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산사'에 해당되는 글 136건

  1. 2022.08.16 충북의 한복판, 음성 겨울 나들이 (설성공원, 경호정, 미타사 지장대불, 가섭산 미타사의 설경)
  2. 2022.06.29 국립서울현충원 뒷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서달산 호국지장사
  3. 2022.06.02 아름다운 숲길을 지닌 고즈넉한 산사, 정릉동 북한산 경국사 (경국사의 석가탄신일 풍경, 경국사 공양밥)
  4. 2022.05.29 석가탄신일 기념 도심 사찰 나들이, 홍은동 백련산 백련사 (백련사 괘불)
  5. 2022.04.13 대구 팔공산 북지장사, 대구올레팔공산1코스, 시인 이상화고택 나들이
  6. 2022.04.07 광주 남한산성 봄맞이 나들이 ~~~ (남한산 장경사, 망월사, 지수당, 연무관, 개원사)
  7. 2022.03.07 우면산 대성사, 방배동, 우면동 동네 나들이 <성안공 상진묘역, 월산대군태실, 우면동석불, 우면동유적, 식유촌>
  8. 2022.02.18 진천의 꿀명소를 거닐다 ~ 진천 농다리, 보련산 보탑사, 연곡리석비
  9. 2022.01.02 한겨울 산사 나들이, 안양 삼성산 삼막사 ~~~ (삼막사 남녀근석, 안양예술공원, 석수동 석실분)
  10. 2021.12.27 늦가을 산사 나들이 ~ 우이동 윗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도선사 (붙임바위, 우이동계곡)

충북의 한복판, 음성 겨울 나들이 (설성공원, 경호정, 미타사 지장대불, 가섭산 미타사의 설경)

음성 겨울 나들이 (경호정, 읍내리모전5층석탑, 미타사)



' 충북 음성 겨울 나들이 '

  음성 설성공원 경호정  
음성 읍내리 5층모전석탑

▲ 설성공원 경호정
◀ 음성 읍내리 5층모전석탑
▶ 미타사 지장대불
▼ 미타사 마애여래입상

미타사 지장대불
  미타사 마애여래입상  

 


 

겨울 제국(帝國)의 차디찬 한복판인 2월의 첫 무렵, 충북 음성(陰城)을 찾았다. 내 마음도
모르고 수북하게 쌓여만 가는 미답처(未踏處)를 하나라도 더 지우고자 수도권과 가까운 적
당한 메뉴를 물색하다가 충북 음성에서 격하게 반응을 보여 그곳으로 길을 정했다.
충북 한복판에 자리한 음성군은 오래전에 1번 지나간 것이 전부일 정도로 지지리도 인연이
없던 곳이다. 하여 고려시대 마애불을 간직한 미타사를 비롯한 음성의 여러 소소한 명소를
둘러보며 그동안의 부족한 인연을 조금 채워보기로 했다.

햇님이 아직 등청하지 않은 이른 아침에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동서울터미널로 달려갔
다. 거기서 음성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1시간 40분 정도를 달려 음성읍의 관문인 음성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음성에 이르니 새벽까지 눈이 왔는지 천하가 온통 은빛세계였다.

음성터미널에서 미타사가 있는 비산리(碑山里) 방면 군내버스 시간을 확인하니 무려 1시간
20분 뒤에 차가 있다. (시외직행버스도 비산리에 정차하나 그것까지는 미처 몰랐음;) 그래
서 시간이나 때울 겸 터미널과 가까운 설성공원을 찾았다. 이곳은 미타사 후식용으로 보려
고 했던 곳인데, 버스 시간 관계로 후식을 먼저 맛보게 되었다.


 

♠  음성읍내의 소중한 휴식처, 경호정과 3층석탑 등을 간직한
음성 설성공원(雪城公園)

▲  설성공원의 중심인 경호정

음성터미널과 가까운 음성읍내 한복판에 설성공원이 자리해 있다. 이 공원은 음성읍민의 포근
한 휴식처이자 설성문화제, 음성품바축제 등이 열리는 지역 축제의 장으로 공원의 꽃인 경호
정을 비롯하여 3층석탑, 독립기념비, 이무영(李無影)문학비, 야외음악당, 음성청소년문화의집
, 음성군 향토민속자료전시관 등을 갖추고 있다.

공원 이름인 설성(雪城)은 음성의 다른 이름으로 고려 때 잠시 쓰였다. 지역 축제도 그 이름
을 따서 설성문화제라 했으며, 음성을 상징하는 옛 이름으로 서서히 되살아나고 있다. 
공원 북부에는 테니스장과 게이트볼장, 야외음악당 등이 자리해 있는데, 매년 5월에는 이 음
악당에서 음성품바축제가 열린다. 그리고 공원 남부에는 동그란 연못과 경호정, 읍내리3층석
탑, 음성청소년문화의집, 음성군 향토민속자료전시관 등이 자리잡고 있다.

공원 면적은 27,669㎡(8,370평)로 공원 동쪽에 음성천이 음성의 산하를 촉촉이 어루만지고 있
으며, 공원 내에 쉼터와 의자가 넉넉히 깔려있고, 경호정과 읍내리3층석탑, 읍내리5층모전석
탑 등 볼거리도 풍부해 음성 나들이 때 꼭 들려볼 만하다. 겉보기에는 시내에 흔한 공원처럼
보여 발길이 잘 가지 않겠지만 속은 제법 알찬 것이다.


▲  경호정과 얼어붙은 연못

설성공원의 갑(甲)은 뭐니뭐니해도 경호정이다. 공원 남쪽에 1,500평의 연못을 파고, 그 중심
에 200평 정도의 섬을 띄웠는데, 그 섬에 경호정과 읍내리3층석탑, 독립기념비를 두었다. 비
록 자연산은 아니지만 섬을 구경하기 힘든 음성 땅의 거의 유일한 섬으로 경호정과 어우러져
상큼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으며, 섬 서쪽과 동쪽에 속세와 섬을 잇는 돌다리를 놓아 운치를
더욱 우려낸다. 거기에 공원의 이름값을 하는 듯, 눈까지 깔려있으니 정말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  경호정(景湖亭) -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9호

돌다리를 건너 섬으로 들어서면 경호정이 반갑게 마중을 한다. 경호정은 정면과 측면이 2칸인
팔작지붕 정자로 1934년에 지어졌다. 당시 이름은 인풍정(仁風亭)으로 1955년에 음성군수 민
찬식이 중건해 경호정으로 이름을 갈았으며, 1997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했다. 그리고 그
해 4월 중건기(重建記)를 작성하여 정자 내부에 걸었다.

경호정은 정확히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연못 중간 섬에 자리해 있고, 사방이 개방된 형
태라 늘 시원한 바람이 앞다투어 머문다.

▲  경호정 동쪽 돌다리

▲  경호정 서쪽 돌다리


▲  독립기념비와 음성 읍내리3층석탑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129호

경호정 맞은편에는 독립기념비와 음성 읍내리3층석탑이 경호정을 바라보며 서 있다. 독립기념
비는 1945년 8월 해방을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지어진 지 80년도 되지 않은 젊은 비석이나 비
석 머리 부분에 검은 때가 가득하여 마치 몇백 년 묵은 비석처럼 고색의 멋을 풍긴다.

그런 독립기념비 옆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읍내리3층석탑이 있다. 그는 높이 2.4m로 읍내
부근 평곡리 절터에 있던 것을 1934년에 현재 자리로 가져와 경호정의 장식물로 삼았다.
1층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얹힌 형태로 지붕돌은 밑면에 3단 받침을 두었고, 지
붕돌 귀퉁이는 아주 살짝 들려져 있으며, 3층 위에는 연꽃 모양의 머리장식을 두었는데,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적지 않은 나이를 지녔지만 아직까지는 별다른 손상이 없이
무탈한 모습을 보인다.


▲  음성 읍내리 5층모전석탑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9호

경호정에서 남쪽으로 가면 음성군 향토민속자료전시관이 나오는데, 그 옆구리에 음성에서 가
장 늙은 탑인 읍내리5층모전석탑이 자리해 있다.
모전탑(模塼塔)이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은 것으로 벽돌로 쌓은 전탑(塼塔)과 조
금 비슷하다. 돌을 다듬어서 만든 석탑은 매우 흔하나 전탑과 모전탑은 거의 흔치 않은 존재
로 전탑의 성지(聖地)로 일컬어지는 경북 안동(安東)과 영양(英陽), 의성(義城), 경주(慶州)
지역에 간간히 남아있을 뿐이다.

이 모전탑은 원래 음성향교 부근 교동(校洞) 절터<'읍내리 사지(寺址)'라고도 함>에 있던 것
으로 1946년 수봉초교 교장인 이철세가 학교 교내로 옮긴 것을 1995년 현재 자리에 안착시켰
다. 탑이 있던 교동 절터는 고려 중기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탑의 구조를 보면 땅에 네모난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1층 기단과 5층 탑신을 차례대로 올렸
는데, 2층과 5층 탑신의 몸돌은 없어진 상태이며, 1층 탑신 4면에는 얇게 감실(龕室)을 팠다.
지붕돌은 위와 아랫면 모두 전탑처럼 층단을 이루고 있고, 네 귀퉁이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
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탑의 조성시기는 고려 초~중기로 여겨지며, 안동 지역 모전탑의 영향
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탑 옆에는 비석의 아랫도리인 비좌(碑座)가 누워있는데, 대머리처럼 허전한 모습으로
오래전에 가출한 비신(碑身)을 애타게 기다린다.


▲  읍내리 5층모전석탑과 성문처럼 생긴 음성군 향토민속자료전시관

5층모전석탑 옆에 자리한 음성군 향토민속자료전시관은 음성 군립(郡立) 박물관으로 1994년 4
월에 문을 열었다. 소장 유물은 950점 정도로 음성의 역사와 문화, 생활, 민속을 아낌없이 담
고 있지만 아직까진 인지도가 낮아 관람객은 별로 없다. 내가 들어선 시간은 주말 낮 11시였
는데, 관람객은 나홀로 뿐이었다.

전시관 1층(향토역사실)은 음성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테마로 관련 자료와 사진, 디오라마 등
을 전시하고 있으며, 음성 지역의 지정문화재와 향토문화재를 축소 재현한 것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2층(민속유물실)은 음성의 풍습과 민속, 농민문학가 이무영을 테마로 관련 자료와 사
진, 이무영의 작품과 유품 등을 두었으며, 전시관에 대한 내용은 이쯤에서 선을 긋는다.

* 설성공원 소재지 -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 향토자료전시관 소재지 -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817-12 (설성공원길 10-7 ☎ 043-
  871-5931)


 

♠  가섭산 미타사(迦葉山 彌陀寺) 아랫 구역
(느티나무, 지장대불, 마애여래입상)

▲  미타사로 인도하는 소이로61번길
저 멀리 금동 피부의 지장대불이 보인다


설성공원을 둘러보고 음성터미널로 돌아오니 비산리를 경유하여 후미리로 가는 음성군내버스
가 막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일요일 낮시간이라 승객은 노인 2명 뿐, 그 상태로 버스는 외마디 부릉소리를 터미널에 남기
며 육중한 바퀴를 움직인다. 음성읍내를 돌아 음성향교 고개를 넘어 10분 정도 가니 왼쪽 창
밖으로 미치도록 거대한 불상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것은 바로 미타사 금동지장대불로 천하에
서 가장 큰 지장보살상(높이 41m)이라 멀리서도 제법 크게 보인다.

버스는 비산1리 정류장을 지나 비산4거리에 이르렀는데, 운전사에게 미타사 길을 문의하니 여
기서 내리라고 그런다. 하여 버스에서 내려 충청대로를 건너 미타사로 인도하는 소이로61번길
로 들어섰다.


▲  미타사입구에 자리한 비선거리 느티나무 - 음성군 보호수 3-14호

비산리 미타사입구에서 미타사로 걸음을 재촉하면 제일 먼저 늙은 느티나무가 발길을 붙잡는
다.
이 나무는 2004년에 음성군 보호수로 지정된 것으로 그때 추정 나이가 약 200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20년 가량이 보태져 대략 220년 정도 된다. 높이는 10m, 둘레 130cm로 미타사에서 관
리하고 있으며, 겨울 제국에게 몽땅 털린 초췌한 모습으로 간절하게 봄의 해방군을 염원한다.

나무 그늘에는 구름무늬 이수(螭首)를 갖춘 오래된 비석 2기가 멀뚱히 서 있는데, 이들은 조
선 후기에 음성 고을을 다스렸던 음성목사(牧使, 현재 군수나 시장) 엄씨와 이씨의 송덕비(頌
德碑)이다. 이들 비석 때문에 이곳을 이 땅에 흔한 지명의 하나인 '비석거리'라 불리게 되었
으며, 그것이 1글자 와전되어 지금은 '비선거리'라 불린다.


▲  후평소류지(구룡연)와 구생범종루(사진 왼쪽 누각)
하얀 눈옷을 걸친 나무들이 호수를 거울 삼아 겨울에 지친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느티나무를 지나면 미타사에서 운영하는 밝은언덕노인요양원과 추모공원(가족납골공원)을 관
리하는 건물이 나온다. 미타사 길은 여기서 동쪽으로 크게 구부러지며 그 옆에 후평소류지(비
산소류지)라 불리는 저수지가 그림 같은 풍경을 드리운다. 미타사에서는 그를 구룡연(九龍淵)
이라 부르고 있는데, 원래는 농지로 이곳에 큰 샘터가 있었다.
이후 1970년대에 농사를 위해 버들골을 막아서 소류지(沼溜地)를 만들었으며, 지금의 절이 있
도록 도와준 비산1리 마을 사람들을 위해 미타사에서 공사 비용을 많이 내주었다.

후평소류지 북쪽에는 2층 규모의 팔작지붕 누각이 있다. 그는 범종(梵鍾)을 품고 있는데, 그
냥 범종루(梵鍾樓)도 아닌 무려 중생을 구한다는 뜻의 '구생(求生)범종루'를 칭하고 있다. 범
종루에 안긴 범종은 2001년에 주지 명안(明岸)이 미타사를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한 지장성지
로 다지는 차원에서 마련한 것으로 범종의 높이는 3.3m, 두께 20cm, 지름 2.1m, 무게 18톤에
청동범종이다.

2006년에 명안이 입적하자 2007년 그의 열반일에 맞춰 범종루를 완성시키며 그를 기리는 회향
(回向) 타종식을 가졌다.


▲  천하 최대의 지장보살상으로 명성이 높은 지장대불(地藏大佛)

구생범종루 북쪽에는 지장대불을 중심으로 한 추모공원이 넓게 닦여져 있다. 이곳은 2001년에
주지 명안이 진공당 탄성(眞空堂 呑性)과 쌍계사(雙磎寺)의 조실(祖室)인 고산(高山)의 도움
으로 만든 것으로 이 일대에 있던 밭과 평평한 모습의 마당바위를 밀어버리고 자리를 닦았다.

공원 북부에는 금동으로 치장된 지장대불이 육환장(六環杖)을 쥐어들고 장엄한 모습으로 납골
당 영가(靈駕)들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의 높이는 불교에서 좋아하는 숫자인 108척(41m)으로
1998년 4월에 짓기 시작하여 2000년 10월에 완성을 보았으며, 천하에서 가장 큰 지장보살상으
로 미타사의 자부심이 담긴 큰 보살상이자 듬직한 후광(後光)이다.
그가 어찌나 크던지 멀리 충청대로에서도 시야에 보이며, 그 앞에 서면 정말 주눅이 잔뜩 들
정도이다. 특히 거구의 지장보살이 서 있는 연화대(蓮花臺)도 그 덩치에 못지 않게 상당하여
높이가 3m에 이르며, 그 밑의 기단석에는 사천왕(四天王)과 팔부중(八部衆) 등의 여러 호법신
(護法神)들이 새겨져 영가들을 보살피는데 정신이 없는 지장보살을 지킨다.

참고로 이 자리는 백룡이 여의주를 품은 최고의 명당(明堂)이라고 한다. 뒤에는 가섭산의 오
색비단 장막이, 동에는 좌청룡, 서에는 우백호가 지켜주고 탁트인 남쪽에는 여의주가 뚜렷하
다는 것이다.

▲  동쪽에서 바라본 지장대불

▲  지장대불의 연화대와 기단부


▲  그윽한 설경에 미타사 숲길 (미타사 마애불 남쪽)

▲  미타사 마애여래입상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130호

지장대불을 지나면 설경에 잠긴 오르막 숲길이 잔잔한 감동의 물결을 선사한다. 푸른 나뭇잎
대신 하얀 눈꽃을 가득 머금으며 순백의 아름다움이 어떤지를 잘 보여주는 그 숲길을 조금 오
르면 미타사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자 옛 미타사의 오롯한 흔적인 마애여래입상이 보호각의 보
호를 받으며 중생을 맞이한다.

미타사 마애불은 마치 현신하듯 바위에 진하게 새겨져 있다. 높이는 405cm로 머리에는 무견정
상(無見頂相)이 두툼히 솟아있으며, 머리 스타일은 민머리이다. 눈은 지워진 듯 보이지 않고,
코는 형태만 남아있으며, 입도 그 형태만 있다. 볼살은 두터워 보이고, 얼굴 양쪽에 달린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청력 하나는 정말 대단할 것 같다.
어깨는 유연하며,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고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제스쳐를 취했다. 옷은 왼
쪽 어깨를 시작으로 발까지 덮고 있고, 주름은 사선으로 흐르고 있으며, 형식화된 신체 표현,
직선적인 윤곽,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 옷주름과 옷자락에서 신라 후기 불상 양식을 따른 고
려 중기 마애불로 여겨진다.

마애불의 보호를 위해 2002년에 맞배지붕 보호각을 씌워 눈과 비를 막아주고 있으며, 보호각
이 사방으로 뚫린 오픈식이라 답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불상 앞에는 예를 올리는 공간이 있는
데, 하얀 눈이 가득 입혀져 있어 예를 표하지는 못했다.


▲  멀리서 바라본 미타사 마애여래입상과 그의 조촐한 거처

▲  표정을 잃어버린 듯한 마애여래입상
눈과 눈썹은 거의 지워졌고, 코와 입, 귀만 형식적으로 남아있다.


 

♠  미타사 경내


▲  미타사 경내 직전 (돌담길)

마애불에서 각박한 경사의 오르막길을 한 굽이 오르면 가섭산(해발 710m) 동남쪽 자락에 안긴
미타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미타사는 이 땅에 아주 흔한 절 이름의 하나로 서울에만 보문동(普門洞), 옥수동(玉水洞), 개
화동(開花洞)에 오래된 미타사가 있다. 미타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뜻하며, 아미타불의 절
이 바로 미타사가 된다.

음성 미타사는 옛 절터에 지어진 것으로 조계종(曹溪宗) 소속의 비구니 수행도량이다. 미타사
란 이름은 1964년 창건 이후에 붙여진 것으로 옛 이름은 유룡사(有龍寺)라고 하나 확실한 것
은 없다.
630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지만 신빙성은 없으며, 876년에 도선국사가 중창하고, 1370
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창했다고 하지만 이 역시 심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하지만
경내에 고려 후기 석불이, 경내 밑에 고려 중기 마애불이 있고, 절터에서 고려 때 기와조각과
분청사기, 백자 파편, 금동불상 등이 출토되고 있어 적어도 고려 초~중기에 문을 연 것은 확
실하다.

1584년에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절을 중건했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36년 병자
호란 때 각성(覺性)이 의병 3천으로 청나라군을 물리친 공로로 그의 소망에 따라 절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허나 1724년(또는 1723년) 화재로 파괴되면서 오랫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이후 마애불만 속세에 드러낸 채, 간신히 터만 남아있다가 19세기에 비산리에 살던 만석꾼 경
주최씨가 '나를 좀 꺼내줘' 외치는 불상 꿈을 꾸고 땅을 파서 석불을 발견했다. 그것이 인연
이 되어 경주최씨는 아들을 얻었고, 그 소문이 퍼지면서 석불은 동네 사람들의 우상이 되었다.
허나 불상의 적당한 거처를 만들진 못하고 김치광처럼 앞가림을 하거나 토굴을 만들어 봉안했
으며, 경주최씨 일가에서 계속 불상을 관리했다.

1964년 인근 충주에 사는 어느 무당이 석불을 가져가려고 인부를 동원했으나 불상이 이상하게
도 너무 무거워서 하루 동안 겨우 지장대불 밑에 있는 비산소류지 밖에 가지 못했다. 그 소식
을 들은 동네 사람들은 죄다 몰려가 무당을 쫓아내고 불상을 되찾았는데, 이상하게도 불상이
가벼워져 금방 제자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해 예산 수덕사(修德寺)에 있던 비구니 명안은 음성에 왔다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이
곳 절터의 존재와 무당 사건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의 안내로 절터를 답사하게 되었는데, 석
불 관리인인 경주최씨 일가 최봉락은 그에게 석불을 모시며 이곳에 머물러 줄 것을 부탁했다.
그래서 일단 땅 주인이 절터에 지은 원두막을 대충 손질하여 머물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명안에게 머물 곳과 먹을 거리를 지원해주었고, 같이 절을 짓기로 의견을 모았
다. 하여 명안과 마을 사람들은 '미타사 창건 기성회'를 조직하여 가가호호 돈을 모으고, 일
일이 공사 자재를 짊어지며 집을 지어 1965년 4월, 8칸의 법당과 산신각이 지어졌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미타사의 시작으로 다른 절과 달리 온 마을 사람들이 나서 절을 지은 점
이 특이하다. 이는 마을 사람들이 석불을 수호신으로 무척 애지중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
당이 석불을 몰래 빼돌리려는 사건까지 터졌으니 더욱 그렇다. 하여 이곳에 온 명안에게 석불
봉안을 부탁하고 절까지 지어준 것이며, 석불과 운 덕분에 수덕사 비구니의 일원이었던 명안
은 자기 이름으로 절을 운영하게 되었다.

1965년 절 창건 당시 고려시대 기와조각과 분청사기, 백자 조각 등이 출토되었으며, 1973년에
는 고려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금동불이 나왔고, 1976년에는 대형 맷돌이 나오기도 하
여 옛 절의 위엄을 어느 정도 가늠하게 해준다.
1979년에는 법당인 극락전과 삼성각을 세웠고, 1980년에 선방과 3층석탑을 세웠으며, 납골당
사업에도 손을 뻗쳐 2001년에 추모공원과 지장대불, 구생범종루 등을 만드는 등, 나날이 사세
를 확장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절을 꾸리게 된 명안 이정화(李貞和)는 2006년에 입적했는데, 다비식
(茶毘式)을 하자 연꽃 봉오리 모양의 사리가 나왔다. 현재는 그의 제자인 희원이 주지로 있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약사전, 선방 등 6~7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절
입구에 지장대불과 관련 건물, 복지시설인 밝은언덕노인요양원 등이 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
는 지방문화재인 마애여래입상을 비롯해 지금의 절을 있게 해준 석조여래좌상, 대형 맷돌 등
이 전하고 있으며, 고색의 내음은 채 익지도 못했지만 첩첩한 산자락에 묻힌 산사(山寺)로 경
내가 정갈하고 깔끔하다.


▲  미타사 경내 (대광명세존진신 사리탑과 극락전)

돌담길을 지나면 경내의 중심인 극락전(極樂殿)이 나온다. 극락전 뜨락에는 특이하게도 6각형
을 띈 날씬한 모습의 3층석탑이 서 있는데, 탑의 이름이 무려 '대광명세존진신사리탑'으로 그
이름 그대로 부처의 사리를 머금고 있다.
탑에 봉안된 사리는 인도의 네루 수상이 영국 대영박물관에서 찾아온 것으로 미얀마 만다래힐
사원에 전달했다. 만다래힐 주지승은 이중 3과를 조계종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인 일타에게
주었고, 일타는 다시 미타사에 기증했다. 이에 미타사는 1992년 사리를 봉안할 탑을 만들어
봉안함으로서 부처의 사리를 보유한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탑의 구조는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2중의 기단을 얹혔으며, 4기의 석사자를 모서리에 두어 3
층 탑신을 지탱한다. 그리고 탑 꼭대기에는 보륜(寶輪) 등을 갖추며 탑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피부가 하얗고 탱탱하지만 100~200년에 시간이 지나면 20세기 후반
을 대표하는 석탑의 하나로 크게 다뤄질지도 모른다.


▲  미타사의 법당인 극락전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9년에 새로 지었다. 지붕이 건물의 무려
⅔를 차지할 정도로 너무 육중한 탓에 건물이 꽤 커 보이며, 내부에는 1965년에 조성된 석가
여래상과 아미타여래좌상,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절의 창건주인 명안(이정화)의 영정이 봉
안되어 있다.

극락전 자리에는 원래 오래된 돌배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무를 베려고
연장질을 하면 사람들이 계속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통에 나무에 귀신이 있는 것으로 여겨 아
무도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미타사 주지 명안은 우리가 나무를 처리할테니 연장을
빌려달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청했으나 빌려주는 사람까지 해를 입을까봐 아무도 호응하지 않
았다.
하여 명안은 나무에 제를 지내 절을 지키는 옹호신장이 되어줄 것을 청했고, 연장을 빌려 나
무를 건드리니 글쎄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한다. 20세기 한복판에 옛날에나 있을 법한 일이 있
었다니 정말 고개가 갸우뚱할 따름이다.

▲  극락전 아미타3존상

▲  미타사의 창건주 명안의 진영

▲  청기와를 눌러쓴 요사(寮舍)
종무소의 역할도 겸하고 있으며, 지하에는
공양간이 있다.

▲  눈이 잔잔히 입혀진 얼어붙은 샘터
겨울에게 털린 물지갑을 쥐어든 동자상의
뻘쭘함은 언제쯤이나 끌날까?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극락전 뒷쪽 좌측에는 삼성각이 높이 들어앉아 경내를 굽어본다.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
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79년 기존의 산신각을 부시고 새로 만들었으며, 칠성탱을 중심으로
산신탱과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  등장 인물로 빼곡한 칠성탱

▲  산신과 호랑이, 동자 등이 그려진 산신탱

  독성(나반존자)과 동자, 천태산이
그려진 독성탱

  극락전 옆구리에 자리한
약사전(藥師殿)


▲  약사전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

극락전 우측에 자리한 약사전은 동방정토(東方淨土)의 주인인 약사여래(藥師如來)의 보금자리
로 절터에서 나온 석불을 약사여래로 삼아 봉안하고 있다.

1724년(1723년) 절이 화재로 붕괴되자 그 충격으로 머리와 양손을 잃은 채, 지옥보다 더 어두
컴컴한 땅속에 갇혀 기나긴 외로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에 비산리에 사는 경주최
씨의 꿈속에 나타나 꺼내달라고 애원하면서 그의 의해 비로소 다시 속세로 나오게 된다.
당시 경주최씨는 마을의 부호(富戶)였으나 불상을 관리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그냥 노천
에 김치광처럼 덮개를 씌우거나 토굴을 파서 봉안을 했고, 그 후손인 최봉락이 비구니 명안에
게 이 절터와 석불을 보여주면서 석불을 모시고 살 것을 권해 지금의 미타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사라진 양손과 머리는 1964년에 새로 만들어 끼었으며, 왼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있는 점이 약
사여래로 여겨져 약사전을 짓고 그 건물의 주인으로 삼았다. 석불 높이는 90cm, 어깨폭 50cm
이며,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후기로 여겨져 절 밑에 있는 마애여래입상 다음으로 오래된
존재이다.

석불의 머리와 손은 새로 했기 때문에 세월의 고된 때로 자욱한 기존 부분과 확연히 색깔 차
이가 난다. 하얀 얼굴에는 미소가 환하게 번져 있고, 몸에 걸친 통견(通肩)은 마치 겨울에 조
성된 듯 매우 두꺼워 보인다. 그리고 아랫도리는 너무 작게 표현되어 윗도리와 아랫도리의 균
형이 지나치게 떨어진다.

이렇게 미타사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다시 속세로 나왔다. 솔직히 경내 밑에 자리한 마애불이
땡겨서 이곳에 온 것이지 미타사 자체에 반응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니다. 아무리 늙은 절터에
다시 세웠다 한들, 지금의 미타사는 분명 새 절이기 때문이다.
마애불의 인도로 찾아온 미타사. 거기에 겨울 제국이 폭풍처럼 선사한 눈이 천하를 순백으로
채색하면서 산사의 그윽한 설경까지 이리 챙기니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와 마음이
싹 정화되는 것 같다.

이렇게 하여 한겨울 음성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미타사 소재지 :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 (소이로61번길164 ☎ 043-872-0522)
* 미타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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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현충원 뒷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서달산 호국지장사

