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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가을 산사 나들이, 삼성산 염불암(念佛庵) '

숙성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염불암 장독대의 정겨운 풍경


여름 제국의 핍박에서 벗어나 이제 좀 살겠네 싶더니만 어느덧 아침과 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에 오
금이시릴 정도로 날씨가 추워졌다.
가을의 저물어 감을 무척이나 아쉬워하며 만추(晩秋)의 꼬리인 11월 중순, 티끌 없이 청명한 가을
하늘에 이끌려 친한 후배와 삼성산 염불암을 찾았다.

삼성산(三聖山)은 관악산 서쪽에 솟아난 높이 480m의 산으로 서울 관악구와 금천구,경기도 안양시
에 넓게 걸쳐져 있다. 삼성산이란 이름은 신라 중기 불교계를 주름잡던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윤필
대사 등 3명의 고승(高僧)이 막(幕)을 치고 머물렀다는 거짓말 같은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고려 후기 불교계를 이끌었던 지공대사, 나옹대사, 무학대사가 삼막사에 머무른데서 유래되었다는
말도 있다. 그래서인지 삼성산에는 삼막사(三幕寺), 안양사, 염불암, 성주암 등에 수많은 절과 풍
부한 불교문화유산이 전해와 산 전체가 거대한 불국토(佛國土)를 연상시킨다.

삼성산과 관악산(冠岳山) 배후에 누워있는 안양예술공원(安養藝術公園)은안양시가 내세우는 명소
로삼성천을 따라 서울농대실습림까지 길게 이어져있다. 이곳은 예전의 안양유원지로 서울근교 유
원지 중 가장 오래된 무려 6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1950년대에 이미 수영장이 문을 열었을 정
도로 수도권 최대의 행락지로 번영을 누렸으나 90년대 이후. 서서히 망해가던 것을2005년 유원지
에서 예술공원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문화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안양시의 21세기 야심작인 예술공원은 삼성천을 정비하고 인공폭포와 야외무대, 다양한 테마의 전
시관, 산책로를 조성하고 조명시설을 설치하여 밤에는 아름다운 야경을 선사한다. 제1회 안양공공
예술프로젝트로 국내외 유명작가의 예술작품 52점을 갖다놓아 예술공원의 이름값을 톡톡히 한다.


▲ 안양예술공원을 촉촉히 적시는 삼성천

예술공원이라고는 하지만 본래 태생이 유원지인지라 유원지가 갖추고 있을 시설과 다양한 먹거리
로 무장한 주막들은 여전하여 유원지의 역할과 성격은 녹슬지 않았다.또한 예로부터 안양포도의
산지로도 유명하여 여름에는 포도의 향기가 공원 일대에 진동한다.

그 외에 우리나라 수목원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관악수목원과 석수동 마애종, 중초사터 등의 문화
유적, 그리고 안양사(安養寺) 등의 오랜 절이 있고 삼성, 관악 두산을 배경으로 하여 자연경관도
아름답다.이처럼 다양한 볼거리와 매력으로 공원을 걷는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하며 휴일에는 등
산객을 비롯하여 나들이객, 답사객, 사진쟁이들로 홍수를 이룬다.

안양예술공원 입구에서 늦가을에 잠긴 공원길을 200m가량 들어서면 삼성천 건너로'유유산업' 공
장이 보인다. 그 뜰에는 옛 중초사(中初寺)의 아련한 흔적들이 덩그러니 놓여 우리를 손짓한다.


♠ 절집은 사라지고 지금은 공장의 뜰 장식용이 되어버린
옛 중초사터(中初寺址)의 흔적들


안양예술공원 초입에 자리한 유유산업 뜰에는 옛날 이곳에 둥지를 텄던 옛 중초사터의 당간
지주(幢竿支柱)와 3층석탑이 남아있다.
중초사는 신라 흥덕왕(재위 826~836) 시절에 세워진 것으로 창건 이후의 사적에 대해서는 전
혀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안양사(安養寺)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안양사와 무슨 관련
이있지 않을까도 싶다. 1960년 절이 있던 곳에 유유산업이 들어서면서 지금의자리에 석탑
과당간지주을 안착시켰다.


