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초파일 절 나들이 ~ 양평 용문산 사나사 (사나사계곡, 함왕혈)


' 4월 초파일 절 나들이 ~ 양평 용문산 사나사(舍那寺) '
용문산 사나사



올해도 변함없이 찾아온 불교의 경축일 4월 초파일을 맞이하여 그 전날, 양평에 있는 용문산
사나사를 찾았다.

집 부근 방학역에서 1호선을 전철을 타고 중앙선과 만나는 회기역에서 중앙선 용문행 열차로
환승하여 양평에 발을 내린다. 집에서 여기까진 1시간 50분 정도 걸렸다. 예전에는 양평까지
무궁화호 열차나 시외직행버스를 타고 가야했으나 덕소에서 끊긴 중앙선 전철이 북한강을 건
너 국수로 연장되고, 2010년에 용문까지 이어지면서 예전보다 빠르고, 편리하고 저렴하게 서
울과 양평을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중앙선의 연장은 수도권 변방에 머물러 있던 양평 고을의
한줄기 희망을 안겨준 것이다. 허나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고 했던가? 용문행 열차의 배차
간격이 평균 30분이라 1대를 놓치면 그야말로 기다리다 졸도할 수도 있다. 나도 간만의 차이
로 열차를 놓쳐 꼼짝없이 30분을 기다려야했다.

전철 개통으로 새롭게 몸단장을 한 양평역을 나와 역 남쪽에 있는 양평군청4거리로 갔다. 여
기서 사나사가 있는 용천리까지 군내버스를 타야 되는데, 배차간격이 1시간이 넘는다.그렇다
고 정류장에 시간표가 달려있는 것도 아니니 운이 나쁘면 정말 1시간 이상을 죽치고 앉아 기
다려야 되는 불상사까지 발생할 수 있다. 환승할인시간(평시는 33분, 21시부터 다음날 7시까
지는 66분) 안에만 와준다면 나로써는 그저 굽신할 따름, 허나 운이 따랐는지 기다린지 겨우
8분 만에 용천리행 버스가 모습을 비춘다. 그때는 정말 대박을 맞은 듯 얼마나 기쁘던지. 덕
분에 그만큼의 시간을 벌었으니 말이다.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를 벗어나 조그만 농로를 10분 정도 비집고 들어가 용천2리 사나사입구
에 발을 내린다. 집에서 여기까지는 70km가 넘는 거리인데 수도권 환승할인제도와 전철 개통
에 힘입어 단돈 2,000원에 저렴하게 왔다. 예전 같았으면 정말 어림도 없을 금액이다.

사나사입구인 용천2리 마을회관에서 사나사까지는 용문산의 품으로 30분 정도 걸어가야 된다.
초파일 전날이고 평일이라 그런지 절로 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용천2리 마을도 나의 숨소리
가 미안할 정도로 고요하기만 하다. 그런 마을 뒤에는 용문산의 가장 서쪽 봉우리인 성두봉(
441m)이 든든한 모습으로 마을을 굽어본다.


▲ 용천리 마을의 든든한 후광 성두봉(441m)
저 봉우리 북쪽에 사나사가 안겨져 있다.


♠ 양평함씨의 성지(聖地)를 품은 사나사계곡

▲ 사나사 가는 길

용천리에서 사나사로 가는 길은 그늘이 없는 시골길이다. 여름 제국(帝國)의 도래가 임박했는지
햇살의 기운이 예사롭지가 않다. 조금씩 새어나오는 땀방울을 간간히 불어오는 산바람과 손수건
으로 훔치며 멀리 보이는 용문산의 품으로 길을 재촉한다.

길 주변에는 농가들이 넓직하게 간격을 두고 웅크리고 있고, 경작지에는 농민들의 정성을 먹고
자란 농작물이 찬란한 햇살을 받으며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었다. 오랜만에 누리는 목가적
인 풍경에 속세에서 오염된 안구가 제대로 정화가 된다.

