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피서지'에 해당되는 글 71건

  1. 2017.07.24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더울 때는 땅 속이 최고!! 수도권 유일의 동굴 관광지, 광명시 광명동굴 (가학산)
  2. 2017.07.18 백두대간 한복판에 뉘어진 신비의 탄산약수, 홍천 삼봉약수 (삼봉자연휴양림, 운두령)
  3. 2017.07.06 정조 임금이 만든 도심 속에 아름다운 호수, 수원 서호 ~~ (서호공원, 항미정)
  4. 2017.05.08 푸른 동해바다를 거닐다. 부산 기장 봄나들이 ~~~ (죽성리왜성, 죽성항, 황학대, 죽성성당, 장어구이 1접시)
  5. 2017.03.31 늦겨울 산사 나들이 ~~~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절집, 청주 낙가산 보살사 (석조이불병립상, 명암저수지)
  6. 2017.03.17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서해바다 포구, 인천 소래포구 나들이 ~~~ (소래철교, 장도포대지, 논현포대)
  7. 2017.01.21 무주의 꿀단지, 무주 머루와인동굴~덕유산 겨울 나들이 (설천봉, 덕유산리조트)
  8. 2016.09.07 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아름다운 계곡을 옆구리에 차고 있는 ~~ 북한산 진관사 (진관사계곡)
  9. 2016.08.29 도심 속에 숨겨진 은빛 폭포, 북한산 3대 폭포의 하나로 추앙받는 ~~ 북한산 구천폭포 (구천계곡,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10. 2016.08.22 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서촌 제일의 경승지 ~~ 인왕산 수성동계곡 (인왕산길, 기린교)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더울 때는 땅 속이 최고!! 수도권 유일의 동굴 관광지, 광명시 광명동굴 (가학산)



' 수도권 유일의 동굴 관광지, 광명시 광명동굴 '

▲  광명 와인동굴 (광명동굴)

▲  황금폭포

▲  광명동굴의 마스코트, 아이샤


 


서울에서 자연산 동굴을 구경하려면 400~500리나 떨어진 강원도 정선이나 영월, 태백, 충

북 단양까지는 가야 된다. 몸에 좋은 탄산약수만큼이나 보기가 참 어려운데, 2011년 이후
서울 근교에도 드디어 동굴이 하나 생겨 멀리 가야 되는 수고로움이 조금은 덜해졌다. 단
양이나 정선처럼 자연산 동굴이면 참 좋겠지만 현실은 광산(鑛山) 출신의 인공 동굴로 그
주인공은 광명시에 있는 광명동굴(가학광산)이다.
비록 인공으로 다져진 굴이지만 내부는 자연산 굴과 많이 닮았으며, 울산 울주군(蔚州郡)
의 자수정동굴처럼 버려진 광산을 관광용으로 잘 재생한 케이스로 널리 칭송을 받고 있다.
그러니 자연산 동굴이 아니라고 그리 실망할 필요는 없다. 정 자연산을 원한다면 강원도
나 단양, 울진(성류굴), 제주도로 쿨하게 날라가면 된다.

수도권 유일의 동굴 관광지로 오랫동안 입소문을 탄 광명동굴은 2012년 11월에 이미 인연
을 지은 바가 있다. 그때는 가학광산동굴이라 불렸는데, 개방 초창기라 광산 시절 그대로
의 모습을 거의 간직하고 있었다. 허나 볼거리는 별로 없었으며 가이드를 따라 30분 정도
동굴을 둘러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야말로 광산 동굴 산책이다.
이후 광명시의 무한 정성에 힘입어 나날이 진화를 보여 이제는 명실상부한 수도권 제일의
동굴 명소이자 광명시(光明市)의 꿀단지로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하여 그가 얼마나 달라
졌는지 확인도 해볼 겸, 오랜만에 다시 인연을 지었다.

햇님이 하늘 중간에 걸린 늦가을의 어느 날 14시, 개봉역(1호선)에서 후배를 만나 광명동
굴의 발, 광명시내버스 17번(개봉역↔광명동굴)을 탔다.
이 버스는 철산동(鐵山洞)과 하안동, 소하동, 가학동 등 광명 동부와 남부를 정신없이 강
제투어를 시켜주며 거의 1시간 만에 광명동굴 종점(광명시 자원회수시설 앞)에 우리를 내
려놓는다.


 

♠  광명동굴 입문

▲  광명동굴 밑에 자리한 광명시 자원회수시설

버스에서 내리니 하얀 구름 무늬를 지닌 붉은 피부의 거대한 건물이 우리를 맞는다. 하늘을 찌
를 듯 높이 솟은 굴뚝이 적지 않게 위압감을 선사하고 있는데 그는 '광명시 자원회수시설'이라
불리는 존재로 원래는 쓰레기 소각장이다. 광명 지역에서 거둬들인 잡다한 쓰레기를 태우고 처
리하던 현장으로 예전 가학광산 시절에는 광산 폐기물을 무방비로 모아두던 곳이었다.

2012년에 왔을 때는 정말 우중층한 모습 그 자체였는데, 광명동굴의 주변 미관을 위해 구름 무
늬를 겯드려 붉은 색 옷을 입혔다. 그래서 그때보다 밝고 화사하게 보인다. 건물 내부에는 광
명업사이클아트센터, 에코에듀센터가 들어서 폐자원을 활용한 문화/예술/교육 공간으로 쓰이고
있으며 식당 등의 편의 시설도 갖추고 있다. (건물 남쪽에 동굴 주차장이 있음)


▲  주차장 주변에 조성된 귀여운 조형물(사슴과 다람쥐, 광명동굴의
마스코트인 아이샤와 쿠오)과 늦가을에 잠긴 단풍나무


▲  자원회수시설에서 광명동굴로 인도하는 오르막 길

자원회수시설에서 3~4분 오르면 바로 광명동굴 앞이다. 동굴 앞에는 광장이 펼쳐져 있는데, 매
표소와 방문자센터, 쉼터, 광차 모형, 광부 모형 등이 있으며, 북쪽에는 아이샤 숲이라 불리는
조그만 공원이 있다. 광장 남쪽에는 막연히 하늘로 이어질 것만 같은 계단길이 길게 펼쳐져 있
는데, 그 길은 가학산(駕鶴山, 220m) 정상과 서독산, 구름산, 광명둘레길로 이어진다.


▲  동굴 앞에 닦여진 공원(아이샤숲)과 광부석상 (가학산 근린공원)
늦가을도 광명동굴의 소문을 들었는지 살며시 다가와 동굴 주변을 곱게 물들였다.
하얀 피부의 광부상은 한때 이곳의 주인공이었던 광부를 재현한 것으로
열심히 광물을 쏟아내던 옛 시절을 회상하게 한다.

▲  광명동굴 광장 (오른쪽 창구가 매표소, 그 오른쪽이 가학산 등산로)

▲  열려라 참깨~~!! 광명동굴이 활짝 빗장을 열었다.

▲  가학산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여기서 가학산 정상까지는 40분 정도 걸린다.

▲  드디어 동굴의 속살로 들어서다.
(바람길)


※ 칙칙한 광산에서 관광용 동굴로 거듭난 현장, 수도권 유일의 동굴 관광지, 광명동굴
시골 풍경이 진하게 서려있는 광명시의 남쪽 변두리 가학동(駕鶴洞), 그 가학동을 둘러싼 가학
산 서남쪽 자락에 천하의 쟁쟁한 동굴들을 긴장시킨 광명동굴이 웅크리고 있다.
서울 근교의 거의 유일했던 광산이자 유일한 동굴<북한이 남침을 위해 파거나 우리 군에서 작
전상 판 땅굴은 제외>로 1912년 4월 왜인(倭人)이 발견하여 광산 사업을 벌이니 그것이 광명동
굴의 시작이었다.

이곳에서는 구리, 아연, 은, 금 등이 푸짐하게 쏟아져 나왔는데, 여기서 나온 광물은 왜열도로
넘어가 그들의 배때기를 찌우는데 주로 쓰였다. 하지만 지역 사람들로 이루어진 노동자들은 가
혹한 노동 착취에 쥐꼬리보다 못한 저임금을 받으며 힘들게 살아갔다.
왜정(倭政) 말기에는 징용을 피하고자 많은 사람들이 광산을 찾았다. 여기서 일하면 징용 대상
자에서 빠지기 때문이다. 어딘지도 모를 이역만리로 끌려가느니 차라리 고향과 가까운 곳에서
고생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허나 지원자가 얼마나 줄을 섰던지 인맥을 동원해야 겨우 발을
들일 정도였다.

1945년 이후, 광산은 지역 사람에게 넘어가면서 비로소 이 땅을 위해 광물을 내놓기 시작했다.
채광 기록이 부실하여 1955년부터 1972년까지의 기록만 남아있는데 그 17년 동안 동 1,247톤,
아연 3,637톤. 금 52kg, 은 6.070kg을 생산하여 주력 광물인 동, 아연 외에 다양한 광물이 담
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지역 주민들이 광산으로 피난해 화를 면했으며 그 피난 시절에 광산
에서 태어난 아이를 '굴댕이'라 부르기도 했다.

1961~1962년에는 노동운동이 일어나 언론을 타기도 했으며, 그 시절에는 시흥광산이라 불렸다.
(그때는 '경기도 시흥군'이었음) 또한 1960년대 중고등학교 지리, 사회과지도에 주요 광물 생
산지로 절찬리에 등장해 이 땅에서 존재감이 꽤 컸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최대 500여 명이 일
을 했었다.

그렇게 잘나갔던 가학광산은 1972년 한순간의 실수로 거지가 되고 만다. 광산에서 채굴하여 버
린 돌을 광산 서쪽에 무방비로 쌓아두었는데, 홍수로 그것들이 죄다 떠내려가 가학동과 시흥시
목감동의 들판을 들이친 대형사고가 터진 것이다. 돌로 뒤덮힌 경작지는 30~40년 동안 경작이
불가능했을 정도였으니 그만큼 광물 찌꺼기의 맹독성은 심했다.
졸지에 터전을 잃은 농민들이 항의하자 이를 보상해야 했고 만만치 않은 보상금을 치르면서 재
정이 바닥나 결국 망하고 말았다.

다행히 인수자가 있어 폐광은 면했으나 바로 그해 7월, 가학산 주변이 그린벨트로 묶이면서 광
산의 목구멍은 막히고 말았다. 개발이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광산 안에는 수십 년을 쓸 수 있
는 광물이 묻혀 있고, (1950년 조사 때 광산 내 매장량은 약 19,000톤으로 측정됨) 금도 적지
않게 깃들여져 있던 상태에서 그린벨트란 굴레가 씌워진 것이다.
그래서 1978년부터 2010년까지 소래포구에서 의뢰 받은 젓갈을 저장하는 창고로 간신히 연명했
으나 그걸로는 본전도 뽑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1994년 6월, 이름 뿐인 광업권까지 소멸되면서
광물 채굴은 어림도 없게 되었다. 채굴이 불가능한 광산은 천상 입구에 못질을 하고 문을 닫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라질 위기에 처한 가학광산에게 의외의 구원자가 두 손을 내밀었다. 바로 광명시였다.
광명시는 이 기회에 동굴 하나 장만하여 폐광산 테마공원으로 꾸밀 계획을 세우고 2011년 1월
광산과 주변 토지 10만
를 43억원에 매입했다. 마땅히 천하에 내세울 명소가 변변치 못하였던
광명시가 버려진 광산을 주목하고 모험을 건 것이다.
그래서 7개월 동안 갱도 내부를 손질하고 홍보 영상까지 제작해 천하에 널리 뿌렸으며, 그해 8
월 22일 가학광산에 동굴 2자를 붙여 '가학광산동굴'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그동
안 어둡고 칙칙했던 광산 이미지를 확 벗어 던지고 수도권 유일의 동굴 관광지로 새롭게 거듭
난 순간이었다.
이때가 1차 개방으로 그해 12월 11일까지 약 110일 동안 문을 열었으며, 11월에는 최초로 동굴
음악회가 열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개방 기간에 무려 17,000명이 찾아와 이곳의 전망이 결
코 어둡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그해 12월 12일 다시 빗장을 잠구고 2012년 3월 16일까지 보수 작업을 벌여 3월 17일 다시 빗
장을 열었으며 그해 11월 30일까지 2차 개방을 실시했다. 이때는 입장 시간을 변경해 9시부터
16시 20분까지 입장시켰으며, 동굴 100주년 기념 행사와 음악회, 영화 상영, 출판 기념회 등의
이벤트를 가졌다.
그리고 다시 빗장을 잠구고 2013년 3월까지 다시 내부를 손질하여 천하 최초의 '동굴예술의전
당'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 개관 기념으로 동굴문명 특별전이 열렸으며, 최초의 동굴 패션쇼와
보석쇼 등의 이벤트를 열어 동굴의 명성을 드높였다. 또한 국토교통부의 의견을 거쳐 동굴 주
변을 가학산 근린공원으로 조성했다.

2014년에는 국내 최초로 판타지 콘셉트 디자인 공모전을 개최했고, 동굴 최초 영화 '터널3D'를
촬영해 시사회를 가졌다. 또한 볼거리를 계속 확충하여 아쿠아월드, 빛의 세계전, 동굴 레이저
쇼 등을 갖추었으며, 이 해까지 100만 명이 다녀가 동굴의 높은 인기를 보여주었다.
2015년에는 조촐하게 와인동굴까지 선보여 서울 근처에서도 동굴에서 숙성된 와인을 즉석에서
마실 수 있게 되었으며, '반지의 제왕'으로 유명한 뉴질랜드 웨타워크숍과 손잡아 판타지 콘셉
트 디자인 공모전을 벌였다. 그리고 프랑스와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고자 2016년 4월부터 9월
까지 라스코 동굴벽화 국제순회 전시회를 벌이는 등, 천하 제일의 동굴 관광지를 위해 열심히
날개짓을 하고 있다.
또한 동굴 이름도 가학광산동굴에서 광명동굴로 갈면서 광산 이미지를 지웠고, 동굴에 들인 본
전을 뽑고자 2015년 4월부터 달갑지 않은 입장료까지 얹혀 이제는 유료의 동굴이 되었다. 유효
화 이후에는 사람이 줄기는 커녕, 풍부하게 넣어든 볼거리와 수도권 유일의 동굴 관광지란 타
이틀 때문에 오히려 증가하여 광명시의 곳간을 채우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광산 갱도의 총길이는 7.8km, 갱도의 깊이는 275m<해발 180m에서 지하 95m까지>이며, 내부 면
적은 42,785㎡<유역 면적 342,797㎡>, 갱도 폭 2~5m<평균 3.5m>, 갱도 높이 1.5~4m<평균 2.75m
> 이다. 하루 선광량은 350톤, 갱도 재질은 석회규산염암과 편암이며, 동공 수는 50여 개로 동
공에는 위 아래를 연결하는 통로를 두었고, 권양기(捲揚機)라는 기계를 와이어로 감아 크고 작
은 광석을 광차를 이용해 실어날랐다.
광산으로 쓰였던 곳이지만 내부 통풍에는 지장이 없어 산소가 충분하며, 평균 13도 가량을 유
지하고 있다. 그래서 한여름에는 시원해 피서의 성지로 아주 제격이다. 내부로 들어가는 곳은
이곳 외에 소하동(所下洞)에도 있으나 그곳은 닫혀 있으며, 갱도 높이가 들쭉날쭉해 정문에 비
치되어있는 안전모를 필히 써야 머리에 탈이 없다.

광명동굴(가학광산 동굴), 그곳을 처음 접했을 때 동굴이란 2글자가 붙어 있어 자연산과 인공
이 섞인 동굴이라 생각했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단어 장난이었다. 순 100% 사람이 삽질해서
판 인공굴이었던 것이다. 자연이 손댄 부분은 하나도 없으나 굴을 둘러보면 정말 자연산 동굴
처럼 느껴져 사람의 힘이 정말 대단함에 놀라게 된다. 먹고 살기 위한 집념과 노다지를 캐려는
집념이 이런 커다란 동굴을 빚었던 것이리라.
땅굴 파기는 북한이 천하 제일이지만 우리도 그에 못지 않다. 아쉬운 건 이곳이 왜정 때 이 땅
의 백성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현장이라 조금은 씁쓸하다는 것이다.

한때 밀폐된 공간에 무엇을 그리 주섬주섬 만드는가 우려와 비판도 많았지만 그 우려를 잘 소
화하여 이제는 어엿한 동굴 관광지로 내 앞에 섰다. 광명시가 5년 넘게 갖은 정성을 들인 광명
의 진정한 꿀단지이자 서울 근교의 주요 명소로 우뚝 선 현장으로 비록 입장료를 씌운 점은 함
정이지만 그 돈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나날이 진화를 보이고 있는 살아있는 동굴이다.

※ 광명동굴 찾아가기 (2017년 7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개봉역(1번 출구 밖 남부순환로변 정류장), 7호선 철산역(2번 출구 밖 2001아
  울렛 철산점 건너편 정류장), 1호선과 고속전철 광명역(7번 출구)에서 광명시내버스 17번을
  타고 광명동굴 종점 하차, 도보 5분
* 지하철 1,2호선 신도림역(1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7호선 철산역(2번 출구 밖 2001아울렛
  철산점 건너편 정류장)에서 광명시내버스 11-2번을 타고 소하동 광명동굴입구 종점 하차, 광
  명동굴까지 도보 30분 또는 코끼리차 아이샤를 타고 광명동굴까지 이동
  <코끼리차는 광명동굴 후문에서 광명동굴 제2매표소까지 운행하며, 9시20분부터 17시까지 20
  분 간격으로 운행, 요금은 청소년과 어른 2,000원 / 어린이 1,000원 (비나 눈이 오거나 강추
  위 때는 운행안함)>
* 지하철 7호선 철산역(2번 출구)과 광명역(2번 출구)에서 광명투어버스 이용, 광명역에서는 1
  일 4회, 철산역에서는 1일 6회 운행하며, 월요일은 운행하지 않는다.
  (광명투어버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 이곳을 클릭한다)
* 광명동굴 자원회수시설 남쪽(제1,2주차장)과 광명동굴 후문(제3주차장)에 주차장이 있음 (주
  차비 무료)

★ 광명동굴 관람정보 (2017년 7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6,000원(단체 5,000원), 군인 4,000원(3,500원), 청소년 3,500원(3,000원),
  어린이 2,000원(1,700원)  <광명시민은 50% 할인, 단체는 20명 이상>
* 관람시간 : 9시~18시 (17시까지 입장 가능, 매주 월요일 휴관)
* 동굴 체험활동 - 광물(보석) 채광 4,000원, 황금채취 6,000원, 광산모자만들기 3,000원, 동
  굴속 황금패 달기 5000원
* 2017년 7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동굴 안 라스코전시관에서 바비인형전이 열린다. (입장료
  는 별도, 자세한 것은 광명동굴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 산 17-1, 27일원 (가학로 85번길 142 ☎ 1688-3399)
* 광명동굴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온갖 색채의 조명이 길을 비추는 광명동굴 바람길


 

♠  지하 세계, 광명동굴 둘러보기 (바람길에서 황금궁전까지)

▲  한때 소박했던 웜홀광장 (2012년 모습)

우리는 입장권을 구입하고 안전모를 눌러쓴 다음 동굴의 속살로 들어섰다. 사람의 손으로 이룩
된 갱도는 휴전선에 있는 북한의 남침용 땅굴과도 조금은 비슷한 모습인데, 폭 2~5m, 높이 1.5
~4m로 상당수의 갱도는 2m 정도를 유지한다. 촘촘한 간격으로 조명 시설을 달아 다양한 색채로
갱도를 곱게 수식하며, 색이 바뀔 때마다 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동굴의 시작인 바람길을 지나면 웜홀(Wormhole)광장이 나온다. 여기서 길(동공)은 3갈래로 갈
리는데 관람 순서가 정해져 있어 무조건 오른쪽 빛의 공간으로 가야 된다. 동굴을 1바퀴 돌면
다시 웜홀에 이르게 되는데, 그때는 옆 길로 들어서 와인동굴을 거친 다음 다시 웜홀로 나와서
밖으로 나간다. 그러니 동굴 관람 동안 웜홀을 총 3번 찍는 것이다. 그래서 동굴의 과거, 미래
, 현재를 둘러보는 입구라 하여 웜홀(우주에서 불랙홀과 화이트홀을 연결하는 통로)이라 이름
지었다.


▲  빛의 황홀한 터널, 빛의 공간 ▼

빛의 공간은 다양한 색채의 조그만 조명등을 터널처럼 씌운 구간으로 검은 도화지 속에 이렇게
찬란한 터널을 두니 마치 겨울 저녁 빛 축제 현장에 들어선 기분이다.
그렇게 빛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터널을 지나면 동굴 아쿠아리움과 예술의 전당이 모습을 드
러낸다.


▲  빛의 공간 남쪽 종점

▲  '황금동굴의 빛나는 생명체' 모형들

빛의 공간을 지나면 '황금동굴의 빛나는 생명체'란 이름을 지닌 요상한 동물 모형이 빛을 발하
며 나타난다. 이들은 동굴을 꾸미면서 달아놓은 테마 모형으로 그들을 만들고 적당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내용인즉 황금동굴(광명동굴)의 가장 깊은 곳에는 황금을 먹고 빛을 내는 다양한 생명체가 살
고 있는데 동굴 벽면에서 살고 있는 젤리팻 가족과 동굴 안을 부유하는 어비스 피쉬가 대표적
인 빛의 생명체란 것이다. 이들은 LED조명 작가 권영준이 만든 것으로 다양한 조명을 씌워 시
간마다 다른 피부색을 낸다.
지금이야 우스개 소리로 듣고 흘리겠지만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 이야기도 세월만큼이
나 커져 무시무시한 전설로 바뀌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면 동굴에 머물며 사람들을 괴롭힌 괴
물,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런 비슷한 전설이 천하에 제법 많다.


▲  붉은 빛을 내는 '황금동굴의 빛나는 생명체' 모형들

▲  동굴 아쿠아월드(Aqua world)

동굴 속에 물고기를 담은 수족관이 있다면 믿겠는가? 바로 그 믿음의 현장이 광명동굴의 아쿠
아월드이다. 어떻게 동굴 속에 수족관을 만들 생각을 했는지 참 생각이 기발하기 그지 없는데
동굴에서 무한리필로 쏟아지는 지하 암반수를 활용하여 1급수에서 사는 물고기와 천하에 여러
물고기를 담아 조촐하게 아쿠아월드를 꾸몄다. 물론 물고기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  조그만 물고기의 세상, 동굴 아쿠아월드 수족관

▲  브라질 아마존강에서 넘어온 무서운 물고기, 피라냐
피라냐는 아마존 원주민 말로 '이빨이 있는 물고기'란 뜻이다. 날카로운 이로
아무거나 물어뜯는 미친 물고기로 사람까지도 물어뜯어 죽게 만든다.
저 쥐방울만한 물고기가 말이다.

▲  다양한 수족관과 물고기가 있는 동굴 아쿠아월드 내부

▲  스크린이 있는 동굴 예술의전당

동굴 남쪽 구석에는 '동굴 예술의 전당'이라 불리는 공간이 있다. 이곳은 동굴 내부에서 가장
너른 공간으로 광산 시절에는 폭파 등의 위험한 일을 할 때 임시 대피소로 쓰였다. 그랬던 현
장이 문화예술 공간으로 상큼하게 변신하여 영화, 음악회, 뮤지컬, 패션쇼, 3D홀로그램 영상
등이 열린다. (350석 규모임)
2012년에 무대와 객석을 만들고 시범용으로 영화를 여러 차례 상영하여 좋은 호응을 얻었으며,
2013년에 스크린을 설치하여 그해 6월 29일 개관하였다. 이 땅 유일의 동굴 속 예술의전당으로
동굴 속살에 이렇게 극장 겸 공연장을 닦을 생각을 하다니 참으로 깜찍한 아이디어 같다. 계절
과 날씨에 방해 받지 않고 언제든 상영이나 공연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다만 깊은 굴 속이라
만약에 사태에 대비할 재난 메뉴얼은 꼭 필요하다.

* 매일 3D홀로그램 영상을 상영한다. 동굴 요정 아이샤와 쿠오가 동굴을 탐험하는 이야기를 다
  룬 3D입체 영상물로 상영 소요시간은 3분 30분 정도 (상영시간은 30분 마다, 변경 가능)


▲  동굴 예술의전당과 위로 향하는 계단
한여름에 여기서 공포 영화를 본다면 참 효과가 클 것 같다. 거기에 정선
화암동굴에서 여름마다 열린다는 귀신체험도 겯드린다면 아주 몸살날 듯.

▲  황금길

동굴아쿠아월드와 예술의전당에서 북쪽으로 가면 황금길이라 불리는 구간이 나온다. 금이 적지
않게 나왔던 동굴의 이력과 부자를 꿈꾸는 속인(俗人)들의 바램을 담아 황금길이라 했는데, 소
망을 적은 황금패를 걸어두는 소망의 벽이 있으며, 숲속 나무에서 나오는 음이온을 깃들여 놓
아 관람객들의 건강도 조금은 배려해주고 있다.


▲  황금길 구간
이곳을 거닐면 혹여 금이 뚝딱 떨어지지 않을까? 아직도 금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고 하니 곡괭이를 들고 몰래 잠입하여 무한정 캐보고 싶다.

▲  동굴 천정에 뚫린 구멍 - 동굴에 살던 용이 급하게
승천하던 자국은 아닐까?

▲  중생들의 소망을 먹고 자라는 황금길 소망의 벽

소망의 벽에는 중생들의 소망을 머금은 황금패(가짜 황금임)들이 주렁주렁 걸려있다. <황금패
를 5,000원에 구입하여 소망을 적은 다음 벽에 알아서 걸면 됨~~> 이 구간에는 건강에 좋다는
음이온이 깃들여져 있어 수복강녕(壽福康寧)의 길이라 불리기도 한다.


▲  동굴 속에 아름다운 수채화, 황금폭포

소망의 벽을 지나면 동공 속에서 울고 있는 황금폭포가 나온다. 관람객의 손길이 전혀 닿을 수
없는 곳에 자리해 있어 그야말로 그림의 떡 같은 폭포인데, 동굴 지하수를 활용해 높이 3.6m의
멋드러진 폭포를 빚었다.
시간당 약 1.2톤의 물이 흐르고 있어 가뭄으로 신음하는 바깥 세상과 달리 수량은 풍부하며 황
금빛 조명을 달아놓아 늘 황금색을 자아낸다. 다른 동굴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진귀한 폭포
로 광산 시절에는 호퍼(hopper)라고 채굴된 광석을 떨어뜨리던 구멍이 있었다.


▲  가짜 황금이 널부러진 황금의 방

황금폭포를 지나면 황금의 방이라 불리는 공간이 나온다. 이 역시 금이 나왔던 광산의 과거 이
력을 반영하여 지은 것인데, 마치 오래된 무덤의 내부나 숨겨진 공간의 석실(石室)처럼 분위기
를 내고 온갖 황금 덩어리를 그럴싸하게 풀어놓아 황금을 꿈꾸는 속인들의 마음에 불을 지른다.
허나 아쉽게도 저들은 모두 가짜이다. 그러니 가져갈 필요도 없다.


▲  광명동굴의 마스코트, 황금 망치와 황금을 든 아이샤(Aixia)

아이샤는 광산이나 동굴 속에서 산다는 난쟁이 요정이다. 그는 주로 금과 은, 보석이 많이 나
오는 곳에 출현한다고 하며, 그 연유로 그를 광명동굴의 마스코트로 삼아 귀여운 어린 여자아
이로 포장하여 내놓았다. 그의 황금 망치는 아무거나 뚝딱 황금으로 바꾸는 신비한 망치로 보
잘것없는 돌이라고 해도 그의 망치질을 받으면 황금으로 변신한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샤는 광명시의 창작물이 아닌 서양의 옛 신화에 나오는 존재이기 때문에 '쿠오'라
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그와 짝을 짓고 동굴 요정으로 삼아 그럴싸한 이야기를 넣었다.

이야기인즉 쿠오는 동굴을 탐험하다가 간드레(광산에서 사용하던 등)를 줍는 과정에서 인간 세
계로 통하는 입구를 발견하니 그게 바로 광명동굴이라는 것이다. 동굴을 나온 아이샤는 하늘에
떠있는 별들에게 홀딱 반해 매일 동굴에서 별을 닮은 금석(金石)을 만들었다고 한다.

동굴 마스코트를 두는 건 좋지만 굳이 양이(洋夷)들의 캐릭터와 칭호를 쓰지 말고 동굴 자체적
인 캐릭터를 만들고 이름 또한 순 한글로 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지역 이름을 따서
'광명'이라고 하는 것도 좋을 듯 함>


▲  조명빨로 살아가는 황금궁전

황금의 방 부근에는 황금궁전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앞서 황금폭포처럼 탐방로 윗쪽에 붕 떠
있어 만지기가 어려운 존재인데, 황금궁전이라 하여 무슨 궁전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며 2~
3개의 동공이 있는 곳에 조명을 달고 수시로 색을 달리하는 것이 이곳의 전부이다. 그 모습이
제법 아름다워서 황금궁전이라 이름 지은 모양이다.


▲  초록색으로 변한 황금궁전

▲  동굴 지하 세계로 내려가는 길
저 계단의 끝에 지하에 숨겨진 또다른 세상이나 저승이 있는 것은 아닐까?

▲  동굴 지하 세계로

황금 궁전을 지나면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마치 지하 끝으로 이어질 것 같은 기세로 나타난
다. 지금까지는 동굴 입구와 해발 높이가 비슷한 수평 갱도였지만 여기서부터 지하1레벨로 내
려가는 것이다. 아주 잠시 말이다.
이 계단은 광부들이 광석을 채굴하고 그것을 나르던 통로로 경사는 약 32도이다. 광산이 폐쇄
된 이후, 지하 구역에 대한 손길이 끊기면서 지하수가 슬쩍 들어와 오랫동안 물에 잠겨 있었으
나 2013년에 모두 퍼내어 길을 냈다.


 

♠  지하 세계, 광명동굴 둘러보기 (지하세계에서 와인동굴까지)

▲  귀신의 집(공포체험관)과 후덜덜한 귀신 누님 모형

동굴 지하 세계로 내려오니 귀신의 집과 처녀귀신 모형이 으시시한 모습으로 마중을 한다. 시
작부터 아주 쎄게 관람객들의 염통을 건드리고 있는데 소복을 입은 처녀귀신은 진짜 살아있는
여인처럼 보여 염통에 긴장을 더하게 한다.
다행히 움직이지는 않아 긴장의 정도는 이내 떨어지고 말지만 만약 저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면 <모형 대신 귀신이나 저승사자 분장을 한 사람을 배치하여 극적 효과를 높이는 것도 좋을
듯함~> 납량특집이 정말 따로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무서운 소리를 내며 살짝 쫓아오거나 수
평레벨로 오르는 계단을 잠시 끊어 공포 분위기를 높인다면 염통과 한여름의 무더위는 그야말
로 제대로 쫄깃해지겠지~~! 광명시는 한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  아득히 바라보이는 동굴 지하호수

광명동굴은 수평 갱도인 0레벨부터 지하 7레벨까지 총 8개 레벨로 이루어져 있다. 광산이 폐쇄
된 이후, 지하 1레벨까지 지하수가 찼으나 1레벨을 해방시키면서 2레벨 이후부터 물에 잠겨 있
다. 이들 물은 지하3레벨과 5레벨에서 나온다.

저 밑에 아득히 바라보이는 지하호수는 지하 2레벨로 접근하기가 꺼림칙할 정도로 무서운 무엇
인가가 툭 튀어나올 것 같다. 현재는 접근 불가이며 늘 암반수에 잠겨있어 비밀의 호수를 연상
케 한다.


▲  동굴 천정에 나타난 무시무시한 신비의 용

동굴 지하 세계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오면 '신비의 지하조망대'가 나온다. 이곳에는 용을 비
롯하여 여러 가지의 실감나는 모형을 만날 수 있는데, 천정에 붙어있는 용 모형은 마치 실물을
보는 듯 하여, 동굴 속에서 수백 년 동안 웅크리다가 드디어 하늘을 향해 몸을 푸는 모습 같다.
조명이 있으니 망정이지 그것마저 없는 상태에서 그를 봤다면 염통이 그야말로 땅에 떨어졌을
지도 모른다.


