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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6.01 북한산둘레길3구간 흰구름길~삼성암 늦봄 나들이 (빨래골에서 구름전망대, 화계사까지) 2
  2. 2020.05.09 서울의 북쪽 끝 지붕,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계곡, 원통사, 우이암 관음봉까지]
  3. 2020.02.05 아름다운 제주도의 서쪽 끝을 거닐다 ~~ 절부암, 생이기정, 제주올레길12코스 나들이 (차귀도, 와도) 2
  4. 2020.01.11 모악산 눈꽃 나들이 [선녀폭포, 대원사, 수왕사, 전북도립미술관]
  5. 2019.12.30 본인 제작 여행답사기 모음집 (2019년 12월 30일 기준)
  6. 2019.08.14 기름진 논두렁과 밭두렁을 간직한 서울의 두메산골, 도봉산 무수골 ~~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전주이씨영해군파묘역, 무수골계곡)
  7. 2019.08.05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산과 숲, 호수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옛길, 괴산 산막이옛길 (괴산호, 등잔봉, 한반도지형, 앉은뱅이약수)
  8. 2019.07.16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봉화 오전약수와 약수탕, 석천계곡, 석천정사 여름 나들이 (휴천동 지석 및 입석)
  9. 2019.04.21 남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옛 탐라의 현장, 제주도 새해 나들이 (외도 월대, 수산리곰솔, 납읍 금산공원, 제주올레길15,16,17코스)
  10. 2019.04.08 늦겨울 산사 나들이, 치악산 구룡사의 은빛 설경 ~~~ (거북바위, 구룡사계곡, 구룡폭포)

북한산둘레길3구간 흰구름길~삼성암 늦봄 나들이 (빨래골에서 구름전망대, 화계사까지)

 


' 북한산 늦봄 나들이 (빨래골, 삼성암, 흰구름길) '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과 도봉산

▲  삼성암(삼성사)

▲  빨래골 숲길


 

북한산(삼각산, 836m)은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의 듬직한 진산(鎭山)으
로 나의 오랜 즐겨찾기의 하나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그의 품을
드나들면서 그가 품고 있는 수많은 명소를 섭렵했지만, 아직도 미답처(未踏處)가 무수히
남아있어 나를 무척 애를 태우게 한다.
미답처 식구 중에는 북한산 동쪽 자락(수유/우이지구)에 안긴 삼성암과 빨래골도 포함되
어 있는데, 이들을 뼛속 깊이 새겨두었다가 5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길을 나섰다.

빨래골은 도봉동 집에서도 무척 가까운 곳이라 여유롭게 15시에 길을 나섰다. 수유역(수
유리)으로 이동하여 강북구 마을버스 03번(빨래골↔수유역)에 나를 담아 수유1동 구석에
자리한 빨래골 종점으로 보냈다.


▲  북한산(삼각산)의 싱그러운 품으로 인도하는 관문, 빨래골공원지킴터
여기서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과 만난다.


 

♠  북한산 빨래골

▲  봄가뭄으로 부실한 모습을 비추는 빨래골 (수유리 빨래터)

빨래골은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에 묻힌 조그만 골짜기이다. 작은 냇가 같은 모습으로 딱
히 유별난 구석은 없으며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을 거닐 때 아주 잠깐 스쳤을 뿐, 제대로 살
펴본 적은 없었다. 그저 골짜기 이름을 통해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동네 아낙네
들이 빨래를 하던 곳으로만 막연히 알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곳이 왜 빨래골이 되었을까?

북한산 동쪽 밑에 자리한 수유동(水踰洞)은 북한산 계곡 물이 많아 '무너미'라 불렸다. 무너
미란 저수지 물이 나태하게 고여있는 것을 막고자 한쪽 둑을 조금 낮추어 물이 넘치면 자연히
흐르게끔 만든 것으로 물이 풍부하다보니 일찌감치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 마을이 이제는 서
울 동북부 부도심이자 강북구(江北區)의 중심지로 어엿하게 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수유동(
수유리) 아낙들이 여기서 빨래를 해서 빨래골이 된 것일까? 물론 그들도 빨래를 하긴 했으나
단순히 그것 때문은 아니다.

조선 왕궁에는 궁궐의 허드렛일을 처리하던 무수리들이 많았다. 그들은 제왕(帝王) 내외와 왕
족들, 궁궐에서 일하는 환관(내시)과 상궁(尙宮), 궁녀, 군사의 옷을 개천(청계천)이나 인근
산골에서 빨았는데, 궁궐 식구들이 많다보니 하루에 나오는 빨래 양이 어마어마했다. 이들 빨
래 중에는 속옷 등의 예민한 옷이나 특별히 다뤄야 되는 빨랫감도 많아 청계천에서 같이 처리
하기가 그랬다. 하여 그런 것들은 특별히 이곳 빨래골에서 처리를 했다. 그래서 '빨래골'이라
불리게 된 것이며, 지역 이름을 따서 '수유리 빨래터'라 부르기도 했다.
여기서 그나마 가까운 궁궐인 창경궁(昌慶宮)까지는 약 7km 거리인데, 계곡 물이 풍부하고 매
우 구석진 한적한 곳이라 이곳을 고른 것 같다. 어쨌든 무수리들은 무거운 빨랫감을 짊어지고
동소문(東小門, 혜화문)을 나와 단장의 미아리고개(또는 아리랑고개)를 넘어 여기까지 낑낑대
고 올라왔다.
그들은 빨래를 마치면 잠시 달콤한 휴식을 취하며 궁궐에서 누리기 힘든 자유를 만끽했고, 한
여름에는 조촐히 물놀이도 즐겼을 것이다. 비록 궁궐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은 고단하지만 휴
양도 누릴 수 있으니 일종의 휴가나 마찬가지라 무수리들의 선호도 대단했을 것이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들의 휴식시설도 있었다고 전하며, 환궁(還宮)이 여의치 않은 경우
인근 화계사(華溪寺)에서 숙박 신세를 지기도 했다.

* 빨래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 127-1일대


▲  윗쪽에서 바라본 빨래골

▲  2004년에 심어진 빨래골 표석
이곳 빨래골은 궁궐 무수리 뿐 아니라 지역 아낙들의 즐겨찾기 빨래터였다.

▲  녹음(綠陰)이 짙은 삼성암 숲길
속세의 번뇌와 먼지를 털기에는 좋은 길이다. 잔잔히 불어오는 산바람에 번뇌를
실어 멀리 날려보내고 싶으나 그 번뇌가 너무 무거워 결국 내가 내려가는
길목에 매복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삼성암 일주문(一柱門)

빨래골 숲길을 오르면 삼성암으로 인도하는 잘 닦여진 오르막길이 나온다. 경사는 그리 각박
하지는 않지만 약간의 더위로 인해 조금은 지친다.
자존심을 곱게 접고 그 언덕길을 조금 오르면 삼성암의 정문인 일주문이 마중한다. 오르막길
에서 봐서 그런지 한층 웅장해보이는데, 이곳의 정체를 알려주는 일주문 현판에는 '삼각산 삼
성암'이 아닌 '삼각산 삼성사'라 쓰여있다. 근래 암(庵)에서 사(寺)로 격을 높이면서 삼성사
를 칭하고는 있으나 속세에서도, 절에서도 삼성암이란 이름을 많이 쓴다. (심지어 삼성암 홈
페이지에도 삼성암이라 나옴)


▲  8각형으로 이루어진 만월당 현종종사탑(滿月堂 玄宗宗師塔)

일주문을 지나 한 굽이 오르면 숲속에 때깔이 고운 부도<浮屠, 승탑(僧塔)> 2기와 비석이 뜨
겁게 눈길을 보낸다. 그들 중 8각형으로 이루어진 맵시가 고운 탑은 '만월당 현종종사'의 사
리가 담긴 승탑으로 만월당은 20세기 후반, 삼성암 주지로 있으면서 절을 크게 일으킨 승려이
다. 그러다보니 그의 제자와 신도들이 크게 정성을 기울여 아름다운 승탑을 지었다.

◀  보광당 중현대선사비(寶光堂 重玄大禪師碑)
중현대선사(박중현)는 왜정 후기에 삼성암
대방을 지은 승려이다.

◀  본공당 성학대선사탑(本空堂 性學大禪師塔)
본공당은 1961년 이후 만월당을 도와
여러 건물을 지은 승려이다.


▲  활짝 열린 삼성암 정문


 

♠  북한산 동쪽 자락에 둥지를 튼 조그만 산사, 독성도량을 칭하고 있는
삼성암(三聖庵, 삼성사)

▲  삼성암 외경

삼성암은 빨래골 상류 숲속에 묻힌 조그만 산사로 1872년에 고상진(高商鎭) 거사가 창건했다
고 전한다. 원래 삼성암 자리에는 천태굴이란 조그만 굴이 있었는데, 북한산(삼각산)에 숨겨
진 기도처로 많은 승려가 수도를 했다고 전한다. (천태굴이란 이름은 삼성암이 독성도량을 칭
한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임)

19세기 후반, 서울에 살던 박선묵은 16세에 불교에 귀의했다. 그는 1870년 봄, 고상진, 유성
종 등 7명과 이곳 천태굴에 들어와 3일 동안 독성기도를 올리고 돌아오다가 '이곳의 지세가
절을 지으면 딱 좋은 터요!'
절을 지을 것을 제안, 2년 동안 준비하여 1872년 봄, 여러 칸의
건물을 짓고 작은 절이란 뜻에 '소난야(小蘭若)'라 하였다. 이후 주변 산지를 조금씩 매입했
고 1881년에 독성각을 장만해 절 이름을 삼성암으로 갈면서 본격적으로 독성도량을 칭했다.

1936년 봄, 한동운(韓東雲)이 신도 김용태의 지원으로 칠성각을 다시 짓고, 돌다리와 계단을
닦았으며, 요사를 수리하고 기와를 바꾸는 등 절의 규모가 한층 커졌다. 허나 1942년 7월 폭
우의 희롱에 잔뜩 흥분한 뒷산이 산사태를 일으켜 절을 덮치면서 그만 폐허가 되고 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화계사 주지 박회경(朴會鏡)이 중창의 뜻을 밝혔고, 삼성암 승려 박중현
(보광당), 김성섭 등과 함께 쓰러진 절을 일으켜 세웠다. 이때 김용태가 목재를 지원했고, 인
근의 여러 절이 흔쾌히 도움을 주어 1943년 3월 대방 등 12칸을 세웠으며, 그 기념으로 승려
김태흡(金泰洽)이 '화계사삼성암중건기'를 지었다. 그리고 그해 7월 독성각을 다시 세웠다.
현재의 가람은 1961년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본공당, 세민(世敏), 현종(만월당) 등이 계속해
서 규모를 불렸다. 세민은 주지가 되자 대웅전을 고치고 범종루를 지었으며, 현종이 그 마무
리를 지어 지금의 삼성암을 이루게 되었다. 근래에 '사(寺)'로 격을 높였으나 여전히 삼성암
으로 많이 불린다.

삼성암은 초창기부터 독성도량을 칭했다. 그래서 중부 지역의 이름난 독성 기도도량을 자처하
고 있고 그 명성을 누리고 있는데, 독성이 머무는 곳으로 알려져 독성기도를 하러 많은 이들
이 온다. 아직 절의 내력도 짧고 문화유산도 빈약하니 독성도량을 내세워 절의 존재를 천하에
홍보하는 것이다. 나 역시 삼성암의 이름 3자만 아련히 듣고 있었을 뿐, 관심도 보이지 않다
가 그런데로 묵은 절임을 알고 뒤늦게 살짝 찾아온 것이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독성각, 명부전, 칠성각, 요사 등 8~9동 정도의 건물이 있
으며, 겉보기와 달리 건물도 제법 있고, 면적도 넓다. 소장 문화유산은 아직 없으나 1908년에
조성된 산신탱과 철원(鐵原) 심원사에서 넘어온 조그만 아미타불, 그리고 상궁윤씨의 헌답기
념비 등이 절의 100년 내력을 살짝 귀뜀해준다.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지만 숲속에 짙게 감싸여 있어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기분이며, 사람
들의 발길도 그리 많은 편이 아니라서 고적한 산사의 멋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 바람에 잠을
깬 풍경물고기의 풍경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로 말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1동 산164-5 (인수봉로23길 235 ☎ 02-988-9300, 1996)
* 삼성암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청기와를 눌러쓴 삼성암 명부전(冥府殿)

활짝 열린 정문을 들어서 온갖 봄꽃이 미소 짓는 오르막 길을 오르면 청기와를 지닌 2층 명부
전이 나온다. 2층이긴 하지만 1층은 종무소(宗務所) 등으로 쓰이고 있어 2층이 진짜 명부전인
데, 원래 이름은 지장전(地藏殿)이었다. 그 뒷쪽에는 요사, 선방(禪房) 등이 자리해 있고, 옆
에는 범종각이 있다.


▲  범종을 비롯한 사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각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 등이 담겨져 있다.

▲  북한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샘터

▲  대웅전 맞은편에 자리한 영월각(소법당)


▲  탐스럽게 익은 불두화(佛頭花)의 위엄

▲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관세음보살상
약간은 통통해 보이는 관세음보살 누님이 어진 표정으로 정병(政柄)을
쥐어들며 중생들을 맞이한다.

▲  청기와로 단장된 대웅전(大雄殿)

명부전에서 1단 더 오르면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나온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머리에 푸른 청기와를 입혀 고급지게 꾸몄으며, 내부에는 아미타3존불과 철원 심원사(深
源寺)에서 넘어온 조그만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그곳 천불전(千佛殿)에 봉안된 천불(千
佛)의 하나였으나 6.25전쟁으로 심원사가 파괴되자 승려들이 부랴부랴 그것을 챙기고 이곳으
로 넘어왔고, 그 불상을 아미타불로 삼아 대웅전의 중심 불상으로 삼은 것이다. 현재 서울에
는 심원사에서 넘어왔다는 불상과 보살상이 여럿 있어 심원사가 왕년에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허나 그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온 나는 그만 대웅전 내부를 살피지 않고 지나쳤다. 모두 근래
에 조성된 따끈따끈한 불상과 불화만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웅전은 20세기 중반에 지어진 것으로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남쪽에는 삼성암의 자랑
인 독성각이 있고, 북쪽에는 칠성각과 관세음보살상, 헌답기념비 등이 있다.


▲  오색 연등이 하늘을 가린 대웅전 뜨락
곧 다가올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일찌감치 오색 연등으로 대웅전 뜨락을 곱게
수놓았다. 하늘을 훔친 연등의 위엄으로 대웅전 머리는 가려져 마치
자욱한 하얀 안개로 산 윗부분이 가려진 것 같다.


▲  바위 위에 자리한 '상궁 청신녀(淸信女) 윤씨 실상행(實相行)
헌답기념비(獻畓紀念碑)'
약간 검은 피부로 이루어진 조그만 비석으로 구한말에 상궁 윤씨가 전답을
시주한 것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다. 그 전답은 삼성암의 살을
찌우는데 크게 보탬이 되었다.

▲  산신각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좌측 안쪽에는 칠성각이 자리해 있다. 산신(山神)과 칠성의 보금자리로 '칠성각' 현판
외에 주원영 거사가 쓴 '영모각(靈母閣)' 현판도 내밀고 있는데, 여기서 '영모(靈母)'는 산신
할매의 다른 표현 같다.

칠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그 역시 청기와를 지니고 있는데, 19세기 말
에 지어진 것으로 1936년에 수리한 것을 근래에 산뜻하게 청기와를 입혔다.
건물 바로 뒷쪽에는 벼랑이 바짝 붙어있어 산사태에 다소 취약해 보이는데, 1984년 여름 장마
의 희롱으로 산사태가 일어나 적지 않은 흙과 물이 거세게 칠성각을 향해 밀려왔다. 붕괴 직
전에 놓였으나 뿌리채 뽑혀 떠내려오던 소나무 1그루가 마치 문어가 감싸듯 그 줄기와 뿌리가
칠성각을 감싸 무너지지 않게 지켜준 이변이 발생했다. 우연인지 칠성/산신의 가호인지는 모
르겠으나 어쨌든 산신각은 위기를 모면했고, 절에서는 그 소나무를 치우고 3일 동안 산신 기
도를 올렸다.


▲  등장 인물이 많은 칠성탱 (왜정 때 그려짐)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고색이 느껴지는 산신탱은 1908년 석옹 철유(石翁 喆裕)가 출초(出草, 초안을 그림)하고 두흠
(斗欽)과 윤오(允旿) 등이 참여해 구산동 수국사(守國寺)에서 그린 것으로 나중에 삼성암으로
넘어왔다.
붉은 옷을 입고 하얀 수염을 휘날리는 산신은 호랑이에 기대 앉아있는데, 꼬랑지를 살랑살랑
거리는 호랑이가 고양이처럼 귀엽기만 하다. 산신의 왼손에는 잘생긴 부채가 있고, 그들 뒤에
는 그의 활동무대인 산이 그려져 있다. 심원사에서 넘어온 아미타불을 제외하면 경내에서 가
장 늙은 보물로 아직 그 흔한 지정문화재 등급은 얻지 못했다.


▲  벼랑 위에 자리한 독성각(獨聖閣)

대웅전 우측 벼랑 위에는 삼성암의 얼굴이자 후광(後光)인 독성각이 걸려 있다. 보통 절에서
산신각이나 산신이 봉안된 삼성각(三聖閣)이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기 마련이나 삼성각
은 독성도량답게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의 거처인 독성각을 가장 하늘 가까이에 두어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다.

독성각은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조그만 팔작지붕 건물로 그 역시 청기와를 쓰고 있
다. 1881년에 처음 지어졌다고 전하며, 1942년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이듬해 7월에 다시 지었
다. 현재 건물은 근래 손질된 것으로 지형적인 탓에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정면에 유리창을
내어 비록 좁지만 경내를 굽어볼 수 있게 했다. 들어앉은 위치가 경사가 각박하고 자리가 협
소해 지그재그로 돌계단을 내었는데, 비록 그 거리는 짧으나 계단이 우중층하니 주의가 좀 필
요하다.


▲  독성각에서 바라본 대웅전 옆구리

▲  목각으로 이루어진 독성탱

독성각에는 나무로 조각되어 곱게 채색을 입힌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그림 가운데에 두광(
頭光)을 갖춘 독성 할배가 앉아있고, 그 옆에 동자가 서 있으며, 독성 좌우에는 늙은 큰 소나
무가 있고, 뒷쪽에는 독성의 활동 무대인 천태산(天台山)이 주름진 선을 이루고 있다.

독성각이 19세기 후반부터 있던 것으로 보아 그와 연배가 비슷한 독성탱이 있었을 것이나 지
금 독성탱은 20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여물지 못했다. 삼성암은 독성을 주
인으로 삼아 독성도량을 칭하고 있으며, 중부 지방 제일의 독성 도량을 자처하고 있지만 역시
나 아는 사람만 찾을 뿐이다. 나도 이곳에 오기 얼마 전에야 겨우 그 사실을 접했다.

독성탱 앞에는 중생들의 소망이 담긴 조그만 원등(願燈)이 무리를 지어 모여 장관을 이루는데,
이들이 강인한 협동심으로 몸을 불사르며 독성각 내부를 환히 밝힌다.


▲  마치 자수를 놓은 듯, 꽃잎과 새 등이 그려진 독성각 우물천정

▲  삼성암을 뒤로하며... (일주문 부근)


 

♠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  삼성암 일주문 밑에 자리한 세심천 약수터

그날의 목적지인 삼성암을 둘러보고 뿌듯한 마음을 품으며 절을 나왔다. 다음 인연이 언제가
될지는 장담할 수 없으나 그때가 되면 이번에 놓친 대웅전의 조그만 아미타불을 꼭 친견하고
싶다. 
절을 뒤로 하며 일주문에 이르니 부근에 세심천약수터가 있다. 산에 왔다면 뫼가 베푼 약수는
꼭 마셔봐야 그 산의 맛과 마음을 아는 법, 하여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들이킨다. 허
나 봄가뭄으로 물이 답답하게 나와 조그만 바가지를 채우는데 꽤 인내를 요했다. 삼성암은 그
래도 물이 넉넉했는데, 이곳은 그렇지가 못하다.
약수터 주변에는 운동시설과 의자 등의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오랫동안 동네 사람들의 몸
풀기 장소로 쓰였던 듯 싶다.


▲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약수터를 나와 빨래골로 내려가지 않고 화계사로 질러가는 산길로 방향을 잡았다. 숲에 묻힌
그 길을 정신없이 내려가면 천하 둘레길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는 북한산둘레길이 모
습을 비춘다.
북한산둘레길은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道峯山), 사패산(賜牌山)의 밑도리를 지나는 21개
구간, 71.5km의 장대한 산길인데, 삼성암 입구와 빨래골을 지나는 길은 그 둘레길의 일원인
흰구름길이다. 이름도 참 어여쁜 흰구름길(북한산둘레길 3구간)은 이준열사묘역입구에서 북한
산(삼각산)과 속세의 경계를 넘나들다가 북한산생태숲(성북생태체험관)에 이르는 4.1km의 산
길로 구름을 만날 것 같은 길 이름과는 달리 현실은 해발 100~150m를 왔다갔다하는 구름도 만
질 수 없는 얕은 높이이다. 그러니 괜히 이름에 속지 말자~~!

흰구름길은 북쪽으로 순례길(북한산둘레길 2구간), 서남쪽으로는 솔샘길(둘레길 4구간)과 이
어지며, 그리 각박한 경사가 없는 정말 착한 산길이다. 별로 힘들지 않은 코스라 마실 삼아
가다보면 길게 잡아도 1시간 20분 내외면 완주할 수 있는데, 이 구간에는 화계사(☞ 관련글
보기)와 본원정사(☞ 관련글 보기), 삼성암 등의 오래된 절과 냉골, 빨래골 등의 계곡, 조병
옥(趙炳玉, 1894~1960)박사묘, 구름전망대 등의 명소가 있어 무작정 앞사람의 뒷통수만 보며
산길만 걸을 것이 아니라 이들을 여럿 겯드려서 거닐면 정말 영양가 높은 둘레길 산책이 될
것이다.

흰구름길 구간에는 냉골(화계사와 본원정사 중간)이란 깊은 골짜기가 있다. 도로가 냉골 윗쪽
에 자리한 영락교회기도원까지 닦여져 있어 차량들도 마음 편히 바퀴를 굴릴 수 있는데, 냉골
공원 지킴터에서 칼바위능선으로 조금 오르면 현대사의 주요 인물인 유석(維石) 조병옥박사의
묘소가 있다.

또한 화계사 남쪽 산자락에는 속세를 향해 고
개를 든 3층짜리 전망대가 있다.
이 전망대는 둘레길의 이름을 따서 구름전망
대라 부르는데, 그렇다고 구름까지 닿는 높이
는 아니다. 전망대 꼭대기까지는 계단이 빙글
빙글 늘어져 있으며, 20m 내외의 높이인 전망
대 꼭대기에 올라서면 강북구와 도봉구, 성북
구, 노원구를 비롯해 북한산(삼각산) 동쪽의
주요 봉우리와 도봉산, 수락산(水落山), 불암
산(佛巖山) 등이 거침없이 들어와 조망이 제
법 일품이다.


◀  나무로 지어진 구름전망대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 동쪽 자락과 도봉산(오른쪽 산줄기)

녹색 물결이 일렁이는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 그 너머로 이 산의 대표 봉우리인 백운대(
白雲臺, 북한산 꼭대기)와 인수봉(仁壽峯)을 비롯해 북한산 동쪽 봉우리 능선이 흔쾌히 시야
에 들어온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유동, 우이동, 도봉구, 노원구 지역)
정면 왼쪽에 보이는 산이 도봉산, 오른쪽에 멀리 보이는 산이 수락산이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유동, 쌍문동, 도봉구, 노원구 지역)
정면에 멀리 보이는 산이 수락산, 그 오른쪽이 불암산이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유동, 미아동, 월곡동, 성북구 지역)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미아동, 길음동, 월곡동, 성북구 지역)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잘 닦여진 흰구름길 (화계사 남쪽)

▲  화계사 직전 (흰구름길과 만나는 구간)

간만에 찾은 흰구름길은 화계사까지만 거닐었다. 햇님의 퇴근 시간도 슬슬 임박했고 종종 왔
던 곳이라 그렇게까지 무리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멀리 가고 요란하게 간다 한
들 그 일정의 끝은 언제나 집이다.
이렇게 하여 삼성암을 겯드린 북한산둘레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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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북쪽 끝 지붕,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계곡, 원통사, 우이암 관음봉까지]

 


' 도봉산 봄나들이 (무수골, 원통사, 우이암)'


▲  도봉산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원통사

▲  무수골 숲길


 

봄이 파릇파릇 익어가던 4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친한 여인네들과 서울의 영
원한 북쪽 지붕, 도봉산(道峯山)을 찾았다. 도봉산은 내가 살고 있는 도봉동(道峰洞)과
도봉구의 듬직한 뒷산으로 우리집에서도 훤히 보이는 천하의 명산(名山)이다.

둥근 해가 하늘 가운데에 걸린 13시, 집에서 가까운 도봉역(1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분
식집과 마트에서 김밥과 간식을 두둑히 사들고 도봉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이번 산행은
무수골에서 시작하여 원통사와 우이암(관음봉), 문사동계곡을 거쳐 도봉산 종점에서 마
무리를 지었는데, 소요시간은 4시간 정도이다.


▲  너른 암반이 많은 무수골 하류 무수천(無愁川)


 

♠  서울에 숨겨진 별천지이자 아름다운 산골 마을, 무수골

▲  무수골길 (무수골 주말농장 부근)

무수골을 겯드린 도봉산 나들이는 도봉역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도봉역 1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도봉역4거리인데, 여기서 도봉산이 바라보이는 서쪽으로 길을 건너면 바로 무수골로 인
도하는 무수천 둑방길(도봉로169길)이 나온다. 여기서는 문사동계곡에서 시작된 도봉천과 무
수골에서 시작된 무수천이 만나며 이들은 도봉천으로 합쳐져 중랑천으로 흘러간다.

무수천 둑방길을 10분 정도 가면 도봉초등학교가 나온다. 여기까지는 단독주택과 빌라가 많은
서울에 흔한 주택가 풍경이나 여기서부터 속인(俗人)들의 집이 크게 줄어들면서 서서히 시골
풍경으로 그림이 바뀐다. 그런 풍경 뒤로 북한산(삼각산) 북쪽 봉우리와 도봉산의 지붕이 바
라보여 뒷배경도 아주 탄탄하며, 무수골 마을버스 종점(도봉08번)을 지나면 완전한 산골 분위
기로 풍경이 변한다.

무수천은 수심이 매우 얕은 하천으로 비가 많이 내릴 때만 잠깐 물이 불어날 뿐, 평소에는 물
이 적은 마른 하천<건천(乾川)>이다. 그러다보니 가뭄 때는 갈증을 너무 심하게 타서 툭하면
맨바닥을 드러내기도 한다. 2007년 이후, 무수골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을 벌이면서 무
수골 아랫쪽(도봉초교 주변) 주거 환경이 어느 정도 개선이 되었는데, 이때 무수천을 정비하
여 하천 양쪽에 중랑천과 이어지는 산책로를 내었다. (무수골 주말농장 동쪽까지 이어짐)


▲  세일교 주변 (오른쪽 길은 무수골 북부, 도봉옛길 방면)

도봉산 동남쪽 자락에 포근히 묻힌 무수골은 도봉산에 널린 수많은 골짜기의 하나이다. 허나
그저 숲과 계곡, 바위만 있는 계곡이 아닌 밭두렁과 산골마을, 심지어 논두렁까지 지닌 산골
마을로 좁게는 도봉산과 도봉구, 넓게는 서울의 숨겨진 비경으로 꼽힌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백두산만큼 높은 서울 바닥에 그런 서울을 비웃는 뜻밖의 별천
지가 있다니? 무수골에 발을 들인 나그네는 그곳의 뜻밖에 풍경에 무한 감동을 먹으며 넋을
잃고 만다. 흔히 서울 하면 사람과 차량, 키다리 건물로 즐비한 번잡한 대도시로만 생각하기
일쑤이니 그 감동의 정도는 더욱 클 것이다. 솔직히 서울이라고 해서 꼭 시가지만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무수골이 이렇게 때 묻지 않은 산골로 남게 된 것은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에
포함되어 개발의 칼날을 부러뜨렸기 때문이다.

무수(無愁)골이란 이름은 근심이 없는 골짜기란 뜻이다. 바깥 세상은 늘 근심의 연속인데, 이
곳은 근심이 없는 이름을 지니고 있으니 이 얼마나 극락정토(極樂淨土)다운 이름인가? 그 유
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조선 4대 군주인 세종(世宗)이 이곳에 왔다가 원터약수터에서 약수를 마시고 '물도 좋고 풍경
이 좋은 이곳이야말로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다!'
찬양하여 무수골이 되었다고 하며, 세종
이 그의 아들인 영해군 이당(李瑭)의 묘역을 둘러보고 원터약수터에서 물을 마시며 근심 없는
곳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허나 영해군은 1477년에 죽었고 세종은 1450년에 죽었으니 서
로 시기가 맞지 않으며, 성종이 영해군의 묘역이 완성되자 직접 찾아와 참배하며 근심이 없는
곳이라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근심이 없는 노인네인 무수옹(無愁翁) 이야기도 한토막
전해오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때는 조선의 어느 시절, 나랏일로 골치가 아프던 왕은 세상에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의문을 품으며 이른바 무수인(無愁人)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아무리 잘나가는 부자도,
사대부도, 왕족도, 어린이도 몇 가지씩 가지고 있는 것이 걱정이니 찾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다가 드디어 무수인 자격에 맞는 노인을 찾았다. 그 노인은 아들이 무려 12명으로 모두
장가를 보냈으며, 아들과 며느리의 효성이 지극하여 노인은 만사가 즐거웠다. 하여 주변 사람
들은 그를 무수옹이라 불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왕은 급히 그를 소환해 이유를 물으니 노인
이 머리를 조아리며
'소인은 아직 몸도 멀쩡하고, 마누라가 잘 보살펴주고 있으며, 자식과 며느리가 효도하고, 벗
들도 많고, 자손들도 건강하고, 전하께서 나라도 잘 다스려 주시고, 봄과 여름, 가을, 겨울도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샘이 단단히 난 왕은 그를 시험할 생각으로 구슬을 건네주며 1달 후에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
다. 노인은 왕에게 성대한 대접을 받고 집으로 오다가 한강에서 배를 탔는데, 뒤에 따라오던
사람이 노인에게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하여 구슬을 꺼내 보이니 그때 그 사람이
실수인양 팔꿈치를 치는 바람에 구슬이 한강에 빠지게 되었다. 그 사람은 구슬을 물에 빠트리
게 하려고 왕이 보낸 사람이었다.

구슬을 잃어버린 노인은 구슬을 어떻하나? 노심초사하다가 결국 식음을 전폐하고 몸저 눕게
되었다. 가족들이 이유를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으니 결국 건강까지 극도로
나빠졌다. 걱정이 된 자식들은 잉어를 잡아 푹 고아주려고 했는데, 그 잉어 배에서 구슬이 나
왔다. 알고보니 강에서 잃어버린 그 구슬이었던 것이다. 노인은 너무 기뻐 그동안의 근심을
다 털어버리고 잉어 요리를 폭풍 섭취해 건강을 되찾았고, 1달 뒤, 궁궐에 들어가 구슬을 바
쳤다. 왕이 낸 숙제를 휼륭하게 소화한 것이다.
깜짝 놀란 왕은 그 사연을 듣고 감복했고, 이후 노인은 잘 먹고 잘 살며 쓸데없이 오래 살았
다고 전한다. 이런 무수옹 이야기는 이곳 무수골 뿐 아니라 전국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옛
전설의 하나이다.


무수골은 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무수(無袖)골(무수동)이란 이름도 있다. 이는 무수골에 묻힌
영해군 이당의 무덤 자리가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형국인 선인무수지형(仙人舞袖之
形)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춤을 뜻하는 '舞'가 '無'로 바뀜)
또한 영해군이 묻히기 이전에는 대장장이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들이 운영하는 대장간이 계곡
에 즐비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쇠골', '수철동(水鐵洞, 무쇠골을 한자로 표현)'이라 불리다
가 영해군이 묻힌 이후 무수골(무수동)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또한 무수골에 있던 무수울에 서낭당이 있어 이 마을을 '서낭당(성황당)'이라 불렸는데, 그게
무수골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체로 성황당은 무수골 하류(도봉초교 주변)를 일컬으
며 그 이름은 아직까지 살아남아 버스정류장 이름(도봉역, 성황당)으로도 절찬리에 쓰이고 있
다.

참고로 무수골은 무수울, 무시울, 모시울, 성황당 등으로도 불렸는데, 무수울은 무수골 마을
의 대표 이름으로 조선 때 양주목 해등촌면(海等村面)을 이루던 12개 리의 하나였다. 무수골
은 윗말(무시울), 중간말, 아랫말로 나눠졌으며, 개성이씨가 먼저 터를 닦은 이후, 전주이씨
(영해군의 후손들), 안동김씨, 함열남궁씨, 진주류씨도 이곳에 무덤을 쓴 인연으로 정착하여
오랜 토박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무수골은 도봉산으로 인도하는 기점의 하나로 굳이 등산이 아니더라도 답사와 나들이, 피서,
농촌 체험 등으로도 안길 수 있는 꿀단지 명소이다. 전주이씨영해군파 묘역을 비롯해 무수골
에 가장 먼저 묻힌 개성이씨의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과 의령옹주(義寧翁主) 묘역, 200여
년 묵은 느티나무, 진주류씨묘역(도봉옛길 중간에 있음), 함열남궁씨 묘역 등의 문화유산이
즐비해 답사지로도 손색이 없으며(옛 무덤 답사지로 아주 좋음;) 서울시는 무수골 입구에서
윗무수골을 거쳐 자현암까지의 길을 테마 산책길로 지정하여 '무수히 전하길(숲이 좋은 길)
'이란 간판을 달아주었다.
또한 무수골 하류(세일교 동쪽)에는 밭두렁이 넓게 펼쳐져 있는데, 시민들을 위한 주말농장도
여럿 있어 농촌 체험도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무수골 계곡은 물도 깨끗하고 암반도 즐비하며
상류로 갈수록 숲이 짙어져 피서의 성지로도 아주 좋다. 계곡 상류는 '원통사계곡(또는 보문
사계곡)'이라 불리는데, 문사동계곡, 원도봉계곡(망월사계곡)과 더불어 도봉산 3대 계곡의 하
나로 추앙을 받고 있다.


▲  무수골의 속살로 인도하는 무수골길 (세일교에서 윗무수골 방향)

▲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 (윗무수골, 원통사 방향)

무수골주말농장을 지나면 세일교가 나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오른쪽(북쪽)으로
가면 무수골 북쪽 마을과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로 이어지고, 세일교를 건너면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북쪽 시작문과 무수골 안쪽, 원통사, 우이암 방면으로 이어진다.


▲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 (도봉역 방향)

방학동길 북쪽 시작점을 지나면 바로 성신여대 난향원 돌담길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길 왼쪽
에 돌담이 펼쳐졌다가 절반 정도 들어서면 자리를 바꾸어 오른쪽으로 돌담이 펼쳐지는데, 비
록 덕수궁(德壽宮, 경운궁) 돌담길만은 못해도 그런데로 운치를 자아내고 있으며, 나무도 무
성해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한다.
어디론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난향원 돌담길, 그 돌담길을 지나면 무엇이 나올까? 무수골
초행이라면 더욱 짙어진 숲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도봉산 산길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할 것이
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다. 무수골이 괜히 무수골이 아니거든..