길을 걸을 수록 닿지 않을 것 같던 용문산의 품은 한층 가까워지고 그늘이 없던 길은 그늘이 충
만하고 계곡을 옆구리에 낀 숲길로 서서히 변해간다. 농가들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대신 속세
를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펜션과 주막들이 그 자리를 채워간다. 평일이라 거의 문을 닫아걸고
졸고 있는 그들을 차례대로 지나면 마지막 주막과 함께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면서부터는 속인(俗人)들의 공간이 아닌 완전한 자연의 공간으로 바뀐다. 더 이상 속인의
집은 나오지 않고 오로지 산과 계곡이 절로 들어가는 길에 전부인 것이다.


▲ 계곡과 나란히 달리는 사나사 가는 길

사나사를 옆에 끼고 흐르는 사나사계곡은 용문산의 서북쪽을 적셔주는 계곡으로 띠끌 하나 없는
청정한 기운을 품고 있다. 수량이 풍부하고 물이 시원하며 삼삼하게 우거진 용문산 숲에서 솔솔
나부끼는 산바람이 어우러져 여름의 제국도 고개를 숙이고 피해간다.

사나사계곡은 다른 말로 '함왕골'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이 계곡이 양평함씨<楊平咸
氏 = 양근함씨(楊根咸氏)>의 성지(聖地)이기 때문이다. 계곡 상류에 함왕성(咸王城)이란 오래된
산성(山城)이 있는데, 이는 양평함씨의 시조인 함혁(咸赫)이 쌓았다고 전한다. 함혁은 삼한시대
(혹은 삼국시대)에 중원대륙에서 넘어온 사람으로 용문산 서쪽에 성을 쌓고 조그만 세력을 꾸렸
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 함왕(咸王)을 칭했는데, 그런 연유로 성의 이름이 '함왕성'이 되었다.
즉 우리나라 함씨의 발생지가 되는 셈이다. 성 밑에는 사나사계곡이 흐르는데, 그 계곡은 함왕
성에 터전을 둔 함씨세력에게 생명수와 같아 특별히 옆에 끼고 살았으며, 사나사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함왕혈이 이를 증명한다. 또한 계곡 중간에 자리한 사나사는 함씨의 지원에 힘입어 그들
시조를 모신 원찰의 역할을 하게 된다.

후삼국시대에 이르러 함씨세력의 우두머리인 함규(咸規)가 세력을 크게 불렸는데, 고려 태조(太
祖)를 도와 고려의 공신(功臣)이 되었으며, 태조에게 양근함씨(양근은 양평의 옛 지명으로 양근
고을과 지평고을이 합쳐져 생긴 이름)란 본관을 하사 받는다. 그 이후 함씨 세력의 일부가 강릉
으로 넘어가 강릉함씨를 이루게 되며, 강릉함씨도 양근과 마찬가지로 함왕인 함혁을 시조로 받
들고 있다. 함왕의 정체에 대해서는 시조(始祖)인 '함혁'이 아닌 '함규'로 보기도 한다.


▲ 함왕혈을 알리는 표석

▲ 양평함씨의 시조가 태어난 곳이라 전하는 함왕혈(咸王穴)

함왕혈을 알리는 표석의 안내로 계곡으로 내려가면 물에 잠긴 함왕혈이 나온다. 함왕혈은 물에
잠긴 암반에 동그랗게 뚫린 자연 구멍으로 그곳에서 양평함씨의 시조인 함왕이 태어났다고 전한
다. 이곳에 서린 함왕설화는 다음과 같다.


