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산사'에 해당되는 글 136건

  1. 2013.03.18 충청도의 내륙, 괴산 역사기행 ~~~
  2. 2013.03.04 늦겨울 산사 나들이 ~ 계룡산 갑사 (갑사계곡, 숲길)
  3. 2013.02.13 한겨울 산사 나들이 ~ 영조 임금의 효심이 깃든 파주 고령산 보광사
  4. 2012.12.29 부산 도심 속에 숨겨진 아늑한 고색의 절집 ~ 백양산 운수사 (백양산 숲길, 범방동3층석탑)
  5. 2012.11.13 늦가을 산사 나들이 ~ 천년 묵은 은행나무로 유명한 양평 용문사 (용문산)
  6. 2012.10.18 산과 호수, 도자기축제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산 ~ 이천 설봉산 (설봉공원, 영월암)

충청도의 내륙, 괴산 역사기행 ~~~

 


' 겨울맞이 괴산(槐山) 나들이 '
괴산 원풍리 마애2불병좌상
▲  괴산 원풍리 마애2불병좌상

 


겨울의 제국(帝國)이 가을을 몰아내고 하늘 아래 세상을 접수한 11월 하순 주말에 충북 괴산
을 찾았다. 이번에는 멀리 남쪽(창원)에서 온 일행분들과 같이 갔는데, 그들이 괴산(槐山)으
로 답사를 온다고 하여 간만에 그들도 볼 겸, 미답지를 하나 지워볼 겸해서 답사에 동참했다.
사는 곳이 서로 반대라 괴산의 첫 답사지인 원풍리 마애불에서 그들과 합류하기로 했다.

괴산은 창원보다는 서울이 더 가깝다.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나 역시 아침 일찍 길을 떠나야
된다. 그래서 찬란한 여명(黎明)이 비추기 전인 5시에 대문을 나섰다. 원풍리는 교통편이 매
우 얄미운 수준이기 때문에 차 시간을 딱 맞춰야 된다. 다행히 동서울터미널에서 6시 20분에
충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면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은 충주터미널에서 원풍리까지 시내버스
로 딱딱 이어진다.

충주행 고속버스는 1시간 24분 만에 나를 충주(忠州)로 실어주었다. 충주터미널에서 8시 5분
에 수안보로 가는 충주시내버스 240번을 타고 아침의 청명한 기운이 깃들여진 충주의 산하를
달려 8시 50분에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水安堡)에 도착했다.
수안보에서 연풍으로 넘어가는 군내버스가 9시 정도에 있는 것 같던데 시간표를 보니 9시 10
분에 차가 있다. 그 시간이 되자 버스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농촌의 인구 감소와 농어
촌버스의 어려운 현실을 보여주듯 승객은 달랑 나 혼자 뿐이다. 운전사에게 원풍리 마애불을
문의하니 마애불과 원풍리는 모른다고 그런다. 다만 신풍에서 내리면 될 것 같다고 그런다.

버스는 중부내륙고속도로와 우회도로로 많이 한가해진 옛 3번 국도를 경유한다. 라면보다 더
꼬불꼬불한 소조령(小鳥嶺, 작은새재) 고갯길을 굽이굽이 돌아 고개의 정상인 문경3관문입구
에 이르고, 고개를 넘자 얼마 뒤 원풍리마애불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나를 마중한다. 운전
사가 그곳을 그냥 지나치자 서둘러 일어나 내려달라고 했다.
그렇게 차에서 내려 이정표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서 마애불까지 얼마나 들어가야되나 왼쪽
을 살피니 들어가고 할 필요도 없다. 거대한 바위에 조그만 감실을 파고 들어앉은 그들이 바
로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에 이른 시간은 9시 20분, 그로부터 약 40분 뒤인 10시에 남쪽 사람들을 태운 관광
버스가 도착했다.

 


♠  우리나라에 거의 없는 이불좌상(二佛坐像), 거대한 바위 중앙에 둥지를 트고
다정히 들어앉은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院豊里 磨崖 二佛並坐像)
- 보물 97호

수안보에서 연풍(延豊)으로 넘어가는 소조령 고갯길 우측 큰 바위에 괴산의 명물이자 우리나라
에는 거의 없는 2불좌상, 원풍리 마애불이 자리해 있다. 문화재청의 지정 명칭은 원풍리 마애2
불병좌상인데, 예전에는 원풍리 마애불좌상이라 불렸다. 그러다가 근래에 그들 성격에 맞춘다고
이름을 고친건데, 그 명칭이 좀 어렵다. 그냥 속편하게 '원풍리 마애불'이라 불러도 무관하다.
그들은 속세에서 자신을 뭐라 부르든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데, 가만히 있는 자신들의 명칭을
두고 속세에서 계속 왈가왈가 하는 것이다.
지금이야 그를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있어 찾기는 쉽지만 도로보다 한층 높은 언덕에 있기 때문
에 이정표가 없던 시절에는 아무리 길가라고 해도 길 우측 위쪽 부분을 잘 살피지 않는 이상은
절대로 찾을 수가 없었다.


▲  도로에서 바라본 원풍리마애불

▲  수레의 왕래가 뜸해진 원풍리마애불 입구
우회도로와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2001년 이전)에는 자주 차가 막힐 정도로
수레의 왕래가 빈번했다.
 

마애불은 수레의 왕래가 많이 뜸해진 옛 3번 국도와 고속질주가 벌어지는 3번 우회국도가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높이 30m에 이르는 거대한 암벽에 조성되어 있는데, 특이한 것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못하는 6.5m 높이에 둥지를 트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 마애불은 아무리 커
도 발이나 다리까지는 사람의 손이 닿는다. 허나 이 불상은 허공에 떠있는 듯, 도저히 만질 수
없게 높은 곳에 만들었다. 아마도 속세(俗世)에 찌든 속인(俗人)의 오염된 손길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고자 그런 모양이다. 지금이야 기술이 좋아서 저런 불상은 뚝딱 만들지만 옛날에는 어떻
게 새겼을까? 나무로 불상 위치까지 대(臺)를 만들고 그곳에 올라 조각을 했을 것이다.

▲  남쪽 측면에서 바라본 마애불

▲  북쪽 측면에서 바라본 마애불

불상의 높이는 5m로 약 6x5.5m 크기의 네모난 감실(龕室)을 파고 그 안에 2구의 큰 불상을 돋음
새김으로 새긴 다음 별도로 2구의 보살상(菩薩像)을 형체만 알아볼 정도로 작게 만들었다. 이들
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없는 이불좌상이자 이 땅에서 유일한 이불마애불(二佛磨崖佛)로 그 가
치가 높다. 이불좌상은 병립불(竝立佛), 병좌상(竝坐像), 이불병좌상으로도 불리며, 중원대륙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크게 유행했던 불상 양식이다.

이렇게 2명의 불상을 나란히 새긴 것은 법화경(法華經)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법화
경은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渤海)에서 크게 유행했던 법화신앙으로 그 주인공은 석가불(釋迦
佛)과 다보불(多寶佛)로 추정되지만 아직까지는 속시원한 정답은 없는 실정이다. 이들은 12세기
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전설에는 신라 후기에 여상조사(呂尙祖師)가 조성했다고 하고, 고려
후기 고승인 나옹대사(懶翁大師)가 인근에 상암사(上庵寺)를 세우고 몸소 새겼다고도 한다. 허
나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일 뿐이다.


▲  노부부처럼 다정하게 들어앉은 원풍리마애불

불상의 얼굴은 도드라지고 넓적하다. 머리는 민머리로 보이며, 눈은 좌우로 가늘고 길다. 코는
왼쪽 불상은 온전하나, 오른쪽은 파여서 흔적만 있다. 눈 위에는 부드러운 곡선의 눈썹이 드리
워져 있으며, 입가에는 은은하게 미소가 번져 자비로운 느낌을 선사한다.

통견의(通絹衣)를 걸친 불상의 몸은 반듯한 어깨와 평평한 가슴이 표현되었으며, 옷 주름이 선
명하다. 눈에 잘 들어오진 않지만 불상 뒤로는 광배(光背)가 있다. 광배에는 5구의 화불(化佛)
이 있는데, 채색과 장식을 했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이 불상에는 전쟁과 관련된 몇 가지 씁쓸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임진왜란 시절에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불상 앞을 지나다가 부처의 모양이 장사처럼 생긴 것을 보고
발끈했다. '근처에서 장사가 많이 나오겠구나. 혈을 끊어야겠다'
그래서 불상 뒤에 있던 혈(穴)을 칼로 찌르고 오른쪽 불상의 코를 베었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
도 명나라를 지극히 숭모하던 사대주의(事大主義)의 일환으로 나온 전설인 듯 싶다. 또한 불상
몸 곳곳에 나 있는 검은색은 총탄의 흔적으로 6.25시절에 근처에서 전쟁을 치르면서 생긴 것이
라고 하며, 혹은 양키 미군이 불상을 사격물로 삼고 표적사격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어 답사객의
마음을 착잡하게 만든다.


▲  기도처가 마련된 마애불의 아랫쪽

불상 앞에는 조촐한 기도처가 마련되어 있다. 기도처에는 마애불을 관리하는 인근 절에서 갖다
둔 복전함이 있는데, 함 옆에는 제발 돈을 빼가지 말라고 호소하는 내용이 걸려있다. 함(函)을
보니 자물쇠가 무려 3개나 달려있다. 오죽 도난이 잦았으면 그리했을까 싶지만 너무 돈에 집착
하는 것 같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마애불상은 돈과 관련없이 중생 걱정에 잠을 못이루
는데, 그런 불상을 관리하는 절은 그의 마음과 달리 복전함 걱정에 잠을 설치는 모양이다.

마애불이 깃들여진 암벽의 왼쪽에는 조그만 샘터가 있다. 수량이 적고 바가지가 없어서 마시진
않았지만 이 지역에서 이름난 샘터라고 한다. 소나무가 우거진 한쪽 구석에는 불공 때 쓰는 초
와 성냥, 청소도구 등이 담긴 함이 있는데, 돈은 복전함에 알아서 넣어달라고 쓰여 있다. 그 문
구를 보니 초를 쓰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 버린다.

불상 주변으로 그를 관리하는 조그만 절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마땅한 흔적은 없다. 왜 이
곳에 불상을 새겼는지는 확실치는 않으나 연풍에서 충주로 넘어가는 주요 길목으로 하늘재보다
비중은 좀 떨어지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 그래서 인근 절이나 이 지역에 연고가 있는 승
려나 상인, 또는 충주 지역의 토착세력인 충주유씨 집안이나 연풍의 유력한 지방세력이 나그네
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명목으로 마애불을 만들었을 것이다. 나그네들은 불상 앞에 절을 올리
며 안녕과 소망을 빌었을 것이며, 그들이 시주한 돈으로 마애불을 관리하거나 자신들의 배를 채
웠을 것이다.

※ 원풍리 마애2불병좌상 찾아가기 (2013년 3월 기준)
① 수안보 경유
* 동서울터미널에서 수안보행 직행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 울산, 구미, 상주에서 연풍, 수안보 경유 충주행 직행버스가 다닌다.
* 동서울터미널이나 서울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 인천, 수원, 성남, 대전, 원주에서 충주
  행 고속/직행버스를 타고 충주터미널에서 수안보행 직행버스로 갈아타거나 충주터미널 밖 시
  내버스 정류장에서 수안보행 시내버스로 갈아타도 된다. (15~30분 간격으로 운행)
* 수안보에서 괴산행 군내버스가 1일 8회 운행한다. 버스를 타고 원풍리마애불에서 세워줄 것을
  부탁하면 어지간해서는 앞에 세워준다. 원풍리마애불은 정식 정류장은 아니며, 마애불 이정표
  가 나올 때 세워달라고 하면 된다. 만약 정차를 거부하면 새터에서 내려가 버스가 가는 방향
  으로 도보 12분, 신풍에서 수안보 방향으로 도보 15분
② 괴산 경유
* 동서울터미널에서 괴산행 직행버스가 3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괴산터미널 부근 군내버스(아성관광) 종점에서 수안보(1일 8회), 수옥정행(1일 2회) 군내버스
  이용 (마애불 앞 또는 신풍에서 하차)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 중부내륙고속도로 → 연풍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연풍면사무소를 지나서 수안보 방면으로
  좌회전 → 원풍리마애불

*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산124-1

 


원풍리마애불을 친견하고 다음 답사지인 각연사(覺淵寺)로 이동했다. 각연사는 연풍에서 괴산가
는 길목인 태성리에 자리한 산중고찰로 속리산국립공원 북단에 고요히 묻혀있다. 이곳은 오른쪽
에 링크된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 괴산 각연사 보러가기)

약 2시간에 걸쳐 각연사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괴산읍으로 길을 잡는다. 각연사에서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다들 시장기가 강하게 맴돈다. 시간은 어느덧 2시를 훌쩍 넘긴 상태, 점심은 매운탕으
로 이름난 괴강매운탕에서 매운탕을 먹었다.
나는 매운탕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그리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생각 외로 꽤 입맛이
맞는다. 쏘가리와 피라미, 메기 등 3~4종류의 민물고기가 수제비와 갖은 진한 양념과 어우러져
매운탕이란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해 사람들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다. 밑반찬도 그런데로
깔끔하고 정갈하며, 무척 시장해서인지 반찬도 금방 동이 나 여기저기서 더 갖다달라며 아우성
이다. 밥을 2그릇이나 먹은 사람도 나를 포함하여 상당하다. 이 집은 80대 할머니가 무려 60년
가까이 꾸린 집으로 지금은 그 아들이 운영하고 있다. 그날은 일요일이라 딸들도 와서 일을 거
들었다.

이렇게 점심을 배불리 마치고 괴산읍내로 들어갔다. 읍내에서 우리가 문을 두드린 곳은 홍범식
고가와 개심사란 조그만 절이다. 이들은 한곳에 뭉쳐 있어서 덩어리로 같이 둘러보면 된다.

 


♠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洪命憙) 일가의 기와집
홍범식 고가(洪範植 古家) - 충북 지방민속문화재 14호

괴산읍내 북쪽 동부리에는 홍범식 고가가 있다. 정남향(正南向)을 하고 있는 이 집은 1730년경(
또는 1861년)에 지어진 풍산홍씨 일가의 집으로 면적은 1,200평, 왕년에는 50여명이 살았다. 좌
우대칭의 평면 구조를 지닌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가로 사랑채는 2고주 5량가의 납도리집이
며,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6칸의 'ㄷ' 모양으로 '一'자형 광채를 합쳐 'ㅁ'자형을 하고 있다.

속세에서 이 집을 주목하는 이유는 괴산이 낳은 위인, 홍범식과 홍명희 부자(父子)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기 때문이다. 홍범식(洪範植, 1871~1910)은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阮)으로 참
판(參判)을 지낸 홍승목(洪承穆)의 아들이다.
1888년(고종 25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1902년(광무 6년) 내부주사(內部主事), 혜민서참
서(惠民署參書)가 되었으며, 1907년 전북 태인(泰仁)군수로 부임하여 의병을 보호했다. 1909년
충남 금산(錦山)군수로 전임되어 백성들에게 아낌없는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나 1910년 8월 경
술국치(庚戌國恥)가 이루어지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을 택했다. 그는 아들에게 절대로 왜
(倭)에 협력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는데, 그것을 지킨 이가 바로 홍명희이다. 나머지는 아
비의 뜻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악덕 친일파가 되었다.

소설 임꺽정으로 유명한 홍명희(1888~1968)는 홍범식의 아들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필명은 가인
(假人, 可人), 백옥석(白玉石), 벽초(碧初) 등으로 보통 벽초가 널리 알려졌다. 그는 왜국 다이
세이(大成)중학교에서 공부를 했으며, 귀국하여 집에 머물던 중, 3.1만세운동이 터지자 바로 이
집 사랑채에서 은밀히 만세운동을 준비해 1919년 3월 19일 괴산 지역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만세운동으로 왜정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고, 그가 감방에 있는 동안 왜정의 탄압으로
가세가 기울어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팔고 인근 제월리로 이사갔다.

출옥 이후, 그는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으며, 휘문고보 교사와 오산고보 교장, 연희전문
(연세대) 교수를 지내고, 시대일보(時代日報) 사장이 되었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
면서 부회장으로 참여했으며, 1930년 신간회에서 주최한 제1차 민중대회사건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그는 민족운동의 지도자로 있으면서 그 유명한 소설 임꺽정(林巨正)을 집필했다. 임꺽정은 1928
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당대 최대의 장편 역사소설로 봉건 귀족을 우월성의 존재
로 파악하지 않고 천민계층을 이상화(理想化)함으로써 계급의식과 집단의식을 드러냈다. 그는
역사소설을 통해 계급의 관점에서 식민지적 모순보다는 자본주의적 모순을 겨냥하는 역사의식을
표출했다.

해방 이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냈으나 38선 이남이 점점 친일파의 소굴로 변질
되어가는 것에 회의를 느끼던 중,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이 남북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평양
(平壤)에 김일성을 만나러 가자 같이 따라 나섰다. 그러고는 다시는 내려오지 않았다. 완전히
월북(越北)을 한 것이다. 그는 북한에서 높은 관직을 지내며 문학활동을 하다가 1968년 8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  홍범식 고가의 솟을대문

▲  창고

홍씨 일가가 떠난 이 고가는 60여 년 동안 그런데로 모습을 유지하다가 1984년 국가지정 중요민
속자료 146호
<당시 지정명칭 '괴산 이복기 가옥(槐山 李馥基 家屋)>로 지정되었다. 허나 집주인
이 집을 변형시키면서 말썽이 생겼고, 결국 집주인의 요구로 1990년 9월 중요민속자료에서 정리
되고 만다. 그 이후 원형을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크게 망가져 끝내는 폐가 지경에 이르게 되었
고, 괴산군에서 홍범식,홍명희 부자를 기리고 관광지로 키울 생각에 이 집을 매입해 지금의 모
습으로 말끔히 손질하였다. 손질한 것은 좋지만 그 과정에서 기존에 없던 부분도 마구 덧붙이게
되었고, 그나마 남은 고색의 때도 거의 사라져 고가(古家)란 이름이 정말 무색하게 되었다.

또한 집을 복원할 때 괴산 지역 노인들이 쌍수를 들고 반대했다. 바로 월북한 홍명희의 집이란
이유 때문이다. 6.25를 뼈저리게 겪은 노인들에게 북한과 북한에 협조한 이들이 좋아 보일리는
없겠지. 그래서 괴산군청은 그들을 달래며 간신히 집을 복원했으며, 집의 명칭을 '홍명희 생가'
로 하려고 했으나 역시 그들의 눈치로 '홍범식 고가(한때는 동부리 고가)'로 이름을 변경했다.

비록 홍명희는 북한으로 넘어갔지만 고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고, 민족지도자이자 문학가
로 활동하며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6.25이후 60년이 넘는 세월이 속절없이 흘렀고 세상도
참 많이 변했다. 북한도 언젠가는 우리가 흡수하고 포용해야 될 존재인데, 그곳으로 넘어갔다고
무조건 부정적으로 몰아세워 복원사업을 방해하는 것은 시대적으로 뒤떨어지는 행위이다. 지금
은 반공(反共)을 내세우던 1950~80년대가 아니다. 만약 그가 월북을 하지 않았다면 이 집이 크
게 훼손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며, 지금과는 다른 높은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아마도 평창의 이
효석(李孝石) 생가처럼 우리나라 근/현대 문학의 성지(聖地)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  홍범식 고가의 사랑채
홍명희가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했던 역사의 현장으로 지금은 빈집이다.
신발을 벗어놓던 섬돌은 신발 대신 먼지만이 수북하여
신발로 가득했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홍범식 고가의 안채 외곽 -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게 안쪽을 가렸다.

▲  뜨락 한쪽에 옹기종기 모인 장독들
장독 안에는 무엇인가가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저들은 이곳을 복원할 때 갖다둔 빈 장독들이다.


※ 홍범식 고가 찾아가기 (2013년 3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괴산행 직행버스가 3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청주와 증평에서 괴산행 직행버스가 수시로 떠난다.
* 괴산터미널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가면 시계탑4거리이다. 여기서 직진하여 7분 정도 걸으면 괴
  산대교가 나오며,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가면 길 오른쪽에 동부리고가가 있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중부내륙고속도로 → 괴산나들목을 나와서 괴산방면 19번 국도로 우회전 → 감물 → 괴강3거
   리에서 우회전 → 동진교를 건너 대덕4거리에서 직진 → 동부교차로에서 괴산읍으로 좌회전
   → 괴산대교북단3거리(역말3거리)에서 직진 → 동부리고가

* 고택 앞에 주차장이 있으며, 주차비와 관람비는 없음
* 관람시간 : 9시~18시
*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450-1

 


♠  법등의 역사는 짧지만 괴산읍내를 앞뜰로 삼은
작은 절집 ~ 개심사(開心寺)

▲  개심사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

홍범식고가에서 뒤쪽 언덕을 보면 절집 하나가 바로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곳이 바로 이번 답
사의 마지막 장소인 개심사이다. 