▲  윗쪽에서 바라본 신비의 용의 위엄

▲  광명동굴에 스미골이 나타났다~~! ▼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단단히 재미를 보았던 스미골이 광명동굴에 놀러 왔다. 그가 영화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던 공간과 이곳이 많이 비슷하기도 한데 반지의 제왕 이후 재미가 별로인지 요
즘 천하에 뜨고 있는 광명동굴까지 날라와 새롭게 안착을 했다.
나도 반지의 제왕 팬으로 그 모형을 본 것은 이곳이 처음인데 반지의 제왕을 만든 뉴질랜드 웨
타워크숍이 광명시와 손을 잡은 기념으로 간달프와 함께 제공한 것이다. 세계적인 영화의 캐릭
터를 이리 만나보다니 참 반갑기 그지 없다.


▲  네모난 상자 안에 담긴 간달프와 트롤 모형
조명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면서 밝음과 어둠 2가지를 재현한다.

▲  여러 그림과 모형이 전시된 신비의 지하조망대
지하1레벨에서 다시 수평레벨로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한 이곳은 공모전을
비롯하여 다양한 전시 공간으로 쓰이는 지하 갤러리이다.

▲  신비의 지하조망대에 전시된 여러 사진과 그림들 (공모전 작품)

▲  광명동굴 속의 유일한 샘터, 광부샘물

강원도 동해, 정선부터 제주도까지 많은 동굴을 다녀봤지만 굴 안에 샘터가 있는 굴은 광명동
굴이 처음이다. 그러고보면 이 동굴은 여러 번 사람을 놀라게 만든다.

광부샘물은 지하1레벨에서 나오는 암반수로 광산 시절 광부들이 마셨던 물인데 광산 내부는 광
물과 그것을 캐는 도구들로 늘 지저분하기 그지 없어 늘 식수 문제가 도사렸다. 그런 상황에서
이 물은 광부들의 목마름을 오랫동안 달래주던 소중한 물로 수질 검사에서도 적합 판정을 받아
여전히 샘터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샘터라고 해서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약수터가 아니라 공원 음수대와 같은 모습이다. 버튼을
누르면 물이 흔쾌히 나오는데, 한 모금 마셔보니 딱히 특별한 맛은 없다. 그냥 흔한 샘물 맛으
로 나중에 나올 와인 1잔과 함께 동굴에서 공짜로 누릴 수 있는 물이다.


▲  동굴의 빛바랜 흔적, 새우젓 저장고

가학광산이 강제로 광산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1972년 이후, 새우젓 저장고로 간신히 명맥을 유
지했다. 이곳이 깊은 지하인데다가 서늘하여 새우젓 보관에는 아주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광산
주인도 먹고 살고자 인근 소래포구에서 의뢰 받은 새우젓 보관 업무를 해주었는데, 1978년부터
2010년까지 32년 동안 그 역할을 하였다. 그 기간 소래포구를 거쳐간 새우젓은 거의 이곳의 신
세를 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새우젓 저장고의 역할은 2010년 그 막을 내렸으며, 옛 저장고 자리에는 새우젓 통이 재
현되어 이곳을 거쳐간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보여준다.


▲  불로문(不老門)

새우젓 저장고를 지나면 불로문이란 나무 현판을 내민 돌문이 나온다. 불로문 즉 '늙지 않는다
'는 뜻으로 황금 찾기와 더불어 사람들의 오랜 소망이기도 하다. 허나 아무리 늙음을 막으려고
용을 써도 우탁(禹倬)의 탄로가(嘆老歌)처럼 지름길로 알아서 찾아온다.

불로문은 바위를 뚫어서 만들었는데, 한자로 쓰인 불로문 현판은 광명 지역의 대표적인 서예가
인 운계 신성재가 예서체로 쓴 것으로 동굴을 찾은 사람들의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뜻에서 문의
이름을 불로문이라 했다.


▲  빛나는 광부 모형
황금 모형이 가득 담긴 광차를 밀고 있는 하얀 빛의 광부. 광부의 피와 땀이
서린 동굴의 과거와 노다지를 향한 광부의 소망을 그렇게 표현했다.
동굴은 바로 그 2가지 요인으로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다.

▲  옛 광산의 아련한 흔적, 조구통

조구통이란 광부들이 광석을 운반하고자 만든 조그만 구멍으로 통나무로 주변을 받쳤다. 광산
을 동굴로 손질하면서 이제 3군데만 남아있을 뿐인데, 광산 시절에는 필요에 따라 아무 때나
만들고 또한 메꾸었다. 방향에 따라서 '남나굴이','북나굴이'이라 불리기도 했고, 지하 사갱
에 만든 조구통에는 '1번 나굴이','2번 나굴이' 등 갱도의 레벨 번호를 붙이기도 했다.


▲  근대역사관에 전시된 광산 도구들

불로문을 지나 북쪽으로 가면 동굴의 100년 역사 및 옛 시흥/가학광산 시절을 머금은 근대역사
관이 나온다. 광명동굴에 걸맞게 동굴 속 컴컴한 곳에 자리를 닦은 역사관으로 광산 시절에 쓰
인 갖은 도구와 생산된 광물들, 광산을 안팎으로 재현한 디오라마 등이 전시되어 있다.


▲  광산이 토해낸 여러 광물들 (동, 아연 등)

▲  가학광산 내부 모형과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들의 모습

현재 동굴은 수평레벨 상당수와 지하1레벨 일부만 문이 열려 있다. 나머지 지하 레벨과 수많은
가지굴은 여전히 닫혀있는 상태~ (지하2레벨 이후는 물에 잠겨 있음) 이들 닫힌 공간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다 공개하기에는 솔직히 무리인 듯 싶고 적어도 지하2레벨과 소하동 방면 가지굴
까지는 해방이 되지 않을까 싶다.


▲  가학광산 외부 모형 (오른쪽이 광물을 추출하던 선광장)

▲  암석을 뚫는 기구를 이용해 가학산의 속살을 들쑤시던 광부 모형

▲  광산의 이동 공간, 동공

▲  광물을 실어나르던 광차(鑛車)

▲  이제 와인동굴로 (와인동굴 입구)

근대역사관을 둘러보고 서쪽으로 가면 다시 웜홀광장이 나온다. 여기서 관람 방향에 따라 왼쪽
(동쪽)으로 가면 (오른쪽은 바람길과 동굴 정문임) 광명동굴의 명물인 와인동굴이 마중을 한다.
 
와인동굴은 수평레벨 동쪽 굴 194m 구간으로 2015년에 와인셀러, 와인레스토랑, 와인 창고, 와
인바(와인 시음장) 등을 닦았다. 그 동굴의 끝에는 와인들이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와인 창
고가 있으며 이곳에 보관 중인 와인은 170여 종의 1,000병이 넘는다.
와인바에서는 와인을 시음할 수 있는데 무료이긴 하나 어차피 그 비용이 입장료에 포함되어 있
다. 그러니 완전 공짜는 아니며 1인당 1~2잔 정도 마실 수 있다. 물론 와인 구매도 가능하다.
이렇게 굴 속에 와인터널을 둔 것은 깊은 지하라 와인 보관과 숙성에 아주 착한 온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이곳처럼 버려진 터널이나 인공굴을 손질해 와인 숙성 공간으로 활용하여
재미를 보는 곳이 여럿 있다. (무주 머루와인동굴, 청도 와인터널 등~) 그야말로 검은 터널의
화려한 변신인 셈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단순히 와인 숙성/보관 장소로 시작했으나 와인을 체
험하고 구매하는 현장으로 차차 인기를 모으면서 지역의 주요 명소로 대박을 터트렸다.


▲  와인에 대한 설명과 빈 와인병이 좌우에 가득 널린 와인동굴

▲  와인바(와인시음장) 직전

와인바에 이르면 그곳을 지키는 사람이 알아서 와인을 따라준다. (미리 몇 잔씩 차려진 경우도
있음) 그렇게 와인을 1잔 들이키고 와인 리필을 요청하면 어지간해서는 1잔을 더 따라준다. 나
는 1잔으로는 별로 느낌이 안와서 2잔을 마셨음.


▲  와인동굴 스타일의 상큼한 와인 조명등
가만 보니 술잔에 와인을 따르는 모습이다.

▲  바람길 (와인동굴입구~웜홀광장 구간)

▲  온갖 조명등이 길을 비춰주는 바람길 (웜홀광장~동굴 정문 구간)

▲  다시 빛을 보다. (동굴 정문 직전)
우리네 인생도 광산 갱도를 방황하는 것과 비슷하다. 잘 방황하면 금 노다지를
캐는 것이고 잘못 헤매면 광산에 갇히거나 벼랑으로 곤두박질~~


 

♠  광명동굴 마무리

▲  을씨년스러운 선광장(選鑛場) <2012년 모습>

동굴 내부를 1시간 정도 둘러보고 다시 햇살이 춤추는 바깥으로 나왔다. 욕심 같아서는 동굴의
금지된 속살까지 더 누려보고 싶으나 나한테는 그 금지를 풀 수 있는 권한이 없다. 그러니 공
개 구역만 얌전히 둘러보고 나가야 된다.

동굴 남쪽에는 '선광장'이라 불리는 조금은 우울하게 생긴 공간이 있다. 이곳은 광산에서 캐낸
돌을 기계를 이용해 불에 달구거나 수작업으로 돌에 묻힌 광물을 뽑던 현장으로 광물을 빼앗긴
돌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 광산 서쪽에 쌓아두었다.
광산이 버려진 이후, 이곳에 쓰인 기계는 모두 고철로 버려지거나 엿으로 바뀌는 신세가 되었
으며, 그 작업을 했던 돌로 다진 현장과 기초석만 남아있을 뿐이라 마치 폐허가 된 고대 유적
지나 옛 군사시설, 영가(靈駕)를 보내던 화장터처럼 황량하기 그지 없다. 한밤중에 오면 은근
히 오싹할 듯~~
어쨌든 광산과 관련된 100년 이상 묵은 산업 문화유산으로 광산 바깥에 유일하게 남은 광산 시
절 흔적이라 등록문화재나 지방문화재 감으로 전혀 손색은 없어 보인다.


▲  다시 찾은 선광장

▲  광물을 추출하던 곳

▲  선광장 옆에 조성된 쉼터과 체험놀이터


▲  체험놀이터 (광물 채광 체험)

선광장 앞에는 체험놀이터가 닦여져 있다. 옛 광산에 걸맞게 광물 채광과 황금 채취, 광산모자
만들기 체험을 하는 곳으로 매표소에서 원하는 프로그램 체험권을 구입해 체험놀이터 체험부스
로 달려가 그것을 제출하고 체험에 임하면 된다. (체험 자료를 제공함)
이곳 체험 놀이는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대단한데, 모래 속에서 황금(또는 광물)을 찾고자 하는
일념들이 대단하다. 지금이야 저런 방식으로 광물과 숨바꼭질을 하지 않지만 옛날에는 저런 방
식으로 광물을 잡아냈다.

* 체험놀이터 운영시간 : 10~18시까지 (17시까지 표를 구입해야 됨)
* 체험활동 가격 : 광물채광 4,000원 / 황금채취 6,000원 / 광산모자 만들기 3,000원


▲  광명동굴 북쪽 산자락에 있는 황금노두(黃金露頭, 노두바위)

일몰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 동굴 매표소 옆 계단길을 올라 잠시 가학산의 품을 거닐었다. 계
단을 오르면 광명의 지붕인 구름산, 도덕산, 서독산, 가학산의 허리를 이어주는 산길이 나오는
데, 여기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기묘하게 생긴 커다란 바위가 두 눈을 단단히 부여잡는다.

그 바위는 '노두바위'로 근래 '황금노두'로 이름이 갈렸다. 바위 근처에 부엉이가 많이 살았다
고 해서 '부엉이바위'란 별칭도 가지고 있으며, 1912년 광산을 시작했을 때 여기서 뚫고 내려
갔다고 한다. 그러니 광명동굴이 시작된 첫 지점이 된다. 현재 그 시절에 뚫은 동공이 좁게 남
아있으며, 바위 주변에는 자갈과 온갖 조그만 돌이 가득 깔려 있고, 나무와 식물도 바위와 적
당히 거리를 두고 있어 흙과 돌만 가득한 사막이나 황량한 대지의 바위산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이국적인 풍경을 그려낸다.


▲  옆에서 본 황금노두 (바위 꼭대기에 동공이 있음)

▲  가학산 광명동굴 숲길에서 만난 쉼터

가학산 정상까지 가볼까 했으나 일몰이 눈치를 주어 중간에 있는 쉼터(윗 사진)에서 발길을 돌
렸다. 어차피 언젠가는 또 올 것이니 그때 정상까지 올라 천하를 굽어봐도 늦지는 않다.

삼삼하게 우거진 가학산 숲은 늦가을 절정에 퐁당퐁당 빠져 한참 타오르고 있었다. 성질 급한
나무들은 반년 동안 걸치던 잎사귀를 땅바닥에 떨구며 소위 낙엽을 배출하고 있다. 귀를 접고
누운 낙엽들은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하고 사람들은 낙엽 밟는 소리가 좋다며 그들을 무침히 밟
고 지나간다. 그렇게 잎은 가루가 되고, 분해자에 의해 썩고, 땅 속에 스며들어가 식물의 양분
이 되니 이것이 소위 생태계의 법칙이다.

광명동굴 숲길을 끝으로 늦가을 광명동굴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가학산에서 만난 일몰 (시흥시, 인천 방향)
칼출근/퇴근의 달인 햇님은 퇴근 시간이 임박함에 따라 슬슬 그만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꽁무니를 뺀다. 마침 그와 약속이라도 한 듯, 한무리의
구름이 몰려와 그를 가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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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한복판에 뉘어진 신비의 탄산약수, 홍천 삼봉약수 (삼봉자연휴양림, 운두령)



' 탄산약수의 성지를 찾아서 ~~~

홍천 삼봉약수터 (삼봉자연휴양림, 운두령) '

▲  삼봉약수터



 

봄이 겨울의 잔여 세력을 토벌하며 천하평정에 열을 올리던 3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강원도를 찾았다.
이번 나들이는 후배가 차를 렌트하여 1박2일 일정으로 강원도와 충북, 경북 지역을 유람
하기로 했는데 렌트카의 장점을 최대한 뽑고자 대중교통 접근성이 매우 고통스러운 곳을
중심으로 아주 아름답게 동선을 짰다. 그래서 요즘 한참 관심을 가지고 있는 탄산약수를
먼저 찾기로 하고 적당한 약수를 물색, 홍천 삼봉약수터에 격하게 반응을 보여 그곳을 1
번 답사지로 정했다.

아침 8시, 능동(陵洞) 어린이대공원 부근을 출발하여 우선 주유소에 들어가 2일 동안 수
고를 해줄 차량에게 밥을 두둑히 먹이고 긴 여정에 들어갔다. 사람이든 차량이든 동물이
든 무조건 배불리 먹고 봐야 된다.

언제나 번잡한 서울 시내를 벗어나 강변북로와 경강로(6번국도)를 신나게 달려 구성포에
서 56번 국도(구룡령로)로 진입했다. 칼처럼 솟은 산 사이를 구불구불 돌아 창촌에 이르
니 동쪽으로 보이는 산 정상부에 하얀 눈이 버젓히 쌓여있어 하늘에 그만큼 가까이 왔음
을 느끼게 한다.
12시 반 정도에 드디어 삼봉약수터를 품은 삼봉자연휴양림 입구에 도착했다. 같은 홍천(
洪川) 땅임에도 홍천읍에서 무려 80여km나 떨어진 곳이니 정말 허벌나게도 멀다. 참고로
홍천군은 우리의 실지(失地, 북한과 요동, 만주, 왜열도)를 제외한 이 땅에서 가장 넓은
행정구역으로 면적이 무려 1817.96㎢에 달한다. (서울의 약 3배임)
고을 대부분이 산지로 동쪽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허리인 태백산맥이 흘러가 고산준령
을 이루며 칼처럼 솟은 뫼 사이로 적게나마 경작지가 누워있어 그곳에 주로 마을이 형성
되어 있다.

수해(樹海)에 잠긴 휴양림길을 들어서면 4동으로 이루어진 한옥지구와 제2야영장, 제1야
영장이 차례로 마중을 나오고, 주차장을 지나면 관리사무소(매표소)가 차단기로 길을 막
고 나그네의 호주머니를 쳐다본다. 삼봉약수터를 비롯한 매표소 북쪽은 유료(有料)의 땅
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꿩 대신 닭을 잡을 권리가 없기 때문에 순순히 입장료와 주차비를 치르니 그
제서야 차단기가 씨익 웃으며 올라간다.

햇빛지구 숙박동과 황토지구 숙박동을 지나니 조촐하게 닦인 약수터 주차장이 마중을 나
온다. 차량은 여기서 더 이상 바퀴를 굴릴 수 없으며 바로 계곡 너머로 삼봉약수터가 바
라보인다. (매표소 옆 주차장에 차량을 두고 삼봉약수터까지 걸어가도 됨, 1km 거리)


▲  삼봉자연휴양림 관리사무소와 매표소



♠  삼봉자연휴양림에 묻힌 신비의 약수, 삼봉약수터(三峯藥水)
- 천연기념물 530호

홍천에서 제일 벽지로 통하는 광원리 산골, 가칠봉 남쪽 자락 계곡에 삼봉약수터가 조용히 웅
크리고 있다.
삼봉약수는 일반 약수와는 차원이 틀린 탄산약수로 맛이 은근히 쓰다. 물 색깔이 붉어서 주변
이 온통 붉은 색을 이루고 있는데, 이 물에 설탕을 타면 천연사이다가 되고, 이 물로 밥을 지
으면 푸른색으로 꼬들꼬들 익어 맛이 좋다.

이 땅<만주와 북한 등 잃어버린 땅은 제외>의 탄산약수는 강원도와 충북, 경북 산골에 몰려있
는데, 그 수가 별로 많지 않다. 탄산약수의 대표적인 성지(聖地)로는 세계 3대 광천수(鑛泉水)
의 하나로 꼽히는 청주 초정약수가 있으며, 제법 이름이 알려진 약수로는 설악산 오색약수, 인
제 방동약수와 개인약수, 양구 후곡약수, 홍천 삼봉약수, 춘천 추곡약수, 평창 방아다리약수,
정선 화암약수, 봉화 오전약수, 청송 달기약수, 세종시 부강약수 등이 있다. 서울에도 천호약
수라고 수도권 제일의 탄산약수가 있었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숨통이 끊어진지 이미 오래
이다. (아주 어린 시절에 가본 기억이 있음)

삼봉약수를 끼고 있는 계곡 이름이 실론계곡인데, 그 이름을 따서 실론약수(實論藥水)라 불리
기도 했으며 <'실룬약수'라 하기도 했음> 가칠봉(柯七峰, 1240m)과 사삼봉(私蔘峰, 1107m), 응
복산(應伏山, 1360m) 세 봉우리 중간에 자리해 있어 삼봉약수라 부르기도 한다. <물이 나오는
구멍이 3개라 하여 삼봉이란 이야기도 있음>

수질이 매우 우수하여 우리나라 명수(明水) 100선의 하나로 격하게 칭송을 받고 있으며, 철분
과 망간, 불소, 탄산이온 등 무려 15가지의 성분이 담겨져 있어 빈혈, 당뇨병, 신경통, 위장병
에 효과가 있다고 전한다. 나 역시 위장병을 자주 달고 사는 가련한 현대인이라 어린 시절 입
에도 대지 않았던 탄산약수에 격하게 흥분을 보이면서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탄산약수를 찾
아가 약수가 마르고 닳도록 본전을 뽑고 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건강을 챙길 나이가 된 것이
다.


▲  삼봉약수터

삼봉약수터는 3개의 혈(穴)로 이루어져 있다. 대자연 형님이 내린 신비의 물을 보호하고자 뚜
껑을 씌워 놓았는데 뚜껑을 열고 물을 마신 다음 다시 뚜껑으로 봉해야 된다. 어느 혈의 물을
마시든 색깔과 맛은 거의 같으며 탄산약수 특유의 약간 쓴 냄새가 조금 풍긴다. 그리고 혈 주
변은 약수의 영향으로 온통 시뻘겋다.

◀▲  신비의 물이 용솟음치는 삼봉약수터의
3개의 혈들 - 가뭄에도 거의 마를 날이
없다고 한다.

서울에서 이 먼 곳까지 힘들게 왔으니 약수는 원없이 마셔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비록 물통을
준비하지 못해 서울까지 수송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몸 속에 가득 넣어 위장을 거의 탄산화시켰
다. 3개의 구멍의 물을 모두 마셨는데, 총 1.5리터는 마신 것 같다. 철부지 어린 시절에는 정
말 입에도 대기 싫었던 탄산약수였는데, 이제는 입맛이 변했는지 달콤하기까지 한다. 이런 내
모습이 과연 제대로 된 모습일까? 아니면 나이를 먹었다는 쓰라린 신호일까?


▲  삼봉약수터 옆을 흐르는 계곡
때 묻지 않은 청정한 계곡으로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열목어(熱目魚)가
소리 없이 서식하고 있으며, 한여름에도 물이 차가워 5분 이상 발을 담그기가
어려울 정도로 여름 제국의 염통을 쫄깃하게 건드린다.

▲  삼봉약수터 옆 이팝나무 숲속에 조성된 약수지구 숙박동

삼봉약수터를 든든한 후광으로 삼은 삼봉자연휴양림은 1992년 산림청에서 조성한 국립휴양림이
다. 산골 벽지에 묻혀있어 접근성도 별로 안좋고 가는 길도 험하지만 그런 고생을 감수하고 안
긴 휴양림은 이곳이 속세인지 신선의 숨겨진 세계인지 햇갈릴 정도로 풍경이 청초하고 침엽수
와 활엽수가 절제된 조화를 이룬 숲은 매우 울창해 그동안의 고생을 싹 가시게 한다. (그래서
인간은 망각의 동물임)
하늘을 향해 늘씬하게 자라난 키다리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며 천연림을 이루고 있고, 열목어가
마음 놓고 꼬리를 흔들 정도로 계곡이 청정하며, 탄산약수의 성지로 추앙받는 삼봉약수터를 품
고 있다. 또한 이곳을 둘러싼 공기는 순수함을 자랑해 바깥 세상의 공기와는 맛과 질부터가 확
연히 틀리다. 이렇게 모든 것이 청정한 곳이니 휴양과 피서지로도 아주 휼륭하다.

휴양림에는 한옥 숙박동과 햇빛, 황토, 약수지구 등에 숙박동(객실 25개)이 있으며, 야영장 55
개, 주차장 4곳, 물놀이장 1곳이 있다. 광원리 계곡(실론계곡)이 휴양림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속세로 흐르며, 삼봉약수터 북쪽에는 숲체험코스와 숲속교실, 그리고 가칠봉 정상으로 인도하
는 산길이 닦여져 있다. 또한 첩첩한 산골에 맞게 산촌 겨울나기 놀이체험과 숲해설 프로그램,
산림문화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다.

※ 삼봉약수터, 삼봉자연휴양림 찾아가기 (2017년 6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과 서울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홍천행 직행버스 이용
* 수원, 성남, 고양(일산), 의정부, 속초, 춘천, 원주, 청주, 대전(복합), 전주, 대구(북부),
  포항, 울산, 부산(동부)에서 홍천행 직행버스 이용
* 홍천터미널에서 내면(창촌)행 직행버스가 1일 11회, 군내버스는 1일 3회 운행
* 내면(창촌)에서 목맥동, 명개리행 군내버스(1일 5회)를 타고 삼봉자연휴양림 하차
  (내면 출발시간 - 6:40, 9:00, 12:00, 16:40, 18:25)
* 승용차
① 영동고속도로 → 속사나들목을 나와서 속사, 진부 방면 → 속사3거리에서 좌회전 → 운두령
   → 자운교차로 직진 → 창촌3거리 우회전 → 창촌(내면) → 원당3거리 직진 → 삼봉자연휴
  양림입구 → 삼봉자연휴양림(삼봉약수터)
② 서울춘천고속도로 → 동홍천나들목을 나와서 홍천 방면 → 구성포교차로에서 서석 방면 56
   번 국도 → 솔치재터널 → 서석 → 율전3거리 우회전 → 창촌3거리 좌회전 → 창촌(내면)
   → 원당3거리 직진 → 삼봉자연휴양림입구 → 삼봉자연휴양림(삼봉약수터)

★ 삼봉약수터, 삼봉자연휴양림 관람정보 (2017년 6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1,000원(단체 800원), 청소년 600원(단체 500원), 어린이 300원(단체 200원)
  <단체는 20명 이상>
* 관람시간 : 9~18시 / 숙박시설 이용시간 : 15시~다음날 12시까지
* 주차비 : 1,500~5,000원 (1일 기준)
* 삼봉자연휴양림 예약과 이용정보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소재지 : 강원도 홍천군 내면 광원리 산197-1 (삼봉휴양길 276, ☎ 033-435-8536)


▲  삼봉약수터 동쪽에 자리를 닦은 황토지구 숙박동


 

♠  막국수와 운두령(雲頭嶺)

▲  홍천에서 먹은 막국수와 여러 김치들

바가지에 불이 나도록 약수를 마시고 약수터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덧 14시가 넘었다. 휴양림을
품은 가칠봉까지 올라간다면 더욱 금상첨화겠지만 애당초 휴양림보다는 몸보신을 위한 약수터
에 더 큰 무게를 두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약수터에만 초
롱초롱 눈빛이 갔지. 하여 약수터 주변을 살펴보는 선에서 삼봉과의 인연을 흔쾌히 마무리지었
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다음에 혹 인연이 닿는다면 그때는 휴양림에서 호젓한 하룻밤을 보
내고 싶다.

졸고 있는 차량을 깨워 휴양림을 벗어나 점심 장소를 물색했다. 점심 시간도 많이 지났고, 지
금까지 딱히 먹은 것도 없어 뱃속에서는 배고프다며 계속 꼬르륵 소리로 불만을 표출한다.
창촌으로 나오던 중, 어느 적당한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막국수와 백숙 등을 팔고 있
었는데, 강원도 산골에 왔다면 그곳의 토속 음식인 막국수나 전병, 메밀전, 메밀전병 등은 먹
어줘야 후회가 없다. 그래서 그곳에 차를 대고 식당에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단체 손님들로 시끌벅적했는데 안쪽 방에 자리를 잡고 막국수를 주문했다. 더
많은 것을 먹으면 좋겠지만 그날 충북 단양(丹陽)까지 먼 길을 가야되기에 위장을 너무 흥분시
키는 것도 그리 좋지는 않다. 그래서 일단은 막국수로 입가심을 하고 저녁에 황제처럼 먹기로
했다.


▲  두둑하게 나온 막국수의 위엄

막국수 주문을 하자 김치 3종류와 막국수 육수가 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을 흘려보
내니 드디어 주인공인 막국수가 큰 그릇에 담겨 나타난다. 김가루와 계란, 오이, 깨 등이 버무
려진 막국수는 전형적인 강원도 막국수 스타일로 거기에 육수를 넣어 먹으면 되는데 육수와 국
수도 얼큰하고 김치도 맛이 괜찮았다.
국수나 냉면이 1끼 식사로는 좀 허전하긴 하지만 이곳은 양이 많아서 그릇을 싹 비우니 뱃속이
완전 만땅이 되버렸다. 그 틈을 노려 식곤증이 스르륵 밀려와 배깔고 자라며 희롱을 하니 정말
벌러덩 눕고 싶다. 허나 갈 길이 멀기에 서비스로 제공되는 자판기 커피로 식곤증에 맞서며 오
후 단잠에 빠진 차량을 깨워 다시 부르릉 시동을 건다.

바로 단양으로 넘어가기에는 해가 아직 있어서 그 길목에 자리한 영월(寧越)에 잠시 들려 적당
한 정처(定處)를 찾기로 했는데, 그곳으로 가려면 반드시 운두령이란 무지막지한 고개를 넘어
야 된다. 그는 강원도에 널린 험준한 고개의 하나로 홍천군 내면과 평창군 용평면 경계에 자리
해 있으며, 그 고개를 넘으면 바로 장평과 진부, 영동고속도로로 이어진다.

운두령의 높이는 1,089m로 고개 시작부터 꼬부랑 고갯길의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며 차와 사람
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다. 한쪽은 가파른 오르막. 반대편은 밑이 보이지 않는 아찔한 내리막
으로 특히 차량이 넘나드는 고개 가운데 정선 만항재(1,330m) 다음으로 높아 운두령의 위엄을
실감케 한다.
운두령이란 이름은 늘 구름과 안개가 넘나든다는 시적인 뜻으로 그만큼 안개가 자주 낀다. 우
리가 지나갈 때는 다행히 쾌청했으나 미칠 정도로 고갯길 굴곡이 심해 자존심을 곱게 접고 바
퀴를 순진하게 굴려야 뒷탈이 없다. 그렇게 고개에 임하면 전혀 나올 것 같지 않던 운두령 정
상에 이르게 된다.


▲  운두령 정상 (평창 방향)

▲  운두령 정상 (홍천 내면 방향)

하늘과 맞닿은 운두령 정상에는 토산품을 파는 운두령쉼터와 주차장이 있다. 하지만 차량의 통
행이 많지 않아서인지 요란한 수준은 아니며 그냥 조그만 가게 수준이다. 고개 주변에는 겨울
의 부흥을 꿈꾸는 눈들이 여전히 남아 천하를 노리고 있고, 바깥에 마련된 화장실은 그들로 인
해 초토화(?)를 당해 잠시 기능이 상실되었다. 도로 휴게소의 기본 요소인 화장실이 그 지경이
되었으니 볼일은 쉼터 주변에서 알아서 봐야 된다.

운두령은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높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 장대한 높이에 비해 조망 범위
는 그리 넓지 않다. 고개 주변에는 그보다 높은 산들이 칼처럼 솟아 병풍을 이루고 있기 때문
이다. 북쪽으로는 홍천군 내면 지역, 남쪽은 평창군 용평면 지역이 바라보이며, 양 옆으로 계
방산(桂芳山, 1577.3m)의 산줄기가 흘러간다. 특히 계방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나있는데, 그
길로 2시간 30분 정도 얌전하게 오르면 계방산 정상에 이른다.


▲  운두령에서 계방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길

운두령에서 잠시 바퀴를 접으며 하늘과 가까운 곳의 공기를 만끽하다가 다시 길을 재촉하였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구불구불 고갯길을 내려와 노동리에 이르니 미친 기운을 보인 운두령
길은 이내 흥분을 가라앉는다. 그런 상태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의 현장 이승복(李承福)
기념관을 지나 속사(束沙)에서 우회전하여 평창(平昌) 방면으로 방향을 틀었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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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임금이 만든 도심 속에 아름다운 호수, 수원 서호 ~~ (서호공원, 항미정)

 



' 도심 속의 그림 같은 호수, 수원 서호 '




 

지겨운 겨울이 저물고 봄이 완연히 내려앉던 4월의 첫 무렵, 수원에 자리한 그림 같은 호
수, 서호를 찾았다. 서호는 경부선 전철이나 열차를 타고 수원을 지날 때 차창 밖으로 본
것이 전부라 나에게는 아직 미답처(未踏處)나 다름이 없었다.

오후 3시, 화서역에서 후배를 만나 수원역 방향(남쪽)으로 조금 들어서니 봄나들이객들로
분주한 서호공원이 모습을 비춘다. <서호공원은 서호 북쪽과 동쪽에 닦여져 있음>


 

♠  수원 도심 속의 호수, 서호<西湖, 축만제(祝萬堤)>
- 경기도 지방기념물 200호

▲  서호 북쪽길 (서호공원)

인구 120만을 지닌 경기도 제일의 큰 도시이자 행정 중심지인 수원(水原), 그 도심 북서쪽에는
물을 가득 머금은 서호가 은빛물결을 글썽이며 정처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뒤흔든다. 경부선 전
철이나 열차를 타고 수원역~화서역 구간을 지날 때 서쪽으로 너른 호수가 보이는데 그곳이 바
로 서호이다.

서호는 1799년 정조 임금이 내탕금(內帑金) 30,000냥을 쏟아부어 여기산 동쪽에 조성했다. 원
래 이름은 축만제로 오래도록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정조(正祖)는 1764년 창경궁 선인문(宣人門)에서 뒤주에 갇혀 강제로 이승을 떠난 아버지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묘역, 현륭원<顯隆園, 현재 융건릉> 곁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마음에 병점
에 있던 수원부(水原府)를 지금의 수원시내로 옮기고 그 유명한 수원 화성(華城)을 구축했다.