삼한시대에 용문산 서쪽에 함씨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하여 살고 싶었
으나 그럴만한 지도자가 없어서 별개의 부족을 이루며 분열되어 살았다. 통합을 갈망하던 그들
은 지도자를 선정해달라고 하늘에 제를 올렸다. 그들의 바램이 하늘을 감동시켰는지 얼마 뒤 함
왕혈에서 튼실하고 총명한 눈동자를 지닌 옥동자가 나왔다. 그들은 하늘이 점지한 자신들의 지
도자라 생각하고 왕으로 세웠다. 아마도 바로 세우진 않고 지도자 교육을 시켜 성인이 될 때 지
도자로 세웠을 것이다. 그 이후 함씨는 통합을 이루어 나라를 세우고 함왕성을 만들면서 세력이
점차 흥했다. 허나 그 번성도 오래가지 못했다. 주변 세력의 공격을 받아 함왕성이 무너지고 왕
이 죽으면서 함씨의 나라는 결국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나라가 망한 이후 어느 날 사나사계곡을 지나던 나그네가
'어머니를 저렇게 버려두고 자기들만
번창하길 바라니 나라가 망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 뼈가 있는 말에 함씨들은 그
제서야 왕이 태어난 바위(함왕혈)를 성 밖에 두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왕이 태어난 바
위를 중심으로 성을 다시 쌓았으나 다시 흥할 운명이 없었던지 예전의 번영을 되찾지 못했으며,
적당한 군주가 나타나지 못하면서 함씨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후손
들은 그 함왕혈 주변에 보호책을 설치하고 제를 지내며 함왕을 시조로 모셨다.

이상이 함왕혈에 깃들여진 함왕설화이다. 설화의 내용대로 함씨의 시조 함왕(함혁)은 함왕혈에
서 태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함씨시조인 함왕이 여기서 물을 마시거나 물 속에 잠긴 구멍에 필
을 받아 세력의 번영이나 가뭄 해소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이 점차
양평함씨의 성지로 돋게 되고 함왕설화까지 품게 된 것이다.


▲ 보기만 해도 시원스런 사나사계곡

▲ 함왕혈 부근에 함왕성터 표석

▲ 함왕성터 표석이 있는 곳에 성터 비슷하게
돌이 뭉쳐져 있다.


함왕혈을 지나면 함왕성터를 알리는 표석과 함께 성터 비슷하게 뭉쳐진 돌무데기가 나온다. 함
왕성이 여기까지 내려왔나 싶어서 확인해보니 진짜 함왕성이 아니다. 함왕성은 계곡 상류 산등
성이에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함왕설화에 나오는 왕이 태어난 바위를 중심으로 다시 성을 쌓았
다는 내용에 따라 근래에 표석과 함께 쌓은 돌무데기이다. 여기까지 함왕성이 미친다면 당연히
이를 알리는 문화재 안내판이 있었을 것이다. 허나 안내판은 없다.


♠ 사나사를 들어서며

▲ 몸단장 중인 사나사 일주문(一柱門)

함왕혈을 지나 다리를 2개 건너면 '용문산 사나사'라 쓰인 일주문이 중생을 반긴다. 드디어 나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사나사가 일주문을 시작으로 슬슬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문은 1982년 5월 주지승인 포운당 태공선사가 서울 봉은사(奉恩寺)의 일주문을 양도받아 옮
겨 지은 것으로
문이긴 하지만
여닫는 문짝이 없다. 누구든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일주문은
중생을 걱정하는 부처의 마음을 상징한다. 인간들이 일주문의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면 세상은
정말 아름다울텐데 인간이란 짐승과 신(神) 중간에 어정쩡한 들어앉은 존재라 그러지를 못한다.
그런 주제에 만물의 영장을 칭하며 천하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악을 행하니 이러다 언젠가는 자
연의 대보복을 제대로 받을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사나사의 당우(堂宇)들이 서서히 떠오르듯 모습을 드러낸다. 경내(境內)를 코
앞에 두고 길 왼쪽 화초가 우거진 공터에는 비석 2기가 잠깐 보고 가라며 눈짓을 보낸다. 우람
한 모습의 오른쪽 비석은 근래에 지어진 대적광전신건비이고 다소 비리해 보이는 왼쪽 비석은
조선 후기에 세워진 불양비이다.

◀ 사나사 불양비(佛養碑)

불양비는 1773년(영조 49년) 양평 백성들로 이
루어져 조직된 당산계(堂山契)가 전답(田畓)을
기증한 것을 기리고자 세운 비석이다. 여기서
불양(佛養)은 절에 기증했다는 뜻이다.