당간지주는 절이 세워지던 826년 8월 6일에 채석(採
石)되어 이듬해인 827년 2월 30일에 완성되었다. 이
석주(石柱)는 다른 당간지주처럼 특별한 장식은 없
으나 서쪽 석주 바깥쪽에 조성연대와 중초사란 사명
(寺名)이 새겨져 있어 자칫 이름 모를 절터로 남을
뻔했던 중초사의 정체를 고맙게도 밝혀준다.
특히 우리나라 당간지주중 유일하게 조성연대(造成
年代) 관련 명문(銘文)이 새겨진 것으로 크게 주목받
는 문화유적으로 보물 4호라는 큼지막한 지위를 누
리고 있다.

약간 휘어진 동쪽 돌기둥의 윗쪽을 보면 상당히 깨어
져있는데 이는 해방 이후 석수장이들이 석재로 쓰기
위해 뜯어간 것이라고 하며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이 그리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쓰라린흔적
들이다.

중초사터 당간지주- 보물 4호
(문화재청 사진 참조)

당간지주 옆으로는 같은 식구인 다소 부실하게 생긴
3층석탑이 멀뚱히 서 있다.
높이 약 3.6m의 석탑으로 당간지주보다 다소 늦은 고
려 중기 정도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져 중초사가 최소
고려 후기까지 법등(法燈)을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기단은 단층으로 되어있으며, 탑신부에 비해 기단부
가 훨씬 커서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이 탑은 원래 보물 5호였으나 1997년 무슨 이유인지
보물에서 지방문화재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64호)
로 등급이 떨어졌다.
왜 격하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석탑은 보물로지
정될 만큼 그렇게 특징이 있는 물건은 아니다. 오히
려보물 5호의 자리가 그에게는 좀 부담이 되었을지
도 모른다.
하지만 보물이나 지방문화재나 다 같은 소중한 옛흔
적들이다. 그들을 어찌 국보나 보물, 지방문화재 등
의 등급으로 나눌 수 있겠는가? 참고로 현재 보물 5
호의 자리는 비어 있다.

중초사터 3층석탑
(문화재청 사진 참조)


※ 중초사터, 안양예술공원 찾아가기 (2010년 12월 기준)
* 1호선 석수역(2번 출구), 관악역(2번 출구)에서 1, 51, 900, 5530, 5624, 5625, 5626,
5713번 시내버스를 타고 안양예술공원입구 하차
*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1번 출구) 바로 앞에서 51, 5624번 버스를 타거나, 시흥대로에
있는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900, 5625, 5713번 버스로 안양예술공원입구 하차
* 공원과 가까운 전철역은 관악역으로 도보 10분 거리이다.
* 안양예술공원입구 정류장에서 도보 7분 정도 가면 하천(삼성천) 너머로 유유산업 공장과
함께 당간지주와 석탑이 모습을 비춘다.
* 유유산업 정문 경비실에 탑과 당간지주를 보러 왔다고 하면 군소리 없이 들여보내준다.
* 승용차로 안양예술공원 진입이 가능하며, 유유산업과 가까운 곳에 공원 주차장이 있다.

* 소재지 - 경기도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1 유유산업



염불암 가는 길


늦가을의 정처없는 흘러감에 몹내 아쉬워하며 곧있으면 들이닥칠 겨울의 시련을 감당하기 위해 나
무들은 그동안 걸친 소중한 잎들을 대지에 떨군다. 그래야만 겨울을 견디고 내년에 좀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빛을 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공원에는 그렇게 한 시절 폼나게 살다 사라질 순간을 기다
리는 낙엽들이 바람에 흩날려 공원을 찾은 인간들을 울적하게 만든다. 계림황엽(鷄林黃葉)의 현장
처럼 누렇게 뜬 낙엽과 높은 가을 하늘을 보며 간드러진 시상(詩想)이 마음 속에 방긋 떠오르지만
그것을 다듬는 실력이 딸려 표현을 못하니 그저 애석할 따름이다.

중초사터의 옛 흔적을 더듬고 다시 공원으로 나와 등산객과 가족. 친구 단위 나들이객들로 분주한
예술공원을 가르며 관악산 방면으로 15분 정도 가면 관악수목원 못미쳐에 염불암으로 오르는 길이
나타난다. 염불암까진 수레가 편히 바퀴를 구르게끔 시멘트로 말끔히 단장되어있다. 길의 경사는
절로 가는 마음마냥 그리 급하진 않아 가볍게 다가서면 된다. 아직은 시원하게 다가오는 산바람에
나의 번뇌를 후우~ 날려보내며 낙엽처럼 우수수 내려오는 등산객들로 정신이 없는 산길을 25분 가
량 오르면 앞쪽으로 공간이 확 트이면서 소나무와 어우러진 암벽을 병풍처럼 두룬 곳이 나온다.바
로 이곳에 안양을 바라보며 자리한 염불암이란 작은 절이 고개를 내밀며 중생을 맞는다.