▲  봄을 맞이하여 슬슬 기지개를 켜는 윗무수골 남쪽 논두렁

난향별원 돌담길을 지나면 흔히 생각하는 그늘진 숲 대신 햇살이 내리쬐는 뻥 뚫린 공간이 나
온다. 그 공간이란? 다름 아닌 논두렁이다. 짙은 숲속에 자리한 윗무수골 논두렁, 설마 이런
첩첩한 산골에 무려 논두렁이 있을 것이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논두렁의 크기는 바깥 세상과 비교하면 턱없는 수준이나 산골치고는 그런데로 큰 편이다. 마
치 강원도나 경북의 산골 논두렁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인데, 길을 중심으로 남쪽에 조그
만 논이 펼쳐져 있고, 북쪽에 큰 논두렁이 여럿 있다. 그리고 영해군파묘역 밑에도 논두렁이
여럿 있다.
이들 논두렁은 무수골의 오랜 상징이자 꿀단지로 무수골 사람들은 조선시대부터 이 논을 통해
곡물을 생산했으며 그 생산량이 많아 배불리 먹고 살았다. 이렇게 산골에서 먹는 문제가 거뜬
히 해결되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식(食)은 걱정할 것이 없으니 근심이 없다는 무수골이란
이름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  호수처럼 보이는 윗무수골 북쪽 논두렁

윗무수골 논두렁은 여전히 논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우리가 갔을 때는 아직 모를 심지 않은
상태라 물만 가득해 마치 조그만 호수처럼 보였는데, 보통 5월에 모를 심어서 10월에 수확을
한다.
친환경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들이 황금색으로 숙성되
는 9월 이후 논두렁 풍경은 무수골 풍경의 가히 백미(白眉)로 꼽힌다
.


▲  느티나무 주변 윗무수골 (원통사 방면)

200년 이상 묵은 무수골 느티나무 앞에서 느티나무를 바라보는 기준으로 오른쪽(북쪽)에 느티
나무가든 문패를 내건 문을 들어서 직진하면 무수골에 가장 먼저 뼈를 묻은 개성이씨 집안의
호안공 이등 묘역이 있고, 오른쪽(북쪽)으로 식당을 가로질러 숲속으로 들어가면 영해군의 묘
역(영해군파묘역)이 있다.
그리고 느티나무에서 산꾼 왕래가 빈번한 왼쪽(서남쪽) 길로 가면 자현암과 원통사, 우이암으
로 이어지는데, 하늘을 가리며 쭉쭉 뻗은 나무들이 아름드리 숲길을 이루어 마치 강원도 원시
림을 방불케 한다. 아름다운 숲길 100선까지는 아니더라도 200선에 넣어도 손색이 없는 품질
로 성신여대 난향원 일부가 이곳에 자리해 있어 길 옆에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또한 숲의 옆
구리를 흐르는 무수골 계곡은 청정하기 이를 데 없어 피서의 성지로 아주 제격이다.


▲  수해(樹海)의 파도 속을 거닐다~~ 윗무수골 숲길

▲  윗무수골에 자리한 자현암(慈賢庵)

햇살도 슬금슬금 피해가는 윗무수골 숲길을 지나면 무수골공원지킴터가 마중을 한다. 여기서
오른쪽 길을 3분 정도 오르면(왼쪽으로 가면 함열남궁씨1묘역과 후손들의 거처) 윗무수골 가
장 윗쪽에 자리한 조그만 비구니 암자 자현암이 나타나며, 그곳부터는 완전한 자연의 공간으
로 바뀐다.


▲  자현암 이후 원통사계곡 산길


 

♠  도봉산의 으뜸 계곡, 원통사계곡(보문사계곡)

▲  숲속에 묻힌 원통사계곡

무수골의 최상류를 이루고 있는 원통사계곡은 보문사계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원통사의 다른
이름이 '보문사'라 그런 이름도 지니게 되었는데 그냥 편하게 무수골계곡이라 불러도 상관은
없다.
이곳은 도봉산 3대 계곡의 하나로 원통사 부근에서 발원하여 무수골을 촉촉히 어루만지며 중
랑천으로 흘러간다. 골짜기는 조촐하지만 주름진 바위와 반석, 수심이 얕은 못이 가득해 아기
자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도봉산의 마음이 담긴 듯, 물이 맑고 허공을 덮을 정도로 숲
이 삼삼하다.
오랫동안 서울 근교 경승지로 계곡 밑에 왕족과 사대부의 묘역이 즐비하다보니 자연히 그들의
발길이 빈번해 오랫동안 그들의 입과 기록에 오르내리던 현장이며, 무수골공원지킴터에서 계
곡을 거쳐 원통사까지는 약 30분 거리로 처음에는 경사가 느긋하다가 막판에 잠깐 각박해진다.
허나 두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오를 수 있는 초급 코스이니 그리 걱정은 안해도 된다.


▲  바위와 암반을 가득 품은 원통사계곡

▲  힘차게 쏟아지는 원통사계곡의 위엄

전날까지 비가 적지 않게 내린 탓에 계곡 수량이 매우 풍부했다. 풍부하게 쏟아진 봄비로 간
만에 포식을 즐긴 계곡은 기분이 좋은지 패기가 돋는 물소리를 베풀며 속세를 향해 두둑하게
물을 흘려보낸다. 이게 얼마만에 들어보는 계곡의 당찬 물소리던가.? 산길은 계곡을 따라 이
어지기 때문에 물소리는 늘 우리를 따라다녔다.


▲  원통사계곡과 그를 쫓아가는 산길

▲  원통사계곡의 조촐한 여흥거리, 조그만 폭포와 주름진 벼랑들

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진리에 따라 우리는 잠시 길을 멈추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아 김밥 등의 간식거리를 섭취했다. 하늘과 조금이나마 가까운 곳에서 낭랑한
물소리를 들으며 먹으니 꿀을 두르지 않았음에도 다들 꿀맛 같다.
그렇게 뱃속을 달래고 힘이 넘치는 계곡에 속세에서 딸려온 번뇌를 살짝 맡기니 시름이 잠시
나마 잊혀진 듯 하다. 하지만 그 번뇌는 우리가 내려올 장소에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해탈(解脫)은 정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  원통사계곡 상류 부분

▲  경쾌하게 흘러가는 조그만 폭포

▲  원통사계곡에서 바라본 보문능선

▲  계곡 징검다리


▲  원통사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길

계곡과 나란히 이어진 느긋한 산길은 계곡 최상류에 이르면 잠시 매정한 모습을 보인다. 여기
서 계곡과 완전히 떨어지게 되는데, 각박한 산자락에 닦여진 나무데크 계단길을 오르면 우이
동에서 올라온 산길과 만나면서 다시 진정을 되찾으며, 원통사와 우이암(관음봉)이 서서히 모
습을 드러내 보인다.


▲  하늘의 요새 같은 원통사 (밑에서 바라본 모습)
하늘과 한 발자국 가까워질 때마다 성큼성큼 커져 보이는 원통사, 그 뒤로
원통사의 든든한 후광, 우이암(관음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  원통사 앞에서 바라본 천하 (서울 동북부 지역)

▲  우이암으로 이어지는 원통사 앞 길


 

♠  서울 지역 사찰 중 2번째로 조망이 우수한 높은 산중의 절집,
~ 도봉산 원통사(圓通寺)

도봉산의 제일 남쪽 봉우리인 우이암(관음봉, 542m) 동남쪽 자락 400m 고지에 원통사가 포근
히 둥지를 틀고 있다.
원통사는 서쪽과 북쪽이 산과 바위로 모두 막혀있지만 대신 동쪽과 남쪽은 조망이 훤히 트여
있으며, 흰구름이 손에 잡힐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의 품질만큼은 아주 우수하다.
여기서는 도봉동과 도봉구, 강북구를 비롯해 노원구, 성북구, 중랑구, 광진구, 동대문구, 수
락산과 불암산, 봉화산, 아차산 산줄기, 북한산(삼각산)이 아낌없이 바라보여 속세에서 오염
되고 상처받은 두 안구와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서울에는 많은 산사(山寺)가 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북한산 보현봉 밑 560m 고지에 둥지를
닦은 일선사(一禪寺)가 서울에서 1등으로 조망이 좋은 절이다. 원통사가 도봉구와 동대문구,
중랑구 등 서울 동북부와 한강 이북의 동부 지역 중심으로 보인다면 일선사는 도봉구와 노원
구, 은평구, 강서구, 몇몇 구석진 지역을 제외한 서울의 상당수 지역을 커버하고 있다. 그러
니 조망(眺望) 부분에서는 이곳을 따라올 절집이 없다. 그 다음이 원통사이며, 3위는 호암산(
虎巖山) 남쪽 자락에 안긴 불영암(佛影庵)일 것이다. <불영암은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등
서울 서남부와 광명 지역이 바라보임>
조망은 일품이지만 그만큼 궁벽한 산중이라 가파른 곳에 간신히 자리를 닦고 석축을 쌓아 터
를 다졌으며, 뒷쪽 바위에도 약사전, 삼성각 등의 조그만 건물을 주렁주렁 올렸다. 거북바위
밑에는 샘터가 있는데, 물이 귀할 것 같은 바위 밑임에도 수량이 넉넉하다. 그렇다면 원통사
는 언제 창건되었을까?

원통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864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여 원통사라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관련 기록과 유물, 흔적이 전혀 없어 창건 시기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가져다
준다. 또한 1053년 관월대사(觀月大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나 이 역시 신뢰도가 떨어진다. 다
만 1392년에 천은선사(天隱禪師)가 중창했다고 하니 아마도 이때쯤 창건된 것이 아닐까 싶으
며,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현재 나한전으로 쓰이는 조그만 동굴에서 태조 이성계가 기도
를 올렸다고 전한다.
하지만 굳이 이성계가 아니더라도 이런 동굴은 승려나 도를 닦는 이의 수행처로 사용되기 마
련이다. 게다가 관세음보살 누님이 부처를 향해 기도를 올리는 형상이라는 우이암(관음봉)이
뒷쪽에 있어 지역 사람들은 그 봉우리를 관세음보살의 성지(聖地)로 여겼다. 바로 그들을 후
광(後光)으로 삼아 고려 말이나 조선 초에 조촐히 절을 짓고 관세음도량(관음도량)을 뜻하는
원통사를 칭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영조 때 유인(宥牣)이 중수를 했고, 1810년 청화(淸和)가 중수를 했는데, 중창 이후 나
라에 큰 경사가 있자 나라와 산천의 은혜를 갚았다는 뜻에서 보은사(報恩寺)로 이름을 갈았다.
1887년 응허 한규(應虛 漢奎)가 중창했으며, 1928년 자현(慈賢)이 주지로 들어와 퇴락한 절의
중건을 발원하고 설악산에 머물던 춘성(春城)을 청해 1,000일 관음기도를 올려 1929년에 절을
중건했다.
이후 보경 보현(寶鏡 普賢)을 데려와 아미타불과 지장보살상을 조성했으며, 1931년에 비로소
1,000일 기도가 끝나자 그해 겨울 보응과 함께 다시 만일 염불회를 시작하여 1933년 칠성각을
세우고 1936년 법당 일부와 큰방을 중수했으며, 이때 절 이름을 잠시 보문사(普門寺)로 갈았
다가 원래 이름인 원통사로 돌렸다. 그리고 1988년 약사탱과 칠성탱, 산신탱, 독성탱 등을 만
들어 봉안했다.

원통사는 양반사대부들이 즐겨 찾던 명소로 인근 방학동(放鶴洞)과 무수골에 별장과 집을 지
어 머물던 그들이 이곳까지 올라와 조망을 즐겼는데, 영조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조현명
(趙顯命)과 서명균(徐命均)이 나라 일을 논하며 마음을 가다듬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태조 이성계가 이곳 석굴에서 기도를 했다고 하는데, 기도 마지막 날에 꿈 속에서 하늘
나라의 상공(相公, 정승)이 되어 옥황상제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고 하여 이를 기리고자 새겨
진 상공암 바위글씨가 있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원통보전을 비롯하여 약사전과 삼성각, 정해료, 범종각, 자연산 석굴
을 활용한 나한전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이미 여러 개의 100년이 지났지만 그에 비
해 고색의 기운은 모두 말라버려 지정문화유산은 하나도 없는 실정이다. 다만 조선 말에 새겨
진 상공암 바위글씨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고, 왜정 때 지어진 원통보전과 탱화 여러
점이 전하고 있다. 또한 나한전 석굴은 태조가 기도를 했다는 전설이 깃들여져 있으며, 오랫
동안 승려들의 수행처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앞서 이른 데로 조망 하나는 아주 최상급이라 서울 동북부와 동부 지역이 훤히 시야에
바라보이며, 절 뒷쪽에 자리한 우이암(관음봉)을 들이밀며 관음도량을 내세우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46 (도봉로169길 520 ☎ 02-954-9944)

◀  서울을 굽어보는 범종루(청화대)
매일 새벽 4시와 18시에 은은한 종소리를
서울로 흘려보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가히 일품급이다.

원통사는 산정(山頂)에 자리한 탓에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을 두지 못했다. 그래서 범종루를
대신 정문으로 내밀고 있는데, 절 남쪽 경계에는 돌담을 둘렀고, 동쪽 경계에는 석축을 2m 높
이로 다져 속세의 기운을 경계한다.
절로 들어서려면 범종루의 밑도리를 지나야 된다. 이 길이 속세와 원통사를 잇는 유일한 길로
범종루는 청화대(淸和臺)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  범종루(청화대) 앞에서 바라본 서울 동북부 지역

▲  오색 연등을 늘어뜨린 원통보전(圓通寶殿)

남쪽을 바라보고 선 원통보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
물이다. 1929년에 지어진 것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나 여러 번 손질을 더하면서 90
년 숙성된 기운은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내부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로 이루어진 아미타3존불을 중심으로 호
법신들의 무리를 머금은 신중탱과 백의관세음보살을 담은 관음탱을 두었는데, 원통전은 관음
전(觀音殿)의 다른 말로 관세음보살 누님이 중심이 되야 맞지만 이곳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삼았다. 대신 관세음보살을 그림으로 1폭, 존상(尊像)으로 1기 등 총 2개를 두어 건물의 이름
값은 조금이나마 하고 있다.


▲  원통보전 내부 (왼쪽부터 백의관세음보살탱, 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 신중탱)

▲  바위에서 샘솟는 원통사 샘터

▲  자연산 석굴에 자리한 나한전

원통보전에서 약사전을 향해 1단계 올라가면 거북바위 밑에 이곳의 소중한 젖줄인 샘터가 있
다. 산사에는 늘 샘터가 있기 마련이라 꼭 1모금 챙겨 마시는 편인데 바위 밑 산정에 있음에
도 물이 풍부한 편이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담아 목구멍에 들이키니 몸 속이 싹 시원해진다.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하늘이 내린 이슬 맛이 담긴 탓일까? 물맛도 그런대로 괜찮은 기분이다.


 ▲  나한전(羅漢殿) 내부

샘터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약사전, 왼쪽은 바위 밑도리에 묻힌 나한전으로 이어진다. 나한
전 석굴은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했다는 현장이라 우기고는 있으나 신뢰성은 없으며, 오랫동
안 승려들의 기도처로 쓰였던 것을 근래 손질하여 돌로 만든 석가3존불과 보살입상, 나한상(
羅漢像)을 봉안해 나한전으로 삼았다.
석굴 내부는 더위 두 글자를 잠시 잊게 할 정도로 시원하며, 촛불이 어둠을 조금이나마 밀어
내고 있으나 다소 어두운 편이다.


▲  거북바위에 둥지를 튼 약사전(藥師殿)
샘터 뒷쪽에는 거북바위가 있다. 그의 등에는 약사여래의 거처인 1칸짜리 약사전이
둥지를 틀고 있는데, 바로 그 앞 바위 피부에 '상공암' 3자가 새겨져 있다.

▲  밑에서 바라본 약사전

▲  약사전 약사여래좌상과 약사후불탱


▲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상공암(相公岩) 바위글씨

약사전 바로 앞에 깃든 상공암 바위글씨는 직각으로 선 바위 피부에 새겨진 것이 아닌 누워있
는 바위에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여기서 상공이
란 정승(正承)을 뜻하는 것으로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엎어버리기 이전 원통사에 들어와 기도
를 하다가 그 마지막 날 꿈에 하늘나라 상공이 되어 옥황상제를 알현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기념으로 이곳에 상공암 바위글씨를 남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전설은 신뢰하기가 어려우며, 태조(太祖)가 과연 이곳까지 올라와 기도를 올렸는지
는 심히 회의적이다. 다만 도봉산 천축사(天竺寺)와 회룡사(回龍寺)는 이성계와 인연이 깊은
절로 그 절의 설화를 가져와 적당히 빚은 것으로 보이며, 조선 후기에 이곳을 찾았던 사대부
가 그 전설을 전해 듣고 꿈 속에서 하늘나라 상공이 된 태조를 찬양하고자 거북바위 위에 '상
공암' 바위글씨를 새겼다.

75x230cm 크기로 네모나게 외곽 선을 긋고 그 안에 3자를 새겼는데, 서체는 해서체(楷書體)이
며, 마치 꿈틀거리는 듯 필체가 우수하고 투박하다. 원통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절 경내
에 바위글씨가 있는 경우는 거의 흔치가 않은데, 그 글씨는 선비와 사대부, 왕족들이 즐겨하
던 낙서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원통사에 그들의 왕래가 잦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약사전 앞에서 꺼꾸로 지켜본 상공암 바위글씨
태조의 하늘나라 꿈 전설을 상징하고자 하늘이 잘 바라보이는 이곳에
글씨를 새겼다.

▲  삼성각(三聖閣) 앞에서 바라본 천하
도봉산 동남쪽 자락과 도봉구, 강북구, 노원구, 불암산, 아차산 산줄기,
성북구, 동대문구, 중랑구 등이 아낌없이 바라보인다.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칠성과 산신, 독성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 칠성탱 (1988년 작)
치성광여래와 칠성(七星)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져 정신이 없다.

▲  삼성각 산신탱 (1988년 작)
흰 수염의 산신 할배와 호랑이, 동자 등
산신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  삼성각 독성탱 (1988년 작)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
존자)과 그의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  도봉산의 남쪽 지붕이자 대자연의 걸출한 작품
우이암(관음봉)

▲  도봉산 우이암<牛耳岩, 관음봉(觀音峯)>

원통사가 우이암(관음봉) 바로 밑이긴 하나 이전보다 더 각박해진 산길을 10여 분을 올라가야
된다. 지도상의 거리는 200m 정도라 금방 이를 듯 싶었으나 체감거리는 거의 1km가 넘어 벌써
부터 땀 육수를 제대로 배출했다.
우이암 그늘이라 그런지 올라가는 길목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유난히도 많았다. 하나같이 생겨
먹은 것들이 예사롭지가 않아 몇몇 바위는 세상이 달아준 이름도 있을 법도 한데 사람들의 귀
차니즘 때문인지 다들 이름표가 없다. 허나 그것이 무슨 대수랴?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일이지 바위들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칼처럼 솟은 우이암의 밑도리를 지나면 우이암을 바라보는 서쪽 봉우리에 이르게 된다. 드디
어 하늘 아래 우이암에 이른 것이다. 허나 우리가 발을 딛은 곳은 정상부가 바위로 이루어진
우이암 서쪽 바위 봉우리일 뿐, 여기서 동쪽으로 보이는 바위 산이 바로 우이암이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도봉산의 위엄
칼바위와 주봉 능선, 만장봉, 자운봉 등이 두 눈에 바라보인다.


도봉산 남쪽 끝 봉우리인 우이암(해발 542m)은 아주 잘생기고 위엄도 대단한 순 100% 바위 봉
우리이다. 대자연 형님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으로 약 2억 년 전인 중생대 쥐라기
중엽 시절에 일어났던 대보조산운동(大寶造山運動)으로 도봉산 산줄기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바람과 비 등이 계속 산을 깎고 다듬으면서 산 정상부는 화강암이 노출된 채 바위산이 되었고
, 그것이 지금의 도봉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여 도봉산은 자연히 서울 근교의 대표적인 화강암 바위 산으로 자운봉, 선인봉, 만장봉, 칼
바위 등 걸출한 바위와 암봉(岩峰)이 즐비하며, 우이암(관음봉)도 바로 그중의 하나로 대자연
이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인간들의 손길을 꺼렸는지 완전히 난공
불락의 요새로 지어놓았다. 허나 그렇게 단단하게 만들었음에도 하늘과 가까워지고 싶은, 봉
우리를 정복하고 싶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 앞에 결국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①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지역


봉우리 자체가 거의 수직 절벽으로 아무나 범할 수 없는 천험의 요새이며, 내려가는 것 또한
까마득한 그야말로 하늘의 감옥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나 올라갈 수는 없고 장비를 갖춘 암벽
꾼에게만 제한적으로 길을 내주고 있다. 특히 암벽 타기에 최적화된 곳이라 암벽꾼들로 늘 부
산하며, 전국 암벽 등반대회가 열렸던 암벽 등반의 성지이기도 하다. 대자연이 인간의 접근을
막고자 만든 바위 봉우리가 졸지에 암벽 등반을 위해 내려준 선물의 모양새가 되버린 것이다.

지금은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에서 아무렇지 않게 우이암이라 불리고 있지만 원래 이름은 관
음봉이다. 관세음보살이 부처를 향해 기도하는 모습과 비슷해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쓰고 있는 모습과도 비슷하여 '사모봉'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다.
도봉산에는 호랑이와 코끼리, 두꺼비, 코뿔소, 학 등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지닌 바위들이 많
은데 이들이 관음봉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
전부터 도봉산 제일의 관음성지(觀音聖地)로 조촐히 추앙을 받았다. 아마도 원통사에 있던 석
굴(현재 나한전)에서 수행하던 승려나 도봉산에 머물던 승려들이 발견하여 성지로 격하게 추
켜세웠을 것이다. 바위 자체가 아주 휼륭한 관음성지이니 그 후광(後光)을 놓치지 않고자 바
위 밑 적당한 곳에 원통사가 둥지를 틀고 관음도량을 칭하고 있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②
우이동을 중심으로 방학동, 강북구, 성북구,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이
바라보인다.


조금 밋밋해 보이면서도 순백의 아름다움이 묻어난 이 봉우리에도 왜정(倭政)의 추악한 잔재
가 서려있다. 왜정은 관음봉의 위엄을 욕보이고자 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의 우이암으로 강제
로 이름을 갈아버린 것이다. (우이동, 우이시장에서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바꾸었다고도 함)
아무리 봐도 소의 귀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왜정은 왜 그리 눈이 삐딱한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 이름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사람의 망각 속에 완전히 굳어져 버렸고, 관음봉이란
이름은 흐릿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원통사와 불교 단체, 뜻있는 이들은 원래 이름으로
다시 갈아야 된다며 천하에 호소하고 있어 차차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

하긴 왜정에 의해 고의로 왜곡되고 격하된 지명이 어디 한둘이던가? 비록 관음봉이 불교식 이
름이긴 하나 왜정의 나쁜 의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니 원래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맞다. 그들
의 썩은 잔재가 이 봉우리 속에도 깃들여져 천하를 비웃고 있으니 기분이 다소 씁쓸하며, 이
렇게 잘생긴 바위가 소의 귀로 머물러 있는 것도 좀 위엄이 서질 않는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③ 북한산(삼각산) 백운대와 영봉

앞서 원통사가 아무리 조망이 좋다고 해도 우이암만은 못하다. 해발도 벌써 140m나 차이가 나
며 그만큼 하늘과 맞닿은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머리 위로 푸른 하늘과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과 별이 바라보이고, 저 밑으로는 서울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성북구, 동대
문구, 수락산과 불암산, 아차산 산줄기가 시야에 잡혀 여기까지는 원통사 조망과 비슷하다.
허나 이곳에서는 의정부 일부(호원동, 장암동, 민락1,2지구 등)와 상계1동, 도봉동 북부가 추
가로 시야에 들어와 조망의 범위는 조금 넓어졌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④
도봉동과 상계1동, 수락산을 비롯해 의정부 호원동, 민락1,2지구(수락산 너머로
보이는 곳)까지 시야에 잡힌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보다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
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두 발 밑에 펼쳐진 천하를 바라보니 도봉산과 수락산부터 점
보다 작게 아른거리는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즐거운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현실은 편히 드러누울 땅도 시원치 않은 시궁창이라는 것..
저 천하에서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땅이 없다.


우이암에는 마침 한 무리의 암벽꾼들이 줄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봉우리를 희롱하고 있었다.
하늘의 감옥 같은 봉우리 정상에 올라선 기분은 어떠할까? 하지만 정상부는 좁고, 그 주변은
죄다 수직 벼랑이니 자칫 실수라도 하는 순간에는 정말 답이 없을 것이다. 내가 저기로 순간
이동을 당한다면 아찔한 위치 때문에 염통이 쫄깃해져서 오래 있기도 어려울 것 같다. 그냥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우이암(관음봉)에서 바라본 천하 ⑤
무수골이 저 밑에 아득하게 바라보여 참 많이 올라왔음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우이암 서쪽 봉우리에서 두 다리를 푹 쉬었다.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이 솔솔 불어
주는 산바람이 땀과 이른 무더위를 싹 털어가고 대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일품 조망을 실컷 누
리니 두 안구와 마음이 싹 위로받은 것 같다. 하긴 이보다 좋은 정화감은 없지.

정상이란 자리는 오래 머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이라 20분 정도 머물다가 우이암능선으로
길을 잡았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우이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우이암능선에서 바라본 우이암(관음봉)과 서울시내
약 50~60도 경사로 비스듬히 기대며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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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4월 1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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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제주도의 서쪽 끝을 거닐다 ~~ 절부암, 생이기정, 제주올레길12코스 나들이 (차귀도, 와도)

 


' 제주도 겨울 나들이 '

(절부암 주변, 제주올레길12코스)

성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에서 바라본 와도와 차귀도

▲  성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에서 바라본 와도(왼쪽)와
차귀도(오른쪽)

절부암 용수리 제주올레길12코스

▲  절부암

▲  용수리 제주올레길12코스


 

묵은 해가 아쉬움 속에 저물고 새해가 막 기지개를 켜던 1월의 첫 무렵,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 제주도를 찾았다.

달님이 하늘 높이 걸린 새벽 3시,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심야시내버스(N버스)를 줄
줄이 이어타 김포공항으로 이동했다. 비수기 평일임에도 제주도(濟州島)와 따뜻한 남쪽
을 꿈꾸는 사람들로 김포공항 국내선청사는 이른 아침부터 북새통을 이룬다.
공항에 도착하여 탑승 수속을 마치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나를 제주도로 옮
겨줄 6시대 비행기에 몸을 담는다. 시간이 되자 비행기는 만석의 기쁨을 누리며 활주로
를 10여 분 정도 방황하다가 창공 속으로 높이 날개짓을 펼친다.
이륙 시간을 기준으로 제주공항 착륙까지는 50분 정도가 걸렸고 활주로 이동 시간을 포
함해 1시간이 소요되었는데, 이 소요시간은 내가 처음 제주도에 갔던 1988년과 별로 차
이가 없다.
제주공항 서쪽 활주로에 사뿐히 착륙하니 공항청사로 인도할 셔틀버스가 넉넉히 대기하
고 있었다. 하여 그 버스에 탑승하여 3분 정도를 달려 제주공항청사로 들어선다.

제주도에 나를 떨어트리긴 했지만 이미 정처(定處)는 싹 정해둔 상태이다. 남들은 거의
렌트카를 이용해 이동을 하지만 나는 극서민이라 마음 편하게 대중교통을 택했다. 제주
도는 육지보다 시내버스 차비가 저렴하고 무엇보다 무료환승이 아주 휼륭하여 섬 1바퀴
(180km)를 기본 요금(1,250원, 카드는 1,150원)에 도는 것도 가능하다. (제주도 간선노
선인 201번과 202번을 이용하면 됨)

제주국제공항을 나와서 제주시내 서부와 애월읍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제주도 간선노
선 202번(제주터미널~고산리~서귀포등기소)을 타고 용수리 충혼묘지에서 내렸다. 202번
은 외도 월대(月臺)부터 다음날 가는 천제연폭포까지 쭉 신세를 진 노선으로 제주도 급
행버스 102번과 함께 서일주(일주서로) 구간을 책임지고 있다. (동일주는 급행 101번과
간선 201번이 맡고 있음)

정류장 바로 남쪽에 용수교차로가 있는데, 여기서 용수리포구로 인도하는 용수1길로 접
어들어 15분 정도 걸으니 이곳에 상륙했던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金大建)을 기리는
'성(聖)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이 잠깐 들리라며 손짓을 한다.
원래는 계획에 없던 곳이라 통과하려고 했으나 그냥 지나치기가 조금 아쉬워 여로(旅路
)를 좀 살찌울 겸, 기념관의 손짓에 응했다. 하여 그곳을 둘러보고 커피까지 기분 좋게
얻어 마시며 바로 서쪽에 자리한 용수리 포구로 이동했다.
표착기념관은 옥상을 개방하고 있는데 거기서 바라보는 차귀도와 와도, 용수리 지역 조
망이 제법 괜찮으니 꼭 누려보기 바란다. (성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에 대한 내용은
생략함)

용수리 포구에는 나를 이곳으로 부른 절부암이 있는데, 바로 그곳을 시작으로 수월봉까
지 제주올레길12코스(용수리↔무릉리, 17.5km)를 거닐었다. 앞서 둘러본 명소들은 코스
요리에서 앞에 먹는 맛보기 음식이고 이번에 다룰 제주올레길 12코스는 그날의 중심 메
뉴라 할 수 있다. 
이 코스는 남해바다와 산, 해안 절벽이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해안 올레길로 용수리 방
사탑과 생이기정, 당산봉, 고산리 유적, 엉알해안 등의 상큼한 명소가 있으며, 바다 너
머로 차귀도와 와도가 다양한 각도로 포즈를 취해 눈과 마음이 지루할 틈이 없다.
나의 정처없는 마음을 수없이 앗아가고 놓아준 올레길 12코스, 우리집과 가까웠다면 즐
겨찾기 명소로 삼아 두고두고 누리고 싶지만 서로의 제자리가 너무나 머니 실로 아쉽다.
(내가 조물주라면 우리 동네로 그대로 옮겨오고 싶음)


▲  성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 옥상에서 바라본 용수리 지역
저 멀리 구름에 감싸인 곳이 제주도의 심장이자 성지인 한라산(漢拏山)이다.
제주도는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한라산이 바라보인다.

▲  용수리 포구에서 바라본 성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
김대건이 청나라 상해에서 라파엘호를 타고 귀국하다가 풍랑을 만나 용수리에
표착했다. (차귀도에 먼저 표착했다고 함) 그때 타고 온 배는 복원되어
저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깃든 바닷가 언덕, 절부암(節婦岩)
- 제주도 지방기념물 9호

▲  서쪽에서 바라본 절부암

바다를 향해 입을 벌린 용수리 포구에 이르면 유난히 나무가 우거진 언덕이 시선을 붙잡는다.
온갖 나무와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뒤섞여 무슨 사연이 있을 것 같은 그 언덕은 용수리의 오랜
상징이자 나를 이 머나먼 남국(南國)으로 오게 한 절부암이다.
서쪽을 바라보고 선 절부암은 이름 그대로 절개를 지킨 부인을 기리는 바위로 다음과 같은 슬
픈 이야기가 속삭이듯 서려있다.

때는 1863년 경, 용수리에는 강사철(姜士喆)과 16살(또는 19세) 먹은 고씨 여인이 살고 있었
다. 그들은 서로 좋아하여 혼인까지 했으나 살림이 영 좋지 못해 차귀도에서 대나무를 베어와
바구니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혼인 며칠 후, 강씨는 바구니를 만들 재료를 취하고자 마을 사람들과 테위(테배)를 타고 차귀
도로 건너갔다. 허나 정오가 지나면서 갑자기 강한 바람이 몰아치자 서둘러 마을로 돌아오다
가 강풍의 희롱에 제대로 흥분한 바다 파도로 배가 뒤집혀 모두 죽고 만다. (다른 이야기로는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강풍으로 침몰해 죽었다고 함)
졸지에 남편을 잃은 고씨는 크게 통곡하며 바닷가에 나가 남편의 시신을 찾을 수 있기를 절절
히 빌었다. 그렇게 3달을 빌었으나 남편의 시신은 소식이 없었고,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해 결
국 해안 절벽에 있는 팽나무에 목을 매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그때까지 행
방이 묘연하던 남편의 시신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고씨가 목을 맨 자리 밑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 해괴한 일에 지역 사람들은 중원대륙 조아(曹娥)의 일과 같다며 감탄을 했다. 여기서 조아는 조간의 딸로 그가 강을 건너다 급류에 빠져 죽자 조아는 70일 동안 아버지를 찾아 헤매다가 너무 비통하여 강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5일 뒤에 아버지의 시신을 안고 물 위에 떠올랐다고 한다.
고씨 부인의 이야기를 들은 대정(모슬포) 사람 신재우(愼哉佑)는 크게 감동을 먹고 자신이 과
거에 붙으면 고씨의 열녀비(烈女碑)를 세워주겠다고 공언했다. 하여 바다를 건너 서울로 올라
가 과거에 응시했으나 정성 부족인지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만다.

풀이 죽은 신씨는 고향으로 가다가 답답한 마음에 점집에 들렸다. 점쟁이는 한 여인이 따라다
니고 있으니 그를 잘 모시면 급제를 할 것이라 답을 했다. 허나 그 여인이 누군지 전혀 알 수
가 없었고 집에 와서도 계속 머리를 굴렸으나 딱히 떠오르는 여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고씨 부인의 이야기가 나왔다. 하여 예전에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라 그 여인이 고씨라 여겨져 고씨의 묘를 참배했다. 그리고 다시 상경
하여 과거에 응시해 드디어 급제를 하였다.
그는 대정판관(大靜判官)의 직을 제수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조정에 상소하여 고씨의 열녀비를
세우는 한편, 70냥을 지원해 고씨 부부의 묘를 당산봉(고산봉) 서쪽 비탈에 합장해 매년 3월
15일에 제사를 지냈다. 또한 고산과 용수 마을에 100냥을 내주어 제사를 꼭 챙기도록 했으며,
고씨가 목을 맨 절벽을 절부암이라 이름 지었다.

왜정(倭政) 때는 왜정의 태클과 재정 문제로 제사가 잠시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마을 부인회가
돈을 모아 300평 정도의 절부암전을 마련하여 그 소출로 매년 꾸준히 제를 지낸다.


▲  북서쪽에서 바라본 절부암

절부암 언덕에는 사철나무, 후박나무, 동백나무, 포나무, 느릅나무, 박달목서(환경부 지정 멸
종위기 야생생물 2급) 등이 모진 바닷바람을 이겨내며 우거져 있다. 예전에는 절부암 바로 앞
까지 바닷물이 넝실거렸으나 개발의 칼질이 여기까지 마수를 뻗치면서 적지 않은 변화를 강제
로 받게 되었다.
절부암 앞에 돌로 다져진 산책로가 닦여 바닷물은 서쪽으로 조금 밀려났으며, 그 앞바다에 도
로가 생기고 항구가 생겼다. 게다가 절부암 뒤쪽에도 집들이 마구 들어서 마치 도시 속에 갇
힌 외로운 공간처럼 되었다. 이곳이 대도시 한복판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으나 엄연한 시골 포
구이다. 개발의 칼질에 절부암의 공간이 다소 쪼그라든 느낌을 주며, 절부암 바로 뒷쪽에 옥
의 티를 선사하면서까지 건축 허가를 내줬어야 했는지 제주도 철밥통들에게 실로 회의감이 든
다. (무분별한 난개발로 계속 망가지고 고통받고 있는 제주도의 현실임)


▲  절부암 앞 산책로 (북쪽 방향)

▲  절부암 앞 산책로 (남쪽 방향)

산책로가 닦여진 이곳에는 층층이 주름진 바위들이 있었고 그곳까지 바닷물이 손을 내밀어 절
부암과 진한 정을 나누었다. 산책로 조성으로 절부암 접근이 좀 쉬워지긴 했으나 1980년대 절
부암 사진과 비교해보니 개발이 씌운 굴레에 단단히 갇혀있는 듯한 모습이다.


