위안제(慰安祭)를 지내게 했다.

▲  온갖 연등으로 가득한 대웅전 내부

▲  용왕상(龍王像)과 연못

임진왜란 시절에 파괴된 것으로 여겨지며 이후 다시 중건되어 법등을 이어오다가 1721년 숙종
(肅宗)과 인현왕후(仁顯王后)의 능인 명릉(明陵)의 원찰이 되면서 나라를 지키는 뜻의 수국사
로 이름을 갈게 된다. 허나 다시 지원이 끊기면서 절은 폐허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잠시 속
세의 뇌리 속에서 두리뭉실 잊혀져 갔다.

1897년 북한산성 총섭(摠攝)으로 있던 월초거연(月初巨淵, 이하 월초)은 진관사(津寬寺)에 들
렸다. 진관사는 북한산(삼각산) 서부를 대표하는 절로 왕실의 지원이 각별했던 곳이다.
그는 대웅전에서 예불을 하다가 문득 구석에 처박혀있던 아미타불상 앞에 불기(佛器)가 없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겨 진관사 승려에게 이유를 물으니 그들은 퉁명스럽게
'그 불상은 수국사가 망해서 부득이 우리 절로 가져온 겁니다. 우리 것이 아니라서 차나 향을
공양한 적이 없지요~!'
그 말을 들은 월초는 발끈하여 아미타불 앞에 예불을 올리면서 수국사를 반드시 일으켜 세울
것을 속으로 다짐했다고 한다.

1900년 황태자(皇太子, 훗날 순종)가 중한 병에 걸리자. 다급한 고종이 월초에게 태자의 쾌차
를 기원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월초는 청도 운문사 부근 사리암(邪離庵)에서 100일 동안 나
반존자(那畔尊者) 기도를 올렸는데, 80여 일 되는 날에 늙은 승려가 꿈속에 나타나 금침(金針
)을 한번 놓는 사이에 태자의 병이 말끔히 나았다는 것이다.
이에 크게 기뻐한 고종은 월초에게 소망을 물으니 그는 바라는 것이 없다고 답을 올렸다. 그
러자 황제가 관직과 녹봉을 제의하자 월초는
'폐하의 말씀은 감사하오나 어찌 출가한 승려가 나라의 녹을 받겠습니까? 다만 서오릉 부근에
수국사가 퇴락하여 향화(香火)가 끊긴 것이 애석하오니, 그 절의 중창을 소망합니다'

이에 황제가 '효심과 신심(信心)은 원래 하나다'라 치하하며 어용(御用)목수를 보내 절을 지
금의 자리로 옮겨 중창하게 했다. 또한 황실에서 내린 돈과 관리들이 모금한 26만 8천냥으로
고양군 지도면 내곡리, 중면 산황리 2곳에 땅을 구입하여 절에 제공했으며, 1907년에 황실에
서 하사한 금 1,500원으로 개금, 탱화 불사를 하였다. 이때 진관사에 얹혀 살며 굴욕의 시간
을 보냈던 아미타불을 도로 가져와 봉안했다. (현재 대웅전에 있음)

1908년 석가탄신일에는 월초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여러 승려의 도움으로 괘불탱과 금강번(
金剛幡) 31위를 조성했으며, 양산 통도사(通度寺)에서 금 1천, 부산 범어사(梵魚寺)에서 금 4
백을 지원했다.

▲  초전법륜상

▲  수국사 십육나한도

6.25전쟁 때 말끔히 파괴되는 비운을 겪었으나 2005년 이후 주지 토진과 원담의 노력으로 지
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동양 최대의 황금사원이자 이 땅 유일의 황금사원이란 이미지를 진하게 내걸며 절을 꾸리고
있으며, 초전법륜상과 특이하게 'V'수인(手印)을 취한 성취여래불<成就如來佛>, 여름에만 있
다는 목탁새 등 독특한 명물로 속세에 강하게 손짓한다.

비록 고색의 내음은 녹슬었고 구산동 주택가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고즈넉한 산사(
山寺)의 분위기도 다소 떨어진다. 또한 많은 절집들이 앞다투어 외형을 불리다보니 그에 대한
반감도 적지 않은 편으로 수국사는 사치품인 금으로 법당을 꾸며 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참고로 금은 사악한 것을 몰아낸다고 하며, 불상에 금을 입히는 이유도 바로 그때
문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좋아하는 광물과 색깔이 바로 금과 금색임)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지장전, 삼성각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
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그 뱃속에서 나온 복장유물이 있다. 그리
고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탱화 6점이 있으나 이들은 모두 조계사(曹溪寺)에 있는 불교중앙박물
관에 가 있다.

* 수국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구산동 산135-1 (서오릉로23길 8-5, ☎ 02-356-2001)
* 수국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十'자형의 지장전(地藏殿)

수국사 경내를 들어서면 3층 규모의 문화센터가 마중을 한다. 그를 지나면 오른쪽(북쪽)에 너
른 뜨락과 지장전, 지장보살상이 있고, 정면으로 가면 용왕상이 있는 연못과 삼성각, 대웅전,
봉산 산길이 차례로 이어진다.

문화센터 옆에 자리하여 속세(俗世)를 굽어보고 있는 지장전은 원래 종의 보금자리인 종각(鐘
閣)이었다. 그러다가 잠시 대웅전으로 쓰였고 황금 법당이 지어지자 지장전으로 바뀌었다. 원
래는 '一'자형 건물이었으나 내부를 확장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으며, (이 땅 유일의 '十'자
형 지장전임) 칠성과 산신 등도 같이 있었으나 삼성각이 생기면서 그들은 싹 방을 빼고 지장
보살과 그 식구들만 남아있다.


▲  봄꽃에 감싸인 삼성각 계단

세상에 이보다 고운 계단길이 또 있을까? 계단 좌우로 봄이 곱게 붓질을 한 봄꽃들이 향연을
펼치고 있어 속세에서 오염된 두 안구를 제대로 정화시켜준다. 금색으로 도배된 대웅전보다
여기가 더 화려해 보이고 더 정감이 가니 역시 사람은 자연 속에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  새로 지어진 8각형의 삼성각(三聖閣)
지장전의 신세를 졌던 독성과 산신, 칠성의
보금자리로 아직 단청도 입히지 않은 아주
따끈따끈한 새 건물이다.

▲  삼성각 칠성탱
1960년에 그려진 것으로 칠성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져 있다.

▲  삼성각 산신탱
1960년에 조성된 것으로 마치 100년 이상
묵은 것처럼 꽤 늙어 보인다.

▲  삼성각 천정에 걸린 동그란 장엄등
장엄등에 동자승이 입혀져 있다.

▲  석조미륵불입상
2002년에 조성된 석불로 자비로운 인상이
중생들의 마음을 들었다 놓는다.


▲  꽃으로 치장된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부처가 기쁨을 가득 드러낸 채, 며칠 앞으
로 다가온 그날을 기다린다. 그 기다리는 시간은 정말 1년 같겠지만 정작 석가탄신일 당일은
1시간도 안될 정도로 체감 시간이 짧을 것이다.
혹시 모를 비와 강렬한 햇살의 태클에 대비해 그의 허공에 우산까지 설치했고, 그 앞에는 깨
알같이 불전함을 두어 석가탄신일 특수를 애타게 고대한다.


▲  초전법륜상(初轉法輪相) - 오비구상(五比丘像)

대웅전 우측으로 부처가 5명의 승려와 야외학습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눈길을 잡아 맨다. 다
들 진지하게 부처의 설법을 듣고 있는 승려들, 오른쪽 어깨를 훤하게 드러낸 법의를 입은 그
들은 부처의 설법에 기뻐하며, 어떤 이는 합장(合掌)으로 예를 올린다.
이들은 초전법륜상으로 오비구상이라 하는데 부처가 녹야원(鹿野苑)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하
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이 땅에서는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합성수지로 조성
된 것으로 그들의 뜨거운 학습 현장을 인자한 모습의 관세음보살 누님이 묵묵히 지켜본다.


▲  수국사의 상징이자 대표 감성, 황금법당 대웅전(大雄殿)의 위엄

▲  수국사의 하늘을 훔친 오색 연등과 그 너머로 보이는 대웅전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수국사의 감성을 자아내고 있는 대웅전이 금빛을 드러내며 웅장하게
자리해 있다. 계단 위쪽에 높이 들어앉은 탓에 그 위엄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돋보여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 정도이다.
그는 정면 3칸, 측면 7칸, 면적 108평에 이르는 팔작지붕 건물로 청기와를 씌운 지붕을 제외
하고는 기둥과 문짝, 벽, 평방(平枋), 공포(空包) 등 건물 안팎을 99.9%의 순금으로 싹 도배
하여 호화로움을 마음껏 뽐낸다. 그래서 고운 빛깔의 단청은 없으며 건물이 상처가 생기지 않
도록 절에서 꽤나 애지중지한다.
해가 질 무렵이나 어둑어둑한 저녁, 연등 빛에 비친 대웅전의 모습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으
며 그 내부 역시 질식할 정도로 화려함의 극치를 드러낸다. 온통 도금이 입혀진 기둥과 벽,
천정을 희롱하는 연등은 중생의 눈을 잔뜩 흥분시키며 그 황홀한 빛에 두 눈이 머는 것은 아
닌지 걱정이 들 정도이다.
불단에는 각각의 표정과 제스처를 취한 5개의 큰 금동불상을 두었고, 그 사이로 작은 보살상
과 불상 4개를 배치해 특이한 구도를 보여준다.


▲  대웅전의 허공을 가득 채운 장엄등의 찬란한 물결

▲  대웅전의 주연과 조연들 (큰 불상 5기와 작은 불상/보살상 4기)

▲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보물 1580호

대웅전 불단이 가히 무너질 정도로 들어앉은 불상/보살상 가운데 특별히 눈여겨 볼 존재가 하
나 있다. 바로 아미타여래좌상이다.
그는 수국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아미타불 뱃속에서 나온 유물은 제외>로 나무로 다져 금을
입혔다.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앉은 키 104cm
, 무릎 폭 72cm이다. 원래는 철원 심원사(深源寺)에 있었으나 수국사로 넘어왔으며, 조선 후
기에 절이 망하면서 진관사에서 샛방살이를 하기도 했다.
허나 다른 절의 불상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공양도 받지 못하고 구석에 처박혀 굴욕을 당하다
가 그것을 발견한 월초가 발끈하여 그에게 예불을 표하며 수국사 중창을 다짐했다고 한다.

이후 고종의 지원으로 절을 중건하고 그를 다시 가져와 법당에 두었다. 진관사에서의 안좋은
추억 때문인지 약간 인상은 쓰고 있지만 중후하고 넉넉한 얼굴로 고려 후기 불상 양식과 많이
비슷하다고 하며, 예전에는 신변보호를 위해 유리막으로 감쌌으나 지금은 거추장스러운 유리
막을 치우고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수국사 경내 (오른쪽 3층 건물이 문화센터)
오색 연등이 낮게 하늘을 가리며 석가탄신일 분위기를 드높이고 그 너머로
북한산(삼각산) 산줄기가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  조계사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만난 수국사의 보물들

▲  수국사 아미타불도(阿彌陀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2호

수국사의 지방문화재 탱화를 보러 간만에 왔건만 결국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들
이 조계사 불교중앙박물관으로 외출을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랴부랴 그들을 찾아 나섰다.
(지금은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음)
보물로 지정된 아미타여래좌상을 제외한 지방문화재 탱화 6점과 아미타불 복장유물이 나들이
를 나왔는데 그들이 속시원히 공개된 적은 거의 없었다. 하여 이런 상큼한 기회를 놓치면 그
들과의 술래 관계를 영영 청산하지 못할 것이다. (이들 탱화에 대한 지식이 짧은 관계로 문화
재청 정보를 거의 그대로 사용했음)

불교중앙박물관에 들어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수국사 탱화는 아미타불도이다. 그는 1907년
에 편수 보암긍법(普庵肯法), 두흠(斗欽), 금어 봉감(奉鑑), 법연(法沿), 범천(梵天) 등이 그
린 아미타후불탱으로 대시주인 강문환과 강재희가 황명에 따라 고종 황제 성수만세(聖壽萬歲),
황태자(순종) 경수천세(慶壽千歲), 황태자비 윤씨 보령천추(寶齡千秋), 황귀비 엄비 보수제년
(寶壽齊年), 의친왕 보수무강(寶壽無疆), 의친왕비 보록장춘(寶籙長春), 영친왕 보소여해(寶
笑如海)를 기원하고자 제작했다.
존칭 뒤에 붙은 성수만세, 경수천세, 보록장춘 등은 이름만 다를 뿐, 모두 만수무강을 기원한
다는 뜻으로 성수만세는 황제에게만 쓸 수 있었고, 경수천세는 황태자(태자), 그 외에는 황족
에게만 사용했다.

그림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8대 보살, 10대 제자, 사천왕, 팔부중, 천인 등이 배치되어
있는데, 갸름한 얼굴에 가는 눈썹과 눈, 작은 입, 높이 솟은 육계를 지닌 아미타불은 수미좌(
須彌座) 위 청련의 연꽃대좌 위에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보이며 결가부좌를 했다. 신광(
身光) 내부를 금박으로 처리해 마치 빛이 발산되는 듯 하며, 그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
보살이 협시하고 있고 그림 밑 중앙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마주보고 있다. 나머지 보살
은 아미타불을 향하고 있는데 지장보살은 어디로 마실을 갔는지 나오지 않는다.

보살들 위에는 아난존자(阿難尊者)와 가섭존자(迦葉尊者) 등 10대 제자가 있으며 윤곽선 주변
에 음영을 표현하여 입체적이면서도 사실적인 느낌을 준다. 그들 좌우에는 용의 뿔을 들고 있
는 용왕과 공양물이 든 과반을 든 용녀(龍女), 사자관과 코끼리관을 쓴 팔부중, 금강신 등이
표현되었다. 그리고 화면의 하단에는 사천왕들이 각자의 연장과 갑옷 등을 갖추며 서 있다.

탱화의 정보를 담은 화기(畵記)는 그림 좌우 가장자리에 있다. 왼쪽에 황제 가족의 성수만세
를 기원하는 내용이 있으며 오른쪽에 연화질과 시주질을 적었다. 화기에 의하면 1907년 2월 7
일, 13점의 탱화<대웅전 상단탱, 대료(大寮)의 상단탱, 영산탱, 독성탱, 칠성탱, 구품탱, 중
단탱, 감로탱, 산신탱, 신중탱 2점, 현왕탱, 조왕탱>을 조성해 봉안했다고 나와있으나 지금은
6점만 겨우 남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이 아미타불도는 대료의 상단탱으로 여겨
진다.

구한말에 황실 발원 탱화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구도와 다양하고 화려
한 문양, 능숙하고 섬세한 필치가 돋보이며, 구한말 서울 지역에서 활동했던 보암긍법과 두흠
, 봉감 등이 참여하여 그린 작품이다.


▲  수국사 십육나한도(十六羅漢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3호

16나한도는 1907년에 보암긍법, 두흠, 금어 봉감, 법연 등이 조성한 아미타후불탱의 일원으로
조성 목적은 앞서 아미타불도와 비슷하다. (이후에 나올 4개의 탱화도 같음)

그림 중앙의 큰 광배에 들어있는 석가3존상은 결가부좌했는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짓
고 가부좌를 취한 석가여래의 모습은 가는 눈썹과 눈, 좁은 입술, 높게 솟은 육계 등이 수국
사 아미타불도의 본존불과 매우 비슷하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의 대의(大衣)에는
아미타불의 대의와 유사한 색 문양과 금문양 등으로 화려하게 묘사되어 있다.
석가여래 좌우에는 협시보살이 청련의 연화대좌에 편안한 자세로 결가부좌했는데, 이중 왼쪽
협시보살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으나 오른쪽 것은 두 손으로 흰 백련을 받들고 있다. 이들
은 16나한과 함께 묘사된 점으로 미루어 왼쪽은 미륵보살, 오른쪽은 제화갈라보살 등 수기삼
존을 배치한 것으로 여겨지나 지물만으로는 단정하기가 어렵다. 석가삼존상 두르고 있는 신광
내부를 모두 금박으로 붙여 화면 중앙에서 광명이 퍼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석가3존상 좌우로 일정하게 분리된 네모의 틀 속에 다양하게 표현된 16나한은 산 또는 계곡을
배경으로 묘사되어 있다. 제12존자(나가세나)와 제13존자(안가다)를 제외한 나한들은 모두 1~
2명의 동자 또는 공양자를 거느리고 있는데, 사각형 틀 속에 각기 따로 묘사된 나한들의 상황
묘사는 매우 뛰어나며 해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나한들은 유사한 크기로 묘사되었고 그 색
감과 필선은 매우 수려하며 나한의 옷과 각종 지물에는 금니가 많이 쓰였다.

이 16나한도와 같은 화면분할식 구도는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울, 경기도 지역의 팔상도, 나
한도, 구품탱 등에 많이 사용된 구도로 나한들은 일정한 사각형 틀 속에 묘사되고 있어서 전
체적으로 정돈된 느낌을 준다. 또한 이 그림은 왕실 발원의 불화답게 금박과 금니 사용이 많
으며, 안정적인 필선과 형태, 조화로운 채색 등이 돋보인다.


▲  수국사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4호

1907년에 조성된 것으로 극락의 구품연화대(九品蓮花臺)를 담고 있다. 편수 보암 긍법과 두흠
, 금어 재원, 기정, 상은이 그렸으며, 강문환과 김종성, 원일상이 감동(監董)을 맡았다.

이 구품탱은 화면을 9개로 나누어 구품도 관련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런 분할 구도법은 개운
사(開運寺) 팔상도, 흥천사(興天寺) 극락구품도, 고양시 흥국사(興國寺) 극락구품도, 낙산 청
룡사(靑龍寺) 팔상도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구한말 서울, 경기도 지역 탱화에서 많이 나
타나는 구도법이다.
그림 중앙에는 아미타극락회(阿彌陀極樂會)가 묘사되어 있으며 그 주위로 구품 연못이 배열되
어 있다. 높은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보살과 10대 제자, 사천왕, 팔부중
, 천중 등이 둘러싸고 있으며, 권속들은 모두 3단으로 비스듬히 배치되어 있는데 흥천사 극락
구품도, 고양시 흥국사 극락구품도 등 다른 구품도에는 인물만 가득한데 반해 이 구품도에는
화면 좌우에 수목을 배치하여 화면 구성이 훨씬 여유가 있어 보이며, 아미타불의 신광과 화면
하단을 금박으로 처리하여 화려한 느낌을 준다.

극락회 향우에는 보살의 극락정토참예도(極樂淨土參詣圖)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아미타불 회
상에 참여하고자 모여드는 보살의 무리와 동자상, 그리고 무악천인 등을 그린 것으로 전각과
연못에는 극락조(極樂鳥)와 연꽃 등이 있다. 그리고 극락회 향좌의 성중극락정토참예도(聖衆
極樂淨土參詣圖)에는 극락의 주악천인과 아미타불 회상에 참여하고자 찾아온 7인의 성문상 등
이 있으며, 그 배경으로 극락조와 노송, 구름 등의 자연물로 이루어진 전각과 연못이 있다.

극락회 바로 밑에 자리한 극락정토 장면은 16관(觀) 중 제6총관(總觀)에 해당되는 관으로 보
수(寶樹), 소나무, 대나무, 기암괴석, 중층 지붕의 전각이 그려져 있다. 전각 앞에는 활짝 핀
연꽃과 연잎으로 가득한 연못이 있고, 주변 곳곳에 코끼리, 금모사자 등이 보인다. 제6총관의
좌/우 하단의 3면에는 극락왕생의 왕생정토를 표현했다. 왕생장면은 극락정토를 상품(上品),
, 중품(中品), 하품(下品)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각각 상/중/하로 나누어 아홉 장면으로 다루
었다.

하단 중앙의 제14관에 해당되는 상품은 화면의 반이 연못으로 이루어진 구도로 연못에는 관모
에 관복을 입은 왕생자, 동자형의 왕생자 등 4명의 왕생자가 백련 위에 앉아 있다. 왕생자 위
쪽에서는 부처가 구름을 타고 내려오면서 왕생자들을 향해 광명(光明)을 비추고 있다. 왕생자
들이 있는 연못 위 정토(淨土)에는 다양한 전각과 기암괴석, 수목 등이 기린 4마리, 극락조 2
마리와 어우러져 있으며, 제6총관 향우(向右)에 위치한 장면은 제15관 중품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는 동자형의 사람 모습을 한 왕생자 4명을 아미타불이 맞이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아미타불은 오른손을 어깨 위로 치켜들고 왼손은 무릎에 두며 정면을 향해 앉아있는데 그에게
서 뻗어 나온 빛이 연못 속 백련 위에 앉은 왕생자를 비추고 있다.
그들 배경에는 중층의 전각과 기암괴석, 수목, 극락조, 금모사자, 괴석, 오색을 발하는 금탑
이 보인다. 하단의 중품(향우)에는 구름을 탄 2구의 보살입상이 연못 속의 속인형 왕생자 3구
를 맞이하는 장면으로 보살의 지물인 연꽃에서 광명이 나와 왕생자를 비추고 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학과 낙타 등이 정토에서 노닐고 있다.

제6총관의 향좌(向左)에는 제16관 하품이 배치되어 있다. 연못 속에는 붉은 옷을 입은 2명의
왕생자와 옷을 입지 않은 3명의 왕생자가 백련 위에 앉아 합장하고 있으며, 화면 상단 우측(
향좌)에서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구름을 타고 왕생자를 맞이하러 오는 모습이 보인다. 그 주위로 여러 수목과 전각, 극락조와 기암괴석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2층 전각의 지붕을
금니로 칠했다. 그 밑에 묘사된 다른 하품의 연못에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내용을 반
영한듯 왕생자의 모습은 담지 않았다. 이는 십이겁(十二劫)이 지나야 하품왕생자의 연꽃이 핀
다는 내용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배경에는 수목과 괴석, 학, 사슴 등이 있다.

