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고구려의 아련한 흔적을 더듬다 ~ 포천 반월성 (포천향교)

~~~~~ 고구려의 아련한 흔적을 더듬다. 포천 반월성(半月城) ~~~~~
고구려 유적인 포천 반월성
▲ 포천 반월성


조그만 한반도에서 서로 아옹다옹거리며 살아가는 우리 민족에게 고구려(高句麗)란 3글자는
정말로 가슴을 벅차게 만든다. 우리가 고구려를 그토록 그리워하고 자랑거리로 삼으며 집착
하는 이유는 현재 우리의 영토와 국력이 지극히 초라하기 때문일 것이다.
옛 조선(朝鮮) 후기에 압록강 중류 졸본(卒本)에서 조촐하게 문을 연 고구려는 조선이 망한
이후, 그 자리를 대신하며 주변 나라를 아우르고 중원(中原) 대륙의 여러 나라와 자웅을 겨
루던 대제국(大帝國)이었으며, 거의 900년 이상 나라를 이어간 장수 국가였다. (삼국사기의
기원전 37년 건국 기록은 왜곡임)
한반도보다 광대(廣大)한 영토를 경영하며, 남으로는 경상북도 포항, 동으로는 러시아의 연
해주(沿海州), 북으로는 옛 부여(夫餘)의 땅을 포함한 북만주(北滿洲), 서로는 흥안령산맥(
興安嶺山脈)과 내몽고, 황하(黃河)에 이르렀다.
이토록 장대했던 고구려의 흔적은 아쉽게도 남한(南韓) 땅에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태반이
고구려가 걸쳐있던 북한과 중국에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주와 요동(遼東)에 있는 고구려
의 흔적은 중국의 추악스러운 동북공정(東北工程)의 먹잇감이 되고 있어 대책이 절실하다.

남한에 전하는 고구려의 흔적은 정말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충주의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
碑)와 서울의 아차산성(阿且山城), 아차산과 용마봉 줄기의 보루(堡壘) 유적, 포천(抱川)의
반월성터 등이 있다. 그중에서 중원고구려비와 아차산성 일대는 고구려 문화유산이란 큰 매
력 때문에 그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특히 아차산성 같은 경우는 서울 광진구(廣津區)와 경
기도 구리시(九里市)가 서로 옆구리에 끼며 고구려의 도시를 칭할 정도로 비싼 몸이 되었다.
그에 반해 포천 반월성은 근래에서야 고구려 유적임이 밝혀졌으며, 인지도도 아직까진 낮아
찾는 이는 별로 없다.

포천(抱川) 반월성터는 포천시내 동쪽에 자리한 청성산(靑城山, 283m)에 누워 있다. 청성산
은 산성의 이름을 따서 반월산으로도 불리며, 우리집(도봉동)에서 35km 정도로 가까운 편이
다. 포천 시내와 무척 가까워 교통과 접근성도 좋고, 산의 높이가 낮고 규모가 조촐하여 성
까지 별로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다.

청성산 서쪽에는 반월성으로 오르는 서쪽 기점이자 포천시민의 포근한 휴식처인 청성문화체
육공원(이하 청성공원)이 넓게 자리를 닦았다. 이 공원은 121,000㎡에 이르며 1994년 9월에
조성되었다. 다양한 운동시설과 어린이놀이터, 공연장, 광장 등을 갖추었으며, 충혼탑과 행
운의종 등의 조형물이 공원을 가득 수식한다. 공원에서 반월루를 거쳐 동쪽 산길을 15분 오
르면 반월성이 그 존재를 드러낸다.



▲ 포천시내를 바라보며 자리한 충혼탑(忠魂塔)

나라와 고장을 지키다 순절한 이들을 기리는 충혼탑과 현충탑(顯忠塔)은 고을마다 꼭 1개 이상
은 있기 마련이다. 신흥도시 포천을 굽어보는 청성공원 충혼탑은 다른 지역의 충혼탑과는 달리
철(鐵)로 만들어진 기묘한 모습으로 눈길을 단단히 잡아맨다. 하얀 대리석으로 탑의 기단(基壇)
을 만들었으며, 탑 좌우로 6.25전쟁 때 포천을 지키던 군인들의 모습이 굳건히 자리를 지킨다.
오른손에 총을 들고 함성을 외치며 기세를 올리는 군인의 모습에서 그날의 처절했던 상황이 눈
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다.


▲ 충혼탑 좌측에 있는 행운의 종
행운의 종이란 이름 그대로 종을 울리면 행운이 달려오는 모양이다.