▲  절부암 제단
상석(床石)과 향로석(香爐石)을 갖춘 이곳에서 절부암 제사가 이루어진다.
평소에는 먼지가 놀이터로 삼을 정도로 한가하지만 3월 15일만 되면
아주 바쁜 시간을 보낸다.

▲  세월을 너무 간지나게 탄 절부암 바위들

▲  절부암 바위글씨의 위엄
감동 김응하(監董 金應河)가 글을 짓고 동수 이팔근(洞首 李八根)이 글씨를 썼다.
제주도에서 유일하다는 전서체 바위글씨로 독특한 글씨라 절부암이면서도
아닌듯한 아리송한 모습이다.

▲  신재우가 남긴 바위글씨

절부암 바위글씨 주변에는 '同治丁卯紀平三字(동치정묘기평삼자, 여기서 '동치정묘'는 1867년
)','判官愼裁佑撰(판관 신재우찬)' 바위글씨가 있다. 이들은 절부암을 있게 한 신재우의 흔적
들로 그 주변 바위에는 절부암 제사를 주관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어 절부암의
과거와 현재가 깃든 소중한 일기장 같은 곳이다.

* 절부암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4241-5


▲  바다를 향해 작게 입을 벌린 용수리 포구
방파제 너머로 보이는 섬은 와도와 차귀도이다. 저들은 용수리에서
수월봉까지 다양한 각도로 아주 지겹도록 구경을 했다.

▲  차귀도(遮歸島)

손에 닿을듯 가까이 떠있는 차귀도는 0.16㎢의 조그만 섬으로 제주도의 서쪽 끝을 잡고 있다.
지실이섬, 죽도, 와도 등의 작은 섬을 거느리고 있으며, 1970년대까지 약간의 사람들이 거주
하고 있었으나 박정희 정권 시절에 여러 번 터졌던 북한의 도발 행위(1968년 김신조 공비 패
거리 서울 침투, 1974년 공비단 추자도 침투 등)로 외딴 섬들의 안보 취약이 문제가 되자 섬
사람들을 제주도 본토로 이주시켜 무인도가 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금지된 섬이 되어 완전 자연의 공간으로 남아있다가 2011년 이후 개방되어 섬
나들이가 가능해졌다.
차귀도는 고산리 차귀도 포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면 되며, 낚시터로도 유명하여 참돔과 돌
돔 등 다양한 물고기들이 잡힌다. (1~3월, 6~12월에 많이 잡힘~) 이번에는 그림의 떡처럼 차
귀도를 대했지만 다음에는 저곳에 꼭 발을 들이고 싶다.

차귀도 일대는 '차귀도 천연보호구역'이란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422호로 지정되었다.


▲  와도(臥島, 누운섬)

와도는 차귀도에 딸린 작은 바위 섬으로 용수리에서 보면 마치 여자가 누워있는 모습으로 보
인다. 얼굴과 가슴(조금 뾰죡하게 나온 부분은 젖꼭지), 다리 부분이 제법 현실감있는 모습으
로 대자연 형님의 위대한 작품성을 느끼게 한다. 허나 용수리에서 볼 때나 그렇게 보이지 당
산봉과 고산리, 수월봉에서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여자가 누워있는 모습의 와도 때문인지 그곳과 가까운 고산리에는 예로부터 과부들이 많았다
고 한다.


▲  바다에 나란히 떠서 물놀이를 즐기는 와도와 차귀도(오른쪽)

▲  용수마을 방사탑(防邪塔) 2호 - 제주도 민속문화재 8-9호

제주도에는 방사탑이라 불리는 동그란 돌탑들이 많이 전하고 있다. 이 땅에 흔한 서낭당이나
돌탑 스타일의 탑으로 마을의 재앙을 막고 비보풍수(裨補風水)에 따라 허한 곳을 채워주는 용
도로 지어졌는데, 답, 답데, 거욱, 거왁, 답단이, 거욱대 등의 별칭을 지니고 있으며, (주로
쓰이는 명칭은 '방사탑') 탑 위에는 돌하르방 모양의 돌이나 사람 얼굴 모양으로 다듬은 돌,
새 모양의 돌을 추가로 올려놓는다.

용수리포구에는 남쪽과 북쪽에 총 2개의 방사탑이 세워져 있다. 차귀도 주변은 바다가 툭하면
심술을 부려 배가 자주 좌초되었고 그때마다 죽은 이들의 시신이 마을로 밀려왔다. 하여 마을
주민들은 그런 재앙을 막고자 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화성물 가까이에 있어서 화성물답, 화성물탑이라 불리기도 하며, 탑의 꼭대기에 새의 부리와
비슷하게 생긴 길쭉한 돌이 바다와 차귀도가 있는 서쪽을 향해 세워져 있다. 새 부리 비슷하
게 생긴 돌이 놓여 있어서 '매주제기'라 불리기도 한다.
새는 예로부터 인간과 하늘을 이어주고 인간의 소리를 하늘로 전해주는 존재로 여겨져 용수리
앞바다에 사고가 없게끔 하늘에 민원을 넣는 용도로 단 것으로 보인다.

* 용수마을 방사탑2호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4288-6번지

▲  가까이서 본 용수마을 방사탑 2호

▲  방사탑 주변 바닷가


 

♠  제주올레길12코스 거닐기

▲  제주올레길12코스 (용수리 방사탑2호~생이기정 구간)

제주올레길 12코스는 용수리 절부암에서 무릉리까지 이어지는 17.5km의 올레길이다. 이 올레
길은 용수리에서 제주올레길 13코스(용수~저지, 15.9km)로 간판이 바뀌며 무릉리에서 제주올
레길 11코스(무릉~모슬포, 17.3km)로 이름이 바뀌어 각자의 방향으로 달려간다.
나는 12코스 구간 중 가장 꿀단지라 할 수 있는 용수리~수월봉 구간을 거닐었는데, 12코스 전
체의 ⅓ 남짓 정도 된다. 허나 일몰 시간의 압박이 내 마음을 크게 흔들어놓는다. 2시간 내에
수월봉까지 가야 일몰의 눈치를 피하며 마음 놓고 사진 셔터를 누를 수 있고, 안전하게 모슬
포(摹瑟浦)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두워지면 출사도 힘들고 올레길 이동도 힘들어짐)

햇님의 퇴근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일단 12코스에 나를 던지기로
하고 길에 임했다. 이 구간은 생이기정 북쪽에 이르면 고산리 유적까지는 완전 속세(俗世)와
등을 지게 되므로 적어도 고산리 유적까지는 무조건 가야 된다.
12코스 구간 중, 용수리~수월봉 구간은 해안 구간으로 당산봉을 넘어가며, 수월봉~무릉리 구
간은 내륙이다. 해안길 중 용수리 방사탑~당산봉까지는 거의 벼랑길로 키 작은 줄난간 외에는
안전시설이 없으므로 괜히 사진 찍는다고 안전선을 넘는 일이 없도록 한다. 게다가 속세와 떨
어진 외진 곳이라 가급적 일몰 전까지는 산책을 마쳐야 뒷탈이 없을 것이다.


▲  누렇게 뜬 억새들이 나그네를 반기는 제주올레길12코스
(용수리 방사탑2호~생이기정 북쪽 구간)


12코스는 제주도의 야심작인 올레길의 일원이라 길은 잘 닦여져 있다. 방사탑2호 남쪽 구간에
는 무려 박석(薄石)까지 입혀져 있어 마치 시내 해안 공원을 거니는 기분이다.
제주도가 아무리 따뜻한 남쪽이라고 하지만 바닷바람이 얼마나 격한지 두 손이 얼어붙을 정도
이다. 그날 제주도 기온은 영상 4~9도라고 나왔으나 체감온도는 거기서 7~8도 정도는 빼야 했
을 정도이다. 너무 두꺼운 잠바까지는 아니더라도 패딩 잠바나 덜 두꺼운 잠바를 입어야 무리
가 없을 것이다. (모자 달린 잠바를 입으면 더 좋음) 대신 내륙 지역은 바닷바람의 간섭을 덜
받아 조금 따스하다.


▲  여기서도 변함없이 나와 놀아주는 와도와 차귀도
마치 양이(洋夷)들이 말하는 천지창조의 현장 같다. 와도와 차귀도가 막
빚어진 듯한 모습, 하늘은 저들을 만드느라 체력이 방전되었는지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다.

▲  가까이서 바라본 와도의 위엄

12코스를 거닐면 꼭 따라다니는 존재가 있다. 바로 차귀도와 와도이다. 이들은 수월봉까지 계
속 나를 따라다니며 그들의 다양한 모습을 비춰준다. 절부암과 용수리포구에서는 윗 사진처럼
보였으나 올레길을 1굽이 돌 때마다 조금씩 다른 자태를 보여주며, 고산리에 이르면 누워있는
여자가 아닌 그저 평범한 바위섬으로 모습이 바뀐다. 사물과 사람을 하나의 각도가 아닌 다양
한 각도로 봐야된다는 진리를 이 올레길12코스가 몸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허나 사람은 동물과 신(神)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존재들이라 그 당연하면서 단
순한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  해안 벼랑으로 이루어진 제주올레길12코스 (생이기정 북쪽)
이곳은 바다 낚시터로 좋은 곳이라 낚시도구를 챙기고 벼랑 밑으로
내려가는 낚시꾼이 여럿 눈에 띄었다.

▲  제주올레길 12코스 생이기정 북쪽 해안 벼랑
오른쪽에 보이는 섬은 와도와 차귀도이다.

▲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 (생이기정 북쪽)
인생이란 이렇게 뒤를 돌아보는 여유도 챙겨야 정신 건강에 좋다. 너무
앞만 보고 달리는 것도 썩 좋은 것은 아니다.

▲  저만치 멀어진 용수리

올레길 12코스 경관에 퐁당퐁당 홀리다보니 어느덧 이곳에 우두커니 선 나를 발견했다. 여기
가 용수리~수월봉 구간의 ¼ 정도 되는 곳으로 길은 한참이나 남았다. 과연 수월봉까지 일몰
직전까지 갈 수 있을까? 수월봉은 내 조급한 마음을 외면하며 아직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
고 있다.


▲  생이기정 북쪽에서 바라본 용수리 앞바다
바다 파도는 제법 패기 있는 모습으로 뭍을 때려대고, 바닷바람은 태풍 같은
기세로 홀로 거니는 나를 때려댄다. 오늘도 고통 받는 내 인생...

▲  바람개비로 정신이 없어 보이는 용수리

제주도 해안과 앞바다에는 거대한 바람개비가 많이 닦여져 있다. 제주도의 거센 바람을 활용
해 풍력발전(風力發電)을 얻고자 설치한 것인데, 바다에 설치된 것들은 해질녘이나 저녁, 흐
린 날에 보면 마치 커다란 괴물이 칼 같을 것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듯 무시무시해 보인다.


▲  슬슬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와도와 차귀도 (생이기정 북쪽)

▲  생이기정에서 바라본 와도와 차귀도
이렇게 보니 와도가 전혀 누워있는 여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차귀도 또한
용수리에서 보이지 않던 숨겨진 남쪽 속살을 비추기 시작한다.

▲  생이기정
난간 너머로 억새들이 펼쳐져 있는데 겉으로 보면 완만해 보이지만 그건
억새가 나그네를 낚으려는 함정이다. 완만해 보이는 억새밭 너머에
천길낭떠러지가 도사리고 있으나 가급적 난간을 넘지 말자.
 

용수리 포구와 고산리 유적 중간에 '생이기정'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제주도 사투리로 새를
뜻하는 '생이'와 절벽을 뜻하는 '기정'이 합쳐진 것으로 새가 날아다니는 절벽길이란 뜻이다.
올레길에서 보면 생이기정이 전혀 실감이 나지 않지만 차귀도나 바다에서 보면 꽤 높은 벼랑
으로 화산재와 용암이 바다로 흘러가 켜켜히 쌓여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생이기정도 그
렇고 엉알해안과 수월봉 모두 용암이 빚은 대작품들이다.


▲  생이기정 남쪽에서 바라본 와도와 차귀도 ①
와도의 숨겨진 남쪽 속살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누워있는 여인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  생이기정 남쪽에서 바라본 와도와 차귀도 ②

▲  당산봉에서 바라본 수월봉과 고산리 유적
드디어 수월봉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다를 향해 자라 목처럼
고개를 내민 해안 언덕이 바로 그 수월봉이고, 사진 가운데 들판이 
고산리 선사유적이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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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산 눈꽃 나들이 [선녀폭포, 대원사, 수왕사, 전북도립미술관]



' 모악산 연말 나들이 (대원사, 수왕사) '


▲  모악산 대원사

 


 

겨울 제국(帝國)의 나날이 강성해가던 연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전북 한복판에 자리한 모
악산을 찾았다.
이번 해가 새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지 정말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묵은 해가 되어 다시
금 새로운 해를 맞이해야 된다. 그래서 묵은 해를 정리할 겸, 올해 마지막 답사지를 물색
하다가 모악산 대원사가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쿨하게 길을 잡았다.

아침 일찍 차디찬 새벽 공기를 가르며 서초동 남부터미널로 이동하여 전주로 가는 직행버
스를 나를 담았다. 버스도 추위가 싫었는지 남쪽을 향해 질주하여 2시간 20분만에 전주시
외터미널에 도착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말이 있듯이 미리 점심을 먹고 움직이고자
전주(全州)에 올 때마다 거의 꼭 들리는 단골 콩나물국밥집(전주한옥마을 부근)에서 전주
의 명물인 콩나물국밥으로 뜨끈하게 배를 채웠다. 거기에 디저트로 주는 커피까지 섭취하
니 식곤증이 밀려와 나를 희롱한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나오니 하늘이 순간 시샘을 벌인 듯,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비의 양
은 다행히 적었지만 나들이에서 비가 오면 이것만큼 열받는 것도 없다. 어쨌든 비의 방해
공작을 원망하며 전주시내버스 970번(송천동↔전북도립미술관)을 타고 모악산으로 이동했
다.
모악산관광단지(전북도립미술관 종점)에 이르니 귀찮게 하던 비도 다행히 그쳤으나, 하늘
이 일그러진 인상으로 세상을 굽어보고 있어 언제 비나 눈이 투하될지 모를 상황이었다.

  모악산 표석의 위엄


 

♠  모악산(母岳山) 입문

▲  모악산 대원사계곡(시앙골, 물레방아골) 하류

전북 한복판에 장엄하게 누워있는 모악산(794m)은 전주와 완주(完州), 김제(金堤)에 걸쳐있는
산으로 호남평야와 전북 내륙 산간지대의 경계 역할을 하고 있다. 1971년 모악산 일대 42.44
㎢가 모악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정상 밑에 있는 '쉰길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
니의 모습이라 하여 '엄뫼'라 불렸는데, 그걸 한자로 표현하여 어머니의 산이란 뜻의 모악산
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신라 후기에는 '금뫼','금산'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모악산의 원래
이름으로 보는 설도 있다.

신라 후기부터 세상을 구할 미륵(彌勒)의 출현을 열망하던 미륵신앙(彌勒信仰)의 성지(聖地)
인 금산사(金山寺)를 비롯해 귀신사(歸信寺), 대원사, 심원암 등 굵직한 오래된 절이 안겨져
있으며, 왕년에는 80여 개의 절과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새로운 종교들이 모악산을 기
반으로 여럿 생겨났는데, 증산교(甑山敎)가 그 대표적이다.
모악산은 봄 풍경이 아름다운데, 특히 금산사 입구 벚꽃길이 매우 유명하다. 하여 변산반도(
邊山半島)의 여름 풍경, 내장산(內藏山)의 가을단풍, 백양사(白羊寺)의 설경과 함께 호남4경
의 하나로 격하게 찬양을 받는다.

모악산 산행은 김제 금산사나 전주 중인동, 완주 모악산관광단지에서 시작하면 편하며, 산에
안긴 명소로는 금산사와 귀신사, 대원사, 심원암, 수왕사 등의 오래된 절과 전북도립미술관,
금산사 벚꽃길, 명당(明堂)으로 소문났으나 이곳에 묘를 쓰면 가뭄이 든다고 전하는 장군봉,
선녀폭포, 전주김씨 시조묘 등이 있다.


▲  전주김씨 세덕비(世德碑)와 전주김씨 종중공덕비(오른쪽 비석)

모악산 동쪽 자락 원기리에는 '모악산관광단지'가 넓게 터를 닦았다. 모악산을 든든한 후광(
後光)으로 삼은 이곳은 다른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토속 음식을 내세운 식당과 가게(편의점),
까페, 등산용품점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관광단지 남쪽에는 전라북도에서 2004년 10월
에 세운 전북도립미술관이 자리하여 전북 지역 현대 미술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허나 미술관은 애당초 계획이 없었기에 쿨하게 통과했다. 나의 미련한 머릿속에는 오로지 모
악산과 대원사 뿐이었기 때문이다. 혹여 대원사를 보고 나올 때 시간이 남으면 들릴까도 했으
나 역시 인연이 닿지 않았다.

평일이라 썰렁한 관광단지를 지나면 눈에 뒤덮힌 모악산의 설경이 나타나면서 전주김씨 세덕
비와 종중공덕비가 슬쩍 모습을 내민다.
여기서 가까운 산자락에 전주김씨 시조인 김태서(金台瑞)의 무덤이 있다. 그래서 이곳에 이들
비석을 주렁주렁 닦아놓은 것인데, 김태서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4째 아들인 김은열(金殷
說)의 후손으로 그의 터전인 경주가 몽골의 침략으로 고통을 받자 1254년에 가솔을 이끌고 전
주로 넘어와 정착했다. 이후 그는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고, 그를 시조로 한 전주김씨가 생
겨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남북분단의 원흉으로 북한이란 괴뢰 정부를 세운 김일성이 그의 후손이라는 점
이다. 1993년 손석우란 사람이 '터'란 책을 냈는데, 김일성이 시조 무덤의 지기(地氣)를 받아
북한을 세워 집권했으며, 음력 1994년 9월에 죽을 거라는 내용을 다루었다. 비록 달은 틀리지
만 1994년 7월 김일성이 갑자기 골로 가면서 그 책과 전주김씨 시조묘는 잠시 세상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전주김씨 시조묘는 대원사로 올라가는 길목 부근에 자리해 있어 잠시 들릴까 했으나 눈의 방
해가 심해 올라가지는 못했다. 어차피 계획에도 없던 곳이다.


▲  선녀폭포(仙女瀑布)와 폭포를 품은 사랑바위

전주김씨 세덕비에서 대원사계곡(시앙골)을 옆에 끼고 산길을 오르다보면 선녀폭포와 사랑바
위가 모습을 비춘다.
선녀폭포는 높이 5m도 안되는 조그만 폭포로 볼품은 떨어지나 무려 선녀란 이름까지 지닌 것
을 보면 옛 사람들의 마음을 많이도 앗아간 모양이다. 이런 폭포에는 꼭 옛 사람들이 심심풀
이로 지어놓은 전설이 있는 법, 그 믿거나 말거나 전설은 다음과 같다.

아주 먼 옛날, 보름달이 뜨면 하늘나라 선녀들이 선녀폭포로 내려와 목욕을 했다. 다른 유사
전설에서는 그냥 목욕만 하고 돌아갔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목욕 외에 수왕사에 들려 약수도
마시고 모악산 신선과도 어울려 놀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뭇꾼이 우연히 폭포 옆을 지나다 목욕 중인 선녀를 발견했고 그들의 아름
다운 자태에 미치도록 넋이 나간 그는 결국 상사병 비슷한 병을 얻어 몸저 눕게 되었다.

병으로 힘들어하던 나뭇꾼은 기왕 이 지경이 된 거 선녀의 모습을 1번만 더 보고 죽자며 보름
달이 뜬 날 폭포를 찾아와 그들을 훔쳐봤다. 그러다가 뜻밖에 한 선녀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
는데, 그 선녀도 나뭇꾼이 좋았는지 둘만 살짝 대원사 백자골 숲으로 자리를 옮겨 사랑을 속
삭이며 예민한(?) 일을 벌이려는 찰라, 갑자기 뇌성병력이 그들을 내리치면서 선녀와 나뭇꾼
은 돌이 되고 말았다.
하늘의 시샘에 돌이 된 그들의 모습이 마치 떨어질 줄 모르고 사랑을 속삭이는 듯 하다 하여
사랑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여기서 치성을 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산길에
서 보면 폭포의 모습이 그리 실감나진 않으나, 바로 앞에서 보면 조금은 그럴싸하게 보인다.


▲  대원사계곡(시앙골)을 따라 이어진 모악산 산길

▲  겨울에 잠긴 모악산 산길
겨울 제국에게 모든 것을 털린 나무들은 숨죽이며 봄을 잉태하고 있다.

▲  속세를 향해 흘러가는 대원사계곡(시앙골)
소쩍새가 울 때면 겨울에 묻힌 계곡도 얼음을 박차고 일어날 것이다.


모악산관광단지에서 20분 정도 야트막한 산길을 오르면 대원사가 반갑게 모습을 비춘다. 시앙
골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오른쪽에 경내로 인도하는 계단이 놓여져 있고, 그 길을 오르면
비로소 대원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  대원사 직전에 걸린 크리스마스 축하 현수막

▲  대원사 경내로 인도하는 시앙골다리와 계단길


 

♠  모악산 동쪽 자락에 안긴 고즈넉한 산사
대원사(大院寺)

모악산 동쪽 자락에는 고색과 숲내음이 깃든 대원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겨울 제국이
내린 두터운 눈을 뒤집어쓰며 겨울 산사의 고적함을 진하게 우려내고 있는데, 종종 나타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와 추녀 밑에 달린 풍경(바람방울)이 들려주는 그윽한 풍경소리가 고요
한 경내를 살짝 어루만진다.

대원사는 670년에 보덕(普德)의 제자인 일승(一乘), 심정(心正), 대원(大原)이 창건했다고 전
한다. 보덕은 고구려 승려로 열반종(涅槃宗)의 개산조(開山祖)인데, 고구려의 대막리지(大莫
離支)인 연개소문(淵蓋蘇文, ?~666)이 당나라에서 도교(道敎)를 받아들이자 이를 개탄하며 백
제로 넘어갔다. 이때 신통력으로 완주 고덕산(高德山)으로 날라와 경복사(景福寺)를 세웠다고
하며, 절을 세운지 얼마 안가서 고구려가 망했다.

보덕의 제자인 일승, 심정, 대원은 경복사가 보이는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워 대원사(大原寺)
라 했다고 전한다. 보덕의 설화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나와있지만 대원사 창건까지는 나
와있지 않아 670년 창건설(또는 660년)에 썩 신뢰는 가지 않는다. 게다가 창건 시기를 입증해
줄 신라 후기 유물과 유적은 전혀 없으며, 1066년에 원명국사(圓明國師)가 중창했다는 이야기
가 있어 이때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374년 나옹(懶翁)이 중창을 했다고 하며, 1415년에 다시 중창을 벌였다. 그러다가 1597년 정
유재란으로 말끔히 파괴되자 1606년 부처로 추앙받는 진묵(震默)이 다시 일으켜 세웠고, 1733
년 동명 천조(東明 千照)가 중창을, 1886년에는 금강산 건봉사(乾鳳寺) 승려인 금곡(錦谷)과
인오 등이 중창했다. 금곡은 함수산(咸水山) 거사와 함께 대웅전과 명부전을 중건했으며, 내
원암(內院庵)에 있던 염불당을 가져왔다.

1950년 6.25전쟁으로 대부분이 파괴된 것을 덕운이 1959년부터 불사를 일으켜 하나씩 건물을
일으켜 세웠다. 1993년 칠성각을 부시고 요사채를 지었으며, 삼성각을 다시 지었다. 그리고
2001년 이후 명부전과 대웅전 수미단을 손질해 지금에 이른다.

예전에는 비록 음은 같지만 가운데 한자만 살짝 다른 대원사(大圓寺)였으나 근래 지금의 한자
로 갈렸으며, 대웅전과 삼성각, 명부전, 나한전, 범종각, 요사 등 약 10동 정도의 건물이 조
촐한 경내를 메우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삼세불좌상과 용각부도가 있고, 1606년에 조성
된 목각사자상(전북 지방민속문화재 9호)도 있었으나 1988년에 도난을 당했다. 그러다가 1999
년에 서울 가회동(嘉會洞)의 어느 화랑에서 발견되었으나 공소시효를 주장하며 돌려주지 않았
으며, 서울 인사동에 어느 작자에게 넘어가면서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1999년에
지방문화재에서 정리되었음) 그 밖에 오래된 5층석탑 2기와 승탑(부도) 6기가 절의 숙성된 내
력을 알려준다.

이곳은 천하대복지(天下大福地)의 최길상(最吉祥)으로 치는 명당으로 효의 절, 어머니 절, 발
원을 이루는 기도처로 꼽히며, 특히 증산교를 세운 증산 강일순(甑山 姜一淳, 1871~1909)이
도를 깨우친 현장이기도 하다.
매년 1월 1일에는 '촛불기원 해맞이 타종제' 행사가, 4월에는 '모악산 진달래 화전축제'를 열
어 속세에 큰 호응을 받고 있는데, 화전축제는 이곳의 백미(白眉)로 꼽힌다.

▲  매점과 찻집으로 쓰이는 소화당(笑話堂)

▲  소화당 현판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소화당이란 조그만 목조집이 마중한다. 이 건물은 불교용품과 기
념품, 커피, 전통차를 파는 매점으로 커피는 무려 3,000원대를 받는다. 건물 옆에는 잠시 쉬
어갈 수 있도록 파라솔이 달린 탁자와 의자가 놓여져 있고, 건물 정면에는 소화당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는데, 마치 미소를 머금고 있는 듯한 상큼한 모습이다.


▲  겨울 산사의 내음을 진하게 보여주는 대원사 경내

▲  대원사 아랫쪽 5층석탑

소화당을 지나면 바로 대웅전 뜨락이다. 정면에는 대웅전이 마주보고 있고, 오른쪽에는 요사
와 모악당, 샘터, 왼쪽에는 5층석탑과 범종각, 명부전 등이 뜨락을 둘러싸고 있다.
바로 왼쪽에 보이는 5층석탑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20세기 중반 이후에 손질하면서 4
사자5층석탑으로 성형되었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내음이 다소 떨어진다. 그 뒷쪽에는 범종(梵
鍾)의 보금자리인 범종각이 있다.


▲  대원사 대웅전(大雄殿)

동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은 대원사의 중심 건물(법당)로 석축 위에 높이 자리해 있다. 정면
과 측면이 각각 3칸인 주심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법당치고는 매우 작은 덩치인데 1886년에 지
어졌으나 6.25때 불탄 것을 1959년 이후에 다시 지었다.
불단(佛壇)에는 목조3세불좌상과 삼신후불탱 등이 있으며, 지금은 없지만 괴목(槐木)으로 만
든 목각사자상이 있었다. 이 사자상은 진묵대사가 축생(畜生)들을 천상(天上)으로 천도하고자
만든 것이라 하며 그 위에 북을 올려놓고 쳤다고 한다. 허나 1988년 불의의 도난을 당했고 다
행히 1999년에 서울 가회동에서 발견되었으나 소유자인 이영옥이 이현수란 사람에게 팔아먹는
등 우여곡절이 심해 아직까지 제자리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  대원사 목조삼세불좌상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215호

대웅전 불단에는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목조3세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얼굴부터 밑도
리까지 하나 같이 두텁게 생긴 이들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로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약
사불(藥師佛)을 거느린 3세불(三世佛)로 17세기에 조성된 것이다.
석가여래와 약사불, 아미타불로 이루어진 3세불은 조선 중/후기에 많이 나타나는 불상 형태로
중앙에 자리한 석가여래는 중심 불상답게 키가 제일 크며(130cm), 좌우 불상은 116cm 정도이
다. 앞으로 조금 내민 얼굴은 다소 경직되고 딱딱한 표정으로 볼살이 많고 이마가 넓으며, 꼽
슬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수인(手印)만 서로 다를 뿐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의 비슷한 모습이며, 윗도리가 아랫도리보다
다소 살이 찐 모습으로 17세기 호남에서 활동하던 조각승들의 조각 스타일이 잘 반영되어 있
다. 그들 뒤에는 화려한 색채의 삼신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  대원사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우측에는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된 명부전이 대웅전을 바라보
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1887년에 금곡이 지었으며, 2001년
에 중수했다.


▲  조선 후기에 조성된 명부전 지장보살상
그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그를 보좌한다.

▲  명부전 10왕(시왕)과 판관(判官), 금강역사상

▲  명부전 윗쪽에 자리한 적묵당(寂默堂)

▲  종무소로 쓰이는 모악당(母岳堂)

▲  모악당 뒷쪽에 자리한 나한전(羅漢殿)

▲  나한전에 봉안된 석가여래와 거울 광배

나한전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羅漢)의 거처이다. 석가
여래의 광배(光背)가 매우 특이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광배 테두리는 검은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광배 중앙에 거울까지 달려있어 잠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아마도 그런 의
도로 거울을 갖추었을 것이다.

  나한전 석가후불탱(19세기 작)과
색채감이 돋보이는 16나한상

  모악당 옆에 자리한 샘터


  경내 윗쪽에 자리한 5층석탑

경내 뒷쪽 언덕에는 고색이 느껴지는 5층석탑이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대원사는 특이하게 오
층석탑이 2기나 있는데, 법당 앞이 아닌 다들 구석에 자리해 있다. 아마도 비보풍수(裨補風水
)의 일환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이 탑은 2중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석축을 기반 삼아, 네모난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2
중의 기단(基壇)과 5층의 탑신(塔身), 얇은 머리장식을 차례대로 얹혔는데, 탑신 지붕돌이 다
소 헝클어지고, 머리 장식 상당수가 사라진 것 외에는 그런데로 상태는 괜찮다.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용각부도 다음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대원사 아랫 승탑군(僧塔群)

5층석탑에서 경내 뒷쪽을 거쳐 북서쪽 산길을 조금 오르면 녹색 철책에 둘러싸인 승탑군(부도
군)을 만나게 된다.
승탑<부도(浮屠)>이란 승려의 사리를 머금은 탑으로 대원사에는 9기(또는 10기)의 오래된 승
탑이 전하고 있는데, 용각부도 1기만 제외하고 모두 조선 중/후기 것이다. 이중 대웅전 남쪽
밑에 있던 승탑 3기(또는 4기)는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진 상태이고, 경내 윗쪽에 2개 그룹으
로 4기와 2기 등 총 6기만 전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대원사는 잃어버린 것이 참 많다. 절의
초창기 역사도 그렇고, 목각사자상, 거기에 승탑까지 말이다.

  대원사 용각부도(龍刻浮屠)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71호

대원사 승탑 중의 아주 유별나게 눈에 띄는 존재가 있다. 바로 검은 피부로 이루어진 용각부
도(용각승탑)이다.
높이 187cm의 이 승탑은 이름 그대로 용이 새겨진 것으로 옥개석 아랫부분에는 대모양의 무늬
위에 겹잎으로 된 18개의 연꽃무늬가 있으며, 그 위에 구름무늬를 새기고 가운데 부분에 여의
주(如意珠)를 두고 다투는 2마리 용을 진하게 새겨놓았다. 승탑의 피부가 완전 흑백이라 실감
이 덜해서 그렇지 만약에 칼라였다면 진짜 용도 시샘을 했을 것이다. 용의 비늘과 피부, 구름
무늬 등이 아주 실감나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탑은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용무늬까지 새겨진 것으로 보아 어느 고승의 승
탑으로 여겨진다. 그 고승의 덕과 업적이 대단했던지 제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저 탑을 조성해
스승의 넋을 기렸던 모양이다.

장대한 세월을 거치면서 반질반질했던 피부는 검은 피부로 대부분 타버렸고, 군데군데 주근깨
같은 것도 달려있지만 이들은 세월이 달아준 훈장으로 보면 될 것 같다. 머리 장식과 기단부
가 조금 깨진 것을 보면 대부분 잘 남아있는데, 머리 장식은 다른 데서 가져왔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대원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자 제일 가는 꿀단지로 이렇게 화려한 용 문양을 지닌
승탑은 처음 본다. 그러다보니 지닌 다른 승탑은 거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용각부도 주변에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승탑 3기가 있다. 매력 만점의 용각부도에 단단히 묻
힌 탓에 그리 주목은 못받고 있지만 조선시대에 흔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스타일의 탑으
로 용각부도와 긴 시간을 뛰어넘으며 나란히 자리한 모습이 마치, 부모와 자식들 같다. 그 옆
에는 마치 버섯이나 양봉통처럼 생긴 조그만 승탑이 있어 귀엽기 그지 없는데, 이들 탑의 주
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전해오는 것이 없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대원사 윗 승탑군

아랫 승탑군에서 윗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녹색 철책에 둘러싸인 윗 승탑군이 나온다. 이곳에
는 2기의 승탑이 있는데, 검은 때가 자욱한 왼쪽 탑은 기단부와 바닥돌을 갖추고 있고, 하얀
피부가 역력한 오른쪽 탑은 바닥돌 위에 바로 탑을 올렸다. 이들은 조선 중/후기에 조성된 것
으로 탑의 주인에 대해서는 전하는 것이 없다.
이들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해 있어 여기서 더 이상 올라갈 공간이 없다.
주변은 대원사 소유의 숲이며 공식 탐방로도 없기 때문이다. (비법정 탐방로만 있음)


  아랫 승탑군에서 바라본 대원사의 뒷모습

  모악산 산길과 이어진 대원사 남쪽 문

  대원사 돌담을 따라 이어진 모악산 산길

승탑을 끝으로 대원사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원래는 대원사만 보고 전주로 쿨하게 철수하
려고 했으나, 여기서 정상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물맛이 일품이라는 오래된 절, 수왕사가
있다고 하여 시간도 아직 이르고 해서 거기까지 발을 넓혀보기로 했다. 기왕 모악산의 품에
들어섰으니 그 품을 더 파고들어야 아쉬움이 없겠지. 다행히 수왕사까지는 1km 남짓이다. (산
에서 1km는 평지의 1km보다 훨씬 김)
허나 문제는 산에 눈이 많이 쌓여있고 얼음 길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걱정이 좀 되었다. 올라갈 때야 별로 문제는 안되지만 문제는 내
려올 때가 아니던가? (트래킹화를 신고 온 것이 전부임) 허나 이미 내 마음은 수왕사에 올라
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라 거기까지 무작정 올라가기로 했다. 내려갈 때 걱정은 나중이다.

* 대원사 소재지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997 (모악산길 243, ☎ 063-221-8502)


 

♠  모악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고적한 산사
수왕사(水王寺)

  모악산 정상과 수왕사로 인도하는 눈덮힌 산길

대원사에서 수왕사까지는 산길을 20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겨울이 내린 눈과 얼음이 두텁게
깔려있어 올라가고 내려가는 길이 그리 넉넉치가 않은데, 앞만 보고 열심히 오른 끝에 해발
약 560m에 자리한 수왕사입구 쉼터에 이르렀다.
여기서 서쪽으로 난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모악산 정상이고, 남쪽으로 나있는 벼랑길로 가면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고적한 절집, 수왕사가 반갑게 모습을 비춘다.