보암 긍법이 1905년에 봉원사(奉元寺) 구품도를 그렸는데 그것을 초본으로 삼아 제작한 것으
로 보이며, 채색은 금니와 함께 진채색을 다양하게 사용하여 매우 화려하면서도 민화의 극채
색을 연상케 한다. 필치 또한 수려하며, 문양의 표현 등 그 표현력이 매우 치밀하다.


▲  수국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5호

등장인물이 빼곡하여 눈과 정신을 쏙 피곤하게 하는 감로도는 1907년에 그려진 것으로 강재희
가 돈을 대고 강문환, 김종성, 원일상이 감동을 맡았으며, 편수 보암긍법, 편수 두흠, 금어
봉감, 계은봉법, 범화정운, 금운정기, 운호재오, 재원, 상은, 상오, 기정, 법연, 범천, 행언,
현상, 종민, 원상 등 많은 이들이 합심하여 그렸다.

죽은 사람의 극락왕생을 위해 봉안된 감로도는 가로 261cm, 세로 157.5cm에 달하는 화면의 하
단에는 아귀(餓鬼) 2마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그 위로는 많은 음식과 공양물이 차려진 제
단과 칠여래(七如來)가 표현되어 있다. 가로로 긴 화면의 상단에는 칠여래가 합장을 하며 나
란히 서 있으며, 좌측에는 아미타삼존과 아난/가섭존자, 왕후장상(王侯將相), 선왕선후(先王
先后), 북채를 든 뇌신(雷神), 우측에는 지장보살과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등이 구름 위에
서 있다.
7여래 밑에 있는 제단 좌우로 높은 기둥을 세운 후 南無百億化身佛(남무백억화신불, 석가모니
), 南無淸淨法身佛(남무청정법신불, 비로자나), 南無圓滿報身佛(남무원만보신불, 노사나) 등
삼신불번(三身佛幡)을 늘어뜨리고 갖은 꽃과 공양물을 두었는데 바람에 휘날리는 삼신번이 현
장감을 준다. 그런 제단 위에는 대황제폐하(고종), 황태자전하(순종), 영친왕전하, 의친왕전
하 등이 적힌 위패 모양의 불전패가 놓여 있다.

제단에 이르는 돌계단 밑 좌우에 놓인 커다란 화병에는 붉은색과 흰색의 모란이 가득 꽂혀있
으며, 제단 우측에는 흰 천막을 치고 승려들이 모여 앉아 독경하거나 큰 북과 바라를 두드리
며 의식을 치르는 모습, 승무를 추는 모습, 커다란 공양물을 머리에 이고 제단으로 가는 사람
들의 모습 등이 표현되었다.

화면의 하단 중앙에는 서로 마주보고 꿇어앉은 1쌍의 아귀가 크게 그려져 있다. 화염이 뿜어
져 나오는 입과 가는 목, 불룩한 배 등 아귀의 특징을 잘 묘사하고 있으나 얼굴 표정 등에서
다소 희화적이다. 아귀 좌우로는 수목으로 분리된 화면 속에 한복을 입은 남녀들이 춤을 추거
나 싸우는 장면, 대장간에서 일하는 장면, 악사들의 반주에 맞춰 광대가 묘기를 부리고 초랭
이가 부채를 들고 춤추는 장면, 죽방울 놀이를 하는 장면, 무당이 굿하는 장면 등 세속의 다
양한 장면들이 묘사되었는데, 음식을 먹거나 술을 받는 모습, 물건을 파는 모습 등은 당시 장
터의 모습을 재현한 듯 싶다.
여기에 표현된 풍속 장면은 주로 장례나 영가천도 등의 행사와 관련된 장면을 중심으로 표현
되어 수륙화로서의 감로도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화면 우측으로는 뇌신을 표현
한 화염 아래로 우산을 쓴 인물과 뱀에게 쫓기는 장면, 관세음보살보문품의 구제난(救濟難)
장면과 더불어 농사짓는 모습, 공부하는 모습,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 소고 등을 가지며 무리
지어 노는 모습, 일하러 가거나 장터에 가는 모습 등의 다양한 일상생활과 죄인을 벌하는 모
습, 전쟁 장면 등이 담겨져 있다.

이 탱화는 남양주 흥국사 감로도(1868년), 개운사 감로도(1883년), 봉은사 감로도(1892년) 등
서울, 경기 지역의 19~20세기 감로도의 도상과 동일한 도상을 취하고 있으며, 전체적인 구도
표현은 다소 복잡다난해 보이지만 풍속화적인 면이 충실하게 묘사되었다. 또한 인물들의 형태
감이 좀 떨어지기는 하지만 필치가 안정되고 다양한 색감에 의한 충실한 풍속 묘사 등이 돋보
인다.


▲  수국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6호

신중도는 호법신(護法神)의 무리를 담은 탱화로 주로 법당에 걸어 법당 수호 및 청정제의 역
할을 한다.
이 탱화는 1907년에 제작된 것으로 편수 보암 긍법과 두흠, 금어 재원, 기정, 상은이 그렸으
며, 강문환과 김종성, 원일상 등이 감동을 맡았다.
화폭이 270cm에 이르는 큰 신중도로 그림 가운데에 위태천(韋太天)과 범천(梵天), 제석천(帝
釋天)을 두고 그 주위로 천부중과 호법신을 배치했는데, 얼굴이 둥글고 넓적한 위태천은 새
깃털을 꽂은 투구와 갑옷을 입고 두 손으로 삼차극(三叉戟)을 세워 들고 있으며 목을 앞으로
내밀고 있다.

범천과 제석천은 화려한 보관과 천신의 복장으로 정면을 향해 합장인을 보이고 있는데 위태천
과 함께 신광 내부를 금박으로 처리해 그림의 중심 인물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들 주위로 주
악천인(奏樂天人)이 피리, 타박, 생황 등을 연주하고 있으며 해와 달이 묘사된 관을 쓰고 있
는 일궁천자(日宮天子)와 월궁천자(月宮天子), 익선(翼扇)을 든 산신과 홀을 든 조왕신, 천동
, 천녀 등이 있다.

위태천 옆에는 좌우 3구씩 6구의 신장(神將)이 배치되어 있다. 뿔을 든 용왕과 칼과 창을 든
호법신이 있는데 특징적인 인물 표정이 신중탱 전체에 다양성을 주고 있다. 채색은 적색, 녹
색을 비롯하여 금색과 갈색, 짙은 청색 등이 같이 사용되었는데 전체적으로 매우 차분하며 그
속에서 보여지는 금박과 여러 문양은 화폭에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필선은 철선묘를 기본
으로 섬세한 필치가 돋보이는데, 호법신의 수염까지 세밀히 묘사되었으며 윤곽선 주위로 선염
(渲染)을 가해 입체감을 표현하는 등 황실 발원 불화의 품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수국사 현왕도(現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7호

현왕도는 사람이 죽은 지 3일 만에 심판을 하는 현왕(보현왕여래)과 그 식구들을 그린 것이다.
1907년에 월초가 화주(化主), 강재희가 대시주가 되어 황제 가족들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봉안
한 것으로 보암긍법과 두흠, 금어 범화정운, 운호재오, 행언이 함께 그렸으며 가로 248.3cmX
세로 150.8cm 크기로 다른 현왕도와 달리 가로가 길어 현왕도 중에서 매우 큰 규모이다.

현왕을 중심으로 대륜성왕, 전륜성왕(轉輪聖王), 판관, 녹사, 천동 등이 그려져 있으며, 각기
바라보는 방향을 달리한 채, 자유로운 몸짓을 하고 있다. 붉은 관복을 갖춘 현왕은 오른쪽으
로 몸을 돌린 채 십자형 문양이 새겨진 천으로 덮힌 의자에 앉아있으며, 머리에는 경전을 접
어 올려 장식한 관을 쓰고 있고 오른손에는 두루마리를 쥐고 있다.
현왕 앞에 놓인 책상에는 화엄경과 벼루, 붓, 연적 등이 놓여있으며. 현왕 주위로는 대륜성왕
과 전륜성왕 등 여러 명의 녹사와 판관이 배치되어 있다. 그림 위쪽에 있는 동자는 부채, 당
번(幢幡), 산개(傘蓋) 등을 들고 있는데 현왕 앞에 있는 2명은 현왕 쪽으로 몸을 굽히고 있다.
그중 1명은 두루마리를 받치고 있고 다른 1명은 두루마리를 받고 있다.

현왕을 중심에 두고 그 가족들을 좌우로 배치했고 가로폭이 넓은 화폭으로 구성되는 등, 안정
감을 보여주고 있으며 금니 사용과 조화된 채색,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문양, 철선묘의 안정적
인 필치 등이 뛰어난 작품이다.


▲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의 하나인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 보물 1580호


대웅전에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고향(철원 심원사)을 잃었고 심지어 남의 절에서 푸대접
을 받으며 샛방살이를 했던 흑역사가 있다. 그 한이 쌓여서 생긴 사리일까? 그의 뱃속에서는
많은 복장(腹臟)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고려부터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온갖 진귀한 것들
이 주류를 이룬다. 하여 그들은 아미타여래좌상과 한 덩어리로 묶여 국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
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이들은 부피가 작은 진귀한 것들이라 신변보호를 위해 비공개로 묶여 있는데 이번에 모두 외
출을 나오면서 속세에 그 도도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다시 수국사로 돌아가면 어지간해
서는 만날 기회가 없을 것이므로 특별히 시간을 내어 찾았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은 아미타불 뱃속에서 나온 문서 중 유일하게 금속활자(金屬活字)로 인쇄된
경전이다.
1457년 세조가 의경세자의 명복을 빌고자 찍어낸 것으로 자신이 큰 글자의 자본을 직접 써서
주성한 정축자(丁丑字)로 경문을 찍었고 오가의 주해문은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로 찍었다.
그리고 책 끝에는 세조의 발문(發文)과 한명회, 조석문(曺錫文), 임원준(任元濬) 등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인 밀교대장(密敎大藏) 권9 - 보물 1580호

밀교대장은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 지은 '밀교대장', 그리고 1424년에 왜열도에 '밀교
대장경판'을 내렸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이 있으나 아쉽게도 관련 실물은 전하지 않았다. 그러
다가 바로 수국사 아미타불 뱃속에서 그 실체가 처음으로 발견되어 이 땅 유일의 밀교대장으
로 크게 추앙을 받고 있다. 그 자체로도 가치가 엄청난 존재로 1389년에 간행된 것으로 파악
되고 있다.


▲  일체여래 전신사리 보협진언(一切如來 全身舍利 寶篋眞言) - 보물 1580호

'기해년(己亥年, 1239년)'과 '시중(侍中) 최종준(崔宗峻)'의 이름이 적힌 다라니이다. 최종준
은 철원최씨 집안인 최유청(崔惟淸)의 손자로 고종(高宗) 때 15년간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
낸 사람인데, 1239년에 집안과 나라의 안녕을 위해 불상과 이 다라니를 조성했다.


▲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진본 권36 - 보물 1580호
11세기에 판각된 사간본(寺刊本)으로 여겨진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조성하면서
집어넣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표지가 떨어져 나가고 권수 일부가 훼손되었으나
그 외에는 잘 남아있다. 권수제는 경제(經題), 품제(品題)가 나눠져 있고
역자가 그 사이에 표시되어 모두 3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  원문(願文) - 보물 1580호
1389년에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개금한 내용과 시주자가 적혀있다.
<1389년 7월 22일에 개금을 시작, 각각 소요된 금과 니금의 양을 표시했음,
화주는 지식행(智識幸), 시주는 영성군부인(寧城郡夫人) 신씨>

▲  몽골에서 넘어온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 - 보물 1580호
14세기에 원나라(몽골) 보령사(普寧寺)에서 간행된 경전으로 일명 보령장(普寧藏)이라
불린다. 권17, 18, 88, 144, 145, 146 등 총 6권6첩이 발견되었는데, 권 17표지에
'주지 계상(戒祥)'이란 묵서가 있어 수국사로 넘어오기 전에 계상이란 승려가
가지고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  절반 이상이 헝클어진 원문(願文) - 보물 1580호
1562년 불상 중수 때 작성된 원문이다. 불상 개금에 니금 2돈이 소요되었다고
나와있으며 1차 중수(1389년)와 달리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나오지
않아 두 보살상은 사라지고 아미타불만 홀로 있었음을 알려준다.

▲  푸른 피부의 발원문(發願文) - 보물 1580호
1562년 불상 중수 때 시주자인 신사지(愼思智)의 발원문이다. 부모와 자손들 모두
정토(淨土)에서 다시 태어나 불법의 소리를 보고 들으며 칠보(七寶)와
안양(安養)의 나라에서 즐겁게 보내기를 소망하고 있다.

▲  불설장수 멸죄호제동자 다라니경(佛說長壽 滅罪護諸童子 多羅尼經)
- 보물 1580호

이름이 무려 14자에 이르는 이 경전은 간단히 줄여서 '장수경'이라 부른다. 석가여래가 문수
보살에게 알려준 일체 중생의 멸죄장수의 법을 적은 것으로 이 경을 독송하면 아픈 아이를 낫
게 하고, 죽은 사람을 위해 49일 이내에 이 경에 향을 사르고 공양하면 현세에서 장수하게 되
며 악도(惡道)의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한다.
서적 끝에 '복위(伏爲) 황제폐하 ~~ 억재(億載)'란 내용이 있어 13세기 정도에 몽골(원)에서
간행된 것으로 여겨지며, 뒷표지에 '성인시납(性仁施納)'이란 내용이 있는데, 성인은 심원사
승려로 1562년 불상 중수 때 많은 불교 서적을 시납했다.


▲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 보물 1580호
1539년에 황주 심원사에서 펴낸 것으로 1541년 불상을 중수했을 때 다시 인출했는데
당시 불상 중수를 담당했던 심원사의 성인이 이런 사실을 기록했다.

▲  약사유리광여래 본원공덕경(藥師琉璃光如來 本願功德經) - 보물 1580호
1528년 강남 봉은사에서 펴낸 판목을 1541년에 화주 법심(法心)이 심원사에서 인쇄한
것이다. 1562년 불상을 중수했을 때 희섬(熙暹)이 지장경과 이 약사경을 시납했다.

▲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뱃속에 넣었던 여러 조선 중기 직물들 - 보물 1580호

▲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뱃속에 넣었던 조선 중기 동경(銅鏡)과
빛깔이 고운 다양한 보자기들 - 보물 1580호

▲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뱃속에 넣었던 하얀 저고리(조선 중기) - 보물 1580호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을 끝으로 수국사의 찬란한 보물 구경은 마무리가 되었다.
수국사를 품은 봉산(烽山, 207.8m)까지 본글에 싹 담고자 했으나 내용이 너무 장대해지므로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이렇게 하여 수국사 5월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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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북쪽 끝에 숨겨진 고즈넉한 산사, 삼각산 정법사 (복천암터, 산사길, 북악산길)

성북동 정법사, 북악산길


' 성북동 정법사, 북악산길 5월 나들이 '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의 끝 무렵, 후배 여인네와 내 즐겨찾기 명소의 하나인
성북동(城北洞)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4시에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를 만나 최순우(崔淳雨) 옛집
과 길상사(吉祥寺) 등 성북동의 여러 단골 명소를 둘러보니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저녁
을 먹기에는 시간도 이르고 입과 위가 섭취 준비가 덜 되어있어서 잠깐 눈요깃감을 생각
하니 번쩍 '정법사'가 뇌리 속에 스친다. 그곳은 길상사에서 북쪽으로 500m 떨어진 절로
성북동을 100회 이상 들락거렸음에도 아직까지 내 손과 발이 미치지 못한 미답처였다.

정법사가 미답처(未踏處)로 버젓이 남아있던 것은 나를 흥분시킬 요소가 전혀 없는 현대
사찰로 보았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에 창건된 것으로 알고 있었음) 하지만 그곳도 성
북동에 안긴 명소의 일원이라 서울 장안의 미답지를 1개라도 더 지울 겸 그곳을 찾았다.


▲  정법사 입구에 세워진 정법사 표석
표석 옆으로 놓인 계단길을 오르면 바로 정법사 경내이다. 계단길 옆에는
경사진 포장길이 있어 취향에 따라 골라가면 된다.



 

♠  성북동 꼭대기에 들어앉은 고즈넉한 산사, 조선 후기에
지어진 복천암의 옛터를 지키고 있는 정법사(正法寺)

▲  정법사 대웅전과 그 주변

길상사에서 북쪽 오르막길을 7분 정도 오르면 골목(대사관로13길)이 서쪽으로 크게 구부러진
곳에 정법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성북동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제일 북쪽 구석으로 북악산(백악산) 북쪽 능
선 자락에 있으나 넓게 보면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에도 해당되어 '삼각산 정법사'를 칭
하고 있다. 18세기에 호암 체정(虎巖 體淨, 1687~1748)이 창건한 복천암(福泉庵)에서 비롯되
었다고 하는데, 왕실과 나라의 안녕을 비는 원찰(願刹)의 역할도 했다고 전한다.
허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감쪽같이 사라져 터만 남은 것을 1959년 건봉사(乾鳳寺) 만일
염불회(萬日念佛會)의 회주(會主)인 보광(葆光)과 석산(石山)이 가회동(嘉會洞)에 있던 건봉
사의 포교당인 정법원(正法院)을 이곳으로 옮겨와 절 이름을 정법사라 짓고 오래전에 끊긴
복천암의 뒤를 잇게 했다.
만일염불회의 고명한 염불승(念佛僧)이었던 석산이 주석하면서 염불수행의 새로운 일가를 이
루었으며, 조금씩 절을 키워나가 지금에 이른다.

아담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산신각, 강당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비록 옛 복천암을 계승
했다고 하나 엄연히 20세기 중반 이후에 중창된 절이라 고색의 내음은 여물지 못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비록 지정문화재는 없으나 조선 후기에 조성된 관세음보살상과 복천암터 주
춧돌, 왜정 때 조성된 산신탱 등을 지니고 있다.

절 바로 서쪽에는 '우리옛돌박물관'이란 이색 박물관이 있는데 서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
고 있으며, 매년 5월과 9~10월에는 성북동 명소를 중심으로 성북동 야행(夜行) 축제가 성황
리에 열린다. 성북동에 있는 문화유산과 여러 명소들, 미술관, 식당, 찻집, 까페들이 거기에
동참하여 달이 기울도록 흥겨운 분위기를 이어가는데, 정법사도 거기에 동참하여 소소하게
음악회를 열거나 전통차 1잔의 여유를 선사한다.

▲  우수에 잠긴 채,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옛 복천암 주춧돌들 ▲

대웅전 뜨락 구석에는 옛 복천암의 주춧돌 여럿이 우두커니 서 있다. 저들은 어느 건물을 받
쳐들던 주춧돌이었을까? 크기를 봐서는 법당으로 여겨지나 저들이 침묵으로 일관하니 그저
허공에 내뱉는 나의 부질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지금은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크지만 무
게가 없는 하늘을 막연히 이고 있다.

▲  조촐하게 꾸며진 연못과 옛 복천암의
길쭉한 주춧돌들

▲  대웅전 뜨락에 세워진 서쪽 5층석탑
(20세기 중반에 세워짐)


▲  정법사 대웅전(大雄殿)

정법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커다란 팔작지붕 건물이다. 그 앞에
는 뜨락이 닦여져 있고 20세기 중반에 지어진 5층석탑 2기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데 동쪽
탑은 벌써부터 피부가 까무잡잡하여 젊은 나이임에도 다소 늙어 보인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
보이면 그리 좋지는 않지만 문화유산과 탑, 석불은 오히려 나이가 들어 보어야 더 보기가 좋
다.
대웅전 맞은편에는 2층짜리 강당이 있어 1금당(법당) 2탑, 강당 형태의 가람배치를 취하고
있으며, 법당 안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금동관세음보살좌상과 석가3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  동쪽 5층석탑
세월을 너무 예민하게 탔는지 벌써부터
검은 때가 가득 끼었다.

▲  대웅전 맞은편에 자리한 2층 강당(선방)
사진에 보이는 부분이 2층으로 1층에는
종무소와 찻집 등이 들어있다.


▲  경내에서 바라본 천하
성북동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도 그런데로 괜찮다. 가까이로 성북동과
와룡공원을 비롯해 멀리 잠실, 강남 지역과 남한산성을 품은 남한산(청량산),
대모산(大母山) 산줄기까지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온다.

▲  대웅전 금동석가3존상 (오른쪽이 관세음보살상, 왼쪽은 지장보살상)

서로 미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대웅전의 주인장 석가3존상, 그들 가운데 보관(寶冠)을 눌러
쓴 관세음보살상이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다. 그렇다고 옛 복천암의 유물은 아니며 정법원
시절에 다른 곳에서 업어왔다고 한다. (고향은 알지 못함) 그들 뒤에는 조그만 금동 원불(願
佛)이 빼곡히 자리해 일제히 금빛을 쏘아대고 있는데 그 눈부심에 나의 침침한 두 망막이 멀
어질 지경이다.

▲  속세를 걱정하듯 바라보는 하얀 피부의
미륵불입상 (대웅전 옆)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산신각(山神閣)


▲  산신각 산신탱(山神幀)
산신각에는 산신과 독성이 봉안되어 있다. 산신탱은 1940년에 조성된 것으로
하얀 부채를 든 붉은 옷의 산신 할배와 그의 심부름꾼인 동자, 호랑이 등
산신의 주요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산과 폭포도 그려짐)

▲  산신각 독성탱(獨聖幀)
독성 할배(나반존자)와 동자, 그의 집인 천태산(天台山)이 그려져 있다. 그림이
다소 늙어 보여 산신탱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듯싶다.