화성을 만들면서 자신의 친위 호위부대인 장용위(壯勇衛)를 주둔시켰는데, 장졸들의 급료와 경
비를 충당하고자 화성 주변에 둔전(屯田)을 두어 경작하게 하고 4개의 호수를 만들어 농업용수
로 사용했다. 축만제는 바로 그 호수의 하나로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호란 단순한 별칭을 갖게
되었으며, 서호 주변에 넓게 둔전을 설치한 연유로 서호 서/남쪽 동네 이름이 서둔동(西屯洞)
이 되었다.
그 시절에 닦여진 4개의 호수 중 북쪽에 있는 만석거(萬石渠)가 가장 먼저 조성되었다. 1795년
5,700냥을 들여 축조했는데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지(北池)로도 불리며 현재 수원시 송죽동 만
석공원에 남아있다. 동쪽의 동지(東池)는 화홍문(華虹門) 동쪽 지동(池洞)에 있었으나 오래전
에 말라버려 체취도 남아있지 않으며 현륭원 앞에는 1797년 남지(南池)인 만년제(萬年堤)를 지
었는데, 지금도 남아있다. 그리고 끝으로 서쪽에 서호(축만제)를 지으면서 수원 화성 주변 4개
의 호수는 완성이 되었다. (그들 중 서호가 제일 넒음)

서호는 제방 길이가 1,246척, 높이 8척, 두께 7.5척, 수심 7척, 수문 2개로 이루어 있다. 제방
남쪽에는 제언절목(堤堰節目)에 따라 심은 것으로 보이는 오래된 나무들이 있으며 1803년에 축
만제둔(祝萬堤屯)을 설치해 서호를 보수,관리토록 했다. 이 관청에는 도감관(都監官)과 감관(
監官), 농감(農監) 등을 두어 관수(灌水)와 전장관리를 맡게 하였고, 도조(賭租, 둔전을 대여
하여 받는 돈이나 벼)를 통해 생기는 수입은 화성 축성고(築城庫)에 납입했다고 하니 제방 남
쪽의 경작지는 국둔전(國屯田)으로 쓰인 듯 싶다.
서호가 생김으로서 232섬지기의 경작지가 혜택을 맛보았으며, 어류자원 확보를 위해 잉어 등의
물고기도 풀었는데, 이곳 잉어는 약용(藥用)으로 점차 유명해져 궁중에 진상되기도 하였다. 또
한 명승지로도 이름을 날려 이곳에서 바라보는 낙조를 천하 일품으로 쳤으며 호수 한복판에 섬
을 띄워놓아 경치를 북돋았다.

1906년 왜(倭)가 이곳에 농사시험장을 설치하면서 조선의 농업 중심지가 되었고, 1945년 이후
에는 농촌진흥청이 들어서 이 물을 이용해 많은 농작물을 연구/개발하니 세계적인 농업학자로
씨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禹長春, 1898~1959)도 이 물의 신세를 졌다.
이처럼 농촌진흥청과 서울대 농생대 경작지(시험답) 외에도 인근 경작지 30만 평에 물을 공급
했으나 수질 오염과 시가지 개발로 경작지가 줄면서 지금은 농촌진흥청과 서울대 농생대만 사
용하고 있으며, 호수도 예전에 비해 덩치가 줄어들었다.
서호를 후광(後光)으로 삼던 농촌진흥청은 원래 서호 북쪽(현 농민회관)에 있었으나 서쪽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전주완주혁신도시로 내려갔으며, 호수 남쪽에는 농촌진흥청과 서울대 농생대
에서 관리하는 경작지가 있어 우리나라 농업 연구/발전의 역할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서호는 농촌진흥청 소유로 인해 오랫동안 속세에 금지된 호수로 있었다. 그러다가 시민들의 개
방 여론에 힘입어 2000년대에 세상을 향해 활짝 문이 열렸다. 2012년에는 서호를 둘러싼 둑방
길에 2.1km 정도의 둘레길을 조성하고 호수 북쪽과 동쪽에 서호공원을, 호수 서북쪽인 여기산
(麗妓山)에 여기산공원을 닦아 시민들에게 선사했다. <여기산에는 우장춘 묘역과 선사유적지,
철새서식지가 있음>

수원 도심에 그림처럼 펼쳐진 서호는 수원, 화성 지역에서 가장 큰 저수지로 지금의 수원을 있
게한 수원의 아버지, 정조 임금이 화성과 더불어 수원에게 남긴 소중한 꿀단지이다. 봄에는 개
나리와 진달래, 벚꽃이 앞다투어 나들이객을 유혹하고 가을에는 오색 단풍이 옛 농촌진흥청과
여기산, 서호 주변을 몸살이 날 정도로 아름답게 물들이며 겨울에는 눈꽃이 하얗게 설경을 이
룬다. (수원시가 선정한 눈꽃 명소 중의 하나임)
서호는 현재 '수원 축만제'란 이름으로 경기도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

※ 서호 찾아가기 (2017년 6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경부선 화서역 5,6번 출구를 나와서 남쪽(수원역 방면)으로 도보 10분 (항미정
  은 화서역에서 도보 25분)
* 수원역(AK플라자)에서 30, 30-1, 42번 시내버스를 타고 숙지중고교(서호공원)에서 하차, 남
  쪽에 바로 보이는 육교를 건너면 서호(서호공원)이다.
* 서호공원 소재지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436-1
* 서호(축만제) 소재지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  서호 북쪽에서 바라본 서호와 섬

서호 한복판에는 호수의 경치를 구수하게 해주는 섬이 외롭게 떠 있다. 섬 이름은 따로 없으며
그곳으로 인도하는 배도, 다리도 없어 접근이 불가능한 그야말로 그림의 떡 같은 섬이다. 그는
서호 초창기 때부터 있었으며 근래에 새롭게 손질되었다.


▲  서호 북쪽에서 바라본 서호 동쪽과 화서동(華西洞)

서호공원을 비롯한 서호 주변에는 봄 기운을 누리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눈이 내리고 강추위가 판을 쳤지만 이제는 봄의 따스한 햇살이 천하를 부드럽게 보듬는다.

우리는 서호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았다. 서호가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넓기
는 마찬가지, 2.1km의 서호 둘레길을 도는데 항미정 관람시간과 휴식시간을 포함해 거의 1시간
반 정도 걸렸다.
호수에서는 잔잔하게 물보라가 피어오르고 은빛물결이 주름을 이루며 글썽인다. 호수에서 불어
오는 바람도 이제는 시원하게 느껴진다.


▲  물결이 주름진 서호 서쪽 ▼


▲  봄나들이객과 산책객들로 북적거리는 서호공원 (서호 북쪽)


▲  서호천이 서호로 변신하는 현장 (새싹교 주변)

서호를 가득 채운 물은 모두 어디서 왔을까? 하늘에서 떨어진 것일까? 아니면 지하수를 쥐어짜
서 채운 것일까? 그는 수원 북쪽 덕성산에서 발원한 서호천(西湖川)을 막아서 만든 것이다.
서호천은 광교산에서 나온 영화천(만석거를 경유함) 물줄기까지 받아들여 서호에서 단체로 모
임을 가진 다음 항미정 옆 수문을 타고 수원 서부와 화성, 평택 땅을 거쳐 서해바다 아산만으
로 흘러간다.


▲  서호로 길을 재촉하는 서호천 (새싹교에서 바라본 모습)
하천 동쪽에 노란 피부의 개나리가 만개해 봄의 기운을 돕고 있다.

▲  녹색과 붉은색이 입혀진 서호 서쪽길
(왼쪽 볏집은 서호 철새간이탐조대)

서호는 상류에서 따스한 물(13도)이 흘러들어와 겨울에도 잘 얼지 않는다. 그래서 일찍이 철새
들이 눈독을 들이면서 4계절 내내 흰뺨검둥오리, 가무우지, 가창오리, 왜가리 등이 무수히 찾
아온다. 이들은 서호 서쪽 여기산에 둥지를 틀고 서호에서 물고기를 잡아 삶을 꾸린다.

수원 도심 속 철새들의 성지로 그들을 관찰하라는 뜻에서 서쪽길에 볏집으로 벽을 만들고 성인
눈 높이 정도에 조그만 구멍을 내어 그들을 훔쳐볼 수 있게 했는데, 대놓고 살펴보면 철새들도
다소 민망해하거나 경계를 품을 것이니 그런 속임수를 쓴 것이다.


▲  서쪽길에서 바라본 서호 - 물결이 참 잔잔하기도 하다.

▲  서쪽길 개나리 너머로 본 서호와 섬 (가운데 보이는 것이 섬)


 

♠  서호의 풍치를 드높이는 양념과 같은 존재, 항미정(杭尾亭)
- 수원시 향토유적 1호

▲  서호 서남쪽 수문에서 바라본 항미정

서호 서남쪽 언덕에는 항미정이란 조촐한 모습의 정자가 호수를 굽어보고 있다. 'ㄱ'(또는 'ㄴ
') 모양의 납도리집으로 홀처마로 이루어진 43.5㎡의 팔작지붕 건물인데 앞쪽(동쪽)은 뻥 뚫려
있고, 뒤쪽(서쪽)은 벽으로 막혀 있다.

이 정자는 서호 초창기부터 있던 것이 아닌 1831년에 생긴 것으로 당시 화성유수(華城留守) 박
기수(朴綺壽)가 서호에서 풍류를 즐기고자 세웠다. 그는 석양에 비치는 여기산의 그림자를 보
고 팔자 좋게 소식<蘇軾, 소동파(蘇東坡)>의 시를 읊었는데, 그 과정에서 '서호는 항주(杭州)
의 미목(眉目)같다'고 해서 항주와 미목의 1글자를 취해 항미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서호의 풍치를 아름답게 해주는 양념으로 서호와 함께 오랫동안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근래 개
방되었으며 개방 이전에 농촌진흥청에서 정자 서쪽 언덕을 뒤집고 도서관을 만들어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항미정은 툇마루를 갖추고 있는데, 화서역을 기준으로 서호 둘레길을 1바퀴 돌 경우 이곳이 거
의 중간 지점이 된다. 그러니 여기서 잠시 쉬어 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단 정자 내부로 들어
가면 안됨) 게다가 그늘진 곳이라 땀도 알아서 줄행랑을 칠 정도로 시원하며 정자 주변에는 푸
른 잔디가 곱게 입혀져 있다.


▲  정면에서 바라본 항미정 - 정자로 인도하는 계단을 오르면
바로 항미정이 몸을 내민다.

▲  남쪽에서 바라본 항미정

▲  북쪽에서 바라본 항미정

◀  항미정 현판과 툇마루
정자 내부는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그러니
툇마루에 잠시 걸터 앉는 수준으로만
머물기 바란다.


▲  항미정에서 바라본 서호와 버드나무

▲  서호 서남쪽 수문 위에 걸린 다리

▲  서남쪽 수문 다리에서 바라본 남쪽 둑방

서호에 모인 물은 서남쪽 수문(항미정 옆)과 동남쪽 수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간다. 서남쪽 수
문은 매일 일정량의 물을 배출하여 서호천의 바다 행을 돕고 있으며, 동남쪽 수문은 농촌진흥
청(국립식량과학원)과 서울대 농생대 경작지에 물을 제공하는 용도로 쓰여 서남쪽 수문보다는
다소 한가하다.


 

♠  서호 마무리

▲  옛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한 서호 남쪽 둑방

서호를 지키고 선 남쪽 둑방은 서울 풍납토성(風納土城) 만큼이나 높고 두껍다. 서호천과 만석
거에서 내려온 막대한 물을 담아야 되기 때문인데, 둑방 남쪽은 여기보다 지대가 낮은 경작지
라 둑방이 자칫 와해된다면 그 경작지는 물론이고 서둔동과 수원역 주변까지 피해를 받는다.
남쪽 둑방길은 서호 동/서/북쪽길보다 조금 넓은 편으로 다른 길과 달리 비포장 흙길을 유지하
고 있어 정겹기만 하다. 또한 오래된 나무들이 둑방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고색의 풍치까지 더
해준다.


▲  둑방에 자라난 오래된 소나무의 위엄

▲  둑방에 세워진 축만제 비석 - 고색의 때가 묻어난 비석 피부에 새겨진
'축만제' 3자가 꽤 패기가 있어 보인다.

▲  남쪽 둑방에서 바라본 서호와 여기산 (오른쪽에 보이는 산)
서호는 여기산과 호수 주변의 동/식물들, 하늘을 떠다니는 온갖 존재들이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는 그들의 커다란 거울이다.

▲  남쪽 둑방길에는 소나무가 여럿 심어져 조촐하게 운치와
그늘을 드리운다.

▲  늘씬하게 잘 빠진 남쪽 둑방길 ▼



▲  둑방 남쪽에 펼쳐진 농촌진흥청(국립식량과학원), 서울대 농생대 경작지
<시험답(試驗畓)> - 서호의 물을 먹고 자라는 시험 경작지로 연구/개발된
다양한 육종(育種)들이 이곳을 거쳐 천하에 보급된다.

▲  남쪽 둑방에서 바라본 서호와 섬

▲  서호 동남쪽에서 바라본 서호와 여기산, 그리고 호수와 마주한
푸른 하늘과 구름의 무리들

▲  갈대가 살랑거리는 서호 동남쪽

▲  서호 동남쪽과 남쪽 둑방

▲  서호 동쪽 산책로

▲  서호 동쪽에서 바라본 서호와 섬

▲  서호 동북쪽 (왼쪽에 보이는 산이 여기산)

▲  서호 동북쪽 산책로

▲  경부선 육교에서 바라본 서호(서호공원)

▲  경부선 육교에서 바라본 경부선과 서호공원

서호를 1바퀴 둘러보니 1시간 30분이 훌쩍 흘렀다. 아직 일몰까지는 여유가 있어 1곳을 더 둘
러보기로 하고 정처를 물색하다가 수원 동북부 우만동에 있는 봉녕사(奉寧寺)가 문득 뇌리 속
에 스쳐 지나가 그곳을 찾기로 했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으며 본글은 여기서 흔쾌히 마무리를 짓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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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동해바다를 거닐다. 부산 기장 봄나들이 ~~~ (죽성리왜성, 죽성항, 황학대, 죽성성당, 장어구이 1접시)

 


' 부산 기장 동해바다 나들이 (기장 죽성리 일대) '

▲  죽성리왜성에서 바라본 죽성리와 동해바다
(정면에 큰 나무가 죽성리해송)

▲  죽성리왜성

▲  죽성리 월전포구


 

 

지루했던 겨울이 저물고 봄이 완전히 천하를 접수했던 4월의 한복판에 겨울로부터 해방된
기분도 만끽할 겸, 그리운 얼굴도 보고자 간만에 부산을 찾았다.
부산(釜山)은 이 땅의 2번째 대도시이자 천하 제일의 항구 도시로 북쪽은 울산 울주군(蔚
州郡), 서쪽은 경남 창원과 김해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동쪽은 너른 동해바다를 품고 있
으며, 남쪽은 바다 건너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는 큰 지역이다.

부산으로 내려가던 중, 잠시 대구에서 발길을 멈추고 팔공산(八公山)에 안긴 파계사(把溪
寺)와 성전암(聖殿庵)을 둘러보며 산사(山寺)의 봄 풍경을 즐겼다. (☞ 관련글 보러가기)
그런 다음 동대구 고속터미널에서 고속버스로 부산으로 내려가 광안동(廣安洞)에 있는 친
한 형님 집에 문을 두드렸다.

저녁을 먹고자 광안리 해변 인근을 거닐다가 소금구이 닭갈비집이 눈에 띄어 그곳에 자리
를 피고 닭갈비에 소주를 여러 잔 걸치며 간만에 회포를 풀었다. 물론 1차로 끝나면 섭하
지. 하여 집으로 돌아와 2차를 하며 다음날 나들이 장소를 모의하다가 새벽 1시에 꿈나라
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찬란한 여명의 재촉을 받으며 부시시 잠에서 깨니 벌써 9시였다. 그
날 일정은 다소 길기 때문에 잠에서 벗어나기 싫은 게으른 몸을 억지로 끌며 세수를 하고
10시에 광안동을 나섰다. 광안역 정류장에 이르니 그의 후배 하나가 합류하여 3명이서 기
장군(機張郡) 동해바다 나들이를 떠나게 되었다.

광안역에서 부산시내버스 39번(기장읍 교리↔용호동)을 타고 수영로터리, 해운대, 송정역
, 청강리를 지나 기장읍내 한복판에 자리한 기장지구대에서 내렸다. 그런 다음 건너편 정
류장에서 죽성리로 가는 기장군 마을버스 6번을 기다리니 5분도 안되어 버스가 나타나 활
짝 입을 벌린다.
주말 나들이 수요로 조그만 마을버스는 바퀴가 가라앉을 정도로 만석을 이루었다. 우리는
재빨리 탑승하여 앉아갈 수 있었지만 조금만 늦었어도 입석 신세를 면치 못할 뻔했다. 비
록 죽성리까지 10분 정도 거리에 불과하지만 서서 가는 것은 애나 어른이나 힘든 것은 마
찬가지이다.
버스는 시간이 되자 읍내에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몸을 움직였다. 죽성사거리와 기장
군청 남쪽 고개, 신천리를 지나 죽성초교에서 두 발을 내리니 바로 남쪽 언덕에 우리의 1
번째 목적지인 죽성리 해송이 기다리고 있었다.


 

  6그루가 합심하여 하나의 거대한 나무를 이룬 오래된 소나무
죽성리해송(竹城里海松) - 부산 지방기념물 50호

▲  죽성리해송의 위엄

죽성리 두호마을 서쪽에는 얕으막한 언덕이 푸른 초원처럼 누워있다. 대부분 경작지가 이루어
진 그 언덕 정상에는 유난히도 초록 빛을 발하는 장대한 소나무가 동대해(東大海)를 굽어보고
있으니 그 나무가 바로 이곳의 오랜 명물인 죽성리 해송이다.

죽성리 해송은 소나무의 일종인 곰솔로 줄기 껍질이 다른 소나무보다 검다고 해서 흑송(黑松)
이라 불리기도 하며, 바닷가 소나무란 뜻의 해송(海松)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곰솔은 남쪽
바닷가에서 많이 자라고 있는데 소금기가 서린 짠 바닷바람에도 잘 견딘다.
이 나무는 겉으로 보면 1그루로 보이지만 6그루의 나무가 한 지붕을 이룬 것으로 높이 약 10m,
나무 지름이 30~40m에 달한다. 나이는 250~300년 정도로 여겨지며 언덕에 있는 경작지를 바닷
바람의 핍박으로부터 보호하고자 심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 곰솔 가족은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
며 서로를 보듬고 있으며, 거의 하나의 나무처럼 자라고 있어 안내문을 살피지 않으면 정말 1
그루의 나무로 오인하기 쉽다.
나무의 키가 훤칠하게 크고 덩치도 제법 있으며, 반경 0.5리 이내에는 키 큰 나무도 거의 없어
세상 중심에 서 있는 큰 나무처럼 웅장함을 진하게 풍긴다. 그리고 나무의 자태도 아름답고 바
다가 바라보이는 언덕 정상에 자리해 있어 사진쟁이와 그림쟁이들이 많이 찾는다.

해송의 그늘로 들어서면 나무들 사이로 조그만 당집인 국수당이 끼여있다. 나무가 제법 풍채를
드러내며 자라나자 마을 사람들이 나무 사이에 당집을 만들어 마을 성황신을 모시는 국수당으
로 삼았는데,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제물을 푸짐하게 차리고 풍어제(風魚祭)를 지낸다. 이 땅
의 어느 마을이든 마을의 안녕을 책임지는 당집이 있지만 나무 사이에 당집을 둔 경우는 별로
없다.

* 죽성리해송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249


▲  죽성리해송에서 바라본 죽성리 두호마을과 동대해

▲  해송 밑에 둥지를 틀어 마을을 지키는 국수당(성황당)
태극 문양이 그려진 국수당은 풍어제 등 당제(堂祭) 외에는 굳게 닫혀져 있다.
나무 밑도리 사이에 당집이 깃든 흔치 않은 곳으로 당집 좌우에는
돌로 벽을 만들어 내부를 보호한다.

▲  솔잎과 솔방울, 거기에 장대한 세월의 무게까지 듬뿍 더해져 가지가
거의 땅으로 내려 앉았다. <철기둥을 세워 가지가 땅에 완전히
주저앉지 않도록 막고 있음>

▲  죽성리해송 인근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기장 미역
기장은 미역이 유명하다. 이렇게 해송 인근에 널어두었으니 해송의 기운도
양념으로 듬뿍 더해져 더욱 최상품으로 끌어올려줄 것이다.


 

  죽성리에서 만난 임진왜란의 쓰라린 흔적
죽성리왜성(竹城里倭城) - 부산 지방기념물 48호

▲  죽성리해송에서 바라본 죽성리왜성 (산꼭대기에 보이는 성)

죽성리해송에서 서쪽(바다와 반대쪽)을 보면 높다란 언덕 위로 성곽 하나가 손에 잡힐 듯 가까
이에 보일 것이다. 그 성곽이 바로 임진왜란이 이곳에 남긴 쓰라린 흔적, 죽성리왜성이다.

해송에서 정겨운 시골길을 5분 정도 가면 왜성을 품은 언덕 밑에 이른다. 이곳에는 주차장, 해
우소가 있는데, 여기서 성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을 타고 2~3분 오르면 왜성의 아랫도리에 이
른다. 계단은 답사 편의를 위해 기장군에서 닦은 것으로 계단 옆에 흙길이 나란히 이어져 있으
니 개인 취향대로 움직이면 된다.
왜성 아랫도리에서 조금 더 오르면 왜성의 중심부이고, 중심부 서남쪽에 왜성 꼭대기가 있는데,
그곳에는 왜성의 본부라 할 수 있는 천수대(天守臺)터가 있다. 천수대의 모습은 왜열도 오사까
성(大阪城)에 있는 푸른 지붕을 지닌 큰 기와집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죽성리왜성은 1593년 봄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왜군과 지역 주민을 동원해 쌓은 순수
100%의 왜성(倭城)이다. 한참 북진을 하며 세를 과시하던 왜군은 1593년에 접어들어 조선의 대
대적인 토벌 작전과 왜열도에서는 맛보기 힘든 강추위로 고전하면서 순식간에 울산과 기장, 부
산, 창원 등 경상도 해안 지역으로 밀려났다.
더 이상 밀려나기 싫었던 왜군은 바다와 무척이나 가까운 산과 언덕에 성을 쌓고 자기 집 마냥
들어앉아 장기전을 준비했다. 그들이 해안가 언덕을 선호한 것은 수비력 강화와 서로 간의 긴
밀한 연락 및 병력/군수물자 수송 편의, 그리고 위급시 신속히 줄행랑을 치고자 함이다.

이 왜성은 죽성리 뒤쪽 언덕에 자리해 있는데,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과 부산왜성 중간에 자
리해 서로를 연결하였다. 성 둘레는 약 960m, 성벽 높이 4m로 3단으로 축성되었으며, 성내(城
內) 면적은 11,776평 정도로 왜성 가운데 큰 편에 속한다. 장방형(長方形)의 크고 작은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성벽은 안쪽으로 조금씩 기울어진 이른바 들여쌓기 공법이다. 이 공법은 천하
제일의 축성술(築城術)을 자랑했던 고구려(高句麗)의 축성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부산왜성과 형태가 비슷하며, 왜열도에서는 기장성(機張城)이라 부른다. 지금도
왜열도에서 많이 답사를 온다고 하는데, 1598년 왜군이 도망친 이후 성이 버려지면서 천수대와
성문, 주요 시설이 사라졌고, 마을 사람들이 밭을 일구거나 집을 지으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
다. 허나 성곽은 쓸데없이 잘 남아있어 왜성 가운데 건강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한때 사적 52호의 외람되는 지위를 누리기도 했으나 1997년 사적에서 정리되어 버려졌다가 부
산시에서 지방기념물로 수습해 죽성리해송, 죽성성당, 죽성리 해변과 한 덩어리로 묶어 기장군
의 주요 명소로 키우고 있다.

왜성 주변은 상당수 경작지로 쓰이고 있으며, 왜성 북쪽과 계단이 있는 남쪽에는 소나무가 조
금 우거져 마치 양쪽에만 머리숱이 조금 있는 대머리를 보는 듯 하다.


▲  죽성리왜성으로 오르는 나무 계단
계단 주변은 유난히 소나무가 무성하여 이 땅을 요란하게 거치고 간 아픈 과거를
조금이나마 덮어주는 듯 하다. 그런다고 그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  풀이 잔잔히 돋아난 죽성리왜성의 아랫부분

▲  약간 비스듬히 누운 죽성리왜성의 본성(本城)

▲  왜성 외곽에서 본성으로 이어지던 성문터
왜성은 작은 산이나 언덕에 짧게 몇 겹으로 두룬 덩어리 같은 형태라 딱히
긴 성이 없다. 그나마 서생포왜성이 좀 긴 편에 속한다.

▲  죽성리왜성에서 바라본 죽성항과 두호마을
저 포구에 배를 정박해 주변 왜성과 수시로 연락을 취하며 병력과 물자를
수송했고 끝내는 저곳을 통해 줄행랑까지 쳤다.

▲  죽성리왜성에서 바라본 죽성리
평화로운 어촌 풍경에 속세에서 오염된 안구와 마음이 정화되는 듯 하다.
바닷가에 죽성리 두호마을과 월전마을(사진 오른쪽)이 형성되어 있고,
마을과 포구 주변에는 경작지가 많아 나무가 별로 없다.

▲  왜성 성곽에 뿌리를 내린 나무
하늘을 향해 무언가를 애타게 열망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  왜성의 중심인 본환(本丸, 본성)

▲  연병장처럼 넓은 본환 - 잡초가 잔잔히 녹색 물결을 이룬다.

▲  죽성리왜성 서쪽에 길게 누운 봉대산(烽臺山) 북쪽 자락

죽성리왜성은 계곡이 없는 낮은 언덕에 자리해 있어 물이 나오는 곳이 없다. 왜성 서쪽에 있는
봉대산에서 식수를 운반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군이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후방이라 물 수송에
는 그리 어려움은 없었다. <봉대산에는 봉수대(烽燧臺)가 있었음>

▲  본환의 서북쪽 성곽

▲  북쪽에서 바라본 본환 내부


▲  죽성리왜성의 꼭대기인 천수대(天守臺)터

왜성 정상부에 자리한 천수대는 왜장이 자고, 먹고, 부하들을 지휘하던 공간으로 사방이 확 트
여 조망(眺望)도 일품이다. 천수대의 모습은 왜열도 오사까성이나 구마모토성 천수각의 축소판
으로 보면 될 듯 싶다. 지금은 풀만 무성하나 바다를 바라보며 우뚝 자리했을 천수대의 모습이
자못 대단했을 것이며, 조선군의 공격 가능성이 적은 후방이라 왜장은 무척 편하게 지냈을 것
이다. (조선군이 서생포왜성을 점령해야 이곳을 마음 편히 공격할 수 있었음)

※ 죽성리해송, 죽성리왜성 찾아가기 (2017년 4월 기준)
① 부산시내에서 기장읍까지
* 지하철 2호선 해운대역(1/7번 출구)에서 39, 181번 시내버스를 타고 기장지구대 하차 (181번
  은 해동용궁사, 대변으로 다소 돌아감)
* 지하철 2호선 장산역(5/7번 출구 사이)에서 182번 시내버스를 타고 기장지구대 하차 (30~40
  분 간격)
* 지하철 4호선 안평역(4번 출구)에서 36, 183, 188번 시내버스를 타고 기장지구대 하차 (183,
  188번을 탔을 경우 기장중학교, 기장성당에서 내려도 됨)
* 부산대병원(1호선 토성역 9번 출구), 남포동, 부산역, 경성대 부경대역(1번 출구)에서 1003
  번 급행좌석버스를 타고 기장성당이나 기장지구대 하차
* 동해선 전철(부전↔일광)이나 동해남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기장역에서 하차, 1번 출구
  를 나와서 4분 정도 걸으면 기장중학교 정류장이다.
② 기장에서 죽성리까지
* 기장지구대, 기장중교(기장역 1번 출구), 기장성당에서 기장군 마을버스 6번(20~40분 간격)을
  타고 죽성초교 하차, 해송까지는 도보 5~6분, 왜성은 10분 정도 소요 / 황학대는 두호마을에
  서 내리면 되며, 월전마을은 월전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
③ 승용차
* 부산시내(반송/해운대) → 죽성4거리에서 죽성리 방면 죽성로로 진입 → 죽성초교 → 죽성리
  해송, 죽성리왜성, 죽성성당 (왜성 밑에 주차장 있음 / 해송은 인근 길가에 주차)

* 죽성리왜성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603일원


 

  죽성리 바닷가 둘러보기 (황학대, 죽성성당)

▲  죽성항 (오른쪽에 나무가 우거진 곳이 황학대)

▲  죽성리의 오랜 경승지, 황학대(黃鶴臺)

씁쓸한 화석으로 이 땅에 남아있는 죽성리왜성을 둘러보고 죽성항(죽성포구)으로 나왔다. 죽성
리는 동대해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어촌이지만 볼거리와 해산 먹거리가 풍성하
여 생각 외로 머무는 시간을 길게 만든다. 우선 앞에서 언급한 죽성리해송과 왜성이 있고, 바
닷가에는 황학대와 드라마 촬영지였던 죽성성당이 있으며 마을 남쪽에는 월전마을이 있다. 먹
거리는 죽성리 북부인 두호보다는 남부인 월전이 더 많은데, 이곳은 장어구이가 유명하다.

죽성항에는 소나무가 우거진 조촐한 바위 동산이 포구의 운치를 조금 돋구고 있다. 이 동산은
기장의 오랜 명승지인 황학대로 예전에는 거의 섬이었으나 방파제와 항만 시설이 닦이면서 육
지로 흡수되었다.


▲  황학대의 동남쪽 부분

황학대는 조선 중기에 활동했던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윤선도야 워
낙 유명한 인물이니 모르는 이는 거의 없겠지만 그가 여기서 오랫동안 유배살이를 했던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나도 여기서 처음 알았음~~

그는 1616년(광해군 8년) 광해군(光海君)을 지지하는 북인(北人) 일파의 죄상을 밝히는 병진소
(丙辰疏)를 올린 것이 원인이 되어 서울에서 2,000리 이상 떨어진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떨려
났다. 그러다가 1년 뒤, 거기서 3,000리 이상 떨어진 기장 죽성리로 이송되어 7년이나 유배생
활을 했다. 귀양살이 때문에 조선 땅을 남북으로 완전 종주를 했던 것이다. 토가 나올 정도로
그 먼거리를 강제로 이동하느라 고산도 무척 진을 뺐을 것이다.

윤선도는 백사장 건너에 있는 송도(松島)를 옛날 신선이 황학(黃鶴)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서린 양자강(揚子江) 하류의 황학루(黃鶴樓)와 견주어 황학대로 멋대로 이름을 갈고 매
일같이 찾아와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시름을 달랬다.
그는 여기서 견회요(遣懷謠), 우후요(雨後謠) 등의 주옥 같은 시 6개를 남겼으며, 죽성리 뒷산
인 봉대산에 자주 올라가 약초를 캐어 병에 걸린 지역 사람들에게 약을 지어주거나 치료를 해
주니 죽성 사람들은 그를 서울에서 온 의원님이라 부르며 존경했다고 한다.

이곳에 오르던 윤선도도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20세기 후반에 방파제와 항만 공사로 백사장 또
한 이슬처럼 사라졌으며, 강제로 연륙되어 육지의 일부가 되버리면서 옛 운치도 다소 녹아내렸
다. 게다가 이곳을 덮고 있는 소나무도 1995년 수해로 뿌리가 뽑히는 피해를 입었는데, 이후로
도 계속 나무들이 말라가면서 황학대는 그야말로 세월의 무덤 같은 곳이 되버렸다.
다행히 기장군청에서 1,000만원의 돈을 들여 황학대를 살피면서 나무들이 다시 살아났고 웃음
을 잃었던 황학대의 표정도 밝아지면서 이곳의 풍경을 크게 수식해주는 꿀단지가 되었다.


▲  황학대의 정상 부분
윤선도 뿐 아니라 지역 선비들과 동네 사람들이 술 1잔의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  두호마을 당집
바다에 제를 지내는 당집으로 굳게 닫힌 문짝에 3색 태극마크가 그려져 있다.

▲  죽성항의 평화로운 풍경
바깥 세상은 아비규환처럼 숨가쁘게 흘러가건만 이곳은 모든 게 정지된 듯
그저 한가롭기만 하다. 죽성리왜성이 활용되던 임진~정유란 시절에는
왜군들의 배로 득실거렸던 현장이기도 하다.

▲  바닷가에 자리한 죽성성당

두호마을 남쪽 바닷가에는 서양 동화에나 나올법한 작은 성당(聖堂)이 있다. 이 성당은 2009년
에 방영된 드라마 '드림(Dream)'의 촬영장으로 콩 볶듯이 지어진 것으로 겉모습만 성당이다.
아담하게 생긴 성당과 주변의 해안 풍경이 아름다워 죽성리의 새로운 명소로 추앙받고 있으며,
처음에는 죽성성당이라 불리다가 드라마 이름을 따서 '드림성당'으로 바꾼 것을 다시 죽성성당
으로 갈았다. 지어진지 10년도 되지 않았건만 건물이 벌써부터 노화현상을 보여 2017년 2월 새
로 지었는데, 이때 지역 사람들이 종교적인 부분을 지워줄 것을 요청하여 마리아상과 십자가를
싹 치워버렸다. 그래서 정체가 더 아리송한 성당 아닌 성당이 되어버렸다.