비석의 높이는 지붕돌을 포함하여 2.1m, 비신(
碑身)의 높이 1.5m, 비신의 폭 65㎝이다. 비신
에는 다량의 운모(雲母)가 섞여 있어 돌의 질이
좋지 못하다. 그러인해 고작 230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치 500년 이상 산 비석처럼 쭈글쭈
글해 보인다. 장대한 세월이 무심히 할퀴고 간
상처 투성이로 마멸이 심해 비문의 전체 해독은
불가능하다.

비석의 바닥돌과 지붕돌은 화강석으로 만들었다.

◀ 대적광전신건비(大寂光殿新建碑)

불양비와 약간의 간격을 두고 자리한 대적광전
신건비는 1993년 대적광전을 세운 것을 기념하
고자 세운 것으로 절의 내력까지 소상히 적고
있어 사적비(史蹟碑)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근래에 세운 비석이라 그런지 귀부(龜趺)와 이
수(螭首)의 피부가 매우 띠끌없이 깨끗하며, 비
신 전면에는 '龍門山舍那寺大寂光殿新建緣起碑(
용문산사나사 대적광전신건연기비)'라 쓰여 있
다. 뒷면에는 시주자의 명단이 빼곡히 자리는
채운다.


▲ 사나사 주차장 주변 계곡 바위에 둥지를 튼 돌탑들
중생들의 소망이 담겨진 돌탑들이 바위 그늘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 바위 위에 멋드러지게 솟아난
키다리 돌탑

키다리 돌탑 주변에는 꼬마 돌탑들이 어지럽게
늘어서 있다. 돌탑의 높이가 하늘에 가까울 수
록 소망의 실현 확률도 높아지는 것일까? 돌탑
을 쌓은 중생들이 골고루 소망을 이룰 수 있도
록 돌탑의 키가 비슷하면 좋으련만 하나만 유별
나게 크고 나머지는 바닥을 기는 높이이니 빈부
격차가 커지는 이 땅의 현실을 보는 것 같다.


▲ 중생구제를 향한 부처의 은은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각(梵鍾閣)
2005년에 지어진 범종각은 대적광전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범종각의 옆구리를 통해 안쪽으로 들어서면 법당인 대적광전을 비롯한 사나사의 중심부가 펼쳐
진다. 범종각 좌우로는 아름드리 나무들을 배치하여 바깥에서 경내가 잘 보이지 않게끔 하였다.
그럼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잠시 사나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용문산의 첩첩한 산주름 속에 둥지를 튼 산사, 보우대사와 인연이 깊은 사나사의 내력(來歷)
용문산 서쪽 사나사 계곡 깊숙한 곳에 둥지를 튼 사나사는 923년(고려 태조 5년) 대경대사(大鏡
大師) 여엄(麗嚴)이 창건했다고 한다. 이때 5층석탑과 노사나불(盧舍那佛)을 만들고 노사나불의
절이란 뜻에서 사나사라 했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함규(咸規)의 양평함씨 세력이 양평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절의 위치는 그들의 성지인 함왕성과 함왕혈의 중간 정도가 된다. 그런 점을
볼 때 함씨세력의 지원으로 그들의 원찰(願刹)로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며, 대경대사는 함씨세력
과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대경대사는 913년 용문산 남쪽에 용문사를 창건했다
고 한다.