▲  주렁주렁 이어진 석조(石槽)
산사에 왔다면 목구멍도 달랠 겸, 물 1모금 마셔줘야 된다. 늦봄 가뭄에도
물이 졸졸 나와 바가지를 금세 채웠고 목구멍에 투하하니 몸속의 때가
싹 가신 듯 마음이 시원해진다. 역시 무더위 갈증에 들이키는
물만큼 달콤한 것은 없다.

▲  정법사에서 만난 정겨운 풍물시, 부뚜막과 검은 가마솥

정법사는 부뚜막에 검은 피부의 가마솥을 두어 밥과 국을 처리하고 있었다. 저기서 숙성된
하얀 쌀밥과 국의 맛은 어떠할까? 몰래 그 뚜껑을 열어 살짝 훔쳐 먹고 싶다. 지금은 전설이
되버린 나의 단양(丹陽) 외가집에도 저런 풍경이 분명 있었는데 이제는 흔적도 없다. 오로지
지우는 것을 좋아하는 세월의 본능 앞에 그 모든 것이 산산이 흩어지고 사라진 것이다.


▲  산사길에서 바라본 정법사 경내와 대웅전의 두툼한 뒷통수

* 정법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330 (대사관로13길 44, ☎ 02-762-0774)
* 정법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 흔쾌히 클릭한다.



 

♠  산사길, 북악산길(북악산로) 거닐기

▲  정법사 뒷쪽 산사길 ①

정법사 서쪽에는 북악산길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다. 절 옆구리를 지나는 산길이라 그에 어울
리게 '산사길'이란 정겨운 이름을 지니고 있는데 나는 정법사만 알고 있었지 그 길의 존재는
전혀 몰랐다. 정법사가 준 뜻밖의 선물에 무척 놀라며 '이 길은 어디로 이어질까?' 두근거리
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그 미지의 산사길로 발을 들였다.

정법사 옆은 나무데크길이 닦여져 있으며, 정법사 경내가 바라보이는 쉼터를 지나면 철조망
과 철책문이 나온다. 문은 탐방객을 위해 늘 열려있으나 어두울 정도로 숲이 무성하고 군사
시설이 여럿 있으며 밤에는 유해동물이 가끔씩 출현하는 경우가 있어 가급적 햇님 근무시간
에 들어가기 바란다.

철책문 이후부터 경사가 잠시 각박해진다. 게다가 나무가 삼삼해 햇살을 느끼기가 어렵다.
허나 북악산길 밑부분이라 차량 소리가 심심치 않게 두 귀를 때려대 '속세가 지척이구나~'
안도감을 준다.


▲  정법사 뒷쪽 산사길 ②

▲  산사길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성북동과 도심 동부, 멀리 관악산까지)

▲  숲속다리 갈림길

정법사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길 직전인 숲속다리 갈림길에 이른다. 여기서 길은 여러
갈래로 쪼개지는데, 북악산길 위에 걸쳐진 숲속다리를 건너면 다모정, 북악산길 산책로와 이
어지며, 서쪽 숲길은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640m)로 그 길의 끝인 북까페에서 북악하늘길 제
2산책로(김신조루트)와 만난다. 그리고 서남쪽 숲길은 경사가 다소 있는데 그 역시 북악하늘
길 제2산책로와 이어지며 그 산책로의 정상 부분인 호경암으로 연결된다.

▲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 위에
유연하게 걸쳐진 숲속다리

▲  숲속다리 남쪽 (산사길 방향)


▲  서울의 대표 하늘길이자 드라이브 코스인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

서울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이 달리는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 지금은 그저 평화로운 산책
드라이브 코스로 크게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의 탄생 배경은 그리 곱지 못했다. 바로 1968년
1월에 터진 1.21사태(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무장공비 패거리의 불법 침투 사건)로 뚜껑이 폭
발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서울 수비 강화를 위해 닦여졌기 때문이다.
1968년 2월, 수도 방어를 겸한 관광도로 '스카이웨이(Sky way)'계획을 발표하여 콩 볶듯이
공사에 들어가 그해 9월 28일 완성을 보았다.

북악산길은 돈암동 아리랑고개에서 북악산(백악산) 북쪽 산허리를 지나 자하문고개, 인왕산(
仁王山) 동쪽 허리를 거쳐 사직단(사직공원)까지 이어지는 10km의 길로 서울에 흔치 않은 산
악도로이자 천하 제일로 꼽히는 드라이브 코스이다. 자하문(창의문)을 경계로 북악산 쪽은
북악산길, 인왕산쪽은 인왕산길로 구분하기도 하며 오랫동안 차량을 위한 길로 뚜벅이들은
접근 조차 불가능했으나 둘레길, 도보길 유행에 따라 길 옆으로 산책로를 닦으면서 마음 편
히 두 다리로 거닐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좋은 길은 달랑 1번이 아니라 두고두고 걸어야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에 가서도 꾸
중을 듣지 않는다. 다행히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어서 내 즐겨찾기 명소로 삼아 꾸준
히 재탕하고 있으며 북악산길과 인왕산길 모두 완주했다. 이번에도 계획에는 없었지만 정법
사 옆 산사길에 홀려 그만 여기까지 오고 말았는데, 우리네 인생에는 늘 변수가 있기 마련이
다.


▲  북악산길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의 위엄
(북악산길과 정릉로10길, 대사관로가 만나는 곳 서쪽 쉼터에서 바라본 모습)

▲  북악산길에서 바라본 정릉동과 성북구, 강북구 지역
(멀리 수락산과 불암산 산줄기까지 시야에 들어옴)

▲  찻길과 뚜벅이길이 공존하는 북악산길
지형이 여의치 않은 경우 이렇게 나무데크길을 깔아 통행 편의를 배려했다.
뚜벅이길은 폭이 딱 2인용이며 찻길 또한 2차선이다.

▲  숲속을 가르는 북악산길

▲  동쪽으로 흘러가는 북악산길 (정릉 뒤쪽)

숲속다리에서 시작된 북악산길(북악산로) 산책은 성북구민회관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시간도
늦었고(19시가 넘었음) 뱃속도 배고프다고 난리를 친다. 이럴 때는 그저 본능에 따라 조용히
길을 접고 저녁을 먹으러 가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하여 성북동, 북악산길 산책은 다음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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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북쪽 지붕이자 우리 동네 뒷동산, 도봉산 <무수골, 우이암(관음봉), 관음암, 천축사>

서울의 북쪽 지붕, 도봉산 나들이 (우이암 관음봉, 주능선, 관음암, 천축사)



' 서울의 북쪽 지붕, 도봉산 '
<우이암(관음봉), 도봉산 주능선, 관음암, 천축사>

도봉산
▲  도봉산의 위엄

우이암(관음봉)

천축사 비로자나삼신불도

▲  우이암(관음봉)

▲  천축사 비로자나삼신불도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의 한복판에 서울의 북쪽 지붕인 도봉산(道峯山, 739m)
을 찾았다.
도봉산은 내가 살고 있는 도봉동(道峰洞)과 도봉구의 듬직한 뒷산으로 그의 그늘에 머문
지도 어언 20년이 넘었다.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아차산, 호암산 못지 않은
나의 즐겨찾기 뫼로 매년 여러 번씩 그의 품을 찾아 나의 마음을 꾸준히 비추고 있다.

햇님이 하늘 한복판에 걸린 12시, 집에서 가까운 도봉역(1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김밥
과 간식 등을 사들고 무수천(無愁川)을 따라 도봉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산골, 무수골의 논두렁과 밭두렁, 울창한 숲길을 주마등처럼 지나 자현암
(慈賢庵)에 이르니 본격적인 산길이 펼쳐진다.

무수골의 최상류이자 도봉산 3대 계곡의 하나인 원통사계곡을 오르다가 지독한 시장기를
잠재우고자 계곡 적당한 곳에 자리를 피고 김밥과 만두, 과자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하
늘과 가까운 곳에서 먹으니 모든 것이 정말 꿀맛 같은데, 대자연이 우리 몰래 음식에 꿀
을 바른 모양이다. 거기에 입가심용으로 막걸리까지 몇 잔 들이키니 정말 신선놀음이 따
로 없다.
그렇게 점심을 마치고 하늘과 더욱 가까워지려는 본능에 충실하며 계곡을 올라가면 우이
암 밑 400m 고지에 들어앉은 원통사(圓通寺)가 마중을 한다. 우이암(관음봉)을 내세우며
관음도량을 칭하는 이곳은 규모는 작지만 조망만큼은 가히 국보급이라 서울 장안에 있는
산사 중, 북한산 일선사(一禪寺) 다음급으로 최우수 조망을 자랑한다.
원통사에서 잠시 일품 조망을 누리다가 다시 출발, 이전보다 더욱 각박해진 산길을 땀을
거하게 쏟아내며 10분 정도 오르니 비로소 우이암 서쪽 봉우리에 도착했다. 허나 우리가
발을 딛은 곳은 우이암 정상이 아닌 바위로 이루어진 서쪽 봉우리이며, 여기서 동쪽으로
보이는 바위 산이 바로 우이암(관음봉)이다.



 

♠  도봉산의 남쪽 지붕이자 대자연이 빚은 걸출한 작품,
암벽 등반의 성지로 추앙을 받는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우이암<牛耳岩, 관음봉(觀音峯)>

도봉산 남쪽 끝 봉우리인 우이암(해발 542m)은 아주 잘생긴 순 100% 바위 봉우리이다. 대자연
형님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빚은 걸작으로 약 2억 년 전인 중생대 쥐라기 중엽 시절에 일어났
던 대보조산운동(大寶造山運動)으로 도봉산 산줄기가 형성되었다고 하며, 이후 바람과 비 등
이 계속 산을 깎고 다듬으면서 산 정상부는 화강암이 노출된 채 바위산이 되었고, 그것이 지
금의 도봉산이 되었다.
하여 도봉산은 서울 근교의 대표적인 화강암 바위 산으로 위엄을 날리고 있는데, 자운봉과 선
인봉, 만장봉, 칼바위 등 걸출한 바위와 암봉(巖峰)이 즐비하다. 우이암(관음봉)도 바로 그중
의 하나로 대자연이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의 손길을 격하
게 꺼렸는지 완전히 난공불락의 요새로 지어놓았다.
허나 그렇게 단단히 만들었음에도 하늘과 가까워지고 싶은 그리고 봉우리를 정복하고 싶은 인
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 앞에 결국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도봉산
칼바위와 주봉 능선, 만장봉, 자운봉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봉우리 자체가 완전 수직 절벽으로 아무나 범할 수 없는 천험의 요새이며, 또한 내려가는 것
도 까마득한 그야말로 하늘의 감옥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나 올라갈 수는 없고 장비를 갖춘 암
벽꾼에게만 제한적으로 길을 내주고 있다.
특히 이곳은 암벽 타기에 아주 최적화된 곳이라 암벽꾼들로 늘 부산하며, 전국 암벽 등반대회
가 열렸던 암벽 등반의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대자연이 인간의 접근을 막고자 만든 바위 봉
우리가 졸지에 암벽 등반을 위해 내려준 선물처럼 되버린 것이다.

지금은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에서 아무렇지 않게 우이암이라 불리고 있지만 원래 이름은 관
음봉이다. 관세음보살 누님이 부처를 향해 기도하는 모습과 비슷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
었는데,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쓰고 있는 모습과도 비슷하여 '사모봉'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
다.
도봉산에는 호랑이와 코끼리, 두꺼비, 코뿔소, 학 등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지닌 바위들이 많
은데, 이들이 관음봉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도봉산 제일의 관음성지(觀音聖地)로 추앙을 받았다. 아마도 원통사에 있던 석굴(현
재 나한전)에서 수행하던 승려나 도봉산에서 머물던 승려가 발견하여 관음성지로 격하게 추켜
세웠을 것이다. 이렇게 바위 자체가 아주 휼륭한 관음성지이니 그 후광(後光)을 놓치지 않고
자 바위 밑 적당한 곳에 원통사가 둥지를 틀어 관음도량을 칭한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①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동대문구 지역


조금 밋밋해 보이면서도 순백의 아름다움이 묻어난 이 봉우리에도 왜정(倭政)의 추악한 잔재
가 서려있다. 왜정은 관음봉의 위엄을 욕보이고자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의 우이암으로 강제
로 이름을 갈아버린 것이다. (우이동, 우이시장에서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바꾸었다고도 함)
허나 아무리 봐도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왜정은 왜 그리 눈이 삐딱한지 모르겠다. 어
쨌든 그 이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사람의 망각 속에 완전히 굳어져 버렸고, 관음봉
이란 이름은 흐릿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원통사와 불교 단체, 뜻있는 이들이 원래 이
름으로 다시 갈아야 된다며 천하에 호소하고 있어 차차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

하긴 왜정에 의해 고의로 왜곡되고 격하된 지명이 어디 한둘이던가? 비록 관음봉이 불교식 이
름이지만 왜정의 나쁜 의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니 원래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맞다. 그들의
썩은 잔재가 이 봉우리 속에도 깃들여져 천하를 비웃고 있으니 기분이 다소 씁쓸하며, 이렇게
잘생긴 바위가 소의 귀로 머물러 있는 것도 좀 위엄이 서질 않는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②
우이동을 중심으로 방학동, 쌍문동, 강북구 지역,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이 시야에 들어온다.


앞서 원통사가 아무리 조망이 좋다고 해도 우이암만은 못하다. 해발도 벌써 140m나 차이가 나
며 그만큼 하늘과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머리 위로는 푸른 하늘과 유유히 흘러가
는 구름과 별이 바라보이고, 저 밑으로는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동대문
구,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용마산 산줄기가 시야에 잡혀 여기까지는 원통사와 비슷하다.
허나 이곳에서는 의정부 지역(호원동, 장암동, 민락1,2지구 등)과 상계1동, 도봉동 북부가 추
가로 시야에 들어와 조망의 범위는 조금 넓어졌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③
북한산(삼각산) 백운대와 만경대, 영봉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④
도봉산 산줄기와 도봉1,2동, 상계1동, 수락산을 비롯해 의정부 호원동과
민락1,2지구 등이 두 망막에 잡힌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보다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
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발 밑에 펼쳐진 천하를 바라보니 산부터 점보다 작게 아른거
리는 속세의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즐거운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
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현실은 편히 드러누울 땅도 시원치 않다는 것.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⑤
무수골이 저 밑에 아득히 바라보여 참 많이 올라왔음을 느끼게 한다.


하늘의 감옥 같은 봉우리 정상에 올라선 기분은 어떠할까? 허나 정상부는 좁고, 그 주변은 죄
다 수직 벼랑이니 자칫 실수라도 하는 순간에는 정말 답이 없다. 내가 저기로 순간이동을 당
한다면 아찔한 위치 때문에 염통이 쫄깃해져서 오래 있기도 어려울 것 같다. 그냥 이렇게 적
당히 거리를 두고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에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했다. 막걸리 1병이 남아있어 남은 행동
식과 함께 몇 잔 들이켰는데 이렇게 산 정상부에서 곡차를 걸치니 마치 구름 위에서 마시는
기분이다.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이 베푼 산바람이 땀과 무더위를 싹 털어가고, 대파노라마
처럼 펼쳐진 일품 조망을 실컷 누리니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 받은 마음과 두 안구가 제대로
정화되는 것 같다.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20분 정도 머물다가 우이암능선으로 길을
잡았다.

* 우이암(관음봉)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
약 50~60도 경사로 비스듬히 기대며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


우이암능선은 도봉산의 남쪽 지붕길로 우이암에서 도봉산 주능선(주봉능선) 남쪽까지 짧게 이
어진다. 이곳에서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가 가장 높은데, 동쪽과 북쪽으로 서울 동북부와 의정
부, 도봉산 주능선이, 서쪽과 남쪽으로는 오봉산과 우이령, 북한산(삼각산)이 바라보이며, 특
히 능선에서 바라보는 우이암의 모습이 자못 위엄이 돋는다.

우이암의 자태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서쪽 봉우리와 우이암 능선에서 보는 것이 좋다. 서쪽에
서 보는 것과 능선에서 보는 것이 서로 다른데, 마치 유럽식 투구를 쓴 장군이 비스듬히 기대
어 서울을 바라보는 모습 같으며, (하얀색 모자 달린 옷을 입은 사람이 비스듬히 기댄 모습으
로도 보임) 두건을 쓴 관세음보살이 서울을 걱정하는 모습으로도 보인다. 허나 왜정의 개소리
처럼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니 관음봉을 우이암으로 깎아내린 왜정의 눈이 정상
이 아님을 보여준다. (우이암의 원래 이름을 속히 찾아주고, 우이암능선의 이름도 관음봉능선
으로 바꿔야됨)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지역
도봉구, 노원구, 강북구, 중랑구, 성북구,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용마산 등

▲  우이암능선 전망대에서 바라본 오봉(五峯)과 오봉능선
오봉(해발 660m)은 오봉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우이령 북쪽 봉우리로 도봉산이나
송추에서 접근하면 된다. (바로 밑에 있는 우이령에서는 접근 불가)


우이암능선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면 서쪽을 향해 고개를 내민 우이암능선 전망대가 모습을 비
춘다. 능선길 서쪽 벼랑에 닦여진 이곳은 위치상 오봉과 우이령, 북한산(삼각산)의 북쪽 뒷통
수(상장봉 등)가 바라보이는데, 특히 오봉이 잘 조망된다.


▲  우이암능선 조망대에서 바라본 우이령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도봉산 주능선과 칼바위, 만장봉, 자운봉

우이암능선 전망대에서 북쪽으로 마저 내려가면 보문능선 갈림길이다. 원래는 여기서 동쪽(문
사동계곡)으로 내려가려고 했으나 오랜만에 인연 지은 도봉산 지붕길이라 욕심이 무럭무럭 솟
아났다. 하여 도봉산의 깊이를 간만에 더 누릴 겸, 지붕길(주능선)을 따라 자운봉까지 가기로
했다. 이번에 내려가면 비록 집이 코앞이라고 해도 언제 이곳에 다시 올지 장담할 수 없기 때
문이다.



 

♠  도봉산 주능선(주봉능선) 거닐기

▲  도봉산 주능선 남쪽 구간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도봉산 주능선은 우이암능선 북쪽 보문능선갈림길에서 칼바위를 거쳐 도봉산 정상까지 이어지
는 도봉산의 진정한 지붕길이다. 서울의 최북단 지붕길이기도 하며, 서울 도봉구와 경기도 양
주시(楊州市)의 경계선 역할도 겸하고 있다.
오르락내리락이 다소 있고 바위 암릉도 적지 않으나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거닐 수 있으
며, 북쪽으로 갈수록 하늘과 점점 가까워진다. 길 좌우로 일품 조망이 펼쳐져 두 눈이 호강을
하며, 하늘의 속살도 보일 정도로 나의 위치도 높아진다.


▲  도봉산 주능선 남쪽 구간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우이암(관음봉) 서쪽 봉우리에서 곡차를 마셨다. 허나
어느새 우이암과 저만큼이나 떨어졌으니 정말 저기서 곡차를 마셨나 싶은
착각 마저 든다. 그래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 모양이다.

▲  한층 더 멀어진 우이암 (오봉갈림길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  도봉산 주능선(오봉갈림길 북쪽)에서 바라본 북한산 북쪽 산줄기
가운데 움푹 들어간 곳이 우이령이다.

▲  칼처럼 솟은 도봉산 칼바위
칼바위는 해발 700m의 바위 봉우리로 그 접근이 험해 옆구리에 우회길을 두었다.

▲  칼바위 남쪽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학의 등에 올라탄 기분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


도봉산 정상을 향한 불굴의 집념을 품으며 주능선을 더듬으니 어느덧 칼바위 남쪽 갈림길(640
m 고지)에 이르렀다.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오봉능선과 오봉(오봉산)으로, 직진하면 칼바위와
자운봉, 동쪽은 마당바위와 문사동계곡으로 이어진다. 당연히 직진을 해야겠지만 일행 중 1명
이 심히 안좋은 상태를 보여 직진이 어렵게 되었다.
아무래도 산보다 사람이 우선이니 아쉽지만 자운봉은 불투명한 다음으로 쿨하게 미루고 주능
선을 버리고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여기서 문사동계곡으로 내려가면 도봉산 종점으로 빨리 이동할 수 있다. 허나 그냥 내려가기
에는 너무나 아쉬워 일행들의 동의를 받아 조금은 돌아가지만 마당바위로 이어지는 산길을 택
했다. 이 코스는 각박한 경사지에 가늘게 길이 이어져 있는데, 동쪽은 거의 벼랑이라 통행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바위도 여러 번 넘어야 됨)
허나 벼랑길이라 능선길처럼 일품 조망은 여전히 옆에서 따라 댕긴다. 바로 그 재미로 이 길
을 거닐면 되겠다. 하지만 그리 알려진 길은 아니라서 지나가는 이는 없었다. 그야말로 우리
가 이 길을 전세를 내며 거닌 것이다.


▲  칼바위 남쪽에서 바라본 북한산(백운대, 영봉)
대자연이 초록 물결과 푸른 물결, 하얀 물결을 일으키며 신선의 경지를 자아낸다.
아무리 천재화가가 붓을 휘날린들 저 모습 그대로 재현하기 힘들 것이다.