▲  세월의 저편으로 사라진 하얀 피부의
성모마리아상 (지금은 없음)

▲  옆에서 바라본 죽성성당
성당 바로 옆에 등대가 붙어있다.


▲  죽성성당 주변 바닷가에 드러누운 울퉁불퉁 바위들

▲  죽성리의 어느 장어구이집에서 먹은 장어구이

죽성리 일대를 정신없이 누비니 어느덧 13시가 넘었다. 아침도 먹지 못한 터라 뱃속은 그야말
로 폭동 직전, 하여 불만에 잠긴 뱃속을 달래고자 점심 장소를 물색하다가 월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적당한 식당이 눈에 띄어 그곳으로 들어갔다.
두호마을은 회와 조개, 장어구이를 다루는 식당이 여럿 있지만 장어구이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월전마을에 밀려서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다. 그에 반해 우리가 들어간 식당과 월전마을의 많
은 식당들은 봐글봐글하다.

우리는 주차장이 바라보이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황제처럼 먹을 요량으로 남정네에게 무척
이나 좋다는 장어구이와 모듬조개구이를 주문했다. 이렇게 장어와 조개구이를 먹으니 곡차 1잔
을 겯드려야 되겠지. 그래서 동동주도 넉넉히 시켰다.


▲  모듬조개구이의 위엄

자신을 불태우는 숯불 위에 먼저 장어를 올려 모락모락 익혀 입에 넣는다. 장어는 맛이 좀 별
로였으나 장어 후속으로 구운 모듬조개구이는 맛깔스러웠다. 큰 조개 안에 조개살을 비롯해 파
와 마늘 등이 버무려져 하나의 작품처럼 나왔는데, 숯불 위에서 지글지글 구우니 거기서 나오
는 육수(조개의 눈물)가 제법 끝내줬다. 그래서 서로 조개를 더 챙기려고 아우성을 떨었다.

밑반찬은 김치와 도토리묵, 상추, 산채나물 등 대략 8가지 정도가 펼쳐졌다. 밑반찬도 그런데
로 맛이 괜찮아 밥도둑이 따로 없었으며, 금세 동이 나고 더 달라고 한 것이 가히 5번은 넘을
듯 싶다. 동동주도 금세 1동이를 비워 하나를 더 불렀는데 배가 불러 간신히 2번째 동이를 비
웠고, 메밀막국수로 식사를 기분 좋게 마무리하였다.
그렇게 점심을 먹어대니 폭동 직전이던 뱃속은 며칠을 굶어도 끄떡 없을 정도로 가득 찼고, 식
곤증의 일환으로 졸음이 슬쩍 마수를 부리자 후식 커피로 그들을 쫓아내며 다시 길을 재촉했다.
일행들은 송정(松亭)까지 걸어가자고 했으나 여기서 거기까지는 20리가 넘는 거리이다. 하지만
일단 갈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가보기로 했다.


▲  남쪽에서 본 월전마을 (월전포구, 월전방파제)

죽성리의 남부를 이루고 있는 월전마을에서 대변까지는 3km 정도 된다. 이 구간을 운행하는 시
내버스나 마을버스는 일체 없으며, 1.5~2차선 정도의 길이 바다와 적당히 거리를 두며 이어진
다. 월전 남쪽에는 식당을 비롯해 분위기를 내세운 카페들이 뿌리를 내렸고, 그 이후 대변(大
邊) 동쪽까지는 드문드문 민가(民家)가 보일 뿐이다.
휴일이라 그런지 월전, 죽성으로 외식을 가거나 나들이를 나온 차량들이 3분이 멀다하고 지나
갔고 대변에서 월전 구간을 걸어서 이동하는 도보꾼도 종종 눈에 띈다. 바닷가는 중간에 등대
가 있는 곳을 빼고는 어디든 자유롭게 바다 곁으로 내려갈 수 있다.


내용 분량상 본글은 여기서 끝 ~~ 이후 내용은 언젠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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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겨울 산사 나들이 ~~~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절집, 청주 낙가산 보살사 (석조이불병립상, 명암저수지)

 


' 늦겨울 산사 나들이, 청주 낙가산 보살사 (명암저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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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살사에 제일 가는 보물, 석조2불병립상


 

겨울 제국이 슬슬 쇠퇴기에 접어들던 2월 끝 무렵, 충청도의 오랜 중심지인 청주(淸州)를
찾았다. 청주에서 나에게 오라는 곳도 불러준 이도 없지만 왠지 그곳의 여러 명소가 땡겨
나그네 본능에 따라 미련없이 길을 나선 것이다.

청주시외터미널(가경동)에 도착하니 시간은 11시가 어느덧 넘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
景)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듯이 우선 요기부터 하기로 하고 터미널 2층에 있는 한식뷔페
기사식당에서 두둑히 배를 채웠다. 자고로 뱃속이 든든해야 일이 편한 법이다.
청주에는 이미 정처(定處)는 정해진 상태라 얌전하게 그곳을 찾아가면 되는데, 우선 시내
로 나가는 청주시내버스 832번(석판↔흥덕구청)을 타고 무심천을 건너 충북도청으로 넘어
가 청주시내버스 922번(보살사↔청주대)으로 갈아탔다.

용암지구까지는 시가지가 울창하게 펼쳐져 있다가 롯데마트 상당점을 지나면서 차창(車窓
) 밖 풍경은 겨울에 잠긴 시골 풍경으로 바뀌었다. 그 시골길을 거침없이 내달려 시내 동
남쪽 변두리에 박힌 보살사 종점에서 육중한 바퀴를 접는다.
버스에서 내려 절로 다가서니 경내 밑에 약수터가 있다. 보살사를 포근히 품은 낙가산(洛
迦山, 475m)이 속세에 베푼 약수로 물 낭비를 줄이고자 수도꼭지를 달았다. 하여 물을 마
시려면 집에서 수돗물을 틀듯이 꼭지를 틀면 된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
을 한가득 담아 마시니 몸 속에 낀 속세의 기운이 말끔히 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 없다.

약수를 마시고 오른쪽으로 난 돌담길을 오르면 청주에 숨겨진 오래된 산사(山寺), 보살사
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서서히 떠오르듯 펼쳐진 돌담길은 시멘트 대신 흙을 입혔으면 더
정겨웠을 것을 그것이 좀 아쉽다.


▲  보살사 경내로 인도하는 돌담길


 

♠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절집, 낙가산 보살사(菩薩寺)

▲  보살사 극락보전

낙가산(475m) 서쪽 자락에 아늑하게 둥지를 튼 보살사는 청주 땅에서 가장 오래된 절로 1530년
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거론된 청주의 절집 중, 지금까지 살아있
는 유일한 절이다. 즉 청주 불교의 화석과 같은 존재이다. <직지심경(直指心經)의 탄생지인 흥
덕사(興德寺)는 고려 때 파괴됨, 남이면에 있는 안심사(安心寺)는 청주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생략>

보살사는 법주사(法住寺)를 세웠다고 전하는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이를
증명할 유물이나 기록은 없다. 다만 창건과 관련된 다음에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1토막 전해온
다.
의신조사는 중생을 교화할 새로운 도량를 찾고자 기도에 들어갔다. 회향일(回向日)을 앞둔 어
느 날, 기도를 하던 의신은 비몽사몽간에 선인(仙人)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선인은 '그대의
기도가 지극하니 좋은 인연이 있을 것이오. 지금 대문을 나가보면 한 노파가 있을테니 그에게
물어 보시오'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래서 의신은 밖으로 나가보니 정말로 한 노파가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이에 의신이 노
파를 부르며 불이 나게 쫓아갔지만, 노파는 돌아보지도 않고 제 갈 길만 빠르게 가고 있어 두
사람간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노파는 한참 후에야 발을 멈췄는데, 의신이 다가가
서 얼굴을 보니 그 노파는 다름아닌 관음보살 누님이었다고 한다.

뜻하지 않은 관음보살의 등장에 기쁨에 가득 찬 의신은 무릎을 끓고 절을 올리며, 새로운 도량
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관음보살이 '그대가 찾고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하고는 발길
을 돌리려고 하자 의신이 깜짝 놀라 '관음보살 누님께서는 어디로 가려고 합니까?' 물으니 관
음보살이 웃으며 '나는 이곳에 늘 머물러 있을테니 걱정하지 마라' 답하였다. 의신은 그의 센
스 넘치는 답변에 크게 감격을 했다고 한다.

어쨌든 의신은 관음보살이 알려준 곳에 절을 짓고, 그가 일러준 곳이라 하여 '보살사'라 하였
다. 또한 관음보살이 항상 머무는 곳이라는 뜻에서 산 이름을 보타낙가산(寶唾洛迦山)이라 했
으며, 이후 그 줄임말인 낙가산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그 연유로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칭하
고 있다. (충청북도에 널린 수많은 옛 절 가운데 유일한 관음도량이라고 함)
산의 이름에서부터 불교식 이름과 관음보살의 향기가 물씬 배어나오니 창건 당시 또는 중간에
관음도량으로 영업을 하면서 그럴싸한 전설을 지어내었고 산 이름도 낙가산으로 바꾼 것이다.

778년에 진표율사(眞表律師)의 제자 융종(融宗)이 중창했다고 하는데, 극락보전에 신라 후기에
조성된 이 땅에 흔치 않은 이불병립상이 있어 이 시기에 융종이 창건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918년에는 고려 태조(太祖)의 5번째 아들인 증통국사(證通國師)가 중창했다고 하는데, 증통은
태조의 3번째 왕후인 신명순성왕후 유씨(神明順成王后 劉氏)의 소생으로 고려 3대 군주인 정종
(定宗)과 4대 군주인 광종(光宗)의 친동생이 된다. 광종이 925년 생이니 증통은 그 이후에 태
어난 것이 되는데, 어찌 태어나기도 전인 918년에 중창을 했다는 것인지 어이가 달아날 따름이
다. 아마도 시기가 잘못되거나 보살사와 인연도 없는 왕자 출신 승려를 억지로 끼어 넣다 발생
한 치명적인 오류인 듯 싶다.

1107년 자정(慈淨)이 중창을 했다고 하며, 고려 말에는 공민왕(恭愍王)이 절을 꾸리는데 쓰라
며 농토(農土)를 내렸다고 한다. 또한 1458년에는 세조(世祖)의 어명으로 절을 중수했다고 하
니 왕실과도 적지 않게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쓰러진 것을 1626년 벽암(碧巖)의 제자인 경특(瓊特)이 다시 일으켜 세
웠으며, 1683년에 일륜(日輪)이 크게 중수를 벌였다. 그러다가 왜정(倭政)과 6.25를 거치면서
퇴락된 것을 1988년부터 대대적인 중창을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경내 서쪽 산
등성이 너머에도 새로 터를 다져 직지보림선원을 세웠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명부전,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직지보림선원에는 큰법당과 선방 등의 건물이 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보물 1258호로 지정
된 영산회괘불탱을 비롯하여 석조이불병립상, 극락보전, 5층석탑 등의 지방문화재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특히 영산회괘불탱(1649년)은 석가탄신일과 주요 행사 때만 공개되
는 귀한 몸으로 평소에는 관람이 불가능하다.

한참 팽창중인 청주 시내와 적절히 거리를 두며 산 속에 포근히 자리해 있어 고즈넉한 산사의
멋과 여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으며, 관광지로 개발되지 않아 절 밑에는 그 흔한 식당도 마을
도 없다. (마을은 1리 정도 나가야 됨)
절도 조촐한 규모로 두 눈에 넣어 보기에 그리 부담이 없으며, 극락보전에는 매우 희귀한 2불
병립상이 있어 겉보기와 달리 보통 절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 낙가산 보살사 찾아가기 (2017년 3월 기준)
청주까지 (버스, 철도)
* 서울고속버스터미널, 남부터미널, 동서울터미널에서 청주행 고속/직행버스가 수시로 떠난다.
* 부산(노포동, 사상), 대구(동대구), 광주에서 청주행 고속버스 이용
* 김포공항, 고양, 의정부, 부천, 인천, 광명(철산역, 광명역), 안양, 성남, 수원, 평택, 이천
  에서 청주행 직행버스 이용
* 대전(복합/유성), 대구(서부), 천안, 원주, 강릉, 충주, 제천, 공주, 구미, 창원에서 청주행
  직행버스 이용
* 대전 신탄진역 건너편에서 405, 407번 청주좌석버스 이용 (도청이나 상당공원에서 하차하여
  건너편 정류장에서 922번 이용)
* 서울역, 용산역, 수서역, 광명역, 동대구역, 부산역, 마산역, 익산역, 광주송정역, 여수엑스
  포역에서 고속전철(KTX, SRT)을 타고 오송역 하차
② 현지교통
* 청주시외/고속터미널, 청주역, 오송역(502, 747번), 조치원역(502번)에서 상당공원/도청 방
  면 시내버스를 타고 도청이나 6거리, 상당공원(내린 자리에서 길 맞은 편)에서 922번 시내버
  스로 환승(거의 1시간 간격)
③ 승용차 (절 밑에 주차장 있음, 자세한 경로는 인터넷이나 네비양 참조)
* 경부고속도로 → 청주나들목을 나와서 청주 방면 → 강상촌분기점에서 남청주 방면 3순환로
  → 양촌분기점에서 청주 시내 방면 → 분평4거리에서 1순환로로 우회전 → 방서4거리 직진
  → 용암지하차도로 들어서지 않고 가변으로 빠져서 4거리에서 우회전 → 보살사

* 관람료와 주차비는 없음
*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7 (낙가산로 168 ☎ 043-297-7526)


▲  보살사 극락보전(極樂寶殿)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56호

보살사는 다른 절집과 달리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도 없다. 보통 일주문은 경내에서 멀리감치
나와 중생을 맞이하는데, 아무도 나와있지를 않으니 그저 고개가 갸우뚱할 따름이다. 일주문을
세울 지형적/재정적인 여건이 안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버스에서 내려 돌담길을 오를 때까지만 해도 오랜 내력에 걸맞게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절로
생각을 했었으나 돌담길 끝에 이르러 모습을 비추는 경내를 보고 그 생각은 보기 좋게 깨지고
말았다. 바로 앞에 펼쳐진 극락보전(극락전)과 그 주변이 절의 전부였던 것이다. (근래에 터를
다진 서쪽 직지보림선원 구역은 제외) 극락보전 앞에는 5층석탑이 서 있어 1금당 1탑의 가람배
치를 보여주고 있으며, 극락보전 좌우와 5층석탑을 둘러싼 앞 뜨락에는 금잔디가 정갈하게 입
혀져 있었다.

보살사의 법당인 극락보전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로 그 주
인을 배려한 탓인지 서쪽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多包)계 맞배지
붕 건물로 전형적인 금당(金堂) 스타일을 지니고 있는데, 뜨락보다 약간 높게 다져진 기단(基
壇)에 주춧돌을 얹히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건물 기둥은 민흘림으로 우주(隅柱)가 평주(平柱)보다 굵고 높으며, 두공은 정연하게 배치되었
다. 창호는 측면의 협칸 없이 3칸이 개방된 정자형(丁字形) 분합문(分閤問)이 달려 있으며, 처
마의 수막새와 암막새에는 범자문(梵字文)과 기년명(紀年銘)이 쓰여 있다.
불단(佛壇)에는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고, 그 좌우에는 이곳의 오랜 보물인 석조2불병립상
과 석조지장보살좌상 등이 따로 자리를 잡고 있는데, 조선 후기에 제작된 아미타후불탱화와 지
장탱, 칠성탱 등의 탱화가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 건물은 조선 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이후에 다시 지었으며, 1683년
에 일륜이 중수하고 1872년에 다시 중수했다. 자연석의 주춧돌과 기둥과 지붕의 비례, 공포가
많이 짜여진 다포의 특징 등에서 조선 초/중기 건축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  고색의 검은 때가 가득 깃든 극락보전 앞 계단

▲  보살사 5층석탑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65호

극락보전 앞에 싶어진 5층석탑은 1703년에 세워진 것으로 2층 탑신에 '강희계미(康熙癸未)'란
명문(銘文)이 쓰여있어 그의 탄생 시기를 귀띔해준다. 강희는 청나라 4대 군주인 강희제(康熙
帝, 재위 1661~1722)의 연호로 그 연호에 계미년은 1703년 밖에 없다.

고된 세월의 흔적이 군데군데 끼어있는 이 탑은 바닥돌 위에 받침돌을 올리고 그 위에 복연화
문(複蓮花紋)이 새겨진 1층 기단을 올렸다. 겉으로 보면 기단이 2~3중으로 복잡하게 되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연꽃잎이 새겨진 부분이 전부이다.
기단 위에는 5층의 탑신(塔身)을 얹혔는데, 1층 탑신에는 우주를 새겼으며, 그 안에 2개의 사
각형을 새기고, 다시 그 안에 2개의 동그라미를 넣어 글자 모양을 새겼다. 처음에는 무슨 마크
인가 궁금했는데 알고보니 범자(梵字)라고 한다. 2층과 3,4,5층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은 하나
의 돌로 구성되었고,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줄어드는 모습으로 균형이 제법 잡혀 보인다. 탑
꼭대기인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이 생략된 복발(覆鉢)과 보륜(寶輪), 보주(寶珠)로 이루
어져 있다.

탑의 조성시기가 새겨진 이 땅에 흔치 않은 석탑이자 조선 후기 석탑 양식을 연구하는데 중요
한 단서를 제공하며, 탑의 높이는 바닥돌까지 포함하여 약 3.5m이다.


▲  1층 탑신에 새겨진 강희계미(康熙癸未) 4글자
오른쪽 강희 부분은 조금 마멸되어있으나 눈을 보다 가까이에 대면
글자 확인에는 별로 어려움은 없다. (단 한자는 알아야 됨)

▲  1층 탑신에 고대 문명의 글씨처럼 쓰여진 범자(梵字)
싸인처럼 보이는 저 내용은 무슨 뜻일까?

▲  1층 탑신 북쪽에 새겨진 범자
왼쪽 범자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자연의 심술궂은 괴롭힘에 형편없이
녹아 내렸고 오른쪽 범자만 간신히 남아 웃음을 짓고 있다.

▲  극락보전 아미타3존불과 붉은 닫집

극락보전의 주인인 아미타3존불은 조선 후기 불상으로 근래 산뜻하게 개금(改金)을 입혔다. 아
미타불 좌우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화려한 보관(寶冠)을 뽐내며 협시(夾侍
)하고 있는데,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덩치가 비슷하다. 은은하게 미소를 드리며 중생들의 고통
과 보살사의 재정을 어루만지는 그들 뒤로 색채가 고운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해 있는
데, 1759년 3월에 조성된 것으로 가로 252cm, 세로 217cm 크기이다.
불단 위쪽에는 날개를 살짝 치켜 올린 듯한 수려한 자태의 닫집이 있어 아미타3존불과 극락전
내부를 더욱 화려하고 장엄하게 수식해 준다.


▲  극락보전 좌측의 석조지장보살상(石造地藏菩薩像)과 지장탱(地藏幀)

극락보전 좌측에 따로 자리를 마련한 지장보살상은 돌로 만든 것으로 1970년 4월 초파일 행사
때 우연히 석조2불병립상과 함께 경내에서 출토되었다.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는 없으나 상
호는 원만하며 보존 상태도 괜찮다. 허나 도금을 입히면서 원래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 되어
근래에 만든 불상처럼 되어버렸다. 
이 보살상은 석조2불병립상과 마찬가지로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그의
등 뒤에는 화사한 색채의 지장탱이 든든한 후광(後光)처럼 자리해 있다.

▲  법당을 지키느라 여념이 없는 여러
호법신들이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  석조2불병립상과 칠성탱
칠성탱은 19세기 후반 것으로 치성광여래를
비롯한 칠성(七星)의 여러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  석조 이불병립상(二佛竝立像)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4호

불단 옆 연화대(蓮花臺)에는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석조2불병립상이 있다. 예전에는 '석조2
존 병립여래상'이란 길고 어려운 이름을 지니고 있었는데, 2자를 줄여서 '석조2불병립상'이라
불린다. 그래도 어려운 건 비슷한 것 같다.

이들은 보살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1970년 4월초파일(석가탄신일) 행사 때 경내에서 우연
찮게 발견되어 화제가 된 주인공이다. 아마도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면서 석조지장보살상과
함께 팔자에도 없는 생매장살이를 하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오랜 세월의 공백을 깨고 다시 햇
살을 받게 되면서 극락보전에 자리를 마련해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이 땅에서 거의 흔치 않은 일광이불상(一光二佛像), 즉 광배 하나에 2기의 불상이 있는 석불이
자, 두 불상이 하나에 돌에 조각된 병립불(竝立佛)이다. (이름도 어렵다) 그들 머리는 나발로
머리 꼭대기에 육계가 솟아 있으며, 얼굴에는 동자처럼 천진난만함이 깃들여져 있어 손으로 쓰
다듬고 싶은 모습이다. 볼은 살이 조금 올랐으며, 코는 심하게 마멸되었으나 양쪽 귀는 중생의
민원을 모두 들으려는 듯,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다. 그리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진하게 그어
져 있어 옛 불상의 모습을 보인다.
그들이 걸친 법의(法衣)는 통견(通絹)으로 옷주름이 굵게 표현되었으며, 양쪽 발은 잘 보이지
는 않지만 정면을 향하고 있다. 수인(手印)은 둘 다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있는데, 우
측 상은 오른손에 보주를 들고 있으며, 좌측 상은 복대의 띠 주름을 쥐고 있다.

조성 시기는 신라 후기나 고려 때로 보이며, 그들을 통해 보살사가 적어도 신라 말에 문을 열
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또한 석가불(釋迦佛)과 다보불(多寶佛)의 병존불좌상(竝尊佛坐像)과도
연관성이 있어보이는 귀중한 불상이자 희귀한 문화유산으로 그 가치가 높다. 마땅히 국가지정
보물로 삼아도 손색이 없건만 아직 지방문화재 등급에 머물러 있는 점이 의아스럽다.


▲  보살사 명부전(冥府殿)

극락보전 뒤쪽에 자리한 명부전은 1999년에 지어진 건물로 2002년 10월 금동지장보살상과 도명
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 십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을 봉안
했다. 극락보전에 이미 오래된 지장보살상이 있어 그를 명부전의 주인장으로 삼아도 될 듯 싶
은데, 그러지 않고 따로 지장보살을 만들어 봉안했다.


▲  보살사 삼성각(三聖閣)
경내 가장 뒤쪽에 자리한 삼성각은 1993년에 지어졌다. 삼성각은 말그대로
3명의 성스러운 존재인 칠성과 독성(獨聖), 산신(山神)의 보금자리이다.

▲  독성탱
소나무 그늘 밑에서 쉬고 있는 독성 할배와
그의 시중을 드는 동자가 그려져 있다.

▲  칠성탱
극락보전에 이미 칠성탱이 있는데,
또 칠성탱을 제작했다.

◀  산신탱
산신의 부하인 호랑이는 거의 호랑이탈을
쓴 고양이처럼 보인다.

극락보전에서 뒤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숲속에는 보살사 중수비(重修碑)가 있었다. 1683년에
절을 크게 중수한 것을 기리고자 세운 것으로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냈던 윤심(尹深, 1633~
1692)이 글을 작성했다.
1988년 보살사에서 중수비를 절 입구로 옮기다가 그만 어이없는 실수로 엎어지면서 절의 내력
을 머금은 비석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아작난 비석의 파편은 버렸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그 비석은 현재 없으며, 다행히 비에 새겨진 내용은 '한국사찰전서'와 충청북도 '사지(寺誌)'
에 전하고 있다.

이렇게 보살사 경내를 둘러보고 서쪽에 새로 닦여진 직지보림선원으로 이동했다. 그곳으로 가
려면 약수터를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야 되는데, (그래봐야 극락보전에서 도보 5분 거리)
고개 중턱에 이곳의 유일한 승탑(僧塔)과 탑비가 서 있다.
이 탑은 제운당 도원(霽雲堂 道源)의 사리탑으로 그의 법호는 제운(霽雲), 법명은 도원(道源)
이다. 그는 보살사에서 30여 년을 머물다가 1984년 10월 9일 새벽에 입적을 했는데 무려 10여
과의 사리가 쏟아져 나와 1985년 승탑과 탑비를 세웠다.

사리가 많이 나온 걸 보니 고승(高僧)은 고승인가 보다. 허나 승려의 몸에서 왜 사리가 나오는
지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수수께끼에 싸여있다. 그 잘난 과학기술도 그 비밀을 풀지 못해 쩔쩔
매고 있으니 이 세상에는 참 신비스러운 것이 한둘이 아니다.


▲  직지보림선원 7층석탑

제운당 사리탑을 지나면 직지보림선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보살
사의 일부라고 보면 된다. 기존 경내가 확장에 좀 문제가 있는지 버스 종점 서쪽 산자락에 터
를 다지고 큰법당을 비롯한 여러 건물과 7층석탑, 관음보살상을 지었다.

금잔디 중앙에 자리한 7층석탑은 바닥돌 위에 2중의 기단을 세우고, 7층의 탑신, 그리고 보륜(
寶輪) 등의 상륜부를 갖춘 당당한 모습으로 탑신마다 석불이 새겨져 있고, 기단에는 팔부중상(
八部衆像)이 새겨져 있다.


▲  관음보살상

7층석탑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높다란 곳에 관음보살상이 천하를 굽어보고 있다. 보살상의 높
이는 대략 6m 정도로 요즘 우후죽순 들어서는 대형 석불보다는 조촐한 크기이다. 왼손에는 감
로수가 든 정병(政柄)을 들고 있으며, 어진 성모(聖母)처럼 속세를 걱정만 한다.

▲  한글 현판이 인상적인 큰법당

▲  선방(禪房)과 요사(왼쪽)


▲  큰법당 내부 - 석가3존불이 불단에 봉안되어 있고, 후불탱을 비롯한
탱화 3점이 내부를 수식한다.


 

♠  청주에서 만난 그림 같은 호수, 명암저수지(明岩貯水池)

▲  겨울 제국에게 봉인을 당한 명암저수지(명암지)

생각보다 작았던 보살사를 40분 정도 둘러보고 종점으로 나왔다. 5분 뒤 시내로 나가는 922번
저상버스가 들어와 적막에 잠긴 종점 주변에 힘찬 엔진 소리를 남기며 입을 벌린다.

버스에 올라 어디로 갈까 궁리를 하다가 청주에서 이름난 약수터인 명암약수터에 가기로 했다.
그래서 도청에서 청주시내버스 863-1번으로 갈아타고 명암저수지와 국립청주박물관, 청주드림
랜드(청주동물원)를 거쳐 명암약수터 종점(약수터 종점)에서 내렸다.

산골에 묻힌 명암약수터는 1920년대에 발견된 탄산약수이다. 허나 가는 날이 문닫는 날이라고
그 착했던 약수터는 이미 운명을 한 상태였다. 철분이 기준치 이상으로 계속 검출되어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몸보신 좀 하려고 여기까지 들어왔는데 폐쇄라니;; 갑자기 눈
앞이 캄캄해진다. 허나 어찌하랴? 부적합 빨간 줄이 그어진 물을 애써 마셔봐야 좋을 것도 없
고 물도 이제 고갈되어 나오지도 않는다.
정보를 미쳐 확인하지 못한 어리석음과 샘터 코 앞에서 물도 마시지 못하고 돌아서야 되는 아
쉬움을 애써 삼키며 약수터를 떠났다.

아 이제 어디로 가야 되나? 신봉동 백제고분군이나 갈까? 정북동토성(井北洞土城)을 갈까? 아
니면 얌전히 청주 도심에 있는 중앙공원이나 갈까? 하지만 모두 땡기지가 않았다. 그렇게 정처
를 잃은 외로운 나그네는 속칭 멘붕에 잠긴 채, 시내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중간에 국립
청주박물관이 있지만 이미 입장시간이 지난 상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어느덧 명암
저수지 북쪽에 이르렀다.


▲  명암저수지 북쪽과 명암타워

명암저수지(명암지)는 청주에서 가장 큰 호수로 농사와 식수 확보를 위해 1922년에 축조되었다.
청주의 덩치가 커지면서 시민들의 조촐한 휴식처가 되었으며, 청주 유일의 낚시터로 강태공(姜
太公)의 발길도 잦아, 밤낚시 때는 잉어와 붕어가 잘 잡힌다고 한다. 저수지 상류에는 오리배
를 비롯한 뱃놀이를 즐길 수 있고, 호수 주변에 산책로를 둘러 평일 낮시간에도 산책이나 운동
을 하는 시민들이 제법 눈에 띈다.
또한 명암타워가 세워지면서 호수를 바라보며 결혼식 및 각종 연회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각종
식당과 찻집(까페)들이 가득 늘어서 호수의 후광(後光)을 나눠 갖는다.


▲  얼음에서 벗어난 호수 남쪽을 순찰하는 압공(鴨公, 오리)들

▲  압공 3인조가 순찰을 돈다.

지나가는 해와 달도 잠시 걸음을 멈추어 매뭇새를 다듬을 정도로 경관이 좋은 명암저수지는 겨
울 제국의 지독한 시샘을 받으며 제국이 씌워놓은 얼음이란 굴레에 갇히고 말았다. 어느 철없
는 소쩍새가 벌써부터 소쩍소쩍~♪ 울어대지만 겨울은 꿈쩍도 하지 않으며, 그 소리에 호수는
용기를 내며 굴레에서 벗어나려 용을 쓰지만 아직은 미약하다. 그나마 호수 남쪽 일부는 얼음
에서 해방되어 청둥오리를 비롯한 여러 압공들이 순찰을 한다.


▲  갈대가 살랑거리는 명암저수지 남쪽

▲  명암타워 동쪽에 자리한 비석과 표석

명암타워 옆에는 오래된 비석과 표석이 자리해 있다. 호수 산책로 옆에 있어 쉽게 눈에 띄지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존재들인데다가 그들에 대한 안내문도 없으니 태반의 사람들은 눈길
조차 주지 않고 지나간다. 나도 그냥 지나치려다가 고양이가 생선가게 앞을 그냥 못지나친다고
이렇게 사진에 담았다.

왼쪽 비석은 명암지에서 상당산성으로 넘어가는 상봉재 옛길에 있던 조씨 집안의 비석이다. 내
용을 보니 그들 집안의 충효를 기리고자 세운 비석인데, 왜 이곳으로 옮겨졌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그곳에 길이 만들어지면서 옮겨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오른쪽에 누워있는 표석은
1922년에 명암지를 축조하면서 만든 것으로 '명암○도(明岩○道)'라 쓰여 있다. 도(道) 옆에는
가로로 쓰인 글씨가 있는데, 시멘트로 지어져 희미하긴 하지만 왜왕(倭王)의 연호인 소화(昭和
) ○년이라 쓰여 있다.

※ 명암저수지 찾아가기 (2017년 3월 기준)
* 청주체육관이나 사직4거리, 지하상가, 도청에서 862-2, 863-1, 863-2번 시내버스를 타고 명
  암저수지 하차
* 승용차로 가는 경우 (호수 북쪽과 남쪽, 명암타워에 주차장 있음)
① 경부고속도로 → 청주나들목을 나와서 청주 방면 → 터미널4거리에서 우회전 → 가마교차로
  에서 좌회전 → 분평4거리에서 1순환로로 우회전하여 직진 → 용암지하차도 직진 → 명암저
  수지
*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용담동



명암저수지를 1바퀴 돌고 시내로 나갔다. 시간은 이제 17시 반, 땅꺼미가 슬슬 짙어지기 직전

이다. 날도 이제 저물어가니 더 이상 갈만한 곳도 없고 그렇다고 만날 사람도 없다. 어두워지
면 속히 나의 제자리로 철수하여 발 씻고 자는 것이 진리. 그래서 오랜만에 찾은 청주와의 인
연을 정리하고 조치원을 거쳐 서울로 올라왔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청주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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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3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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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서해바다 포구, 인천 소래포구 나들이 ~~~ (소래철교, 장도포대지, 논현포대)

 


' 서울에서 가까운 바다 포구, 인천 소래포구 나들이 '

▲  옛 수인선의 아련한 흔적, 소래철교


 

겨울 제국(帝國)의 한복판이자 새해 첫 무렵에 친한 후배와 인천 동남부 끝으머리에 자리
한 소래포구와 논현포대를 찾았다.