종이 달린 기둥 위에는 까치 조각 1쌍이 서로 마주보며 서로의 정을 속삭인다.

▲ 반월루(半月樓)
청성공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1층 누각으로 새해 타종식(打鐘式)을 거행하는
동종(銅鐘)의 보금자리이다. 이곳에 올라서면 포천시내가 두 눈에 달려온다.
반월루에서 동쪽 산길을 10분 남짓 오르면 반월성 서쪽에 이른다.

▲ 야생화 가득한 들판에 봉수대의 연기처럼 피어오른 돌탑 4기

▲ 나의 발길을 한없이 머물게 만든 시간 도둑 ~
보라색 향기가 깃들여진 벌개미취의 방긋 미소


♠ 포천에 서린 고구려의 아련한 흔적 ~ 포천 반월성터(半月城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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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403호

▲ 반월성 서쪽 성벽

▲ 반월성 북쪽 성벽

포천시내 동쪽 청성산 정상부에 터를 닦은 반월성은 고구려 때 축성된 산성(山城)이다. 원래는
철원(鐵原)에 태봉국(泰封國)을 세운 궁예(弓裔)가 쌓았다고 막연히 전해져 왔으나 1994년부터
1997년까지 진행된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결과 고구려의 성곽 임이 드러났다. 특히 '마홀수해공
구단(馬忽受解空口單)'이라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고구려 때 포천의 지명이 '마홀(馬忽)
'임을 알려준다.

반월성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과 대동지지(大東地志), 포천군읍지(抱川郡邑誌), 견성지(堅城
誌) 등의 옛 기록에는 고성(古城), 산성(山城), 반월산성(半月山城), 청성(靑城) 등으로 나와있
는데, 둘레가 1,930~1,937척에 이른다고 한다. 현재 성의 길이는 1,080m로 지형은 북쪽과 서쪽
이 높고, 남쪽과 동쪽이 낮으며, 성문터 2곳(남문과 북문), 치성(雉城) 4개, 건물터 6개, 우물
터, 수구(水口)터, 장대(將臺)터, 망대(望臺)터 2곳이 있다.

포천이 고구려의 영역에 들어온 것은 4세기 후반,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때이다. 아리수(阿利
水, 한강)를 장악한 고구려는 포천 지역을 다스리고 혹시 모를 백제의 북진을 막고자 이 성을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후 신라가 이 지역을 점거하면서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 북쪽으로
향하는 요새로 사용했을 것이며, 고구려의 부흥을 내세운 태봉의 궁예는 국도(國都)인 철원의
남쪽을 방비하고자 성을 수리하고 군사를 주둔시켰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광해군(光海君) 10년(1618년)에 영평(永平)에 감영(監營)을 두면서 이 성을
개축했는데, 그때 오래된 구리 숟가락과 쇠솥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그 빛깔이 전혀 변하지 않
았다고 한다. 이곳을 주진(主鎭)으로 삼고 중군(中軍)을 설치했으나 1623년(광해군 15년)에 서
인(西人) 패거리의 반란으로 광해군이 떨려나면서 반월성은 버려지고 만다. 그 이후 세월의 장
대한 흐름과 자연의 심술궂은 장난 앞에 제대로 방치되면서 산성의 위용(威容)과 모든 것은 먼
지처럼 흐트러졌다. 간신히 성곽 일부를 외부에 드러내며 수풀에 묻혀 살아오다가 근래에 고구
려 성으로 밝혀지면서 팔자가 180도 확 달라졌다.
300m 남짓의 성벽만 간신히 살아 숨쉬던 반월성은 1998년 사적으로 승진되어 국가지정문화재의
큰 지위를 누리게 되었으며, 2000년 이후 꾸준히 복원사업을 벌여 지금에 이른다.

이 땅(북한 제외)에 흔치 않은 고구려 유적으로 가슴이 떨리는 현장이지만 정작 마음과 피부에
와닿지는 않는다. 그냥 오래된 산성을 거니는 기분에 호기심이 +알파로 첨가된 정도랄까. 아무
리 고구려 성이라고 해도 중원고구려비나 아차산성처럼 상세한 정보도 세상에 나오지 않았고 인
지도 또한 아직은 빈약하니 그런 듯 싶다.


▲ 반월성의 제일 서쪽 성벽 ~ 마치 봉수대(烽燧臺)처럼 보인다.