국립서울현충원 호국지장사



~~~ 국립서울현충원 호국지장사 현충일 나들이 ~~~
호국지장사 지장보살입상 (지장전)
▲  호국지장사 지장전 (지장보살입상)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이 되면 진하게 생각나는 그곳이 있다. 바로 호국(護國)의 신이 봉
안된 국립서울현충원(顯忠園)이다. 내가 애국심이 유별난 것도 아니요. 가족과 일가 중
에 그곳에 묻힌 이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석가탄신일에 그날 본능에 따라 절 투어를 즐
기듯 현충일에는 그날에 맞게 현충원을 찾아가 그곳에 깃든 늙은 문화유산과 숲길(동작
충효길)도 둘러볼 겸, 호국의 신을 기리며 그날의 분위기를 누리는 것 뿐이다.

국립서울현충원은 한강과 관악산 사이에 솟은 공작봉<孔雀峰, 서달산(西達山,197m)> 자
락에 넓게 터를 닦았다. 1954년에 조성되어 천하에 흩어진 6.25 전쟁 전사자를 모아 봉
안했는데, 처음에는 지역 이름을 따서 '동작동 국립묘지'라 했으나 2006년부터 '국립서
울현충원'으로 이름을 갈았다. (본글에서는 '국립현충원' 또는 '현충원'이라 표시함)

이곳은 특히 명당 자리로 명성이 자자한데, 마치 공작이 아름다운 날개를 쭉 펴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며,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형세도 지니고 있어 좀 어려운 말
로 장군대좌형(將軍對座形)이라 부른다. 즉 동쪽인 좌청룡(左靑龍)의 형세를 보면 웅장
한 산맥의 흐름이 마치 용이 머리를 들어 꿈틀거리는 듯, 한강을 호위하는 형상이고 서
쪽인 우백호(右白虎)는 힘이 센 호랑이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며, 전후좌우로
솟은 봉우리와 산허리는 천군만마가 줄지어 서 있는 형상과 같다는 것이다.
정면 앞산을 바라보면 주객이 마주 앉은 모양이고, 멀리 보이는 산은 물소뿔 같으며 한
강은 동에서 서로 흘러가니 명주 폭이 바람에 나부끼듯 하늘거려 공작봉을 감싸 흘러내
려간다. 마치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이라 하여 명당 중의 명당으로 통
한다.
이렇게 의미가 남다른 곳에 호국의 신을 봉안했으니 그들의 후손과 이 나라가 잘되어야
마땅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효과는 시원치가 못한 것 같다. (친일 패거리와 자격 미달자
들이 적지 않게 자리를 축내고 있음)

현충원 내에는 창빈안씨묘역과 부안군 이석수 묘역(扶安君 李碩壽墓域), 호국지장사 등
등의 문화유산이 깃들여져 있는데, 본글에서는 현충원 단골 명소이자 내 즐겨찾기 명소
의 하나인 호국지장사만 다루도록 하겠다. (부안군 묘역은 철책이 꽁꽁 둘러져 있어 들
어갈 수가 없음)



 

♠  국립현충원 뒷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책임지는 서달산 호국지장사(西達山 護國地藏寺)

▲  국립현충원 호국지장사 입구

국립현충원의 꼬리 부분인 공작봉(서달산) 북쪽 자락에는 호국지장사(지장사)가 포근히 둥지
를 틀고 있다.
처음에는 현충원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위해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절로 여기고 거의 관
심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5년 이후 겉보기와 달리 문화유산을 넉넉히 품은 오래된 절임
을 알게 되면서 구미가 확 올랐고 그 이후 현충원을 찾을 때마다 꼭 발걸음을 하고 있다.

호국지장사(이하 지장사)는 신라 끝 무렵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670년
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서로 시기가 틀려먹음)
부동산 전문가인 도선은 북쪽으로 가다가 한강 언덕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니 어디선가 서기
(瑞氣)가 흘러나와 자신을 유혹하고 있었다. 하여 그 서기를 추적하니 그 기운이 나오는 곳에
칡덩굴이 엉켜있고 약수가 나오고 있었다. 하여 자리를 살펴보니 아주 기가 막힌 명당인지라
토굴(土窟)을 짓고 갈궁사(葛弓寺)라 했다고 한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지장사에서 내세우는 설화일 뿐이다. 봉은사(奉恩寺)에서 작성한 '봉은
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1577년 선조가 창빈묘역 부근 산기슭에 절을 창건하고 원찰을 삼으니 갈궁사가 바로 이 절이
다'
내용이 있으며 고려 공민왕(恭愍王) 시절에 보인(寶印)이 중창<또는 창건>하고 화장암(華
藏庵)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덩달아 전해오고 있어 이르면 고려 후기, 늦어도 1577년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절의 내력이 구체적으로 윤곽을 보이는 것은 16세기 말이다. 명종(明宗) 시절 창빈안씨묘역이
양주에서 절 부근으로 이장되었는데 1577년 선조가 친할머니인 창빈의 묘역을 동작릉으로 높
이면서 화장암을 창빈묘역을 지키는 원찰(願刹)로 삼았다. 이때 화장사(華藏寺)로 이름이 갈
렸다고 하며, 그 인연으로 오랫동안 왕실의 지원을 받았다. 또한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
항복(李恒福)과 이덕형(李德馨)이 10대 시절 공부를 했던 곳으로도 전해진다.
1663년 절을 중수했으며, 영조 시절에 신경준(申景濬)이 작성한 '가람고(伽藍考)'에 '동작리
에 화장암이 있다'는 내용이 있어 그때까지도 꾸준히 법등을 지키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1862년 운담(雲潭)과 경해(鏡海)가 중건했으며, 1870년에 경파루(鏡波樓)를 지었고 1878년에
주지 서월(瑞月)과 경해가 대방(大房)을 수리했다. 1893년에는 경운(慶雲), 계향(戒香)이 불
상을 개금하고 구품탱, 지장탱, 현왕탱, 독성탱,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1896년에 칠성각을 새
로 지었다. 그리고 1906년에는 풍곡(豊谷)이 약사전의 불상을 개금 단청하고 후불탱과 신중탱
, 감로탱, 신중탱, 칠성탱 등을 봉안했다.
1911년 왜정(倭政)의 사찰령(寺刹令)으로 봉은사의 말사(末寺)가 되었으며, 1920년에 대방을
수리했고, 1936년 주지 유영송(劉永松)이 능인전(能仁殿)을 중수했다.

1954년 이후 절 밑에 국립묘지가 들어서면서 자연히 호국신을 책임지는 사찰이 되었다. 하여
지장도량(地藏道場)을 칭하게 되었는데 1983년 주지 혜성(慧惺)은 호국신들이 지장보살의 원
력으로 모두 극락왕생이 되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호국지장사<줄여서 '지장사'>로 이름을 갈았
다. 그야말로 현충원 사찰에 아주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이름이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능인보전과 삼성각, 극락전, 지장전, 심우당, 청심당 등 10동 가
까운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과 삼성각 등은 동남향(東南向)을 취하고 있다. 경내 남쪽에는 약
수가 나와 주민들이 많이 물을 뜨러 오며 지장보살입상을 중심으로 3,000좌의 조그만 지장보
살을 봉안해 절 이름 값을 톡톡히 한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철불좌상과 괘불도(掛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3호), 극락9품도, 독
성도, 약사불도 등 무려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지니고 있으며, 한강에서 건져 올렸다는 철불
좌상과 목조여래좌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 후기 탱화들이다. 그 외에 멀리 경주에서 왔다
는 신라 후기 3층석탑이 있는데 그것이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다.

서울 도심과 무척 가깝지만 삼삼한 숲에 감싸여 있어 산사(山寺)의 분위기를 여실히 간직하고
있으며 고즈넉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현충원에 발을 들였다면 꼭 둘러보길 권한다. 또한 짙은
숲에 가려 보이는 범위는 적으나 현충원 일대와 한강, 용산구 지역이 시야에 들어와 경치도
그런데로 괜찮다. 하여 이승만 전대통령도 꽤나 군침을 흘렸던 곳이기도 한데, 그가 국립묘지
를 둘러보고 잠시 절에 들려 사람들에게
'만일 이곳에 절이 없었다면 내가 묻히고 싶은 땅이오~' 했다고 전한다. 그만큼 자리가 좋은
곳이다.

이곳은 절의 마르지 않는 샘이자 든든한 후광(後光)인 현충원이 있는 한 배를 굶거나 문을 닫
을 일은 절대로 없다. 현충원의 일원으로 그와 운명을 함께 하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만
약 현충원이 없었다면 인근 상도동의 사자암(獅子庵, ☞ 관련글 보기)처럼 숲과 주거지의 경
계가 되거나 주거지에 거의 둘러싸여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석가탄신일과 현충일에는 중생들에게 공양밥이나 국수를 제공하는데, 맛이 제법 괜찮다.
(현충일에는 보통 13시 이전에 공양을 제공함)

* 호국지장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305 (현충로 210 ☎ 02-814-5257)
* 호국지장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지장사로 인도하는 오르막길에서 바라본 국립현충원
현충원은 물론 그 너머로 용산구와 남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지장사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20-5호

지장사 입구에서 절로 인도하는 각박한 오르막길을 오르면 커다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시원
한 그늘을 베풀며 마중을 한다.
그는 350년 정도<1985년 10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315년> 묵은 나무로 높이
15m, 둘레 4.5m에 이른다. 오랜 세월 지장사의 이정표 및 정자나무의 역할을 해왔던 그는 아
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양분과 지장사의 보살핌으로 무럭무럭 자라나 현충원에서
가장 장대하고 늙은 자연물이 되었다.
 
지장사에는 일주문(一柱門)이나 천왕문(天王門) 같은 문이 없다. 대신 삼삼한 숲이 일주문의
역할을 대신한다. 숲에서 불어오는 산바람과 절에서 낭랑하게 흘러나오는 염불소리는 천근만
근 무겁다는 번뇌를 참교육시키며 마음 바깥으로 쫓아낸다. 하지만 멀리 가지 않고 절 입구에
서 우두커니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나 또한 그 번뇌를 찾으니 해탈이니 성불이니 하는 것은 그
저 먼 세상의 이야기인 모양이다.


▲  지장사 경내로 인도하는 숲길

▲  석등을 한복판에 띄운 네모난 연못

▲  조촐한 모습의 능인보전(能仁寶殿)

경내로 들어서면 정면에 지장보살입상을 중심으로 한 지장전이, 오른쪽은 대웅전 구역, 왼쪽
에는 단출한 모습을 지닌 능인보전이 있다.
능인보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겉으로 보면 그저 작은 건물로 여기고 지
나칠 수 있다. 허나 그 안에 철불좌상과 신중탱 등 오래된 문화유산이 자리를 채우고 있으니
꼭 둘러보기 바란다.


▲  능인보전에 봉안된 철불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5호
능인보전 약사불도(藥師佛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호


능인보전 불단에 홀로 자리한 철불좌상은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경내에서 3층석탑 다음으
로 늙은 존재이다. 철불(鐵佛)이란 이름 그대로 철로 만든 불상으로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잠깐 등장을 하는데, 그가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다면 도선국사가 세운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을 흔쾌히 입증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아쉽게도 그는 다른 곳에서 온 불상으로 이곳에 들어온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다음과 같
은 전설이 아련하게 전해온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인 어느 옛날, 한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의 꿈에 이 불상
이 나타나 제발 빛 좀 보게 해달라며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어부는 혹시나 싶어 한강으
로 달려가 그물을 치니 녹슨 채로 버려진 그 불상이 걸려들었다. 하여 그를 가져와 깨끗하게
목욕을 시키고 집에 봉안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이상하게도 고기도 잡히지 않고 나쁜 일만 연이어 생기는 것이다. 보통 이
런 전설에선 고기가 잘 잡혀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기 마련인데, 불상이 좀 심성
이 고약한지 그게 아닌 것이다. 그래서 어부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화장사(지장사)에 넘겼다고
하며 그 이후부터 비로소 잘 먹고 잘살았다고 한다.
이 전설을 통해 절이 파괴되거나 도난, 배 침몰 등으로 강에 버려진 불상을 수습해왔음을 알
수 있는데 그의 고향은 현재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고향을 잃은 이 철불은 높이 98cm로 얼굴은 동그랗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눈이 유난히 길고
가는데 보는 위치에 따라 날카롭게 보이기도 하며 머리는 꼽슬인 나발(螺髮)이다. 눈썹은 무
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졌으며, 굳게 다문 입에는 엷게나마 미소가 드리워져 환하게 웃음짓는
표정 같다.
어깨는 꽤 단련을 한 듯 당당하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법
의(法衣)는 주름선이 선명하다. 또한 왼손에는 약합이 들려져 있어 그가 약사여래불임을 알려
주고 있으며, 고려 초에 조성된 천하에 몇 없는 철조약사여래상으로 그 당시 약사여래 신앙에
중요한 자료로 판단되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철불 뒷쪽에 걸린 약사불도는 1906년에 봉감(奉鑑), 정운(禎雲), 긍법(肯法), 경조(敬照) 등
이 그린 것이다. 간략한 아미타존상의 형태와 음영법의 구사, 적색과 녹색의 탁한 색감이나
어두운 군청색을 많이 쓴 점, 불화의 횡적인 구도와 그림에 나타난 상을 간략하게 나타낸 점
등,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철불 좌우에는 조그만 금동불(金銅佛)이 각자의 작은 공간을 지니며 빼곡히 들어앉아 철불을
받쳐주며 건물 내부를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 이들은 중생들의 돈과 소망을 담아 만든 원불(
願佛)로 약 400기 정도 된다.


▲  능인보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호

능인보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도는 약사불도와 같은 시기(1906년)에 같은 화승이 그렸다. 그
림은 수평 3단의 정연한 구도를 보이며, 범천(梵天), 제석(帝釋), 위태천(韋太天) 등 신중탱
의 대표적인 존재들이 모두 묘사되어 있다. 균형이 잡히지 않은 인체나 경직된 자세, 무겁고
탁한 색채 등은 전체적으로 불화의 품격이 떨어지던 20세기 초에 많이 나타난다.


▲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7호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 등 14명의 화승이 그린 것으로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권속들을 계
단식으로 배치했고 화폭 상단으로 갈수록 존상을 작게 묘사하여 원근법의 효과를 살렸다. 원
만한 인물의 형태는 18세기 후반 양식이지만 오색 광선으로 표현된 광배와 도식(圖式)적인 천
의, 단조로운 구름의 묘사는 19세기 불화 양식을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많이 변색되긴 했으나
일부 적색과 녹색은 비교적 밝게 채색되었다. (지장시왕도의 봉안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범종각(梵鍾閣)
범종각은 1975년에 지어진 것으로 저 안에 같
은 해에 조성된 범종이 담겨져 있다. 국립현충
원과 절의 이름에 걸맞게 그 종을 호국범종이
라 부르며 애지중지한다.

     ◀  고색의 무게가 짙어보이는 돌판
대웅전 옆구리에는 고색이 자욱한 네모난 돌판
이 놓여져 호기심을 자극시킨다.
그의 피부에는 한문 여러 자가 새겨져 있는데,
눈이 침침해 제대로 확인은 못했다. 건물 주춧
돌이나 상석(床石)으로 여겨지나 정체가 아리
송하며, 돌판에 화분이 여럿 놓여져 그의 허전
한 머리를 달래주고 있다.


▲  멀리 경주(慶州)에서 왔다는 3층석탑

범종각 옆에 자리한 이 석탑은 멀리 경주 남산(南山)에서 가져온 신라 후기 석탑이라고 한다.
이승만 시절에 국립묘지를 조성하면서 강제로 소환해 경상도를 상징하는 탑으로 삼았다고 하
는데,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버려진 것을 지장사에서 수습해 보수했다.
지장사에서 가장 늙은 존재라고는 하나 겉모습은 완전 20세기 석탑 같으며, 지붕돌과 석재 일
부에만 오래된 티가 보일 뿐, 머리장식과 탑신(塔身) 상당수는 지장사에서 새로 손질을 하여
늙은 돌과 새 돌이 서로 어색한 조화를 보이고 있다.

그는 현충일 기념으로 소원지를 가득 머금고 있는데, 그 앞 탁자에는 소원지와 볼펜, 조그만
불전함이 깨알처럼 놓여져 있다. 탑과 주변 줄에 달아놓은 소원지는 나중에 불에 태워버리는
데, 그래야만 소원지에 쓰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과연 얼마나 이루어졌을까??)


▲  지장전(지장보살입상)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산신과 독성, 칠성 등 삼성(三聖)의 공간으로 1칸짜리 팔작지붕 집이다.

▲  칠성도(七星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호)와 석가여래상

삼성각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는 석가여래상은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동그랗게 표현된 풍만한
가슴과 가슴선이 제법 눈길을 부여잡는다. 그의 두툼한 얼굴에는 미소가 살짝 깃들여져 있고
물레방아처럼 생긴 법륜(法輪)을 왼손에 소중히 쥐고 있는데, 법륜의 8개의 바퀴살은 팔정도
(八正道)를 나타내며, 동그란 모양은 부처의 가르침인 담마(蕁麻)가 완전하다는 것을 뜻한다
고 한다.

그런 석가여래상 뒤에 자리한 칠성도는 1906년 보암긍법(普庵肯法)이 그린 것이다. 화면은 화
폭의 좌우대칭으로 권속들을 배치하고 상하 2단으로 나눈 수평 구조로 경직된 형태와 선, 탁
한 색채 등은 20세기 초 불화 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독성도(獨聖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호)와 독성상(獨聖像)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은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한이다. 승려 비슷한 복장으
로 앉아있는 모습이 안방 마님처럼 편안해 보이는데 머리털이 없어 허전하기만 한 그의 머리
에는 혹 같은 것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독성상 뒤쪽에 깃든 독성도는 소나무 밑에서 바위에 기댄 채 동자(童子)의 공양을 받고 있는
독성 할배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전형적인 19세기 독성도로 폭포와 나무, 꽃 등의 표현이나
늘어진 옷자락의 묘사는 다소 서투르나 독특한 자세와 온화한 얼굴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그
리고 그림의 깊이를 살려준 투명한 광배의 표현 등이 눈길을 끈다.


▲  산신도(山神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호)와 산신상

길쭉한 흰 수염을 지닌 산신 할배는 왼손에 붉은 지팡이를 들고 오른손으로 그의 애완동물인
호랑이를 쓱쓱 쓰다듬고 있다. 호랑이가 아무리 무섭다한들 산신 앞에서는 그저 꼬랑지를 살
랑거리는 고양이에 불과하며, 산신 옆에 있는 동자는 무척 앳돼 보여 마치 할배와 손자처럼
다정해 보인다.

산신상 뒤에 걸린 산신도는 1893년에 금호약효(錦湖若效)가 그렸다. 민화(民畵, 속화)풍의 나
무와 폭포, 호랑이의 모습은 19세기 말 산신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원색적이고 장식적
인 당시의 산신도와는 달리 은은한 중간 색조를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위엄과 격이
담긴 산신의 얼굴 묘사도 제법 돋보인다고 한다.



 

♠  호국지장사 마무리 (지장전, 대웅전 등)

▲  밑에서 바라본 지장전(地藏殿)

지장사의 백미(白眉)이자 최대 명물은 경내 뒤쪽에 자리한 지장보살입상과 3,000좌에 달하는
조그만 지장보살상의 장대한 물결일 것이다.
절에서는 이곳을 지장전으로 삼아 각별히 챙기고 있는데, 비록 건물은 아니나 석불이나 마애
불을 두고 각(閣)이나 전(殿)을 칭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많다. 능인보전과 삼성각, 대웅전 등
에 깃든 늙은 문화유산도 중요하나 지장사의 성격을 분명히 밝혀주는 존재가 바로 이곳 지장
전이다.

지장전은 1983년 주지 혜성이 현충원 호국신들이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극락왕생이 되도록 기
원하고자 조성한 것으로 지장사의 최대 프로젝트였다. 육환장(六環杖)이란 긴 지팡이를 들며
온화한 표정으로 현충원을 굽어보는 지장보살의 뒷통수에는 동그란 두광(頭光)이 그를 빛내주
는데 마치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햇님 같다. 그 뒤에는 그를 멀리서 둘러싸듯, 거대한 석벽을
병풍처럼 만들고 조그만 지장보살을 가득 입혀놓아 장관을 이룬다.


▲  극락전에서 바라본 지장전의 위엄

▲  지장보살상 좌우에 있던 5층석탑들

연꽃이 새겨진 기단(基壇)을 지닌 이들은 고색의 때가 다소 묻어나 보이는데, 그들에 대한 정
보가 딱히 없다. 탑의 생김새로 봤을 때는 왜정(倭政) 때나 20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
겨지며 좌측 탑의 1층 탑신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이들 석탑은 능인보전 앞쪽으로
옮겨짐)

   ◀  지장전 우측에 자리한 극락전(極樂殿)
예전에는 1칸짜리 팔작지붕 집이었으나 근래에
맞배지붕 집으로 새로 갈았다. 아미타불과 관
세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후불탱 등이 봉안
되어 있으며, 대웅전 목조여래좌상 뱃속에서
나온 저고리의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다.


▲  극락전에 있는 불복장(佛腹臟) 저고리(북제품)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38호


이 겹저고리는 2006년 5월 대웅전 목조여래좌상(아미타여래좌상)을 개금하던 중에 그의 뱃속
에서 나왔다.
1630~1650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400년 가까이 먹은 늙은 옷임에도 색깔은 잘 남아
있다. 하여 옷의 원형 훼손을 막고자 유물 보수를 생략하고 나온 모습 그대로 오동나무 상자
에 보관을 했으며, 조계사(曹溪寺) 불교중앙박물관에 관리를 맡겨 지금은 그곳에 있다. 그리
고 단국대 석주선박물관에서 원형에 가깝게 복제품을 의뢰하여 그것을 이곳 극락전에 두어 그
들의 빈 자리를 조금이나마 채워준다.


▲  극락전에 봉안된 아미타3존상과 후불탱

▲  큼직한 맞배지붕을 지닌 대웅전(大雄殿)과 앞뜨락
대웅전 뜨락 주변에는 종무소(宗務所)와 심우당(尋牛堂)이 있고, 대웅전
뒤쪽에는 청심당과 공양간, 요사가 있다.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8호

지장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맞배지붕 집으로 보통은 정면이 더 크지만 이 건물은 반대로
측면이 더 넓다. 2016년에 건물과 지붕, 내부를 손질하여 조금 젊어졌으며, 근래에 또 손질을
했는데, 제법 너른 대웅전에는 목조여래3존상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에 그려진 탱화들이 여럿
걸려있다. <호국지장사는 지방문화재 탱화와 탑의 위치를 자주 옮김>

법당의 필수 그림인 신중도는 인도의 토속신(土俗神)으로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된 호법신(護
法神)의 무리를 조금의 여백도 허용치 않고 꾸역꾸역 집어넣은 탱화이다.
1893년 금호약효, 정련(定鍊) 등이 그린 것으로 위태천과 범천, 제석을 중심으로 비교적 많은
이들을 담았는데, 좌우 대칭구도와 위태천과 제석 등이 이루는 역삼각형 구도가 다소 어수선
해 보인다. 특히 천녀(天女)들이 20여 종에 달하는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은 본그림의 백미라
할만하다. 인체를 불균형하게 표현한 점과 과장된 안면의 묘사 등이 19세기 불화의 특징을 보
이는 작품으로 비록 색이 좀 퇴색되긴 했으나 조화로운 색채 구성으로 그림의 품격을 높였다.


▲  대웅전 목조여래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26호)과 그 뒷쪽에
자리한 아미타불도(阿彌陀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4호


대웅전 목조여래좌상(가운데 금동불)은 좌우로 승려 머리의 지장보살상과 화려한 보관(寶冠)
을 눌러쓴 관세음보살상을 거느리고 있다. 2006년 5월에 개금을 하다가 그의 뱃속에서 후령통
과 저고리 등의 복장유물이 나왔는데, 조성 시기를 알려주는 조성발원문이나 관련 기록은 아
쉽게도 없었다.
다만 후령통은 1639년에 조성된 예산 수덕사(修德寺)의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뱃속에서 나온
은제(銀製) 후령통과 많이 비슷하여 1639년 전후 것으로 여겨지며, 불상 또한 그 시기에 조성
된 것으로 파악된다.
(지장사 목조여래좌상은 '지장사 목조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
재로 지정되었으며, 저고리는 '호국지장사 불복장 저고리'란 이름으로 2021년 11월에 서울 지
방민속문화재 38호
로 지정됨, 복장유물과 저고리는 모두 불교중앙박물관에 가 있음)

목조여래좌상 뒷쪽에 자리한 아미타불도는 1870년에 원명긍우(圓明肯祐), 경은계윤(慶隱戒允)
등 4명의 화승이 그린 것으로 중앙에 아미타불을 두고, 양 옆구리에 그의 식구를 배치했는데,
형태가 풍만하고 정교하며 무늬가 화려하다. 5가지 색깔의 광배(光背)가 눈길을 끌며 옷의 묘
사가 도식화되어 있다. 적색과 녹색 색상은 다소 탁하며 코발트 빛깔의 짙은 청색은 19세기
말 불화 양식을 잘 보여준다.
그는 대웅전 식구이나 한때 능인보전에 가 있기도 했으며, 다시 대웅전으로 돌아왔다. 즉 목
조여래좌상이 탱화갈이를 한 것이다.


▲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6호

감로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 등 3명의 화승이 그렸다. 그림은 상부에 아미타여래 일
행이 지옥에서 온 중생을 맞이하러 가는 장면을 그렸고 중앙에는 성반의식(聖盤儀式, 우란분
경에서 7월 15일 승려 및 십방제불에게 백미를 올리고 발원하는 의식)
을 하는 모습을, 그 주
변에는 아귀(餓鬼)의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하단부에는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들로 가득한 지옥과 현실의 모습을 그렸는데, 7여래
의 장엄하면서도 원만한 얼굴과 옆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 성반의식을 치르는 승려의 모습과
산수의 표현 등은 19세기 초의 양식을 잘 보여주며, 나뭇잎 선의 처리와 산수의 음영처리 등
에서 19세기 말 불화양식이 잘 드러나고 있다.


▲  팔상도(八相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0호

팔상도는 부처의 일대기를 8개의 장면으로 그린 것으로 1893년 한곡돈법(漢谷頓法)이 그렸다.
이곳 팔상도는 부처의 생애 중 가장 극적인 장면을 묘사했으며 형식적인 형태와 탁한 색조는
19세기 말 불화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5호

극락9품도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16관 중의 제14, 15, 16관에 해당되는 9품의 극락왕생
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은 1893년 금호약효 등 3명이 그린 것으로 대구 동화사(桐華寺)의 부속암자인 염불암(
念佛庵)의 극락구품도와 같은 원본을 보고 그린 것이다. 등장 인물의 얼굴 이목구비를 섬약하
게 표현하여 조선 후기 극락구품도의 독특한 유형을 보여주며, 음영의 표현이나 적색과 녹색
의 대비, 화려한 꽃무늬 등은 19세기 불화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  대웅전 앞에 차려진 아기부처상 세트

대웅전 앞에는 거하게 아기부처상 세트를 깔아놓았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아기부처상과 석
조는 연못 부근 옛 샘터에 있던 것으로 대웅전을 손질하면서 그 앞으로 가져왔는데, 임시로
만든 것이 아닌 돌로 단단하게 다진 것들이다. 하여 1년에 대부분을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지
내야 되는 다른 아기부처상과 달리 365일 햇살을 보고 있으며, 매일 관불의식이 가능하다.


▲  공양간에 깃든 현왕도(現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9호

점심 공양을 먹으러 대웅전 뒷쪽으로 가다가 공양간으로 쓰이는 하얀 건물 안에서 늙은 그림
하나가 뜨겁게 시선을 보낸다. 마침 현왕도를 만나지 못했고 이전 지장사 나들이 때 하얀 건
물에서 본 기억이 있어서 살펴보니 현왕도 그가 맞았다.

현왕도는 1893년에 금호약효 등 3명이 그렸다. 현왕(現王)이란 저승의 대표 대왕인 염라대왕(
閻羅大王)을 일컫는 것으로 죽어서 3일만에 그에게 심판을 받는 장면을 담았다. 둥근 구조 안
에 그의 심판 장면을 그렸는데, 현왕의 우람한 체구와 세밀한 얼굴 묘사에서 비교적 예스러운
양식이 나타난다. 얼굴과 옷주름을 획일적으로 묘사했고 꽃무늬와 구름을 단색으로 처리해 19
세기 말 탱화의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 탱화는 보통 대웅전 등의 법당에 걸기 마련인데, 지장사는 특이하게도 하얀 요사(寮舍)에
두었다. 그 요사가 공양간의 역할까지 하게 되었고, 따로 거처를 옮기지 않아 공양간 지킴이
현왕탱이 되버린 것이다. (탱화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아마도 공양간이 대중적인 공간이
라 밥을 먹는 중생들로 하여금 선하게 살라는 경각심을 주고자 공양간에 둔 것이 아닐까 싶다.
공양밥을 먹으면서 현왕탱 염라대왕과 눈이 딱 마주치면 그 기분이 어떠할까? 나는 다행히 바
깥에서 공양을 먹어서 그런 기분은 느끼지 못했으나 조금 뜨끔하면서도 죽어서 지옥으로 떨어
지지 않을까 싶은 불안감이 엄습할지도 모르겠다.


▲  청심당(淸心堂)
대웅전 뒷쪽이자 경내 북쪽에 자리한 청심당은 2016년에 지어진 한옥으로
요사와 선방(禪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청심당에 걸린 화장사 현판의 위엄

▲  지장사에서 섭취한 국수의 위엄

호국지장사는 현충일에 중생들에게 국수 등의 공양을 제공한다. 대웅전 뒤쪽에 있는 공양간(
하얀 건물)에서 13~14시까지 제공하고 있는데, 건물 바깥에서 음식을 제공하며, 주변에 마련
된 탁자에 앉아 즐겁게 공양에 임하면 된다.
이번 공양은 국수가 나왔는데, 국수 외에도 김치와 고사리 등의 나물, 호박전 등의 전, 수박
까지 나와 국수 그릇을 아주 풍성하게 해주었다. 보통 절의 국수 공양은 국수와 김치가 전부
이나 이곳은 현충일 특집인지 그 이상을 제공하는 것이다. 하여 국수가 완전 비빔국수, 비빔
전골이 되버렸다. 국수 국물은 따뜻하며, 김치와 나물, 전까지 모두 담다보니 저 1그릇으로
충분히 배가 차고도 남는다. (수박은 국수를 다 먹고 챙겨 먹었음)


▲  지장사 약수터와 그곳을 지키는 약왕보살(藥王菩薩)

절 남쪽 숲길에는 지장사의 오랜 명물인 약수터가 있다. 그는 원래 경내 연못 서쪽에 있었으
나 그 자리에 아기부처상 등 다른 것을 깔면서 이곳으로 이전된 것이다.
약합을 쥐어든 약왕보살상 앞에 수도꼭지로 된 샘터가 있는데 졸고 있는 꼭지를 틀어서 물을
받아 마시면 된다.

이곳은 물 수요가 많아 아침과 휴일에는 상도동(上道洞)과 사당동(舍堂洞) 사람들이 많이 와
서 물을 담아가며, 가뭄에도 물이 별로 줄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서울 시내에 많은 약수들이
개발의 칼질과 환경오염, 가뭄으로 죽어가고 있으나 이곳 약수터는 아직 정정한 모습을 보이
고 있으니 아마도 호국신과 대자연의 가호가 깃든 모양이다. (지독한 가뭄과 약수터 주변 손
질, 수질 악화 등으로 휴업을 하는 경우도 있음)

이른 무더위에 지친 목구멍을 달래고자 간만에 이곳 약수를 흔쾌히 들이키니 맛은 예전과 비
슷한 것 같다. 2~3모금 정도를 마시며 목구멍을 촉촉하게 적시고 현충원의 남쪽 후문인 상도
출입문(상도통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하여 현충일에 찾아간 국립서울현충원 호국지장사 나들이는 내년을 기약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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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숲길을 지닌 고즈넉한 산사, 정릉동 북한산 경국사 (경국사의 석가탄신일 풍경, 경국사 공양밥)

정릉동 경국사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 정릉동 경국사 '
경국사 숲길
▲  경국사 숲길



 


올해도 변함없이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4월 초파일)이 찾아왔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서울 장안에서 100년 이상 묵은 오래된 절을 대상으로 그날의 메뉴를 물색했
으나 서울에서 미답(未踏)으로 남은 늙은 절은 이제 씨가 마른 상태이다.
그래서 서울 밖으로 나갈까도 했으나 멀리 나가는 것도 귀찮고 해서 가본 절에서 적당한
곳을 골라 재활용하기로 했다. 하여 경국사를 시작으로 여러 오래된 절을 돌기로 했는데,
경국사는 이상하게도 이번을 포함하여 석가탄신일에만 무려 5번이나 인연을 지은 석가탄
신일 인연 사찰로 거의 4년 만에 방문이다.

도봉동(道峰洞) 집에서 정릉동(貞陵洞) 경국사까지는 버스로 40~50분 정도 걸린다. 12시
에 집을 나서 경국사 정류장에 두 발을 내리니 그날 같이 움직이기로 한 친한 후배가 대
기를 하고 있었다. 원래 혼자 석가탄신일 절 투어를 하려고 했으나 그가 그날 쉰다고 새
벽에 연통을 보내서 같이 가게 되었다.

경국사는 석가탄신일 대목이라 정류장부터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정릉천에 걸린 극
락교를 건너니 일주문이 중생 맞이에 여념들이 없고, 절로 인도하는 길 좌우에는 오색영
롱한 연등이 길게 이어져 초파일의 흥겨운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  경국사 옆을 흐르는 정릉천(貞陵川)
정릉천은 북한산(삼각산) 정릉계곡에서 발원한 하천으로 경국사 옆구리를
살짝 지나간다. 그 하천에 무게가 백두산만한 나의 번뇌를 내던지고
경국사 경내로 들어선다.



 

♠  경국사(慶國寺) 입문

▲  경국사 일주문(一柱門)

극락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향하면 바로 눈앞에 일주문이 크게 아른거린다. 문이 바로 앞에서
나를 뚫어지라 굽어보니 안그래도 큰 문이 더욱 장대하게 보여 제대로 주눅을 들게 한다. 돌
로 만든 굵직한 기둥에는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이 새겨져 있어 문의 위엄을 더욱
돋구고 있으며, 지붕 밑에는 '삼각산 경국사'라 쓰인 현판을 내걸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  경국사의 싱그러운 보물, 경국사 숲길

일주문을 들어서면 숲내음이 진동하는 푸른 숲길이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경국사의
첫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인도하고 속세(俗世)에서 오염된 망막에 한줄기 감동을 선사하는 이
숲길은 300년 묵은 소나무까지 100m 정도 곧게 펼쳐져 있는데, 거기서 서쪽으로 꺾여 경내로
이어진다. 숲길의 길바닥은 다행히 콘크리트로 닦지 않고 박석(薄石)을 깔아 숲길의 운치를
전혀 해치지 않았다. (흙길이었으면 더욱 좋았겠지;;)

하늘로 늘씬하게 솟아 하늘과 햇님을 가리고 선 나무들이 저마다의 빼어난 자태를 뽐내며 앞
다투어 갖은 청정한 기운을 베푸니 머리와 마음이 싹 정화되는 것 같다. 경국사가 이렇게 경
내를 앞에 두고 숲길을 내민 것은 극락교와 일주문에서도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번뇌와 속세
의 기운을 자연의 힘에 의지해 싹 털고 경내에 임하라는 뜻이다.


▲  정처 없는 내 마음을 제대로 뒤흔든 경국사 숲길
집으로 몰래 가져와 나 혼자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숲길이다. 허나 조물주가 아닌
이상 그건 불가능하니 사진으로 대신 품으련다. 이 숲길은 봄도 아름답지만
처절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늦가을도 단연 백미(白眉)이다.

▲  300년 묵은 소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11호

숲길이 서쪽으로 100도 구부러지는 곳에 숲길의 최고 어른인 소나무가 있다. 나이가 무려 300
년이 넘었다는 늙은 나무로 몸매도 매우 준수해 키가 무려 20m를 넘는다. 
하늘을 떠받들며 숲길을 다스리는 이 나무는 매우 지극한 나이임에도 그 흔한 '서울시 보호수
' 등급이 아닌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등급에 머물러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가지고 있다.
인간들이 제멋대로 정한 등급이 뭐 그리 중요하냐 싶겠지만 서울에서는 100살이 넘는 나무 중