햇님이 하늘 한복판에 걸려있던 오후 2시에 신도림역(1,2호선)에서 후배를 만나 개봉역(1
호선)에서 광명시내버스 1번(개봉역↔거모동)으로 바꿔타고 광명4거리, 계수동, 은행지구
, 삼미시장을 두루 거쳐 월곶포구에서 두 발을 내렸다.

월곶(月串)은 경기도 시흥시(始興市)이 일원으로 서해 갯벌을 사이에 두고 북쪽으로 인천
관할인 소래포구와 마주보고 있다. 월곶이란 이름은 육지에서 바다로 내민 모습이 반달처
럼 생겼다고 해서 유래된 것으로 달을 뜻하는 '달월'이라 불리기도 했다. (수인선에 달월
역이 있음)
조선 후기에는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설치되어 인근 바다를 지켰으며, 1991년까지 갯벌로
전해오다가 1992년 8월 시흥시가 이 일대 564,938㎡의 갯벌을 생매장시키고 그 위에 위락
시설과 아파트단지, 항구를 갖춘 해안 마을을 만들었다.

월곶은 소래포구와 함께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해안 포구로 종합어시장과 활어회, 조개구
이 등을 취급하는 식당들이 즐비하며, 한때는 소래포구의 염통을 쫄깃하게 건드릴 정도로
잘나갔으나 소래와 오이도(烏耳島)에게 밀려 예전만은 못한 실정이다.
월곶포구의 구조를 보면 북쪽에 2012년에 개통된 수인선 월곶역이 있고, 서쪽에 풍림아이
원1~2차 아파트, 동쪽에는 풍림아이원3~4차아파트가 있다. 그리고 중앙에 월곶동주민센터
가 있고, 남쪽에 어선이 들락거리는 월곶포구가 자리한다.


▲  월곶해안로와 서해 갯벌
거대한 늪지대처럼 무시무시해 보이는 서해 갯벌 너머로 인천 영역인
에코메트로10~12단지가 바라보인다.


 

♠  옛 수인선(水仁線)의 아련한 흔적, 소래철교(蘇來鐵橋)

▲  갯벌에 다리를 담군 새 수인선 다리, 그 너머로 옛 소래철교가 보인다.

월곶에서 소래포구로 넘어가려면 소래의 오랜 명물인 소래철교를 건너야 된다. (수인선 전철을
이용해서 건너는 방법도 있음) 이 철교는 옛 수인선(수원~송도)의 몇 남지 않은 흔적이자 수인
선 협궤(狹軌)열차가 기적소리를 날리며 바퀴자국을 남겼던 다리로 인천 남동구와 시흥시의 경
계를 이루고 있다.

수인선은 1937년 여름에 개통되었는데, 건설비 절약을 위해 일반 궤도(1.435mm)의 절반 정도인
협궤선(0.765m)을 깔았다. 이 철로는 왜정(倭政)이 소래와 달월, 안산 지역에서 생산되는 소금
과 1972년에 없어진 옛 수려선(수원~여주)을 통해 이천과 여주의 쌀을 인천으로 수송하려는 목
적으로 신설되었다. (수려선도 협궤선임)
처음에는 왜인이 세운 경동철도가 운영을 했으나 해방 이후 국가 소유가 되었으며, 인천 송도(
松島)와 논현, 소래, 달월, 군자, 원곡, 사리, 어천, 수원(水原)을 이어주면서 수인선 주변 주
민들의 소중한 발이 되어주었다. 그들은 소금과 농산물, 수산물을 싸들고 인천과 수원으로 이
동하여 판매를 했는데, 송도역 앞에는 그들로 인해 조촐하게 시장이 형성되기도 했다.
허나 승객 감소와 협궤열차 유지의 어려움으로 운행 횟수가 야금야금 줄어들었고, 1992년 '송
도~소래' 구간을 자르고 '소래~수원' 구간만 다니다가 1994년 9월 나머지 구간마저 절단을 내
면서 이 땅에 유일하게 남은 협궤열차와 협궤선은 끄집어내기 어려운 추억의 저편으로 완전히
종적을 감추게 된다.
이후 버려진 수인선을 광역전철로 다시 단장하면서 지루한 공사 끝에 2012년 6월에 '송도~오이
도' 구간이 개통되어 옛 수인선의 뒤를 잇고 있다. <지금은 인천역까지 연장되어 '인천~송도~
원인재~오이도' 구간을 운행하고 있음, 나머지 수원역~한대앞역 구간은 2018년 말 개통 예정>


▲  장도포대지에서 바라본 소래철교

▲  댕구산(소래포구 서쪽이자 장도포대지 뒷산)에서 바라본 소래철교

수인선 열차가 신세를 졌던 소래철교는 1937년에 개통되었다. 철교의 길이는 126.5m, 폭 1.2m
로 수인선이 폐선되자 자연히 사람들의 통행 다리로 활용되었다. 소래포구와 1992년에 개발된
월곶을 바로 이어주는 다리가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철교에서 인도교(人道橋)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소래철교는 소래포구의 명물로 지금까지 변함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으나 인천과 시흥 경계에 자리한 탓에 말썽도 다소 있었다. 2010년 2월
한국철도시설공단에서 철교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내렸는데, 이때 시흥시는 통행 안
전을 이유로 부실 것을 외쳤지만 소래철교로 단단히 재미를 본 인천시는 철교 보존을 외치면서
서로 갈등이 생겼다. 다행히 국토해양부가 다리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철거를 면하게 되었고 철
교의 건강과 통행 안전을 위해 철교를 보수했다.

2011년 여름, 문화재청에서 '인천 소래철교'란 이름으로 등록문화재로 삼으려고 하자 이에 뿔
이 난 시흥시는 '소래철교'로 할 것을 요구하면서 다시 쓸데없는 갈등을 빚었다. 그래서 아직
까지 등록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 (이래서 우리나라는 지방자치제를 하면 안됨)
또한 다리 보강공사가 끝나자 인천시에서 소래포구 축제에 맞춰 철교를 다시 개방했으나 시흥
시에서 소래 관광객의 월곶포구 불법주차와 쓰레기 무단투기로 월곶동 주민들이 고통을 겪는다
며 다리 남쪽에 철조망을 치고 사람들의 통행을 막아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인천에게는 이
철교가 소래포구를 두툼하게 수식해주는 소중한 존재이지만 시흥시에게는 월곶의 관광/외식 수
요를 소래로 빨아들이고 소래의 뒷치닥거리나 하는 인천의 얄미운 빨대로 보았던 것이다.


▲  소래철교를 건너다

소래철교는 비록 철교에서 은퇴하긴 했지만 이 땅의 철도 교량 가운데 가장 폭이 좁다. 그래서
2명이 지나가면 좌우가 꽉 찬다. 협궤열차가 바퀴를 굴렸던 선로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철판
을 깔았다. 그 밑은 썰물 때는 검은 갯벌이, 밀물 때는 서해바다가 넝실거리며 고깃배가 들어
온다. 철교 좌우에는 난간을 둘러 사람들의 안전을 배려했다.

이 철교가 소래의 명물이 되다보니 온갖 이상한 말이 생겨닜다. 소래포구를 찾은 연인들이 손
을 잡고 이 다리를 건너면 헤어지지 않는다는 말부터 해서 다리를 건너면서 소원을 빌 때 포구
로 들어가는 배가 있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까지.. 무슨 불상이나 신앙 대상물도 아닌 철
도가 지나갔던 철교일 뿐인데, 다리의 인기가 높다보니 그런 허무맹랑한 말까지 생겨나 철교를
좀 무안하게 만든다.


▲  소래철교에서 바라본 갯벌과 소래포구 (재래어시장)

소래철교를 건너면 동쪽에 어선들이 정박한 소래포구와 재래어시장, 서쪽에는 근래 복원된 장
도포대지가 있다. (소래포구에는 재래어시장과 종합어시장 등 2개의 어시장이 있음)

소래포구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해안 포구이자 해안 어시장으로 인기가 자자하다. 섬을 제외
한 인천 본토의 거의 유일한 포구이자 서울 근교의 거의 유일한 재래 어항(漁港)으로 썰물 때
는 서해바다가 저멀리 줄행랑을 치면서 검은 갯벌이 고스란히 드러나 포구로써의 실감이 좀 떨
어지지만 밀물이 되면 포구 바로 앞까지 바다가 밀려와 제법 포구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이때 배들이 들어와 바다에서 건져온 것들을 풀어놓는다.

소래는 인천과 월곶을 이어주던 나룻터이자 포구로 주변에 경작지가 많아 제법 괜찮게 살던 어
촌이었다. 왜정 때 인근에 소래염전이 생기고 수인선이 개통되면서 소금 수탈의 현장이 되기도
했으며, 해방 이후 북쪽 실향민들이 모여들어 정착을 했다. 포구 사람들은 바다에 나가 새우와
물고기를 잡아 젓갈을 만들었고, 수인선 열차를 타고 서울과 인천, 수원 등을 오가며 새우젓을
팔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소래는 한산했던 포구였다.
그러다가 1974년 인천내항이 준공되어 새우잡이를 하던 조그만 어선의 출입이 어려워지자 인천
항에서 가까운 소래로 배들이 몰려들면서 졸지에 새우파시로 부상하게 된다. 이때부터 서울/인
천 근교의 대표적인 포구로 두각을 드러냈으며, 매년 500만 명이 넘는 관광객과 장꾼들이 몰려
와 인천의 소중한 관광 꿀단지가 되었다. 포구의 대표적인 특산물로는 젓갈과 새우, 꽃게, 소
라 등이 있다.

비록 포구는 작지만 10톤 미만의 어선 200척 정도를 보유하고 있으며, 어시장에는 300개 정도
의 점포와 식당, 선술집이 들어서 있다. 휴일은 물론 평일에도 이곳을 찾는 수요가 상당하며,
싱싱한 회와 생선찌개, 각종 어패류와 건어류, 생선튀김, 젓갈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생선을
취급하는 점포에서는 즉석에서 회를 쳐주는데, 어시장 남쪽 포구 쪽에 그런 집이 많다.

소래란 이름은 지형이 소라처럼 생겨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와 냇가에 숲이 많은 솔내에서 비
롯되었다는 설, 지형이 좁아서 생겼다는 설이 있으며, 660년에 신라와 당이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군을 이끌고 온 소정방(蘇定方)이 산동 내주(來州)를 출발해 이곳에 상륙하여 머물렀다
고 해서 소래(蘇來)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정답은 아니다.


▲  댕구산에서 바라본 소래포구 재래어시장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소래 지역은 소래포구와 어시장이 전부인 인천의 변두리 어촌이었다.
그러다가 개발의 칼춤이 포구 주변을 싹 뒤엎으면서 어시장과 포구, 말쑥하게 솟은 고층 아파
트와 온갖 빌딩이 어색한 조화를 이루는 현장이 되었다.


▲  소래포구 재래어시장 내부
우리는 어시장을 간단히 둘러보고 바로 이웃에 자리한 장도포대지로 이동했다.


 

♠  소래포구 서쪽에 자리한 장도포대지(獐島砲臺址)
- 인천 지방문화재자료 19호

▲  소래철교에서 바라본 장도포대지와 댕구산

소래포구 서쪽 해안가에는 장도포대지와 댕구산이 자리해 있다. 소래철교에서도 뻔히 바라보이
는 그들은 예전에는 잡초만 헝클어진 언덕이었으나 최근에 산뜻하게 손질을 하면서 소래포구를
한층 꾸며주는 해안공원이 되었다.

장도포대는 1879년 화도진(花島鎭) 소속 포대로 설치되었다. 1876년 2월, 강화도조약(江華島條
約) 이후 왜국(倭國)이 서해바다를 멋대로 측량하며 개항지를 물색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인천
을 개항지로 요구할 것으로 짐작하고 혹시나 모를 외세의 침략에 대비해 어영대장 신정희(御營
大將 申正熙)와 강화유수 이경하(江華留守 李景夏)에게 명해 동인천에 화도진을 설치했다. 이
때 인천과 부평(富平) 해안 요충지에 장도포대, 논현포대 등 여러 포대를 설치해 인천 바다를
지키게 했다.

허나 1894년 화도진이 철폐되자 이들 포대는 거의 철거되었으며, 장도포대도 이때 없어진 것으
로 여겨진다. 워낙에 별처럼 나타나 별처럼 사라진 탓에 생전의 모습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터만 아련히 남아있었는데, 1999년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는 '화도진도(花島鎭圖)'를 살펴본 결
과 포좌(砲座) 2개는 바다를 향하고 있고, 1개는 동남쪽을 향하고 있어 총 3개의 포좌가 있었
음이 밝혀졌다. 이후 2001년 지방문화재로 지정해 개발의 칼질 앞에서 그 터를 구제했으며 근
래에 화도진도를 바탕으로 흙으로 토성을 씌워 포대를 복원했다.

장도포대 바로 옆에는 댕구산이란 조그만 언덕이 소래포구와 서해바다를 말없이 굽어보고 있다.
높이는 고작 40m 정도에 불과하지만 소래 일대가 바다에 접한 낮은 지대다 보니 제법 돋보인다.
그는 원래 한반도와 분리된 소소한 섬으로 그 모습이 마치 노루처럼 생겨서 '장도(獐島)' 또는
'노루목', '노렴'이라 불렸다. 장도포대의 이름도 바로 이 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후 대자연
의 힘으로 한반도의 일원이 되었으며, 왜정이 수인선을 만들 때 언덕 동쪽을 죄다 밀어버려 지
금은 반쯤 남아있는 상태이다.

댕구산이란 이름은 이곳에 포대를 설치하면서 대완구(大碗口)란 대포를 설치했는데, 그 대완구
가 댕구로 통용되면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대포산이란 뜻이다.


▲  공원으로 변신한 장도포대지, 댕구산
소래역사관 건너편에 장도포대지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  복원된 장도포대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현재 장도포대는 2개의 포좌가 재현되어 있다. 돌로 포대를 쌓고 윗쪽과 바깥쪽에 흙을 덮어서
토성처럼 만들었는데, 포좌 2개는 바다 쪽으로 구멍을 내었다. 근래 복원된 탓에 고색의 내음
은 아직 여물지 않았으나 한겨울이라 포대에 기댄 잡초들이 누런색을 발산하고 있고 포대를 이
루고 있는 돌들도 색깔이 제각각이라 조금은 빛바래 보인다.


▲  서쪽에서 바라본 장도포대

▲  동쪽에서 바라본 장도포대와 수인선 전철

▲  바다를 향해 입을 연 장도포대 대포의 소소한 위엄

▲  장도포대에서 바라본 서해 갯벌
마치 석유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 유전처럼 온통 검은색이다. 다가가면 크게
혼이 날 것 같은 무시무시한 모습이지만 차가운 겉모습과 달리
많은 생물들이 의지하며 살아가는 생물의 보고이다.


※ 소래포구, 장도포대지 찾아가기 (2017년 2월 기준)
* 수인선 소래포구역 2번 출구를 나와서 오른쪽 소래역로를 따라 8분 정도 가면 소래역사관이
  다. 여기서 왼쪽(동쪽)으로 가면 바로 오른쪽에 장도포대지 정문이 있고, 곧바로 가면 소래
  철교 입구와 소래어시장이다. (수인선은 인천역에서 1호선, 원인재역에서 인천1호선, 오이도
  역에서 4호선과 연결됨)
* 1호선 개봉역<1번 출구를 나와서 도보 3분>에서 1번 시내버스/ 7호선 광명4거리역<4번 출구>
  에서 1, 510번 시내버스/ 1호선 광명역(고속전철역) 동쪽 정류장에서 11-3번 시내버스를 타
  고 소래포구입구나 월곶해안로에서 하차, 소래철교를 건너 소래포구로 이동한다.
* 인천1호선 선학역(4번 출구), 문학경기장역(2번 출구)에서 754번 시내버스 이용

★ 소래포구, 장도포대지 관람정보
* 매년 10월에는 소래포구축제가 열린다. 꽃게 등의 수산물 시식회, 특산물 판매, 꽃게/전어낚
  시 체험, 소래습지생태공원 갯벌체험, 갈대축제 등이 있으며, 소래철교와 소래빛의거리에서
  는 아름다운 야경이 펼쳐진다. 소래포구축제 홈페이지는 아래 댕구산 정상 사진을 클릭한다.
  (문의 인천소래포구추진위원회 남동구 도시관리공단 ☎ 032-466-3811)
* 장도포대지와 댕구산 관람시간 : 9시~20시 <동절기(11~3월)는 18시까지, 입장료 없음>
* 소래포구 소재지 :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111외
* 장도포대지 소재지 :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111-13 (아암대로 1614)


▲  소래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댕구산 정상
정상에 오르면 소래포구와 어시장, 월곶포구, 소래 주변 아파트들이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호구포에 자리한 조선 후기 국방 유적 - 논현포대(論峴砲臺)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6호

소래포구 일대를 둘러보고 고가식으로 되어있는 수인선을 따라 서쪽으로 걸어갔다. 인천논현역
과 호구포역을 지나면 논현포대근린공원이 나오는데, 그곳에 이날 마지막 행선지인 논현포대가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호구포(虎口浦) 남쪽에 자리한 논현포대는 앞서 장도포대와 같은 목적으로 1879년에 화도진 소
속 포대로 축조되었다. 지금이야 주변이 죄다 아파트(논현휴먼시아)와 공장(남동공단)으로 바
다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이곳까지 바다가 거침없이 넝실거렸다. 게다가 포좌 앞
에는 갯골수로가 흐르고 있었는데, 그 수로를 타고 혹여 침투할지 모를 외래 선박을 막으려는
목적도 띄고 있었다.
이 포대는 1894년 화도진이 철폐되면서 문을 닫았으며, 장도포대와 달리 약간의 흔적만 전해오
다가 근래 말끔하게 정비되었다. 포대는 포좌 아랫쪽에 잡석을 깔고 중단과 상단에 장대석(長
臺石)을 쌓았으며, 그 위에 흙을 덮었다. 넓게 다진 포좌에는 이동식 중포 2문이 설치된 것으
로 여겨지며, 예전에는 호구포대라 불렸으나 논현포대로 이름이 갈렸다.

논현포대가 자리한 호구포는 명칭 그대로 호랑이 입이란 뜻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범아가리'
라 불렸는데, 호구포 뒷산인 오봉산(五峯山) 자락에 호랑이 입 모양을 한 커다란 호구암(虎口
岩)이 떡하니 자리해 있었다. 그 바위는 검은 피부를 지니고 있어 주변 바위와는 다소 색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며, 호구포 사람들은 그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기며 무척 애지중지했다.

호구포에는 참으로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세상 만물이란 늘 양면성을 띄고 있는 터
라 누군가에게는 꽤 소중한 존재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징그러운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바로 호
구암이 그렇다.
이 바위는 대부도(大阜島)와 안산(安山)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안산에 무덤을 쓴 지
체 높은 세력가의 자손이 매우 귀하여 대를 잇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끙끙 앓던 차에
마침 집 앞을 지나던 승려가 '호구암이 산소를 향해 입을 크게 벌리며 마치 무덤을 삼킬 기세
라 자손이 귀한 것이오'
알려주었다. 
그래서 자손들은 호구암을 옮기기로 했으나, 바위가 워낙 집채보다 커서 옮기는 것이 불가능하
자 호랑이 입을 부시면 될 것이라 생각, 아예 호랑이 턱에 해당되는 부분을 도끼로 찍어 부셔
버렸다. 그랬더니만 이후부터 자손이 번성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왜정 시절에 호구포에 염전
을 만들면서 바위가 강제로 매몰되어 없어지게 되었는데, 마을의 명물이자 수호신을 잃어버린
호구포 사람들은 곡소리를 냈지만 안산 지역에 조상묘를 둔 이들은 쾌재를 외쳤다고 한다.

그리고 안산의 일원이 된 대부도 역시 호구암의 눈치를 적지 않게 보고 있던 모양이다. 대부도
에서는 이상하게도 개의 번식이 잘되지 않았는데, 이유를 알고보니 호랑이를 상징하는 호구암
이 대부도를 뚫어지라 보고 있어 그 기운 때문에 개들이 금방 죽어 나갔다는 것이다. 개는 호
랑이의 밥이래나 뭐래나?
허나 왜정 때 바위가 사라지자 개의 무덤이던 대부도는 개의 낙원이 되었다고 한다. 호구암이
위엄을 부릴 때는 안산과 대부도 지역은 울상, 바위 인근 주민은 싱글벙글이었지만 바위가 사
라지니 안산과 대부도 지역은 싱글벙글, 바위 인근 주민은 울상이 되었다.


▲  동쪽에서 바라본 논현포대 - 포대의 모습은 장도포대와 비슷하다.

▲  서쪽에서 바라본 논현포대
흙으로 두툼하게 다진 포대 아랫도리에 대포가 마음껏 포탄을 뿜을 수 있는
조그만 창을 내었다.

▲  강화도 포대를 연상케하는 논현포대 포좌
대포는 어디로 마실 갔는지 보이지 않고 그의 빈 자리에는 겨울 제국을
원망하는 낙엽들로 가득하다.

▲  청동중포(靑銅中砲)와 청동대포(靑銅大砲)의 위엄
청동대포는 1854년, 청동중포는 1876년에 제작된 것으로 1994년에 복원했다.
쟁쟁한 후배 대포들에게 밀려 이제는 뒷전으로 밀려난 녹슨 신세이지만
왕년에 이양선들의 염통을 쫄깃하게 건드린 역전의 대포들로
그 정정함은 아직 잃지 않았다.

▲  논현포대에서 바라본 포대 서쪽 쉼터

▲  논현포대에서 바라본 호구포역

논현포대를 둘러보니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겨울의 한복판이라 햇님도 17시만 넘으면 꽁무니
를 빼기가 바쁘고 겨울을 등에 업은 땅꺼미가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칼바람이 몰아치니 더 이
상 돌아다니기도 고통스럽다. 그래서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따로 없는 인천 논현동(論峴洞)을
뒤로 하며 얌전히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소래포구를 중심으로 한 새해 맞이 인천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논현포대 찾아가기 (2017년 2월 기준)
* 지하철 수인선 호구포역 2번 출구를 나와서 서쪽(원인재역 방향)으로 도보 6~7분, 논현포대
  근린공원 남쪽에 자리함 (관람시간은 제한 없음)
* 소재지 -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648-1 (호구포로 2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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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2월 2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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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의 꿀단지, 무주 머루와인동굴~덕유산 겨울 나들이 (설천봉, 덕유산리조트)

 


' 무주 머루와인동굴, 덕유산 나들이 '

▲  덕유산 설천봉


 

늦가을이 힘없이 쓰러지고 겨울이 한참 제국의 기틀을 다지던 11월 끝자락에 전북 동북부
끝으머리에 자리한 무주(茂朱) 땅을 찾았다. 이번 나들이는 멀리 동남쪽에서 온 일행들과
함께 하였는데, 무주터미널에서 그들에게 합류하여 같이 움직였다.

무주에서 제일 먼저 인연을 지은 곳은 덕유산 북서쪽에 자리한 적상산(赤裳山, 1,034m)이
다. 그곳에 안긴 안국사(安國寺)와 적상산성(赤裳山城),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적상호
수를 둘러보고 (☞ 관련글 보러가기) 뱀처럼 구불구불한 고갯길(산성로)을 다시 내려오다
가 적상산 고개 밑에 자리한 무주머루와인동굴에서 잠시 바퀴를 멈추었다.


 

♠  무주의 새로운 꿀단지, 머루와인이 아낌없이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 무주머루와인동굴

▲  무주머루와인동굴 매표소

적상산 북쪽 450m 고지에 무주머루와인동굴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1988년 이후 적상산의 지도
를 크게 흔들어 놓은 무주양수발전소 건설 당시에 굴착 작업용으로 뚫어놓은 인공 동굴로 무주
양수발전소 상부댐, 적상호와 더불어 인간이 적상산에 남긴 혹이다.

1995년 발전소가 완성된 이후에는 쓸모가 없어 거의 버려졌는데, 무주군청에서 동굴 활용을 두
고 머리를 굴리다가 머루 재배 농가를 위해 머루로 만든 머루주의 숙성 장소로 사용하기로 하
였다. 하여 2007년 한국수력원자력으로부터 임대를 받아 내부를 상큼하게 손질하여 무주머루와
인동굴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처음에는 머루와인(머루주)을 숙성시키는 숙성고로 쓰였으나 이곳을 관광지로 널리 개방하면서
완전 대박을 쳤다. 위치도 적상산이나 무주리조트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수요 확보에도 어렵지
않았고, 이곳을 찾는 발길이 늘어나는 만큼, 머루와인의 인기도 치솟으면서 무주의 소중한 꿀
단지로 등극한 것이다.

이 동굴의 몸매는 길이 579m로 이중 290m만 개방하고 있다. 높이 4.7m, 폭 4.5m로 넓은 편이며,
비록 인공 땅꿀이긴 하지만 동굴은 동굴인지라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스하다. 또한 연
평균 기온은 13~14도로 머루주를 숙성시키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머루주의 발효
온도는 18도, 보관 온도는 12도, 평균 일교차가 18도가 되야 맛이 좋다고 함)


▲  머루와인동굴 앞을 지키는 머루장승부부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들고 안으로 들어서면 동굴 앞에 재미나게 생긴 갈색 피부의 머루장승
부부가 하얀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우리를 맞이한다. 이들은 동굴 수식용으로 여기서는 머루장
승부부로 통하는데, 그들에게 적당한 정체성과 주제를 붙여주어 동굴 나들이의 달달한 재미를
더해준다.
비록 장승을 칭하고 있지만 그 흔한 장승의 모습이 아닌 남태평양 이스터섬의 석상 같은 모습
으로 너무 익살스럽게 표현되어 나그네들로 하여금 웃음을 머금게 한다.

이들 가운데 왼쪽에 하늘색 머리를 가진 이는 남편으로 머루와인을 즐겨 마셔 노화가 늦게 진
행되었다고 한다. 나이는 50대 후반이라고 하나, 실제 나이는 90세라는 설이 있다고? 그는 과
묵하지만 바람기가 많다고 하며 정력도 무지 대단하다고 한다.
그리고 오른쪽 노란 머리는 부인으로 50대 초반이라고 한다. 머루와인을 즐기는 탓에 기억력이
매우 좋아 남편의 외도 횟수와 장소를 모두 기억한다고 하며, 애교의 본좌라고 한다. 지금이야
허허 웃지만 시간이 몇 갑절 흐르면 그들에게 부여한 주제는 한토막 전설로 승화될 것이다. 이
들의 공통적인 주제는 결국은 머루와인 찬양이다.


▲  머루와인동굴 정문 (비밀의문)

머루장승부부를 지나면 '머루와인 비밀의 문'이라 이름 붙여진 동굴 정문이 나온다. 문 위쪽에
는 두툼한 코와 온갖 주름 곡선이 자욱한 얼굴이 있는데, 좌우로 가늘게 뜬 눈도 보인다. 이
얼굴은 이곳을 지키는 머루정령으로 동굴 관람객에게 신령스러운 기운을 내려주며, 머루와인
숙성의 신비스러운 기운을 불어넣는 용으로 주제를 잡았다. 성격은 좀 더럽지만 책임감과 인내
력이 강하다고 한다.


▲  머루와인동굴 통로

비밀의 문을 들어서면 동굴 통로가 일직선으로 펼쳐진다. 양쪽 벽에 휘날리는 모습의 등을 비
롯하여 내부를 밝히는 다양한 등을 두어 심봉사 같은 장님이 아닌 이상은 통행에 지장은 없다.
통로 양쪽에는 무주 고을의 풍경 사진과 옛날 사진들이 배열되어 있다.


▲  통로 중간 - 머루와인과 머루에 대한 정보를 머금은 온갖 안내문들이
오른쪽 벽을 가득 메운다.

▲  통로 좌우에 배열된 사진들 (무주 풍경 사진)

▲  동굴 광장 직전

▲  와인 시음 현장인 동굴 광장

동굴 정문(비밀의 문)에서 3~4분 정도 들어가면 동굴 광장에 이른다. 이곳은 와인을 테마로 한
공간으로 여기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왼쪽 코너로 가 와인잔을 받기 바란다. 와인잔은 1명당 1
개씩 제공되며 집으로 가져가도 상관없다. (동굴 입장료에 와인잔과 와인 시음 비용이 포함되
어 있음)
와인잔을 받으면 우선 잔의 상태를 확인하기 바란다. 간혹 부실한 잔이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래가 약간 깨진 잔을 받았는데 교환을 요청하니 바로 다른 잔으로 바꿔준다. 그렇게 교
환을 당한 부실한 잔은 와인잔 담당자가 아무 미련도 없이 옆으로 던져 깨뜨렸다. (그 현장에
는 그렇게 깨진 와인잔이 가득했음, 잔을 어떻게 만들길래 부실 잔이 그리 많은 걸까?)

와인잔을 들고 반대쪽 와인바로 가면 머루와인을 주는데, 보통 3종류를 준다. 첫 잔을 마시고
다음 칸으로 가면 다른 와인을 주며, 1번 정도는 리필을 해준다. (줄이 길다면 그냥 1잔만 마
시기 바람) 술이 싫다면 머루 아이스바나 머루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된다. 허나 이들은 따로
돈을 줘야 된다.

       ▲  와인바의 명물 오줌누는 아이
머루장승 부부의 늦둥이 아들로 5살이라고 한다
. (영원한 5살) 자랑스럽게 거시기를 내밀고 소
변에 임하는 모습이 참 패기가 넘쳐 보인다.

▲  문이 닫힌 통제 구간에는 머루와인이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다 (윗 사진)

▲  와인 시음 현장인 와인바 (밑 사진)


▲  와인동굴 통로 (밖으로 나가는 방향) ▼

머루장승부부에게는 딸이 하나 있는데, 동굴 주변 물레방아에 있는 연인상이 그 딸이라고 한다.
상대방 남자하고는 무려 나이트클럽 부킹에서 만났다고 하며 (좀 건전한 걸루 하지 ㅋㅋㅋ) 그
들은 포석정 물레방아에서 주로 데이트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거기에 그들의 상을 두었다고?
머루장승부부는 그들의 교제를 반대하고 있으며, 딸은 23세, 상대남은 27세라고 한다.


동굴 관람은 와인 마시고, 사진을 찍고 하다 보면 보통 20~30분 정도 걸린다. 휴일에 관광객이
폭주하는 경우에는 와인이 일찍 동날 수가 있어 휴일이나 성수기에는 가급적 빨리 가야 뒷탈이
없다.

※ 무주머루와인동굴 찾아가기 (2017년 1월 기준)
무주까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무주행 직행버스가 1일 5회 떠난다.
* 대전복합터미널에서 무주행 직행버스가 4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광주에서 무주행 직행버스가 1일 6회 정도, 전주에서는 1일 14회 떠난다.
* 영동역(경부선)에서 무주행 군내버스가 50~7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② 현지교통
* 무주터미널에서 내창행 군내버스 이용 (1일 2회, 11:40, 16:30) → 내창에서 도보 40분 (무
  주터미널에서 택시로 접근 가능)
③ 승용차
* 대전~통영고속도로 → 무주나들목을 나와서 무주방면 우회전 → 무주1교차로에서 우회전 →
  적상산입구에서 우회전 → 북창리 → 적상분소 → 무주머루와인동굴

★ 무주머루와인동굴 관람정보 (2017년 1월 기준)
* 입장료 : 2,000원 (20인 이상 단체 1,800원) <미취학 아동, 국가/독립유공자와 그 가족은 무
  료>
* 관람시간 : 10:00~17:30 (12~3월은 10:40~16:30) / 매주 월요일 휴관(성수기는 개관함)
* 와인족욕 이용료 : 성인 3,000원 / 만7세 미만 2,500원 (10:00~16:30, 12~3월은 10:30~15:30)
* 소재지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산119-5 (산성로 359, ☎ 063-322-4720)
* 무주머루와인동굴 홈페이지는 ☞ 여기를 클릭한다.



무주 머루와인동굴에서 잠시 머루주의 달콤한 향기에 빠져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무주덕유

산리조트(이하 덕유산리조트)로 이동했다.
북창리와 무주양수발전소 하부댐이 있는 무주호, 괴목리, 구천동터널을 차례로 지나 온갖 식당
과 숙박업소, 스키용품 가게로 즐비한 덕유산리조트입구 심곡리에서 잠시 길을 멈추고 두부 음
식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여기서는 두부전골을 먹었는데, 맛도 제법 괜찮다. 게다가 시장기가 진하게 발동해 밥을 2그릇
이나 해치우고 전골과 반찬도 싹싹 긁어먹고 나서야 겨우 손이 멈춘다. 그렇게 기분 좋게 점심
을 마치고 덕유산리조트로 진입하여 곤도라(Gondola) 승강장이 있는 설천하우스를 찾았다.