개심사는 역사가 매우 짧은 절로 1935년에 지어졌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1935년 괴산군 칠
성면 두천리에 있던 도덕암(道德庵)이 문을 닫자 괴산읍 서부리에 살던 김경림이란 여신도가 도
덕암에 있던 목조여래좌상과 목조관음보살좌상을 옮겨와 지은 절이라고 한다. 그 불상 2구는 조
선 후기 불상으로 1993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그들이 바로 우리를 이곳으로 오게 한 장
본인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이곳에 올 일은 정말 영원히 없었을 것이다.
1998년 대웅전에 있던 불상을 새로 만든 극락보전으로 옮겼으며, 요사채와 삼성각, 명부전을 지
어 절집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절의 역사가 80년 남짓이고 지금 있는 건물은 모두 1998년 이후에 세운 때깔 고운 것들이라 고
색의 내음은 없다. 극락전 뜨락에는 자갈돌이 정갈하게 깔려져 있으며, 절이 바라보는 남쪽으로
괴산읍내가 두 눈에 바라보인다. 비록 절은 작지만 읍내를 앞뜰로 품으며 열심히 미래를 꾸려간
다.


▲  극락보전에 봉안된 개심사목조여래좌상과 목조관음보살좌상
(開心寺 木造如來坐像 / 木造觀音菩薩坐像) - 충북지방유형문화재 173호

려함이 배여난 극락보전 불단에는 도덕암에서 옮겨왔다는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가운데에 앉
은 이는 3존불의 본존불(本尊佛)로 나무로 만든 목조여래좌상이다. 그리고 그 우측에 화려한 보
관(寶冠)을 쓴 보살상은 목조관음보살좌상이다. 좌측에 있는 것은 근래에 만든 것이다.

이들 목조여래좌상과 관음보살좌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다. 여래좌상은 머리에 작은 소라 모
양의 머리칼을 붙였으며, 얼굴에는 그만의 미소가 흐드러지게 피어 중생의 마음을 다독거린다.
목에는 3줄의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으며, 양 어깨를 가린 옷을 걸치고 있다. 양 손목과 무릎
에 걸쳐 두껍게 표현된 옷주름은 조선시대 불상 양식이며, 그의 수인(手印)은 설법인(說法印)을
취하고 있다.
관음보살좌상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으며, 여래좌상 못지않은 자비로운 인상이 풍긴다. 3존불
뒤로 붉은 색채의 후불탱화가 든든하게 자리해 있으며, 극락보전 좌우 벽에는 신중도(神衆圖)가
자리하여 법당을 지킨다.

절을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6시를 넘었다. 개심사를 끝으로 그날의 답사일정은 별무리 없이
마무리가 되었다. 아쉽지만 여기서 남쪽 일행들과 작별을 고하며 나의 제자리로 돌아오니 이렇
게 하여 겨울맞이 괴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개심사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428-1 (☎ 043-832-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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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겨울 산사 나들이 ~ 계룡산 갑사 (갑사계곡, 숲길)

 

' 계룡산 갑사(甲寺) '
갑사 대적전과 승탑
▲  갑사 대적전과 승탑


겨울의 제국이 서서히 저물어 가던 2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계룡산을 찾았다. 중악(中嶽)
이라 불리며 호랑이가 담배 먹던 시절부터 신성시되오던 계룡산의 맑은 정기를 듬뿍 받고 싶
은 마음에서였다. 저번 주만해도 날씨가 겁나게 추웠는데, 이번 주는 좀 포근하여 두꺼운 잠
바에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뫼에 오르면 좀 춥겠지? 그래서 그보다 1단계 낮은 잠바
와 두툼한 장갑을 갖추어 길을 떠났다.

동학사(東鶴寺)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동학사 경내를 둘러보고 오뉘탑이라 불리는 청량사지 5
/7층석탑에서 잠시 속세에서 가져온 먹거리로 배를 채운 다음 삼불봉(三佛峰)으로 올라가 천
하를 굽어본다. 여기서 금잔디고개로 내려와 신흥암(新興庵)에서 잠시 발을 멈추며 천진보탑
(天眞寶塔)을 친견하고 갑사 계곡 상류에 자리한 용문폭포(龍門瀑布)에서 다시 발을 멈췄다.
계룡산 동학사 보러가기 (클릭)
계룡산 오뉘탑, 삼불봉, 천진보탑 보러가기 (클릭)

용문폭포에서 갑사 방면으로 10분 정도 내려가면 대성암이란 작은 암자가 나온다. 여기서 다
리를 건너면 대나무에 둘러싸인 길이 나오고 운치가 서린 그 대나무길을 지나면 슬슬 갑사의
건물이 해가 떠오르듯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서 잠시 갑사에 대한 급한 마음을 접고 왼쪽 길
로 들어가 보자. 보통은 그 길을 외면하고 지나치지만 그건 갑사에 대한 큰 실수이다. 그 길
로 들어서면 갑사계곡의 으뜸인 명월담(明月潭)이 있고 유리 지붕이 얹혀진 공간이 있는데,
바로 그곳에 고려시대 불상인 석조약사여래입상이 자리해 있다.


♠  갑사 석조약사여래입상(石造藥師如來立像)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50호

갑사 경내에서 동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명월담 왼쪽에 큰 바위가 있다. 바위 위쪽에는 대나
무가 삼삼하게 자라고 있고, 바위 밑에는 얕게 판 석굴(石窟)이 있는데, 그 안에 석조약사불이
둥지를 트고 있다.

이 불상은 원래 갑사 동쪽 자락에 자리한 사자암(獅子庵)에 있던 것으로 왜정(倭政) 시절에 악
덕 친일파로 악명 높은 윤덕영(尹德榮)이 옮긴 것이라고 한다. 키가 남자 성인만한 조그만 불상
으로 머리에는 큼직한 무견정상(無見頂相)이 솟아있다. 얼굴은 조금 길며, 중생들의 소망을 하
나도 빠짐없이 접수하려는 듯 귀가 어깨까지 닿았다.

몸에 걸친 옷은 가슴을 약간 드러내고 있으며, 무릎 아래까지 늘어져 있다. 가슴 밑에는 반원형
의 옷주름이 표현되었으며, 왼손에 조그만 약병을 쥐고 있어 그가 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다. 불
상의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바위 석굴에 들어앉아 비와 바
람, 눈 등 자연의 괴롭힘에서 자유로우니 덕분에 건강은 양호하다. 허나 친일파의 의해 강제로
옮겨진 점은 조금은 찜찜한데, 옮겨진 이유에 대해서는 전하는 것이 없다.

예전에는 불상과 기도를 올리는 조그만 노천 공간만 있었으나 그의 건강 및 중생들의 예불 편의
를 위해 유리 지붕을 얹혀 보호각을 만들었다. 또한 예불 공간을 확장했으며, 조그만 석등(石燈
)을 석불 오른쪽(석불이 바라보는 방향 기준)에 주렁주렁 설치했는데, 좀 어색해 보인다.


▲  석조약사여래입상의 조촐한 보금자리

▲  가까이서 본 석조약사여래입상

▲  겨울잠에서 깨어나려는 명월담

석굴에 들어앉은 석불을 가까이서 친견하니 얼굴에 비해 몸이 너무나 커 보인다. 표정도 걱정에
시름하는 중생들처럼 그렇게 밝아 보이진 않는다. 그의 발 밑에는 그의 인기를 보여주듯 꽃 2송
이가 살짝 놓여져 있다.

석불 동쪽에는 갑사계곡의 백미(白眉)인 명월담이 있다. 상류에서 내려온 계곡물이 잠시 한숨을
돌리는 공간으로 옛 사람들이 새긴 '명월담(明月潭)'을 비롯한 여러 바위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이 주변에는 윤덕영의 별장이 있었는데, 그는 나라를 팔아먹고 왜정의 지원의 배때기를 가득 불
리며 명월담의 정취를 누렸다고 한다.
그럼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갑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백제 때 창건된 계룡산 사찰의 으뜸, 갑사(甲寺)
계룡산 서쪽에 안긴 갑사는 420년<백제 구이신왕(久爾辛王) 원년>에 고구려 승려인 아도화상(阿
道和尙)이 창건했다고 한다. 아도는 고구려 불교를 전하고자 신라로 건너갔는데, 그는 일선군(
一善郡, 경북 구미)의 부호(富戶)인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며 신라에 고구려식 불교 포교의 임
무를 수행하고 귀국하는 길에 계룡산을 지나갔다.
그런데 산중에서 상서로운 빛이 하늘까지 오르는 광경에 넋을 잃고 빛이 발하는 곳을 찾아가니
그곳이 바로 천진보탑(天眞寶塔)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보탑에 예를 올리고 갑사를 창건했
다고 한다. 그러니까 천진보탑을 후광(後光)으로 삼은 신흥암과 같은 시기에 창건된 것이다. 허
나 이를 입증할 유물이나 기록은 전혀 없으며, 천진보탑 전설도 허무맹랑하다. 하지만 백제의
국도(國都)인 공주와 부여하고도 가깝고 계룡산의 오랜 명성을 생각해 보면 백제 때 창건된 것
은 확실해 보인다.

창건 이후 556년<위덕왕(威德王) 2년> 혜명(慧命)이 천불전과 보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했다고
하며, 이때 창건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한다. 679년(신라 문무왕 18년)에는 의상대사(義湘大師)
가 불전 1,000칸을 지어 화엄도량(華嚴道場)으로 삼으면서 신라 화엄종(華嚴宗) 10대 사찰의 하
나로 성장했다고 한다.
887년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중창했으며,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킨 영규대사(靈圭大師)
가 잠시 머물렀다. 그는 조헌(趙憲)과 의기투합하여 청주성을 탈환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으나
금산(錦山) 연곤평에서 조헌과 의병 700명과 함께 장렬히 산화하고 만다.

1597년 영규대사에 대한 복수로 왜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1604년 대웅전과 진해당을 중건하고
1654년 크게 중창을 벌였다. 1875년에는 대웅전과 진해당을 중수했으며, 1899년 적묵당을 지었
다. 1911년 사찰령(寺刹令)으로 마곡사(麻谷寺)의 말사(末寺)로 들어갔으며, 6.25전쟁 때는 다
행히 총탄이 비켜가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

갑사란 이름은 으뜸 또는 첫째 가는 절이란 뜻으로 갑(甲)에는 1등의 뜻이 있다. 이외에 한자는
다르지만 갑사(岬寺), 갑사사(岬士寺), 계룡갑사(鷄龍甲寺) 등으로 불리웠으며, 18세기 후반 산
의 이름을 딴 계룡갑사란 이름도 적지 않게 쓰였다.

고색이 만연한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적묵당, 전해당, 삼성각, 보장각, 팔상전, 표충원,
범종루, 강당, 대적전 등 약 20동의 건물을 갖추고 있어 규모도 상당하며, 대성암과 내원암, 신
흥암 등을 부속암자로 거느리고 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국보 298호인 삼신불괘불탱화를 비
롯하여 철당간과 승탑, 동종, 월인석보판목 등 보물 4점과 석조약사여래입상과 사적비, 강당,
대웅전 등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지니고 있다. 장대한 역사에 걸맞게 풍부한 보물을 소장하고
있는 것이다.

절은 크게 경내의 중심인 대웅전 구역과 팔상전이 있는 북쪽 구역, 서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대
적전 구역 등, 3개로 나눌 수 있다. 원래는 대적전 구역이 절의 중심이었으나 1604년 대웅전 구
역에 대웅전을 지으면서 중심지가 그곳으로 이전되고 대적전은 변두리가 되었다. 그 이후 북쪽
으로 영역이 확대되면서 경내가 무지 넓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 넓은 대지에 건물이 대
도시처럼 촘촘히 박힌 것도 아니다. 대웅전 구역을 빼면 다 널널하게 자리해 있다.
계룡산의 주요 사찰이다 보니 사람들의 발길이 잦지만 깊은 속세와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깊은 산골에 터를 잡고 있어 산사의 고요함과 고즈넉함을 누리기에 적당하다. 게다가 절을 둘러
싼 숲도 무성하고 유리처럼 맑은 계곡이 경내를 가로지르면서 청정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또한
역사의 숨결이 서린 볼거리도 매우 푸짐하니 눈과 마음도 배불리 호강을 누리며 정화가 된다.

갑사는 계룡산으로 오르는 3대 기점의 하나로 등산객과 답사객, 신도들의 발길이 빈번하며, 여
기서 금잔디고개를 거쳐 동학사로 내려가거나 연천봉을 거쳐 신원사로 내려가도 된다.

※ 갑사 찾아가기 (2013년 2월 기준)
① 공주 경유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공주행 고속버스가 25~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공주 산성동행 직행버스가 거의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공주 산성동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다닌다.
* 인천, 수원, 성남, 천안, 청주, 대전(서부, 동부, 유성), 보령에서 공주행 직행버스 이용
* 공주 산성동에 있는 시내버스터미널에서 갑사행 공주시내버스 320, 322번이 30~50분 간격으로
  다닌다. 공주시외/고속터미널에서 갈 경우는 시내(산성동 방향)로 들어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금강(공주대교)을 건너자마자 옥룡동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길 건너편 옥룡동주민센터 정류장
  에서 320, 322번 시내버스로 환승하면 빠르다. (공주터미널에서 시내버스터미널까지 택시로 5
  분 거리)
② 대전 유성/논산 경유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유성행 고속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유성행 직행버스가 10~25분 간격으로 다닌다.
* 인천, 성남, 수원, 천안, 청주, 전주, 익산, 광주에서 유성행 직행버스 이용
* 유성시외버스터미널 시내버스 정류장<유성시외터미널에서 서쪽(공주 방면)으로 120m 지점>에
  서 갑사로 가는 공주시내버스 340, 341, 342번 시내버스 이용 (1일 7회 운행, 대전지하철 유
  성온천역(6번 출구)과 현충원역(3번 출구) 경유)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 천안논산고속도로 → 정안나들목을 나와서 공주/논산 방면 23번 국도 → 신공주대교 → 계룡
  → 계룡저수지 → 갑사 주차장
* 호남고속도로(회덕~논산) → 유성나들목을 나와서 공주 방면 32번 국도 → 공암 → 청벽대교
  건너기 전에서 갑사 방면 → 내흥리 → 갑사주차장

★ 갑사 관람정보
* 입장료(단체는 30인 이상) : 어른 2,000원(단체 1,800원) / 청소년,학생,군인 700원(단체 600
  원) / 어린이 400원 (단체 300원)
* 주차비 : 대형 6천원 / 소형 4천원
* 매년 가을(10월)에 영규대사를 추모하는 추모재와 산사음악회를 연다.
* 갑사 템플스테이는 주말에 1박 2일 일정으로 진행된다. 사찰예절과 새벽예불, 사물체험, 숲길
  명상 등을 하며, 참가비는 성인 5만원, 어린이 3만5천원이다. 신청은 갑사 홈페이지의 템플스
  테이 메뉴에서 하면 되며, 자세한 것은 전화로 문의하거나 갑사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2 (☎ 041-857-8981~2)
* 갑사 홈페이지는 아래 갑사 배치도를 클릭한다.


▲  갑사 경내 배치도 (갑사 홈페이지 참조)


♠  갑사 둘러보기 (1) 종각, 강당 주변

▲  갑사 종각(鐘閣)

석조약사불을 친견하고 경내로 들어서면 강당 앞에 단촐한 모습의 종각이 있다. 종각에는 조선
중기에 조성된 동종이 소중히 안겨져 있다.


▲  갑사 동종(銅鍾) - 보물 478호

이 동종은 당시 조선 국왕이던 선조(宣祖)의 만
수무강을 기원하고자 1584년에 만든 것으로 높
이 1.3m, 입지름 91cm의 조그만 종이다. 명세기
왕을 위해 만든 것이니 조선 정부나 공주 관아
의 지원이 적지 않게 있었을 것이다.

종 꼭대기에는 음관(音觀)이 없고 대신 2마리의
용이 종을 들고 있으니 이는 조선시대 종의 특
징이다. (그 이전에는 용통=음관이 있었음)
종의 견대(상대)에는 물결모양의 꽃무늬를 둘렀
고, 밑에는 연꽃무늬와 범자(梵字)가 새겨져 있
다. 범자 역시 조선 동종의 특징.. 상대 밑에는
4곳의 네모난 유곽이 있으며 그 안에 볼록 나온
9개의 유두가 있다. 유두는 종을 옮길 때마다
1개씩 뽑는다고 한다.

종신(鐘身) 아랫쪽에는 동그란 모양의 당좌가
있는데 여기는 종을 치는 부분이며, 4개의 당좌
사이로 구름을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지장보살
(地藏菩薩)이 있다.

어둠의 시절 당시 왜정(倭政)이 헌납(獻納)을 구실로 가져가면서 자칫 그들의 전쟁무기로 사라
질 뻔했으나 해방을 맞이하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이 아름다운 종은
무기의 일부로 변했을지도 모르니 참 다행이 아닐 수 없다.


▲  종각 옆에 있는 약수터

종각 맞은편에는 산사(山寺)에는 으레 있는 약수터가 있다. 고개를 들며 웅크린 거북이가 쉬지
않고 옥계수를 뽑아내 물이 마를 날이 없다. 계룡산이 중생에게 베푼 물로 바가지에 가득 담아
1모금을 들이키면 세상 시름과 몸 속의 떼가 싹 내려간 듯 오장육부와 마음이 시원하다고 쾌재
를 부른다.

▲  강당 옆에 경내로 인도하는 돌문

▲  사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루(梵鍾樓)
2003년에 새로 만들었다.


▲  갑사 강당(講堂)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95호

온몸을 다해 경내를 가리고 있는 강당 자리에는 원래 해탈문(解脫門)이 있었으며, 강당은 해탈
문과 대웅전 사이에 있었다. 그러다가 해탈문을 없애고 강당을 해탈문 자리로 밀어 대웅전 뜨락
을 넓혔다. 해탈문의 빈 공간에는 돌을 채워 강당 전면을 석축 바깥에 돌출시켰고, 나무 기둥을
세우면서 지금의 누각형태로 변하게 되었다. 그외에는 단청이 퇴락하고 문짝이 바뀐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이다.

강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승려들이 공부를 하며 법문(法文)을 강론하던 교
육 공간이다. 조선 초기에 지어졌으며, 1597년에 불탄 것을 조선 후기에 다시 세웠다. 기둥은
가운데가 볼록 나온 배흘림기둥이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 촘촘히 공포를 박은 다포(多包) 양식
이다. 강당 정면에는 갑사의 다른 이름인 '鷄龍甲寺(계룡갑사)'라 쓰인 현판이 당당한 풍채로
걸려 있는데, 이는 충청도절도사(節度使) 홍재의가 썼다고 한다. 글씨는 특이하게 파란색이다.


▲  휘황찬란한 강당 내부

강당 내부에는 동쪽에 불단을 두고 육환장(六環杖)을 든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두었다. 그 뒤에
는 후불탱화 대신 거의 1,000개의 달하는 조그만 금동불을 빼곡히 배치하여 지장보살의 뒤를 든
든하게 받쳐준다. 금동불이 한꺼번에 쏟아내는 금빛 찬란함에 두 눈이 가히 마비될 지경이다.
 


♠  갑사 둘러보기 (2) 사적비, 팔상전 주변

▲  갑사의 보물을 간직한 성보보장각(聖寶寶藏閣)

강당 앞에서 경내로 들어가지 않고 직진하면 성보보장각을 중심으로 한 갑사의 북쪽 구역이 펼
쳐진다. 사람들이 대부분 대웅전 구역만 보고 갈 뿐, 북쪽 구역은 지나치기가 쉽다. 허나 이곳
에는 팔상전과 표충원, 사적비, 성보보장각 등의 볼거리가 있으므로 반드시 눈에 넣고 가길 바
란다.

맞배지붕의 단아한 모습을 지닌 성보보장각은 갑사가 지닌 동산문화유산들이 들어있다. 허나 시
간이 늦었는지 문을 굳게 닫아 걸어 안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  갑사의 역사가 담긴 사적비(史蹟碑)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52호

성보보장각 정면에는 해우소가 있고, 여기서 일주문 쪽으로 조금 가면 오른쪽에 사적비가 자리
해 있다. 바위에 뿌리를 내린 사적비는 갑사의 내력이 담겨져 있으며, 바위 위에 비좌(碑座)를
만들고 그 위에 비석을 세운 다음 솥뚜껑처럼 생긴 지붕돌을 얹혔다. 비석 4면에는 모두 글씨를
새겼는데, 일부는 손상되어 해독이 불가능하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비석에 금이 들어있다는
잘못된 이야기에 사람들이 그것을 캐고자 비석을 괴롭히면서 그리 된 것이라고 한다.

1659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碑文)은 여주목사(驪州牧使) 이이천(李志賤, 1589~1683)이 짓고, 공
주목사 이기징(李箕徵)이 글씨를 썼다.