법등(法燈)을 켠 이후 양평함씨의 지원으로 그런데로 유지된 것으로 보이며, 1367년(공민왕 16
년) 보우대사(普愚大師, 1301~1382)가 왕사(王師)의 자리를 버리고 이곳에 들어와 140칸 규모로
중건하여 머물렀다. 보우대사는 고려 후기 불교의 1인자로 우왕(禑王) 때 다시 왕사가 되었으나
1382년 용문산 소설암(小雪庵)에서 입적(入寂)했다. 보우가 세상을 뜨자 우왕은 원증국사(圓證
國師)란 시호를 내렸으며, 그의 사리를 나눠서 그와 인연이 깊던 북한산 태고사(太古寺)와 이곳
에 부도와 탑비를 세워 안치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시절에는 절이 파괴되어 1608년(선조 41
년)에 단월 한방손(檀越 韓芳孫)이 재건했으며, 1773년 양평 백성들의 시주를 받아 불량답(佛糧
畓)을 마련해 절을 꾸렸다.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왜를 토벌하기 위해 의병(義兵)들이 용문산 부근에 집결하자 왜군은 그들
을 토벌한다는 이유로 사나사를 비롯한 용문산의 절들을 죄다 불질러버렸다. 1909년 승려 계헌(
戒憲)이 대방 15칸을 지어 꺼진 법등을 다시 켰으며, 1936년 광명전을 중건하고 1937년 법당 15
칸과 조사전을 지었다. 허나 6.25전쟁으로 간신히 가꾼 가람은 다시 잿더미가 되었으며, 1956년
양평함씨 일가인 단월 함문성(檀越 咸文成)과 주지승 김두준(金斗俊)이 합심하여 대웅전과 대방,
요사, 산신각, 함씨각을 재건했다.

1982년 5월에 포운당(布雲堂) 태공(太空)선사가 주지로 부임하여 요사를 신축하고 서울 봉은사
에서 일주문을 넘겨 받아 옮겨 세웠으며, 1993년 대적광전을 지어 법당으로 삼고, 기존의 대웅
전은 옆으로 옮겨 지장전(현재 미타전)으로 삼았다. 현재 봉은사의 말사로 조계종 소속이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미타전, 조사전, 함씨각, 범종각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
며, 함씨각은 양평함씨의 시조인 함왕을 모신 전각으로 함씨세력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음을 보
여준다. 법당 앞에는 으례 있어야 될 탑이나 석등(石燈)이 없으며, 다소 좌측 부분에 용천리3층
석탑이 이곳의 유일한 탑이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원증국사탑과 석종비,
용천리3층석탑이 있으며, 1773년 백성들의 불량답 시주를 기리고자 세운 불량비가 있다.

같은 산에 안긴 용문사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져 찾는 이도 많지 않다. 마을과도 1km 이상 거리
를 두어 속세의 기운을 경계했으며, 아늑하고 그윽한 산사의 분위기를 제대로 누릴 수 있다. 멋
드러진 사나사계곡이 절 남쪽을 감싸 흐르고 새도 넘어오다 졸도할 정도로 높은 산에 에워싸인
첩첩한 산골로 번뇌도 졸졸 따라오기가 힘들 정도이다. 속세의 짐을 사나사계곡에 내던지고 속
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을 때 마음과 안구를 정화하며 잠시 안기고 싶은 그런 절집
이다.

▲ 사나사 원증국사탑

▲ 범종각에 매달린 잘생긴 목어(木魚)


※ 용문산 사나사 찾아가기 (2011년 5월 기준)
* 지하철 중앙선(용산~용문) 용문행 열차를 타고 양평역 하차. 열차는 보통 30분 간격이다. 중
앙선과 환승이 가능한 전철역은 용산역(1호선), 이촌역(4호선), 옥수역(3호선), 왕십리역(2,5
호선), 회기역(1호선), 상봉역(7호선, 경춘선), 망우역(경춘선)
* 청량리역에서 안동, 강릉 방면 열차를 타고 양평역 하차. 열차는 보통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소요시간은 30분 내외로 운임은 무궁화호 3,000원 / 새마을호 4,700원 (휴일 좌석요금 기준)
* 동서울터미널과 상봉터미널에서 양평행 직행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양평터미널과 양평군청4거리(양평역 1번 출구)에서 용천리행 6-1, 6-2, 6-3번 군내버스를 타
고 용천리 사나사입구에서 내린다. 버스는 거의 1시간 간격으로 버스 번호보다는 버스 정면에
꽂힌 '용천리' 행선판을 확인하고 탄다. 사나사입구에서 사나사까지 도보 35분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절까지 접근 가능, 절 밑에 주차장 있음)
① 서울 → 양평 방면 6번 국도 → 오빈교차로에서 6번 외곽국도로 좌회전 → 덕평2교를 건너
우회전하여 상평교차로에서 우회전 → 신애3거리에서 용천리 방면 농로로 직전 → 용천2리
마을회관 → 사나사
② 서울 → 양평 방면 6번 국도 → 고읍교차로에서 옥천 방면 좌회전 → 옥천면주민센터(옥천냉
면촌) → 백현4거리에서 직진 → 용천2리마을회관 → 사나사