에 지방기념물 이상의 지위를 얻지 못한 나무들은 상당수 '보호수'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그러니 300살이면 99% 보호수로 지정되고도 남을 연세인데 그에 상응하는 등급을 줘야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소나무 그늘에는 차량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있다.

소나무 북쪽에는 부도탑(승탑) 2기와 비석(碑石) 3기로 이루어진 너른 공간이 있다. 다들 고
색의 때가 얇은 존재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그냥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이들 부도탑은 이
땅의 현대 불교 발전에 크게 공헌한 승려 2명의 사리탑으로 경국사에서도 매우 비중이 큰 인
물들이다. 그러니 한번 더듬고 가길 권한다.
비석 가운데 가장 왼쪽에 있는 큰 존재가 경국사의 내력을 머금은 사적비(事蹟碑)로 1995년에
지관이 세웠다.


▲  자운대율사 계주원명사리탑(戒珠圓明舍利塔)

네모난 기단 위에 마치 범종(梵鍾)이 그대로 돌로 굳은 듯한 모습의 석종형 승탑은 자운대율
사(慈雲大律師, 1911~1992)의 사리탑으로 탑 이름은 계주원명사리탑이다.

자운대율사는 왜정(倭政) 이후 계율을 무시하고 대놓고 혼인하여 가정을 꾸리고 심지어 고기
까지 처묵처묵하는 등, 불교가 타락의 극치를 보이자 이에 발끈하여 불교 중흥과 율풍(律風)
진작에 팔을 걷어부쳤다.
그는 1940년부터 서울 도심에 있는 대각사(大覺寺)에 머물며 율장과 관련 자료를 찾고자 매일
도시락을 싸들며 국립중앙도서관을 들락거렸다. 그래서 만속장경(卍續藏經)에 수록된 오부율
장(五部律藏)과 그 주소(註疏)를 모두 필사해 연구했으며, 1948년에 문경 봉암사(鳳巖寺)에서
처음으로 보살계(菩薩戒) 수계법회를 열었다.

1949년에는 천화율원 감로계단(千華律院 甘露戒壇)을 설치해 대각사에서 범망경(梵網經), 사
미율의(沙彌律儀), 사미니율의(沙彌尼律儀), 비구계본(比丘戒本) 등의 간행을 준비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모두 분실하고 만다. 허나 이에 굴하지 않고 부산에서 다시 율문(律文)을 준비
하여 한문본(漢文本) 25,000권을 포함해 총 48,000권을 간행하여 불교의 법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고 1981년부터 단일계단 전계대화상에 추대되어 1991년까지 많은
승려에게 계를 주었으며, 1992년 2월 7일, 해인사(海印寺)의 부속암자인 홍제암(弘濟庵)에서
바쁘게 살아온 삶을 마무리 지었다.
자운이 세상을 뜨자 그와 인연이 있던 경국사에서 그의 승탑을 만들었는데, 2년 동안 공을 들
여 2005년에 완성을 보았다. 승탑은 그의 명성과 업적에 걸맞도록 특별하게 계단형(戒壇形)으
로 만들어 두고두고 그의 업적을 기린다.

자운대율사 사리탑 뒤쪽에 자리한 고운 맵시의 승탑은 보경보현대종사(寶鏡普賢大宗師)의 사
리탑으로 충주 정토사지(淨土寺址)에 있던 고려시대 승탑인 홍법국사실상탑(弘法國師實相塔)
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 그리고 승탑 바로 옆에 자리한 보경의 행적비는 1991년 지관이 찬
(撰)을 하고 세운 것으로 그의 일대기가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보경은 1916년 이곳 주지가 되어 60여 년 동안 경국사를 꾸린 인물로 교학(敎學)과 선지(禪智
)를 두루 익혔고, 계율에도 무지 철저해 승가의 귀감이 되었다. 특히 탱화를 잘 그려 화승(畵
僧)으로도 널리 활동을 했는데, 경국사의 탱화 상당수는 그의 손길에서 탄생했다.


▲  펼쳐진 책 모양의 불교대사림(佛敎大辭林) 편찬발원문

불교대사림(불교대사전)은 지관이 오랫동안 추진한 편찬 사업으로 10여 권을 편찬했다. 이 발
원문은 지관이 정성을 들여 작성한 것인데 그 내용에서 그의 지성이 제대로 우러나온다.


▲  경국사 샘터 위에 자리한 조그만 석불들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조그만 저들도 과일과 떡, 돈으로 초파일 특수를 제대로
누리고 있다. 나보다 저들이 훨씬 돈이 많으니 내가 저 자리에서
석불 흉내를 내며 대신 하고 싶을 정도이다.

▲  공양삼매경에 빠진 경내 앞 (관음성전 공양간 앞)

주차장에서 서쪽으로 휘어진 오르막길을 오르면 숲속에 숨겨진 경국사가 모습을 비춘다. 경내
앞에는 너른 공터가 펼쳐져 있고, 공양 수요를 위해 돗자리가 넉넉히 깔려 있는데, 공양 수요
가 워낙 많아 돗자리는 물론 공터 주변에 앉을 만한 자리는 싹 사람들로 넘쳐난다. 공양은 천
막 뒷쪽 관음성전 밑에 있는 공양간에서 제공하고 있는데, 공양 줄이 길게 이어져 있다. 금강
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크고 아름다운 말이 있지만 줄도 길고 해서 우선 경국사의 보물을
살펴보고 공양에 임하기로 했다.

공양간 앞 천막에서는 믹스커피와 티백 녹차를 제공하고 있는데 무려 500원씩이나 받는다. 그
외에 연등 만들기 체험, 기와 시주, 불교용품 판매로 짭짤하게 초파일 특수를 누린다. 그럼
여기서 잠시 경국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북한산(삼각산)에 제일 남쪽, 정릉천을 낀 숲속에 둥지를 튼 경국사는 1325년에 자정율사(慈
淨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절이 북한산 청봉(靑峰) 밑에 있어서 절 이름을 청암사(靑岩寺)라 했다고 하며, 1330년에 무
기(無奇)가 이곳에 머물러 천태종(天台宗)의 교풍을 크게 떨치었고, 1331년에 채홍철(蔡洪哲,
1262~1340)이 절을 증축해 승려들의 수행을 도왔다고 한다.
1349년 보우대사<원증국사(圓證國師)>가 이곳에 머물다가 공민왕(恭愍王)이 내린 금란가사(金
襴袈裟)와 주장자(柱杖子)를 받고 국사(國師)가 되었다.

조선이 들어서면서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서서히 망해가다가 결국 중종(中宗) 시절에
완전 망하여 터만 남았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1545년 왕실의 도움으로 절을 다시 일으켜 세
웠고, 1546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지원으로 크게 중창을 벌였다. 이때 문정왕후에게 잘보이
고자 부처의 가호로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을 기원하는 뜻에서 경국사(慶國寺)로 이름을 갈았
다고 전한다.

1669년 속세의 뇌리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능
인 정릉(貞陵)이 복원되자 근처에 있던 봉국사(奉國寺), 흥천사(興天寺)와 함께 정릉을 지키
는 원찰(願刹)이 되었다. 이때 경국사로 이름을 갈았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정릉의 원찰이
되어 망할 일은 없게 된 경국사는 이후 탄탄대로를 누비게 된다.

1698년 연화승성(蓮華昇城)이 절을 중수하고 천태성전(天台聖殿)을 세웠다. 천태성전은 독성
각의 다른 이름으로 당시의 상량문이 남아있다. 1737년에는 낙암의눌(洛巖義訥)이 주지로 부
임하여 절을 손질했고, 1793년에는 천봉태흘(天峰泰屹)이 크게 중수했다.
1855년 예봉평신(禮峰平信)이 법당을 다시 세웠고, 1864년 고종(高宗)의 즉위를 축하하는 재
를 열어 왕실에 더욱 굽신거렸다. 그리고 1868년에 칠성각과 산신각을 새로 짓고 호국대법회
를 열었는데, 이때 왕실에서 범종(梵鍾)을 하사했으며, 1870년에 큰방을 수리했다.

1878년에는 함홍치능(涵弘致能)이 고종의 지원으로 요사를 중수하고, 철종의 왕비인 철인왕후
(哲仁王后) 김씨의 49재를 지냈으며, 1887년에는 석찬(碩讚) 등이 팔상도(八相圖)와 지장시왕
도, 신중도, 현왕도, 감로도 등을 조성하여 봉안했다.

1914년 기송석찰(其松錫察)이 극락보전을 다시 세웠고, 1917년에 정릉천에 반야교(般若橋)를
놓았다. 1921년부터는 보경(寶鏡)이 주지로 머물면서 절을 크게 일으켜 세웠는데, 그는 직접
건물에 단청을 입히고 큰방에 아미타후불탱과 구품탱 등을 그렸으며, 1930년에는 영산전과 산
신각, 큰방을 중수하고, 1936년에는 영산전에 석가모니후불탱과 신중탱, 18나한탱 4폭, 범종
을 조성했다. 그리고 1939년에는 삼성보전에 약사탱, 칠성탱을 봉안했다.

6.25전쟁 이후에는 이승만 전대통령이 이곳에 들렸는데, 보경의 인격에 크게 감동을 먹어 참
다운 승가(僧伽)의 모범이 이곳에 있다면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 인연으로 경국사의 단
골이 되어 여러 차례 보경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1953년 11월 닉슨 미국 부통령이 서울을
방문하자 이승만이 한국 문화의 참모습이 경국사에 있으니 한번 가자며 그를 데리고 오기도
했다. 이때 닉슨은 경국사에서 참배했던 경험이 한국 방문 일정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밝히며 경국사를 크게 찬양했다.

보경이 사라진 이후, 현대의 큰 승려로 추앙받는 지관(智冠)이 주지로 머물며 관음전과 삼성
보전, 영산전, 산신각, 환희당 등 대부분의 건물을 중수하여 경국사를 반석 위에 올렸다. 또
한 1989년에는 극락보전을 크게 넓혔으며, 1991년에 보경의 행적비를 세웠다. 이후 사적비를
세우고, 삼성보전과 관음성전을 새로 지었으며, 자운의 부도인 계주원명사리탑을 세웠다. 그
지관이 2012년 1월 입적하면서 그의 사리를 공개했는데, 이때 많은 중생이 몰려와 그를 애도
하며 사리를 친견했다.

북한산(삼각산)에 안겨있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주택가에 빙 둘러싸인 형태로 다행히 절 주변
이 수목들로 삼삼해 심산유곡의 산사에 파묻힌 기분이다. 또한 정릉천이 바로 앞에 흘러 속세
와 적당히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도심 속의 조그만 오아시스처럼 포근하고 그윽하기만 하다.

청정한 승가의 본가임을 자처하는 이곳에는 극락보전과 관음성전, 삼성보전, 무우정사, 명부
전, 영산전, 산신각 등 10동 정도의 건물이 경내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을 비롯해 팔상도, 괘불도(掛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4호
) 등 지방문화재 6점을 간직하고 있다. (괘불도는 관람이 어려움) 그 외에 이곳에서 가
장 늙은 보물인 철조관음보살좌상과 보경이 그린 여러 불화 등이 전한다.
건물들은 죄다 근래에 손질되어 고색의 멋은 별로 없지만 그 속에는 많은 문화유산이 고색의
기운을 피우고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해준다.

* 경국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3동 753 (보국문로 113-10 ☎ 02-914-5447)



 

♠  경국사 둘러보기 (관음성전, 극락보전 주변)

▲  관음성전(觀音聖殿)의 뒷모습

공양간 윗쪽에는 육중한 덩치의 관음성전이 자리하여 경내를 가리고 있다. 이 건물은 그 흔한
관음전(觀音殿)으로 경국사는 유난히 '성(聖)'과 '보(寶)' 돌림을 좋아하는지 그 글자가 첨가
된 건물이 많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관음성전은 옛 무량수각(無量壽閣) 자리에 2000년대에 새로 지은 'ㄷ'모
양의 집으로 관세음보살의 거처이다. 건물이 워낙 넓어 서큰방이라 불리기도 하며, 법회와 강
의 장소로 쓰인다. 그리고 바로 밑에 넓게 자리를 파고 공양간을 닦으면서 졸지에 2층집이 되
버렸다.

관음성전 정면에는 불당에서 흔치 않은 툇마루가 있으며, 건물 안에는 목관음보살좌상과 감로
도 등 여러 탱화와 중생들의 돈을 받아 만들어진 무수한 원불(願佛)이 일제히 금빛 물결을 이
루며 내부를 장엄한다. 또한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 쓴 '화엄회(華嚴會)','
법화회(法華會)' 현판과 이승만이 남긴 '경국사' 현판이 걸려있다.


▲  경국사 목관음보살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8호

관음성전 중심에는 이 건물의 주인장인 관세음보살좌상이 자리해 있다. 어린 동자승이 관세음
보살 누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의 보관(寶冠)과 복장, 장식물을 슬쩍 착용한 것일까
. 아니면 잠시 관세음보살 체험을 해보는 것일까. 표정이 어린 아이처럼 해맑고 천진난만하다
. 게다가 덩치도 쥐방울만하여 귀여움도 가득 묻어나 나도 모르게 쓱쓱 쓰다듬고 싶다.

이 보살상은 원래 경국사 것이 아니었다. 1703년 전남 영암군 도갑사(道岬寺)에서 조성된 것
으로 도갑사의 부속암자인 견성암(見性庵)에 있었다. 청신(淸信)이 화주가 되어 만든 것으로
어찌어찌하여 서울까지 흘러들어왔는데,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다. 덕분에 경국사의 늙은 문화
유산이 하나 더 늘었으니 경국사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지, 그가 경국사에 들어온 이후에는 한
동안 극락보전 불단 우측에 있던 것을 관음성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보살상의 높이는 60cm로 그의 뱃속에서 발견된 발원문(發願文)에 따르면 색난(色難)을 수조각
승(首彫刻僧), 순경(順瓊)을 부조각승으로 하여 행원(幸垣), 대원(碓遠), 일기(一機), 대유(
大裕) 등이 같이 조성했다. 색난은 조선 후기에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불상 전문 승려이다.

앳된 표정이 묻어난 얼굴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는데,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으며, 눈은
살짝 뜨고 있는 것 같다. 코는 끝이 오똑하고, 입은 굳게 다물고 있으며, 머리에는 화려하면
서도 신라 금관(金冠)처럼 무거워 보이는 보관을 썼는데, 귀 옆까지 관대자락이 내려와 보관
의 수려함을 더욱 드높인다. 그런 보관 밑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삐죽 나와있는데, 이마 중간
에는 백호가 찍혀 있으며, 볼살은 두툼하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다.
신체는 나름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작은 어깨에는 법의(法衣)가 걸쳐져 있는데, 목 뒷부분이
약간 접혀있고, 법의의 왼쪽은 어깨를 완전히 가리고 어깨부터 무릎까지 내려오면서 무릎 위
에 놓인 왼손을 손목부분까지 완전히 덮고 있다. 그리고 법의 오른쪽은 어깨를 덮은 뒤 오른
쪽 팔꿈치 아래로 하여 배 부근으로 내려가 왼쪽에서 내려온 법의 안쪽으로 여며진 모습이다.
이런 착의법은 넓게 트인 가슴과 수평 혹은 연꽃형의 군의 표현과 함께 조선 후기 불상의 가
장 전형적인 모습이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고 첫째 손가락과 3째 손가락을 마주잡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에 대고
그의 필수품인 정병(政柄)을 살짝 쥐고 있다. 앉은 자세는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오른쪽 발이
훤히 드러나 있으며, 무릎 앞쪽으로는 옷자락이 물결치듯이 좌우로 유려하게 흘러내렸다.

조선 후기 목조보살상의 양식을 잘 드러낸 보살상으로 나무로 빚어 도금을 입혔으며, 그의 뒤
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중심이 된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한다. 이 후불탱은 1924
년에 보경이 그렸다.


▲  경국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1호

관음성전 우측 벽에는 매우 복잡하게 생긴 탱화가 있다. 이 탱화는 죽은 이의 극락왕생을 염
원하고자 만든 감로도로 19세기 중/후반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크게 유행한 감로왕도(甘露王
圖)의 하나이다.
그림을 보면 밑부분은 극락왕생을 못해 방황하는 영가(靈駕, 죽은 사람)들이 그려져 있고, 중
간에는 그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후손들이 있다. 그리고 가장 윗쪽에는 극락으로 들어간 영가
의 환희가 담겨져 있다.

무수히 많은 인물의 표현과 생동감있는 자세 연출로 조금의 공백도 허용치 않고 알차게 채우
고 있으며, 서울/경기와 강원도에서 활동했던 화승(畵僧)인 축연과 철유가 상궁(尙宮)들의 시
주로 1887년경에 그린 것으로 왕실의 불화 발원 사례를 잘 보여준다. 조선이 비록 대내외적으
로는 불교를 배척했지만 속으로는 적지 않게 불교를 옆구리에 낀 것이다. 특히 19세기부터 20
세기 초까지 상궁은 물론 왕비와 후궁의 시주로 그려진 불화가 서울과 경기도 사찰에 상당히
존재한다.


▲  경국사 극락보전(極樂寶殿)

경국사의 법당(法堂)인 극락보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관음성전의 뒷통수
를 바라보고 있다. 관음성전과 더불어 동쪽을 바라보고 선 그는 뜨락보다 한 3m 높은 기단(基
壇) 위에 자리해 있어 자못 웅대해 보이는데, 1989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증축된 것이며, 한때
는 건물 앞쪽에 1칸 정도 보태어 공간을 넓혔으나 나중에 철거했다.

건물 내에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과 신중도, 팔상도 등의 문화유산이 있는데, 경국사에서 소
장하고 있는 지정문화유산 7점 중 3점이 이곳에 깃들여져 있으니 꼭 살펴봐야 나중에 명부(저
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  경국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
- 보물 748호

극락보전 불단에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이하 목각탱)과 조그만 아미타3존상이 봉안되어 있
다. 아미타3존상은 근래에 달아놓은 것이지만 그 뒤에 든든히 자리한 목각탱은 경국사에서 특
별히 애지중지하는 보물로 서울에서 거의 유일한 조선 후기 후불목각탱이다.

이 목각탱은 나무를 조각하여 금색을 입힌 것으로 겉으로 보면 꽤 복잡해 보이지만 잘 살펴보
면 구조는 단순하다.
목각탱 중앙에는 극락전의 주인인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가 두손을 무릎에 댄 이른바 설법인
(說法印)을 취하고 있는데, 앙련(仰蓮)이 새겨진 여러 층으로 된 대좌(臺座)에 앉아있다. 그
런데 목각탱의 주인공임에도 그를 둘러싼 인물들보다 덩치가 작아 귀여운 인상을 풍긴다. 그
래도 그들과 달리 주형광배(舟形光背)를 달아주어 그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고, 광배의 위, 아
래가 비슷한 폭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양식이다. 또한 광배 안에는 연꽃을 새기고
일정한 너비의 주연(周緣), 밖으로는 화염(火焰) 무늬를 생겼는데, 그 무늬는 위로 솟구치고
있고, 그 안쪽에 조그만 불상이 4구 정도 있다.
 
아미타여래의 옷무늬는 통식(通式)으로 조선시대 양식이며, 그 좌우에는 아미타8대보살을 각
각 4명씩 배치했다. 그들 가운데 지장보살을 제외히고 모두 가지각색의 보관(寶冠)을 쓰고 연
꽃을 들고 있으며, 앙련 위에 앉아있다. 그 밑의 좌우 끝에는 사천왕(四天王)의 하나인 증장
천왕(增長天王)과 지국천왕(持國天王)을 배치해 아미타불의 호위를 부탁했고, 보살들 바깥 좌
우에는 나한상(羅漢像)을 1구씩 두었다.

목각탱의 양식으로 보아 18세기 중반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몇 없는 조선 후기 목
각탱이자 서울에 거의 유일한 늙은 목각탱화로 그 가치는 대단하다. 그런 목각탱을 간직하고
있으니 경국사는 예사로운 절은 아닌 것 같다.


▲  경국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3호

극락보전 좌측 벽에는 호법신장(護法神將)이 빼곡히 담겨진 신중도가 있다. 이 탱화는 1887년
상궁들의 시주로 혜산 축연(惠山 竺演) 등이 그린 것으로 중앙에는 동진보살(童眞菩薩)과 제
석천(帝釋天), 범천(梵天)이 있고, 그 좌우에 명왕(明王)와 신장(神將)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은 인도의 토속신으로 범천은 무려 힌두교의 창조신인데, 불교에서 이들을 모두 영입하여
부처의 세계를 지키는 신장으로 꾸몄다. 특이한 것은 산신(山神)과 조왕신(竈王神) 등 우리나
라의 토속신이 위태천(韋太天)의 협시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  경국사 팔상도(八相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2호

신중도 주변에는 부처의 일대기를 8개의 그림으로 표현한 팔상도가 있다. 이 탱화는 1887년에
상궁들의 시주로 보암 긍법(普庵 亘法)과 금운 순민(錦雲 洵玟), 봉규(奉奎), 종현(宗現) 등
이 그린 것으로 전체적으로 구성이 안정되어 있고 청색 사용을 자제했다.
19세기 말 서울/경기 지역 화승의 새로운 도상과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이곳 팔상도는 다
른 절과 달리 그림 4개를 하나로 하여 2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윗 사진의 4폭은 큰 네모 안에
가로가 조금 긴 직사각형을 두고 그 안에 4폭을 담았으며, 아랫 사진의 4폭은 가로가 매우 길
쭉한 것이 특징이다.


▲  삼성보전(三聖寶殿)

극락보전 좌측에는 삼성보전이 자리하여 나란히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원래는 왼쪽 1칸만 삼성보전이고, 오른쪽 2칸은 범종의 보금자리인 범종각으
로 쓰였으나 범종(梵鐘)을 내보내면서 3칸 모두 완전한 삼성보전이 되었다.
이곳 삼성보전은 산신과 독성, 칠성의 거처인 삼성각(三聖閣)의 다른 명칭이나 현실은 엉뚱하
게도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미륵보살(彌勒菩薩)과 칠성(치성광여래)를 협시로 배치한 약사3존
상의 공간이다. 물론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으나 산신각과 천태성전을 별도로 두면서
산신과 독성을 그곳으로 빼고 그 빈 자리에 약사여래와 미륵보살을 투입하면서 그렇게 된 것
이다.


▲  하얀 피부의 삼성보전 약사여래상과 약사회탱

달랑 1칸에 비좁게 살았던 약사여래와 미륵보살, 칠성 3형제는 범종을 밀어내고 집을 넓히면
서 각각 1칸씩 공간을 누리게 되었다. 약사회탱, 미륵탱, 칠성탱은 1939년에 보경이 그린 것
으로 그들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온갖 과일과 음식들로 불단이 무너질 지경이다.


▲  삼성보전 미륵보살과 미륵탱
하얀 피부의 조그만 미륵보살 뒤로 보경이 1939년에 조성한 미륵탱이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  석가탄신일 행사가 펼쳐지고 있는 극락보전 뜨락
행사 무대 옆에는 아기부처에게 관불(灌佛)을 행하는 관불의식의 현장이 닦여져
있다. 오색 연등이 무리를 지으며 행사장 허공을 낮게 드리우고 있어
하늘이 움푹 낮아진 기분이다.



 

♠  경국사 명부전, 영산전

▲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명부전(冥府殿)

극락보전 뜨락에서 초파일 행사가 열리고 있어 일제히 앞쪽으로 쏠린 시선이 부담스러워 극락
보전 뒷쪽으로 해서 명부전으로 넘어갔다.
극락보전 우측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지장보살상과 시왕(
十王), 판관 등 명부(冥府, 저승)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지장시왕도와 사자탱, 시왕탱 등
이 걸려있고. 좌측에는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의 철조관음보살좌상이 있다.


▲  명부전 지장보살상과 지장시왕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0호)

푸른 머리의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나
란히 서 있다. 이들은 보경이 흙으로 빚어서 만든 것으로 그들 뒤에 자리한 탱화가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지장시왕도이다.

이 탱화는 1870년에 안암동 개운사(開運寺)에 있는 지장시왕도를 참고하여 혜산 축연(惠山 竺
演)이 그린 것이다. 혜산은 구한말에 강원도와 서울/경기에서 활동했던 화승으로 서울에는 흥
천사와 경국사를 비롯해 그의 불화 20여 점이 전한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릴 때 수화사(首畵師
)로 활동하면서 불사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림을 보면 선악동자를 함께 그린 전형적인 지장시왕도 형식으로 유난히 가늘고 긴 눈과 아
주 작은 입 등 얼굴 한 가운데로 몰려있는 이목구비, 좁은 미간, 눈 주위와 코/뺨 부분에 음
영을 표현해 얼굴의 골격을 강조한 점은 다른 지역의 불화와 구별되는 서울,경기 지역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이다.


▲  명부전 우측의 시왕상과 시왕탱

▲  명부전 좌측의 시왕상과 시왕탱, 철조관음보살좌상

지장보살상 좌우에는 죽은 이를 심판하는 저승의 10왕(시왕)이 각각 5왕씩 앉아있다. 복장은
거의 비슷하지만 손짓이나 얼굴,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은 서로 다르다. 그들 뒤에는 시왕탱이
있는데, 역시 1왕당 1폭씩 배치하여 총 10폭을 이룬다.

명부전 좌측 벽에는 시커먼 피부를 지닌 철불(鐵佛)이 사람처럼 앉아있다. 여기서는 그를 철
조관음보살좌상이라 부르는데, 파리도 쑥 미끄러질 것 같은 탱탱한 피부와 달리 경내에서 가
장 늙은 존재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11세기 경에 요(遼)나라에서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요나라는 옛 조선(고조선)과 고구려의 속민(屬民)이자 동이족의 일원인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비록 200년도 버티지 못했지만 요서(遼西)와 만주, 화북 지역을 차지하며 크게 위엄을 떨쳤다.
이 보살상이 과연 요의 것인지 이불의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고려와 조선의 불상, 보살상과
는 확연히 차이를 보이고 있어 물 건너 온 것은 확실하며, 언제 무슨 일로 여기까지 들어왔는
지는 그가 이야기를 해주지 않아 알 도리가 없다.

의자에 앉아있는 그는 성인 남자 키 정도 되는데 얼굴은 그냥 무표정에 가까워 보인다. 두 손
을 가슴 앞에 대고 있으며, 손가락에는 특이하게 반지가 끼여져 있다. 적의(翟衣) 형태의 옷
에는 용과 새, 사자 등이 새겨져 있고 보관에는 모란꽃무늬를 매우 정교하게 나타냈다. 그리
고 정병(政柄)까지 새겨져 있어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로 여겨지나 정병은 근래에 손질한 것
이라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허나 경국사에서는 호랑이가 곶감의 눈치를 보던 시절부터 관세음보살로 받들고 있어 한때 관
음전에 있기도 했으며, 경내에서 가장 늙은 보물임에도 많은 것이 아리송한 상태라 아직 지정
문화재 등급을 얻지 못했다.


▲  경내를 굽어보고 있는 영산전(靈山殿)

명부전에서 서쪽으로 난 계단길을 오르면 부처와 그의 열성제자인 나한(羅漢)들의 공간, 영산
전이 모습을 비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말에 지어진 것을 1930년에
보경이 중수했다. 어칸 위에 달린 영산전 현판은 해강 김규진이 쓴 것으로 필체가 무척 돋보
인다.


▲  영산전 석가3존상과 석가모니후불탱

현란한 보관의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좌우에 거느린 석가여래의 표정이
꽤 후덕해 보인다. 이들 3존상은 보경이 만든 것으로 뒤에 있는 석가모니후불탱도 1935년에
그가 그렸다. 분업 정신이 투철한 불교계에서 주지승이 직접 불상과 보살상을 만들고 불화까
지 그리는 경우는 거의 흔치가 않은데, 그림과 조형에 능한 보경이 주지로 있으면서 불상을
조성하고 그림까지 그리니 제작 비용은 크게 절약되었을 것이다.

▲  영산전 18나한상과 18나한탱

석가3존상 좌우에는 부처의 열성제자인 나한상과 나한탱이 배열되어 있다. 하얀 피부의 나한
상은 좌우에 각각 9개씩 18나한을 이루고 있는데, 16나한은 지겹도록 봤지만 18나한은 생소하
다. 경국사를 찾은 중생처럼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닌 그들 뒤에는 나한탱이 2폭씩, 4폭이 자
리해 있는데, 나한과 동자가 어울려 있는 모습이다.
이들은 모두 보경이 만든 것으로 왼쪽에 1폭은 1966년에 다시 그렸고, 우측 벽 구석의 신중탱
은 1966년에 제작되었다.


▲  경국사 산신각(山神閣)
극락보전 뒷쪽 언덕에서 경내를 굽어보고 있는 산신각은 산신의 공간으로
달랑 1칸에 불과한 조촐한 건물이다.

▲  산신각 산신탱

소나무와 산을 배경으로 한 산신탱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童子) 등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진하게 우러나온다.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북쪽을 향하고 있는데, 그곳에 꿀단지나 아리따운
처자라도 있는 것일까. 보는 시선이 예사롭지가 않다. 이 그림은 1980년에 덕문(德文)이 조성
한 것으로 그 앞에 산신의 탈을 쓴 애기 같은 산신상은 근래에 봉안된 것이다.


▲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민 천태성전(天台聖殿)

산신각, 영산전보다 1단계 더 높은 곳에 천태성전이 자리하고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
까운 건물로 보통은 산신각이나 삼성각이 제일 높은 곳을 차지하고 있는데 반해 이곳은 천태
성전이 그 자리를 누리고 있다. 건물 이름이 좀 낯설긴 하지만 천태(天台)란 이름에서 이미
답은 나왔다. 바로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거처이다.

독성의 거처는 독성각(獨聖閣)이란 흔한 이름을 쓰지만 북한산(삼각사) 진관사(津寬寺)의 독
성전(獨聖殿)이나 삼천사(三千寺)의 천태각처럼 다른 이름을 쓰기도 하며, 경국사는 그의 거
처를 크게 높여 천태성전이라 부른다.
경내의 다른 건물과 달리 담장을 두르고 있어 특별한 이미지를 선사하지만 담장 안에 담긴 천
태성전은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조그만 건물이다.


▲  독성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과 독성상
독성탱은 1980년에 덕문이 조성한 것으로 그 앞에 있는 독성상은
그 이후에 장만했다.

▲  무우정사(無憂精舍)와 3층석탑

종무소에서 해우소(解憂所)로 가다보면 종무소 바로 뒷쪽에 무우정사가 있다. 그 뜨락에는 극
락보전 앞에도 없는 3층석탑이 서 있는데, 그 탑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무우정사가, 탑 좌우로
승려들이 생활하는 요사가 좁은 뜨락을 둘러싸고 있다.

다소 고급 분위기가 느껴지는 무우정사는 주지승이 거주하는 집으로 가운데 칸이 약간 앞뒤로
삐죽나와 '十' 모양의 구조를 이룬다. 지관이 설계하고 지은 것으로 현관에는 금강반야대(金
剛般若臺)란 현판이 걸려있다. 그리고 뜨락에 자리한 3층석탑은 석가탑(釋迦塔)을 그대로 모
방하여 맵시가 고운데, 경국사의 유일한 석탑으로 왜 법당인 극락보전을 놔두고 이곳에 두었
는지는 모르겠다. (극락보전 뜨락이 조금 좁기는 하지만 무우정사 앞보다는 넓음)
무우정사 일대를 문수원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예전에는 중생들의 출입을 통제했으나 이때 가
보니 활짝 열려 있었다.

참고로 무우정사의 무우는 무우수(無憂樹)에서 유래된 말로 아수가수(阿輸迦樹)를 한자로 번
역한 이름이다. 부처는 룸비니 동산의 무우수 밑에서 태어났고 과거 1불인 비바시불도 이 나
무 아래에서 성도(成道)했다고 하며, 보리수와 더불어 불교에서 꽤 애지중지하는 나무이다.


▲  경국사에서 먹은 공양밥의 위엄

경국사 경내를 깔끔하게 복습하고 공양간으로 갔다. 보통은 '금강산도 식후경' 원칙을 지키는
편이나 이번에는 초파일 여로(旅路)와 사진기 데이터를 먼저 살찌우고 그 다음에 뱃속을 찌우
기로 했다.
절을 둘러보는 동안 공양밥을 기다리는 줄은 90% 이상 감소하여 줄에 동참한지 3분 만에 밥그
릇을 손에 쥐었다. 이곳 공양밥은 다른 절과 비슷한 비빔밥으로 밥과 콩나물 등의 여러 나물,
고추장이 담겨져 있다. 밥과 함께 오이냉국과 절편이 옵션으로 제공되었는데, 오이냉국은 물
대신 마시면 되고 절편은 후식거리로 먹으면 된다.
이곳 초파일 공양밥은 보통 14~15시까지 제공하나 수요가 너무 많을 경우 일찍 마감된다. 그
러니 가급적 14시 이전까지는 가야 안전하게 공양밥을 받을 수가 있다. (이는 다른 절도 비슷
함)

우리는 돗자리에 앉아 공양밥을 들었는데, 절을 1바퀴 둘러보고 먹는 밥이라 그런지 맛이 좋
았다. 거기에 절편까지 모두 섭취하니 뱃속은 만땅이 되고 졸음이 슬슬 다가와 한숨 자라며
나를 희롱한다. 커피를 마실까 했으나 믹스커피를 무려 500원에 팔고 있어 바깥에서 캔커피를
사먹기로 하고 졸음의 희롱을 박차며 경국사를 나왔다. 그곳에 머문 시간은 공양시간을 포함
해 1시간 30분 정도.
우리가 나갈 때도 경국사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파도처럼 들어오고 있었다. 물론 그만큼
속세로 빠져나가 경내는 크게 혼잡하지는 않았다. (조금 혼잡한 편)

이렇게 하여 석가탄신일 경국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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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 기념 도심 사찰 나들이, 홍은동 백련산 백련사 (백련사 괘불)

홍은동 백련산 백련사



' 석가탄신일 도심 사찰 나들이,
백련산 백련사 '
백련사 약사전
▲  연분홍 연등이 하늘을 훔친 백련사 약사전 앞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왔다. 비록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석가탄신일 앓이가 좀 심한 편이라 그날에 대한 기대감이 큰 편이다.
하여 심쿵(심장이 쿵쿵)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서울 장안에서 적당한 절을 물색했으
나 서울에서 미답(未踏)의 고찰(古刹)은 이제 씨가 마른 상태이다. 그래서 이미 인연을
지었던 절 중에 아직 사진에 담지 않은 곳을 골라 영화사(永華寺)와 백련사 등 여러 절
을 그날의 메뉴로 정했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오전 11시, 기분 좋게 집을 나서 아차산 남쪽 끝에 자리한 영화
사(☞ 관련글 보기)를 둘러보고 비빔밥 스타일의 공양밥을 배불리 섭취한 다음, 홍은동
(弘恩洞) 백련사로 넘어갔다.
영화사에서 백련사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어 서둘러 지하철을 타고 홍제역에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10번(백련사↔홍제역)으로 환승하여 백련사 종점에서 두 발을 내렸다.



 

♣  정토도량 백련사(白蓮寺) 입문

▲  백련사 일주문(一柱門)

백련사 마을버스 종점에서 2분 정도 가면 장대한 모습의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1999년에 짓
기 시작해 2000년 10월에 완성을 본 것으로 일주문의 규모는 서울 사찰 가운데 거의 3위 안에
꼽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
현판에는 '삼각산정토백련사(三角山淨土白蓮寺)'라 쓰여 있어 이곳의 정체를 널리 알리고 있
는데, 엄연히 백련산(白蓮山) 자락에 있지만 조금 거리가 있는 북한산(삼각산)을 가져와 칭하
고 있다. 허나 북한산 탕춘대(蕩春大) 능선에서 갈라진 서남쪽 산줄기가 바로 백련산이라 삼
각산을 칭해도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 (넓게 따지면 이곳도 북한산의 일원으로 볼 수 있음)
그리고 정토는 백련사의 옛 이름이자 이곳에서 내세우고 있는 정토도량을 뜻한다.

일주문을 들어서니 석가탄신일 특수를 노리며 절에서 깔아놓은 커피와 아이스크림 판매 천막
이 지갑 좀 펼쳐보이라며 발길을 붙잡는다. 이제 갓 5월이건만 철모르고 찾아온 더위에 냉커
피 1잔을 사먹었는데 가격이 무려 3,000원대나 한다. 판매를 맡은 이들은 청소년들로 아마 백
련사 승려의 자녀거나 신도로 여겨진다.
참고로 백련사는 승려의 혼인을 대놓고 허용하는 태고종(太古宗) 소속이라 절 주변에 승려 가
족들이 사는 집이 잔뜩 깔려있다. 태고종의 중심 사찰인 봉원사(奉元寺, ☞ 관련글 보러가기)
처럼 말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백련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이 땅 최초의 정토도량(淨土道場)을 내세우는 백련산 백련사
백련산 남쪽 중턱에 자리한 백련사는 747년에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부처의 정토사상을 천하에 널리 알리고자 이 절을 세웠다고 하며 절 이름도 그에 걸맞게 정토
사(淨土寺)라 했다고 한다. 그 연유로 이 땅 최초의 정토도량임을 아주 강하게 내세운다.
허나 아쉽게도 진표의 창건설을 밝혀줄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는 실정이라 심히 회의감을 들
게 한다. 게다가 창건 이후 14세기 말까지 이렇다할 기록도 없다. 다만 1399년 무학대사(無學
大師)의 지시로 함허대사(涵虛大師)가 중창했다고 하니 어쩌면 이때 창건된 것이 아닐까 싶다
. (고려 중/후기에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있음)
 
1413년 태종(太宗)의 형인 정종(定宗)이 요양차 이곳에 머물렀으며, 세조(世祖)의 장녀인 의
숙공주(懿淑公主, 1442~1477)가 20세에 남편을 잃고 비통함에 잠겨있던 중, 백련사에서 해동
묵(음나무)를 보고 인생의 참뜻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후 공주의 무덤이 근처에 마련되자 그
의 원당(願堂)이 되면서 백련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전한다. <의숙공주의 묘는 현재 경기도 의
왕시에 있음>
또한 경복궁(景福宮)에서 봤을 때 절이 서쪽에 있어 서방정토(西方淨土)를 뜻하는 '서방정(西
方淨)','정토사'라 불렸는데 어느 여름, 연못에서 하얀 연꽃이 피어올라 백련사라 했다는 설
도 덧붙여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중건했으며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터지자 승려들이 모두 도
망치고 건물은 거의 퇴락했다. 1659년에 3년에 걸쳐 중창을 벌여 1662년 법당을 다시 지었으
며, 1701년 절이 소실되자 1702년에 중건했다.
이곳에서 수행하던 낙창군 이탱(洛昌君 李樘, 선조의 증손자)이 돈을 내어 1774년 크게 중창
했으며, 1891년 경운(慶雲)이 법당과 여러 전각을 다시 짓고 1911년 명부전을 중수했다. 그리
고 서옹이 1914년 삼성전을 중건하고 1917년 사무실을 신축했다.