  수왕사입구 쉼터

  수왕사입구 쉼터에서 수왕사로 인도하는 벼랑길
안전한 통행을 위해 벼랑길에 철난간을 둘러 절을 찾은 이들을 배려했다.


  소박한 모습의 수왕사 경내

해발 570m 고지에 자리한 수왕사는 모악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절이다. 이곳은 약수가 유
명하여 '물왕이절','무량(無量)이절'이라 불렸는데, 680년에 완주 경천사를 지은 보덕이 수도
장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적이나 관련 역사 기록이 전혀 없어 신빙성은
없으며, 이곳 밑에 대원사가 있어 대원사나 금산사 승려의 참선 장소로 쓰였다가 조선 때 건
물을 심으면서 절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1125년에 원명국사(圓明國師)가 중창했다고 하나 이 역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며, 1597년 정
유재란(丁酉再亂)으로 불탄 것을 1604년 진묵대사가 중건하여 머물렀다. 6.25전쟁이 한참인
1951년 1월 10일, 모악산 일대를 어지럽히던 공비를 토벌하고자 작전상 소실된 것을 1953년에
천석진사(千錫振師)가 다시 세웠다.

이곳은 모악산 정상 북쪽 밑으로 가파른 곳에 간신히 터를 닦은 탓에 절이 매우 단출하다. 법
당과 요사, 진묵조사전이 좁은 경내를 이루고 있으며, 근래에 새로 지어진 탓에 고색의 내음
은 진작에 날라가버렸다. 오래된 유물도 없고, 건물도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여염집 스타일이
라 겉으로 보이는 절집 분위기도 다소 떨어진다. 게다가 첩첩한 산속에 묻혀있다보니 머무는
승려도 거의 없고 절을 찾는 신도나 산꾼도 별로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대원사에 많이 의존
을 한다.
또한 수왕사는 완주 지역 전통민속주로 꼽히는 송화백일주(松花百日酒), 송죽오곡주(松竹五穀
酒)를 생산하는 현장으로 주지승인 벽암(碧岩)이 수왕사 약수로 직접 술을 빚는다. 그는 대한
민국 전통식품 명인 1호로 지정된 전통민속주의 장인이자 수왕사의 자랑으로 술을 멀리하는
절에서 곡차(穀茶)로 빗대 표현되는 술을 직접 만든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수왕사 법당

  법당 내부 (석가3존불과 여러 탱화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수왕사 법당은 금동으로 치장된 석가3존불과 석가후불탱, 신중탱, 용왕탱
이 봉안되어 있다. 절은 작고 초라해도 법당 내부에 봉안된 존재만큼은 다른 절 못지 않은데,
바다와 전혀 관련도 없을 것 같은 이곳에 용왕탱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는 수왕사가 거
의 약수로 지탱하는 절이다보니 물을 관리하는 용왕(龍王)이 담긴 용왕탱을 봉안해 매일 좋은
물이 나오도록 기원하는 것이다.

  법당 신중탱(왼쪽)과 용왕탱(오른쪽)

  수왕사 약수터

수왕사의 든든한 후광인 약수터는 겨울 제국의 심술로 얼음에 완전 봉해진 상태이다. 그래서
이곳의 명물인 약수를 마시지 못했지. 선녀도 와서 마신다는 물인데 이렇게 막혀버렸으니 여
기까지 온 보람이 크게 떨어진다.


  진묵조사전(震默祖師殿)

보통 절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산신각이나 삼성각을 두기 마련이나 이곳은 절
을 중창한 진묵대사를 봉안한 진묵조사전을 그 자리에 두었다. 여기서만큼은 산신이나 칠성,
지장보살보다 진묵대사를 더 크게 여기기 때문이다.
바위 밑 가파른 곳에 간신히 자리를 닦고 진묵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1칸 크기의 집을 두었
는데, 그곳까지 인도하는 돌계단을 법당 옆까지 늘어뜨려놓았다.


  하늘색 두광(頭光)까지 갖춘 진묵대사의 진영

진묵(1562~1633)은 수왕사와 대원사의 중창주이자 석가여래의 소화신(小化身)으로 격하게 추
앙을 받는 고승으로 그의 흥미로운 이적과 일화가 많이 남아있다.
그가 동자승이던 시절, 주지승이 그에게 향불을 피우게 하니 주지승 꿈에 제천(諸天) 등이 나
타나 '부처가 향을 피우니 우리는 받을 수 없소!' 했다는 것, 8만대장경을 모두 암송하고 무
슨 책이든 바로 다 외워버려 따로 스승이 필요 없었다는 것. 해인사에 불이 나자 소나무잎에
물을 묻혀 뿌리니 큰 비가 내려 불이 진화되었다는 것, 동네 사람들이 물고기 매운탕을 먹고
가라며 놀리자 탕이 담긴 가마솥을 번쩍 들어 다 흡입한 다음, 엉덩이를 까서 변을 누니 물고
기가 살아서 나왔다는 설화 등, 술을 흔히 곡차(穀茶)라 부르는데, 이는 그가 술을 즐겨 마시
며 곡차라고 했다는 것, 어머니의 무덤을 '무자식 천년향화지지(無子息 千年香火之地)'란 명
당에 썼다는 것 등 재미나고 신비로운 일화가 전해져 온다.

* 수왕사 소재지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산13 (모악산길 246, ☎ 063-287-0485)


  수왕사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나무들이 있어서 시야는 별로)

수왕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5시가 넘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뒷쪽인 모악산 정상까
지 오르고 싶었으나 시간도 늦고 산길도 가파르며 거기에 눈과 얼음까지 덮여있으니 오를 엄
두가 나지 않는다. 아이젠이라도 있었으면 모르지만 그것도 없다. 이럴 때는 건방 떨지 말고
자존심을 곱게 접고 무조건 내려가는 것이 상책, 안그래도 수왕사까지 눈길을 뚫고 무리하게
올라온 터라 내려가는 것도 걱정인데 자꾸 일을 벌여봐야 좋을 것이 없다.

산길을 기어가듯 조심에 조심을 기하며 내려가 별탈없이 대원사에 도착했다. 여기서 관광단지
까지는 길이 완만하기 때문에 별 어려움은 없다. 처음에는 대원사만 보려고 들어왔는데, 수왕
사까지 보너스로 겯드리면서 모악산에서의 일정이 다소 연장되었다.

전북도립미술관 종점에 이르니 마침 전주시내버스 970번이 바퀴를 접고 쉬고 있어 그것을 타
고 미련없이 전주시내로 나갔다.
이렇게 하여 연말의 모악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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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12월 2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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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제작 여행답사기 모음집 (2019년 12월 30일 기준)

 

서울 - 118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글 링크
1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심우장, 성락원, 선잠단터 201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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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종로구 경복궁, 인사동 200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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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종로구 창경궁 (1) 200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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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종로구 창경궁 (2) 200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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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강남구 봉은사 1 (사월초파일) 200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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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강남구 봉은사 2 (사월초파일) 200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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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종로구
서대문구

세검정, 대원군별장, 홍지문
옥천암 마애좌상

200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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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종로구

북한산 금선사

200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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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금천구

호암산 호압사

200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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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금천구

호암산 (호압사, 석구상, 한우물, 호암산성) 200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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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종로구

선희궁터, 청와대분수대, 청와대앞길,
경복궁신무문, 인사동

200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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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강남구

대모산 불국사 (사월초파일)

200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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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은평구

북한산 삼천사 (사월초파일)

200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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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이종석 별장

200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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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노원구 수락산 학림사 2009, 8 ☞ 블로그글 보기

16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 2009, 12 ☞ 블로그글 보기

17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 2010, 4 ☞ 블로그글 보기

18

은평구 태화산 수국사 2010, 7 ☞ 블로그글 보기

19

종로구 부암동 뒷골마을, 북악산길, 창의문 2011, 3 ☞ 블로그글 보기

20

관악구

관악산 관음사, 효민공이경직묘역,
사당동백제요지, 구벨기에공사관

2011, 4 ☞ 블로그글 보기

21

성북구

돈암동 흥천사

2011, 5 ☞ 블로그글 보기

22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2011, 5 ☞ 블로그글 보기

23

종로구

가회박물관, 삼청동(북촌), 인사동

2011, 9 ☞ 블로그글 보기

24

성북구

성북동 삼청각, 홍련사, 북악산

2011, 10 ☞ 블로그글 보기
25 도봉구

방학동 은행나무, 원당샘, 안맹담/정의공주묘
목서흠묘역

20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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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 2012, 2 ☞ 블로그글 보기
27

종로구

장의사지당간지주, 세검정, 석파정별당, 홍지문

2012, 2 ☞ 블로그글 보기
28

강서구

구암공원(광주바위), 허가바위, 허준박물관

2012, 3 ☞ 블로그글 보기
29

노원구

불암산 학도암, 이윤탁한글영비

2012, 4 ☞ 블로그글 보기
30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2012, 5 ☞ 블로그글 보기
31

동작구

상도동 사자암

2012, 5 ☞ 블로그글 보기
32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창빈안씨묘역, 호국지장사)

2012, 6 ☞ 블로그글 보기
33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백사골)

2012, 8 ☞ 블로그글 보기
34

성북구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북악산길

2012, 9 ☞ 블로그글 보기
35

성북구

성북동 심우장, 최순우옛집, 선잠단터

2012, 10 ☞ 블로그글 보기
36

종로구

북촌문화센터, 관상감관천대, 계동길, 창덕궁길,
요금문, 고희동가옥, 백흥범가옥, 빨래터

2013, 1 ☞ 블로그글 보기
37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 2013, 4 ☞ 블로그글 보기
38 종로구

석파정별당(석파랑), 부침바위터, 무계정사터,
현진건집터, 청계동천, 반계윤웅렬별장

201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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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종로구

재동백송, 재동초교, 백인제가옥, 북촌3경 일대,
정독도서관(서울교육박물관), 안국동 윤보선가

201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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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강북구

북한산 본원정사

201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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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성북구

정릉동 경국사

201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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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종로구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201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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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도봉구

도봉산 (자운봉, 포대능선, 만월암, 도봉서원,
광륜사)

201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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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201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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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금천구

호암산 (석구상, 호암산성터, 한우물, 불영암,
칼바위)

201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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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종로구

윤동주시인의 언덕(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201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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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종로구
중구

서울연등회 (서울연등축제)
조계사, 우정국로, 청계천, 광통교

201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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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종로구

북한산 승가사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201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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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중구

환구단(원구단), 덕수궁 대한문, 성공회 서울성당,
양이재, 구세군 중앙회관

201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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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서대문구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 201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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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종로구

동대문성곽공원, 이화마을, 낙산(낙산공원) 201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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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성북구

성북동 선잠단터, 최순우옛집, 삼청각 201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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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종로구

인왕산 인왕사, 국사당, 선바위, 해골바위 201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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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종로구

서울연등회(연등축제), 조계사 201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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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성북구

정릉 봉국사 201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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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동작구

국립현충원(창빈안씨묘역, 부안군이석수묘역),
동작충효길(현충원길), 이수폭포

201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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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 (백사실)

201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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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성북구
종로구

북악산 주능선 (숙정문, 촛대바위, 청운대,
백악마루, 창의문)

201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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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종로구

배화여고생활관, 이상범가옥, 백호정, 자수궁터,
송석원터

201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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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종로구

창덕궁 후원뒷길, 흥덕사터, 북묘하마비,
우암 송시열집터

201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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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종로구

북촌(고희동가옥, 기기국번사창, 삼청동길) 201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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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중구
용산구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 남산공원길, 남산 정상
(팔각정), 남산야외식물원

201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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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도봉구

도봉산 천축사, 마당바위, 자운봉, 포대능선

201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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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서대문구

인왕산 개미마을, 환희사, 큰절골

201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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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강동구

암사동 선사유적지

201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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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서대문구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

201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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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종로구

인왕산 수성동계곡

201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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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강북구

북한산 구천폭포(구천계곡),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201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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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은평구

북한산 진관사, 진관사계곡

201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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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성북구

심우장, 수연산방, 최순우옛집

201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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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강남구

대모산, 불국사, 구룡산

201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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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종로구

부암동 무계원, 무계정사터(안평대군 이용집터),
청계동천, 반계 윤웅렬별장

201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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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종로구

한양도성, 행촌동 은행나무, 딜쿠샤, 홍난파가옥
, 월암근린공원

201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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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금천구

호암산 (삼성산성지, 호압사, 호암산 정상)

201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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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서대문구

안산, 무악동봉수대 (안산자락길, 무악정)

201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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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종로구

중앙고등학교(본관, 서관, 동관), 창덕궁 신선원전

201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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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성북구

보문동 보문사 201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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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광진구

홍련봉 보루,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1/5/6보루, 고구려정

201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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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동대문구
노원구

회기동 연화사
월계동 기원사

201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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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성북구

개운산 보타사 201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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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동작구

국립현충원 호국지장사 201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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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종로구

북악산 백석동천 (백사실)

201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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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종로구

삼청공원, 북악산 말바위

201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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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은평구

북한산 삼천사 (삼천사계곡)

201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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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관악구

강감찬생가터, 낙성대(안국사), 난곡로 느티나무,
신림동 굴참나무

201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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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종로구
성북구

한양도성, 낙산공원, 비우당, 자지동천,
삼군부총무당(삼선공원)

201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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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종로구

서촌 박노수가옥(박노수미술관), 옛 윤덕영 집

201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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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종로구
은평구

북한산둘레길 옛성길, 구름정원길, 탕춘대성 암문

201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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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강서구

양천향교, 궁산, 소악루, 양천고성터, 관산성황당

201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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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

201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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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종로구

장면 가옥, 흥덕사터, 북묘 하마비, 송시열집터

201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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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강서구

능말 은행나무/느티나무, 풍산심씨 문정공파 묘역,
개화산 약사사

201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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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종로구
서대문구

세검정, 석파정 별당(석파랑), 홍지문과 탕춘대성
옥천암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201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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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동대문구

선농단(선농대제), 선농단 향나무,
선농단역사문화관

201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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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성북구

안암동 개운사

201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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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종로구

낙산 청룡사

201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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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강북구

북한산 화계사

201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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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은평구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마실길, 구름정원길,
경천군 송금비, 백화사, 화의군묘역

201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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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노원구

수락산 벽운동계곡, 염불사, 영원암, 귀임봉

201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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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구로구

궁동저수지생태공원, 정선옹주묘역, 구로올레길,
지양산

201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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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종로구

윤동주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201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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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성북구

북악산 북악하늘길1산책로, 2산책로(김신조루트)

201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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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광진구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5보루

201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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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성북구

성북동 최순우옛집, 수연산방(상허 이태준 가옥)

201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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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종로구
서대문구

박종화가옥, 보현산신각, 홍지문, 산모퉁이까페
옥천암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201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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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종로구

북한산 금선사 (목정굴)

201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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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중랑구

숙선옹주묘역, 봉화산(아차산봉수대터),
봉화산둘레길, 충익공 신경진 묘역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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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노원구

불암산 학도암, 중계본동 느티나무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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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강북구

수유동 분청사기가마터, 신익희묘, 김병로묘,
유림묘, 북한산둘레길 순례길

20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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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도봉구

무수골, 무수골느티나무, 전주이씨영해군파묘역

201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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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서대문구

봉원사(서울연꽃문화축제)

201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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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노원구

수락산 노원골, 수락산보루, 동막골, 도선사

201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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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종로구

북촌문화센터, 김형태가옥, 이준구가옥,
북촌 가회동 일대

201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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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도봉구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 능원사, 도봉사, 윗무수골

201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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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종로구

월암근린공원(한양도성), 홍난파가옥, 딜쿠샤,
행촌동 은행나무, 황학정

201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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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관악구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관악산 사당능선,
선유천국기봉, 관음사국기봉, 관음사

201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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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종로구

청운문학도서관, 청운공원, 인왕산자락길
(이빨바위, 가온다리, 산들수목원약수터)
수성동계곡

201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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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금천구

호압사, 호암산, 석구상, 호암산성터,
한우물, 불영암, 칼바위

201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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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인천 - 4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글 링크

1

부천

야인시대촬영장, 루미나리에축제 20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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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양 북한산성(대서문, 중흥사터, 북한산행궁터) 200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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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양 북한산성(태고사, 산영루터, 북한산성계곡) 200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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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남 망경암, 봉국사 (사월초파일) 200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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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오산
수원

오산 물향기수목원 / 수원 팔달문

20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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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남양주

수락산 흥국사

2008, 3 ☞ 블로그글 보기
7 남양주

덕릉마을 산신각, 덕흥대원군 묘역

2008, 5 ☞ 블로그글 보기

8

파주 용미리 마애2불입상, 용암사 2008, 10 ☞ 블로그글 보기
9

안양

안양사, 석수동마애종, 석수동석실고분 2009, 3 ☞ 블로그글 보기
10

안성

서운산 석남사 (사월초파일)

2009, 5 ☞ 블로그글 보기
11

하남

춘궁동동사지(동사지3/5층석탑), 광주향교

2010, 2 ☞ 블로그글 보기
12

안양

삼성산 염불암, 중초사지당간지주, 안양예술공원

2010, 12 ☞ 블로그글 보기
13

양평

용문산 사나사, 사나사계곡

2011, 5 ☞ 블로그글 보기
14

강화

강화도 선원사 (연꽃축제)

2011, 8 ☞ 블로그글 보기
15

고양

북한산성 중성문, 노적사, 중흥사터, 봉성암,
산영루터

2011, 8 ☞ 블로그글 보기
16

포천

반월성, 청성공원, 포천향교

2011, 10 ☞ 블로그글 보기
17

하남

선법사(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

2011, 11 ☞ 블로그글 보기
18

고양

한미산(노고산) 흥국사

2011, 12 ☞ 블로그글 보기
19

고양

중남미문화원, 벽제관터

2012, 5 ☞ 블로그글 보기
20

강화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장정리5층석탑, 고려궁터,
김상용 순절비

2012, 8 ☞ 블로그글 보기
21

이천

관고리 석불입상, 설봉공원(설봉저수지),
설봉서원, 설봉산 영월암

2012, 10 ☞ 블로그글 보기
22

양평

용문산 용문사, 양평친환경농업박물관

2012, 11 ☞ 블로그글 보기
23

파주

고령산 보광사

2013, 2 ☞ 블로그글 보기
24

화성

제암리 3.1운동순국유적 2014, 3 ☞ 블로그글 보기
25

파주

용미리 마애2불입상, 용암사 2014, 12 ☞ 블로그글 보기
26

의정부

도봉산 회룡사, 석굴암, 회룡골 2015, 7 ☞ 블로그글 보기
27

고양,
서울
종로구

북한산 북한산성계곡, 태고사, 행궁터,
금위영이건기비, 금위영유영지, 경리청상창터,
대남문, 문수사

2015, 12 ☞ 블로그글 보기
28

의왕

청계산 청계사

2016, 2 ☞ 블로그글 보기
29

강화

외포리, 석모도 보문사

2016, 7 ☞ 블로그글 보기
30

포천

백운산 백운계곡, 흥룡사

2016, 7 ☞ 블로그글 보기
31

양주
서울

우이령길(교현리~우이동), 우이동유원지

2016, 11 ☞ 블로그글 보기

32

인천

소래철교, 소래포구(소래어시장), 장도포대지
(댕구산), 논현포대

2017, 2 ☞ 블로그글 보기

33

수원

서호(서호공원), 항미정 2017, 6 ☞ 블로그글 보기

34

광명

광명동굴, 가학산 2017, 7 ☞ 블로그글 보기

35

양주

오봉산 석굴암, 우이령길 2017, 11 ☞ 블로그글 보기

36

안양

안양예술공원, 안양사지, 김중업건축박물관,
석수동 마애종, 안양사

2018, 1 ☞ 블로그글 보기

37

강화

월곶돈대, 연미정, 강화평화전망대

2018, 6 ☞ 블로그글 보기

38

과천

관악산 문원계곡, 문원폭포, 문원하폭포,
일명사지, 마애승용군, 보광사

2018, 7 ☞ 블로그글 보기

39

군포

수리산(철쭉동산, 수리산 산림욕장, 수리산
둘레길), 수리사, 반월호수

2018, 9 ☞ 블로그글 보기

40

인천

양주성금속비, 용궁사, 영종도 백운산

2018, 12 ☞ 블로그글 보기

41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 (구석기 겨울여행축제)

2019, 1 ☞ 블로그글 보기

42

강화

교동도 (교동읍성, 교동향교, 화개사, 화개산)

2019, 6 ☞ 블로그글 보기

43

화성

봉림사, 구봉산 당성

2019, 10 ☞ 블로그글 보기

 

강원도 - 2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링크

1

양양

낙산사, 홍련암, 오색약수, 성국사, 설악산 주전골 200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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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릉 객사문, 오죽헌, 경포대, 굴산사터, 신복사터 200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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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창 대관령 양떼목장 200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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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릉
동해

경포대해수욕장, 등명낙가사, 묵호항 200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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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동해 감추사, 감추해변 200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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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태백 구문소 200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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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양구

양구 선사박물관 20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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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화천

토고미마을(산천어축제), 딴산 2011, 1 ☞ 블로그글 보기
9

화천,양구
춘천

화천 평화의댐, 세계평화의종공원,
춘천 윗샘밭

2011, 2 ☞ 블로그글 보기
10

평창

남산공원, 송학루, 노산성

2011, 12 ☞ 블로그글 보기
11

삼척

미인폭포(통리협곡), 여래사

2012, 6 ☞ 블로그글 보기
12

정선

정선5일장, 봉양리뽕나무, 아우라지

2012, 7 ☞ 블로그글 보기
13

영월

보덕사, 금몽암, 낙화암, 금강정, 금강공원

2013, 11 ☞ 블로그글 보기
14

태백

태백산 (당골, 석탄박물관, 석장승, 눈꽃축제장,
단군성전)

2014, 2 ☞ 블로그글 보기
15

동해

추암(추암해수욕장, 촛대바위), 해암정,
추암조각공원, 북평5일장

2014, 7 ☞ 블로그글 보기
16

화천

화천 산천어축제(화천읍내, 북한강) 2015, 1 ☞ 블로그글 보기
17

정선,태백

함백산, 만항재 2015, 9 ☞ 블로그글 보기
18

정선

아라리촌, 아우라지 2015, 12 ☞ 블로그글 보기
19

양구

팔랑폭포, 팔랑계곡 2016, 6 ☞ 블로그글 보기
20

삼척

미인폭포(통리협곡), 여래사

2016, 7 ☞ 블로그글 보기
21

홍천

삼봉약수, 삼봉자연휴양림, 운두령

2017, 6 ☞ 블로그글 보기
22

춘천

사명산 추곡약수, 천전리 고인돌

2018, 2 ☞ 블로그글 보기
23

원주

치악산 구룡사, 구룡사계곡, 학곡리 황장금표

2019, 3 ☞ 블로그글 보기

 

충청북도 - 1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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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은
대전

보은 삼년산성
대전 동춘당 / 송애당 / 법동 석장승

20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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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동 영동향토민속자료전시관, 가학루, 황간향교 20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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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충주

단호사, 사문리당산나무숲, 미륵리사터,
하늘재, 충주호

20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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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단양

사인암, 청련암, 중선암, 북상리 시골

20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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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괴산

각연사 (각연사계곡)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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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괴산

원풍리 마애2불병좌상, 홍범식고가, 개심사

20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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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옥천

정지용 생가(정지용문학관), 육영수생가,
죽향리초교 구교사, 죽향리사지3층석탑, 옥천성당

201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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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청주

낙가산 보살사, 명암약수터, 명암저수지

201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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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단양

북상리 시골, 사인암, 청련암

201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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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단양

구인사 (구봉팔문)

201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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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괴산

산막이옛길 (괴산호, 등잔봉)

201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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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충청남도, 세종 - 16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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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안 태화산 광덕사 200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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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진
태안

행담도, 꽃지해수욕장, 방포항, 안면도자연휴양림,
안면암

200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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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전

식장산 고산사

2009. 11 ☞ 블로그글 보기
4 공주

계룡산 동학사

2012. 3 ☞ 블로그글 보기
5 공주

계룡산 남매탑, 삼불봉, 천진보탑, 용문폭포

2012. 3 ☞ 블로그글 보기
6 공주

계룡산 갑사

2013. 2 ☞ 블로그글 보기
7 태안

신진도(안흥외항), 마도, 안흥항, 안흥성(태국사)

2013, 8 ☞ 블로그글 보기
8 홍성

용봉산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용봉산자연휴양림)

2014, 6 ☞ 블로그글 보기

9

당진
아산

장고항, 삽교호관광지, 외암리민속마을

2015, 11 ☞ 블로그글 보기

10

예산

금오산 향천사

2016, 1 ☞ 블로그글 보기

11

대전

계족산(계족산성, 계족산 황톳길), 장동산림욕장

2016, 10 ☞ 블로그글 보기

12

보령

성주사지, 성주천 가로수길

2017, 2 ☞ 블로그글 보기

13

서산

해미읍성, 해미순교성지

2017, 12 ☞ 블로그글 보기

14

대전

장태산자연휴양림, 형제산

2018, 7 ☞ 블로그글 보기

15

천안

태조산 각원사, 성불사 2019, 1 ☞ 블로그글 보기

16

세종

비암사, 도깨비도로 2019, 3 ☞ 블로그글 보기

 

전라북도 - 15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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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안 상록해수욕장, 내소사, 곰소항 200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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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수 의암사(논개사당) 200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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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주
장수

한풍루, 무주향교
의암송, 장수향교

200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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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주 전주한옥마을, 오목대(이목대), 한벽당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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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군산

동국사, 은적사, 발산초등학교

20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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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군산

응항, 선유도, 고군산군도 일주

201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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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순창

강천산(강천산계곡, 구장군폭포), 강천사, 삼인대

201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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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임실

오수 의견비, 오수망루, 오수리석불, 해월암

201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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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김제 망해사, 새만금바람길, 심포항 201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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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부안 변산 내소사 201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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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무주 적상산(적상호, 적상산성, 적상산사고), 안국사 201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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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무주

무주머루와인동굴, 덕유산무주리조트(곤도라),
덕유산 설천봉

201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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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김제 모악산 귀신사 201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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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완주 종남산 송광사 201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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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완주 모악산 대원사, 수왕사 201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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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전라남도 - 14개

연번

지역 가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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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성
담양
나주

장성 방울샘,
담양 관방제림 / 담양읍 5층석탑 / 석당간
나주 남고문 / 정수루

200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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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광 내산서원 200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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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주
광주

정수루, 금성관
광주 풍영정

200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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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순천 금전산 금둔사 2009, 11 ☞ 블로그글 보기

5

순천 개운산 동화사 2010, 1 ☞ 블로그글 보기

6

순천 조계산 천자암 2010, 2 ☞ 블로그글 보기

7

장성 백암산 백양사 2011, 9 ☞ 블로그글 보기

8

광주 무등산 원효사 2011, 10 ☞ 블로그글 보기

9

구례 지리산 천은사(천은제) 2012, 4 ☞ 블로그글 보기

10

곡성 동리산 태안사(태안사계곡) 2013, 5 ☞ 블로그글 보기

11

광양 백계산 옥룡사터 (동백나무숲, 운암사) 2015, 4 ☞ 블로그글 보기

12

목포

노적봉, 유달산(목포시사), 달성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갓바위

2017, 9 ☞ 블로그글 보기

13

나주

덕룡산 불회사, 불회사 석장승

2018, 12 ☞ 블로그글 보기

14

영광

불갑산 불갑사(꽃무릇군락지)

2019, 9 ☞ 블로그글 보기

 

대구, 경상북도 - 23개

연번

지역 가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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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주

반월성, 석빙고, 남산 서쪽(용장사터, 천룡사터)

200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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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경 문경새재(여궁폭포, 혜국사, 주흘산, 주흘관) 20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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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달성 비슬산(유가사 / 암괴류), 현풍석빙고 200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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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구미 의구총, 낙산리고분군, 낙산리3층석탑 2009, 2

☞ 블로그글 보기

5

예천
상주

개심사지5층석탑
용화사(증촌리석불좌상/입상), 전고령가야왕릉

200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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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주

남산 불곡 석불좌상, 신문왕릉 2009, 7 ☞ 블로그글 보기
7 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불무사)

2009, 9 ☞ 블로그글 보기
8

영덕
울진

고래불해수욕장, 후포항, 월송정, 월송해변 2011, 6 ☞ 블로그글 보기
9

달성

다람재, 도동서원, 이노정 2012, 12 ☞ 블로그글 보기
10

청도

남산 낙대폭포 2013, 7 ☞ 블로그글 보기
11

달성

비슬산 용연사 2014, 2 ☞ 블로그글 보기
12

예천

회룡포, 비룡산 2014, 7 ☞ 블로그글 보기
13

경산

팔공산 갓바위, 선본사 2014, 11 ☞ 블로그글 보기
14

경주

효소왕릉, 성덕왕릉, 성덕왕릉귀부 2014, 12 ☞ 블로그글 보기
15

경주

남산 보리사(미륵곡 석조여래좌상) 2015, 10 ☞ 블로그글 보기
16

안동

도산서원 2016, 1 ☞ 블로그글 보기
17

대구

팔공산 파계사, 대비암, 성전암 2016, 4 ☞ 블로그글 보기
18

경주

효현동3층석탑, 법흥왕릉, 율동 마애여래3존입상 2016, 11 ☞ 블로그글 보기
19

의성

문소루, 구봉산, 금성산고분군, 문익점면작기념비 2016, 12 ☞ 블로그글 보기
20

예천

개심사지5층석탑, 동본리석조여래입상과
3층석탑, 초간정(초간정 원림)

2018, 3 ☞ 블로그글 보기
21

상주

장각폭포, 오송폭포(성불사), 옥양폭포

2018, 6 ☞ 블로그글 보기
22

영주
봉화

휴천동 지석 및 입석
오전약수, 삼계서원, 석천계곡, 석천정사

2019, 6 ☞ 블로그글 보기
23

경주

감산사, 연지암, 숭복사(숭복사터)

2019, 8 ☞ 블로그글 보기

 

부산 - 17개

연번

지역 가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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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영구
강서구

광안리해수욕장, 가덕도(외양포, 대항, 세바지)

200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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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서구
서구

망상도/유주암, 송도해변, 송도해수욕장

2008, 9 ☞ 블로그글 보기
3

기장군

불광산 (장안사. 장안사계곡) 2009, 1 ☞ 블로그글 보기
4

기장군

불광산 (척판암, 백련암) 2009, 1 ☞ 블로그글 보기

5

서구
북구

내원정사, 만덕사(만덕사 당간지주), 알터유적 2009, 9 ☞ 블로그글 보기

6

금정구

금정산(금정산성, 국청사) 2011, 1 ☞ 블로그글 보기

7

금정구

금정산 미륵사, 금성동 2011, 1 ☞ 블로그글 보기

8

강서구

가덕도(가덕도등대, 외양포, 대항, 새바지) 2012, 7 ☞ 블로그글 보기

9

사상구
강서구

백양산 운수사, 백양산 숲길,
범방동3층석탑, 부산경남경마공원

2012, 12 ☞ 블로그글 보기

10

사하구

몰운대, 다대포

2013, 7 ☞ 블로그글 보기

11

남구

백운포, 오륙도 (오륙도등대, 등대섬) 2014, 1 ☞ 블로그글 보기

12

사하구
서구

승학산, 구덕문화공원 2014, 11 ☞ 블로그글 보기

13

금정구

금정산(고당봉, 금샘), 원효암, 금정산성 2015, 4 ☞ 블로그글 보기

14

해운대구

해운대 동백섬, 해운대해수욕장, 미포,
달맞이길, 문텐로드, 청사포, 구덕포, 송정해수욕장

2015, 7 ☞ 블로그글 보기

15

연제구

배산, 배산성터

2016, 9 ☞ 블로그글 보기

16

기장군

죽성리해송, 죽성리왜성, 황학대, 두호포구,
기장성당, 월전포구

2017, 4 ☞ 블로그글 보기

17

기장군

월전~대변 해안가, 대변항, 죽도, 연하리 해변,
오랑대, 해동용궁사

2017, 7 ☞ 블로그글 보기

 

울산, 경상남도 - 2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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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울산
부산

처용암
옥련선원 / 정묘사(배롱나무)

200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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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창원 무학산(관해정), 가포해변 20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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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해

김해 수로왕릉

20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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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진주
사천

진주 금선암
사천읍성(산성공원), 대방진굴항

2008, 1 ☞ 블로그글 보기
5

함안
창원

함안박물관, 말산리/도항리고분군
진해 우체국

2008, 1 ☞ 블로그글 보기
6

창원

불모산 성흥사, 대장동계곡

2008, 9 ☞ 블로그글 보기
7

밀양

밀양 표충비, 무안리 향나무(홍제사) 2009, 1 ☞ 블로그글 보기
8

양산

천성산 홍룡사(홍룡폭포), 원효암 2009, 6 ☞ 블로그글 보기

9

울산 일산해수욕장, 대왕암공원 2009, 7 ☞ 블로그글 보기

10

창녕

창녕석빙고, 송현동석불좌상, 송현동고분군,
진흥왕척경비, 만옥정공원, 남지철교

2010, 5 ☞ 블로그글 보기

11

거창

수승대(귀연서원, 요수정)

2011, 7 ☞ 블로그글 보기

12

울주
밀양

서생 나사리해변,
밀양 얼음골(천황사)

2011, 7 ☞ 블로그글 보기

13

함양

상림공원, 한남군묘역

2012, 7 ☞ 블로그글 보기

14

산청

목면시배유지, 배산서원, 덕천서원, 남명조식유적

2012, 9 ☞ 블로그글 보기

15

남해

호구산 용문사, 남해자생식물단지, 미국마을,
용소리/금평해변

2012, 11 ☞ 블로그글 보기

16

통영

통영 달아공원

2013, 3 ☞ 블로그글 보기

17

울주

가지산 석남사 (석남사계곡)

2013, 9 ☞ 블로그글 보기

18

고성

연화산 옥천사, 공룡발자국화석

2013, 11 ☞ 블로그글 보기

19

창원

불모산 성주사 (성주사계곡)

2014, 10 ☞ 블로그글 보기

20

울주

서생포왜성

2016, 6 ☞ 블로그글 보기

21

산청

덕양전, 전 구형왕릉, 왕산(유의태약수터,
왕산사지)

2018, 10 ☞ 블로그글 보기

 

제주도 - 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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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

외도 월대, 수산봉, 수산리곰솔, 납읍리
납읍 금산공원(납읍리 난대림)

2019, 3 ☞ 블로그글 보기


 

기타 지역 - 1개

연번

지역 가본 곳

글 공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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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열도

동경 지역(긴자, 록뽕키, 우에노, 도쿄도청타워,
아사쿠사<관음사>, 신주쿠, 코쿄, 디즈니랜드)

200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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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하에 공개된 글 중에서 하자가 없는 글만 선정해서 지역별로 모았습니다.
2. 2003년 4월 이전 글은 모두 제외했습니다.
3. 답사기 내용과 사진을 전체 혹은 일부라도 퍼갈 경우, 반드시 출처와 원작자(박융) 이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4. 사진이 일부 뜨지 않는 글들이 약간 있습니다. 이 점 널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5. 공개된 글 중, 추후 업데이트 판이 나올 경우, 이전 판은 모음집에서 삭제 될 수 있으며 2개 이상의 시리즈로
   작성된 글 중 추후 본인 필요에 따라 1개나 2개로 통폐합 정리될 수 있습니다.
6. 지역 별로 분류했으나 지역이 2개 이상 겹치는 글은 먼저 간 곳을 기준으로 했습니다.
7. 최종 업데이트 2019년 12월 30일

기름진 논두렁과 밭두렁을 간직한 서울의 두메산골, 도봉산 무수골 ~~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전주이씨영해군파묘역, 무수골계곡)



' 서울의 두멧골, 도봉산 무수골 '

▲  무수골 논두렁 (초가을)

▲  전주이씨 영해군파묘역

▲  무수골길 (성신여대 난향별원)

 


 

 

♠  서울의 숨겨진 별천지이자 논까지 간직한 상큼한 두멧골,
도봉산 무수골

▲  세일교 주변 (오른쪽 길은 무수골 북부, 도봉옛길 방면)

도봉산 동남쪽 자락에 포근히 묻힌 무수골은 도봉산에 널린 수많은 골짜기의 하나이다. 우리
집에서 매우 가까운 상큼한 곳으로 그저 숲과 계곡, 바위만 있는 계곡이 아닌 밭두렁과 산골
마을, 심지어 논두렁까지 담고 있는 산골마을로 좁게는 도봉산(道峯山)과 도봉구, 넓게는 서
울의 숨겨진 비경으로 꼽힌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백두산만한 서울 바닥에 그런 서울을 비웃는 뜻밖에 별천지가
있었다니? 무수골에 발을 들인 나그네는 그곳의 뜻밖의 모습과 아름다운 풍경에 무한 감동을
먹으며 넋을 잃고 만다. 흔히 서울 하면 수많은 사람과 차량, 키다리 건물이 즐비한 번잡한
회색빛 풍경만 생각하기 일쑤이니 그 감동의 정도는 더욱 클 것이다. 솔직히 서울이라 해서
꼭 시가지만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무수골이 이렇게 개발의 칼질이 거의 닿지 않은 때 묻
지 않은 시골로 남게 된 것은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에 포함되어 개발의 칼날을 부러뜨렸기 때
문이다.