★ 사나사 관람정보
* 사나사에서 용문산 정상까지 3시간 정도 걸리며, 용문사나 연수리 방면으로 내려 갈 수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304 (☎ 031-772-5182)


♠ 사나사 경내 둘러보기

▲ 사나사의 법당인 대적광전(大寂光殿)

범종각 옆구리로 경내로 들어서면 봄 햇살의 손길이 구석구석 보듬고 있는 넓직한 뜨락과 함께
사나사의 건물과 보물이 모습을 비춘다. 정면에는 대적광전이 우람한 모습으로 경내를 굽어보고
있고, 앞뜰에는 하루 앞으로 다가온 초파일 행사에 쓰일 의자들이 1줄로 덩어리를 이루며 길게
늘어서 있다. 또한 중생의 소망이 담긴 연등이 뜨락 허공을 가득 메운다. 뜨락 왼쪽(범종각에서
바라본 방향을 기준)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인 요사가 있고, 오른쪽에는 이곳의 오랜 보물 3점이
나란히 자리를 지킨다.

대적광전은 사나사의 법당으로 이곳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1993년 2월에 완성되었으며, 정면 3
칸, 측면 3칸의 다포(多包)식 팔작지붕 전각이다. 높다란 기단 위에 올라서 경내를 굽어보는 모
습이 자못 위엄이 넘쳐보여 아직은 작은 사나사의 왜소함을 크게 커버해준다.


▲ 대적광전 금동비로사나3존불

대적광전 불단(佛壇)에는 비로사나불을 중심으로 한 금동비로사나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지권
인(智拳印)을 취한 비로사나불 좌우로 현란한 보관(寶冠)을 자랑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
현보살(普賢菩薩)이 나란히 자리하여 3존불을 이룬다. 이들은 1993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2005년
가을에 개금불사(改金佛事)을 하였으며, 후불탱화가 그들 뒤를 든든하게 받쳐준다. 붉은색의 화
려한 닫집은 대적광전 내부를 눈부시게 만든다.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포근하고 인자한 표정으로 중생을 맞이하는 3존불 앞에 3배의 예를 올
리며 슬그머니 소망을 들이밀어 본다.


▲ 대적광전 좌측 벽에 걸린 지장시왕탱화
1993년에 제작된 것으로 지장보살을 비롯한 저승의 10왕과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 대적광전 뜨락을 가득 메운 연등의 물결
연등(蓮燈)이 그저 색깔이 고와서 아름다운 것일까? 그건 아니다. 부지런히 살아가는
중생들의 소망을 품으며, 그 소망을 위해 자신을 불태워 속세를 비춰주기 때문이다.
햇님이 휘장을 치고 꽁무니를 빼는 밤이면 저들은 스스로를 태우며
어둠에 잠긴 이곳을 대낮처럼 비춰줄 것이다.


▲ 사나사 미타전(彌陀殿)

대적광전 좌측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미타전이 서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서방정
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봉안한 건물로 원래는 대웅전(大雄殿)이었다. 허
나 1993년 대적광전을 크게 지어 법당으로 삼으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미타전으로 삼았다.
처음에는 지장전이었다고 한다.

미타전의 전신(前身)인 대웅전은 1956년 양평함씨 일가로 서울에 살던 함문성의 시주로 지어졌
으며 1966년에 중건했다. 불단에는 아미타불과 1994년에 그려진 아미타후불탱화가 있으며, 1965
년에 그려진 지장시왕탱, 신중탱화가 건물 내부를 수식한다.


▲ 미타전에 봉안된 아미타불
좌우 협시불(夾侍佛)이 없이 홀로 불단을 지킨다.