예로부터 서백련(서쪽의 백련사)이라 하여 동쪽의 청련사<靑蓮寺, 왕십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양주시 장흥으로 자리를 옮김>, 남쪽의 삼성산 삼막사(三幕寺, ☞ 관련글 보기), 북쪽의 북한
산 승가사(僧伽寺, ☞ 관련글 보기)와 함께 한양도성의 4대 비보사찰로 꼽히기도 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무량수전을 비롯해 약사전, 명부전, 관음전, 범종각, 요사 등 10여 동
의 건물이 있으며, 그 주위로 승려 가족들이 사는 집이 무더기로 몰려있다. 지정문화재는 아
직 없는 실정이나 1569년에 만들어진 '융경(隆慶) 9년명 동종'이 가장 오래된 존재이며 19세
기에 조성된 괘불과 여러 탱화들이 전한다. 그리고 500년 묵은 음나무가 있었으나 세월의 고
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몇 년 전 하직하고 말았다.
또한 백련사는 예로부터 약수 맛이 좋았다. (10대 시절에 마셔봤음) 허나 그 착했던 물도 앞
서 음나무처럼 옛말이 되버린 상태이다. 하긴 서울에 이름난 약수들이 천박한 개발의 칼질과
환경오염의 마수(魔手) 앞에 상당수 고통을 받으며 명이 끊겼으니 백련사 약수라고 예외일 수
는 없을 것이다.

* 백련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 산11-155 (백련사길 170-72, ☎ 02-302-0288)
* 백련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무량수전 앞에 펼쳐진 석가탄신일 산사음악회

백련사의 중심인 무량수전(無量壽殿) 뜨락에는 산사음악회가 신명나게 열리고 있었다. 이제는
석가탄신일의 필수 요소로 자리를 잡아 음악회를 여는 절이 많은데 보통은 저녁이나 오후 늦
게 하기 마련이나 이곳은 대낮으로 시간을 잡았다.
공연장 앞에는 하얀 연등과 연분홍 연등을 적절히 조합하여 하늘을 대신하게 했고 그 밑에 넓
게 방석을 깔아 방청석으로 삼았다. 그리고 공연장 뒤쪽에 나를 흥분하게 만든 괘불이 높다랗
게 걸려 시끌벅적한 야단법석(野壇法席)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정말 보기 힘든 괘불이
석가탄신일을 맞아 간만에 외출을 나온 것이다.

천하에 300곳 이상의 절을 들락거렸지만 괘불을 본 것은 정말 손에 꼽는다. 그만큼 보기가 힘
든 비싼 존재로 그나마 석가탄신일이 만날 확률이 좀 크다. (내가 만난 괘불의 대부분이 석가
탄신일에 본 것임)
나를 흥분시킨 백련사 괘불은 1892년(또는 1868년)에 조성된 것이다. 높이는 약 6m 정도로 따
사로운 5월 햇살에 비춰 더욱 윤기가 흘러 보인다.


▲  오랜만에 나들이를 나온 백련사 괘불(掛佛)의 위엄

▲  백련사 괘불과 그 앞에 펼쳐진 산사음악회 현장

▲  원통전(圓通殿)

원통전은 관세음보살 누님의 거처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백련사는 이곳
외에도 칠성각 옆에도 관세음보살의 거처인 관음전을 두었으며 명부전 옆에는 따로 석조관세
음보살입상까지 지어놓아 관세음보살상만 무려 3기나 갖추고 있다. 이곳처럼 관음전(원통전)
계열의 건물을 2개나 지닌 절은 처음 보는데, 정토도량 외에 관음도량까지 염두에 둔 모양이
다.


▲  원통전 내부
늘씬한 몸매의 금동관세음보살상과 백의관음(白衣觀音) 후불탱, 신
중탱이 내부를 장식하고 있다.

▲  백련사의 법당인 무량수전

무량수전은 서방정토의 주인장,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이다. 'ㄱ'모습의 팔작지붕 2층 집
으로 1층은 종무소(宗務所), 공양간 등으로 쓰이며 2층이 바로 무량수전으로 실내가 연병장만
큼이나 넓다. 또한 이곳말고도 동쪽에 극락전이라고 아미타불의 거처를 또 마련하였는데 이는
이곳이 정토도량을 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량수전의 별칭이 바로 극락전임)



 

♠  백련사 마무리

▲  백련사 약사전(藥師殿)

원통전 옆구리에는 약사여래(藥師如來)의 거처인 약사전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
지붕 집으로 내부에 1569년에 조성된 '융경(隆慶) 9년명 동종(銅鍾)'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해 지나치고 말았다. (동종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그가 백련사
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며, 불단에 자리한 석조약사여래좌상과 약사후불탱은 19세기 것이다.


▲  약사전 석조약사여래좌상
하얀 피부를 지닌 밝은 표정의 약사여래좌상이 좌우로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거느리며 약사3존상을 이루고 있고, 그 뒤에는
19세기에 그려진 약사후불탱이 든든하게 걸려있다.

▲  약사전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탱화들 (극락구품도, 신중탱, 현왕탱 등)

▲  석조관세음보살상과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으로 지장보살과 저승(명부)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2017년 5월에 장만한 석조관세음보살상이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매
끄러운 하얀 피부를 자랑하며 자리해 있다.


▲  19세기에 조성된 명부전 지장보살상과 무독귀왕, 도명존자(道明尊者)

▲  명부전 우측 시왕상과 시왕탱

▲  명부전 좌측 시왕상과 시왕탱


▲  한 지붕 세 가족을 이루고 있는 관음전, 칠성각(七星閣), 산신각(山神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3칸짜리 맞배지붕 집이 있다. 이미 원통전이란
관세음보살의 거처가 있음에도 이곳에도 1칸을 떼어나 그의 공간을
추가했으며 가운데 칸은 칠성, 오른쪽 칸은 산신의 공간이다.

▲  극락전과 칠성각 사이를 가득 메운 연분홍 연등의 고운 물결
연등에 의해 하늘이 푹 낮아진 기분이다.

▲  극락전(極樂殿)의 옆구리

극락전은 무량수전과 마찬가지로 서방정토의 주인인 아미타불의 거처이다. 무량수전 다음으로
큰 집으로 백련사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한 정토도량임을 강조하고자 그의 공간을 2개씩이나
두고 규모도 크게 다졌다. (극락전 계열의 집이 2동이나 있는 절은 처음 봄)


▲  극락전 내부

극락전을 끝으로 백련사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이곳의 석가탄신일 인심도 확인할 겸, 공
양밥 1그릇 들고 갈까 했으나 영화사에서 먹은 것이 다 소화되지 않았고, 아무리 둘러봐도 공
양밥을 주는 곳이 보이지 않아 아무래도 공양시간은 끝난 듯 싶었다. (백련사 공양밥이 맛있
다고 함)
두 다리도 잠시 쉴 겸, 잠시 신명나는 산사음악회를 구경하다가 보조 메뉴로 급히 정한 다른
절로 길을 잡았다. 이후에 간 고찰들은 자주 복습했던 곳이라 사진에 따로 담지 않아 본글에
서는 생략한다.

이렇게 하여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나들이는 보다 흥겨운 내년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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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팔공산 북지장사, 대구올레팔공산1코스, 시인 이상화고택 나들이

대구 팔공산 북지장사, 이상화 고택



' 대구 겨울 나들이 '
(팔공산 북지장사, 시인 이상화 고택)

팔공산1코스 북지장사 가는 길

▲  팔공산1코스 북지장사 가는 길

북지장사 지장전 대구 이상화고택

▲  북지장사 지장전

▲  이상화 고택

 



 

겨울의 차디찬 한복판인 2월의 첫 무렵, 오랜만에 대구(大邱) 땅을 찾았다. 올해도 변
함없이 미답처 지우기에 열을 올리며 어디로 갈까 궁리하던 중, 대구에서 적당한 미답
처가 감지되었다. 바로 팔공산에 있는 북지장사와 근래 무섭게 뜨고 있는 중구의 근대
문화유산들이다. 그래서 북지장사를 먼저 들렸다가 대구 도심으로 나와서 햇님이 떨어
질 때까지 중구의 근대문화유산을 최대한 챙겨보기로 했다.

햇님이 등청하기가 무섭게 서울을 출발,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4시간 가까이를
달려 대구의 대표 관문인 동대구역에 두 발을 내렸다.
사람들로 늘 북새통인 동대구역을 서둘러 벗어나 동대구역 지하도 정류장에서 대구 급
행좌석 1번(동화사↔다사,매곡리)을 타고 북쪽으로 30분 정도를 올라가 동화사로 넘어
가기 직전인 방짜유기박물관에서 하차했다.



 

♠  팔공산 북지장사(北地藏寺) 둘러보기

▲  북지장사 소나무숲길 ①

북지장사는 방짜유기박물관 정류장에서 도장길을 따라 40분 정도 들어가야 된다. 전국적인 도
보길 유행에 따라 대구시는 북지장사 길을 '대구올레 팔공산1코스(북지장사 가는 길)'로 포장
하여 세상에 내놓았는데 거리는 2.5km(방짜유기박물관 입구↔북지장사)로 느긋한 길의 연속이
라 걷는 마음도 가볍다.
북지장사 길을 그대로 둘레길로 삼은 탓에 전 구간이 포장길로 박물관입구에서 약 0.9km 정도
는 보행길을 갖춘 2차선 길이나 그 이후부터는 굽이굽이 이어진 1차선 시골길이다. 그 모습이
정겹기 그지 없어 무리하게 길을 넓히지 말고 이대로 두었으면 좋겠다. 더군다나 길 중간에
두툼함 소나무 숲도 있으니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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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지장사 소나무숲길 ②

▲  북지장사 소나무숲길 ③

북지장사 길 중간에는 짙게 우거진 소나무 숲길이 있다. 소나무들이 얼마나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던지 하늘이 거의 보이질 않아 어두울 정도인데 그들이 베푼 솔내음이 속세의 번뇌를 거
의 털어주어 나의 돌머리와 어지러운 마음에 한 줄기 평화를 준다. 시작부터 이런 명품급 숲
길을 내밀며 중생을 맞이하니 북지장사에 대한 첫 인상과 기대감을 적지 않게 높여준다.


▲  북지장사 숲길과 겨울 가뭄으로 고통받는 계곡(숲길 왼쪽)

▲  드디어 도착한 북지장사 용호문(龍虎門)

도장길(북지장사 가는 길) 끝에는 나를 이곳으로 부른 북지장사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주
차장을 지나면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려진 용호문과 그 좌우에 딸린 기와집이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는데 절에 따로 일주문(一柱門)이 없기 때문에 용호문이 일주문(정문)의 역할을 도
맡고 있다.
그 문을 들어서면 경내의 중심인 지장전이 나타나고 그 뒤쪽에 대웅전이, 동쪽에는 오래된 3
층석탑이 있다. 그럼 여기서 북지장사의 내력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팔공산 동남쪽 끝자락이자 노족봉(老足峰, 600m)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북지장사는 팔공산에
무수히 널린 늙은 절의 하나이다. 같은 팔공산(八公山) 식구인 동화사(桐華寺), 파계사(把溪
寺, ☞ 관련글 보기), 갓바위(선본사, ☞ 관련글 보기)의 명성에 크게 가려져 있고 규모도 작
지만 그들 못지 않게 유구한 역사와 문화유산을 오롯하게 지니고 있으며 산 속에 고적하게 자
리해 있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꽤 깊다.
북지장사란 이름은 '북쪽에 있는 지장사'란 뜻이다. 원래 이름은 '지장사'이나 대구의 동남쪽
끝인 가창면 우록리에도 오래된 지장사가 있어 그들을 구분하고자 팔공산 것은 북지장사, 우
록리 것은 남지장사(南地藏寺)를 칭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두 절이 특별한 사이도 아님)

북지장사는 485년에 극달화상(極達和尙)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흔쾌히 밝혀줄 사료
(史料)와 유물은 없으며 그 시절 대구 지역을 다스렸던 신라의 소지왕(炤知王, 재위 479~500)
은 고구려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고구려에서 전해준 불교를 때려잡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
니 팔공산(八公山)에 절이 세워질 근거가 전혀 없다.
1040년 최제안(崔齊顔)이 쓴 경주 천룡사(天龍寺) 중창 관련문서에는 북지장사의 밭이 200결
이나 된다고 쓰여있어 고려 초에도 제법 잘 잘나갔음을 알려준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공산(公山) 지장사'로 나와있고 신라 후기에 지어진 석조지장보살좌상과 3층석탑이 있어 절
이 우후죽순 들어섰던 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동화사의 말사(末寺)로
조용히 있지만 왕년에는 오히려 동화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1192년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이 중창했다고 하며 지장전(옛 대웅전) 기와 중 1623년
과 1665년에 만들어진 것이 있어 17세기에 여러 차례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한때 부속 암자
를 여럿 거느리고 있었으나 동화사와 파계사 등 쟁쟁한 절에 밀려 19세기 초에 동화사의 그늘
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후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지장도량으로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지장전, 요사, 산령각 등 8~9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지장전을 비롯해 3층석탑과
석조지장보살좌상(대구 지방유형문화재 15호), 아미타삼존불좌상(대구 지방문화재자료 51호),
금고(金鼓,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55호) 등이 있다. 허나 정보 부족으로 아미타3존불과 금고는
만나지 못했으며, 조선 후기 지장탱(지장보살도)과 지장사유공인 영세불망비, 옛 석재(石材)
와 주춧돌 등이 전하고 있다.


▲  북지장사 지장전(地藏殿) - 보물 805호

단출하고 날씬하게 생긴 지장전은 북지장사의 상징 같은 존재이다. 정면 1칸, 측면 2칸의 겹
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과 뒷면에 사잇기둥을 세워 3칸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그 3칸을 다
합쳐봐야 겨우 일반 기와집 1칸 정도 크기이다. 홀쭉해 보이는 건물에 비해 지붕이 육중하게
보여 이를 받치고자 추녀가 있는 네 모서리에 붉은 피부의 기둥을 세웠는데, 그 기둥을 활주
(活柱)라고 한다.

건물 정면에는 꽃살창호를 달고 옆면과 뒷면에 띠살창호를 달았는데 기단(基壇)은 2단으로 다
지고 그 위에 막돌로 주춧돌을 닦은 다음 건물을 올렸다. 기둥 윗쪽에 창방과 평방을 두르고
그 위에 공포를 안팎 4출목(出目)으로 촘촘히 짜서 다포(多包) 양식을 취했다.
공포의 세부 처리는 조선 중기 스타일이나 용봉(龍鳳) 머리는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수법이다.
내부는 바닥에 우물마루를 깔아 불단을 마련했고 가구(架構)는 도리칸이 1칸으로 대들보는 사
용하지 않고 사각귀틀맞춤으로 짠 다음, 둘레는 빗천장으로, 가운데는 우물천장으로 했다. 이
런 기법은 정자(亭子)에서 많이 쓰이는 것으로 사찰 건물로써는 흔치가 않아 처음에는 목탑으
로 지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건물 지붕에서 1623년과 1665년에 만들었음을 알리는 글씨가 깃든 기와가 발견되어 1623년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2011년 해체보수 때 1761년에 지장전으로 상량(上樑)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원래부터 지장전으로 출발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대웅전이 화마(火魔)의 장난으
로 쓰러지자 그 앞에 있던 지장전이 그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대웅전과 극락전으로 간판을 바
꾸기도 했으며, 대웅전이 새로 지어지자 그에게 법당(法堂)의 역할을 넘기고 지장전으로 돌아
왔다.

▲  방향에 따라 조금씩 모습을 달리하는 지장전

지장전에는 신라 후기에 조성되었다는 석조지장보살좌상과 조선 후기 지장탱이 들어있다. 그
들을 모두 친견했으나 지장전 내부를 찍지 말라는 절 관계자의 당부로 굳이 사진에 담지 않고
나의 침침한 자연산 망각에 살짝 담고 나왔다.

나의 촬영을 거부했던 석조지장보살좌상은 대웅전 뒤쪽 땅 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그의 정체는
아리송하긴 하나 머리의 형태나 손에 든 보주(寶珠) 등으로 보아 지장보살(地藏菩薩)로 여겨
진다. 단정한 모습과 온화한 인상으로 신라 말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경내에서 가장 늙은
보물로 북지장사의 불투명한 창건 시기를 최대 신라 후기까지 끌어올려준다.


▲  지장사유공인 영세불망비(地藏寺有功人 永世不忘碑)

지장전 바로 앞에는 약간 빛이 바랜 조그만 비석 하나가 멀뚱히 서 있다. 그는 운암당 옥준대
사(雲巖堂 玉峻大師)의 공적을 기리고자 1731년에 세워진 것으로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니
다.
17~18세기 지장사 승려들은 세금으로 종이를 만들어 관아에 바쳤는데 그 수고로움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것을 운암당이 조금 해소해주자 이를 감사하게 여겨 비석까지 세웠고 나중에는
지장전 앞에까지 두어 그 고마움을 두고두고 기린다.
비석이 심어진 비좌(碑座)는 높이 30cm, 92x60cm 규모이며, 빗돌은 높이 101.5cm, 상부 폭 50
cm, 하부 폭 47cm로 빗돌 윗부분이 둥글게 처리되었다.

▲  지장전 뜨락 우측에 자리한
설선당(設禪堂)

▲  아직도 연꽃무늬가 생생한 옛 석재
(석등의 일부로 여겨짐)


▲  지장전 뒷통수에 자리한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근래에 마련했다. 예전 대웅전이 화재로 맥
없이 쓰러지자 지장전이 그 역할을 맡게 되었으나 그가 다시 지어짐으로써 법당의 자격을 다
시 찾아왔다. 허나 북지장사에서 지장전의 존재감이 거의 독보적인 수준이라 대웅전이 절의
중심 건물임에도 지장전의 보조 건물 정도로 작게만 보인다. 게다가 지장전의 뒤쪽에 있으니
그런 기분에 더욱 부채질을 한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산령각(山靈閣)
대웅전 뒷통수에 있는 산령각은 1칸짜리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에게
꽤 친숙한 산신의 공간이다.

▲  북지장사 3층석탑(동탑)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6호

지장전 뜨락 동쪽에는 고색이 깊게 묻어난 3층석탑 형제가 있다. 이들은 2중의 기단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얹히고 머리장식으로 마무리를 지은 것으로 높이는 모두 3.8m이며 옥개석과 탑
신이 같은 돌로 지어졌다.
신라 후기 또는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1981년 5월 해체복원을 했는데 이때 땅 속에 묻혀있
거나 주변에 흩어져 있던 탑의 살을 갖다붙였다. 아무리 복원을 했다고 해도 고된 세월의 흔
적까진 어쩌질 못하여 군데군데 장대한 세월이 할퀴고 간 상처들이 역력하다.

▲  정면에서 바라본 3층석탑 동탑

▲  3층석탑 서탑


▲  북지장사를 뒤로하며

생각보다 꽤 작고 아담했던 북지장사를 30분 정도 둘러보고 다시 속세로 나왔다. 사전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간 탓에 금고와 아미타삼존불좌상을 놓치는 실수를 범해 다시 와야될 구실
을 빚고 말았으나 아직도 이 땅에는 나의 발이 닿지 않은 미답지들이 우주의 별만큼이나 즐비
하여 이곳과의 재 인연은 솔직히 장담할 수가 없다.

북지장사를 나오다가 이 땅의 유일한 방짜유기 전문 박물관인 대구방짜유기박물관에 잠시 발
을 들였다. 방짜유기는 구리와 주석을 78:22 비율로 녹여서 만든 유기의 일종으로 징과 꽹과
리 등은 오로지 방짜기법으로 만들어진다. <박물관 내부는 사진에 담지 않아서 이 정도 언급
으로 쿨하게 선을 긋겠음, 방짜유기박물관 ☎ 053-606-6171~4, ☞ 홈페이지 보기>
그곳을 둘러보고 백안3거리로 나와 뜨끈한 순두부찌개로 늦은 점심을 섭취했다. 점심과 저녁
사이의 시간임에도 손님들이 제법 되었고 후식으로 커피 외에 식혜도 준비되어 있어 후식 인
심도 넉넉했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중구(中區) 지역의 근대문화유산을 보고자 대구시내버스 401번(갓바위↔
범물동)을 잡아타고 대구 도심 한복판인 반월당(半月堂)으로 나왔다.
허나 햇님이 적지 않게 기운 상태라 근대문화유산을 얼마나 잡을 수 있을지 장담을 할 수가
없다. 햇님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게 꽉 붙잡고 싶지만 인간 주제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길을 서둘렀다.

* 북지장사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6225 (도장길 243, ☎ 053-985-5217)



 

♠  빼앗긴 들에서 민족혼을 일깨운 대구의 대표적인 민족시인
상화 이상화(尙火 李相和) 고택

▲  시인 이상화 고택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어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에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쁜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잡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반월당역(반월당교차로)에서 달구벌대로를 따라 서쪽으로 500m 정도 가면 계산5거리이다. 여
기서 오른쪽(북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시인 이상화 고택과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한 서
상돈(徐相燉) 선생의 고택이 나란히 마중을 나온다.
이들은 대구 도심 근대문화유산의 대표 성지(聖地)로 원래 그들을 볼 계획은 없었다. (존재
조차 몰랐음) 그저 청라언덕과 계산동성당만 생각을 했었지. 그러다가 생각치도 못한 그들의
깜짝 등장에 두 다리가 얼어붙으면서 그들을 덤으로 둘러보게 되었다.


▲  주인이 가고 없는 이상화 고택 안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아주 유명한 민족시인 이상화(1901~1943)는 1901년 4월 5일,
여기서 가까운 서문로2가 11번지에서 이시우(李時雨)와 김신자(金愼子)의 4남 중 2남으로 태
어났다.

그의 아호는 무량(無量)이며, 호는 상화(尙火, 想華), 백아(白啞)이다. 1908년 아버지를 잃자
14살까지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훈도(訓導)를 받으며 한문을 익혔다. 1915년 서울로 올
라가 경성중앙학교(중앙중고등학교)에 입학, 1918년 3학년을 수료하고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방랑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1919년 3.1운동 때 대구 지역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서울로 급히
피신, 박태원이 운영하는 하숙집에서 머물렀으며, 그해 10월 서순애(徐順愛)와 혼인을 했다.

1922년 현진건(玄鎭健)의 소개로 박종화(朴鍾和)를 만나 홍사용(洪思容), 나도향(羅稻香) 등
과 함께 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말세의 희탄','단조','가을의 풍경' 등을 발표해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으며, 보다 넓은 문학의 세계를 익히고자 바로 그해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
아테네프랑세에서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다.
1923년 3월 아테네프랑세를 수료하여 프랑스 유학을 추진하던 중, 그해 9월 동경을 중심으로
관동대지진이 터졌다. 그때 관동 지역에 살던 조선 사람들이 왜열도 원숭이들에게 잔인하게
탄압을 당하는 꼴을 보고 크게 분노해 프랑스를 포기, 1924년 3월 서울로 건너와 가회동(嘉會
洞)에 있는 취운정(翠雲亭)에 머물며 그 유명한 '나의 침실로'를 '백조' 3호에 발표했다.

1925년 김기진(金基鎭) 등과 함께 파스큘라(Paskyula)란 문학연구단체에 가담했으며, 그해 8
월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1926년에는 '개벽' 70호에 그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했는데 그 시에 발작한 왜정(倭政)이 태클을 걸어
'개벽'은 판매 금지 처분을 당했다.

1928년에는 신간회(新幹會) 대구지회 출판간사로 있었는데, 자신의 집 사랑방을 담교장(淡交
莊)이라 칭하며 많은 항일 인사들과 교류를 했다. 그러다가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한 'ㄱ당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했다.
1930년 '대구행진곡'을 '별건곤(別乾坤)' 10월호에 냈으며 1933년 교남학교에 들어갔으나 이
내 사임하고 1934년 조선일보 경상북도 총국을 경영하다가 실패했다. 1935년 시 '역천'을 '시
원' 2호에, '나는 해를 먹다'를 '조광' 2호에 발표했다.

1936년 큰 형인 이상정(李相定)을 만나고자 중원대륙(서토)으로 건너가 남경과 북경, 상해 등
을 3개월 동안 여행했으며 1937년 3월 귀국하자 왜경에게 바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그해
11월 석방되었다.
이후 교남학교에 복직하여 3년 동안 교편을 잡으면서 권투부를 창설했으며, 1939년 6월 계산
동(桂山洞)2가 84번지(현 자리)로 집을 옮겼다. 허나 교가(校歌) 가사 문제로 왜정에게 가택
수색을 당하면서 시 원고와 고월 유고까지 압수를 당했으며, 그 충격으로 1941년 학교를 그만
두었다.

이후 시 '서러운 해조'를 '문장' 폐간호에 발표했고 '춘향전'을 영역했으며, 국문학사와 불란
서시정석 등을 시도했으나 완성을 하지 못한 채, 1943년 4월 25일 아침 8시 45분 경, 위암으
로 계산동 집에서 안타깝게 숨을 거두고 만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42살이었다.

가만히 보면 정의롭게 살아온 문학인들은 거의 명줄이 짧고<이상화, 김영랑, 윤동주, 정지용,
이육사 등> 불의(不義)와 어울리며 자신의 배때기를 채우느라 여념들이 없던 작자들<서정주,
이광수 등>은 너무 쓸데없이 오래 산다. 언능 가야될 잡것들은 늦게 가고 정작 오래 살아야
될 사람들은 일찍 죽으니 그래서 이 나라의 정의가 제대로 안서는 모양이다.

1948년 달성공원에 그의 시비가 최초로 건립되었고, 1985년 죽순문학회가 '상화시인상'을 제
정하여 '2009기념사업회 설립'에 따라 시인상을 승계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
되었다.


▲  이상화 고택 안채 마루 (뒤주와 이상화의 흉상)

이상화 고택은 왜정 때 지어진 개량한옥으로 사랑채와 안채 등 2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
고 마당에는 감나무가 자라고 있어 감나무 마당이라 불렸다.

이상화가 저 세상의 별로 홀연히 사라진 이후, 비록 주인도 바뀌고 모습도 조금 변화를 겪었
지만 집은 계속 그 자리를 지켰다. 허나 이곳이 대구 도심 한복판의 금싸라기 땅이다보니 천
박한 개발의 칼질이 군침을 흘리며 집을 위협하기에 이르렀고, 2001년 대구 중구청이 고택이
있는 계산동2가 84번지 일대 도로계획을 추진하면서 개념없이 집을 밀어버리려고 하였다.
이에 고택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방송국에 제보를 하여 2002년 1월, 대구MBC, 매일신문, 영남
일보, 한겨례신문 등에서 이를 보도했고, 윤순영(분도예술대표), 이상규(경북대 교수), 공재
성(대구MBC) 등 3명이 앞장서 고택보존운동 100만인 서명운동으로 중구청 철밥통들을 참교육
시키면서 그 마수를 부려뜨렸다.
허나 2003년 5월, 이번에는 (주)L&G에서 32층 주상복합 건물을 짓고자 다시 고택을 괴롭히자
'민족시인 이상화 고택보존운동본부'에서 대구시를 설득, 상화고택 보존을 조건부로 신축을
허가했다. 이에 (주)L&G는 상화고택과 인근 부지 1필지를 매입해 착공 전에 대구에 기부채납
하겠다며 대구시에 공증을 제출했다.

2004년 6월 (주)L&G와 상화고택 소유자간의 고택 매매계약이 체결되었고, 7월에 군인공제조합
이 그 신축건물 공사를 맡게 되자 상화고택 기부채납 기본 협약을 다시 체결, 2005년 6월 상
화고택과 인근 부지 1필지를 대구에 기부채납하였다.
그렇게 해서 고택이 완전히 살아남게 되자 '민족시인 이상화 고택보존운동본부'는 해산되었고
그동안 모은 이상화 시집 1,729권과 모금액 8,600만원을 대구시에 기증했다. 또한 이상화의
후손들과 그를 흠모하는 문인들이 그의 유품과 자료를 흔쾌히 기증하여 이상화 고택을 아낌없
이 꾸며주었다.

2007년 5월 상화고택 보수공사에 들어가 11월 완성을 보았으며, 2008년에도 3달간 내부 공사
를 벌여 2008년 8월 12일, 속세에 개방되었다. 이후 대구 중구의 대표적인 근대 명소이자 문
학의 성지로 뜨겁게 추앙을 받으며 대구 도심 투어의 필수 명소로 자리매김하였다.


▲  책상과 의자가 놓인 안채 방 ①
사랑채에는 이상화의 시집과 유품, 사진, 그의 작품과 일생을 다룬 안내문을
배치하여 그의 조그만 전시관을 이루고 있다.

▲  이상화의 여러 문서와 유품이 담긴 안채 방 ②

▲  이상화의 여러 문서와 유품이 담긴 안채 방 ③

▲  무늬만 남은 부엌
이상화의 문학 작품은 바로 이곳에서 지어진 음식의 힘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2007년 이후 고택을 손질하면서 부엌이 조금 변형되었으며, 부뚜막은 더 이상
연기를 피울 일이 없어 그저 먼지만 가득하다.

▲  감나무 그늘에서 한가로운 인생을 보내는 장독대
왕년에는 다양한 음식들을 숙성시키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지금은 빈 껍데기이다.

▲  이상화 고택 서쪽에 자리한 계산예가(桂山禮家)
계산예가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중구 계산동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
근대문학 등을 사진과 자료, 영상물 등으로 엮어낸 근대문화체험관이다.
(기념스탬프 코너도 있음)

▲  계산예가 옆 골목길 (계산동성당 방향)

시민과 문학인들이 개발의 칼질과 중구청 철밥통들을 참교육시키며 지켜낸 이상화 고택을 둘
러보고 바로 이웃에 자리한 서상돈 고택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은 여기서 흔쾌히 휘장을 걷는다.


* 이상화고택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84 (서성로 6-1, ☎ 053-256-3762)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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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남한산성 봄맞이 나들이 ~~~ (남한산 장경사, 망월사, 지수당, 연무관, 개원사)

남한산성 늦겨울 나들이 (장경사, 망월사, 지수당, 개원사, 연무관)



' 남한산성 늦겨울 나들이 '

남한산 장경사
▲  남한산성 장경사

지수당

남한산성 연무관

▲  지수당

▲  연무관

 



 

차디찬 겨울 제국이 드디어 그 끝물을 보이던 3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광주(廣州) 남
한산성을 찾았다.
오전 11시에 집을 나서 지하철을 3번씩이나 갈아탄 끝에 남한산성의 서쪽 입구의 하나
인 산성역(8호선)에 이르렀다. 이 역은 해발 100m 고지에 자리해 있어 신금호역(5호선
), 만덕역(부산3호선)만큼이나 장대한 깊이를 자랑한다. 하여 역을 빠져나오는데만 한
참이 걸린다.

어두컴컴한 지하를 벗어나 산성역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성남시
내버스 52번(성남동 대형주차장↔남한산성)을 잡아탔다. 산성역에서 남한산성 내부(산
성리)로 들어가는 버스는 9번과 9-1번, 52번, 53번이 있는데, 52번은 평일에만 바퀴를
굴리는 노선으로 남한산성 안으로 바로 들어가나 배차간격이 2시간 이상이라 절망적인
수준이다. 그리고 9번은 20분대 간격이나 성남시 양지동과 은행동 지역 강제투어가 심
하다.
9-1번은 52번처럼 남한산성으로 바로 들어가나 토요일과 휴일에만 운행하며,(배차간격
은 10~20분대) 53번도 휴일에만 운행하나 배차간격이 우울하다.

남한산성 나들이객과 산꾼을 가득 머금은 버스는 마치 뱀의 허리에 올라탄 듯, 구불구
불한 고갯길(남한산성로)을 지나 산성 남문<南門, 지화문(至和門)>을 통해 남한산성으
로 진입, 남한산성 종점인 산성로터리에서 두 발을 내린다.

남한산성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산성로터리에서 남한산성로를 따라 동쪽으로 15분 정
도를 가면 남한산성 동문<東門, 좌익문(左翼門)>이 마중을 한다. 여기서 장경사까지는
2갈래의 길이 있는데, 하나는 남한산성 성곽길을 따라가는 것이고, 다른 것은 동문 서
쪽에 있는 포장길을 이용하는 것이다. 성곽길이 조금은 지름길로 20분 정도 걸리나 경
사와 성곽길이 다소 거칠며, 포장길도 시작부터 각박한 경사로 진을 제대로 빼게 하나
장경사/망월사 갈림길 이후부터 점차 순해진다. (포장길은 25분 정도 걸림)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남한산성 동문에서 장경사, 망월사로 인도하는 각박한 포장길

▲  망월사 입구 (장경사, 망월사 갈림길)

▲  장경사, 망월사 갈림길에서
장경사를 알리는 표석



 

♠  남한산성 10개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자리를 지키며 살아남은
조선 중기 산사(山寺), 남한산 장경사(南漢山 長慶寺)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5호

▲  장경사 숲길 (장경사/망월사 갈림길에서 장경사 방향)

동문 서쪽 포장길을 6~7분 오르면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장경사 표석과 망월사 표석이 서
로 자기네 절에 오라며 호객 행위를 벌이고 있는데, 우선 구석에 자리한 장경사를 둘러보고
나오면서 망월사에 들리기로 했다, (갈림길에서 직진하면 망월사, 오른쪽 길은 장경사로 이어
짐)

장경사 표석의 손을 들어주어 오른쪽 길로 향했지만 산길의 흥분은 여전하여 숨을 제대로 헐
떡이게 만든다. 다행히 한 굽이를 지나니 길은 서서히 진정을 되찾으며 다소 순화되었고, 다
시금 1굽이를 크게 도니 동문에서 서로 떨어졌던 남한산성 성곽길이 바로 옆에 붙는다. 여기
서 잠시 나란히 이어지다가 곧 갈라져 제 갈 길을 간다. 어디로 가든 장경사로 이어지나 빠르
게 가고 싶다면 숲길(왼쪽)로 가면 된다. 성곽길은 절 주차장 남쪽으로 이어진다.


▲  장경사 곁을 흐르는 남한산성(사적 57호) 동쪽 성곽 (북쪽 방향)

▲  남한산성 동쪽 성곽에서 바라본 한봉(漢峰, 418m)

한봉은 남한산성(청량산)을 지키는 동쪽 봉우리로 산성의 동쪽 가지 성(枝城)인 한봉성(漢峰
城)을 품고 있다. 이 성은 산성 동장대터와 벌봉(봉암성) 능선에서 한봉 정상까지 이어지며
지형이 각박해 수비에 용이하다.


▲  장경사 일주문(一柱門)

성곽길과 떨어지면 얼마 안가서 장경사 정문인 일주문이 마중을 나온다. '남한산 장경사' 현
판을 정면에 내밀며 절의 정체를 널리 드러내고 있는데, 다른 일주문과 달리 지붕과 현판이
달린 평방(平枋)의 높이가 너무 낮다. 그 문을 들어서면 여태까지 보이지 않던 장경사의 속살
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럼 여기서 잠시 장경사의 내력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남한산성 내에서 제일 동쪽 구석 360m 고지에 자리한 장경사는 병자호란 직후인 1638년에 창
건되었다.
1624년 전국의 승려를 소환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수축했는데, 공사가 끝나자 그들을 제
자리로 보내지 않고 산성에 눌러앉게 하여 산성 수비와 관리의 임무를 맡겼다. 허나 그 시절
산성 안에는 망월사와 옥정사(玉井寺) 등 2개의 절 밖에는 없어서 수용 공간이 너무 딸렸다.
그러니 승려들의 불만과 원성은 대단했다. 하여 1638년에 장경사와 개원사, 한흥사(漢興寺),
국청사(國淸寺), 천주사(天柱寺), 동림사(東林寺), 남단사(南壇寺) 등 7개의 절을 새로 지어
이들을 수용했고, 그로 인해 남한산성에는 9개의 절이 둥지를 틀게 되었다. 그중 장경사는 충
청도 출신 승려(승군)들이 머물렀다.
병자호란이 한참이던 1637년 1월 19일 청나라군이 동문 주변을 공격했는데 어영별장 이기축(
李起築)이 장경사 자리에 있다가 죽을 힘을 다해 그들을 격퇴했다. 이에 인조가 찾아와 그를
위로하고 가선(嘉善)의 품계를 더하고 완계군(完溪君)에 봉했다.

1907년 왜군이 남한산성을 찾아와 9개 사찰의 무기고와 화약고를 모두 정리했는데, 그것들이
화약을 폭파하는 과정에서 8개의 절이 몽땅 파괴되었으나 장경사는 그나마 피해가 덜해 유일
하게 살아남았다. 하여 창건 당시의 모습과 가람 배치를 많이 유지하고 있으며, 1975년 화재
를 만나 소실된 것을 다시 중창했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심향각, 삼성각, 대방, 요사, 범종각, 무심당 등 8~9동 정도의 건
물이 있으며, 이중 대웅전은 19세기 건물이나 20세기 후반에 너무 변형을 주면서 고색의 향기
는 거의 말라버렸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강희21년명 동종이 있는데, 이 종은 오랫동안 삼성
동 봉은사(奉恩寺)에서 객지생활을 하다가 2013년에 겨우 돌아왔다.

▲  검은 피부를 지닌 똥배 포대화상
그의 배를 어루만지면 아들을 낳는다고??

▲  경내를 가리고 앉은 무심당(無心堂)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  범종의 보금자리, 범종각(梵鍾閣)

▲  선방과 요사로 쓰이는 심향당(心香堂)

남쪽을 바라보고 앉은 장경사는 남쪽을 제외하면 모두 산으로 막혀있다. 남한산성을 대표하는
절이긴 하지만 가장 동쪽 외진 곳에 자리해 있고 숲에 완전 감싸인 곳이라 적막하고 고즈넉한
산사(山寺)의 분위기를 제대로 누릴 수 있다. '절간답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말이다.

법당(法堂)인 대웅전 앞에는 뜨락이 있는데, 뜨락에는 1995년에 조성된 9층석탑이 파리도 미
끄러울 정도로 매끄러운 하얀 피부를 드러내고 있다. 그 좌우에 심향당과 요사가 서로 마주보
고 있으며, 대웅전 맞은편에는 무심당이란 건물이 있는데, 예전 진남루(鎭南樓)로 근래에 지
금의 모습으로 변형되었다.

▲  장경사 현판을 내건 요사(寮舍)

▲  법당 뜨락에 세워진 9층사리탑