▲  갑사 표충원(表忠院)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52호

성보보장각 뒤쪽에 담장에 둘러싸인 건물이 있는데, 그 앞쪽은 표충원, 뒤에는 팔상전이 있다.
표충원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738년에 지어졌다.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서산대사(西山大師)와 사명대사(四溟大師), 영규대사(靈圭大師)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으며, 뜨락에는 영규대사비가 세워져 있다.

▲  영규대사비

▲  저 문을 들어서면 표충원이다.


▲  갑사 팔상전(八相殿)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54호

표충원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리한 팔상전은 조선 후기 건물이다. 부처의 일대기를 8부
작으로 나눠 그린 팔상탱화(八相幀畵)가 있어서 흔히 팔상전이라 부른다. 팔상탱화 외에 신중탱
과 석가불을 봉안하고 있으며, 공포가 촘촘히 박힌 다포(多包) 양식으로 나름대로의 격조를 갖
추었다. 팔상전 정면에는 툇마루를 지닌 요사(寮舍)가 있으며, 팔상전을 나와 산을 조금 오르면
내원암(內院庵)이 나온다.


▲  담장 너머로 본 보장각(寶藏閣)

팔상전을 나오면 정면에 담장에 둘러진 대웅전 구역이 보인다. 그중에서 담장도 안심이 안되는
지 녹색 펜스까지 치고 사나운 견공(犬公)까지 옆에 둔 맞배지붕 건물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보물 582호로 지정된 월인석보(月印釋譜)의 판목(版木)을 간직한 보장각이다.

월인석보는 1459년(세조 4년) 세조의 명으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석보상절(釋譜詳節)
을 합쳐 만든 불교대장경이다. 여기서 석보는 부처의 일대기를 뜻한다. 본래는 57매 233장으로
모두 24권이었으나 지금은 전국적으로 21권 46매만이 남아있다. 갑사의 월인석보는 1569년 충청
도 한산(서천군 한산면)에 사는 백개만(白介萬)이 시주하여 활자를 새기고, 논산 쌍계사(雙磎寺
)에서 보관하던 것을 왜정 때 갑사로 넘어왔다.
계수나무에 돋음새김으로 새겼고, 판목의 오른쪽 밑에 시주자의 이름과 새긴 이들의 이름이 있
으며, 내용표기에 있어서는 방점과 글자 획이 닳아 없어져 변모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현재
는 보호를 위해 속세에는 공개하지 않으며, 사자암에서 가져온 석조보살입상도 저 안에 있다.
(성보보장각에 있을 수도 있음)


♠  갑사 둘러보기 (3) 대웅전 주변

▲  갑사 대웅전(大雄殿)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05호

팔상전이 있는 북쪽 구역을 살피고 경내의 핵심인 대웅전 구역으로 넘어갔다. 이 구역은 1604년
절을 중건하면서 새롭게 개척한 곳으로 대웅전은 원래 대적전 주변에 있었다. 절의 법당(法堂)
인 대웅전이 개척지에 생겼으니 그 주변이 흥(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 원래 자리였던 대적
전 구역은 변두리로 밀려나 호랑이가 나타날 정도로 인적이 드물 지경이다.

대웅전은 절의 중심 건물답게 규모가 매우 상당하다. 건물을 받치는 기단도 높이가 거의 2.5m에
이르러 그의 거창함을 더욱 끌어올린다. 대웅전 현판도 내 키에 이를 정도로 큼지막하여 주눅이
앞다투어 밀려온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불전으로 공포가 촘촘히 박힌 다포양식이다. 건물 내
부는 우물천정으로 되어 있고, 불단(佛壇)에는 석가불을 비롯하여 3존불과 4개의 보살상을 봉안
하여 눈길을 끈다. 조선 중기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으며, 뜨락에는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석
탑을 닮은 5층석탑이 서 있었으나 근래에 철거했다.


▲  대웅전 현판의 위엄
현판의 글씨가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다. 현판 글씨는
1669년에 쓰여진 것으로 석봉체 계통의 명필(名筆)을 자랑한다.

▲  대웅전 불단

대웅전 볼단에는 건물만큼이나 육중한 3존불이 자리를 지킨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阿
彌陀佛)과 약사불(藥師佛)이 좌우에 앉아 3존불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은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
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수려한 보관(寶冠)을 쓴 관음보살(觀音菩薩)과 문수보살(文殊菩薩), 보
현보살(普賢菩薩) 등이 서 있는데, 한결같이 자비로운 표정으로 중생들을 맞이한다.

▲  대웅전 뜨락 우측의 진해당(振海堂)
승려들의 생활공간 및 선방으로 쓰인다.

▲  대웅전 뜨락 좌측의 적묵당(寂默堂)
요사 겸 종무소로 쓰이며, 1899년에 세워졌다.


▲  갑사 삼성각(三聖閣)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53호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삼성각은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로 조선 후기
에 지어졌다. 예전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사이에 담장을 놓아 속인의 접근을 통제했으나 이제는
삼성각까지 접근이 가능해졌다. 대신 뒤쪽의 대적선원과 승탑은 여전히 통제 구역이다.

▲  산신탱화와 산신상

▲  칠성탱화


▲  계곡을 바라보며 자리한 갑사 전통찻집
예전 2004년 3월에 왔을 때 일행들과 차 1잔의 여유를 누렸던 기억이 솔솔 떠오른다.


♠  갑사 둘러보기 (4) 대적전, 철당간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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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우탑(功牛塔)

▲  공우탑에 새겨진 '功牛塔(공우탑) 명문

전통찻집에서 계곡을 건너면 조그만 3층석탑이 나온다. 겉으로 보면 3층 탑신(塔身)만 있는 것
으로 보이지만 기단부(基壇部)는 땅 속에 묻혀 윗부분만 햇살을 받고 있다. 이 탑은 원래 갑사
가 아닌 부속 암자에 있던 것을 가져온 것이라고 하는데, 공우탑이란 말 그대로 절 중창 때 크
게 도움을 준 우공(牛公)의 부도탑이라고 하며, 짧막한 전설 한토막이 전해온다.

때는 바야흐로 백제 비류왕(比流王, 재위 304~344) 시절, 이곳에 절을 세울 때에 일이다. 목재
를 운반하던 소가 냇물을 건너다가 갑자기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아마도 과로사인 듯 싶다. 소
가 죽자 지금의 자리에 그를 묻고 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전설의 스토리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
는 일이나 그 시기가 100% 의문이다.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대략 384년으로 전설에 나오는
시기는 그 이전이다. 불교도 들어오지 않은 시절에 어찌 절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이 전설이
과연 사실이라면 이 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탑이 되겠지만 탑의 양식을 보면 전혀 신뢰
성이 없다. 아마도 고려나 조선 때 절을 중건하면서 목재를 운반하던 소가 숨지자 그를 화장하
여 지금의 탑을 세웠을 것이다.
1층 탑신에는 '臥塔起立人道偶合 三層己巳厥功居甲<쓰러진 탑을 일으켜 세우니 인도(人道)에 우
연히 합치되었네, 3번을 수고하고 수고했으니 그 공이 으뜸이다>
이란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으
며 2층에는 '牛塔', 3층에는 '功'이 새겨져 있어 이 탑이 절에 공을 세운 소를 위해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절 건축에 헌신하다 죽은 동물을 위해 탑을 만들어 그의 영혼을 위로했던 승려의 지극한 마음과
심하게 부려먹었던 그들의 미안한 마음까지 느낄 수 있는 정(情)이 담긴 문화유적이라 하겠다.


▲  갑사의 옛 중심지를 지키는 대적전(大寂殿) -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06호

공우탑에서 전통찻집으로 나가지 말고 안쪽으로 좀 들어가면 대적전이 나온다. 경내를 3개로 나
누면 이곳은 대적전 구역에 해당된다. 지금은 경내에서도 한참 외곽으로 밀려나 한적하기 그지
없지만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엄연한 갑사의 중심 구역이었다. 대웅전도 원래는 대적전 옆에 있
었다.
그러다가 1597년 절이 파괴되고 1604년 절을 다시 일으킬 때 계곡 건너에 자리를 다져 대웅전을
지었고, 자연히 그 일대가 흥하면서 절의 중심지가 되었다. 반면 원래 중심지였던 대적전 구역
은 대적전과 돌담에 둘러싸인 요사를 다시 짓는 선에서 더 이상의 개발이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경내 변두리로 밀려나고 만다.

대적전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고도 하며, 비로자나불의 거처이다. 허나 이곳에는 비로자나불
대신에 석가불과 문수, 보현보살을 봉안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불단 위에
천정을 1단 올려 닫집의 효과를 내고 있다.

대적전의 창건 시기는 문헌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지금의 대적전은 18세기부터 많이 나타나는 다
포식 공포의 법식화된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공포의 구성에 화려한 초각의 경향을
보이는 등 18세기 이후 불전의 경향을 잘 보여준다. 또한 도리통의 협칸을 어칸에 비해 1/2정도
로 줄인 것은 19세기에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건축 특성과 함께 현판에 쓰인 명문으
로 보아 현판이 씌어진 1826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건물 주변에는 옛 주춧돌과 기와가
널려 있어 옛 시절을 그리워한다.

▲  갑사 승탑(僧塔) - 보물 257호

대적전 뜨락에는 수려한 자태로 속인(俗人)들의 안구를 정화시켜주는 아름다운 승탑(부도)이 서
있다. 이 탑은 원래 갑사의 것은 아니며, 절 뒤편 산자락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17년 지금의 자
리로 수습한 것이다.

8각의 바닥돌 위에 여러 조각을 베푼 3단의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탑신과 지붕돌을 차례로 얹
힌 형태로 기단은 위로 올라갈 수록 줄어든다. 기단 밑부분에는 사자와 용, 구름을 어지럽게 새
겼는데, 승탑을 둘러싸고 심하게 각축전을 벌이는 듯,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다. 기단 중간에
는 각 귀퉁이마다 꽃 모양의 장식이 있고 그 사이에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을 배치했다. 탑신
을 받치는 윗부분에는 연꽃을 둘렀고, 탑신 4면에는 자물쇠가 있는 문을 새겼다. 그리고 다른 4
면에는 사천왕상을 새겨 탑을 지키게 했다. 지붕돌은 기왓골을 표현하여 지붕 모양을 정교하게
따랐으며, 머리 장식은 옛날에 없어지고 나중에 달아놓은 연꽃 모양의 보주(寶珠)로 꼭대기를
마무리했다.

이 탑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비슷한 시대에 만들어진 승탑에 비해 목조건축의
구조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기단부의 화려한 조각은 승탑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
다. 누구의 승탑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오래전 갑사 인근에 터를 닦은 이름 모를 암자가 남긴 유
일한 유물이다.


▲  철당간에서 대적전으로 오르는 길

▲  갑사 철당간(鐵幢竿) - 보물 256호

대적전에서 일주문으로 내려가면 하늘을 찌르는 거대한 철당간을 만나게 된다. 양쪽 2개의 돌기
둥이 가운데에 있는 철기둥을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데, 여기서 양쪽 돌기둥을 당간지주(幢竿支
柱)라고 하며, 가운데 철기둥을 한 덩어리로 묶어 철당간이라 부른다.

철기둥은 현재 24개의 철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래는 28개였다고 하며, 1893년 7월 25일 벼
락을 맞아 4개가 떨어져 사라졌다고 한다. 아무래도 너무 하늘로 노출이 되있다보니 피뢰침 작
용을 받은 듯 싶다. 그것이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웅장했을 것이고, 하늘을 찌르
는 그의 모습에 하늘은 더욱 기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철통을 보좌하는 돌기둥은 별 꾸밈
이 없는 소박한 모습으로 당간지주는 대체적으로 멋대가리가 떨어진다. 꾸밈이나 화려함은 통하
지 않는다.
이 철당간은 680년에 세웠다고 하나 근거는 없으며, 당간의 양식을 보아 신라 후기인 9~10세기
경에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철당간은 갑사를 비롯하여 청주시 도심
에 있는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이 전부로 그만큼 희소가치가 상당하다.

철당간이 얼마나 높은지 주변 나무들을 죄다 압도한다. 그의 높이는 15m가 넘으며, 나무들은 기
껏해봐야 10m가 고작이다. 거기에 겨울 제국의 모든 것을 공출당한 상태이니 그 왜소함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이곳에 철당간을 세웠을까? 풍수지리의 영향 때문은 아닐까?
용두사지 철당간 설화를 보면 청주 고을이 북쪽으로 떠내려가자 이를 막고자 세웠다고 한다. 갑
사의 철당간 역시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곳이 풍수적으로 배의 지형을 상징한다하여 떠
내려가지 말란 의미와 함께 풍수지리적으로 허한 부분을 보충하고 마을과 절의 안녕을 기원하려
는 의미도 담겨져 있을 것이다.


▲  갑사 사천왕문(四天王門)

철당간을 둘러보고 계곡을 건너 일주문으로 향했다. 겨울에 잠긴 갑사 숲길을 거닐면 사천왕(四
天王)의 보금자리인 사천왕문이 모습을 비춘다. 이 문은 2002년에 지은 것으로 내부에는 사천왕
상이 봉안되어 절을 찾은 중생들을 검문한다.


▲  겨울 제국의 신민이 되어 봄을 열망하는 갑사 숲길
소쩍새가 울 때면 겨울의 눈치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던 저들은
환하게 기지개를 켤 것이다.

▲  갑사 숲길 (일주문 → 천왕문 방향)
갑사로 가는 숲길은 갑사가 품은 또다른 보물이다. 겨울이라 그렇지
봄과 여름, 늦가을에는 매우 매혹적인 숲길이다. 

▲  갑사 일주문(一柱門)

갑사 일주문은 1998년에 만든 것으로 현판에는 절의 이름인 '계룡산 갑사'가 쓰여 있다. 문이라
고는 하지만 여닫는 문짝은 없다. 어느 누구든 가리지 않고 맞이하겠다는 부처의 뜻이 담긴 것
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입장료를 받는 매표소가 나오고, 이윽고 등산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주막촌
이 펼쳐진다. 절 밑에 자리한 마을을 유식한 말로 사하촌(寺下村)이라 하는데, 산채비빔밥이나
파전, 도토리묵, 동동주, 백숙, 된장찌개 등을 판매한다. 휴일이면 주막촌이 시끌벅적할텐데 평
일이라 썰렁함이 진하게 감돈다. 몇몇 집은 아예 문을 닫아걸고 쉬었다.
이곳에 오니 시간은 어느덧 6시, 햇님은 달님에게 업무를 넘기고 천하는 다시 땅거미의 세상이
되었다. 오전에 계룡산을 오를 때 점심은 대충 때우고 저녁은 황제처럼 먹기로 했지. 그래서 점
심은 동학사 주막촌에서 산 김밥 4줄과 컵라면, 계란으로 동학사와 남매탑에서 반반씩 먹었다.
이제 저녁시간이고 하니 먹을 곳을 물색하다가 서울식당이란 곳에 들어갔다. 이 집도 다른 집과
마찬가지로 손님이 없기는 마찬가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주인 아줌마가 몇년 만에 맞는 손님처
럼 환하게 맞이한다. 우리가 아니었으면 그날 매출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거의 주말 장사니)

식당에 자리를 피고 된장찌개와 묵밥, 해물파전을 주문했다. 점심을 간단하게 먹었고, 등산을
한 탓에 시장기가 하늘을 찌른다. 드디어 나타난 저녁밥상, 나오기가 무섭게 열심히 숟가락과
젓가락을 총동원해 열심히 배를 채운다. 처음에는 배고픔에 눈이 뵈는 것이 없어 양이 적어 보
였으나 먹고나니 양이 많았다. 파전은 덩어리가 커서 간신히 다 먹었고, 묵밥과 된장조치(찌개)
는 조금 남겼다. 반찬도 맛있는 것은 동이 나고 몇몇은 반 정도 남았다. 동동주나 막걸리도 1잔
하면 좋겠지만 술은 땡기지 않아 그냥 식사만 했다.

그렇게 황제처럼 저녁을 마치고 커피 1잔 뽑아마시며 갑사 주차장으로 갔다. 여기서 속세로 나
가는 시내버스를 타면 된다. 날이 어두워지니 따스한 기운 대신 제법 매서운 산바람이 우리를
희롱한다. 그렇게 20분을 기다려 공주시내버스 320번을 타고 공주시내로 나갔다.
이렇게 하여 오랜만에 찾아간 계룡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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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산사 나들이 ~ 영조 임금의 효심이 깃든 파주 고령산 보광사


' 한겨울 산사 나들이 ~ 파주 보광사(普光寺)'

▲  보광사 목어


겨울의 제국이 강추위로 천하를 부들부들 떨게 만들던 겨울의 한복판에 파주(坡州)에 있는 보
광사를 찾았다. 이곳은 어린 시절에 2~3번 가본 인연이 있는 곳으로 구파발역에서 파주시내버
스 333번(금촌↔구파발)을 타고 보광사로 들어간다.

보광사에 가려면 고양시(高陽市) 벽제동과 파주시 광탄면(廣灘面) 동부 지역을 잇는 고갯길인
됫박고개를 넘어야 되는데 고개가 제법 패기가 있다. 이 고개는 조선 21대 군주인 영조(英祖)
와 인연이 아주 깊은데, 그는 소녕원(昭寧園,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 묘역)과 소녕원의 원찰
인 보광사를 자주 찾았다. 그때마다 이 고개를 싫든 좋든 넘어야했지.
고개가 제법 험준하여 다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지라 뚜껑이 열린 영조는 '고개를 더 파서
낮추라!'고 명했다. 그 연유로 '더 파기 고개'가 되었다가 나중에 됫박처럼 가파르다 하여 됫
박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4발 수레로 편하게 넘을 수 있다지만 그 수레들도 이 고갯
길만큼은 조심스레 바퀴를 굴리며 몸을 사린다.

버스에서 내리니 보광사 일주문(一柱門)이 여기까지 나와 중생을 맞는다. 문 좌측에는 고령산
에서 발원한 계곡이 숨을 죽여 흘러가고, 일주문을 들어서면 주막과 찻집이 주를 이루는 조그
만 마을이 고개를 내민다. 이곳은 절 밑에 터를 닦은 이른바 사하촌(寺下村)으로 보광사와 고
령산을 후광(後光)으로 삼아 밥장사를 하는데, 보리밥이 꽤 유명하다.

부처의 세계를 코앞에 둔 속세의 마지막 유혹이라고나 할까? 찻집과 주막의 유혹을 벗어나 10
분 오르면 보광사의 산문이 나타난다.


  보광사 일주문을 들어서다

▲  '고령산보광사'라 쓰인 보광사 일주문(一柱門)

대부분의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주문은 절의 정문이다. 보광사의 일주문은 1999년에 지어진
것으로 문이라고는 하지만 문을 여닫는 문짝이 없어 절을 찾은 중생이나, 산을 찾은 등산객, 부
자와 서민 등 그 누구도 가리지 않고 반갑게 맞이한다. 일주문처럼 넓은 포용력을 지니며 살리
라 다짐을 하건만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  보광사의 옆구리를 거쳐 속세로 흐르는 고령산 계곡
얼음 밑으로 숨죽여 흘러가는 계곡, 소쩍새가 울 때면 움츠려든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켤 것이다.

▲  겨울의 정령에 사로잡힌 보광사 가는 길
겨울의 제국 치하에 들어간 나무들은 잔뜩 몸을 움츠리며 봄의 해방군을 기다린다.

▲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

일주문을 지나 8분 정도 오르면 흙담장에 가린 보광사의 모습이 나타나면서 길이 2갈래로 갈라
진다. 길 오른쪽에는 윗 사진처럼 계곡 위에 걸린 돌다리를 건너 흙길과 계단을 거쳐 경내로 들
어가는 길과 경내까지 뚫린 수레길을 이용하여 가는 것이 있다. 어느 길을 이용하든 경내로 통
하지만 돌다리 코스가 운치가 있으며, 수레길이 없던 옛날에는 저 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섰다.

절을 받치고 있는 석축(石築)은 마치 산성(山城)처럼 3중으로 계단식으로 쌓여져 있으며, 그 위
에 담장을 두르고 넓게 터를 닦아 절을 일구었다. 만세루 남쪽은 석축을 1단으로 높게 쌓았다.


▲  보광사 설법전(說法殿)

갈림길에서 2분 정도 오르면 길 왼쪽에 설법전이란 길쭉한 건물이 있다. 이곳에는 찻집인 도솔
천(兜率天)과 종무소(宗務所)가 있으며, 여러 법회(法會)와 강좌가 열린다. 그리고 도솔천에서
는 다양한 전통차와 온갖 불교용품을 판매하고 있는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곳에서 일다경(一
茶頃)의 여유를 누리고 싶다.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명당자리, 영조 임금과의 각별한 인연으로
조선왕실의 원찰로 번영을 누린 ~ 고령산 보광사(古靈山 普光寺)

▲  겨울 햇살의 드넓은 손길이 구석구석 보듬고 있는 보광사

보광사는 서울과 가까운 고령산(621m) 서쪽 자락에 아늑히 안긴 산사(山寺)로 절 이름인 보광(
普光)은 넓은 광명(光明)을 뜻한다고 한다. 그렇게 좋은 뜻을 가지고 있으니 그 이름을 지닌 오
랜 절집만 서울 주변에 4곳(서울 우이동, 파주, 과천, 남양주)이나 된다. 그중에서도 이곳이 가
장 오래되고 제대로 남아있다.