무수(無愁)골이란 이름은 근심이 없는 골짜기란 뜻이다. 바깥 세상은 늘 근심의 연속인데, 이
곳은 근심이 없는 이름을 지니고 있으니 이 얼마나 극락정토(極樂淨土)다운 이름인가? 그 유
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조선 4대 군주인 세종(世宗)이 이곳에 왔다가 원터약수터에서 약수를 마시며 '물도 좋고 풍경
이 좋은 이곳이야말로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다!'
찬양을 하여 무수골이 되었다고 하며, 세
종이 그의 아들인 영해군 이당(李瑭)의 묘역을 들러보고 원터약수터에서 물을 마시며 근심 없
는 곳이라 했다고 한다.
허나 영해군은 1477년에 죽었고 세종은 1450년에 붕어(崩御, 제왕의 죽음)했으니 서로 시기가
맞지 않으며, 성종이 영해군 묘역이 완성되자 직접 찾아와 참배하면서 근심이 없는 곳이라 했
다는 이야기도 있다. 거기에 근심 걱정이 없는 노인네인 무수옹(無愁翁) 이야기도 한 토막 덧
붙혀 전해오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때는 조선의 어느 시절, 나랏일로 골치가 아프던 왕은 세상에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의문을 품으며 이른바 무수인(無愁人)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아무리 잘나가는 부자도,
사대부(士大夫)도, 왕족도, 어린이도 몇 가지씩 가지고 있는 것이 걱정이니 찾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다가 드디어 무수인 자격에 맞는 노인을 찾았다. 그 노인은 아들이 12명으로 모두 장가를
보냈으며, 아들과 며느리의 효성이 지극하여 노인은 만사가 즐거웠다. 하여 주변 사람들은 그
를 무수옹이라 불러 부러워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왕은 급히 그를 소환하여 이유를 물었다.
이에 노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소인은 아직 몸도 멀쩡하고, 마누라가 잘 보살펴주고 있으며, 자식과 며느리가 효도하고 벗
들도 많고, 자손들도 건강하고, 전하(殿下)께서 나라도 잘 다스려 주시고, 봄과 여름, 가을,
겨울도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샘이 단단히 난 왕은 그를 시험할 생각에 구슬을 건네주며 1달 후에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다.
노인은 왕에게 성대한 대접을 받고 집으로 오다가 한강에서 배를 탔는데, 뒤에 따라오던 사람
이 노인에게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하여 구슬을 꺼내보이니 그때 그 사람이 실수
인양 팔꿈치를 치면서 구슬이 한강에 빠지게 되었다. 그 사람은 구슬을 물에 빠트리게 하려고
왕이 보낸 사람이었다.

구슬을 잃어버린 노인은 구슬을 어떻하나 노심초사하다가 결국 식음을 전폐하고 몸저 눕게 되
었다. 가족들이 이유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으니 결국 건강까지 극도로 나빠졌
다. 걱정이 된 자식들은 잉어를 잡아 요리해주려고 했는데, 그 잉어 배에서 글쎄 구슬이 나온
것이다. 알고보니 강에서 잃어버린 그 구슬이었다. 노인은 너무 기뻐서 그동안의 근심을 흔쾌
히 털어버리고 잉어 요리를 폭풍 흡입하며 이내 건강을 되찾았다.
그리고 1달 후, 궁궐에 들어가 구슬을 바쳤다. 왕이 낸 숙제를 휼륭히 소화한 것이다. 깜짝
놀란 왕은 그 사연을 듣고 무한 감동을 먹었고, 이후 노인은 잘먹고 잘살았다고 한다. 이런
무수옹 이야기는 무수골 뿐 아니라 전국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옛 전설의 하나이다.


무수골은 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무수(無袖)골(무수동)이란 이름도 있다. 이는 무수골에 묻힌
영해군의 무덤 자리가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형국인 선인무수지형(仙人舞袖之形)에
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춤을 뜻하는 '舞'가 '無'로 바뀜)
또한 영해군이 묻히기 이전(15세기 후반 이전)에는 대장장이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들이 운영
하는 대장간이 계곡에 즐비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쇠골', '수철동(水鐵洞, 무쇠골을 한자로
표현)'이라 불리다가 영해군이 묻힌 후 무수골(무수동)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무수골에 있던 무수울에 서낭당이 있어 이 마을을 '서낭당(성황당)'이라 불렸는데, 그
게 무수골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체로 성황당은 무수골 하류(도봉초교 주변)를 일컬
으며 그 이름은 아직까지 살아남아 버스정류장 이름(도봉역, 성황당)으로도 절찬리에 쓰이고
있다.

참고로 무수골은 무수울, 무시울, 모시울, 성황당 등으로도 불렸는데, 무수울은 무수골 마을
의 대표 이름으로 조선 때 양주목 해등촌면(海等村面)을 이루던 12개 리의 하나였다. 무수골
은 윗말(무시울), 중간말, 아랫말로 나눠졌으며, 개성이씨가 먼저 터를 닦은 이후, 전주이씨
(영해군 후손들), 안동김씨, 함열남궁씨, 진주류씨도 이곳에 무덤을 쓴 인연으로 정착하여 오
랜 토박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무수골은 도봉산 산길 기점의 하나로 굳이 등산이 아니더라도 답사와 나들이, 피서, 농촌 체
험 등으로 안길 수 있는 꿀단지이기도 하다. 전주이씨 영해군파 묘역을 비롯해 무수골에 가장
먼저 묻힌 개성이씨 집안인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과 의령옹주(義寧翁主) 묘역, 오래된 느
티나무, 진주류씨묘역(도봉옛길 중간에 있음), 함열남궁씨 묘역 등의 문화유산이 즐비해 답사
지로도 손색이 없으며(옛 무덤 답사지로 아주 좋음) 서울시는 무수골 입구에서 윗무수골을 거
쳐 자현암까지의 길을 테마 산책길로 지정하여 '무수히 전하길(숲이 좋은 길)'이란 간판을 달
아주었다.
또한 무수골 하류(세일교 동쪽)에는 밭두렁이 넓게 펼쳐져 있는데, 시민들을 위한 주말농장도
여럿 있어 농촌 체험도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무수골 계곡은 물이 깨끗하고 암반도 즐비하며
상류로 갈수록 숲이 짙어져 피서의 성지(聖地)로도 아주 바람직한 곳이다.
이 계곡은 문사동계곡, 원도봉계곡(망월사계곡)과 더불어 도봉산 3대 계곡의 하나로 추앙받으
며, 우이암 부근 원통사(圓通寺)에서 시작되어 '원통사계곡(또는 보문사계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무수골은 '무수천'이란 간판을 달고 무수골의 만물을 촉촉히 어루만지며 흐르다가 도봉
역 서쪽에서 문사동계곡에서 시작된 도봉천에 흡수되어 중랑천(中浪川)으로 흘러간다.

* 무수골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도봉초교 주변 무수골 하류 (무수골 상류 방향)
도봉산 산줄기 너머로 북한산(삼각산) 백운대(836m)와 인수봉 등이 바라보인다.

▲  도봉초교 주변 무수천 (무수골 하류)
무수천 양쪽에 자전거 통행이 가능한 산책로를 내었는데, 무수골 주말농장
동쪽에서 시작되어 도봉역 북쪽을 거쳐 중랑천까지 이어진다.


무수골 나들이는 1호선 도봉역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도봉역 1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도봉
역4거리인데, 여기서 도봉산이 바라보이는 서쪽으로 길을 건너면 바로 무수골로 인도하는 무
수천 둑방길(도봉로169길)이 나온다. 이곳에서는 문사동계곡에서 시작된 도봉천과 무수골에서
나온 무수천이 만나는데, 이들은 도봉천으로 합쳐져 중랑천으로 흘러간다.

무수천 둑방길을 따라 7~8분 정도 가면 무수교가 나온다. 이곳까지는 온갖 주택과 빌라가 즐
비한 서울에 흔한 주택가 풍경이나 여기서부터 집들이 크게 줄어들면서 서서히 시골 풍경으로
갈아탄다. 그런 전원 풍경 뒤로 북한산(삼각산) 북쪽 봉우리와 도봉산의 지붕이 바라보여 뒷
배경도 아주 탄탄하다. 이윽고 무수골 마을버스 종점(도봉08번)을 지나면 완전한 전원(田園)
분위기로 그림이 바뀐다.

무수천(무수골)은 수심이 매우 얕은 하천으로 비가 많이 내릴 때만 잠깐 물이 불어날 뿐, 평
소에는 물이 적은 마른 하천<건천(乾川)>이다. 그러다보니 가뭄이 심하면 갈증을 너무 심하게
타서 툭하면 맨바닥을 드러내기도 한다. 2007년 이후 무수골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을 벌
이면서 무수골 아랫쪽(도봉초교 주변) 주거 환경이 어느 정도 개선되었는데, 이를 맞추어 도
봉구에서 무수천을 정비하여 깨끗한 우리 동네 가꾸기 사업을 벌였다. 이때 하천 양쪽에 중랑
천과 이어지는 산책로를 닦았다.


▲  하얀 반석들 사이로 가늘게 흘러가는 무수골 하류 (무수천)

▲  북한산둘레길 방학동(放鶴洞)길 북쪽 관문

무수골주말농장을 지나면 세일교가 나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오른쪽(북쪽)으로
가면 무수골 북쪽 마을과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로 이어지고, 정면의 세일교를 건너면 북한산
둘레길 방학동길 북쪽 관문과 무수골 안쪽, 원통사, 우이암 방면으로 이어진다.

무수골 북쪽에서 온 도봉옛길은 세일교에서 방학동길로 간판을 바꾸고 남쪽으로 흘러간다. 이
길은 방학동 정의공주(貞懿公主)묘역까지 이어지는 3.1km의 산길로 오르락내리락을 여러 차례
반복해야 되지만 그런데로 무난한 산길이다. 방학동길이란 이름은 방학동을 지나기 때문에 붙
여진 이름이다.


▲  무수골의 속살로 인도하는 성신여대 난향별원 돌담길 (무수골길)

방학동길 북쪽 관문을 지나면 바로 성신여대 난향별원 돌담길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길 왼쪽
에 돌담이 펼쳐졌다가 절반 정도 들어서면 자리를 바꾸어 오른쪽으로 돌담이 펼쳐지는데, 비
록 덕수궁(德壽宮, 경운궁) 돌담길만은 못해도 그런데로 운치를 자아내고 있으며, 나무도 무
성하여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한다.
어디론가 끝없이 이어진 것 같은 난향별원 돌담길, 그 돌담길을 지나면 무엇이 나올까? 무수
골 초행자라면 더욱 짙어진 숲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도봉산 산길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할 것
이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다. 무수골이 괜히 무수골이 아니거든..


 

 

♠  윗무수골 논두렁과 느티나무

▲  이제 기지개를 켜는 윗무수골 북쪽 논두렁 ▼

난향별원 돌담길을 지나면 흔히 생각하는 그늘진 숲 대신 햇살이 내리쬐는 뻥 뚫린 공간이 나
온다. 그 공간이란 다름 아닌 논두렁이다. 짙은 숲속에 묻힌 윗무수골 논두렁, 설마 이런 첩
첩한 산골에 논두렁이 있을 것이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논두렁의 크기는 속세와 비교하면 턱없는 수준이지만 산골치고는 그런데로 큰 편이다. 강원도
나 경북의 산골 논두렁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인데, 길을 중심으로 남쪽에 조그만 논이 펼
쳐져 있고, 북쪽에 큰 논두렁이 여럿 있다. 그리고 영해군파묘역 밑에도 2~3개의 논두렁이 있
다.
이들 논두렁은 무수골의 오랜 상징이자 꿀단지로 무수골 사람들은 조선시대부터 이 논을 통해
곡물을 생산했으며 그 생산량이 많아 배불리 먹고 살았다. 이렇게 산골에서 먹는 문제가 거뜬
히 해결되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식(食)은 걱정할 것이 전혀 없으니 근심이 없다는 무수골
이란 이름도 괜히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  윗무수골 남쪽 논두렁

윗무수골 논두렁은 여전히 논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보통 5월에 모를 심어 10월에 수
확을 한다.
친환경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들이 황금색으로 크게 숙
성되는 9월 이후의 논두렁 풍경은 무수골 풍경의 백미(白眉)로 꼽힌다
.


▲  남쪽과 북쪽 논두렁 - 그들 사이로 길이 지나간다.

▲  무수골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0-3호

논두렁을 지나면 바로 정면 약간 높은 곳에 큰 느티나무가 모습을 비춘다. 넓게 그늘을 드리
우며 무더위의 염통을 긴장시키는 그는 높이 22m, 가슴높이 둘레 3.7m로 1981년 보호수로 지
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215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30여 년이 더해져 약 250살로 여겨진다.
계곡 부근 비옥한 땅에서 자라고 있어 왕성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으며, 가지가 꽤 굵고 묵직
하다. 이곳에 살던 영해군파 후손들이 심어 정자나무나 당산나무 용으로 사용했으며, 전주이
씨 영해군파 후손들이 애지중지 관리하고 있다.


▲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으로 인도하는 길

느티나무 앞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산꾼들이 자주 오가는 서남쪽 길은 자현암(慈賢庵)
과 도봉산(원통사, 우이암) 으로 이어지고, 서북쪽 길은 느티나무가든으로 이어진다. 느티나
무가든은 입구에 문패를 내건 뻥뚫인 문이 있고, 좌우로 철책이 둘러져있어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개인 사유지로 오해하기 쉬우나 생긴 것이 그렇게 생겼을 뿐, 들어가도 무방하다. 대중
에게 개방된 식당이고 마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느티나무가든은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당으로 백숙과 파전, 도토리묵, 고기류 등을 취급
하고 있는데, 그 식당 앞에서 길은 또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호안공 이등/
의령옹주 묘역으로 인도하는 길이 나오고, 식당을 끼고 북쪽 숲으로 들어가면 영해군파묘역이
나온다.

호안공 이등/의령옹주 묘역은 입구에 녹색 철책과 문이 둘러져 있으나 대낮에는 거의 열려있
다. (밤에는 닫아둠) 그 숲길을 2분 정도 들어서면 호안공의 후손이 사는 붉은 지붕 기와집이
나오는데, 정말 외딴 산골에 묻힌 시골집이다. 서울에도 이런 곳이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거
리며 계속 걸음을 옮기니 집 앞을 지키고 선 큰 멍멍이가 무섭게 짖어대며 나를 경계한다.
물론 개는 줄로 묶여 있었지만 가까워질수록 멍멍 소리가 커지니 나도 모르게 염통이 쪼그라
든다. 내가 수상한 짓을 하러 온 것도 아니지만 단순한 개는 무작정 적으로 간주하고 맹렬히
멍멍 공격을 가하니 결국 그 공격에 꼬리를 내리고 뒷걸음을 쳤다.
개의 멍멍 소리에 집에서 사람이 나와서 무슨 일로 왔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이유를 말하면 되
지만 시간도 이미 18시가 다 된 상황이라 들여보내줄 것 같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인연
이 아닌 듯 싶어 이쯤해서 쿨하게 물러났다. (그 이후 아직까지 인연이 닿지 않고 있음)

참고로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 1379~1457년)은 개성이씨로 태조의 서장녀(序長女)인 의령
옹주(義寧翁主, ?~1466)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1435년 계천군(啓川君)으로, 1444년 봉헌대부
(奉憲大夫)에 봉해졌으며, 이들 무덤은 무수골에 처음 정착한 무덤으로 조선 초기 무덤 양식
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영해군파묘역 밑에 자리한 논두렁

호안공 묘역을 포기하고 느티나무가든 북쪽 숲에 묻힌 영해군파묘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
해군파묘역 밑에는 느티나무가든에서 관리하는 커다란 야외 단체석과 족구장, 논두렁 등이 있
는데, 이들 논두렁도 아직 모를 심지 않아 마치 큰 연못처럼 보인다. 그들 너머로 나무가 삼
삼히 우거져 있고, 그 숲속에 영해군파묘역이 자리해 있다.


▲  영해군파묘역 20m 전

▲  영춘군 이인묘와 신도비로 올라가는 산길

영해군파묘역으로 가다보면 중간에 왼쪽 언덕으로 올라가는 산길이 있다. (계단처럼 주름진
길이 보일 것임) 그 길로 가면 영춘군 이인묘와 신도비가 나오며, 직진하면 그 산길의 끝에
무리지어 있는 영해군파묘역이 있다.


 

 

♠  조선 초기 무덤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한 조선 왕족들의 묘역
전주이씨 영해군파묘역(寧海君派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6호

무수골 깊숙한 곳에 자리한 영해군파묘역은 세종의 9째 아들인 영해군과 그의 후손들이 묻힌
왕족 일가의 묘역이다.
무수골은 뒤에 도봉산, 앞에 무수천이 흐르는 이른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착한 명당(明堂)
자리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15세기 초반에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가 가장 먼저 이곳을 닦았
고, 영해군, 진주류씨, 함열남궁씨 순으로 무덤을 썼다. 이중 영해군파묘역이 가장 묘역이 넓
은데(1,630.4㎡)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선인무수지형(仙人舞袖之形)의 명당으로 꼽
힌다. (무수골의 이름도 거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음)

영해군파묘역은 크게 4구역으로 나뉜다. 묘가 몰려있는 중앙 구역은 묘역의 시조인 영해군 이
(李瑭) 내외를 비롯해 그의 장인어른인 신윤동(申允童), 영춘군의 아들인 강녕군 이기, 이
기의 노비인 김동(금동)의 묘가 있다. 이당 묘역 뒷쪽 산속에는 영춘군의 장남인
완천군(完川
君) 이희(李禧)와 완천군의 3째 아들인 평성수(平城守) 이질(李耋)의 묘가 있고, 동쪽 능선에
는 길안도정 이의의 묘, 묘역 직전 서쪽 능선에는 영해군의 장남인 영춘군 이인의 묘와 신도
비, 부원정 이이(영해군 손자의 아들) 내외의 묘가 있다.

묘역은 영해군을 시작으로 그의 아들과 손자, 증손자 4대가 묻혀있으며, 묘비가 없는 한참 후
손들의 무덤도 여럿 꼽사리로 끼어있다. 묘역은 영춘군 이인이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원종
공신(原從功臣)이 되면서 더 확대되었으며, 특히 중앙 구역 밑에 아주 조그맣게 충노(忠奴)로
포장된 금동의 묘가 있어 눈길을 끈다. 무덤들은 새로 손질된 부분이 거의 없는 16세기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 조선 초기 왕족들의 무덤 양식과 석물의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  충노 김동(金同)의 묘

묘역 중앙구역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충노 김동(금동)의 묘를 만나게 된다. 이 무덤은 영해군
파묘역의 다른 무덤과 달리 매우 아담한 모습인데, 이는 김동이 노비이기 때문이다. 밋밋하게
솟은 봉분(封墳)은 한 사람이 누우면 딱 적당할 정도로 작고, 풀도 별로 없다. 석물도 네모난
비좌(碑座)를 갖춘 묘비(높이 64cm, 너비 37cm, 두께 13cm)가 전부로 그 역시 꼬마 키보다도
작아 죽어서도 신분 차별을 주었다.
묘비는 비좌 위에 '故 忠奴 金同'이라 쓰인 빗돌을 세워 무덤의 주인을 알렸고, 빗돌 위는 반
원 모양으로 다듬었다. 그리고 그 위에 꽃봉오리 모습의 장식을 달았는데, 마치 위스키병처럼
보인다. (내가 술을 좋아해서 그런가?) 그러면 김동은 누구이고 왜 왕족 묘역 한쪽에 이렇게
무덤까지 있게 된 것일까?

김동은 강녕군(江寧君) 이기의 노비로 원래 이름은 금음동(今音同)이다. 연산군 시절에 흥청(
興淸)에 소속된 세은가이(世隱加伊)가 왕의 총애를 받자 그의 아비인 김숙화(金淑華)가 그 권
세를 믿고 이기의 집과 첩을 빼앗으려고 했다. 이기가 김숙화의 요구를 거절하자 뚜껑이 열린
김숙화는 이기가 노비 금동을 시켜 자신을 욕했다고 왕에게 하소연을 했다. (또는 이기가 노
비 금동과 함께 거친 말을 하며 항의했다고 함)
이에 뚜껑이 폭발한 연산군(燕山君)은 이기의 가족과 장인을 모두 연좌해 잡아들이고 집을 봉
쇄하고 노비까지 모두 압송케 했다. 이때가 연산군의 마지막 해인 1506년이다.

왕은 추관(推官)들에게 명해 낙형(烙刑)을 가하며 이기와 그의 아비인 영춘군 이인을 고문케
했다. 죄가 없는 이기 부자는 억울함을 토로했으나 허공의 메아리로 끝날 뿐, 아무 소용이 없
었다. 그러자 김동은 굳게 마음을 먹으며 '소인이 혼자 한 짓입니다. 나으리는 아무 것도 몰
라요!'
진술을 했다.
그 말을 신뢰하지 않던 왕은 거짓말 말라며 금동에게 6번씩이나 고문을 벌였다. 왕이 듣고 싶
던 말은 바로 이기가 했다고 자백하는 것이었다. 허나 금동은 끝까지 자기 소행이라 주장했고
그의 고집에 지친 왕은 결국 김동의 단독 범죄라 단정하여 그를 처단했다. 그리고 이기 부자
는 장형 100대, 이인은 장형 80대를 때려 유배형에 처했고 이기는 위리안치(圍籬安置)시켰다.
이 사건을 통해 이기와 연산군이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김숙화는 이를
악용해 이기의 집과 첩을 빼앗으려 했고, 연산군은 단순히 그의 무고만으로 이기를 잡아들였
으며, 김동이 자신이 벌인 일이라 자백하자 자신이 바라는 답변을 얻고자 더 고문을 가한 것
을 보면 이번에 아예 이기를 족치려고 작정했던 듯 싶다.

목숨을 건진 이기는 중종반정 이후 복권되었고, 김동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묘역 한쪽에 조촐
하게 그의 무덤과 비석을 만들어주었다. 그의 사연을 전해들은 중종(中宗)은 김동을 의노(義
奴)라 칭찬하며 1508년 4월 5일에 동네 어귀에 문려(門閭)를 세워주었고, 김동 가족의 요역(
徭役)을 면해주었다. 그리고 3년 뒤에 다시 명을 내려 집 앞에 정문을 세워 그의 희생을 길이
길이 기렸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그 공로로 김동과 그의 처자식은 면천이 되어 평민이 되었
고, 김씨 성을 하사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노비 김동의 묘가 무려 조선 왕족인 영해군파묘역 속에서 비록 작은 규모
이지만 주인 일가와 나란히 자리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거의 흔치 않은 노비의 묘로 묘비까지
갖춘 것은 아주아주 드문 케이스로 그 가치는 높다. 하긴 자신의 목숨을 던져 주인을 살렸으
니 이 정도 정성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  강녕군 이기(江寧君 李祺)와 그의 전/후처의 묘

김동 묘 옆에는 그의 주인인 강녕군 이기의 묘가 있다. 비록 무덤의 덩치는 김동 묘보다 크지
만 그와 거의 비슷한 높이에 자리해 있어 죽어서도 김동의 은혜를 잊지 않고 늘 함께 하겠다
는 주인의 지극한 마음이 담겨있는 듯 하다. (자리가 마땅치 않아서 그리 했을 수도 있음, 속
사정이야 당사자만이 알 것이니)
이기와 그의 전/후처 등 3명이 합장된 무덤으로 왕족의 무덤치고는 매우 작은 모습이다. 호석
(護石)을 두른 네모난 봉분과 비좌와 이수를 갖춘 비석, 상석(床石)이 전부로 그 부친대까지
는 봉분도 크고 문인석과 장명등까지 갖추었지만 이기부터 무덤이 간소하게 변화된다. 그만큼
먼 왕족이 되고 벼슬도 크게 못했기 때문이다.

이기는 영춘군 이인의 차남으로 영해군의 손자가 된다. 부인은 양주조씨인 조방우(趙邦佑)의
딸이며, 후처는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다. 그의 태어난 시기와 사망 시기는 전해오는 것이 없
으며, 연산군 말엽인 1506년에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세은가이의 아비 김숙화가 집을 뺏고자
시비를 걸자 이를 지키는 과정에서 그의 무고로 가족과 노비가 모두 압송되어 이기와 이당 부
자는 고문을 당하게 된다.
다행히 노비 김동이 자신을 불태워 이기의 가족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나 이기는 장형 100
대를 맞고 먼 곳으로 쫓겨나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중종반정 이후 복권되었다.

중종 때는 이정숙(李正淑) 등과 폐비 신씨(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청했다가 죄를 받은 김정
(金淨)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조광조(趙光祖) 등과 친분을 쌓았다. 허나 1519년 기묘
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 일당이 모두 아작이 나자 그의 일당이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죽은 이후 그 흔한 시호도 받지 못했다가 1794년 유림에서 그도 기묘사화 때 화를 받은
이른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하나라며 시호를 내리자는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문경(文景)이
란 시호를 내렸다.


▲  영해군 이당의 부인인 평산신씨(平山申氏)묘

강녕군 이기와 노비 금동의 무덤 윗쪽에는 영해군 이당의 부인인 평산신씨묘가 있다. 평산신
씨는 신윤동의 딸로 영춘군 이인과 길안도정 이의를 낳았으며, 남편의 무덤 옆이 아닌 친정
아비의 무덤 밑, 남편 무덤보다 2단계 밑에 따로 자리한 것이 이채롭다.

무덤은 동그란 봉분과 묘비, 상석 외에 장명등(長明燈)과 문인석(文人石) 2기까지 갖추고 있
으며, 이들 석물에는 500년 세월의 때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우측에는 묘비가 없는 후손 무
덤 2기가 봉긋 솟아있다.

▲  평산신씨묘와 묘비, 장명등

▲  고된 세월에 지쳐보이는 우측 문인석

▲  눈망울이 큰 좌측 문인석

▲  평산신씨묘에서 바라본 이기묘(왼쪽)와
금동묘(오른쪽)


▲  영해군의 장인인 신윤동(申允童)묘

영해군묘와 평산신씨묘 중간에는 영해군의 장인인 신윤동 묘가 자리해 있다. 영해군파묘역 중
간 구역에서 2번째로 높은 곳에 자리해 딸과 손자, 노비 금동의 무덤을 굽어보고 있는데, 사
위와 딸 무덤 사이에 둥지를 튼 점이 특이하다. 게다가 영해군 집안(전주이씨) 묘역에 부인도
아닌 다른 성씨의 인물이 잠들어 있는 점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아무리 장인어른이라고
해도 엄연한 다른 성씨이기 때문이다.
허나 조선 초까지는 집안 묘역에 사위나 장인 등 다른 성씨의 인물이 섞여 있는 경우가 흔했
다. 고려의 마지막 자존심이던 정몽주(鄭夢周) 묘역(용인시 능원리 소재)에도 정몽주의 손녀
사위인 저헌 이석형(樗軒 李石亨)과 그 후손이 묻혀 있고, 조선 10대 군주인 연산군은 부인인
거창신씨 집안의 땅에 묻혀있다.

신윤동은 좌의정에 추증된 신효창(申孝昌)의 손자이자 신자경(申自敬)의 아들이다. 그의 집안
은 왕실과 매우 가까워 세종의 왕자들에게 여럿 시집을 갔는데, 고촌사촌인 제안부부인(濟安
府夫人) 전주최씨(全州崔氏)는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부인이며, 숙
부 신자수(申自守)의 딸은 세종의 5남인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에게, 자신의 딸은 세
종의 9남인 영해군 이당에게 시집을 갔다. 그러니 집안도 배경도 다들 탄탄하다.
허나 영해군만큼이나 역사에 요란하게 이름을 남기지 못하여 인지도는 영해군파묘역에 와서야
확인이 될 정도로 매우 낮다.

신윤동의 행적에 대해서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서울시장)을 지내고 죽은 이후 의정부 좌
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는 것 등이며, 그의 할아버지인 신효창은 큰아들인 신자근이
아들을 얻지 못하고 일찍 죽자 막내 신자수를 신자근의 후사로 삼으려 했다. 허나 마음을 바
꾸어 신자경의 아들인 신윤동에게 신자근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는데, 신윤동이 사망하자 신효
창에 대한 제사를 누가 맡을 것인가를 두고 조정 관리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어났다는 내용이
전부이다. 또한 신윤동의 행적이 적혀있을 묘비(묘표)도 안타깝게도 마모가 되어 확인이 불가
능한 실정이다.

무덤의 구조는 동그란 봉분과 묘비, 상석, 문인석 2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석 앞면에 '증 의
정부 좌찬성 신윤동지?(贈議政府左贊成申允童之?)'라 쓰여 있다. 끝 자는 훼손되었으나 다른
묘비의 예를 볼 때 묘(墓)가 분명하며 우측에는 묘비가 없는 후손의 무덤 1기가 조용히 자리
한다.


▲  신윤동 묘의 뒷모습

▲  영해군 이당(寧海君 李瑭) 묘

신윤동 묘역 윗쪽에는 영해군파묘역의 시조인 영해군 이당의 묘가 있다. 묘역 중앙 구역에서
가장 높은 곳에 들어앉아 장인과 부인, 후손의 묘를 굽어보고 있는 이 무덤은 동그란 봉분과
고색의 내음이 진한 묘비(묘표), 상석, 날씬한 장명등, 문인석 2기로 이루어져 있다.

영해군(1435~1477)은 세종의 9째 아들로 신빈김씨(愼嬪金氏) 소생이다. 처음 이름은 이장(李
璋)이었으나 나중에 이당으로 갈았으며, 성격이 화목하여 다투는 일이 없었다고 전한다. 7살
에 영해군에 책봉되어 소덕대부(昭德大夫)의 품계를 받았으며, 1477년 42세의 나이로 죽자 성
종은 안도공(安悼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400년이 흐른 1872년에 영종정경(領宗正卿)
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신윤동의 딸인 임천군부인(林川君夫人) 신씨로 영춘군 이인과 길안도정 이의 등 2남1
녀를 두었으며, 보통 부인과 같은 봉분에 묻히거나 봉분을 달리해서 나란히 배치한 것이 보통
이나 영해군은 2단 밑에 부인의 묘를 두었다.
영해군묘는 정확히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무덤 뒷쪽 숲속에는 그의 손자인 완천군 이희(
영춘군 이인의 아들), 완천군의 3째 아들이자 영해군의 증손자인 평성수 이질 묘가 있으나 찾
지는 않았다. (그때는 몰랐음)
묘비 앞면에는 '영해군시 안도공당지묘(寧海君諡安悼公瑭之墓)'라 쓰여 무덤의 주인을 소상히
알려주고 있으며, 뒷면에는 그의 생애가 적혀있으나 마멸이 심해 확인하기가 어렵다.


▲  뒷쪽에서 바라본 영해군묘
(그 너머로 신윤동, 부인 평산신씨, 이기의 묘가 있음)

▲  영해군묘 우/좌측 문인석
장대한 세월에 제대로 지쳤는지 표정이 그리 밝지가 않다. 좌측 문인석은
세월이 씌워준 검은 때가 가득해 고색의 멋을 제대로 풍긴다. 세월이
달아준 얄미운 훈장이라고나 할까?

▲  길안도정 이의(吉安都正 李義)묘

영해군묘와 신윤동묘에서 동쪽으로 난 산길을 오르면 바로 길안도정 이의의 묘가 모습을 비춘
다. 동그랗게 솟은 봉분에는 이의와 그의 전/후처 등 3명이 잠들어 있는데, 그 앞에는 장대한
세월이 제대로 태워먹어 온통 검은 피부가 되버린 고색의 묘비(묘표)와 새로 세운 묘비, 상석
, 향로석(香爐石), 문인석 2기를 갖추고 있으며, 묘역 앞에 조촐하게 계단이 닦여져 있다.

이의는 영해군의 차남으로 구체적인 생몰시기는 전하는 것이 없다. 그는 여산송씨 집안의 송
자강(宋自剛)의 딸과 청주한씨인 한명회(韓明澮)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했으며, 은계군 이말숙
(銀溪君 李末叔, 한씨부인 소생), 시산군 이정숙(詩山君 李正叔, 송씨부인 소생), 청화수 이
창숙(淸化守 李昌叔), 송계군(松溪君), 벽계도정 이종숙(碧溪都正 李終叔), 옥계군(玉溪君)
등의 아들을 두었다. 그중 특히 벽계도정 이종숙은 황진이(黃眞伊)와 가까웠던 인물로 벽계수
(碧溪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의 묘비에는 '증 명선대부 길안도정행 창선대부 길안정(贈 明善大夫 吉安都正行 彰善大夫
吉安正)'이라 쓰여 있으며, 이의의 손자인 이휘(李徽)는 임진왜란 때 왜군을 격퇴한 공으로
그와 그의 아비, 할아버지 등 3대가 추증되었다. 그리고 이의의 아들인 이말숙의 묘비명에는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 이의와 사별했다고 나와있어 이의는 젊은 나이에 죽은 것으로 여겨진
다.

▲  이의묘의 옛 묘비와 새 묘비

▲  조각 솜씨가 일품인 옛 묘비의 이수(螭首)


▲  영춘군 이인(永春君 李仁)묘

영해군파묘역 중심 구역을 둘러보고 서쪽 산자락에 있는 영춘군 이인묘를 찾았다. 묘역 서쪽
구역에는 이인 내외와 부원정 이이 내외의 묘, 그리고 이인의 신도비가 있는데, 이 신도비는
이 묘역의 유일한 신도비로 이인의 높은 위치를 알게 해준다.