 

♠  덕유산리조트 곤도라를 타고 덕유산 설천봉(雪川峰)으로 오르다~~

▲  덕유산리조트 설천하우스

덕유산리조트는 덕유산 정상 북쪽 산자락에 넓게 들어앉은 대규모 휴양시설이다. 스키와 보드
등 겨울레포츠의 성지(聖地)로도 아주 명성이 높은데, 스키장을 비롯, 수영장과 골프장, 눈썰
매장, 호텔 등을 갖추고 있다. 리조트 내부가 매우 넓어서 내부를 이동할 때 차량과 셔틀버스
를 이용해야 될 정도이며, 곤도라 승강장이 있는 설천하우스는 리조트 동부에 자리해 있다.

이곳 리조트의 중심인 스키장은 덕유산의 피부를 싹 밀고 만든 것으로 덕유산 정상 북쪽 봉우
리인 설천봉까지 펼쳐져 있다. 설천봉이나 그 중간까지 곤도라나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 스키나
보드로 내려오는 것이다.
겨울 레포츠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지나치게 넓은 공간을 잡아먹는 스키장이나 골프장이 너무
남발되고 있어 이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나라가 미대륙이나 시베리아 벌판, 중원대륙,
호주대륙 정도 되면 모르지만 유감스럽게도 매우 좁고 좁은 현실이라 그런 것들을 몇 개 만들
면 국토가 거의 꽉찰 지경이다. 게다가 그들로 인해 자연도 적지 않게 파괴되고 있으니 지구와
후손들을 위해 한번 생각을 해봐야 될 문제이다.

나무로 삼삼해야 될 산자락이 스키장으로 벌거숭이 임금처럼 된 현장을 보니 인간이 오로지 그
들의 부질없는 취미를 위해 너무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든다. 덕유산에 희귀
한 동/식물이 많고, 전나무의 일종인 구상나무의 대규모 자생지인데, 스키장과 리조트로 인해
적지 않은 자연이 고통을 받게 된 것이다.
흔히 말하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 우리는 친구라는 구호. 실은 자연과 지구의 최대 적은 인간
이다. 그 인간이 전기를 만든답시고 적상산에 양수발전소와 적상호란 혹을 붙였고, 덕유산에는
그보다 더 큰 덕유산리조트와 스키장을 붙였다. 더 이상 대자연 형님의 콧털을 건드리지 않았
으면 좋으련만, 이러다 정말 그의 대보복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덕유산리조트 곤도라는 케이블카와 비슷한 것으로 설천하우스(해발 700m)와 설천봉 정상(1520m
)을 이어준다. 무려 해발 800m를 뛰어넘는 이 곤도라는 선로 길이 2.659m, 속도는 초속 5m, 소
요시간은 약 20분, 곤도라 1대당 정원은 8명이다.
그의 등장으로 덕유산 정상까지 2시간 이상 힘들게 올라야 되는 수고로움이 크게 줄었으며, 설
천봉에서 정상(향적봉)까지는 달랑 20분 정도만 오르면 된다. 허나 정상의 접근성이 너무 쉬워
지면서 사람들의 방문이 크게 늘어났고, 그로 인해 향적봉과 설천봉 구간의 자연이 크게 망가
졌다. 곤도라가 다니는 구간 역시 스키장으로 인해 망가지긴 마찬가지, 2012년 5월부터 2개월
간 설천봉~향적봉 구간의 자연을 복원했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땜방용에 불과하다.


▲  설천하우스에서 바라본 곤도라 승강장과 덕유산 설천봉

▲  스키장에 인공눈을 뿌려 슬슬 겨울 장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곳은 인공눈이지만 곤도라를 타고 윗세상으로 올라가면 거기는 진짜
눈이 기다리고 있다.

▲  스키장 인공눈밭을 누비는 관광객들

▲  곤도라 타는 곳

▲  설천봉으로 인도하는 곤도라 승강장

▲  좁은 곤도라에서 바라본 스키장

곤도라를 타는 줄이 조금 길었지만 거의 20초에 1대씩 빗자루 배차를 하는 지라 오래 기다리지
않고 탑승했다. 초속 5m로 사람의 뛰는 속도와 거의 비슷해 처음에는 이 속도로 설천봉까지 언
제 올라가나 싶었다. 하지만 금세 설천하우스가 작은 점이 되어 흐릿해지고 대신 푸른 하늘이
점점 가까워진다. 밑에는 아직 늦가을인데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풍경은 서서히 겨울로 변하여
눈쌓인 풍경이 펼쳐진다.

곤도라에서 정면을 보면 바로 앞에 가파른 오르막이 있어 덜하지만 뒤를 보면 정말 까마득하게
펼쳐지는 풍경에 두 눈이 어지럽다. 그렇게 곤도라를 20분 타면 설천봉에 도착한다.


▲  설천봉 정상

설천봉(1520m)은 덕유산 정상 북쪽에 자리한 봉우리로 덕유산리조트 스키장의 윗쪽 시작점이다.
설천봉에서 내려가는 스키와 보드 코스는 경사가 꽤 각박해 상급 코스로 치며 스키철에는 곤도
라 외에 별도로 리프트도 운행한다.

설천봉 정상에는 마치 요새처럼 생긴 휴게소가 있는데, 식당과 편의점을 갖추고 있다. 허나 물
가는 속세에 비해 1.5~2배 이상 비싸다. 음료 역시 산의 높이만큼 비싸게 받는다. 그래도 사먹
는 사람이 적지 않아 장사는 쏠쏠해 보인다. 편의점은 비록 할인카드에 의지해 할인을 해도 시
중의 같은 편의점보다 비싼 건 마찬가지다.

▲  설천봉에 자리한 3층 기와집

▲  설천봉에서 향적봉으로 오르는 산길

설천봉휴게소 남쪽에는 8각형을 띈 3층짜리 기와집이 있어 눈길을 끈다. 이 기와집이 설천봉의
실질적인 꼭대기로 겉으로 보면 하늘에 제를 지내는 원구단이나 천단(天壇)처럼 신성한 건물로
보인다. 허나 저것은 이곳이 하늘과 맞닿은 곳이라 그 분위기에 어울리게끔 만든 장식용 건물
에 불과하다. 그래도 그냥 휴게소만 있는 것보다는 저거라도 있으니 정상 풍경이 조금 신비롭
게 다가오며, 덕유산리조트 관련 관광자료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곳의 간판과 같은 존재이다.

설천봉까지 올라온 일행들은 가득 쌓인 눈과 미끄러운 산길에 기겁을 하여 대다수 휴게소 주변
에서 길을 멈추었다. 향적봉까지 편히 가게끔 길이 정비되어 있기는 해도 눈빙판길까지 개선된
것은 아니다. 나도 향적봉까지 가려고 했지만 생각 외로 미끄러운 그 길을 오르기가 겁이 났다.
아무리 팔팔한 30대라고 해도 20대는 아니며, 나도 이제 몸을 사려야 된다. 자칫 미끄러지면
큰일난다. 향적봉까지 간 일행은 1/3 정도인 10여 명, 그중 1명이 내려오는 중 크게 미끄러져
응급차 신세를 졌다.

눈길에 단단히 꼬리를 접고 설천봉으로 도로 내려가 그곳에서 계속 머물렀다. 덕유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향적봉(1614m)이 바로 코앞이건만 가지 못하는 한이 오죽하랴. 결국 다음에 다
시 와야될 명분만 만들고 말았다. 하긴 이렇게 좋은 명소를 1번만 오는 것도 솔직히 섭섭하지.
집에서 가까우면 두고두고 옆구리에 끼고 싶다.


▲  향적봉으로 잠깐 오르는 길에 바라본 설천봉
설천봉 정상을 장식하고 있는 3층 기와집이 꽤 신비롭게 보인다.
마치 높은 존재가 하늘에 제를 지내는 공간처럼 말이다.

▲  가깝고도 먼 덕유산 향적봉
20분 거리란 말에 많이 주저했지만 결국 몸을 사리는 쪽으로 기울었다.
허나 돌리는 발길이 너무 아쉬워 자꾸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  설천봉 정상을 장식하는 3층 기와집
여기서 바라보는 조망이 꽤 일품이다.

▲  힘차게 남쪽으로 달려가는 덕유산 산줄기

▲  설천봉에서 바라본 천하 (무주 안성면 지역)
마치 학이나 용의 등에 올라타 천하를 내려다보는 기분이다. 천상(天上)세계가
보일 정도로 하늘과 맞닿은 곳이니 조망의 품질도 꽤 우수하다.

▲  설천봉에서 바라본 천하 (무주 안성면 지역)

▲  설천봉휴게소 옥상에 조그만 기와집이 있어 마치
성곽 위에 세운 망대 같다.

▲  설천봉에서 만난 구상나무들

구상나무(Korean Fir)는 제주도 한라산(漢拏山)이 원산지로 한라산과 지리산(智異山), 덕유산
에 많이 살고 있다.
이 나무는 전나무의 일종으로 우리나라 토종 나무인데, 서양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로 많이 애용
되고 있는 나무가 바로 구상나무이다. 지구촌에 퍼진 구상나무는 모두 우리나라에서 식재된 것
으로 공룡을 깨끗히 말아잡순 빙하기(氷河期)를 견딘 강인한 나무이기도 하다. 허나 아무리 강
한 나무라고 해도 빙하기의 후예인 겨울 제국 앞에 모든 것이 털린 상태라 정말 빙하기를 이긴
나무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앙상하기 그지 없다.


▲  설천봉에서 바라본 천하 (구천동, 무풍면 방면)

▲  설천봉 정상 동쪽 부분

▲  설천봉과 밑 세상을 이어주는 곤도라

향적봉을 찍고 내려오는 일행을 기다리느라 1시간 정도 설천봉에 머물렀다. 하늘의 속살이 보
일 정도의 고지대라 바람이 무척 패기가 있어 휴게소에 들어가 30분 정도 추위를 녹이고 있으
니 그곳에 갔던 사람들이 모두 내려왔다.
그래서 덕유산을 뒤로 한 채, 다시 곤도라에 의지해 밑 세상으로 내려갔다. 내려갈 때는 올라
갈 때와 마찬가지로 같은 속도로 움직여 소요시간은 비슷하며, 밑이 까마득하게 보여 언제 내
려가나 싶었으나 점처럼 작았던 밑의 여러 시설(설천하우스 등)이 점점 커지고 대신 설천봉은
한줄기 점이 되어 사라지면서 무탈히 설천하우스에 도착했다.

이렇게 짧게나마 덕유산에 대한 볼일을 마치고 구천동터널과 적상산입구를 거쳐 무주터미널로
나왔다. 여기서 아쉽지만 일행들과 쿨하게 작별을 고하며 충북 영동(永同)으로 가는 군내버스
를 타고 40여 분을 달려 영동역으로 넘어갔다. 여기서 서울행 누리로 열차(무궁화호의 별종격
열차)에 고된 몸을 담고 북쪽으로 달려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정말 번개처럼 날라가 재미나게 보냈던 그날 하루, 그곳이 그리워지고 같이한 이들이 보고 싶
은 마음에 비록 한참이나 보잘 것은 없지만 이렇게 글을 남겨 그날을 추억해본다.
이렇게 하여 겨울맞이 무주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무주 덕유산리조트 찾아가기 (2017년 1월 기준)
* 무주까지 가는 방법은 앞에 무주머루와인동굴 참조
* 무주시외터미널에서 구천동으로 가는 직행버스(1일 11회)나 군내버스(1일 5회)를 타고 덕유
  산리조트(리조트3거리)에서 하차. 리조트 방면으로 2분 걸어가면 '생두부촌'이란 식당이 있
  다. 그 앞에서 리조트행 무료셔틀버스 이용 (1일 20여 회 운행)
* 무주읍내(제일의원, 산림조합)에서 리조트행 무료셔틀버스 이용 (1일 6회 운행, 아침 2회는
  시장4거리, 반딧불주유소, 군민회관 경유)
* 설천면(면사무소 앞)과 구천동(관리공단 밑 주차장)에서 리조트행 무료셔틀버스 이용 (설천
  에서는 1일 9회, 구천동에서는 1일 10여 회)
* 서울 종합운동장(2,9호선 종합운동장역 7번 출구 밖 150m 지점)에서 덕유산리조트행 정기셔
  틀버스가 1일 1회 떠난다. (비수기에는 주말만 운행하며 자세한 운행 정보는 덕유산리조트
  홈페이지 참조)

★ 덕유산리조트 곤도라 관람 정보 (2017년 1월 기준)
* 이용요금 : 어른 편도 11,000원, 왕복 15,000원 / 어린이 편도 7,700원, 왕복 11,000원 (리
  조트 회원은 30% 할인)
* 곤도라 설천봉행은 대체로 9시부터 17:30분까지, 리조트행은 16:30~18시까지 운행한다. 4계
  절마다 운행시간이 다르므로 자세한 운행시간은 덕유산리조트 홈페이지 곤도라 부분을 참조.
* 덕유산리조트 설천하우스 소재지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심곡리 1287-5 (만선로 185)
* 덕유산리조트 문의 ☎ 063-322-9000
* 덕유산리조트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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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아름다운 계곡을 옆구리에 차고 있는 ~~ 북한산 진관사 (진관사계곡)



' 북한산 진관사 여름 나들이 (진관사계곡) '

▲  진관사 경내

진관사 독성전, 칠성각

▲  진관사 독성전과 칠성각

▲  진관사계곡 폭포




뜨거운 도가니와 같았던 7월의 끝 무렵, 여름 제국(帝國)의 혹독한 핍박에서 잠시 벗어나
고 싶은 마음에 북한산(삼각산) 진관사계곡과 진관사로 피서 순례를 떠났다.

서울에서 계곡하면 북한산에 안긴 계곡들을 으뜸으로 쳐주는지라 서울에 몇 남지 않은 미
답처(未踏處)인 불광사(佛光寺)계곡으로 가려고 했다. 허나 사람의 마음은 갈대라고 이미
익숙해진 진관사와 진관사계곡으로 마음이 기울면서 오랜만에 진관사로 발걸음을 향했다.
서울 서북부의 중심지인 연신내역에서 일행을 만나 간단히 먹거리를 사들고 서울시내버스
701번(진관차고지↔종로2가)에 의지하여 진관사(삼천사)입구에서 두 발을 내린다. 여기서
전원 풍경이 눈을 시리게 하는 진관길을 7분 정도 들어서니 일주문이 멀리감치 나와 우리
를 맞는다.

진관사입구에서 일주문 사이에는 조선 성종(成宗)의 아들인 영산군묘역(寧山君墓域)과 영
산군의 생모인 숙용심씨묘표(淑容沈氏墓表) 등의 문화유산이 있고, 1968년 1,21사태를 일
으킨 김신조 공비 일당이 거쳐갔던 산길임을 알리는 안내문이 있으며, 북한산둘레길의 마
실길과 구름정원길이 이곳에서 서로 간판을 바꾸어 제 갈 길로 흘러간다.


 

♠  진관사 입문

▲  진관사의 정문인 일주문(一柱門)

1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진관사도 그 몇 년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그새 적지 않은 변화를 보여
주었다. 절에 들어서기도 전에 예전에는 없던 문이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으니 그 문은 바로
일주문이다.
그렇다면 그 문이 있기 전에는 진관사에 그 흔한 일주문이 없었을까? 그건 아니다. 여기서 경내
로 더 들어가면 1970년에 지어진 예전 일주문이 있다. 그 문이 40년 동안 일주문 역할을 하였으
나 2012년 속세 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주차장에 나무로 새 일주문을 만들고 기존 일주문은
해탈문으로 용도를 바꾸었다.

이전보다 더 크게 세워진 일주문은 그 위치가 길의 중앙이 아닌 너무 좌측으로 밀려나 있어 조
금은 뒷전으로 밀려난 기분을 준다. 그러다보니 산꾼과 중생들 대부분은 절의 관문인 일주문을
애써 지나지 않고 옆으로 지나간다. 문에게 그런 굴욕을 준 이유는 절을 찾는 차량들과 사람들
의 통행 편의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일주문 주변은 2008년 이전까지 조그만 마을이 터를 닦고 있었다. 산꾼과 속세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벌였던 식당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진관사에 갈 때마다 그들이 흘린 음식
냄새에 정신을 잃곤 하였다. 허나 북한산 주변을 정비하면서 마을을 모두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소나무와 갖은 나무를 심었으며, 마을까지 들어왔던 시내버스<7723번, 옛 454-2번>도 진관사입
구로 멀리감치 물러나 거기서 육중한 바퀴를 돌린다.

▲  극락교 밑을 흐르는 진관사계곡
(극락교 우측)

▲  진관사계곡과 나무 탐방로
(극락교 좌측)


▲  진관사 해탈문(解脫門)

일주문을 지나 극락교에서 졸졸졸~♪ 흐르는 계곡에 나의 번뇌를 힘껏 내던지며 흩어진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번뇌야 제발 바람 따라 멀리멀리 가거라~!' 주문을 해도 그 번뇌가 얼마나 무
거운지 떠내려가지도 않고 나를 기다리며 외친다. '잠시 너를 놓아줄테니 좋은 말 할 때 언능
내려와~~!!'

극락교를 지나면 시원스런 팔작지붕의 해탈문이 중생을 맞는다. 이 문은 원래 진관사의 일주문
으로 1970년에 진관이 만들었다. 전통 방식으로 만들지 않고 콘크리트로 기둥을 세우고 지붕만
나무로 한 형태로 한글로 가로식으로 쓰인 '삼각산 진관사' 현판이 걸려있었다. 콘크리트로 기
둥을 삼은 것도 그렇지만 현판 글씨도 전통식이 아닌 너무 현대식이라 옛 절의 면모가 다소 떨
어지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진관사도 그 부분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지 2012년에 새로
일주문을 짓고 기존의 일주문은 해탈문으로 이름을 갈았다.

해탈문을 들어서면 숲에 가려 보이지 않던 진관사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며, 문의 이름처럼
해탈을 해야 하건만 그게 참 쉽지가 않다. 그래서 부처는 아무나 되지 못하는 모양이다.


▲  석종형 승탑(僧塔)과 2기의 빛바랜 비석들

일주문을 지나면 왼쪽에 숲으로 인도하는 오솔길이 보일 것이다. 그 길은 삼천사로 넘어가는 산
길로 그 오솔길로 들어서면 근래에 지어진 때깔이 고운 사적비와 공덕비를 비롯하여 수풀 속에
자리한 석종형 승탑과 비석들이 나란히 3형제를 이루며 서 있는 모습이 두 눈에 들어올 것이다.

3형제 가운데 왼쪽에 자리한 승탑은 '혜월당대선사우성탑(慧月堂大禪師宇性塔)'으로 승탑에 잠
든 혜월당은 20세기에 활동했던 승려이다. 그 옆에 지붕돌을 인 빛바랜 비석은 조선 후기에 세
워진 것으로 정3품 벼슬을 지낸 전사명(全士明)의 석교송덕비(石橋頌德碑)와 자선송덕비(慈善頌
德碑)이다. 비석을 하나도 아닌 2개씩이나 지어줄 정도면 절에 대한 지원이 꽤 상당했던 모양이
다. 이래서 속세나 절이나 돈은 중요하다.

▲  2012년에 세워진 진관사 사적비(事積碑)와
공적비(功績碑)

▲  초가로 이루어진 진관사 찻집
(2015년 이전)


▲  진관사 돌담길 - 길 오른쪽(홍제루 방향)에는 진관사계곡이
속세를 향해 힘차게 물-질을 한다.

 ◀  진관사 은행나무 - 서울시보호수 12-3호
진관사에는 오래된 보호수가 3그루가 있다. 그
중 찻집 옆에 서 있는 이 은행나무는 그 막내로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지정 당시 나이
가 약 115년이라고 하니 그새 30년의 세월이 추
가되어 약 150년 정도 된다. 높이는 26m로 경내
에서 가장 높으며 둘레는 3m이다.


▲  진관사계곡에 걸려있는 세심교(洗心橋)
선암사 승선교(昇仙橋)를 꿈꾸는 것일까? 하얀 피부의 맨들맨들한 세심교는 경내와
함월당, 길상원, 공덕원을 이어주는 돌다리로 근래에 지어졌다.

▲  홍제루 정면

경내를 가리고 선 홍제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중층 건물로 절의 속살을 보이기 싫
은지 좌우로 담장을 두르며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다.
이 건물은 1977년에 진관이 세운 것으로 지붕은 호화롭게 청기와로 꾸몄으며, 아랫 층은 경내로
인도하는 통로로 가운데 계단을 올라서면 대웅전을 비롯한 경내가 흔쾌히 모습을 나타낸다.

홍제루 윗층은 교육 공간으로 수륙재를 비롯한 절의 행사 때는 단체 공양 장소로 쓰이기도 한다
. (예전 진관사 행사에 참여했을 때 여기서 점심공양을 한 적이 있음) 그리고 홍제루를 들어서
오른쪽으로 가면 커피 자판기와 두 다리를 쉴 수 있는 쉼터가 있다.


▲  홍제루 뒷면 (경내)

▲  홍제루 앞에 자라난 오래된 느티나무

홍제루 앞에는 오랜 세월을 머금은 느티나무 2
그루가 서로를 보듬으며 앞다투어 그늘을 드리
운다. 나무가 뿌리를 내린 위치가 평평한 곳이
아닌 계곡변 90도 벼랑이라 어떻게 저런 험난한
자리에서 어엿하게 자라날 수 있었는지 그저 신
기할 따름이다.
이들 느티나무는 1982년에 서울시 보호수 12-4,
12-5호로 지정되었는데, 지정 당시의 저들 나이
가 230년이라고 한다. 그새 30년에 세월이 얹혀
졌으니 나이는 260년 정도 된다. 높이는 각각
18m, 19m, 둘레는 3.1m, 2.5m이다. 둘이 워낙
따닥따닥 붙어있어 보호수 안내문이 아니면 누
가누군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  석조 옆 화단에 심어진 옛 주춧돌과 석물들
6.25때 파괴된 옛 건물의 주춧돌 3개가 화단에 벌러덩 누워 있다. 어느 건물을 받치던
주춧돌이었을까? 받쳐들 상대를 잃은 주춧돌의 허전한 대머리를 달래주려는 듯
합장인을 선보인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거북이상을 그들 머리에 두었다.

▲  진관사 석조(石槽)
석조에는 북한산이 베푼 물로 조그만 바다를 이룬다. (가뭄 때는 맨바닥을 드러냄)
허나 속세의 때를 탔는지 식수 불가가 되어 석조에 고인 물은 그야말로
그림의 물이 되었고, 석조는 경내를 수식하는 장식물이 되고 말았다.
그럼 여기서 잠시 진관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서울 서북부 제일의 고찰, 수륙재의 성지(聖地)인 북한산 진관사(津寬寺)
① 고려 현종의 이야기가 서린 진관사의 창건 설화
북한산(삼각산) 서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진관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조계사의 말
사(末寺)이다. 조선시대부터 불암산 불암사(佛巖寺), 삼성산 삼막사(三幕寺), 북한산 승가사(
僧伽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더불어 서울 근교 4대 명찰의 하나로 명성을 누렸으며 서울 서
북부에서 가장 크고 잘나가는 절이었다.

진관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고려 8대 제왕인 현종이다. 그는 자신을 구
해준 진관대사(津寬大師, 진관조사)를 위해 이 절을 지어주었는데,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워
낙에 유명한 이야기라 사극이나 영화 소재로 써도 손색은 없을 것이다. (이미 사극 '천추태후'
에서 1번 써먹었음)

현종(992~1031, 재위 1009~1031)은 고려 태조(太祖)의 아들인 안종 왕욱(安宗 王郁, ?~997)과
태조의 손녀인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씨의 소생으로 이름은 왕순(王詢)이다. 헌정왕후는 태조
의 아들인 대종 왕욱(大宗 王旭, ?~969)의 딸로 그녀의 남편인 안종과 한자만 다를 뿐 이름은
같으며, 헌정왕후도 엄연한 왕씨이나 고려 황족(皇族)들은 족내혼(族內婚)을 너무 선호한 탓에
공주를 비롯한 왕족 여인들은 보통 외가의 성을 땄다. 그래서 외가인 황보<皇甫, 황해도 황주(
黃州) 지역 세력가>씨를 칭하게 된 것이다.

헌정왕후는 사촌인 경종(景宗, 재위 975~981)에게 시집을 갔으나 981년 경종이 붕어(崩御)하자
사저로 나와 살던 중, 숙부가 되는 안종과 친해지게 된다. 그들은 숙부와 조카 사이임에도 그
경계를 넘어섰고, 그 결과 현종(왕순)을 낫게 되었으나 극심한 산고(産苦)로 죽고 만다.
그의 오라버니인 성종(成宗)은 그 책임을 물어 안종을 멀리 경상도 사천(泗川)으로 귀양보냈는
데, 나중에 왕순을 내려보내 직접 기르도록 했다. 하지만 안종 역시 오래 살지는 못하고 997년
거기서 숨을 거둔다.
이후 성종은 왕순을 다시 불러 궁중에서 길렀고, 성종이 997년 붕어하자 왕순의 사촌인 목종(穆
宗)이 제위에 오른다. 목종은 경종과 헌애왕후(獻哀王后) 황보씨(왕순의 큰 이모)의 아들로 그
가 제위에 오르자 왕후는 그 이름도 유명한 천추태후(千秋太后)를 칭하게 된다.

천추태후는 김치양(金致陽)이란 오랜 정인(情人)이 있는데, 그 사이에서 아들까지 낳아 부부행
세를 하기에 이른다. 유약한 목종은 특이하게도 동성연애를 빠져 점점 병약해지고 아들을 포기
한 태후와 김치양은 그들의 아들을 제위에 올리고자 안간힘을 쓴다. 마침 목종은 아들도 없었으
므로 그가 죽으면 별탈없이 김씨가 제왕이 될 수도 있다. 허나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친조카
인 왕순의 존재였다.

김치양은 고려 왕실을 뒤엎고 새 왕실을 세우려는 욕심 때문인지 왕순을 죽이고자 혈안이 된다.
그래서 그를 숭경사(崇慶寺)에 보내 죽이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진관사의 전신(前身)
으로 여겨지는 북한산 신혈사(新穴寺)로 쫓아내 비밀리에 자객을 보냈다.
당시 신혈사에는 진관대사가 머물고 있었는데, 왕순의 위급함을 눈치채고 불단(佛壇) 밑에 굴을
파 그를 숨기는 등 3년 동안 지켜주면서 자객은 결국 헛탕만 치고 만다. 젊은 나이에 드러누운
목종은 왕순을 후계자로 정하며 대량원군(大良元君)에 봉해 즉시 그를 데려오도록 했다.
그래서 왕순은 무사히 개경(開京)으로 돌아왔고, 1009년 북쪽에서 반란을 일으킨 강조(康兆)에
의해 제위에 오른다.

1010년 요나라(거란) 성종(成宗)이 강조의 난을 따진다는 이유로 친히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
어왔다. 초반에 강조가 검차(檢車)를 이용하여 꽤 선전을 했으나 자만으로 인해 크게 패하였고,
그 여세로 개경이 함락되자 현종은 눈물을 머금고 나주(羅州)까지 먼 길을 몽진했다. 1011년 거
란군이 토벌되어 개경으로 환궁을 했는데, 바로 그 해에 진관조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
인근에 절을 지어주고 그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했다.
절은 1012년 가을에 완성되었으며, 대웅전이 10칸, 동/서 승당(僧堂)이 각각 30칸, 청풍당(淸風
堂)과 명월요(明月寮)가 10칸, 기타 일주문, 해탈문, 종각 등 규모가 상당했고, 불상과 온갖 물
품까지 현종이 하사했다. 그리고 진관조사를 국사(國師)로 삼았다.
이렇게 제왕의 어려웠던 시절을 구해준 깊은 인연으로 태어난 진관사는 고려 왕실의 지원을 두
고두고 입으며 크게 승승장구한다.

② 딱 천년 묵은 진관사, 창건 이후 지금까지의 과정
1090년 선종(宣宗)은 남경(南京, 서울 도심)에 행차하면서 진관사에 친히 들려 오백나한재(五百
羅漢齋)를 열었다. 그리고 1099년 숙종(肅宗)이, 1110년에는 예종(睿宗)이 남경을 순행하는 과
정에서 들리면서 여러 보물을 하사했다. 당시 진관사는 승가사, 장의사(長義寺)와 더불어 서울
에서 가장 잘나가는 절이었다.

1392년 천하가 조선으로 강제로 바뀐 이후에도 진관사의 명성은 여전했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를 뒤엎으면서 마구잡이로 죽인 고려 왕족과 백성들의 혼을 달래고 민심 안정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수륙재(水陸齋)를 계획한다. 그래서 서울과 가까운 북한산과 도봉산 일대 사찰 가운
데 마땅한 장소를 물색했는데, 진관사가 딱 적합하다는 보고에 따라 재를 지낼 수륙사(水陸社)
를 짓게 했으며, 1397년 건물이 완성되자 친히 낙성식에 참여하여 거하게 수륙재를 여는 한편,
권근(權近)에게 '수륙사 조성기(造成記)'를 작성토록 했다. 그 인연으로 진관사는 수륙재의 중
심 도량이 되어 변함없는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때 지어진 수륙사와 부속건물은 59칸 규모로 상/중/하단의 3단을 기본 구조로 하여 중/하단에
회랑(回廊)을 설치하는 등, 자못 위엄이 있는 규모였다.

참고로 수륙재는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물과 땅을 헤매는 고혼(孤魂)들을 천도하는 일종의 천도
재로 영산재에 비해 공익성이 큰 불교의 주요 행사이다. 양나라 무제(武帝, 502~549) 때 처음
시작되었다고 하며, 이 땅에서는 940년(고려 태조 22년) 12월에 처음 시작되었다.

1413년 태종은 일찍 죽은 4번째 아들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해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
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하사해 경비로 쓰게 했다. 그 이후 매년 1
월 또는 2월 15일에 국가 주도의 수륙대재가 열리면서 왕족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구름처럼 몰
려와 재에 참여했고, 서울 근교 제일의 사찰로 굳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421년에는 세종(世宗)이 부모인 태종 내외의 명복을 빌고자 재를 지냈는데, 이때부터 왕실의
각종 재를 지내는 역할까지 담당하게 된다. 또한 1442년 세종은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의 공부
를 독려하고자 독서당(讀書堂)을 경내에 설치해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등 많은 문인
들이 이곳에서 머리를 싸매고 독서를 했다.

1452년에 중수를 벌였고, 1463년 화재로 건물 일부가 타버리면서 1470년에 중건했다. 이후 별탈
없이 지내오다가 1854년과 1858년에 중수했으며, 1879년에 당두화상(堂頭和尙) 경운(慶雲)이 34
칸을 지었다. 그리고 1908년 송암(松庵)이 경내에 오층석탑을 세웠으며, (경내 서쪽 외곽에 있
음) 명부전에 불상과 시왕탱을 개금했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짓고, 자신의 토지를 절에 기
증해 '백련결사염불회'의 자원으로 쓰게 했다.

1950년 6.25전쟁 때 공비 토벌 작전 과정에서 나한전과 칠성각, 독성전을 제외하고 모두 파괴되
는 비운을 겪었으며, 초라한 몰골로 있던 것을 1963년 비구니 최진관<진관(眞觀)>이 이곳 주지
로 들어와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비록 살아남은 칠성각 등 3동을 제외하고는 예전 가람과는
다르게 중창되어 아쉬움이 다소 있으나 진관의 노력으로 예전 규모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으며,
1980년 대웅전과 주요 건물의 기와를 청기와로 도배했다. 그리고 1992년 공양간과 요사를 새로
지었으며, 1996년 코끼리유치원, 2007년에 사회복지법인 진관 무위원을 세워 어린이 교육과 사
회복지, 포교에 나섰다.

2009년에는 칠성각을 해체/수리하는 과정에서 3.1운동 시절 승려 백초월이 사용했던 태극기와
독립신문 등이 발견되어 매스컴을 크게 흔든 바가 있으며 이때쯤 수륙사터를 발굴 조사하였다.
2012년에는 일주문을 새로 지었고, 2015년에는 경내 북쪽을 싹 밀어 산사음식연구소, 보현다실
등 사찰 음식과 전통 찻집, 템플스테이를 다루는 건물을 요란하게 지어올려 절의 사세를 한껏
뽐내었다.
또한 진관의 주도로 오랫동안 잊혀진 옛 수륙재(국행수륙대재)를 복원하고자 동분서주하여 1982
년 자운율사의 의해 힘들게 복원에 성공, 이후부터 매년 윤년 윤달에 수륙재를 봉행하고 있으며
, 2012년부터는 매년 여름과 가을에도 개최하여 수륙재의 전통을 힘차게 이어나가고 있다. 그렇
게 진관사를 반석 위에 올렸던 우리나라 비구니의 원로, 진관은 바로 얼마 전 2016년 7월 3일
한낮에 88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어 영원히 진관사에 깃들게 되었다.