보광사는 신라가 망해가던 894년(진성여왕 7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왕명에 따라 비보(裨補
) 사찰로 창건했다고 전하나 확실한 것은 없다. 창건 이후 1215년 원진국사(元眞國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며, 법민대사(法敏大師)가 불보살(佛菩薩) 5위를 봉안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1388년에
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창을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22년에 설미(雪眉), 덕인(德仁)이 중건하고 1634년 범종을 만들었다.
그 범종이 보광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숭정7년명동종이다. 1667년에는 지간(智侃), 석련(石
蓮)이 대웅전과 관음전을 중수했다.

보광사가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누린 것은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시절이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소생으로 그녀의 무덤인 소녕원(昭寧園)이 보광사 서쪽 영장리에
있다. 그런 인연으로 영조는 보광사를 소녕원의 원찰(願刹)로 삼아 많은 지원을 내렸으며, 그때
대웅보전과 관음전을 중수하고 절에서 가장 큰 건물인 만세루를 세웠다. 또한 소녕원에 참배하
러 갈 때는 보광사에 꼭 들렸다.
이렇게 원찰로서의 지위와 번영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쭉 이어져 1863년에 왕실의 지원에 힘입
어 나한전, 큰방, 수구암을 짓고,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석가3존불, 16나한상 등을 조성했으며,
1864년에는 관음전과 별당을 세우고, 1869년에 절을 중수했다. 1901년에는 상궁(尙宮) 천씨의
시주로 대웅전과 만세루를 중수하여 절의 면모를 크게 하였다.

이렇게 잘 나가던 보광사는 1950년 6.25전쟁으로 대웅전과 별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
되는 비운을 겪는다. 그 이후 꾸준한 중창불사로 관음전을 새로 짓고 만세루를 해체하여 복원했
으며, 1981년에 석불전이라 불리는 거대한 대불(大佛)을 세웠다. 2003년에는 납골당(納骨堂) 사
업에도 손을 뻗쳐 경내 북쪽에 영각전을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고색의 기운이 진한 경내에는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원통전, 어각실, 응진전, 산신각, 지장전,
만세루, 수구암, 설법전, 영각전 등 10여 동의 건물이 가득 들어차 있으며, 대부분이 서향(西向
)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북쪽을 제외하고 경내 주변을 토담으로 빙 둘러 속세와 부처의 세계의
경계를 가른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인 대웅보전과 숭정7년명동종, 목조보살입상(지방유형문화재 248
호)을 간직하고 있으며, 지장탱화와 나한탱화등 19세기에 그려진 불화가 다수 있다. 만세루와
어각실, 응진전도 18~19세기에 지어진 건물이며, 어실각 옆에는 영조가 심었다는 향나무가 무럭
무럭 자라고 있다. 또한 수구암(守口庵)과 영묘암(靈妙庵), 도솔암(兜率庵) 등 부속암자 3곳을
가까이에 거느리고 있다.

서울에서 가깝지만 깊은 산중에 안겨있어 고요함과 고즈넉함이 중생의 마음을 편하게 인도하며,
산새의 지저귀는 소리와 바람의 소리, 그리고 풍경소리와 목탁소리가 전부인 산사이다. 또한 절
을 알처럼 품은 고령산은 숲이 울창하고 봄과 가을에는 꽃과 단풍의 화려한 향연으로 이름을 날
려 휴일에는 많은 등산객이 찾아온다. 고령산을 오르려면 보광사를 거쳐가야 되기에 그날만큼
은 중생들로 경내는 시끌벅적하다.

▲  대웅보전을 옆에서 가린 요사채

▲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응진전 우측의 장독대들

※ 파주 보광사 찾아가기 (2013년 2월 기준)
* 3호선 구파발역(1,2번 출구)이나 삼송역(3호선, 8번 출구)에서 파주시내버스 333번을 타고 보
  광사 하차, 버스는 20~4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까지 수레 접근 가능)
① 서울 → 문산 방면 1번 국도 → 대자3거리에서 의정부 방면으로 우회전 → 고양동에서 광탄
   방면으로 좌회전 → 벽제3거리에서 우회전 → 보광사입구 → 보광사
② 수도권외곽고속도로 → 통일로나들목에서 문산 방면 → 대자3거리에서 의정부 방면으로 우회
   전 → 고양동에서 광탄방면으로 좌회전 → 벽제3거리에서 우회전 → 보광사입구 → 보광사

★ 보광사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으며, 경내와 일주문 부근에 주차장이 있다.
* 보광사 템플스테이(Temple stay)는 부정기적으로 열린다. 개인은 1박 2일, 단체와 어린이는 2
  박 3일 일정으로 진행되며, 자세한 것은 보광사 홈페이지를 참조한다. 참가 신청은 홈페이지
  에서 하거나 전화로 하면 된다.
*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13 (☎ 031-948-7700~1)
* 보광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꾹 누른다.


▲  대웅보전 뜰에서 바라본 고령산

▲  범종각(梵鍾閣)

경내로 들어서면 대웅보전을 가리고 선 요사 서쪽에 단촐한 모습의 범종각이 있다. 범종각 옆에
는 문화재안내판이 멀뚱히 서 있는데, 범종각에 걸린 종이 숭정7년명동종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은 범종각의 종이 그것인줄 안다. 허나 종을 잘 살펴보면 고색의
때도 거의 없을뿐더러 중간중간 한글이 보여 근래에 새로 만든 종임을 알 수 있다. 원래의 종은
최근까지 이곳에 있다가 건강을 이유로 대웅전으로 옮겼다.
범종각은 대웅전에 있던 숭정7년명동종를 위해 1990년에 지어졌으며, 만세루에 있던 목어(木魚)
도 이곳으로 잠시 옮겼으나 다시 원위치시켰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응진전(應眞殿)과 산신각(山神閣), 3층석탑

대웅전 우측 석축 위에는 단촐한 모습의 전각 2개가 오붓하게 자리해 있다. 우측에 자리한 응진
전은 1863년에 중건된 것으로 원래 이름은 나한전(羅漢殿)이었다. 내부에는 1863년에 조성된 것
으로 보이는 석가3존불과 16나한상이 있으며, 나한탱화는 1877년에 금곡영환(金谷永煥), 한봉창
엽(漢峯瑲曄) 등의 화승이 그렸다. 응진전 곁에 자리한 1칸짜리 산신각은 1893년에 중건된 것으
로 근래에 만든 산신상과 산신탱이 있다.
그들 앞에는 맵시가 돋보이는 3층석탑이 서 있는데, 원래는 대웅전 뜨락에 있었다.


▲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원통전(圓通殿)

대웅전 좌측에는 관음보살을 봉안한 원통전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
물로 이곳에는 예전에 쌍세전(雙世殿)이 있었으나 1994년에 부시고 새롭게 원통전을 지었다.
새로 지은 것이다보니 그냥 지나치고 말았는데, 알고보니 보광사의 불화(佛畵) 가운데 가장 오
래된 지장탱화(地藏幀畵)가 들어있었다. 순간의 방심으로 놓친 그 그림은 1802년 승려 경욱(慶
郁)이 그린 것으로 원래는 부속암자인 수구암에 있었다고 하며, 지장탱화와 나란히 있는 삼장탱
화(三藏幀畵)는 1898년에 제작된 것으로 경선응석(慶船應釋), 금화기동(錦華機同), 용담규선(龍
潭奎禪)이 그렸다.


▲  원통전 앞에 자리한 지장전(地藏殿)

지장전은 원통전과 마찬가지로 1994년에 지어졌다. 지장보살과 도명존자(道明尊者), 시왕상(十
王像) 등 저승의 주요 식구들의 존상(尊像)과 그림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중 장군탱화는 1872년
에 제작된 오래된 그림이다. 지장전에 있던 존상과 그림은 원래는 쌍세전에 있었다.

◀  어실각(御室閣)과 향나무

원통전 뒤쪽에는 조그만 1칸짜리 어실각이 있다.
이 건물은 1740년에 보광사를 소녕원의 원찰로
삼으면서 세운 것이라 전하며, 굳게 닫힌 내부
에는 숙빈최씨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건물 옆에는 겨울의 제국에도 아랑곳 않고 푸르
름을 간직한 10m 정도의 향나무가 자라고 있는
데, 이는 영조가 심은 것이라 한다. 세월을 양
분으로 삼아 무럭무럭 자란 향나무에는 영조의
혼이 깃들여 있는 건지 늘 어실각에 시원한 그
늘을 드리운다.


▲  왕실의 어보(御寶)처럼 특별하게 보이는 어실각
영조에 어미에 대한 그리움과 효를 읽을 수 있다.

▲  어실각 뒤쪽으로 끝없이 이어진 토담
흙으로 만든 토담의 모습이 너무 정겹다. 절과 속세의 경계선으로 그어진
토담 너머로 소나무가 속세의 악한 기운과 냄새로부터 절을 지킨다.


  안팎으로 다양한 볼거리와 보물을 간직한 보광사의 보물창고
대웅보전(大雄寶殿)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83호

경내 중앙에는 보광사의 법당(法堂)인 대웅보전(대웅전)이 만세루를 마주보고 있다. 만세루 다
음으로 규모가 큰 건물로 기와부터 기둥까지 고색의 내음이 진하게 묻어나 있다. 법당으로서의
품격과 위엄이 돋보이는 보광사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원래는 창건 시절부터 있었다고 하나 지금의 건물은 1740년에 중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대웅전은 만세루보다 1단계 높은 석축 위에서 서쪽을 바라고 있다. 건물을 받치는 석축은 자연
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이용했으며, 돌마다 기나긴 세월의 때가 가득 입혀져 고색의 향기를
강하게 풍긴다. 건물의 벽은 흙벽이 아닌 나무벽으로 되어 있고, 좌우측벽에는 다른 절에서는
보기 힘든 5개의 색다른 벽화가 눈길을 단단히 붙잡는다. 이들 벽화는 1740년에 건물을 중건하
면서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불단에는 조선 후기 불상인 삼세불을 중심으로 한 5존불이
있으며, 1898년에 그려진 석가모니후불탱화를 비롯한 6개의 불화와 숭정7년명동종, 금고(金鼓)
등 오랜 보물이 깃들여져 있다. 그야말로 보광사의 보물창고인 셈이다.


▲  대웅보전 우측벽화

왼쪽에는 하얀 옷을 입은 백의관음보살이 물결이 출렁이는 바다 위에서 배를 움직이고 있는데,
중생을 이끌며 거친 파도를 헤치고 극락으로 가는 모습을 담은 것 같다. 오른쪽에는 상아가 탐
나보이는 거대한 코끼리와 등에 올라탄 승려가 담겨져 있는데, 코끼리는 부처의 법을 상징한다
고 한다.


▲  대웅보전 좌측벽화

▲  좌측벽화의 좌측 그림
창을 들고 옷자락을 휘날리는 모습이 사천왕의 하나인 광목천왕(廣目天王) 같다.
부처를 지키는 성스러운 존재로 팔에 주름진 근육이 그의 힘을 느끼게 한다.
허나 그의 표정은 천왕(天王)으로서의 위엄과 무서움보다는 귀엽다는
인상을 지을 수 없게 한다.

▲  좌측벽화 가운데의 그림
개와 비슷하게 생겼으면서 이상하게 생긴 커다란 동물과 동자(童子)로
보이는 승려가 그려져 있다.

▲  좌측벽화 우측 그림
갑옷 비슷한 것을 갖춰 입고 비파 같은 것을 연주하는 모습이
사천왕의 일종인 다문천왕(多聞天王) 같다.

▲  대웅전 우측 출입문 위에 걸린 '고령산보광사상축서(上祝序)' 현판

대웅전 우측 출입문 창방에는 낡은 현판이 걸려있다. 이것은 '고령산보광사 상축서(古靈山普光
寺 上祝書)'로 1869년 왕실의 시주로 절을 중수한 것을 기리고자 만든 것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성상(聖上)은 고종, 왕비전하(王妃殿下) 민씨는 명성황후(明成皇后), 대원위(大院位)는 흥선대
원군(興宣大院君)으로 고종(高宗)의 가족이 보광사 중수에 크게 신경쓰고 지원했음을 보여준다.
현판에는 그들의 은혜로 절을 중수하여 그들의 성수무강(聖壽無疆)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
다.


▲  대웅전 불단(佛壇)에 모셔진 5존불

대웅전 불단에는 흔히 있는 3존불이 아닌 5존불이 봉안되어 눈길을 끈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
우에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앉아 있으며, 이들 불상은 이른바 삼
세불(三世佛)이다. 그들 좌우로 현란한 보관(寶冠)을 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서 있는데, 이
들은 마땅히 둘 장소가 없어서 삼존불 옆에 배치하여 졸지에 5존불이 된 것이다. 그들 모두 지
그시 눈을 감으며 은은하게 미소를 드리운 포근한 표정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저보다 편안한 표정이 어디에 있을까?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에 따르면 이들은 1215년 원진국사가 절을 중창할 때 조성했다고 한다. 허
나 저들은 엄연히 조선 후기 불상이다. 그들 뒤로는 석가가 설법을 하고 있는 석가모니후불탱화
가 걸려있는데, 1898년에 예운상규(禮芸尙奎), 경선응석(慶船應釋), 금화기동(錦華機同), 용담
규선(龍潭奎禪) 등의 화승이 그렸다. 후불탱에 깃들여진 빛바랜 고운 색채는 그림의 중후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며 신중탱화와 감로탱화, 칠성탱화, 독성탱화, 현왕탱화 등 5점의 불화(佛畵)
가 대웅전 내부 벽을 화려하게 수식하여 불화미술관을 방불케 한다. 이들 모두 후불탱화와 마찬
가지로 1898년에 제작된 것이다.

▲  독성탱화(獨聖幀畵)
지팡이를 쥐어들고 앉아있는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의 모습이다. 무슨 근심거리가 있는
것일까? 그의 표정에 우수(憂愁)가
서려 보인다.

▲  신중탱화(神衆幀畵)
조금의 여백도 허용치 않고 그림에 한가득
그려진 신들의 모습이다. 저들은 원래 인도의
토속신으로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되었다.


▲  칠성탱화(七星幀畵)
칠성신앙은 우리의 고유 민간신앙으로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되었다. 칠성(북극성)은
산신, 독성과 달리 부처에 준하는 대접을 받으며 치성광여래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여백이 없어 복잡한 신중탱화와 달리 이 그림은 눈이 편할 정도로 간결하다.

▲  현왕탱화(現王幀畵)

저승의 주인인 염라대왕(閻羅大王)이 심판을 하는 장면을 담았다. 여기서 현왕은 염라대왕을 지
칭하며, 대왕 주변으로 판관과 명부(冥府, 저승)의 여러 관리들이 구름처럼 모여있다. 대왕 앞
에 무릎끓고 앉아 있는 이는 이승에서 막 저승으로 들어온 사람인 모양이다. 그는 대왕에게 어
떤 판결을 받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  불단 우측에 있는 숭정7년명동종(崇禎七年銘銅鍾)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58호

단 우측에는 보광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숭정7년명동종이 놓여져 있다. (종의 위치는 바
뀔 수 있음) 이 종은 대웅전에서 계속 생활했으나 1990년 범종각을 지어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
다. 그러다가 근래에 종의 건강과 보호를 위해 다시 대웅전으로 옮기고 새 종을 만들어 범종각
을 지키게 했다.

이 종은 높이가 98.5cm로 범종각에 흔히 달려있는 범종(2~3m)보다 훨씬 작다. 종이 이렇게 작으
니 도난의 위험이 늘 도사리는 것은 당연하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범종으로 종 꼭대기에 2마
리의 용이 서로 뒤엉켜 종을 달리 위한 고리를 형성했다. 종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띠가 둘러져
있고, 그 가운데에 3줄의 띠가 둘러져 있어 종을 상하로 구분한다. 위쪽 부분에는 네모난 유곽(
乳廓) 4개와 보살입상(菩薩立像)이 4구가 있고, 아래쪽에는 파도무늬와 용이 종을 장식한다. 아
래 띠와 가운데 끼 사이에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는데 범종을 만든 시기와 제작자의 이름, 그리
고 보광사의 연혁이 길게 적혀 있다.
명문(銘文)에 따르면 이 종은 숭정7년에 제작되었다. 숭정7년은 1634년(인조 11년)으로 숭정은
명나라 황제인 의종(毅宗, 1611~1644)의 연호이다. 종의 이름은 바로 제작시기인 숭정7년에서
따온 것이다. 범종 불사에는 신관(信寬)이 화주를 맡았고, 설봉천보(雪峯天寶)와 3명의 승려가
범종을 조성했는데, 설봉천보는 1619년(광해군 11년)에 봉선사(奉先寺)의 대종(보물 397호)를
만들기도 했다.

대웅전 한쪽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조그만 종을 치고 싶다. 종을 치면 그는 졸음에서 깨어나
은은한 종소리를 건물 내에 잔잔히 울리겠지, 허나 문화재로 지정된 귀한 존재이자 보광사에 소
중한 보물로 괜히 그를 건드리다가는 된소리를 들을 각오를 해야 된다. 그냥 보는 것으로 만족
하는 것이 쌍방에 이롭다.

사진에는 없지만 불단 좌측에는 조그만 금고(金鼓)가 있다. 가운데에 태극마크를 그리고 가장자
리에 꽃무늬가 있으며, 전면에 '大皇帝陛下萬萬歲(대황제폐하만만세)'란 명문이 있어 고종이나
순종 시절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역시 황실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  영조의 친필이라 전하는 대웅보전 현판의 위엄
빛바랜 하얀 현판에 쓰인 대웅보전의 4글자 마치 글씨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처럼 필체의 힘이 넘쳐 흐른다.

▲  푸른 하늘을 바다로 삼으며 그윽한 풍경소리를 베푸는
대웅전 풍경물고기


  보광사 마무리

▲  승방의 역할을 겸하는 만세루(萬歲樓)의 후면(後面)

대웅보전과 마주보고 있는 만세루는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승방이 딸린 독특한 'T'구조를 하
고 있다. 이 건물은 원래 누각으로 1740년경에 영조의 지원으로 절을 중수할 때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며, 건물은 높은 석축을 발판으로 삼아 자리해 있다. 1913년과 1914년에 대한제국 상궁(
尙宮)의 시주로 중수를 했는데, 그때 만세루 옆으로 툇마루가 딸린 승방을 만들어 지금의 구조
를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정면 9칸의 규모로 '염불당중수시시주안부록(念佛堂重修時施主案付
祿)'이라 쓰인 현판이 있어 한때는 염불당(念佛堂)이란 이름을 지녔음을 알 수 있으며, 누마루
정면에 걸린 '고령산보광사'란 현판은 영조의 친필로 전해진다.


▲  만세루의 정면
누마루 정면에 영조가 썼다는 '고령산보광사' 현판이 있으며, 좌측 가장자리에
만세루란 현판이 걸려있다. 툇마루와 난간까지 갖춘 모습이 제법 품격을 갖춘
양반가를 보는 듯하다.


▲  만세루 목어(木魚)의 위엄
용을 꿈꾸는 목어가 입에 여의주로 보이는 동그란 것을 물고 하늘을 거닌다.
크게 부릅뜬 두 눈과 이글거리는 듯한 지느러미, 살랑거리는 꼬리 등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그를 덥썩 붙잡고 하늘을 날고 싶어진다.

▲  만세루 우측에서 속세로 나가는 문
수겹의 줄무늬가 쳐진 토담 사이로 속세로 안내하는 기와문이 있다.

▲  오색영롱한 연등이 대롱대롱 중생을 맞이하는 문 바깥 부분

▲  경내 서쪽을 빈틈없이 에워싼 토담
2중의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터를 닦아 절을 지었다.
천리장성처럼 끝없이 펼쳐진 토담의 물결 앞에 절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火魔) 등의 악귀도 두 손을 들고 물러갈 것이다.

▲  납골당으로 쓰이는 영각전(靈覺殿)

경내에서 개울 건너 북쪽에는 2003년에 만든 영각전이 자리해 있다. 이 건물은 납골당으로 서쪽
에 납골당으로 들어가는 지하도가 있으며, 위의 건물은 영가(靈駕, 죽은 이들)들을 위한 49재나
천도재를 지내는 공간으로 쓰인다. 내부 중앙에는 아미타불과 아미타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으
며, 외벽에는 고려불화(高麗佛畵)에 그려진 관음보살이 수려하게 그려져 있다.
* 납골당 문의는 보광사 영각전(☎ 031-948-4440)


▲  지하 납골당으로 들어가는 문 위쪽에 걸린 그림

관음보살이 영가를 배에 가득 태우고 넝실거리는 바다를 건너 극락으로 인도하는 장면이다. 판
옥선(板屋船) 비슷하게 생긴 큰 배에는 극락으로 가려는 이들로 가득하며, 배의 정원이 가득 차
서 따로 조그만 배 2척을 마련했다. 푸른 용과 붉은 용이 관음보살과 영가들을 지키며 극락으로
배를 이끈다. 출렁이는 물결이 마치 하늘로 치솟는 바위 산을 보는 듯 하다.