이인의 묘는 이인과 부인 유씨<유양(柳壤)의 딸>의 봉분을 비롯해 묘비 1기, 상석 2기, 혼유
석 2기, 장명등, 문인석 2기, 망주석(望柱石) 2기는 물론 무려 신도비까지 갖추고 있어, 영해
군파묘역 중의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묘역의 시조는 분명 그의 부친인 영해군이지만 그
부친보다 묘가 더 있어보여 이인묘가 이 묘역의 실질적인 주인공 같은 인상이다. (영춘군 이
인 묘역이라 불러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
특히 이들 묘역의 무덤들은 무덤 필수품인 망주석이 하나도 없는데 반해 이인 묘에는 망주석
이 있으며, 무덤도 동그란 형태가 아닌 앞은 네모, 뒷쪽은 세모로 총 5각형으로 이루어진 특
이한 모습이다. 동그란 봉분과 네모난 봉분(조선 초까지 많이 나타남)은 많이 봤어도 5각형은
처음이라 참 신선하며, 봉분 밑에는 호석을 둘러 단단히 다진 다음 두툼하게 봉분을 쌓았다.

영춘군 이인(1465~1507)은 영해군의 아들로 자는 자정(子靜)이다. 어렸을 때 외할머니 이씨(
신윤동의 부인)의 손에서 자라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었다고 하며, 10살 때 정의대부(正義大夫
)의 영춘군에 봉해졌고, 사옹원제조(司饔院提調)를 거쳐 숭헌대부(崇憲大夫)에 올랐다.
1506년 연산군이 총애하던 흥청 소속의 세인가비의 아비 김숙화의 무고로 이인과 이기 부자(
父子)가 압송되어 모진 고문 끝에 이인은 남해로 유배를 갔다. 다행히 중종반정(中宗反正)으
로 풀려나 복권되어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올랐으며, 1507년 4월 27일, 42살에 사망
했다. 하여 그해 8월 임신일에 지금의 자리에 장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목성(穆成)이다.

이인은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대단했는데, 11살에 어머니 신씨가 세상을 뜨자 3년상을 치
렀고, 그 상이 끝나기도 전에 부친 영해군이 사망하자 다시 3년상을 치렀다. 상례를 잘하여
종친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으며, 평상시 생활이 담박하고, 이름난 꽃을 뜨락에 심는 것을 좋
아했다고 한다.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으며, 중종반정으로 원종공신에 오른 덕에 집안 묘역을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  이인 묘비(묘표)
봉분 사이에 묘비 하나를 두었다.

▲  키 작은 장명등

▲  동자승처럼 생긴 우측 문인석

▲  홀을 쥐어든 좌측 문인석 (우측
문인석도 홀을 쥐어들고 있음)


▲  확트인 이인묘 앞부분
영해군이 묻힌 중심 묘역과 길안도정 이의묘는 숲속에 묻혀있어 시야가 좋지 못하다.
(주변에 보이는 건 나무, 위로는 하늘 뿐) 허나 이인묘는 나무의 눈치들이
적어 멀리 수락산과 불암산 산줄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  이인 내외 묘의 뒷모습
앞은 네모, 뒤는 세모를 취한 독특한 모습으로 5각형을 이루고 있다.

▲  이인묘에서 바라본 수락산(水落山, 638m)의 위엄

▲  이인 신도비(神道碑)

이인묘에는 특별한 존재가 하나 있다. 바로 신도비이다. 신도비란 무덤 주인의 생애를 기록한
비석으로 고위 관료와 왕족들의 무덤에만 쓸 수 있던 비싼 존재이다. 이인 역시 부모를 잘만
나 모태부터 왕족이기 때문에 신도비를 지녔다. 하지만 그의 아비인 영해군과 아들의 무덤에
는 신도비가 없으니 이는 중종반정으로 원종공신에 봉해진 탓이 아닐까 싶다.

신도비는 보통 신도(神道)로 통한다는 무덤 동남쪽에 세우지만 이곳은 서남쪽에 비석을 두었
다. 땅바닥에 네모지게 바닥돌을 깔고, 거북 머리인 귀부(龜趺) 대신 연꽃 무늬와 안상이 새
겨진 두툼한 비좌를 얹힌 다음 백일석(白一石)으로 만든 빗돌을 세우고, 그 위에 이무기가 여
의주를 두고 다투는 모습을 다룬 머리장식인 이수(螭首)로 마무리를 지었다.
비석의 높이는 273cm로 장대한 세월이 강제로 달아준 검은 주근깨가 많이 끼어있지만 그 덕에
중후한 멋과 고색의 미가 크게 돋보인다. 특히 이수에 새겨진 이무기는 비대칭적으로 새겨져
있는데, 그 조각수법이 꽤 섬세하여 은근히 탐이 난다.

이 비석은 1509년 9월에 세워진 것으로 당당하고 기품이 넘치는 모습으로 16세기 초를 대표하
는 비석으로 꼽힌다. 도봉산 자락에는 신도비를 갖춘 조선시대 무덤이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
도 이 비석은 단연 갑(甲)이며, 17세기에 세워진 임당 정유길(林塘 鄭惟吉) 신도비(서울 사당
동에 있음)의 모델이 되기도 한다.
빗돌에는 이인의 생애가 빼곡히 담겨져 있는데, 아들 이기의 부탁으로 첨지중추부사 남곤(南
袞, 1471∼1527)이 글을 지었고 글씨는 승정원 주서(注書)인 김희수(金希壽, 1475∼1527)가
썼으며, '목성공신도비명(穆成公神道碑銘)'이란 머리전서는 바로 김희수가 쓴 것으로 여겨진
다. 특히 도봉과 노원, 무수골의 옛 지명인 수철동 등 도봉/노원 지역의 옛 이름과 현재 이름
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 지역 지명을 최초로 언급한 기록으로 여겨져 지역 연구에도 큰 열쇠
를 제공해준다. 겉모습만 착할 뿐 아니라 빗돌에 새겨진 내용들도 착한 것이다.

지금은 영해군과 그의 후손들 묘역이 '전주이씨 영해군파묘역'이란 이름으로 지방문화재로 지
정되어 있지만 원래는 이 신도비만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묘역 전체
로 확장된 것이다.


▲  현란한 조각 솜씨를 드러낸 신도비 이수
소용돌이치듯 흘러가는 구름들 사이로 2마리의 이무기가 재주를 부리며
여의주를 다툰다. 비록 검은 때가 자욱하긴 해도 아직은 정정한
모습을 자랑해 500년 나이를 무색하게 한다.

▲  이인 묘 밑에 자리한 부원정 이이(富原正 李㶊)와 부인 전주유씨 묘역
이이는 영해군 이당의 증손으로 조용히 살다간 사람이다. 이이 부부의 봉분을
비롯해 세월에 검게 그을린 묘비(묘표)와 상석, 향로석 등이 있다.


무수골을 주름잡던 영해군파묘역을 싹 둘러보니 어느덧 19시가 되었다. 햇님도 퇴근본능에 따
라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 너머로 뉘엿뉘엿 저물고 달님과 땅꺼미가 조금씩 드리우기 시작
한다. 오랜만에 찾은 무수골, 개발도 그 칼날을 접은 곳이라 아직 산골과 시골 분위기는 여전
했다.
집에서 도보로 25~30분 정도면 충분히 안길 수 있는 무척이나 가까운 곳이지만 1년에 고작 1~
2번 가는 것이 고작이다. 집 인근에 이런 아름다운 곳이 있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하여 도봉
산의 숨겨진 비경, 무수골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산81-1 (도봉로169라길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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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7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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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산과 숲, 호수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옛길, 괴산 산막이옛길 (괴산호, 등잔봉, 한반도지형, 앉은뱅이약수)

 


' 괴산 산막이옛길 봄나들이 '

▲  등잔봉에서 바라본 신비로운 운해

▲  괴산호

▲  산막이옛길


 

봄이 한참 무르익어가던 4월의 한복판에 괴산(槐山) 지역 제일의 명소로 추앙을 받고 있
는 산막이옛길을 찾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산막이로 가는 그날은 공교롭게도 빗방울이 떨어졌다. 전
날까지는 마음이 싹 정화될 정도로 화창한 날씨였는데, 불과 하루만에 날씨가 안면을 바
꾼 것이다. 하여 비의 대한 불안감을 약간 품은 채,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집결지인 신도
림역(1,2호선)으로 이동했다. 물론 우산은 챙겼다.
신도림역에서 일행들을 만나 관광버스 2대에 나눠 타고 동남쪽으로 길을 향했다. 구름이
당장이라도 비를 투하할 기세로 나를 쫓아왔는데, 안성(安城)을 지날 무렵, 비가 쏟아지
기 시작했다. 버스는 빗속을 가르며 열심히 육중한 바퀴를 굴렸고 서울 출발 2시간 만에
산막이옛길 주차장에 이르렀다.

비가 조금 내리고 있어 우산을 펼치고 산막이옛길 우중(雨中) 산책에 들어갔다. 비는 조
금 내리다가 잠시 그치면서 '이제 날씨가 개인 모양이다' 희망을 주더니만 얼마 가지 않
아서 다시 비가 내린다. 그러기를 수 차례~! 하늘은 그야말로 우리를 희망고문을 시켰다.
나들이와 답사, 등산에서 비가 오는 것만큼 싫은 것도 없다.


 

♠  산막이옛길 입문

▲  산막이옛길의 마스코트
옛날 복장을 한 할머니와 손자 도령, 선비 복장을 한 할아버지와 손녀가 나란히
자리한다. 지팡이를 들고 삿갓을 쓴 할아버지 옆에는 경찰청 마스코트인
포돌이, 포순이 형상이 있다. (사진에는 짤림)


괴산의 새로운 꿀단지로 명성을 누리고 있는 산막이옛길은 괴산호(槐山湖)와 어우러진 아름다
운 경승지이다.
이곳은 원래 연하9곡(煙霞九曲)이라 불리던 명소로 계곡(달천 상류)을 따라 10리 정도의 산길
이 산막이마을까지 이어졌다. 허나 1957년 우리 기술로 지은 최초의 댐, 괴산댐이 마을 북쪽
사은리에 지어지면서 계곡 일대가 강제 수몰되었다. 그래서 산중턱에 새로 길을 내었으니 그
것이 바로 산막이옛길이다. 옛길이란 명칭은 수몰된 산길 윗쪽에 다시 길을 닦았다는 의미에
서 붙여진 것이다.

산막이옛길(이하 옛길)은 3.9km로 괴산호 서쪽에 자리해 있다. 원래는 흙길이었으나 2011년에
천하에 개방되면서 나무데크길을 내었다. 숲과 호수, 산이 어우러진 빼어난 절경에 퐁당퐁당
빠진 사람들이 늘면서 그 존재감이 미치도록 커졌고, 이제는 괴산 제일의 명소로 우뚝 섰다.
호수를 따라 이어진 옛길에는 소나무동산, 노루샘, 호랑이굴, 앉은뱅이약수, 얼음바위골, 괴
산바위, 진달래동산 등의 조촐한 볼거리가 있으며, 유람선이 옛길의 시작점인 차돌바위 나루
터에서 환벽정나루를 거쳐 산막이나루까지 운항한다.

옛길의 종착지인 산막이마을에는 노수신(盧守愼)이 유배 생활을 하였던 적소(謫所)가 있으며,
그곳에는 그의 후손인 노성도(盧性度, 1819~1893)가 세운 수월정(水月亭)이 있다. 그리고 괴
산호가 자연스럽게 빚은 한반도지형에는 환벽정이란 정자가 둥지를 틀었다.

옛길 서쪽에는 국사봉(477m)과 등잔봉, 천장봉, 삼성봉(550m)이 산막이의 지붕을 이루고 있는
데, 옛길에서 등잔봉과 한반도전망대, 진달래능선, 진달래동산을 거쳐 옛길로 내려가도 되고,
(출발점→등잔봉→한반도전망대→산막이마을, 2.9km) 한반도전망대에서 더 욕심을 부려서 천
장봉, 삼성봉을 찍고 '신령참나무'와 '시련과 고난의 소나무'를 거쳐 산막이마을로 내려가도
된다. (출발점→등잔봉→천장봉→산막이마을, 4.4km) 그리고 산을 타기가 귀찮다면 호수를 따
라 이어진 옛길을 이용하면 되며, 그것도 귀찮다면 돈 몇푼 주고 배를 타면 된다.

싱그러운 나무와 풀의 향기, 산에서 낭랑하게 불어오는 산바람과 괴산호에서 불어오는 강바람
에 몸과 마음이 상쾌해지는 즐거운 곳으로 시간이 넉넉하다면 옛길만 살피지 말고, 등잔봉과
천장봉 등의 산도 같이 겯드리면 정말 배터지는 나들이가 될 것이다. 그렇게 둘러봐도 길어봐
야 4시간 이내(천장봉을 경유할 경우 5시간 이내)면 충분하다.

*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 일대


▲  세모로 솟은 산막이옛길 표석

▲  산막이옛길로 들어서다

궂은 날씨임에도 산막이를 찾은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다행히 비가 크게 내리지 않아서 우산
이나 우의, 모자만 걸쳐도 별탈 없이 움직일 수가 있다.
주차장을 출발해 밤, 옥수수 등의 자연산 간식과 지역 특산물을 파는 가게촌을 지나면 본격적
인 산막이옛길 나들이가 시작된다. 소나무가 무성한 소나무동산이 곧 모습을 드러내고 유람선
을 타는 차돌바위 나루터가 걷기의 귀차니즘과 문명의 혜택을 바라는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
것을 타면 산막이까지 10분 정도면 간다. (옛길로 걸어갈 경우 1시간 소요) 하지만 우리는 등
잔봉과 천장봉, 삼성봉을 찍고 산막이마을로 내려가 옛길로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그야말
로 산막이옛길 본전 코스로 돌기로 했다.


▲  괴산호 유람선을 타는 차돌바위 나루터
적정인원이 차면 바로 배가 출발한다. (따로 시간표는 없음)

▲  고인돌쉼터
고인돌처럼 생긴 바위가 여럿 널려 있다. 이곳은 옛 사오랑 서당에서
한여름에 야외 학당으로 이용했던 곳이다.

▲  가파르게 이어지는 소나무동산 옛길

▲  솔내음이 코와 마음을 찌르는 소나무동산
40년 묵은 소나무가 넓게 군락(약 1만 평)을 이루고 있다.

▲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산막이옛길의 자연산 거울, 괴산호
나무와 꽃, 산, 구름이 호수에 비친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으며 몸단장에 여념이 없다.
산에 둘러싸인 호수의 자태는 첩첩한 산중에 안긴 비밀의 호수처럼 신비롭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  소나무 출렁다리를 타고자 기다리는 사람들

▲  소나무 출렁다리 (1)

소나무동산 남쪽에는 산막이의 명물인 소나무 출렁다리가 있다. 이름 그대로 출렁이고 흔들거
리는 다리로 다리 밑판의 간격이 성인 발 크기 정도로 벌어져 있어 좌우 난간을 잘 붙잡고 밑
판도 잘 챙기며 움직여야 별탈이 없다. 자칫 방심하여 그 틈으로 발이 빠지면 영 좋지 않은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게다가 오르막길, 내리막길이 반복되고, 지그재그 형태로 여타 관광지의 그저 그런 흔들다리
와 완전히 차원이 틀린 거의 훈련/유격용 흔들다리 버전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
니 다리가 짧은 사람이나 어린이, 알콜이 좀 들어간 사람은 출렁다리를 피하기 바란다. 보기
와 달리 다소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어 체감 거리를 더욱 늘려준다.


▲  소나무 출렁다리 (2)

▲  소나무 출렁다리 (3)

▲  변덕스런 하늘과 대조적으로 고요함에 잠긴 괴산호


 

♠  산막이옛길의 지붕을 거닐다 (등잔봉, 한반도전망대)

▲  등잔봉으로 올라가는 길

소나무출렁다리를 지나면 오른쪽에 등잔봉으로 오르는 가파른 산길이 나온다. 호수 옛길만 거
닐면 싱거울 수가 있으니 산막이의 지붕인 등잔봉~천장봉 능선을 거니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
다.

등잔봉으로 오르는 길은 세상살이만큼이나 다소 각박하다. 처음에는 경사가 완만하지만 하늘
과 가까워질수록 점차 각박하게 이어져 숨을 제대로 가쁘게 만든다. 그 각박한 산길은 등잔봉
북쪽까지 이어지는데, 그냥 오르는 것도 힘든 마당에 봄비의 희롱으로 산길이 흥분하여 진흙
탕이 되버렸으니 은근히 질퍽이고 미끄럽다. 게다가 산길 밑 경사는 60도 이상으로 아찔하여
더욱 조심을 기해 움직일 수 밖에 없다.


▲  등잔봉으로 오르면서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
괴산호와 산막이옛길 주변

▲  등잔봉으로 오르는 길

▲  조그만 등잔봉 정상 표석 (해발 450m)

등잔봉은 국사봉과 더불어 산막이의 북쪽 지붕이다. 이곳에 오르면 남쪽으로 천장봉과 삼성봉
이, 동쪽으로는 산막이옛길과 괴산호가 바라보이는데, 비를 가득 품은 비구름이 그 풍경을 모
조리 앗아가버려 보이는 것은 그저 하얀 구름 뿐이다.
궂은 날씨로 인해 내가 기대했던 환하게 펼쳐진 풍경은 아니지만 꿩 대신 닭이라고 구름이 진
하게 그것도 발 밑으로 가득 깔려 있어 고작 해발 450m를 올라왔을 뿐인데, 마치 1,500m이상
봉우리에 올라선 기분이다. 그야말로 3배 이상의 효과라고나 할까? 게다가 천상(天上) 세계의
신선이나 그의 식구가 된 기분까지 교차하니 화창한 날 풍경에 못지 않은 기분이 나를 즐겁게
한다.


▲  등잔봉에서 바라본 장대한 운해(雲海) ①
하늘 세계도 세력 확장을 하는 모양이다. 구름이 해발 400m까지 쑥 내려왔다.
이러다 밑 세상까지 하늘의 침범을 받는 것은 아닐까? 구름이 거대한
하얀 도화지를 이루며 밑 세상을 모두 가져가버렸다.

▲  등잔봉에서 바라본 장대한 운해 ②
저 하얀 구름을 거닐고 싶다. 물론 신선이나 손오공이 아닌 이상은
위험하겠지..

▲  등잔봉에서 바라본 장대한 운해 ③
운해 너머로 구름에 감싸인 산이 있다. 그 자태가 마치 신선이나 천상 세계의
지체 높은 존재만 접근이 허락되는 신비로운 산처럼 보인다.

▲  등잔봉에서 바라본 장대한 운해 ④
대자연이 그린 장대한 수묵담채화, 아무리 천재 화가라고 해도 저 그림을
100% 그대로 담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  등잔봉에서 바라본 천장봉(437m)
엷은 구름을 걸친 모습이 자못 신비로워보인다. 혹 선녀 누님이
구름을 타고 내려온 것은 아닐까?

▲  한반도전망대에서 희미하게 바라보이는 한반도지형

등잔봉과 천장봉 사이에는 한반도전망대라 불리는 조망대가 있다. 이곳은 바로 밑에 아득히
바라보이는 괴산호의 걸출한 작품, 한반도지형을 굽어보는 현장으로 괴산호가 빚은 작품이다.
허나 아무리 걸출하면 무엇하나? 자연이 단단히 시샘을 했는지 비구름과 안개로 싹 가려버렸
으니 말이다. 다행히 구름이 조금 틈을 보여 그 사이로 한반도지형이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한반도지형이란 말그대로 우리나라가 담겨진 한반도를 닮은 지형으로 영월(寧越)의 한반도지
형이 대표적이다. 그것도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그것을 시작으로 천하에 많은 한반도지형이
발굴되어 하나 같이 관광지로 키워지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아주 조그만 축소판
이라 그렇다.
허나 우리는 그 조그만 한반도에서 안주하면 안된다. 그 옛날 선조들이 다스렸던 수많은 실지
(失地, 만주와 요동, 요서, 연해주, 대마도, 왜열도 등)을 되찾아 과거의 광영을 되찾아야 될
것이다. 언제가 될지 모를 그때가 오면 한반도지형은 과감히 버리고 그에 걸맞는 지형을 키웠
으면 좋겠다.


 

♠  산막이옛길 마무리

▲  나무 사이로 보이는 괴산호 (고공전망대 주변)

한반도전망대에서 남쪽으로 1굽이 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그대로 직진하면 천장봉, 왼
쪽으로 가면 진달래능선인데, 비가 계속 내리고 있고, 산길 상태도 좋지 못해 천장봉과 삼성
봉을 빼고 바로 진달래능선으로 내려가 원점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쉽기는 하나 날씨가 계
속 심술을 부리고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럴 때는 욕심을 쿨하게 부리고 코스를 좀 줄이
는 것이 좋지.

진달래능선은 천장봉 북쪽에서 옛길로 내려가는 길로 경사가 조금 패기가 있다. 진달래가 무
리를 이루고 있어 진달래능선이라 불리는데, 진흙이 되버린 산길을 정신없이 내려오니 괴산호
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진달래동산이 마중을 한다. 여기서 잠시 떨어졌던 옛길과 만났다.

진달래능선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북쪽은 괴산호를 따라 출발점으로, 남쪽은 가까이에
보이는 산막이마을로 이어진다. 이곳에 왔으니 산막이마을도 봐야 당연한 도리이지만 코스 단
축에 따라 주어진 시간도 줄어들어 거기를 경유하기에는 상당히 촉박했다. (마을에서 배를 타
고 돌아가면 충분하나 배까지는 생각을 안했음)
개인적으로 왔다면 모두 보고 가야 직성이 풀리겠지만 단체로 온 것이니 시간을 어길 수는 없
다. 게다가 일행들이 가져온 행동식과 간식을 먹느라 중간중간 눌러 앉은 시간이 너무 많아서
정작 필요한 것을 보는 시간이 많이 줄어버렸다. 하여 노수신적소가 있는 산막이마을을 저 앞
에 두고 단장의 마음으로 길을 돌아서야 했다. 아무래도 다음에 다시 인연을 지어 오라는 산
막이의 지극한 뜻이 아닐까? 그래도 너무 아쉽다.


▲  산막이옛길의 잔잔한 거울, 괴산호

▲  물결을 가르며 달리는 괴산호 유람선
산막이마을과 바깥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발이다. 마을까지 빠르게 이동하는
교통수단으로 15~20분 정도 걸리며, 인원이 차면 출발한다.

▲  나무데크길로 무장한 산막이옛길

▲  얼음바람골

호수전망대를 지나면 얼음바람골이라 불리는 조촐한 계곡이 나온다. 돌 피부에 푸른 이끼가
가득하여 이곳이 청정한 곳임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데, 이곳은 한여름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한기를 느낄 정도라고 하여 얼음바람골이라 불린다.
그래서일까?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밀양(密陽) 얼음골의 바람처럼 매우 차갑게 느껴졌다.
여름 제국도 염통을 부여잡고 슬금슬금 피해가는 피서의 성지인 셈이다.


▲  산막이옛길의 유일한 샘터, 앉은뱅이약수

옛날에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가 이 물을 마셨는데 물의 효험을 받아 무려 걸어서 나갔다고 한
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몸에 좋은 무언가가 깃든 물로 명성이 자자
했으며, 수질도 양호하고 1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괴산호의 물을 채워주는
수원(水源)의 하나이기도 하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가득 받아 마시니 몸 속의 때가 싹 가신 듯 시원하다. 내 마음
이 마치 앉은뱅이에서 정상 다리로 된 기분..


▲  귀여운 호랑이 형상이 있는 호랑이굴

호랑이굴은 바위에 뚫린 조그만 자연산 동굴로 1968년까지 호랑이(표범)이 살았던 굴이라 전
한다. 그 이후 주인 없는 굴이 되었으며, 호랑이가 살던 것을 기리고자 그 앞에 색채가 진한
모형 호랑이상을 두었으나 예전 호랑이의 매서운 기운은 커녕 호랑이탈을 쓴 고양이처럼 귀엽
기만 하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스한 바람이 나오며, 옛길에는 이곳 외에도 여우비바위굴도 있
는데, 그곳은 산막이를 오가던 사람들이 여우비(여름 소나기)와 한낮 더위를 피하던 곳이다.


▲  연화담(蓮花潭)
이곳에는 예전에 벼를 키우던 논이 있었다. 높은 곳이기 때문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에 의존해 모를 심었는데, 옛길을 조성하면서 그 자리에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연화담으로 삼았다.


촉박해진 집결시간 때문에 옛길의 많은 명소를 사진에 싹 담지 못하고 겨우 일부만 담는데 그
쳤다.
진달래동산에서 연화담 사이에는 다래숲동굴, 마흔고개, 고공전망대, 괴음정, 괴산바위, 호수
전망대, 얼음바람골, 앉은뱅이약수, 풀과나무의 사랑, 옷벗은 미녀참나무, 여우비바위굴, 매
바위, 호랑이굴, 노루샘 등의 명소가 있는데, 이중 얼음바람골과 앉은뱅이약수, 연화담만 사
진에 담은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둘러보긴 했으나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쳤다.

어쨌든 주차장으로 돌아와 부근 식당에서 버섯소고기전골로 두둑히 배를 채우고, 곡차(穀茶)
도 다수 겯드리며 뒷풀이를 하다가 오후 4시에 잠시나마 정든 산막이옛길을 뒤로하며 다시 서
울로 돌아갔다.
분명 보긴 했으나 많은 것을 놓쳤던 산막이옛길과의 첫 만남, 그야말로 벌처럼 날라가고 돌아
왔던 단체 등산 나들이로 놓친 것이 많은 만큼 아쉬움도 크다. 허나 나중에 다시 인연이 된다
면 그 아쉬움을 모두 풀 것이다. 둘러보지 못한 곳은 잠시 미래에 맡겨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산막이옛길 봄비 산책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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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봉화 오전약수와 약수탕, 석천계곡, 석천정사 여름 나들이 (휴천동 지석 및 입석)

 


' 경북 영주, 봉화 나들이 (오전약수터, 석천계곡) '

▲  오전약수터

▲  석천계곡

▲  석천정사


 

 

여름 제국의 한복판인 7월 중순의 어느 평화로운 날, 몸에 좋은 탄산약수와 시원한 계곡
생각이 간절하여 간만에 수도권을 벗어났다.

청량리역에서 안동(安東)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 나를 담고 원주, 제천, 단양을 거쳐
영주로 내려가는데, 죽령(竹嶺) 이전까지만 해도 장마의 기운이 여전했으나 죽령을 지나
면서부터 차창 밖은 완전 다른 세상으로 바뀌었다. 단지 고개 하나를 지났을 뿐인데, 중
부 지방에서 남부로 지역이 지역이 바뀌었고 장마가 죽령을 넘지 못하면서 그 이남은 벌
써부터 30도를 웃도는 무더위가 판을 치는 것이다.

영주역에 도착해 두 발을 내리니 거의 숨이 막힐 정도로 후덥지근한 날씨가 나를 맞이한
다. 장마로 조금은 선선한 서울 날씨에 익숙해진 탓에 처음에는 좀 난감했지. 하여 인근
편의점으로 들어가 무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벗삼아 컵라면과 삼각깁밥 등으로 조촐하
게 이른 점심을 때우며 더위에 흥분한 몸을 달랬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던 편의점을 나와 무더위를 뚫고 영주여객 종점으로 이동하다가 문득
생각나는 존재가 있어 휴천동 주택가를 기웃거렸다.


 

 

♠  이 땅에 흔치 않은 고인돌과 선돌의 공존 현장
영주 휴천동 지석(支石) 및 입석(立石) -
경북 지방기념물 24호

휴천동(休川洞) 주택가 속 조그만 공원에는 장대한 세월을 머금은 존재들이 있다. 바로 고인
돌<지석묘(支石墓)>과 선돌(입석) 형제이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휴천리 지석 및 입석')
이들은 고인돌 2기와 선돌 1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가 허전한 돌이 여럿 자리해 있어 고
인돌이 더 있었음을 가늠케 한다.
고인돌과 선돌은 학창시절 교과서부터 요란하게 등장하는 존재로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대
표적인 유적이다. 고인돌은 지역과 마을을 다스리던 우두머리의 무덤, 선돌은 세력이나 마을
간의 경계 표시나 기념비, 신앙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선돌이 나중에 장승
으로 변했다고 함) 특히 고인돌은 한반도와 요동(遼東), 만주에 집중 분포하고 있어 우리 역
사의 특허 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인돌 분포지를 옛 조선의 영역으로 보기도 함)
이렇게 고인돌과 선돌이 많이 널려있지만 정작 그들이 같이 있는 현장은 매우 희귀한데, 이곳
휴천동 유적은 바로 그 흔치 않은 두 존재의 흥미로운 공존 현장이다.

2그루의 나무가 넓게 그늘을 드리운 곳에 드러누워 여름 제국을 잊고 사는 이들 고인돌은 조
그만 돌을 기반으로 삼고, 그 위에 넓직한 뚜껑돌을 올렸는데, 아직 학술조사를 벌이지 않아
땅 속 사정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 지역을 주름잡던 고인돌 주인의 시신이 담긴 공간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고인돌 곁에 서 있는 선돌은 남자 성인 키의 절반 정도의 높이
로 예전에는 치성의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  북쪽에서 바라본 고인돌 형제

▲  고인돌 남쪽에 자리한 선돌

오랜 세월을 탄 고인돌은 피부가 까무잡잡하며, 선돌도 비슷하나 남쪽 면은 제법 하얗다. 이
곳은 무려 20여 년 전에 와본 인연이 있는데, 보호 난간과 공원이 조성된 것 외에는 고인돌과
선돌 자체는 딱히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내가 많이 변해 버렸지. (그때는 파릇파
릇했던 10대 시절, 지금은 그저 눈물만 ㅠㅠ)
고인돌 주변은 조촐하게 공원이 닦여져 있으며, 동네 사람들이 일군 조그만 텃밭도 있어 도심
속의 소소한 휴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휴식처는 엄밀히 따지면 고인돌/선돌 형제가 시민
들에게 준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이곳도 진작에 건물이 들어섰을 것이다.

*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 693-1,-2


 

휴천동 지석/입석을 오랜만에 인연 짓고 영주여객 종점(영주시내버스 차고지)으로 이동해 봉
화(奉化)로 가는 영주좌석버스 33번을 탔다. 날씨도 허벌나게 무덥고 가격도 비싼 좌석버스이
건만 무정하게도 냉방을 틀지 않아 창문을 열어 자연산 바람에 의지해 더위를 쫓았다. 
영주시내와 봉화읍내는 30리 남짓의 가까운 거리라 약 30분 만에 봉화읍내에 진입, 읍내 한복
판에 자리한 봉화터미널에서 하차했다.

봉화터미널로 들어가 그날의 주메뉴인 오전약수터행 시간표를 확인하니 40분 뒤에 차가 있다.
하여 그 시간을 억지로 죽이다가 오전약수터(오전약수탕)로 가는 군내버스에 나를 담고 북쪽
으로 향한다.
차가 막힐 일이 거의 없는 곳이라 2차선 도로를 쌩쌩 질주하며, 석천계곡과 북지리 마애여래
좌상, 계서당(溪西堂) 입구를 지나 어느새 물야(物野)에 이른다.
물야에서 사람들은 모두 내리고, 나와 운전사 둘만 남은 상태로 내성천(乃城川)을 따라 북쪽
으로 더 들어가니 물야저수지가 물연기를 모락모락 피우며 그림 같은 표정으로 나를 맞는다.
그 호수를 지나 2분 정도 더 가니 오전약수터 주차장이 나오고, 주차장 북쪽 가게에서 버스는
심장 소리를 멈추었다. 그곳이 바로 오전약수탕 종점이다.


 

 

♠  탄산 약수의 정석, 봉화 오전약수(梧田藥水)터 <오전약수관광지>

▲  오전약수터 주차장에 세워진 오전약수관광지 표석

선달산(先達山, 1,236m) 동남쪽 자락 450m 고지에 자리한 오전약수터(오전약수탕)는 일반적인
약수와 달리 탄산과 철분이 함유된 약수(藥水)이다. 이런 약수는 주로 백두대간(白頭大幹)이
지나는 강원도 영서(嶺西) 지방(춘천, 양구, 인제, 평창, 홍천, 정선)과 경북 산간지대(봉화,
청송)에 분포하고 있는데, 모두 교통이 불편한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혀있다.

오전약수터의 오전은 점심 이전의 오전(午前)이 아니라 쑥밭을 뜻하는 한자어로 조선 성종(成
宗) 때 보부상(褓負商)이 발견했다고 전한다. 그 보부상은 서벽장과 오전리 후평장을 오가며
장사를 했는데, 산을 넘다가 너무 피곤하여 쑥밭에 벌러덩 누워 잠을 청했다. 그때 만병통치(
萬病通治) 약수가 있다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보니 바로 옆에서 약수가 솟는 것이 아닌가. 그
약수가 바로 오전약수라고 한다.
성종 임금은 천하에서 가장 물맛이 좋은 약수를 추천하게 했는데, 오전약수가 그 으뜸으로 뽑
혔다고 전한다. (전국 약수 대회에서 1등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음) 중종(中宗) 시절에는 풍기
군수를 지내며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세운 주세붕(周世鵬)이 즐겨 찾았으며, 그가 남긴 4편의
약수터 찬양시가 전해오고 있다.

영남 북부 제일의 약수터로 오랜 인기를 누렸으며, 탄산과 철분이 강해 피부병과 위장병에 아
주 좋다고 전한다. 이런 약수는 사이다처럼 톡쏘는 맛이 나고, 맛이 일반 약수보다 쓴 편으로
여기에 설탕을 넣으면 거의 사이다가 된다.
약수의 성분은 탄산과 철분이 거의 절반을 이루고 있으며, 마그네슘이 1/3정도 된다. 그래서
약수터 주변이 온통 시뻘겋다. 또한 이런 물로 몸을 씻으면 건강에 좋다고 하여 약수터 부근
에 목욕탕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런 탕을 약수탕(藥水湯)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오전약
수탕이라 부름) 

오전약수 같은 탄산/철분 약수는 일반 약수와 맛이 틀리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이런 약수
를 가장 기피하여 입에 대지도 않았지, 그런데 이런 약수로 지은 밥은 밥이 파랗게 물이 오르
면서 일반 밥과 달리 꼬들꼬들하고 맛이 좋았다. 물은 싫었지만 그 물로 지은 밥은 좋았던 것
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20대 후반에 탄산약수의 하나인 설악산 오색약수(五色藥水)를 오랜만에
가보았는데, 약수터가 마르도록 본전을 뽑았다. 소시(少時)적에 그토록 싫어했던 물맛이 이제
는 달콤한 물맛으로 바뀐 것이다. 물론 몸에 좋다는 이유도 크게 한몫했지, 맛은 좀 쓰지만
몸에 좋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제 슬슬 몸을 생각할 나이대가 된 것이다.
그 이후 오랫동안 그런 약수를 찾지 못했다가 이번에 이렇게 오전약수를 찾게 된 것이다.

약수터에는 거북이 석상이 물을 졸졸 내뱉고 있는데, 몇 바가지를 마셨는지 모른다. 위장병이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니나 물이 몸 속에 들어가니 정말 약수의 효과인지 꼬르륵하던 뱃속이 조
용해진 거 같다. 마치 속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  오전약수터(왼쪽 6각형 정자)와 보부상 석상

▲  탄산 약수의 정석, 오전약수터

오전약수탕 종점에서 무성한 숲길을 3분 정도 들어가면 6각형 정자에 자리한 오전약수터가 활
짝 모습을 드러낸다. 한참을 들어가야 나올 것 같은 신비의 약수가 싱겁게 나와버려 이게 정
말 오전이 맞나? 오후 아닌가? 갸우뚱했지만 오전은 맞다. 의심할 필요가 없다.
약수터 주변에는 그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식당이 여럿 있는데, 한결같이 이 물을 이
용하여 닭백숙을 내놓고 있다. 탄산 약수로 고아 만든 닭백숙은 맛도 일품이고, 몸에도 좋다
고 하여 이곳의 든든한 별미로 크게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다보니 가격이 좀 있는 편인데,
혼자 온 탓에 백숙은 먹지 않았다.