▲  마당바위 방면 산길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과 도봉산 남쪽 자락

▲  마당바위 방면 산길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지역

▲  관음암(觀音庵)의 자랑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인적이 거의 없는 마당바위 방면 산길을 10분 정도 가니 숲과 큰 바위에 묻힌 관음암이란 비
구니 암자가 살며시 마중을 한다. '어머나 도봉산에 이런 곳이 있었나?' 나의 돌머리 속에는
전혀 정보가 없는 미지의 장소로 적지 않은 놀라움을 안겨준 관음암, 그 절은 법당인 극락보
전과 삼성각 등의 목조 건물 2동과 돌로 지은 요사 등 3~4동이 전부인 조그만 암자이다.

숲에 완전히 감싸여있고 서쪽에는 큰 바위가 하늘을 가리고 있어 바깥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
는 곳으로 이렇게 없는 듯 자리해 있으니 절간답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암자이다. 이런 곳이
기도 올리기에도 딱 좋겠지. 비록 너무 궁벽한 곳이고 접근성 또한 좋지 못하지만 작지만 반
듯한 건물과 오백나한상까지 바위 밑에 주렁주렁 조성했으니 이런 첩첩한 산골에 어찌 이렇게
지었을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곳은 무학대사(無學大師)가 태조 이성계를 위해 기도를 했던 곳이라 전한다. 그가 기도를
하던 중, 엄청난 굉음과 함께 땅이 갈라지며 미륵불(彌勒佛)이 나왔다고 하는데, 이에 크게
놀란 무학이 태조에게 그 말을 전하니 그 자리에 암자를 지었다는 것이다. 허나 이는 어디까
지나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이며, 다만 전설을 통해 기도처나 산악신앙의 현장으로 쓰였던 것
으로 여겨진다.
현재 관음암은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고색의 내음은 아직 여물지 못했다. 딱히
볼거리는 없으나 커다란 바위 밑에 만든 오백나한상이 아주 장관으로 비록 건물이 아닌 바위
밑 노천 공간이지만 오백나한전으로 삼아 애지중지하고 있다. 또한 마당바위와 칼바위를 잇는
산길이 경내를 관통해서 지나기 때문에 절은 꼭 거쳐가야 된다.

▲  맞배지붕을 지닌 관음암 삼성각(三聖閣)

▲  관음암 극락보전(極樂寶殿)

관음암은 해발 560m 고지에 자리해 있지만 워낙 숲의 위엄이 대단해 바깥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요사(寮舍)에서는 보살 아줌마와 비구니의 이야기 소리가 흘러나와 '이 첩첩한 곳도
사람 사는 세상이구나'를 느끼게 한다. 산속에 별천지처럼 숨겨진 관음암, 정말 세상에서 잠
시 나를 지우고 싶을 때 이곳의 신세를 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관음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산31 (도봉산길 92-6 ☎ 02-955-4246)


▲  마당바위와 그 너머로 펼쳐진 서울의 산하

관음암을 벗어나 10분 정도 내려가면 하얀 피부를 지닌 너른 모습의 마당바위가 마중을 한다.
이름 그대로 마당처럼 넓은 바위로 도봉산역과 도봉산 종점에서 도봉산 정상을 향해 오를 경
우 거의 반드시 거쳐야 되는 길목이자 관음암, 문사동계곡 방면으로 갈라지는 요충지이다. 
마당바위에서 잠시 두 다리를 쉬며 천하를 굽어보다가 동쪽 밑에 자리한 천축사로 길을 향했
다. 천축사는 이미 여러 번 인연을 지은 곳이지만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마애사리탑의 존재도
확인할 겸 다시 인연을 잡았다.



 

♠  도봉산 천축사(天竺寺) 둘러보기

▲  천축사 대웅전과 만장봉(萬丈峯)

천축사 정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청동불의 장대한 물결이 두 눈을 놀라게 한다. 거의 4~5단
으로 이루어진 공간에 청동으로 지어진 석가여래상,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불, 약사여
래 등 다양한 불(佛)과 보살(菩薩)을 집합시켰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생의 시주로 지어진 원
불(願佛)로 근래에 조성된 것인데, 대충 헤아려봐도 108불은 넘어 보인다.

청동불/보살군상에서 1굽이를 돌면 북쪽 건너편으로 대웅전을 비롯한 경내가 바라보인다. 경
내 뒷쪽에 바라보이는 바위 봉우리는 도봉산의 주요 봉우리인 만장봉으로 이곳의 든든한 후광
(後光)이 되어준다.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담장 끝에 자리한 아담한 석조(石槽)가 모습을 비춘다. 석조란 물
을 담아두는 돌통으로 높은 산중이라 물을 아끼기 위해 수도꼭지를 달았다. 하여 물을 마시려
면 졸고 있는 수도꼭지를 반드시 움직여야 된다. (가뭄과 수질 문제로 물 섭취가 어려울 수도
있음)

▲  청동불/보살군상의 위엄

▲  담장 끝에 자리한 천축사 석조


▲  고된 세월이 느껴지는 늙은 승탑(僧塔, 부도)

석조 맞은편에는 고색의 때로 자욱한 승탑(부도)이 옥개석(屋蓋石) 등 일부만 남은 채 측은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이 땅에 흔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승탑으로 연꽃잎을 비롯하여 사
자와 코끼리 등 동물이 새겨져 있으며, 조각 수법이 수려하여 천축사의 왕년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그는 조선 후기 것으로 여겨지며, 그 옆에는 오래된 승탑의 옥개석이 덩그러니 놓여져 동병상
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그럼 여기서 잠시 천축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겨우 뚜껑(옥개석)만 남은 승탑
그의 왕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  연등으로 머리를 가린 독성각(獨聖閣)
2002년에 조성된 독성탱과 석고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다.


만장봉 동쪽 자락에 안긴 천축사는 도봉산 서울 구역의 대표적인 고찰(古刹)이다. 이 절은 의
상대사(義湘大師)가 673년에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그는 인근 의상대(義湘臺)에서 도를 닦다
가 빼어난 산세에 감탄하여 제자를 시켜 물이 나오는 곳에 암자를 짓게 하니 맑은 샘물이 나
온다는 뜻에 옥천암(玉泉庵)이라 했다고 하며, 그것이 천축사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은 없는 실정이며, 의상은 문무왕(文武王)의 허가를 받아 부석
사(浮石寺)를 세우기 이전까지 주로 서라벌 왕경(王京)에 머물면서 화엄종(華嚴宗) 보급에 힘
쓰고 있었다.

천축사의 내력이 본격적으로 가슴을 펴는 것은 조선 태조 때이다. 의상의 창건설과 달리 신라
와 고려 때 흔적이 전혀 없고, 고려 명종(明宗, 재위 1170~1197) 때 영국사(寧國寺, 도봉서원
자리에 있었음)의 부속암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 역시 정확하지 않다. 그러니 조선
태조 시절이나 빠르면 고려 중/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398년 태조 이성계는 1차 왕자의 난으로 단단히 뚜껑이 열려 왕위를 2째 아들인 정종(定宗)
에게 던져주고 함흥(咸興)으로 가버렸다. 그곳으로 가는 길목인 도봉산 밑을 지날 때 만장봉
천축사 주변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피어올라 직접 그곳을 찾아가 봉우리는 하얗고 꽃은 삼문에
떨어져 길이 붉다는 시구(詩句)를 읊고 절에서 하룻밤 머물렀다고 전한다.
이후 함흥에서 돌아올 때 이곳에 들려 100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절을 중수했는데, 고려 후기
에 인도에서 건너온 지공(指空)이 나옹화상(懶翁和尙)과 이곳에 들려 '천축국(天竺國) 영축산
(靈鷲山)의 일부가 완연히 이곳에 있구나'
격찬한 일을 승려에게 듣고, 옥천암에서 천축사로
이름을 갈게 했다.

1474년(또는 1470년)에는 성종(成宗)의 명으로 절을 중창하고, 명종 시절에는 문정왕후(文定
王后)가 화류용상(樺榴龍床)을 내려 불좌(佛座)로 삼게 했다고 한다. 1812년에 경학(敬學)이
중창을 하였고, 1816년에는 김연화(金蓮花)가 불량답(佛糧沓) 15두락을 시주해 살림이 많이
좋아졌다.
1862년 상공(相公) 김흥근(金興根), 판서(判書) 김보근(金輔根), 참판(參判) 이장오 등이 불
량을 희사했으며, 1863년에는 주지 긍순(肯順)이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을 조성하고, 1895
년에 화주 성암응부(星巖應夫)가 명성황후(明成皇后) 및 상궁(尙宮) 박씨 등의 시주로 후불탱
과 신중탱, 지장탱을 조성했으나 관리 소홀로 불화 대부분이 도난을 당했다.

1911년 화주 보허축전(寶虛竺典)이 관음탱과 신중탱을 봉안했고, 1931년에 주지 김용태(金瑢
泰)가 천축사로 가는 산길을 확장했으며, 1936년에 현재와 비슷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바
로 그 시절에 천하 제일의 참선수행도량으로 명성이 높던 무문관이 지어졌다. 1959년에는 주
지 용태가 불사를 벌였고,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대웅전, 독성각, 산신각을 중수했으며, 요
사와 공양간을 신축해 천축사의 왕년의 모습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
도봉산의 주요 비구니 사찰이자 관음도량(觀音道場)으로 명성이 자자하며, 고승들의 수행공간
인 무문관을 경내 북쪽에 두어 참선도량으로 꾸려가고 있으나 수행의 난이도가 아주 최상급이
라 도전하는 이가 드물어 그 맥이 거의 끊겼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원통전과 산신각, 독성각, 무문관, 범종각 등 7~8동의 건물이 있
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비로자나삼신불도 및 복장유물, 비로자나삼신괘불도(서울 지방유형
문화재 293호
), 목조석가삼존불, 마애사리탑 등 지방문화재 4점과 늙은 승탑, 천축사 편액 등
이 전한다. 또한 1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목조불단(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6호)이
있는데, 지금은 조계사 불교중앙박물관에 가있다.

절이 각박한 산자락에 자리해 있어 그곳에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닦았으며, 주어진 공
간을 최대한 채운 터라 경내 확장도 여의치 않다. 그래도 첩첩한 산주름 속의 산사치고는 그
런데로 넓은 편이다.
일요일에는 산꾼들에게 점심 공양을 제공하며, 평소에는 대웅전 1층 앞 쉼터에서 따뜻한 차와
티백차, 물을 제공한다. (차와 티백차는 알아서 마시면 됨) 그리고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에는 아침~점심 공양밥 외에 떡과 염주 등도 제공하여 석가탄신일 인심도 넉넉하다.

* 천축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49 (도봉산길 92-2 ☎ 02-954-1474)
* 천축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산신각(山神閣)
1979년에 금어 조정우가 그린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  원통전(圓通殿)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로 관세음보살과 1980년에 조성된
천수천안관음탱(千手天眼觀音幀)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석굴, 옥천석굴(玉石窟庵)

원통전 좌측이자 대웅전 뒤쪽에는 높은 벼랑이 있는데, 그 밑도리에 옥천석굴이라 불리는 석
굴(石窟)이 있다. 천축사의 예전 이름인 옥천암의 유래가 된 옥천이 여기서 용솟음치고 있으
나 불공 공양 용도로만 쓰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꽁꽁 봉해둔다.

이곳은 자연산 석굴로 승려들이 오랫동안 수행을 했던 공간이다. 태조 이성계가 여기서 기도
를 올렸다고 전하며, 근래에 내부를 손질하여 석조약사여래좌상을 봉안해 약사전(藥師殿)으로
삼았다. 그리고 좌우에 조그만 감실(龕室)을 파서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
을 두었다.

▲  석굴에 봉안된 석조약사여래좌상

▲  경내 북쪽에 자리한 무문관(無門關)

천축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하나 있다. 바로 이곳의 상징인 무문관이다. 오로지 수행
을 위한 공간으로 1964년에 주지 정영이 새로 지었다.
건물 이름인 무문(門無)은 깨달음을 얻는데 있어 길도 문도 없다는 뜻으로 부처의 설산 6년
고행을 본받아 4년 또는 6년 동안 면벽(面壁), 즉 벽만 바라보고 수행을 하는 고난의 길을 걸
어야 된다. 방문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일체 금지되며, 한번 발을 들이면 무조건 4년이나 6년
을 채워야 된다. 게다가 수행 중에 먹는 음식도 창구를 통해 받아야 되는 등, 수행 규범이 매
우 엄격하다. 그야말로 그 기간 동안은 '나 죽었소' 하며 인간의 삶을 포기해야 된다. 그러다
보니 수행을 통과한 승려 수가 거의 없다. 1965년과 1979년에 100여 명이 도전했으나 겨우 4
명만 통과했다.
워낙 가시밭보다 더한 곳이라 도전자가 거의 없어 시민선원으로 활용하기도 했으나 호응이 없
어서 결국 문을 닫았으며, 2010년 11월 지금의 건물을 지어 다시 문을 열었다.

허나 불교의 세속화와 어려운 것을 꺼려하는 성향 때문인지 도전자가 없는 실정이라 새 건물
을 그냥 두기도 그래서 시민선방과 절의 쏠쏠한 수입원인 템플스테이(Temple stay)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천축사 편액을 머금고 있다.


▲  대웅전 목조석가삼존불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7호

경내 중앙에 자리한 대웅전은 2층짜리 건물로 꽤 우람한 모습이다. 대웅전은 원래 1812년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ㄷ'자 팔작지붕인 것을 현공이 2004년에 부시고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1층은 5칸 규모의 종무소(宗務所)와 쉼터로 쓰이고, 2층에 대웅전을 두었는데, 정면 5칸, 측
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그 안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존재들이 있으니 꼭 눈에 넣어가지
고 가자.

화려한 닫집을 지닌 불단에는 목조석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미륵
보살과 제화갈라보살(提華褐羅菩薩)로 이루어져 있는데, 푸근한 표정과 살짝 머금은 미소로
여기까지 힘들게 올라온 중생을 맞이한다.
처음에는 오래 숙성되지 않은 삼존불로 여겼으나 근래 석가여래 뱃속에서 복장(腹臟)유물이
쏟아져 나와 그들의 신상정보를 알게 되었다. 복장유물은 불상의 중수 사실을 담은 2장의 발
원문(發願文)과 경전, 다라니 등으로 이를 통해 만력<萬曆,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1573
~1618> 시절에 조성되어 북한산 노적사(露積寺)에 봉안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니 원래부터
천축사 불상은 아니었다.
1713년 발원문에는 진열(進悅)과 영희(靈熙), 태원(太元), 처림(處林), 청휘(淸徽) 등이 불상
을 개금, 중수하여 민지사<閔漬寺, 북한산 서암사(西岩寺)>로 옮겼다는 내용이 있으며, 1730
년 발원문에는 황금을 시주받아 개금불사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후 돈암동 흥천사(興天寺)로
거처를 옮겼다가 20세기 중반 정도에 천축사로 흘러들어와 이곳의 보물을 하나 늘려주었다.

이들 삼존불은 그리 크지 않은 중간 규모의 불상으로 조선 중기(16세기 후반~17세기 초)의 불
상 양식(또렷하고 균형 잡힌 이목구비, 안정된 인상, 팽팽하고 풍만한 신체의 질감, 간략화되
고 형식화된 천의 표현)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복장유물을 통해 조성시기와 중수에 참여한
승려 등이 밝혀져 바로 그 점 때문에 2013년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요즘은 늙은 불상이나 보살상, 불화 중 조성 시기를 알려주는 내용만 나오면 거의 무조건 지
정문화재로 삼는 추세이다. 옛 사람들의 그런 작은 배려가 불상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것이
다. (발원문 하나에 국가 보물이냐 지방문화재냐, 그냥 비지정문화재냐가 갈리는 세상임)


▲  천축사 비로자나삼신불도(毘盧舍那三神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92호

대웅전 우측 벽에는 고색의 기운이 자욱한 비로자나삼신불도가 걸려있다. 등장 인물이 복잡한
불화(佛畵)는 언제 봐도 참 어렵고 난해하여 정말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림에 나오는 인물과
그 성격, 그림의 특성까지 다 파악하려면 그야말로 암이 걸릴 정도이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그렸을까? 세상의 복잡함을 상징하고자 함일까..?

탱화 중앙에는 그림의 주인공인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있고, 왼쪽에는 노사나불(盧舍那佛
), 오른쪽에는 석가여래가 자리하고 있다. 이들이 삼불도의 중심인 삼불로 목리문(木理紋, 나
무결 무늬)이 표현된 불단 위의 연화좌(蓮花座)에 앉아 있다. 녹색을 띈 두광(頭光)과 살색의
신광(身光)을 표현해 장엄함과 신비로움을 불어넣었으며, 삼불 주변에는 제일 위에 4명의 보
살을 두었고, 좌우에 시방제불, 그 밑에 보살 2명과 범천(梵天), 제석천(帝釋天)을 삼불 사이
에 넣었다.
비로자나불 무릎 좌우에는 부처의 열성 제자인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이 있고, 그림 하단의
8명 보살은 모두 동그란 두광과 모서리가 둥근 네모난 신광을 가지고 있다. 지장보살을 제외
한 모든 보살은 비슷한 모습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각자의 연장을 들고 있다.

조선 후기에 흔한 삼신불도이나 독특한 도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19세기 중엽부터 서울과 경
기도 지역에서 활약했던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碩)이 편수(片手)를 맡아 환감(幻鑑). 혜조(慧
照). 경림(璟林). 탄인(呑仁). 창오(昌悟) 등이 합심하여 제작했다.
경선당은 이곳 삼신불도처럼 전통적인 화법으로 작품을 그리면서 간혹 도상을 나름대로 변화
시켜 새로운 도상을 창출했으며, 갸름한 얼굴과 지극히 작은 이목구비의 얼굴, 꽃무늬가 새겨
진 대의, 적색, 녹색, 청색의 색조, 목리문의 표현 등의 양식적 특징들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림 오른쪽 밑에는 '臣尙宮 己酉生朴氏  尙宮己 酉生金氏 等○○奉爲 王妃殿下 辛亥生閔氏
玉體恒安 聖壽萬歲'란 명문이 있어 기유년생 상궁 박씨와 기유년생 상궁 김씨 등이 왕비전하
(명성황후)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고자 시주한 불화임을 알려준다.
그림의 상태는 전체적으로 잘 유지되고 있으나 그림 상단이 그을음 등으로 채색이 좀 어두워
져 있고, 화폭 상단 오른쪽이 일부 찢겨져 나갔다.


▲  천축사 마애사리탑(磨崖舍利塔)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5호

천축사 경내를 20분 정도 둘러보면서 주변 바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2016년 2월에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마애사리탑을 찾기 위함이다. 그것말고도 비로자나삼신괘불도도 있으나 괘불(掛
佛)은 석가탄신일 같은 특별한 날에만 잠깐씩 외출을 나오기 때문에 평소에는 친견이 불가능
하다.

경내 주변 바위를 살펴보았지만 마애사리탑 비슷한 것도 보이질 않는다. 인근 불암산(佛巖山)
의 학도암(鶴到庵,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절 밑에 있을 듯 싶어서 절을 나와 동쪽으로 내
려가면서 주변에 널린 바위들을 계속 살펴보던 중, 일주문 직전의 북쪽 바위 높은 곳에 수상
한 것이 눈에 아른거린다. 바로 마애사리탑이다. 천축사를 여러 번 찾았지만 마애사리탑은 이
번에 처음 인연을 짓는다.

견고한 바위 피부에 살짝 깃든 마애사리탑은 모두 2기이다. 아쉽게도 나는 1기만 확인을 했는
데, 바위 남쪽에 있는 사리탑은 사리를 넣었던 감실(龕室) 위에 '청신녀정월 영주봉안탑 정축
사월일(淸信女淨月 靈珠奉安塔 丁丑四月日)'이라 새겨져 있어 정월(淨月)의 것으로 정축년(
1817년 또는 1877년) 4월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동쪽에 있는 탑은 '신녀○영
영주탑 임오팔월(信女○英靈珠塔 壬午八月)'이라 쓰여 있어 임오년(1822년 또는 1882년) 8월
에 조성된 것임을 귀뜀해 준다. 이중 내가 만난 것은 남쪽 탑이다.

마애사리탑은 19~20세기에 잠시 등장하는 아주 간편한 사리탑 양식으로 부도탑을 세우기 어려
운 산사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다. 보통 바위에 감실을 파서 사리함을 봉안하고 주변에 관련
글씨를 새기는데, 학도암 마애사리탑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곳 천축사와
안양 염불사(念佛寺)에 19세기 마애사리탑이 있고, 인왕산 석굴암(石窟庵)과 국사봉 사자암(
상도동) 등에 20세기 사리탑이 있다.


▲  최근에 지어진 천축사 일주문(一柱門)

마애사리탑을 만나기가 무섭게 천축사 일주문이 뒷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에는 없던 존재로 그
새 새로 장만하여 이곳에 심어두었다. 문의 위치가 경사진 산길에 자리해 있는데 문 정면에는
'도봉산 천축사' 현판을 내걸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하얗게 쓰인 글씨는 마치 날라갈 것
같은 기세라 명필임이 분명해 보였다.

일주문을 벗어나니 시간은 17시 반, 여기서부터 열심히 내려가다가 금강암(金剛庵) 부근 계곡
에서 잠시 길을 멈추고 신발에 오랫동안 갇힌 꼬질꼬질한 두 발을 해방시켜 계곡에 담구었다.
계곡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졸졸졸 흐르는 물에 발을 넣으니 그동안의 피로감이 싹 가시는 듯
하다. 그리고 동시에 발에 깃든 냄새도 다소 가셨다.