▲  석불전(石佛殿)

영각전 동쪽 높은 곳에 거대한 석불이 속세를 굽어보고 있다. 절에서는 이 석불(石佛)을 석불전
이라 부르는데, 그렇다고 건물은 아니다. 순천 금둔사(金屯寺, ☞ 관련글 보러가기)의 불보전처
럼 석불과 예를 올리는 공간을 통틀어 전(殿)이란 칭호를 준 것 뿐이다.

이 불상은 예전에는 나라를 지키는 호국대불(護國大佛)이라 불렀다. 1980년 1월 대웅보전 보살
상의 복장(腹臟) 유물이 도난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다행히 진신사리만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를 봉안하고자 1980년대 거액의 어음 사기 사건으로 악명이 높은 장영자의 시주로 경내에서
가장 높은 이곳에 터를 닦고 석불을 세웠다. 그리고 6.25전쟁 때 절 부근이 치열했던 격전지였
으므로 그때 죽어간 이들을 위로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호국대불이라 불리게 되었다.

석불의 복장에는 보살상에서 나온 진신사리 11과와 여러 나라에서 가져온 각종 보석, 법화경과
아미타경,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발원문(發願文)이 봉안되어 있으며, 불상의 높이는 대략 15m에
이른다.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잔잔히 미소를 드리운 석불은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서 있으며, 주변에
석등 2기가 그의 광명을 밝힌다. 이곳은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경내가 두 눈에 훤히 들어
온다.


▲  석불전에서 바라본 경내 서쪽 (설법전 구역)

▲  절을 뒤로하며 다시 속세로 나오다.

석불전을 끝으로 정말 오랜만에 찾은 보광사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둘러본 시간은 대략 1시
간 정도로 그냥 경내를 나오지 않고 다시 대웅전과 만세루를 찾아 거기서 조금 다리를 쉬었다가
속세로 아쉬운 발길을 떼었다. 고요하고 평안한 절을 뒤로하고 속세로 나올 때는 마치 돌아오지
못할 전쟁터로 향하는 군인의 처절한 기분이다. 아비규환의 속세에서 살아가는 것은 하루하루가
전쟁이기 때문이다. 속세는 언제쯤이나 극락처럼 평안해질까? 과연 그것이 가능이나 할까? 
이렇게 하여 한겨울 보광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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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최근에 본인 다음 블로그에 올린 글과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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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도심 속에 숨겨진 아늑한 고색의 절집 ~ 백양산 운수사 (백양산 숲길, 범방동3층석탑)

 


' 부산의 숨겨진 명소 둘러보기 ~
백양산 운수사, 범방동3층석탑 '
백양산 운수사
▲  백양산 운수사


백양산(白羊山)은 부산 사상구(沙上區)의 동쪽을 보듬은 해발 641m에 큰 산이다. 바로 그 산
서쪽 기슭에 운수사란 오래된 절이 조용히 묻혀있다. 그 절의 이름 석자를 우연히 듣고 부산
에 사는 선배한테 물어보니 절의 이름은 들어봤다고 그런다.
그래서 이번 부산 봄나들이에서는 금정산을 등산하면서 미륵사(彌勒寺, ☞ 관련글 보러가기)
와 국청사(國淸寺, ☞ 관련글 보러가기)를 둘러보고 여건이 된다면 한번 문을 두드리기로 하
였다. 다행히 약간의 여유가 있어서 구포시장에서 모라동으로 들어가는 148번 시내버스를 타
고 모라주공아파트 종점에서 내린다.

백양터널 위쪽(백양터널 사업소)을 지나 숲에 묻힌 운수사 길로 들어선다. 초반부터 약간 가
파른 길이 금정산을 갔다온 우리를 기운 빠지게 만든다. 그 길을 1분 정도 오르니 길은 수레
길과 계곡길로 갈라선다. 어디로 가든 운수사는 나오지만 우리는 수레의 핍박이 싫어서 시원
한 계곡길을 택했다. (계곡길이 수레길보다 조금 지름길이다. 운수사까지는 15분)


▲  인공(人工)이 가미되어 다소 볼품이 떨어진 운수사 계곡
백양산이 베푼 계곡물이 졸졸졸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계곡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돌과 시멘트로 정비한 인공적인 모습이라 그다지 정이 가질 않는다.

▲  자연의 모습을 간직한 조그만 폭포
하얀 피부의 바위를 타고 비스듬하게 떨어지는 폭포 소리에
철모르고 찾아온 더위가 나 살려라 줄행랑을 친다.

▲  계곡과 저만치 떨어지면 녹음이 깃든 넓은 산길이 나타난다.
군데군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인 돌탑이 중생들의 소망을
차곡차곡 품으며 뿌리를 내렸다.

윗 사진의 산길을 넘으면 2갈래로 갈라졌던 길은 다시 하나가 된다.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운수사 주차장이 나오고 주차장 너머 높다란 언덕에 수미산의 궁전과 같은 거대한 건물이 나
의 눈을 자극시킨다. 그 건물은 운수사의 또 다른 법당인 대웅보전(大雄寶殿)이다.


▲  높은 언덕 위에 새로 지어진 대웅보전

절에서 가장 높은 곳에 터를 닦은 대웅보전은 1993년에 착공하여 2006년에 완성되었다. 13년
에 걸친 공사에 걸맞게 운수사에서 가장 규모가 장대하며, 정면 7칸, 측면 4칸에 달한다. 절
중심 경내와 약간 거리를 두고 터를 닦은 저곳에 오르면 낙동강과 김해평야가 두 눈에 달려
올 만큼 조망이 일품이다.
허나 우리는 저곳으로 오르지 않았다. 덩치만 큰 건물의 위용이 그리 달갑지가 않았고, 운수
사에 서린 오랜 보물에만 오로지 관심이 갔기 때문이다. 내부에는 웅장한 규모의 석가삼존불
이 모셔져 있는데, 높이가 무려 2.6m에 달하여 주눅들기가 쉽다.


♠  백양산 자락에 조용히 안긴 오랜 절집
~ 백양산 운수사(雲水寺)

구름이 물처럼 흐른다는 뜻의 운수사는 백양산 서쪽 자락에 포근히 묻혀있다.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 대부분이 낙동강이 바라보이는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구름도 앞다
투어 발길을 멈추는 곳이다.

부산 땅에서 범어사(梵魚寺)와 선암사(仙岩寺), 미륵사에 비해 인지도는 턱 없이 낮으며, 백양
산 등산객 일부만 발걸음을 하는 그야말로 아는 사람만 찾는 조촐한 절이다. 내가 그곳의 존재
를 안 것은 방문 2달 전에 일이다.

운수사의 창건시기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금관가야(金官伽倻) 시절에 창건되었다
는 것, 다른 하나는 원효대사가 선암사를 세우고 산을 건너와 세웠다는 것이 그것이다. 허나 이
를 입증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설에 지나지 않는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범어사, 선암사 등과 더불어 같은 시대에 지어진 절로
나와있어 이곳의 깊은 역사를 가늠케 한다. (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중기에 창건된 것으로 짐작
됨)
1592년 4월 임진왜란으로 절이 모조리 잿더미가 되었으며, 1660년에 중건을 했다. 경내는 물론
이고 경내에서 200m 정도 떨어진 승탑(僧塔) 주변에서도 옛 운수사 시절의 기왓조각이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어 예전에는 지금과 달리 규모가 제법 있었음을 아련히 보여준다.
또한 1740년대에 편찬된 동래부지(東來府誌) 불우조(佛宇條)에는 '初名 新水庵(운수사의 처음
이름은 신수암이다)'이라 나와있어 18세기 이전에 지금의 이름으로 갈렸음을 보여주며, 그 당시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예로부터 사상8경(沙上八景)의 하나로 운수모종(雲水暮鐘)을 꼽았다. 이는 운수사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보듬어 주었음을 보여주며, 빼어난 절경으로 많은 사람
들이 찾아오는 부산의 숨겨진 명승지였다.

근래에는 화명종합사회복지관을 세워 복지, 문화사업에 앞장서고 있으며, 불교대학을 설립하는
등 불교 대중화 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또한 '아름다운 인연'이란 이름으로 각종 후원회를 설
립하여 사회의 그늘진 곳을 향해 따뜻한 정을 펼치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인 대웅전과 석조여래3존좌상, 아미타3존도(부산 지방문화재자료
43호, 관람 거의 불가)가 있으며, 부근 소나무숲에 조선 초기에 조성된 승탑 2기가 있다. 절을
이루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대웅보전, 삼성각 등 7~8동의 건물이 있다. 특히 청양의 장곡사(長谷
寺)처럼 대웅전이 2개나 있다는 것이 이곳의 큰 특징이다.

풍광이 수려한 산중암자로 부산 도심과도 무척이나 가까워 번뇌가 복잡하고 싹둑 정리가 필요할
때,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모든 걸 잠시 내려놓고 안기고 싶은 절이다. 대웅보전을 제외하고 건
물의 크기도 적당하며 고색의 때가 만연한 아담한 대웅전은 정감을 많이 불러 일으킨다.

※ 운수사 찾아가기 (2012년 12월 기준)
* 부산지하철 2호선 모라역(3번 출구)에서 148번 시내버스, 2호선 사상역(6번 출구를 나와서 뒷
  쪽)에서 31, 338번 시내버스를 타고 모라주공아파트 종점에서 하차.
  버스에서 내려서 왼쪽으로 가면 막다른 길(모라로 192번길)이 있다. 여기서 직진을 해도 되고
  오른쪽으로 가도 되는데, 쉽게 갈려면 직진을 해서 백양산터널 윗쪽을 지나 운수사로 올라가
  는 길로 들어서면 된다. 오른쪽으로 갈 경우 3분 정도 가면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으
  로 가면 모라예비군훈련장이다. 훈련장을 지나 넓직한 산길을 계속 오르면 운수사 남쪽이다.
  (모라주공아파트에서 운수사까지 도보 30분 거리) 
* 소재지 - 부산광역시 사상구 모라동 산5 (☎ 051-332-5671)


▲  운수사 약수터

대웅보전을 외면하고 경내로 들어서기 직전에 백양산의 옥계수가 흘러나오는 약수터가 있다. 어
느 절집이나 약수터는 꼭 있기 마련으로 절에 갈 때마다 몇 모금씩 마신다. 이곳의 물은 시원하
기 그지없어 마음 속에 담긴 온갖 때가 싹 가신 듯, 오장육부가 시원하다. 물을 마시고 경내를
가린 건물을 지나서면 대웅전이 중심이 된 운수사 경내가 조촐하게 펼쳐진다.


▲  건물 중간에 나 있는 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선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1996년에 지어진 건물로 삼성각의 주요
식구인 칠성탱과 산신탱,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용왕각(龍王閣)
1998년에 지어진 건물로 용왕탱화와 1.8m에 달하는 목어(木魚)가 있다.


▲  작지만 속은 알찬 운수사 대웅전(大雄殿)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91호

서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운수사 대웅전은 안으로 들어가면 무너지지 않을까 겁날 정도로 고색의
때가 만연하다. 고려 후기 건축물인 수덕사(修德寺) 대웅전이나 봉정사(鳳停寺) 극락전보다 더
나이가 들어보이니 말이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柱心包) 맞배지붕 불전으로 범어사 대웅전과 더불어 부
산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손꼽힌다. 건물의 크기는 조촐하지만 법당(法堂)으로서의 위
엄과 격식이 진하게 돋보인다. 18세기에 지어진 것으로(혹은 19세기로 보기도 함) 그 당시는 부
산 지역에서 건물 조영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였다. 또한 운수사의 공역 여건과 기반도 상당
한 수준에 달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대웅전에서 발견된 송판(松板)을 보면 1770년대에 이루어진 범어사 대종(大鐘) 주조불사,
동래향교 대성전(大成殿) 중수공사, 범어사 종루 이건공사 등에도 참여한 사람이 확인되어 18세
기 부산지역 공장(工匠)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한다.

임진왜란의 큰 피해지인 탓에 임란 이전의 목조건물이 남아 있지 않은 부산 지역에서 조선 중기
건축기법을 두루 갖추고 있는 유일한 건물로 그 가치가 뒤늦게 인정되어 2008년 9월 지방문화재
로 지정되었다.


▲  대웅전과 5층석탑

대웅전 앞에는 울퉁불퉁하게 다져놓은 돌계단이 놓여져 있는데 이 역시 오래된 때가 느껴진다.
잘 다져진 석축 위에 뿌리를 내린 대웅전의 조촐한 모습은 정말 두 눈에 쏙 넣어도 부담이 적을
정도로 정감이 많이 간다.


▲  대웅전 좌측 기둥에 선명히 새겨진 이름
부산진(釜山鎭)에 사는(혹은 그곳에 소속된) 이상길(李常吉)이란 사람이
대웅전 공사에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  대웅전 석조여래삼존좌상(石造如來三尊坐像)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92호

꽃그림이 가득한 대웅전 불단(佛壇)에는 포근하고 넉넉한 인상의 소유자인 석조여래3존불이 중
생을 맞는다. 이들은 17세기 이후에 불석(제오라이트)이란 돌로 만든 것으로 3존불 가운데 좌협
시 보살은 여래(如來)의 옷을 입은 우협시 보살과 달리 보살상의 전통적 착의법인 천의(天衣)를
걸치고 있으며, 팔찌와 같은 형태의 장신구를 양팔에 착용하고 있어 조선후기 여타 삼존상과는
다르다.

양쪽 보살은 선정인(禪定印)을 지그시 취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 조각승의 개인 양식 혹은 지역
성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또한 부산, 경남 지역에 현존하는 17~18세기 불상으로 그
가치가 인정되어 2008년 9월 대웅전과 함께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대웅전 뜨락에서 바라본 운수사의 든든한 후광, 백양산의 위엄

▲  좌우로 길쭉한 운수사 선방(禪房)

▲▼  호젓함이 깃들여진 백양산 숲길

운수사 남쪽에는 녹음이 짙은 백양산 숲길이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모라동으로 내려가는 길로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이 길은 백양산 허리를 따라 멀리 당감동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집
으로 살짝 가져와 늘 옆구리에 끼고 거닐고 싶은 아름다운 숲길로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당감동
까지 걸어보고 싶다. 여기서 거기까지 10리가 넘는 길이지만 이토록 어여쁜 숲길에게는 10리도
너무 짧다.
숲이 무성하여 벌써부터 여름을 사칭한 봄의 뜨거운 햇살도 감히 들어오질 못한다. 솔솔 나부끼
는 산내음에 속세의 찌듬이 완전히 정화된 듯 몸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  경사의 기복이 심하지 않아 느긋하게 거닐 수 있는 백양산 숲길
우리는 10분 정도 숲길을 거닐다가 모라주공아파트, 예비군훈련장으로 내려가는 길을
통해 다시 속세로 나왔다. 꿈에서도 잊지 못할 그 길을 다시 거닐 그날을 염원해 본다.


김해 삼각주(三角洲)에 자리한 강서구(江西區)는 낙동강 동쪽의 부산 본토와 달리 드넓은
평야로 이루어진 시골이다. 2000년 이후 명지와 녹산 일대에 공업단지와 주거지가 무진장
들어섰지만 아직 강서구의 태반은 촌 분위기를 여실히 간직하면서 부산의 또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런 강서구를 이루고 있는 동네 가운데 부산경마공원 뒤쪽에는 범방동(凡方洞)이란 시골
동네가 있다. 그곳에는 예전부터 나를 아련히 손짓하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범방동3층석
탑이 그것이다. 촌구석에 숨어있는 그 조그만 탑에 왜 그리 끌렸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 탑을 보러 강서구 벽지투어란 이름으로 그곳을 찾게 되었다.
(백양산 운수사와는 전혀 다른 날에 간 것임)

부산 시내에서 범방동에 가려면 하단에서 강서구 마을버스 7번(하단역↔조만포)을 타야된
다. (지금은 범방동 개발로 인해 버스가 들어가지 않음)  벽지라 그런지 마을버스도 거의
농어촌 버스나 다름없다. 배차간격이 무려 30~40분이기 때문이다.

많은 버스를 하염없이 흘려보내며 30여 분을 기다리니, 그제서야 7번 번호판을 단 조그만
카운티 버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자리를 가득 채우며 하단을 떠나는 우리의 마을버스, 승
객들은 세산3거리 이전에서 모두 다 내리고 우리만 남았다.
세산3거리부터는 큰 길을 과감히 버리고 2차선도 안되는 조그만 농로로 들어선다. 대도시
속 시골길을 쿵쾅쿵쾅거리며 드디어 3층석탑이 있는 범밤동 탑동에 도착했다. (지금은 탑
동 경유하지 않음, 세산초교에서 차를 돌려 경마공원으로 바로 운행)

탑동마을 입구에는 탑동을 상징하는 근래에 만든 뾰족한 3층석탑이 마을을 찾은 나그네를
맞는다.
여기서 범방동3층석탑까지는 대략 500m 거리로 마을을 지나 마을 뒤쪽 야산에 자
리해 있다. 조용함이 감도는 탑동마을은 녹산공단 배후지역 재개발 때문에 빈집과 파손된
집이 많아 다소 어수선해 보인다. (지금은 마을 전체가 철거됨)


♠  잡초가 무성한 이름없는 절터를 홀로 지키고 선
범방동3층석탑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23호

탑동마을 뒤쪽 야산 정자나무 그늘에 자리한 범방동3층석탑은 이름과 역사가 전해오지 않는 옛
절터에 홀로 서 있다. 절터라고는 하나 절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다.
이 탑은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 시절에 이곳에 절을 지으면서 세운 것이라 전해오고 있
으나 전혀 신빙성이 없다. 그는 고려 때 세워진 탑으로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을 얹
힌 전형적인 고려 석탑이다. 높이는 4m 정도로 1층 탑신이 상당히 두꺼워 보여 배가 풍만하게
나온 뚱보 같다. 탑의 비례는 그리 맞아보이지 않으며 탑 꼭대기에 두툼하게 노반(露盤)이 솟아
있다.
원래는 경상남도 지방유형문화재였으나 1989년 낙동강 서부 지역이 부산 강서구에 강제로 들어
가면서 부산지방문화재로 변경되었다.


▲  커다란 정자나무 밑에 자리한 범방동3층석탑
탑만 남기고 사라진 이름 모를 옛 절터를 푸른 수풀이 가득 보듬어 준다.

▲  가까이서 바라본 범방동3층석탑 - 1층 탑신이 유난히 두꺼움을 알 수 있다.


▲  녹음에 젖은 탑동마을의 당산나무 - 범방동 팽나무
나무의 나이는 200년 정도로 범방동 일대에 개발의 칼질이 자행되는 지금은
어찌 지내는지 모르겠다. 부디 별일이 없어야 될텐데 말이다.
나무높이는 14m, 둘레는 2.3m, 지정번호는 2-12-6-3호


※ 범방동3층석탑 찾아가기 (2012년 12월 기준)
* 부산지하철 1호선 하단역(1~8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220, 221번 좌석버스(30~40분 간
  격)나 강서구마을버스 7번(30~40분 간격)을 타고 부산경남경마공원 입구에서 하차. 경마공원
  입구3거리에서 경마공원 남문 방면 2차선 도로로 계속 들어가면 옛 탑동마을이 나오는데, 마
  을 뒤쪽 야산에 탑이 있다. 현재 범방동 일대 개발로 탑까지 진입이 어렵다.
* 소재지 - 부산광역시 강서구 범방동 1345


▲  부산경남경마공원 남문

범방동3층석탑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부산경남경마공원(이하 경마공원)이 가까이로 바라보인다.
경마공원이 여기보다는 차편이 좋을 것이므로 거기서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마침 폐장시간이라 드넓은 주차장은 짐을 꾸리고 나가려는 수레들만 보일 뿐, 썰렁하기 그지 없
다. 공원에 들어있는 범방동 패총(貝塚, 조개더미)을 보려고 했으나 공원 겉만 맴돌았을 뿐, 안
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  부산경남경마공원 관람대
경마공원이 시민을 위한 공간이긴 하지만 사행성을 조장하는 곳임은 부인할 수 없다.
달리는 말에 모든 걸 내걸며 대박을 꿈꾸는 사람들의 함성소리, 그리고 백성들의
그런 심리를 이용해 막대한 돈을 챙기는 썩어 문드러진 지배권력층의 행복한
비명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오는 듯 하다.

▲  텅빈 경마공원 경마트랙
인간이란 동물의 사행성을 위해 오늘도 말은 열심히 말발굽 소리를 낸다.