▲  장경사의 빛바랜 과거 (1958년 사진)
지금과 달리 뜨락이 좁고 동쪽 요사 건물과 대웅전이 많이 달랐음을 알려준다.

▲  장경사의 법당인 대웅전(大雄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너무 변형을 많이 주어 옛 모습을 다소
잃었다. 1958년 사진과 비교하면 오히려 젊어진 느낌이랄까~~! 저 안에
이곳의 보물인 강희21년명 동종이 들어있으니 꼭 살펴보도록 하자.

▲  대웅전 석가여래3존상
살짝 미소를 던지고 있는 석가여래가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거느리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그들 뒤에는 붉은 색채의 후불탱이 있으며, 그 좌우로 조그만
원불(願佛)이 빼곡히 자리를 채워 장관을 이룬다.

▲  강희(康熙) 21년명 장경사 동종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282호

대웅전 안에는 이곳의 유일한 문화유산인 동종이 있다. 그의 시커먼 피부에는 '강희 21년명~'
글씨가 있어 1682년 3월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종이 작아 보여 거뜬히 들 수 있을
듯 싶지만 그의 무게는 300근(약 180kg)에 이르니 괜한 생각은 하지도 말자.

1907년 왜군이 장경사에서 무기를 압수하고 절을 파괴했는데 그때 동종까지 집어가 삼성동 봉
은사에 넘겨버렸다. 이후 봉은사에서 100년 이상 타향살이를 하다가 2013년 제자리로 돌아왔
으며 2014년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그는 강제로 타지로 넘어간 문화유산이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힘든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꼽히며, 그의 무사 귀환 덕분인지 2014년 6월,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의 지위를 얻
게 되었다. (종의 위치는 절의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음)


▲  장경사 9층사리탑
월정사(月精寺) 8각9층석탑을 많이도 닮은 9층사리탑은 1995년에 조성된 것으로
부처의 사리를 머금고 있다. 그 이전에는 경내에 탑이란 존재가 없어서
무척 허전했었는데, 그를 장만함으로써 허전함이 많이 가셨다.

▲  티벳 불교 스타일로 지어진 동그란 경통(經筒)

경통이란 불경을 넣어두던 통으로 티벳 불교에서 많이 쓰이고 있다. (경통을 티벳어로 '마니
차'라고 함)
우리의 윤장대(輪藏臺)와 비슷한 것으로 손으로 저것을 돌리며 염불을 하거나 소망을 빌면 경
전을 모두 읽거나 이해한 것과 같다고 하며 소망도 이루어진다고 한다. 옛날에는 글자를 모르
는 까막눈이 많다보니 저런 것을 이용해 영업을 한 것이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뒷쪽에 자리한 삼성각은 산신과 칠성, 독성(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  경내 밑에 닦여진 돌탑
돌탑 중앙에 일종의 감실(龕室)까지 갖추고 있어 마치 경주 첨성대(瞻星臺)의
축소판을 보는 듯 하다.

* 장경사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22-1 (남한산성로 676 ☎ 031-743-6548)


▲  돌탑 감실을 장악한 조그만 존재들의 위엄
동자승과 돌하루방, 불상까지 다양한 군상들이 모여 그들만의
조그만 세상을 이루었다.



 

♠  남한산성에서 가장 오래된 절, 망월사(望月寺)
- 망월사지(경기도 지방기념물 111호)

▲  가파른 곳에 세워진 망월사 일주문

장경사를 40분 정도 둘러보고 다시 갈림길(망월사, 장경사 갈림길)로 나왔다. 이번에는 장경
사 때문에 미루어둔 망월사로 길을 잡았는데, 이곳 역시 각박한 경사를 내밀고 있어 숨을 또
헐떡이게 한다. 장경사는 어느 정도 길을 오르면 흥분을 가라앉지만 망월사는 경내 끝까지 가
파른 경사의 연속이라 속세에 은근히 까칠한 모습을 보인다.

장경사보다 더 하늘과 가까운 420m 고지 가파른 곳에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망월사는 남한
산성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남한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
이나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우면서 서울(한양)을 도읍으로 꾸밀 때, 서울에
있던 장의사(莊義寺)를 밀어버리고 그곳에 있던 불상과 금자(金字)로 된 화엄경(華嚴經), 금
솥 등을 수습해 남한산에 망월사를 지었다고 한다.
허나 불교를 신봉하던 이성계가 도성을 닦을 자리에 있었다는 장의사를 밀어버렸다는 것도 그
리 신뢰가 가지 않으며, 서울 4대문 안에는 장의사란 절도 없었다. 다만 창의문(彰義門) 바깥
인 세검정(洗劍亭) 부근에 연산군(燕山君) 때 사라진 장의사가 있어(절터에 당간지주가 남아
있음) 거기서 가져온 것을 봉안하려고 지었거나 기존에 있던 망월사에 옮겨놓고 장의사의 뒤
를 이었다는 식으로 둔갑시킨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처음 이름은 망월암이었다고 하며, 남한산성의 역사가 담긴 남한지(南漢誌)에는 남한산성 9개
사찰 중 가장 늙은 절로 나왔다. 또한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이 쓴 가람고(伽藍考)에는
망월사가 폐사(廢寺)터로 나와 18세기에 잠시 망한 것으로 보이며, 1907년 왜군이 남한산성에
있는 절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강제 폐사되고 만다.
그러다가 1990년부터 폐허의 절터에 중창불사를 일으켜 대웅보전(1994년)과 극락보전(1993년)
, 범종각(2003년), 요사 등 4~5동의 건물을 갖추었으며, 특히 대웅보전과 극락보전, 요사는
하나같이 규모가 장대하여 아직은 조촐한 절의 규모를 능히 커버하고도 남는다. 그 외에 인도
인디라 간디 수상에게서 받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머금은 13층 사리탑이 있다.

남한산성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라 자부하나 소장 문화유산은 하나도 없으며 돌로 쌓은 축대가
곳곳에 남아있고 늙은 대형 맷돌 1기가 전할 따름이다. 또한 절터라고 해봐야 그 위에 모두
건물을 올렸기 때문에 제대로 확인하기가 어려우며, 극락보전 자리가 옛 망월사 법당이 있던
터이다. 현재 망월사는 망월사터란 이름으로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부도, 비석군에서 바라본 망월사 (극락보전과 13층석탑)

망월사는 경사진 곳에 자리해 있어 석축을 다지고 건물을 주렁주렁 지어 올렸다. 그래서 밑에
서 보면 자못 웅장해 보인다. 건물은 몇 채 안되지만 대웅보전과 극락보전 등이 한 덩치를 자
랑하니 더욱 그렇다.
절 뒷쪽은 남한산성 동장대(東將臺) 쪽이나 이어지는 산길은 없으며, 각박한 경사지라 이곳도
사실상 막다른 곳이다. 하여 절을 둘러봤으면 미련 없이 다시 왔던 길로 나가야 된다.

▲  수미당 본견의 부도탑과 망월사 복원에
공헌한 이들을 기리는 공덕비들

▲  옛 법당터 자리에 우뚝 선 극락보전
(極樂寶殿) - 1993년에 지어졌다.

▲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망월사 요사

▲  극락보전 아미타3존상
(아미타불과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  범종을 비롯한 사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각

▲  1994년에 지어진 대웅보전(大雄寶殿)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  망월사의 자랑, 13층사리탑의 위엄

대웅보전 옆구리에 세워진 13층사리탑에는 인도 인디라 간디 수상이 선물한 부처의 진신사리
가 깃들여져 있다. 그러다보니 온갖 정성을 다해 지어올린 망월사의 야심작으로 밑도리 3층은
동그란 모습, 중간의 3층은 8각형, 나머지 윗층은 4각형으로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조각
수법도 매우 현란하며, 최근에 조성된 탓에 피부가 매끌매끌하다.


▲  경내에서 산신각으로 인도하는 계단

▲  바위 밑에 자리한 산신각(山神閣)

망월사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에 산신의 보금자리인 산신각이 있다. 산신각이라 해서 번
듯한 기와집이 있는 것은 아니며, 원래 바위 밑에 그의 노천 거처를 마련했다가 석고를 이용
해 홍예 모양의 굴을 만들어 그 안에 봉안했다.
흑백 피부의 산신은 역시나 같은 피부색인 호랑이 등에 앉아 수염을 어루만지고 있는데, 그
옆에 색이 입혀진 별도의 산신상이 따로 있어 특이하게 2개의 산신상을 간직하고 있다. 허나
덩치 면에서 흑백 산신이 훨씬 우위를 점하며 정면에 앉아있고, 그에게 밀려난 칼라 산신은
뒷전에 있으니 산신 세계도 속세처럼 경쟁이 치열한 모양이다.

산신각 뒤에는 예사롭지 않은 큰 바위와 벼랑들이 포진해 있어 절이 있기 전에도 기도처나 민
간신앙의 애듯한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 망월사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4 (남한산성로 680, ☎ 031-747-3312)
* 망월사 홈페이지는 위의 산신각 사진을 클릭한다.



 

♠  지수당과 연무관

▲  지수당(池水堂)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4호

망월사를 둘러보고 다시 동문으로 내려와 지수당으로 이동했다. 남한산성의 조그만 꽃이라 할
수 있는 지수당은 1672년 광주부윤 이세화(李世華, 1630~1701)가 지었다.
이곳은 연못 3개와 지수당, 관어정 등 정자 2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의 중심인 지수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정자(亭子)로 연못을 바라보며 연회를 즐길 수 있도록 사방이
뻥 뚫려 있다. 허나 20세기 이후 연못 하나는 쥐도새도 모르게 매몰되었고, 관어정 또한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지고 말았다.


▲  지수당 느티나무 (추정 나이 250년, 높이 25m, 둘레 3.5m)

지수당 동쪽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 근래 건강에 이상이 생겨 시름시름 앓던 것을 경기
도와 LG상록재단에서 외과수술을 벌이고 그의 삶터 확보를 위해 울타리를 치면서 생육환경이
크게 개선되었는데, 이후 예전처럼 왕년의 모습을 보이며 지수당에 시원한 그늘을 베푼다.

▲  옆에서 바라본 지수당과 연못

▲  연못 너머에서 바라본 지수당

지수당 동쪽 연못은 지수당을 중심으로 하여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지수당이 있는 대
지가 연못의 중심부로 크게 튀어나와 있어 3면에서 연못을 즐길 수 있도록 했으며, 연못 테두
리를 돌로 정연하게 다져 안정감을 주었다.


▲  동그란 섬을 띄워놓은 지수당 서쪽 연못

지수당 서쪽 연못은 네모난 모습을 하고 있다. 연못 복판에는 동그란 섬을 두둥실 띄워 풍치
를 돋구고 있으니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상징하
는 것 같다.
맨물을 드러낸 동쪽 연못과 달리 겨울 제국이 씌워놓은 두꺼운 봉인(얼음)이 입혀져 있어 봄
이 코앞에 이르렀음에도 아직까지도 겨울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연못 섬은 남한산성
의 유일한 섬으로 소나무들이 바깥 세상의 간섭을 거부하며 그들만의 작은 세상을 일구고 있
다.

지금은 자연의 공간이 되었지만 섬 중앙에는 1804년에 지어진 관어정(觀魚亭)이 있었다. 생전
의 모습을 남기지 못해 생김새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네모난 정자로 여겨지며, 지수당과 마
주보면서 서로 아름다움을 견주었다. 바깥에서 섬까지는 다리를 놓지 않고 조그만 배를 이용
해 섬을 오갔으며, 관어정이란 이름은 중원대륙(서토)의 개허접 소설인 삼국지에 지겹도록 나
오는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이 못에 임(臨)하여 방책을 결정하며 적을 헤아렸다는 고사
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현재 섬으로의 접근은 거의 불가능하며, 연못 바깥에서 그림의 떡처럼 바라봐야 된다. 허나
바깥에서도 섬 내부가 훤히 보이니 굳이 깊은 연못을 무릅쓰면서까지 들어갈 이유는 없다.

* 지수당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24-1


▲  지수당 서쪽 연못과 관어정터를 품은 동그란 섬
섬 중앙에 관어정이 자리하여 동쪽에 있는 지수당을 바라보았다.

▲  연무관(演武館) - 보물 2,154호

지수당에서 산성로터리 방면으로 4~5분 가면 오른쪽 언덕(남한산초교 동쪽)에 기와집 하나가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그가 남한산성 군사훈련장으로 살았던 연무관이다.
연무관은 남한산성에서 가장 늙은 측에 속하는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보기만 해도 시
원스런 팔작지붕을 날개처럼 펄럭이고 있다. 군사 훈련장이라 자못 위엄이 있는 규모로 남쪽
(앞면)은 뻥 뚫려있어 군사 훈련을 지휘하거나 감독하기에 좋다. 나머지 3면은 문이 달린 벽
으로 막혀있으나 건물 뒷쪽은 화살을 쏘거나 창검술을 익히던 곳이었으며 서쪽에는 이아(貳衙
)가 있었다.

이 건물은 1624년 남한산성을 손질했을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처음에는 연무당(演武堂)
이라 불렸다. 그러다가 숙종 시절에 수어사(守禦使) 김재호(金在好)가 건물을 수리하자 숙종
임금이 연병관(練兵冠)이란 편액을 내리면서 연병관 또는 연무관으로 이름이 갈렸다. 정조 때
는 수어영(守禦營)으로 이름이 바뀌기도 했으나 이후로도 쭉 연병관, 연무관으로 불려왔다.
장수와 군사들이 몸을 풀던 훈련장이지만 가끔씩 무과(武科)나 문과(文科)가 열리기도 했으며,
여기서 무예가 뛰어난 사람을 뽑아 서울로 보냈다. 그리고 무기 시연과 주조, 야조 등의 군사
훈련도 이루어졌다.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천정은 연등천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면은 여러 번의 보
수공사로 지금처럼 뚫린 형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연무관은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2021년 12월 국가 보물로 승진되
었다.

▲  연무관 현판의 위엄
1762년에 쓰인 현판으로 글씨들이 마치
군사들이 몸을 푸는 모습 같다.

▲  연무관의 뒷모습
군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하던 곳으로
지금은 무늬만 남아있다.


▲  주춧돌만 일부 남은 이아(貳衙)터

연무관 옆에는 이아 또는 제승헌(制勝軒)이라 불리던 관청이 있었다. 1748년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이아에 있던 작청(作廳)은 중간 관리층인 이방과 아전들이 남한산성과 광주부(廣州府)
관내의 행정 업무를 보던 곳이다.
관리와 민원을 넣는 백성들로 시끌시끌했을 이아는 장대한 세월(왜정 때 없어진 것으로 여겨
짐)에 녹아 없어지고 겨우 터만 희미하게 남아있으며, 그 터의 상당수는 농경지로 쓰이고 있
어 옛 기억 마저 희미하게 만든다.


▲  봄을 향한 몸부림, 연무관 느티나무 - 광주시 보호수 13호, 14호

연무관 밑에는 500년 이상 묵은 느티나무 2그루가 애타게 봄의 해방군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
중 광주시 보호수 13호인 나무는 추정 나이 510년(1983년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는 470년),
높이 23m, 둘레 7m이며, 광주시 보호수 14호인 나무는 추정 나이 550년(1983년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는 510년), 높이 24m, 둘레는 8.9m에 달한다.
아무리 먹어도 고갈되지 않는 세월을 무한리필로 씹어먹어 이렇게 장대한 나무로 성장했는데,
이들도 한때 건강의 적신호가 켜졌던 것을 2008년 LG상록재단의 보살핌으로 생육환경 개선사
업을 받아 예전의 생기를 되찾았다.
3월도 왔으니 빨리 잎을 피워야 되겠지만 겨울 제국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여전히 앙상한
가지만이 가득하다.

* 연무관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400-1



 

♠  한때 남한산성의 중심 사찰이었던 개원사(開元寺)
- 개원사터(경기도 지방기념물 119호)

▲  개원사 일주문인 조계문(曹溪門)

연무관에서 다시 지수당 쪽으로 가다가 지수당 못미쳐에서 남쪽 길로 빠지면 개원사로 인도하
는 길이 살짝 손을 내민다.
절을 목전에 둔 속세의 마지막 유혹이랄까? 온갖 음식 냄새로 사람들의 후각을 희롱하는 식당
들을 지나면 높은 키의 개원사 일주문이 마중을 나온다. '청량산(淸凉山) 개원사 조계문'이라
쓰인 현판을 정면에 내밀고 있어 이곳의 정체를 말해주고 있는데, 여기서 조계문은 일주문의
이름이다.
그런 일주문을 지나면 남옹성(南甕城)으로 유혹하는 산길이 나오고, 곧이어 문짝이 달린 커다
란 문이 길을 막는다. 그 문은 천왕문으로 이 땅에 흔한 천왕문의 모습이 아닌 여닫는 문짝으
로 이루어져 있으며, 문짝에 사천왕(四天王)을 그려 넣어 그런데로 천왕문의 기능을 수행한다.
허나 방패 같은 그 문짝은 차량 통행이나 석가탄신일 등 큰 행사가 있을 때만 열리며, 보통은
오른쪽 문짝에 조그맣게 달린 출입문으로 오가면 된다. (보통 18시까지만 열어둠)


▲  큰 문짝으로 이루어진 개원사 천왕문(天王門)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속세의 기운을 막고자 저렇게 문을 지은 모양이다.

▲  개원사 사적비(事蹟碑)와 절 중창에
기여한 이들을 기리는 공덕비들

▲  구석에서 홀로 오후 햇살을 즐기는
조선 후기 석종형 부도(石鐘形 浮屠)

▲  승장조사전(僧將祖師殿)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병자호란 때 산성을
지켰던 벽암대사의 사당이다.

▲  경내 밑에 자리한 조그만 연못
절 주변 나무들이 연못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있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바로 옆에 절의 내력을 담은 사적비와 절 중창에 기여한 이들을 기리는 공
덕비 등 비석 3기가 때깔 고운 모습으로 나란히 환영을 해준다. 그들을 지나면 왼쪽 숲에 홀
로 자리한 맞배지붕 건물이 홀로 보일 것인데, 그 건물은 승장조사전으로 1624년에 승려들을
독려해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승려의 거처 해결을 위해 산성 안에 여러 절을 지었으며, 병자호
란 때 성을 지켰던 벽암대사(碧巖大師)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있다.
이곳에 이렇게 조사전을 둔 것을 개원사가 조선 후기에 전국 승병을 지휘하던 곳이었기 때문
이다. 지금 건물은 근래 지어진 것으로 절이 비록 뒷전으로 물러나 초야에 묻힌 신세나 다름
이 없지만 한때는 천하 승병을 주름잡고 지휘하던 왕년의 영광을 고스란히 추억하고 있다.

경내 앞에 이르니 개원사 안내문과 돌에 새겨진 2기의 석불입상이 마중을 하고 그 뒤로 개원
사 건물들이 모습을 비춘다.


▲  경내 앞에 자리한 석불입상과 개원사 안내문

앞서 장경사가 남한산성의 가장 동쪽 구석에 자리해 있다면, 개원사는 가장 남쪽 구석에 자리
해 있다. 그러니까 남한산성 성내(城內)를 동에서 남으로 바쁘게 가로지른 셈이 된다.

1624년 남한산성을 보수하려고 전국의 승려들을 징발했는데, 그들에게 산성 수비와 관리의 임
무까지 떠맡기면서 그들의 편의를 위해 1638년에 7개의 절이 새로 지어졌다. 기존에 있는 2개
의 절로는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개원사는 바로 그 7개 절의 하나로 으뜸을 연다는 절의
이름처럼 1894년까지 남한산성 본영(本營) 사찰 및 조선 승병의 총지휘소로 위엄을 떨쳤다.
그리고 전국 사찰의 승풍(僧風)을 감찰하는 규정소(糾正所)의 역할까지 도맡으면서 조선 불교
의 중심격 사찰로 명성을 누렸다.

허나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의승방번(義僧防番)이 폐지되자 승병의 총지휘소, 규정
소의 감투를 강제로 내려놓게 되었으며,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왜군이 남한산성 사찰의 무기
고를 강제로 정리했을 때 개원사에 보관 중이던 화약을 처리하다가 미련하게도 절을 홀라당
태워먹어 졸지에 망하고 말았다. 허나 그것들이 실수가 아닌 고의로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쓰러진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나 1970년에 또 큰 화재가 발생하여 건물 1동을 제외하
고 몽땅 태워먹었다. 이후 선효화상(禪曉和尙)이 신도들과 함께 10여 년 간 불사(佛事)를 일
으켜 대각전과 요사, 범종루 등 건물 다수를 다시 세웠다.

숲에 감싸인 경내에는 법당인 대각전을 비롯해 불유각, 범종루, 승장조사전,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2차례에 걸친 대화재로 절의 장대한 역사와 유물이 죄다 흩어져 지금은 승군
들이 사용했던 유분(鍮盆) 1점과 석장(石杖). 옹기, 함지를 비롯해 석종형 부도, 조선 후기
것으로 보이는 불유각 석불입상, 조선 중기 것으로 보이는 화현전 석불좌상 등이 있다, 그리
고 군기고터와 누각터, 종각터 등의 건물터와 돌계단, 박석 등 옛 흔적이 남아 개원사의 왕년
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또한 지금은 전설이 되어 버렸지만 남한산성 사찰 중, 유일하게 대장경(大藏經)을 지닌 절로
1638년 이후부터 쭉 보관되어 왔다. 그 대장경을 실은 배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서호(西湖)
에 닿았는데, 사람은 없고 배 위에 '중원개원사간(中原開元寺刊)'이라 쓰인 책함만 있는지라
그 말을 들은 소심한 인조(仁祖)는 전국에 개원사란 절을 찾아 봉안하도록 지시했다.
허나 그 이름을 지닌 절이 오로지 남한산 개원사가 전부라 거기에 봉안했다는 거짓말 같은 전
설이 덧붙여 전해온다. 그 대장경은 금란보 10벌에 싸서 애지중지 보관했으나 1970년 화재로
모두 날라가버려 안타까움을 더해준다. 만약 살아남았다면 아무리 못해도 지방문화재의 지위
를 누렸을텐데 말이다.

현재 개원사는 개원사터란 이름으로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절 건물이 버젓이 있
는데도 터를 붙인 것은 대화재로 건물이 몽땅 날라가 새로 지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앞서
망월사도 마찬가지이다.

* 개원사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98-5 (남한산성로 731-73, ☎ 031-743-
  6568)


▲  청기와를 두룬 대각전(大覺殿)
개원사의 법당으로 그 흔한 대웅전이 아닌 크게 깨닫는다는 뜻의
대각전을 칭하고 있다.
 

▲  불유각(佛乳閣)과 화현전(化現殿)

보통 불유각이라 하면 우물이나 샘터가 있기 마련이나 여기는 그런 것은 없고 조선 후기 것으
로 여겨지는 석불입상이 있다. 원래부터 이곳 석불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넉넉한 표정과 온화
한 미소를 머금고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선보이며 중생들을 위로한다.


▲  불유각의 주인, 석불입상
피부에 검은 때가 많이 낀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 늦어도 구한말
석불로 여겨진다. (확실한 정보는 없음)

▲  화현전에 봉안된 누런 피부의 석불좌상
돌에 마치 현신한 듯 진하게 자리한 석불로 조선 중기 석불로 여겨진다. 그 역시
자세한 정보는 없으며, 원래부터 이곳 석불이었는지도 분명치 않다.
 

이름도 참 생소한 화현전은 누런 피부를 지닌 늙은 석불좌상과 산신탱, 독성탱 등이 봉안되어
있다. 석불좌상 뒤에는 색채가 곱게 입혀진 목조후불탱이 든든히 자리해 있으며 중생들이 올
린 쌀과 과일, 과자 등의 음식 제물이 가득하여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이다.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  나무 조각에 색을 입힌 독성탱

▲  대각전 뜨락에 세워진 3층석탑

▲  2층 범종루

개원사를 이리저리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8시 턱 밑에 이르렀다. 마침 아줌마 신도가 나오
더니 곧 문닫을 시간이라고 그런다. 다시는 안와도 아쉽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둘러본 상태라
물론 승군이 사용했다는 조선 후기 유물들은 만나지 못했지만 그런 조그만 것들은 보기도 힘
든 존재들이니 애시당초 포기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그렇게 개원사와 작별을 고하고 다시 산성리로 나와 산성로터리 서쪽에서 열리고 있는 사진전
을 구경했다. 낮이 많이 길어지긴 했지만 18시부터는 어두운 기운이 적지 않게 도사리고 있는
지라 더 이상의 사진 촬영은 어려웠다. (찍어봐야 다 흐리게 나오니)
인근에 자리한 침괘정(枕戈亭)이 잠시 들렸다 가라며 꼬리를 치지만 몸도 좀 지친 상태라 남
한산성과의 그날 인연을 쿨하게 정리하고 성남시내로 나갔다.

이렇게 하여 오랜만에 찾은 남한산성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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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 대성사, 방배동, 우면동 동네 나들이 <성안공 상진묘역, 월산대군태실, 우면동석불, 우면동유적, 식유촌>

우면산 대성사, 성안공 상진 묘역, 우면동 지역(월산대군이정 태실, 형촌 회화나무, 우면동유적, 식유촌 회화나무)



' 서초구 우면산, 우면동 나들이 '

월산대군 이정 태실, 태실비

▲  월산대군 이정 태실, 태실비

대성사 목불좌상 성안공 상진 묘역

▲  대성사 목불좌상

▲  성안공 상진 묘역

 



 

♠  우면산 북쪽 자락에 안긴 조그만 산사, 대성사(大聖寺)

▲  대성사 대웅보전(윗쪽 건물)과 종무소
사진에 보이는 건물이 대성사의 거의 전부라고 보면 된다. 1층에는 종무소와
극락전, 요사, 선방 등이 들어있고, 윗층에 대웅보전을 두었다.


천하 최대의 명절인 한가위(추석)가 다가왔다. 제아무리 즐겁다는 명절이라고 해도 딱히 정처
(定處)도 없고, 할 일도 없으며, 나를 부르는 곳도 솔직히 없다. 하여 심심함도 달랠 겸, 서
울에 일부 남아있는 미답처(未踏處)를 몇 개라도 지우고자 서초구 우면산(牛眠山, 293m)으로
출동했다.

서초구(瑞草區)의 남쪽 지붕인 우면산은 풍수지리적으로 소가 자고 있는 형국(形局)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나 나는 서울의 북쪽 끝, 도봉동(道峰洞)에
있고 우면산은 한강 남쪽 멀리에 있다. 하여 그의 품을 찾으려면 대중교통으로 적어도 1시간
20분 이상은 가야 된다.
예술의전당 뒤쪽에 자리한 대성사를 그날의 첫 메뉴로 정했는데 그곳은 이미 여러 번 인연을
지은 절이다.

▲  시커먼 피부와 똥배를 드러낸
포대화상의 위엄

▲  우면산이 베푼 물로 가득한
대성사 석조(石槽)


대성사는 우면산 북쪽 자락이자 예술의전당 뒤쪽에 자리한 조그만 산사이다. 절에서 내세우는
믿거나 말거나 창건설화에 따르면 384년에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백제에 불교를 전
하고자 백제의 국도인 한산(위례성)을 찾았다. (마라난타의 불교 전래 부분은 역사 기록에 있
음)

서토(西土, 중원대륙)의 무수한 해안 지역과 왜열도를 다스리던 해양대국 백제(百濟) 조정의
넉넉한 대접을 받으며 불교 전파에 매진하다가 그만 풍토병에 걸려 고생을 했다고 한다. (또
는 바다를 건너 백제로 오다가 병에 걸렸다고 함)
그러다가 대성사 자리에 있던 샘물을 마시고 병이 나았고 이에 감동을 먹어 그곳에 대성초당
을 지으니 그것이 대성사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절
이자 백제 불교의 시작점에 세워진 절로 의미가 참으로 깊어 보인다.
허나 아쉽게도 관련 유물과 기록은 전혀 없다. 조선 명종(明宗) 시절에 보우대사가 머물며 불
교 중흥을 구상했다는 이야기 외에는 20세기 이전 역사는 사실상 없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
이다. 다만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하나인 승려 백용성(白龍城 1864~1940)이 이곳에
머문 적이 있어 빨라도 18~19세기에 법등을 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384년 창건설은 대성
사의 부질없는 메아리이자 욕심일 뿐이다.

     ◀  날씬한 모습의 약사여래3층석탑
기단부와 탑신(塔身) 사이에 작게 공간을 내어
조그만 사자상 4기를 배치하고 그 한복판에 약
사여래를 두었다. 그래서 탑 이름도 약사여래3
층석탑이다.

백용성은 이곳에 머물며 만해 한용운(韓龍雲)과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孫秉熙), 기독교 목사
인 길선주(吉善宙), 이필주(李弼柱) 등과 교류하여 종교 화합을 통한 3.1운동 및 민족중흥을
도모했다. 허나 왜정(倭政)은 그를 탄압했고 그 과정에서 절에 불을 질렀다. 이후 중창을 했
으나 6.25때 파괴되었으며, 1954년에 다시 지었다. (백용성의 사리탑은 합천 해인사에 있음)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大雄殿, 대웅보전)을 비롯해 산신각과 요사채 등 4~5동 정도의 건물
이 있으며 대웅전 밑에는 종무소(宗務所)와 요사(寮舍), 납골당 등을 담은 너른 건물을 닦았
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불좌상이 있으나 그 외에 딱히 늙은 존재는
없으며, 경내 앞에 3중으로 이루어진 석조(石槽)가 있어 우면산이 베푼 물로 늘 가득하다.

  ◀  토굴처럼 지어진 산신각(山神閣) 내부
산신각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 등 산신 식구
들이 들어있다. 호랑이와 동자의 표정이 꽤 익
살스럽고 귀여워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에게
한줄기 웃음을 선사한다.

       ◀  용왕대신(龍王大神)의 거처
산신각 옆에는 작게 굴을 파고 용왕패를 봉안
했다.
바다와 전혀 관련도 없는 이곳에 웬 용왕인가
싶겠지만 용왕은 바다뿐만 아니라 강, 샘물 등
천하의 모든 물을 관리한다. 하여 창건설화에
서 샘물을 강하게 내세운 대성사도 샘물의 무
탈함을 빌고자 이렇게 용왕의 보금자리를 마련
한 것이다.


▲  대웅보전에 봉안된 금동석가여래상과 금빛으로 치장된 닫집
석가여래의 표정이 후덕해보여 무슨 소망이든 다 들어줄 것만 같다.
허나 현실은 소망만 듣고 바로 흘려버리는 모르쇠...

▲  대웅보전 앞에서 바라본 천하
서초구와 강남구 지역을 비롯해 남산과 멀리 북한산(삼각산), 도봉산까지
시야에 들어와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의 가성비는 썩 괜찮다.


▲  극락전(납골당)에 봉안된 조그만 목불좌상과 지장보살(왼쪽),
관세음보살상(오른쪽)

▲  대성사 목불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2호

대성사의 유일한 보물인 목불좌상은 종무소가 있는 대웅보전 밑층에 있다. 신발을 벗고 안으
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종무소와 강당 등이 있고, 왼쪽에 문이 닫힌 납골당(극락전)이 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면 된다.

이 목불은 백용성이 20세기 초(1919년 이전)에 대성사에 주석하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허
나 다른 안내문에는 조선 후기(18~19세기)에 조성된 것이라 나와있어 시대가 약간 차이가 있
다. 아마도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을 백용성이 도금을 입혀 이곳에 봉안한 것으로 여겨지며
몸을 앞으로 약간 숙인 조선 후기 양식을 취하고 있다.

높이는 62cm, 어깨 너비 28cm, 무릎 너비 39cm 정도의 작은 불상으로 몸통에 비해 얼굴이 좀
크다. 표정은 좀 우울해 보이며 나발(螺髮) 스타일의 머리 꼭대기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히 솟아있다.
두 눈은 가늘고 코는 오똑하며 붉은 입술은 다물고 있는데 볼에 살이 많아 보인다. 귀는 어깨
까지 늘어져 있고, 몸에 걸친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옷 주름은 간결하게 처리되었다. 두 손
은 가슴 앞에서 각각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취하고 있어
그가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귀뜀해준다. 하여 그의 공간을 극락전(極樂殿)이라 하였다.


▲  목불좌상이 있는 극락전(납골당) 내부
극락전의 낮은 허공에는 납골당에 걸맞게 죽은 영가(靈駕)를 위한 하얀 연등이
빼곡히 들어차 다소 오싹하고 우울한 기분을 준다.


그의 좌우에는 근래 지어진 승려 머리의 지장보살과 보관(寶冠)을 눌러쓴 관세음보살이 앉아
있다. 이들은 중심 불상(목불)보다 훨씬 덩치가 크나 어디까지나 그의 협시(夾侍) 보살에 지
나지 않는다. 그들은 목불과 함께 대웅보전에 있기도 했으나 지금은 극락전에서 영가들을 지
키고 그들의 극락왕생을 책임지는 역할을 한다.

* 대성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산141-7 (남부순환로328길49 ☎ 02-583-1475)
* 대성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대성사 샘터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멀리 도봉산까지 보임)



 

♠  고등학교 안에 자리한 조선 중기 사대부 묘역
성안공 상진(成安公 尙震) 묘역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60호


▲  서쪽에서 바라본 성안공 상진 묘역 (앞쪽이 상진 부부묘)

대성사를 나와서 근처에 있는 성안공 상진 묘역을 찾았다. 이곳은 상진의 3대가 묻힌 사대부
묘역으로 특이하게도 상문고등학교 교내에 들어있다. 즉 학교 안에 늙은 무덤들이 시퍼렇게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후손인 목천상씨 문중에서 조상들의 묘역도 지키고 교육
사업도 벌이고자 무덤 옆에 학교를 세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1969년 학교법인 상문학원을 세워 1970년 1월 상문중학교를 설립했으며, 1972년 상문
고등학교를 설립해 중/고교를 같이 운영하다가 1975년 중학교를 정리하고 고등학교만 운영하
고 있다. (학교 이사장을 상씨들이 맡고 있음) 그래서 천하에서 거의 유일하게 옛 무덤을 간
직한 고등학교가 되었다.

소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교내 북쪽 언덕에 묘
역과 신도비가 있는데 교문을 들어서면 약간
오른쪽 방향으로 그 언덕이 보여 찾기는 매우
쉽다.
묘역은 속세에 공개되어 있는데, 평일과 수업
을 하는 토요일에는 관람이 제한될 수 있으니
수업이 없는 일요일과 휴일에 찾는 것을 권한
다.

◀  상진 신도비를 머금은 비각(碑閣)


▲  성안공 상진 신도비(神道碑)

묘역 북쪽 밑에는 상진의 신도비가 비각 안에 소중히 감싸여 있다. 신도비는 보통 신도(神道)
로 통한다는 묘역 동남쪽에 쓰기 마련이나 이곳은 묘역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어 지형상 동북
쪽에 비석을 두었다.

비석은 꽃무늬가 새겨진 비좌(碑座)와 상진의 생애와 품성이 정리된 비신(碑身), 지붕돌로 이
루어져 있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비좌와 지붕돌은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총 높이 362cm, 비
신 높이 220cm, 너비 106cm, 두께 36cm이다. 1566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碑文)은 손자 손시손
의 부탁을 받은 홍섬(洪暹)이 지었고,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썼던 여성군(礪城君) 송인(
宋寅)이 썼으며, '成安公 神道碑銘'이란 두전(頭篆)은 상진의 2째 사위인 예문관검열 이제신(
李濟臣)이 썼다.
비각은 원래 없었으나 비석의 건강을 위해 근래 씌웠으며 지금은 신도비를 포함한 묘역 전체
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나 처음에는 신도비만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  동쪽에서 바라본 묘역 (앞에서부터 상시손, 상붕남, 상진 묘)

상진 묘역은 상진 부부와 그의 아들 내외, 손자 내외 등 3쌍 6기로 이루어져 있다. 다들 묘표
(墓表)와 상석(床石), 혼유석(魂遊石), 문인석(文人石), 장명등(長明燈) 등을 갖추고 있어 16
세기 사대부의 무덤 양식을 흔쾌히 보여주고 있다.

묘역의 주인공인 상진(1493~1564)은 자가 기부(起夫), 호는 송현(松峴)과 향일당(嚮日堂), 범
허재(泛虛齋)로 아버지는 찰방(察訪)을 지냈던 상보(尙甫)이고, 어머니는 연안김씨(延安金氏)
로 박사(博士)를 지낸 김휘(金徽)의 딸이다.
그의 집안은 부여 임천 지역의 큰 부자로 증조부인 상영부(尙英孚)는 이자놀이로 크게 배를
불렸다. 허나 말년에 부질없음을 깨닫고 차용증서를 모두 불태워 지역 사람들에게 크게 칭송
을 받았는데, 이후 상진의 벼슬이 높아지자 주위에서 증조부의 선행 덕분이라고 칭송을 했다.

일찍 부모를 잃어 8살 때부터 큰 누님집에서 살았는데 누님의 남편은 하산군(夏山君) 성몽정(
成夢井)이다. 공부와 완전히 담을 쌓으며 말타기와 활쏘기 등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친구
와 주위 사람들로부터 '부모도 없는 아이라서 공부도 안한다!!'는 식으로 개무시를 당하자 너
무 열받은 나머지 15세에 늦깎이 공부를 하여 겨우 10개월 만에 글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1516년에 생원시(生員試)에 붙었고, 1519년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예문관검
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이어서 봉교(奉敎), 예조좌랑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특
진되었다.
1528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는데, 당시 영경전(永慶殿)에서 거행된 세자의 친제(親
祭)에 병으로 불참했다가 탄핵을 받아 물러났다. 이후 재기용되어 장령과 홍문관교리(弘文館
校理) 등을 역임했으며, 지방 관리의 탐학을 제거할 것과 농촌 진흥책을 건의했다.
1533년 대사간(大司諫)이 되었고 이어서 부제학(副提學),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내면서 언