▲ 양평함씨의 시조를 모신 함씨각(咸氏閣)

미타전 우측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단촐한 모습을 지닌 함씨각이 있다. 양평함씨의 시조인
함왕(咸王)의 영정을 모신 건물로 1956년 단월 함문성의 시주로 지어졌다. 창건부터 지금에 이
르기까지 양평함씨와 각별한 인연을 지닌 사나사의 성격을 고스란히 말해주는 산증인으로 매해
함씨들이 모여 제를 지낸다.


▲ 민화(民畵)틱하게 그려진 함씨각 함왕의 영정


▲ 사나사 삼성각(三聖閣)

함씨각 우측 계단 위에 맞배지붕을 지닌 삼성각이 있다. 삼성각은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
성(獨聖, 나반존자)를 모신 건물로 1999년에 지어졌다. 내부에는 1964년에 그려진 산신탱화를
비롯하여 1965년에 그려진 칠성탱화와 독성탱화가 자리를 채운다. 보통 독성탱화는 독성의 활동
무대인 천태산(天台山)이 그려져 있으나 이곳은 천태각이란 건물이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 칠성탱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칠성의 주요 식구들이 2열로 그려져 있다.

▲ 독성탱화
천태각(天台閣) 앞에 방석을 펴고 앉아
있는 독성의 모습이 평온하다.


▲ 조사전(祖師殿)

삼성각 좌측에는 2006년에 지어진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조사전이 있다. 경내에서 가장 구
석에 있는 건물로 내부에는 사나사를 크게 키운 보우대사의 진영(眞影)이 모셔져 있다.


▲ 기품과 중후함이 엿보이는 보우대사의 진영


♠ 사나사의 보물 둘러보기


▲ 대적광전 좌측 부분에 옹기종기 모인 사나사의 오랜 보물들

대적광전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좌측 구역에는 사나사의 오랜 보물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
며 자리를 메우고 있다. 맞배지붕 보호각 안에는 원증국사석종비가 들어 있으며, 그 옆에는 보
우대사의 사리가 담긴 원증국사탑이, 그 앞에는 3층석탑이 서 있다. 내가 깊은 산골에 박힌 사
나사에 발을 들인 것은 바로 이들을 보기 위함이다. 이들은 사나사의 장대한 역사를 온몸으로
밝혀주는 존재들이다.

▲ 용천리3층석탑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21호

용천리3층석탑은 사나사의 유일한 석탑이자 가장 오래된 보물로 사나사 보물 3형제의 맏이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분명 사나사 경내에 있음에도 탑 이름이 사나사3층석탑이 아닌
지명을 따서 용천리3층석탑이기 때문이다. 이는 원래부터 사나사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고 이 탑이 원래 어디에 있었는지 언제 이곳에 안착을 했는지도 전해오는 것이 없어 알 수가 없
다. 오로지 탑만이 알고 있을텐데 아픈 과거를 내밀기 싫은 듯,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도저
히 알 도리가 없다.

탑의 높이는 1.8m로 작으나 네모난 축대에 바닥돌과 기단을 깔고 세워진 탓에 다소 높아보인다.
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노반(露盤)과 복발로 이루어진 상륜부
(相輪部)로 마무리를 했다. 상륜부가 다소 소실되고 옥개석 추녀 일부가 떨어져 나가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원형 그대로 잘 남아있으며, 건강 상태도 괜찮은 편이다. 2중의 기단과 옥개석(屋蓋
石)의 층급받침이 3단으로 구성된 점을 통해 빠르면 고려 초기에 늦어도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
으로 여겨진다.

오늘도 3층석탑은 자신의 고향과 정체성을 잊은 채, 사나사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 원증국사탑(圓證國師塔)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72호

3층석탑 뒤쪽 자리한 원증국사탑은 신라 중기 이후 유행한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로 마치 대추
가 그대로 돌로 굳은 듯한 모습이다. 부도라고 해서 경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줄 알았건
만 경내 한복판 법당 옆에 떡 하니 자리해 있는 것이 특이하다. 그만큼 사나사에서 보우대사를
크게 내세우고 기리고 있다는 뜻이다.