그렇게 발을 정화시키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18시 반, 도봉산 종점에 이르렀다. 12시에 시작
된 도봉산 산행은 무수골과 원통사, 우이암(관음봉), 주능선, 관음암, 천축사를 거쳐 도봉산
종점까지 거의 6시간 반 동안 파란만장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비록 정상은 가지 못해 아쉽지
만 우리에게는 다음이란 것이 있으니 그때를 기약하면 된다.
 
이렇게 하여 도봉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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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여름 산사 나들이, 문경 운달산 김룡사 (운달계곡)

문경 운달산 김룡사



' 늦여름 산사 나들이, 문경 운달산 김룡사 '

▲  문경 김룡사
 



 

여름 제국이 서서히 내리막을 보이던 8월의 끝 무렵. 문경(聞慶)에 있는 운달산 김룡사를
찾았다.
아침이 열리기가 무섭게 도봉동 집을 나서 동서울터미널에서 점촌, 상주행 직행버스에 몸
을 실었다. 허나 아침부터 차가 오지게 막혀 무려 1시간이나 늦게 점촌(店村)에 도착했다.
그래서 김룡사로 가는 시내버스를 간만에 차이로 놓쳤고, 다음 버스는 무려 2시간 이후에
나 있다.
하여 다른 곳을 급히 물색했으나 딱히 땡기는 대체 장소도 없고,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기
에도 시간이 애매하여 그냥 계획대로 다음 버스를 타고 김룡사로 들어가기로 했다.

졸지에 2시간 가까운 잉여 시간이 생겨버려 무엇을 할까 궁리했으나 답은 역시 하나 밖에
없었다. 그리 넓지 않은 점촌시내를 간단히 둘러보는 것이다. 시내에 마땅한 명소가 없어
서 점촌전통시장과 점촌역 등 시내를 돌며 중간에 편의점에서 간단히 요기도 하는 등, 억
지로 시간을 죽여가며 시내 북부에 자리한 점촌시내버스터미널로 시간에 맞춰서 돌아오니
김룡사행 좌석버스가 타는 곳으로 다가와 활짝 입을 연다.
드디어 시간이 되자 버스는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터미널을 출발했다. 우리의 버스는
산양과 산북을 거쳐 김룡사까지 곧게 가더니 갑자기 산골로 비집고 들어가 석봉리 지역까
지 강제투어를 시켜주어 점촌 출발 50분 만에 김룡사 종점에 이르렀다.

김룡사 종점에는 여느 유명 사찰과 마찬가지로 식당들이 가득 진을 치고 있는데, 절을 목
전에 둔 속세의 마지막 유혹 같은 그들을 지나치면 그림 같은 숲길이 펼쳐지면서 속세(俗
世)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안구와 마음을 소독시켜준다.


▲  김룡사로 인도하는 숲길



 

♠  김룡사 숲길, 해우소

▲  녹음(綠陰)에 잠긴 김룡사 숲길

김룡사 주차장(종점)에서 김룡사로 이어지는 숲길을 10분 정도 가면 홍하문 현판을 내건 일주
문이 활짝 열린 모습으로 마중을 나온다.
일주문 천정에 걸린 '雲達山金龍寺(운달산김룡사)' 현판은 근대 서화가로 명성이 높은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 쓴 것으로 문 주변에는 오래된 비석 2기 등, 비석 3기가
있다. (비석 내용은 모르겠음)


▲  홍하문(紅霞門)이라 불리는 김룡사 일주문(一柱門)과
김규진이 남긴 '운달산 김룡사' 현판

▲  일주문에서 김룡사로 인도하는 숲길
여름 제국의 강렬한 햇살도 우걱우걱 씹어먹을 정도로 숲이 울창하다.

일주문을 지나 5분 정도 가면 김룡사입구 3거
리가 나온다. 여기서 김룡사는 오른쪽 전나무
숲길로 들어가면 되며, 직진하면 운달계곡(김
룡사계곡) 상류와 대성암, 양진암 등의 암자,
운달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  김룡사 입구에 차곡차곡 구축된 돌탑

요즘 전국적으로 둘레길과 온갖 도보길이 크게
유행을 하면서 이곳 역시 그 유행에 호응하여
'김룡사 둘레길'을 천하에 내놓았다.
김룡사에서 대성암과 화장암, 양진암을 경유해
다시 김룡사로 돌아오는 2.6km의 산길로 그야
말로 김룡사와 산내 암자 순환 코스이다. 대성
암까지는 길이 널널하며 양진암과 화장암은 산
을 좀 타야 되지만 둘레길에 걸맞게 초급 수준
이다.

김룡사 경내 직전에는 늘씬하게 솟은 전나무가
조촐하게 숲길을 이루고 있다. 비록 긴 거리는
아니지만 소소하게 멋을 풍기며 김룡사에 대한
첫인상을 긍정적으로 인도한다.
한낮에도 햇님을 가려 어두울 정도로 그 숲길
을 지나면 경내를 가리고 선 보장문이 마중을
한다.


◀  김룡사를 목전에 둔 싱그러운 전나무숲길


▲  금강문(金剛門)의 역할을 하는 보장문(寶藏門)

솟을대문처럼 생긴 보장문은 김룡사의 2번째 문이다. 하지만 굳이 그의 밑도리를 지날 필요는
없다. 바로 옆에 차량을 위한 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보장문은 금강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1960년대에 소실된 것을 옛 건물을 축소하여 중건했
다. 문짝에는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깃들여져 있는데, 그들의 검문을 통과하면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나오며, 그 너머로 김룡사 경내가 층층이 펼쳐진다.


▲  300년 이상 묵은 김룡사 해우소(解憂所)

보장문을 들어서 오른쪽을 보면 고색에 깃든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모습도 단촐하고 요상한
냄새까지 약간 풍기기도 하는데, 그 건물은 300년 이상 김룡사 사람들의 생리적 볼일을 묵묵
히 받아주던 해우소(뒷간)이다.
사진으로 보면 1층 같지만 엄연한 2층으로 윗층에는 볼일을 보는 공간을 남녀 구분하여 만들
었고, 밑층에는 생리적 볼일이 생산한 쾌쾌묵은 물질이 쌓여 있다. 이들 물질은 절에서 퇴비
로 사용했으나, 수세식 화장실이 들어서면서 이제는 물질 공급도 여의치 않아 매우 한가한 처
지가 되었다.
그래도 김룡사에서 대웅전, 공루 다음으로 늙은 건물이고 사찰 해우소의 대명사로 통하는 순
천 선암사(仙巖寺) 해우소와 더불어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절 뒷간이라 문화유산급의 가치는
충분해 보인다. 허나 아직까지 그 흔한 지방문화재 등급도 얻지 못했다. 그렇게 하기에는 다
소 껄끄럽고 예민한 냄새가 나는 공간이라 그런 것일까? 뒷간에 대한 이 땅의 사람들의 생각
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닌 모양이다. (뒷간의 역사와 옛 구조를 조사하는 학자, 교수도 거의
없다고 함)


▲  주차장과 경내 밑부분 (보제루와 천왕문)

▲  범종의 보금자리, 범종각(梵鍾閣)

▲  부처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 천왕문(天王門)


김룡사는 산자락에 자리해 있어 그 지형을 이용해 석축을 층층이 구축하고 등급에 맞게 건물
을 두었다. 석축의 높이는 2~3m 정도로 주차장에서 1단 석축을 오르면 범종각과 천왕문이며,
2단 석축을 오르면 보제루 밑도리, 그리고 3단 석축을 오르면 비로소 경내 중심에 이른다.

▲  하얀 피부를 드러낸 석조 사천왕상
원래 나무로 만든 사천왕상이 있었으나 그 큰 것을 누가 훔쳐가서 돌로 다시
만들었다. 피부들이 너무 흰색이라 마치 하얀 먼지를 가득 뒤집어
쓴 모습 같은데, 끝없이 몰려드는 속세의 분진가루 같은
기운을 막느라 그리 된 모양이다.

▲  운달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연꽃 석조(石槽)

절에 왔으니 약수 한 모금은 마셔야 되겠지. 굳이 목이 마르지 않더라도 경내에 샘터가 있으
면 꼭 바가지를 깨워 마신다. 절의 인심과 산의 넉넉한 마음도 읽어볼 겸 말이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들이키니 몸 속의 때가 싹 가신 듯, 마음과 오장육
부가 싹 시원해진다. 그리고 보는 사람마다 틀리겠지만 물빛이 우유빛과 비슷하다는 말이 있
다. 그 이유는 이곳이 풍수지리적으로 와우형(臥牛形)이라 그렇다고 한다. 그러면 여기서 잠
시 김룡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운달산(雲達山) 남쪽 자락에 안긴 김룡사는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김천 직지사(直指寺)의 말사
(末寺)이다.
588년 운달조사(雲達祖師)가 창건해 운봉사(雲峰寺)라 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이를 입증할
유물과 기록이 전혀 없으며, 창건 이후 17세기까지 무려 1,100년 동안 마땅한 사적(事績)도
전하는 것이 없어 창건 시기에 대해 심히 회의감을 품게 한다. 1624년에 혜총선사(慧總禪師)
가 중창했다는 기록이 절의 첫 중창 기록이고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가 17세기 중반에 조성
된 대웅전과 삼장탱화 정도라 빠르면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 늦으면 1624년에 창건된 것으
로 여겨진다.

혜총이 그의 제자인 광제(廣濟)와 묘정(妙渟), 수헌(守軒)과 함께 1년 동안 공을 들여 선방,
승방, 법당 등을 완성해 혜총도장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1643년 여름, 화재로 말끔히 소실된
것을 1649년에 의윤(義允)과 무진(無盡), 태휴(太休) 등이 중수했으며, 계속 경내를 확장하여
왜정(倭政) 때는 31본산(本山)의 하나로 50개의 말사를 거느린 큰 절로 성장했다.
허나 워낙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산골이라 교통이 불편하여 말사 가운데 하나인 김천 직지
사에게 그 감투를 넘기고 그의 그늘로 들어갔다. 1940년에는 요사와 범종각을 중수했으며, 이
후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쳐 지금에 이른다.

절 이름이 운봉사에서 김룡사로 바뀐 것은 조선 후기로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
하고 있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인 어느 옛날,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운봉사 입구인 용소(龍沼
) 부근에 살았다고 한다. 그는 매일 지극 정성으로 불공을 올렸는데, 용소에 살던 용왕(龍王)
이 그 불공에 감동을 먹어 딸을 그에게 시집 보냈다. (또는 김씨가 죄를 짓고 운달산에 숨어
살다가 신의 딸을 만나 혼인했다고 함)
그들 부부는 아들을 낳자 이름을 '김용(金龍)'이라 했으며, 나날이 집안이 번창하니 지역 사
람들은 그를 김장자(金長者)라 불렀다. 또한 그의 영향력이 대단했던지 마을 이름도 그의 이
름을 따서 김용리라 했으며, 절 이름 또한 김용사로 갈았다고 한다. 아마도 그의 지원이 상당
하여 그 은혜를 기리고자 절 이름까지 그의 이름에 맞춘 모양이다.
이 전설 외에도 금선대(金仙臺)의 '금'과 용소폭포의 '용'을 따 금룡사(김룡사)로 했다는 설
도 덧붙여 전해온다.

비록 31본산에서 밀려나긴 했지만 왕년에는 48동의 크고 작은 건물을 지니고 있었으며, 지금
은 대웅전을 비롯해 극락전, 금륜전, 명부전, 보제루, 명부전, 응진전 등 무려 30여 동(부속
암자 포함)을 지니고 있어 여전히 큰 규모를 자랑한다. 부속 암자로는 대성암(大成庵)과 화장
암(華藏庵), 양진암(養眞庵), 금선대 등 4곳이 있는데, 이중 양진암은 1658년에 지어졌고, 나
머지는 18~19세기에 세워졌다. 이들 암자는 모두 비구니 도량이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 1,640호로 지정된 '영산회괘불도(靈山會掛佛圖)'와 '사료수집(史料
蒐集, 국가등록문화재 635호)','대본산 김룡사 본말사 연혁 원고(국가등록문화재 636호)'를
위시해 명부전 목조지장삼존상 및 제상(경북 지방유형문화재 385호), 대웅전, 영산회상도, 석
불입상, 3층석탑, 양진암 신중도 등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지니고 있으며, 쇠북과 삼장탱화,
해우소, 노주석, 업경대, 지장탱, 시왕탱 등의 오래된 유물이 있다.
또한 1670년에 사인비구(思印比丘)가 만든 동종(김룡사 동종, 보물 11-2호)도 있었으나 1990
년대 중반 그의 신변 보호를 위해 직지사 성보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겨 지금은 없다.

속세의 기운이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첩첩한 산골에 묻혀있으며, 절을 둘러싼 숲이 매
우 삼삼하고 바람소리와 새소리, 풍경소리, 목탁소리, 염불소리가 소리의 전부일 정도로 적막
하기 그지 없어 고즈넉한 산사의 멋과 내음을 누리기에 아주 좋다. 또한 비구니 절집이라 경
내도 참 정갈하고 차분하며, 절을 둘러싼 풍경 또한 일품이라 문경8경의 하나로 추앙을 받고
있다.

끝으로 김룡사에는 대승사(大乘寺)의 불을 껐다는 동자승 전설이 한 토막 전해오고 있다. 역
시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지나치게 영리한 동자승과 그를 의심하는 어른 승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 언젠가 있던 것으로 여겨지는 절의 요지경 갈등이나 일종의 시기심을 전설
로 그럴싸하게 포장한 듯 싶다.
 
김룡사가 꽤 잘나가던 시절(고려 때라고 함)에 영리하게 생긴 동자승이 있었다. 어느 날 주지
승이 저녁에 먹을 상추를 씻어 오라고 시켰다. 하여 계곡으로 내려가 상추를 씻고 있으려니
난데없이 동쪽 산 너머에서 불기둥이 솟구치는 것이다. 그래서 상황을 살펴보니 글쎄 산너머
에 있는 대승사에서 불이 난 것이 아니던가.
대승사 승려들은 불을 잡기는커녕, 불에게 단단히 희롱을 당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어 자칫
절 하나가 화마(火魔)에게 통째로 날라갈 판이었다.

동자승은 염불을 외운 다음 물을 소쿠리에 담아 산 너머를 향해 열심히 퍼부었다. 그 물은 동
자승의 주문에 힘입어 대승사까지 태풍의 기세로 날라갔고, 한참 만에 간신히 불길이 잡혔다.
그제서야 동자승은 다시 상추를 마저 씻으려고 했으나 소쿠리로 물을 정신없이 퍼붓는 과정에
서 상추까지 죄다 날라가 거의 몇 잎밖에 남지 않았다. 하여 주지승에게 혼날까봐 걱정이 되
었으나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서둘러 절로 돌아갔다.
한편 주지승은 그를 기다리다가 지쳐 뚜껑이 제대로 폭발한 상태였다. 게다가 배도 무지 고픈
상태였으니 오죽했으랴. 그런데 동자승이 몇 잎 남지 않은 상추를 들고 헐레벌떡 왔으니 안그
래도 폭발한 뚜껑, 더 폭발하여
'왜 늦게 왔냐. 상추는 어디다 팔아먹었냐?'
역정을 내며 그의 종아리를 때렸다, 동자승은 앞
서의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어서 그냥 매를 맞고 말았다.

그날 밤, 동자승 옆에 누운 승려가 무슨 일로 매를 맞았냐며 물었다. 그래서 낮에 있던 일을
설명해주었는데, 솔직히 누가 그걸 믿겠는가? 그 말을 들은 승려는 웃기지 말라며 비웃었고,
자기 말을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듯싶어 이튿날 새벽, 미련 없이 절을 떠나고 말았다.

동자승이 사라진 것을 안 승려들은 그가 대승사의 불을 껐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두고 서
로 수근거리다가 승려 하나가 대승사에 직접 갔다오기로 했다.
가보니 전날 불이 났다고 했다. 불을 끄지 못해 애태우던 중 어디선가 상추와 함께 물줄기가
날라와 진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김룡사 승려들은 동자승이 비범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그를 찬양했다. 허나 한번 떠난 동자승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 김룡사 소재지 :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김용리 410 (김용길 372, ☎ 054-552-7006)



 

♠  김룡사 대웅전 주변

▲  경내 중심부를 가리고 앉은 콧대 높은 보제루(普濟樓)

보제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2층 건물로 교육이나 설법(說法)을 하는 강당(講堂)
의 역할을 하고 있다. 보통 1층 가운데 칸에 법당 등 경내 중심부로 인도하는 통로를 내나 여
기서는 모두 틀어막고 건물 옆구리에 계단을 내어 법당으로 가도록 했다.
건물이 워낙 장대한 모습이라 절 중심부를 완전히 가리고 앉았는데, 이는 경내 중심부를 외부
에 노출시키지 않고자 그리한 것으로 조선시대에 흔히 보이는 가람 형태이다.


▲  김룡사의 중심부, 대웅전 주변

보제루 옆구리를 통해 경내 중심부로 들어섰다. 뜨락을 중심으로 정면에 법당인 대웅전이 남
쪽을 바라보고 있고, 대웅전 맞은편에는 보제루, 뜨락 우측에는 설선당, 좌측에는 종무소와
선방(禪房)의 역할을 하는 해운암(解雲庵)이 있다.


▲  천하에서 가장 큰 방을 지닌 설선당(設禪堂, 경흥강원)

대웅전 뜨락 우측에 자리한 설선당은 예전 향응각(凝香閣)으로 경흥강원(慶興講院)이라 불리
기도 한다.
이 건물은 3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70평짜리 온돌방을 가지고 있는데, 장판지만 무려 120
장이 소요될 정도로 천하에서 가장 큰 방이자 최대의 강원(講院) 건물로 위엄이 자자하다. 게
다가 온돌을 때는 아궁이 또한 장대하여 어린이가 서서 들어갈 정도로 크다.
김룡사의 왕년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주는 건물로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지었으며, 큰 승려
로 추앙을 받는 성철(性徹, 1912~1993)이 처음으로 설법을 펼쳤던 현장이기도 하다. 경흥강원
이란 현판이 측면에 걸려 있으며, 강당과 숙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조각이 아름다운 서쪽 노주석(露柱石)

▲  단촐한 모습의 동쪽 노주석

뜨락 남쪽에는 이쁘게 조각된 돌기둥 2기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그들의 정체는 노주석
으로 야간에 불을 피워 그 위에 올려놓거나 숯을 피워 주변을 따뜻하게 하는 용도로 쓰였다.
절에 흔한 석등(石燈)과 서원이나 향교의 정료대(庭燎臺)와 성격이 비슷하며, 화광대(火光臺)
란 별칭도 지니고 있는데, 순 우리말로는 '불우리'라고 한다.

김룡사 노주석은 서로 모습을 달리하고 있는데, 다른 모습 만큼이나 서로 태어난 시기도 다르
다. 조각이 유난히 아름다운 서쪽 노주석은 1940년에 설선당 중수 기념으로 조성되었는데, 높
이 176cm, 불을 피우던 꼭대기 폭은 75cm로 대웅전을 향한 피부면에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글
씨 10자가 새겨져 있다. 내용은 'ㅇㅇ十五年 庚辰十月日(경진십월일)'로 앞줄 2자가 고의적으
로 뭉개져 있었다.

고약했던 왜정 때 조성된 탓에 혹시 왜왕(倭王
)의 연호가 쓰이지 않았을까 싶어 1940년 경진
년을 찾아보니 왜왕 소화(昭和) 15년이 있었다.
즉 그때 조성된 것이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입에 담기도 구역질 나는 그 연호를 지우면서
일종의 옥에 티가 되버린 것이다.
그런 점만 뺀다면 이 노주석은 제법 휼륭한 작
품이다. 연꽃봉오리가 늘씬하게 깃들여져 있고
각 면마다 조그만 연꽃잎이 앙증맞게 있다. 그
리고 밑에는 '亞' 무늬가 있다.
동쪽 노주석은 높이 179.5cm, 꼭대기 폭 75cm
로 돌기둥 윗쪽에 구름 무늬가 있다. 그는 강
희(康熙) 51년, 1712년(임진년) 3월에 조성된
것으로 서쪽 노주석보다 단촐한 모습이다.

노주석은 김룡사 외에 대승사, 봉암사(鳳巖寺)
등 문경 지역 고찰(古刹)에서 유난히 많이 나
타나고 있는데, 노주석이 있는 대신 탑이 없는
점도 특징이다. 이는 대승사에서 시작된 문경
지역 사찰만의 개성이라고 보면 될 듯 싶다.

▲  서쪽 노주석에 새겨진 글씨들
왜왕 연호가 빡빡 지워져 있다.


▲  김룡사 대웅전(大雄殿)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453호

남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은 2중으로 된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아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
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이 건물의 6할을 차지할 정도로 육중해 보인다. 그러다보니
건물의 규모도 꽤 크다.
17세기 중반에 지어진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로 기단 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기둥을 세
워 높이가 하나 같이 일정하지가 않다. 허나 기둥 모두 대웅전의 중심 쪽으로 약간씩 기울어
져 있어 안정감을 주며, 커다란 지붕 처마를 받치고자 공포(空包)를 기둥과 기둥 사이에 촘촘
하게 배치한 다포(多包) 양식을 취했다.