♠ 삼성산 남쪽 자락에 절벽을 병풍처럼 두르고 둥지를 튼
오래된 산사 ~ 삼성산 염불암(念佛庵)



삼성산 남쪽 자락의 안긴 염불암은 조계종 소속으로 삼성산의 중심사찰인 삼막사(三幕寺)의 부속
암자이다. 암자(庵子)라고는 하지만 삼막사와 비슷할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염불암이란 이
름은 삼성산에서 의상, 원효, 윤필대사가 이곳에 있던 토굴(土窟)에서 불도를 닦으며 염불을 올렸
다는데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물론 이는 곧이 곧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절의 창건시기는 926년(또는 936년)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치기 위해 삼성산의 옆구리를 지나던
중 안양사 창건설화(☞
안양사 답사기 보러가기)에도 등장하는 능정(能正)이 좌선에 들어있는 모
습을 보고 그 자리에 염불암의 전신(前身)인 안흥사(安興寺)를 세웠다고 전한다. 조선 태종 7년
(1407년)에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고자 관악산의 여러 절과 더불어 중창했다고 한다.

그 이후 400년 동안은 별다른 일이 없는건지 중간에 망했는지 전혀 기록이 없다가 1857년(철종 8
년) 청허(淸虛), 도인(道人)이 칠성각을 세웠고 1904년과 1927년에 중수가 있었다. 1930년에는 세
심루(洗心樓)를 세우고, 1932년에 산신각, 1941년에 대웅전과 칠성각을 중수하였다. 1964년에 미
륵불을 세우고 1992년에 대웅전을 옮겨 크게 중창했으며, 2000년에 나한전을 세워 지금에 이른다.

옛 대웅전 자리에 지은 염불전(念佛殿)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은은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梵鍾)의 거처 범종각(梵鍾閣)


높다랗게 석축을 쌓아 절터를 닦고 대웅전 등의 불전을 이룩한 절로 칠성각을 제외한 건물 모두
20세기에 지어진 것들이라 고찰의 내음은 전혀 없다. 게다가 부근 삼막사와 안양사처럼 소장하고
있는 지정문화재도 없다. 다만 염불전 부근에 19세기 초반에 만든 부도 3기와 대웅전 앞뜰에 600
년 먹은 보리수나무가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 준다.

당우(堂宇)로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나한전, 염불전, 칠성각, 영산전, 요사, 산신각 등 약
10동의 건물을 지녔으며. 대웅전 뒤쪽으로 소나무가 솟아난 멋드러진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
는데, 그 벼랑에 신기하게도 조그만 전각과 미륵불을 주렁주렁 달아놓아 일대 장관을 연출한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룬 염불암은 인간과 불교는 자연과 하나요, 그 일부
임을 몸소 실천한 것이라 하겠다.

삼성산 등산로의 길목이라 등산객들이 허벌나게 지나다녀 자연히 절을 둘러보는 사람도 많다. 그
래서 한적한 산사의 분위기는 조금 떨어지긴 하나 산중 깊숙히 박힌 암자로 잠시 속세를 등지며
해탈을 꿈꾸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을 것이다. 특히 벼랑에 뿌리를 내린 산신각과 칠성각에서 바라
보이는 삼성산과 안양시내(보이는 곳은 한정됨)는 막힌 마음을 후련하게 해준다.

안양예술공원에서 염불암까지는 수레가 들어오게끔 길이 깔려져 있으며, 여기서 삼막사까지는 산
길로 30분 정도 걸린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조촐한
영산전(靈山殿)

대웅전 앞 3층석탑과 보리수나무

※ 염불암 찾아가기 (2010년 12월 기준)
* 안양예술공원 교통편은 앞에 중초사터 참조
* 안양예술공원 정류장에서 도보 50분
* 수레로 염불암까지 접근 가능하며, 절 밑에
주차장이 있다.
* 염불암에서 삼막사를 거쳐 호암산(시흥2동),
경인교대, 서울대 방면으로 하산할 수 있다.
* 소재지 - 경기도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 17
(☎ 031-471-2300)