③ 진관사의 현재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독성전, 칠성각, 나한전, 나가원, 요사, 서
별원, 홍제루, 범종각 등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세심교 건너에도 함월당과 길상원, 공덕
원 등의 여러 건물이 있어 도합 약 20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칠성각에서 발견된 태극기 및 독립신문류(등록문화재 458호)를 비롯해 칠성
각과 독성전, 석불좌상, 독성도, 소조3존불상, 소조16나한상, 산신도, 칠성도, 수륙무차평등재
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23호) 등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간직하고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준다. 또한 이곳의 자랑인 수륙재는 '진관사 수륙재'란 이름으로
국가 무형문화재 126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100~200년 묵은 보호수 3그루가 있어 고색의
무게를 조금 보탠다.

서울 도심과 가까운 산사로 울창한 숲속에 묻혀있으며, 멋드러진 진관사계곡을 옆에 끼고 있어
경관도 일품이라 세종이 왜 이곳에 독서당을 지었는지 알만하다. 첩첩한 산골에 자리하여 산사
의 내음도 진하게 풍기고 있으며, 비구니 사찰이나 경내가 깨끗하고 정갈해 어수선한 마음마저
싹둑 가다듬게 만든다. 속세에서 나를 잠시 지우고 싶은데 멀리 가기가 힘들 때 찾아와 안기고
싶은 곳으로 한여름에 오면 절을 둘러보고 윗쪽 계곡에 올라가 피서를 즐기면 아주 극락이 따
로 없다.

※ 진관사 찾아가기 (2016년 8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에서 701,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
  입구)에서 하차하여 도보 15분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3번 출구)에서 7723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에
  서 하차
* 연신내역 3번 출구 밖 하나은행 앞에서 진관사 셔틀버스 이용. 평일은 1일 4회, 행사가 있는
  날과 주말은 9회 운행한다. (8시부터 10시대까지 운행)
* 진관사 일주문 주변에 주차장이 있으며 홍제루까지 차량 접근 가능

★ 진관사 관람정보
* 진관사는 템플스테이(Temple Stay)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주중이나 주말에 1박 2일을 머
  무는 휴식형(14시부터 다음날 10시까지)과 불교문화 체험형, 단체형, 어린이 템플스테이. 청
  소년 템플스테이 등이 있으며, 예불과 참선, 다담(茶談), 발우공양, 108배, 안행(安行), 연꽃
  등 만들기, 사찰음식 체험 등을 제공한다. 1박2일 가격은 성인 7만원, 청소년과 어린이는 5만
  원이며, 템플스테이 신청과 자세한 정보는 진관사 홈페이지를 참조한다.
  (문의 ☎ 02-359-8410)
* 진관사 홍제루에서 계곡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폭포가 등장하며, 여기서부터 진관사계곡의 숨
  겨진 절경이 마음을 앗아간다. 서울에서 제법 잘생긴 계곡이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또한 진
  관사계곡 산길은 2015년 이후 길이 다소 정비되었다고 하나 바위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어 조
  심을 기해야 되며, 탐방로에서 계곡까지는 대부분 바위를 타고 내려가야 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354 (☎ 02-359-8410)
* 진관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칠성각에 봉안된 귀여운 석불좌상과 칠성도


 

♠  진관사 대웅전 주변

▲  서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大雄殿)

홍제루를 들어서면 바로 정면으로 법당인 대웅전이 마주한다. 정면 5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1965년에 진관이 세웠으며, 1980년에 그 비싸다는 청기와를 입혀 화려함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불단에는 1966년에 조성된 석가/미륵/제화갈라보살상을 중심으로 1967년에 제작된 삼신불
후불탱, 신중탱(1967년), 오여래탱(1990년), 범종(1966년), 1934년에 그려진 현왕탱(現王幀) 등
이 내부를 눈부시게 수식한다.

대웅전 뜨락에는 푸른 잔디가 정갈하게 깔려져 입혀져 있고, 건물 바로 앞에 석등(石燈) 2기가
자리한다. 허나 법당 앞에 으례 있는 석탑은 없는데, 원래는 1908년에 세운 5층석탑이 하나 있
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지금은 경내 구석에 몰래 찌그러져 있으니 아마도 풍수지리(風水地理)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곳이 계란을 상징하는 지형인데, 탑을 세우면 계란이 자칫 깨질 수 있
어서 그런듯)


▲  대웅전 불단을 지키는 석가/미륵/제화갈라보살

법당의 3존불이면 보통 중심 불상과 협시불(夾侍佛)을 짧은 간격으로 배치하는데 반해, 이곳은
서로가 조금씩 거리를 두며 독자적인 모습으로 앉아있다. 이들은 1966년에 조성된 것으로 가운
데 앉아있는 불상이 불교의 1인자인 석가불이고, 그의 왼쪽은 미래의 부처로 일컬어지는 미륵보
살(彌勒菩薩), 오른쪽은 과거불인 제화갈라(提華褐羅)보살로 이들은 법화경(法華經)에 나오는
수기3존불(授記三尊佛)이다.
가운데에 자리한 석가불을 빼고는 모두 보살(菩薩)의 신분이라 탐이 날 정도로 화려한 보관(寶
冠)을 쓰고 있으며, 다들 온화한 미소로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격려한다. 그리고 그들 뒤에
는 각각 후불탱화가 걸려있는데, 이들은 1967년에 제작된 것으로 석가불 뒤에는 비로자나불(毘
盧舍那佛)을 담은 후불탱이, 미륵보살 뒤에는 노사나불(盧舍那佛)이 담긴 후불탱화, 제화갈라
뒤에는 석가모니 후불탱화가 걸려있다.


▲  진관사 나가원(那迦院)

푸른 잔디가 곱게 입혀진 대웅전 뜨락 우측에는 나가원이 있다. 정면으로 요사인 동별당을 마주
하고 있는 나가원은 한때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1972년에 진관이 지은 것이다. 정면 7칸, 측
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요사 및 대중방(大衆房), 종무소(宗務所)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신
도를 수용하는 대중방에는 1972~73년에 조성된 석조관음보살좌상과 아미타후불탱화가 있다.


▲  나가원 뒷쪽(종무소 쪽)에 놓인 맷돌들
조선 후기와 왜정 때 쓰인 맷돌 3형제가 어처구니를 상실한 채, 뜻하지 않은
장식물이 되어 쓸쓸한 노년을 보낸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건물이든 뒷전으로 밀려난 모습은 쓸쓸하기 그지 없다.

▲  진관사 동정각(動靜閣)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아련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의 보금자리로 1975년에 지어졌다.
종은 1974년에 조성된 것으로 그 흔한 범종각이 아닌 고요함을 흐트린다는 뜻의
동정각을 칭하는 점이 참 이채롭다.

▲  대웅전과 나가원 뒷쪽

▲  수륙재 행사 천막에 정면이 가려진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명부전은 1968년에 지어진 것으로 1996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새로 지어졌
다. 지붕에는 푸른 기와가 입혀져 화려함을 더하며, 내부에는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10왕, 판관,
사자,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건물 내부를 사진에 담으려고 했으나 마침 비구니 1명이 안에서 염불을 중얼거리고 있어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  진관사의 보물창고 ~~ 나한전, 독성전, 칠성각

▲  왼쪽부터 독성전, 칠성각, 나한전

진관사에 왔다면 꼭 봐야되는 존재들이 있다. 바로 경내 좌측 구석에 옹기종기 모인 나한전과
칠성각, 독성전 3동(나한전 구역)이 그것이다. 이들은 진관사를 잿더미로 몰아넣었던 6.25 때
도 살아남은 진관사의 옛 건물로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지어진 것들이다. 겉보기에는 청
기와로 번쩍이고 덩치도 큰 대웅전이나 나가원, 홍제루에 비해 보잘 것도 없고 구석에 몰려들
있어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정말 지나치기 일쑤다.
하지만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명언이 있듯이 진관사의 지정문화재(무형문화재 제외) 가운
데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를 빼고는 모두 이들 건물 안에 담겨져 있다.
게다가 자리 이동도 없이 예전의 가람배치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진관사의 예전 모습을 더듬
는데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대웅전과 나가원 등은 대충 둘러봐도 되니 나한전 구역 건물들은 내부까지 꼭 살펴보도록 하자.
그래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독성전과 칠성각은 서울에 있는 칠성각/독성각/산신각 계
열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  진관사 나한전(羅漢殿)

나한전 구역에서 유일하게 청기와를 눌러쓴 나한전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필체의 힘이 넘쳐보이는 명부전 현판은 1886년에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이 쓴 것이라고 전하며, 내부에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한 소조3존불을 비롯해 소조
16나한상, 영산회상도, 16나한도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나한전 소(塑, 소조) 3존불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3호
후불탱화로 걸린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5호


나한전 불단 유리 안에 소중히 봉안된 소조 3존불은 흙으로 빚어서 도금을 입힌 것으로 가운데
불상은 석가불이고, 좌우에 보관을 쓴 이들은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다. 대웅전 불단에 봉
안된 수기3존불(授記三尊佛)과 같으며, 석가불은 통통한 얼굴에 좀 경직된 표정이지만 좌우 보
살은 온화한 표정으로 살짝 미소가 드리워져 있다.
이 3존불은 진관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
겨진다. 서울 토박이 불상 가운데서도 나이가 많은 편으로 얼굴의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그들이
입은 법의(法衣)는 통견의(通肩衣)로 옷주름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3존불상 뒤에 걸린 영산회상도는 부처가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1884년 상궁(尙宮)들의
시주로 진철(震徹)이 그린 것이다. 구도는 중앙에 부처가 있고, 그 옆에 4명의 보살과 사천왕(
四天王), 6명의 제자를 배치했는데, 빈 공간에는 채운(彩雲)을 가득 채워 여백이 없다.
부처는 얼굴이 양감(量感)있게 표현되었고, 몸을 꽤나 단련한 듯, 힘찬 모습이다. 법의는 통견
으로 두 손은 아미타수인(阿彌陀手印) 비슷한 수인을 보이고 있는데, 이런 제스쳐는 조선 후기
불화에서 많이 나온다. 그리고 부처 좌우에는 문수/보현보살이 큰 연꽃을 들고 서 있고, 사천
왕이 각자의 장비를 들고 그들을 호위한다. 또한 상체만 드러내며 합장인을 보이고 있는 제자
가 좌우에 3명씩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횡축의 화면과 단아한 형태, 밝은 주조색 등 19세기 후반 불화의 양식을 잘보여주고
있으며, 그 당시 서울 지역 불화의 베스트급으로 꼽힌다.



▲  나한전 소(塑) 16나한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4호
16나한도(十六羅漢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6호


3존불 좌우에는 부처의 핵심 제자인 16나한상과 16나한도가 자리해 있다. 불단 좌우에 각각 8
구의 나한상이 16나한을 이루고 있고, 그외에 제석상(帝釋像) 1구, 사자상(使者像) 1구, 활력
이 넘치는 인왕상(仁王像) 2구 등 모두 20구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흙으로 빚어 색을 입힌 것으로 진관사를 찾는 수많은 중생처럼 제각각의 모습이라 어느
하나 같은 얼굴, 같은 포즈가 없을 정도로 개성이 넘친다. 게다가 자세나 얼굴 표정도 어느 양
식에 얽매이지 않은 사실적이고 해학적으로 묘사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서울, 경기도 지역의
나한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유물로 가치가 높다.

16나한도는 나한도 4폭과 제석신중도(帝釋神衆圖) 1폭, 사자신중도(使者神衆圖) 1폭 등 총 6폭
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한도(羅漢圖)는 4명의 나한이 산수를 배경으로 시자(侍者)와 동자를 거
느리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제석신중도와 사자신중도는 나한도 좌우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화면
을 2개로 나누어 구름 속에 있는 제석과 신중, 사자와 신중(神衆)을 그렸는데 근대적인 음영법
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 그림은 영산회상도와 마찬가지로 상궁의 시주로 1884년에 진철(震徹), 축연(竺衍) 등이 그
린 것으로 세밀한 필선(筆線)과 정교한 문양 표현, 금니(金泥) 사용 등이 주목된다. 그리고 나
한도에 나와있는 경물(景物)은 당시에 유행하던 민화풍으로 그려져 있어 그 시절 회화 연구에
착한 자료가 되어준다.


▲  진관사 독성전(獨聖殿)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4호

칠성각 옆에 자리하며 나한전을 바라보고 있는 독성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아주 단촐한 맞
배지붕 건물이다. 부처의 제자로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의
보금자리로 2006년까지만 해도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독성각이라 불렸으나 진관사에서 이 건물
에 대한 기대감이 큰지 각(閣)에서 전(殿)으로 등급을 높이면서 독성전이 되었다.

이 건물은 1907년에 지어진 것으로 상궁 4명과 부부 2쌍이 돈을 대주었다. 당시에 만들어진 독
성전 공덕기(功德記)에 시주한 사람과 공사 참여자 명단이 기재되어 있는데, 6.25때 운이 좋게
살아남았으며, 1969년에 진관이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조그만 내부에는 소조독성상을 비롯해 독성도, 산신도 등이 있는데, 모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독성상과 독성도는 유리로 봉해져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다.


▲  소(塑) 독성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1호
독성도(獨聖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2호

▲  작고 귀여운 소 독성상의 위엄

독성전의 주인장인 독성상은 흙을 빚어서 만든 것으로 인형처럼 귀엽고 아담한 모습이다. 눈썹
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입술은 살짝 다물고 있으며, 입술 위에 엷은 수염이 있다.
눈은 양쪽으로 길게 뜨고 있고, 표정은 동자승을 모델로 만든 듯, 천진난만해 보인다. 이는 독
성의 존재가 백성들에게 아주 가까이 있었다는 뜻이 된다. 왼쪽 어깨에는 옷을 고정한 금구장
식(金具裝飾)이 있으며, 몸통에 비해 얼굴이 좀 크고 무릎이 매우 낮아 신체가 다소 길어 보인
다.
19세기(이르면 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고색이 묻힌 독성상이 꽤 많은 것 같지만 정작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서는 거의 없어 진관사의 독성상은 꽤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래서 당시 독성
상의 특징과 조각 수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지방문화재자료의 지위를 얻었다.

독성상 뒤에 걸린 독성도는 독성을 비롯하여 시자(비서)와 동자 등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와 인연이 깊은 천태산으로 보이는 돌봉우리가 여러 개 보이고, 동자 옆에는 소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그림 폭이 2m에 이르러 우리나라 독성도(독성탱) 가운데 제법 큰 편에 속한다. 이 그
림은 1907년 상궁 이씨와 홍순모(洪淳謨)의 시주로 경기도에서 활약하던 화승(畵僧) 경선당 응
석(慶船堂 應釋)이 그린 것으로 채색이 전체적으로 탁해 보이며, 같은 독성인데도 그림에 나온
독성과 앞에 있는 독성상의 모습이 너무 차이가 나 마치 독성의 한참 때 시절과 늙은 시절을
사이좋게 담은 것 같다.


▲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9호

진관사는 독성전과 칠성각을 갖추고 있지만 유독 산신의 건물인 산신각을 갖추지 않았다. 그래
서 독성전 한쪽에 조촐하게 그의 공간을 마련했다.
산신도에는 유난히 빨간 옷을 입은 산신(山神)과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그려져 있는데, 민
화에 나오는 호랑이 이상으로 너무 익살스럽고 귀여워 정말 쓰다듬고 싶다. 그의 긴 꼬랑지는
산신 왼쪽에서 살랑살랑 춤을 춘다. 산신은 인심 좋은 구멍가게 노공(老公) 같으며, 산신도(산
신탱)에 기본으로 등장하는 산은 나와있지 있고, 배경은 그냥 여백으로 남아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그려진 것으로 자세한 제작시기와 시주자, 화승에 대한 정보는
아쉽게도 전해오지 않는다.


▲  칠성각(七星閣)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3호

독성전 옆에 자리한 칠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1911년에 지어
진 것으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서울, 경기도 지역의 사찰 건물에서 많이 나타나는 건
축 양식인 좌/우/후면을 벽돌로 처리한 화방벽(火防壁)이 설치되었다.
내부에는 석불좌상과 칠성도, 명호 스님 초상화 등이 있으며, 2009년 5월 칠성각을 해체/보수
했을 때 태극기와 독립신문류 등이 발견되어 속세를 한참 떠들썩하게 했다. 


▲  칠성각 석불좌상(石佛坐像)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0호
칠성도(七星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7호

▲  귀여움이 묻어난 칠성각 석불좌상의 위엄

유리로 봉해진 칠성각 불단에는 아기부처를 닮은 아주 조그만 불상이 앉아있어 보는 이로 하여
금 마음의 편안함을 안겨준다.
이 불상은 옥석(玉石)으로 만든 것으로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으며, 1969년에 진관이 개금(改金
)을 입혔다. 불상의 크기를 봐서는 천불상(千佛像)의 일원으로 조성되었다가 따로 떨어져 나온
것으로 여겨지며, 이런 불상은 서울과 경기도 북부, 강원도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불상의 머리는 나발로 머리 윗부분에는 육계(肉髻, 무견정상)가 완만하게 튀어나왔으며, 앳되
고 귀여운 인상으로 내가 친견한 불상 가운데 제일 편안하고, 귀여우며. 근엄하지도 무섭지도
없는 온화한 표정이다. 불상의 양손은 손의 바깥부분이 보이도록 다리에 대고 있는데, 그 의미
는 모르겠다. 저건 도대체 무슨 수인(手印)일까?

석불좌상 뒤에 걸린 그림은 칠성도로 1910년 춘담(春潭), 범천(梵天) 등이 그린 것이다. 그림
중앙에는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를 중심으로 칠성(七星)과 성군(星君) 등이 있다. 청련화(靑
蓮花) 위에 앉은 치성광여래는 붉은 법의를 입고 오른손은 가슴 부위에, 왼손은 무릎 위에서
금륜을 얹고 있으며, 그 좌우에는 7구의 칠성이 여래를 향해 합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밑에
는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이 여의(如意)를 들고 있는데, 일광은 붉은 해를,월광은 하얀 달이 그려진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그 옆에는
도교식으로 표현된 칠원성군(七
元星君)이 홀을 들고 서 있다.

이 그림은 두터운 설채법(設彩法), 붉은 적색의 주조색(主調色)에 감색과 녹색이 조금 섞인 채
색, 등장 인물 얼굴에 칠해진 두터운 호분(胡粉) 등의 표현에서 20세기 초반 불화 양식을 보여
주고 있으며, 조성 연대와 그림을 그린 승려 등이 나와있고 서울에서 보기 드문 칠성도(七星圖
)의 작례(作例)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명호스님 초상(肖像)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8호

석불좌상과 칠성도 옆에는 독특하게도 승려의 초상(영정)이 걸려있다. 초상의 높이는 106.2㎝,
폭 83㎝로 그림 왼쪽 상단에 세로로 '影入山水圖 數珠看經(영입산수도 수주간경)~'으로 시작되
는 4줄의 찬시(讚詩)가 있고, 오른쪽 상단에는 한글로 '인사졀명호불영뎡'이란 문구가 있어 인
수사(또는 인사사)에 있던 명호의 영정으로 여겨진다.
그림 중앙에는 경상(經床)을 앞에 두고 정면을 향한 채 결가부좌한 승려의 모습을 가득히 그렸
는데, 그의 옆으로 불자(拂子)와 두루마리를 든 시자를 배치해 3존형식을 이루었다. 이러한 3
존 형식의 영정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것으로 크게 주목된다.
허나 그림의 제작시기와 그린 사람의 정보, 명호란 인물의 대한 기록과 인수사의 위치, 진관사
에 흘러들어온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그림에 속사정은 알 수 없으나 그림 구도와 채색으로 미
루어볼 때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3존 배치와 찬시, 한
글 제목 등은 다른 불화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이다.


▲  90년 만에 햇살을 본 빛바랜 태극기 - 등록문화재 458호

2009년 5월 칠성각을 해체 보수했을 때 불단 내부와 벽체 사이에서 태극기와 독립신문 등 독립
운동 관련 자료 6종 21점이 발견되어 속세의 진한 주목을 받았다. (이때 대들보에서도 칠성각
상량문이 발견되어 1911년에 지어졌음이 밝혀졌음)
이들은 진관사와 인연이 깊던 백초월(白初月, 1878~1944)이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사용한 것
으로 여겨지는데, 독립신문과 자료들은 태극기에 포근히 감싸인 채로 발견되었다.
이렇게 90년 가까이 칠성각에 꽁꽁 숨겨진 것은 왜정의 탄압을 피하기 위함으로 보여지며, 기
나긴 세월 동안 광합성 작용을 받지 못했지만 빛이 좀 바랜 것을 빼고는 대체로 양호하여 알아
보는데 그리 지장은 없다. 단순해보이면서 심오한 뜻이 가득 깃든 태극기를 보니 그동안 진관
사에서는 누리지 못했던 가슴 뭉클함이 솟아 오른다.

태극기는 가로 89cm, 세로 70cm의 면직물에 바느질되어 있으며 중앙에 32cm 직경의 태극문양이
있고, 건과 곤, 감, 리의 4괘가 갖추어져 있다. 4괘의 위치가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
위원회가 제정한 국기 양식의 4괘와 동일하나 현재와는 위치가 달라 태극기 변천사에 귀중한
자료일 뿐 아니라 진관사가 서울 지역 불교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음을 살짝 귀뜀해 준다.

태극기 안에 담긴 독립신문류는 신대한<(新大韓), 신채호(申采浩)가 창간한 신문> 3점, 독립신
문<(獨立新聞), 상해임시정부의 기관지> 4점,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 천도교에서 3.1운
동 당시 발행한 신문> 5점, 자유신종보(自由晨鍾報) 6점, 경고문(警告文) 2점으로 이중 자유신
종보는 이번에 처음으로 그 존재가 알려진 매우 신선한 자료이다. 신문마다 태극기 도안과 태
극기와 관련된 내용이 게재되어 있고, 경고문은 독립에 대한 확신으로 끝까지 독립투쟁을 하자
고 호소하는 문서이다.
이렇게 귀중한 독립운동 관련 자료가 같은 곳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것에 그 의미가 크며, 1919
년 3.1운동 이후 12월까지 조선과 우리의 옛 땅인 중원대륙에서 펼쳐진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보충해주는 중요 자료로 그 가치가 높다. 현재 태극기는 칠성각에 공개하고 있으며, 독립신문
과 기타 문서는 비공개이다, ('진관사 소장 태극기 및 독립신문류'란 이름으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됨) 2010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진관사 태극기' 특별전에 이들이 처음 속세에 공개
되었으며, KBS에서 3.1절 특집으로 '초월의 비장, 진관사 태극기'를 방영하기도 했다.

이 태극기를 사용했던 백초월은 만해 한용운(韓龍雲)에 비견되는 항왜(抗倭) 승려로 3.1운동
이후 진관사에 주로 머물며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1944년 왜정에 체포되어 그들의 잔인한 고문
끝에 광복을 1년 앞둔 청주교도소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  진관사 뒷쪽에 숨겨진 서울 제일의 명품 계곡 ~ 진관사계곡

▲  진관사계곡에서 만난 1번째 폭포 (폭포 이름은 없음)

진관사에 왔다면 경내만 살피지 말고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발품을 조금 팔아서 절 뒷쪽 계곡에
도 한번 올라가보자. 그렇다고 많이 올라갈 것도 없다. 조금만 가면 윗 사진의 폭포가 나오고,
여기서부터 금강산과 설악산도 질투할 정도로 1품급 경관이 펼쳐져 중생의 정처없는 마음을 단
단히 앗아갈 것이다.

진관사계곡(진관천)은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서 있던 비봉(碑峰) 북쪽에서 발원해 진관
사를 끼고 창릉천(昌陵川)으로 흘러가는 북한산 서쪽 계곡의 하나로 북한산성 안에 자리한 북한
산성계곡, 개연폭포 주변과 견줄 정도로 국보급 계곡을 자랑한다. 북한산에서 가장 빼어난 수준
의 계곡이자 서울 장안 으뜸의 계곡으로 키 작은 폭포가 주렁주렁 달려있어 경관을 크게 돕는다.
이들 폭포는 아직까지는 속세에서 지어준 이름이 없다.

1번째 폭포를 시작으로 대자연 형님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그림 같은 절경이 가히 숨을 질리
게 하는데, 1번째 폭포 윗쪽부터는 계곡 접근이 가능하여 여름 제국에 저항하며 피서를 즐기는
이들로 봐글봐글하다. (폭포 밑에서 진관공원지킴터 구간 계곡은 접근 통제)
우리는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속세에서 가져온 먹거리로 황제 못
지 않은 간식 시간을 가지며 거울처럼 맑은 못에 꼬질꼬질한 발과 다리를 담구었다. 마음 같아
서는 온 몸으로 진하게 계곡과 스킨쉽을 즐기고 싶지만 여벌의 옷을 갖추지 않았다.


▲  물이 지그재그로 흐르는 2번째 폭포 주변

▲  장대한 세월의 거친 주름이 그어진 90도 벼랑과 계곡
벼랑 밑에 폭포와 좁은 목이 있다. 수심은 얕으나 큰 비가 내려 계곡이
잔뜩 흥분한 직후에는 조심하는 것이 좋다.
 

진관사계곡 산길은 1번째 폭포를 조금 지나 2번째 폭포 직전에서 계곡 북쪽으로 펼쳐지는데, 경
사가 각박한 벼랑길을 올라가야 된다. 다행히 2015년에 길을 크게 순화시켜 통행이 한결 편해졌
는데, 산보다 계곡이 주목적이라면 계곡을 따라 가는 것도 괜찮다. 중간중간 머물 자리도 많고,
계곡의 속살을 깊히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 이름난 계곡은 여기 외에도 북한산 삼천리골(삼천사계곡)과 불광사계곡, 구기동계곡, 소
귀천계곡, 구천계곡(구천폭포, ☞ 관련글 보러가기), 동령폭포, 도봉산(道峰山) 무수골과 문사
동계곡, 도봉계곡, 북악산 백사실(백사골), 수락산 벽운동계곡, 관악산 암반천계곡 등이 있다.


▲  40~45도 기울어진 하얀 피부의 벼랑과 그 밑을 흐르는 진관사계곡
우리는 등산로에서 40도 벼랑을 타고 내려와 이곳에 자리를 피고 조촐하게
피서를 즐겼다. 끝없이 넓은 여름 제국에 대항하며 머문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우리의 임시 낙원이었다.

▲  40도 벼랑 밑에 숨겨진 청정한 못
하늘나라 선녀 누님들이 살짝 몸을 씻는 곳은 아닐까? 달님이 천하를 희미하게
비출 때 몰래 잠입하여 그들의 목욕 장면을 훔쳐보고 싶다.

▲  장쾌하게 쏟아지는 40도 벼랑 밑 폭포의 위엄
하얀 명주를 급하게 늘어뜨린 듯, 폭포수의 기세가 대단하다.
그 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귀신이 다 도망칠 정도이다.

▲  진관사계곡 90도 벼랑
단양 사인암(舍人巖, ☞ 관련글 보러가기)의 축소판일까? 산길에서 보는 것보다는
계곡 40도 벼랑에서 보는 모습이 훨씬 장관이다.

▲  40도 벼랑에서 바라본 진관사계곡 최상류와 비봉 능선
마음 같아서는 더욱 깊숙히 파고들고 싶지만 이후는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에
맡기며 여기서 길을 접었다. 다음에 오면 계곡 끝까지 꼭 올라가보리라~~~!

▲  다시 속세로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다. (진관사 앞 길)
이렇게 하여 명품 계곡을 겯드린 진관사 여름 나들이는 다음의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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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숨겨진 은빛 폭포, 북한산 3대 폭포의 하나로 추앙받는 ~~ 북한산 구천폭포 (구천계곡,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일품 폭포, 북한산 구천폭포 '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구천폭포 상단 


 

지구 온난화를 등에 업고 나날이 비대해지는 여름, 그 여름이 한참 기지개를 켜며 무더운
이빨을 드러내던 6월 한복판에 여름 제국(帝國)의 이른 핍박에서 잠시 벗어나고자 북한산
(北漢山, 삼각산) 동쪽 자락에 묻힌 구천폭포를 찾았다.

동그란 햇님이 하늘 복판에 걸려있던 오후 2시, 수유역에서 일행들을 만나 강북구 마을버
스 01번을 타고 4.19국립묘지 윗쪽에 자리한 아카데미하우스<통일교육원, 이준 묘역 입구
> 종점에서 두 발을 내린다. 여기서 구천계곡을 따라 15분 정도 들어가면 피서의 구세주,
구천폭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  대자연이 서울에 내린 크나큰 선물, 북한산 3대 폭포의 하나로
오랫동안 찬양을 받고 있는 구천폭포(九天瀑布)

▲  구천폭포 하단(아랫폭포)

구천폭포를 품은 구천계곡은 북한산 동부를 장식하고 있는 주요 계곡의 하나로 계곡 상류 200
~250m 고지에 북한산 3대 폭포(구천폭포, 동령폭포, 개연폭포)의 하나인 구천폭포가 1폭의 수
채화처럼 도도하게 걸려있다.
이 폭포는 '수도폭포'라고도 하며, 폭포 상단에 '구천은폭(九天銀瀑)'이란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어 그 글씨 그대로 '구천은폭'이라 불리기도 한다.

폭포는 상/중/하단(넓게 나누면 4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
은 하단(아랫폭포)이다. 구천계곡 산길은 폭포 직전에서 2갈래로 갈라지는데, 여기서 직진하면
바로 폭포 하단이며 왼쪽으로 가면 구천폭포의 윗도리와 진달래능선, 북한산성 대동문으로 이
어진다.
누워있는 계곡을 일으켜 세운 듯, 비스듬한 경사의 암벽을 타고 내려오는 폭포의 모습에 '이게
구천폭포야? 장난해??' 다들 실망을 금치 못한다. 허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구천폭포의 맛보기
버전이지 본 모습은 아니다. 그의 실체는 여기서 더 올라가야 나오니 괜히 폭포의 농간에 발길
을 돌리지 말자~~~!

폭포 하단은 높이가 약 20~25m 정도로 폭포를 이루는 암벽은 새하얀 피부를 자랑하며 폭포 앞
에는 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암석과 바위들이 이리저리 널부러져 있고, 폭포 동남쪽에
는 넓은 공터가 있다. 우리는 그 공터에 자리를 잡고 속세에서 가져온 행동식을 섭취했다.
일행들이 가져온 먹거리는 김밥과 떡볶이, 순대, 온갖 과자, 막걸리, 파전, 도토리묵 등 참으
로 다양했다. 버스에서 내려 겨우 15분 정도 올라온 곳이지만 기분은 마치 2시간 이상 올라온
느낌으로 속세보다는 하늘과 조금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모두가 꿀맛이다.
그렇게 폭포 앞에서 푸짐한 행동식에 곡차(穀茶) 1잔 겯드리다가 계곡에 두 손을 담구며 잠시
이른 더위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다. 정말 기분 같아서는 두 발과 몸까지 물에 푹 담구고 싶
었으나 그러지는 못하고 대신 폭포의 상단을 보고자 폭포 암벽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폭포 하단을 이루고 있는 하얀 피부의 암벽은 경사가 완만해 기어오르기는 쉽다. 하지만 파리
가 미끄러질 정도로 미끄러운 구석도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그렇게 폭포 하단을 딛고 올라서
면 폭포의 중단(중간 부분)이다.


▲  구천폭포 중간에서 바라본 하단

▲  구천폭포 중단(중간폭포)

접근성이 쉬운 폭포 하단과 달리 중단(중간 폭포)은 거의 숨겨진 속살이다. 경사 30도의 바위
를 미끄럼틀 삼아 2줄기의 폭포수를 이루며 힘차게 쏟아지는데, 이 폭포는 어디까지나 구천폭
포의 중간이지 본폭포는 아니다. 폭포 주변은 하얀 바위가 암벽을 이루며 은빛 절경을 빚는다.


▲  외부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중간폭포 못
혹시 선녀 누님의 숨겨진 욕탕(浴湯)은 아닐까?

▲  슬슬 꽁무니를 드러내는 구천폭포의 상단(윗폭포)

▲  구천폭포 상단(윗폭포)의 위엄

구천폭포 상단은 구천폭포의 진정한 위엄과 매력을 패기있게 보여주고 있다. 그저 폭포의 아랫
도리만 보고 그것이 구천폭포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서울 부도심에 들어와 서울 전부를 봤
다고 우기는 것과 마찬가지의 오류이다. 폭포는 자신의 준수한 모습을 천하에 보이기가 싫어서
아랫폭포를 내세워 구천폭포의 전부인냥 눈속임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긴 신(神)과 동물 사
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사람들이 잔뜩 몰려와봐야 그저 폭포와 계곡만 괴로우니 그
심정이 십분 이해가 간다.
어쨌든 폭포의 속임수를 간파하고 폭포 옆 산길이나 폭포 암벽을 열심히 발품을 팔면 중간 폭
포가 나오고 그곳을 지나면 바로 이곳의 백미(白眉)인 윗폭포가 수줍은 듯 모습을 드러낸다.