▲ 반월성 서쪽 성곽에서 굽어본 포천시내
시내 건너편의 높다란 산은 왕방산(737m)

성곽(城郭)에는 오랜 세월의 떼가 거침없이 서린 옛 성돌과 어여쁘게 깎고 다듬은 하얀 피부의
반질반질한 새 성돌이 어색한 조화를 이루며 성벽을 이룬다. 성곽 복원에 옛 성돌이 넉넉치 못
하여 새 성돌을 가득 채워 넣었다. 오랜 성돌과 성곽 위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는 옛 성의 중후
함을 느끼게 만드나 새 성돌 위주의 성곽은 근래에 만들어진 방어시설처럼 그다지 정감이 가질
않는다.

청성산 정상부에 자리한 탓에 조망(眺望) 또한 천하 일품이다. 성 서쪽에서는 포천시내와 왕방
산(旺方山, 737m)이, 북쪽에서는 신북면과 영중면, 남쪽에서는 군내면과 가산면, 소흘읍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게다가 산성 주변의 지세도 가파른 편이라 적군이 공격하기가 쉽지 않다. 왜 이
곳에 힘들여가며 성을 쌓았는지 십분 이해가 간다.

속세에서 반월성으로 가는 길은 2가지가 있다. 포천시내에서 청성공원을 거쳐 가는 길과 군내면
사무소에서 오르는 길이 있는데, 군내면 코스는 성 남쪽까지 수레 접근이 가능하다. 청성공원에
서 오르는 길은 시내와 가깝고 솔내음이 가득한 조촐한 산길이 주류를 이룬다. 답사코스는 청성
공원에서 산성을 돌아 군내면사무소로 내려가거나 그 반대로 군내면사무소에서 올라 청성공원으
로 내려가면 되며 1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산성의 동남쪽 성곽은 나무가 우거져 출입이 어렵다.

▲ 서쪽 치성

▲ 장대가 있던 곳으로 여겨지는 자리


▲ 칼로 다듬은 듯 정연하게 늘어선 성벽

성벽은 대체로 하나의 돌을 6개의 돌이 에워싸
는 6방식(六方式)으로 되어있다. 이는 고구려
성의 특징으로 우리나라와 중국, 왜국(倭國)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성벽의 기울기가 거의
80도로 이는 6방식과 더불어 고구려 축성의 특
징인 들여쌓기 방식이다. 칼로 싹둑 다듬은 듯
한 정교한 성벽은 비록 무거운 세월의 떼와 자
연의 태클에 많이 망가지긴 했지만 여전히 옛
모습과 위용을 자랑한다.
성벽의 높이는 4~6m로 성을 방어하는 여장이나
추락에 대비한 안전장치가 없으므로 성곽을 거
닐 때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호젓한 산행과 함께 옛성 답사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성곽을 따라 거닐면서 성을 뒤덮은 자연
의 향기에 마음이 시원해지며, 그 옛날 이곳을
지키던 군사와 군사시설들, 그리고 성을 두고
치열하게 싸웠을 그 당시를 상상하며 성을 거닐
어 보는 것도 나름 쏠쏠할 것이다.


▲ 수풀 사이로 비좁게 놓인 반월성 탐방로

▲ 반월성의 서쪽 부분 ~ 가운데 두툼하게 나온 곳은 장대터

서쪽 성곽으로 들어서면 들꽃과 잡초가 무성한 들판 사이로 두툼하게 솟은 부분이 있는데, 장대
가 있던 자리로 여겨진다. 군사들과 군사시설로 가득했을 그곳에 이렇게 잡초만 무성하니 그야
말로 세월 무상이로다. 잡초에 단단히 억눌리며 오랜 시간을 숨죽여 지냈던 성벽은 애처롭기까
지 하다. 인간이 만든 것이 아무리 화려하고 견고하다 한들 자연 앞에서는 언제든지 날라갈 수
있는 일개 먼지에 불과하다.


▲ 힘차게 뻗은 반월성 북서쪽 성곽
산성 복원 이전에도 성곽의 모습을 그런데로 유지하던 구간으로
반월성의 옛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 북쪽 성벽에서 바라본 천하
포천 신북면과 영중면이 두 눈에 바라보인다. 저 높은 산 너머로 태봉국의
중심지인 철원이 있어 궁예가 국도(國都)의 남쪽을 수비하기 위해 특별히
옆구리에 끼던 성이었을 것이다.