속세를 굽어보는 염불암 대웅전


♠ 염불암의 법당, 대웅전(大雄殿) 주변


절 아랫목에 세워진 염불암 안내문을 읽어보고 계단을 통해 경내로 올라서면 제일 먼저 안양시내
를 굽어보는 대웅전의 위용에 새삼 놀라게 된다. 원래는 그 우측 염불전에 있었으나 1992년 주지
성수화상이 옛날 의상, 원효, 윤필 3명의 고승이 정진하던 터라 여겨진다는 지금의 자리로 옮겨
크게 지은 것이다. 오늘날 염불암의 사세를 보여주듯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며 지붕을 받치고 있
는 촘촘히 박힌 공포(空包) 덩어리는 그 아름다운 섬세함에 감탄이 새어 나오게 한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얹힌 대웅전 주변으로 난간석을 둘러 건물의 품격을
드높였으며 계단 앞에 2마리의 석사자를 배치해 혹여 놀러올지 모르는 화마(火魔)의 공습에 대비
했다.

대웅전 불단(佛壇)에는 금빛이 찬란한 석가여래 3존불이 모셔져 있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제스처를 취한 석가여래 좌우로 수려한 자태의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시립
(侍立)해 있다. 이들은 1992년 은행나무로 만들었다고 전하며, 그들 뒤로는 색채가 무지 고운 후
불탱화가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꽃을 든 문수보살 우측에는 조그만 아기부처가 초파일의 그날을
꿈꾼다.


대웅전 불단에 모셔진 석가3존불

대웅전 좌측에 마련된 야외불단

대웅전 좌측의 야외불단에는 누님이라 부르고 싶을 정도로 고운 맵시를 자랑하는 관음보살(觀音菩
薩)이 정병(政柄)을 들며 가운데 자리를 장식하고 있다. 그 좌측으로 육환장(六環杖)이란 길쭉한
지팡이를 쥐어든 지장보살(地藏菩薩)이 관음보살의 반만한 크기로 자리해 있으며, 우측에는 산신
(山神)으로 보이는 약간은 초라해 보이는 조그만 존재가 앉아있다. 2002년에 왔을 때는 저들이 없
었는데 그새 새로 지어 올린 모양이다. 때깔이 무지 고운 그들을 정성들여 조각했을 석공의 숨결
이 나의 마음을 자극시킨다.

대웅전 앞 3층석탑

600년 묵은 보리수나무


대웅전 앞뜰에는 독특한 모습의 새하얀 3층석탑이 서 있다. 8각으로 된 2중 기단(基壇) 위로 연꽃
무늬가 새겨진 괴임돌 같은 것을 깔고, 그 위로 부처가 새겨진 8각의 탑신을 얹혀 제일 위에 보주
(寶珠)로 마무리 하였다. 전형적인 3층탑과는 거리가 먼 이형(異形) 탑으로 몇 백년이 흐른 이후
에는 우리나라 미술사학의 1줄을 장식할 것으로 기대된다.

탑 좌측에는 염불암의 명물이자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살아있는 보물이 살아 숨쉬고 있다, 바로
600년 묵은 보리수나무이다. 보리수(菩提樹)의 원래 이름은 '보디 브리크샤(Bodhi vriksa)'로 부
처가 붓다가야 보리사에 있는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여 불교계에서 매우 소중히 여
기는 나무이다. 무화과와 흡사한 뽕나무과 상록수로 인도의 힌두교에서도 신성시 여기는 나무라
고 한다.

보리수는 우리나라에는 그다지 많지 않은 외래나무로 서울과 가까운 곳에서는 이곳과 도봉산 천축
사(天竺寺)에서 오래된 보리수를 만날 수 있다. 아무리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의미심장한 나무라
고 해도 겨울의 제국 앞에서는 추위의 시련을 겪어야 되는 일개 나무에 불과하다. 푸른 이파리는
이미 사라졌고, 가지만 앙상하게 드러낸 보리수에 겨울에 대한 원망이 가득해 보인다.

6백년 정도 되었다는 이 나무는 14세기에 이곳에서 수도하던 승려가 심었다고 하며, 높이는 12m,
둘레는 1.2m로 조그만 편이다. 안양시 지정보호수 안양-2호이다.

대웅전 뒤쪽에는 1990년대에 지은 나한전(羅漢
殿)이 조그맣게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
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2000년에 만든 500나한과
16나한을 모셨다.


염불암 나한전


♠ 벼랑에 오묘하게 들어앉은 염불암 산신각, 미륵불 주변

대웅전 뒤로는 기암괴석이 가득한 높은 벼랑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염불암의 든든한 후광(
後光)이자 절을 더욱 장엄하게 꾸며주는 그 벼
랑에는 산신각과 칠성각, 나한전, 미륵불 등이
아슬아슬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어 아래서 보면
그야말로 신비로움을 더해주며, 위에서 보면 천
하가 나의 발굽 아래에 펼쳐진 듯, 전망도 가히
일품이다.