동쪽을 향해 하얀 비단을 늘어트린 듯 장엄한 모습의 폭포 상단은 2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성
나게 쏟아지는 폭포수가 윗도리 중간에서 방향을 꺾어 우렁찬 소리를 지르며 위엄 돋게 쏟아진
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바위와 숲이 죄다 흔들릴 정도이며, 멋모르고 놀러온 귀신과 악귀
도 놀라서 정신줄을 놓을 정도이다. 폭포의 높이는 대략 25m 정도로 상/중/하단을 모두 합치면
대략 60m 정도 된다.
이렇게 잘생기고 장대한 자연산 폭포가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다니 그저 믿기지 않으면
서도 한편으로 정말 영광스럽다. 일행들도 의외에 장소에서 보석을 발견한 듯, 감탄을 하느라
입을 좀처럼 다물 줄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흔히 서울하면 키다리 빌딩과 사람과 차량으로
번잡한 거리만 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서울에 이런 폭포가 버젓히 있으니 놀라 기절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만약 폭포 사진
만 들이민 채, 그의 정보를 말해주지 않으면 다들 강원도나 경기도 동북부, 지방 어딘가의 폭
포로 여길 것이다. 허나 이 폭포는 엄연히 서울에 있다. 서울 도심에서도 무척 가까운 곳에 말
이다.

참고로 서울에는 잘생긴 폭포가 북한산의 품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평창동(平倉洞)에 동령폭
포는 북한산 3대 폭포의 하나로 당당히 꼽히며, 진관사계곡과 삼천리골(삼천사계곡), 불광사(
佛光寺)계곡에 구천폭포 수준은 아니지만 소소한 폭포들이 여럿 널려있다. 그외에 나의 즐겨
찾기 명소의 하나인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 관련글 보러가기)에도 백사폭포(동령폭포)라
불리는 폭포가 있는데 작고 아담한 것이 나름 패기가 있다.


▲  하얀 명주를 늘어트린 듯한 구천폭포 상단의 아랫폭포

▲  윗폭포에 진하게 새겨진 '구천은폭' 바위글씨

윗폭포 상단 우측의 바위 피부를 가만히 살펴보면 왠 한자가 눈에 밟힐 것이다. 모두 4자가 쓰
여 있으나 얼핏 보면 3자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 글씨는 '구천은폭(九天銀瀑)'으로 여기서 은
폭이란 은빛처럼 아름다운 폭포를 뜻한다.
해서체로 쓰인 이 글씨는 17세기 중반, 당대 명필인 이신(李伸)이 쓴 것이라고 전한다. 인조의
3째 아들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수행원으로 따라갔으며, 경희궁(
慶熙宮) 흥화문(興化門) 현판 글씨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글씨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대궐에
쓴 글씨는 밤에도 그 빛이나 어둠을 훤히 밝혔다'고 찬양할 정도였으며, 글씨 외에도 그림과
무예에도 능했다. 그는 이 폭포와도 인연이 있었는지 이렇게 4자를 남겨 폭포에 퐁당퐁당 빠진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하지만 글씨의 위치가 그리 쉬운 자리가 아니어서 어떻게 저런 위치에 글씨를 썼을까 궁금하다.
사다리를 올려놓고 했을까? 위에서 줄을 잡고 내려와 새겼을까? 아니면 폭포를 다녀간 선녀 누
님이나 신선 형님들이 이신의 글씨체를 흉내내서 몰래 한 글자 남긴 것일까? 요즘 같은 세상에
도 저런 자리에 글씨를 새기는 것이 쉽지가 않은데, 장비와 시설이 열악하던 옛날에는 어떻게
했을까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  윗폭포 상단과 구천은폭 바위글씨

※ 구천폭포 찾아가기 (2016년 8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수유역(4번 출구)에서 강북구 마을버스 01번을 타고 아카데미하우스 종점 하차,
  구천계곡 산길을 따라 도보 15분
* 서울역버스환승센터, 남대문시장(4호선 회현역), 대학로(4호선 혜화역), 성신여대입구역(4호
  선), 길음역(4호선)에서 104번 시내버스를 타고 강북청소년수련관 종점에서 하차. 강북구 마
  을버스 01번으로 환승하거나 도보 25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127-1


 

♠  구름을 거닐듯 편안한 숲길,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  녹음이 짙은 흰구름길

구천폭포에서 2시간 정도 신선놀음 못지 않은 시간을 보내다가 아쉬움을 뒤로 하며 다시 아카
데미하우스로 내려왔다. 마음 같아서는 속세를 잠시 잊고 더 머물고 싶지만 이곳이 우리의 전
용 공간도 아닐 뿐더러 우리가 있어야 될 곳은 폭포가 아닌 속세의 한복판이기 때문이다. 아무
리 좋은 자리라고 해도 적당히 머물러야 뒷탈이 없는 법인데, 인간들은 그 쉬운 원칙을 알면서
도 제대로 깨닫지를 못해 늘 욕을 본다.

햇님의 퇴근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고, 날씨도 조금은 선선해져서 구천폭포 입구를 흘러가
는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을 잠깐 거닐기로 했다.
북한산둘레길은 북한산과 도봉산(道峯山), 사패산(賜牌山)의 밑도리를 지나는 21개 구간, 71.5
km의 장대한 산길이다. 이름도 어여쁜 흰구름길(북한산둘레길 3구간)은 이준열사묘역입구에서
북한산과 속세의 경계를 수 차례 넘나들다가 북한산생태숲(성북생태체험관)에 이르는 4.1km 구
간으로 구름을 만날 것 같은 이쁜 길 이름과는 달리 현실은 겨우 해발 100~150m를 왔다갔다하
는 구름도 만질 수 없는 얕은 높이이다. 그러니 괜히 이름에 속지 말자~~!

흰구름길은 북쪽으로 순례길(북한산둘레길 2구간), 서남쪽으로는 솔샘길(둘레길 4구간)과 이어
지며, 그리 각박한 경사가 없는 정말 착한 산길이다. 별로 힘들지 않은 코스라 마실 삼아 가다
보면 길게 잡아도 1시간 20~30분 내외면 완주할 수 있는데, 이 구간에는 화계사, 본원정사(☞
관련글 보러가기), 삼성암 등의 오래된 절과 냉골, 빨래골 등의 계곡, 조병옥(趙炳玉, 1894~
1960)박사묘, 구름전망대 등의 조촐한 명소가 있어 무작정 앞사람 뒷통수만 보며 걸을 것이 아
니라 이들 명소를 제대로 겯드리며 거닐으면 정말 알차고 배부른 둘레길 나들이가 될 것이다.


▲  냉골 (조병옥박사묘 입구)


▲  나무로 지어진 구름전망대

흰구름길 구간에는 냉골(화계사와 본원정사 중
간)이란 깊은 골짜기가 있다. 찻길이 냉골 윗쪽
에 있는 영락기도원까지 나 있어 차량들도 마음
편히 바퀴를 굴릴 수 있는데, 냉골공원지킴터에
서 칼바위능선으로 조금 오르면 현대사의 주요
인물인 유석(維石) 조병옥박사의 묘역이 있다.

또한 화계사 남쪽 산자락에는 속세를 향해 고개
를 쳐든 높은 전망대가 있다. 이 전망대는 둘레
길의 이름을 따서 간단히 구름전망대라 부르는
데, 그렇다고 구름까지 닿는 높이는 아니다. 전
망대 꼭대기까지는 계단이 빙글빙글 늘어져 있
으며, 20m 내외 높이인 전망대 꼭대기에 올라서
면 강북구와 도봉구, 성북구, 노원구를 비롯해
북한산 동부의 주요 봉우리와 도봉산, 수락산(
水落山), 불암산(佛巖山) 등이 거침없이 들어와
조망이 제법 일품이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 동쪽 자락과 도봉산(오른쪽 산줄기)
녹색 물결이 일렁이는 북한산 동쪽 자락, 그 너머로 백운대(白雲臺, 북한산 꼭대기)와
인수봉(仁壽峯)을 비롯하여 북한산 동쪽 봉우리 능선이 두 눈에 들어온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유동, 우이동, 도봉구 지역)
정면 왼쪽에 보이는 산이 도봉산, 오른쪽에 멀리 보이는 산이 수락산이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 강북구, 노원구 지역)
정면에 멀리 보이는 산이 불암산이다. (그 왼쪽이 수락산)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미아동, 월곡동 지역)

▲  숲속으로 인도하는 흰구름길 (화계사 남쪽)
화계사를 끝으로 짧게 진행된 북한산 구천폭포, 흰구름길 초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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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서촌 제일의 경승지 ~~ 인왕산 수성동계곡 (인왕산길, 기린교)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계곡이자 옛 경승지
~ 인왕산 수성동계곡 '

▲  인왕산 수성동계곡 (사모정 주변)

옛 옥인아파트의 흔적

▲  옛 옥인아파트의 흔적

▲  기린교

 


 

여름 제국이 무더위로 천하 만물을 핍박하던 7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들과 인왕산 수성
동계곡을 찾았다.

오전 11시,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그들을 만나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북악산 백
사실계곡<백석동천(白石洞天), 백사골 ☞ 관련글 보러가기>을 제일 먼저 찾았다. 속세에
찌든 꼬질꼬질한 두 발을 계곡에 담구며 막걸리 1잔 걸치다가 도심 속의 두멧골, 능금마
을(뒷골마을)을 거쳐 부암동(付岩洞) 산복도로를 따라 창의문(彰義門, 자하문)으로 내려
갔다.

창의문에서 윤동주(尹東柱)시인의 언덕(☞ 관련글 보러가기)에 자리한 서시정(序詩亭)에
서 잠시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하다가 인왕산(仁王山) 동쪽 허리를 가르는 인왕산길을 따
라 남쪽으로 넘어갔다.
인왕산길은 사직공원에서 창의문까지 이어지는 산악도로로 북악산길과 서로 이어져 있다.
4발 수레를 위한 2차선 도로와 뚜벅이를 위한 도보길이 공존하고 있어 서로의 눈치 없이
거닐기 좋으며 주변 풍경도 아름다워 지루할 틈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그런 인왕산길에
단단히 홀린 듯 정신없이 따라가니 어느덧 석굴암(石窟庵) 입구에 이른다.
여기서 석굴암 약수를 마시고자 잠시 인왕산의 품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무더운 날씨로
인해 반대 여론이 거세 인연을 짓지 못하고 동쪽으로 난 조그만 산길을 따라 수성동계곡
으로 내려갔다.
이 산길은 석굴암 부근에서 발원한 계곡과 나란히 속세로 내려가는데, 그 계곡은 수성동
계곡의 상류가 된다.


 

♠  수성동계곡 상류

▲  숲속에 묻힌 수성동계곡 상류

인왕산에서 수성동계곡 공원으로 이어지는 계곡 상류는 복원된 계곡 중심부와 달리 거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자연산 바위와 온갖 돌들이 좁은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고, 그
사이를 인왕산이 베푼 계곡물이 숨을 죽이며 흘러간다. 계곡 옆에는 시멘트를 발라놓은 산길이
이어져 있는데, 그냥 흙길이었으면 매우 좋았을 것을 시멘트길이라 촉감이 그리 착하지가 않다.
계곡 일대는 숲이 무성하여 강렬한 여름 제국의 햇살도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피해가며 계곡
상류 산길을 2~3분 정도 내려가면 바로 수성동계곡 공원이다.


▲  계곡 산길과 조그만 나무 다리 (석굴암 입구 방향)

▲  계곡 상류에서 만난 조그만 폭포

이 계곡은 청계천의 주요 발원지로 수질이 양호하여 도룡뇽과 가재, 개구리, 버들치 등이 조용
히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저 좁은 계곡이지만 그들에게는 이만한 보금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계곡에서 괜히 물놀이를 하거나 그들을 탄압하는 행위는 하지 말자. 그들이 사
라지면 그 다음 차례는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는 우리 인간이 될 지
도 모른다.


▲  수성동계곡 상류의 아랫부분 (수성동계곡 공원의 제일 서쪽)

▲  수성동계곡 공원 가장 윗쪽에 닦여진 황토색 산책로
계곡 일대를 두 눈으로 살피며 거닐 수 있다. 계곡 복원에 걸맞게 흙길이면 좋았을 것을
길을 현대식으로 밀어버린 점이 상당히 아쉽다.

▲  수성동계곡 공원 윗쪽 계곡

▲  수성동계곡의 또다른 상류
숲속에 숨겨진 가느다란 폭포를 타고 수성동계곡으로 살짝 숟가락을 내민다.
폭포 주변에는 수풀을 걸친 벼랑과 흙과 돌이 섞인 자갈밭이
조촐하게 펼쳐져 있어 1폭의 수채화를 자아낸다.

▲  협곡을 그리며 내려오는 수성동의 또다른 상류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온 계곡)


수성동의 상류는 대략 3개 정도로 석굴암에서 내려온 계곡과 그 남쪽에서 내려오는 계곡, 인왕
천약수터에서 내려오는 계곡이 서로 상류를 자처하며 수성동으로 내려온다. 수성동은 이들에게
서 인왕산의 맑은 물을 공급받고 서울 도심으로 청계천으로 흘려보낸다.

인왕산에서 제법 이름이 있는 인왕천약수터도 손을 내밀며 수성동에 아낌없이 물을 보태고 있
는데 이 물줄기는 거의 90도 각도가 진 암벽 사이의 좁은 공간을 타고 내려와 그 풍경이 나름
절경을 이루며, 조그만 폭포 앞에는 얕은 못과 모래밭이 있어 어린이들이 흙장난을 하며 물놀
이를 하기에 아주 적당한 곳이다.
모래 옆과 다리 주변에 돌로 쌓은 인공의 흔적이 조금 끼여있어 약간의 어색함을 주지만 그 외
에는 예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 수성동 상류의 원초적 모습을 살피는데 도움을 준다.


▲  수성동계곡 서남쪽 산책로


 

♠  옛 한양도성의 오랜 경승지,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었으나 2012년
복원되어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도심 속에 흔치 않은 계곡 ~~~
인왕산 수성동계곡(水聲洞溪谷) - 서울 지방기념물 31호

인왕산 동쪽 자락이자 서촌(西村, 경복궁 서쪽 지역) 서쪽에 자리한 수성동계곡은 서울 도심에
이름난 경승지로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와 한경지략(韓京識略) 등에
서울의 오랜 명승지로 절찬리에 소개된 곳이다. 이곳 계곡을 예로부터 수성동(水聲洞)이라 하
였는데, 이는 계곡 밑에 걸린 기린교란 돌다리 밑에 물소리가 청아하고 좋기로 명성이 자자하
여 물소리가 좋다는 뜻에서 유래된 것이다.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이자 거대한 돌산으로 제대로 된 계곡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인
왕산이지만 그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계곡이 많음에 놀라게 된다. 수성동을 비롯해 청풍
계(淸風溪), 청계동천(淸溪洞天), 송석원(松石園), 백운동(白雲洞) 등 이름난 계곡이 많이 있
었으나 20세기 중반 이후 개발의 칼질에 죄다 사라지고 수성동만 옥인아파트의 압박 속에 간신
히 숨쉬고 있었다. (백운동과 청계동천은 일부만 살아남음) 그외에 환희사계곡(큰절골)과 몇몇
약수터 주변에 조그만 계곡이 있으나 볼품은 별로 없다.

수성동은 도시와 먼 첩첩한 산주름 속이 아닌 도성(都城) 속에 자리해 있어 접근성이 매우 착
했다. 게다가 경복궁(景福宮)과 귀족들이 주로 살던 북촌(北村)과 서촌과도 바로 지척이다. 그
래서 왕족과 사대부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계곡의 풍경을 즐겼는데, 이곳에 단단히 반한 이들은
아예 집이나 별장 등을 지어 머물기도 했다. 이곳에 처음으로 집을 지은 이는 세종의 3번째 아
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으로 계곡 밑 기린교 부근에 비해당(匪懈堂)을 지어 머물렀다.
 
영조(英祖) 시절에는 겸재 정선이 인왕산을 모델로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남기
면서 수성동을 비롯한 장동8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수성동 그림은 계곡 복원에 아주 큰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그 그림에는 기린교를 건너는 선비 3명과 시중을 드는 동자(童子) 1명이 계곡
상류로 걸어가는 모습이 담겨져 있고 가벼운 붓놀림으로 이끼가 낀 바위와 질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도 비오는 날에 이곳을 찾아 '수성동 빗속에서 폭포를
구경하다(水聲洞 雨中觀瀑)'란 시를 지어 수성동을 찬양했다.
도시와 가까운 탓에 중인과 평민들도 많이 발걸음을 했는데, 인근 송석원과 더불어 조선 후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위항문학(委巷文學, 중인/평민/서얼들이 주도하는 문학활동)의 성지(聖
地)로도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 (기린교 돌다리가 그려져 있음)

이렇게 인왕산을 든든한 후광으로 두르며 서울 장안의 경승지로 초절정 인기를 누렸던 수성동
은 1960년대 이후 서울 도심에 개발의 칼질이 정신없이 그어지면서 아작나기 시작했다.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 9동이 건방지게 수성동계곡을 깔고 앉았던 것이다. 그래서 참으로 아름답고 착
했던 수성동의 경관은 99% 망가졌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인근 청풍계나 옥류동처럼 계곡이 거의 증발되는 꼴은 면했지만 아파트로
인해 계곡 폭도 줄어들고 아파트 사이를 마치 버려진 하천처럼 흘러가면서 완전 천덕꾸러기 신
세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아파트 9동 앞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해 어두컴컴한 지하를 거쳐 역시
나 생매장된 청계천으로 서글프게 흘러가야 했다. 그렇게 도시 개발과 생활 편의를 내세운 인
간의 욕심 속에 서울 도심에 많은 경승지는 꽃잎처럼 지고 말았다.

그 이후 수성동의 이름 3자는 속인(俗人)들의 뇌리 속에서 점차 시들어가고 동네 사람들만 세
월의 저편으로 잊혀져 가던 계곡의 이름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서울 전문을 자처하는 본인
역시 수성동의 존재를 안 것은 2011년, 그 이전에는 인왕산에 이런 곳이 있는 것도 몰랐고 그
런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존재감이 밑바닥을 기었던 것이다.
 
옥인시범아파트에 강제로 깔린 채, 40년 가까이 수난의 세월을 보냈던 수성동계곡. 개발의 칼
질에 빼앗긴 계곡에도 과연 봄이 올 것인가? 이러다가 수성동 이름 3자가 영구히 지워지는 것
은 아닐까?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으나 계곡을 해방시킬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수성
동에게는 절망의 시절이었다.

▲  기린교

▲  사모정 북쪽 산책로

허나 자연과 인간의 대결에서 거의 자연이 이기듯, 수성동에게도 좋은 소식이 날라왔다. 옥인
아파트가 2008년 재난안전위험시설 C급으로 지정되면서 철거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수성동의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서울시는 이번 기회에 아파트를 싹 밀어버리고 계곡을 복원하기로 의견
을 모으고 우선 2010년 10월 21일 기린교를 비롯한 수성동계곡 일대를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삼
아 늦게나마 문화유산으로 대우를 해주기 시작했다.
이후 인왕산을 가리며 계곡의 목을 조르던 옥인아파트는 2011년에 모두 철거되었으며, 아파트
주변을 통제하고 1년의 복원공사를 벌여 2012년 7월 마무리가 되었다.

계곡 복원을 위하여 전문가와 사회단체, 문화재청에 자문을 구했고 정선의 수성동 그림을 적극
참조했다. 또한 옛 경관을 어느 정도 재현하고자 소나무를 중심으로 상수리나무, 참나무, 산철
쭉 등 우리 고유의 나무 18,477그루를 심었으며, (그중에 구부러진 소나무가 제일 많음) 돌단
풍과 바위취 등 다양한 화초를 심어 주변과의 조화를 꾀했다. 그리고 계곡을 크게 넓혀서 계곡
양쪽에 전통 방식으로 돌을 쌓아 암석 지형을 최대한 회복하고자 했으며, 계곡 중간에 전통식
정자를 세워 옛 사람들의 풍류를 조금이나마 느끼도록 했다.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곳으로 여겨지는 계곡 아랫쪽에 관람공간을 닦아 정선의 눈으로 계
곡을 바라볼 수 있게끔 배려하였고, 계곡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산책로를 닦아 인왕산과 어
우러진 시민공원의 성격도 겸하게 했다.

수성동계곡 공원에는 복원된 계곡을 비롯하여 이곳의 터줏대감이자 유일한 오래된 존재인 기린
교가 있으며, 옥인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공원 북쪽에 아파트의 잔재를 일부 남겨두어 수성
동을 거쳐간 개발 지상주의의 그릇됨을 일깨우게 했다. 상류 부분과 사모정 주변은 계곡 출입
이 그런데로 가능하나 계곡 하류와 기린교 주변은 통제하고 있으며, 계곡을 복원했다고는 하지
만 완전한 옛날 모습은 아니다. 게다가 여전히 비슷한 자리(옛 옥인아파트 9동 자리로 지금은
관람 공간으로 바뀜)에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해 청계천으로 흘러간다.
청계천까지 이어지는 전 구간을 모두 끄집어내 복원하면 참 좋겠지만 이미 시가지가 꽉차게 들
어앉아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계곡이 생매장되는 부분은 계곡이 상당히 밑으로 내려간 상태
이고, 주변 바위들도 날카로운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어 사고의 위험이 있다. 기린교 같은 경우
는 계곡이 3m 밑에 흐르고 있으므로 조금 아찔하다.

도시 개발의 칼질에 희생된 수성동은 인간 중심의 개발의 난도질이 무조건 능사가 아님을 보여
준다. 안그래도 사람도 허벌나게 많고, 빌딩도 많고, 차도 많고, 공기도 탁한 서울 도심에 마
음 편히 의지할 수 있는 공간이 1개 더 생겼으니 그 가치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비슷하다 할 것
이다.
비록 옛 모습 그대로 100% 복원된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옛 모습을 되살리고자 노력했고 복원
공사를 벌이는 중에도 여러 의견을 수렴해 어색함을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그래서 인왕산이
베푼 옥계수를 모아 계곡을 재현했으니 어설프게 재현되어 전기와 세금만 잔뜩 축내는 청계천
과는 차원이 다른 살아있는 계곡이다.

※ 인왕산 수성동계곡 찾아가기 (2016년 8월 기준)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4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
  서 종로구마을버스 09번을 타고 수성동계곡 종점 하차.
*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자하문로를 거치거나 1번 출구에서 사직공원 못미처에 나오는
  필운대로를 거쳐 수성동계곡까지 가볍게 걸어가도 된다. (17~20분 소요)
* 수성동계곡 관람공간 동쪽에 주차공간이 있으나 충분치는 않다. 대중교통 이용을 권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79-1, 185-3외


 

♠  수성동계곡 둘러보기

▲  수성동계곡 사모정 주변

몇년 전만 해도 밋밋한 성냥갑 아파트 사이로 그들의 눈치를 보며 눈물처럼 흘러야했던 수성동
계곡은 이제 누구의 눈치도 없이 가슴을 피며 당차게 흘러간다. 소나기가 지나간 이후라 계곡
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어린이와 여중생으로 보이는 애들이 계곡 주변을 서성이며 발을 담
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  수성동의 풍경을 한껏 수식해주는 구수한 양념 - 사모정

수성동계곡 한복판에는 달랑 1칸에 불과한 조그만 정자, 사모정이 맵시를 드러내고 있다. 사모
정이란 네모난 정자를 뜻하는 것으로 새색시처럼 단아한 모습으로 계곡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
는 옛날부터 이곳을 스쳐갔던 정자는 아니며 계곡을 복원하면서 장식용으로 달아놓은 것이다.
(정선이 그린 그림에도, 수성동 관련 기록에도 정자의 존재는 나오지 않음)
허나 계곡과 나무만 있는 계곡에 전통 양식의 정자(亭子)를 하나 두니 수성동의 미소와 풍경이
한층 더 살아나는 것 같다.

정자 안에는 한 무리의 아줌마들이 진을 치고 놀고 있었다. 계곡 바람과 인왕산 바람이 앞다투
어 선선한 바람을 선사하고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며 솔내음을 불어주는 명당 자리라 저곳에
들어가 낮잠 한숨 청하면 정말 꿀맛일 것 같다.


▲  사모정 동쪽 계곡
계곡과 돌을 대충 배치한 듯 조금은 어색한 모습이다.

▲  사모정과 사모정 북쪽 산책로
산책로 너머로 인왕산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  공원 북쪽 산책로
저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옛 옥인아파트의 초췌한 흔적이 나온다.

▲  공원 북쪽 산책로에서 만난 바위글씨
동그라미 안에 중(中) 또는 신(申)으로 보이는 글씨가 문신처럼 박혀있다.
조금은 오래된 티가 풍기긴 하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다.
(수성동에 바위글씨가 있다는 정보는 듣지 못했음)

▲  공원 북쪽에 자리한 옛 옥인아파트의 잔재 ▼

수성동계곡 북동쪽에는 옛 옥인아파트의 흔적이 아련하게 남아있다. 이 흔적은 아파트 7동의 1
층으로 2008년 철거가 결정되자 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계곡과 조금 떨어진 7동의 아랫도리
일부만 남겨 이곳의 기념물로 삼았다.

한때 계곡을 깔고 앉아 감히 인왕산을 가리던 옥인아파트의 최후로 이곳을 요란법석 거쳐간 엄
연한 역사의 흔적이다. 아파트를 말끔히 밀어버리는 것보다는 이렇게 일부라도 남겨 개발의 난
도질의 희생된 수성동의 서글픈 과거를 보여주고, 무분별한 개발의 폐해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교육의 장으로 삼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또한 이곳 아파트에 살았던 사람들의 향수(鄕愁
)와 추억도 조금은 배려하였다.
흔적을 모두 없앤다고 이곳에 40년 가까이 둥지를 틀었던 옥인아파트의 존재와 수성동의 그늘
이 완전 지워지는 것은 아니며,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20세기 후반 서울 지역 아파트의 양
식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 인정되어 등록문화재나 지방문화재 등의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얻
게 될 수도 있다.

계곡에 둥지를 틀었던 인간의 흉한 창조물은 그 자리를 계곡과 자연에게 다시 내주었고 이제는
그들 눈치를 살살 보며 공원 한쪽 구석에 찌그러진 신세가 되었다. 인간이 아무리 용을 쓰고
만들어도 위대한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역시나 일개 모래성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파트의
남겨진 흔적은 마치 예비군훈련장의 시가전 훈련장이나 전쟁의 폭격으로 주저앉은 건물처럼 보
인다. 그렇다 대자연의 보복 폭격의 옥인아파트는 저렇게 주저앉은 것이다.


▲  주름진 바위들로 가득한 수성동계곡 (사모정과 기린교 사이)

▲  기린교 서쪽에서 바라본 수성동계곡과 인왕산

▲  한굽이 쉬어가며 조그만 폭포를 빚은 수성동계곡


 

♠  수성동계곡의 오랜 상징 ~ 기린교(麒麟橋)

▲  2개의 통돌로 이루어진 조촐한 돌다리 - 기린교

넉넉한 폭으로 흐르던 수성동계곡은 기린교 이전에서 급격히 좁아지고 하얀 피부의 포근한 반
석들도 무시무시한 낭떠러지를 계곡 쪽에 빚으면서 제법 날카로운 모습을 보인다. 그 낭떠러지
바위 사이에 우리네 인생처럼이나 짧은 돌다리가 고색의 때를 간직하며 놓여져 있는데, 그 다
리가 바로 수성동의 오랜 명물인 기린교이다.

기린교는 달랑 길쭉한 통돌 2개로만 이루어진 아주 단촐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다리 남쪽에 다
리를 보조하는 커다란 돌 여럿을 둔 것이 전부이다. 다리 폭은 1m 남짓, 길이는 3m로 언제 조
성되었는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겸재 정선의 수성동 그림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7세기에 놓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계곡을 찾은 귀족들의 통행 편의를 위해 가설된 듯
싶은데 벼랑으로 이루어진 이 부분이 계곡 가운데 가장 위험하기 때문이다.


▲  높은 벼랑 위에 걸쳐진 기린교

서울 도심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는 누가 뭐
래도 광통교(廣通橋, 광교)이다. 그외에 수표
교(水標橋)와 창경궁(昌慶宮) 옥천교(玉川橋)
도 2위, 3위에 들어간다.
(중랑천 살곶이다리는 도심이 아니므로 제외)
수표교는 청계천 생매장 때 제자리를 떠나 장
충단공원에 둥지를 틀었고, 광통교는 비록 자
리는 지켰지만 생매장의 치욕을 겪다가 청계천
엉터리 복원 때 약간 서쪽으로 옮겨졌다.
그에 반해 기린교는 그들보다 한참 후배이지만
제자리를 지키며 원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그 가치가 높다. 게다가 통돌로 만든 다리 가
운데 가장 긴 편이다.

인왕산이 빚은 제일 가는 경승지인 수성동계곡
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된 것도 어찌보
면 기린교 덕분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계곡
이 아무리 잘났어도 딱히 오래된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계곡은 복원되
었을 망정, 지방문화재까지 지정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  옆에서 바라본 기린교

▲  바로 앞에서 본 기린교
다리 너머로 수성동계곡의 생매장 현장이 보인다.

▲  멋드러진 반석이 잔뜩 널린 기린교 주변
대자연이 칼로 싹둑 손질을 했는지 바위들이 90도 절벽을 이루며 무시무시한
모습을 드러낸다. 저 밑으로 떨어지면 정말 나오기도 힘들다.

▲  기린교 동쪽에 마련된 수성동계곡 관람공간 (계곡 동쪽 광장)

수성동계곡 동쪽에는 잘다져진 평평한 광장이 있다. 이곳은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위치로
여겨지는 곳에 넓게 터를 다진 것으로 그 당시 정선의 눈높이가 되어 수성동계곡과 인왕산의
모습을 바라보도록 지어졌다.
이곳에서는 계곡 상류를 제외한 수성동계곡 일대와 인왕산이 흔쾌히 바라보이는데 보통은 높은
곳에 전경(全景)을 바라보는 자리를 두지만 이곳은 반대로 계곡 밑에 그 자리를 둔 것이 특징
이다.

인왕산이 빚은 수성동계곡은 기린교 밑을 지나 낭떠러지 밑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관람공간 밑
에서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하수구를 통해 어두컴컴한 지하로 생매장된다. 계곡을 복원했다고
는 하지만 옛 옥인아파트 주변만 재현된 것이며, 이후 서촌을 가로질러 세종로 서쪽을 거쳐 청
계천으로 흘러간다. 이 구간은 보기만 해도 머리가 복잡한 시가지로 땅을 열기도 힘들다. 이곳
도 마저 끄집어낼려면 수많은 건물과 도로를 싹 밀어야 되나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
하긴 수성동계곡만 그렇겠는가? 삼청골(삼청천)이나 청풍계, 창덕궁 빨래터에서 나오는 냇물도
그렇고 기타 북악산과 인왕산, 남산에서 발원한 수많은 물줄기도 근대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어
대부분 생매장을 당했다.


▲  유연하게 구부러진 수성동계곡 동북쪽 산책로

인왕산길에서 수성동 상류로 내려와 계곡 구석구석을 천천히 둘러보니 어느덧 1시간이 훌쩍 흘
러가버렸다. 보통 20분이면 충분히 둘러볼 장소를 뭐 그리 세세히 보겠다고 두 다리를 바쁘게
부렸는지 3배 이상의 시간을 투자한 것이다. 그래도 혹 빠진 것은 없는지 모르겠다.

2012년 복원 이후, 시작부터 싹수를 보이며 도심의 인기 명소들을 긴장시켰다. 서촌의 인기와
인왕산의 인기, 그리고 서울 도심에 흔치 않은 계곡이란 타이틀로 나날이 인기가 높아져 이제
는 도심의 주요 경승지이자 서촌 나들이 때 필수로 들려야 직성이 풀리는 서촌 지역의 꿀단지
로 완전히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수성동계곡을 겯드린 도심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서울은 내가 서
식하고 있는 곳이라 지방과 달리 달랑 1번이 아니라 계속 찾는 경우가 빈번하다. 일부를 빼고
는 지겹도록 찾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수성동계곡의 가을과 봄 풍경을 담아 소소하게 글로 남
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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