론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형조참판(刑曹參判)과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민정을 살폈다.

1539년 중종(中宗)의 특명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었는데 전
례가 없는 특진이라며 사간원(司諫院)의 탄핵을 받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체직(遞職)되
었다가 대사헌이 되었다.


▲  묘역 위쪽에 자리한 상진과 전주이씨 부부묘
상진 부부묘는 봉분 밑도리에 특별히 호석(護石)까지 둘렀다.
(상붕남, 상시손 묘에는 호석이 없음)


1543년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고, 1544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병조판서(兵曹判書
)가 되었다. 중종의 신임으로 우찬성(右贊成)에 제수되었으나 대간의 탄핵으로 지돈녕부사(知
敦寧府事)에 체직되었으며, 얼마 뒤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윤원로(尹元老)와 결탁한 전력으로
인종(仁宗) 즉위와 함께 경상도관찰사로 떨려났다.

1545년 명종(明宗)이 즉위하고 이기(李芑) 등이 권력을 잡자, 그의 천거와 문정왕후(文定王后
)의 후원으로 병조판서에 중용되었으며, 마정(馬政)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실시에 노력했다.
1548년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우찬성이 되었으나 질병으로 사임했으며, 1549년에 이기와
윤원형(尹元衡)의 추천으로 이조판서가 되었고, 이어 우의정에 올랐다.
이때부터 이기, 심연원(沈連源) 등과 국정을 주관했는데, 문정왕후가 주장한 양종(兩宗) 설립
에 온건론을 펴서 유생들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부민고소법(部民告訴法)을 실시해 민원을 살폈으며, 1551년 좌의정(左議政)에, 1558년에 영의
정(領議政)이 되어 5년 동안 국정을 이끌었다. 이때 황해도 평산에서 임꺽정(林巨正)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했으며, 사림(士林) 패거리들을 적극 등용하기도 했다.
이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전임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궤장(几杖)을 하사받
았다. 그리고 1564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니 명종은 성안(成安)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그
를 위해 도노덕대신(悼老德大臣)이란 시를 짓게 했다.

▲  상진 묘역 우측 문인석과 망주석
고된 세월에도 표정과 하얀 피부는
여전하니 그 비결이 궁금하다.

▲  상진 묘역 좌측 문인석과 망주석
그들 뒤로 보이는 기와집에 상진 신도비가
들어있다.


그는 매우 청렴하여 주로 오두막살이를 했는데 윤원형이 사람을 보내 먹을 것이 풍족한지 염
탐케 했다. 마침 하인이 맷돌에 통밀을 갈고 있어서 물어보니
'우리 나리는 죽으로 저녁을 때웁니다'고 했다. 또한 집에 도둑이 침투하자 그를 잡았는데 관
청에 넘기지 않고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남의 물건에 손 대지 말고 나를 찾아오시오' 타이르며 물건을 쥐
어 보냈다.

상진은 성품이 넉넉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남의 말을 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가 16년 동안 정
승을 지내면서 세운 업적은 그 시절 황희(黃喜), 허조(許稠) 다음 수준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그가 살았던 남대문로3가(남창동) 일대를 상정승골, 상동(尙
洞)이라 불렀으며, 영조 임금도 이곳을 지나갈 때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전한다.

그는 그의 자식들에게 너무 과거 급제와 출세
에 매진하지 말라며 이런 걸쭉한 말을 남겼다.
(연려실기술에 실려있음)

'세상에는 과거에 낙제하고 상심하는 사람이
있다. 허나 어찌 대장부가 시험관 한 사람의
눈으로 결정한 것을 두고 걱정하고 즐거워하
겠는가. 이런 연연함의 폐단이 차츰 벼슬도
잃을까 근심하는데까지 이른다. 하지만 그릇
이 이 정도에 머물면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  세월을 너무 예민하게 타서 검은
피부가 되버린 상진 묘표(묘비)

  ◀  상붕남(尙鵬南)과 전주이씨 부부 묘표
상붕남(1511~1542)은 상진의 아들이다. 유우(
柳藕)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경사(經史)에
밝고 예서(隷書)에 능했으며 음보(蔭補)로 관
직에 등용되어 판결사(判決事)까지 지냈다.
허나 벼슬에 별로 뜻이 없어 시서(詩書)로 일
생을 살았다고 전한다.

   ◀  상시손(尙蓍孫)과 청송심씨 부부묘
상시손(1537~1599)은 상진의 손자이자 상붕남
의 아들이다.
군자감 판관(軍資監 判官)을 지냈으며 죽은 이
후 정3품 사복시정에 추증되었다.
조선 10현상(賢相)의 하나로 격하게 추앙을 받
던 상진이었으나 그의 아들과 손자는 눈에도
거의 띄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수준이었다.

   ◀  상시손 묘 망주석과 검게 탄 동자석
상진과 상붕남묘에는 문인석을 두었으나 상시
손묘에는 난쟁이 반바지 반 접은 정도의 작은
동자석이 그 자리를 대신해 잘나갔던 집안의
무덤치고는 소박한 모습을 보인다.
상시손이 크게 벼슬을 하지 못한 탓도 있으나
상진이 벼슬에 너무 연연치 말고 청렴하게 살
것을 후손에게 부탁했으므로 그 영향도 있다.

* 성안공 상진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 1002 (명달로 45)



 

♠  우면동의 여러 명소들

▲  월산대군 태실을 품은 태봉(태봉근린공원)

우면산 동남쪽에는 서초구의 일원인 우면동(牛眠洞)이 자리해 있다. 서초구의 서남쪽 끝이자
경기도 과천시와 살을 맞대고 있는 변두리로 우면산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는데, 형촌과 식
유촌, 송동, 성촌 등 12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시골이었으나 개발의 칼질이 요란하게 춤을
추면서 주택과 아파트들이 마구 들어섰다. 비록 적지 않게 성형은 되었으나 우면산 자락에 자
리해 있고 녹지가 많아서 전원 분위기는 조금 남아있다.

우면동 한복판에는 태봉이란 조그만 언덕이 있다. 우면지구를 개발하면서 언덕 주변을 손질하
여 태봉근린공원(이하 태봉공원)으로 삼았는데, 그 언덕 정상에 태봉의 주인인 월산대군 태실
이 조용히 자리해 있다.


▲  월산대군 태실로 인도하는 숲길 - 수풀의 패기가 가히 천하를 찌른다.

태실로 가는 산길은 수풀이 살벌하게 우거져서 그렇지 경사는 거의 느긋하다. 숲으로 들어서
니 깊은 산골에 들어선 듯 공기부터가 다르며, 강렬한 햇살도 숲의 기운에 눌려 옆으로 비켜
간다. 공원에서 3분 정도 오르면 그 산길의 끝에 태실이 모습을 비춘다.


▲  월산대군 이정(月山大君 李婷) 태실 - 서울 지방기념물 30호

태봉 정상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월산대군 태실은 태실비(胎室碑)와 석함(石函) 1기로 이루어
져 있다.
태실(胎室)이란 왕족의 탯줄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탯줄을 버리지 않고 태항아리에 넣어 특별
히 엄선된 명당(明堂) 자리에 봉안한다. 조선의 군주는 총 27명, 그들의 아들, 딸까지 합치면
수백 명이 넘으니 태실도 그만큼 조성되었을 것이다. 허나 정작 서울 토박이 태실은 월산대군
태실이 유일하다.

태실비는 난쟁이 반바지를 2번 접은 정도의 매우 작은 크기로 비신(碑身)과 비석 받침이 하나
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신 앞면에는 '월산군정태실(月山君婷胎室)'이라 쓰여있어 태실의
주인을 알려주고 있으며, 뒷쪽에는 '천순6년 5월18일 입석(天順六年五月十八日 立石)'이라 쓰
여있어 1462년 5월에 세웠음을 속삭이고 있다.
태항아리를 머금던 석함은 바깥에 노출되어 있는데, 안에 담긴 태항아리와 지석(誌石)은 왜정
때 싹 털려 지금은 왜열도 아타카(安宅) 콜렉션에 갇혀 있는 실정이다. 그 항아리가 희소가치
가 대단했던지 왜열도의 어느 미술잡지에 세상에 딱 2개 밖에 없는 희귀한 항아리로 소개되기
도 했다. <항아리의 출처도 나와있음 '조선 시흥군 신동면 우면리(현 우면동)'>

서울 유일의 태실이자 제자리에 원형대로 남은 태실이고, 조선 왕실의 안태(安胎) 의식이 담
긴 현장으로 2010년에 서울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럼 월산대군은 누구일까?

월산의 이름은 이정, 자는 자미(子美), 호는 풍월정(風月亭)이다. 1454년 세조(世祖)의 맏아
들로 일찍 죽은 덕종(德宗, 추존된 묘호)과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성종의 친형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할아버지인 세조의 귀여움을 받으며 궁궐에서 자랐다. 1460년 월산군(
月山君)에 봉해졌고, 1468년 동생인 잘산군(乽山君)과 함께 현록대부(顯祿大夫)가 되었다.
1469년 작은아버지인 예종(睿宗)이 승하하자, 왕위 계승 1순위로 지목되었으나 한명회(韓明澮
)와 소혜왕후의 뜻으로 동생인 잘산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성종이다. 성종은 형을 달래고자
1471년 월산대군으로 급을 올렸으며, 그해 3월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봉하여 전지(田地
)와 노비, 구사(丘史) 등을 넉넉히 주는 등 성의를 보였으나, 왕위 계승에서 밀려나 좌리공신
이나 받아야 되는 자신의 처지에 열불이 나 자연으로 뛰쳐나가고 만다.

월산은 양화도(楊花渡, 양화대교 주변) 북쪽 언덕에 있는 희우정(喜雨亭)을 수리해 망원정(望
遠亭)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살림을 차려 매일 책을 읽고 시를 지으면서 팔자 좋은 삶을
누렸다.
그러다가 어머니(소혜왕후)가 병에 걸리자 입궐하여 극진히 간병을 했는데 너무 무리를 했는
지 그만 1488년, 3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인은 평양군(平陽君) 박중선(朴中善)의 딸로 소생은 없었으며, 첩을 통해 아들 2명을
얻었다. 또한 1473년까지 집에 별묘(別廟)를 세워 아버지 덕종의 제사를 주도했으나 덕종이
종묘(宗廟)에 봉안되면서 그의 위치는 종실의 일부로 떨어지게 된다.

월산은 학문을 좋아해 왕족을 위한 종학(宗學)에서 열심히 공부를 했고, 경사자집(經史子集)
을 두루 섭렵했다. 성품은 침착 결백했고, 술과 산수를 좋아했으며 부드럽고 율격(律格)이 높
은 문장을 많이 지었다. 속동문선(續東文選)에 그의 시가 여럿 실려 그의 시심(詩心)을 보여
주며, 저서는 풍월정집이 있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월산의 저택은 지금의 덕수궁(德壽宮, 경운궁) 자리에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도망친 선
조(宣祖)와 신하들은 1593년 2월 서울로 돌아왔으나 궁궐이 모두 파괴된 상태라 머물 곳이 여
의치 않았다. 이에 선조는 크게 발작을 하며 거처를 찾으라고 다그쳤는데 다행히 월산의 저택
이 멀쩡하게 살아있어 그곳을 임시 궁궐로 삼고, 주변 집을 몰수해 궁역(宮域)에 넣었다. 그
것이 바로 덕수궁<경운궁(慶運宮)>의 시작이었다. 이후 궁궐을 보수하면서 월산의 집은 철거
되었으며, 현재 덕수궁을 메운 건물은 모두 고종(高宗) 때 지어진 것이다.

▲  동남쪽에서 바라본 태실과 태실비

▲  서쪽에서 바라본 태실과 태실비

석함에 담겼을 그 귀한 알맹이는 언제나 제자리에 돌아올 수 있을까? 안그래도 작은 태실, 알
맹이까지 강제로 털렸으니 태실의 우울한 그늘은 언제나 거두어질지 모르겠다.

* 월산대군 이정 태실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초구 우면동 291-1


▲  형촌마을 회화나무 - 서울시 보호수 22-28호

태봉 북쪽에는 형촌(荊村)마을이 자리해 있다. 1740년대에 풍양조씨가 들어와 터를 닦은 마을
로 당시 이곳에 가시덤불이 무성하여 가시내꿀(또는 샛말)이라 불렀는데, 그것을 한자로 표시
해 형촌마을이 된 것이다.
풍양조씨의 집성촌(集姓村)으로 현대까지 이어오다가 1963년 경기도 시흥군(始興郡)에서 서울
로 편입되었으며, 강남 개발 이후 마을 개량 사업을 벌여 지금에 이른다. 개량 사업으로 인해
주민 절반 이상이 마을을 떠났고 그 틈을 타 외지인들이 대거 들어왔다. 하여 토박이 주민의
평범한 주택과 졸부들의 현기증 나는 저택과 빌라가 공존하는 어색한 현장이 되었다.

형촌에는 수백 년 묵은 보호수 2그루(회화나무와 돌배나무)와 석불, 성정승묘, 우면산 자연생
태공원 등의 명소가 있는데, 마을 한복판에 자리한 회화나무는 약 230년 묵은 나무로 높이 12
m, 둘레 280cm이다. 골목길 중앙에 자리해 있고 그 좌우로 주택들이 바짝 붙어 있어 나무의
생육 공간은 넉넉치 못하다. 마을의 오랜 내력을 알려주는 존재라 예우 차원에서 나무 주변을
공원으로 꾸며 마음 편히 살게끔 해주는 것이 마땅하나 사람들의 욕심이 그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것이다. 하여 골목길 중앙과 집들 사이에 어정쩡하게 자리해 나무와 사람, 차량 서로가
불편하게 되었다.


▲  회화나무 그늘에 깃든 우면동 석불 (동자상미륵)

회화나무 북쪽 그늘에는 조그만 석불이 우두커니 서 있다. 이곳에선 마을을 지키는 신령한 힘
을 지닌 동자상 미륵 또는 미륵불(彌勒佛)로 여기며 신성시하고 있는데 예전에는 그에게 제를
올렸다.
허나 토박이 주민들이 많이 빠져나갔고 우면동의 오랜 무형자산인 우면두레도 희미해진 상태
라 그에 대한 숭상심도 많이 떨어져 나무의 밑도리나 뚫어지라 바라보며 떨어지는 나뭇잎이나
맞아야 되는 우울한 신세가 되었다. 만약 그에 대한 숭상이 여전했다면 그를 위한 집을 세우
던지 무슨 배려를 했을 터인데 그런 것은 없다. 그러니 석불은 마냥 나무에 의존하고 있다.

석불의 높이는 1m 정도로 그나마 밑도리는 땅 속에 묻혀있다.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모
르겠으나 나무 밑도리를 바라보게 배치한 것도 이상하며 밑도리도 모두 끄집어내 온전한 모습
으로 세상 앞에 섰으면 좋겠는데, 마을 사람들이나 서초구청, 서울시에서 그런 의지까지는 없
는 모양이다.
그의 얼굴은 마모가 심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얼마나 울었길래 얼굴이 죄다 지워진 것일
까? 그저 얼굴과 귀의 윤곽만 확인이 가능하다. 머리에는 돌갓을 쓰고 있는데 고려와 조선의
많은 미륵불들이 돌갓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미륵불로 조성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조성시기는 조선 너머까지는 갈 것 같지는 않고 형촌마을이 형성된 1740년대 이후 마을 수호
신으로 세웠을 가능성도 있으나 얼굴이 저 지경이 된 것을 보면 다른 곳에서 불우한 시간을
보내며 방치되어 있던 것을 이곳으로 가져와 마을 수호신으로 삼았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설
마 마을 사람들이 그의 얼굴에 못된 짓을 했을 리는 없을 것이고, 돌갓을 쓰고 있으니 자연의
괴롭힘의 의한 얼굴 훼손도 적을 것이다.

그가 동자상미륵이 된 것은 키가 어린이처럼 작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거의 유일한 동네 미륵
불로 서울시에서는 그에 대한 조사를 벌여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씌워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의 어두운 얼굴도 조금은 밝아지지 않을까?

* 형촌 회화나무, 석불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초구 우면동 218-4


▲  망루근린공원 정상에 자리한 정자 쉼터

형촌마을에서 형촌천을 따라 펼쳐진 산책로를 타고 바깥으로 나오니 서초네이처힐2단지 서쪽
에 자리한 망루근린공원(이하 망루공원)이 마중을 한다. 처음에는 이 땅에 흔한 근린공원으로
여겨 넘어가려고 했으나 공원 안내도를 보니 그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겉보기와 달
리 이곳에는 구석기시대부터 근대까지 여러 시대를 초월한 유적이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 유적은 우면동 유적이라 불리는데, 망루공원을 중심으로 태봉 주변과 서초네이처힐단지
에 분포되어 있다.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다가 2008년 이후 우면지구와 우면산터널 도로를
닦는 과정에서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는데, 2010년까지 발굴조사를 거치면서 수백 점의 유물
이 쏟아져 나왔으며, 발굴이 끝나자 유적이 집중적으로 나온 서초네이처힐2단지 서쪽을 공원
으로 꾸며 망루공원으로 삼았다.
허나 유적은 모두 흙과 수풀로 덮었고, 그 위에 조그만 표지를 세운 것이 전부라 이곳이 유적
지란 기분이 거의 나질 않는다. 일부 유적에 한해 속살을 드러내고 유리 보호막을 설치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 부분이 참 아쉽다. 게다가 망루공원 외에 유적은 아파트와 도로로 죄다 밀어
버려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땅의 개발의 칼질은 참으로 천박하기 그지 없어 옛 유적이고 사람이고 죄다 갈아버리는 못
된 습성이 있는데 우면동 유적은 그나마 2년 동안 발굴조사라도 했고, 일부는 공원이 되면서
그런데로 살아남아 다행이다.

이곳 유적은 구석시시대 사람들의 흔적이 묻어난 문화층부터 신석기시대 야외 화덕 자리, 백
제와 신라의 마을 유적과 무덤 흔적, 신라 후기부터 고려까지 이용되었던 논과 물길의 흔적,
조선시대 구들과 무덤, 기와가마터, 근대 수레길 등이 확인되었다. 구석기 문화층은 태봉 남
쪽과 동쪽에서 나왔는데, 긁개와 밀개, 여러 석기들이 출토되었다. 이곳이 발견됨으로써 서울
의 구석기 유적은 면목동(面牧洞) 유적과 함께 2개가 되었으나 아쉽게도 둘 다 개발의 칼질로
사라졌다.
백제시대 마을 유적은 망루공원 일대에서 11동의 집자리가 확인되었는데, 그중 4호 집자리가
이들 마을 유적의 중심부이다. 여기서는 항아리와 시루, 병, 굽다리 접시, 뚜껑, 장군, 납작
밑단지 등의 토기가 나왔고, 도끼, 끌, 손칼, 화살촉, 창의 물미 등의 철제품과 가락바퀴, 소
형 절구 등의 석물도 나와 당시 생활상을 알려준다. 특히 재가 나온 집터가 많아 화재로 소실
되었음을 알려주는데 아마도 백제와 고구려, 신라와의 전쟁에서 파괴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백제와 신라의 무덤도 여럿 나왔는데, 공교롭게도 집자리 유적과 같은 언덕에서 발견되
었다. 무덤은 마을이 사라진 이후 들어선 것으로 백제의 무덤은 2기가 나왔는데 모두 굴방무
덤이다.
백제 1호분은 네모진 돌방과 다른 돌방으로 연결되는 널길이 덧대어진 모양으로 돌방은 길이
330cm, 너비 336cm이다. 이들 묘는 귀족이나 지방 세력의 묘로 여겨지는데, 돌방 바깥 위쪽에
는 눈썹 모양의 도랑이 둘러져 있으며, 살포와 도끼낫, 창의 물미를 비롯한 여러 철제 유물과
관못, 꺽쇠 등도 나와 목관(木棺)을 사용했음을 알려준다.
신라의 무덤은 신라 중기부터 후기에 이르는 것들로 앞트기식 돌방무덤이 주류를 이룬다. 여
기서는 굽다리사발과 둥근밑항아리, 손칼 등이 발견되었다.


▲  백제시대 집터 1호 자리

망루공원 정상에는 조촐한 정자 쉼터가 있다. 그 안에는 여기서 발견된 삼국시대 마을 유적과
무덤 유적에 대한 설명문, 유적과 출토유물 사진이 걸려있어 이곳에 대한 이해를 조금이나마
도와준다. 정자 주변에는 집터와 고분이 발견된 자리에 조그만 표시를 설치했는데, 유적은 모
두 흙과 수풀로 덮어버렸다.

구석기부터 근대까지 수천 년의 흔적이 복합적으로 담긴 이 땅에서 흔치 않은 유적으로 국가
사적이나 적어도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부여하여 어엿한 사적(史蹟)공원으로 꾸몄으면 좋겠다.
그냥 이렇게 조그만 동네 공원의 일부로 썩히기에는 장대한 세월을 이어져 내려온 그들 유적
이 너무 아깝다.

▲  삼국시대 석실묘 6호 자리

▲  백제시대 집터 5호 자리

▲  백제시대 집터 4호(왼쪽)와
6호(오른쪽) 자리

▲  삼국시대 석실묘(石室墓) 1호 자리

▲  시대가 아리송한 석곽묘 1호 자리

▲  시대가 아리송한 석곽묘 2호 자리


▲  식유촌(植柳村) 회화나무 - 서울시 보호수 22-5호

우면동에서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망루공원을 보너스로 둘러보고 과천 방향 47번 국도(중앙로
)를 따라 식유촌으로 이동했다.
식유촌은 우면동의 서쪽 끝이자 서초구의 서남쪽 끝에 자리한 시골마을로 경기도 과천시가 바
로 코앞이다. 마을 이름은 버드나무를 심는다는 뜻으로 우마니(우면동의 옛 이름) 마을 근처
인 이곳에 버드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해서 유래되었다. 허나 마을 이름과 달리 버드나무는 없
다 싶이 하여 그 이름은 무색해졌다. (종종 이름을 혼돈하여 석유촌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음)
 
식유촌에는 마을의 장대한 내력을 알려주는 늙은 회화나무가 있다. 그는 약 360년 묵은 나무
로 높이 18m, 둘레 3.8m에 이르며 예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존재로 1945년에 나무에서 구렁이
4마리가 튀어나와 사방으로 사라졌다고 하며, 이내 해방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식유촌 회화나무를 끝으로 우면산, 우면동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식유촌 회화나무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초구 우면동 5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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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의 꿀명소를 거닐다 ~ 진천 농다리, 보련산 보탑사, 연곡리석비

진천 농다리, 보탑사



' 진천 농다리, 보탑사 봄맞이 나들이 '

진천 농다리
▲  진천 농다리

보탑사 3층목탑

보탑사 금동와불

▲  보탑사 3층목탑

▲  보탑사 금동와불

 



 

반년 가까이 천하를 주름잡던 겨울 제국과 그 겨울로부터 천하를 해방시키려는 봄이 마
지막 자웅을 겨루던 3월 한복판에 일행들과 충북 진천을 찾았다.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하여 엄청난 출근 차량의 버벅거림을 간신히 뚫고 진천(鎭川) 땅
에 들어섰는데, 그동안 진천은 그저 지나가기만 했지 제대로 둘러본 적은 없었다. 하여
제일 먼저 진천을 찾아 그곳에 깃든 미답처(未踏處)를 몇 개라도 지워보기로 했다.

오전 10시 경, 문백면에 자리한 농다리에 도착했다. 아직은 아침에 가까운 시간이고 농
다리가 발을 담군 미호천에서 물연기도 살포시 피어올라 이른 아침의 청명한 기운이 고
스란히 남아있었다.



 

♠  천하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 - 진천 농다리(籠橋)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8호

▲  서쪽에서 바라본 농다리

진천 구산동리에는 천하에서 가장 늙은 돌다리로 추앙을 받는 농다리(농교)가 미호천(세금천)
에 발을 담구며 정정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농다리는 약 94m 길이의 돌다리로 28개의 마디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마디는 다리 교
각과 같은 존재로 길쭉한 마디 사이에 길이 1m 정도의 통돌을 1~2개 정도 얹혀 다리로 삼았는
데, 각 마디마다 통돌이 일직선으로 놓여있지 않고 아주 약간 구부러진 'S'자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크고 작은 돌<자석(紫石)이 많이 사용됨>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은 다음, 지네
모양처럼 길게 만들었는데, 석회 등을 바르지 않고 오로지 순 100% 돌로만 쌓았다.
교각 마디를 굵게 지었고 지역 사람들이 꾸준히 다리를 보살펴 다리가 크게 무너지는 등의 피
해는 없었다고 하며, 지금도 무난히 다리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농다리를 시기하던 대자연
이 1,000년 이상 비와 눈, 바람을 억수로 퍼부으며 다리를 헝클어뜨리려고 애를 썼지만 지금
까지 28칸의 마디 중 3칸을 지우고, 하천의 수심을 얕게 만들어 원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려워
진 정도가 전부이다. (예전에는 어른이 서서 다리 밑을 통과할 정도였으나 지금은 수심이 많
이 얕아짐;) 그 정도의 피해를 제외하면 거의 양호한 수준이며, 다리가 떠내려가거나 붕괴된
적은 없었다.
그저 자연석으로 구축된 아주 단순해 보이는 돌다리임에도 수십 년을 견디지 못하고 앉은뱅이
가 되버리는 요즘 건축물보다 더 단단하니 옛 사람들의 건축 실력과 농다리의 근성이 신기롭
고 두려울 따름이다.

그렇다면 이 다리는 언제 지어졌을까? 진천의 향토사를 다룬 상산지(常山誌)와 왜정(倭政) 때
이병연(李秉延)이 쓴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따르면 '고려 초 임장군(林將軍)이 축조
했다고'고 쓰여있다. 여기서 임장군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진천 지역의 유력한 세력가로
보이며 통행 편의를 위해 백성들을 동원하여 1,000년 전에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다리 이름이 농다리가 된 것은 단순히 길다는 뜻에 농(long)이 아니라 교각 마디마다 돌을 쌓
으면서 밟으면 움직이고 잡아 당기는 돌이 있어서 농다리라 불리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이 땅
에서 가장 늙은 돌다리이자 다른 돌다리와 완전히 구별되는 특이한 양식을 지니고 있으며, 건
강도 양호하여 고려 초 다리 건축을 연구하는데 아주 착한 자료가 되어준다.
특히 고려 후기 이전 돌다리가 거의 없는 실정에서 매우 희소가치가 높다. 허나 그럼에도 불
구하고 아직까지 지방문화재의 지위에 머물러 있으니 그 이유가 갸우뚱할 따름이다. 국가 지
정 보물이나 사적으로 삼아도 손색이 없는데 말이다.

시골 구석의 늙은 돌다리로 조용히 묻혀 지내던 농다리는 2,000년대 이후 진천군에서 격하게
띄워주면서 이제는 진천 제일의 명소이자 꿀단지로 크게 명성을 누리고 있다. 장대한 세월이
훔쳐간 마디 3칸을 복원하여 예전처럼 28칸으로 회복했으며, 다리 주변에 주차장과 쉼터, 미
르숲을 닦았다.
하여 주말과 휴일만 되면 농다리의 위엄을 보고자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며, 매년 5
월에는 농다리 일대에서 진천의 주요 축제인 '생거진천농다리축제'가 열린다.


▲  동쪽에서 바라본 농다리

농다리가 튼튼하긴 하나 돌로 닦여진 다리라 길이 꽤 울퉁불퉁하다. 게다가 마디(교각) 사이
에 통행을 위한 통돌을 1~2개 붙여놓은 것이 고작이라 반대 방향으로 가는 사람과 마주친다면
괜히 다리를 두고 서로 으르렁거리지 말고 먼저 쿨하게 양보하기 바란다.
그렇게 돌다리를 건너면 진천군청이 현대모비스와 자연환경국민신탁 등과 닦은 미르숲에 이른
다. 미르숲은 농다리 수식용으로 지어진 공원으로 천년정과 농암정, 인공폭포, 징검다리, 쉼
터, 야외음악당, 산길, 미르전망대 등이 닦여져 있으며, 여기서 고개를 하나 넘으면 바로 진
천의 대표적인 호수로 명성이 자자한 초평저수지(미호지)가 모습을 비춰 시간이 넉넉하면 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기를 권한다. 다만 초평저수지는 덩치가 꽤 크기 때문에 전체를 둘러보
는 것은 좀 무리가 있으며, 농다리와 이웃한 서쪽 부분과 하늘다리만 둘러보면 충분하다.

▲  마디(교각) 사이에 걸린 2개의 통돌

▲  마디를 이어주는 좁은 통돌

▲  서로 비슷한 모습을 지닌 2개의 통돌

▲  농다리의 단잠을 깨우는 중부고속도로

농다리 서쪽에는 중부고속도로가 흐르고 있다. 통행 수요가 겁나게 많은 도로라 차량들의 질
주 본능 소리로 귀가 따가울 지경인데, 고속도로와 바로 이웃하고 있어 서울 방향(상행선)으
로 이동할 때, 잠시 오른쪽을 살펴보면 농다리가 눈인사를 건넬 것이다. 그렇다고 갓길에 아
예 바퀴를 접고 구경하지는 말자. 갓길은 긴급시를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  미호천의 물살이 혼돈을 이루고 있는 농다리 (천년정에서 바라본 모습)

▲  지네가 징그럽게 기어가는 듯한 모습의 농다리
(동쪽 윗쪽에서 바라본 모습)

▲  농다리를 쌓은 이들의 아련한 흔적, 임장수와 말의 발자국

농다리 동쪽에는 바위들이 주름선을 이루고 있는 조그만 계곡이 있다. 그 계곡에 붉은 피부의
화살표가 밑을 가르키고 있는데, 그곳에 임장수와 말의 발자국이라고 전하는 흔적이 서려있어
다음과 같은 전설을 살짝 귀띔해준다.

때는 고려 초 어느 날, 임장군이 농다리를 만들고자 큰 바위를 짊어지고 말을 탄 채, 용고개(
살고개)를 내려오고 있었다. 농다리에 거의 다 와 갈 무렵, 말이 바위 무게에 너무 지친 나머
지 잠깐 주춤하더니 그때 발을 디딘 바위가 움푹 들어가 말의 발자국이 생겼다. 하여 말이 움
직일 수 없게 되자 임장군이 바위를 든 채, 말에서 뛰어내리니 그가 발을 디딘 곳에도 장군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생겨났다고 한다.
물론 이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다. 하지만 임장군을 바위도 거뜬히 드는 괴력의 사나이로 꾸
밀 정도면 그에 대한 지역 사람들에 높은 추앙을 엿볼 수 있으며, 말이 지쳐 발자국이 생겼다
는 전설은 다리 축조가 그만큼 고단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또한 이들 흔적은 다리를 만드
는 과정(석재를 캐던 현장 정도)에서 생겨난 것으로 여겨진다.


▲  농다리의 신선한 양념, 1칸짜리 천년정(千年亭)
정자의 이름이 천년이 된 것은 별 이유 없다. 농다리가 1,000년 이상 숙성된
늙은 돌다리라 그를 기리고자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  미호천 산책로에서 바라본 농다리와 중부고속도로

▲  미호천 산책로에서 바라본 북쪽 징검다리

농다리에서 미호천을 따라 북쪽으로 산책로가 닦여져 있다.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바로 징
검다리에 이르게 되는데, 보통 농다리를 찾으면 농다리를 건너 징검다리로 원점회귀하는 코스
로 많이 둘러본다. 시간이 넉넉하면 여로(旅路)도 좀 살찌울 겸, 바로 이웃에 자리한 초평저
수지로 잠깐 넘어가도 되겠지만  우리는 진천부터 경북까지 둘러볼 곳을 많이 잡은 관계로 그
냥 징검다리로 돌아왔다.


▲  농다리와 징검다리를 이어주는 미호천 동쪽 산책로

▲  미호천 산책로에서 바라본 농다리와 중부고속도로

▲  21세기판 농다리? 농다리 북쪽에 닦여진 징검다리

징검다리는 미호천에 촘촘히 박힌 큰 돌로 이루어져 있다. 농다리 주변을 꾸미면서 닦은 다리
로 한참이나 선배인 농다리와 서로 경쟁하는 듯 하다. 허나 농다리의 위엄 앞에 이제 10~20년
이 갓 넘었을 징검다리가 어디 감히 이름과 위엄을 내밀겠는가. 그저 묵묵히 농다리를 보조하
는 역할로 그의 곁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  징검다리에서 바라본 농다리와 미호천

▲  서쪽에서 바라본 징검다리


* 농다리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산동리 601-32



 

♠  폐허에 옛 절터에 연꽃처럼 피어난 현대 사찰
~ 진천 보련산 보탑사(寶蓮山 寶塔寺)

농다리를 둘러보고 다리 서쪽에 자리한 농다리전시관도 살펴보려고 했으나 귀차니즘에 휩싸여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내던지고 진천읍내로 나왔다.
원래는 바로 보은(報恩) 땅으로 넘어가려고 했지만 문득 보탑사 3자가 스치듯 생각이 나 그곳
을 그날의 2번째 메뉴로 흔쾌히 정했다. 솔직히 농다리 하나만 보고 진천을 떠나기에는 다소
허전했지. 마치 50%가 부족한 느낌이랄까? 그래서 보탑사로 나머지 50%를 채우기로 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말에 따라 진첩읍내에서 뼈다귀해장국으로 점
심을 때우고 보탑사로 들어갔다. 읍내에서 그곳까지는 약 13km, 진천 지역에서도 매우 첩첩한
산골이자 벽지인 연곡리 골짜기를 굽이굽이 들어가 김유신(金庾信)장군 탄생지와 연곡저수지
(연곡제)를 거쳐 그 길(김유신길)의 끝에 자리한 보탑사에 도착했다.


▲  보탑사 느티나무 - 진천군 보호수 4호

보탑사에 이르니 제일 먼저 늙은 느티나무가 마중을 한다. 겨울 제국을 몰아내고자 봄의 해방
군이 지척에 왔건만 나무는 여전히 겨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봄이 더 분발하여
겨울로부터 천하를 속히 해방시켜야 되지만 겨울 제국 또한 만만치 않은 상대라 아직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보탑사 느티나무는 나이가 약 370년 정도(1982년 11월 보호수로 지정될 때 추정 나이가 327년
)로 높이 18m, 둘레 5.3m의 덩치를 지녔다. 아무리 먹어도 끝이 없는 세월과 비립동 마을(보
탑사 밑에 자리한 마을)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어엿하게 성장했는데, 그의 그늘을 지나면
보탑사의 정문인 천왕문이 두툼한 덩치를 내밀며 중생을 맞이한다. 그럼 여기서 잠시 보탑사
의 짧은 내력을 살펴보자.


▲  보탑사 천왕문(天王門)
천왕문 현판 대신 절 이름이 담긴 현판을 내걸었다.

▲  비파를 연주하는 흰 수염의 다문천왕
(多聞天王)과 칼을 다듬고 있는
지국천왕(持國天王)

▲  작은 용을 쥐어든 증장천왕(增長天王)과
보탑을 들고 있는 광목천왕(廣目天王)


▲  경내 바깥 주차장에서 바라본 보탑사의 위엄
왼쪽 2층 건물이 수련원, 오른쪽 석축 위에 자리한 건물이 범종각,
그리고 그들 사이로 3층 목탑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진천의 명산인 만뢰산(萬賴山, 611m) 남쪽 자락에는 20세기 말 현대 사찰인 보탑사가 우람하
게 둥지를 틀고 있다. 보탑사는 만뢰산을 보련산(寶蓮山)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절을 둘러
싼 도덕봉과 약수봉, 옥녀봉 등 만뢰산의 남쪽 9개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그것이
마치 1송이 연꽃이 피어난 모습처럼 아름답다 하여 유래된 것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연꽃
의 골짜기란 뜻의 연곡리(蓮谷里)가 되었다고 전한다.

현재 보탑사 자리에는 오래된 절터가 아련히 전해오고 있었다. 그 절은 백비로 유명한 연곡리
석비와 석탑을 남긴 채,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에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는데, 절의 이
름과 정보에 대해서는 전해오는 것이 없어 안따까움을 더한다. 그러다가 1988년 보탑사 창건
주인 지광(智光), 삼선포교원 주지인 묘순(妙純), 보탑사 주지가 된 능현(能現) 등 3명의 비
구니가 그 터를 매입해 보탑사를 세워 기백(幾百)년 이상 끊어진 이곳의 법등(法燈)을 다시
켰다.

보탑사란 이름은 법화경(法華經)에서 나온 것으로 석가여래의 법문을 다보여래(多寶如來)가
증명하고자 칠보탑(七寶塔)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비록 그것에 미치지는 못해도
보배탑(3층 목탑)을 세움으로써 모든 이들의 마음에 부처의 가르침을 심어주고 자비심으로 가
득 채워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지었다.
또한 그냥 절만 으리으리하게 닦으면 다소 식상할 수 있으니 통일 기원 도량임을 강조하여 나
름의 절의 성격과 존재의 이유를 부여했다. 이는 부근에 신라 무열왕(武烈王)과 문무왕(文武
王)을 도와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당나라까지 토벌한 김유신장군의 탄생지가 있기 때문이다.

1991년 우람한 규모의 3층 목탑을 세우고자 당시 이름난 한옥 전문가들로 구성된 고건축 문화
재팀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들이 현장을 살피고 건물 설계를 마친 다음 1992년 5월 공사에 들
어가 1996년 8월 완성을 보았으며, 이후 지장전과 영산전 등 여러 건물을 줄줄이 지어올려 절
의 빈 공간을 채워나갔고, 2014년에 불사가 최종 마무리되어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비록 옛 절터에 지었다고 하나 엄연한 현대 사찰로 법등이 켜진지는 이제 30여 년에 불과하다.
현대 사찰에 별로 관심이 없던 내가 보탑사를 몸소 찾은 것은 그곳이 어떻게 생긴 곳인가 궁
금하기도 했고, 국가 보물로 지정된 연곡리석비도 서려있어 그것도 같이 보고자 함이다.

넓게 자리한 경내(부지 규모는 약 13,223㎡)에는 이곳의 법당이자 자랑인 40m가 넘는 3층 목
탑을 비롯해 산신각, 삼소실, 지장전, 해행당, 영산전, 수련원, 천왕문 등 10여 동의 크고 작
은 건물이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연곡리 석비와 비지정문화재인 늙은 석탑 하나가 전
하고 있다.
또한 비구니 절이라 경내가 꽤 산뜻하고 정갈하며, 꽃과 나무를 많이 심어 왠만한 고급 정원
부럽지가 않다. 또한 금낭화와 앵초, 영산홍 등을 화단과 대형 화분에 심어놓아 4~5월에는 그
들의 봄꽃 향연이 펼쳐지며, 여름에는 연꽃의 향연도 펼쳐져 볼거리도 넉넉하다.
 
보탑사에서 눈여겨 볼 존재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연곡리석비와 오래된 석탑을 위시
해 3층 목탑과 목탑 내부(3층까지 관람 가능), 적조전에 봉안된 금빛 와불, 특이한 모양의 지
장전과 산신각, 영산전 정도이며, 봄에 왔다면 야생화를, 여름에 왔다면 연꽃의 향연을 구경
하고, 겨울 동짓날에 왔다면 팥죽과 7개월 묵은 수박을 꼭 먹어보자.

* 보탑사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483 (김유신길 641, ☎ 043-533-6865)


▲  와불이 봉안된 적조전(寂照殿)

적조전에는 부처가 열반에 들 때 반쯤 누운 모습을 재현한 금빛 와불(臥佛)이 봉안되어 있다.
건물 앞에는 동그란 존재가 놓여져 있는데, 그것은 부처의 발자국을 표현했다는 불족석(佛足
石)으로 비가 내릴 때 발자국 안에 물이 고이고 그 위에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면 안에 새겨진
물고기가 움직이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허나 나는 그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
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  적조전에 누워있는 와불의 위엄
와불 뒤에는 그 흔한 후불탱 대신 푸른 초원이 담긴 그림을 걸어두었다.