나무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면 제일 먼저 절벽
사이 좁은 공간에 조마조마하게 들어앉은 산신
각이 마중한다.
경내를 굽어보는 산신각(山神閣)은 정면과 측면
이 1칸에 불과한 조촐한 건물로 1932년에 중수
했다.
내부에는 1970년대 후반에 그려진 산신도가 걸
려 있으며 여기에 서면 경내가 시원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염불암 산신각

염불암 미륵불(彌勒佛)


산신각을 지나면 절벽에 등을 대며 남쪽을 바라보는 거대한 미륵불이 나온다. 이 불상은 1960년
기석화상 꿈 속에 미륵보살이 나타나 이마를 어루만지며 '마애석불을 만들어 널리 중생을 구제하
라' 한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그래서 1964년부터 5년간 공들여 석불을 만들어 공덕비를 세웠다.

연꽃이 새겨진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다소곳이 서 있으며, 전체적으로 풍만한 느낌을 던진다.
머리에는 2중으로 된 보관(寶冠)을 썼으며, 얼굴은 다소 경직되어 보이긴 하나 그리 싫지만은 않
은 표정이다. 입가에는 넌지시 미소가 드리워져 여기까지 올라온 중생을 위로한다.
오른손으로 시무외인, 왼손으로 여원인(與願印)을 취하며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상징하다는 안양
시내를 굽어보는 미륵불 옆에는 산신각과 쌍둥이꼴인 영산전이 있다.


산신각 부근에 마련된 돌탑아파트
중생들의 소망이 담긴 탑들로 지하 1층, 지상 6층의 아파트를 이루었다.

▼ 산신각에서 바라본 천하
저 너머에 보이는 산은 안양 서쪽에 자리한 수리산(修理山)이다.
인구 60만을 지닌 안양시내가 산 사이로 간신히 고개를 내민다.


절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칠성신을 모신 칠성각(七星閣)이 마치 수미산 정상에 있는 건물처럼 자
리해 눈길을 끈다. 범인(凡人)은 감히 접근도하지 못할그런 곳. 구름 위로 솟아난 칠성각의 모
습이 자못 신비로워 보인다.

칠성각은 1857년에 지어진 것으로 염불암에서 제일 오래된 건물이다. 벼랑 사이에 간신히 비집고
들어앉았으나 산신각, 독성각보다는 넓어 정면 2칸, 측면 1칸의 구조를 지녔다.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펼쳐진 칠성도

칠성각 벽면에 그려진 관음보살 누님


칠성각 안에는 1979년에 그려진 칠성도가 걸려 있다. 밖과는 달리 건물 내부는 무척이나 넓어보
인다. 우리는 그에게 예를 올리며 조그만 소망을 살짝 들이밀어본다.

칠성각 바깥 벽면에는 용을 타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관음보살이 화려하게 그려져 시선을 떼지 못
하게 한다. 두 손으로 연꽃 또는 복숭아로 보이는 것을 든 관음보살은 어디로 볼일을 보러 가는
모양인데 그 와중에도 중생들이 걱정되는지 하늘 아래 세상을 내려본다.



칠성각에 올라 잠시 천하를 굽어보고 다시 대웅전으로 내려온다.미륵불에게 인사나 드릴까 했지
만 차가운 바닥에서 절을 하기도 그래서 그냥 눈인사만 올리고는 내려왔다. 이제 슬슬 속세로 나
가야 될 시간이 온 것이다.

잠시 해우소로 가고자 요사(寮舍) 밑을 지나니 맛있는 것이 듬뿍 담겨져 있을 장독대가 질서정연
하게 들어서 지나는 이의 시장기를 자극시킨다. 과연 무엇이 들어있을까? 살짝 뚜껑을 열어 속살
을 들춰내고 싶다.
이렇게 하여 산중암자, 염불암 나들이는 다음을 기약하며 여기서 접는다. 독성각과 조선 후기 부
도 3기를 지나치긴 했지만 이미 예전에 본 것들이고 정 아쉬우면 다음에 또 발걸음을 하면 된다.
내가 살아 숨쉬는 동안은 언젠가는 또 찾지 않겠는가?


2층 요사채 아래로 펼쳐진 1장의 가을 풍경
울긋불긋 타오른 단풍나무가 저물어가는 늦가을의 끝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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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일 - 2010년 12월 28일부터

*최종수정 - 2010년 12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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