▲ 수풀로 무성한 북쪽 성곽 길

잡초가 가득하여 반바지 차림으로 가기에는 조금은 꺼림칙하지만 그리 위험하진 않다. 서쪽 성
곽에서 동쪽으로 넘어가는 길은 오로지 이 길 하나 뿐이다. 잡초가 다리를 슬금슬금 간지럽히는
저 길을 넘으면 수풀길 대신 복원된 성곽길이 펼쳐진다.


▲ 북쪽 성곽에서 동쪽 성곽으로 넘어가는 북동쪽 성곽길

▲ 차곡차곡 잘 다듬어진 북동쪽 성곽길

▲ 유연한 곡선으로 힘차게 뻗은 반월성 동쪽 성곽

이 구간은 새 성돌의 비중이 매우 커서 고성(古城)의 분위기를 무척이나 떨어트린다. 하지만 그
러고 싶어서 그랬으랴?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산성은 무너지고 성돌은 하나, 둘 깨지고 사라진
상태에서 복원하기 위해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바로 반월성의 운명인 것을...


▲ 반월성 동쪽 성곽의 성문터로 여겨지는 곳

▲ 바깥으로 다소 튀어나온 동쪽 치성
치성 역시 고구려 성곽의 특성으로 효율적인 수성전(守城戰)을
위해 성벽 곳곳에 바깥으로 나온 치를 두었다.

▲ 자연에 묻히거나 자연의 일부가 되버린 반월성 남동쪽 성벽
인간이 아무리 잘나도 그들이 만든 것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 한줌의 재로 사라지거나
자연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에게 늘 겸손해야 된다.


남동쪽 성곽은 위의 사진처럼 수풀이 무성하여 도저히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안쪽으로 나 있는
넓은 길을 이용해야 한다. 3분 정도 가면 발굴조사단 사무실로 쓰이는 컨테이너 건물이 있으며,
곧 삼거리가 나타난다. 여기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군내면사무소이며, 오른쪽 길은 가보진 않았
지만 막다른 길로 여겨진다. 한 치의 끊김도 없이 이어진 반월성은 남쪽에 해당하는 이 부분에
서는 붕괴하여 끊겨 있다. 아마도 3거리에 성문이 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없어진 남쪽도 성문
과 더불어 어여 복원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3거리에서는 군내면과 소흘읍이 두 눈에 바라보며
조망이 좋으며, 오래된 느티나무 1그루가 푸른 옷을 걸치며 자리를 지킨다.


▲ 반월성 남쪽에서 바라본 천하 (1) 군내면과 가산면, 소흘읍 일대

▲ 반월성 남쪽에서 바라본 천하 (2) 군내면, 가산면

◀ 반월성의 말년을 말없이 지켜본 오래된 느
티나무 (경기-포천-28-1-5호)
수령(樹齡)이 거의 400년에 이르는 느티나무로
나무가 심어지던 때는 반월성이 군사기지로 한
참 쓰이고 있던 막바지 시절이다. 흐르는 세월
을 가지런히 양분으로 삼으며 무럭무럭 자라나
높이가 25m에 이른다.


▲ 반월성에서 군내면사무소로 가는 숲길
느티나무에서 산내음을 마음껏 누리며 10분 정도 내려가면 군내면사무소가 있는
군내면의 중심지 구읍리(舊邑里)에 이른다. 구읍리는 옛 읍이란 뜻으로
포천고을의 옛 중심지였다.

▲ 속세에 오염된 안구가 싹 정화되는 푸른 하늘
한 점의 티끌도 없이 청명한 그야말로 하늘빛 물결이다. 아무리 천재 화가가
그린다고 해도 결코 나오기 힘든 하늘의 푸른 빛깔~~ 사람이 만든 색깔이
어찌 대자연이 만든 천연의 물감만 하겠는가~~?


※ 반월성터 찾아가기 (2011년 10월 기준)
* 서울 수유역(4호선)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72번 시내버스를 타고 신읍7통(기업은행)에서 하차
* 도봉산역(1,7호선)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72, 72-3번 시내버스 이용
* 동서울터미널에서 포천, 철원 방면 직행버스(15~20분 간격)를 타고 포천터미널 하차
* 의정부역(1번 출구를 나와서 왼쪽으로 4분 정도 가면 서울, 포천행 버스정류장이 있음)에서
포천 방면으로 가는 138번 계열 좌석버스를 타거나 길 건너편(동두천 방면) 정류장에서 72,
72-3번 시내버스 이용
* 포천터미널에서 운천 방면으로 2분 정도, 신읍7통 정류장에서 내린 방향 기준 오른쪽으로 가
면 구한내4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동쪽으로 가면 포천천 위에 걸린 한내교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 10분 정도 직진하면 청성공원이 나오고 공원으로 들어서 충혼탑 좌측 산길로 15분 정도
오르면 반월성 서쪽 성곽에 이른다. 공원에서 반월성이 보이므로 성이 어떻게 생겼는지만 안
다면 찾기는 무지 쉽다.