식당은 대부분 민박을 겸하고 있으며, 평일이라 다들 한산하다. 약수터도 덩달아 한산하여 혼
자 거의 전세를 내다싶이하여 물을 섭취했다. 기분 같아서는 이 약수터를 집으로 가져와 혼자
두고두고 마시고 싶지만 그럴 권한과 힘은 나에게 없었다. 선달산 산신령을 뇌물을 구워삶아
약수터를 내게 달라고 청하고 싶지만 산신령이 약을 빨지 않는 이상은 이곳의 꿀인 약수터를
내주지 않을 것이다. 오전약수터는 바로 이곳에 있어야만 그 진가를 발휘하지 다른 데로 가면
죽은 약수가 된다.

오전약수터는 1986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그래서 많은 식당과 민박집이 생겨났으며, 약
수터 동쪽에는 몸을 씻을 수 있는 약수탕이 조성되어있고, 북쪽에는 근래에 인공폭포와 조그
만 공원을 닦았다. 또한 도보길 유행붐을 타고 봉화군에서 야심차게 추진한 외씨버선길이 이
곳을 지나간다.
인공폭포와 공원은 약수터 외에는 딱히 볼거리가 없는 문제점을 해소하고자 조성한 것 같은데
, 솔직히 오전약수와 어울리는 존재는 아니다. 이런 약수터에는 샘터과 계곡, 적당한 양의 편
의 시설(식당, 숙박업소) 정도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보며 이런 어설픈 것까지 굳이 만들어야
했는지 의문이다.

*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99-5, 1212 (오전약수탕길 18-24, 문수로 1601)


▲  오전약수터 옆을 흐르는 오전계곡 (내성천 상류)

▲  오전약수터 북쪽에 조성된 인공폭포
인공폭포 위쪽에는 넓게 공원을 조성하여 정자와 연못, 공연장을 두었다.


오전약수터와 인공폭포 공원에서 1시간 정도 머물다가 버스 시간에 맞춰 종점으로 나갔다. 외
씨버선길을 타고 두내약수탕(두내약수터)으로 넘어갈 생각도 했지만 날씨가 무더워 그건 포기
했다. 하여 일단 읍내로 나가면서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사람의 마음
이 갈대라 이내 변심하여 예전에 갔던 석천계곡(석천정사)으로 메뉴를 바꿨다. 한여름에는 뭐
니뭐니해도 계곡과 바다가 최고 아니겠는가.

봉화읍으로 나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석천계곡 입구이자 읍내 직전인 삼계에서 내렸다. 계곡으
로 들어가려던 찰라에 문득 마을 쪽에서 오래된 기와집 하나가 크게 눈빛을 보낸다. 하여 그
눈빛에 일부러 홀리며 가보니 삼계서원이란 오래된 서원이다.


▲  삼계서원(三溪書院)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417호

석천계곡 입구 북쪽에 자리한 삼계서원은 석천계곡과 닭실을 일군 충재 권벌(沖齋 權橃, 1478
~1548)을 배향한 서원이다.
1588년 안동부사(安東府使) 김우옹(金宇顒)이 권벌을 기리고자 석천계곡 입구에 조촐하게 세
웠는데, 1601년 한강 정구(寒岡 鄭逑)가 건물 이름을 지어주었고, 1660년 삼계란 사액(賜額)
을 받아 국가 공인 서원이 되었다.
1868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통 큰 서원 정리 사업으로 사당과 환성문(喚惺門), 관물루(
觀物樓)가 철거되었으며, 1951년에 중건되었다. 이곳은 특히 을미의병(乙未義兵)이 한참 일어
나던 1895년 안동 유림들이 권세현(權世賢)을 의병(義兵) 대장으로 추대하며 격문(檄文)을 작
성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서원의 구조는 앞에 공부를 하는 강당(講堂)을 두고 뒤에 사당을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
태로 좀 지나치게 커 보이는 2층 누각인 관물루가 서원 앞쪽에 자리해 있는데, 그 가운데 칸
에 문을 두어 환성문이라 했다. 허나 문은 굳게 잠겨있어 좀처럼 열릴 줄을 모른다.
환성문을 들어서면 좌우에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고, 정면에는 강당이 자리해 있는데,
서원 철폐 당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존재로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그래서 고색
의 기운이 진하다. 강당 뒤쪽에는 사당이 자리해 있고, 서재 좌측에는 관리인이 머무는 건물
이 있으며, 동재 옆에는 1906년 사림(士林)에서 세운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

서원 주위로 돌담을 길게 둘렀는데, 오래된 마을의 돌담길처럼 정겹고 푸근한 모습이다. 서원
서쪽에는 관리인이 머무는 건물이 있는데, 그곳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나 어차
피 밖에서도 사당을 제외하고 보일 것은 다 보이므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들어가기도 귀찮
고, 그때 내 마음은 이미 석천계곡에 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삼계서원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삼계리 174 (생기마1길 24)

▲  담장 너머로 바라본 강당과 동/서재

▲  1906년에 세워진 권벌 신도비(神道碑)


 

 

♠  봉화 제일의 경승지, 석천계곡(石泉溪谷) - 명승 60호

▲  석천계곡 입구

삼계서원을 둘러보고 바로 남쪽에 자리한 석천계곡으로 이동했다. 이 계곡은 봉화 제일의 경
승지이자 피서의 성지(聖地)로 추앙받는 봉화의 꿀단지로 아직 본격적인 피서철도 아니고 그
날이 평일인지라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람이 너무 많은 것보다는 이렇게 한적한 것이 더 좋
지, 덕분에 석천계곡과 닭실마을 일대를 참 아늑하고 마음 편하게 둘러보았다.

석천계곡은 가계천(駕溪川)의 일부로 닭실마을<달실, 유곡(酉谷)마을>에서 내성천(乃城川)이
합류하는 삼계교까지 약 1km 구간을 일컫는다. 이곳에는 권벌이 터를 다지고 그의 큰 아들인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가 지은 석천정사(석천정)가 있으며, 울창한 소나무숲과 기암괴석,
계류(溪流)가 어우러진 현장으로 예로부터 봉화 으뜸의 경승지로 찬양이 대단했다.
계곡 상류에 자리한 닭실은 권벌이 개척한 곳으로(또는 권벌의 조상이 1380년대에 개척했다고
함)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파직을 당하자 고향 안동으로 내려와 1520년 집을 짓고 닭
실을 일구었다.
지금은 석천계곡이 자연/답사 탐방로가 되었지만 읍내에서 계곡 남쪽에 신작로(다덕로)를 내
기 이전에는 읍내에서 닭실로 갈 때는 이 계곡을 거쳐서 갔다.

석천계곡과 닭실 일대는 '내성유곡 권충재(乃城酉谷 權沖齋) 관계 유적'이라 하여 사적 및 명
승 3호
로 지정되었으나 그 등급이 명승에 통합되면서 '봉화 청암정과 석천계곡'이란 이름으로
명승 60호로 변경되었다.


▲  석천계곡 하류 (주차장 남쪽)
멋드러진 풍경에 계곡 수심까지 얕은 편이라 피서의 성지로 전혀 부족함이 없다.

▲  석천계곡 (석천정사로 가는 계곡길)

석천계곡 주차장을 지나면 흙과 돌로 이루어진 계곡길이 나온다. 길이 좀 울퉁불퉁하긴 하지
만 너무 깔끔함과 편리함을 추구하는 포장길보다는 운치가 있고 정겹다. 길도 오로지 계곡길
뿐이라 두 다리에 의지하여 갈 수 밖에 없는데, 송림(松林)이 울창해 솔내음이 그윽하며, 계
곡에는 온갖 바위가 계류의 희롱을 즐긴다.


▲  청하동천(靑霞洞天) 바위글씨

석천계곡 주차장과 석천정사 중간 정도에 기묘하게 생긴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중간 도
리에 붉은 피부로 이루어진 청하동천 바위글씨가 있다. 청하동천은 석천계곡의 다른 이름으로
하늘 위에 있는 신선이 사는 마을이란 뜻이다. 그만큼 이곳이 신선(神仙) 세계와 가까울 정도
로 경승지임을 내세우고 있는데, 여기서 동천(洞天)은 빼어난 경승지에 부여되는 명예로운 이
름으로 아무 명소나 가질 수 있는 명칭이 아니다.

이 바위글씨는 권벌의 5대손인 권두옹(權斗應, 1645~1732)이 쓴 것으로 그의 호는 대졸자(大
拙子)이다. 여기서 대졸자는 요즘 흔한 대졸자가 아니라 크게 어리석은 작자라는 뜻으로 자신
을 낮추려는 의도로 지은 것이다. 호부터가 참 특이한데, 그가 살던 시절에 석천계곡의 명성
을 듣고 많은 도깨비들이 몰려와 놀면서 이곳에서 공부를 하던 유생들이 크게 고통을 당했다
고 한다.
그래서 권두옹은 바위에 글씨를 새기고 붉은 칠을 하여 필력(筆力)으로 도깨비를 쫓아내니 이
후 계곡에 평화가 찾아와 유생들의 공부가 더 잘되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설화가 한 토막 전해
온다.
과연 도깨비가 이곳까지 놀러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도깨비도 흥분시킬만큼 이곳이 대단한 경승
지임을 강조하고자 적당하게 지어낸 설화라 하겠다.


▲  청하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구렁이가 움직이는 듯한 생생한 필체이다.

▲  신선이 나올 것만 같은 소나무 숲길

▲  바위에 뿌리를 내리며 장차 석천계곡의
중심을 꿈꾸는 돌탑 무리들

▲  싱그러운 석천계곡 (청하동천 바위글씨와 석천정사 중간 지점)


▲  소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석천정사<(石泉精舍), 석천정(石泉亭)>

▲  석천계곡의 백미(白眉) 석천정사(석천정)

석천계곡 주차장에서 계곡길을 10분 정도 들어가면 계곡 건너에 자리한 석천정사가 모습을 드
러낸다. 석천정은 석천계곡의 상징이자 이 계곡에서 가장 절경이 뛰어난 곳으로 권벌이 1526
년에 세우려고 축대까지 쌓았으나 거기서 공사가 중단되고 대신 청암정을 지었다. 이후 축대
만 남은 이곳을 큰아들 권동보가 춘양목(春陽木)으로 산뜻하게 집을 지었다. 그의 후손과 지
역 유생들이 공부를 하던 배움터이기도 했으며, 여러 번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계곡 동쪽에 돌로 석축을 단단히 다지고 돌담을 두룬 다음 팔작지붕의 석천정을 세워 계곡을
바라보게 했고, 그 옆구리에 익랑(翼廊)을 덧붙여 공간을 넓혔으며, 담장 양쪽에 외부로 나가
는 문을 내고, 북쪽 문 옆에는 유생들의 숙소인 3칸짜리 맞배지붕 건물을 두었다.

계곡길에서 석천정을 가려면 계류 위에 놓인 외나무 다리를 건너야 되는데, 물살의 패기가 조
금 있을 뿐, 수심이 얕아서 폭우로 계곡이 미치지 않는 이상은 누구든 건너갈 수 있는 수준이
다.


▲  석천정으로 인도하는 외나무다리 (다리 건너의 기와집은
석천정의 딸린 건물로 관리인이 머물고 있음)

▲  외나무다리와 무성한 숲을 이룬 계곡 상류

▲  서쪽에서 바라본 석천정의 위엄


▲  석천정에서 바라본 계곡

▲  외나무다리에서 바라본 계곡 (주차장 방향)
이곳은 계곡이 굽이치는 곳이라 물살이 제법 급하다.

▲  석천계곡 상류 방면 (닭실 방향)

석천정은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허나 바깥에서도 왠만한 것은 다 보
이니 굳이 홍길동을 따라하며 월담을 할 필요는 없다. 예전 석천계곡에 왔을 때도 딱 여기까
지만 갔었다.
여기서 뒤쪽으로 조용히 난 샛길을 따라가면 권벌의 후손이 사는 닭실마을이 나온다. 기왕 석
천계곡에 발을 들였다면 샛길을 쭉 따라가 닭실까지 모두 살펴보기 바란다. 닭실과 석천계곡
은 서로 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계곡으로 이어져 있는 하나의 존재이다.

글 분량상 닭실마을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본글은 여기서 끝~~

* 석천정사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945 (충재길 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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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옛 탐라의 현장, 제주도 새해 나들이 (외도 월대, 수산리곰솔, 납읍 금산공원, 제주올레길15,16,17코스)

 


' 제주도 겨울 나들이  '
(외도 월대, 수산봉, 납읍리 금산공원)

▲  제주해협이 바라보이는 외도 해변

수산리 곰솔 납읍리 금산공원 (납읍리 난대림)

▲  수산리 곰솔

▲  납읍리 금산공원

 


 

묵은 해가 아쉬움 속에 저물고 새해가 막 기지개를 켜던 1월의 첫 무렵, 사흘 일정으로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 제주도(濟州島)를 찾았다.
제주도는 거의 13년 만에 방문으로 비행기나 장거리 여객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야 되는
부담감 때문에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허나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수천~수만 리가 되
는 것도 아니고 고작 500km 남짓에 불과하며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로 1시간 내외면 충분
히 닿는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천하를 마음대로 주유한다는 내가 제주도에게 너무나 소심하게 대한
것 같고, 이러다가는 제주도란 존재를 깜빡 잊어먹을 것만 같았다. 하여 나를 제주도에
팍 떨어트리기로 작정하고 부랴부랴 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해봐야 비행기표 예약밖에
는 없음)

평일 아침 6시대 비행기라 널널하게 새벽 2시에 도봉동 집을 나서 심야시내버스(N버스)
를 1회 갈아타고 다시 일반시내버스로 환승하여 5시에 김포국제공항 국내선청사에 도착
했다. (2시 50분대에 방학사거리에서 N15번 시내버스를 타고 종로2가로 이동 → 3시 50
분대에 N26번 시내버스를 타고 공항시장까지 이동 → 4시 50분대에 공항시장 건너편 정
류장에서 6629번을 타고 김포공항 진입)

공항은 여행 비수기인 겨울 평일임에도 이른 아침부터 제주도를 꿈꾸러 온 사람들로 거
의 북새통을 이루었다. 탑승 수속을 마치고 30여 분 정도 지루하게 시간을 때우다가 제
주로 가는 아시아나항공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시간이 되자 비행기는 그 작은 입을 닫
고 넓은 활주로를 10분 남짓 방황하다가 드디어 하늘 높이 비상한다.
제주도에 처음 발을 들였던 초등학교 시절, 김포공항에서 50분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하
고 있다. 그 소요시간은 여전히 유효하여 제주국제공항에 착륙하여 바퀴를 멈출 때까지
딱 50분이 걸렸다. (보통은 활주로 방황 시간까지 포함하여 1시간~1시간 10분을 소요시
간으로 잡고 있음)

활주로 한쪽에 멈춰선 비행기에서 내려서니 공항청사로 인도하는 저상형 셔틀버스가 대
기하고 있었다. 그 버스를 타고 3분 정도를 달려 공항청사로 이동했는데 공항이 바닷가
와 가까워서 그런지 바람이 다소 매서웠다. 제주도는 여름에만 와봤지 겨울에는 처음이
다. 따뜻한 남쪽이라 별로 춥지 않을 것이라 방심을 하였으나 바닷가는 바람 때문에 오
히려 본토 이상만큼이나 추웠다. (단 내륙 쪽은 따뜻함)

제주도에서 이미 정처(定處)는 정해둔 상태라 그곳만 얌전히 찾아가면 된다. 남들은 렌
트카로 많이 이동을 하지만 난 마음 편하게 대중교통을 선택하여 돌아다녔다. 제주도는
비록 일부 노선을 제외하면 버스 배차간격은 긴 편이나 본토보다 시내버스 차비가 저렴
하고 무료환승제가 아주 휼륭해 섬 1바퀴(180km)를 기본요금(현금 1,200원, 카드 1,150
원)이면 돌 수 있다. (제주도 급행버스와 공항버스는 제외)

제주국제공항에서 첫 답사지인 외도 월대를 가고자 제주시내버스 315번(국제여객선터미
널↔수산리)을 탔다. (다른 노선들도 있으나 그것이 먼저 와서 탔음)
버스는 오랜만에 건너온 나에게 신제주 일대를 신나게 강제투어를 시켜주고 8시가 조금
넘어서 외도초교 정류장에 나를 가져다 주었다. 외도초교에서 남쪽으로 가면 광령천(光
令川)이 있는데 바로 그곳에 나를 여기로 부른 월대가 있다.


 

♠  달놀이와 은어로 유명했던 제주시내 외곽 명승지
외도 월대(月臺)

▲  현무암으로 닦여진 월대

월대는 광령천(외도천)과 도근천<都近川, 수정천, 조공천>이 만나는 곳에 닦여진 명승지이다.
월대 앞을 흐르는 광령천을 따로 월대천이라 부르기도 하며, 남해바다도 이곳까지 손을 대고
있어 자연히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수심이 깊고 청정해 예로부터 은어
와 숭어, 뱀장어가 많이 노닐고 있다. (지금도 많이 서식하고 있음)

월대 주위로 하천을 따라 200~300년 숙성된 팽나무와 해송이 멋드러지게 늘어서 있는데 이곳
지형이 반달과 비슷하다고 하며, 달님이 뜰 때 주위와 어우러져 수면에 비친 달빛이 아주 예
술이라고 한다. 반달을 닮은 곳에 달빛 또한 그윽하니 이곳에 퐁당퐁당 빠진 옛 사람들은 누
대(樓臺)를 짓고 신선이 내려와 달놀이를 하던 곳이란 의미로 '월대'라 하였다.

월대는 제주도에서 가장 흔한 현무암으로 낮게 네모난 기단을 깔고, 그 위에 동그란 낮은 대
를 다져 4각형 위에 동그라미가 있는 모습처럼 되었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돌로 쌓은 석대만 있을 뿐, 건물은 없으며 선비와 관리들, 지역 사람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시
를 짓고 낚시를 하며 풍류를 즐겼다. 그들은 월대를 포함한 외도동(外都洞) 일대에 적당한 풍
경 8곳을 골라 외도팔경(外都八景)이라 이름 짓고 찬양을 하니 그 8경은 다음과 같다.

1. 월대피서(月臺避暑) - 월대에서의 피서
2. 야소상춘(野沼賞春) - 들이소(월대천 남쪽)에서의 봄구경
3. 마지약어(馬池躍漁) - 마지(연대입구 마이못)에서 뛰는 물고기
4. 우령특송(牛嶺特松) - 우왓동산의 큰 소나무
5. 대포귀범(大浦歸帆) - 큰 포구(조공포)로 돌아오는 돛단배
6. 광탄채조(廣灘採藻) - 넓은 여에서 해조를 캐는 모습
7. 사수도화(寺水稻花) - 절물 벼밭에 벼꽃이 핀 모습
8. 병암어화(屛岩漁火) - 병풍바위에서 고기잡이 불구경


▲  시커먼 피부의 월대 비석
비석 피부에 쓰인 '월'이 그 흔한 '月'이 아니라 거의 초승달 같은 모습이다.
(사람이나 동물의 삐뚤어진 눈처럼 보이기도 함)
비석까지도 달을 표현했으니 이곳은 그야말로 달을 찬양하는 공간이다.


월대 주변은 완전 시골이었으나 제주 시내가 동/서/남으로 크게 살을 찌우면서 그 주위로 시
가지가 형성되었다. 하여 옛날의 운치는 다소 깎이긴 했으나 월대와 광령천, 하천을 따라 늘
어선 나무들은 거의 그대로이며, 광령천 동쪽은 전원(田園) 풍경을 여실히 간직하고 있어 월
대의 위엄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 또한 제주도의 야심작인 제주올레길 17코스(제주시내 원도
심~광령, 18.1km)가 이곳을 살짝 지나가며 올레길 뚜벅이들을 인도한다.


▲  월대 주변에 자리한 키 작은 비석 4형제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은 비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이들은
지역 사람들의 공덕비로 기단석은 현무암으로 지어졌다.

▲  월대 해송 - 제주시 보호수 13-1-15-30(2) / 13-1-15-30(3)호

월대 옆에 제주시 보호수로 지정된 해송 2그루가 있다. 이들은 280년 묵은 것들로(1982년 보
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250년) 지정 번호가 앞선 것을 기준으로 높이는 각각 10m와
3m, 나무둘레는 3.2m와 2m이다.


▲  월대 산책로의 평화로운 아침 풍경 (제주올레길 17코스)

▲  월대 산책로와 오래된 해송<제주시 보호수 13-1-15-30(1)호>
정면에 보이는 수형(樹形)이 좋은 소나무가 제주시 보호수인 해송으로 앞서 언급한
해송들과 나이(약 280년)가 비슷하다. 나무높이는 12m, 나무둘레 3.2m

▲  이제는 무늬만 남은 고망물(수정천)

월대가 있는 외도동에는 조부연대(煙臺)와 고인돌(지석묘), 마이못, 고망물, 수정사(水精寺)
터, 제주도에서 유일한 자갈해변인 알작지 등의 소소한 명소들이 전하고 있다.
나는 월대와 수정사터만 알고 있었지 다른 명소는 전혀 몰랐다. 여기서 덤으로 알게 된 그들
을 싹 보고 가면 좋겠으나 언제나 그렇듯이 시간도 여의치 않았고 마음은 벌써부터 다음 행선
지를 재촉하고 있어서 월대에서 가까운 고망물만 보기로 했다. 그곳은 월대교에서 광령천 천
변길(통물길)을 따라 2~3분 정도만 가면 된다. (제주올레길 17코스가 그 길을 따라감)

고망물은 오래된 샘터로 외도동에 크게 둥지를 틀었던 수정사의 샘터로 전해진다. 그래서 수
정천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수정사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 때 원나라(몽고)의 황후(皇后)가 물이 잘 나
오기를 기원하고자 세웠다고 한다. 몽고 왕비(또는 몽고 조정)가 그들과 전혀 관련도 없을 것
같은 머나먼 제주도에 왜 절을 세웠나 싶겠지만 그 시절 고려는 몽고의 그늘에 있었고, 몽고
는 고려의 영역이던 제주도, 함경남도, 평안도, 요동(遼東) 지역을 강제로 접수해 그들 땅에
넣어버렸다. <평안도와 요동에 동녕부(東寧府)를, 함경남도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제주
도에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를 설치하여 통치함>
기마병 중심인 몽고에게 말은 꽤 중요한 전투 자원으로 제주도는 말목장으로 아주 휼륭했다.
그러니 몽고의 제주도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으며, 절도 여럿 설치하여 통치수단으로 삼았다.
그런 배경에서 태어난 수정사는 제주도에서 제법 덩치가 있던 절로 서귀포에 있던 법화사(法
華寺)와 함께 제주도 2대 사찰(또는 3대 사찰)로 꼽혔다. 허나 17세기 말 화마(火魔)의 먹이
가 되어 부질없이 사라졌으며, 20세기 이후에 새로운 수정사가 들어서 작게나마 옛 터를 지키
고 있다.

고망물은 늘 물이 풍부하게 나와 동네 사람들의 식수가 되었으며, 왜정(倭政) 때 지금의 모습
으로 정비하고 그 기념비를 세웠다. 여전히 물은 나오고 있으나 개발의 칼질이 주변까지 미치
면서 수질은 장담이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그러니 아무리 갈증이 나더라도 이곳 물은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


▲  세월이 씌워놓은 온갖 주근깨로 범벅이 된 수정천 신축기념비
왜정 때 고망물을 손질한 기념으로 세워진 것으로 옆구리에 조성시기가 쓰여있다.
허나 시대가 시대인지라 서기 대신 왜왕(倭王)의 연호가 쓰여있었고,
1945년 이후 그 부분은 뜯겨졌다.

▲  고망물에서 바라본 한라산(漢拏山)의 위엄
제주도는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한라산이 바라보인다. 한라산은
제주도를 빚은 장본인이자 제주도의 어머니와 같은 큰 존재이다.

▲  광령천과 바다가 만나는 외도 해변 <조공포(朝貢浦)>

고망물에서 광령천을 따라 월대를 거쳐 외도 해변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고려와 조선 때 제주
도에서 조정으로 보내는 공물선(貢物船)이 오가던 포구로 조공포라 불렸는데, 그 조공선은 도
근천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하여 도근천을 조공천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늘에 점점이 떠있는 구름 밑으로 푸르기 그지없는 제주해협이 넓게 펼쳐져 있다. 혹시나 추
자도(楸子島)나 본토가 보이지 않을까 싶어 주름선이 일그러질 정도로 눈에 힘을 주고 살펴봤
으나 역시나 거리 때문인지 보이지가 않는다. 바다 파도는 조금 흥분기를 보이며 뭍을 때리고
있었고 바닷바람은 그리 춥지 않았다.


▲  외도 해변 (대원암 동쪽)
왼쪽에 보이는 돌탑은 대원암에서 만든 것이다.


외도 해변 서쪽에는 천하 유일의 해수관음보살(海水觀音菩薩) 와상(臥像)을 봉안한 대원암이
있다.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조그만 절집으로 내가 갔을 때는 와상의 존재도 전혀 몰랐
고, 그곳에는 딱히 손이 가지 않아 해변만 잠깐 기웃거리고 외도초교 정류장으로 나왔다.

* 외도 월대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외도2동 230, 240, 241일대


 

  제주해협을 바라보고 있는 조그만 오름(봉우리)
수산봉(水山峰)과 수산리(水山里) 곰솔

▲  수산봉 충혼묘지(모감동) 기점 (제주올레길 16코스)

외도초교 정류장에서 제주도 간선 202번을 타고 하귀를 지나 모감동에서 내렸다. 202번은 제
주터미널에서 제주도 서쪽 일주로(애월, 한림, 고산, 대정, 화순, 중문)를 따라 서귀포 중앙
로터리(서귀포등기소)까지 가는 긴 노선으로 외도부터 다음날 찾아간 천제연폭포(天帝淵瀑布)
까지 쭉 그의 신세를 졌다. (총 5번을 탔음)
이 노선은 달랑 1km를 가던, 40km를 가던, 전 구간을 가던 무조건 기본 요금이며, 제주시내버
스(300, 400번대)와 서귀포시내버스(500, 600번대), 제주시와 서귀포 외곽버스(700번대), 제
주도 장거리 간선버스(200번대)와 무료환승이 가능하다. (100번대 제주도 장거리 급행버스도
환승이 되나 약간의 차액이 나가며 구간요금 있음)

모감동 정류장 남쪽에 야트막한 산이 손짓을 하니 그곳이 수산봉이다. 차량의 왕래가 빈번한
도로(일주서로)를 신호등의 도움을 받아 건너면 수산봉으로 인도하는 길이 마중을 나오는데,
제주올레길16코스(고내~광령, 15.8km)가 그 길을 따라 수산봉 남쪽까지 이어진다. 16코스는
광령에서 17코스로 간판을 갈아 월대와 제주시내로 달려가며, 고내에서는 15코스로 이름을 바
꾸고 한림읍으로 이어진다.


▲  수산봉 북쪽 산길 (1)

수산봉은 해발 122m의 낮은 뫼로 '수산봉오름','수산오름','물메오름','물메' 등의 별칭을 가
지고 있다. 옛날에는 주로 물메라 불렸는데, 이는 봉우리 정상에 못이 있어서 그렇게 불린 것
이다. (물뫼, 물메)
지금은 딱히 특별한 것이 없어보이는 평범한 뒷동산이나 그 태생은 무시무시했던 화산으로 화
산 폭발로 못과 지금의 산이 형성되었다. 이런 식의 산은 제주도에 매우 많다.

조선 때는 정상에 물메봉수를 두었는데 동쪽에 도두봉수, 서쪽으로 고내봉수와 연락을 했으며,
기우제를 지냈던 터가 있어 영산(靈山)으로 추앙을 받기도 했다. 해송이 울창해 솔내음이 그
윽하며 서쪽 자락에는 애월읍 충혼묘지가 닦여져 있어 호국(護國) 신들이 안식을 취하고 있다.

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크게 모감동(충혼묘지), 대원정사, 수산리 곰솔 등 3개가 있는데, 산이
작다보니 어디로 올라가든 10분 안에 정상부에 닿는다. 산 정상은 군부대가 있어 금지된 곳이
되었으며, 봉수대터는 그 안에 있어 관람이 어렵다.
내가 수산봉을 찾은 것은 봉우리보다는 산 남쪽에 있는 수산리 곰솔을 보고자 함이다. 그곳으
로 가려면 수산봉을 거쳐가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  수산봉 북쪽 산길 (2)

▲  수산봉 북쪽 산길 (3)
겨울의 한복판이지만 해송 외에도 많은 나무들이 버젓히 푸른 옷을 걸치고 있어
겨울임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만큼 제주도는 따뜻한 남쪽이다.

▲  수산봉 정상부
바다가 바라보이는 정상부에는 쉼터용 정자와 여러 운동시설이 닦여져 있다.

▲  수산봉 남쪽 숲길

▲  수산리 곰솔 - 천연기념물 441호

수산봉 동남쪽에 곱게 늙은 곰솔이 있다. 수산저수지를 거울로 삼으며 도도한 모습을 드러내
고 있는 그는 높이 11.5m, 나무둘레 4.7m, 수관폭 26m로 4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나무의 눈덮힌 모습이 마치 백곰이 물을 마시고자 웅크리고 있는 모습처럼 보여 곰솔이라 불
리며 나무 껍질이 검은색이라 흑송(黑松)이라 불리기도 한다. 또한 바닷가에 많이 자라고 있
어 해송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지상 2.5m 높이에 원줄기가 잘려진 흔적이 있고, 거기서 4
개의 큰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있으며, 호수 쪽 가지가 밑동보다 2m 정도 낮게 물가에 드리워
져 있어 나무의 자태가 곱다.

이 나무는 수산봉 밑에 마을이 지어졌을 때 그 기념으로 심어진 것이라 전하며, 수산리 사람
들은 그를 수호목으로 삼아 애지중지하고 있다. 나무 북서쪽에는 나무에게 당제를 지내는 맞
배지붕 당집이 있다.


▲  물을 향한 마음, 호수로 뻗은 남쪽 가지
물이 많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아니면 갈증이 심했는지도) 나무의 남쪽 가지가
계속 호수로 손을 내밀고는 있으나 호수는 액체라 그의 손을 잡을 만한
것이 없어 서로 뻔히 보임에도 전혀 닿지를 못하고 있다.

▲  수산봉과 곰솔의 잘생긴 거울, 수산저수지

수산저수지는 현무암 피부를 지닌 제주도에서 거의 흔치 않은 저수지이다. 예전에는 유원지가
들어서 한때 시끌벅적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 흔적들이 거의 지워져 고요하다. 다만 그 고요
함을 툭하면 건드리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제주공항으로 착륙하는 비행기들이다.
이곳은 비행기들이 제주국제공항으로 진입하는 길목으로 5분이 멀다하고 지나간다. 비록 소음
이 있긴 하나 형형색색의 비행기들이 날개를 낮추며 들어서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으며, 저렇
게 많은 비행기가 들어오고 그만큼 바깥으로 나가니 제주도의 위엄과 인기를 정말 실감케 한
다. (현재 제주공항은 거의 포화상태임)

수산봉을 넘어온 제주올레길16코스는 저수지 서쪽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가며, 나는 곰솔과 당
집 주변만 둘러보고 다시 수산봉 정상부를 거쳐 모감동 정류장으로 돌아왔다.

▲  수산리 곰솔에게 제를 지내는
마을 당집

▲  곰솔 맞은편에 자리한 무덤들
현무암으로 무덤 경계를 닦았다.

* 수산봉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
* 수산리 곰솔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 1935


 

♠  오래된 난대림을 간직한 납읍리의 상큼한 언덕
납읍 금산공원(錦山公園)


▲  납읍리 돌담길

모감동 정류장에서 다시 202번을 타고 애월을 지나 한림읍내에서 내렸다. 여기서 제주도 간선
291번(제주터미널~한림읍)으로 환승하여 금산공원을 간직한 납읍리에 두 발을 내린다.
모감동에서 여기까지 바로 가는 292번 버스가 있으나 운행횟수가 너무 적고 시간이 전혀 맞지
않아서 부득이 한림으로 돌아간 것이다. (한림읍에서 납읍리로 가는 버스가 30~40분 간격으로
있음)
애월읍 납읍리(納邑里)는 제주도에서 이름난 양반 마을로 꼽힌다. 14세기에 마을이 조성된 것
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납읍을 중심으로 사방 10리 이내에 곽지, 애월, 고내, 상가, 하가, 어
음, 봉성 등 7개의 마을이 들어서 있어 그것을 아우르는 뜻에서 동네 이름에 읍을 쓴 것으로
보인다.
납읍리 지역에서 처음 사람이 산 곳은 곽남(郭南)으로 여겨진다. 그곳의 처음 이름은 곽지남
동으로 그것을 줄여 곽남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이후 '곰팡이','둥덩이' 등지에 사람들이 터
전을 닦으면서 마을이 확대되었다.

현재 납읍리는 본동, 서동, 중하동 등 3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동에 나를 이곳으로
부른 금산공원이 있다. 제주시(북제주)에서 가장 감귤이 잘되는 동네로 제주올레길15-A코스(
한림~납읍~고내, 16.5km)가 납읍리와 금산공원 내부를 지난다.


▲  귤나무밭을 가르는 납읍리 돌담길

▲  금산공원 정문

납읍리사무소 정류장(반대편 정류장은 '납읍리')에서 납읍로2길을 따라 9분 정도 들어가면 무
성한 숲을 드러낸 금산공원이 모습을 비춘다. 납읍리사무소에 이르면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양
쪽 길이 비슷하게 생겨서 햇갈리기가 쉽다. (이정표도 없음) 여기서는 무조건 서쪽(진행 방향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된다.
현무암 돌담과 귤나무, 마을 가옥이 잘 어우러진 제주도의 전형적인 시골 마을로 귤나무 가지
에 감귤이 달린 모습이 심심찮게 눈에 띄어 제주도 한복판에 왔음을 더욱 실감나게 한다.

금산공원은 납읍리의 허파이자 아름다운 뒷동산으로 33,980㎡(약 13,000여 평) 면적에 후박나
무와 생달나무, 종가시나무, 모밀잣밤나무, 동백나무, 식나무, 아왜나무, 자금우, 마삭줄, 송
이 등 200여 종의 식물이 우거진 상록수림(常綠樹林)이다. 다른 말로는 난대림(暖帶林)이라고
도 한다. 제주시 서부에서 평지에 남아있는 유일한 상록수림으로 온난한 기후에 적합한 식물
들이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며 1년 내내 삼삼한 모습을 자랑한다.

허나 금산공원은 원래부터 숲동산은 아니었다. 옛날에는 돌만 가득한 돌언덕으로 볼품이 없었
다고 하며, 그 언덕 건너편으로 금악봉(430m)이 훤히 바라보여 마을에 화재가 잦았다고 한다.
그래서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금악봉이 보이지 않게끔 돌언덕에 나무를 심었고 마을
제사를 지내는 포제단을 담으면서 마을의 성역으로 부상하게 된다. 성역을 품은 숲은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것이 법칙이라, 마을에서는 나무 벌채나 식물 채취를 엄격히 금하여 숲이 마음
놓고 자라게끔 배려했으며, 숲 주위로 돌담을 둘러 속세와 숲의 경계를 분명히 하였다.
처음에는 숲 벌채를 금한다는 뜻으로 금산(禁山)이라 불렸으나 나중에 이름을 순화시켜 비단
뫼를 뜻하는 금산(錦山)으로 한자를 갈았다고 한다.