▲  부산경마공원 정문 옆 분수대에 말상
허무맹랑 역사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적토마(赤兎馬)가 물 위를 뛰는 듯,
역동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  부산경남경마공원 정문
어둠이 어슬렁 다가오자 문에서 알록달록 빛이 쏟아져 정문을 수식한다.
불빛도 거의 없는 황량한 벌판인지라 정문의 야경이 꽤 돋보이고
멋스러울 것이다. 이것으로 본글을 마무리 짓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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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산사 나들이 ~ 천년 묵은 은행나무로 유명한 양평 용문사 (용문산)

 


' 늦가을 산사 나들이 ~ 양평 용문산 용문사(龍門寺) '
용문사 정지국사탑
▲  용문사 정지국사탑


여름의 제국을 몰아내고 잠시나마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물들이던 가을은 겨울제국의 등쌀에
떠밀려 우리 곁을 떠나려고 한다. 차디찬 바람은 겨울의 도래를 알리고 늦가을의 향연을 즐긴
단풍잎은 그 이름도 우울한 낙엽으로 화하여 화려한 윤회(輪廻)를 꿈꾼다. 세상만물을 우울쟁
이로 돌변시키는 늦가을과 겨울의 길목에 친한 이들을 이끌고 양평 용문사를 찾았다.

용문사(龍門寺)는 우리나라에 3곳이 있는데(근래에 지어진 절 제외) 양평 용문사와 예천 용문
사, 남해 용문사가 그것이다. 이들을 묶어서 세상에서는 3대 용문사라 부르기도 한다. 이들의
특징은 내력이 깊이가 대단하고 문화유산을 적당히 지니고 있으며 속세에 널리 알려진 명물을
1가지는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양평 용문사는 이 땅에서 제일 오래되고 크다는 은행나무로
명성을 누리고 있고, 예천(醴泉) 용문사는 불가(佛家)의 사치품으로 꼽히는 윤장대(輪藏臺)가
유명하다. (남해 용문사는 문화유산은 허벌나게 많지만 딱히 대표적인 것은 없음)
양평 용문사는 그 문턱인 용문까지 수도권 전철이 들어오면서 서울과의 접근성이 한층 좋아져
예전보다 훨씬 편하고 저렴하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용문산(龍門山)을 찾는 주말
등산객이 제법 늘었다.

1호선과 중앙선이 만나는 회기역에서 일행들을 만나 용문행 중앙선 전철을 타고 1시간을 내달
려 용문(龍門)에 발을 내린다. 용문행은 배차간격이 거의 30분이라 1대를 놓치면 그야말로 치
명적이다. 기다리다 지쳐 졸도(?)할 수도 있다.

용문역에서 인근 용문터미널로 이동하니 마침 용문사행 군내버스가 출발을 하려고 한다. 버스
는 용문산 등산객들로 이미 초가축수송 상태, 버스의 네 바퀴가 뭉개질 지경이다. 허나 그 차
를 보내면 무작정 30~40분 이상을 기다려야 된다. 그리되면 환승할인(33분)도 받지 못하고 일
정에도 약간 차질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인정사정 없이 버스에 올라 짐짝 수송에 흔쾌히 일
조하며, 간신히 앞문에 매달려 용문사까지 고행의 길을 자처했다.

용문에서 용문사까진 차로 15분 거리로 가깝다. 허나 힘들게 가는 상황이니 그 거리도 지나치
게 멀게만 느껴진다. 정말 서울에서 묘향산(妙香山)을 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좀처럼 나오
지 않는 종점을 원망하며 가까스로 손잡이에 매달려 몸을 지탱했다.

용문사 종점에 이르니 가축 수송으로 숨도 못 쉬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하차를 하면서 다시 한
번 대혼란을 겪는다. 게다가 환승할인과 경기도 버스 거리비례제 때문에 무조건 하차단말기와
승차단말기에 카드를 대야 되니 (카드를 안대고 내리면 다음에 1,100원의 패널티 요금을 강제
로 뜯기야 됨~) 자연히 하차 시간은 길어질 수 밖에 없다. 그 줄이 엉키고 설키니 오죽하겠는
가? 그야말로 버스는 아비규환 속세의 축소판이다.
버스에서 내리니 해탈의 경지를 누린 듯 이제서야 숨을 제대로 쉴 것 같다. 버스 안에는 대략
90명 정도가 타고 있던 듯 싶으며, 그들이 싹 내리니 찌그려져 있던 버스 바퀴의 표정도 씨익
밝아진다.

시간이 점심 때를 약간 넘긴 터라 우리는 점심을 먹고자 용문산중앙식당에 자리를 폈다. 용문
산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용문산 주막촌에는 많은 주막과 숙박업소가 있지만 그 집의
이름은 예전에 들은 바가 있어서 그 집을 골랐다. 물론 맛은 옆집이나 앞집이나 비슷하다.

우리는 산채비빔밥과 도토리묵, 파전 등 정말 두루두루 시켜 뱃속의 불만을 잠재운다. 그렇게
배불리 먹고 동동주 1잔 걸치니 정말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배가 부르고 등이 따스하니 졸음
이 배 깔고 한숨 자라며 나를 희롱하려 든다.


▲  점심으로 먹은 산채비빔밥

점심을 먹고 잠시나마 쉬었던 두 발을 다시 움직였다. 주막촌을 지나면 관광안내소와 함께 용
문사매표소가 나타난다. 나그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보는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확인해보
니 성인은 무려 2,000원... 혹여 단체할인이 안될까 싶어서 할인을 요청했으나 인원이 부족하
다고 절대로 안된다고 그런다. 다른 곳은 적정 인원을 못채워도 10명만 넘으면 눈치껏 해주던
데, 여기는 그렇지 않은 듯 하다. 꿩 대신 닭을 잡을 겨를도 없이 소정의 입장료를 내고 안으
로 들어선다.


♠  용문사 가는 길 (일주문, 은행나무)

▲  용문사매표소에서 용문사로 인도하는 길

매표소를 지나면 드넓은 광장이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놀이시설이 있는 용문산관광단지
가 나오고, 직진을 하면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과 용문사로 통한다. 광장 주변은 조촐하게 공원
으로 꾸며져 있다. 오래 전에 왔을 때는 주막촌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는데, 그새 이것저것 심
어 놓아 위락관광단지로 번잡하게 만들어 놓았다.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을 지나면 용문사 길은 말끔히 포장된 수레길과 흙길인 산길로 갈린다. 여
기서 빠르고 편하게 가고자 한다면 수레길로 가면 된다. 이 길이 용문사로 가는 주된 길로 매표
소에서 용문사까지 수레길로 가볍게 걸어도 20분이면 족하다. 또한 경사도 무척 낮아 누구나 쉽
게 오를 수 있다. 반면 산길은 끝없는 오르막의 연속으로 약간의 등산을 요하지만 운치가 진하
게 깃들여져 있으며, 소위 말하는 친환경적인 흙길이다. 수레길에 비해 인적도 많지 않아 잠시
나마 한적한 산행을 누릴 수 있으며, 용문사의 보물인 정지국사탑비와도 이어진다.

수레길로 접어들어 다리를 건너면 (산길은 다리
건너기 직전에 있음) 용문사의 정문인 일주문이
중생을 마중한다.
이 문은 1986년에 세운 것으로 여의주를 머금은
용머리가 달린 기둥 2개 위에 평방(平枋)을 두
어 절의 이름이 담긴 현판(懸板)을 달고 맞배지
붕으로 마무리했다. 문이라고는 하지만 여닫는
문짝은 없다. 누구든 맞아들여 보듬어 주겠다는
부처나 자연의 마음이 담겼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일주문처럼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면
이 세상은 정말 극락이 따로 없을터인데 신과
동물 사이에 들어앉은 애매한 존재다 보니 전혀
그러지를 못하는 것 같다.

▲  용문사 일주문(一柱門)

 


▲  겨울제국이 눈치챌라 물 흐르는 소리도 조용한 용문사계곡

일주문을 지나면 은행과자를 파는 가게가 나온다. 이곳은 용문사에서 운영하는 집으로 은행나무
의 은행 열매를 넣어 만든 과자를 판매한다. 과자의 생김새는 호두과자와 같으며, 과자 안에 호
두 대신 은행이 들어있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 5천원과 1만원 단위로 판매하는데, 과자를
만드는데 시간이 조금 걸려서 어쩔 때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된다. 20분을 기다린 끝에 겨우
5천원치 은행과자를 샀는데, 맛은 호두과자와 비슷한 것 같다. 양이 20개 남짓으로 일행이 많다
보니 금세 동이 난다.

일주문을 지나 15분을 들어가면 찻집과 기념품점을 겸하는 전통다원이 나오고, 용문사의 명물인
은행나무가 장대한 모습으로 눈 앞에 나타난다.

◀  용문사를 상징하는 대명사이자 동양
최대의 은행나무, 용문사 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30호

이 은행나무는 용문사에서 특별히 옆구리에 끼고 애지중지하는 이곳의 꿀단지이자 듬직한 밥줄
이다. 이 나무가 없었다면 지금의 용문사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최대의 은행나무이자 동양 최대의 은행나무란 지위까지 지지고 있는 고품격의 나무로
높이가 무려 42m, 가슴높이 줄기둘레 14m, 가지퍼짐은 동쪽 14.1m, 서쪽 13m, 남쪽 12m, 북쪽
16.4m, 뿌리부분 둘레는 15.2m이다. 추정 나이는 약 1,100년을 헤아리며, 줄기 아래쪽에 큰 혹
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나무가 너무 큰지라 경내 어디서든지 그가 흔쾌히 보인다.

이 나무는 신라(新羅)의 마지막 자존심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신라의 재건을 꿈꾸며 경주(慶州)
를 버리고 금강산으로 가던 중에 심었다고 전한다. 신라가 935년 10월에 쿨하게 망했으니 태자
가 무리를 이끌고 여기까지 온 것은 적어도 935년 11월 정도 될 것이다. 그러면 나무의 나이와
대충 맞아 떨어진다. 허나 전설처럼 태자가 과연 이곳에 들렸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용문사가
10세기 초반에 양평함씨(양근함씨)의 지원으로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함씨(咸氏) 세력
이나 절에서 심은 것이 아닐까 싶다.
다른 전설로는 7세기에 활약하던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꽂은 지팡이가 자라났다고 하는데, 이는
나무의 나이나 그 당시 상황을 봐도 전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조선 세종 때는 당상관(堂上官) 품계를 받아 정삼품송(正三品松)이라 불리기도 하며, 절이 수차
례 불타고 재건되기를 반복했으나 이 나무는 별탈없이 그 자리를 지켰다. 특히 사천왕전(四天王
殿)이 불탄 이후에는 절을 지키는 천왕목(天王木)으로 받들었다고 하며,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
마다 소리를 내어 세상에 알렸다고 전한다. 요즘 나라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면 순 재변(災變)
투성이인데도 근래는 한번도 소리를 안낸 모양이니 참으로 이상하다. 너무 소리를 내서 이제는
낼 소리조차 없는 것은 아닐까?

1907년 왜군이 의병 토벌을 구실로 용문사를 불질렀는데, 이 나무만 타지 않았다고 하며, 왜정(
倭政) 때는 왜군이 나무를 자르려고 용을 쓰다가 벼락을 맞아 줄행랑을 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걸 증명하듯 그 당시의 도끼자국이 아련히 남아있어 우리의 아픈 역사를 비추게 한다.

은행나무는 녹음(綠陰)이 깃드는 여름에도 멋있고 시원하지만 아무래도 황금빛으로 물드는 늦가
을의 자태가 단연 으뜸이다. 바로 그 절정을 보려고 왔지만 너무 늦게 와서 은행잎은 커녕 굵은
가지만 남은 그의 앙상한 모습만 눈에 넣고 말았다. 아무리 잘나가는 나무라 해도 겨울의 제국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가지만 가련히 남은 모습은 누구나 같기 때문이다. (동백나무 등의
친겨울계 나무나 소나무, 향나무는 제외)
늦가을의 절정을 누리는 은행나무의 모습을 담지 못해 그 아쉬움을 달래고자 문화재청에 올려진
사진을 아래 첨부하니 안구정화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  늦가을 용문사 은행나무의 위엄 (문화재청 사진)

▲  땅바닥에 떨어져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하는 은행잎들

▲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용문사 경내
탑 너머로 보이는 용문산 산줄기

▲  경내로 조심스레 인도하는 돌계단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간략하게 용문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은행나무로 유명한 양평 용문사의 굵직한 내력
용문산 남쪽 자락에 안긴 용문사는 913년 대경대사(大鏡大師) 여엄(麗嚴)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다른 설로는 신라의 마지막 군주,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이 친히 행차하여 세웠다고 한
다. 허나 당시 신라는 고려와 백제, 여러 지방세력에게 영토 대부분을 빼앗기고 간신히 경주 일
대만을 지키던 상황이었다. 그런 지경에 어찌 머나먼 용문산까지 와서 한가롭게 절을 짓겠는가?
게다가 그럴 재정도 없었다.
또한 양근(楊根)이라 불리던 양평 일대는 고려의 영역으로 양평함씨 세력의 본거지로 고려에 투
항한 그들이 신라의 떨거지 왕이 와서 설치는 것을 그냥 팔짱만 끼고 보고 있을 리도 없기 때문
이다. 아마도 은행나무를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전설 때문에 그의 부왕(父王)이 등장한 듯 싶다.
그것 말고도 649년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신라 후기에 도선국사가 중창했다는 설도 있으니 이 역
시 신뢰성이 없다.

절의 창건 시기를 알리는 최초의 기록은 조선 세조 때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용문사기(龍門寺
記)'와, 1493년 임사홍(任士洪, ?∼1506)이 쓴 '용문사중수기(龍門寺重修記)'가 있다. 이들 기
록에는 '신라 때 창건된 나라의 이름 있는 절','경기도의 이름 있는 절로 오래 되었다'고 쓰여
있을 뿐이며, 1927년 안진호(安震浩)가 쓴 '봉선본말사지(奉先本末寺誌)'와 권상로(權相老)의 '
한국사찰전서'에는‘신라 신덕왕 2년(913)에 대경대사가 창건했다. 일설에는 경순왕이 친히 거
둥하여 절을 창건하고 손수 공손수(公孫樹)를 심었다고 하나 증명할 기록은 없다'
라 되어있어
대경대사 창건설에 무게를 잔뜩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용문사는 절 앞에 있는 은행나무를 통해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중에 창건된 후삼국시대
절은 확실하다. 절을 창건했다는 대경대사는 용문사 창건 10년 뒤인 923년에는 용문산 서북쪽이
자 양평함씨의 성지인 함왕혈(咸王穴) 인근에 사나사(舍那寺. ☞ 관련글 보기)를 세운 것을 보
면 양평함씨의 후원을 업은 승려가 분명하며, 그들의 지원에 힘입어 창건된 절이 확실하다.

창건 이후 1378년(우왕 4년) 정지국사(正智國師) 지천(智泉)이 개성 경천사(敬天寺)에 있던 대
장경(大藏經)을 가져와 대장전(大藏殿) 3칸을 지어 보관했다고 하며, 1395년 중창을 벌였다.
1447년(세종 29년)에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모후(母后)인 소헌왕후(昭憲王后)를 위해 중수를
벌이면서 왕실의 원찰(願刹)이 되었고, 1457년(세조 2년) 왕명으로 절을 크게 불려 '동국(東國)
제일가는 사찰'이라 불릴 정도로 호황을 맞는다.

1480년(성종 11년)에는 처안(處安)이 중수를 하고 1890년 봉성(鳳城)이 신정익황후(神貞益皇后)
조씨<조대비(趙大妃)>의 지원으로 중창했고, 1893년 다시 중창을 했다. 봉성은 조대비에게 극진
한 예우를 받았는데, 1891년 대비의 권유로 양주 견성암(見聖庵)에서 용문사로 넘어왔다.

이렇게나 잘나가던 용문사는 1907년 왜군들이 용문산에 머물던 의병(義兵)을 토벌한다는 이유로
불을 지르면서 그 영화로움은 순식간에 한줌의 재가 되고 만다. 이때 같은 산에 안긴 사나사와
상원사(上院寺)도 불타고 말았다.

1909년 취운(翠雲)이 큰방을 다시 짓고, 1938년 태욱(泰旭)이 대웅전과 어실각, 노전, 칠성각,
기념각, 요사 등을 중건하며 다시 재흥을 꿈꾸었으나 6.25전쟁으로 상당수가 불타고, 대웅전과
관음전만 간신히 남았다. 1983년 범종각과 지장전을 중건했고, 끊임없이 불사(佛事)를 벌여 지
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관음전, 지장전, 삼성각, 독성각 등 약 10동의 건물이 있으며, 경
내에 깃들여진 고색의 향기는 죄다 흩어져 사라지고 말았다. 허나 1,100년 묵은 은행나무와 정
지국사탑비, 금동관음보살좌상 등의 문화유산이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용문사는 용문산과 한덩어리로 오래 전부터 수도권 유명 관광지로 명성을 누렸다. 특히 중앙선
전철이 뚫린 이후에는 더욱 그렇다. 용문사는 등산객과 관광객들로 늘 북새통을 이루어 아늑하
고 적막한 산사의 향기를 누리는 것은 조금은 힘들 듯 싶다. 다만 은행나무 아래쪽에 전통다원
이란 찻집이 있어 산사에서의 차 1잔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 또한 용문산 등산로 길목에 있어
절을 둘러보고 상원사나 윤필암터, 용문산 정상까지 오를 수 있으며, 근래에는 템플스테이를 운
영하면서 산사 체험을 누릴 수 있다.

동양 최대라는 은행나무의 아름다움과 용문산의 삼삼한 숲이 어우러진 산사로 한번은 안기고 싶
은 그런 절집이다.

※ 용문사 찾아가기 (2012년 11월 기준)
* 용문행 중앙선 전철(용산~용문)을 타고 용문역 하차(30분 간격), 중앙선과 환승이 가능한 전
  철역은 용산역(1호선), 이촌역(4호선), 옥수역(3호선), 왕십리역(2/5호선, 분당선), 회기역(1
  호선), 상봉역(7호선, 경춘선), 망우역(경춘선)이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용문 경유 홍천 방면 직행버스 이용 → 용문 정류장에서 용문터미널이나 용
  문축협까지 도보로 이동(터미널은 10분 정도, 축협은 5분)하여 용문사행 군내버스 이용
* 용문터미널(군내버스만 정차)과 용문역에서 용문사행 군내버스가 거의 50~60분 간격으로 다닌
  다. (휴일에는 30~50분 간격으로 운행)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서울 → 홍천 방면 6번 국도 → 용문사나들목을 나와서 331번 지방도 → 용문사주차장
② 중부고속도로 → 하남나들목 → 팔당대교 → 6번 국도 → 용문사나들목을 나와서 331번 지방
   도 → 용문사주차장

★ 용문사 관람정보
* 입장료 : 어른 2,000원 (30인 이상 단체 1,800원) / 청소년과 군인 1,400원 (30인 이상 1,200
  원) / 어린이 1,000원 (30인 이상 800원)
* 주차비 : 승용차 3,000원 / 버스 5,000원
* 용문사 템플스테이는 주말에 하는 1박 2일 프로그램과 평일에 자유롭게 머무는 휴식형 프로그
  램이 있다. 참가비는 어른 5만원, 학생(대학생 포함) 4만원. 자세한건  ☞ 용문사 홈페이지
  참조 또는 전화로 문의요망 (☎ 031-775-5797)
* 용문사에서 상원사까지 산행 1시간, 장군약수가 있는 운필암은 2시간 30분 정도 걸리며, 정상
  까지는 3시간 정도 잡으면 된다. 운필암을 거쳐 사나사나 연수리 방면으로 내려갈 수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5 (☎ 031-773-3797)


♠  용문사 경내 둘러보기

▲  용문사 대웅전(大雄殿)

경내로 들어서면 바로 정면으로 법당(法堂)인 대웅전과 마주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
붕 건물로 1983년에 새롭게 지은 것이다. 대웅전 현판은 서울 봉은사(奉恩寺)에 있는 추사 김정
희(金正喜)의 글씨를 번각(飜刻)한거라 한다.

◀  용문사3층석탑

대웅전 뜨락에 심어진 3층석탑은 1989년에 주지
이선걸이 만든 것이다. 저 탑이 있기 전에는 용
문사에는 이렇다 할 탑이 없었다. 불국사 석가
탑(釋迦塔)을 빼닮은 탑의 풍채가 제법 돋보인
다.


▲  용문사 삼성각(三聖閣)

대웅전에서 산령각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삼성각은 1985년에 지은 것으로 단청은 박정원이 했
다. 같은 해에 조성된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
지붕 건물이다.


▲  삼성각 칠성탱(七星幀) - 1985년 제작
색상이 진해서 그런지 그려진 인물이 많음에도 그리 번잡해 보이지가 않는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산령각(山靈閣)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최근에 지어진 산령각과 독성각이 자리해 있다. 경내를 굽어보며 자
리한 이들은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정말 조촐한 건물이다.
산령각은 산신(山神)을 봉안한 건물로 아래 삼성각에서 산신을 모시고 있음에도 그만의 별도 공
간을 두었다. 건물의 정체를 밝히는 현판은 가로로 걸려 있으며, 건물은 비록 작지만 제법 품격
이 서려 보인다.