* 군내면사무소에서 오르고자 할 경우 포천시청 정류장(신읍7통 전 정류장)에서 20, 66번 시내
버스를 타고 군내면사무소(구읍리)에서 내리면 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서울 → 포천 방면 43번 국도 → 포천3거리에서 우회도로로 직진 → 한내4거리에서 우회전
→ 청성공원 주차장
② 서울 → 포천 방면 43번 국도 → 포천3거리에서 우회도로로 직진 → 군내4거리에서 우회전
→ 용정4거리에서 직진 → 군내면사무소입구에서 면사무소로 좌회전하여 길 끝까지 직진 →
반월성터

★ 반월성터 관람정보
* 청성공원에서 반월성을 거쳐 군내면사무소까지 1시간 정도 걸린다. (반대 코스도 마찬가지)
*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산 5-1일대


♠ 옛 포천고을 교육의 중심지, 공자왈 맹자왈 소리는 세월에 묻혀 사라지고
바람의 소리만이 향교 뜰을 감도는 포천향교(抱川鄕校)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6호

반월성을 둘러보고 군내면사무소로 나오면 군내면(郡內面)의 중심지인 구읍리이다. 이곳은 포천
시내에서 불과 2km 거리로 면사무소와 가까운 곳에 포천향교가 웅크리고 있어 기왕 여기까지 온
거 그곳의 문도 두드려 보기로 했다. 반월성(면사무소)입구에서 내촌 방면으로 100m 정도 가면
큰 할인마트가 있고, 향교를 알리는 조그만 이정표가 수줍은 듯, 답사객을 인도한다.
이정표의 안내로 현대식으로 꾸며진 농가(農家)와 정갈하게 꾸며진 꽃밭, 그리고 옥수수와 배추
등 온갖 채소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정겨움이 묻어난 시골길을 300m 들어가면 홍살문이 나오고,
그 길의 끝에 포천향교가 포근히 터를 닦았다.

반월성을 품에 간직한 청성산 남쪽 자락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포천향교는 옛 포천고을의 교육
과 유교식 교화를 담당하던 교육기간으로 오늘날의 국립중고등학교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향
교는 교육 외에 공자(孔子) 등의 유교 성현(聖賢)에게 제를 지내는 제사의 기능도 있는데, 갑오
개혁(甲午改革) 이후 교육의 기능은 신식학교에게 넘겨주고 제사 기능만 남아있다.

향교가 들어앉은 군내면 구읍리는 지금은 군내면의 중심지로 조그만 마을에 불과하지만 조선 후
기까지만 해도 포천고을의 중심지였다. 허나 구읍리는 다소 외진 곳에 자리한 탓에 더 이상 발
전을 거듭하지 못하고 43번 국도가 지나는 교통의 중심지인 신읍리(포천시내)로 중심지가 옮겨
가면서 구읍리는 작은 시골마을로 전락해버렸다. 옛 포천고을의 중심지였지만 그 시절 관아와
객사는 왜정(倭政) 때 모두 파괴되고 오로지 향교만이 간신히 생명을 부지하며 옛 영화를 숨 죽
여 간직한다.

포천향교는 그 역사가 오래되어 무신(武臣)들에게 휘둘려 살던 고려 명종(明宗) 3년(1173년)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병화(兵火)로 소실된 것을 1594년에 중건했고, 1916년
에 중수했다. 6.25전쟁 때 파괴된 것을 지역 유림들이 돈을 모아 1962년에 다시 지어 지금에 이
른다. 향교의 배치를 보면 명륜당이 앞에, 대성전이 뒤에 자리한 이른바 전학후묘(前學後廟)로
향교와 서원의 일반적인 배치 양식이다.


▲ 포천향교 홍살문

향교의 구조는 외삼문과 약 40m 떨어진 전방에 홍살문을 세워 국가의 중요한 곳임을 알린다. 보
기만 해도 정덜미가 뚝 달아날 것 같은 홍살문을 들어서면 답사객을 위한 조그만 주차장이 나오
며, 오른쪽 시야로 향교가 눈에 들어온다. 향교 왼쪽으로 청성산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다.