공원을 덮고 있는 숲은 '납읍리 난대림'이란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375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
으며(예전에는 천연기념물 182-4호였음) 공원 전체가 국가 천연기념물 보호 구역이라 지정된
탐방로 외에는 접근을 금하고 있다. 아무리 공원 감독이 느슨하다고 해도 자연보호를 위해 탐
방로를 벗어나거나 식물을 괴롭히는 행동, 나뭇잎과 식물을 따는 행위는 절대로 해서는 안된
다.


▲  금산공원 정문 갈림길

원시림과 같은 공원으로 들어서면 길은 3갈래로 갈린다. 넓은 흙길로 된 중앙 숲길은 이곳의
성역인 포제청으로 이어지며, 서쪽 숲길과 동쪽 숲길은 흙길과 나무데크길이 섞여있다. 어느
길로 가든 남쪽에서 모두 만나며, 다시 정문으로 돌아오게 되어있다. 공원으로 들어서는 문은
정문 1개 뿐이며, 공원 밖에는 경작지가 펼쳐져 있다. 즉 밭 한복판에 숲이 있는 것이다.


▲  송석대(松石臺)

정문 동쪽(진행 방향 왼쪽)에는 송석대란 높은 대가 있다. 이곳은 정헌 김용징(靜軒 金龍徵)
이 후학을 가르치던 곳으로 1850년대 말에 그의 제자들이 지었다. 구릉지를 다듬어 3개 층으
로 겹돌을 쌓아 터를 다진 다음 반지름 4.5m의 원형 정자를 닦았는데, 현재 정자는 없고 완전
히 개방된 공간으로 있으며 매년 여름마다 애월문학회에서 시낭송회와 출판기념회를 열고 있
어 문학 공간의 기능은 녹슬지 않았다.


▲  인상정(仁庠亭)

송석대 맞은편(정문 서쪽)에는 인상정이라 불리는 공간이 있다. 이곳은 천문에 능했던 현일문
(玄日文)이 공부를 했던 곳으로 1889년 그의 후학들이 구릉지를 다지고 인상정이라 불리는 공
간을 지었다. 송석대처럼 정자가 없는 그냥 열린 공간으로 그 한복판에 오래된 나무가 자리하
여 고품격의 그늘을 선사한다.


▲  난대림 속에 나를 숨기다 (공원 서쪽 숲길)
아무리 따스한 남쪽이라고 해도 동남아나 아프리카가 아닌 이상은 이렇게까지
푸른 잎을 대놓고 드러내며 무성하기가 쉽지가 않은데 이곳은 계절의
변화도 안중에 없는 별천지 같은 곳이다.

▲  밀림처럼 우거진 서쪽 숲길 (1)

▲  밀림처럼 우거진 서쪽 숲길 (2)

통행 편의와 식물 보호를 위해 서쪽 숲길과 동쪽 숲길 일부에 나무데크길을 닦았다.


▲  정낭이 걸쳐진 포제단(酺祭壇) 출입구

금산공원 한복판에는 돌담에 둘러싸인 포제단이 있다. 이곳은 납읍리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
마을의 성역으로 서쪽에 제주도 스타일의 정낭이 있는 출입구가 있어 그곳으로 들어서면 된다.
허나 제삿날을 제외하면 정낭이 모두 걸쳐져 있어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다행히 정낭이
그리 높지가 않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살짝 안으로 발을 들였다.

▲  포제청 건물
제사 때를 제외하고는 늘 적적한 모습이다.

▲  난대림에 둘러싸인 포제단 뜨락
저 끝부분에 3개의 단이 있다.


이곳에서 지내는 제사를 '납읍리 포제','납읍리 마을제'라고 하는데, 남자들이 행하는 유교적
마을제인 포제와 여자들이 하는 무속 마을제인 당굿을 같이 벌이고 있다. 예전에는 음력 정월
초정일(初丁日)에 춘제(春祭)를 지냈고, 7월 초정일에 추제(秋祭)를 지냈으나 20세기 중반 이
후부터는 춘제만 지내고 있다. 그리고 마을에 일이 생겨서 정월 초정일에 제를 지내지 못하는
경우, 그 다음 중정일(中丁日)에 제를 지내는 융통성도 가지고 있다.
포제단으로 들어서면 남쪽(오른쪽)에 포제청이란 기와집이 있다. 이곳은 제를 지내고 준비하
는 건물로 원래는 초가였으나 최근에 기와집으로 손질했다. 북쪽(왼쪽)에는 3개의 조그만 석
단(石壇)이 누워있는데 이들 단은 손님신을 봉안한 포신단(酺神壇), 마을의 수호신을 봉안한
토신단(土神壇), 홍역이나 마마신을 봉안한 서신단(西神壇)이다.
예전에는 포신, 토신, 서신에게 모두 제를 올렸으나 홍역과 마마가 사실상 사라진 상태라 포
신과 토신에게만 제삿밥을 올린다.

이곳 제사는 '납읍리 마을제'란 이름으로 제주도 지방무형문화재 6호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  현무암으로 닦여진 3개의 제단 (서신단, 토신단, 포신단)
제단 앞에는 술이나 향로 등을 두는 조그만 돌이 있고, 단 위에는 위패 역할을
하는 키 작은 돌이 세워져 있다.

▲  금산공원 동쪽 숲길 (1)

▲  금산공원 동쪽 숲길 (2)

▲  주황색 피부를 드러낸 납읍리 감귤

금산공원을 1바퀴 둘러보니 1시간이 훌쩍 지났다. 서쪽 숲길로 들어서 포제청을 찍고 동쪽 숲
길로 나왔으니 공원의 공개된 공간은 모두 본 셈이다. (통제구역은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음)

이렇게 금산공원과의 인연을 마무리 짓고 다음 답사지로 가고자 제주도 간선 291번을 타고 한
림읍으로 나왔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금산공원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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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겨울 산사 나들이, 치악산 구룡사의 은빛 설경 ~~~ (거북바위, 구룡사계곡, 구룡폭포)

 


' 늦겨울 산사 나들이, 치악산 구룡사 '

▲  구룡사 소나무 숲길


 

울 제국이 막바지에 이르던 2월 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원주에 있는 치악산 구룡사를
찾았다.
그곳을 찾은 이유는 별거 없다. 서울에서 적은 비용에 간단히 갈만한 강원 영서/충청 지
역 명소를 물색하다가 그곳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치악산(雉岳山)은 이 땅의 국립공원의 하나로 구룡사는 치악산의 대표 관문이다. 그곳은
이미 중학교 때 인연이 있으나 그건 어언 2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래서 간만에 구룡사도
둘러보고 구룡사계곡을 따라 세렴폭포까지 가보기로 했다.

아침 9시에 집 부근 방학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회기역에서 경의/중앙선 전철로 환승
하여 양평역(楊平驛)에서 내렸다. 여기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중앙선 무궁화호 열차로 갈
아탔는데, 좌석이 없어서 강제 입석을 해야 했다.
원주(原州)의 관문인 원주역에 발을 내리니 바람이 칼날처럼 꽤 매섭다. 멀리 보이는 치
악산과 여러 뫼들은 겨울 제국(帝國)이 내린 하얀 옷을 반쪽씩 입고 있어 한겨울로 돌아
간 기분이다.

원주역에서 구룡사로 가는 원주시내버스 41번(관설동↔구룡사)을 타고 시내를 벗어나 변
두리로 나오니 멀리서만 보이던 하얀 눈이 바로 차창 밖에 진을 치고 있었고, 구룡사 종
점에 두 발을 내리니 여기는 시내와 달리 완전 겨울의 한복판 그 자체였다. 사방에 눈이
내려앉아 부질없는 설경(雪景)을 자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소쩍새가 울면서 겨울잠에 잠
든 천하를 깨우고, 천하만물들은 봄 환영에 여념이 없건만 겨울이 다시금 위엄을 보이며
원상태로 돌리니 완전 다된 밥에 재를 뿌린 격이 되었다.


▲  눈에 덮힌 구룡사 종점 주변 (학곡저수지 방향)


 

♠  구룡사 입문 (황장금표, 부도군, 거북바위)

▲  소나무가 무성한 구룡사 매표소 주변

구룡사 종점 주변에는 나들이꾼과 산꾼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
다. 날씨가 구려서 그런지 주말임에도 산꾼이 별로 없어 식당들은 대체로 썰렁하다.
치악산의 자랑인 황장목(黃腸木) 소나무가 훤칠한 키로 하늘을 훔치며, 그의 밑도리에 그늘을
드리운다. 한여름에 왔다면 정말 반가운 그늘이었겠지만, 겨울 끝 무렵이라 그 그늘이 은근히
춥다. 천하를 뒤덮은 눈구름이 잠시 개이고, 구름들 사이로 푸른 하늘과 햇살이 속살을 비추
어 이제 날씨가 개이는구나 싶었지만 그 역시 잠시 뿐이다.

식당 거리 끝에 이르니 썩 반갑지 않은 매표소가 나타나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대놓고 노려본
다. 입장료를 보니 어른은 무려 2,500원, 오기 전에는 막연히 2,000원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먹고 살기가 나처럼 힘든건지 무려 500원이나 높은 가격으로 중생을 맞이한다. 문화유산도 별
로 없는 절이 문화재관람료란 명목으로 고액의 돈을 대놓고 뜯으려 하여 절에서 많이 통용되
었던 여러 할인안을 제시했으나 무조건 정가를 내라고 인상을 쓴다.
그냥 되돌아가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다른 대체 장소를 둔 것도 아니어서 울며 겨자먹고 토하
는 심정으로 입장료를 치루었다. (국립공원 고찰 중 법원의 판결까지 무시하며 입장료를 뜯는
절이 여럿 있음)

이유도 불분명한 소위 구룡사의 입장료삥에 불쾌한 마음을 가득 품으며 유료의 공간으로 들어
서니 바로 왼쪽에 황장금표를 알리는 안내문이 나오고, 그 안쪽 높은 곳에 황장금표가 나그네
들의 시선도 받지 못하며 보호 난간에 둘러싸인 채, 누워있다.


▲  바위에 새겨진 학곡리 황장금표(黃腸禁標) - 강원도 지방기념물 30호

황장금표는 조선 조정에서 황장목이란 소나무를 보호하고자 백성들의 출입과 벌채를 금지하는
경고 안내문이다. 황장목은 나무 수심부분의 색깔이 누렇고, 몸이 단단한 우수한 소나무로 조
선 왕실에 필요한 물건이나 궁궐 건물을 지을 때 사용했다.
이 금표는 황장목이 자라는 곳 경계 지점에 설치되었는데, 폭 110cm, 높이 47cm, 둘레 270cm
크기의 자연산 바위로 그 피부에 '황장금표' 4자가 조금은 뚜렷하게 눈을 뜨고 있다. 근래에
금(禁)과 표(標) 사이에 동(東)이란 글자가 추가로 확인되어 황장금동표(黃腸禁東標) 5글자가
되었는데, 이는 여기서 동쪽이 황장금표 구역이니 건들지 말라는 뜻이다. 여기 외에도 구룡사
입구 주차장 부근 도로에도 황장금표가 하나 더 있다. (땅속에 좀 묻혀 있음)

조선 초에는 전국 60개소의 황장목 봉산(封山)이 있었으며, '관동읍지(關東邑誌)'에 구룡사가
황장소봉지(黃腸所封地)라 나와있다.


▲  구룡교(龜龍橋)

황장금표를 지나 3분 정도 가면 구룡탐방지원센터가 나온다. 여기서 계곡 위에 유연하게 걸린
구룡교를 건너면 소나무 등 온갖 나무로 가득한 구룡사 숲길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구룡교 난
간 양쪽 끝부분에는 용머리 장식이 달려있어 다리의 이름값을
돕는다.


▲  겨울에 잠긴 구룡교 주변 구룡사계곡

▲  북쪽을 바라보는 원통문(圓通門)

구룡교를 건너 얼마 안가면 원통문이란 이름의 일주문(一柱門)이 마중을 한다. 겨울이 채색한
하얀 지붕을 머리에 인 원통문 옆에는 차량을 위한 길이 나있어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은데,
절에 왔으면 절의 정문인 일주문을 이용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속세에서 가져온 거추장스러운 번뇌를 멀리 날려줄 것을 산바람에 부탁하며 문을 들어선다.


▲  구룡사 승탑(僧塔, 부도)들

일주문을 지나 2분 정도 가면 길 오른쪽에 승탑과 비석이 어우러진 공간이 나온다. 이곳은 구
룡사 승려의 넋이 깃든 승탑의 보금자리로 모두 7기가 있는데, 이중 6기가 조선 후기에 조성
된 것이다. 조그만 몸통에 고색의 때가 자욱한 이들은 석종형(石鐘形) 승탑으로 조금씩 모습
을 달리하고 있다.
승탑 사이로 3기의 탑비(塔碑)가 있는데, 세량당 초운대사탑(洗梁堂 楚雲大師塔)과 충허당(沖
虛堂), 뇌파당(雷波堂)의 비석으로 18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조성된 것이다.


▲  무총대선사탑(武總大禪師塔)과 탑비

승탑 무리를 장식하는 승탑 중 가장 앞에 있는 있는 것이 무총대선사의 탑이다. 이곳에서 가
장 큰 승탑으로 뒤쪽에 병풍처럼 늘어선 고참 부도 6기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자리를 지킨다.
이 탑과 탑비는 2005년에 조성된 것으로 탑의 주인인 무총대선사는 구한말(舊韓末)에 활약했
던 승려이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하늘과 땅, 사람, 귀신이 모두 분노하자 썩어빠진 권력층 타
도와 토왜(討倭)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전국적으로 의병(義兵)이 일어났다. 무총은 승병(僧兵
)을 일으켜 의승장(義僧將)으로 경상도로 내려가 승병 봉기를 시도했고, 경북 예천에서 대구
승려 성기(聖基)가 경상도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짜고 의병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그를 응
징하는 등, 많은 활동을 했다.
그의 활약은 원주항일기념사업회에서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을 고증
하는 과정에서 밝혀져 뒤늦게나마 그의 승탑과 비를 만들어 그의 애국충절을 기렸다.


▲  승탑 무리와 국사단 사이에 닦여진 쉼터
숲길 한복판에 너른 공간을 닦아 쉼터 겸 식당을 두었다. 앞 공터에는 둥글게 터를
다지고 조그만 돌탑을 테두리 부분에 쌓아 소소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  구룡사 국사단(局司壇)

쉼터를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은 차량, 오른쪽은 뚜벅이 길인데, 어느 길
로 가든 크게 상관은 없다. 차량의 왕래도 별로 없는 편이고, 어느 길로 가든 구룡사는 나오
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오른쪽 길로 가다보면 길 오른쪽에 높이 터를 다지고 들어선 국사단을 만나게 된다. 이 건물
은 절터를 지키는 신을 봉안한 건물로 여기서 국사(局司)는 절터를 뜻한다. 옛날부터 있던 것
으로 예전에는 1칸짜리 맞배지붕 건물이었으나 근래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덩치를 불렸다.
경내나 경내 인근에 이렇게 국사단을 둔 절은 가야산 해인사(海印寺)가 대표적이다.

평소에는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문창살 사이로 속인들이 낸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 보는 수
밖에는 없는데, 어두컴컴한 내부에는 위패가 봉안되어 있을 뿐, 딱히 다른 것은 보이질 않는
다.


▲  구룡사를 지키던 거북바위

국사단을 지나서 왼쪽을 잘 살펴보면 목과 몸이 끊어진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뚜벅이길보다는 차량길로 가면 찾기가 더 쉬운데 이 바위가 구룡사의 오랜 지킴이인
거북바위이다.
구룡사에는 2개에 재미난 전설이 전하고 있는데, 하나는 창건설화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거
북바위에 얽힌 설화이다. 오랫동안 절의 운을 지키고 선 바위였으나 오히려 사람들의 욕심으
로 목이 끊어져 두 동강이 난 비운의 존재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에는 치악산에서 나오는 산나물 상당수를 왕실에 공납(貢納)했다. 그래서 구룡사 주
지승을 산나물 공납을 담당하는 책임자로 삼았는데, 산에서 나온 모든 산나물은 모두 주지승
의 검사를 받아야 했다. 여기서 통과된 것만 서울로 보냈던 것이다. 그래서 인근 사람들은 어
떻게든 심사에서 통과하고자 또는 나물값을 제대로 받고자 주지승에게 별도의 뇌물을 건넸다.
계속되는 뇌물 공세에 입이 귀까지 걸린 주지승은 욕심이 더욱 커져 돈 챙기기에 급급하였고
그로 인해 절의 이미지가 하락하여 자연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승려가 찾아왔다. 그는 절이 몰락한 것은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이
라고 하면서 그 바위를 쪼개 없애면 좋을 거라고 했다.
그 말에 두 귀가 솔깃해진 주지승은 바로 거북바위를 두 동강냈지만 오히려 신도의 수가 줄었
고, 수입이 줄어 문을 닫아야 될 지경에 이르렀다. 아마도 구룡사에 반감이 있거나 인근 경쟁
사찰의 승려가 거북바위가 절을 지키는 존재임을 눈치채고 절을 망하게 하고자 그런 말을 던
진 듯 싶다. 그걸 주지승이 생각도 없이 받아들여 절 지킴이 바위를 스스로 아작낸 것이다.

이후 어느 날, 도승 하나가 찾아왔다. 주지승이 넋두리를 하니 도승이
'절이 몰락한 것은 그 이름이 맞지 않기 때문이오'

그 말에 주지승이 귀를 크게 하고
'그건 무슨 말씀이오?'

그러자 도승이
'이 절은 절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가 절운을 지켜주었소. 허나 그 바위를 동강을 내어 혈맥을
끊었으니 운이 막힌 것이오'

주지승이 애타게 방안을 묻자. 도승은
'거북바위는 이미 죽었으니 그를 다시 살린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구(九)에서 구(龜)로 바꾸
시오. <그 당시 절 이름은 구룡사(九龍寺)였음>'

그 연유로 지금의 구룡사(龜龍寺)로 이름이 갈렸던 것이다. 이후 절은 그런데로 흥성을 누려
치악산 제일의 사찰이라는 지위를 누리게 된다.

거북바위는 마치 거북이가 오르막을 오르는 모습처럼 보인다. 하여 그의 진면목을 보고자 한
다면 거북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에서 보기 바란다. 그럼 정말 거북바위의 이름이
허언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원래는 목과 몸통 부분이 붙어있었으나, 생각 없는 주지승이
목을 끊어버려 지금의 비통한 모습이 되었다.


▲  하얀 소복을 걸친 구룡사 은행나무 (강원-원주-38호)

거북바위를 지나면 경내를 가리고 선 커다란 은행나무가 중생을 맞이한다. 이 나무는 추정 나
이가 약 200년 정도로 높이 19m, 가슴둘레 1.25m에 큰 나무이다. 봄이 곧 도래할 시기라 봄맞
을 준비에 부산해야 되지만 늦겨울이 내린 하얀 눈송이가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가득 들러 붙
어있으니 진정한 봄은 아직도 멀었다. (보통 겨울은 3월까지 감)

은행나무를 지나면 산자락에 터를 다지고 담장과 보광루 등의 여러 굵직한 건물로 속살을 가
린 구룡사 경내 밑에 이르게 된다.


 

♠  치악산 북쪽에 안긴 원주 제일의 고찰, 구룡사(龜龍寺)

치악산 북쪽 자락 소나무숲에 포근히 둥지를 튼 구룡사는 치악산에서 제일 큰 절이자 원주 지
역에서 가장 큰 절이기도 하다. 흔히 치악산에 가면 구룡사를 많이 거쳐간다. 다른 코스도 있
지만 구룡사가 가장 널리 알려졌고 교통도 괜찮기 때문이다.

구룡사는 666년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구룡사의 주장과는 달리 당시
의상은 당(唐)나라에 머물며 한참 화엄종(華嚴宗)을 익히던 시절이므로 도저히 시기가 맞지가
않는다. 그는 661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670년에 귀국을 했기 때문이다. 귀국하여 신라 조정의
허가를 받아 세운 것이 영주 부석사(浮石寺)이다.
의상대사 외에도 무착대사(
無着大師)란 인물이 비슷한 시기에 세웠다고 하나 이를 입증할 기
록과 유물은 전혀 없으며, 조선 초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구룡사
의 이름 3자는 나오지 않는다. 또한 경내에 전하는 유물도 모두 조선 후기(18세기 이후) 것으
로 1706년에 만들어진 와당이 제일 오래된 것이다. 그러니 구룡사의 바램대로 신라는 커녕 고
려 때 지어졌을 가능성도 적어 보이며, 조선 초나 중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중기까지도 적당한 사적(事績)이 전해오지 않으며, 18세기 중반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
圖書)에는 85칸의 건물이 있고, 절 앞에 용연(龍淵)이 있어 가뭄이 들었을 때 기도를 하면 항
상 반응이 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이 구룡사의 제일 오래된 기록이다. 그 시절에는 보광
루나 대웅전, 승탑(부도), 삼장탱화 등이 조성되던 때이기도 하다.

1895년 이곳 승려인 총무대선사가 의병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6.25시절에는 총탄도 비켜
가 딱히 피해가 없었다. 1966년 보광루를 해체복원하고, 1968년에 심검당과 요수를 보수했으
며, 2000년 이후에도 꾸준히 불사(佛事)를 벌여 지금의 큰 규모를 이루게 되었다. 허나 2004
년에는 강원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던 대웅전이 화재로 무너져 안그래도 없는 지정
문화재가 하나 줄어들었다.

▲  구룡사 범종각(梵鐘閣)

▲  설선당과 적묵당(寂默堂)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중심으로 천불전, 보광루, 설선당(종무소), 응진전, 관음전, 삼성
각, 사천왕문, 국사단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보광루를 빼면 고색의 기운은 별로 없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광루,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복장유물(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174호), 아
미타설법도(강원도 지방문화재자료 160호), 금고(강원도 지방문화재자료 161호) 등의 지방문
화재와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있으며, 그 외에 삼장보살도(보물 1855호)와 용다사(龍多
寺) 동종(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133호)도 있으나 이들은 신변보호를 위해 멀리 월정사(月精
寺) 성보박물관에 가 있다.
(목조관음보살좌상과 아미타설법도, 금고는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해 모두 지나치고 말았음)

구룡사는 하늘을 가리고 늘어선 수해(樹海) 속에 자리해 있으며, 멋드러진 계곡을 옆에 끼고
있어 경승지로 꼽힌다. 계속되는 불사로 커다란 건물이 마구 들어서면서 예전과 달리 조촐하
고 아늑했던 멋은 좀 떨어지긴 했으나 속세(俗世)와 적당히 거리를 두며 첩첩한 산골에 위치
해 있어 번뇌를 털기에는 좋다.
고색의 기운이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재밌는 창건설화를 간직하고 있어 절을 찾은 중생들에게
웃음을 머금게 한다.

★ 믿거나 말거나 웃고 넘기는 구룡사 창건설화
의상대사(또는 무착대사)는 절을 세울 명당을 찾고자 치악산을 온종일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
가 지금의 절자리를 발견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 이유는 이곳 동쪽으로 치악산의 주봉인 비
로봉(毘盧峯)이 있고, 다시 천지봉의 지맥(地脈)이 앞을 가로지른데다가 수려한 계곡이 흐르
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는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연못이야 메우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그
곳에 9마리에 용이 살고 있었다. 하여 의상은 연못 앞에서 한숨을 쉬며
'연못을 메우고 법당을 지어야겠는데, 용이 살고 있으니 그들을 내보내야 일을 할 수 있겠군,
참 난감하구나~~'

그 말을 엿들은 용들은 뚜껑이 단단히 열려 밖으로 나와 의상에게 시비를 걸었다.
'야 땡중! 너가 우리를 내쫓을 생각인가본데, 우리가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을 것이야. 그러니
서로 내기를 하는 건 어떠냐? 우리가 이기면 너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고, 만약 너가 이기면
흔쾌히 이곳을 넘겨주겠다'
용이 의상을 깔보며 자신만만하게 내기를 제안하자 의상은 빙그레 웃으며
'너희들이 무슨 재주를 부리려고 하느냐?'
그러자 용은
'잠시 뒤에 알게 될 것이다. 각오해라'

답을 하며, 9마리가 모두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뇌성벽력과 함께 장대비를 쏟아 부어 순
식간에 모든 산들이 물에 잠겼다. 한참 동안이나 비를 퍼부은 용은 의상이 물에 빠져 골로 갔
을 것이라 여기고 비를 거두고 내려왔다. 허나 뜻밖에도 의상은 비로봉과 천지봉 사이에 조그
만 배를 띄우고 낮잠을 자고 있었다.

▲  경내 바깥 부분

▲  천불전(千佛殿)

부시시 잠에서 깬 의상은 그의 멀쩡한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진 용을 보며
'너희들 재주가 고작 그것뿐이냐. 실망이구나. 이제 내가 조화를 부릴 차례이니 너희들은 눈
을 크게 뜨고 잘 지켜보아라'

하면서 부적 1장을 그려 연못에 넣었다. 그러자 연못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고, 뜨거
움을 참지 못한 용은 연못 밖으로 뛰쳐나와 한달음에 동해바다로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얼마
나 다급했던지 용 8마리는 구룡사 앞산을 8조각으로 쪼개어 도망을 친 것이다. (현재 구룡사
앞산은 동해를 향해 8개의 골이 패여져 있음)
그리고 나머지 용 1마리는 눈이 매우 침침해 멀리 못가고 절 남쪽 구룡소(용연)에 들어가 살
았다고 한다. 그 용은 가뭄 때 비를 빌면 비를 내려주는 등, 좋은 일을 많이 했다고 하며, 늦
게까지 살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구룡사란 이름은 바로 9마리의 용을 내쫓은 설화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구(九)가 구(龜)로 변경됨>

이 창건설화는 구룡사에서 그럴싸하게 내놓은 전설이라 곧이 곧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하지만
전설의 내용을 통해 현재 절 자리에 9마리의 용으로 표현된 토착 종교 세력이 있었음을 추정
해 볼 수 있다. 절의 창건주는 그 자리가 마음에 들어 평화롭게 살던 그들을 내쫓으려고 했고
서로 신경전을 벌이다가 창건주의 빛나는 승리로 그들을 내쫓고 절을 세운 것을 이런저런 살
을 붙여 전설로 다듬은 것이다.

▲  구룡사 앞 산줄기

▲  구룡소

* 구룡사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1029 (구룡사로 500 ☎ 033-732-4800)
* 구룡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설산(雪山)이 되버린 구룡사 앞 산줄기
8마리의 용이 저 산줄기를 쪼개고 도망쳤다고 한다. 얼마나 놀랬으면 그랬을까..

▲  거대한 사천왕문(四天王門)

구룡사는 지형적인 위치로 법당을 비롯한 상당수 건물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경내 앞에 자
리한 사천왕문 역시 용들이 쪼갰다는 동쪽 산줄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 문은 부처와 절을 지
키는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천왕문치고는 특이하게 중층구조를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2000년 이후에 지어진 그는 겉은 2층이지만 속은 1층으로 마치 성문처럼 규모가 장대하여 속
인들을 잔뜩 주눅들게 만들며, 우리나라 천왕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라고 한다.

▲  사천왕문 좌측에 자리한 보광공덕탑
(普光功德塔)

▲  사천왕문 우측의 석조미륵불상

▲  각자의 애용품을 지니며 문을 지키고 선 사천왕의 위엄
저들의 검문을 거쳐 경내로 들어선다.

▲  보광루(普光樓) - 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145호

천왕문을 들어서 높이 걸린 계단을 오르면 보광루가 바로 경내를 가리며 나타난다. 이 건물은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로 19세기 이후에 지어졌다. 누각이다보니 2층 규모로 되어있는데 아
랫층은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통로를 만들었으며, 윗층에는 우물마루
로 바닥을 만들고 대웅전이 있는 서쪽을 빼고 싹 벽으로 막아 동쪽으로 창문을 내고 강당(講
堂) 및 법회 공간으로 사용했다.
정면 가운데 칸인 평방(平枋)에는 치악산 구룡사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
주며, 누각 아랫층 가운데에 마련된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 마치 태양이 떠오르듯 천천히 위
로 솟아나 웅장한 규모를 드러낸다.
보광루 2층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멍석이 깔려져 있었다. 3명이 3달에 걸쳐 만들었다
고 전하는 이곳의 자랑으로 현재는 보호를 위해 깊은 곳에 꽁꽁 숨겨두어 관람이 어렵다.


▲  보광루 앞에서 바라본 사천왕문 지붕과 치악산 북쪽 줄기
잠시 맑은 하늘을 되찾더니만 곧 구름들이 몰려와 잔뜩 인상을 부린다.
그리고는 다시 폭설을 투하해 치악산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  구룡사 둘러보기

▲  대웅전(大雄殿)

보광루와 마주보고 있는 대웅전은 구룡사의 법당(法堂)으로 한때는 강원도 지방유형문화재 24
의 지위를 누렸던 존재이다. 허나 2003년 화재로 무너지면서 지방문화재의 지위가 박탈되었
으며, 이후 예전 모습 그대로 복원을 했으나 날라간 지방문화재의 지위는 회복하지 못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커다란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 봉안된 석가3존불과 신중탱, 감로탱 등
은 모두 2004년 이후에 조성된 것들이라 고색의 때는 찾을 수 없다.


▲  대웅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나란히 3존불을 이루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석가불은 2003년 대웅전 화재에 대한 불만일까? 인상을 조금 쓴 듯 보이며 좌우 협시
불(夾侍佛)은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들 뒤에는 후불탱화가 든든하게 걸려있다.

▲  붉은 지붕의 화려한 닫집
너무 휘황찬란하여 눈이 멀 지경이다.

▲  대웅전 우측 영가단(靈駕壇)에 있는
최규하 전대통령 내외 영정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샘터
평소에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사람이 샘터 주
변 네모난 공간에 다가서면 알아서 물을 쏟아
내는 21세기형(?) 자동시스템의 샘터이다.

     ◀  천불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좌
우에 협시해 있다. 좌우 벽에는 조그만 금동불
(金銅佛) 1,000기가 빼곡히 들어앉아 일대 장
관을 이룬다.


▲  대웅전 앞 3층석탑
대웅전 정면이 아닌 다소 우측에 비켜 자리한 탑으로 근래에 장만했다.

▲  천불전 좌측에 놓여진 탱화 3점
저들에게 맞는 마땅한 자리가 없는지 천불전 좌측 구석에서 잉여 신세를 지내고 있다.
제일 앞에 놓인 것은 산신탱으로 흰 수염의 산신 옆에 앉은 이는 여자 산신이다.
허나 그림으로 봐서는 완전 산신 부부처럼 다가온다.

▲  천불전 뒤쪽 높다란 곳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산신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의 보금자리로 칠성탱은 2000년에,
산신탱과 독성탱은 2002년에 그려졌다.

▲  산신 가족이 그려진 산신탱

▲  칠성 가족이 그려진 칠성탱

▲  소나무 밑에 앉은 독성이 그려진 독성탱

▲  관음보살의 거처인 관음전(觀音殿)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응진전(應眞殿)

대웅전 좌측 뒤쪽에 있는 관음전과 응진전은 2000년 이후에 숲을 밀어내고 일군 공간이다. 응
진전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羅漢), 그리고 조그만 500나한이 봉안되어
있으며, 나한의 모습이 우리나라 7,000만 인구만큼이나 다양하여 눈길을 끈다.


▲  응진전 석가불
석가불 좌우로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이 합장인을 선보이며 서 있다.

▲  나한으로 가득한 응진전 내부


▲  고양이 같은 호랑이를 옆에 품은 나한의 위엄 <나반존자(那畔尊者)인듯?>

▲  눈구름이 몰려오더니 이내 눈폭탄을 투하한다.


 

♠  치악산 마무리

▲  폭설에 시야마저 흐릿한 사천왕문 주변

절을 둘러보는 사이에 겨울의 사주를 받은 구름들이 전력을 다시 가다듬고 하늘을 가렸다. 아
직 오후 한참 시간이지만 이내 저녁처럼 어두워지고 다시 눈폭탄을 투하하면서 천하는 벌집이
몇 번이나 뒤집힌 듯, 혼란에 빠진다. 겨울 산행 장비를 갖추지 못한 나는 여기서 더 올라갈
것인지. 쿨하게 철수할 것인지를 고심해야 했다. (그날 기상청은 눈이 안온다고 예보했음;;;)

그래도 개념없이 비싼 입장료를 치르고 여기까지 왔는데, 구룡소와 선녀탕까지는 올라가야 직
성이 풀릴 듯 싶어서 사천왕문 남쪽에 있는 구룡사 기념품점에서 조금 대기를 하다가 눈의 공
세가 약간 멎은 틈을 타 다시 길을 나섰다.


▲  구룡소(九龍沼)와 구룡폭포

구룡사 기념품점에서 길을 나선지 1분도 안되어 기가 막힌 풍경이 나의 발길을 붙잡고 늘어진
다. 바로 구룡소이다. 이곳은 절 창건주에게 추방된 9마리의 용 중, 시력이 안좋은 용이 살았
다는 현장이다. 그 용은 이곳에 머물며 가뭄에 비를 내려주는 등, 좋은 일을 하다가 승천했다
고 전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전설일 뿐이다.

소의 수심이 깊고, 색감이 아주 연해 용이 살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청정함을 자랑하며, 구
룡소 위에는 조촐한 높이의 구룡폭포가 상류의 물을 실타래처럼 흘려보내고 있다. 구룡소 주
변은 자연보호구역으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니 계곡에 애써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  구룡소 절경에 단단히 시샘한 겨울이 눈을 날리며 그를 가리려고 한다.

▲  구룡소 옆 탐방로 (구룡사 방향)

▲  눈에 뒤덮힌 구룡사계곡 상류
봄을 알리는 소쩍새의 울음소리도 정녕 소용이 없는 것인가?

▲  치악산으로 올라가는 산길
겨울이 그린 수채화에 그저 감탄사만 나올 뿐이다. 인간의 그 잘난 언어와 문자로
감히 대자연의 작품을 표현한다는 것이 건방질 정도로 말이다.

▲  나무로 지어진 구룡자연해설센터

구룡소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구룡자연해설센터가 나온다. 이곳은 치악산의 자연과 생태를 살
펴보고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자연 공부를 하는 공간으로 주변에 여러 꽃과 식물을 심어 자
연학습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겨울에 의해 완전 눈밭이 되버렸으니 현재로써는 할 것
이 없다. 잎이 피고 꽃이 자라는 3월 말 이후에나 그 역할을 제대로 하게 될 것이다.


▲  구룡자연해설센터 주변 계곡

구룡자연해설센터에서 나의 발길은 멈추었다. 세렴폭포와 선녀탕까지 올라가고 싶었으나 날씨
도 영 좋지 못해 가고자 하는 의욕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조금은 아쉽고 여운이 좀 남지
만 어차피 다음이란 것이 있으니 언젠가는 또 오지 않겠는가?

발길을 180도 돌려 구룡사로 나올 때는 길을 좀 달리하여 계곡 동쪽에 있는 대곡야영장을 경
유했다. 야영장과 식수대는 아직도 겨울의 단잠에 빠져 깨어나질 못했다. 한없이 쏟아지던 눈
도 이젠 고갈이 되었는지 완전히 멎었고,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삐죽 속살을 드러낸다.

구룡사를 거쳐 내려오면서 앞서 언급한 거북바위를 둘러보고(올라갈 때는 어디에 있는지 몰라
서 지나쳤음) 일주문과 구룡교, 황장금표를 거쳐 구룡사 종점으로 내려오니 마침 속세로 나가
는 원주시내버스 41-1번(구룡사↔관설동)이 치악산의 청정한 기운을 가득 머금으며 떠날 준비
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에 머뭇거림도 없이 그 버스를 잡아타고 속세로 나왔다.

이렇게 하여 늦겨울 치악산 구룡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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