▲  산령각에 봉안된 산신탱과 산신상

산령각에는 산신 가족이 그려진 산신탱과 호랑이와 같이 있는 산신상이 있다. 산신탱에는 흰 수
염의 산신할배를 비롯해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와 앳된 동자(童子)가 그려져 있으며, 소나무와
산이 뒷배경이 되어준다. 산신탱 앞에 자리한 산신상은 지팡이를 들고 앉아 있으며, 오른쪽에는
호랑이가 귀여운 표정으로 으러렁거리며 산신의 곁을 지킨다.


▲  산령각과 이웃한 독성각(獨聖閣)

산령각 이웃에 자리한 독성각은 삼성(三聖)의 하나인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거처이다. 역시나
삼성각에서 그를 다루고 있음에도 별도로 그만의 공간을 지어 중생들의 하례를 받게 했다. 독성
전과 산령각 앞에는 넓게 예불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조그만 독성각에는 독성이 그려진 독성탱과 독성상이 있으며, 앞가슴을 시원스레 드러내고 아줌
마 자세로 앉은 모습이 편안해 보인다. 얼굴에는 뭔가 수심에 잠긴 듯, 오른쪽을 바라보며 편치
않은 표정을 짓는다.


▲  독성각의 주인 독성상


▲  중생구제를 향한 부처의 아련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梵鍾)

지장전 맞은편에는 범종의 보금자리인 범종각이 자리해 있다. 범종각에는 보통 범종을 비롯하여
목어(木魚)와 운판(雲版), 법고(法鼓) 등 사물(四物)이 담겨있게 마련이다. 허나 이곳은 오로지
범종만을 두어 중생 구제를 향한 부처의 메세지를 용문산에 울려 보낸다.

범종각은 1986년에 조성되었으며, 다른 절과 달리 중생들에게도 종을 칠 수 있게 하였다. 물론
불전함에 돈을 넣고 쳐야 된다. 그냥 치면 눈치가 보일 수 있으니...


▲  청기와를 입힌 지장전(地藏殿)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지장전은 1993년에 세워졌다.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비롯하여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를 봉안하고 있으며, 특별히 청기와를 입혀 건물의 품격을 높였다. 지장전의
편액은 서예가로 유명한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이 1973년에 남긴 것이다.


▲  용문사 약수

▲  연못에 가라앉은 무심한 동전들

지장전 좌측에는 동그란 연못과 약수터가 있다. 산사에는 필수적으로있는 약수터, 용문산이 내
리는 옥계수가 마를 날 없이 흘러 나와 중생들의 목을 축여준다. 용머리 밑에 꽂힌 대나무통에
서 흘러나온 물은 동그란 석조에 머물다가 어느 정도 물이 차면 밑에 있는 조그만 석조로 떨어
지고, 역시 같은 원리로 연못으로 흘러간다.
연못은 수심이 얇아 바닥이 보일 정도로 인간들이 심심풀이로 내던진 동전들이 수북히 쌓여있어
마치 보물선이 침몰한 자리를 연상시킨다. 수면 밑에서 빛을 발하며 잠들어 있는 동전들의 물밑
세상, 저기 깔린 돈은 과연 얼마나 될까? 겉으로는 10원짜리나 50원, 100원이 주류라 얼마 되겠
나 싶지만. 티끌도 모아지면 태산이 된다고 상상 이상의 금액이 될 것이다. 저들을 손수 수거하
여 세상에 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보는 이목들이 많으니 그림의 떡처럼 그저 바라볼 수
밖에는 도리가 없다.


▲  6각형의 관음전(觀音殿)

용문사 경내를 이루는 건물들은 죄다 네모이다. 허나 경내 동쪽에 자리한 관음전만큼은 독특하
게도 6각형의 모습을 취하고 있어 눈길을 잡아 맨다.

관음전은 관음보살의 거처로 원래는 대웅전 우측 툇마루를 지닌 선방(禪房)이 관음전이었다. 그
러다가 최근에 동쪽에 터를 닦고 새롭게 관음전을 지어 올렸다. 내부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금동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좌상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72호

불단에 홀로 앉은 관음보살은 수려한 보관(寶冠)에 누님처럼 인자한 표정, 찬란한 장식으로 보
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머금게 한다.
그는 조선 초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원래부터 용문사의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흘러 들어왔
는지는 알 수 없다. 불상의 건강 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으로 얼굴은 작고 동그랗고 볼살이 좀
있어 보인다.

머리를 장식하는 화려한 보관은 나무로 만들었으며, 리본처럼 묶은 머리가 어깨까지 흘러 내린
다. 원만하고 볼살이 있는 얼굴에는 조촐한 얼굴 크기처럼이나 눈과 코, 입이 소소하게 표현되
었으며, 상체는 약간 뒤로 젖혀져 있다. 특히 유난히도 구슬장식이 많이 달려 있어, 귀족적 분
위기도 느껴진다.
양 어깨에 걸친 옷은 목 부분에서 한번 접혀 양 팔로 자연스럽게 내려오고 있으며, 오른쪽 소매
자락은 배 부분의 옷자락 사이에 끼워져 곡선을 형성하고 있다. 발목 부분에서는 부드럽게 접힌
'八'자형의 옷주름을 이루며 두 무릎을 덮는다.

불상의 구슬장식과 왼쪽 가슴에 있는 금으로 된 세모 장식 등은 14세기 보살상(菩薩像) 양식으
로 고려 후기 보살상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며, 조촐하고 차분한 모습을 보여준다. 현재 불상
은 금동(金銅)인데. 이는 근래에 입힌 것이다.


▲  금동관음보살좌상과 건물 외벽에 빙 둘러진 관음후불탱화
관음보살을 주위 3면에는 관음보살이 주인공인 후불탱화가 있다.
탱화의 색채가 매우 밝고 고운지라 관음보살상과 잘 조화를 이루며
관음전 내부를 눈부시게 밝혀준다.

▲  관음전 내부를 수식하는 하얀 피부의
 지장보살상 - 마치 '반지의제왕'에 나오는
 회색 간달프를 보는 듯 하다.

▲  옷주름을 휘날리며 푸른 정병을 들고
 선 관음보살상 (석가탄신일용 장엄등)


▲  관음전에서 바라본 용문사 경내

▲  부도군(浮屠群)
고색의 떼로 가득한 조선 후기 승탑(僧塔, 부도)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을 넘나들며 한 자리에 모인 승탑들의 보금자리이다.


♠  용문사 정지국사탑/비(正智國師塔/碑) - 보물 531호

▲  정지국사탑

용문사를 찾은 사람들의 상당수는 은행나무와 경내만 둘러보고 다봤다면서 그냥 돌아간다. 허나
이는 큰 실수이다. 경내에서 동쪽으로 300m 가량 떨어진 산자락에 보물로 지정된 정지국사탑/비
가 있기 때문이다. 은행나무야 원래 유명한데다 경내 앞에 떡 있으니 보고 싶지 않아도 무조건
보고 가야 되는 존재이고 절에 왔으니 대웅전을 위시한 경내를 보고 가야 된다. 허나 정지국사
탑/비는 경내와 다소 떨어진 산모퉁이에 있고 속세에 노출 정도가 낮아서 많은 이들이 모르고
지나친다.

정지국사탑비를 가려면 경내에서 부도전 뒤쪽으로 난 산길을 이용하면 된다. 이정표는 있으므로
헤맬 염려는 없다. 겨울이 깃들여진 산길은 경사가 없는 평지라 부담은 없다. 그 길을 5분 정도
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의 가파른 계단길로 오르면 정지국사탑/비가 나온다. 탑은
그 길의 끝에 있고, 비석은 그 중간에 있는데, 비석 같은 경우는 안내문이 없어 자칫 지나치기
가 쉽다. 게다가 지형을 이용해 나무로 엮은 계단들이 키다리들에게 맞춰졌는지 계단의 높이가
상당히 높아 오르기가 좀 힘들어 키 작은 사람이나 어린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쥐약이다.

허나 오르는 길이 힘들다 한들 각박한 속세살이보다는 쉽다. 자존심을 곱게 접고 차근차근 길을
임하면 나올 것 같지 않던 그들이 나타나 반갑게 맞이해 줄 것이다.


▲  네모난 기단 위에 심어진 정지국사탑(부도)

넓은 네모난 기단 위에 자리한 정지국사탑은 바닥돌과 하대석(下臺石)이 네모로 지붕돌과 탑신(
塔身)은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큰 기단(基壇) 한복판에 네모난 바닥돌을 두고 연꽃이 새겨진 하대석(下臺石)과 중대석(中臺石)
을 두었으며, 그 위로 8각의 탑신(塔身)을 두었는데, 문짝 모양이 얇게 새겨져 있다. 고색의 검
은 떼가 서린 지붕돌은 밑에 3단 받침이 있고, 처마 밑에는 모서리마다 서까래를 새겼다. 지붕
돌 위에는 지붕선이 있고, 하늘을 향한 앙련(仰蓮) 장식으로 꼭대기를 마무리했다.

탑에 묻힌 정지국사(1324~1395)는 고려 후기 승려로 황해도 재령(載寧) 출신이다. 명나라 연경
(燕京)으로 건너가 유학을 하며 구법승(求法僧)으로 생활했다. 1356년(공민왕 5년)에 귀국하여
전국을 돌면서 오로지 수도에 임했으며, 속세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하며 거의 은둔생활을 했다.
말년에는 용문사에 들어와 절을 중창하며 머물다가 1395년 7월 7일 열반에 들었다.
그를 다비(茶毘)하면서 찬연한 사리들이 많이 나오자, 태조가 이를 듣고 정지국사(正智國師)란
시호를 내렸으며, 부도와 탑비를 세웠다.

탑의 크기는 고려 때와 비교하면 대체로 작은 편이고, 그다지 수려하지도 않다. 장식이라고 해
봐야 연꽃무늬와 문짝무늬가 고작이기 때문이다. 허나 고색의 떼가 적당히 입혀 있고 조촐하고
소박한 모습이 은근히 마음에 든다. 사람들로 시장통을 이루는 경내와 달리 인적도 별로 없어
적막감이 진하게 감싸 흐른다. 가끔씩 들려오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나 메아리 소리, 바람의
소리만이 살짝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  소박한 스타일의 정지국사탑비

정지국사탑으로 오르는 길목에 조그만 비석이 하나 있다. 마땅한 안내문도 없고 흔한 모습의 비
석이라 지나치기 쉬우나 그는 정지국사탑과 한 덩어리인 탑비(塔碑)이다. 다만 비석이 이수(螭
首)와 귀부(龜趺)를 기본적으로 갖추는 고승(高僧)의 비석치고는 너무 궁색한 모습이라 나그네
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바위 위에 세워진 이 비석은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머리 부분 양쪽 모서리를 종이 끝이 접혀진
듯 깎았다. 글씨가 새겨진 주위에는 가는 선이 그어져 있으며, 비문(碑文)에는 정지국사의 생애
가 20행의 880자로 빼곡히 적혀있다. 뒷면에는 조성자의 명단이 적혀있으며, 비문은 조선 초기
이름을 날린 권근(權近, 1352~1409)이 썼다.

비석은 처음에는 정지국사탑 20m 아래 바위에 있었는데, 바위에서 뽑혀나와 경내에서 이리저리
뒹굴고 있던 것을 1970년경에 지금의 자리에 안착을 시켰다. 비석의 모습이 평범한 수준에 머문
것은 정지국사가 고승이긴 하나 딱히 알려진 인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부도와 탑비
를 화려하지 크지도 않게 적당한 선에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  정지국사탑으로 올라가는 길
보기와 달리 제법 가파르다. 길 중간
왼쪽에 정지국사탑비가 있음

▲  용문사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산길

정지국사탑/비를 둘러보고 산길을 거쳐 속세로 나왔다. 수레길과 달리 한적하기 그지 없는 산길
은 흙길이다. 산에 왔으니 흙은 밟아봐야 되는 법~~ 산길의 경사는 그리 급하진 않다. 수레길과
일정한 간격을 두며 진행되던 산길은 결국 일주문 부근에서 수레길과 합쳐진다.


▲  용문사 입구에 지어진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

용문사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2007년 10월에 문을 연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이 자리해 있다. 양평
의 역사와 문화, 농업, 자연, 용문산을 아낌없이 담은 박물관으로 이름이 좀 길다. 그냥 간편하
게 양평농업박물관이나 양평박물관으로 부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박물관은 2층 규모로 전시실은 2층에 있다. 양평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제1전시관과 농업과 자
연을 담은 제2전시실, 양평의 역사를 담은 역사실과 다양한 테마의 기획전시실이 있으며, 2층
실외 한쪽에 누각(樓閣)을 두어 관람객에게 조촐히 쉼터를 제공한다.
용문산관광단지의 한 획을 장식하는 문화 공간으로 볼거리도 많이 있으므로 용문사나 용문산에
왔다면 꼭 둘러보기 바란다. 입장료도 공짜이니 경제적 부담도 없으며, 2012년 1월부터 용문사
에서 위탁관리하고 있다.

우리가 이곳에 이른 시간은 오후 4시, 폐장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 박물관을 가볍게 둘러
보았다. 박물관에 대한 내용은 2장의 사진으로 간단히 마무리를 짓는다.

★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 관람정보 (2012년 11월 기준)
* 관람시간 : 하절기(3~10월) 9시 ~ 18시 / 동절기(11~2월) 9시 30분 ~ 18시 (입장은 폐장 30분
  전까지)
* 입장료 공짜
* 휴관일 :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 추석
*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508-10 (용문산로 670) <☎ 070-7715-3796>
* 박물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박물관 2층 로비에 놓인 기이한 장식물
나무 장작을 이용하여 만든 것이다. 무슨 의미가 있을 듯 싶은데 ;;

▲  제1전시관에서 담은 차정첩(差定帖)
차정첩은 공공기관에서 사무를 맡기는 임명장의 하나로 1815년 양평현감이
김치성(金致聲)에게 권농별유사(勸農別有司)의 임무를 맡긴 내용이다.
별유사는 관청에서 호적 등의 사무를 보는 직책이다.


용문사에서 속세로 나가는 길도 정말 만만치가 않았다. 버스를 기다리는 줄이 200m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휴일에 증회 운행을 한다고 떠들어도 배차간격이 길기는 마찬가지, 사람들이
몰리는 시간대에는 10분 내외 간격으로 투입하여 등산객 수요를 바로바로 처리했으면 좋겠다.

15분 정도를 기다리자 버스가 나타났다. 버스 바퀴가 뭉개질 정도로 금세 콩나물시루가 되었지
만 운전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사람들을 태운다. 더 이상 공간이 없음에도 말이다. 승객들
은 그만 태우고 빨리 가자고 소리치지만 운전사는 출발시간이 되지 않았다며 손사래를 친다. 이
건 무슨 버스 승차 기네스북을 세우는 것도 아니고, 점심 때 용문사로 올 때 보다 더 심하게 태
운다. 길이 10.6m의 버스 안에 100명은 넘게 탄 듯 싶다. 다시 한번 아비규환이 된 버스..

드디어 버스는 시동을 걸고 인원초과로 초죽음이 된 바퀴를 굴린다. 손잡이를 간신히 붙잡고 용
문역까지 가던 15분의 시간은 정말 150분처럼 길고 고통스러웠다. 용문역에서 지옥과 같던 버스
에서 해방되어 전철을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리하여 늦가을 용문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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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11월 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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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최근에 본인 다음 블로그에 올린 글과 사진입니다.
(글 제목을 클릭하시면 해당글로 바로 이어집니다)

 

산과 호수, 도자기축제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산 ~ 이천 설봉산 (설봉공원, 영월암)

 


' 이천 설봉산 나들이 (설봉공원, 3형제바위, 영월암) '
설봉산 삼형제바위에서 굽어본 이천시내
▲  설봉산 삼형제바위에서 바라본 이천시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을 얼마 앞둔 5월 초에 쌀과 도자기의 고장인 경기도 이천 고을을 찾
았다. 이천에 간 것은 이천의 명산(名山)이자 듬직한 뒷산인 설봉산을 보고자 함인데 이천은
서울과도 가까운 곳임에도 지지리도 인연이 없는 고장이라 발을 들인 횟수는 정말 한손에 꼽
을 정도이다.

이천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문을 두드린 곳은 관고리 석불로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존재이다.
광주(廣州)에서 광주좌석버스 114번을 타고 설봉산과 가까운 이천의료원(소방서) 정류장에서
내리니 그를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을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게 왠 떡인가!' 싶어 흥분하는
마음을 다독이며 이정표의 지시를 따라 산 쪽으로 들어가니 대각사(大覺寺)란 조그만 절집이
모습을 비춘다. 이 절은 대웅전을 비롯하여 선방으로 쓰이는 건물 2채가 전부로 대웅전을 지
나면 흙길이 야트막한 경사로 펼쳐지는데, 그 길의 끝에 관고리석불입상이 있다.


♠  귀와 손이 유난히도 큰 고려시대 석불 ~
관고리 석불입상(官庫里 石佛立像) - 이천시 향토유적 6호

대각사(옛 법왕정사) 뒤쪽 언덕에 고색이 때로 가득한 관고리석불입상이 자리해 있다. 고려 중
기 이후에 세워진 불상으로 마땅히 내세울 것이 없는 대각사의 든든한 밥줄이다. 원래는 미륵골
이라 불리던 산골 밭에 있던 것을 1987년 12월에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문화재 안내문에
는 석불입상이 아닌 입상석불로 나와있음>


이 석불은 높이가 4m로 머리칼은 나발(螺髮)이며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얼
굴은 밤하늘에 비치는 보름달처럼 동그란 모습으로 볼에는 살이 적당하게 붙어 있다. 무지개처
럼 구부러진 눈썹에 두 눈은 지그시 감겨져 있으며, 코는 세모 모양으로 오뚝하다. 다물어진 입
술에는 은은히 미소가 풍겨져 나와 중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귀는 얼굴보다 길어서 양쪽
어깨에 닿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다.
석불이 걸치고 있는 법의(法衣)는 通肩(통견)으로 가슴부터 옷무늬가 거의 'u'자형으로 살짝 구
부러지다가 무릎에서 타원형을 이루어 발 밑까지 닿아있다. 오른손은 옆으로 곧게 내리고 왼손
은 밖으로 향하게 하여 배 앞에서 구부렸는데, 몸에 비해 손이 좀 큰 편이다. 콧마루와 손가락
부위는 일부가 떨어져 나가 시멘트로 땜질하였고, 등 복판에는 10cm가량의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는데, 머리 뒤에 씌우는 두광(頭光)을 만들기 위한 자리로 여겨진다.

석불의 정체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지만 그가 있던 골짜기가 미륵골이란 점을 보면 오랫동안 지
역 주민들로부터 미륵불(彌勒佛)로 숭상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
진다.  또한 석불 주변에서 돌덩어리와 기와조각이 나온 적이 있어 불상을 모신 건물이나 조그
만 절이 있었음을 가늠케 한다.

* 관고리 석불입상 소재지 :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 산39-3

관고리석불입상을 둘러보고 다시 큰길로 나와 설
봉공원으로 이동했다. 은빛물결이 일렁이는 설봉
저수지(관고저수지)를 중심으로 펼쳐진 설봉공원
을 벗어나 이천시립 월전미술관을 지나면 영월암
으로 가는 조그만 숲길과 계곡이 그림처럼 나타
난다. 이 골짜기를 범앙골이라고 하는데, 옛날에
호랑이가 살던 곳이라 하며, 영월암 승려가 출타
하여 늦게 귀가하면 그가 걱정이 되었는지 범앙
골 호랑이가 종종 마중을 나갔다는 재미난 전설
도 1토막 전해온다.
영월암 가는 길은 사람과 수레들로 부산한 설봉
저수지와 달리 인적이 없어 고요함과 녹음이 가
득 깃들여진 것이 속세에 찌든 마음을 무척 시원
하게 해준다.

▲  석불의 측면
오른손에 마치 야구글러브를 낀 듯
손의 크기가 상식 밖으로 너무 크다.


♠  이천 도자기축제의 현장, 설봉저수지(설봉호)와 설봉공원(雪峯公園)

▲ 설봉저수지(설봉호) - 수면 위로 도자기 모양의 분수대가 이채롭다.▼

드넓게 펼쳐진 설봉저수지(관고저수지)는 이천의 손꼽히는 관광지로 1969년 관개수로 및 관광개
발을 목적으로 1970년 7월에 준공되었다. (총 공사비는 2,800만원) 낚시터로도 명성이 자자하여
많은 강태공(姜太公)들이 찾아오며 저수지 주변으로 설봉공원이 조성되어 이천의 주요 밥벌이인
이천도자기축제(4~5월)와 이천쌀문화축제(가을), 세계도자비엔날레가 절찬리에 열린다. 호수 주
변으로 순환도로가 놓여져 아름다운 산책코스를 뽐내며 가족 나들이 장소로도 그만이다.