비록 영가(靈駕)의 49재 행사로 대웅전 내부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천정에는 천녀(天女), 비
천상(飛天像) 등 다양한 존재들이 그려져 있으며, 1644년에 조성된 삼장탱화가 좌측 벽에 걸
려있고, 성균대사(省均大師)가 그린 영산회상도가 삼세불좌상(석가여래불, 아미타불, 약사불)
의 뒤를 든든히 받쳐준다.
삼세불좌상은 1649년에 설잠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09년에 경북도청에 이들 삼세
불을 지방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신청하면서 불상 뱃속에서 나온 복장유물을 살펴본 결과,
1658년에 제작되었음이 밝혀졌다. (아직 삼세불은 비지정문화재임)


▲  대웅전 삼세불좌상과 영산회상도(경북 지방유형문화재 524호)

영산회상도는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비단 바탕에 그려진 탱화로 높이 5.2
m, 너비 4.3m 규모인데, 그림 가운데에 석가여래가 크게 그려져 있고, 그를 중심으로 앞에는
4위의 보살이 일렬로 있으며, 좌우로는 8위의 보살이 서 있다. 그림 상단에는 가섭존자와 아
난존자를 비롯한 10대 제자와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포함한 사자관을 쓴 건달파, 그
리고 사자관을 쓴 야차와 4명의 금강이 있으며, 하단에는 비파, 검, 용과 여의주, 탑 등의 연
장을 쥐어든 사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이 탱화는 제작 당시부터 이곳 대웅전 삼세불좌상의 후불벽에 꾸준히 있었다. 화기(畵記) 부
분이 훼손되어 제작시기는 알 수 없지만, '김룡사사료수집'에 의하면, 1648년에 제작된 불화
들이 낡아 1803년에 적지 않은 탱화를 새로 제작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그때 사불산 화승
홍안(弘眼)과 신겸(愼謙)을 중심으로 18명이 탱화 제작에 참여했다.

영산회상도에 나타난 사불산화파의 특징을 살펴보면, 측면향을 한 보살의 얼굴형은 타원형에
눈 부분은 들어가고 이마와 볼을 튀어나오게 표현했고, 채색은 홍색과 녹색을 선명하게 대비
되도록 진채(珍菜)를 사용했으며, 보살과 사천왕 등의 장신구와 지물은 돋음기법에 금을 칠했
다. 특히 존상 구성에서 지장보살이 권속으로 표현된 점이 가장 주목된다. 지장보살은 아미타
불회도에서 8대 보살로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이나 19세기 전반 사불산화승들은 지장보
살을 주요 권속으로 표현했다. 이처럼 김룡사 영산회상도는 조선 후기 후불도 양식을 고수하
는 한편 화면 구성과 존상 구성 및 상호 표현, 채색법 등에서 사불산화파의 특징적인 도상과
화풍이 잘 드러난 불화로 바로 그런 점 때문에 2018년 12월 뒤늦게나마 지방문화재에 지위를
얻게 되었다.

▲  측면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위엄

▲  종무소와 선방의 역할을 하는 해운암


▲  괘불(영산회괘불도)이 담긴 길쭉한 괘불함 (대웅전 뒷쪽)

1703년에 제작된 김룡사 영산회괘불도는 국가 보물 1640호로 지정된 비싼 몸이다. 비싼 만큼
이나 만나기도 여간 힘들지가 않아 석가탄신일과 일부 행사 때만 반짝 얼굴을 드러낼 뿐이며,
대부분의 날을 괘불함 속에서 지낸다. 괘불이 워낙 큰 그림이라 그의 보금자리 또한 길쭉한데,
기분 같아서는 그 함을 열어 괘불의 단잠을 깨우고 싶지만 그럴 위치가 되지 못한다.

괘불의 신상이 적힌 화기에는 제작시기와 기원문, 시주자 50여 명의 이름이 적혀 있으며, 김
룡사 대신 운봉사로 나와있어 18세기까지 운봉사로 불렸음을 알려준다.


▲  빛바랜 쇠북 <청동금고(靑銅金鼓)>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밥 시간과 예불 시간, 기타 주요 시간을
알리는 용도로 쓰인다.



 

♠  김룡사 마무리

▲  김룡사의 창고인 공루(空樓)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698호

해운암 뒷쪽에는 고색이 제법 느껴지는 2층짜리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그는 절의 살림살이와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인 공루로 정면 4칸, 측면 1칸의 누각 형태를 취하고 있다. 1624년에 지
어져 여러 번 중건을 거쳤는데, 2층에는 1칸, 1층은 1칸, 2칸, 1칸 규모로 방이 나뉘어져 있
으며, 원래 자리를 지키면서 절 창고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그런 가치가 있음에도 오랫
동안 비지정문화재에 서러움을 간직하며 살다가 2022년 6월에 이르러 경북 지방문화재의 지위
를 얻게 되었다.

그러고보면 김룡사에는 특이한 늙은 존재들이 많다. 앞서 해우소도 그렇고, 노주석도, 그리고
창고까지. 역시 김룡사가 예사롭지 않은 큰 절임을 귀뜀해준다.


▲  앞에서 바라본 공루

▲  김룡사 응진전(應眞殿)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의 보금
자리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다시 지었다고 하며
석가여래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대동해 3존
상을 이루고 있는데, 그 모습이 작고 귀엽다.
16나한 또한 다들 제각각의 모습으로 옷과 얼
굴, 머리스타일, 포즈가 모두 틀리며, 그들 뒤
로 16나한도가 걸려있다.

그리고 좌우 모서리에는 신중도와 독성도가 걸
려 있는데, 독성도(獨聖圖) 같은 경우 그 주인
공이 나한의 일원인 나반존자(那畔尊者)이기
때문에 이곳에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  응진전 석가3존상

▲  응진전 석조십육나한좌상 일괄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512호

응진전 식구 중 16나한상과 제석천 2구, 사자(使者) 2구가 '석조십육나한좌상 일괄'이란 이름
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6나한상은 가부좌(跏趺坐)를 튼 모습으로 각자의 표정, 옷차림, 연장을 취하고 있으며, 보관
(寶冠)을 눌러쓰고 홀을 쥐어든 제석천 2구와 두건을 쓰고 두루마기를 든 사자 2구가 그 주변
에 자리한다. 이들은 1709년에 조각승 수연(守衍) 등이 조성한 것으로 수연의 스승인 승호파(
勝湖派) 양식에 기반한 17세기 말~18세기 초기 조각 양식이 잘 드러나 있다.


▲  김용사 금륜전(金輪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금륜전이란 칠성각의 다른 이름이다.

▲  금륜전 식구들 (산신탱, 칠성탱, 독성탱)
금륜전이란 이름답게 칠성(치성광여래) 식구를 중심으로 하여 왼쪽에 산신 식구,
오른쪽에는 혼자 유유자적하는 독성이 자리해 있다. 독성탱 같은 경우
앞서 응진전에 있음에도 이곳에도 별도의 독성탱을 두었다.

▲  극락전(極樂殿)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의 보금자리로 조그만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  극락전 아미타불과 아미타후불탱

▲  상선원(上禪院)

상선원은 이름 그대로 윗 선원으로 성철 등 많은 선승(禪僧)들이 머물던 곳이다. 허나 지금은
요사로 쓰이고 있으며, 고승(高僧)들의 진영(眞影) 35점과 1830년에 조성된 시왕탱, 1858년에
조성된 지장탱 등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의 위치는 바뀔 수 있음)


▲  김룡사 경내에서 석불입상으로 인도하는 산길
하얀 들꽃이 가득해 마치 소금이 뿌려진 듯 하다.

▲  소나무숲에 자리한 김룡사3층석탑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667호

경내 동쪽 산자락에는 석불입상과 3층석탑이 숨겨져 있다. 경내에서 그곳까지는 산길이 살짝
이어져 있는데, 3층석탑은 산길에서 다소 떨어진(그래봐야 길에서 다 보임) 소나무숲 바로 앞
에 외로이 떨어져 있다.

이 탑은 1709년에 조성된 것으로 전체 높이는 2.85m이다. 바닥돌과 1층 기단, 3층 탑신(塔身)
, 머리장식으로 이루어진 수수한 모습으로 탑과 석불입상을 경내 중심이 아닌 경내 뒷쪽 구석
에 둔 것은 그들이 꼴보기 싫어서가 아니라 혹시 모를 나쁜 기운을 단죄하고 운달산의 촉맥(
促脈)을 보우하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이유는 단순히 그것
뿐이다.
한때 이들을 천왕문 앞으로 옮기기도 했으나 절의 전통을 지키고자 1989년 10월에 다시 원위
치시켰다.


▲  석불입상으로 인도하는 계단 (사진 중앙에 석불이 있음)

▲  소나무숲에 자리한 석불입상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655호

김룡사 경내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석불입상이 고적하게 자리해 있다. 8각형 기단 위에 연화
대좌를 깔고 그 위에 2.27m의 석불을 올렸는데, 머리에 주름선이 많이 있어 나발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은 평온한 모습으로 눈썹이 구부러져 있고, 눈은 가늘게 떠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
으며, 코는 약간 오똑하고, 입은 살짝 다물고 있다. 그리고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무엇이든
들을 자세가 되어 있다.
몸통에는 얕은 새김이 이리저리 주름선을 자아내고 있는데, 두 손에 약합 같은 것이 들려져
있어 그가 약사여래임을 알려준다. 그의 아랫도리는 장대한 세월에 선이 거의 지워졌다.

그는 1709년에 조성된 것으로 거의 민불(民佛) 스타일의 석불이다. 3층석탑과 함께 비보풍수
의 일환으로 세워진 것인데, 절 자리가 와우형혈(臥牛形穴)이라 그 이름에 걸맞게 소를 모는
사람이 필요했다. 하여 당시 유행했던 약사신앙을 내세워 이곳에 석불입상(석조약사여래상)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 덕분인까? 31본산에서 밀려난 것 외에는 절에 딱히 큰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비보풍수
의 덕인지 그냥 운이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보장문 앞에 펼쳐진 전나무숲길

이렇게 김룡사를 둘러보니 1시간 반 정도가 정말 훌쩍 가버렸다. 나름 꼼꼼하게 봤다고 여겼
으나 나중에 보니 명부전(冥府殿)을 빼먹었다. 거기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지장3존상이
있는데, 명부전이 경내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보니 보기 좋게 놓친 것이다. 영산회괘불도나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서적이야 원래부터 만나기 어렵고 아무나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예 마음을 비웠지만 명부전은 늘 열려있는 공간이라 정말 곡소리를 내고 싶은 심정이다.


▲  조촐한 모습의 김룡사계곡(운달계곡)

▲  김룡사를 뒤로하며 (김룡사 숲길)

김룡사를 나와서 부속암자도 둘러보려고 했으나 버스 시간이 임박해 그만 발길을 돌렸다. 여
기서 버스 하나 놓치면 2시간 이상 강제 대기를 해야 되고 그리되면 이후 일정에 차질이 생긴
다, (이후에 들릴 곳이 있었음)
그래서 대성암 등의 부속암자는 쿨하게 포기하고 절입구에 조촐하게 펼쳐진 김룡사계곡(운달
계곡)에서 잠시 두 다리를 쉰 다음, 자리를 떴다. 명부전 목조지장3존상도 놓치고 부속 암자
들도 싹 놓쳤으니 결국 다시 와야 될 명분을 만들고 말았다. 하지만 이곳과 또 인연이 닿을지
는 솔직히 장담하기가 어렵다. 아직도 나를 못참게 하는 미답처(未踏處)들이 천하에 수두룩하
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늦여름 김룡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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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2년 8월 2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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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산사 나들이, 안성 고성산 운수암 (무한성, 무양성)

안성 운수암 (무한성)



' 한여름 산사 나들이 ~ 안성 운수암 '
운수암 대방
▲  운수암 대방
 



 

여름 제국(帝國)이 정점에 치닫던 8월의 첫 무렵, 안성(安城) 운수암을 찾았다. 수도권에
서 당일 답사로 간단히 몸을 풀 곳을 물색하다가 운수암이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길을 잡
았는데, 12시에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지하철과 시내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며 쉬엄쉬
엄 이동해 15시에 안성 서북부에 자리한 양성(안성시 양성면)에 이르렀다.

양성까지는 환승할인 시간에 맞게 무탈하게 이동했으나 여기서 공도(孔道)로 가는 시내버
스가 출발시간보다 5분 일찍 도망치면서 환승 리듬이 그만 깨져버렸다. 다음 버스는 거의
50분 뒤에나 있는 상태. 여름 제국의 무더위 핍박이 극에 달한 상태에 환승할인까지 날라
갔으니 정말로 복창이 터질 판이다.
허나 나에게 꿩 대신 닭을 고를 권한은 없어서 별수 없이 50분을 강제로 기다려 공도읍으
로 가는 안성시내버스 7번(안성터미널↔원곡)에 탑승, 10분을 더 달려 운수암입구인 방신
1리에서 두 발을 내렸다.



 

♠  운수암 입문

▲  운수암으로 인도하는 숲길 (성하길) ①

▲  운수암으로 인도하는 숲길 (성하길) ②

▲  운수암으로 인도하는 숲길 (성하길) ③

방신1리에서 운수암까지는 25분 정도 걸어가야 된다. 마을을 가로지르며 그늘도 거의 없는 길
을 10분 정도 가면 숲이 나타나면서 길도 그늘길로 변신하는데, 그늘이 짙게 깔려 무더위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며, 땀이 조금씩 나긴 해도 선선한 산바람 앞에 이내 산산히 사라진다.

길은 처음에는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다가 운수암이 가까워질수록 점차 각박해진다. 밑골고개
를 넘으면 주차장이 나오며, 여기서 더 오르면 그늘에 묻힌 쉼터와 약수터가 나온다. 약수터
에서 대자연이 베푼 샘물을 여러 번 떠마시며 더위와 갈증을 삼키고 길을 마저 걸으면 고갯길
의 끝에 늙은 느티나무가 마중을 하는데, 그 느티나무에 이르면 백운산 정상부에 자리한 운수
암이 말끔히 모습을 드러낸다.


▲  운수암 느티나무
약 160년 정도 묵은 나무로 높은 키와 큰 덩치에 걸맞게 운수암 경내에
넓게 그늘을 드리운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느티나무
아직 그 흔한 시/군 보호수 등급도 얻지 못한 야인의 신세이다.

▲  승탑(僧塔)을 가장한 석물
느티나무 부근 수풀 속에 승탑(부도탑) 1기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겉으로 보면 영락없는 승탑이지만 현실은 경내에 흩어진
석재를 모아서 승탑 형식으로 수습한 것이다.

▲  느티나무 곁에서 바라본 운수암 경내
뿌연 연기를 내뿜은 소독차가 방금 다녀가 연기가 채 가시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소독차 연기만 보면 뭐가 그리 좋은지 열심히
달려 쫓아가곤 했는데, 이제는 무덤덤하다.


고성산(高城山, 298m)의 남쪽 봉우리인 백운산 숲속 180m 고지에 포근히 터를 다진 운수암은
화성 용주사(龍珠寺)의 말사(末寺)로 1750년에 장씨 보살(菩薩)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의
법명(法名)은 반야명(般若明)으로 근처에 살던 청상과부였는데, 남은 여생을 부처를 봉안하며
살고자 가산을 털어서 무한성(무양성) 밖에 절을 세우려고 했다.
절을 막 짓던 날 밤, 노승(또는 부처)이 꿈에 나타나 '무한성 안에 숲이 넘어진 곳이 있으니
거기에 지으시오'
현몽했다. 그래서 다음날 성 안에 들어가 살펴보니 과연 숲이 넘어진 곳이
있어 그곳에 절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렇게 조선 후기에 한 여인에 의해 창건된 운수암은 고종(高宗) 시절에 이르러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과의 인연 덕분에 크게 덕을 본다. 그의 지원으로 중건을 한 것이다. 이때 대방을
세우고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탱을 봉안했는데, 이곳이 어찌 대원군과 인연을 지었는지는 모
르겠지만 그가 내린 '운수암' 현판이 대방에 있다.
1873년에는 아미타회상도(현재 용주사 성보박물관에 가 있음)를 제작했는데, 앞서 칠성탱 등
과 함께 왕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내용이 적혀 있어 왕실과 대원군 일가의 원찰(願刹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참고로 흥선대원군은 불교에도 관심이 지대해 서울 화계사(華溪寺)
와 흥천사(興天寺), 남양주 흥국사(興國寺) 등 서울 근교의 여러 절을 오가며 온갖 지원을 아
끼지 않았다.
19세기 후반에 비로전(처음에는 대웅전)을 지었고, 이후 쇠락하여 무너지기 직전인 것을 현암
(玄岩)이 1980년대부터 불사를 벌여 1986년에 대웅전(대웅보전)을 지었으며, 기존의 대웅전은
비로전으로 삼았다. 그리고 1996년에는 광음선원(光音禪院)을 세우고 1997년 범종각을 두었으
며, 이후에 3층석탑을 세워 경내의 면모를 새롭게 했다.

암자(庵子)란 이름에 걸맞게 매우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보전과 비로전, 대방, 삼성각, 광음선
원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비롯해 대
방과 비로전 등이 있으며, 운수암 자체는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25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세기 말에 조성된 아미타회상도와 칠성탱, 독성탱, 산신탱은 신변보호를 위해 용주사 성보
박물관에 가 있다.

거의 산 정상부에 자리해 있고, 숲이 무성하여 절을 둘러싼 기운도 청정하며, 경관이 좋고 약
소하긴 하지만 동남쪽으로 약간 전망이 트여 있다. 안성과 평택 지역의 명소로 등산과 나들이
수요가 많으며, 경내까지 포장길이 잘 닦여져 있어 차량으로도 편히 접근도 가능하다.

* 운수암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방신리 85 (성하길 80-63 ☎ 031-673-7372)


▲  삼성각에서 바라본 운수암 경내



 

♠  운수암 둘러보기

▲  대웅보전 뜨락에 세워진 6면3층석탑

운수암 경내로 들어서면 대방과 3층석탑을 시작으로 광음선원과 대웅보전 등이 차례대로 마중
을 한다.
대웅전 뜨락 중앙에 자리한 3층석탑은 1990년대 후반에 마련한 것이다. 1990년대면 지금과도
꽤 가까운 시절인데, 벌써부터 기록이 누락되거나 기억이 상실되어 막연히 1990년대 말에 세
웠다고 그런다.

수려하고 정교한 조각이 일품인 이 탑은 특이하게 6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그래서 6면3층석탑
이라 부른다. 그가 있기 전에는 절에서 그 흔한 탑도 하나 없었는데, 탑을 아주 우람하게 세
워 그 허전함을 크게 달랠 수 있게 되었다.
탑의 구조는 밑에서부터 2층의 기단(基壇)과 3층의 탑신(塔身), 상륜(相輪)으로 이루어져 있
으며, 아직은 어린 탑이라 피부가 매우 하얗고 반질반질하다. 윗층 탑신에는 6마리의 석사자
를 배치해 탑신을 받쳐들며, 그 안에는 사천왕(四天王)과 관세음보살을 두었다.


▲  6면3층석탑 윗층 기단의 사자석과 사천왕상

◀  대방과 마주보는 광음선원(光音禪院)
1996년에 지어진 것으로 요사(寮舍) 및 선방
(禪房)으로 살아가고 있다.

        ◀  운수암 대웅보전(大雄寶殿)
북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
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82년에 짓기 시작
하여 1986년에 완성을 보았다. 그가 세워짐으
로써 기존의 대웅전은 비로전으로 현판을 갈았
다.


▲  운수암 석가여래좌상과 닫집

대웅보전 불단(佛壇)에는 석가여래상을 봉안했고, 그 뒷쪽에 삼신후불탱을 두었다. 그들 위에
는 붉은 피부의 닫집이 있는데, 1층은 적멸궁(寂滅宮), 2층은 법왕궁(法王宮), 3층은 내원궁(
內院宮)이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극락조(極樂鳥)와 구름 등 갖은 조각을 두어 장엄함을 더했
다.

불단 좌우에는 11면관세음보살입상과 목조지장보살입상을 봉안했는데, 이들은 2001년에 조성
된 것으로 그 주변에는 삼장탱(三藏幀)과 신중탱(神衆幀)이 자리하고 있다.


▲  운수암 대방(大房)

대웅보전 뜨락 우측에 자리한 대방은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로 양반가 같은 모습을 하고 있
다. 1870년에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지어진 26칸 규모로 위에서 보면 'H' 모양이며, 예전에
는 법당의 역할도 겸했다. 대방은 보통 왕족과 양반사대부들의 숙식/예불 편의를 위해 지어진
것으로 왕실의 지원을 받던 서울 근교 사찰의 필수 건물이었다. 이곳도 흥선대원군과 인연이
깊어 이렇게 대방을 마련했는데, 절이 서울과 멀어서 상류층 손님의 왕래가 적었다. 하여 평
시에는 운수암 승려와 신도들도 예불/숙식 장소로 사용했다.

비로전이 생기면서 법당의 짐은 덜게 되었으며, 지금은 요사와 종무소(宗務所), 공양간의 역
할을 하고 있다. 종무소는 건물 앞부분에 있는데, 신발을 벗고 툇마루를 거쳐 안으로 들어가
는 구조이며, 공양간은 서측에, 요사는 북측에 자리한다. 근래에 북측에 지붕을 덧붙여 내부
가 좀 넓어졌다.
정면 어칸에는 흥선대원군이 내린 '운수암' 현판이 있어 그와의 끈끈한 관계를 보여주며, 가
로 184cm, 세로 52cm 크기로 하얀 바탕에 푸른색으로 글씨를 썼다. 글씨체는 예서(隸書)로 3
개의 낙관이 뚜렷하다.


▲  대웅보전에서 바라본 대방 (정면에 보이는 문이 공양간임)

▲  삼성각에서 바라본 대방의 뒷모습

▲  흥선대원군이 쓴 푸른색 운수암 현판의 위엄
'庵'자가 저렇게 변할 수도 있구나. 글씨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듯
생기가 감돈다.