향교 앞에는 푸른 물결이 넝실거리는 은행나무 몇 그루가 슬슬 가을의 영접을 준비한다. 향교나
서원에는 꼭 은행나무가 있기 마련인데 이는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강의를 했다는 행단(杏壇)
을 상징한다고 한다. 향교는 유교(儒敎)를 보급하고 가르치는 곳이니 유교의 중심 인물인 공자
를 빼놓을 수가 없다.


▲ 포천향교 외삼문(外三門)

향교로 들어서는 외삼문은 태극마크를 지닌 가운데 문을 제외한 양쪽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대
부분의 향교가 외삼문을 단단히 걸어잠구며, 외부인에 대해 폐쇄적으로 일관하는 실정인데, 이
곳은 속시원히 개방되어 있어 답사객을 위한 향교와 포천시청의 정성과 배려가 돋보인다.


▲ 포천향교 명륜당(明倫堂)

▲ 명륜당 우측의 서재(西齋)

▲ 명륜당 좌측의 동재(東齋)

계단을 올라 외삼문을 들어서면 명륜당이 바로 정면에 나타난다. 오랜 세월의 떼가 잔잔히 입혀
진 명륜당은 교육의 공간으로 나의 발자국 소리와 사진 찍는 소리가 미안할 정도로 고요함에 깃
들여져 있다. 학생들의 낭랑한 글 읽는 소리와 수다소리로 꽤나 시끄러웠을 그 현장, 그들의 신
발이 섬돌을 가득 채웠건만 지금은 굳게 닫힌 문과 먼지만 수북한 섬돌만이 북적거리던 왕년을
그리워한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앉은 모습은 참으로 쓸쓸하다.

명륜당의 뜨락 좌우로 향교 학생들의 숙소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해 있다. 이들 역시 현역에서
물러나 명륜당과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 서로를 보듬어 준다.


▲ 대성전으로 들어서는 내삼문(內三門)

▲ 포천향교 대성전(大成殿)

명륜당의 옆구리를 지나면 향교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대성전이 나온다. 대성전은 유교 성현에
게 제사를 지내는 향교에서 가장 중요하고 성스러운 곳이다. 거의 죽어있는 명륜당과 달리 1년
에 여러 번 주기적으로 제례행사가 열리기 때문에 아직도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담당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쓸쓸함이 깃든 명륜당과 달리 웅장함과 근엄함이 깃들여져 보
는 이를 주눅들게 만든다. 특히 대성전 주변 뜨락의 면적이 좁고 내삼문과 대성전의 거리가 좁
기 때문에 더욱 커져 보인다.

대성전은 제례행사 외에는 굳게 입을 봉하고 있어 내부 구경은 어려우며, 가운데에 공자의 신위
(神位)가 있고 우리나라와 중국의 성현들 신위가 좌우로 늘어선 형태로 신위와 약간의 제사용품
만이 있을 뿐, 내부는 조촐하다.


▲ 포천향교 홍살문에서 만난 한 송이 무궁화

우리나라의 국화인 무궁화가 홍살문 주변에 흐드러지게 피어나 향교를 살피고 돌아가는 답사객
의 마음과 발길을 붙잡고 늘어진다. 수줍게 미소를 머금으며 연분홍 아름다움을 마음껏 드러내
는 가녀린 무궁화에 나의 마음도 두근두근 어찌할 바를 모른다.


※ 포천향교 찾아가기 (2011년 10월 기준)
* 포천시청 정류장에서 20, 66번 시내버스를 타고 군내면사무소(구읍리)에서 내려 버스가 가는
방향으로 100m 정도 가면 향교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 송우리(송우리시장, 송우리터미널)에서 20, 66번 시내버스를 타도 되나 무척 돌아간다. 원하
지 않는 강제투어를 당할 수 있으므로, 포천시청에서 환승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 포천시청에서 구읍리까지 걸어서 30분 거리이다. 버스 배차간격이 길므로 가볍게 걸어가는 것
도 괜찮다. (포천시청 → 신읍4거리에서 우회전 → 반월교를 건너 무조건 직진 → 구읍리)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서울 → 포천 방면 43번 국도 → 포천3거리에서 우회도로로 직진 → 군내4거리에서 우회전
→ 용정4거리에서 직진 → 군내면사무소입구(구읍리) → 포천향교
*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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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일 - 2011년 10월 2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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