▲  설봉저수지 둑방에 '새계도자기엑스포 주행사장'이 쓰여 있다.
설봉저수지를 옆에 낀 설봉공원은 2001년 세계도자기엑스포가 열린 현장으로
매년 4~5월에 이천도자기 축제가 열린다. 축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위의
사진을 클릭한다.

▲  설봉호의 은빛물결 너머로 바라본 설봉공원과 설봉산 줄기

▲  봄도 한없이 머물다 가는 설봉저수지 산책로
저수지 주변으로 운치가 서린 산책로가 둘러져 있다. 산책로 곳곳으로
조각품을 아낌없이 배치하여 밋밋한 공간을 채워준다.


▲  월전미술관 부근에서 만난 어느 심오한 작품

멀뚱한 표정의 사람 조형이 큰 돌을 머리에 이고 있다. 마치 갖은 욕심과 속세의 짐 등을 싫든
좋든 머리와 마음 속에 이고 사는 우리네 가련한 인간을 상징하는 것 같다. 번뇌로 상징되는 저
돌을 과감히 내던지는 순간 마음도 편해지고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에도 이를 수 있을지
도 모른다. 허나 해탈을 한다고 해서 그걸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단계에 가면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이 모를 또 다른 걱정꺼리가 존재할 것이다.


▲  이천 고을을 빛낸 이들의 조각상과 고을에 얽힌 충효 이야기를
한데 정리한 충효(忠孝)동산

▲  충효동산 정문인 충효문(忠孝門)

◀  충효동산 한복판에 듬직하게 자리한 복천
서희(福川 徐熙) 동상의 위엄
서희는 993년 고려와 거란과의 1차전쟁을 승리
로 이끌며 거란 장수 소손녕(蕭遜寧)과 담판을
통해 청천강 서부에 강동6주(江東六州) 280리
땅을 얻은 고려의 대영웅이자 이천의 자랑이다.


▲  설봉서원(雪峯書院) - 이천시 향토유적 18호

월전미술관을 지나 5분 정도 걸으면 길 오른쪽으로 태극마크의 홍살문을 갖춘 설봉서원이 나온
다. 이곳은 1564년 이천부사(利川府使) 정현(鄭玄)이 안흥지 주변에 세운 안흥정사(安興精舍)에
서 시작되었다.
159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설봉서원으로 이름을 갈았으며 1871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
원철폐령으로 말끔히 사라지고 말았다. 1990년 이천시와 유림의 노력으로 서원복원이 추진되었
으며, 2005년에 드디어 삽을 뜨기 시작하여 2007년 4월에 복원되었다. 비록 고색의 내음은 증발
해버렸지만 서희를 비롯하여 김안국(金安國), 최숙정(崔淑精), 이관의(李寬義) 등을 배향(配享)
하고 있으며, 지역 학생들과 일반인을 위해 한문학과 전통예절, 국악 교실을 개설하여 호응이
좋다고 한다. 교육은 무료 (문의 ☎ 031-632-6564)


♠  설봉산(雪峯山, 394m)의 명물, 3형제바위

▲  3형제바위 입구

산내음을 만끽하며 숲길을 10분 가량 오르면 3형제바위 입구가 나온다. 여기서 바위 쪽으로 가
나 수레길로 가나 영월암은 나오지만 기왕 산에 온 거 콘크리트 수레길보다는 흙으로 이루어진
산길이 더 호젓하지 않을까? 여기서 절까지는 두 길 모두 10~15분 정도 걸린다.


▲  마치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것 같은 3형제바위 산책로
산길 왼쪽에 엉뚱하게도 석탑의 부재(部材)로 여겨지는 납작한 돌이 박혀있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영월암이나 인근 절터에서 가져온 것으로 여겨진다.


▲  어머니를 향한 3형제의 애듯한 전설이 서린 3형제바위

3형제바위 입구에서 산길로 3분 가량 들어가면 하늘로 솟은 3개의 바위가 교묘하게 붙어있는 3
형제바위를 만나게 된다. 바위의 1/3지점에 가로로 가로로 틈이 그어져 정말 사람과 비슷한 모
습이다. 위대한 자연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빚어놓은 대작품으로 기가막힌 풍경에 사죽을 못쓰
는 옛 사람들은 그 바위에 단단히 반한 나머지 그럴싸한 전설을 만들어 우리에게 들려준다. 세
개의 바위가 서로 붙어 나란히 한 모습에 다정한 형제로 연상된 모양이다. 만약 바위가 2개였다
면 금슬이 좋은 부부바위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아주 먼 옛날 늙은 어머니를 모신 나
무꾼 3형제가 있었다. 그들은 우애와 효성이 지
극하여 효자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어느날 설봉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던 형제가 날
이 저물도록 오지 않자 걱정이 된 어머니는 아
들을 찾아 산으로 나섰다. 뒤늦게 나무를 잔뜩
지고 귀가한 형제는 어머니가 없자 서둘러 어머
니를 찾으러 나섰다. 어디선가 호랭이의 울음소
리가 들려 달려가보니 낭떠러지 밑에서 어머니
가 호랑이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다. 다급한 광
경을 본 형제는 어머니를 구하러 아래로 뛰어내
렸는데 그 순간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또다른 전설로는 어머니를 모시던 형제는 징병
(徵兵)이 되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무사귀환을
애타게 빌었으나 약속한 3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홀로 생계를 꾸려가다가 그리움이 병이 되
어 결국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이후 병역의 의무를 마치고 뒤늦게 돌아온 3형제는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가 엎드려 통곡하며
일어날 줄 몰랐고 그 모습이 그대로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  3형제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이천시내와 설봉저수지)


▲  드디어 녹음에 묻힌 영월암에 이르다.


♠  이천의 진산(鎭山) 설봉산에 포근히 안긴 오랜 산사
설봉산 영월암(映月庵) - 이천시 향토유적 14호


▲  영월암 경내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은 요사채로 쓰이는 안심당)

달이 비춘다는 뜻의 영월암은 설봉산 깊숙한 산골에 안긴 산중암자이다. 이천 고을의 대표적인
고찰(古刹)로 7세기 중반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하나, 신빙성은 전혀 없다. 다
만 경내에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조광배와 연화대좌, 3층석탑, 거대한 마애불 등이
있어 절이 한참 우후죽순 들어서던 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질 따름이다.

창건 이후 오랫동안 이렇다할 내력을 남기지 못하다가 18세기에 들어서 1774년(영조 50년) 영월
낭규대사(映月 郎奎大師)가 중창을 벌였다. 1760년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절의 이름
이 북악사(北岳寺)로 나와있는데, 낭규대사로 인해 지금의 이름으로 갈린 듯 하다.
 
1911년에 보은(普恩)이 중건하고, 1920년에는 극락전(極樂殿)을 옮겨 세웠으며, 1937년에 산신
각과 단하각을 손질하였다. 1949년에 이천향교 명륜당(明倫堂) 앞에 있던 풍영루(風詠樓)를 해
체하여 그 목재로 대웅전을 짓다가 그만 6.25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된 것을 전쟁이 끝난 1953년
11월 완성을 보았다. 1989년 불의의 화재로 삼성각과 서요사채가 무너져 내린 것을 1991년 복원
하여 지금에 이른다.

절을 이루고 있는 건물로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요사 등 6~7동이 있으며, 고색의
내음은 다들 시들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마애여래입상을 비롯하여 석조광배와
연화대좌, 3층석탑, 600년 묵은 오랜 은행나무 등이 있어 절의 유구한 내력을 가늠케 하며 1988
년 7월 27일에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이천 시내에서도 제법 떨어져 있고, 달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삼삼한 산자락에 둥지를 튼 산
사로 속세의 번뇌를 설봉저수지에 던져놓고 무작정 안기고 싶은 정겨운 절집이다.

※ 영월암 찾아가기 (2012년 10월 기준)
* 서울강남고속터미널과 동서울터미널에서 이천행 고속/직행버스가 수시로 떠난다.
* 수원, 성남(야탑), 강릉, 구미, 대구(북부)에서 이천행 직행버스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분당선 강남역 중앙차로 정류장과 3호선 양재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500-2
  번 좌석버스 / 2,8호선 잠실역 중앙차로 정류장 500-1번 좌석버스 / 2호선 강변역(1번 출구),
  5호선 천호역(6번 출구)에서 1113-1번 좌석버스 / 8호선,분당선 모란역(5번 출구)에서 500-1,
  500-2번 좌석버스 이용 → 광주시내(보건소, 터미널)나 초월읍사무소, 곤지암터미널에서 114
  번 좌석버스로 환승하여 이천의료원(소방서)에서 하차 → 정류장 남쪽(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5분 정도 가면 설봉공원 입구이다. 여기서 영월암까지 도보 35~40분
* 이천시외고속터미널 북쪽 건너편 정류장에서 28번 시내버스를 타고 설봉공원 하차, 허나 버스
  가 자주 안다니므로 택시를 타거나 30분 정도 걸으면 설봉공원이다. 공원을 지나 영월암까지
  도보 25~30분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절 직전에 주차장 있음)
① 중부고속도로 → 서이천나들목을 나와서 좌회전 → 사음동3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이천시내로
   직진 → 이천의료원을 지나 설봉공원 입구에서 우회전 → 설봉공원 → 월전미술관 → 영월암
② 영동고속도로 → 이천나들목을 나와서 이천시내 방면으로 우회전 → 이천육교에서 설봉공원
   으로 좌회전 → 설봉공원 → 월전미술관 → 영월암

★ 영월암 관람정보
* 영월암에서 설봉산성을 거쳐 설봉산 정상까지 오르는데 1시간 남짓 걸린다.
* 소재지 -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 438 (☎ 031-635-3457)

▲  중생 구제를 향한 부처의 은은한 메세지가
담겨진 범종각(梵鐘閣)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  연등으로 주변을 두룬 영월암 대웅전(大雄殿)

영월암은 코앞에 다가온 초파일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대웅전 앞에 아기부처를 두어 관정의식
의 장을 만들고 연등으로 경내를 곱게 치장하였다. 하늘을 가리며 뜨락 허공에 걸쳐진 검은 덮
개로 햇빛이 들어오지 못해 경내는 시원하다.

경내를 발을 들이면 정면으로 법당인 대웅전이 나온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남향(南向)을 취하고 있는데, 1949년 이천향교 명륜당 앞의 풍영루를 철거하여 그 재목으로 지
은 것이다. 건물을 짓던 중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가 터지는 바람에 서둘러 피난짐을 꾸리느라
공사는 중단되었으며, 전쟁이 끝나고 1953년 11월에 가까스로 준공을 본 우여곡절이 많은 블전
이다. 불단(佛壇)에는 석가불을 비롯한 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앞에 차려진 관정(灌頂)의식의 현장

▲  오랜만에 바깥 나들이를 나온 아기부처의 희열(喜悅)

부처의 법을 상징한다는 하얀 코끼리 등 위에 놓여진 연꽃대좌에 아기부처가 오른손을 치켜들며
서 있다. 곧있으면 중생들의 하례와 관정의식을 받으며 시원하게 이른 피서를 즐길 생각인지 그
의 표정이 해맑아 보인다. 다양한 꽃으로 코끼리 주변을 아리땁게 치장하며 두 눈이 단단히 호
강을 하다못해 쾌재를 부른다.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아미타전(阿彌陀殿)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을 모신 건물로 1920년에 지어진 것이다.
근래 손질을 해서 그런지 매우 깨끗한 모습이다.

▲  대웅전에서 마애여래입상 가는 길목에 자리한 석불좌상과 3층석탑

▲  석조광배와 연화대좌를 갖춘 패기 돋는 석불좌상
(석불좌상의 석조광배와 연화대좌는 이천시 향토유적 3호)

대웅전에서 마애불로 올라가는 길목에 석불좌상과 3층석탑이 자리해 있다. 우측에 자리한 석불
좌상의 석조광배(石造光背)와 연화대좌(蓮花臺座)를 보면 당당한 패기의 석불과 달리 고색의 때
가 만연함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영월암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자 고려 때 혹은 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영월암의 역
사가 꽤 깊음을 가늠하게 해준다. 광배의 높이는 156cm, 폭은 118cm, 두께가 45cm이며, 연화대
좌의 높이는 107cm에 이른다. 불상은 오래 전에 없어진 채, 땅에 엎어져 있던 것을 1980년에 불
상을 조성하면서 복원한 것이다.

▲  석불좌상의 뒷부분
기둥 모양의 길다란 돌이 연화대좌와 광배를
받치고 있다.

▲  석불좌상과 나란히 자리한 3층석탑
자신이 언제 태어나고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이 전혀 없는 가련한 탑이다.


불상이 편안히 기대고 선 광배는 하나의 화강암으로 조성된 것으로 표면에 두 줄의 선으로 신광
(身光)과 두광(頭光)을 나타내었다. 연꽃잎과 불꽃무늬, 당초(唐草)무늬 등이 광배를 가득 수놓
고 있으나 유구한 세월의 흐름 속에 깎이고 깎여 무늬만 희미하게 확인할 수 있다. 두광과 신광
이 접히는 곳과 두광 위쪽 가운데에 3존의 화불좌상(化佛坐像)을 새겼다.

불상의 보금자리인 연화대좌는 바닥돌과 기단석(基壇石), 상/중/하대석으로 이루어졌다. 중대석
은 8각형으로 바닥돌은 네모난 모양이며, 하대석에는 꽃잎이 아래로 향한 복련(伏蓮)이, 상대석
에는 꽃잎이 하늘로 향한 앙련(仰蓮)을 새겼다. 꽃잎이 너무 아름다워 채색만 제대로 해주면 정
말 한 송이의 어여쁜 연꽃이 따로 없을 것이다.

석불좌상 좌측에 뿌리를 내린 3층석탑은 은행나무 밑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91년에 없어진 부
분을 보충하여 복원한 것이다. 탑은 보통 법당 앞에 있어야 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곳에 두지
를 않고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원래 절에 있던 탑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나중에 은행나무 밑에
수습한 것을 복원한 것으로 여겨진다. 탑의 조성시기와 원래 위치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는 그야말로 오리무중(五里霧中)의 탑이다. (3형제바위 입구에 있는 석탑 부재가 혹 이 탑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음)

마애여래입상과 약간 거리를 두고 우측에 자리한 삼성각은 우리에게 친숙한 칠성(七星)과 산신
(山神), 독성(獨聖)의 보금자리이다. 1989년 불의의 화재로 무너져 내린 것을 1991년에 다시 지
은 것이다. 산신과 칠성은 탱화(幀畵)로 그려져 있지만 독성은 유별나게 불전 뒤쪽 바위를 파내
어 적당한 공간을 만들고 그 자리에 독성상을 봉안했으며, 건물에 유리창을 설치하여 안에서도
친견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  그림의 여백처럼 허전해 보이는 삼성각 우측 부분
가건물과 비닐하우스, 장독대 등이 넓은 터를 듬성듬성 채운다.


♠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커다란 불상,
영월암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 보물 822호
영월암 마애여래입상

영월암 경내 뒤쪽 커다란 바위에는 장대한 규모의 오랜 마애불(磨崖佛)이 이천시내를 굽어보며
자리해 있다. 내가 이곳까지 발을 들인 것도 바로 그를 보기 위함이다.
고려시대 마애불은 대체로 덩치가 크며, 비슷한 모습이 아닌 지역마다 각각 독특한 모습을 지니
고 있으며, 다소 작품성이 떨어지는 것이 큰 특징이다. 이곳의 마애불 역시 그런 요소를 모두
갖춘 전형적인 고려 불상으로 높이가 9m, 폭이 3m에 이르는 대단한 규모의 불상이다. 그의 앞에
서는 아무리 잘난 인간이라 할지라도 주눅이 일고도 남을 것이다.


▲  마애불의 위쪽 부분

불상은 대체로 선으로 표현된 선각(線刻)이며 얼굴과 손은 얕음새김으로 표현되었다. 머리는 바
위 꼭대기에 있어 자세한 모습은 확인하기가 어렵다. 얼굴은 둥근 형태로 나이가 지긋하고 온후
한 승려의 얼굴 같으며, 눈은 지그시 감고 있다. 세모로 우뚝 선 코는 큰 편이며, 앙 다물어진
두터운 입술에는 약간의 미소가 아련히 떠 있다. 귀는 길쭉하여 목까지 닿으며 볼과 턱에는 살
이 두툼하다.
두꺼워 보이는 목에는 삼도가 획 그러져 있으며, 덩치에 걸맞게 커다란 양 손은 가슴에 모았는
데, 오른손은 손바닥을 드러내어 설법인(說法印)을 취한 듯 하다.


▲  희미하게 비치는 옷주름이 전부인 마애불의 아랫 부분

불상의 몸을 뒤덮고 있는 옷은 발 아래까지 내려오고 있으며, 옷 주름은 소박하다. 위쪽의 주름
선은 확인이 쉽지만, 아랫쪽의 주름선은 마멸이 심해 눈을 크게 뜨고 봐야 확인이 가능하다. 온
화하고 덕망이 높은 승려의 분위기로 아마도 영월암과 인연이 깊은 어느 고승을 모델로 하여 만
든 듯 싶으며, 일부에서는 승려의 모습을 새긴 조사상(祖師像)으로 보기도 한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 후기 고승인 나옹선사(懶翁禪師)가 부모를 천도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니, 아마도 부모의
극락왕생을 바라는 이천 지역 지방세력이나 부호(富戶)의 시주로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지극한 나이를 먹었음에도 마애불의 건강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작품성은 그리 괜찮은 편은 아
니지만, 고려 마애불의 특징을 잘 간직한 불상으로 그 가치는 높다. 마애불 앞에 이르면 조촐한
영월암 경내가 훤히 바라보이며, 지나가는 봄도 마애불의 후덕한 모습에 단단히 매료되었는지
주변을 곱게 손질하였다. 녹음이 깃들여진 계단을 오르면 그 끝에 마애불이 그대들을 맞이할 것
이다.

▲  우측에서 바라본 마애불

▲  좌측에서 바라본 마애불

▲  녹음이 가득 깃들여진 영월암 은행나무 (경기-이천-1호)

경내로 들어서기 직전에 정겨운 풍경을 자아내는 고즈넉한 돌담길이 있다. 돌담길의 우측 끝부
분에 아름다운 여인네와 같은 커다란 은행나무 1그루가 한참 봄의 절정을 누린다.
은행나무는 자연으로 자라는 것이 아닌 사람이 심은 것이 대부분으로 이 나무 역시 영월암과 관
련된 승려가 어떤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심었을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나옹화상이
심었다고 하나 나무에게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아니면 내가 나무의 언어를 구
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소상한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지만 그러지를 못하니 진실을 알 도
리는 없다.
나무의 나이는 무려 640년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게 맞으면 나옹이 심었다는 전설도 어쩌면 들
어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무의 높이는 마애불의 4배인 무려 37m에 이르며 세월을 꾸역꾸역
잡수신 탓에 둘레가 5m에 이른다.

초파일을 하루 앞둔 영월암을 이리저리 둘러보니 시간은 어언 18시를 가리킨다. 절에서는 저녁
공양(供養)을 보통 18시부터 하는데, 대웅전을 한참 사진에 넣고 있으려니 아줌마 신도가 저녁
시간이라며 밥 먹고 가라고 그런다. 절밥을 좋아하는 나로써는 거절할 이유가 없어 그들의 손길
을 따라 영월암 승려의 생활공간인 안심당(安心堂)으로 들어선다. 겉으론 대웅전처럼 작아보이
던 안심당 내부로 들어서니 서쪽으로 내부를 튼 탓에 무척 넓어 보였다. 공양간은 안심당의 서
쪽 칸으로 승려와 아줌마 신도들, 절을 찾은 이들이 한참 즐거운 공양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  영월암에서 먹은 저녁 공양의 위엄

공양은 뷔페식으로 반찬은 거의 10가지가 넘는다. 고기를 기피하는 절의 특성상 고기와 생선은
일체 없고 모두 나물이다. 국은 아욱국 비슷한 것이 제공되었다. 보름달을 닮은 동그란 그릇이
깨질 정도로 밥과 반찬을 가득 담아 즐겁게 공양에 임한다. 역시나 먹는 시간만큼 흐뭇한 것은
없다. 절에서 정성스럽게 다듬은 반찬은 밥도둑이 따로 없어 금세 밥그릇을 비우고, 점심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해 불만에 가득찬 목구멍과 뱃속도 너무 흥겨워 한다.


▲  영월암을 나오면서 만난 조그만 승탑

저녁 공양을 마치고 아쉽지만 영월암과의 짧은
인연을 마감하고 다시 속세로 발길을 돌린다.
절로 오를 때는 3형제바위가 있는 산길로 갔지
만 속세로 내려갈 때는 수레길로 갔다. 내려가
는 도중에 왼쪽 언덕으로 조그만 승탑<僧塔, 부
도>이 눈에 띈다. 이 탑은 근래에 세운 것으로
머리 부분은 8각으로 되어있다.
조그만 앵두를 보듯 귀엽고 산듯해 보이는 그와
작별을 고하며 이천 설봉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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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10월 1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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