▲  비로전(왼쪽)과 삼성각(윗쪽)

▲  운수암 비로전(毘盧殿)

대웅보전 옆구리에는 비로전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2번째로 늙은 건물인데, 건축 양식과 내부에 있었던 칠성탱과 산신탱이 1870년에 조성된 것으
로 보아 19세기 후반(1870년 또는 그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예전에는 대웅전의 역할을 했으며, 1980년대에 불단에 봉안된 석불(비로자나불)이 마모가 심
하고 깨진 부분이 많아 땅에 묻었다고 한다. 이후 1986년에 대웅보전이 신축되자 땅속에 파묻
은 석불을 다시 꺼내 이곳에 봉안하고 건물 이름을 비로전으로 바꾼 것으로 보이는데, 1986년
이면 40년도 채 되지 않는 지척의 시절임에도 이곳은 기록을 너무 남기지 않아 혼돈을 유발한
다.
불단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뒤에는 아미타회상도(아미타후
불탱)이 있으나 진품은 용주사 성보박물관에 가 있고 그 모조품이 대신 한다. 그 외에 현왕탱
과 신중탱이 걸려있고, 절을 세운 장씨 보살의 진영(眞影)이 걸려 있다.


▲  비로전 석조비로자나불좌상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202호

비로전의 주인인 비로자나불좌상은 고려 때 석불(石佛)로 왜정 말기에 다른 곳에서 가져왔다
고 전한다.
경내에서 가장 늙은 보물이자 옛 대웅전의 중심 불상으로 높이 107cm, 어깨 폭 82cm인데, 파
손된 부분이 많아서 1980년대에 땅속에 묻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1986년에 다시 꺼내 비
로전의 주인으로 삼았으며, 불상의 피부와 옷이 온통 하얀 것은 땅속에 묻힌 흔적과 이전에
파손된 부분을 커버하고자 백분을 발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굴이나 좀 고색의 때가 감돌지
나머지는 고색의 기운도 거의 잠들었다.
그는 1986년 안성시(당시는 안성군) 향토유적 16호의 지위를 얻었으나 2006년 경기도 지방유
형문화재로 지위가 높아졌으며, 연꽃과 구름 무늬가 새겨진 화강암 대좌(臺座)까지 갖추고 있
다.

불상의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히 솟아있고, 머리는 나발(螺髮)이다. 백분과 검
은색이 뒤섞여 고단해 보이는 얼굴은 통통한데, 눈과 코, 입, 귀가 선명하며, 귀는 목까지 늘
어져 중생의 소리를 경청한다. 목은 두껍고 삼도(三道)가 있었으나 훼손되었으며, 몸에 걸친
법의는 통견으로 옷 주름이 섬세히 표현되었다.
두 손은 비로자나불의 수인(手印)인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으며, 다리는 오른쪽 발을 올
려 결가부좌(結跏趺坐)하였는데, 정강이 부분에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수리한 부분이 많지만
조각솜씨는 괜찮은 편이며, 다소 경직되고 도식화된 형태를 통해 고려 때 불상으로 여겨진다.

석불 뒤에는 아미타후불탱이 걸려 있는데, 1870년에 흥선대원군의 시주로 제작된 것이다. 허
나 이 그림은 모조품으로 진품은 용주사 성보박물관에 가 있으며, 그림 화기(畵記)에는 왕과
왕비의 만수세(萬壽歲)를 기원하는 글과 대원군 일가, 명성황후(明成皇后) 일가의 시주자 명
단이 있어 운수암도 왕실 원찰(願刹)의 대우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화기에는 '高聖山 雲峀庵'이라 쓰여있어 이름은 같지만 지금과 한자(漢字)가 1글자씩 달랐음
을 보여주며, 제작시기에 대해서는 '大明 崇禎紀元後 五癸酉閏六月二十八日(대명 숭정기원후
오계유윤육월이십팔일) ~~'이라 쓰여 있어 오래전에 망한 명나라에 대한 쓸데없는 사대주의와
그리움이 여전했음을 보여주어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  현왕탱(現王幀)과 창건주 장씨 보살의 진영(오른쪽)

비로전 불단 옆에는 명부(冥府, 저승)의 왕인 현왕(現王)을 담은 현왕탱과 창건주 장씨 보살
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창건주의 진영은 언제 제작되었는지는 전하지 않으며, 그림 상단
측면에 '伽藍刱建大化主 淸信女 般若明 張氏 眞影(가람창건대화주 청신녀 반야명 장씨 진영)'
이라 쓰여 있고, 그 앞에 단을 마련해 창건주를 기린다.

▲  비로전을 지키는 호법신(護法神)들의
무리를 머금은 신중탱

▲  삼성각 산신탱

▲  삼성각 칠성탱

▲  삼성각 독성탱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삼성각은 198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이 봉안되어 있다. 그들은 삼성각이 있기 전에는 비로전에 얹혀 살았
는데, 이곳에 있던 산신탱과 칠성탱, 독성탱은 1870년에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조성된 것으
로 진품은 모두 용주사 성보박물관에 있고, 복제품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래서 그림이 꽤
선명도가 진하고 세월의 주름이 전혀 없다.



 

♠  무양성<舞陽城. 무한성(無限城)> - 안성시 향토유적 2호

▲  무한성의 북쪽 부분

조촐한 규모의 운수암을 둘러보고 절을 둘러싸고 있는 무한성(무양성)을 1바퀴 돌았다. 무한
성은 무한하다는 뜻의 성으로 성의 역사는 무한해도 규모는 그리 무한하지 못하다.
고성산 남쪽 산정(山頂)에 둥글게 닦여진 둘레 약 120m, 높이 2~4m에 조그만 퇴뫼식 산성으로
무양성(無陽城), 무양산성(舞陽山城), 무란성(舞鸞城) 등의 별칭을 지니고 있다. 무란성이란
이름은 힘이 장사인 '무란'이란 여인네가 쌓았다고 해서, 그리고 무양성은 '무양'이 운수암을
지키려는 용도로 축성했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이 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는 고성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
地勝覽)에 양성현(안성시 양성면) 남쪽 12리 지점에 있는데, 둘레 1,305척, 성 안에 못이 하
나 있다는 기록이 있고, 1899년에 제작된 양성읍지(陽城邑誌)에 '무한성 남단 아래 고성(古城
)이 있어 옛 고을터가 완연하다'
는 내용이 있다.
성 내부에는 건물터와 많은 기와파편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을 통해 막연히 삼국시대(백제 또
는 신라)에 닦여진 것으로 보이며, 고려 때 증축된 것으로 여겨진다.


▲  무한성에서 바라본 운수암

▲  무한성 서쪽 부분

무한성(무양산성)은 오랫동안 버려진 성이라 속세의 관심을 제대로 받지 못해 왕년의 위엄은
자연과 세월의 집요한 시비 앞에 거의 무너지고 말았다. 하여 지금은 남벽과 동벽, 내성벽,
성문터 등이 일부 남아있을 뿐인데, 아무리 옛 사람들이 철옹성처럼 만들었다고 해도 대자연
과 세월 앞에서는 한낱 모래성에 불과하다.

여름 제국의 뜨거운 햇살을 굴복시킬 정도로 나무와 수풀에 제대로 치여 성곽의 모습은 흐트
러졌지만 다행히 산성의 윤곽이 잘 남아있고, 성곽을 이루던 성돌도 여럿 남아있어 무한성의
존재감을 그런데로 확인할 수 있으며, 성이 들어앉은 지형은 대체로 경사가 각박해 성은 작지
만 요새지로는 아주 그만이다. 이곳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는 알기 어려우나 삼국시대에 조
성된 것이 맞다면 자기 밥값은 충분히 했을 것이며, 18세기에 운수암이 성내에 들어앉으면서
운수암을 지키는 소소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 무양성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방신리 산42


▲  무한성 서남쪽 부분

▲  숲길 같은 무한성 남쪽 부분

▲  경사가 각박한 무한성 남쪽 부분

▲  성문터로 여겨지는 부분

▲  무한성 남쪽 부분에서 바라본 천하 - 안성 공도읍 지역

▲  무한성 남쪽 부분에서 바라본 천하 - 독정저수지와 안성 원곡면 지역

▲  운수암을 뒤로하며 다시 속세로 ~~

무한성(무양산성)을 1바퀴 도니 다시 운수암이다. 무한성 성곽길은 운수암에서 시작해서 운수
암에서 끝나는 순환형 산길인 것이다.

다시 찾은 운수암에서 대방 툇마루에 걸터앉아 지금까지 고생한 두 다리를 어루만지며 땀을
씻었다. 솔솔 불어오는 고성산 산바람이 땀을 앗아가면서 몸도 좀 시원해진다. 기분 같아서는
산중에 묻힌 이곳에 며칠 신세를 지고 싶지만 그럴만한 처지도 되지 못해 쿨하게 작별을 고하
며 운수암을 나온다. 올라올 때는 무더위 때문에 힘들었지만 내려갈 때는 내리막과 초저녁 기
운의 탄력을 받아 금세 운수암입구 방신1리 정류장에 이른다.

여기서 공도와 평택을 거쳐 나의 제자리로 돌아오려고 햇으나 그러면 너무 돌아가는 것이 되
어 다시 양성으로 나왔다. 다행히 버스가 10분 만에 와서 무난히 양성까지 왔으나 용인으로
가는 용인시내버스 22-1번이 무려 40여 분 만에 오면서 다시금 환승할인이 깨져 가게 부담을
가중시키는 비운을 겪었다. 어떻게 같은 곳에서 2번 연속 그런 고통이 생기는 것인지 여기가
그만큼 벽지 비슷한 곳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여름 안성 운수암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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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의 달달한 향연 속으로, 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문화축제)

봉원사 연꽃 나들이 (서울연꽃문화축제)



' 연꽃의 즐거운 향연 속으로 ~~~
봉원사 연꽃 나들이 '

▲  봉원사에서 만난 한 송이 연꽃
 



 

여름 제국의 무더운 한복판에 이르면 하늘 아래 곳곳에서 연꽃축제가 열린다. 내가 살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에도 괜찮은 연꽃축제가 하나 있는데, 바로 봉원사에서 열
리는 '서울연꽃문화축제'이다. <이곳 외에도 조계사(曹溪寺)에서도 연꽃축제가 열림>
2003년에 처음 시작하여 벌써 20년 가까이 이르렀는데, 봉원사 연꽃은 이미 지겹게 인연
을 지었다. 허나 여름에는 친여름파인 연꽃의 향연을 꼭 봐줘야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
)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여름 제국을 대표하는 꽃이 바로 연꽃이다.

드디어 고대하던 봉원사 연꽃축제날의 서광이 밝아오자 후배 여인네와 그곳의 문을 두드
렸다. 이번에는 바로 봉원사로 가지 않고 안산자락길을 반바퀴 정도 돌아 봉원사로 들어
섰는데, 경내로 들어서니 벌써부터 연꽃 향기가 후각을 마구 찌르고, 연꽃의 아름다움이
속세살이로 오염된 두 눈과 정처 없는 마음을 찌르며, 연잎의 살랑거리는 소리가 청각을
찔러댄다.



 

♠  봉원사(奉元寺) 입문 (만월전, 명부전, 미륵전)

▲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서울 도심에서 북쪽으로 뻗어가는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
산(仁王山)과 마주하고 있는 안산<鞍山, 295.9m> 서남쪽 자락에 서울 장안에 이름난 고찰(古
刹)로 꼽히는 봉원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봉원사는 태고종(太古宗)의 총본산으로 신라가 한참 망해가던 889년에 부동산 전문가인 도선
국사(道詵國師)가 지금의 연세대<연희궁(延禧宮)터>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명
쾌히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이며, 그나마 조선 초기에 정도전(鄭道傳)이 썼
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이 경내에서 가장 늙은 것으로 여겨져 도선의 창건설은 거의 신빙성
이 없다.
어쨌든 창건 이후 적당한 내력이 없다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시절에 보우대사<普
愚大師, 원증국사(圓證國師)>가 크게 중창하면서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 중생들로부
터 크게 찬양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때 보우가 창건한 것이 아닐까 싶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색(李穡)에게 명해 보우대사(원증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
스로 그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니 그 이름이 봉원사에 기록되어 있다. 허나 이색은 고려가
망하자 초야에 숨으며 조선과 담을 쌓았던 삼은(三隱)의 하나인데, 왜 나라를 뒤엎은 이성계
의 명을 받아 보우대사의 비문을 썼는지가 의심스럽다. 아마도 잘못된 기록인 듯 싶다.
1396년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3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했고, 태조가 붕어(崩御)한 이
후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해 왕실의 원찰로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렸다.

임진왜란 때 절이 소실된 것을 1651년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했으며, 이후 동,서 요사채가 불
타자 극령(克齡)과 휴엄(休嚴)이 중건했다. 1748년 영조(英祖)가 현재 절 자리를 하사하며 절
을 옮길 것을 명하자 찬즙(贊汁)과 증암(增岩)이 절을 이전했는데, 이에 영조가 친히 '봉원사
' 친필 현판을 내렸다. (그 현판은 6.25때 사라짐)
봉원사가 떠난 자리에는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映嬪)이씨의 묘
역인 수경원(綏慶園)이 1764년에 닦여졌는데, 이 수경원은 20세기 후반, 서오릉(西五陵)으로
이전되어 지금은 정자각과 약간의 석물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봉원사를 흔히 '새절'이라 부르는데, 이는 영조 때 터를 옮기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 지은
절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며, 수경원의 원찰(願刹) 역할까지 자연스럽게 맡게 되면서 굶어
죽을 일은 없게 되었다.

1788년 전국 승려의 풍기를 단속하고자 8도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가 봉원사에 설치되었으며
, 1856년에는 은봉(銀峯), 퇴암(退庵)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잠시
머물며 여러 현판을 써주기도 했다. (대방에 2개의 현판이 남아있음)
고종(高宗) 초기에는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開化派)의 지도자로 활약했던 이동인(
李東仁)이 5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던 김옥균(金玉均)과 박영
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이 찾아와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에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세웠으나 곧 불에 탔으며, 1908년 8월에는 한글학회가
이곳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1911년 주지 보담(寶潭)이 중수했고, 땅을 더 확보하여 경내를
넓혔으며, 1945년에는 해방을 기념하고자 주지 기월(起月)이 광복기념관을 세웠다.

1950년 천하의 비극인 6.25가 터졌다. 초반에는 절이 무탈했으나 한참 서울 수복을 벌이던 그
해 9월 말, 무심한 총탄의 세례로 광복기념관이 소실되고 영조의 현판과 이동인 등 개화파 인
물의 유물이 화마(火魔)의 덧없는 먹이가 되는 큰 비운을 겪는다.

6.25이후 주지 영월(映月)이 1966년 염불당을 중건했는데, 그 목재는 1962년에 공덕동(孔德洞
)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를 구입하여 충당했
다. 당시 친일 식민사학 패거리의 두목이던 이병도와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유적을 부시고
자 봉원사에 판 것이다.

1991년 젊은 주지승인 김성월이 삼천불전을 짓는다고 난리를 피우다가 누전으로 이곳의 유일
한 지정문화재였던 대웅전을 홀랑 태워먹었다. (당시 뉴스에 요란하게 나왔음) 이후 새로 부
임한 주지 혜경이 신도들과 함께 쓰러진 대웅전을 1994년에 복원하고 삼천불전까지 같이 완성
을 보았다.
2009년에는 봉원사에서 전문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영산재(靈山齋)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
정되었으며, 2011년 전통사찰의 지위를 받았다.

넓직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삼천불전과 명부전, 염불당, 극락전, 만월전, 미륵
전, 칠성각, 운수각, 전씨영각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아미타괘불
도와 범종, 약사불회도, 산신도, 독성도, 시왕도 및 사자/장군도, 도량장엄용 불화(오여래도,
사보살도, 팔금강도, 십이지신도), 도량장엄용 불화(칠여래도, 사보살도, 팔금강도), 의소제
각 편액, 용암사(龍巖寺) 감로왕도, 반야암(般若庵) 목조관음보살좌상, 반야암 목조석가여래
좌상, 반야암 석조보살좌상 등 지방문화재 20점 정도를 지니고 있다. (이들 모두 2014년 이후
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용암사와 반야암은 봉원사의 부속 사찰임)
또한 국가무형문화재 48호인 단청장(丹靑匠) 기능 보유자 만봉이 주석하고 있고, 국가무형문
화재 50호
인 영산재(靈山齋)를 지키는 영산재보존회가 이곳에서 후학을 기르고 있다.

그 외에 명부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탱화가 여
럿 전하며, 오래된 보호수 5그루가 경내 외곽에서 사이 좋게 그늘을 드리워 절의 오랜 내력을
묵묵히 속삭인다.

봉원사는 2003년부터 매년 한여름에 연꽃축제를 선보인다. 서울 최초의 연꽃축제로 '서울연꽃
문화축제'를 칭하고 있는데, 봉원사 연꽃축제라 불러도 크게 상관은 없다. 이곳이 다른 연꽃
축제와 다른 것이 있다면 연못이나 논두렁에 연꽃밭을 닦지 않고 커다란 수조(水槽)를 동원해
연꽃을 심어 경내에 배치한다는 것이다.
축제날에는 연꽃의 향연 외에 전통차와 떡 제공, 국수 공양, 산사음악회, 영산재 등이 열리며
연꽃은 축제가 끝난 이후에도 8월 중/하순까지 경내에 선보인다.

서울 도심에서 무척이나 가까운 절로 숲이 무성해 깊은 산골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선사하며
접근성 또한 착해 언제든지 안길 수 있다.

* 봉원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26 (봉원사길 120 ☎ 02-392-3007~8)

* 봉원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붉은 연꽃의 요염한 자태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만월전(滿月殿)

안산자락길에서 조금 내려가면 기와집 일색의 봉원사 뒷통수가 보인다. 그 뒷통수가 점점 커
지면서 제일 먼저 만월전이 마중을 나오는데, 안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봉원사 경내를 거쳐
가기 때문에 자연히 산꾼의 왕래도 잦아 늦은 시간에도 길을 열어둔다.

만월전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외진 곳으로 약사여래(藥師如來)의 거처이다.
이곳에는 1894년에 조성된 약사불회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65호)와 1904년에 그려진 독성도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66호), 1905년에 조성된 산신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65호)가 봉안되
어 있는데, 이 건물은 무슨 사연을 숨기고 있는지 늘 굳게 잠겨져 있어 봉원사를 여러 번 왔
음에도 단 1번도 그 속살을 구경한 적이 없다. (산신도와 독성도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극락전(極樂殿)과 자애수(慈愛樹)
만월전 앞에는 극락전이 명부전의 뒷통수를 바
라보며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아미타
불(阿彌陀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 옆에는 자
애수'란 어여쁜 이름을 지닌 아름드리 느티나
무가 그늘을 베풀고 있다. 나이는 100~150년
정도로 여겨지는데, 왜 자애수라 불리는지는
모르겠다.


▲  명부전(冥府殿)

삼천불전과 극락전 사이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두툼한 맞배지붕 건물로 조
선 후기에 조성된 지장보살과 저승의 10왕(시왕) 등 명부(저승)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  삼봉 정도전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의 위엄
왼쪽 구석 위쪽에 '정도전 필' 4자가 쓰여 있다.


명부전 현판은 조선 태조 때 삼봉(三峯) 정도전이 쓴 것이라 전한다. 하지만 내 눈이 안경이
라고 내 침침한 두 눈에는 그리 오래되어 보이진 않는다. 비록 현판 구석에 '정도전 필(鄭道
傳 筆)' 4글자가 아주 작게 쓰여있긴 하나 옛 사람들은 이름보다 '호'나 '자'를 우선적으로
썼기 때문에 역시 의구심이 든다.
허나 봉원사가 태조 이성계의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았고, 그의 어진까지 봉안했던 절이니 그를
도와 새 나라를 열었던 정도전도 봉원사를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온 기념으
로 한 글자 남겼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 현판이 세월을 너무 타자 필사(筆寫)를 해 새 것으
로 교체했는데, 그가 쓴 것을 강조하고자 실수로 이름만 덩그러니 썼을 수도 있다.

또한 원래 봉원사 것이 아닌 태조의 계비(繼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능, 정릉(貞陵)
에 설치된 명부전의 현판이란 이야기도 있다. 태종이 정릉을 서울 외곽으로 추방하면서 명부
전을 때려부셨고, 그 현판이 이리저리 떠돌다가 봉원사로 흘러들어와 이곳 명부전의 현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명부전은 정도전의 글씨로도 빛이 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꼭 있다고 기둥에 달
린 주련 4개는 친일매국노로 악명이 높은 이완용(李完用)이 쓴 것이다. 조선을 세우고 명나라
(요동)를 정벌하여 보다 큰 나라를 꿈꾸었던 나라의 창업 공신과 그 조선을 말아먹고 왜정에
빌붙은 작자의 흔적이 한 자리에 공존하고 있는 점이 참 이채로운데, 광복 이후 친일파를 제
대로 단죄하지 못한 휴유증으로 점점 기형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 땅의 더러운 현실이 매국
노의 고약한 흔적을 남겨두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봉원사도 생각이 있다면 이완용이 쓴 주련을 싹 뜯어내 장작으로 쓰거나 내버리기 바란다.


▲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지장시왕도(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9호)

녹색 승려 머리에 금동 피부를 지닌 지장보살상은 지장전의 주인장으로 좌우로 도명존자(道明
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거느리고 있다. 그들을 중심으로 좌우에 시왕(十王)과 판관(判
官), 사자(使者), 인왕상, 동자 12위 등이 자리해 명부전 식구들은 총 33기이다.
2019년 7월 말에 지방문화재 지정 신청을 위해 그들을 조사했는데, 지장보살상 몸속에서 조성
발원문 2점과 후령통 2점, 묘법연화경 일부가 나왔고, 도명존자 몸속에서는 명주저고리와 명
주천, 무독귀왕에서는 조성발원문과 후령통, 다라니가 나왔다. 그리고 좌측 판관상에서 후령
통 3점과 1546년에 제작된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73
), 성종 시절에 쓰여진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72호
), 묘법법화경(일부) 등이 쏟아져 나왔다.