▲  연꽃 보개(寶蓋) 밑에서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그 유명한 백제의 반가사유상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 다소곳하게 앉은 그는
무슨 생각을 그리 골몰히 하고 있을까?

▲  보탑사 산신각(山神閣)

산신각은 그 흔한 기와집 대신 너와지붕을 얹힌 귀틀집 모양을 하고 있다. 귀틀집이 산악지방
에서 많이 지어진 집이라 산을 근거지로 삼은 산신(山神)의 보금자리인 산신각도 그렇게 지은
모양이다.


▲  산신각 산신탱
수염이 지긋한 산신 할배를 중심으로 동자, 호랑이, 소나무, 산, 폭포 등이
담겨져 있다.

▲  보탑사의 조촐한 여흥거리, 야생화 화단과 화분들
아직 겨울과 봄의 팽팽한 경계선이라 꽃들은 아직 피지도 못했다.

▲  삼소실(三笑室)
승려들의 생활, 참선 공간이다.

▲  양반가 모습의 해행당(解行堂)
주지를 비롯한 선임 승려들의 생활공간이다.


♠  보탑사 마무리 (연곡리석비, 영산전, 3층목탑)

▲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된 지장전(地藏殿)

지장전은 앞쪽에 3칸짜리 맞배지붕 기와집을 배치하고 뒷쪽은 돌로 다져 석굴(石窟)처럼 꾸민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 건물은 고구려 제20대 태왕(太王)으로 북경(北京)을 비롯한 하북(河北) 지역과 내몽골(지
두우), 경상북도까지 너른 영토를 닦았던 장수태왕(長壽太王)의 능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단순히 남북통일 뿐 아니라 북방의 옛 땅까지 모두 아우르는 대통일을 염원하고자 그리
만든 듯 싶다.


▲  동그란 지붕 밑에 자리한 보탑사 석조(샘터)
보련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듯, 석조에는 늘 물이 가득하다.

▲  고된 세월에 완전 떡이 되버린 옛 연곡리절터 석탑

석조 뒷쪽에는 옛 연곡리절터의 흔적인 석탑이 헝클어진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2중의 기단(
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얹힌 형태로 지금은 2층만 남아있는 상태이나 원래는 3층이나 5층
탑으로 여겨진다.
윗 기단은 석재가 떨어져 나간 것을 붙였으며, 1층과 2층 탑신은 그런데로 남아있으나 그 윗
쪽에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산산이 부셔진 머리장식의 잔재가 얹혀져 있어 그의 삶이
순탄치 못했음을 보여준다.
고려 때 탑으로 보이며, 현재 높이는 2.5m 정도로 그나마 보탑사가 수습해주었으니 망정이지
그 이전에는 지금보다 더 헝클어진 모습이었다.


▲  연곡리석비 보호각

▲  하얀 백지로 남아있는 연곡리석비(石碑) - 보물 404호

보탑사 경내 서쪽에는 이곳의 가장 늙은 보물인 연곡리석비가 보호각에 두텁게 감싸인 채 자
리하고 있다.

이 비석은 아무 것도 쓰이지 않은 이른바 백비(白碑)로 유명하다. 무슨 글자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비신(碑身, 빗돌)을 아무리 뚫어지라 바라봤지만 글씨는 커녕 세월이 그어놓은 주름선만
보일 뿐. 글씨 같은 것은 일절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백지로 있는 것일까? 아쉽게도 세
계 7대 불가사의(不可思議)보다 더 불가사의하게도 그 이유는 밝혀진 것이 없다. 처음부터 백
지로 세웠다는 설과 중간에 지워졌다는 설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데, 비석 조각 기법이 우수한
것으로 보아 애당초 백지용으로 세웠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비석을 세울 당시, 귀부와 이수가 완성되고 글씨를 새기려는 찰라 절이 불의의 이유(전
쟁이나 천재지변, 민란)로 파괴되면서 그 작업이 중단된 채, 버려졌을 가능성도 있고 글씨는
있었으나 절을 파괴한 자들이 그 글씨를 빡빡 밀어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허나 어느 것이 정
답인지는 석비만 알 뿐이나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알 도리가 없다.

비석 제일 밑바닥에는 네모난 바닥돌을 깔고, 머리에 귀갑(龜甲)을 갖춘 귀부(龜趺)를 두었는
데, 귀부 머리는 거북이 아닌 말 머리와 비슷해 보인다. 비석 머리에는 9마리 용이 새겨진 이
수(螭首)가 달려 있으며, 조각 기법이 매우 우수하다. 비신 높이는 2.13m로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비신의 윗부분과 용과 구름무늬가 새겨진 이수

▲  8각형을 이루고 있는 영산전(靈山殿)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 제자인 500나한의 거처이다. 이들 500나한은 신도들이
기증한 것으로 각자 다른 얼굴과 옷, 포즈를 취하며 바위처럼 새겨진
자리에 빼곡히 앉아있다.

▲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한 영산전 내부

▲  석가여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들, 500나한의 위엄

▲  정면에서 바라본 3층 목탑의 위엄

나보다 나이가 어린 보탑사가 짧은 시간에 진천 제일의 명소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바로 3층
목탑 때문이다.
보탑사의 야심작이자 자존심이며, 소중한 꿀단지인 3층 목탑은 1991년 이름난 한옥 전문가들
로 구성된 고건축 문화재팀에 의해 설계되어 1992년 5월에 공사를 시작, 1996년 8월에 완성을
본 20세기 최대의 목조 건물이다. 목탑 높이는 42.73m, 꼭대기 상륜부(相輪部)의 높이는 9.99
m로 총 높이는 52.72m에 달한다.

강원도에서 소나무를 가져와 못 1개도 쓰지 않은 전통 방식으로 지어졌으며, 무늬만 3층이 아
닌 실제 3층이다. 1층은 법당(금당)으로 석가여래와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불을 봉안했
고, 2층은 법보전(法寶殿)으로 석가여래의 가르침을 머금은 8만대장경 번역본과 윤장대, 한글
법화경을 새긴 돌판을 봉안하고 있으며, 3층은 미륵전(彌勒殿)으로 미륵불이 기거하고 있다.
그러니까 한 지붕 아래 3개의 성격을 지닌 건물을 담고 있는 셈이다.

지금까지 이 땅에 전해온 목탑 비슷한 건물<법주사 5층 팔상전(八相殿)이나 1983년 불에 타버
린 쌍봉사 3층 대웅전 등>은 무늬만 증충이지 속은 하나의 층이나 다름이 없었으나 보탑사 목
탑은 겉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처럼 3층을 지녔다. (층 중간에 2개의 숨겨진 층이 있음, 일종의
다락방 같은 것)
목탑의 정식 이름은 '보탑사 통일대탑'으로 너무 으리하고 화려하다는 눈총을 조금이나마 피
할 겸, 부근에 있는 김유신 탄생지에서 힌트를 얻어 통일 기원 목탑으로의 성격을 갖추고 있
다.

목탑 자리는 연꽃의 한 가운데 꽃술에 해당하는 지점이라고 하며, 당시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
은 경주 황룡사(皇龍寺) 목탑과 경주 남산 탑곡마애불상군(☞ 관련글 보기)을 참고하여 제작
했다고 한다. 2층과 3층에는 바깥에 마루 난간을 두었으나 위험 때문에 평소에는 문을 닫아
출입을 금하고 있다.

이곳에는 2가지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는데, 석가탄신일 전후하여 1층 약사불 앞에 사람들이
수박을 올린다. 그런데 그 수박을 며칠 사이에 처리하지 않고 그냥 두었다가 12월 동짓날, 팥
죽을 먹을 때 수박을 깨서 나눠먹는다. 그 기간이 최소 7개월이고, 수박을 따로 저장고에 둔
것도 아닌데도 수박은 전혀 상하지 않고 신선함 상태를 유지한다고 한다. 거짓말 같아 보이지
만 사실이다. 이미 여러 번 언론을 타 화제가 된 적이 있으며, 동짓날에 절을 찾은 이들에게
실제로 나눠준다.
또한 절 앞에 자리한 370년 묵은 느티나무에서 올라오는 바람이 바람개비처럼 부속 건물의 지
붕을 타고 북쪽으로 빠져나가도록 만들어 목탑 지붕에 눈이 쌓이는 것을 방지했다고 한다. 실
제로 목탑에는 눈이 발을 붙이지 못한다. 지어진 지 이제 20여 년 밖에 안된 어린 목탑이 벌
써부터 끼를 보이고 있으니 80~90년 정도 지나면 20세기 후반 흥미로운 건축물이라 하여 국사
나 한국미술사 서적에 절찬리에 실릴 것이다.

3층 꼭대기 부분에는 능엄경과 법화경 등 불교 경전과 절의 사적기(事蹟記)를 보관한 일종의
타임캡슐이 있는데, 불기(佛紀) 3,000년이 되는 서기 2,456년에 개봉한다고 한다. (내 생애에
는 어림도 없다는 소리;;) 또한 목탑 머리 부분에는 동자승 4명이 천상에서 줄을 매고 목탑으
로 내려오는 장면을 연출했다.

▲  1층 아미타불(阿彌陀佛)
그 좌우로 문수,보현보살이 시립해 있다.

▲  1층 석가여래3존상
그 좌우로 지장,관세음보살이 서 있다.

▲  1층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  1층 비로자나불

▲  1층에서 2,3층으로 올라가는 통로
실내화를 신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되며
계단은 2개가 있다.

▲  1999년 5월에 봉안된
석가여래후불탱


▲  2층 법보전 중앙에 자리한 윤장대(輪藏臺)

윤장대는 불경이나 불교 관련 서적을 넣어두던 책장이다. 그 윤장대를 돌리면 경전을 이해한
것과 같다고 홍보를 했는데, 이는 티벳불교의 경통과 비슷하다. 지금과 달리 옛날에는 글을
모르는 까막눈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영업을 하고자 윤장대를 적극 활용한
것이다.

▲  원(願) 성취대라 불리는 윤장대

▲  2층 법보전 내부

▲  3층 미륵전 미륵3존불

▲  뒷쪽에서 바라본 3층 목탑

목탑 내부는 햇살이 별로 들어오지 않아 은근히 시원했다. 하여 한여름에 왔다면 정말 조촐한
피서지가 따로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50분 가량 보탑사 경내를 둘러보고 다음 답사지로 길을 향했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은 여기서 쿨하게 선을 긋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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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산사 나들이, 안양 삼성산 삼막사 ~~~ (삼막사 남녀근석, 안양예술공원, 석수동 석실분)

안양 삼성산 삼막사, 석수동 석실분



' 한겨울 산사 나들이, 안양 삼성산 삼막사 '
삼막사3층석탑
▲  삼막사3층석탑
 



 

겨울 제국이 늦가을을 몰아내고 천하를 완전히 휘어잡던 12월 한복판에 일행들과 삼성산
삼막사를 찾았다.
삼성산(三聖山, 481m)을 오르면 삼막사는 거의 거쳐가기 마련인데, 햇님이 하늘 높이 걸
려있던 12시에 서울대입구역(2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6515번(양천차고지
↔안양 경인교대)을 타고 관악구청, 서울대를 지나 삼성산성지 정류장에서 두 발을 내렸
다. 바로 여기서 삼막사를 찾기 위한 삼성산 산행을 시작했다.

서울의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聖地)로 꼽히는 삼성산성지(三聖山聖地)를 지나 호암산(虎
巖山, 385m) 정상 부근에서 속세(俗世)에서 가져온 먹거리(김밥, 과일, 과자 등)로 간단
히 점심을 때웠다.
호암산 정상에서 삼성산까지는 부드러운 곡선을 지닌 삼성산 서북쪽 능선이 펼쳐져 있는
데, 능선길이 느긋하고 각박한 구간이 별로 없어 마치 구름 위를 거니는 기분이다. 장군
봉과 운동장바위, 446봉을 지나 15시에 삼성산 정상 서남쪽에 자리한 삼막사에 도착했다.


▲  경내에서 내려다본 삼막사 일주문(一柱門)



 

♠  많은 문화유산을 품고 있는 삼성산의 대표 산사,
~ 안양 삼막사(三幕寺)

▲  밑에서 바라본 삼막사 - 마치 산 위에 닦여진 요새를 보는 것 같다.

삼성산 정상(481m) 서쪽 360m 고지에 둥지를 튼 삼막사는 삼성산(三聖山)의 대표적인 고찰(古
刹)이다. 오래된 절들은 그럴싸한 창건 설화나 사연을 하나씩은 지니고 있기 마련인데, 이곳
역시 창건 설화 한 토막을 내밀고 있다.
때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 시절인 677년, 신라(新羅) 불교의 핵심 인물인 원효
(元曉)와 의상(義湘), 윤필(潤筆) 3명의 고승이 삼성산에서 막(幕)을 치고 수도를 했는데, 원
효가 지은 막이 1막, 윤필은 2막, 의상은 3막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 자리에 절을 세우면서 그들이 막을 지어 수행한 곳이라 하여 삼막사라 하였으며 산
이름도 삼성산이라 했다고 한다. 여기서 삼성(三聖)은 3명의 성인으로 원효, 의상, 윤필을 뜻
한다. 하지만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그의 좌우를 지키는 관세음
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한 덩어리로 묶어 삼성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산 이름을 따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만큼 삼성산에는 절이 많았다. (지금도 많음)

삼성산의 이름은 그렇다쳐도 삼막사 창건설화는 어디까지나 삼막사에서 지어낸 믿거나 말거나
설화일 뿐이다. 창건 시기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상은 당나
라에서 가져온 화엄종(華嚴宗) 보급과 귀족 중심의 불교를 추구하면서 왕경(王京, 경주)과 그
가 지은 영주 부석사(浮石寺) 등 10개 사찰에 주로 머물러 있었으며, 원효 또한 불교 대중화
를 위해 민중에 뛰어들던 시기이므로 그가 지은 절은 정작 거의 없다. 그렇다면 절 이름인 '
삼막'은 어디서 나왔을까?
관음사(觀音寺)로 불리던 신라 후기 또는 고려 때, 절이 나날이 융성하여 도량의 짜임이 송나
라 소주(昭州)의 삼막사(三邈寺)를 닮아 격하게 찬양을 받았다고 한다. 하여 자연스레 삼막사
로 불리다가 언제부터인가 삼막(三幕)으로 바뀌었는데, 절에서 창건 설화를 지으면서 한자를
바꾸고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신라 고승 3명을 강제로 등장시켜 그들이 막을 치고 머물렀다고
설화를 짠 것이다. 그러니 절의 처음 이름도 '삼막'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 후기에 부동산 전문가인 도선(道詵)이 절을 중건하고 불상을 봉안하여 관음사로 이름을
갈았다고 하며, 고려 태조(太祖)가 중수하여 다시 삼막사로 바꿨다고 전한다. 태조는 삼막사
남쪽에 있는 염불사(念佛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안양사(安養寺, ☞ 관련글 보러가기) 창
건 설화에도 절찬리에 등장하는데, 그가 후백제(後百濟)를 치러 갈 때, 그 길목인 삼성산에
여러 절을 짓거나 중수를 도와준 것으로 여겨진다.

1348년 나옹(懶翁)과 지공(指空)이 이곳에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날렸고,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나라의 융성을 기원했는데, 1398년 왕명으로 중건했다. 그 인연으로 북
쪽에 승가사(僧伽寺, ☞ 관련글 보기), 서쪽에 진관사(津寬寺, ☞ 관련글 보기), 동쪽에 불암
사(佛巖寺, ☞ 관련글 보기)와 더불어 서울을 지키는 비보사찰(裨補寺刹)의 일원이 되었으며,
그중 삼막사는 남쪽에 있으므로 서울의 남쪽을 지키는 역할을 했는데, 그 연유로 남왈삼막(南
曰三幕)이라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불을 질렀으나 법당이 타지 않아서 그들은 참회를 하고 철수했다고 전하
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도를 했다고 전한다. 1880년에는 의민(義旻)이 명부전을 짓고,
1881년 칠성각을 지었으며,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의 형인 지운영(池雲英)이 절 옆에 백련
암을 지어 은거하기도 했다.

경내에는 천불전과 명부전, 망해루, 대방, 칠성각, 육관음전 등 10여 동이 있으며, 상당수의
건물이 지형상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
석탑과 명부전, 사적비, 남녀근석, 마애3존불 등이 있고, 삼귀자 바위글씨와 감로정 등의 비
지정문화재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아낌없이 대변해준다. 특히 3층석탑은 이곳에서 가장 늙
은 존재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이라 절이 적어도 고려 중기에 창건되었음을 알려준다.

삼막사는 삼성산 정상부 서쪽 요충지에 자리하여 산꾼과 답사꾼들이 많이 찾아오며, 특히 삼
성산 정상을 가거나 삼성산을 가로지를 경우 거의 꼭 거쳐야되는 황금 길목에 위치해 사람들
로 늘 북적거린다. 게다가 절까지 길이 잘 닦여져 있어 차량 접근도 가능하다. (서울대와 삼
성산성지, 호압사, 경인교대, 안양예술공원에서 등산으로 1~2시간 정도 걸림)
또한 서울과 안양(安養) 도심에서 가깝고 산 정상부에 자리해 있어 조망도 괜찮으며, 공기질
이 좋을 때는 멀리 서해바다까지 시야에 잡힌다.

*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41-54 (삼막로 478, ☎ 031-471-5978)


▲  삼막사 명부전(冥府殿)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60호

서울대와 호압사, 호암산 주변, 경인교대에서 올라오는 길이 만나는 일주문에서 계단길을 오
르면 비로소 삼막사 경내에 이른다. 경내는 일주문 윗쪽에 높이 자리해 있는데, 망해루와 범
종각 등을 바깥에 내밀며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다.

경내 북부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천불전과 망해루 등 다
른 건물들이 죄다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반해 명부전은 거의 혼자 남쪽을 향하고 있다. 남
향(南向) 건물이 이 땅에서 일반적이긴 하지만 이곳만큼은 그 원칙은 서향(西向)이 진리이다.
(물론 지형적인 영향이 크지만;;)
이 건물은 1880년에 의민이 지은 것으로 1975년에 수리를 했다. 네모난 장대석(長臺石)으로
다진 기단(基壇)을 2단으로 깔고 그 위에 집을 얹혔는데, 현재 맞배지붕 건물에 흔치 않은 방
풍판(防風板)이 달려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팔작지붕인 것을 개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공포는 주심포(柱心包) 형태로 귀포의 용머리 조각 등 장식적인 요소가 많으며, 건물 내부에
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상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
중 시왕상은 명부전 이상으로 늙은 보물이다.


▲  중생 구제를 염원하는 4개의 지물, 사물(四物)이 담겨진
범종루(梵鍾樓)

▲  삼막사 망해루(望海樓)

범종루와 함께 경내를 가리고 앉은 망해루는 삼막사의 얼굴과 같은 존재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중기에 지어진 것을 20세기에 중건했는데, 건물 이름 그대로 바
다가 있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허나 인천(仁川)과 시흥(始興), 안산(安山) 지역의 갯벌이
마구 매립되어 육지가 늘어남에 따라 바다는 그만큼 멀어졌고, 대기오염도 툭하면 말썽을 부
려 이제는 공기질이 아주 좋은 날이 아닌 이상은 바다를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망해루' 이
름 값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삼막사는 서울을 지키는 남쪽 비보 사찰이라 선비와 관리들의 출입이 잦았는데, 그중에는 백
호 윤휴(白湖 尹鑴, 1617~1680)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당시 성리학(性理學)에 쓸데없이 능했
던 송시열(宋時烈) 마저 질리게 만든 문인으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경신환국(庚申換局,
1680년) 직전에 삼막사를 찾아 망해루에 걸터앉으며 시 1수를 지었다.

 푸른 산에 찬 기운 일어 망해루에 바람이 거세고
 강구름이 비를 불러 해는 모래톱으로 사라지네
 이때 높이 올라 바라보는 것도 우연한 충성인데
 눈 들어 산하를 보니 시름을 이길 수 없도다

허나 누가 알았으랴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시가 될 줄은... 이처럼 망해루는 문인들 시에 종
종 등장했으며, 현재는 주로 강당의 역할을 맡고 있다.


▲  망해루 옆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가까이에 경인교대를 비롯하여 안양 석수동, 광명 남부 지역, 시흥시,
그리고 멀리 인천 땅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허나 이날은 아무리 인상을
쓰고 살펴도 서해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  청기와를 지닌 육관음전(六觀音殿)

명부전 옆에는 금동으로 치장된 6명의 관세음보살이 봉안된 육관음전이 청기와 지붕을 뽐내며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서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칸을 구분 짓
는 기둥이 돌로 이루어져 있어 나름 이형(異形)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  다양한 관세음보살을 모아놓은 육관음전 내부

▲  삼막사 3층석탑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12호

육관음전과 천불전 중간 높은 곳에 3층석탑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사람의 손길이 닿기 어
려운 석축 윗쪽 바위에 높이 들어앉아 있어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인데, 보통 석
탑은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나 이곳은 다소 구석진 곳에 두어 사람의 손길을 피하게 했으니
그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다.

이 석탑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삼막사 출신인 승려 김윤후(金允
侯)가 몽골(원나라)의 제2차 침공(1232년) 때 처인성(處仁城, 용인 남쪽)에서 몽골군 우두머
리인 살리타이를 처단하여 대승을 거둔 것을 기리고자 세웠다고 전한다. 그래서 '살례탑'이란
별명도 가지고 있다.
김윤후는 이후 충주(忠州)에서도 대승을 거두어 그 위엄을 크게 떨쳤으며, 나라에서 상장군(
上將軍) 직을 내리려고 했으나 쿨하게 거절했다.

탑의 높이는 2.55m로 조그만 편인데,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혔으며, 3층 탑
신은 옥개석(屋蓋石, 지붕돌)만 겨우 남은 실정이다. 두툼하게 생긴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이 있고 낙수면의 경사는 급하며, 탑 꼭대기에는 1979년에 보수한 머리장식이 하얀 피부
를 드러내고 있다.
지붕돌 받침이 3단으로 줄어드는 등, 고려 탑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탑 뒤에는 소나
무들이 푸르름을 드러내며 탑의 우산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  감로정 석조 옆에 자리한 관세음보살상
삼막사는 육관음전이라 하여 6명의 관세음보살을 두었는데, 밖에도 마애불(磨崖佛)
비슷하게 하얀 피부의 관세음보살상을 두어 관음도량처럼 꾸몄다.

▲  감로정 석조(甘露井 石槽)

3층석탑 바로 밑에는 삼막사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감로정 석조가 누워있다. 삼성산이 베푼 감
로(甘露) 같은 약수가 늘 넘칠 정도로 쏟아져 나와 대자연 형님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주고 있
는데, 감로를 머금은 거북 모양의 석조에는 고색의 때와 주근깨가 자욱하다. 그 역시 삼막사
의 오래된 유물 중 하나로 앞쪽에 '甘露井(감로정)'이란 글씨와 1837년에 조성되었음을 알려
주는 글씨가 있어 그의 이름과 경력을 알려준다.

거북 모양의 석조 옆에 원통형 석조는 근래 마련된 것으로 그가 있기 전에는 뚜껑이 닫힌 거
북 석조에서 직접 물을 떠다 마셨다. 지금은 옆으로 홈을 내서 물이 원통형 석조로 흘러내려
와 그것을 마시면 된다. 특히 이 석조에는 조선 정조 때 인물인 김창영(金昌永)의 탄생 설화
가 전하고 있다.


▲  삼막사의 법당 역할을 하는 천불전(千佛殿)

육관음전 못지 않게 청기와 지붕을 드러내고 있는 천불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역시나 서쪽을 향하고 있다.
천불전이란 이름 그대로 1,000개의 조그만 불상을 지니고 있는데, 그 모습이 이 땅의 7천만
인구처럼 가지각색이다. 귀찮아서 건물 내부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지만 현재 법당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건물 뒷쪽에는 원효가 수행했다고 전하는 토굴(土窟)이 있다.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고 종무소(宗務所) 옆 쉼터에서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 아직까지 남은
식량이 있어서 커피와 과자 등을 꺼내 잠시나마 조촐한 향연을 즐긴다. 서쪽 전방에 펼쳐진
일품 조망에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으며, 잔잔히 불어오는 산바
람은 번뇌와 온갖 상념을 싹 털어간다. 그렇게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다가 삼막사의
나머지 부분을 보고자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보통 천불전과 명부전, 육관음전, 3층석탑이 있는 경내가 삼막사의 전부로 착각하기 쉬우나
그것은 삼막사의 함정이다. 아직 사적비와 삼귀자, 마애불, 남녀근석 등의 문화유산이 남아있
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을 지나치면 삼막사의 절반 밖에는 못보는 것이다. 기왕 여기까지
올라온 거 말끔하게 보고 가는 것이 좋으며, 그것이 삼막사에 대한 작은 예의가 될 것이다.
사적비와 삼귀자는 경내와 가까운 곳에 있으며, 마애불과 남녀근석(칠성각 구역)은 5~6분 정
도 산을 타야 된다.


▲  삼막사 사적비(事蹟碑)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25호

경내에서 칠성각 구역으로 길을 접어들면 바로 왼쪽 높은 곳에 빛바랜 비석 하나가 눈에 아른
거릴 것이다. 그는 삼막사의 일기장인 사적비로 네모난 비좌(碑座)와 비신(碑身), 지붕돌로
이루어진 단촐한 모습인데, 삼막사 창건 설화부터 조선 후기까지 내력이 적혀있으나 아쉽게도
비문(碑文) 상당수가 훼손되어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다.
다만 관악산맥 삼성산 밑에 있다는 것과 절 이름이 삼막사로 향로봉이 왼쪽에 있다는 것, 사
적비를 1707년에 세웠음을 알리는 내용만 간신히 확인이 가능하다.


▲  산신각 - 바위에 새겨진 마애 산신탱

사적비를 지나면 바위에 깃든 산신탱이 마중을 한다. 지팡이를 든 대머리 산신 할배를 중심으
로 동자와 호랑이, 소나무, 구름, 햇님 등을 담았는데, 색을 입히지 않아서 윗쪽을 제외하면
모두 하얀색이다. 마치 흑백사진처럼 말이다.
이렇게 산신탱을 닦고 그 주변을 노천식 산신각(山神閣)으로 삼았는데, 산신탱 앞에는 중생들
이 올린 막걸리와 사탕, 과자, 떡 등이 가득하여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이다.


▲  삼귀자(三龜字) 바위글씨를 머금은 바위

예전에는 경내에서 칠성각 구역으로 가려면 무조건 사적비와 삼귀자 앞을 지나가야 했다. 허
나 지금은 질러가는 길이 생겨서 그들 앞을 굳이 지나갈 필요는 없어졌으나 그들은 삼막사의
오랜 보물들이니 이곳이 초행이라면 꼭 살펴보기 바란다.

산신탱을 지나치면 기묘하게 생긴 삼귀자 바위글씨가 발목을 붙잡는다. 바위 피부에 쓰인 글
씨는 모두 거북 귀(龜)로 그 글씨를 전서체 등 다양한 모습으로 디자인하여 새긴 것인데, 오
른쪽 글씨는 그나마 귀자 비슷하게 생겼으나 무슨 부적 분위기가 나고, 가운데 글씨는 엉금엉
금 기어가는 거북이(또는 무당벌레) 모습 같으며, 왼쪽 글씨 또한 거북이를 닮았다.
이들 삼귀자는 종두법(種痘法)으로 유명한 지석영(池錫永)의 친형 지운영(地雲英, 1852~1935)
이 이곳에 소박하게 백련암(白蓮庵, 지금은 남아있지 않음)을 짓고 은거했을 때 쓴 것으로 지
석영이야 워낙 인지도가 높아 삼척동자도 다 알지만 그에게 형이 있었다는 것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지운영은 여기서 관세음보살 누님을 친견하는 꿈을 꾸고 너무 기뻐 새겼다고 하며, 삼귀자 이
웃 바위에 '관음몽수장수 영자(觀音夢授長壽 靈字)'라 해서 그 소감을 밝혔다.

삼귀자 글씨의 크기는 왼쪽부터 높이 74cm, 77cm, 86cm이며, '불기(佛紀) 2947년 경신중양 불
제자 지운영'이란 글씨가 있어 1920년에 그가 썼음을 귀띔해 준다. 그리고 옆 바위에는 시주
자 명단이 적힌 명문이 있다.


▲  거북귀(龜)의 화려한 변신, 삼귀자(3개의 거북귀) 바위글씨의 위엄
명필가는 이렇게 글씨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악필가는 살아있는 글씨마저
죽여버린다.

▲  삼귀자 안내문 뒷쪽 바위에 새겨진 시주자 명단 바위글씨



 

♠  삼막사 마무리

▲  칠성각 구역으로 올라가는 길 ①

삼막사 경내에서 칠성각 구역까지는 5~6분 정도 발품을 팔아야 된다. 그만큼 외딴 곳에 떨어
져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곳까지는 돌로 길을 잘 닦아놓아 통행에 어려움은 없으며, 혹시나
엉뚱한 길로 빠질까봐 연분홍 연등이 대롱대롱 길을 안내하고 있다.


▲  칠성각 구역으로 올라가는 길 ②

▲  삼막사 남녀근석(남근석) - 경기도 지방민속문화재 3호

삼막사 경내보다 더 하늘과 가까운 곳, 칠성각 구역에 이르면 아주 재미있게 생긴 바위가 마
중을 한다. 바로 삼막사의 백미이자 이곳에서 꼭 봐야 직성이 풀리는 남근석(男根石)과 여근
석(女根石)이다.
이들은 2개의 바위로 남쪽에는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남근석이, 북쪽에는 여인네의 은밀한
부분을 닮은 여근석이 누워있는데,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은 작품으로 특히나 여근
석은 그 부분과 너무 닮아서 강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이렇게 거시기하게 생긴 돌은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이른바 성기신앙(性器信仰)
의 대상으로 격하게 숭배를 받았다. 이 바위를 만지며 기원을 하면 아들 낳기와 출산에 효험
이 있다고 전해져 석가탄신일과 7월 칠석에는 많은 사람들(특히 아줌마들)이 찾아온다.
남근석의 높이는 1.5m, 여근석은 1.1m로 삼막사는 이 바위를 매우 애지중지 다루고 있다. 여
자를 멀리해야 되는 절간에서 예민하게 생긴 바위를 옆구리에 끼고 있다는 점이 참 이채롭기
까지 하는데, 이는 모두 절의 인지도와 수입을 위해 그리 한 것이다. 그리고 18세기에는 그들
옆에 마애불을 세우고 칠성각을 세워 칠성신앙까지 어우러진 현장으로 만들었다.


▲  대자연 형님의 심술궂은 작품, 여근석

▲  바로 앞에서 바라본 여근석의 위엄
앞이나 옆이 아닌 바로 위에서 보면 기가 막히게 실감이 난다. 마치 그 모습 그대로
돌로 굳어버린 듯한 느낌. 나는 쑥쓰러워서(?) 위에서 사진을 담지 않고
약간 옆에서 살짝(?) 담았다. 이거 좀 무안해서 말이지 ~~~!

▲  바위에 씌워진 삼막사 칠성각(七星閣)

칠성각은 바위에 깃든 마애3존불의 거처로 1881년에 지어졌다. 바위와 마애불에 맞게 짓다 보
니 지붕이 2겹이 되어버렸는데, 마애불이 바라보는 서쪽에 문과 성인 키 정도의 계단을 내었
다. 전실(前室)처럼 자리한 건물 내부는 마치 석굴(石窟) 마냥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중
생들이 달아놓은 조그만 인등(引燈)이 강인한 협동심을 드러내며 내부를 환하게 수식한다.


▲  삼막사 마애3존불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94호

칠성각에 담긴 마애3존불은 칠성(치성광여래)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
보살(月光菩薩)로 이루어져 있다. 가운데 존재를 칠성이라 한 것은 건물 이름이 바로 칠성각
이기 때문이다. 건물이 칠성각인데 엉뚱한 존재가 중심에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들은 연화좌(蓮花座)에 앉아있는데, 보관(寶冠)을 눌러쓴 양쪽 보살상은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이고 있으며, 칠성은 두 손을 가부좌(跏趺坐)를 튼 무릎 위에 대고 보륜(寶輪)를 들고 있
다.
수인(手印)을 제외하면 이들은 모두 비슷한 모습으로 얼굴부터 옷주름까지 진하게 남아있어
형태를 알아보는데 문제는 없으며, 몸에 걸친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가슴에는 내의의
매듭이 표현되어 있다.
마애불 밑에는 고맙게도 '乾隆二十八年癸未八月日化主悟心'이란 명문이 있어 1763년 계미년 8
월에 화주(化主) 오심이 조성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이 땅에 칠성을 담은 그림(칠성탱, 칠
성도)은 많지만 이렇게 바위에 마애불로 새긴 것은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또한 조성 관련 명
문까지 새겨져 있어 당시 마애불 양식을 연구하는데 좋은 단서가 되어준다.

마애3존불의 눈, 입, 귀, 눈썹이 매우 선명하나 코는 닳아져 형태만 남아있다. 이는 그 코를
갈아서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고 해서 아낙네들이 그의 코를 마구 갈아버린 것이다. 게다가 성
기신앙의 현장이 옆에 있으니 그 현상은 심했으리라, 그렇게 중생들에게 코까지 떼였으니 마
애불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허나 마애불이 누구를 위해 있는가? 바로 중생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 중생을 위해 기꺼이 코 하나 내놓는 것은 그들의 임무이며, 코는 나중
에 새로 달아도 된다.


▲  칠성각을 뒤로하며



 

♠  삼성산 서남쪽 능선에 숨겨진 아주 늙은 무덤,
석수동 석실분(石室墳) - 경기도 지방기념물 126호

이렇게 삼막사를 고루고루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6시, 햇님도 이제 고개가 아픈지 슬슬 지
평선 너머로 내려앉을 준비를 한다.
염불사(염불암)를 둘러보고 안양예술공원으로 내려갔는데, 일몰까지는 약간의 여유가 있어 삼
성산의 숨겨진 명소이자 은자(隱者)인 석수동 석실분을 이날의 마지막 메뉴로 둘러보기로 했
다.

석수동 석실분은 안양예술공원 공영주차장 뒷쪽에 있는 석수동 마애종(磨崖鍾)을 기준으로 삼
아서 찾는 것이 편하다. 마애종에서 서쪽 길(예술공원로117번길)로 들어가면 막다른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 길(예술공원로 117번길)로 접어들면 안양노인전문요양원이 나온다.
그곳을 지나면 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 길로 들어서 쭉 올라가면 된다. 이곳은 옛날
에 광산이 있던 곳으로 마을의 밥줄이던 광산이 없어지면서 가옥 몇 채와 폐광의 흔적만 황량
하게 남아 늦은 시간에 오면 으시시함까지 느끼게 한다.

석실분을 알리는 이정표는 다행히 넉넉하게 닦여져 있어 길을 잃을만하면 나타나 길을 비춰준
다. 심지어 무덤 50m 전까지도 이정표가 있다. (석수동 마애종에서 도보 20분 거리)

▲  돌탑 위에 피어난 석실분 이정표

▲  석실분으로 인도하는 산길

▲  북쪽에서 바라본 석실분

▲  동쪽에서 바라본 석실분

석수동 석실분은 삼성산 서남쪽 능선 300m 고지에 둥지를 튼 삼국시대 무덤이다. 보통 고구려
무덤들은 흙무덤과 돌무덤(4세기 이후) 중심으로 주로 평지에 널려있고, 백제 무덤은 거의 흙
무덤 중심으로 바깥은 흙으로, 안은 돌로 돌방(석실)을 만든 구조인데, 대체로 평지와 언덕을
선호했다. (백제 돌무덤도 석촌동고분군을 비롯해 일부 남아있음) 그리고 신라 무덤은 흙으로
다지고 안에 돌방을 넣은 형태로 평지와 언덕을 선호했고, 가야는 특이하게 산자락이나 능선
을 주로 선호했다.

우리가 찾은 석수동 석실분은 산능선에 자리해 있어 가야 무덤이 아닐까 싶지만. 가야의 무덤
은 아니다. 가야(伽倻)의 영역은 경기도에 이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막연히 삼국시대 무덤
으로만 여겨질 뿐, 정확한 조성 시기와 무덤 주인은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을 헤매고 있
으나 무덤 안에 석실을 다지고 윗도리에 흙으로 봉분(封墳)을 씌웠으며, 바깥과 석실(石室)을
잇는 연도(羨道)가 없는 횡혈식고분(橫穴式古墳)인 것으로 보아 6~7세기 이후 신라 무덤으로
여겨진다.
비록 봉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심술쟁이 자연의 손길, 일확천금을 노린 도굴꾼의 검
은 마수로 오래 전에 녹아 없어졌지만 석실까지 갖춘 규모와 안양시내를 바라보는 산자락에
자리한 점으로 보아 안양 지역을 다스리던 관리나 지방 세력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왜 하필이면 이런 첩첩한 산능선에 무덤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안양사 동쪽 산자락에도 늙은
고분이 1기 있다고 하며(이곳은 확인하지 못했음), 지형 조건을 통해 조그만 고분이 더 숨겨
져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허나 아직까지 이 무덤을 포함하여 주변을 싹 뒤집지는 못했다.

무덤은 산 정상부를 향해 남북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옛날에 이미 도굴을 당한 상태라 발견된
유물은 없다. 들리는 풍문에는 여기서 금관(金冠)과 금귀걸이가 나왔다고 전하는데, 진위 여
부는 알 수 없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대단히 높은 인물의 무덤임이 틀림없다.

흙으로 다진 봉분은 무참히 벗겨나가 흔적은 없으며, 석실과 석실 천정을 이루던 거대한 판석
(板石)이 대머리처럼 적나라하게 노출된 상태이다. 석실 내부는 길이가 3.4~4.5m, 폭 1.5~1.7
m, 높이 85~100cm이며, 자연석을 적당히 다듬어서 동/서/북벽을 쌓았고, 남쪽 벽은 커다란 판
석 1매로 축조했다. 그리고 3개의 넓다란 판석으로 석실을 덮었는데, 가운데 판석이 파괴되어
무덤의 속살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인다. 연도가 생기기 이전 형태로 여겨지며, 조선총독부가
1942년에 제작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시흥군(始興郡)
35. <고분>, 동면 안양리 국유림(國有林) - 석수동 동방의 산록 제24호 귀부(龜趺)의 후방에
석곽(石槨)이 노출된 것 2, 3개가 있다. (여기서 귀부는 안양사 귀부로 여겨지나 확실치는 않