이 부도는 1383년에 보우대사의 제자인 달심(達心)이 세웠다. 보우의 부도는 여기 말고도 그가
창건한 북한산 태고사(太古寺)에도 있으며, 그의 사리는 태고사와 이곳에 나누어 봉안되었다.
태고사에 있는 원증국사탑은 보물 749호이다.

바닥돌 위에 기단석을 올리고 그 위에 부도를 얹힌 형태로 높이는 2.7m이다. 기단석은 가로, 세
로 1.1m의 네모난 모습으로 네 면에 각각 3개의 안상(眼象)을 새겼으며, 탑 꼭대기에는 별석으
로 불꽃무늬를 새긴 보주(寶珠)를 올려 마무리했다. 곡선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부도 탑신에는
별다른 장식은 없다.


▲ 원증국사석종비를 담은 보호각

▲ 원증국사석종비(圓證國師石鐘碑)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73호

원증국사탑 옆에 정면과 측면이 1칸인 조그만 맞배지붕 비각이 있다. 그 안에 원증국사석종비가
빛바랜 다이어리처럼 소중히 간직되어있다. 이 비석은 1386년 보우대사의 제자인 달심이 세웠다.
탑을 세운지 3년 뒤에 일이다. 참고로 북한산 태고사에도 원증국사탑비(보물 611호)가 있는데,
그곳의 비석은 귀부와 이수(螭首)를 갖춘 당당한 비석인데 반해 이곳은 비신(碑身)만 있는 조촐
한 모습이다.

비석의 높이는 167cm, 비신의 높이 102cm로 바닥돌과 비신, 지붕돌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암반
을 이용해 만든 바닥돌 위에 홈을 파서 비신을 끼워 넣었는데, 비신 양쪽에 돌기둥을 세워 비신
을 보호하게 한 점이 이 비석의 독특한 매력이다. 비신 위에는 가옥의 지붕 모양 형식의 지붕돌
을 얹혔으나 조각 수법이 다소 떨어지며, 그마저도 한쪽이 부러져 나가 불균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비신은 앞과 뒤에 글을 빼곡히 새겼는데, 앞면에는 '圓證國師石鐘銘(원증국사석종명)'이란 비명
을 새기고 그 밑에 비문을 적었으며, 뒷면에는 비석을 세우는데 도움을 준 시주자들의 명단을
적었다. 비문은 정도전(鄭道傳)이 지었고, 글씨는 재림사() 주지인 훤문(煊文)이 썼다.

▲ 원증국사석종비의 앞면

▲ 원증국사석종비의 뒷면

비석은 6.25전쟁 시절에 손상을 입어 비신 가운데 부분에 크게 금이 나 비신 위쪽 부분이 위태
위태하며 구석 구석이 깨지고 구멍이 생겨 건강상태가 심히 좋지가 못하다. 게다가 비문마저 심
하게 마멸되어 대부분의 글씨가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비석 머리에 얹혀진 지붕돌은 아래
쪽을 둥글게 마름질한 화강석을 사용했으며, 지붕돌 위에는 중생들이 던져 놓은 동전들이 한가
득 무심하게 널려져 있다. 동전의 무게가 얼마 나가진 않지만 워낙 비석의 상태가 비리비리하다
보니 수북히 쌓인 동전의 무게에 비석이 넘어지는 건 아닌지 걱정 마저 들 정도이다.


▲ 3층석탑 옆에 솟은 소나무

작지만 나름대로 유서가 서린 사나사를 이리저
리 1시간 가량 둘러보니 어느덧 6시가 넘었다.
햇님도 그만의 공간으로 들어가려고 슬슬 휘장
을 치려고 한다. 산속이다 보니 속세보다는 해
가 일찍 진다. 이렇게 사나사와의 짧은 인연을
마무리 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다시 아비규환의
속세로 나왔다. 속세로 나오려고 하니 사나사계
곡에 던진 번뇌가 떠내려가지 않고 나를 기다리
고 있었다. 이래서 해탈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
닌가 보다.

이렇게 하여 4월 초파일 전날 사나사 순례는 대
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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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1년 5월 1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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