조성 당시 발원문(發願文)은 3개가 나왔는데, 제작시기와 만든 사람, 시주자 등의 정보를 담
고 있으나 처음 봉안되었던 절 이름은 없다. 또한 대좌(臺座) 상면에 쓰인 조성기를 통해 수
조각승 색난(色難)을 비롯한 18명이 1704년 6월 30일에 완성했음을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무독귀왕이 들고 있는 네모난 지물 밑면에 숨겨진 묵서명(墨書名)을 통해 1858년에 봉
원사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하여 비록 그들의 제자리를 확인할 수 없지만 1858년을 전후로 봉
원사에 안착했음을 보여준다.
바로 조성시기와 제작자 등을 알려주는 발원문과 글씨를 남겨둔 제작자의 작은 배려 덕에 여
러 숨겨진 사실을 알게 되어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은 것이다. ('봉원사 목조지장보살
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71호로 지정됨)

그리고 지장보살 뒤에 든든히 걸린 지장시왕도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9호)는 목재로 딴 패널
형태로 관리 소홀로 화기(畵記) 부분이 사라져 자세한 정보는 알 도리가 없다.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와 무독위왕, 시왕상, 보살상, 공양천녀상, 동자상, 시방불상이 빙 둘러싸
고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불화에 많이 쓰인 바림기법으로 옷주름 표현을 하고 있으며, 연화문(蓮花紋)
과 연화당초문(蓮花唐草紋), 모란화문, 운문(雲紋), 동심원문(同心圓文), 나비문, 칠보문 등
이 장식되어 있다. 색채는 적색과 녹색, 황색 등을 적절히 사용하고 있는데, 전반적으로 채도
가 낮고 탁한 색조를 보인다. 특히 상/하단에는 얼룩이 심하며 피부색도 많이 변색되었고 곳
곳에 보채(補彩)된 흔적이 보인다. 또한 의복 문양, 무독귀왕상과 시왕상이 쓴 관, 손에 들고
있는 지물, 지장보살상의 광배 등은 금니(金泥) 기법을 사용했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지장시왕도과 비교하여 19세기 후반 불화로 여겨지며, 조선 후기 지
장시왕도의 일반적인 도상 형식과 다르게 간략화되어 집중도 있는 화면과 공간 구성이 돋보인
다.

▲  명부전 옆구리에 자리를 닦은 연꽃들

▲  한글학회 창립 기념비

봉원사는 우리 글 지킴이인 한글학회 창립 총회가 열렸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1908년 8
월 주시경(周時經)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한글학회
(국어연구학회)를 세웠는데 그들은 개화파 선구자였던 이동인이 머물던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
를 열어 봉원사를 근거지로 삼았다.
2008년 8월 한글학회 창립 100돌을 기념해 '한글학회창립 100돌 기념사업회'와 봉원사가 표석
을 세워 그날의 높은 뜻을 기린다.


▲  미륵전(彌勒殿)과 7층석탑

칠성각 뒷쪽에 자리한 미륵전은 기와집이 아닌 현대식 건물로 마치 강당이나 체육관 같은 모
습이다. 그 안에는 근래에 조성된 하얀 피부의 미륵불(彌勒佛)이 있는데, 건물도 그를 닮아
죄다 하얀색이라 조촐하게 순백(純白)의 세계를 자아낸다. 미륵불 주위에는 기름을 먹고사는
인등(引燈)이 가득 자리해 건물 내부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데, 그 인등으로 인해 인등각이
라 불리기도 한다.
미륵전 앞에는 날씬한 몸매를 지닌 7층석탑이 서 있는데, 그는 왜정(倭政) 이후에 많이 나타
나는 석탑 양식으로 20세기 중~후기에 마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  봉원사 칠성각, 삼천불전, 대웅전

▲  칠성각(七星閣)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6호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칠성각은 그 이름 그대로 칠성(七星, 치성광여래)의 보금자리이다. 허
나 이상하게도 칠성이 아닌 하얀 피부의 약사여래상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 건물의 이름을
무색하게 만든다.

칠성각은 19세기 말에 지어진 것으로 봉원사에서 가장 늙은 집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
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약사여래상을 중심으로 19세기 말에 조성된 치성광여래도(서울 지방
문화재자료 80호
)가 그 뒤를 지켜주고 있으며,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八相圖)와 호법
신들이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산신 가족이 담긴 산신탱 등이 들어있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관세음보살상
이글거리는 두광(頭光)을 지닌 관세음보살
누님이 용선을 타고 파도를 즐기며
어디론가 가고 있는 모습이다.

▲  메마른 목에 한줄기 빛, 수각(샘터)
대자연이 내린 옥계수로 연꽃 석조는 거의
마를 날이 없다. 특히 한여름에는
연꽃보다 샘물이 더 반갑지.


▲  삼천불전과 3층석탑(가운데 탑)

경내 우측에 자리한 삼천불전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름 그대로 3,000불을 머금고 있다.
이곳에는 1945년에 지은 46칸짜리 광복기념관이 있었으나 1950년 9월 25일 서울 수복을 둘러
싼 우리군과 북한군과의 싸움에서 무심한 총탄에 쓰러졌으며, 그때 영조의 봉원사 현판과 이
동인, 김옥균의 유물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이후 터만 남아오다가 1988년 삼천불전을 짓기 시작하여 1997년 완성을 보았다. 무려 9년
에 걸쳐 지은 이 건물은 210평 규모로 대들보 무게만 7톤을 헤아린다고 하며, 멀리 알래스카
에서 227년 이상 묵은 나무를 수입하여 만들었다. 또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 본 건
물의 특징인데, 절을 크게 돋보이게 할 겸, 삼천불전을 짓는 것까지는 좋으나 이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누전으로 소중한 대웅전을 화마로 떠나보내는 비극을 겪었다. 그런 대웅전의 희생으
로 태어난 것이 바로 삼천불전이 되겠다.

건물 중앙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가 이 큰 건물의 주인장이다. 그
를 중심으로 좌우에 조그만 금동불(金銅佛) 3,000불을 가득 채워 눈을 부시게 하는데 모두 중
생의 돈을 받아 지은 원불(願佛)이다. 그 외에 내부 우측에는 조그만 납골당이 있어 영가(靈
駕)를 위한 공간을 두었으며, 건물 내부가 워낙 넓어서 1,000명은 능히 구겨 넣을 수 있다.

절에 필수 요소인 석탑은 보통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다. 허나 봉원사는 풍수지리 때문인지
오랫동안 탑이 없는 허전함을 안겨주었지. 그러다가 1991년 7월 봉원사 승려와 신도 75명이
스리랑카의 초청을 받아 캔디의 불치롬보에 있는 강가라마사(寺)를 방문했는데, 그곳 대승정
(大僧正)인 그나니사라가 부처의 사리 1과를 선물로 주면서 봉원사도 어엿한 진신사리 보유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사리는 가져왔으나 정작 탑을 세우지 못해 애 태우다가 삼천불전이 세워진 이후 신도들의 지
원으로 석가탑(釋迦塔)을 닮은 3층석탑을 세우게 되었다. 대웅전 앞에 세우면 좋으련만 삼천
불전에 대한 기대가 큰지 그 앞에 세워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뽀송뽀송한 하얀 피부를 마음
껏 뽐낸다.


▲  봉원사 산사음악회 (범패 공연이 한참 펼쳐지고 있다)

삼천불전 앞에는 연꽃축제의 일원인 산사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산사라고 늘 고적(적막)만
고집해야 될 이유는 없지, 1년에 며칠 정도(절 축제나 석가탄신일)는 산사음악회로 떠들썩하
게 즐기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고 사찰 홍보와 영업에도 도움이 된다.
봉원사 산사음악회는 이곳의 자랑인 영산재와 범패를 위시해 다양한 전통공연과 퓨전음악, 서
양음악, 초청 가수 공연 등이 열린다.

3층석탑 옆에는 떡과 전통차를 제공하는 공간이 있는데, 18시 이전에 마감을 하여 서둘러 가
야 떡과 전통차를 먹을 수 있다. (무료로 제공되며 거의 무한 리필임, 차가 매우 시원함) 그
리고 17시부터 1시간 정도 삼천불전 지하층 공양간에서 국수 공양을 제공한다. 연꽃축제 기간
외에도 평일과 일요일에도 제공하니 시간이 맞거든 한 숟가락 들며 이곳의 인심을 확인해보자.
(공양은 상황에 따라 제공되지 않을 수 있으며, 비빔밥 공양을 제공하는 경우도 있음)
우리는 국수 1그릇과 떡, 전통차를 무한정 즐기고 산사음악회도 전부는 아니지만 ⅓ 정도 구
경을 했다. 이렇게 절 축제를 이용하여 전통공연과 서양음악 공연 등의 문화생활을 무료로 즐
겨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  대웅전 뜨락 연꽃축제장에서 바라본 삼천불전

▲  연꽃의 향연을 바라보는 대웅전(大雄殿)

봉원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연세대 자리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1748년 이곳으로 옮겨오
면서 조금 변형된 것으로 보고 있다. 18세기 중반 건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8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는데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린 사찰 건축물은
화계사(華溪寺, ☞ 관련글 보러가기) 대웅전과 흥천사(興天寺, ☞ 관련글 보러가기) 극락전,
명부전이 고작이었다. 그만큼 일찌감치 서울 지역 조선 후기 사찰 건축물의 대표작으로 평가
를 받았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봉원사 대웅전은 1991년 삼천불전을 무리하게 짓는 과정에서 전기 누전으
로 홀라당 태워먹고 말았다. 그때 영조가 내린 봉원사 현판을 비롯하여 건물 내부를 장식하고
있던 조선 후기 탱화들이 죄다 재가 되었으니 6.25 시절 피해만큼이나 그 안타까움은 실로 크
다 할 것이다. 봉원사가 축적했던 많은 보물들이 부질없이 또 사라진 것이다.
이후 2년 동안 공사를 벌여 1993년에 생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일으켜 세웠지만 떠나간 지방문
화재의 지위는 되찾지 못했으며, 승려 이만봉이 탱화와 단청 대부분을 그려 건물 내부는 매우
화려하다.

대웅전 안에는 조그만 범종(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4호)이 하나 깃들여져 있다. (종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흥선대원군이 부질없는 명당(明堂) 욕심으로 예산 덕산(德山)에 있던 가야사
(伽倻寺)로 부친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이전할 때 그 절을 강제로 불을 질렀는데, 그때 타
지 않고 남은 것을 가져온 거라고 한다.
과연 가야사 자리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제왕이 되었지만 결국 자신을
포함 3대 만에 나라를 제대로 말아먹었으니 명당의 치명적인 함정이라고나 할까..?


▲  대웅전 석가3존상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좌우에 자리해 3존상을 이룬다.
색채가 고운 후불탱이 든든하게 그들을 받쳐주고 있으며, 붉은 지붕의
닫집이 매우 호화롭기 그지없다.

▲  호법신들의 정모 현장, 신중도(神衆圖)

신중도에 빼곡하게 담긴 존재들이 모두 절과 석가여래를 지키는 호법신(護法神)들이라고 한다.
조금의 여백도 없이 그들을 담아놓아 너무 정신이 없는데, 여러 번의 화마(火魔)로 많은 것을
잃은 봉원사라 그런 사고가 다시는 없도록 호법신은 싹 소환하여 담은 모양이다. 저들의 한결
같은 보호가 있다면 정말 든든하겠지. 물론 인간들 하기에 달려있지만 말이다.


▲  아미타불이 극락왕생하는 고혼들을 맞이하는 모습을
그린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  대웅전 계단 좌우에 배치된 해태상들
대웅전을 화마로부터 굳게 지키고자 계단 양쪽에 귀여운 해태상까지 두었다. 연꽃에
둘러싸인 탓에 해태상의 표정이 씨익~ 해맑기 그지 없어 대웅전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도 그의 표정 앞에 이곳에 온 소임도 잊고 돌아갈 것이다.

▲  다소 낡아보이는 영안각(靈晏閣)

▲  단촐한 1칸짜리 건물, 전씨영각

대웅전 좌측에는 조그만 건물 3동이 연이어 자리해 있다.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은 운수
각(雲水閣)으로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이며, 그 옆에 맞배지붕 건물은 일정기간 혼백을 봉안하
는 영안각으로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196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하는데, 겉 나이는
거의 100년은 되어 보인다.
그리고 그 좌측에 있는 1칸짜리 건물은 전씨영각으로 평생 모은 재산을 봉원사에 넘긴 전성기
부부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매년 기일마다 절에서 온갖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주고 있는
데 절에서 그들을 부처 시절의 급고독장자로 비유하면서 사당까지 지어 제삿밥까지 직접 챙겨
줄 정도이니 시주한 돈이 꽤 되었던 모양이다. 역시나 절이나 속세나 돈 앞에서는 어쩔 수 없
는 모양이다.



 

♠  어찌 꿈엔들 잊으리요 ~ 연꽃의 즐거운 향연의 현장
대웅전 뜨락과 대방(염불당)

▲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은 연꽃축제장의 심장으로 연꽃을 머금은 수조들이 가득 널려 거대한 연꽃 밀림을
이룬다. 천하의 연꽃을 싹 소환한 것일까? 수련(睡蓮)을 제외한 갖은 연꽃들이 서로 아름다움
과 맵시를 견주면서 연꽃축제의 열기는 여름보다 더욱 뜨겁게 타오른다. 어여쁜 꽃잎을 펼쳐
보이는 연꽃들은 정처 없는 중생의 마음에 제대로 불을 지피며, 그들의 향연을 보고 있으면
속세에서 아무리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안구와 마음이라도 싹 정화가 될 것이다.


▲  삼삼하게 우거진 푸른 연잎들
이렇게 보니 연지(蓮池) 한복판에 퐁당 빠진 기분이다.

▲  붉게 물든 홍련
인당수(印塘水)에 몸을 던진 심청 누님이 저 연꽃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보기만 해도 마음이 콩닥콩닥..

▲  연분홍 연잎을 4박자로 펼쳐보인 홍련의 경쾌함

▲  홍련을 희롱하는 나비
연꽃 속에 그만의 꿀단지가 숨겨진 것은 아닐까?

▲  잘 익은 홍련의 요염함


▲  근심 어린 표정으로 입술을 굳게 닫은 홍련

▲  두툼하게 살이 오른 홍련

▲  푸른 연잎 밑에서 여름 햇살을 피하는 연꽃

▲  아주 화사하게 피어난 홍련

저토록 아름다운 연꽃이지만 그 미모는 불과 1달도 못 가서 꺾이고 만다. 한참 물이 오른 지
금이야 사람들이 서로 보려고 아우성을 떨지만 그때가 되면 누가 저들을 챙겨 보겠는가? 그래
서 인생은 부질없는 모양이다.


▲  푸른 연잎 사이로 살짝 고개를 내민 홍련

▲  산바람을 즐기며 목운동을 하는 홍련 3자매의 위엄

▲  서로 키와 아름다움을 견주는 홍련들

▲  다양한 인상의 홍련들

▲  방긋 웃는 홍련 - 하루살이 같은 찰라와 같은 삶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으며 이곳을 찾은 중생들을 격려한다.

▲  푸른 연잎 속에 홀로 솟은 홍련

▲  연잎 속에서 숨바꼭질을 즐기는 연꽃들

▲  방긋 웃는 푸른 연잎과 그들 사이로 고개를 내민 연꽃들

▲  작게 물방울을 머금고 있는 푸른 연잎

▲  연꽃 밀림 속을 거닐다

▲  수조에 몸을 담군 연꽃 무리들
한 마리의 개구리가 되어 연잎에 앉아 개굴개굴 노래를 부르고 싶다.

▲  출렁이는 연꽃 밀림 너머로 바라보이는 대방

▲  봉원사 대방<大房, 염불당(念佛堂)>

대웅전 뜨락 좌측에 자리한 대방(염불당)은 넓직한 팔작지붕 건물로 공덕동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의 본채 건물을 업어와 만든 것이다.

1960년대에 봉원사 주지였던 영월은 6.25 때 파괴된 절 건물을 다시 짓고자 궁리를 하였는데
마침 이병도를 비롯한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흔적을 산산조각 내고자 아소정을 헐값에 내
놓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여 아소정 본채를 구입하여 도화주 김운파 등과 1966년에 축소/변
형하여 대방으로 삼았다. 내부는 절 스타일에 맞게 변형을 주더라도 외형은 원래 모습으로 했
으면 좋으련만 당시 인식 부족으로 인하여 그리 하지 못한 점이 참 아쉽다.
비록 아소정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지 못한 채,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유일하게
남은 아소정의 흔적으로 건물 자재는 대부분 아소정 것이며, 그 시절 현판이 걸려있어 그런데
로 대원군 할배의 독한 향기를 뿜어낸다. 게다가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기존 크기에서 축
소했다는 것이 저 정도이니 원래 모습은 대원군의 생전의 위엄처럼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  대방 석조여래좌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7호

대방은 승려의 생활공간 및 손님 공간, 유가족을 위한 49재, 그리고 영산재를 지도하는 공간
으로 고루고루 쓰인다. 범패와 영산재를 배우는 이들의 음악 소리가 늘 끊이지 않고 구수하게
새어나와 이곳이 영산재의 성지(聖地)임을 실감케 한다.

대방 불단에는 아기처럼 매우 조그만 하얀 피부의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높이 37cm
에 작은 불상으로 경주 불석으로 조성되었는데, 그는 원래 철원 심원사(深源寺)에 있던 것이
라고 한다. 6.25때 심원사가 파괴되면서 그곳에 깃든 많은 불상과 보살상이 전국에 흩어졌는
데, 그때 들어온 것으로 보이나 확실한 것은 없다.
그의 뱃속에서는 '금강반야바라밀경'과 '팔엽대홍련지도', '준제구자천원지도', '열금강지방
지도' 등 각종 다라니가 나왔는데, 그들을 머금은 복장 주머니에는 '證明臣 華應 亨眞 謹封(
증명신 화응 형진 근봉)'이라 쓰인 띠를 둘렀다. 허나 이들은 20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화응
형진이 봉안한 것이지 불상 조성 당시 것이 아니다.
예로부터 영험이 있다고 전해져 불상에 대한 기도 수요가 적지 않으며, 추사 김정희(金正喜)
가 쓴 현판과 인간문화재인 이만봉 승려의 신장도(神將圖, 부엌문에 있음) 등이 대방 외부를
아낌없이 수식한다.

▲  운강 석봉이 쓴 봉원사 현판의 위엄

▲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  추사 김정희가 쓴 산호벽루(珊瑚碧樓)

▲  추사의 스승인 옹방강(翁方鋼)이
쓴 무량수각(無量壽閣)


추사체(秋史體)를 일군 김정희는 말년에 불교에 크게 관심을 가지며 많은 절을 찾았다. 방문
한 절마다 친필 현판을 넉넉히 남겼는데 봉원사에도 그의 현판 2개가 고스란히 전해온다. 파
란 글씨로 쓰인 그의 필체는 160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으며, 추사는 비록 가
고 없지만 그의 힘찬 필력을 느끼는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  대방의 뒷모습 (건물 왼쪽 문짝에 그려진 것이 이만봉이 그린 신장도)
대웅전과 대방 앞은 물론 절의 숨겨진 뒤쪽까지 숙성된 연꽃 수조를
갖다 놓아 연꽃의 조촐한 세상을 이루고 있다.

▲  대방 앞에 놓인 연꽃무늬 돌덩어리
범상치 않아 보이는 석물이다. 조선 후기
것으로 여겨지나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  연꽃 밀림 너머에서 바라본 대방
지금은 연꽃 밀림이 되었지만 그들이 모두
사라지면(8월 말) 이곳은 원래의 모습
(대웅전 뜨락)으로 돌아간다.


▲  연꽃 밀림에서 바라본 삼천불전의 야경
산사음악회의 밤은 깊어만 가고...


연꽃축제 현장을 몇 바퀴나 돌면서 부지런히 사진에 담느라 정말 도끼자루가 썩는 줄도 몰랐
다. 그야말로 연꽃이 시간 도둑인 셈이다. 허나 그런 어여쁜 도둑은 봐줄 만하다.
그 사이 세상은 낮에서 밤으로 바뀌고 시커먼 땅거미가 짙게 드리워지면서 여름 제국의 혹독
한 기운도 조금은 꺾였다. 햇님이 커튼을 치자 음악회가 열리는 삼천불전 앞은 그 어둠을 몰
아내고지 일제히 조명을 틀었고, 산사음악회는 점점 숙성이 되어 분위기는 더욱 솟아오른다.

마음 같아서는 음악회를 끝까지 관람하고 싶지만 저녁밥이 그리울 시간이라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버렸다. 그러니 아무리 음악회가 신명이 나도 그저 흐릿하게 보일 뿐이다. 봉원사에서
이미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고, 연꽃축제의 주인공인 연꽃을 실컷 눈에 넣었으니 그리 아쉽지
는 않다. 하여 꿈에도 잊지 못할 연꽃의 즐거운 향연을 뒤로 하며 그곳을 나왔다.

봉원사에는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된 늙은 나무(느티나무, 회화나무)와 16나한상, 조낭자 희정
유애비(趙娘子 熺貞 遺哀碑) 등의 볼거리가 더 있으나 이들을 사진에 담지 않았고 시간이 늦
어 제대로 친견하지 못해 본글에서는 쿨하게 생략한다.

이렇게 하여 봉원사 연꽃 나들이는 내년을 기약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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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2년 8월 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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