음)

▲  세상을 향해 입을 벌린 석실분

▲  돌로 다져진 석실분 내부 ①

◀  돌로 다져진 석실분 내부 ②

무덤 내부는 문화유적 보호 차원에서 들어가면 안되지만, 이미 뚜껑이 열린 상태라 살짝 들어
가 볼 수 있다. 하지만 깊이가 1.5m 정도로 깊고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없어 다리에 무리가
없도록 조심을 기해 내려가야 된다.

주인도 오래전에 떠나버린 무덤 내부는 상석(床石)처럼 놓인 돌을 빼고는 텅 비어 있다. 무덤
이라기보다는 임시 거처나 아지트 같은 기분이다. 소름이 끼치는 무덤의 속살이지만 이곳을
알리는 문화유산 안내문이 없고, 옛 고분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이게 무덤인지 군사시설인지,
숨겨진 아지트인지 헷갈릴만하다. 누가 이런 곳에 무덤을 쓸 것이라 생각을 하겠는가. 죽어서
도 권력과 부귀를 누리고 싶었던 옛날의 어느 부질없는 망족(望族, 귀족)의 욕심이 이 무덤을
탄생시켰고, 그 욕심에 대한 혹독한 대가로 사람과 자연, 세월에 의해 여러 차례 털리고, 파
괴되는 비운을 맞으며 '내가 과연 무덤일까?' 이곳의 성격마저 크게 흔들어 놓았다.

햇살이 조금씩 내려앉은 석실 내부는 오싹하기는 커녕 오히려 아늑한 느낌이다. 학우봉과 삼
막사 방면으로 산길이 나있지만 다소 외진 숨겨진 곳이라 이곳을 지나는 산꾼의 수요는 별로
없으며 석실분 내부는 포근하고 비바람을 피하기에 좋아 간단한 먹거리나 손전등을 갖춘다면
염치불구하고 하룻밤 살짝 머물고 싶은 곳이다. 물론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그리해서는 안되
지만 정말 나만의 비밀 공간으로 삼고 싶을 정도로 욕심이 간다.


▲  석수동 석실분에서 바라본 천하, 안양시내
멀리 바라보이는 산은 안양을 서쪽에서 감싸는 수리산이다.


무덤 밖에서 눈 아래로 펼쳐진 속세를 바라보며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 수리산과 삼성산 사
이에 둥지를 튼 안양시내를 바라보니 그곳이 나의 영지(領地)인양 거만한 착각에 마음이 잠시
즐거워진다. 무덤 주인도 아마 그런 것 때문에 노비와 백성들을 닥달하여 이곳에 무덤을 쓴
것은 아닐까?
천하를 비추던 햇님은 그만의 공간으로 가고자 슬슬 휘장을 거두고, 진하게 보이던 안양시내
도 그만큼 흐릿하게 다가온다. 어둠이 내려앉으니 사람도, 도시도, 산도, 어둠을 몰아내고자
불빛을 여기저기서 발산하면 검게 익은 안양의 산하는 그것을 얼굴에 바르며, 환상적인 야경
을 선보인다. 안양의 야경을 제대로 누리고 싶다면 안양예술공원 남쪽 산자락에 자리한 망해
암(望海庵)도 좋지만 석수동 석실분도 엄지를 강하게 치켜들며 추천하고 싶다.

*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산236-9


▲  석수동 석실분에서 맞이한 일몰
이렇게 하여 삼성산, 삼막사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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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산사 나들이 ~ 우이동 윗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도선사 (붙임바위, 우이동계곡)

북한산(삼각산) 도선사



' 늦가을 산사 나들이, 북한산(삼각산) 도선사 '

도선사 18나한상, 포대화상
▲  도선사 18나한상과 포대화상

도선사 마애불입상

도선사 붙임바위

▲  도선사 마애불입상

▲  붙임바위

 



 

늦가을이 한참 깊어가던 10월 끝 무렵의 어느 평화로운 날, 집에서 가까운 북한산(삼각
산) 도선사를 찾았다.
도선사는 지금까지 10회 남짓 인연을 지었던 절로 그곳의 늦가을 풍경과 늙은 마애불이
문득 그리워 간만에 그곳을 찾은 것인데,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4시에 도봉동(道峰洞
) 집을 나서 방학4거리에서 노원구 마을버스 15번(월계동 청백1단지↔덕성여대)을 타고
우이동 도선사입구에서 두 발을 내렸다.
우이동은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道峯山) 사이에 자리한 동네로 이들 산을 찾는 산꾼
과 나들이꾼들로 늘 북새통을 이룬다.

우이동(牛耳洞) 109번 시내버스 종점 맞은편에는 도선사행 셔틀버스 정류장이 있다. 도
선사까지 걸어가기에는 다소 거리(약 2.3km)가 있고, 이날은 도선사가 목적이라 버스를
기다리는 행렬에 흔쾌히 동참했다. 하여 10분 정도 기다리니 셔틀버스가 기지개를 켜고
내 앞에 나타나 활짝 입을 벌린다.
이 노선은 우이동(109번 종점 맞은편)에서 도선광장까지 운행하는데, 평일에는 30~40분
간격으로 다니며 휴일에는 증차 운행한다. (석가탄신일은 거의 10분 내외 간격, 입석은
안됨) 차비는 무료이나 굳이 내고 싶다면 승차장에 있는 돈통에 알아서 넣으면 되며 신
도와 절에 볼일 또는 예불을 보러 가는 사람만 가려서 받는다. (산꾼들은 거의 받지 않
음)
버스는 각박한 오르막의 연속인 도선사 길(삼양로173길)을 5~6분 정도 낑낑대고 오르다
가 도선광장에 이르러 바퀴를 멈추었다. 우이동에서 도선사를 잇는 신작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닦아준 것으로 그 길로 인해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도선사는 서울 동북부를 대
표하는 고찰(古刹)로 크게 흥하게 된다.

도선광장(마음의 광장)에는 우리나라 최대급의 옥외(屋外) 석불좌상으로 꼽히는 미소석
가불이 이름 그대로 미소를 흩날리고 있다. 그를 중심으로 그 옆에 셔틀 정류장과 주차
장이 있고, 북쪽에는 백운대탐방지원센터와 백운대로 가는 산길이 있으며, 서쪽에는 안
양암과 도선다원이 있고, 그 남쪽에 도선사로 가는 길이 있다.
도선광장에서 도선사 경내까지는 도보 5분 거리로 길은 느긋한 수준이며 천왕문이 제일
먼저 마중을 나와 중생을 검문한다.



 

♠  도선사(道詵寺) 입문

▲  천왕문(天王門)의 뒷모습

맞배지붕을 지닌 천왕문(사천왕문)은 도선사의 정문으로 1987년 11월에 지어졌다. 봉황문(鳳
凰門)이라 불리기도 하며,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四天王, 다문천왕, 지국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의 보금자리로 그들은 이곳을 지나는 중생들을 검문하느라 여념들이 없다. 그들의
수고로움이 있기에 오늘도 도선사와 북한산(삼각산)은 평화롭다.


▲  천왕문 남쪽에서 바라본 천하 (해발 300m)
정면에 보이는 진달래능선 너머로 강북구와 도봉구, 노원구, 중랑구 지역과
불암산, 아차산, 멀리 남양주 지역의 뫼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왜열도에서 건너온 검은 피부의 청동지장보살상

천왕문을 지나 조금 들어가면 청동지장보살상이 모습을 비춘다. 그는 도선사와 자매결연을 맺
은 왜열도 진언종(眞言宗)의 본사, 고야산 안양원(高野 山 安養院)에서 1983년 11월 15일 청담
대종사 열반재 때 증정한 것인데, 주변 나라와 분쟁이나 일삼으며 툭하면 평화를 깨려고 드는
왜열도 원숭이들의 시커먼 마음을 보여주듯 피부가 아주 검다.


▲  가을 단풍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도선사 경내

경내 직전에 이르면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직진하면 주차장과 도선사 경내로 바
로 이어지며, 오른쪽은 종각과 청담대사비, 청담대종사 사리탑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왼쪽은
북한산(삼각산) 산길로 여기서 해발 260m 정도 오르면 북한산성(北漢山城) 용암문에 이른다.
나는 오른쪽 길로 들어서 청담대종사 사리탑을 둘러하고 경내로 들어섰다.


▲  시원스런 추녀 곡선을 지닌 종각(鐘閣, 범종각)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아리를 머금은 사물<범종(梵鐘)과 목어(木魚),
법고(法鼓), 운판(雲版)>의 보금자리로 여기서 북쪽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청담대종사의 사리탑과 그의 비석을 만날 수 있다.

▲  수수한 모습의 청담대종사 석상

▲  귀부가 꽤 인상적인 청담대사비


▲  화려한 수작(秀作)을 자랑하는 청담대종사(靑潭大宗師) 사리탑과
그의 뒤를 받쳐주는 조그만 삼천(三千)지장보살상


도선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20세기 큰 승려의 하나로 추앙받는 청담대종사<1902~
1971, 청담당 순호대종사(靑潭堂 淳浩大宗師)>이다.

그는 경남 진주 출신으로 이름은 이순호(李淳浩)이다. 3.1운동에도 참여했으며 금강산 마하연
에서 수행했던 승려 박포명을 만나 불교와 강렬한 인연을 맺게 된다.
'왜 불이 뜨겁고 얼음이 찬 줄 아느냐? 마음이 뜨겁다고 생각하고 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의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법문이 청담을 불교의 세계로 고스란히 인도한 것이다.

1924년 왜열도로 건너가 송운사(松雲寺)에서 행자생활을 했으나 왜열도 불교의 좋지 않은 점<
승려가 마누라를 두고 가정을 꾸림>에 크게 경악하여 바로 본토로 돌아와 고성 옥천사(玉泉寺
)에서 석전 박한영(石顚 朴漢永)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가 개운사(開運寺)
불교전수상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하고, 바로 만공(滿空)의 문하에 들어가 수행을 했다.
1928년 조선불교학인대회를 통해 왜정(倭政)에 저항하는 불교에 앞장섰고, 1947년 봉암사(鳳
巖寺) 결사를 통해 왜정의 농간으로 망가진 이 땅의 불교를 정화하고 철저히 계율을 지키며
오로지 참선에 정진하자는 불교정화운동을 추진하게 된다.
허나 청담의 개혁에 발끈한 승려들(대부분 대처승)의 태클도 만만치 않아 그 길은 순탄치 않
았다. 다행히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승(帶妻僧)에 대해 절에서 나가라며 불교의 개혁을 지지했
고 성철(性徹), 자운 등 깨어있는 승려들도 앞다투어 그의 개혁에 동참했다.

1960년 11월 대법원이 비구승(比丘僧)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이상한 판결을 내리자 청담은 비
밀리에 6명의 비구로 이루어진 순교단을 결성, 판결 다음날 대법원청사에서 할복을 감행했다.
이 행위는 여론을 비구승 쪽으로 돌리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1961년 박정희 군사 정권이 들
어서자 '불교 정화는 비구와 대처승 간의 싸움이 아니라 국민사상 개조 운동'이라며 군부를
설득해 1962년 4월 비구승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통합종단이 출범하게 되었다.

1966년 11월 초대 종정(宗正)인 효봉(曉峰)의 뒤를 이어서 청담이 제2대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불교 근대화의 발판을 위해 내세운 역경(譯經), 도제양성, 포교 등 3대 지표를 포함하여
의식의 현대화, 군승제(軍僧制) 촉구, 신도 조직 강화, 석가탄신일 공휴일 제정, 불교회관 건
립 등 6개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또한 포교의 활성화를 위해 절에서 매주 1회씩 정기법회를
개최하는 것과 불교방송국 및 승가대학 설립을 목표로 세웠다.
그 목표를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1971년 11월 15일, 69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 그의 다비
식(茶毘式)에는 무려 20,000여 명의 사부대중이 모여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으며, 1972년
도선사 경내 동쪽 산자락에 자리를 닦고 그의 사리탑과 비석, 석상을 세웠다.

청담의 사리탑은 20세기 후반 제일의 승탑<부도(浮屠)>이라 내세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
주 찬란하고 장엄한 모습이며, 승탑 뒤로 무려 3,000기의 조그만 지장보살을 갖춘 커다란 벽
을 둘러 가히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만큼 청담대사를 향한 도선사와 후학들의 지극정성이 대
단하다. <청담대사의 승탑은 고성 옥천사(☞ 관련글 보러가기)에도 있음>
사리탑 구역은 3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일 밑에 청담의 석상을 두었고, 중간에는 청담대
사비, 윗쪽에는 사리탑을 두었다. 바로 이 구역을 닦으면서 오래된 청동범종과 청동숟가락 5
점, 청동젓가락 1짝, 청동국자 2점, 왜열도에서 건너온 동경(銅鏡, 봉래문경), 상평통보 등
고려 말과 조선 중기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들 유물을 통해 절 건물이 이 자리에 오래 눌러앉았음을 보여주며, 그들 모두 서울 지방유
형문화재 259호
('도선사 청동종 및 일괄유물')로 지정되어 청담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종각에서 경내로 이어지는 호젓한 길

▲  도선사 호국참회원(護國懺悔院)

청담대종사 사리탑을 둘러보고 경내로 들어서니 호국참회원이라 불리는 커다란 팔작지붕 건물
이 마중을 한다.
호국참회원은 지상 3층, 지하 1층의 1,000평 규모로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1968년 11월
청담대종사가 우리나라 불교의 중흥과 평화통일의 염원을 담은 호국참회불교를 제창하며 지은
것으로 1977년 증축을 했으며 단양 구인사(救仁寺)의 건물 스타일과 많이 비슷하다. 아무래도
이곳이 첩첩한 산중이고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이라 추가로 건물을 올리기 어려워 이런 식의 건
물을 다진 것이다.
1층에는 공양간이 들어있고, 2층은 어린이회, 학생회, 도서실, 수련원 등이 있으며, 3층은 대
법당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상이 깃들여져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도선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이자 북한산 3대 봉우리의 하나인 만경대(萬景臺) 밑에 자리한 도선
사는 862년에 부동산 전문가인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이곳 산세가 1,000년 뒤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불법(佛法)을 다시 일으킬 곳이라 예견하
고 절을 지은 뒤, 큰 암석을 주장자(柱杖子)로 갈라 마애불을 새겼다고 한다. 그 연유로 사찰
이름을 도선사라 했다는 것이다. 허나 안타깝게도 이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
이며, 그 마애불 조차도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이미 판명이 났다.
다만 청담대종사 사리탑 자리에서 고려 말과 조선시대 유물이 출토되어 적어도 고려 한복판부
터 절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그곳이 경내의 중심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창건 이후, 어찌된 영문인지 오랫동안 일기장을 남기지 못했으며, 조선 숙종(肅宗) 시절 북한
산성을 수리했을 때 승병(僧兵)들이 이 절에서 보초 임무를 선 기록이 있다. 1863년 안동김씨
의 실세인 김좌근(金左根)이 돈을 대어 칠성각을 지었고, 1887년 동호 임준(東湖 任準)이 7층
석탑을 세우고 그 안에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1903년 혜명(慧明)이 고종의 명으로 대웅전을 중건하고 신중도와 지장도 등 14점의 탱화를 봉
안했으며(이때 불상 2기를 개금하고 1기를 개채함) 1904년 국가기원도량으로 지정을 받았다.
1961년 청담이 주지로 주석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절을 크게 불려나갔
으며, 1963년 도선암을 도선사로 격을 높였고, 1968년에 절과 속세를 이어주는 도로가 닦여지
면서 접근성이 한층 좋아졌다.
2001년 청담대종사를 기리고자 청담기념관을 세웠고, 2002년 그 안에 유물관을 두어 청담대종
사의 유물과 절의 문화유산을 전시/보관하고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해 호국참회원, 명부전, 삼성각, 적묵당, 천불전, 요사채 등 10여 동
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마애불입상과 목아미타불 대세지보살상, 석독성상, '청동종 및
일괄 유물(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59호)',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조관음보살좌상(서울 지방유
형문화재 396호
) 등 지방문화재 5점을 품고 있다.
그 외에 오래된 보리수와 19세기 말에 조성된 지장시왕도, 괘불도, 묘법연화경, 7층석탑, 마
애사리탑 등의 비지정 문화유산도 여럿 지니고 있으며, 청담대종사 사리탑과 청담대사비, 18
나한상과 포대화상, 진신사리탑 등의 조촐한 볼거리도 간직하고 있다.
절의 부설 기구로는 금천구 시흥동(始興洞)에 있는 혜명보육원과 실달학원, 청담종합중고교
등이 있으며, '도선법보'등의 정기 간행물을 내놓고 있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제대로 박힌 고즈넉한 산사로 신작로가 경내까지 뚫려있어 실감이 덜하겠
지만 북한산(삼각산) 서울 구역에 자리한 고찰(古刹) 중 문수사(文殊寺), 일선사(一禪寺) 다
음으로 높은 320~330m 지점에 자리해 있다. 그만큼 이곳은 깊은 산골이다.
만경대와 인수봉(仁壽峯) 그늘에 자리하여 위치도 좋으며, 그곳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산꾼과 답사꾼의 왕래도 빈번하다. 또한 마애불입상이 영험하다고 소문이 자자하여 기도 수요
도 상당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264 (삼양로173길504, ☎ 02-993-3161~63)
* 도선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도선사의 오랜 자랑, 마애불입상



 

♠  도선사 둘러보기 (호국참회원, 삼성각 등)

▲  도선사에서 먹은 공양밥의 위엄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아주 아름다운 말이 있다. 호국참회원 1층 공양간이 마침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 밥과 국 냄새가 나의 후각을 어지럽히니 이곳 공양(供養) 인심이나 확인할
겸, 1그릇 들고 가기로 했다. 어차피 급한 것도 없다.
도선사 공양밥은 다른 절과 비슷한 비빔밥 스타일로 하얀 밥과 김치 등의 나물, 고추장을 먹
을 만큼 담고 별도의 그릇에 미역국을 담아 즐겁게 공양에 임하면 된다. 누구든 무료로 공양
을 할 수 있으며 보통 17시까지 밥을 제공한다. (시간은 상황에 따라 변경 가능) 미역국은 비
록 고기나 해산물은 들어있지 않으나 국물이 진국이다.

어찌하다보니 그릇이 터질 정도로 밥과 나물을 담았는데 이것을 과연 다 먹을 수 있을까? 걱
정이 들었다. 허나 그것은 기우였다. 순간 시장기가 강림하여 거뜬하게 빈 그릇으로 만든 것
이다.
그렇게 공양을 마치고 옆 칸으로 넘어가 내가 먹은 그릇과 수저를 설겆이하고 물 1모금 섭취
한 다음 밖으로 나왔다. 도선사 관람은 이제부터이다.

◀ 청담심지(靑潭心地)
청담대종사가 머물렀던 백운정사 옆에
있던 것으로 2002년에 현 자리로
옮겼다.

◀  돌로 다진 천불전(千佛殿)
종무소(宗務所)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건물로 이름 그대로 조그만 천불이
봉안되어 있다.


▲  배불뚝이 포대화상(布袋和尙)
그의 배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하여 그의 배는 좀처럼 마를 날이 없다.
사람들이 얼마나 문질렀는지 배가 아주 검은 피부가 다 되었으며, 그의
허공에는 조그만 등이 대롱대롱 달려 가을 바람을 즐긴다.

          ◀  도선사 보리수(菩提樹)
명부전 앞에는 불교에서 가장 애지중지하는 나
무인 보리수가 있다. 부처가 보리수 밑에서 깨
달음을 얻었다는 사연 때문이다.
이 나무는 2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어느 승려
가 멀리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과연 그
럴까?) 보리수는 염주나무, 각수(覺樹), 성수(
聖樹)란 별칭도 지니고 있으며, 사진이 너무
흐릿하게 나온 것이 다소 아쉽다. (내 역량이
그것 밖에 안되니 어쩔 수 없음...)


▲  청기와를 눌러쓴 명부전(冥府殿)

보리수 그늘에 자리한 명부전은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
王), 저승의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지금은 명부전이 자리
를 잡고 있으나 이곳은 원래 청담대종사가 머물렀던 백운정사(白雲精舍) 자리이다.

▲  온화한 표정의 금동지장보살상과
19세기에 그려진 지장시왕탱

▲  죽은 이를 심판하는 저승의 10왕과
시왕탱 (지장보살상 좌측)

▲  저승의 10왕과 시왕탱 (지장보살상 우측)

▲  명부전 앞에 자리한 윤장대(輪藏臺)


▲  도선사 대웅전(大雄殿)과 국화전시장

청기와를 지닌 대웅전은 도선사의 중심 건물인 법당(法堂)이다. 절 초창기 시절부터 있었다고
하나 신뢰도는 떨어지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대웅전이라 석가여래상이 중심으로 있어야 되지만 아미타불(阿彌陀佛)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에 거느려 아미타3존상을 이루고 있다. 또한 대웅전
현판은 강창회(姜昶會, 1789~?)가 12살에 썼다고 전한다.

내가 갔을 당시 대웅전 뜨락에는 노란 국화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뜨락 허공에는 연등이 가득
매달려 국화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경내를 둘러싼 단풍과 더불어 늦가을의 멋을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이곳은 매년 11월 경내에서 이렇게 가을 국화전시를 하고 있으며, 석가탄신
일에는 이곳에서 산사음악회와 공연, 법회가 열리는 경내의 광장과 같은 곳이다.


▲  금빛찬란한 대웅전 아미타3존상과 금동후불탱
대웅전 천정에는 하얀 연등이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며 보랏빛 색깔을
연출해 황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  대웅전 앞을 곱게 수식하고 있는
노란 국화들

▲  연등이 하늘을 가린 대웅전 뜨락
(삼성각에서 바라본 모습)


▲  호국참회원 대법당에 봉안된 목아미타불, 대세지보살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91호


호국참회원 3층에 자리한 대법당에는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아미타3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아
미타불을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가지고 있는 점이 참 이채로운데 그렇다고 도선사가 아미타불
도량을 칭하지도 않는다. (도선사는 '호국참회도량'을 칭하고 있음)

대법당 불단에 들어앉아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아미타3존상은 크기가 아주 조그만하여 동자승
처럼 귀엽기 그지 없다. 이들 중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상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
으며, 관세음보살은 근래 새로 지은 것이다.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상 뱃속에서는 고맙게도 그들의 조성시기가 적힌 발원문(發願文)이 나
왔는데, 1740년에 여기서 가까운 도봉산 원통암(圓通庵, 원통사)에서 조성하여 북한산 진관암
(津寬庵, 진관사)에 봉안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하여 18세기 서울 지역 보살상과 아미타불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주며 그 발원문 덕에 지방문화재의 감투까지 받게 되었다. 그리고 아
미타불 이름 앞에 '목(木)'이 붙은 것은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으로 이후 개금을 하여 현재 모
습이 되었다.

북한산(삼각산) 반대편에 있던 이들이 어찌하여 도선사까지 흘러들어왔는지는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다. 다만 1933년 도선사에서 만든 사찰재산대장에 아미타불, 약사불, 관세음보살이 등
장하는데, 그들이 아미타3존상인지는 불투명하며(관세음보살은 입상으로 나와있음) 1960년대
에 촬영된 사진에는 아미타불 옆에 관세음보살이 있는데, 그 역시 진관사에서 넘어왔다고 한
다.
이후 그의 보관(寶冠)이 일부 손상되어 새 관세음보살을 만들어 붙였으며, 기존 관세음보살은
청담기념관 수장고에 넣어버렸다. (그 관세음보살상이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96호인 석조관음
보살좌상임)
아미타3존상 뒤에는 금동으로 치장된 후불탱과 닫집이 듬직하게 자리하여 그들을 반짝반짝 윤
기를 내준다.


▲  연병장처럼 넓은 호국참회원 대법당
중생들의 지원을 받아 달아놓은 조그만 금동원불이 벽을 가득 도배하고 있다.
이곳은 공간이 넓어서 강당 및 행사장의 역할도 도맡고 있다.

▲  대웅전 옆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 석 독성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92호

대웅전 뜨락에서 마애불입상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삼성각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山神)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 치성광여래)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중 독성상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어깨가 딱 벌어지고 체격 또한 단단해 아주 늠름해보이는 이 독성상은 돌로 빚은 것으로 지장
보살처럼 푸른 대머리를 지니고 있다. 시선은 약간 아래로 하고 있으며 무슨 걱정이 있는지
표정이 썩 밝아보이지는 않는다. 몸에 걸친 붉은 가사(袈裟)를 묶은 고리매듭이 왼쪽 어깨에
있으며, 오른손은 바닥에 대고 왼손을 왼쪽 다리를 세운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아줌마 자세처
럼 앉아있다.

그는 원래 마애불입상 주변에 있던 독성각(獨聖閣)에 있었으나 이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으
며, 1962년에 청담이 불교정화운동으로 도선사에 있던 산신각과 칠성각, 용왕당 등 토속신앙
적인 건물을 모두 부시면서 그 건물에 봉안된 산신과 칠성을 모두 독성각에 집어넣고 삼성각
으로 이름을 갈았다.
1992년 독성상의 몸을 새롭게 채색을 했는데, 이때 그의 뱃속에서 1876년에 개분(改紛)했음을
알려주는 '독성나반존자 개분 봉안축원문'이 튀어나왔다. 하여 빠르면 18세기에 조성된 것으
로 여겨지며 조선 후기에 흔치 않은 돌로 만든 독성상이자 그 시절 독성상 연구에 좋은 자료
로 평가를 받는다. (대부분의 독성상은 나무로 만들었음)

▲  삼성각 산신탱과 산신상

▲  삼성각 칠성탱과 석가3존상

▲  삼성각 밑에 자리한 반야굴(般若窟)
쌍용그룹을 세운 김성곤이 돈을 대어 지은
것으로 11면관세음보살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  반야굴을 장식하고 있는 보살들
가운데가 11면 관세음보살, 좌우가
문수보살, 보현보살



 

♠  도선사 마무리

▲  도선사 마애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호

경내 뒤쪽이자 도선사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에 높이 20m 정도 되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바로 그곳에 도선사의 오랜 명물이자 든든한 밥줄인 마애불입상이 짙게 깃들여져 있다. 도선
사에서는 도선대사가 직접 새겼다고 홍보를 하고 있으나(도선이 손으로 바위를 갈라서 만들었
다고 함;) 조사 결과 고려 때 유행했던 마애불 계통을 이어받은 조선 중기 석불로 크게 보고
있다.

돋음새김으로 짜여진 이 석불은 높이 8.43m(머리 부분 2.15m, 어깨 너비 2.88m)의 장대한 규
모로 오랫동안 산골 구석에서 외롭게 지내다가 19세기 후반, 안동김씨의 후원으로 나라의 기
도도량으로 지정되면서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이후 도선사가 '영험한 마애불'로 적극 홍
보하면서 찾는 수요가 나날이 늘어났고, 365일 사람들의 발길이 마를 날이 없다. 완전 서울판
갓바위(관봉 석조여래좌상)가 된 것이다.

이 마애불은 얼굴도 몸통도 모두 두툼하다. 그를 보호하고자 검은 피부의 청동 보호각을 씌워
놓았는데, 그로 인해 얼굴 부분은 거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머리 위에 간단하게 비와 눈을
막을 수 있는 덮개 정도만 설치했으면 좋았을 것을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의 보호각을 씌워놓
아 마치 갇힌 듯한 답답한 모습을 만들어버린 것이 다소 아쉽다.

마애불의 머리는 소발(素髮)로 낮게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솟아있다. 가늘게 뜬 두 눈
은 음각으로 처리해 눈과 주변 살이 두꺼워 보이며, 코는 넓직하고 두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큰 얼굴에 비해 입은 작으며 수염이 살짝 표현되어 있고, 얼굴과 몸통이 딱 붙어있어
목은 아예 없는 것 같다.
몸통에는 옷주름이 이리저리 그어져 율동을 보이고 있으며, 그의 정체는 관세음보살 누님으로
여겨진다. 그 앞에는 넓게 공간을 닦아 예불 공간으로 삼았고, 주변에 1887년에 동호 임준이
지은 7층석탑이 날씬한 모습으로 자리해 뜨거운 예불 현장을 지켜본다.

도선사에서는 마애불 자체를 석불전(石佛殿)으로 삼아 애지중지하고 있으며, 그를 통해 적지
않은 수입을 거둬들이고 있다. 비록 팔공산(八公山) 갓바위만큼은 아니더라도 매일 들어오는
재물이 실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오늘도 중생들의 소망을 접수하랴. 도선사 곳간을 채워주랴.
마애불의 고생이 참으로 크다. 부디 그렇게 벌어들인 돈, 관세음보살 누님의 뜻에 따라 어려
운 중생을 위해, 속세를 위해 모두 내놓기를 바란다. (자고로 종교는 돈과 정치에 너무 욕심
을 부리면 안됨)


▲  평화의 진신보탑(眞身寶塔) (9층석탑)

마애불을 둘러보고 밑으로 내려가면 평화의 진신보탑과 일심광명각 등이 있는 공간이 나온다.
오대산에 있는 월정사(月精寺) 8각9층석탑을 닮은 평화의 진신석탑이 이곳의 중심 역할을 하
고 있는데,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파리와 개미도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하얀 피부
를 자랑하고 있어 월정사8각9층석탑의 젊은 시절을 보는 듯 하다.


▲  일심광명각(一心光明閣)
반야굴 위에 무지개로 화현(化現)했다는 청담대종사를 위해 만든 공간이다.

▲  일심광명각 내부

▲  평화의 불과 괘불(掛佛)

도선사가 호국참회도량을 칭하다보니 평화를 강조하는 석탑과 불까지 갖추고 있다. 짜투리 공
간을 활용하여 경내의 눈요깃감도 조금 늘릴 겸, 평화를 염원하는 도선사의 마음을 살짝 담은
것인데, 평화의 불 뒤에는 근래 장만한 괘불이 걸려있어 활활 타오르는 불을 지켜보고 있다.


▲  포대화상과 18나한상, 그리고 그들을 보듬은 늦가을 풍경

경내 제일 뒤쪽(진신보탑 뒤쪽) 산자락에는 돌로 다진 18나한상과 포대화상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들은 일심광명각과 비슷한 사연으로 조성된 것으로 돌 하나에 나한 1명씩 배치해 다
소 여유로운 모습들을 보이고 있는데, 다들 자유롭고 제각각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포대화상이 그의 치명적인 매력인 똥배를 쑥 내밀고 돈통을 쥐어들며 해
맑은 표정으로 서있어 마치 18나한의 두목 같다.

평화로운 그들 뒤로 늦가을 누님이 질러놓은 고운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져 속세(俗世)에서 오
염되고 상처 받은 두 안구를 제대로 정화시켜준다. 붉게 물든 단풍잎부터 연두색, 녹색, 노란
잎까지 대자연이 물들인 색채들이 너무 곱다. 하여 제아무리 천재 화가라 한들 대자연의 색채
를 감히 흉내내지는 못할 것이다.

▲  윗쪽에 자리한 나한상들

▲  밑쪽에 자리한 나한상들

18나한상까지 모두 둘러보고 잠시 잊었던 청담기념관으로 내려갔다. 그곳은 호국참회원 밑에
자리해 있는데, 문은 이미 굳게 닫힌 상태였다. 알고보니 개방시간은 16시까지이다. (그때가
17시가 넘었음)
이럴줄 알았으면 미리 그곳을 살펴보고 경내를 둘러보는 것인데 그만 방심을 하고 말았다. 이
렇게 중요한 것을 놓쳐버려 다음에 또 와야 되는 구실을 만들고 말았으나 다행히도 집에서 가
까운 곳이라 언제든 쉽게 찾을 수가 있다. (이후 청담기념관도 모두 둘러보았음)


▲  늦가을이 산에 불을 놓았다. 알록달록 타오르는 늦가을 풍경
(도선사 주변)

마음 같아서는 북한산성 용암문까지 훌쩍 올라가고 싶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서 더 이상의 욕
심을 부리지 않고 우이동으로 얌전히 내려갔다.
내려갈 때는 금지된 곳으로 묶은 우이동계곡의 안부를 확인하고자 셔틀버스에 의지하지 않고
걸어서 내려갔는데, 도선광장에서 조금 내려가니 커다란 바위가 잠시 보고 가라며 발목을 붙
잡는다. 바로 붙임바위이다.


▲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고개를 든 붙임바위

도선사까지 신작로가 닦이기 전에는 사람들이 붙임바위에서 많이들 쉬어갔다. 물론 지금도 쉼
터의 역할은 녹슬지 않았다. 산꾼들과 문명의 이기(利器)를 거부하며 두 다리로 오가는 사람
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바위에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바위에 조그만 돌을 붙이고 소망을 들
이밀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하여 바위의 배는 물론 옆구리와 주름선 등 돌
이 안착하기 좋은 자리에는 마구 돌을 갖다 붙였다. 심지어는 그의 피부에 상처를 내고 돌을
얹는 사람도 있었다. 하여 돌을 붙이는 바위란 뜻의 '붙임바위'라 불리게 되었고, 이곳 고개
는 '배바위고개'가 되었다.

바위를 딱 봐도 크고 준수하게 생겼으며, 도선사로 가는 길목에 있다보니 자연스레 주목을 받
은 것이며, 저런 바위는 굳이 절이 아니더라도 산악신앙(山岳信仰)의 대상으로 늘 추앙을 받
기 마련이다. 하여 사람들의 부질없는 소원풀이 도구가 되었고, 옆구리에 신작로가 뚫리면서
5분이 멀다하고 차량들이 소음과 매연을 쏟아붓고 지나가니 그의 고통이 말이 아닐 것이다.
허나 대자연의 넉넉한 마음처럼 딱히 싫은 내색 없이 그 자리를 지키며 도선사의 이정표 역할
을 한다.
지금도 그의 주름과 피부 곳곳에는 사람들이 붙여놓은 돌이 적지 않다. 그만큼 사람들이 속세
의 팍팍한 삶을 그에게 푸는 것이다.


▲  늦가을에 잠긴 도선사 길 (붙임바위 주변)

▲  금지된 계곡, 우이동계곡 (청담폭포, 적취병 주변)

도선사 신작로(청담로, 삼양로173길) 옆에는 우이동계곡(도선사계곡)이 졸졸 흐르고 있다. 북
한산(삼각산) 동부 지역의 이름난 계곡의 하나로 도선사 윗쪽에서 발원하여 속세를 향해 흘러
가는데, 백운천(白雲川)이라 불리기도 하며, 우이동으로 내려가 우이천으로 간판을 갈고 도봉
구와 강북구, 노원구와 성북구의 경계를 이루며 중랑천(中浪川)으로 내려간다.

조선 초부터 서울 근교 경승지로 격하게 찬양을 받았던 우이동계곡은 양반사대부의 피서지로
인기가 높았다. 하여 수재정(水哉亭)과 재간정(在澗亭), 겸산루(兼山樓) 등 그들이 지은 정자
와 별장이 계곡 주변에 즐비했으며, (지금은 다 사라짐) 그들이 남긴 바위글씨가 여럿 전하고
있다.
이곳을 즐겨찾던 사람 중 이계 홍양호(耳溪 洪良浩, 1724~1802)가 있는데, 그는 여기서 9곳의
괜찮은 명소를 뽑아 '우이동구곡(九曲)'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 식구들은 대략 이렇다. <그의
'우이동구곡기(牛耳洞九曲記)'에 실려있음>
제1곡은 '만경폭(萬景瀑)'이란 폭포로 도선사 밑에 있다. 조현명(趙顯命, 1690~1752)과 이주
진(李周鎭, 1692~1749), 그의 아들인 이은(李殷, 1722~1781) 등이 남긴 바위글씨가 전하고 있
으며, 제2곡은 적취병(積翠屛), 제3곡은 찬운봉(瓚雲峯), 제4곡은 커다란 바위인 진의강(振衣
岡), 제5곡은 옥경대(玉鏡臺), 제6곡은 월영담(月影潭), 제7곡은 회영암(淮纓巖), 제8곡은 명
옥탄(鳴玉灘), 그리고 제9곡은 재간정(在澗亭)이다.

왜정 때는 서울 근교 벚꽃 명소로 유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봄꽃놀이를 하러 왔다. 이때만 되
면 경성역(서울역)에서 임시 관광열차를 편성하여 우이동 부근인 창동역(倉洞驛)까지 운행했
는데, 창동역부터 여기까지는 걸어서 이동했다.
이처럼 서울 사람들과 귀족들의 눈과 마음을 시리게 해주었던 우이동계곡은 1970년대 이후 상
수원 보호구역이 되면서 계곡 전체가 금지된 계곡으로 꽁꽁 묶여 있다. 하여 우이동9곡 식구
들 상당수는 접근이 통제되어 제대로 더듬기가 어렵게 되었고, 그저 계곡 옆 신작로에서 바라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2021년에 9곡 명소와 가까운 곳에 관련 안내문과 조망대를 설치
했으나 만경폭과 적취병 등은 너무 거리가 있어서 제대로 보기가 힘듬)
비록 사람들에게는 다소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그 덕에 인간들의 괴롭힘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이렇게 청정하고 때 묻지 않은 구석을 자랑하게 되었다. 선녀 누님도 놀러올 것 같은 계곡이
저 밑에 간드러지게 유혹을 하지만 괜시리 잘못 발을 들였다가 벌금형의 고통을 받을 수 있다.

붙임바위 주변 계곡에는 청담폭포와 적취병이 있는데,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벼랑
과 바위들이 늦가을 단풍과 어우러져 일품 수채화를 자아내고 있었다.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바라보듯 해야 되는 아쉬움이 있으나 굳이 접근 통제의 경고를 무시하면서까지 대자연의
작품에 옥의 티가 되고 싶지는 않다.

붙임바위를 끝으로 도선사 늦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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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1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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